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 삼촌을 회억하여
살아계신다면 나에게는 금년에 80세넘는 삼촌 방정관이 계신다. 나의 아버지-방민관의 영향을 받아 마을 형님들을 따라다니며 버드나무 숲속에 모여서 비밀 모임을 할때에도 그들의 그림자 마냥 따라 다녔었다. 13살이 되자 “지주는 흡혈귀로 우리의 피를 빨아 먹는 귀신이다”는 아리숭한많은 말들은 그로 하여금 알아 들을 수 없었다. 하여 늘 형님의 보충 설명을 받았기에 그는 아는것도 많았다.
학교도없는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 없이자란 그는 형님의 귀여운 동생이였고, 학생이였고, 우수한 혁명전사이기도하였다.
”연길시 흥안 촌은 원래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 버들숲, 습지, 모래땅이였던 곳을 개간한 곳이다. 여기에 이주하기전에는 동흥촌(지금 흥안촌 동쪽 산마을) 역시 모래땅 돌밭이였는데 이런 곳을 개간하여 땅을 만들고 조이, 옥수수, 수수를 심어 살만하게 되자 일본놈들이 군사기지를 만들어 이곳 농민들을 쫒아 30여가족들이 산으로부터 전부가 습지인 흥안촌-----그때엔 아직 이름도 업없던 이 습지에 자리를 옮기게되엿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7가족이 오게 되였다. 새롭게 땅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자 일본놈을 등에 업은 강치수 지주가 전부 앗아 제 땅으로 만들었다. 그런후 다시 이땅을 촌민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소작 짓게 하고 자기는 호미 한번 들어 보지도않고 가을이면 소작료를 거둬갔다.
보기에는 점잖게 생긴 강치수 . 사실은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지주였다 그래서 강치수 아들놈은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쏘다니며 일본놈의 앞잡이로 룡정에 자리잡은 일본놈 사령부도 제집처럼 나들었다.
그당시 진보적이였던 형님을 따라다니며 배운것도 많았고 한일도 많았다 삼촌은 많은 혁명도리를 깨닫게 되였고 조상들이 개간한 땅을 찾고 보호하기 위하여 형님의 뒤를 바짝 따랐다. 형님이 종이 뭉치를 주면 말없이 밤에 나가 강지주네 토성에 부쳤고 개가 짓으면 마을로 들어 오지 않고 버들 숲 속을 내 뛰였다. 어득스래한 밤이지만 “강지주를 타도하자!”, “토지는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 “중국 공산당 만세”라는 삐라들은 이튿날 아침 햇볓에 너무 확연히 보였고 애들도 부모들도 누가 한 일인지 장하다고 할때마다 그의 작은 가슴은 긍지감을 느꼈고 자기뿐만 아니라 애들을 하나 둘 몰래 함께 “비밀혁명”에 나서도록조직하였고 애들도 그의뒤를 졸졸따르며 말들을 잘들었고 시키는 일도 잘하였다.
그가 13살 될 때에는 이미 제법 꼬마 혁명군이 되여 “팔도, 삼함, 라자구까지 형님의 친구 ‘지하 혁명군’을 따라 다니며 삐라를 뿌리고 붙이고 하였는데 이런 일들은 애들이여서 적들의 눈을 피해가며 비밀리에 하는것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여겼다.
겨울 어느날 형님이 거리에 나가 삐라를 붙이라고 하여 보니 “쏘련 홍군을 열렬히 환영한다”는것이였다. 인젠 비밀 사업이 아닌 쏘련 홍군과 함께 혁명을 한다는 것으로 그는 얼마나 기뻤던지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삼촌은 형님이 집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형님들과 함께 집으로왔다. 낯선 형님이 말이다 “지금 일본놈들은 투항하고 쏘련 홍군이 연길에 진주하자 지주놈들은 도망쳐 토비부대를 조직하고 우리의 땅을 도로 빼앗으려 하고 “홍색정권”을 뒤엎으려 한다” 그의말에 모두가 주먹을 부르쥐고 윽윽 거리였다. 삼촌도 그 말뜻을 어지간히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날 저녁 저녁식사를 하려고 식구들이 밥상에 모여 앉았다. 삼촌은 밥술들기 전에 말을 꺼냈다. “할머니, 아버지! 지금 우리 마을에 있던 강지주랑 그 아들이랑 모두 모여 토비에 참가하여 깊은 산으로 갔습니다. 우리땅을 빼앗으려고” 형님이 그에게 눈치를 보였다 “그런데는 어쩌자는 거야” 삼촌은 강력한 태도를 보이며 하던 말을 계속이었다. “형님은 금방 결혼 하였구 집을 지켜야 하지만 나는 자유롭기에 내가 군대로 가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로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대노하였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총을 쥐겠다고? 이건 안돼! 내가 가련다!” “형님이 참전하면 새 아주머니는 어떡하고?”
집안이 번쩍 뒤집힌다. 조선족 나이로 겨우 16살 밖에 안되였어도 그를 누구도 이길 수 없었다.고집이라 할까 높은 혁명 열정이라 할까? 끝내 집식구들의 권고는 헛수고로 돌아가고 18살이라고속이고 군대에 참군 신청을 한 그의 늠름한 모습, 기골도 형님만큼 성큼 커서 누구보아도 18살 되여 보이고 이미 형님들 속에서 단련 받은 그는 그 누구보다도 성숙한 모양이였다. 끝내 집식구들의 설복을 귀뚱으로 듣고 1945년 11월 13일 16살에 군대에 가게 되였다. 부대에 가서 몇 달되지않아 친구의 앞으로 첫 편지가 왔다 “나는 총을 메고 부대에 편입되여 이란으로부터 싼도만까지 와서 련이어 장춘을 향하였다. 처음 총 쏠 때에는 어깨 쭉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몇발 쏘니 아무렇지도 않더구나. 난 토비놈들을 직접 세 놈이나 쏴 죽였다. 처음엔 좀 두려웠으나 저놈들이 우리를 죽이자구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 하니 눈에 불이 켜지더라. 우리는 지금 계속 장춘으로 쳐 들어간다. 지금 나는 그 강 이름은 모르겠는데 장춘을 해방하는 전투에서 얼음선이 둥둥떠내리는 강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난 장가두 가지 않은 놈인데 물이 어떻게 찬지 나의고추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놀랐다. 그래두 그것이 얼어 떨어지지 않았거든 하!하!하!”
언제 쓴편지인지날짜도 없이 구겨진 이 편지는 그의 마지막 편지였고 마지막 소식이였다.
장춘 해방전투에서 삼촌은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장춘 포위전이라 치료를 하지못하고 16세에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같으면 겨우 소학교를 필업하고 중학교 다닐 나이에 삼촌은 이렇게 혁명열사 증서를 발급받게 되였다.
지금의 연길연북교는 내가 중학교를 다닐때만 하여도 작은 나무다리로 수레도 서로 기다려 하나씩 지나야 했고 바람도 어찌나 심하게 불었던지 16살 초중학교 다닐 때 바람에 날려갈까 두려워 길가던 향인들이 우리를 부축여 주어야 다리를 건널 수 있었고 다리 동쪽 협곡은 수양버들이 동층촌까지 수풀을 이루었고 작은 도랑물이 흐르는 습지였다. 삼촌이 집을 떠나 항일군들과 함께나 다닐때다. 밤이면 이곳에서 총소리가 콩볶듯하면 온집식구들은 숨을 죽이며 뜬 눈으로 밤을 보내야했고 이른 아침 날이 채 밝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이곳을 찾아 보곤 하였다. 빨갱이들을 총살하는 곳으로 지정되여 있은 이곳에서는 이런 총소리가 드문 것이 아니였다. “혹시 삼촌이 붙잡힌 것은 아닌지?” 번번히 매차마다 3---5명 많은 때에는 8명 되는 시체들을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묻어 주어야 하였다. “이번엔 없어서 다행이구나 그러나 이들 모두가 내 자식 내 형제들과 같은데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비오듯하는 눈물을 씼으며 시체들을 옮겨 파뭍군하였다.
중화인민 공화국은 70세 생일을 쇠였고 삼촌도 계셨더라면 이뜻깊은명절을 함께 경축할수있었으련만 그당시 진보적이였던 형님을 따라다니며배운것도 많았고 한일도 많았다.
사진한장 남기지 못하고 일본놈들의총알에나어린목숨잃은삼촌 연길시 공원 뒤켠 혁명렬사비에 3자의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
혁명영웅들이여 영원히 길이 빛나라.
조국은 영원히 삼춘을 잊지 않을 것이다
202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