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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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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
2020년 02월 03일 22시 24분  조회:771  추천:0  작성자: 류재순
단편소설

오 후 네 시

류 재 순

 
뚜벅뚜벅…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늦은 밤 5층 건물의 적막을 깼다 두 사람의 잦은 발자국 소리가 마치도 박자가 맞지 않는 작은 드럼북 소음 같다.
앞에서 내려가는 키가 훌쩍 큰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한 남학생 뒷등의 풍뗑이 같은 감색 책가방이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조금씩 흔들린다. 그 뒤에, 상중키의 오십대 남자가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만 들어가세요.”
“그래 부탁한다. 이번 시험 부디 차분하게 있는 실력 잘 발휘해라. 모르는 것 있으면 언제든지 수시로 연락하고, 좋은 소식 기다릴게.”
학생은 꾸벅 인사하고 출입문을 열었다. 오십대 남자는 학생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또다시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3층 학원 교실로 들어섰다. 문을 닫고 발걸음을 멈추니 사위가 영안실처럼 괴괴했다. 학원 강의실의 불빛이 마침내 하나의 중심체를 발견한 듯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벽에 걸려있는 검 녹색 칠판, 학생들의 온기를 싹 잃어버리고 숨죽이고 있는 작은 책상과 걸상들… 어디에도 생기는 찾아볼 수 없다. 쓸쓸함과 막연함이 밀물처럼 덮쳤다.
 
학원 영어 선생님, 그랬다. 이제 쉰하고도 여섯 고개를 넘은 고등학부 영어 과외 강사는 오늘부로 종지부를 찍을 거다. 참 빨랐다. 이렇게 강단에서 보낸 세월이 어언 30년, 기타를 치며 이범용 한명훈의 ‘꿈의 대화’를 열창하던 대학시절의 그의 풋풋한 가슴에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지 깊은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50 몇 년이란 세월은 갔다.
 
대학 영문학과를 나온 그의 젊은 가슴엔 채색 풍선이 붕붕 떠 있었다. 이름 있는 대기업도, 콩나물 틈새 같은 좁은 희망의 골목길을 밀고 들어가려는 공무원 시험도 그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영문학은 그의 평생 취미였고 사랑이었다. 마치도 노스텔지어란 사랑의 그물에 빨려 들어간 꿈꾸는 파랑새 같았다.
과외 학습열에 한창 열기를 뿜던 대한민국의 엄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애들의 학원 주소지를 검색하였고 영어 학원은 또 그 많은 과외 학원 중에서도 검색 첫 코스로 주목받았다.
어느 한 영어학원에서 그를 불렀다. 파랑새는 운이 좋았다. 3년이 지나자 그는 이백여 명 학생을 수용하고 있는 이름 있는 영어학원의 스타 강사가 되었다. 월급봉투는 대기업에 들어간 동창들보다 두둑했고 자기 아이를 들어가게 해달라는 학부형들의 전화는 항상 그를 어정쩡하게 하였다. 그때는 분명 그 인생의 르네상스 시기였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그 돈 봉투의 금액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담뱃값과 점심값을 내놓고는 그 수익금을 신혼 생활에 애까지 키우는 젊은 아내의 통장으로 모두 들어가게 했다. 그의 젊음은 몽땅 학원 일에 불태웠다. 강단 앞에 서서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특기와 열정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이 한가지만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의 학원엔 서울대를 지망하는 영훈이라는 고등학생이 있었다. 모든 과목이 다 우수하지만 영어성적은 항상 뒤꼬리에 처져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영어에 취미가 없는 아들을 앞세우고 영어 학원을 찾아왔다. 다른 성적은 다 좋은데 영어 성적이 뒤져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찾아온 학생 어머니의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얼마 전에 위장암 수술을 했다고 했다. 학생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학생 아빠는 한국의 미국 회사에서 일하다 미국에 있는 본사로 들아가 있은지도 몇 년 잘 되었는데 아들을 빨리 미국유학을 시키려 해도 영어가 너무 떨어져 집중 보충공부를 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그는 암묵적으로 그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려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밤새우며 교안을 짜고 충혈된 눈으로 학생을 붙들고 일대일 교육을 진행해 나갔다. 물론 그 한 학생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느 날 학원 수업이 끝나고 개별 학생을 위해 특별 지도를 하며 다음날 교안을 짜는데 재킷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심하게 진동했다. 그날 결석한 영훈 학생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궁금하고 불안하던 터라 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니?”
“선생님 죄송한데 이제부터 제가 학원에 다닐 수 없을 것 같아요.”
“왜?”
“어머니가 다시 입원하셔서 학교 끝나고 바로 병원에 한 번씩 들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머니 병이 재발해 위태로운 상태라 외동아들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어머니를 병문안 가려 한 것이었다. 학교와 집 그리고 학원과 병원의 거리는 학생이 소화해 낼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능시험이 코앞인데 지금 손 놓아버리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어머니의 애절했던 눈빛이 축축한 그의 가슴속 한구석으로 집착스레 스며들었다.
“알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그때부터 선생님은 학원 수강이 끝나면 바로 병원 옆 커피숍으로 달려가 영훈 학생의 영어 수강을 보충해 주었다. 밤 9시가 넘어 시작한 학습은 한 시간만 해도 10시가 넘었고 집까지 차로 태워다 주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었다. 눈에 핏발이 서고 싸느런 김밥 도시락이 항상 그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다. 그래도 지칠 줄 몰랐다. 드디어 대학수능시험이 시작되었고 초조한 기다림의 끝에 시험 결과가 나왔다.
“선생님, 저 합격했어요!”
헐레벌떡 학원까지 달려와 흥분으로 끝말을 잇지 못하는 제자 앞에서 이 파랑새 같은 강사의 날개는 힘차게 푸득이는 것을 느꼈다. 날개에 반짝이는 구슬처럼 아롱아롱 매달린 희열은 장시간의 모든 고뇌와 피로와 중압감을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이런 순간순간의 유혹 때문에 세상만사를 제쳐놓고 자기 한 몸을 이 학원에 다 바쳐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행이 집안일은 아내가 다 알아서 처리했다. 파랑새는 아무 잡념없이 한 방향을 향해 날아만 가면 됐다. 밤을 새우며 교안을 짜고 고등시험 자료들을 연구하고 학생들의 수능성적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는 날들의 연속으로 세월은 흘러갔다. 아내는 원망스럽게 그를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라 불렀다.
 
스타 강사가 된 지 몇 년 만이었던가?
“당신 실력에 충분히 학원 하나 잘 꾸릴 수 있잖아요? 왜 다른 사람 밑에서 온 진을 다 빼요?”
아내의 성화다. 친인척들도 부추긴다. ‘경영’이라는 것보다는 아무 부담 없이 그저 애들을 가르치는 데만 온 정력을 쏟아 붓고 싶었던 그였건만 모든 집안일을 아내 혼자에게 맡겨놓고 있는 자신이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아내의 제안이라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그마한 학원 하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학원 창밖에 갑자기 휘휘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 투덕투덕 난데없는 빗방울이 창문 유리를 두들겼다. 고요가 깨지고 사색의 줄을 끊어놓는다. 그러나 이 시각 그의 머리엔 집요하게 지나간 일들이 줄을 잇는 밤 거미마냥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그 선을 이어놓는다.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며 그는 계속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그래, 학원을 꾸리기 시작한 지 한 2년쯤 지난 뒤였을까?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 늦게 집에 돌아오니 어린 아들은 눈물방울이 마르지 않은 채 방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성빈아, 웬일이니, 엄마는?”
“아빠 나 배고파”
몇 시인데 아직 저녁도 못 먹었다니. 그는 다급히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하는 녹음된 기계 소리만 반복되었다. 음성 메시지를 남겨도 응답이 없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니, 온 세상이 하얘졌다. 종잡을 수 없는 공포가 덮쳐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무슨 정신으로 아들애에게 밥 한술을 먹여줬던지 기억이 없다. 밤을 꼬박 새웠던 그에게 새벽녘에야 냉철한 무엇인가가 머리를 쳤다.
집안일에 너무 무관심했고 아내의 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과 학원 사이에서 그는 어릿광대처럼 뛰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초점 잃은 눈빛, 학생들의 질문에도 멍하니 인지도 떨어지는 어수선한 몸짓, 학원은 생기를 잃고 수강생 엄마들은 벌써 이상해진 학원 모습에 민감해져 있었다.
어느 날, 인천 댁- 큰 형님네 집에 사는 어머니가 올라왔다. 몰라보게 초췌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는 놀랬다.
“어머니, 웬일이세요?
“웬일? 네 꼴을 봐라!‘
“나 다 알고 왔다. 성빈 어미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냐?”
어머니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가져왔다.
 
한국사회의 어느 모퉁이에서는‘애견 백화점’ 건설 마케팅이라는 사람들의 상상 속의 금자탑이 돌개바람처럼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었다. 그 바람은 거센 마력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수십억 모아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애견들의 천국 같은 백화점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세상살이에 아직은 서투른 젊고 순진한 그의 마누라도 그 환상적인 행렬에 끼어들었다. 투자한 만큼 몇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니 남편만 돈을 잘 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그 돈을 몇 배로 불릴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열정이 불타올랐다. 남편이 벌어들여 오는 돈들을 다 투자 하였고 시숙, 여동생 친정 부모님 것 까지 그 현대식 피라미드식 금자탑 건설에 쏟아 넣었다. 아내는, 피보나치수열처럼 1이 3되고 3이 5되는 마법 같은 자람의 규칙이 바로 그곳에 절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설계와 꿈은 저 우주 공간 어디에선가 바람에 몰려온, 유혹을 가득담은 황홀한 구름 황궁이었다. 모든 것은 흩어지고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 많은 사람이 투자하여 지은 몇 십억의 건물은 폐물로 되었다. 그와 함께 그들의 십여 억도 다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아내와 소식이 단절된 사이에 죄어오는 공포 속에서 그는 정말 많은 추측과 상상을 했었다. 외도? 납치? 어쩐지 이상한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경찰 문밖에서 머뭇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다 머리를 떨어뜨리고 황망히 돌아 선적도 몇 번 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런 날벼락이 집안에 떨어졌다.
어머니는 친인척들에게서 이모든 사실을 자초지종 다 알게 되었던 것이다. 누누이 사실을 다 밝힌 어머니가 푸념을 하며 무너지는 한숨을 쉬면서 나갈 때까지도 백지가 되어있는 그의 머리로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창에 맞은 짐승처럼 피를 흘리면서 날뛰고 싶었고 울부짖고 싶었지만 전기 방망이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몸과 마음은 지심 깊이 떨어진 듯 도저히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딘가에 가서 몸을 숨겼던 아내가 결국은 집에 들어왔다. 물독에 빠졌던 생쥐 모양의 아내, 그 모습은 너무나 참혹했다. 동그마니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아내의 꼬부라진 새우등 같은 뒷등을 바라 보늬라니 귀싸대기라도 후려치며 함성을 터뜨릴 것 같던 분노의 불길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저걸 어쩌나 하는 원한과 측은함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폭풍전야를 예고하는 질식할 것 같은 침묵만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내의 꾹 다문 입술이 열렸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 뱉어졌다.
“우리 이혼해요, 나는 한 푼 돈도 없고 또 돈 벌 능력도 없으니 아들 성빈은 당신이 키워요.”
얼마나 당돌한 말이었던가. 왜, 왜 그런 일을 저질렀냐고 그렇게 따지고 싶고 묻고 싶은 말이 산처럼 쌓였는데 그의 입에서 외려 이런 되알진 말이 나오다니, 더 이상의 사죄도 해석도 없었다. 남자는 바라던 일이였지만, 그리고 이미 예고된 일이었지만 집을 망쳐놓고 들어온 아내의 입에서 이런 당찬, 뻔뻔한 말이 나오는 순간 손에 쥐어져 있던 휴대폰이 ‘팡!’하고 둘러메쳐지며 유리가 깨지고 각들이 뜯어져 나갔다. 자신도 이게 어떤 분노의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전번에 어머니가 오셨을 때 어머니가 모든 것을 결정 지어 놓고 간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을까?
“ 당장 이혼해라. 온 집안을 이렇게 풍비박산을 만들어 놨으니 집안사람들 눈에서 성빈 어미가 없어지지 않으면 우린 더 머리를 들 수 없게 될 거다. 그리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간 후에라도 다시 합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 내가 용서 못 할 것이다.”
우두망석 멍청하니 앉아 있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정신 차리라며 최후통첩 했었다.
불가사의한 일은 이렇게 터지고 말았다. 남자는 항상 정직한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많은 돈도 욕심낸 적 없었으며 그저 학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몰 붓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그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 유일한 그의 귀숙 처인 보금자리가 그렇게 무너져 버리고 있는 줄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어머니께서 내린 그런 강경한 결정을 자신으로선 반박할 이유와 힘이 전혀 없음에 가슴이 터졌다.
하지만 아무리 분하고 미치겠지만, 당신은 한 번도 이 가정에 신경 쓰기나 했나요. 하며 무관심했던 남편을 향해 악을 쓰며 소리라도 치든지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발목을 붙들고 성빈을 봐서라도 제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하던지, 여리고 어리석고 솔직한 아내의 모습을 남자는 몇 번이나 상상 했는지 모른다. 아내가 진짜 이렇게 소리도 치면서 빌고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니 모르게 고민에 시달리기도 했던 그였다. 그런데 모든 세상사를 다 읽었다는 듯이 아내는 강인해 있었고 굳어져 있었으며 냉각되어 있었다. 눈물도 사죄도 구걸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울고 있는 성빈이만은 부둥켜안고 전률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애가 깊이 잠든 새벽에 짐 몇 가지를 챙겨 그렇게 홀연히 떠나가 버렸다.
한때의 어리석음과 허망한 욕심 때문에 친인척들을 사분오열시키고 경제적으로 풍지 박산을 만들어 놓은.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한 징벌이었을까, 도주였을까?
상황을 듣고 난 법원에서의 이혼 절차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줄 몰랐다. 이혼 신청을 했지만, 그 결과가 내려오는 순간 텅 빈 머리와 허망한 가슴은 도저히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부부라는 인연은 도대체 무엇일까?
파랑새의 한쪽 날개 죽지는 피흘리며 떨어져 나갔고 어두운 곳에서만 푸득이는 밤 박쥐 발톱 같은 것이 그 가슴 고통의 우주속에서 갉음질을 하고 있었다.
얼마간 방황의 날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떠나간 마누라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친인척과 세인들에게 ‘사기꾼’이라는 낙인이 찍혀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무엇이 가슴을 채웠다. 형제 가족들의 빚을 온 힘을 다하여 자신이 최대한으로 꼭 갚아 나가리라 결심했다. 밤과 낮이 따로 없는 학원 강사의 생활은 기어코 이 빚들을 갚아야 한다는 그의 악착스러운 집념 속에서 무겁게 힘겹게 지탱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를 팔고 아들과 함께 옥탑방 셋집으로 이사했다. 조금이라도 빚을 빨리 갚기 위해서였다. 집안일로 학원 경영에 많은 차질을 가져왔고 떠나간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는 다시 수습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온 정력을 학원에 올인했다.
열 몇 살 된 아들도 벌써 철이 드는지 해거름녘이나 밤늦게 돌아오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않고 저녁 찬밥도 군소리 없이 혼자 먹고 먼저 자리에 누워 잠들 곤 했다. 그러나 그는 가끔 어린 아들이 꿈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가느다랗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었다. 엄마들이 참석하는 학교 모임에도 빈자리를 내어줘야만 하는 슬픈 일들을 어린 아들이 한마디도 내뱉지 않는 것이 더욱 참을 수 없이 가슴 아팠다.
 
하루는 그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고향 불알친구였다 어려서부터 물장구를 치면서 같이 커 왔고 같이 상경하여 대학 공부했다. 아니, 두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었다. 친구의 마누라와 아들 성빈 엄마다. 남자들 두 친구가 어려서부터 똑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탁구 짝꿍이며 기타반주 애호가였다면. 그 두 여자애도 항상 손을 마주잡고 다니며 두 남학생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으며 두근두근 뛰고 있는 작은 가슴을 두 팔로 막으며 비밀스런 사춘기 얘기를 밤을 새우며 했었다. 익살스런 얘기 속엔 늘 자신들의 눈동자에 박힌 그 두 남학생의 하루하루의 신비한‘시추에이션’이 들어 있곤 했다.
같이 상경하여 대학을 졸업할 때도 휴일이면 그들 넷은 학교 캠퍼스를 멀리 떠나 저녁노을이 잔잔한 푸른 언덕과 한강 둔치에 앉아 ‘꿈의 대화’를 부르곤 했다.
… …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운 거리에
가만히 너에게 나의 꿈 들려주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를 주니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 …
졸업을 앞둔, 쫑파티가 끝난 어느 날,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유진이가 널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
“응? 유진이?”
“그래 너 영어 수준이 장난이 아니라며 영어로 대화할 때 너무 멋지대”
조용하고 말이 적으며 늘 새물새물 웃는 눈매를 가지고 있는 작고 가냘픈 몸매를 가지고 있는 유진이다. 그러나 의외로 남의 말에 솔깃하기 좋아했고 사람을 바라보는 크고 맑은 눈은 착한 양처럼 티 없이 순진해 보였다. 사실 오래전부터 깊이를 숨겨 놓은듯 한 조용한 모습과 청순한 눈빛은 그의 마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었다. 사실 두 남자애의 성격은 완연 달랐다. 영어를 잘 하는 이 친구는 조금은 우직스러울 정도로 하나에 묻히면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릴 줄 모르는 단순하고 정직한 반면 저쪽 종원이란 친구는 일찍이 수학 천재란 말까지 들을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순발력도 강하며 변하는 환경에 적응력도 강했다.
“어제 나도 혜나 불러내어 데이트 좀 했어. 향후 우리들의 취업 얘기랑…”
친구가 불쑥 내뱉는 말이다. 항상 큰소리로 웃기 좋아하고 익살스러우며 주견을 숨길 줄 모르는 혜라의 모습은 나름의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종원친구가 혜라의 의사 분명하고 활달한 성격을 좋아하며 썸을 타고 있는 줄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유진은 성빈의 엄마로 되었고 혜라는 친구 종원의 마누라로 되었다.
만사를 제치고 하나의 취미와 신념에 올인하며 영어 학원에 영어강사로 들어갈 때 그 수학머리는 용케도 그 콩나물 틈 속 같은 경쟁력을 뚫고 이름있는 S 회사에 들어갔다. 영어 학습열이 붐을 이루고 학원학습을 하나의 필수 코스로 알고 있던 그 나날에 영어강사의 수입은 유명회사에 들어간 수학머리를 훨씬 초과 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서로에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두 친구는 서울 공덕에 있는 ‘신라스테이’에서 맥주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당신은 영어 학원에서 엄청 큰 수입을 올렸었다며?
“그거? 우리 집 일...자네도 소문 다 알고 있잖아…”
수학머리는 무슨 말을 더 물으려 입술을 움찔거리다 맥주 한잔만 쭉 들이켰다. 그리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도 회사에서 오래 못 갈 것 같아, 워낙 잘 나가는 젊은 층이 밀고 올라오니, 나 과장으로 승급하던 해 아들놈 미국 유학 보낸 거 알지? 아직도 전셋집 신세 지고 있다네. 다시 방법을 생각 해 봐야겠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종원에게는 이름 있는 큰 회사의 금베지 광택이 어디에선가 빛나고 있음을 강사는 마주 앉은 공기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어떤가,
그랬다. 어느 날 부터인가 학생 수가 부쩍 줄기 시작한 그의 학원도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설렁해지는 냉기를 막을 수 없었고 그래서 안간힘을 쓰며 고민 중이던 터였다. 대한민국 엄마들의 자녀 학원 열의는 다 어디로 갔나? 이제 겨우 절반 빚밖에 갚지 못했다. 저성장, 저출산- 매스컴에서 자주 뜨는 문구들이다.
“누가 소개를 하는데 저쪽 서울시 서남권 쪽에는 이쪽 서울 중구보다 월세가 훨씬 싸다는데 나 어떻게 그쪽으로 자그마한 학원자리 하나 알아볼까하는 중이야”
낯선 곳이다.
“그쪽의 학습 열기는 어떻데?”
“뭐가 어떻겠어, 다 그렇지. 그나마 집세가 많이 싸다니 웬만하면 살아남을 거 아닌가?”
 
그는 원해서라기보다 쫓기다시피 신도림 부근의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 학원자리를 마련했다. 학군이 좀 되는 곳이어서 희망을 걸었다. 수중에 가진 게 없는 그에게는 이것이 자신의 몸체를 줄이고 소비를 줄이는 최적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알심 들여 학원을 꾸려놓고 학비 수준을 줄여 놨건만 학원을 찾아온 학생은 고작 십여 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나도 벌써 흰 머리 새치가 생기는 것 같아. 강단에 나서기가 어떤 땐…”
그랬다. 근방의 학원들을 보면 모두 이삼십 대 혈기 왕성한 젊은 강사들이었다. 자신에게 저런 모습은 이미 기억 저편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쎔 숙제 만땅이네요.”
“우리 꼭 스카이(SKY) 안가도 돼요”
가끔은 낯설기만 했다. 교사의 존엄으로 리액션 같은 것을 날리고 싶기도 했지만 어쩐지 자신이 스마트하지 못하고 빈티지같은 자괴감 같은 것 때문에 학원의 이 오십 대 후반의 선생님은 포장하려 애썼고 뒤떨어지지 않으려 분발했다. 투 잡스라도 해야하나? 줄어드는 학생 수 때문에 이런 생각도 불쑥 들 때가 있었다.
 
그는 또다시 잠깐 사색을 멈추고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를 막아 버티고 있는 창문 유리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유리창들이 마치 아픔을 견디고 있는 자기 같았다. 머릿속 밤 거미는 계속 사색의 망줄을 이어간다.
 
“쎔, 저 미국 유학가게 됐어요!”
어느 주말이었다. 미국 유학가기 위해 특수 강습을 받았던 영훈학생이 찾아왔다. 그때 마침 종원 친구도 여유가 생겼다며 치맥 한잔 하자며 로비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야 잘됐다. 근데 어머니 병은 어떻게 됐냐?”
“미국 둬 번 들어가서 치료 받으시고 지금은 많이 나았어요. 이번에 같이 들어가려구요. 아버지 퇴직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거기서 계속 치료받으며 계시게 될 것 같아요.”
유학가게 된 일도 경사였고 어머님 병이 호전되었다는 소식 또한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따봉! 봉주르!”
 
셋은 잔을 부딪치며 축배를 들었다.
‘그런데 영훈 학생, 미국가면 부디 우리에게 가끔씩 소식 전하는 거 잊지 말라고, 아참, 내 아들도 미국 있는데 서로 연락도 하고.” 종원은 재빠르게 영훈 학생 아빠의 연락처까지 주고받기에 분주했다. 학생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그의 영어 선생님이 문밖으로 같이 나왔다.
“선생님 집 얘기 다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두 분이 갈라지셨다는 소식에 많이 마음 아파하시며 그 아주머니와 연락 하는 것 같았어요.”
사실 그 영훈 어머니가 병원 입원 중이였을 때 학생의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는 걸 알고 아내를 설복시켜 수시로 병원을 드나들며 병수발을 들게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훈 학생의 어머니께서 떠나간 자기 마누라와 연락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랬다. 그리고 많은 궁금함이 치솟아 올랐다. 그러나 학생에게 더 무엇을 묻고 싶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친구는 학생이 떠난 후 치킨과 맥주를 앞에 놓고 대학 문을 나설 때의 꿈을 이야기했고 학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겪었던 희열과 번민을 주고받았으며 털어놓고 싶지 않은 가정사를 얘기했다. 가정사, 그 아픈 얘기를 왜 꺼냈을까? 아들 성빈이는 이 홀아비 아빠 손에서 13년을 컸다. 엄마의 따뜻하고 애절한 사랑의 햇볕이 결핍한 아들애의 성장을 지켜보는 그의 가슴엔 항상 녹지 않는 음지의 그늘이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가끔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그늘진 얼굴을 보며 이혼은 정말 옳은 일이였을까 하고 판단할 수 없는 사색에 잠기곤 한다.
얼마 전 그는 중구의 충무로 지하철 8번 출구를 나오며 걷노라니 왼쪽 길옆에 줄지어 늘어선 ‘애견백화점’건물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펫하우스’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 집 막내둥이들’ ‘동물들의 왈츠’ 참 간판 이름들도 다양하였다. 정말 뜻밖에 이런 매점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세상은 첨단을 향해 달리는데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은 커가기만 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또 다른 향수를 찾는다.
십몇 년 전에 누군가는 이런 미래를 확신하고 투자를 했지만 지금 같은 붐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선 사람들은 인생을 말아버렸다. 성빈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세상 흐름의 타이밍을 잘 못 맞춘 사람들은 널뛰듯 흥하고 망했다. 성빈이 엄마는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사실 40대 초반에 돌싱이 된 영어강사, ㅡ그는 꽤 멋진 남자였다. 이마를 덮는 숱 많은 머리와 길게 쭉 뻗은 두 다리를 가진 꾀 훤칠한 키에 우뚝 솟은 코 등 위에 얹힌 안성 맞춤한 안경, 그 속에 침묵에 잠겨 있는 조용한 눈빛은 주위의 눈길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적어도 십 년 정도까지 더 젊게 넘겨짚곤 했다. 그의 형편이 어려운 줄 알면서도 그의 사람 됨됨을 잘 아는 학부모들은 이 젊고 바르고 고독한 선생님에게 짝을 무어 주려 여기저기서 혼사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에게는 확실히 아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잠자리를 펴주는 여인이 필요했고 학원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들어설 때 따뜻한 불빛이 집안에서 흘러나오길 수도 없이 갈망해 봤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소박한 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학원 일에만 몰입했던 그는 한 번도 레스토랑이나 룸 같은 곳을 들어가 본 적 없으며 노래방 도우미들의 추파를 가슴에 새겨본 적도 없었다. 웃음 날리며 지나가는 뭇 여인들에게 한가하게 눈요기를 할 사이도 없이 총총걸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바보였을까, 멍청이였을까?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미쳐버리면 이렇게 쳇바퀴 돌 듯하고 생활에 푹 파묻혀 버리게 되는 걸까?
 
그런데 아내가 떠난 그 이후의 생활은 좀 달랐다. 아무리 힘든 나날이어도, 아무리 생존 의식주에 정신없이 쫓기는 나날이어도 40대 중반이었던 그에게는 자신을 속일 수 없는 젊음의 욕망이 꿈틀거리며 그를 무시로 괴롭힐 때가 있었다. 더운 여름날 고등학부 여학생들이 팬티를 겨우 가릴 정도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선생님에게 다가와 팔을 붙들고 새물새물 웃으며 이것저것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를 할 때면 싱긋한 봄 향기 같은 채취와 함께 그의 온몸은 경직되곤 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체 반응에 놀랐고 화끈 달아오르는 수치심에 황급히 칠판으로 다가가 몸을 돌려세웠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중년 남자의 왕성한 성은 그의 오랜 돌싱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꿈틀거리게 하였다.
 
가끔은 현실에서 도망쳐 나와 어딘가에 숨죽이고 있던 그 날의 숨결들을 한 겹 한 겹 펼쳐 보게 된다. 사실 아내 유진이가 같이 살던 때의 그의 성은 지금 생각해보니 과분할 정도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신혼 때도 그랬고 갈라질 무렵에도 그랬다.
강사는 밤늦게 돌아와 침대에 고꾸라지면 세상만사를 모르고 쿨쿨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새벽녘 화장실에 한번 갔다 와 잠자리에 누우면 불끈하고 금방 치켜세운 팬티를 치솟고 일어선 놈이 있었다. 그것은 아랑곳없이 그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신경 줄을 타고 근질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는 서슴없이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아내를 끌어당겨 그것의 뜨거운 피를 식혀 줄 자리를 서슴없이 찾았다. 아무 준비도 없는 아내였지만 아내는 잠결에도 항상 너그럽게 그것을 받아들여 식혀 줄줄 알았다. 처음엔 자신의 그런 준비도 허락도 없는 처사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끔 늦은 퇴근길에서도 작은 선물 하나라도 사 들고 오군 했었지만 그것이 점차 습관이 되면서 부부간에 자연히 받을 수 있는 혜택으로 묵인되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그래서 그는 한 번도 또 다른 ‘해소처’를 찾을 생각을 전혀 가져본 적 없이 온갖 정력을 학원에만 쏟아 부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아내의 얼마나 큰 아량이었으며 사랑스런 구석이었는지 휴~ 이제와 생각해보니 가슴이 아프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부간에 그 소리 없는 교감들이 아내가 남편에 대한 또 하나의 뜨거운 사랑이었음을 왜 진즉 깨닫지 못했었을까?
 
간만에 세미원에 놀러갔을 때었다. 길섶에 널어진 왕바랭이속에서 우뚝서있는 부처꽃 몇 대가 보였다.
“이거 꽃말 알어?”
“...”
“사랑의 슬픔이래. 근데 그거 알아? 혹 갈라진다고 해도 만나야 할 사람은 지구를 몇 바퀴 돌아서도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된데 운명처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아무리 피하고 피해도 언젠가는 부딛치게 된데, 숙명처럼.”
오늘 우연히 그때 들었던 유진의 말이 유령처럼 그 눈앞의 공기속에서 부유(浮遊)한다.

누군가 그에게 은행에 다니는 혼기를 넘긴 사십 대 아가씨를 소개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작은 카페에서 그들은 만났다. 말끔한 피부와 세련된 옷맵시는 지적이면서도 냉철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긴 생머리 속에 감춰진 그의 로련한 눈길은 처음부터 남자를 당황하게 했다. 영어 학원 강사며 나이가 얼마라는 정도밖에 더 많은 정보 없이 찾아온 이 아가씨는 일단은 남자의 보기 드문 시크한 모습에 입귀를 올리며 얇은 미소를 보낸다. 그러면서도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 깐깐하게 물어왔다.
남자는 마누라와의 이혼 사유를 털어놓았고 혼자 키우고 있는 아들애를 얘기했으며 아내가 남겨놓은 빚을 갚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 이혼까지 했는데, 그 빚을 선생님이 갚아요?”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친인 들이고 그 사람은 전혀 상환할 능력이 없어서.”
그는 숨김없이 솔직한 생각을 털어놨다.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도망쳤어요? 짐을 언제까지 메고 가야 합니까?”
상대방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맞이할 현실을 얘기했다.
글쎄 나는 왜 이런 현실을 따져보지 않았지? 남자들의 머리는 아무래도 항상 이런 사전 ‘팸투어’ 같은 것들이 부족한 것 같다. 그저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고 그리하여 따뜻하고 안정된 작은 새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그의 단순하고 소박한 욕망은 버벌 티의 거품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다. 갈라질 때 여자는 그래도 지금부터라도 그 당치도 않은 빚더미를 집어 던지면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어쩐 일인가? 이 난감한 현실 앞에서 몇 년 만에 만나는 여자인데도 그는 설렘도 없었고 애틋함도 없었다. 철부지인 듯 한데도 어딘가 곁에서 늘 느낄 수 있었던 유진의 에로틱함과는 너무나 다른, 여자의 흐트러짐 없는 과분한 냉철함이 싫었다.
그렇다고 그 여자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당연한 것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는 문득 당대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들이 가져야 한다는 ‘3M’-말하자면 메너, 무드, 머니 이것들 중 자기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간단히 몇 글자 전송하였다.
‘죄송합니다. 저의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빕니다.’
침대에 누워서 탁상에 턱을 고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하지 않던 말을 꺼냈다.
“아빠, 혹 엄마 소식 알아? 우리 찾아가면 안 돼?”
그는 한참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이 복잡한 사정을 어떻게 아들에게 해답해야 할지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말았다

동창 부친상에 적지 않은 친구들이 모였다. 그곳에 종원은 없었다.
그는 선배에게 혹시 종원의 소식을 아느냐 물었다. 생각해보니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한자리에 앉고 보니 모두 아직 50대에 걸려있고 60대를 넘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다사다난한 세대들이다.
“그 친구 소식 아직 못 들었나? 조기 퇴직했어.”
종원의 소식을 묻자 옆 선배가 말한다.
“아니, 회사에서 인정받고 잘 나갔었잖아?”
“그럼 뭘 하나, 이 불경기에 감원 감축한다고 야단들인데 빵빵한 젊은 층이 밀고 들어오는데 버텨낼 수 있나?”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이라는 이 울타리 밖으로 도망쳐 나간 걸까? 이름 있는 조직이라는 시스 템 속에서 빛을 내던 옷을 갑자기 벗는 순간, 자신 존재의 가치와 그의 몸에 있던 틀과 위엄은 순식간에 빠져나갔고 남아있는 자존심은절친이었던 그에게도 소식을 끊고 도피와 침묵이란 숨 막히는 하우스 속으로 꽁꽁 숨게 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이제 뭘 하나? 아직은 손 놓고 놀 나이가 아니잖나?”
“미국 뒷바라지 하느라 모아놓은 돈은 없을 테고 퇴직연금으로 이제 뭘 시작해보려 해도 전업 내놓고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하긴 나도 직장 그만 뒀다네. 재간이 없어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살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그 잘난 경비직 같은 것도 50대 1의 경쟁력이라나. 더러워서 그렇다고 없는 재간에 뭘 하나 펼쳐 보기도 그렇고”
“야 인마, 지금 백세시대란다 그럼 우리는 아직 중간역 밖에 안 왔다는 말인데 왜 이렇게 힘들이 빠졌어? 그러고 보니 딱 늦어진 오후 네시야. 자, 끝내기도 시작도 힘든 늦어진 오후 네시의 티타임, -허허”
누군가 불콰해진 얼굴로 술이 푹 취해 반쯤 남은 술잔을 들고 한마디 내뱉고는 남은 술잔을 쭉 비운다. 오후 네시의 게으른 햇살이 늦은 간이역의 창살을 힘없이 스치고 있다. 흐르는 하오다.
모두 할 말이 없었다.
어두워진 무드를 살릴 수 없었다. 그도 쓴 술잔을 비우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나오면서 그는 오랜만에 종원의 아내 혜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 간 거 말 안 했구나.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갔어. 그 영훈 학생 아버지가 에스코트하면서 둘 다 많이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야, 일자리랑. 유진이가 하도 너에게 비밀로 해 달라 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이상해졌다. 둘 다라니? 왜 하필이면 그 둘이 같이, 그것도 비밀리에? 십 몇 년 동안 소식이 딱 끊겨 한국 어디에선가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혜라의 말을 들으니 죽음만 기다리는 것 같은 유진이를 그때 그 영훈 학생 어머니가 측은히 여겨 남편과 연락하여 그쪽에서 다시 자리 잡게 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가정부로부터 시작하여 한인 유치원 선생으로 체면과 몸을 다 던져 버리고 억척스레 돈을 모으고 있으며 자리매김이 온정되자 한글 강사로 학원하나를 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알게 된 자기 남편도 직장에서 조기 퇴직을 당하자 아무도 모르게 유진이와 연락하여 그 근방서 작은 서비스 일거리 하나 찾아 일하고 있단다. 모두 그 학생 아빠의 덕이란다. 혜라도 아직 여기서 공부중인 딸만 아니면 당장 따라가야겠는데 왼통 불안해 못 살겠다는 것이다.
 
성빈 엄마… 무엇인가 울컥하고 목울대를 꽉 채웠다. 세상에 믿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두 남학생이 기타를 치고 두 여학생이 같이 소리 높여 부르던 그때의 그 열창, 그 피어나던 꿈들… 마지막까지 꿈을 저버리지 않고 무작정 달려 온 인생 50대 후반, 아, 움이 트던 봄날의 갈망과 녹음 무성했던 여름날의 열정, 지금 설익은 가을들녘엔 무엇을 남겼는가.
번잡하게 들끓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쉬고만 싶었다. 차갑고 혼잡한 도시 속에서 발걸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늘 마냥 주체를 못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학원의 모든 것에 눈길을 쭉 돌렸다.
계단의 희미한 불빛을 등에 지고 다시 뚜벅뚜벅 아래로 내려간다. 대문을 여니 쏴 하는 비바람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튕겨왔다.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어디론가 모두 숨 가쁘게 달음박질하고 있다. 은연중 자기도 과거와 현재라는 존재의 무게를 어깨에 메고 비안개 속에 서 있다는 것을 놀랍게 발견했고 그리고 그 속에서 또다시 뛰어야 할 자신의 환영을 보고 있는 듯 했다.
그는 가방을 머리에 이고 학원 뒤울안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허줄 한 기아 모닝 차량 앞으로 달려갔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에서 문자 들어오는 소리가 울렸다.
-나 종원이다, 너무 오랜만이어 할 말이 많은데, 우선 유진이 혼자 올 수 없어서 같이 미국서 돌아왔다는 거 알려준다. 돈은 많이 벌어 돌아온 것 같은데 지금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야. 성빈이를 데리고 와 달라고 하더라. 모든 것을 너 두 부자에게 다 주고 떠나고 싶은가 봐…
 
2019, 11, 15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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