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령장이라 자처해왔기에 다른 기타 사물을 자아중심의 시점에서 판정해버리는데 습관되였다. 례컨대 맹수들의 야성은 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저렬한 품성이라 평판해놓고 인성이야말로 가장 완미하고 성결한 문명의 상징이라고 자긍하는 등이다.
인성은 과연 그렇듯 완미한것인가? 맹자는 인성은 천성적으로 선하다고 하였지만 순자는 인성은 원래부터 악하다고 반기를 내들었다. 그러나 고자(告子)는 인성에는 선악의 계선이 따로 없이 다만 환경에 따라 호상 전화한다고 절충하였고 후에는 누군가 인성에는 원래 선악이란게 없다는 주장도 내세웠다. 사실상 인간이 대자연속에서 뛰쳐나오기까지는 역시 금수였고 점차 문명개화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인간속에 고 유된 야성은 극복하지 못했고 또 극복할수도 없는것이였다.
만약 인성이란 이미 형성된 정의만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재성(自在性) 및 현존성을 의미할 때 마땅히 인애와 잔인, 호조우애와 상호 알륵, 성실과 음모궤계 등 량극성이 포괄된 복합체라고 해야만 객관적일것이다. 그렇지 않던가? 인성이란 워낙 극단에로 나아가기 십상이고 경우에 따라 잔악성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가 너무 많기때문이다. 환언하면 두 극단이든 극치이든 어디까지나 다 인성안의 일로서 인성과 야성은 피장파장이다.
흉악과 잔인의 화신인 승냥이는 약소동물들을 잡아먹는다. 인간도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이 점은 량자가 같다. 승냥이는 로획물을 이발과 발톱으로 찢어발기며 아귀아귀 처먹는다. 그 정상은 잔인하고 참혹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존수단의 살생으로서 포식에 그치고만다.
문명인은 생존수요보다 영양학각도에서, 식도락의 욕구에서 모든 네발 가진 짐승,두발 가진 조류, 각종 크고작은 어족들을 내키는대로 잡아먹고있는바 인성이 이룩한 이른바《식문화》의 형식, 내용은 실로 다양하고 다채롭기로 눈부실 지경이다. 껍질 을 벗기고 내장을 훓어내고 각을 뜨고 고기를 발라낸다. 연후에도 토막치고 칼탕치기도 해서 지지고 볶고 튀기고 굽고 고으고 절이고 회치고…거기에 온갖 조미료까지 쳐서 냠냠 먹어댄다.
먹는 형식과 멋에서 인간을 따를 동물은 없다. 중국의 남방에서는 산 원숭이 두개골을 빠개고 뇌수를 파먹는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야성의 발작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 않으며 잔인한 생명학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약육강식, 우승렬패의 자연법칙이 인류문명권에도 적용되는것이라고 생각하면 전현 문제시되지 않는것일가?
어찌생각하든 결과적으로 잔인성이란 생존경쟁의 계선을 초월하여 수요이상으로 살생, 학대하는 행위인것이다. 이런 행위는 인간의 향상심과 진취심에서 기인되고 주 밀한 계획성과 그 실현을 위한 무지경의 실천에서 더욱 발휘된다. 엥겔스가 인간의 동물성과 야성을 두고 인간은 절반은 천사이고 절반은 야수라고 말하였는데 얼마나 지당한가?
동물계에는 사상이 없다. 사상이 없는 동물은 생명수요의 계선을 초월하는 법이 없고 따라서 가증한 음모술수도 없다. 배부른 뒤의 사자는 눈앞에 령양떼가 풀을 뜯 고있어도 다음 끼니를 위해 미리 잡아두지 않는다. 이렇듯 야수들에게 락인찍혀진 “잔성”은 그것들과는 무관한것으로 다만 인류가 제 좋을대로 고안해낸 단어로 품평해 버린것이다.
사상이 없는 동물은 자신을 위해 변호할수 없다. 진정 극악한 동물은 인간자신이면서도 다른 동물들을 잔인한 야수라고하니 우습지 않은가! 귀머거리나 벙어리앞에서 의 역설이나 웅변은 보건대 위풍스럽지만 무모한 자아풍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인류는 동물을 향하여 절대적인《진리》를 역설해왔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한가지《우수한 품성》이 있다. 그것은 자연계의 일체를 통치하려는 무한대의 지배욕과 향락욕이다. 그것의 핵심은 자사자리이지만 동물학 대에 대한 행위의거로 된다. 문명사가 시작된 래 인간은 자신들의 리익에 저촉되는 다른 생령들의 생존권을 무단적으로 박탈했고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여왔다. 인류가 자연을 정복한 뒤끝에 얻은것은 무엇인가? 평화롭던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파괴한것외에 또 무엇이 남았는가? 수많은 물종들을 절명시켰거나 멸종의 변두리에까지 몰아넣은 인간의 의지야말로 무서운 품질이다.
웃으면서 칼을 가는 표리부동한 인간구, 함정을 파놓거나 올가미를 걸어놓고 교묘하게 유인할줄 아는 인간군은 자기의 생존수단을 초월한 무비의 기술을 장악하였기에 이 지구촌에서 제일 강력한 물종으로 부상되였다. 하지만 조물주가 태초에 억조창생을 내실제《천하지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고 규정짓지 않았을것이고 모든 금수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하사하지도 않았을것이다.
하건만 야성은 인성의 강포와 모략앞에 영원한 패배자의 운명을 면치못했다. 비상한 살생도구를 창제해낸 인류는 완력으로 굴복시킬수 없는 강대한 동물을 기술과 음모로 굴복시키고 관상용으로 쇠살창안에 가두어놓고 즐기였다. 인간의 모진 학대와 공격에 때때로 개체적 혹은 집단적으로 보복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만물의 령 장》들에게 섬멸당할뿐이였다. 인간과 함께《노아의 방주》에 올라 재난을 모면한 동 물들은 모두 이 지구촌에서 동등한 생존권을 가진《공민》들이건만 인성은 악착스럽게 살생을 추진해왔다.
이 지구촌에는 위선적인 인성은 있지만 허위적인 야성은 없다. 이른바 여우의 교활성이란것도 기실 일종의 생존본능일뿐인데 보다 교활한 인간은 되려 여우에게 그 루명을 들씌웠다. 죽은듯이 떠있다가 대방을 공격하는 악어의 궤계도 생존수단의 일종일뿐이다. 이른바 탐식의 대표자로 추대된 돼지의 탐식도 그의 생리특징에서 기인된 생존욕구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탐식하는 돼지이지만 너무 처먹어서 배가 터져죽 었다는 기문은 여직 없다.
돼지가 탐식한다고 비웃으면서도 빨리 살지기만 바라는 인간들속에서 돼지보다 더 탐욕스러운 인성이《행복》을 마련한다. 흔히 량심이 없거나 패덕한자를 개같은 놈이라고 욕하지만 개보다 못한자들이 인간들속에서 부지기수다. 그래도 주인을 위한 충견들의 미담은 많이도 전해오고있다.
동물들에게는 인간들에게 있는 그런 사치한 요구가 없다. 인간들처럼 더 많은 자연자원을 점유하려는 웅심도 없고 옹근 동물세계를 통치하려는 포부나 야심도 없다. 오직 인성만이 유희삼아 살생하는 품질이 겸비되여있을뿐이다. 그런 인성때문에 수천년의 문명사가 피로 씌여진것이 아니랴!
인성과 야성의 대비속에서 하나의 결론이 지어진다.가장 야만적인것도 인성이요, 가장 잔인무도한것도 인성이다. 수천수만 아니 수백만명씩 서로를 도살하는 동물이 인간을을 내놓고 또 어디에 있는가?인성이 빚어내는 비극이 야성이 빚는 비극보다 더 집대성적이고 더 잔혹함에도 인간은 그냥 웃으면서 야성을 질책하였으니 가소롭지 않으랴.
인간은 마침내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 지구촌에서 인류자신외에 다른 동물을 볼수 없는 날이 오게 된다면 무분별한 악행의 보응으로가장 살기 어렵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료하며 가장 황당한 유일한 동물로 남게 되고 그로하여 이 세계마저 고독 속에서 서서히 훼멸될것임을 자각했던것이다. 하여 동물보호법이 나오고《자연동물호구》니 뭐니 하는 조치를 대기시작했다. 비록 너무 늦었지만 인류를 위해서 다행이 아닐수 없다. 인류는 이제 인간다운 인성으로 새로운 희망사항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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