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이해
『世界 戰後問題 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독일 편에서
이 글은 독문학교수 이동승 님이 1961년『世界 戰後問題 詩集』에 발표한 오래된 글이지만 내용의 첨단성과 강렬함이 21세기의 현대시의 이론을 능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글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현대시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재발표한다. 현대시를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글 속의 한자는 단어의 느낌에서 생기는 미묘한 변화나 차이와 상관되어서 그대로 싣는다.- 심상운
시
알베트 아아놀드 숄 (Albert Arnold Scholl) 이동승(李東昇) 역
시는
내용이 끝나는데서 시작된다.
신비로운 장미는 피어난다
황금의 언어의 피안에서
성곽의 저 바깥에서
논의되는 형태의 피안에서
思考體系의 바깥에서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壁紙의 白馬 무늬에서
제단의 背面에서
生起하지 않는 것의
焦點에서,
母音으로 된 시는 分子模型
名詞로 된 교회의 창문
회상으로 된 거미줄
理想鄕에서 온 分光器
버려진 것으로 된 星座圖
太陽系 너머의
태양계
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
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
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
非論理的이기에 논리적이며
비현실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
가까이 있기에 宇宙船으로도 도달할 수 없고
다치기 쉽기에 전술적, 전략적
무기로도
다칠 수 없다.
사람들은 시를
조그마한 사슬에 달아
내복 밑
발가벗은 피부 위에 달고 있다.
<戰後 독일시의 槪觀>李東昇에서 발췌
(전략)
詩는 인간의 與件에 대한 地震計이어야 하고 시 이외의 아무것도 代置될 수 없는 생명의 有機體이어야 한다. 현대시인은 급격히 진척되어 가는 현대인의 의식의 범위의 확장을 命名해야하고 核分裂이라든지 宇宙旅行이 爐邊에 불꽃이나 家庭事들과 마찬가지로 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知性의 尖端에 서고 蓄積된 지식의 總動員이 요구된다.
현실을 한 개의 單一體로 잡으려면 통합이 요구된다. 內面世界와 外的世界가 시 속에서 同時에 反影되어야 한다. 이런 통합은 자주 瞬間의 竝列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分裂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을 하기 위해 언의의 최고도의 凝固가 요구된다. 이것은 일종의 瞬間을 수단으로 한 시간성의 극복을 뜻한다. 이런 과중한 부담 앞에 현대시인은 과거의 언어를 수단으로 造花를 만들어 낼 수 없게 됐고, 현대시인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고 새로운 언어의 表現可能性을 모색하고 있다. (중략)
적어도 1920년대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시란 이제는 사상의 표현도, 교훈적인 언어의 나열도, 재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調和의 추구도, 우주관, 인생관의 표현이나 탐색도 아니며, 감정의 솔직한 流露도, 자연의 謳歌나 形而上學的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魅惑의 曲藝를 전제로 하는 언어의 遊戱인 것이다. 시는 표현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서 사용되는 시어는 그가 지니는 역사성을 無視 내지는 輕視하고 所用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언어에 대한 狂躁曲을 형성한다. 언어는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色彩나 현대음악에 있어서의 音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詩中의 단어는 그 의미 내용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音響에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오스카 뢰르케(Oscar Loerke)의 말을 빌리면 <시에 있어서의 단어는 모든 관습과 소용의 한계를 벗어나 순수한 존재를 최고도의 鮮明性 속에 표현하는 發見的 단어>라고 한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의미의 전달이 아닌 이미지의 전달 밖에는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다만 자기자신을 통해서만 論證되는 旣存하는 모든 詩形態에 대한 항의가 되고 극히 自律的인 것이 된다.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내용에 先行하는 것이다.
현역작가이며 문예학자인 훨레러(Walter Hollerer)는 <현대시는 순간적 魅惑과 순간의 竝列>을 수단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시인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幻覺을 예리하게 오려내서 언어를 수단으로 모자이크한 벽처럼 한 편의 시를 組立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은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극단으로 나가면 순수상징에 의한 감각적 경험의 파괴에 도달한다. 이 수단으로 현대시는 時空의 한계를 극복해서 한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려고 하고 이른바 <超越詩>에까지 가려고 한다. 이 태도가 재래의 시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현대시에는 언어에 대한 신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고 언어가 그 綜合的機能을 발휘하지 못할 때 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게오르게 (Stefan George)는 <언어가 파괴되는 곳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한 말이 이런 입장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純粹象徵으로서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벌써 역사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차원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시는 몽타주의 방법을 통해 조립되는 것이다. 이른바 <순간의 불꽃>을 시인은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琢磨해서 꿰어 맞춤으로써 현대시는 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서 絶對的 自律性에 도달하려는 피나는 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한계의 돌파>가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공간, 시를 위한 새로운 차원을 찾기 위한 도상에 오른 현대시는 과거와의 訣別을 선포했고, 소재의 선택에서도 과거의 것과 판이해서 古典的詩에서 있어서의 調和 대신에 不調和를, 정상적인 것에 대신해서 非正常的인 것을, 자연적인 것 대신에 人工的인 것을 표방하고, 否定을 통해 긍정에로 도달하고자 하고 언어의 幾何學的 조립을 통해 불협화를 구성하고자 하고, 종합 대신에 解剖를 통해 재래의 형태의 파괴를 기도하는 까닭에 현대시에서는 <超現實的인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현대시에서는 논리가 아닌 幻想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언어를 수단으로 한 暗示力의 최고의 驅使를 통해서 성립되는 상징을 매개로 旣存限界의 突破가 試圖되고 있다. 보다 큰 협화음은 不協和音까지도 그 자신 속에 내포하는 것이다. 현대시는 否定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려고 하고 不調和 너머의 조화를 추구한다. 현대시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는 과거와의 斷絶의 시이며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絶對詩>이며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形而上學詩>라고 命名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현대시가 성립되는 까닭에 현대시는 어떤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魔術師이며 자기 언어가 가져오는 이미지의 空間에서 절대적 고독과 대결하게 된다.
현대시는 릴케가 『두이노의 悲歌』를 쓸 때 겪었다고 하는 靈感의 폭풍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意識的인 知識의 동원을 요구한다. 현대시인에게서는 詩作과 自己觀察 및 批評의 과정이 竝存한다. 感性的인 孕胎를 전제로 하지 않고 바로 頭腦의 소산인 것이다. 골프리드 벤에서 자주 언어의 曲藝라는 말이 나오는데 현대시는 이 언어의 曲藝로써 성립된다고 했다. 이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언어의 曲藝는 내용의 일반적인 脫落 속에 자신을 내용으로 止揚하고 이 새로운 경험에서 어떤 새로운 形態를 찾으려고 하는 藝術的 시도이다.>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內容은 분리할 수 없고 형태가 바로 내용임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는 독자의 理解可能與否에 아무런 介意도 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시가 성립하는가 하는 것을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論理로 구명할 수 없는 창작적 萌芽가 언어를 찾고 언어가 그 역사적 意味內容에서 이탈되어 시인의 요구에 따라 성립된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시는 써지기 전에 시인에게 內在하고 創作過程은 이 내재하는 것을 언어라는 실마리를 통해 표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 있어서 시의 각개의 단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 할 수 없는 것이며 飜譯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또 그를 구성하는 각개의 단어의 槪念의 外延을 거의 無視 내지 輕視하는 까닭에 意味以前의 것이며 형태와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形態는 최고의 내용이다.>라고 極言하고 있다. 外界의 대상들은 시인의 창작의 욕구를 자극하는 誘引에 불과하고 시는 외계의 具象的 세계의 再現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신 외의 아무 것도 眼中에 없다. <시는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는 존재한다.>라고 벤은 말한다. <시에서 현실의 삶으로 통하는 직접적인 길은 없고 삶에서 시로 통하는 길도 없다.>고 호프만슈탈도 일찍이 말했었다. 이리하여 알베트 아아놀드 숄(Albert Arnold Scholl)의 말을 빌리면, 현대시는 내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시는 존재하는 것이고 太陽系 너머의 太陽系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絶對詩>란 신앙도 희망도 안중에 없고 누구를 위한 시도 아니며 시인이 매혹되어 조립하는 언어에 의한 시라고 벤은 말하고 있다. 언어가 지니는 시간적 制約性의 무시를 통해 현대시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고 논리적 체계에 대한 체념으로서 절대적 자유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모두 限界의 擴張을 위한 피나는 기초공사이다.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한 것처럼 바로 현대시에서는 언어가 <存在의 집>인 것이다. <이제 시는 解明하는 것이 아니라 暗示하는 것이다.>라고 크로이더(Ernst Kreuder)는 말하고 있고 <진실한 神秘는 해명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로마노 구바르디니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論述은 戰後獨逸詩의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벤을 鼻祖로 하는 超現實派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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