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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바르트의 이런 말, "문학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인 미메시스(Mimesis)도, 세계의 인지 수단인 마테시스(Mathesis)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인 세미오시스(Semiosis), 즉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롤랑 바르트 평전 R. Barthes par lui-meme, p123)라고. 그리고 이 구분은 그의 문학 편력을 요약하는 것으로, 미메시스는 브레히트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신화에 관심을 가졌던 제1기, 마테시스는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적 기호학적인 모험의 제2기, 세미오시스는 데리다나 솔레르스, 크리스테바 등 후기구조주의자의 보호체계하에 텍스트에 관심을 가졌던 제3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얕은 배움들, 주워삼킨 옅은 지식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정화시켜버린 무지의 확증이란, 어찌나 폭력적인지. 언제나 늘, 어찌나 늘, 얕은 앎과 옅은 이해는 보잘 것 없다. 그리고 텍스트는 그 마저도 거부하려 한다. 마치 손아귀에 틀어 잡히면 죽어버릴 것 처럼, 끊임없이 탈주하려는. 늘 탈주 중의 텍스트. 지드였던가. 자신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엔 그 모든 걸 버려버리라고 했던게. 어쨋건 일이 귀찮아져버렸다. 늦바람 마냥 갈증이라니. 바르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년 프랑스 북쪽 셰르부르 출생. 1980년 사망. 그보다 열살 많은 사르트르(1905~1980)와 같은 해에 죽었으며, 그보다 열한살 어린 절친했던 미셸 푸코(1926 ~ 1984)보다는 4년 전에 죽은. 그의 생과 죽음의 해를 굳이 상기하는 이유라는 것은, 같은 해의 사르트르의 죽음 때문에 그의 죽음이 묻혔던 이유와 비슷하게 롤랑 바르트의 입지 같은 것 때문이다. 칼베Calvet는 이렇게 얘기한다. "바르트가 이론가가 아니라면, 타자의 이론을 이용할 줄 아는 에세이스트도 아닌 하나의 시선, 목소리, 스타일이다."
텍스트의 즐거움,La Plaiser du texte. 롤랑 바르트 1973년 作. (참고로, 뒤이어 읽을 사진에 관한 책인 '밝은 방'은 1980년 作). 동문선東文選에서 번역, 발간한 책에는 '저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는 그의 후기 작업들,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의 즐거움' 등이 실려있다.
1. 텍스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것/비상징적인건,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항상 그 마지막에 시니피에, 총체적이고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그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 의사소통, 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현상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 상징화, 생산성(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발생텍스트)의 영역이다.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내어 유희, 작업, 생산, 실천을 수용하게 한다.
이런 텍스트론에 따라,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바흐친의 상호텍스트 개념도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인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나'가 종이 위에 씌어진 '나'에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저자의 죽음.p.33)
1) (현실이란 주체와는 무관한 완전히 외적인 세계,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실재는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 현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이 관계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보여지는 것이나, 텍스트는 증명되는 것이며, 작품은 손 안에 쥐어지지만,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2) 텍스트는 정확히 Doxa(일반 견해)의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Paradox적인(반론적인), ㅡ 일반견해 밖에 있는 ㅡ 것이다.
3) 작품은 하나의 기의(signifie)로 닫혀진다.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 그것의 영역은 기표(signifiant)이다. 작품의 경우 평범하게 상징적인 것이나(그 상징성은 곧 고갈되어 정지된다),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의 전적으로 상징적인 속성 안에서 구상되고 인지되고 수용되는 작품 곧 텍스트이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는 언어로 회수된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인 것이며, 닫힌 것이 아니다.(구조란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이다)
4) 텍스트는 복수태(pluriel)이다. (여러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텍스트의 복수태는 그 내용의 모호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짜고 있는(어원적으로 텍스트는 직물) 기표들의 입체적인 복수태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그 개별성이 아니라)에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5) 텍스트의 은유는 망(reseau)의 은유이다. 즉 텍스트가 확장된다면, 그것은 체계나 배합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어진 나일 뿐이다.
6)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내(만약 작품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유희, 노동, 생산, 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연주자는 일종의 공저자로서, 악보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악보를 완성하는 자이다. 텍스트도 이런 새로운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7) 텍스트는 즐김에, 다시말해 분리가 없는 즐거움에 연결된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는(circuler. 이 단어의 순환적인 의미를 간직하면서) 바로 그 공간이다.
2.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을 중심으로)(즐거움과 즐김 사이의 구별은 바르트가 말하듯이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에서 즐거움plaisir이란 육체적, 도덕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가리키며, 즐김jouissance은 동사 즐기다jouir에서 나온 말로 보다 내밀한, 그리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보다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문화와 단절되지 않은 즐거움 및, 문화와 단절된 즐김, 자아의 강화에 연관된 즐거움과 자아의 상실을 유도하는 즐김의 구별)
균열(Clivage), 즐거움의 텍스트는 만족시켜 주고, 채워 주고, 행복감을 주고, 문화로부터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상실의 상태로 몰고 가서 마음을 불편케 하고(어쩌면 권태감마저도 느끼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취향, 가치관, 추억의 견고함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이 두 개의 텍스트를, 자신의 손 안에 즐거움과 즐김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주체는 요컨데 시대착오적인 주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순되게도 동시에 모든 문화의 심오한 쾌락주의('삶의 기술'이라는 포장하에 독자의 마음 속에 편안하게 스며드는, 요컨대 과거의 책들이 공유했던 것)와, 그 문화의 파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그는 자아의 강화를 즐기며(이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또 그 상실을 추구한다(이것이 그의 즐김이다). 이 주체는 이중으로 균열된, 이중으로 변태적인 주체이다. p.61_62.
다만 하나의 "살아 있는 모순"(contradiction vivante), 즉 텍스트를 통해 자아의 강화와 동시에 그 붕기를 즐기는 균열된 주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p.68
차이가 살며시 갈등을 대체하기를. .. 갈등이란 다만 차이의 도덕적인 상태일 뿐이다. p.62.
텍스트의 즐거움, 즐거움의 텍스트. 이 표현은 동시에 즐거움(만족감)과 즐김(소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가 없어서 애매하기만 하다. 따라서 "즐거움"은 때로 여기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아무 예고도 없이), 때로는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애매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텍스트의 지나침이나, 혹은 텍스트 안에서 모든 기능이나(사회적인) 기능화(구조적인)를 초과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즐거움"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김에 고유한 충격, 진동, 상실로부터 행복감, 충족, 편안함(문화가 자유롭게 스며들 때 느끼는 포만의 감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모든 즐거움의 단순한 일부인 어떤 특정한 즐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67
여기서 언급한 체계들이 우리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그 중 하나 속에 사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는,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 속에서 무얼 하고 있지? 라고 말하든가. p.77
텍스트는 그 소비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생산 속에서 탈장소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화법도 허구도 아니며, 시스템은 그 안에서 넘쳐흘러 해체된다(이 넘침, 이 벗어남이 곧 시니피앙스이다). p.77
프루스트는 내가 호출하는 것이 아닌 그냥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서"가 아닌, 단지 순환적인 추억이다. 이것이 바로 상호 텍스트(inter - texte)이다. 그것이 프루스트이든 신문이든 텔레비전 화면이든간에 무한한 텍스트를 벗어난 삶의 불가능성. 책은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삶을 만든다. p.84
즐김의 비사회적인 성격은 사회성의 갑작스러운 상실이다. 그렇지만 어떤 결과도 주체(주관성), 인간, 고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완전히 상실된다. 내밀함의 극단적인 단계, 영화관의 암흑. p.87
모든 과거의 언어는 즉각적으로 연루되며, 모든 언어는 그것이 반복되기만 하면 옛것이 된다. 그런데 권력 언어(권력의 보호하에 생산되고 전파되는 언어)란 규정상 반복 언어이며, 모든 공식적인 언어 제도는 되새기는 기계들이다. 학교며 스포츠며 광고며 대중 작품이며 유행가며 뉴스며,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똑같은 구조, 똑같은 의미, 대개는 똑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상투성은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형상, 정치적 사실이다. 이와 대립하여 새로움은 바로 즐김이다(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인에게서 새것은 항상 오르가슴의 필수조건이다"). (중략) 한편에는 대중의 진부함(언어의 반복과 관련된) ㅡ 반드시 탈즐거움적인 것은 아니지만 탈즐김의 진부함 ㅡ 다른 한편에는 새로움을 향한 격앙(주변적인, 탈중심적인), 담론의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격렬한 열광이 있다. (중략) 그런데 규칙은 남용이며, 예외는 즐김이다.
그렇지만 이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반복자체가 즐김을 야기한다라는. 거기에는 많은 민속학적 사례가 있다. 집요한 리듬들. 주술(呪術)의 음악, 연도문, 제의, 불교의 염불 등. 과도한 반복은 상실로, 기의의 부재로 몰고 간다. 하지만 반복이 관능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어야 하며, 문자 그대로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공공연한(과도한) 반복은 탈중심적인/괴팍한 것이 되며, 음악의 몇몇 주변적인 영역으로 밀려 나간다. 대중 문화의 조잡한 형태는 수치스러운 반복이다. 그것은 내용, 이데올로기적인 도식, 모순의 삭제마저도 반복한다. 그러나 그 겉모습은 다양하다. 언제나 새 책, 새 방송 프로그램, 새 영화, 삼면 기사,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의미.
요컨데 말이란 두 개의 대립되는 조건, 둘 다 과도한 조건에서만 관능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반복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새로움으로 넘쳐흘러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되든가 하면 말이다. p.88_89
그리고 무언가 자명해지면, 나는 그것을 버린다. 이것이 바로 즐김이다. p.91
모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기원을 찾기 위한, 혹은 법칙과의 갈등을 말하며 증오와 연민의 변증법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중략) 사람들이 그 결말을 모르는 극적 이야기에 비해,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에서는 즐거움은 사라지지만 즐김은 증가된다(오늘날 대중문화에서는 "극적" 이야기의 소비는 많으나, 즐김은 거의 없다). p.95
"모든 이데올로기적 행위는 구성상 완결된 언표의 형태로 제시된다." 크리스테바의 이 명제를 반대로 돌려 말한다면, 모든 완결된 언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8
텍스트의 즐김은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쁜 철이른 것이다. 그것은 제때에 오지 않으며, 어떤 성숙 과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단번에 미쳐 날뛴다. 이 격앙은 오늘날의 회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것으로, 그 격앙이 이해되는 순간 상실의 원칙은 무용해지며,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모든 것은 첫번째 시각에서 행해지며 즐겨진다. p.100
낡지 않을 것은 아미엘의 철학이 아닌, 바로 그 날씨일 텐데. p.101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텍스트의 분리에 대항하여 행해진 권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자기 이름의 특수성을 통해 말하는 것은 즐거움의 편재성, 즐김의 아토피(atopie)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즐김의 관계가 삶의 즐김과 텍스트의 즐김이,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엮어지고 짜여지는 한 권의 책(텍스트)에 대한 상념, 그리하여 동일한 건망증이 삶의 모험과 텍스트의 독서를 사로잡는 그런 책에 대한 상념. p.107
"우리는 아마도 변전의 절대적인 흐름을 인지할 만큼 그렇게 정교하지 못한지도 모른다. 영속적인 것은 단지 사물을 요약하거나 평범한 도식으로만 몰고 가는 우리의 조잡한 기관 덕분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 무엇도 그런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매순간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움직임의 그 정교함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다."(니체)
텍스트 또한 우리의 조잡한 기관에 의해 명명된(일시적으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우리는 정교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p.108
시니피앙스(Signifiance)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으로 생산되는 한에 있어서의 의미이다. p.109
(왜냐하면 즐김은 거기서 말해짐 없이 그 자신의 마멸의 전율을 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텍스트, 즐거움, 즐김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누가 해석하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정념으로 존재하는 것은(하나의 존재가 아닌 과정이나 변전으로서) 힘의 의지의 형태인, 바로 해석(interpretation)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니체) 그리하여 주체는 아마도 환상이 아닌 허구로서 회귀할 것이다. 하나의 즐거움은 자신을 개별체로 상상하는 방식으로, 최종적인 가장 진귀한 허구, 즉 정체성의 허구를 고안하는 방식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이 허구는 더 이상 통합의 환상이 아닌, 반대로 우리의 복수성을 등장하게 하는 사회의 연극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개별체적인(individuel) 것이지 개인적인(personnel) 것은 아니다.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분석"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주관성"이 아닌 내 "개별체"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켜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이 즐김의 육체는 또한 내 역사적 주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즐거움(문화적인)과 즐김(비문화적인)의 그 모순된 유희를 조정하고, 또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서 현재로서는 잘못 위치한 주체로서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전기적, 역사적, 사회적, 신경증적인 요소들의 아주 섬세한 배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시대착오적인 주체가 표류한다. p.109_110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중략) 이 직물,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p.111
즐거움의 유보(suspension)의 힘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진정한 에포케(epoche - 그리스어 어원은 정지라는 뜻으로,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에게서는 모든 판단의 유보를 뜻한다. 후엘 에트문트 후설은 세상의 현실에 관한 모든 판단의 유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이렇게 지칭하였다)요. 모든 공인된(스스로 공인한) 가치들을 멀리서 응결시키는 제동장치이다. 즐거움은 중성이다(악마적인 것에서도 가장 변태적인 형태). 또는 적어도 즐거움이 유보하는 것은 기의의 가치, 그 (거창한) 대의명분이다. (중략)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그것이다. 기표의 화려한 위치로 이동한 가치. p.112
기의를 저 멀리 추방하고, 말하자면 내 귀에 배우의 익명의 육체만을 내던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알갱이로 만들고, 탁탁 튀고, 어루만지고, 줄로 썰고, 자른다. 그것은 즐긴다. p.114
3. 권력, (강의講議를 중심으로)
그러나 이제 우리는 권력이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상이며, 우리가 단번에 권력을 알아채지 못하는 곳, 즉 제도나 교육 속으로 슬며시 스며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교환의 가장 미세한 메커니즘 속에서도 권력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해방적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현존합니다. 저는 과실을 유발하고, 그 때문에 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죄의식을 유발하는 담론은 모두 권력 담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혁명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금방 다시 살아나 새로운 상태에서 싹틉니다. 이런 끈질김과 편재성의 이유는 바로 권력이 정치적, 역사적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역사에 관계된 통사회적 조직의 기생충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태고적부터 권력이 기재된 이 대상이 바로 언어(langage),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표현인 언어체(langue)입니다.
언어가 법규라면 langue는 그 약호(code)입니다. 우리는 언어체 안에 있는 권력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langue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선 하나의 행위를 발화하기 이전에 자신을 주어로 설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 행위는 나를 수식해주는 말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의 결과이자 연속일 뿐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하물며 담론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해서 말하듯이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한 것입니다.
langue를 구성하는 기호는 그것이 인지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반복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기호는 맹종적이고, 군생적입니다. 각각의 기호 안에는 상투적인 것(stereotype)이라는 괴물이 잠자고 있습니다.
**langue에는 필연적으로 예속과 권력이 뒤섞여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권력에서 벗어나는 힘뿐만 아니라, 특히 그 누구도 굴종시키지 않는 힘을 자유라 부른다면, 자유는 언어 밖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언어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폐된 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불가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langue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langue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원의 속임수, 이 도피, 이 놀라운 술책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영속적인 혁명의 그 찬란함 속에 탈권력의 언어체를 이해하게 해주며, 나로서는 이것을 문학이라 부릅니다.
문학에서 제가 겨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텍스트, 다시 말하면 작품을 구성하는 기표들의 짜임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란 langue가 드러남 그 자체이며, 또 langue가 공격당해서 길을 잃어야만 하는 곳은 바로 langue 내부이기 때문입니다. langue를 도구로 삼는 메시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langue를 무대로 삼는 단어들의 유희에 의해서. 그러므로 저는 문학, 글쓰기, 텍스트를 별차이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문학 안에 존재하는 자유의 힘은 작가가 언어에 행사하는 이동(deplacement) 작업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한다는 것(s'enteter)은 문학의 비환원성 ㅡ 즉 문학 안에서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철학, 과학, 심리학의 그 전형적 담론들에 저항하면서 살아남는다는 ㅡ을 긍정하고, 마치 문학이 비교할 수 없는 불멸의 것인 양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실천의 주체로서)는 다른 모든 담론의 교차로에서 학설의 순수성에 비해 저속한(trivial,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trivialis는 세 개의 길이 나 있는 교차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창녀를 가리킵니다) 입장에서 망을 보는 사람의 고집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고집한다는 것은 요컨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류의, 기다림의 힘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군생적인 권력이 당신이 쓴 것을 이용하고 예속하려 할 때,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abjurer. 그렇다고 당신이 생각한 것마저 버리는 것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행동을 하기 이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권력과 그 문화로의 병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그런 위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 그렇지만 행동을 한 후에는 우리가 얼마만큼 권력에 의해 이용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의 진솔함이나 절박함이 예속되었거나 조작되었다면, 절대적으로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75)
고집하며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요컨대 유희 방법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언어의 무정부상태라는 그 불가능한 지평에서 ㅡ 즉 langue가 그 자체의 권력, 그 자체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ㅡ 연극과 관계된 그 무엇을 발견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문학의 그 기호학적 힘은, 기호를 파괴하기보다는 기호를 유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전장치와 걸쇠장치가 폭파된 언어의 기관실 안에 기호를 집어넣는 것, 간단히 말해 예속적인 langue의 한복판에다 사물의 진정한 동철자의어(heteronymie, 철자는 같지만 발음이나 뜻이 다른 단어)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로의 규칙적인 몰입은 기호학으로 하여금 차이 위에서 작업하게 하며, 그리하여 기호학이 교조적인 학설이 되는 것을, 기호학이 굳어지는(prendre) 것 ㅡ 보편적 담론이 아닌데도 보편적 담론으로 자신을 간주하는 ㅡ 을 막아 줍니다. 또 텍스트 위에 놓인 기호학적 시선은 문학을 둘러싸며 압박하는 저 군생적인 말로부터 문학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존하는 신화, 즉 순수 창조의 신화를 거부하게 해줍니다. 어쩌면 기호란,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호학은 틀(grille)이 아닙니다. 기호학은 실재를 명료하게 만드는 어떤 일반적인 투명성을 부여하면서, 실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게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호학은 실재를 여기저기서 때때로 들어올리려고 하며, 실재를 들어올리는 이런 효과가 틀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로 기호학이 틀이 되고자 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들어올리조 못합니다. 기호가 다른 모든 담론에 대해 그렇듯이 모든 연구를 도와 주는 일종의 회전의자, 오늘날의 앎의 조커(joker)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호학은 해석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헤친다기(via di levare)보다는 채색하는(via di porre) 것입니다. 그것이 선호하는 대상은 상상계의 텍스트로서, 이야기, 그림, 초상화, 표현, 개인어, 정념, 사실임직한 것의 외관 아래 진실의 불확실성을 연출하는 구조들입니다. 그 조작 과정 내내 하나의 채색된 베일이나, 혹은 허구처럼 기호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가능한, 혹은 그렇게 기대되는 것을 저는 기꺼이 "기호학"이라 부릅니다.
교수가 자신의 여행 방향을 결정해야 할 순간에 매해마다 돌아가야 하는 곳은 바로 팡타즘입니다. 그 팡타즘이 말해진 것이든 말해지지 않은 것이든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는 곳,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죽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팡타즘을 가지며, 아들만이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놀라웁게도 롤랑 바르트는 20세기가 거쳤던 거의 모든 사유에 직접적으로 발을 걸치고 있다. 대부분의 이해에 놀라운 매듭을 연결짓는 시선, 스타일, 목소리. 재밌지. 기호는 상징으로 '굳어버린' 그 자체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탈주하기 위한 숱한 무엇들이라니. 혹은, 구조는 이미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라니. ㅡ 모든 중심, 혹은 모든 끝의 연속이라는 것과의 시각 차. 굳어가는 모든, 또 권력의 지독한 편재 안에서, 자유로의 반항같은 것. (늘, 모두 그렇다시피, 그랬다시피) 모든 이미 죽은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기위해 치뤄야할 불가능의 대가, 혹은 유희. 즐거움, 즐김. 삶 자체, 실천으로서의 글쓰기. 읽기. 텍스트의 즐거움, 그리고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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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Author, 롤랑 바르트의 이 유명한 아티클은 이 텍스트에서 pp.27~35에 실려있다.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 아티클을 다시금 살핀다. 첫 문제제기는, 발자크의 소설 <사라진느>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 문장에서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p.27)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인간>이 아닌 <주어>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말하는 데에>,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앞서의 언술과 같이, 저자author, 마찬가지 저자에게 권위authority를 부여하는 기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p.32) 과거, 저자, 기원의 부재(무無라기 보다는 부재)는 이제 그 각각의 현전에서 의미가 된다. 요는,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p.31)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isentangled)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eciphered)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p.33)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저자, 혹은 기원, 숨겨진 의미라는 것이 있어서, 저자의 은유를 뒤집어서 그 밑에 있는 암호를 해독하거나,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구조는 연속적이므로, 바닥이 없고, 그러므로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p.34) 정리하자면, 앞서 발자크의 문장에서의 문제제기에서, "아무도 그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p.34)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독자는, 저자와 달리,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p.35)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아, 정리 잘했군. 더하여 이 아티클에서, 위에도 옮겼던.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인간>이 아닌 <주어>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말하는 데에>,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번역 김희영)라는 문장의 영역英譯 부분을 옮기면, "I is nothing other than the instance saying I : language knows a 'subject', not a 'person, and this subject, empty outside of the very enunciation which defines it, suffices to make language 'hold together', suffices, that is to say, to exhaust it." 주어라고 번역된 subject는, 작금의 주체의 의미를 환원시킨다. subject는 주변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문맥 상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띠는 것이다. 주체 역시, 더는 절대적 정체성의 self가 아니라, 이와 같다. 지하철에선 승객, 술집에선 꽐라, 등등등, 뉘앙스도 각개 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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