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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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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선생님을 찾아서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767  추천:73  작성자: 김혁
 

 

  2006년 6월, 한국행차를 했던 나는

공식적인 업무를 마치자 스스로 마련한 문학기행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의 향기를 찾아 나섰다.

나는 그 무슨 역마살이 끼여 엄청난 사비를 털며

진동한동 강원도의 곳곳을 밟은 것이 아니였다.
문학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

수많은 독자와 방황하고 있는 문단 후학들에게

하나의 디딤돌이자 지향점이 되고 있는 <<토지>>에서

위기 돌파의 지혜와 힘을 얻자는 것이

내가 스스로 마련한 이번 문학기행의 의취였다.  

내가 회의를 가지면서도 또 그렇게 미련이 있는 글쓰기를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하고 살 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답을 구하고자 나는 화두를 품고 산사의 문을 두드리듯 토지문화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하지만 그때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이제 그 존안을 영영 뵙지 못하게 된것이다.

이국의 작은 문인으로서 무람된 일일지 모르지만

당시 썼던 기행문을 다시 올려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박경리 선생님, 부디 영면하옵소서!

  

장독대에선 된장이 익고 펜끝에선 글이 익는다

회촌마을의 토지문화관을 가다

김 혁 

 

<<토지>>의 향기를 찾아 스스로 마련한 문학기행의 세번째날에 선생님이 기거해 계시는 회촌마을에 있는 토지문화관을 향했다. 진정 대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장밤 뒤척이며 무척 설렜다.
원주역 남부시장앞에서 시교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혹시 지점을 놓칠가봐 차창 밖의 낯선 풍경에 취하여 두리번거리는 사이, 반시간여를 달린 뻐스는 곧 연세대 원주 분교 캠퍼스를 지났고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에 이르렀다.
곧추 가면 토지문화관이 보일거라고 기사아저씨가 알려주었다.

 

길녘의 파릇파릇한 벼포기,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탁 트인 산자락아래 원주에서 오는 도로는 하나뿐, 시골농촌의 전형적이라 할만큼 조용하고 인적 드문 비포장도로 나는 홀로 걸었다. 새파란 하늘과 투명하도록 맑은 물, 풋풋한 땅내음이 좋은 길가에 메꽃, 접시꽃, 패랭이꽃들이 소탈하게 피여있었다. 유월의 신록은 눈부시게 싱그럽다. 거기다가 호젓하고 고요하여 가끔 산새 소리만 들릴뿐이였다.

 

머리에 수건 두르고 밭에 묻혀 정성을 쏟는 농부들이 보였다.

파릇파릇한 벼포기 하나가 례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논밭 사이로 작은 저수지 하나도 눈에 들어온다.
나지막한 고개마루에 장승이 서있었다.

장승이 한두개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얼굴도 늙은 로안의 장승으로 보였다.

[토지]문화관을 가는 길옆의 장승 앞에서

 

장승고개를 넘어서니 좌측의 나지막한 산기슭쯤에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세동이 있었는데 건물하나는 짓고 있는 중이였다. 길곁에 토지문화관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진초록으로 덮인 오봉산. 덩치값을 하는 듯 강파르게 뻗쳐 내리던 산은 마을에 이르자 넉넉하게 품을 펼쳐 숨을 고르고 바로 그 들머리에 박경리선생님이 계신 토지문화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적한 숲 속의 공간을 제공해 메마른 감성을 일깨워주고 자연과 삶의 리치를 깨닫게 하여 멋진 후진을 양성하려고 이곳 매지리에 문화관을 설립하였다고 박경리선생님은 그 의중을 밝혔다. 그래서 1996년 이곳에 토지문화관을 건립하기 위해 토지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근 2년간의 공사 끝에 1999년 6월 9일, 마침내 토지문화관을 개관하게 된것이였다.

큰길좌측에서 문화관으로 난 좁은 소로를 따라 한참 올라가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눅잦히며 문화관 본사동의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홀은 비여있었다. 홀에 딸린 숙직실에도 사람이 없었다. 머쓱한 나머지 홀을 두리번거렸다.


벽에 걸린 스크립보드(記錄計)에는 작가들의 이름이 써있었고  월~토요일까지 동그라미 표시로 식사를 들었는지 표시되여 있었다. 벽에 액자도 걸려 있었다.
<<사고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그 제언이였다.


홀 중앙에 놓인 거대한 북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후에 안데 의하면 이북은 88년 올림픽 개막식에서 두드렸던 북이였는데 대회측에서 경모의 마음으로 단 3개밖에 없는 그 중의 하나를 박경리 선생님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호기심에 그 북을 두드려보았다. 조심스레 두드렸지만 북소리는 조용한 홀에서 공명이 되여 울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북소리를 들었던지 2층에서 60대로 보이는 선생 한 분이 내려왔다.
문화관의 관리를 맡고 있는 변재봉이라고 자아소개를 했다.

중국에서 왔다는 말에 관리원은 적이 놀란 기색을 지었다.
마침 선생님은 연세대의 초청으로 산을 내려 자리를 비우고 없다며 난감한 기색을 짓다가 선생님에게로 전화를 걸어 연계해주려 했다. 나는 선생님의 스케쥴을 깨뜨릴가 저어되여 그러는 관리원을 말렸다. 그냥 이국의 한 작가가 왔다갔다고 안부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변선생에 의하면 높은 혈압 때문에 팔순의 선생님은 한쪽 눈을 못쓸 정도로 시력도 좋지 않고 의사로부터 더 이상 소설을 쓰면 안 된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일전엔 한 신문에 광복 이후를 다룬 신작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련재하다가 혈압이 높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경과 생명 문제 만큼은 너무나 중요해서 간혹 환경 에세이를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관의 관리자 변재봉선생과


지금 토지문화관은 선생님의 외동딸인 김영주씨가 관장을 맡고 서울과 원주를 오고가면서 돌보고 있다고 한다. <<한국미술사>> <<한국불교미술사>> 등의 저작을 펴낸 학자인 김 관장은 자매라고 생각될 정도로 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관리원이 그래도 멀리에서 모처럼 찾아왔는데 선생님에게 련계해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재차 말렸다. 사실 높은 산인 선생님앞에서 작은 키로 나서기나 감히 문학을 운운하기가 외람된  마음에서였다.
농부자같이 구순한 인상을 한 변선생은 오히려 미안쩍어 하며  쉬는 점심시간이였지만 일일이 문화관을 안내해주었다.

 선생님이 몸소 심으신 소나무
묘하게도 나무의 이름은 나의 고향 연변의 명물인 [일송정]과 꼭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토지문화관은 대지 1천547평에 지상 4층 규모의 건축물로 연면적 8백여평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건물 내부는 첨단 음향시스템과 국제회의용 동시통역실 4개를 갖추고 있으며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회의실, 분과토론과 작은 학술모임을 위한 3개의 세미나실, 그리고 도서실 및 자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별채로 꾸며진 숙소동에는 세미나 참석자를 위한 26개의 침실과, 학자나 예술가들의 창작과 연구를 위한 집필실이 마련되었으며, 장기투숙이 가능한 숙소도 따로 있었다.
이밖에도 부대시설로 야외무대와 식당, 체육시설,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100여석 남짓 준비된 강연장은 늘 청중이 자리를 메워 주최측이 추가로 마련한 보조의자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아이를 품에 안은 주부에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로부부, 린근 도시에서 온 직장인과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운집해 든다고 한다.


문화관의 공간활용계획을 보면 학술문화행사의 기획 및 추진, 연구 및 창작활동 지원 , 국제학술문화교류 활동, 문화운동 및 교육활동, 문화계 네트워크 형성, 사이버공간을 활용한 문화예술활동 등으로 다양하다.
선생님에게는 자연과 생명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이 안스럽다.

하여 토지문화관은 내내 <<생명ㆍ환경ㆍ문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와 토론회, 출판사업을 벌이고 있는 데 이렇게 치러온 세미나며 심포지엄이 지난 몇년간 60여회에 이르렀다. 이곳이 한국 환경운동의 <<새로운 중심>>으로 불리고 있는 이유다.
이렇게 토지문화관은 이미 한국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부상해 있었다. 

변선생은 특별히 박경리 선생님의 집무실까지 문을 열어 보여 주었다. 집무실은 의외로 너무나도 간단했다. 사무상에 어느 조각가 빚은 선생님의 두부상 한 점이 놓여져 있을뿐이였다.


   그만큼 번화한 차림과 교제를 선생님은 꺼려한다고 했다. 본인의 작품 이야기는 물론, 인터뷰 자체를 꺼려한다. 박경리 선생의 유명세에 비해 언론에 노출된 것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다. 선생님이 단구동 자택에 계시던 시절,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서울 MBC방송의 한 PD는 선생님의 댁으로 6개월을 출퇴근 하다싶이 해 겨우 인터뷰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대중매체에 노출을 꺼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한적 있다.


<<작가가 대중에 로출되는 것이 세속적인 것이다. 작가가 진정 자유를 원할 때는 스스로가 차단해야 한다. 25년간 <토지> 쓰는 동안 내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 글 쓰는 일 이상으로 힘들었다.>>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선생님. 그러나 정작 본인작품의 해외진출도, 노벨상 수상 여부 대해서도 달갑지 않아 한다.


전국의 문화 예술인 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열렸던 개관식 행사에서 토지문화재단의 리사장이자 이 문화관의 상징인물인 선생님은 <<이 문화관은 내 작품 을 기념하는 문화관이 절대 아니며 그런 생각들은 전적으로 오해>>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과거를 추억하는 곳이 아닌, 미래지향적 순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더 나아가 <<내 생전에는 이곳에서 <토지> 세미나는 열 수 없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자유지만 만약에 산 사람을 곁에 두 고 이 공간을 내 작품과 련관시켜 활용한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욕이다>>라고 못박았다.


<<작가는 얼굴이 필요 없습니다. 작품 내놓으면 그걸로 끝이죠. 문학 작품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독자들이 읽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선생님의 작가적인 신조였다.

 

세련되게 만든 회의실과 세미나실이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창작실이다.
이곳에는 여러 분야, 여러 곳에서 찾아온 문학가, 예술가들이 산다. 중국 상해에서 와서 반년째 머물고있는 녀류작가도 있다고 변선생이 알려주었다.
이들은 13평짜리 각방인 창작실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그 분위기는 <<고시원에 가깝다. >>고 이곳에서 체류한적 있는 어느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
800여평의 4층건물에 한 달이면 인건비, 공과금 등 1000만원 가까운 유지비를 사재로 쏟아붓고 있는 터라 어려움이 많을 터이지만 선생님은 시골집에 내려 온 아들 딸이나 손자들을 거두듯이 문화관 창작실에 머무는 문인들을 보살피신다. 


입주한 작가들이 행여 신경 쓰일까봐 일체 내려오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터밭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로, 산에서 채취한 나물로 반찬을 만들어 새벽에 조용히 주방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창작실의 식사시간에 맞춰 반찬들을 내려보내는 선생님은 신나고 행복해 보인다.
  
사람들에 대해서 까다롭고 낯가림도 심한 편인 선생님이 후배 문인들에게 쏟는 그 무조건의 정성은 어디서 오는 걸가?


리유는 단 하나, 그들이 문학인이기 때문이다. 대하소설을 창작해 오면서 겪은 글쓰기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은 후배들의 작업을 도와주는 일을 한없는 기쁨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기에 이곳에서 집필의 나날을 보낸 박범신소설가 는 선생님에게 <<하숙집 아줌마>>라고 친절한 별명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내가 자네들을 뒤에서 살펴주는 리유는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뜻이야. 내가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 새끼에게 모이먹일 일이 있다는 것은 다 고마운 일이지.>>


선생님은 후배사랑의 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러면서 <<여기 작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니 박경리 개인에게는 라이트를 비추지 말기를 바란다>>고 매스컴에 경고하기도 했다.
<<토지문화관>>은 문학에 매료된 작가들이 거장의 정기를 받고 문학정신을 고양하는 문학산실로 사랑받고 있다. 이곳은 선생님의 글에도 나오듯 정녕 오봉산에 피어 있는 글꽃산인 셈이다.

   

박경리선생님이 기거하는 집

 선생님의 사택은 토지문화관과 울타리를 맞댄 오른쪽에 있었다.
작은 이층구조의 사택 앞에는 터밭이 일구어져 있다.  상추며 고추며 오이며 여름 한철내기엔 그만인 채소들이 하나하나 예쁘게 잘 자라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500평의 터밭을 손수 일구시고 있다고 한다. 비료를 절대 쓰지 않는 유기농업을 중히 하신다.


밭머리에 장독대가 일매지게 놓여 있는 것이 가관이였다. 얼추 세여 보아도 50개는 넘어 보였다. 70~100년 된 투박한 항아리들인데 쇼와(昭和) 년호가 새겨진 장독도 있다고 한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장독이 다 모여 있어요>>
변선생이 웃으면서 이 장독은 이 문화관의 또 하나의 명물이라고 알려주었다.  

오봉산에 정착한뒤 이제야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터밭의 생명을 키우고 마당의 거위를 보살피는 생활로만 돌아갈 수 있게 됐노라고 선생님은 웃었다.


원주 단구동에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닭장과 거위장 문을 연다. 손수 기른 상추에 아침을 드시고 텃밭을 일구고, 마당의 돌을 고르고, 뒷산에 올라 칡덩굴을 뽑으며 산다. 김장도 많이 담근다...

 

선생님이 몸소 가꾸시는 터밭과 몸소 담그신 장

박경리 선생님은 왜 이렇게까지 로동에 집착하는 것일까?
어느 산문집에서 선생님은 <<로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고 하셨다. 발이 셋 달린 그 기구에서 조리되어 나오는 것이 곧 선생님의 작품이자 삶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글과 함께 해온 로동은 이제 선생님의 일부가 된 듯 보인다.


무려 25년 동안 작품에 진력하셔야 했고 소설 속의 세계는 호흡이 길 뿐만 아니라 소우주에 가까울 정도인데,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과 긴장을 어디서 끌어오셨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동과 글쓰기는 일종의 정화 작용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부정적이 됩니다. 잡다한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로동을 하거나 글을 쓰면 우리의 슬픔이나 이런 것이 왜 있는가에 대해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것이, 설령 되돌아올지언정 한발 나아갔다는 것이 전진이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존의 지속성을 위해서 <토지>를 썼다는 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옛날부터 <<글 쓴다>>라는 말을 안하고 그냥 <<일한다>>고 표현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몸을 움직여 생산활동을 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건강과 활력을 유지한다. 생명과 자연, 로동을 중요시하는 선생님. 그에 대한 수많은 존경과 찬사는 그처럼 한평생 자연에 뿌리를 둔 실천하는 삶, 육신과 령혼이 하나 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16권의 대하소설《토지》외에도 장편소설 20부, 단편소설 42편을 발표하고, 수필집 4권 시집 3권을 발간한 선생님의 왕성한 문학세계는 무엇일가?
80세의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그이가, 또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이기도 한 대작가로서의 그이가 체득한 인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토지문학관 정원에서 나는 스크랩해둔 선생님의 강의록, 대담록을 떠올리며

목전에서 뵙지못한 선생님과 가상인터뷰를 해보았다.
한가지 선률에 심취한 매니아의 심정으로 마음의 자문을 구해 보았다.

 

-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의 길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와 작품은 무엇입니까.
- 제임스 조이스의 작가정신을 존경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악한 데가 있어요. 나쁜 뜻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정직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불행한 생애죠. 아픔 고난의 생애랄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훌륭한 작품이죠.

토머스 울프, 윌리엄 포크너도 좋아해요.
토마슨 만의 <마의 산>도 감명 깊게 읽었어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읽었지만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감정적 유희를 한다고 할까요.
특별히 한 사람한테 영향을 받은 건 없어요.

 

- 선생님, 우리의 문단과 작가들이 갖추어 할 요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작가에게는 책상만이 있습니다. 작가에게는 정치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식인에게도 권력지향이 있고 그래선지 기득권에 대한 집념으로 문인들도 리념적으로 갈라졌습니다. 문학은 생존문제의 추구인데 이데올로기가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문인들, 예술가들이 어떤 권력이나 집단의 시녀노릇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는 진실에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힘도 작가에게 미쳐선 안 됩니다. 완전한 자유, 그 안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악세사리 달기에 급급해 자기 장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의 집념이 너무 서글퍼요. 그들은 권력이나 명예가 너무 초라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를가요.
어느 시대나 모든 문인들은 두 가지라고 봐요. 하나는 현실을 추종하는 세력, 다른 하나는 시류를 역행하고 비판하는 세력! 우리 세대에도 있었고, 지금 세대에도 있지요. 문제는 인간과 제도가 극도로 오염됐다는 것이고 그 오염을 아무 망설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비 현상이 있다는 것이지요.

 

- 작가는 자기 힘의 50퍼센트를 작품에 쏟는다면 나머지 오십 퍼센트는 세속적인 욕망과 허영심과 싸우는 데 쏟아야 한다던데요. 선생님은 다 놓으셨습니까?


- 다들 그렇습디다. 지식인도 마찬가지에요. 30평 아파트 사는 사람이 40평으로 늘려가야 되겠다. 이런게 지식인의 꿈이니 답답합니다. 이런 것말고 <내 생애에 이 일을 이뤄야겠다> 이런 꿈을 가져야 평생 활기와 흥분이 있고, 성취감을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리기적으로 살아도 되나 내 존재 가치는 어디 있나싶어 다시 글을 쓰게 돼요.
<토지>의 독자가 많다는 것이 내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걸림돌입니다. 존대 받으면 좋고 괄시 받으면 싫지만, 존대 받으려면 지불해야 할 것도 있으니 부담입니다.
다 놓아 버리면, 그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그 되찾아 오는 것을 맞이하면 될 터인데, 그걸 몰라요. 다 놓아버리고 다시 찾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는 게 그렇습니다.

 

- 선생님은 언젠가 서울대에서 <지식인의 착각과 리기>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셨지요. 사회와 문단의 편 가르기가 너무 심한 오늘 그 말씀이 와 닿더군요.


- 파벌과 분렬주의야말로 우리 문단을 황폐하게 만든 요인인데 난 그런 그룹에 지금까지 한 번도 끼여본 적이 없습니다. 토지문화재단 또한 편협한 정치성이 나 파벌,개인의 리익을 도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요새 흔히들 무한경쟁이라 말합니다. 지식인도 쓰고 대통령도 써요. 무한경쟁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무한경쟁의 끝이 어디냐 하면 하나만 남는다는 얘기예요. 둘만 있어도 경쟁하는 것이죠. 하나만 남으면 종자가 없어져요. 2개가 있어야 종자가 납니다. 그러니까 무한경쟁은 멸망을 의미하는 거지요.
상대방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한거죠

- 선생님의 문학관은 무엇입니까?


- 문학이란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생존하는 이상의 진실은 없습니다
인생에 대한 물음, 진실에 대한 물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끝이 없게 그 물음에 매달리는데 <모른다>는 그 말만이 확실한 것이죠. 제가 집념이 별로 강하지는 않지만 그 물음을 포기할 때는 작가도 포기하는 거죠. 포기할 수 없으니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선생님의 정서와 사상이 서린 곳을 속속 밟아보며 그동안 수없이 읽었던 선생님의 심오한 대담록 인터뷰들이 이 순간 머리에서 정리되는듯 했다. 이런 삶에 대한 명징한 의식들이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문학 작품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가!

 

비록 선생님을 목전에서 뵙지 못했지만 나는 한 가슴 들먹한 포만감을 안고 오봉산을 내렸다. 귀로에서 발길을 멈추고 돌아본 토지문학관은 다양한 초록색들에 어울려 서있다. 마치 점점 짙어지는 자연의 색상환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문화관에 서려있는 선생님의 명멸한 힘의 빛이였다.

 

나는 그 무슨 역마살이 끼여 엄청난 사비를 털며 진동한동 강원도의 이 작은 도시의 곳곳을 밟은 것이 아니였다.
문학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 수많은 독자와 방황하고 있는 문단 후학들에게 하나의 디딤돌이자 지향점이 되고 있는 <<토지>>에서 위기 돌파의 지혜와 힘을 얻자는 것이 내가 스스로 마련한 이번 문학기행의 의취였다. 내가 회의를 가지면서도 또 그렇게 미련이 있는 글쓰기를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하고 살 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답을 구하고자 나는 화두를 품고 산사의 문을 두드리듯 토지문화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자신의 모든 걸 정지시켜 놓거나 슬로모션으로 떠올려볼 수 있었다.
사실 이 3년간 나는 사랑했던 문단과 단절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한 문단이고 글쓰기였지만 글을 안 쓰고 사는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것에 적응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선생님은 자신을 <<고독에 처단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도 실존적 결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을 내내 더듬고 있었다.
나뿐아니라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지르는 우리의 허다한 작가들의 문장에서도

조울증이나 자폐증, 게다가 현실도피의 자위의 흔적마저 보이기도 한다.


숙제를 풀려고 찾아든 토지문화관은 휴양지와 고시원과 수도원의 분위기가 묘하게 섞인 곳이였다. 그곳에서 땀으로 끈적이는 여름이지만 나는  열망으로 뜨거워진 가슴을 시원하게 식힐 수 있었다. 오감으로 체험한 문학이 가진 불멸의 힘은 세파에 흔들리는 나를 일깨우고 마음을 추스르게 했다.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구도자처럼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을 헤쳐 나간 박경리 선생님, 이 종잡을 수 없고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시대에 치렬한 작가정신으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여준 박경리선생님, 팔순의 대작가의 신변에서 느낀 모든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토지>>를 통해 남은 삶의 려정에서 존경하는 또 한분의 선생님의 문향을 간직하게 되여 가슴 벅차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수가 문학과 예술의 꿈을 먹고사는 이들에게 곧 행복한 바이러스로 퍼질 것이다.

 

사색의 연속으로 깔린 귀로에서 나는 일순 꿈을 꾼것처럼 멈춰서버렸다. 청명한 기후 탓인가 논두렁에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내려서있었던 것이였다. 처음 보는지라 그것이 무슨 새인지 잘 가려지지 않았다. 외다리로 선 그 도고한 모습에 나는 일단 학이라고 단정했다.

 

 (감흥에 못이겨 산자락아래 <<토지>>라 이름한 가든에서 소머리국밥에 <<참이슬>> 한병을 거뜬히 비우며 가든 마담에게 물었더니 이곳에 학이 산다고 했다)


그 학의 자태와 겹치여 검은 마로 지은 옷에, 반백의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올리시고 밭머리에서 천착할듯한 눈길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한 로인장의 모습이 내 눈가에 머문다.
문학기행을 다녀오고 나서 그분의 고고한 생이 내 삶에 한 발짝 들어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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