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http://www.zoglo.net/blog/hanyongzhe
블로그홈
|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카테고리
전체보기
한영철
수필
취미
좋은글
한영철
한영철
한영철
※ 작성글
시골정취
자전거 수리
로천영화와 함께한 나날들
포도풍년
※ 댓글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편폭을 혼자 놀면 어떻게 됩니까
혼자노는 곳인가 상식도 없는 작가
가사가 어페 있네요. 내 기억에는 마반산 높은봉에 아침해 솟고....농부야 쟁기메고 밭갈이 가세..달랑 보습으로 밭을 갈수 없으니, 글은 익히고 삭여서 발표함이 좋을듯,그저 다산이 능사가 아니죠, 미안....
<<
11월 2024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방문자
wenbiao
10-30 11:58
monsteraa
06-11 11:03
kool
08-24 10:08
jinrenxie
03-10 16:03
pms
03-05 18:56
okc10125
12-09 15:28
okc10125
12-09 07:06
kimzx
11-24 21:46
ab1688
06-19 07:24
mesinzer
05-31 10:11
한영철
좋은글
한영철
홈 > 한영철
전체 [
125
]
45
봄이온다
댓글:
조회:
1148
추천:
0
2019-02-28
봄이 온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얼음진 강변도로를 거느노라면 꽝꽝하는 소리가 들린다. 얼음강판이 깨여지는 소리다. 눈덮힌 얼음판이 쩍쩍 갈라진 것이 보인다. 그 밑으로는 차고 맑은 강물이 흐른다. 봄바람이 분다. 왜잉왜잉 바람소리 세다. 옛말에 봄바람에 고목에 움이 튼다고 했다. 봄바람과 겨울바람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봄바람은 아무리 바람이 세다 하여도 살을 에이는 듯 춥지 않다. 어차피 철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저멀리 강변의 버드나무 숲은 점점 물기를 머금는다. 연한 푸른색이 보이는 듯 하다. 봄을 맞이 하며 과농들은 분주하다. 과일나무 전지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봄바람을 맞으며 일손을 다그친다. 한해의 수확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이다. 먹고 살려면 어차피 부지런하여야 된다. 마음의 봄은 항상 먼저 찿아오는가 보다. 아직도 얼음이 붙어 있는데 봄을 그려보고 한해를 그려 본다. 봄은 농사군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령은 봄기운을 타고 기지개를 하고 새출발 한다. 과거에는 봄기운이라고 하면 다만 철기에 따른 날씨 변화정도로 간주하였다. 지금 보면 봄기운이란 천지간의 만물이 대자연의 규칙에 따라 생명을 잉태하고 배육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정심을 먹고 도보 운동하려 강변에 나왔다. 아침에 까지 세게 불어치던 바람은 잔잔해지였고 따스한 해볓이 온몸을 비춘다. 장갑을 끼지 않았는데 손은 전혀 차겁지 않았다. 삼삼오오 강변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브라하통하 강변도로는 나에게 매우 익숙한 운동코스다. 춘하추동 시간 날때마다 나는 강변도로를 걷는다. 강변은 봄이면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록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억새꽃이 날리고 동삼에는 휜눈이 뒤덮히는 환상적인 코스다. 비록 도심이지만 큰길을 멀리하여 자동차의 소음피해도 적다. 봄이면 이름모를 갖가지 새들이 모여와 지지배배 노래하고 춤을 춘다. 물도 있고 풀도 있고 따스한 해살이 비춰주는 새들도 반기는 자연이다. 도심에서 이같은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지 상락원을 찿으려면 힘들다. 강변도로는 절기의 변화를 감지 할수 있는 참으로 리상적인 코스다. 사람들은 청춘을 인생의 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 청춘이 그만큼 생신하고 생명력으로 차넘치기 때문일것이다. 시작으로하여 과정이 있고 결말이 있게 된다. 자연의 봄은 해마다 있지만 인생에 청춘은 단 한번 밖에 없다. 하지만 맘속에는 항상 청춘이 숨쉬고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은 년령과 상관없다. 봄이 있음으로하여 우리에게는 꿈이 있다. 금년에는 또 어떤 꽃이 필지. 어떤 새들이 날아 올지. 금년에는 뭘 심을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 더 나가서 올해 공작계획은 어떻게 내올가.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가. 어느 방면에서 성과를 낼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과제(课题)이자 방향이다. 봄은 우리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살푼살푼 새아씨와 같이 하늘하늘 버드나무 가지와 같이 우리를 향하여 걸어 오고 있다. 우리는 모두 꿈을 쫓는 사람들이다. 꿈이 있으므로 하여 인생은 더욱 아름다운것이다. 꿈이 있으므로하여 올해 봄은 더욱 아름다울것이다.
본문보기
44
화고연변분회배구팀
댓글:
조회:
1707
추천:
0
2019-02-22
화고연변분회배구팀 배구운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운동소질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탄탄한 신체가 필수고 셋째 집단주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비록 경기장에서 대방팀과의 신체 접촉사고 같은 것은 없지만 이런 저런 부상을 입기가 다반사다. 대중운동으로서의 배구는 요지음 인기몰이를 한다. 여름 도문 두만강변에 가면 아침마다 적지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배구운동 하는것을 볼수 있다."와야.와야"하는 소리가 도문강광장에 울린다.나의 주변에도 여느 배구협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배구가 가장 인기 있을 때는 아마 전세기 80년대초 중국녀자배구팀이 4련승 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때 일반사람들도 손진방 랑평등 운동원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총지도원위민의 이름은 더욱 력사에 기록되였다. 그때쯤 "배구녀장"(排球女将)이란 일본드라마가 중국에서 상영되였는데 인기가 대단하였다. 白鹿春子의 晴空霹雳가 지금도 생각난다. 스포츠는 사람을 단합시키고 집단주의를 양성하는데 아주 좋은 작용을 한다. 19세기80년대초는 개혁개방의 물고가 방금 틔였을 때였다. 그때 대내적으로는 분발정신이 필요했고 대외적으로는 형상수립이 필요했다. 국가팀이 거둔 4연승의 성과는 단순한 스포츠우승을 떠나나서 온국민을 승리의 희열에 파묻히게 하였고 단결 분발 정신이 사회각분야에서 체현되게 하였다. 이것은 나라건설에도 막강한 작용을 하였다. 화룡고중위챗에 가입하면서부터 화고연변분회 배구협회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배구협회는 2018년5월6일 첫모임을 시작하여 지난주까지 제37회모임을 가지였다. 처음에는 두주일에 한회꼴로 모여 배구운동을하다가 후에는 한주일에 한번씩 토요일에 배구를 친다. 지난해 말에는 협회의총화모임도가지고 선진일군도 표창했다고 한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동호회정도로 생각할수 있지만 실은 화고동창협회 가운데서 가장 활발한 조직이다. 김봉순회장님한테는 출석부까지 있다. 요지음 운동사진과 록화도 보게 되였는데 선수들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다. 내부조직구성이라던가 회원구성도모두 탄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모든 조직이라는것은 경상적인 활동을 전개할때만이 그생명력이 더 왕성해지고 발전할수 있다. 회원모두 협회일을 자기일처럼 대한다. 활동일이면 과일박스며 음료 샘물등을 들고 오는 회원들이 적지 않다. 어느 성배님은 배구공10개를 헌납했다. 민간협회라는것은 흥취와 애호를 바탕으로 자원원칙하에서 형성된 조직이지만 지킬것은 지킨다. 조직이니 만큼 규률이 중요하다. 자률(自律)이 주도적인 작용을 하지만 타률(他律 )이 없어서도 안된다. 아직까지는 연변을 제외한 타지방에 지역화고배구팀이 구성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인원수의 제한과 여러가지애로사항이 있을 수 있다. 연변일중 재일본류학생협회 산하에는 여러개 배구팀이 있는데 그들은 전국시합도 조직한단다. 앞으로 화고총모임일정에 각지역 분회간의배구시합을 배치하면 훌륭한 행사가 될것이다. 지역간의 단합을 촉진하고 선수지간의 교류와 우의를 증진할수 있다. 화고연변분회배구팀은 3월2일 전주배구시합에 나간다고 한다. 대단한 실력이다. 지금까지 등록된 선수는 순 화고졸업생으로 46여명인데 경상적으로 훈련에 나오는 분들이 30여명이 넘는다. 열정 또한 대단하다. 선배님들의 선줄군 작용이협회의 운영과 발전에 매우 큰 작용을 한다. 이것이 또한 화고동창회의 소중한 전통이자 이어 나가야할 대물림보배라고 생각 하다. 협회는 매주 토요일을 활동일로 정하고 있는데 선수들이 종사하는 직종도 다종다양하다. 대오가 방대하니 회장의 로고 또한 적지 않다. 무슨 로임을 타는 일도 아니고 오로지 봉사하는 자리다. 협회의 발전 성장은 회장의 로심초사와 갈라 을수 없다. 리더가 든든하고 활약이 있어야 협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요지음은 전주배구시합 출전으로 훈련강도가 높아졌다. 전번주 토요일에는 오전에만 하던 훈련은 정심을 곽밥으로 해결하고 오후에도 계속되였다. 정신력이 대단한 분들이다. 이러한 완강하고 분발하는 정신이 있기에 화고대표팀은 훌륭한 성적을 따낼수 있을 것이다. 화고연변분회배구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이번 경기에서 원만한 성적을 거두기 바란다.
본문보기
43
정월대보름
댓글:
조회:
1074
추천:
0
2019-02-19
정월대보름 보름날은 우리에게 특수한 의미가 있다. 섣달23일부터 시작된 설맞이 행사는 정월보름이 되여서야 막을 내리운다. 하기에 보름전에는 다 설이라고 말한다. 길에서 만나면 설인사를 나눈다. 아마 세상 어디가도 하나의 명절을 이만큼 오래쇠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중화민족은 전통명절을 중시하고 또 명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내가 대학다닐때에 보름전에는 신수리쟁이나 뻥튀기장사군도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 흑룡강성목단강시에 가보니 보름날 양걸이 표현이 성행하였다. 이마을 저마을 다나와서 표현하는데 서로 겨루기를 하는듯하다. 내가 용정에 근무할때 보름이 되면 오히려 골치거리가 생긴다. 여러개 양걸이대오가 륜번으로 단위울안에 들어와 춤을춘다. 공짜란 없다. 이대오가 나가면 또 저대오가 들어온다. 반공실주임은 붉을 봉투를 들고 대문어구에서 양걸이대오 접대에 바쁘다.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다. 온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단원(团圆) 절이란 이야기다. 헌데 현대생활에서 그것을 이루기가 힘들다. 설휴가도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모이기가 현실적으로 곤난한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에 가보면 명절기분이 다분하다. 상가에서 분위기 띄우기 때문인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맘속 깊은 곳에 명절이란 개념이 있고 또 명절을 통하여 그무엇을 잇어 나가려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몸은 비록 부모곁을 못가지만 마음은 언녕 부모님곁에 가있다. 어제 안해는 슈퍼에서 기름에 튀긴 원소(元宵 )를 사왔다. 집에서 원소를 튀길려면 기름냄새도 나고 귀찮기 때문이다. 원소를 빼여 놓고 보름을 쇠였다고할수 없다. 이것은 중국북방지구의 전형적인 보름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애가 하나 먹어보고 하는말이 "엄마가 한것보다 맛없어요"라고 한다. 그저 엄마가 한것이면 다 맛있다고 한다. 그러니 엄마는 흔쾌히" 내일 집적튀기여 줄게"라고 한다. 자식의 요구라면 뭐나 만족시켜 주려는 부모의 맘이다. 우리민족은 보름날 아침에 귀밝이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다. 그것이 안해의 말을 잘 들으라는 이야긴지 아니면 세간에서 나도는 좋은 말만 잘 들으라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내가 생각할때 옳은 말은 잘 듣고 받아 들이라는 충고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얼마나 슬기로운 민족인가. 새해 벽두에 귀밝이 술이(聪耳酒)라는 아주 작은 행사를 통하여 옳고 바른 것을 귀담아 듣고 그르고 나쁜말은 멀리하라는 충언을 세세대대에 전해왔다 . 보름날 우리민족은 오곡밥을 지어 먹는 습관이 있다. 이것은 오곡풍등(五谷丰登)하고 국태민안(国泰民安)을 기원하는 우리민족의 소원이 담겨져 있다. 오곡이라니 옛날에는 특정된 벼 좁쌀 대두 밀 黍등을 말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곡이란 풍요롭다 건강하다로 리해할수 있다. 곡간을 털어서 맛있고 건강한 오곡밥을 짓으라. 요지음 집밥을 먹으라는 충고가 있다. 너무 나돌지 말고 손수지은 오곡밥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 줄 것이다. 아침 반찬으로는 지난해 말린 채소를 무친다던지 복아서 내놓는다. 하긴 조선반도에 정월대보름때 신선한 채소가 나올수도 없었다. 지금은 아무 계절이라도 푸른채소가 많다. 그러니 옛날에는 임금님이라도 계절을 뛰여 넘을수 없었다. 고사리 더덕 도라지 가지 고추 무우등 말린채소를 물에 담구었다가 료리를 만든다. 듣는 말에 의하면 말린채소에 비타민이 푸른채소에 바하여 더 많이 함유되였다고 한다. 저녁이 되면 달맞이 놀이가있다. 연변지구에 과거에는 실외에서 특정된 달맞이 놀이가 없었다. 다만 우리 민족은 집에서 윷놀이를 논다던지 글귀를 알아 맞춘다던지 하는 놀이가 있었다. 남녀노소 한구들에 모여앉아 "몽이야""쓩이야"하고 소리치며 유쾌히 웃을 때 액은 사라지고 복은 다발로 들어올것이다. 윷놀이로 가정의 단합과 화목을 기원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달집 태우기를 배워온 것 같다. 정월대보름날 저녁 나무를 어기여 세워 놓고 그밑에 장작을 쌓아 올린다. 달이 솟아 오르면 달집에 불을 질러 놓는다. 활활 타오르는 저불길은 지나간 한해 액운을 다 태워 버리고 우리의 건강과 사업을 지켜줄 것이다. 한해 지계는 봄에 있다(一年之计在于春)고 말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하였다. 보름도 맞이 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대자연의 섭리란 이처럼 막강한 것이다. 우리 모두 신들메를 조이자. 또 한껨의 경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본문보기
42
평양
댓글:
조회:
1186
추천:
0
2019-02-18
평 양 내가 처음으로 평양유람을 다녀온것은 1998년9월이였다. 그때 평양유람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컸던것도 사실이였다. 평양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오늘 과거 서류들을 뒤적거리다가 평양유람때 쓰던 작은 수첩을 발견하게 되였다. 번져보니 당시의 유람일정과 소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주 반가운 발견이였다. 하여 오늘 나는 그것을 정리하게 되였다. *************** 9월7일 연길에서 출발하여 삼합해관에 도착. 정심에 회녕에도착. 늦은 정심식사를함. 저녁6시 청진어랑비행장에 도착. 저녁8시 평양순안비행장에 도착. 9월8일 오전 만수대 수령님동상에 꽃바구니를 드림.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 인민대학습당 만수대극장앞에서 기념촬영. 오후 개선문 천리마동상참관. 만경대고향집을 방문. 돌아 오는 길에 소년궁전을 참관. 저녁 교예연출을 관람 9월9일 오전 김일성광장 관례대에서 열병식을 관람. 오후 김일성체육장에서 학생들의 집단체조를 관람. 저녁 김일성광장에서 군중연출과 회불행진을 관람. 9월10일 아침7:30식사 묘향산으로 출발. 정심 청강산려관에서 식사. 묘향산국데친선전람관을참관. 오후 묘향산 등산 . 만폭동 구천폭포 정자3개등을 구경. 저녁 9시 평양에 돌아옴 9월11일 아침 뻐스로 원산을 출발. 5시간의 로정. 평양에서원산까지 거리 200킬로메터. 원산에서 정심식사. 원산에서 금강산130킬로메터. 금강산에 도착하여 온천욕함. 저녁식사후 노래방. 9월12일 금강산에 오름. 폭포높이 73메터 담깊이14메터. 하산후 정심식사는 3일포에서 어죽을 먹음. 원산에서 저녁식사함. 우리유람단에 환자가생겨 강원도 도립병원을 찿음. 9월13일원산에서 평양으로 출발. 오후 사적지를 방문. 조국해방전쟁기념탑 강사 홍련희 주체탑강사 김씨 9월14일 개성과 3. 8선을 방문. 평양으로 돌아와 지하철을 참관. 저녁에 조선기록영화를 관람. 9월15일 귀국. 평양에서 청진까지 비행기로 이동 청진에서 회녕까지 조선뻐스로 이동. 삼합에서 연길까지 려행사뻐스로 이동. ************************ 9월30일 조선방문을하고 돌아온지도 벌써 2주일이되였다. 방문기간은 9일8박이라 짧고 긴장한 려정이였으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았다. 9월7일(월요일) 아침 택시를타고 연변직공려행사에 도착하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스산한 날씨였다. 그래서 인지 아직 도착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허나 뻐스가 떠날 때 보니 70여명의 대부대 못지 않은 제법 큰 유람단이였다. 같은 뻐스를탄 이들로는 강동무와 이름모를 사람들이다. 어쩐지 면목있는 사람이 한분 있었는데 후일 알고 보니 한계통에 사업하는 김씨성을 가진 분이였다. 그때 한창 룡정삼합도로를 수리하고 있었다. 뻐스는 연길을 떠나 2시간넘게 달려서야 삼합해관에 도착하였다. 회녕해관의 검사까지 마치고나니 정심시간도 훨씬 지나간때였다. 하여 회녕식당에서 정심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채와밥은 상에 올린지 이슥하여 모두 식었다. 두부전이며 고사리무침이며 감자탕도 올랐다. 정심식사를 끝내고 우리뻐스는 청진시를 향해 달리였다. 뻐스는 일본제중고차였다. 차에는 이미 평양에서온 안내들이 타고 있었다. 회녕과 청진사이 거리가80킬로메터라 그리 먼거리가 아니였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꽤나 오랜 기간을 달리였다. 오래만에 보는 조선경치라 나는 무시로 차창밖을 내다 보았다. 작은 시가지 몇개를 지나니 멀리에 청진시가지가 보인다. 청진시내에 들어설렵부터는 제법 큰 비가 린다. 어랑비행장을 바라고 달리던 뻐스는 도중 다이야가 펑크내고 말았다. 기사동무는 비를 맞으며 다이야를 수리하였다. 어랑비행장에 도착하고서야 시름이 놓인다. 어랑비행장은 군용 비행기장이였는데 프로펠라식 비행기도 보였다. 모든 검사와 수속을 마치고 우리는 드디여 탑승하게 되였다. 비행기는 쏘련제품이였다. 우리는 자기의 물품을 선반에 올려놓았다. 안전띠를 매고 차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끊었고 서쪽하늘에는 붉은노을이 지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대부분 사람들은 중국유람객들이고 소수의 조선분들이 우리와 함께 탑승하였다. 가슴에는 많은 훈장들이 달고있었는데 나라에 공훈이 큰 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강동무에게 사진한장 찍어달라고 부탁해 놓고 밖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밤이다. 근 한시간을 비행하여 우리는 평양순안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평양상공에서 바라본 평양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비행기에서 내려 맥주상자를들고 약싹바르게 달려나오는데 촬영사들이 사진을 찍는다 록화한다하며 분주하다. 참으로 체면이 깍기는 일이였다. 돈을 절약한다고 맥주와 명태를 가지고왔는데 하필이면 이장면을 찍을건 뭐람. 나는 촬영사들을 향해 손을저으며 "찍지마세요"라고 말했다. 출국하기전 려행사에서하는 말이 우리의 모든 행적은 록화하여 매개인에게 나누어 준다고 했다. 우리 유람단이 7개소조로 나뉘였으니 7명의 촬영사가 공항에 나온것이다. 공항에서 유람뻐스를 타고 시계를보니 평양시간8시다. 회녕까지 마중나왔던 조선측안내 김씨가 우리4조사람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을 향해 선포하기를 내가 단장이라 한다. 하여 9일간의 단장벼슬을 하게되였는데 사실은 심부름꾼이자 출납이다. 저녁은 청광산호텔 2층3호식당에서 먹었다. 연회식당은 규모가 컸다. 식사후 나는 안내원동무를 침실로 청하였다. 나는 상냥한 어조로 평양에사촌누님들이 살고 있는데 만날수없는가고 문의하였다. 헌데 허가가 나야 만날수있지 사사로이는 절대로 안된다고 그루를 박는다. 그날저녁 우리는 조선의 최고급 호텔 고려호텔을 찿았다. 호텔은 규모가 아주 컸는데 깔끔한 옷단장을 한 사람들이 오갔다. 커피와 쥬스를 마시면서 호텔안을 살펴보니 외국손님들도 적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서 보니 많은사람들이 손에 꽃을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12시가 다되여가는 이때 무얼하는걸까 물어보니 국경절 절목 연습학생들이라고 한다. 대단히 수고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운동복차림을 하고 호텔에서 나왔다. 빙산관 체육관이 눈앞이다. 말지 않은 곳에 채완공되지 않은 류경호텔도 보인다. 사람들은 아침 청소에 분망하다. 뻐스정류소에서는 신문을 보는 사람들도 보였다. 오전에는 만수대 김일성수령님 동상에 헌화하고 인사하는 행사가 있다. 우리 순서가 되여 만수대언덕에 도착하니 많은 차량들이 정차되여 있다. 정복차림의 사람들이 손에 생화를 들고 줄을 지어 수령님동상에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린다. 재일본교포들 행렬이 많이 보인다. 평양시민과 재일본교포들 모두 수령님초상을 가슴에 모시고 있었다. 제132차 방문단의 인사순서가되여 우리는 꽃바구니를 드리고 정중히 인사를올리였다. 귀중한 기념사진도 남기였다. 다음 뻐스를 타고 만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려 떠났다. 기념궁전에 도착하여보니 재일본교포방문단이 이미 도착하여있었다. 안전검사를 마치고 차레순서로 자동인행도를 리용하여 궁전안으로 이동하였다. 내부는 대단히 깨끗하게 정돈되여 있었다. 우리는 수령님석상이 모셔진 홀에 들어 섰다. 일렬에 다섯명 씩 앞으로 나와서 수령님석상에 인사를 드리였다. 군인들이 총을 잡고 량켠에 줄지어 서있었다. 이때 기념록화는 전문으로 안배된 촬영사들이였다. 기념궁정 정상에 올라가니 수령님의 유체를 모신 곳 이였다. 수령님 몸위에는 붉은 천이 덮혀 있었다. 우리는 허리 굽혀 세번 인사를 올리였다. 그때 조선주재 외국공관의 군관들이 들어 와서 군례로 인사를 올리는 것이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우리는 천리마동상을 보게 되였다. 어릴쩍 조선예술영화를 관람할때 첫화면이 바로 천리마동상이였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실물을 바라보니 너무도 흥분된다. 그리고 개선문도 마찬가지다. 어제날 화보나 기념사진에서만 보아 왔던 웅위로운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니 너무도 격동된다. 인민대학습당은 조선에서 가장크고 선진적인 도서관이다. 우리는 인민대학습당과 만수대극장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정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만경대고향집을 찿아 떠났다. 만경대고향집은 평양시중심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지였는데 그곳에는 나무들이우거지고 땅에는 잔디가 곱게 자라고 있었다. 고향집을 방문하려 오는사람 방문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하는 우리의 마음은 경건했다. 우리는 수령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차레로 찿아 인사를 올리였다. 강사선생님의 소개에 따르면 이집은 옛날 지주의집이였는데 할아버지때 산소를 봐 주기로하고 빌린 집이 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바로 이집에서 탄생했다. 김정숙어머님께서 아버지 어머님한테 선물한 벽시게가 고향집의 벽에 걸려 있었다. 장군님께서 조국광복후 나라일을 보시던나날에도 다녀간곳 하루밤깔고주무시였던 멍석과 이전짜리 독도 전시되여 있었다. 우리는 만경대고향집 울바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우물맛도 보고 만경대정자에 올라 평양시내도 바라보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돌아 오는 길에 보니 만경대유람터가 잘 정비되여 있었다. 우리는 소년학생궁전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저녁에는 예술인들의 교예공연을 관람하였다. TV를 통하여 익숙해졌고 또 연길까지와서 공연을 벌리였던 종목들이라 너무도 친근하였다. 9월9일은 조선의국경절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일어나 식사하고 열병식과 군중시위를 관람하려고 서둘렀다. 안전검사를 마치고 김일성광장 오른쪽 관례대에 올랐다. 인민군의 검렬은 위풍당당하였고 군중시위는 열열하였다. 김정일총비서께서 나오시여 군중들에게 손을 젓어 인사한다. 격동된 군인과 시민들은 만세를 외치는데 그소리가 하늘을 진동한다. 전투기가 하늘을 날아가는데 김정일총비서를 옹호하는 글발이 달려있다. 오전 행사가 끝난뒤 정심에는 특식이 있다고 했다. 연회주최측에서 남자들에게는 긴바지에 넥타이를 착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특식전에 행사주최측의 간부연설이 있었다. 특식은 서양식 비슷하게 칼 포크 잔3개씩을 올리였다. 여러가지 맛나는 료리들이 나오는데 당시 조선의실정을 감안하면 진짜로 특식이다. 당시 조선은 몇년을 이어오는 자연재해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학생들의 집단체조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5. 1경기장에는 10만명의 관중이 입장 할수 있는 대형 경기장이다. 과거에 록화나 영화에서 만 보았던 집단체조 너무나도 환상적이였다. 세계의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집단체조였다. 수만명의 청소년학생들이 공연하는데 동작이 일치하고 멋지게 하는 품이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할수 없는 최고급 수준이다. 저녁에는 회불시위를 관람하게 되였는데 아름차다! 가관이다! 힘이다! 결사적이다라는 느낌이 가슴에 닫는다. 그처럼 곤난한 국제환경과 국내사정에도 상관없이 주체조선을 온 세상에 시위하고 있었다. 저녁에도 김정일장군님께서 나오시여 집회를 관람하시였다.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하늘 땅을 진감하고 꽃불이 밤 하늘을 곱게 수 놓았다. 멀리 주체사상기념탑의 회불이 밤하늘을 비추어 준다. 다음날은 묘향산구경이다. 아침 일찍일어나 시내구경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같이 유람간 두분을 만났다. 그들과 이야기하며 보통강변을 거닐다 보니 아침식사 시간을 어기였다. 부랴부랴 식당에 뛰여가 아침을 먹고 나오니 다른팀들은 다 떠나가 버리고 우리 팀만 남았다. 묘향산까지의 거리는 두시간 정도라고 한다. 도중에 차집에 들려 차도 마시고 휴식도 하고 우리는 계속 묘향산을 바라고 길을 조였다. 우리는 먼저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하고 식사후 묘향산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국제친선전람관에는 세계각국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가득 전시되여 있었다. 국제사회의 여러나라 령수 군인 상인 우호인사들이 김일성원수님께 선물한 례품은 한점앞에서 일분씩 하루에 8시간씩 관람하여도 1년6개월이 수요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수가 얼마나 방대한지 알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에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사용했던 무기등 별라별 선물이 다 있었다. 중국정부의 력대 령수들이 선물한 례품도 많이 전시되여 있었다. 자지오 축음기 가구도 있었다. 이제 김정일관도 세운다고 하는데 명년쯤이면 그곳도 관람 할수 있다고 한다. 관람을 끝내고 6층 로대에서 맥주를 마시며 사진도 찍고 또 노래도 하였다. 묘향산의 안개낀 골짜기를 바라보니 참 신선이 된 같은 느낌이다. 조선동지들과의 휴식의 한때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오전의 활동을 마치고 정심은 청강산여관에서 먹었다. 식사후 모두들 신들메를 바싹조이고 등산준비를 하였다. 묘향산은 말 그대로 아름답고 절묘한 산이였다. 우리가 등산하는 선로에는 폭포가 여러번 나오는데 폭포 옆으로는 등산길이 나져있다. 우리가 묘향산에 오르던 날 평양상업대학 급양학부의 1학년학생들과 상업부복장공장의 청년들도 묘향산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휴식의 한때를 즐기였다. 난폭동 비성폭포등은 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아름다움과 정결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질무렵에야 우리는 하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도토리를 줏는 어린이 젊은이 노인들을 만나게 되였다. 등에진 배냥은 허리휘도록 무거워 보였다. 우리는 빈손으로도 등산하기 힘든데 그분들은 그 가파로운 길을 오르고 내리고 할려니 얼마나 힘들까. 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묘향산에서 촬영가 동무가 수고 많았다. 7킬로그람이나 되는 촬영기를 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의 모든 행사를 촬영해주었다. 늦게 돌아 왔다고 총안내의 꾸지람도 들었지만 유람의 기쁜 하루를 보낸것으로 하여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내일은 금강산으로 간다. 금강산은 강원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양시에서 200킬로메터 거리다. 원산에서 정심을 먹고 금강산으로 달리던 도중에 차집이 있어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휴식하였다 . 그리고 어떤이들은 바다물에 뛰여 들어 수영하고 어떤이들은 해변가에 가서 조개도 주었다. 내륙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바다 구경이 흔치 않다. 넓고 푸른 바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수영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바다물에 발목을 적신다. 세시간 가량 바다가에서 놀다가 다시 뻐스를 타고 우리는 금강산호텔에 도착하니 이른저녁이다. 1974년도에 건축한 금강산호텔은 아주 멋진 건축물이였다. 이전에 중국의 대학들이 건축양식을 배우려 조선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금강산에는 온수욕이 있었다. 2인용이 48원이라고 한다. 물이 어쩌나 맑은지 유리 같은데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어느새 온갓 피로가 다가시여 진다. 저녁까지 먹고 나니 기분 또한 만점이다. 식후에는 꼭대기층에 올라가 맥주를 마시였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흥이난 우리들은 옛노래와 아름다운 춤사위로 놀이판을 고조에로 끌어 올리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우리는 금강산구경에 나섰다. 유람객들은 신비한 금강산의 모습을 보려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조인다. 금강산은 돌이 많고 계곡이 많은 것이 특점이라 하겠다. 기암괴석이 많다. 여러가지 모양을 한 바위들 돌 쯤 사이에 자라난 소나무들 그리고 바위 사이로 흘러 내리는 계곡의 맑은물 이 모든 것이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내였다. 금강산은 조선5대명산중의 하나로서 4개절의 변화에 따라 4개의 듣기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금강산이요 여름에는 봉래산이라 가을에는 풍악간이요 겨울에는 설봉산(개골산)이라 부동한 계절에 각이한 측면을 보여주는 실감적인 이름이다. 옛 사람들은 금강산의 매력에 매료되여 많은 글귀들을 남기였다. 큰바위들에는 고인들이 적어 놓은 글흔적들이 많았다. 금강산에서 제일높은곳의 폭포의 길이는 73메터 담의 깊이는 14메터라고 한다. 우리는 폭포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묘향산의 방문과는 달리 금강산에는 조선유람객들이 많이 찿아와 있었다. 옷차림이 평범한 유람객들이 질서 정연하게 등산도 하고 여럿이 모여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기념촬영도 하고 있었다. 금강산구경내내 수옥동무는 맥주와 음료를 넣은 보온상자를 메고 우리들의 안내를 해주었다. 너무 힘들어 하는 같아 우리는 주동적으로 맥주와 음료를 사마시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말이다. 돌아 가는 길에 수옥동무는 하차하고 우리는 그대로 3일포로 향했다. 옛날 왕이 하루만 쉬여가려고 했다가 경치가 하도나 좋아서 3일묵어갔다고 해서 지은 이름 3일포다. 그리고 김정숙어머님께서 총한방에 300메터밖의 물오리를 쏘아 떨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3일포이기도 하다. 원래 3일포에서 조개구이를 먹으려고 했으나 가스가 없어서 못하고 어죽을 먹고 나왔다. 어죽맛이 일품이였다. 그후 조선분들과 배놀이도 하고 이야기나누다 헤여지고 또다시 원산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 원산에 들어서니 우리를 맞는것은 송도원려관이다. 요지음 조선은 사정에 의하여 전력이 부족하다. 하여 우리가 려관에 들어설 쯤에도(이미 날이 어둡기 시작함) 대청에는 불이 밝혀 있지 않았다. 원산은 조선의 해군기지라고 한다. 원산의 앞 바다가 아름다웠다. 송도원려관은 바다가에 들어선 소나무숲속에 자리 잡았는데 진짜로 풍경 좋고 공기 좋은 곳이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먹고 우리는 평양을 바라고 떠났다. 평양에 들어서니 정심 시간이 되여간다. 우리의 뻐스가 통일거리를 지나는데 그거리는 넓고도 평탄했으며 길량쪽의 건축물들도 굉장이 아릅다웠다. 정심을 먹고 오후에는 조국해방전쟁탑 주체탑을 견학하였다. 주체탑의높이는 176메터이고 주체건물의 높이는150메터라고 한다.승강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보니 평양시내가 한눈에 안겨 온다. 평양시인구가 약170만명정도라고 한다. 그곳에서 영어안내를 맡은 한 안내원동무를 만났다. 내가 영어는 출국하여 배운것인가고 물으니 국내에서 배웠다고 한다.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였다. 평양에 도착하던첫날 뻐스가 평양시내를 들어 서는데 높은 건물우에 네온등으로된 "조선은 하나다"라는 글발이 보였다. 어릴때 조선방송을 통하여 익숙해진 노래 제목이다. 통일이냐 분렬이냐 엄숙한 이시각에 대를잇어 나가자 통일의 한길로 조선은 하나다. 이튿날 우리는 3.8선을 참관하기로 하였다. 먼저 개성시내에 들려 거리도 구경하고 정심도 먹었다. 개성시하고 판문점은 아주가까운 거리다. 판문점의 회의장소 사이에는3.8선이 놓여있었다. 한20센치메터폭의 콩크리트뚝이 남과 북을 갈라 놓았다. 민족의 비극이였다. 남쪽 하늘에는 태극기가 휘날리 였고 북쪽 하늘에는 공화국국기가 휘날린다. 3. 8선을 중심으로 량측 2킬로메터내는 비군사지역이다. 여기에서는 학이 날아 예고 이름모를 새들이 지저긴다. 듣는바에 의하면 비군사지역에는 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에 돌아온 우리는 지하철을 견학하였다. 지하궁전같은 평양지하철은 세상에도 이름 높다. 1974년도에 완공된 지하철은 아주 높은 예술성과 전략성을 보여주었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벽화와 커다란 전등불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세인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기록영화를 관람하였다. 이튿날 우리는 비행기편으로 순안비행장에서 떠나 청진 어랑비행장에 내리였다. 때는 오전9시다. 다음 회녕을 바라고 달리다가 도중에 평양에서 가지고 온 곽밥으로 정심을 해결하였다. 오후3시에 삼합에서 뻐스를 탓는데 연길에 도착하니 5시가 넘었다. 9일8박의 조선방문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진짜로 한번쯤 경험해 볼 만한 유람이다.
본문보기
41
대전
댓글:
조회:
1181
추천:
1
2019-02-11
대 전 대전(大田) 처음으로는 노래에서 들어보았다. "서울 대전 부산 찍고"이런 노래를 들어도 보았고 불러도 보았다. 대전은 한국의 5개광역시중의 하나다. 도시인구는 2018년말 기준으로149만명으로서 충북지역에서 그 위치가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년유람객500만명을 유치하고 있고 앞으로 3년안으로 1000만명까지 유치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고 있다.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우리는 이번 설행사 모든 일정을 기본상에 마무리하고 오전에 서울에서 세종으로 내려왔다. 나머지 행사라면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당지 맛집도 돌아보고 장구경도하고 집으로 안전히 돌아가는것 뿐이다. 우리는 촌에서 시내로 장보려가듯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떠났다. 동서 이야기가 "이동네는(조치원)시골이요. 볼것도 없고하니 대전구경이나 가기요. "조치원에거 대전까지는 반시간 거리였다. 그러니 시내구경삼아 물품구입삼아 대전으로 다닐만도 하다. 특히 우리에게는 부담없는 안성마춤한 거리다. 차에서 내려 역을 나와보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에 와보면 광주나 대전이나 역전주변의 건물이 비슷비슷하다. 새 건물과 낡은 건물 고층과 낮은 건물이 공존하고있다. 지금 중국의 대부분 역전건물은 체적이 크고 웅장하다. 한것은 중국이 대국이고 인구가 많은 것과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파가이주가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쉬운편이다. 한국은 대부분 건물이 개인소유로써 영원한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다. 하기에 건물 소유자의 허락없이는 파가이주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동서의 제안으로 시장구경에 나섰다. 대전역전 동쪽에는 도서방향의 대전로가 놓여 있는데 길 북쪽에는 역전시장 남쪽에는 중앙시장으로 나뉘여 있다. 역전시장은 재래식시장으로서 대부분 먹을거리를 팔고 중앙시장은 경공업품 시장으로서 여러가지 옷 신발 생활용품을 팔고 있다. 중앙시장의 규모가 엄청 크다. 중앙시장은 중앙로동쪽 대흥로서쪽 대천동로 북쪽 대전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시장안에는 8갈래의 거리와 3갈래의 길이 중앙시장을 마치 두부모 베듯 여러개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각구역마다 팔고 있는 물건이 구별된다. 시장안에 길을 내여 차량들의 출입에 편리를 도모하여 주었다. 중앙시장의 지붕은 높고도 환하다. 찬연한 해빛이 유리지붕으로 비쳐들어와 시장안을 밝게 비추어 준다. 여름에는 비를 막아주고 계울에는 바람을 막아준다. 한국시장은 대부분 이런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중앙시장에서 여러가지 원단으로 제작된 한복이 전렬되여있는 전문매점이 많다. 한복이 어찌나 이쁘게 만들어지였는지 구경하노라면 자연히 발길을 멈추게 된다. 전통의상과 개량형의상이 너무도 화려하고 아릅답다. 우리민족복장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나는 다시 한번 긍지감을 느끼게 되였다. 각종 침상용품도 사람의 눈길을 끈다. 칠색단으로 누빈 전통비단이불이 보이는가하면 간편하게 제작된 꽃이불도 보인다. 그외에도 복장 모자 신발 장갑 가방등 상품들이 즐비하게 전렬되여 있다. 상가들사이에는 드문드문 먹거리를 파는 집들이 보인다. 장구경은 역시 먹거리와 결합되였을 때만이 가장 큰 매력을 과시하는가 보다. 종합시장에서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생필품을 구입한 우리는 시장 서쪽 골목에 위치한 유명한 칼국수집을 찿았다. 헌데 만석이란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우리는 겨우 자리를 잡을수 있었다. 우리가하는 말을듣던 식당남자직원이 다가와서"중국에서 왔습니까?"고 웃으며 뭇는다. "우린 연길에서 왔습니다. " 직원은 익쌀스러운 표정을 짓으며 "나는 화룡"라고 한다. 칼국수의 국물이 아주 시원하다. 량도 많다. 특히 국물의 톡 쏘는 듯한 맵고도 칼칼한 맛이 입맛을 당긴다. 연길에는 투도온면이 맛있다면 대전에서는 ㅇㅇ칼국수가 일품이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따스한 해볓이 온누리을 비춘다. 따스한 해볓을 맞으며 우리는 대전천강뚝을 거닐었다. 일요일이라 도보운동하는사람 자전거운동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강물에서는 커다란 고기가 유유히 헤염치고 있고 하늘에서는 이름모를 새무리들이 날아여고 있었다. 전번에 평택에 갔을때도 강뚝길을 따라 도보운동한적이 있는데 보매 한국의 하천치수가 잘된것같은 느낌이다. 자연의 진면모를 최대한 보류하는 한편 또 살기 좋고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낸것이다. 우리는 재래식 대전역전시장에 들어갔다. 여러가지 해산품 말린 물고기 채소 조미료 과일등이 즐비하게 전렬되였다. 장에는 먹거리를 사려온 가정주부들로 붐빈다. 물건을 파는사람들은 대게 로인들이 많다. 시래기를 파는 것이 보이 길래 물어보니 한줌이 될가하는 한단에 4000원이라고 한다. 감자 파 배추 시금치등은 무지를 단위로 하여 판매 한다. 한국의 도량형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어떤것은 400그람에 한근이라라고 어떤것은 600그람이 한근이라고 한다. 사과같은것은 또 하나에 얼마라고 한다. ㅎㅎㅎ 집으로 돌아올때 보니 장보기 수확이 적지 않다. 오른손 왼손에 모두 구럭이들려있다. 장도 보고 정심도 먹고 재미있는 하루였다. 충북대전은 멀고도 가까운 곳이다.
본문보기
40
목포
댓글:
조회:
1143
추천:
0
2019-02-09
목 포 어제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 오는데 광주에 사는 문사장이 전화가 왔다. "형님 우리 동네는 안 오는게요. 여기 와서 놀다 가라우. " 내가 시간을 보아서 결정한다는데 기어이 오라고 한다. 일단 간다고 대답해 놓고 집에 들어와 누나와 매부에게 어떻게 광주로 가는가 시간은 얼마나 필요한가를 상세히 자문하였다. 이때 아들애가 "3 호선을 타고 충무로에 가서4 호선을 갈아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광주가는 KTX를 타고 광주송정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했다. 요지음 인터넷이 발달하여 참으로 편리하다. 나는 모든 필요한 사항을 다 체크해놓았다. 이때 문사장이 또 전화왔다. "몇시 차를 타는겨. " "7:40분 케텍스야. 10:05도착" "알았수. 내가 역에 나간다우" 그런데 기차가 광주에 도착하는 시간은 9:39분이고 목포에 도착하는 시간이야 말로 10:05분이다. 잘못된 기억으로 하여 후에 기차역을 지나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역에 나가야 한다. 오늘 아침 내가 일어나 시간을 보니 5시다. 집에 있을 때 이맘때 일어 나는것은 보통이다. 헌데 서울와서는 기침시간이 억망이다. 생활규칙이 변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내가 살금살금 옷차려 입는 다는것이 매부와 누님에게 발견되였다. "아침 먹고갈거요?" "아니. 가다가 길에서 먹을게" 밖에 나오니 행인이 안 보인다. 다만 가게안에서 일하는 아줌마와 고기집아저씨의 뒤모습만 보인다. 너무 이른 시간이다. 늦은 새 먼저 날으라고 물어보며 가는길이라 빨리 떠나야 마음이 편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사람이 그리 많지않다. 현금으로 승차권을 살려니 줄서기가 필수다. 하긴 자동찬매기를 리용할줄 모르니 말이다. "6시20분 기차가 가능합니다. 3분남았습니다. " 여기저기 가서 묻고 갈팡질팡 뛰여 갔더니 기차가 떠나 간다. 원래7:40차를 탈려고 나왔는데 쇼 한번 한섬이다. 다시 표를 바꾸어 가지고 대기실에 돌아 왔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대기실 여기저기 둘러 보기도하고 기웃기웃 거리기도 하였다. 말이 서울역이지 북경이나 상해역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손님도 확실히 적다. 전남광주는 이번이 첫걸음이다. 일전에 한국영화 "택시"를 본적이 있다. 한국예술영화로는 첫음으로 본 완정판이다. 광주5. 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였는데 아주 감동적이다. 돈 한푼이라도 더벌려고 다른사람의 일거리를 가로챈 택시기사가 외신(外信)기자를 모시고 광주에들어가 운동전반과정을 채방하고 돌아오는 험난한 과정을 다룬 이야기다. 민중의 생활과 심리활동을 잘 반영한 작품이였다. 듣는바에 의하면 지금도 5. 18민주화운동에 대한 견해가 여러가지라고 한다. 전남에는 목포항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목포의 눈물" 이 바로 목포 이야기다. 그리고 고 김대중대통령의 고향이다. 과거에는 목포가 광주광역시보다 큰 4대도시의 하나였다고 한다. 물론 김서기한테서 얻어 들은 소리다. 고속렬차는 남으로 남으로 향해 달려 간다. 이국땅 낯선 풍경이 차창밖으로 보인다. 도시도 보이고 논도 보인다. 레시바이를 귀에 걸고 음악감상에 들어갔다. 노래가 좋다. 고개를 끄떡끄떡 거리며 안하던 짓을 했더니 사고를 빚어냈다. 아직 10시가 안되였는데 렬차가 광주송원역이 지나가 버리였다. 아불싸. 기차 도착시간을 착각한 결과였다. 어떡하지? 문사장은 이런줄도 모르고 전화온다. "내리였어?1호출구로 나오라구" "깜빡했어 . 목포갔다가다시 올라올게" "아니요. 원래 목포로 가기로 했어" "역전에서 기다리오. 내인츰 내려갈게" 목포탐방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원했던 싫어 했던 코스는 여기서 부터 시작되였다. ㅎㅎㅎ 플랫트홈에서 나온 나는 기차역 부근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목포의 기본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목포는 큰도시가 아니다. 기차역 부근에는 나즈막한 상가들이 많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적은 눈까지 내리는지라 나는 역전대기실로 다시 돌아왔다. TV에서는 남북고위급회담 뉴스가 한창이다. 이때 누가 어깨를 툭친다. 문사장이 나를 보며 호탕하게 웃는다. 나도 웃어버렸다. 인츰 렬차를 타고 내뒤를 쫓아왔던 것이다. 정심때가 되여 오는지라 우리는 역전부근의 음식점으로 들어가 간단히 정심을 해결하기로 하였다. 이른 아침에 집을나온 나도 사실 어느정도 배가 촐촐해났다. 정식 정심식사는 오후에 횟집에 가서 문사장누이동생과 매형같이 하기로하였다. 식사후우리는 택시를 타고 바로 부두로 향했다. 바람은 더 세차게 불고 눈도 더 많이 내린다. 이것이 바로 고추가루 팔려 가면 바람이 분다는 식이다. 목포의 눈물이라더니 나의 눈에는 눈물(雪融水)이 흘러 내리였다. 부두에서 사진 찍고 나서 우리는 커피점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는 사업이야기 친구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사장은 한국에 나와 꼬치집두개를 경영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사장의 녀동생과 매형이 광주에서 우리를 찿아 목포로 내려 왔다. 열성이 대단하다. 우리가 찿은 집은 금강산횟집이라고 진도다리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 김대중대통령이 찿았을 만큼 유명한 집이였다. 맛있는 회를 안주하여 진도홍주를 마시였다. 배불리 맛있는 정심을 먹고나서 우리는 진도(珍岛)로 들어가 전망대에 올랐다. 여기가 바로 리순신장군이 13척의 배를 거느리고 왜놈의 133척배를 전승한 곳이다. 전망대에는 리순신장군의 업적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이 전시되여 있었다. 리순신장군은 한국의 자랑이자 민족의 자랑이다. 우리는 거북선도 구경하였다. 문사장의 매형은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박식한 분이였다. 리순신장군에 대하여 목포에 대하여 료해가 깊었다. 하기에 우리는 많은 참신한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정심도 잘 먹었겠다 구경도 잘하였겠다 우리는 광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참으로 감사한 사람들이다. 기차역을 놓쳐버린 나를 찿아온 문사장과 문사장의 누이동생 그리고매형이 목포로 내려온것은 순전히 나를 초대하기위해서였다. 음식은 너무 달고 술은 너무향기로왔다. 문사장은 나보고 극구 만류한다. 저녁을 먹고 내일 서울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전주에는 구경거리도 많고 음식맛도 좋아 한다. 허나 더 체류할수 없다. 내일에는 일찍이 청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엔들 헤여지지 않는 만남이 있겠는가. 이번 한국방문길에서 다시 한번 친구들의 정과 우의를 한몸으로 느끼였다. 그토록 바쁜 시간을 내여 동무하여 주고 식사를 초대 하여준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본문보기
39
고향
댓글:
조회:
1467
추천:
0
2019-02-08
고 향 고향이 어디 냐고 물으면 자기가 태여난 곳을 말하게 된다. 즉 자기의 출생지를 알려 주게 된다. 허나 어떤 분들은 고향을 부모님들의 출생지로 간주하는데 중국에서 말하는 적관(籍贯)쯤으로 생각하는 같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부모님들이 살아 계시던 곳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지금 5~6십대의 사람들이 부모님의 고향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참 아쉬운 일이다. 최저로 아버지세대가 어디서 태여 났고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알아야 한다. 가정성원으로서 자기의 뿌리를 알아야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더 깊어 질수있다. 요지음 족보를 찿고 종친회를 구성하고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허나 이것처럼 요란하게는 아니더라도 조상들의 명맥을 이어 나간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가족력사를 아는것도 도리라고 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 마치 노래 부르는것처럼 말이다.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 갑산1리 라고 말이다. 아버님은 18세에 고향을 떠나 만주로 왔다. 그뒤로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그러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대단하였다. 남북이 통일되면 우리을 데리고 고향에 간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시였다. 오늘은 아버님의 고향을 찿아가는 날 이다. 형님 누님 나 조카까지 4명이 경주를 찿아 가기로 하였다. 이전에 형님누님은 경주로 여러번 다녀왔다. 내가 한국에 왔다고 형님이 특별히 이번 행사를 안배하였다. 자식으로서 아버님의 고향을 참배하는것이 응당한 일이다. 조카가 차를 운전하여 가니 차를 갈아타는 번거로움을 면하였다. 평택에서 떠난차는 경주방향을 바라보며 달리였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온통 산이다. 이처럼 산구에서 농사는 뭘해먹고 사는거지? 차가 경주에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심장이 두근 거린다. 아버님의 동년의 발자취가 남아있을 그 땅을 밟게 된다는 격동 때문이다. 사전에 형님이 경주에 있는 4촌형님에게 우리가 간다고 전화를 하였었다. 했더니 형수님이 평택에 전화가 여러번 걸려왔다. 어떻게 오냐고 몇시에 도착하냐고 말이다. 그리고 포항에 사는 딸에게 전화를 하여 올라와 우리를 배동하도록 분부하였다. 차는 경주에 들어서기전에 오른쪽으로 돌려 산 내면 방향으로 달렸다. 나는 차창밖의 모든 것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어떤곳일까 옛날에는 어떠했을가 지금은 어떨가. 나로 말하면 조상의 발자욱과 숨소리가 슴배여 있을 고향에 다가선다는 그자체가 격동이다. 차는 산골짜기를 따라 달린다. 과거에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집들이 잘 건축되여 있다. 문화주택이라 할가 집자체가 깔끔하게 보인다. 큰형님이 말한다. "다왔어. 여기야" 차에서 내려보니 완전한 시골 풍경이다. 새로짓은 아담한 집은 널판자로 울타리를 둘었고 뜰안에는 경인기한대와 네바퀴오토바이가 서있었다. 집뒤에는 참대나무가 빼곡히 자라있다. 우리는 문앞에가서 "안녕하세요"하며 기척소리를 내였다. 헌데 대답이 없다. 출입문을 열고 들여다보는데 형수님이 나온다. "아이고야. 너들이 왔꼬나" "형수님 안녕하셨습니까?" " 너들 왜전화 안받노?" 급히 떠나오노라 형님이 전화를 휴대하지않았다. 형수님이 고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온다니 형수님은 형님에게 리발하려고 하던 참이였다. 형님과 누님이 사촌형님한테 인사를 올리는데 잘 알아보지 못한다. 치매가 온것이다. 어떤때는 알아보고 어떤때는 못 알아본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정이다. 형님과 형수님이 정좌하시였다. 우리는 옛법대로 큰절을 올리였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내내 건강하세요. " "너들이 오니 참 반갑다. 오노라 욕보았다. " "많이 기다렸다. 고생했다. " 처음으로 듣는 한씨집안의 관심이야기다. 인사가 끝나니 형수님이 식혜와 붙이개 과일등속을 내온다. 우리 아버님이 형제분이 8명이고 사촌형이 바로 제일큰형님의 큰아들이다. 종가집이다. 한해에 제사만해도 얼마지내는지 모른다. 여기서 우리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낸다고 했다. 저녁때가 되니 또 밥상을 갖추어 올린다. 아마 큰집에서 맨날 제사상차리던 연고인지 형수님의 일솜씨가 재빠르다. 올해75세의 나이지만 목소리가 챙챙하고 기억력이 비상하다. 딸과 사위는 우리를 챙기노라 여념없다. 포항에서 여러가지 료리를 준비해가져 왔다. 식사하는 내내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 했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편지가 왔던이야기 그편지를 받고 그처럼 즐거워하던 큰아버지의 이야기 등이다. 전에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와 삼촌들은 만주로간 우리 아버지가 돌아 간것으로 알고있었다 한다. 하여 아버지의 제사까지 지내였던 것이다. 남과북의 분단의 력사는 이처럼 친형육을 갈라놓았다. 민족의 비극이다. 초사흩날 저녁은 깊어 간다. 고향을 찿은 우리의 마음은 사뭇 설레인다. 뿌리를 찿아 왔다는 뿌듯함과 혈육의 정때문이다. 비록 아버지의 소년시절 유물들은 찿지 못했지만 이번 걸음이 참으로 잘된 결정이였다고 생각한다. 어느정도 아버지를 대신하여 귀향의소원을 이루지 않았는가는 생각이다. 오래 계시였으면 고향방문을 이루었으려만 너무 일찍 돌아가시였다. 내일은 포항으로 가야한다.
본문보기
38
그믐날
댓글:
조회:
1119
추천:
0
2019-02-06
그믐날 그믐날을 놓고 말할진대 설날 당일보다 더 굉장하고 열열하고 더의미가 깊다.수세(守岁) 란 옛날부터 내려오던 새해맞이 관습으로서 온밤 불을 켜고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다. 새날이 들어설때에 교자를 먹거나 밥을 먹는데 이것을 년야밥(年夜饭)이라한다. 맞이하는 한해 내내 먹이가 충족하고 가정이 번창하고 만사가 대길허기를 바래는 민중의 념원을 반영하였다. 그믐날 밤에 자면 안된다는 옛말도 많다. 귀신을 몰아내고 자기를 지켜내는 날인데 자면 큰 일난다고 어른들이 일러주기도 했다. 그믐날의 가장 큰 소원이라면 가족과 같이 모여 식사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다들 집에 돌아 가려고 한다.과거에는 타자방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설에돌아오기가 여러모로 힘들어 했지만 지금은 많이 다르다. 심지어 일본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부모님 모시고 설을 쇠려고 고향에 돌아 오고 있다. 부모님 모시고 쇠는 설이야 말로 가장 뜻깊고 행복한 설이다. 하여 부모님 살아 계시는 집은 대체로 자식들이 돌아와 설을 보내게 된다. 금년설 우리 집에서는 형님 누님이 계시는 서울을 찿았다. 형님누나들과 같이 설을 쇠여 보긴 20년이 되여 간다. 그믐날은 우리 형제들은 부천에 계시는 외숙모집에서 설을 쇠기로 하였다. 집에 들어서니 외숙모와 사촌동생이 한창 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통배추를 탕쳐 밴새속을 만들고 있다.우리와 같이 집에 들어선 누님은 인츰 팔을 걷우고 속을 만든다. 퇴직하고 나서 근년에는 한국에서 유희회사를 하는 딸의 뒤바라지를 해주고 있다. 18세 입당한 전형적인 볼세위크다. 헌데 조리과정에 대형사고가 내였으니 누님이 식초를 콩기름으로 착각하여 밴새속에 쏫아 부은 것이다. 모두들 걱정이다. 쏸차이(酸菜)로 밴새속도 할려니 더 맛있을 것이라고 나는 웃으개를 했다. 통이 큰 4춘 누이동생은 고기가 부족할것같다며 장으로 간단다. 나는 고기사려가는 4춘누이동생과 함께 시장구경에 나섰다.부천자래시장은 규모가 엄청 컸다. 우리 연길시장에서는 옷 등속이 위주지만 이동네는 먹거리와 일용품이 대부분 이다. 동생의 말이 중국 시장에는 먹거리가 많고 맛있지만 한국시장의 먹거리는 종류가 적고 맛이 쑬쑬다고 한다. 하긴 까마귀도 고향것은 희다고한다더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따뜻한 정때문이리라.고기시장에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고기집사장이 쪽걸상우에 올라서서 나팔에 대고 고함친다. "사십년 전통의 정육점입니다. 맛있는 되지고기입니다". 동생이 고기사는 사이 나는 장구경을 하였다. 고소한 냄새가나는 매대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부치개를 만들어 파는집이였는데 사람들이 줄지어 자기차레를 기다리고 이었다. 뭐든 다 붙인다.호박이며 가지며 심지어 배추잎도 붙인다. 맛이 어떨지 모르지만 배추잎 부치개는 별로 접수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니 밴새가 다 익었다. 오늘은 손님이 많다. 외숙모가정 누님가정 사돈집 우리집 도합18명이다.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려는데 숙모님이 돈지갑을 연다. 어린 동무들에게 5만원짜리 지페 한장씩 나누어 준다. 우리아들은 대학다니는 어른인데도 준단다.할머님도 너무 자상하다. 밴새에 식초냄새가나면 어쩌랴했는데 생각외로 너무 맛있다. 사람도 많고 이야기도 많다. 너무 오래만에 만들어진 설모임이다.숙모님이 이야기한다. "올해 설모임 너무도 즐겁네.자네들한테 고맙소." 진짜로 너무 오래만이다. 즐거운 행사였다. 이전엔 설이라도 몇명이 모여 단촐한 모임을 가졌는데 금년에는 대가정행사였다. 우리도 금년에 서울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변하여 우리는 서울에 와서 친척들과 함께 설명절을 보낸다. 고향이 경상북도 월성군인 아버님은 고향을 떠나 47년이 되도록 단 한번도 귀향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자식들 보고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면 너희들 데리고 고향에 간다고 말씀하였지만 생전에 고향땅도 밟아 보지 못했다. 아버님세대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도 행복하다. 서울이 지금은 먼곳이 아닌 근처로 되였다. 그믐날의 밤은 깊어 간다. 여기서는 폭죽소리가 없다. 하지만 설 행사는 게속되고 있다. 내일은 평택에 갈 예정이다.
본문보기
37
설 나들이
댓글:
조회:
1297
추천:
0
2019-02-05
설 나들이 금년 기해년 음력설은 서울에 가서 쇠기로 하였다. 형님 누님 숙모 동서간되는분까지 그리고 소꿉친구들 동창들하여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생활하고 있다. 우리 집안의 최고령인 외숙모는 못뵙운지도 7년이 된다. 외손군들 돌바준다고 서울의 딸집으로 떠난 뒤로는 중국에 한번도 다녀 오지 않았다. 나도 한국에 다녀온지도6년이 넘었다. 하여 우리는 금년설에 형님누나들 같이 설명절도 쇠는겸 친척친우들도 방문할겸 서울려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2월2일 한국에 도착한 우리식구는세종시에살고있는 동서집에 행장을 풀었다. 성격이 서글서글한 둘째동서는 우리 세식구의 방문을 환영하여 왕게(大王蟹)와 사시미등 귀한 음식들를 가득 올렸다. 힘든 로동을 하여 돈을 버는 동서내외에게 감사한 마음에 앞서 미안한감이 들었다. 안해와 아들은 맛있다고 야단이다. 2월3일 우리는 서울을 향해떠났다. 세종시는 아직 교통이 그리 편한편이 아니였다. 우선 무궁화렬차타고 용산에 도착한후 다시 전철을 타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방정맞게 하늘은 흐리였고 굿은비가 구질구질 내린다. 때아닌 동삼비로 몸이 오그라든다. 서울에는 친구 리군이 살고 있다. 그는 한국경력 20년짜리 진짜배기 한국통이다. 그전에는 리비아에가서 트럭 운전을 한 경력도 있다. 울산에 있는 친구류군와 전라도 광주에 있는 현군은 이미 하루전에 서울에 도착하여 나를 대기하고 있었다. 기차로 이동시간만 해도 2_3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를 달려온 친구들이다. 재별난 친구들이다. 만나는 지점은 동대문근처의 음식점이였다. 전에 서울방문때도 리용했던 식당으로써 음식맛이 좋았다. 12시 전후로하여 만나야할 사람들 륙속도착했다. 도합9명이다. 내가 가져간 중국술이며 친구가 내온 일주(日酒)며 거기에 또 맥주까지 곁들었다. 만남의 즐거움과 기쁨 격동까지 들먹여 술을 적게 마실수가 없다. 우리사이는 이토록 진지하였고 친밀하였다. 만남의 즐거움과 새해축복이 한데 엉키고 반죽이 되여 웃음소리 환호소리 가득하다. 한고향에서 나서자란 우리들 사이에는 허위와 가식이 없고 다만 내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진심만 존재 할뿐이다. 어디까지나 친구를 믿고 밀어주고 축복하는 자세다. 하기에 우리는 친구다. 저녁에는 화고(和龙高中)835행사가 있다. 저녁6시에 만나기로 하였는데 5시가 좀넘은 시간에 나는 동대문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료량진수산시장역으로 떠났다. 노량진 수산시장 2층 5호식당에서 만나자는 친구들의 메세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솔찍히 서울와서 혼자 전철타보기는 처음이였다. 겨우 6번출구를 찿아나왔더니 맞은켠에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노랑진새수산물시장이란 카다란 글이 보인다. 길목에서 어떻게 건물에 진입할가 궁리중인데 어떤사람이 나에게 묻는다. "노량진시장에 어떻게 진입하죠?" 고개돌려 보니 동창김양이다. 그도 나를 바라보고 놀란다. 원체 우리는 모두 행사에 참가하려고 여기에 온것이였다. 서울사는 동창이 중국에서 온 나에게 길을 물은 것이다. "ㅎㅎㅎ" 우리는 동시에 웃음보릏 터뜨리였다. 6시가 되자 약속한 시간내에 10명의 친구들이 모였다. 대단한 열정이다. 허군과김군과는 학교에서 나와 처음 만난 것이다. 한국분회 김회장의 새해 축하인사와 더불어 행사는 차곡차곡 진행되였다. 나는 단임선생님과 서기를 대표하여 주한동창들에게 축배의 술잔을 들었다. 새해 여러분 신체건강하고 사업에서 성과를 올리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모두들 가쁨에 도취되여 술인지 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너도 나도 다투어 술을 권한다. 친구들이 올린 물고기회와 물고기국이 어쩌나 맛좋은지 잊을수가 없다. 그 비싼 생복과 조개류도 듬뿍듬뿍 올리였다. 중국광주에 있는 김양도 서울에 왔는데 할약이 만점이다. 술도 따라주고 사진도 찍으며 동무들사이를 오간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동창이란 혈육관계가 없는 친척이라고. 그는 안산에서 친척모임이 있는 것도 마다하고 전문 안산에서 동창모임에 참가하려 올라온 것이다. 대단하다. 나는 정심에 술마신 상태에서 저녁에 또 마시니 힘들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우리 보고 반갑다며 권하고 또 권한다. 어쩌나 소리지르며 술 마시였는지 사장님이 와서 조용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또 마찬가지다. 사장의 한마디에 먹힐 스타일이 아니다. 하긴 너무 반갑고 너무 흥분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술자리를 끝내고 친구들은 2차라며 노래방으로 향했다. 아마 1차에서 끝난다면 누구도 마음이 내켜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분에 도가니에 빠진 우리들은 누가 노래를 시키지 않아도 서로 자기가 한다고 야단이다. 노래 실력또한 수준급이다. 그정도로 부르려면 아마 노래방에 넣은 돈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춤도 잘 춘다. 노래와 춤이 어울려진 2차는 밤이 깊어지는 줄 모른다. 술자리도 점점 익어 갔다. 노래방에서 끝나 나왔는데 모두 해여지기 싫어 한다. 나는 내일 행사 때문에 만류하는 것도 거절하고 전철을 타고 동대문으로 떠났다. 아. 기해년의 설이 다가 온다. 이역땅에서의 설맞이 행사는 이렇게 시작되였다. 새해 여러분 신체 건강하고 마음이 즐겁고 만사대길 하시라.
본문보기
36
설날이 다가 온다
댓글:
조회:
1178
추천:
0
2019-02-02
설날이 다가 온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설이다. 오늘 시장에 나가 보았는데 사람이 많아 진 것을 확실히 감지 할수 있었다. 큰 명절이든 작은 명절이든 명절만 되면 붐비는 곳이 바로 시장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명절을 중시 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웬일인지 금년에는 특별히 길역에 산더미처럼 싸아 놓고 파는 지전(纸钱) 과 제물이 많이 보인다. 설이 되면 제새상에도 돈이 필요하단다. 자식들은 하늘 나라에 돈을 보내서 좋고 상인들은 돈을 벌어서 좋지만 지전을 태워 공기오염을 조성하는 행위는 단속해야 할 바라고 본다. 요지음 설날은 새해를 맞이 한다다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를 빼고 보면 별로 다른 명절과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 세대들에게 까지는 수천년을 걸쳐 내려온 관습 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관념이 무서울 정도로 머리에 박혀 있다. 광동성지역에서 일하던 농민공들이 기차표를 사지 못해 오토바이를 타고 10여시간 달려 고향에 간다든가 큰도시에서 보모일하던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 구인(求人)난에 봉착하는 것을 보면 그 정도를 알수 있다. 지난해 광주에서 설을 보내였는데 농민공들이 떠난 도시는 한적하기만 하였다. 어찌하면 공성(空城)이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금년에도 북상광심(北上广深)일선도시에서 최저로2~3천만명이 고향을 찿아 도시를 떠난다고 한다. 전통 교육의 세레를 받아온 우리들은 설이 되면 집에 가야 한다는것을 법처럼 생각하고 있다. 집으로 향하는 자식들의 마음과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님들의 맘이 하나로 되여 설명절 민족대이동을 이끌어 내였다. 얼마동안 자식들과 갈라져 있던 부모님들은 자식들 돌아오기를 내내 고대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설명절이되여 만난다는 의미보다 우리 방식의 혈육의정과 사랑을 나누고 잇어 나가고 또 승화시키는 것 이라고 생각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은 다른 명절로 데체 수할 없는 커다란 공능을 가지고 있다. 부모님들로 말할진대 기다리던 자식들이 집에 들어 돌아 온다는 것은 지나간 한해 평화와 안전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만남의 자리가 된다는 점은 부모자식간 형제자매간에 모두 화목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기에 만남의 설은 더욱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로 흥분되기도 한다. 필경 사업터가 다르고 사는곳이 다르다보니 평소 부모자식간 형제지간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생존하고 발전하려면 어차피 피면 할수 없는 문제다. 이전에는 생활조건이 허락되지 못하여 설명절이 되여야 죠즈도 빗고 도기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애들은 당연히 설을 기다리게 된다. 사탕알도 먹고 폭죽도 터칠수 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설이 되여야 새옷을 마련 할 수 있었다. 물질이 결핍하던 과거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무엇이든 풍부하다. 생활수평이 현저히 제고 되였음을 말한다. 고양이 뿔 빼놓고는 없는 것이 없다. 평소에도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수 있으니 설을 기다려야 맛나는 음식을 먹던 세월은 옛말이 되였다. 음력설은 중국의 최대명절이다. 오늘 친구들이 올린 글을 보니 2월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돈을 가장많이 쓰는달 인사치레를 가장 많이 하는달 음식을 가장 많이 하는달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나는 달 술을 가장많이 마시는달 려행을 가장 많이 하는 달이라고 한다. 여하튼 특별한 것이 많다. 그것은 모두 설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계실때야만 최고 설 기분을 느낄수 있다. 부모님들이 계심으로하여 가정이 중심축을 이룰수 있고 형제들사이에 더욱 많은 우정을 맺혀갈 수 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고 나면 형제들 사이에도 만남의 자리가 적어 진다. 그리고 형제들도 자식이 있다 보니 자기집에서 설을 세게되는 경우가 많게 된다. 그러니 부모님들 생전에 좋고 많은 설명절을 보내야 함이 도리다. 한족사람들은 설이 면 拜年하는 습관이 있다. 전에는 그의미에 대해 리해가 부족하였다. 저사람들은 왜 저런걸할가. 호탕한 말소리로 설문안하는데 내역을 보면 새해축복과 바램이 다반이다. 전문으로 집에 와서 하는 설문안도 있다. 요지음 우리는 설기간 이웃에 찿아 가서 설인사 드리는 일이 적다. 그저 만나면 인사하는 정도지만 한족들은 다르다. 이웃사이에 찿아와서 인사와 축복을 한다. 설기간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사이에서는 拜年이 필수다. 拜年은 중국민간의 전통습으로서 사람들이 송구영신 할때 상호간 아름다운 축원을 표달하는 일종 방식이다. 拜年은 사람들지간에 감정과 우의를 증진시키고 상호축원과 문안을 표달하는 좋은 방식이다. 拜年은 몸짓으로 하는 언어로서 사람들이 자기의 축복을 표달하는 일종의 형식과 방법이다. 한사람이 서있을 때에는 자세는 높지만 拜年인사드릴 때에는 자연히 자세를 낮추게 된다. 그럼으로하여 자기의 진정성과 겸허 공경을 대방에게 보여 주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도 설인사과 설례배전통이 있다. 이상분들을 찿아 설인사드리고 부모들에게 절하며 례배드린다. 아주 의식감이 강한 행사이다. 이상분들에게는 돛자리를 깔아 드리는것이 례이이다. 이만큼 우리민족이 례의에 바르다는 표식이다. 아래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 위사람들은 새해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한다는 덕담을 해준다. 이른바 인생교육의 한부분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는 세배돈을 준다. 90년대초에 일본북해도 고모집에 방문간적이 있었다. 고모부 삼촌되는 분이 우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먼곳에서 운전하여 우리를 찿아 주었다. 고모님께서는 사전에 우리에게 만나서 어떻게 인사 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주었다. 그때서야 나는 큰 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먼저 고모님이 큰절로 인사드리는데 그렇게 겸허하고 공경할수가 없다. 서툰대로 우리도 절을 올리였다. 우리쪽에서는 많은 례법이 간소화되거나 사라지였지만 일본사는 조선사람들사이에는 많이 보존되고 있었다. 좋고 올바른 것은 대대로 잇어나가야함이 도리다. 돼지해 기해(己亥)년이 다가온다. 새해의 발자욱 소리가 들려 온다. 바라옵건대 새해에 부모형제자매 친척친우 동사자 모두 건강하고 유쾌하기를 바란다. 해해년년 설이 있지만 올해만은 더욱 의미 있고 즐거운 설이 되기를 맘속 깊이 바란다.
본문보기
35
면 허 증 시 험
댓글:
조회:
1097
추천:
0
2019-01-29
면 허 증 시 험 지금은 자동차운전은 기술이라기 보다 생활의 기본 기능으로 되였다. 마치 생활하면 글을 알아야 하고 컴퓨터 조작이 가능하여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자가용이 보급되고 있는 요지음 운전 할 1줄 모른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특히 젊은 축들이라면 차가 없더라도 운전면허를 먼저 취득하는 것이 옳바른 선택이라고 본다. 우리집에서는 안해가 제일 먼저 면허증을 취득하였다. 2004년도 봄이라고 생각되는데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며 자동차연습에 몰두하였다. 열심히 해야하는 리유가 바로 그해에 우리 아이가 소학교에 입학하게되기 때문이였다.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고 할려면 자동차가 필요했고 운전이 필요했다. 3년이 지난후에 내가 면허증을 취득하였다. 물론 그전에도 운전할수는 있었지만 면허증이 없다 보니 도로에 오를수 없었다. 후에 지인의 도움으로 여차여차하게 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였다. 지난 여름방학부터는 아들애가 자동차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과목 1과2는 여름방학에 끝내고 올 동삼방학에는 과목3과4를 준비하고 있다. 동삼에 차를 배우다보니 고생이 막심하다. 낮에 개발구에 가서 배우는 것 쯤은 다호사(好事)다. 실기시험___과목3을 룡정에가서 보아야기 때문에 현장 적응성 훈련이 필수다. 이전에 동사자가한 말이 생각난다. "딸 면허시험때문에 요지음 저녁마다 룡정에 차련습할려 다닌다구"뭔소리인가 했더니 이런판이로구나. 교련선생의 전화를 받을 때는 저녁7시가 넘었다. 7시40분까지 룡정공업집중구 시험장에 대기하라고 한다. 웬만해서는 차를 빨리 운전하지 않던 안해가 조급해 한다. 약속 시간전에 지점에 도착했는데 교련은 보이지 않는다. 이윽하여 도착한 교련은 낮에1로선을 훈련했는데 100점이다. 저녁에는 2호선과 3호선을 련습하겠다고 하였다. 아들은 교련차를 몰고 떠났다. 우리는 차안에서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캄캄한 공업집중구 강변도로에서 별일없이 시간이 흐르기만를 기다린다. 여름철이면 내가 자전거운동을 즐기던 정다운 코스다. 헌데 여기서 그것도 한동삼의 밤중에 안해와 같이 자동차면허시험 훈련하는 아들을 기다리리 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한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우리는 교련차뒤를 추적하기로 하였다. 많은 교련차에서 안해는 용케도 우리 아이가 운전하는 차량을 찿아 내였다. 아이가 우리를 발견하면 긴장해 할가봐 멀찌 감치에서 뒤를 따랐다. 10시가 넘어서야 훈련은 끝났다. "어떻던?피곤하지?" 자식에대한 관심이다. "관(关)을 못넘었어요 " "어두워서 그래. 낮이면 괜찮을 거야" 돌아오는 길에 나는 될수록이면 아이에게 신심을 북돋아 준다고 고무의 말을 했다. 오늘 퇴근해 집에들어오면서 나는 아들과 물었다. "오늘 훈련했니?" "아니요. 오늘은 통지가 없었어요. 저녁에 나가할거예요. " 안해는 저녁밥도 안먹은채아들을데리고 체육장광장으로 차훈련을 내려갔다. 31일날 시험본다니 며칠 남지 않았다. 며칠전 내가 위챗에 우리애가 방학에 와서 자동차면허시험을 본다고 했더니 친구가 하는말이 "지금 야들은 얼마나 좋아" "부모들 애 운전까지 다 책임지고" 그렇다. 요지음 애들이 좋은 세월만난것도 사실이지만 경쟁시대를 만난것도 사실이다.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고중 대학교 어느한 환절에서도 경쟁은 맘추지 않았다. 내가 대학을 나올때에는 통일분배라는것이 있었고 복리집분배가 있었다. 그시절에도 경쟁이라는것이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회적인 관심을 많이 받은 세대다. 대학교때에 학비가 없었고 숙사비가 없었고 오히려 보조가 있었다. 진짜 막바지 복지렬차를 탄 세대다. 허나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진짜 실력이없으면 구직(求职)도 어렵고 일하기도 어렵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맘이다. 경쟁이 심한 요지음 세월에 쟁기하나라도 자식손에 쥐여 주고 싶은 마음이다. 뭐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좀더 쉽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지 않겠느냐는 욕심이다. 그래서 오늘도 같이 노력하는 것이다
본문보기
34
한담(闲谈)
댓글:
조회:
1189
추천:
0
2019-01-25
한 담(闲谈) 공작에 참가한 시간을 공령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령이란 체제(体制)내에서의 공작한 년수을 말한다. 과거에는 기관간부들도 공령에 따른 대우가 있었는데 한해에 1원씩 계산하여 임금에 넣어 주는 것이다. 허나 후에는 취소 되었고 공무원은 공령과는 별개로 직급에 의한 로임제도를 실행한다. 설명하자면 로임의 높고 낮음은 공령의 길고 짧음과 별로 관계없이 직급이 올라가야 로임도 오른다. 몇해전부터 중앙에서 현(시)이하급 정부에서 직무와 직급에 의한 병행정책을 실행하여 과원들도 부과급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금년부터는 이정책의 사용범위를 넓힌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볼 것이다. 어느 정도 공령이 길지만 직급이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일종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요지음 규정에 의하면 공령만 30년이면 임금의 85퍼센트를 받고 퇴직할수 있다. 하여 률사증이라던지 회계사증을 딴 사람들은 먼저 퇴직하고 제2의 직업생애를 시작하려하고 있다. 어느정 도의 보장이 잡혔으니 이제 부터는 자기의 취향에 맞는 일을 하겠다는 배심인 것 이다. 그리고 수입도 현저히 제고될수 있다. 내가 직생활을 한지 어느덧 30년이 되였다. 세월의 흐름이란 참으로 빠르다. 학교문을 나온지가 어제 같은데 퇴직해도 된다고 하니 당황하기도 하다. 무슨일을 하던지 일하면서 재미를 찿아 야하고 방법을 터득해야 오래 할수 있다. 과거에는 기관에 출근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이전에 우리애가 고중다닐때 문과리과반를 나누는데 아들애는 리과를 하겠다 한다. 내가 문과공부를 하면 좀 쉽게 공부할수 있지않냐고 제안해 보았다. 그런데 애는 문과에 흥취가 없으니 리과를 지망하겠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리과를 선택하였고 지금은 리공과 대학에서 측량전업을 배우고 있다. 요지음 겨울방학이 되여 집에 왔는데 자기는 측량전업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한다. 흥취와 직업이 맞아 떨어진 사람은 행복하다. 원래 하고 싶은 일인데 그일이 직업이다 보니 일도하면서 재미도 느끼니 얼마나 행복하랴. 하지만 현실가운데서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 직업은 직업대로 흥취는 흥취대로 병행하는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흥취만을 고집하고 직업을 선택하는데 자기를 먹여 못살리는 경우가 많다. 직업이란 왕왕 그렇다. 좋아서하는 직업도 있지만 생계를 잇어나가기 위하여 하는 직업도 많다. 北京人在纽约에서 나오는 예술가들이 미국에서의 화면이 이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네들은 예술하려고 미국에 왔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먹고 살려니 식당에서 사발씻는 일 이라도 하지 않을수 없다. 목구멍이 초도청이라 이것저것 가릴것이 못된다. 어떤이가 고취하는데 직업을 사업으로 대하는 사람은 기업가고 생계수단으로 대하는 사람은 월급쟁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직업을 리상으로 대하는 사람은 령수가 될것이다. 여하튼 같은 일을 하면서도 취하는 태도에 따라 얻는 것이 판이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태도가 일체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나의 한친구는 대학본과에 연구생에 박사까지 맞혔다. 일생에 많은 책을 읽고 대학교수로 초빙되여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수직함을 얻게 되였다. 헌데 몇해전 부터는 교수를 그만두고 식당을 경영하고있다. 그것도 집적 료리를 하면서 말이다. 내가 식당할거면 왜 그힘든 박사공부까지 했냐고 물으니 하는말이 공부도 하고 싶어 했고 식당도 하고 싶어 했단다. 대단한 결단이다. 그리고 교수와 식당관리사이에 많은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어찌보면 직업과 추구의 고도의 결합이라고 할수있다.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고 자기가 잘 할수있는 분야가 있다. 무작정 남들이 하는 로 할 필요 없다. 자기 실정에 부합되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다. 요지음 사회적으로 많은 민간단체가 활약하고 있다. 등산협회 배구협회자전거협회등 운동관련협회와 문학예술 등 많고 많은 협회가있다. 어찌보면 직업외 취미생활에 대한 보충이라 하겠다. 직업은 직업대로 취미는 취미대로 서로 보충하고 서로 밀고 나갈수있는 좋은 생활방식이다. 외국에는 외과의사가 축구 시합에 나가고 률사가 피아노경연에 나가는 일도 푸술하다. 딱히 직업과 흥취를 묶어놓지 않고도 인생을 즐길수 있는 좋은 방법이 많다. 요지음 어느 친구가 위챗에 인생은 정답이없다고 했다. 심오한 이야기다. 자기 나름으로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것이 정답이다.
본문보기
33
마반산
댓글:
조회:
3342
추천:
0
2019-01-23
마 반 산 연길시에서 동쪽으로 6공리 정도가면 그 유명한 성자산이 나온다. 성자산은 천여년전 동하국의 서울이였다. 다시 고개를 넘어 동북쪽 방향으로 8공리 정도 가면 마반산이 나타난 다. 마반산은 연길과 가까히 하고 있지만 행정소속은 도문시 장안진에 귀속된다. 화룡시 서성진에서 시작한 연변고장성(古长城)의 동쪽끝이 바로 마반산이다. 이전에는 봉화대자리도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찿아 볼수 없다. 마반산을 마을 사람들사이에서는 일명 시리봉 혹은 베개산으로도 부른다. 전에 왕청에 갔더니 거기에도 마반산이라고 있었다. 땅이 큰 나라 다보니 같은 지명을 가진 곳도 많다. 내가 처음으로 마반산에 오른 것은1980년 가을께 였다. 학교에서 가을 나들이로 마반산을 가기로 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마반촌이 나에게 그렇게 익숙한 마을이 아니였다. 어릴때 마반역전 아래 강변으로 들놀이 가본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붉은기를 앞세우고 우리학교 사생들은 길게 줄을 지어 마반촌에 들어 섰다. 촌부앞에서 물도 마시고 휴식도 취하며 우리는 동네구경을 하였다. 마반산촌부 뒤산에는 사자바위가 있다. 숫사자가 머리를 쳐들고 서쪽을 바라고 서있는 모습인데 머리 털이 뒤로 흩날리는 자태가 아주 멋지다. 오랜 세월 돌산이 풍화되고 또 식물이 자라면서 이루어진 석상이다. 마을사람들의 건의로 여기저기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관찰해 보니 사자모습이 더욱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는데 신기하기만 하다. 사자석상은 대자연이 마반촌을 지키라고 하사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6대마을 동쪽비탈을 타고 우리는 계속 산을 오른다. 길옆에는 소나무와 가둑나무가 무성하다. 나먹은 소나무들은 모양생김도 저마끔이지만 형태가 아름답다. 언제 심었는지 모를 이깔나무밭도 보인다. 마반촌은 원래 돌이 많은가 보다. 밭에도 길에도 많은 돌들이 널려 있다. 어떤밭 가운데는 집채 만큼한 돌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산은 오를 수록 점점더 가파롭다. 한참 오르다가 머리돌려 서쪽을 바라보니 연길 시가지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마반산은 연길주변에서 비교적 높은 산에 속한다. 산넘어 산이라고 높은곳 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니 마치 수려한 한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듯하다. 가까운데 보이는 룡산은 높고 골격이 선명한데 뒤에 보이는 산은 멀고 어렴풋하다. 또 그뒤로도 여러겹의 산이 보이는데 어렴풋이 보이는 저먼산의 뒤쪽에는 또 누가사는지 알고싶다. 리몽룡과 성춘향이살던 남원은 아닌지. 한참 더 올라 가노라면 남북방향으로된 산등성이를 타게 된다. 량쪽을 바라보니 깊은 골짜기다. 수레길 만큼 넓은 길엔 누런 왕모래가 깔려져 있다. 그것은 이곳토질이 모래성분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원체 산등성이고 모래길이다보니 아주 깨끗하다. 하늘은 푸르고 내마음 즐겁다. 우리 친구들은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웃고 떠들며 길을 조인다. 교실에서 나올수 만 있다면 날씨가 나쁘면 어떻고 길이 가파로운들 또 어떠하리. 들에서 산에서 뛰노는것이 바로 우리의 소원이다. 산은 오를수록 거칠다. 수림도 빼곡하고 잡풀이 무성한데 드문드문 비물 웅덩이가 보인다. 나는 홍군이 늪지를 건너는 장면을 떠놀리면서 신발이 젖어드는것 따위 에는 개의치도 않았다. 수레길도 어언 사라지고 오솔길만 남아있다.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같다. 굽이굽이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니 불현뜻 앞이 확트인다. 새파란 잔디풀이 곱게자란 산등성이에 올라선 것이다.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노라니 서북쪽에 불현뜻 여느 다른 행성에서나 날아 왔음직한 커다란 돌바위가 밋밋한 산등성이우에 앉아 있는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어찌보면 큰 군함이 하늘에 떠있는 느낌이다. 너무도 환상적인 장면이다. 아. 이것이 바로 전설속의 마반산이였구나! 서쪽면은 가파로운 절벽으로 되였는데90도각을 이룬다. 우리는 바로 보이는 마반봉우리를 향하여 환호하였다. 그리고 환상속의 그림을 향하여 뛰여 갔다. 두다리는 마치 진공속에서 달리는 느낌이다. 마음이 붕하고 떠있으니 몸마저 하늘에 떠있는 같다. 헌데 현실속에는 주위에 가시나무가 았많다. 하여 우리는 손도 긁히우고 옷소매도 찟기였다. 봉우리 밑에 가니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보인다. 돌로 대충 계단도 쌓아올리고 올라가는 험한길엔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돌부리도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레 돌부리도 잡고 나무가지도 잡으며 정상에 올랐다. 마반산의 가장 큰 특점이 바로 봉우리위가 평퍼짐한 것이다. 어떻게 되여 이높은 산등성이에 이같은 베개모양의 큰바위가 언쳐있는지 알길없다. 대자연이란 참으로 위대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정상에 올라 왔으니 어서 구경해야 한다. 서쪽 끝머리의 바위우에 서서 먼산을 바라보니 울긋불긋한 산이마치 잔잔한 파도가 설레이는 바다 같이 보인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찔해난다. 방향을 바꾸어 북쪽면에 가서 저멀리를 바라보니 망망한 산림과 띄염띄염 붙어 있는 밭들이 보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벼랑벽에서 무너져내린 큰 바위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누군가가이처럼 위험한 벽을 타고 오르내린것 같았다. 큰직한 돌들사이로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보인다. 사시장철 해볓을 보지 못한 북쪽면의 큰 바위들 우엔 푸른 이끼가 끼여 있고 사이사이로는 머루넝쿨이 드려있다. 어찌보면 대자연이 만들어낸 미궁같은 곳이다. 다시 동쪽을 걸어가서 바라보니 아래는 협곡이다. 연길에서 흘러내려오는 부라하통하와 룡정에서 흘러오다가 구룡에서 방향을 바꾼 해란강은 성자산부근에서 합수한다. 물폭은 넓어지고 물량이 급격이 불어난다. 강물은 마반산역전을 지나면서 저 협곡으로 흘러든다. 산아래를 굽어보니 넓은 강폭은 불시로 졻아지면서 물쌀이 거세 진다. 졻은 강옆으로 한갈래의 기차길이 뻗어 있는데 해빛에 반짝인다. 바로 장도선(长图线)철로다. 마반산정에는 누군가가 써놓은 글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어떤이는 정으로 돌을 쫓아서 정성스레 글발들을 새기였다. 그해 나는 마반산 가을 놀이를 하고 돌아와 작문을 썼다. 그때 나는 마반산의 서쪽머리를 배( 船)머리에 비유하였다. 20세기 네가지 현대화건설의 선줄군인 우리가 큰 파도를 헤가으고 앞으로 항행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북쪽의 허물어진 바위는 우리 중화민족의 유구한 력사를 상징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때는 무엇이나 보면 상징의미을 부여하기 좋아 했던 시기였다. ㅎㅎ 그런데 여차여차하게 되여서 나는 마반산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다. 2002년 이른봄 나의 제안으로 우리 단위친구들이 고려대학에서 출발하여 마반산을 등산하기로 하였다. 대오는 광흥촌을 지나고 학교마을을 지나 산등성이에 붙었다. 걷고 또 걸어 과수촌을 지나고 또 다시 산등성에 올랐다. 이제 한시간이면 마반산정에 오를수 있을 것 같았다. 산등성이에 올라서니 세찬 산바람이 마구 불어치고 있었다. 큰 바람으로 우리는 몸겨누기 조차 힘들다. 게다가춥고 허기까지진다. 망냉이 친구가 눈물을 똑똑 떨구며 그만하고 돌아가자고 제안하였다. 여러분들을 둘러보니 말은 안해도 힘겨운 빛이 력력하다. 하여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마반6대마을로 내려 왔다. 내려오는 길에 마을을 지나며 보노라니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느낌이 든다. 옴폭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오붓한 마을 게다가 마을옆을 끼고 흘러가는 시내물 정말로 안성맞춤한 동네다. 며칠후 마음이 동한 나는 집을 구입하려고 마반촌에 다녀왔다. 마침 초가집을 내놓겠다는 분이있어 나는 인츰구입하기로하였다. 그후로 부터 나는 마반산촌의 일원이 되여 채소도 심고 강냉이도 심고 휴식의 한때도 보내였다. 마반산집은 형제들의 주말농장으로 우리 친구들의 활동장소로 제격이였다. 1980년도로부터 나는 열번정도 마반산에 오른것 같다. 하지만 매번 오를때마다 격정이 차넘치고 감회가새롭다. 사실 연길주변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두메산골이 있다고 생각해본이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안오면 모르지만 와보면 부러워하는 마을이다. 마을 풍경좋고 인심이 후하고 공기 맑고 물맛이 달다. 이전에"마반산 "이란 제목의 노래가 류행되였는데 도대체 도문의 마반산을 말하는건지 왕청의 마반산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맘속으로 부터 그것이 우리 마반산이라고 믿고 있다. 노래는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 또한 마음에 닫는다. 마반산 높은봉에 태양이 솟고 우리네 마음에는 희망이 솟네 동무야 보습메고 밭갈이가세 에헤야 데헤이야 밭갈이가세
본문보기
32
축음기
댓글:
조회:
1080
추천:
0
2019-01-17
축 음 기 축음기는 미국 에디슨의 위대한 발명중의 하나다. 100여년전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는 지금 기본상 볼수 없다. 축음기보다 음질이 훨씬 우월하고 원리도 선진적인 음향설비가 많이 나와 있다. 허나 50대이상의 사람들은 축음기를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하여 보았을 것이다. 미국서부영화에서 등장하는 수동식 축음기 나팔은 꼭마치 나팔꽃 모양을 하고 있고 흘러나오는 노래는 랑만에 차 넘친다. 어릴때 축음기 공작원리가 뭘까 대단히 궁금하였다. 그러던차 둘째형님이 축음기를 만들어 냈다. 내가 초중 일학년 때쯤 이였다. 형님은 널판자를 주어다 나무통을 만들고 작으마한 내면에 모터를 안장하였다. 원판을 얻어다가 나무통 우에 올려 놓고 모터로 작동시키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원판우에 레코트판을 올려놓으니 제법 모양새가 난다. 다음 막대기를 주어다가 끝머리에 못을 박아 나무통 우에 고정시키였다. 다음 막대기 다른 한끝에 바늘을 꼽은 석냥갑을 고정해 주었다. 호졸하나 원시적 미를 다분히 풍기는 축음기가 모양새를 드러냈다. 모터에 전기를 넣으니 빨간 레코트판이 빙글빙글 잘 돌아간다. 바늘이 박힌 석냥갑을 조심스럽게 회전중인 레코트판에 올려 놓으니 기적이 일어났다. 노래소리가 흘러 나온것이다. 너무 환상적이다. 이같이 호졸한 기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다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필경은 첫 작품이다보니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 우선 회전속도가 노래 멜로디를 바로 읽어 내는데 문제가 있다.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늦다. 형님은 작은 치륜을 얻어다가 매분 회전속도를 73회에 맞추었다. 물론 많은 참고서적을 찿아 읽었고 많은 실험을 하였다. 속도가 맞으니 음악효과가 월등히 제고되였다. 다음으로 석냥갑에서 노래가 울려나오다보니 외관상에도 꼴볼견이다. 형님은 작은 양철통을 얻어다가 중간에 구멍을 뚫고 바늘을 고정시키였다. 구멍이 뚫인 자석에 코일을 감고 이것을 양철통에 밀어 넣는다. 바늘의 떨림이 전류를 만들어 내는 원리다. 그선에 확성기를 달아놓으니 정확하게 나팔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또 하나의 비약을 도출했다. 70년대말 형님이 손수 만들어낸 축음기는 동네서도 인기다. 나의 동학들도 여러번 견학을 하였다. 모두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저런데서 어떻게 소리가나지. 고개를 개우뚱거리기도 하고 축음기통안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현대식 레코트판은 미국적 독일인이 발명한 것이다. 음악의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을 레코트판에 새겨 넣는 작업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굴곡과 깊이 로서 바늘의 떨림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어릴때의 축음기 인상이 머리에 깊이 박혔나 보다. 결혼식을 앞두고 가전제품 사려 갔는데 나는 축음기 앞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밑에는 록음기 우에는 축음기로 안배된 음향설비였다. 아주 고급스러웠는데 음향이 두개나 딸려 있었다. 미국서부 음악가의 크라네트독주가 주입된 립체성 레코트판에서는 은은하나 깊고 구성진 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는 당연이것이라고 판단하고 구입하였다. 당시 립체성레코트판의 가격이 꽤나 비싸다. 30원정도에 한장인데 로임이 200여원인 나에게는 부담이다. 93년도에 여름 나는 4촌 누님 만날려고 조선 신의주로 갔다. 한것은 그해 가을로 고모 만나려 일본행을 결정했는데 조선가서 당신 딸도 만났고 잘 보내고 있더라고 회보하기 위해서 였다. 헌데 빈손에 갈수는 없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축음기다. 조선에는 우리와 달리 축음기가 많이 보급되여 있다. 그러니 선물로 가져다 주면 좋아 할 것이라 판단하고 들고 갔다. 지금은 축음기를 듣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가전제품상점에 가면 구식 축음기가 긴나팔을 자랑하며 구매자들을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장식품 일뿐이다. 소박에는 다 신식으로 된 음향설비가 들어 있다. 다만 옛것을 그리는 중장년들의 마음을 끌기 위한 수단이다. 축음기는 한개 시대의 상징이다. 30년대 상해탄의 여느 나이트클럽에서 한가수의 노래가 축음기를 통하여 흘러 나온다. 그러면 개미허리를 한 무녀들리 하늘하늘 춤춘다. 夜上海 夜上海 你是个不夜城 华灯起 车声响 歌舞升平 只见她 笑脸迎 谁知她内心苦闷 夜生活 都为了 衣食住行 酒不醉人 人自醉
본문보기
31
사진현상기(扩印器)
댓글:
조회:
1165
추천:
1
2019-01-16
사진현상기(扩印器) 지금은 많은 사진기가들은 자기로 사진을 씻지 않는다. 칼라로된 사진현상 하려면 기술도 기술이거니와 설비 또한 비싸다. 그리고 요지음 디지텔사진기가 많기에 사진을 별도로 뽑아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진이더라도 켐퓨터에 입력하기만 하면 끝이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였다. 과거에는 누구 집에 놀려 가면 종종 사진첩 구경을 하게 된다. 허나 지금는 그런 일이 없어 져버리였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취향에 변화가 생긴것도 있겠지만 구구히 사진첩이 아니라도 사진을 열람 할수 있는 도경이 너무 나도 많아 지였기 때문이다. 지능형 전화라든지 노트북이라든지 모두 영상입력이 가능하다. 지난해 내가 지능전화기로 찍은 사진만하여도 1700여장이 되였다. 그것도 년말에는 운(云)도편에 저장하는데 보관이 무료다. 80년대 초반에 우리 집에는 35미리짜리 일본제 자동사진기가 있었다. 일본에 계시는 고모님이 중국 방문오시며 우리에게 선물한 사진기였다. 그 시절에는 극히 적은 사람들이 유람이라던지 결혼식때나 사진기를 들고 다니였다. 어찌보면 자랑거리에 속하는 귀중한 물건이였다. 당시135필림을 쓰는 사진기는 기본상 일본산이였다. 국산이라면 갈매기표 사진기가 있었는데 필림은120미리를 넣었다. 사진기는 갖추어 지였겠다 나머지는 촬영하고 사진을 뽑는 일이다. 우리는 이 사진기로 많는 사진을 찍었다. 지금 사진기는 디지텔 사진기여서 찍은 직후 집적효과를 체크할수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불 가능 했다. 오직 사진을 뽑아야만 코가 달렸는지 눈이 달렸는지 알수 있었다. 지금도 사진업계에 우스개소리가 있는데 누구를 망하게 할려면 사진기술을 배워주라는 말이다. 알면 알수록 사진기에 대한 요구가 높아가고 설비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자연히 돈을 팔게 되여 있다. 당시 나의 둘째형님은 사진기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형님은 낡은 구식 사진기 한대를 얻어왔다. 형님은 나무 널판자에 금속 막대기를 고정해 놓았다. 사진현상기를 만드는 첫 보조였다. 그리고 깡통하나를 얻어다 금속막대기에 련결시키였다. 물론 조절 가능한 조리개를 안장하였다. 깡통안에는 전등불을 넣었고 밑에는 사진기에서 떼여낸 렌즈를 부착시키였다. 렌즈밑에는 유리를 고정시키였는데 그사이로 사진필림을 끼여넣었다. 이쯤 하면 간단한 사진현상기가 탄생한 것이다. 방의 모든 불을 끄고 천정에는 붉은색 등불을 켠다. 그리고 확인기의 불을 켜준다. 사진필림을 끼여 넣으면 검판에 담긴 영상이 사진현상기 불빛을 통과하여 널판자에 아주 똑똑히 비쳐진다. 깡통을 아래우로 조절하며 사진의 크기를 확정한후 불을 끈다. 집안 에는 붉은 빛만 남아있다. 이때 검은 종이에 싼 사진종이를 꺼내여 널판자 우에 고정시킨다. 강통안의 전등과 련결된 개페기가 형님의 손에 쥐여져 있다. 형님은 전등을 켰다 껐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显影分이 용해된 소래의 액체에 빛을 쪼인 사진 종이를 잠구고 영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기적같은 일이 서서히 눈앞에 나타난다. 점차점차 사진종이에 영상이 나타난다. 마치 마술사 된 기분이다. 딱좋은 영상이다 싶으면 참대로 제작된 펜센트로 사진을 짚어 내여 定影分이 용해된 액체 소래에 잠군다. 이로서 사진 씻는 일이 완료된 셈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진종이를 꺼내여 물에 씻은 후 유리에 부착시켜 말리 운다. 그때 우리는 많은 사진을 씻었다. 형님 몰래 나도 가만가만 사진을 현상해 보았다. 반급의 친구들도 청하여 견학시키였다. 사진영상이 나타날때 이런 장면을 처음보는 친구들은 눈이 휘둥 그래 진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그때 뽑은 사진들이 많다. 모두 기념의미가 깊은 사진들이다. 더욱히 자기가 손수 촬영하고 또 집적 씻은 것이 기에 더욱 친절한 느낌을 주는 사진이다.
본문보기
30
사격장
댓글:
조회:
1065
추천:
0
2019-01-15
사 격 장 사격장이란 말그대로 총을 쏘는 장소라는 말이다. 지금은 우리 민간인들이 사격장을 접근하기가 어렵다. 한것은 성시의 확장과 더불어 사격장은 시내와 동떨어진 외진곳으로 전이 되였고 또한 안전문제로하여 접근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때에는 지금 소영소학교 동쪽에 큰 사격장이 설치되여 있었다. 부대에서는 자동차에 군인들을 싣고 와서 총탄실험도하고 사격훈련도 하였다. 사격하기 전에 몇명의 병사들이 사격장 주위의 산꼭대기에 뛰여올라가 기발을 꼽는다. 뜻인즉 사격훈련을 하겠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다. 아침부터 콩복듯한 사격소리가 마을을 시끄럽게 한다. 어찌보면 소영에서만 볼수있는 풍경이다. 우리는 하학만하면 사격장으로 달려 간다. 어떤 친구들은 집으로 뛰여가서 호미를 들고 달려온다. 한것은 그곳에 가면 돈이 될만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간이자 금전이다. 바로 사격장에서 체험할수 있는 진리였다. 사격이 끝나고 군대들이 철거하자 바람으로 총알이 가장 많이 박힌 흙더미를 향해 달려간다. 먼저 노다지를 차지하고 감자캐듯 땅을 파헤치면 탄두를 많이 주을 수 있다. 권총탄두는 껍데기는 동으로 되여 있고 그 속에는 연(铅)이들어 있다. 자전거방울에 탄두를 담아 풍로불에 올려 놓는다. 불이 이글거리면 탄두에서 연이 녹아 나온다. 이쯤에 집게로 탄두껍데기를 집어 내고 연을 식힌다. 연은 비중이 높은 금속이다. 녹여서 얻은 연과 동으로 된 탄두껍데기를 공소소에 팔면 돈이 된다. 권총탄두에 연이 많다. 반면에 보총탄두내면을 보면 연이 적고 쇠가 많다. 70년대 동 한근에 3원좌우 연 한근에 60전좌우 였는데 그때 운동화 한컬레가 3원좌우다. 운수가 좋으면 두어번 줏으면 새신이 생긴다는 말이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다. 그때는 사격훈련이 많았다. 중쏘관계가 긴장하던 시절이 였다. 어린 나이여도 어른들이 전쟁에 대해 말하면 귀가 솔깃해 진다. 무슨 쏘련에서 비행기가 뜨면 담배 한대 피우는 시간이면 연길까지 온다는둥 중국과 쏘련이 전쟁하면 독일이 쏘련을 진공한다는둥 그 시절에는 진짜로 밭고랑 타고 세계를 내다보는 토배기 군사가들이 많았다. 군관들은 권총사격훈련하는데 팔목힘을 키우는 목적으로 권총자루에 벽돌장을 매달고 묘준훈련을 한다. 진종일 무거운 짐이 달린 권총을 꼬나들고 있는 것도 고역이다. 또 한편에서는 기관총 기능검사를 한다고 무수한 총을 쏘아 댄다. 표준동작으로 말하면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여 사격하는 것이지만 군인들은 쇠막대기로 당겨준다. 기관총도 쇠로된 틀에 고정하고 말이다. 총신이 벌겉게 달아오으면 식히고 또 쏜다. 며칠전 한국방송에서 사격장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60년대 미군이 군사연습을 단행하는데 포탄알이며 탄피를 줏겠다고 애들이 사격장에 뛰여 들어 갔다는 것이다. 지금 어른이 된 그들과 무섭지 않았냐고 물으니 배고푼것이 더 무섭더라고 대답한다. 그 사람들도 사격장에서 돈이 나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사격장이 근처에 있다보면 탄깍지라던지 탄두같은 것을 많이 줏게 되고 그것이 어린시절 우리들의 유일한 놀이감이 였다. 하다보니 불발탄을 갖고 놀다가 터져 손을 상한 사고도 있었다. 그때 사격장의 규모도 점점 커가고 시설도 많이 개선되였다. 고정된 사격표말은 사격훈련을 만족시킬수 없었던지 후에는 이동식으로 고치는 것이였다. 전호를 파고 레루장을 펴고 그우에 구루마(车)를 앉히고 사격표말을 고정시키였다. 다음 구루마에 바줄을 매고 전호량끝의 자새에 바줄을 감아 놓았다. 병사들이 자새를 돌리면 구루마가 이동하는데 이동속도는 임의로 조절이 가능했다. 움직이는 사격표말은 군인들에게는 사격난도가 커졌지만 우리에게는 절호의 놀이터가 되였다. 길이가 한백메터되는데 구루마에 앉아 놀다 보면 속도감도 좋다. 손에 막대기를 들고 휘두르노라면 마치 개선장군이 된 느낌이다. 당시 여느 공원에 간들 이보다 더 좋은 놀이가 있으랴. 시간이 흘러 80년대에 들어서며 사격훈련이 적어지였다. 아마 다른 곳으로 전이 되였는가 보다. 군인들이 안오는 사격장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졌다. 관리가 없으니 레루장도 하나둘씩 도적맞히였다. 결국에는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뜯어져버렸고 목침마저 사라져버렸다. 다시 몇해 후에는 새마을이 들어 섰고 지금은 사격장 흔적조차 찿아 볼수 없다. 지금도 새마을을 지나다닐 때에는 그시절 사격장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들의 동년의 꿈이 묻혀있던 사격장이다. 아 나의 동년이여!
본문보기
29
사물놀이(四物乐)
댓글:
조회:
1392
추천:
1
2019-01-14
사물놀이(四物乐) 사물놀이에 들어가는 악기로는 꽹가리 징 북 새장구등 네가지다. 비록 악기의 종류는 적지만 소리의 변화 풍부하며 박진감이 강하여 흔히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속에 빠져 들어가게 한다. 선조들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속악기로 귀맛좋고 변화무쌍한 많은 소리를 편곡해 내였다. 사물놀이를 관람하노라면 출현자들의 능란한 손놀림과 몸짓 익쌀스러운 표정에 매료되여 같이 흥분하고 같이호흡하고 같이 몸을 흔드는 일이 허다하다. 북소리는 마치 잔잔한 호수가에서 노니는 갈매기를 표현하듯 소리도 낮고 빈도도 늘지다가도 마치 우뢰가 울고 번개가 치듯 소리가 높고 빈도가 밀집해 진다. 표현자들은 징을 선두로 하여 소리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혹은 낮은 데로부터 높은 데로 혹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의 변화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사물놀이는 옛날 농경시대의 농가락의 일종으로서 힘든일 할때 피로도 풀고 기분도 돋구고 마음도 단합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농부들이 휴식의 한때를 리용하여 공터나 밭머리에 모여서 고정된 식과 틀을 떠나 자유자재로 마음의 변화를 표현하던 놀이 방식이다. 지금 보아도 아주 지헤롭고 슬기로운 우리민족의 내심세계의 변화를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촌에 가도 대부분 기계화농사라 분공이 세밀하고 시간이 급하여 밭 머리에서 농악을 즐길 겨를이 없다. 오히려 도시에서 무대에서 사물놀이가 더욱 류행되는 편이다. 내가 사물놀이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연변대학 학생들의 표현을 보면서 부터였다. 학생들은 민족복장을 입고 연변대학길거리에서 표현하는데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고 새장구의 멜로디가 관람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춘절을 맞이하여 단위에서는 문예공연을 한다고 통지하였다. 각 부서 에서는 무슨형식을 취할가 고민이 많다. 형식은 재담 소품 합창 무용등 다양하다. 우리는 합창할가 무용할가 토론하다가 엉뚱하게 사물놀이를 하기로 합심하였다. 한것은 우리 부처의 한직원이 소개하기를 친구가 군중예술관선생님으로 사업하는데 청해올수 있다는것 때문이 였다. 사상을 통일하고 우리는 실천에 몰입하였다. 젊은 선생님은 요구가 엄격하였다. 매하나의 동작과 소리를 꼼꼼히 가르쳐 주는데 정말 책임심 또한 강한 분이였다. 허나 문제는 우리 한테서 생기였다. 두개 처실이 합하여 절목을 표현하게 되였기 때문에 사람을 고정시키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긴 우리에게 전문연습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은 사업대로 해야 했고 연습은 연습대로 밀고나가야 했다.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은 저사람이 청가다. 내일은 이사람 청가다. 가뜩이나 시간이 없는데 사람변화가 너무 많다. 기초라도 있는사람들이라면 괜찮은데 난생 처음으로 새장구를 치여보는 녀성분들 그리고 북이라는 개념조차없는 남성분들 모두가 골치덩이다. 이번 공연을 책임진 처장동무는 공연때문에 잠도 못잔다고 나보고 하소연했다. 나는 고무격려의 차원에서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말은 했어도 실은 나도 어떤 연출이 될지 모르겠다. 울며 겨자먹기다. 절목 형식도 보고했고 선생님도 청해왔고 악기도 빌려 왔으니 이제 다른 선택이란 없다. 하는데 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 선생님은 우리의 구체적 실정을 고려하여 작품을 4개 악장으로 비교적 간단하나 박진감이 강하고 재미있는 사물놀이로 편곡하였다. 일단 연습에 들어갔다. "북과 새장구를 가운데를 쳐야 합니다. ""크게 두번치고 낮게 네번 쳐야 합니다. ""소리의 높고 낮음이 선명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목소리 마저 쉬였다. 얼마나 애간장이 터졌으면 목소리 마저 쉬였겠는가. 잘하던 못하던 우리 탓이지 선생님의 교육과는 별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마이크가 달린 확성기를 빌려왔다. 될수록 이면 선생님께서 큰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들릴수 있게 말이다. 원래 기초가 없는 학생들이라 두개를 배우면 하나를 잊어 먹는다. 반복이 필수다. 하여 우리는 오전에는 자습하고 오후에는 교학받기로 하였다. 이쯤하면 평판이 나올 법하다. 우리는 될수록 이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하여 연습장을 1층전람실에 안배하였다. 하지만 북소리 새장구소리 징소리가 요란하기 만하다. 잘치면 소리가 듣기 좋을 련만 초보들에게 기대하긴 무리다. "소리가 너무커요""무슨소린지 모르겠다""박자가 엉망이구먼 ㅎㅎ"벼라별 소리가 다있다. 허나 남이야 뭐라던 상관이 없다. 오직 우리가 열심히 하고 연출에서 성공을 거둘때 만이 이것이야 말로 관중들에 대한 가장 큰 보답이리라. 출연자들 열성 또한 대단하다. 어린이 두명을 둔 애엄마는 휴식일 집에서 연습한다며 새장구를 메고 집에 갔다. 징을 치는 친구는 악보는 문외한 이지만 자기만의 기법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정리해냈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집단의 한명의 성원이다. 집단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는 노력한다. 사람살이도 사물놀이와 비슷하다. 모르는 것을 배와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무대에 나설 차비를 해야 한다. 남이야 뭐라던 결과를 얻어 내는것이 중요하다. 이제 연출할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집단의 매개 성원이 합심하여 노력한다면 사물놀이가 매우 성공하리라 믿는다. 하기에 오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본문보기
28
주민 신분증
댓글:
조회:
1112
추천:
0
2019-01-04
주민신분증 신분증은 한사람의 신분에 대한 증명이라 하겠다. 1984년에 우리 나라에서 처음 신분증이 나와서 부터 신분증은 이름도 여러번 변하고 내포된 정보도 많이 변하였다. 현재는 제2대신분증을 사용하는데 칩이 안장되여 더욱 많은 장보를 저장하고있다. 지금은 신분증을 휴대하지 않으면 진짜로 움직이기 힘든 세월이다. 기차도 뻐스도 비행기도 탈수 없다. 집을 구매해도 차를 뽑아도 모두 신분증을 제시하여야 한다. 이렇게 중요한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았을 경우 따라오는 불편함이 이루 감당하기 어렵다. 오늘 나는 일보려 장춘으로 가게 되였다. 같이 떠난 친구들이 나의 차표까지 끊은 상태라 나는 자동매표기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표를 뽑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였다. 가방에서 신분증을 꺼내여 자동매표기에 제시하던 찰라 이게뭐야. 신분증이 아니고 은행카드였다. 나는 다급히 가방이며 호주머니를 뒤졌다. 헌데 유독 신분증만 없다. 다시 한번 삿삿히 번져봐도 없다. 나는 다급히 안해한테 전화했다. 집에 신분증이 있는가 찿아보라고. 때는 기차출발을 20여분 앞둔 시각이였다. 전화가 왔는데 못찿았다고 했다. 긴박한 순간에 안해가 운전면허증을 갖고 갈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기차출발을 10분 앞두고 안해가 차를 운전하고 운전면허증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기차표구매소로 달려갔다. 여차여차하게 매표원에게 설명하고 운전면허증을 제시 했더니 인츰 차표를 건여 주었다. 만세다 대뜸 검표구를 지나 차에 올랐다. 차에 앉아 신분증이 어느곳에 두었을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지난달 26일에도 기차를 탔으니 물론 신분증이 이었다. 그런데 31일날 세차하고 집에 돌아온후 가방을 열어보니 카드며 운전면허증이며 열쇠며 아무것도 없었다. 당금 새해를 맞이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나는 당금 집에서 나와 차고로 뛰여갔다. 차앞좌석 문을 열고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보조석 밑을 살펴보니 다행이도 카드며 열쇠며 현금이 보였다. 행운이다 이것들을 못 찿았을 경우 나의 생활은 막대한 혼란을 받게 된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으며 집에 올라 왔다. 보험의 각도에서 나는 가방에는 은행카드 신분증만 소지하기로 하고 나머지 일체는 집에 두고 다니기로 하였다. 그런데 원고로 신분증을 둬두고 은행카드만 갖고 나온 것이다. 신분증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한장의 신분증이 이처럼 우리의 생활에 중대한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장춘에서 일보는 와중에도 신분증 불소재로 인한 근심을 떨쳐 버릴수 없었다. 하여 동사자들과 좀 일찍 역에 도착해야 함을 재차 강조했다. 발차 45분을 앞두고 우리는 장춘역에 도착 할수 있었다. 기차표는 이미 인터넷으로 구매되였기에 다른 친구들은 자동판매기에서 표를 뽑고 대합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줄을 서 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은 대가를 치루는 판이다. 근데 오늘 따라 웬 손님이 이렇게나 많은지. 그리고 판매원의 속도는 왜 이렇게나 늦은지. 속이 부글거려도 참을 수 밖에 없다. 20분을 기다려 나의 차려가 되였다. 운전면허증을 들이 밀고 표를 달라고 했다. 헌데 인터넷구매기록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연길역과는 또 다른 시스템이다. 친구들이 나한테 기록을 보내주지 않았다. 다급히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통화가 안된다. 뒤에선 사람들은 빨리 사라고 야단이다. 일단 옆으로 자리를 내주며 또 통화를 시도했지만 엮시 안된다. 시간은 빨리도 흐른다. 이젠 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집에 있는 동사자에게 전화하여 같이 온 친구들에게 련락하여 나의 정황을 알려주라고 통지하였다. 드디여 기록이 위챗을 통하여 전해왔다. 표를 찿을 수 있게 되였다. 만세다. 표를 찿은 나는 2층 대합실로 뛰여갔다. 나는 또다시 신분증의 중요함을 실감했다. 감사한건 신분증불소재자들에게 마련한 만회조치다. 운전면허증으로나마 구매가 가능하여 졌기 때문이다. 나는 출장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신분증불소재로하여 부산 떨기는 처음이다. 나는 오늘 일이란 빈틈없는 준비가 되여야 하고 마음은 항상 차분하여야 되고 흥분상태에서는 실수가 많을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하나 심오한 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본문보기
27
두도온면(头道温面)
댓글:
조회:
1506
추천:
0
2018-12-29
두도온면(头道温面) 두도온면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 준다. 대게는 술을 마신 이튿날 속이 번저질때 찿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뜻하고 칼칼한 온면국물이 해정작용을 한다할가 어째든 한번 먹으면 다시 찿게되는 맛집이다. 헌데 연길에는 두도온면이란 간판을 단 식당이 여러군데 있다. 손님들이 두도온면을 하도 많이 찿으니 각자 두도온면이라고 내놓는지 모르지만 "두도온면" 상표를 획득한 집은 오직"맛선생"한집뿐이다. 온면집은 북대 동전서부대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항상 손님이 많다. 우리 반장와이프하고 온면집 사장은 친척 사이였다. 그렇게 알고 다니기 시작한지도 여러해가 지났다. 어느날 정심시간 나와 서기 반장이 만나서 무엇을 먹겠는가 연구하고 있었다. 반장이 말했다. " 북대에 온면집이 있어. 집적 누룬국수로 온면하는데 맛이 죽인다니까"하여 우리 세명은 민주에서 부터 차를 운전하여 북대로 이동하였다. 기대감을 품고말이다. 문을 떼고 들어가니 주인이 반긴다. "아즈바이 왔습니까. 빨리 들어오시오"신체가 든든하게 생긴 주인은 첫인상에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후더워 보였다. 정심이라 우리는 온면세그릇만 시키였다. 벽에는 사장님이 연변방송국에서 취재받을 당시 찍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국가공상관리국 국장이서명한 "두도온면"전문상표획득 증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걸려있었다. 이 온면집의 정통(正统)성을 증명하고 있다. 온손님들은 대체적으로 단골인것 같다. 젊은축들이 있는가하면 로부부들도 있다. 온면의 가장 큰 특점은 사람이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집 온면은 매운맛의 정도에 따라 특급 중급 초급으로 나뉘였다. 원래 매운것을 즐겨 먹는지라 나는 일단 중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기다리던 온면이 올랐다. 국물은 연한 간장색을 띠였고 면발은 빛이 돌았다. 안춘(鹌鹑)알 소고기등 고명이 면발위에 곱게 얹혀있다. 온면과 랭면의 고명이 가장큰 차이점은 바로 냉면고명에는 고추가루가 들어가나 온면고명에는 고추가루가 없다. 온면 그릇을 가까히하고 코를 벌름거려 냄새맡으니 조금은 매운냄새와 짭짜름함과 고소한 향이 난다. 나는 일단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마시였다. 온면먹기전 국물을 마시여 보아야 진짜 온면의 맛을 알수 있기 때문다. 카 . 톡톡쏘는 맛이다. 고추매운맛 후추매운맛 그리고 연한향까지난다. 국물이 배속으로 흘러드니 온몸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쨍해난다. 마치 포근한 담요를 몸에 두른것 같다. 면발은 어찌나 쫄깃쫄깃하고 매끄러운지 입에 넣자마자 목구멍을 넘어간다. 내가 국수를 좋아하는 원인중 하나가 바로 매끌매끌한 면발이 목구멍을 넘어갈때 그감각이다. 그리고 매운맛 짠맛 고소한맛 모두가 내입에는 딱맞다. 진짜로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정신마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국물까지 다비웠다. 서기가 말한다. "두도온면 좋아하는구머. 먹을줄안다구" 우리 서기는 견식이 많은 사람이다. 국내는 메주밟듯 돌아 보았고 멀리로는 영국땅을 밟아본 친구다. 온면이 오르자 나와는 달리 국수몇오리 입에 넣고 음미하더니 왈 "동남아국가들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가 들어간거같다구. "내가 사장어른하고 진짜 그러냐고 물으니 시물시물웃으며"아즈바이 내가 그걸알려주면 안됩즈비"라고 슬쩍 넘겨버린다. 하긴 특허가나온 두도온면인데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여 나는 온면이라면 줄곳 "맛선생"집으로 다니였다. 무슨 끌어 당기는 힘이 있는 같다. 그리고 화룡고중835 많은 행사는 기본적으로 여기서 조직되였다. 우리 반급의 아지트 같은 곳이다. 일본 한국 국내 여러동창들 모임에도 "두도온면"이 빠질수 없다. 나의 추천으로 직장동료들 그리고 친구들도 잘 다닌다. 한번은 한처실에 친구를 데리고 온적이 있는데 너무 맛 있어서 이튿날 다시 찿았다고 한다. 근데 그날 따라 손님이 넘쳐나 기다리다 아쉬움만 남긴채 돌아 갔다고 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이튿날 다시 찿았을가. 두도온면이 점점 연변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특유의 칼칼한 맛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것 같다. 얼마전 내가 고향음식에 대한 글을 쓰고나서 친구보고 뭐가 빠지였는가 보라고 했다. 위챗에 당금 소식이 들어왔다. "왜서 두도온면이 빠졌지. " 아주 리해 안간다는 립장이였다. 나는 온면집에서 동사자들이나 친구들을 자주만난다. "여기는 웬일이여" " 우리 이집 단골이야"모두 반갑다 인사한다. 제일 좋은 광고는 입소문이다. 한입 두입 건너가면서" 맛선생"두도온면이 소문낸것이다. 나와 두도온면은 연분이있다. 맛도맛이려니와 사장부인이 성씨가 한씨라 한다. 어쩌면 맛있는 온면도 먹고 한집안도 만난 것이다. "맛선생"식당에서 요지음은 새상품 개발에도 힘을 쏫아 붓고있었다. 집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있도록 개발한 편이"두도온면"이다. 특히 타향에 있는 친구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 가장 알맞는 음식이라 생각한다. 연변의 명물 두도온면이 더욱많은 사람들의 사랑속에서 번영하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도 아무때건 맛보려갈것이 아닌가. ㅋㅋㅋ
본문보기
26
고추장 련정
댓글:
조회:
1259
추천:
0
2018-12-28
고추장 련정 지금은 고추장이라고 하면 누구나 별로 라고 생각할수 있다. 슈퍼에 가면 각양각색의 상표를 붙인 여러가지 맛의 고추장이 진렬되여 있다. 장마당에나 시장에 가면 빨간색의 큰소 래에 고추장을 가득 담고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도 볼수 있다. 허나 70년대 중반기만 해도 상품으로 된 고추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우리 살던 마을에서도 고추장담그는 집이 몇집 안 되였다. 나의 부친은 경상북도 월성군 산내면 출신이다. 비록 18살 나이에 중국에 들어 오시였으나 고향음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시였다. 경상도사람들 매운것을 즐기는지라 부친께서는 고추장을 좋아 하시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경산도 말씨를 구사하는 우리 아버지를 보고 붉은군대라고 하였다. 따뜻한 경상도에 살다가 찬바람 불어치는 만주땅에 들어오니 얼굴피부가 얼어든것 처럼 붉게 변하였다. 1947년도 학강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해방군에 입대하였고 조선전쟁에도 참가하였다. 산전수전다 겪어오신 아버지지만 음식습관만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에 우리 자식들도 어려서부터 고추장을 접하게 되였고 또 즐겨먹게 되였다. 우리 모친은 비록 함경북도 출신이였으나 고추장을 좋아하는 남편덕분에 맛있는 고추장을 담그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님이 고추장을 만드는것을 보아 왔다. 고추장을 담그려면 손이 많이가야 한다. 이름에서 알수있다 싶이 우선 좋은 고추가루가 준비하여야 한다. 가을에 고추장을 만드는 첫 순서로는 메주를 만들어 천정에 걸어 놓는 것이다. 우리 연변의 된장을 담글때 쓰는 메주모양은 대체상 반원체 모양이다. 그러나 고추장을 담글때쓰는 메주는 조개떡 모양으로서 엷고 작다. 이런 고추장메주를 대여섯개씩 짚오라기로 묶어서 천정에 걸어 놓는다. 한해동삼 걸어놓고 있노라면 집안의 온도와 습도가 메주를 잘뜨게 하는 작용을 한다. 봄이 면 어머님은 메주를 물에 씻는다. 솔로 여기저기 불순물을 깨끗이 씻어 버린다. 그리고 쪼개여 햇빛에 바싹 말리운다. 다음 순서는 방아간에가서 메주를 가루내는 작업이다. 나는 어려서 어머님과 같이 방아 찢으려 자주 다니였다. 우리 동네계시는 황선생님의 집은 팔간집으로서 뒤울안에 방아간이 설치되여 있었다. 방아간도 과거에는 잘사는 집에만 설치되였나보다. 평소에 방아간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자물쇠는 영화에서나 볼법한 구식자물통이였는데 마치 할머님들의 비녀같이 생긴 쇠막대기가" ㄷ" 자형의 자물통에 꽂혀 있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넣어 발판을 딛는다. 쿵덕 쿵덕 방아소리가 난다. 어머님은 방아가 호박을 떠나는 순간에 잽싸게 손으로 메주덩어리를 이리저리 번져준다. 이러기를 반복하다가 바가지로 메주가루를 떠내여 채에 친다. 어둑시그레한 방아간에서 나와 어머니는 손을 맞추어 방아 찢는다. 이렇게 쿵덕쿵덕 방아찢고 가루를 내였다. 한줄기의 햇볕이 방아간에 비쳐와 힌 머리수건을 친 어머님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메주가루에서는 특유의 발효냄새가 났다. 집에오면 우선 큰 나무함지에 메주가루를 쏫아 붓는다. 거기에 곱게 가루낸 고추가루와 소금가루를 두르고 잘 섞어 준다. 다음 물엿과 찹쌀죽도 넣는다. 그리고 또 번져주기를 반복하는데 아마 여러가지 원자재가 고루 섞겨야 발효가 잘되고 맛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고추장은 발효음식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조건이 잘 구비되여야 한다. 다음 고추장단지에 퍼담는다. 고추장단지는 보통자기로 된것인데 배는 불룩하고 아구리는 작다. 다 담은후 알소금을 뿌린다. 장맛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 한다. 덮개를 닫고 단지를 집뒤쪽의 벽밑에 놓는다. 이렇게 서늘한 곳에서 고추장은 발효되고 맛을 낸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빨같던 고추장이 약간 검른색을 띤다. 다 익었다는 신호다. 여름 터밭의 채소가 한창 일때 밥상에서 고추장이 빠져서는 안된다. 쌈을 싸먹어도 오이 파 풋마늘을 먹어도 고추장이 있어야 한다. 맵고도 달콤하며 쨍한 우리집 고추장은 입맛을 당기게 하는 마력(魔力)이있었다. 고추장은 그무엇과도 배합이 잘된다. 겨울철 뚝배기에 된장을 풀고 감자를 넣고 끓인다. 말리운 푸른고추를 손으로 비벼 넣고 마지막으로 고추장을 떠넣는다.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데 필수다. 세치네탕에도 고추장이 들어간다. 더덕구이에도 고추장이 들어간다. 고추장은 당년 우리 집의 유일한 조미료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때 늘 산에 가서 방목 한다거나 삼을 자래웠다. 덕분에 우리는 곰취며 더덕이며 고사리 같은 야채를 알게 되였고 그런 것들이 늘 우리집 밥상에 오르게 되였다. 곰취쌈을 싼다던지 고사리무침에 밥을 비빌때에도 고추장이 빠져서는 안된다. 더욱히 더덕은 고추장을 발라서 구워야 제맛이다. 어머님께서 손수담근 일년 먹을 고추장이 반년 정도면 굽이 난다. 그러면 어머니는 또 고추장을 담그는데 발효시간이 짧아 아직 제맛이 아니라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지금 우리집 아들은 고추장을 먹지 않는다. 세대차인가 보다. 매운것을 먹으면 속이 아리다 한다. 나는 자극성이 강한 맵고 얼얼한 것이 좋은 반면에 애들은 고소하고 정갈하고 담백한 것을 좋아 한다. 이전에 우리는 고추장을 먹으면 싸움 잘 한다고 들었다. 하여 나는 싸움에서 이기라고 우리집 수닭에게 고추장를 많이 먹이였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수닭은 뼛이 진붉고 키가 크고 발톱이 날카롭다. 웬만한 닭과의 전투에서는 지는법이라곤 없다. 우리집 고추장에 찹쌀죽이 들어가는 것이 특별하다. 어머님이 어디서 배운비법인지 모르나 방송에서 나오는 고추장담그기 절목에서도 그런것이 없었다. 하기에 우리집 고추장은 항상 하르르하고 달콤하다. 아마 "소영표"고추장의 비법이리라. 고추장은 익어 갈수록 매운맛이 줄어드는 반면에 달고 은은한 맛이 깊어진다. 마치 사람이 나이 들수록 모(角)는 줄어들고 지헤로와지는 것과 흡싸하다할가. ㅎㅎㅎ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30년이 넘는다. 하지만 지금도 어머님의 손맛이 배인 그 고추장맛을 잊을수 없다.
본문보기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제목
내용
제목+내용
글쓴이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
粤ICP备2023080415号
]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