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에 울고 웃는 여자
허복순
십 년 동안 꿈을 꾼 것 같다. 어쩌다 나로 돌아와, 아니 여자로 돌아와 발바닥에 힘을 넣으며 하이힐을 신었다. 치마를 입고 봄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거리에 나섰다. 공기도 새로운 것 같고, 기분은 날 것 같다. 봄꽃의 싱그러운 향기인지, 아니면 내 몸에서 풍기는 향 내음인지 코를 간질이며 내 마음을 더 흥분시킨다. 그러다 어느 거리의 음향설비가게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내 신난 발걸음에 절주감을 더해준다.
결혼은 미친 짓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서로 구속해 안달이야
………
오, 모두 미쳤나 봐 그런가 봐
왜 자꾸 머뭇거려…
………
날 그냥 내버려 둬 책임 못져
더 이상 부담 주지마
결혼은 이혼은 재혼은 결혼은
………
난 화려한 싱글이야
곡은 신나는데 가사는 영 마음에 안 든다. 불혹의 나이인 내가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만 10년째 뒷바라지하다가 이제 겨우 마음을 열고 재혼의 맞선을 나서는데 말이다. 게다가“왜 자꾸 머뭇거려”그 부분을 듣는 순간 나도 머뭇거릴 번했다. 어떻게 내린 결정인데…
십 년 동안 어깨위로 내려온 적 없던 쪽진 머리도 어쩌다 내 어깨에 내려앉아 바람을 맞으며 촐싹거린다. 나는 종아리에 힘을 쭉 넣고 허리를 꼿꼿이 펴며 최대한 일자형으로, 사십대 여인이 아닌 이십대 꽃나이의 처녀인 듯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들리는《오늘부터 나는 싱글이야》란 노래를 무시한 채…
아니 나는‘오늘부터 나는 싱글이야!’라고 소리 지르며 일자미소를 짓는다. 지천명의 나이 오십을 다 넘기고 이렇게 맞선 자리에 나서는 기분이 이렇듯 즐거울 줄을 어찌 알았으랴.
1. 어떤 재혼을 꿈꾸며
내 나이 32살에, 아들 열 살에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서 힘들게 아들을 키우면서 한 번도 재혼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의 손에서 눈치 보면서 커왔기에 자식한테 그런 아픔을 주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들에게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를 만들어주는 것이 어머니로서의 임무라고 생각했고, 아들이 대학이라는 큰 나무로 날아간 후에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리라 생각하였었다. 하지만 과부의 내 삶은 내 마음대로 순순히 굴러가지 않았다. 가장 힘든 건 경제력이었다. 혼자의 노임으로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고, 대학에 보낼 돈까지 적금하며 생활하자니 나는 남들이 하는 걸 다 하면서 살 수가 없었다. 여자로서 화장품을 사서 바른지도 까마득한 옛말이 된지가 오랬다.
그러다가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우리들의 근검절약의 생활 질서는 깨어지고 적금통장의 수치는 마이너스로 내려가고 말았다.
큰 사람이 되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며 주변사람들이 아들을 연변1중에 보내라고 부추겼다. 성적이 되는데 왜 안 보내느냐고 하는 바람에 돈 때문에 못 보낸다고 말하기는 자존심 상했고, 또 부모를 잘못 만나서 좋은 학교도 못 다녔다는 원망을 들을 것도 같아서 아들의 동의 없이 내가 지망을 용정고중에서 연변1중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붙어도 되고, 못 붙어도 아쉬울 건 없다고 생각했다. 연변1중에 붙으면 연길 가서 세집을 맡아야 했고, 나도 용정에서 연길로 통근해야 했으므로 내가 부담해야 할 경제적 부담은 과중하기만 하였다. 시험결과 아들은 겨우 점수 선에 도달하여 연변1중에 입학하였다.
3년간의 학습생활은 간고하였다. 사춘기로 민감한 아들은 낯선 환경에서 싱글 맘의 아들로서 경제조건의 차이로 인한 열등감을 느꼈고, 성적마저 부진하여 자존감마저 상실하였다. 이대로라면 일반대학도 가지 힘들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 없었던 내가 찾은 방법은“1대1 교사”를 모시는 것이었다.
“1대1 교사”의 학비가 일반 과외보다 두 배 정도 더 높았다. 생각지 않던 과외비로 인해 나름대로 대학자금까지 마련했던 적금은 거의 절반 넘게 축이 났지만 대학 못 가면 그걸 남길 필요도 없으니 일단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했다. 그런 간난신고 끝에 다행히 아들은 일반대학의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적금에 대출까지 내어 아들을 겨우 대학에 보내놓고 내 마음은 더 무겁기만 했다.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인생숙제를 완성한 여유를 마음껏 부리며 화려한 싱글로 멋있게 살아갈 것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버텨 왔던 나에게 남은 대학 뒷바라지나 그의 결혼을 위한 준비까지 또 나의 목을 조여 왔었다.
나는 출근으로 받는 노임 외에 거의 10년 동안 한국번역 일을 해서 적당한 수입을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 천하가 역병으로 신음소리를 내면서부터 나는 각박한 노임에 목을 해야 했다. 적은 나의 노임으로 아들의 뒷바라지나 그의 결혼자금을 준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에라도 나갈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래도 적은 노임이나 확실하게 보장되는 직장을 그만두기 싫었고, 역병의 도가니에서 신음할 때 외국으로 가는 것도 위험한 짓이고, 또한 별 보장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게 들어온 주문이 바로 재혼이었다.
“너 이제 재혼을 해라. 이런 때는 돈 좀 있는 남자와 결혼해 살면 편한 거다. 너 아직 예뻐서 돈 많은 총각에게라도 시집 갈 수 있을 거야. 돈 많은 늙은이들이라면 아예 줄을 설 거야.”
나의 절친 명희의 권고이자 주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삼일이고, 일주일이고, 한 달이건 명희의 집요한 권고와 주문에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갑자기 내 생활의 패턴이 깨지기 시작했을까. 조용한 방에는 나의 숨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고독하고, 외롭고, 왠지 슬펐다.
나도 좋은 남자와 재혼해 살고 싶었다. 그런데 행복한 재혼이 나에게 선물처럼 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역병시대에 자식의 뒷바라지나 결혼준비가 어려울 때 나에게 돈 많은 남자가 필요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멋진 재혼을 하고 난 후의 피곤함은 나를 겁먹게 했고, 어려서부터“엄마는 영원히 나하고만 살아야 돼.”하던 아들의 말이 귀가에 주문처럼 들려와 갑자기 나는 재혼에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실면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고, 점차 우울해졌다. 인생마저 허무해졌다.
마음이 병들면 만병이 찾아든다고 면역력의 저하로 인해 나도 그예 역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다.
열이 너무 올라 혼미해지기까지 했지만 따뜻한 물 한 컵을 건네주는 사람도, 약을 사다주는 사람도, 열을 내린다고 물찜질 해주는 사람도 없이 나 혼자 버텨야 했다. 슬펐다.
열이 내리고 정신이 좀 드니 배가 너무 고팠다. 몸은 솜처럼 해나른하여 손가락 하나 들 힘이 없었고, 입을 벌려 말할 힘조차도 없었다. 처음으로 돌아간 남편생각이 났다. 공장이 파산되어 집에서 외조를 하면서 자격지심으로 하루가 멀다하게 싸웠지만 그래도 하루 세 끼 따듯한 밥을 해놓고 기다리곤 했었다.
처음으로 혼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다.
사람이 그리웠다.
목이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또 기침이 컹컹 쉴 새 없이 나왔다. 마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기침하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기진한 나는 화장실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침대에서 벌벌 기어 내려와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기침을 하고 가래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뱉었다.
눈물이 났다.
울다가 지쳐서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서 잠들어버렸다. 사람이 힘이 없으면 이렇게 비참해질 수 있다는 것, 존엄 같은 건 운운할 수도 없음을 알았다. 만약 내가 이렇게 화장실 바닥에서 죽음으로 발견된다면…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 안의‘나’가 말한다. 그건 아니라고, 그건 네가 지금까지 아글타글 살아온 삶에 대한 부정이라고, 갈 때 가더라도 품위 있게 살다 가라며 내 머리를 쥐어박는다.
나는 살아야겠다는 욕망으로 비칠거리며 주방으로 가 냉장고문을 열었다. 감자 두 알에 오이 하나가 있었다. 나는 오이를 꺼내 씻지도 않고 그대로 서걱서걱 씹어 삼켰다. 시원한 오이향이 잠자고 있던 온몸의 세포를 깨운다. 조금 정신이 들었다. 나머지 감자 두 알을 삶아 먹으려고 일어서서 냉장고문을 여는데 어지럼증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냉장고 손잡이 쪽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면서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손으로 쓱 문질렀다.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보니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절친 명희의 번호를 눌렀다.
이런 모습을 제일 보여주기 싫은 사람이지만 또 이런 상황에서 제일 믿을 만한 사람이기도 한 명희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명희는 달려왔고, 나는 울며불며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설움과 슬픔을 다 털어 놓았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후,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에 아들이 친필로 쓴 편지를 받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였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요즘 많이 아프셨다고 명희 이모한테서 들었어요. 아프실 때 가장 가족이 그립고, 필요할 텐데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내가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아들로서 가책이 됩니다.
절 보내면서 빈 적금통장을 감추며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학비 걱정은 마세요. 제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또 시간 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해결할게요.
어머니만 건강하시고 행복하시면 됩니다.
명희이모가 어머니가 재혼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어 보든데요.
제 대답은 그래요.
절대 저를 위한 재혼은 하지 마시고, 어머니를 위한 재혼을 하세요.
저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 사업에 참여할 것이고, 또 결혼도 할 것예요. 이미 결혼할 상대도 있고요.
지금까지 어머니는 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어요. 그러니 어머니의 진정한‘사랑’을 찾으세요.
매 글자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담았어요. 느끼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내 몸에서도 어머니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요. 저는 영원히 어머니 착한 아들이 될게요.
사랑합니다. 어머니
부디 행복하세요!
아들 홍천으로부터
편지를 읽는 내내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나는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쩜 재혼에 미쳐갈 수도…
어수선한 내 마음을 달래준다고 워낙에 활발하고 개방적인 명희는 있는 자리 없는 자리 만들어서 나를 참여시켰다. 여러 유형의 모임에서 여자로서의 나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였고, 남자들의 사랑의 눈길도 많이 받게 되었다. 나는 대담히 재혼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런 뜻을 명희에게 내비쳤다. 명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 벗고 나서서 주선을 해주었다. 재혼은 말처럼 쉬운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아들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또 나의 외로운 삶에서 해탈되기 위해 재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나의 절친 명희가 나의 재혼상대를 주문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얼굴의 화장을 여러 번 고쳐가며 남자 만나러 나가기 시작했다.
2.첫째 남자가 무섭다고 하오
명희는“카오스 맥주 점”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완전 이십대구나, 너한테 이런 모습이 있는 줄 몰랐지. 너무 예쁘다야.”
명희는 호들갑을 떨며 부러운 듯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내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끈다.
문이 열렸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십 년 동안 보고 연구했던 사람만 몇 천 명은 되는지라 내 눈은 레이저보다 더 예리하고 정확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명희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두 남자를 한번 눈 빗질 해보니 금방 검사결과가 머리에서 찍혀져 나온다.
남자 1.
키: 175cm정도
체격: 보기 좋음
인물: 보통.
첫인상: 친구로 사귀기 좋은 사람.
실제 나이는 40세인데 삼십대 중반으로 보였다.
성격: 활발하고 직장에서는 상하 급 관계를 잘 처리할 줄 알며 발 빠르고 눈치 빠르고 중간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일인자 역할을 하기에는 능력미달인 사람.
남자 2.
키: 168cm정도
체격: 약하고 마름
인물: 보통에 미달
실제 나이는 40세인데 나이 사십대 중반
성격: 내성적이고 직장에서는 누구나 나쁘다는 사람이 없고 업무능력 최상이고 꾸준히 성적을 내는 사람이지만 아무도 견제하지 않는 사람. 상급의 사랑을 받는 충실한 부하직원. 권력과 명예에 둔감한 사람.
스캔을 끝내고 우리는 두 남자와 마주 앉았다. 명희는 키가 168cm 정도인 남자가 나와 맞선을 볼 남자라고 눈치를 주었다. 왜 하필 키가 작은 남자지? 나는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갈마들면서 서운함 같은 것을 느꼈다. 나와 맞선을 볼 남자도 곁에 앉은 키 큰 남자의 눈치를 받고 나를 주시해보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나에 대한 호감이 아주 강열하다는 것을 나는 보아낼 수 있었다. 명희는 먼저 나와 맞선을 볼 남자를 나에게 인사시켰다.
“서 과장 인사하오. 내 친구 경옥이요.”
남자는 소파에서 살짝 일어서며 남자의 손이라기보다 여자 손이라고 표현할 정도의 부드러운 손으로 내 손을 잡는다.
“서장국입니다.”
내 손을 어찌나 살짝 건드리는지 잡았다는 느낌도 안 들 정도로 짧은 부딪침이었다. 예쁘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자연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힘주어 잡거나 아니면 좀 오래 잡는다든가 하는 일반인들의 잣대로는 그 깊이를 잴 수 없는 별종인 것 같았다. 간단한 인사말이 오가고 술잔도 오갔다. 소개인 두 사람은 성격도 비슷한지라 어쩌다 지기를 만난 듯 떠들고 웃으면서 벌써 누나, 동생으로 호칭도 금방 바뀌었다. 하지만 주인공인 우리 두 사람은 가담가담 그들이 던져주는 말에 대답을 할 정도였다. 도대체가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가 헛갈릴 정도였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이런 자리에서 나에게 말도 걸어주고, 음식도 권하고 하면서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애쓰건만 내 맞선은 그냥 부어주는 술만 말없이 마셨다. 술 주량은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한참 떠들던 두 사람은 안 돼 보였는지 그제야 우리 주인공들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서 과장, 내 친구 세 살 위래도 그렇게 안 보이지?”
그 남자는 괜찮다는 듯 빙그레 웃는다. 담배 연기에 그은 듯 누르스레한 이가 보인다.
옆에 친구가 대답한다.
“아이고, 더 어려 보이네요.”
시장반공실 주임으로 일한다는 친구는 소개인답게 옆으로 치기 올려 추기 수법을 썼다.
“저번에 너네 심계국 국장이 우리 과로 왔다가 네 칭찬 많이 하더라. 심계국은 네가 없으면 못 돌아간다고.”
그리고는 나를 보며 농조로 경제력도 과시한다.
“결혼준비를 알뜰히 하느라 지금까지 장가 안 간 겁니다. 집도 있고, 적금도 적잖이 있을 겁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게다가 최 선생님처럼 예쁜 딸까지 안겨주면 가문의 왕이 되시는 거죠.”
애 때문에 신물이 난 사람한테 이제 다시 애를 낳아서 키우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시무룩이 웃기만 하였다. 올 때의 기분은 다 사그라지고 인제는 일어나고 싶은데 들러리 서러 온 두 사람이 더 신나하면서 2차로 노래방까지 가자고 하였다. 좀 자유로운 장소에 가서 요해를 깊이 하자고 하였지만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하였다. 우리는 각기 자기편을 데리고 돌아섰다. 나와 명희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어떻데?”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명희는 물었다.
“나랑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안가.”
“외모만 보면 당연히 너랑 안 어울리지. 그런데 재혼이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건 자식하고 경제문제 아니니? 그런데 총각이여서 자식이 없으니 너한테 마음을 다 줄 것이야. 돈도 따로 돌릴 데가 없으니 집이고 통장이고 고스란히 네 것이 될 거 아니니?”
“그건 그런데… 그래도 아닌 것 같아.”
명희는 답답하다는 듯 입을 다시더니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야, 너는 네가 아니야! 애 딸린 아줌마라고! 자신을 두어 등급 정도 낮추어 봐라, 아직도 처녀 때 배우자를 고르는 조건으로 견주지 말구.”
‘나는 나가 아니다.’는 말에 나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귀까지 뜨거워 난다.
‘나는 내가 아니라니?’
그럼 나는 누구로 살아야 하지? 외모는 이십대의 표준으로 가꾸어 놓았고, 마음도 이십대로 돌려 놨건만 현실은 나를 나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으로 살란다. 내 얼굴색이 변하는 걸 눈치 챈 명희는 커피 한 모금 마시더니 태도를 바꾸어 말한다.
“내가 너 자존심 상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보자. 이제 와서 뭘 바라겠니? 사랑? 사랑은 이미 지나갔어. 그냥 네가 마음 편하고 네가 필요한 거 해결해주는 믿음직한 사람이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 다 주고, 적금 다 준다면 더 이상을 바라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거야. 너 같은 우수한 여자한테는 좀 불공평하고 억울하겠지만 너 운명을 탓할 수밖에…”
기구한 운명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서 맺히면서 저도 몰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동갑이고 태어나서부터 한 마을에서 같은 물을 먹고 자랐고, 같은 학교를 나왔다. 학교에서 나는 부반장이고, 명희는 문오위원이었다. 인물체격도 내가 명희보다 못한 거 없었지만 명희는 전교 여자애들이 흠모하는 학생회주석이랑 자유연애로 결혼하여 부시장의 부인으로 시인대반공실 주임으로 지조 높은 삶을 사는데 나는 부모님의 주선으로 연애도 못해보고 결혼하여 사업에서 성과를 따내기도 전에 남편을 잃고 거의 십 년 동안 학교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아들만 바라고 코흘리개들과 싸우면서 살아왔으니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는 건가?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에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눈물을 흘리자 명희도 말없이 따라 운다. 명희는 슬며시 다가와 내 옆에 앉으면서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다. 나는 명희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이 마음대로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힘들 때마다 어깨를 내어주는 명희가 고마우면서도 부럽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나는 소녀 같은 꿈을 내려놓고 명희의 건의를 받아들여 현실에 맞추기로 하였다. 옛날부터 한 번 보기 다르고, 두 번 보기 다르다는 어르신들의 말씀대로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한 번만 더 만나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우리는 꼬치 집에서 만났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시늉을 한다. 영화에서는 남자들이 일어나서 걸상을 당겨주면서 여자를 기분 좋게 하건만 매너가 없다. 메뉴판을 주면서 먹고 싶은 걸 시키라고 하여 나는 갈비 살 열 개를 주문했다. 그는 이것저것 서른 개를 더 시켰다. 나는 적이 놀랐다. 지금은 꼬치 열개정도면 다 많이 먹는 편인데 둘이서 40개를 시키다니… 고기가 오르자 그는 열심히 구워서는 반반씩 똑같이 헤어서는 내 쪽으로 절반 옮겨놓았다. 나는 내장은 좋아 안하다고 사양했지만 그는 먹어보라며 기어이 내 앞에도 절반을 넘겨 놓았다. 고기가 절반쯤 축날 때까지도 그는 별말이 없고, 열심히 먹기만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목이 마를 때마다“한 잔 합시다.”하고는 맥주를 쭉 들이켠다. 답답해난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부모님이랑 같이 사신다고 들었는데 부모님은 다 건강하신가요?”
그는 입 안의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한다.
“지금 사는 집은 우리 부모님이 내가 공작에 참가하자 내 이름으로 사준 건데 이제는 거의 이십년이 되네요. 내가 결혼하면 고향인 태양으로 내려가시겠다고 해요. 농촌에도 집이 있거든요.”
말이 직설적이긴 해도 궁금증을 단번에 해결 할 수 있어서 대화가 힘들지는 않았다.
“형제는 누나 한 분 있다고 들었는데 뭐하시는 분이신가요?”
“우리 누나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서 일하는데 잘 살아요. 내가 결혼하면 누나가 결혼 집을 새로 사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부모님도 누나가 다 책임진다고… 나는 그냥 나만 잘 살면 된다고 하네요.”
얼마나 장가를 보내고 싶었으면 가족들이 이럴까 싶었다. 그러한 것들을 너무 당연하듯이 말하는 그가 철이 없어 보였다.
내 앞에 놓인 내장과 고기들을 내가 한 점도 먹지 않는데도 그는 부지런히 구워서는 넘긴다. 축나지 않는 음식이 보이지도 않는지.
“안 좋아하시면 다른 걸로 시켜드릴까요?”
이런 말도 없이 구워주기만 한다. 참 눈치가 없어도…
축나지 않는 내 앞의 고기까지 넘겨다 먹더니 어느 정도 배가 불렀는지 이번에는 마늘을 고기를 다 뽑아먹은 꼬챙이에 꿰어서 굽는다. 노랗게 구워지는 마늘꼬치를 바라보면서 남자는 어쩌다 주동적으로 말을 꺼낸다.
“애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무방합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리고 경옥씨 아들에 대해서는 자기 자식처럼 뭐든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고마운 그 말에 가슴에 얹혀있던 큰 돌덩이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한 잔 하자며 남자를 향해 맑게 웃었다. 다 구워진 마늘 하나 발라서 남자의 앞 접시에 놓아주고 나도 마늘 한쪽을 발라서 입에 넣었다. 들큰한 마늘향이 입안에 꽉 채워지며 시원한 맥주를 부른다.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성격이며, 애호며, 취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영화를 즐기는 공동한 취미가 있음을 기쁘게 발견하였다. 우리는 내친김에 영화 보러 가기로 하였다. 꼬치 집을 나서서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내가 멋을 내느라 굽 높은 구두까지 신다보니 그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몸을 흠칫 떨며 재빠르게 주위를 눈 빗질하였다.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우리. 택시 탈까요?”
걸어도 십분도 안 걸릴 거리건만 나는 굳이 택시를 타자고 하였다. 신호등에서 택시가 멈췄다. 그는 슬그머니 팔을 올려 내 어깨를 감싼다. 앞좌석의 기사가 후시경으로 슬쩍 들여다보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단번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뒤로 손을 뻗쳐 허리를 감싸면 티도 안 나고 느낌도 더 좋으련만 굳이 목을 감싸 안는 건 뭘까? 눈치가 없어도. 차가 멈추자 나는 도망치듯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저만치 걸어가는데 택시기사가 부른다.
“손님, 핸드폰을 두고 내렸어요.”
“감사합니다.”하고 급히 몸을 돌리려는데 오지랖이 넓은 운전기사가 달려와서 슬며시 물어왔다.
“저 분은 대상자인가요?”
아까 멋쩍었던 것을 복수라도 하듯 나는 곱지 않게 되물었다.
“왜요? 우리 어울리지 않나요?”
“여사분이 너무 아깝네요.”
지나치게 솔직한 운전기사의 말에 나는 대번에 기분이 잡쳤다.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어디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집에 갈까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팝콘과 콜라 두 병을 들고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아는 얼굴이라도 만날까 두렵다. 남자가 더 가까이 오기 전에 나는 우리가 일행이 아닌 듯 먼저 상영관을 향해 걸어갔다. 빨리 어두운 곳에 숨어버리고 싶어서였다. 안은 넓고 고급스러운 의자가 쭉 배열되어 있어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앉아보니 포근하였다. 가운데 팝콘이랑 음료를 놓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연인들이 영화 관람을 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도 저런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인 것 같아 언짢던 기분이 조금 풀어진다.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세 쌍이고 딸을 데리고 온 엄마가 있었다. 우리는 뒤쪽으로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기분이 묘했다. 문화적 정취가 다분한 분위기에서 나도 이십대의 문학소녀로 돌아간 듯하였고, 앞자리에 앉은 젊은 연인들의 사랑행각이 나의 눈을 자극하고 향긋한 팝콘향이 내 코를 간질인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센스 없어 보이던 남자가 선택한 것은 다행히 멜로영화여서 지금의 분위기와 맞았다. 주인공남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에 푹 빠진 나는 내가 여자주인공이라도 된 듯 기쁨과 설렘에 가슴을 태웠다. 달아오른 얼굴을 매만지며 남자를 쳐다보니 그는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나는 콜라병을 집어 쪼록쪼록 소리 내어 빨았다. 잠을 깬 남자는 자기도 콜라병을 들어 후루룩 빤다. 멋쩍은 듯 팝콘 통에 손을 넣는다. 이미 팝콘 한 줌을 집으려던 내 손과 부딪친다. 남자는 흠칫 하는 듯하더니 내 손을 잡는다. 손이 따듯하다. 오랜만에 남자의 손길을 느껴본다. 내 몸의 피가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두 손의 뜨거운 체온에 팝콘의 엿이 녹아내려 손을 적시는 끈적끈적함이 느껴진다. 나는 그제야 손을 빼고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고 한 장을 뽑아 남자에게도 건네준다.
돌아오는 길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다. 서로가 자기 생각에 잠겨서 걷는다. 현관 앞에 다다랐다. 남자는 마주섰다. 남자는 아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한 번 안아 봐도 될까요?”라고 말한다. 아직 몸의 열이 다 내리지 않은 나는 거절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안아주세요.”하고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멍하니 서있자 남자는 그제야 다가와서 나를 끌어안는다. 조심스럽게 감싸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쿵쿵 울리는 남자의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조금 식었던 열기가 다시 가열되어 온몸에 퍼지면서 피가 속도를 가하며 흐른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서서히 다가와 내 입술위에 얹힌다. 입안에 침이 그들먹이 고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의 뜨거운 숨소리가 내 얼굴을 간질인다. 또 침이 차오른다. 꿀꺽 삼킨다. 그때까지도 남자의 입술은 원 자리에서 미동이다. 빠르게 흐르던 피가 서서히 정상속도로 돌아온다. 나는 남자를 밀어낸다. 우리는 교차로에서 만날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평행선에서 달려야 할 사람들인 것 같았다.
“늦었어요. 들어갈게요.”
나는 누가 볼세라 부랴부랴 돌아섰다. 남자는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른 채 어정쩡하게 선 채로 멀어져 가는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다.
3. 둘째 남자가 무섭다고 하오
책임성 높은 명희는 기어이 날 시집보내고야 만다고 팔을 걷고 나선다. 이번에는 나보다 여섯 살 이상인 이혼남을 소개하였다. 딸이 한 명 있는데 이미 시집가서 잘 살고 있으니 나한테는 부담될 게 없다고 하였다. 제2선에서 편히 보내고 있는 간부로서 경제력도 있고, 시간도 넉넉하니 사랑받을 일만 남은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첫 번째 맞선의 실패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도 못하여 달갑지 않았지만 명희의 성화에 만나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들러리도 없이 직접 둘이 만나기로 했다. 마음을 편히 가진다 해도 선 자리는 역시 사람을 긴장시킨다. 나이가 드신 분이라 하니 나는 옷차림도 점잖고 우아한 쪽으로 골라 입고 약간의 흥분을 안고 집을 나섰다. 새까만 벤츠승용차 한 대가 문 앞에 서있다. 운전석문이 열리더니 대머리 아저씨 한 분이 내려와 나를 보며 웃는다.
“최경옥 씨 맞죠.”
“네 그런데요. 누구신지?”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입니다. 참 미인이시네요. 타세요.”
대머리는 느슨하게 웃으면서 조수석의 문을 열고 손으로 문 높이를 견주며 내 머리가 차문에 부딪히지 않도록 안쪽으로 안내한다. 드라마 장면속의 주인공들이나 느끼는 향수를 누려보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대머리는 자리에 앉자 먼저 내 안전띠를 둘러주었다. 쓰러질듯 몸이 내 쪽으로 기울어 왔고 나는 숨을 죽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딴딴한 팔뚝이 슬쩍 내 젖가슴을 스치고 지났다.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으니 감점으로 매길 수는 없었다. 승용차가 스르륵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아파트단지를 빠져나간다. 지인들이 벤츠승용차를 남자와 같이 타는 내 모습을 보고 소문을 내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마중 온 남편의 고급승용차 조수석에 턱 하니 앉아서 차창 밖으로 머리칼을 휘날리던 여인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오늘은 내가 그런 여인으로 되었으니 마음은 꿀 먹은 듯 달콤했다. 저 하늘 끝 어디까지라도 지금처럼 달리고 싶었다.
“시교에 있는 친구가 하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조용하고 음식도 맛있어요.”
느릿하게 전해오는 저음이 무게 있게 들려온다.
“엄마 손맛을 떠올리는 닭곰이나 초두부 같은 것도 있고요. 불고기 같은 것도 있는데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나는“가리는 거 없이 다 좋아해요.”라고 말할까 하다가 성의 없다고 생각 할 것 같고, 또 자기 주견이 없는 사람으로 볼 것 같아서 똑 부러지게 대답하였다.
“전, 양 꼬치나 불고기 쪽을 좋아해요.”
“저랑 입맛이 비슷하네요. 저도 불고기 좋아하는데 하하하!”
별로 우스운 일도 아닌데 너무 크게 웃는다. 기분이 좋은가보다. 나무가 우거진 수림 속 한가운데 조용하고 아담한 우리민족의 옛 식 건물이 보인다. 앞마당에는 인공폭포에 분수도 있고, 옹기종기 장독도 배열되어 있어 어릴 적 우리 외갓집에 온 듯한 친근감을 준다. 사십대쯤의 사장인 듯한 여인이 마주나오며 반긴다.
“김 국장님, 오랜 만이시네요. 자주 들리시지. 면목도 잊히려고 하네요.”
사장의 목소리는 대머리를 향했지만 눈은 나를 눈 빗질한다.
“나야, 귀한 손님 아니면 여기로 안 모시지 허허. 조용한 방으로 주시오.”
방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하는데 나는 선 듯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벽에는 분홍색으로 된 원앙새가 그려진 벽보가 걸려있고, 벽 쪽 이불장에는 청색홍색으로 여민 결혼이불과 칠색단요가 얹혀있었다. 온돌방 가운데는 둥근 상에 두툼한 칠색단자부동이 마주 놓여 있고 상우에는 귀여운 옛 식 누런 놋쇠그릇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도 나의 신혼 방에 온 듯한 느낌이 들면서 불현듯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는 우리 나이에는 드물게 옛 식 결혼을 하고, 이런 방에서 첫날밤을 보냈었다.
“최 선생, 어서 올라가세요.”
대머리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나는 엉겁결에 구들에 올라섰다. 여러 가지 고기들이 오르고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린다. 부지런히 고기를 뒤번지는 대머리의 이마에선 땀이 번들거린다. 나는 뙤창을 열었다. 산 향기를 실은 싱그러운 산바람이 불어 들어와 가슴을 훑는다. 여러 가지 잡념들도 흩어져간다. 참새 두 마리가 나무위에서 짹―짹 울어댄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자연의 정취에 푹 빠져들며 나는 무릉도원에 온 듯하였다. 저 멀리에서 뻐꾹뻐꾹 하는 뻐꾹새의 울음소리도 귀맛 좋게 들려온다.
대머리는 다 익은 고기를 먹기 좋게 잘게 썰고 있다. 나는“제가 할게요.”하면서 가위를 넘겨잡고 싹둑싹둑 잽싸게 잘라서 타지 않게 변두리에 옮겨 놓는다.
대머리는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땀을 닦고는 잔을 든다.
“최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서 너무 기쁩니다. 식상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첫눈에 반했어요. 내가 바라던 이상형입니다. 한 잔 합시다.”
그는 먼저 고기를 집어 양념에 묻혀서 내 앞에 놓아준 후 다음에 자기도 한 점 집는다. 우물우물 넘기고 말을 잇는다.
“내가 비록 이혼남이기는 하지만 남편으로서 내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아내가 잘못한 것도 없어요. 상황이 그렇게 되다보니 헤어진 겁니다.”
대머리는 이번에는 고기와 야채와 마늘을 고루 얹어 쌈을 만들어 나에게 건넌다. 다행히 입에 넣어주겠다고 하지 않아서 나는 고맙게 받았다. 쌈을 씹는 입안이 달콤해 난다. 나도 제일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국장님, 실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혼사유는 무엇이었나요?”
남자는 허구푸게 웃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혼사유를 뭐라고 해야 될지, 아내의 꿈은 여성기업가로 되는 것이었어요. 그만한 꿈을 가질 만큼 능력이 있는 여자죠, 외자기업이 들어서던 시기에 한국인하고 합작하여 작은 기업을 세웠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됐어요. 빚이 늘어나자 한국인은 한국으로 도망가 버렸어요.”
대머리는 잠간 말을 멈추더니 다시 고기 한 점 집어서 내 앞에 놓아준다.
“많이 드세요. 몸매보다 건강이 우선이죠.”
‘내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역시 유부남은 어딘가 다르네.’
나는 집어준 고기를 냉큼 입에 넣고 다그쳐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경옥 씨가 궁금해 하면 거짓 없이 다 말해야겠죠? 부부사이엔 믿음이 중요하니까.”
최 선생이 경옥 씨로 바뀌었네. 고기 두 점 받아먹은 것뿐인데 너무 앞서가는 건 아닌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능글맞은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아내는 꿈이 큰 여자였어요.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서지 않죠. 나는 언제나 그의 지지자였죠. 내가 좌우지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어요.”
그의 얼굴에는 아내에 대한 막연함, 존경심, 그리움이 그려져 있었다. 아직도 아내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나한테 기대고 나만을 바라보는 경옥 씨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요. 한번 남자답게 살아보게요.”
나는 조금은 시무룩해졌다. 술 한 잔을 들어 쭉 굽을 냈다. 이건 무슨 감정인가? 질투심? 내가 왜?
“지금은 어디에 계세요?”
대머리도 술 한 잔을 넘기고 말을 이었다.
“미국에요. 인젠 15년 됐어요. 거기서 아마도 기업가의 꿈을 이루고 있겠죠. 오지 않으니 이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인생만 허무하게 된 거죠. 인제라도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경옥 씨 같은 분을 만나야 되는데 허허허…”
그의 마른 웃음소리는 자성(磁性)이 없고 메마르게 들려온다.
그는 나에게도 한 잔, 자기 앞에도 한 잔 술을 붓고는 그윽한 눈길로 나를 응시한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할까요?”
대머리는 고기 한 점을 집어서는 비계를 뜯어낸 후, 상추에 올리고 쌈장 듬뿍 바르고 마늘까지 얹어서는 새지 않도록 정성스레 오므려서 내 입으로 가져온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제, 경옥 씨는 아무 걱정 말아요. 내가 든든히 지켜줄게요.”
크지 않은 쌈이 목구멍을 꽉 메우면서 코마루가 찡해 온다. 나는 억지로 참으면서 쌈을 꿀꺽 삼키였다. 나의 미세한 감정변화도 대머리의 눈을 피할 수 없었나 보다. 그는 상우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다독인다. 그리고는 손을 쥔 채로 일어서더니 상을 에돌아 내 쪽으로 넘어와 나를 살며시 껴안아준다. 넓고 든든한 가슴에 안긴다. 너무 포근하고 따뜻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이런 품에서라면 공주로 되는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굽실굽실 파도쳐 내린 내 머리 숲에 남자는 얼굴을 묻는다. 나지막이 속삭인다.
“향이 참 좋다.”
다정하게 내 머리를 어루 쓸면서 남자는 신음하듯 중얼거린다.
“내가 긴 머리를 그렇게 원했건만 한 번도 날 만족시켜 주지 않았어요.”
그 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맴돌더니 기억속의 남자 목소리가 대답한다.
“나도 당신 앞에서 남자이고 싶었어. 그런데 당신은 한 번도 나한테 기대지 않았어.”
마지막 숨을 톺으며 힘겹게 토해내던 남편의 마지막 얼굴이 떠오른다. 깜짝 놀라서 남자를 밀어내치며 가슴에서 빠져 나왔다. 갑작스런 나의 거동에 휘청하던 남자는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 부시시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간다. 둘은 말없이 불판에서 부직부직 익어가며 몸이 오그라드는 오징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최 선생. 방금은 실례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남은 인생의 행복을 사고 싶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맥주 한잔을 입안에 쏟아 부었다.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의 목숨까지 걸고 경옥 씨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지켜준다. 지켜준다. 지켜준다.”
메아리가 되어 가까이에서부터 멀리로 흩어져 간다. 남편이 피 묻은 입술을 감빨며 나한테 남긴 마지막 부탁이었다.
‘나보다 우수한 당신을 잃을까봐 못되게만 굴었어. 미안해, 힘들었지. 이제 다시 만나면 꼭 당신보다 우수한 사람,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편하게 살아…’
남편은 오토바이 사고로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 아버지는 농촌간부였고 시아버지는 시정부에서 사업하셨는데 농촌에 사업시찰을 내려오셨다가 우리 집에서 이틀간 묵게 되었다. 그때 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며느리 삼으셨으면 좋겠다고 하시였다. 나는 농담인 줄로 알았는데 진짜로 진척을 하시였다. 아버지의 간곡한 설복 끝에 나는 남편을 만났고, 조건이나 여러 모로 별로 짝이 지우지 않아 우리 나이에는 드문 부모님들의 소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아버지는 발탁되어 현성으로 전근을 하셨고 사업단위 명액으로 헐값으로 집도 분배 받았다.
결혼해서 몇 년은 아기자기 재밌었다. 그러다가 차츰 서로를 깊이 알아가게 되자 집안일은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가정에서 크고 작은 일은 내가 나서서 처리하게 되었고, 남편은 가장의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자격지심으로 우울해지는가 싶더니 그 후로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 날도 나를 미행하다가 차 사고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당신을 만난 걸 후회 하지 않소. 당신을 사랑하오,’하면서 사랑을 호소했지만‘사랑’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이제 다시 결혼을 한다면 절대 조건만남 같은 건 안하리라고.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현실은 늘 나를 조롱하며 비참하게 만든다. 지금 나는 또다시 조건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는가? 그의 화려한 조건에 눈이 멀어 내 마음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은 갈 때와는 달리 무거운 기운이 감돈다. 대리기사가 운전을 하고 우리 둘은 나란히 뒤 좌석에 앉았다. 남자는 조용히 내 손을 잡는다. 나는 항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별 느낌이 없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대머리도 따라 내리면서 물었다.
“실례되지 않는 다면 제가 올라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면 안 될까요?”
남자의 애원에 찬 눈길을 피하며 나는 거절했다.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하다. 빨리 눕고 싶었다.
“그럼 악수라도 하고 헤어집시다. 경옥 씨의 전화만 기다리겠습니다.”
남자는 점잖게 악수를 하고는 돌아선다. 현관 등의 불빛에 대머리가 더욱 번쩍거렸고 허리가 휘어든 그림자가 멀어져 간다.
딩동, 문자가 온다. 명희이다. 나는 명희와 메시지대화를 시작했다.
‘어떻게 됐어? 궁금해서 자지 않고 기다렸어.’
‘사람도 좋고 조건도 좋더라. 그런데 내 짝은 아닌 것 같아.’
‘또 뭐가 문젠데 그래? 그 만한 사람 등잔 켜고 찾아도 없어.’
‘알아, 그런데 결혼까지 갈 마음이 안 생겨.’
‘안 되는 이유 하나만 말해봐 좀 들어보자.’
나는‘대머리고, 허리도 구부정하고, 나이 들어보여서 싫어.’라고 썼다가‘너 나이에 무슨 외모지상주의니?’라고 할 것 같아 지웠다. 다시‘그 사람 마음엔 아직도 아내가 차지하고 있어서 내 자리가 없어.’라고 썼다가‘전처의 흔적이 없으려면 총각을 만나야지.’라고 할까봐 또 지웠다.
내가 썼다 지웠다 하는 사이에 성미가 급한 명희는 음성통화를 보내왔다.
“도대체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니?”
명희의 열띤 목소리에 나는 미안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의 마음이 안 생겨…”
명희는 어이없다는 듯이 하~ 하는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화가 난 듯 말했다.
“어느 때라고 사랑 타령이니? 나 투항이다. 너 혼자 살아.”
그리고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음성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래, 재혼은 뭐 아무나 하나. 사랑 없는 재혼은 또 다른 결혼의 무덤일 것이다. 두 번 다시 조건결혼을 한다면 그게 더 바보스러운 짓이겠지. 나는 마음을 다독이며 멋있는 싱글 맘으로 살아갈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다가 잠이 들었다.
4. 셋째 남자가 무섭다고 하오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세상을 다 잃은 듯 허전하여 이제는 무얼 바라고 살아야 하나 목표가 없이 헤매다가 재혼으로 또 다른 나로 살아보려던 아름다운 희망도 물거품으로 되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차츰 혼자만의 생활에 적응되어 갔지만 걱정스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경제상의 어려움이었다. 워낙에도 빠듯한 살림에 명희가 내부인원 가격으로 내놓은 집이 있으니 아들 이름으로 마련해놓으라는 말에 욕심이 생겨서 주머니사정은 생각도 않고 공적금만 믿고 덜컥 사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공적금으로는 부족하여 은행대출을 받았는데 한 달에 1500원씩 대출금으로 나가고, 아들 생활비로 2000원 학교에 보내고, 나면 4천원 좀 넘게 나오는 로임으로는 고기 한 번 사먹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뭐든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머리를 짜 봐도 일개 교원이 할 수 있는 부업이라야 과외 밖에 더 없었다. 정부로부터 재직인원은 과외보도를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지뢰구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일선교원도 아니고 부교장직에 있다 보니 학생모집도 힘들었다. 나는 반주임들 중에서도 그래도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내 사정을 잘 아는 경숙선생한테 부탁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저번 부교장경선에서 나와 두 표 차로 낙선되어 조금 사이가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라이벌로 20여년 함께 해온 세월이 있는데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 미안한데 부탁 좀 해도 될까요?”
“오, 최 교장님이시군요. 영도에서 무슨 부탁이라는 단어를 쓰십니까. 호호. 지시만 하세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제가 미안하죠. 그래도 어려운 일이 있으니까 선생님밖에 생각 안 나서 전화 드렸어요. 선생님의 인격을 전 믿어요.”
“농담이요. 무슨 일이요? 말하오.”
그제야 경숙선생은 원 어투로 돌아서며 시원스럽게 나온다.
“선생님도 제 사정을 잘 아시잖아요. 아무래도 과외 좀 해야 내가 살 것 같아요. 힘들어서 굶어죽게 생겼어요.”
“몇 명 보내줄까?”
“지금은 형세도 이렇고 하니 말이 안 나갈 집으로 5명만 모집해주세요.”
경숙선생의 도움으로 일 년 간 밥은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 해 연말에 학교에서는 고급교사직함평의를 하게 되었다. 고급교사직함평의는 모든 교원들이 신경을 모으는 일이였다. 조건에 부합되는 인원은 많은데 명액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여러 항목에 따라서 점수를 매기고 선정하였다. 한평생 교원사업을 하면서 고급교사직함도 못 가지고 퇴직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간주되고 있었고 또 로임도 많이 차이가 나다보니 말없는 전투마당이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또 한 번 경숙선생하고 내가 후보자로 되었고, 둘 가운데 한 사람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부교장이다보니 그 선생보다 추가점수가 있어서 내 쪽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부교장경선 때도 그렇고 나는 경숙선생을 존경하고 가깝게 보내고 싶은데 왜 이렇게 자꾸 부딪치게 되는지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발등에 불 떨어진 신세라 양보할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며칠 후, 교장선생님이 부르셨다. 늘 웃어주던 분이 오늘은 전례 없이 엄숙한 얼굴로 말한다.
“최 교장, 혹시 과외를 했소?”
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하는 사이 교장선생님은 대답도 필요 없다는 듯이 계속한다.
“시교육국에서 부르니까 가보오. 시기가 시기인 것만큼 일이 좀 복잡해질 것 같소. 마음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서 잘 말해보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싶었다. 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달래며 교육국 법제과의 문을 열었다. 들어서는 나를 보자 지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한테로 다가와 손을 마주비비며 긴장한 듯 말한다.
“제보가 들어왔어요. 여기 아니고 주교육국이에요, 여기 들어오면 그냥 다시는 하지 말라고 권고비평으로 끝낼 수 있는데 조사조까지 내려왔어요.”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 과장은“저쪽 방으로 갑시다.”하면서 앞장서서 걸어 나간다. 나는 코 꿴 송아지마냥 졸래졸래 따라 나갔다. 머릿속에서는 전쟁이 일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상황을 보면서 숨길 건 숨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저쪽 방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이십대 쯤 돼 보이는 젊은이고, 다른 한 명은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누런 금테안경을 건 남자 분이었는데 피부도 희고 깔끔하고 단정해보였다. 조사는 젊은이가 하였다. 그는 이것저것 사실 확인을 했다. 어찌나 상세하게 알고 있는지 속이고 뭐고 할 게 없었다.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사실대로 승인하였다. 내가 대답을 인차 못하고 긴장해하자 금테안경은 뜨거운 물을 부어 주면서“마시면서 이야기 하세요.”하면서 웃어준다. 가쯘한 하얀 치아가 보인다. 웃고 있는 그 사람이 참 얄밉다. 나는 울고 싶은데…
마지막 결론을 말한다.
“하나는 제보가 들어왔고요. 다음은 일반 교원도 아니고 교장선생님이셔서 영향이 아주 나쁩니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고처분을 받고 반성문을 전교교원대회에서 읽는 방안, 둘째는 교장 직에서 면직되는 것이고, 셋째는 교원 대오에서 영원히 제명당할 수도 있습니다. 토론을 거쳐서 며칠 후에 다시 통지를 드리겠습니다. 사상준비를 하고 계세요.”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아들 같은 젊은이 앞임에도 불구하고 예고도 없이 눈물이 뚝 터진 강물처럼 좔좔 흘러내린다. 금테안경은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나한테 건넨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손수건을 받아 흐르는 눈물을 적셔냈다. 지과장이 들어와서 부축하여 겨우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앞길이 캄캄하다. 이대로 제명당하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들을 두고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 되고 살 수도 없는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라도 알려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계 앞에서는 나의 자랑이었던‘선생님’의 명칭도 내놓을 수 있고 이십여 년 밤낮없이 분투하여 얻었던 부교장이라는 명예도 서슴없이 버릴 수 있었다. 그냥 학교 식당도 좋고 청소공도 좋고 출근만 할 수 있게 해준다면 더 바라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습관적으로 거울 앞에 섰다. 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나는 그를 찾는다. 거울속의‘나’가 말한다.
‘너, 결심했어? 다 버릴 수 있지?’
나는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봐? 용기를 내야 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충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섰다. 택시를 타려고 했으나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보이지 않는다. 내 마음은 급하다. 밤거리를 달린다. 금테안경이 묵고 있다는 진달래호텔에 도착하여 전화를 하였다.
“죄송한데요. 저 아까 낮에 만났던 최 선생입니다. 다 하지 못한 말이 있어서 찾아 왔어요. 잠간 내려와 주시면 안 될까요?”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다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 데요.”
나는 숨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호텔로비까지 왔습니다. 일층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무례하기는 해도 지금 나는 이것저것 고려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나는 커피숍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지금 내려오지 않더라도 죽치고 앉아있으면 아침에라도 내려오면 만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듯 간절하게 만나고 싶고 만나려고 찾아왔지만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은 하얗다. 그냥 만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뿐이다. 나는 물 컵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앉아있다.
복무원이 단설기와 뜨거운 백과향 차를 가져다 테이블 위에 놓는다. 나는 의아해 하며 묻는다.
“나, 시키지 않았어요.”
“666호실 손님이 시키신 겁니다.”
커피숍 오면 내가 꼭 시키는 두 메뉴, 내려오지 않겠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전달하는구나.
처음 바다를 마주 했을 때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보며 환성을 질렀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잇닿아 하나가 돼 보이는 장관 앞에서 나는 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미소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고, 울고 웃는 세상만사가 이 바다 앞에서는 그냥 아이들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바다는 조용하다. 가끔씩 출렁이며 기슭의 모래알들을 씻어간다. 나는 한 알의 모래가 되여 바다의 세계에 흔적 없이 묻히고 싶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커피 잔을 손에 든 금테안경이 내 앞에 서있다.
나는 생각 밖이라 벌떡 일어섰다. 그가 또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내 어깨를 잡고 앉으라고 하고는 자기도 마주 앉는다. 금방 샤와를 마친 듯 얼굴과 머리 결이 촉촉해 보이고 알로에비누의 시원한 향이 진하게 풍겨온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뜨거운 백과향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커피를 시킬까 하다가 잠이 안 오는 분도 있다고 해서 차를 시켰어요.”
‘고맙다고’머리로는 말하는데 입은 붙었는지 말이 안 나온다.
금테안경은 단설기를 조금 베어 내 앞에 놓아주며 말한다.
“스트레스 받았을 땐 단것을 드시면 해소된대요.”
가슴이 뭉클해난다. 참았던 설움이 임자를 만난 듯 터져 나와 반쯤 비워진 찻잔에 뚝뚝 떨어진다. 금테안경은 찻잔에 떨어지는 눈물을 막으려는 듯 급히 손수건을 꺼내 찻잔을 덮는다. 나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로 가져간다. 똑같은 손수건, 낮에 받았던 금테안경의 손수건, 우리 둘은 똑 같은 손수건을 보며 웃는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다니? 사람은 참 이상한 동물인가보다. 단설기를 한입 떼어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각의 크림이 한입 가득 차오른다. 나는 혀끝을 입천장에 대고 몇 번 더 문지르면서 단맛을 한껏 느낀 후, 사르르 넘겼다. 마음이 진정되고 편안해진다.
나는 오랜 지기를 만난 듯 지금까지 누구하고도 하지 않았던 살아온 이야기와 그 사건들 속에서 느꼈던 세세한 감정까지도 주절주절 이야기 하였다. 금테안경은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내 이야기보다는 중간, 중간 단설기를 베어 내 앞 접시에 놓아주는 것에 더 집중하는 듯하였다.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이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구구절절 읊조리는 것은 살아온 삶에 대한 미련인지 아니면 벼랑위에 선 사람에게 구하는 애원의 목소리인지…
말을 다 하고나니 마음은 후련해났다. 이런 말까지 하려고 한건 아닌데 극본 없는 연극을 연출한 자신이 관중 없는 무대에서 혼자 놀아난 어릿광대가 된 듯 뒤늦게야 부끄러워 났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급히 코트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연신 사과하였다.
“미안합니다. 늦은 시간에. 제가 실수 했습니다.”
나는 도망치듯 커피숍에서 빠져나왔다. 금테안경의 목소리가 코트자락에 따라온다.
“잠깐만요. 바래다 드릴게요.”
나는 못 들은 척 종종걸음을 치며 홀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택시도 없을 겁니다. 걸읍시다.”
금테안경은 내 손의 코트를 당겨 내 몸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한다.
우리는 강변도로를 걸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오래 동안 쌓였던 체증이 풀린 듯 가슴이 뻥 뚫린다. 어떠한 결론이 나오든지 용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노 교원으로서 공산당원으로서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마음을 먹는다.
집문 앞에 다다랐다. 금테안경은 핸드폰을 꺼내며 말한다.
“전화번호를 입력해주세요. 결정이 나면 처음으로 알려 드릴게요.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제일 나쁜 결과까지는 안 가겠지요.”
일말의 희망이 생기는 거 아닌가 싶으며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손끝이 떨린다.
실면의 밤이다. 지치고 힘들게 달려오느라 실면이 뭔지 몰랐고 누우면 금방 잠들곤 하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주소록을 열고 하나하나의 이름들을 보면서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킨다.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 보이는 이름들을 하나씩 삭제했다. 갑자기 딩동~ 위챗 추가를 요청하는 메시지가 뜬다. 금테안경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급히 허락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손수건을 빌려준 남자입니다.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편히 쉬세요.
문자를 읽는 순간 미소가 번진다. 마음이 따뜻해난다.
내안의‘나’가 갑자기 뛰쳐나와 말한다.
‘그분 참 자상하시고, 말수도 적으시고, 눈길도 그윽하시고 유머감각도 있으시고 참 재미있는 분이네.’
나는 머리를 흔들며‘나’를 나무랐다.
‘아니야, 지금 심각한 상황인데 너 좀 나대지 마.’
나와‘나’는 밤새 승강이질을 하다가 잠들었다.
소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게만 흐른다. 월요일에 결정이 난다니까 이 주말은 지옥의 시간이다. 월요일 아침이다. 다섯 시가 되니 어김없이 벨이 울린다. 그렇게 듣기 싫던 벨소리도 오늘만은 정겹게 들려온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자명종을 들어 깨끗이 닦아주고 너도 좀 쉬라고 벨을 끄고 다시 이불을 들쓰고 눕는다. 손에는 전화기만 꼭 쥐고 있다. 여섯 시가 되니 더는 버티고 있을 수 없어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는다. 화장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거울속의‘나’가 말한다.
‘화장을 하고 기다려. 금테안경이 도와줄 거야.’
그때 딩동, 메시지가 온다.
금테안경:
출근할 수 있을 겁니다.
간단한 한 줄의 메시지였지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나는 간단히 화장을 마치고 첫 출근 날 입었던 양복을 찾아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교장선생님의 전화만 기다렸다. 출근만 할 수 있다면 체면도 명에도 다 버릴 수 있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최 선생, 출근하세요. 먼저 저희 사무실에 들르세요.”
최 교장이 최 선생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인제 출근할 수 있다고 하니 또 마음이 무거워난다. 결국 나는 교원대회에서 반성문을 읽었고, 부교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일반교원자격도 박탈당하고 학교 도서관리를 책임지게 되었다. 나는 도서실에서 두문불출하고 책만 열심히 읽었다. 책을 보니 잡생각을 할 사이도 없고 문학소녀의 꿈을 꾸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하였다. 유일한 교제상대는 나의 절친 명희뿐이다.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위챗문자가 딩동 떠오른다.
명희:
내일 네 생일이지? 저녁 다섯 시에 백옥뀀점에서 기다릴 게, 밤새 놀자.
전화기를 닫으려는데 또 딩동~ 하고 문자가 뜬다.
금테안경:
오늘 일보러 용정에 왔는데 잠간 만나서 함께 식사하실까요?
가슴이 뛴다. 나는 잊고 있었는데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는 인사도 할 겸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보쌈집에서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더덕구이에다, 족발 쌈이 올라 있었다. 나는 저번의 어색한 만남을 잊으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셨죠?”
내가 환하게 웃자, 그도 흰 이를 드러내며 따라 웃는다.
“최 선생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놀란 듯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진짜요?”
그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신나게 말한다.
“선생님은 해산물을 좋아하고요. 육류는 안 드시는데 족발하고 닭발만은 예외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또 더 아는 것이 있나요?”
나는 다그쳐 물었다.
“흰색을 좋아하고요, 민요를 잘 부르시고요, 운동은 안 좋아하는데 탁구만은 수준급이다.”
금테안경은 시뚝해 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번에 만났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내 표정이 바뀌자 그제야 그는 웃음을 거두면서 말했다.
“놀라지 마세요. 저는 명희사촌오빱니다. 명희가 선생님을 나한테 소개해준다면서 중학교 때부터 내 앞에서 선생님 자랑을 하더니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네요.”
그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명희한테서 아주 멋있는 사촌오빠가 있다며 자랑하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우리는 그날 많은 말을 하였다. 그도 작가의 꿈을 꾸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번째 맥주상자가 굽이 날 무렵에는 함께 다시 문학을 시작해보기로 약속까지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가방 안에서 예쁜 선물함을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그가 선물까지 준비하고 왔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급히 포장을 뜯어보니 예쁜 여자용 시계와 편지 한 장이 있었다. 오랜 편지지는 접은 자리가 찢어져 있었지만 또박또박 쓰인 글만은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경옥 씨에게:
생일 축하합니다.
올해부터의 생일은 저랑 함께 보냅시다.
“카오스다방”앞에서 올 때 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명희오빠 명호로부터
1995년 5월 7일
부치지 못한 연애편지.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놀랍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나한테도 이런 낭만적인 사랑의 로맨스가 숨겨져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때로 되돌아 간 듯 온밤 흥분으로 잠을 설치였다. 그때 이 편지를 받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후, 우리 둘은 주말마다 만났고, 서로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늦깎이 사랑이 기둥뿌리 뺀다고 나는 일주일이 너무 길었다. 우리가 어디 한곳으로 합치면 어떻겠냐는 나의 제의에 그는 아직은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지 못하였으니 좀 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며칠 후, 학습 차 연길로 가게 되었고 학습이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고 그의 직장 앞에 차를 주차해놓고 기다렸다. 깜짝쇼를 해주고 싶었다. 다섯 시가 되자 드디어 보고 싶은 얼굴이 나타났다. 역시 늠름하고 지적인데다가 언제나 흰 셔츠에 양복에 넥타이를 맨 깔끔한 그의 모습에 나는 저도 몰래 입이 벌어진다. 저녁에 양 꼬치 먹자고 할까? 불고기 먹자고 할까? 고민하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가 전화를 받으려는데 저쪽에서 한 여인이 마주오며“여보, 여기!”하면서 손을 흔든다. 그는 급히 전화기를 닫고 여자의 차에 몸을 싣는다.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점차 내 쪽으로 가까워져 온다. 나는 급히 머리를 숙여 모습을 감춘다. 내가 다시 머리를 들었을 땐 그는 이미 가로등불이 명멸하는 퇴근길, 차량의 물결 속에 자취를 감춘 뒤였다.
첫사랑 여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는 첫사랑, 죽어서도 영혼 속에 담고 갈 거라던 달콤한 말은 다 거짓말이었을까? 순진해서 귀엽다는 말은 바보스러워서 편했다는 말이었구나.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 결혼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라서 지금까지 혼자라는 말을 나는 믿었었다. 부모님을 설득하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나는 믿었었다. 그는 거짓말쟁이, 바람둥이였고 나는 남자에 미친년,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제3자이다. 사업에서도 오점을 남겼고 이제 품행에서도 오점을 남긴다면 나는 얼굴을 들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머릿속은 삼검불처럼 어지럽다. 두서를 잡을 수가 없다. 제3자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차 앞면 유리에 비친다. 나는 그들의 손가락질을 피하려고 눈을 감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백이 낙하산처럼 펼쳐지면서 내 얼굴을 덮친다.
5. 넷째 남자가 좋다고 하오
사람의 명은 정해졌나보다. 갈 시간이 안 되면 차사고로 차가 다 박살나도 사람은 멀쩡히 살아있다. 경미한 뇌진탕이 전부였다. 이 세상에서 도망가고 싶은데 가지도 못하게 날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하느님께 묻고 싶다. 내가 전생에 지은 죄를 다 갚지 못하였으니 계속하여 벌을 받으라는 건지 아니면 고생 끝에 낙이 오니 행복을 누리고 가라는 건지…
눈을 떴다. 명희가 보인다. 뭐라고 말한다. 안 들린다. 명희 옆에 웬 남자가 걱정스런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 눈길 너무 익숙하다. 누구지? 흉터가 보인다. 이마에 동그란 흉터, 아, 내 신랑이다. 애기신랑, 너무 흔들린다. 어지럽다. 다시 눈을 감는다.
마을 공터에서 애들이 모여“가위, 바이, 보!”를 하며 편을 가른다. 철호오빠와 꺽다리 경칠이가 대표로“가위, 바이,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먼저 마음에 드는 편을 선택한다. 힘찬‘가위, 바위, 보!’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한 명씩 편이 되어 철호 오빠와 꺽다리 경칠이 뒤에 가서 줄을 서고 한 팀이 된 애들은 자기편을 고를 때 더 역빠른 애 이름을 부르곤 하였다. 이제 나이가 제일 어린 나와 명희만 남았다. 마지막‘가위, 바위, 보!’를 한다. 나는 긴장하다. 명희는 나보다 키도 더 크고 달리기도 더 빠르다. 하지만 나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는 마지막 나머지 사람으로 편입되기 싫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의 비참함이 싫었다. 제발 철호오빠가 이기기를 바랐다. 적어도 철호오빠라면 나를 먼저 선택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만 꺽다리는 무조건 명희를 선택할 것이니까.
‘가위 바위, 보!’
철호오빠가 이겼다. 뒤에 선 애들은‘와’하고 외치고는‘명희, 명희, 명희!’하며 절주에 맞추어 외친다. 철호오빠는 나와 명희를 번갈아 본다. 급해난 나는 애원의 눈길로 철호오빠를 쳐다보며 입을 실룩거리며 울음이 터지려고 하였다. 철호오빠는 애들의 외침도 무시한 채“경옥이!’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가고 나는 시뚝해서 입을 한발이나 내밀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명희를 할깃 쳐다보고는 철호오빠 등 뒤에 딱 붙어 서서 옷자락을 꼭 쥐었다.
눈을 떴다. 누군가 다가와 내 침대머리에 꽃병을 갖다 놓고 맞은 편 침대머리에 걸터앉는다. 동공이 흔들려서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누군지 흐릿하게 보여서 알 수가 없다. 아! 시원한 진달래꽃향이 느껴진다. 나는 눈을 스르르 감고 있는 힘을 다해 숨을 한껏 들이시며 마음껏 마신다.
봄이 오면 내 고향 뒤 동산은 진달래꽃으로 물들었다. 진달래 꽃잎 먹으러 동네조무래기들은 산을 오른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올라설 때면 철호오빠는 앞에서 내 손을 당겨준다. 우리는 뒤 동산에 올라 진달래꽃잎을 배부를 때까지 뜯어 먹는다. 철호오빠는 나를 보며 웃는다.
“너 입술 빨갛게 물들었어, 새 각시 같아.”
“오빠, 나 새 각시 할래. 꽃 너울 만들어 줘.”
철호오빠는 진달래꽃을 뜯어서 내 머리 여기저기에 꽂아준다.
“됐어. 인제 시집가도 되겠다.”
“오빠, 나 오빠한테 시집가도 돼?”
“응, 꼭 나한테 시집와야 돼?”
오빠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오빠, 우리 약속해, 새끼손가락 걸자.”
우리는 깍지걸이를 하고는 마주보며 웃는다.
오빠가 운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피 운다. 오빠가 소 수레에 앉아서 외갓집 동네로 이사 가던 날, 난 동구 밖 시내물이 흐르는 강가까지 따라가며 울었다. 강을 건너서 나와 거리가 멀어지자 오빠도 엄마 품에 머리를 묻으며 울었다. 울다가 다시 돌아보며 외쳤다.
“경옥아, 어른이 되면 너 보러 올게”
나는 엉엉 울면서 외친다.
“꼭 와야 돼?”
“경옥아, 눈 떠 봐. 왜 그래?”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웬 남자가 내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닦아준다.
‘누구지? 오 이마에 십자모양의 상처? 혹시 철호오빠?’
나는 찬찬히 보려고 몸을 일으킨다.
“누구세요?”
“경옥아, 나야 철호…”
나는 저도 몰래 손을 들어 남자 이마의 상처를 만져본다. 내 손은 그 상처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보다 조금 더 깊어진 듯싶었다.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욱하고 올리 밀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너, 아직도 울보구나.”
오빠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데… 맞죠. 어머니.”
오빠는 웃으면서 저쪽 침대에 누워있는 한 늙은이한테 말을 건넨다.
나도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경옥이니? 오랜 만이다. 우리 며느리 하겠다더니 약속도 안 지키고…”
뇌출혈로 입원한 철호오빠의 어머님이셨다. 나는 현기증 때문에 일어나지는 못하고 그냥 얼굴만 돌린 채 인사를 하였다.
“어머님, 정말 오랜 만이예요.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요.”
나는 마치 6살 그때로 되돌아간 듯 스스럼없이 철호오빠의 어머님하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인연이란 참 이상한가보다.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제든 만나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철호오빠는 내 동년의 기억 속에서 나의 영웅이었고, 어린 소녀 꿈속의 백마왕자였으며 나의 수호천사였다.
우리 고향마을에는 마을을 에돌아 흐르는 작은 냇물이 있었다. 우리가 마을을 벗어나려면 꼭 그 냇물을 건너야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오빠의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넜고, 비가 와서 물이 불면 오빠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 어느 해 이른 봄, 강 얼음이 채 녹지 않아 징검다리가 미끄러워 위험하다며 오빠는 기어이 나를 업고 뼛속까지 얼어드는 얼음물에 들어섰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넘어지며 돌멩이에 이마를 쫓고 말았다. 이마가 찢어져 여덟 바늘이나 기웠는데 그 자리가‘十’가 되어 보기에 흉측하였다.
어머님이 마음이 아파하시며“어쩌다가 넘어졌어? 조심하지. 흉터가 생기면 어떻게 하냐? 예쁜 색시 못 얻겠다.”고 낙담하시였다. 나는 오빠가 나 때문에 넘어져서 미안하다는 말을 무서워서 감히 하지 못하였다. 오돌오돌 떨고 있는 내 손을 잡아 어머님 앞에 내세우며 오빠는 말한다.
“예쁜 색시 얻었어요. 경옥이가 시집온다고 했어요.”
나는 어머님이 믿지 않을까봐 그렇다고 고개를 두 번, 세 번 끄덕거렸다. 그래야만 덜 미안할 것 같았었다.
“어이구, 우리 애기며느리. 나는 찬성이다.”
어머님은 환하게 웃으시더니 찬장에서 기다란 엿가락을 꺼내어 나에게 주셨다.
그때 먹은 엿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지금도 엿을 보면 그 때 그 맛을 떠올리곤 한다.
오빠와의 상봉은 나의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내가 먼저 퇴원을 한 후, 나는 인사차 몇 번 병원에 찾아갔고 어머님한테서 오빠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 혼자 키우다 보니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힘들게 학업을 완성하였다는 것, 오빠의 꿈이 큰 기업가가 되어 도움 받은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것이었다는 것, 지금은 진짜 큰 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업에서 성공을 하기 전에는 장가를 안 간다는 걸 내가 우겨서 중매를 서서 서른 살에 결혼시켰는데 애 엄마가 난산으로 애만 남기고 갔어. 얼마나 불쌍하든지, 늙은 것이 주책없이 나서서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서…”
어머님은 한숨을 후~ 하고 크게 내쉰다.
“애가 몇 살이에요? 다시 결혼은 안했어요?”
“올해 중학교 1학년에 다녀. 애한테 계모를 안 만들어준다며 지금까지 혼자야. 재혼하라고 해도 말을 안 들으니 나도 더 이상 나서지도 못하고… 그저 우리 손녀만 불쌍하지…”
“어머님도 몸이 편찮으신데 애는 누가 돌봐요?”
“보모를 쓰고 있어. 오늘 퇴원하니까 왔던 김에 집 문이나 알고 가…”
어머님의 강권에 나는 같이 가기로 하였다. 모아산자락의 호화스런 별장마을의 3층 건물이었다. 집은 화려하고 으리으리하였다. 집에 들어서자 손녀가“할머니!…”하며 뛰어와 밀차에 앉은 할머니 품에 안긴다. 그리고는 올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인사해라, 네 아빠 동생이니까 고모야.”
“나한테 고모가 있었어요? 고모!”
여자애는 준비도 없는 나한테 매달리며 응석을 부린다.
어머님이 나무란다.
“애가, 철이 없어. 나하고만 자라서 사람이 그리워서 그런다.”
딸애는 이름이 혜정이었다. 저녁시간은 혜정이한테 다 빼앗겼다. 내 손을 꼭 잡고 자기 방을 구경시키고, 옷도 구경시키고, 친구도 자랑하였다. 저녁에 자고가면 안되냐고 응석을 부렸지만 그건 안 된다고 했더니 위챗추가를 하자고 하였다. 또 놀러 온다고 약속을 받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철호 오빠는 기어이 차로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였다. 내가 뒷문을 열고 오르려고 하자 오빠는 조수석에 앉으라고 하였다.
“혜정이가 아빠는 조수석에 자기 외에 누구도 못 앉게 한다고 하던데요.”
오빠는 웃으면서“너만은 돼.”라고 하신다. 은근히 좋았다. 삼십여 년 만에 만났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그 때 그 마음 그대로라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였다.
오빠는 차안에서 조용히 말했다.
“명희한테서 너 얘기 다 들었어. 네 아들, 학비 걱정은 마. 우리 회사 장학금명단에 넣었어. 생활비는 내가 후원해줄게.”
“염치없이 생활비까지 어떻게 그래?”
“괜찮아, 너는 그래도 돼. 대신에 우리 혜정이를 많이 돌봐줘. 나 좀 편해지자.”
오빠의“너만은 그래도 돼.”라는 말을 수십 번 곱씹으며 나는 그날 행복한 밤을 보냈다.
딩동~ 딩동~ 연이어 들려오는 메시지알림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주말인데 이렇게 일찍이 연락 올 사람이 없겠는데 하면서 들여다보았더니 혜정이의 음성메시지였다.
‘고모, 우리 오늘 진달래축제 보러 같이 가요. 여덟 시 출발합니다. 답 주세요. 급! 급! 급!’
혜정이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제 오빠와의 약속도 있고,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진달래꽃축제라니 가보고 싶었다. 나는 선보러 가는 날보다 더 정성스레 단장을 하였다. 오빠는 히죽이 웃으면서 내 머리를 막 헝클어 놓으며‘예쁘네.’라고 하신다. 오빠의 장난스런 손길이 싫지가 않았다. 오늘은 오빠의 조수석을 비워두고 혜정이와 나는 뒤 좌석에 붙어 앉아 노래를 부르며 신나는 봄나들이에 나섰다.
혜정이는 구경하는 내내 내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면서 나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릴 때처럼 진달래꽃잎을 뜯어 먹어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오빠는 진달래꽃잎을 뜯어 내 머리에 얹어주었다. 혜정이는“와, 신부 같아요.”라고 하면서 그 장면을 놓칠세라 렌즈에 담는다.
“혜정아!”
친구인 듯한 아이가 멀리서부터 부르며 알은체 한다.
“너도 왔구나, 누구랑 왔어?”
혜정이는 사진을 찍다 말고 내 쪽으로 뛰어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우리 엄마랑, 아빠랑 같이 왔어.”
“미국 가셨다더니 오셨구나.”
친구인 듯한 아이는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하더니 자기 엄마, 아빠 쪽으로 뛰어간다.
혜정이는 멋쩍은 듯이 웃어보이고는 잡았던 손을 놓고는 계속하여 사진을 찍는다.
그 후부터 나는 혜정이의 진짜 엄마노릇을 다 하게 되었다. 옷 사러 같이 다니고, 찜질방도 다니고, 학부모회의도 다니고 하였다. 주말에는 또 우리 집에 와서 내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도 먹고는 자고 가기도 하였다. 점차 나의 생활패턴은 혜정이를 위해 돌아갔다.
며칠 후면 5월 8일 나의 생일이다. 또한 오빠 생일이기도 하다. 우리 둘은 세살차이지만 생일은 하루였다. 나는 오빠한테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하면서 인터넷쇼핑몰에서 남자용품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오빠의 전화번호가 뜬다. 나는 벨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
“울보, 뭐하니?”
“오빠생일선물 뭐 할까 고민 중인데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가 말하면 다 해줄 거야? 뭐든지?”
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응, 오빠라면 뭐든지 다 해줄게.”
“알았어, 그러면 지금 계란 볶음밥 해줘. 배고파.”
“지금 어떻게 해줘? 만나야 해주지.”
“혜정이가 그러는데 네가 한 계란볶음밥이 맛있다고 해서 달려왔어. 올라가도 돼?”
나는 부랴부랴 머리를 다듬고 화장도 못한 채 립스틱만 급히 바르고 문을 열었다.
오빠는 계란볶음밥을 진짜 맛있게 다 드셨다. 한 숟가락 뜨고는 김치를 얹어달라고 나한테 내밀면 내가 김치 한 조각 얹어준다. 그러면 볼이 미어지게 먹어준다. 대기업의 사장님답지 않게 장난꾸러기 아이 같다. 그릇을 비우고는“잘 먹었다.”하면서 휴지를 뽑아서 입을 닦더니 내 입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다.
“너, 나한테 잘 보이려고 급히 발랐구나. 옆에 묻은 거 봐.”라고 하면서 휴지로 닦아준다.
속마음을 들킨 나는 부끄러워 눈을 흘기면서 얄미워서 한매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오빠는 치켜든 내 주먹을 꽉 잡아 내리고는 억지로 손가락을 펼쳐놓는다. 내가 안 펼치려고 아무리 악을 써도 오빠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펼쳐진 손가락들은 부끄러운 듯 빨갛다. 오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약지를 치켜들고 거기에 반짝거리는 보석반지를 끼워준다. 그리고는 나의 두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받쳐 들게 하면서 묻는다.
“마음에 들어?”
오빠의 뜨거운 입김이 내 얼굴 전체에 펴진다.
눈과 눈, 코와 코, 입과 입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나는 대답대신 천천히 입술을 오빠의 이마상처자국에 갖다 대고 정성껏 애무한다. 오빠는 그대로 나를 번쩍 안고 침실로 향한다. 나는 애무를 멈추지 않았고, 오빠는 걸음을 빨리하였다. 우리는 삼십여 년 만에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서로의 몸을 마음껏 탐닉하였다.
이 소설의 어떤 結
나는 선택이 제일 두렵다. 선택하기 위한 고민도 싫고, 틀린 선택을 했을 때에 감당해야 하는 후회라는 가슴을 뜯는 고통을 겪는 것도 싫다.
요즘에는 집을 장식하는 일로 바쁘다. 오빠네 집 이층 전부의 설계를 나한테 맡겼다. 앞으로는 내가 살 집이니까 마음에 들도록 고쳐보라고 한다. 일층에는 보모아줌마와 어머님이 거주하시고 2층에는 오빠가 거주하였고 3층은 혜정이 낙원이었다. 침실, 옷방, 공부방, 피아노실, 운동실 등 혜정이 맞춤형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나도 혜정이 3층을 참고로 우리의 신혼 방을 마음대로 꾸며보라고 하여 나는 소녀시절에 머릿속에서 그려보았던 꿈의 궁전을 현실로 만드는 일에 달라붙었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행복하다.
오늘은 주말이라 늦게까지 푹 자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혹시 혜정이 전화인줄 알고 펼쳐봤더니 입력되지 않은 전화번호인지라 나는 거절을 하고 다시 누웠다. 또 울린다. 다시 거절을 눌렀다. 또 다시 울린다. 조금 짜증이 났지만 요즘 장식하느라 주문한 물건이 많아서 택배회사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오빠네 집 식모아줌마인데 혜정이에 대해서 긴하게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그 여자는 집에서와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긴 생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우고 명품 옷에 장신구로 전신을 무장하였는데 식모가 아니라 귀부인 같았다.
“놀라시네요. 심장에 문제는 없죠? 내 얘기를 듣고 까무러치지는 마세요.”
여자는 내 표정을 할끔 쳐다보고는 말을 계속한다.
“혜정이는 내 손으로 다 키웠어요. 25살에 난 이 집 애기보모로 들어왔고요. 한 가족으로 살았어요. 나는 이 집을 위해 청춘을 다 바쳐 헌신한 사람이에요. 결혼도 하지 않고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나는 눈살을 꼿꼿이 세우고 다그쳐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용건만 얘기하세요.”
여자는 전혀 기죽지 않고 도고하게 말한다.
“그럼 선택을 하세요. 청춘배상비 10만원을 지불하면 이 집에서 조용히 나갈게요. 안 그러면 혜정이 아빠와 나의 관계를 세상에 공개할겁니다.”
여자는 야비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된 방망이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떵해났다. 하지만 심리상에서 너한테 지지 않을 것이라는, 정신력으로 이기고야 말거라는 오기가 생겼다. 나는 커피 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떨리는 마음을 안정시켰다. 숨을 고르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아줌마는 나한테 문제를 낼 자격이 없어요. 대답할 마음도 없고요. 하지만 나는 철호 오빠를 믿어요. 아줌마가 오늘 내로 그 집을 떠나지 않으면 무함 죄로 콩밥 먹으러 가셔야 될 거예요. 선택을 잘하세요. 커피 값은 내가 낼게요.”
말을 마치고 나는 표연히 그 자리를 떠났다. 커피숍 문을 밀고 나서는 순간 다리맥이 풀리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택시를 탔다. 차에 오르자 설움이 북받친 나는 애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운전기사는 후시경으로 들여다보고는 아무 말이 없이 출발한다. 조금 진정이 되자 나는 눈물을 닦고 머리를 다듬고 운전기사에게 사과한다.
“미안해요. 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울 수 있는 곳으로 가주세요.”
“가까운 곳으로 갈까요? 먼 곳으로 갈까요?”
“선택권을 기사님한테 드릴게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전기사는 즐겁게 웃는다.
내 머리는 하얗게 빈다. 아스팔트길을 지나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린다. 차안은 무거운 정적이 흐른다. 무서울 것도 없고 아무데든 사람이 없는 곳에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뿐이다. 숲이 우거진 나무숲 곁의 도로에 택시가 멈추었다.
기사는“조금 내려가면 시냇물이 있어요.”하면서 차문까지 열어준다.
“언제 모시러 올까요?”
택시기사가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성한 나무숲을 끼고 있는 도로변을 터벅터벅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우거진 나무숲사이로 돌돌돌~ 소리를 내며 시냇물이 흐르는 낮은 계곡에 내려섰다. 계곡 양쪽의 우람한 나무사이에 매달린 그네가 외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신을 풀밭에 벗어놓고 시냇물에 발을 들여놓았다. 찬 기운이 발바닥에 쫙 퍼지면서 머리가 금세 어떤 충격 따위를 망각하고 맑아진다. 나는 미끌거리는 돌 위를 조심조심 지나서 그네에 앉았다. 내 몸무게에 의해 흔들이그네는 좌우로 흔들린다.
발바닥에 매달렸던 물방울이 내 몸의 흔들림에 따라 흐르는 물에 똑똑 떨어진다. 내 몸에 잠재해 있던 나쁜 기운들이 분해되어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삐죠롱, 삐죠롱 하는 종다리의 노랫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왔다. 머리를 들어보니 나무우듬지가 하늘을 가린 틈서리로 햇빛이 간신히 얼굴을 살짝 드러내며 나한테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셨다. 시원한 자연의 공기는 폐까지 깨끗하게 정화시킨다. 나는 마치 구름을 타고 앉아 선경에 빠져버린 듯싶었다. 그네를 타는 공주는 꿈나라 여행을 시작하였다.
나무에 매달린 연을 내리려고 소녀는 힘겹게 바라 오른다. 연을 잡고 내려오려니 너무 무서웠다. 뛰어내리려니 너무 높고 미끄러져 내려오려니 발을 받칠 그루터기가 없다. 겁난 소녀는 엉엉~ 운다. 한 소년이 뛰어온다. 밑에서 두 팔을 벌리고 소리친다.
“날 믿고 뛰어내려…”
“무서워, 안 돼…”
울음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꿈이었다. 하마터면 그네에서 떨어질 번 하였다. 날이 어두워졌다. 몸까지 으스스 추워나고 모기가 매달린다. 나는 그네에서 내려 무성한 나무숲을 끼고 있는 도로변을 터벅터벅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도로변의 북쪽 수림으로 난 오솔길이 있었다. 나는 무작정 그 길로 들어섰다. 얼마 들어가지 않으니 우거진 나무숲사이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안겨오는 산장 하나를 발견했다.
산장의 주인은 연로한 양주였다. 나는 사정이야기를 하고 산장의 작은 별채에 며칠 묵어가기로 하였다.
20여 평 되는 작은 집안에는 침대 하나와 그 옆에 책상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위에는 구식 전하기 한 대가 유표하게 눈에 띄었다. 수화기를 들어보니 윙~ 하는 소리가 나는 걸 보아서 통화 가능한 것 같았다. 핸드폰 신호도 안 터지는 이 산중에서 유일하게 외부와 연계할 수 있는 도구인 듯싶었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머리를 비워두니 잠이 몰려든다. 그냥 이대로 이곳에서 동면하고 싶다. 나는 먹지도 않고 그곳에서 삼일동안 자기만 했다. 그런데 날마다 첫날에 꾸었던 꿈과 똑 같은 꿈을 꾸곤 한다.
오늘은 뭐든지 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속이 비여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 할머니가 진심으로 챙겨주는 저녁을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먹었다. 식욕을 채우고 나니 몸에서 수많은 엔도르핀이 생성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지금이 참 행복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인간은 살아가려면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때에야 기사아저씨가 떠오른다. 내일은 기사아저씨가 데리러 올려나? 내가 기사아저씨를 믿은 건 정확한 선택이었을까?
타인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고 믿음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의 선택이 틀렸다고 해서 인생전체를 부정하는 건 옳지 않은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이겨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인간의 바람직한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리라 작심하며 나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제발 그 꿈을 꾸지 말기를 바라면서…
철호 오빠가 두 팔을 벌리고 애타게 소리친다.
“경옥아, 나만 믿고 내려와, 뛰어내려…”
“안 돼, 무서워,”
“그럼 내가 누울게, 내 몸 위에 뛰어내려…”
쿵~ 하고 나는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갑자기 쿵쿵쿵~ 하고 문을 잡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한밤중이었다.
“경찰입니다. 최경옥 씨 안에 계세요.”
화닥닥 놀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우르르 사람들이 쓸어 들어왔다. 전등을 켜고 보니 경찰들이 운전기사와 함께 들어왔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속옷 바람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맨발로 침상 곁에 내려서서 우들우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한 사내가 목멘 소리로“경옥아.”라고 부르며 뛰어들어 와 나를 번쩍 안고 밖으로 나갔는데 그는 철호오빠였다. 철호오빠의 가슴에 안겨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니 놀랐던 내 가슴은 평정을 다시 되찾아 갔다.
꿈은 잠재의식이 주는 일종 암시이다.
나의 잠재의식은 철호오빠를 믿고 있었다. 철호오빠는 사흘 동안 밤잠도 못자고 날 찾아다니다가 나중에 실종신고까지 하게 된 것이다. 택시기사가 억울하게 용의자로 잡혀 들어가서 위치를 알려주었기에 찾아올 수 있었다.
그 번 풍파 끝에 고마운 택시기사는 철호오빠에 의해 나의 전문기사로 취직이 되었고, 겨우 두 달을 일하고 나한테 사기를 치려고 했던 식모아줌마는 나한테 안 먹히자 집의 장신구를 가지고 도망치려다 붙잡혔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를 겪게 된다. 그 많은 위기 중에서 가장 힘든 건 믿음이 주는 불신이다. 만약 한 가정, 한 사회에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악몽의 시작일 것이다. 결혼도 초혼이든, 재혼이든 조건맞춤보다는 사랑을 토대로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믿음도 일종의 능력이고, 모든 선택은 모험을 동반한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고 재혼이라는 아름다운 사랑의 선택을 다시 하게 되었다.
2023. 송화강 3기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