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블로그

나의카테고리 : 심상운 시론

심상운 시모음
2019년 06월 30일 19시 35분  조회:952  추천:0  작성자: 강려
심상운 시모음
 

헤드라이트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 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모형 전시실 또는 깨진 유리창
 
 
 
6월의 태양이 눈부신 한낮 국립박물관 모형 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 근육질 젊은 사내의 돌칼 가는 소리가 난다. 사내는 숫돌에 칼을 갈다 가끔씩 고개를 들고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을 움켜쥐고 유리 상자를 깨고 뛰쳐나오려는 듯 허연 수은등 불빛을 노려보고 있다.
 
 
12월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세찬 눈보라로 뒤덮인 겨울날 뻘겋게 이글거리던 드럼통 석탄 난로 곁에 둘러서서 외지外地로 떠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방금 검은 탄 속에서 나온 듯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젊은 광부들의 뿌연 입김이 깨진 유리창에 묻어 있는 30년 전의 K역을 찾아서 눈길을 떠나는 그녀.
 
 
낮 12시 20분, 나는 그녀의 모형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컬러사진 검붉은 고철古鐵들의 무더기 사이로 돋아난 풀잎의 푸른 혈관 위에 앉아 있던 벌 한 마리가 잉잉 잉잉 방안을 돌며 유리창에 몇 번 몸을 부딪칠 듯하다가 열린 유리창 밖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뱀과 그녀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겨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 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소리가 묻어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빛 또는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노랑나비
 
 
 
비오는 날 번쩍이는 빛을 향해
 
어두운 헛간을 뛰어나간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랑나비 하나
 
내 숲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반짝인다
 
 
李箱은 <詩第十號 나비>에서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 본다. 그것은靈界에絡繹
 
되는秘密한通風口“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영계의 컴컴한 숲속에서
 
죽은 나비와 춤을 추고 있을까?
 
 
정리해고 된 40대의 사내가
 
중고 트럭 조수석에 아내를 태우고
 
휘파람 불며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날고 있다.
 
 
 
 
블랙홀(black hole)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되어 소멸하는 거대한 별에는 정지된 시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고요? 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석化石 속의 물고기처럼 박혀 있을 거라고요?
 
 
아산병원 영안실에 있는 그녀의 시신屍身도 자세히 관찰하면 연료가 모두 소모된 마지막 순간에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어 생성하는 죽은 별들의 검은 구멍과 다르지 않다고요?
 
 
오늘 밤 당신은 35000피드 상공의 비행기가 컴컴한 허공 벽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우주의 얼음덩이 속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여름 풍경
 
 
 
 
 
 
 
 
뱀 굴에서 미끈미끈한 몸뚱일 좌우로 흔들며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뱀 세 마리 뱀 네 마리 나온다. 가늘고 긴 혀 날름거리며 나온다. 엊저녁 기억들은 푸른 가지 사이에 허연 비닐봉지같이 걸어놓고 햇빛 속으로 스르르르 스르르르 미끄러지며 나온다.
 
 
발가숭이 햇빛들은 분수噴水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고 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을 빨아먹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로 풍선 하나 풍선 둘 풍선 셋 풍선 넷 둥둥 떠오른다. 찢어진 풍선들은 보이지 않고 새 풍선들이 떠오른다.
 
 
초여름 풀 향기 풍기며 19살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청계천 물속에서 나온다. 눈이 큰 헵번, 입이 큰 헵번이 눈웃음치며 나온다. 휴대폰을 들고 시청 앞 광장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목이 긴 헵번은 빨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다.
 
 
가슴에 철퇴를 맞고 허물어진 50년 전 건물들의 폐자재 더미 속에서 나온 유리창의 파편 조각들이 반짝인다. 덤프트럭에 실린 우그러진 창틀을 향해 반짝인다. 원주민들의 구멍 난 양말짝, 찌그러진 양재기, 찢어진 홑이불에 묻어있는 얼룩을 보며 반짝인다.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 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 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가방 또는 붉은 바닷물
 
 
 
나는 나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고
 
그는 그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서
 
불을 켠다
 
 
내 가방은 빨간 토마토들이 제각기 불을 반짝이는
 
도시의 상공을 떠다니고
 
그의 가방은 하와이 푸른 해변 위로 둥둥 떠간다
 
 
나는 가방 속에서 방울토마토를 깨물며
 
젊은 가방들이 터뜨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20대의 백남준이 도끼를 휘두르고
 
부서지는 피아노가 비명을 지른다
 
 
피아노의 비명 속에서 튀어나온 붉은 바닷물이
 
허공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순간 내 가방도 꿈틀대며 다른 허공으로 치솟는다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중계동 은행사거리 40대 사내의 붕어빵틀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전자상가 TV 화면에는 시리아 반정부군의 자살폭탄으로
 
반쯤 부서진 건물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상자들
 
 
나는 제주산 노란 감귤 한 봉지를 사들고 행인들이 붐비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고
 
 
내 옆을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10대 여자 아이들
 
 
아파트 화단 젖은 흙속에서 10cm 가량의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통화
 
 
 
아 아, 여보세요. 40대의 사내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아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는 걸 봤다구요. 그 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구요. 3월의 하늘에선 확성기를 든 경찰과 구경꾼들에게 주는 선물인양 하얀 눈송이를 흩뿌렸다구요.
 
 
말수가 적은 40대의 회사원 K씨는 1년에 한두 번 손에 날카로운 못을 들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 고급 승용차들의 차체에 굵은 금을 긋고 다닌다구요.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아 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구요?
 
 
* 조주 선사(778-897):『육조단경』에 나오는 중국의 선승. 선가(禪家)에서는 조주고불(趙州古佛) 또는 조주라 부른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말을 했다.
 
 
 
자살폭탄 또는 푸른 울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봉오리를 만지며 은밀한 욕망 속으로 잠입하는 영화 속의 그녀. 밤마다 폭탄을 준비하는 그녀의 몸은 800만 화소의 선명한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사과를 도막내어 빨갛게 익은 사과의 중심에 박혀서 스스로 소리 없는 폭발을 꿈꾸고 있던 까만 씨앗 몇 개를 들여다본다. 그들도 촉촉한 살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있던 걸까?
 
 
<아프가니스탄 카블 시내 한복판에서 자살폭탄 테러 사상자 10명>
 
 
TV 뉴스 자막이 사라지자, 한여름 밤 안동 지레 마을 산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쏟아내는 푸른 울음소리가 달빛 속을 벗어나서 무한허공으로 출렁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시 20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都市建築物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물고기 그림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그때 그는 손에서 리모컨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다>
 
 
 
 
 
 
 
파란 의자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환각제 복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의 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볼록한 가슴 선에선 노란 봄꽃냄새가 물씬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있던 둥근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가득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 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사각형 스크린
 
 
 
비 그친 아침, 나는 닫힌 창문을 연다. 스르륵 열린 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구름 A, 구름 B,구름 C. 이어서 펼쳐지는 파란 여름바다의 영상.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출렁인다 동해 화진포에는 빨간 사과 빛 안개. 나는 그곳에 푸른 비늘 덩이로 살아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았다 그 집은 환상의 집.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시간 밖에서 일하는 푸른 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별빛이 찬란한 밤바다 모래 위를 걷는다 사각형 스크린은 무한 공간. 그 속에 가득한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는 나뭇잎에서도 출렁이고 땅강아지 집에서도 출렁이고 아스팔트 속에서도 출렁이고 노래방에서도 출렁인다 젊은이들은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가자며 매일 밤 어깨동무를 하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그들에게 바다는 황홀한 전율의 출렁임. 햇빛 번쩍이는 검푸른 등을 보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각형 속 스크린도 부르르 부르르 온 몸을 떤다. 스크린은 사각형을 확 밀어버리고 수영복차림으로 뛰어나가려는 거 같다 그때 사각형 스크린 밖에서 사람 A가 열무, 가지, 오이, 호박을 트럭에 싣고 와서 스피커로 “무공해 싱싱한 채소를 싸게 팝니다”라고 소리친다. 캄차카 바다 돌고래들이 펄떡펄떡 솟구치고 있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한 아침이다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에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그림 또는 링크
 
 
 
 
 
산 너머에서 산 너머로 오가면서 어디론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는 것은 구름? 그 구름들은 수분덩이. 사람보다 더 많은 수분을 안고서도 유유하다 한 목동이 언덕 풀밭에 앉아 풀피릴 불고 있다 메에 메에 우는 양들은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경사진 돌밭 길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 머리 위에는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있다 19세기 그림이 21세기의 나를 유유하게 휘감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그 구름과 양을 만날 수 있나? 지하철 4호선 분실물 센터에는 양털실로 짠 모자가 있다. 그 모자는 울지 않는다 그 모자의 DNA에는 고산지대의 기억이 들어있지 않을까? 나는 양털의 기억 속 좁은 경로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는다. 양털 속에는 하얗게 말라버린 양의 숨소리만 묻어있다 나는 햇빛이 환한 내 의식의 방으로 들어가서 양이 걸어갔음직한 북한산 향로봉 계곡 바위 길을 링크한다. 순간 양은 지워지고 5월의 하얀 아카시아 꽃향기가 물씬물씬 솟아나며 쌔애롱찍 쌔애롱찍 능선의 산새들 소리가 귀를 울리는 사이사이로 "순수한 떨림은 기호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그 소리에 취해 일행들과 더 깊은 산속 숲길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다가, 깜박하는 사이에 하루 종일 녹취한 북한산 계곡 물소리와 어른 손바닥보다 큰 떡갈나무 잎사귀들의 푸른 숨소리가 출렁이는 등산 가방을 지하철 4호선 전동차 바닥에 놓고 내렸다
 
 
* DNA: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 모든 살아 있는 세포에서 볼 수 있고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복잡 한 유기 화학적 분자구조
 
 
 
 
 
우주의 시간
 
 
 
 
그 미술관 대형 바다 그림 <신의 바다> 속에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의 가족들이 푸른 살 번득이며 파도치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밤 11시20분, 사이언스 TV에선 은하계 넘어 어느 별에 납치되었던 지구의 사람들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귀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400명의 귀환인 들은 우주의 0의 시간 속에서 살다왔다고 한다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은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 애태우다가 떠나간 이들이 만나서 산과 들과 바다에 눈부신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하얗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눈의 입자 속에서는 눈물을 안고 살아온 1000년도 우주의 0의 시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공과 아이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쫒아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거리의 유리창들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침 9시, 공을 따라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 공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통통통통 공장 굴뚝을 오르기도 하고, 통통통통 푸른 가로수 가지 위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건너뛰기를 하다가 초록 들길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 내려 앉아 잠시 멈춰 있다 아이도 버스지붕 위에서 흰 구름을 보며 쉬고 있다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 아이의 집은 해초들이 나부끼는 바다 속인 거 같다고요? 아이의 몸에선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요? 빨간 공은 수평선의 해 같다고요?
 
 
 
버스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아이가 빨간 공과 함께 노랗게 불타는 한낮의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밀짚모자를 쓴 이중섭이 화판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30대 여인 또는 구렁이
 
 
 
한 청년이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딴다. 검푸른 살의 꽁치 한 마리가 책처럼 잘 요약되어
 
삭아 있다. 이집트 미이라의 여인이 관棺 속에서 꿈틀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신전古代神殿의 조각상에서 나온 30대 여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면을 쓴 사내가 칼을 들고 말했어” “신神은 인간의 피를 좋아 한다고” “나는 그와 잔 적이 있어”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붉은 노을이 TV 화면 가득 이글거린다
 
 
작은 새들이 찌르르 쫑쫑 찌르르 쫑쫑 경쾌한 소리로 날고 있는 5월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어젯밤 드라마 속 여인이 자신의 검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녀의 허리가 푸른 잎 사이에서 구렁이처럼 햇빛에 번득인다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 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 꽃들과 어우러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 종일 은백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UFO:미확인 비행물체
 
 
 
이미지 여행
 
 
 
 
 
 
너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것들이 웅숭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만 무엇이 휘익 휘감는 느낌만 든다고? 너는 그림자여서, 그 느낌은 빛이 발산하는 백색의 전율이라고?
 
 
어디서 둥둥둥둥 소리가 들려오고 막이 오르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소가 된다고? 그곳에는 시간을 지워버리는 안개의 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으로 둥둥 떠올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너는 아침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나일 강을 내려다보다가 히말라야 하얀 눈 산 위를 지나간다고? 너는 도시의 전동차 안을 떠돌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나는 너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 숲 푸른 공기 속을 둥둥 떠간다. 그때 사원의 짙은 그늘과 무한 질량의 환한 햇살 사이를 넘나들며 UFO처럼 번쩍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
 
 
 
맨살에 링크하기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아스팔트 위의 맨살 여자
 
 
 
아스팔트 위에서 30대의 여자가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넣고 앉아있다. 둥근 여자의 몸은 매끈한 살덩이 바퀴가 되어 아스팔트 도로를 굴러갈 것 같다
 
 
(화가는 왜 여자를 달팽이같이 둥글게 말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은 것일까?)
 
 
(여자는 화가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일까?)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굴려 본다 그녀는 공기가 팽팽한 고무공같이 가볍게 구른다 그녀는 통통 튀기도 한다 구름이 그녀를 태워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파란 바다로 굴러가며 깔깔거린다 그때 100km로 달려오던 육중한 화물차가 삐익 소리를 내며 간신히 그녀를 비켜간다 핏발선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휙 스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도로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 맨살로 앉아있는 30대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너무 뜨겁다
 
 
 
 
 
우아우아 아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검푸른 파도 펄떡이는 돌고래
 
(산의 어깨 위로 솟구치는 검붉은 불길)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다시마 미역 멍게 해삼 조개
 
(풀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불길 속의 주택들)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란 바다 빨간 구름 허연 맥주 거품
 
(47인치 모니터에서 풀썩풀썩 뿜어져 나와 중계동 은행사거리 상공을 떠도는 LA의 검은 연기 검은 연기)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도소리 기타소리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
 
(거대한 공동묘지 상공 떼 지어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위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 하얀 눈)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뜨거운 모래밭 달빛 속 엉덩이
 
(당신은 죽은 30대 여인의 목에서 반짝이던 나비날개 모양의 보석을 보았다고요?)
 
(그녀는 나비가 되어서 봄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모닥불 하얀 잿더미 빈 맥주병
 
(당신은 사람들이 모두 복제품 같다고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가슴을 껴안고 싶다고요?)
 
 
 
꿈틀꿈틀 아침 바다 붉은 핏덩이 핏덩이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노란 색을 주조로 한 세 개의 그림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뻗은 큰 도로 옆엔 봄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꽃 울타리가 석재상 마당 한쪽과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돌부처 돌마리아 돌사자 돌여인 돌사슴의 머리와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그 석물들과 손잡고 노는 상상을 하며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일까? 돌부처와 돌마리아가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둘레를 돌사자 돌사슴 돌여인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들이 뛸 때마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늘진 석재상 마당이 환해지곤 한다
 
 
목만 있는 늘씬한 젊은 여인이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서 있는 대형 마트 의류 코너. 그 건너편 쪽에는 목만 있는 청년이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다
 
 
 
<그들은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끌려나온 현대판 노예라고요?>
 
<그들은 초현실의 예술품이 아니라고요?>
 
<생각이 없는 그들은 얼마나 자유롭겠어요.>
 
<그들 목에 노란 풍선을 매달아 주면 어떨까요?>
 
<그들은 성가시다고 하지 않을까요?>
 
 
강남 터미널 대형 TV에서 갑자기 콸콸콸콸 흙탕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떠내려 온 가재도구들이 큰 물살에 둥둥 떠가다가 나무그루에 걸려있는 게 보인다 주민들은 무너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무어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멀리서 털털털털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노란 조끼를 입은 구조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경을 하던 청년 셋이 TV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모니터에서 튀어나온 흙탕물이 내 몸에 확확 끼얹힌다 내 옷에서는 노란 개나리꽃 향기가 난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65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4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0> / 심 상 운 2019-07-12 0 1094
4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9> / 심 상 운 2019-07-12 0 1144
43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8> / 심 상 운 2019-07-12 0 1019
42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7> /심 상 운 2019-07-12 0 994
41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6> / 심 상 운 2019-07-12 0 1011
40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5> /심 상 운 2019-07-12 0 1005
39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4> / 심 상 운 2019-07-12 0 927
38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3> /심 상 운 2019-07-12 0 954
37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2> /심상운 2019-07-12 0 886
36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1> / 심 상 운 2019-07-12 0 878
35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10> / 심 상 운 2019-07-12 0 846
34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9> / 심 상 운 2019-07-12 0 936
33 심상운 시모음 2019-06-30 0 952
32 하이퍼시론 묶음 / 심상운 2019-06-20 0 1164
31 [2017년 4월호] 나의 시쓰기: 자작 하이퍼시에 대한 해설 / 심상운 2019-06-17 0 867
30 하이퍼텍스트의 기법과 무한 상상의 세계 - 문덕수의 장시 『우체부』/ 심 상 운 2019-06-04 0 971
29 모더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리즘의 詩 / 심상운(시인, 문학평론) 2019-03-17 0 1214
28 현대시의 이해 / 심상운 2019-03-02 0 985
27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상운 2019-03-02 0 1081
26 아이러니(irony)의 효과/심상운 2019-03-02 0 1234
‹처음  이전 1 2 3 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