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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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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변질된 의식은 버려야 한다 댓글:  조회:1518  추천:0  2009-05-16
길이란것이 어떻게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는가? 이 물음에 함의가 투명하고 값있는 대답을 주려면 성큼 앞서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인간발전력사의 상징으로 된다는것을 까밟혀놓는것이 필요할것이다. 우리가 가장 고약한 도적놈으로 알고있는 쥐는 생존본능에 의해 가을철엔 밭고랑사이에 길을 내고 긴긴 봄, 여름, 겨울 이 세 계절엔 고작 량식창고나 부엌간으로 길을 낸다. 그러나 길은 인간과 관계할 때 재빨리 그 무의미성이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자기의 가슴우에 력력히 찍어놓고있는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서 길을 내는것이 아니라 보다 더 아름답고 리상적인 세계에로 통하기 위하여 길을 더듬고있기때문이다. 바로 이와같이 길에 대한 인간의 지향적인 탐색으로 하여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유익하고 무익한 길들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바로 또 그러한 지향적인 탐구로 하여 갈곳은 저긴데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헛되지 않은 헛된 걸음(성공을 약속한 실패이므로) 을 걸었는가를 그 길들은 말해주고있는것이다. 우리 인간은 길의 운명에 처참할 정도로 급속한 진보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인제는 결코 자기의 행동적체험만으로 길을 탐색하는것이 아니라 보다 총명한 지혜로 길을 탐색하게 되였다. 그 지혜의 상징인즉 과학이다. 지남침이 생겨난것도 인젠 놀랍고 신비로울 때가 아니다. 하늘에 낸 길은 사람들에게 무한히 가능한 직선운동을 가리켜주어 더는 저 앞에 있는 샘을 찾아 열두굽이를 돌아 헤매게 하지 않는다. 바다에 낸 길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땅이란 결코 내가 딛고선 밑에만 있는것이 아니며 바다란것이 결코 끝간데 없이 망망하기만 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익한 길이 아직도 완전히는 자취를 감춘것이 아니다. 뿐더러 그것은 력사의 흔적으로 남은것이 아니라 아직도 무수한 발자국을 찍고있다. 그것은 아직도 산너머에 벌판이 있음에도 산을 옮겨 길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황소가 지구를 끈다고 미신하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조상숭배가 극한을 이룬 결과라 해야 하지 않을가. 자기의 태줄이 묻힌 고향땅에서 원시적일망정 외계의 소음이 없이 조용히 살아가는것이 생소한 현대적흐름속에서 버둥거리기만 낫다고 생각하는것이다. 그로부터 자아위안이란 곧바로 비행기보다 기차가 안전하고 기차보다 자동차가 안전하며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안전하고 자전거보다 11호차(두다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것이다. 돈이 없어 자전거를 사지 못하면서도 신체단련과 안전을 위해 사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아뭏든 어떻게 하나 돈을 벌어 차를 사겠다고 분발심을 가지지 못하는데는 적어도 현상태에 만족하는 정신적고질이 장난치기때문일것이다. 무슨 일을 해도 조상이 물려준 <<퇴물림>>에 있나 없나를 표준 세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여 그런 사람들은 지남침도 없던 그런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경험하여온 그런 애처롭고 가련한 탐색으로 망망한 원시림에서 자기가 나아갈 길을 찾아헤매고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그런 속에서도 숙명적인 행운으로 요행 무의미한 고행에서 빠져나오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가 나와 선자리에는 현대인이 살던 흔적밖에 남지 않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현대인이 달리는 속도, 그것은 결코 자연이 마련해준 생리적구조인 두다리로 닫는 속도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여드레팔십리걸음을 하는 황소의 걸음은 더구나 아니다. 사람들이 고향땅에만 묻혀 사는 사람을 일컬어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하던 속담도 인젠 오라지 않아 그 공간적함의가 훨씬 넓어질것인즉, 그때면 지구에만 묻혀 사는 사람을 일러서 우물안의 개구리라고 할것이다. 사람들은 벌써 지구로부터 달에로 려행할수 있는 공중길을 닦아놓고있지 않는가. 우리로부터 몇억광년이나 떨어져있는 별에 대한 한결 현실적인 관찰을 할수 있는것도 사실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이런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의 도전속에서 현대화의 길을 닦고있다. 우리와 세계속도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근대와 전근대사이랄만치 세기적격차를 두고있다. 그런데 그 차이자체가 벌써 하나의 엄청난 비극적요소로 되고있는데 가날픈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남은 우주속을 헤염치면서 마음에 드는 별을 따려할 때 그들은 황소로 지구를 끌어보려 한다. 원시적신화와 현대적리상의 대비라고 하는것이 적중할것이다. 정든 길이 편하고 가깝다는 말도 있다마는 그것은 결코 전제없이 무분별하게 믿을수 있는 만병통치의 약은 아닐것이다. 가령 산을 뚫고 턴널을 놓고 골을 질러 다리를 놓아 곧게 뻗은 아스팔트를 두고도 오불꼬불한 산길을 걷는다면 걸어본다는 전제가 없을 때 그런 사람은 적어도 머리가 돈것이 아니겠는가. 조상들이 경험한바를 다듬어놓은것이 우리가 물려받아야 할 전통임에는 에누리없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삶을 펼쳐가던 그 당시의 최대의 지혜의 산물이라 할때 오늘의 삶의 광장에서 우리 현대인의 지혜의 극점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있음도 틀림없다. 부모슬하에서 자식이 성장함은 본능에 가까운 상식일테지만 인간은 동물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풀어보면 자식은 결코 절대적으로 부모를 모방하기만 하는것이 아니다. 어제의 리상이 오늘의 현실로 되면서 부단히 그 삶의 내용을 달리하는것이 인간사회라고 보면 오히려 바야흐로 현실로 되는 리상을 위해 일생을 소모해온 전세대가 그 리상을 현실로 맞이하고 새로운 보다 높은 리상을 위해 새로운 길을 탐색하는 후세대앞에 자기를 반성하고 새롭게 삶의 내용을 꾸며가는것이 월씬 전진적인 삶의 자세일것이다. 그러니깐 우리가 전통에 대해 취해야 할 옳은 자세란 조상세대가 그때의 삶의 현실에서 최대의 지혜를 동원하여 력사를 앞으로 굴려온 그 보배로운 삶의 자세를 물려받는것이지 결코 그들의 일거일동을 답습하는것일수 없음이 투명하다. 력사의 흐름은 세기의 쌓임속에서 가속적이다. 그것은 력사의 운수도구가 부단히 혁신되기때문이다. 그 본질적 함의는 바로 인간지혜의 무궁한 발굴에 따른 과학의 끊임없는 창조력이다. 토끼와 거부기의 달리기시합에서 토끼가 진것은 그 자신의 자만때문이지 결코 거부기가 토끼보다 빨라서가 아니다. 그나마 우주비행선은 결코 토끼처럼 자만하여 황소가 따라오도록 하늘공중에 발을 멈추고 잠을 자지는 않을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신적고질이다. 원시적생활에 마음의 뿌리를 심고 원시적신화의 창조에 만족한 웃음을 짓는 변질되고 곰팽이 낀 농경의식은 전혀 먹을 수 없이 변질된 고기를 아깝다고 집구석에 그냥 놓아두어 악취를 한집 가득 풍기게 하는것과 꼭 같은 경우이다. 숨가쁜 세계의 달음질에 아침은 잠간이고 저녁도 순간이다. 억지로나마 소궁둥이에 채찍을 안겨 해넘기전에 갈곳에 닿을 수 있던 요행은 더는 바라볼수 없게 되였다. 아니, 그것은 렬강들의 총포앞에서 칼을 휘두르던 그때에 벌써 산산쪼각이 나지 않았던가! 닭알로 바위를 깠다면 신화라 해도 믿음을 줄수 없다. 하물며 소수레에 앉아 달나라로 갈 꿈을 꿔서야 되겠는가! 변질된 의식은 버려야 한다!
14    채취능력과 선광능력 댓글:  조회:1507  추천:0  2009-05-16
인간은 흔히 어떤 사실, 사물, 사태, 사정, 사상, 사유, 사람 내지 사회에 대해 선입견으로 긍정 또는 부정해버리는 오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무턱대고 자기를 개여올리는 아첨쟁이를 충신으로 잘못 믿었다가 발밑이 와그르르 허물어져버리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진리를 위하여 그릇된것을 지적해주는 충신을 야심가로 잘못 진단하고 여지없이 꼭두눌러버리는 인간도 있다. 어떤 기업인들은 나라의 경제진흥을 자기들이 짊어지고 있다면서 선비님들을 기생충은 아니래도 식객은 틀림없다고 비웃는다. 그런가하면 일부 인테리들은 보다 발전한 문명은 그래도 자기들이 창조하는것이고 경제인이란 사실 인간본능의 한 욕구를 위해 발버둥치는 저급차원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풍자한다. 어떤이들은 소위 절대적진리를 사회현실 내지 구체생활적으로 강요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개성과 인간성을 묵살해버리는가 하면 또 어떤이들은 이른바 절대적자유 혹은 인간성을 부르짖다 못해 퇴페적이고 부진한 허무주의인생관에 삶을 절이면서 무병신음에 령혼을 썩여간다. 서방문화는 자본주의문화이기에 부패하고 썩어빠진것으로서 배격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지금껏 절대적방어관념을 앞세우고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인류문명발전의 고차원을 상징하는 우수한 문화이기에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맹목적인 숭배에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도 있다. 극단성이 빚어내는 악과이다. 절대적인 긍정과 부정, 옳다와 그르다, 배척과 수용, 진압과 범람, 찬양과 비판은 흔히 주관적인 선입관으로 열가지 특성에서 한가지 특성을 잡아 그 열가지를 일색화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게 하는것이다. 어떤 사물, 사상, 사유, 사람에 대해 우선 넓은 수용력과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다음 가져야 하는것이 진가를 가르는 선광능력이다. 그것은 어떤 사물, 사상, 사유, 사람이든 과연 절대적으로 긍정할수 있다든지 아니면 그 반대로 절대적으로 부정할수 있다는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수 없기때문이다. 광물을 캐내는데는 우선 채취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선택하여 채취해낸 광물이라도 그 자체가 최종가치를 가질수 없다. 그래서 요청되는것이 캐여낸 광물중에서 가치가 적거나 없는것들을 골라내는 선광능력이다. 그러나 우선 채취이고 그다음이 선광이다. 광산에서 직접 철을 뽑아낼수는 없다. 그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달라는격이다. 우선 채취해낸 다음 다시 선광작업을 거쳐 용광로에서 제련해내야 하는것이다. 또 달리 비할것 같으면 우리가 수확하려는것은 통통 영근 벼이삭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논밭에서 쭉정이나 피를 골라내며 가을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그런대로 와락와락 거둬들여야 한다. 그다음 마침내 낟알을 털어서 바람에 날려 영근 낟알과 쭉정이나 피따위를 가려내야 하는것이다. 문화수용도 이와 다를수 없다. 우선 관용의 자세로 모든 문화유산, 문화적재부들을 욕심스레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다음 우리의 제도적장치 즉 선광력에 의해 알맹이와 쭉정이를 쭉 갈라놓아야 하는것이다. 사실 인류문화의 본질적인 창조력이 민중이라고 확인하고보면 원래 문화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쉽게 제도적장벽과 국경을 뛰여넘을수 있는것이다. 특히 대중문화의 경우 역시 문화적토양의 현격한 차이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백성들에게는 벌써 훨씬 동질적인 삶의 광장이 마련되여있기때문에 짙은 공감대가 이루어져있는것이다. 그런데다 지금 또 세계가 제도적차이와 리념적차이가 있음에도 한걸음 시장경제질서로 규범화되고있으니 동질성보다 이질성이 더 커질수 있을가. <<구데기 무서워 장못담글가>>하는 유명짜한 우리 민족의 속담이 있다. 신사차림하듯이 멋진 수식어로만 사용하는 겉치레에서 벗어나 심각한 인생철리로 다시 받아들여야 할것이다. 장맛을 보려면 여하튼 장을 담그어야 한다. 장에 잠재한, 구데기 낄수 있는 균을 어떻게 왁찐하는가 하는것은 그다음으로 요청되는 일이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후 우리는 문화적으로 훨씬 성숙되였고 문을 닫아걸었을 때보다는 오히려 면역력이 뚜렷이 강해졌다. 문을 열어놓았기때문에 파리가 날아들어와 리질에 걸렸다고 아우성치는 자를 대신해 우리가 다시 문을 닫아걸수는 없다. 모든것이 격리된 공간에서는 성숙이요, 면역력이요 하는것을 운운조차 할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열고닫는것이 문이고보면 우리는 신을 신고 발바닥긁는 격으로 객관적법칙 혹은 사물의 기능을 어기고서는 정상적인 생활, 정상적인 성장을 꾀할수가 없는것이다. 절대적인 방어관념에 지나친 과민증을 앓으면서 닫아건 방안에 들어박혀 밖의 공기와 접촉하기를 두려워하는자는 적어도 자기 능력을 부정하는자, 풀어말하면 진가를 가려내는 선광능렬을 잃은자거나 병균을 이겨낼수 없는 면역력결핍자일수밖에 없는것이다. 이런 사람은 문화수용자세가 문제이기전에 벌써 그 자신의 문화적토대와 삶의 자세가 문제인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한테 우수한 선과능력과 튼튼한 면역력이 있는한 그리고 우리 사회에 문화발전을 담보할수 있는 믿음직한 제도적장치가 마련되여 있는한 우리는 대담하게 문을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선광능려이 없는자, 면역력이 약한자는 그 자신이 벌써 적자생존, 우승렬패의 법칙에 의해 도태될 인간이며 사실 문을 닫아걸어도 조만간에 병들어 시들어버릴 인간임에 틀림없다. 지나친 방어관념을 앞세우지 말고 우리의 선광능력으로 들어오는 족족 진가를 가르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벌려야 한다. 아뭏튼 더 많은 광물을 캐낸다면 더 많은 가치를 얻어낼수 있음은 너무도 투명한 리치가 아니겠는가.
13    스스로 절름발이 되지 말라 댓글:  조회:1497  추천:0  2009-05-16
<<지금은 경제, 경제할 때야. 까짓것 사회과학이요, 문학이요 하는 따윌 배워선 뭘해, 학교를 갈려면 리과대학을 가고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아무래나 기술을 배우는게 상수야...>> 과연 그 말에 전혀 도리가 없는건 아닌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개혁의 모진 진통속에 신음하고있다. 림산전의 산부의 진통을 덜어주자면 산부인과의사나 산파가 있어야 하듯이 역시 경제개혁의 모진 진통을 하루빨리 진정시키려면 그에 전공한 의사, 산파라 할수 있는 과학, 경제 및 기술인재가 대량적으로 수요될것은 자명한 일이다.미구에 태여나게 될 영아--현대화사회를 생각하면 누군들 기쁘고 격동하지 않으랴! 그런데 다만 물질적재부와 물질적생활에서 창조와 발전을 가져왔다 해서 인생목적의 전부가 완정하게 완수돼간다고 할수 있겠는가. 그에 앞서 벌써 물질문명창조자체가 정신적비약이 없이 이루어질수가 없다. 하나의 시대가 다른 하나의 시대를 탄생시키려면 의식의 갱신과 관념의 구조적 재조합을 전제로할 때라야만 가능하다. 미래에 대한 설계는 언제나 새로운 정신적추구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성장적이고 전진적인것일수 있다. 다시금 력사를 펼쳐보아도 그 첫페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의 발전사는 틀림없이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상호보완의 발전력사였다. 오천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문명대국이 렬강의 총칼에 찔려 릉지처참을 당했던 력사적 교훈은 단지 경제적락후라고 결론하기에는 아직 뿌리가 남아있다. 화약은 일찍 중국인이 발명한 4대발명중의 하나이다. 자기가 발명한 화약에 의해 자기가 망한 거기에는 의식의 변질 내지 정신적락후라는 치명적인 인간적착오가 아프게 묻어있다. 상승력을 잃었거나 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의식주에 만족한 안일과 향락이 전부일수 밖에 없고 그만큼 과거에 대한 집착에 어제, 오늘, 래일이 반복되는 동물적인 본능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정신적각성이나 관념적비약이 없을 때 우리는 과학의 비약적인 돌파를 운운할수 없다. 그리스도교적리념이 생활의 전부의 내용에 지배적으로 작용할 때 과학의 꽃은 필수가 없었고 과학가는 이단으로 몰리워 처참하게 죽어갔다. 어제에 오늘을 이은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은 새것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의식을 낳을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의식이나 인간성마저 박탈당했던 전대미문의 시대가 종말되고 인간의 주체의식이 주장되고 사회의 밝은 미래가 약속되는 오늘 우리에게 급선적으로 나서는것은 어제의 상처를 아물리고 강요된 기계적관념을 청산하여 창조적삶을 위한 참신한 정신적기틀을 마련하는것이다. 래일을 지향하는 정신적각성이 없다면 새것은 금이래도 돌로 보일수밖에 없을것이다. 정신문명은 인간사회의 독점물이고 역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원질적인 특성이다. 정신이 뿌리뽑히면 인간은 그대로 그냥 동물이 되고만다. 문학도 인간정신의 창조물이다. 인간의 정신적생활에서 문학은 홀대할수 없이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문학은 그 산생때로부터 벌써 인간의 쾌락과 함께 정신적생활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간단하면서도 주요한 수단으로 되였다. 그후 인류문명의 간단없는 발전과 함께 문학은 인간의 사상, 감정, 도덕, 습관, 사랑, 우정, 미학관 등 에 작용하고 따라서 인류사회발전에 거대한 역할을 놀게 되였다. 문학은 자신의 특유한 교양적작용을 통하여 사람들더러 정확한 사상, 감정, 도덕을 수립하고 바람직한 인생관을 세우게 함으로써 물질문명건설을 자극하고 힘있게 추동한다. 문학은 사회 전체를 무대로 하여 활약하고 그가 창조한 형상은 바로 사회의 물질문명을 건설하는 인간자신이기때문에 그것이 사람들의 사상, 사업, 리상, 분투심에 직접적인 작용을 불러일으키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우리 민족을 말하면 문학은 그 본체론적인 의미를 훨씬 초월하여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도 민족교육과 함께 민족의 운명까지를 확인하는 필수불가결한 장치로 된다. 문학을 통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우리 말을 살려갈수 있고 민족의 문화권을 튼튼히 정립해갈수 있으며 건강한 민족정신을 키울수 있다. 물질문명은 순결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서만 인간적인 향기로 채색될수 있다. 정신적으로 뿌리뽑힌 사람에게는 의식주가 예나 지금이나 목적이고 수단일수 없다. 의식주가 목적 그 자체로 되는것은 동물성이지 인간성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인제 더는 생을 위한 본능적인 수단으로만 되지 않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것은 인간의 영원한 리상이다. 예술이 없는 동산에 꽃이 필리 만무하고 꽃이 없는 동산에 나비가 찾아들리 만무하다. 고도로 되는 물질문명과 고도로 되는 정신문명을 건설하는것이 우리의 분투목표이다. 그거야말로 현대화꽃동산이다. 그러니 어느 하나를 홀시하든지 그것은 스스로 절름발이가 되는 아둔한 작법이 아닐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인 각성, 미래지향적인 추구만이 사회의 성장과 발전의 원질적인 동력이다.
12    오늘의 도시인도 도시진출을 했었다 댓글:  조회:1407  추천:0  2009-05-16
먹고입는것이 자연생장물에만 의거해야 했던 원시사회나 그후 퍽 오랜 단계, 지어는 상품경제가 사회생활의 기본을 이루기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런대로 자아도취적이고 저급적인 랑만에 쉽게 몸을 잠글수가 있었다. 생명본능이 최종적인 목적으로 확정된 시대에서는 주린 창자처럼 렴치없는것이 없으리만치 먹는것만 해결되면 만사대길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농가의 창문밑에 쌓이는 쌀가마니의 층층에 상징성을 주는것이였다. 일년농사뒤에 높직이 쌓아놓은 쌀가마니를 보면서 사람들은 무한한 성취감에 도취될수가 있는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오래동안 생산에서 위성을 발사하는 바람이 휘몰아치는통에 현실적으로 통쾌히 실현해보지 못한 <<리상>> 내지 소망 그대로 걸려있었으니 더욱 강렬한 성취욕을 불러일으킬수 있었던것이다. 그럼에도 아쉽게도 호도거리를 선행하여 인제 막 그 <<리상>> 내지 소망을 성취하는 찰나에 시대는 본격적으로 상품경제의 요청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주는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지만 시대와 력사와 문명의 발전에 따라 그 차원을 한층한층 높이는것이다. 인제 더는 쌀가마니를 앞에 쌓아놓고 술을 나누고 농악을 잡으며 태평성대를 노래할수 없게 되였다. 낯선 시간 낯선 해빛아래 변함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것이 도리여 인생도태라는 썩은바줄을 잡아타는것으로 되여버린것이다. <<바람은 예전에 다니던 길을 잃었고 달은 새로 비칠 땅을 얻었도다>>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속에서 자칫하면 패자가 된다는 공포적인 생존의식은 그런대로 불안한 평온을 유지하고있던 농촌에도 커다란 돌덩이처럼 던져져 파문을 일으켜놓았다. 자급자족의 농경사회가 소실되고있는 오늘 농촌은 철저한 변형이 피할수 없이 요청되고있는것이다. 상품경제의 완벽한 구조는 틀림없이 전통적농경문화의 구조적몰락을 토대로 하게 된다. 어차피 피할수 없는 이런 력사의 갈림길에서는 오직 두가지의 선택, 즉 새로운 농촌문화질서확립에서 적자생존의 도태과정을 겪거나 아니면 아예 제도화되여가는 시장경제구조속에 뛰여들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것이다. 그런데 다른건 다 밀어놓고라도 우선 우리 나라는 락후한 농업국으로부터 발전한 현대적공업국으로 철저히 탈태환골하는 격세적진통기에 처한데다 12억에 9억이 농민이라는 현실이 자아선택에 앞서 군체적인 도태 내지 선택을 강요해오고있는것이다. 농촌경제가 상품경제로 탈바꿈하면서 그 창조하는 <<상품가치>>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로동력이 달라붙어있는것이 꼭 마치 언젠가는 터지든가 넘쳐흐르게 돼있는 언제와 흡사하다. 즉 로동력과잉이란것이 상품경제와 기계화대두에 따른 치명적화근이다. 이로 하여 도시와 농촌의 전통적인구비례가 점차 바뀌는것이 시대발전이고보면 어차피 오늘의 9억에서 훨씬 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선택에 새로운 신분증을 타야 할것은 확정된 일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새로운 선택이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질수 있는 필연의 결과로 될수 없다. 자각적으로 현실에 발맞추는 노력이 없다면 그때에 가서 선택보다 도태가 앞설것은 지금까지의 문명발전의 척도로써도 투명한 결론이 아닐수 없다. 그로부터 보면 도시진출 내지 시장경제진출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인식은 차라리 촌문화질서가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로부터 경쟁적 및 상승적 상품경제로 과도하는 현실의 필연에 대한 일찍부터의 자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어찌보면 그들의 경쟁, 분투 내지 모험이 주관적으로는 자주적인것일수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시대가 반짝거리고있는 신호를 정확히 확인한 것이라고 보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종속적인 현실대응방식이라고 할수도 있는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문화질서의 확립과 시대상승적힘에 의해 원래 자연으로부터 약속되였던 행복이 파괴되는 운명적비극을 전통적농민은 겪지 않으면 안되겠기때문이다. 그런바하고는 낯선 환경에 적응되기를 앉아기다리는것보다는 차라리 일찍 젊었을 때 아직 모두가 낯선 환경에 순응되지 못한 기회에 젊음을 있는대로 아낌없이 소비해가면서 새로운 시대적 삶의 세례를 받는것이 훨씬 바람직할것이다. 실패나 고배를 맛본다는것은 사실 참된 삶을 살려하기때문이다. 맹동을 침묵시킨답시고 무능으로 실패했거나 정신적빈곤으로 타락한 인간들을 효시물로 내걸고 도시공포증을 살포하지 말아야 한다. 망망한 인생의 대해에는 언제나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기마련이다. 삶과 죽음이 한 광장에 있듯이 실패와 성공도 따로 떨어져있는것이 아니다. 행운만을 바라는자는 벌써 결론이 확인된 실패자일수밖에 없다. 기다림의 일생, 그것은 살아숨쉬는 송장이 죽은 송장으로 변하는 과정인것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무사한 습관에 길들여 살았던 재정로임팀들도 생존에의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 시대이니만큼 지루하고 번쇄한 시비만을 비생산적 내지 순소비적으로 되풀이할수는 없는것이다. 새로운 삶의 광장에 떳떳이 나서기 위해 힘차게 행동하며 실천해야 한다. 어쨌든 그 이상의 상승이 있을수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보려는 자체가 전진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11    낭만을 광열과 바꾸지 말라 댓글:  조회:1854  추천:0  2009-05-16
변혁의 모진 진통속에서도 더욱 아름다운 래일을 믿고 웃음짓는 고향의 모습, 그 속에서 내 고향의 정다운 얼굴들이 자유를 본다. 얼마나 갈 망하던 자유더냐. 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4층 과학기술관청사의 창문들에서는 밤늦게까지 탐구의 불빛이 내리덮은 밤장막을 헤가르며 오늘과 래일을 이어주려는듯 꺼질줄 모르고 흘러나온다.그 길건너 맞은편에 외형은 수수하나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한 어느 한 직장의 무도청에서는 경쾌한 음악소리가 어둠을 실어 저 멀리로 떠나보내는듯 그칠줄 모르고 흘러나온다. 실로 변혁되고 약하는 오늘의 시대를 온몸 뿌듯이 감촉하게 하는 시대의 축도앞에 선듯한 심정이였다. 그런데 어느 한 기회의 <<집돌이>>(취재)에서 나는 감각과 시각과 청각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난것으로 하여 놀라움과 서운함을 금치 못했다.무도청에 들어서니 그 아름답고 경쾌한 음악속에 과학기술관청사를 비방하는 추잡한 잡음이 은은히 동반되여 흐르고있었다. <<책벌레들이 들어찬 벌레통>>--더 달리 부를수 없을 정도로 형상적인 개괄을 했다고 손벽치는 맞장구소리도 장단마냥 음악의 선률에 어울려 귀가에 들려왔다. 그럼에도 어쩐지 그들의 건방진 언사에 대한 반감과 근면하고 이악스러운 <<책벌레>>들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생활을 모르는 책벌레>>들이 가련하고 측은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사업할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레닌도 말한바 있지 않는가, 참 그렇다. 그 머리 하나가 모든것을 다 생각하고 감당해야 할터인데 일년 사시절, 아니 인생의 황혼이 물드는 그때까지 오직 <<골방>>에만 들어박혀있는다면 단순한 생각에도 어쩐지 그것은 기계를 기름도 주지 않고 쉬우지도 않고 내내 돌리는것과 같은 졸렬한 방법인줄로 여겨졌다. 그런데 과학기술관청사에 들어서니 역시 <<무도청>>을 조소하는 용속한 잡빛이 조용한 불빛에 섞여 흐르고있었다. <<네 배야, 내 배야, 도시의 쓰레기들이 안고도는 쓰레기통>>--뒤따른 손벽과 폭소가 조용하던 집안을 무닐듯한다. 물론 그것은 오늘에 래일을 이어 허송세월하고 가정의 불화를 초래하고 사회의 도덕적질서를 어지럽히는 허무하고 맹랑한 <<무도쟁이>>들로부터 결론한 과잉반응이다. 흙을 담은 가마니는 홍수를 막을수 있어도 텅빈 가마니는 개울물에도 밀려간다. 이건 누구의 명언이던가. 명언이 아니고 나의 말이지만 그래도 낮이나 밤이나 앉으나 서나 일하나 휴식하나 그냥 온 뇌리에 <<무도>>장면만을 그려넣는 인간에게는 명언못지 않은 좌우명이 되리라. 밤일을 한다며 시어머니와 남편을 속이고 아이까지 팽개치고 매일매일 새날이 되도록 무도장에 붙박혀있는 며느리, 안해, 한 녀인의 미모에 매혹되여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달에 백여원돈을 밀어넣는다는 <<애정적인 사나이>>, 실로 이러루한 무도장견문이야 수두룩하다. 인성의 고갈, 개성의 억압, 자유의 박탈에서 해방된 인간들이 자유를 편식하고 과식하고있는것 같다. 물론 사회에 보다 밝고 민주적이고 활발한 자유가 주어질 때 그만큼 인간의 창조적 힘은 커지는것이고 사회의 성장도 급속할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질서속에서 이룩되는 자유여야 하지 아무런 약속력도 없고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는 무절제한 <<절대적자유>>라면 오히려 사회건강에 해로울것이고 개체인생의 비극의 씨앗이 될수도 있을것이다. 오직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상승적경쟁력을 가지고있는 사람만이 자유는 무한한 지혜의 원동력으로 될수 있다. 과식은 불식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옛날에 한 훈장이 아이들한테 너무도 혹독하게 굴어 아이들의 원한을 사게 되였다. 아이들은 한번 훈장을 혼내우리라 별렀다. 동지팥죽을 먹게 되자 급장이 훈장을 집에다가 모셨다. 그런데 금방 밖에 나서자 또 한 어린이가 자기 집에 훈장을 청했다. 너도나도 청하자 훈장은 인젠 배가 불러 먹을수 없다고 사절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왜 그 애들의 낯만 봐주고 자기들의 성의는 짓밟는가고 항의했다. 훈장은 할수 없이 한집에서 한술씩이래도 뜨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맨 마지막 집을 나서면서 훈장은 올챙이배처럼 탱탱 불어난 배를 붙안고 걸음도 걷지 못했다. 훈장은 하늘을 바라고 <<아, 과식은 불식보다 못하도다>>하고 개탄했다고 한다. 자유를 편식하거나 과식하는 인간들, 사회의 성장과 개체의 발전과는 무관하거나 지어는 해로운 <<자유>>를 선택없이 따먹는 인간들은 질탕한 방종속에서 마음이 썩어가고있다. 하나의 군체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질서속에서 선택된 자유가 있을 뿐 무절제한 절대적인 자유란 있을수 없다. 혹자가 그런 자유를 얻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금과를 따먹은것이다. 과학의 고봉으로 높이 톺아오르는 용감한 <<책벌레>>들이 무도회나 기타 오락활동을 에네르기를 보충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총명한 방법일가. 그리고 무도장에 다니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무도를 목적성없는 쾌락이나 이성에 대한 <<탐닉>>으로만 생각지 말고 진정 사회교제를 넓히고 하루로동의 피로를 푸는 수단으로 삼고 또 래일의 진보를 예언적으로 축원하는 모임으로 되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미래에 대한 동경과 리상이 동반되고 생활의 정취가 짙게 깔린 자유의 락원이 아니겠는가. 자유의 락원으로 가자. 허나 랑만을 광열과 바꾸지 말라.
10    문명과 <문명악> 댓글:  조회:1876  추천:0  2009-05-16
금방 우리가 딛고선 땅이 흔들리고있다. 강력한 지진파의 충격을 당한듯 고요한 산간도시로 잠에 취해있던 시내가 벌둥지 터진것마냥 벅적 끓어번지고있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모든것이 탈바꿈을 하고있다. 산업문화, 오락문화가 농경문화를 여지없이 충격하였다. 오락문화가 단순한 가정문화를 충격하였다. 천여대의 택시, 거리거리에 번쩍번쩍하는 술집, 커피점, 가라OK, 나이트클럽, 사우나욕탕 그리고 유혹의 밤거리에 다채로운 음식문화의 전경을 펼쳐보이는 밤시장. 모든것이 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생경하고 환상적인것이였다. 그런데 인젠 그 모든것이 우리 생활의 현장에 유혹의 현실로 세워져있는것이다. 그때도 비록 공장에서 직장인으로 일하는 인간들이 이 도시를 메우고있었지만 그런대로 수입과 지출이 자연적 삶의 연장을 위해 고스란히 이어진, 자급자족에 만족하는 전통적농경문화의 특성 그대로였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문화적인 욕망충족을 갈구하는 성향이 발돋움하면서 사람 호상간의 관계에서 상승적경쟁력이 외면된 원시적인 평화와 행복과 화목과 인정은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승화를 저애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동조자로 몰리우고말았다. 모두가 산업화, 상업화로 특징된 도시적 삶의 질서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모지름쓰고 찢기며 지어는 피흘리고있다. 차겁고 랭혹하고 인정미가 멀어진 현장에서 우리는 극복의 어려움을 절감하고있다. 인격론에서조차 상대방의 지갑의 크기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인간들, 닫는 절주에 이웃이 사촌이라던 속담이 퇴색하고 우승렬패의 생존위기에 타인이 지옥으로 되여버린 사실앞에서 우리는 분명 문명의 뒤안길에서 쏟아져나오는 <<문명악>>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도덕적건강의 보호가 급선적으로 요청되고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을 다시 인간적향기로 채색할것이 절박히 주시되고있다. 그렇다고 다시 옛 농경문화를 복귀할수는 없다. 어제까지만도 우리는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인간에게만 차례진 혜택인 의식, 지식, 지혜와는 너무나도 무관하게 고정불변적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순소비적인생에 지치고 변질되여왔다. 인간의 의식, 지식, 지혜가 높은 차원에서 발굴되고있음에도 원시적신화를 동경하는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요사스럽게 비행기보다 자동차가 안전하고 자동차보다는 걷는것이 안전하다는 설법의 기저에는 상승력을 잃은 락오자의 궤변철학이 안받침되여 있을것이다. 그렇고보면 과연 어떻게 우리는 사회에 대한 긍정적시선을 회복할수 있을가. 가장 바람직한것이 그래도 보다 많은 문화적투자를 하여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문화적신변정리에 게을리하지 않는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삶의 총체성에서 사회를 통찰해보면 비록 문명의 뒤안길에서 휘몰아오는 <<문명악>>이 사람들에게 극복의 어려움을 안겨주고있지만 그러나 향상하려는 정신적독방을 갖고있는 사람에게는 그 현실적아픔이 상승적 내지 전진적 삶의 현장을 마련하기 위한 진통임에 다름아니라는것은 투명한 사실이다. 이런 상승적인 시각에서 볼 때 기존가치질서의 파괴나 변질은 역시 새로운 가치질서의 형성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물론 기존가치질서가 충격을 받고 아직 새로운 가치질서가 이루어지지 못했거나 제도적으로 고착되지 못했들 때 우리는 이른바 질서의 혼란속에서 인간의 생존위기감 같은것까지도 체험적으로 살깊이느끼는수가 있다. 이것은 계절이 바뀔 때 발병률이 많은 자연법칙에 맞물린다. 그러니깐 절실한것은 우리의 문화적투자 내지 삶의 자세이다. 코페르닉세와 같은 선각자들의 인생에는 문명의 창조를 위한 희생적체험이 아프게 묻어있다. 육체적생명만을 연장하는 원시적인 삶이라거나 혹은 어제, 오늘, 래일에 변함없이 그대로 그냥 한점 공간이 되여버린 삶은 흐르는 삶, 나아가는 삶, 상승하는 삶이 아니라 굳어버린 삶, 인생의 의미를 상실한 삶이 된다는것을 말해준다. 언제나 정신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의식, 지식, 지혜에 녹이 쓸지 않게 끊임없이 참된 인생을 추구하고 문화적신변정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문화적질서, 삶의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현실을 아프게 그리고 역시 보람있게 살아가야 한다. 상승적, 전진적 삶의 현장을 마련하기 위해 문명을 창조하고 건설하는 마당에 이른바 <<문명악>>이 묻어들어오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악을 제거하기 위해 문명까지를 밀어버리거나 외면해버린다는것은 손톱이 길어졌다고 손가락까지 잘라버리는 미련한 짓일수밖에 없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글가>>하는 우리의 속담은 영원한 인생철학이다.
9    과학의 정신=? 댓글:  조회:1814  추천:0  2009-05-16
어느 한 만화가는 <<과학자의 머리>>라는 만화에서 과학자의 머리를 <?>로 그렸다. 참으로 신통하고도 간결하게 과학자의 전부의 함의를 개괄한것이라고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만화를 감상하노라니 과학의 정신이란 틀림없이 바로 이런것이구말구 하는 생각에 젖고만다. 과학의 정신, 그것은 틀림없이 회의의 정신이다. 이 회의의 정신의 바탕은 자유로운 사유이다. 오직 자유분방하고 무한공간적인 사유에서만이 자연과 사회의 천태만상이 원래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놓게 된다. 학술에서의 치렬한 론쟁, 그것은 벌써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예고하는것이다. 그런데 학술자신안에서 충분한 리유로 대방을 수긍시키는것이 아니라 그 어떤 외부적인 힘 이를테면 권력이나 권위 등으로 대방에 자갈물릴 때 과학의 꽃은 요절하고만다. 서양의 찬란한 문화도 이런 비극을 극복한 토대우에서 현대문명을 창조한것이였다. 서양의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적 통일문화>>라고 일컬어진다. 이를 풀어보면 서양의 중세문화는 그리스도교의 리념에 의해서 통일되여있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이때의 그리스도교는 사회생활전체안에 스며들어 모든것을 감독하고 지배하였다. 하여 당시에는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 문화의 각 분야가 모두가 하나하나 그 자신안에 자기의 존재적리유나 고유의 원리를 갖고있은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의 힘에 의하여 지탱되고 그리스도교의 리념에 의해 지배되였다. 하여 교회는 과학의 리론이 자기의 교설에 배치되지 않는한은 일정한 자유를 허용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중세교설의 권위를 침범하는자는 이단이라고 하여 가차없이 처참하게 탄압하였다. 부르노가 강경한 자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여 교설에서 인정하는 <<지구중심설>>을 부정한 대가는 참으로 비참한것이였다. 문제는 바로 교회가 순수한 과학에 자기의 리념을 강요한데 있다. 교회는 절대적권위를 요하던 나머지 모드것에 대하여 분별없이 자기의 리념을 진리로 접수시키려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각 분야는 각기 독립하여 그 하나하나가 그의 존재리유와 고유의 발전법칙과 원리를 갖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무시당하고 오직 교설의 채찍아래 순종할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과학정신의 발아와 확산에 가장 큰 장애로 된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하여 종교개혁과 함께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 일어나게 된것이다. 개성해방, 정신적 개인, 신에서의 해방, 자유의식에 립각한 문화 이것이 르네상스가 추구한바였다. 이는 인간의 자유로운 전개를 가능케 함으로써 따라서 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자유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비판도 가능하게 되였다. 오늘 우리한테도 바람직한것은 자연계와 인간계에 대한 자유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비판이다. 학술에서 지나치게 통일만을 주장하는것은 리론의 고갈을 초래할 뿐이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모두 과학정신에 의해 발전한다는것을 념두에 두고, 또 과학정신이란 바로 회의의 정신이라고 바꿔볼 때 지나친 통일은 도리여 과학정신에 배치되는것이다. 왜냐하면 학자 또는 과학자의 육체에서 과학정신내지 회의의 정신, 또는<?>를 그의 생명과 함께 쫓아내지 않는한은 절대적인 통일이란 있을수조차 없는 일이기때문이다. 한 학자 또는 과학자로 놓고볼 때 회의의 정신, 또는 <?>를 자기의 머리속에서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곧 그의 과학생명의 종말을 알리는것으로 될수밖에 없다. 하기에 <?>는 과학자의 모든것이며 삶의 내용이다. 사실 복잡한 사회를 하나의 통일된 안목으로 밝혀본다는것은 너무나 아름차고도 불가능한 일이다. 비행기로 산림을 찾았다하여 바늘도 찾을수 있다고 한다면 세살먹은 아이도 입이 째지게 웃을 일이 아닐수 없다. 어떤 사물이든지간에 모두 그 자신안에 자기의 고유의 존재리유와 발전원리를 담고있는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학술토론에 대해서 급급히 정치적발언을 하는 고약한 버릇이 남아있다. 이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사람들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시키던 고루한 전통이 아직 우리의 머리에 남아있기때문이다. 하기에 무슨 일이든지간에 통일된 결과를 보지 못하면 잘못된것인듯싶어서 께름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람들의 인식을 통일시키려 한다. 그런데 과학정신으로는 도저히 통일을 가져올수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의 정신은 회의의 정신이요, 학술토론의 과학적태도는 자유로운 사유의 전개이지 결코 절대적인 통일인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는 정치적으로 학술의 통일을 꾀하는것이다. 그러나 동란의 세월에 중국에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또는 부르노와 같은 운명의 사람이 얼마였는지 모른다는것을 기억에 떠올린다면 우리는 다시는 그것을 재연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특히 현대화의 공정을 벌려놓고 세계적 절주와 발을 맞추려고 과학기술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오늘 우리는 결코 다시 자기의 사유를 얽어놓는 미련한 짓을 할수가 없다. 자기의 사유에서 과학적근거를 찾았을 때 한 과학자는 성공한것이고 하나의 문명도 함께 태여나는것이다.
8    어른들이여, 우화를 보라 댓글:  조회:2032  추천:0  2009-05-16
부엉이는 온 힘을 다해 동쪽을 향해 날아간다. 얼마나 날았는지 기진맥진한 부엉이는 울창한 수림속 어느 한 나무가지에 털썩 내려앉아 황황거리며 숨을 돌렸다. 때마침 수림속에서 쉬고있던 산비둘기가 부엉이의 씩씩거리는 꼴을 보고 말을 걸었다. <<당신은 이리 급히 어디로 가시나요?>> <<난 동쪽으로 이사해가려하오.>> <<왜 이사하려 하나요?>> <<흥, 몰상식한 서쪽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듣기싫다며 나를 욕하질 않겠소. 그래 내 그들이 싫어서 아예 이사해버리려는 거요.>> <<이사하면 문제가 풀릴것 같아요? 내 보건댄 당신이 자기의 목소리를 고치지 않는다면 동쪽의 사람들도 결국 마찬가지로 당신을 싫어할거예요.>> 산비둘기의 사리밝은 말에 말문이 막혀버린 부엉이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여 랭가슴만 앓았다. 이것은 우화 <<부엉이가 이사하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화란 사람들에게 그 어떤 진리와 생활의 철리를 설명해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엮은 이야기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화란것은 공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기침을 떼거나 수염을 쓸면서 자손들이나 어린이들한테 들려주어 그들을 교양하는 훌륭한 수단이라고만 여기고있다. 실은 만약 어느 총명하고 글 잘 읽는 어린이가 <<총명한 잇규>>처럼 제구실 못하는 공민권사용자들에게 우화를 들려주어 경종을 울려준다면 그것이 도리여 별미일것 같고 또 어찌보면 우화란것이 워낙 어른들을 위해 꾸며진것만 같다. 사회를 살아가는 기성세대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것부터가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것과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직접 사회건설의 한 귀퉁이를 담당하여 <<벽돌>>을 쌓고있는 어른의 잘못을 깨우쳐준다는것은 결국은 사회란 이 청사의 질적보장에 관계되는것이요, 그만큼 그것은 인간의 미래와 직결되기도 한다. 앞에서 들려준 우화의 경우도 그렇다. 그것을 어린이들한테 들려준다면 자기의 결점이나 착오를 깨끗이 시정하는것만이 밝게 성장하는 길이지 부엉이처럼 자기의 그 듣기 싫은 목소리는 고치려하지 않고 못나게 집을 옮기는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어데가나 마찬가지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도리를 깨쳐줄수 있는것도 틀림없다. 그러나 인제 그것을 어른들에게 들려준다면, 그것도 제 잘못은 모르고 남의 일깨움을 되려 공격하는것으로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도리를 깨치고 서로의 마음을 열수 있는 밝은 환경을 마련할수 있을것이다. 어린이는 어른들이 꾸며주는 삶의 현장에서 어른들의 질서를 이어받으면서 사회문화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만큼 어른들은 어린이의 보기가 될수밖에 없다. 바꾸어말하면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푸른꿈을 키워주는것도 어른들이요, 동심에 상처를 주고 락서하는것도 어른들이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이 꾸며가고있는 사회의 현주소는 어떻고 또 기성세대의 현모습은 어떠하던가. 자아를 찾은 인간들--우리는 철저하리만치 자아를 찾았다. 봉건륜리도덕에 의하여 부모(자식)의 자식(부모), 남편(안해)의 안해(남편), 형님(동생)의 동생(형님), 자(매)의 매(자), 시어머니(며느리)의 며느리(시어머니)...로 아주 자아를 잃어버리고 남의 <<노예>>로 봉사적인 삶만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날인가부터 갑자기 자아를 찾고 자유를 획득하였다. 인간의 주체의식인지 개체의식인지 하는 자아중심적인 생명욕구가 보둑을 터친 홍수마냥 강한 <<생명력>>으로 사회를 잠궈버렸다. 인간은 인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여 다시 물질의 노예로 전락했다. <<돈의 노예>>, <<권력의 노예>>, <<사랑의 노예>>, <<향락의 노예>>..., 그러나 어쨌든 인간사회에서 인간의 <<노예>>가 아니라는것은 충분하게 자아를 찾은것이요, <<절대적인 자유>>를 얻은셈이다. 서로의 감옥--절대화된 자아와 자유는 인간대 인간을 불신이라는 장벽으로 막아버렸다. 그래서 자아중심적인 홀로서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적기틀이 되여 누구도 믿을수 없다는것이 <<철학적 결론>>이 되였다. 나에게 좋은 말을 하는것은 간릉한 아첨이요, 잘못을 일깨워줌은 위험한 도전이다. 모든것을 믿을수 없으니 모든것을 배척하게 되고 자아중심적인 판단에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고 관용의 마음으로 남을 리해하고 접수할수 없다. 인성에서 다시 본능에로--철저한 자아중심적인 삶의 자세는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을 인간사회전체에 그대로 적용시킨다. 전진적이고 상승적인 경쟁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네라는 생사판가리로 동류상잔이다. <<남편죽이기>>, <<안해죽이기>>, <<아이죽이기>>, <<천재죽이기>>...아뭏튼 나한테 걸림돌이 되면 주저없이 제거해버려야 자기보존을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제 누군가 자기의 그림자를 죽였다는 뉴스도 듣게 될것이다. 두려움이 부실부실 가슴에 내린다. 하얀 백지같은 동심세계에 우리 어른들이 그리고있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락서이다. 못난 부엉이처럼 자아중심적인 판단에 자기 령혼을 세탁하려는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이 그냥 마음가는대로 남을 쥐여박고 인생을 찢어발기는, 사냥물을 노리는 포수같은 어른들이 어린이들한테 어떤 삶의 자세를 가르쳐줄수 있을가. 속수무책인고로 다만 여기에서 우화 <<부엉이가 이사하다>>를 공민권사용호들에 선사할 뿐이다. 어른들이여, 우화를 보라.
7    소와 호랑이의 계주 댓글:  조회:1783  추천:0  2009-05-16
<<금닭이 홰를 치니 천하가 밝아온다>> 제6차5개년계획의 시작을 알려 금닭이 홰를 치던 1981년 닭해, 어느덧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을 달려 이제 막 그 마무림을 지은 소해가 계주봉을 제7차5개년계획의 첫시작을 떼게 되는 호랑이해에 넘겨주었다. 날쌔고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호랑이가 대견스럽고 자신만만하게 계주봉을 받아쥐였다. 호랑이가 날래게 첫 스다트를 뗀다. 그결에 세기는 나래를 펼친다. 이 순간 다시 머리를 돌려 금방 계주봉을 넘겨주고 숨을 돌리고 있는 소를 바라보노라니 소에게 미더운 눈길과 아낌없는 찬사가 쏠리게 되는 심정이니 이는 또 무엇때문일가. 결코 과거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아니다. 래일을 향해 새로움을 바라는것, 이것만이 리상의 대문에 들어설수 있는 길이요, 과거를 붙들고 통곡하거나 자만하는자에게는 나귀가 연자를 돌리는 격으로 처참한 맴돌림이 있을뿐이라는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소에 대한 미련이 아마도 새로움을 추구하는것 역시 오늘이 우리의 미래였을 때 오늘이였던 어제가 매 순간순간이 그렇게 알매지고 빛발치였기때문이라는데서 오는 소에 대한 편애인것 같다. 편애이면 또 어떤가. 오늘을 딛고서서 래일을 당겨오는 사람에겐 어제가 신심의 믿음이 되고 신념의 바탕이 되여있는것이 분명하다. 그 믿음이 진정 미더운것이고 그 바탕이 진정 튼튼할 때 미래에 대한 새로움의 추구는 비로소 희망의 문턱에 닿게 될것이다. 하기에 호랑이한테까지 달려온 소는 그토록 미더웠다. 미욱할만치 유순하면서도 끈질기고 느린듯하면서도 부지런한 소의 걸음은 사실 우리에게 그 무엇인가를 가르쳐준것이 아닌가. 소는 수레를 끌고 높은 언덕도 거침없이 오르고 깊은 골짜기도 서슴없이 내려서 얼마만한 짐이래도 가야할 곳까지 기어코 가고야마는 고집스런 견지성과 멍에에 목덜미가 벗겨지도록 수걱수걱 일만하는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제 호랑이가 빨리 달릴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맹수가 목표물을 쫓는 경우가 아니라 진흥과 발전을 예기하는 현대화장정이라고보면 소의 그런 성격이 퍽 보배롭고 미더웁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갈마들면서 호랑이의 날램에 소의 끈질김과 부지런함을 합치면 그거야말로 과연 <<호랑이한테 날개를 달아주는격>>이 아닐가싶다. 될듯한 일이다. 그래서 소가 끈질기고 부지런하지만 좀만 빨라야겠다는 생각에서 계주봉을 빨리 뛰는 호랑이한테 넘겨준것인지도 모른다. 계주봉을 받은 호랑아, 날래게 뛰라. 허나 소처럼 끈질기고 부지런하게. 일사천리로 내달려라, 허나 소처럼 착실하게, 실속있게!
6    명인일화에서 받은 계시 댓글:  조회:2042  추천:0  2009-05-16
 명인들의 일화속에는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오지리의 저명한 음악가 요한 스트라우스가 집에 왔다가 어지러워진 옷들을 벗어놓고 새옷들을 갈아입고 나간후 그의 안해 티제는 남편이 벗어놓은 옷견지들을 뒤적이다가 그의 적삼소매끝에 오선보가 가득 씌여져있는것을 발견하고 입으로 흥얼거려보니 곡이 과연 우아하고 듣기 좋았다. 그래서 그는 그 적삼을 꺼내여 한켠에 따로 두었다. 그런데 티제가 일이 있어 잠간 밖에 다녀온사이에 어느 세탁소일군이 그 적삼까지 한데 걷어가버렸다. 안달아난 티제는 차를 몰고 온 시가지의 눈에 띄우는 세탁소를 참빗질했지만 적삼의 행방은 나지지 않았다. 나중에 사맥이 풀린 그가 한 주막집부인의 안내에 으슥한 곳에 자리잡은 한 조그마한 세탁소에 들어서니 면바로 세탁공이 그 적삼을 비누물에 막 담그려고 서둘고있었다. 티제는 그 세탁공한테 와락 달려들어 적삼을 나꿔챘다. 천만다행이였다. 이 <<옷소매곡>>이 바로 세계음악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이름 높은 원무곡 <<아름다운 다뉴브강>>이다. 이 명인일화를 읽어보다가 홀연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크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이 티제처림 그런 훌륭한 <<안해>>로 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것이다. 지식을 토대로 하고 지능을 동력으로 하는 현대화건설은 여러 류형의 인재들을 많이 현대화건설장에 보내줄것을 요구하고있다. 이 요구를 만족시키자면 한쪽으로는 인재를 많이 발굴하고 양성해야 하고 한쪽으로는 이미 양성한 인재를 버리지 말고 합리하게 리용해야 한다. 이 짐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가에 개혁시기의 지도일군들의 형상적특징이 체현된다. 지금 이런 두 부류의 못난 지도일군이 있다. 한 부류는 안락과 향수와 권세만 추구하면서 곤난과 시끄러움을 두려워하여 이 두 짐을 아무데나 마구 팽겨쳐버리고 전혀 도외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시대가 준 중임을 떠메고 책임을 다 하느라고는 하나 도대체 어느것이 아껴야 할 <<보배>>이고 어느것이 버려야 할 <<쓰레기>>인지조차 몰라 장님 막대질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다. 틀림없이 전자는 력사에 책임지지 않고 직책을 희롱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시대를 인식하지 못하고 원시적인 노력에 헛막대질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거니, 바로 티제에게는 그들이 본받아야 할 두가지 특점이 다 겸비되여 있다. 어떻게든 그 명곡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리라 애끓게 뛰여다닌 티제의 높은 책임감이 첫 부류의 사람들이 배울바라면 아름답고 듣기 좋은 명곡임을 가려낼수 있은 티제의 내항적인 지혜가 둘째부류의 사람들이 본받을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깐 그렇다. 우리의 지도일군들은 인재를 스트라우스로, 자기를 티제로, 인재의 발명, 창조를 <<아름다운 다뉴브강>>으로 비유해보라. 힘써 노력하여 <<아름다운 다뉴브강>>을 발견하고 구해내라. 티제처럼 다행감을 느낄 때 거기에 희열과 영광이 함께 숨쉰다.
5    배 곯은 성냥갑 댓글:  조회:2002  추천:0  2009-05-16
우리 집에서 성냥의 용처는 내가 담배피울 때와 안해가 불을 지필 때뿐이다. 그런데 성냥 한보이면 열갑인데 거퍼 며칠 못가면 거덜이 나는것이 이상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처음엔 안해가 성냥 그을줄도 몰라서 씀씀이가 헤프다고 생각하고 큰 소문없이 가정에서 살짝 해결하려 하였다. 그런데 내가 <<절약교육>>을 들이대자 안해는 금방 <<항의>>를 제기하면서 내앞에 배가 촐촐 곯은 성냥갑들을 내놓았다. 말이 궁해진 나는 도리여 안해한테 <<관료주의>>를 부린것을 검토하고 사과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나는 그 길로 상점에 가서 성냥 한보를 사다가 한구들 가득 헤쳐놓고 다시 한놈한놈씩 배를 불려놓기 시작했다. 먹는 놈이 배가 커서인지 제배의것을 몽땅 털리고 나앉은 놈이 저그만치 세갑이나 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냥 소화불량이 되도록 너무 쑤셔넣은것도 아니였다. 퍽 오래전 내가 아직 어려서 손등으로 코를 썩썩 씻으며 신끈에 불을 달아 폭죽을 터치우던 때를 끄당겨보면 그때의 성냥들은 확실히 공장에서 인품 후하게 먹인데서 갑마다 배가 불룩하여 갑 웃면이 밖으로 거북등처럼 부풀어 올랐던걸로 기억된다. 어이쿠, 이거야 너무하지 않은가. 한갑차이래도 속으로 묵새겨버리련만. 중국어 성구에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말이 있다. 우리 말로 풀이하면 사물이 극한에 달하면 모름지기 그 반면에로 기울어지게 된다는 뜻일것이다. 물론 생산과 경영에 미립이 튼 그들이 붓이나 휘두르는 나보다 경제원리를 모르는바는 아니겠으나 사실로부터 보면 그래도 그들이 모름지기 경제적 지도원리를 빗나가고 있는법도 했다. 기업소의 생산목적은 물론 자체의 경제수익이겠지만, 그러나 그 목적을 실현하는 경영원리는 공급과 수요라는 시장원칙을 떠날수 없을것이다. 공급의 립장에서 시장원칙을 운운할 때 경영자, 생산자는 무엇보다 먼저 수요자의 리익을 보호해주어야 한다. 바꿔말하면 소비자관점을 수립하여 소비자들의 리익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이 경영의 근본적인 지도원리일것이다. 높은 리윤은 시장확보내지 확대에서 짜내야지 소비자들한테서 빨래를 비틀어짜듯이 해서는 안된다. 사실 소비자들의 리익을 보호하는것은 생산자가 그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상품생산자로서는 상품경영활동에서 시장보호관점을 지도원리로 할 때만이 소비자의 리익을 보호할수 있고 또 소비자의 리익을 보호할 때만이 공고한 시장을 확보하여 자기의 상품경제활동의 증대와 련속성을 보장받을수 있기때문이다. 그러지 않고 소비자들의 리익을 손상주어 자기의 리윤을 높이려 한다면 결국은 스스로 시장을 허물게 되여 긍정코 들어오는 눈앞의 리익에 악성후과가 인츰 뒤따르게 될것이다. 경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의 만성자살일뿐이다. 보따리장사군처럼 눈앞의 리익만 따지는 한치보기가 되지 말고 줄을 길게 늘여 큰 고기를 낚는 참된 사업인이 되여야 한다.
4    오늘의 <엽공> 댓글:  조회:1996  추천:0  2009-05-16
<<엽공이 룡을 즐기다>>라는 고사가 있다. 말 그대로 엽공은 룡을 무척 즐겼는바 방안 벽마다 룡을 그렸고 기둥에도 룡을 새겨넣고... 아무튼 그의 방은 룡으로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하늘의 진짜룡이 이 말을 듣고 그의 집에 내려와 머리를 남쪽창문으로 기웃이 들이밀고 꼬리를 북쪽창문에 걸쳤다. 엽공은 이것을 보고 그만 혼비백산하여 온 몸을 사시나무떨듯하면서 황급히 숨어버렸다. 실은 그가 즐기는 것은 가짜룡이지 진짜룡이 아니였다. 그런데 현실생활에서 우리 주변에는 엽공과 같은 사람도 없지 않다. 가슴을 치면서 사내대장부라고 호언장담을 뽑다가도 일단 남이 위험에 처한것을 보고는 슬그머니 주자를 놓는 인간, 호랑이 없는 골안에서 원숭이가 왕질한다는 격으로 안중에 약자로 보이는 사람앞에서는 호통질을 곧잘 하다도 저보다 강해보이는 사람앞에서는 굽실거리며 머리를 낮추는 인간도 현주소를 가진 <<엽공>>이라 하겠지만 그보다도 시대의 개혁자라로 자처하는 일부 지도일군의 옳지 못한 소위는 옛날의 엽공마저 무색할 정도이다. 사회발전에 유리한 것이면 언제나 푸른등을 켜주련다고 말은 아름답게 뱉으나 그것이 자기의 리해타산과 마찰이 생기면 그냥 사정이 달라진다. S국의 한 국장님은 말끝마다 합리하고 현명한 인재등용설을 부르짖으나 S국산하의 어느 한 공장의 공장장이 그의 공장에 조동시키려는 국장의 조카를 언감생심 시험을 쳐 받으려 하자 그만 혈압이 높아질양으로 대노하더니 정신적프레스로 그 공장장을 꽉 눌러놓아 공장장은 범의 수염을 다친 자기의 미련함을 한탄하면서 별 수 없이 이사짐을 싸지않으면 안되였다 한다. 옛날의 엽공이 진짜룡을 보고 혼비백산한것은 그래도 담 작은자의 명철보신이라 하겠으나 S국 국장의 한심한 처사는 바로 리해관계라는 이 령혼심처에서 오물처럼 괴고 있는 비도덕적이고 비량심적인 도척같은 사리사욕임이 틀림없다. 개혁을 시대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인재의 합리한 등용을 개혁의 필연적인 요청이라고 쏘프라노로 웨치면서도 그것이 일단 자기앞의 현실로 나타나 자기의 리익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되면 그만 온 몸이 추워나고 혈압이 올라가면서 시비를 전도하고 인재를 죽이는것마저 서슴치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리상이 있고 포부가 있으며 하다못해 자그마한 욕망이래도 있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은 래일에 미련을 두고 오늘을 분투한다.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다면 인간은 어제, 오늘, 래일을 반복하는, 성장이 없는 동물적인 삶에 무의미한 수명을 연장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를 서로 어울리며 살아간다. 욕망이 서로 다른 인간이 한 사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장치가 바로 도덕과 법에 의한 질서이다. 그만큼 질서는 어떤 가치이기전에 벌써 인간이 서로를 제약하여 서로가 피해를 입지않기 위한 방책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더라도 어디까지든 능동적으로, 상승적으로 쟁취해야지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어느땐가는 자기도 피해를 입게 된다. 남을 물에 끌어들이려면 자기도 한발 빠진다는 말처럼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서도 남을 피해주는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덕을 쌓는다는것은 남에게 베풀어 자기를 충실히 하고 세상 인심을 얻는 순리적인 인생자세다. 인심이 희박해지고 믿음이 퇴색하는 현실에 살면서 낯을 익힌 주변인간들의 긍정과 관심을 받는것보다 더 큰 얻음이란 또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천냥주고 못산다고 했다. 돈이나 권력은 몸외의 물건이다. 이는 옷을 입을수도 있고 벗을수도 있는것처림 돈이나 권력도 한 때의 향수나 기능에 불과한것이고 그것을 인생의 전부로 잘못 알면 어느날 아침 갑자기 돈도, 권력도, 인심도 모두 잃은 알거지가 될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돈이나 권력이 사회에 선택된 인간의, 사회를 주도해나가고 인생을 윤택하는 하나의 수단이나 에너지가 될 때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하게 될것이고 평화의 질서가 지켜질것이다. 가짜룡을 좋아하는 엽공이 되느니 차라리 강을 건늬워주는 사공이 됨이 나을것이다.
3    궁전에 들어야 할 <왕>들이건만 댓글:  조회:1950  추천:0  2009-05-16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은 위대한 자연이 모든 생물에 부여한 기본적인 생존본능이다. 인류가 원시적인 때가지만도 그러했다. 그러나 인류가 차차 동물세계로부터 인간사회에로 전화함에 따라 상기 정의는 인류를 제외한 모든 생물은... 하는식으로 고쳐져야만 하였다. 인류사회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실천활동은 더는 생을 위한 본능적인 수단으로만 되지 않으며 이성이 결합하여 남편되고 안해되여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되고 어머니되여 자식을 키우는 것이 다만 대를 잇기 위한 본능적인 결합만이 아니다. 오늘을 딛고서서 미래를 당겨오는 것이 사람들의 삶의 신념으로 확고해지고 있다. 과연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어린이들을 나라의 왕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 <<왕>>들이 살게 될 사회를 마련하는 <<신하>>들이며 <<백성>>들이다. 그들을 잘 보호하고 건실하게 키우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의무와 도덕적책임이다. 조선족은 예로부터 <<집을 털고 나앉더라도 자식만은 공부시킨다>>는 참으로 빛나는 삶의 신조를 지켜왔다. 16~17세기 영국의 저명한 철학가 프란시스 페겐의 <<지식은 곧 힘>>이라는 명언이 좌우명으로 된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지식을 중시한 미덕이 있었다는 것으로 하여 자호를 느낄만하다. 특히나 지식과 능력으로 삶의 길을 개척해야만 하고 고도로 첨단적인 문명을 창조하는 시대에 생을 허락받은 우리고보면 조상들이 굳혀준 이 삶의 신조가 얼마나 보배롭고 미더운지 모르겠다. 하기에 파릇파릇 새싹같이 래일에 피려고 방긋 웃는 어린 자식을 너무도 일찍 금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부모는 그 자식한테 죄짓기에 먼저 우리 조상님들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한 부모의 소행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인 병페로 그것이 만연될 때 그 위해성은 전체 민족의 건강에 미치게 되며 민족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날로 황페화되여가고 있는 농촌에서 인제 어린들이 배움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부모들이 가난때문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정부의 재정난으로 교원들이 로임을 받지 못하여 교단을 떠나 학교들이 페허로 되고 쑥대만 무성히 자란다. 나라의 왕, 미래의 주인인 어린이들-이들은 인류의 창조물중에서도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가치있고 가장 신통력이 있는 재부이다. 이 재부가 있는한 미래는 역시 우리에게도 속한다. 만약 혹자가 자기를 위해 어린이를 포기했다면, 만약 그들이 오늘을 위해 미래를 차던졌다면 과연 그보다 더 한심한 리기주의, 그보다 더 한심한 한치보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이는 결코 한 가정의 재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역시 인류적인 <<창조물>>이다. 보다 고급적인 사유와 보다 과학적인 사회는 한세대한세대를 거쳐 현실로 된다. 세계가 지구촌으로 좁아지고 문명이 정보화로 창조되는 시대에 호미로 땅을 뚜지는 원시로력을 미련없이 생산해낸다면 우리 민족은 동화에 먼저 시대의 락오자로 도태당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웃세대가 아래세대에 대해 사회적의무감과 도덕적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사회력사의 필연적인 요청이다. 이에 대한 거부는 력사에 대한 반역이요, 민족에 대한 배신이다. 그것은 결국 미래의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고만다. 학교는 미래의 행복이 창조되는 책원지이다. 그만큼 그것의 질적가치는 높이 긍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결코 응부적으로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뜻깊은 사회적학과로서 틀림없이 전 사회적으로 눈길을 모아야 하며 능동적인 제도적장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금을 잃고 도금을 얻는 사람 댓글:  조회:1922  추천:0  2009-05-16
한국에 다녀온 한 친구가 담배가게에서 외제담배를 사려고 손을 들어 왼쪽으로 몇번째 담배를 가리키자 가게주인이 영어로 씌여있지 않으냐며 얼굴에 아주 비웃는 표정을 짓기에 그만 얼굴이 확 뜨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동행한, 어느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있는 친구가 짐짓 영어로 이것저것 묻자 가게주인은 또 <<한국인>>같은데 그렇게 유식한체 할것 있느냐며 꼬집더란다. 그러고보니 그 가게주인도 영어는 기껏 안다는 것이 자주 구입하고 있는 물품명이나 기억(암기)한 정도인듯 했다. 술상에서 금방 친구의 소개로 낯을 익힌 친구가 물흐르듯 류창한 중국어로 일장 <<연설>>이다. 이쪽이 중국어에 퍽 낯설어서 겨우 의미전달이나 하자 그 친구는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어가 왜 그 꼴이냐 하는 야릇한 표정이다. 그때 누군가 당신은 우리 말을 아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그게 무슨 대순가 하는 떳떳한 얼굴로 전혀 모르거니와 또 알아서 무슨 쓸모가 있는가고 하는 것이였다. 그러니 모국어를 모르는 것은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고 영어나 중국어를 모르는 것이 도리여 수치스럽다는 것이다. 과연 장소나 신분에 따라 영어나 중국어에 견습공수준을 보여줄 때면 어느정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역시 다민족국가에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에게 있어서 그 주체민족의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공간이나 자활력이 약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된 사회에 선택된 인간들이 사회 적응력의 부족에서 가지게 되는 안타까움이지 수치심은 결코 아니다. 모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 그것도 모국어는 몰라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대하기가 도리여 부끄러운 노릇이다. 주체민족어에 잘 통하지 못하는 사람을 얕보기전에 벌써 그는 자기 조상을 외면해버린 사람, 현대 <<진화>>를 겪어 동화된 <<이민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신분증을 확인하고보면 그는 워낙 중국어밖에 모르는 <<중국인>>인데 구태여 조선사람으로서 과연 중국어를 잘 한다고 감탄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그가 중국이란 이 땅덩어리에서 인간가치를 실현하는 유일한 의미는 그가 이미 중국인으로 동화되였다는 것외에는 달리 자리매김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어에 잘 통하지 않으면 생존공간이 좁아지니 자활력이 약해지니 하는 것부터가 바로 우리는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조선족이기를 고집하고 강한 생명력으로 이 땅에 민족의 원색적인 문화터전을 마련하려는 모지름 때문이다. 청나라의 봉금령으로 월강죄에 걸리면 사형까지 당할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른바 <<룡흥지지(龍興之地)>>에로 대거 천입한 조선족은 봉금령의 페지와 함께 또 앞머리를 깎고 만복을 입는 <<치발역복( 髮易服)>>이란 민족동화정책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죽더라도 조선족이기를 바라고 조상한테 치욕을 주기를 한사코 원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갖은 릉욕과 천대를 받으면서도 끝끝내는 <<자기>>를 잃지 않았지만 일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은 마침내 그에 순종하여 <<치발역복>>하고 점산호(占山戶)의 마름이 되거나 지어는 점산호가 되여 천여쌍의 땅을 소유한 으리으리한 부호가 되고 조선족소작농을 부렸다. 한일합방을 탄압적으로 <<실현>>한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민족어를 말살하려 할 때에도 우리 민족은 돌틈에 솟아나는 풀마냥 끈질긴 생명력으로 민족의 얼을 고스란히 지켜냈지만 역시 창씨개명하고 넔마저 빼앗긴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수치심이란 것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거나 어떤 일에 떳떳하지 못할 때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를 아예 잃어버린 사람앞에서 모국어는 <<정통>>하고 주체민족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수치심을 가질 리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나 역시 간혹 때와 장소에 따라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없지 않다. 그것이 대학을 나온 이른바 선택된 인간의 부끄러움이라면 신분적차원에서 당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으나 그것이 아니고 그냥 중국어가 신통치 않다는 사실에서 느끼게 되는 사회 일반에 흐르는 의식이라면 그 수치심은 우리 민족의 체면의식의 변질된 표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리조량반의식을 보여주는 <<선비정신>>이 인제 빈 껍데기만 남았을 때 그것은 허례허식과 유식을 자랑하는 것이였다. 사회에 아무런 유익함도 없이 그냥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세속을 묻지 않았던 량반들은 고리타분한 유흥에 달을 보고 풍월을 잡으면서 유식을 자랑했다. 바로 그것이 비탈려 어떤 경우라도 절대 체면 하나만은 잃어서는 안된다는 민족의 변질된 체면의식으로 확대된듯 싶다. 그리고 그런 체면의식이 절대화되면 경우불문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자기의 <<유식>>이나 <<우월>>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민족의 뿌리를 뽑히운 사람이 꼭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수치심을 느낄 대신 자기의 유식이나 우월을 자랑하는 것이 퍽 민망스럽다. 연변오동팀의 영웅이라고 할만한 문지기-블라이마가 조선말을 모른다고 해서 안스러움은 있어도 수치심이 있을 수 있을가. 연변의 중국인이 조선말을 모른다고 해서 불편함은 있어도 수치심이 있을 수 있을가. 여자가 아무리 부끄러움을 잘 탄다고 해도 남자의 불능으로 아이가 없다면 여자가 임신못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남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수치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살려면 중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리치이겠으나 조선말을 전혀 몰라도 좋다는 것은 벌써 마음속으로 조선족이기를 포기한 것인데 그래도 여기에 <<표범의 반점을 지워도 의연히 표범>>이라는 속담이 적용될 수 있을가. 민족어를 잃어도 민족의 넋은 잃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타민족도 그 민족의 문화를 알면 그 민족으로 될 수 있다거나 또는 쪼각난 것을 풀로 붙이면 의연히 새것이 된다고 하는 억지임에 다름아니다. 곰이 옥수수따는 격으로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는다거나, 지어는 순금보다 화려한 도금쪽에 마음을 빼앗겨 귀중한 것을 잃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1    문학인은 철학인생을 살아야 한다 댓글:  조회:2002  추천:0  2009-05-16
기계마다 자기의 성능이 있듯이 사람은 태여나면서 천성적인 기질이 있다. 유아교육의 가장 기본은 어린이의 천성적인 기질, 특장을 잘 발굴하고 키워주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많은 투자를 하여 자식을 어릴 때부터 어떤 인재로 양성하려다가 결국 발을 깎아 신에 맞추는 격이 되고만 가장 원질적인 요인이 바로 남의 성공적인 경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식의 기질, 특장 판단이 빗나간데 있다. 억지로 딴 참외 달지 않은듯 아이가 전혀 무관심이거나 거부감까지 있는 일을 강박관념으로 채찍질한다면 그 아이는 에누리없이 그 일을 해낼 수는 있으되 덜 익은 참외처럼 썩 잘 해내지는 못하고 만다.  그만큼 재능에서 기질이 바탕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재능이 최고의 절정에 오를 수 있는 가장 관건적이고 확실한 요인은 결코 기질이 아니라 심, 즉 마음 또는 정신이다. 그 일을 꼭 하고싶다는 강렬한 욕망, 어떤 어려움도 견디여 내리라는 강한 의지, 꼭 어떤 경지에 도달하고야 말리라는 드팀없는 신념, 이런 내적인 또는 심적인 자아완성이 있어야만 기질을 바탕으로 재능이 그 자신의 체질적인, 그리고 소망적인 한계까지 쭉 치달아오를 수 있다.  고종훈이 오동팀의 령혼으로 될 수 있은 것은 기질적인 바탕에 심적인 자아완성이 있었기때문이다. 직업의식, 그것이 직업축구선수의 심적인 자아완성이다.  고봉이 학해동보다 어리고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되면서도 마침내는 한 머리 솟아오르지 못한 것은 바로 심적인 자아완성을 가져오지 못했기때문이다. 북경국안팀에 있을 때에도 술을 마시고 지도와 배짱을 부려 출전하지 못한 경력이 있었는데 금년에 전위환도팀에 와서 다시 한번 력사를 재현하였다. 정신적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다.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잘 정리되지 않으면 왕성한 의력이 있을 수 없다. 망동은 멸망에 앞서간다는 말이 있듯이 심적인 자아완성이 없으면 아무리 천부적인 기질이 있다고 해도 종당에는 예기가 꺾이고 만다.  문학도 례외일 수 없다. 천부적인 언어구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문학인재로 될 수 있다는 판단은 옳은 것이고 그런 기질이 없으면서도 선택착오로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을 위한 특별한 노력만 있다면 시인, 소설가 또는 무슨 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가능한 것이지만 꼭 남보다 한 머리 뛰여날 수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문학이 그냥 기술적인 조작에만 그치고만다면 생명력이 있을 수 없고 지어는 언어유희에 그치고말 수도 있다.  율곡 리이는 <<도(道)가 나타난 것을 문(文)이라 하니 도는 문의 본(本)이요 문은 도의 말(末)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깐 도에 근본을 두고 문으로 도를 꿴다는 것이다. 오늘의 개념으로는 도를 철학으로 바꾸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기술적으로 허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내용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문학이 인간학이기때문이요, 그리하여 문학은 군체동물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체를 파악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근본일 수 밖에 없으니 과연 문학의 궁극적인 성공은 철학인간으로 성장하는 길을 택하는 길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에서조차 개인적인 차원, 가정적인 차원, 사회적인 차원의 원리가 립체적으로 파악될만큼 작가는 지극히 철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시끌벅적하고 허둥거리는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가치를 판단하고 사물의 본질을 진맥하려면 문학인 자체가 벌써 철학인생을 살지 않으면 안되고 덕행과 학문에 의한 심적인 자아완성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심적인 자아완성은 모든 외부로부터 오는 유혹을 물리치고 물질적인 빈곤내지 사회적인 빈곤속에서도 정신적으로 충족한 철학인생을 살아가려는 자세를 갖출 때만이 비로소 이루어진다. 자고로 청빈은 선비정신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빈을 가난하고 말끔하다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청백하여 가난하다.>>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청백하기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다함은 선비의 깨끗하고 굳은 지조를 말해주면서도 또 어찌보면 부자로 되는 길은 선비의 길이 아니요, 선비는 오직 마음의 부자가 되여야 함을 표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문학의 선택은 가난을 딛고 세상을 옳게 조명할 수 있는 정신적독방을 가질 때라야만 성공을 약속받을 수 있는 것이고 문학을 다만 장끼로 표현하거나 상업적인 관심을 가지고 출세의 수단으로 리용한다면 마음조차 가난해지게 된다. 돈과 권력의 힘이 팽창하는 사회에서 모든 영욕을 버리고 오직 마음의 부자로 인정사회를 구축하려고 문학이란 이 초불을 켜들고도 그 자신이 벌써 마음이 가난해진다면 그것보다 더 슬프고 안타까운 일 또 어디 있겠는가. 몸은 문학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돈과 권력의 주변에서 활약한다면 그것은 욕망이 실천능력을 넘쳐난 것이요, 어찌하면 처음 문학을 전공하려는 것부터가 선택착오일 수 있다.  사실은 문학뿐이 아니고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로 재능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역시 마음이 근본이다. 재능이 없으면 한 무능함이요, 마음이 서지 않으면 한 간릉함이다. 심리건강이 좋지 못하고 자기를 지키는 도덕적장치가 마련되여 있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든 차디찬 정신적방랑을 하게 되거나 자칫 인생에 락서를 하게 된다.  인간을 사랑하는 건강한 마음이 있어야 인간의 군체속에서 유익무해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역시 인간을 구원하려는 정신과 사명감이 있는 작가라야 인정이 메말라가는 사회에 하나의 오아시스를 마련해줄 수 있다.  학자는 산속에서 나고 철인은 목동의 오두막에서 난다고 했다. 세속에 몸을 담고있으면서도 정신은 멀리 비켜서서 사회를 조명하고 취사선택하는 것이 철학인생이다. 아, 고달픔이여, 고행이여.  오직 내몸을 위하여야겠다는 일념에 가슴태우는 사람은 돈과 권력의 힘이 팽창하는 사회에서 선택착오를 실감할 것이니 그냥 세속에 <<하해(下海>>하는 것이 바람직한 계산적조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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