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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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랑의 표현" 수업스토리 댓글:  조회:1331  추천:0  2009-12-06
                     "사랑의 표현" 수업스토리                                                              ---연변주 "성공훈련"교수 제7륜시합이 룡정중학종합교수청사에서      12월4일 전주 "성공훈련"교수시합 제7륜교수가 룡정중학종합교수청사에서 펼쳐졌다. 이날 교수활동에는  주에서 파견한 교수평심원교원들과 연길시 대표, 화룡시대표, 룡정시교원연수학교 대표 등 5명 평심교원과 룡정중학, 룡정시제4중학,룡정시실험소학, 룡정시 안민소학교 교원들이 참가하였다.   교수담당교원 천민선교원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과제를 가지고 아주 정채롭고 감동적인 교수를 펼쳐 학생들과 참가자교원들의 감동과 절찬을 받았다. "불쌍한 애들에게 사랑을 주자"라는 선률을 주선으로 학교, 학생, 부모, 그리고  대자연, 고향,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서로서로 사랑을 표현하고 보답하는 조화로운 사회에서 사랑은 나누면 커진다는 도리를 깨달게 하였다. 이날 교수현장에서 불우한 학생 돕기 의연금 모금활동을 동시에 진행하여 사랑을 주고 보담하는 깊은 감동을 남겼다. 1학년2학급 30여명학생들은 자신들의 소비돈을 나름대로 의연하였고  룡정중학 박철교장은 선뜻이 100원을 의연하여 활동에 이채를 돋구었다. 학생들의 소중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모금된 261원을 당장에서 룡정시고아원 박상우학생에게 전달되였고 한차례 생동하고 감동적인 "사랑 표현"수업스토리로 진한 여운을 남기였다.                                           룡정중학 천민선교원은 48세로교원이며도 교수시합에 도전                                                                      주에서 파견한 평심원 교원들                                    연변주교육학원에서 파건된 평심원교원과 룡정중학박철교장                                                           수업에 열중하는 룡정중학 1-2학급 학생들
18    룡정시초중조선어문소인수학급수업연구모임 댓글:  조회:1592  추천:0  2009-12-05
                                            룡정시초중조선어문소인수학급수업연구모임 12일4월 룡정시중학조선어문교수전문위원회에서는 룡정중학교에서 전시 초중조선어문소인수학급수업연구모임을 가지였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산생한 조선족학생 자연감소는 우리 매개 민족교육자들에게 시급히 시대의 발전수요에 적응할수있는 신형의 교수모식을 탐색하고 그 교수모식을 45분간의 실내수업에 체현시켜 우리의 매 시간 수업이 새로운 과정리념의 요구와 학생실제에 부합되는 최적화 교수가 되게 할것을 절박히 수요하고있다. 이런 형세하에서 소인수학급수업이 주되는 방향으로 부상되는 현재 기초 도구과로서의 조선어문학과를 가르치고있는 우리들의 임무는 배우 간고하고 보다 성스럽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소인수학급수업연구모임에서는 룡정중학초중1,2학년의 두개절의 공개과 수업과 3학년의 한개절의 복습지도수업을 시청하고 학습방법지도와 수준별문제설정에 관한 문제를 둘어싸고 토론을 진행하고 민족교육의 성스러운 터전을 보다 알뜰하게 보다 훌륭하게 가꾸기 위해 열심히 뛸것을 다짐하므로써 룡정시초중조선어문학과의 교수질을 크게 제고시킬것을 다짐하였다.                                                                          룡정시전체 조선어문교원합영                                                      교수담당교원 최미라교원의 교수현장                                                                교수담당교원 백문영교원의 교수현장                                                  룡정중학조선어조조장 장룡문교원의 교수현장          룡정시중학조선어문전문위원회바서장 정룡철교원의 사회하에 소인수학급교수 토론을 진행    
17    중학교단계에 해야 할 일들 댓글:  조회:1966  추천:0  2009-12-03
  중학교단계에 해야 할 일들 북경대학 김준 대학에 온후 우리말로 문장을 쓰는것이 처음인것 같다.그래서 그런지 더욱 친근감이 간다.대학에 온후에야 강렬하게 느낀점인데 나는 우리 민족으로 인하여 더없는 자부심을 느끼고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더 사랑하게 되였다.주위의 친구들이 내가 한가지 언어를 더 장악한것을 무척 부러워하고 우리 민족에 강렬한 호기심을 보이고있다. 중학교를 다닐때 많은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학습방법과 인생의 도리를 가르쳤다.그때는 마치 자신이 아주 비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중국최고의 문명대학—북경대학에 온후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어보였다.주위의 친구들이 다 나보다 우수하고 훌륭했기때문이다.하여 나는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학습에 대해 건의를 물으면 썩 원치 않는다.왜냐하면 내가 아직 누구에게 가르칠 정도가 아니라는것을 잘알고 있기때문이다.하지만 여기서 후배들에게 몇가지 건의를 하고싶다.혹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수 있으면 큰 기쁨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많은 친구들이 어릴때부터 부모와 선생님들로부터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공부를 잘해야 이후에 성공한다고 귀에못이박히게 들으며 자랐을것이다.나도 포함해서말이다. 하지만 이미 걸어온 선배로서 내가 하고싶은 말은 중학교에서 우리가 해야할 제일 중요한 일은 절대 학습뿐이 아니다.학습보다 중요한일이 많고도 많다.아래에 나의 생각에 중요하다는 일들을 몇가지 말하려한다. 첫째,좋은 습관을 키워야 한다.내가 이것을 첫자리에 놓는것은 그만큼 중요하기때문이다.우리는 매순간마다 무의식간에 습관의 지배를 받으며 산다.우리는 모두 이미 형성된 자신만의 생활습관,학습습관,사유습관,처사습관이  있으며 이런 습관들이 우리를 구성한다.내가 여기서 말하는 습관은 절대 아침일찍 일어나고 매일 저녁마다 자기전에 치솔질을 하고 경상적으로 신체단련을 하는 등등 일상생활습관만이 가리키는것이 아니다.내가 말하는 습관의 범위는 이것을 훨씬 초과한다.례를 들면 지연시키는 습관,게으른 습관,쉽게 화내는 습관,자고자대하거나 비관실망하는 습관,우유부단하거나 쉽게 두려워하는습관 등등 나쁜 습관들이 있는가하면 반면에 인차 행동하는 습관,부지런한 습관,정서를 잘 조절하는 습관,겸손하며 자애하는 습관,과단하게 결정을 내리는 습관,용감하게 도전을 맞이 하는 습관 등등 좋은 습관들도 있다.중학교단계에 우리는 나쁜습관들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우리에게 유리한 습관들을 심기위해 노력해야 한다.이후에 다 자란후 습관들이 뿌리깊게 박히면 고치려 해도 힘들다.이미 오랜시간을 거쳐 형성된 습관을 고친다는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하지만 우리가 굳게 결심만 내리고 행동에 옮기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둘째,좋은 성격을 배양해야 한다.성격은 비록 선천적인소의 영향도 받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후천적으로 형성되는것이다.많은 성공한 사람들을보면 어릴때와 성인이된후에 성격의 변화가 아주 크다.중학교단계는 성격을 개조하기 제일 좋은 단계이다.성인이 된후에는 성격을 개변하는것이 거의 불가능하다.좋은 성격의 소유자는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주위에 친구들이 많이 모인다.사실 우에서 말한 습관을 고치는 과정에 성격도 차츰씩 개변을 가져온다.여기에서 좋은 성격을 배양하는 아주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너의 주변의 모든사람을 좋아하기위해 노력하라.자신이 이전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우점을 찾고 그 우점들을 흔상하라.만약에 이점을 할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좋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셋째,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학교 교과서와 련습책에만 얽매이지 말고 과외책을 광범하게 읽어 지식과 시야를 넓혀야 한다.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딪히든지 모두 책속에서 그 답안을 찾을수있다.전세계 위대한 인물들이 책을 통해 당신에게 그들의 지식과 지혜를 전수한다.당신은 반드시 부단히 책속에서 영양분을 섭취해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중학생시기는 한 사람의 성장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이고 또 여유의 시간이 제일 많은 시기이기때문에 이때에 성장에 유리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이후에 대학에 오거나 사업에 참가한후 이렇게 많은 시간을 짜내기 힘들다. 넷째,운동에 경상적으로 참가해야 한다.이 건의는 공부만 하고 운동을 적게 하는 친구들에게 주는 건의다.<<생명은 운동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운동에 참가해야만이 생활속에 활력이 넘친다.운동은 건강에 좋을뿐만아니라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며 지어는 성격을 개변시키기도 한다.또한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친구들과의 관계도 더 밀접해진다.축구,수영,탁구,롱구 등등이 다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중학교단계에서 해야하는 일들이다.여기서 특별이 하고싶은 말이 있다.중학교시기는 어린 애로부터 점차 성인으로 성장하는 시기이기때문에 유혹과 곤혹이 가장 많을때이다.가능하게 적지않은 친구들이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불평을 늘일것이다.하지만 이점을 꼭 기억하라.당신뿐만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것을.누구나 다 이렇게 힘들게 걸어왔다.왜냐하면 성장에는 원래 아픔이 따르기때문이다.그러니 이 과정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가라.그러면 어느날엔가 갑자기 자신이 이전에 비해 많이컸음을 느낄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우리 조선족 후배들에게 진심어린 축복을 보낸다.너희들이 모두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16    룡정중학 소인수학급 교수활동 활발하게 댓글:  조회:1491  추천:0  2009-11-27
  2009년 한해도 막 지기 시작한 끝자락에 저희는 회의 모임차 뉴욕으로 가게 되었어요. 저로서는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처음 부인과 동반하였기에 시간을 내여 뉴욕의 문물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답니다. 뉴욕은 세계적인 으뜸 도시라 이름난 지역과 건물, 기념물들도 많은 곳이지요. 그중 하나가 현재 우리 코리아인 반기문 사무총장이 주인"호주"로 있는 유엔본부 빌딩이랍니다.   세계평화와 인류애의 상징을 위해 조직된 유엔의 본부, 당연 중화인민공화국의 출현과 함께 대만을 밀어내고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5대 상임이사국 자리에 5성 붉은기를 꽂은 곳이지요. 그런데 이 상임이사국이 국제 상 큰일을 가결할 때는 다수 소수로 가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상임이사국도 반대하면 가결되지 못하는 “이상한 법”실행이 상임이사국 법이라네요.   역사를 살펴보면 유엔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51개국의 회원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192개의 나라가 회원국으로 불어났대요. 건물 둘레에 바자처럼 꽃혀 펄럮이는 자국의 기발을 찾자 해도 한창은 헤메야 될 판이랍니다. 저의 부인이 “사진 찍을 바엔 중국기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자”고 중국민으로서의 기대를 나타냈지만 어디 제한된 시간내에 기발이 보여야지요. 할 수 없이 남의 손을 빌려 빨리 건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자리를 떴지요.   이 유엔본부건물은 194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53년에 전부 완공했다 네요. 본부건물은 39층에 높이가 154m나되었어요. 이 역사적 건축을 위하여 미국에 예수 믿는 부자 - 존 D 록펠러가 공헌했다는 군요. 록펠러가 이스트 리버 부근의 대지 구입비로 8천 5백만 달러를 기증하였대요. 지금의 달러 가치로는 엄청난 큰 돈이지요.   그리고 이곳은 유엔UN복합단지로 구성되었답니다. 복합단지에는 컨퍼런스 빌딩(Conference Building), 유엔총회빌딩(General Assembly Building), 사무국빌딩(Secretariat Building), UN공원(U.N. Gardens) 등으로 유엔 세계각국의 정부대표단이 들어서 있는 어마어마한 “큰 어른들”의 집이랍니다.   참 그런데 유엔은 미국의 뉴욕에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이 땅은 미국의 영토가 아니라고 하네요. 국제적인 지역으로 치부되고, 건물의 내부는 회원국들이 기증한 많은 예술 작품들로 꾸며져 있대요. 어찌 보면 “세계의 정치 경제 힘을 파는 장마당“이라나 할까요? 하여턴 평백성들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협상 처리하는 지구촌 최대 "양반 집"이 틀림없는 것 같애요.      
15    연변주제21차고중조선어문교수연구모임 댓글:  조회:1688  추천:0  2009-11-14
          연변주제21차고중조선어문교수연구모임     지난 11월13일 연변주제21차고중조선어문 교수연구 모임이 연변제1중학교 과학기술청사 다매체교실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연변주 교육학원 조선어문교연실 김현우주임의 개막사를 이어 고중조선어문 새과정교수담당  엄정복교원이 "량반전", 문춘복교원이 "유머---남자의 멋" 김옥금교원이 "문학작품감상의 쇠"를 선을 보이였다. 교자들은 선후하여 필수과 교수, 선택과 교수,  비교교수를 새과정리념에 어울리고 창의적으로 교수를 진행하여 흑룡강성 목단강시 교육학원 민교부교원들과 전주 고중조선어문교원들의 절찬을 받았고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오후 연변제1중학교 소회의실에서 이 학교 조선어문교연조 조장 오경숙교원의 교연조경험소개로부터 시작하여 교수토론이 진지하고 활발하게고 진행되였다. 엄정복,문춘복,김옥실교원이 교수설명을 이어 자연히 고3대학입시준비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초점으로 열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신편교재와 대학입시관계문제에 대하여 교육출판사 태산주임의 해석과 교육학원 고중교양원 권명활교원의 방향성있는 해설을 진행하여 전주 고중조선어문교원들의 시야를 밝혀주었고 고3지도에 크나큰 도움을 받게하였다.                                      엄정복교원의 "량반전"교수현장                                                      문춘복교원의 "유머---남자의 멋"교수현장                                             김옥금교원의 "문학작품감상의 열쇠"교수현장                                                        교연조 경험소개를 전개하는 오경숙조장                                                신편교재와 대학입시지도에 대한 교류토론현장  
14    룡정시 중학생 장거리 달리기 시합을 진행 댓글:  조회:1436  추천:0  2009-11-07
                                       룡정시 중학생 장거리 달리기 시합을   11월6일 전 룡정시 중학생장거리 달리기 시합이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이번 시합에서 룡정중학교 선수들은 집체 2등상을 획득하였고 박군등 5명학생이 전 10등안에 들었다.                                  룡정중학대표팀 합영                
13    《관내진출 조선족 삶의 현장 찾아》 댓글:  조회:1452  추천:0  2009-09-23
                                                                  관내진출 조선족 삶의 현장 찾아 건국60주년,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으며 관내에 진출한 중국조선족 생활려정과 현실을 반영하고저 《인터넷길림신문》김태국, 전광훈 등 특파기자들이 오늘 오후 1시《관내진출 조선족 삶의 현장을 찾아》연길에서 출발하였다. 지난 세기말, 급작스레 들이닥친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료하 등 류역에서 농경문화를 고집하던 중국 조선족은 커다란 시련을 겪었왔다. 많은 사람들이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길, 생존의 길을 찾아 대도시로 외국으로 떠났다.  비록 삶의 터전을 정든 고향으로부터 낯선 타향으로,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옮겨졌지만 조선족들은 자기의 슬기와 근면으로 사회발전의 세찬 풍랑속에서 온갖 간난곡절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고 우수한 기업인, 우수한 기술로동자로 육성되면서 무궁무진한 정신적부와 경제적부를 창출하였다. 2007년에 통계한 호구부등록이 있는 수자에 따르면 동북 이외 지구들에 사는 조선족인구는 북경시에 27,795명, 천진시에 10,463명, 하북성에 12,017명, 내몽골에 22,173명, 산동성에 30,148명, 광동성에 13,824명이다. 하지만 계절성이동과 환경성이동이 강한 조선족들을 감안할 때 기실 북경시, 천진시, 하북성, 산동성, 광동성, 상해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인구는 훨씬 더 많다. 이를테면 2008년말까지 산동성경내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이 18만이라는 수자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중, 청도시에 12만명, 연태시에 3만명, 위해시에 2만명, 기타지구에 약 1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동북지구 대도시들의 조선족인구와 대등한 수자에는 놀라지 않을수 없다. 일부 지역들에는 이미 조선족기업인협회, 조선족로년협회, 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조선족축구협회 등 사회단체를 결성하였고 이런 협회들을 중심으로 점차 규모적인 조선족사회를 형성하고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하고있다.  이번《인터넷길림신문》이 기획 조직하는 대형순방활동인 《관내진출 조선족 삶의 현장 찾아》는 50여일 시간을 통해 동북이외의 연태, 위해, 청도 등 도시를 위주로 한 산동지구, 상해, 항주, 의오 등 도시를 위주로 한 장강중하류지구, 광주, 심천, 주해 등 도시를 위주로 한 광동지구의 20여개 도시들과 북경, 천진 등 기타 도시들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생활현장을 직접 찾아가 우리 조선족들의 희노애락, 대대소소 사사건건 생활모습을 《인터넷길림신문》을 통해 국내외 독자들에게 전해주므로서 그들에 대한 인식과 료해를 돕게 된다. 따라서 이번 순방취재가 고향을 떠나 제2 고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오고 또 새로운 삶을 영위해가는 우리 조선족들에 대한 평가와 관심도와 지명도를 높이고 형상을 수립하데 취지를 두었다. 한편 이번 순방취재는 인력, 시간 등 제한으로 조선족이 널려사는 구석구석을 일일이 다 찾아가기 어려움을 간암하여 특히 우리 민족사업에 관심을 갖고있는 많은 인사들의 지속적인 성원과 조선족기업단체, 사단법인, 개인들의 기사제보, 정보제공을 요청한다. 련계전화: 0433-2536131, 2576663핸 드 폰: 13844389834련 계 인: 김선생련계메일:jbnews@jlcxwb.com.cn
룡정중학 당위에서는 신입하여 과학발전관 실천학습활동을 전개 9월21일 오후 룡정중학당위에서는 공화국창건 60돐에 즈음하여 룡정중학 종합교수청사 3층회의실에서 신입하여 과학발전관 실천학습활동 동원대회가 열렸다. 이날 동원대회엔 룡정시교육국 령도와 룡정중학 전체당원과 적극분자교원 및 학생적극분자들이 참가하였다. 대회에서는 “전주중소학 과학반전관 학습실천활동지도의견”을 선독하고 “룡정중학 관학발전관학습실천활동방안”을 선독하였다. 그들은 학습연구계단, 분석검사계단, 정개락실계단, 총결검증계단, 학습성과공고계단으로 나누어 신입하여 과학발전관 학습실천활동을 전개할것을 호소하였다. 특히 과학발전관 학습실천활동 동원대회에는 룡정중학 마지막고중학생 적극분자들이 참가하여 대회의 분위기를 농후하게 하였다.                         동원대회의 사회를 보는 룡정중학 당위부서기 겸 공회주석 현만룡선생님                                                          동원대회에 참가한 교육국 령도 동원대회에 참석한 학생 적극분자 대표
11    <<꿈---비전>>출간 댓글:  조회:1368  추천:0  2009-09-17
    사진: 포탈라궁은 신의 땅 라싸(티벳)의 상징이다. 청장열차의 개통으로 오늘 이 운둔의 궁이 우리 앞에 한걸은 다가 왔다. 필자가 지난 8월30일 포탈라궁에서  방문기의 첫 걸음을 내디디었다..     1. 라싸 방문기 중국에서의 몇 가지 일을 마치고 필자는 전에 가고프던 라싸 방문기회를 얻었다. 하늘 지붕에 오른다는 새 청장열차에 몸을 실은 하늘 길 배낭 여행이었다. 기실 라싸는 중국과 미국등 서구국가들 간의 인권문제로 공방전을 벌리는 국제 골칫거리의 1순위 지역이다. 그래선지 7-8월 잡아 여행 고봉기를 맞으며 하루 평균 4천 여명의 여행객들이 라싸에 모여든다.   오죽했으면 그 웅장한 포탈라궁이 순수 대못 하나 밖지 않은 목조건물로 되었다는 근거로 안전을 위해 하루에 2천3백명의 여행객들에게만 티갭을 판단다. 하지만 그 많은 여행객들 중 푸달라궁을 못 구경하고 돌아 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첫 문표 값만 100원씩이니 그 수입 또한 짭짤할 것이고......... 라싸는 평균 해발고가 4,000m 이상이어서 "세계의 지붕"또는 “고원의 진주”라고 불러 왔다. 지구촌에서 보기드문 아름답고 기이한 눈도시의 풍광, 휘황찬란한 고대문화, 신비하고 다채로운 민속풍정은 라싸의 특유한 관광자원으로 인기가 높다.   서장(티벳)자치구 소재지인 라싸는 하나의 눈부신 고원진주로 세기를 휘감는 역사의 풍운을 거치면서도 줄곧 운둔의 땅으로 여겨 왔었다. 전 중국 대륙의 1/8의 땅을 차지하는 라싸는 한국의 12배 크기의 엄청난 땅이다. 하지만 86만 8천 인구만이 사는 가장 해발고가 높은 얼음, 눈의 도시이며 주요 언어는 서장 장족어를 쓰고있다. 신의 땅이라 불리 우는 라싸에는 불교 사원이 많기로 유명하다 장족들의 거의 다인 98%가 라마 불교를 믿는 그야말로 말못하는 불상이 끌어가는 "불교천지"이다. 라싸는 서장(티벳)의 정치ㆍ경제ㆍ교통ㆍ종교활동의 중심으로 시내의 포탈라궁ㆍ대소사 등은 세계에 이름난 관광지들이 있다. 최근 우후죽순마냥 늘어난 여행사와 많은 교통편이 사방과 연계되어 잇어 라싸를 중심으로 하여 티벳 각지의 명소들을 돌아 볼  수 있다. 라싸는 현재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21세기 도시문명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높은 히말라야를 넘어 순수한 땅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다. 여기저기 새로운 변화와 모습들이 동토의 땅을 뚫는 새싹마냥 꿈틀 거리며 변화를 추구하고있다. 라싸의 현재와 장래 ......... 궁금 한게 한두 가지만은 아니다. 중국 공화국의 성립을 뒤이어 55년간 진행되어 온 하늘길 청장열차가 마침내 중국의 아름찬 서부대개발의 동풍을 타고 대륙의 동서를 꿰뚫었다. 작년 2005년 7월 1일에 기적소리 높이 히말라야 고봉을 울리며 ‘하늘 길(天路)’ 기차를 개통시켰던 것이다. 이로 인해 라싸 (티벳)는 어느덧  선교적으로 우리와 한발  더 가까워 졌으며 복음전파의 새로운 도전지역으로 급 부상하였다. 라싸의 정신과 물질적인 급격한 변화와 기회가 크리스천들의 관심의 초점을 끌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에도 우리 동포들이 살고있다.   라싸에 여행 적기인 5월부터10월까지  도합 30여명의 코리아인들이 라싸를 중심으로 여행봉사업등  각 종 사업을 벌려 간다 한다. 필자는 이번 기회에 그곳에 정착하여 사업을 벌려온 조선족 기독교인을 만나 함께 무릎을 맞대고 많은 이야기로 회포를 풀었다. 갈라질 때는 다시 만남을 기대하며 마음속 격정을 담아 축복 기도해주는 뜻 깊은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라싸진출의 첨병으로 나선 이들 한민족 동포들이 열악한  히말라야의 설한풍을 이겨내며 동토의 땅에서 건전히 뿌리를 내려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래에 무재한 필자가 무딘 필묵이나마 라싸 방문기를 “방문여행기”와 “인물 인터뷰” 편으로 나누어 연재하여 여러 독자들과 나누며 신의 땅, 운둔의 땅을 함께 밟아 보려는 소박한 희망으로 이글을 연재한다. (계속)      
10    전국소수민족교육 이중언어교수선진단위로 댓글:  조회:1777  추천:0  2009-09-15
2004년 8월중순의 어느날 오후에 보슬비가 솔솔 내리였다. 정주시 모 향진의 자그마한 강가에 무덤이 새로 나타났다. 처량한 울음소리속에서 이윽고 하나둘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건만 머리에 검은 상장을 드리운 한 중년사나이만은 친우들과 이웃들의 재삼되는 권고에도 불구하고 묘앞에 꿇어앉아 그냥 비통하게 부르짖고있었다. “여보, 애기엄마, 당신은 우스개로 우리 가정을 망하게 하지 말아야 했어. 당신이 이렇게 떠나면 너무하잖아. 아이구 나의 운명아…” 사망자의 이름은 희작이고 울고있는 사나이의 안해이며 30살이다. 이들에게는 귀여운 아들과 딸이 있다. 희작은 말하기를 좋아하고 떠들석한 분위기를 좋아하며 아무때건 사람들을 만나면 우스개를 피워댔다. 어떤 때는 우스개가 너무 과분하여 오해를 사기도 하고 가끔 말썽도 일으키군 했다. 하여 남편은 몇번인가 안해에게 귀띔을 해주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했다. “왜서요? 난 너무너무 재미나는데. 남들이 놀라와하는것도 재미나고 화를 내는것도 별멋인데요.”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 희작이 즐기던 한마디 우스개소리가 사람들을 놀래운 비참한 비극을 불러올줄을… 어느날 희작은 목화밭에서 솜을 따고있었다. 그때 이 마을에 금방 시집온 새색시 뉴뉴도 함께 솜을 땄다. 희작은 새색시를 보더니 희한한 장난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걸었다. “이봐 새각시, 자네의 남편은 지금 뭘해요?” “네, 언니세요? 그이는 지금 집에 있어요.” 그러자 희작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봐 뉴뉴, 조심하게. 전번에 내가 영화를 보고 마을로 돌아올 때 어떤 녀자가 자네의 남편 조우와 함께 아주 다정하게 손잡고 치근덕거리는것을 보았댔어. 그날 남편이 집에 늦게 돌아갔지?” “어찌 그런 일이?!” 뉴뉴는 희작의 말을 듣고 너무도 놀라 목화광주리를 땅에 떨구었다. “그런데 난 왜 그런 일을 몰랐을가요? 정말이세요?” “그런 말을 누가 본인의 앞에서 말해주겠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한 말을 꼭 비밀로 지키라구. 조우한테는 절대 말해선 안돼.” 뉴뉴가 당황하고 놀라하는 꼴을 보면서 희작은 속으로 깨고소히 웃었다. 그녀는 또 말이 나가는대로 지껄였다. “내가 보건대 그 녀자가 화화같애. 그애는 늘 조우와 같이 다니던데.” 속담에 말하는자는 무심해도 듣는자는 맘속에 새겨둔다고 했다. 사실 희작의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용속한 롱담에 불과했지만 원래 마음이 좁고 고지식한 뉴뉴는 그날 저녁에 남편이 돌아왔던 일을 떠올리고는 희작의 말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디 두고 보자. 감히 금방 결혼한 안해를 속이다니?”  뉴뉴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게를 대고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남편 조우가 집마당에서 나무를 패고있었다. 조우는 일하러 나갔던 안해가 일찍 돌아온데다 낯색이 좋지 못한것을 보고 놀라와하면서 물었다. “여보? 어디 아파?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낯색도 좋지 않아보이는데?” 남편은 안해를 걱정하고있었지만 뉴뉴는 눈길을 꼿꼿이 세우고 따지고들었다. “영화보던 날 왜 늦었어요? 바른대로 말해요.” “야. 그날 영화보고 친구 왕철네 집에서 마작을 놀다왔지.” “뭐요? 마작을 놀았다구? 참 뻔뻔스럽고 유치해요. 날 바보취급하세요?” 조우가 아무리 해석해도 뉴뉴는 믿지 않고 점점 더 화를 냈다. 뉴뉴는 도끼를 들고 조우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것이고 리혼할것이야.” 조우는 어안이 벙벙하여 한식경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닌가? 성실하고 정직한 조우는 자기의 가슴을 치며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맹세했다. 그래도 안해가 믿어주지 않으니 도끼를 거머쥐고 온 마당이 떠나갈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어느 씨팔놈이 나를 물어먹어? 내 그자식과 생사결판을 낼테다.” 성실한 사람이 한번 성을 내게 되면 무섭기 그지없다. 뉴뉴는 자기 남편이 이렇게 성내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뉴뉴는 자기한테 호의로 남편의 비밀을 말해준 희작을 보호해주려 했는데 남편이 이렇게 드세게 나오자 더욱 걱정되여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계속 싸움을 하면서 밥도 먹지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었을가 없었을가? 가령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이 일을 밝혀낼수 있을가? 온밤 생각을 굴리던 뉴뉴는 마침내 좋은 생각을 찾아냈다. 이튿날 아침에 뉴뉴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고 화화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화화네 집앞에서 허리에 두손을 지르고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창 아침밥을 먹고있던 화화네 집식구들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 욕의 내용이 화화가 뉴뉴의 남편을 꼬시였다는것임을 알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집안에 앉아서 생벼락을 맞는다는 격이 아닌가? 보수통이라고 소문난 화화어머니는 대문을 닫아걸고 화화에게 따졌다. “이년아.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저년의 남편과 바람을 피웠니?” 화화는 너무도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며 변명했다. “무슨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엄마도 이 딸을 안믿어요? 이 며칠전 난 그냥 외가집에 가있었잖아. 난 우리 마을에서 영화를 돌린것도 모르고있어요.” 그러자 어머니도 알아차린듯 말했다. “옳아, 옳구말구. 이 에미가 정말 얼빤하구나. 넌 외가집으로 놀러갔지.” 어머니는 문을 열고 대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내 딸은 내가 잘 알아. 응, 우리가 성실하다고 꼭뒤에 앉아 오줌을 싸려는구나. 하지만 어림도 없다.” 뉴뉴가 집앞에서 계속 지껄이자 화화의 어머니는 대문을 열고 나가 거치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년이 누굴 욕해?” “남의 남편을 꼬시는 계집을 욕한다.” “개나발을 불지 마. 이년이 생사람을 잡아먹겠네.” “네가 개나발을 분다.” … 두 사람의 말싸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중에 화화네 집식구들이 모두 나오고 뉴뉴의 남편 조우도 달려왔다. 마을사람들도 모여와 구경을 했다. 두 집의 말싸움이 승화되여 나중에 손찌검까지 벌어졌다… 구경군들속에는 희작도 있었다. 그는 벽돌 두장을 깔고 올라서서 재미있게 구경했다. 말싸움이 손찌검으로 벌어지자 그만 너무 놀라 물앉고말았다. 두 집에서 서로 조상 8대까지 욕하며 싸우다가 모두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렸다. 싸움이 끝나자 조우는 안해를 데리고 촌위생소로 갔고 화화는 어머니를 향위생원으로 모시고갔다. 이때 희작은 례물을 사들고 두 집을 방문하여 진상을 말해주려고 했으나 그들이 용서해줄것 같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고 사태를 지켜보는수밖에 없었다. 온 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재빨리 화화네 외가집마을로도 전해져갔다. 화화를 그토록 사랑하던 그 마을의 청년은 단연 퇴혼을 선포했다. 금방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단순하고 정파다운 화화는 억울하게도 씻어버릴수 없는 치욕을 당하게 되자 집을 뛰쳐나갔다. 화화네집에서는 싸움에서 손해를 본데다가 딸까지 가출했으니 더는 참을래야 참을수 없었다. 화화의 어머니는 무함죄와 명예침해죄로 뉴뉴를 법에 고소했다. 법정에서는 인차 조사에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화가 희작의 입에서 나왔다는것을 조사해냈다. 남편이 캐묻자 더이상 속일수 없게 된 희작은 사건의 진상을 이실직고했다. 들을수록 분개한 남편은 안해를 땅에 엎어놓고 두들겨패면서 욕사발을 퍼부었다. “야, 이년아. 입덕을 톡톡히 보았지? 네가 쑤셔놓은 벌둥지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할테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희작은 “화가 입으로부터 나간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알았고 “세상에 후회를 고치는 약이 없다”는 뜻이 무엇인가도 알았다. 희작은 생각했다. 가령 화화를 찾지 못한다면 자기는 벌금을 당하든가 아니면 옥살이를 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후에 무슨 낮으로 마을사람들을 대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무섭고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해났다. 하여 그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던것이다.   지음/연변라지오TV신문 제공
9    불타는 저녁노을 댓글:  조회:1658  추천:0  2009-08-21
  원세개(1859~1916년)는 북양군벌사령관으로부터 중화민국 대통령직을 력임하였다.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며 하남성 항성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 두번이나 향시에 응시했으나 합격되지 못하자 결국 문(文)을 포기하고 무(武)를 택하여 리홍장의 막료인 오장경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광서 8년)  8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청나라정부는 조선(명성황후)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오장경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리홍장의 천거로 한성에 주둔하면서 조선방어임무를 맡았다. 1894년 7월, 중일갑오전쟁(즉 청일전쟁)이 터지기전날 밤에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한성에서 탈출한후 천진으로 돌아왔다. 1895년 12월, 원세개는 영록,  리홍장 등의 추천으로 천진소참(天津小站)에 주둔하고있는 정무군에 파견되였다. 그는 정무군의 이름을 “신건륙군”으로 바꾸고 많은 심복들을 끌어들이거나 양성하여 전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청나라말기 중화민국초기의 군정요인으로 되였다. 서세창(徐世昌), 단기서(段祺瑞), 풍국장, 왕사진, 조곤, 장훈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천진소참의 군사훈련은 청나라말기 신식군대발전의 전환점으로 되였으며 또한 원세개의 야망을 다지는 기초로 되였다. 당시 유신변법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자 원세개는 강연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유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898년, 무술변법기간에 원세개는 유신파앞에서는 “보수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내오자”는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돌아서자마자 이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했다.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구금하고 다시 섭정을 맡는다고 선포했다. 1899년 6월, 원세개는 공부우시랑, 산동순무 서리로 승진하여 신군(新 : 당시에는 ‘무위군’이라 하였음) 전병력을 동원하여 의화단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써 그는 단번에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01년이후 원세개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임명되였다. 1902년 원세개는 보정(保定)에서 북양상비군(략칭 북양군)을 편성하였다. 1905년에 북양군을 북양6진으로 편성하였는데 제1진은 만족귀족 철량이 통솔하는 기병(旗兵)이고 나머지 5진은 모두 원세개의 통제하에 있었다.   주요 장령들은 거의 대부분 천진소참시절의 심복들이였다.  이 시기에 원세개는 북양공장광산기업 발전,철도건설, 순경창설, 지방정권정돈,신식학당설립 등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신정(新政)을 실행하면서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방대한 북양군사정치집단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이들 북양집단이 세력확장을 통하여 만족황제측근집단의 세습적지위를 강력하게 위협했으며 량측의 권력다툼도 날로 심화되였다. 1906년,  원세개는 강요에 의해 겸임하고있던 직무를 모두 사임하고 북양군 제1진, 제2진, 제3진, 제6진을 륙군부 직할로 넘겨주었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북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군기대신 겸 외무부 상서직을 력임하였다. 1909년초,   원세개는 섭정왕  재풍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료양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부하들은 여전히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있었으며 원세개는 항상 재기를 준비하고있었다. 1911년 10월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는 10월 27일에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여 호북전선의 륙해군을 통솔하였다.   계속하여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여 북양군을 이끌고 한구를 점령한후 즉시 북경으로 진입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정부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12월에 당소의를 파견하여 혁명당과 협상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혁명당은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共和)체제를 약속한다면 원세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원세개는 혁명당의 기세를 빌어 선통황제 부의를 퇴위시켰다. 1912년 2월, 손중산이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직에서 사임한후 참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원세개를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원세개는 북경의 군사반란을 빌미로 북경에서 대통령에 취임할것을 요구하였고 참의원에서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수 없었다.  원세개는 취임초기부터 전제독재정치를 도모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집권실행의 최대 걸림돌로 판단, 북양군경(北洋 警)을 책동하여 정치를 간섭하고 국민당원들을 내각에서 쫓아내고 남방 각 성의 혁명군대를 감축하고 국민당지도자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이와 동시에 량계초를 중심으로 하는 청나라말기 립헌파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진보당결성자금을 지원하고 국민당과 대항하였다. 외교방면에서도 원세개는 영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5개국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파운드를 차관으로 확보했다.   원세개는 1913년 7월에 2차혁명을 진압하고 북양세력을 장강류역의 각 성으로 확장했다. 1913년 10월, 원세개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를 협박하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렬강들의 공식적인 승인도 얻어냈다. 이어서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별도로 정치회의와 약법회의를 소집하여 독재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1914년 5월, 민주주의정신이 깃들어있는 “림시약법”과 국무원을 페지하고 정사당과 륙해군대원수판사처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이 개편을 통하여 그를 지지하였던 진보당을 몰아내고 단기서 등의 군권을 박탈함으로써 군정대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1914년말부터 군주제 복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이 제안한 21개조 요구조항중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일본정부로부터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얼마후 다시 북양관료들을 교사하여 주안회와 청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군주제 복원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12월 11일, 참정원에서 원세개를 “중화제국 대황제”로 추대했다.   그 다음날 원세개는 제위를 받아들인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민국 5년(1916)을 “홍헌원년”으로, 대통령부를 신화궁으로 고쳐 1916년 원단(元旦)에 있을 황제등극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원세개의 이러한 행위는 전국적으로 각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월 25일, 채악과 당계요 등이 운남에서 봉기를 선포하고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한 호국전쟁을 일으켰으며 귀주와 광서에서도 잇달아 호응하였다.   북양파내부에도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있었다.   결국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군주제 취소와 “중화민국”년호의 회복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단기서를 국무경 겸 륙군총장으로 기용하고 북양세력에 의존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맡고자하였다.  그러나 봉기를 일으킨 각 성에서는 그가 다시 대통령으로 되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기서도 그에게 군정실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며 광동,   절강,  섬서,  호남, 사천 등지에서도 독립 혹은 그와의 관계단절을 선포함으로써 그는 결국 대중과 측근들 모두에게서 고립되였다.  원세개는 5월하순에 울분에 싸인 나머지 병이 나고말았으며 6월 6일에는 거국적인 성토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8    전국 중학생 17차글짓기 콩클시상식 댓글:  조회:1301  추천:0  2009-08-02
    【북경=신화통신】 1950년 10월 19일 초저녁무렵,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보무당당히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장으로 달려갔다. 항미원조전쟁이 이로써 서막을 열었다.1950년 6월, 조선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9월 미국 등 나라들은 "유엔군"의 명의로 인천에 상륙했다. 아울러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씨가 조선반도 북측에 떨어지면서 재빨리 중조국경선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당시 중국은 정권을 공고히 하고 경제를 회복하는 긴박한 과업에 봉착하고있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탁을 받고 중공중앙에서 여러차례 회의를 소집하고 거듭 가늠하고나서 10월 상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유난히 가혹한 이번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기백이 산하를 삼킬듯한 영웅적인 웅장한 노래를 엮었고 인류전쟁사상 약소한 병력으로 강한 적을 물리친 빛나는 전범을 보여주었다. 이국타향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백설로 뒤덮인 고산준령속에서 번개같이 날아다니며 피흘려 용감하게 싸웠다. 상감령전역에서 이들은 산꼭대기의 흙들이 적들의 포화로 무려 2메터되게 푹 패인 상황에서도 진지를 고수하면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의 주단식폭격과 엄밀한 봉쇄속에서도 이들은 물리칠수 없고 폭격에도 끄떡않는 강철같은 운송선을 구축했다. "왕패공군"과의 겨룸에서도 이들은 "공중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용기로 세계공군전투사상 기적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더없이 어려운 최악의 조건에서 눈으로 목을 추스리면서 용감하게 싸워 생명극한의 가혹한 시련을 이겨냈다. 조선전장에서 지원군들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웅인물들이 용솟음쳐나왔다. 라성교,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이들은 모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공통한 이름을 갖고있다.  조선인민들을 위하고 국제주의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택동주석의 큰아들 모안영을 포함한 많은 영웅들이 조선의 땅속에서 영원히 잠들고있다.지원군이 조선전쟁에 참가한후 전국인민들의 애국열정과 적극성이 광범위하게 동원되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실제행동으로 항미원조운동에 참가했다. 로동자들은 "공장이 곧 전장이며 기계는 곧 총포이다"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농민들은 애국풍작거두기운동을 펼쳤다. 학생, 간부들은 너도나도 애국공약에 서명했다.  지원군들이 무기장비를 바꿀수 있게 하기 위해 전국인민들은 모금해 비행기와 대포를 구매해 기증하는 운동을 벌렸다. 하남성의 저명한 예극배우 상향옥이 령도하는 "향옥연극사"는 반년 동안에 170여차례의 공연을 해 비행기 한대를 구매해 지원군에 기증했다. 1951년 11월 15일까지 전국인민들이 모금한 금액은 무려 4조원(옛 화페)에 달했다.거의 3년 동안의 가렬처절한 판가리싸움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미국은 부득이 정전협정에 서명할수 밖에 없었다. 그때 "유엔군"  총사령으로 있던 크라크는 후에 "나는 사람들이 결코 흠모하지 않는 명성을 띠게 되였다. 나는 미국사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사령관으로 되였다"고 말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겸 정치위원 팽덕회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에 관한 보고"에서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침략자들이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선에다 몇대의 대포만 걸어놓으면 한 나라를 점령하고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게 되였다."   신화통신 2009.7.29  
7    길림성 룡정중학교 교내잡지 '별천지' 출간 댓글:  조회:1410  추천:0  2009-07-14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6    민족문화교육 교수의 한마당을 펼쳐 댓글:  조회:1395  추천:0  2009-06-19
  민족문화교육 교수의 한마당을 펼쳐 오늘 오전 7.30분(6월19일)길림성 룡정시 교육과학연구소의 주체로 룡정시실험소학교 6층 다매체 교수청사에서 전국교육과학 15계획과제연구 “조선족중소학교민족문화교육체제구축과 유효한실시연구” 자과제 교수연구활동이 성황리에 펼쳐졌다. 교수 담당교원들로는 룡정시 실험소학교의 김홍실교원의 “아리랑” , 룡정중학조선어문교연조 허복순교원의 “우리 민족의 자랑 ---윤동주”, 룡정고중 조선어문교연조 계영호 교원의 중국조선족 이민사에 대한 연구” 로 다채롭고 창의적인 교수활동이 펼쳐졌다. 교수담당 교원들의 교수는 참가자 교원들의 한결같은 절반을 받았다. 특히 3명 교수담당교원들의 과제론증보고는 전국교육과학 15계획과제연구 “조선족중소학교민족문화교육체제구축과 유효한실시연구” 자과제의 성과를 충분히 과시했고 룡정시 민족문화교육의 현상태를 여실히 표현하였다. 이날 회의 참가자들은 룡정실험소학교의 민족예술 표현을 관람하였고 주 교육과학연구소 김영욱령도의 보귀한 말씀도 경청하였다.    
5    별천지 제1기 편집을 마무지으면서 댓글:  조회:1406  추천:0  2009-06-07
  모택동의 둘째아들 모안청은 2007년 3월 23일 오전 4시 18분에 84세를 일기로 북경301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모안영이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된후 모택동의 유일한 아들인 모안청은 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등영초, 강극청, 왕진 등 로동지들이 생전에 그와 그의 가족을 아주 관심하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도 여러번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다.   동 년   모안청은 1922년 11월 13일에 호남성 장사시 동향 판창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의 첫번째 부인인 양개혜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모안청이 4살되던해 가을에 모택동은 중공중앙이 한구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한후 부인 양개혜, 보모 진옥영과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삼형제를 비밀리에 장인네 집인 장사 판창의 양가댁으로 보내고나서 명령을 받들고 추수봉기를 일으키러 떠났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모택동, 모안청부자가 다시 상봉할수 있었다.   모택동이 떠난후 3년동안 모안청은 장사 판창에서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가 호남군벌 하건에게 살해되자 모씨3형제는 외할머니 향진희와 함께 살았다. 얼마후 상해로부터 향진희더러 아이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모택민의 편지가 왔다. 주밀한 배치끝에 60여세의 향진희할머니와 20여살의 며느리 리숭덕이 친척방문가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삼형제를 데리고 기차에 앉아 무한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모씨3형제는 지하공산당이 꾸리는 상해대동유치원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후에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를 당하면서 대동유치원도 해산되여 모안영, 모안청형제는 동건오의 집에 맡기여졌고 그후부터 두 사람은 끝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맛보게 되였다.   모안영이 후에 그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억하며 한 말이 있다. “나는 그때 도적질하지 않고 부자밑에서 일하지 않은외에는 모든 생활이 《삼모류랑기》의 삼모와 다를바 없었다. 거리바닥에서 자고 남의 마루바닥을 닦아주었으며 쓰레기통에서 누데기를 줏는 등 무슨 일이나 다 하였다. 상해에는 외백도교라는 곳이 있는데 인력거가 올라가기 힘드므로 나와 동생 안청이 뒤에서 떠밀어주고는 돈을 좀씩 얻어가지군 하였다…”   아 픔   더욱 불행한것은 이 시기에 모안청이 구타당하여 머리에 상처입고 뇌진탕이란 병을 얻어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것이다.   1936년, 동건오를 위수로 한 상해지하당원들의 도움으로 모안영과 모안청 두 형제는 동북의용군사령 리두장군이 서유럽으로 고찰가는 기회를 타서 프랑스를 거쳐 쏘련에 도착하였다.   1937년초, 모스크바에 이른 두 형제는 선후로 모스크바교외의 모니노국제 제2아동병원과 이완노브성의 국제 제1아동병원 등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이미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1938년, 누가 쏘련으로부터 안영과 안청의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모택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얼마후 모택동은 편지를 써서 쏘련으로 가는 사람한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안영, 안청아! 늘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의 형편이 좋고 진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또 너희들의 사진까지 받아보았기에 아주 기쁘다. 지금 인편으로 이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기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의 형편은 좋은편이니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쓰겠다…”   바로 그해에 쏘련에 있는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이 모안청형제와 련계를 갖고 늘 두 사람을 보살펴주었다.   1947년, 모안청은 귀국후 리부춘, 채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 흑룡강 극산현의 토지개혁시점에 참가했다.   1949년 7월, 모안청은 북경에 돌아와 중공중앙 선전부 맑스-레닌저작편역실에서 로어번역을 맡았다. 그는 10여부의 맑스-레닌경전저작과 정치리론서적을 번역출판하였고 1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처받은 머리는 나을리 없었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왕학빈의 회억에 의하면 한번은 모택동이 편지 한통을 왕학빈에게 보여주었는데 모안청이 모택동한테 쓴것이였다. 편지내용은 모안청이 자기 머리속에 한 “녀석”이 들어있는데 자기는 그 “녀석”과 끝없이 싱갱이질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후 모택동은 하는수 없이 모안청을 쏘련에 보내 병치료를 받게 했다.   혼 인   1959년, 쏘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후 모안청은 대련 남산호텔에서 휴양하고있었다. 그때 모안영이 이미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다. 대련시공안국 경위처 원 처장 장세보의 회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사돈 장문추가 모택동과 계속 인연을 맺겠다고 원하면서 모안영의 안해인 류송림의 녀동생 소화를 데리고 대련에 와 휴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휴양은 “맞선을 보는 색채가 얼마간 있었다.”   뜻밖에도 모안청과 소화는 보자마자 익숙한 사이처럼 이야기를 잘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일을 안 모택동은 특별히 모안청에게 편지를 썼다. “네 병이 많이 나았다니 아주 기쁘다. 의사동지들과 너를 도와주고있는 다른 동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잘 휴양하면서 치료를 잘해야 한다. 절대 성급해서는 안된다. 너의 형수 사제와 그 녀동생 소화가 너를 보러 왔고 또 너의 병상황을 아주 관심하고있으니 너는 그녀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네가 소화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친구로 사귈 의향이 있니? 소화는 좋은 아이이다. 잘 이야기해보아라…”   1960년의 5.1절전야에 모안청과 소화는 대련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0년에 아들을 보았는데 모택동은 “신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 향   1931년에 장사 판창을 떠난후 모안청은 여러해동안 고향으로 가보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처음으로 소산으로 갔었다. 모안청의 사촌동생 모안평의 회억에 의하면 모안청은 그때 모택동의 고향집을 참관하고 촌에서 일부 로인들을 만났는데 그속에는 그의 할머니도 들어있었다. 떠날 때 모안청은 특별히 200원을 꺼내 로인한테 드리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주는것이 아니라 내돈”이라고 말했다 한다.   모택동이 서거한후 모안청부부는 여러번 소산으로 가보았는데 갈적마다 소산호텔에 들었고 또 모택동의 고향집과 적수동으로 가보았으며 소산에다 중로 두 나라 문자로 “나는 소산을 몹시 사랑한다”는 제사를 썼다.   “이 말은 우리가 그한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해낸것이다.” 모안평은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출생지인 판창에 대해 모안청은 더욱 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어릴적 그는 줄곧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고 “양영수”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몇십년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묘에 와 성묘한 다음 서명책에다 “양안청”이라고 썼다. 모두들 그가 잘못 쓰지 않았는가고 여겼지만 그의 유년시절 감정의 문이 그때까지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년   쏘련에서 11년간 사업하고 학습하였기에 모안청은 로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양성되였고 일상생활양식도 유럽식의 풍격을 확보했다.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모안청의 큰 애호이다. 젊었을 때 그는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룰줄 알았고 작곡도 할줄 알았다. 모안청의 생활은 주로 텔레비죤을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것인데 로어를 한어보다 더 잘 알기에 특히 로씨야문학을 즐겼다.   모안청의 집에서 비서장으로 4년간 있은 장정걸은 “모안청은 성격이 아주 좋다. 정말 좋다!”고 말했다.   장정걸의 회억에 따르면 모택동이 혁명하러 떠나고 양개혜가 일찍 희생되여 모안영, 모안청 형제는 오래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그들 “형제의 감정은 특별히 깊다.”   “안영의 희생은 그한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장정걸은 모안청이 여러번 “나는 형을 보았다. 나는 그와 산보하러 갔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했다.   《환구시보》  
4    성공교육모식= 자애로운 교원+밝은 학생 댓글:  조회:1710  추천:0  2009-05-15
성공교육모식= 자애로운 교원+밝은 학생 기자: [김정섭 특약기자]  룡정중학에서는 교육형세의 발전과 더불어 교원 자질양성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자애로운 교원+밝은 학생=성공적인 교육》이라는 교육리념을 선도하고 실제적으로 소인수학급 교수연구강좌를 조직하여 교원들의 관념갱신에 최선을 다하고있다. 사진은 연변주 민족교육처 리천민주임을 청해서 《소인수학급》교수연구강좌를 경청하는 룡정중학 전체 교원들이다.
3    룡정중학 《위험 응급 피난 연습》을 진행 댓글:  조회:1629  추천:0  2009-05-15
룡정중학 《위험 응급 피난 연습》을 진행 기자: [김정섭 특약기자]  4월16일 오전  룡정중학교에서는 업간체조시간에 소방부대장병들의 배합하에  전교사생들을 조직하여 《위험 응급 피난 연습》을 생동하게 진행하였다.  9시 23분 경보기가 울리자 학생들은 피난통로에 따라 우측통행을 유지하면서 반달음으로 질서있게 운동장 지정한 지점에 도착하였고 매개 통로를 책임진 교원들은 학생들을 인도하여 넘어지거나 기타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소방부대 장병들의 시범표현을 관람하고 사고발생시 응급조치사항을 하나하나 경청하였다. 이날 룡정중학 전체 사생들은 《위험, 응급, 피난 연습》의 생동한 수업을 받았다. 소방부대장병들이 시범표현을 보여주고있다. 소방부대장병들의 지도하에 진화훈련을 하고있는 학생들.  
2    룡정중학 《3.8》국제로동부녀절 경축 댓글:  조회:1601  추천:0  2009-05-15
룡정중학 《3.8》국제로동부녀절 경축 기자: [김정섭 특약기자]   룡정중학공회에서는 《3.8》국제로동부녀절 99돐경축행사를 성황리에 진행하여 녀성교원들의 사업적극성을 더욱 부추기였다. 대회에서는 사업에서 앞장서고 가정에서 묵묵히 자신을 헌신하는 우수한 녀성교원들을 표창하였다.  모범 며느리에 시집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불평 한마디 없는 길림성 조화가정기준병 안명희, 친어머니 시어머니 병시중에 지친 몸이지만 사업에서 성과를 올린 최춘자교원, 모범안해로는 교통사고후유증으로 행동이 불편한 남편에게 정성을 다 바치며 가정의 중임을 떠멘 김국화교원, 남편의 건강을 위하여 정성이 지극한 문경애교원, 결혼하여 28년간 가정의 중임을 혼자 떠메면서도 항상 락관적이였던 함영자교원, 모범어머니로는 자식에게 인간된 도리를 가르치면서 남다른 교육방법으로 자식을 우수한 사회인재로 키운 김홍화교원, 어려운 생활조건에서도 두딸을 어엿한 대학생으로 키운 리경애 교원 등 7명 교원을 표창하고 기념품을 드렸다.  대회에서 박철부교장은 축사를 올려 녀성교원들을 높이 평가하였다.《누군가 녀성을 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룡정중학의 녀성교원들을 한부의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매력을 한몸에 지니고 청춘의 패기와 정열로 본때있게 사업을 밀고나아가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감동적인 사적들을 간직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2십대 녀성교원은 한수의 서정시이고 30십대 녀성교원들은 자애로움과 생활의 정취가 가득한한편의 산문이며 40십대 녀성교원들은 안해와 어머니의 직책을 한몸에 지니고  자식의 숙제책과 동무하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50십대 녀성교원들은 고요한 심령의 바다를 지닌 한편의 철학론문같다고 하여 대회의 한결같은 절찬을 받았다.  그는 녀성교원들에게 2009년 한해에 바라던 모든 소망이 이룩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하면서 명절의 축복을 올렸다.
1    허춘길 제10회 윤동주문학상 대상수상 댓글:  조회:1552  추천:0  2009-05-15
허춘길 제10회 윤동주문학상 대상수상 연변인민 출판사 <<중학생>>잡지 편집부와 <<윤동주 문학상 운영 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 국제 라이온스 355-H지구 서포항 라이온스클럽의 후원으로 개최된 제 10회 윤동주 문학상 글짓기 대회가  지난 5월9일 연길시 상우 호텔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윤동주의 넋을 기리고 우리 중학생들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고 글짓기 능력을 제고하는데 취지를 둔 이번 백일장은 올해로 열번째를 맞이했는데 이왕과 달리 현장에서 직접 글짓기를 하고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최종 초 고중 장려상 각기 5명 동상 각기 10명 은상 각기 4명 금상 각기 1명을 선정하였고 초 고중을 포함하여 최종 대상 1명을 선정하였다 고중조에선 “산과 마주하고, xxx오는소리, 나의 길” 등 3개 글제가 제출되였는 룡정중학 고중3학년2학급에 허춘길학생이 “산을 마주하고”로 단연 대상을 수상하였고 리해연 학생이 동상을 받아안는 경사를 안아왔다.윤동주 모교로서 룡정중학 조선어문교연조에서는 다년래 학생들의 특장배양에 힘을 기울려 오고 있으며 그 성과가 혁혁하다. 특히 허춘길 학생은 이번으로 대상 2차 금상2차를 수상한 문학지망생이다. 그는 지도교원의 지도하에 지난해 아리랑 백명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아않았고 제10회 윤동주 문학상 대상을 받아안으므로서 한국연세대학 장학금 도전에 들어서게 되는 영광을 향수하게 되였다.김정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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