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fln1472 블로그홈 | 로그인
함께 하는 인생여행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 기타

나의카테고리 : 나의서재 -> 메모장

신희교, , 국학자료원, 1996
2009년 05월 16일 21시 42분  조회:2128  추천:0  작성자: 방룡남

발표매체는 작품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일제말기문학작품들은 일간신문과 잡지에 발표되거나 단행본의 형태로 출판되었다. 이 시기 일간 신문을 통한 작품발표는 한국에서는 {每日新報}를 통하여, 만주에서는 {滿鮮日報}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 총톡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 매체의 성격상 어용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많이 연재하였다. 특히 역사소설을 포함한 장편소설이 이 신문의 지상에 많이 발표되었는데 모두 어용적인 성향을 띠려 하였다.(34쪽)
한편 기존의 한글신문인 {滿蒙日報}와 {間島日報}를 통합하여 1937년 10월 21일 {滿鮮日報}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 신문은 1945년까지 한글신문으로 존속하면서 2백만 명을 상회하는 만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이주민드에 대한, 국책홍보지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였다. 신춘문예의 현상 모집을 하기도 한 이 신문은 그러나 관동군 기관지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하였다.(채훈, {재만한국문학연구}, 깊은샘, 1990, 152면-인용자 재인용)(34쪽)
문학작품의 발표매체로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잡지였다. {文章}과 {人文評論}, 그리고 {國民文學}과 {春秋}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 잡지인데 특히 {문장}은 {국민문학}이 출연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민족문학을 지킨 마지막 堡壘였다.(35쪽)
창작소설의 경우, 종합잡지인 {춘추}가 {국민문학}보다 훨씬 덜 시국적이었다. 특히 한글 순수지향 소설은 1941년 2월 1일부터 1944년 10월 1일의 통권 39호까지 40편 내외가 발표되었다.
{춘추}는 동아일보가 폐간된 뒤 그 기자였던 梁在廈가 중심이 되어 창간된 종합잡지였다. 초기에는 면수도 3백여 면에 읽을만한 논문도 없지 않았다. 문학란 또한 충실했다. 특히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도 나타나 이여성의 [조선복색원류고]('41. 2)와 고유섭의 [약사신앙과 신라미술]('41. 4)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잡지 또한 말기에는 면수도 줄어지고 전쟁협력과 소위 內鮮一體를 위한 어용지로 화해버렸다. 이외 이 시기 문학작품이 발표된 잡지로서는 종합잡지인 {朝光}과 {新時代}, 그리고 {大東亞}, {野談}, {東洋之光}이 있었으나 모두 어용지임을 면치 못했다. 이 시기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전술한 바 어용색을 띠고 말았으나 {춘추}에 한글 순수지향 소설이 많이 게재된 것을 들 수 있다.(39쪽)
일제의 언어침략은 1937년 1월 {매일신보}가 "학예기사 일부를 확장, 국어(일어-인용자)면을 창설"할 것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때 박춘식의 俳句인 [春]과 최남선의 [조선문화당면의 문제](日文)가 실렸다. 한편 사회의 각 기관으로 하여금 일어상용을 강요하던 조선총독 미나미는 이해 4월 1일 이후 각 중학교에서의 조선어교육을 폐지시켰다. 그리고 1938년 3월 3일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을 통해 일어교육을 더욱 강요하였다. 이 교육령 개정에 따라 종래 시간수는 적(46쪽)었으나 정식과목이었던 조선어는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행정지도 차원에서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 시켰으므로 실제로는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교수용어는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일어상용이 강요되는 형국이었다.(47쪽)
1939년 1월에는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친일파인 朴熙道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東洋之光}이라는 일어잡지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에는 鄭人澤의 [晩年記]('42. 5), 崔秉一의 [或る晩]('43. 1), 牧羊 李石薰의 [血緣]('43. 8), 玄薰의 [山また山]('45. 1)등의 일어소설이 실리기도 하였다.(47쪽)
일제의 언어침략은 1941년 1월 이후에는 출판물에 대한 각종 檢閱方針의 강화라든가 이 해 6월 1일 이후의 용지 사용에 관한 승인제 실시로도 나타났다. 즉 일어면을 첨부하지 않는 한 용지를 배급받을 수 없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즉시 검열에 걸려 발행권이 박탈되었다. 일어면 첨부와 관련, 예컨대 {三千里}의 改題誌인 {大東亞}는 당시의 정황을 반영하여
[국어사용]은 이때에 있어 우리가 가장 진심으로 밧뜨러행할 일이외다. 반도동포, 아직 국어를 모르는이는 하로바삐 습독하소서. 이뒷날 남방으로 북방으로 전세계에 웅비할시기가 올터인데말도모르고 었저자고 그러심니까어서 국어습득에 전력하셔요, 본지 [대동아]도 내일부터 誌上 [국어강좌]를 특설하겠습니다.({大東亞}, '42. 7, 편집후기-인용자 재인용)
라고 하여 애교아닌 애교를 부렸던 것이다.(47쪽)
'녹기연맹'의 현영섭이란 자는 1938년 7월 8일 미나미와의 면담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뇌까렸다.
세계를 통일한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인 근거를 가지고 있으나 한번도 실현된 일은 없다. 이러한 세계적인 이상을 생각할 때 내선일체의 문제는 극히 적다. 그라나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하여는 문의식적 융합인, 즉 완전한 내선일원화에서부터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종래에 체험치 않은 신도(神道)를 통하여, 또는 조선어 사용 전폐에 의하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每日新報}, 1938. 7. 9 임종국, {親日文學論}, 평화출판사, 1966, 50면-인용자 재인용)
玄은 내선일체의 완전한 구현을 위해 한국어 사용의 全廢를 부르짖었다. 이에 대해 미나미는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한 일이다. 가급적으로 국어를 보급하자는 것은 가한 일이며 이 국어보급운동도 조선어폐지운동으로 오해를 받는 일이 종종 있은즉 그것은 불가한 말이다"({每日新報}, 1938. 7. 9 임종국, {親日文學論}, 평화출판사, 1966, 51면-인용자 재인용)라고 하여 오히려 한 발 물러서는 듯한 포즈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한국어 과목이 폐지된 지 3개월 후의 일이었다. 미나미의 태도가 포오즈였음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장}, {인문평론}의 폐간으로도 나타났던 것이다. 玄의 언급을 실증이라도 하듯, {국민문학}같은 잡지는 1942년 5, 6월 합병호부터 전면 일어화시켜 버렸다. 崔載瑞에 의해 한국어는 苦悶의 種子로, 한국어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정신의 ( )인으로 오인되어졌던 것이다.(48쪽)
한편 文壇의 얼어화를 촉진하고 장려하기 위한 각종 賞도 설정이 되었다. 즉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국어문예총독상'('43.1)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수여하는 '국어문예연맹상'이 그것이었다.(48쪽)
한글 말살책의 일환으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朝鮮語學會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어상용이 강요되는 와중에서 한국인이 모두 일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일제가 일어 해득이 어려웠던 한국의 민중에게 국책을 선전하기 위해 한글 사용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지식인 상대의 {국민문학}과는 달리 대중상대의 일간신문과 종합잡지가 한글을 계속 사용했던 것은 대체로 그와 같은 정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한글로 표기된 순수지향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창작될 수 있었다.(38쪽)
일제는 한국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整地 作業의 일환으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撫摩할 필요가 있었다. 반일 감정의 무마는 미나미 조선 총독이 주창한 '內鮮一體' 정책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한국인을 완전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 즉, 민족말살을 획책하기 위함이었다. 민족말살의 가장 강력한 수단 가운데 하는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피를 섞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른바 '日鮮通婚'이라고 한다.(53쪽)
이 시기 어용소설 가운데는 한국인 청소년을 일제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마당으로 내몰기 위한 의도로 창작된 작품이 많다. 이는 일제가 시행한 두 가지 정책을 지지할 목적으로 창작된 것이다. 그 두 가지 정책 중 하나는, 中日戰爭이 발발된 이듬해인 1938년 2월에 공포된 志願兵制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43년 3월에 공포된 徵兵制라는 것이다. 지원병제는 징병제를 위한 준비 단계였지만, 이 시기 어용소설을 통하여 자주 선전되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강제성을 띤 채 강력히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징병제는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과 1945년에 강력히 시행되었다.(61쪽)
전쟁의 완수를 위해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통제가 뒤따르고 또한 물자 생산을 위해 총력이 집중되었던 것이 이 시기의 생활양식이었다. 우선 전시하인 이 시기의 생활양식을 규정한 하나의 커다란 틀은 무엇보다도 愛國班의 활동에 있을 것이다. 애국반은 1938년 7월 7일 결성(70쪽)된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基底組織으로 그 조직은 한국 전체를 대상으로 하엿는데 이는 모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동원하려는 지향의 표현이었다.(71쪽)
중일전쟁에 이어 太平洋戰爭을 터뜨린 일제는 이후 전쟁에서 소모되는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제는 우선 일반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물자절약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근로를 강조하였다. 한편 모자라는 식량을 전선으로 조달하기 위해 식량의 증산을 부르짖었고 전력이나 귀금속의 생산을 장려하기도 했다. 여기서 물자의 절약이나 근로, 그리고 생산증가와 관련된 활동은 이 시기 일반인들의 생활의 변모 가운데는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었다.(71쪽)
이 시기 만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의 제목에 나타나 있는 작가의(83쪽) 설명을 살펴보면, 만주 건국 이전의 삶을 취택할 경우에는 이민이나 선구 개척민이라는 표현을 썼고 건국 이후의 삶을 취택할 경우에는 開拓民이라는 표현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자료를 잠깐 살펴보면, 우선 개척민 정책은 만주 건국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그 정책은 이른바 일본과 만주는 하나라는 정신에 의해 민족의 협화와 국토의 개척, 그리고 왕도낙토의 건설을 구현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京城'의 선만척식주식회사와 '新京'의 만선척식주식회사가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회사들은 첫째 한국내의 우수한 농부들을 집단적, 또는 집합적으로 이주를 시켰고 둘째 만주국 안의 기존 한국인들의, 영농을 도왔다. 한편 이 개척민정책은 對蘇兵力 배치 및 産業開發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노린 것이었고 한민족을 한국으로부터 몰아내려는 民族解消 전략과도 문관하지 않은 것이었다.(林鍾國 編, {親日論說選集}, 409면-인용자 재인용)(84쪽)
[목축기]의 주인공인 찬호는 을종의 학력으로, 축산과 삼년을 마친 후 한때 사립중학의 교원을 지낸 인물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학력이 이렇게 처리된 것은 일제의 시책을 선전함에 있어 기능인력으로서의 인물이 설정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만주국의 근로교육정책에 따라 해당학교에 의해 간택된 후, 농과의 대용 교원으로 지내면서 농사일과 같은 실습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귀농을 권장해 보았지만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말재주가 없는 대신 그저 묵묵히 농사일이나 할 줄 아는 그러한 인물이었는데 건국 전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던 학생들이었던지라 그의 말은 전혀 통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만주국의 정책이 교육의 현장에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20만 동포의 8할을 점령한 농촌으로 학생들을 돌려보내려던 주인공의 의도는 전혀 빗나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여기서 개척지에서의 삶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알려주고 있다. 즉 주인공이 부임한 지 삼 년 동안 두 명의 청년이 개척지의 교원으로 부임해 갔으나 外敵으로부터의 위협 등으로 인해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개척지라든가 개척촌은 생명을 잃을 만큼 매우 위험한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여기서 하나의 사실, 즐 교육자라서 실패했음을 자각하고 직접 개척의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85쪽)
주인공은 목장을 꾸미기 위해 첫째, (감자 사료를 얻기 위해)농민을 입식시키고 둘째, "현당국"의 협조를 얻게 된다. 특히 후자는 "와우산목장"이 "목축부락"으로 인가를 받고 "목축자작농"에의 각종 편의를 받았음이 밝혀져 있다. 이 소설은 이처럼 개척민 부락이 건설되기 위한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을 제시해 놓고 있다....이 작품의 구성은 시국과 관련되 이러한 내용을 전반에, 그리고 주인의 조력자인 양돈전문 인부에 관한 이야기를 후반에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노송이라는 인물은 돼지를 끔찍히 사랑하는 인물인데, 이러한 인물의 설정은 작품의 전반에서 주인공인 찬호가 돼지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낀 반면 인간(학생)에 대해서는 실망했다는 심리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1940년 가을, "목축지정현"인 00현의 臥牛山을 배경으로 그 해 겨울까지 있었던 일을 다루었다.(86쪽)
작품의 서두와 말미에는 이러한 계절의 경과를 그려둠으로써 구성의 묘를 기해보려 하였으나 時局物로서의 성격을 탈피할 수 없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처럼 사립학교에서 농사일과 같은 실습을 맡고 있던 기능적 지식인이 학생들을 향해 만주국의 근로정책을 찬양해 보았지만 신통치 않자 그 스스로가 개척민이 되어 목축부락을 세우고 돼지목축을 해나간다는 이야기였다.(86쪽)
이상 어용소설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개성의 상실과 함께 전체성을 획득한 이상의 소설들은 이미 문학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주로 시국적인 주제가 어용적 입장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소설의 양식은 파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팽팽한 대립은 찾아볼 길이 없고 작가적 개성 또한 상실한 이렇나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親日的 傾向, 天皇에 대한 狂的인 忠誠心, 戰時政策에 대한(90쪽) 무조건적인 복종, 주체성의 살실 등이다. 이는 [아자미의 장]과 [뒤돌아보지 않으리], 그리고 [봄의 노래] 및 [목축기]에서 잘 드러났다. 침략전쟁을 수해하는 것, 이 한가지 일에만 미친 듯이 매어달렸던 것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였던 듯하다. 오직 군국주의적인 파시즘만이 대두되었던 이때의 소설들 대부분에서 미적인 형상화보다는 국한된 목적의식밖에 찾을 길이 없다. 일제의 정책선전에 기여하기도 한 이러한 소설들은 주로 작가들의 창작동기라는 차원에서 살펴보았다. 여기서 작가들이 획일적이고도 폐쇄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자유로운 사고를 펼치지 못했던, 어용소설들은 바로 暗黑期 소설의 한가지 뚜렷한 양상이라 할 것이다.(91쪽)
이 시기 소설 중에는 일제의 국책 선전에 협력한 소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어용소설과 대립되는 순수지향 소설은 어려운 창작적 정황 가운데에서도 꾸준히 발표되었다. 순수지향 소설 중에서도 특히 한글로 표기된 순수지향 소설이 여전히 발표되었다. 이는 {국민문학}지 들을 토해 일본어로 표기된 작품이 많이 발표되는 상황에서의 일인지라 우리 문학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러한 순수지향 소설의 유형은 대체로 세 가지로 갈라 볼 수 있다. 첫째는 身邊小說이다. 일제말기 신변소설은, 신변소설이라는 字義(字意?-인용자)에만 국한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둘째는 세태·시정소설이다. 일제말기 세태·시정소설 또한 그 字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아진다. 이외 이상의 두 유형에 들지 않는 소설들이 있다. 이를 흙과 자연에의 磁性이 나타난 소설들이(91쪽)라 하여 살펴 보았다.(92쪽)
어용소설과 함께 일제말기 소설사를 형성하는 또 하나의 큰 흐름은(엄밀히 말해 순수지향의 소설 중에서도) 신변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신변소설은 당시 작가들에 의해 많이 발표되었다. 신변소설은 작가가 자기의 생활 체험이나 신변의 사실만을 다루는 소설이다. 일제말기 신변소설은 작가의 신변사는 물론이지만, 특히 작가의 (전체주의적 경향에 반한) 개인의식을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일제 말기 신변소설에서 보여지는 작가의 개인의식은 무엇보다 당시의 현실과 관련되 것임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즉 이 시기 작가들은 신변소설을 통하여, 일제와의 직접적 대결이 불가능한 상황이 빚어내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즉 시대적 고민을 표출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생활의 정신화를 꾀하거나 과학적 법칙을 통하여 생활의 변모를 가져오려는 지식인 작가가 일제와의 대결이 봉쇄되었다고 하여 현실의 전면으로부터 완전히 후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로부터 물러서는 듯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이 점은 자의를 그대로 나타내는 일본의 私小說과 한국의 신변소설이 결코 동일한 의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저자 주) 이 시기 신변소설을 통하여 드러나는 작가들의 시대적 고민은 이러한 각도에서 파악된다.(92쪽)
세태소설이란 프로문학의 퇴조에 따라 소설계에 사상성이 현저히 후퇴한 대신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경향-즉 하나는 世態描寫(외향적)인 것과 다른 하나는 內省心理(내향적)인 것 중 하나이다. 임화에 의하면 세태소설이란 "내성의 소설"과 대척적인 소설이며, 무력한 시대의(114쪽) 소설로서 평가되고 있다.(115쪽)
가족사소설에서 시간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시간은 하나의 역사적 흐름이자, 인간의식의 각성과정이기도 하다.(116쪽)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억압과 긴장의 해소를 반복함으로써 그 조절기능을 적절히 수행해 나간다.(125쪽)
일제말기 소설 중에는 주제가 뚜렷하지 않은 소설이 상당히 많다. 작품의 내용이 일부는 어용적이고 일부는 비어용적인, 이러한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형상화하는 소설쟝르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하나의 이단일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소설의 경우, 어용적인 측면에 주목하여 어용소설로 분류하였다.(171쪽)
본고가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소설들은 1941년부터 해방 전까지의 시기에 발표되었던 것드이다. 소설연구의 기점을 1941년으로 택하게 된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즉 1941년은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비화됨에 따라 일제에 의해 민족말살정책이 더욱 강하게 추진되었으며 문학 또한 이에 따라 완전한 변모의 양상을 보였다는 것, {문장}의 폐간에서 알 수 있듯 민족문학의 발표매체가 상실되었다는 것, 한글 사용의 강제규제와 함께 일어상용이 강요되었다는 것, 문단의 어용화가 더욱 촉진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1941년 이후의 시기는 '조선문인협회'나 '조선문인보국회'와 같은 어용문인단체에 의해 작가들이 전쟁을 위한 시책에 앞장 설 것이 요구되었고 또한 일본어로만 작품을 쓰도록 요구되었다. 여기서 본고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이, 이와 같은 연유로 1941년부터라고 보아 1941년 이후의 시대 속으로 들어가서 소설계를 구명함으로써 공백기로 일컬어져온 이 시기의 문학사에 작은 디딤돌을 놓고자 하였다. 한편 문학과 관련하여 이 시기의 시대정신을 뜻하는 용어로서는 통칭 암흑기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용어는 애초 白 鐵에 의해 불리워졌던 바, 민족문학에 대한 허무주의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179쪽)
1936년  8월 미나미 대장, 총독에 취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공포
1937년  2월 일본어 사용을 강제
1938년  2월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 창설
        3월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
1940년  2월 창씨제도 시행
        8월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폐간
       10월 국민총력연맹 조직, 황국신민화운동 강행
1941년  3월 사상범예방구금령 공포
        8월 농산물 공출제도 강행
1943년  5월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
        8월 징병제 실시
1944년  1월 학병제 실시(李弘植, {國史大事典}, 대영출판사, 1976의 년표 참고.-저자 주)
(274쪽)
1941년 4월, 월간의 순문예지인 {문장}과, 역시 같은 성격이나 평론중심의 글을 싣던 {인문평론}이 폐간되었다. 그 후작가들은 {춘수}, {국민문학}, {동양지광}, {신시대}, {야담}, {조광} 같은 잡지나 {매일신보} 같은 총독부 기관지에다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리한 잡지와 신문의 지면에 친일적인 작품을 게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국민문학}은 몇 편의 한글 작품을 제외하고 일본어 작품만이 실려 있는, 일본어 일색의 잡지였다.(274쪽)
[새벽]은 모두 23回가 연재되었다. 신문소설은 독자에게 계속적으로 흥미를 유발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 작품 또한 이를 고려한 때문인지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圖式的인 듯하다. 또한 신문소설은 광범위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 작품 또한 이를 고려한 때문인지 그 내용이 비교적 단순하다. 그리고 일제의 검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민 공동체와 같은 스케일이 큰 이야기보다는 이민일가의 삶이라는 스케일이 작은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문에 연재한다는 負擔感을 다소 덜어보려 한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이 만주건국 이전의 과거로 설정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고난에 가득 찬 간도 이민의 정착과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점에서 [새벽]은 그 제재가 전형적이며 그 다루어진 사건 또한 蓋然性이 있다고 할 것이다. 간도 이민의 정착과정중에 있었던 빚에 얽힌 人間事, 얼되놈의 橫暴, 그리고 그 결과로 慘憺한 지경에 처하게 된 일 등을 통하여 이민의 정착이 얼마나 어려웠던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277쪽)
[새벽]은 만주에서 한국인 이민들이 정착과정에서 너무나 흔하게 겪었을 법한, 결코 평범할 수만은 없는 경험적인 敍事를, 微視的 範疇인 한 이민가족을 통하여 다루어 나간 작품이다.(278쪽)
[홍염]과의 간텍스트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벽]은 간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구체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고 하겠다.(278쪽)
남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의 제목에 관한 것이다. 작품의 제목인 "새벽"은 결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새벽이 의미하는 바는 희망 또는 낙관이다. 그런데 그 결말은 매우 비극적인 것이었다. "새벽"이라는 제목은, 단지 작품의 中間場面 일부와만 호응되고 있을 뿐이다. 그 중간장면에는 "장작림군벌의 사용병(私用兵)인 육군"들의 "약탈"상이 그려져 있다. 군벌로부터 물자지급을 받지 못하는 군인들은, 주인공의 집에 들어와 횡포를 부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인들의 횡포가 있고 난 후,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78쪽)
주민들은 누구나 할것업시 평화롭고 안온한 속에서 즐겁게 농사를 지을수 잇는 세상을 갈망하엿다. 그러나 누구하나 십여년후에 이 땅에 그들이 갈망하는 세상이 웅장한 보조로 차저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햇다({싹트는 대지}, 97-98면-인용자 재인용).
군벌로 인한 피해가 사라질 만주 건국이야말로 이민들의 농사를 안전하게 보장해 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점에서 제목인 "새벽"은 장차 도래할 만주의 건국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정책에 편승하여 제목이 붙여졌다고 하겠다. 그러나 [새벽]은 일제를 무조건 찬양한 작품은 아니다. 한 청년이 과거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된 이 작품은, 그 소년 주인공을 등장시켜 간도 이민 일가의 수난을 집작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새벽"이라는 제목은 다만 편의상 붙여진 데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279쪽)
{만선일보}를 통하여 나타난 찬수의 생각과 행동은 선집·전집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단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의 세력이 사태 해결의 관건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선일보}판의 [벼]가, 간도의 조선인 이민을 통하여 그 땅과 논, 고리고 벼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그린 작품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285쪽)
[원각촌]이 일제의 만주에 대한 정책적 이민인, 개척민을 권장할 의도로 마련(285쪽)되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작품 또한 앞서의 작품들처럼 단순히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는 소설로만 보기는 어렵다.((286쪽)
[원각촌]은 간도에 살고 있던 동포들의 개척담을 담았다는 점에서 경험적 서사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원각촌]은 그와 같은 경험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갈등을 그린 허구적 서사물이라는 점에서도 이채를 띤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리원보는 특이한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출신지가 분명치 않은 그는 아내에 대한 끔찍한 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사보다는 산판으로 전전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힘이 센 그는 외톨이로 자처했고 과묵했다. 작가가 만주의 이주농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고 이처럼 의처증에, 방랑벽에, 불교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허구적 서사를 위해 架空의 인물을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처럼 한익상 또한 가공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익상은 경험적 서사에 더욱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 관리들에게 빌붙어 동포들에게 횡포를 일삼아 온 얼되놈이다. 여기서 한익상의 제거는 동포들만으로 이루어진 원각촌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원각촌의 안정을, 민족모순 같은 구조적인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단순히 일개인의 제거 같은 현상적인차원에서만 다룬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 작가는 [원각촌]을 선구 개척민 생활 발굴이라는 각도에서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남녀간의 애정(289쪽)갈등에다가 그 각도를 맞추었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한익상은 원각촌의 정신적 지주인 화담법사와의 긴장된 대립보다는, 오히려 금녀를 중심으로 하여 억쇠의 연적으로 기능한 몫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한익상은 이 점에서 억쇠와 금녀의 애정을 가로막는 방해인물인 것이다.
한편 배경이 된 원각촌은, 동포들만이 모여사는 곳이다. 불교를 믿고 농사를 지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참으로 살기 좋은 이상촌이 건설되고 있다고 하였다. 원각촌은 그런데 실재하는 촌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촌이기도 하다. 이는 경험적 서사와 허구적 서사의 조화때문인 듯하다.(290쪽)
[원각촌]은 발표기관이 {국민문학}지였다. 따라서 모종의 시국적인 색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말에서 "명일의 평화"란 곧 만주 건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국적 발언은 작가의 설명에도 나타나 있었다. 서두에서의 작가의 설명과 결말에서의 나레이터의 발언은 일종의 외부액자를 이루고 있는데 이 외부액자에서 시국적인 발언이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원각촌]은 개척민의 생활묘사에 주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남녀간의 삼각관계를 통한 애정을 그리는데 주력한 듯하다. 이와 같은 남녀간의 애정은 일종의 내부액자에 담겨져 있는 셈이다. 작가는 [원각촌]에서 선구 개척민 생활 발굴을 명분으로 밀고(290쪽) 나가면서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짜임새있게 전개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91쪽)
만주에 대한 정책적 이민을 '개척민'이라고 불렀음에 비추어 [목축기]는 일단 일제의 이민정책에 순응하여 씌어진 작품이라 하겠다(291쪽)
한편 이 작품의 후반에서 老宋이라는 인물은 찬호의-인간에 대한 嫌惡心이라는-심리를 강조해주는 역할을 맡은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찬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전반과 달리 후반은 노송이 중심인물로서 이야기의 방향이 다소 엉뚱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시국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작가의 의지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292쪽)
작품의 후반은 노송을 통하여 개척생활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노송의 이야기는 인물설정이라든가 작품의 분위기가 전반과는 뚜렷하게 다르다고 보아진다.(293쪽)
그가 "눌변"이라는 것은 그의 역할이 매우 고민스러운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학생들로부터 "귀농선생"이란 별명까지 얻은 그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개척의 현장에 종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철저히 만주국의 정책에 순응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교육자로서, 목축가로서 그는 만주국의 꼭두각시역을 맡고 있는 것이다.(294쪽)
이 작품의 후반에 등장한 老宋이 찬호의 심리를 강조해주고 있다함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전반을 다시 검토한 결과, 우리는 후반이 전반과 다르다는 느낌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된다. 즉 전반이 시국에 매우 민감한 인물을 형상화했다면, 후반은 시국에 전혀 鈍感한(294쪽) 인물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후반은 하나의 독립된 성격을 지닌 이야기로서 그 자체가 純粹物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작품의 전반을 통해 시국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작품의 후반을 통해서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두와 결말에서 보듯 臥牛山을 통한 계절의 경과를 그림으로써 한 편의 이야기로 완결되어졌다고 하겠다.(295쪽)
간도는 식민지하 조선인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었지만 또한 고난의 땅이기도 했다.(306쪽)
[벼]는 조선인 이민의 논(벼)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그렸다. 특히 밥 다음으로 필요한 학교 설치-이민 2세의 교육 문제-를 다루었다. 간도에 정착한 조선인드이 어떤 경로를 밟아 하나의 사회를 이룩해 나갔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지도자격인 지식인 주인공의 일제 세력에 대한 傾斜는 아무런 반성을 수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포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독립심이 다소 부족한 것으로도 보였다.(306쪽)
일제말기에 창작된 안수길의 소설들은, 시대와 접촉하고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세계관이 상이한 듯하다. 작품의 제목이나 외부액자는 일제의 시책에 순응하고 있지만, 작품의 내용이나 내부액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아진다. 이는 특히 [새벽]과 [원각촌]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목축기] 또한 [원각촌]과 같은 성격을 지닌 일종의 액자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말기 안수길은 일제의 시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거부하면서 창작활동을 지속해 나갔던 것으로 판단된다.(1991-저자)(307쪽)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4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