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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로, , 명문당, 1991
2009년 05월 16일 21시 50분  조회:2443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윤병로, 󰡔�한국 근․현대문학사󰡕�, 명문당, 1991.


서설-문학사 기술의 시각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공시적인 측면에서 면밀히 검토하면서 동시에 통시적으로 체계화하여 구명․서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내야 하는 데 문학사 기술의 의의가 있다. 문학사란 문학적 유산의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이나 사건․사조들의 현상적 전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일정한 시각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편타당한 의미를 부여받는 차원에서 기술된, 하나의 문학적 총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를 올바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한 이해와 역사를 보는 안목의 깊이가 전제되어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학사란 문학과 역사의 복합체로서, 이들 상호간의 긴밀한 연계에 의한 유기적 조직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이 지닌 심미적 질서와 가치체계가 인간 행위의 시간적 누적이며 동시에 그 주체들에 의해 방향성이 희구되는 역사와 접맥되는 데서 성립․전개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문학유산 가운데 어느 양상이 보다 주된 흐름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또 어떤 문학적 사상(事象)들이 어떤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하는가에 따르는 인식과 방법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 문학유산에 대한 인식과 방법의 문제가 진지하게 검토되고, 그 자체가 과거와 오늘의 삶에 대한 적극적 이해를 동반하게 될 때, 하나의 문학사는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15)

이 점은 우선 하나의 문학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다 그렇지만 문학은 특히 삶의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될 수 없다. 또 일반적으로 삶과 동떨어진 가치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간략히 정의한다면 문학은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문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당대적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일상적 삶의 모습들이 제시되고, 그 속에서 야기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작가의 미적 태도에 의해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부각됨으로써 문학작품은 당대의 현실적 삶과 가치, 사회구조와 문화적 세부를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적 행위의 형태가 당대적 삶의 모습과 문제들을 하나하나 거론하여 그 각각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때로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과 어긋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고, 시대를 앞질러서 새로운 삶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만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존재하는 데에 문학의 속성이 내재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문학사는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이 당대적 삶의 모습을 진지하게 반영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는가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훌륭한 문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문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은 다름 아닌 당대의 현실임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문학사가에게 있어서 기술 대상의 취사선택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다음으로, 문학사를 기술하는 일이 오늘의 작가적 현실과 문학유산을 추구해 나가는 작업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인식과 방법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오늘의 문학이 과거의 문학적 유산들과 아무런 연계를 맺지 않고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보다 풍요롭고 알찬 오늘의 문학을 위해서는 과거 문학유산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집 가능한 자료들을 낱낱이 수집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초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료와 사실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다양한 이해의 시각을 넓혀감으로써, 우리 문학의 전통과 현재적 위상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문학적 유산에 대한 구명을 통해 오늘의 문학과 삶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확충됨으로써, 문(16)학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로서의 의의를 지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 기술에 있어서 자료의 선택과 체계적 정리는 그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과거의 문학적 실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기술 태도이다. 그것은 문학사에 편입되어 서술되는 그 자체가 이미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학사는 거시적 체계에 있어서 통일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그것의 세부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문학사가의 태도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 자체의 맥락과 작품 상호간의 유기적 연계관계를 주목해야 하며, 나아가 문학이 존재하는 대사회적 성격과 문화적 의미까지를 아울러 밝혀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의 실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객관적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17)

요컨대 문학사는 다양한 시각에서 기술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의당 방법론적 각성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그것이 다채롭게 기술되는 만큼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과 현실을 재구성하는 깊이의 문제가 다시금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학사를 기술하는 일은 삶에 대한 자각적인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결국 문학사 기술에 따르는 시각의 문제로 귀결되겠지만, 문학이 지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속성은 그 같은 과정을 통해 보다 절실하게 우리를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18)


제1부 초기의 신문학: 개화기시대의 문학


1. 신문학 태동의 역사적 배경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 문학은 적어도 두 차례의 분기점을 통해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전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훈민정음의 창제에 의한 자국문자의 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개항 이후 비록 외래적 요인의 힘이 컸지만 새로운 근대사회와 사상의 도래이다.(19)

주지하다시피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민족이 자국어에 의한 정서표출과 사상 표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른바 진정한 의미의 국문학이 태동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학은 보다 다양한 형(19)식과 내용, 더욱 확장된 계층적 참여를 통해 문학사를 수놓아 왔다. 그러다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역사적 대전환의 시기를 맞게 되고, 이는 결국 19세기 말엽에 이르자 그동안 누적되어온 변화의 조짐이 사회․문화적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말하자면 우리의 문학사에 있어서 ‘근대’를 준비하는 과정에 놓여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20)


근대에의 지향


새로운 문화현상은 당대의 사회현실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 문학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많은 사회변화와 가치질서의 변모를 자체 내에 수용하고 있다.(20)

단적으로 말하여 18세기 이후 한국사회는 근대를 향한 움직임이 사회전반에 움트기 시작했고, 문학 역시 그 같은 움직임을 적극 수용하여 작품에 반영하려고 한 모색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색이 곧 근대문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移行期)에 해당한다 하겠다. 우리의 근대문학은 다음 시기인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문학사의 표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21)


갑오경장(甲午更張)과 정신사적 흐름


전근대적(前近代的)인 봉건체제의 모순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드러나 갈등을 야기하는 대내적 상황과 함께 쇄국(鎖國)과 개화(開化)의 갈림길에서 대외적 위기를 맞게 된 것이 19세기의 조선사회였다.(21)

결국 강력한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구미열강과 일본의 압력으로 개국(開國)하게 된 1876년의 개항을 출발점으로, 이 땅에 개화의 물결은 거세게 밀어닥쳤다. 그 결과 조선은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신․구 문물의 교체적 상황과 함께 필연적인 갈등이 수반되었다. 문(21)학 역시 이러한 시기적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개화사상의 형성과 함께 커다란 변화의 싹을 배태(胚胎)하게 되었다.(22)

감오경장(甲午更張․1894)은 전통적인 봉건 조선사회로부터 자율적인 개혁의 기점이 되고 있다.(23)


근대문학 기점문제


대체로 ‘근대’라는 개념은 중세적 주종관계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철폐된 점, 시민의식의 성장,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의 확립, 새로운 문물제도에 의한 세계관의 변환이라는 특징적 국면들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24)

요컨대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전통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변혁이 이루어졌으며, 외래사조 및 문물의 이입(移入)으로 인한 근대적 성격변화를 경험하게 된 사실들로 비추어, 갑오경장 이전을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과도기로 보아 그 이후를 근대문학으로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25)


2. 개화기 시가와 사회사적 성격


개화기 시가의 범위를 일단 갑오경장을 전후한 19세기 후반에서 본격적인 근대문학이 전개되는 20세기 초,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이전으로 잡아볼 때, 이 시기의 시가형태와 개념적 정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거듭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의 시가를 ‘창가(唱歌)→신체시(新體詩․新詩)’순의 전개를 주장하여 신체시 이전의 모든 시가를 창가라는 개념으로 묶어 이를 개화기 시가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임화, 백철, 조연현, 조윤제, 김동욱, 문덕수 등), 창가 이전에 개화가사를 두어 ‘개화가사→창가→신체시’순의 전개를 주장함으로써 전통가사 형식을 답습한 개화가사와 다소 새로운 가요인 창가를 구분지어 사용하기도 하며(조지훈), 개화가사를 다시 개화시와 개화가사로 구분하여 ‘개화시→개화가사→창가→신체시’순의 전개를 주장하는(송민호) 등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실정이다.(26)

실제로 이 시기의 시가는 󰡔�독닙신문󰡕�의 독립․애국가류를 비롯하여 가사(개화가사)․시조․한시 등 전통적 시가형태와 창가․신체시 등으로 불리어지는 다소 새로운 시가형태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당대 간행되었던 신문․잡지들을 통해 발표되었다.(27)

그런데 여기서 ‘신체시’까지를 개화기 시가의 범주에 넣어 살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체시가 흔히 우리 시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적 특징을 지닌 문학형태로 일컬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단순한 몇 가지의 형태적 변형에서 일뿐, 개화기적 특징을 두루 담고 있다는 역사적 성격과 내용적 사실 이외에도 개성적 차원에서 개인의 정서적 반응을 노래한 근대적 서정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 과도기적 혹은 이행기적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함이 옳을 듯하다. 따라서 신체시 역시 개화기 시가의 말미에서 새로운 시의 태동을 예비하는 단계에 놓여 있는 문학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본다.(27)


독립․애국가류와 개화가사


개화기 시가는 특히 초기에 있어 ‘독립가’ 혹은 ‘애국가’라는 모습을 띠고(27)있었다.(28)

이들 독립 애국가류와 개화가사는 전통적 율조인 4․4조 리듬을 취하고 있다는 데 큰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세차게 밀려드는 외래사조와 문물제도들에 대한 반응을 새로운 형식적 장치를 구비하여 새로운 감수성의 차원으로 노래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해야 있는 형식적 율조를 통해 보편적인 정서 반응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28)


창가(唱歌)의 성행


창가란 주로 7․5, 8․5, 6․5 등의 형태적 특징을 보이며 서양식 악곡에 얹혀 불린 개화기 시가를 말한다. 가창의 여부가 필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을 내리기 어려우나, 4․4조의 독립․애국가류 및 개화가사와는 그 형태의 면에서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30)


3. 애국․계몽적 서사문학의 양상


개화기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문학형태들 가운데 서사양식을 취한 것으로서 신소설류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일군의 작품이 있다. 흔히 애국․계몽문학으로 불리어지는 이들 작품은 그리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 문학의 한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정확한 연대를 고정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애국․계몽문학은 대체로 190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1910년 무렵까지에 걸쳐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등장했던 우리의 과거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제재로 한 역사전기문학과, 시사적 성격을 띤 단편 토론체문학, 그리고 외국의 역사서 및 전기의 번역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사회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애국․계몽이라는 주제지향을 강렬히 표출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는데, 개화나 혁신의 측면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통고수와 민족적 주체성의 발견 및 확립을 보다 강조한 측면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거시적으로는 당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과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33)


4. 개화문학으로서의 신소설(新小說)


신소설이란 우선 우리의 ‘고대소설’과 대립적 위치에 서있는 명칭이다.(41)

신소설의 특징적 면모는, 우선 그 형식적인 면에서 묘사가 치밀하고, 새로운 가치질서와 시대의식을 주제화하려고 했으며, 구어체를 바탕으로 한 문체의 산문화 및 현실적 소재와 배경을 작품에 도입하는 등의 진보적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주제 형상화나 인물의 성격창조 등 내용적 사실에 있어서는 미숙한 점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어, 그 새로운 문학으로서의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도 한다. 즉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작품에 도입하되, 그것의 미적 형상화보다는 전달적 측면에서의 목적의식이 선행하여 계몽적 차원에 떨어지고 마는 가장 큰 문제점과 함께 인물의 성격창조에 있어서도 선․악의 대립적 구도에 의해 개화인은 선, 전통적 수구인은 악이라는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한 점 등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사실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비판의식의 결여라든가, 근대적 인간형을 제시하지 못한 점, 그리고 소설 구성상 우리의 고대소설적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널리 지적된 바이기도 하다.(43)

요컨대 신소설은 이른바 ‘이야기책’으로 불리어지던 고대소설의 퇴진과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에 의한 근대소설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측면에서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문학형식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구성과 주제의식의 이면에는 다소 고대소설적 수법이 남아있기도 하는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소설에 의해 우리의 서사문학이 새로운 문학사적 전환을 맞게 된 사실은, 그 내용에 있어 새로운 역사 전환기의 삶의 양식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려는 작자의 의도와, 그것이 출판문화의 활발한 진전과 함께 일간신문에 연재됨으로써 이른바 독자를 전제로 한 상업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와 시대의식은 흔히 상업적 성격을 지닌 통속소설 내지 개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 계몽적 교화를 의도하는 목적성의 문학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신소설이라는 문학이 존재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출발 거점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44)


제2부 근대문학의 태동: 1910년대 문학


1. 근대문학의 성격과 특징


근대문학의 일반적 성격


하나의 문학장르가 문학사 위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을 구비하여야 한다. 흔히 일컬어지듯 문학담당 층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 그들의 세계관과 미의식을 일정한 형식을 통해 표출해 낼 수 있는 역사적 실체로서의 장르가 마련되어야 함음 물론, 그들이 지향하는 문학적 경향이나 세계관이 일정한 공유분모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52)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근대문학의 성격은 크게 작품 외적 사실의 면과 작품 내적 사실의 두 면을 통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작품 외적 사실들로는 표현언어의 면에서 중세문학이 지향했던 보편적 문어(文語)가 폐기되고 자국어(自國語)에 의해 문학작품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53)

다음으로 작품 내적인 사실들로서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새로운 형식적 틀을 통해 새로운 면모들을 형상화시켜 나간 점들을 들 수 있는데, 새로운 시형태의 개발과 산문적 성향의 대두에 의한 소설장르의 확립을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소설장르의 확립은 중세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의식과 문학적 지향을 형상화해 낸 것으로 공인되는데, 특히 의식의 측면에 있어서의 자아각성과, 형식적 측면에 있어서의 문장의 산문성․소재의 현실성, 그리고 방법적 측면에 있어서의 심리묘사와 성격창조 등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문학장르와 의식의 동질성이라는 공통분모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중세적 운문 위주의 영역에서 크게 탈피하여 근대적 산문 위주의 영역을 지향하는 문학적 경향으로 대변된다 하겠다.(53)


한국문학사에서의 특징


식민지시대는 주지하다시피 일제에 의한 주권의 상실과 정치적 부자유, 경제적 궁핍, 그리고 한말에서부터 물려받은 봉건적 잔재의 상존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 내지 당시 사회집단의 정신적 구조에 대응하거나 연관되는 작품들의 세계관은, 대체로 다음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된다. 그 첫째가 일정 초기의 무단정치시대로서, 이 시기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세계관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여 그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견해와, 그 통치에 반항하여 민족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둘째는 중기의 이른바 문화정치시대로서 이 무렵에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 비판과 계급의식적 해석, 그리고 비현실적 유미세계에의 지향 등이 그 대표적 세계관들이다. 셋째는 전시체제가 지속되던 일정말기로서 이 시기에는 현실사회로부터 서정세계로 비켜서거나, 신변적인 현실세태를 풍자․냉소하거나, 농촌문제를 고민하고 그 현실을 증(55)언하거나, 한국 민중의 강인한 삶을 역사소설로 비유하거나, 혹은 식민지체제에 협력하고 마는 등의 다양한 세계관이 제시되어 있다.(56)

대체적으로 우리의 근대문학사가 ① 극히 후진적인 것, ② 전통성의 빈곤, ③ 서구 문예사조의 혼류성, ④ 사상성의 결핍, ⑤ 국토분단에 따른 비극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공인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57)

요컨대 한국문학사에서의 근대적 성격과 특징 논의는, 일반적 성격의 측면에서 검토됨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고, 다시 개별적 성격의 측면에서 고찰됨으로써 특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보(57)편성의 측면과 특수성의 측면을 병행한 다면적 접근에서 구체적 실상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서구 문학적 기준이나 내용으로 우리의 문학을 저울질하거나 편협한 국수주의적 태도로 끌어당기는 안이함에서 문학의 실상이 왜곡되는 것이다.(58)


2. 신체시(新體詩)의 등장과 그 특징


3. 1910년대와 이광수(李光洙)


우리의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1910년대는 흔히 ‘2인 문단시대’로 불리워져 왔다. 이러한 명명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재삼 검토를 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주인공에 해당되는 최남선과 이광수의 활동은 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60)


4. 새로운 시양식의 등장-김억(金億)과 주요한(朱耀翰)


근대 자유시의 초기적 특징과 시사적 의의


우리의 시사(詩史)에서 1910년대의 중․후반에 등장한 초기 근대시적 실상들은 무엇보다도 그 전 단계적인 신체시의 계몽적 교시성(敎示性)을 극복하고 개인의 감수성을 노래하는 차원에서 일정한 미의식의 내면적 정조를 형상화하려고 노력하였다는 데서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이를 위해서 그 개인의 감수성에 맞는 시형(詩形)과 운율미에 대한 자각적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예술성의 확보를 위해 서양문학의 충격에 이끌려 방황하는 가운데 우리의 민족적 정서와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기도 하는 등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93)

반면, 이러한 긍정적 시각의 이면에는 이 시기의 시들이 문학이 근거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시대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적 감수성의 세계만을 분방한 낭만적․애상적 정조로써 노래하는데 치우쳤다는 질책도 모면키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물론 식민지적 현실이 이 경우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도 보이나, 그러한 상황 자체가 이러한 의식부재의 면을 합리화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다.(93)


제3부 근대문학의 성장: 20년대 전반기 문학


1. 3․1운동과 근대문학사


모든 문화현상이 다 그렇지만 특히 문학은 삶의 문제를 대상으로 하여 이에 관한 모든 인간행위를 형상적으로 그려낸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역사․사회적 공간과 분리되어 이해되기 어렵다. 더욱이 그 형상적 기술을 바람직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각 시대현실의 역사․사회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행위에 대한 일정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95)

물론 이러한 관점은 자칫 문학의 독자성을 흐리게 하는 듯한 그릇된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릇된 이해는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히려 문학의 독자성을 가능케 하는 대 역사․사회적 관련을 이해함으로써, 이 시기에 있어서 전개되었던 문학현상에 대한 온당한 이해의 과정을 밟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95)


3․1운동과 문학사적 변모


3․1운동 자체가 근대적 민족주의의 확립이라는 거시적 명제 하에 전개되었던 만큼, 1919년 이후의 근대문학은 민족문화를 새롭게 재편하고 창달해야 하는 기본사명을 문화의 다른 어느 영역에서보다 뚜렷하게 자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구체적 현실에 있어서 상당한 질적 변화를 가져왔고, 그 변화과정 또한 단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100)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 서 있을 경우 당대 문학인들에게 절실히 기댈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시대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민족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작가적 사명의식의 확립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시기의 문학인들이 보여준 것은 어느 정도의 긍정적 평가를 가능케 한다. 당시 일본을 통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학을 통해 새로운 자아각성과 과학적․합리적 사고를(100) 갖추기에 힘썼고, 귀국하여 언론과 문필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종사했기에, 작품 창작의식의 면에 있어서나 인쇄매체를 통한 작품 발표의 면에 있어서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전문성을 견지하려고 한 점이 두드러진다. 또 나름대로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창작하려는 문학사상적 측면에서의 자각도 엿보이고, 전통부정의 시각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조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문학전통을 수립하고자 한 지향적 면모 역사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는 부분들로 생각된다.(101)

많은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문학적 실상이 보여주는 것은 먼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 ‘민족적인 형식’을 새롭게 모색해 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실제에 있어 이 문제는 작품을 창작하는 전문인으로서 견지해야 할 창작방법의 적극적 개척과, 당대의 시대이념 및 민족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민족해방의 과업을 언어예술로써 적절히 형상화해 내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아직 문학적인 미숙성을 보였고, 문학 외적인 상황과 무분별한 외래사조의 수용, 그리고 사상적 혼란에 근거한 가치의식의 불안 등으로 인하여 근대문학의 성격을 매우 복합적이고 파행적인 것으로 이끌어 가기도 했다. 식민지적 현실을 감안할 때 다소 무리한 시각이긴 하겠으나, 당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이를 타개하려는 문학적 각성이나 작가정신을 높이 치켜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진실은 이러한 문학 외적 장애나 갈등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더욱 그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것임에 비추어, 쉽게 합리화할 수 없는 결격사유로 인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101)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거시적인 면에서 특히 문화일반에 대한 이해나 민족문화의 진지한 모색이 결핍되었다는 데 큰 원인이 있다. 거듭 강조하는바 민족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나 적극적 계승의식이 각성되지 않았기에, 청년기의 불안정한 정서가 쉽게 ‘새로움’에 이끌리게 되었고, 그 결과 문학을(101) 삶에 대한 진취적 방향제시의 차원에서 지속하기보다는 때로 자아도취와 현실외면의 한 구실로 삼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102)


2. 동인지 시대의 개막과 문학운동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정책의 양상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정치적 탄압책동과 경제적 수탈구조 그리고 문화적 왜곡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적 과정 속에서 우리의 자생적 근대화는 억압되었고, 식민지적 근대화라는 변칙적 의지만이 강요되었다.(102)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가장 크게 변모된 계기는 주지하다시피 민족적 거사인 3․1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 방식에서 문화통치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된다.(102)

어떻든 3․1운동의 결과로 나온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는 그 본질에 있어(102)서 그 이전의 무단통치와 다를 바 없다 하더라도, 한국 지식인의 활동과 그 한 부분으로서의 문학운동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곧, 신교육을 받은 무학지망생이 어느 시기보다도 많이 등장하고, 문화통치로 인해 발언영역의 진폭과 발표지면이 넓어지게 되었던 바, 각종 신문․잡지 및 동인지가 격증되면서 이 땅의 근대적 성격의 문학이 개화(開化)를 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문학활동의 양적 확대와 내용상의 다양성을 밑받침해 주게 된 구체적 현상의 하나가 ‘동인지 시대의 개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20년대 이후의 문학은 그 토대를 확보하게 되었고, 우리의 근대적 문단 형성의 저변을 마련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103)


주요 동인지의 양상


이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 동인지로는 문학적 성과의 면과 당대적 위상에서 차지한 영향력을 고려하는 측면에서 󰡔�창조󰡕�, 󰡔�개벽󰡕�, 󰡔�폐허󰡕�, 󰡔�장미촌󰡕�, 󰡔�백조󰡕�, 󰡔�금성󰡕�, 󰡔�영대󰡕� 등을 들 수 있다.(103)

󰡔�창조󰡕�는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이며 동인지로서 3․1운동이 일어나기 한달 전인 1919년 2월에 창간되었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동인․주요한․전영택 등이 주축이 되어 2호까지 동경에서 발간되다가, 3․1운동 후에는 국내에서 속간하여 1921년 5월 통권 9호로 폐간되기까지 이른바 근대문학 초기의 계몽적 교훈주의와 관념적․추상적인 성향을 배격하고 문학의 예술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창조󰡕�를 통해 우리나라 본격 자유시가 발표되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소설에 있어서도 자연주의 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엿볼 수 있다는 데 이 잡지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103)

1920년 6월에 창간된 󰡔�개벽󰡕�은 천도교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1926년까지 통권 72호를 발행했고 이후 수년간 정간되었다가 다시 속간되기도 한 월간종합지이다. 문예동인지의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으나, 일제에 투쟁하고 민족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신과제의 해결과, 세계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평등주의를 내세우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는 데 의식을 같이하는 한편, 문화(103)주의를 표방하여 민족문학의 수립과 발전에 공헌하자는 기본목표를 세워 주목할 만한 의욕을 보였다. 특히 문예면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우수한 작품과 문인을 배출함으로써 1920년대의 문학을 주도한 범 문단적 성격의 잡지였다. 1920년대에는 김억․김소월․변영로․박종화 등과 신경향파문학을 대표하던 김기진․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했고, 염상섭․현진건 등도 󰡔�개벽󰡕�을 통해 등장하고 여기서 성장했다. 󰡔�개벽󰡕�은 특히 초기 신경향파문학이 성장하는 데 거점적 역학을 하였다.(104)

다음으로 󰡔�폐허󰡕�는 1920년 7월에 창간된 문예동인지로서 김억․남궁벽․염상섭․오상순․황석우 등이 참가, 2호까지 발간되다 말았으며, 주로 19세기 후반 서구문학의 상징주의와 퇴폐적 경향이 짙은 작품들이 실렸다. 또한 1921년 5월 창간된 󰡔�장미촌󰡕�은 최초의 시전문지로서 주로 낭만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으나, 대다수의 동인들이 다시 󰡔�백조󰡕�를 창간하는데 참가, 󰡔�백조󰡕�의 전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104)

한편 1922년 1월에 창간된 󰡔�백조󰡕�는 애초에 격월간으로 계획된 것이었으나 3호에 그치고 만 순 문예동인지였다. 특히 당대의 시대현실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나, 식민지적 현실의 암울함에서 오는 감상적 낭만성에 치우친 경향이 짙다가 점차 반성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발표된 작품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비중이 주어진 특징을 보였다. 홍사용․박종화․나도향․이광수․현진건․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했으며, 시 쪽에서는 낭만주의적 성향이 강한 반면 소설 쪽에서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적 색채가 강했고, 또한 신경향파문학이 태동하게 된 모체가 되기도 한 복합적 성격을 지녔다.(104)

󰡔�금성󰡕�은 1923년 11월에 창간된 시전문동인지이다. 주로 해외문학의 번역․소개와 창작시 발표를 전문으로 했는데, 양주동이 중심이었고, 김동환이 추천시를 발표하였다. 순문학동인지로서 1924년 8월에 창간된 󰡔�영대󰡕�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평양에서 편집을 한, 이 지역 중심의 문학동인지라 할 수 있다. 그 동인들은 󰡔�창조󰡕�에서 주축이 되었던 이들이 거의 속해 있었으므로 그 성격을 그대로 계승 반영했다.(104)

이상에서 그 윤곽만을 간략히 살펴본 이 시기 주요 동인지의 양상들로부터(104) 다음과 같은 몇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먼저, 간행 횟수가 대체로 단명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동인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속성인 사상적 경향이나 표방된 노선의 통일이 진지하게 모색될 수 없었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창간 당시의 의욕과는 달리 모호한 성격을 띠게 되었고, 발표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엇비슷한 동인지들을 다시 등장시키게 된 결과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지적될 수 있는 사실은 한 작가가 여러 동인지에 동시에 관여하였다는 점이다. 각 동인지가 표방한 노선이 조금씩은 달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문제는 작가의식의 파행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다양한 사조적 경향으로 창작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어느 한 작가의 특징적 성향이나 사조적 공통분모를 추출해 내기 힘들다. 이러한 작가의식의 복합성은 특히 서구문예사조에의 무비판적 경도에서 비롯된 것이 주요 원인이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시기의 작가들을 어느 한 사조에 쉽게 한정시켜 바라볼 수 없으며, 또 다양한 장르에 걸쳐 창작활동을 한 점을 감안하면 실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 많았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끝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동인지들을 통해 비슷한 연령층의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폐쇄적 범주 속에 갇힐 위험을 내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갑작스런 사태는 문학활동의 양적 확대와 내용상의 다양성이라는 긍정적 측면의 이면에, 문학에 대한 인식의 폭과 작가정신의 깊이를 확충하는 면에 있어서의 심각성을 의심케 해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가들에 대한 연구는 이 같은 사실을 충분히 고려한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반성적 관점을 제기하고 있다.(105)


동인지문학의 기본성격


우선 이 시기의 문학인들과 그들 문학의 기본성격은 김억과 주요한의 경우에서 살핀 바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 당대 일본 유학생 출신이 대부분응ㄹ 차지하였고, 그들의 연령적 미숙성이나 가치관의 혼란 및 부재 등으로 인하여 파행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 또 신학문과 접하면서 서구의 문예사조에 깊이 있는 인식 없이 경도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차원에서 전통부재의 현실을 외치면서도 새로운 방법적 모색을 꾀하지 않고 개인적 감수성의 표출에 치우친 점, 그리하여 결국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민족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점 등은 비판적 측면의 경우에 해당되며, 반면 긍정적 측면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문학이 보여준 교시적 계몽성을 탈피하여 자유로운 정서를 표출하려는 지향적 면모를 보여준 점이라든가, 근대적 각성에 의한 자아의 발견과 그 정서적 가치구현에 힘쓴 점, 또 구체적 대안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전통에 뿌리를 둔 민족적 정서의 필요성을 인식한 점, 그리고 다양한 사조적  혼융을 보여주면서도 우리의 근대문학을 본격적으로 개화(開花)시킨 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106)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 측면은 우리에게 반성적 시각을 열어준다. 곧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여 당대의 문학적 실상을 왜곡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또 문학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가시적으로 드러난 변화만을 문제 삼을 수 없는 구체적 접근방법의 모색을 환기시키기도 한다.(106)

따라서 이 시기 동인지문학의 기본성격을 통해 우리는 거기에 속해있는 작가들의 개별적 실상을 다시 작품을 통해 진지하게 구명해야 한다.(106)

결론적으로 말하여, 1920년대 초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후의 문학은 보다 발전적인 면모로 쇄신되었으며, 그 방법과 인식의 관점에서 상당한 전환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107)


3. 20년대의 시적 기류와 민족적 정조의 시


1900년대의 신문학적 탐색기를 통해 새로운 시형과 내용적 사실들을 모색해 온 우리의 근대시는 신체시라는 과도기적 형태를 거쳐 19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 근대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살핀 바 있듯이, 이러한 본격 근대시로서의 도약에는 김억과 주요한의 선구적 업적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에 의한 계몽적 교시성의 배제와 개인적 감수성의 확보 및(107) 시의 미학적 자질에 관한 자각적 면모들은 이후 1920년대의 시인들에게 일정한 토양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근대시는 3․1운동 직후의 신문학 운동의 전개와 함께 1920년대에 이르러 그 구체적인 성과와 문학적 역량을 축적시키며 뚜렷이 정립되기에 이른다.(108)

1920년대의 다양한 시적 성향과 특징들을 갈래지어 보면, 초기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낭만적 성향과, 중반 이후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등장하여 후반까지 이어지는 신경향파-카프계열의 투쟁적․ 이념지향적 성향, 그리고 이러한 특정 사조나 운동에 속하지 않으면서 시작활동을 펴나간 시인들에게서 추구된 전통적 정서의 심화와 확대의 성향 및 철학적 사유와 적극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한 시적 성향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으리라 본다.(109)


낭만적 성향의 분출-초기 문예동인지의 시와 시인들

전통적 정서의 심화와 확대-김소월(金素月)

시적 인식과 민족의식-한용운(韓龍雲)


4.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


이 시기 소설의 새로움은 우선 이광수로 대표되는 계몽적 목적성의 탈피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추구된 예술성의 확보 및 다양한 문예사조에의 관심 등으로 대변된다.(130)

이 시기의 소설들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작가의식이 나름대로 확보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20년대의 소설과 이후의 많은 작품들에 있어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데, 이는 문학이 제시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양태와 그 구체적 삶의 공간에서 야기되는 다단한 인간 행위 자체가, 무엇보(130)다도 작가가 경험한 의식세계 내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시기에 있어서도 이 작가의식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겠지만, 이 시기의 삶의 현실과 문학적 풍토에서 제기되는 특징적 사실들은,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 속에서 적절히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그 세부적 실상이 개별 작품을 통해 검증됨으로써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당한 의미부여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다양한 관점과 객관적 사실 규명의 측면에서 항상 새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긍정적 면모만을 부각시키는 편향성을 벗어나서 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131)


김동인(金東仁)의 소설적 지향


사실 김동인만큼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1920년대의 문학적 상황 속에서 본격문학의 기치를 들고 나와 문학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 나름대로 고심한 작가이다.(132)

김동인의 소설이 통속화되기 이전의 1920, 1930년대 주요 단편들을 대상으로 그 성격을 구분할 때는, 대체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의거한 「감자」 계열과, 탐미주의적 요소가 짙은 「광염소나타」․「광화사」 계열로 이분(二分)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탐미주의는 김동인 문학의 독자성을 구축하고 예술성을 높이는 데 주요한 구실을 하는 2원적 요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3)


염상섭(廉想涉)의 현실감각


염상섭은 우리의 근대소설사에 있어서 특히 김동인과 비교되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작가로 정평되고 있다.(136)

이와 같은 염상섭의 작가적 지향은 결국 각성된 자아의 눈을 통해 가려진 현실의 이면을 해부하고 그 내부적 실상을 문학적으로 폭로함으로써 현실감(137)각을 더욱 냉철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작품에는 당대의 식민지적 현실과 맞닥뜨린 지식인의 사고와 행동의 문제라든가, 그 현실을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필수적으로 결부되는 도덕성의 문제,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의 도래로부터 특히 의식적인 변모를 가져왔던 성(性)과 윤리의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이끌어 가는 특징적 변모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38)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의 개성


1920년대의 소설을 살피는 과정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나도향과 현진건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백조󰡕�파 작가로 지칭되지만, 실상 󰡔�백조󰡕�동인들의 성향이 어떤 공통적 특징보다도 개별성을 띠고 있는 면이 강하고, 또 이들 󰡔�백조󰡕�지를 통해 작품활동을 지속적으로 펴 나간 것도 아니어서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다만 󰡔�백조󰡕�지의 동인들이 문학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 무렵, 그들은 이른바 당대의 문학청년들로서 낭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초기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공통적 성격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141)


최서해(崔曙海)의 빈궁소설


최서해는 그 작품성향에 있어 이 시기의 일반적 작가들과는 그 갈래를 달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으나, 우선 이 시기의 소설이 보여준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라는 관점에서도 특징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에 주목을 요하는 작가이다.(145)

그의 소설들을 통해 추출할 수 있는 새로움의 면모는 다름 아닌 작품의 ‘소재’이다. 그는 당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그 자신이 직접 머슴살이, 나무장수, 물장수, 도로공사인부, 중, 방랑걸식 등 가장 뼈저린 하층생활을 거의 안 해 본 것 없이 겪었으며, 이러한 체험들을 바탕으로 소설 창작에 임하여 매우 강렬한 작가의식을 내보이고 있다.(145)

이와 같은 작품의 소재와 작가의식의 강렬함은 당대 문단에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와 비슷한 경향을 띤 작가나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작가 자신의 체험을 다른 무엇에 의탁하지 않고 보다 직접적이며 사실적으로 작품화한 경우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서해의 문학적 성향을 특히 객관적 사실주의와는 갈래가 다른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다.(146)

요컨대 이와 같은 최서해 소설의 특징들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이 땅을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상통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서해는 그러한 제재를 선택하거나 주제를 내세우는 것이 결코 의식적인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인데 있었다.(147)

실상 그의 체험문학이 좀 더 빛나는 문학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생활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따르는 기법적 자각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소설은 문학적 형상화의 면모보다는 체험적 사실의 단순한 재생에 그치고 만 결함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추구해 나간 작가의식의 세계가 이 시기 소설에 있어 보다 확장된 소재적 차원(147)과 계층의식의 확대라는 면에서는 소설미학의 새로운 면모를 열어주었다 하겠으나, 그것이 다만 일종의 소재문학이라는 한계를 지닌 결함을 내포한 것이었음도 동시에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148)


5. 민족적 현실의 소설적 형상화


그런데 이러한 1920년대에 등장한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는 이렇듯이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라는 관점과는 다른 측면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특징적 면모들이 또한 내재해 있다. 그 공분모적 성격을 함축적으로 얘기한다면 곧 ‘민족문화적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48)

새삼스러운 얘기겠지만 우리가 식민지시대의 민족문학을 중요하게 문제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문학으로 표현된 역사적 삶의 근거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오늘의 관점에서 수렴, 창조해 가는 데 있을 것이다. 문학이 민족적 자기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언어와 문화의 공동체임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사고와 정서의 특징적 면모는 민족 혹은 민족문학을 떠나서 얘기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문학이 일정의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할 수 있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이를 당위적 사실로 받아들여 구체화시키는 것이 문학사 기술에 있어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된다.(149)

그런 면에서 이 시기의 소설에 나타난 민족문학적 성격은 특히 토착적 삶 속에서 제기되는 정서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점이 우선 주목되며, 다음으로 식민지 현실이 야기시킨 일상적 현실의 조건과 그 생활상의 문제를 형상화한 점, 그리고 과거의 역사현실을 매개하여 자아각성을 촉구하고 현실인식의 안목을 제시하고자 하는 점 등의 특징들이 주목된다.(149)


토착적 삶과 민족적 정서의 추구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란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현실적 여건에 대한 민족 주체성의 확립, 그리고 이에 의한 새로운 민족적 활로의 모색으로 봄이 적절하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루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자주독립은 근대화라는 또 다른 민족적 활로와 결부되어 새로운 정신적 지주와 가치기준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당대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 형상화하려는 문제의식들이 이른바 전통적 삶과 그 시대적 위상에 따른 변모양상, 또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갈등의 문제들을 심각한 양상으로 제기하였다. (150)

특히 이 시기에 발표된 소설들 가운데 우리의 토착적 생활현실을 작품의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그 속에서의 삶의 모습을 그려나간 것들이 많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이 공간적 배경에 의한 문학적 형상화의 작업이 당대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태도, 즉 문학인으로서의 작가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토착적 생활현실과 등장인물을 통한 삶의 모습을 그리는 것 자체가 당대 현실상황에의 관심과 극복의지를 표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150)

이 같은 경향의 작품으로 먼저 현진건의 「고향」(1926)을 들 수 있다.(151)

김동인의 「붉은 산」(1932) 역시 토착적 삶과 민족정서의 추구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151)


일상적 현실의 조건과 생활상


일상적 삶의 조건과 생활상을 작품의 주된 소재로 채택하여 식민지적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먼저 현진건의 「빈처(貧妻)」(1921)를 들 수 있다.(155)

이와 함께 현진건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운수좋은 날」(1924)에서는 당시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인물 ‘김첨지’의 단면적 일상을 통해 찌든 현(155)실의 가난과 비애가 핍진하게 그려지고 있다.(156)

그런 면에서 또한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와 「만세전」(1922)이다.(156)

한편, 김동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문학적 지향을 구체화시킨 작품 중의 하나인 「감자」(1925)를 통해 식민지의 일상적 현실 조건과 그 생활상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157)

시기적으로는 조금 뒤에 위치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인적인 문제가 당대의 시대현실과 사회의 문제로 확장되어 있는 예가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이다.(157)


6. 희곡문학의 초기적 정착


제4부 성숙기 근대문학: 프로문학과 민족주의문학


1. 초기 프로문학운동의 양상


(1) 신경향파 시기의 프로문학의 양상


신경향파문학의 어의


신경향파문학이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전 단계, 즉 목적의식적 계급성이 확고히 드러나지 않은 채로 사회적 모순을 개인적 차원에서 폭로와 고발로 표현하던 시기의 문학을 가리키는 말로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이라 칭할 수 있다. 임화(林和)는 신경향파문학을 말 그대로 막연한 경향성으로만 존재하는 일종의 혼효상태나 과도기의 문학이라 했으며, 박영희는 부르주아문학의 전통과 전형에서 벗어 나와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던 각 작품에 나타난 색채를 종합적으로 대표한 말이라고 하였다.(171)


(2) 카프(KAPF)의 결성과 내용․형식논쟁


카프의 결성

내용․형식논쟁


1926년 12월 󰡔�조선지광󰡕�에 발표된 김기진의 「문예시평」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인 내용․형식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글이었다.(176)

김기진은 어떠한 소설이든 일정한 소설적 형상화와 구성 및 표현 등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초기 김기진 비평문에서 보이는 효용의 문학, 생의 본연한 요구의 문학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러한 문학도 역시 문학인 이상 최소한 소설적 형상화를 갖춰야 한다는 입장으로 진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박영희는 그러한 김기진의 논의와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이를 비판해 버렸다. 말하자면 김기진은 프로문단도 이제 본무대로 들어섰다고 인식한 데 비해서 박영희는 여전히 투쟁기라는 인식으로 투쟁성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76)

말하자면 김기진이 문예의 본질적 문제로 내용․형식문제를 논한 데 비해 박영희는 현 단계 프로문예의 임무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면서 문학내적인 방법이 아닌 사회사적 혹은 문화사적 비평이 현재 프로문예 비평가가 취할 태도라고 강조...(177)

그러나 이 논쟁은 이후 창작방법논쟁이 본격화되면서 그 단초를 형성하는 계기로서의 평가를 받으며 일원론, 이원론에 대한 규정문제로서 접근해 들어가기도 한다. 실제로 이 논쟁은 미학상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에 속하는 문제이며 창작방법론 혹은 리얼리즘론의 계기들을 내포하고 있다.(178)


(3) 목적의식론의 제창과 1차 방향전환


제1차 방향전환론


내용․형식논쟁은 그 출발부터 당연히 요구되는 문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문예비평가의 태도문제로 제기되고 그 내면에는 의식의 선명성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박영희에 의해 계속해서 선도된다. 그는 이미 앞서 김기진의 소설건축론에 의해 작품이 창작되면 프로생활묘사가 될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기존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의식문제를 집중적으로 논함으로써 의식(178)의 방향전환에 기반을 둔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한다. 특히 박영희는 이미 김기진과 논쟁할 때 일본의 아오노 수에기치(靑野季吉)의 외재비평론(外在批評論)에 의지해 비판했다. 이 아오노 수에기치의 외재비평론은 한마디로 “주어진 예술작품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고 주어진 예술가를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인식하여 그 현상과 존재의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는 비평”, ‘문화사적 비평’이라 할 수 있다. 박영희는 바로 이러한 비평방식에 의해 김기진과 당시의 창작경향을 비판했던 것이다. 즉 신경향파의 인생관 내지 사회관은 반항기에 있었던 만큼 허무적, 절망적, 개인적이었다면서 투쟁기에서는 성장적, 집단적,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79)

제3전선파는 당시 동경에서 󰡔�제3전선󰡕�을 발간하던 조중곤(趙重滾), 이북만, 홍효민(洪曉民),한식(韓植) 등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은 낚노 시게하루(中野重治)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입장에 선이 닿아 있었다. 그러면 이들의 입장은 정확히 어떠한 것이었는가. 조중곤은 「비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의 배격」(󰡔�중외일보󰡕� 1927년 6월 18일~22일)에서 프롤레타리아예술은 당의 지령에 의하여 제작해야만 정치투쟁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라 하여 현 단계에서는 “××주의 달성에 대한 공리적 선전적 전투술을 쓰면 그만이며, 좌익적 정견발표문도 예술이며 포스터도 예술”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당시 형성되어 있던 신간회에 종속되어 그 지도정신에 통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181)


제2기 작품논쟁(김기진과 조중곤의 「낙동강」 논쟁)


작품비평에 치중하고 있던 김기진은 조명희의 「낙동강」을 끌어들여 제2기 작품론을 개진하였다. 말하자면 내용․형식논쟁 이후 침묵하고 있던 김기진이 당시 주요한 쟁점이었던 목적의식 문제를 작품 내적인 문제로 끌어들인 것이다. 즉 김기진은 「낙동강」이 1920년 이후 조선대중의 거짓 없는 인생기록이고, 독자대중의 감정조작에 성공했으며, 또한 각 인물에 상응한 성격과 풍모를 부여한 점에서 재래의 공상적 행방불명의 빈궁소설에서 벗어난 제2기에 선편(先鞭)을 던진 작품이라 하였다.(182)


(4) 초기 프로문학 작품의 경향


초기 신경향파소설의 두 경향


전반적으로 이 경향을 처음으로 내보인 작품으로 김기진의 「붉은 쥐」(󰡔�개벽󰡕� 1924년 11월)를 들 수 있다.(184)

그리고 이 작품을 시발로 하여 1925년에 들어서는 새로운 경향을 갖는 작품들이 다수 산출되기 시작하였다. 박영희의 「전투」「사냥개」, 이익상의 「광란」, 주요섭의 「살인」, 이기영의 「가난한 사람들」, 최서해의 「기아와 살육」 등이 그것이다.(184)

그러나 이러한 신경향파문학 내부에는 상이한 두 가지 조류가 들어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임화가 지적한 박영희적 경향과 최서해적 경향이 그것이다.(186)

박영희적 경향은 소위 작가의 관념적 편향에 의한 인물의 단순화, 사건과 행동의 도식성, 전망의 과장의 문학적 특질로 규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소설은 구체적 현실의 반영이 뚜렷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 우위에 선 주관주의적 혹은 낭만주의적 경(186)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187)

최서해적 경향의 작품세계는 생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만큼 절박한 핍박받는 빈곤층의 세계를 여실히 반영하는 데 작품의 주안점이 놓여있다. 특히 최서해는 당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황이 만들어 놓은 간도 유랑민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여실히 그려내어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로 일컬어진다. 방향전환을 기점으로 탈락됨으로써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서해는 그런 점에서 신경향파문학의 특징과 한계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 작가라 할 수 있다.(187)

이러한 두 경향은 결국 신경향파소설의 주된 특징과 함께 한계도 잘 보여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의식적 관념세계와 현실묘사의 분열이다. 일정한 주제, 제재, 줄거리의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이렇게 대별되었다는 것은 이들 작가들의 초지의식의 미진함, 그리고 그와 연관하여 리얼리즘적 창작방법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 등의 자연스런 발로라 할 수 있다.(187)


본격적 프로소설의 태동


이러한 신경향파 문학의 근본적 문제들은 조명희의 「낙동강」, 이기영의 「민촌」「농부 정도룡」, 송영의 「석공조합대표」에 와서 당시 프로문학운동이 요구하는 의식성에 걸맞는 리얼리즘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된다.(188)


초기 신경향파시의 성격


초기 프로시는 통칭 신경향파시라 불려지고 있다. 소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으나 김형원, 박팔양, 유적구, 김창술, 이상화 등에 의해 과거의 센티멘털하고 데카당한 문단 풍조와는 반대로 힘 있는 새로운 시풍이 싹터 나오기 시작했다.(191)


2. 볼셰비키기 프로문학


(1) 무산자파(無産者派)의 등장과 볼셰비키화


대중화 논쟁-볼셰비키화의 서곡


제1차 방향전환론의 주요 쟁점이 예술의 정치투쟁의 무기화였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교화사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194)

이미 제1차 방향전환기에서도 “선동의 유일 최선의 방법은 언어와 구체적 표현-그것도 알기 쉬게 해야 한다-을 빌어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여 이미 문예를 어떻게 함으로써 대중에게 가지고 가 선전 선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대중화론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중화론은 오로지 대중의 직접적인 아지테이션(agitation)을 위한 ‘진군나팔’이면 족했기 때문에 간단한 시를 읽는다든지, 알기 쉬운 포스터를 그려 붙인다든지, 간단한 연극을 한다든지 하면 된다는 입장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무지한 대중을 위해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즉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초보적 표현방식으로 투쟁의식을 전달하면 된다는 것이다.(195)

이 결과 여기서는 특히 문학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무지한 대중은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문학작품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읽고 보는 포스터, 연극, 그리고 시낭송에 집중할 도리밖에 없었다. 결국 창작활동은 여기서 부차적이라기보다는 무시될 공산이 컸다. 그런데 김기진은 바로 이러한 제3전선파의 논리에 반대하면서 작품중심의 문제로 되돌려 놓는다. 말하자면 작품을 중시하는 김기진이 세 번째로 도전한 셈이다. 이미 「감상을 그대로-약간의 문제에 대하여」(󰡔�동아일보󰡕�, 1927년 12월)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한(限)의 대중은 어떠한 대중일 것인가”라고 묻고, 그것은 문학과 서적으로부터 선이 먼 절대다수의 농민이 아니라 농민급 노동자 출신의 급진분자 외 청년학생, 실업자군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예작품을 읽을 수 있는 독자대중을 염두에 두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대중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195)


볼셰비키화와 조직개편


193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프로문단에는 임화를 제외한 새로운 이름의 일군의 신진들이 지면에 나타난다. ‘볼셰비키화’란 구호를 다 같이 앞에 내세우고 기존 논자들은 과감하게 비판하며 다시 방향전환할 것을 맹렬히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른바 동경 「무산자」 그룹이다. 이들 「무산자」 그룹 구성원은 임화를 필두로 한 안막, 권환, 김남천 등이다. 「무산자」란 과거 제1차 방향전환을 주도한 「제3전선파」에 뒤이은 새로운 소장파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당시 일본 프로문단의 새로운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하면서 새로운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200)

이러한 볼셰비키화의 이해는 사실 1927년의 방향전환을 후꾸모또주의에 의한 관념적 방향전환론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것은 노동자 농민의 실제 생활을 묘출하지 않고 관념적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실제에서 유리시키며, 작가 자신의 관념적 주관으로 해결지어 버리고 말았다고 비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전위-노동자 농민의 아지(agitation)프로-조직을 위하여 사회의 생산 발전에 적응시킨 경제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현실을 현실대로 묘출하는 객관적 실제주의인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으로 비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01)


(2) 볼셰비키화 제창 이후의 전개양상


조직 및 출판활동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의


사실상 프로문학에 있어서 농민의 문제는 대중화 논의에서 명확히 나타나듯이 의식화의 무기로서의 문학의 기능에 따라 필연적인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볼셰비키화 문예창작의 기본방침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 등에게 주입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농민을 주체로 다룬 문학의 문제는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대중화논의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온 김기진에게서 농민문학 문제(「농민문예에 대한 초안」, 󰡔�조선농민󰡕� 1929년 3월)가 프로문학 측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김기진은 앞서 보았던 대로 통속적 대중화론의 관점에서 무식한 농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쓸 것, 구성의 단순화, 농민의 대중 심리에 영합 등을 창작상 지침으로 내걸고 있다.(206)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제창


1차 검거사건을 겪은 카프는 급속히 조직활동이 둔화되면서 1932년에 들어서부터는 극히 위축된 활동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비평의 초점도 실제 창작과 관련된 부분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창작방법(207)이라 일컬어지는 리얼리즘 논의와 작품비평에 주안점이 두어진다. 이때까지 창작방법론으로 간주되어 왔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을 비판하면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그 대안으로 제창되기 시작한다.(208)


(3) 창작계의 실상


공장소설(工場小說)의 출현


본격적 노동소설의 출현과 관련하여 우리는 김남천을 빼놓을 수 없다. 김남천은 이 시기에 들어와서 활동을 시작한 신진작가로 이갑기는 김남천의 출현을 ‘혜성적 출현’이라고 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210)

이북명 역시 이 시기 들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는 데 대부분의 작품이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그 공장에서 3년간 노동자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11)


농민소설의 활성화


이 시기에 들어와서 농민문학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볼셰비키화 제창시에도 당면 제재 중에 농민문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당시 운동의 지침이 되었던 12월 테제에서도 부르주아 혁명단계로서 토지혁명이라고 명명될 만큼 농민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민문학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졌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리하여 많은 작가들이 농민 문제를 테마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시기 중요한 작품은 1933년 별나라에서 발행한 󰡔�농민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다.(212)


3. 카프 해산기 프로문학


(1) 카프 핵산의 경위


해산 직전의 카프

카프 해산까지의 경위


(2)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창작방법 논쟁


1933년 3월 백철(白鐵)은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문예시평」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개한다. 백철은 이 글에서 새롭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현재 소비에트에서 주창되어 논의 중에 있다고 소개하면서 정식으로 결의되고 다시 구체화되는 경우에 복종할 수밖에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즉석으로 태도를 결정지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 적당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220)


(3) 해산기 전후의 창작 성과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이 노골화됨에 따라 위기에 처하면서 카프의 활동도 극도로 위축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창작계에도 반영되어 양적으로 전시대에 비해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작품의 질에 있어서는 오히려 전시기보다도 진전되어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 중시에 대한 자기반성과 함께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이 높아감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들어 본격적인 장편소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기영의 󰡔�고향󰡕�과 강경애의 󰡔�인간문제󰡕�가 그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고 이들 작품은 프로문학 운동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224)


이기영(李箕永)의 󰡔�고향󰡕�

강경애(姜敬愛)의 󰡔�인간문제󰡕�


강경애는 엄밀히 말해서 카프에 직접 속해 있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이른바 프로소설을 꾸준히 쓴 작가이다. 특히 간도에서 생활하면서 이농민의 어려움을 형상화한 작품을 많이 썼다.(227)


4. 민족주의 문학운동


사실상 프로문학이 대두하면서 이들 문학론자는 자신의 문학적 존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이전의 지배적 문학형태였던 이광수, 최남선 들 기성 문단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말하자면 계급적 시각에서 기존의 문학은 부르주아 내지 소시민계급적 토대의 소산이란 평가와 함께 자신들의 문학은 프롤레타리아에 기반한 문학이란 인식이 그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그 직접적 대상자에게는 명확한 사상적 입장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결과가 프로문학의 본격적 문단 진출과 함께 이루어진 민족주의 문학파 혹은 국민문학파의 형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열의 형성은 프로문학의 선전포고에 맞서 소극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대립의 선을 그었을 뿐이지 명확한 의식과 그 기치 하의 조직적 단결의 형태는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대개 20년대 말 무렵부터 카프가 존속했던 30년대 초반까진 문단적 흐름을 프로문학 대 민족주의 문학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열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 내용적 문학적 입장을 엄밀히 분석해야 한다. 사실상 20년대 중반 이후 이 민족주의 문학 계열에는 민족주의파, 절충파, 해외문학파가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30년대에 들어와서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테면 정인섭은 1930년의 우파 한국문학의 판도를 김동인 등의 순수예술지상주의자, 최독견 등의 통속적 모더니스트, 염상섭 등의 심리 해부적 리얼리스트, 이광수 등의 민족적 인도주의자 등으로 4분하고 있으(228)며, 프로 측의 김기진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문학 대 프로문학으로 구분하면서 이를 보다 복잡하게 세분화시키고 있다.(229)


(1) 민족주의 문학론의 주요 이론


국민문학론


그러나 프로문학의 선전포고에 맞서 대부분의 것이 소극적이거나 혹은 문학관의 차이로 접근함에 비해 20년 중엽 이후 일련의 민족주의 문학파(국민(229)문학파)는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주목을 끈다. 특히 염상섭, 양주동, 조운 이병기 등 소장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프로문학에 맞서 적극적으로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 국민문학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조선으로 돌아오라’ ‘조선심을 현양하라’ ‘시조와 민요를 부흥하라’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적인 것의 존중과 시조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원래 이광수와 최남선이 주장하여 왔던 것으로 프로문학론에 밀려 주춤해 있다가 이들 소장 문인들이 프로문학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발판삼아 다시 국민문학론이란 이름으로 제창하였던 것이다. 양주동은 ‘조선심’을 “조선이란 땅과 기후 생활 풍습이 모인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생긴 전통과 정조 및 동족애 같은 것...... 조선이란 땅과 민족생활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산출된 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230)

민족주의 문학계열이 부분적으로 당대 현실에 뿌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손을 잡아 <신간회>를 결성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230) 민족주의는 말 그대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보다는 전통주의 혹은 복고주의에 가까웠다. 이들의 중요한 성과를 보면 첫째는 1926년에 와서 정음(正音)반포일을 찾아 정한 것이요, 또 하나는 시조 부흥운동이었다. 말하자면 정음반포일을 찾음으로써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것은 자연적으로 과거 민족 전통형식으로서 시조와 연관되었던 것이다.(231)

그러나 프로문학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적 체계를 발판으로 하여 워낙 강력히 이를 비판함에 따라 이들의 이론적 모색은 불과 2, 3년 후인 1928년(231)경부터는 프로문학의 계급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한 절충적 계급협조주의를 들고 나온다.(232)


절충주의 문학론


양주동 주재의 󰡔�문예공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학이론을 지칭하는데, 당시 󰡔�개벽󰡕�을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적 경향과 󰡔�조선문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다 같이 비판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내걸었다. 양주동이 대표적 이론가였고 여기에 염상섭, 정노풍 등이 가담한 이 절충주의는 <신간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에 따라 계급주의를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내건 ‘민족문학이 곧 무산문학’이라는 절충적 이론이다.(232)


(2) 민족주의 문학의 창작상의 성과


시조(時調)의 부흥

장편역사소설의 등장


제5부 근대문학의 성숙과 현대문학의 태동: 30년대 후반기 문학


1. 30년대 후반의 문단조감


1930년대 후반의 문단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란 사실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20년대나 30년대는 현실을 마주보고 작가 자신의 신념대로 분명한 자기의 입장을 취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전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 들어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거쳐 태평양전쟁(1941)으로 확산된 일제의 군국주의화에 의해 우리 국토와 민족은 노동과 각종 자원을 약탈당하고 병참기지와 상품시장으로 제공되는 가장 가혹한 희생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1930년대는 형식적으로나마 일부 주어졌던 제한된 자유와 활동마저 유린당하고 모든 것이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위한 무자비한 전쟁체제에 동원되어 가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문인들은 대개가 현실로부터 비켜서서 자기 자리들을 잡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그 자신들의 규정처럼 ‘무규정의 시대’ ‘혼란․혼돈의 시대’ ‘무주류의 시대’라는 특징으로 나타나고 만다.(236)

사실 1920년대 초에 󰡔�창조󰡕�, 󰡔�백조󰡕� 등을 중심으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풍미했고, 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프로문학이 태풍처럼 몰아닥쳐 전 문단을(236) 휩쓸고 그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이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 데 비해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또한 카프가 해산되고 난 후에는 문단을 주도하는 어떠한 흐름도 없었다는 것이 특성이라면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237)

그러나 조직적인 측면에서 카프가 해산되고 나서 강력한 조직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고 대신 29년대 초반처럼 동인지나 동인 형식의 소규모 모임이 활발히 모색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문예활동에 종사하는 문인들의 숫자가 대단히 많아졌다는 점도 이 시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과거 이광수, 김억 등 신문학 초창기 문인들로부터 시작해서 30년대에 등장한 오장환, 김동리에 이르기까지 백여 명이 넘는 문인들이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단체로는 1933년에 결성된 <구인회>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의 특징은 어떤 강령을 내걸고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한 단체가 아니라 색채와 경향이 그다지 분명치 않는 일종의 친목단체 성격이 강한 데 있다. 그 외에 다수의 동인지들이 속출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순문학계열에 속한 것이어서 20년대 초반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의 동인지 시대를 방불케 한다. 말하자면 민족의식을 내걸고 계몽문학을 적극적으로 실행해나간 이광수 문학 뒤에 예술지상주의문학이 솟구쳐 나왔듯이 적극적 사회참여문학이었던 프로문학이 카프 해산과 함께 일제의 탄압에 따라 위축되자 이에 대항해 전반적으로 새로이 순문학이 만개한 형상이었다.(237)

실제로 이 시기에 이르러 예술의 미적․형식적 측면이 다각도로 모색되고 심화되면서 현대적 양식이 어느 정도 정립되기에 이른다. 특히 소설과 관련해서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전반적으로 세태소설과 심리소설의 두 경향에 집중되고 있다. 이른바 20년대 자연주의 경향이 강하게 온존되어 있는 이 두 경향은 30년대의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반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현대 작가들의 정신적 능력인 자기 무기력의 증명이나 제가 사는 환경에 대한 경멸과 악의의 한계를 넘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바로 30년대 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솔직히 드러내 놓은 데 그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238)

그리고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들어서 묘사의 기술을 완성한 문학적 단계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물론 서구의 현대적 문예사조의 활발한 수입과 모색과도 깊은 관련을 갖지만, 현상의 정밀이나 자기 내면심리의 솔직한 표백에 주안점을 두면서 문장과 기교의 숙련을 통한 묘사의 발전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모더니즘 작가들은 리얼리즘 작가들의 ‘내용의 사회성’을 ‘형태(기술)의 사회성’으로 대체시키면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추구하였으나 그 실제 작품들은 소외, 퇴폐성, 도피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집단에서 분리된 채 이성이 아닌 지성과 감각으로써 근대문명에 직면하고자 했던 만큼 어느 정도 예견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새로운 문학형식의 발견과 창작 기술이 확대되고(심경, 세태소설, 알레고리 방법, 의식의 흐름 수법, 이표석의 순수한 설화체의 소설), 문학에 대한 공리 효용 우선의 흐름에서 일탈 경향이 확고히 정초되었으며, 기교를 강조한 도시문학의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238)

시부문에 있어서 1930년대 후반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해방 이후 최근까지 시단의 흐름은 어떤 점에선 바로 1930년대 후반의 시단의 영향권에서(238)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보다 엄밀히 말하면 소위 순수시 경향의 현대적 경향이 바로 이 시대에서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유달리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었고 순수시 영역에 포함되는 제 시적 흐름들이 조직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동인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보다 개성적인 모습으로 다양하게 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시문학󰡕�파의 박용철․김영랑․신석정 등, 그리고 <구인회>계의 김기림․정지용․이상 등, 또한 󰡔�시인부락󰡕� 출신의 서정주․유치환․오장환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고 개별적인 활동을 통해 신석초․이용악 그리고 과거 카프계열에 속했던 박세영 등이 주목을 받았다. 또한 4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목월․박두진․조지훈 등 <청록파>도 시단에서 고유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239)

한편 비평과 관련해서는 임화와 김기림의 기교주의 논쟁, 「날개」, 󰡔�천변풍경󰡕�을 둘러 싼 최재서 대 임화의 논쟁을 통해 모더니즘 문학이 내용과 형식, 지성과 감각의 분열, 문학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분리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주목된다.(239)


2. 전형기 비평의 양상


(1) 모더니즘 계열의 비평양상


구인회(九人會) 중심의 모더니즘


김기림은 기술자본주의 시대인데도 시인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과학문명의 발달, 그에 따른 인간의 생활 감정의 변화, 신비적 사고의 종언, 기존 문학전통의 붕괴, 현대 문명의 병적 징후 등이 자기 시대의 정신적, 현실적 변화의 실상이라고 규정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모더니즘 이론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면서 <구인회>의 대표적 논자가 되었다.(239)

김기림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언어의 예술, 의식적인 제작, 현대문명의 형상화를 그의 문학관의 요체라 할 수 있으며 “실로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사상과 논의의 의견이 거의 선인들에 의하여 말해졌다.-우리에게 남아있는 가능한 최대의 일은 선인이 말한 내용을 다만 다른 방법으로 논설하는 것”이라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표현방법과 기교문제를 중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역사의 변화와 문학형식의 변화를 대응관계에서 파악하면서도 구 카프 측 논자들이 이전까지의 세계관의 혁명에 집중함으로써 양식 문제를 소홀히 한 데 비해, 모더니즘 작가들은 세계관 자체를 도외시하고 양식 문제의 변혁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그 배경에 파시즘이 놓여 있고 이에 대응한 자율적 ‘지성’의 문제로 세계관 문제를 격하시키면서 문명비판을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해야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240)


주지주의 문학론의 정착-최재서(崔載瑞)


주지주의 문학론을 확고히 정착시킨 최재서는...30년 후반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 이론가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이론적 성과는 최재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41)

최재서는 무엇보다도 지성을 중시한다. 최재서가 파악하는 지성은 한마디로 예술가가 자기 내부에 가치의식을 가지고 그 가치감을 실현하기 위해 외부의 소재, 즉 언어와 이미지를 한 의도 밑에 조직하고 통제하는 데서 표시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재서는 바로 이 지성을 핵심에 두고 현재에 요구되는 지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문학론으로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풍자문학론은 그런 점에서 현재적 지성의 표현인 ‘풍자’라는 문학정신과 그 문학적 수법인 풍자수법을 아울러 결합한 그 나름의 종합적 문학론이라 할 수 있다.(241)

최재서는 이렇게 풍자문학 등을 내세우면서 주지적 경향의 대표적 예로 당시 창작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김기림의 「기상도」와 이상의 「날개」를 들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 작품은 현대인의 비애 그 자체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풍자, 위트, 과장, 패러독스, 자조 등의 지적 수법을 통해 ‘아무 막(膜)도 없는 맑은 눈’을 통해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독특하게 리얼리즘론을 펴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객관적 태도를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여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외부세계 혹은 내부세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태도가 관건이란 견지에서 흔히 심리주의 소설이라 칭하는 「날개」와 세태소설이라 칭하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리얼리즘의 심화와 확대로 보게 된다.(242)


김환태(金煥泰)․김문집(金文輯)의 인상주의 비평론


그런데 최재서가 지성이라는 객관적 태도를 중심으로 창작방법과 비평을 통일시켜 이해하려 했다면 이와 정반대로 김환태는 이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작품을 객관적 존재물로 상정해 두고 이 작품이 주는 인상을 비평의 기준으로 내세움으로써 문단에 개인주의적 인상주의 비평론을 내건다. 즉 문예비평이란 정치도, 사상도, 사회도 그 대상이 도리 수 없고 오직 문학 그 자체만이 대상이라는 견지에서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인간정신의 노력이므로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243)

이러한 김환태의 인상주의 비평은 김문집에 와서 보다 완벽한 형태의 이론으로 제시된다. 그 역시 김환태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비평론자에 포함되지만 그는 거기에 탐미성을 가미시킨다.(243)·

이렇듯 비평 자체를 문학 자체로 놓음으로써 비평의 과학성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 최재서와 정면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립은 1930년대 말기 문단의 최대 쟁점이 되기도 했으며, 오히려 대중적 인기면에서 김문집이 앞서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정치적 폭압 속에서 대중문예지가 속출하고 신문학예면이 오락 쪽에 쏠리면서 이러한 시류에 김문집의 탐미적 인상주의가 자연스럽게 이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44)


(2) 구(舊) 카프 계열의 비평적 동향


백철(白鐵)의 전향과 인간묘사․퓨머니즘론

김남천(金南天)의 고발문학론과 관찰문학론

장편소설론


3. 순문학의 융성과 리얼리즘 문학의 퇴조


(1) 󰡔�시문학󰡕�파와 순수시


사실상 30년대 후반의 흐름에서 큰 윤곽으로 보아 가장 큰 줄기를 형성했던 순문학의 흐름의 선두는 󰡔�시문학󰡕�을 중심으로 한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등의 시문학파이다. 이 파는 그러나 이미 1930년대 초반에 태동되었다. 즉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에서 유래한다. 물론 앞서 거론한 인물 중 소위 시문학파의 특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은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이고 정지용이나 이하윤 등은 전체 시세계를 고려해볼 때 오히려 <구인회>나 <해외문학파>에 속하는 작가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이 시문학파의 특징은 한마디로 반이데올로기적 순수서정의 추구이다. 그에 따라 당연히 표현매체인 언어에 대한 관심과 기법에 대한 노력에 집중한다.(249)

시문학파의 작가들은 당시 문단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카프계열의 이데올로기 편향주의에 맞서 성급하게 직설적으로 토해지던 선동시 혹은 이념시를 거부하고 예술적 양식화의 중요성을 부각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와 관련해서 카프에 대항한 세력으로 흔히 국민문학파를 들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국민문학파는 의식면에서 민족주의 내지 민족개량주의로 맞선 반면, 시문학파는 문예관에서 예술지상주의로 맞선 편이다.(250)


김영랑(金永郞)

박용철(朴龍喆)

신석정(辛夕汀)


(2) 구인회(九人會)와 모더니즘 문학


<구인회>는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모더니즘문학의 대변자로 흔히 일컬어진다. <구인회>는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多讀多作)을 목적으로” 1933년 8월 15일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이무영, 정지용, 김유영, 이효석, 이종명, 유치진 등 9명으로 창립되었다. 창립목적에서도 드러나듯이 창작에 주안점을 둔 비슷한 경향을 갖는 문학가들의 친목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다.(254)

그리고 기존회원의 탈퇴와 신입회원의 가입 등 몇 번의 교체 과정에서 이태준, 박태원, 이상이 중심회원이 되면서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 구성원들의 개인적 창작활동이 30년대 후반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에 <구인회>의 가치를 문학사적으로 중시하게 된 것이다.(255)

이들 성원들은 상호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마디로 서구적 의미에서의 현대문학의 양식을 가장 잘 소화해낸 도시세대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작가들에게서는 도시풍의 문명화된 언어가 주종을 이구고, 집단에서 분리된 채 개인성을 중시하여 이성이 아닌 지성과 감각을 중시함으로써 주지주의, 지성주의라든가 초현실주의라는 정신적 틀 속에서 각기 자유를 구가하였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여 보면 모더니즘 계열 내에서 영미계쪽에 그 원천을 둔 이미지즘((주지주의)적 경향과 전위예술에 가까운 초현실주의계의 모더니즘으로 대별할 수 있다.(255)

이렇게 볼 때 실제 작품을 통해서 주지주의,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심리주의, 신감각파 등 잡다한 경향을 보여주는 모더니즘 문학은 전반적으로 언어의 세련성과 기교를 통한 문학양식의 근대성을 최고도로 높인 데 그 의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김기림, 정지용, 이상, 박태원, 이효석 등 구인회 작가들과 함께 그 뒤를 이은 김광균, 오장환, 최명익 그리고 󰡔�삼사문학󰡕� 및 󰡔�단층󰡕�계 작가들도 이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확립기, 즉 식민지 정착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세대들에 의해 추진된 무학경향으로 문학 양식과 실험정신면에서 문학의 현대성을 모색하고자 했다.(256)


박태원(朴泰遠)


구보 박태원(仇甫 朴泰遠)은 소위 <구인회>의 경향을 가장 대표할만한 소설가이다. 순수 서울 태생인 그는 1930년 소설 「수염」으로 등단하여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성탄제」 등의 작품을 썼다.(256)


이태준(李泰俊)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은 한마디로 봉건적 풍속 속에서 급격히 식민지 자본주의적 풍토로 변모해가는 사회변화 추세 속에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내보이지 않는 수동적 인물을 즐겨 그린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허를 두고 딜레탕티즘의 작가라고도 일컫는다. 말하자면 그의 대표작이라 칭해지는 「가마귀」 「불우(不遇)선생」 「복덕방」 「우암노인」 등은 거의 전부 일상적인 사소한 것들에 복수당하는 패배적 인간들이 그려지고 있다.

물론 이태준은 하층민의 고난을 형상화한 작품도 썼는데 「꽃나무는 심어놓고」(1933) 「농군」(1939) 등이 그런 작품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이태준은 분위기 묘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어두운 현실문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적 색채의 소설을 잘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모든 소설에 해당되는데 문장이 유려하고 구성이 치밀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지금까지 우리 소설이 갖지 못한 치밀한 형식미를 구비하고 있는 작가였다.(257)


이상(李箱)


건축기사 출신의 이상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파격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이상이란 이름은 건축기사 시절 인부들이 그를 가리켜 ‘리상’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다고 알려져 있다. 소위 심리주의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는 1934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시, 소설 양 장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대표작 「날개」(1936)를 비롯해서 「봉별기」(1936)․「종생기」(1937)․「동해(童骸)」(1938) 등 그의 소설 전부는 평면적 구성보다는 입체적 구성을 통하여 인간의 심리적 내부를 분석하고 해부함으로써 심층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을 문학에 적용한 작가였다. 따라서 외부적인 디테일은 거의 무시하고 자의식의 세계만을 철저히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상은 이러한 수법을 사용하여 부정적인 자기폐쇄를 통해 정당하게 사회와의 통로를 차단당한 인간의 파산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작품 내에서 보여지는 것의 역설로서 규정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극단적 자기폐쇄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의 비건강성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258)

한편 시에서도 이상은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시를 창작하는데 「오감도」 「꽃나무」 등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은 우리 근대사에서 처음이라 할(258) 수 있는 자동기술법을 도입하여 이성이나 이지, 기성관념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잠꼬대와 같은 넋두리나 숫자와 기하학적 낱말 등을 도입하여 이른바 난해시를 처음으로 선보였다.(259)


김기림(金起林)


모더니즘 시 이론을 전개하며 모더니즘문학을 이끌어나갔던 김기림은 실제로 전형적인 모더니즘 시를 창출해낸 시인이다. 시집 󰡔�기상도󰡕�는 이 시기 모더니즘 시양식의 표본이 되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김기림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여 시적 형상의 감각적 표현에 주력하였다.(259)

그러나 그의 이론수준에 비해서 시는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말하자면 몇 편의 시에서는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시 대부분이 방법의 도식화와 기교적인 형태주의에 사로잡혀 비유로 짜여진 설명적인 풍경화에 지나지 않는다.(260)


정지용(鄭芝溶)


정지용은 본래 시문학파에서 활동했으나 이미 그전부터 독자적인 시 영역을 가진 중견시인이었다. 사실 시문학파에서도 그는 시문학파 특성에 맞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큰 의미에서 순수시를 지지하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이 컸다. 그러다 <구인회>에 가입하면서 그는 자신의 특성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초기 시는 「고향」 「향수」 등에서 볼 수 있는 짙은 향토색의 서정시들이었고, 제2기에 해당하는 <구인회> 시절에는 「아침」 「유랑자」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문명에 소재를 둔 모더니즘풍 시들을 창작하였다.(260)

이처럼 문명과 관련된 언어의 음감을 통해 도시적 감각의 정서를 표출한 정지용은 김기림과 더불어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재래의 관념어 대신 현실의 구상, 이를테면 넥타이, 페스탈로치, 오르간 소리 등과 같이 서구적 감수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언어를 발굴하여 시각, 청각, 촉각, 공감각 등이 비유를 통해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특히 다른 시인들에게서 자주 보는 감정의 과잉이 정지용에게서는 철저한 절제 혹은 객관화로 정제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261)


이효석(李孝石)


이효석은 1928년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고 또한 「마작철학」 등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대표적 동반자작가로 간주되었으나 1930년대에 접어들어 서울 시절을 청산하고 구인회에 가입하고 「돈」 「수탉」 등 일련의 향토를 무대로 한 본격적인 순수문학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특이한 성적 모럴을 제시한 「분녀」(1936)를 발표하고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262)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 포함된 순박한 인간상을 주제로 그들의 순수한 본능적 애정문제를 그린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가 낳은 한국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장돌뱅이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ㅇ가는 인간의 원초성을 애정과 핏줄의 해후로 회구시켜 과거로부터 우리 전설이나 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형적 모티브를 전통화시킨 작품이다.(262)


오장환(吳章煥)


오장환은 직접 구인회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성벽󰡕�(1937) 󰡔�헌사󰡕�(1939) 등의 시집을 발표함으로써 구인회의 모더니즘 시풍을 가장 올바로 계승한 후기 모더니즘시의 대표적 젊은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263)


(3) 「시인부락(詩人部落)」 등의 동인지와 신진작가들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서정주가 발해 및 편집인이 되어 창간한 소책자의 시전문 동인지로 2호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발간 당시 이 동인지는 문단의 주목을 전연 받지 못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후 여기에 속한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이 신진 작가로서 시단의 주요 작가로 등장함으로써 문학사적으로 중시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뚜렷한 문학적 이념과 방향을 표방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문학 동호인적 집단의 성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 김동리 등이 이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면서 그 위치가 높아지고 독자적인 경향성을 보이자 이들의 경향이 태생한 시발점에 󰡔�시인부락󰡕�이 있음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264)

무규정 혹은 무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사실 30년대 후반기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 30년대 후반의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동인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이들이 그 전시대의 모든 활동을 비판하면서 이 시대의 상황과 결부되어 비로소 등장한 신진 작가들이란 점이며, 아울러 이들에 의해 소위 세대논쟁이 촉발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65)


(4) 구 카프 계열의 작가와 작품-김남천(金南天), 채만식(蔡萬植) 등


우리는 앞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에 의해 당시 현실이 직면한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여러 쟁점을 정면으로 다룰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이유 때문에 과거 가장 첨예하게 이제와 맞섰던 구 카프계열의 작가들도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개별 작가 나름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태소설, 풍자소설, 가족사․연대기 소설들이다. 이들 가족사 연대기 소설들은 시대변화의 다양한 모습을 주관을 개입하지 않고 묘사하는 것이 기본 원칙으로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그 관계를 중시하고 있지만 대부분 풍속을 소개하는 방식이어서 당시 일제의 가혹한 검열과 탄압을 피해 적극적인 대결을 상실한 상태에서의 소설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266)

그중 김남천은 30년대 후반에 있어 매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고발 문학론-모럴론-풍속론-로만개조론-관찰문학론으로 이어지는 리얼리즘론의 모색을 창작과 결부시킨 작가였다.(266)

채만식(蔡萬植)은 1934년 「레디메이드 인생」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이른바 대표적인 동반자적 작가로 알려졌다. 「사라지는 그림자」, 「화물자동차」(19310, 「부촌」 등의 작품에서 그는 카프 작가와 마찬가지로 사회 현실에서 노동자들과 무산자들이 겪는 삶과 투쟁을 그렸다.

그러나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풍자성이 강한 사회문학을 창출하면서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풍자작가로 자리잡는다.(269)


(5) 30년대 후반의 농촌소설과 역사소설


다양한 농촌소설


이미 살펴본 대로 농촌소설은 주로 농민소설이란 개념으로 카프작가들에 의해 많은 작품이 산출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각도로 순수문학 계열의 작가에 의해서도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직접적인 목적의식보다는 농촌이란 지역적 삶과 연관된 전원소설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농촌소설이란 이름이 더욱 타당할 것 같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작품으로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 그리고 김유정과 이무영의 여러 단편을 들 수 있겠다.(272)


제6부 일제말 암흑기의 문학


1. 일제말 암흑기 문단의 동향


30년대가 저물고 40년대가 오면서 시대적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이미 일제는 문인보국회 등을 만들어 작가들을 침략전쟁의 앞잡이로 만들기에 광분하는 등 문학이 설 자리는 차츰 없어져 갔다. 모든 작품 내용은 국책문학 쪽으로 내몰려갔고 끝내는 일본말로 작품을 쓰게까지 하였다.(277)


암흑기 문단을 지킨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

1939년에 창간되었다가 1941년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일간신문과 함께 일본의 압력에 의해 자진폐간의 형태로 폐간된 󰡔�문장󰡕�과 󰡔�인문평론󰡕�은 비록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암흑기 문단을 그나마 유지시킨 최후의 보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잡지는 단순히 일제 말기의 암흑기의 문학활동을 유지시킨 공적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일제하 전 기간 동안 어떤 문학잡지보다 높은 권위를 확보한 대표적 잡지이기도 하였다. 특히 󰡔�문장󰡕�지는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는 신인추천제도를 실시하여 최고권위작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심사를 통해 역량있는 다수의 신인을 배출함으로써 암흑기 문단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명맥을 잇게 하였다.(278)


세대․순수논쟁


이 논쟁은 보다 엄밀히 말하면 ‘세대론’에서 비롯되어 ‘순수논쟁’으로 그 성격이 이월되어 간 논쟁이다. 먼저 세대논쟁은 임화, 유진오, 이원조 등 30대의 중견비평가들과 김동리, 오장환, 정비석 등 20대 신진작가들 사이에 벌어진 세대간의 대립이었다. 논쟁은 신인다운 신인이 없다고 개탄한 임화의 「신인론」(󰡔�비판󰡕�10권1호, 1939)에서 비롯되었다.(279)

유진오는 ‘순수’란 개념을 모든 비문학적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라고 하여 이를 새로이 정의하였다.(279)


고전론과 신체제론


2. 일제말 암흑기의 문학계


순수문학의 자기심화


전반적으로 이 시기 문학은 사상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 문학은 일체의 정치성․사회성을 배제하고 심미적 순수문학의 방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경향은 30년대 후반부터 태생되어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순수문학의 자기심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문학적 성과에 있어서는 주목할 만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특히 30년대 후반과 비교해 보면 그 성격이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즉 1930낸대 후반의 중심은 해외문학파와 모더니즘 문학운동을 기반으로 한 서구문학의 수용이란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자발적으로 계승하려는 측면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281)

󰡔�문장󰡕�지의 전통․고전주의는 󰡔�문장󰡕�지에 관계한 주요 인물들인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의 활동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말하자면 과거 모더니즘의 대표주자였던 정지용과 이태준이 가람 이병기와 손을 잡고 고전에 귀의하여 각각 시조, 시, 소설부문의 선고위원을 맡아 신인을 발굴하고, 또한 잡지원고의 기획 및 집필을 하는 등 중추역할을 하였던 것이다....실제로 이들의 경향은 당시 일제말기 문학계의 가장 큰 줄기를 형성한다. 즉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장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를 필두로 하여 가장 토속적인 작품을 써냈다고 하는 김동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282)

<청록파>는 그들을 추천한 정지용의 영향 아래 자연을 공통된 시적 공간으로 설정하여 우리의 뿌리깊은 시적 흐름인 자연시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민족의식과 그 정서나 감정을 집약 승화시켜 밝고 정제되고 청아한 율조와 청신한 자연의 이미지로 서정시의 푯대를 세웠던 것이다.(282)


암흑기의 별, 이육사(李陸史)와 윤동주(尹東柱)


지금까지 우리는 암흑기의 문학적 특징으로 문화적 전통에 대한 관심과 자연에의 귀의, 그리고 삶에 대한 허무와 절망 등 일련의 현실도피적 은둔적 세계가 주류를 이루어왔음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이고 다소간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도 암흑기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뚫고 나가려는 두 별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육사와 윤동주가 그들이다. 물론 이들은 당시 문단에 적을 두고 세칭 문단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 작가이다. 그들의 시는 8․15 이후에 비로소 유고집으로 발간되면서(46년 󰡔�육사시집󰡕�이, 그리고 48년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알려지기 시작한 시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는 그 당시 문단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자산으로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285)

이육사는 실제로 자기 스스로 운동가적 삶을 살다가 1944년에 옥사한 투사로서 이러한 면모가 그의 시풍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285)

「청포도」 「광야」에서처럼 이육사는 우리 민족의 자긍을 기반으로 하여 애조 띤 애상적 분위기를 걷어치우고 강건성을 시적 분위기로 탁월하게 형상화하면서 미래에의 꿈을 확신시킨다.(286)

반면 윤동주는 옥사한 시인이긴 하지만 보다 종교적이며 개인에 대한 진지한 실존적 성찰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윤동주가 이육사처럼 실제 운동가로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무명시인으로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신의 진실한 삶을 꿈꾸며 진지하게 자기성찰의 길을 걸어왔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286)


기타 경향과 주요 작품들


이른바 30년대 후반 소설계의 주요한 흐름 중의 하나가 장편소설서 가족사 세태소설임을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 대표적 소설로 이기영의 󰡔�봄󰡕�과 한설야의 󰡔�탑󰡕�,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 등을 꼽을 수 있다.(287)

이밖에 소설 쪽에서는 안수길, 김정한, 현덕, 이근영과 여류작가 최정희, 이선희 등이 이 시기에 주목을 받을 만한 신진작가들인데 이들은 당대 사회적 삶의 궁핍상을 진솔하게 그리려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만주 간도에서 살았던 안수길은 그곳을 무대로 「새벽」 「원각촌」 등을 발표하여 간도이민생활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새벽」은 만주로 이주한 농민 일가족의 삶을 그린 소설인데, 소년의 눈을 통해 같은 동족을 고발하는 비열한 세태, 빚값에 누나를 빼앗겨야만 하는 궁핍상을 리얼하게 형상화하였다.(288)


3. 일제말 친일문학(親日文學)의 양상


친일문학이 본격적으로 우리 문단에 주목된 것은 잘 알려진 대로 1966년에 임종국이 발표한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임종국은 대표적 친일문학가로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김팔봉, 박영희, 유진오, 백철, 최재서, 김동인, 모윤숙, 김동환, 노천명, 장혁주, 유치진 등을 꼽고 있다.(289)

사실상 이렇게 많은 문인들이 친일적 행동을 수행함으로써 일제 말기 친일문학 양상은 어느 한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문단적 양상이었다는 것이(289)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렇게 친일문학으로 전 문단이 끌려가기까지에는 1930년 말부터 이를 노골적으로 주도한 몇몇 대표적 문인들의 민족배반적인 행동에 기인한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프로문학 초창기의 대표적 논객으로 활동했던 박영희는 이미 1939년 󰡔�인문평론󰡕� 창간호 「전쟁과 조선문학」이란 글에서 대동아전쟁을 성전(聖戰)이라 칭송하고 일본정신을 세계정신의 종국적인 목표를 구현하는 의의가 있다고까지 하였다. 그 외에 이광수, 최재서, 김기진, 김용제 등이 <문인보국회> 등을 주도하면서 일본에 동화하여 학도병 참전을 권유하고 창씨개명을 선도하는 등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290)

이렇게 되면서 일제는 전 문인에게 친일적 행동을 강압하고 그 결과 일제 말기에는 친일문학이 하나의 흐름처럼 되어 대다수 작가들의 작품에 일본말 문학으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비평가로는 박영희, 최재서, 김기진, 안함광 등이 친일문학의 대열에 들어섰고, 이광수, 유진오, 이효석, 이석훈, 정인택들이 소설에서, 그리고 김동환, 김종환, 김용제 등이 시에서, 또한 유치진, 송영, 함세덕이 희곡으로 친일문학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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