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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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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로 마음의 <3.8선>을 지워라 댓글:  조회:1602  추천:0  2009-05-16
짐승은 먹이를 놓고 싸우고 인간은 마음때문에 싸운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주인의 발뒤굼치를 따르면서 서로 사이좋게 비비고 핥아주던 개들이 하나의 뼉다귀때문에 으르렁거리면서 피를 보지 않고는 물러서지 않을듯이 싸운다.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이면서 역시 동물과는 구별되는것이 바로 생각, 즉 사유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범처럼 용맹하지 못하고 사자처럼 포악하지 못하고 소처럼 힘이 세지 못하고 원숭이처럼 날렵하지 못하고 날아다니는 새처럼 빠르지 못한 인간이 만물의 령장으로 이 세상에 군림하여 그 모든 천지만물을 주재할수 있는것이 바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마음을 독유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 바로 그 생각하는 마음때문에 그 어느 동물보다도 더 쉽게, 지어는 본의 아니게 서로가 반목하고 헐뜯고 싸우고 판가리한다. 물론 인간도 먹고 입는것과 같은 물질적인 욕구때문에 서로가 반목하고 질투하고 지어는 판가리를 하는것이 피상적으로는 동물의 싸움과 다를바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궁극적인 동력은 역시 인간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마음의 자세인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그림을 그리듯이 투명하게 들여다 볼수 있는것이 아니다. 오직하면 인간 자신이 경험으로 확인한 속담에도 열길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였겠는가. 그만큼 우리는 인간에 대한 판단에서 어떤 류형, 어떤 경우, 어떤 차원에 따라 획일적인 결론을 내릴수 없다. 다 같은 목사라지만 이분은 확실히 하나님의 독실한 신도로서 인간의 마음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모시나 저 사람은 지극히 계산적인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인간을 희롱하고 있는것이다. 한국에는 사장님도 많더니 무리로 중국에 쓸어들어 미담과 함께 많은 시비거리를 만들고 있다. 어떤 분은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서까지 중국의 조선족지역사회의 발전과 민족문화의 정립을 위하여 여러모로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있으나 어떤 사람은 백두산이다, 윤동주생가다 하면서 유람차로 신선놀음을 와서는 마치 중국 동포들을 도우려고 온것처럼 한바탕 사장의 호기를 부리고 실속없는 약속을 락서처럼 란발하고는 선량하고 유치한 중국 동포들의 푸짐한 대접에 룡트림을 하면서도 짐짓 조선족들의 랑비벽에 가슴 아픈듯 제쪽에서 핀잔까지 주고는 꼬리를 사려버리고 어떤 놈은 가난하고 무지한 중국 동포들의 황금몽을 장사거리고 알고 본국의 국법조차 무시하고 위장결혼, 가짜초청에 쁘로까로 나서서 엄청난 리익을 챙기고 지어는 사기군으로 전락되기를 서슴치 않고있다. 하여간 다 같은 사장님이래도 좋은 분, 사귈만한 사람과 미운 놈은 있는것이다. 다 같이 한입처럼 고국, 고국 하고 한국을 친절하게 부르는 중국 조선족이지만 역시 그 마음자세는 같지 않다. 반세기를 넘어오면서 친혈육마저 생리별을 해야만 했던 리념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인제 세계 선진국으로 부상하는 고국과 고국의 유지들의 동포애에 기대여 우리의 조선족지역사회와 민족문화를 미래지향적으로 튼튼히 다져갈수 있다는 긍지로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는 공익사업에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장결혼, 초청장위조, 밀입국 등 불법수단으로 고국에 들어가서는 고국의 법과 질서를 외면하고 사기와 매음과 도박으로 자신을 망치는 사람도 있다. 한국사람 죽일놈이요, 중국동포 나쁜놈이요 하고 획일적인 흑백론리로 어느 일방을 타매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법과 질서가 있는것이고 법으로 다스리고 제도적인 질서로 약속하는것부터 벌써 이 한무리나 저 한무리의 인간들속에는 모두 좋은 분도 있고 사귈만한 사람도 있고 미운 놈도 있음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죄가 있어 법이 있음을 반증하는것이다.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요, 같은 신분, 같은 차원, 같은 형상을 한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그 나름이라는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자세가 서로 다르기때문이다. 그렇게 정분이 짙던 친구지간에 트럼프 놀다 말다툼에 손찌검이 나는것처럼 놀음이 고름이 되는것도 역시 사람의 마음의 넓이가 다르기때문이다. 생각하는 동물, 마음을 굴리는 동물, 사유로 판단하는 령적인 동물이기때문에 인간은 항상 마음을 깨끗이 세탁하여 서로가 오갈수 있는 열린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여야 너나가 함께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세상을 꾸밀수 있다. 그러나 리념적인 갈등이나 정치학적 인생관의 차이에서 오는 대결은 그렇게 봄이 되여 눈이 녹듯이 쉽사리 풀릴수 있는건 아니다. 다른 동물들과 본직적으로 확연히 구별되여 인간에게만 있을수 있는 대결, 그것은 물질적인 충돌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만 있는 정신의 대결이요 그것도 집단의식의 대결이다. 극단적인 정신적 대결이 인간들에게 주는 파괴력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한반도를 보라. 전설에 의하면 산천을 주재하는 바다룡왕이 인간들중에서도 마음이 티없이 깨끗한 신성한 생민에게만 준다는 제일금강을 우리 민족한테 주었다고 하니 아마도 그 때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제일 슬기롭고 용감하고 마음이 깨끗했으리라. 그런데 그후로 바다룡왕이 이제 더 마음이 깨끗한 인간들이 있으면 그때 주리라던 남은 일곱개의 금강을 더는 인간세상에 내주지 않은건 무엇때문이였을가. 우리 민족 말고는 이 세상에 더는 마음이 깨끗한 민족이 없었기때문이였을가. 그 복받은 민족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출연하였고 지금까지도 금강산과 설악산을 보루로 그 사이에 남북의 한 민족 서로가, 아니 한 피줄을 타고난 친 혈육마저 넘나들수 없는 <<3.8선>>이라는 긴 장벽을 쌓아놓았다. 얼마나 많은 리산가족들이 한탄과 설음과 저주의 마음으로 인간이 만들어놓은 <<3.8선>>을 자유로이 날아넘는 새들을 부러워 하였던가. 만물의 령장이 되느니 차라리 창공을 마음대로 비행하는 하나의 새가 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민족이 비운, 물론 따져보면 그것은 계급각성에 따른 리념대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세계렬강들의 정치대결의 희생품임에 틀림없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격이다. 그러나 아무튼 베를린 담벽이 허물어진 이후로는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민족분단의 상징물인것만은 사실이다. 혹시 바다룡왕이 그래서 남은 일곱금강을 더는 인간세상에 내려주지 않은것은 아닐가. 믿는 도끼에 발등 깼다고 생각해서. 아마도 그래서 바다룡왕이 토해낸 한숨이 안개되여 금강산과 설악산에 서리서리 감도는것이리라. 인제 강성했던 하나의 해동국, 복받은 하나의 민족임을 자랑해야 한다. 동족을 적대시하고 세계를 외면했던 금강산과 설악산의 <<빗장>>을 벗기고 문을 활짝 열어 온 세상에 그 아름다움을 자랑해야 한다. 민족의 비운을 가셔버리고 룡왕의 뜻이 다시 동그랗게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민족의 대영합일것이며 또 그래야만 과연 슬기로운 우리 민족이 민족혈연의 통일문화를 다시 지향함을 의미할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제도와 의식의 대립과 정치학적 이질성에 의한 대결에서 한걸음 물러나 하나의 민족과 문화라는 공동분모에 의하여 다시 혈맥을 이어가는, 열린 마음공간을 마련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것이다. 이는 리념과 제도에 의한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과 문화라는 동질성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민족대영합의 바탕을 마련하는 미래지향적인 작업이요, 평화통일의 실천적 일환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세계적인 리념대결이 공존공생의 평화원칙으로 순화되면서 우리 민족의 정감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 반세기 넘어 생리별의 아픔을 앓으면서 하나의 민족이 만남이 없는 두줄기의 레루처럼 한 곳을 병행하면서도 서로가 거리를 두고 이질적인 의식구조로 모습을 달리해온 분단력사를 떠올리면 민족의 현실과 극복의 의지라는 열린 인식에서 출발하여 리념적 대결과 제도적 분립과 정치학적 인식의 갈등에서 한걸음 물러나 열린 마음공간을 마련하고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는것이 역시 평화통일을 위한 기초공정이라 할것이다. 만물의 령장으로서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인간들 서로간에 열린 마음공간이 있어야 평화로울수 있다. 역시 종이장도 맞들어야 가볍고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나는 법이라 분단의 아픔을 앓고있는 우리 민족은 서로 마음의 <<3.8선>>을 허물고 민족혈연으로 이어지는 열린 마음공간을 마련하여야 통일의 서광을 맞아올수 있다.
34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라 댓글:  조회:1759  추천:1  2009-05-16
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빛과 하늘과 땅과 물과 낮과 밤을, 그리고 생물과 짐승과 새들을 그 종류대로 내여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진후에야 비로소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여 천지만물 모든것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지키게 하면서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브가 간교한 뱀의 꾀임에 들어 끝내는 그 선악의 실과를 따먹고 나중에 아담도 먹게하여 갑자기 눈이 밝아져 마침내 선악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였다 한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낯도 피해버려 노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고 선악을 알게 된 그들이 이제 또 생명나무의 실과도 따먹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할까 저어되여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그들이 드나들수 있는 생명나무의 길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범과할수 있는 인간의 육체를 백이십년으로 한계했다고 한다. 만약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을 함께 한, 그래서 언제든지 범과할수 있는 인생이 무한이였다면 인간은 더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것이고 아무런 속죄의식도 가지지 않았을것이다.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여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자리를 잡음으로 하여 이 세상 인간이 있는 곳에 언제나 선과 악이 쌍둥이처럼 뒤따르게 되고 사람은 마음에 생각할때, 계획할때, 계산할때, 판단할때 언제나 스스로 선과 악의 선택에 몸살을 앓게 된것 같다. 또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인간은 옷으로 몸을 가리우던데로부터 선과 악의 대결속에서 점차 언어와 행위로 마음조차 가리우게 된것 같다. 그런데 부끄러움때문에 가리우는것을 알게 된 인간이 마음에 자리한 악을 가리울때 그 사람은 그가 몸 담고있는 사회와 주변의 인간들에게 시한폭탄과도 같은 큰 파괴력으로 잠재하게 될것이다. 종교의 신자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죄악에서 구제해주는 령혼의 구세주를 상징한다고 확인할때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가 선을 선택하고 령혼을 세탁하는 심상(心象), 곧 마음에 세우는 우상이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저주하면서 모든 생명을 홍수로 밀어버리면서도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했던 노아를 살려준것을 보면 마음에 선을 선택하고 령혼을 세탁하는 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곧 스스로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자이리라. 령안으로만 볼수 있다는 옥상과 같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았다는 신도가 생활일상에서 지극히 리기적이고 계산적일때 그가 과연 어느만큼이나 하나님을 믿을가 회의하면서 정녕 마음의 악을 스스로 징벌하지 않고 다만 교리에 몸을 감추고 객관적으로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자>>는 어떤 강박관념이나 리해타산에 지나치게 민감한것이라고 넘겨짚게 된다. 오직 육체와 함께 하는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자만이 악을 단속하고 선을 내세워 스스로 원초적인 욕심에 자갈을 물리고 외부적인 유혹이 불러일으키는 과잉반응을 억제할수 있는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러나 한길 사람속은 몰라도 한치 자기 마음속을 모른다고 할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집단리념 내지 정치학적 인생관에 삶의 전부를 내맡기는 사람은 인간성을 거세당한 로보트같은 존재일뿐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 다만 타력이나 객관적인 장치에 순종하는 자는 사실 마음 한 구석에 타인이나 객관을, 결국에는 자기를 속일수 있는 계산장치를 버리지 않고 있는, 그래서 겉과 속이 수박처럼 다른, 역시 그래서 누구보다 더 간교하고 사악한 인간일수 있다. 권력에 아부하는것은 권력에 기대여 타인을 누르거나 그 자신의 권력욕을 만족시키려는 계산일수 있고 어떤 집단리념이나 신앙의 절대적인 추종자인듯이 자처하는것은 정치학적 인생관에서 출발하여 선택한, 지나치게 현실순응적인 대응방식일수 있으나 역시 양머리 걸고 개고기를 파는 식으로 지나치게 계산적인 마음의 <<치부>>를 감추려는 요사한 미용술일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바로 로보트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범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내 마음에 선이 설수 있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한 자만이 노아의 방주에 오를수 있을것이요, 신앙이나 인생관이나 도덕적 행위에서 실천적 리성에 의하여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자률적인 인간성을 완성해갈수 있을것이다. 인간의 선이나 인간성을 살리기 위한 제도적 장치나 도덕규범이 때로는 도리여 인간의 선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인간성을 억압할수도 있는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이다.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는 먼저 선불금을 내야 입원이 될수 있다. 그런데 먼저 입원을 시키고 나중에 입원비를 가져와야 할 딱한 급성환자나 뜻밖의 사고를 당한 환자도 있다. 그러나 먼저 입원을 시키면 나중에 치료비를 질질 끌어대는 환자에 질겁한 병원측은 천편일률로 제도를 고집하려 한다. 이런 경우가 있으나 저런 경우도 있으니 과연 제도를 내세우는것도 당연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자식교육에서 아이더러 하루 일정을 사전에 부모한테 이야기할것을 요구하나 때로는 아이들한테도 계획외 활동이나 사정이 생길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조차 부모는 속으로는 묵인하면서도 아이한테는 어떤 경우라도 사전에 부모한테 알리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번 두번 먼저 일을 보고 나중에 청가맡다보면 그저 그렇다 싶어 담이 커져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수 있기때문이다. 아직 식별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리유만 충족하게 세우면 먼저 알리나 후에 알리나 별문제더라고 확인한 나머지 사실을 꾸며 부모를 얼려넘기는 거짓말까지 배워내게 되는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틈서리를 주지 않기 위하여 부모는 절대적인 원칙으로 아이를 교육하는것이다.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하는 까닭일가. 그래서 암세포를 떼낸다는것이 그만 주변의 산 세포까지를 베여내는것과 같으리라. 특히 악의 제거를 위하여 악의 수단이 필요할 때 그 악의 제거와 함께 선마저 악의 수단에 상처를 입게 되는것이다. 바로 악의 수단을 요청할때 악의 제거를 위하여서는 선의 희생도 불가피하다는 당연성을 내세우기때이다. 쥐를 치려다 쌀독을 깨는 경우, 그래도 그 동기만은 정당한것이다. 그러니 타력에 의한 강박관념이나 내 마음밖에 존재하는 <<하나님>>은 도저히 하나의 육체에 선과 함께 공존하는 악을 완전히는 베여버릴수 없는것이다. 오직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야만 <<하나님>>은 내 육체를 타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시시각각으로 내 령혼에 침투하여 기회를 노려 머리를 쳐들려는 악을 눌러버리고 선이 굳세게 일어설수 있도록 뒤를 받쳐줄것이다. 선과 악이 한 육체에 자리를 잡고있다지만 열심히 령혼을 세탁하여 그 마음의 지옥에 악을 가둬넣고 선이 령혼과 육체를 집정할때 그래도 그는 한 선인이 될수 있다. 죽음을 앞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자기를 뉘우치고 인정에 목이 메는것은 인간들 서로가 악의 마음까지 동원하면서 쟁탈하던 모든 영욕이 육체와 함께 하는것임을 깨달은 때문이리라. 그런데 죽은 자의 덕성을 칭송하는 산 사람의 마음도 과연 죽음을 앞에 두고 새삼스럽게 그 모든 영욕이 육체와 함께 사라지는것임을 깨달은 때문일가. 산 사람의 육체에는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자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를 완승할수 없는 불행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한다. 그냥 선한 마음뿐이라면 그 마음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나 알수 없는게 인간의 마음이라지만 하나의 육체에 동거하여 생사를 함께 하는 선과 악만은 그 육체에 담긴 마음의 건강상황을 알것임은 분명하다. 마음에 길을 물어라고 하는것은 바로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그 마음의 건강상황이 모든 인생판단과 현실선택의 정확여부를 결정할것임은 당연한것이다. 인간대 인간은 서로의 감옥이라고 하는것은 물론 하나의 육체에 선과 악의 두 마음이 함께 함을 어쩔수 없이 승인하는 말이겠으나, 그러나 그런 말을 시러베장단 치듯 일상용어로 스스럼없이 쓰면서 친구나 형제나 지어는 부부사이를 가볍게 스친 마찰에마저 적용하려는 사람들을 볼작시면 그것은 역시 내 마음에 비추어 타인의 마음을 꼬집는것이요, 그러면서도 짐짓 자기는 관조자의 립장에 서서 이웃의 싸움에 두쪽이 다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듯 공정한체 하는 사이비신사의 처세철학임에 다름아니다. 내 마음의 건강을 지켜주어 악을 전승하고 선을 주장하게 하는것은 오직 내 마음속에 모신 <<하나님>>뿐이다. 그 <<하나님>>은 나의 육체와 마음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함께 하고 언제 어디서나 시시각각으로 나의 마음에 길을 가리켜 줄것이다. 계산적이고 리기적인 장사군의 속궁리로 죄를 사면받거나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는 자는 썪은 바줄을 타고 하늘을 오르려는 호랑이와 같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냥 아무런 구구계산이 없이 정신건강에 인생의 전체적인 의미를 자리매김해줄 때 그는 과연 한 선인이다.
33    망각의 미학 댓글:  조회:1779  추천:0  2009-05-16
 몇년전에 대학의 동창생 서영빈씨가 수필<<실수의 미학>>을 써서 수상한적이 있다. 그때 그의 수필을 읽고 마음으로 크게 동감했었다. 인간이 한 자연인으로 태여나 부모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면서 한 사회인으로,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번식과 생존이라는 본능적인 동물성에서 삶과 존재라는 리성적인 인간성에로의 변질과정이다. 그 과정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을 잘못 들어 에돌아 가고 얼마나 많은 실수로 발목을 접지르거나 타인의 구원을 요청하게 되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타인의 관용하는 마음에 기댈수 없거나 구원을 요청할수 없는 인간은 고독한 인간이고 사회와 무리에 외면당하고 버리워진 인간일것이다. 이는 대개 자기중심적인 리해타산과 지극히 보수적인 인간자세를 취하는 인간들이 받게 되는 대접이다. 그 자신이 남을 너그럽게 읽어주지 못하고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용서해주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때문에 받게 되는 보응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민족과 나라의 운명까지 결정하는 극한의 대항, 이를테면 전쟁과 같은 퇴로가 없는 생사의 선택에서는 악에 맞서는 악의 수단이 필수부가결(必需不可缺)할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관용과 너그러움과 참을 인자를 지켜야 한다고 하면 이는 강도가 로략질을 해서는 되고 당하는 자는 반항해서는 안된다는 강도리론임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값은 피로 값는다>>는 <<명언>>을 너무나 선택없이 우리의 일상에 활용하고 있다. 친구사이에, 이웃사이에, 지어는 형제사이에마저 조그마한 알륵을 가지고 한 하늘을 이고 살수없는 철천지 원쑤처럼 이를 사려물고 어떤 갚음에 악의 수단까지 서슴치않는다. 우리의 일상에 많은 알륵은 어떤 실수나 오해에서 기인된다. 그럼에도 그것이 풀리지 못하고 그냥 서로가 반목하고 시기하고 마침내 <<피값은 피로 값는다>>는 악의 수단까지 동원하게 되는것은 벌써 내 마음에 관용과 너그러움이 없기때문이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자신의 마음자세를 정리하는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어떤데 네가 어떻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에 타인의 잘못을 확인하려 든다. 무작정 네가 잘못했으니 빌어야 용서한다는 일방적인 자기본위주의 앞에서 누군들 마음이 개운할수 있고 너그러운 관용을 보일수 있겠는가! 아직은 사회문화적인 문명이 미숙한 사회나 민족일수록 인간들지간의 관용과 너그러움이 결여하고 풍속이나 도덕적 규범에 의한 책벌이 악렬하고 지어는 대항정서와 악의 수단이 범람하는것이다. 소학교시절에 읽은 책이고 또 워낙 책가위가 떨어져나가고 갈피들이 보풀이 일대로 인 책이여서 제목은 떠올리수 없는데 하여간 량산의 이족부락사회를 쓴 책이였다고기억된다. 이쪽 부락의 처녀가 저쪽 부락의 총각한테 시집갔는데 결혼식날에 식장에서 누가 방귀를 뀌는바람에 처녀가 부끄러움을 못이겨 자살하고 만다. 그것이 두 부락이 <<피값은 피로 값는다>>는 동족상잔의 피바다를 만드는 발원이 된다. 두 부락은 서로가 친가로부터 원쑤가 되여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른다. 승부를 가를수 없이 상잔에 상잔을,살생에 살생을 거듭하다가 나중에 그래도 담판으로 화해를 가져온다. 아직 문명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다만 풍속과 절대적인 도덕률에 의해 인간을 약속하고 규제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아주 작은 실수라도 용서할수 없는 죄악으로 락인받을수밖에 없는것이다. 사회적으로 극단적인 집단리념과 정치학적 인생관이 한 개인의 삶을 절대적으로 간섭하던 때 우리도 흑백리론과 단순한 가치판단에 숨가삐 살아왔었다. 어떤 집단리념에 충실하고 정치적각성에 인간성이 외면당할때 우리의 눈에 보이는것은 다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일과 나쁜 일, 옳은것과 그른것, 원칙적인것과 무원칙한것, 찬성할것과 반대할것, 긍정할것과 부정할것 등 극단적인 판단일뿐이다. 이성지간의 애정, 결혼은 지극히 천륜적인것인데 얼마전까지도 늙은이들의 재혼은 망발에 가까운 망칙한 짓거리로 비난받았고 마음과 마음의 결실인 결혼에 사랑이 부재하고 성격을 비롯한 여러가지가 상충하는 상황에서 결혼이 오히려 인생선택의 실수일수 있고 리혼은 각자의 인생을 존중하고 인격을 세워주는 해탈일수 있음에도 사회는 덮어놓고 그 도덕성을 문책하고 신변의 인간들은 기어이 어느 일방의 잘못을 확인하려 든다. 붐비는 차안에서 발등을 밟는것과 같은 실수는 너만이 아닌 나도 늘 범할수 있는 실수임에도 마치도 고의적인 침해를 받은것처럼 눈을 부라리거나 지어는 드잡이까지 하려 든다.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야 내 마음도 편안할수 있다. 타인의 실수를 용서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놀려주면>> 어느땐가는 나의 실수가 타인의 웃음속에 용서받을수 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줄 알고 너그럽게 용서할줄 알려면 우선 자기의 마음을 비울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망각의 미학이라는 개념을 떠올려본다. 군체동물인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노라면 어떤 실수거나 오해거나 무의식적인 언행에 의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수 있고 지어는 한때의 알륵때문에 고의적인 침해를 받을수도 있다. 세월의 빛이 바래짐에 따라 이런 마음의 상처나 알륵을 기억의 쪽대문에서 끄집어내여 망각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것이 바람직할것 같다. 몇년전에 이사짐을 싸면서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다가 소학교 일학년부터 대학까지 쭉 써오던 일기책을 끄집어내게 되였다. 이것저것 펼쳐보노라니 문득 마치도 이미 팽개쳐버렸던 낡은 장부를 다시 들춰보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가 내 마음에 어떤 빚을 졌던가,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가, 누가 어떤 실수를 했던가, 누가 어떤 망신을 했던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헐뜯었던가,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해쳤던가...이십년, 삼십년을 두고 전혀 기억에 잊혀졌던 일들이 남의 비밀을 훔쳐본듯이 새삼스럽게 마음의 빈자리에 내려앉았다. 공연히 마음이 불쾌하고 번거로워졌다. 제발로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오물구덩이에 뛰여든것 같은 그런 기분이였다. 서로 만나면 반갑고 형제처럼 따뜻한 정을 주고받는 동창들과 친구들을 두고 기어이 내가 허물을 찾고 있는것만 같았다. 내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야 어찌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물론 일기라는것이 빚문서처럼 어느때든 진 빚을 받아내기 위해 기록하는것이 아니고 또 그때 그때 있었던 일을 적으면서 자기의 마음자세를 바로잡는 작업을 하는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세월의 쪽배에 실려 기억속을 멀리 떠나가버렸던 일들을 먼 후날 다시 새삼스럽게 기억의 우물속에서 떠올릴수 있다는것만으로도 마음이 석연치가 못했다. 꺼꾸로 되는 이야기지만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사람이 먼 후날 다시 고향을 찾았을때 모진 생활고에 찌든 고향친구들과 생기없이 시들어가는 고향모습을 보고는 그냥 마음속에 아름다운 고향모습을 간직하기보다 못했다고 아프고 쓸쓸한 심정을 토파할때 추억도 역시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필요할뿐이다. 바로 그 추억속에 내 마음을 쓸쓸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 모든 일들을 망각하려는 추구가 있는것이다. 소학교시절, 중학교시절, 대학교시절...이미 오늘과 아득히 멀어진 지난시절의 추억을 더듬을때 우리는 그냥 어떤 그리움과 아름다움과 애틋한 정을 담아올린다. 그만큼 인간은 자기와 멀어진 일과 인간에 대해서는 충분히 너그러움과 관용과 용서로 마음의 여유와 인간애를 되찾을수 있는것이다. 산 사람이 죽은 자의 덕성을 기리는것은 산 사람의 인격론리로 자리매김하고있다. 인제 그런 인격론리를 산 사람사이에서 펼쳐야 한다. 서로를 믿어주고 서로를 사랑해주고 서로를 너그럽게 관용하는 인간애를 키워가야 한다. 지구촌의 인구가 몇십억은 되는데 내가 알고지내는 사람은 요만큼밖에 안된다는 안타까움에 그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인정속에서나마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찾는것이 자기를 위해서도 바람직할것이다. 잔치집에 가서 기뻐해주고 제사집에 가서 슬퍼해주려 해도 나와의 인연이 없으면 문밖이다. 산속의 고독보다는 무리속의 고독이 더 큰 고독이다. <<함께 하는 세상>>에 서로가 아픔을 나누고 기쁨을 함께 즐기려면 열린 정신공간을 마련하고 투명하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여러권의 일기책을 몽땅 처분해버린것은 나의 극단적인 행위 내지 순간적인 충동일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아무튼 나는 그때로부터 어떤 무거운 짐을 부리운듯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무위의 경지에서 모든 영욕을 버리려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하고 참된 인생수련에 고심할수 있었다. 득달이 아니라 고심이다. 인생을 마감하면서도 득달은 못하겠지만 고심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유족하다. 사람은 그래도 잊으며 살아야 한다. 마음에 맺혔던것, 타인에게 가졌던 한을 세월의 빛바램속에서 기억의 저 뒤안길에 던져버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인간애를 키워갈때 망각의 아름다움을 만끾하게 될것이다. 실수가 생겼을때, 오해가 생겼을때, 알륵이 생겼을때 망각을 위한 악수를 나누라.
32    동물의 성으로 본 인간의 본성 댓글:  조회:1947  추천:0  2009-05-16
         동물의 성생활에 대해 관찰한 연구결과를 보면 령장목의 으뜸으로 치는 인간의 본래의 모습-동물적인 인간의 본성도 엿볼수 있더라. 그중에도 인간과 같은 영장목에 속하는 성성이과에서 고릴라가 가장 인간과 닮아있다고 하는데 그것들의 가족구성과 성의 추구를 보면 저것이 인간의 태초의 모습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고릴라사회는 철저하게 <<일부다처>>의 가족으로 구성되였는데 <<가장>>은 성에서조차 절대적인 지배권과 소유권을 가진다고 한다. 다 성장한 가족성원들은 <<가장>>의 성행위를 보면서 자위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금번에 외면당했던 암컷은 다음번에는 <<가장>>의 사랑을 받을수 있으나 수컷은 완전히 성의 소외자가 되여 자위행위로 애타는 가슴을 달래고 마침내는 독립생활에 나선다고 한다. 가족에서 당한 성억제때문인듯 독립생활에 나서는 첫 행위가 짝을 얻는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릴라사회에서 중매결혼이란 있을수 없는 일이고 직접 <<처녀>>와 련애하거나 랍치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짓이 다른 가족에서 <<엄마>>의 젖먹이를 빼앗아 <<엄마>>를 유인하는것이라고 한다. 젖먹이를 찾는데 가족성원들은 나서지 않고 <<엄마>>만이 하늘끝까지라도 찾아간다고 한다. 결국 젖먹이는 죽음을 당하고 <<엄마>>는 총각의 아내가 되고만다고 한다. 젖먹이를 죽이는것으로 <<엄마>>의 미련을 철저히 없애고 새로운 욕망만을 남게하는 극단적인 악의 수단이라 할것이다. 조물주가 생명을 만들때 생명보존의 법칙을 성의 결합으로 만든것이 잘못일것이다. 고릴라가 죽은 아기에 대해 단념하고 다시 성적결합으로 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명보존내지 종족번식도 성을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 조물주의 희롱이 아닐수 없다. 프로이드가 인간의 모든 행위를 성으로 풀이한것은 동물적인 인간의 본성으로 볼때 지극히 원색적인 파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문명이 인간들의 삶에 아름다운 옷을 입힌 오늘에도 의식주는 역시 삶의 기본적이고도 우선가는 욕구이다. 그러나 생명이 성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보면 인간 역시 고릴라처럼 성의 욕구가 가장 기본적이고 본원적인 욕구일수밖에 없다. 죽음의 동굴속에서 두 남녀가 재생의 등불이 꺼져버린 상황에서조차 성의 희열을 만끽하였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지만 다만 오늘에 와서 성이 더는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삶의 윤활제와 같은 역할도 하기때문에 그것에 본능적인 행위자체보다는 더 심각한 사회적인 인식적의미가 매겨졌을뿐이다.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성악이니 성선이니 하고 시야비야하는것은 어찌보면 순소비적인 입씨름에 지나지않을것이다. 관념적인 립장에서 자기의 정당성을 립증하려는 목적만으로 이런 시비를 한다면 그냥 동물의 본성을 관찰하는것만으로도 결론을 얻을수 있을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비가 사회적인 화제로 떠오를수 있는것은 인간은 오랜 세월을 진화해오면서 이미 동물의 세계를 떠나서 그들을 정복하고 주재하는 주인으로 군림하여 광활한 지구마저 하나의 작은 촌락으로 전락시킨 총명과 문명때문이다. 뇌의 고도로 되는 발달은 상품포장처럼 인간을 극히 위선적이게 하였다. 그로하여 인간은 동물의 사회보다 더 교활하여 혹은 동물보다 더 잔인하게 동류상잔하고 혹은 더 지혜롭게 질서를 잡아나간다. 강간, 살인, 폭력은 약육강식의 동물의 본성이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형태일것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직행로에서 급회전하여 사냥물을 찾는 택시나 십자거리에서 신호등을 무시하고 종횡무진하는 차들을 보고는 미개인취급을 하며 욕설이지만 급한 일로 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도리여 감사한 마음이다. 인간의 사치한 리기심이다. 기차역같은 공공장소에서 정탐처럼 기둥뒤에 숨었다가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던지는 사람을 죄인 잡듯 덜미잡아 벌금을 안기는 관리일군을 교활하다거나 치사하다고 욕하는 사람은 많지만 너나가 공공위생을 지키면 그들도 <<하강(下崗)>>을 면치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동물적인 본성을 인간성으로 순화시키는 장치가 바로 도덕과 법과 질서이다. 인간의 상호관계가 언제나 욕망충족에 지배된다면 그것은 동물성에 다름아니다. 인간 특유의 체면과 도덕적구실과 법에 의한 질서확립은 인간이 평화를 찾기위한 수단이고 역시 자아보존을 위해서도 요청되는 장치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단지 류혈싸움만이 아니라 한치의 혀로도 타인을 죽음에로 몰아갈수 있기때문이다. 강간, 살인, 폭력의 피해가 타인의 일로만 생각될수 있겠는가. 때문에 법과 도덕과 질서는 인간 일반에 대한 약속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 관념도덕대로만 살수 없고 법의 질서조차 그냥 변할수밖에 없는것은 그것이 결코 확실한 가치기준이 아니라 다만 불특정인간들이 지켜야 할 게임법칙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이른바 객관적이고 시대적인 집단의지로 어떤 가치를 강요한다는것은 다만 피해의식 내지 강박관념만을 절감시킬뿐이다. 축구에서의 황패, 홍패벌칙은 대항적경기에서 폭력적피해를 방지하고 게임을 게임으로 끝내기 위해서 필요한것이다. 그저 그럴뿐이다. 그런 게임법칙이 없으면 도저히 게임을 할수가 없고 폭력적피해를 내가 입을수 있다는 판단에서 선수들은 그 게임법칙을 합리하게 받아들이는것이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기성틀을 마스기 위하여 새로운 틀을 만드는것이다. 법, 도덕, 질서의 변화 즉 기성틀 마스기는 그 기성적인것의 시대적 한계성에 기인하는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런 기성적인 틀이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지켜지고 그리하여 그 기성적인것들의 고루함이 사회적인 보편화제로 되였을때 틀마스기는 불가피한것이고 사회비판층의 승리는 비로소 새로운 틀을 구축할수 있는것이다. 한밤중에 교통경찰이 자리를 비운때에도 신호등에 따라 움직이는 차들이 많아지고있는것을 보면서 교통규칙위반으로 내는 벌금도 적어졌겠다고 생각했다. 백두산의 쓰레기줏기를 보면서 오래지않아 공공장소에 포장이 고운 쓰레기통만 놓으면 벌금을 노리는 관리원은 <<하강>>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긴 서울에 가면 벌써 공공버스에 차장이 없어도 승차권을 속여먹는 사람은 볼수 없는것이 우리의 어두운 삶의 현장을 반성하게 하는 현실이다. 오늘날에 와서 <<목각남편>>을 모시면서도 재가하지 못하는 오청화는 없고 남녀칠세부동석을 도덕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없다. 기성의 틀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틀이 자리잡는 과정은 인간이 자아완성과 인간성해방을 실천해가는 과정이다.
31    가난뱅이와 게으름뱅이 댓글:  조회:1802  추천:0  2009-05-16
    퍽 몇해전에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글이라고 생각되는데 오늘 새삽스럽게도 문득 기억의 쪽문을 열고 나오는 차에 한번쯤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보지 않을수 없게 되는 것이다.동냥으로 살아가는 한 비렁뱅이가 어느 오막살이같은 집에 동냥주머니를 들이대고보니 그 집에서는 입에 거미줄이 칠 지경으로 가난을 밥먹듯하고 있더란다. 배가죽이 뒤잔등에 가 붙도록 주린 창자를 붙안고 앉아있는 그들을 보노라니 너무도 민망하여 비렁뱅이는 돌아서 나오더니 밖에 놓아두었던 쌀자루를 들고 다시 들어가 그들한테 주면서 이걸로 얼마간 주린 배를 말리라고 했단다. 비렁뱅이가 가난뱅이를 구제했다는 아이러니이다. 인생을 좀더 적극적이고 전진적으로 꾸며야 한다고 생각하면 비렁뱅이 삶도 그리 신통치는 않겠으나 재난이나 죽음의 현장에서조차 아무런 방어도 대응반응도 없는 게으른 인생이 가난을 몰아온다고 확인하면 그만큼한 게으름뱅이도 다시 없을것이다. 혹은 초인간적인 재난이 한 인생을 가난의 구렁텅이에 밀어붙이는 비극도 있을수 있으나 죽음의 현장에서 부활의 의미를 적어가는 그런 비극적 인간은 삶의 자세에서는 어디까지나 강자이지 가난뱅이가 아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정신이 뿌리뽑힌 사람이야말로 <<참>> 가난뱅이이다. 게으름이 낳은 가난이야말로 인생몰락의 종착역이다. 그런 인생은 역시 생명조립에 구제불능의 문제가 있는것이다. 친구의 누님은 순대따위 음식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데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음식물을 장만해서는 밀차에 싣고 시장에 나갔다는 저녁이 이슥해서야 귀가한다. 그러면서도 또 가무를 도맡아 해야 한다. 그런데 매형되는 사람은 아주 젊은 늙은이가 돼버렸다. 매일매일을 마실을 다니거나 늙은이들의 장기판에 끼여붙어 옥신각신 얼굴을 붉히기도 하면서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줄 모른다. 정말 가난할수록 기와집 짓는다더니 그만큼 셈평이 좋은 인생도 있을가 싶다. 그러나 마음에 톱질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마비된 인생은 산 송장임에 다름아니라고 생각하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안해가 그에게 찾아준 현주소는 하나의 무덤이라고 할수밖에 없을것이다. 무덤속에서 살아움직이는 송장, 가난의 때를 벗고 인생부활의 의미가 돋을 그러한 가능성을 안해가 열어놓고있음에도 그 자신은 그 가능성마저 열린채로 방치해두고 다만 어제, 오늘, 내일이 무의미한 반복만을 거듭하는 마비된 인생, 그것은 인생자체가 랑비된 생명의 찌꺼기임에 다름아니다. 극적인것은 그 친구한테 또 쌍둥이 누이동생들이 있는데 역시 음식물장사를 하고있는것이다. 그런데 보배로운것은 그들 쌍둥이는 두집 부부가 모두 꼭 맞물린 치륜처럼 일손이 척척 맞아돌아가는것이다. 삭막한 세속의 풍진속에서도 삶의 자세를 흐트림없이 적극적인 대응반응을 보이면서 생의 강한 실천능력을 키워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과 함께 게으른놈의 가난은 죽어야 끝난다는 명언을 떠올리게 된다. 지난번 추석에 아버지산소를 찾아 도문으로 갔다가 기차역 앞거리에서 구두닦기를 하는 조선족처녀를 보고 크게 감동했었다. 체면의식이 남달리 발달한 우리 민족은 빈부귀천에 너무도 과잉반응을 나타낸다. 비민중적이고 비속세적인 고루한 량반의식이 우리의 의식의 주근이 되여버려 굶어도 체면 하나만은 버리지 못하는데 큰 길가에 앉아 체면무릅쓰고 길가는 나그네의 구두를 열심히 닦아주고있는 처녀, 그냥 부드럽고 조용하고 깨끗한것이 우리 조선족녀성의 참모습이라면 그 처녀의 처신을 어떻다 해야 할가. 민족성에 대한 반역? 량반의식에 대한 반발? 시대적 변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의식의 개혁? 아무튼 인생의 아픔을 갈무리하면서 자신의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열심히 인생을 실천해가는 모습은 루추함이 아니라 그냥 대견스럽기만하다. 물론 한 인생에는 현실의 삶과 리상적인 삶이 언제나 쌍둥이처럼 동반한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흔히 실천능력보다 훨씬 크다. 사람들이 쉽게 순금보다 도금에 마음을 빼앗기는것도 바로 지나친 욕심의 작간때문이다. 현실의 삶을 외면한 리상적인 삶이란 그 자체가 벌써 인생의 무덤이다. 그만큼 현실의 삶을 외면하고 인생의 실천능력을 초월한 리상이나 꿈의 종말은 그 사람의 삶의 자세에 따라서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할수도 있고 인생부활을 상징할수도 있는것이다. 우리의 고전에 <<흥부전>>이 있다. 전통적인 문학해석으로는 악덕의 상징인물인 놀부와 선량함의 상징인물인 흥부의 형상을 통하여 죄는 지은데로 가고 덕은 쌓은데로 간다는 인과보응설을 말한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는 이른바 비천한 일은 하기싫어하면서 토끼가 부딪쳐죽은 나무그루를 지키고앉은 인간들이 많은데 어찌보면 제비다리를 비끄러매주고 벼락부자가 된 흥부를 추종하는 의식이 모름지기 자리매김한것 같다. 언제는 누군가가 돈 많은 한국인을 사경에서 구해주고 보은을 받았다는 말에 왜 나한테는 그런 행운이 내리지 않는가고 하면서 무심한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그냥 우스개 소리를 한다고 받아줄수 없을정도로 너무나 진지하고 안타까운 모습이였다. 또 누구는 2원짜리 유상권 한장으로 승용차를 소득했다는 말에 욕심이 팽창하여 도박심리를 발동했다가 본전만 몽땅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보물을 줏지나 않을가 은근히 가슴을 달구는 못난 인간도 없지 않을것이다. 지나치게 팽창한 욕심이나 현실의 삶을 외면한 <<리상적인 삶>>은 그대로 게으름을 낳는것이고 그 게으름이 가난을 몰아온다. 그런 요행심리는 삶을 보다 전진적이고 실천능력에 맞게 조립하여 현실에 대응하려는 마음을 죽여버리기때문이다. 우리 말에 <<게으른 년이 삼가래 세고 게으른 놈이 밭고랑 센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재난이나 초인간적인 힘의 희롱도 아니고 그냥 달을 따려고 떼질쓰는 천진한 어린이의 짓거리같은 인생자세가 문제라면 그런 가난의 뿌리는 바로 정신적독방이 없는 그것이고 그런 가난뱅이의 별명은 바로 게으름뱅이이다.
30    아이한테는 부모가 거울이다 댓글:  조회:2070  추천:0  2009-05-16
   우리는 흔히 어린이들을 미래의 주인이요, 나라의 동량이라고 한다. 사실 그들의 부모가 된 우리도 부모의 그런 관심 내지 관념에 약속하면서 자랐다. 제자식 룡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천하 부모의 사랑심이겠지만 꼭 그렇게 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어느정도 벌써 사랑을 넘어선 리기적인 강박관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된 우리가 누구나 룡이 되여 자식을 룡으로 키우려 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런 관념에 따르면 룡이 못된 우리와 같은 부모는 자식을 교육할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그예 자식이 해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부모로서는 염치없는 과대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성공하지 못한 부모는 과연 자식을 교육할 자격이 없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린이를 교육하면서 교육관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 부모들은 흔히 어린이들의 장래를 설계하면서 흔히는 자기가 이루지 못하였던 바를 성공시켜려 하는데 아예 어린이의 특장, 기질, 기호 내지 지력수준을 외면한대로 그냥 부모들의 설계도에 따라 자식이 성장하기만을 바라고 또 사회적 병페로도 되는바와같이 지식제일, 점수제일을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또는 유일한 내용으로 일괄해버린다. 그 결과는 오히려 어린이들의 건실한 성장을 이끌지 못하고 나중에 부모 자신의 지식수준의 제한으로 자식교육에 실패감을 느끼며 자기 무안에 될대로 되라고 두손 들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은 부모가 자식에 대한 교육은 결코 공부가 전부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것은 자식을 훌륭한 사회성원으로 성장시키는 하나의 수단임에 다름아니다. 우리 부모들한테는 사회나 교육기관에 앞서 더 많은 범위에서 자식에 대한 교육을 틀어쥐여야 하며 또 어쩌면 그것이 어린이가 정상적인 사회인간으로 성장하는데는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연인으로 태여나서 사회, 문화인으로 성장한다. 갓 태여난 영아는 한 생명체에 불과하나 부모슬하에서 점차 사회, 문화인으로 전변된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이 그 자체가 벌써 부모, 다시말하면 가정교육이 어린이의 육체적 성장뿐만아니라 정신적 성장에서 가지는 중요성 내지 절대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건강한 정신세계는 직접 어린이의 보기가 되는 것이고 성인사회의 한 축소물이자 어린이가 몸을 담고 생활하는 작은 사회인 가정의 투명도는 그대로 한 어린이의 미래를 결정할수조차 있는 것이다. 가정교육의 관건은 어린이들의 정신건강을 틀어쥐는 것이다. 과학적이고 빈틈없는 정신건강에 대한 교육은 육체건강을 비롯한 모든 교육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이는 말하기는 쉽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 만큼은 어렵고 부모 자신의 꾸준한 노력과 자아수양을 요청하는것이다. 어린이가 태여나면서부터 시종 보기로 되여온 부모의 언행은 모방을 통해 그대로 어린이한테 교육적 효력을 발생한다. 말하자면 자연인으로 태여나 어른들을 <<흉내>>내면서 사회,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그 애의 심령세계에 아직은 파란 잔디뿐인데 인제 그 잔디밭을 파헤치고 무엇이 자라날수 있을가 하는데는 어쩔수 없이 그 애의 흉내의 대상물이 되여버린 우리 어른들의 형상이 거울이 된다는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애 앞에서 일거일동을 애써 아름답게 꾸미려고 모지름을 쓴다. 마치도 흰종이에는 어떤 색갈이나 다 옮을수 있듯이 고운 말, 미운 말, 옳은 행동, 그른 행동이 죄다 그애한테 <<전염>>될수 있기때문이다. 특히 소학을 지나 중학에 진입하면 어린이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성이 뚜렷해지면서 호기심에 찬 질문도 많아지고 성인사회에 대한 불신임도 훨씬 커지는듯 싶다. 그러기에 부모들도 자아수양에 힘쓰면서 매사를 얼렁뚱땅 어른행세를 하지 말고 충분한 리유를 갖고 어린이가 정신적으로 쾌히 접수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 하얀 백지같이 깨끗한 동심에 우리 어른들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는가 아니면 성인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그대로 락서하는가 하는것이 성장하는 어린이들한테는 거의 운명적인것이다. 그만큼 부모는 어린이 교육에서 자기의 언행이 보기가 됨을 늘 자각해야 한다. 사실 성인사회에서도 타인에 대한 설복력은 그 설복자의 인격에 정비례함은 투명한 리치이다. 하물며 바야흐로 성인으로 성장하는 어린이들이 성인을 거울로 자기를 비추어보려는것은 거의 본능적일 수 있다. 어느땐가는 소학교 학생이 깨여진 창문을 보고 그냥 깨여진 세상을 보았다는 시를 썼다는 어른들의 감탄을 듣고 도리여 마음속에 이 세상 제일 깨끗하고 파아란 동심마저 어른들의 락서로 하여 어지러워 지고 마구 찢겨지는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과연 이 인간세상이 어느만큼은 그냥 타락의 낭떠러지를 굴러내릴런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도교원들의 성인화교육의 결과이든 이 사회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아픔과 어두움과 비리와 부정과 폭력과 물욕을 절감켜했든 아무튼 깨여진 창문을 보고 깨여진 세상을 보았다는 너무도 기발한 착상에 어른들은 한번 깜짝 놀라서 저들의 성인사회나 저들이 어린이들한테 마련해주고 있는 성장환경을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문학의 힘이 정신력에 있을진대 나어린 학생이 그토록 사회의 아픔내지 허황한 세상을 보았다는것은 어쩐지 우리 아동문학이 너무나 성인화교육을 하고있었지 않았나 하는 근심이 어지려운 사회현실 다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음으로 자식의 공부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교육체계가 단일한 응시교육으로부터 다양한 자질교육으로 바뀌움에 따라 부모들의 교육작용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질교육은 어린이의 건강성장의 모든 인소를 내함하기때문에 다만 사회와 학교의 직능에 의해서만은 완성할 수 없기때문이다. 어찌보면 법과 질서로 약속하는 사회와 지식을 전수하는 학교보다는 어린이의 일상을 책임진 가정에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전통적인 교육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것을 가장 높은 목표로 삼고있지만 사회의 진보는 이미 우리더러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실제문제를 풀이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능형 인재를 배양하는데 있다는것을 내다보게 한다. 이 관점으로 다시 사회를 조명해보면 확실히 중국의 전통적교육은 기나긴 봉건사회로부터 줄곧 책을 중시하고 실제를 홀시하며 주입하는것을 중시하고 계발하는것을 홀시하며 기억하는것 또는 외우는것을 중시하고 사고하는것을 홀시하며 지식을 중시하고 능력을 홀시하는 교수관념과 체계를 키워왔다. 그러나 또 지금 아무리 교육체계가 자질교육으로 전변되였다 하더라도 학교의 주목적은 의연히 어린이들의 지력을 개발하고 지식을 키워주는것임은 틀림없다. 년령단에 따라 발굴되여야 할 지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선인이 연구하여 체계화한 지식을 배워내지 못하면 인간선택에 앞서 벌써 시대에 도태되고말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학교교육은 역시 공부를 기본으로 하게 된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어린이의 사유공간을 넓혀주고 정신건강을 보장해주는것은 많이는 부모를 핵으로 하는 가정에서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것이다. 이는 부모도 간접적으로 자질교육의 일익을 맡고있음을 말한다. 간접적이라고 함은 사회직능적 의미에서 매겨지는것이지 사실은 어린이를 놓고 대상적으로 결론을 내리면 지극히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책임을 지고있는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의 피줄인 자식에 대해 그 누구보다 보호의식이 강렬한만큼은 자식의 건강한 성장에 미룰수 없는 책임감을 가져야 할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본성적인 부모사랑이거나 맹목적인 과대욕망만으로는 자식교육을 훌륭하게 할수 없다. 물론 백사람이 백가지 성미라고 시대가 다르고 대상이 구체적인만큼 만병통치의 약이 없듯이 꼭 자식교양에 두루 맞춰댈수 있는 교육방법 내지 교육경험이란 있을수 없다. 다만 부모의 지극한 책임감과 꾸준한 자아수양에 의해서만 문제를 옳게 진맥하고 과학적으로 자식을 교육할수 있을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보기이며 거울이다. 깨여진 창문을 보고 깨여진 세상을 보았다는 풍부한 상상력에 앞서 어린이들은 부모로부터 벌써 사회의 한 축도를 보게 되고 삶의 자세를 정립하고 정신적인 자리매김을 하게 되는것이다.
29    입맛이 변했습니다 댓글:  조회:1925  추천:0  2009-05-16
어느 유치원에서 겨우내 움에 저장해 두고 어린이들에게 먹이던 감자가 진달래 피는 새봄이 찾아와 싹이 움트도록 무드기 남게 되였다. 이때쯤이면 음지에서 시들고 속이 비여가던 가을 저장물들은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봄남새들에 밀리워 쓰레기장에 버려지는것이 건강원리가 음식문화에 자리매김함에 따라 거의 상식화되고 있다. 그런 건강원리를 교육자가 모를리는 없겠지만 이 유치원에서는 세간살이를 어찌나 물이 못나게 하는지, 아니 저장이 계산적이 못되였으니 그게 아니라 아까워 버릴수 없다거나 랑비는 죄악이라는 순수한 절약원칙에 립각하여 생각을 굴리던 끝에 어린이들한테 감자떡을 해 먹이기로 하였다. 귀하면 보배라고 어쩌다 해 먹이는것이니 생활개선인셈이다. 하루종일 팔이 시큰해나도록 감자를 씻고 깎고 썰고 갈고 하느라 허기진 대가로 어른들이 먼저 지져먹는것도 당연한 일이다. 겨가루가 섞인 옥수수떡이래도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족했던 어른들은 크게 입맛이 틀리는 것 없이 감자떡을 맛갈스럽게 먹는다. 그런데 여기에 유치원어린들이 등장하였다. 한 교양원이 학부모가 오지 않아 그냥 남아있는 두 어린이를 데려온것이였다. 래일의 감자떡소비자들한테서 먼저 간식효과를 알아보자는 심사였다. 이런 떡을 처음 보는 애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대롱대롱 매달렸고 입에는 군침이 감돌았다. 그애들에게 떡을 쥐여준 어른들은 결론이 궁금하였다. 마치도 품평가들앞에서 자기의 솜씨를 평가받는 료리사의 조마조마한 심정이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처음 먹어보는것이니 꼭 맛있어 해야 한다는 강박결론을 앞세우고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말았다. 두 아이는 약속이나 한듯이 떡을 도로 놓으면서 안먹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유혹하던 그곳을 떠나면서 저희들끼리 주고받는것이였다. <<감자떡 맛이 없지.>> <<응. 난 별것인가 했어.>> 그애들의 수작을 살피고있던 교양원들은 한동안 억이 막혀 서로를 쳐다보다가 지뢰가 터진듯 일시에 폭소를 터뜨리고말았다. <<애들두.>> 어쩔수 없다는듯 그저 이 한마디뿐이였다. 그들이 하루종일 신고스레 만든 감자떡이 1차, 2차, 3차의 계획을 작성하기도전에 벌써 두 어린이한테 여지없이 소박당하고만것이다. 그 이튼날, 유치원에서는 과단성있게 원래의 생각대로 감자떡을 빚어서 어린이들한테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호기심에 찬 눈길로 손에 쥔 감자떡을 이리저리 번져볼뿐이였다. 교양원이 감자떡이 참 맛있다며 <<시범적>>으로 한입 뚝 떼자 아이들도 반사적으로 한입 뚝 떼물었다. 그런데 한 어린이가 본능적으로 퉤 하고 뱉어버리자 아이들은 또 반사적으로 잇따라 뱉어버리였다. 그 이상 더는 교양원의 <<상품광고>>가 효력을 내지 못했다. 결국엔 교양원이랑 직원들이 <<생활개선>>을 하고말았다. 물론 2차, 3차의 계획은 포기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애들의 아버지벌이 되는 나한테도 이와 근사하게 아이러니한 일화가 있다.        1980년의 여름방학에 집에 휴가차로 왔을 때였다. 어머님은 1년사이에 내가 몸이 반쪽이 되였다면서 하루는 보신시킨다고 암탉 한마리를 사다가 곰을 하셨다. 그리고는 다른 식구들이 돌아오기전에 빨리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까지 하면 아홉식솔인 우리집은 생활이 째지게 가난했다. 사실 대학공부를 하고있는 내가 제일 부담거리 소비자였다. 그런 형편에서도 어머님은 큰맘 먹고 며칠분의 생활비를 털어 닭을 사신것이였다. 그런테 그날따라 시교의 농촌에 사는 형수벌되는 아주머니가 <<그전에 내가 좋아하던 옥수수떡>>을 그릇에 이고 5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나를 보러왔다. 그때까지만도 농촌에서 아직 호도거리책임제를 하지 않은 때라 논이 없이 밭만 다루는 곳에서는 여전히 옥수수떡이라도 배불리만 먹을수 있다면 괜찮은셈이였다. 그러니깐 옥수수떡을 가져온것도 최대의 성의가 아닐수 없었다. 생활고를 겪을대로 겪으신 어머님이라 그 마음을 헤아리시였다. 그때 우리집 생활형편도 말이 아니였지만 그냥 가문의 일에 총관이 되다싶이 한 어머님은 그 조카들의 간장돈마저 꼭꼭 챙겨주셨다. 어머님은 그 아주머니가 면구해 할가봐 얼른 닭곰을 치우시고 반갑게 옥수수떡그릇을 받아놓으면서 말씀하셨다. <<이거, 옥수수떡이 참 오래간만이구만.>> 그 아주머니는 좀 게면쩍어하며 말했다. <<경철이삼촌이 그전에 옥수수떡을 하도 반가와하길래.>> 나도 얼른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능청을 부렸다. <<그땐 주먹 두개만큼한것도 서너개씩은 재꼈지요. 인젠 1년나마 못먹어봤습니다.>> 그날 나는 옥수수떡 두개를 먹었는데 처음 한개는 그래도 추억이 고명이 되여 <<맛갈스레>> 먹었지만 두개째는 실토정하면 아주머니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하겠기에 울며겨자먹기로 삼켰다. 입맛이 변했다. 겨가 섞인 옥수수가루를 빚어만든 옥수수떡이나마 배불리 먹으면 감사했던 세월에 철없이 식욕만 잔뜩 늘어난 나는 거짓없이 옥수수떡을 좋아했고 한번에 소똥만큼은 큰것을 서너개는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의 식생활에서 그것보다 더 맛이 있는 음식도 없었다. 말리운 그구마쪼각을 삶아먹는것이 어찌나 싫던지. 그것에 비하면 그래도 옥수수가루를 반죽하여 소똥처럼 둥글넓적하게 손바닥에 구을렸다가 가마굽에 찰싹 붙여 노랗게 굽거나 쉬웠다가 묵은밥을 넣어 버무려서 시루에 찌면 노란것이 그런대로 보면 군침이 돌고 먹어도 별미였다. 그것이 그때는 이밥이 지금 우리의 주식인것 못지 않게 매일 식탁에 오를수 있는 주식이였다. 그나마 배부리 많이 먹을수만 있으면 감사한 마음이였다. 그러니깐 사실은 옥수수떡을 맛있게 먹을수 있은것은 굶는것보다는 낫다는 심리작용이 고명이 되였던것이다. 아이스크림은 고사하고 창자마저 변변히 달랠수 없었던 그때의 생활난이 굳혀준 입맛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형수벌 되는 아주머니가 이밥 자시면서 이쿠스탠(憶苦思甛)하려고 나한테 옥수수떡을 가져온것은 아니였다. 그런데 1년나마 수도 북경에서 이밥이나 새하얀 우질밀가루로 찐 만두를 먹어온 내가 그냥 입맛이 변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언제가 연변대학에서 학생들이 옥수수떡을 먹이는데 항의하여 단식까지 하였다. 음식생활에서 결국 나 한사람만 시치한 수도생활에 물젖어 입맛이 변한것이 아니였다. 사회의 음식문화에 질적 변화가 생겼던것이다. 우리가 어렸을때의 음식생활 내지 음식문화 수준의 한 눈금이였던 옥수수떡이 새하얀 이밥이나 만두앞에서 무색해지고 력사의 전람관에 진렬되게 된것은 우리 사회의 성장과 생활의 향상을 상징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에 와서 우리 아이들은 더구나 입맛이 변했다. 아니, 그애들은 나서부터 벌써 그런 맛을 몰랐고 생활고란걸 몰랐다. 가난의 상징이였던 이를 아이들한테 설명해주면 그애들은 그저 신기한 눈길이고 어쩌면 웃세대를 금방 동물에서 진화한것이나 아닌가고 생각할수도 있다. 가난과 발전의 쓰고 단 맛을 겪어본 부모들이라 그저 자식을 꽃과 같이 키우려고 모지름이다. 인제 우리에게는 자식을 고생없이 행복하게 키울 환경이 마련되였다. 아니, 굶주림에 모대기면서 우리의 두 손으로 열고말았다. 유치원을 나서면 아이스크림, 집에 돌아오면 사탕, 과자, 과일들을 입에 달고있는 아이들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밥 한끼 변변히 먹어보지 못하고 1년 한두번쯤 생활개선으로만 먹을수 있었던 생활체험이 낳은 <<감자떡에 대한 애착>>과 가난이 굳혀준 입맛을 그애들이 <<세습>>할수 있겠는가. 지금도 어떤 음식점에서는 옥수수떡을 음식상에 올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새물이로다>>하는 격으로 옥수수떡은 과연 옥수수떡이로되 거기에는 많은 재료들이 가첨되고 겉에는 또 기름이 찰찰 넘치게 발리워진 별미요, 그것도 역시 주식은 아니고 구미바꿈일뿐이다. 아이들한테 <<우리때는...>>하는 <<추억식교양>>이 별로 나쁠건 없다. 인생이 그렇게 행복하기만 한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하는건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생활에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해도 너무 무리가 아닐수 없다. 인류의 력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력사이고 열심히 행복을 만들어가는 력사이다. 우리 세대한테는 감자떡이 옥수수떡에 비해 별맛이였다면 아이들한테는 이밥보다 별맛인 음식이 있어야 한다. 어제의 발전이 오늘의 기점이고 오늘의 발전이 래일의 기점인것이 과연 인류발전의 성장과정이다. 옥수수떡을 먹던 어제에 이밥이 음식문화의 향상수준이였다면 오늘에 그것은 음식문화의 기점일따름이다. 음식문화가 서로 다른 시대의 동일한 기점이라는 시점에서 옥수수떡과 이밥은 동질성을 갖는다. 그러니깐 옥수수떡은 결코 그 시대 사람들의 검박한 정신의 상징이기에 앞서 벌써 이밥이 오늘의 음식문화의 기점인과 같은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의 우리가 옥수수떡을 먹던 신세를 고치려고 강한 현실극복의지로 끈질기게 노력했다면 오늘은 이밥만 먹는 신세를 고치려고 세계적 인식을 키워가야 할것이 아닌가. 서로 다른 시대는 서로 다른 리상이 있기마련이고 어제의 리상은 곧 오늘의 현실이다. 하물며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지구촌의 다른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가고있는데 기어이 조상들이 걸어온 길만 뒤돌아본다면 우리는 래일에 떳떳한 조상으로 부끄럼없이 나설수 없을것이다. 남들이 후대들에게 마련해주는 기점과 꼭 같은 기점을 우리 후대들에게도 마련해주어야 자신의 인생에 긍정적인 종지부를 찍을수 있을것이다. 전통은 성장을 위해서만 영원히 보귀한것이다. 물론 어제 창조한 전통이 없다면 오늘의 성장이 있을수 없다. 그러나 전통을 다만 감상할수 있는 <<골동품>>이나 허물수 없는 <<틀>>로만 간주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을뿐더러 지어는 오늘의 성장을 가로막는 파수군이 되여버릴수도 있을것이다. 우공이 산을 옮긴 끈질긴 노력정신은 과연 게으른자를 계몽하고 창업자를 고무할것이지만 그러나 그 누가 만약 산너머에 벌을 두고 우직스레 그 산을 파옮기려 한다면 그보다 더 아둔한 일이 또 없을것이다. 인류의 회망은 언제나 저 앞에 있는것이다.
28    갑속에 든 사람과 틀 허물기 댓글:  조회:1838  추천:0  2009-05-16
어떤 물체이든지 무릇 모이면 서로를 제약하는 원칙이나 어떤 질서가 형성되게 된다. 일단 그 질서가 파괴되면 천지개벽이 일어나거나 적어도 구조적인 변질이 있게 된다. 인간은 사회를 구축하고 여럿 또는 군체가 함께 그속에서 어울려 사는 이른바 군체동물이다. 군체동물로서의 인간은 어떤 질서로서 서로를 약속하고 서로의 피해에서 물러설수 있는것이다. 자연에로의 회귀, 개성해방과 무한한 자유에로의 갈망이 인간의 궁극적인 희망사항임에도 법과 도덕과 질서가 필요한것도 바로 인간은 군체동물로서 타인을 외면한채 그냥 내멋, 내 생각 그대로 살수는 없기때문이다. 나 하나의 생각이나 행위가 여러 사람과 리해관계를 달리하거나 지어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게 될 때 그는 결코 군체의 용서를 받을수 없으며 결국은 군체에 의하여 억제당하고말것이다. 홀로의 외로움보다 군체속에서의 고독이 인간 최대의 불행이다.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인간은 그만큼 무한한 욕심이 마음에 옴츠리고 있기에 선택없는 자유는 그만큼 벌써 방종이 앞서 가게 된다. 인간사회에는 타인을 위해서라는 공리주의에 앞서 벌써 서로가 서로의 피해에서 보호받기 위하여 어떤 약속력이 필요한것이다. 풀어말하면 나 자신이 타인의 욕심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벌써 법과 도덕과 질서따위가 요청된다는것이다. 그만큼 법이나 도덕이나 질서는 군체동물로서의 인간이 서로를 제약하고 경계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치이지 절대적인 가치기준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강압성을 띠는것이고 따라서 인정과 사랑과 천륜마저도 외면해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어떤 약속력의 지배를 받는다는것을 개념화하면 인간에게는 틀이란것이 있고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는 그 틀의 주조물일 때라야만 사회의 승인을 받을수 있다는것이다. 틀, 틀은 인간을 자연인으로부터 사회문화인으로 성장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며 인간군체가 평화공존하게 하는 제도적장치이다. 잔치집에 가서 축하의 웃음을 웃어주고 제사집에 가서 슬픈표정을 보여주는것이 선의적인 문화인의 <<틀>>이다. 주인석에서 따스함을 베풀고 손님석에서 겸손함을 나타내는것도 문화인격에 따르는 주객의 <<틀>>이다.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으면 인체미를 보여줄수 있지만 거리바닥에서 알몸을 드러내면 진화가 덜된 미개인간의 표상으로밖에 되지않는다. 이른바 목적의 정당성(?)을 위하여 악의수단도 가리지 않는다면 나중에 인간실패는 그 자신이 당하게 된다. 악의수단은 타인에 대한 피해를 전제로 하기에 틀에 의한 인간약속력의 판결을 받지않을수 없기때문이다. 그럼에도 틀이란것이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역전으로 인간을 속박하는 쇠고랑이 될수 있다. 인류는 틀의 약속으로 평화공존하지만 역시 틀에 대한 부단한 개진과 파괴속에서 성장하고 리상을 현실화한다. 흘러간 인류사회가 력사라는 틀속에 갇힐수밖에 없는것은 오늘을 살고있는 인간들이 새로운 틀을 설계해낸 까닭이다. 틀이란것이 어떤 가치판단기준이 아니라 인간이란 군체동물이 사회를 어울려 살아가는 약속력인만큼 인간들이 문화의 성장과 함께 어제의 리상이 현실화된 삶의 현장에서 새로운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틀을 설계내는것은 지극히 당연할수밖에 없다. 사회가 개방적으로 개체의 자유와 성장을 보장해주는 현시점에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거나 허례허식의 량반틀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력사를 재현시키는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기분일것이다. 조선족의 전통적인 집구조가 온돌에 이영이라고 해서 문명의 거리에 초가집을 앉힌다면 민속학의 의미가 매겨지지 않는한 우리는 학의 무리에 든 오리를 련상하게 될것이다. 축구규칙에서 문지기가 자기쪽 선수가 차넘겨주는 공을 받아쥐지 못한다고 새로이 틀을 만들었음에도 그 공을 받아쥐였다면 우리는 패너티킥이다 하고 환성을 지를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것이 틀이 있다. 그리고 부단히 그 틀을 깨뜨리고 또 다른 틀속에 갇힌다. 지진, 화산폭발, 홍수범람 등 자연현상도 결국은 틀의 용량을 초과한 결과로 폭발하는것이고 폭발후엔 또 다른 틀을 형성하는것이다. 인간사회도 부단히 틀을 허물고 또 다른 틀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행정이다. 그러나 틀의 변화 내지 변질은 사회발전법칙이나 인류의 발전적인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지 개미가 제방을 허물듯이 어떤 개체의 욕심팽창이나 어떤 집단의 배타적인 리익계산에 의한 파괴로 기인된다면 그 개체가 주소를 잡고있는 군체는 피해를 입게 되고 그 집단이 거래하는 사회는 벌써 퇴보 내지 멸망조차 미리 약속받게 될것이다. 삶의 현실적인 질서로 자리매김하고있는 틀의 약속을 지키면서도 문화성장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창조력으로 기성적인 틀을 허물고 새로운 <<리상적인 틀>>(신생사물은 언제나 리상적인 농도가 짙을수밖에 없다)을 구축하는 사람이야말로 창조적인 삶, 성장적인 삶,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수 있다. 이런 삶은 오직 법과 도덕과 질서 등 사회의 <<틀>>에 순응적으로 자기를 매워놓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접수하고 정신건강에 노력하여 마음의 부자가 되고 자신의 정신적독방을 화려하게 꾸며가는 사람에게만 있을수 있다. 너의 마음에 내가 있고 나의 마음에 네가 있는것, 다시말하면 자아와 타아가 협화음을 울릴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것이 인간의 가장 바람직하고 리상적인 요청이다.
27    엘리트정신 댓글:  조회:1877  추천:0  2009-05-16
요즘 우리 주변에서는 엘리트가 어쩌구저쩌구 의론이 많이 되고있다. 외래어에 낯설다보니 집에 와서 남몰래 외래어사전을 펼쳐보았다. 설명이 구구하나 아무튼 한마디로 사회에 선택된 인간이라는 뜻으로 전달되였다. 그러니깐 군체적인 의미보다는 한 개체로서의 자리매김이 더 뚜렷한 사람이라는것이다. 경쟁의식이 사회적으로 고조되고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절대적으로 동원되고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과연 <<엘리트론>>의 대두가 시대적인 요청인것 같다. 그만큼 엘리트를 대접하는것이 시대발전 내지 사회성장에 결정적인 수요로 나선다고 할수 있겠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이 여러가지로 제기되고있음을 그냥 외면할수 없다. 문제의 하나는 엘리트란 개념을 그 어떤 메달이나 향수특권으로 착각하고 있다는것이다. 물론 민중앞에 초연한 엘리트는 시대와 사회의 요청을 받고 선택된만큼 그 시대와 사회에서 충분한 보상을 받고 향수를 누릴수 있는것은 의심할바가 아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한테 효성함은 무모님이 자기를 낳아키우고 한 가정을 책임졌기때문인것처림 시대와 사회에 의해 선택된 엘리트는 그만큼 그 시대와 사회에 대해 벌써 책임과 의무가 앞서고있음을 가슴 무겁게 받아안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지혜롭고 총명한자가 악인이면 만사람이 해를 입을것이요, 선인이면 만사람이 덕을 받을것이다. 그만큼 시대와 사회는 엘리트에 의하여 력사적인 퇴보 내지 비극을 연출할수도 있고 획기적인 급성장 내지 기적을 창조할수도 있는것이다. 이것은 력사를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사람에게는 구구히 사례를 들것도 없이 납득이 가는 해석일것이다. 민중한테는 선택된 인간의 호소력이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유다의 배반으로 십자가에 못박혀죽을 때 그를 못박아죽이라고 고함친 사람들속에 그들로부터 소외될수가 없다거나 또는 양몰이군의 채찍질에 한덩어리로 몰려드는 양처럼 항거할수 없다는 맹목적인 순종의식에 지배된자가 얼마였던가! 전체 국민이 우상숭배에 리성을 자리내주었던 시기에 선택된 인간의 호소력이란, 그 호소 자체가 바로 국민의 선택이고 행동이고 운명이였지 않았던가! 인간은 누구나가 <<소아>>와 <<대아>>의 두가지를 가지고있지만 바로 선택된 인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벌써 <<대아>>가 인격과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수밖에 없다. 그도그럴것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으로 선택된 인간이고보면 그만큼 시대와 사회를 대표할수 있는 인격과 가치만이 그 자신을 시대적의미로 자리매김해주고있기때문이다. 다음, 엘리트정신이란 과연 어떤것이냐 하는것이 다른 하나의 문제이다. <<엘리트정신>>이라고 하면 대뜸 <<선비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선비정신>>을 청빈 즉 가난하고 말끔한 정신이라고 해석해왔다. 력사적으로는 해석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 역시 력사적인 해석에만 그치고 그 변질을 보지 못한것, 그리고 시대적인 조명과 반성이 따르지 못한데서 생긴것이다. 선비정신이란 리조 5백년간에 걸쳐 량반들의 리상적인 지식인 형상으로 자리굳혀온것임을 새삼스레 꼬집을 때 우리는 그것이 바로 리조신분사회에서 지배층을 이루었던 량반들의 도덕적인 규범이였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이에 따라서 선비란 비민중적이고 비속세적이라는 특징이 이루어지게 되여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값을 물어보는 법이 없다>> 는것이 선비정신의 주근이 되여버렸다. 그리하여 세속적으로 선비는 빈 껍데기만 남았고 선비정신은 사회를 외면한 허식으로 변질하고말았다. 박지원의 소설 <<량반전>>은 력사적반성에서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바가 자못 크다. 리조시기에 껍데기만 남은 량반들이 나라의 환곡을 파먹는 식객 내지 좀도적으로 탈락해버린데 비해 오늘 국록이나 타먹으면서 일하는자, 돈버는자를 비천하게 보고 다만 학문을 유식함의 상징으로, 권력을 신분적인 특권으로 행사하는 신분층이 륜곽을 드러내고 있다. <<엘리트특권>>을 향수하는 사람들이 식당에서,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무도장에서, 나이트클럽에서, 다방에서 <<엘리트론>>을 <<강의>>하는 단골이 되였다. 현재를 살면서 현실적인 향수를 누릴수 없다는것은 무리겠으나 력사적인 사명감이나 시대적인 책임감따위는 헌신짝처럼 한쪽에 팽개쳐버리고 공금이나 협잡으로 <<노세, 노세>>를 웨쳐대는데는 새삼스럽게 <<엘리트>>들에 대한 신변정리를 요청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물론 허식으로 변질된 선비정신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바람직한것인 못된다. 사회에 선택된 인간으로서 되돌아가 사회에 작용해야 함은 당연한 리치이다. 그만큼 경제성장의 시대에 <<얼어죽어도 화로불은 쪼이지 않는다>>는 고루한 량반사상으로는 도저히 사회성장의 선두는 커녕 장애로 될수도 있는것이다. 자기의 생활은 자신이 열심히 가꾸어나가야 한다. 삶에는 특권이 없다. 인생을 열심히, 참답게 살아가는자만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과 선택에 나설수 있는것이다. 선택된 인간의 선택된 삶이란 시대와 사회에 그리고 민중에 책임을 다하는것뿐이다. 량반신분이 부패와 몰락의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때에조차 김만중과 같은 대바른이들은 류배살이도 외면없이 신하된 충정을 다하지 않았던가! 바로 선택된 인간의 책임으로 사회를 고발하였기에 <<사씨남정기>>는 그 시대를 아득히 흘러보낸 오늘에도 그 가치를 확인받고있는것이 아닌가! 자기가 발딛고선 사회의 무탈한 성장을 위하여 딱따구리가 나무를 파고드는 벌레를 쪼아내듯 사회의 병근을 집어내고 새로운 가치창조를 위해 생산적인 삶을 꾸며가는것,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엘리트정신>>이 아닐가 한다.
26    서울로 가야 과거에 급제한다 댓글:  조회:1862  추천:0  2009-05-16
조선의 18세기 민간소설문학에서 퍽 주목되는것의 하나가 <<장화홍련전>>과 <<콩쥐팥쥐>>이다. 이 두 설화는 또 모두 전실자식과 이붓어미와의 갈등을 다루고있다는 점에 사회초첨을 같이하고 있다. 물론 속담에 이붓어미가 티를 내는것이 아니라 이붓자식이 티를 낸다고도 하였으니 세상에 저를 낳은 어미가 아니니 어쨌든 친어미처럼 대할수 없다는 선입견을 앞세워 이붓어미의 정성과 모성애를 몰리해하는 이붓자식도 상당수인듯 싶다. 이러하든 저러하든간에 그것은 천륜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인간애를 요청하는 노력적인 관계임은 틀림없다. 급작스럽게 지구촌이란 개념이 현실의미로 투명하게 밝아옴으로 하여 전에 멀리했던 이웃들과 만나는 기회가 밥먹듯 잦아졌다. 그네들은 우리가 정신적인 성장조차 꾀하는 생동한 군체로 삶의 광장을 넓혀가고 있는데 감탄과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 종족기시 내지 차별시에 의해 소외감을 절감하는 그들에게는 순 개인적인 경제성장외에는 민족문화요, 정신이요, 언어요 하는것은 아무런 보장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네들에 비해 정신적성숙과 경제적성장을 동보로 꾀할수 있는 우리가 훨씬 다행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생존권이 많이는 그 경제력에 힘입어야 하는 경쟁적인 세계절주에 대응하여 경제적성장이 선차적인 시대요청으로 나선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그제날에 <<철밥통>>이 깨여지면서 재정로임팀들이 느꼈던 위기감 내지 불안전감과 비슷한 아픔을 앓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국가의 계획적인 조달에 의해 그럭저럭 혜택을 받으며 평균주의사상에 노력을 게을리하던 국민들이 구체적인 대응관념을 세우지도 못한채 상호경쟁적인 힘의 맞겨룸속에 갈팡질팡하게 되였다. 아직 창조적인 독립성과 자활력을 키우지 못하고 부모한테 모든것을 의탁하는 소년적인 천진성과 유치함에서 현실을 외면한채 자체모순에 빠져 근심하고 번민하고 부정하고 분노하고 있다. 현실감각이 없이 단순하고도 유치한 믿음에 의지하여 과거동경에 자각증상이 없는 동통을 겪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오늘의 삶의 현장은 흘러간 세대가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리상임에 다름아니다. 그들의 게으름없는 노력이 없으면 오늘의 현실이 있을수 없다. 그만큼 현세주의적이 아닌, 삶의 현실에 대한 긍정적시선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여 래일을 밝게 하려는 미래지향적인 목적추구와 직결될수 있는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 가마밥을 먹고 한 지붕밑에서 산다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리며 메마르고 무심한 활기를 본의 아니게 동원했다. 인제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삶의 총체성을 통찰하여 현실에 대응할수 있는 새로운 정신적 출발점을 찾을 때이다. 그럼 우리 민족의 현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하나의 대가정속에서 국가제도적인 민족자치와 계획적조달의 혜택으로 주체적인 노력이 없이도 <<근심걱정없이>> 살아갈수 있었다. 매일 부모가 계산적으로 주는 소비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난하지만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어느덧 줄것만 바라는 변태적인 심리습관이 자라서 운명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지혜를 잃었고 하나의 운명을 가진 공동체의 건강에 관심은 높으나 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엔 게을리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도시문화가 활기를 띠고 상품경제가 시대적요청으로 대두하자 갑자지 마음이 가난해지고 방향감각마저 상실하게 되였다. 차에 오르고도 어디로 가는 차인지조차 모르는 격으로 그냥 고루한 소농경제사상과 가부장제적 대가정속에서 주체적 정신을 뿌리뽑힌 무기력한 상태로 락오의 넉두리를 하고 있다. 상품경제가 사회의 주되는 경제행위로 되고 다성분의 소유제가 병존하는 시대에 국가는 절대적인 가부장제적 대가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가정성분이 훨씬 단순하고 책임이 훨씬 직접적인 핵가정으로 세분되였다. 이와같은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시대에 자기의 자활력을 키우지 못하고 그대로 의타사상에 빠져버린다면 큰소 잃고 송아지 흩어지는 격으로 이중랑패를 당하고 말것이다. 새롭게 정신적 출발점을 정하고 바람직한 방향감각을 잡아야 한다. 틀림없이 새로운 정신적 출발점은 현실도피적 립장을 버리고 세계적 절주 내지 국가적 성장에 발을 맞추기 위한 민족의 각성에 정해져야 할것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감각이란 시대의 정상급문명이 대집결된 곳을 민족의 제1번지로 잡는것이라고 풀이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상승하려는 정신이 없는 민족은 이미 령혼이 없는 육체와 같이 분해되고말 운명이다. 성경에도 이르기를 <<령혼이 없는 몸은 죽은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니라>>했다. 시대의 정상급문명과는 떨어지고 소외된 페쇄된 공간에서 상승적인 삶이라거나 민족적인 성장이란 있을수조차 없다. 문명의 중심에 주소를 잡고 신분증을 타지 못한다면 도태는 불가피면적이다. <<서울가야 과거에 급제>>할수 있다. 하나의 운명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는것이 중요하다는 피상적이고 단일적인 사유에서 농촌집거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것은 짚신에 국화그리기임에 다름아니다. 장사군 웃덮기라고 덮은 한층을 벗겨내면 부실한 체질이 그대로 드러나고 만다. 천자문도 못읽고 도장을 새긴다면 기계나 다름없을것이다. 다음으로 요청되는것은 민족의 생존과 성장과 상승의 책임이 훨씬 직접적인 상황에서 민족정신과 민족경제, 지성인과 사업인의 참다운 교제와 믿음직한 악수이다. 거족적인 생명운동에서 문화와 경제의 유능한 두뇌들의 집결은 거의 그대로 유일한 출로임에 의심없다. 사업인의 돈지갑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문화인이나 순 개인적인 명예에만 계산적인 사업인이 선택된 인간의 다수일 때 우리의 실망은 그만큼 클수밖에 없다. 그들의 교제에 빠진것이 바로 육체에 령혼같은 정신이기때문이다. 정신이 뿌리뽑히고야 어찌 민족의 운명교향곡에 대한 참다운 연주를 할수 있겠는가! 시대에 따르는 각성과 건강을 위한 노력이 없다면 호미로 막을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는것을 자각해야 한다.
25    대중화 행동모형 댓글:  조회:1740  추천:0  2009-05-16
척척보일러- 기름공급상황, 표준온도, 급수, 이상경보 모두를 자동으로 척척 공제하는 척척보일러. 척척할아버지- 우주의 비밀, 십만가지는 무엇때문에, 풀기어려운 수수께끼 모두를 척척 알려주는 척척할아버지. 일을 순서대로 막힘없이 잘해나감을 척척이라고 한다. 그것은 달리 첨단적인 기능, 풍부한 지식을 상징하는 말일것이다. 그런데 그 겹친 <<척척>>을 견우직녀처럼 갈라놓으면 한 경우는 태연한 모양을 나타내고 다른 한 경우는 어떤 가상의 모양을 나타낼수 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자세 내지 삶의 방식에서 두루 살펴보면 놀랍게도 <<척>>, <<척>>이 대중화 행동모형으로 되고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르면서 아는척(체): 길을 가다가 어떤이가 알은체 하는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상대를 확인할수 없거나 어렴풋하지만 그냥 같이 알은체 하는것은 상대의 인격과 체면을 보는 문화인격이라 하겠다. 그러나 토끼꼬리만한 상식을 들고 로반앞에 도끼질로 너무 아는척하는것은 바지벗고 춤추는 초라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알면서 모르는척(체): 상대가 여러 사람들앞에서 조그마한 실수를 하였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척 했다가 조용히 귀뜸해주는것도 믿음과 우정을 중히 여기는 소행이라 하겠다. 그러나 친구나 벗이 탈선의 심연에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는것은 지나친 교활성이거나 극단적 리기주의때문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없으면서 있는척(체):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하나밖에 없는 빵을 쥐워주면서도 자기몫도 있는척하는 어머니의 태연함은 그대로 위대한 모성애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해한테 화장품 하나 변변한걸 사주지 못하면서도 길을 가면 택시요, 술을 하면 카라OK요 하면서 밖에 나와서는 그냥 없으면서도 있는척하는것은 참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지나친 허위로 관습화된 정신빈곤자의 소행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있으면서 없는척(체): 넉넉하지 못한 로임에 장작을 쪼개듯 힘겹게 살면서도 패가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친구앞에 생활고가 있으면서 없는척 서슴없이 구제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그 강개한 모습에서 아름다운 인간애와 미더운 우정을 읽을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상품화된 인정상황을 절대화한 나머지 처참하게 허물어져가는 혈육의 삶의 아픔을 그냥 외면한채로 있으면서 없는척 능갈스레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빈손만 펼쳐보이는 사실앞에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를 회의조차 하게 되고 상품화시대에 자기보존의 자률성과 부자의 륜리가 그리는 불신과 배타의 풍속도를 보게 된다. 못보고도 본척(체): 축구장에서 고조되였던 흥분과 열광이 아직 식지 않은 축구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텔레비실황을 본 이가 현장에서 못보고도 본척하면서 기분을 리드해갈 때 어느정도 허영심이 작간한것도 시살이겠지만 그런대로 때와 장소에 맞게 정서를 조절해가는 무해한 삶의 예술이라고 해도 괜찮을것이다. 그러나 남의 흉이라면 못보고도 본척하면서 아예 추리와 판단까지 동원하여 날개를 달고 꼬리를 붙여주는 그런 사람들의 심태를 들어 우리는 요언의 비루함을 알것 같다. 보고도 못본척(체): 새로 인사시킨 자리에서 친구의 실수를 직방 꼬집을수 없어 슬쩍 눈치질을 하는것을 이쪽에서 보고도 못본척하는것은 자기의 대범함을 나타내거나 적어도 상대방을 존중해서일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못본척하거나 지어는 보수를 따지는 사실앞에서 우리는 인정이 메말라가고 돈의 론리가 횡행하는 사막과 같은 현실을 새삼스럽게 절감하지 않을수 없다. 이와같이 <<척>>, <<척>>이 우리 삶의 광장에서 하나의 행동 <<모형>>으로 되고있는데 우리는 그 어느 한쪽에서만 진실이나 진리나 가치를 득점할수는 없다. 없으면서 있는척하든 있으면서 없는척하든 그냥 사랑과 우정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우리는 다소라도 <<척>>, <<척>>에서 화목하게 어울려 살려는 도피의 결백성을 보게 되는것이고, 그것이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이라거나 돈에 의한 인격이화의 소생이라면 우리는 그 <<척>>, <<척>>에서 탐욕과 허위가 관습화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이 앓고있는 질병을 진단할수 있느것이다.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라고 남남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하니 인간에게는 작은 알륵은 숨기고 큰 알륵은 해소하면서 화목과 사랑과 우정과 평화를 도모하려는 <<척>>, <<척>>의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만큼 문화인격이란것은 어느정도 아름다운 <<허위성>>을 띠는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교활성으로 변질되여 자기타산적이고 자기계산적인 극단적 리기주의에로 추락될수 있다. 언제나 한가지만 말하고 다른 한가지는 숨겨두려는 자는 사실 비겁한 자이고, 줘야 할 때 외면하고 받을 때 비굴한 자는 너무나 리기적인 인간이다. 너무 타산적이거나 계산적이면 남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질수 없을뿐더러 그 자신이 벌써 표리부동한 이중인격 내지 인격이화로 굴러떨어지고 마는것이다. 그럼에도 제사집에서는 만들어진 슬픔, 잔치집에서는 장식화된 웃음이 필요하다.
24    실수와 죄와 그리고 가난 댓글:  조회:1645  추천:0  2009-05-16
어느때인가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별명을 가지면서부터 갑자기 모든것이 좁아진듯싶다. 거리거리는 차들로 꽉 미여지고 고층건물들이 높다란 담장마냥 길 량옆을 덮칠듯이 막아서서 워낙 좁다랗던 길이 그냥 개미길처럼 좁혀졌다. 연기와 기름과 오염과 알콜이 머리우를 폭탄처럼 뒤덮어 인간들이 청신한 자연의 공기로 한껏 배속의 오물을 세탁할수 있는 공간도 훨씬 좁혀졌다. 어디로 가나 숨만 콱콱 막힌다. 불야성을 이루며 명멸하는 네온등아래 야성과 본성과 그리고 그래서 풍겨나는 타락과 륜락의 악취가 카라OK, 나이트클럽, 술집, 무도장 등등과 함께 우리의 시각과 마음과 그리고 인생을 좁혀온다. 문명의 도래와 함께 문명의 사생아인 <<문명악>>도 청신한 대기속의 병균처럼 요사스럽게 우리의 삶의 광장을 배회한다. 인성과 인격과 륜리와 도덕과 리성과 철학과 그리고 가치판단에서 사람들은 도착증에 걸려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군체동물로서 서로가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면서도 서로지간에 화해의 접점을 모색하지 못한채 그냥 대화의 대상을 잃고 있으며 군체속에서 홀로의 고독보다 더 참혹한 배타의 고독을 씹어삼킨다. 나중에 인간의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깃들어있는 관용마저 자기보존의 중압아래 수증기처럼 증발되여버리고 의심과 시기와 그리고 질투로 바깥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풍문마저 견디어내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앞에서 자기본위로 지나치게 계산적인 판단에 착오적인 시비나 충돌을 몰아오기도 한다. 실수와 죄와 그리고 죄악은 때로는 꼭같은 결과를 낳을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결과더라도 그것들은 과연 서로가 본질적인 함의가 다르고 동기나 목적도 다르다. 과학에서의 실수, 생사고비에서의 순간적인 실수따위는 그대로 만구할수 없는 참극을 빚어낼수도 있다. 인성을 상실하고 부모를 학대하며 폭행까지 서슴치 아니하는 자식의 생명을 되찾아간 부모의 행위는 그 비장함에 동정이 가더라도 역시 벌을 받을만한, 도의에 벗어난 악행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실수가 아닌 죄이다. 그러나 살인했거나 강간했거나 강탈한것은 틀림없이 중죄가 될만한, 대중의 질서속에서는 용서를 받을수 없는 죄악이다. 죄나 죄악은 다 생활의 일상적인 질서속에서는 용인할수 없는 범죄요 어차피 질서를 지키는 법의 단속을 받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실수는 불문곡직하고 그대로 법을 적용할수는 없다. 엄격한 조작규정을 위반했거나 집단적인 규칙을 무시한것과 같은 경우에는 법이 적용될수도 있을것이다. 어떤 규정이나 규칙은 벌써 그 자체가 질서확립을 위한 법적담보로 되는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생활상에서 너무나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실수하는수가 있다. 그래서 비평도 있고 반성도 있으며 가르침도 있고 뉘우침도 있는것이다. 인간은 원래가 벌써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것을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하고 승화할수 있는 그런 불완전한 미완성의 존재이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생명연습은 없더라도 생활실습은 있어야 하는것이고 역시 서로가 리해하고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문명악의 회오리바람속에서 의심병만 잔뜩 심해져서 날따라 대화의 대상마저 잃어가고 있으며 사랑과 우정에서조차 계산과 감각과 추측을 앞세운다. 좁아진 길, 좁아진 공간속에 마음마저 좁아져서 비좁은 길에서 차들이 서로 양도하지 않아 부딪치듯 서로가 어쭙지 않게 말매를 맞는다. 그냥 타산적이거나 계산적인 마음이 남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것이다. 인제 우리는 말의 과잉속에서 또 서로가 믿고 화목한, 어여쁜 삶의 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좁혀>>지듯이 그냥 내 마음 하나만을 담아들고 살아가야만 하는가. 세계가 지구촌이라면 세계화라는것도 결국은 <<우물안의 개구리>>가 하늘보기임에 다름아닌것 같다. 삶의 공간을 넓히고 자기가 발딛고선 현장을 초월하려는것이 인간의 상승적인 힘 내지 리상이라면 인제는 우주의식을 키워야 하는가보다. 우리의 마음에 우주를 담아야 한다. 따사로운 태양과 아름다운 달과 그리고 무수한 별들을 너그럽게 품어주는 우주의 관용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삶의 일상성에서 자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잘못을 저지를수 있는 존재라고 보면 벌써 계절에 따라 면역을 잘 해야 하듯이 그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에 주의해야 하며 역시 환자를 동정하고 살뜰히 보살피듯이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를 좀더 너그럽고 체온이 섞인 말로 타이를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잘못이나 실수를 자기본위로 지나치게 타산적이거나계산적으로 판단하면 그로부터 죄악을 낳는수도 있다. 실수는 관용으로 치료하고 죄와 죄악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냥 사랑과 우정의 마음을 키워가노라면 언젠가는 너의 실수도 타인의 관용을 받게 될것이다.
23    법 질서 그리고 가난 댓글:  조회:1720  추천:0  2009-05-16
서한의 선제년간에 발해일대에는 련년으로 재황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도둑이 벌떼처럼 성했다. 발해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한선제는 여러 대신들을 보고 현능한 신하를 발해태수로 추천하라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의론끝에 마침내는 칠십고령에 이른 공수를 발해태수로 천거했다. 선제는 공수가 키가 작고 용모도 볼데가 없는데다가 나이조차 많은것을 보고 저으기 실망하면서 짐짓 공수한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발해를 다스리려고 하는고?>> 그러자 공수가 대답했다. <<발해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지금 년년으로 재황이 들어서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나이다. 그런데 당지의 관리들은 백성들을 안무하지 못하니 도적이 또한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나이다. 임금께서는 저를 보내시여 그 기아민들을 징벌하도록 하시겠나이까? 아니면 안무하도록 하시겠나이까?>> 선제는 공수의 냉철하고 빈틈없는 대답에 근심이 씻은듯이 가셔져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현능한 사람을 선용함은 바로 그곳 백성들을 안무하기 위해서이노라.>> 그러자 공수가 말했다. <<그러시다면 저를 그곳에 내려가 일을 보도록 윤허해 주사이다.>> 이리하여 공수는 그 즉시로 발해군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당지 관리들은 새로운 태수가 부임되여 온다는 말을 듣고 많은 군사를 판견하여 연도에서 영접했다. 그러나 공수는 도리여 군사를 모두 돌려보내고는 한편 소속 각 현에 서신을 띄워 도적나포를 맡은 관리들을 죄다 파면시켜버렸다. 그리고 무릇 호미를 들고 밭을 다루는 사람은 모두 량민이니 누구든 그들을 시끄럽게 굴지 못한다고 했다. 발해군내의 백성들은 이 말을 듣자 더없이 위안을 받았고 로략질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모두 병기들을 던지고 뿔뿔이 흩어져 밭을 다루는 농기구를 손에 잡았다. 며칠도 안되여 발해는 평온을 다시 찾았다. 이 력사의 한 대목을 오늘의 삶의 현장에 옮겨놓고 의미매김을 해보면 어떨가? 사실 삶의 현실을 살고있는 우리의 신변체험을 떠올려봐도 모든 병이 감기로부터 시작될수 있듯이 모든 사회병근도 가난에 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리향의식과 망향의식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한국나들이에서 많은 물의 내지 비리가 몸에 이가 끼듯이 비일비재한것도 종국적으로는 빈부의 차이, 다시 말하면 가난이 근원이다. 농촌의 황페화상태나 농촌처녀들의 도시진출도 결국은 가난이 원인이다. 몇달씩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거나 제도적장치 내지 구제책도 없이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이 어느곳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는것도 역시 가난이 도화선이다. 어느 한 현소재지에서는 도둑이 주인이 집을 잠간 비워놓은 틈을 타서 금방 다 된 전기밥가마의 밥을 홀랑 쏟아가고 밥가마는 그대로 놓아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제발 굶어죽는 사람을 구해주십사 하는것이라고 유머를 조미하는 익살에 어설픈 웃음이나마 지을수 있다. 법과 질서는 불가분리의 사회적장치이다. 질서는 법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지만 또 법에 의해 파괴되는수도 있다. 물론 법 그 자체가 질서를 파괴하는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법이란것이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지키고 사람이 집행하는것이고보면 누가 그 법을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집행하는가에 가부가 결정될수밖에 없다. 다시 상기 력사이야기에서 공수의 안무책을 풀이해보자. 공수의 판단: 재황으로 가난에 허덕이는 발해의 백성을 안무해주는것이 질서파괴의 뿌리를 뽑아버리는것이요, 지방의 안정을 가져오는 근본이다. 발해백성들의 심리수요: 련속적인 자연재해는 원초적인 생활보장마저 흔들리게 한데다가 탐관오리의 수탈은 반역의 심리마저 조장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적으로 되게 하였다. 공수의 책략: 백성을 안무하고 반역한자를 관용하고 탐관오리를 처치하여 질서파괴의 근본뿌리를 뽑아버리는것이다. 공수가 발해로 내려가면서 새로운 법을 가지고 간것은 아니다. 다만 법을 권력의 보호산으로 리용하거나 략탈의 악수단으로 전락시킨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법을 질서확립의 합리한 수단 내지 제도적 장치로 바로잡은것이다. 백성은 법을 지키는 무리요 권력자는 법을 집행하는 무리이다. 그러니깐 지키는 무리가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파괴되는것도 사실이지만 집행하는 무리가 잘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파괴될것은 당연하고 자칫하면 나라조차 망할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한자 지혜로우면 만사람이 덕을 입고 악한자 지혜로우면 만사람이 해를 입는다고 했다. 지키는것과 집행하는것이 결국은 피동과 주동의 관계라고 보면 아무튼 지키는자는 지키면 되지만 집행하는자는 집행에 앞서 벌써 지키기를 잘해야 할것이다. 발해백성들이 련속적인 재황으로 굶주림에 허덕일 때에조차 수탈과 억압을 멈추지 않은 탐관오리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으니 어찌 법을 집행할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강도가 도적을 잡는격이요 나는 략탈해도 되고 너는 반항해서는 안된다는 강도리론이다. 지키는자는 집행하는자가 지킬 때 그 집행을 거역할수 없다. 지키는자와 집행하는자가 다 같이 지키는 법, 그것이야말로 진짜 사회질서확립, 말하자면 사회군체 모두가 리해관계를 같이 할수 있는 바람직한 질서를 정립하는 만민옹호의 법일것이다. 지키는자와 집행하는자는 순종하는자와 이끄는자임에 다름아니다. 순종하는자는 이끄는자가 현명하지 못하거나 악인이면 한사코 순종하기를 거부하거나 반역조차 꾀할것이다. 겉둥치기로 환자를 진찰하고 약이나 팔아먹는 의사는 명의가 될수 없다. 환자는 두번 다시는 그를 찾지 않을것이다. 물건의 품질과 시세를 모르는 상인은 결코 훌륭한 사업가가 될수 없다. 종당에는 패가망신하는 운명일것이다. 집행하는자, 이끄는자는 지키는자, 순종하는자에게 어차피 혜택을 주어야 하며 그들의 의식주수요, 인격존중수요, 심리적수요, 물질적수요를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이잡이에 이골이 난 아Q처럼 우리 세대까지도 온 육체를 그대로 이의 온상으로 제공한, 째지게 가난한 력사가 있었다. 가난은 이뿐만 아니라 모든 심리적, 물질적 잡것의 온상이 된다. 이제 우리 후대들은 이란놈이 어떻게 생겨먹은것인지조차 모른다. 그저 간혹 옛날에는 너무도 가난해서 몸에 이가 득실거렸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기 몸을 살펴보면서 매우 신기해하는 얼굴이다. 그 천진하면서도 밝은 얼굴에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질서를 설계해낸다. 가난을 력사에만 적어놓고 사회군체 모두가 리해관계를 함께 하는 질서,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가. 다만 <<권력의 세계는 무법의 세계>>라는 특권적인 <<명언>>이 력사에만 기재되기를 바랄뿐이다.
22    우물을 뛰쳐나오는 개구리들 댓글:  조회:1697  추천:0  2009-05-16
어느 일요일날, 동창생 몇몇이 북경 동물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전에 손을 씻는데 사람들이 손을 들이밀기만 하면 수도꼭지에서 저절로 물이 흘러나왔다. 한 친구가 신기하게 생각하며 두손을 들이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 친구가 재차 손을 들이댔으나 역시 수도꼭지는 벙어리가 된듯 싶었다. 이때 누군가 웃으면서 너는 촌놈이여서 봉사하지 않는거라고 악의없는 놀림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수도꼭지에서 물이 세차게 뿜어나왔다. 삽시에 그 친구는 얼굴에 물벼락을 맞고 옷까지 화락하게 젖어버렸다. 그가 어망결에 발로 딛게 만든 수문을 밟았던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반갑게 만나면 그때의 일을 악의없이 놀려주는걸 잊지 않는다. 오늘 그것이 인생의 철학적 사색마저 불러일으키는것이 흥미롭다. 사실 그 친구뿐만 아니라 닫힌 공간에서 풀려나와 사회의 요청으로 시대에 선택된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그런 신변체험이 한두가지가 아닐것이다. 감회깊은것은 그런 신변체험에 대해 철학적사색을 할수 있다는것, 풀어말하면 닫힌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사회의 요청으로 시대에 선택되였다는 다행스러움과 인생을 승화시키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했다는 자부감이다. 닫힌 공간이라고 하면 삶의 질변이나 승화가 있을수 없거나 거의 없는 공간일것이다.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순 소비적인 인생에 지치고 변질되는 그런 공간일것이다. <<우물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뛰쳐나와 안도의 숨을 몰아쉴 때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는 <<지구촌의 개구리>>라는 속담을 현실화시키고 있었다. 이런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의 도전속에서 개체의 사회화는 문화적인 신변정리와 함께 일생의 과업으로 제기되고 있는것이다. 산업화, 상업화로 특징된 도시적 삶의 질서가 사회발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적자생존의 경쟁의식이 원시적인 자연경제에 안주하여 그런대로 불안한 평온을 유지하여오던 농촌에 여지없는 충격파를 주었다. 생산성문화의 퇴화 내지 답보, 생활문화의 고갈 내지 빈혈증으로 질병을 앓고있는 변질된 삶의 현장에서 <<탈가도주>>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져 황페화되여가는 농촌현실은 이미 사회적 관심을 모으는 과제로 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12억에 9억이 농민이였던 농경사회가 갑자기 산업화, 상업화를 특징으로 하는 도시사회로 탈태환골하였다는 사회의 질적변화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사회의 이런 질적변화로 하여 농촌의 많은 잉여로력이 도시로 흘러드는것이 주되는 흐름이기도 하다. 농업생산문화의 발전은 최대한의 기계화실현과 로력의 최적화를 요청하기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발전의 필연성을 말할뿐이지 아직 농업생산문화의 현실변화를 의미하지는 못한다. 그에 반하여 자기는 화려하고 안락한 문화생활에 몸담그고 있는 재정로임팀들이 농민들의 질고와 어려움에 대해서는 눈을 감거나 아예 외면하면서도 짐짓 농민들의 운명을 관심하고 황페화되는 농촌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체 하는 트림질에 대한 반발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원시적인 자연경제에 안주하여 변질된 삶을 살아가다가 그대로 그냥 인생도태를 당하기보다는 낯선 곳이래도 현대절주에 몸담그고 령으로부터 시작하는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사그러져가는 문화생활과 앞서가지 못하는 교육시설 내지 조치는 굶어죽어도 자식만은 공부시키던 전통적 미덕조차 고갈의 낭떠러지에 밀어냈으니 그들에게 인생의 질변과 상승이란 도대체 무엇일가. 하물며 짐승은 골로 오르고 인간은 버덕으로 내린다 하지 않았던가. 농촌의 이와 같은 실태에 많은 지성인들이 불안과 우려, 심지어 가속화될수 있는 민족동화에 위기감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민족의 집거가 <<동화연장법>>의 기본의 하나라고 할수 있겠다. 민족의 집단거주는 그 민족의 언어, 풍습, 인정세태 등을 망라한 문화권을 그대로 잘 보존해 줄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지역의 40대 심지어는 50대까지도 벌써 민족의 대오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있다. 우리가 중국특색이 있는 조선족문화를 운운하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민족의 집단문화를 떠나서는 아무런 시대적가치도 없다. 한 민족이 현실적으로 이미 집단문화 내지 문화권을 상실하였다면 그 민족의 문화란 사실상 벌써 생명력 내지 재생력조차 상실한 전통문화의 잔재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집단거주가 민족동화의 기본적인 연장법이래도 우리는 그 집거지가 오늘의 현대절주 내지 삶의 현장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감안하지 않을수 없다. 그것이 주어진 자연적인 생존공간에서 자연생장적이고 고정불변적인 생물과정, 즉 정신의 움직임이 없이 그냥 어제, 오늘, 래일이 무의미한 반복만 거듭하는 자연적이고 순 소비적인 인생에 지치고 변질되는, 그런 닫힌 공간이라면 그 민족은 동화에 앞서 벌써 도태당하고마는 운명일수밖에 없다. 적자생존의 치렬한 경쟁속에서 한 민족이 생존하려면 세계적인 속도와 절주에 도전하지 않을수 없다. 그만큼 문화권형성과 동보로 문화적신변정리에 따르는 삶의 질적 상승 내지 끈질긴 생명력과 자활력을 꾀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기어이 기성도시인도 어제는 도시진출을 했었다는걸 꼬집을 필요가 있을가. 그 이상의 상승이 있을수 없거나 심지어는 삶의 변질까지를 어쩔수 없는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자체가 벌써 전진적인 삶의 자세요 끈질긴 생명력이다. 거기에 또 도시문화속에 민족의식의 뿌리를 박고 키워가려는 정신적 움직임까지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목적추구를 넘어서 벌써 민족의 근원적인 목적추구와 직결되는 비장한 움직임이 아닐수 없다. 생명력이 넘치는 삶의 광장을 마련해야 한다.
21    홀로서기 댓글:  조회:1644  추천:0  2009-05-16
아빠엄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타던 아이가 마침내 손을 놓고 아장아장 걸음을 내디딜 때 부모는 감탄과 격동을 금하지 못한다. 지팡이를 짚고 걷던 사람이 흔연히 지팡이를 뿌리치고 우쭐우쭐 걸음을 뗄 때 그 충격은 자못 큰것이다. 홀로서기를 자립함으로 풀이할수 있다면 그것도 바람직한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누구의 힘에 기대거나 누구의 지배에 움직이는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가 나를 지배하고 미궁같은 사회에 몸담그었어도 인생을 옳게 살아가는 정신적독방을 마련하는것을 일컬어 홀로서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인생을 살아가는 밝은 자세라 할수 있겠다. 카멜레은처럼 보호색을 쓰고 자기의 리해에 지나치게 계산적인 우정은 상업이지 참우정은 못된다. 상업이래도 실은 협잡에 더 가까운것이다. 또 리용가치를 계산하거나 적어도 어떤 빚이나 혜택때문에 강박관념 내지 고마움에서 우정을 맺었다면 아직 뜻과 마음이 통하기에는 불의 시련이 남아있을수 있다. 역시 종교적인 하나님을 믿는것도 계산적인 사람에게는 죄를 사면한다거나 축복을 내린다는것을 전제적 약속으로 하는 교역인듯싶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본위로 하는 인격지배가 아니라 타력에 강요당하는 강박관념일수 있는것이다. 자각증상도 없이 사회 기성도덕이나 리념에 강요당한다거나 종교적인 하나님을 의식하기에 앞서 그냥 그대로 내 가슴에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 <<하나님>>을 모시는것이 훨씬 주체적이고 바람직한것이다. 그러나 백사람이 <<이 세상에 누구도 믿을게 없다. 대방이 곧 지옥이다.>>라고 하는데는 우선 그 백사람이 문제이다. 그 자신이 벌써 대방이나 누구의 지옥임을 시인하고있으니 말이다. 하긴 속담에도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으나 궤변적으로 자기까지 숨기고 그림자를 내세우는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나의 속은 모른다>>고 억지할수는 없지않은가. 그리고 사실 인간은 만남으로 사회를 구축하고있는것이니 그냥 모이는 장소에서 그림자처럼 만나야 하는 사람의 눈치까지를 살핀다는것은 그 자신이 문제가 되는것이고, 또 자기 자신만을 껌처럼 질근질근 씹어대는 인생은 벌써 절망에 앞서가는 순 소비인생 그것뿐이다. 공적인 인격은 믿음의 다리요, 믿음은 우정의 바탕이다. 국가적인, 민족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인격은 서로간에 믿음을 주게 되고 또 그런 인격적인 믿음은 뜻과 마음을 통하는 우정을 키워준다. 자기의 마음의 창문을 꽁꽁 닫아버린 사람한테 남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있을수 없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한테 믿음이 있을수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 우정이 있을수 없다. 그냥 의심과 경계와 배타심을 앞세워 우정을 버릴지언정 친구를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인민내부모순>>에도 <<피값은 피로 갚는다>>는 투쟁철학을 람용한다. 전하는 말은 눈덩이 굴리듯하는데 그냥 스쳐지나는 바람결에 귀동만 열심이다. 짐작이 생사람 잡는것인데 자기의 총명과 판단력에 절대적인 권위를 세워준다. 도덕이니, 질서니, 법이니 하는것이 서로의 평화를 위한것이라고보면 인격이란것도 내가 다듬는것이지만 역시 사회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것인데 그냥 자아긍정에 남의 흉만 본다. 만약 이런것마저 홀로서기라고 할수 있다면 그것은 적자생존이요, 우승렬패요 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인간사회에 도입하여 사막같이 인정이 메말라가는 현실에서 인정의 오아시스를 찾는 갈망의 시대적심리가 낳은 기형아임에 다름아니다.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상품경제가 지구촌을 휩쓰는 정보화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소외가 자살적으로 감행되고 인정에 굶주린 비렁뱅이가 급증하고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결코 인간록지와 샘과 화원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도덕과 법과 질서말고도 인간의 본성적인 사랑심은 그냥 뿌리깊은 사랑나무를 무성하게 키우고 있다. 천륜의 부모자식사랑, 형제자매사랑, 부부사랑의 나무가 푸른 숲을 이루고 뜻과 마음의 틈에서 솟는 우정의 샘이 아늑한 호수를 펼치고 리해와 문명이 낳은 평화의 꽃들이 아름다운 화원을 수놓는다. 백사람이 나한테는 사랑과 우정과 평화의 마음이 있다고 확인할수만 있다면 그 백사람이 바로 사랑의 숲이요, 우정의 호수요, 평화의 화원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이어달리기는 그 자신의 정신적인 자세가 계주봉이 될수 있다. 백사람이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할때 벌써 그 자신을 부정하는것이요, 나부터 마음에 정신적독방을 꾸며갈 때 그 자신이 바로 사랑의 나무요, 우정의 샘이요, 평화의 꽃이다. 길어지는 이야기지만 문뜩 련상되는것이여서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아버지를 따라 목욕하러 갔던 아이가 물에서 피여오르는 뜨거운 김에 겁을 먹고 물에 들어서기를 주저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먼저 물에 들어서면서 뜨겁지 않다고 했다. 조심스레 한발을 물에 들여놓던 아이가 얼른 발을 들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한사람도 없다>>고 했단다. 아직 인내력과 적응력이 완숙하지 못한것이 아이의 판단을 빗나가게 한것이지 과연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것은 아닐것이다. 자신의 상황으로 객관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랑과 우정과 평화를 위한 정신적인 독방을 마련하는것이야말로 예쁜 인정사회를 구축해가는 바람직한 홀로서기이다.
20    거짓말 이설 댓글:  조회:1964  추천:0  2009-05-16
아들애는 인제 겨우 다섯살이다. 자연인으로 태여나 어른들을 <<흉내>>내면서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그 애의 가슴엔 아직은 파란 잔디뿐이다. 인제 그 잔디밭을 파헤치고 무엇을 심게 될가 하는데는 어쩔수 없이 그 애의 흉내의 대상물이 되여버린 우리 어른들의 형상이 보기가 될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애 앞에서 일거일동을 애써 아름답게 꾸미려고 모지름을 쓴다. 마치도 흰종이에는 어떤 색갈이나 다 옮을수 있듯이 고운 말, 미운 말, 옳은 행동, 그른 행동이 죄다 그애한테 <<전염>>될수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지나친 조심성이 더 부자연스러운 때가 많았다. 몸에 배지 못한 공식화된 규범을 지키노라니 자연 그 배역이 서툴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런데다 아들애는 나이를 한살 더 먹더니 호기심에 찬 질문도 많아졌고 성인사회에 대한 불신임도 훨씬 커진듯싶었다. 그애의 엉뚱한 질문이나 간단한 추리, 판단에 문뜩문뜩 놀라움을 금치못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고 그래서 례사롭게 지나쳤던 사회현상에 새삼스럽게 철학적사색까지를 굴리여보는수도 종종 있었다. 얼마전의 어느 휴식일이였다. 금방 아침을 먹고 밖에 나가 산책하고 돌아오는데 아들애가 떠들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거짓말 했습니다.>> <<응, 무슨 거짓말을 했게?>> 나는 안해를 핀잔주려는듯 쳐다보았다. <<아까 아버지 친구가 왔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화룡갔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거짓말쟁입니다.>> 나는 대뜸 얼굴에 노기를 띄우며 안해를 쏘아보았다. 안해는 얼굴을 붉히며 아들애를 흘겨보더니 바삐 변명을 하였다. <<마작놀러 가자고 찾아왔더군요. 오늘 글쓸것들이 많아 하루종일 바쁠것 같다기에 둘러붙인거예요...>> 한순간 할말을 찾지 못했다. 안해와 아들애가 다 접수 할수 있는 표정을 골라잡지 못하여 그런대로 멍청한 상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들애가 또 떠들었다. <<그런데 어째 나를 보고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까?>> 하긴 어른들로부터 귀에 아프게 도적질하면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하면 나쁜 사람이다...하는 식의 훈시를 밥먹듯해왔으니 어느덧 그런것들이 그애가 문화인으로 성장하는 좌우명으로 자리매김했을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른이 그 좌우명과 빗나간 행위를 저지른것이다. <<너 아버지가 공부하는게 좋니? 마작노는게 좋니?>> <<공부하는게 좋습니다.>> 그러던 아들애는 갑자기 신대륙이나 발견한듯이 눈을 반짝 빛내며 <<아, 그런건 좋은 거짓말입니다. 예?>> 하는것이였다. <<엉?>> 너무도 엉뚱한 추리에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마침내 안해와 함께 웃어버렸다. 좋은 거짓말, 참 유치하면서도 멋스러운 말이다. 거짓말에도 좋고 나쁨의 구별은 있다는 말이 된다. 구태여 단어의 합리성을 추상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는가. <<어머니를 찾아 삼만리>>(영화)에서 오빠는 동냥한 음식을 어린 녀동생한테 주면서 자기는 배고프지 않으니 어린 네가 많이 먹으라고 한다. 그러면서 걸탐스레 먹어대는 녀동생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꼴깍 삼킨다. 희생적 거짓말이라고 할가. 아무튼 자기를 희생하는 도덕과 인정에 젖은 거짓말이다. 거리에서 관계가 그닥 투명하지 못하고 지어는 알륵까지 있는 두 사람이 만나 얼굴에 웃음을 피우며 알은체한다. 등등... 이런건 뭐라고 명명할가? 생각키우는대로 먼저 문화적 거짓말이라고 하여보자. 백사람이면 백가지 성미라고 남남에 아니 지어는 혈육지간에도 생각이 착착 맞물려지는것은 아닌데 그대로 내내 얼굴을 붉히고 지어는 드잡이따위를 한다면 인정이란 무엇이고 질서란 또 무엇인가. 그러니 작은 알륵을 숨기고 큰 화목을 도모하며 례의와 문화인격을 수립하려는 <<틀>>에 맞추는 거짓말이겠다. 그러고보면 원시인격이란것이 보다 진실하면서도 대항적이거나 배타적인것이라면 문화인격이란것은 보다 허위적인것이기는 하면서도 평화적이고 도덕적인것이 아닐가. 그런데 상술한 이 두가지 거짓말을 말고도 또 한가지가 있다. (이 글에서는 남을 해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그런 악의 소산으로서의 거짓말은 철저히 배제된다는것을 밝혀둔다. 하긴 제목부터가 거짓말 이설이니깐 밝힘이 오히려 지나친 로파심이기도 한것같다.) 한 대학본과 졸업생이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나와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려고 어느 향정부에 배치되였다. 몇년간 꾸준히 일한 보람으로 사업에서 떳떳이 한몫을 떠멜수 있게 되였고 선거표도 표결전에 벌써 불보듯 빤해졌다. 그런데 어찌해도 향장관을 통과할수가 없었다. 이튼날, 그는 전화로 향장을 찾아 자기는 현장인 아무개인데 자기의 먼 조카벌되는 아무개가 일 잘하는가고 물었다. 그후에 그는 영광스럽게도(?) 부향장으로 제발되였으며 사업에서 큰 성과를 따낼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따질 필요없다. 사회적비리를 풍자하여 확대가공한것일수도 있다. 도리대로 하면 이것은 없어야 할 거짓말이다. 그러나 생활현실에서는 없을수 없는 필연성까지를 내함하고 있다는것이 비극적으로 받아안게 되는 결론이다. 그것은 악의 범람 내지 삶의 무질서가 제도적으로 또는 사회의지적으로 극복 내지 구속되지 않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극복할수 없기때문이다. 더우기 권력은 한사람이 만사람을 다스리는것이요, 또 층층이 구슬처럼 꿰여져있는것이기에 덕을 선행하면 만사람이 복을 입게 되고 악을 선행하면 만사람이 해를 당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또 권력에 매달린자들은 촉매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쾌속반응을 나타낸다. 특히 권력자체가 어떤 일에서 직접 촉매제로 나설 때 그 일은 에누리없이 성공을 미리 축하할수조차 있는것이다. 그러고보면 거짓말의 대상물이 부패 내지 악이라면 그 거짓말자체가 진실과 진리의 가면 내지 수단으로 될수도 있지 않을가? 도덕에 어긋난 악의 소산으로 된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타매하고 뿌리뽑을수 있는 처방을 떼야 지당할것이지만 부패와 악을 대상물로 한 거짓말은 그것을 합리하게 받아들일바는 아닐지라도 처방만은 틀림없이 부패 내지 악을 제거하는 처방을 떼야 하는것이다. 이때는 병의 뿌리가 거짓말에 있는것이 아니라 악에 있기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때에 거짓말을 제거하는 처방만 뗀다면 그것은 칼로 부추베기거나 도리여 악을 조장하는 결과외엔 아무것도 될수 없는것이다. 악을 대상물로 한 거짓말은 그 악을 제거할 때라야만 그 필연성이 소실될것임이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에 <<신을 신고 발바닥긁기>>란 속담을 추천하고싶다.
19    겨울은 신변정리의 계절 댓글:  조회:1706  추천:0  2009-05-16
왜 이럴가, 립춘이 들이닥친줄도 모르고 아직은 뼈를 저미는 추위가 저쪽에 호랑이처럼 도사리고 있으리라 믿어 솜옷밑에 끼여입을 털실옷을 그런대로 옷장속에 대기시키고있는데 일력을 넘기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이쿠, 이게 뭐야, 벌써 2월이라니. 이게 웬 일일까? 작년까지만도 이맘때면 아무리 감각이 무딘 사람이래도 눈에 눈물이 찔끔 나도록 고추추위에 몸을 움츠렸고 푼푼히 쌓인 눈을 치느라고, 눈사람을 만드느라고, 눈덩이를 뿌리느라고 법석대지 않았던가. 또 그 한때만이라도 나무가지에 새하얀 눈꽃이 피고 인공화된 도시의 모습이 하얗고 깨끗한 눈옷속에 감추어진 황홀한 설경이 제법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할수 있도록 석유와 연기와 알콜에 찌든 도시민들을 유혹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그때가 먼 옛날의 기억처럼 훌쩍 멀어져가버린다. 계절의 변화를 다만 하늘에서나 읽을수 있던 우리가 이제 그것마저 박탈당하고마는것인가. 순간 이름못할 긴장과 불안과 위기가 가슴을 쓸쓸하게 엄습한다. 내가 기성된 체험내용과 반응방식에만 안주한탓일가. 혹은 콩크리트화되여가고있는 도시열기에 하늘마저 콩크리트화되여 변화무쌍한 조화의 성미를 잃어버린것일가. 새삼스럽게 신변을 둘러보니 모든것이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변화없는 고리타분한 생활절주에 정신마비증환자가 하나둘 늘어만 간다. 자아를 속뽑힌 흐트러진 몸체들이 좌절의 체험과 희망의 체험조차 희미한속에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여 돌아간다. 석유와 연기와 알콜에 찌들고 방종과 허탈과 무위를 삶의 일상성으로 받아들여 도시는 명실공히 소비도시로 전락해간다. 전국에 명성을 떨친 술소비 내지 택시소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탈바꿈하는 옷소비 내지 미용소비, 한강에 돌던진격으로 투자만 있고 창조나 발전이 없는 무역소비 내지 산업소비, 목적성도 없이 만나니깐 앉고 앉으니깐 마시고 마시니깐 소리한다는식의 거래소비, 그리하여 인생마저 비창조적이고 비생산적인 무위도식으로 하루하루를 소비해간다. 다시금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나는 내가 그속에 주체성없이 끼여서 허동대고 있음을 발견하고 전률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여기에 와 있었을가. 이찌하여 침묵과 도피라는 형태의 죽음을 택하고 여름조차 사계절 온실속에 묶어두는 인공의 섭리에 만족한 웃음을 짓고 무지러져가는 계절의 변화에 감각마저 상실하고만것인가. 억지로 몰락해가는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향수 내지 체험에 도취되였을뿐이라고 자기변명에 몸부림쳐보았으나 지성인으로서는 지나치게 사회의 문화적기여에 린색하였다는 죄의식을 떨쳐버릴수는 없었다. 아, 그래도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 인격이 돈과 권세에 직결되는 세속속에서 인심조차 세멘트바닥에 눌린 도시민의 곤혹을 신변체험으로 절감하였다. 그런 감각에 나는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자각할수가 있다. 그것이 백약보다는 나으리라. 하늘은 아직 콩크리트로 닫히지 않았다. 다만 구름이 뒤덮혔을 뿐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의연히 겨울이 오는 자연의 섭리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 이끌어내고 보다 예쁜 삶의 공간을 체득하며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기도 하지만 그 공간을 가꾸며 넓히기란 벌써 희생조차 요청하는 더욱 어렵고 그래서 또 아름다운 창조적인 생산이다. 겨울은 워낙 자기의 신변정리와 한해를 총결산하는 계절이다.
18    의태현상 댓글:  조회:1944  추천:0  2009-05-16
아폴리네르의 소설 <<오노레 쉬불락의 소멸>>은 카프카의 <<변형기>>처럼 인간의 의태현상을 쓴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노레 쉬불락은 스물다섯되던 때에 한 유부녀와 치명적인 애정도가니에 빠진다. 그러다가 며칠동안 출장중이라는 남편의 기만술에 속아 유부녀와 둘은 알몸의 그대로 남편의 총구멍앞에 서게 된다. 오노레 쉬불락은 극도의 공포속에서 그저 꺼져버렸으면 하는 소원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벽에 등을 붙이며 자기의 몸이 그대로 벽과 더불어 함께 되기만을 기원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실현되였다. 그는 갑자기 벽지의 색갈이 되여버렸고 사지는 의지의 힘으로 엄청나게 늘어나서 납작하게 되였으며 결국 그의 몸은 그대로 벽과 한덩어리가 되여버린것이다. 그를 죽이려고 한참 날뛰던 남편은 그 분노를 안해에게 전환시켜 그녀의 머리에 여섯발이나 쏘아 무참하게 죽이고만다. 그리고는 절망에 울어대며 사라져버린다. 남편이 가버리자 오노레 쉬불락은 본능적으로 정상적인 모양으로 되돌아가며 본래의 색갈이 된다. 그후로부터 그는 의태의 령역에 속하는 이 요행스러운 능력을 지니게 된다. 중국 고전명작중에도 <<료재지의>>와 같은 귀신이야기가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고 이채로우며 의태현상을 고도로 집중체현한 소설은 그래도 <<서유기>>일것이다. 손행자는 72반의 둔갑술을 가지고있으며 헤아릴수 없이 많은 요귀들이 변신술을 부릴뿐더러 하늘에는 호풍환우하며 형태나 색채를 마음대로 바꿀수 있는 부처님과 신선들이 있다. 물론 소설로서의 오노레 쉬불락의 의태현상이다. 서유기의 둔갑술은 사실의 차원에서는 기막힌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의 강렬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경험내지 체험에 가까운 인상을 남기게 되는것은 무엇때문일가. 그것은 소설이 거짓말에 의탁하면서도 진실과 현실에 도달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때문일것이다. 오노레 쉬불락의 입을 빌면 자연은 자기의 아이들중에서 위험에 빠져있는 자들, 그리고도 너무나 약하여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기를 둘러싸고있는것들과 함께 합쳐버릴수 있는 재주를 나누어 주었다. 나비는 꽃을 닮고 어떤 종류의 벌레는 나무잎과 흡사하고, 카멜레온은 주위의 상태에 따라 몸을 잘 감출수 있는 빛갈을 바꾸기도 하는 등이다. 의태현상이란 사실 형태와 색채를 변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의지의 본능은 두가지로서 하나는 극도의 공포와 피해의식이요, 다른 하나는 욕구불만일것이다. 생활의 일상에서 우리는 카멜레온식의 인간을 성실하지 못하고 도덕적이 못되는 위선적인 인간으로 몰아붙이며 사기군이나 협잡군과 등호를 쳐버린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은 자기의 승진을 위해 남을 모함하고 상전에 아부하는 벼슬광환자, 자기가 진리의 화신인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리성을 강요하면서 자기는 호의호식에 빠져버린 방탕아, 국가의식이요, 집체주의요 하는 아름찬 구호를 웨쳐대면서 자기는 뒤주속의 쥐처럼 나라의 재물을 좀먹는자들의 가장 교활한 수단으로 의태법이 활용되고있는 탓일게다. 그러나 사실 의태현상이 자연이 베풀어준 재주라 한다면 의태현상 자체가 그대로 비난받을것은 아니다. 생활의 일상에서도 우리는 흔히 본래의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때가 자주 있게 된다. 그것은 사실자체가 그대로 사회적 긍정이나 도덕적 정당성을 보증한다고는 할수 없기때문이며 지어는 정당한 사실만 있는것이 아니고 부당한 사실도 있기때문이다. 제사집에 가서 슬퍼해주고 혼사집에 가서 기뻐해주는것이 문화인의 선의적인 위선이라고 할수 있다. 무더운 삼복철에도 장소 맞춰 옷을 입는 체면을 우리는 원시인으로 퇴보하기전에는 도저히 버릴수가 없다. 점심이나 저녁식사때에 내려오는 이러저러한 검사단을 우리는 웃으며 환영할수밖에 없다. 무슨 의연이요, 부조요 하는 항목이 갈수록 많아지지만 아니내면 모르되 낼바에는 웃으면서 당연한것처럼 태연자약하는것이 리로울뿐이다. 암행어사처럼 돌연습격하는것이 황제의 행차처럼 요란스럽게 떠들면서 내려가는것보다는 훨씬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 풀을 다쳐 뱀을 놀래우는것이 목적의식적인것이 아니라면 현명한 관원들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는 의태법을 배워야 한다. 악인이 의태법에 능하면 만사람이 해를 입을것이요, 선한자들이 의태법에 능하면 사회가 화목한 대가정처럼 하냥 밝음이 깃들것이다. 오늘도 나는 길을 가다가 풋면목이라도 있는 이를 만나면 반갑게 웃으면서 알은체 할것이다. 그보다 더 가까운 이를 만나면 오래오래 손을 잡고 살틋한 정을 나타낼것이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모든 사람들과 깍듯이 인사를 할것이다. 찬물에 밥을 말아 김치를 먹으면서 한때를 맛있게 배불리 잘 먹었다고 안해에게 감사의 말을 한마디쯤 해주는것을 잊지 않을것이다.
17    절름발 댓글:  조회:1658  추천:0  2009-05-16
지금에 와서 과부가 재가하는것은 별로 시비거리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과부들이 독수공방의 서러움과 인성억압의 고통속에서 자유를 찾기까지에는 그로서의 력사과정을 거쳐왔다. 그것은 거의 륜리제도적으로 고착되여버린 관념도덕(특히 우리 민족은 렬녀관의 단속을 엄히 받아왔다)의 변질내지 교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획득한 결과이다. 지금 로인들이 재가 혹은 재장가가는것은 의연히 큰 시비거리로 되고있다. 그것은 여러 사회적요소가 있지만 그래도 근원적으로는 아직 관념도덕 내지 기성도덕이 이런 경우에 다는 변질되지 않았기때문이다. 관념이란것은 인간경험의 집합체인만큼 거의 제도적힘으로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를 약속하는것이다. 신생사물은 낡은 관념이 타파되거나 양보하기전에는 그래서 파란곡절을 겪는것이고 지어는 요절되기까지 하는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틀림없이 그 당시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발견이였음에도 불고하고 이단으로 몰리워 그 자신은 화형까지 당하고만것은 역시 극단적인 종교정치의 완고성때문이였다. 아무튼 새로운 사물은 새로운 접수력을 요청한다는 도리를 우리는 신변체험적으로도 깊이 느끼고있는터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공식에는 개혁과 경제개혁이 등식으로 표시되고있는것이 보편적이다. 이는 설명도 필요없이 류개념과 종개념을 동등시하는 착오에 떨어지는것이 투명한데 여기서 아직 관용의 태도로 따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개혁(경제개혁)이라고 하여 경제적인 활동자체만을 신성하고 급선무적인것이라고 여기는것은 사실 기계를 돌리는데 손만 필요하고 머리는 필요없다거나 뽈을 차는데 발만 필요하고 머리는 필요없다는식의 아주 천진하고 유치한 생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비록 경제개혁에서 정신적인것이 <<간접적>>일지라도 결코 보조적이기만 한것이 아닐 정도로 개혁의 승패조차 좌우지할수 있다. 뼈저린 교훈을 무드기 남겨놓은 지나간 몇십년을 민망스럽게 돌이켜보면 결코 최종적과오는 경제가 락후한때문이 아니라 락후한 경제를 승인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사실 인류문명발전사의 매 단계를 살펴보아도 사회는 새로운 과학에 의한 의식의 변질, 의식의 새로운 수준에 의한 과학의 비약, 이런 호상 교차적인 순환공식에 의하여 발전하였음이 틀림없다. 물질이냐, 정신이냐 하는 관념적 또는 결론적 철학의 범주에서 뛰쳐나와 사회발전의 실천적측면에서 판단할 때 우리는 결코 어느것이 중요하고 어느것이 차요하다는 그런 선입견이 앞서는 편애적인 긍부정을 할수 없다. 그것은 마치도 눈이 중요하냐, 귀가 중요하냐, 또는 손이 중요하냐, 발이 중요하냐 하는 시비와 같이 전혀 무의미한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 큰 땅덩어리가 백년 넘어 타족의 발밑에서 몸부림쳤던 과거의 교훈도 최종적으로는 의식의 락후라는데 도장찍힌다. 일본의 메이지유신후의 밝은 전도와 청정부때의 유신변법실패후의 암담한 현실의 대비는 결코 순순히 경제적락후 또는 과학의 락후라는데서 근원을 찾기에는 아직 뿌리가 남는것이다. 그 경제적락후 또는 과학의 락후라는것은 어찌하여 생기게 되였느냐 하는 물음이 아직 해답을 기다리고있으니 말이다. 서양의 문명이 그처럼 놀라운 속도로 줄달음치게 된것도 중세기 그리스도교적 통일문화의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탄압에서 해탈되게 한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란 정신적해방운동이 있은 후의 일이였다. 극단적권위의 종교정치하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아무리 과학적발견이였다 하더라도 어쩔수 없이 이단으로 몰리우는수가 당연한것이다. 이와 같이 능히 떨어버릴수 있는 고통에서, 낡은 도덕에서 관념에 의해 벗어날수 없을 때 정신적인 <<개혁>>이 유일한 비방이 아닐수 없다. 황소가 지구를 끈다는 소농의식을 가지고 원시적신화생활이 고달픈 현대절주의 문명생활보다는 훨씬 안온하고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관념을 갱신하지 않고도 로동력을 제고하고 새것을 받아들이며 로동적극성을 만부하로 불러일으킬수 있다고 믿는자는 채찍질할줄밖에 모르는자이다. 서로 다른 접수력은 서로의 행위를 제약한다. 제딴엔 아무리 경제적이고 과학적이고 계산적이고 타산적인것일지라도 접수자의 접수력과 맞물림을 이루지 못할 때 소귀에 경읽기가 되고말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물질문명이냐, 정신문명이냐 하고 극단적인 판단에 골머리를 앓는자는 틀림없이 개혁의 절름발이다. 혹시 두다리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바이올린을 멋들어지게 켰는가 하는 실례를 신문을 꺼내들고 증명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람과 구태여 입씨름할 필요는 전혀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이런 실증이 결코 신체장애자들에게 삶의 신심과 굳은 의력을 키워주기 위한것외의것으론 될수 없기때문이다. 만일 성한 사람더러 그들을 본받아 두팔을 두고도 두발로 바이올린을 켜라고 한다면 머리가 돌지 않았나 하는 관심부터 앞설것이다. 부단한 탐색과 선택속에서 삶의 선률을 엮어가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식수준의 여하가 력사발전의 흐름을 결정하는 근본요소로 된다. 그만큼 천만갈래의 선택앞에서 가장 발전적이고 믿음 짙은것을 골라잡는데는 동등수준의 인식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진귀한것일망정 모르는자에겐 한낱 평범한 돌멩이나 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이 그런자들에게 믿음을 준다면 내내 얻는것이란 돌멩이나 풀뿐일것이다.
16    지식과 지능 댓글:  조회:1682  추천:0  2009-05-16
소학 5년, 중학 5년에 대학 4년이면 모두 14년에 나는데 거기다가 말과 셈을 베운 철없는 7년까지 합하면 작히 인생의 세등분한 한몫은 학문닦기에 고스란히 바친셈이니 그만하면 참된 삶에 굳건한 노력을 몰부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그런데 노력과 결과가 언제나 자매처럼 다정하게 어깨를 겯는건 아니다. 물론 피타는 노력끝에 마침내 성공의 령마루에 오른 사람이 많고 그래서 이 세상에 <<공든탑이 무너지랴>>,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는 속담이 나오게 된것이 아닌가고도 생각되지만 그러나 또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속담도 있으니 그 반대의 실례도 퍼그나 많은것 역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굶어죽어도 자식만은 공부시킨다>>는 전통미덕을 대바르게 지켜가는 부모의 따뜻한 배려와 혜택을 받아 근심에 걱정이 없이 마음껏 배우고서도 게을러 수확이 적고 둔해서 머리트임이 없는자야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저주할순 없고 그저 게으른 자기를 후회하고 둔한 자기를 개탄할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모든 과목을 우수하게 끝마치고 사회에 자신있게 진출하였으나 기울이는 노력과 갈망하는 목적과는 어긋나게 그저 차례진 일이나 쑬쑬하게 해나가거나 지어는 도태까지 당하는 그런 <<학생팀>>이 적지 않다. 그 원인을 그들 주관에만 몰밀어버리기에는 아직 그들의 학적부가 억울함을 하소연하고있다. 전통적인 교육체제는 지식을 추구하는것을 가장 높은 목표로 삼고있지만 사회의 진보는 이미 우리더러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실제문제를 풀이할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능형 인재를 배양하는데 있다는것을 내다보게 한다. 이 관점으로 다시 사회를 조명해보면 확실히 중국의 전통적교육은 기나긴 봉건사회로부터 줄곧 책을 중시하고 실제를 홀시하며 주입하는것을 중시하고 계발하는것을 홀시하며 기억하는것 또는 외우는것을 중시하고 사고하는것을 홀시하며 지식을 중시하고 능력을 홀시하는 교수관념과 체계를 키워왔다. 그런데 지금은 점잖은 선비들이 수염을 내리쓸며 달을 바라보며 풍월을 짓고 술을 마주해 권주가를 부르며 하찮게 유식이나 자랑하는 <<태평성대>>가 아니다. 온 사회가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왁왁 들끓고 고도로 되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낳으려고 모진 진통에 악악 몸부림을 치고있다. 이와같이 십년이 아니라 일년이 다르게 변모하는 오늘날에 와서 지식에로의 주기가 날로 긴축됨에 따라 그와같이 여유작작하게 지식을 루적하고 느릿느릿 소화하여 천천히 응용하는 객관적조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우기 사회와는 전혀 담을 쌓고 지식과 지식의 대비로 너와 나의 학문이나 수준을 가늠하는 어리광대놀음은 더는 사회의 용납과 사람들의 흠모를 자아낼수 없다는것이 지식과 능력의 대비속에 통쾌하게 투명해졌다. 그러니깐 인제 교육의 진정한 힘은 근근히 지식을 루적케 함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계발하여 지식으로 실제문제를 풀이하고 지혜와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시대의 진통을 덜어주고 인류에 행복을 창조해주게 하는것이다. 매듭지어말하면 배운 지식과 발휘하는 능력이 유기적인 련계를 갖게 하고 혈연적인 자매로 되게 하는것이다. 실제를 위해 능력을 발휘할수 없는 지식은 참지식이 아니다. 옛날 배우기를 더없이 즐기는 주평만이라는 사람이 어디 한번 남모르는 재간을 배우리라 다짐하고 하늘을 무찌를듯한 포부에 가산까지 몽땅 털어 천냥 황금을 장만한후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지리익이란 사람을 찾아가 룡잡는 기술을 배웠다. 옹근 삼년동안 배우고 돌아온 그는 제멋에 겨워 사람들에게 손짓발짓해가면서 룡머리는 어떻게 누르고 룡꼬리는 어떻게 디디며 룡모가지에 어떻게 칼을 박는가를 신나게 설명하였다. 사람들이 폭소하면서 <<그런데 그 룡이란놈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고 묻자 그는 단꿈에서 깨여나 경황실색하였다. 목적도 없이 아무 쓸모도 없는 기술을 배운 주평만이 측은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보다도 그런 쓸모없는 지식을 배워준 지리익이 더 밉살스럽고 괘씸하지 않은가! 인조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생기가 없고 향기도 없다. 따사로운 해빛과 풍요한 대지의 자양분을 한껏 섭취한 백화가 만발해야만 사회는 생기를 띠고 생명이 약동할수 있다. 지식은 지식을 위한 지식이 되지 말고 능력을 위한 토대로 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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