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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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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2006, 그해 겨울
2019년 11월 22일 12시 29분  조회:869  추천:0  작성자: 류재순
단편소설

2006, 그해 겨울
너무 추웠던 그해 겨울의 간이역…

진눈개비가 어지럽게 흩날린다.
물먹은 스펀지 마냥 축 처져 있는 내 마음에 우수를 난무한다.
한집의 가정부로 집에도 가지 못하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소진하고 있는 나는 주인집의 저녁 준비를 하려고 쌀바가지를 들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가 급작스레 귀청을 두드린다.
"여보세요"
“큰일 났어요, 성남 씨가 출입국에 잡혀 갔어요!”
다급히 소식을 전하는 상대방은 우리가 ‘얼음 꽃 미인’이라고 부르는 민정이었다. 그만큼 차분한 말투와 침착성이 일관되었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뒤쫓기는 듯 당황하였다. 아니, 성남 씨가 출입국에 잡혀 가다니? 나는 머리가 띵해 나며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 시키며 자초지종을 케어 물었다. 민정은 숨 가쁘게 널뛰기로 대충대충 상황을 설명하였다.

성남 씨는 어제 저녁, 오랜만에 처남을 만나-다시 말해 몇 년 전에 암으로 저 세상에 간 마누라의 오빠를 서울에서 만났다고 한다. 가슴에 오래 묻어 놓았던 슬픔의 보따리를 풀며 두 사람은 만취하도록 같이 술을 마셨다고 한다. 지하철까지 나와 처남을 보낸 후 성남 씨는 그만 술기운에 지하철 장의자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 플레트홈을 순회하던 지하철 경찰이 의자에 누워 자고 있는 사람을 일어나라고 흔들었다. 성남 씨는 취중의 잠결에 눈을 감은채로 귀찮다고 팔을 들어 휙 쳤는데 재수 없게 안경 낀 경찰의 눈두덩을 쳤다. 같이 동행하던 두 경찰이 와락 성남 씨를 끌어 당겨 땅에 팽개쳤다. 그때까지도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는 성남은 무어라 중얼거리며 같이 주먹질을 했다. 발길에 무수히 걷어차인 그는 결국 외국인이란 것이 탄로가 되며 출입국에 잡혀 들어갔다.

“어떻게 해요, 빨리 구해 내야 할 텐데요!“ 그래도 나이 둬 살 많은 나를 언니처럼 여기고 나에게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한 그에게 나는 그녀가 어떻게 이처럼 상세하게 먼저 알았는지 미처 물을 여지도 없이 전화기를 놓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보니 마침 그날은 나의 남편이 집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하였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말귀를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멍해있는 남편에게 빨리 은행에 가서 현금 한 200만 원 정도 꺼 내여 출입국에 찾아가 사람을 구해보라 부탁하였다. 언젠가 누구도 잡혀 간 사람을 돈으로 해결해 나왔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았다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급히 폰을 닫았다.
늦은 밤, 나는 자그마한 "아줌마 방"에 들어와 마음을 조이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웬일인지 남편은 계속 전화도 받지 않고 소식도 없다. 윙윙거리는 창밖의 눈보라 소리는 신음하는 짐승의 괴성 같았다.

어느 날 이였던가, 그날은 때 이른 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남편은 현장 일에서 다친 다리 통증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고 나와 지팡이를 짚고 사거리를 지나 쩔뚝쩔뚝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씽-하고 갑자기 오토바이 한 대가 빗살 속으로 쏜살같이 지나며 남편이 짚고 가는 지팡이를 쳤다. 놀란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이 오토바이는 이미 종적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만 할 뿐 아직 누구 하나 선뜻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였다.
"다친대는 없습니까?"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며 오십대 남자가 부리나케 옆으로 다가왔다.
오토바이에 직접 몸을 부딪치지 않았어도 오토바이와 지팡이와의 갑작스런 충격으로 남편은 이미 저 만큼 나굴러 떨어졌다. 허리와 다리의 통증이 말이 아니었다. 상 중등 키에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진 그는 두말없이 남편을 업고 병원으로 되돌아 뛰었다. 그게 바로 성남 씨였다. 병원에서 돌아와 집에 도착하였을 때 같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고향친구 철수 씨도 찾아왔다. 그날 저녁 내가 성남 씨를 위하여 저녁상을 준비하며 그전에 나와 한식당에서 일했던 민정이와 월매도 불렀다. 우리는 아무 허물없이 너무 잘 어울려 졌다.
우리에겐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고독과 외로움, 똑같이 풍기는 "이방인의 냄새", 똑같이 안고 사는 힘든 노동의 고달픔이 있었다. 우리는 만남 그 자체부터 한 동아리가 되어 휴식일이면 꼭 한곳에 모이군 하였다..




중국의 어느 한 무역회사의 대표로 한국에 들어 왔다가 사업 실패로 중국 측의 귀국 통보를 받았지만 마누라 암 치료에 쏟아 넣었던 빚 때문에 그대로 물러앉았다는 김 성남 씨, 러시아 보따리 장사 때 남편을 잃어버리고 한국 돈 천 여 만원을 브로커에 넘겨주고도 한국에서 불법체류라는 신분으로 남아 억척스레 돈을 벌어야 하는 민정이, 그리고 술 만 마시면 마누라 때리기가 장기인 남편과 갈라지려 절대 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월매. 그리고 또 한사람 철수 씨, 그림그리기 손재간이 있어 어느 건축회사의 설계사로 있었다는 그는 건설 현장에서 철근 오야지로 일하며 수입이 그중 좋은 편이다. 다만 같이 한국에 들어 온 마누라가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장년 어느 지방에 내려가 먹고 자고 하는데서 일하다 보니 역시 항상 외로움을 타고 있는 그다. 그래서 우리와 합류가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나와 남편은 유일하게 같이 동참한 부부였다. 한국 친척 초청으로 들어와 이젠 한국 국적까지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들보다 둬 살 더 많았는데 그들은 우리 두 내외간을 항상 친 형님 언니처럼 따르며 많은 것을 우리 두 내외와 상의하고 의뢰하군 하였다. 국적을 가졌어도 이방인이라는 아픔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그들과의 모임은 역시 즐거운 마음의 쉼 터였다.


주말 휴식일이 되면 우리는 혼자 셋집을 잡고 있는 성남 씨 집에 모여 들었다. 우리만의 메인홀이였다. 그 집 창문의 블라인드는 항상 드리워져 빛을 막고 있어 타향 생활에 불안함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어쩐지 아늑한 안주감을 주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책읽기를 무척 좋아하는 성남 씨는. 입을 꾹 다물고 늘 내용이 담긴 따뜻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있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교포들 치고는 퍽 젠틀맨의 멋을 가지고 있는 그는 항상 상대방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끝까지 잘 들어 주며 자기의 의사는 겸손하게 뒤로 양보하는 풍격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 만났던 사람을 두 번째 만날 때 는 꼭 이름을 맞춰주는 책임감 있는 기억력 때문에 다들 그를 좋아하였다. 여성들에겐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하고 따뜻했으며 화를 내는 것을 거의 못 봤다. 화를 내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과오로 자신을 징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격언"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 우스겟 소리도 곧잘 하였다. 그럴 때면 민정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성남 씨를 할끔 바라보군 하였다.
성남 씨는 우리가 모일 날이 되면 항상 냉장고에 먹 거리를 그득 준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그와 우리 남편, 그리고 철수는 물론 우리 여성들도 잘하던 못하던 맥주나 중국산 포도주를 놓고 즐겼다. 그중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다 한국에 왔다는, 애교가 많은 월매는 늘 남자들을 잘 챙겨주었다.
“오빠, 요것 좀.”
얼굴에 별빛 같은 눈웃음을 반짝이며 안주도 착착 집어서 남자들 접시에 잘 놔 주고 술잔에 술도 잘 따라 주었다. 옛날 같으면 술집의 기생 같다고 우리는 입을 막고 삐죽거렸으련만 타향의 슬픈 생활의 환난지우(患難之友)라는 아픔 때문이었는지 우리 동성들의 마음에도 그저 고맙기만 하였다. 물론 월매가 성남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살피며 매번 이미 애인이라도 된 듯이 성남 씨를 각별히 챙길 때면 성남 씨는 가끔 겸연쩍어 우리 눈치를 슬쩍 보기도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우리는 오히려 ‘풋 하하’하고 웃음보를 터트리군 하였다.
단 한 사람이 웃지 않고 있었다. 민정이었다. 월매와는 달리 다문 입을 잘 열지 않는 민정은 어딘가 조금은 쌀쌀한 기운까지 도는 찬 여자-그야말로 얼음 위에 피고 있는 얼음 꽃 같았다. 그래도 그녀는 모임에 올 때마다 먹 거리를 잘 사오고 설거지를 도맡아 하였다. 그리고 일단 노래방에 만 가면 그의 애잔한 슬픈 노래들은 우리의 가슴을 적셔 놓았다. 한번은 그녀가 우리 교포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노래, 드라마 "황금사과"에서 나오는"꿈꾸는 카사비앙카"를 불렀다..
"석양은 물드는데,
그댄 어디에 있나
… …
바다와 맞다은 그곳에
붉은빛의 부겐빌레라
그대를 기다리네"

이 노래를 얼마나 애절히 부르고 있었던지 우리는 숨도 크게 안 쉬고 듣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부겐빌레라’는 걸 알고 있어?' 하고 물었더니 "네, 미국 켈리포니아주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꽃나무 이름인데 당년에 프랑스의 제독이자 탐험가인 부겐빌리 이름에서 나온거란 걸 책에서 봤어요." 하며 야무진 대답을 하여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노래방에 갈 때 마다 한 번씩 부르는 노래 한곡이 또 있었다. 바로 "님과 함께"였다.' 새 곡들을 많이도 알고 있는 그가 이런 오래되고 조금은 신물이 난 이 노래를, 그리고 그의 애상과 우수에 맞지 않게 이런 경쾌한 노래를 한번 씩 부를 때 면 우리는 의아한 생각으로 바라보다가도 미래의 그 어떤 동경에 빠진 듯이 머리를 약간 수그리고 눈을 감고 엉덩이를 살록살록 흔들며 깊이 심취된 우아한 모습과 그 자태를 동반하는 애잔한 맑은 목소리에 번번이 홀딱 매혹되여 쿵짝쿵짝 다같이 춤을 추며 돌아갔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타향생활의 아글타글하는 고생살이도 우리 모두 그 하나의 꿈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 특히 노래방에 만가면 탠버린을 흔들어 대고 있는 철수는 그 옛날 중국에서 한동안 무대에서 가수 생활을 좀 했었으며 지금 그 고된 노동 속에서도 변함없는 텔렌트 같은 몸매와 사람의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를 부르는 민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우리가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갈 때면 철수는 민정에게 은근슬쩍 제 2차로의 약속을 받아내려 그녀의 뒤를 급히 쫓았다. 그러면 민정은 큰언니인 내 곁을 바짝 붙어 걸어간다. 왜, 철수가 싫어? 노래방에 갈 때 마다 주머닛돈을 아끼지 않는 철수가 조금은 안쓰러워 나는 슬쩍 비춰 보았다. 그냥요. 민정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잠깐씩 생각에 잠긴다. 혹 민정도 월매처럼 성남 씨를? 싹싹하고 얼굴 어여쁜 월매, 새침데기면서도 제 할 일은 말끔히 다 해치우며 멋진 몸매에 노래까지 잘하는 얼음 꽃 미인 민정이, 그런데 성남의 태도에선 그 .어떤 기미도 보아낼 수 없었다. 하긴 그들 모두 돌 싱 이긴 하지만 아직은 스테디 한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나에게도 몇 년 전 이혼을 하고 혼자 있는 질녀가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여서 성남이란 남자의 인품을 얘기해줬더니 질녀가 홀 하였다. 성남에게 나의 뜻을 비쳐 봤다. 성남은 또 그 알 수 없는 미소만 남길 뿐 확실한 대답을 적이 피하고 있었다.
이렇게 몇 년을 함께 지낸 우리 동아리는 이젠 정말 한집 식구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성남 씨가 출입국에 잡혀 가다니.


한참 마음을 조이고 있는데 뒤늦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아 참, 뜻밖이요! 성남 씨가 불법체류 자라네, 돈을 가지고 흥정할 일이 아니었소. 면회는 되여 성남 씨를 만났는데 몸을 많이 다쳤다누만. 출입국에 요구하여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했더니 글쎄 지하철에서 경찰 발길에 차여 갈비뼈 세대나 금가고 상했다오. 병원에 입원 시켜 놓고 오느라 정신이 없었소. 개자식들!”
그러니까 그해 중국 대외 무역부측의 소환통보를 받고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은 것이 결국은 불법이란 결과를 초래 한 것이다. 그런 내막 까지는 우리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가슴이 떨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엔 종래로 화를 낼 줄 모르던 그다. 가슴속 깊이 묻혀있던 저 세상 간 마누라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얼마나 욱 하고 올리 밀었으면 그토록 인사불성이 되도록 만취 했을까?
사실 성남이 무역대표로 한국에 들어와 한창 사업을 시작했을 때 간경화 후기로 고생하던 그의 부인이 시급히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성남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팔을 걷어 올리고 혈액 검사를 하였다. 하늘이 도와 줬나, 남편이 부인에게 직접 이식할 수 있는 천재난봉(千載難逢)의 기회를 얻었다. 돈도 없고 이식할 대상도 기다릴 수도 없었던 그 상황에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었으랴 그러나 간이식후 워낙 건장한 체구였던 성남은 무사히 회복이 잘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식을 받은 부인은 거부 반응으로 상용적인 면역억제제 치료를 계속 받았지만 끝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부인은 남편의 손을 잡고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한마디 말을 남기였다.
"그래도 당신 참 고마웠어, 내가 하늘에서 도와 줄 테니 꼭 좋은 사람 만나요!"
그의 고향 친구에게서 들은 이 이야기는 우리 몇이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술김에 무의식적인 실수로 경찰의 눈두덩을 쳐 안경까지 깨여 졌다고 해도 술 취한 사람에게 갈비뼈가 다 부러 지도록 발길질을 했다니. 분을 삭이지 못해 한참 가슴앓이를 하던 나는 한밤중에 철수에게 전화를 했다. 월매나 민정이 보다는 어쩐지 그에게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성남 자신은 불법 체류라는 낙인만으로도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는 상태지 않는가. 철수도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씨발, 때려죽일 놈들! 경찰이란 놈들이 술 취한 사람을 그 지경 만들어 놓다니, 다 교포라고 깔보고 그런거야!“

. 나는 월매에게도 민정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사실 성남이 그날 출입국에 잡혀 가던 날 때맞춰 성남에게 민정에게서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문득 걸려온 민정의 전화에 자기가 지금 어떻게 출입국에 잡혀왔다는 소식만 전하고 더 상세한 것은 말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두 충격을 받는 상태였다. 그들은 일제히 내일 출입국에 성남 씨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였다. 철수와 월매는 몰라도 민정은 역시 불법체류자니 출입국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나는 신심 당부하였다. 이튿날, 철수와 월매가 출입국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성남 씨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고 있으니 일단은 치료 받는 동안 우리가 어떤 대책이라도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와 남편은 벌서 며칠째 서울 출입국을 쫓아 다녔다. 발길질을 한 그 경찰에겐 아무런 법적 처벌도 없은 체 치료중인 성남은 이제 곧 강제추방이란다. 정말 뚜껑이 열리고 꼭지가 돌 일이다. 가슴은 꽉 막혀 버렸고 힘없는 우리의 목소리는 그 어느 문도 열 수 없었다. 아, 나는 머리를 들고 초점 없는 눈길로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이 해를 막고 해는 숨어 버리고, 쌀쌀한 바람은 뺨을 때린다. 올 겨울 서울의 하늘은 항상 그렇게 어둠침침하고 서울의 길은 어디나 올리막 길 같다. 공원 길목에 걸려있는 누가 쓴 시 한줄이 눈에 띄운다
"바람이 분다, 괜찮아, 괜찮아."
제밀할, 괜찮기는, 모든 것은 틀어지고 엉망이다. 배부른 소리는 걷어치우라! 벌어진 사태 앞에서 이렇게 하릴없이 나날을 소모하고 있는 나는 주위에 대한 영문 모를 간헐적인 분노로 한참씩 자신을 괴롭힌다. 성남은 벌써 몇 번이나 소식을 전해 왔다. 자기는 모든 것을 다 달갑게 접수하고 있으니 제발 친구들은 조용히 있으라고.

우리의 생각은 이처럼 흐리터분하고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침울하다. 대책도 대안도 보이지 않는다
궁지에 몰리면 담을 뛰어 넘는다고들 한다. 그것은 상식일가 초탈일가? 세상만사의 순리에 따른 순응이냐, 아니면 내 판단의 주장과 욕망을 위한 담 뛰어 넘기냐? 실타래처럼 헝컬어진 사유를 물고 침묵은 지속되고 그 둔중한 침묵 속에서 스릴한 무엇이 잉태되고 있었다..


또 며칠이 지났다. 나의 남편과 철수는 성남 씨를 보려 병원에 갔다. 출입국의 한 젊은이가 성남 씨 옆에서 지킴이 역을 하고 있었다. 곧 떠나야하는 성남 씨를 위해서 하루 일을 전패하고 일부러 왔다고 지킴이 직원에게 해석하였다. 그들은 직원과 같이 울안에 나가 한담도 하고 담배도 같이 피우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었다. 김밥 한 줄로 점심을 때운 그들은 모두 속이 출출 하였다. 같이 나가서 간단히 국밥이라도 하고 들어오죠? 아니요. 철수의 말에 지킴이 대답은 단호하였다. 침묵이 흘렀다.
“저 사람 저렇게 링겔 맞으며 계속 자고 있는데 제가 한턱 쏠 테니 잠깐 식사하고 들어옵시다.”
남편이 지킴이를 잡아 당겼다 지킴이는 쿨쿨 자고 있는 환자를 한참 지켜보더니 생각 밖으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식사를 하며 캠 맥주 세 통까지 굽을 낸 그들은 기분들이 한결 느슨해졌다.
“아이고 난 오줌이 마려 화장실에 좀…”
“나 두요”
두 사람이 급히 화장실로 가고 젊은 지킴이는 혼자 뚜벅뚜벅 병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병원 길 건너 왼쪽 굽인 돌이에서 월매를 태운 택시 한 대가 길 한쪽에서 민정이가 대기하고 있는 지점으로 휙 하고 다가와 멈춰 섰다. 언제 나타났는지 나의 남편과 철수가 몸을 제대로 가늠 못하는 성남을 부축하여 감쪽같이 택시에 올라탔다.
병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완전 다른 구역의 한 2층 집에서 나는 찬을 준비하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은 산란하기 그지없었다. 나의 질녀가 구해낸 세집인데 얼마 전에 지방에 내려가 일하게 되여 집이 비어 있었다.

드디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쿵당쿵당 다급히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구부린 성남, 그리고 당황한 눈길을 나에게 던져오는 남편과 철수,
다급히 뒤 따라 올라 온 민정과 월매…
후-나는 드디어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우리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도 상황 설명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도저히 감각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서야 민정이가 정신을 차린 듯 말하였다.
‘일단은 편히들 앉으세요. 언니가 음식을 다 준비해 놨는데.”

민정 이와 월매가 주방에 내려가 음식상을 차려 들여왔다. 나는 그동안 오래 동안 옷도 못 갈아입었을 성남 씨를 위하여 미리 준비해 온 옷가지들을 내 놓았다. 성남은 화장실로 들어가 환자복을 벗고 속옷부터 몽땅 갈아입었다.
"나 빨리 집에 좀 갔다 와야겠어요."
성남이 불쑥 말했다.
"이 상황에 어딜 간다고?"
우리는 거의 이구동성으로 소리 쳤다.
"그분들과 찍은 사진 액자들과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다 챙겨 와야 합니다."
그때에야 우린 생각이 났다. 그해 중국 무역대표로 성남이 한국에 갓 왔을 때 국회의 모모한 분들과 찍은 사진 액자들이 그 집 벽에 걸려 있었다.
"잘됐네, 그 분들께 좀 도와 달라하면 되겠네."
철수가 흥분하여 말하였다.
"그분들께 그렇게 루를 끼치는게 아닙니다!"
성남의 단호한 말투였다. 얼굴빛마저 생경해 보였다. 침묵이 흘렀다. 이 상황에 누가 감히 '탈주범'의 집을 찾아간담?
성남은 두말없이 일어나 신을 찾아 신는다.
"안돼요, 조용히 집에 계세요!"
말을 끝내기가 바쁘게 민정이 어느새 신을 끌고 문밖을 나섰다.
"안 돼, 너도 불법인데"
나의 말은 그의 쾅하는 문소리에 묻혀 버렸다.
"꼭 챙겨야 해? 별나게도!"
월매가 나가버린 민정을 향해 볼 맨 소리를 하였다.

.서울의 밤은 유난히 밝고 소란스럽다 .사랑에 울고 웃는 서울의 밤거리, 희망과 절망에 우여우여 소리치는 서울의 밤거리, 달과 별이 짙은 구름 속에 깊이 묻혀 있어도 네온등들은 제가끔의 황홀한 불빛으로 어둠을 샅샅이 들춰내고 있다. 그리고 들쑹날쑹 꽃혀져 있는 서울 밤하늘의 수많은 십자가들, 그 아래로는 삼엄한 경찰차들이 거리를 누빈다.
-불법체류자! 누군가 당장이라도 뒷덜미를 잡는 것 같다. 민정은 잔뜩 얼어붙은 가슴을 안고 어두운 골목을 찾아 밤 고양이 마냥 조심스레 걸어갔다. 드디어 민정은 텅 빈 성남의 집 문 앞에 이르러 우리가 공동으로 알고 있는 감춰놓은 키를 찾아 집안을 정리하였다. 국회의원님 들과 찍은 벽에 걸려있는 액자들-한때의 ‘영광’을 다 내려 챙겨 넣었다. 이것저것 깔끔히 다 정리를 한 민정은 부리나케 문밖을 나섰다.

"저 집인 것 같은데"
민정이 금방 골목길로 되돌아서는데 저쪽 골목 어귀에서 경찰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언듯하였다. 민정은 잽싸게 어둠속에 묻어 들어갔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 같았다.


차려 놓은 음식을 월매가 제일 먼저 성남 씨 입으로 가져갔다.
“너무 고생 많았어, 자기가 추방되는 줄 알고 난 정말 눈앞이 캄캄했었다구. 이젠 정말 다행이다.”
월매 눈에는 눈물이 가랑가랑하였다.
삐걱하는 문소리와 함께 민정이 사색이 되어 집안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물건을 가득 담은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백지장이 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린 할 말을 잃었다.
"민정 씨!"
갈린 목소리와 함께 성남이 울뚝 일어섰다. 우린 충혈 된 그의 두 눈에 푹 젖은 무엇이 글썽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정서와 행동에 대해 항상 소심하던 그였다!

“자, 우리의 탈출기, 아무튼 오늘 끝내 성공했으니 술 한 잔 합시다… 다들 잔을 들어 건배!”
누군가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보려 크게 한마디 띠였다.
이 때였다. 철수의 휴대폰 소리가 우리의 귀를 찔렀다. 모두의 눈길이 소리 나고 있는 그의 폰에 꽃혔다. 숨소리도 멈췄는데 벽시계 소리만 똑-딱, 똑-딱…
모르는 번호인데? 폰을 한참 뚫어지게 응시하던 철수가 머리를 기우뚱하였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불안한 예감이 번개처럼 휙 지나갔다.

“ 받지 마, 빨리 전화기 꺼! 혹시 위치 추적이라도…”
오늘 그 지킴이는 자기 전화번호 모른다고 폰을 든 철수가 당황히 설명 하였다. 아차, 처음 출입국에 성남 씨 면회하러 갔을 때 방문 서명 단에 전화번호까지 적게 했었지? 철수가 끝내 생각을 더듬어 냈다. 출입국 쪽에선 벌써 다 연계가 되고 깐깐한 추적이 시작 된 것이다! 사실 그 첫 방문 때 만해도 오늘의 계획은 전혀 없었지 않는가. 얼마가 지나자 나의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오늘 사건에 직접 노출 되지도 않았고 나만은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으니 혹 일이 커진다 해도 강제추방 같은 건 없을 것이란 생각도 있었지만 일하는 집 주인에게 잠시 말미를 얻어 나온 나였기에 주인집의 전화가 올 가봐 유독 나만 휴대폰을 켜놓고 있었던 것이다. 폰 뚜껑을 열면 통화가 되는 나의 휴대폰은 번호를 확인 하려는 순간, 벌써 저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디십니까, 혹 남편 분과 같이 있습니까?”
아차, 나는 나의 실수를 직감하였다.
“네? 남편요? 전 지금 일 하는 집에 있는 데요"

이제 위치 추적이 될 거예요 민정의 말 이였다. 우리는 차려놓은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 한 체 부랴 부랴 문밖을 나섰다. 빨리 흩어져 각자 갈 곳으로 가서 숨어 있자고 하였다. 계단을 내리며 나는 남편과 철수에게 휴대폰을 절대 더 쓰지 말고 버리라고 신심 당부하였다. 뒤를 보니 민정이가 성남을 부추겨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거리에 나왔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나도 빨리 일하는 집에 도착해야했다. 철수와 월매도 제가끔 택시를 잡아타고 뿔뿔이 도망치고 있었다. 성남 씨에게만은 빨리 택시를 잡아타고 시골이던 어디든 멀리멀리 도망치라고 부탁하였다. 나도 차를 잡아타고 떠났다. 모두들 나 몰라라 도망가기 바쁘다. 무의식중 백미러로 뒤를 돌아보았다. 민정이가 성남 씨의 팔 하나를 제목에 얹고 걷고 있었는데 마침 택시 하나가 그 옆을 지나다 섰다. 그들 둘은 같이 급히 차에 올랐다. 나는 눈시울이 흐릿해졌고 가슴이 젖어 올랐다. 아, 얼음 미인!

납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힘겨운 나날이 지속 되었다. 사람만 탈출시키면 일거 대성공 일거라는 생각은 오산 이였다. 법무부 사람들이 갑자기 내가 일하는 집에까지 찾아 왔다. 그들의 호출을 받고 밖으로 나와 보니 남편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된 판인가? 쏘아보는 나의 눈길을 피하며 남편이 가만히 나에게 알려 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이 우리 집에 뛰어 들었소, 집도 몽땅 뒤집어 놓고 미처 버리지 못한 내 휴대폰도 찾아내고, 그 휴대폰에서 통화명단들에, 전화번호들에 다 들통 나고 말았다니까"

끝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어제 저녁 그들은 남편을 법무부에 불러다 놓고 사실을 실토하라고 위협 공갈하였으며 내 남편의 휴대폰으로 유관 명단에 다 전화를 하였다. 내가 그렇게나 휴대폰들을 다 버리라고 당부 했건만 내 남편도 그들도 버리지 않았다. 내 남편의 전화번호가 뜨자 철수와 월매는 고스란히 다 전화를 받았다. 법무부에서는 별 큰 힘 들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둬 들였다. 물론 남편은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구치소에서 나왔다. 후에 법적 조치가 따라갈 것이니 우선 집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단 민정과 성남은 정말 휴대폰을 버렸는지 통화도 되지 않고 출입국에서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

. 그날은 월매를 면회하는 날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두등이 퉁퉁 부어 눈도 바로 뜨지 못하는 월매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하소연하였다.
"언니, 나 중국으로 추방당하면 어떻게 해! 우리 집 그 알콜 중독 놈 새끼 어떤 여자와 살다 빚만 잔뜩 받아 안고 지금도 매일 술 퍼마시며 나만 기다린다 잔아. 내가 돈을 몽땅 안내놓으면 때려죽이려 할 거야! 흑흑…"
한참 울던 그는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한마디 더 하였다.
"근데요, 성남 씨와 민정이 소식은 전혀 없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들 같이 있는 것 같아, 앙큼한 계집년!"
월매의 입에서 드디어 야멸찬 한 마디가 튕겨 나왔다. 지방에 내려갔다 돌아온 나의 질녀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아니, 집 안 꼴이 왜 이렇게 됐어요? "
두서없이 나날을 보내느라 도망친 후 뒷수습 하는 것도 깜박하고 있었다. 나는 성남에게 닥친 재앙을 얘기해주었다.
"아이고, 그런 재수 없는 남자를 소개하려 했어요? 나도 불법인데 큰일 날 번 했네요."
나는 똑같은 불법이었던 얼음꽃 미인이 생각나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 났다.

외로운 타향살이에서 나를 친언니 친누나처럼 따라주며 서로를 구하다 사고를 친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건가?
내가 갇혀있는 친구들을 찾아 출입국을 얼마나 쫓아 다녔던지 출입국 직원들은 나에 대해 아주 익숙해 졌다.

그날도, 출입국 구치소에 갇혀서 고생하는 친구들을 면회하고 또 조사과에 가서 친구들에 대한 선처를 빌고 나온 나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출입국 복도 장의자에 앉아 흑흑 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눈보라가 씽씽 몰아쳤다.
하나의 나무가지가 물결 사나운 소용돌이 속에서 빙빙 돌며 허덕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 범피중류{泛彼 中流}란 것이 있는가 아무리 똑바로 가려해도 세상이란 물살은 기어이 너를 흔들어 놓고 뒤집어 놓으려 한다. 법의 천평은 누구를 위해 평형을 잡고 있나요?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갑자기 누군가 울고 있는 내 눈앞에 휴지통을 갖다 놓는 것이었다. 조금 있더니 휴지 두 장을 빼 내여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눈물을 닦으며 앞을 바라보니 30대 좀 넘어 보이는 젊은이였다. 누구세요? 나의 의아해 하는 눈길을 보더니 이곳 사무실 직원이라고 알려 주었다. 벌써 여러 날 여기 와서 매일 친구들 위해 찾아다니고 우시는 걸 봤습니다. 그 말에 나는 울음이 더 왈칵하고 쏟아졌다. 그는 계속 내 옆에서 휴지를 뽑아주며 눈물을 닦게 하였다.
“그만우시고 이젠 집에 돌아가세요, 밖에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 택시 잡기도 힘 들것 같네요. 나도 퇴근 시간 다 되였으니 제 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나는 이 낯선 한국 젊은 직원을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모처럼 마음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그의 차에 탔다.

눈발이 풀풀 날리는 도로 위를 달리며 그는 나와 많은 얘기를 했다. 참, 대단 하십니다. 중국 교포들은 친구지간에 이렇게나 의리를 지키시는 군요, 한국 사회에선 이미 낯 선 풍경입니다. 지금 서울에 대단한 센세이션입니다. 잘 하셨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친구를 빼내기 위해 그런 큰 모험을 걸고 작전들 하신 것도 그렇고 또 친구가 붙들려 들어 왔다고 해결하시려고 매일 와서 하소연하고 우시는 것도, 그런데 전번에 그 젊은 지킴이 직원 말이에요, 신입 공무원 이였어요, 도망간 두 사람 찾지 못하면 해고 될지도 몰라요.
네? 해고?
나는 머릿속이 다시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해고당한 그 신입공무원의 얼굴이 깨여진 유리 조각처럼 일그러진 성남과 민정의 얼굴에 꽃혀서 다같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놀라 깨였다. 새벽의 꿈이였다.

어둠이 염치없이 야금야금 낮볕을 먹어가고 있는 저녁, 바람이 좀 누그러들었다 .다시 일을 시작한 나는 무거워진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려 문고리를 쥐였다. 갑자기 가방 속에서 핸드폰 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나는 가방 속에 손을 넣고 폰을 꺼 내였다.
"여보세요?"
묵묵부답
"누구세요 말씀 하세요"
"누님, 접니다."
뜸을 한참 들이고 나지막이 들려오는 성남의 목소리였다 .나는 죄여드는 철갑을 뒤집어 쓴듯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저 땜에 너무 죄송해서, 근데 지금 바깥 사정은 어떻게 되었는지요?"

지금 통화가 얼마나 위험 한가를 직감하고 있는 나는 도청이란 두 글자를 떠올리며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보내느냐 등을 물을 수 도 없었다.
나는 급급히 이쪽 사정을 대충대충 알려 주었다. 철수 월매가 잡혀 들어간 것, 그리고 그 신임 공무원의 해임 위기.
"네? 그 신임 공무원의 해임 위기까지?"
너무 충격적인 소식 이었던가 저쪽에선 더는 말을 못하고 떨렁 전화를 놓아 버렸다 .내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폰에서는 걸 수 없는 전화라고 알려 줬다. 공중 전화인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또다시 밤을 새웠다. 그들이 아직 무사히 있다는 점이 한시름 놓이게 하면서도 알 수 없는 마음속의 불안감은 심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또 얼마가 지났다. 집으로 들어 온 남편이 성급히 새 소식을 알려 주었다.
“여보, 성남 씨와 민정이가 끝내 출입국에 잡혀 들어 왔다오.”
응? 난 마음이 덜컹했다. 그러나 금방 또 안도의 한숨이 푸하고 나왔다. 마치 다행이다 싶도록. 이건 또 뭔가? 정말 나로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극도의 엇갈린 정서의 교차점 이였다. 그들까지 잡혀 들어 올 가봐 얼마나 마음을 조였던 나였던가.

사실 출입국에서는 그사이 서울과 지방에 숱한 사복 경찰들을 풀어놓고 샅샅이 뒤집고 있었다고 한다.
무슨 살인 죄수도 아닌데 이렇게 까지 강력 대처 할 줄 몰랐다.


오랜 흐린 날씨 끝에 모처럼 따사로운 겨울해가 서울의 한강을 비추고 있었다. 구름들 사이에서 태양은 오랜만의 기지개를 켜며 살얼음 아래서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의 물결에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한강변의 마른 나무와 풀잎들이 가벼운 바람결에 귀를 열고 몸을 흐느적이고 있다. 쉽지 않게 찾아온 한적하고 고즈넉한 한강변의 자태다.
두 중년 남녀가 저 멀리 다리 위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천천히 강변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이 바깥공기가 정말 오랜만이란 듯이 가슴을 쫙 펴고 심호흡을 한다.
택시를 타고 같이 도망치던 그날 밤, 그들 둘은 사우나 방에서 밤을 새운 후, 교포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한강변 어느 빌라의 낡고 축축한 싸구려 지하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민정은 가슴 깊이 묻어 놓았던 얼음 속에 포장 되어 있던 뜨거운 사랑을 드디어 마음 놓고 쏟아 붓기 시작했다. 한 번도 성남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험을 무릅쓰고 장을 봐오고 약을 사오며 살뜰히 보살폈다.

저 한강 나루터에서 물오리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그러자 뒤에서 또 한 마리가 푸르릉 날아오른다. 두 사람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사색에 잠긴 듯 한참 바라본다.
"아마 같이 있는 짝궁인 거봐요"
"역시 운명을 같이 하는 놈들이군."
운명을 같이 한다는 말에 민정은 생각에 잠기었다. 민정은 성남이 안고 있는 아픔들을 조용히 옆에서 살펴보았다. 그의 과묵이 좋았고 그의 교양과 품위가 좋았다. 전 남편과 비교가 되였으며 매일같이 분주한 식당 홀 서빙에서 무시로 그의 손목을 잡고 그의 엉덩이를 건드려 보는 그 많은 뭇 사내들과 비교가 되였다 .성남은 말없이 그의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에게는 천번의 키스와 백번의 색스는 아니어도, 월매나 나의 질녀와는 다른 자신만의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누가 삭풍에 끄달리는 나무숲은 고통 받는 짐승과도 같다고 하였다. 곰팡이 냄새 그득한 지하방에서 도주범이란 곽 안에서 그들은 숨소리 죽여 가며 신음하는, 삭풍에 끄달리는 숲속의 짐승 같았지만 서로를 품어 주고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며 같이 가야할 운명을 후회 없이 맞이하고 있었다.
.
저 다리 밑에서 누군가 한강변에서 팔을 끼고 조용히 산책하고 있는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민정 이는 허리를 굽히며 말하고 있었다.
"이거 행운의 네 잎 크로버 아닌가요? 불쌍하게 다 말라 얼어 버렸네요. 돌아오는 봄날에는 다시 살아 날가요."
그 옛날, 나폴레온이 허리를 굽혀 땅위의 네 잎 크로버를 만질 때 적군의 총알이 그의 머리위를 스쳐 날아가 그의 목숨을 건져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풀은 행운의 상징물이 되였다고 하지만 이 마르고 얼어버린 행운의 풀은 과연 행운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우리 걸음을 좀 다그칩시다. 저기 올라가서 지하철을 타고 간다 해도 출입국까지는 아마 시간이 꾀 걸릴 거요."
"알았어요. 난 당신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햇빛 좀 더 쬐이라고, 우리가 싸놓은 짐은 그 사람들이 출국할 때 갖다 주겠지요?"
말을 마친 두 남녀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그들의 얼굴엔 있어 본 적 없는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아까 그 두 사람 갑자기 어디로 갔지?"
한강변 어느 은행에서 민정이 돈을 꺼낸 단서를 발견하고 한강변으로 찾아와 긴가 민가 확실한 파악 없이 아까부터 그 두 남녀의 행적을 뒤쫓고, 있던 두 사복 경찰은 다시 한강 대교 아래쪽으로 들어가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한사람이 귀에서 이어폰을 내려놓으며 놀란 듯이 말한다.
"아니, 그 두 사람 방금 출입국에 와 자진 신고 했다네!”
“네?”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그들은 총총 한강변을 떠났다.

성남은 그날 나와 통화를 한 후 깊은 충격에 빠졌다. 둘은 자신들의 행로를 놓고 모진 진통을 겪었다. 그렇게 많은 희생의 대가를 속출 시키고도 궁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러나 울분과 절망의 하중을 감당 못해 휘청이는 곤고한 삶의 좌표를 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에까지 주어져야 하는가? 단연히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진신고를 결정하였다.
출입국에 와서 그들은 불법이던 불법이 아니던 이번 사건에 연루 된 외국인은 몽땅 강제 추방이란 최후 결론을 듣게 되었다.
.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저 친구들 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어떠한 처분도 제가 가중으로 받겠습니다!"
소나무 껍질같이 갈라 터지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아픔과 회한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옆에 서있는 민정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떠나는 날이 닥쳐왔다. 성남도, 민정도, 월매도, 철수도 모두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리 두 내외는 그들을 보내 주려 마지막으로 출입국에 왔다. 이제 곧 그들은 외국인"보호소" 화성을 거쳐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 언제 다시 한국에 들어 올 수 있어요?"
울음 섞인 월매의 피타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누구도 확답을 줄 수 없다. 성남의 자수로 출입국에서는 앞으로 일단 환대 정책을 쓰겠다고 했지만 이후의 일은 모두 미지수다.
"면목 없습니다 .평생 이 짐을 지고 가게 될 것입니다."
말을 하는 성남은 고통스레 눈을 감아 버린다.
결국 공든 탑은 이렇게 와르르 다 무너졌다. 우린 억이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아저씨 부디 건강하십시요! 아무 때 건 꼭 다시 돌아오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성남을 마주하고 서 있는 젊은이는 바로 그 지킴이 신입 공무원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이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 때문에 참았던 눈물과 설음이 이렇게 갑자기 터져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아, 2006년, 그해 겨울은 너무 춥고 캄캄하였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많은 것을 깨달은…
.


에필로그

바로 한해 뒤엔 2007년, 한국엔 재외동포들에 대한 “방문취업(H-2비자)제”라는 새로운 정책이 실행되었다. 자유왕래가 보장되고 단순노무 같은 제한적인 취업보장이 이루어져 한국에 3D업종 등 인적 자원이 많이 개선 되였고 중국 동포들의 불법체류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F-4비자,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인권 보장, 재입국을 할 수 있는 합리화한 제도 등 부단한 개선이 실행되고 있다.
2006년에 떠나간 친구들의 소식을 나는 아직도 모른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때 일이 지금 발생했다면…
한 시대는 한 시대의 비극과 아픔이 있다. 그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 역사다.

2016년, 2월14일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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