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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딸애의 가출
나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자리에 누웠다. 월말이 다 되어 가는데 딸애는 나에게 생활비를 입금하지 않았다. 나는 폰의 음량을 최고 높이에 놓고도 혹시 못 들을 까봐 진동까지 설정해놓았다. 딸애는 언제나 정해진 날짜 없이 생활비를 보내주기에 딸애의 생활비에 의지하는 나로서는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달갑지 않은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잘한 거 없는 아빠로서 모든 걸 감수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라도 나를 용서해준 딸한테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딸애는 한번 마음이 상하면 사후에 아무리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 같은 걸 안 하는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말수는 적어도 속이 깊었고, 자신이 마음 먹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마는 올곧은 면이 있었다.
중학교 때 작문경연에서 대상을 받았던 딸의 작문을 선생님이 학부형회의에서 읽어준 적이 있었다. 나는 딸의 작문을 듣는 내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도 옷을 홀딱 벗은 채 사거리에 서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 모욕을 느꼈던 딸애의 작문을 지금도 원문 한 글자도 빠짐없이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의 ‘그랑데 아버지’
아버지는 작달막한 키에 가무잡잡한 얼굴로 ‘허허!’ 하고 호탕하게 웃을 때라야만 하얀 이가 드러나면서 인자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 아버지의 웃음도 웬만해서는 쉽사리 볼 수가 없다. 돈을 생각하거나 벌었을 때에만 웃는다.
아버지는 인력거를 끄는 삼륜차부이다.
사계절 어김없이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혼자 주방에서 찐만두에 김치를 서걱서걱 씹어 드시고는 4시가 되면 집을 나선다.
새벽 4시, 새벽시장에서 할머니들의 장짐을 옮겨줄 때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의 빨라진 발걸음과 빨갛게 얼어든 두 볼에선 즐거움이 춤을 춘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시장과 손님 집 사이를 아버지는 부지런히 오간다.
아침 6시, 아파트단지 문 어귀에서 줄느런히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삼륜차부들의 행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뚫어져라 문 어귀를 쳐다보다가 짧은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온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마치 자식이라도 되는 듯 달려가 책가방을 받아 쥐며 어린 손님들을 다정히 맞아준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착한 삼륜차 아저씨” 라고 부른다. 가끔 아버지의 순서가 아닌데도 굳이 뒷자리에 서 있는 아버지를 찾아오는 애들이 있는 날에는 집에 와서 신나게 자랑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시무룩해진다. 나는 “나도 아빠 삼륜차 타고 학교 가고 싶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아침 7시, 기차역에서 농산물을 팔러, 장 보러 오는 사람들의 장짐을 받아 싣고 서시장 오르막길에서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힘겹게 페달을 밟는 아버지를 볼 수 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려도 아버지는 뒤에 앉은 손님과 웃으면서 대화를 나눈다. 그의 온 얼굴에 피어난 웃음은 즐거움으로 흘러내린다.
날이 어스름하게 어두워지고 내가 하학하여 숙제를 시작할 즈음이면 아버지는 퇴근한다. 시장할 법도 하건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허리에 둘렀던 쪼르래기가 달린 지갑을 열고 하루의 수입을 세어보는 일이다. 한 번 손님을 태우면 1위안, 2위안씩 받는데 하루에 50위안을 수입하는 것이 아버지의 목표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면서 서너 번씩 헤어보고 오십 번이 넘으면 “허허허, 오늘은 괜찮구나.”하면서 크게 웃는다. 그리고는 나더러 다시 한 번 세어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도 돈을 세어보는 것이 재미가 있었는데 후에는 그것을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돈 냄새만 맡게 하고 용돈을 좀 달라고 하면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기 때문이었다. 다른 애들은 하루에 1위안씩 용돈을 가지고 다니지만 난 소학교를 다니는 6년 동안 하루도 간식을 사 먹은 적이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내가 하도 떼를 써서 겨우 하루에 십 전씩 가질 수 있었다. 6.1절이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싸우곤 하였다. 명절인데 애한테 새 옷 한 벌 사입히자고 아버지한테 돈을 빌리면 아버지는 “자꾸 크는 애들 1년도 못 입고 버릴 옷을 왜 사냐”며 큰소리를 냈고, 그런 날에는 어느 손님이 주더라며 남의 입던 옷들을 삼륜차에 싣고 싱글벙글 들어왔다. 내가 서운해서 눈물을 보이면 어머니는 “돈 많이 모아서 널 좋은 학교로 보내려고 그러는 거니까 우리 조금만 참자.” 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곤 하였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나를 흘겨보면서 “가시나가 공부는 해서 뭐해. 돈 셈이나 알면 되지.” 라고 말하였다.
내가 세상을 알고 나서 나는 우리 집에서 무언가를 돈 주고 사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 집의 모든 물건은 다 아버지의 손님들로부터 후원을 받은 것들이다. 심지어 먹는 채소까지도 장마당에서 팔고 남은 것들, 그리고 버리고 간 것들을 주어서 가져온 걸로 해결하곤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깍쟁이’ 이지만 또 ‘엄청난 부자’ 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랑데 영감’ 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랑데 영감’ 이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그가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의 장편소설《외제니 그랑데》에 나오는 엄청난 부자이자 수전노라고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그랑데 영감’ 이다. 어머니는 ‘그랑데 아내’ 이다. 그리고 나는 ‘그랑데 영감’ 의 딸 ‘외제니 그랑데’ 이다.
그날, 학부형회의에서 집으로 돌아온 나는 화가 나 딸의 귀뺨을 쳤다. 그리고는 딸애에게 집안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내가 무슨 고리대금업자 ‘그랑데 영감’ 이나 된 줄 알아? 나는 뼈가 빠지게, 삭신이 녹아나게 몸팔이를 하는 삼륜차부란 말이다! 종일 벌어도 1년에 겨우 몇 천 위안 남고, 석삼년 벌어도 고작 만 위안도 못 남기는 가난뱅이란 말이다! 그러니 너를 호강시킬 여지가 어디에 있나 말이다.”
딸애는 빨갛게 손자국이 난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아빠가 싫어! 이담 나절로 돈 많이 벌어서 마음대로 쓸 거야. 아빠한테는 단 십 전도 안 줄 거야.”
그때의 정경이 지금도 내 눈앞에 선하다.
딸애가 나의 모습을 그대로 적은 것인데 내가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딸에게 미안해서였는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벌어들이지도 못하는 삼륜차부인 주제에 소설에나 등장하는 대부자 ‘그랑데 영감’ 에 치부되는 자신이 억울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식이란 전생에 진 빚을 받으러 온 거라고 하더니 그 말이 그른 데가 없었다.
딸애가 초중을 졸업할 즈음이 돼서야 나에게는 드디어 막대기 하나에 동그라미 네 개가 박힌 두둑한 적금통장 하나가 겨우 만들어졌다. 나는 기쁜 마음에 오랜만에 삼겹살 한 근을 사들고 페달을 힘껏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모녀는 그날따라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알고 보니 딸애가 연변1중에 수석으로 붙었다며 기뻐하였다. 하지만 나는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여자애가 초중을 졸업하면 식당 같은 데서 복무원도 하고, 돈 벌 곳이 많은데 굳이 공부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용정에서 고중을 다녀도 모를까 외지에서 숙소 생활을 하면 돈도 몇 곱절 더 들어가니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나의 표정을 읽은 모녀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내 마음 돌리기 작전을 펼쳤다. 아내가 상추에 밥을 올리면 딸애는 고기를 얹어 쌈을 만들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밥상을 물린 후 아내가 발 씻을 물을 준비해 대령하면 딸애는 나의 발을 씻어주고 자리에 누우면 발도 꼭꼭 눌러 시원하게 안마를 해주었다. 방학 내내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내 비위를 맞추느라 애썼지만 내 마음은 끄덕도 안했다. 동의를 못 얻은 딸애는 화가 나서 울며 집을 나가버렸고, 애가 탄 아내는 여기저기 도움을 청했다. 결국 학교에서 기자들을 동반하여 집까지 찾아와 장원장학금으로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해서야 나는 겨우 동의하였다.
그래도 주일마다 집에 오면 이것저것 챙겨 갔고, 생활비에서 절약한 돈을 슬그머니 딸한테 쥐어 주는 아내의 소행을 보고도 나는 못 본 척 눈을 감아주었었다. 결국 딸애는 고중을 나의 인색함 속에서 힘들게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갔는데 그것도 아내의 담보로 내게서 학비를 이잣돈으로 받아서 간 것이다.
지금 대학을 졸업한 딸애는 외자기업에서 높은 월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 아버지한테 생활비 정도는 보내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딸애에게서 효도돈은 단 일 푼도 넘어오지 않고 있다. 나는 할 말이 없다. 딸애에게 나는 진짜 ‘그랑데 영감’ 이었으니 말이다.
3. 실패한 도전
뜰에 소담하게 피어서 여름내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따스한 향기를 풍겨주던 꽃들도 뜨거운 햇빛의 세례에 지쳐 노긋한 몸으로 느슨하게 처져있다. 꽃은 자신의 짧은 인생을 아쉬워하고 있는 걸까? 토마토밭에는 순이 누렇게 죽은 잎사귀 사이에 벌레 주둥이가 얼룩덜룩 누런 지도를 그렸거나, 너무 익어서 벌겋게 갈라 터졌거나, 뒤늦게야 애기주먹만 한 파란 열매를 맺은 토마토가 보인다. 커서 익어보기도 전에 서리 맞고 쓰러질 운명을 그들은 알고나 있을까? 바자굽의 강낭콩덩굴의 그늘에는 누렁이가 뻘건 혀를 한발이나 내밀고 침을 뚝뚝 흘리며 숨을 씩씩 쉬고 있다. 누렁이는 뜨겁게 대지를 달구는 햇빛을 원망하는 걸까? 아니면 더위를 막아주지 못하는 작은 그늘을 지어주는 강낭콩넝쿨을 원망하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짝짝이 다리로 태어났어도, 왼 다리가 오른 다리보다 한 뼘이나 작게 태어나 걸을 때면 엉덩이로 반원을 그리면서 걸어 다녔어야 했어도…….
애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나는 술래 대신 “꽁꽁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만을 수백 번 외쳐 목이 다 쉬어버렸어도 놀이에 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고, 애들이 강가에서 물놀이를 할 때, 애들의 벗은 옷을 지켜주며 혼자 흙장난을 하면서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고, 청춘남녀들이 짝을 지어 노천극장으로 밤영화 구경을 다닐 때 나는 결혼예단에 놓을 뜨개를 배우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었다. 이십여 가지에 달하는 나의 예단감이 거의 다 만들어지고 삯 받고 동네 처녀애들의 예단감까지 나의 앉은 키보다 더 높이 만들어져 가고 있을 때쯤 드디어 나한테도 혼삿말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대신 만나보고 오케이를 하였다. 총각이 키는 160cm도 안 되지만 몸은 제법 탄탄했고, 얼굴도 준수하고 말도 잘하고 자기 식구만큼은 아끼고 굶기지 않을 것 같더라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시집이라는 걸 가게 되었고,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면 나한테는 과분하다고 생각하며 뛸 듯이 기쁜 건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빨리 시집가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남편은 아버지 말대로 특별히 키가 작은 것 외에는 모자라는 면이 없었다. 일 욕심도 많고, 부지런하였으며 생활을 알뜰히 잘 해나갔다. 다른 집과 다른 점이라면 경제권은 아내인 내가 아닌 본인이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지나친 절약 정신 때문에 경제에 대해서만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흠이라면 지나치게 모든 걸 절약하다 보니 생활의 불편을 느낄 때가 있었다.
금방 결혼했을 때, 아침에 먼저 일어나서는 세숫물을 떠 바치는 것이었다. 내가 한 다음에 그 물에 자기도 했고, 저녁에도 나에게 발 씻는 물을 떠다 바친 뒤 내 발도 씻겨주고 그 물에 다시 자기도 발을 씻었다. 해가 져 날이 어두워지면 바로 자자면서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남편의 뜨거운 사랑에 행복의 눈물을 흘렸었다. 그 사랑은 이십 년이 되는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거기에 감동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그런 소행은 사랑보다는 물 절약, 전기 절약을 위해서였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새것이라는 것이 별로 없다.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물건 어느 하나도…… 나한테 그러는 건 참을 수 있는데 딸애한테까지 그러는 건 도저히 봐줄 수 없어 가끔 대들어보지만 내가 이기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나는 일도 못하고 얻어먹는 신세니까 그런대로 살겠지만 내 자식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었다. 날마다 정화수를 놓고 빌었던 덕분인가 내 딸이 꿈 같이 북경대학에 붙었는데 안 보내겠다니 이는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했다. 남편이 이토록 미워 보기는 결혼해서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면 딸 학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 머리를 동이고 끙끙 앓았다. 목숨 걸고 애걸해볼까? 들어준다고 해도 학교만 보내놓고 계속하여 학비를 대줄 지는 미결이었다. 어떡하면 될까? 방법은 내가 돈을 버는 것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심했다. 외국으로 가야겠다고. 구걸도 외국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평생 돈 한 푼 못 벌어본 나는 두려움에 얼음처럼 차가운 가슴을 붙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슬로모션처럼 흘러가는 창밖 풍경을 굽어보며 나는 “안녕히!” 를 속살거렸다. 손도 흔들어 주었다.
내가 술래잡기를 하던 그 동네와, 흙으로 인형을 만들던 그 냇가와, 시집가던 날 언덕길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던 어머니의 무덤을 향해…….
연해도시에서 일하다 만난 외국인과 결혼하여 이곳에 정착한 소꿉친구 미화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눈물까지 지으며 반갑게 맞이해주는 미화가 너무 고마웠다.
짐을 풀자 바람으로 직업소개소에 등록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주방에서 설거지밖에 더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써주지 않았다. 소개소 소장님한테 사정사정하여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고기집이었다. 거기서 불판을 닦는 일을 하였다.
작은 주방 안에서 일꾼들이 몸을 비비면서 움직였는데 내 걸음새가 뒤뚱거리다 보니 거치적거린다며 다음날부터는 오지 말라고 하였다. 다음날 찾아간 곳은 삼계탕집이었다. 뚝배기가 어찌나 무거운지 그걸 씻어 한 대야씩 담아서는 선반에 올려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높은 곳에는 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걸상 같은데 올라설 수도 없고 하다 보니 또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 없었다. 딸애의 학비와 5푼 이자로 받아온 돈이 이자가 불어나는데 내가 주저앉으면 딸애의 인생도, 우리 가족도 파산될 일이니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하느님이 무정하지 않으시다면 꼭 내려다보실 거라 생각하면서 다음날도 나갔다. 이번에는 자장면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이었다. 자그마한 가게에서 배달 위주로 하는 집이라 한 평 남짓한 주방에서 두 사람이 일하고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설거지는 주방밖에 따로 비닐로 막을 친 작은 공간에서 했다. 커다란 함지박 하나에는 세척제를 듬뿍 푼 뜨거운 물이 담가져 있고, 다른 하나의 함지박에는 깨끗한 물이 담가져 있었다. 산처럼 쌓인 자장면 그릇을 세척제를 푼 물에서 닦아낸 후, 깨끗한 함지박에 넣고 다시 한번 헹구면 설거지가 완성되었다. 자장면 그릇은 가벼워 쌓아 놓아도 깨질 염려가 없는 재질이라 나한테 딱 맞는 일이니 은근히 마음에 들어서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겨울에 밖에서 일을 하였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넣어도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찬물이 돼버렸고 수도를 틀어서 헹구는 찬물함지박에 손을 넣으면 얼음장처럼 차가워 발끝까지 시려왔다. 게다가 세 시간이 넘어가자 얼굴은 뜨겁게 열기가 나고 발은 아예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하루 열두 시간을 참고 견뎠다. 첫날 7만 원의 일당을 받아 쥔 나는 너무 기뻐 잠이 오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내 손으로 벌어본 돈이었고, 이렇게만 견지한다면 살 길이 나질 것 같았다. 게다가 사장님은 열심히 잘했다며 내일도 나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그 집에서 3개월을 일하고 봄이 되어 날씨가 괜찮아지면서 희망이 보인다 했더니 그만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
눈을 떠보니 미화네 집이었다.
“어, 눈을 떴네. 다행이다, 너 바보니?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 내버려뒀어?”
미화는 눈물이 글썽해서 나무람하였다. 동상을 입은 발이 볼품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빨갛게 익어버린 발 군데군데에는 허옇게 물집이 져 있었고, 꽁꽁 동인 천 사이로 뻘건 피고름이 흘러나와 있었다.
“별로 아프진 않았어. 근데 자꾸 너한테 신세만 지니 미안해서 어떡해?”
“지금 신세지는 게 문제니. 더 미루었다가는 발을 잃을 수도,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단다. 나을 때까지 꼼짝 말고 우리 집에 있어라. 다음 일은 일단 몸을 춰세운 후에 고민하자. 다른 생각하면 안 돼. 알았지. 너 죽으면 네 딸은 어떡할 건데…….”
미화는 다짐을 받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러마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미화의 손을 꼭 잡았다. 이 은혜를 뭐로 갚아야 하나, 절대 잊지 않으리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5. 벼랑 끝의 선택
눈이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푸슬푸슬 소리 없이 내린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창밖은 온통 새하얗다. 세상의 모든 걸 차별 없이 새하얗게 덮어준다.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깍쟁이 남편도 삼겹살을 사오곤 했다. 나는 된장을 기름에 볶아 쌈장을 만들어놓고, 밖에 매달았던 얼린 배춧잎을 들여다 한 가마 푹 삶아놓는다. 그리고는 네 식구가 오랜만에 고기쌈을 해서 배 터지게 먹곤 하였다. 그때가 그립다.
남의 나라, 남의 집에서 눈치 보면서 설거지하고 청소하면서 밥 얻어먹는 지금의 신세가 가엾고 불쌍하다. 이렇게 이 집에 계속 눌러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집에 돌아갈 수도, 여기에 남아있을 수도 없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세상은 워낙 나를 환영하지 않았다. 내가 고집을 쓰고 절뚝거리면서 찾아온 것일까? 남편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냥 불쌍해서 받아주었을 것이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오직 나의 사랑하는 딸 뿐이다. 그런데 이 못난 엄마는 그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빚만 안겨주고 내가 가버린다면 나는 딸한테도 아무 쓸모없는 사람으로 되고 마는 것인가! 아! 하느님 제발 절 살려주세요. 저는 죽을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흐른다. 천천히, 천천히 흘러내린다. 입술을 적신다. 입술을 깨물면서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눈물을 힘껏 빨았다. 텅 비어있는 가슴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만 하는 강박감에서였을까. 찝찔하고 들큰한 눈물이 가슴을 꽉 메운다. 목구멍은 메어오는데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오른다. 욱~ 치미는 설움을 참고 있으려니 흑흑~ 하는 막힌 숨소리가 콧구멍으로 둬 번 나오는가 싶더니 목젖이 흔들리면서 으윽~ 으윽~ 하는 소리가 꼭 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드디어 참을 수 없는 설움이 막힌 둑을 허물듯 터져 나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마음껏 소리 내어 엉엉 울면서 눈 내리는 이국의 거리를 방황하였다.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에 떨어지는 눈꽃이 녹아내리면서 아프게 얼굴을 찌른다. 쩔룩~ 쩔룩~ 나는 목적 없이 하얀 눈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비뚤비뚤한 발자국을 남기면서…….
“영애야, 너 왜 이래? 빨리 집에 가자.”
미화가 헐레벌떡 눈 속을 헤치면서 달려와 나를 끌어안는다.
“내 발자국 보고 찾은 거지? 비뚤비뚤한 내 발자국, 그래서 나를 술래잡기에도 안 끼워줬니?”
“그래, 넌 금방 잡히니까, 그러니까 술래잡기 더 이상 하지 말자.”
솔직한 미화의 대답에 나는 웃었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억울한 마음을.
미화도 울었다.
우수에 잠긴 듯 눈 오는 거리를 내다보며 자신의 아픔을 처음으로 나한테 드러내었다.
“내가 네 마음을 왜 모르겠니? 나는 사람들이 나더러 참 예쁘다고 말할 때가 제일 싫었다. 예쁘면 뭐하냐고, 가난한 농촌에서 앞 못 보는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 바보 동생까지 책임져야 하잖아. 이렇게 외국 타향의 곱사등이한테 시집와 부모님과 바보 동생을 섬겨야 하는 나는, 살맛 났겠어? 그래서 네 마음 잘 알아. 너만 불행한 게 아니라고.”
이미 알고 있었고, 보고 있었어도 나는 왜 그 아픔을 느끼지 못했을까? 내 아픔만 아픔인 것처럼.
“지금은 다 이기고 잘 살고 있잖아. 남편도 날 사랑해주고 예쁜 새끼들도 키우면서…… 물론 부자 시형 덕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만족해. 버티고 견디면 잘 살날 온다고 생각해 나는…….”
미화는 눈물을 쓱 닦고는 다시 밝게 웃어보였다.
“나 요즘 생각해봤는데…… 너 우리 시형 집에 들어가서 도와줘. 네가 버티기만 하면 노임은 섭섭지 않게 줄 거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일주일 못 버티고 다 시형한테 쫓겨 나오거든. 네가 잘해봐. 힘들기는 하겠지만…….”
나한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함정에 빠진 나한테 주어진 것이 썩은 밧줄이건 생 밧줄이건 나는 쥐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나는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시형이라는 그 남자가 사는 집에 겁없이 발을 들여놓았다.
시교 쪽에 위치한 단독으로 된 3층 별장이었다. 으리으리한 대문 앞에서 벨을 누르니 집사인 듯한 나이 드신 아저씨 한 분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저녁상을 차려주면서 말했다.
“오늘 저녁 그 방에서 쫓겨나지 않고 버티기만 하면 면접은 합격된 것이니까 절대 나오시면 안돼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음식을 실은 밀차를 밀고 내 운명이 달린 그 미지의 문을 열었다. 문이 서서히 닫힌다. 휠체어에 앉은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창문을 향해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카트를 밀고 그쪽으로 움직였다. 남자도 천천히 휠체어를 돌리면서 이쪽을 향해 돌아 선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카트에 기대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손으로 마구 문질러 놓은 밀랍 같은 얼굴에서 오관을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머리인지 이마인지 얼굴인지 한데 엉켜 있었고, 한쪽은 크고 다른 한쪽은 다 말라붙어버린 눈이 상하로 찌그러져 있었다. 왼쪽으로 비뚤어진 코에 콧구멍마저 한쪽이 붙어버려 있었고, 오른쪽으로 처져 내린 입은 입술은 없고 허연 이발이 다 드러난 입 구멍만 조금 열려 있었다.
괴물 같았다. 아니 괴물이었다. 꿈에 나타날까 두려울 만큼 끔찍했다. 그는 천천히 휠체어를 움직여 내 앞에 와 멈춘다. 그리고는 나를 점토록 쳐다본다.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무서웠지만 눈을 맞추었다. 내가 눈길을 돌리면 쫓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앞이 흐릿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무서워서인지, 내 처지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이 사람이 가련해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끔찍한 그의 몰골은 눈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빚 받으러 온 사람들 앞에서 쩔쩔매며 수모를 당하는 남편과 학비 번다고 추운 겨울 식당에서 설거지하는 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동상으로 벌겋게 부어오른 두 손에 뚝뚝 떨어진다. 손등이 아릿해나며 가슴까지 찡 저려 온다. 탕~ 하고 휠체어가 밀차에 부딪치면서 밀차에 실렸던 밥이며, 반찬이며, 국물이 와당탕~ 소리 내며 쏟아져 내렸다.
괴물은 “나가!” 하며 소리를 질렀다. 몇 백 년 비어있던 동굴에서 나오는 울림 같은 무엇에 찢기는 듯한 괴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애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쏟아진 밥그릇들을 치우면서 나는 집사님이 어떤 일이 있어도 나오면 안 된다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괴물의 방은 보통의 집만큼 크고 넓었다. 남쪽 벽면에 커다란 사무용 책상이 놓여있었고 책상 위에는 컴퓨터도 있었다. 북쪽 면에는 자동으로 자유롭게 움직여지는 첨단기술로 제작된 맞춤형 환자용 침대가 있었다. 출입문 옆쪽에는 유리 벽면으로 된 작은 칸이 있었고, 안에는 침대가 있었다. 그것이 호리원이 있는 칸인 듯하였다.
괴물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는데 특히 얼굴이 심했고, 팔은 움직일 수 있는데 손가락이 한데 붙어서 쓸 수 없었고 발은 경하여 잠깐 설 수 있을 뿐 자유롭게 걸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일은 식사를 도와주고, 시간 맞춰 몸에 약을 발라주고, 눈치를 보며 그가 손을 써야 할 부분에서 도와주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그와 직접 접촉하는 일인데 보고 있는 것만도 몸이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입을 꼭 다물고 눈을 딱 감고 견지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것이 없었다. 식사 중 잘 다물어지지 않는 입안에 적당한 양을 맞추어서 넣어야지 조금만이라도 많이 넣어 흘러내리거나 하면 마치 내 잘못이기라도 하듯 식기들이 바닥에서 나뒹굴어야 했고, 엉덩이가 있는 가운데 부위만 상처를 입지 않은 알몸의 남자의 온몸에 약을 바른다는 것도 고역이지만 조금만 잘못 건드려서 아프기만 하면 몸부림을 쳐 그의 팔이나 발에 얻어맞아 멍이 지고 피가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일 힘든 건 밤중이었다. 피부가 접촉하면 통증이 있어서 침대가 있어도 눕지 않고 그냥 휠체어에 앉은 채로 자곤 하였다. 통증인지, 가려움인지 알 수 없지만 참기 힘들 정도로 발작을 할 때면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고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에 갇힌 야수마냥 울부짖으며 알몸으로 마구 걸어 다닐 때면 정말 무서웠고,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유리벽으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어야 했고, 듣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방음장치가 잘 되어있는 방이라 밖에서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나아지는가 싶으면 또 수술을 했고, 나아지는가 싶으면 또다시 수술을 하였다. 그렇게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의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견지해나갔다.
그렇게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괴물도 이젠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거의 찾아가고 있었다. 나에게도 살갑게 대해주었고, 정원 산책을 나가면 꽃과 나무들의 이름도 알려주고 기분이 좋을 때면 시도 읊어주었다. 가을 단풍이 짙게 내려앉으면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단풍나무숲에 내 모습도 넣어주었다. 그가 사무책상에 앉아 걸걸한 중저음으로 전화를 받고 회사의 서류에 사인을 해주고 컴퓨터에 정신이 팔려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나는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정말 너무 멋있고 존경스러워 보이고, 나 같은 사람들과는 다른 세상을 사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손을 저으며 나한테 나오라는 신호를 준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풀어 들고 그한테로 다가간다. 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오늘은 어떤 곡을 선물해드릴까요?”
나는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 을 선곡하였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넓은 등이 보인다. 하얗고 긴 손가락들이 하얀 건반에서 춤을 춘다. 그 음악 소리는 세찬 파도가 되어 내 운명의 시간들을 펼쳐 보이다가 또 잔잔한 파도가 되어 행복한 미소를 피어 올린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괴물도 미남으로 돌아왔고, 딸도 대학을 나와 북경의 외자기업에서 높은 노임을 받으면서 출근한다고 하였다. 깍쟁이 남편도 돈 잘 보내주니 가타부타 독촉 전화가 없다. 나도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5년을 모신 주인은 떠나는 나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 주었고, 손가락에 다이아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집 문은 아줌마한테 언제든지 열어 둘게요.”
우리는 포옹했다. 남자의 품이 이렇게 따뜻함을 처음 느꼈다. 돌아서는 그의 눈에 피어나는 맑은 이슬을 나는 보았다.
7. 깨어진 꿈
나에게 불면의 하룻밤이었다. 옆에 누워있는 아내가 송충이처럼 끔찍스럽고 싫었다. 나는 이혼을 생각했다. 그런데 재산 분할이 문제였다.
재산이라야 아내가 보내온 돈이 전부인데 그것은 이미 집 사고, 인테리어하고, 이잣돈을 물다 보니 다 없다고 했으니까 나눌 재산이라야 집이다. 집을 10만 위안에 샀으니까 5만 위안 정도 주고 합의이혼을 하고 내보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5만 위안을 어떻게 해결한담? 지금은 손에 돈도 없지만 있다고 해도 자기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다시 꺼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머리를 굴리고 굴려도 5만 위안을 해결할 방안이 잘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잠을 설쳤다.
아내가 일찍 일어나 아침 시장에 나간 후에야 나는 시름 놓고 새벽잠에 들었다. 갑자기 “오빠!” 하며 댄스 파트너가 내 방에 들어오며 흔들어 깨운다. 비몽사몽 간에 사랑하는 그녀를 보자 나는 습관적으로 이불 속으로 잡아끌었다. 우리 둘은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뜨겁게 온몸을 달구어 갔다. 온 밤 막혔던 골물이 이제야 분출구를 찾은 듯 힘차게 내달린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정열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하는 새된 소리에 놀라 우리는 동작을 멈추었다. 채소를 담은 주머니를 땅에 팽개치고 아내는 달려들어 나의 머리를 쥐어뜯고 얼굴을 손톱으로 긁으며 악을 썼다. 나는 아직도 잠을 덜 깬 듯 상황파악을 못한 채 아픈 줄도 모르고 가만히 당하고 있었다. 그 사이 옷을 주어입은 파트너는 슬며시 도망치려고 일어섰다. 아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파트너를 넘어뜨리고 깔고 앉아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한생을 얌전한 고양이처럼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자기주장 한 번 내세우지 않은 채 남편이 하자는 대로 따라주기만 하던 그녀가 오늘은 포효하는 암범 같았다.
뭔가 찔리는 데가 있어서 그런지 파트너는 전혀 기운을 쓰지 못하고 그저 “누구세요? 왜 이래요?” 하며 소리만 지를 뿐 아내의 기세에 눌려 당하기만 하고 있었다. 그때에야 제정신이 든 나는 마구 날뛰는 아내의 손목을 잡았다. 아내가 손을 홱 밀치는 그 서슬에 귀뺨을 얼얼하게 얻어맞은 나는 갑자기 화가 욱하고 올라왔다. 나는 아내의 머리채를 확 낚아채고 귀뺨을 세차게 때렸다. 저만치 내팽개쳐진 아내는 귀뺨을 감싸 안고 불이 이는 듯한 눈길로 나를 쏘아본다. 빨간 코피가 뚝 하고 한 방울 떨어지더니 이어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빠져나갔던 혼이 돌아온 듯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더니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는 양 말 한마디 없이 캐리어를 끌고 맥없이 집 문을 나선다. 나는 떠나가는 아내의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탕! 하는 육중한 문 닫기는 소리가 나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른다. 이어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왜 갑자기 새벽에 찾아 왔어?”
나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악몽 같은 시간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듯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우리 조카가 애 데리고 말도 없이 집 나갔어요. 어떡해요? 우리 돈…….”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 질렀다.
“뭐라고? 돈 갖고 튄 거 아니야?”
“그건 아닐 거예요. 걔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회사가 파산됐다나 뭐 그러는 것 같았어요. 전화하는 걸 들으니까.”
“그런 말 왜 인제야 해? 내가 말해두는데 그 돈 찾아오기 전에는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 마. 썩 꺼져.”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그녀를 향해 뿌렸다. 눈에서 불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탁상등을 추켜들고 그녀의 머리를 향해 돌진했다.
“개 같은 년, 너 돈 못 가져오면 죽여 버릴 거야.”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고 그 방을 뛰쳐나갔다. 나는 분하고 억울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아직 빨갛게 아물지 않은 상처 자리에 스며들면서 짜릿한 아픔을 더해준다.
갑자기 일어난 엄청난 이 사태들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나는 머리가 빠개지듯 아파났다. 나는 “내 돈, 내 돈!……” 을 중얼거리며 우리에 갇힌 사자마냥 집안을 쉼 없이 맴돌았다. 나는 이 벽에 머리를 쪼아보고, 또 저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 다음날 아침까지 으르렁거리다가 지쳐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았다.
9. 마지막 사인
인과보응이라고나 할까? 내게 그 후의 3년은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낮이면 공안국, 검찰원, 변호사사무소 등 곳으로 뛰어다니며 돈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수많은 법인지에 사인을 했건만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밤이면 빈 적금통장을 꺼내놓고 다시 채워갈 방안을 연구하느라 날을 샜다. 경제 내원이 없다 보니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었고, 배고픔에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다. 나는 다시 무도장으로 찾아갔으나 머리 통증 때문에 어지러워 춤을 출 수가 없었다. 차 사고로 인한 후유증이 인제 뛰쳐나오는 것 같았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나는 연락을 끊고 산 지가 오래된 딸한테 생활비를 보내 달라는 메시지를 만장같이 써서 보냈다.
나는 자신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한테 생명을 준 부모이고, 적어도 고중까지는 내가 삼륜차를 하여 모은 피 같은 돈으로 널 부양했으니까. 그리고 네가 뺨 맞은 걸 잊지 못한다면 짧은 다리를 온 하루 높은 자전거 걸상에 매달고 엉덩이를 비벼대는 바람에 다리 사이가 벌겋게 살갗이 벗겨져 거기에 약을 바르던 나를 생각해. 두 다리를 쩍 벌린 채 잠들어 버리면 민망하다고 담요를 덮어주며 투덜거리던 그 시간들을 다 잊지는 않았겠지. 지금은 북경에서 한 달에 몇 만 위안씩 월급을 받는다고 얻어들었다. 내가 몸도 너무 아프고 살기 힘들어져서 그러니까 생활비 좀 보내줬으면 한다.’
그 후, 답장은 없었지만 달마다 500위안씩 생활비를 보내왔다. 비록 생각보다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달마다 정해진 수입이 있다는 것에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생활이 안정되니 힘이 생기고 낮에는 운동 삼아 걸으면서 재활용 쓰레기를 주어 일상생활에 보탰고, 500위안은 그대로 적금으로 넘어갔다. 적금통장에 다시 돈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나의 생활에는 다시 활력이 넘쳤다. 저녁에는 한 달에 천 위안씩 받고 식당에서 밤 당직을 서는 일거리도 맡았다. 마지막 손님이 먹다 남은 상의 음식은 챙겨올 수도 있어서 생활비도 절약할 수 있었다. 3년을 넘어서자 적금통장에도 5만 위안이라는 거금이 축적됐다. 뒷심이 든든해지자 나는 다시 문화생활을 시작해볼까 싶어 무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생각과는 달리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한 바퀴도 못 돌았는데 씩씩 거센 숨이 터져 나와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밤이면 가슴이 답답하고 잠깐 숨이 안 나오는 차수가 잦아지면서 은근히 걱정되어 병원에 가봐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금방 맞추어놓은 적금을 깰 수는 없고, 또 그러다 보면 일자리도 내놓아야 되니 이래저래 양패라 나름대로 쓰레기통 뒤지러 다니면서 쉼 없이 머리, 가슴, 배, 다리를 두드리는 보건체조로 치료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러다 언젠가 자다가 숨이 막히고, 곁에 사람도 없으면 그냥 골로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내 돈은 누가 가질까? 딸애한테 가겠지. 아직 이혼 수속은 안 했으니까 아내한테로 가나? 가끔씩 뒤뚱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가던 아내가 언제 그랬냐고 쉽게 웃으면서 다시 돌아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꿈이 사람을 부르는지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예요. 잘 보내시죠. 내일 서류 정리하러 갈까 하는데 시간 내주세요.”
언젠가 이날이 올 줄을 알았다. 시간이 흐르니까 혹시라도 다시 올 생각이 있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재산이라야 집밖에 없는데 어떻게 할 예정이요.”
나는 역시 ‘그랑데 영감’처럼 양심도 없이 집 문제부터 내 걸었다.
“그건 가서 다시 얘기하죠. 어디서 만날까요?”
아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서울 말씨와 발음이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나는 저도 몰래 존대어를 썼다.
“상의할 것도 있으니까 집에서 먼저 만납시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머리를 굴렸다. 반반으로 나눈다면 겨우 만들어 놓은 5만 위안을 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집도 돈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럼 돈이 없다고 생떼를 쓰며 나누울까? 그래도 안 먹히면 둘이 집을 반반씩 사용하자면 어떨까? 그렇게 한집에서 살다 보면 다시 합칠 기회도 오지 않을까? 나는 자신의 묘책에 기분이 좋아져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튿날, 나는 시장에 나가 아내가 좋아하는 찰떡도 사고 삼겹살도 샀다. 정성껏 준비한 밥상을 차려놓고 둘이 같이 먹으면서 좀 달래볼 생각이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자 나는 반갑게 달려나가 문을 열었다. 키가 늘씬하고 귀티 나는 한 여인과 풍채가 늠름한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일순 잘못 온 거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누굴 찾으세요?”
여인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집 문을 아는데 당신은 내 얼굴도 못 알아보네요.”
너무나 달라진 분위기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급히 돌아 들어와 밥상을 신문지로 덮었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신문지 밑으로 드러난 밥상을 일별하더니 그녀가 말했다.
“무슨 요구라도 있으면 말씀하세요.”
경제문제가 나오자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린 나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주장을 내세웠다.
“집값 절반을 줄 돈이 나한테는 없소. 그러니까 정 필요하면…….”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 분위기상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우린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혼서류에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언제부터 너희들이 ‘우리’가 되었는데…….”
나는 크게 배신감이 들면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자신도 전과가 있다 보니 큰소리를 칠 수도 없었다. 나의 아름다운 꿈은 물거품이 되어 부글부글 끓어 번졌다. 갑자기 머리가 뗑 하면서 어지럼증이 일었다. 간신히 서류에 사인을 마치자 두 사람은 필묵이 마르기도 전에 서류를 빼앗아 가지고는 “민정국으로 갑시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남자의 팔짱을 끼고 앞서가는 아내의 두 다리는 멀쩡했다. 내가 눈을 다시 비비고 봤지만 진짜로 제대로 걷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 무겁기만 했다.
아내와 이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집 문턱도 넘어서지 못한 채 문틀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스르르 무너졌다. 구급차의 앵앵 소리와 함께 나는 병원에 옮겨졌다. 나의 몸은 재빨리 여러 가지 의기들에 의해 원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어떻게 왔는지 아내가 다급한 걸음으로 의사와 간호사 사이를 오가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맥없이 처져 내리는 눈에 힘을 주며 흘린 듯 빠르게 움직이는 아내의 멀쩡한 다리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아내가 수술합의서에 사인을 한다.
나는 서서히 하얀 세계로 실려 들어가고 아내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나의 몰풍스러운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본다. 나는 있는 힘껏 한쪽 손을 들어 쫙 펴 보이면서 돈 5만 위안이 있다고 처음으로 아내에게 솔직히 알려주었다. 아내가 옆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고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아내 손에서 죽어가는 것이 이렇듯 행복한 일임을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의 어떤 结
‘동키 그랑데’ 는 죽었다. 그의 아내와 딸은 그의 죽음을 별로 슬퍼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죽음에 가족이란 인연 때문에 그의 후사를 잘 치러준 것뿐이다.
‘동키 그랑데’ 의 아내는 “당신은 절대 꾀를 내지 않는 당나귀처럼 열심히 삼륜차를 끌었지만 당신은 평생 돈밖에 모르는 가난뱅이에 그랑데 영감 같은 수전노였어요. 딸의 학비에까지 이자를 붙여 먹었던 당신의 돈 5만 위안은 저희가 유산으로 남기지 않고 저승길 노자로 함께 보내드릴게요. 안 그러면 당신은 또 그 이자 받으러 올 것이잖아요. 부디 그 돈으로 저승에서 이자를 많이 굴려 대부가 되어도 귀신들에게 선행이라도 좀 베풀길 바랄게요. 그렇지 않는다면 당신은 저승에서도 버림받을 거예요.”
‘동키 그랑데’ 의 아내는 그의 골회와 함께 그가 남긴 5만 위안의 현금을 함께 묻으며 진저리를 떨었다.
‘동키 그랑데’ 의 딸은 “그동안 아버지가 저에게 한 짓은 너무 미웠지만 이제 다 용서할게요. 우린 앞으로 잘 살거니 부디 걱정은 마시고요.” 라고 하면서 그의 무덤에 흙을 얹어주었다.
2024. 송화강 1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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