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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을을 만나다-리화
2019년 07월 18일 10시 27분  조회:80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리화 
가을을 만나다
 
가을이면 의례 맑아지는 것이 있고 물드는 것이 있다.
하늘이 그렇고 땅이 그렇고 그사이에 나마저도 어디 숨을 곳이 없다.
아직 촐랑거리는 정도의 내 감성과 엷은 내공으로는 이 계절을 읊고 노래하기가 부끄럽다. 다만 그 속에서 한껏 맑아지고 깊게 물들기만 해야 한다.
야트막한 산에 올라 누렇게 물든 풀밭에 앉아서 멍을 때리던 어느 가을날이 있었다. 굳이 가을정취를 느끼려 산에 오른 것은 아니였지만 하늘은 그렇게 높게, 그렇게 푸르게 걸려있었다. 마치도 대지의 아픔을 거둬가기라도 하듯이.
그 맑고 푸른 빛은 구천에서 주렴처럼 드리워 산과 나무와 풀밭과 그 우에 앉아있는 나를 관통해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
눈 맞추는 잎새마다 얼굴 살짝 붉히고 풀잎들은 바스락거린다. 나무와 풀들은 저마다 예쁘게 물들면서 한여름의 탁하고 무겁고 치열했던 삶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그 삶의 정화만 동그랗게 남겨두고 또 어떤 것은 굳이 열매 맺을 필요가 없다는듯 소탈하게 겨울차비를 서두르며.
매년 립추가 시작되면 나는 늘 가을을 찾아 서성거렸고 그러는 나에게 가을은 늘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으며 고스란히 내 안에 와주기만 했다.
 
익어라 가을
 
가을이 왔다.
위챗에도 가을이 왔다.
곱게 물든 단풍사진이 똘깍 소리와 함께 핸드폰을 물들이고 있다.
가을날의 안부는 이처럼 단풍사진 한장 만으로도 충분하다.
촬영관련 위챗계정들은 가을 려행지와 가을촬영에 대한 글들을 도배하고 있다. 한편한편 열어보면 어느새 그곳의 가을 속에 빠져버린다.
가까운 곳에 있는, 그 전해에 다녀왔던 은행나무숲으로 향한다. 가슴 설레이며 도착한 은행나무숲,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숲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벌거벗고 신음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는 나무가지들이 떨어져있었고 숲 전체가 강탈을 당한 느낌이다. 땅에는 계절을 앞당겨 떨어진 푸른 잎새들이 죽어가고 가지에는 몇몇 남지 않은 아픈 잎새들만 겨우 물들고 있었다.
그 전해의 황금빛 가을숲은 어디로 간 걸가.
그때 이 숲으로 왔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였고 저녁해살에 숲 전체가 노란 물결로 반짝이고 있었다. 황금을 모아놓으면 이처럼 노랗게 반짝일가. 엄마는 그속에서 아이처럼 신나하시고 은행나무 잎들을 두 손으로 받쳐 우로 날리신다. 한잎한잎 내리는 노오란 잎새들 사이로 엄마의 웃음이 더 환하시다. 수북한 락엽 우에 앉아서 잎새들을 다리 우에 올려놓으며 ‘소꿉놀이’도 하신다.
엄마, 엄마의 가을이 너무 이쁘닷…
우리 딸 가을도 이처럼 아름답게 물들 거야…
그럴가? 노랗게 물들고 싶어… 이 잎새들처럼…
그럴 거야. 너 노란 조각달 좋아하잖아. 너의 가을은 분명 노랗게 물들 거야.
그해 가을 속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잎새를 단 은행나무가 가지를 뻗어있었고 숲의 노란 물결사이로 보라색 외투를 걸친 엄마가 천진란만하게 웃고 계셨다.
그러나! 지금은?!
살펴보니 은행 열매를 털어간 흔적이 력력했다.
은행 열매를 얼마나 털었으면 온 은행나무숲이 다 멍들고 벌거벗었을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를 미리 떨어뜨린 사람들, 사람들의 사심으로 생긴 악과였다. 분노가 일었다. 언젠가 집앞 거리에 심어진 은행나무 가로수가 노랗게 익자 긴 막대기를 들고 가지를 툭툭 치던 사람모습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럼 이 은행나무숲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혹은 사다리로 올라가 은행 열매를 털었던 것일가.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더 털어서 팔면 수입이 많아질 것이니 모조리 깡그리 털어간 것 같았다. 돈이라면 환장을 하는 사람들이지. 모든 것은 돈과 초점을 맞춰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며 씁쓸해졌다.
손으로 이 숲들의 나무를 다 만져주면 이 숲의 아픔은 조금이라도 사라지는 것일가. 이 숲을 바라보며 아파했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서 미안하다고 얘기해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라도 될가. 숲은 여전히 말이 없다. 잎새도 다 요절되여 서걱이며 대답해줄 수가 없다. 모처럼 아픈 가을을 만났고 숲은 나보다도 더 아프면서 침묵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은 락엽의 계절도 앞당겨 온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사심으로 잎새는 고운 바람 한번 제대로 들지 못하고 요절하고 만다. 온 세상이 물들어 황홀해야 할 이 가을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익어가야 할 이 가을을, 부디 다치지 말자. 가을바람이 불어도 물들 잎새가 없는 가을은 삭막하다.
잎새야, 바람 들어라.
 
빛나라 가을
 
익어서 다가오는 가을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헛헛하고 아픈 마음을 얹어주기도 한다.
십자거리에 서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문득 싸늘한 이 공기와 십자로 놓여진 길이 겹치면서 추억의 정경 같은 막연한 그리움이 몰려든다. 담배진처럼 지독한 이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가…
이 정체 모를 무엇인가를 찾아서 길에 오르고 싶어진다. 새벽부터 길에 올라 떠돌이를 하고 싶어진다.
길에 오르면 내가 원하는 뭔가를 만나거나 느낄지도 몰라.
새벽 장거리 뻐스에 오르자 세상은 그제서야 고요히 열리기 시작했다.
재빛, 푸름푸름, 연홍빛, 엷은 젖빛 물안개…
이런 것들이 내가 찾는 막연한 정체인 걸가.
세상이 고즈넉하고 평화롭게 밝아온다.
새벽길에 오르면 새들의 지저귐도, 이른아침 어느 산사의 고요한 정적도, 아침해살에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숲도, 레루 우에서 빛나는 가을 해살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솔잎, 그 파아란 바늘 끝 마다에 령롱한 이슬이 맺힌 천년로송도 만날 수 있다. 발뒤축을 들고 입술을 가져다댈 수 있는 행운이 이어지고 솔향이 스며든 이슬이 입술을 달게 적셔준다. 행인에게 내려주는 하늘의 은혜 같은 것일가. 이 감로수를 받아서 차 한잔 달여내면 또 얼마나 향기로울가.
가을의 투명한 빛 아래 세상도 빛나고 있었다.
헛헛하고 아픈 것들이 조금 눅잦혀질 것만 같다.
이런 헛헛함과 아픈 것들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아니여서, 마치도 매년마다 가을이 오듯이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기에, 이 투명한 가을 해빛 아래 자주 바래주어야 한다. 물든 가을잎새마냥 스스로 그 투명한 해빛 아래서 더 짙게 물들고 더 순하게 반짝일 수 있어야 한다.
그해도 나는 가을 속의 물든 잎새 한장인듯 그렇게 가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제법 잘 익은 어느 가을 잎새를 닮은 그런 색 코트 목깃을 세우고, 짙은 회색 스키니 바지를 입고, 두 어깨에는 해골도안이 찍힌 큼직한 배낭을 멨다. 목에는 회색 목수건을 두르고.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다리 밑으로는 가을 해볕만 흐르고 있었다. 다리 량켠으로는 나무들이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그 속에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숨차게 걷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 속을 비집고 씨엉씨엉 걸어가는 그대의 걸음이 버겁게 빠르다. 부지런히 뒤따르지만 그대의 발꿈치를 따르지 못한다. 올리막길을 한참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가을 단풍산의 산자락이였다. 울긋불긋 커다란 가을산이 빛나고 있었다. 잠간 현기증이 들었다. 노랗게 빛나는 잎새가 춤추듯이 떨어진다. 그 나무 아래로 다가서니 노란 잎새들이 머리에도 어깨에도 살풋이 내려 내 머리며 내 어깨에 빛을 더해준다. 한켠에서는 단풍나무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그대는 그 빨간 빛 속에 흠뻑 빠져있는 것 같다. 산이 빛나고 사람이 빛나고 세상이 빛나고 있었다. 삶에는 늘 빛이 고여있는듯 싶었다.
가을산에 오르면 이런 가을에 빠져서 돌아오고 싶지가 않다. 조금만 머물러있어도 잘 익은 저 나무잎들마냥 열매들마냥 성숙한 녀인으로 무르익고 빛날듯 싶다. 무성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그 삶의 방증과 훌훌 털어버리고 소탈하게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 느끼면서 저도 몰래 가을의 성품도 닮아가고 싶어진다.
절정에 오른 가을 단풍산.
그 속에는 나도 있고 그대도 있었다.
잠간이였지만 우리는 벌써 물들어있었다.
우리는 벌써 빛나고 있었다.
그대는 빨갛게 나는 노랗게.
서산 우로 노을이 타오르고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것은 수년전 어느 늦가을이였다.

출처:<<도라지>>2017년 제 6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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