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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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시학
2011년 04월 19일 10시 42분  조회:2098  추천:43  작성자: 김호웅

디아스포라의 시학

김호웅

        가을비 쓸쓸하게 내리는데
        고독한 내 신세 구 누가 알아주랴
        창밖에 구질구질 밤비 내리고
        외로운 초불 켜고 머나먼 고국을 그리네.

     당나라에 가있던 최치원(857~?)의 시이다. 12살 어린 나이에 만리타향 당나라에 가서 16년간이나 유학하고 벼슬살이를 살았던 최치원, 그는 이들은 이국타향에서 나그네로 떠돌면서 늘 소외감을 느꼈다. 그는 오매에도 고국  산천과 부모형제들을 그리고 고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수많은 시문을 남겨 당나라에 크게 문명을 떨쳤는데 그 중 고국을 그린 가장 감동적인 한시가 바로 상술한 시이다.
   이 시에서 보다시피 문학은 본질적으로 두 가지 물음에 답을 준다. 즉 “나” 는 누구인가? “나”의 생존상황은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거나 그러한 물음에 답을 줄 수 없는 문학은 의미가 없다. 요즘 세계적 범위에서 화두(話頭)에 오르고 있는 디아스포라의 문학(diaspora writing, 離散寫作)이 이에 해답을 줄 수 있는데 사실 1990년대 이후 토니 모리슨, 주제 사라마구, 고행건, 오르한 파묵 등의 경우와 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부분 작가들이 디아스포라였다.
   약 200만으로 추산되는 조선족은 조선반도에 살다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동북에 정착한 과경민족(跨境民族)의 후예들로서 오늘도 여전히 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의 특성을 갖고 있다. 조선족공동체에 내재한 디아스포라의 성격을 인정하고 그 잠재적 창조성을 십분 발굴, 발휘할 때만이 우리 조선족문학은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 飛散)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인데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은 후 세계 각지로 나가 떠돌이생활을 해온 그러한 비참한 상황을 가리킨다. 디아스포라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유대민족은 자기의 고토나 고향을 떠나 타향, 타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여전히 자기의 문화적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둘째는 유대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난을 당했다(victimhood, 受害)는 의식이다. 셋째는 바빌로니아는 유대인들의 추방지요 그들이 수난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들이 자기의 문화를 재건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디아스포라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대역사에서 나온 디아스포라 개념과 현대 디아스포라 개념 사이에는 연계성도 있지만 구별점도 있다고 본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현대적인 디아스포라의 출발점으로 되지만 그 규범으로는 될 수 없으며 현대 디아스포라의 다양한 형태를 다 대변할 수는 없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는 주로 지난 20세기의 근대적인 여러 가지 힘, 이를테면 정치권력, 경제력이나 군사력, 전쟁이나 혁명 등이 낳은 “경계적인 존재”를 지칭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국민국가라는 틀에서 쫓겨난 존재로서 경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또는 민족공동체이다.
   이러한 디아스포라적인 인간 또는 민족공동체는 경계적인 삶, 변두리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부동한 문화와의 모순과 충돌 또는 교류와 영향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디아스포라의 개체 또는 민족공동체는 자기의 고토와 고유문화에 대한 짙은 향수와 집착을 갖는 동시에 다른 문화에의 동경과 접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디아스포라의 개체 또는 민족공동체는 문화적 변이(變異)를 일으키게 되며 혼종성(hybridity) 또는 다중문화신분(culture identity)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모체에서 찢겨나간 자의 상처”이고 아픔인 동시에 “일종의 특권이며 다시 얻을 수 없는 우세”로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잡종강세(雜種强勢)는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머 바바(1949- )는 새로운 문화는 다양한 문명들이 교차되는 “걸출한 변두리”에서 파생된다고 하였다.  
   물론 디아스포라는 다른 문화와 교류 또는 접목을 함에 있어서 자기 문화의 뿌리를 지켜야 만이 전반 인류문화의 다원화에 일조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주변 문명과 문화에의 일방적인 동화(同和)는 문명 또는 문화공동체의 개체수를 격감시키게 되므로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세계를 만드는데 불리하다.  
   디아스포라적인 실존상황과 가치관을 다룬 것을 디아스포라 글쓰기(diasporic writing, 離散寫作)라고 하는데 이를 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와 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로 나눌 수 있다.
   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장구한 발전과정과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다. 서방의 경우, “유랑자 소설(picaresque novelists)”이나 “망명작가(writers on exile)들의 작품이 그러하다. 유랑자 소설의 인물들은 시종 유동(流動)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데 그 전형적인 소설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트웨인의《톰 소여의 모험》등을 들 수 있다. 몰론 이 경우 작가 자신이 외국에 망명했거나 외국에서 유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망명작가들의 경우는 그들 자신의 가정적 불행, 그들 자신의 지나친 선봉의식(先鋒意識)이나 기괴한 성격, 또는 그들 자신이 모국의 고루한 문화와 비평관행에 불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하는 수 없이 타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은 외국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빛나는 작품을 창작해낸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그렇고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이 그러하며 또 아일랜드의 조이스, 영미 모더니즘 시인 엘리트가 그러하다. 이들은 외국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모국과 민족의 현실을 깊이 반성하면서 독특한 형상과 참신한 견해들을 내놓았다.
   협의적인 디아스포라 글쓰기는 상술한 유랑자 소설과 망명작가 작품의 연장선 위에서 형성되었지만 주로 20세기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디아스포라 현상과 관련된다. 여기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이 화두에 오른다.
   첫째는 잃어버린 고토와 고향에 대한 끝없는 향수(鄕愁)이다.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바와 같이 망명이란 “개인과 고토, 자아와 그의 진정한 고향 사이에 생긴 아물 줄 모르는 상처로서 그 커다란 애상(哀傷)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향수는 디아스포라의 영구한 감정이며 그것은 또 잃어버린 에덴동산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인 향수와 이어져 제국의 식민지배와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둘째는 디아스포라는 모국과 거주국의 중간위치에 살고 있기에 “집”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국과 거주국 모두에게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이를테면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잃은 자의 고뇌와 슬픔, 모체 문화로의 회귀와 그 환멸, 사랑과 참회를 통한 화해, 근대와 전근대의 모순과 충돌,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형태들의 숙명적인 결합 등 감동적인 야야기로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현대문학의 최고의 주제 ― 인간의 소외(疎外)와 맞닿아있으며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획득할 수 있다.
   셋째로 디아스포라는 모국과 거주국 사이에서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아주 미묘한 “중간상태(median state, 中間狀態)”에 처해 있고 “경계의 공간(liminal, 閾限)”을 차지하고 있어 보다 넓은 영역을 넘나들 수 있다. 하기에 디아스포라의 경력은 풍부한 소재를 약속해 준다. 이국(異國)의 기상천외한 자연, 인정과 세태를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국이라는 타자(The other, 他者)를 통해 자기 민족과 문화를 비추어볼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형상을 창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국의 근대적 발전상을 확인하고 유토피아적 형상을 창조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이국의 식민지현실을 확인하고 모국의 식민지 현실을 재확인하는 이데올로기적 형상을 창조하는 경우이다. 둘 다 거대한 인식적, 미학적 가치를 가진다. 
   넷째로 디아스포라는 “중간상태”에 처해 있고 아주 미묘한 “경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디아스포라 문화계통은 쌍개방(双開放)적 성격을 지니며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다중문화구조를 규정한다. 이러한 다중문화구조를 가진 “제3의 문화계통”은 단일문화구조를 가진 문화계통, 즉 모국과 거주국의 문화계통에 비해 더욱 강한 문화적 기능과 예술적창조력을 갖게 된다. 특히 예술적 형식에 있어서도 고금중외의 우수한 문학과 예술의 기법을 십분 수용해 변형, 환몽, 패러디,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디아스포라의 시학에 비추어 조선족공동체와 그 문학에 대해 말해 보자.
   우리문학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혜초의 여행기《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나 이 글의 서두에서 본 최치원의 한시《가을비 속에서》가 바로 광의적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조선족 문학의 경우 강소성 남통에서 외롭게 살았던 김택영의 시문(詩文),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활동했던 주요섭, 김광주의 소설들, 그리고 용정, 신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안수길, 최서해, 김창걸 등의 소설들을 모두 협의적인 의미의 디아스포라 글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후 조선족은 중국 국적을 가졌고 중국 공민의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니 해방 전과 사정이 좀 다르다고 하겠으나 디아스포라의 아픈 기억은 여전히 집단무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의 조선족집거구는 여전히 조선반도 문화와 중국의 주류문화 사이에 있는 경계적인 지역이요, 여기에 살고 있는 작가들은 어차피 디아스포라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고 해야 하겠다. 황차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한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나라로의 이동 및 산해관 이남 대도시로의 이주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양산하고 있다.
   조선족 작가의 경우, 연변을 비롯한 동북의 조선족작가들은 중국과 조선, 한국 사이를 자유롭게 나들고 있고 지어는 유순호처럼 미국에, 장혜영처럼 한국에, 김문학처럼 일본에 장기 거주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원길, 황유복, 오상순, 서영빈, 장춘식, 김재국처럼 조선족집거구를 떠나 중국의 수도요, 다양한 문화의 합수목인 북경에 “걸출한 변두리”를 조성해 가지고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모두의 움직임을 통틀어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글쓰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조선족 작가들은 이주초기부터 심각한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마음 놓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 때 모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착, 모국과 거주국 문화 사이에서의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의혹과 불신을 초래했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자유로운 문학의 시대를 맞아, 다원공존과 다원공생의 세계사적 물결을 타고 디아스포라의 삶과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형상화하고 그러한 갈등을 극복, 승화시켜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시각으로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조성희의 단편소설《동년》, 박옥남의 단편소설《둥지》,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와 연변을 다룬 석화의 연작 서정시《연변》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럼 석화의 서정시《연변 2, 기적소리와 바람》을 보자.

 기차도 여기 와서는
 조선말로 붕 ―
 한족말로 우(嗚) ―
       기적 울고
       지나가는 바람도
 한족바람은 퍼~엉(風) 불고
 조선족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 바람 바람 바람 분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늘을 나는 새새끼들조차
 중국노래 한국노래
 다 같이 잘 부르고
 납골당에 밤이 깊으면
 조선족귀신 한족귀신들이
 우리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저들끼리만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월의 거리에 넘쳐나는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이 시는 상이한 것들이 갈등이 없이 공존하는 다문화적 혼종성,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과 한족이 연변땅에서 공존, 공생해야 하는 숙명 내지 필연성을 유머러스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다. 제1연에서는 기차와 바람을 의인화하면서 “붕 ―”과 우(嗚)―”, “바람”과 “퍼~엉(風)”의 대조를 통해 조선족과 한족의 언어적 상이성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제2연에서는 미물인 새들도, 납골당의 귀신들도 서로 상대방의 소리와 언어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두 문화형태 간의 대화와 친화적인 관계를 하늘을 날며 즐겁게 우짖는 새와 납골당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귀신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몽환적인 색채를 십분 살리고 있다. 제3연은 이 시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내적 구조에서 보면 “전(轉)”과 “결(結)”에 속하는 부분인데 연변의 풍물시라고 할 수 있는 “6.1” 아동절 날, “붉고 푸른 옷자락처럼/ 온갖 빛깔이 한데 어울려/ 파도를 치며 앞으로 흘러간다” 고 색채적 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논리로 자연스럽게 매듭짓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시야말로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고 필자가 앞에서 구구히 논의한 디아스포라의 시학을 일목요연하게 구현했다고 본다.
   이제 석화 시인은 물론이요, 우리문단의 더욱 많은 작가, 시인들이 문화적 자각을 가지고 우리민족의 삶과 운명을 극명하게 파헤칠 수 있는 디아스포라 글쓰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디아스포라, 그것은 우리 조선족문학의 “잃어버렸던 주제”요, 특성이며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通路)이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22일, 연길 연서가 민항아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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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영어철자 수정
날자:2011-04-19 11:18:15
김호웅님께 영어철자가 틀린 것을 알려 드림니다. 본문에 쓰인 vietimhood 는 victimhood(피해의식)으로 정정해야 됨니다. 좋은 글 잘 읽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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