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를 읽는 밤
김지헌
문장이 자꾸만 길을 잃는다
때로 의식을 끌어당기는 어둠을 직시해가며
보르헤스를 읽는 밤
늙은 역사가의 호기심으로
제국의 흥망사를 논하듯
무한천공에는 오합지졸 같은 별들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따금 미시령터널 쪽으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서둘러 사라지고 나면
또다시 절해고도,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단단해진 어둠을 흔들어 깨뜨린다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어댄다
패잔병 같은 혹독한 겨울의 잔해들 속
바짝 말라 기억의 회로가 끊긴
겨울나무들조차 이곳에선
눈이 먼 보르헤스를 추종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사들처럼
나이테 속에 바벨의 도서관*을 새긴다
이곳 내설악엔 겨울이 일찍 도착해서
오래도록 질기다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단 전 세계 작가 40인의 작품 모음집
<이선의 시 읽기>
김지헌은 이방의 천재작가 보르헤스를 읽고, 필자는 김지헌을 읽는다. 아니다 필자는 김지헌의 눈으로 보르헤스를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시에 내포된 보르헤스적 요소를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시에 내포된 보르헤스적 요소를 제외시키고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표본을 도출해 내기 위해 보르헤스적 요소를 분석한다.
김지헌의「보르헤스를 읽는 밤」의 구조와,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의 구조를 비교해 보자. 김춘수는 감성에 호소한 서정시를 썼다. 김춘수의 시가 단일구조인 반면, 김지헌의 시는 다시점 구조다. 현재진행형-과거완료형-현재완료형-과거추적형-현재진행형 시간의 환타지를 시로 엮어낸다. 김춘수의 시는 샤갈의 그림 <나의 마을>을 텍스트로 하였고, 김지헌은 ‘보르헤스’를 텍스트로 하였다. 정반합의 원리처럼. 시간의 환상을 좇던 보르헤스처럼. 위의 시 4연을 살펴보자.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단단해진 어둠을 흔들어 깨뜨린다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어댄다
패잔병 같은 혹독한 겨울의 잔해들 속
바짝 말라 기억의 회로가 끊긴
겨울나무들조차 이곳에선
눈이 먼 보르헤스를 추종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사들처럼
나이테 속에 바벨의 도서관*을 새긴다
‘상식을 벗어나 정신의 오지탐험’을 추구한 ‘보르헤스’라는 이방의 시인을 초대하였다. 시와 철학과의 만남은, 종교와 철학의 만남처럼 이질적이면서 동질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철학이 과거에서 불어온 바람을 현재에 숙성시킨 것이라면, 시는 미래의 환타지한 상상력을 현재로 끌어내어 성숙시킨 맛깔스런 바람이다.
감정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의 원리.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 이성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의 원리.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어둠을 흔들어 깨뜨리듯,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듯이(4연 1-3행)’<바벨의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보르헤스파의 지성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을까? 겨울밤, 먼 이국에서 후대의 시인은 홀로 과거의 천재시인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는 밤. 냉정과 열정 사이. 이성과 지성 사이. ‘내설악에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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