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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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의 시로 시지평을 새롭게 연 시인의 새사유의 결정 ㅡ 김영건시집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에 부쳐 최흔
2019년 04월 27일 20시 05분  조회:622  추천:0  작성자: 최룡관
한수의 시로 시지평을 새롭게 시인의 새사유의 결정
김영건시집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 부쳐
최흔
 
근일에 출간된 김영건의 시집 <<물결이 구겨지고 펴지는 리유>>(아래 물결로 략칭)를 읽어보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의 지평을 새롭게 여는 시적사유의  결정이라고 할수 있겠다. 모두 5개부로 나뉘여진 시집인데 읽을수록 시맛이 살아나는 시집이였다. 필자는 <<돌의 시>>라는 한수의 시에 담긴 예술적특색을 세가지 부분으로 말하는것으로 시집평을 대체하려 한다. 첫째 구성이 구성을 넘어서다. 둘째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다. 세째 현실이 현실을 넘어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시구성이 구성을 넘어서다.
 
우리시의 재래의 구성들은 한가지 심상을 말하기를 즐기였다. 하나를 틀어쥐고 시인의 해석을 하는것이 일상적인 현실이였다. 김영건시인은 많은 시들에서   일상적인 구성에 대담한 도전을 걸었다. 그의 대부분 시들이 한선을 가지고 시를 구성하는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이미지를 겹쳐서 시를 구성하는 특점이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런 구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시들이 도시거리의 즐비한 층집처럼 늘어서 있다. 그 거리를 산책하느라면 산도 밟히고 강도 들리고 새도 락하하고 하늘의 해달별이 또렷이 살아나기도 하고  전설도 보인다.
 
돌이 산이였다는
사실을 바람은 오늘도 들려주었다
개미가 인간의 길을 내고
나비가 하늘길을 열고 물고기가 수평선 틔워놓았다
바람을 받쳐올린 제전이
돌임을 립증하는 날
우주의 그물에 걸린 별들 하나둘 따다가
탐험대의 길을 놓아주었다
아름다운 흙의 품안에
뼈로 솟아있는 암석을 나와
지상에 얼굴 내민 사내들이 돌의 시를 읽고있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을 안아준
암흑의 종자들이
오판된 생명의 근원들 수정하노라
일제히 강변에서 돌아왔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돌의 춤이다 또 돌의 언어이며
미래이다 마를길 없는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ㅡ 돌의 시 전문
정말 마음이 활 열리고 가슴이 활열리고 시정이 활 열리는 시다. 이 시에는 여러개의 이미지단위가 있다. 시인은 돌을 산에서 땅으로 끌어내리고 땅에서 강과 접속시키는 점층법을 썼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미지단위마다에 또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길이 번쩍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놀람을 금하지 못하게 하고있다. 첫머리에서 바람이 돌이 산이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그 사실이 돌연성을 띄였다. 시인은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라 <<개미가 인간의 길을 내고/ 나비가 하늘길을 열고/ 물고기가 수평선 틔워놓았다>>고 한다. 대담한 도약을 펼쳐보이는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아래의 엮음도 돌발적이다.
<<바람을 받쳐올린 제전이 /돌임을 립증하는 날/우주의 그물에 걸린 별들 하나둘 따다가/탐험대의 길을 놓아주었다>> 돌발적인 이미지창출은 진짜 강력한 상상의 결실이다. 시의 이미지가 돌발성을 띄였을 때 독자들은 놀라게 되는데 그 놀람이 바로 시의 진짜맛이다. 이런 놀람이 없으면 시는 시들하게 되고 시시하게 보이게 마련이다.
시인은 산에서의 돌의 이미지를 파헤친다음 땅에서의 돌의 이미지를 이렇게 파헤치고있다.
 
아름다운 흙의 품안에
뼈로 솟아있는 암석을 나와
지상에 얼굴 내민 사내들이 돌의 시를 읽고있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을 안아준
암흑의 종자들이
오판된 생명의 근원들 수정하노라
일제히 강변에서 돌아왔다
 
앞의 석줄이 한개 이미지 단위이고 뒤에 석줄이 한개 이미지 단위이고 마지막 줄은 단독 이미지이면서 다음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과도구 작용을 한다고도 말할수 있겠다. 시인은 돌을 땅의 뼈다귀라고 하면서 땅속에서 사내들이 얼굴을 내밀고 시를 읽는다고 한다. 실로 기상천외한 이미지창출이다. 돌속에서 뼈속에서 사내들이 나온다는 자체가 너무 경의로운 일일뿐만 아니라 돌의 시를 읽는다는것도 경의롭게 읽어지는 시구다. 시인은 어떤 사물에 대한 모방을 하고있는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속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사실을 들춰내고있다. 일상적인 사유의 테두리를 과감하게 짓부시며 새로운 시적행동을 감행하고 있는것이다. 돌에 새겨진 시의 내용도 일반적이 아니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을 안아준 ./ 암흑의 종자들이/ 오판된 생명의 근원들 수정>> 한다고 한다. 이 은유적인 언어들의 진의에 대해서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 두번째 례에서 다시 보기로 하자.
 일제히 강변에서 돌아온 돌에 대하여 시인은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돌의 춤이다 또 돌의 언어이며
미래이다 마를길 없는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시의 결말로 된 이 시구들은 돌과 물의 관계를 읊은것이다. 시인은 강물은 돌의 살이라고 하기도 하고 돌의 춤이라고 하기도 하고 미래라고 하기도 하고 영원한 돌의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 수법은 련속변형으로써 렉시아라고 한다. 가히 이렇게 풀어쓸수 있는것이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강물은 돌의 춤이다/ 강물은 돌의 언어이다/강물은 돌의 미래이다/ 강물은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강물과 돌에 대한 다섯가지 변형을 련속적으로 창출한 시인은 아마 김영건이 처음인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는 천재적 재능이라고 하였고, 류협은 시는 은유라고 하였는데 이런것을 두고 말하는것이 아닐가 하고 생각해본다. 이 천재적인 은유야 말로 아우라이다. 시는 이렇게 독보적인 형상을 창조함으로써만이 개성이 있는 시인으로 되는것이 아니랴.
이제 시에 대한 내용의 분석은 끝났다고 할수 있다. 이런 분석을 넘어서 필자가 말하려는것은 시구성이 일상성을 떠나서 새롭다는것이다. 시인은 산의 돌, 땅 다시말하면 버덕의 돌, 강의 돌 등 세가지 측면으로 고찰하였다고 하겠다. 돌의 존재의 공간을 이동시키면서 이미지를 창출하면 돌이미지의 립체성을 기하게 된다. 각각의 장소에서의 이미지의 이질성을 도출해내면서 시인은 시의 새로움을 획득하고 있다겠다. 산에서의 돌도 그렇고 땅에서의 돌도 그렇고 강에서의 돌도 그렇다. 돌은 부단히 변신을 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물로 현시하고 있다. 왕양명(송명시대의 걸출한 철학가)은 이 세상사물들의 아버지가 하늘이고 어머니가 땅이라고 하였다. 사물들은 모두 형제간이다. 돌은 형제들과 서로 사귀면서 경쾌한 나들이를 하면서 이것저것으로 변해보고있다겠다. 이것이야 말로 시의 본연을 알고 쓰는 시적작업이라고 하겠다. 시는 워낙 사물의 변화를 쓰는 작업이니까. 공간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을 동반하게 되며 공간과 시간의 이동은 사물의 변화를 생성하게 된다. 이것은 도이다. 시는 도에 도달하는것이 의무라고 하겠다. 주역에서 <<사물이 궁극에 이르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시에서 돌이 자그만치 10여가지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별무리 없이 통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서 어떤 공동분모가 있는가를 찾는 일은 다 헛수고이다. 공분모는 없는것이 아니니까. 다 지구우의 사물이 아니면 이 우주속의 사물이라는데 공분모가 있는것이 아니랴.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한사물이 여러가지 사물로 변하면서 세개의 큰 이미지단위가
있는데 이 단위들을 바꾸어놓아도 시에는 아무런 손상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시는 종적구성의 구축이 아니라 횡적구성의 구축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하이퍼시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하이퍼시는 중국의 고대의 시인 맹호연으로부터 오늘의 시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시대간을 이룬 시기법이다. 횡적구성으로 된 하이퍼시는
필자도 처음에는 서양의것인가 착각하였다. 실은 우리의 시문학전통이다. 김시인은 이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다겠다. 계승한다는것은 시종 심상을 틀어쥐고 놓지 않는데서 표현되고 발전시켰다는것은 돌하나로 10여가지의 새로운 이미지를 과감하게 창출하였다는데서 립증되고 있다.
 
2시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다.
 
김영건시인은 <<돌의 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끈질기게 해내고있다. 시는 언어이고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한다. 시인에게 이런 명칭이 주어지는 원인은 여러가지겠지만 필자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시인이 하고있기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것은 일상적인 언어련결을 떠나서 새로운 언어련결을 하고있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돌의 시>>에서 시인은 언어를 갈고 닦으면서 그냥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작업을 하고있다. 전반 시에서 <<아름다운 흙의 품안에>>를 제외한 나머지 언어들은 죄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고 할수 있겠다. 첫번째에서 필자는<<대지의 모든 나붓김을 안아준 ./ 암흑의 종자들이/ 오판된 생명의 근원들 수정>> 한다는 시구를 례로 들때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두번째에 다시 살펴보자고 하였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것은 일상적으로 두가지가 있다고 할수 있겠다. 한가지는 우에서 례를 든 시구가 은어로 된경우를 말할수 있겠다.  대지의 모든 나붓김이란 언어는 대지의 모든 생명체를 말하는것이고 암흑의 종자란것은 새로운 사물들이 암흑속에서 생성된다는것을 말한것이다. 애기가 어머니배속에서 자라는것도 암흑속에서의 나오는것이며 씨앗이 땅에서 움트는것도 암흑속에서 나오는것이며 알에서 새새끼들이 탄생하는것도 암흑속에서 까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때문에 암흑은 모든 새로운 생명의 발원지이며 탄생지라고 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한낱 자연의 법칙이다. 일상적으로 암흑이면 나쁜것으로 말하기 쉬운데 실제 그것은 시인이 말하다시피 잘못 판정된 <<생명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한것첨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분리되는데 기의가 기표와 다를수도 있다는것이다.
아무렇게나 이미지 한부분을 더 인용해보자
 
돌임을 립증하는 날
우주의 그물에 걸린 별들 하나 둘 따다가
탐험대의 길을 놓아주었다
 
사람을 아연하게 하는 이미지라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말이 맞지 않는 말인것처럼 착각이 얼마든지 올수 있는 말이다. 돌이 별이 되고 별이 그물에 걸려있고 탐험대의 길을 놓아준다고 한다. 사물과 사물사이는 통일성과 동일성이 없지만 언어사이에는 통일성과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언어의 나라에는 법률도 황제도 없고 오직 자유만이 있다고 하겠다. 돌과 별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고 그물도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고 탐험대의 길도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별개의 개념을 이루는 문자들은 아무런 주저심도 없이 한줄에 꿰여져있으며 신비한 세계를 구성해내고 있다. 왜 이럴수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시이기때문이다. 시는 바로 이런 언어들의 련계를 꿈꾸고 있으며 그 꿈을 시적현실로 만들고 있는것이다.
이제까지 글의 흐름속에서 자연적으로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것을 보았다. <<돌의 시>>에는 다른 한가지 수법이 또 있다. 그것은 한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은유적수법이다.
 
개미가 인간의 길을 내고
나비가 하늘길을 열고 물고기가 수평선 틔워놓았다
 
강물은 돌의 살이다
돌의 춤이다 또 돌의 언어이며
미래이다 마를길 없는 영원한 돌의 노래이다
 
<<돌의 시>>는 돌을 썼는데 돌의 언어이다. 이런 언어들은 죄다 은유로 된 언어이며 무엇이 무엇으로 둔갑하기이며 상생이다. 한사물속에서 다른 사물들이 련속적으로 태여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새로운 사물의 생성을 쓰는 일이지 모방하거나 추억하거나 회상하는 일이 아니다. 시에 생성이 없으면 낡투가 되기 마련이다. 시는 피끓는 청춘들의것이지 늙은이들의것이 아니다. 청춘들은 새것을 추구하고 늙은이들은 회억과 추억을 즐긴다. 우의 시구들은 련속부절히 한언어가 다른 언어를 불러오고있으며 한언어가 다른 언어에 대체되고 있다겠다. 그어떤 설명이나 해석이 없다. 시는 설명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고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쓰는것이라겠다. 그것이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역활을 논다고 하겠다. 시를 쓰자! 넘어서자! 사물은 태여났다가 죽고 다른 사물이 생성되는것이 자연이고 인간의 문화도 생성되기도 하고 력사의 뒤안길에 묻혀지기고 한다. 그러니 앉은 자리에서 한가지 사물만 안고있는것은 보수가 아니랴. 언어는 한사물이나 행동을 나타내는 기표이지 그 사물이 아니다. 사물과 별개의 관계를 이루고있는것이 언어이다. 때문에 마음대로 결합시킬수 있다. 특히 시인이 언어의 마술을 부리는것은 바로 언어를 갈고 닦는 고된 작업으로서 잘 갈고 닦은 언어는 후세에 가서도 영양을 주게 되고 빛발을 뿌리게 된다. 그로 인하여 민족은 살아있게 되는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언어가 죽으면 생명도 끝나게 되고 한민족에게서 언어가 죽으면 민족도 죽게 된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가. 김시인은 바로 이런것을 통감하고 언어의 다스림을 새롭고도 알차고 신선하고도 황홀하게 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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