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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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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단편소설 하얀 무지개
2019년 11월 22일 16시 31분  조회:1592  추천:0  작성자: 류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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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류재순 사진.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322pixel, 세로 4128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6년 04월 22일, 오후 6:19
단편소설
하얀 무지개

류 재 순
 
오래된 열기에 몸체를 한껏 줄이며 맥을 풀고 흘러가던 세린하(细鳞河)강물은 한식경 잘되게 급작스레 퍼부어 댄 소낙비에 시원히 갈증을 푼 철부지 애들 마냥 크고 작은 돌 자갈들을 신나게 마구 부딪치며 쏴쏴 소리쳐 흘러간다. 나는 예금 이와 나란히 책가방을 메고 싱그런 흙냄새로 콧구멍을 가득 메우며 세린하 강가의 젖은 풀숲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바짓가랑이가 다 젖어도 마냥 즐겁기만 하다. 세린하 강둑길로 왕가툰(王家屯)을 지나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예금이가 사는 영안툰(永安屯)이 보인다. 하학 후 으레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토요일의 반나절 수업은 나로 하여금 친구네 집까지 따라가 놀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금 이는 과자봉지안의 닭똥과자를 한 움큼 꺼내어 내 손에 쥐여 준다.
닭똥과자-말 그대로 닭똥 모양으로 튀겨 나온 과자 모양새를 보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불렀다. 모양은 그래도 그 특별히 바삭하고 달콤한 이색 맛은 우리의 입안에서 행복의 천국을 만들어 주었다
 
물기 가득 먹은 대기 속에서 씻은 듯 말끔해진 하늘 중천에 눈부신 태양이 우리 정수리를 따갑게 내려 쪼였다.
“저것 봐,무지개!”
예금이가 가리키는 저 먼 곳을 바라보니 채색 띠 같은 오색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찬란한 햇빛, 무한정 시야를 넓혀주는 청신한 공기, 무지개는 요정마냥 하늘에 동화 같은 다리를 걸어놓고 우리를 유혹하였다…
“와!”
많은 무지개를 보아왔으나 그날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지평선 저 어딘가에 꽂혀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인 덧 싶었다. 우리는 고개를 젖히고 입을 하 벌린 채 아무 소리 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러던 중 예금이가 문득 한마디 했다.
“근데 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전번 가을에 흰색 무지개를 봤데”
“뭐? 무지개가 흰색?”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큰 소리로 말도 안 된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할머니 손에서 힘들게 자라고 있는 내가 친구 덕에 이런 사치한 간식을 맛볼 수 있다는 고마움에 입을 봉하였다.
예금 이는 “재봉틀 집” 외동딸이었다. 그에게는 손재봉틀 일로 동네 사람들의 옷을 지어주며 품삯을 받는 재간 있고 인물 좋은 어머니가 계셨다. 그래서인지 예금이의 주머니엔 잔돈푼이 늘 떨어지지 않았다. 예금 이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 인물체격도 최고였지만 옷도 언제나 예쁘게 잘 입고 다녔고 책가방에 군거짓거리도 늘 있었다.
특히 닭똥과자는 그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와 나는 친구들이 다 인정하는 십대 문학소녀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틈만 생기면 저 멀리 세린하를 끼고 있는 우리 학교 근처의 버들 방천으로 가서 이해 못할 돈키호테의 대사를 모방해 보고 푸시킨 시를 읊곤 했다. 머리가 좋은 그는 교과서에 있는 고리키의 “해연의 노래”를 늘 큰 소리로 줄줄 낭송도 잘 하였다. 물론 공부는 내가 더 잘하였다. 나는 숙제를 꼬박꼬박 완성하는 노력파였지만 그는 대충대충 눈가림으로 해치워도 나와 조금 차가 날 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음도 좋으셨고 아는 것도 많으셨다. 그날도 예금이가 나를 데려 온걸 보고 반겨 맞으시며 내가 좋아하는 감자볶음이며 절인 깻잎을 내 놓으시며 배불리 먹으라 하였다. 그리고 예금 이와 함께 오래 놀고 잠을 잔 후 내일 돌아가라 하셨다. 또 남은 헝겊 조박들로 만든 작은 속옷 하나도 입으라고 내 책가방에 넣어 주셨다. 나는 주말을 그의 집에서 보내기가 일수였다. 이 모든 걸 나의 할머니까지 다 알고 계실만큼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정말 하얀 무지개가 있어요?"
"그래, 햇빛이 부족하거나 물방울이 부족 하거나, 벼로 말하면 결실을 못 맺은 쭉정이 같은 것이지. 살아가노라면 너희도 보게 되겠지.”
 
우리는 어머니가 들으실 가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문학을 얘기했고 반의 남자애들을 얘기했다. 예금 이는 반의 반장인 민 철 이가 책가방 안에 몰래 넣어줬다는 연애 쪽지도 나에게 보여 줬다. 이불 속에서의 예금의 커다란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다른 재간이 없는 나는 문학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는데 예금 이는 좀 망설이고 있었다.
음악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학교 교경절(校庆节) 때면 번번이 무대에 올라 맑은 목소리로 독창을 하군 하는 그에겐 또 다른 꿈이 싹 트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선생님은 그가 훌륭한 가수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졌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시험 준비를 한창 하던 어느 날 이었다. 전반이 발칵 뒤집어졌다. 예금 이와 반장의 연애편지가 선생님의 교탁 위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발견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연신 조용하라고 교탁을 탕탕 두드렸지만 들쑤셔놓은 벌집 마냥 교실은 끝없이 웅성거렸다.
“잘난 척 하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누가 그러는데 세린 하 다리 밑에서 둘이 뽀뽀 하는 것도 봤데 ”
점점 이상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책상에 엎드려 울던 예금 이는 끝내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같이 뒤따라 나서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꽥 소리를 지르셨다.
 
오랫동안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어수선한 학교생활 속에서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주말에 내가 그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나에게 하였다 -한 마을에 사는 어느 언니 벌 되는 친구와 함께 북조선에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외지로 옷감을 사러 나가신 어머니가 집에 없는 사이에 빨리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한창 북조선에선 이쪽을 향해 인력과 인재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때인지라
예금이 같은 경우, 나이도 어리고 노래 잘하고 인물 좋으니 예술대학 같은데도 거뜬 입학시켜 줄 거란 것이다. 모두 다 그 언니의 말 이었다. 북조선에 가서 유명한 가수로 태어나겠다고 하였다. 예금이의 얼굴은 또 다시 생기가 떠올랐고 그의 입에선 계속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말렸다.
나는 예금이가 북조선에 가는 것이 더 큰 출세의 길이 될 지 아닐 지는 아예 생각도 안했다. 단 그와 갈라지는 것이 싫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 엉엉 울면서 말렸다. 그러나 자신감에 잔뜩 부풀어져 있는 예금 이는 머리를 마구 흔들며 나를 마주하고 소리쳤다.
“두고 봐, 이담에 너까지 데려갈 수도 있지 않은가, 거기 가서 너도 유명한 소설작가가 될 수 도 있잖아! 생각해봐 너는 작가 나는 가수, 아주 우린 유명 빵빵 일걸!”
손뼉까지 치며 부산을 떨었다. 헤픈 웃음, 넘치는 열정, 안하무인식의 충만된 자신감- 예전의 그가 다시 살아났다. 그의 마음은 모든 것이 이미 굳게 결정된 상태였다. 그의 뒤에는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한 동네 선배언니가 있었다.
나는 머리를 떨어뜨리고 학교숙소를 향해 세린 하 강변 길섶을 뚜벅 뚜벅 걸었다. 세린 하는 누가 어디서 부르기라도 하는 듯 햇빛 아래서 물고기 비늘 같은 잔물결을 이루며 반짝반짝 줄기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강줄기의 끝은 어디일까…
 
세린하의 강물처럼 이미 저 멀리로 출렁출렁 흘러가버린 이 모든 옛일들이 지금 다시 고향을 찾아가는 나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돌아간다. 이번에 가면 꼭 한번 찾아가 봐야지. 이번 귀향길의 가장 큰 계획 중의 하나다. 그때 집에 돌아와 딸의 행적을 알게 된 그녀 어머니가 만사를 불사하고 압록강을 건너가 예금 이를 찾기 시작하였다. 반년도 안 되어 예금 이는 코 뀐 송아지처럼 꼼짝 없이 끌려 돌아왔다.
그 어머니는 평양의 어느 한 작은 방직공장에서 그녀를 찾아 내였다. 일하는 데는 보통 방직공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과외 문예 연출 단으로, 희망 있는 어린 가수로 자그마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연출하는 것을 본 평양 어느 예술단의 단장은 그를 이미 주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외동딸을 타향에 두고 떠나올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예금이는 징징 울면서도 그 동안 그리웠던 어머니였는지라 또다시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겠다는 풍성같이 부풀었던 꿈을 가라 안칠 수 없었다.

아무 경험도 없는 그는 어떻게 하면 가수가 될 수 있을 지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집에 사람이 없을 땐 무작정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나름대로 연습을 하였다. 그때의 중국은 호적 거주지가 한 사람의 평생 일터를 붙들어 놓던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앞 뒤 소통이 꽉 막힌,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작은 시골에서 자기를 둘러싼 담 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가려 천방지축 부딪치고 있었다.
 
뜻밖의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Y시의 가무단에서 가수를 모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소식을 접했을 때는 면접 볼 날이 단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붙들고 생전 가보지 않았던 Y시를 향해 부랴부랴 떠났다.
교통이 불편한 외진 곳에서 떠나 Y시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하루반의 시간이 다 소비 된 상태였다. 긴장하고 떨고 지치고, 끝내는 그의 편도선염이 도지고 말았다. 완벽한 준비들을 하고 온 뭇 가수들 앞에서 그는 아무런 실력도 보여줄 수 없었다.
"저 원래 노래 잘해요 나의 병 나을 때 까지 좀 기다려 줄 수 있나요? “
이 낯선 응시자의 당돌한 말에 면접관들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렇게 두 모녀는 김빠진 공처럼 후줄근히 집으로 돌아 왔다.
몇 년 만에 한번 있을 듯 말 듯 한 기회를 그녀는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자신이 면접 본 여느 가수 들 보다도 노래를 잘한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평양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어머니와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나는 가끔 그녀를 만났다. 내가 학교에서 우리끼리 조직한 문학서클 얘기를 하면 그녀도 같이 흥분되어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의 운명을 얘기를 하며 그 중의 대사들을 큰 소리로 줄줄 외웠다. 그리고 북조선의 유명 시인 조기천의 시도 얼마나 많이 외우고 있는지 몰랐다. 사실 자기도 가끔 시를 쓴다고 하였다.
그가 낭송하는 자작시를 듣노라면 교실 책상머리 얘기만 알고 있던 우리 같은 단순한 문학도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넓은 폭의 생활 감수성과 기발한 상상력을 뽐내고 있어 나를 심히 놀래 우군 하였다. 나는 우리 문학 서클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그녀는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진절머리 나는 학교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그래도 자기는 가수가 되는 것이 적성이라 하였다. 방법도 정보도 스승도 없이 꽉 막힌 구석진 자그마한 촌마을에서 그는 방향 잃은 사슴마냥 마구 날뛰었다.
 
그때 우리 집은 시골이 아닌 국가의 양식공급을 타먹는 작은 시민생활을 하고 있는 때여서 가끔은 배급 받는 밀가루를 가지고 중국 한족들에게 배운 대로 물만두를 만들어 먹곤 하였다. 조선족 시골 사람들이 잘 먹어보지 못하는 중국식 물만두를 예금이는 너무나 좋아했다. 나의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그녀가 오면 갖은 애를 써 꼭 물만두를 해 먹여 보냈다. 그러면서 예금이가 노래를 잘하니 한마디 불러 보라 한다.
그러면 그는 서슴없이 그 작은 방에서 목청을 높여 평양에 있을 때 항상 무대에서 불렀었다는 ‘박연폭포’를 부른다. 그는 우리 둘만을 상대해서도 항상 무대에 나선 것 마냥 얼굴 표정과 몸 연기를 살려가며 목청을 제대로 돋우어 부르는 턱에 옆에 사는 중국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들여다보고 킥킥 거렸다. 할머니와 나는 급기야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그런 상황은 우리 집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저 정신병 아니야? 촌사람이면 착실히 농사나 지을 거지! 농사일에 바쁜 한 부락 사람들은 입을 가만 두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에게도 행운은 찾아왔다. 소란스러운 문화대혁명의 비상 속에 수많은 학생들은 ‘투쟁’하러 다니느라 바빴고, 놀러 다니느라 바빴다. 역전 대합실은 항상 고교생, 대학생들로 웅성거렸다. 예금 이는 문화대혁명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의 가수 꿈 출로를 위해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찾아보려고 고군작전하며 항상 여기저기 차를 타고 다녔다.
강성(江 城)의 저녁 대합실엔 국방색 헐렁한 홍위병 복장을 입고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는 수많은 홍위병들로 벅적거렸다. 바로 그 속에 물 오른 봄버들 같은 날씬한 몸매, 한참 부푸는 가슴을 팽팽히 감싸고 있는 맞춤형 평복을 입고 어디론가 빠져나가려고 출구를 찾고 있는 한 청초한 앳된 여자의 커다란 맑은 눈동자가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그녀의 말쑥하고 겁기어린 하얀 얼굴은 이 열기 띤 대혁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두려운 듯 방황하는 어린양 같이 귀엽고 불쌍해 보였다. 그 모습은 한 대학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문화대혁명 때문에 휴학이 된 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북경대학 졸업을 앞 둔 남학생이었다. 그는 예금을 바라보며 자기네 대학교정에선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다는 생각에 넋을 잃고 있었다.
 
지루한 문화혁명도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예금이가 우리 집엘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은 희열에 들떠 있었다. 그는 그 북경대의 남자친구에 대해 끝없이 얘기하였다. 자기는 중학밖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실토할 때 그 남자는 이렇게 예쁜 여자가 학벌이 뭐가 대수냐며 "그래도 이것이 힘을 냈어!" 하며 자기 대학 마크를 시위하더란 것이다.
"아, 그 남자는 공과전공이어도 문학예술 모르는 게 없어, 정말 내가 딱 찾고 있던 사람 같아!"
뜻밖에 자신의 소울 메이드를 찾았다는 행복에 푹 젖어있는 그는 잠시 가수의 꿈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는 수많은 사랑 시를 밤낮 쓰고 있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해 하는 친구의 얼굴은 태양보다 더 찬란해 보였다. 그의 결혼으로 더 멀리 떨어져 살게 된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나도 결혼하고 애들을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느라 그녀를 찾아가 보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강성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을 마치고 번화한 동 시장(东 市场)을 돌아보고 있었다. 옷 가게 앞에서 체구가 늘씬하게 잘 빠진 어떤 여자가 옷 장사와 가격 실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예금이 아니니?!” 나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휙 돌리던 그녀도 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너 남편 따라 남방 어느 도시에 간 거 아니었어?"
그의 남편은 남방의 어느 대도시의 큰 공장에서 기술공정사로 취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진작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몇 해만에 만난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물었다. 항상 자신감에 충만 되어 있던 그의 얼굴엔 어쩐지 옛적의 도도하던 빛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묻는 말에 한 오리 가냘픈 웃음을 얼굴에 남기며 어서 자기네 집에 가자고 하였다. 그의 집은 번화한 동시장의 뒤 모퉁이에 있는 한 아파트였다. 그가 차려준 밥을 먹고 우리는 또 다시 한 이불을 덮고 밤을 새우며 얘기를 나누었다.
결혼 후, 그는 줄줄이 딸 셋을 낳았다. 물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들이길 바랬다 . 남편은 그를 자기 부모님들이 계시는 강성으로 집 하나를 사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달마다 생활비를 보내온다고 하였다. 생활은 이럭저럭 유지가 되었지만 남편 없이 혼자 애들을 키우느라 힘겨운 생활이 역력하였다. 나는 그녀의 방을 둘러보며 옛날에 그가 추구하던 그 무슨 흔적 같은 거라도 남아 있나 찾아보았다.
보풀진 소설책과 시집 몇 권이 있었고 음악책 몇 권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린 처녀시절에 가수가 되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닐 때 찍은 사진 몇 장이 크게 확대되어 액자 속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결혼사진에 담겨진 행복이 피어나는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사진속의 한 송이 화려한 꽃으로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갈라 살아야만 하느냐고 나는 따지고 물었다. 남편의 그 공장엔 대학시절 같은 전공이었던 여자 동창이 같이 일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대학 때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이 남자를 벌주기 위해 평생 남자의 옆에서 시집을 가지 않으련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독한 여자도 있다니!~
"아니, 네가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어?"
이런 얘기 그 사람은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해 .
하느님 맙소사! 너의 자존심은?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당겨 마구 흔들었다.
"에잇, 재미없다. 우리 다른 얘기하자"
분명 많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찾아 온 친구에게 구구절절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게다. 아니 아프게 가라앉은 앙금을 다시 흔들어 놓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또다시 문학에 대하여 가수에 대하여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요즘 자기가 Y시의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 ‘푸른 머리야’로 작곡을 했다며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밤중인데 무슨 노래냐며 내가 극구 말렸지만 그는 옛적과 똑같이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애들도 상관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뜻밖에 그 감성에 푹 젖은 노래의 정서가 너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아니 너 언제 작곡도 배웠어?"
그는 히히 웃으며 자기는 오선지도 잘 모르지만 일단 감정이 솟구치면 어디선지 알 수 없는 멜로디가 술술 나온다는 것이었다. 필기가 없어도 한번 작곡 된 곡은 순서 하나 틀림없이 그대로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작곡해서 어디다 발표 좀하지?"
"내가 뭐 오선지를 적을 줄 알아야지."
그는 자기가 작곡했다는 여러 곡을 불렀다. 모두 서정 곡들이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곡들을 세상에 내어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무튼 그는 천재인 것이 분명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나는 다시 반시간 남아 급행열차를 타고 강성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이미 근 십 몇 년 만에 고향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동창들과 고향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었지만 예금 이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소식도 두절되었다. 만나보고 싶은 예금 이는 아직도 이곳에 살고 있는 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너무나 많은 것들이 궁금하였다. 나는 한국에 왔다간 고교동창을 먼저 찾아갔다. 혹시 예금이란 친구를 알 수 있느냐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가 한국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은 그 친구의 전화를 통하여 순식간에 퍼졌다 뒤따라 동창모임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 예금이는 없었다. 나는 조급히 예금 이를 묻기 시작했다.
동창이라면 초중 고중 동창이 다 섞여 있는데 예금이가 이 고장에 생활하고 있기만 하다면야 당연히 이 좌석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애타게 찾고 있자 한 친구가 예금 이는 확실히 아직 이곳 강성에 산다고 머리를 끄덕였다. 내가 왜 안 불렀냐고 화를 내었다.
"너 걔 하구 아직도 친해? 왜 꼭 불러야 돼? 그 완전 미치광이야!"
한 남자 동창이 퉁명스레 대답을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이람? 나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옆에 앉은 동창에게 조용히 예금이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보았다. 이튿날 나는 그 전화번호로 예금이를 찾아 갔다. 그녀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문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예금 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였다.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의 자세는 옛날 버들가지처럼 쭉 뻗었던 멋쟁이 몸매가 아니었다.
그리고 검은 포도 알처럼 맑고 또랑또랑하던 눈망울은 물에 풀려져 있는 새알같이 힘이 없었다. 두서없이 그려진 눈가의 아이섀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어쩐지 슬퍼졌다. 낡은 아파트는 한 계단 한 계단 걸어서 층계를 올라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잘 오르질 못하고 있었다.
"올 봄에 Y시에서 교통사고가 있었어,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나의 놀란 시선을 감지한 그녀가 힘없이 말하였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천천히 올랐다. 문 앞에 도착하니 집안에서 깽깽 거리는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너 강아지 키워?”
그녀는 말없이 씩 웃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새하얀 강아지 세 마리가 오구굿 달려 나와 깽깽 거리며 주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이상한 냄새가 코 속으로 확 스며들었다. 그는 강아지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답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먹이를 장만해 놓고 강아지들을 불렀다. 집 안엔 아무도 없었다. 제일 먼저 나의 눈에 안겨 오는 것은 맞은 켠 벽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엄청 큰 사진액자였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그 액자 앞으로 다가갔다. 분명 예금이의 결혼사진이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있는 남자는? 나는 근시안경을 추켜올리며 자세히 바라보았다. 저 남자-나도 알고 있는 Y시의 유명한 문학선배? 바로 그 ‘푸른 머리야’를 쓴 시인이었다. 예금이가 그 옛날 그 시에 작곡을 하여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맑은 하늘을 이고 서 있는 푸른 머리 벚나무ㅡ가없는 들판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 푸른 스카프를 날리며 서 있는 여름소녀의 상상에 심취 되어 있었다. 시인은 나의 친구와는 적어도 십년 이상은 연령차가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때는 우리 모두 그 시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내 친구의 얼굴도 사진사에 의하여 젊음으로 많이 손질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너 남편은? 딸들은 다 시집가서 잘들 살고?”
나는 알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고, 묻고 싶은 말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뭐가 그렇게 급해, 다 얘기 할게, 우리가 서로 소식을 끊고 있은 세월이 얼만데. 나한텐 엄청 많은 일들이…”
 
그는 내 손을 잡아당겨 같이 소파에 앉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곤 한참을 머리를 수그리고 묵묵히 있더니 흩어 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예금이의 남편은 몇 번이고 이혼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버티고 남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았다. 남편도 끝까지 외지에서 독신생활을 고집하였다. 원래 술을 좋아하던 남편은 잦은 연회와 파티에서 늘 만취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혼자 있을 때도 맑은 정신일 때가 별로 없었단다.
어느 날, 그 먼 곳에서 갑자기 소식이 왔다. 남편이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그때 중국 돈 몇 십 만이라는 상상 밖의 수액의 돈을 통장에 남겼다. 회사에서 몇 번이나 뛰어 난 연구 성과로 거금의 장려금을 탔었단다. 예금 이는 즉시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는 숨어서 울고 있는 그 여자도 봤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웬일인지 예금 이는 달려가 그 여자를 붙들고 같이 울고 싶었다.
 
시집간 세 딸들에게도 얼마의 금액을 나눠주었다. 그리곤 마음을 달래려 Y시로 떠났다.
여관의 한 장사꾼 아줌마가 저녁이 되자 그녀를 무도장으로 끌었다.
아직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하는 예금이의 미모와 몸매, 노래와 춤, 천부적인 재능은 금방 무도장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슬픈 노래도 불렀고 슬픈 춤도 추었다. 바로 그곳에서 그녀는 십여 년 전에 상처하고 혼자 살고 있는 그 남자를 만났다. 퇴직하고 할 일이 별로 없는 그 남자는 가끔 이렇게 무도장에 나와서 고독을 푼다고 했다.
그런데 춤을 추며 인사를 하고보니 그 남자가 바로 ‘푸른 머리야’를 쓴 시인이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 남자는 오선지도 잘 모르는 이 미모의 여자가 자신의 그 옛 시에 그처럼 감성 깊은 멜로디를 맞춰 넣은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에서 예금이의 숨겨진 천재 같은 반짝이는 무엇인가를 발견하였다.
 
“우리는 똑같이 미쳐 있었지, 역시 비슷한 사람끼리 알아보게 되어 있는 것 같아”
그녀가 그 남자를 데리고 강성으로 돌아와 딸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남자가 떠나기 바쁘게 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몰려와 돈을 몽땅 내어놓으라고 달려들었다. 왜 아빠가 남긴 그 피 같은 거액의 돈을 가지고 이렇게 급급히 다른 남자 품으로 들어가느냐고 떠들었다. 떠들고 싸우고… 그녀는 기진맥진하였다.
홧김에 그녀는 남은 돈을 몽땅 딸들에게 돌려주고 쫓아버렸다. 그리고 빈집을 뒤로 한 채 Y시로 다시 찾아갔다. 그 남자와 밤을 새우며 인생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문학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얘기했으며 무도장으로, 커피숍으로, 공원으로 마음을 풀었다.
“그래도 그 남자가 내 인생에서 제일 내 마음을 잘 알아 줬던 것 같아. 참 좋은 사람이었지!”
액자의 사진을 보며 예금 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참 말을 끊고 있었다. 그 힘없는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얘기를 계속 했다. 어느 날인가 그 남자가 속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많은 검사를 끝낸 의사는 말기췌장암이라는 무서운 선고를 하였다.
그녀는 첫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보다 훨씬 더 충격이었다고 털어 놓았다.몇 년 동안 병수발을 하면서 그는 뒤에서 한 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래도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그 남자의 뒷수습을 다 끝내고 강성으로 돌아오려던 날, 깊은 수심에 잠겨 있던 그는 무의식중에 붉은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다 속도를 미처 줄이지 못한 승용차에 부딪치고 말았다.
허리를 다치고 다리가 골절되었다. 그는 심신이 만신창이 되어 Y시를 떠나 다시 이고장의 비어있던 옛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휭 해진 집안엔 낡은 가구들 몇 점이 조는 듯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개털이 날려 다녔다. 봄철이어서 강아지들도 털갈이를 하는 모양이었다. 털이 묻을 것 같아 나는 내 가방 놓을 자리를 찾느라 한참 서성거렸다 내 모양새를 보고 그녀는 웃으며 말하였다.
“집안이…내가 다리도 허리도 잘 못 쓰니 집안 꼴이”
 
침대는 두 개였다. 그의 집에만 오면 항상 한 이불을 덮고 밤을 새우며 끝없는 얘기로 밤을 새우던 일이 생각났다. 오늘 저녁엔 어떻게 하는 거지?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말하였다.
“이 강아지들 셋 다 아직 어려서 내가 데리고 이 침대에서 잘 테니, 넌 저쪽 침대에 가서 혼자 편하게 자라”
“강아지를 데리고 한 침대에서 자?”
머리를 끄덕였다. 강아지들은 그의 유일한 식구니까 한 이불 속에서 외롭고 고독한 밤을 강아지들과 보낸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이불이라니, 그 털?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방안이 캄캄하였다. 그녀의 입에선 더는 문학과 예술, 자작곡들 아무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간혹 이것저것 물으면 동문서답 식이었고 어찌 보면, 이상하게 횡설수설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의 이불속에서 강아지들의 깽깽거리는 소리가 가끔 들렸다. 아아,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독하면 저럴까? 나는 코등이 찡해졌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겨우 잠이 들려 할 무렵이다.
“너 외로움이란 거 알아?"
“알만해!”
잠기 어린 소리로 대답하였다. “
“알긴 무슨, 아플 때 물 떠줄 사람 하나 없는 것도 그렇고…환갑이 넘은 여자가 말이야…”
한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또다시 혼곤히 잠이 들려 하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 넌 모르지…한 밤중에 두 다리가 걷잡을 수 없이 움씰거릴 때가 있는거, 웬일인지 몰라 뒤척거리다 비로소 느낌을 알게 되는데, 손을 팬티 속에 넣고 엉성해진 털(거웃) 등에 대고 투정부리는 애 얼리듯 그 외로워하는 것을 한참 문지른다는 사실 상상해봤니? 그러면 그것이 착각을 하고 드디어 …”
 
나는 자던 잠이 싹 달아났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었지? 숨을 죽이고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처럼 숨김없는 “고백”에 깜짝 놀랐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에 면사포를 씌워야 하고 색깔을 뿌려야 하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그의 이런 “시크릿”을 들으면 분명 육십 줄에 들어선 늙은 여자가 미친 소리 한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이야 어떤 경험을 했었던 지간에.
 
이튿날, 날이 새어 한결 환해진 방안을 보니 구석구석 손갈 데가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청소를 하며 침대 밑을 보니 하느님 맙소사 이걸 어찐 담? 강아지들의 똥 덩어리, 털 무더기들이 수북수북 쌓여있었다. 강아지들은 그 어둑한 곳을 자기들의 변소 칸으로 정해 놓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허리를 조금도 구부릴 수 없는 예금 이는 그 침대 아래를 한 번도 내려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청소를 마친 나는 그에게 돈 오백 원을 주며 강아지들 집을 하나 사다 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론 다른 수요 되는 물건도 사라고 하였다. 이렇게 큰돈을 주느냐며 그는 거의 허리를 굽히며 받았다. 물론 당시에 그 액수가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 익숙해 왔던 콧대 높은 친구의 보지 못했던 자아비천의 자세가 너무나 낯설게 안겨왔다. 닭똥 과자 하나도 쪼개 먹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너 왜 이러니? 나는 가슴이 저렸다.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북경의 친구 하나가 오늘 강성에 오는데 어느 공무원 국장으로 있는 동창 집으로 오니 그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예금이도 동창이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는 아주 좋아하였다. 그는 장롱의 많은 옷들을 꺼내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하는 많은 옷들은 대부분 Y시에 있을 때, 그 사랑하는 시인 남편이 사준 거라고 하였다. 잠시 눈시울을 붉히는 덧 하더니 금방 기분을 되살리며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을 견주어 보았다.
그러면서 나보고도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하나 골라 가지라 하였다. 나는 저 옷이 꾀 예쁜데 하면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보아하니 이런 모임에 오랫동안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의 아픈 다리와 허리가 엄청 불편해 보였지만 모처럼 좋아진 그의 기분이 보기 좋았다. 국장 집은 넓고 고급스러웠다. 강성에서는 꽤 손꼽히는 사람들이 모인 듯 했다. 내가 절룩거리는 예금 이를 데리고 들어서자 나를 반겨 맞던 북경의 그 친구가 금방 낯빛이 흐려졌다. 다른 동창들도 애써 불쾌감을 감추고 있었다.
“너 아직도 쟤하고 친하니?”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어제 저녁도 예금이네 집에서 잤다고 말하였다. “쟤 강성에서 소문났어! 미쳤다고 부르는 사람 없어. 툭탁하면 분수없는 말이나 지껄이고 저 주제에 노래도 뭐 가수보다 지가 더 잘 한다나 ”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였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예금 이는 내가 그에게 돈까지 줬다는 자랑까지 하였다.
며칠 후, 나는 다니던 직장에 볼 일도 있고 하여 그녀와 함께 세린하가 흐르는 고향을 찾아갔다. 우리는 세린 하 강변을 거닐며 옛날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세린 하 다리에 서서 다니던 모교 저 멀리 높은 굴뚝도 바라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시체를 태우는 화장장의 굴뚝이었다. 그 화장터를 학교 근처에 지을 때 우리 모두가 재수 없다고 몇 날 며칠을 불평을 부리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 그 굴뚝을 바라보는 감회가 또 달랐다.
“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어떤 한들을 풀어내고 있을까?”
예금의 이 뜻하지 않은 말을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글쎄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한들을 풀려고 할까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갔던 이런저런 일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특히 예금이의 낯설게 변화된 모습은 계속 나를 우울하게 하였다. 어쩌면 그렇게 되었을까? 나는 폰을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돌아온 후 잘 있느냐고, 그리고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굳세게 살아가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자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받았다. 그런데 내가 미처 인사를 다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혹시 내 그 옷 가져갔어? 나비리본의 하늘색 블라우스 말이야?”
“뭐? 무슨 말 하는 거야? 옷이라니?”
“그 있잖아, 그날 놀러가던 날, 내가 너에게 보여줬더니 네가 엄청 예쁘다고 했잖아 그 옷 Y시에 있을 때, 우리 그 선생님이 사주신 건데?”
나는 예금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가까스로 용건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나는 한대 얻어맞은 것 마냥 띵했다. 설마 나를 도적으로?
“너밖에 왔다간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심장이 쿵쿵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소리 질렀다.
“너 과연 미쳤구나! 정말 무섭다!”
그리고 휴대폰을 콱! 닫아버렸다. 이런 상대에겐 구구절절 해석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나를 그렇게 모르고 사귀어 왔단 말인가? 어쩌면 나를 그런 상상으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주위 친구들이 왜 그를 피하며 미쳤다고 하는 지 비로소 깨달음이 왔다. 이렇게 그와 나의 우정은 끝을 맺었다.
 
약 1년쯤 지나서였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고향에 갔다 온 친구가 나를 특별히 찾아왔다. 역시 우리 강성 사람이었다. 그가 예금이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예금이가 고향에 돌아온 그녀를 찾아 왔더란다. 예금 이는 우리 둘 사이에 벌어진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반년 후에 그 옷을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찾아내었다고 했다. 생전 손님이라곤 없는 자기 집에 나밖에 왔다간 사람이 없었기에 경솔하게 판단하였다는 것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강아지들의 수작이었단다. 그러니 부디 용서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바뀌어 진 전화번호도 보내왔다. 제발 전화 한 통만 걸어달라는 것이다. 할 말이 많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한국에서 강성에 갔다 오는 친구들은 번번이 나를 찾아와 그의 용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한번 굳어진 나의 마음은 풀리지가 않았다. 그 후, 그녀의 소식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몇 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나는 문득 예금이를 떠올렸다. 소녀시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갖가지 색상으로 떠올랐다. 생각지 않던 회한과 성찰이 내 가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용서를 “구걸”했던 예금의 마음이 보이는 듯 했다.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또 다시 고향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강성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예금이부터 먼저 찾아갔다. 그녀가 살던 집에는 새 아파트가 들어서고 번화해진 강성은 낯선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아는 친구들에게 돌아가며 그녀에 대해 물었다. 마지막 전화를 받은 친구가 분명한 소식을 말하였다.
“내가 그 집 큰딸을 만났었는데 저네 엄마 소식을 물었더니 엉엉 울더라!”
“왜?” 나는 다그쳐 물었다.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었나봐. 집안에서 목을… 무슨 한이 그렇게 쌓였는지 끝까지 눈을 뜨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딸들이 기절 통곡을 했단다.”
 
그 뒤에 친구가 뭐라고 세세히 상황을 얘기하는지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살!’ 이란 두 글자만 내 머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오랫동안 엄마를 방치하고 무관심했던 딸들의 마음도 얼마나 큰 천벌을 받고 있으랴.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이름 모를 무엇인가를 원망하고 한탄하며 밤거리를 방황하였다. ‘용서!’ 란 한 마디가 그렇게 힘들었던가!
이튿날, 직장 퇴직금 때문에 다시 세린하가 흐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일을 마치고 혼자서 세린 하 강변을 찾아왔다. 둘이서 닭똥과자를 먹으며 마냥 즐겁기만 하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가 큰 소리로 낭송하던 고리키의 “해연의 노래”가 귀에 쟁쟁히 들려온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 가슴을 파고드는 자작곡들…
저 멀리 화장터의 굴뚝에선 오늘도 연기가 피어오른다. 저승에 가는 저 사람들은 어떤 한들을 풀어 놓고 있는 것 일까? 아아, 사라져 버린 하얀 무지개…
 
 
프로필
중국작가협회회원.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장. 한국 공무원 문인협회 회원
중단편소설집“여인들의 마음” 북경민족출판사, “홀리워 가는여인” 서울 과학과 사상사 각각 출판.
도라지, 흑룡강 신문, 길림신문 해외판 등 부분 문학상 수상. 설원 컵 소설대상, 해외 문학상 수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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