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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2009년 05월 16일 21시 21분  조회:1716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제1장에서 작자는 중산층 출신의 부자집 손주인 덕기와, <맑스 보이>인 김병화를 보여줌으로써 30년대의 풍속도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514)

-말일 <삼대>가 이광수나 이효석의 작품에서처럼 사랑이라든가 감정을 일층 우위에 두고 얘기를 전개한다면 그것은 한갓 낭만적 멜로드라마에 떨어졌을 것이다. 사랑이나 감정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근대에는 핏줄이나 재산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 삶이란 재산에 대한 생각이 핏줄이라든가 사랑보다 훨씬 큰 비중을 가져 인간을 행동케 하는 것이다.(516)

-<삼대>에는 핏줄과 재산이 유착되어 있어, 핏줄 쪽은 봉건적인 생각에, 재산 쪽은 근대적인 생각에 속하는 것이어서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삼대>는 근대적 소설이자 거기에 미흡한 것, 곧 중산층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이로써 잘 드러난다. (516)

-인간적 바탕의 깨끗함에 대한 도덕적인 우월성이야말로 작품 <삼대>의 밑바탕에 깔린 힘의 일종이다. 덕기도 병화도 이러한 도덕적 정결성에 의해 서로 깊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필순 및 필순 집안의 존재는 <삼대>의 세속적인 측면을 재는 눈금과 같은 것이다. 어떤 명작도 그것이 명작이기 위해서는 논리 밖에 놓인 어떤 정결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삼대>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522)

-조성훈이 이 편지를 찾고자 안절부절 못하고 홍경애는 그 편지 쓴 여인의 정체를 몰라 몸이 달아 있는 이 장면을 국외자인 김병화가 지켜보고 있다. 부자집 아들의 오입장이 노릇하는 삶의 풍속도라 할 것이다. 홍경애가 김병화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것 역시 20년대 후반의 식민지 속의 서울의 풍속도에 속하는 것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부자집 오입장이와 그 첩에 대한 흥미와 김병화와 피혁 등 사회주의자들의 행동 따위가 꼭같은 평면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곧 두 가지 모두가 한갓 풍속적인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대>에서 작가의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작품의 의미는 똑바로 파악될 수 없다.(523)

-풍속을 삶의 깊은 곳에서 그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풍속이 의식주를 해결한 자리 위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중산층 이상에 연결된 삶이라면 문화적 감각으로의 오입장이적인 감각이 빠질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조아지의 일상적 삶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이 시대 중산층의 삶의 감각을 다룬 유일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근거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527)

-...조씨가문의 분재기를 보여줌에 있어 작가 염상섭은 실로 파격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작가 염상섭이 맨얼굴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536)

-작가가 자기의 목소리를 버리고 돌연 <필자>라는 한갓 기록자의 자리에로 옮아 앉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삼대> 속에서 바로 이 대목만이 소설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소설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현실적 삶에서는 사실자체를 드러내야 한다. <삼대>가 소설임엔 틀림없지만 위의 대목만은 소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실적 세계로 옮겨가 버린 것이다. 진실과 사실이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형국이다. 어째서 분재기란 소설로 다루어지지 않는가. 왜 작가는 소설 속에 분재기만은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이질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진실과 사실 사이에 소설을 두느냐 진실 쪽으로만 치달을 것인가를 묻는 마당에까지 작가는 모르는 사이에 육박해 온 것이다. 사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소설은 소멸되고 신문기사라든가 학술논문이라든가 보고문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진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그 끝에는 사랑이라든가 미움 또는 그리움과 같은 환상(꿈)의 수준에 이르고 말 것이다. 곧 로만스에 이를 것이다... <삼대>는 이 점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았다. 사실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진실이라는 이름 밑에 자행되는 허위성(환상적 열매, 허황한 기준)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분재기의 제시와 그 제시방법이다.(536-537)

-그렇지만 <삼대>는 소설인지라, 작가는 금방 자기 목소리에로 되돌아갔다. 사실이란 한 번 얼굴을 내밀면 족한 것이다.(537)

-조부의 돈의 사상을 유지하되 사당의 사상(봉건적인 것)을 버리겠다면, 그것은 어는 쪽으로도 불철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철저함이야말로 바로 <삼대>의 한계라 할 수 있다.(539)

-곧 그러한 사상운동의 묘사는 범죄자(깡패)라는 감각이 아니면 결코 소설 속에서 포착될 수 없다. <삼대> 자체가 신문소설인 만큼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의 직접적인 대상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정이 잘 이해될 것이다. 가치중립적인 일상적 삶의 감각 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 만큰 그 신문이 안고 있는 정치감각에 충실하는 일이야말로 근대적 삶의 기준에 제일 알맞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병화. 장훈은 깡패 또는 범죄자의 범주가 아닐 수 없다.(547)

-<삼대>가 가족사적인 소설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조부. 부. 손에 걸치는 삼대의 세대적인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님도 거의 확실하다. 더구나 같은 세대의 동시대적 의식을 그린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렸는가. 성격이었다. 성격이되, 운명론적인 성격이다. 발전소설, 또는 교양소설이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교양(발전)소설 또는 성장소설에서의 성격이란,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해 가는 것이지만, 운명론적인 성격은 날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비중이 결정론적 성격에 있는 만큼, 현실개혁의 의지는 사실상 승인되지 않는다. 현상유지의 보수주의, 인간의 일상적 준거, 가치중립성에 멈추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속성이 이 보수주의와 잘 어울릴 수가 있는 것이다.(554-555)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한 것, 그 속에 덕기의 인생이 놓여 있다. 이 불확실한 마음이란 덕기가 놓인 상황과 등가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삼대>의 참주제가 새삼 선명해진다.(561)

-돈의 자율성과 개개인의 성격이라는 두 기둥 속에 놓인 조씨가문의 삼대는 각각 저마다의 <도의적 이념>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치중립적이고 현상유지의 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제 4 대인 덕기의 아들도 앞 세대가 보인 성격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음이 원칙이다. 다만 그는 그 나름의 <도의적 이념>만을 가질 따름일 것이다. 돈의 자율성을 돌파하지 않으면 이들 가문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은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이들 가문은 그들 재산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주는 통치부가 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구한말 통치부든 총독부든 미군정이든 자유당 통치부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에겐 역사가 없는 만큼 삶의 내재적 가치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삼대>가 안고 있는 한계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니깐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이 작품만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일찍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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