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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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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이상(李箱) - 권태(倦怠) 댓글:  조회:709  추천:0  2022-08-31
 권태(倦怠) - 이상(李箱)    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炎署)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최서방네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 지난 후니까,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여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의례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 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나면 도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利慾)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 빈약한 물이 소리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더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域)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失色)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는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荒漠)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 민절(悶絶)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우 황원(荒原)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게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雷聲)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村童)이 범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넘어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松明)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라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胸裏)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奴役)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대싸리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어왔으니까 그저 들었을 분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마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鵲巢)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서 희귀한 겸손한 겁장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旅人)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시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수운 위험한 지대이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은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느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가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서방네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良久)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연 알 길이 없다.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아니,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도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상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自意識)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가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덩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瘦軀)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위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畜類)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동해(童孩)들에게도 젊은 촌부(村婦)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집 부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 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 넝쿨의 뿌리 돌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너라도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어찌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보았다는데 지나지 않는다.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村童)들을 원숭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는 중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징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레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레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있지 않는다. 저물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중적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중로(中路)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덩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덩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그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러나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식이다. 야우(野牛)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 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위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보다. 내 생면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소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략하는 체해보임이리요?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膚)의 반라군(半裸群)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두른 베두렁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6세 내지 7,8세의 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으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도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더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 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 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놓았다. 아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런 그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날이 어두웠다. 해저(海底)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덩이 속을 실로 송사리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떼가 준동하고 있나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彼岸)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 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 작자 이상(李箱,1910년 9월 14일-1937년 4월 17일)은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1910년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12년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보(普成高普),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거쳤고 졸업 후에는 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취직하였다.   1931년 처녀시 ‘이상한가역반응’,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1934년 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6년 동인지 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내고 그만두고, 에 ‘지주회시’, 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이해,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종생기' ,'권태', '환시기' 등을 쓰고, '봉별기'가 에 발표되었다. 1937년 사상 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향년 만26년 7개월에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출처: https://hichy.tistory.com/entry/이상李箱-권태倦怠?category=592743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115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댓글:  조회:854  추천:0  2022-08-15
책머리에 (p.331~332) 1902년 늦가을이었다. 나는 빈 신시가지의 육군대학 교정에 있는 늙은 밤나무 아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나 독서에 빠져 있었던지, 우리 학교 교수들 가운데 유일한 민간인이며 학문에 조예가 깊고 온화한 호라체크 교수님이 내 곁에 와서 앉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교수님은 내 손에서 책을 거두어 표지를 들여다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인가?" 그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책장을 넘기며 시를 두세 편 훑어본 다음 생각에 잠긴 눈길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기숙생 르네 릴케가 시인이 됐구먼." 그리하여 나는 15년 전쯤 부모님에게 떠밀려 장교가 되기 위해 상트펠텐 육군유년 학교에 들어갔던 그 가냘프고 창백한 얼굴의 소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호라체크 교수님은 학교 목사로 그곳에 근무하셨는데, 지금도 그 기숙생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신다고 했다. 교수님은 그를 조용하고 진지하며 똑똑한 학생으로 묘사했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며, 군대 같은 학교생활을 4년 동안 참을성 있게 견딘 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메리 슈바이스키르헨에 있는 육군실업학교로 진학했다. 그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그의 체질로는 군대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므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프라하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 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교수님은 모른다고 하셨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내가 그 자리에서 내 습작 시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보내 비평을 청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때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았던 나는 내 소질과는 정반대되는 직업을 구하려던 참이었고, 누군가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면 《나의 축제를 위하여》를 쓴 시인에게 이해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러기로 마음을 굳히기도 전에 나는 습작 시에 곁들여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렇게 편지로 내 속내를 털어놓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몇 주가 지나 서야 답장이 왔다. 파란 봉인이 된 그 편지에는 파리 소인이 찍혀 있었다. 들어보니 묵직했다. 겉봉에는 아름답고 단정한 필체로 보낸 이가 적혀 있었고, 본문도 첫째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그와 똑같은 필체로 채워져 있었다 그때부터 나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이에는 규칙적으로 편지가 오갔다. 편지는 1908년까지 이어지다가 그 뒤 서서히 시들해져 갔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에서 시인이 애써 만류했던 그 영역으로 내 삶01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소개하는 10통의 편지이다. 이 편지들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삶과 그가 창작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오늘과 내일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인간이 말할 때 하찮은 사람이여 침묵해야 하리. 1929년 6월, 베를린에서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첫째 편지 - 시를 꼭 써야 하는가? (p.333~336) 파리에서 1903년 2월 17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께, 보내 주신 편지는 며칠 전에야 받았습니다. 편지에서 보여주신 두터운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군요. 내겐 당신 시의 본질을 분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비평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작품을 느끼는 데 있어서 비평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습니다. 비평은 언제나 많든 적든 그럴듯해 보이는 오해를 낳기 마련이니까요. 세상사란 흔히 믿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포착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며, 아직 그 어떤 낱말도 들어서지 못한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더욱 표현이 불가능한 대상은, 우리의 덧없는 인생과 더불어 존속하는, 바로 저 비밀로 가득한 존재인 예술작품일 것입니다. 이렇게 운을 뗐으니 이제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겠군요. 당신 시는 개성적이지 않지만, 개성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싹을 조용히 품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특히 당신의 마지막 시 을 읽을 때 가장 뚜렷해졌습니다. 이 시에는 개성이 시어와 운율로 나타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레오파르디에게>라는 아름다운 시에는 이 위대하고 고독한 인간과의 친근감 비슷한 것이 자라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시는, 마지막 시와 레오파르디에게 부치는 그 시조차도, 아직 독자적이지 못하며, 그 자체로는 미완성에 불과합니다. 시와 함께 보내 주신 친절한 편지 덕분에 나는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지만 무어라고 꼭 짚어낼 수는 없었던 여러 결함들을 비로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쓴 시들이 어떠냐고 묻습니다. 지금은 내게 묻고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겠지요. 당신은 잡지사에 시를 보냅니다. 그러고는 자꾸만 다른 이의 시와 당신의 시를 비교하면서, 혹시나 편집자가 당신이 애써서 쓴 작품을 거절하지나 않을지 걱정합니다. (내게 충고를 부탁했으니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제 나는 그런 짓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바로 지금 무엇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조언하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이유가 당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글쓰기를 그만둘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무엇보다 한밤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갸', 그 대답을 찾아 내부로 내부로 파고드십시오. 그 대답이 긍정이라면, 그 진지한 물음에 힘차고 짤막하게 “나는 반드시 써야만 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이 필연성에 따라 삶을 만들어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가장 무심하고 사소해 보이는 시간까지도 이런 충동의 징표 또는 중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자연으로 다가가십시오. 인류 최초의 인간이 된 것처럼,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은 것을 표현해 보십시오. 사랑시는 쓰지 마세요. 너무 흔하고 평범한 형식은 피하십시오. 그린 형식이 가장 어려운 법입니다. 이미 전통적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작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영역에서 당신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위대하고 성숙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주제는 피하고, 일상에서 주제를 찾으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소망,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그려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뜨겁고 차분하며 겸허한 솔직함으로 묘사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주변 사물이나 꿈속에서 본 풍경, 또는 추억의 대상을 이용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그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비난할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아직 진정한 시인이 아니기에 일상의 풍요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창작하는 사람에게 빈곤한 소재나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벽에 가로막혀 세상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감옥에 갇혔다 할지라도, 당신에게는 어린 시절이라는 왕의 부와 맞먹는 소중한 기억의 보물창고가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당신의 관심을 돌리십시오. 저 먼 과거의 잃어버린 감각들을 되살리려 노력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확고해지고 당신의 고독은 더욱더 넓게 퍼져나가 세상 사람들의 소음마저 멀리 비껴가는 어스름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여 시를 쓰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다른 이에게 당신의 시가 훌륭한지 물어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잡지사에 시를 보내어 관심을 끌고자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시 속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소유물을, 당신 삶의 한 조각을, 당신 삶의 한 가닥 목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연성에서 싹트는 예술 작품은 훌륭합니다. 이 기원의 문제야말로 예술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인 것입니다. 그 밖의 판단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가 당신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내면으로 들어가 당신의 삶이 솟아나오는 깊은 근원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꼭 창작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그 원천에서만 발견될 것입니다, 답이 나오면 그 의미를 따지지 말고 그대로 받아 들이 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예술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답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무거운 짐과 위대함을 짊어지십시오. 외부에서 올지도 모르는 보상을 바라지 마십시오. 창조자는 스스로 하나의 세계여야 하며 그 자신과 그가 속한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내면으로, 당신의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뒤 시인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느낀다면 시를 써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요구한 이러한 내면의 성찰이 그저 헛된 것만은 아니겠지요. 어찌되었든 이를 계기로 당신의 삶은 그 고유한 길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그 길이 훌륭하고 풍요로우며 드넓기를 성심을 다해 기원합니다. 이 이상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모두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조언을 드린다면,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당신의 성장의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외부세계로 향한 채, 그로부터 질문의 답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당신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당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감정만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에서 호라체크 교수님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무척 기뻤습니다. 나는 그 경애할 만한 학자에게 큰 존경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디 나의 이 마음을 그분께 전해주세요. 교수님께서 아직도 나를 기억하신다니 정말 영광스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보내주신 시들을 동봉해서 돌려드립니다. 내게 보여주신 크고 진지한 신뢰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보답의 뜻으로, 비록 당신에게 나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내가 아는 한 솔직하게 답변함으로써 그 신뢰에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진심 어린 존경과 공감을 담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둘째 편지 - 반어법과 추천도서에 관하여 (p.337~338) 이탈리아, 피사 근교의 비아레지오에서 1903년 4월 5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이 보내주신 2월 24일자 편지에 오늘에서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행성 감기에 걸린 것처럼 무기력증에 빠져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기에 이 남쪽 바닷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 번 이곳에 와서 몸이 회복된 적이 있거든요. 그렇지만 아직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편지 쓰기도 힘겹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그다지 길게는 못 쓰지만, 양해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당신 편지는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이 점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답장은 한참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결국 근원적으로 그리고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이름도 없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조언하거나 심지어 그를 도우려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고 또 많은 일들이 성공해야 하며 행복한 결과를 이루도록 전제적인 주변상황이 조화롭게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 겠습니다.  첫 번째는 반어법(irony)입니다. 반어법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특히 창조력이 빈약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창조력이 넘칠 때는 삶을 포착하는 수단의 하나로써 사용해 보십시오. 그 쓰임이 순수할 때면, 반어법 그 자체도 순수합니다. 그럴 때 반어법을 쓰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반어법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거나 타성에 젖을까 봐 두렵다면, 그때는 위대하고 진지한 대상으로 눈을 돌리십시오. 그것들 앞에서 반어법은 하찮고 초라해질 테니까요. 사물의 깊이를 탐색하십시오. 반어법은 거기까지는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그리하여 위대함에 가까이 다가갔다면, 동시에 그런 이해의 형태가 당신 존재의 필연성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음미해보십시오. 만약 그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면、엄숙한 사건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그것은 곧 당신에게서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이 당신에게 속하고 선천적으로 내재한다면, 더욱더 강하게 성장하여 진지한 도구로써 당신의 예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오늘 당신한테 말씀드리고자 하는 두 번째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가진 책 중에서 내게 꼭 필요한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어디나 가지고 다니는 책은 딱 두 권이지요. 그 책들은 지금도 내 좌우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덴마크의 위대한 시인 옌스 페테르 야콥센이 쓴 책입니다. 당신도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의 작품들은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일부가 훌륭하게 번역되어 레클람 출판사의 세계 문고로 나와 있으니까요. 야콥센의 소품집 《여섯 가지 이야기》와 소설 《닐스 뤼네》를 사십시오. 그리고 소품집에 첫 번째로 실린 라는 제목의 단편부터 읽어보십시오. 하나의 세계가, 행복과 풍요로움과 불가사의 한 위대함이 당신을 감쌀 것입니다. 한동안 이 책들 속에 파 묻혀 지내면서, 거기에서 배울 만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습득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들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어떤 인생행로를 걷든지 그 사랑은 천 배 만 배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장담하건대, 그것은 당신의 존재라는 옷감을 짜는 데 들어가는 경험, 좌절, 기쁨과 같은 모든 실타래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더러 창작의 본질과 그 깊이와 영원성에 대해 무언가 깨달음을 준 은인이 누구인지 물으신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이름은 단 둘뿐입니다. 바로 위대하고 위대한 시인 야콥센과 현존하는 모든 예술가 중 필적할 자가 없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당신의 인생행로에 늘 성공이 있기를!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셋째 편지 - 야콥센의 작품에 관하여 (p.339~342) 피사 근교의 비아레지오에서 1903년 4월 23일 부활절을 맞아 보내주신 편지, 아주 기쁘게 읽었습니다. 당신의 여러 면모를 엿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기 때문이죠. 또 야콥센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술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들으니, 이전 당신의 삶과 여러 문제들을 이 풍요로운 보물창고로 안내한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닐스 뤼네>를 펼쳐보십시오. 정말 찬란하고 심오한 책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에서 가장 은은한 향기로부터 가장 진한 열매의 풍부하고 위대한 맛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듯 느껴지지요. 이 책에는 이해되지 않거나 파악되지 않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떨려오는 추억의 여운으로 모든 걸 알아볼 수 있지요. 어떤 체험도 무의미하게 다루지 않으며,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건이라도 운명처럼 펼쳐집니다. 그리하여 운명 자체가 커다란 직물처럼 느껴집다. 한 올 한 올이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짜여 다른 실 옆에 놓이고 마침내는 수백 올의 실과 엮이게 되는 경탄스러운 직물이지요. 당신은 비로소 이 책을 읽는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진기한 꿈속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이 주는 무수한 경이로움을 통과해 갈 것입니다.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어도 지금과 똑같은 경이감을 느끼리라는 점,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 그 놀라운 힘이며 옛날이야기와도 닮은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독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즐거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고, 어떤 의미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이 보다 좋아지고 단순해지며, 인생에 대한 믿음이 훨씬 깊어져 그 인생이 더욱 신성하고 위대해질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마리 그룹베의 운명과 동경을 그린 뛰어난 책과 야콥센의 시간집, 일기, 단상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록 그저 그런 번역본이긴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음악 속에 사는 듯한 그의 시를 읽어 보십시오 (이를 위해서라도 기회가 되면 이 모든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 아름다운 야콥센 전집을 구입하기를 권합니다. 라이프치히의 오이겐 디트리히사에서 총 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번역이 훌륭한데다 가격도 겨우 권당 5, 6 마르크 정도입니다.) (이곳에 장미가 피어있다면… )-그 섬세함과 형식은 독보적이지요-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그 책의 서문을 쓴 이와 비교해보더라도 의문의 여지 없이 옳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당부 드리고 싶은 건, 가급적 미학 비평은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글들은 생기 없는 완고한 사고에 갇혀 굳어버린 의미 없고 편파적인 견해거나, 오늘은 이 의견이 이겼다가 내일은 저 의견이 이기는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예술 작품은 한없이 고독하기에, 비평에 의존하는 것만큼 거기에 다가가기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예술작품을 포착할 수 있고, 정당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 그런 논쟁의 글이나 비평, 해설을 대한 때면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감정이 옳다고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틀렸더라도,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이 세월과 함께 당신을 다른 인식으로 서서히 이끌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이 조용하고 흐트러짐 없는 발전을 이루도록 놓아두십시오. 모든 진보가 그렇듯이, 그 발전은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강요한다거나 재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달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분만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모든 인상과 모든 감정의 싹이 온전히 그 자체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에서, 무의식 속에서,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완전히 자라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깊은 겸허함과 인내심으로 새로운 명료함이 해산할 순간을 기다리십시오. 이것만이 예술가의 삶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을 이해할 때나 창작할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시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해(年)는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10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릇 예술가란 재거나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름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말고, 수액의 흐름을 억지로 재촉하지 않고 봄 폭풍 한가운데서도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성숙하십시오. 그러지않아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하지만 여름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자들, 마치 눈앞에 영원이 펼쳐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근심 없고 고요하며 마음이 탁 트인 자들에게만 옵니다. 나는 이 진리를 고통 속에서, 그리로 그 고통에 감사하면서 날마다 배웁니다. 인내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리하르트 데멜, 그의 책은(참고로 말하자면, 그 책에 관해서는 조금밖에 모릅니다. 그 사람 자체에 관해서도요)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만났나 싶으면 금세 다음 페이지에서 그 감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책이지요. 매혹적인 것들을 보잘 것 없는 것들로 뒤엎어버리면 어쩌나 겁이 날 정도입니다, 당신은 '육감적인 삶과 시'라는 표현으로 그의 특징을 정확히 잘 잡아냈습니다. 실제로 예술적 체험은 그 고통과 열망에 있어서 믿을 수 없으리만치 성적(性的) 체험과 비슷합니다. 두 현상은 동일한 동경과 황홀감이 다른 형식으로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열'이라는 말 대신에 성(性) 을 넣는다면-넓고 순수한 의미에서, 곧 교회의 잘못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왜곡되기 이전 의미에서-데멜의 예술은 매우 위대하고 한없이 중요해 질 것입니다. 그의 시가 가진 힘은 위대하며, 원초적 본능처럼 강력합니다. 그 안에는 자유로운 박자가 담겨 있으며, 그의 내부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 힘이 언제나 솔직하고 가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창작자가 처하게 되는 가장 어려운 시련 중 하나입니다. 창작자는 자기가 지닌 최고의 미덕을 스스로 의식하거나 예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미덕의 순수성을 해치고 싶지 않다면요!) 이 힘이 그(데멜)의 본성을 소용돌이치다가 성적인 것으로 변했을 때, 그곳에서 그 힘은 자신에게 맞는 순진무구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진정으로 성숙하고 순수한 세계는 없습니다. 충분히 인간적이지 못하고 단순히 남성적인 성의 세계가 있을 뿐이죠. 욕정과 도취와 흥분에 지나지 않는, 남성이 일그러뜨린 사람을 강제로 짊어진 낡은 선입관과 교만을 업은 세계입니다. 그가 남자로서만 사랑하고 인간으로서는 사랑하지 않는 탓에 그의 성 감각 안에는 무언가 편협하고, 거칠어 보이며, 악의적이고, 일시적이며, 영속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들이 그의 예술을 저속하고 모호하며 의심쩍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은 오점이 없다고 할 수 없지요. 그의 예술은 시간과 열정으로 특징지워지며, 따라서 그 가운데 오래 살아남을 만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안에 있는 위대함을 깊이 맛보고 즐겨도 무방합니다. 다만 그로 인해 타락하거나 데멜 의 세계를 추종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것은 간통과 혼란으로 가득한 한없이 무시무시한 세계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고뇌 이상의 괴로움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더 많은 위대함으로 나아갈 기회와 영원을 추구할 용기를 가져다주는, 우리 인간의 참된 운명의 길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내 책에 대해서 말씀드리 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좋아하실 만한 책들을 다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책들은 일단 출간되면 더는 내 소유물이 아니고, 나는 몹시 가난합니다. 나 자신조차 내 책들을 구매할 수 없는 형편이지요. 늘 그러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 책을 받고 좋아할 것이 틀림없는 분들께조차 드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따라서 쪽지에다 최근에 출간된 내 책들(12~13권 정도 되는 책 가운데 최근 것만 적습니다)의 제목(그리고 출판사명을 적어드릴 테니 기회가 닿는 대로 그 중 몇 권을 주문하시라고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내 책을 곁에 두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넷째 편지 - 성에 관하여 (p.343~347)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에서 1903년 7월 16일 열흘 전쯤에 파리를 떠났습니다. 몸이 너무나 안 좋고 완전히 지쳤던 터라 드넓은 북부의 평야로 왔습니다. 이 광활함과 적막함과 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게 해주겠지요. 그런데 정작 나를 맞아준 건 긴 장마였습니다. 오늘에야 겨우, 쉬지 않고 몰아치던 폭풍우가 누그러지고 청명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첫 순간을 이용하여 당신에게 안부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나는 당신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답장 쓰기를 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당신 편지는 다른 편지들 틈에서 눈에 띄면 또 다시 읽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읽다 보면 당신이 바로 가까이에서 느껴졌지요. 5월 2일 자 편지였는데, 당신도 물론 잘 기억하실 겁니다. 이렇게 도회지를 멀리 떠나 이 커다란 고요 속에서 당신 편지를 읽자면, 삶에 대한 당신의 아름다운 근심에 감동하게 됩니다. 파리에서도 이미 느낀 바 있지만, 그보다 더욱 격렬한 감동이지요. 도시에서는 사물을 뒤흔드는 사나운 소음 때문에 모든 것이 음색을 잃고 사라지고 말거든요. 그런데 이곳, 광활한 땅 위로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 이곳에 있으니, 당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나름의 생명을 지닌 질문과 느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처럼 너무나 섬세하고 거의 설명이 불가능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어김없이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고 이 평생 그 물음을 해결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 눈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 사물과 비슷한 것들에 의지한다면 말이지요. 거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뜻밖에도 위대함과 무한한 가치를 품고 있는 자연속의 단순하고 소박한 존재들에게 다가간다면, 이런 하잖아 보이는 작은 것들에게 사랑을 품고서 마치 주인을 대하는 하인처럼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고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좀더 쉽고 한결같으며 친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일은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서는 이성이 아니라, 당신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각성과 앎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모든 시작을 앞에 두고 계시니, 되도록이면 이렇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당신 마음속에 있는 풀리지 않은 모든 문제에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물음 자체를 굳게 닫힌 방이나 대단히 진기한 언어로 쓰인 책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곧바로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지금은 구하지 못 합니다.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겪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물음에 직접 부딪히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먼 훗날 그 해답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면에 특별히 행복하고 순수한 삶의 형태를 빚어낼 가능성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갈고닦으십시오.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크나큰 신뢰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자신의 의지에서, 당신 내면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성(性)이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짐 지워진 모든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진지한 것은 대부분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진지합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의 기질과 본성에서, 당신의 경험이나 어린 시절이나 힘에서 인습이나 관습에 영향 받지 않은) 완전히 고유한 성 관념을 얻게 된다면, 이제 자아를 잃거나 당신이 가진 가장 큰 재산에 스스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육체의 쾌락은 감각적인 체험으로서, 순수한 시각이나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과일의 순수한 미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하고 무한한 경험이자,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인식인 동시에 모든 인식의 성취요, 영광입니다. 쾌락을 맛보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 경험을 남용하고 허비한다는 데 있으며, 또한 절정의 순간 을 위해 아껴두어야 할 그런 경험을, 인생의 따분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흥거리로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먹는 일조차 다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한편에서는 궁핍이,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이 이 식욕의 해맑은 속성을 흐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모든 강하고 단순한 욕구마저 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은 그 욕구들을 스스로 맑게 만들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이면 몰라도 고독한 사람은 가능합니다). 고독한 사람은 동식물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랑과 동경의 조용하고 영속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잘 떠올리며 식물을 볼 때처럼 동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기꺼이 한몸이 되고 번식하고 성장해간다는 사실, 그것도 육체의 쾌락이 나 고통에서가 아니라 필연에 따른 행동이라는 사실, 이 필연이야말로 쾌락이나 고통보다 위대하고 의지나 반항심보다 강력한 것임을 잘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아아, 이 지상에 있는 가장 하찮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깃든 이 넘치는 비밀을 인간이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더 진지하게 품는다면, 그리하여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는 대신 그 비밀이 얼마나 두렵고 중대한 것인가를 느끼고 견디게 된다면! 또한 인간의 생식능력이 정신과 육체 둘로 나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태도를 지닌다면! 왜냐하면 정신적인 창조도 육체적인 창조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신적인 창조는 육체적 쾌락의 더욱 은밀하고 황홀하여 영속적인 반복일 따름입니다. “창조자가 되어 무언가를 낳고 만들려는 생각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위대한 증거를 얻고 실제로 이뤄내지 않는 한 허황한 것이며,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서 지속적인 동의를 보내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창조를 즐기는 행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까닭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물려 받는 수백만 번의 잉태와 분만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자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잊고 있던 숱한 사랑의 밤이 되살아나 그 생각을 숭고함과 고귀으로 가득 채웁니다. 한편 한밤중에 하나가 되어 떨리는 쾌락 속에서 얼싸안은 연인들은 미래의 시인들이 부를, 형언할 길 없는 환희의 노래를 위해 달콤함과 깊이와 힘을 쌓아 올리는 진지한 작업을 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리로 미래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방황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포옹하는 그 순간에도 미래는 찾아오고 새 생명은 탄생합니다. 명백히 우연의 영역인 듯한 곳에서도 법칙은 눈뜨며, 그 법칙에 따라, 저항력 있는 힘찬 정자가 그를 활짝 맞아들이는 난자를 향해 돌진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저 밑바닥에서는 모든 것이 법칙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비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봉인된 편지인 양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다양한 이름과 복잡한 현상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 위에는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위대한 모성이 존재할 테니까요. 처녀의 아름다움, (당신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아무것도 다하지 않은" 존재의 아름다움은 스스로 예감하고 준비하며 불안과 동경에 전율하는 모성입니다. 어머니 의 아름다움은 섬기는 모성이며, 노파의 가슴속에서 그것은 위대한 추억이 됩니다. 남성에게도 모성이 있으며, 내게는 육체와 정신 두 측면으로 여겨집니다. 남성의 생식 작용도 일종의 분만이며, 내면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창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이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친근한 것이지요. 세계의 위대한 개혁은 남자와 여자가 모든 그릇된 감정과 혐오감에서 벗어나 서로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닌 형제며 이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부과된 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소박하고 진지하며 끈기 있게 짊어지기 위해 인간으로서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고독한 사람은 언젠가는 다른 이들도 생각해낼 모든 것을 벌써부터 준비하여 보다 실수 없는 손길로 만들어갑니다. 그러니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고독이 아름다운 탄식의 소리를 자아내며 당신에게 맛보여준 고통을 짊어지십시오. 당신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야말로 당신 주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그토록 멀어졌다면, 당신의 지평선은 별들 아래 어딘가에 이를 만큼 광대해져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뒤처진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그들 앞에서 태연하고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십시오. 의심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이 이해 못할 확신이나 기쁨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 마십 시오. 그런 사람들과도 어떠한 형태로든 단순하고 친밀하게 결합하고자 노력하십시오. 당신만 차근차근 맞춰 긴다면, 굳이 그들과 똑같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낯설지라도 그런 사람들의 삶을 사랑하고, 늙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노인들은 당신이 믿는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상투적인 갈등에 논쟁거리를 제공하지 않도록 조 심하십시오. 그러한 갈등은 자식의 기력을 크게 소모시키고, 비록 자식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언제든 따뜻하게 품어줄 부모의 사랑마저도 좀먹게 합니다.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지 말고, 이해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에게 남겨줄 유산처럼 쌓아둔 그들의 사랑을 믿으십오. 그 사랑 안에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벗어나서는 안될 힘과 축복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먼저 어떤 직업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직업은 당신을 독립시켜 모든 의미에서 완전히 홀로 서게 하니까요. 당신 안의 생명이 그 직업에 제약을 느끼는지 한번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지켜보십시오. 나는 직업이란 대단히 힘든 것이며, 인간에게 대단히 까다로운 요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에는 거대한 인습이 짐 지워져 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해 개인의 견해가 받아들여질 여지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고독이 아주 낯선 상황 한복판에서도 당신이 의지할 곳과 고향이 되어 주겠지요. 당신은 바로 거기에서 당신의 모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이 기꺼이 당신과 동행할 것이며, 나의 믿음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다섯째 편지 (p.348~350) 로마에서 1903년 10월 29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8월 29일자 편지는 피렌체에서 받았습니다. 두 달이 지난 지금에야 그 사실을 알리는군요. 나의 게으름을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하지만 나는 여행 중에 편지 쓰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쓰는 데 있어서 내게는 꼭 필요한 도구들 밖에도 약간의 정적과 고독과 너무 낯설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6주 전쯤 로마에 도착했는데, 그때 로마는 텅 비어 한산했고 열병이 속출할 만큼 무더웠습니다. 이런 상황에다가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겹치는 바람에, 우리를 둘러싼 불안은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았고 타향살이의 무게가 우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로마는 (아직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처음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워지리만큼 서글픈 인상을 풍겼다는 점도 덧붙여야겠습니다. 이 도시가 내뿜는 무기력하고 우중충한 박물관 같은 분위기며, 발굴되고 애써 복원된 어마어마한 과거(그 덕분에 초라한 현재가 먹고사는 셈이지만)며, 학자나 문헌연구가들이 바람을 잡으면 널리고 널린 이탈리아 여행객들이 덮어놓고 맞장구치는, 온통 깨지고 허물어진 물건들을 둘러싼 끔찍한 과대평가가 이런 인상을 부추기는 원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물건들은 우리 삶이 아니며 우리 것이어서도 안 되는 다른 시대, 다른 삶01 빚은 우연한 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방어적인 태도로 몇 주를 보낸 뒤 우리는 아직 얼마간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마침내 침착함을 되찾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여기에 다른 곳보다 많은 아름다움이 있는 건 아니야. 몇 세대에 걸쳐 끊임없이 칭송되고 수선공이 보수를 거듭해온 이 유물들은 아무 영혼도, 가치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 야," 하지만 이곳에는 아름다운 것도 잔뜩 있습니다.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것들 천지지요. 한없이 생기 넘치는 물줄기가 고대 수로를 따라 대도시로 흘러들어와, 수많은 광장마다 설치된 하얀 석조 분수대 위에서 춥추고 널따란 수반 안으로 넓게 번지며 떨어집니다. 물줄기는 낮에는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밤에는 목소리를 드높입니다. 이곳의 밤은 광활하고 별이 총총하며 감미로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곳에는 정원도 있고, 인상적인 가로수과 돌계단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고안한 이 돌계단은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본뜬 것으로, 물결에서 물결이 생겨나듯이 앞으로 기울여 한 단 한 단 폭넓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인상들을 통해 인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다스럽게 지껄여대는(실제로 어찌나 떠들기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 온갖 사물의 호소로부터 자기 자신을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영원 속에 머무르며 조용히 누릴 수 있는 고독이 깃든 몇 안 되는 사물들을 발견하게 되지요. 현재 나는 시내 중심인 카피톨에서 지냅니다. 보존된 로마 예술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기마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요. 그렇지만 몇 주 안에 한적하고 아담한 곳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커다란 공원 깊숙한 곳에 외딴 섬처럼 자리 잡은 집으로, 오래된 발코니가 딸린 방을 쓰게 될 겁니다. 도시의 소음과 소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지요. 겨우내 그곳에서 지내며 위대한 고요를 즐길 생각입니다. 그 고요함이 훌륭하고 유익한 시간을 선물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옮기면 차분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 자세한 편지는 그때 다시 쓰도록 하지요. 당신 편지에 대해서도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오늘은(진작 알리지 않은 점은 내 잘못입니다만) 당신이 편지에서 말씀하신 그 책을 당신이 무척 공들여 썼다고 했던) 내가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려드려야겠군요. 보르프스베데에서 당신에게 되돌아간 것 아닐까요? (외국으로는소포를 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정말 그렇게 되었기를,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기를 바랍니다. 분실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이탈리아의 우편 사정으로는 분실도 드문 일이 아니지만요. 그 책이 배달되었더라면 (당신의 소식을 대할 때면 늘 그래 왔듯이) 나는 기쁘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쓴 시들도 (제게 보내주신다면) 언제든 성심성의껏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고 싶군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여섯째 편지 - 직업과 신에 관하여 (p.351~354) 로마에서 1903년 12월 23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성탄절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로 한창인 이런 때, 평소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당신에게 어찌 인사말 한마디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고독의 위대함을 느꼈다면 그것을 기뻐하십시오. 위대하지 않은 고독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고독은 단 하나뿐이며, 위대하고 쉽게 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흔한 관계라도 좋으니, 뜻하지 않게 맺어진 보잘것 없는 관계도 좋고 아무 가치 없는 표면적 관계라도 좋으니 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고독과 맞바꾸고 싶다고 바라는 시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고독이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고독의 성장은 소년의 성장처럼 고통을 동반하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서글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결국, 필요한 것은 고독, 오로지 위대한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는 것--이는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자못 중요하고 대단해 보이는 일들에--그 모습이 하도 바빠 보이는 데다, 어린 눈이 어른들의 일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만--얽매여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꼈던 고독, 바로 그런 고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어른들의 일이란 것이 딱하기 짝이 없으며 그들의 직업이 그 자체로 굳어버려 삶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문득 간파하면, 왜 우리는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그런 모습을 서먹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일까요? 자기 세계의 밑바닥에서, 다시 말해 그 자체가 일이요 지위요 직업인 자기 만의 고독 저 멀리에서 그 모습을 방관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어린아이의 현명한 몰이해를 거부와 경멸로 바꾸어놓으려 합니까? 몰이해는 고독을 의미하지만, 거부와 경멸은 일종의 관여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수단을 써서 거기에서 멀어지려고도 하지만요. 부디 당신이 내부에 지니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십시오. 그 생각을 뭐라고 부르든 그건 당신 마음입니다. 그 생각이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든 미래에 대한 동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당신 내부에 떠오른 그 생각에 주의를 쏟으며, 그 생각을 당신 주변에서 보이는 모든 것 위에 놓으십시오. 당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당신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을 만합니다. 어떻게든 당신은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입장을 해명하느라고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용기를 들여서는 안 됩니다. 대체 어느 누가 당신더러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단 말입 니까? 나는 당신의 직업이 힘들고 당신과 반대되는 성향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압니다. 더 나아가 당신이 언제, 어떤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짐작했었습니다. 그게 현실이 되고 나니 나는 당신을 진정시킬 수가 없군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직업이란 다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직업이란 본디 개개인에게 온갖 것을 요구하는 법이고, 늘 적대적이며, 입을 꾹 다문 채 뚱한 표정으로 무미 건조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증오로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당신의 현재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인습과 편견과 오해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겉보기에 더 큰 자유를 누리는 직업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 내에 드넓은 자유로운 공간을 갖고 진정한 삶을 구성하는 위대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그런 직업은 없습니다. 고독한 개인만이 하나의 사물처럼 심오한 법칙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동틀 무렵의 아침 풍경 속을 걸어갈 때, 또는 사건들로 가득한 황혼을 바라볼 때, 그리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느낄 때, 모든 세속적 지위는 마치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가듯이 삶의 한복판에 서 있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이 장교로서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다른 직업을 택했다 하더라도 비슷하게 겪었을 일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직업도 갖지 않고 사회와는 단지 가볍고 독립적인 관계만을 맺는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구속감은 여전히 당신을 따라다닐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당신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떤 유대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사물에 다가가 보십시오. 사물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직 밤이 있습니다. 나무 사이를 누비고 수많은 땅 위를 지나가는 바람이 있습니다. 사물들과 동물들은 아직 당신이 관여할 만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을 보고 당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면, 다시 그 고독한 어린아이들 틈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존엄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디에나 등장했던 신을 더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소박함과 적막감을 떠올리기가 두렵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이 정말로 신을 잃어버렸는지 자문해보십시오. 오히려 신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요? 대체 언제 신을 가졌었습니까? 어린 아이가 신을 지닌다는 걸 믿습니까? 장정들조차 간신히 짊어져야 하는, 노인들은 숫제 깔아뭉개질 듯이 무거운 그 신을요? 정말로 당신은 신을 가진 사람이 돌멩이를 잃어버리듯이 그렇게 쉽게 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는 설사 신을 지녔던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그가 신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신이 그를 버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신이 없었음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동경이 만들어낸 환상이며 마호메트는 그 자신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속임수라고 느낀다면, 우리가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깜짝 놀라며 신이 없음을 느낀다면--그렇다면 도대체 왜 당신은 결코 존재한 적 없는 신을 과거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리워하고, 진짜로 잃어버린 것처럼 찾아다니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신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영원으로부터 이제 곧 출현하게 될 존재, 미래의 존재, 우리가 이파리로 달린 나무의 마지막 열매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신의 탄생을 미래에 일어날 일로 생각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당신의 생애를 위대한 잉태의 역사에 담긴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하루처럼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매 순간이 시작임을 왜 보지 않으십니까? 시작 자체가 그토록 아름다운데 그것이 신의 시작이라고는 어째서 생각하지 않나요? 신이 완전하다면, 많고 많은 것들 사이에서 신이 선별할 수 있도록 먼저 신 앞에 하찮은 존재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만물을 그의 안에 품으려면 신은 마지막에 오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존재가 이미 과거에 있었다면, 대체 우리에게 어떤 존재 의의가 있겠습니까? 꿀벌이 꿀을 모으듯, 우리도 만물 가운데서 가장 달콤한 것을 모아서 신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작고 소박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일, 일에 이은 휴식, 침묵, 작고 고독한 기쁨, 함께하는 이나 따르는 이도 없이 혼자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신을 만듭니다. 우리 조상이 우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또한 신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 리의 조상은 이렇게나 오랜 세월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그들은 우리 안에 여러 가능성으로, 우리의 운명에 지워진 짐처럼, 우리 안에 흐르는 피처럼,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 얼굴처럼 존재합니다. 그 무엇이 당신에게서 언젠가는 신 안에 머물 날이 오리라는, 가장 아득하고 궁극적인 존재인 신의 일부가 되리라는 희망을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카푸스 씨, 아마도 그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는 당신의 삶에 이런 고뇌가 필요하리라 신께서 생각하시는 거라고 믿으십시오.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축하하십시오. 삶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당신 안의 모든 것들이 신을 위해 일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당신이 그토록 숨 가쁘게 신에게 열중했듯이 말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불쾌한 기분 일랑 떨쳐 버리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신의 도래를 방해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겨울이 끝날 무렵, 대지가 봄이 찾아오는 걸 막지 않듯이 부디 기쁨과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일곱째 편지 - 사랑에 관하여 (p.355~361) 로마에서 1904년 5월 14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지난번 편지를 받고 나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일 때문에, 그다음에는 여러 가지가 거치적거려서, 마지막에는 몸이 좋지 않아서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차분하고 기분 좋은 날을 잡아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이곳에서도 초봄 날씨가 심술궂고 변덕스러워서 고생을 좀 했지요) 이렇게 당신에게 안부도 묻고, 당신이 편지에 쓰셨던 질문들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성심껏 답해드리고자 합니다. 보시면 아시 겠지만, 당신이 보내주신 소네트를 내 필체로 옮겨 써보았습니다. 아름답고 소박하며 고요한 우아함이 느껴지는 형식미를 갖춘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읽은 당신의 시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렇게 필사본을 동봉하는 이유는, 자기 작품을 남의 필체로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고도 대단히 새로운 경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이 쓴 시라는 생각으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시가 얼마나 완벽하게 당신 고유의 것인지를 가슴 깊이 느끼게 될 테지요. 이 소네트와 당신의 편지를 반복해서 읽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그 두 가지 에 감사드립니다. 당신 안에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이 있다고 해서 혼란스러워하지는 마십시오. 차분한 생각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도구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 소망은 당신의 고독을 드넓은 들판 위로 펼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어려움에 천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성장하고 나름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를 방어하며,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온갖 어려움에 맞서 온몸으로 싸웁니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어려움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고독은 좋은 것입니다. 고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어렵다면, 그만큼 더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늘어나는 셈입니다. 사랑도 좋은 일입니다. 사랑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려운 궁극의 과제이자 마지막 시련입니다. 다른 일들은 사랑을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서툰 젊은이들은 아직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혼신을 다해, 그들의 고독하고 수줍으며 높은 곳을 향해 고동치는 심장에 모인 힘을 모두 쏟아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배우는 기간은 언제나 기나긴 은둔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삶 속으로 깊게 파고든 사랑은 오랫동안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할수록 고독은 더욱 커지고 깊어집니다. 이때의 사랑은 결코 결합이나 헌신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없습니다. 정화되지 않은 존재, 준비되지 않은 존재,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 끼리의 결합이란 대체 무엇01겠습니까?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성숙시키고, 스스로를 고유한 하나의 세계로 세우도록 만드는 고귀한 사건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부과된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이며, 그를 머나먼 곳으로 이끄는 부름입니다. 젊은이들은 오직 이런 차원에서,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갈고닦아야 하는(밤낮으로 귀 기울이고 밍치질해야 하는 의무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을 이용해야 합니다. 헌신이나 희생, 결합으로서의 사랑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힘을 모으고 비축해야 할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도 그런 사랑을 성취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에도 젊은이들은 너무나 쉽게 사랑에 뛰어들고, 또 너무나 쉽게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성급함은 젊은이들의 본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다가오면 거기에 자신의 모든 걸 내맡김으로써 온갖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헛되이 기력을 소모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이른바 그들이 결합이라고 부르는, 또는 그게 가능하다면, 기쁜 듯이 그들의 행복이라, 미래라 부를 그 반쯤 부서진 존재더미와 더불어 삶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자기 자신을 잃고, 그다음엔 상대방을 잃고, 급기야는 미래에 찾아올 모든 인연을 잃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을 잃고 조용히 왔다가 사라지는 예감으로 가득 찬 섬세함을 공허한 당혹감과 맞바꿉니다. 그리하여 이제 환멸과 절망과 빈곤만 남은 그들은 위험한 길목마다 설치되어 있는 공공대피소처럼 우리 인생에 무수히 많이 세워져 있는 관습 가운데 하나로 도피합니다. 인간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이만큼 관습이 잘 갖춰져 있는 영역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고안해낸 온갖 구명대며 보트며 튜브 따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이러한 온갖 종류의 피난처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때문에, 사회는 그것을 다른 모든 대중오락과 마찬가지로 쉽고 값싸고 안전한 오락거리로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을 하는(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젊은이들(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수준에 머뭅니다) 또한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개성에 따라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본성은 사랑의 문제가 그 밖의 다른 중요한 문제들과 달리, 관습과 같은 사회적인 해결책을 통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문제는 각 경우마다 새롭고 특수한 해결책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제 자신을 관계 속에 던져버린 사람,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서 그 어떤 경계나 차이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전부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자아로부터, 자신의 깊은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올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무력하기만 할 뿐입니다. 애써 (결혼과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관습을 거부한다 해도 그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치명적인 것은 마찬가지인 또 다른 관습적인 해결책에 빠져들고 맙니다. 결국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이루어진 잘못된 결합의 문제를 풀기 위한 모든 시도는 관습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란에서 비롯 된 모든 상황은 그것이 아무리 비일상적인(다시 말해서 비도덕 적인) 성격을 갖는다 해도 결국 일종의 관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헤어짐조차도 관습적입니다. 무기력하고 아무런 결실도 얻을 수 없는, 몰개성적이고 우연한 결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물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운 죽음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사랑에도 아무런 해명도 해법도 암시도 없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봉인한 채 가지고 다니다가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게 될 이 두 과제에 대해서 우리는 합의에 기초한 어떤 공통 법칙도 찾아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으로서 삶을 시험에 들게 할수록 우리 개인은 이 위대한 두 과제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어려운 일이 우리 성장 과정에 제시하는 요구들은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어서, 우리 같은 초심자에게는 그것을 감당해낼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견디며 이 사랑을 무거운 짐으로서 또 수련으로서 받아들이고, 보통 사람들이 자기 존재에 가장 절실한 진지함을 피해서 숨어온 모든 값싸고 경박한 놀이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먼 훗날의 후손들은 조금이나마 진보와 개선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결코 무가치 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는 개인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편견 없이 바라보려 하는 단계에 도달한 최초의 인류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에 참고할 만한 어떠한 본보기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우리의 조심스러운 첫걸음에 도움을 줄 많은 것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소녀와 부인들은 처음 잠깐 동안에는 남성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흉내 내고 남성과 똑같은 직업을 가지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과도기가 지나면, 여성들이 그처럼 (종종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수없이 변장하고 변해온 것이 단지 왜곡을 강요하는 남성의 영향 밑에서 그녀들의 본질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 더욱 내밀하고 내실 있는 형태의 삶을 품고 있는 여성은 삶의 씨앗을 잉태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삶의 표면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고, 오만하고 성급하게 자신이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을 평가절하 해버리는 천성적으로 경박한 남성보다 더 풍요롭고 더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그동안 고통과 수모를 받아 온 이러한 여성의 인간성은 신분변화와 오랜 사회적 관습의 변화와 더불어 마침내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남성들은 그때 가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지금도 특히 북쪽 나라에서는 그렇게 믿을 만한 조짐 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명칭이 단순히 남성의 반대를 의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립된 어떤 것을 뜻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는 여성을 생각하면 보충이나 한계 같은 단어 대신 생명, 존재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그런 소녀와 부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으로서의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진보는 처음엔 뒤처진 남성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칠 테지만, 결국 지금의 온갖 오류로 가득한 사랑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그것을 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이 더욱 인간적인 사랑 (결합할 때든 헤어질 때든 한없이 사려 깊고 조용하게 선의로써 분명하게 행해질 사랑)은 우리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준비하는 사랑, 곧 두 고독이 서로 지켜주고 서로 한계를 넘지 않으며 서로 인사함으로써 성립하는 사랑과 매우 흡사할 것입니다. 한 말씀만 더 드리 겠습니다. 당신이 언젠가 소년이었을 때 부여받은 그 위대한 사랑이 사라져버렸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대하고 훌륭한 소망이 오늘날 삶의 기반인 의도가 그때 당신 안에서 성숙해 있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랑이 당신 기억 속에 강하고 힘차게 남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당신 최초의 깊은 고독이었고. 당신이 살면서 행했던 첫 내면의 작업이었으니까요. 친애하는 카루스 씨. 모든 일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SONETT Durch mein Lehen sinn chse Klags ohne Seufer rin nefdunkles Weh. Meiner Träume reiner Blürenschnee ist die Weihe meiner stillsten Tage. Öfter aber kreuzt die große Frage meinen Pfad. Ich werde klein und geh kalt vorüber wie an einem See, dessen Flut ich nicht zu messen wage. Und dann sinkt ein Leid auf mich, so trübe wie das Grau glanzarmer Sommernächte, die ein Stern durchflimmert--dann und wann-- Meine Hände tasten dann nach Liebe weil ich gerne Laute beten möchte, die mein heißer Mund nicht finden kann ....... Franz Kappus 소네트 내 인생 사이를 탄식도 없이 한숨도 없이 떨며 지나가는 어둡고도 어두운 고통. 내 꿈들의 청정무구한 눈보라는 내 조용하기 짝이 없는 날들의 봉헌식 그러나 더 자주 커다란 물음이 내 길을 막아서 네, 나는 움츠러들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호숫가를 지나갈 때처럼 추위에 떨고 있다네 그때 어떤 슬픔이 마치 별빛이--이따금--가물거리며 새어나오는 어슴푸레한 여름밤들의 잿빛과도 같이 흐릿하게 내 위로 가라앉는다네 그러면 내 손은 사랑을 더듬어 찾네. 내 뜨거운 입이 찾아내지 못하는 소리를 기도처럼 읊조리고 싶어서…… 프란츠 카푸스   여덟째 편지 - 슬픔과 고독에 관하여 스웨덴, 프레디 보레비 고르에서 1904년 8월 12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 얘기가 당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잠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그동안 많은 큰 슬픔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곁을 지나가는 그런 슬픔 들이 힘겹고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큰 슬픔들이 오히려 당신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간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슬퍼하는 동안 당신 안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나요? 당신 존재의 어느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나요? 슬픔이 위험하고 나쁜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슬픔을 억누르려 할 때뿐입니다. 그런 슬픔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대충 치료받은 질병처럼 잠시 물러났다가 이내 더 무섭게 터져 나옵 니다. 그러고는 인간 내부에 모여서, 삶을 부여받지 못한 채 모욕당하고 타락한 생물이 됩니다. 인간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식의 한계와 예감의 외벽을 넘어 조금 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기쁨보다도 슬픔을 더 큰 신뢰감으로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새로운 미지의 무언가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감정은 수줍어 쭈뼛거리며 입을 다물고, 우리 내부의 모든 것이 뒷걸 음질쳐 적막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그 새로운 것이 그 적막 한가운데에 머물러 서서 침묵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거의 모든 슬픔은 긴장의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우리는 이 순간을 마비라고 느낍니다. 이 순간 우리의 감정은 뒤로 물러선 채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면으로 들어온 낯선 손님과 홀로 대면해야 합니다. 친근하고 익숙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떨어져나갑니다. 우리는 예전과는 더 이상 같은 곳에 머물 수 없는 변화의 한복판에 놓이게 됩니다. 그 슬픔 또한 지나갑니다. 그 새로운 것은 심장 속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의 심실을 관통하여 사라집니다. 벌써 피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쉽게 속일 수 있을 정도지요.  하지만 우리는 변했습니다. 손님이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가 바뀌듯이, 누가 왔었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 손님의 정체를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현실이 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우리 안으로 틀어와 그 모습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신호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슬플 때 고독하고 빈틈없이 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래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언뜻 아무런 사건도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외부에서 비롯된 사건인 양 느껴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저 시끄럽고 우연한 순간들보다 훨씬 더 삶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다 참을성 있고 고요해질수록 우리 존재는 슬픔을 향해 더욱더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이 우리 안으 로 깊숙하게, 왜곡 없이 들어올수록 그것은 보다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고 또한 우리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일어날 때(말하자면, 그것이 우리로부터 나와 다른 이들에게로 전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친밀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서서히 발전해가는 방향이며, 따라서 우리의 운명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은 어떤 낯선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있어 왔던 어떤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과정들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님을 서서히 깨달아가겠지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나온 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의 내면에 운명이 남아 있을 때 이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막상 운명과 부닥쳤을 때 그 낯설음에 혼란스러워 하며 그것이 지금 막 자기에게로 온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로서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그와 비슷한 것조차 발견한 적이 없노라 맹세할 수도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태양의 운동에 대해서 잘못 알아왔듯이, 그들 또한 운명의 운동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푸스씨, 미래는 굳건히 서 있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무한한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고독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택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은 사실 하찮은 것임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독합니다. 고독을 얼버무리고 자못 그렇지 않은 듯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러는 대신, 우리가 고독한 존재임을 명확히 꿰뚫어 보고 차라리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편이 훨씬 현명합니다. 물론 그러다가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느 때 우리의 눈이 머물며 쉬던 것들, 우리 가까이에 있던 낯익은 사물들이 사라지고 멀리 있던 것들은 더더욱 멀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자기 방에 있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느닷없이 산꼭대기로 끌려간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극도의 불안감,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내맡겨졌다는 두려움에 숨이 막혀 오겠지요. 마치 추락하고 있거나 공중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또는 온몸이 산산조각 난 듯한 기분일 것입니다. 이러한 감각의 상태에 적응하고, 또 이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의 뇌는 엄청난 거짓말을 꾸며 내야 하겠지요.  이처럼 고독한 사람에게는 모든 거리감과 모든 척도가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상당수는 갑자기 일어나고, 그 산꼭대기에 놓인 남자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벗어난 듯 보이는 괴상한 공상과 기이한 감각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까지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한 그 안에서 우리 존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전혀 생소한 것까지도 그 범위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용기입니다. 우리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가장 이상한 것, 기이한 것, 불가사의 한 것을 용기 있게 직면하십시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인류는 이제껏 겁쟁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의 삶에 말할 수 없이 큰 해악을 끼쳐왔습니다. 사람들이 기이한 현상이라 부르는 경험들, 이른바 '영혼의 세계, 죽음 등, 우리의 삶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자기방어로 인해 우리의 일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런 것들을 느끼던 인간의 감각능력마저 퇴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신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사의 한 것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개개인의 존재를 빈약하게 만듭니다. 더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커다란 제약이 생겨납니다 . 이는 마치 무한한 가능성의 강바닥에서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강기슭으로 끌어올려진 것과 같습니다. 인간관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단조롭고 구태의연하게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비단 게으름 때문만은 아닙니다.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체험을 덮어놓고 마다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아무리 수수께끼 같은 것일지라도 거부하지 않을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 생동감 넘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자기 존재의 맨 밑바닥까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 개인의 존재를 방에 비유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방의 창가 구석자리나 늘 오가는 동선에 해당하는 작은 공간만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일종의 안정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 등장하는 죄수들이 그들이 갇힌 무시무시한 감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며 손으로 벽을 더듬는 그 위험 가득한 불안정함이 훨씬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수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함정도 덫도 없습니다. 우리를 겁주거나 괴롭힐만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요소로서의 삶 속에 놓였습니다. 게다가 수천 년에 걸친 적응을 통해 이 삶과 아주 닮은 존재가 되었기에 뛰어난 보호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불신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기때문입니다. 그곳에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포요, 심연이 있다면 우리의 심연입니다. 또한 그곳에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어려운 것에 천착하라는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면, 아무리 낯설던 것도 더없이 친숙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모든 민족의 시초에서 발견되는 오랜 신화, 마지막 순간에 공주로 변하는 용의 신화를 어찌 잊겠습니까. 우리 삶의 모든 용들은 우리가 아름다움과 용기를 조금만 더 보여주기를 기다리는 공주일는지 모릅니다. 모든 공포는 그 가장 깊은 본질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도움을 바라는 무력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카푸스 씨,  여태껏 본 적 없는 커다란 슬픔이 당신 앞길을 가로막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불안감이 빛처럼, 구름이 드리운 그림자처럼 당신 손 위를, 그리고 당신의 모든 행동 위를 지나가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면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으며, 삶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았고, 당신은 삶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고 삶은 당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 당신은 불안함과 슬픔과 우울함이 당신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들을 당신 삶에서 쫓아내려 하십니까? 왜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려 합니까? 당신은 지금 과도기에 있으며, 이런 때에 당신이 바랄 수 있는 건 오직 스스로 변화하는 것뿐임을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신 삶의 어떤 부분이 병들어 있다 해도, 병이란 유기체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취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런 때는 유기체가 병에 걸리도록 도와주고, 완전히 병을 앓고 나면 이번에는 병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병은 유기체의 성장 수단인 것입니다.  카푸스 씨, 당신 안에서는 지금 대단히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투병 중인 환자처럼 끈기 있고, 회복기 환자처럼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당신 상태는 양쪽 모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당신은 자기 몸 상태를 감시해야 하는 의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병이든 의사마저도 때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날들이 있는 법입니다. 당신이 자기 몸을 돌보는 의사로서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렇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너무 꼼꼼히 관찰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일에 얽힌 당신의 과거를 비난의 눈으로 (다시 말해,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소년 시절에 저지른 잘못과 소망과 동경 가운데 지금 당신 내면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기억해내거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무력한 유년시절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대단히 어렵고 복잡 미묘하며, 많은 영향을 받는 동시에 모든 실제 생활관계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악덕 하나가 그 안으로 침투했다고 해서 그것을 덮어놓고 '악'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명칭은 조심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것도 어떤 범죄의 이름이지 이름 붙일 수 없는 개인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은 인생의 필연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그 인생이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이 힘의 소모를 그토록 크게 느끼는 것은 승리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기는 하지만, 승리는 당신이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위업이 아닙니다. 당신이 기만 대신 그 자리에 놓을 수 있었던 어떤 것, 이른바 참되고 알찬 어떤 것이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위업이지요. 그것이 없었더라면 당신의 승리는 그저 의미 없는 도의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승리는 당신의 인생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가 언제나 잘되기를 기도하는 당신 인생에 말입니다. 당신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었는지 기억하시 겠습니까? 나는 이제 그 인생이 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기에 삶은 계속 험난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기에 삶은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을 위로하려 애쓰는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끔 위안이 되는 소박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쉽게 인생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 또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당신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이런 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홉째 편지 - 감정에 관하여 스웨덴, 욘세레드 푸루보리에서 1904년 11월 4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그동안 편지 한통 쓰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행을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이 바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편지를 쓰는 일이 힘겹게 느껴집니다. 벌써 여러 통을 써야 했거든요. 손이 몹시 피곤합니다. 누군가에게 받아쓰게 할 수 있다면 많은 이야기를 할 텐데 그럴 수는 없으니, 당신의 긴 편지에 얼마 되지 않는 말로나마 답장하는 것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나는 오로지 당신이 잘되기를 기도하며 당신을 생각하곤 하는데, 실은 이것이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고 힘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내 편지가 과연 도움 될지는 종종 의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그저 내 편지를 딤덤하게 받아주세요. 그리고 지나지치게 고마워 하지 마십시오. 그냥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려 봅시다. 이제 당신이 한 말들에 대해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을 것 을같습니다. 당신이 어떤 회의를 품고 있는지, 외부와 내부를 조화시킬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 그밖에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제껏 했던 말과 똑같을 테니까요. 괴로움을 묵묵히 참고 견딜 충분한 인내심을 갖기를, 어려움 속에서도 나날이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당신의 고독을 신뢰할 수 있는 내면의 단순성을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제쳐두더라도, 인생을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부디 내 말을 믿으세요,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든 옳습니다. 이제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당신의 존재 전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고양하는 모든 감정은 순수합니다. 반대로 당신 존재의 일부만을 이해하고 당신을 일그러뜨리는 모든 감정은 불순합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모든 것은 좋습니다. 당신을 예전 가장 좋았던 순간의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은 옳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존재 전체에 퍼지는 것이라면, 그리고 도취나 혼탁함이 아니라 그 바닥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많은 기쁨과 같은 것이라면, 당신을 고양하는 모든 것은 다 옳습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 겠습니까? 당신의 의심도 잘만 다스리면 좋은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은 지식과 비판적 정신의 힘을 아울러 갖추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당신 안의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 때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보십시오. 의심에게 증거를 요구하고, 그것을 시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의심하는 마음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심지어는 발끈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말고, 논쟁을 끝까지 끌고 가십시오. 그런 식으로 번번이 신중하고 철저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언젠가 의심이 파괴자로부터 당신의 가장 훌륭한 일꾼이-아마도 당신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현명한 일꾼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오늘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번에 프라하에서 발행된 독일 연구라는 잡지에 실린 저의 짧은 시의 별쇄본을 동봉합니다. 이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삶과 죽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것인지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열번째 편지 파리에서 1908년 성탄절 다음 날에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에게 멋진 편지를 받고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손에 잡힐 듯 실감 나는 당신의 근황을 전해 듣고서,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좋은 소식인 듯 합니다. 사실 이 편지는 성탄절 전날 밤에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겨울 유난히 많고 끊이질 않는 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이 전통 축제가 어느새 코앞에 와 있더군요. 꼭 필요한 일들을 처리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을 정도입니다. 편지 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이 성탄절 축제의 며칠 동안 나는 자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센 남풍이 산들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이 휘몰아치는 광활한 산속의 외로운 요새에서 당신이 얼마나 조용히 지내고 있을지를 상상했습니다. 그런 소리와 움직임을 품은 고요함은 참으로 거대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고요에 먼 바다가 선사시대의 그토록 조화롭고 깊은 음색을 더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제 내가 당신에게 바랄 수 있는 건, 다만 그 거대한 고독이 굳은 믿음과 인내로 당신에게 작용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것뿐입니다. 그 고독은 영원히 당신의 삶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당신이 겪고 행할 모든 일에 숨어서 영향을 끼치며 당신의 삶에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 있는 조상의 피가 우리의 피와 뒤섞여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고유한 요소가 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삶의 중대한 변화를 맞을 때마다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고립된 환경에서 얼마 되지 않는 동료들과 함께 그토록 구체적이고 확고한 존재로 직책과 제복과 직무를 갖게 된 것이 기쁩니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은 진지함과 필연성을 띠게 되며, 자칫 놀이나 시간 때우기가 되기 십상인 군복무는 주의 깊고 독립적인 의식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훈련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작용하고, 때때로 위대한 자연과 대면하도록 이끄는 이런 환경조건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부입니다. 예술은 단지 삶의 한 가지 형태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 생활이 알게 모르게 예술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기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술과 가까운 척하는 저널리즘과 대부분의 비평들, 그리고 스스로 문학이라 불리고자 하는 온갖 가짜들과 같이 현실생활과 동떨어진 어정쩡한 직업보다는 현실생활에 밀착된 직업이 오히려 예술과 더 가까운 법입니다, 한마디 로 말해서, 나는 당신이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직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처럼 혐한 현실 속에서 고독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이 기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그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여 더욱더 강건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114    하이퍼시 (조명제) 댓글:  조회:616  추천:0  2022-07-11
■하이퍼 시   해 있을 동안 조 명 제   처서(處暑), 백로(白露) 지나자 해가 자꾸 자꾸 한 쪽 지름길로 간다. 대낮인데도 오동잎 같은 해 그늘이 길바닥에 내려앉는다. 짧아지는 해가 우수(憂愁)라는 단어처럼 슬픈 빛깔로 길 위의 모래에 깔린다. 해가 짧아져서 우수가 된다는 걸 까치가 깔긴 똥 보고 낄낄거리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매화꽃빛이 눈썹 끝에 와 매달리는데 어쩌구 문자 보낸 이후, 오래 소식 없는 송영희 시인에게 문득 다시 문자를 날려 본다. 어느새 가을빛이 발끝에 차이는 때 영월 깊은 산골 운학리의 농사는 잘 영글고 있으리. 밀꽃도 한창이리. 보내기 전 다시 읽어 보니, ‘메’자를 빠뜨려 먹어 ‘메밀꽃’이 ‘밀꽃’이 되어 버렸네. 밀꽃? 밀꽃! 밀꽃, 밀꽃 이 이쁜 말을 나는 왜 여직 시에 써 먹지 못했을까. 지상에 내리는 한 줌 햇빛이 금싸라기인기여! 산이 고가구빛으로 깊어지면 해 뜨기 무섭게 진다 한들 뉘 이상히 여기리. 농사에는 농사꾼이 박사예요. 이웃밭 할아버지가 메밀씨를 나눠 주며 심으랬지요. 서울 들락거리느라 한 열흘 늦게 씨 뿌렸지요. 할아버지는 마땅찮아 하셨지만, 뭐 열흘쯤 늦은들 어떠리 하였지요. 일요일, 열한시나 돼서야 부, 시, 시 일어난 아내가 거실로 나온다. 티브이의 티브이 보고 있던 남편과 아이들이 입 맞춘 듯 세 입 한 목소리로 말한다. “밥 줘!” 얼굴 넓적한 아내가 반사적으로 대꾸한다. “내 얼굴이 밥으로 보여!” 9월이 오고, 효석(孝石)표 소금을 뿌린 듯 할아버지네 메밀꽃이 환히 피었더랬지요. 보름밤 달빛 아래 누운 맨몸의 메밀밭은 황홀 그 자체였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어도 제발 해 길이만은 여름 같아라 한들 무슨 소용이리, 무슨 끝여름 홍천 비발디 파크의 오션월드!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네. 이집트식 이미지의 온갖 물놀이 기구 만들어 놓고 떼돈 벌고 있네. 옷 같잖은 끈수영복 입은 아가씨들 겨울을 어찌 할꼬. 땡볕 아래 뱀줄로 서서 서너 시간씩 기다려, 뒤틀리는 곡절(曲折)마다 아아아악아아아— 삼사십초 타는 몬스터 블라스터 Monster Blaster! 파도 수영장엔 파라오가 근엄하게 물 좋은 인어떼를 내려다보고 있다. 인어들을 패대기치는 파도는 아무 때나 치지 않는다. 기다려야 한다. 잠시가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지나간 세월은 아무리 지루했어도 잠시가 되는데.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그 위엄 있는 고둥 나팔소리가 부드럽게 심금을 울리자 (아직 파도는 칠 생각을 않고 있는데) 아르르르르— 인어들이 먼저 목소리 기절을 한다. 우리 메밀밭의 꽃도 할아버지를 뒤따라 드디어 까르르르르— 한창으로 피어났더랬지요. 아, 이뻐! 근데 말이지요 선생님, 이게 웬 일? 우리 메밀꽃이 한창일 때, 밤은 다 찌그러든 눈썹달 하나를 띄워 놓는 게 아니겠어요! 조각달과 그믐 사이, 메밀밭 꼴이 어땠겠어요. 여자 속옷 6.25 동란 이래 최대 똥값 처분! 미호천변 옷가게 주인 백, 농사에는 농사꾼이 박사라니깐요! 바다 이야기 터지기 전에 죽어 버린 놈 누구야 엉 누구냐 말이다. 죽여 버린 놈이! 밀꽃 피던 봄에 밀밭 속으로 떠나간 긴머리(한 번 묶은)는 어느 하늘빛이 되었을까. 지중해의 푸른 문을 열고 솟아나오는 금발의 헬레나들이여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시간이 많지 않다.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     조 명 제   내 살아 있음의 기쁨이여! 이것이 끝물 사랑의 발설법이던가. 해질녘 캔맥주와 줄김밥 사 들고 루비콘보다 아름다운 강변으로 간다. 먼저 온 데이트족들이 자신들의 반짝이는 사랑 넓이만큼씩 풀밭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 알맞은 사랑만큼의 터를 꾸미고 풀잎 위에 앉는다. 날은 아직 훤한데, 저만치 제일 높은 빌딩 허리춤에서 반달이 희미한 얼굴로 삐져나온다. 빡! 캔을 따고 촉촉한 눈웃음 섞어 틱! 부딪치고, 부풀어 오른 사랑의 거품을 쭈욱 들이킨다. 식사와 안주, 하찮은 김밥이 이리 요긴할 줄이야! 저녁의 미풍을 타고 여기저기 어스름이 가등(街燈)을 켠다. 가을을 검색하자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고기가 당긴다. 겨울잠에 들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내 몸의 센서가 먼저 알고 일러 주는 것이리. 문화일보 1면 사진 기사가 가을을 전한다. 물두꺼비는 짝짓기 꼴로 동면에 들어 7개월을 지낸다고. 물두꺼비는 좋겠다. 너희들은 지겹지도 않니? 한 사람과 한 평생 산다는 거 지겹지도 않아? 한 5년이나 10년마다 결혼을 갱신해야 하잖겠니? 옥시토신의 유효 기한이 길어야 3년이라잖아! 풀잎 끝마다 멀리 도회의 오색 불빛이 이슬처럼 맺힌다. 맞댄 두 이마 아래의 키 작은 풀잎들이 거짓말처럼 고개를 꺾어 까-딱- 인사을 한다. 저들도 심상찮은 사랑의 공기를 느끼는가. “이 봐! 풀들도 우리 사랑에 경의를 표하는 걸!” “불륜인데두요?” 라고 그네는 말하지 않았다. “불륜의 사랑은 위대한 거야.” “하기사, 세계문학사의 모든 위대한 소설의 사랑은 다 불륜이라고 설파해 왔죠. 당신이 젤루 좋아하는 「닥터 지바고」도 그렇지만요.” 황운(黃雲)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 광덕사 가는 길은 참으로 호젓했다. 절 문을 지키는 늙은 시조(始祖) 호두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어뜨리고 회갈색의 빛나는 가지로 한 줌이 아까운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습작시마다 핀잔을 들은 시인 지망생 이쁜 코 미시 제자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절친한 미쓰 학우 앞에 대고 나 들으라는 듯, “시를 쓰려면 눈물의 뼈도 볼 수 있어야 한대 글쎄!” 한다. 아직 더러 잎 달린 젊은 호두나무숲을 지나 골짜기로 가는 오솔길 향긋한 가을 잡목들이 팔 뻗듯 가지들을 내밀어 시샘하듯 우리의 허리께를 치며 인사를 한다. “이 봐! 나뭇가지들이 우리의 사랑을 반기는 거!” 눈이 작아서 예쁜 여자가 대답한다. “거 참, 신기하네요!” 바빌론강 기슭 거기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리는 울었도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竪琴)을 걸어 놓고서* 밤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큰 눈의 그네는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 살아 있음의 슬픔이 기쁨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성경』의 「시편」137에서 인용.         목 화 꽃   조 명 제   야크가 만들어 놓은 히말라야의 설산고봉을 철새들이 넘는다. 기류를 타고 힘겹게 힘겹게 넘는 두루미떼 수만년 지층을 날아온 날개의 힘과 고공 기류의 긴장이 깨지면서 더러는 8000 미터의 벼랑 아래로 추,락,한,다. 목숨을 건 비행(飛行), 철새들은 내장에 센서 내비게이션을 달고 머나먼 행로를 따라 비행한다. 설악의 울산바위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그리스의 마테오르 그 벼랑 꼭대기의 수도원을 곡예하듯 도르레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검은 망토의 수도사들, 그들은 뼈를 갈아 끼우려고 그 아득한 높이의 가파른 벼랑을 오르는 것일까. 청량산(淸凉山)
113    곶감/피귀자(기법/의인화) 댓글:  조회:713  추천:0  2022-05-30
곶감/피귀자(기법/의인화) 옷을 벗었다. 호흡이 불규칙하고 맥박이 빨라진다. 알몸위로 지난날이 출렁인다. 천둥과 장대비를 맨몸으로 견뎌낸, 유년의 기억들이 또렷이 남아있는 집과 이제 이별이다. 내 자신이 내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무수히 많은 말을 몸으로 뱉으며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짜릿하다. 간택이 끝나고 주홍빛으로 밀려나오는 속살을 드러내는 수모, 새댁이 된다는 건 여린 살갗이 찢기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 낯설게 다가오는 내 모습이 익숙해질 때까지 바람과 햇빛과 수시로 내통하리라. 이제 나의 시간은 바람과 햇빛이 좌우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때린다. 가느다란 신음 뒤에 가벼우나 날카로운 촉수들이 돋아난다. 온몸의 세포들을 깨우는 일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부드러운 미풍과 단물을 꿈꾸던 풋풋한 젊은 날의 꿈들은, 달콤한 또 다른 삶을 위해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세상의 이치를 깨치며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다보면 두루 뭉실한 아낙이 되리라. 그리고 적당히 그을린 결 고운 피부로 환생하리니.   가을이 익어가기를 기다린다.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물기는 빠져나가고 모서리는 더욱 둥글어지리라. 내장까지 보일 것 같은 날씨 속에서 내 몸도 추억처럼 익어 간다. 오랜 시간 아픔을 묵묵히 감당해내며, 감칠맛과 향을 내던 할머니처럼 단아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으리라. 부드럽고 따뜻한 맛은 줄어들지만 굳은살이 깊어질수록 마침내 오묘한 단맛을 내며 삶이 완성되리라. 외로운 시간 자신과의 싸움만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가슴을 가리고 몸을 비틀어 보지만 구경꾼들의 시선은 끈적거린다.   이따금 어둠 속에 침잠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빈자리의 그늘만큼 눈 밑의 그림자도 짙어가고 사라지는 하루하루를 견디면 짜릿한 역전의 시간이 오리니. 긴장과 이완, 길들여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중용의 도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 덜 마르면 쉽게 변하고 너무 마르면 질겨서 먹지 못하는 법. 그런가 하면 내 몸은 사람의 손이 닿으면 딱지 앉은 상흔처럼 색깔이 검게 바뀌고 만다.   감으로 한 생을 살아내고 또 다른 삶을 이어가는 곶감의 생은 얼마나 혼곤한가. 인고의 세월이자 형벌과 같은 기다림의 세월이기도 하다. 세상과 통하는 지혜를 배우는 나의 일생은 여자의 길!   한숨 같은 흰빛이 희미하게 피어 오른다.
112    담쟁이덩굴 - 김광영 댓글:  조회:668  추천:1  2022-05-26
담쟁이덩굴   김광영     담쟁이는 홀로 서기를 못한다. 줄기 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악착스레 기어올라야 한다. 원래 담쟁이가 설 자리는 담벼락인데 나무를 타고 오르는 별종도 있다. 제자리를 타고 오르면 눈길이 곱지만, 나무를 타고 오르면 짐으로 보이기도 한다.   낙엽송의 둥치에 담쟁이가 타고 오른다. 어깨에 매달린 식솔도 많은데 담쟁이까지 붙어서 살려고 한다. 줄기로는 목을 조이고 부착 근으론 수액을 빨아먹으며 염치없는 짓을 한다. 하지만 낙엽송은 살갑게 봐주는 듯하다. 어쩌면 낙엽송의 우직한 성격이 나풀나풀한 담쟁이를 좋아했지 싶고, 매달리는 손을 뿌리칠 만큼 야멸치지도 않아 연을 맺었는가 싶다. 몸 붙일 곳을 찾은 담쟁이는 미끈한 둥치를 기어올라 상큼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하늘거리는 잎들의 율동. 그 잎에 흐르는 자르르한 윤기는 낙엽송에겐 더없이 사랑스러운지 그윽한 그 눈빛을 보내 담쟁이의 기를 살려 놓기에 충분하다. 뼈대 없는 가문에서 자라 듬직한 둥치를 안고 살 수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낙엽송의 마음을 차지한 담쟁이의 기세가 가관이다. 비록 기대어 살지만 홀로서기로 살아가는 싸리나무들을 눈 아래로 본다. 깔밋한 몸에 성질까지 깐깐하여 융통성이라곤 없다고 무시하는 듯하다. 비바람에 모든 잡목들이 휘청거릴 때도 든든한 둥치만 휘감고 있으면 무사한데, 능력도 없으면서 고매한 척 살아가는 여린 나무들을 아둔하게 보는 눈치다. 담쟁이의 반질거리는 잎들을 보면 자신이 아주 지혜롭게 한 세상 살아간다는 듯하다. 담쟁이는 요구조건이 합당치 않으면 간간이 낙엽송의 속을 썩이기도 한다. 생글거리던 웃음도, 귀여운 몸짓도 죄다 거두고 절개도 아닌 절개를 과시한다. 이미 담쟁이의 맛에 길들여진 낙엽송은 ‘어디에서 이 외꽃 같은 웃음과 야들한 자태를 볼 것인가’ 해서 무릎을 꿇고 만다. 비록 더부살이를 하지만 어진 동반자를 만나 성깔을 한껏 부리면서 살아간다. 한편 싸리나무들은 남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걸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 한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그런 삶은 용납이 될 수 없다. 둘은 근본부터 다르다. 담쟁이는 요령껏 남의 등골을 빼먹고 살고, 싸리나무들은 궁핍하지만 곧은 절개를 으뜸으로 친다. 그래서 쉽게 살아가는 담쟁이덩굴이 곱게 보이질 않는다. 뼈대 있는 나무들의 모임엔 절대 끼워주지 않고 신분을 구분하며 무시해 버린다. 왜소하고 초라하지만 내면에선 품위를 지니려고 애를 쓴다. 무성한 칡덩굴보다는 나약한 잡목을 높이 보는 무리들이다. 물질보다는 정신을 앞세우고 후세에게 누가 되는 흠집은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아간다. 낙엽송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넘쳐흐를 땐 무리가 없는데 가뭄에는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정든 담쟁이를 뗄 수도 없어 애초에 뿌리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눈치다. 담쟁이가 누구인가. 어디에 기대고 살아볼까? 요 궁리 저 궁리하며 눈치 하나로 살아가는 덩굴식물이 아니던가. 약삭빠른 담쟁이는 스스로 떠나주는 것만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타고서 슬슬 떠날 채비를 한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존재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로 작별인사를 하며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풍채 좋은 낙엽송의 둥치에 얼기설기한 줄기들이 지저분하게 남아서 품위를 추락시킨다. 하지만 그 흔적은 뼈대 없는 후예들을 거두어 먹인 후덕한 처소이기에 미워하지 말아야 하리라. 설 자리를 아는 건 지혜로운 일이다. 고샅길 돌담 위에 초록 레이스를 덮어씌우듯 뻗어나가는 담쟁이덩굴은 살뜰한 형이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담을 운치 있게 꾸며서 발길을 불러들이는 재주꾼이다. 조석으로 피워 올리는 굴뚝의 연기를 마시며 소박한 꿈을 꾼다. 고택의 이끼 낀 기와담장을 덮어줄 꿈이 아니라 오막 집을 그림같이 채색할 아름다운 꿈이다. 허황된 부를 탐내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자리를 반짝거리게 가꾸는 형이다. 해묵은 은행나무가 뜰 안에 우뚝 선 대가의 담장에도 빛깔 깊은 담쟁이덩굴이 엄전케 덮고 있다. 번잡하게 드나드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조신하게 담벼락을 지킨다. 엄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생뚱맞은 생각도 가끔 있지만 대가의 체통을 위해 마음을 삭이곤 한다. 명문가가 그냥 되는 게 아닌 것을 체험으로 배우며 자리를 지킨다. 낙엽송을 휘감던 담쟁이! 그는 어물전 망신을 시킨 꼴뚜기다. 두 갈래 길목에서 헷갈린 판단으로 설 자리를 못 찾은 실수한 삶이다. 격을 잃어버린 담쟁이. 그를 마음 깊은 담쟁이들이 와락 껴안으며 시멘트벽이라도 벽을 타고 오르라 한다. 그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쓰디 쓴 후회의 눈물인가.([수필시대] 2012. 7/8)   ∣작법 공부∣   수필의 다중(多重)적 구성법 구조   문예작법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작법은 크게 세 가지로 발견되고 있다.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상징)창작, 서사구성법의 창작,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이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법은 번과 번을 합친 구조의 창작이다. 「담쟁이덩굴」은 일견 번 서사구성법의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종결문단의 “그는 어물전 망신을 시킨 꼴뚜기다.”를 담쟁이덩굴에 대한 비유(상징) 창작으로 본다면 + 형태의 구성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다중적 구성법은 소설이나 희곡 등에서는 흔하게 발견되지만 수필작품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작법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담쟁이덩굴’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소재로 선택한 담쟁이덩굴은 한 가지가 아닌 세 가지이다. 첫 번째 담쟁이덩굴은 낙엽송에 붙어서 기생하는 담쟁이, 두 번째는 고샅길 돌담 위의 담쟁이, 세 번째는 대가의 담장을 터로 잡은 담쟁이. 이 세 가지 담쟁이 중에서 낙엽송에 붙어서 기생하는 담쟁이덩굴 이야기를 작품의 중심무대로 삼고 있다. 구성법이란 사건과 사건의 관계설정과 그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사건)를 어떻게 전개해 갈 것이냐의 문제가 기본 작업이 된다. 이 작품의 중심 구성법은 낙엽송에 붙어사는 담쟁이덩굴과 그 주변 환경과의 다중적 관계 구조로 짜여져 있다. 첫째는 담쟁이덩굴과 낙엽송과의 관계다. 두 번째는 싸리나무와 비교되는 삶의 양상의 관계다. 세 번째는 고샅길 담쟁이와 대가집 담쟁이와 비교되는 삶의 양상의 관계다. 이 같은 다중적 구성법을 통해서 형상화하고 있는 주제는 “그는 어물전 망신을 시킨 꼴뚜기” 같은 삶이라는 것이다. 이곳의 ‘꼴뚜기’는 말 할 것도 없이 어떤 인물 유형의 상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창작문예수필의 세 가지 기본작법 양상 중에서 번과 번을 합친 고차원적 구성법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사건과 두 개 이상의 보조관념 사건과의 다중적 관계를 얽어 짜서 구성하는 작법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TV 드라마이다. a남자와 b여자 관계라는 중심사건에 a남자의 가정 이야기와 b여자의 가정 이야기, 그리고 a와 관계가 있는 c와 d의 이야기, 다시 b와 관계가 있는 e와 f의 이야기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중심 사건인 a남자와 b여자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 거의 모든 드라마의 구성법이다. 그럼에도 시청자는 다음 회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며 방송극을 시청한다. 그런데 그런 방송극 시청자들에게 수필을 읽으라고 하면 방송극만큼 손에 땀을 쥐고 읽겠는가? 읽기는커녕 “수필도 문학이냐?”고 손가락질하고 있지 않은가? 왜 수필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창작론이 없는 글쓰기를 무려 1백년이나 하여왔기 때문인 것이다. 수필문단이 이 작품 같은 다중적 구성법을 할 줄 알게 된다면 앞으로 10년쯤만 지나도 떠나갔던 수필독자들이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8 ]호에 게재)
111    나는 자전거입니다 - 권오훈 댓글:  조회:659  추천:0  2022-05-26
나는 자전거입니다   권오훈     “이 놈 효주 아빠한테 줘버려야겠어. 자전거 한대 사려나 본데 자전거 타는 게 얼마나 힘든 지 겪어보고 나서 새 걸 사라고 했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고? 달리는 것이 존재이유인 나를 데려다가 서너 달 타보고는 힘이 부쳐 못 타겠다고 두 해씩이나 창고 구석에 쳐 박아 두었지요.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나를 꺼내놓고 부인에게 하는 말이 고작 남한테 줘버린다고? 그 길로 나는 먼지만 대충 털린 채 트럭에 실려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단지로 옮겨왔지요. “내가 먼지만 대충 털었는데 손볼게 좀 있을 거야. 난 힘들어서 못 타고 몇 번 타다 처박아 두었던 건데 자네 탈 수 있겠으면 타고 못 타겠거든 버리던지, 고물상에 넘기던지 처분대로 하게” 나의 전 주인은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그의 붙잡음도 한사코 뿌리치고 내게 변변히 작별인사도 않고 휑하니 가버리더군요. 아마도 꾀죄죄한 몰골의 나를 넘겨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자기 걸 공짜로 주면서도 미안해하는 전 주인은 그렇게 마음만은 순수한 사람이었지요. 토요일 그는 나를 부축하여 아랫동네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더군요. 내 발은 공기를 불어넣어줘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는데 쭈그려져서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었거든요. 의사는 이것저것 내 장기들을 새 것으로 바꾸고 약도 발라주었지요. 긴 다리의 그에게 맞춰 내 몸 이곳저곳을 조절해 주었고요. 내 모양이 제법 깔끔하게 갖춰지자 남의 손을 타지 않도록 내 다리를 채울 자물통도 하나 장만하라고 권하더군요. “늘어진 와이어를 모두 갈아서 브레이크도 잘 듣고, 안장도 높이고 윤활유도 쳤으니 이제부터 21단 기어도 활용해서 자전거 타는 재미를 제대로 누려보세요. 초보는 이 정도만 해도 탈 만할 것입니다” 치료를 끝낸 의사가 그에게 말했어요. 돌아오는 길은 모처럼만에 신나게 달릴 수 있었지요. 그는 거의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나를 데리고 나갔지요. 지나다 만난 사람들에게 가고 싶었는데 걸어가기엔 엄두도 못 내던 곳을 나 때문에 다닐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할 때는 얼마나 뿌듯하던지. 나도 내 본연의 속성인 달리기를 할 수 있어 행복했지요. 그가 참 좋아졌습니다. 나에게는 그가 천생연분이란 생각도 들었어요. 그가 좋아하는 수목원도 마을 안 들길도 텃밭도 따라 다니다 보니 완전 내 취향이데요. 스마트폰으로 다운받은 모 방송국의 ‘나는 가수다’ 실황을 들을 때는 떨리는 그의 전율을 고스란히 느낄 때도 있어요. 내 등에 오를 때면 의식적으로 날렵하게 차려 입는 그의 차림새는 수더분한 내 몸매를 보완해 주지요. 극성스레 좋아하다 싫증나면 쉽게 내쳐버리는 가벼움이 아닌 진득함도 마음에 들고요. 무엇보다 나도 그처럼 두발인 게 닮았잖아요. 이런 감정들이 나만의 생각일까요? 나의 행복을 시샘한 걸까. 그렇게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밤새 내린 비로 길이 젖어 있더군요. 그는 갈까 말까 망설이다 내 등에 올라 운동 길에 나섰지요. 횡단보도를 건너 인도로 올라가는 경계부분은 매끄러운 화강석이데요. 물기가 남아 미끄러운 그곳에서 아차 내 발이 미끄러졌지 뭡니까. ‘어어’ 하다가 나는 머리가 180도나 홱 돌아간 채 나동그라지고 그도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지요.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꼴이라니. 그나마 그는 손으로 땅을 짚는 바람에 얼굴에 빈대떡을 갈아 부치는 꼴은 면했지요. 나도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지만 그도 무릎을 갈아붙이고 왼 손목 인대가 늘어났다나 봐요. 책임회피 같이 들리겠지만 이건 순전히 그의 순발력이 떨어진 탓이었어요. 인간이란 종족들은 원래 그런 면이 있잖아요. 우리가 말을 못한다고,‘내 탓이요 내 탓이요 더 큰 너의 탓이로다.’ 벙어리 냉가슴입니다. 그 길로 나는 또 내팽개쳐졌지요. 다시 내게 다가온 시련, 이번엔 아파트 계단에서 썩어야 할 팔자인가? 그가 며칠째 보이지 않네요. 지난 번 부상이 차도가 없는가? 몸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인데. 그에게 온 후로 나는 매일 아침 콧바람을 쐬는 것에 길들여지고 말았나 봐요. 어슴푸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면 내 몸에는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하거든요. 곧 날렵하게 차려 입은 그가 문을 열고나올 것이고 우리는 차가 뜸한 사잇길을 따라 수목원으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온갖 꽃과 풀과 나무들을 구경하고 향긋하고 싱그러운 내음을 맘껏 마시는 즐거움도 있지만 동무들을 만나는 것이 더 가슴 설렙니다. 아침에 그곳 오는 것에 이력이 난 동무들이지요. 그들과 어울려 내가 못 가본 세상에 대한 얘길 듣는 재미는 여간 쏠쏠한 게 아니랍니다. 사실 나는 다른 곳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거든요. 그가 사는 곳은 도심외곽지고 아침 운동할 때나 오후에 텃밭에 갈 때만 나를 데려가므로 그네들 사는 번화한 동네가 자못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덩치가 크고 실팍한 발을 네 개씩이나 가지고 기름을 먹여야 달린다는 뚱보 형의 뱃속에 들어앉아 아래 동네에 있는 직장으로 출근하고 가끔은 먼 곳을 다녀오기도 하데요. 나는 형이 부러워요.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 양복 차림으로 내 등을 타고 출퇴근하는 모습은 당치도 않은 장면이겠지요. 나란 존재는 단지 수목원 운동길, 동네 들길을 따라 산 아래 작은 저수지까지 다녀오는 운동길, 텃밭에 다녀오는 길의 동반자일 뿐이랍니다. 그는 나에게 아주 살뜰하지는 않아요. 복잡한 도심은 위험하다며 안 데려가고 눈비 안 맞히고 더러우면 닦아주지요. 그저 적당한 수준의 보살핌과 관심만 줄 뿐이지요. 다른 동무들처럼 갖가지 예쁜 장식품을 갖춰주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 감지덕지랍니다. 나는 그저 수더분한 모양새에 꼭 필요한 신체도구만 갖췄을 뿐이거든요. 몸무게도 그리 가볍지는 않아요. 살뜰하지는 않지만 무던하기는 한 그이기에 이런 일로, 아니면 내가 낡았다는 이유로 쉽게 나를 내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을 가져봅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인연인데요. 그가 돌아왔습니다. 아직은 손목에 압박붕대를 감고 있지만 조심조심 타면 된다나요. 근질거리던 난 신나게 씽씽 달려보고 싶지만 그럴 날을 위해서 지금은 조심 또 조심해서 걷습니다. ([구미수필] 2011년 9집)   ∣작법 공부∣   예술작품의 의인화법은 역사가 깊다. 근대 문학양식에서 의인화법을 주된 작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르라면 동화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필작품에서도 의인화법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는 연구대상이다. 의인화법의 대상은 거의 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물 등의 생물이다. 의인화 대상이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이 되는 까닭은 동물들과의 사이에는 그들의 반응을 통한 교감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자전거를 의인화하고 있다. 무생물인 자전거를 의인화 할 경우 동물과 나누어 오던 경험적 교감에서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예술작품으로서의 실감 형성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자가 이 작품을 비평대상작품으로 선정한 까닭은 그 같은 무생물 의인화의 어려움을 끝까지 잘 극복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실제 작법이 무엇일까? 첫 번째 눈에 띈 점은 “두었지요.”, “옮겨왔지요.” 투의 문장법이다. ‘요’로 끝나는 존대어법은 동화체 문장법의 기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친근감이 일어나는 문장법이다. 두 번째로 필자의 눈에 띈 점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무생물 의인화’에 예술적 실감을 불어 넣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끝까지 이야기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끌고 가고 있는 작가의 지구력이라고 하고 싶다. 이 달의 비평은 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중에서 무생물인 자전거 의인화는 빠져야 된다는 법은 없다. 자전거도 시화(詩化) ・ 이야기(story)화 하면 당연히 창작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떤 경우에라도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시 만들기이거나 이야기 만들기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인과 함께 미끄러운 길에 넘어졌다가 다시 돌아 온 후의 작품 결미를 찾지 못하고 “그가 돌아왔습니다.” 상태에서 작품을 마무리 지으므로 여기까지 뚝심 있게 끌고 온 이야기 만들기의 보람을 잃고 만 것은 아쉬운 점이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작가로서의 상상력일 것이다. 작가가 작품의 결미를 “그가 돌아왔습니다.”에서 펜을 놓아 버리게 된 심리적 요인이 혹시 문학작품 창작에 절대 필요조건인 상상력을 의인화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한 데에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의인화 형식의 장점은 의인화 형식 자체가 작품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단숨에 옮겨 놓아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의인화 문장법을 통해서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옮겨 놓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만다면 소재를 사실대로 기록하고 마는 기존의 수필쓰기와 크게 다를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무생물인 자전거 의인화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이야기 만들기를 끝까지 끌고 간 뚝심과 끈기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준다면 좋은 개작(改作)이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말미에서 필요한 상상력은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 ・ 상징) 창작이 될 것이다.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이란, 쉽게 예를 든다면 는 설정도 가능 할 것이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6 ]호에 게재)
110    사과 - 황정순 댓글:  조회:728  추천:0  2022-05-26
사과   황정순     작은 글씨 속에 채 물 방울이 가시지 않은 포도, 붉으스레한 사과, 빨간 토마토, 검은 점이 박힌 키위, 시원한 한 조각의 수박, 단내 그윽한 참외, 상큼한 오이 중에서 오늘은 어떤 과일이 배달되었을까? 기대하며 현관문을 연다. 종이 쟁반 위에 사과 한 개가 올려져 배달되었다. 아침에 좋다는 사과 한 개다. 언제나 그렇듯 과일 느낌은 신선하다. 은은한 사과향이 풍긴다. 먹음직스럽다. 사과를 정면으로 잡고 전체를 보고 각도를 돌리며 아래 위, 옆을 훑어 본 후 꼭지를 기준으로 반으로 자른다. 또 그 반쪽의 반을 자른다. 한쪽을 밤새 다붙었던 허기진 입술에 갖다 댄다. 입술이 촉촉이 살아난다. 입안에 침이 듬뿍 고인다. 과일 특유의 맛이 조금씩 더해진다. 사과를 쩝 쩝 씹는다. 다른 사과에 비하여 아삭함이 더하다. 퇴비를 듬뿍 넣은 토양에서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자란 과일나무에서 수확한 것 같다. 나뭇잎도 성성한가 보다. 햇빛도 충분히 받은 듯하다. 늦가을 서릿발을 맞은 후 숙성된 사과가 더 깊은 맛을 내고 저장이 오래간다. 그래서인지 과즙이 풍부하다. 향내가 더 진하게 풍긴다. 식욕을 더 많이 유혹한다. 그 맛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삭, 아삭, 아사삭 하며 어금니로 세게 힘을 준다. 사과알갱이 사이를 가르는 과즙 소리가 들린다. 뒷맛이 달착지근하다. 온 몸에 과일 맛이 한 바퀴 돌았다. 역시 비타민은 빠르다. 신선한 몸을 느낀다. 그 여운이 하루를 시작하는 문을 열어준다. 오늘 아침 신문에 배달된 상큼한 시 한 조각을 맛있게 잘 먹었다.  (본지출신 창작문예수필 작가)   ∣작법 공부∣   이 작품은 아침 신문에 게재된 시 작품 감상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작품이다. 소재에 대한 시적 발상이라는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 개념을 실제 작품을 통해서 확인 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대마다 새로운 문예사조가 생겨나는 까닭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방법으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돌도끼가 국보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지금도 돌도끼를 연장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아무리 7080 시대가 아름다웠던 추억이라 하더라도 소녀시대 보고 왜 7080 노래는 안 부르냐고 불평한다면 손가락질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 있다. 바로 수필 관련 이론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갑오경장(1894)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시, 소설, 희곡 등 문학은 물론 미술, 음악, 무용, 그리고 대중예술까지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창조적인 예술활동을 통해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러나 10년도 아니고 30년이나 50년도 아닌 무려 1세기 동안이나 ‘붓 가는 대로’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것이 참으로 악몽이 아닌 현실이란 말인가?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아직도 ‘붓 가는 대로’ 운운하고 있는가? 낭만주의 시대에는 워즈워드의 말대로 ‘감정의 폭발적 토로’ 자체가 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형식이 ‘아!’, ‘오!’의 남발이었다. ‘아! 배달의 민족이여!’, ‘오! 아름다운 금수강산!’ 등이 그 형식적 특징이었다. 그러나 현대시 작법은 정서나 관념도 사물화 하여 형상화 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 현대시 시대도 지나가고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시라는 것도 막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싶은 이때에, 아직도 우리의 아리랑도 아닌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문학 이론적 정체불명의 ‘붓 가는 대로’를 문학이론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문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현대문학이 그렇다. 온 지구촌이 함께 하는 것이 문학예술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벨문학상을 왜 올려다보고 있는가? ‘붓 가는 대로’를 가지고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다고 생각들 하시는가? 이 작품의 내재적 수필화자 ‘나’는 아침 신문을 기다리며 오늘은 어떤 과일이 배달될까 기대한다. 신문 배달을 과일 배달로 발견하는 소재에 대한 창조적 발견에서부터 창작이 시작된다. 필자는 창작문예수필은 길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한다. 시가 길어서 문학의 왕좌 자리에 앉아 있는가? 창작문예수필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다. 비유컨대 시가 문학의 왕이라면 창작문예수필은 왕비자리에 앉아있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종결어 “오늘 아침 신문에 배달된 상큼한 시 한 조각을 맛있게 잘 먹었다.”에 의해서 이 작품은 한 편의 산문의 시 작품으로 완결되고 있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5 ]호에 게재)
109    전등사 나부상 - 원용수 댓글:  조회:677  추천:0  2022-05-26
전등사 나부상   원용수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 처마 네 귀에 나무로 깎아 만든 나부상(裸婦像)이 앉아 있다. 그 상은 비너스처럼 아름다운 자태가 아니고, 얼굴은 남상에 가까운 여인이다. 알몸으로 쪼그리고 앉아서 지붕을 이고 있다. 네 개의 나상(裸像)중 두 개는 두 팔로, 나머지 둘은 한 팔로 추녀를 떠받치고 있다. 상들이 추녀 밑 조그만 판자에 앉아 있으니 공포(栱包)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그 여인은 사하촌 주막의 주모였는데, 고향을 떠나와서 전등사를 짓던 도편수와 눈이 맞아 사랑에 빠졌단다. 두 사람은 불사(佛事)가 끝나면 집을 지어 살림을 차리기로 하였다. 남자는 그 약조를 지키려고 돈이 생길 때마다 그녀에게 주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에 남자가 주막으로 갔더니 그녀는 야반도주하고 없었다. 배신당한 도편수는 화가 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아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나부상을 만들어 두었다. 그는 도망간 주모에게 무거운 불사(佛寺)를 이고 억겁(億劫)의 고통을 당하는 벌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사찰 안내판에도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원숭이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용덕의 자세라고 하나, 상이 원숭이와는 달라 사찰 안내판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동행한 일행 중에 불교 신자들은 도편수가 그녀에게 죄를 씻을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의 소중한 치부를 드러내 놓은 것으로 보아 용서해 줄 뜻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 아는 친구가 퇴직 후에 이와 같은 일을 당하였다. 그는 교육계에 있다가 갑년에 명퇴하였다. 퇴직할 무렵에는 부부가 고급 맨션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이자놀이가 쏠쏠하다고 퇴직금을 일실불로 탔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아내가 운명하였다. 아들 형제를 분가시키고 부부만 재미나게 살려던 꿈이 깨어졌다. 정이 많던 그는 혼자 살 수 없다면서 연하의 여인과 재혼하였다. 보통 늙바탕에 재혼하면 자녀들 모르게 현금을 주거나 집을 한 채 사주고 남자 돈으로 생활한다. 그는 신의를 돈돈히 하려고 혼인신고까지 하였다. 새로 맞이한 부인에게 미장원을 차려주고, 아파트를 저당 잡혀 융자까지 내어 주었다. 전처에게 잘못해 준 것을 반성하며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부부간이면 남자가 차려준 미장원의 수입으로 생활해도 되는데, 생활비는 남자가 대었다. 그렇게 5년쯤 살다가 부인이 친정에 다녀온다면서 집을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돌아오지 않는 게 수상하여 부인의 사업장으로 가보았더니 미장원은 주인이 바뀐지 한참 되었다. 아파트는 경매로 넘어갔다. 살 집이 없어졌다. 말 그대로 몸 둘 곳이 없는 알거지 신세였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였으나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어느 촌락의 빈 집에 숨어들었을 것 같다. 인생 말로에 달콤한 사랑에 빠졌던 자신을 반성하는 눈물을 머금고 ‘망처(亡妻)에 망신살(亡身煞)뻗쳤다’고 신세타령을 할 것이다. 그를 만나 위로주(慰勞酒 )를 사고 싶다. 그녀들이 왜 도망갔을까. 그 사연이야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니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숨겨둔 가족을 돌보러 갔는지, 재물에 욕심이 앞섰는지, 지금 살고 있는 남자보다 나은 남자를 따라 갔는지 모를 일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사랑에 빠진 남자들이 그 속내를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사랑에는 신뢰가 첫째 요건이다. 도편수와 내 친구는 신뢰를 얻으려고 물량공세를 취하였다. 사랑은 남녀가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면서 같이 가꾸어야 한다. 옛날 사람들은 사랑을 표시할 줄 몰랐는데 그들은 돈으로 사랑 탑을 쌓은 것 같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수시로 사랑을 확인해 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면서 서로 믿고 지낸다. 아마 그들은 연인을 조강지처와 같이 믿고 지냈을 것이다. 여인들이 도망을 가고 난 다음 도편수는 실형은 아니더라도 주모에게 벌을 주었다. 자기 죄는 덮어두고 상대의 잘못만 응징하였다. 하지만 내 친구는 벌을 주고 싶어도 참았다.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스쳐가는 운으로 넘겼다. 찾아가서 따지거나 법률적으로 제재를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섞으며 살던 사람에게 벌은 줄 수 없다는 선생님다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것도 이런 인간성 좋은 사람이 살기 때문인지 모른다. 절을 나오려는데 모든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나부상이 측은해 보였다.( 작품집 [능수버들])   |작법 공부|   필자가 이 작품에서 본 작법은 다음과 같다. ① 이 작품의 원관념(원소재)은 ‘내가 잘 아는 친구’의 이야기이다. ② 그 친구의 이야기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보조관념(2차적소재)가 전등사 나부상 이야기이다. ③ ‘내가 잘 아는 친구’ 이야기는 생활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 가운데 하나다. 그 모든 경험들은 작가의 기억 속에 저장된다. 그 중 어떤 기억은 즉시 작품의 소재로 채택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험들은 기억 속에 잠자고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한 편의 작품 소재로 선택 될 때는 언제인가? ④ 이 작품의 창작발상은 전등사 나무상을 보았을 때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편수와의 사랑의 약속을 배반하고 떠나간 나부상 이야기에서 작가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내가 잘 아는 친구’ 이야기가 작품의 소재로 선택받게 된 것이다. ⑤ 작법에 공식이란 없다. 그러나 편의상 ‘공식 같은 작법’을 만들어 본다면, 창작법의 기본은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⑥ [이것]을 가지고 [저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것]만 있는 상태에서는 될 수 없다. 반드시 [저것]이 나타나야 된다. ⑦ 그러므로 작법의 실제는 [이것]이라는 소재를 형상화 할 수 있는 [저것]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저것]은 [이것]이라는 소재의 발견과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것]을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거의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 지나서 발견되는 것이 통례다. 그러므로 [이것]은 메모장과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저것]이 발견되고, 나타날 때 까지 기다려야 된다. ⑧ 기존의 수필이 신변잡기 소리를 듣는 까닭은 [이것]만 가지고 [이것]만 쓰고 말기 때문이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3 ]호에 게재)
108    깻잎김치 - 김영옥 댓글:  조회:706  추천:0  2022-05-26
깻잎김치   김영옥   열장 한 묶음. 세 묶음에 천원. 마트에서 오천 원어치 깻잎을 샀다. 크기가 일정하다. 간혹 길가에서 바구니에 가득 담긴 깻잎을 살 때도 있다. 섞여 있어서 크기는 들쑥날쑥하지만 양은 더 많다. 언젠가는 뿌리만 제거된 줄기에 그대로 달린 깻잎을 사 본적도 있다. 깻잎 한 장씩 떼어낼 때마다 깻잎에서 나는 향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지나치게 독한 향을 지닌 깻잎도 있다. 다른 깻잎에 비하여 유난히 색깔이 진할 뿐 아니라 훨씬 넓적하고 두텁고 잎에 핏줄처럼 그어진 줄마저 더욱 뚜렷하였다. 나는 그것을 오히려 좋게 여겨서 듬뿍 사다가 깻잎 김치를 담가 보았다. 그러나 간도 잘 들지 않고 어쩐지 뻣뻣하기만 하다. 맛을 보니 혀가 얼얼할 정도로 독하였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이제 결혼해야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에게 전화기 속에서 무심코 말한 일이 있었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들은 여자친구라며 낯 선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또 다른 한 편의 내 마음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향해 ‘어머니’라 불러주는 낯선 여자 아이의 얼굴도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디 한 곳 부족함이 없었으나 준비가 덜 된 내 자신이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자녀들의 결혼과 관련하여 주변으로부터 흘려들었던 말들이 이제야 하나씩 귀에 들어온다.   깻잎을 한 장 한 장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담는다. 찢어진 것, 구멍 난 것도 있다. 바구니에 담기 주저할 만큼 잎이 작은 것도 있다. 하지만 양념에 섞여지면 모두 똑같은 깻잎김치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충분히 잘 섞어 준비된 양념을 깻잎에 묻히기 시작한다. 깻잎 자체의 향을 살리기 위해서 마늘이나 생강류는 거의 넣지 않지만 그 외의 양념들은 빼놓지 않는다. 어떤 깻잎에는 양념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깻잎에는 조금 묻혀지기도 한다. 혹은 양념이 전혀 묻지 않을 수도 있다.   차곡차곡 포개어서 통에 담아 놓았던 깻잎을 한참 후 들여다보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적당하게 최적의 깻잎김치가 만들어져 있다. 신기한 일이다. 양념이 많이 묻은 깻잎과 양념이 묻지 않은 깻잎끼리 알맞게 양념이 스며들어 서로 간이 배어 있는 것이다. 색깔도 그럴 듯하다. 깻잎김치의 완성이다.   다가올 아들의 결혼을 생각한다. 부질없는 염려와 걱정을 모두 내려놓는다. 꼭꼭 누르지도 말고, 들춰내지도 말 일이다. 저희들끼리 편한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다. 양념만 묻혀 놓으면 저절로 만들어지는 깻잎김치처럼. (본지출신 창작문예수필 작가)   ∣작법 공부∣   에세이(수필) 문학은 일정한 형식이 없는 문학이라는 말의 ‘일정한’은 창작형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에세이는 창작형식의 문학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글(문장)의 형식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일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에세이는 일반산문문학으로서의 형식은 물론 문장으로서의 형식도 갖추어야 된다. 창작문예수필은 기존의 수필과 다른 문학이라는 말은 창작문예수필은 시, 소설, 희곡처럼 창작형식을 갖춘 문학이라는 뜻이다. 창작형식이란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를 의미하고, ‘문학적 이야기’란 창조적 이야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정한 창작형식이란 창조적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창조적 이야기 만들기의 기본 형식은 ‘소재에 대한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에 있다. 김영옥은 창작문예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한 작가다. 이 작품은 창작문예수필 출신 작가답게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을 마치 공식을 대입하듯 충실하게 적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원관념 소재는 아들의 결혼 이야기이다. 결혼 적령기가 된 아들의 결혼은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이제 결혼해야지.” 라고 결혼 독촉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며느리 감을 데리고 오자 감출 수 없는 섭섭함을 느끼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소재가 된 작품이다. 이 같은 소재를 필자가 정리해 본 내용 그대로 서술하고 말았다면 아무 것도 창작한 것이 없는 사실의 소재의 나열, 즉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필(에세이)문학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이라는 양식상의 특징을 안고 태어난 문학이다. 기존의 수필이 신변잡기로 낙인찍히게 된 원인은 사실의 소재에서 몽테뉴나 베이컨 같은 뛰어난 창조적 생각을 길어내지도 못하였고, 찰스 램처럼 창작적인 문학도 만들어 내지 못한 데에 있다. 즉 사실의 소재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글을 써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문예수필은 사실의 소재를 가지고 실제로 어떤 방법으로 창작문학화 하는가? 그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창작’이라는 낱말의 뜻부터 해명해야 된다. ‘창작’이란 ‘창조적 사물 · 존재 탄생’을 의미한다. 이는 곧 성서적 우주창조 사상에 까지 이르는 개념이다. 시가 창조적 언어 존재를 창작한다는 것과 소설이 허구적 인물ㆍ서사를 창작한다는 것 모두가 다 이 같은 ‘창조적 사물 · 존재 탄생’ 개념에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창작문예수필은 무엇을 어떻게 창작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 그 대답은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어떤 방법으로든 ‘소재 자체를 창작문학化’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기본방법이 ‘소재에 대한 비유적(상징) 창작’에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아들의 여자친구, 즉 낯 선 며느리 후보감에 대한 어머니의 당혹스런 느낌을 깻잎 김치 담그는 이야기에 접목하여 비유적으로 형상화 하는 창작을 하고 있다. 이것이 창작문예수필의 기본적인 창작양식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같은 창작양식은 ‘기본적인 창작양식’일 뿐이라는 점이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할 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이 무엇을 어떻게 창작하는 문학인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작품이 ‘소재에 대한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라는 개념을 공식처럼 적용하고 있는 작법을 참고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5 ]호에 게재)
107    달이 웃다 - 김귀선 댓글:  조회:671  추천:0  2022-05-26
달이 웃다    김귀선   "원래 다 그런 겁니다아." 택시 기사의 축 늘어뜨린 음성에서 능청스러움이 삐져나온다. 속이 울렁거린다. 차에서 내린 그 자리에 여행용 가방과 함께 멍하니 서 있다. 그런 나를 뒤로 한 채 택시는 재바르게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자정 가까운 시간, 구름 사이 달은 훤한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꾸만 더듬거린다. '원래 그런 것이라.' 혼란스럽다. 경비실 맞은편 의자에 몸을 디밀듯 앉는다. 여행 동안 함께한 가방을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거슬러 본다.    ◇ 삼십 분 전   여독에 절은 채 공항 리무진에 얹혀 대구에 도착하였다. 굴속을 들여다보듯 궁둥이를 내민 사람들을 비집고 버스 짐칸 깊숙이 웅크리고 앉은 짐을 꺼낸다. 크고 작은 가방이 세 개다. 무게의 정도에 따라 어깨에 메고 왼손에 들고 하나는 오른손으로 끈다. 불을 환하게 켜고 줄서 있는 택시 앞으로 갔다. 먼저 택시를 잡은 아가씨는 뒷좌석으로 박스를 밀어 넣느라 허리를 반쯤 내놓고 있다. 빈 차 앞에 이르러 우리도 짐을 실으려 손에 든 가방을 내려놓았다. 운전사가 얼른 내린다. 앞의 택시와는 달리 가방을 트렁크로 번쩍 옮겨준다. 이런 친절한 기사도 있었구나. 피로회복제를 먹은 듯 몸이 가볍다. 예상하지 않았던 친절에 차에 타자마자 앞서 못마땅한 서비스에 대해 속풀이한다. 그런데 밖을 보니 우리 집 방향과 반대로 차가 고속으로 달린다. 당황해 하며 얼른 목적지를 말하자 자기도 깜박했다며 너스레를 떤다. 좀 전의 서비스를 생각하면 기분이 언짢지 않다. 멈췄던 이야기가 이어진다. 서비스에 대한 견해가 일치하는 등 장단이 잘 맞는다. 막내딸 아이가 신나한다.   ◇ 세 시간 전   부산 김해공항에 내렸다. 대구로 오는 리무진 버스표를 사기 위해 안내소에 들른다. 현금을 주고 타라는 말과 함께 1번 정류소에서 기다리라 한다. 여행에 지친 몸이지만, 지정석이 아니기에 휴게실 가는 것도 포기하고 줄을 섰다. 가방을 곁에 두고 자세를 고쳐가며 한 시간여를 기다린다. 드디어 버스가 온다. 뒷사람을 위해 짐을 안쪽으로 깊이 넣으라며 버스 운전사는 옆에 서서 고함을 지르듯 말한다. 옆의 분이 고맙게도 자기 짐을 제쳐두고 짐칸 문지방에서 미끄러지는 내 짐을 같이 올려준다. 버스가 움직이고 십여 분이 지나자 여기저기 들리던 전화소리도 멈춰 조용하다. 그제야 몸을 의자 깊숙이 밀어 넣고 잠을 청한다. 그때, “안전벨트 매 주이소오.” 운전사의 투박한 음성이 차 안 공기를 세게 흔든다. 그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딱 소리와 함께 실내등을 몽땅 끈다. 순간 캄캄하다. 들여다보던 물건을 더듬거리며 챙겨 넣는지 뒷좌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린다.     ◇ 이십일 전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하였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 리무진 버스표를 산다. 매표 직원은 버스가 대기한 곳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무거운 가방을 차에 옮길 걱정에 버스 짐칸 가까운 곳에 서서 차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딸아이가 얼른 내 가방을 뒤로 끌어당긴다. 돌아보니 가방과 사람이 나란히 두 줄로 서 있다.  직원이 나타나서 일일이 가방에다 꼬리표를 단다. 직원이 짐칸에 짐을 실을 동안 승객은 버스에 오른다. 차가 출발하자 운전사의 낮은 음성이 마이크로 들린다. 여기저기에서 안전벨트 매는 소리가 난다. 조용해 대화하기도 조심스럽다. 간간이 휴대전화 만지작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도착지에 내리자 이번엔 운전사가 짐을 다 꺼내주면서 일일이 확인까지 해 준다. 이어서 택시 승강장으로 간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저절로 택시 문이 열린다. 운전사가 얼른 차에서 내리더니 무거운 가방을 트렁크에 실어준다. 손에 짐을 들고 문을 열어야 하는 불편함 없이 편하게 차에 탄다. 운전사는 목적지까지 어느 길을 택해 갈 것인지를 미리 설명한다. 말을 알아들은 딸아이들이 좋다고 하자 차가 움직인다. 숙소인 아파트에 도착했을 땐 역시나 짐을 다 내려준다.     ◇ 바로 전   우리 집 앞에 도착해 미터기 금액을 보니 7,700원이었다. 만원을 내밀었다. 돈을 받은 운전사는 얼른 내리더니 트렁크에 얹힌 가방부터 내려준다. 마지막까지의 친절에 그저 감동이다. 가방을 건네받고 거스름돈을 기다린다. 내어줄 돈을 잊었는지 운전사가 그냥 차에 오르려한다. 얼른 거스름돈 이야기를 하자 능청스러움이 섞인 말 몇 마디가 움직이는 차 안에서 흘러나온다. “원래 다 그런 겁니다아.”   하늘을 본다. 달이 웃고 있다.   ∣작법 공부∣   문학작품의 본질적 방법은 구성에 있다. 그것이 시문학이든 소설이나 희곡이든 창조적 구성작업 없는 창작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진흙을 가지고 사람의 모양을 빚었다는 기록이 있다. 구성이란 소재라는 진흙을 가지고 문학작품이라는 존재ㆍ대상(형상적 존재)을 빚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을 ‘소재에 대한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라고 하는 말 중에 ‘구성적’이라는 낱말이 바로 이 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무리 소재에 대한 비유(상징) 창작이 뛰어나다고 해도 작품 구성이 안 되어 있다면 창작에 실패 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구성법으로 창작에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서두문단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현재시점의 문장세계다. 전개문단에 들어오면 , , 이라는 소제목이 보여주고 있는 대로 소과거로부터 대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건 전말이 서술된다. 그리고 종결문단은 이라는 서두문단의 현재 시점 직전 과거를 서술하고 있다. 구성법은 서사문학 구성법의 일반적인 기본 구성법이다. ([창작문예수필 - 작품과 작법 5 ]호에 게재)
106    집 ㅡ송복련 댓글:  조회:592  추천:0  2022-05-26
집 ㅡ송복련   집이 아프다. 여기저기가 들썩거린다. 밖으로 나다니는 동안 돌보지 않았더니 이제 구석구석 살펴달라고 외친다. 안방인가 싶어 열어보고 건넌방을 휘이 돌아 나와 대청마루에 서 본다. 반질거리던 마루는 어느덧 빛을 잃고 엷은 먼지 위로 고양이 발자국처럼 검은 꽃이 피었다. 딱히 어디가 탈이 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집 전체가 우는가 싶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기둥들이 등 굽은 아버지처럼 작아 보인다. 내 집이 이렇게 작았던가. 윤이 흐르는 검은 기왓장들을 거뜬히 받쳐 올려 넉넉한 품으로 감싸주었던 곳인데.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도시의 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 하나가 스친다. 아파트단지의 촘촘한 건물들 사이로 철거되지 않아 섬처럼 남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집이다.   살구꽃이 피어 담 너머로 연분홍빛을 흘리며 마냥 향기를 뿜어내던 그 시절, 작고 보드라운 아이를 품어 안으며 우윳빛 가슴을 풀어헤쳐 보이던 곳이다. 딸랑이와 밥숟가락이 노랫소리가 되고 앳된 언어들도 여물어 갔다. 그곳은 에너지가 늘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먼 곳을 향해 늘 열려 있는 창은, 집밖으로 나간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바깥 풍경마저도 집인 줄로만 여겼다. 아이들이 머무는 교실이며 운동장과 돌아오는 길목들, 먼 곳에서 일하던 직장이며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 집이었다. 때로는 먼 우주까지 시선이 열리던 곳이다.   세상은 눈길이 가는 만큼 이곳으로 스며들었다. 모든 부분들은 예민한 감각으로 통통 튀어 오르고 뜨거워졌다. 계절이 묻어오고 세상의 소문들도 실려 왔다. 비오고 눈 내리는 날에는 뜨신 온돌과 구수한 밥 냄새를 찾아 식구들의 귀갓길이 빨라졌다. 언제나 이곳에서 기운을 회복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식구들의 숨결은 골랐다. 지금은 푸르고 싱싱한 근골로 떠받들어온 세월을 추억한다.   몸져누웠던 날, 뼈마디들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몸집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하듯 그동안 몸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이 작은 뼈가 이루고 있는 몸집이 내 정신이 머물렀던 곳인가. 거죽으로 검은 꽃이 피어오르고 피돌기는 생기를 잃어가지만 본래의 나와 만나게 되었다.   집은 그동안 자신을 봐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조금씩 탈이 나기 시작한다. 이 보잘것없는 뼈대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많이 헐거워지고 누추해졌다. 부쩍 작아진 몸집이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슬픔이 놀빛처럼 번진다. 마음도 덩달아 허약해지나 보다.   낡아가는 집을 어루만져 조금씩 손보며 더 깊이 사랑할 때다. 허물어지는 속도와 함께 손때 묻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은 더욱 깊어지리라. 함부로 써버린 것들을 다독 다독거릴 날이 더 많을 것 같다. ([대구문학])   ∣작법공부∣   세상 만물이 다 그렇듯 문학도 외형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이 있다. 문학을 외형, 즉 그 형식과 방법문제를 놓고 볼 때 문학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하게 된다. 첫째는 창작문학이고, 두 번째는 일반산문문학이다. 이를 ‘문학적 이야기 만들기’라는 용어로 풀어 말하면, 창작문학이란 창조적으로 꾸며서 만들어낸 문학적 이야기라는 뜻이 되고, 일반산문문학이란 사실의 어떤 문제나 주제에 관하여 토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한 문학적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문학을 그 내용상의 문제로 볼 때도 역시 크게 두 가지 문학을 말하게 된다. 첫째는 서정문학이고 두 번째는 서사문학이다. 서정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이 시문학이고, 서사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이 소설문학이라는 것은 일반인도 잘 아는 일이다. 즉 내용으로 본 ‘문학적 이야기’의 대표적인 양식은 시와 소설이라는 뜻이다.   창작문예수필은 서정문학과 서사문학을 아우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의 문학이다. 문학이론은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이다. 누가 ‘창작문예수필은 서정문학과 서사문학을 아우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의 문학’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이 없다. 창작문예수필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학자나 평론가가 아니고 창작문예수필 작품 그 자체다. 문학학자나 평론가는 작품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해석하는 일을 할 뿐이다.   창작문예수필이 서정양식의 문학이라는 말은 ‘창작문예수필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문학’이라는 뜻이다. 이 말 역시 필자가 창안하여 작가들 보고 그런 작품을 써 보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오히려 작가들이 써 놓은 작품을 보고 그렇게 해석하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적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실제 작품은 어떤 것인가? 그 대답을 ‘송복련이다’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수필이라는 잡문쓰기 시대에 평론가로 행세하게 된 나의 외롭고 고달픈 문학 인생에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가.   송복련의 문학은 한 편 한 편이 시작품이다. 그런데 운문양식의 시가 아닌 산문양식의 시이다. 이것이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시로 읽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직 문학 작품을 정상적으로 감상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 독자는 시작품과 소설 작품 등 창작문학 작품을 좀 더 많이 읽은 후에 창작문예수필 작품을 읽기를 권한다. 문학은 독자가 만드는 것이다. 문학을 문학으로 감상 할 수 있는 독자가 많을수록 그 나라 문학은 발전하게 된다. 수필이 왜 이 지경으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잡문쓰기가 되었는가? 찰스 램 시대 때부터 으로 써 온 수필작품을 발견하여 문학작품으로 감상 할 능력을 갖춘 독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서두문장 ‘집이 아프다.’는 시어다. 시어가 아니라면 ‘집이 아프다.’는 샛빨간 거짓말이 된다. ‘집은 그동안 자신을 봐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도 시어다. 그런데 운문의 시 작품에 나오는 시어가 아닌 산문문장의 시어인 것이다. 이것이 ‘산문의 시문학’ 양식이다.
105    유정이네 여름동화ㅡ황광지 댓글:  조회:569  추천:0  2022-05-26
유정이네 여름동화ㅡ황광지 우리집을 보러 부동산 아줌마와 엄마아빠를 따라온 여자 아이는 작은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어린이용품이었지만 조신한 숙녀처럼 찬찬한 몸짓에 핸드백이 제법 어울렸다. 나는 어른들에게 내가 사는 아파트를 성심껏 알려줘야 했으므로 부지런히 세 사람을 따라다니느라 말없는 그 아이를 뒷전으로 돌렸다. 집을 다 둘러본 어른들을 따라 현관문을 나갈 때까지 아이는 한 마디도, 사부작거리는 동작 한 번도 없었다.   그날 당장 매매계약을 하겠다는 통지가 있어 부동산중개소로 갔더니 핸드백을 앞에 둔 아이도 함께 있었다. 아이가 아홉 살쯤 되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절차가 길었음에도 아이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묵묵히 기다렸다. 부부가 공동으로 계약한다는 말에 나는 단번에 젊은 남자에게 호의가 갔다. ‘민’이란 이름의 아빠는 준수한 용모에 어진 말투가 사람을 편하게 했다. ‘빈’이란 이름의 엄마는 딸아이처럼 가냘픈 몸매였는데, 이미지가 지혜롭게 느껴지고 사랑스러웠다. 젊은 부부가 좀 더 큰집을 마련하고 새로운 설계를 하는 희망 같은 것이 그들에게서 솔솔 뿜어졌다.   며칠 뒤에 이 가족들이 세상이치에 밝은 아이의 외할아버지를 앞세우고 아침시간에 다시 한 번 집을 보러 왔을 때도 아이는 핸드백을 들고 사뿐사뿐 집에 들어섰다. 외할아버지가 복층아파트를 오르내리며 구석구석 요모조모 심사하는 동안 엄마는 똘똘하게 의견을 말하는 것 같았고, 아빠는 내게 미안한 눈빛을 두어 번 보내며 조용했다. 나는, 입을 꼭 닫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몸은 엄마를 닮았고 성품은 아빠를 닮았나보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그러면서 과연 집을 잘 판 것인가에 골똘했다. 값 안 나가는 복층이라는 부동산 소장의 중개에 손들고, 너무 헐값에 판 것 같아 이들 측에서 계약을 파기하자면 얼씨구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말끔히 가신 기회가 왔다. 얼마 뒤, 내가 아름다운가게에서 판매천사로 일일봉사를 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이 부부가 나타났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반가워서 손을 마주 잡았다. 딸아이 옷 중에 작아서 못 입는 것을 기증하러 왔다며, 평소에도 아름다운가게에 자주 들린다고 했다. 진실이 담겨있는 부부의 태도가 가슴에 닿았다. 그렇다면 그들도 같은 지향점을 두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무한한 신뢰가 갔다. 이 기증천사들이 우리집에 살게 된다는 것이 벅차서, 참 집을 잘 팔았다는 마음으로 굳어졌다.   나는 집을 줄여서 이사하는데 반해, 이 젊은 부부는 업그레이드 된 인생의 새로운 설계를 하는 터라 세심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것 같았다. 인테리어 업자를 대동해서 견적을 낸다고 며칠 뒤 아침에 또 왔고, 일주일 후에는 분야별 시공업자들을 대동하고 치수를 잰다고 또 아침에 왔다.   그때마다 딸아이는 분홍색 핸드백을 꼭 들고 따라왔다. 업자들이 치수를 잰다고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나는 모임에 나갈 채비를 다 마치고 그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소파에 입을 굳게 닫고 흐트러짐 없이 앉은 아이 곁에 처음으로 앉는 여유를 가졌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아이는 핸드백을 열고 그 속에 있는 손지갑을 꺼냈다. 어린이용이지만 어른 것처럼 구색이 갖추어져 있었다. 신분증 같은 것도 있고, 신용카드를 흉내 낸 것도 있었다. ‘유정’이라는 이름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유정이가 물건들을 보여주며 조용조용 설명도 덧붙였다. 내가 아이에게 그 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이 죄스러워 호들갑을 더해서 이것저것 물었고, 유정이가 환한 얼굴로 자기 귀중품들을 꺼내 보였다.   이 아이가 우리집에 살게 될 것을 상상하니 마음이 아주 환해졌다. 복층 아파트를 젊은이들 취향에 맞게 잘 꾸며서, 유정이는 동화 속의 공주처럼 사뿐사뿐 여기저기 다니면서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유정이가 이층 계단을 내려오며 엄마아빠에게 아침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그려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이 집에 애착을 가지면서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혼자 살기에 버거운 크기라며 방치하다시피 하고 살았는데, 딱 맞춤인 새 주인을 만나 집이 빛나게 될 것이다. 아이 엄마는 이층 한 방을 과외교실로 꾸며 아이들을 가르칠 것이라니, 이 집이 더 이상 적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팽개쳐 놓았던 넓은 베란다에서 유정이를 닮은 꽃들이 피어나서 예쁜 정원을 이루는 상상도 했다.   이 가족에게 완전히 내 마음이 열렸다. 어떤 요구라고 큰 무리가 없으면 들어주고 싶었다. 부부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리모델링 때문이라며 일주일을 당긴 이삿날에서 일주일을 더 당겨달라고 찾아왔을 때도 쉽게 응했다. 잔금을 받는 날도 금액을 채우지 못한 사정을 듣고, 며칠 후에 받기로 하고 흔쾌히 이삿짐을 내렸다. 내가 이사 들어갈 집을 기다리며 이삿짐센터에 짐을 맡기고 호텔에서 묵을 때도 유정이네가 집을 예쁘게 잘 손봐서 행복하게 엮어진 동화처럼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사철도 아닌 여름의 한복판에서도 나는 내게 맞는 아담한 새 보금자리를 꾸미느라 더위를 탓할 겨를이 없었다. 유정이네도 무미건조한 헌집을 반짝이는 새집으로 만들어 세 식구의 새로운 인연을 엮느라고 아름다운 여름을 보내고 있으리라. 유정이는 핸드백을 어디에 올려놓았을까? -가향문학회17인 사화집 [작업]   |작법공부|   인류문화는 끊임없는 발전의 역사다. 발전의 원리와 원동력은 변화에 있다. 그 중심 자리에서 새로운 인류문화의 산파역을 하고 있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은 원시 종합무용예술로부터 오늘날의 다양한 장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변신과 진화를 계속하여왔다. 몽테뉴의 에세이 문학도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 지구촌의 에세이는 더 이상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가 아니다. 영문 웹사이트에서 ‘creative essay’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에 관한 자료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창작적(creative essay)인 에세이에 관한 개념을 전혀 언급조차 하고 있지 않는 일단의 사람들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수필계라는 곳이다. ‘창작적인 수필’은 대한민국 문학학자들 모두도 말하고 있다.(백철 · 조연현) 그러나 오직 대한민국 수필계라는 곳의 수필이론은 이에 관하여 암흑천지다.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일선 수필가들 모두가 그 같은 암흑천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최남선으로부터 이양하, 한흑구, 윤오영, 피천득을 거쳐서 적지 않은 현역작가들에 이르기 까지 신변잡기 일색인 수필문단 한 모퉁이에서 끊임없는 문학적 변신과 진화를 계속하여 오고 있음을 저들의 작품이 스스로 증언해 주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수필문학은 수필계에서 말하는 문학적 국적불명의 수필이론(필자주 : ‘붓 가는 대로’를 방치하고 있는 수필계에서 말하는 수필이론이라는 것은 고전문학 이론도 아니고 현대문학 이론도 아니다.)을 말하고 있는 수필문학 잡지들과 수필문학 교실을 중심으로한 선생님들 밑에서 공부(?)하여 등단하고 있는 수필가들의 ‘기존의 수필’과 창작문예수필 작가들의 작품이 혼재된 상태에서 발표되고 있다. 필자는 그 가운데서 기존의 수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은 인 수필 작품들을 찾아내서 이를 증거물로 을 하고 있다.   필자는 ‘창작문예수필은 기존의 수필이 아니다.’ 라는 점을 강조한다. 창작문예수필은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새로운 양식의 창작문학이다. 그렇다면 그 실제 작품과 작법(이론)은 어떤 것인가? 필자는 현재까지 약 4백편에 가까운 창작문예수필 작품들을 발굴하여 창작비평과 함께 발표한바 있다. 여기 또 한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황광지의 「유정이네 동화」는 기존의 수필 시각으로는 어떻게도 비평 할 길이 없는 작품이다. 기존의 수필에는 이 같은 작품을 비평 할 창작론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수필계에서 행하고 있는 수필비평 자체가 창작론적 근거가 없는 비평들이다. 이를 가리켜 좋은 말로는 인상비평이라고 하지만, 인상비평 그 자체가 현대문학 이론의 한 가지다. 그러나 기존의 수필은 현대문학 이론에 근거한 문학이 아니다. 홍매의 ‘붓 가는 대로’에 의한 글쓰기는 문학이론적으로는 잡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수필 비평은 세간의 조롱대로 ‘주례사 비평’이라는 말을 공론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존의 수필을 가리켜서 ‘수필도 문학이냐’고 하는 비난은 바로 이 같은 이론부재의 글쓰기를 지적하여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현대문학 이론에 의하면 이 작품은 동화 작품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성된 아름다움 창작문예수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소재는 살던 아파트를 팔게 된 집 매매 이야기이다. 기존의 수필쓰기라면 당연히 왜 집을 팔게 되었으며, 그 집에서 살아온 사연은 어떻고, 집을 판 후에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 계획인지, 등등 신변잡사적인 사연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가는 그 모든 사연들을 ‘집을 보러 온 부모를 따라 온 여자 아이와 그 여자 아이가 들고 있는 작은 핸드백’에 묶어서 동화 같은 이야기로 엮어서 보여주고 있다.   서두 문장에서 작가는 ‘핸드백을 들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주목하도록 독자들의 시선을 유도한다. 그러나 정작 작품 속의 화자는 아이에게 관심을 두지 못하는 상황을 설정해서 독자의 ‘아이에게’ 향한 시선 유도를 외면하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는 ‘핸드백을 든 여자 아이’를 독자들 눈앞에 계속, 반복 등장 시킨다. 그러나 준수한 용모의 아이 아빠, 그리고 가냘픈 몸매의 아이 엄마, 그리고 외할아버지까지 등장하여 매매가 성사되어 이사준비를 하게 되기까지 작중 화자의 관심은 여전히 아이에게 머물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사 준비가 진행될 때까지 작가는 반복적으로 독자들 눈앞에 ‘핸드백을 들고 있는 아이’를 등장시킨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이 작품이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작가가 경험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쓰는 그런 작법의 수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기존의 수필에 대한 국어사전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수필 :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형식의 글(에센스 국어사전)   즉 기존의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가는 지금 그런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닌 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창작이란 의도적인 작법의 작품 만들기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고 작품은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이 문예창작 이론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창작하는 행위에 ‘생각나는 대로 ’란 있을 수 없다. 기존의 수필이 이 같은 국어사전의 낱말 뜻풀이를 방치하고 있는 한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이런 형편에 기존의 수필을 놓고 ‘수필창작’ 혹은 ‘창작수필’ 운운하는 것은 대한민국 문학의 수치일 뿐이다. 더구나 ‘붓 가는 대로’라는 개념 하에 쓴 글을 놓고 ‘노스롭 프라이’니 ‘가스통 바스라르’니 하는 유명 문학이론가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넌센스다. 기존의 수필이 언제부터 현대문학 이론에 의한 문학이 되었기에 이들 현대문학 이론가들의 이론을 적용한단 말인가? 먼저 ‘붓 가는 대로’부터 부정하고 나서 ‘노스롭 프라이’도 말하고 ‘가스통 바스라르’도 거론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핸드백을 들고 있는 여자 아이’에 대한 독자들의 의문과 흥미 고조법은 작중 화자의 관심 돌리기뿐만이 아니다. 작품 후반부에 들어서기까지 아이의 이름이 유정이라는 것마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유정이네 여름동화」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아이의 이름이 유정이일 텐데, 왜 유정이 이름이 안 나올까, 혹 핸드백을 든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등장하는 걸까, 그러면 여름동화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작품 후반부에 이르도록 팽배하게 된다.   여기까지 작가는 무슨 창작을 어떻게 하여 왔는가? 작가는 「유정이네 여름동화」라는 ‘동화 같은 상상력의 이야기’를 독자의 머리속에 만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읽도록 독자들의 뇌리 속에 ‘핸드백을 들고 있는’ 의문의 ‘여자 아이’를 놓고 상상해 온 ‘여름동화’ 이야기가 곧 작가가 작품 후반부에 펼쳐 보여주고 있는 「유정이네 여름동화」 그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 같은 창조적 구성법이 기존의 수필과 창작문예수필의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104    박상순 시인의 시모음 댓글:  조회:764  추천:0  2022-04-13
  eun540900님의 블로그 | eun540900 https://blog.naver.com/eun540900/80011667320 [박상순 시인 시모음]   나에게 길이 있었다 1                                        나에게 길이 있었다. 낮은 언덕을 넘어온 길이었다. 길가엔 언제나 몇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다. 작은 길이다. 큰 길이 열리는 곳엔 유리문과 유리벽 을 가진 옷가게가 있다.  지금 옷가게 앞은 저녁이다. 텔레비젼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촬영이 벌어 지고 있다. 여배우가 뛰어간다. 내게는 뒷모습만 보인다. 나는 잠시 기다려 야 한다. 그들이 길을 막고 있다.  촬영이 끝나자 길이 다시 열렸다. 나는 길을 따라 간다.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문. 은빛 손잡이를 돌린다. 문이 열린다. 나는 안으로 들어간다.  팩스밀리의 수신음이 울린다. 끊긴다. 또 울린다. 다시 끊긴다. 팩시밀리 앞. 안락의자 에 앉는다. 내 등 뒤로 시냇물이 흐른다. 의자에 씌워놓은, 넓 고도 얇은 천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린다.         나에게 길이 있었다 2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가방을 든 사람 눈이 큰 사람 그 길에 서 있는 키가 큰 사람 허리띠 대신 멜빵을 멘 사람 구두를 쭈구려 신은 사람 그 사람들이 뭉쳐서 하나가 된 사람 길 끝에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던 사람 내가 달려갔을 때, 다시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그 길에 서있는 가방을 든 사람 그 길에 서있는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멜빵을 멘 사람 구두를 쭈그려 신은 사람 그러한 사람들로 다시 흩어져 갈래갈래 작은 길을 따라 흘러가던 사람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길 위에 또 보이는 사람 그 길에 서있는 모자 쓴 사람 그 길에 서있는 가방을 든 사람 그 길에 서있는 눈이 큰 사람 길끝에 동그랗게 말아놓고 사라지던 멜빵을 멘 사람         나는 시간을 만든다                                        나는 시간을 만든다. 허리를 만들고 앞가슴을 만들고, 머리를 만든다. 나는 그녀를 만들었다. 진흙으로 뭉쳐진 그녀를 다 만든 뒤 두 손을 털며 문 밖으 로 나온다. 그녀는 흙반죽 어지러이 흩어진 작업대 위에서 쉬임없이 허둥댄 다.     그녀는 내가 두고 온 크림빵을 먹으려고 애쓴다. 받침대에 붙박인 한쪽 발 을 떼어내려 한다. 그사이, 내가 작업대 밑에 놓고 온 사진들, 내 사진들을 내려다보며, 사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부른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나를 본다. 바다를 본다. 들길을 보고, 황혼을 확인하 고, 내가 빠져나온 작업실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내 그림자를 앞질러 간다.     나는 시간의 꿈 밖에 앉아, 작업실 밖 빈터에 앉아, 짐차를 기다린다. 멀리 갔던 그녀가 짐차를 타고 내게로 온다. 내 작업실을 싣는다. 작업대를 싣고 간다. 그녀의 차바퀴가 픽픽댄다. 바람이 샌다.     나만 홀로 짐차에서 내린다. 바람 빠진 그녀의 짐차가 내 작업대만 싣고 간 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 시간을 기록한다. 뿌리뽑힌 집터에 앉아 지붕을 생 각한다. 별을 만든다. 작업대를 만든다. 별 속에 만든다. 진흙을 만든다. 작 업대가 진흙으로 나를 만든다.          낱말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 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노래 약속을 품에 안고 꿈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 빛의 소음(騷音)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 환몽의 정거장에 선 유령이 된다         내 머리 위에서 지구가 돈다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는 단지 책꽃이들을 바라보며 꽂힌 책들의 제목을 소리내어 읽을 뿐이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가 내게 물었고 내가 선택했고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에 앉았지만 일어서지 못한다 그녀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다 돈 뒤에도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는 마침내 의자에 올라 올가미에 목을 맨다 의자를 발로 차고 달나라로 떠난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햇빛이 따가운 5월의 피렌체 공항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 하나가 내 옆에서 담배불을 붙인다. 그녀의 목에 걸린 동그란 목걸이가 빛난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그녀가 돈다 내 머리 위에서 지구가 돈다         마라나 ;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1                  언제부터인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한 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리고 또 언제부턴가 비가 수평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수직으로 흐르 고 지붕은 쓸모없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마라나는 누웠다. 시간에 눕고 먹구 름 속에 눕고 봄빛과 가을빛에 누웠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사라져가는 세계의 폭풍에 취해 그녀가, 흰 천 위에 나뒹굴 때    나는 피를 뽑는다. 그녀의 옷가지를 허리에 둘둘 감고 오후 2시에서 3시를 넘기며 이 세계의 끝에 쓰러진 그녀의 피를 뽑는다. 어느날 강변에서 그녀 가 내 허리에 규산硅酸을 바르던 그때처럼.     나 ; 오고   마라나 ; 가고     나 ; 가고   마라나 ; 오고     문여는 소리   문닫는 소리     마지막 전람회가   끝나는 소리     마라나 ; 가고   나 ; 오고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                                  머리가 크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소년들이 오래된 야마하 피아노 한대를 공중으로 옮기고 있다. 공중의 풀밭에 피아노가 옮겨진다. 나와 같은 또래 로 보이는 소녀가 키 큰 화초 위에 앉는다. 피아노의 페달을 밟으며 어깨의 힘을 이용해 건반을 누른다.    나는 한편에 앉아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머리가 크고 배가 불룩 나온 소년 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그녀 는 한 소절이 다할 때마다 한번씩 옆으로 고래를 돌린다. 소년들은 반대편 에 서 있다.    정원 아래. 허공 밖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둠 속에 잠긴다.         밤의 버스                                                    정류장마다 얼굴들 통로 끝에서 솟아나 굴러오고 굴러가는 밤의 버스 내가 찍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어깨와 어깨들 사이로 통로를 굴러 덜커덕 어둠의 정류장에 내린다         변전소의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곳                 목 쉰 연주자가 있었다. 손풍금이 있었다. 목 쉰 연주자가 졸고 있을 때 검은 옷의 아이들이 걸레처럼 칼질한 샛노란 커튼이 유령처럼 있었다. 귀 떨어진 손풍금과 목 쉰 연주자,양말 속에 칼을 숨긴 아이들이 있었다. 높다란 철탑 아래 변전소가 있었다. 목 매달고 죽어버릴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봄밤                                                         어두운 골목길에 떨어져 끝까지 움직이는 한 쪽 팔         비오는 날의 도쿄                                        붉은 구름이 내 머리에 내려 앉았다 나는 고양이를 머리에 쓰고 서둘러 강을 건넜다 간판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아래로 들어갔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차가 출발했다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치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계란 한 알이 들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벌거벗은 여자가 웃고 있었다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왜 커피가 다 식었냐고 따졌다 계란과 치약을 바닥에 내던졌다 발가벗은 여자는 갑자기 옷을 입은 여자가 되고 엘리베이터는 커피집이 되고 비는 아직도 내리는지 붉은 구름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내 어깨를 누른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4년 뒤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체국 뒷길을 맴돌다. 수채구멍 속에서 나온 개구리 한 마리를 밟아 죽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미는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점심은 먹었는지, 저녁은 어떻게 먹고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눈을 감기 전에 내 귀여운 방에게 말했습니다. - 나는 거미가 되고 너는 거대한 개구리가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체국처럼 커다란 불자동차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의 머리통을 물동이에 처넣고 발길질하였습니다.   거미는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처음 본 젊은 여자 하나가 나의 뺨을 때린 뒤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커튼 뒤에 놓여진 오래된 기타가 쓰러졌다 울림통 속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내 가슴 속에서 갈비뼈 하나가 기타줄처럼 흔들렸다 경찰관 A가 들어와 내게 말했다 소설가 B가 들어와 내게 말했다 생선장수 C가 석유통을 들고 나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어젯밤 계단 위에서 소설가 B의 막내딸을 밀쳤습니다 B의 막내딸이 넘어지며 경찰관 A의 둘재 딸이 넘어지고 계단 위에 서 있던 A,B,C의 딸들이 다리가 부러지고 목뼈가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았습니다 내 어머니가 경찰관 A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어젯밤 할머니댁 다락에 갇혀 있었습니다 낮 동안엔 창고에 가둬 놓았고 아침에는 손발을 묶어 두었습니다 소설가 B가 경찰관 A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제 오후 저 녀석은 계단 아래 골목에서 하수구 뚜껑을 열고 있었습니다 하수구 속에서 커다란 쇠구슬을 꺼낸 뒤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쇠구슬을 핥고 있었습니다 경찰관 A가 생선장수 C에게 물었다 어젯밤 계단 위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생선장수 C는 석유통을 내려놓고 소설가 B를 쳐다보았다 소설가 B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경찰관 A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당신의 아들입니까 어머니가 생선장수 C를 바라보며 경찰관 A에게 말했다 내 아들은 아닙니다 생선장수 C가 말했다 내 아들은 아닙니다 소설가 B가 말했다 내 아들도 아닙니다 경찰관 A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의 아들 또한 너는 아니다          소쩍새는 폭발한다                                      꿈 많은 소쩍새는 푹발한다. 내가 수풀 속에 누운 뒤, 풀숲 밖에 버려 둔 자동차, 자주색 코팅 위에서, 쫓겨난 숲의 날개, 밤의 얼굴은 폭발한다. 나는 숲에 누워 꿈꾼다. 내가 폭발하는 꿈, 폭발하는 꿈 때문에 내가 폭파되는 꿈,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나는 왜 꿈을 꾸지 않는가?”라고 고민하는 꿈을 꾼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밤마다 숲이, 나를 불러 꿈을 꾼다. 소쩍새가 폭발하는 꿈, 나는 숲의 꿈이 등장시킨 내 꿈 밖의 운전사다. 밤이 가면 나는 지워진다. 운전석에 앉는다. 폭파된 꿈이 자주색, 밤의 자주색 살갗을 지붕에 얹고, 아침을 따라간다. 태양 아래 멈춘다. 신호등이 켜진다. 라디오 안테나를 올린다. 창 밖에 보이는 건 꿈 같은, 꿈속에 보이는 창 밖 같은, 라디오 소리 속에 들어앉은 꿈 같은, 라디오 속에 들어앉은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말해 주는 꿈 이야기 같은, 그런 것, 그런 것 같은…… 한 소녀가 걷는다. 소녀의 손가방이 폭파된다. 찢어진 소녀, 찢어진 옷자락이 차창 위에 날린다. 사람들이 폭발한다. 내 밖의 모든 사람들이 폭파된다. “안테나가 흔들린다. 내가 흔들린다” 라고 생각하는 동안, 소쩍 …… 소쩍 …… 주둥이로, 아침의 길 위에서 나는, 밤의 꿈속에서 밀려난, 아침으로 나는, 꿈 많은 소쩍새가 되어 나는, 폭발한다.         스모그                                                       그것은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것은 내 손에 있고, 두 개의 구멍이 있고 튀어나온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 트가 있는 그것은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그런데, 고등어가 내게 말하길, 낙엽들이 내게 말하길, 지하철 翩瑛揚?내 게 말하길, 그 속에는 길이 있고, 내가 걸었고,그 속에는 네가 있고 너를 향 해 내가 있고, 그 속에는 고등어가 있고 낙엽이 있고 공사장이 있고, 눈썹 아래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올리던 내 손이, 손가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커넥터가 되었다. 나와는 정말 관계가 없는, 멍청한, 바보같 은,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정말 커넥터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네 게 말하길, 나는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리하여 나는 내 손에 있고 두 개의 눈이 있고,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길이 말하길, 그 속에서 네가 말하길, 내 손가락이 내 손 에게 말하길, 그것은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것은 내 손 에 있고, 두 개의 구멍이 있고 튀어나온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그것은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스모그                                                    ─ 말죽거리를 지나던 소녀    그녀의 손목에서는 연기가 났다.    그녀는 한때 응원단원이었다. 무슨 경기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 는 다른 응원단원들처럼 똑같은 차림의 옷을 입고 깔깔거렸다.    경기가 끝나던 날,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날 그녀의 팔에서는 붉은 연기가 났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연기 속에서 구출되었다.    그녀는 가끔 지하철역 모퉁이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럴 때에도, 수화기를 든 그녀의 손목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나왔 다.    그녀는 취직을 했다. 사파이어, 진주, 루비 등등의 보석들이 가지런히 놓여 진 진열대 앞에 서 있을 때에도, 그녀의 손목에서는 연기가 났다. 그녀는 실 낱처럼 새어나오는 연기를 손수건으로 떨쳐내고 있었다.    그녀는 한때 동그란 소녀였다. 느티나무 길을 지나 버스를 타고, 전철역의 길고 깊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단지 책가방을 고쳐잡던 아주 동그란 소녀였 었다.    그녀의 손목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났다.         스모그                                                    ―서쪽의 넓은 벽    그 집의 서쪽 벽엔 창문이 없다. 붉은 벽돌로 3층까지 높여진 벽이 서 있 다. 어느날 한 번, 그 벽 아래 좁은 골목으로 사람의 머리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깡충깡충, 골목의 맞은편 낮은 담장 위로 서른 번쯤 솟았다가 내렸다. 반 토막의 머리, 한 토막의 머리…… 그런데 그 뒤로는 아무도 지나 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매일 그 집의 서쪽 벽을 본다. 창가에 설 때마다 그 벽은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창문도 없고, 사람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에 우뚝 선 붉은 벽,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둘기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오래된 면도기가 바뀌고 솔 빠진 칫솔들이 새것 으로 바뀌고, 이것저것 바뀌다가 어느날, 짜장면을 시켜서, 검붉은 면발들 을 걸레처럼 뒤집으며 먹다가, 보았다. 내 눈에서 떨어지는 벽돌들, 붉은 벽 돌들.    그 속에 낡은, 내 얼굴처럼 낡은, 수세미가 담긴 빈 그릇 하나. 깡충깡충, 깡충, 깡충         아주 오래된 숲에 대하여                               여름 강변에 앉아 우리는 칸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은 아주 커다란 숲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름 강변에서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칸트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유령 칸트가 썩은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우리에게 던진다. 서둘러 우리는 발목을 하나씩 잘라 그의 봉지에 넣어 주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풀밭에 누군가가 기르다 버린 집토끼 한 마리도 죽고, 썩어, 아이스크림처럼 녹는다. 옆에서 칸트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우리는 토끼의 유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숲에 대해 이야기한다. 썩은 가방을 맨 유령 칸트만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동안 오토바이를 탄, 무거운 모자를 쓴 경찰관이 순찰을 돈다. 여름 강변은 아름다운 연인들로 빛난다. 그 사이로 썩은 가방을 맨 중년 하나가 썩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다리 밑 물가로 내려간다. 오토바이를 탄 경찰관이 썩은 가방을 지켜본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썩은 소녀를 바라본다. 강변에서 중년이 썩은 소녀의 몸을 들어올린다. 경찰관이 달려간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갑자기 넘어진다. 소나기가 내린다. 선상카페의 네온사인이 잠깐동안 꺼진다. 여름 강변에 소나기가 유령처럼 내린다. 유령 칸트가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빗속으로 사라진다. 그동안 우리는 라틴 풍으로, 때로는 중국 식으로 아주 오래된 썩은 숲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앵두나무, 앵두나무                                     염소우리 옆에 집을 지었다. 마루를 놓고 방을 꾸몄다 지푸라기 벼개를 깔고 앵두나무를 눕혔다 옛 이야기 속의 뒤뜰, 푸른 오월이 가볍게 찰랑거리던 수반(水盤)의 물이 마르고 앵두나무는 누웠다. 나는 망설이다 얇은 이불을 열고 이제 물기가 말라 끝까지 작아진 앵두나무에 저고리를 입혔다 행여 놓칠세라 튼튼한 끈으로 나무를 받쳐들고 염소우리를 지나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아 집을 나섰다 팔월의 뜨거운 하늘, 긴 가뭄 위에 올라 앉아 앵두나무가 누웠던 요와 이불 지푸라기 벼개에 불을 지르고 나는 포크레인 기사가 땅파는 소리 윙윙거리는 엔진소리가 끝나자마자 커다란 구덩이 속에 앵두나무를 던졌다 앵두나무를 버렸다 옛 이야기 속의 넓은 마당, 장닭이 내 어깨를 냅다 쏘고 달아나던 날 수반의 뒤 뜰에서 뿌리채 걸어나와 쓰러진 나를 업어 잠재우던 앵두나무 나는 그 앵두나무를 뿌리채 뽑아 포크레인을 부르고, 내 키보다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 칙칙한 구덩이 속에 앵두나무를 던졌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지만 염소우리 옆을 한 바퀴, 다시 한 바퀴 돌다 자동차의 엔진을 켰다 이제 더 이상 앵두나무는 나를 찾아오지 못한다 따라오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 발명하지 못한다 앵두나무. 앵두나무 내가 그 나무를 흙구덩이 속에 버렸다 이제 앵두나무는 영원히 더 이상의 나를 발명하지 못한다         옛이야기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새들이 나를 피해 숲을 떠난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내가 잠들면 키 큰 동물들이 숲으로 돌아와 새들을 사냥한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내가 그 중국인 사내를 걱정하면 새들이 숲에서 빠져나오는 키 큰 동물들을 습격한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내가 영원히 눈을 감고 누우면 새들이, 키 큰 동물들이, 중국인 사내를 공격할 것이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그 중국인 사내는 어느 날 키 큰 동물이 되어 큰 새가 되어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의 숲속에 쓰러진 키 큰 짐승 나를 타고 누워버린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 빨리 떠나는 새들 - 늦게 돌아오는 새들 - 쓰러진 짐승만이 나오는 - 내 숲속의 이야기         의사 K와 함께                                            의사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이지만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의사 K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가 서둘러 옷을 입고 나간 뒤 나는 의사 K의 열린 옷장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내 오랜 친구인 의사 K는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전에도 의사 K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오늘처럼 밖으로 나갔습니다. K는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때도 나는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보았습니다. 롤러 코스터, 휴게소, 작은 광장, 매표소, 분수, 징검다리, 유령의 집, 전망대 지도에는 정확한 위치 조목조목 일러주는 설명문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 잘못 들면 빠져나와 다시 쉽게 가는 길도 적혀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K는 물론 나 역시 놀이공원에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의사 K의 옷장에서 새로 바뀐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내가 그를 찾아가면 꼭 긴급한 전화가 옵니다. K는 참 바쁜 의사입니다. 그가 나가면 옷장 문이 또 이렇게 열려있게 됩니다. 놀이공원 지도 속엔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쉬는 사람, 누운 사람, 의사 K와 같은 사람 하나 없지만 나는 또 할 수 없이 이런 저런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도를 보며 의사 K를 기다립니다. K를 기다리며 나는 옷장에서 떨어진 놀이공원 지도를 보고있지만 의사 K는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나 또한 가지 않습니다. 의사 K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지도를 보며 K를 기다립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놀이공원에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이 가을 한순간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가 내렸다 고양이가 내렸다 오토바이를 탄 피자 배달원이 내렸고 15톤 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텅 빈 버스가 내 손바닥 안으로 굴러왔다   나도 내렸다 울고 있던 내 돌들도 모두 내렸다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단풍잎 하나 초침이 돌고 있는 내 눈 속에 떨어지고 있었다          자네트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 버린 솜 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 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 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 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 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를 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 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 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 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이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 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 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 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이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난밤, 술 취한 배들이 하늘을 날고, 술 취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풀들의 뿌리는 어둠의 깊이를 미처 알지 못한 채 땅을 향해 거꾸로 솟아올랐습니 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이제 하늘이 터질 것 같아. 큰 가방을 마련 해, 큰 가방. 내 눈물을 거두고, 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솟아오 른 풀들의 뿌리를 거두어야 해.    지난밤, 한 남자의 머리 위에서 하늘이 터져버렸습니다- 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선 풀들의 뿌리, 가방집의 가방들도 모조리 터져버렸습 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터진 하늘과 긴 강물이 그의 곁에 숨죽여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가방집 지붕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 꿈 속의 내 가방은 작은 뿌리, 내 가방은 취한 때, 내 가방은 술 취한 구름, 내 가방은 기나긴 강물, 그리고 내 가방은 거대한 눈물.    만져 봐, 만져 봐.    지난밤, 한 남자가 세계의 끝에서 말했습니다 만져 봐. 터진 하늘 아래 피 는 봄, 터진 가방 아래 흐르는 거대한 강물, 꽃봄처럼 터져나온 내 심장이 너의 손을 잡는꿈    박상순(朴賞淳)                                                                                         1962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 전공. 1991년 《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6년 수상.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와『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이 있다. 최근 신작시집  [Love Adagio] (민음사, 2004)    박상순은 기법적으로는 이른 바 계열에 속하는 시인이다. 많은 평자들은 그의 시를 로 보고 있지만, 내 견해는 다르다. 기법적으로는 이수명이 그의 시세계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박상순과 이수명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이수명의 시세계가 거의 투명하고 자의적인 기호 놀이로 일관하는 데 반해서, 박상순의 언어들은 일정한 심리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상처와 고뇌를 지니고 있다. 그의 언어는 투명한 시니피앙들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박상순이 심리적인 시들을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이른 바 계열에 속하는데, 읽고 나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투명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아주 도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목가적인 언어. 그의 시적 자아는 타락한 일상 안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살아가도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집요한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적 자아가 거의 언제나 소년이거나 소녀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다. 외로움과 아픔. 그리고 망가진 세계. 그 안에서 부서진 마네킹 같은, 얻어맞아서 빠개진, 그러나 상처를 치료할 붕대조차 얻지 못한, 가엾고 순결하지만, 강하고 독립적인 소년과 소녀들이 조용조용 움직인다. 슬프고 아름답고, 말이 안되는 부조리한 동화. 쉽게 위안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위안하는 힘이 그들의 부서진 형태로부터 나온다. [김정란] [출처] [펌] 박상순 시인 시모음|작성자 해모수  
103    [공유] 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댓글:  조회:1909  추천:0  2022-03-31
[공유] 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비니파파의 사랑이야기 | 비니네  https://blog.naver.com/ydkim0301/20039056890 * 저작권자의 요청시 삭제하겠습니다. *   국내최초 완역본   안데르센 동화전집   저자: 안데르센   역자: 김숙희 외4인   출판사: 도서출판 한뜻     인어공주 ㅡ 안데르센   깊은 바다 속은 아름다운 수레국화의 꽃잎처럼 푸르고 투명한 유리처럼 맑습니다. 하지만 그 곳은 어떤 닻줄도 닿지 못하고, 바닥에서 물위까지 수많은 교회 종탑을 쌓아야 닿을 정도로 깊답니다. 그 깊은 곳에 바다의 종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저 흰 모래밭만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에는 이상한 나무와 식물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그 나무와 식물들의 줄기와 잎들은 너무나 부드러워 물살이 조금만 일어도 흔들린답니다. 그 사이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구요. 마치 새들이 하늘에서 공기 속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는 바다 임금님의 궁전이 있습니다. 궁전의 벽은 산호로 만들었고, 길고 뾰족한 창문들은 가장 맑은 호박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지붕은 물결이 흔들릴 때마다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조개 껍질들로 덮었답니다. 거기 조개껍질 하나하나 속에는 모두 빛나는 진주들이 놓여 있습니다. 정말 그런 궁전의 모습은 굉장하답니다. 거기 진주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임금님의 왕관을 멋지게 장식할 만큼 값진 것들이거든요. 바다 임금님은 혼자 살고 있답니다. 그의 늙은 어머니가 살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영리한 그 부인은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꼬리에 열 두 개의 굴을 달고 다녔습니다. 다른 부인들은 여섯 개까지만 달 수 있도록 했지요. 그것만 빼고는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요. 그녀는 나이 어린 바다의 공주들을 몹시 사랑했습니다. 여섯 명의 아름다운 아가씨들이지요. 그 중에서도 막내 공주가 가장 예뻤습니다. 피부는 장미빛처럼 깨끗하고 맑았으며, 두 눈은 깊은 바다처럼 파랗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발이 없고 물고기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주들은 바다 속 궁전에서만 살았습니다. 공주들은 궁전의 커다란 수문에서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그 수문 벽에는 살아 있는 꽃들이 자라고 있었어요. 커다란 호박 창문이 열리면 거기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들어오죠. 우리가 창을 열면 제비가 날아 들어오듯이 말이에요. 물고기들이 작은 공주들에게 헤엄쳐 오면 공주들은 먹이를 주기도 하고 물고기를 쓰다듬기도 했습니다. 궁전 바깥에는 불길처럼 붉고 검푸른 나무들이 있는 큰 정원이 있었습니다. 과일들은 황금처럼 빛났고, 꽃들은 타고 있는 불길 같았습니다.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 있었는데, 그 모래는 유황의 불길 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바다 속 공주들은 바람이 잠들면 해님을 보러 나왔습니다. 공주들에게는 해님이 자주 빛 꽃처럼 보였습니다. 꽃받침이 모든 빛을 뿜어내는 그런 꽃 말이에요. 공주들은 정원 안에 자기만의 구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땅을 파고 식물을 가꿀 수 있었습니다. 어떤 공주는 고래 모양으로 만들었고, 다른 공주는 인어 모양의 꽃밭을 만들었지요. 그러나 막내 공주는 꽃밭을 해님처럼 둥글게 만들고, 붉게 빛나는 꽃들을 심었습니다. 막내는 조용하고 신중하며 특별한 공주였습니다. 다른 언니 공주들이 난파한 배에서 주워온 진기한 물건들로 치장을 해도 그녀는 저기 위 해님과 닮고, 장미꽃처럼 붉은 꽃들과 오직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만을 가지려 했습니다. 그것은 흰색의 맑은 돌로 조각된 아름다운 소년상이었습니다.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막내 공주는 조각상 옆에 장미빛처럼 붉은 수양버들을 심었습니다. 수양버들은 근사하게 자라 푸른 모랫바닥을 향해 싱싱한 가지를 뻗었습니다. 조각의 그림자가 바이올렛 빛으로 모래바닥에 비치고 수양버들의 가지들이 흔들흔들 움직이면, 마치 수양버들의 꼭대기와 뿌리가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공주는 저 위쪽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할머니는 배와 도시, 인간과 동물 등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공주는 그 중에서도 꽃들이 향기를 낸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다 속 꽃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숲들이 초록색이라는 것과 나무들 사이에서 고기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 등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할머니가 나무들 사이의 고기라고 부른 것은 작은 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주들은 한 번도 새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한답니다. "너희들이 열 다섯 살이 되면 허락을 얻어 바다 위로 나가서 달빛이 비치는 바위 위에 앉아 지나가는 배들을 볼 수 있단다. 그러면 숲들과 도시들도 볼 수 있지."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큰언니 공주가 제일 먼저 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공주들은 꼭 한 살씩 나이 터울이 졌습니다. 그러니 막내 공주가 인간 세상을 보려면 아직도 5년이나 남은 것이지요. 공주들은 자기가 본 것을, 그리고 첫날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을 다른 공주들에게 이야기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할머니가 얘기해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어떤 공주도 막내 공주만큼 동경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습니다. 조용하고 사려 깊은 막내 공주는 가장 바다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가장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창가에 서서, 물고기들이 지느러미와 꼬리를 움직이며 이리저리 첨벙거리는 바닷물을 통해 저 위를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주 희미하게 비쳤지만 달과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검은 구름 같은 무언가가 그 아래를 스쳐 지나가면 고래이거나 아니면 많은 사람들을 태운 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바다 속에서 작고 아름다운 인어 공주가 하얀 손을 내밀고 있으리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맏이인 첫째 언니 공주가 열 다섯 살이 되어 바다 위로 올라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맏언니는 돌아와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달빛을 받으며 고요한 바닷가의 모래 언덕에 앉아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 곳에 앉아 수백 개의 별 같은 불빛들이 반짝거리는 큰 도시를 바라보는 것, 음악과 마차와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 많은 교회 종탑을 바라보면서 종소리를 들었던 것은 잊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막내 공주는 그곳에 가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정말 그리워했답니다. 아! 막내 공주는 정말 얼마나 열심히 귀를 기울였던지요. 늦은 저녁 창가에 서서 검푸른 물결을 통해 위를 올려다보면서 떠들썩하게 소리가 울리는 큰 도시를 상상했답니다. 그러면서 교회 종소리가 바다 밑까지 울려온다고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둘째 공주가 허락을 얻어 바다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침 해가 지고 있을 때였지요. 해가 지는 하늘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온 하늘이 황금처럼 보였지요. 그리고 그 구름들! 그래요, 그 아름다운 모습은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답니다. 구름은 붉은 색과 바이올렛 빛을 띠고서 그녀의 머리 위로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리고 길고 하얀 면사포처럼 한 떼의 들오리들이 해가 떠 있는 물 위를 향해 구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날아갔습니다. 그녀는 해를 향해 헤엄쳐 갔습니다. 그러나 해는 곧 가라앉고 바다 표면과 구름 위의 장밋빛 홍조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셋째 공주가 올라갔습니다. 그녀는 자매들 중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바다로 흘러드는 넓은 강을 따라 헤엄쳐 올라갔습니다. 그녀는 포도 넝쿨이 우거진 찬란한 초록 언덕과 찬란한 숲들 사이로 성을 보았습니다. 또한 공주는 새들이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햇볕이 어찌나 따뜻하게 비치는지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물 속으로 들락거려야만 했지요. 바닷가에서는 발가벗은 어린아이들이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지요. 공주도 그 아이들과 함께 놀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공주의 모습을 보더니 놀라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때 작은 검은 색 동물이 공주에게 뛰어왔어요. 그 동물은 바로 개였지요. 그 개가 얼마나 크게 짖어대는지 공주는 무서워서 얼른 바다 속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셋째 공주는 바다 위에서 본 그 찬란한 숲과 푸른 언덕들, 그리고 물고기 같은 꼬리가 없이도 물 속에서 귀엽게 헤엄치던 그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넷째 공주는 그다지 호기심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냥 바다 한가운데에 머물러 있었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그곳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했습니다. 멀리 수평선이 바라다 보이고, 그 위로 하늘이 마치 유리로 만든 종처럼 펼쳐 있었다는 거예요. 또 멀리 지나가는 배들도 보았답니다. 배들은 마치 갈매기처럼 보였습니다. 돌고래들은 즐겁게 재주를 넘고, 커다란 고래들은 콧구멍을 물을 뿜어댔습니다. 마치 수백 개의 분수처럼 말이에요. 이제 다섯째 언니의 차례였습니다. 다섯째 공주의 생일은 마침 겨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다른 공주들이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다는 짙은 초록색이었습니다. 커다란 빙산들이 물위를 떠다니는 그 모습이 마치 진주처럼 보였습니다. 빙산은 사람들이 세운 교회의 종탑보다 더 컸고, 아주 멋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가장 커다란 빙산 위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자 하늘이 온통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습니다. 번개가 치고, 천둥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높은 파도가 일어나 커다란 빙산을 때렸습니다. 빙산들은 밝은 번개 불빛 가운데를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던 배들도 돛을 올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서워 보였지만 공주는 그래도 떠 다니는 빙산 위에 걸터앉아 푸른 번개 불빛이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며 바다로 내리뻗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바다 위로 올라갔던 공주들은 하나같이 그들이 보았던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들을 자랑하면서 황홀한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바다 위로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곧 바다 위의 풍경에 대해서도 시들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바다 속 우리 집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다섯 공주는 서로 손을 잡고 줄을 지어 바다 위로 올라가곤 했습니다. 인어 공주들은 그 어떤 인간보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답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면 그들은 바다 위 배 가까이 다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폭풍이 다가온다는 것을 선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원들은 인어 공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인어 공주들의 노래 때문에 폭풍이 다가온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그 선원들이 바다 속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침몰하면 선원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다 속 궁전으로 오게 되니까요. 언니들이 물을 헤치고 높이 올라가고 나면 막내 공주는 혼자 남아 언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막내 공주는 울고만 싶었답니다. 하지만 인어들에게는 눈물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아, 나도 빨리 열 다섯 살이 되면 좋으련만..." 막내 공주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저 위에 있는 세상과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세월이 흘러 마침내 막내 공주도 열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자, 보렴. 너도 이제 다 컸구나."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렴. 너도 다른 언니들처럼 단장을 해야지." 할머니는 하얀 백합꽃으로 화환을 만들어 막내 공주의 머리에 씌워 주었습니다. 그 화환의 꽃잎은 하나하나 모두가 진주였어요. 할머니는 또 여덟 개의 커다란 굴을 공주의 긴 꼬리에 매달아 주었습니다. "아파요!" "하지만, 아름다워지려면 이런 건 참아야 한단다." 아, 막내 공주는 차라리 이런 온갖 장식들을 떼어 버리고 무거운 화환도 벗어버리고 싶었어요. 정원에 피어 있는 붉은 꽃들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씀에 거역할 수는 없었어요. "안녕!" 막내 공주는 마침내 그동안 꿈에 그리던 바깥 세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공주가 바다 위에 올라갔을 때에는 마침 해가 막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노을에 붉게 물든 구름이 마치 장미꽃처럼 빛나고 있었어요. 그리고 밝게 빛나는 저녁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지요. 공기는 맑고,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했습니다. 바다 위에는 돛대를 세 개나 단 커다란 배가 떠 있었습니다. 돛 가운데 하나만 감아 올려져 있었어요. 바다는 바람 한 점 없이 조용했습니다. 배의 활대에는 선원들이 올라가 앉아 있었어요. 배에서는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고, 등불이 몇 백개씩이나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온 세상 나라의 국기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 같았답니다.     인어 공주는 선실의 창문 가까이 헤엄쳐 갔습니다. 일렁이는 물살에 기댄 채 공주는 거울처럼 반짝이는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커다랗고 검은 눈을 가진 젊은 왕자님도 있었답니다. 왕자님은 거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열 여섯 살이 넘어 보이지는 않았답니다. 오늘은 바로 왕자님의 생일이었어요. 그래서 배 안을 온통 화려하게 꾸민 것이랍니다. 갑판 위에서는 선원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공중에는 불꽃이 펑펑 터지고 있었습니다. 그 불빛은 바다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깜짝 놀라 물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곧 물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 때 보이는 모습은 마치 하늘의 별들이 자기에게 떨어져 내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불꽃은 이리저리 튀면서 화려하게 빛나는 물고기처럼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불꽃은 맑고 조용한 바다를 비추고 있었답니다. 왕자님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화려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왕자님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어요. 점점 밤이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그 아름다운 왕자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답니다. 이제 화려한 등불이 모두 꺼지고 더 이상 불꽃이 하늘로 날아오르지도 않았지요. 대포 소리도 잠잠해졌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혼자서 조용히 배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배는 돛을 활짝 펼치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파도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커다란 구름도 몰려왔어요. 멀리서 번개가 치고 있었습니다. 곧 폭풍이 몰려올 것 같았습니다. 선원들은 재빨리 돛을 접어 올렸습니다. 배는 커다란 파도 때문에 바다 위를 날 듯이 달렸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마치 그네를 타는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시커먼 파도가 마치 배를 덮치려는 듯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배는 높은 파도 사이에서 백조처럼 가라앉았다가 다시 치솟으면서 거칠게 흔들렸어요. 인어 공주는 그런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배의 선원들은 그렇지 않았지요. 여기저기서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배가 부서지기 시작했어요. 배의 두꺼운 몸체가 거센 파도에 얻어맞고 휘어졌어요. 그리고 그 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돛대가 절반으로 부러져 버렸어요. 그러면서 배는 한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위험해진 것을 보고 인어 공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하지만 인어 공주도 부서진 배의 파편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어요. 그 때 다시 한 번 번개가 번쩍이며 주위를 밝게 비추었습니다. 선원들은 침몰하는 배를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인어 공주는 왕자님이 어디 있는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나 인어 공주가 막 왕자님을 발견한 순간 배는 완전히 두 동강이 나서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인어 공주는 무척 기뻤습니다. 왕자님이 바다 속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반가웠거든요. 하지만 곧 사람은 인어처럼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물 속으로 들어오면 왕자님은 곧 죽고 말 거예요. 그러나 왕자님은 절대 죽어서는 안됩니다. 인어 공주는 물위에 어지럽게 떠다니는 배의 파편들을 피해 왕자님에게로 헤엄쳐 갔습니다. 자기가 다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답니다. 인어 공주는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파도 위로 떠올라 왕자님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왕자님은 정신을 잃고 거친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어요. 그렇게 아름답던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어요. 인어 공주가 아니었다면 왕자님은 틀림없이 죽고 말았을 거예요. 다음 날 아침, 바다는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그러나 지난밤 그 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빛나는 해님이 붉게 떠올랐어요. 왕자님으 두 뺨이 햇빛을 받아 차츰 붉어졌어요. 하지만 아직 두 눈은 그대로 감겨 있었답니다. 인어 공주는 왕자님의 아름다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리고 젖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어요. 왕자님의 모습은 마치 바다 속 작은 정원에 서 있는 조각상 같았답니다. 인어 공주는 다시 한 번 왕자님에게 입을 맞추었어요. 그리고 왕자님이 살아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때 인어 공주는 육지를 보았습니다. 높고 푸른 산꼭대기에 백조처럼 하얀 눈이 덮여 있고, 그 아래 바닷가에는 멋있는 푸른 숲이 펼쳐져 있었어요. 그 앞에 있는 집들은 아마 교회나 수도원들이겠지요. 거기 정원에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문 앞에는 키가 큰 종려나무들이 서 있었구요. 바닷가에는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왕자님을 끌어안고 모래밭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양지쪽에 왕자님을 눕혔습니다. 그 때 종소리가 울리더니 젊은 처녀들이 정원으로 뛰어 달려왔습니다. 인어 공주는 그래서 얼른 바위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가엾은 왕자님에게 누가 오는지를 지켜보았어요. 어떤 젊은 아가씨가 왕자님을 발견했습니다. 그 아가씨는 깜짝 놀라 곧 사람들을 불러 왔어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왕자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인어 공주에게는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가 자기를 구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인어 공주는 몹시 슬펐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왕자님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인어 공주는 슬픈 마음으로 바다 속 궁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막내 공주는 항상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깥 세상을 다녀온 뒤로는 더욱 말수가 줄었습니다. 언니들이 막내 공주에게 바깥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막내 공주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막내 공주는 매일 밤 왕자님이 누워 있던 그 바닷가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그 뒤 단 한 번도 왕자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높은 산을 뒤덮고 있던 하얀 눈도 모두 녹았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언제나 슬픈 마음으로 바다 속 궁전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인어 공주는 이제 꽃도 가꾸지 않았어요. 그래서 꽃과 나무들이 날이 갈수록 시들고, 정원은 무척 쓸쓸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막내 공주는 한 언니에게 이 얘기를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차츰 다른 언니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언니 가운데 하나가 그 왕자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요. 그 언니도 배에서 잔치를 하고 있는 왕자님을 보았던 거예요. "막내야, 이리 오렴." 공주들은 막내 공주를 이끌고 왕자님의 궁전이 있는 곳 가까이 헤엄쳐 갔습니다. 궁전은 노란 돌로 지어져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어요. 바다에서부터 커다란 대리석 계단이 궁전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지붕에는 아름다운 탑들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 탑의 동그란 지붕에는 황금을 입혀 놓아서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어요. 깨끗한 유리창을 통해 궁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비싼 커튼과 벽걸이로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방 가운데에는 커다란 분수가 있고, 거기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천장을 덮은 둥근 유리창에까지 솟아올랐습니다. 인어 공주는 매일 왕자님의 궁전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언니들보다 훨씬 더 육지 가까이 간 것이지요. 바다 위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화려한 대리석 발코니 바로 아래까지도 갔습니다. 그리고 인어 공주는 거기서 왕자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자님은 밝은 달빛 아래 혼자서 앉아 있곤 했습니다. 인어 공주는 또 왕자님이 보트를 타며 음악을 듣는 모습도 초록색 갈대 사이로 몰래 훔쳐보았습니다. 인어 공주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곤 했지만 왕자님은 그 모습을 보고 그저 백조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인어 공주는 자기가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던 왕자님을 구했다는 사실이 기뻤어요. 그리고 왕자님이 평화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인어 공주는 그 때 왕자님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입을 맞추었답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지요. 인어 공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바다속보다 훨씬 더 넓은 사람들의 세상에서 살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마음대로 다니는가 하면 높은 구름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물 밖 세상은 숲과 들판이 있고, 인어 공주가 바라보는 곳보다 훨씬 더 멀리 뻗어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니들도 거기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할머니만이 바다 위의 세상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인어 공주는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지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나요? 바다 속 우리와 달리 죽지 않고 살 수 있나요?"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아니, 사람들도 죽는단다.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더 빨리 죽게 되지. 우리는 300년 동안 살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죽은 다음에 그냥 물위의 거품이 되고 마는 거야. 무덤도 없고... 다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단다. 우리는 저 푸른 갈대와 마찬가지야. 한 번 꺾이면 두 번 다시 파랗게 살아나지 못하는 저 갈대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은 죽어서 흙이 된 뒤에도 그 영혼은 영원히 살 수 있지. 영혼은 맑은 공기를 뚫고 솟아올라서 저 반짝이는 별로 간단다. 우리가 물위로 떠올라 인간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올라가는 거야." "우리는 왜 영혼을 얻을 수 없어요?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이 되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제 생명을 버리겠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 못써! 우리는 지금 인간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지내지 않니." "하지만 제가 죽으면 바다 위 거품으로 떠돌겠지요? 파도가 노래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이나 붉게 빛나는 태양도 볼 수 없잖아요? 영혼을 얻으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방법은 없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너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만약 어떤 사람이 너를 사랑하고, 너와 결혼하면 그 사람의 영혼이 네 몸 속으로 흘러 들어와 너도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을 함께 누리는 거야. 서로의 영혼을 나누게 되는 거지.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생길 수 없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네 꼬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들은 우리와 달라서 다리라는 것을 갖고 있지." 인어 공주는 슬픈 얼굴로 자기의 꼬리를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말했어요. "자, 이제 좀더 즐겁게 지내자꾸나. 우리는 300년 동안이나 살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건 정말 즐거운 거야. 인간들은 무덤으로 가지만 말이야. 오늘 저녁에 궁전에서 무도회를 열도록 하자." 바다 속 무도회는 사람들이 상상도 하기 어려운, 그렇게 화려한 축제예요. 무도회장의 벽과 천장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져 있지요. 장미처럼 붉은 조개와 초록색 조개들이 사방으로 줄을 지어 있구요. 이 조개 껍질들이 파란 불빛을 비춰 무도회장을 아름답게 밝힌답니다. 그리고 수많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유리벽 사이로 헤엄치구요. 물고기들의 비늘은 자주빛, 붉은 색으로 반짝입니다. 어떤 물고기의 비늘은 금빛과 은빛이랍니다. 맑은 시냇물이 무도회장 가운데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남자 인어들과 여자 인어들이 사랑스러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지요. 아마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지는 못할 거예요. 막내 인어 공주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답니다... 막내 공주는 이 세상에서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인어 공주는 결코 왕자님을 잊을 수 없었어요. 자기가 왕자님처럼 영혼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인어 공주는 혼자서 몰래 궁전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슬픈 마음으로 작은 정원에 앉았어요. 그 때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마 틀림없이 저 배에는 왕자님이 타고 있을 거야. 왕자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 나는 꼭 왕자님을 얻고야 말 거야. 그리고 영혼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거야. 그래, 마녀에게로 가 보자. 어쩌면 마녀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인어 공주는 정원을 빠져 나와 바다 저쪽 거칠게 날뛰는 소용돌이 속으로 갔습니다. 마녀는 바로 그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그 전에 한 번도 그 길로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꽃은 말할 것도 없고 흔한 바다 풀조차 나 있지 않은 곳이었어요. 쓸쓸한 회색 모래만이 멀리 뻗어 있었습니다. 마녀의 집으로 가려면 소용돌이와 부글부글 끓는 진창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마녀의 집은 거기를 지나 이상한 숲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나무와 덤불에는 모두 대가리가 달린 것 같았습니다. 마치 흙에서 솟아나 꿈틀대는, 수백 개 머리가 달린 뱀처럼 말이에요. 가지는 마음대로 휘어지는 긴 팔 같고, 몸통이 따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것들은 지나가는 것을 단단히 붙잡아 휘어 감아서는 두 번 다시 놓아주지 않는답니다. 인어 공주는 너무나 무서워서 그 앞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차라리 이제라도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순간 인어 공주는 왕자님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인어 공주는 다시 용기를 냈습니다. 팔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 살아 움직이는 덤불들이 손을 댈 수 없도록 말이에요. 그리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가지를 내뻗는 무서운 그 덤불 식물들 사이를 물고기처럼 헤엄쳐 지나갔습니다. 그 덤불 속에 사람들의 하얀 해골이 보였습니다. 또 그 덤불들이 목을 졸라 죽인 여자 인어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인어 공주가 지금까지 본 것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드디어 아주 커다란 늪에 도착했습니다. 살이 찐 커다란 바다뱀이 보기 흉한 노란색 배를 드러낸 채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있었어요. 이 늪의 한가운데에 배가 난파당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의 뼈로 만든 집이 서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마녀가 살고 있었어요. "네가 지금 뭘 하려는 건지 난 이미 다 알고 있다." 마녀가 말했습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지. 아름다운 작은 공주님... 하지만 넌 아무리 그래도 네 물고기 꼬리를 없애고 그 대신 인간들처럼 걸어 다니는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거겠지? 그 젊은 왕자와 영원히 죽지 않을 그 영혼을 얻고 싶어서 말이야." 마녀는 소름 끼치는, 기분 나쁜 목소리로 낄낄대며 웃었습니다. "마침 때를 잘 맞춰 왔어. 내일 해가 뜨고 나면, 앞으로 1년이 지날 때까지는 너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으니 말이야. 내가 아주 효과가 좋은 물약을 만들어 주마. 그걸 가지고 해가 뜨기 전에 육지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서 그 물약을 마시는 거야. 그러면 네 꼬리가 떨어져나가게 된다. 그 대신 인간들이 갖고 있는 다리가 생기는 거야. 사람들은 너를 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고 얘기할 거야. 하지만 네가 걸어다닐 때는 마치 날카로운 칼 위를 걷는 것처럼 무척 아플 거야. 하지만 별 수 없지. 네가 이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다면 내가 너를 도와주마." "네, 그렇게 하겠어요." 인어 공주는 왕자와,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영혼을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녀는 다시 말했어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한 번 인간의 몸으로 변하면 두 번 다시 인어가 될 수 없어. 두 번 다시 네 언니들이나 아버지가 있는 궁전으로 내려올 수 없는 거야. 그리고 왕자가 진정으로 널 사랑하지 않으면... 넌 영혼도 얻지 못하고, 결국 네 심장이 쪼개지면서 넌 물위의 거품으로 변하고 만단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하겠어요." 인어 공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몹시 떨고 있었습니다. 마녀는 또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요구가 하나 있다. 네 목소리는 여기 바다 밑에서 가장 아름답지. 넌 아마 그 목소리로 왕자를 홀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넌 그 목소리를 나에게 주어야 해. 그것으로 물약을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당신이 내 목소리를 가져가면 난 무얼 갖게 되나요?" "아름다운 모습이지. 경쾌한 걸음걸이, 속삭이는 듯한 두 눈... 그것만 가지고도 넌 얼마든지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할 수 있어. 어때, 아직도 용기가 남아 있어? 그렇다면 이제 네 혀를 내밀어라. 그걸 잘라야 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겠어요." 마녀는 그 마술 물약을 끓이기 위해 불 위에 솥을 얹었습니다. 그러더니 칼로 자기 가슴을 그어 검은 피를 나오게 해서, 그 핏방울을 뚝뚝 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솥에서 김이 솟아올랐습니다. 마녀는 계속해서 솥 안에 뭔가 이상한 물건들을 집어넣었습니다. 마침내 물약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그 약은 마치 맑은 물처럼 보였습니다. "자, 이제 네 혀를 다오." 마녀는 인어 공주의 혀를 싹둑 잘랐습니다. 이제 인어 공주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네가 숲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 괴물 덤불들이 너를 잡으려고 하거든 이 물약을 한 방울만 떨어뜨려라. 그러면 그 덤불들의 팔다리가 산산이 부서질 거야." 그러나 인어 공주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덤불들은 물약을 보자마자 소스라쳐 놀라 움츠러들었거든요. 인어 공주는 그 소용돌이 속을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궁전에 갔습니다. 무도회장의 불빛은 이미 꺼져 있었어요. 아마 다들 잠이 들었겠지요. 하지만 인어 공주는 그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를 영원히 떠나야 하니까요. 인어 공주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생각하고 무척 슬펐습니다. 그래서 살그머니 정원으로 들어가 언니들의 꽃밭에서 꽃을 한 송이씩 꺾었어요. 그리고 나서도 인어 공주는 궁전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푸른 바다로 나왔습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고, 달빛이 바다를 조용하게 비치고 있었어요. 인어 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결심을 굳게 하고 물약을 마셨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칼이 부드러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어요. 인어 공주는 해가 높이 떠오른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인어 공주는 실을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녀 앞에 아름다운 왕자님이 서 있는 것 아니겠어요? 왕자님은 검은 두 눈으로 인어 공주를 보고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꼬리가 있던 자리에는 작고 하얀 두 다리가 있었습니다. 완전히 발가벗은 모습이었어요. 인어 공주는 부끄러워서 긴 머리카락으로 얼른 몸을 감췄습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에게 도대체 누구인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부드럽게 왕자님을 바라보았어요. 하지만 혀를 잘린 인어 공주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왕자님은 곧 인어 공주를 궁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녀가 말한 것처럼 인어 공주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날카로운 칼 위를 걷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인어 공주는 잘 참았습니다. 왕자님의 손에 이끌려 마치 비누방울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습니다. 왕자님은 우아하고 가벼운 인어 공주의 걸음걸이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인어 공주는 비단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어 공주는 궁전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습니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노래를 부를 수도,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였어요. 인어 공주를 환영하는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비단과 황금으로 단장한 여인들이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왕자님은 박수를 치면서 여인들에게 미소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슬펐습니다. '아, 왕자님의 곁에 오기 위하여 내 아름다운 목소리를 버렸다는 사실을 왕자님이 알아줄 수만 있다면!' 여인들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인어 공주도 춤을 추었습니다. 발끝으로 마루 위에 서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춤을 추었어요. 그 아름다운 춤은 여인들의 노래보다 훨씬 더 깊은 가슴 속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왕자님은 인어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발이 마루에 닿을 때마다 날카로운 칼에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인어 공주는 더욱 열심히 춤을 추었습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에게 승마복을 입혔습니다. 함께 말을 타기 위해서요. 인어 공주는 왕자님과 함께 말을 타고 초록색 숲을 달렸습니다. 작은 새들이 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며 노래하고 있었어요. 높은 산에도 올라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부드러운 발에서 피가 흘렀지만 인어 공주는 오히려 즐겁게 웃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이면 인어 공주는 넓은 대리석 계단을 걸어 내려와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갔습니다. 그러면 타는 듯 쑤시던 발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인어 공주는 저 바다 아래 깊은 곳에 있는 언니들을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이 날도 인어 공주는 뜨거운 발을 바닷물에 담그고 있었어요. 이 때 귀에 익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언니들이었어요. 인어 공주는 언니들에게 손짓을 했습니다. 언니들은 다가와 막내 공주 때문에 다들 얼마나 가슴아파 하는지를 얘기했습니다. 그 뒤로 언니들은 매일 밤 인어 공주를 찾아왔습니다. 한 번은 늙은 할머니와 아버지까지도 올라왔답니다. 할머니는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바다 위로 올라온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는 멀리서 인어 공주에게 손을 흔들기만 하고 육지 가까이로 오지는 못했습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꼭 왕자님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인어 공주는 영혼도 얻지 못한 채 바다의 물거품이 되어야 하니까요. '왕자님, 나를 가장 사랑하실 수는 없나요?' 왕자님이 인어 공주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 인어 공주의 두 눈은 이렇게 묻는 것이었어요. "그래요, 당신은 나에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라오.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 마음씨가 곱고 아름다워요. 그리고 언젠가 내가 보았던 그 아가씨와 너무 닮았습니다. 그 때 나는 배를 타고 있다가 그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파도에 휩쓸려 바닷가로 밀려왔지요. 그리고 어떤 아리따운 아가씨가 나를 살려주었어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아가씨를 잊을 수 없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 아가씨를 꼭 닮았어요. 아마 행운의 여신이 당신을 내게 보낸 모양이지요?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말아요." '아, 제가 바로 왕자님을 구한 사람이랍니다.' 인어 공주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이 말하는 그 아가씨는 바로 왕자님을 교회로 옮겼던 바로 그 아가씨였어요. '그래, 나는 바위 뒤에 숨어서 그 아가씨를 보았어. 왕자님을 교회로 옮긴 아리따운 그 처녀 말이야.' 인어 공주는 깊이깊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그 처녀는 성스러운 수도원에 있다고 했어. 그 아가씨는 절대 이 세상에 나와서 살지 않을 거고, 두 번 다시 왕자님을 만나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난 이렇게 늘 왕자님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 내가 왕자님을 돌볼 거야. 왕자님을 위해 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어.' 그런데 어느 날 왕자님이 이웃 나라의 공주님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인어 공주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인어 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왕자님의 마음속은 자기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전 이제 떠나야 합니다." 왕자님은 말했습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결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아가씨를 사랑할 수 없어요. 그 아가씨는 너와 그 아리따운 교회의 처녀와도 닮지 않았을 테니까요. 만약 내가 내 뜻대로 신부를 선택한다면 당신을 고를 겁니다." 왕자님은 인어 공주의 붉은 입술에 키스했습니다. "혹시 바다를 무서워하는 건 아닙니까?" 이웃 나라로 가기 위해 화려한 배에 오른 왕자님이 인어 공주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은 인어 공주에게 폭풍우, 바람이 잔잔해진 바다,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이상한 물고기들에 대해 얘기해 주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왕자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미소만 지었습니다. 바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어 공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거든요. 모두 잠든 밤이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배의 난간에 앉아 맑은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다 속 궁전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어요. 그렇습니다. 머리에 은관을 쓴 할머니가 인어 공주가 타고 있는 배를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언니들이 물 위로 떠올랐어요. 언니들은 하얀 손을 내밀며 슬픈 눈으로 인어 공주를 바라보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언니들에게 손을 흔들며 자기가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어떤 선원이 갑판으로 나왔습니다. 그러자 언니들은 서둘러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배는 이웃 나라의 화려한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도착하자 교회들이 일제히 종이 울렸습니다. 깃발이 나부끼고, 번쩍거리는 칼을 찬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높은 탑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사람들이 왕자를 맞이했습니다. 그 도시에서는 매일 밤 무도회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그 나라의 공주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공주님은 멀리 떨어진 어느 수도원에서 왕비가 갖추어야 할 미덕을 배우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드디어 그 나라의 공주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어 공주는 아름다운 그 공주님을 보았습니다. 공주님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길고 검은 속눈썹, 검푸른 눈... 그렇게 미소를 짓는 그 공주님의 모습은 이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바로 당신이군요! 그 바닷가에서 저를 구해주셨던 분이..." 왕자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자님은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공주님을 껴안았습니다. "아,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야!" 왕자님은 인어 공주에게도 자신의 기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말했습니다.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당신도 나의 이 행복을 기뻐해 주겠지요?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와 생각이 같으니까요." 인어 공주는 왕자님의 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무척 슬펐어요. 이제 왕자님이 저 공주님과 결혼을 하면 자신은 바다 위의 물거품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의 종들이 울리고, 심부름꾼들이 여기저기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왕자님과 공주님의 결혼식을 알렸습니다.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신랑 신부는 나란히 손을 내밀고 주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어 공주는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것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물거품이 되고야 말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죽음의 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신랑 신부는 배에 올랐습니다. 대포가 울려 퍼지고 하늘에는 수많은 깃발이 나부꼈습니다. 배의 한가운데에는 왕자님과 공주님을 위해 황금빛과 자주빛으로 곱게 장식한 방이 마련됐습니다. 바람을 받아 돛이 부풀어오르자 배는 이제 가볍게 맑은 바다 위를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오색 찬란한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갑판 이에서 즐겁게 춤을 추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자신의 생일 날 바다 위에 난생 처음 올라와서 보았던 그 배의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인어 공주도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마치 제비가 날쌔게 맴을 도는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춤을 추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면서 인어 공주에게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인어 공주도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춤을 춘 적은 없었답니다. 부드러운 두 다리를 날카로운 칼날이 베는 것 같은 고통도 지금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어 공주는 지금 두 다리보다 마음이 훨씬 더 아픈 거예요. 오늘이 왕자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인어 공주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가족과 고향을 떠나 아름다운 목소리까지 마녀에게 주어가면서 이런 고통을 참았던 것은 오직 왕자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자님과 함께 공기를 숨쉬는 것도, 깊은 바다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모두 오늘이 마지막이랍니다. 영혼을 가질 수 없는 인어 공주를 기다리는 것은 이제 생각도 없고, 꿈도 없는 영원한 밤의 어두움일 뿐이지요. 배 위에서는 자정이 넘도록 즐겁고 흥겨운 축제가 계속되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슴 속 가득 품고서 계속 춤을 추었습니다. 왕자님은 아름다운 신부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신부를 안고서 화려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배는 다시 조용하고 평화로운 정적에 잠겼습니다. 인어 공주는 하얀 팔을 난간에 기대고서 아침해가 떠오르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바닷물 위로 언니들이 떠올랐습니다. 언니들도 인어 공주처럼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언니들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어요. "우린 해가 뜨기 전에 너를 살리려고 이렇게 달려왔단다. 우리 모두 머리카락을 잘라 마녀에게 주고 이렇게 칼을 얻어 왔어. 자 여기 있단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이 칼을 왕자의 가슴에 꽂아야 한다. 왕자의 따뜻한 피가 네 발을 적시면 네 꼬리가 다시 자라나는 거야. 그러면 너는 다시 예전처럼 인어가 되어 앞으로 300년을 더 살 수 있어. 서둘러야 해! 해가 떠오르기 전에 왕자를 죽여. 아니면 네가 죽어야 하니까 말이야. 할머니도 너무 슬퍼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그 흰 머리카락을 잘라 마녀에게 주었어. 왕자를 죽이고 돌아오려므나! 서둘러야 한단다! 저기를 봐! 하늘에 저렇게 붉은 띠가 나타나는 게 보이니? 이제 금방 해가 솟을 거야. 그러면 넌 죽고 마는 거야!" 언니들은 칼을 인어 공주에게 주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파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인어 공주는 자주빛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름다운 공주님이 왕자님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자는 모습이 보였어요. 인어 공주는 허리를 굽혀 공주의 아름다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었습니다. 그리고는 점점 아침 노을이 밝아오는 하늘과 날카로운 칼을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왕자님은 꿈을 꾸면서도 신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칼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그러나 마침내 그 칼을 멀리 바다 가운데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왕자님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습니다. 인어 공주는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며 세상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 부드러운 햇살은 죽음처럼 차디찬 바다를 비추었어요. 인어 공주는 죽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인어 공주는 밝게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었어요. 햇빛 사이로 투명한 모양들이 수백 개나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인어 공주는 그 투명한 모양들을 통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바다 위 배의 하얀 돛과 하늘의 붉은 구름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투명한 모양들은 어떤 곡조를 따라 목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을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었답니다. 인어 공주는 점점 더 하늘 높이 떠올랐습니다. 인어 공주는 그 투명한 형체들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난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인어 공주가 물었습니다. "공기의 딸들에게로 가는 거예요." 다른 형체들이 대답했습니다. "인어는 영혼이 없지요.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사는 영혼을 가질 수 없어요. 공기의 딸들도 역시 영혼은 갖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착한 일을 하면서 영혼을 만들어갈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따뜻한 나라로 날아가는 중이에요. 공기를 통해서 꽃의 향기를 이 세상 멀리까지 퍼뜨리는 거랍니다. 300년 동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영혼을 얻을 수 있어요. 가엾은 인어 공주님, 당신은 마음을 다 바쳐 영혼을 얻으려고 했지요. 엄청난 아픔을 참으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그 고통이 당신을 공기의 요정들의 세계로 끌어올린 거랍니다. 이제 당신이 착하게 살아가면 300년 뒤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을 얻을 수 있답니다." 인어 공주는 하얀 두 팔을 해를 향해 뻗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배 위에서는 왕자님이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인어 공주를 찾고 있었어요. 그들은 슬픈 얼굴로 진주빛으로 빛나는 바다의 거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인어 공주가 바다 속으로 뛰어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인어 공주는 아무도 모르게 신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에게는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기의 요정들과 함께 장미빛 구름 위로 올라갔습니다. "300년이 지나지 않아도 우린 그 곳에 갈 수 있어요. 우리는 지금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을 찾아가는 중이랍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착한 어린이를 찾아내면 하나님은 우리의 시험 기간을 줄여 주십니다. 그러면 300년 가운데서 1년이 줄어드는 거에요. 하지만 나쁜 아이를 보게 되면 우리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시험 기간도 하루씩 늘어나게 됩니다." 어느 공기의 요정이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꼬마 이다의 꽃밭 ㅡ 안데르센     "내 불쌍한 꽃들이 모두 죽어 버렸어요!"   꼬마 이다가 말했습니다.   "어제 저녁만 해도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요. 그런데 잎들이 시들어서 모두 아래로 축 늘어졌어요. 꽃들이 왜 그러지요?"   이다는 소파에 앉아 있는 대학생 아저씨에게 물었지요. 그 아저씨가 이다를 몹시 귀여워했습니다.   그는 온갖 아름다운 옛날 이야기를 알고 있답니다. 또 재미있는 그림들을 오려 주기도 했지요. 그래요, 춤추는 작은 소녀들이 그려진 예쁜 하트 모양의 심장이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큰 궁전, 그리고 꽃들을 오려 주었어요. 참 재미있는 아저씨랍니다.   "왜 꽃들이 병이 든 것처럼 보일까요?"   이다는 다시 물으면서 시들어 버린 꽃 한 송이를 보여 주었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니?"   아저씨가 부드럽게 물었지요.   "꽃들은 어젯밤 무도회에 갔었단다. 그래서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거란다."   "하지만 꽃들은 춤을 출 수 없쟎아요?"   이다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어요.   "그렇지 않아. 춤출 수 있단다. 날이 어두워지고 우리가 잠이 들면 꽃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닌단다. 꽃들은 밤마다 무도회를 열지."   "어린 꽃들도 무도회에 가나요?"   "물론이지. 아주 어린 데이지꽃과 은방울꽃도 갈 수 있지."   "그럼, 어디서 춤을 추나요?"   "성문 밖 큰 궁전 알지? 왕이 살고 있는 곳 말이야. 궁전에는 수많은 꽃들이 만발한 화려한 정원이 있단다. 백조도 보았지? 네가 빵부스러기를 던져 주면 헤엄쳐 오던 백조들 말이야. 그 바깥에 무도회장이 있단다. 알겠니?"   "어제 엄마와 함께 정원에 가 보았어요. 하지만 나무들만 잎들을 떨군채 서 있고 꽃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꽃들은 다 어딜 갔을까요? 여름에는 그토록 많이 있었는데 말이에요."   "꽃들은 모두 궁전 안으로 들어갔단다."   아저씨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어요.   "왕이 시종들과 함께 시내로 나오면 꽃들은 궁전 안으로 달려간단다. 그리고 재미있게 놀지. 너도 그걸 봐야 하는데. 옥좌에는 가장 아름다운 두 송이의 장미가 앉지. 바로 왕과 왕비란다. 그리고 붉은 맨드라미꽃들이 양쪽으로 늘어서서 허리를 굽히고 있어. 그들은 시종들이지. 그러면 무도회가 시작된단다. 해군 소위 후보생인 푸른색 제비꽃은 히아신스와 크로커스꽃들과 춤을 춘단다. 제비꽃들은 히아신스와 크로커스꽃을 아가씨라고 부르지. 튤립과 노란색 큰 백합은 늙은 귀부인들이야. 그들은 꽃들이 춤을 잘 추는지, 무도회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감독을 한단다."   "그렇담, 꽃들이 궁전에서 춤추는 걸 방해하거나 혼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요?"   "꽃들의 무도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밤중에 가끔 늙은 궁전 관리인이 오긴 하지만 그는 큰 열쇠 꾸러미를 갖고 있어서 걸어다닐 때마다 열쇠들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기 때문에 꽃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한단다. 커튼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궁전 관리인을 살피면서 말이야. 그러면 늙은 관리인은 꽃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지. 그러나 꽃들을 볼 수는 없어."   "야, 정말 재미있다!"   이다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어요.   "그러면 나도 꽃들을 볼 수 없나요?"   "아냐, 볼 수 있어."   아저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그 곳에 가면 창문으로 들여다보렴. 그러면 꽃들을 볼 수 있을 거야. 나도 오늘 그렇게 했지. 소파 위에는 긴 부활절 종꽃이 몸을 뻗고 누워 있었어. 그 꽃은 시녀야."   "식물원의 꽃들도 무도회에 갈 수 있나요? 그 먼 길을 갈 수 있나요?"   "그럼 물론이지. 꽃들은 마음만 먹으면 날아갈 수 있단다. 아름다운 나비들 알지? 붉은색, 노란색, 흰색 나비들 말이야. 그들은 꼭 꽃처럼 보이지 않니? 사실은 꽃이야. 나비들은 꽃의 줄기에서 높이 뛰어올라 잎들이 마치 날개인 것처럼 퍼덕인단다. 그러면 잎들은 진짜 날개가 되어 날아오른단다. 나비들은 착하기 때문에 낮에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 너도 보았을 거야. 어쩌면 식물원의 꽃들은 궁전에 가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밤이 되면 그 곳이 그렇게 재미있는 줄 알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네게만 얘기해 주는 건데, 여기 옆집에 살고 계시는 식물학 교수님 있잖니. 너도 알지? 그 분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정말 놀라실 거야. 네가 만약 옆집 정원에 가게 되거든 한 꽃에게만 살짝 얘기해 주렴. 궁전에서 큰 무도회가 열린다고 말이야. 그러면 그 꽃이 다른 꽃들에게 말해 줄 거야. 그리고는 그 꽃들은 이제 무도회장으로 날아가는 거야. 교수님이 정원에 나와 보면 깜짝 놀라실 거야. 꽃이 한 송이도 없으니까 말이야. 꽃들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실 거야."   "꽃이 어떻게 다른 꽃들에게 이야기하지요? 꽃들은 말을 할 줄 모르는데요!"   "물론 꽃들은 말을 할 줄 모르지. 너, 왜 약간이라도 바람이 불면 꽃들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초록색 잎들을 흔드는 것을 보았지? 바로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단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듯이 말이야."   "교수님도 그걸 아시나요?"   "물론이지. 어느 날 아침 정원에 나온 교수님은, 큰 쐐기풀이 아름답고 붉은 패랭이 꽃잎들과 얘기하는 것을 보셨단다. 쐐기풀은, 패랭이 꽃잎이 예쁘고 또 좋아한다고 했지만 교수님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어. 그래서 쐐기풀의 손가락인 잎들을 뽑아 버리셨지. 그러다가 교수님은 그만 쐐기풀 이파리에 찔리고 말았어. 그 뒤로 교수님은 쐐기풀을 건드리지 않는단다."   "참 재미있네!"   이다는 크게 웃었답니다.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 그런 헛소리를 하지?"   마침 그 집에 왔다가 얘기를 듣게 된 재미없는 재판소 참사관님이 말했지요.   그는 대학생을 좋아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대학생이 이다에게 그림들을 가위로 오려 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요. 대학생은 가끔 빗자루를 타고 가는 늙은 마귀할멈 그림도 오려 주었답니다. 그 나이 든 재판소 참사관님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그는 지금처럼 "원, 어린아이에게 바보 같은 환상을 심어 주다니!" 하고 말했지요.   그렇지만 이다는 대학생 아저씨의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었답니다. 이다는 꽃들이 밤 내내 무도회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에 피곤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꽃들은 틀림없이 아픈 거야.' 그래서 이다는 꽃들을 작고 아담한 책상 위에 서 있는 장난감들에게로 가져갔답니다.   서랍 속에는 온통 예쁜 물건들로 가득 차 있고, 인형 침대에는 인형 소피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다는 소피에게 말했습니다.   "소피야, 네가 좀 도와 주어야겠다. 오늘 밤 너는 서랍 속에서 자야 해. 불쌍한 꽃들이 병들었거든. 오늘은 이 꽃들이 네 침대에서 자야 하니까. 그러면 꽃들이 다시 건강해질지도 몰라."   이다는 소피를 들어올렸지요. 소피는 몹시 못마땅한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침대를 빼앗겨 화가 났던 거랍니다.   이다는 꽃들을 침대에 눕히고는 작은 이불을 덮어 주었답니다. 그리고는 얌전하게 누워 있으면 차를 끓여 주겠다고 말했지요. 차를 마시고 건강해져서 내일이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이다는 또 해가 비치지 않게 작은 침대에 걸린 망사 커튼을 꼭 여며 주었어요.   그날 저녁 내내 이다는, 대학생 아저씨가 해 준 이야기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답니다. 이다는 자러 가기 전에 창문에 걸려 있는 커튼 뒤를 들여다 보았지요. 거기에는 아름다운 튤립과 히아신스가 있었답니다. 이다는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지요.   "너희들 오늘 밤 무도회에 가지? 난 알고 있어."   그러나 꽃들은 아무 말도 못 들은 척했어요. 이파리 하나 꼼짝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꼬마 이다는 꽃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다는 침대에 누워 오랫동안 자지 않고 있었답니다. 궁전에서 무도회를 여는 꽃들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꽃들이 정말 궁전에 갔을까?"   그러다가 잠이 들었답니다.   이다는 한밤중에 깨어났지요. 이다는 꿈 속에서 꽃들과 대학생 아저씨를 보았답니다. 재판소 참사관님이 대학생 아저씨를 야단쳤어요. 어린 이다에게 환상을 심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에요.   방 안은 조용했지요. 엄마도 아빠도 잠들어 있었어요.   '내 꽃들이 아직 소피의 침대에 누워 있을까?'   이다는 생각했어요.   이다는 약간 몸을 일으켜 열려 있는 방문 쪽을 바라보았답니다. 저 안쪽에 꽃들이 누워 있거든요. 이다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방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어요. 피아노 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소리였지요.   '틀림없이 꽃들이 춤을 추고 있는 거야.'   이다는 생각했어요.   "정말 보고 싶어!"   하지만 이다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엄마 아빠가 깨어 나실지도 모르거든요.   '꽃들이 이리로 들어와 주면 좋으련만^5,5,5^.'   이다는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꽃들은 오지 않았답니다. 피아노 소리는 더욱 아름답게 들려 왔지요. 이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요.   이다는 침대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왔답니다. 그리고는 방 안을 들여다 보았어요. 그래요, 방 안에서는 정말 재미있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어요.   방 안은 대낮처럼 밝았답니다. 달빛이 창을 통해 마룻바닥을 비추고 있었거든요. 히아신스와 튤립은 길게 두 줄로 서 있었어요. 창문 턱에는 빈 화분들만 놓여 있었지요. 마룻바닥 위에서 모든 꽃들이 서로 어울려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요.   꽃들은 빙글빙글 몸을 돌릴 때는 긴 녹색 잎으로 서로를 받쳐 주었답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는 노란색 큰 백합이 앉아 있었지요.   이다는 지난 여름에 그 백합꽃을 보았답니다. 대학생 아저씨가 백합꽃을 보고 리네 아가씨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요. 사람들은 그 말을 한 대학생 아저씨를 놀렸었지요. 그런데 이다에게는 그렇게 보였답니다. 정말 리네 아가씨와 닮아 있었어요. 피아노를 치는 모습도 리네 아가씨와 꼭 닮았지요. 때로 노란색의 긴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는가 하면, 또 금방 반대쪽으로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사한 음악에 박자를 맞추는 것이었어요.   어떤 꽃도 이다가 숨어서 지켜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답니다. 푸른 색의 키 큰 크로커스꽃은 장난감이 서 있던 책상 한가운데로 폴짝 뛰어 오르더니 인형 침대로 가서는 침대의 망사 커튼을 열어제쳤습니다.   침대에는 병든 꽃들이 누워 있었어요. 병든 꽃들은 크로커스꽃을 보더니 함께 춤추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러자 아랫입술이 떨어져 나간 신사가 병든 꽃들을 일으켜 세웠지요. 그는 담배통에 그려진 신사였습니다.   꽃들은 이제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답니다.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로 깡충깡충 뛰어갔지요. 그리고는 아주 즐겁게 어울려 춤을 추는 것이었어요.   그 때 무엇인가 책상에서 굴러 떨어진 것 같았답니다. 이다는 그 쪽을 보았지요. 바로 사육제 지팡이였어요. 지팡이 역시 꽃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했지요. 그 지팡이 위에는 납인형이 앉아 있답니다. 재판소 참사관이 쓰는 것과 똑같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지요. 사육제 지팡이는 붉은색 뻗정다리로 꽃들의 한가운데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아주 세게 발을 굴렀답니다. 지팡이가 추는 춤은 마주르카였습니다. 꽃들은 마주르카를 출 수가 없답니다. 너무 가벼워서 세게 발을 구를 수가 없었습니다.   사육제 지팡이 위의 납 인형이 갑자기 크고 길어졌답니다. 그리고는 빙글빙글 돌더니 아주 크게 소리쳤어요.   "어린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환상을 심어 줄 수가 있나?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러자 납 인형은 넓은 모자를 쓴 재판소 참사관과 똑같아졌어요. 늙은 참사관처럼 노랗고 심술궂어 보였지요.   꽃들은 납 인형의 가는 다리를 때렸답니다. 그러자 납 인형은 다시 오그라들어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어요.   이다는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   사육제 지팡이는 계속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서 참사관을 닮은 납 인형도 함께 춤추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납 인형은 춤추는 것이 싫었답니다. 납 인형은 그냥 검은색 큰 모자를 쓴 작고 노란 납 인형으로 남고 싶었어요. 그래서 꽃들이 지팡이에게 간청했답니다. 특히 병이 들어 누워 있던 꽃들이 애써 주었지요.   사육제 지팡이는 그 때 서랍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서랍 속에서 장난감들과 함께 누워 있던 인형 소피였지요.   담배통에 그려져 있던 신사가 책상으로 달려가 서랍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소피가 고개를 내밀며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지금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왜 내게는 그걸 말해 주지 않았지요?"   소피가 물었습니다.   "나와 춤추지 않겠어요?"   담배통에 그려져 있던 신사가 정중하게 청했어요.   "좋아요. 당신이 적당한 상대같군요."   소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침하게 등을 돌렸답니다.   그리고는 꽃들 중의 누가 와서 춤을 추자고 청해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러나 어떤 꽃도 춤을 청하지 않았답니다. 소피는 들으라는 듯이 흠흠 헛기침을 했지요. 그래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담배통의 신사도 혼자 춤을 추었는데 그 모습도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어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자 소피는 마룻바닥으로 뛰어내렸답니다. 쿵 하고 큰 소리가 났지요. 그러자 모든 꽃들이 달려와 어디 다치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꽃들은 소피를 걱정했답니다. 특히 침대에 누워 있었던 꽃들이 더 걱정을 했지요.   소피는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어요. 꽃들은 소피가 침대를 내어 준 것을 알고는 소피에게 더욱 잘해 주었지요. 소피도 곧 병들어 있던 꽃들과 함께 달빛이 비치는 마루 한가운데에서 즐겁게 춤을 추었어요. 다른 꽃들은 모두 그들 주위로 원을 그리며 춤을 추었답니다.   소피는 몹시 만족했지요. 그래서 꽃들에게 자기 침대에 계속 누워 있어도 좋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꽃들이 말했지요.   "우린 진심으로 너를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우린 그리 오래 살 수 없어. 아침이 되면 모두 죽는단다. 네가 이다에게 말해 줘. 카나리아가 노래하는 정원에 우릴 묻어 달라고. 그러면 우린 여름에 다시 자라날 수 있어. 그 땐 훨씬 더 예쁘게 피어날 거야."   "아냐, 너희들은 죽어선 안돼!"   소피는 꽃들에게 입맞추었지요.   그 때 방문이 열리면서 한 떼의 꽃들이 춤을 추며 들어왔답니다. 이다는 그 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틀림없이 궁전에서 온 꽃들일 거예요. 작은 황금 왕관을 쓴 두 송이의 장미꽃이 맨 앞에 서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왕과 왕비였지요. 뒤이어 귀여운 토란꽃과 패랭이꽃들이 들어왔어요. 그들은 모두 꽃들에게 인사를 했어요.   또 악대도 함께 왔습니다. 큰 양귀비꽃과 작약꽃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완두콩 꼬투리로 나팔을 불었지요. 푸른색 풍령초와 작고 하얀 갈탄투스 꽃은 마치 몸에 종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딸랑거렸답니다. 정말 재미있는 음악이었어요.   꽃들은 모두 함께 춤을 추었답니다. 푸른 제비꽃, 붉은 팬지꽃, 데이지 꽃, 그리고 은방울꽃, 모두가 서로 정답게 입맞추었지요. 정말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어요.   이윽고 꽃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답니다. 그래서 이다도 살그머니 침대로 들어갔지요. 이다가 본 이 모든 것을 꿈꾼 침대로 말이에요.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이다는 재빨리 장난감들이 들어 있는 작은 책상으로 달려갔답니다. 꽃들이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지 보기 위해서 말이지요.   작은 인형 침대의 망사 커튼을 열었어요. 그래요, 꽃들은 어제보다 훨씬 시든 모습으로 누워 있었답니다. 소피는 그대로 서랍 속에 들어 있었지요. 무척 졸리다는 듯이 말이에요.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니?"   이다는 물었어요.   하지만 소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요.   "너 아주 못됐구나! 꽃들이 너와 함께 춤춰 주었는데도 꽃들의 부탁을 잊었니?"   이다는 곧 귀여운 새들이 그려져 있는 작은 종이 상자를 가져왔답니다. 그리고는 시든 꽃들을 그 안에 뉘었지요.   "이게 너희들의 아름다운 관이란다. 나중에 우리 노르웨이 사촌들이 오면 너희들을 저기 바깥 정원에 묻도록 도와 줄 거야. 너희들이 여름에 다시 아름답게 필 수 있도록 말이야."   이다에게는 두 명의 사촌이 있었답니다. 모두 명랑한 그들은 요나스와 아돌프였는데 모두들 쾌활했습니다.   요나스와 아돌프는 아버지에게 새 장난감 활 두 개를 선물 받았답니다. 그래서 이다에게 자랑하기 위해 찾아왔어요.   이다는 가엾은 꽃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답니다. 그리고 꽃들을 묻어 주자고 했지요.   요나스와 아돌프는 활을 어깨에 매고 앞장서서 걸었답니다. 이다는 시든 꽃들이 들어 있는 귀여운 상자를 들고 뒤따랐지요.   이제 정원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만들어졌답니다. 이다는 꽃들에게 입을 맞추고는 그 상자를 흙 속에 묻었지요. 요나스와 아돌프는 하늘로 활을 쏘아 올렸어요.   올레 루쾨이에 ㅡ 안데르센     이 세상에서 올레 루쾨이에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거예요. 그는 이야기를 아주 잘한답니다.   올레 루쾨이에는, 저녁 무렵 아이들이 아직 식탁 앞에 앉아 있거나 오리 의자위에 앉아 있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온답니다.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와 가만히 문을 열지요. 그리고 살짝 아이들의 눈에 달콤한 우유를 뿌려 넣는답니다. 아이들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뿌리지요. 그리고 살금살금 아이들의 등 뒤로 와서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김을 불어 넣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의 머리는 무거워지지요. 하지만 아프지는 않답니다. 왜냐하면 올레 루쾨이에가 좋은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는 아이들이 조용해지기를 바랄 뿐이지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조용해야만 한답니다.   아이들이 잠들면, 올레 루쾨이에는 아이들의 침대맡에 앉는답니다. 그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초록색이나 붉은색으로, 혹은 파란색으로 반짝이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팔에는 우산을 하나씩 갖고 있었답니다.   그림이 그려진 우산을 착한 아이들의 머리 위에 펴면 아이들은 그날 밤 내내 멋진 꿈을 꾼답니다. 하지만 아무런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은 우산은 못된 아이들에게 펴준답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꿈을 하나도 못 꾸지요.   이제 우리는 올레 루쾨이에가 1주일 동안 소년 할마르를 찾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듣게 될 겁니다. 모두 일곱 개의 이야기지요. 1주일은 7일이니까요.   월요일.   "잘 들어라."   올레 루쾨이에는 할마르를 침대에 눕혀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방을 예쁘게 꾸며 줄게."   그러자 화병 속의 꽃들은 모두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나무들은 벽을 따라 긴 가지들을 뻗었습니다.   온 방 안이 근사한 정원처럼 되었답니다. 가지마다 꽃이 가득 피었으며 장미꽃보다 아름답고 향긋한 향기를 뿜었지요. 사람들은 그 꽃들을 먹고 싶어할 거예요. 집에서 만든 잼보다 더 달콤했으니까요. 열매는 황금처럼 빛났고, 또 정제 건포도가 박힌 과자도 있었어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지요!   그 때 할마르의 교과서들이 들어 있는 책상 서랍 속에서 무시무시한 신음 소리가 울려 나왔답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올레 루쾨이에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지요. 신음 소리를 낸 것은 석판이었습니다. 석판은 금이 가고 찌그러져 있었답니다. 산수 숙제에 틀린 숫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철필은 산수 숙제를 도와 주려는 듯이 껑충 뛰어올랐지만 도울 수가 없었답니다.   이번에는 할마르의 공책 속에서도 신음 소리가 났습니다. 정말 듣기 싫은 소리였지요. 공책에는 대문자들이 뒤섞여 서 있었으며 그 곁에 소문자들이 열을 이루었답니다. 그것은 글씨 연습용 공책이랍니다. 이 글씨들 옆에는 똑같이 흉내 내어 쓴 글씨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할마르가 쓴 것이었습니다. 그 글씨들은 연필로 그은 줄 위에 서 있었는데도 그 줄 위에 누운 것처럼 보였답니다.   "너희들은 이렇게 똑바로 하고 있어야 돼!"   글씨 연습용 공책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형편없이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니. 우리들은 정말 네 말대로 하고 싶어. 하지만 우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우린 힘이 없거든."   할마르가 쓴 글씨들이 말했습니다.   "그렇담, 너희들은 아동용 가루약을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올레 루쾨이에가 말했답니다.   "오, 아니에요!"   글씨들은 소리쳤지요. 그리고 똑바로 섰습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올레 루쾨이에는 다시 말했지요.   "이제, 훈련을 좀 시켜야겠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는 글씨들을 훈련시켰답니다. 그래서 글씨들은 연습용 글자들이 서 있는 것처럼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할마르가 아침에 일어나 글씨들을 보았을 때는 어제처럼 뒤죽박죽인 모습이었답니다.   화요일.   할마르가 침대로 가자마자 올레 루쾨이에는 방 안의 모든 가구들에게 마법의 주사를 놓았답니다. 그러자 그들은 금방 수다를 떨기 시작했어요. 모두가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타구만은 예외였답니다.   타구는 말없이 자기 자리에 서 있었지요. 그리고 모든 가구들이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허영심에 화가 났습니다.   서랍장 위에는 금빛 액자가 걸려 있었답니다. 풍경화였지요. 오래 된 키 큰 나무들과 풀잎 속의 꽃들, 숲과 많은 성들을 지나 멀리 거친 바다로 흘러가는 강의 큰 물줄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올레 루쾨이에는 그 그림에도 마법의 주사를 놓았지요. 그러자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나뭇가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구름은 풍경 위로 지나가면서 그림자를 만들었습니다.   올레 루쾨이에는 할마르를 그림 속의 높이 자란 풀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제 할마르는 그 곳에 서 있었답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해가 비추었습니다. 할마르는 강가로 달려가서 작은 배에 앉았어요. 그 배는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돛은 은처럼 반짝였으며, 빛나는 푸른 별과 황금관을 쓴 여섯 마리의 백조가 배를 끌고 갔답니다.   나무들은, 도둑들과 마녀 이야기를 하고, 꽃들은, 작고 귀여운 요정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나비들이 그 이야기를 전해 주는 초록색 숲을 지나갔지요.   금이나 은처럼 반짝이는 비늘을 단 물고기들이 배를 따라 헤엄쳐 왔습니다. 물고기들은 폴짝 뛰어오르면서 물 속에서 "첨벙!" 하고 말했답니다.   붉은색, 푸른색의 작고 큰 새들은 두 줄을 지어 뒤따라 날아왔습니다. 하루살이들은 춤을 추고, 개똥벌레들은 "붐! 붐!"하고 말했답니다.   그들은 모두 할마르를 뒤따르고 있었어요. 할마르에게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신나는 여행이었답니다. 숲은 빽빽하고 어두웠다가 금새 햇빛과 꽃이 만발한 화려한 정원처럼 변했습니다. 유리와 대리석으로 된 큰 성들도 있었습니다. 발코니 위에는 공주님들이 서 있었는데 모두 꼬마 아가씨들이었답니다.   공주님들은 모두 할마르를 잘 알고 있었지요. 공주님들은 할마르에게 손을 뻗어 귀여운 돼지 사탕을 내밀었답니다.   할마르는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돼지 사탕의 한 쪽 끝을 잡았지요. 공주님도 그것을 꼭 잡고 놓지 않아 한 쪽씩 나눠 갖게 되었답니다. 공주님은 작은 조각, 할마르는 큰 조각을요.   성에는 꼬마 왕자님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답니다. 황금 칼을 찬 진짜 왕자님들이었습니다.   할마르는 때로는 숲속을, 때로는 큰 궁전을, 또 때로는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할마르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 언제나 사랑해 주었던 누나가 사는 곳도 지나갔습니다. 누나는 손을 흔들면서 자신의 시를 노래로 불렀지요.   나는 항상 널 생각한단다.   나의 할마르, 사랑하는 아이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네게 입맞춘단다.   네 이마에, 네 입술에, 네 속눈썹에.   나는 너의 첫 울음 소리를 들었지   하지만 너와 작별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축복과 함께 하기를   내가 업어 주었던 너, 작은 천사여!   새들도 함께 노래불렀답니다. 꽃들은 줄기 위에서 춤을 추고 나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요. 마치 올레 루쾨이에가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처럼 말이에요.   수요일.   바깥에는 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지 않겠어요?   할마르는 잠을 자면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올레 루쾨이에가 창문을 열었을 때 바로 창문 턱에까지 물이 차 있었으니까요. 바깥은 그야말로 호수였지요. 그런데 여기에 화려한 배 한 척이 놓여 있었답니다.   "할마르야, 함께 타고 가겠니? 그러면 오늘 밤 먼 나라에 갔다가 내일 아침 다시 올 수 있단다."   올레 루쾨이에가 말했지요.   그러자 할마르는 어느 새 외출복을 입고 화려한 배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날씨는 금방 좋아졌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길거리를 지나 교회 모퉁이를 지나갔지요. 도시는 아주 커다란 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땅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노를 저었습니다.   그들은 무리 지어 나는 황새 떼를 보았습니다. 황새들은 고향을 떠나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황새들은 차례차례 줄을 지어 날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마리는 지쳤는지 날갯짓하는 것이 무척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 새는 줄의 맨 꼴찌에 따라가다 금방 다른 새들에게 뒤쳐지고 말았어요.   결국 그 새는 날개를 편 채 급속히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번 더 날개를 퍼덕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배로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새는 쿵 하고 갑판 위에 떨어졌지요.   할마르는 황새를 안아서 닭들과 오리들과 칠면조들이 있는 우리 속에 넣어 주었답니다.   황새는 머뭇거리며 서 있었지요.   "저 녀석을 봐!"   닭들이 말했습니다.   칠면조는 한껏 깃털을 뽐내며 몸을 크게 하면서 누구냐고 물었지요. 오리들은 뒷걸음질을 치면서 "정신 차려! 정신 차려!" 하고 푸덕푸덕 소리를 냈습니다.   황새는 따뜻한 남쪽 나라들에 대해, 피라미드에 대해, 야생마처럼 사막을 달리는 타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지요. 하지만 오리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푸덕거리기만 했지요.   "우리 생각에는 쟤가 정말 바보같다, 그치?"   "그래, 틀림없이 바보야."   칠면조는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어 울고, 황새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서서 남쪽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넌 정말 가늘고 근사한 다리를 갖고 있구나!"   칠면조가 말했지요.   "1엘레(옛 독일의 치수 단위로 약 66센티미터)에 얼마나 주고 샀니?"   "꽥꽥꽥!"   그러자 오리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습니다. 황새는 아무것도 못들은 척했지요.   "너도 함께 웃어도 좋아."   칠면조가 황새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우스운 말이야. 어쩌면 너무 수준이 낮은 건가? 우리끼리 얘기하면서 그냥 우리끼리 재미있는 걸로 하자."   "꽤 꽤꽥!"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 즐겁고도 놀랍다는 듯이 떠들었지요.   할마르는 우리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황새를 불렀지요.   황새는 폴짝 뛰어 갑판으로 나왔어요. 황새는 아주 잘 쉬었답니다. 할마르에게 감사하며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갔지요.   "내일 아침에 너희들로 수프로 끓여야겠다."   할마르는 말했지요. 그러다가 잠이 깨었답니다.   그는 작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올레 루쾨이에와 함께 떠난 여행은 정말 멋졌답니다.   목요일.   "너 아니?"   올레 루쾨이에가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마. 이제 작은 생쥐를 보게 될 거야."   그러면서 그는 가볍고 귀여운 동물을 쥔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생쥐는 너를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 왔단다. 오늘 밤 두 마리의 작은 생쥐가 결혼을 하려고 해. 생쥐들은 창고에서 살고 있는데. 이제 그곳을 아주 예쁜 방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단다."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그 작은 쥐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할마르가 물었지요.   "그건 내게 맡겨. 내가 너를 아주 작게 만들어 주마."   올레 루쾨이에는 할마르에게 마술 주사를 놓았답니다. 할마르는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작은 손가락 크기만해졌습니다.   "이제 장난감 병정의 옷을 빌려 입으렴. 네게 꼭 맞을 거야. 결혼식에 갈 때는 제복을 입어야 멋져 보인단다."   "그럼요."   할마르는 순식간에 귀여운 장난감 병정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할마르님, 당신 어머니가 쓰시는 골무에 앉지 않으시겠어요? 그러면 제가 당신을 태운 골무를 끌고 가는 영광을 얻을 거예요."   작은 생쥐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할마르도 즐겁게 대답했지요.   그들은 결혼식에 갔답니다. 처음에 그들은 땅바닥 아래의 긴 복도를 지나갔습니다. 골무를 타고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높이였습니다. 복도는 썩은 나무들로 되어 있었어요.   "근사한 냄새가 나지 않아요?"   생쥐가 물었습니다.   "복도는 전부 베이컨으로 발라져 있어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예요!"   이윽고 그들은 결혼식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른쪽에는 숙녀 생쥐들이 서로 귓속말을 속삭이며 서 있고, 왼쪽에는 신사 생쥐들이 앞발로 콧수염을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신랑 신부가 서 있었답니다.   그들은 속이 우묵하게 패인 치즈 껍질 안에 서서, 많은 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입을 맞추었습니다. 둘은 곧 결혼할 사이였으니까요.   점점 더 많은 손님들이 들어왔지요. 식장 안은 옆에 있는 쥐의 발을 밟을 정도로 좁아졌습니다. 결혼식장은 복도처럼 베이컨으로 발라져 있었답니다.   손님들에게는 완두콩 한 알씩을 주었습니다. 그 완두콩에는 신랑 신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어요.   참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답니다. 생쥐들은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했지요.   할마르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답니다. 정말 신기한 잔치에 갔다 온 것이지요.   금요일.   "정말 놀라운 일이야. 어른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하다니! 특히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날 보고 싶어하지.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단다. '착한 올레야, 우리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단다. 우리는, 누워서 마치 보기 싫은 작은 악마들처럼 침대 맡에 앉아 있는 우리의 나쁜 행동들을 보면서 밤새도록 뜨거운 눈물을 흘린단다. 네가 와서 좀 그들을 몰아내 주지 않겠니? 우리는 정말 속죄하고 싶단다. 우리가 잠을 좀 잘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면서 깊은 한숨을 쉰단다."   올레 루쾨이에가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할 건가요?"   할마르가 물었습니다.   "네가 오늘 저녁에도 결혼식에 가고 싶은지 잘 모르겠구나. 어제와는 전혀 다른 결혼식이란다. 진짜 남자처럼 보이는, 왜 그 헤르만이라고 하는 네 누이동생의 큰 인형이 인형 베르타와 결혼한단다. 게다가 그 인형의 생일날이거든. 그러니 많은 선물도 받게 된단다."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인형에 새 옷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누이는 생일을 차려 주거나 결혼식을 올려 줘요. 벌써 백 번도 더 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오늘은 백한 번째 결혼식이 되겠구나. 백한 번째의 결혼식이 끝나면 결혼식은 이제 그만두기로 하자꾸나. 그럼 오늘 결혼식은 정말 멋지게 해야겠구나. 한 번 보려무나."   할마르는 책상을 바라보았답니다.   창에 불을 밝힌 인형의 집이 있고, 집 바깥에는 장난감 병정들이 총을 든 채 뽐내고 있었습니다. 신랑 신부는 방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책상 다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지요. 무슨 이유가 있을 거예요.   올레 루쾨이에는 신랑 신부를 결혼시켰답니다. 결혼식이 끝나자 방 안의 모든 가구들이 연필이 쓴 노래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불렀지요. 맥주통 마개를 두드리는 멜로디에 맞춰서 말이에요.   노래는 바람처럼 울려 퍼지네   신랑 신부 만세!   눈이 먼 그들은 자기 모습을 자랑한다네   가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네.   만세! 귀가 먹고 눈이 멀었어도 상관없다네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도, 겨울에도 노래한다네.   신랑 신부는 선물을 받았답니다. 하지만 먹을 수 있는 선물은 모두 거절했지요. 사랑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요.   "우리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아니면 외국으로 여행을 갈까?"   신랑이 물었지요.   많은 여행을 한 제비와 다섯 번이나 병아리를 낳은 암탉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비는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들이 크고 탐스럽게 영글어 매달려 있는 곳, 공기는 온화하고 산들은 사람들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채를 띠고 있는 그 찬란하고 따뜻한 남쪽 나라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지요.   "나는 여름 내내 새끼들과 함께 시골에 가 있었어. 그 곳에는 모래굴이 있지. 우리는 그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모래땅을 파헤치며 즐겁게 놀았어. 그런 다음에 우리는 양배추들이 아주 많은 정원으로 들어갔어. 오, 얼마나 근사한 초록색이었는지!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은 생각할 수 없어."   "그렇지만 양배추 줄기는 다른 것들하고 똑같아 보이는데요, 뭘. 또 시골은 날씨가 안 좋잖아요."   "그래, 날씨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시골은 추워요. 얼어 죽을 지경이에요!"   "양배추에게는 이런 날씨가 제격이야. 그리고 따뜻한 날씨가 될 수도 있어. 4년 전에는 여름이 5주 간이나 계속되지 않았니? 그 때는 어찌나 더웠던지. 또 시골에는 독을 품은 동물들이 없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자는 나빠. 그런 자는 정말 이 나라에 있을 자격이 없어."   암탉은 울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계속 말을 이었지요.   "나도 통을 타고 12마일 이상을 여행해 보았어. 여행은 재미있는 일이 아니야."   "그래, 암탉이 옳아."   인형 베르타가 말했습니다.   "나도 산을 기어오르는 것은 재미없어. 올라갔다가 그냥 다시 내려오다니. 우리 양배추 밭이나 걷자."   그래서 신랑 신부는 시골로 여행을 떠났답니다.   토요일.   "또 이야기를 들을 수 있나요?"   올레 루쾨이에가 할마르를 침대에 눕히자마자 할마르가 물었어요.   "오늘 밤은 이야기할 시간이 없구나."   올레 루쾨이에는 가장 아름다운 우산을 할마르의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이 중국인들을 보고만 있으려무나!"   그러자 우산은 커다란 중국 주발처럼 보였답니다. 푸른 나무들, 뾰족한 다리, 그리고 다리 위에는 중국인들이 서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요.   "우린 내일을 위해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치장해야 한단다. 내일은 일요일이야. 난 교회 종탑 위로 가 봐야 해. 종이 예쁘게 잘 울릴 수 있도록 꼬마 요정들이 종을 반짝반짝 잘 닦아 놓았는지 살펴봐야 하거든. 또 들판으로 나가 바람이 풀과 잎의 먼지를 털어 냈는지도 살펴봐야 한단다. 그러나 가장 큰 일은 별들을 가지고 내려오는 일이란다. 별들도 반짝반짝 닦아야 하거든. 나는 별들을 앞치마에 담아 온단다. 그 전에 별 하나하나에 번호를 매겨야 하지. 또 별들이 들어 앉아 있는 곳에도 번호를 매겨야 해. 별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별들은 제자리를 찾을 수 없고 결국에는 유성이 되어 땅으로 떨어져 내릴거야."   "이봐요, 루쾨이에 씨!"   할마르가 잠들어 있는 방의 벽에 걸린 초상화가 말했답니다.   "난 할마르의 증조 할아버지요. 우리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 주어 감사하오. 그러나 아이의 생각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오. 별들은 데려올 수도, 닦을 수도 없다오. 별들은 우리 지구와 똑같은 천체들이라오."   "고마워요. 증조 할아버지. 그러나 내가 당신보다 더 나이가 많아요. 로마인들과 그리스 인들은 나를 꿈의 신이라 불렀지요. 나는 아주 고귀한 집에만 들어갔으며 지금도 그런데만 다녀요. 나는 큰 사람들과도, 또 작은 사람들과도 사귈 수 있어요."   올레 루쾨이에는 우산을 가지고 나가 버렸답니다.   "원, 자기 의견도 제대로 말할 수가 없군."   증조 할아버지는 툴툴거렸답니다.   그 때 할마르가 잠이 깨었습니다.   일요일.   "안녕!"   저녁 때, 올레 루쾨이에가 왔습니다. 할마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일어나서 벽에 걸린 증조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돌려 놓았답니다. 어제처럼 말참견하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이제 이야기해 주세요. 깍지 속에 살고 있는 다섯 개의 초록색 완두콩과, 암탉들을 치근치근 따라 다니는 수탉에 대해서요. 그리고 고상한 척하면서 자기가 재봉바늘이라고 상상하는 뜨개바늘에 대해서도요."   "네게 내 동생을 보여 주고 싶어. 동생 이름도 나와 같은 올레 루쾨이에지. 동생은 아무에게도 한 번 이상은 가지 않는단다. 동생은 사람들을 말에 태우고 이야기를 해 준단다. 하지만 아는 이야기는 두 가지밖에 없어. 하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추악하고 참혹한 이야기란다. 정말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   그러면서 올레 루쾨이에는 할마르를 창가로 들어올렸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 내 동생 올레 루쾨이에가 보일 거다. 사람들은 내 동생을 죽음이라고도 부르지. 어떠냐, 그림책에서 보는 해골처럼 그렇게 보기 흉한 모습은 아니지? 그래, 동생 옷은 은으로 수가 놓여져 있단다. 정말 아름다운 제복이지. 그리고 검은 벨벳으로 된 외투를 입고 있단다. 보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할마르는 동생 올레 루쾨이에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람들을 말에 태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몇몇 사람은 자기 앞쪽에, 다른 사람은 뒤쪽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 보았지요.   "성적표는 어떤가?"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대답하지요.   "좋아요!"   "그래? 직접 봐야겠어."   모두 성적표를 내밀었습니다.   '대단히 잘함' '우수함'을 받은 사람들은 말의 앞쪽에 앉아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그러나 '보통임'의 성적을 받은 사람들은 뒤에 앉아서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지요.   뒤에 탄 사람들은 몸을 떨면서 울었습니다. 말에서 뛰어내리려고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답니다. 몸이 굳어져 말에 단단히 붙어 버리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는 정말 멋진데요, 뭐. 난 그가 무섭지 않아요."   할마르는 말했지요.   "그럼, 무서워해선 안 되지. 네가 좋은 성적표를 갖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거라."   "그래, 참 교훈적인 이야기로군."   증조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중얼거렸습니다.   보세요, 이것이 올레 루쾨이에의 이야기랍니다.   이제 오늘 밤 올레 루쾨이에가 여러분에게 직접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답니다   황새들 ㅡ 안데르센   어느 작은 집 위에 황새 둥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둥지 속에는 네 마리의 새끼 황새와 엄마 황새가 살고 있었지요.   검고 작은 부리를 가진 새끼 황새들은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그 곳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용마루 위에는 아빠 황새가 아주 당당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답니다. 한쪽 다리를 높이 들고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새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할 정도로 조용하게 말이지요.   '내 아내가 서 있었다면 정말 우아하게 보일 텐데. 사람들은 내가 남편인 줄은 모를 거야. 아마 내가 여기 서 있도록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래도 여기 서 있는 건 몹시 고상해 보인단 말이야.'   아빠 황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외다리로 서 있었습니다.   아래쪽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답니다. 아이들은 황새를 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황새야, 황새야, 집으로 들어가거라   그렇게 외다리로 서 있지 말고   네 아내는 둥지 속에 누워 있지   그 곳에서 새끼들의 요람을 흔들어 주지.   한 새끼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두 번째 새끼는 그을려 죽고   세 번째 새끼는 총맞아 죽고   네 번째 새끼는 창에 찔려 죽고.   "아이들이 노래부르는 것 좀 들어 봐. 우리가 목 매달리고 불에 그을릴거라고 노래부르잖아."   새끼 황새들이 그 노래를 듣고 말했지요.   "그런 말에 귀기울일 필요 없단다. 듣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엄마 황새가 말했지요.   아이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황새들을 가리켰지요.   오직 페터라고 불리는 한 아이만이 동물을 놀리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말했어요. 페터는 아이들과 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엄마 황새는 새끼들을 달랬습니다.   "그런 데 신경쓰지 마라. 아빠가 얼마나 평온하게 서 있는지 보렴, 그것도 외다리로 말이야."   새끼 황새들은 얼른 둥지 속으로 숨었습니다.   다음 날도 아이들은 다시 그 노래를 불렀답니다.   하나는 목 매달리고   다른 하나는 불에 그을리고.   "우리가 목 매달리고 불에 그을리게 될까요?"   새끼 황새들이 물었습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너희들은 곧 나는 것을 배우게 될 거란다. 그런 다음 우리는 초원 위를 날아서 개구리들을 찾으러 갈 거야. 개구리들은 연못 속에서 꽥꽥꽥 노래를 부른단다. 바로 그 개구리들이 우리들의 먹이란다."   "그 다음엔 뭘 하나요?"   새끼 황새들이 물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여기에 살고 있는 황새들이 모두 모이지. 그리고 겨울에 대비하여 나는 연습을 해. 그 때에는 정말 잘 날아야 한단다. 아주 중요하니까. 제대로 잘 날지 못하면 장군 황새가 부리로 물어 죽이지. 그러니 연습이 시작되면 잘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단다."   "그렇다면 우린, 아이들이 노래부르는 것처럼 죽는 건가요? 들어 보세요. 아이들이 또 노래를 불러요."   "그 노래에 귀기울이지 말아라. 나는 연습을 마치면 우리는 따뜻한 나라로 날아간단다. 이 곳에서 정말 멀리 떨어진 곳이지. 산들을 넘고 숲들을 지나간단다. 그 곳은 이집트라는 곳이야. 거기에는 구름 위까지 뾰족한 지붕이 뻗어 있단다. 사람들은 피라미드라고 부르지.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된 거란다. 또 강물이 넘치면 온 나라가 진흙늪이 된단다. 그러면 우리는 늪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개구리를 잡아먹지."   "오!"   새끼 황새들이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 곳은 정말 근사한 곳이란다. 하루 종일 먹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 우리가 그 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 동안 여기에서는 초록 잎들이 진단다. 그리고 작은 구름들이 조각조각 얼어붙은 채 하얗게 떨어지지."   엄마 황새가 말한 것은 눈이었습니다.   "그러면 못된 아이들도 조각조각 얼어붙나요?"   새끼 황새들이 물었지요.   "아냐, 아이들은 조각조각 얼지는 않는단다. 하지만 비슷하게 된단다. 아이들은 방 안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하거든. 그렇지만 너희들은 꽃들이 있고 따뜻한 해가 비치는 낯선 나라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닐 수 있단다."   새끼 황새들은 둥지 속에서 똑바로 서서 멀리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자랐습니다.   아빠 황새는 날마다 먹이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늪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이제 너희들은 나는 것을 배워야 한단다."   어느 날 엄마 황새가 말했지요.   네 마리의 새끼 황새들은 모두 용마루로 나왔습니다. 다리가 몹시 떨렸지요. 새끼 황새들은 날개로 균형을 잡으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래도 밑으로 떨어질 뻔했지요.   "나만 쳐다봐. 이렇게 머리를 들고 발은 이렇게 놓아. 하나 둘, 하나 둘."   엄마 황새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새끼 황새들도 서투르게 약간 날아올랐어요. 하지만 곧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난 날지 않을래요. 따뜻한 나라로 가고 싶지 않아요."   새끼 황새 한 마리가 둥지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겨울이 되면 여기서 얼어 죽을래? 아이들이 와서 널 목 매달고 불에 구워도 괜찮겠어?"   "아니에요!"   새끼 황새는 다시 다른 새끼들처럼 지붕 위로 폴짝 뛰어나왔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새끼 황새들은 약간씩 날 수 있었습니다. 공중에서 균형을 잡고 있을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다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답니다. 그것을 보고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지요.   황새야, 황새야, 집으로 들어가거라!   "아래로 날아가서 아이들의 눈을 찔러 줄까요?"   새끼 황새들이 물었습니다.   "아냐, 그냥 내버려둬. 지금은 이게 훨씬 더 중요한 거란다. 하나, 둘, 셋! 이제 오른쪽으로 돌아 날아봐. 하나, 둘, 셋! 이제 왼쪽으로 저 굴뚝을 돌아봐. 자, 봐. 잘했어. 마지막 날갯짓이 정말 훌륭했어. 내일은 늪으로 나가야겠다. 여러 황새 가족들이 새끼들을 데리고 그 곳으로 온단다. 너희들이 제일 귀엽다는 것을 보여 주거라. 그리고 머리를 똑바로 들고 다녀라. 그러면 당당하게 보인단다."   "저 못된 아이들에게 복수를 해서는 안 되나요?"   새끼 황새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소리지르게 내버려 두려무나. 너희들은 곧 하늘 높이 날아서 피라미드의 나라로 갈 텐데 뭘 그러니. 저 아이들은 이 곳에서 떨면서 지낼 텐데 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못된 아이는 노래를 처음으로 부른 아이였답니다. 여섯 살도 안 되었을 거예요. 물론 새끼 황새들은 그 아이가 1백살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아이가 자기들의 엄마 아빠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랍니다. 아이들이 몇 살인지 새끼 황새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 아이는 날마다 노래를 불렀답니다. 새끼 황새들은 참을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좀더 자라게 되자 더욱 더 참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결국 엄마 황새는 새끼들에게 복수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답니다. 그렇지만 남쪽 나라로 떠나는 마지막 날에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연습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좀 봐야겠다. 너희들이 잘하지 못하면 장군 황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렇게 되면 아이들의 노래가 맞는 셈이지."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새끼 황새들은 씩씩하게 대답했지요.   그리고는 열심히 연습을 했답니다. 나는 것은 참 재미있었지요. 그렇게 산뜻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가을이 되었습니다.   황새들은 따뜻한 나라로 날아가기 위하여 모두 모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나는 연습을 했어요. 모든 숲들과 도시에는 황새들의 무리가 장관을 이루었답니다.   새끼 황새들은 아주 훌륭하게 날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성적을 얻었지요. 이제 개구리를 잡아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복수하자."   새끼 황새들이 말했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나는 아이들이 노는 연못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단다. 아이들은 그 곳에서 황새가 와서 부모에게 데려다 줄 때를 기다리고 있지. 아주 귀엽고 작은 아이들이 그 곳에서 잠을 자면서 아름다운 꿈을 꾼단다. 부모들은 모두 작은 아기를 갖고 싶어한단다. 아이들도 동생을 갖고 싶어하고 우리가 그 연못으로 날아가서 나쁜 노래를 부르지 않은 아이들에게 아기들을 하나씩 갖다 주자. 그리고 우리를 놀린 아이들에게는 아기를 갖다 주지 말자."   엄마 황새가 말했습니다.   "그 심술쟁이 나쁜 아이는 대체 어떻게 해 주어야 해요?"   새끼 황새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연못에는 죽은 아이가 하나 있단다. 그 못된 아이에게는 죽은 아이를 갖다 주자. 그러면 엉엉 울 거야. 하지만 동물을 놀리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말한 그 착한 아이에게는 여동생과 남동생을 가져다주자. 그 아이는 이름이 페터라고 했지? 너희들도 모두 페터라고 이름을 붙이자꾸나."   모든 일이 엄마 황새가 말한 대로 되었답니다.   그 뒤 모든 황새들은 페터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답니다.   이삿날     여러분은 아직도 탑지기 올레를 기억하고 있나요? 언젠가 그의 집에 찾아온 두 사람의 방문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오늘은 세번째 방문객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랍니다. 새해 설날 무렵이면 나는 언제나 탑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번도 으레 있는 그 이삿날이었 습니다. 저 아래쪽에 있는 도시의 거리는 지저분했어요. 쓰레기와 유리 조각들, 그리고 잡동 사니들이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지요. 짚으로 만든 다 낡아빠진 침대도 있었는데 속을 헤집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움푹 패여 있었답니다. 거리를 따라 내려가다가, 흘러 넘치도록 쌓인 쓰레기 더미 위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잠자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아이들은 잠자기 놀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 냈지요. 아이들은 짚 더미 속으로 기어들어가 낡은 벽걸이를 이불로 덜고 있었습니다. "참 기분 좋은데!"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며 즐거워했지요. 그렇지만 내겐 그 말이 과장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얼른 그 자리를 떠나 올레에게 올라갔답니다.  "이삿날이야!"  올레가 말했습니다.  다음은 올레가 들려 준 이삿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리와 골목이 온통 쓰레기통이야. 아주 커다란 쓰레기통이 되었어! 내 수레도 가득 찼지. 성탄절 직후에 수레에서 물건 하나를 끄집어내어 거리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지. 날이 축축하고 흐려서 감기 걸리기에 딱 좋은 날씨였지. 청소부가 가득찬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은, 이사철의 코펜하겐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예행연습 이야. 그 수레 뒤에는 크리스마스용 전나무도 실려 있었는데, 그 때까지도 나뭇잎은 푸르고 가지엔 금박이 붙어 있었어. 거리에 버려져 있는 걸 청소부가 수레 뒤쪽에다 실은 거지. 그러나 그 광경은 눈물이 나올 만큼 즐거워 보였어.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럴 때 무얼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야. 난 많은 생각을 했어. 수레 안에는 뭐가 있을까 하고 말이지. 거기에 찢어진 숙녀용 장갑 한짝이 있었어. 장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한 번 알아맞혀 볼까? 장갑은 거기 누워서 작은 손가락으로 전나무 위를 가리켰을 거야. 그리고는 이렇게 불평을 했겠지. '이 나무가 자꾸 나를 건드려!' '나도 샹들리에와 함께 축제에 있었어! 내 인생은 원래 무도회의 밤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런데 악수를 하다가 잘못해서 찢어지고 말았던 거야! 그 바람에 내 기억은 끊어지고 말았지. 난 이제 아무것도 없어. 뭘 위해 살아가야 할지!' 이렇게 장갑은 생각했을지도 몰라. 도자기 조각들은 전나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어.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은 언제나 모든 것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한 번 쓰레기 차 위에 있어 봐. 그럼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고 금박도 입지 못할걸. 난 내가 이 세상에 쓸모가 있다는 걸 알아. 난 저 푸른 전나무보다도 더 쓸모 있다구.' 조각들은 이렇게 말했지. 그래, 이것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 조각들의 생각이지. 그럼에도 전나무의 모습은 참 보기 좋았어. 전나무는 쓰레기 위에 있는 한 편의 시였던 거야. 이삿날의 거리 주변에는 이런 종류의 시가 많아. 저 아래로 난 길은 무척 무겁고 고 달파 보였어. 그래서 호기심을 느낀 난 다시 탑에 올라가 앉아 있기로 했지. 이 탑 위에 앉아서 저 아래를 재미있게 구경하는거야. 착한 사람들이 '작은 나무 바꾸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 자질구레한 일상 용품들을 끌어내다가 지쳐 버렸던 거야. 집의 요정도 통 속에 앉아 함께 잡아당기고 있었지. 집안은 온통 시끌벅적했어. 식구들이 소란스럽게 왔다갔다 했고, 걱정과 근심도 함께 옛 집에서 새 집으로 이사 갔지. 그 다음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건 뭘까? 물론 오래 된 시 중 '광고인' 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도 있지. "죽음이라는 큰 이삿날을 생각하라!" 이것은 결코 가벼운 생각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듣는 걸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죽음은 수많은 일을 겸해서 하고 있지만, 가장 믿음직한 공무원이지. 이런 걸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있니? 죽음은 버스 운전사이고, 여권을 쓰는 사람이며, 우리들의 신분 증명서 밑에 자기 이름을 쓰는, 삶이라는 커다란 은행의 지배인이지. 이걸 이해할 수 있겠니? 이 지상 에서 행하는 크고 작은 모든 행위들을 우리는 이 은행에 저금하는 거야. 그래서 죽음이 자기의 이사 버스를 타고 오면, 우리는 그 버스에 올라타고 영원의 나라로 가야만 하는 거지. 죽음은 경계선에서 우리의 신분 증명서를 여권으로 바꿔 주는 거란다.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죽음은 은행에서 이런 저런 행위들을 꺼내 가는데, 그건 바로 우리가 했던 행위들이란다. 은행에는 우리의 활동과 행위들이 낱낱이 적혀 있거든. 그건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끔찍할 수도 있지. 어느 누구도 이 버스 여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단다. 함께 가서는 안 되었던 예루살렘 의 구두장이가 그걸 얘기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뒤에서 달려가야만 했지. 그가 만약 버스에 함께 탔다면, 시인의 대우를 받지 못했을 거야. 자, 상상의 날개를 펴고 이 큰 이사 버스 안을 살펴봐! 여러 종류의 사람이 보이지. 한 쪽에는 왕과 거지들이 나란히 앉아 있고, 또 한 편엔 천재와 바보들이 나란히 앉아 있어. 그들은 모두 떠나야 하는 거야. 돈이나 재산도 없이, 오직 신분증명서와 은행에서 꺼낸 여비만 가지고 말야. 그런데 은행에서 어떤 행위들을 꺼내서 가지고 가게 될까? 아마 완두콩만큼이나 아주 작은 것일 거야. 물론 완두콩은 한창 피어나는 덩굴을 달고 갈 수는 있겠지.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서 구석진 곳에서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불쌍한 신데렐라는, 아마 신분 증명서와 여비로 낡아빠진 의자를 받은 모양이군. 그러나 이 낡아빠진 의자는 영원의 나라에서는 가마가 되어 옥좌에 오르게 되지. 아늑한 정자처럼 푸르른 나무들이 우거지고, 금처럼 찬란하게 빛나게 될 거야.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잊어버리려고 즐거움이라는 향기로운 술을 늘 마신 사람은 버스 여행에서는 남김없이 마셔야만 하는 작은 나무통을 받게돼. 이 술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음료인데, 이 술을 마시면 생각이 맑아지고 착하게 되며, 숭고한 감정들이 되살아나게 되지. 그래서 전에는 보고 싶지도 않았고 볼 수도 없었던 것을 보고 느끼게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양심의 가책이란 벌을 받게 돼. 술잔에는 '망각' 이라는 말이, 작은 나무통엔 '기억' 이라는 말이 씌어 있지. 만약 내가 올바른 역사책을 읽는다면, 나는 책 속에 나온 인물들이 죽음의 버스에 올라타는 것을 눈을 감고 그려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깊이 생각해 보게 되겠지. 죽음이 은행에서 그들을 위해 어떤 행위들을 꺼내 갔는지, 또 영원의 나라에 얼마만큼의 여비를 갖고 갔는지. 옛날 프랑스에 어떤 왕이 있었어. 이름은 잊어버렸어. 좋은 사람의 이름은 때때로 잊혀지기 마련이잖아. 나도 그렇고. 그러나 그 왕의 모습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올라. 그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은인 이었어. 그래서 백성들은 하얀 눈으로 그의 기념비를 세웠단다. 기념비엔 "당신은 이 눈이 녹는 것보다 더 빠르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 라고 적혀 있었지. 난 상상할 수 있어. 죽음이 이 기념비를 바라보며 이 왕에게 영원히 녹지 않는 한 떨기의 눈송 이를 주고, 그의 머리에서 하얀 나비가 되어 영원의 나라로 날아가는 것을. 또 루드비히 11세라는 왕이 있었어. 그의 이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악인의 이름은 항상 쉽게 떠오르거든. 내 머릿속엔 그가 한 행동이 자주 떠오르는데,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이 왕은 육군 총사령관을 처형시켰어. 정당한 이유가 있든 없든 그는 그렇게 할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더 지독한 것은, 사령관의 죄 없는 여덟 살과 일곱살짜리 두 아이들을 단두대에 서게 해서 아버지의 따뜻한 핏방울이 그들에게 튀게 했던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엔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내서 쇠창살 속에 가두었지. 그들은 감옥에서 단 한 장의 모포도 받지 못했지.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루드비히왕은, 1주일 내내 형리를 보내 형제의 이빨을 하나씩 뽑게 했어. 그들이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도록 말이야. 참다못한 형이 말했어. "어린 내 동생이 굉장히 고통스러워 한다는 걸 어머니가 아시면 걱정하시다 결국 돌아가시고 말 거예요. 제발 제 이빨을 두 개 뽑고 동생은 풀어주세요!" 이 말을 들은 형리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왕의 뜻이 눈물보다 더 강했어. 1주일 내내 은 쟁반에 아이들 이빨 두 개가 얹어져 왕에게 진상되었어. 왕이 그렇게 요구했던 거야. 그는 그걸 받았지. 죽음이 국왕 루드비히 11세를 위해, 삶이라는 은행에서 아이들의 이빨 두 개를 꺼내 영원의 나라로 가는 여행길에 그에게 줄 거야. 죄 없는 아이들의 이빨이 그 왕 앞에서 날아갈 거야. 마치 불타는 파리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것은 불처럼 활활 타서 왕을 꼬집을 거야. 그 순진 무구한 아이들의 이빨이. 그래, 큰 이삿날의 버스 여행은 참 진지한 여행이지. 그런데 이런 이삿날이 언제 올까? 사람들이 매일 매시간 매초마다 이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 또한 진지한 일이야. 그 때가 오면 죽음은 은행에서 우리들의 어떤 행위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 주게 될까? 그걸 한 번 생각해 보자. 달력에는 이 이삿날이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말야.   벌거벗은 임금님 ㅡ 안데르센   옛날에, 옷을 매우 좋아하여 많은 돈을 옷치장하는데 낭비하는 임금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은 군인들을 돌보지도 않고, 또 연극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었답니다. 자기의 새 옷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면 숲으로 나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답니다. 누군가 임금님을 찾으면 대신들은 "회의중이십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임금님이 살고 있는 곳은 이웃 나라의 사람들이 오가는 큰 도시였답니다. 어느 날, 두 명의 낯선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공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짤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짜는 옷감은, 색깔과 무늬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일할 능력이 없거나 바보 같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옷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 참, 굉장한 옷이 되겠다. 내가 만약 그 옷을 입는다면 우리 나라 대신들 중 누가 그 직위에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물론 영리한 사람과 바보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즉시 그 옷감을 만들도록 해야겠다." 임금님은 두 사람을 궁궐로 불렀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많은 계약금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두 개의 베틀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베틀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빈 물레에 앉아 밤늦도록 일하는 척했지요. 임금님은 옷감이 얼마나 짜여졌는지 궁금했답니다. 그러나 바보이거나 직위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임금님은 불안했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꾀를 하나 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이 옷감의 신비한 힘에 대한 얘기는 온 나라 국민들이 알고 있었으니까요. 자기의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 모두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정직한 장관을 직공들에게 보내야겠다. 그 장관이라면 옷감이 어떠한지 잘 볼 수 있을 거야. 그보다 더 자기 직무를 잘 해 내는 사람은 없어." 임금님은 늙은 장관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늙은 장관은 두 사기꾼이 일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답니다. "맙소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구나." 장관은 두 눈을 크게 떴습니다. 두 사기꾼은 부디 가까이 와서 보라고 간청했습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아름다운 색깔에 예쁜 무늬가 아니냐고 되물었지요. 늙은 장관은 눈을 더 크게 떴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럴 밖에요. 사실 빈 베틀뿐이었으니까요. '내가 바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내겐 장관 직위에 있을 능력이 없단 말인가? 아냐, 이 옷감이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어!' 늙은 장관은 생각에 잠겨 있었어요. "자, 왜 아무 말씀도 않으십니까?" 직물을 짜는 체하고 있던 직공이 물었습니다. "오, 정말 아름다워요! 아주 멋지군요! 이 옷감이 썩 마음에 들더라고 임금님께 말씀드리지." 늙은 장관이 대답했습니다. "그것 참 기쁘군요." 두 직공은 옷감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 진귀한 무늬를 설명했답니다. 늙은 장관은 직공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임금님에게 돌아가서 똑같이 설명해야 하니까요. 직공들은 옷감을 짜는 데 필요하다면서 많은 돈과 비단과 황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들의 호주머니를 채웠답니다. 베틀에는 실 한 올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직공들은 빈 베틀에서 열심히 일하는 척했지요. 임금님은 옷감이 얼마나 짜여졌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곧 다시 다른 정직한 대신을 보냈답니다. 얼마 전에 늙은 장관이 찾아갔을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겠죠? 빈 베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는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내가 대신의 자격이 없단 말인가? 참 우스운 일이로군.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알아서는 안 돼!" 그 대신은 보이지도 않는 옷감을 칭찬했습니다. "네에, 최고입니다!" 직공들을 만나고 온 그는 이렇게 임금님에게 말했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은 너나없이 모두 이 옷감에 대해 이야기했답니다. 이제 임금님은 그 옷감을 직접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을 데리고 그 곳으로 갔답니다. 대신들 중에는 먼저 그 직공들에게 갔던 두 명의 대신도 끼여 있었어요. 여전히 직공들은 실 한 올 없는 베틀에서 열심히 옷감을 짜는 척했답니다. "정말 근사하지 않습니까? 페하, 보십시오. 이 근사한 색깔과 무늬를!" 직공들을 만났던 두 대신이 텅 빈 베틀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그 옷감이 보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은 눈앞이 깜깜했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다니! 그것 참 기가 막힌 일이로군. 내가 바보인가? 내가 황제될 자격이 없단 말인가? 거참, 내가 당할 수 있는 가장 기막힌 일이로군.' 임금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옷감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 정말 좋구나! 짐의 최고의 찬사를 얻을 만하도다." 임금님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텅 빈 베틀을 살펴보았습니다. 임금님을 따라온 대신들도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그들도 임금님처럼 말했습니다. "오, 정말 멋지군요!" 그들은 임금님에게 행진할 때에 새 옷을 입고 나가시라고 말했답니다. "훌륭합니다! 근사합니다. 기막히게 좋습니다!" 이 옷에 관한 소문은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이면 옷감 이야기를 했지요. 임금님은 그 직공들에게 기사 훈장을 수여하고, 궁정 직조사라고 부르도록 했답니다. 행진이 시작되는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직공들은 베틀에 앉아 열여섯 개의 불을 밝혔습니다. 임금님의 새 옷을 마무리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요. 직공들은 베틀에서 옷감을 들어내서 공중에서 큰 가위로 잘랐지요. 그리고 실도 없는 바늘로 기웠답니다. 마침내 직공들이 말했습니다. "자, 옷이 완성되었습니다." 임금님이 대신들을 데리고 그 곳으로 왔습니다. 두 직공은 마치 무엇인가를 받치고 있는 것처럼 한 팔을 높이 들어올렸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바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윗도리입니다. 여기 망토가 있습니다. 이 옷은 거미줄처럼 가볍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지요. 그것이 바로 이 옷의 장점이랍니다." 직공들이 말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대신들로 말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답니다. 그래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폐하, 이제 그 옷을 벗으시지요. 저희가 직접 새옷을 입혀 드리겠습니다. 여기 큰 거울 앞으로 서십시오." 임금님은 직공들의 말을 듣고,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습니다. 직공들은 임금에게 새 옷 하나하나를 입혀 주는 척했어요. 그리고 임금님의 몸을 잡고 뒤에 끌리는 옷자락을 단단히 매어 주는 척했지요. 임금님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렸습니다. "훌륭합니다, 폐하. 기막히게 잘 맞습니다." 대신들이 말했습니다. "행렬 중 폐하의 머리 위에 받치고 갈 천개를 든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예식 담당 장관이 말했습니다. "그래, 끝났어. 잘 맞지?" 그러면서 임금님은 한 번 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려 보았답니다. 마치 귀중한 보석이라도 관찰하는 것처럼 보여야 했으니까요. 옷자락을 끌고 가야 할 시종들은, 마치 옷자락을 들어올리려는 것처럼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어요. 그들은 무엇인가를 공중에 들고 있는 것처럼 걸어갔답니다. 자기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드디어 임금님의 행진이 시작되었답니다. 길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어머나, 임금님의 새 옷좀 봐. 정말 근사해!" 어느 누구도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바보가 되니까요. 임금님의 어떤 옷도 이옷처럼 찬사를 받지는 않았답니다. 그 때였습니다. "임금님은 아무것도 안 입었잖아." 마침내 한 꼬마가 말했습니다. "이 순진한 아이의 말을 들으세요." 그 꼬마의 아버지도 주위를 살펴보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답니다. "임금님은 아무것도 안 입었대. 저기 저 아이가 그러는데 아무것도 안 입었대." "임금님은 아무것도 안 입었어." 마침내 온 국민이 소리쳤습니다. 그 말은 임금님의 마음도 흔들어 놓았답니다. 임금님도 국민들의 말이 옳은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고 이 행차를 도중에서 그만둘 수는 없다.' 임금님은 아까보다 더 자랑스러운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시종들도 여전히 임금님의 기다란 옷 소매를 높이 쳐드는 시늉을 하면서 아주 의젓하게, 그리고 천천히 임금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완두콩 공주     진짜 공주님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왕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왕자는 공주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공주들이야 이 세상 어딜 가도 많지만 진짜 공주인지 아닌지 그것까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답니다. 결국 왕자는, 공주를 찾지 못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왕자는 몹시 슬펐답니다. 진짜 공주와 결혼하고 싶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느 날 저녁, 무시무시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렸습니다. 장대 같은 비도 쏟아졌지요. 정말 무시무시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렸습니다. 늙은 왕이 나가서 문을 열어 주었지요. 문 앞에는 한 공주가 서 있었답니다. 비에 흠뻑 젖은 공주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머리카락과 옷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빗물은 구두부리로 들어갔다가 뒤축으로 다시 나오고 있었어요. 그녀는 자기가 진짜공주라고 말했답니다. ”그래? 그거야 우리가 알아 낼 수 있지.' 늙은 왕비는 생각했지요. 그러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답니다. 왕비는 곧 침실로 들어가서 이불을 다 걷어 내고 완두콩 한 알을 놓았지요. 그 위로는 스무장의 솜이불을 깔았습니다. 그날 밤 공주는 그 침대에서 자게 되었답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이 그녀에게 잘 잤느냐고 물었어요. "오, 정말 무서웠어요. 밤새도록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어요. 침대 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침대 밑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온몸이 멍이 들었답니다. 정말 끔찍했어요." 사람들은 그녀가 진짜 공주라고 생각했답니다. 스무 장의 이불을 통해서도 한알의 완두콩을 느꼈다면 그건 공주님이 틀림없으니까요. 진짜 공주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렇게 예민할 수 있겠어요. 왕자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답니다. 그녀가 진짜 공주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완두콩은 미술 전시실로 옮겨졌답니다. 누가 훔쳐가지 않는 한 누구나 볼수 있도 록 말이지요. 보세요, 이건 진짜 이야기랍니다.   전나무 이야기 ㅡ 안데르센   숲속에 키가 작은 전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답니다. 그 전나무가 서 있는 곳은 햇빛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공기도 맑은 곳이었어요.   전나무 주위에는 키가 큰 전나무들과 가문비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작은 전나무는 키 큰 전나무들이 부러웠어요. 그 전나무는 따뜻한 햇살도 신선한 공기도, 산딸기를 따러 돌아다니며 재잘거리는 농가의 아이들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바구니에 딸기를 가득 채우거나, 지푸라기 위에 산딸기를 나란히 늘어놓거나 하면서 작은 전나무 옆에 앉아서 말했어요.   "아이, 정말 작고 귀엽네!"   그러나 이 나무는 전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답니다.   다음 해에 나무는 새싹을 틔운 만큼 더 자랐답니다. 그 다음 해에는 또 새싹만큼이나 더 자랐어요. 전나무는 나이테를 보면 몇 해나 자란 나무인지 알 수가 있답니다.   "나도 다른 나무들처럼 큰 나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새들이 내 가지들 속에 둥지를 틀고 바람이 불면 저기 저 다른 전나무들처럼 멋지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텐데..."   작은 전나무는 한숨을 쉬었답니다.   전나무는 햇빛을 즐기지도 않았고 새들이 와도 기뻐하지 않았어요. 아침과 저녁에 자기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붉은 구름을 반가워하지도 않았지요.   겨울이 와서 그 전나무 주위에는 눈이 쌓였어요. 가끔 토끼 한 마리가 그 작은 전나무를 뛰어넘어가곤 했답니다. 그 전나무는 그럴 때마다 무척 속상했지요. 그러나 두 번째 겨울이 지나가고 세 번째 겨울이 되자, 나무는 너무 커져 토끼는 나무 둘레를 빙글빙글 돌 수밖에 없었지요.   그 전나무의 소원은 빨리 큰 나무가 되는 것이었답니다.   가을이 되면 나무꾼들이 와서 아주 큰 나무들 중 몇 개를 베었답니다.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었지요. 키가 커진 그 전나무는 그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몸을 떨었어요. 크고 화려한 나무들이 우지끈 딱 소리를 내며 땅으로 쓰러졌지요. 가지들이 잘려나가고 나무는 완전히 벌거벗은 채 길고 홀쭉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나무였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그런 뒤, 말들이 마차에 실린 그들을 숲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며, 그들에겐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   봄에 제비와 황새들이 왔을 때 전나무는 물어 보았답니다.   "너희들은 큰 나무들이 어디로 가는지 아니? 그 나무들 못 만났어?" 제비들은 아무것도 몰랐답니다. 그러나 황새들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   "그래, 그런 것 같아. 내가 이집트에서 날아올 때 새 배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배들 위에 근사해 보이는 돛대들이 그들인 것 같았어. 그들은 전나무 냄새를 풍겼거든. 내가 인사를 전해 줄 수 있지. 그들은 머리를 높이 세우고 있었어."   "오, 나도 바다 위를 건너갈 수 있을 만큼 빨리 자랐으면^5,5,5^. 그 바다라는 것 말이야. 대체 어떤 거야? 어떻게 생겼어?"   "설명을 하자면 너무 길어."   황새는 그렇게 말하고는 날아가 버렸답니다.   "네가 젊은 것을 기뻐하라. 네 몸 속에 들어 있는 젊은 생명을 기뻐하라."   해님이 속삭였답니다. 바람이 입맞추었고, 이슬이 눈물을 뿌렸답니다. 그러나 전나무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많은 어린 나무들이 베어졌어요. 언제나 숲을 떠날 생각만 하고 있는 이 전나무와 비슷한 크기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나무들이었답니다. 그들이 마차에 실리면 말들이 그들을 숲에서 끌고 갔습니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거야? 나보다 훨씬 작은 나무도 있었어. 어디로 실려 가는거야?"   전나무가 외쳤답니다.   "우린 알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지. 오, 그들은 가장 찬란하고도 호화스러운 데로 간단다. 우린 창문으로 들여다보았지. 그들이 따뜻한 방 한가운데에 심어져서 황금 사과, 꿀과자, 장난감 같은 아름다운 물건들과 수백 개의 등불들로 장식되는 것을 보았단다."   참새들이 재잘거렸습니다.   "그러고 나선 어떻게 돼?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야?"   "더 이상은 우리도 보지 못했어."   "나도 그렇게 되겠지? 바다를 건너가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아! 오, 얼마나 멋있을까? 지금이 크리스마스라면! 이제 나도 지난 해에 떠나간 나무들처럼 멋지게 자랐어. 오, 내가 맨 먼저 마차에 타고 있다면. 내가 온갖 화려하고 찬란함으로 치장된 그 따뜻한 방에 가 있다면. 그리고 나선 어떻게 되지? 더 좋은 일, 더 아름다운 일이 생기겠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 치장을 해 주겠어! 더 훌륭한 것, 더 화려한 것이 올 거야. 난 그렇게 되고 싶어."   바람과 햇빛이 말했답니다.   "자연 속에서 네 싱싱한 젊음을 기뻐하렴."   그러나 전나무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오직 빨리 자라고 싶은 마음뿐이었답니다. 어느덧 전나무는 짙은 녹색으로 자라 있었습니다. 그 나무를 본 사람들은 말했어요.   "참 잘생긴 나무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가 되자 맨 먼저 잘렸답니다. 도끼가 몸 속 깊이 때렸지요. 나무는 비명 소리와 함께 땅으로 쓰러졌어요. 나무는 매우 고통스러웠답니다. 행복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지요. 나무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슬펐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주위의 작은 덤불과 꽃들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새들도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답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신나는 일이 아니었답니다.   그 전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함께 어떤 마당에 내려졌지요. 그리고 한 남자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답니다.   "정말 근사해. 우린 이런 나무가 필요해."   그리고 정장을 한 두 명의 하인이 나와서 그 전나무를 큰 홀로 운반해 갔어요.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큰 난로 옆에는 사자들이 그려진 키 큰 중국제 화병이 놓여 있었지요. 또 그 곳에는 흔들의자와 비단 소파도 있었고, 장난감들과 그림책으로 가득 찬 큰 책상도 놓여 있었답니다.   그리고 전나무는 모래를 가득 채운 큰 통 속에 세워졌어요. 그러나 아무도 그것이 통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가 없었답니다. 그 통을 녹색 헝겊으로 둘러 장식하고 크고 화려한 양탄자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나무는 온몸을 떨었답니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하인들과 시녀들이 그를 장식했어요. 그들은 가지 하나에 색종이로 만든 작은 그물들을 걸었고, 그물마다 사탕을 매달았습니다. 황금 사자와 호두들은 마치 그 나무에서 자라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매달려 있었어요. 1백 개가 넘는 붉고 푸르고 하얀 촛불들이 가지들 사이에 단단히 꽂히고,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인형들이 녹색 옷을 입은 채 흔들거리고 있었답니다. 나무의 맨 위 꼭대기에는 금박으로 된 큰 별이 놓여졌습니다. 눈부시도록 화려했답니다.   모두들 저녁에 불을 밝힐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생각했답니다.   '어서 저녁이 되었으면. 어서 촛불들이 켜졌으면.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숲에서 온 나무들이 나를 볼까, 참새들이 창문으로 날아올까? 나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장식을 한 채로 이대로 서 있을까?'   전나무는 어서 그렇게 되고 싶어서 껍질통이 날 지경이었답니다. 나무의 껍질통이란 사람들의 두통만큼이나 고약한 것이랍니다.   드디어 양초에 불이 밝혀졌답니다. 얼마나 휘황찬란했는지 나무는 기뻐서 온 가지를 떨었지요. 그래서 그만 촛불 하나가 떨어져 녹색 잎을 태우고 말았습니다. 타닥타닥 소리가 났지요.   "맙소사!"   하녀가 외치면서 황급히 불을 껐답니다. 나무는 매우 조심했답니다. 그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나무는 무슨 장식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불안했습니다. 나무는 불꽃의 휘황찬란함에 넋이 빠져 있었던 거랍니다.   얼마 후에 양쪽 문이 열렸습니다. 한 떼의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마치 나무를 덮치려는 듯이. 그리고 어른들이 의젓하게 뒤따라 들어왔어요. 아이들은 아무 말없이 서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이었지요. 곧 다시 소리를 질러서 방 안이 온통 울릴 지경이었답니다.   아이들은 나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어요. 선물들이 하나하나 나무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무얼 하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무는 불안했어요.   촛불들은 나뭇가지 가까이까지 불타 내려왔습니다.   촛불이 다 사그라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껐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나무를 마음대로 꺾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요.   아이들은 우르르 나무에게 덤벼들었답니다. 가지에서 탁탁 소리가 났어요. 만약 맨 꼭대기의 금박 별을 천장에 매달아 놓지 않았더라면 나무는 땅으로 쓰러졌을 거예요.   그런 뒤, 아이들은 가지를 흔들며 이리저리 춤을 추었답니다. 늙은 하녀만이 계속 나무를 살펴보았어요. 그 하녀도 무화과 한 알이나 사과 한 알이라도 걸려 있지 않을까 하여 가지들 사이를 살펴보고 있었던 것이랍니다.   "이야기해 주세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세요."   아이들은 외치면서 작고 뚱뚱한 남자를 나무 밑으로 끌고 왔답니다. 그 남자는 전나무 아래에 앉았지요.   "우리가 녹색 나무 아래에 있으면 나무도 함께 들을 수가 있거든. 하지만 난 꼭 한 가지만 이야기할 거야. 너희들 이베데 아베데 이야기를 들을래, 아니면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도 살아나 공주님을 얻은 클룸페 둠페 이야기를 들을래?"   "이베데 아베데요!"   몇몇 아이가 외쳤답니다.   "클룸페 둠페요!"   다른 아이들이 외쳤어요.   전나무도 아이들처럼 하고 싶었답니다.   그 남자는 클룸페 둠페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도 살아나 공주님을 얻은 이야기를요. 그러자 아이들은 또 박수를 치면서 외쳤답니다.   "다른 것도 이야기해 주세요."   아이들은 이베데 아베데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한 가지 이야기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전나무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 서 있었어요. 숲속의 새들도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답니다.   '클룸페 둠페가 계단을 굴러 떨어졌어. 그래도 공주님을 얻었다니. 그래, 세상은 그렇게 되는 모양이야.'   전나무는 그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었지요.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친절한 남자였으니까요.   "그래, 그래! 누가 알겠어? 어쩌면 나도 계단을 굴러 떨어져서 공주님을 얻게 될지."   그리고 그는 다음 날도 다시 촛불과 장난감과 과일들로 치장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내일은 떨지 말아야지.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찬란함을 즐길 거야. 내일이면 다시 클룸페 둠페 이야기를 듣게 되겠지? 어쩌면 이베데 아베데 이야기도 듣게 될지 몰라."   나무는 그날 밤 내내 조용히 생각에 잠겨 서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하인과 하녀들이 들어왔답니다.   '이제 새 장식을 시작하려나 봐.'   나무는 기뻐했지요. 그러나 그들은 나무를 방에서 끌고 나갔답니다. 계단으로 끌고 내려가서 햇빛이라곤 비치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 세웠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무엇을 하려는 거지?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얻어듣겠어?'   나무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답니다.   여러 날이 지나갔습니다. 그 동안 아무도 나무를 찾지 않았답니다. 어느날 누군가가 왔지만 그것은 큰 상자 몇 개를 구석에 세우기 위해서였지요. 이제 나무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진 것입니다.   '바깥은 겨울이구나. 땅은 딱딱하고 눈으로 덮였겠지. 그러니 사람들은 나를 심을 수가 없어. 봄까지 날 보호하느라고 이 곳에 세워 두었을 거야.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라. 사람들은 참 착해. 여기가 어둡지만 않다면. 그리고 외롭지만 않다면. 작은 토끼도 없구나. 저 바깥 숲속에선 눈이 오고 작은 토끼가 나를 뛰어넘어가도 괜찮았는데. 정말이야. 날 훌쩍 뛰어넘어가도 괜찮았는데. 그러나 그 땐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지. 이 곳은 너무 외로워.'   "찌익찍, 찌익찍."   그 때 작은 생쥐가 휙 스치고 지나갔어요. 뒤이어 또 한 마리가 나왔지요. 그들은 킁킁거리면서 전나무의 냄새를 맡았답니다. 그리고는 전나무가지들 사이로 살짝 기어 들어왔어요.   "끔찍한 추위야. 그것만 아니라면 여긴 참 좋은데. 그렇지 않니? 늙은 전나무야."   작은 생쥐들이 말했습니다.   "난 늙지 않았어! 나보다 훨씬 늙은 나무들도 많아."   "너 어디서 왔니? 네 이름이 뭐야?"   생쥐들은 몹시 호기심이 많았어요.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딘지 얘기 좀 해 줘. 너 거기 가 봤니? 음식물 저장실에 가 본 적이 있니? 널판때기 위엔 치즈가 놓여 있고 천장에는 햄이 걸려 있는 곳, 수지 양초를 칠한 바닥에서 춤을 추는 곳, 말라서 들어갔다가 살이 쪄서 나오는 곳 말이야."   "난 그런 건 몰라. 그러나 해님이 비치고 새들이 노래하는 숲은 잘 알지."   전나무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작은 생쥐들은 귀를 기울였습니다.   "많은 걸 보았구나. 넌 참 행복했겠구나!"   "내가?"   전나무는 자신이 이야기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 정말 즐거운 시기였어."   그리고 과자와 촛불이 장식되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관해 이야기했답니다.   "오! 얼마나 행복했겠니, 늙은 전나무야."   생쥐들이 부러워했답니다.   "난 전혀 늙지 않았어. 이번 겨울에 숲에서 나온걸. 난 아주 젊은 나이란다. 좀 빨리 자랐을 뿐이야."   "너 참 이야기를 잘하는구나."   생쥐들이 말했지요.   다음 날 밤 그들은 네 마리의 다른 작은 생쥐들과 함께 왔어요. 그들도 나무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러 온 것이죠. 나무는 이야기를 할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그 모든 것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정말 즐거운 때였어. 그 때가 다시 올 수 있을 거야. 한 번 더 올 거야. 클룸페.. 둠페는 계단을 굴러 떨어졌지만 공주님을 얻었지. 어쩌면 나도 공주님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   그러면서 전나무는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작고 귀여운 자작나무를 생각했답니다. 그 어린 자작나무야말로 전나무에게는 진짜 아름다운 공주였으니까요.   "클룸페 둠페가 누구야?"   생쥐들이 물었어요.   그래서 전나무는 그 동화를 이야기해 주었답니다. 전나무는 단어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해 낼 수 있었지요. 생쥐들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나무 꼭대기까지 뛰어오를 뻔하였답니다.   다음 날 밤에는 더 많은 생쥐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왔지요. 일요일에는 두 마리의 큰 쥐까지 왔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재미없다고 했지요. 이 말은 생쥐들을 슬프게 했답니다. 생쥐들도 더 이상 같은 이야기는 재미없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 하나만 알고 계세요?"   큰 쥐들이 물었답니다.   "이것 하나만요.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행복했던 저녁에 들은 거예요. 그러나 나는 그 때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을 못했었죠."   "그건 참 재미없는 이야기로군요. 햄과 수지 양초가 나오는 이야기나, 음식물 저장실 이야기는 모르세요?"   "몰라요."   "그래요? 그럼 고맙습니다."   큰 쥐들은 돌아갔답니다. 결국은 생쥐들도 다 가버렸지요. 나무는 한숨을 쉬었답니다.   "그 날랜 생쥐들이 둘러앉아 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참 좋았는데. 이제 그것도 다 지나갔구나. 내가 다시 끌려 나가게 되면 정말 기쁠 거야. 그걸 생각해야지."   어느 날 아침이었답니다. 사람들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상자들이 치워지고 나무도 끌어냈답니다. 사람들은 나무를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해가 비치는 계단으로 나무를 끌어다 놓았지요.   '이제 다시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나무는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싱싱한 공기와 햇빛을 느꼈지요. 나무는 바깥 마당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나무는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일 따위는 잊고 있었지요. 주변에 볼 것이 너무나 많았거든요.   마당은 정원과 맞붙어 있었고, 정원에는 꽃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장미꽃들은 작은 격자 울타리 위로 향기를 풍기며 늘어져 있었고, 보리수나무도 꽃을 피우고 있었답니다. 제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주인이 왔다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러나 제비들이 말한 것은 전나무가 아니었습니다.   "난 이제 살아난 거야."   전나무는 환호하면서 가지들을 펼쳤답니다. 그러나 가지들은 전부 시들어 노란색이 되어 있었고 잡초와 쐐기풀 사이의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었지요. 전나무의 머리 꼭대기에는 아직도 금박 별이 햇빛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답니다.   마당에서는 몇 명의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어요. 크리스마스 때 나무 주위를 돌며 즐거워했던 그 아이들이었지요.   한 꼬마가 달려와 나무의 금박 별을 뽑아 버렸답니다.   "봐, 저 못생긴 늙은 전나무 위에 이런 것이 있다니."   그리고는 그 가지를 밟았어요. 나뭇가지는 아이의 장화 아래에서 우지끈 소리를 냈답니다.   나무는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자기 자신도 바라보았답니다. 그리고 숲에서 지냈던 날과 크리스마스 이브를 생각했지요. 클룸페 둠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던 생쥐들도 생각했답니다.   "다 지나갔구나, 지나갔어. 그 때가 좋았었는데. 이젠 지나갔구나. 다 지나갔어."   그 때 하인이 나와서 전나무를 조각조각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나뭇단으로 묶었습니다. 나무는 큰 양조 가마 밑에서 밝게 타올랐지요. 나무는 깊이 한숨을 쉬었답니다. 그리고 한숨은 작은 폭발음이 되었습니다. 놀고 있던 아이들이 달려와서 불 앞에 앉아서 외쳤답니다.   "빵빵! 탕탕!"   그러나 불꽃이 소리를 낼 때마다 나무는, 숲에서의 여름날과 별들이 반짝이던 겨울날, 크리스마스 이브를 생각했습니다. 클룸페 둠페 동화를 생각했지요. 나무는 완전히 불타 버렸습니다.   마당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는데, 가장 어린 꼬마가 금박 별을 가슴에 달고 있었지요. 전나무가 가장 행복했던 밤에 달았던 그 별이지요. 그러나 그 시간은 지나갔지요. 나무와 함께, 이야기와 함께 지나가 버리고 말았답니다. 모든 이야기가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랍니다 장다리와 꺼꾸리 ㅡ 안데르센   어느 마을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답니다. 둘 다 클라우스라는 이름이었지요. 한 클라우스는 네 마리의 말을 갖고 있었지만, 또 다른 클라우스는 단 한 필의 말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답니다. 사람들은 그 둘을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 네 필의 말을 가진 클라우스를 '장다리 클라우스', 단 한 필의 말을 가진 클라우스를 '꺼꾸리 클라우스'라고 불렀지요. 이제 우리는 그 두 클라우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게 될 거예요. 이건 진짜 이야기랍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한 주일 내내 장다리 클라우스를 위해 밭을 매고 한 마리뿐인 자기의 말을 빌려 주었답니다. 물론 장다리 클라우스도 꺼꾸리 클라우스를 도왔지요. 하지만 장다리 클라우스는 1주일에 한 번만 도왔답니다. 그것도 일요일에만요.   이럇! 무슨 소리냐구요? 꺼꾸리 클라우스가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랍니다. 말들은 채찍을 맞으면서 열심히 일을 했지요.   태양은 찬란하게 비추고, 교회의 종들은 교회로 오라고 울렸답니다. 일요일이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잘 차려입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로 가지요. 하지만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섯 마리의 말로 밭을 매느라 열심이었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채찍을 휘두르며 "후, 내 말들" 하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답니다.   "너, 그렇게 말해선 안 돼. 한 마리만 네 거잖아."   장다리 클라우스가 말했지요.   그러나 꺼꾸리 클라우스는 사람들이 자기 옆을 지나갈 때면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후, 내 말들" 이라고 외치지요. 그러자 화가 난 장다리 클라우스가 말했어요.   "한 번만 더 그렇게 말하면 네 말을 죽여 버릴 거야. 그러면 넌 끝장이야."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꺼꾸리 클라우스는 약속했지요. 그러나 다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자, 꺼꾸리 클라우스는 몹시 기분이 좋았답니다. 다섯 마리의 말을 끌고 밭을 매고 있으니 아주 멋지게 보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며 외쳤지요.   "후, 내 말들."   "어디 맛좀 봐라."   장다리 클라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요. 그래서 꺼꾸리 클라우스의 말을 곤봉으로 쳐서 그만 죽이고 말았답니다.   "아, 이제 나는 말이 한 마리도 없어."   꺼꾸리 클라우스는 울어 버렸답니다.   그는 말가죽을 벗겨서 바람에 잘 말린 뒤 그것을 푸대자루 속에 넣었지요. 그리고는 말가죽을 팔기 위해 도시로 갔어요.   그는 몹시 먼 길을 가야만 했답니다. 그런데 크고 어두운 숲을 지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어요. 길을 찾기도 전에 저녁이 되고 말았지요. 또 너무 멀기 왔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길가에 큰 농가가 하나 있었답니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지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기서 하룻밤 머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농가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어요.   그러자 한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지요. 하지만 부인은 꺼꾸리 클라우스의 절박한 이야기를 듣고도 이 곳에서 머물 수 없다고 했어요. 남편이 집에 없어 낯선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헛간이라도 좋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 사정했답니다. 하지만 부인은 쾅 하고 문을 닫아 버렸어요. 때마침 농가 옆에는 건초 더미가 놓여 있었고, 이 건초 더미와 농가 사이에는 평평한 초가 지붕을 얹은 작은 헛간이 있었답니다.   "옳지, 저 위에서 자면 되겠구나."   꺼꾸리 클라우스는 초가 지붕을 바라보면서 기뻐했지요.   "근사한 침대가 되겠어. 설마 황새가 날아와서 다리를 물지는 않겠지?"   그래요, 초가 지붕 위에는 둥지를 틀고 있는 황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지붕위로 기어 올라갔답니다. 그리고는 자리를 잡고서 누웠지요. 그런데 바로 앞으로는 농가의 창문이 나 있어서 창문으로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요.   방 안에는 큰 식탁이 있었답니다. 식탁 위에는 포도주와 구운 고기,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차려져 있었지요.   식탁에는 농부의 아내와 성당의 관리인 둘만이 앉아 있었어요. 부인은 성당 관리인에게 포도주룰 따라주었지요. 성당 관리인은 생선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걸 좀 얻어먹을 수 있었으면^5.5.5^."   꺼꾸리 클라우스는 군침을 삼키며 방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답니다. 방안에는 정말 맛있는 과자들이 잔뜩 있었지요. 그래요, 꼭 잔칫집 같았어요.   그 때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답니다. 농부였습니다.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오고 있는 농부는 마음씨가 아주 착한 사람이었답니다. 하지만 농부는 성당 관리인을 굉장히 싫어했지요. 성당 관리인만 보면 꼭 미친 사람처럼 흥분하곤 하지요.   오늘도 성당 관리인은 농부가 집에 없는 것을 알고 농부의 아내에게 인사라도 하기 위해서 놀러 왔던 거예요. 농부를 닮아 마음씨 좋은 부인도 정성껏 음식을 대접하고 있던 참이었지요.   그들은 농부가 오는 소리를 듣자 소스라치게 놀랐답니다. 부인은 성당 관리인에게 뒤쪽 모퉁이에 놓여 있는 빈 상자 속에 들어가라고 했지요. 그리고는 재빨리 음식을 모두 화덕 속에다 감추었어요. 만약 남편이 보게 되면 틀림없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될 테니까요.   "저걸 어째!"   꺼꾸리 클라우스는 음식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소리를 냈지요.   "거기 위에 누가 있소?"   그 소리를 들은 농부가 꺼꾸리 클라우스를 올려다보았지요.   "왜 거기 누워 있소?"   꺼꾸리 클라우스는 길을 잃은 이야기와 함께 하룻밤 머물게 해 준다면 고맙겠다고 했지요.   "좋소. 어서 우리 집으로 갑시다. 가서 무얼 좀 먹도록 합시다."   이번에는 부인도 꺼꾸리 클라우스를 친절하게 대했답니다. 하지만 보리죽만 내놓았지요.   배가 고팠던 농부는 잘 먹었답니다. 하지만 꺼꾸리 클라우스는 화덕 속에 들어 있는 음식들을 생각하면서 군침만 삼켰지요. 그는 화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지요. 보리죽은 정말 맛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꺼꾸리 클라우스는 발치에 놓아 둔 푸대자루 위에 발을 올려 놓은 채 화덕 속의 음식을 생각했지요. 그러자 말가죽이 들어 있는 푸대자루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니, 푸대자루 속에 뭐가 들어 있소?"   농부가 물었지요.   "오, 이 속에 마법사가 있지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꾀를 내었어요.   "우리가 보리죽을 먹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군요. 우리를 위해 화덕 속에 구운 고기와 생선과 과자를 만들어 놓았다는군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시 푸대자루 위에 발을 올려 놓고는 말가죽이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게 했어요.   "이번엔 또 뭐라고 하는 거요?"   농부가 신기한 듯이 물었지요.   "마법사가 대꾸했습니다. 포도주 세 병도 우릴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군요. 그 포도주는 저기 구석에 있다는군요."   부인은 하는 수 없이 감춰 두었던 고기와 생선은 물론 포도주도 내와야 했답니다.   농부는 술을 마시면서 몹시 기분이 좋았어요. 농부도 푸대자루 속에 든 마법사를 갖고 싶었어요.   "마법사는 악마도 부를 수 있을까?"   농부가 물었어요.   "기분이 좋으니까 악마까지도 한 번 보고 싶네, 그려."   "그러지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말했어요.   "마법사는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봐, 그렇지?"   그러면서 꺼꾸리 클라우스는 푸대자루를 건드려 소리가 나게 했지요.   "마법사가 네라고 대답하는 것 들리지요? 그러나 악마는 너무나 흉해 보인답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나을 텐데요."   "아니, 하나도 겁 안나네. 대체 악마가 어떻게 생겼소?"   "악마는 성당 관리인과 꼭 닮은 모습으로 나타날 겁니다."   "그래? 그것 참 흉하군. 내가 성당 관리인을 보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뭐 괜찮아. 사람은 원래 악마 같은데 뭘. 그러니 쉽게 참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내게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말게 해주시오."   "좋아요. 마법사에게 물어 볼게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푸대자루에 귀를 가까이 갖다 대었지요.   "마법사가 뭐라고 그래요?"   "가서 저 구석에 있는 상자를 열어 보면, 그 안에 악마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군요. 그러나 악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뚜껑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군요."   "뚜껑을 잡고 있도록 날 좀 도와 주겠나?"   농부는 상자로 다가갔답니다. 성당 관리인이 숨어 있는 상자로 말이에요. 성당 관리인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서 가슴을 조이고 있었지요.   농부는 뚜껑을 약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악마가 있어! 정말 성당 관리인처럼 생겼구려. 정말 끔찍해."   농부는 그렇게 외치면서 뒤로 풀쩍 물러났어요. 두 사람은 다시 술을 마셨답니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마셨어요.   "자네, 내게 그 마법사를 팔 수 없나?"   농부가 말했어요.   "대신 원하는 건 뭐든지 말해. 그래, 자네에게 한 됫박의 돈을 주지."   "아니, 그럴 수 없어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거절했지요.   "이 마법사가 내게는 너무나 소중하답니다."   "그래도 정말 마법사가 갖고 싶다네."   농부는 마법사를 팔라고 계속 졸랐답니다.   "그럽시다."   마침내 꺼꾸리 클라우스는 승낙했지요.   "당신이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서 할 수 없이 마법사를 파는 겁니다. 대신 약속대로 한 됫박의 돈을 주어야 해요."   "물론이지!"   농부는 기분 좋게 말했어요.   "그런데 악마가 들어 있는 상자는 자네가 가져가야 해. 나는 저 상자를 내 집에 두고 싶지 않아. 악마가 아직도 그 안에 들어 있는지도 몰라."   꺼꾸리 클라우스는 말린 말가죽이 들어 있는 자루를 농부에게 주었답니다. 그 대신 한 됫박의 돈을, 꼭꼭 채워서 받았지요. 게다가 농부는 돈과 상자를 가져갈 수 있도록 큰 짐수레까지 주었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돈과 성당 관리인이 숨어 있는 상자를 가지고 떠났어요.   숲의 반대 편에는 크고 깊은 강이 흐르고 있었답니다. 강물이 몹시 세게 흐르고 있어서 물결을 거슬러 헤엄칠 수가 없었지요.   강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져 있었지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리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상자 안의 성당 관리인이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쳤지요.   "그래, 이 바보 같은 상자를 가지고 가서 뭘 하겠어? 무겁기만 하지. 안에 돌멩이가 들었나, 원 계속 가지고 가다간 피곤하기만 할 거야. 그러니 강에다 던져 버려야겠다. 다행히 상자가 강물을 타고서 나를 쫓아온다면 다행이고, 안 그러면 그만이지 뭐."   그리고는 마치 강물 속에 상자를 당장 던져 넣기라도 할 것처럼 약간 들어올렸습니다.   "그러지마. 그만둬!"   성당 관리인이 상자 안에서 소리쳤어요.   "제발 나를 꺼내줘!"   "후우!"   꺼꾸리 클라우스는 겁이 난다는 듯이 외쳤어요.   "악마가 아직 있군. 빨리 강에다 던져 버려야겠다. 그래야 어서 물에 빠져 죽지."   "안 돼! 안 돼!"   성당 관리인은 외쳤어요.   "나를 살려 주면 한 됫박의 돈을 줄게."   "아, 그러면 문제가 좀 다르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상자를 열었답니다. 성당 관리인은 재빨리 기어 나와서 빈 상자를 강물에다 던지고는 재빨리 집으로 갔지요. 물론 꺼꾸리 클라우스는 한 됫박의 돈을 받았답니다. 이제 손수레는 돈으로 가득 찼어요.   "말 값을 아주 톡톡히 받았는걸."   꺼꾸리 클라우스는 매우 기뻤답니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와 돈을 꺼내 방바닥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지요.   "내가 죽은 말 덕분에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을 장다리 클라우스가 알게 된다면 몹시 화를 낼 거야. 그러니 자랑하지는 말아야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이웃집 소년을 시켜 장다리 클라우스에게 재는 됫박을 빌려 오게 했답니다.   "이걸로 뭘 하려는 걸까?"   이상하게 생각한 장다리 클라우스는 됫박 아래쪽에다 콜타르를 칠해 놓았지요. 그러면 그 물건이 약간이라도 붙어 남아 있게 되지요.   장다리 클라우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습니다. 됫박을 되돌려 받았을 때 그 안에는 은화 세 개가 붙어 있었답니다.   "어떻게 된 거지?"   장다리 클라우스는 즉시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달려갔습니다.   "너 어디서 그렇게 많은 돈을 얻었니?"   "아 그건 내 말가죽 값이야. 어제 저녁에 팔았지."   "정말 값을 잘 받았구나."   욕심이 생긴 장다리 클라우스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와 네 마리 말을 모두 일부러 죽여 버렸답니다. 그리고 나서 장다리 클라우스는 큰소리로 외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녔지요.   구두장이들이 모두 몰려나와 얼마를 받겠느냐고 물었어요.   "가죽 하나에 은화 한 됫박이지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즐겁게 말했어요. 그러자 모두들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말 미친 놈이로구먼. 누가 그렇게 비싸게 쳐준대?"   "가죽이오, 가죽, 가죽 사시오."   장다리 클라우스는 다시 외쳤지요. 그는 값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은화 한 됫박" 이라고 말했어요.   "우릴 바보로 아는구먼."   모두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구두장이들은 구두를 팽팽하게 만들 때 쓰는 가죽끈을, 무두장이들은 가죽 앞치마를 들고 나와서 장다리 클라우스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어요.   "가죽이오, 가죽?"   그들은 장다리 클라우스를 흉내 내며 비웃었지요.   "우리를 바보로 아는 너 같은 놈은 혼이 나야 해. 이 도시에서 썩 꺼져."   장다리 클라우스는 힘껏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장다리 클라우스는 화가 났지요.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꼭 갚아 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꺼꾸리 클라우스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할머니는 꺼꾸리 클라우스를 항상 못살게 굴었지만 꺼꾸리 클라우스는 몹시 슬펐어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할머니를 자기 침대에 뉘었답니다. 할머니가 혹시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지요.   그래서 할머니는 그날 밤 꺼꾸리 클라우스의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의자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밤이 깊었답니다. 그런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더니 막대기를 손에 든 장다리 클라우스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꺼꾸리 클라우스의 침대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곧장 침대로 다가가서 막대기를 내리쳤지요. 그리고는 소리쳤어요.   "이 나쁜 놈! 이제 더 이상 날 속이지 못할 거다."   장다리 클라우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 꺼꾸리 클라우스는 생각했지요.   "정말 못된 친구로구나. 나를 때려 죽이려 하다니. 할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게 참 다행이야. 만약 살아 계셨더라면 큰일날 뻔했군."   꺼꾸리 클라우스는 할머니에게 외출복을 입혔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서 말을 빌렸지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할머니를 마차 뒷자리에 앉히고 숲을 지나 달렸어요.   아침에 어느 큰 선술집 앞에 닿았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마차를 멈추고, 뭘 좀 먹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 술집 주인은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성질이 몹시 급해서 화를 자주 냈습니다.   "어서 오게."   술집 주인이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말했지요.   "아침 일찍 왔네. 그려. 그것도 좋은 옷으로 차려입고 말이야."   "네. 할머니와 도시에 나가는 길이거든요. 할머니는 저기 마차에 앉아 계시죠. 우리 할머니에게도 술을 한 잔 갖다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귀가 먹었으니까 아주 크게 말씀하셔야 해요."   "그래, 그렇게 하지."   술집 주인은 큰 유리잔에 술을 따라서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갔지요.   "할머니, 손자가 드리는 술이라오."   술집 주인은 말했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답니다.   "안 들리세요?"   술집 주인은 할머니의 귀에 바짝 대고서 큰소리로 외쳤어요.   "여기, 당신 손자가 드리는 술이 있어요."   술집 주인은 말했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답니다.   "안 들리세요?"   술집 주인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답니다. 몇 번이고 그렇게 소리를 쳤지요. 그래도 할머니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화가 난 술집 주인은 할머니를 잡고서 이리저리 흔들었답니다. 그 바람에 할머니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지요.   "이게 무슨 짓이오."   꺼꾸리 클라우스는 문 밖으로 뛰쳐나와 술집 주인의 멱살을 잡았어요.   "우리 할머니를 죽였어! 당신이 죽였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술집 주인은 몹시 괴로워했지요.   "모든 게 이 놈의 성질 때문이야. 이거 보게, 꺼꾸리 클라우스. 내 자네에게 한 됫박 가득 돈을 줌세. 또 할머니도 우리 할머니처럼 잘 묻어 줌세.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떡하겠나? 달리 위로할 방법이 없네.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이렇게 해서 꺼꾸리 클라우스는 또 한 됫박의 돈을 얻었답니다. 그리고 술집 주인은 할머니를 자기 할머니처럼 여기고 정성껏 묻어 주었지요.   많은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꺼꾸리 클라우스는 다시 이웃집 소년을 장다리 클라우스에게 보냈답니다. 재는 됫박을 좀 빌리기 위해서였지요.   "뭐라고?"   장다리 클라우스는 깜짝 놀랐지요.   "꺼꾸리 클라우스가 죽지 않았단 말이야? 내가 가서 직접 봐야겠다."   그래서 그는 직접 재는 됫박을 들고 꺼꾸리 클라우스를 찾아왔답니다.   "아니, 너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얻었니?'   그는 꺼꾸리 클라우스가 살아 있다는 것도 놀랐지만 한 됫박의 은화를 보고 더욱 놀랐지요.   "그날 침대에 누워 있었던 사람은 바로 우리 할머니였어."   꺼꾸리 클라우스는 장다리 클라우스를 놀리며, 모든 것을 말했지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몹시 분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장다리 클라우스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답니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몹시 기뻐하면서 약제사를 찾아가 죽은 사람을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지요.   "그 사람이 누구요?"   약제사가 물었어요.   "바로 우리 할머니지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신이 나서 말했지요.   "이런 못된 손자가 다 있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정성스럽게 장사는 못 지내줄 망정 할머니를 돈으로 팔려고 하다니."   그제야 장다리 클라우스는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장다리 클라우스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집으로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너에게 꼭 복수하고 말 테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다짐했지요.   집에 도착한 장다리 클라우스는 큰 푸대자루를 가지고 꺼꾸리 클라우스에게 달려갔어요.   "너 나를 또다시 바보로 만들었겠다. 내 말들을 때려 죽인 것도 모두가 너 때문이야. 이제 더 이상 나를 바보로 만들 수는 없을 거야."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 클라우스의 몸을 묶고는 자루 속에 집어 넣었지요.   "너를 강물에 빠뜨려 버릴 거야."   강으로 가는 길은 몹시 멀었답니다. 게다가 꺼꾸리 클라우스는 아주 무거웠지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교회 곁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오르간 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어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꺼꾸리 클라우스가 든 푸대자루를 내려 놓았답니다. 교회 안에 들어가서 합창을 듣고 가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꺼꾸리 클라우스가 빠져 나올리도 없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와 있었답니다. 그래서 장다리 클라우스는 교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 살려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푸대자루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소리를 질렀어요. 하지만 밧줄을 풀고서 푸대자루 속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었답니다.   그 때 한 늙은 목자가 교회 쪽으로 오고 있었지요. 눈처럼 흰 머리에 손에는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어요. 늙은 목자는 소 떼를 몰고 오던 길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만 꺼꾸리 클라우스가 들어 있는 자루에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어요.   "아이쿠! 무슨 일이지? 난 아직도 젊은데, 벌써 하늘 나라에 와 있다니."   꺼꾸리 클라우스는 깜짝 놀랐지요.   "아 불쌍한 내 신세. 나는 늙었는데도 아직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오."   늙은 목자도 한탄을 했지요.   "자루를 풀어 주세요. 나 대신 들어와 계세요. 그러면 곧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소리쳤어요.   "그래? 기꺼이 그렇게 하지."   늙은 목자는 자루를 풀어 주었지요. 꺼꾸리 클라우스는 얼른 자루에서 나왔습니다.   "젊은이, 나 대신 가축을 잘 돌봐 주게."   노인은 자루 안으로 들어갔답니다. 꺼꾸리 클라우스는 자루를 단단히 묶은 뒤 소 떼를 몰고서 도망갔지요.   조금 있으려니 장다리 클라우스가 교회에서 나왔답니다. 그는 다시 자루를 등에 메었지요. 자루는 훨씬 가벼워져 있었어요. 늙은 목자는 꺼꾸리 클라우스보다 훨씬 가벼웠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이렇게 가벼워졌지? 그래, 아마 내가 찬송가를 듣고 와서 그럴거야."   이윽고 강에 이르렀답니다. 장다리 클라우스는 흐르는 강물 속에 자루를 힘껏 던졌지요. 그리고는 큰소리로 소리쳤어요.   "나쁜 놈아! 이제 더 이상 날 바보로 만들지 못할 거야."   장다리 클라우스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저쪽에서 가축을 몰고 오는 꺼꾸리 클라우스를 만난 거예요.   장다리 클라우스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웃으며 대답했어요.   "그래, 맞아. 자넨 방금 날 강물에 내던졌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동물들을 얻은 거지?"   "이것들은 바다 가축일세."   꺼꾸리 클라우스는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난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어. 날 물에 빠져 죽게 해서 말일세. 그래도 난 이렇게 살아 있다네. 더군다나 부자로 말일세. 자네가 날 다리 위에서 차가운 강물 속으로 던졌을 때, 이제 죽었구나 싶었지. 나는 곧 강바닥 깊숙이 가라앉았지. 강바닥에는 아름답고 연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나는 그 풀 위로 떨어졌어. 그런데 자루가 열리지 않겠나? 눈같이 하얀 옷을 입고 녹색 화관을 쓴 사랑스런 처녀가 내 손을 잡으며 묻더군. '네가 꺼꾸리 클라우스니? 네게 바다 가축을 줄게. 저 위로 한참 올라가면 바다 가축이 있단다. '강은 그 곳 바다 사람들의 큰길이었다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부터 육지까지 걸어가기도 하고 물살을 타고 가기도 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육지까지 말이야. 그 곳은 온갖 꽃들과 싱싱한 풀들이 피어 있어 몹시 아름답다네. 물 속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들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지. 마치 새들이 공중을 가로질러 가듯이 말이야.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몰라. 게다가 구릉과 제방 위에서 풀을 뜯는 근사한 가축들이라니!"   "그렇담, 넌 어째서 다시 나온 거야? 그렇게 아름답다면, 나 같으면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장다리 클라우스가 물었지요.   그러자 꺼꾸리 클라우스가 말했어요.   "나는 여기가 더 좋아. 하지만 그 아름다운 곳을 잊을 수가 없어. 내 이야기 잘 들었지? 저 위쪽에 바다 가축이 있다고 바다 처녀가 얘기했던 것 말이야. 그 곳을 가려면 강을 따라 가면 되는데 강이 얼마나 꼬불꼬불 흘러가는지 몰라. 때로는 여기서, 때로는 저기서 휘어지지. 그리고 굉장히 멀어. 하지만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훨씬 더 빨리 바다 가축에게 갈 수가 있단다."   "오, 너는 참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장다리 클라우스는 부러운 듯이 말했지요.   "나도 너처럼 바다가축을 얻을 수 있을까?"   "그래, 그럴 수 있어."   꺼꾸리 클라우스는 말했지요.   "하지만 난 너를 자루에 넣어서 강까지 들고 갈 수는 없어. 넌 너무 무겁거든. 네가 그 곳까지 가서 직접 자루 속에 들어가겠다면 기꺼이 널 던져 줄 수는 있어."   "정말 고맙다. 그러나 내가 바다 가축을 얻지 못하게 되면 그땐 널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내 말 명심해!"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은 강으로 갔답니다. 목이 말랐던 소 떼는 물을 보자마자 강가로 달려갔어요.   "저것 봐. 저 가축들이 달려가는 걸. 다시 강 속으로 내려가고 싶은 거야."   꺼꾸리 클라우스가 말했어요.   "자, 어서 날 도와 줘."   장다리 클라우스는 바다 가축을 얻고 싶은 욕심에 재촉했답니다. 그리고는 자루 속으로 들어갔지요.   "돌을 하나 넣어 줘. 안 그러면 가라앉지 않을지도 몰라."   "괜찮은데 뭘."   꺼꾸리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큰 돌을 자루 속에 넣었어요. 그리고 단단히 자루를 묶고는 발로 찼지요. 첨벙! 자루는 강물 속으로 떨어져서 강바닥 깊숙이 가라앉았답니다.   "장다리 클라우스가 바다 가축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꺼꾸리 클라우스는 중얼거리며 소 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행복의 덧신 ㅡ 안데르센   1.       시작   쾨니히시노이 시장에서 가까운 코펜하겐의 외스트 슈트라세의 어느 집에서 모임이 열리고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런 모임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또 초대를 받으니까요.   손님들 중 절반은 카드 놀이 탁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손님들은, 이 집 주부의 "이제 무엇을 할까요?"에 이어서 과연 어떤 화제가 이어질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화제가 중세로 넘어갔답니다. 몇몇 사람들은 중세가 지금보다 훨씬 좋다고 말했습니다. 법률 고문관 크납 씨는 어찌나 열렬히 이 의견을 찬성했는지 이 집 여주인은 금방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연감에 씌어 있는 외르스테드 씨의 말을 반대했지요. 연감에는 지금이 훨씬 이점이 많다고 씌어 있었으니까요.   법률 고문관은, 덴마크의 한스 왕(1513년 사망, 작센 선제 후 에른스트공의 딸 크리스티네와 결혼) 시대를 찬란하고 가장 행복했던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때마침 신문이 배달되어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에는 특별한 읽을거리가 없었답니다. 그리고 외투나 지팡이, 우산과 덧신들을 보관하는 방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 방에 두명의 처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젊은 처녀와 나이가 조금 든 처녀였는데, 마치 주인들을 따라온 하녀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녀라고 하기엔 손이 너무나 고왔어요. 또 태도와 움직임이 당당했고 독특한 옷을 입고 있었답니다. 그들은 바로 요정이었습니다. 젊은 처녀는, 행복의 작은 선물들을 이리저리 들고 다니는 행복의 요정이었고, 나이가 든 처녀는 대단히 엄격해 보이는 근심의 요정이었습니다. 두 요정은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행복의 요정은 몇 가지 하찮은 일들을 처리했답니다. 소나기로부터 새 모자를 구해 주었고, 어느 남자에게 별 중요치 않은 인사를 전해 준 일이었지요. 그러나 이제 아주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한 쌍의 덧신이 맡겨졌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 덧신을 전해 주어야 해요. 이 덧신은 신기한 덧신이에요. 덧신을 신자마자 가장 가고 싶어하던 곳으로 갈 수 있거든요.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소망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마침내 행복하게 된답니다."   그러자 근심의 요정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불행하게 되어서 그가 그 덧신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축복할 거예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예요. 이제 덧신을 문 앞에 세워 두어야겠어요. 누군가 발을 잘못 디뎌서 그 덧신을 신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지요." 2. 법률 고문관에게 생긴 일 밤이 되었습니다. 한스 왕의 시대에 깊이 빠져 있던 법률 고문관 크납 씨가 집에 돌아가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덧신 대신 행복의 덧신을 신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답니다.   그는 행복의 덧신을 신은 채 외스트 슈트라세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덧신의 마법과 같은 힘 때움에 한스 왕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었답니다. 그는 진창에 발이 빠졌습니다. 그 시대에는 아직 길이 포장되지 않았으니까요.   "야 지독하구나. 왜 이리 더럽지? 보도는 다 어디 가고, 가로등들도 다 꺼져 버렸담".   법률 고문관은 투덜거렸습니다. 달님이 구름 속에 숨어 있어서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했습니다. 길 모퉁이의 성모 마리아 상 앞에 가로등이 하나 켜져 있긴 했지만,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그 밑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그 불빛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법률 고문관의 두 눈은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그림에 머물렀습니다.   "아마도 미술품 진열실인 모양인데 간판 들여놓는 것을 잊어버린 게로군."   그 때 이상한 복장을 한 두어 명의 사람들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가장 무도회에라도 갔다 오는 걸까?"   갑자기 북소리와 호각 소리가 들려오더니 횃불이 환하게 비쳤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 이상한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맨 앞쪽에는 악기를 든 사람들이 가고, 그 뒤에는 활과 석궁을 든 친위병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행렬 중에서 가장 품위 있어 보이는 사람은 성직자였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 보았답니다.   "제란트의 주교님이십니다."   "주교님이 웬 행차시지?"   법률 고문관은 생각에 잠긴 채 외스트 슈트라세를 통과해서 그리고 호엔브뤽켄 광장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슬로스 광장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희미하게 시내의 강둑이 보였습니다. 그 쪽으로 다가가니 보트 안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거기, 신사분들은 홀름으로 건너가려 하시는가요?"   그들이 물었습니다.   "홀름으로 건너간다구?"   자기가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 모르는 법률 고문관이 대답했습니다.   "난 크리스티안 항구로 가서 슈트라세 시장으로 가려는 중이오."   그 두 남자는 법률 고문관을 빤히 바라보았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리가 어디 있는지만 말해 주시오. 가로등도 하나 밝혀져 있지 않다니, 이 무슨 창피스런 일이람. 마치 늪 속을 걷는 것 같군. 불쾌해."   보트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할수록 법률 고문관은 점점 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난 당신들이 쓰는 옛날 홀름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소."   화가 난 법률 고문관은 발길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다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다리로 올라가는 난간조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참 별일이군."   법률 고문관은 이날 밤처럼 지금 시대가 비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마차를 타야겠군."   그런데 마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쾨니히스노이 시장으로 되돌아가야겠군. 그 곳에는 마차들이 있겠지. 이러다간 크리스티안 항구로 못 나갈 거야."   법률 고문관은 다시 외스트 슈트라세로 향했답니다.   그 길을 거의 다 지나왔을 때 구름 속에서 달이 나왔습니다.   "맙소사, 여기다가 뭐 이런 것을 세워 놓았을까!"   법률 고문관은 외스트 슈트라세의 끝에 서 있던 외스트 성문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도 마침 성문 하나가 열려 있었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그 문을 통해서 노이 시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곳 역시 넓다란 초원이었습니다. 덤불이 군데군데 솟아 있었고, 초원을 가로질러 시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홀란드 배들을 위한 목로 주점이 몇 개 저쪽 강둑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홀랜다우가 되었답니다.   "내가 신기루를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취한 것일까?"   법률 고문관은 탄식했습니다.   "이게 웬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법률 고문관은 아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외스트 슈트라세로 되돌아온 그는 집들을 좀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집들은 대부분 나무로 뼈대를 넣은 파흐베르크(흔히 보는 유럽가옥)였는데 초가 지붕을 이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정말 몸이 안 좋은가 봐."   법률 고문관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펀치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 왜 이렇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펀치와 따뜻한 연어를 함께 주다니, 미친 짓이었어. 그 집 여주인에게 얘길 좀 해야겠어. 다시 올라가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얘기를 할까? 그것도 참 우습게 보이겠지. 또 그들이 없을지도 모르지."   법률 고문관은 두리번거렸으나, 그 집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 기막힌 일이네! 외스트 슈트라세를 알아볼 수가 없다니. 상점도 하나 없어. 눈에 보이는 것은 비참하게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오두막들뿐이니. 마치 로에스킬데나 링슈테드 같은 옛 도시에 있는 것 같아. 아, 내가 아픈가봐. 주저하다간 이로울 게 없지. 그런데 도대체 그 집이 어디 있는 거야? 이런! 저 안에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양이야."   법률 고문관은 열려진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을 밀쳤습니다. 그 것은 그 당시의 맥주집이었습니다.   술집 안은 홀슈타인 식 마루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선원들, 코펜하겐의 시민들, 그리고 두어 명의 학자들이 술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에 빠져있어, 들어오는 사람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례합니다."   법률 고문관은 그에게 다가오던 술집 여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몸이 몹시 좋지 않아요. 크리스티안 항구로 가게 마차를 한 대 불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더니 독일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그녀가 덴마크 어를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독일어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법률 고문관의 복장이나 태도가 이상해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답니다. 약간 짠맛이 나는 물이었습니다. 바깥 샘에서 길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률 고문관은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이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 [데어 타크](날이라는 뜻) 지가 오늘 건가요?"   술집 여주인이 종이 조각을 치우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법률 고문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것을 건네 주었습니다. 그것은 쾰른 상공에서 본 공중 기상도를 나타내는 목판화였습니다.   "대단히 오래 된 거로군."   법률 고문관은 오래 된 물건을 만나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진기한 그림을 손에 넣었습니까? 이 그림은 상상으로 그려졌지만 그래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지요. 이러한 대기 현상을 사람들이 본 것은 북극광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지요.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 대기의 현상들은 전기에 의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를 매우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예의의 표시로 모자를 벗더니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했습니다.   "선생, 당신은 대단한 학식을 갖추신 분이군요."   "오, 아닙니다. 저는 이것저것 그저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법률 고문관이 대답했습니다.   "겸손함이란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런데 귀하의 견해에 대해서 말해야겠소이다. 내 생각에는 그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법률 고문관이 물었습니다.   "저는 성서 학자올시다."   법률 고문관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의 복장이 그걸 말해 주었으니까요.   "사실 이 곳에는 뛰어난 학자가 없어요. 그러니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옛 문서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요?"   성서 학자가 물었습니다.   "물론이지요! 저는 옛 문서 읽기를 좋아한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것도 읽기를 좋아하지요. 실제 생화에서도 충분히 보고 듣는 평범한 책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평범한 이야기라구요?"   "네, 그 왜 소설이라는 것 말입니다. 요즘 나오는 것들요."   "오, 그것들에도 많은 정신이 들어 있어요. 궁중에서 읽혀지고 있답니다. 우리의 왕은 특히 이프벤 씨와 가우디안 씨의 소설을 좋아하십니다. 아더 왕과 그의 원탁의 기사들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대신들과 그 소설에 관해 농담까지 주고받으셨답니다."   "전 아직 그것을 읽어보지 못했군요. 하이베르크 출판사에서 나온 최근의 책인 모양이지요."   "아닙니다. 하이베르크가 아니라 고드프레드 폰 게멘 출판사에서 나왔답니다."   "그게 저자 이름인가요? 그건 대단히 오래 된 이름이죠! 아마도 덴마크 최초의 인쇄업자 이름이 아닌가요?"   "네, 우리 나라 최초의 인쇄업자이지요."   순조롭게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자 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두어 해 전에 전국을 휩쓸었던 페스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한 것은 1484년의 페스트였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그것이 콜레라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490년의 약탈 전쟁도 이야기되었답니다. 영국의 해적 약탈자들이 정박소에서 배를 훔쳐갔다고도 했습니다. 1801년의 사건을 경험했던 법률 고문관은 영국인들에 대한 미움이 솟아나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외의 이야기는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성서 학자는 너무나 아는 게 없었지요. 법률 고문관의 단순한 이야기들이 성서 학자에게는 너무 대담하고 공상적인 것으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습니다. 그러자 성서 학자는 라틴 어로 말을 했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좀 어떠세요?"   술집 여주인이 법률 고문관의 소매를 잡아당겼습니다. 그러자 법률 고문관은 정신이 들었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맙소사, 여기가 도대체 어딥니까?"   법률 고문관은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우리 맥주를 마십시다. 브레멘 맥주와 밀주를 마십시다, 당신도 함께 마십시다."   손님들 가운데 누군가가 외쳤습니다.   그 때, 두 명의 처녀가 들어왔습니다. 한 처녀는, 두 가지 색깔로 된 두건(한스 왕의 법률에 따라 나쁜 행동을 한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게 되어 있었다)을 쓰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술을 따르면서 허리를 굽혔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야? 무슨 일이냐구?"   법률 고문관이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꼼짝없이 술을 마셔야 했답니다. 그리고 그 두 처녀는 웃으면서 법률 고문관에게 다가왔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취했다고 말하자 자신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륜마차를 하나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법률 고문관이 이제 모스크바의 말을 하는 줄 알고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그토록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모임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교도들의 시대로 되돌아갔나, 원. 내 인생의 가장 무시무시한 순간이로군."   법률 고문관은 탁자 아래로 허리를 굽히고 문 쪽으로 기어갔습니다. 거의 출입문에 다 왔을 때에야,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법률 고문관의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다행스럽게도 덧신이 그만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 모든 마법 같은 일도 사라졌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자기 앞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로등 뒤에 큰 집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눈에 익고 근사해 보였답니다. 그 곳은 바로 외스트 슈트라세였습니다.   법률 고문관은 성의 작은 문 쪽에 발을 뻗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경비병이 앉아서 잠들어 있었지요.   "아이쿠, 맙소사! 내가 길 위에 누워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래, 여기가 외스트 슈트라세야. 얼마나 근사하고 밝은가! 펀치 한 잔에 이 꼴이 되다니, 기막힌 일이로군."   잠시 후 법률 고문관은 크리스티안 항구로 가는 이륜마차 속에 앉아 있었답니다. 자기가 겪은 불안과 그 위급했던 상황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진심으로 이 행복한 현실을 찬양했습니다. 얼마 전에 머물렀던 그 시대보다는 훨씬 좋은 지금을 말이에요.       ----------     3. 경비병의 모험   "야, 덧신이네! 틀림없이 저 위에 사는 소위의 것일 거야. 그 문 앞에 놓여 있으니까."   잠에서 깨어난 경비병이 말했습니다.   경비병은 벨을 눌러 그 덧신을 전해 주고 싶었답니다.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웃 사람들을 깨우게 될까 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저걸 신으면 참 따뜻할 거야. 가죽이라 부드럽고."   그 덧신은 경비병의 발에 꼭 맞았습니다.   "세상이란 참 우스워. 소위는 따뜻한 침대 속에 누워 있어도 되니 말야. 어디 한 번 볼까,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방 안을 왔다갔다 하고 있네. 참 행복한 사람이야! 딸린 가족이 없으니 매일 밤 친구들이나 만나고 말이야. 오, 내가 만약 그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경비병이 이렇게 말하자마자 그가 신고 있던 덧신이 요술을 부려 경비병은 소위로 변해 있었습니다. 방안에 서서 손가락 사이에 장미처럼 붉은 빛깔의 종이를 들고 있었지요. 그 종이에는 시가 씌어져 있었답니다. 소위가 직접 쓴 시였습니다. 평생 시 한편 써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한 것을 글로 쓰면 바로 시가 되는 거랍니다.   오, 내가 부자라면   오, 내가 부자라면!   거의 두 치 키도 안 될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자주 그렇게 소망했다네   오, 내가 부자라면! 난 장교가 될 텐데   칼을 차고 군복을 입고 탄띠를 두른 장교   때가 와서 나는 장교가 되었네   그래도 나는 부자가 아니고 부자가 되지도 못했네   난 가난한 사람.   자비로운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   언젠가 젊은 시절 저녁에 나는 인생을 기뻐하며 앉아 있었네   소녀가 내 입술에 입맞추었지   나는 동화를 짓는 부자였거든   그러나 황금은. 아, 그 때처럼 가난한 적이 없었네   그 아이는 오직 문학만을 원했지   그 때 나는 부자였지. 그러나 황금을 가진 부자는 아니야   난 가난한 사람.   자비로운 신이여, 그대는 알리라.   오, 내가 부자라면! 신에게 올리는 나의 애원이라네   그 아이가 처녀로 자라는 것을 나는 보았네   그토록 영리하고 아름다우며 선량한 그녀   내 가슴에 들어 있는 생각을 그녀가 안다면   그 위대한 동화를 안다면, 그녀는 내게 잘해 줄 텐데!   그러나 나는 침묵해야 할 운명. 난 가난한 사람   자비로운 신이여, 당신이 그걸 원하므로.   오, 내가 여기 위로와 평안을 구하는데 부자라면   그렇다면 내 모든 고통을 이 종이 위에 옮기지 않으리   그대 나를 이해하는가, 나를 바친 그대여   그렇게 내 청춘 시절의 이 종이를 읽어 다오   어두운 밤에 바쳐진 어두운 동화를.   내 눈엔 오직 어두운 미래만 보일 뿐. 아, 나는 가난한 사람!   그대를 축복하리라, 자비로우신 이여.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이런 시를 쓸 수 있답니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이런 것을 인쇄하지는 않습니다. 소유, 사랑, 가난, 이것은 삼각형을 이루거나, 행복이라는 주사위의 부러진 반쪽이라고나 할까요. 소위도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창틀에 기대고 깊이 한 숨을 쉬었답니다.   "길 위의 저 가난한 경비병이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할 거야. 그는 내가 외로운 것을 모르지. 그에게는 가정이 있으니까. 슬플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즐거워 해 줄 아내와 자식이 있어. 만약 내가 저 경비병이 된다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 행복해질 텐데^5,5,5^. 그가 나보다 행복하니까 말이야."   그 순간 소위가 되었던 경비병은 다시 경비병이 되었습니다. 행복의 덧신 때문에 그는 소위가 되었던 것이니까요. 그러나 소위가 된 그는 본래의 그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참 나쁜 꿈이네. 하지만 재미있군. 마치 내가 정말 저 위의 소위가 된 것 같았어. 그런데 그건 하나도 즐거운 일이 아니었어. 아내도 없고 내게 달려들어 입맞추는 아들녀석도 없었단 말야."   경비병은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그 꿈이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덧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저기, 별 하나가 떨어지네. 그래도 하늘에는 별이 많이 있단 말이야. 저것들을 좀 가까이에서 보았으면 좋겠어. 특히 저 달을 말이야. 달 같은 것은 쉽게 손에서 미끄러지는 물건이 아니거든. 우리 마누라가 빨래를 해주는 그 대학생은 우리가 죽으면 이 별에서 저 별로 날아가는 거라고 말했지. 그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사실이라면 멋질 거야. 살짝 저 달 위로 뛰어올라가 보았으면 좋겠어. 몸은 그냥 계단에 그대로 놓아 둔 채 말이야."   그래요, 말은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행복의 덧신을 신었을때는 더욱 조심해야지요.   경비병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여러분은 속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빠르기 말이에요. 증기로 달리는 열차나 배에서 이미 그것을 시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가진 속도에 비한다면 그것은 그저 나무늘보의 산보나 달팽이가 행진하는 것쯤 된답니다.   빛은 가장 빨리 달리는 경주자보다 9천만 배나 빠르니까요. 그런데 전기는 빛보다 빠르답니다. 죽음은 우리가 심장에 얻는 전기 충격이랍니다. 영혼은 전기의 날개를 타고 날아갑니다. 8분 몇 초면 햇빛은 2천만 마일 이상을 여행할 수 있지만, 전기라는 특급 우편 마차를 타면 영혼은, 햇빛보다 몇 분이나 더 짧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천체들 사이의 공간은 영혼에게는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 집 사이의 거리보다도 좁답니다. 집이 서로 나란히 있다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전기 충격은 경비병처럼 행복의 덧신을 신고 있지 않을 때는, 몸과 마음을 함께 있지 못하게 하지요.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서 경비병은, 달에 이르는 5만 2천 마일을 날아 갔답니다. 달은 지구보다 훨씬 가벼운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갓 내린 눈처럼 부드럽답니다.   경비병은, 메들러 박사의 대형 달 지도에 있는 동그란 반지같이 생긴 산에 올랐습니다.   반지 산은 안쪽에서 보면, 솥의 안쪽처럼 가파르게 굽어 있었습니다. 대략 반 마일 정도 크기였지요. 그리고 아래쪽에 도시가 놓여 있었답니다. 마치 물이 담긴 유리잔 속의 달걀 흰자처럼 보였습니다. 탑과 둥근 지붕과 돛 모양의 발코니를 가진 도시는 공기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구는 경비병의 머리 위에서 크고 검붉은 공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답니다.   달에도 많은 생물체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답니다. 그들도 말을 했습니다.   경비병의 영혼은 놀랍게도 달 주민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지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답니다. 사람들이 살기에는 지구의 공기가 너무 탁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달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달이야말로 먼 옛날에 최초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믿고 있었답니다.   자, 이제 다시 외스트 슈트라세로 가서 경비병의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 볼까요?   경비병은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는 창이 굴러 떨어졌고 두 눈은 달쪽을 향했습니다.   "경비병, 지금 몇 시요.?"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어요. 그러나 경비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사람이 아주 부드럽게 경비병의 코를 꼬집자, 경비병의 몸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래요, 죽은 것입니다. 코를 꼬집었던 사람은 무서웠습니다.   "경비병이 죽었어. 죽어 있어."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경비병의 몸을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다시 돌아온 영혼은 분명 외스트 슈트라세에서 자기 몸을 찾겠지요? 그러나 찾을 수 있을까요? 아마 영혼은, 우선 경찰서로 가고 다음은 분실물센터로 달려가겠지요. 그러다가 맨 마지막으로 병원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영혼이 자기 혼자 행동할 때는 대단히 영리하다는 사실이 그나마 좀 위로가 될까요. 영혼을 우둔하게 만드는 것은 몸이니까요.   경비병의 몸은 병원의 세척실로 옮겨졌습니다. 사람들이 맨 처음 한 일은 물론 덧신을 벗겨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영혼이 들어왔으며 곧장 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비병이 살아났습니다.   경비병은 가장 무시무시한 밤이었다고 단언했습니다. 2탈러를 준다 해도 다시는 그런 감정은 갖기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다 지나간 일이었습니다.   그 날 경비병은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덧신은 그대로 병원에 둔 채였습니다.     ------------     4. 매우 이상한 여행   프리드리히 병원의 입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코펜하겐의 사람들은 모두 알 것입니다. 그러나 코펜하겐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짧게라도 설명을 해야 하겠지요?   병원은 높은 격자 창살로 거리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문의 쇠막대기들은 아주 널찍하게 박혀 있어 몸이 아주 홀쭉한 사람만이 쇠막대기 사이를 뚫고 나올 수도 있고, 바깥에서 살짝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드나들기가 제일 어려운 부분이 머리통이랍니다. 그러니까 머리통이 작은 사람이 유리했답니다. 이 정도 얘기면 충분히 상상이 되겠지요?   이 날 밤, 한 수련의가 당직을 서고 있었습니다. 그는 큰 머리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15분이면 돼. 쇠막대기 사이로 살짝 뚫고 나갈 수만 있다면 수위에게 말할 필요도 없어."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그가 문을 열자 경비병이 잊고 간 덧신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덧신이라는 것을 꿈에도 알 리 없었지요.   그 덧신은 이런 날씨에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신었답니다. 이제 쇠막대기 사이로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지요.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곳으로 빠져 나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리통만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머리통이 살짝 빠져 나갔습니다. 행복의 덧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는 몸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빠지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 내가 너무 뚱뚱한가 봐. 머리통이 가장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빠져 나갈 수가 없네."   그는 재빨리 머리통을 다시 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목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슬며시 화가 났습니다. 식은땀도 줄줄 흘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안간힘을 쓰면서 몸을 움직였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고 거리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관의 벨에도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까요? 그는 아침 시간까지 여기 이대로 서 있어야 할 것이고 아침이 되면 사람들은 자물쇠공을 불러서 쇠창살을 톱으로 자르겠지요. 그러나 그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빈민학교 학생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의 우스운 꼴을 보려고 선원 구역의 사람들도 달려올 것입니다.   "후유! 피가 거꾸로 솟겠네. 미쳐 버리겠어. 그래, 정말 미쳐 버리겠어. 오, 제발 빠졌으면! 그러면 이 일이 무사히 지나갈 텐데^5,5,5^."   그는 진작 이 말을 했어야 했습니다.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자마자 그의 머리통은 빠져서 안으로 튕겨 들어왔습니다. 그는 놀라 어쩔 줄 몰랐습니다.   여기서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그 다음 날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덧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저녁, 카니케 가세에 있는 작은 극장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극장은 만원이었답니다. 관객들 속에는 그 수련의도 있었습니다. 그는 전날 밤의 모험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아직도 그 덧신을 신고 있었습니다.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고 길이 진창이어서 덧신은 안성맞춤이었지요.   (백모님의 안경)이라는 새로운 시가 낭송되었습니다. 이 안경을 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트럼프 카드처럼 보인다는 시였답니다. 그리고 내년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알아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신기한 안경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그런 안경을 하나 갖고 싶어졌습니다. 만약 그 안경만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 속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아는 것 보다 훨씬 흥미로울 거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내년에 생길 일이야 어차피 경험하게 되겠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을 아는 것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맨 앞줄에 앉은 신사 숙녀들의 심장 속을 볼 수 있다면. 그래, 아마 상점 문을 여는 것과 같을 거야. 상점 안에서 내 눈이 휘둥그래지겠지. 저기 저 귀부인에게서는 틀림없이 유행하는 옷이랑 물건들을 잔뜩 발견하게 될거야. 또 이 숙녀의 상점은 텅텅 비어 있겠지. 깨끗이 청소를 한다 해서 상점에 해로울 건 없어. 그런데 정말 건실하고 단단한 상점이 있을까.?"   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래, 어떤 상점을 알고 있긴 하지. 그 안의 물건은 모두 단단하지만 벌써 하인이 한 사람 들어 있어. 그것이 이 상점의 결점인걸. 이 상점 저 상점에서 '어서 오세요!' 하고 외치겠지. 그래, 내가 작고 귀여운 생각처럼 가슴 속에로 살짝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면^5,5,5^."   보십시오! 덧신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수련의의 몸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리고 맨 앞줄에 앉은 관객들의 마음 속을 뚫고 들어가는 이상한 여행이 시작되었지요.   그가 뚫고 들어간 첫 번째 마음은 숙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순간, 정형외과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의사가 사람의 뼈를 들어내고 상처를 고치는 그런 곳 말이에요. 깁스로 뜬 팔다리들이 사방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정형외과에서는 환자가 오면 그 깁스들이 같이 없어 지지요. 그러나 이 숙녀의 마음 속에서는 들어왔던 사람들이 나간 뒤에도 깁스들이 만들어진 그대로 보관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곳에 있는 것은 여자 친구들의 깁스였답니다. 그 여자 친구들의 몸과 마음의 결점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랍니다.   그는 재빨리 다른 여자의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크고 성스러운 교회처럼 보였습니다. 높은 제단 위에는 흰 비둘기가 날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싶어졌지요. 그러나 그 곳을 떠나 다음 마음으로 날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풍금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또 다른 성스러운 장소에 별로 주저하지 않고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곳은 병든 어머니가 있는 초라한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열려진 창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치고, 지붕의 작은 나무 상자에서는 장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병든 어머니가 딸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하는 동안, 두 마리의 하늘빛 새가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다시 손과 발등 위를 기어 고기들이 가득한 찬 푸줏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부딪치는 것은 오로지 살코기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명 인사 주소록에 이름이 올라 있을 부자의 심장이었지요.   그리고 다시 그 부자의 아내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은 낡고 쓰러져 가는 비둘기집이었습니다. 남편의 초상화가 부채로 이용되고 있었답니다. 이 부채는 문과 연결되어 있어 남편이 몸을 돌릴 때마다 이 문이 닫혔다 열렸다 했습니다.   뒤이어서 그는, 로젠베르거 성에서나 볼 것 같은 유리거울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이 곳의 거울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비쳐 보였습니다. 방바닥 한가운데에는 초라한 사람이 앉아 있었어요. 마치 달라이 라마처럼 앉아서 놀란 눈으로 자기 자신의 크기를 보고 있었지요. 그는 뾰족한 바늘들로 가득 찬 바늘 쌈지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 못한 늙은 노처녀의 가슴임이 틀림없어.' 그러나 그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많은 훈장을 탄 젊은 장교였답니다. 사람들이 가슴과 정신을 함께 지닌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였지요.   수련의의 정신이 멍해져서 첫째줄의 마지막 가슴을 나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방금 겪은 일들은 자신의 지나친 상상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미칠지도 몰라. 그런데 이 극장 안은 왜 이렇게 덥지? 피가 머리로 오르는 것 같아."   그는 머리가 병원 문의 쇠창살 사이에 끼었던 어제 저녁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나는 확실히 알았어. 제때에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어. 러시아 식 목욕이 좋을 거야. 우선 가장 높은 판대기 위에 누워야겠어."   그러자 그는 증기가 뿜어 나오는 목욕탕의 높은 판 위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옷을 입고 부츠에 덧신까지 신은 채 였습니다. 천장에서 뜨거운 물방울들이 그의 얼굴로 떨어졌습니다.   "이럴 수가!"   그는 소리를 지르면서 벌떡 일어나 찬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경비원이 욕조 속에서 옷 입은 사람을 보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수련의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경비원의 귀에 대고 변명의 말을 속삭였습니다.   "내기를 하고 있는 중이요."   그리고 자기의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스페인제 파리 잡는 끈끈이를 목에도 한 장, 등에도 한 장 붙였습니다. 미친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등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행운의 덧신에게서 얻은 상처랍니다.     ------------   5. 글씨 베끼는 서기의 변신   죽었다가 살아난 그 경비병은 어느 날 문득 덧신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덧신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소위도, 이 거리에 사는 어느 누구도 덧신을 아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덧신을 경찰에 넘겼습니다.   "내 덧신하고 똑같아 보인단 말이야. 구두장이의 눈이라도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겠는걸."   경찰서 서기가 자기의 덧신과 경비병이 가지고 온 덧신을 나란히 세워놓고 보고 있었습니다.   "여보세요, 서기님."   서류를 가지고 들어온 사환이 그를 불렀습니다.   서기는 몸을 돌려 사환과 이야기를 하고 다시 덧신들을 보았을 때, 그는 어느 것이 자기 것인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젖은 것이 내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생각이었답니다. 바로 행운의 덧신이었으니까요. 그는 그 덧신을 신고 서류 몇 장을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또 다른 서류들은 들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꼼꼼히 읽고 베껴 쓸 참이었습니다. 그 날은 일요일 오전이었으며, 날씨는 매우 맑았답니다.   "프레데릭스베르그로 산책을 가야겠군."   그는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착실한 사람이랍니다.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그에게 산책은 좋은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걷고 있었어요. 그래서 덧신은 마법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답니다.   그는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은 시인인데, 내일 여름 여행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또 여행을 떠나신다구요? 당신은 정말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원하는 곳 어디나 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은 발에 고리가 묶여 있는데 말씀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먹고 사는 걱정이 없잖습니까. 다음 날을 걱정할 필요도 없구요. 또 늙으면 연금을 타지요."   시인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더 좋지요. 앉아서 시를 쓴다는 것은 만족스런 일이니까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당신에게 좋은 이야기를 하지요. 게다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인이잖아요. 별 것 아닌 사소한 일 때문에 법원에 앉아있는 것을 한 번 시험 삼아서라도 해 보십시오."   시인은 머리를 흔들었답니다. 서기도 머리를 흔들었지요. 두 사람은 서로 자기 의견이 옳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답니다.   "시인들이란 이상한 사람이야. 한 번 시험 삼아 그런 사람이 되어 보고 싶어. 시인이 된다면 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탄식조의 시는 쓰지 않을 거야. 정말 시인이 되기에 알맞은 봄날이로구나. 공기는 맑고 구름은 이토록 아름답고 초록 풀들은 향기를 풍기누나. 그래, 지난 몇 년 동안 이 순간처럼 느껴 본 적이 없었어."   그는 이미 시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시인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보통 사람들 중에도 위대한 시인들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인은 생각과 감정을 명확한 글로 옮겨 놓을 때까지 그것을 꼭 붙잡고 있다는 점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린답니다. 그러나 평범한 성격에서 재능 있는 성격으로 넘어가는 것도 어쨌든 변화는 변화이니까요. 이제 그 변화를 서기가 겪고 있었습니다.   "이 찬란한 향기! 로네 아줌마의 작은 오랑캐꽃이 기억나는구나. 그래, 내가 아주 어린 아이 때였지. 맙소사, 정말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살았네. 그 착하던 노처녀를 말야. 그녀는 저기 저 거래소 뒤편에 살았었지. 겨울이 아무리 춥고 가혹할 때라도 그녀는 항상 나뭇가지나 두어 개의 초록색 새싹을 물 속에 담가 두고 있었지. 내가 손으로 데운 동전을 언 유리창에 대고 구멍을 만들어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오랑캐꽃 향기가 은은히 풍겨 왔었어. 참 멋진 풍경이었지. 저쪽 바깥 운하에서는 배들이 언 채 정박해 있었어. 배에는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었지. 까악까악 우는 까마귀 한 마리가 유일한 승무원이었지. 봄의 공기가 불어 오면 세상은 활기를 띠었어.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톱으로 얼음을 동강냈지. 배에는 콜타르가 칠해지고 기계도 수리되었어. 그리고는 먼 나라들로 떠나갔지. 그런데 나는 여기 머물러 있었지. 늘 경찰서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여권을 발급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게 내 운명이야. 오, 그래!"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추어 섰습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예전에는 결코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하거나 이렇게 느낀 적이 없었잖아. 봄 때문인가 봐. 유쾌하지만 복잡해지거든."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서류를 찾았습니다.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는 첫 번째 종이로 눈을 돌렸습니다.   "'지그브리트 부인 5막 창작극.' 이게 뭐야? 내 글씨 아냐. 내가 이 비극을 썼단 말이야? '제방 위에서의 음모, 혹은 참회 기도일'이라? 대체 이게 어디서 났지? 누군가가 내 호주머니에 넣었음에 틀림없어. 여기 편지가 있군."   그것은 극장 담당자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그 작품의 평이 좋지 않게 되어 있었습니다. 편지의 어투도 전혀 정중하지 못했습니다.   서기는 벤치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곁에 있는 꽃 한 송이를 꺾었습니다. 작고 소박한 데이지꽃이었어요.   식물 학자가 여러 번의 강의를 통해 알려 주는 것을 꽃은 몇 분 안에 알게 해 준답니다. 그 꽃은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과, 잎을 넓혀 주고 향기가 나도록 해 주는 해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꽃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속에 감정을 일깨워 주는 생명력을 생각했답니다. 꽃의 친구는 공기와 해님입니다. 그 중에서도 더 친한 것은 해님이지요. 꽃은 해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해님이 사라지면 잎들을 접고 공기의 포옹 속에서 잠이 든답니다.   "저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은 해님이랍니다."   데이지꽃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너를 숨쉬게 하는 것은 공기잖아."   시인이 속삭였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다가와서 막대기로 진흙투성이의 도랑 속을 휘젓자 물방울들이 초록색 가지들 사이로 튀어올랐습니다. 시인은 공중으로 높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수백만 개의 작은 동물들을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크기가 다른 것처럼 그것들도 크기가 각기 다르지요. 구름까지 높이 소용돌이를 치며 올라가는 아주 작은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를 생각하면서 서기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내가 자면서 꿈을 꾸고 있나 봐. 아주 자연스럽게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란 것을 알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내일 아침, 내가 깨어나도 기억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기분이 좋아. 모든 것에 대해 맑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또 이렇게 원기 왕성하게 느끼고 있어. 하지만 내일도 이런 기분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 한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 예전에도 겪어 봤잖아. 꿈 속에서 듣고 말하는 것은 땅 속의 황금 같은 거야. 그것을 얻게 되면 부자가 되고 화려해지지. 그러나 밝은 낮에 보면 그건 돌맹이와 시든 잎일 뿐이야."   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즐겁게 날아다니며 노래하는 새를 보았습니다.   "저들이 나보다 훨씬 낫다. 난다는 것, 그건 정말 훌륭한 기술이야. 날수 있도록 태어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일 거야. 만약 내가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다면, 저런 종달새가 되고 싶어."   그 순간, 윗옷자락과 팔소매는 오그라들어 날개가 되고, 옷은 깃털이 되고, 덧신은 발톱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 내가 꿈꾸는 걸 볼 수가 있다니. 그런데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해본 적이 없어."   그는 녹색 가지 위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답니다. 그러나 노래 속에는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지요. 시인의 재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하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덧신도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먼저 시인이 되고 싶어 시인이 되었고, 그리고 다시 작은 새가 되고 싶어 작은 새가 되자 시인의 재능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참 재미있군. 낮에는 경찰서에서 딱딱한 서류 더미 속에 앉아 있었지. 밤에는 종달새가 되어 프레데릭스베륵 공원을 나는 꿈을 꿀 수 있다니. 이걸로 진짜 코미디 극본을 써도 되겠어."   그는 풀섶에 내려앉았습니다.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면서 부리로 잘 휘어지는 풀줄기들을 쪼았습니다. 지금의 그의 몸 크기에 비하면 북아프리카의 종려나무 가지만큼이나 커보이는 풀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지더니 거대한 물체가 그의 머리를 덮쳤습니다. 그것은 선원 구역에 살고 있는 소년이 던진 큰 모자였습니다. 모자 속에서 손이 하나 들어오더니 새가 된 서기의 등과 날개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이 염치없는 장난꾸러기야. 나는 경찰서의 서기야."   그러나 소년에게는 여전히 짹짹거리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소년은 새의 부리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새가 들어 있는 모자를 안고 그 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길에서 소년은, 짓궂은 상급생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새를 8실링에 샀답니다. 그래서 서기는 코펜하겐의 고터 슈트라세에 있는 어느 가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꿈이라서 다행이야. 꿈이 아니라면 화가 나서 죽었을 거야. 처음에 나는 시인이었어. 그런데 이제는 종달새야. 그래, 나를 이 작은 동물로 만든 것은 필시 그 놈의 시인이야. 새가 된다는 건 참 슬픈 일이로군. 특히 장난꾸러기들의 손에 들어가면 말이야. 이제 어떻게 될지 궁금하구나."   새가 된 서기가 말했습니다.   소년들은 그를 잘 꾸며진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뚱뚱한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볼품없는 새를 집으로 가지고온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늘만 허락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창가에 서 있는 빈 새장에 새를 넣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앵무새가 기뻐할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덧붙이면서 녹색의 큰 앵무새를 보고 웃었습니다. 앵무새는 화려한 놋쇠 새장 안의 둥근 쇠굴레에서 우아하게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앵무새의 생일이란다. 그래서 이 작은 들새가 축하하려는 거야."   그녀가 말했습니다.   앵무새는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이리저리 그네만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따뜻한 고향에서 이 곳으로 온 예쁜 카나리아가 큰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울보."   여인은 흰 보자기를 카나리아에게 덮어씌웠습니다.   "짹짹."   서기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서기가 변신한 종달새는 앵무새와 멀지 않은 곳에서 카나리아와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앵무새가 지껄이는 유일한 인간의 말은 '아냐, 우리를 인간답게 해 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들렸답니다. 그 소리 외에는 카나리아의 지저귐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새가 되어 있는 서기는 새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답니다.   "나는 초록색 종려나무들과 꽃 핀 편도나무 아래를 날아다녔어. 난 언니 오빠들과 함께 화려한 꽃들 위와 식물들이 땅 위에서 고갯짓하는 거울처럼 맑은 호수 위를 날아다녔지. 아름다운 앵무새들도 많이 보았어. 그들은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지. 아주 긴 이야기들 말야."   카나리아가 말했습니다.   "그건 야생의 새들이야. 교양이 없어. 아냐, 우리를 인간이게 해 줘. 너 왜 안 웃니? 다른 사람들이 모두 웃는다면 너도 웃을 수 있는 거야. 재미있는 것을 즐기지 않는 것은 잘못이야. 아니 그저 나를 인간이게만 해 줘."   앵무새가 말했습니다.   "오, 너 기억하니? 꽃이 만발한 곳에 펼쳐진 천막 아래에서 춤추던 그 아름다운 소녀들 말이야. 너 기억하니? 달콤한 과일들과 우거진 잡초들 속의 서늘한 물을."   카나리아가 물었습니다.   "응, 그래. 그러나 나는 이 곳에서 훨씬 더 잘살고 있어. 나는 좋은 음식과 대우를 받고 있지. 나는 좋은 머리를 가졌어. 더 이상은 바라지 않아. 그저 인간이게만 해 줘. 너는 시인의 영혼이야. 사람들이 하는 말을 빌리면 말야. 나는 지식과 재치를 가지고 있지. 그러나 너는 천재지만 신중함이 없어. 자주 너무 높은 자연의 음색으로 올라간단 말야. 그 때문에 너를 덮어씌우는 거야. 사람들은 내겐 그렇게 하지 않아. 내가 그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거든. 나는 내 부리로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지. 그리고 '재치 재치' 하고 지저귈 수 있어. 우리를 인간이게 만 해 줘."   "오, 꽃피는 나의 따뜻한 고향이여! 나는 너의 암록색 나무들을 노래하고 싶구나. 내 형제 자매의 기쁨을 노래하고 싶구나. 황량한 선인장이 자라는 곳이여."   "그렇게 짜는 소린 그만둬.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을 노래해. 웃음은 생각할 수 있다는 표시야. 개나 말이 웃는 것 봤니? 아니지. 그들은 울 수는 있지만 웃을 수는 없어. 웃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거야. 호호호."   앵무새는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를 인간이게 해 줘."   "작은 갈색의 덴마크 새야. 너도 잡힌 몸이로구나. 네가 있던 숲속은 확실히 춥지. 그러나 그 곳엔 자유가 있어. 날아가. 사람들이 널 가두는 것을 잊었단다. 위쪽 창문이 열려 있어. 날아가. 날아."   서기는 카나리아의 말대로 했습니다.   휘익! 그는 새장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 순간 옆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이 삐걱거렸습니다. 그리고 번득이는 초록색 눈을 가진 집 고양이가 기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를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카나리아가 새장 속에서 퍼덕거리고, 앵무새는 날개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우리를 인간이게 해 줘."   서기는 무서웠습니다. 창으로 나와서 거리로 도망쳤습니다. 이제 그는 쉬고 싶어졌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맞은편 집이 낯익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창문 하나가 열려 있어 그는 그 곳에서 날아갔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방이었습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이럴 수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잠에 골아 떨어졌지? 무서운 꿈이었어. 정말 엉터리 같은 이야기였어."     ------------   6. 덧신이 가져다 준 최상의 것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서기가 아직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같은 층에 사는 대학생이었는데 목사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덧신 좀 빌려 주세요. 정원이 몹시 젖어 있어서요. 하지만 햇볕이 너무 좋아서 저 아래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어요."   그 대학생은 덧신을 빌려 신었습니다. 그는 사과나무와 자두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는 아래쪽 정원으로 내려갔습니다. 작은 정원이지만 코펜하겐 시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잘 가꾸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마당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바깥에서 우편 마차의 종소리가 울려왔습니다.   "오, 여행! 여행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지. 내 소망은 바로 여행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느끼는 이 불안이 잠재워질 거야. 찬란한 스위스를 보고 싶구나, 이탈리아도 여행하고 싶고^5,5,5^."   신학생이 외치자 덧신이 즉시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만약 그 덧신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먼 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스위스의 한가운데에 와 있었습니다. 여덟 명의 여행객들과 함께 마차 안에 끼여 앉아 있었지요.   그는 머리가 아프고 등도 쑤셨으며, 부츠에 짓눌린 발이 부어올랐습니다. 그의 오른쪽 호주머니에는 신용장(오늘날의 신용 카드에 해당하는 것인 듯함)이 들어 있었고, 왼쪽 호주머니에는 여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가죽 지갑에는 프랑스 금화가 조금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잠깐씩 졸 때마다 금화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고는 소스라쳐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는 그 물건을 더듬어서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바깥 경치보다도 더 관심이 가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그물망 속에서 그네를 타듯 출렁거리는 우산, 지팡이, 모자였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의 가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이 이미 노래했지만 아직 인쇄되지 않은 시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이 곳은 아름다워, 가슴이 원하는 그대로야   나는 몽블랑을 보네, 그 가파른 몽블랑을.   돈이 조금만 더 있다면   아, 이 곳에 좀더 머물 텐데!   그를 둘러싼 자연은 위대하고 엄숙했습니다. 전나무 숲들은 마치 높은 바위 위에 솟아 있는 히드처럼 보였습니다. 그 숲의 봉우리가 구름 속에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바람도 불어 왔지요.   "후유."   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만약 알프스 산맥 반대편에 있다면^5,5,5^. 그 곳은 지금 여름일 거야. 그러면 나는 신용장으로 돈을 꺼내 썼을 거야. 돈 때문에 스위스를 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어. 오, 내가 반대편에 있었으면!"   그러나 마차는 알프스 산맥의 반대편인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로마 사이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녁놀 속의 트라지멘 호수는 마치 불붙은 황금처럼 암청색 산들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니발이 플라미니우스를 쳐부순 이 곳에는 이제 포도 넝쿨들이 녹색 손가락처럼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길가에서는 헐벗은 아이들이 월계수나무 아래에서 석탄처럼 검은 돼지 떼를 몰고 갔습니다. 만약 이 경치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찬란한 이탈리아여!" 라고 환호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생이나 마차에 타고 있는 그 어느 승객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천 마리의 파리와 하루살이들이 달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도금양나무가지로 주위를 이리저리 내리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얼굴이 부어오르고 피가 났습니다. 불쌍한 말들은 마치 썩은 짐승의 시체처럼 보였습니다. 파리들이 말의 몸에 까맣게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마부가 내려서 파리들을 쫓아 버렸지만 그 때뿐이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해가 지자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산들과 구름은 찬란한 빛을 띠었습니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거라고 여행객들은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몹시 배가 고프고 피곤했습니다. 여행객들은 모두 편안하게 쉬고 싶어졌답니다. 아름다운 자연보다는 그런 것이 훨씬 그리웠으니까요.   마차는 올리브 숲을 지나갔습니다. 마치 고향의 수양버들 길로 이끌려 가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여관이 한 채 보였습니다. 대여섯 명의 불구자들이 구걸을 하며 그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은 비참했습니다. 눈이 멀었거나, 비쩍 마른 다리로 걷지 못하고 손으로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이 없는 팔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불쌍히 여겨 주소서!."   그들은 한숨을 쉬면서 병든 팔다리를 내밀었습니다.   맨발에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더러운 옷을 입은 여주인이 손님들을 맞았습니다. 문이란 문은 모두 끈으로 묶여져 있었고 방바닥은 군데군데 벽돌들을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천장에서는 박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또 지독한 냄새가 났답니다.   "차라리 외양간에다 식탁을 차려 주시오. 그 곳이라면 무슨 냄새인지 알기나 하지."   여행객 가운데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게 창을 모두 열었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보다 더 빠르게 비참한 팔들과 "선생님,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탄식이 먼저 날아 들어왔습니다. 벽은 낙서투성이였는데 그 중 절반은 찬란한 이탈리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식사가 왔습니다. 후추와 부패된 기름이 섞인 물로 만든 수프였어요. 그리고 샐러드에도 같은 기름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 썩은 달걀과 구운 닭벼슬이 가장 훌륭한 요리였답니다. 포도주조차도 이상한 맛이 났습니다. 그야말로 뒤죽박죽 섞인 맛이었답니다.   밤이 되자 문에다 가방들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 한 사람이 보초를 서기로 했습니다. 신학생이 보초를 섰습니다. 방이 얼마나 후덥지근한지 그 열기가 사람을 짓누를 지경이었습니다. 하루살이들은 윙윙거리며 날아들었고, 바깥에서는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탄식이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여행이란 좋은 거지. 사람이 몸을 안 가지고 있다면 말이야. 몸은 가만히 있고 정신만 날아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대체 어딜 가든지 불행한 일들이 있단 말이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순간적인 것보다 좋은 것, 보다 나은 거야. 그래, 보다 나은 것. 최상의 것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지? 그래, 난 내가 원하는 걸 잘 알고 있어. 나는 행복을 느끼고 싶어. 그 어느 것보다도 행복을 느끼고 싶다구!"   이 말을 입 밖에 내자마자 그는 집에 와 있었습니다. 창문에는 길고 흰 망사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방바닥 한가운데에는 검은 관이 놓여 있었지요. 이 관 속에서 신학생은 잠에 취해 누워 있었답니다. 그의 소망이 실현된 거지요. 몸은 가만히 쉬고 정신만 여행을 하고 있으니까요. 무덤에 들어가지 전에는 아무에게도 행복하다는 찬양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솔론이었던가요? 이 말은 여기서 새로이 입증된 셈이지요.   모든 시체는 스핑크스랍니다. 여기 검은 관 속의 스핑크스 역시 이틀 전 살아 있었을 때 자기가 썼던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너, 막강한 죽음이여. 네 침묵이 전율을 일깨우도다   네 자취는 오직 교회 묘지의 무덤일 뿐   정신은 야곱의 사다리를 올려다봐서는 안 되나요?   오직 죽음의 풀이 되어야만 부활하나요?   세상은 가장 큰 고통은 보지 못하나니!   너, 네 종말에 이르도록까지 외로운 너.   그토록 많은 의무들이 가슴을 짓누르도다   여기 지상, 관의 벽 속에서보다 훨씬 더 무겁게.   방 안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근심의 요정과 행복의 요정이었어요. 두 요정은 죽은 사람에게 몸을 굽혔답니다.   "보세요 이 덧신이 사람들에게 대체 어떤 행복을 가져다 주었나요?"   근심의 요정이 물었습니다.   "여기 잠자는 이 사람에게 계속되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지요."   행복의 요정이 대답했습니다.   "오! 아닙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요. 정해진 운명대로 그가 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의 정신력은 강하지 못하답니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겠어요."   근심의 요정은 신학생의 발에서 덧신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잠은 끝이 났지요.   신학생은 몸을 일으켰습니다. 근심의 요정은 사라졌고, 덧신도 사라졌답니다. 근심의 요정은 덧신을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꿋꿋한 장난감 병정  ㅡ 안데르센   스물다섯 명의 장난감 병정이 있었답니다. 그들은 모두 낡은 주석 숟가락으로 만들어진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팔에는 총을 들고, 얼굴은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붉고 푸른색 군복은 아주 화려했지요. 병정들이 이 세상에서 들은 최초의 소리는 "야! 장난감 병정들이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작은 소년이 이렇게 외치면서 손뼉을 쳤습니다. 소년은 생일선물로 장난감 병정들을 받았던 거예요. 소년은 병정들을 책상 위에 세워 놓았습니다.   병정들은 모두 하나같이 꼭 닮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병정은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병정은 맨 마지막으로 만들어졌는데, 주석이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병정은 두 다리를 가진 다른 병정들과 똑같이 한쪽 다리로 꼿꼿이 서 있었답니다. 우리가 할 이야기는 바로 이 외다리 병정 이야기랍니다.   책상 위에는 다른 장난감들도 많이 있었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이로 만들어진 예쁜 성이었습니다.   작은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면 기둥이 없는 복도가 보입니다. 성의 앞쪽에는 호수가 있고 작은 나무들이 빙 둘러 있습니다. 그 호수 위에는 밀랍으로 만든 백조들이 떠다니고 있었지요. 모든 것이 산뜻하고 귀여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귀여운 것은 열려진 성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작은 숙녀랍니다. 그녀 역시 종이로 오려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좋은 리넨으로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작고 가느다란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금박으로 된 장미 한 송이가 띠에 꽂혀 있었습니다.   작은 숙녀는 양팔을 하늘로 내뻗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희였답니다. 다리 하나를 위로 높이 들어올리고 있었지요. 이것을 보지 못한 외다리 병정은 그녀도 자기처럼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색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외다리 병정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귀족처럼 성에서 혼자 살잖아. 나는 스물다섯 명과 함께 상자에서 사는데 말이야. 상자 속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러면 친구로라도 사귈 수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외다리 병정은 책상 위에 서 있는 깡통 담배통 뒤로 한껏 몸을 길게 뻗고 누웠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한 다리로 균형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그 우아한 숙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었답니다. 병정들은 잠을 자기 위해 모두 상자 속으로 들어갔고, 식구들도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책상 위의 장난감들은 이제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놀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을 하기도 하고 무도회를 열기도 했어요. 그들과 함께 놀고 싶어 병정들은 상자 속에서 몸을 꼼지락 거렸습니다. 그러나 상자 뚜껑을 열 수가 없었답니다.   호두까기는 공중제비를 넘고, 철필은 책상 위를 돌아다니며 즐겁게 웃었습니다. 잠시 소란스런 소리도 났습니다. 카나리아가 잠에서 깨어 수다를 떨기 시작했거든요. 그것도 시를 읊으면서 말이에요. 움직이지 않는 것은, 외다리 병정과 춤추는 무희뿐이었답니다.   그녀는 두 팔을 내뻗고 까치발로 가만히 서 있고, 외다리 병정은 꿋꿋하게 외다리로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답니다.   시계가 열두 시를 쳤습니다. 그러자 털썩 담배통의 뚜껑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담배가 아니라 검은색의 작은 오뚝이 였습니다.   "외다리 병정? 너하고 상관없는 그 숙녀를 쳐다보지 마."   오뚝이가 말했어요. 그러나 외다리 병정은 그 말을 못 들은 체했지요.   "어쭈, 그래 내일까지만 기다려."   오뚝이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침이 되었답니다. 아이들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창가에 그대로 서 있었어요. 그런데 오뚝이의 장난 때문일까요, 아니면 바람 때문일까요. 갑자기 창문이 확 열리면서 외다리 병정은 거꾸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여행이었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공중으로 다리를 뻗고 멋진 칼을 포도 사이에 박은 채 떨어졌습니다.   소년이 금방 달려 내려왔습니다. 소년은 외다리 병정을 밟을 뻔했으면서도 보지 못했어요.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외다리 병정이 외쳤더라면 소년은 금방 찾았겠지요. 하지만 외다리 병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멋진 군복을 입은 병정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빗줄기는 굵어지더니 억수같이 퍼붓는 소나기로 변했답니다.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자 소년 두 명이 외다리 병정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저기 봐!"   한 아이가 말했어요.   "장난감 병정이 있어. 가져가서 종이 배를 태워 줘야겠다."   아이들은 신문지를 찢어 종이 배를 만들고 그 위에 외다리 병정을 태웠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종이 배를 타고 도랑을 따라 떠내려갔습니다. 아이들도 손뼉을 치며 따라왔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억수같이 퍼부은 비 때문에 도랑의 물살이 세어져서 종이 배는 이리저리 요동을 쳤답니다. 어떨 때는 갑자기 휙 돌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외다리 병정은 몸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잘 견뎠답니다.   종이 배는 긴 하수구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몹시 어두워서 꼭 상자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지요.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래, 이게 다 그 오뚝이 때문이야. 아, 이 종이 배에 그 작은 숙녀와 같이 탔다면 캄캄해도 좋을 텐데."   외다리 병정은 겁이 났어요.   그 때 갑자기 하수구에 살고 있는 큰 시궁쥐가 나타났습니다.   "너 통행증 있어?"   시궁쥐가 물었어요.   "통행증 내놔."   외다리 병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단단히 총을 잡았습니다. 종이배가 그 곳을 떠나려하자 시궁쥐가 뒤쫓아 왔습니다. 시궁쥐는 이빨을 드러내고 하수구의 나무 조각들과 지푸라기들에게 외쳤습니다.   저 배를 잡아. 통행료를 안 냈어. 통행증을 보이지 않았단 말이야."   물살은 점점 더 거세졌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간신히 하수구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깜짝 놀랄 만한 쏴쏴 하는 큰 굉음이 들려 왔습니다. 하수구는 곧장 큰 운하와 연결돼 있었답니다. 큰 폭포 속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나 장난감 병정에게나 똑같이 위험한 일이지요.   이제 더 이상 배를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종이 배는 쏜살같이 미끄러졌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그래도 몸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어요. 누가 보더라도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종이 배는 몇 번씩이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습니다. 가장자리까지 물이 가득 찼습니다. 이제 가라앉을 수밖에요!   그래도 외다리 병정은 목까지 물에 잠긴 채 서 있었답니다. 종이 배는 점점 더 깊이 가라앉더니 마침내 종이가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외다리 병정의 머리 위로 물이 덮쳤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그 귀엽고 작은 무희를 생각했답니다. 그 때였습니다. 귓전에 시가 들려 왔습니다.   타고 가려나, 오 전사여!   그대는 죽음을 견뎌야 하느니라!   마침내 종이 배는 두 동강이 나고 외다리 병정은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큰 물고기가 외다리 병정을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 그 안은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하수구보다 더 기분 나쁜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몹시 좁았습니다. 하지만 외다리 병정은 꿋꿋하게 견뎠답니다. 총을 단단히 쥐고 말이에요.   물고기는 이리저리 헤엄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해졌지요.   외다리 병정의 눈앞으로 번개 같은 것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밝은 빛이 들어왔습니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야, 장난감 병정이다!"   그래요, 물고기는 어부에게 잡혀 시장으로 옮겨졌고, 다시 팔려 부엌으로 왔던 것입니다. 한 아주머니가 큰 칼로 배를 가르고 외다리 병정을 꺼내 방으로 가져갔지요.   아이들이 물고기의 뱃속을 여행하고 온 장난감 병정을 보려고 몰려왔어요. 하지만 외다리 병정은 전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아이들은 그를 책상 위에 세워 놓았지요. 그런데 세상에는 참 희한한 일도 있지요! 그 방은 바로 자신이 있던 방이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옛 친구들이 그대로 있고, 귀여운 작은 무희가 서 있는 화려한 성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한 쪽 다리를 높이 세운 채 나머지 다리로 서 있었답니다. 그녀 역시 꿋꿋했지요. 그 모습을 본 외다리 병정은 감동했어요.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참았답니다.   외다리 병정은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 역시 외다리 병정을 바라 보았지요, 그러나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 하나가 외다리 병정을 집더니 곧장 난로 속에 집어 넣는 게 아니겠어요? 그 아이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깡통 속에 들어있는 오뚝이 때문이었을 거예요.   외다리 병정은 불 속에 서 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열을 느꼈지요. 그러나 그 열이 실제 불길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붉고 푸른 색깔이 다 벗겨져 나갔어요. 여행 중에 그렇게 된 것인지 근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아무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다리 병정은 그 작은 숙녀를 바라보았답니다. 그녀도 외다리 병정을 바라보았지요. 이제 외다리 병정은 천천히 녹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총을 들고 꿋꿋하게 서 있었답니다. 그 때 문이 열리더니 바람이 그 숙녀를 붙잡았습니다.   그녀는 마치 공기의 요정처럼 외다리 병정에게로 날아왔어요. 그리고는 불꽃 속에 타올라 사라져 버렸답니다. 물론 외다리 병정도 다 녹아 버렸지요.   다음 날 아침, 난로에서 하녀가 재를 끄집어냈을 때 그녀는, 외다리 병정의 주석이 작은 하트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숙녀에게서는 금박 장미만이 남아 있었지요. 석탄처럼 까맣게 타 버린 모습으로.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   1   "어제 점심 식사는 굉장했었어요."   늙은 쥐 부인이 향연에 참석하지 않았던 다른 쥐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늙은 쥐 대왕님 옆 21번 좌석에 앉아 있었어요. 모든 것이 훌륭했답니다. 음식들도 아주 잘 차려졌었지요. 곰팡이가 난 빵, 베이컨 껍질, 수지 초와 소시지, 그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같은 음식들이 나왔지요. 그것은 우리들이 두 끼 식사를 대신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어요. 마치 가족간의 모임처럼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유쾌한 농담들이 오갔죠. 소시지 꼬챙이밖에는 단 한 조각도 남은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했어요.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끓일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모두들 그런 수프를 만드는 법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모두가 입을 다물었어요. 그것을 생각해 낸 이의 건강을 위해 멋지게 축배를 들었지요. 그는 장차 가난한 자들의 대표가 될 것이랍니다. 그 때 대왕님께서 일어나셔서 젊은 여자 쥐 중에서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가장 맛있게 끓일 수 있는 쥐는 자신의 부인으로 맞겠다고 약속했답니다. 대왕님은 단 1년 동안 시간을 주었지요."   "그것 좋은 생각이로군요."   다른 쥐 부인이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수프를 어떻게 만들까요?"   "그래요, 그걸 어떻게 만드는가? 젊거나 늙은 여자 쥐들이 똑같이 물었죠. 누구나 왕비가 되고 싶었답니다. 마지못해 하는 노력이긴 했어도, 그것을 배우기 위해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지요. 그래요, 그걸 필요가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팽개치고 떠나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는 않았죠. 먼 길을 떠나면, 치즈 껍질이 날마다 길위에 있을 리 없고, 베이컨 껍질 냄새도 맡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아니, 결국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될 거예요. 그럼요, 결국엔 고양이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거라구요."   이런 생각들이 탐문 여행에 나서려는 쥐들을 위협했었죠. 결국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젊고 장애가 없고 가난한 네 마리의 쥐들뿐이었답니다.   그녀들은 각자 동서남북 중의 한 방향으로 가기로 했답니다. 누구에게 행운이 오느냐는 거기에 달려 있죠. 무엇 때문에 그들이 길을 떠났는가를 잊지 않도록 각자 소시지 꼬챙이 하나씩 챙겼답니다. 그것은 그녀들의 지팡이 노릇도 할 것입니다.   그녀들은 5월 초에 그곳에서 떠났어요. 그리고 1년 후인 5월 초에 돌아왔어요. 그러나 돌아온 쥐는 셋뿐이었고 네 번째 쥐에게는 아무런 소식 조차 없었어요. 며칠 뒤, 드디어 결정의 날이 왔습니다.   "가장 큰 기쁨은 항상 슬픔을 동반하는구나!"   대왕 쥐는 그렇게 말하면서 몇 마일 내의 모든 쥐들을 초대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그들은 모두 부엌에 모였답니다. 여행을 떠났던 세 마리의 쥐들은 한 줄로 섰고, 오지 못한 네 번째 쥐를 위해서는 검은 상장을 휘감은 소시지 꼬챙이를 세웠어요. 그 세 마리 쥐들이 말하기 전이나, 계속해서 말하라는 대왕 쥐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 안 되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       2   "제가 넓은 세상으로 나갔을 때^5,5,5^."   작은 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제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얘기한 것처럼 제가 세상의 지혜를 섭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그 사건이 있기까지 세월이 걸렸죠. 저는 곧바로 바다로 갔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배를 탔지요. 거기서 저는 배의 요리사가 어떻게 혼자서 요리를 해결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베이컨 조각과 소금에 절인 고기들, 그리고 곰팡내 나는 밀가루를 가진 사람이라면 음식 장만쯤 혼자서 해결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맛있게 먹고 살더군요. 그러나 사람들은 어떻게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만드는가는 모르고 있더군요. 우리는 여러 날을 항해했습니다. 배는 흔들렸고 배 안까지 물이 들어와 모든 것이 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표했던 곳에 닿았을 때 저는 배에서 나왔습니다. 그 곳은 아주 북쪽이었어요.   집에서 떠난다는 것, 또 하나의 생활인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 그리고 갑자기 수백 마일 멀리 떨어져 낯선 땅에 서 있게 된 것은 특별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소나무와 자작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그 숲에서는 아주 강한 냄새가 났습니다. 저는 그 냄새가 싫었어요. 야생 식물들은 그렇게 강렬한 냄새가 나더군요. 그 곳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는데, 그 호수는 가까운 곳에서는 아주 맑게 보였지만, 멀리서는 잉크처럼 검게 보였습니다. 백조들이 호수에서 헤엄을 치는데 어찌나 조용히 떠 있던지 저는 거품인 줄 알았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들이 나는 것도 보고 뛰는 것도 보았죠. 그 때야 저는 그들을 다시 알아봤어요. 그들은 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위 종류에 속해요. 누구도 그와 같은 종족임을 부인할 수 없죠. 저는 저를, 요리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 야생쥐나 들쥐와 다르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제가 외국으로 갔었던 거죠.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끓인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곧바로 숲 전체로 퍼졌지요.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 방법을 알아 낼 수가 없었죠. 그래도 저는 최소한 그 곳에서, 게다가 그 밤안에 조리 방법이 전수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때는 한여름이었죠. 그래서 숲은 더욱 강한 향기를 내뿜고, 호수들이 그처럼 맑으며 흰 백조들이 떠 있을 때는 물빛이 더욱 검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숲가에 있는 서너 집 사이에 큰 돛대처럼 막대가 높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꼭대기에는 화관과 리본이 달려 있었지요. 그것은 메이폴(서양에서 5월 1일 광장에 세우고 꽃리본으로 장식하는 기둥. 그 주위에서 춤을 추며 즐김)이었습니다.   소녀들과 소년들은 빙 둘러서 춤을 추었고, 바이올린 켜는 사람과 경쟁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노래하였습니다. 노랫소리는 석양과 달빛 속에서도 흥겹게 계속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숲의 향연에서 한 작은 쥐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저는 부드러운 이끼 속에 앉아서 소시지 꼬챙이를 꽉 잡았어요. 달빛은 특이한 이끼가 낀 나무를 비추었습니다. 이끼는 정말 부드러웠죠. 그래요, 말하자면 대왕님의 털처럼 그렇게 부드러웠습니다. 달빛은 녹색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과도 같이 보였을 겁니다.   그 때 갑자기 깜짝 놀랄 만큼 작은 사람들이 행진해 왔습니다. 그들은 겨우 제 무릎에나 닿을 만큼 작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훨씬더 균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요정이라 불렀는데, 파리와 모기의 날개 장식이 달린 꽃잎으로 만든, 섬세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었을 때는, 저는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몇 명이 내게로 와서 그들 중의 대표가 내 소시지 꼬챙이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우리는 바로 그것이 필요해요! 그것은 똑바로 잘라졌어요. 아주 알맞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제 지팡이를 바라보며 점점 더 만족해 했습니다.   '좋아요. 빌려 주겠어요. 그러나 돌려 주셔야 합니다.'   '갖지 않을게요.'   그들이 동시에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건네자, 그들은 그 소시지 꼬챙이를 잡고서 춤추는 듯한 발걸음으로 곱게 이끼 낀 장소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꼬챙이를 녹지 한가운데에 세웠습니다. 그들도 메이폴을 갖고 싶었는데 마치 그러기 위해 잘라 놓은 것처럼 소시지 꼬챙이는 그들의 메이폴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꼬챙이는 장식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요, 이제 소시지 꼬챙이는 달라 보였어요.   작은 거미들은 그 나무 둘레를 금빛 거미줄로 짜고, 곱게 짜여진 달빛속에서 눈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거리는 베일과 깃발들을 매달았습니다. 요정들은 나비 날개에서 물감을 만들어 하얀 천 위에 떨어뜨려, 꽃과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소시지 꼬챙이를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메이폴은 세상에 다시 없는 것이었어요. 그런 후에야 정말 곱고 예쁜 옷을 입은 많은 요정들이 왔습니다. 저는 그 장관을 볼 수 있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그러나 멀리서만 볼 수 있었죠. 왜냐하면 제가 요정들에 비해서 너무 컸으니까요.   드디어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천 개의 유리 종들이 한꺼번에 올렸을 때, 백조들이 노래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뻐꾸기와 개똥지빠귀들의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어요. 마지막에는 숲 전체가 함께 노래하였지요. 그것은 아이들의 노랫소리, 종소리와 새들의 노래가 만드는 감동스런 가락이었습니다. 이 모든 훌륭한 것은 요정의 메이폴에서 흘러나왔고, 그것은 최고의 종소리 연주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소시지 꼬챙이였습니다. 저는 소시지 꼬챙이에서 그처럼 많은 것이 터져 나오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감동하였습니다. 커다란 기쁨으로 눈물까지 흘렸지요.   그 밤은 너무나 짧았어요. 밤은 더 이상 그 곳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동이 트자 호수에 잔물결이 일게 하는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섬세하고 하늘거리던 베일과 깃발들은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거미줄로 엮은 흔들거리는 정자나, 구름 다리들과 난간들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섯 명의 요정들이 제게 와서 소시지 꼬챙이를 돌려 주었습니다. 요정들은 자기들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정들에게 어떻게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끓일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 당신이 바로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당신은 당신의 소시지 꼬챙이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정들의 대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 그걸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어떻게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고향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대략 설명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쥐 대왕님과 우리의 거대한 왕국의 모든 이에게 내가 이처럼 기적 같은 광경을 보았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소시지 꼬챙이를 흔들면서 말할 수는 없어요, 보라, 여기 꼬챙이가 있다. 이제 수프가 나온다. 이미 배가 부르다면, 어떤 요리 같은 것이 있을 텐데^5,5,5^.'   그 때 요정이 작은 손가락을 바이올렛 꽃 속에 넣으면서 말했습니다.   '잘 보세요. 당신의 지팡이에 칠을 해 주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대왕 쥐의 성으로 돌아갔을 때, 그 막대로 대왕의 따스한 가슴을 건드리면 막대둘레 전체에서 바이올렛이 피어나게 될 거예요. 한겨울일지라도. 집에가면 당신은 이 막대에서 항상 무엇인가를 얻게 될 거예요. 게다가 약간의 덤까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덤이 무엇인지를 쥐가 말하기 전에 대왕은 막대를 가슴에 들이댔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장말 아름다운 꽃다발이 피어났습니다. 그 꽃의 향기는 대왕 쥐가 쥐들에게, 괴상한 냄새가 나도록 곧바로 쥐들의 꼬리를 굴뚝의 불 속에 넣어야 한다고 명령할 만큼 강한 냄새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바이올렛의 향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이올렛 향기가 아닌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이야기하였던 덤이라는 게 무엇이었느냐"   대왕 쥐가 물었습니다.   "예,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백미라 일컫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그 쥐는 소시지 꼬챙이를 돌렸습니다. 그러자 꽃들이 사라지고 쥐는 민둥민둥한 꼬챙이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쥐는 그 막대를 지위봉인 양 높이 들었습니다.   "바이올렛 꽃들은 눈을 위해, 냄새를 위해, 그리고 감각을 위해' 라고 요정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밖에 귀와 혀를 위한 어떤 것이 있지요."   그리고 나서 쥐는 막대로 박자를 쳤습니다. 그러자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숲속 요정들의 축제에서 울려 퍼지던 그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그 음악은 부엌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었어요. 그래요, 그것은 엄청난 소리였습니다. 아주 갑작스런 바람이 모든 불구멍으로 분 것처럼 주전자와 냄비들이 끓어 넘치고 부젓가락은 구리 주전자를 진동시키고 나서 단번에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신비한 찻주전자의 조용한 노래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중단되었는지, 시작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작은 냄비가 끓고, 큰 냄비가 끓었습니다. 냄비들은 전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작은 쥐는 지휘봉을 계속해서 격렬하게 흔들었습니다. 냄비들에서 거품이 일었고 부글부글 끓어 올랐으며, 흘러 넘쳤습니다. 바람이 불어 왔고, 굴뚝은 피리 소리를 냈습니다 그것은 작은 생쥐도 자기의 막대를 떨어뜨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수프로구나! 지금 음식은 안 나오느냐?"   늙은 대왕 쥐가 말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작은 쥐가 말하면서 무릎을 끓고 절을 하였습니다.   "이게 전부라고? 좋아, 그럼 다음 쥐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자."   대왕 쥐가 말했습니다.     ------       3   "저는 성의 서재에서 태어났죠."   두 번째 쥐가 말했습니다.   "저와 저의 많은 친척들은 그 곳에서 식당이 있는 방으로 갈 수 있는 행운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부엌으로까지야 이를 말이겠습니다.   제가 여행길에 올랐을 때와 바로 오늘 여기서 처음 부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재에서 약간 배가 고프게 지냈지만 많은 지식을 섭렵했습니다. 그 곳에 있었던 우리에게,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만들면 상을 주겠다는 소문이 들려 왔고, 곧바로 늙은 할머니가 제게 오셨습니다.   할머니는 한 편의 원고를 꺼내셨습니다. 할머니는 원고를 읽을 수 없었지만 읽는 것을 들을 수는 있었지요. 거기에 씌어 있기를 '시인이라면 소시지 꼬챙이로 수프를 끓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시인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했고, 할머니는 그렇다면 제가 시인이 될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인이 되기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여쭤 봤어요. 왜냐하면 시인이 되는 것은, 그 수프를 끓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으니까요. 할머니께서는 책에 나온대로라면 세 가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고력, 환상, 그리고 느낌 네가 그것들을 간직할 수 있다면 너는 시인이 된단다. 그러면 너는 소시지 꼬챙이로 그 수프를 끓일 수 있단다.'   그리하여 저는 시인이 되기 위해 서쪽의 먼 세상으로 나갔어요. 저는 사고력이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맨 먼저 사고력을 찾기 위해 바깥 세상으로 갔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개미들에게 가면 지혜로워질 거라고 유대 나라의 왕이 말했었죠. 저는 그것을 서재에서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커다란 개밋둑에 닿을 때까지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나아갔어요. 지혜롭게 행동하기 위해 저는 그 개밋둑 옆에 몸을 숨기고 기다렸죠.   개미들은 아주 복종심이 강한 종족입니다. 정말 뛰어난 사고력도 가지고 있지요. 그들은 모든 것들을 정말 자로 잰 듯한 계산 문제같이 풀어 버립니다. 개미들은 노동과 알 낳는 일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후세를 위해 물려주는 것이라 했고, 그대로 행합니다. 개미들은 깨끗하고도 끈적끈적한 개미들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들에겐 서열이 있지요. 여왕개미가 제1호입니다. 그녀의 의견이야말로 최상의 그리고 유일한 진리입니다. 여왕개미는 매우 지혜로웠으며 그 지혜를 경험하는 것은 제게 중요하였습니다. 그녀는 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는데 대단히 지혜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물론 제가 보기엔 종종 어리석은 점도 있었지만,   여왕개미는 자신의 개밋둑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개밋둑 바로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어요. 그 나무는 개미보다 훨씬 더 높았지요. 누가 봐도 분명한 것이었죠. 그렇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밤, 개미 한 마리가 길을 잃고, 그 나무줄기로 기어 올라갔습니다.꼭대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떤 개미도 가 보지 못했던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개미는 가까스로 집에 돌아와서 개밋둑 바깥에 있는 훨씬 높았던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개미들은 그가 전체 사회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개미에게 마스크가 씌워지고 한없이 외로움을 당해야 하는 형벌에 처해졌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또 다른 개미 한 마리가 그 나무에 오르게 되었고, 똑같은 여행을 하고서 똑같은 발견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개미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 사실을 신중하면서도 암시하듯이 이야기했습니다. 게다가 그 개미는 품행이 바른 개미로 존경 받는 개미였으므로 이번엔 그 개미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 개미가 죽자, 다른 개미들은 알껍질을 그녀의 기념석으로 세워 주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 그 개미를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쥐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저는 개미들이 계속해서 자기들의 알을 등 위로 올려 운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개미가 자기의 알을 떨어뜨리면, 그것을 다시 들어올리는데 아주 힘들어 합니다. 그 때 그 개미 가까이에 있던 두 마리의 다른 개미들이 와서 힘을 내어 돕는답니다. 자기들이 등에 지고 있던 알을 놓아 버리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개미들은 곧바로 그 알들이 제자리에 놓이게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스스로 다음 개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왕개미는, 이것이 바로 가슴과 사고력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두 가지 특성들이 우리 개미들을 이상적 동물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평가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고력은 아주 중요한 것이며, 또 모두가 그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가장 많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왕 개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맨 뒤에 있는 다리들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저는 여왕 개미를 가지면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개미를 삼켜 버렸지요. 개미에게 가라, 그러면 지혜롭게 되리라. 이제 나는 그 여왕개미의 사고력을 가진 것입니다.   저는 곁에 있는, 아까 언급했던 높은 나무 가까이로 갔습니다. 그 나무는 떡갈나무였습니다. 떡갈나무는 높은 줄기와 거대한 나무관을 갖고 있었는데, 아주 나이가 많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드루야데(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무 요정)라 불리는 여자가 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나무와 함께 태어나고 나무와 함께 죽는답니다. 저는 예전에 서재에서 그 여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떡갈나무 여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무서운 소리를 냈습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쥐들에 대해 아주 불안해 했지요. 더욱이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도 훨씬 더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나무를 깨물어 뜯어 구멍을 낼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죽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었지요. 저는 친절하게 말을 걸며 그녀에게 접근해서 용기를 주었어요. 그리하여 그녀는 나를 믿고 그녀의 고운 손 위에 올려놓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제가 넓은 세상으로 나왔는가를 알고서는, 그 날 밤에 아직 찾아 헤매고 있는 그 두 가지 보물 중의 하나를 얻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판타수스와 그녀는 아주 잘 아는 친구인데, 판타수스는 사랑의 신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뭇가지밑에 앉아 있었으며, 나뭇가지들로 살랑살랑 소리를 내면서 안정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습니다.   판타수스는 그녀를 자신의 드루야데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판타수스는 모든 나무를 자신의 나무라고 하고, 특히 마디가 있고 힘이 있는 아름다운 떡갈나무는 놀랄 만큼 자기 뜻대로 자라난 것이라고 드루야데에게 말하였습니다. 땅 속에 깊고 단단하게 뿌리가 내려져 있으며 나무 줄기와 수관은 공중에 높이 솟아 몰아치는 눈과 매서운 바람, 그리고 따뜻한 햇살을 알고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이런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새들은 저 위에서 노래하고 낯선 나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뿐인 메마른 가지 위에 황새는 보금자리를 짓는다. 그것은 멋진 장식물이고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나라에 대해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된단다. 이 모든 것을 판타수스는 아주 좋아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는 만족스럽지 않아 하거든. 그래서 나는 그에게 숲 속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한단다. 나도 그 나무도 모두 어렸을 때, 그래서 쐐기풀들로 덮일 만큼 작았던 그 나무가 크고 거대하게 자라난 동안의 이야기 말이야, 자, 거기 밑에 앉아 산림 감시원이 오는지 잘 보렴. 판타수스가 오면 기회를 보아 그의 날개에서 작은 깃털을 뽑아 줄테니 그 깃털을 가지렴. 어떤 시인도 아직 더 좋은 것을 갖지 못했단다. 그것이라면 충분할 거야.'   잠시 후 판타수스가 왔을 때, 드루야데는 제게 그의 깃털을 뽑아 주었습니다. 저는 깃털을 가졌어요."   작은 쥐가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깃털을 부드럽게 될 때까지 물 속에 담갔어요. 처음에는 소화시키기가 힘들었지만, 저는 그걸 다 깨물어 먹었답니다. 단지 시인이 되겠다는 마음만으로 그것을 다 씹어 먹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이 막히도록 삼켜야 되는 커다란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제 저는 그 두 가지, 즉 사고력과 상상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고력과 상상력의 힘을 빌어, 저는 세 번째 것은 서재에서 찾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 인간들이 넘치는 눈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기 위해 소설이 있다고 글로 쓴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펀지처럼 그 내부로 감정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 책들 중에서 몇 권이 떠올랐습니다. 언제나 흥미를 돋우는 낡고 반점투성이의 책들이었습니다. 그 책들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기 자신 안에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향의 서재로 와서 곧바로 소설 한 권을 거의 다 먹었습니다. 거의 다 먹었다는 것은 책의 겉표지, 즉 책의 연한 본체는 다 먹고 표지는 놔 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그 소설을 소화시켰을 때, 저는 그것이 제 속을 휘젓는 것처럼 느꼈어요. 세 번째 것 중에서 가장 어렵게 소화를 시킨 것이지요. 그 때부터 저는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머리와 창자에 아픔을 느꼈지요. 저는 소시지 꼬챙이 때문에 어떤 이야기가 엮어졌는지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나무들이 제 감각 속에 떠올랐습니다. 그 여왕개미는 독특한 사고력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입에 흰 막대를 물었다가는 그 막대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했던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나무 머리들, 나무 사내들, 나무 사과들, 그리고 우리들 관에 박힐 못들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나무로 만들어졌어요. 시인이라면 그런 이야기들로 시를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힘껏 노력하여 시인이 되었지요. 저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에게 1주일 내내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저의 수프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세 번째 쥐의 이야기를 듣기로 하자."   대왕 쥐가 말하였습니다.   그 때 부엌 문 쪽에서 찍찍!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네 번째 쥐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왔습니다. 그 쥐는 헐떡거리면서 검은 베일을 단 소시지 꼬챙이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매우 흐트러진 몰골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쥐는 소시지 꼬챙이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말은 잃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쥐는 마치 모두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쥐는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곧 이야기를 마쳐 버렸지요. 쥐는 그렇게 예기치 않게 왔으며, 이야기하는 동안에 아무도 그 쥐와 그 이야기에 대해 열중할 시간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       4   "저는 곧바로 가장 큰 도시로 갔어요."   네 번째 쥐가 말했습니다.   "그 도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저는 압류된 물건들에 실려 시청으로 갔습니다. 제가 탔던 기차에 압류된 물건들이 실려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나서 저는 붙잡힌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감시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특히, 분별 없던 일들에 대해 말했던 어떤 죄수 이야기를 가장 신나게 했지요. 그렇게 분별 없는 일들은 당연히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지요.   '그 모든 것은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에 지나지 않아. 그러나 그 수프가 그에게는 목숨에 관계되는 일일 수도 있어.'   이렇게 해서 저는 그 죄수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회를 틈타 그 죄수가 있는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닫힌 문들 뒤에 있는 쥐구멍으로 쉽게 들어갔지요. 갇혀 있는 그 죄수는 창백한 얼굴에 긴 수염과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등불이 그을음을 내며 타올랐지만, 벽들은 이미 그을릴 대로 그을려 더 이상 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죄수는 검은 바탕에 하얗게 그림을 그려 자국을 내고, 거기에 시를 써 넣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들을 읽지 못하였지요. 그는 몹시 지루해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저를 보자 무척 기뻐했지요. 그는 말랑말랑한 빵으로 저를 유혹하여 자기 쪽으로 오게 하였으며, 휘파람과 부드러운 말로 저를 꾀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서로 친해지게 되었답니다. 그와 나는 빵과 물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는 내게 치즈와 소시지를 선물해 주기도 했지요. 그렇게 그 곳에서의 생활은 멋진 것이었죠.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와 제가 참 좋은 관계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저를 그의 손과 팔 위로 돌아 다니게 하였고 소매 속에서도 놀게 하였답니다. 그는 저를 자기의 수염 속에서도 기어다니게 하였으며, 작은 여자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도 저를 사랑했지요. 그러다가 저는 제가 넓은 세상 밖으로 나와 무엇을 하려 했던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소시지 꼬챙이도 마룻바닥 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 막대기는 아직도 그 곳에 있겠지요 저는 제가 있던 곳에 머물려고 했었습니다. 제가 떠나 버렸다면 그 불쌍한 죄수에겐 정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그 곳에 머물렀지만, 그가 영원히 그 곳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주 슬프게 제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때보다 두배나 많은 빵과 치즈 껍질을 선물했고, 저의 손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곤 그는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후의 그의 이야기를 알지 못합니다. 그제야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 라고 맨 처음 말했던 간수가 생각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 간수에게 갔지만 그는 저를 귀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를 손 위에 올려놓기는 했지만 저를 우리 속에, 죄수에게 벌로 밟게 하는 답차에다 넣어 버렸습니다. 너무해요, 달려도 달려도 좁은 답차 안일 뿐,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죠.   그 때 금발의 고수머리, 기쁨에 가득 찬 눈과 항상 미소 짓는 입을 가진 그 간수의 손녀가 다가왔어요. 그 아이는 매력적인 아이였어요. '불쌍한 작은 쥐야!' 라고 말하면서 제가 갇힌 지긋지긋한 우리를 굽어보더니 쇠로 된 걸림쇠를 뽑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창문 홈통과 추녀 홈통을 통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자유, 자유다. 저는 오직 그것만을 생각했고 여행 목적은 생각나지도 않았어요.   그 때는 너무 깊은 밤이라 어두웠습니다. 저는 옛 탑 속에서 피난처가 될 만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 곳에는 파수꾼 한 사람과 부엉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 둘 다 믿지 않았습니다. 부엉이는 고양이처럼 쥐들을 잡아먹지요. 그에 비하면 사람은 때때로 어리석기도 하죠. 하지만 그 부엉이는 존경스러울 만큼 대단히 교양 있는 늙은 부엉이였어요. 파수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젊은 부엉이들은 아주 작은 일까지도 그 부엉이에게 하소연했습니다.   늙은 부엉이는 소시지 꼬챙이로는 수프를 만들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그 부엉이가 말할 수 있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부엉이는 부엉이 가족들에게서 깊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저 또한 제가 겪었던 그 고난에서 빠져 나왔다는 안도감과 부엉이에 대한 신뢰감을 느꼈습니다. 저의 그런 신뢰감이 부엉이 맘에 들었던지, 부엉이는 제가 자신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어떤 동물도 저한테 나쁘게 굴 수 없게 되었지요. 하지만 부엉이의 속뜻은 음흉했습니다. 겨울에 양식이 다 떨어져 가면 저를 먹으려는 수작이었죠.   부엉이는 매우 영리했습니다. 파수꾼은 느슨하게 걸려 있는 나팔이 없이는 울부짖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 파수꾼은 나팔에 대해 대단한 자만심을 갖고 있지. 말하자면 그는 종루 속의 부엉이야. 대단한 것일 수도 있고 하찮은 것일 수도 있지.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나 마찬가지라구.'   저는 그 부엉이에게 비법을 알려 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고, 그 부엉이는 드디어 제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란 단지 사람들이 말하는 표현 방법이지. 그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단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 자체는 원래 없는 거야.'   '없는 것이라구요.'   저도 모르게 소리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말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거든요.   '진실이란 항상 달콤하지만은 않지. 하지만 진실이 최고란다.'   그 늙은 부엉이는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제가 만약 최상의 것을 가져간다면,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 때 저는, 때맞춰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또 최상의 것과 최고의 것을 가져오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진실을 전하기 위해   쥐들은 깨어 있는 종족이고 쥐 대왕님께서는 그들보다 훨씬 월등하십니다. 쥐 대왕님께서는 진실을 위해 저를 왕비로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야! 저는 그 수프를 끓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해 보이겠습니다."'   아직 말하지 않은 세 번째 쥐가 소리쳤습니다.     ------       5   "저는 여행하지 않았어요. 저는 이 땅에 있었어요. 이것이 유일한 진실입니다. 여행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이 곳에서도 똑같이 얻을 수 있어요. 저는 여기 있었다구요. 저는 수프 만드는 법을 초자연적인 것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무엇을 갉아 먹지도 않았고, 부엉이와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제 생각대로 만들었어요. 자, 물을 가득 붓고 솥을 좀 걸어 주세요. 불을 지펴 물을 끓여 주세요. 충분히 끓여야 합니다. 이제, 소시지 꼬챙이를 던져 넣으세요. 친절하신 대왕님, 당신의 꼬리를 충분히 끓고 있는 물 속에 넣고 저어 주십시오. 오랫동안 저으면 저을수록 수프는 점점 더 진해집니다. 돈 한푼 들지 않습니다. 조미료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젓기만 하면 됩니다."   세 번째 쥐가 말했습니다.   "다른 쥐가 할 수는 없느냐?"   대왕 쥐가 물었습니다.   "안 됩니다. 이러한 힘은 오직 대왕님의 꼬리에만 있습니다."   그 쥐가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 물은 펄펄 끓어 올랐고, 대왕 쥐는 솥 가까이에 섰습니다. 매우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쥐들이 우유 창고에서 양푼 속의 연유를 퍼내고 나서 꼬리에 묻어 있는 연유를 핥듯이 자신의 꼬리를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대왕 쥐는 뜨거운 증기만 쏘였을 뿐, 더 이상 꼬리를 내밀지 못했습니다.   겁먹은 대왕 쥐가 급히 되돌아 내려오며 소리쳤지요.   "너야말로 나의 왕비로다! 그 수프는 우리의 금혼식까지 기다리기로 하자. 그리고 내 왕국의 가난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식량을 나누어 주어라. 모두가 기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 그들은 결혼 잔치를 베풀었어요. 그러나 쥐들 중의 몇몇은 집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라고 말할 수는 없고, 정확히 말하자면 쥐꼬리 수프였어요."   그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라면 그렇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텐테^5,5,5^."   그것이 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지혜로운 것입니다. 언제까지라도.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나라마다, 또 사람마다 서로 견해가 달랐지만 원래의 이야기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서도,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소시지 꼬챙이로 만든 수프'는 옛날 덴마크에서 쓰던 관용어로 헛수고, 공연한 소동이라는 뜻)   메밀       뇌우가 치고 난 뒤 메밀밭을 지나가다 보면 메밀이 까맣게 탄 것을 볼 수 있답니다. 불길이 스쳐 지나간 듯한 모양을 하고 있지요. 그러면 농부들은 이렇게 말한답니다.   "벼락을 맞았군."   왜 메밀은 벼락을 맞았을까요?   참새가 얘기해 준 것을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들려 줄게요. 참새는 메밀밭에 서 있는 늙은 버드나무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정말 굉장히 큰 버드나무인데, 지금은 몹시 늙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운데가 둘로 쪼개져있지요. 그 쪼개진 틈으로 풀과 딸기 넝쿨들이 마구 자라나 있답니다. 또 초록색 머릿결 같은 가지들이 완전히 땅바닥까지 늘어져 있습니다.   들판에는 호밀, 보리, 그리고 메귀리 들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메귀리는 작은 노란색 카나리아들이 한 무더기 앉아 있는 것처럼 근사하게 보인답니다. 그리고 이식이 무거워질수록 겸손하게 더욱 깊이 머리를 숙이지요.   메밀밭은 바로 버드나무 반대 편에 있었습니다. 메밀은 다른 곡식들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거만하고 뻣뻣하게 높이 고개를 쳐들었습니다.   "나도 다른 곡식들처럼 부자야. 게다가 나는 훨씬 더 예뻐. 사과나무꽃처럼 아름답지. 내 친구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늙은 버드나무야, 우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알고 있니?"   버드나무는 '그래, 물론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요. 메밀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보 같은 늙은 나무 같으니라구! 몸에서 풀들이 마구 자라다니."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려왔답니다. 모든 들꽃은 폭풍이 몰려오자 잎들을 접거나 연약한 머리를 숙였지요. 하지만 메밀은 오만하게 머리를 높이 들었습니다.   "우리처럼 머리를 숙여."   꽃들이 말했지요.   "난 그럴 필요가 없어."   메밀은 꽃들을 비웃었어요.   "우리처럼 고개를 숙여."   곡식들도 외쳤어요.   "이제 폭풍이 몰아칠 거야. 폭풍은 구름에서부터 땅에까지 이르는 진동을 몰고 온단다. 네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기도 전에 널 뚫고 지나가 버릴 거야."   "그래? 그래도 나는 굽히지 않겠어."   메밀은 말했어요.   "네 꽃을 닫고 잎을 숙여. 구름이 쪼개질 때 절대로 번개를 올려다보지마.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아. 만약 그렇게 하면 곧 장님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야. 하물며 사람보다 훨씬 못한 우리가 감히 그런다면 어떻게 되겠니!"   늙은 버드나무도 말했지요.   "사람보다 훨씬 못하다고?"   메밀이 말했지요.   "좋아, 하늘을 똑바로 올려다볼 테다!"   그래요, 오만한 메밀은 정말 그렇게 했답니다. 온 세상이 불길 속에 휩싸일 것처럼 번개가 쳤는데도 말이에요.   폭풍우가 지나가자 꽃들과 곡식들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고요하고 순수한 대기 속에 일어섰답니다. 그러나 메밀은 번개를 맞아 석탄처럼 까맣게 되어 버렸지요. 시든 잡초가 되어 버린 것이랍니다.   늙은 버드나무는 바람 속에서 가지들을 흔들었지요. 녹색 앞에서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마치 나무가 우는 것처럼요.   참새들이 늙은 버드나무에게 물었지요.   "왜 우세요? 이 곳은 축복 받는 곳인데요. 보세요, 해님이 비치는 것을. 보세요,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꽃 향기를 맡지 못하세요? 늙은 버드나무님, 왜 우세요?"   버드나무는 메밀의 오만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답니다. 그리고 언제나 따라 다니는 천벌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지요.   참새들이 들려 준 이야기가 어때요? 참새들은 내가 동화를 하나 해 달라고 조르자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답니다.   돼지치기 소년 ㅡ 안데르센   아주 작은 왕국에 가난한 왕자가 살고 있었답니다. 왕자는 왕국을 갖고 있긴 했지만 아주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결혼을 할 정도로는 넓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왕자가 감히 황제의 따님에게 "나를 사랑하오?" 하고 물어 본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왕자는 그렇게 했답니다. 왕자는 아주 유명했으니까요. 그말을 다른 공주들에게 했다면 아마 모든 공주들이 "네" 라고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과연 황제의 따님이 그렇게 할까요?   자, 이제 어떻게 되었는지 보기로 해요.   왕자의 아버지의 무덤 위에는 아름다운 장미 덤불이 자라고 있었답니다. 장미 덤불은 5년마다 꽃을 피웠지요. 오직 한 송이의 장미꽃을. 그 장미꽃은 어찌나 달콤한 향기를 풍겼던지 향기를 맡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어버린답니다. 왕자는 또 온갖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나이팅게일도 한마리 가지고 있었지요,   왕자는 장미꽃과 나이팅게일을 은으로 만들어진 상자 속에 넣어서 공주에게 보냈답니다.   황제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선물을 보고는 기뻐서 박수를 쳤지요. 하지만 공주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암고양이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시녀들은 찬란한 장미꽃을 보며 감탄을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미인가!"   황제도 탄성을 질렀답니다.   "정말 매혹적인 장미로구나!"   그러나 공주는 장미를 만져 보더니 실망한 듯 말했지요.   "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거예요."   황제는 공주를 달래며 말했지요.   "화를 내기 전에 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도록 하자."   이번에는 나이팅게일이 나왔어요. 나이팅게일이 어찌나 아름답게 노래했던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답니다.   "정말 훌륭해!"   시녀들이 말했어요.   "저 새가 황후 폐하의 자동 주악기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한 늙은 기사가 말했지요.   "그래, 정말 똑같은 음조에 똑같은 연주야."   그러나 공주는 울 듯이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노래를 부를 수는 없나요?"   그러자 새를 가져왔던 사람들이 말했지요.   "네, 이 새는 살아 있는 새랍니다."   "그러면 새를 날아가게 내버려두세요."   그러면서 공주는 왕자가 오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왕자는 실망하지 않았지요. 왕자는 초라한 모습으로 변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찾아갔지요.   "안녕하십니까? 황제님, 제가 이 궁전에서 일할 수 없을까요?"   그래? 일을 찾는 사람들은 참으로 많지. 그렇지만 어디 보자. 마침 돼지를 돌보는 사람이 하나 필요한데, 아주 잘됐구나."   그래서 왕자는 돼지치기가 되었답니다. 돼지우리에 작고 초라한 방 하나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왕자는 온종일 일을 했지요. 그리고 저녁에는 작고 귀여운 냄비를 하나 만들어 냄비 둘레에는 방울들을 달았지요. 음식을 끓이면 냄비는 아름다운 노래를 연주한답니다.   아, 너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 것이 끝났구나, 끝났구나!   이 냄비는 신기한 요술을 부렸습니다. 냄비가 끓을 때 내는 김 속에 손가락을 대기만 하면 어떤 집에서 어떤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금방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요. 신기한 요술이지요?   하루는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산책을 나왔답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공주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자신도 '아, 너 사랑스러운 아우구스틴!' 을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공주는 손가락 하나로 연주할 수 있답니다.   "나도 연주할 수 있는 거야. 아주 교양 있는 돼지치기로구나. 애들아, 돼지치기에게 가서 그 악기가 얼마인지 물어 보아라."   시녀 한 사람이 돼지치기에게 가서 물었지요.   "그 냄비를 얼마면 팔겠니?"   "공주님이 입맞춤을 열 번 해 주면 그냥 주지."   "뭐라고?"   "그러지 않으면 절대로 줄 수 없어."   공주는 시녀의 말을 듣고 몹시 화를 냈답니다.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그러면서 공주가 직접 갔습니다. 그 때 다시 종소리가 아름답게 울렸습니다.   아, 너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 것이 끝났구나!   공주는 다시 시녀에게 말했지요.   "시녀의 입맞춤을 대신 받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 보아라."   하지만 돼지치기는 거절했지요.   "공주님이 아니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는 수 없이 공주는 그렇게 하기로 했지요.   "할 수 없지. 그렇담, 아무도 보지 않도록 너희들이 가리고 있으렴."   시녀들은 옷을 넓게 펼쳐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가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주는 냄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냄비의 요술을 알게 된 것이랍니다. 어떤 집에서 어떤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있었지요. 공주는 손뼉을 쳤습니다.   "누가 달콤한 수프를 먹는지, 누가 달걀 요리를 먹는지 우린 알고 있다네. 누가 보리죽을 먹고 누가 커틀릿을 얻어 먹는지 우린 알고 있다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야."   시녀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쳤지요.   "정말 재미있는 일이네요."   "그래, 하지만 모두들 모르는 체하고 있어."   "물론이지요. 그렇고말고요."   왕자는 또다시 딸랑이를 하나 만들었답니다. 그 딸랑이를 흔들면 온갖 무도회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공주님은 그 소리도 듣게 되었습니다.   "정말 훌륭하구나! 이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애들아, 그 악기가 얼마나 하는지 물어 보아라.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입맞춤하지 않을거야."   "공주님, 이번에는 입맞춤을 백 번이나 해야 주겠답니다."   돼지치기에게 다녀온 시녀가 말했지요.   "정말 나쁜 놈이군!"   공주는 화를 내면서 그냥 가 버렸지요. 하지만 곧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의 딸이야! 그에게 말해라. 입맞춤 열 번만 받고 나머지는 시녀들에게 받으라고."   그러자 시녀들이 말했어요.   "그렇지만 우린 하고 싶지 않아요."   "안돼! 내가 할 수 있다면 너희들도 할 수 있어. 그렇게 하면 너희들에게 상을 줄테다."   하지만 돼지치기는 공주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공주는 할 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시녀들이 공주를 둘러싸고 공주는 왕자에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저기 돼지우리에서 웬 소란인고?"   마침 그 모습을 멀리서 본 황제가 물었어요.   "시녀들이 몰려 있구나. 어디 한 번 가 봐야겠다."   황제는 시녀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조용히 다가갔답니다. 시녀들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지요. 돼지치기가 백 번을 넘지 못하게 하려고 열심히 수를 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냐?"   가까이 다가간 황제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답니다. 그 때 돼지치기는 여든여섯 번째의 입맞춤을 받을 참이었지요.   "아니 이런 일이!"   황제는 깜짝 놀랐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요, 공주도 돼지치기도 멀리 쫓겨나고 말았답니다. 공주는 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후회하기 시작했지요.   "아, 그 때 내가 그 잘생긴 왕자와 결혼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돼지치기는 나무 뒤로 가서 누더기 옷을 벗고 다시 공주 앞에 나타났습니다. 오, 어찌나 잘생긴 모습이었는지 공주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난 당신을 비웃어 주려고 왔어. 당신은 아름다운 장미도 나이팅게일도 알아보지 못했어. 그러면서 돼지치기에게는 욕심을 채우려고 입을 맞추었어. 이제 그 벌을 받는 거야."   이렇게 말한 왕자는, 작은 왕국으로 돌아가 성문을 닫아 버렸답니다. 공주는 성문 밖에 서서 슬프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 너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모든 것이 끝났구나, 끝났구나!   내 인생의 동화, 문학은 없었다.   (안데르센이 직접 쓴 자신의 이야기)       1   내 인생은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다. 그토록 풍요롭고도 행복한.   내가 헐벗은 채 세상에 나왔을 때 만약 한 요정이 나타나, "원하는 대로 네 인생의 길과 목표를 선택하여라. 그러하면 내 너를 보호하고 이끌리라. 꼭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살거라" 하고 말했다 한들, 내 운명은 내가 지내 온 것보다 더 행복하고 더 낫게 이끌려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 이야기를, 이 세상이 내게 말해 준 그대로 되돌려 말해 주겠다.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최상으로 이끄는 사랑에 찬 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내 조국 덴마크는 시적인 나라다. 민담과 옛 민요들, 그리고 이웃 나라인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역사와 함께 얽혀 있는 풍요로운 역사로 가득 찬 나라다. 덴마크의 섬들은 찬란한 너도밤나무 숲과 밀밭과 크로바 들판으로 덮여 있어서 마치 위대한 양식을 갖춘 정원들처럼 보인다.   내가 태어난 곳 오덴세는 이 섬들 중의 하나인 핀에 있는데, 오덴세라는 이름은 이 곳에 살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오딘이라는 신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이 곳은 우리 주의 서울이며 코펜하겐으로부터 34.2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805년, 이 곳의 어느 작고 초라한 방에는 서로 끝없이 사랑하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신기료장이인 남편은 채 스물두 살이 되지 않은, 시적 천성을 가진 재주 많은 사람이었고, 몇 년 연상인 아내는 세상일이나 사는 일에는 서툴렀으나 사랑으로 가득한 가슴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젊은 부부는, 단칸방에 구둣방과 살림방을 차렸는데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뜬 트람페 백작의 관을 운반하는데 쓰였던 목재 틀을 이용해서 신혼부부의 침대를 꾸몄다. 침대 테두리에 붙어 있는 검은 천 조각이 아직 그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1805년 4월 2일, 이 침대에는 베일과 촛대에 둘러싸인 백작의 시체 대신 생명을 지닌 어린아이가 누워 울고 있었다. 바로 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다.   태어나서 며칠 간 큰 소리로 우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침대머리에 앉아 홀베르그를 큰 소리로 읽었다 한다. 그리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 잘 테냐, 조용히 들을 테냐?"   그러나 나는 계속 울어 대었고,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도 큰 소리로 울었으므로 다혈질인 목사님은, "얘는 꼭 고양이처럼 우는군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목사님의 이 말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민으로 나의 대부가 되었던 고마트 아저씨는 내가 어린 아이 때 큰 소리로 울면 울수록 자라서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어머니를 위로하곤 했다.   구두 수선 도구들, 침대 그리고 내가 누워 잠자는 벤치로 꽉차 버린 우리의 유일한 작은 방이 내 유년 시절의 거처였다. 그러나 사방 벽은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고, 구둣방의 천장 쪽에는 책과 노래책으로 가득 찬 널빤지로 된 서가가 있었다.   작은 부엌은 반짝반짝 빛나는 접시와 그릇들로 가득했다. 옆집을 마주한 추녀의 홈통에는 흙과 야채들이 자라고 있는 큰 상자가 있었는데 ^6,36^이것이 내 어머니의 정원이었다^36,3^ 사다리 위에 올라서면 이 곳으로 뛰어내릴 수가 있었다. 내가 쓴 동화 '눈의 여왕' 속에서 이 정원은 아직도 꽃피어 있다.   무녀 독남인 나는 몹시 엄하게 자랐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어머니 어렸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며, 어머니에 비하면 백작 아들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 때 동냥질을 하라고 부모로부터 집에서 내쫓겼으며, 그 짓을 할 수가 없자 온종일 다리 아래 앉아 울었다 한다. 내 작품 '즉흥시인'에 나오는 늙은 도미니카의 모습 속에, 그리고 '바이올린 켜는 사람'의 어머니 속에 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로 내 어머니의 품성을 재현해 놓았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의 완전한 사랑을 소유했으며, 그는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았다.   일요일이면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고, 변화하는 그림들이라 할 수 있는 연극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홀베르그의 코미디와 '천일야화'를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그러한 순간에만 아버지는 진정 즐거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인생에 있어, 그리고 수공업자로서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모님은 유복한 농사꾼이었다. 그러나 불행한 일들이 계속해서 그들을 덮쳤다. 가축들이 죽었고 마당이 불탔다. 그 충격으로 마침내 할아버지는 실성을 해 버렸다.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오덴세로 이사를 와서 원기 왕성하던 소년이던 아버지를 구두장이 수업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라틴어 학교를 다니는 것이 아버지의 불붙는 소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보다못한 두어 명의 잘사는 사람들이 한때 아버지를 도와 주기로 했지만 그것은 말로 그치고 말았다. 불쌍한 나의 아버지는 자기의 열렬한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후 그 일은 결코 그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우리 집에 와서 구두를 맞추면서 책을 내보이고 자신이 배운 것을 이야기했을 때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이던 것을 기억한다.   "나도 저 길을 가야만 했는데^5,5,5^." 하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내게 격하게 입을 맞추고는 그 날 저녁 내내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같은 직업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었다.   대신 일요일이면 숲으로 나갔다. 그 때는 꼭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밖에 나가면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조용히 앉아 있곤했다. 그러면 나는 그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풀잎 위에 딸기를 늘어 놓거나 화환을 만들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특히 5월에 싹이 파릇파릇 돋을 때면 어머니도 함께 숲으로 나갔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1년을 통틀어 그녀의 유일한 외출복인 면직물 원피스, 성찬식 때나 차려 입곤 하던 그 옷을 입고 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한 무더기의 싱싱한 너도밤나무 가지를 집으로 가져 오곤 했다.   가져와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난로 뒤에다 심었다. 더 때가 지나면 성요하네스 잡초가 들보의 틈서리에 꽂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우리가 오래 살 것인지 아닌지를 추측해 보곤 했다.   어머니는 깨끗하고 청결한 우리의 작은 방을 늘 풀과 그림들로 장식했다. 그리고 침대보와 커튼이 언제나 하얗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찾기도 했다.   할머니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린 손자를 보기 위해 매일 우리 집에 왔다. 나는 할머니의 기쁨이요, 행복이었다.   할머니는 온화한 푸른 눈과 어렵게 생을 견뎌 온 가냘픈 체구를 가진 지극히 사랑스러운 조용한 늙은이였다. 유복한 농부의 아내였던 할머니는 이제 몹시 궁핍하게 되어 정신 박약인 할아버지와 함께 조금 남은 재산으로 구입한 작은 집에 살고 있었다. 나는 결코 할머니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할머니의 외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할때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즉 독일의 카셀 출신인 할머니의 외할머니는, (우리 할머니의 표현을 빌자면) '딴따라 패'와 눈이 맞아 마음대로 결혼을 하고는 부모와 고향을 버리고 도망을 쳤으며, 그리고 이제 그 후손들이 그 죄값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외할머니의 성을 부르는 것을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타고난 덴마크 인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빈민 병원 곁 한구석에 정원을 가꾸었으며, 토요일 저녁이면 꽃들을 얻어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 꽃들은 어머니의 서랍장을 장식했으나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허락을 얻어 그 꽃들을 물잔 속에 넣어 두곤 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가!   할머니는 모든 것을 내게 가져다 주었다. 그녀는 온 영혼으로 나를 사랑하였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그리고 이해했다.   할머니는 1년에 두 번 정원에서 나오는 녹색 쓰레기들을 불에 태웠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를 따라 빈민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녹색 잎들과 완두콩 줄기, 그리고 많은 꽃들 속에서 놀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많은 가치를 두던 것이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집에서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병원 마당에는 정신병 환자들이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과 공포심이 뒤섞인 채 그들을 뒤쫓아다녔다. 나는 경비병들과 함께 미쳐 날뛰는 환자들에게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긴 복도가 그들의 병실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경비병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땅바닥에 누워 문틈으로 한 병실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짚으로 된 침대 위에 벌거벗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으며 아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누워 있는 문틈으로 돌진해 왔다. 음식을 넣어 주는 작은 벼락닫이 문이 열렸다. 그녀는 노려보면서 나를 향해 긴 팔을 뻗었다.   나는 공포에 쌓여 비명을 질렀다 ^6,36^나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내 옷에 닿는 것을 느꼈다^36,3^. 반쯤 넋을 잃고 있을 때에야 경비병이 왔다. 후일 나이가 들어서도 이 때의 광경, 이 때의 인상은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잎들을 태우는 장소 아주 가까이에 가난한 할머니들이 물레를 돌리는 방이 있었다. 나는 자주 그 곳에 놀러갔는데 곧 그들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나는 아주 말을 잘 해서 그들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나는 우연히 인간의 내장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에 관해 듣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비밀스러운 것이 나를 잡아 끌었다.   나는 백묵으로 그 할머니들의 방문에다 마구 둥근 모양의 나선들을 그려 놓았다. 내 딴에는 사람의 내장을 그린다고 한 것이었다. 심장과 폐에 관한 나의 묘사는 할머니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고 영리한 아이로 여겨졌다. 내가 말을 잘한 대가로 할머니들은 옛날 이야기들을 하는 것으로 보상을 해 주었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것같이 풍요로운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들의 옛날 이야기들과 내가 빈민 병원에서 본 미친 사람들의 모습은 어찌나 내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지 나는 어두워지기만 하면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또 해가 지면 꽃무늬의 긴 커튼이 달린 부모님의 침대에 누워도 좋다는 허락을 얻곤 했다. 왜냐하면 내가 잠자는 침대가 당시 그 방의 공간을 좁혀서는 안 되었는데다가 부모님의 침대에 누워 있으면, 마치 실제 세계가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신 박약인 할아버지에게는 무지무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단 몇번밖에 할아버지와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나에게 '당신' 이라는 이상한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는, 동물의 머리가 달린 인간들이나 날개 달린 동물 같은 이상한 형체들을 목각으로 만들어서는 그것들을 바구니에 싸서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농부의 아내들이 어디에서나 그를 대접했다. 그는 그 목각들을 그들의 아이들에게 선물하곤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쫓아가면서 소리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무서워서 계단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그이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가 자란 바로 그 환경은 오직 나의 상상력을 채워 주는 데에만 도움을 주었다. 아직 증기선도 없고 우편 연결도 쉽지 않던 그 당시 오덴세는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다른 도시에 비해 한 1백 년쯤 뒤져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옛날에나 있음직한 많은 미신 같은 관습들이 아직도 오덴세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도 그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공업자 조합은 이리저리 떼를 지어 행진을 했고, 그들의 앞에는 채찍과 방울을 든 광대들이 앞서갔다. 참회 화요일 전의 월요일(사육제 전의 월요일)에는 백정들이 꽃으로 장식을 한 가장 살찐 황소를 데리고 거리를 지나갔다. 그 황소의 등에는 날개 달린 흰옷을 입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선원들은 음악에 맞춰 깃발을 휘두르며 시내를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바다에서는 두 대의 보트사이에 널빤지를 놓고 그 위에서 가장 용감한 두 사람이 격투를 했다. 물속에 빠지지 않는 자가 승자였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특별히 남아 있는 것은 1808년 스페인 군의 핀 주둔이다. 나는 그 때 사실 세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거리를 떠들며 돌아다니던 갈색의 이방인들과 그들이 공중으로 쏘아 올리던 대표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빈민 병원 옆의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교회의 짚더미 위에서 사람들이 잠자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인가는 어느 스페인 병사가 나를 자기 팔에 안아서 가슴에 달고 있던 은으로 된 그림을 내 입술에다 눌렀다. 어머니는 그 일로 화를 내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카톨릭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나와 춤을 추었던 그 이방의 병사는 내게 입을 맞추고 울었다. 그도 고향 스페인에 내 또래의 자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이 동료 한 사람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도 보았다. 프랑스 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에 자극을 받아서 여러 해가 지난 후 '병사' 라는 짧은 시를 썼다. 그것을 샤미소가 독일어로 번역하여 후일 '병사의 노래' 라는 책에도 수록이 되었다.   나는 거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아 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들과 함께 놀지 않고 교실 안에 있었다. 집에서도 장난감은 충분했다. 아버지가 내게 만들어 준 것들이었다.   가장 큰 기쁨은, 인형의 옷을 깁는다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앞치마를 벽과 마당에 심어진 구즈베리 딸기 숲 앞의 두 개의 막대기 사이에 걸어 놓고 햇빛에 비치는 이파리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꿈꾸는 듯한 아이였다. 자주 두 눈을 꼭 감고 걸었으므로 사람들은 내 시력이 약한 것으로 믿었다. 바로 이 감각이야말로 아주 특별하게 발달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때때로 수확철이 되면 어머니는 들판으로 나가서 이삭들을 주워 왔다. 그럴 때면 나도 어머니를 따랐다. 마치 보아의 풍성한 들판으로 나가는 성경의 룻처럼 따라나갔다. 어느 날 우리는, 관리인이 거칠기로 소문난 곳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무시무시하게 큰 채찍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도망을 쳤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것 같은 발레용 나막신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그루터기들이 마구 찔러 대어서 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남아 있었다.   나는 벌써 채찍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저기 하느님이 보고 계신데 어떻게 당신이 날 때릴 수 있겠어요!"   가혹하기로 이름난 그 사람이 갑자기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더니,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내 이름을 묻고 돈을 주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보여 주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얘는, 정말 이상한 아이에요. 한스 크리스티안 말이에요. 모두가 그에겐 잘해 주거든요. 저 나쁜 작자까지 그에게 돈을 주었어요."   나는 경건하게 그러나 미신적으로 자라났다. 또한 나는 결핍이라든가 부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해 갈 정도의 살림살이였으나 나에게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어떤 할머니는 아버지의 옷을 내게 맞게 고쳐 주기도 했다.   나는 때때로 부모님을 따라 극장에 갔다. 나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독일어로 된 연극을 보았다.   '도나우강의 여자'는 온 도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페라로 취급된 홀베르그의 '술집 정치극'을 보았다. 극장과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서 받은 첫인상은 결코 내 속에 정치적인 것이 잠자고 있다는 그런 인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 많은 삶을 보았을 때 내뱉은 첫 반응은, "이 곳의 사람들처럼 많은 버터 통을 가졌더라면 정말 좋은 버터를 먹었을텐데!"라는 탄성이었던 것이다.   극장은 곧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드물게 밖에 그 곳에 갈 수 없었으므로 나는 영화 광고지를 돌리는 사람을 사귀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매일 광고지 한 장씩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극장 한 귀퉁이에 앉아서 그 연극의 제목에 다른 코미디를 내 나름대로 새롭게 창작해 보기도 하고, 그 속에 다른 인물들을 집어 넣어 보기도 했다. 그것이 내 최초의 무의식적인 창작이었다.   아버지가 즐겨 읽어 주었던 것은 코미디나 단편들만은 아니었다. 역사책이나 성경같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서 자기가 읽어 준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점점 말이 없어져 갔다. 어느 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성경을 덮었다.   "예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나 비상한 인간이었지."   어머니는 이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물을 터뜨렸다.   나도 불안에 싸여서 하느님에게 아버지의 이 불경한 말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이외의 다른 악마는 없다"고 아버지가 말하는 것도 나는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혼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못을 뽑다가 팔에 세 군데나 깊이 찔리자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지난 밤에 아버지를 찾아온 악마의 소행이라는 어머니와 이웃 여자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했다.   아버지가 숲을 찾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신문에서 호기심을 가지고 읽은 독일에서의 전쟁 소식이 그의 가슴 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의 영웅이었다. 더구나 당시 덴마크는 프랑스와 연합해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의 관심사는 오직 전쟁 이야기뿐이었다.   아버지는 소위로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군대에 갔다. 어머니는 울었다. 이웃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총에 맞아 죽으러 나가는 것은 만용이라고 말했다.   군대가 출발하는 날 아침, 나는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가슴은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의 입맞춤에서 그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마침 홍역에 걸려 방에 누워 있었다. 북소리가 울리고 어머니는 울면서 성문 밖까지 아버지를 전송 나갔다. 그들이 집을 나가자 할머니가 찾아왔다. 할머니는 온화한 눈으로 나를 찬찬히 살피더니, 내가 지금 죽는다해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고통에 찬 최초의 아침들 중의 하나였다.   그 사이 아버지의 연대는 홀슈타인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고전했다.   평화가 다시 찾아왔고 지원병들은 자신들의 일터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이 보였다.   나는 다시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코미디 연극 놀이를 독일어로 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어로 된 것만을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독일어는 되는 대로 만들어 붙인 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였다. 그 중에는 유일하게 제대로 된 독일어가 한마디 있었는데 그것은 '빗자루'라는 단어로 아버지가 홀슈타인에서 가지고 온 여러 가지 말 중에서 언뜻 들었던 것이었다.   "네가 내 여행 덕을 보는구나." 하고 아버지는 농담을 했다.   "네가 나처럼 멀리까지 가게 될지는 신만이 아신단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해 보아라. 한스 크리스티안."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집에 남아 있어야 하며 아버지처럼 건강을 잃어서는 안 되며 집을 떠나 멀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건강 때문에 고통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심한 환상 속에서 일어나더니 전쟁에 나갔던 것과 나폴레옹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며, 스스로 직접 지휘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즉시 나를 의사에게로가 아니라 오덴세에서 반 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용하다는 여자에게로 보냈다. 그녀는 아버지의 상태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내 팔 위에다 털실을 재고 이상한 표시를 하더니 마지막으로 내 가슴에 초록 가지 하나를 놓았다. 구세주께서 처형당한 나무와 같은 종류의 조각이라고 말했다.   "이제 가거라! 강을 따라 집으로 가거라. 만약 아버지가 이번에 돌아가신다면 너는 그의 영혼을 만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토록 미신에 가득 찼었고 내게서는 환상이 그토록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 아무도 안 만났지?"   내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는 물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누르며 아니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죽었다. 그의 시체는 침대에 눕혀졌다. 나는 그 앞에 어머니와 함께 누워 있었다. 간밤 내내 귀뚜라미가 찌륵찌륵 울었다.   "그는 죽었단다. 너는 그를 부를 필요가 없어. 얼음 처녀가 그를 데려갔단다."   어머니는 귀뚜라미에게 말했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겨울 우리 방의 유리창이 얼어붙었을 때, 아버지는 그 유리창에 나있는 팔을 벌린 처녀의 형태와 비슷한 그림을 가리키면서, "아마도 그녀가 날 데려갈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던 것이다.   세인트 크누츠 교회 묘지에 묻혔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위에 장미를 심었다.   이제 같은 장소에는 두 개의 낯선 무덤이 있다. 이 무덤들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나는 완전히 나 자신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빨래를 해 주러 다녔다. 나는 집에 혼자 앉아 연극 놀이를 하고 인형을 깁고 연극 작품들을 읽었다. 사람들은 내게 언제나 깨끗하게 옷을 잘 입고 다닌다고 말했다. 나는 후리후리하게 키가 컸고 거의 노란색에 가까운 밝은 색의 머리카락에 모자를 쓰지 않고 다녔다.   우리 이웃에는 마담 분케플로트라는 이름의 목사 미망인이 올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부인은 내게 퍽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고인이 된 목사님은 시를 썼었고, 그 당시 덴마크 문단에서는 꽤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의 '물레노래'는 당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나는 '덴마크 시인들을 위한 동판화'에서 내 동시대인들이 잊어버린 그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물레가락이 달그락달그락,   물레가 돌아간다   물레 노래가 날아간다   청춘의 노래는 곧   옛 멜로디가 되리니.   이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시인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존경의 대상으로 불리는 것도 들었다.   아버지는 홀베르그의 코미디를 자주 읽어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작가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의 문학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이다.   분케플로트 목사의 누이동생은, 자신의 오빠를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럴 때 그녀의 두 눈은 반짝였다. 나는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찬란한 것, 행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었다. 대담한 묘사나 유혈의 사건들, 마녀와 유령들은 바로 내 취향에 맞았다. 나는 즉시 셰익스피어를 인형극으로 연기했다. 햄릿의 유령을 보았고, 리어 왕과 함께 황야에서 살았다. 나는 작품 속에서 사람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첫 작품을 쓴 것도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은 물론, 모든 등장 인물들이 죽은 비극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옛 노래에서 내용을 빌어왔다. 그러나 나는 둘 다 티스베를 사랑하여 그녀가 죽자 따라 자살하는 그의 아들을 등장시켜 줄거리를 확대시켰다. 은자의 대사 중 많은 부분은 성경에서, 교리 문답에서, 특히 '이웃에 대한 의무' 에서 따왔다. 그 작품은 '아보르와 엘비라'였다.   "농어와 건대구(얼간이나 멍청이를 가르킴)라는 제목이 더 맞을걸 그랬구나."   내가 그 작품을 우리 골목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어 주고 그녀에게 보이자 이웃 부인은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작품을 그녀가 놀리는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슬퍼하면서 그것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자기 아들이 그런 것을 짓지 못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머니는 대꾸했다.   나는 그 말에 위로를 받고 왕과 왕비가 등장하는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에나 나오는 왕과 왕비가 보통 사람들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대체 왕은 어떻게 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오덴세에 왕이 있었던 것은 오래 전의 일이며, 아마도 그 왕은 외국어로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 불어, 영어가 덴마크어로 번역되어 있는 일종의 사전을 하나 마련했다. 그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각국의 언어에서 한 단어를 골라 그것을 내 작품의 왕과 왕비의 대사에다 끼워 넣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고귀한 인물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언어는 바빌론의 언어가 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내 작품을 들어야만 했다. 그것을 낭독하는 것이 내게는 진정한 축복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웃집 아들은 직물 공장에 기숙하면서 매주 약간의 돈을 집으로 가지고 왔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기만 한다고 했다. 나 역시 공장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돈 때문만은 아니란다. 그래야 네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잖니."   어머니도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음 속으로 몹시 슬퍼하면서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갔다. 내가 다른 가난한 아이들과 그런 곳에 함께 다니게 될 줄은 정말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공장에는 많은 독일 직공들이 와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또한 나는 많은 야비한 농담들이 오고가는 것을 들으면서, 어린 아이는 그러한 것도 순진한 귀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한 것은 내 마음에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이상하리 만큼 곱고 높은 소프라노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우리 집의 작은 정원에서 노래를 할 때면 골목의 사람들은 귀를 귀울였다. 우리 골목에 붙어 있는 추밀원 정원에 있는 고상한 외국 사람들도 판자 울타리에 기대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공장 사람들이 내게 노래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자신있게 노래를 불렀다. 모든 베틀이 멈추었으며, 직공들이 내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부르고 또 불러야만 했다. 내가 맡은 일은 다른 소년들에게 떠넘겨졌다. 이제 나는 코미디도 연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홀베르그와 셰익스피어의 온갖 장면들을 생각해 내었다. 모두가 나를 좋아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공장에서의 첫 며칠을 아주 재미있게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노래에 열중해 있을 테였다.   "저 자식은 사내 새끼가 아니라 어린 계집아이야."   어느 직공이 소리치더니 나를 붙잡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신음하였다. 다른 직공들도 그 농담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내 팔과 다리를 꼭 붙잡았다. 나는 계집아이처럼 큰 소리로, 바보처럼 애원을 했다.   공장에서 뛰쳐나와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즉시 더 이상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해 주었다.   나는 다시 분케플로트 부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의 생일날 나는 하얀 비단으로 직접 바늘 쌈지를 만들어 선물했다.   우리 이웃에 있는 또 다른 늙은 목사 미망인들과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나에게 순회 도서관에서 빌려 온 장편 소설들을 낭독하게 했다.   어떤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었다.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다. 비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참 훌륭한 책이구나."   하고 그 늙은 부인은 말했다.   나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느냐고 아주 순진하게 물었다.   "나는 첫 문장만 듣고도 안단다. 아주 훌륭하게 되어갈 거라는 걸 말이야."   나는 그녀의 통찰력에 매우 놀랐다.   언젠가 수확기에 나와 어머니는, 어머니가 태어났던 보겐세 근처에 있는 귀족의 장원으로 오덴세에서 수마일 떨어진 길을 갔다. 그 곳의 귀부인이 ^6,36^어머니는 그 귀부인의 부모의 시중을 들었다^36,3^ 어머니에게 한 번 방문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는 대여행이었다. 우리는 걸어갔다. 이틀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 곳에서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마침 홉을 수확하는 철이었다. 창고 속에서 큰 통을 빙둘러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아서 홉 가려내는 일을 도왔다. 사람들은, 옛날 이야기와 그리고 각자 보고 겪었던 이상한 일들을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 오후 나는 한 늙은 남자가, 신은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모두 아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 말이 내 생각을 온통 빼앗았다.   저녁때 나는 혼자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깊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속에 있는 몇 개의 돌 위에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정말 신이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신이, 내가 앞으로도 여러 해 더 살아가도록 정해 놓았다면 이제 물 속에 뛰어든다해도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나는 익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물에 빠지기로 결심하고,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때였다. 또 다른 생각이 내 영혼을 스쳐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 누가 나를 쫓아오기라도 하듯 달렸다. 그리고 울면서 어머니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도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낼 수 없었다. 어느 부인은 내가 틀림없이 유령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 자신도 그 말을 믿었다.   어머니는 젊은 수공업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역시 수공업자 신분인 그의 가족은 그가 너무 보잘것 없는 짝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도 나도 그의 가족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낼 수 없었다.   나의 계부는 전혀 나의 교육에 관여하려 하지 않은 조용한 젊은이였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며 인형 놀이를 하며 살았다. 여러 가지 색의 헝겊을 모으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러면 나는 그 모은 헝겊들을 직접 자르고 바느질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내가 재단사가 되기 위한 좋은 연습이라고 생각했으며, 틀림없이 그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극장에 가서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반대였다. 어머니는 떠돌아다니는 유랑 극단과 줄타기 광대 이외의 다른 연극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나는 꼭 재단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단사라는 직업의 운명에서 날 어느 정도 위로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되면 내가 인형극에 쓸 제법 많은 헝겊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독서욕이나, 많은 연극 장면들, 특히 아름다운 목소리는 오덴세에 있는 몇몇 고상한 상류 가정에서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들에게 자주 불러갔다. 그리고 나의 특이한 사람 됨됨이가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방문하게 된 많은 사람들 중 회크 굴트베르크 대령과 그의 가족은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다. 언젠가는 지금은 왕이 된 크리스티안 왕자에게 데려가기도 했다.   지난 해에 나는 약간의 돈을 저축했다. 세어 보니 13탈러였다. 나는 이제껏 그토록 많은 재산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주 확고하게 내가 이제 재단 기술을 배우러 가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나는 어머니에게 코펜하겐으로 여행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코펜하겐은 그 당시 내게 있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거기 가서 뭐가 될래?"   "난 유명하게 될래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내가 읽은 위대한 남자들에 관해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우선 많은 역경을 뚫고 나가면 그 다음에는 유명해진대요."   정말이지 나를 이끌던 설명할 길 없는 충동이었다. 나는 울고 간청했다. 어머니는 마침내 굴복했다. 그러나 우선 카드와 커피로 내 미래의 운명을 점쳐 보기 위해 빈민 구호소에 있는 용하다는 늙은 여자를 데려오게 했다.   "당신의 아들은 위대한 사람이 될 거요.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오덴세에는 언젠가 환히 불이 밝혀질 거예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울었다.   나는 여행 허락을 얻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어머니에게 열네 살밖에 안 된 나를 그토록 멀리 떨어지고 혼란스런 도시인 코펜하겐으로 가게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요, 자식이 날 안심시키지 않는군요. 하지만 난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니보르크 이상 더 가지 못할 거라고 믿어요. 그 거친 바다를 보면 불안해져도 아마도 다시 되돌아올 거예요."   어머니는 이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내가 견진 성사를 받기 전 여름에 왕립 극장의 가수와 배우들이 오덴세에 와서 오페라와 비극을 공연한 일이 있었다. 온 도시가 그 일로 술렁거렸다. 광고지를 돌리는 사람과 알고 있었던 나는, 무대 뒤에서 모든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시동이나 은자 등의 배역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몇 마디 대사까지 했었다. 나는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배우들이 무대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올 때면 이미 옷을 다 차려 입고 서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일로 해서 그들은 나를 주목하게 되었고, 나의 어린애다움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들은 내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고, 나는 지상의 신들을 우러르듯 그들을 보았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연극을 위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할 곳은 코펜하겐이었다. 그 때문에 코펜하겐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였다. 나는 코펜하겐에 있는 큰 극장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특히 사람들은 발레리나인 마담 샬을 그 누구보다 첫째로 꼽았다. 그 까닭에 나는 그녀를, 내가 그녀의 보호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날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에 가득 차서 나는 오덴세의 명망 있는 시민 중의 한사람인 늙은 인쇄업자 이베르센 씨를 찾아갔다. 그는 배우들이 오덴세에 왔을 때 그들과 많은 교분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그 발레리나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그녀에게 줄 추천서를 부탁할 작정이었다. 그 나머지의 것은 신이 덧붙여 줄 것이다.   그 늙은 분은 처음으로 나를 보는데도 나의 청원을 친절하게 귀담아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충고했으며, 수공업을 배우라고 말했다.   "그건 정말이지 큰 죄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는 내 말에 멈칫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발레리나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편지를 써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편지를 얻었다. 그리고 벌써 목표에 가까이 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어머니는 작은 옷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마부에게 눈먼 승객이나 다름없는 나를 코펜하겐까지 데려가 달라고 당부했다. 거기에 3탈러가 들어있었다.   그 날 오후, 어머니는 슬퍼하면서 나를 성문 밖까지 배웅했다. 성문 밖에는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할머니의 아름답던 머릿결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내 목에 매달리면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울었다. 나 역시 매우 슬펐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할머니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할머니는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녀의 무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빈민 공동 묘지에 쉬고 있다.   마부가 경적을 불었다. 해가 찬란하게 빛나는 오후였다. 해는 곧 나의 가벼운, 어린애다운 감각 속으로도 비쳤다. 나는 모든 것이 즐겁고 신기했다. 동경하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보르크의 대발트 해협에 도착하고, 배가 섬에서 멀어졌을 때, 나는 하늘의 신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고독하고 내버려진 사람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제란트 섬에 도착하자마자 해변가에 서 있는 창고 뒤로 가서 무릎을 꿇고 신에게 도와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하자 위로가 되었다. 나는 확고하게 신과 내 행복을 믿었다.   도시와 마을들을 지나갔다.   짐을 다시 꾸리는 동안 나는 마차 옆에 서서 빵을 씹어 먹었다.   나는 벌써 넓은 세상으로 나와 있다고 생각했다.     ------       2   1819년 9월 5일 월요일 아침, 난생 처음 나는 프레데릭스베르그 언덕에서 코펜하겐을 볼 수 있었다. 작은 짐 꾸러미를 들고 슐로스그르텐을 지나, 긴 가로수 길과 시 외곽을 지나 시내로 들어갔다.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저녁은, 유럽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간 그 유명한 유태인 박해가 터진 날이었다. 온 도시가 흥분 속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따라서 코펜하겐의 소란과 소요는 당시 내게는 가장 큰 도시였던 코펜하겐에 대해 상상하던 것과 일치했다.   호주머니에는 채 10탈러도 안 된 돈을 가지고 나는 작은 여관에 들었다.   내가 맨 먼저 찾아간 곳은 극장이었다. 나는 여러 번 같은 극장 주변을 돌며 벽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극장을 내 고향을 보듯 살펴보았다. 이 곳을 매일 서성거리며 표파는 사람이 나를 유심히 보고는 표를 갖겠느냐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제의를 대단히 감사해 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는 내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었으므로, 나는 놀라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장소를 떠나고 말았다. 그 때 나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10년 후 내 처녀작이 그 곳에서 공연되리라는 사실을, 내가 그런 방식으로 덴마크 관객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 날 나는 견진 성사 때 입던 옷을 꺼내 입었다. 부츠도 잊지 않았다. 나로서는 가장 잘 차려 입고, 눈까지 내려오는 모자를 쓰고 발레리나인 마담 샬을 찾아갔다. 그녀에게 내 추천서를 전하기 위하여.   벨을 누르기 전에 나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가 여기서 도움과 보호를 찾게 해 달라고 신에게 간구했다. 그 때 바구니를 든 하녀가 계단을 올라왔다. 그녀는 나를 보고 친절하게 미소 짓더니 내게 1실링을 주고는 뛰어갔다. 나는 놀라서 그녀와 1실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견진 성사때의 옷까지 꺼내 입었으니 제법 단정해 보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녀는 어떻게 내가 구걸을 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그냥 가져!"   그녀는 소리치고는 가 버렸다.   마침내 나는 발레리나의 면회를 허락 받았다. 그녀는 나를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이 편지를 써 준 사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연극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욕망을 토로하였다.   어떤 역할을 연기할 수 있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신데렐라" 라고 대답했다. 이 작품은 오덴세에서 왕립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주인공이 어찌나 나를 감동시켰던지 기억만으로 완벽하게 그것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부츠를 벗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부츠를 신고는 가볍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큰 모자를 탬버린 삼아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 지상의 지위와 부도   근심 걱정을 면할 수는 없지요. 나의 거동을 본 발레리나는 나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했다. 결국 나는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실망하지 않고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극장주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연극을 하기에는 너무 말랐다고 말했다. 나는, 1백 탈러의 출연료로 취직만 될 수 있다면 살이 찔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극장주는 내 길을 가라고 말하면서 여기는 교양을 갖춘 사람만 고용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매우 슬펐다. 위로와 충고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죽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곧 신을 생각했다. 어린 아이가 완벽한 믿음으로 아버지에게 매달리듯이 내 생각은 신에게로 향했다.   나는 실컷 울고 나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만약 모든 것이 불행하게 흘러간다면 신은 나에게 도움을 보내리라. 나는 그걸 믿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전에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극장으로 가서 오페라 '포올과 비르지니'의 맨 위층의 싼 관람석의 표를 샀다. 연인들의 이별은 몹시 내 마음을 감동시켜서 나는 격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두어 명의 부인들이 그저 연극일 뿐이라고, 저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나를 위로했다. 한 부인은 내게 소시지가 들어 있는 큰 샌드위치를 주기도 했다.   나는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 솔직하게 포올과 비르지니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극을 나의 비르지니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만약 연극과 이별한다면 나도 포올처럼 불행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나를 천천히 바라보았으나 나를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왜 코펜하겐으로 왔는지, 내가 얼마나 고독하게 여기 있는지를 이야기하였다. 그 부인은 내게 더 많은 빵과 과일과 과자를 주었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갔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버림받은 몸이었다. 그러자 나는 오덴세에 있을 때 어느 신문에서 시보니라는 이탈리아 인에 관해 읽은 생각이 났다. 그는 코펜하겐의 음악 학교 교장이었다.   '그래, 모든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칭찬했었지. 어쩌면 그가 나를 돌봐 줄지도 몰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날 밤을 집으로 돌아가는 배를 찾아야 하리라.'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나는 더 격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시보니 씨를 찾아갔다. 그는 마침 점심 모임을 갖고 있었다. 내게 문을 열어 준 가정부에게 나는 가수로 취직하고 싶다는 내 갈망뿐 아니라, 내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동정심을 가지고 내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의 대부분을 손님들에게 반복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오래 기다려야 했으니까 말이다.   문이 열리자, 모든 손님들이 나와서 나를 관찰했다. 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시보니 씨는 주의 깊게 들었다. 나는 홀베르그의 연극 몇 장면과 두어 편의 시를 낭송했다. 그러자 나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생각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든 손님들이 박수를 쳤다.   "내가 예언하겠네. 이 아이는 언젠가는 크게 될 거야. 그러나 후일 모든 관객이 네게 박수 갈채를 보내더라도 너무 허영심에 들뜨지 말아라!"   바게센 씨가 말했다.   그는 순수하고 진정한 천분에 관해 몇 마디 덧붙이면서 천분이란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 사이에 섞일수록 파멸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시보니 씨는 내 목소리를 교육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내가 왕립 극장의 가수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너무나 행복해서 웃고 울었다.   가정부가 나를 밖으로 불러 내 볼을 쓰다듬으며 내일 바이제 교수에게 가 보라고 했다.   나는 바이제 교수에게 갔다. 그 역시 가난하게 태어나서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처지를 이해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70탈러를 모금해 주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첫 편지를 썼다. 환호하는 편지였다. 온 세상의 행복이 내게로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쁜 나머지 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몇 사람은 놀라워했고, 다른 사람들은 미소 지었다.   시보니 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워야 했다. 오덴세에서 코펜하겐으로 올 때 함께 타고 온 어느 코펜하겐 여성이, 자신이 아는 어학선생에게서 공짜로 몇 시간 배울 수 있게 알선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독일어를 배웠다. 시보니 씨는 네게 자기 집을 언제나 드나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나자 내 목소리는 변성기가 되었다. 아니면 겨울내내 변변히 신지도 못하고, 따뜻한 외투도 없이 지낸 까닭에 목소리가 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훌륭한 가수가 될 전망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시보니 씨는 내게 정직하게 그것을 말해 주면서 오덴세로 돌아가 그 곳에서 수공업을 배우라고 충고해 주었다. 내 상상력의 풍요로운 색채로 실제 느꼈던 행복을 어머니에게로 그려 보냈던 나는 이제 오덴세로 돌아가서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다니!   이러한 생각에 고통당하면서 나는 으깨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큰 불행처럼 보이는 곳에 보다 나은 상태로의 계단이 놓여 있었다.   버림받은 기분으로 그 곳에 서서 외로이 내가 뭘 시작해야 할 것인지 곰곰 생각하고 있을 때 내게 그토록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오덴세의 굴트베르크 대령의 동생인 시인이 코펜하겐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 시 외곽의 새로 단장한 교회 묘지 옆에 살고 있었다. 이 묘지를 그는 자신의 시에서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했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써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뒤이어 그를 찾아간 나는 그가 활기 넘치며 다정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는 내 편지에서 내가 얼마나 글자를 틀리게 쓰고 있는지 알았으므로 내게 덴마크 어 수업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독일어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는 당시 출간된 책의 수입 일부를 내게 주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1백탈러 이상이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이제 씨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후원해 주었던 것이다.   여관에서 사는 것은 내게 너무나 비쌌다. 나는 좀더 싼 집을 찾아야 했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나는 코펜하겐에서 가장 악명 높은 거리에 있는 어느 과부의 집에 방을 얻었다. 그녀는 좋아하면서 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주위에 어떤 세계가 돌고 있는지 예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엄격하면서도 활동적인 여자였다. 그녀가 도시의 모든 다른 사람들을 어찌나 무시무시한 악인으로 묘사했던지 나는 그녀의 곁에 있으면 안전한 항구에 있는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방 한 칸에 매달 20탈러를 지불해야 했다. 창문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빈 식당을 방으로 썼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거실에 앉아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나는 우선 이틀 동안 그것을 시도해 보았다. 쉽게 사람을 사귀는 나는 그 동안 그녀가 좋아져서 마치 고향집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월 16탈러 이상을 낼 수는 없었다. 바이제 씨와 굴트베르크 씨로부터 받는 돈이 바로 이 액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그 이외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펐다.   주인 여자가 외출을 한 다음 나는 소파 위에 앉아 죽은 그녀 남편의 초상화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직 어린애였다. 눈물이 내 뺨위를 흘러내리자 나는 그 그림의 두 눈을 내 눈물로 발랐다. 내가 얼마나 슬픈지 그 죽은 남편이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아내의 가슴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하여. 그녀는 내게서 더 이상 짜낼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음에 틀림없었다.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계속 16탈러로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신과 그리고 그 죽은 남편에게 감사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친절한 젊은 숙녀가 있었다.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때때로 울었다. 매일 저녁 그녀의 늙은 아버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그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을 입고 목을 완전히 싸 감추고 모자를 눈 위에까지 내려쓰고 있었다. 그는 항상 딸과 차를 마셨는데 그 때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함께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가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오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해가 흐른 후 어느 날 저녁 나는 불빛이 찬란한 홀의 한가운데로 훈장을 단 고상한 늙은 남자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바로 내가 문을 열어 주곤 했던 그 아버지였다. 그가 손님이었을 당시, 그는 내가 문을 열어 준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 당시 내 편에서도 코미디 연극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다. 즉 인형놀이를 하고 인형 옷을 깁는 데에만 열중해 있을 만큼 유치했던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헝겊을 얻기 위해 상점마다 돌아다니며 주인들에게 간청을 하곤 했다. 나는 단 한 푼의 돈도 없었다. 내 하숙집 여주인이 한 달 선불로 모든 돈을 가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내가 달라고 할 때에만 그녀는 약간의 돈을 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돈으로 종이나 혹은 코미디 책을 사는 데 썼다. 그럴 때면 나는 몹시 기뻤다. 또 굴트베르크 교수가 극장의 제일가는 희곡작가요, 대단히 선량하고 교양 있는 작가인 린드그렌씨로 하여금 나에게 수업을 베풀어주도록 주선해 주었을 때에는 정말 곱절이나 기뻤다. 그는 내게 헨드릭이나, 혹은 내가 특별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한 바보 소년 같은, 홀베르그 연극의 여러 역할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은 위대한 화가 코레기오의 역할이었다. 린드그렌 씨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엄숙하게 위대한 화가 코레기오의 역할을 흉내 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이 나 혼자 힘으로라도 이 역을 습득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나는 코레기오의 화랑에서의 모놀로그를 어찌나 감정을 섞어 잘 암송했던지 린드그렌 씨는 내게, 이렇게 말을 할 정도였다.   "감정은 그대로 지니시오. 그러나 배우는 되지 마시오! 당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신만이 아시는 일이긴 하지만. 굴트베르크 교수와 의논해 보시오! 라틴 어를 좀 배우도록 해요. 그것이 대학생이 되는 길이니."   내가 대학생이 되다니! 그런 생각은 아직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게는 극장이 훨씬 가까이 있었고 또 그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공짜로 독일어 수업을 해 주고 있던 아가씨와 그 문제에 관해 상의했다. 그녀는 라틴 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언어이며, 그것을 공짜로 배우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사이 굴트베르크 씨는 내가 그의 친구 한 사람에게 1주 몇 시간 라틴 어 수업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남성 무용수 달렌 씨였다. 그의 아내는 당시 덴마크 무대의 일류 예술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는 자주 그의 집에 갔다. 그 부드럽고 다정한 부인은 내게 잘 대해 주었다. 달렌 씨는 나를 자신의 무용 학교에 받아 주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연극 무대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발걸음이었다.   나는 오전 내내 긴 막대기처럼 다리를 뻗으며 서 있었다. 그러나 나의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달렌 씨는 내가 단역 배우 이상은 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나는 얻은 게 있었다. 어느 날 저녁인가 무대 뒤편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단역들이 있는 칸막이 좌석의 맨 뒷줄에 앉아 있어도 되었던 것이다.   벌써 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대 위에는 아직 한 번도 선 적이 없었다.   오페레타 '두 명의 사보아 사람'이 공연되던 어느 저녁이었다.   시장 장면에서는 무대를 꽉채우기 위해 누구나 무대 위에 등장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약간 분장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기분으로 무대로 나갔다. 나는 늘 입던 옷을 입고 있었다. 견진 성사 때의 그 옷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솔질을 하고 수선을 했어도 그 옷은 초라해 보였다. 나는 또 얼굴을 덮는 큰 모자도 썼다. 나는 내 꼴이 우습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내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내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내 짧은 조끼가 내 긴 몸체에 비해 너무 드러나지 않게 하려면 나는 가만히 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웃음거리로 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난생 처음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했다. 그 때 당시에는 대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가수가 나왔다. 그는 내 손을 잡더니 비웃으면서 내 무대 데뷔에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제가 덴마크 관객에게 당신을 소개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나를 조명 아래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웃었다. 나는 그것을 느꼈으며,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를 뿌리치고 무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 후 곧 달렌 씨가 발레에서 단역을 하도록 해 주었다. 내가 맡은 것은 악마 역할이었다. 나는 이 발레의 인연으로 교수 하이베르크 여사를 알게 되었다. 시인의 부인이요, 지금은 덴마크 무대의 존경 받는 예술가인 그녀는, 그 당시 그 발레에 어린 소녀 역을 맡아 출연했던 것이다.   우리의 이름이 프로그램 종이 위에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 일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내 이름이 인쇄되다니! 나는 그 속에서 불멸의 후광을 보았다고 믿었다. 나는 그 인쇄된 이름을 보고 또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밤 발레 프로그램을 손에 들고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불빛에 내 이름을 읽었다. 나는 행복했다.   이제 나는 코펜하겐에서의 두 해째를 맞고 있었다. 나를 위해 모금되었던 돈은 다 쓰고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수치스러워서 결핍과 곤궁함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처를 아침 커피만을 제공하는 어느 선원의 미망인 집으로 옮겼다. 어둡고 암울한 날들이었다. 하숙집 여주인은 내가 다른 집에서 식사하기 위해 외출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킬스베르그 공원 벤치에서 작은 빵을 씹고 있었다. 아주 드물게 허름한 식당에 가서 가장 멀찍이 떨어진 식탁을 골라 앉기도 했다. 버림받은 상태였으나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친절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면 모두 정직한 친구로 생각했다. 신은 내 작은 방에 함께 계셨고 저녁 기도를 올리는 저녁마다 나는 순진하게 신에게 물었다.   "곧 나아지겠지요?"   나는 1년 중 첫날의 상태가 그 해 내내 지속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 최상의 목표는 연극에서 배역을 얻는 것이었다. 바로 새해 첫날이었다. 극장은 문을 닫고 있었다. 반쯤 눈이 먼 늙은 수위만이 무대로 통하는 입구에 앉아 있었다.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살짝 수위 곁을 지나 무대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아무도 없는 객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 한 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큰 소리로 '주기도문'을 외운 후, 새해 첫날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이야기했으니 올해에는 이 곳에서 더 많은 배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아래 그 곳을 나왔다.   코펜하겐에 온 두 해째에도 밖으로 나가 보지 못했다. 딱 한 번 동물원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 해째 되던 어느 봄날 아침 나는 처음 밖으로 나갔다. 그 곳은 프리드리히 6세가 여름 별장으로 이용하던 프레데릭스베르그가 가르텐이라는 곳이었다.   나는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너도밤나무 아래 서 있었다. 태양이 잎들을 투명하게 만들고,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이 풍경에 압도당하여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내 양팔을 나무 둘레에 감고는 입맞추었다.   "미친 사람아냐!"   내 곁에서 어떤 남자가 말했다. 그는 이 궁정의 관리였다. 나는 놀라서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풀이 죽은 채 시내로 되돌아왔다.   나중에 사귀게 된 친구 한 사람이 이 시절의 나를 처음으로 보았노라고 말해 주었다. 그것은 어느 부유한 상인의 살롱에서였는데, 사람들은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자작시를 한 편 낭독해 달라고 청했다. 나는 몹시 감정을 섞어서 시를 낭송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롱하려던 기분은 동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내게 학문에 전념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날 위해 한걸음을 내디뎌 주지 않았다. 목숨을 연명하는 것도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그 때 비극을 한 편 써서 왕립 극장에 제출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돈을 받게 되면 나는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 해 여름 내내 나는 극심한 고통으로 시달렸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라면 내게 관심을 보여 준 많은 사람들은 틀림없이 내 고통이 덜어지도록 도와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내 사정이 어떤지 말하지 못하도록 거짓 거품이 나를 막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감에 도취해 있었으니 그 때 처음으로 월터 스콧을 읽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현실을 잊었다. 그리고 점심 비용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데 썼다.   내게 제 2의 아버지가 되어 준 분은 지금의 상공회의소 고문인 콜린 씨였다. 또 그의 자식들과도 형제 자매처럼 지냈다. 나는 그 당시 처음으로 그를 보았는데, 그는 최고의 유능함과 고귀한 마음이 결합한, 덴마크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존경했다. 그는 벌써 그때 왕립 극장 극장장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내게 관심을 가져 준다면 가장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후일 내게 그토록 소중하게 될 그 집을 찾아가게 되었다.   코펜하겐의 제방이 확장되기 이전에 그의 집은 성문밖에 있었으며 스페인 공사의 여름 별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도 약간 삐뚜름히 기울어진, 각이 진 그 집은 그대로 명망 높은 거리 그 곳에 같은 모습으로 놓여있다. 입구 쪽으로는 고대풍의 나무 발코니가 이어져 있고 마당과 뾰족한 합각 지붕 위로는 큰 나무가 초록색 가지들을 뻗치고 있었다. 그 집은 내게 내 부모님의 집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처음에 콜린 씨에게서 상인 같은 느낌만을 받았다. 그는 몇마디하진 않았으나 진지했다. 관심은 기대하지도 않은 채 나왔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걱정해 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바로 콜린씨였다. 그 당시 나는 그가 내 말에 귀기울이는 조용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곤궁하다는 나의 말에, 그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고 있고 항상 열성과 행운으로 날 위해 영향을 끼쳐 주고 날 도와 줄 것을 다짐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늘어놓은 내 제출 작품 '알프솔'에 대해 그는 어찌나 가볍게 언급했던지 그가 보호자라기보다는 적으로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극장 관리부로 호출을 받았다. 그 곳에서 라베크 씨는 '알프솔'은 무대 공연에는 쓸모가 없는 작품이라고 돌려 주었다. 그러면서 그 작품 속에는 많은 황금 낟알이 들어 있으며, 내가 진지하게 공부를 하면, 언젠가는 덴마크 무대를 위해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져도 될 것이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는 내게 공연할 가치가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콜린 씨는 내가 수업을 받으며 생활해 갈 수 있도록 프리드리히 5세 왕에게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었다. 왕은 몇 년 동안 매해 일정 금액을 장학금으로 주었다. 아울러 마침 활동적인 교장이 새로 부임한 슬라겔세의 라틴 어 학교에서도 콜린 씨의 주선에 의해 공짜 수업을 받기로 되었다. 나는 너무 놀라 벙어리가 될 지경이었다.   나는 내 인생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는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나는 코펜하겐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는 슬라겔세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은 시인 바게센 씨와 잉게만 씨가 학교를 다닌 곳이기도 했다.   나는 콜린 씨로부터 3개월마다 돈을 받았다. 그는 내 열성과 진도를 시험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그에게 갔을 때, 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그러자 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부족한 것이나 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써 보내게."   이 시간부터 나는 그의 마음 속에 뿌리를 박았다. 어떤 아버지도 그가 내게 해 주고 있는 이상의 것을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후일 내가 누리게 된 행운을 그보다 더 마음 속으로 기뻐해 준 사람은 없었다. 또 내 근심을 그보다 더 진정으로 함께 걱정해 준 사람도 없었다. 덴마크의 가장 유능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나를 자기 친자식처럼 생각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우편 마차 편으로 코펜하겐을 떠났다. 슬라겔세에서 학교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내 옆에는, 한 달 전에 대학에서의 첫 시험을 치르고 이제 대학생이 된 모습을 보여 주기, 부모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고향인 유틀란트로 가는 대학생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제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쁨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그가 만약 나 같은 사정에 처해 있다면, 그래서 다시 라틴 어 학교에 다니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가지고 제란트의 그 작은 섬으로 여행했다.   어머니는 아마 나로부터 가장 행복한 편지를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늙은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셔서 내가 라틴 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이신다면 얼마나 좋으셨을까.     ------       3   늦은 저녁 슬라겔세에 있는 여관에 도착하자, 나는 여관 여주인에게 이 도시에 볼 만한 것이 있는 지를 물었다.   "그럼, 새로운 영국제 소화기와 바스트홀름 목사님의 도서관이지."   여주인의 말처럼 그것들이 이 도시에서 주목해 볼 만한 전부였다.   두어 명의 창기병 장교들이 세련된 사교계를 이끌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학생의 성적이 올라갔는지 떨어졌는지 등의 것을 모두 빤히 알고 있었다. 총연습 때면 라틴 어 학교의 학생들과 시내의 하녀들에게 공짜로 입장을 시켜 주었던 사립극장이 대화의 풍성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그 곳은 숲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해안까지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중요 우편 도로는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종종 우편 마차의 호각 소리가 울려 오기도 했다.   나는 교양 있는 계층의 점잖은 미망인 집에 하숙을 얻었다. 나는 배우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바다에 내던져진 것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면 다음 파도가 뒤따랐다. 문법, 지리, 수학. 나는 그런 것들에게 압도당할 것처럼 느꼈고, 내가 이 모든 것에 결코 적응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모든 사람을 비웃고자 하는 특이한 욕망을 가진 교장은 물론 나라고 해서 예외로 삼지 않았다. 그는 내게는 신성 그 자체처럼 그 곳에 서 있었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어느 날 내가 그의 질문에 틀린 대답을 하고, 뒤이어 그가 날더러 바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콜린 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사람들이 내게 베풀어 준 것에 대해 보답을 못할 것 같다고 토로를 할 정도였다. 그러면 콜린 씨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차츰 좋은 성적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내게 진심으로 잘해주었다. 그러나 잘해 나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첫 시험에서 나는 교장의 칭찬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기록부에다 기입해 주었다. 이 일에 기뻐하면서 나는 며칠 후 코펜하겐으로 왔다.   나의 발전을 알아차린 굴트베르크 씨는 친절하게 맞아 주면서 나의 열성을 칭찬해 주었다. 오덴세에 있는 그의 형님도 내가 모험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내 고향을 다음 여름에는 다시 볼 수 있도록 비용을 약속해 주었다.   나는 발트 해협을 건너 걸어서 오덴세로 갔다. 고향에 가까워지고 오래된 높은 교회 종탑을 쳐다보자 내 가슴은 점점 부드럽게 녹아 갔다. 신의 보호를 가슴 깊이 느꼈다.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행복해하셨고 이베르센 씨네 가족과 굴트베르크 씨네 가족도 모두 나를 진심으로 반겨 주었다. 작은 골목에서 사람들이 내 뒷모습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내가 기막히게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 위에 높은 탑을 지어 놓은 가장 부유한 사람이 나를 초대해 그 탑으로 이끌었을 때, 도시와 그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광장 아래쪽에서 내가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빈민 병원의 몇몇 불쌍한 여인네들이 날 올려다보았을 때 나는 진정 행복의 성벽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슬라겔세로 돌아가자마자 이 후광은 사라져 버리고 이에 대한 생각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행동 및 태도와 관련하여 기록부에 항상 '대단히 우수함'의 성적을 얻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냥 '우수함'의 성적을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나는 콜린 씨에게 편지를 쓰고 '우수함'의 성적을 받은 것은 전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단언을 할 만큼, 나는 걱정 많고 유치한 아이였다.   교장 선생님은 슬라겔세에 머무는 것에 싫증을 내고, 헬싱괴르에 있는 라틴 어 학교의 임기가 다 된 교장의 후임을 간청하여 그 자리를 얻었다. 그는 내게 그 이야기를 해 주면서 내가 자신을 따라 그 곳으로 가도 좋으며 자신의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콜린 씨에게 써도 좋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당장 이사와도 좋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나는 1년 반 후에 대학생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같은 일은 내가 그 곳에 남아 있으면 일어 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직접 내게 라틴 어와 그리스 어를 몇 시간씩 개인 수업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교장은 직접 콜린 씨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6,36^후일 내가 보게 되었지만^36,3^ 나의 열성과 진도와 훌륭한 능력에 대한 최상의 칭찬을 담고 있었다. 내 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전혀 잘못 생각했고, 그 능력의 결핍 때문에 자주 울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이 나를 그토록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아무런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그가 내게 그것을 표명해 주었더라면 나는 고무 받고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는 끊임없이 나를 비난하여 나의 기를 꺾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물론 즉각 콜린 씨의 허락을 얻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곳은 내게는 불행의 집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 헬싱괴르로 옮겨 갔다. 한 번도 1마일 이상 넓이를 가져 본 적이 없고 마치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부풀어오른 푸른 강처럼 보이는 외레준트에 밀접해 있는, 덴마크의 가장 아름다운 곳의 하나인 그 곳으로.   온갖 국적의 배들이 수백 척씩 그 곳을 지나갔다. 겨울이면 얼음이 얼어 나라들 사이에 단단한 다리를 놓아 주었고, 봄이 되어 얼음이 깨어질 때면 그것은 마치 떠내려가는 빙하와도 같았다.   이 곳의 자연은 내게 생생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몰래 그 자연을 훔쳐보아야 했다.   학교 시간이 끝나면 대개 집의 문이 닫혀져 버렸다. 나는 후덥 지근한 공부방에 앉아서 라틴 어를 배우거나 아이들과 놀거나 아니면 내 작은 방에 들어앉아 있어야만 했다. 집 밖으로 놀러 나갈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의 생활은 내 기억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저녁마다 신께 올리는 기도에서 이 성찬을 거두어 차라리 죽음을 내리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 가질 수가 없었다. 교장이 나를 조롱하고 내 감정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때, 그것이 얼마나 내게 심한 일인가를 나는 결코 편지에서 발설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탓해 본적이 없었다.   "저 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저 환상적인 작자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거야."   코펜하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 콜린 씨에게 가는 내 편지는 그토록 음침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콜린 씨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를 도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내 내면의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감정은 몹시 탄력성이 있었고, 모든 햇빛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코펜하겐으로 여행 허가를 얻는 휴일만 이 감정 속으로 살짝 빠져 들어갔다. 코펜하겐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 며칠 동안은 얼마나 굉장한 변화가 일어났던가!   모든 우아함과 청결함, 교양 갖춘 세계의 안락함이 있는 코펜하겐의 집으로! 그러나 나는 며칠 후면 다시 교장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교장은 코펜하겐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내가 그 곳에서 자작시를 낭독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가 그 시에서 문학의 불꽃을 발견한다면 날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떨면서 시 '죽어 가는 아이'를 가져갔다.   그는 읽고 나더니 그것은 감정의 장난이며 시시덕거리는 잡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내가 시를 쓰는 것으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그가 나를 비난했더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날부터 나는 더욱 불행해졌다. 정신적으로 어찌나 고통을 받았던지 거의 파멸할 지경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음울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그 때 마침 교사 한 사람이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하게 되어 콜린 씨에게 내 사정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임시로 날 학교에서 그리고 교장의 집에서 빼내어 주었다.   교장과 작별하면서, 내가 받았던 호의에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 이 격렬한 남자는 나를 저주하면서 내가 결코 대학생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시는 서점 바닥에서 먼지가 앉고, 나 자신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충격을 받으면서 그를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난 후 내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즉흥시인'이 출간되었을 때, 코펜하겐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화해하는 태도로 손을 내밀면서 나를 잘못 생각했으며 잘못 판단했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둡고 암울하던 날도 내 인생에 축복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북방 언어 및 시에 대한 열성으로 후일 덴마크에서 명성을 얻게 된 젊은 남자가 내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작은 다락방을 빌려 살았다. 그 방은 '바이올린'에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림 없는 그림책'을 읽으며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곳에서 자주 달의 방문을 받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나를 후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수업료도 지불해야 했다. 다시 말해 다른 방식으로 절약을 해야 했다. 몇몇 가정이 내게 그들의 식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주 중에 그 식탁들은 모두 자리가 찼다. 나는 당시 많은 코펜하겐의 가난한 대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종의 '밥 먹으러 오는 사람' 이었다. 여러 가정의 다양함을 들여다보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되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헬싱괴르에서는 특히 수학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따라서 이 과목들은 이제 나 스스로에게 맡겨졌고 모든 것은 그리스 어와 라틴 어에서 뒤떨어진 것을 보충하는데 집중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향에서 ^6,36^아마도 사람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36,3^ 많이 도와 주어야겠다고 탁월한 선생님은 생각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 과목이었다. 그는 엄격하게 성서의 말씀을 지키고 있었다. 성경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성서에서 말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생생하게 받아들였다. 신은 사랑이라는 것을 감정과 개념으로 파악했다. 이에 반대하는 모든 것, 영겁의 불이 지속되는 지옥을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교실 의자 위의 억압 받는 존재로부터 벗어나자 나는 모순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나는 마치 자연인인 것처럼 말을 했다. 아주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그러나 철저하게 글자 그대로의 성경을 믿고 있던 선생님은 자주 나를 걱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똑같이 순수한 불길을 가슴에 담은 채 논쟁을 했다. 이 더럽혀지지 않고, 재능 있는 젊은 사람과 만난 것은 내게는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이즈음 덴마크 문학에는 신선한 물결이 지나가고 있었다. 국민들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 비하면 정치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탁월한 작품인 '사이코'와 '도공 발터'로 인정 받고, 시인이라는 명성까지 얻은 하이베르크가 덴마크 무대에 보드빌(프랑스에서 생긴 통속 가극)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은 덴마크 식 보드빌이었다. 그 때문에 그것은 환호와 함께 받아들여졌고 다른 모든 것을 거의 몰아내 버렸던 것이다. 탈리아가 덴마크 무대에 사육제를 개최했다면, 하이베르크는 덴마크 무대의 비서 격이었다.   나는 외르스테드 근처에서 처음으로 그와 알게 되었다. 세련되고 말 잘하고 그 당시의 영웅이었던 하이베르크는 나를 높게 평가하여 말을 걸어 주었다. 그는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나는 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나의 해학에 찬 시들을 가치 있다고 판단, 주간지 '날으는 우편마차'에 실어 주었다. 그보다 바로 직전에 시 '죽어 가는 아이'가 어느 신문에 실리게 할 수 있었다. 평소 보잘 것 없는 작품들을 잘 받아들이던 그 수많은 잡지 발행인들 어느 누구도 나같은 학생의 시를 실어 줄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나의 가장 잘 알려진 시는 일종의 사과문과 함께 게재될 수밖에 없었다.   하이베르크는 이것을 알고, 자기 신문의 명예로운 자리를 내게 내 주었던 것이다. 두 편의 해학적인 내 시는 'h'라는 이니셜로 제대로 데뷔를 한 셈이었다.   나는 '날으는 우편마차'가 내 시를 싣고 나왔던 그 첫날 저녁을 기억한다. 나는, 내게 잘해 주었으나 나의 시인 기질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며, 시 한줄 한줄마다 비난을 하는 사람의 집을 방문하고 있던 중이었다. 주인 남자가 '날으는 우편마차'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오늘 저녁 두 편의 우수한 시가 실려 있어. 하이베르크의 시야. 다른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을 쓸 수가 없어."   그리고 그 시를 열광하여 낭송했다. 내가 몰래 숭배하던 이 집의 딸이 그것을 지은 사람이 나라고 기뻐하며 외쳤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것은 내 마음을 매우 아프게 했다.   1828년 9월,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시험을 끝내자 수천 가지의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흡사 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내 처녀작 '아마크로가는 도보여행' 속에 잘 묘사되어 있다. 어떤 서적상도 그 작은 책을 출판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비로 출판을 감행했으며 그것은 나오자마자 며칠 만에 다 팔리고 말았다. 서적상 라이제 씨가 두 번째 판권을 샀다. 뒤이어 그는 제3판을 찍어 냈다. 그 책은 스웨덴에서도 출판이 되었다. 모두가 그 책을 읽었다. 나는 환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생' 이었으며 내 최고의 목표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기쁨에 도취되었다. 이러한 도취 속에서 나는 운율을 맞춘 시로 된 내 최초의 희곡 '니콜라이 탑 위에서의 사람' 혹은 '1층 좌석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나요?'를 썼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즉 기사극을 풍자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이 작품은 보드빌에 대한 열광을 조롱하고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동료 학생들은 그 작품을 환호하면서 받아들였다. 그들은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 해에 덴마크 무대에 작품을 올린 두 번째 동창생이었다. 나와 같은 대학생이었던 아르네젠이 보드빌 '민중 극장에서의 음모'를 썼던 것이다. 이 작품은 장기 공연목록에 올라가 있었다. 우리는 10월의 두 젊은 작가였고, 이 학기가 배출한 열여섯 시인 가운데 두 명이었다. 사람들은 농담으로 이 열여섯을 네명은 크고 열두명은 작다고 분류했다.   이제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시인의 용기와 젊음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집들이 내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서클에서 저 서클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또한 상당히 배짱을 가지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1829년 9월 문헌학과 철학 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 많은 갈채를 받은 내 처녀 시집을 출간할 수 있었다. 생은 햇빛을 받으며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시인이 된 나는 소위 이 나라의 제1급 가정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의 좋은 점을 높이 사주고 그들의 교제 범위에 나를 받아 주었다. 또 그들의 행복하고 풍요로운 여름 휴가에 나를 참여하도록 해 주었다. 나는 그 곳에서 자연과, 숲의 고독, 시골 생활에 나 자신을 내맡길 수가 있었다. 그 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제대로 된 덴마크의 자연 속에 들어가 살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동화의 대부분을 지었다. 나를 둘러싼 자연, 그리고 내 속의 본성이 내 직업에 관해 설교를 해 주었다. 옛 기셀펠트의 들판 위에서, 예전의 수도원에서, 깊은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호수와 언덕과 함께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성의 소유주이며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부인의 어머니인 단네스크욜트 백작 부인은 참으로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부인이었다. 나는 민중의 가난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친절하게 받아들여진 손님이었다. 지금은 자연 속에 있는 그녀의 무덤에 너도밤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기셀펠크보다 더 풍요로운 녹지가 있는 브레겐트베드도 있었다. 덴마크 재무상 몰트케 백작의 소유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영지 중의 하나인 이 장소에서 내가 누렸던 손님으로서의 자유,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행복한 가정 생활은 내 생 위에 비치는 햇빛을 더욱 넓게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혹 내가 이 이름들을 강조하여 자랑하려는 것처럼, 혹은 내가 이 이름들에게 감사의 말을 늘어놓으려는 것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또 만약 내가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다면 나는 더 많은 이름들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두 장소와 또 토르발센 씨에 의해 유명해진 슈탐페 남작 소유나 니제만을 언급하려 한다. 그 곳에서 나는 그 위대한 예술가 토르발센 씨와 함께 지냈다. 내 젊은 시절의 가장 값진 친구이며 후일의 소유주인 사람과 우정을 맺었던 것이다.   이 여러 가지 다른 범주에서의 생활은 내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영주들에게서도, 귀족들에게서도, 또 아주 가난한 민중들에게서도 고귀하며 인간적인 것을 발견하였다. 선량함에 있어 우리 모두는 같다!   덴마크의 겨울 역시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 때에도 나는 시골에서 며칠을 보내며 자연속에서의 본래적인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년 중 가장 많은 시간은 코펜하겐에서 지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콜린 씨의 결혼한 아들 딸들의 집에서 나는 고향에 온 듯이 느꼈다. 천재적인 작곡가 하르트만과의 우정도 해가 갈수록 돈독해졌다. 그의 집에는 예술과 자연의 싱싱함이 꽃피어 있었다.   실제 생활에 있어서 내 충고자가 콜린 씨였다면 새로운 작품에 있어서의 충고자는 외르스테드 씨였다. 극장은 내가 매일 저녁 찾아가는 클럽이 되었다. 바로 이 해에 나는 소위 궁정 1층 관람석에 자리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물론 내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었다.   첫번째 작품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1층의 최하층 좌석을 얻는다. 두 번째 작품 후에는 연극 배우들의 자리인 공짜 1층석에, 그리고 세 개의 큰 작품이나 여러 개의 작은 작품들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작가는 번호가 매겨진 일등 좌석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토르발센이나, 외렌슐레거 등 몇몇 나이 든 시인들을 만날 수 있고 나 역시 1840년 일곱 작품을 공연한 후에 이 곳에 자리 하나를 차지했던 것이다. 토르발센 씨가 살아 있었을 때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자주 그의 옆자리에 앉곤 했다. 외렌슐레거 역시 나의 다정한 이웃이었다. 그리고 많은 저녁 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 위대한 두 정신 사이에 앉아 있으면 경건한 겸손함이 내 영혼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지난 날의 내 인생이 눈앞을 떠돌며 흘러간다.   내가 단역 배우들의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때도, 또 유치하게 미신에 잠겨 어두운 저 무대 위에 무릎을 꿇고 바로 지금 내가 최상급의 중요한 인물들 사이에 앉아 있는 이 자리 앞에서 주기도문을 외웠던 시절도 흘러간다. 만약 나의 동료가 나를 보고서, 저기 두 위대한 정신들 사이에 안데르센이 오만하고 자랑스럽게 앉아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얼마나 날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겸손함이요, 내 행복을 벌어들일 힘을 달라는 신에게의 간구일 뿐이다. 신이여, 항상 제게 이 감정을 허용하소서! 나는 토르발센에게서도, 오렌슐레거에서도 우정을 발견하였다. 북방의 지평선 위에 있는 이 중요한 두 별에게서 말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고 날 둘러싸고 있는 두 분의 반사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843년 성탄절, 나는 동화집을 출간함으로써 덴마크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한탄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나는 내가 벌어들인 것을, 아니 더 이상의 것을 내 고향을 위해 쓰기도 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써온 모든 것 덴마크에서 절대적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은 이 문학에 나의 온 힘을 쏟았다.   맨 처음 출간된 책에서 나는, 어렸을 때 들었던 전래 동화를 이야기하였다. 그 책은 나 자신의 독창적인 동화로 끝을 맺고 있다. 그 동화는 호프마(독일 낭만주의의 작가)의 동화와 상당히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바로 이 동화인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점점 더 동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됨에 따라 대부분의 동화를 나 스스로 창작하고자 했다. 그 다음 해에 새로운 동화책이 나왔고 뒤이어 곧 세 번째 동화책이 나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상당히 긴 동화 '인어 공주'는 나의 창작품이었다.   이 동화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특히 높아졌고 다음에 나오는 동화집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매해 크리스마스 때마다 새로운 동화집이 나와서 나의 동화집이 걸리지 않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일급 희극 배우들 중 몇몇은 내 동화 하나하나를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것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들은 시 낭송으로부터의 전환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꿋꿋한 장난감 병정' '돼지치기 소년'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동화가, 왕립 극장이나, 사립 극장의 무대에 올려져 좋은 반응을 얻었다.   동화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려하여, 독자를 올바른 관점으로 이끌기 위하여 나는 첫 동화집에다 "어린이에게 들려 주는 동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직접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로 들려 준다는 기분으로 종이 위에 옮겨 썼다. 그렇게 하자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은 내가 장식물이라 부르고 싶은 것을 특히 재미있어 하였다. 그에 반해 나이 든 사람들은 보다 깊은 이념을 담고 있는 작품들에 관심을 가졌다.   동화는 어린이와 어른들이 모두 읽는 장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동화를 쓰려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 주게 되었다. 동화는 덴마크의 열려진 가슴들을 찾았다. 누구나가 그것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들려 주는" 이라는 수식어를 지웠다. 그리고 모두 내가 창작한 세 권의 새로운 동화집을 내놓았다. 이들은 모두 내 조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나는 더 이상의 것을 바랄 수가 없다.   동시에 나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토록 명예로운 평가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을, 아니 공포를 느꼈다.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한 줄기 햇빛이 나를 뚫고 들어온다. 나는 용기와 기쁨을 느끼고 더욱 이 방향으로 나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과 동화의 본질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내가 길어 퍼 올려야 할 동화의 원천과 본질을 더욱 깊이 주의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예술과 인생이 내게 분명해지면 해질수록 더욱 많은 햇빛이 바깥으로부터 내 영혼으로 뚫고 들어오는 행복한 체험을 하였다. 어두웠던 젊은 시절에 비해 지극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온 것은 확신과 안정이었다. 게다가 그 안정감은 가끔씩 하는 여행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어디에 가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사람들과 쉽게 사귀었고 그러면 그들은 신뢰와 다정함을 되돌려 주었다.   나는 올덴부르크에서 동화를 여러 차례 독일어로 낭독했다. 물론 도처에서 덴마크 어로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덴마크 어로 읽어야 낭독이 가질 수 있는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덴마크 어에는 번역이 재생시킬 수 없는 언어의 힘이 놓여 있다. 독일어로 읽으면 동화는 내게 좀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낭독할 때 나의 영혼을 독일어 속에 옮겨 놓은 것은 어렵다. 또 나의 독일어 발음도 너무 부드럽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를 발음할 때마다 그것을 목구멍 밖으로 내오기 위해 마치 달리기 할 때의 도움닫기를 해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독일 어디에서나 나의 독일어 동화 낭독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동화 낭독에서 외국어 발음이 가장 많이 허용되었다고 믿고 싶다. 여기서 외국적이란 것은 거의 순진성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정도로 크게 중요치 않다. 그것은 오히려 낭독에 자연적인 색채 효과를 부여해 주었다. 어디에서나 나는 탁월한 남자들과, 재치 있는 여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따르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내게 읽어 달라고 간청하였고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였다.   이 시간까지의 내 인생의 동화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그토록 풍요롭고 아름답게.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렇게 창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행운아라고 느낀다.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고 다정하게 맞아 주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실망으로 변하는 일은 드물었다. 영주에서부터 아주 가난한 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나는 고귀한 인간의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산다는 것, 신과 인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서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솔직하게 모두를 믿으면서 나 자신의 살아온 동화를 이야기하였다. 내 행복은 물론 근심도 털어놓았다. 마치 신 앞에 털어놓듯이 내가 누린 경의와 인정에 대한 기쁨을 토로하였다. 그것이 허영심일까?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 감정은 격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겸손하다. 나는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옮기고 나서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 그 어린 시절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이름들 중에는 반드시 '안데르센'이 포함되어 있다. 어머니가 흔들어 주던 요람에서부터 유년기, 소년^5,23^소녀기, 청년기를 거치면서 어떤 형태로 된 것이든, 안데르센의 동화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어른들의 머릿속에도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야생 백조들' '빨간 신' '미운 오리새끼' 등의 동화는 아름답고 또 혹은 슬픈 모습으로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안데르센의 문학 세계가 어떠한지, 그가 어떤 배경에서 동화를 쓰게 되었는지 또 그가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났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여기 모아진 '안데르센 동화 전집(전7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화는 물론 그 동안 우리가 접할 수 없었던 그의 모든 동화가 수록되어 있어 안데르센 문학의 참모습을 보여 준다. 또 전집 1권에 실린 자전적인 이야기 '내 인생의 동화, 문학은 없었다'는 작가 안데르센에 대한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 준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덴마크의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독서를 많이 하고 사색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안데르센의 정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또한 북구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유년 시절의 정서는 안데르센 문학 세계의 뿌리를 받치고 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열네 살 소년의 몸으로 단신 상경한 안데르센은 모진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직 선량한 마음씨, 그리고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 하나로 주위의 도움을 얻어 대학생이 되었고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아 결국은 세계 동화 문학에 우뚝 솟은 사람이 되었다.   안데르센은 처음 희곡과 시에서부터 그의 문학 세계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동화라는 장르에 들어섬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이룰 수 있었다. 동화는 안데르센의 인생에 안정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온 세계 아이들에게 또 어른들에게 동화라는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창작 예술 동화이다. 그는 애초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염두에 두고 동화를 만들었다. 전승되어 온 민담이나 설화 등을 바탕으로 한 것도 있으나, 그 어느 것이든 안데르센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들어가지 않은 동화는 없다. 바로 이 점이 전래 동화들만을 모아 놓은 독일 그림 형제의 동화집과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 아닐까싶다.   정령이나 동물들의 세계에 대한 의인화가 민간 전승 동화에 비해 비교적 적은 점, 지하세계나 저승 세계가 등장하더라도 그것이 고대 설화와는 다른 감각으로 그려지고 있는 점, 또 어떤 동화에서든 내용이 반드시 권선 징악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점 등은 안데르센의 동화가 창작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승 동화가 민속적인 장르인데 비해 안데르센의 창작동화는 문학이요, 예술 장르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동화가 어린이들에게서는 물론 어른들에게서 반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동화들이 바로 그의 창작품이며 그 속에 우리 인간의 문제, 세상살이의 모습이 진솔하게 동화의 색채를 빌어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읽어도 좋다. 어린이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길러 주고, 어른에게는 때묻지 않은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정서를 남겨 준 안데르센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1994년 12월                     옮긴이    
102    허클베리핀의 모험-마크 트웨인 댓글:  조회:947  추천:0  2022-03-31
  허클베리핀의 모험-마크 트웨인[미국]/김병철 譯   마크 트웨인 (Samuel Langhorne Clemens) 소설가 생몰1835년 11월 30일 ~ 1910년 4월 21일 출생지미국 신체A형 데뷔1865년 단편집 '캘리베러스군의 명물 뛰어오르는 개구리' 경력모닝콜지 기자 제1장 모세와 부들을 찾아낸 이야기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책을 읽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나라는 사람을 알 길이 없겠지만 그런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마크 트웨인으로 이야기를 엿 늘이듯이 좀 늘여서 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거짓말을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폴리 아주머니와 더글라스 과부댁과 그렇지, 메리 정도일 것이다. 폴리 아주머니 - 즉 톰의 폴리 아주머니 - 와 메리와 더글라스 과부댁에 관한 얘기는 '톰 소여의 모험'에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얼마간 거짓말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그것은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의 결말은 대개 이렇다. 톰과 나는 강도들이 동굴 속에 감춰 둔 돈을 찾아내어 그 덕택으로 우리들은 부자가 된 것이다 한 사람 몫이 6천 달러로, 고스란히 금화이다. 쌓아놓고 보니 상당한 높이의 돈이었다. 그래서 대처 판사가 그것을 맡아가지고 이자를 붙여서 남에게 놓아주어, 우리 수중에는 1년 내내 매일 1달러씩 글러들어와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할 바를 모를 정도의 돈이었다 더글라스 과부댁은 사뭇 나를 자기 아들로 생각하고는 나를 문명인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 아주머니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어찌나 깔끔하고 품위있는 것을 생각하는지, 밤낮 집안에서만 날을 보낸다는 것은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으므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집을 도망치고 말았다. 다시 한번 그전에 입던 누더기옷과 빈 통으로 돌아와 나는 자유의 몸이 되고 만족하였다. 그러나 톰 소여는 나를 찾아내어, 자기는 강도단을 조직하는 중인데, 만일 내가 과부댁에 다시 돌아와 의젓하게 지낸다면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과부댁은 이번 내가 저지른 일로 엉엉 울기까지 하며 불쌍한 길잃은 양새끼라고 부르고, 또 그밖에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과부댁은 또다시 나에게 새옷을 입혔고, 나는 구슬 같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은 기분 외에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 낡은 버릇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과부댁은 저녁 식사 때가 되면 벨을 울렸고, 그러면 나는 1초도 어김없이 식탁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식탁으로 가서도 즉시 먹는 것이 아니라. 과부댁이 머리를 숙이고는 음식물에 관해서 뭐라고 중얼중얼대고 있는 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물이 어떻다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음식이 하나하나 따로따로 되어 있을 뿐으로 그밖에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먹다 남은 찌꺼기를 넣은 통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있어 말하자면 마룩의 교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이루어져 있어서 음식맛이 한결 좋아진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과부댁은 으레 책을 꺼내들고 모세와 부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고, 나는 나대로 또 그 사나이에 관한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알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 마나님은 무슨 바람이 불어 그만 모세가 훨씬 이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하고 말았다. 나는 죽은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으므로 그후부터는 일체 마음을 쓰지 않기로 했다. 금세 나는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고, 피우게 해달라고 과부댁에게 졸라보았지만 막무가내로 들어주지 않는다 흡연은 나쁜 일이며 깨끗하지 못하니까 앞으로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말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흔히 있는 법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남에게는 심하게 군다. 이 마나님은 자기 친척도 아니고, 죽은 지 이미 오랜 모세에 관한 일을 이러쿵저러쿵 찧고 까불면서 좋은 점이 있는 것을 내가 하려고 하면 서슬이 시퍼렇게 펄쩍 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연방 코담배를 피운다. 자기가 하는 일이니까 물론 이것은 상관없다는 투로. 이 과부댁의 언니되는 사람으로, 안경을 쓴 왜 몸집이 날씬한 올드 미스인 왓슨 아주머니가 그때 자기 동생과 마침 같이 살러 왔는데, 이번에는 이 사람이 또한 철자책을 가지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 마누라가 한 시간쯤 나를 제멋대로 공부를 시킨다고 졸라맨 다음에야 과부댁은 고삐를 늦춰 주었다 나는 이 이상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후 한 시간쯤은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심해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왓슨 아주머니는 밤낮 나를 보기만 하면 한다는 소리가 '허클베리, 그렇게 늘어지는 게 아냐, 똑바로 앉아.' 이러는 것이다. '허클베리, 그렇게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게 아니다. 왜 버르장머리있게 굴려고 하지 않느냐?' 그 다음에는 버룻없이 굴면 빠지고 만다는 지옥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해주어, 나는 거기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 말대답으로 왓슨 아주머니는 그만 머리끝까지 화를 내었지만, 나로서는 별로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아무 데라도 좋으니 무작정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변화가 부러웠을 뿐으로 별로 어디라고 정한 것은 아니다. 나처럼 얘기하는 것은 심술궂기 때문이며, 자기는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그런 말은 절대로 하지는 않을 것이고, 천국에 갈 양으로 자기는 살고 있는 것이라고 왓슨 아주머니는 열을 내어 늘어놓았다. 나로서는 왓슨 아주머니가 가는 곳에 가보았자 별로 신통한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까닭으로 가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다. 그러나 입밖에 내놓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성가신 일이 생길 것이 뻔했고, 또 그래 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일단 입을 연 왓슨 아주머니는 계속하여 천국 이야기를 낱낱이 늘어놓았다. 거기 간 사람은 하루종일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며, 언제까지나 빙빙 도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신통한 일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입밖에 내놓고 그렇다고 하지는 않았다. 톰 소여도 거기 갈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천만에 당치 않는 소리 말라고 딱 잡아떼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톰과 나는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왓슨 아주머니는 계속 나를 못살게 굴었으며, 그 바람에 나는 갑갑증이 나고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얼마 후 검둥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기도를 올린 다음 모두들 잠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양초 토막 하나를 집어들고 이층 방으로 올라가서 그것을 테이블 위에다 놓았다. 창 곁 의자에 걸터앉아 신나는 생각을 해보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나는 심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별은 반짝이고, 숲속의 나뭇잎들은 여간 처량하게 소리를 내고 있지 않고, 멀리서는 부엉이가 죽은 누구를 부르는 듯 호-호-하고 울고 있고, 소쩍새와 개는 임종의 자리에 있는 그 누구를 위해 울고 있고, 바람은 나에게 무슨 하소연을 하듯 속삭이려고 애를 쓰고 있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나는 온몸이 오싹하며 떨렸다. 그때 먼 숲에서 들려온 것이, 마음속에 있는 무슨 하소연을 털어놓고 싶었으나 누구에게도 깨닫게 할 수 없는 유령이 무덤 속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수가 없어 밤마다 슬퍼서 그런 투로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소리였다. 나는 정말 누가 같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풀이 죽어 무서워졌다 얼마 후 거미 한 마리가 내 어깨로 기어올라, 내가 그놈을 손톱으로 탁 튀기자 그만 촛불에 부딪쳐 눈 깜빡할 사이에 지글지글 타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무섭게 나쁜 전조로, 그 무슨 악운이 다가올 것을 누가 나에게 얘기해 주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찌나 무서웠던지 하마터면 입고 있던 옷을 떨어뜨릴 뻔했다 일어나 걸으면서 세 번 방향을 바꾸어 그때마다 십자를 긋고는 다음에 마녀를 접근시키지 않으려고 머리칼 몇 개를 실로 잡아매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길에서 주운 말편자를 문 위에 못으로 박아놓지 않고 그대로 올려놓았다가 잊어버리면 이 짓을 하는 것이다 거미를 죽였을 때 악운을 피하게 하는 데 이 짓이 소용에 닿을는지 어떨는지 누구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다(주운 말편자를 문 위에 걸어두면 행운이 온다는 것은 이 지방의 미신이다). 나는 벌벌 떨면서 다시 한번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워 보려고 파이프를 꺼냈다. 이때는 집안이 온통 죽은 듯이 고요해서 과부댁에게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런데 왜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마을 저 먼 곳에 있는 시계가 땡 땡 땡 하고 열두번치는 소리를 듣고는, 그 다음엔 만사가 전보다도 훨씬 조용해졌다. 얼마 후에 나는 창 아래 나무 사이의 어둠 속에서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뚝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무엇이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바로 아래에서 '야옹!'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옳지, 줬다! 나는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야옹, 야옹!'하고 호응하고 불을 끄고는 창으로 해서 광 지붕으로 기어내려왔다 다음 땅 위로 미끄러져 내려 나무 사이로 기어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톰 소여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2장 우리들 갱의 비밀 맹세 우리 둘은 과부댁 뜰의 저쪽 끝까지 나뭇가지에 머리를 긁히지 않도록 잔뜩 몸을 구부리고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부엌 옆을 지날 때 나는 그만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그 바람에 쿵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는 몸을 웅크리고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짐'이라는 왓슨 아주머니의 몸집이 큰 검둥이가 부엌문 가에 앉아 있는 것이 그 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 때문에 왜 똑똑히 보였다. 짐은 일어서서 잠시 목을 길게 뽑고는 귀를 기울이고 있더니 "거 누구?" 하고 외쳤다. 좀더 잠시 귀를 기울인 다음 그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내려오더니 우리들 한복판에 섰다 만지면 거의 손이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세 사람이 이렇게 가깝게 있으면서 몇 분이고 몇 초고 시간이 흘러갔으리라. 내 발목에 가려운 데가 생겼지만 감히 긁을 수도 없었다 다음엔 귀가 가려워졌고, 양어깨 사이의 잔등이 가려워졌다. 가려운 데를 긁지 못하면 죽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되었다. 그후 나는 몇 번이고 그런 경험을 했다. 훌륭한 사람과 함께 있게 되거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나, 졸리지도 않는데 자려고 하거나 - 즉 몸을 긁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으면 이건 어찌된 셈인지 온몸이 가려워졌다. 얼마 후에 짐이 "어이 누구야? 어디 있는 거야? 쯧 확실히 무슨 소리가 났는데. 옳지, 알았다.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여기 주저앉아서 다시 한번 그 소릴 들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있을걸, 정말." 이러면서 짐은 나와 톰 사이의 땅바닥에 덥석 주저앉았다. 등을 나무에다 기대고 두 다리를 쭉 뻗는 바람에, 그 하나가 하마터면 내 한쪽 다리에 닿을 뻔했다 이번에는 코가 가려워졌다.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가려웠다. 그래도 차마 긁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뱃속이 가려워졌다. 다음에는 엉덩이가 가려워졌다. 가만히 앉아 있을 성싶지가 않았다. 이와 같은 딱한 상태가 계속된 것은 불과 6분인가 7분 동안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보다도 훨씬 오래 계속된 것만 같았다. 이제는 가려운 데가 열한 군데로 많아졌다. 이제는 1분 동안도 그 이상은 참을 수 가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악물고는 참아보리라 결심했다 마침 그때 짐의 숨결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코를 골기 시작했는데, 그 바람에 금세 내 가려운 데도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톰이 입속으로 조그마한 소리를 내어 나에게 신호를 보내 왔으므로 우리 둘은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그 장소를 피했다. 10피트쯤 떨어졌을 때 톰은 내 귀에다 입을 갖다대고, 재미로 짐을 나무에다 묶어 놓자고 했다 하지만 그건 안돼, 짐 녀석 눈을 뜨고 떠들어 댈지도 몰라, 그러면 집안식구들이 내가 집안에 없는 걸 깨달을지도 모를 게 아니냐고 내가 반대했다 그러자 톰은 양초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부엌에 몰래 침입하여 몇 개 더 가지고 오자고 했다. 나는 톰이 그런 짓을 하지 말아 주었으면 싶었다. 짐이 눈을 뜨고 부엌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내가 우겨댔지만, 톰이 좌우간 한번 해보고 싶다고 우겨대는 바람에 우리 둘은 부엌으로 침입하여 양초를 세 개 구했다. 톰은 그 대가로 5센트를 테이블 위에다 놓았다. 그 다음 우리는 밖으로 나와, 나는 도망치는 데 온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톰은 짐이 있는 데까지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무슨 장난을 해주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는다며 막무가내였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방이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하고 쓸쓸했으므로 왜 오랜 시간이 걸린 것만 같았다. 톰이 돌아오는 즉시 우리는 오솔길을 재촉해서 마당 울타리를 빙 돌아, 이내 집 저쪽 언덕의 가파른 꼭대기에 이르렀다. 톰은 짐의 머리에서 모자를 가만히 벗겨 그의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 걸었는데, 그 바람에 짐은 약간 꿈틀하기 는 했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나중에 짐은 마녀들이 자기에게 마법을 걸어 혼을 빼앗고는, 미주리주 내로 온통 자기를 타고 다니다가 또다시 그 나무 아래로 도로 갖다 놓고는, 다른 사람이 그런 짓을 했는지를 보이기 위해서 모자를 나뭇가지에다 걸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되풀이할 때에는, 마녀들은 자기 잔등에 올라타 자기를 뉴 올린즈까지 끌고 내려갔다고까지 과장해서 말했으며, 다음부터는 얘기가 진전될 때마다 점점 늘어가, 마침내는 마녀들에게 끌려 온 세계를 모두 빙빙 돌았으므로 그 바람에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몸이 녹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잔등이 안장 종기 투성이가 되었다고 했다. 짐은 이것을 자랑거리로, 나중에는 다른 검둥이들은 있으나 없으나 눈도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짐의 얘기를 들으러 몇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 오는 검둥이들도 있었으므로 짐은 이 지방의 어느 검둥이보다도 존경을 받았다. 낯선 검둥이들이 입을 헤에 벌리고 서서, 마치 짐이 그 무슨 경이의 존재라도 되는 듯이 아래 위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검둥이들은 부엌 난로 옆의 어둠 속에서 늘 마녀 얘기를 하는 것인데, 누가 입을 열고는 그런 것도 몰라서 어떻게 하느냐고 모두들 아는 척할 때마다 짐이 끼여들며, "흥, 자기가 마녀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다구?" 하고 핀잔을 주면, 이제까지 신이 나서 지껄이고 있던 그 사나이도 그만 움찔하고는 뒷자리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짐은 톰이 파둔 그 5센트짜리에다 실을 꿰어 늘 목에다 걸고는, 이것은 악마가 손수 자기에게 준 부적으로 이것만 있으면 어떤 환자라도 고칠 수 있고 또 무슨 말만 하기만 하면 마녀들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고 했지만, 그 5센트짜리에다 대고 악마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검둥이들이 모여들어 그 5 센트짜리를 한번 보기 위해서 소지품을 무엇이든지 짐에게 주었는데, 악마가 손으로 만져본 물건이라고 해서 아예 그것에 손을 대려고는 하지 않았다 악마를 만나고 마녀에게 끌려서 사방으로 돌아다녀 엉덩이에 잔뜩 뿔이 난 짐은 이제는 머슴으로는 거의 소용없게 되었다. 이야기가 바뀌어, 언덕 꼭대기에 이른 톰과 나는 마을에 등불이 서너개 깜빡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 환자가 있어서 켜놓은 등불이리라 또 머리 위에선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마을 옆 저쪽 아래로는 몸이 떨릴 만큼 고요하고 웅대한 그 강이 있었다. 우리들은 언덕을 내려와 조 하퍼와 벤 로저스와 그밖의 두서너 명의 사내애들이 이제는 폐허가 되고 만 그 무두질 공장에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었다 다음 우리들은 스키프의 방색을 풀고는 3마일 반 하류의 언덕 중턱에 있는 큰 절벽까지 저어 간 다음 그곳에 상륙했다 우리들이 덤불 속으로 들어서자 톰은 전원에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시킨 다음에 덤불 제일 우거진 곳 한복판에 있는. 동굴로 우리들을 안내했다. 그 다음 우리들은 초에 불을 켜 들고는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약 200야드쯤 기어들어가자 동굴은 앞이 탁 넓어졌다. 톰은 몇 개나 되는 통로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핀 끝에, 얼마 후에는 아무도 거기에 설마 무슨 구멍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암벽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우리들도 좁은 장소를 뚫고 방처럼 생긴 곳으로 나온 것인데, 그곳은 축축하고 땀이 서리고 추웠다. 거기서 우리들은 걸음을 멈췄다. 톰이 입을 열었다. "자, 우리들은 도적단을 조직하여 '톰 소여의 갱단'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입단하고 싶은 자는 맹세를 하고 피로 이름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모두가 그럴 생각으로 있었다. 톰은 미리 맹세를 써둔 종이를 꺼내서 읽었다. 그것은 누구나 단원은 이 단을 지켜야만 하며, 또 어떠한 비밀도 누설해서는 안 되며, 만일 단원 중의 누구에게 단원 아닌 누가 무슨 짓을 했을 경우에는, 그 자와 그 자의 가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 은 단원은 그 명령을 완수해야만 하며 그 자들을 죽여서 가슴에다 이단의 표지인 십자가를 새겨넣기 까지 무엇을 먹어서도 안 되고 또 잠을 자서도 안 된다. 이 단에 속해 있지 않는 비단원은 이 표지를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만일 사용하는 날엔 피소될 것이며, 이 짓을 두 번 하면 피살된다. 그리고 만약 단원 중에서 비밀을 누설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그 자의 목을 토막토막 잘라 시체를 완전히 태워 재를 사방에다 뿌리고, 이름은 명부에서 피로 싹 지워 버리고, 단원들을 다시는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저주를 받게 되고, 영원히 그 이름은 망각되고 말 것이라는 벌을 받게 된다. 우리들은 그 모두가 이것은 참말로 훌륭한 맹세라고 칭찬하고는, 톰에게 네 혼자 짜낸 생각이냐고 물었다 톰은 그 중의 약간은 자기가 생각해 낸 것이지만, 그 나머지는 해적의 책인지 강도의 책에서 빼낸 것으로, 급이 높은 갱이라면 누구나 다 이러한 맹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비밀을 누설한 단원의 가족도 죽여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누가 말을 하자, 톰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하고는 연필로 써넣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벤 로저스가 말했다. "여기 허클 핀은 가족이 없잖아. 톰, 허클은 어쩔 셈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있잖아?" 톰 소여가 대답했다. "그렇지, 있긴 하지만 요즘 어딜 찾아봐도 찾아낼 수 없단 말야. 그 전에는 무두질 공장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돼지와 함께 곧잘 자곤 했지만 최근 1년 동안은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거든." 모두 이 일을 의논하고는 나를 제외해 버리려고 했다. 어느 아이든 죽일 가족이나 누가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애들에게 공평치 못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신통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들 있었다. 나는 거의 울음보가 터질 지경이었으나, 그때 얼핏 방법이 있는 것이 머리에 떠올라, 나는 왓슨 아주머니를 내놓기로 했다. "너희들 그 사람을 죽이면 되잖아 "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옳지 그 사람이면 돼. 그럼 문제없어. 허클은 입단할 수 있다" 그래서 전원이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서명할 피를 내었고, 나는 종이에다 내 이름을 써넣었다. "한데 말이야, 이 강도단의 사업안은 대체 뭐지?" 하고 벤 로저스가 물었다. "강도와 살인뿐이야." 톰이 대답했다. "그런데 뭣을 훔친다는 거야? 집인가 가축인가, 그렇잖으면...... "저런 병신! 가축이나 그런 걸 훔치는 건 강도가 아냐, 밤도둑이라는 거지" 톰도 지질 않는다. "우린 밤도둑이 아냐. 그런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우린 기마로 출몰하는 노상 강도란 말이다. 가면을 쓰고 역마차나 자가용 마차를 노상에서 세워 타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는 시계와 돈을 빼앗는 거야." "언제나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나?" "그렇지, 그 말이 맞아.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딴 생각을 하는 선배도 있지만 대체로 죽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으로 돼 있어. 하기야 이 동굴까지 데리고 와서 몸값이 올 때까지 가둬 두는 사람들은 다르지만." "몸값? 그건 무슨 말이야?" "뭔지 몰라. 하지만 강도들이 하는 짓이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그러니까 물론 우리들도 하지 않으면 안 돼." "원지도 모르고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냐?" "에이 귀찮아, 해야만 한다니까. 내 책에 나와 있다고 그랬잖아. 책에 나와 있는 것과 다른 짓을 해서 모든 걸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겠다는 거야?" "옳지, 톰 소여, 그렇게 하는 건 매우 좋은 일이지만 우리들이 놈들을 어떻게 석방해 줘야 좋을지 그것도 모르고 대관절 어떻게 놈들을 석방한다는 거지? 내가 알고 싶은 점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말이야, 너는 석방이 란 뭐라고 생각하냐 말이야?" "몰라. 그저 우리들이 석방될 때까지 놈들을 가둬 둔다고 하는 것은. 놈들이 죽을 때까지 놈들을 가둬 둔다고 하는 뜻일지도 모르지," "옳지. 이제 좀 알 것 같군. 자, 그럼 이제 됐어. 왜 좀더 빨리 그 말을 할 수 없었느냐 말이야. 사신에게 석방될 때까지 가둬 둔단 말이지, 그래도 그 작잔 여전히 귀찮을 거야. 뭐든 모두 먹어 버릴 테고, 늘 도망치려고만 할 게 아냐." "그게 무슨 소리야, 벤 로저스. 감시인이 감시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단번에 쏴 죽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다는 거야?" "감시인! 이건 큰일이군. 그럼 누가 놈들을 지키기 위해서 밤새도록 일어나 있으면서 조금도 자지 않는 일이 생기겠군 바보 수작 같은데. 그보다는 차라리 누가 곤봉을 가지고 있다가 놈들이 도착하는 즉시 석방하면 어떨까?" "어찌됐든 책에는 그렇게 써 있진 않아 그러니까 말이야, 이봐, 벤 로저스, 넌 일을 규칙대로 하고 싶은가 하고 싶지 않은가, 요는 이거야. 너는 이런 책을 만든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는 것이 옳은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너는 이런 사람들에게 뭘 가르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림도 없지. 안돼, 우리는 놈들을 규칙대로 석방하는 거야." "좋아. 난 괜찮아. 하지만 어쨌든 어리석은 수작 같애. 그건 그렇구 우리들은 여자도 죽이는 건가?" "아서라, 벤 로저스, 만일 내가 너처럼 무식쟁이라면 난 차라리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해.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식이나 면할 게 아냐. 여잘 죽이느냐고? 그런 얘기가 책에 나와 있는 걸 본 사람은 하나도 없어 여자들은 동굴로 데리고 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아주 위해 주기만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금세 네가 좋아지게 되어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아주 깨끗이 없어지는 거야." "응. 그래. 그게 규칙이라면 나도 반대는 하지 않지만 어쩐지 그다지 믿어지지 않아서 그래. 당장에 동굴이 여자와 석방되기를 기다리는 놈들로 가득 차버려 강도들을 가둬 둘 장소가 없어질 게 아냐 그래도 좋아, 하고픈 대로 맘대로 해. 난 아무 할 말도 없으니까. 이때 꼬마 토미 바만즈는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다른 애들이 깨우자 겁을 집어먹고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엄마 있는 집으로 갈 테야, 강도가 되는 건 싫어, 하며 울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른 애들이 모두 놀려주면서 '우지'라고 하였더니. 토미는 몹시 골을 내면서 이제 곧 집으로 가서 비밀을 전부 털어놓겠다고 대단한 기세였다. 그러자 톰은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토미에게 5센트를 주고는 모두 다같이 집으로 돌아가 다음주에 또 만나 누구의 것을 훔치고 누구누구를 죽이자고 했다. 벤 로저스는 공휴일 외에는 별로 나을 수가 없으니까, 다음 공휴일부터 곧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지만. 다른 애들이 그런 짓을 공휴일에하는 것은 나쁘다고 반대했으므로 그 일만큼은 합의가 되었다. 되도록 빨리 모여 날짜를 정하기로 모두가 찬성하고는, 톰 소여를 이 강도단의 수령으로, 조 하퍼를 부수령으로 뽑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날이 새기 바로 직전에 광의 지붕으로 기어올라, 창문으로 해서 슬쩍 방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새옷은 촛물과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나는 솜처럼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제3장 아라비아 사람을 복병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왓슨 아주머니로부터 옷 일로 해서 톡톡히 꾸중을 들었지만 과부댁은 나무라지도 않고 다만 촛물과 진흙을 깨끗이 털어 주었으며 자못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깐 동안은 점잖게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왓슨 아주머니는 나를 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기도를 올렸지만 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기도를 올려라, 그러면 소원이 성취될 수 있다고 왓슨 아주머니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나는 시험삼아 한번 해보았다. 언젠가 낚싯줄을 얻었으나 낚시가 없었다. 낚시가 없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래서 세 번인가 네 번 낚시를 주십사 하고 시험삼아 해보았지만 웬일인지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왓슨 아주머니에게 나를 위해서 한번 기도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해 보았더니, 넌 바보로구나 하고 핀잔만 주었다. 왜 바보인지 그 까닭을 얘기해 주지 않아, 나는 아무리 해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느날 숲속 깊숙이 들어가 앉아, 이 일에 관해서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도의 덕택으로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간에 손안에 넣을 수 있다면 왜 교회의 집사 윈은 돼지로 해서 잃은 돈을 도로 찾지 못하는 것일까? 왜 과부댁은 도둑맞은 은제 코담뱃갑을 도로 찾지 못하는 것일까? 왜 왓슨 아주머니는 살이 찔 수 없는 것일까? 하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얼마 후에 나는 또다시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아냐, 기도란 건 아무 소용도 없는 거라고, 과부댁한테 가서 이 얘길 했더니, 사람이 기도를 올려 손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정신적인 선물'이라고 했다. 이 얘긴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말이었지만 과부댁은 그 의미를 나에게 얘기해 주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 늘 다른 사람들 일을 마음속에 두고, 절대로 자기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왓슨 아주머니도 그 다른 사람들 중 하나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숲속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지만 결국 다른 사람만이 덕을 보게 되고, 나는 밤낮 손해만 볼 것이 뻔한 일이니까 마침내 이 이상 걱정할 것 없이 그냥 내버려두자고 생각 했다. 때로 과부댁은 나를 방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군침이 흐를 정도의 말투로 '신의 섭리'에 관한 얘기를 했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것은 왓슨 아주머니의 손으로 해서 그만 깨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의 섭리'가 둘 있어서, 건달도 과부댁이 말하는 신으로부터 는 구제될 가망이 있지만 왓슨 아주머니에게 걸리면 구제될 가망이라곤 전혀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본 끝에, 나는 만일 과부댁의 신이 나를 원한다면 그쪽 부하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무식하고 천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부하로 삼아서 그 신은 무슨 덕을 보자는 셈일까 하고 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아빠는 근 1년 동안이나 얼씬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건 나에겐 도리어 마음 편한 일이었다. 이 이상 또다시 만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술 취해 있지 않을 때에는 늘 나를 때려대어 못살게 굴었지만 난 나대로 아빠가 있을 때에는 대개 숲속으로 피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이때 마을로부터 12마일쯤 상류 지점에서 아빠의 익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익사체의 주인공이 꼭 아빠만한 크기로 누더기 옷을 입고 있고, 머리칼은 보통 길이보다 훨씬 길더라는 점에서 만사가 갈데없이 아빠임에 틀림없는데, 얼굴을 전혀 분간할 수 없더라는 것은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었으므로 얼굴이 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얼굴이 위를 향한 채 떠내려 오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체를 건져 강둑에다 묻어 버렸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나는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는 물에 빠져 죽은 사나이는 얼굴을 위로 향한 채 떠있지 않고 엎드린 채 떠 있다는 예를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아빠가 아니라 남복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덜컥 걱정이 되었다. 아빠가 머지않아 꼭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와주지 않으면 더 고마울 데가 없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리들은 거의 한 달 동안 가끔 강도 장난을 하였지만, 그후에 나는 그만두고 말았다. 다른 애들도 모두 그만두고 말았다. 누구의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고.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그런 시늉만을 해보았을 뿐이다. 우리들은 숲속에서 뛰어나와 돼지를 모는 사나이와 야채를 시장으로 운반해 가는 짐마차 위에 앉아 있는 여자들을 습격하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훔치지는 않았다. 톰 소여는 돼지를 '금은 덩어리' . 순무나 그밖의 야채를 '보석'이라고 불렀다. 그후 우리들은 동굴로 가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고, 몇 사람을 죽였고, 누구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가를 서로 지껄였지만, 나로서는 그런 게 무슨 소용에 닿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때 톰은 어떤 애 하나에게 횃불(통은 이것을 슬로건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단원을 소집하는 신호였다)을 들고 동네 안을 달리게 하여, 스파이로부터 비밀 뉴스가 들어왔다. 내일 아주 많은 수의 스페인 상인과 아라비아의 부자들이 코끼리 200두와 낙타 600두 1000마리 이상의 섬터노새(섬터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도시로 독립전쟁의 용사 토머스 섬터 장군의 묘가 있다)의 그 모두가 금강석을 산더미처럼 실은 것을 끌고 '동굴의 골짜기'에서 야영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호위병은 불과 400명밖에 안 되니까 우리들은 복병하여(라고 통은 그렇게 불렀다)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칼과 총을 손질하여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톰은 어떤가 하면, 순무 마차 하나를 공격할 때에도 칼과 총을 모두 정성껏 손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야단야단이었다. 하기야 말이 총과 칼이지 그것은 흔해빠진 외와 빗자루에 지나지 않으니까 죽을 때까지 손질을 해본댔자 조금도 전보다 좋아질 턱이 없었다. 나는 우리들이 그렇게 많은 수의 스페인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을 해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했지만 어쨌든 낙타와 코끼리만은 보고 싶었으므로 내일 토요일에는 복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는 신호가 내리자 부리나케 우리들은 숲속을 빠져나와 언덕을 달려 내렸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도 아라비아 사람도 낙타도 코끼리도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은 소풍 온 주일학교의 학생들뿐으로, 그것도 1학년 꼬마들이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때려부수고 애들을 구덩이 밖으로 내쫓고, 전리품은 도넛 몇 개와 잼이었으나, 그래도 벤 로저스는 헝겊으로 만든 인형을, 조 하퍼는 찬송가 책과 '트랙트'(종교와 도덕에 관한 잡지) 한 권을 얻었다 그때 선생이 침입하여 왔으므로 우리들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낱낱이 땅바닥에다 내던지고는 도망쳐 버렸다. 나는 금강석 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지 못했으므로 톰 소여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톰은 어쨌든 금강석이 산같이 있었고, 아라비아 사람도 코끼리도 그밖의 것도 모두 있었다고 우겨댔다. 그럼 우리들에게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내가 물었더니, 톰은 네가 그렇게까지 무식하지 않고 '돈키호테'라는 책을 읽고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묻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있을 게 아니냐고 도리어 핀잔만 주었다. 모든 것이 다 마법의 조화라는 것이다. 병사도 몇 백명 있었고, 코끼리와 보물과 그밖의 여러 가지 물건도 있기는 있었지만 우리들에게는 마법사라는 적이 있어 그놈이 그저 앙갚음으로 만사를 주일학교 애들로 바꿔 놓았다고 톰은 설명했다 "응, 그래, 그렇다면 좋아 우리들이 할 일은 그 마법사의 토벌이다"라고 내가 했더니, 톰 소여는 "이 병신아!" 하고 또 핀잔이었다 "이봐, 임마, 마법사는 말이지 여간 많은 도깨비를 불러낼 수 있는게 아냐. 그러니까 순식간에 너 하나쯤은 콩가루로 할 수 있는 거야 놈들은 나무처럼 키가 크고, 몸뚱어린 교회만큼이나 돼 뭘 알아 " "그럼 우리도 그 도깨비를 우리 편에 넣으면 되잖아? 그럼 다른 놈들을 쳐부술 수 있을 게 아냐?" "임마, 무슨 수로 도깨비를 불러들이느냐 말이야?" "몰라. 그럼 그놈들은 어떻게 해서 불러낼까?" "뭘, 헌 양철 램프나 쇠 굴레를 문지르면 우당탕 천둥소리가 나고, 번갯불이 번쩍번쩍 거리고 연기가 자욱이 떠오르는 사이를 도깨비들이 순식간에 몰려오는 거야 그리고는 하라는 일은 원이든지 척척 하거든. 높은 탑을 뿌리에서부터 송두리째 뽑아 그걸로 주일학교 선생이나 그밖의 누구의 대가리를 후려치는 것 따위는 누워서 떡 먹기야" "그럼 도깨비를 그렇게 몰려오게 하는 건 누구야?" "결국 램프나 굴레를 문지르는 사람이지 뭐야. 도깨비들은 램프나 굴레를 문지르는 사람의 부하니까 그 사람이 하라는 말은 원이든지 척척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금강석으로 길이 40마일의 궁전을 짓고, 그 속에다 껌이니 뭐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잔뜩 채우고, 아내로 할 테니 중국에서 임금님 딸을 훔쳐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받으면 도깨비들은 그 분부대로 꼭 해야만 하고, 그것도 내일 아침 당장 해가 뜨기 전까지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뿐이 아냐. 도깨비들은 이 궁전을 미국 내 어디로든지 이쪽이 원하는 대로 가지고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응 그래, 궁전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함부로 자기 몸을 쓰다니, 도깨비란 정말 바보 천치군 게다가 말이야. 만일 내가 도깨비의 하나라면 헌 양철 램프를 문질렀다고 해서 하고 있던 일을 내던지고 그 사나이 있는 데로 가기 전에 어딘지 아무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릴 테야"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 허클 핀. 그 사람이 문지르면 싫든 좋든 넌 할수없이 가야 하는 거야. 뭘 알아 " "뭣이! 나무처럼 키가 크고 몸집이 교회만한 내가 말이야? 그럼 좋아 난 가기로 할 테니. 그렇지만 난 꼭 그놈을 미국 내에서 제일 높은 나무꼭대기로 몰아 올려놓고 말 테니 두고 봐." "쯧! 소귀에 경 읽기구나 넌, 허클 핀 어찌된 셈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으니, 이런 병신." 나는 이 일을 2,3일 생각해 본 결과 그 말에 무슨 참된 점이 있을까 시험해 보기로 했다 헌 양철 램프와 쇠 굴레를 얻어 가지고 숲속으로 들어가 몸에서 몹시 땀이 날 때까지 문지르고 또 문질러보았다. 궁전 을 지어서 그놈을 팔아 버릴 작정이었으나 헛수고여서, 도깨비는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수다가 전부 톰 소여가 지어낸 거짓말의 하나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톰은 아라비아 사람과 코끼리에 관한 얘기를 믿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톰의 얘기에는 어딘지 주일학교 냄새가 풍기고만 있었다 제4장 털공의 신탁 석 달인가 넉 달이 지나고, 이제는 완전히 겨울이 되었다. 나는 대개 쉬지 않고 쭉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철자를 읽는 젓과 쓰는 것을 초보 정도로는 할 수 있었고, 구구단도 칠 육은 35라고까지 외울 수 있게끔 되었지만 그 이상은 영원히 외워질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든 나는 산수 같은 것에는 전혀 취미가 없다. 처음에 나는 학교가 몹시 싫었지만 그러는 동안에 이럭저럭 참게 되었다. 견딜 수 없이 싫어져서 학교를 까먹고는 다음날 몹시 얻어맞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쾌활해졌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갈수록 점점 편하게 되었다 또 과부댁의 처사에도 얼마간 만성이 되어 그것에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집안에서 살며 침대 위에서 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추위가 오기 전에는 가끔 몰래 집을 빠져나가 산에서 자기도 했는데, 이것은 나에게는 휴식이 되었다. 그전대로의 생활방식이 제일 마음에 들었지만 새로운 생활방법도 점점 마음에 들게 되었다 과부댁은 내가 아직 느리기는 하지만 하는 일이 착실해졌고 또 아주 마음에 들게 잘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내 일도 부끄럽지는 않게 되었다고 칭찬이다. 어느날 아침 식사 때, 나는 그만 소금병을 엎지르고 말았다. 재빨리 손을 뻗쳐 소금을 집어 왼쪽 어깨 너머로 던져 악운을 면하려고 한 것인데, 왓슨 아주머니가 어느새 나보다도 먼저 손을 뻗쳐 방해를 한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 "손을 치워, 허클베리, 밤낮 넌 이 야단이구나!" 과부댁은 나를 두둔해 주었지만 그걸로 악운이 막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고, 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어디서 어떠한 액운이 닥쳐올지 모르겠다고 마음을 조리며 집을 나섰다. 악운을 막을 방법이 있기는 있지만 이것은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숫제 아무것도 해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수심에 싸여 마음을 조리며 어슬렁어슬렁 이리저리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다. 나는 앞뜰로 내려가 높은 판자 울타리의 통로에 만들어 놓은 층계를 넘었다. 땅 위에는 새 눈이 한 인치쯤 하얗게 쌓여 있어, 거기 누구의 것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발자국은 채석장 쪽에서 와서 잠시 층계 근처에서 머뭇거린 흔적이 보였고, 다음 마당 울타리를 따라 저쪽으로 가버린 흔적이 보였다. 이렇게 머뭇거리면서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하다.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 보려고 했지만 우선 몸을 굽혀 발자국부터 조사해 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으나 차차 알 수 있었다. 악마를 붙이지 않기 위해서 큰 못으로 만든 십자가가 왼쪽 구두 뒤꿈치에 붙어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다리야 날 살려라고 언덕을 뛰어내렸다. 가끔 어깨 너머로 뒤를 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전속력으로 대처 판사댁으로 달려갔다. 판사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웬일이냐. 얘야, 아주 숨이 막히겠구나. 이걸 받으러 온 건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몫의 이자가 있습니까?" "있구말구. 반기분이 어제 막 들어왔는데. 150달러 이상이나 되지. 너에겐 큰 재산이다. 그러나 가지고 가면 써버릴 테니까, 나에게 투자 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저 6천 달러와 함께 " "아닙니다, 판사님, 나는 쓰고 싶진 않아요, 전혀 소용없어요. 그냥 판사님께 드리겠어요. 판사님께 드리고 싶어요, 6천 달러고 뭐고." 대처 판사는 다시 한번 깜짝 놀라는 얼굴을 하였다. 까닭을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아니, 무슨 말이냐, 네 말은?" "제발 이것에 관해선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세요. 받아 주세요, 제발, 받아 주시겠죠?" "아니, 이건 수수께낀데, 무슨 일이 일어났나?" "제발 받아 주세요.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그러면 난 거짓말을 안 시켜도 됩니다. " 잠시 무슨 생각을 한 후에 판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아, 이젠 알 것 같구나. 넌 재산 전부를 나에게 팔고 싶단 말이지 주는 게 아니라 그쪽이 옳은 생각이야." 여기서 판사는 종이에다 무엇을 써서,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자, 이걸 봐라. 이처럼 매도증에 '대가로서'라고 써 있지? 그건 내가 너에게서 이걸 사고, 그 때문에 내가 너에게 지불을 했다고 하는 의미다 여기 자, 1달러가 있다. 자, 서류에다 서명을 하라구." 그래서 나는 서명을 하고는 떠났다. 왓슨 아주머니의 검둥이인 짐은 황소의 네번째 위통에서 나온 사람 주먹만한 털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가지고 곧잘 마법을 쓰곤 했다. 짐은 이 공 속에는 영혼이 있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늘 큰소리 쳤다. 그래서 나는 그날 밤 짐에게로 가서, 눈 위에서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아빠가 또다시 여기 나타난 게 분명하다고 넌지시 말해 보았다. 실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아빠가 무엇을 할 작정인지, 또는 여기 언제까지 있을 작정인지 그 여부였다. 짐은 털공을 꺼내 그것에다 대고 뭐라고 말하고는 높이 쳐들어 그것을 마루 위에다 떨어뜨렸다. 공은 푹 하고 떨어지며 한 인치쯤 굴렀을 뿐이었다 짐은 똑같은 짓을 또 한번 반복하고, 다시 또 한번 해본 것인데, 공은 여전히 아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짐은 마루에 무릎을 꿇고 귀를 공에다 갖다 대고는 열심히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짐은 공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머리를 가로저었다. 내 말을 잘 듣던 이 공도 어쩌다가 돈을 주지 않으면 영 말을 듣지 않는 수가 있다고 짐이 불평이었다. 나는 짐에게 매끈매끈하게 닳아빠진 25센트짜리 가짜 은화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은이 닳아서 놋쇠 부분이 약간 보이므로 쓸 모가 없고, 비록 놋쇠 부분이 약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주 매끈 매끈하여 촉감이 너무도 미끄러워서 어디로 가지고 가도 곧 탄로가 나고 마니까 영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판사가 준 1달러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나는 이 돈은 상당히 좋지 못한 돈이지만 털공은 어쩌면 진짜와의 차이를 모르고서 아마 그것을 받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더니, 짐은 그것의 냄새를 맡아보고, 깨물어보고, 비벼보고는 털공이 이것을 진짜로 생각하도록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말했다. 생감자에 칼자국을 내어 25센트짜리 은화를 그 사이에 끼워 하룻밤만 두면 내일 아침엔 놋쇠가 보이지 않게 되고 매끈매끈한 촉감도 없어지게 되어, 털공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 사람들도 서슴지 않고 받아줄 것 이라고 짐은 자못 자신만만하다. 실은 나도 갑자기 그런 작용을 한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짐은 털공 아래에다 25센트짜리 은화를 놓고 무릎을 꿇고는 또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엔 털공이 아주 말을 잘 듣는다고 했다. 잘 되면 내 운수를 전부 가르쳐 줄 것만 같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어서 그렇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털공은 짐에게 말하고, 짐은 또 그것을 나에게 전했다. "임자 아빤 말이야, 아직 뭘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구먼. 어디로 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고 또 여기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 제일 좋은 방법은 가만히 아빠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거야. 가만 있자 아빠 주위를 천사 둘이 빙빙 돌고 있네. 하나는 횐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또 하나는 흑색이야. 횐놈은 아빠에게 잠시 옳은 일을 시키지만 그 다음 검은놈이 난데없이 홱 나타나서 모든 걸 파괴해 버리거든. 임자 아빠가 최후로 어느 놈의 손안에 들어가고 말지 아직 아무도 몰라. 하지만 임잔 문제없어. 이제부터 왜 고생도 하겠지만 꽤 재미도 볼거야. 부상을 당할 때도 있고, 몸이 아플 때도 있겠지만, 늘 먼저대로 회복하고말구. 임자 팔자엔 임자 주위를 딸 애 둘이 날고 있구먼. 하나는 쾌활한 편이고 또 하나는 우울한 편이야. 또 하나는 부자가 되고 다른 하나는 가난뱅이가 될 팔자야. 임자는 두번 장가들 팔잔데 처음엔 가난뱅이 여자와 결혼하고 나중엔 부자 여자와 결혼하게 될 거야 되도록 물을 멀리해야 되고 위험을 피하도록 해야 해. 그래야 후한이 없겠어. 살다가 교수형을 당할 팔자라고 사주팔자에 딱 그렇게 나와 있구먼." 그날 밤 양초에 불을 켜들고 이층 내 방으로 들어가니 아빠가, 틀림없는 아빠가 방안에 앉아 있었다. 제5장 아빠, 새생활을 시작하다 나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빙 돌아가서 보니 거기 아빠가 있었다. 나는 매만 맞고 있었으므로 아빠만 보면 겁이 났던 것이다. 이때도 겁을 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채 1분도 못 되어 그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인즉 아빠가 거기 있으리라고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으므로, 말하자면 숨이 막힌다고 하는 최초의 충격이라고나 할까, 좌우간 그런 것이 일단 가라앉자 나는 걱정이 될 만큼 아빠가 무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빠는 나이가 50고개로, 얼굴도 그렇게 보였다 머리칼은 긴 것이 엉켜 기름기가 돌고, 그것이 아래로 흘러떨어져 있었고, 그 흘러내린 긴 머리칼 사이로 눈이 반짝이고 있어, 그는 마치 덩굴 뒤에 있는 것만 같았다. 눈에는 회색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흑색 일색으로, 서로 엉킨 긴 구레나룻 수염도 마찬가지였다. 구레나룻 수염과 머리칼에 가려 있지 않는 얼굴 부분에는 핏기라곤 전혀 없이 그저 희고.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러한 횐색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보는 사람의 몸을 스멀거리게 하는 횐색이었다. 두꺼비의 횐색, 생선 배때기의 흰색이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라곤 그저 누더기뿐이었다 한쪽 발목을 다른 쪽 다리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있는데, 그 올려놓고 있는 쪽의 발에 신은 구두는 뻐끔히 입을 벌리고 있고, 그 사이로 삐죽이 밖으로 새어나온 발가락 둘을 그는 가끔 움직이고 있었다. 마루에 놓아 둔 모자는 다 낡은 까만 테가 늘어진 소프트로, 꼭대기가 뚜껑모양으로 푹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선 채로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고, 또 아빠는 의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 앉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초를 책상 위에다 놓았다. 그때 창이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띄어 아빠는 광으로 해서 기어들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아래위를 훑어보고 있던 아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응, 이놈 봐라, 거북한 옷을 입고 있구나 제법. 이놈 바로 원님이라도 된 듯이 뻐기고 있구나."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죠." "네이놈, 건방지게 말대답이야 사뭇 내가 없는 동안에 패 많은 패물을 몸에다 붙이고 있구나 제법 네놈을 아주 없애 버리기 전에 이제 단단히 혼을 내어 정신을 차리게 해놓을 테니 두고 봐라 네이놈, 교육도 받고 있다더구나. 제법 쓰기도 읽기도 할 수 있다지? 네놈 애비보다도 위라고 생각하겠구나? 자. 어때 이 애빈 쓰지도 읽지도 못하니까 그럴밖에. 이놈 혼을 내줄 테니 두고 봐라. 대관절 뉘놈이 네놈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수작에 손을 대도 좋다고 한 거야, 응? 누가 네놈에게 그런 수작을 해도 좋다고 그런 거야?" "과부댁이에요. 그 아주머니가 나에게 그랬어요." "과부댁이라고, 헤에! 그러면 대관절 또 그 마누라에게 되지도 않은 일에 손을 대도 괜찮다고 한 건 뉘놈이야?" "아무도 없어요." "옳지, 자, 그럼, 주제넘은 짓을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걸 그 마누라에게 내가 가르쳐 줄 테니 두고 봐라 그리고 이봐, 이놈 넌 당장에 학교를 그만둬, 알았지? 자기 애비 앞에서 건방진 얼굴을 하고, 애비보다도 자기편이 위라고 말대답을 하게 아들을 길러내는 자식들을 내 그냥 둘 줄 알구. 다시 그 학교 문턱에라도 가봐라, 내 그냥 둘 줄 알구 네놈을, 알았지? 네 어민 죽을 때까지 읽을 줄도 쓸 줄도 알았다더냐? 집안에서 죽을 때까지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한데 네놈은 이처럼 잔뜩 풍선처럼 부풀어 있다는 거지. 야 이놈 봐라, 난 그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알았느냐? 야, 이놈아, 어디 뭘 좀 읽어 봐라." 나는 책을 집어들고는 워싱턴 장군과 전쟁에 관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30초쯤 읽었을 때 아빠는 손을 뻗쳐 책을 홱 빼앗아 나꿔채더니 저쪽 담벽에다 힘껏 내던졌다. "응, 그래. 네놈은 읽을 줄 안다는 거지? 네놈이 그랬을 때 난 설마하고 코방귈 뀌었더니 이놈 봐라 맹랑하게. 이놈아, 이게 뉘 앞이라구 네놈이 큰소리야? 그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응, 참을 수 없다. 내 가만 내버려둘 줄 알구. 이 아귀놈아! 학교 근처에서 붙잡히는 날엔 그냥 둘 줄 아느냐? 네놈은 그 동안에 예수쟁이 냄새까지 나게 되었구나. 아니, 이게 내가 낳은 자식이란 말이야." 아빠는 소 몇 마리와 소년 하나를 그린 청색과 황색의 조그마한 그림한 장을 집어들고서, "이건 또 뭐야?" 하고 물었다. "내가 공부를 잘해서 준 거 예요." 아빠는 그림을 북북 찢고 나서, "이것보다 더 좋은 걸 주마. 쇠가죽 채찍을 주마." 잠시 거기 앉아 뭐라고 중얼중얼 투덜대고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법 네놈은 좋은 향길 풍기는 멋쟁이란 말이지, 응? 아따 이놈 봐라. 침대에다 이불에다 거울에다 마루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네놈 팔자 늘어졌구나 한데 널 낳은 그 애비놈은 무두질 공장에서 돼지를 벗삼아 자야 할 팔자라니 이게 내가 낳은 새끼야. 네놈을 없애버리기 전에 네놈 그 주젤 꼭 꺾어 놓고야 말 테니 두고 봐라, 네놈 그 주제엔 정말 끝이 없구나. 이놈아 네놈은 부자가 됐다구? 헤에, 그건 어찌된 셈이냐 이놈아?" "그건 거짓말이 에요." "아니, 이놈이 아직도 입조심을 못하고 나로선 이제 참을 수 있는 데까진 참고 있으니까 또 건방진 소릴 지껄여 봐라. 그냥 두진 않을 테니 날 송장으로 알아, 이놈아 내가 마을로 와서 이틀 동안 들은 건 네놈이 부자가 됐다는 그 말뿐인데. 미시시피의 훨씬 아래에서도 그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왔지, 무슨 수로 온 줄 알아 내일 그 돈을 내놔, 필요해." "돈이 없어요." "돈이 없어. 이 거짓말쟁이농아. 대처 판사가 가지구 있다던데, 그건 네 거라던데. 그게 내가 필요하단 말이다." "돈이 다 무슨 돈이에요. 대처 판사님께 물어보면 알아요. 내 말과 똑같은 말을 할 테니" "좋다. 그럼 물어보자 내 꼭 내뱉게 하고야 말 테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까닭을 캐볼테구 임마, 주머니에 얼마 가지고 있어 지금? 난 지금 돈이 꼭 필요하단 말이다." "1달러밖에 없어요. 한데 난 그걸로......" "그걸로 네놈이 뭘 하든 내 알 바가 뭐야. 어서 이리 못 내놔?" 아빠는 그 돈을 손안에 넣자, 깨물어 그 진위 여부를 시험해 보고는 마을로 가서 위스키를 산다고, 하루종일 이렇게 한 방울도 마시지 못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연방 투덜거렸다. 그러고 나서 창고 지붕으로 빠져 나갔는데, 금세 다시 머리를 안으로 쑥 들이밀더니 나를 주제넘은 놈이라느니, 애비보다도 위에 서 보겠다고 하는 놈이라느니 하고 계속 투덜거리며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젠 가버렸겠지 하고 마음을 놓고 있는데, 또다시 돌아와서 머리를 디밀고는, 학교일만은 조심해라,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숨어 있다가 단단히 혼을 내 줄 테니 그리 알라고 다시 한번 공갈을 쳤다. 다음날 아빠는 만취가 되어 대처 판사한테 가서 판사를 위협하여 돈을 짜내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므로, 이번에는 법률에 호소하여 돈을 받겠다고 펄펄 뛰었다. 판사와 과부댁도 법률에 호소하기로 하여, 재판소가 나를 아빠에게 서 떼어 둘 중 하나가 내 후견인이 되도록 하려고 했지만, 재판관은 새로 부임해 온 신인으로 아빠의 소행을 잘 모르는지라 재판소로서는 되도록이면 이 사건에 개입하여 가족을 떼어 놓아서는 안 되며, 또 그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떼어가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했으므로 대처 판사와 과부댁은 이 사건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뻐서 날뛰었다 얼마만큼이라도 돈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온몸에 시커멓게 멍이 들 때까지 나를 쇠가죽 채찍으로 때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나는 대처 판사에게서 3달러를 꾸었고, 아빠는 그것을 가지고 가서 만취가 되어 그 부근을 돌아다니며 허풍을 떠는 등, 욕설을 퍼붓는 등, 난장판을 친다는 등, 동네 안을 양은 냄비를 치고 돌아다니며 거의 한밤중까지 그 짓을 계속 했다. 결국 그 일로 감옥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다음날에는 재판소에 끌려나가 또다시 1주간의 콩밥 신세라는 판결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빠는 조금도 유감이 없다고 큰소릴 하며, 난 아들놈의 지배자가 되었다. 아들놈은 내 것이니까 나중에는 혼을 내준다고 연방 큰소리만 쳤다. 감옥에서 나오자 새 재판장은 이 사나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다고 하고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깨끗한 새옷을 입히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세 끼 꼬박꼬박 같이 시켰으며, 어쨌든 온정을 가지 고 그를 대우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재판장은 아빠에게 절주와 그밖의 일을 여러 가지로 타일렀고, 그때마다 아빠는 울음보를 터뜨리며 자기는 참 바보였다. 일생을 헛되이 보냈지만 이제부터는 개심하여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테니 제발 업신여기지 말아 달라고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이 말을 들은 재판장은 참 좋은 말을 했다 그 말로 자네를 가슴에 껴안아도 좋다고까지 하며 울음보를 터뜨 렸고, 부인도 또한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빠는 자기는 지금까지 늘 남의 오해만을 받아 온 사나이였다고 했는데, 이 말에 재판장은 그 말을 믿는다고 했다. 아빠는 타락된 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동정이라고 했고, 재판장도 이에 맞장구를 치고는 두 사람은 같이 울었다. 잘때가 되자 아빠는 일어나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는 말했다. "이걸 보십쇼, 신사 숙녀 여러분 이 손을 붙잡고 악수를 해주십쇼. 이 손은 그 전에는 돼지 손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새생활로 돌아온 사람의 손으로, 그 전 생활을 되풀이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이 말을 명심해 주십시오. 내가 이 말을 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젠 이 손은 깨끗한 손이올시다 악수해 주십시오. 무서워 할 건 없습니다." 그래서 일동은 다같이 차례차례로 그 손에 악수를 하고는 울었다 재판장의 아내는 아빠 손에다 키스까지 했다. 다음에 아빠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 라기보다는 표를 한 것이다. 재판장은 이거야말로 기록에 남을 가장 신성한 시간이라고까지 했다. 다음에 집안식구들은 아빠를 손님용 침실인 방으로 안내했는데, 밤중 몇 시쯤인가 아주 목이 마른 아빠는 현관 지붕으로 기어나와 기둥을 미끄러져내려 새 저고리를 아주 독한 위스키병과 바꿔 가지고는 이층으로 기어올라 방으로 돌아와 혼자 잔뜩 재미를 본 것인데. 먼동이 트기 전에 아주 만취가 되어 또다시 방을 빠져 나오다가, 그만 현관에서 떨어져 왼팔을 두 군데나 분질러 해가 뜬 후 누가 그 꼴을 발견했을 때에는 조금만 그대로 더 두었더라면 얼어죽을 판이었다. 그리고 손님용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어찌나 방이 흩어져 있었던지 한참 찾아야만 겨우 발 디딜 곳을 찾아낼 정도로 형편이 아니었다. 재판장은 몹시 화를 내고는, 이런 녀석을 개조시키려면 엽총으로 쏘아 죽여서 다시 빚 어 만들밖에 딴 길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며 혀를 찼다. 제6장 아빠, 죽음의 천사와 격투하다 그런데 아빠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건들거리기 시작했고, 그 다음 대처 판사에게서 그 돈을 짜내기 위해서 법률에 호소하고, 또 나에게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다고 맹렬히 공격했다. 두 번쯤 나를 붙잡아 매질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학교에 갔으며. 대개 아빠의 눈을 피하거나 도망을 치거나 했다. 전에는 그렇게까지 학교에 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빠를 곯려주는 것이 재미나서 도리어가고 싶어졌다. 그 소송사건은 참으로 지리한 일이어서 언제까지 가도 착수된 것같이 생각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가끔 아빠를 위해서 2달러인가 3달러를 판사에게서 꾸어 쇠가죽 채찍으로 얻어맞는 것을 면했다. 아빠는 돈이 손안에 들어올 때마다 만취가 되었고, 만취될 때마다 동네에서 대소동을 일으켰으며, 대소동을 일으킬 때마다 감옥 신세를 졌다. 아빠는 대만족이었다 이런 종류의 일이 참말로 그의 성미에는 맞는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너무나도 과부댁 주위를 배회하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과부댁은 그 부근을 배회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혼을 내주겠다고 위협을 했다. 이 말에 아빠는 펄쩍 뛰었다. 허클 핀의 아버지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 본때를 보여 줄 테니 두고 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던 어느 봄날 감시를 하고 있다가 그만 나를 붙잡아 가지고 스키프에다 싣고는 3마일쯤 상류로 데리고 가, 거기서 일리노이 쪽의 강둑 나무가 우거진 곳을 향해 강을 건넜다 그곳에는 낡은 오두막 외에는 집이라 곤 한 채도 없었고, 그 오두막집까지도 그 집이 어디 있는지 미리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찾아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빠는 그곳에 이를 때까지 쭉 나를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나에게는 도망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우리들은 그 낡은 오두막집에서 살았고, 밤이 되면 아빠는 반드시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그 열쇠를 머리 밑에다 넣고 잤다 아빠는 어디서 훔쳐온 것 같은 총을 한 자루 가지고 있어, 우리들은 낚시질을 하고 사냥을 하여 그것으로 살아나갔다. 가끔 아빠는 나를 방안에다 가둬 놓고 3마일 하류에 있는 나루터의 가게로 가서 물고기와 사냥에서 잡은 짐승들을 위스키와 바꿔 가지고 와서는 만취가 되어 얼큰한 기분에서 나를 때리곤 했다 얼마 후 내가 어디있는지를 알아낸 과부댁은 사람을 보내서 나를 데려가려고 했지만 아빠는 이 사나이를 총으로 쫓아 버렸다. 그후 나는 그곳에 순화되어 쇠가죽 채찍을 제외하고는 그곳이 좋아졌다. 하루종일 건들건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담배나 피우고 낚시질이나 하며, 책도 안 읽고 공부도 하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고 즐거운 일이었다. 두 달 이상이 되자, 내 옷은 누더기와 때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나로서는 손과 낯을 씻고, 음식은 접시에 담아서 먹고, 머리를 빗으로 빗어올리고, 취침과 기상은 꼭꼭 규칙대로 하고, 책을 읽느라 머리를 써야만 하고, 게다가 왓슨 아주머니가 1년 내내 바가지를 긁는 과부댁의 그 집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좋았었는지 이제 생각하니 통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제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과부댁이 싫어했으므로 욕을 하는 것은 그만두고 있었으나, 아빠는 전혀 반대하는 기색도 없었으므로 또다시 그 욕하는 버룻이 붙었다. 대체로 그 숲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아빠는 호두나무 채찍을 마구 아무렇게나 휘두르게 되어 나는 그것을 참아낼 재주가 없었다 온몸이 콩멍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또 아빠는 나를 방에다 가둬 놓고는 집을 비우는 수가 많았다. 어떤 때에는 나를 가둬 놓은 채 사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이때만큼은 정말 적적했다. 아빠는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나는 이젠이 오두막집에서 빠져 나가기 아주 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무서워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도망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때껏 몇 번인가 이 오두막집에서 나가려 고는 했으나 도망칠 길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개가 드나들 만한 크기의 창도 없었다. 연통은 너무 좁아서 몸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빠는 아주 조심성이 많아서 집을 나갈 때에는 집안에다 칼이나 무엇을 남겨놓고 나가는 법이 없었다. 나는 집안을 백번은 뒤 졌으리라고 생각한다. 거의 하루종일 이 짓을 하고 있었다. 시간을 보내는 데 이 짓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마침내 나는 어떤 물건을 발견했다 자루가 없는 녹슨 헌 톱으로, 지붕 서까래와 널빤지 사이에 꽃혀 있었다. 나는 이 톱에다 충분히 기름을 발라서 일에 착수했다. 테이블 뒤 구석받이에 있는 통 나무에 헌 말안장용 담요를 못으로 박아놓고서 바람이 틈에서 불어들어와 촛불을 끄지 못하도록 해놓은 것이 있었다. 나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담요를 쳐들고는 제일 밑 큰 통나무의 한 군데를 겨우 내몸이 빠져나갈 정도로 톱으로 켜기 시작했다. 옳지, 물론 이 일은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지만 점점 끝이 가까워졌을 때 숲속에서 아빠의 총소리가 났다. 나는 일자리를 지워 버리고 담요를 내려 톱을 감추자 아빠가 들어왔다. 아빠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본성 그대로였다. 하는 말이 읍에 갔었는데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재판이 시작되기만 하면 소송에 이겨서 돈을 손안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재판을 오랫동안 열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두는 방법이 있고, 대처 판사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마을 사람들은 나를 아빠에게서 떼어가지 고 후견인으로서 과부댁에게 맡기기 위한 재판도 있을 수 있고, 또 그러면 이번에는 과부댁이 이길 것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나도 왜 몸이 떨렸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다시 과부댁으로 끌려가서 여러 가지로 시달림을 받고 소위 문명화된다는 것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는 연방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거의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일과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사람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어느 누구를 빼놓는 일이 없는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전부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맨 마지막으로 총정리격으로 욕설을 퍼부은 것인데, 그 중에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까지도 왜 들어가 있어, 그 사람들 차례가 오면 그놈 이름을 뭐했지 하며 계속해서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아빠는 과부댁이 나를 빼앗아가는 꼴을 보고 싶다고 장담을 했다. 잔뜩 감시를 하고 있다가 만일 그런 허튼 수작을 하려는 놈이 있으면 6,7마일 떨어진 곳에 네 몸을 가둬 둘 장소가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놈들이 녹초가 될 때까지 찾아도 네 놈을 무슨 수로 찾아낼까 보냐고 혼자 큰소리를 했다. 이 말에 나는 또다시 겁이 났지만 삽시에 그 마음이 가시고 말았다. 그런 결과가 될 때까지 어느 놈이 감히 아빠 곁에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나에게 스키프를 타고 가서 사온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50파운드짜리 콘밀 한 부대, 베이컨 탄약 40갤런들이 위스키병, 충전용으로 헌책 한 권과 신문지 두 장, 견인용 밧줄이 그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짐들을 일단 강둑까지 나르고 나서 다시 스키프 있는 데까지 돌아가 선수에 걸터앉아 쉬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도망칠 때에는 총과 낚싯줄을 가지고 숲속으로 도망치리라 결심했다. 한 곳에 오랫동안 있지 말고, 대개 밤에는 이 지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새를 쏘고, 고기를 낚아 먹으며, 아빠도 과부댁도 두번 다시 나를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으로 가버리리라 결심한 것이다. 아빠가 만취될 때까지 마시면 그날 밤 사이로 톱을 사용하여 구멍을 크게 뚫고는 도망치리라, 틀림없이 취할 테지. 나는 이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으므로 아빠가 나에게 자고 있는 거냐 혹은 물에 빠져 죽은 거냐 하고 큰 소리를 질렀을 때까지 오랫동안 멍하니 넋을 잃고 스키프에 앉아 있었다. 내가 사온 물건들을 집에까지 운반하는 사이에 날이 어슬어슬 어두워졌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에 아빠는 한두 잔 맛으로 마셔본 것이 그만 왜 흥이 나 그 바람에 또다시 욕설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마을에서 만취가 되어 밤새도록 시궁창 속에 구르고 있었으므로 그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빠라고는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온통 진창 투성이었다. 술이 돌기 시작하면 아빠는 거의 한사코 정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번 욕설은 다음과 같았다. "이걸 정부라구 해! 흥, 그 꼴이 어떤지 잠깐만 보란 말이다. 남의 자식을 빼앗아가려는 법률이 있단 말이야, 세상에 - 남의 친자식, 수고를 할 대로 했고, 걱정을 할 대로 했고, 돈을 쓸 만큼 써서 길러낸 자식을 말이야. 그 사나이가 겨우 자식을 길러 한시름 덜게 되었고, 자식은 또 자식대로 일을 시작하여 애비를 위해서 무슨 짓을 하여 애빌 좀 편히 해주려고 할 바로 그때에 법률이 뻔뻔스럽게 나타나 그 사나이를 못살게 군다. 이게 정부란 말이야1 어디 그뿐인가. 법률은 그 늙은놈 대처 판사의 엉덩이를 떠받쳐가지고는 나를 내 재산에서 떼어 놓으려고 하는 데 한 구실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법률이 한다는 짓은 6천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인간을 붙잡아서 이런 꼴의 함정과 같은다 낡은 오두막집 속에다 처박아 넣고 돼지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 돌아다니게 한단 말이야. 제기랄, 이게 정부야 이런 꼴의 우라질 정부에선 인간은 권리를 가질 수 없어. 없구말구. 가끔 나는 이런 꼴의 나라에서 영원 무궁히 아주 깨끗이 나가 버리려 굉장한 생각을 한단 말이야 암 그렇구말구. 난 모든 놈에게 그렇게 말해 준 거야, 그 늙은 대처놈에게도 그 상판때기에다 맞대고 그렇게 쏘아붙여 준 거야. 내 말을 들은 놈이 한두 놈이 아니고, 놈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단 말이다. 전별 금으로 한 푼도 안 주더라도 이까짓 똥 같은 나라를 나가 두번 다시는 아예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이다. 내말은, 정말 그대로의 말을 한 거야. 난 이봐 내 모자 꼴을 좀 보란 말이다. 이게 모자라고 할 수 있다면. 어때, 뚜껑이 쑥 올라가 있고, 그 밖의 다른 부분은 내 턱 아래까지 축 늘어져 있어 전혀 모자 꼴이 아니라 마치 내 머리가 난로 연통을 이은 목에서 불쑥 나와 있는 짝이 아니냐 말이다. 이걸 좀 보란 말이야, 내 말은 이게 내가 쓰는 모자야. 권리 행사가 인정되어 그 돈이 내 수중에 들어올 수 있다면 이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될 이 나으리가 말이다. 암 그렇구말구 대단한 정부구말구, 대단하구말구 응, 좀 생각해 보란 말이다 오하이오 주에서온,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검둥이놈이 하나 있었는데 백인에 가까을 정도로 살색이 횐 튀기놈이야 게다가 이놈이 바로 아무도 본 일이 없을 만큼 횐 셔츠를 입고 있고, 아무도 본 일이 없을 만큼 번쩍거리는 모자를 쓰고 있는 게 아냐 온 동네 안을 뒤져 봐도 이놈만큼 훌륭한 옷을 입고 있는 놈은 없고, 금시계에다 금시계줄이니 대가리에다 은을 입힌 단장이니 하는 몸치장으로 주 내에서도 가장 무서운 백발의 부호라는 거야. 게다가 또 아, 이것 좀 봐, 이놈이 대학교수로 여러 나라 말을 지껄이며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게야 더구나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뿐이 아냐 자기 고향인 오하이오 주에 있을 때엔 투표까지 할 수 있었다는 거야. 이 말에는 나도 정신이 멍해졌다니까 그만 이 나라가 대관절 어떻게 되려구 이러는 걸까 하고 난 생각한 거라니까 마침 선거일로, 투표장에 갈 수 없을 만큼 곤드레가 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도 한 표를 던지러 갈 판이었는데, 그 검둥이에게 투표시키는 주가 이 미국 내에 있다는 소릴 듣고 난 그만뒀어, 그만두고말구. 두번 다시는 누가 투표할까 보냐고 내가 그래줬지. 내가 한 소린 바로 이거야. 사람들이 모두 내 말을 들었다 이따위 나라가 망하든 내 알 바가 뭐야. 난 살아 있는 한 투표 안해. 게다가 이것 좀 보란 말이야, 그 검둥이 녀석의 뻔뻔스러운 상판때긴. 내가 떼밀지 않는다면 길을 양보하려고도 하지 않거든. 왜 이 검둥이놈을 경매에 걸어서 팔지 않는 거야, 하고 거기 있는 작자들에게 물었지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이거거든. 그랬더니 작자들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 주에 6개월동안 있지 않으면 팔 수가 없다나. 그리고 놈은 아직 그만큼 오래 있지 않았다는 거야 어때 만사가 다 이런 투라니까. 이 주에 6개월 동안 있지 않았다면 시민권을 가진 검둥일 팔 수 없다는 것이 정부라니까. 이런 주제에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것을 손수 자기 자신을 정부 정부 하고 떠들어대고, 정부인 척하고, 정부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나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리저리 싸질러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는 지긋지긋한 횐 셔츠 입은 시민권이 있는 검둥일 하나쯤 붙잡는데 꼬박 6개월 동안이나 수수방관으로 기다리고 있지 않고서는 놈을 잡을 수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아빠는 자기의 늙은 빼빼 마른 다리가 어딜 향하고 있는지도 전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 기염을 올리고 있는 바람에 그만 베이컨 통에 부딪쳐 거꾸로 나자빠져 양쪽 정강이가 까지고 말았으므로, 욕설의 나머지 부분은 이 검둥이와 정부와 그 도중에 여기저기서 베이컨 통에도 던진다는 더할 나위 없이 과격한 욕설이 되고 말았다 아빠는 처음에는 한쪽 정강이를 붙잡고 다른 쪽 다리로, 다음에는 다른 쪽 정강이를 붙잡고 한쪽 다리로 방안을 뛰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왼쪽 발을 뻗치더니 통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 생각이었다는 것은 구두 앞 축으로부터 발가락이 두 개 빠져나와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곁에서 듣는 사람의 머리칼을 일으켜 세우게 하리만큼 무서운 비명을 올리고는 그만 땅 위에 벌렁 나자빠져 데굴데굴 뒹굴며 발가락 끝을 움켜쥐고는 이제까지 보다도 더 지독한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자신도 그런 말을 했다. 소베리 헤이건 영감의 한참나이 때의 욕설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 내 욕설에 비하면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릴 쳤지만, 내 생각으로는 어쩌면 이건 허세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아빠는 술병을 들고 나와, 이 속에는 대취 2회분과 얼근할 정도의 만취 1회분에 충분한 위스키가 들어 있다며 우쭐거렸다. 이것이 아빠의 입버릇이었다. 나는 거의 한 시간 내에 아빠가 곤드레가 되어 버리리라고 판단하고는, 그렇게 되면 열쇠를 훔치거나 혹은 톱을 사용해서 밖으로 나가거나, 이 둘 중 하나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혼자 마시고 또 마셔 금세 담요 위에 쓰러지긴 했지만, 아직 나에게는 행운이 오지 않았다 어디가 불안한지 푹 잠을 이루지 못하고는 끙끙 앓고 있었다. 오랫동안 끙끙 앓는 소리를 하기도 하고, 신음하기도 하고, 손발을 꿈틀거리기도 했다. 이윽고 나는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왔으므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는 그만 촛불을 켜둔 채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떠들어대는 비명소리에 나는 그만 잠이 깨고 말았다. 아빠가 마치 미친 사람 모양으로 이리저리 방안을 마구 뛰어 돌아다니면서 뱀이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두 다리 위로 기어오른다고 하고, 다음 껑충 뛰어오르고는 비명을 지르고, 한마리가 뺨에 달라붙었다고 야단이었지만 나에게는 뱀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빠는 "떼어 줘! 떼어 줘! 목에 붙었어!" 하고 외치면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저렇게 미쳐 날뛰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다. 얼마 후 아주 녹초가 되어 버린 아빠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만 마루 위에 쓰러져, 아주 굉장히 빠른 기세로 몸을 이리저리 뒤치락거리면서 두 다리로 마구 여기저기를 걷어차고 비명을 지르며 악마가 붙어 있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허공을 때리기도 하고 움켜잡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만 녹초가 되어 잠시 끙끙거리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더 조용해지고 마침내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게 되었다. 저쪽 먼 숲속에서 부엉이와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려와 무섭게 고요한 느낌을 자아내게 했다. 아빠는 한구석에 잠이 들어 있었다. 얼마 후에 갑자기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머리를 한쪽으로 기우뚱하고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지놈......거지놈......거지놈, 저건 죽은 놈이야, 거지놈......거지놈......거지놈, 날 붙잡으러 왔지만 내 갈 줄 알고. 아아 여기 왔구나! 나에게 손을 대면 안 돼. 손을 대지 말라니까1 손을 떼1 얼마나 차가운 손이냐, 놔. 아아, 불쌍한 날 내버려둬!" 그런 다음 아빠는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죽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버려두라고 애원하고, 담요로 몸을 싸고는 헌 송판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가더니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담요 사이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얼마 후 담요에서 기어나와 벌떡 일어선 아빠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사납게 보였는데, 나를 알아보자 이번에는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접개 칼을 집어들고는 방안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이놈, 네놈은 죽음의 천사야, 죽여 버릴 테다 그러면 두번 다시는 여기 올 수 없을 게 아냐"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며, 천사가 아니라 그저 허클에 지나지 않는다고 애원을 했지만 아빠는 아주 높은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웃고, 욕설을 퍼부으며, 거듭 내 뒤를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한번 몸을 홱 돌려 팔 아래로 빠져 나가려고 하다가 그만 아빠에게 옷자락을 붙잡히고 말아 나는 이젠 만사가 다 끝이로구나 하고 단념했지만, 번개처럼 재빨리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아빠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문에 등을 대고 털썩 주저앉아 잠시 쉰 뒤에, 또다시 네 놈을 죽여 없애겠다고 야단이었다. 칼을 엉덩이 밑에 깔고 한잠 자고 나서 힘이 생기거든 판가름을 해버리겠다고 대단한 기세였다 이렇게 해서 아빠는 이내 잠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을 등으로 깐 헌 의자 있는데로 가까이 다가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도록 가만히 그 위에 올라서 총을 꺼내들었다. 화약이 재어 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탄약 재는 쇠꼬치를 내리밀어보고는 총끝을 아빠 쪽으로 향해서 순무 통 위에다 놓고, 그 뒤에 앉아 아빠가 몸을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정말로 천천히 조용히 흘러갔다 제7장 아빠를 속여 도망치다 "일어나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눈을 뜨고 대체 내가 어디 있는가를 알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벌써 해가 뜬 후로, 나는 포근히 잠을 잘 잤다 아빠는 내 바로 앞에 씁쓸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으나, 어디 몸이 아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총으로 뭘 한 거야" 하고 아빠는 물었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아빠는 전혀 알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나는 대답했다. "누가 들어오려고 하기에 그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왜 날 깨우지 않았지" "글쎄, 깨우려고 했지만 안 됐어요. 깨울 수가 없었어요." "음, 그래, 그럼 됐어. 거기 서서 온종일 잔소리만 말고, 어서 나가 조반용 고기나 낚싯줄에 걸렸나 보고 와, 나도 이제 곧 갈 테니." 아빠가 잠근 문을 열었으므로 나는 강둑으로 나갔다 몇 개의 큰 나뭇가지 또는 그것 비슷한 것과 나무껍질 부스러기가 떠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미시시피 강에 물이 불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지금쯤 마을에 있다면 큰 재미를 볼 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유월의 증수 는 나에게 늘 행운을 가져다주곤 했다. 증수가 시작되면 땔나무가 될 목재와 통나무 덩어리, 게다가 그것도 때로는 몇십 개씩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이 떠내려와서 그것을 끌어당겨서 재목상과 제재소에 다 팔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한눈으로는 아빠를 경계하면서 또 한눈으로는 증수가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표류 물에 마음을 쓰면서 강둑을 따라 상류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갑자기 카누가 나타났다. 길이 13.4피트 가량의 아름다운 카누는 오리 모양으로 가볍게 물위에 떠있었다 나는 옷을 입은 채로 개구리처럼 강둑에서 곧장 강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카누를 향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누가 바닥에 누워 있음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 한 것은 남을 놀려주기 위해서 곧잘 그런 장난을 하는 작자들이 흔히 있었기 때문으로, 누가 스카프를 저어서 카누 바로 앞까지 가면 성큼 일어나서 웃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 은 틀림없이 표류된 카누로, 나는 그것에 올라타고는 둑을 향해 조용 히 젓기 시작했다. 10달러 가치는 있어 보이니까 아빠가 이걸 보면 기뻐할 테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둑에 이르고 보니 아빠가 보이 지 않았다 나는 덩굴과 버들가지로 완전히 덮여서 도랑처럼 된 개울 속에 카누를 저어 넣고 있는 동안에 내 머릿속에 딴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이놈을 꼭 감춰 두었다가 도망을 칠 시기가 오면 숲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그 대신 강을 한 50마일쯤 내려가 한 장소에 언제까지 야영하고 있으면 방랑 여행과 같이 고생을 할 일은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이곳은 비교적 오두막집에 가깝고 해서 나는 연방 아빠의 발소리를 들은 것 같은 느낌이었으나, 교묘하게 카누를 감추고 나서 강둑으로 올라가 버드나무 숲을 따라 빙 둘러보고 있을 때, 아빠가 오솔길을 약 간 내려간 곳에서 총으로 새를 겨누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는 그때까지는 아무 것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빠가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열심히 흘림 낚싯줄을 끌어당기는 시늉 을 하고 있었다. 아빠는 뭘 그리 꾸물거리고 있느냐고 약간 나를 나무랐지만 강에 빠져 그만 늦었노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내가 젖어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무슨 말을 물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메기를 다섯 마리쯤 낚싯줄에서 끌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반이 끝난 후 거의 녹초가 되다시피 된 우리들은 누워 피로를 풀기 위해서 한잠 자기로 한 것인데, 그때 나는 내가 도망을 친 후에 아빠나 과부댁이 내 뒤를 쫓지 않게끔 꾸며 놓으면, 그 편이 오히려 두 사람이 내가 없어진 것을 깨닫기 전에 운에 맡기고 멀리 도망쳐 버리리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다간 도중에서 붙잡힐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동안 나로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금세 물 한잔을 또 마시기 위해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또 누가 이 근처로 와서 서성거리면 날 깨우는 거다. 알았지. 그놈은 필경 좋지 못한 배짱으로 여기 온 거야. 쯧, 그놈을 쏘아 죽였으면 좋았을 걸 그랬군. 요 다음엔 날 깨우는 거다. 알았지" 아빠는 다시 자리에 누워 또 잠이 들었다 이제 방금 아빠가 한 말을 듣고 나는 좋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자, 아무도 내 뒤를 들으리라 고 생각하지 않을 방법을 쓸 수 있다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12시쯤 해서 우리들은 밖으로 나가 상류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강은 꽤 빨리 물이 늘어, 그 물살에 따라 표류목이 많이 흘러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 후에 통나무 뗏목의 일부-아홉 개를 한데 묶은 것이 떠내려왔다. 우리들은 스키프를 타고 나가 이것을 강둑 위로 끌어 올렸다. 그 다음 점심을 먹었다 아빠 이외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날 하루만은 온종일 강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좀더 무엇을 건지려고 하겠지 만 아빠가 하는 식은 그렇지가 않았다. 한번에 뗏목이 아홉 개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곧 마을로 가지고 가서 팔지 않으면 안 된다. 세 시 반경 아빠는 나를 방안에 가둬 놓고는 스키프를 타고 통나무를 끌고 마을을 향해 떠났다. 오늘밤은 돌아올 리가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빠가 이젠 왜 멀리 갔으리라고 생각되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나 는 톱을 꺼내서 그 통나무를 또다시 썰기 시작했다. 아빠가 강기슭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구멍에서 빠져 나왔다. 아빠와 뗏목은 멀리 강 위 의 한 점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콘밀 부대를 들고, 카누를 감춰 둔 곳으로 가서는 덩굴과 작은 가지를 헤치고는 이것을 카누에 실었다. 다음에 베이컨 그 다음에 위 스키병 순서로 똑같은 짓을 반복했다. 거기 있는 전량의 커피와 설탕 과 탄약도 카누에 가져다 실었다. 충전용 솜, 양동이. 바가지, 물주걱 과 양철 컵, 헌 톱과 담요 두 장, 프라이팬과 커피 주전자도 갖다 실었다 낚싯줄, 성냥, 그밖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물건은 무엇이거나 모두 갖다 실었다. 오두막집을 텅 비게 할 셈이었다. 도끼도 탐이 났지만 나무광에 있는 그 한 자루뿐으로, 나는 그것을 그곳에다 남겨 두고 가는 까닭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총을 싣자 만사는 끝났다 구멍을 기어 나오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물건을 끌어내기도 하여 땅 위를 어지럽게 했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 안으로 모래를 뿌려 평평하게 된 곳과 톱밥 위에다 덮고 되도록 교묘하게 먼저 모양대로 해놓았다. 그 다음에 통나무의 자른 부분을 먼저 장소에 끼우고, 빠지진 않도록 돌 두 개를 그 아래에다 고이고 하나는 걸쳐놓았다. 그곳이 쳐들려서 땅에 붙지 않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4,5피트나 떨어져서 보니 톱으로 켜진 것을 알지 못한다면 절대로 들킬 염려가 없을 뿐더러, 여 기는 오두막집 구석이어서 그런 데까지 호기심을 가지고 가볼 사람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카누까지 온통 풀이 우거져 있으니까 발자국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 주위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둑에 서서 저 앞까지 바다를 내다보았다. 만사는 안전. 그래서 총을 들고 숲속으로 조금 들어가 새를 찾고 있던 중 멧돼지가 한 마리 나왔다. 초원의 농장을 도망쳐 온 돼지는 이러한 강둑 저지대에서는 재빨리 야생 짐승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놈을 쏘아 집으로 가지고 왔다. 나는 도끼를 집어들고 문을 때려부셨다 그리고 산산조각으로 갈라놓았다 돼지를 안으로 날라다 테이블 옆에까지 끌고 가서 도끼로 목 을 때려박고는 피를 흘리도록 땅 위에다 내버려두었다. 내가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밟아서 굳게 다져진 땅으로, 마루는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헌 부대를 꺼내다가 큰 돌을 잔뜩 주워다 넣고 이것을 돼지 가 있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숲속을 지나 강 있는 데까지 끌고 와 물속 에다 던졌더니, 그만 가라앉아 자취를 감추었다. 무엇이 땅 위로 끌려 왔다는 것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톰 소여가 여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톰이 이런 일을 재미있어 하고. 또 꾀를 보태어 틀림없이 재미있게 일을 꾸몄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톰 소여만큼 신나게 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맨 나중에 나는 머리칼을 움켜 뽑아 도끼에 흥건히 피를 묻혀 도끼 저쪽 날에다가 머리칼을 붙여서 방 한쪽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그 다 음에 돼지를 쳐들어 피를 흘리지 않도록 윗도리 가슴팍에다 대고 방 저쪽 아래에 흥건히 피를 흘린 후에 강속에다 던져 버렸다. 이때 언뜻 딴 생각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카누가 있는 데까지 도로 가서 콘밀 부대와 그 헌 톱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부대를 늘 과두는 곳에다 놓고는 톱으로 그 밑바닥에다 구멍을 뚫었다. 톱으로 구멍을 뚫은 것 은 아빠는 음식을 만들 때에는 접개칼로 무엇이든 하는 까닭으로 방안에는 칼도 포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집 동쪽 풀밭과 버들숲 사이를 100야드쯤 부대를 들고, 폭이 5마일이고 온통 갈대가 우거진 계절에는 오리도 날아든다고 할 수 있는-얕은 호숫가로 갔다. 그 저쪽으로부터 수렁이라고 할까 개울이라고 할까 그러한 것이 흘러내려,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미시시피 강은 아닌 곳으로 몇 마일이나 흘러 내려갔다. 콘밀은 부대에서 흘러 이 호숫가까지 쭉 기다란 자국을 만들었다. 나는 아빠의 숯돌도 그곳에다 떨어뜨려. 무슨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 다음 콘밀이 홀러내리지 않도록 부대 찢어진 곳을 실로 잡아 묶고는 톱과 함께 카누 있는 데로 가지고 갔다 이제는 어둑어둑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카누를 강둑 버드나무가 물 위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곳으로 돌려놓고는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버드나무 하나에다 밧줄을 매어놓은 후에 대강 식사를 하 고, 담배를 피우며 계획을 짜내기 위해서 카누 바닥에 드러누었다 사람들은 그 돌을 잔뜩 담은 부대 자국을 따라 강둑까지 가서 거기서 내 시체를 찾아 강바닥을 뒤질 테지. 그 다음 모두 콘밀 자국을 따라 호숫가까지 가서 나를 죽이고 물건을 훔쳐간 강도를 찾아 이리저리 호수로부터 흘러내리고 있는 개울을 따라 내려갈 테지 내 시체 외에는 강을 뒤질 리는 절대로 없으리라. 금세 그것에 싫증이 나서 그 이상 더 내 일에 마음을 쓰진 않을 테지. 옳지 나는 어디든지 내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다. 작슨 섬이라면 안성맞춤이다 나는 이 섬이라면 상당히 잘 알고 있고, 또 그 섬에는 아무도 올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또 나는 밤에는 읍으로 카누를 타고 가서 숨어 다니며 갖고 싶은 물건 을 수중에 넣을 수도 있다. 뭐니뭐니 해도 작슨 섬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나는 상당히 피로했으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잠깐 동안은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 했다. 일어나 좀 겁이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음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강폭은 몇 마일이나 되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나에게는 강둑으로부터 몇백 야드 저쪽을 꺼멓게 고요히 떠내려가고 있는 표류목을 셀 수가 있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고요하고, 느린 것처럼 보이고, 느린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사람들은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을 알아 줄 테지-어떠한 말을 써야 좋을지 나는 모르겠다. 마음껏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나서 이제라도 곧 밧줄을 풀고 떠나려 하고 있을 때 강물 저쪽으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금세 알 수 있었다 고요한 밤에 노받이 속에서 움직이는 노가 삐걱거리는 그 둔한 규칙적인 소리였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가만히 내다보았더니 스키프가 떠있었다. 몇 사람이 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와 바로 나와 병행된 위치에까지 왔을 때 오직 한 사람만이 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밤 돌아오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어쩌면 그게 아빠일지도 모르겠다고 나 는 생각했다. 흐름에 밀려 내 바로 아래까지 떠내려온 것인데, 이내 흐름이 약한 수역으로 들어온 다음 힘있게 강둑으로 다가와, 총을 뻗치면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지나갔다. 틀림없이 아빠였다 노를 젓는 품으로 봐서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나는 일각이라도 꾸물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에 나는 강둑의 그늘 속을 조용히 그러나 쾌속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2마일 반 내린 다음 4분지 1마일 이상 강 한복판으로 나간 것은. 나루터 옆을 지나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불러 세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표류목 사이로 들어가서 카누 밑바닥에 납작 드러누운 채 흐르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드러누워서 푹 쉬며, 파이프를 피워 물고서 하늘 을 쳐다보고 있자니 구름 한 점도 없다. 달빛 아래 벌렁 자빠져 있으면 하늘은 여간 넓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때까지 이런 맛을 몰랐다. 더욱이 이런 밤에는 그 얼마나 소리가 멀리까지 물위를 전해 오는 것일까 나루터에서 사람들이 지껄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을 수가 있었다. 어떤 사람 하나가 낮은 길어지고 밤은 짧아지는 계절이 되었다고 한 다. 다른 사나이가 이 말을 받아, 오늘밤은 짧은 밤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반기를 들자, 두 사람은 껄껄 웃으며, 하나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는 두 사람은 또다시 웃어대었다. 다음 두 사람은 또 한 사나이를 깨워 가지고 이 얘길 하며 웃어댄 것인데, 이 사나이는 따라서 웃지는 않고 뭐라고 가시가 있는 말을 톡 쏘아붙이고는 난 내버려둬 하고 짜증을 부렸다. 맨 처음 사나이는 이 얘길 자기 마누라에게 하면 마누라 는 참 근사한 얘기라고 생각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은 자 기가 젊었을 때 한 얘기에 비하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사나이는 이젠 거의 세 시쯤은 되었을 것이고, 이제까지 만도 일각여삼추 같은 느낌인데 날이 샐 때까지는 일주일이나 기다리는 것 같을 테니 이 갑갑증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탄식이었다 그후 지껄이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이젠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중얼중얼 대는 소리와 가끔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만 같았다. 벌써 나는 나루터 한참 아래에 와 있었다. 일어나 보니 2마일 반쯤 하류에 나무가 우거진 마치 불을 켜지 않은 기선 만한 크기의 시꺼먼 작슨 섬이 강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물이 불어서 강둑 머리의 모래언덕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섬에까지 이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흐름이 빨랐으므로 강둑 머리를 거센 속력으로 지나 흐름이 없는 수역으로 들어가서 일리노이 쪽에 면한 강둑에 상륙했다. 그전부터 알고 있는 둑의 깊은 포구에 카누를 저어 넣었다. 거기 들어가려면 버드나무가지를 헤쳐야 만 했는데, 매놓은 카누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섬 머리까지 걸어가 통나무 위에 걸터앉아, 큰 강과 표류목과 3마일 저쪽에 있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마을에는 등불이 셋인가 넷 깜박거리고 있었다. 괴물처럼 커다란 뗏목이 1마일쯤 상류지점에서 그 한가운데에다가 초롱을 놓은 채 떠내려오고 있었다. 느릿느릿 떠내려오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까 거의 내가 서 있는 장소와 병행의 위치에까지 왔을 때 사나이 하나가 "고물 노를 써 뱃머리를 우현으로 돌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이 사나이가 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똑똑히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늘이 약간 회색으로 흐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숲속으로 들어가 조반 전에 한잠 자기 위하여 드러누웠다 제8장 왓슨 아주머니의 짐을 구출하다 눈을 떴을 때 해는 벌써 여덟 시가 지났으리라고 판단이 들만큼 높이 솟아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풀 속의 서늘한 그늘에 누워 있자 몸이 풀어지고, 오히려 마음이 놓이고 만족한 기분이었다. 나는 나무 사이로 해서 해를 볼 수 있었지만, 부근 일대가 큰 나무들로 우거져 있어 그 안은 음산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땅에 떨어지는 장소에는 반점을 이루고 있어, 그곳이 약간 흔들거려 포구에 카누를 저어 넣었다. 거기 들어가려면 버드나무가지를 헤쳐야 만 했는데, 매놓은 카누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리고 있는 것은 왼쪽에서 다소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람쥐 두 마리가 큰 가지에 앉아서 나에게 자못 정답게 뭐라고 짹짹 재잘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몸이 나른하고 편해져서 일어나 아침밥을 만들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깜박 졸고 말았는데, 그때 상류에서 '씬' 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았다. 몸을 쳐들어 팔꿈치를 괴고 귀를 기울이자 이내 또 한 방 들려왔다. 얼른 뛰어 일어나 나뭇잎 구멍 있는 데로 가서 내다보니 상류 위쪽 나루터 근처의 물위에 연기가 몇 줄기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을 가득 태운 나룻배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나는 이내 알 수 있었다 '꽝' 하고 하얀 연기가 나룻배 한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내 시체를 물위에 떠오르게 하느라고 대포를 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나는 꽤 시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가 눈에 띌까봐 불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때문에 나는 거기 앉아서 대포 연기를 지켜보며 꽝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쪽 강은 폭이 1마일로, 여름 아침은 늘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좀 요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내 시 체를 찾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껏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사람들이 늘 빵덩어리 속에다 수은을 넣어서 물위에다 떠내려 버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이렇게 하면 빵은 곧장 익사체 있는 데로 가서 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감시하고 있다가 빵덩어리가 나를 찾아서 넘실넘실 흘러 내려오면 한번 시험해 보리라 혼잣말을 했다. 어떠한 운수에 얻어걸릴 것인지 그걸 시험해 보리라고 생각하고는, 섬의 일리노이 쪽 끝으로 자리를 옮겨 보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큰 빵덩어리 두 개가 흘러 내려왔으므로 나는 긴 장대로 거의 그것을 건질 뻔했지만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만 빵은 멀리 떠내려가고 말았다 흐름이 둑으로 가장 접근하기 쉬 운 장소에 내가 가 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나는 이 일을 너무 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또 한 개가 떠내려와 이번에는 건질 수가 있었다. 마개를 뽑고 조그만 수은덩어리를 흔들어 버리고 나는 먹기 시작했다 그것은 '빵집에서 구운 빵' - 나으리들이 먹는 빵으로 흔히들 먹는 품질이 나쁜 옥수수 빵이 아니었다 나는 나뭇잎 사이의 좋은 장소를 알아내어 통나무에 걸터앉아 자못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빵을 씹으며 나룻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언뜻 무슨 생각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과부댁이나 목사 그 누 가 이 빵이 나를 찾아내도록 기도를 올린 것이니까 이처럼 내 뱃속에 들어가서 우선 그 효능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 기도에는 무엇이 있다. 즉 과부댁이나 목사와 같은 사람이 기도를 올리면 그 기도에는 무엇이 있지만 내가 하면 아무 효능도 없고, 다만 적당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효험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파이프에 불을 붙여 천천히 빨아들이면서 감시를 계속했다 나룻배는 흐름에 따라 둥실둥실 떠내려와 빵이 떠내려온 것처럼 섬 근처까지 올 것이 뻔한 일이니까 누가 타고 있는지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꽤 가까이 까지 왔을 때 나는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 빵을 건져 올린 장소로 가 조그마한 공지에 있는 통나무 뒤에 드러누웠다. 통나무가 가지로 된 그곳으로부터 내다볼 수 있었다. 얼마 후 나룻배는 판자만 걸치면 걸어서 상륙할 수 있을 거리에까지 떠내려왔다. 거의 전원이 배에 타고 있었다 아빠, 대처 판사, 판사의 딸 베키 대처, 조 하퍼, 톰 소여 폴리 아주머니, 톰의 동생 시드와 메 리. 그밖에도 많았다. 모두가 살인사건을 두고 얘기꽃을 피우고 있던 것인데, 선장이 끼여들며 말했다 "자, 잘들 보십쇼. 흐름은 여기서 제일 둑에 접근하니까 그 애는 둑 에 밀려올라 물가 덤불 아래에 엉켜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 나로선 조금도 좋을 것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내 얼굴 바로 앞에 모여, 난간 너머로 몸을 불쑥 내밀고는 죽은 듯이 숨을 죽인 채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나에게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똑똑 히 보였지만 그 사람들은 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선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기 비키시오" 그리고는 대포가 바로 내 앞에서 어찌나 은 소리를 내며 터졌던지 그 소동으로 귀는 들리지 않고 눈은 연기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죽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탄알을 재서 한 일이라면 그 사람들은 찾고 있는 시체를 찾았을 것이리라. 하지만 하느님 덕택으로 나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는 움직이기 시작하여 섬 어깨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점점 멀어져 가면서 가끔 꽝꽝 하 는 소리가 들렸는데, 얼마 후 한 시간 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섬은 길이가 3마일쯤 되었다. 나는 그들이 섬 끝까지 가서 그만 단념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섬 끝을 돌자 이번에는 미주리 쪽 수로를 기력으로 달리면서 가끔 꽝꽝 하고 대포를 쏘았다. 나는 그쪽으로 섬을 횡단하고는 감시를 계속했다 섬 머리와 병행되는 지점에 오자 대포를 쏘는 것을 그만두고는 미주리 쪽 뒤에 이르러 모두들 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이젠 문제없구나 하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 이상 나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을 테지 카누에서 짐을 집어들고 우거진 숲속에다 멋진 캠프를 쳤다. 담요 두 장으로 텐트를 만들어 비가와도 젖지 않도록 그 아래에다 여러 가지 물건을 넣었다. 나는 메기 한 마리를 잡아 톱으로 아무렇게나 배를 갈라서 해가 질 무렵 야영 모닥불을 만들어 저녁밥을 먹었다. 그 다음 아침 식사용 고기를 낚기 위해서 흐름낚싯줄을 물속에다 넣어 두었다. 어두워지자 야영 모닥불 앞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자못 즐거웠지 만, 곧 그것도 심심해졌다. 강둑으로 가서 앉아 쏴쏴 흐르는 물소리를 듣기도 하고, 또 별과 흘러 내려오는 통나무와 뗏목의 수를 세기도 하 다가 그만 자기로 했다. 심심할 때 시간을 보내기에는 이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언제까지 심심한 채로 있을 수는 없고, 자면 곧 그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상태로 사흘 낮 사흘 밤이 지났다. 아무 변동도 없는 똑같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나는 섬을 빙 돌아 아래쪽으로 탐험의 길 을 떠났다. 나는 이 섬의 주인공으로, 말하자면 섬 전체가 내 것이니까 그 전체를 무엇이든 모두 알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주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참 잘 익은 딸기가 얼마든지 있었고, 푸른 여름 딸기와 푸른 라즈베리를 발견해 냈고, 푸른 블랙베리는 이제 열매를 맺기 시작한 참이었다.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곧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섬 끝에서부터 그리 멀다고 생각되지 않는 지점까지 깊은 숲속을 슬슬 걸어갔다. 총을 들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방어를 위한 것으로 아무것도 쏘지는 않고 집 근처에서 무슨 짐승을 죽일 작정이었다 이 때 나는 하마터면 큰 뱀을 밟을 뻔했지만 뱀은 풀과 꽃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가 나는 놈을 쏘아 죽일 작정으로 뒤를 따랐다 있는 힘을 다해 그 뒤를 쫓았지만 갑자기 연기를 내고 있는 야영 모닥불의 재에 뛰어 들고 말았다. 깜짝 놀라 가슴이 뛰었다. 그 이상 무엇을 보려고 할 것도 없이 방아쇠를 내린 다음 되도록 빨리 발끝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서 잠깐씩 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지만, 숨이 가빠서 다른 소리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또 잠시 도망을 치 다가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고, 또 도망치다가 귀를 기울이는 똑같은 짓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나무 그루터기를 보고는 사람으로 잘못 보았고, 나뭇가지를 밟고서 부러지면 숨통이 둘로 갈라져 나에게는 그 절반의, 그것도 작은 쪽의 숨통밖엔 남아 있지 않는 것만 같았다. 캠프에 돌아왔을 때에는 헛기운마저 빠져 맥이 완전히 풀려 버렸지 만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아 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도록 살림 도구 전부를 또다시 카누에다 싣고, 불을 끄고 재를 그 근처에다 뿌려 작년의 헌 캠프처럼 보이도록 해놓 고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다. 나는 2시간쯤 나무 위에 있었을까, 그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 무 소리도 듣지 못했건만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물건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나무 위에 있을 수도 없고 해서 나는 나무에서 내려왔지만 우거진 숲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채 줄곧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먹을 것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딸기와 먹다 남은 아침밥뿐이었다 밤이 왔을 때 나는 왜 배가 고팠다 그래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 달이 뜨기 전에 살그머니 둑을 떠나 4분지 1마일쯤 카누를 저어 일리노이 쪽 둑에 상륙했다. 숲속으로 들어가 저녁밥 준비를 하고, 오늘밤은 여기서 보내리라고 결심을 했을 때, 저벅저벅 하고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되도록 빨리 모든 것을 카누 속에다 처넣고는 가만히 숲속으로 들어가서 무엇이 보이나 그것을 보려고 했다. 그리 멀리 가기도 전에 그 중 한 사람이, "마땅한 장소가 있으면 여기서 캠프를 치는 게 좋지 않을까 말들은 거의 녹초 가 되어 있어. 어디 좀 찾아보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둑을 떠나 조용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예의 그곳에다 카누를 매놓고 오늘밤은 카누 안에서 자기로 했다. 나는 잠이 깊이 들지 못했다.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아서 암만해도 그리 잠이 잘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뜰 때마다 누가 내 목덜미를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러한 상태로 자도 몸에 이로울 것은 없었다. 얼마 후에 나는 이러한 꼴로는 도저히 살아나갈 수는 없다, 대관절 이 섬에 나와 같이 있는 놈이 누구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찾아내야만 하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노를 집어들고 한두 번 저어 둑을 떠난 후에 그늘 아래로 항로를 유지했다 달은 중천에 교교히 떠 있어 그늘 밖은 마치 대낮처럼 훤히 밝았다. 근 한 시간 동안이나 찾아다녔지 만 모든 것은 바위처럼 고요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이때 나는 섬의 한끝 가까운 거 리에까지 와 있었다. 약하지만 소근거리는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하였고 날이 거의 새었다고 해도 좋을 만한 시각이었다 나는 카누를 돌려 뱃머리를 둑에다 대고, 총을 들고 뛰어나가 숲 한끝에다 몸을 감췄다. 거기 있는 통나무에 걸터앉아 나뭇잎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달은 당직을 끝마쳤는지 어둠이 온통 강 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나무 끝에 파릿한 줄무늬가 보이며, 나는 그것으로 아 침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총을 집어들고는 모르고 밟은 그 야영 모닥불이 있던 곳으로 1,2분 만큼씩 걸음을 멈추고는 서서 귀를 기울이면서 살금살금 접근해 갔다. 그러나 그 장소를 찾아낼 것 같지가 않았다. 얼마 후에 저 멀리 나무사이로 분명히 불이 반짝 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심조심 그쪽으로 접근해 갔다 그것이 똑똑히 보일 만큼 접근해 가서 보니 웬 사나이 하 나가 땅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으며 두근거렸다. 이 사나이는 머리에다 담요를 쓰고 있었으며, 그 머리가 거의 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나는 그 사나이로부터 약 6피트쯤 떨어진 우거진 덤 불 뒤에 앉아 두 눈을 놈에게서 잠시도 떼지 않았다 동쪽하늘이 희멀겋게 밝아왔다. 얼마 후에 놈은 꿈틀하더니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는 담요를 쳐들었다. 아니 그것은 왓슨 아주머니의 짐이 아닌가 나 는 정말로 기뻤다. 그래서 "어이 짐" 하고 뛰어나갔다. 짐은 일어나기가 무섭게 사나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다음에 는 땅에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하고는 말했다. "내게 해를 끼쳐선 안 돼 제발. 난 도깨비에게도 해를 끼쳐 본 일이 없어. 난 언제나 죽은 사람이 좋아서 할 수 있는 데까진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일은 다 했어. 임잔 다시 강으로 돌아가. 임자 있을 곳은 강이야. 늘 임자의 단짝이었던 이 늙은 짐에게 무슨 짓을 해선 안 돼 " 짐에게 내가 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는 짐을 만나서 정말 기뻤다. 이젠 심심하지도 않다. 내가 어디 있는지 짐이 사람들에게 일러바치리라는 걱정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였지만, 짐은 거기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자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이젠 틀림없이 아침이야. 아침밥을 짓기로 해야지 자, 모닥불을 잘 만들라구." "딸기나 그런 푸성귀로 요리를 만드는데 모닥불을 만들어서 무슨 소용이야. 그렇지만 임잔 총을 가지고 있겠다. 그렇지 그러니까 우린 딸기보다 훨씬 좋은 걸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딸기나 그런 푸성귀라고 그런 걸로 살아왔었단 말이야" "그밖에 먹을 것이 있어야지." "아니 뭐 이 섬에 온 지 얼마나 됐는데, 짐" "임자가 죽은 날 밤 온 거지 ." "뭐 그렇게 오랫동안." "그래 , 정 말이 야 " "그리고 그 쓰레기 같은 것밖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거야" "그럼, 없구 말구......그밖에 뭣이 있어야지." "그렇다면 짐, 너는 거의 굶어 죽게 돼 있게, 어때" "난 말 한 마리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수다. 정말. 임잔 이 섬에 온지 얼마나 되우" "내가 죽은 그날부터 " "아니 뭐 그럼 임잔 뭘 먹고 살아온 거야 하지만 임자에겐 총이 있으니까. 그건 잘 됐어. 자, 그럼 뭘 잡아오라구. 내가 불을 지펴 놓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카누를 매어 둔 곳으로 가서, 짐이 나무 사이의 풀이 난 공지에다 불을 지피고 있는 동안에 나는 콘밀과 베이컨과 커피와 커피 주전자와 프라이팬과 설탕과 양철 컵을 꺼내 가지고 왔다. 이걸 본 짐은 이게 모두 도깨비 조화냐고 깜짝 놀랐다. 나는 큼직한 메기 한 마리를 잡았다 짐은 그놈을 칼로 깨끗이 다듬어 프라이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자 우리들은 풀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뜨끈한 놈 을 먹기 시작했다 거의 빈사상태에 이른 짐은 대단한 기세로 먹어치웠다. 얼마 후 왜 배가 차자 우리들은 먹기를 그만두고는 벌렁 나자빠져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짐이 입을 열었다. "근데 말유, 허클, 그 오두막집에서 죽은 게 임자가 아니라면 대관절 누구란 말유" 내가 자초지종을 모두 얘기했더니 짐은 그건 참 근사한. 일이라고 입 을 벌렸다. 톰 소여라 할지라도 그런 계획을 짜낼 수는 없을 거라고 감탄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입을 열어, "짐, 어떻게 여기 온 거야. 어떻게 해서 여기 오게 된 거지" 하고 물었다. 이 말에 짐은 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못하더니 한참만에, "아마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다. "왜 그래, 짐" "뭐 까닭이 하나 둘이어야 말이지. 하지만 임자에게 얘기해도 날 밀고하진 않을 테지, 허클" "천만의 말씀" "음, 그럼 난 임잘 믿어, 허클 난‥‥‥난 말이야 도망친 거야." "짐 " "이봐, 밀고 안한다고 그랬지‥‥‥ 밀고 안하겠다고 한 말을 임잔 알고 있을 테지, 허클." "그야 그렇지 밀고 안한다구 했구말구 난 그 말을 실행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대로 해. 날 보잘것없는 노예 폐지론자라고 부르고, 고발 안한다고 해서 날 깔보고 싶은 놈들은 맘대로 깔보라지. 그것과 이건 아무 관계도 없어. 난 밀고도 안하고, 또 어쨌든 거기 돌아가진 않아. 그러니까 뭐든지 얘기해 봐." "음 그렇다면 이런 사정이야, 그 아씨 - 그 왓슨 아씨 말야 - 그게 늘 잠시도 빼놓지 않고 나에게 잔소리를 쏟아놓고, 또 나에게 심하게 굴기는 했지만 날 올린즈에 팔겠다고 한 말은 없었단 말야, 이날 이 때까지, 그러던 것이 요먼저 그 집에 노예 매매인이 온 것을 알게 되어 나는 버럭 걱정이 되었단 말야 그러던 차에 어느 날 밤 밤늦게 문 뒤로 살며시 가보았더니 문이 꼭 닫혀 있지 않았는데, 아씨가 과부댁에게 하는 말이, 날 올린즈에 팔기로 했는데 팔기는 싫지만 날 팔면 800달러를 받게 되어 이건 큰돈이니까 팔지 않을 수도 없다고 하는 소릴 들었지. 과부댁은 아씨에게 날 팔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퍽 애를 썼지만 난 그 뒷말은 듣지 않았어. 난 들키지 않도록 밖으로 나오자 다리야 날 살려라고 언덕을 뛰어내려, 마을 상류의 둑 어디서 스키프를 홈치리라고 생각한 것인데, 아직도 자지 않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강둑 근처의 허물어진 통장이 집에 숨어서 사람들이 모두 없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하룻밤을 그 속에서 보냈단 말야, 정말. 그 중 하나는 늘 거기 있더라니까 아침 6시경에 스키프가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고, 8신가 9시경이 되니까 앞을 지나가는 어느 스키프나 모두 임 자 아빠가 마을로 와 있는 동안 임자가 죽었다고 하는 얘길 했다고들 하더군. 그 뒤 스키프는 그 오두막집을 보러 가는 부인들과 나으리들로 만원이었다니까 글쎄. 때로 강을 건너기 전에 강둑에다 스키프를 대놓고 쉬는 사람들도 있고 해서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로 난 살인에 관한 얘길 전부 알게 되었단 말야. 난 말야, 허클, 임자가 죽었다고 해서 퍽 슬펐지만 이젠 슬프진 않구먼. 난 하루 종일 대패밥 아래에 누워 있었지 뭐야, 배는 고팠지만 무섭지는 않았어. 아씨와 과부댁은 조반 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내 야외 설교회에 가서 하루종일 거길 떠나지 않고, 두 마님은 날이 새기만 하면 내가 가축들을 밖으로 내놓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저녁때가 되어 사방이 어두워질 때 까진 내가 집에 없는 걸 알 까닭이 없으리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단 말야. 또 다른 머슴들 도 주인이 집을 비우자마자 대번에 자기 세상이 왔다고 나자빠지니까 이 녀석들도 역시 내가 집에 없는 걸 알 까닭이 없을 거란 말야. 어두워지자 난 강가 길로 몰래 빠져 나와 한두 마일 가량 집이 없는 곳으로 갔단 말야. 이제부터 무엇을 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있었어. 좀 들어봐. 만일 내가 걸어서 도망을 치려고 한다면 개가 뒤를 쫓을 게 아냐. 스키프를 훔쳐서 그걸로 저쪽 둑으로 가려고 한다면 스키프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는, 저쪽 둑의 어디서 내가 내렸는지를 깨닫고, 어디서부터 이 놈을 추격하기 시작하면 좋으리라는 걸 알 게 아냐. 그래서 난 뗏목을 타리라고 작정을 한 거야. 뗏목은 발자국을 남길 리 없으니까. 얼마 후섬머리 저쪽에서 등불이 하나 가물가물하며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여서 나는 강속으로 뛰어들어 통나무 하나를 붙잡고는 강 절반 이 상이나 헤엄을 쳐서 표류목 사이로 들어가 머리를 숙이고는 뗏목이 떠내려올 때까지, 말하자면 흐름에 거슬리면서 헤엄을 치고 있지 않았겠지. 다음 뗏목 고물로 헤엄쳐 가 거길 꽉 붙잡았단 말야. 그때 구름이 끼면서 잠시 꽤 어두워지더군. 그래서 슬쩍 뗏목 위로 기어올라 널빤지 위에 드러누었지 뭐야. 사공들은 모두 저쪽 등불이 있는 한가운데 에 모여들 있더군. 강물이 부쩍 늘어 그 속력이 여간이 아냐. 그래서 나는 아침 4시까지는 틀림없이 25마일 하류까지는 와 있으리라, 그러면 거기서 날이 새기 직전에 강속으로 슬쩍 들어가서 강둑으로 헤엄쳐 올라 일리노이 쪽 숲속으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한 거지 뭐야. 그런데 아 무슨 놈의 운이 그렇게도 딱 막히는지, 거진 섬머리에까지 뗏목이 흘러내렸을 때에 사공 하나가 등을 들고 고물 쪽으로 걸어오지 않겠어. 이거 가만히 있다간 큰일밖에 날 것이 없다고 덜컥 겁이 나길래. 나는 뗏목에서 슬쩍 내려 이 섬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하지 않았겠어. 아 무 데나 마음에 드는 장소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웬걸 그렇게 될 수 있어야지, 둑이 아주 깎아 내린 듯한 절벽이더란 말야. 섬 끝에 가까운 곳으로 왔을 때 겨우 좋은 장소 하나가 눈에 띄더군. 나는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저렇게 등을 들고 사공이 이러 저리 돌아다닌다 면 두 번 다시는 뗏목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으리라 결심한 거야, 난 모 자 속에다 담뱃대와 쌈지와 성냥을 넣어 뒀더랬는데, 아 글쎄 요놈들 이 하나도 젖지 않은 걸보고 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럼 짐은 지금까지 고기도 빵도 먹은 일이 없다는 거야 그럼 왜 거북이라도 잡지 못했지" "원 참, 무슨 수로 그놈을 붙잡는다는 거야. 몰래 가서 잡을 순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바위를 깨뜨려 부술 수도 없잖아. 밤중에 무슨 수로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야. 게다가 낮에 강가에 가려고는 꿈도 꾸지 않았으니까. " "옳지, 그럴 법도 하군. 짐이 늘 숲속에 숨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건 당연한 일이지. 그럼 대포 쏘는 소리 들었어" "듣구말구 그 사람들이 임잘 찾고 있다는 걸 난 그 소리로 알았는데, 작자들이 여길 지나가는 것이 보이더군‥‥‥덤불 속에서 지켜보고 있자니까 " 어린 새가 몇 마리 날아와서는 1,2야드 빙 돌더니 내려앉았다 짐은 그걸 보고 비가 올 전조라고 했다. 병아리들이 이렇게 나는 것은 비가 올 전조인데, 어린 새가 이런 짓을 해도 역시 같으리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놈을 몇 마리 잡겠다고 했더니 짐이 굳이 말린다. 그런 짓을 하다간 이쪽이 죽고 말 거라며 펄쩍 뛴다. 자기 아버지가 한 때 중병이었을 때 식구 중의 누가 새를 잡았는데, 짐의 할머니가 그걸 보고 이젠 아들이 죽는다고 한 것인데, 과연 그 말대로 짐의 부친은 세 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짐은 저녁 식사에 반찬거리로 쓸 물건의 수를 헤아려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악운이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가 진 후에 식사보를 털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 다음 또 짐은, 꿀벌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다음날 아침해가 뜨기 전까지 그 얘길 꿀벌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만일 그렇게 안 하면 벌은 모두 몸이 약해져 일도 안하고 죽어 버린다는 말도 했다 꿀벌은 바보는 쏘지도 않는다 고 짐은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몇 번이고 손수 이것을 시험해 보았지만 나를 쏘려고는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이런 얘기들을 들었지만 그 전부는 아니다. 짐은 모든 종류의 전조를 알고 있었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 전조라는 것은 거의 모두가 악운을 알리는 것 같은데, 그 무슨 행운을 가져다주는 전조는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짐이 말했다 "극히 적지. 그것도 사람에게 도움이 되진 않아 행운이 올 때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알고 싶어하는 거지 오지 않게 하고 싶다는 건가"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 "털이 많은 팔과 털이 많은 가슴은 부자가 될 전조야. 그런 전조는 좀 뭣에 도움이 되지. 먼 장래 일을 알 수 있으니까 그렇지, 임잔 처음엔 오랫동안 가난뱅이로 있을지도 모르지. 이 전조로 머지않아 부자가 된다는 걸 모르고 있다면 실망하여 그만 자살하고 말지도 모를 게 아냐 " "그럼 짐은 털 많은 팔과 털 많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걸 질문이라고 해, 이게 보이지 않아, 임자에겐" "그럼 짐은 부잔가" "천만에, 하지만 난 한 번은 부자였는데 이제 다시 부자가 될 거야. 한때 나에게 14달러가 있었더랬는데 투기에 손을 대어 그만 홀딱 날리 고 말았다우 " "짐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또 그런 짓을 했담" "글쎄, 우선 주식에 손을 했다니까." "어떤 주식" "어떤 주식이냐고, 라이브 가축. 변하잖아, 소 말야. 난 10달러를 주고 암소를 한 마리 샀단 말야. 이젠 죽어도 가축에 돈을 거는 일은 안 해, 이 암소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내 손바닥 위에서 그만 뻗었단 말 야, 제기랄. " "그러니까 결국 돈만 손해보았단 말이구먼" "천만에. 10달러를 고스란히 손해를 본 건 아니지. 그 중에서 약 9달러뿐이지. 껍질과 지방은 1달러 10센트에 팔았으니 까." "그럼 1달러 10센트 남은 셈이구먼, 그걸로 또 무슨 투기를 했나" "하구말구. 아 왜 저 부래디쉬 영감님네 왼발잡이 검둥일 알잖나 그 작자가 은행을 세운 거야. 1달러를 넣으면 그 해 말에 4달러를 탄다든 가, 뭐, 넣은 돈 외에, 그래서 검둥이들이 모두 돈을 턴 것인데 큰 돈 을 가진 작자가 어디 있어야지, 아 글쎄 큰돈을 가진 건 나 하나뿐이더라구. 그래서 4달러 이상을 내라고 하여 끝까지 버티지 않았겠어 만 일 그렇게 안 된다면 내가 손수 은행을 하나 시작하겠다고 막 버티었지. 그런데 이 검둥이가 나까지 장사를 시키지 않으려고 한 것은 물론 이고 은행을 둘이서 할 만한 장사거리는 못 된다고 하면서 내가 5달러를 내면 그 해 말에 가서 35달러를 내겠다는 게 아냐. 그래서 난 그대로 하잖았겠어. 그 35달러를 곧 투자하여 그걸로 한몫 단단히 볼 배짱이었지 불이라는 검둥이가 있어서 이 검둥이가 뗏목을 건진 것인데, 이 사실을 그 작잔 주인에게 알리지 않았단 말야. 난 이걸 불에게 외상으로 사서 그 해 연말이 되면 35달러를 주겠다고 큰소릴 쳤는데, 그날 밤에 어떤 놈이 그 뗏목을 감쪽같이 훔쳐가 버렸고, 다음날엔 외다리 검둥이가 은행이 파산했다고 딱 잡아떼는 바람에 누구 하나 돈을 타낸 사람은 없었지 뭐 야." "짐, 그 10센트 어떻게 했지" "옳지 그 얘기 난 그 10센트도 써버리려고 생각했는데, 아 글쎄 꿈 을 됐다니까. 그때 그랬더니 그 꿈은 나에게 그 10센트를 발럼이라는 검둥이에게 주라는 게 아냐 바보 발럼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짧게 그렇게들 부르는 게으름뱅이 바보 말야. 그런데 모든 사람 말이 놈은 바보지만 운을 타고난 놈이라나. 난 내가 운이 나쁘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 이 꿈은 발럼에게 10센트를 투자하게 하라, 그러면 그 녀석이 나에 게 돈을 벌어다 준다는 거야 그래서 이 발럼이라는 작잔 돈을 받아들고 교회로 갔는데, 목사가 가난한 사람에게 선심을 쓰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에게 돈을 꿔주는 것이 되어 틀림없이 그 돈의 100배가 되돌아오 게 된다는 말을 들었단 말유. 그래서 이 작잔 10센트를 들고 가서 가난 한 사람에게 주고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나 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나." "그래서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야" "일어나긴 뭐가 일어나. 나두 이젠 그 돈을 회수할 수 없고, 발럼도 어림도 없지. 난 저당물을 보지 않고선 절대로 돈을 꿔주지 않기로 했구먼, 이젠. 목사 말은 돈이 100배가되어서 도로 돌아온다는 거야. 그 10센트만이라도 그대로 돌아온다면 난 이거야말로 공평한 처사라고 생각하고는 운이 참 좋았다고 기뻐할 텐데 말야." "하지만 어쨌든 잘 되었어. 언젠가 또다시 짐은 부자가 되기로 되었다니 ." "허긴 그래.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난 부자야. 난 내 몸은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능히 100달러의 가치는 있으니까. 그 돈이 이제 당장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어, 난." 제9장 떠내려온 죽음의 집 나는 탐험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발견한 섬의 바로 한복판에 있는 장소로 가서 거기를 잘 봐두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떠난 것인데, 이 섬은 길이가 3마일, 넓이가 4분지 1마일밖엔 되지 않았으므로 곧 거기 도착했다. 그 장소는 높이 40피트 가량의 왜 길고 가파른 언덕이라고 할까, 산마루를 이루고 있었다. 사면이 아주 가파른 데다가 덤불이 우거져 있었으므로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퍽 애를 썼다. 우리들은 그 부근을 공연히 빙빙 돌기도 하고 또 오르기도 하여 얼마 후에는 일리노이 쪽에 면한 사면 꼭대기에 채 이르기 전의 바위에 훌륭한 큰 동굴이 하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을 두 개나 세 개쯤 합친 정도의 크기로 짐 은 그 안에서 몸을 꼿꼿이 펴고 설 수 있었다 동굴 안은 서늘했다. 짐 은 단번에 살림 도구를 이곳으로 옮기자고 했지만 나는 밤낮 오르내리게 될 테니 싫다고 반대했다 짐은 카누를 그럴싸한 장소에 감춰 두고, 살림 도구 전부를 이 동굴 속에다가 감춰 둔다면 누가 섬으로 왔을 경우 우리들은 동굴 속으로 피신할 수 있을 것이고, 개를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들킬 염려는 없다고 했다. 게다가 또 그 새들은 비가 올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물건들 이 젖어도 괜찮단 말이야 하며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돌아가 카누를 타고 동굴과 병행되는 지점까지 왔을 때, 물건 전부를 그 동굴로 날랐다 다음 우리가 있는 장소에 아주 가까운 우거진 버드나무 숲 한복판에다 카누를 감출 장소를 발견했다. 낚싯줄에서 물고기 몇 마리를 떼고, 낚시 장치를 다시 먼저대로 해놓은 뒤에 점심 준비에 착수했다. 동굴 입구는 큰 통을 굴려서 넣을 수 있을 만큼 컸으며, 입구 한쪽으로 바닥이 좀 앞으로 나와 그것이 평행했으므로 불을 사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거기서 불을 일으켜 점심 준비를 했다 우리들은 안에다 담요 몇 장을 깔아 융단 대신으로 하고는 그 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밖의 다른 물건들은 동굴 구석에다 쓰기 좋게 정리 해 두었다. 머지않아 어두워지며 천둥소리가 나더니 번갯불이 번쩍번쩍 하기 시작했다 역시 새는 틀림이 없었다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기세가 맹렬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몹시 부는 바람을 나는 아직껏 본 일이 없다. 영락없는 여름의 폭풍우였다. 밖은 모든 것이 청흑색으로 아름답게 보일 만큼 어두워지고, 내리치는 빗발은 저만큼 떨어 진 나무에 어렴풋이 거미줄처럼 보일 만큼 굵었다. 게다가 설상가상격으로 한 가닥의 회오리바람이 마구 불어와 나무를 쓰러뜨리고, 나뭇잎 의 색이 연한 하측을 위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그 뒤를 따라온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거센 찢어발길 듯한 질풍으로, 작은 가지는 완전히 미친 듯이 두 팔을 휘두르며, 다음 이 이상은 푸르게도 꺼멓게도 될 리는 만무할 테지 하고 생각했을 바로 그때 번쩍 하고 후 광이 비치어 그때까지 볼 수 있었던 장소로부터 몇백 야드 저쪽에서 나뭇가지가 저 멀리 먼 폭풍우 속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 것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할 사이도 없이 금세 사방은 어두워지고, 천둥이 한번 크게 터진 후에 지구 저쪽 반대 방향으로 과당과당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빈 통을 이층에서 아래로 굴리는 것만 같았다-계단이 길어서 통이 몇 번씩이나 튀어 오를 때 일어나 는 소리와 같았다고나 할까. "짐 이건 근사한테." 나는 반가웠다 "여기 외엔 아무 데도 있구 싶지 않아, 생선 가운데토막 하나 더하고, 뜨끈한 옥수수 빵을 이리 좀 줘." "그런데 이 짐이 없었더라면 여기 무슨 수로 있지 저 아래 숲속에 있어 가지고 점심은 없을 테고, 게다가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을 게 아냐, 병아린 비가 올 것을 알고 있고, 새도 마찬가지라우." 강은 열흘인가 열 이틀 동안이나 물이 붇고 또 불어 마침내는 둑을 넘고 말았다. 이 섬의 얕은 곳과 일리노이 쪽의 분지에서는 수심이 3,4피트에까지 이르렀다. 일리노이 쪽 강둑까지의 거리는 수 마일이 더 되었지만, 미주리까지의 강폭은 전과 다름이 없는 한 마일 반. 그것은 미주리 쪽의 강둑이 높은 절벽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낮에는 카누를 타고 섬 안을 이러 저리 돌아다녔다. 해가 이글이글 내리쪼여도 깊은 숲속은 여간 시원치 않고 그늘이 많았다. 우 리들은 나무 사이를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덩굴이 몹시 엉킨 채 흘러내리고 있었으므로 뒤로 물러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었다 다 쓰러진 고목마다 토끼와 뱀과 그 밖의 짐승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섬이 하루나 이틀 동안 침수되어 있을 때에는 이놈들 배를 잔뜩 곯리고 있는 터이라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어, 생각만 있으면 곧 근처에까지 카누를 접근시켜 만져볼 수도 있었지만 뱀과 거북만은 어림도 없었다. 물 속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고 말았다. 우리들이 들어 있는 동굴 지붕에는 이런 짐승들로 초만원이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집짐승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근사한 널빤지 몇 장을 건졌다. 넓이 12피트에 길 이 15피트 내지 16피트 정도로 상부가 수면 밖으로 6,7인치 가량 나와 있는 단단하고 평평한 마루용 재목이었다. 낮에도 가끔 켠 나무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낮에는 나타나지 않기로 작정했으니까. 어느 날 아침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우리들이 섬머리에 있으려니까 서쪽으로 목조 건물이 한 채 둥실둥실 떠내려오고 있었다. 이층집인데 한쪽으로 왜 기울어 있었다. 카누를 저어 나가 이층 창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까닭으로 카누를 잡아매 놓고 그 안에 앉아 밝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섬 끝으로 오기 전에 날이 환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창으로부터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침대 하나와 책상과 헌 의자 두 개와 마루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물건으로 벽에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 저쪽 구석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무엇이 드러누워 있었다. 그것을 보고 짐이 소리를 질렀다. "여보" 그러나 그것은 꿈쩍도 안 했다 이번엔 내가 소리를 질러보았다. 그러자 짐이, "저 사람은 자고 있는 게 아냐 죽었어. 가만히 있으라구. 내 가서 보고 올 테니" 하고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구부리고 보더니, 내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건 죽은 사람이야. 그런데다 벌거숭이구먼 등에 관통상을 입었어 죽은 지 2,3일쯤 된 것 같군. 허클, 들어와 보라구. 하지만 얼굴을 봐선 안 돼. 아주 기분이 나빠 " 나는 이 사나이를 전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짐은 헌넝마를 그 사람 얼굴 위에다 던졌지만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나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루 위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채 수북이 쌓여 있는 기를 먹은 트럼프짝과, 위스키병 몇 개와, 또 까만 천으로 만든 마스크 두 개와 벽에는 숯으로 쓴 상스러운 종류의 말과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벽에 걸려 있는 것은 더러운 갱사옷 두 벌과 부인용 밀짚모자와 여자 내의 등이었고 남자 옷도 있었다. 우리들은 그것을 카누에다 실었다. 나중에 무엇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루에 있는 소년용 밀짚모자는 헌 것이 때가 묻어 여기저기 반점을 이루고 있었지만 나는 이것도 가지기로 했다. 또 우유를 넣은 적이 있는 병도 있었는데, 어린이용 헝겊 젖꼭지가 달려 있었다. 우리는 이 병도 가지고 갈까 하고 생각했지만 깨져 있었으므로 그만두었다. 초라한 헌 궤짝과 돌쩌귀가 깨진 헌 트렁크도 하 나 있었다 뚜껑은 열린 채로였지만 값이 있어 보이는 물건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러 가지 물건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들은 이 집 사람들이 아주 급하게 집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물품의 대다수를 끌어낼 수 있는 여유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헌 양철 램프와 손잡이가 없는 식칼과 어느 가게에서든지 25센트 하는 아주 신품인 발로 나이프(날이 한쪽만 붙어 있는 대형 칼. 발로라는 사람이 처음 만들었다) 와 양초, 양철로 만든 촛대와 바가지, 양철 컵, 침대에서 벗긴 쥐가 갉아먹은 헌 이불, 바늘과 핀과 밀랍과 단추와, 그밖에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 있는 손가방과, 도끼 한 자루와 못과 터무니없이 큰 낚시바늘이 몇 개 달려 있는 내 새끼 손가락만큼이나 굵은 낚싯줄과, 무두질을 한 사슴가죽 한 장과, 가죽으로 만든 개 목걸이와 말편자, 상표가 붙어 있지 않는 물약병 몇 개를 찾아내어 마침 나오려고 한 그 순간에 나는 왜 좋은 말빗을 발견하였고, 짐은 쥐가 갉아먹은 헌 바이올린 활과 목제 의족 한 쪽을 발견했다 가죽끈은 끊어져 있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이것은 왜 좋은 다리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좀 길고 짐에게는 좀 짧아 여기저기를 찾아보았지만 또 한쪽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합치면 대체로 우리는 큰 벌이를 한 셈이었다. 이 집을 떠나려고 할 때 우리는 섬에서 4분지 1마일이나 하류에 와 있어, 사방이 왜 훤해 졌으므로 나는 징을 카누 바닥에 눕게 하고는 그 위에 다 이불을 푹 덮었다. 꼿꼿이 앉아 있으면 왜 멀리서도 단번에 검둥이 라는 것을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나는 일리노이 쪽 둑으로 반 마일쯤 떠내려갔다. 강둑 아래 고요히 고여 있는 물을 기어올라 아무 사고도 없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우리들은 안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제10장 뱀껍질을 만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아침 식사를 끝마친 후 나는 죽은 사람 얘기를 꺼내어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그 결과를 캐내고 싶었지만 짐이 응해 주지 않는다. 그런 짓 을 하면 악운이 올지도 모르며, 더욱이 그 사나이가 나타나 그 귀신이 달라붙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직 매장이 되지 않은 사람은 매장되어 편히 쉬고 있는 사람보다는 어쨌든 그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라고 한 다. 이 말은 왜 그럴싸하게 들렸으므로 나는 입을 꾹 다물고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건을 생각하고는 누가 그 사나이를 쏘아 죽였으며, 왜 그런 짓을 했을까를 알고 싶은 마음은 누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옷들을 뒤져서 헌 담요로 만든 외투 안쪽에 은화로8달러를 꿰매 붙여 둔 것을 발견했다. 짐은 그 집사람들은 이 외투를 틀림없이 훔쳤을 것이라고 한다 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냥 그대로 둘 리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나는 외투를 훔쳤을 뿐만 아니라 그 주인마저 죽였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짐은 그것에 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자, 짐은 그걸 악운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저께 지붕 꼭대기에서 발견한 뱀껌질을 내가 가지고 왔을 때 짐은 뭐라고 했지 손으로 뱀껍질을 만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운이 나쁜 짓이라고 그랬겠다. 어때, 이게 짐의 악운이라는 거야 우린 이 물건 전부와 게다가 8달러를 벌지 않았느냐 말이야. 이런 악운이 매일 있으면 참 좋겠구먼 어때 짐." "아예 그런 생각은 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냐. 너무 건방지게 굴지 않는 게 좋아. 이제 곧 올 테니 두고 보라니까. 내 말을 잊지마. 이제 온다니까." 그 말대로 오고야 말았다. 이 얘길 한 것은 화요일이었다 금요일 점심을 끝마친 후에 우리는 지붕 꼭대기 한끝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때 담배가 떨어지고 말았다. 담배를 가지러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 때 동 굴 안에 방울뱀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그놈을 죽여 짐의 담요 한끝에 다 아주 살아 있는 거나 다름없이 둘둘 사린 채로 놔두었다. 짐이 그놈 을 발견하면 재미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밤이 되기 전에 나는 뱀 생각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내가 불을 켜고 있는 동안 짐은 털썩 담요 위에 나자빠졌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와 있던 죽은 뱀의 짝이 짐을 물었던 것이다. 짐은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올랐고, 불빛에 비친 최초의 광경은 독사 가 또 뛰어오를 준비로 몸을 둥글게 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당장에 그놈을 막대기로 내리쳐 죽였으며 짐은 아빠의 위스키 병을 움켜쥐더니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짐은 맨발이어서 독사는 발뒤꿈치를 문 것이 확실했다 어디다 죽은 뱀을 놔두면 그 쪽이 와서 시체 주위에 사리고 앉아 있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깜빡 잊어버린 내 탓이었다. 짐은 뱀 대가리를 쌍둥 잘라서 멀 리 내던지고, 동체에서 껍질을 벗기고는 고기를 한 덩어리 구워 달라 고 했다. 그대로 했더니 짐은 그것을 먹으며, 이렇게 하면 물린 게 낫 는 데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또 독사의 그 소리나는 꼬리를 잘라서 자 기 발목에 감아달라고 했다. 이것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나는 가만히 밖으로 나와 두 마리의 뱀을 멀리 덤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될 수 있으면 짐에게 이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 하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은 계속해서 위스키를 마셨고, 가끔 제정신을 잃고는 갑자기 뛰어오르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마다 또 다시 계속해서 위스키를 마셨다. 물린 쪽 발이 왜 부풀어올랐으며, 다리도 그랬지만 얼마 후에 술의 효능이 돌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이제 상관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나는 아빠의 위스키로 혼이 나는 것보다 뱀에 물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짐은 4주야를 꼬박 잠만 잤다. 그후 부기가 아주 완전히 빠지고, 원기를 회복하여 또다시 돌아다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똑똑히 안 이상 나는 두 번 다시는 뱀껍질을 손으로 만지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짐은 이제부터는 자기를 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자못 우쭐대었다. 그리고 뱀껍질을 만지는 것은 매우 운이 나쁜 일이니까 아직도 언짢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자기라면 뱀껍질 을 손으로 만지기보다는 차라리 초승달을 왼쪽 어깨 너머로 천 번쯤 보는 쪽이 낫겠다고 말했다. 초승달을 왼쪽 어깨 너머로 본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싱겁고도 바보짓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도, 어찌된 셈인지 짐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핸크 번커 할아버지는 한때 이 짓을 하고는 그걸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채 2년도 못 되어 만취가 되어 높은 탑에서 떨어져, 말하자면 백지장처럼 납작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사람들은 번커 할아버지를 관 대신 헛간문 사이에다 겨우 틀어넣어서 그대로 매장해 버렸다고 하는데, 나는 실제로 그걸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아빠가 그 이야기를 해주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초승달을 바보처럼 왼쪽 어깨 너머로 본 데서 일어난 일에는 틀림이 없다 이야기가 바뀌어, 하루하루가 흘러 강은 양 둑 사이를 흐르게 되었으므로 우리들이 한 맨 처음 일 중의 하나는 껍질을 벗긴 토끼를 큰 낚싯줄에다 달아 흘렸더니 길이 6피트 2인치, 무게 200파운드 이상이나 되는 사람 크기 만한 메기를 잡은 일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놈을 다를 수 없었고, 잘못하다간 도리어 이놈이 우리들을 일리노이 쪽 둑에다가 내동댕이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이놈이 제 마음대로 이 리 펄떡 저리 펄떡 하고 날뛰다가 드디어 죽고 마는 꼴을 그저 둑에 앉아서 보고만 있었다. 위 속에는 놋쇠 단추 하나와 둥근 공과 여러 가지잡동사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도끼로 공을 갈라 보았더니 그 속에 서 실감개가 나왔다. 짐은 이 메기가 이것을 오랫동안 위 속에 가지고 있어 이런 모양으로 무엇을 자꾸만 싸고 또 싸서 이렇게 공이 되고 만 것이라고 했다. 미시시피 강에서 잡은 것 중에 가장 큰놈이라고 생각된다. 짐도 이보다 더 큰놈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마을로 가지고 가서 팔면 상당한 액수의 돈이 되었으리라. 마을 시장에서는 이런 물고기를 1파운드 얼마에 팔며, 누구나가 다 얼마큼씩은 고기를 산다. 그 살은 눈처럼 하얗고 기름으로 튀기면 맛이 그만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사는 게 점점 지루하고 따분하니 신나는 일을 하나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강을 건너 그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보러 가고 싶은데 어떻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짐은 그건 좋은 생각이지만 어두워진 후에 가서 단단히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된 다고 대답했다. 다음 그는 한참 궁리한 끝에 무슨 헌옷 같은 것을 입고 여자애 같은 꼴로 갈 수는 없을까 하고 말했다. 그것도 역시 좋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갱사 잠옷 하나를 줄여서 나는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올려 그것을 입었다. 짐이 등뒤를 낚싯바늘로 찍어매니 꽤 잘 어울렸다 나는 밀짚모자를 쓴 후에 턱 아래에다 모자끈을 매었다. 그랬더니 넓은 챙의 여자 모자를 깊숙이 쓰고 있는지라, 남이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연통 이은 곳으로부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격으로 모든 것이 기암절벽일 것이었다. 짐은 이거라면 대낮이라 할지 라도 나를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며 칭찬을 했다. 나는 여자옷 을 입는 요령을 터득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걷는 연습을 하여 얼마 후 에는 왜 선수가 되긴 했지만, 암만해도 걷는 폼이 여자답지 않다고 짐 이 걱정하며, 또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꽃을 때마다 옷자락을 치켜올리는 것만은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걱정이었다. 나는 그 주의를 받아들여 전보다는 훨씬 선수가 되었다. 해가 지자 나는 곧 카누를 타고 일리노이 쪽 둑으로 향했다. 나는 나룻터 조금 아래를 목표로 하여 강을 건넌 것인데 표류되어서 마을 끝에 도착하고 말았다. 카누를 매놓은 다음에 강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집에 불이 켜져 있으므로 누가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되어 나는 몰래 접근하여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40살 정토 된 여인이 널빤지로 만든 테이블 위에 촛불로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하여튼 이 마을에서 내가 모르는 얼굴은 하나도 없으니까, 이 여인은 다른 고장에서 온 여인이 분명했다.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오지 않을 걸 괜히 왔군 내 목소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잔뜩 겁이 나기 시작하던 판이었으니까 이것은 참 다행한 일이었다. 한편 이 여인이 이런 조그마한 마을에 2주일이나 있었다고 하면,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얘기해 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노크를 하고는 내가 여자애라는 것을 잊지 않으리라 결심을 했다. 제11장 우리는 몰리고 있다. "들어와요" 하고 여인이 대답했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앉아" 하고 의자를 가리켰다. . 나는 그 말대로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인은 반짝이는 조그마한 두 눈으로 유심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름이 뭐지 " "사라 월리암즈예요. " "어디에 살고 있어 이 근천가" "아뇨, 7마일 떨어진 하류에 있는 후커빌이에요. 여기까지 쭉 걸어와서 아주 녹초가 됐어요." ' "배도 고프겠구나. 뭘 좀 줄까" "아는, 아주머니, 배는 고프지 않아요. 전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2마일 아래에 있는 어떤 농가에 들렀더랬어요 그래서 이젠 배는 고프지 않아요. 농가에 들렀었기 때문에 이렇게 늦었어요. 우리 엄마가 병으로 누워 있어서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서 앱너 무어 큰아버지에게 알리러 가는 중이에요. 큰아버지는 이 동네 위쪽 동구밖에 살고 있대 요. 난 아직까지 여길 와 본 일이 없어요. 앱너 큰아버질 아세요" "모르겠는데, 허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여기 온 지 2주일도 안 되니까. 위쪽 동구 밖까진 퍽 멀다. 우리집에서 묵고 가는 게 좋겠다. 모자나 좀 벗어 . " "아는, 좋아요. 좀 쉬었다 가야겠어요. 난 어두워도 무섭지 않아요." 여인은 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으며, 자기 남편이 한 시간 반만 있으면 돌아올 테니 남편에게 나를 바래다주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 서 자기 남편 얘기, 상류에 사는 자기 친척 얘기, 하류에 사는 친척 얘 기, 그 전엔 깨가 쏟아질 정도로 재미나게 살았노라는 얘기 어찌된 셈인지 자기들도 모르게 이 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생각해 보니 큰 실수로 그런 짓을 안 할 것을 괜히 했다는 것과, 그밖에 여러 가지 얘기를 연방 지껄였고, 너무 지껄이는 까닭으로 동네 사정을 알러 이 집으로 들어온 것은 내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후회하게 된 것인데, 그래도 좌우간 얘기가 아빠와 살인 얘기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나는 한결 안심이 되어 그대로 지껄이게 내버려두었다. 나와 톰 소여 가 1만 2천 달러를 (그러나 이 아주머니는 2만 달러라고 했다.) 발견한 얘기와, 아빠의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아빠가 얼마나 운이 나쁘고 또 나 도 얼마나 운이 나빴는가를 지껄인 후에, 맨 나중에는 내가 어디서 죽었는가를 얘기했다. 내가 끼여들었다. "누가 그랬죠, 그런 짓을 우리는 후커빌에서 그 얘길 왜 들었지만 누가 허클 핀을 죽였는지는 몰라요." "그야 여기서도 누가 허클을 죽였는지 그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왜 많지. 핀의 아빠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뭐요...... 정말이에요"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핀의 아빠는 자기는 모르지만 하마터면 린칠 당할 뻔했다던데. 그러나 모든 사람들 은 밤이 되기 전에 생각을 바꿔가지고, 짐이라는 도망친 검둥이가 한 수작이라고 판단했다는 거야 " "어째서 또 짐이...... 나는 그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잠자코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계속 지껄였고, 내가 한 마디 끼여든 것에 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검둥인 말이다. 허클 핀이 죽은 바로 그날 밤에 도망쳤다는 거 야. 그래서 지금 현상이 붙어 있지...... 300달러래. 그리고 핀의 아버지도 현상이 붙어 있다는 거구...... 200달러라던가 이봐, 이 작잔 살인사 건이 있은 다음날 아침 마을로 와서 사건 얘길 하고 또 나룻배의 시체 수색대와 함께 행동을 한 것인데, 그후 곧 자취를 감춰 버렸다는구나.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어 보니 그 검둥이도 없어졌더라는 거야.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 밤 10시 이후로는 아무도 그놈을 본 사람은 없다 는 사실도 드러났어.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그 사건을 그놈의 탓으로 돌린 것인데, 다음날 모두가 이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으려니까 핀 의 아버지가 난데없이 나타나 엉엉 울면서 대처 판사에게 가서 일리노이 주 내의 모든 검둥이 놈을 찾을 테니 돈을 내라고 종주먹을 대더라 는 거야. 판사가 얼마간 돈을 주니까 그날 밤으로 이 작잔 만취가 되어 한밤중까지 아주 험상궂게 생긴 낯모르는 딴 고장 녀석 2명과 싸질러 다니더니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는 거란다. 그 이후로는 이 작 잔 꼬리도 보이지 않았으며 마을 사람들도 이 소동이 좀 가라앉을 때 까진 돌아오지 않을 거로 보고 있지, 왜 그런가 하니, 이제 사람들은 모두 핀이 자기 아들을 죽여 놓고 마치 강도가 한 것처럼 보이려고 여러 가지로 꾸며 놓은 소송 사건에 오랜 시간이 걸릴 말썽도 없이 허클 의 돈을 그저 단숨에 먹어치우려고 한 수작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소문에 의하면, 이 작잔 본래 악인이니까 능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음이 있는 놈이라고 하더라 참 간사한 놈이야. 1년 동안만 돌아오지 않으면 만사가 문제없이 될 거야 그놈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댈 수 없게 되고, 그때까진 모든 것이 가라앉아 있을 테니까, 놈은 아주 쉽게 허클의 돈을 자기 수중에 넣고 말 테니." "그렇겠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걸리적거리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 검둥이가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도 없을까요" "천만에, 하나도 없다니. 그놈이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러나 이젠 곧 그 검둥인 체포될 것이고, 협박을 하면 자백할 지도 모르지 " "그렇다면 아직도 검둥일 찾고 있는 거군요" "어머나, 너 숙맥이로구나 300달러라는 돈이 매일같이 누가 주우라 고 그냥 길에 굴러다니고 있다더냐 그 검둥이가 이 근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있어 2, 3일 전에 이웃집에 살고 있는 노인 부부와 얘기하던 끝에 우연히 이 부부가 강 저쪽에 작슨 섬이라고 부르는 그 섬에는 거의 아무도 가본 일이 없다고 하는 얘길 하게 됐어. 누가 그 섬에 살고 있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노부부는 '아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더군 난 그 이상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리저리 궁리를 해봤어. 그날보다 하룬가 이틀 전에 섬머리 근방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본 것이 확실하니까 난 혼잣말을 해봤단 말이야 - 그 검둥인 거기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어쨌든 찾아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그후 연기가 안 보이니까 그게 놀이라고 하면 이젠 없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좌우간 우리 애아버진 조사하러 가기로 했단 - 또 한 사람과 함께. 우리 애아버진 저 상류에 가 있었지만 오늘 돌아왔어 두 시간 전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 얘길 했지 뭐냐."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덜컥 걱정이 되었다. 두 손으로 무엇을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바늘 하나를 집어들어 그것에 실을 베기 시작했다. 사뭇 손이 떨려 잘 꿰지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얘기가 끝났을 때 난 얼굴을 쳐들었다. 그때 내 쪽을 왜 이상한 눈초리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바늘과 실을 아래에다 내려놓고는 재미있는 척해 보였다-사실 재미있기도 했다. "300달러라고 하면 큰돈이군요. 우리 엄마 돈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네요. 그럼 아저씬 오늘 밤 그 섬으로 떠나는 건가요" "아아 그럼. 애아버진 아까 얘기한 사람과 함께 배를 한 척 구하고, 총을 한 자루 덤으로 빌릴 수 있을까 없을까 그걸 알아보러 윗마을로 갔단다. 두 사람은 자정 조금 지나게 될 때 떠나게 될 거야 "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요" "그야 그렇지 검둥이도 이쪽을 잘 볼 수 있을 테구. 그렇지 한밤중이 지나면 놈은 어쩌면 자고 있을 테니까 우리 애 아버지들은 숲속을 살살 걸어다니며 컴컴하면 컴컴할수록 야영 모닥불을 발견해 내기가 쉬운게 아냐. 놈이 그대로 불을 피우고 있다면 말이야." "아 정말 그렇군요." 아주머니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얼마 후에 아주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너 이름이 뭐랬지" "메 메리 월리암즈예요," 암만해도 전에 메리라고는 하지 않은 것만 같았으므로 나는 차마 얼굴을 쳐들 수가 없었다. 암만해도 '사라'라고 한 것만 같아서 나는 어쩐지 추궁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아니 느낌이 들었을 뿐만 아니 라 사실 그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이 아주머니가 좀더 무슨 얘길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점점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 그 여 인이 입을 열었다 "저, 너 처음에 여기 왔을 땐 사라라고 그런 것 같았는데" "네, 그래요. 아주머니, 그랬어요. 사라 메리 월리암즈예요. 사라란 제일 첨 이름이에요. 날 사라라고 부르는 사람도, 메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 "오오, 그렇기도 한가" "그럼요, 아주머니 " 나는 아까보다는 마음이 좀 편해졌지만 어쨌든 이 집에 있고 싶진 않았다. 아직 머리를 쳐들 수가 없었다. 화제를 바꾸어, 아주머니는 살기가 말이 아니라는 것과 가난한 살림 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쥐놈들이 마치 이 집주인인 것처럼 제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닌다는 것과, 그밖에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와 비슷한 얘기를 언제까지나 한 것인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또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쥐 얘긴 정말이었다. 저쪽 구석 구멍에서 쉴새없이 쥐코가 날름거리는 꼴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혼자 있을 때에 는 원이든 쥐에게 던질 물건을 옆에다 항시 놓고 있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지 않으면 쥐가 야단을 하여 쥐 성화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뒤틀어서 그 끝을 마디로 만든 납몽둥이를 나에게 보이며. 대개는 이놈을 멋지게 던져서 맞히는 것인데, 하룬가 이틀 전에 그만 한쪽 팔을 삐고 말아, 이제는 그 전처럼 멋지게 맞힐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찬스를 보아 던진 것인데 그만 과녁을 빗나가 팔만 삐어 '아야' 하고 비명을 올렸다. 그래서 다음 놈은 나에게 해보라고 했다. 나는 이 집 바깥주인이 오기 전에 어서 이 집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조금도 보이진 않았다. 나는 끝이 뒤틀린 납몽둥이를 주워다 구멍에서 남실 코를 내민 농을 향해서 잽싸게 던졌다. 만일 이놈이 코를 내민 장소에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면 상당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여인은 아주 잘 던졌다고 칭찬을 하며 요다음 쥐 는 문제없이 맞힐 거라며 어서 다시 한번 해보라는 눈치였다 그녀는 납덩이를 다시 들고와 그것과 함께 털실 한 뭉치를 들고 오더니 나에 게 좀 도와 달라고 했다 내가 손을 내밀었더니 두 손에다 털실을 걸고 는 자기 얘기와 영감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더니 도중에서 말을 끊었다. "쥐에서 눈을 떼면 안 돼. 납덩일 손이 닿을 수 있는 네 무릎 위에다 놓아두는 게 좋다. "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납덩이를 내 무릎에다 떨어뜨렸으므로 나는 그걸 두 다리를 꼭 오므려 받았으며, 그녀는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에 지나지 않았다. 털실을 집어들더니 곧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자못 즐거운 듯이 말했다. "자, 자, 네 진짜 이름은" "뭐, 뭐요, 아주머니" "네 진짜 이름은 뭐냐 말이야 빌 이냐, 톰이냐, 불이냐 - 그렇잖으면 뭐지 " 나는 나뭇잎처럼 떨었을 것이리라. 뭐라고 해야 좋을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어쨌든 대답만큼은 "아주머니, 나 같은 불쌍한 계집아일 놀려선 안 돼요. 여기 있는 게 귀찮으시다면 난...... "나가겠다는 거지. 안돼. 거기 가만히 있어. 난 네게 해를 끼치려고도 하지 않고 밀고도 안해. 네 비밀을 얘기하렴. 그리고 날 믿어. 비밀을 지킬 테고 게다가 널 도와 줄 테니. 우리 영감도 네가 소원이라면 역시 그렇게 해줄 게다. 넌 아무리 봐도 집을 도망친 떠꺼머리 고용놈이야. 그렇다니까 암만 봐도. 아무것도 아냐. 아무 해도 없어. 넌 학대에 못 이겨 도망치려고 결심한 거야. 불쌍도 해라, 얘야, 난 밀고는 안한다. 자, 무엇이든지 낱낱이 얘기해 봐, 좋은 앤 그래야만 되는 거야." 나는 이 이상 더 연극을 해봐도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아서, 깨끗이 모든 걸 자백할 테니, 아까 한 약속만은 깨뜨려선 안 된다고 지레 다짐을 주었다. 이렇게 다짐을 받고 나서 난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아 법률이 명하는 대로 강으로부터 30마일 떨어진 오지에 사는 어느 구두쇠 농부 영감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간 것인데, 대우가 말이 아니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영감이 이틀 동안 집을 비운 사이를 이용하여 딸의 헌옷을 훔쳐 입고 도망을 쳐 30마일을 사흘이나 걸려서 여기까지 왔으며 밤엔 걷고 낮엔 숨어서 쉬고 그 집에서 가지고 나온 빵과 고기가 든 주머니를 아직도 가지고 있으며, 식량도 며칠은 충분하고 앱너무어 큰아버지가 나를 받아 줄 거라고 믿고 있으므로 이 고센까지 왔노라고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고센이라고, 얘야 여긴 고센이 아니다. 센트 피터즈버그야. 고센은 아직도 9마일이나 상류야. 누가 이 마을이 고셴이라고 너에게 가르쳐 주었단 말이냐" "누군지 오늘 아침 먼동이 틀 무렵에 내가 낮잠을 자러 숲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만난 사람이에요. 길 갈림목이 나오거든 바른쪽으로 가거라 5마일만 더 가면 고센에 다다른다고 그 사람이 그러던데요." "취해 있었나 보구나. 정반대로 가르쳐 주다니 " "아주머니 얘길 듣고 보니 어째 그 사람 꼴이 취한 것 같기도 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젠 떠나야겠어요. 밤이 새기 전에 고센 에 도착하겠지요." "잠깐만 기다려. 뭘 좀 간단한 걸 만들어 줄 테니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여기서 그녀는 먹을 것을 만들어 나에게 주고 나서 말했다 "저 말이다. 누워 있는 암소가 일어설 때 어느 쪽에서부터 일어나 지" "뒤쪽이지 뭐예요, 아주머니." "이끼가 끼는 건 나무 어느 쪽이냐" "북쪽이 에요." "언덕 비탈에서 소가 열 다섯 마리 풀을 뜯고 있다면 그 중 몇 마리가 같은 방향을 향해서 풀을 뜯고 있지" "열 다섯 마리 전부죠, 아주머니." "옮지, 정말 시골서 자란 것 같구나. 어쩌면 또 날 속일 셈이 아닌가 하고 생각이 되어서 한데 네 진짜 이름은" "조지 피터즈예요, 아주머니 " "응, 그래, 조지, 잘 외고 있어, 나가기 전에 알렉산더라고 나에게 말하고 꼬리를 잡히자 조지 알렉산더라고 속이는 그런 수작은 안 하도록 조심해. 그리고 또 그 낡아빠진 갱사옷으로 여자 흉내를 내는 건 제발 그만둬. 남잘 속일 순 있을지 모르지만 여자 흉낸 전혀 돼 있지 않아. 얘야,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할 때에는 실을 움직이지 않고 바늘을 실 쪽으로 갖다대는 게 아냐. 바늘을 움직이지 않고 실을 바늘구멍에 갖다 꿰는 거야. 그리고 또 쥐나 뭐에게 가져다가 쥐 있는 데서 6,7피트 떨어진 곳에다 던져 버리는 거야. 팥을 뻣뻣이 내뻗고 어깨에 회전축이라도 있는 듯이 어깨에서부터 던지는 것은 여자들이 하는 식이고, 팔을 한쪽으로 뻗고 손목과 팔꿈치로 던지는 것은 남자들이 하는 식이란다 그리고 말이다. 뭘 무릎으로 받으려고 할 땐 여자는 두 무릎을 떼는 법이야, 이 도령아, 네가 납덩일 받았을 때처럼 무릎을 갖다 모으진 않아 난 네가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할 때 남자라고 하는 걸 단번에 알아했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걸 생각해 낸 거야 자, 이젠 아저씨 댁에 어서 뛰어가. 사라 메리 월리엄즈 조지 알렉산더 피터즈. 그리고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면 주디스 롭터스 아주머니에게 연락하라구. 이게 내 이름이다. 될 수 있는 데까지는 널 돌보아줄 테니까. 쭉 둑길만을 따라가는 거다. 그리고 다음에 여행을 할 때에는 구두와 양말을 가지고 오도록 해. 둑길은 돌투성이로 고센에 도착할 때의 네 발은 말이 아닐 게다. " 나는 50야드쯤 길을 따라 올라간 후, 다시 뒤로 돌아서 그 집 한참 아래에다 매둔 카누 있는 데까지 다시 걸어갔다. 몸을 싣기가 무섭게 출발했다. 섬의 북단이 보이는 상류까지 멀리 스쳐 올라간 후에 강을 횡단했다. 이젠 사람 눈을 피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밀짚모자를 벗었다. 강 한가운데 에 왔을 때 시계가 치기 시작했으므로 노젓는 것을 멈추고 듣자니까 소리는 물위를 멀리, 그러나 똑똑히 들려왔다. 11시. 섬 북단에 이른 나는 거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나 할 정도였지만.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캠프가 있던 숲속으로 달려가, 높고도 마른 그 곳에 굉장히 큰불을 질렀다.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카누에 몸을 싣기 가 무섭게 1마일 반 하류의 우리들이 현재 있는 장소를 향해 힘껏 노를 저었다. 상륙하자 숲을 뚫고 언덕을 올라 동굴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동굴 속에서는 짐이 땅 위에 나자빠진 채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짐을 깨웠다. "짐, 어서 정신차려 1분도 어물거릴 수 없어. 우린 몰리고 있어" 짐은 아무 말도 묻지도 않고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후의 30분 동안에 일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는가를 능히 알 수 있었다. 30분 후에는 우리는 전재산을 뗏목에 실었고, 뗏목을 감추어 둔 버드나무 물굽이에서 언제 밀어내도 좋을 만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굴의 야영 모닥불부터 끄고, 그후에는 촛불 광선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조심했다. 나는 카누를 둑에서 약간 저어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비록 근처에 배가 있었다 하더라도 눈에 띄지는 않았으리라. 별과 그늘 때문에 비쳐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우리는 뗏목을 둑에서 내어 둑의 그 늘 속을 미끄러지듯 흘러 죽은 듯이 고요한 섬의 말단을 지난 것인데, 둘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제12장 '그대로 내버려두는 게 좋아' 우리들이 마침내 섬 아래까지 왔을 때는 1시 가까운 시간이었음에 틀림없고, 뗏목은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배가 가까이 다가오면 우리는 카누에 바꿔 타고 일리노이 쪽으로 도망칠 작정이었다. 배가 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카누에다 총과 낚싯줄과 먹을 것을 싣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서두르고 있어서 그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나 전부 뗏목에 실은 것은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예의 그 두 사나이가 섬에 온다면 내가 질러놓은 야영 모닥불을 발견하고는 짐이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려 밤새도록 감시를 계속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내가 불을 지른 일이 두 사람을 우롱하지 않았더라도 그건 내탓이 아니다. 나는 되도록이면 저급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곯려 준 것이다. 동쪽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일리노이 쪽 둑에서 크게 굽어든 물굽이에 있는 사주에다 뗏목을 매놓고, 도끼로 미루나무 가지를 쳐서 뗏목 위를 덮어놓았으므로 뗏목은 마치 둑의 그 부분에 함몰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사주라는 것은 미루나무가 써레 이빨 모양으로 우거진 모래톱을 말한다. 미주리 쪽 둑에는 산이, 일리노이 쪽 둑에는 깊은 삼림지대가 있고, 우리가 뗏목을 매둔 수로는 미주리 쪽이었으므로 누구하고 만나리라고 하는 걱정은 통없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숨어서 뗏목과 기선이 미주 리 쪽 둑을 흘러 내려가고, 또 상류를 향하는 기선이 이 강 한가운데서 이 강과 격투를 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짐에게 그 여 인과의 얘기를 전부 털어놓았더니 짐은, 참 머리가 좋은 여자야. 만일 그 여자가 손수 우리들을 추격하기로 했다면 그 여잔 가만히 앉아서 야영 모닥불이나 지켜보고 있을 여자가 아니야. 아니 천만에, 필경 개를 데리고 올 테지 했다. 그래서 나는 왜 그 여자가 주인더러 개를 데리고 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물었다. 짐이 하는 말이, 두 사람이 떠나려고 할 때 그 여자는 정말로 그 일을 생각해 내어 그래서 두 사람은 개를 구하러 윗마을로 가, 그 때문에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마을로부터 16,7마일이나 하류인 이 사주에 와 있을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아니, 정말로 우리 마을로 다시 끌려가 있을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두 사나이가 우리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 그 체포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든 그 것은 상관할 바 아니라고 해주었다 사방이 어둑어둑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미루나무 덤불사이로 얼굴을 내밀고는 강 상류와 하류 쪽을 내다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짐은 뗏목 및쪽의 판자 몇 장을 뜯어서 아늑한 윅왬(아메리카 인디언의 텐트 오막집)을 만들어, 찌는듯이 내리쪼이는 볕과, 비가 오는 날에는 그 속으로 피신을 하기도 하고, 또 물건 을 적시지 않도록 넣어 두기로 했다. 짐은 이 윅왬에다 마루를 깔고, 그것을 뗏목 높이보다도 1피트 이상 높였으므로 살림 도구에 파도가 미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윅왬 한복판에다 높이 5,6인치 가량 의 진흙대를 만들어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그 주위에다 나무틀을 둘렀다 축축한 날씨와 추울 때에는 이 위에서 불을 피우기도 한 것인데, 윅왬이 있는 까닭으로 밖으로 눈에 띌 염려는 전혀 없다 그리고 또 우리는 여분의 노도 몇 개 만들었다. 이것은 다른 노 하나가 물 속에 잠긴 나무나 그밖의 것에 부딪쳐 깨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헌 초롱을 걸어두는 짧은 두 갈래의 막대기도 준비했다. 기선이 내려오는 것이 보일 때에는 반드시 기선에 눌려 깨지고 마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류로 향하는 기선의 경우에는 우리가 횡단수로라고 불리는 특정 장소에 있지 않는 이상 초롱에 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강물의 높이는 아직도 상당히 높아, 반드시 수로를 통할 필요는 없었고, 흐름이 완만한 수역을 찾아서 올랐기 때문이다. 이 두번째날 밤 우리는 시속 4마일 이상의 흐름을 타고 7,8시간 강을 오르내렸다. 우리는 고기를 낚았고, 얘기도 교환했고, 또 때때로 졸음을 쫓기 위해서 헤엄도 쳤다. 벌렁 누워 별을 쳐다보면서 크고도 고요한 강을 떠내려가는 데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엄숙함이 있었고, 커다란 목소리로 지껄일 생각은 통 나지 않았으며, 별로 웃음소리도 내는 일 없이 고작 낮은 소리로 킬킬대는 정도였다. 대체로 날씨는 화창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도, 다음날 밤도, 그 다음날 밤도. 밤마다 우리는 여러 마을 옆을 지났는데, 그 중 어떤 마을은 저 멀리 떨어진 시꺼먼 구릉 비탈에서 반짝이는 한 지점에 지나지 않았으며,집이라곤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닷새되는 날 밤에 우리는 센트 루이스를 통과했는데, 마치 온 세상에 불이 켜져 있는 것만 같았다. 센트 피터즈버그 사람들은 센트 루이스의 인구가 2,3만 명이라고 했지만, 이 고요한 밤 2시에 놀랄 만큼 넓게 퍼진 그 숱한 여러 불빛의 바다를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그 얘길 믿을 수 있었다 이 강 위에서 소리라곤 전혀 들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잠만 자고 있었다. 밤마다 10시경이면 나는 그 어떤 조그만 마을에 몰래 상륙하여, 옥수수 가루와 베이컨과 다른 음식물을 10센트 내지 15센트어치 샀으며, 또 이따끔 닭장에서 자고 있지 않는 닭을 잡아가지고 돌아오는 수도 있었다.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기회 있는 대로 꼭 닭을 훔치라고 말했었다. 그것은 내 자신은 닭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걸 원하는 사람은 삘새가 없을 터이니 선행이라는 건 늘 잊혀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빠 자신이 닭을 싫어한 걸 한 번도 본 일은 없는데, 어쨌든 아빠는 늘 그런 소리를 했다. 해가 뜨기 전 이른 아침에 나는 여러 번 옥수수밭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수박이나 참외 호박 싱싱한 옥수수 등을 차용하기로 했다 아빠는 언제나 돈을 갚을 작정으로 있다면 무엇이든 차용해도 상관할 것 없다고 했지만 과부댁은 차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도둑질을 합리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니 점잖은 사람이라면 할 짓이 못 된다고 했다. 짐은 과부댁의 말도 옳고 또 아빠의 말도 옳으니까 표를 만들어서 그중에서 둘인가 셋쯤 뽑아서 그건 다시는 차용하지 않기로 하는 게 제일 좋고, 다른 것은 차용해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캔털루프 (참외의 일종)를 그만둘 것인가, 참외를 그만둘 것인가, 이 중에서 무엇을 그만둘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새벽 무렵에 이르러 우리는 의논이 만족스럽게 결말이 지어져 야생 능금과 감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진 어쩐지 마음이 꺼림칙했었는데, 결정을 짓고 보니 마음이 거뜬해졌다. 야생 능금은 언제나 맛이 좋지 못했고, 감은 익으려면 아직도 2,3개월은 더 걸려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는 가끔 아침에 지나치게 일찍 일어났거나 저녁 때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은 물새를 쏘았다. 통틀어 말해서 우리는 왜 호화로운 생활을 한 셈이었다. 센트 루이스 하류에서 닷새되는 날 밤 한밤중이 지났을 때 큰 폭풍우가 일고 무서운 천둥과 번갯불이 번쩍번쩍 야단을 치더니, 비가 마치 폭포수 모양으로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우리는 윅왬 속으로 들어가 모든 걸 뗏목에 내맡겼다. 번갯불이 번쩍 비치자 눈앞에는 크고도 기둥 같은 똑바른 강이, 그리고 양쪽으로는 천야만야한 바위 절벽이 보였다. 얼마 후에 나는, "어이, 짐! 저걸 좀 봐!" 하고 짐을 불렀다. 바위에 부딪쳐 부서진 기선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향해서 똑바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번갯불 덕택으로 여간 똑똑히 보이는 게 아니었다. 기선은 상갑판 일부가 수면 위로 삐죽 나와 있고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고, 연통의 받침 쇠줄은 가는 것까지도 낱낱이 보였으며, 큰 종 옆에 놓인 의자 등에 소프트 모자가 하나 걸려 있는 것까지도 번쩍 번개가 칠 때마다 보였다. 그런데 밤이 늦기도 하고, 폭풍우이기도 하고, 또 모든 것이 신비적이기도 하였으므로 강 한복판에 이처럼 슬프고도 외롭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기선을 본 나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다 틀림없이 느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진 것이었다 즉 그 기선 위로 올라가 이리저리 걸으면서 무엇이 있나 조사해 보았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짐에게 "짐, 저 배에 올라갈까." 하고 물었다. 짐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난 난파선 같은 델 가서 맥없이 돌아다니긴 싫어 우리는 뭐 하나 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으니까 성경에도 있듯이 족함을 족하다고 알지어다가 제일 좋아, 어쩌면 그 난파선엔 망꾼이 있을지도 모르지," "망꾼이라고, 바보 소리 마. 상갑판실과 조타실 외에는 망볼 거라곤 아무것도 없잖아. 언제 깨져 떠내려 갈지도 모르는 상갑판실과 조타실을 위해서 이런 밤중에 목숨을 내걸 사람이 있을 줄 알아." 짐은 이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또 숫제 대답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말이야"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선장실에서 그 무슨 가치있는 물건을 빌려올 수 있을수도 모르잖아 시거쯤은 문제없어. 한개에 5센트 하는 놈은 말야, 기선 선장은 부자일 게 뻔하지 않아. 60달러나 되는 월급을 받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그러니까 갖고 싶은 물건은 무엇이든 얼마든지 상관할 것 없이 돈을 내고 사는 거야, 알았어. 어서 주머니에 초를 하나 넣어, 짐. 저 난파선을 한번 뒤져보지 않고선 내 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아. 짐은 톰 소여가 이걸 그냥 내버려둘 줄 알아. 천만에, 흥, 내버려두긴. 톰은 이걸 모험이라고 부르고 - 그럼, 모험이라고 부르고 말고, 비록 목숨을 거는 일이 있더라도 이 배에 오르고 말 거야, 꼭. 그리고 신이 나게 해치울 거야. 막 뻐기며, 안하는 것이 없을 거야, 마치 천국을 발견해 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이랬었겠지 하고 생각될 만큼. 톰 소여가 여기 있으면 얼마나 좋아." 짐은 처음에는 툴툴 불평을 늘어놓았으나 찬성하고 말았다. 우리는 필요한 얘기 외에는 하지 말 것이며, 한다 해도 아주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하자고 했다. 때마침 이때 번갯불이 난파선을 비추었으므로 우현 데틱크로 달려들어 날쌔게 뗏목을 잡아매었다. 갑판의 이 부분은 수면 위로 높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어둠 속을 상갑판실로 향해 경사진 왼쪽 현을 발소리를 죽여 걸어갔으며, 발로 찬찬히 뒤지며 두 손을 뻗쳐 더듬으며 받침쇠줄을 피했다 아주 컴컴해서 받침쇠줄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선창 앞쪽 끝에 이르러 기어올라갔다 다음 한 걸음 내딛자 우리는 선장실 입구에 서게 되었는데, 이게 열려 있고, 놀랍게도 상갑판실 저쪽에 등불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것과 동시에 저쪽에서 낮은 얘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짐은 웬일인지 아주 기분이 나빠졌다고 하며 돌 아가자고 속삭였다. 나는 그러자고 하고는 뗏목 있는 데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때 누가 통곡을 하며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제발 그것만은 그만둬 줘, 자네들. 절대로 누설하진 않을 테니까" 다른 왜 큰 목소리가 말을 받았다. "이새끼, 또 거짓말이야? 그런 네 수작이 이번 한 번만인 줄 알아. 넌 언제나 약탈품의 자기 몫 이상을 내라고 하고는 반드시 그걸 손안에 넣었거든 내지 않으면 다른 놈들에게 누설하겠다고 공갈을 치고는. 허나 이번만큼은 좀 지나친 소릴 했지, 네놈은. 네놈처럼 인간이 천하고 믿을 수 없는 놈은 이 나라엔 또다시 없을 거야." 그 동안에 짐은 뗏목 있는 데에 가 있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슴이 들끓으며, 톰 소여라면 여기서 꽁무닐 빼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도 꽁무닐 뺄 순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알아내 고야 말겠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래서 나는 좁은 통로에 네 발로 엎드려, 상갑판실의 횡단 낭하 사이에 객실이 하나밖에 없는 곳까지 어둠 속을 고물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자 그곳 마루 위에 수족이 결박된 사나이 하나가 쓰러져 있고, 그 옆에 두 사나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하나는 흐릿한 초롱을 들고 있고, 다른 하나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권총을 마루에 있는 사나이의 머리에서 떼지 않으며 이렇게 을러대고 있었다. "이놈을 그저 한방! 정말 그래줘야 해. 사람 같지 않은 놈 같으니라구!" 마루에 쓰러져 있는 사나이는 잔뜩 위축되어 이렇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아아, 빌,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죽어도 누설하지 않을 테니." 이 사나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초롱을 들고 있는 사나이는 비실비실 웃으며, "아, 그야 넌 누설하지 않을 테지! 이 이상으로 참말을 말해 본 적이라곤 없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뭐야, 그 애원하는 꼴은. 하지만 우리가 이놈을 이겨내어 결박하지 않았다면 우리 둘은 문제없이 저놈 총에 얻어맞고 죽었을 게 아냐. 뭣 때문이지. 뭣 때문이야. 우리가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지 - 다만 그뿐이야. 한데 이봐, 짐 터너, 넌 이젠 아무도 위협할 생각은 없겠지. 어이 빌 그 권총을 집어치워 ." 그러나 빌은, "천만에, 제이크 팩카드. 난 이놈을 죽여 버릴 작정이야. 그리고 이놈은 아주 똑같은 방법으로 햇필드 노인을 죽인 게 아니냐 말야. 보복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냐 말야" 하고 지지 않았다. "하지만 말일세, 난 이놈을 죽이고 싶진 않아. 그만한 이유가 있지," "그런 말을 해주니 자낸 축복을 받을 거야, 제이크 팩카드! 자네 은혜는 일생을 두고 잊어 버리지 않을 테야." 얼른 윗쪽 객실로 기어들어갔다. 팩카드는 어둠 속을 손더듬으로 와서 내가 있는 객실까지 왔을 때, "여기야, 이리 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팩카드가, 그리고 빌이 들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나는 진퇴양난의 경지에 몰리게 되어, 온 것을 후회하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거기 서서 손을 침대 선반에다 걸치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시고 있는 위스키 냄새로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위스키를 마실 줄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마음놓고 숨을 쉴 수 없었으므로 언제까지 거기 몰려 처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몹시 겁이 났다 그리고 또 사람이라는 것은 숨을 쉬며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았다. 빌은 터너를 죽이고 싶어했다. 빌은 이런 말을 했다. "놈은 밀고하겠다고 했고, 사실 그 말대로 밀고할 거야. 이렇게 되고만 이제 우리 두 사람의 몫을 그놈에게 주겠다고 해본댔자 이렇게 싸움을 하고도 이렇게 우리들이 놈에게 혼을 내준 후니 아무 소용도 없을 거야, 놈이 우리들에게 불리한 증인이 될 것은 뻔해 어때, 내 말 좀 들어봐. 그놈을 깨끗이 없애 버려 귀찮은 문제를 제거해 버리자는 거야, 내 말은" "나도 동감이야." 팩카드는 아주 나직이 말했다. "아니 뭐야 싱겁게 임잔 그런 생각이 아니려니 하고 내가 생각한 참인데, 그럼 이걸로 됐어. 자, 치워 버리세 " "잠깐만 아직 내 말은 끝난 게 아냐. 잘 들어봐. 쏘는 것도 좋지만 꼭 해야만 하겠다면 좀더 조용한 방법이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이거야. 만약 위험을 불러일으킬 것도 없이, 더군다나 같은 정도로 멋지게 목적을 달성할 방법만 있다면 목매달아 죽일 밧줄을 손수 찾아 다니는 건 그리 영리한 방법이 아니거든. 어때, 그렇잖아 이 사람" "그야 그렇지.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대관절 어떻게 하자는 거지, 임자 생각은?" "음, 내 생각은 결국 이래, 좀더 객실을 살펴보고 거기 남은 물건을 모아 둑으로 가지고 가서 그걸 감춘단 말이야. 그리고 기다리자는 거야. 채 두 시간도 못 가서 이 난파선은 산산조각이 나 하류로 떠내려 갈 게 뻔하지 않아. 알겠나? 놈은 쇠절구나 마찬가지지 뭐야. 그렇게 되는 것도 자승자박이지 뭐야. 내 생각은 말일세. 놈을 죽여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이게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말이야. 되도록이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반대야. 분별이 없는 양심적이 아닌 얘기야. 어때 내 말이 옳지?" "응, 그럴 것 같애 한데 말이야, 배가 산산조각으로 떠내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어쨌든 두 시간쯤 기다렸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면 되잖아. 그것도 못 기다려." "그럼 됐어 가세." 여기서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나는 온몸이 식은땀 투성이가 되어 얼른 그곳을 피해 이물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거긴 마치 먹물을 깔은 듯 기암절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목쉰 소리로 속삭였다. "짐" 그러자 내 팔꿈치 바로 옆에서 짐이 신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짐 꾸물거리거나 신음하고 있을 새가 없어 사람 백정놈들이 저기 있어. 그놈들의 보트를 찾아내어 놈들이 이 난파선에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떠내려보내지 않으면 그 중 한 놈이 야단나게 돼. 그러나 놈들의 보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린 놈들 전체를 혼나게 할 수 있단 말야 - 군 치안관이 체포할 테니까 말이야. 어서 - 빨리 해. 자, 난 왼쪽 현을 찾아볼 테니, 짐은 오른쪽 현을 찾아봐. 뗏목 있는 데서부터 시작해, 그리고...... "아아, 하느님 맙소사! 뗏목이라고! 뗏목 그림자도 없는데. 밧줄이 끊어져서 떠내려갔어! 우릴 여기 남겨놓고." 제13장 월터 스콧트 호로부터의 공정한 약탈품 나는 숨이 막히며 그만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저런 갱놈들과 함께 난파선에 감금되는 신세가 되고 말다니!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그 보트를 찾아내어 우리가 당장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들부들 떨면서 오른쪽 현을 따라 걸어갔는데, 고물까지 이르는 데 일주일이나 걸린 것만 같았다. 보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짐은 이 이상 더는 걸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서워서 그만 힘이 빠져 버렸다고 꼼짝도 안했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차려야지, 만일 이 난파선에 그대로 남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 날 거라고 경고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엉금엉금기기 시작했다. 상갑판실 끝을 목표로 하여 기어가 그것이 눈에 띄었으므로, 그후로는 천창 위를 들창에서 들창을 따라 매달리면서 앞으로 나갔다. 천창끝이 침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횡단 낭하의 문 바로 옆에까지 왔을 때 과연 거기 스키프가 있었다! 희미하게 그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만큼 고마웠다. 다음 순간 내가 스키프에 몸을 실으려고 했을 때, 마침 문이 열리며 사나이 하나가 내가 있는 데서부터 불과 2피트 거리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었으므로 나는 이젠 모든 것이 그만이로구나 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또다시 머리를 움츠리고는, "그 빌어먹을 초롱을 보이지 않게 감춰 두지 못해" 하고 이쪽 사나이에게 쏘아붙였다. 이 사나이는 무엇이 든 주머니를 보트에 던지고는 다음에 자기도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팩 카드였다. 이번엔 빌이 나와 보트에 올라탔다. 팩카드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준비 완료 - 내밀어" 나는 녹초가 되어 들창문에 매달려 있기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이때 빌이 말했다. "잠깐만, 그놈 몸을 뒤져 보았던가" "아니 , 자넨" "아니, 저런, 그럼 그놈은 자기 몫의 현금을 아직 가지고 있겠구먼." "음, 그래. 그럼 따라와. 쓸데없는 물건만 가져가고 돈을 놔두고 가서야 되나." "한데 말일세, 그놈 우리가 뭘 하려는지 그걸 의심하지 않을까" "의심 안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린 어쨌든 돈을 손안에 넣어야만해. 자, 가세." 문은 기운 쪽에 달려 있었으므로 꽈당 하고 닫혔다. 다음 순간 나는 순식간에 보트에 올라탔고, 짐이 내 뒤를 따라 굴러들어왔다. 나는 칼을 꺼내 밧줄을 잘랐으며 우리는 순식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노에 손을 대지도 않았으며, 입을 떼지도 않았을 뿐더러 속삭이지도 않았고, 아니 거의 숨까지도 죽이고 있었다. 스키프는 죽은 듯이 고요히 미끄러져 떠내려가 외를 덮개 끝을 지나 다음에는 고물 옆을 빠져 그러고 나서 1,2초 후에는 난파선 하류 100야드 거리에까지 내려와 있어, 그때 암흑은 이 배 전체를 삼키고 있었으므로 이젠 살았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400여 야드쯤 하류에 왔을 때 상갑판실의 문에서 초롱이 잠시 조그마한 불꽃처럼 반짝하는 것이 보였다. 이것으로 우리는 악한들이 보트가 없어진 것을 깨닫고. 이젠 자기들도 짐 터너와 똑같은 운명에 빠진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 얼마 후에 짐은 노를 집어들고 우리는 뗏목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비로소 나는 그 세 사람의 일이 걱정되었다. 지금까진 그런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사람을 죽인 범인이라 할지라도 그런 운명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난들 앞으로 언제 어느 때 살인을 할지도 모르고, 만일 저런 경우에 빠지게 되면 대관절 기분이 어떨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짐에게 말했다. "맨 처음 불빛이 보이거든 거기서부터 100야드 상류나 혹은 하류에다 너와 보트를 안심하고 감출 수 있는 장소에 오르기로 해. 그 다음 난 무슨 얘길 꾸며내 누가 그 악당놈들을 구해내게 해가지고는 적당한 시기에 놈들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해야겠어." 그러나 이 생각은 실패였다. 왜냐하면 또다시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고, 아까보다도 심했다. 불빛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불빛을 찾으며 또 우리의 뗏목을 찾으며 강을 맹렬한 기세로 내려갔다. 한참만에 비는 그쳤지만 구름은 걷히지 않았고, 번갯불은 계속 번쩍거렸다 얼마 후에 번갯불이 번쩍하는 바람에 저만큼 앞에서 무엇인가 커다란 것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그것을 목표로 하여 그쪽으로 보트를 몰았다. 그것은 우리 뗏목이었다. 또다시 뗏목에 오를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이때 훨씬 하류 오른쪽 둑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가보겠노라고 했다. 스키프는 그 악당놈들이 난파선에서 훔친 약탈품으로 절반이나 찼다. 우리는 그것을 뗏목으로 옮겨 싣고. 짐에게 그냥 그대로 내려가 2마일쯤 간 후 초롱에 불을 붙여 놓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끄지 말고 그대로 놔두라고 당부를 하고는 노를 집어들고 불빛을 목표로 젓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접근해 가자니까 언덕 중턱에 불빛이 서너 개 보였다. 마을이었다. 나는 강둑 불빛 위지점으로 배를 저어 놓고 노에서 손을 떼고는 흐르는 대로 내맡겼다. 그 옆을 지날 때 보니 그것은 대형 나룻배의 이물 깃대에 매달려 있는 초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시인은 어디서 자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빙 돌고 있자니까 금세 나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다 처박고 이물의 큰 밧줄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고 있는 감시인을 발견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서너 번 가볍게 두들기고 나서 울기 시작했다 감시인은 깜짝 놀란 모양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게 나라는 것을 깨닫자 큰 하품을 하고 기지개부터 켜고 나서 말했다 "어이 웬일이야? 울지마, 얘야, 무슨 일이 생겼니" "아빠와 엄마와 누나와 그리고...... 여기서 나는 울음보를 와 하고 터뜨렸다. "아니, 이건 어찌된 셈이냐. 그렇게 우는 게 아냐. 사람이란 건 누구나 다 어려운 일에 부딪치는 것인데, 네가 겪은 일도 이제 곧 잘 될 거 야. 아빠와 엄마가 어찌 됐다구" "우리 부모는...... 우리 부모는...... 아저씬 이 배의 감시인인가요" "그렇다." 그는 꽤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난 선장이기도 하고. 선주이기도 하고, 기관사이기도 하고, 수로 안내인이기도 하고, 감시인이기도 하고, 또 갑판 수부장이기도 하지. 때론 화물과 승객이 되는 때도 있고, 난 짐 혼백 노인처럼 부자는 아니니까, 그 영감처럼 그렇게 아무에게나 인심을 쓰거나 돈을 물처럼 뿌릴 순 없어 하지만 당신과 신분을 바꿀 생각은 영 없다고 그 늙은이에게 몇 번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난 말하지만 뱃사공 생활이야말로 내 생활이지. 마을에서 2마일 떨어진 곳 - 짐 영감의 큰 재산과 그 두 배를 준다고 해도 -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살 것 같은가 천만에, 난 말이야...... "모두가 이제 죽을 지경이에요" 하고 내가 그 말을 막아 버렸다. "누가 말이냐" "누구냐구, 아빠와 엄마와 누나와 미스 후커가 말이에요. 아저씨가 이 나룻배를 가지고 거기까지 가주신다면...... "어디루 말이냐? 모두 어디 있는데" "난파선 말이 에요." "어느 난파선인데" "아니, 난파선이 또 어디 있어요. 하나밖에" "뭐 설마 월터 스콧트 호는 아닐 테지" "그거예요" "이거 큰일났구나 아니 거기서 대관절 뭘 하고 있어" "무슨 목적이 있어 간 게 아니예요."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이거 큰일났구나. 어서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그 밴 영 못쓰게 되고 말겠구나. 한데 하필 또 왜 그런 운명에 빠졌다는 거냐" "아무것도 아녜요. 미스 후커가 상류에 있는 그 마을로 온 거예요 "옳지, 그럼 부스라는 나루터구나. 그래서" "미스 후커는 부스 나루터에 와 있었는데, 저녁녘에 친구 누구라더라 - 아이크, 이름을 그만 잊어 버렸지만 - 그 사람 집에서 그날 밤을 묵으려고 생각하고는 니그로 식모와 함께 말이 끄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한 거예요. 그랬는데 그만 조타용 노를 잃고 말아, 배는 빙빙 돌다가 고물을 앞으로 하고 2마일이나 표류한 끝에 난파선에 부딪쳐 그만 그 위로 솟구쳐 올라가고 말았는데, 사공이니 니그로 식모니 말이니 할것없이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미스 후커 하나만은 무엇을 붙잡고 난파선 위로 기어올라간 거예요. 해가 진 후 한 시간쯤 해서 우리가 장사배로 내려왔는데, 너무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해서 순식간에 난파선에 부딪쳐 솟아오르고 말았어요. 우리는 모두 살았지만 빌 휩풀 하나만은 - 아아, 그렇게 좋은 놈은 없었는데! - 차라리 내가 물귀신이 되었으면 좋았을걸, 정말." "거, 큰일이군 듣던 중 큰일이구나.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했지, 너희들은" "그래서 우린 사람 살리라고 소릴 지르고 막 떠들어댔지만, 워낙 강폭이 넓어서 누구에게 알릴 수 있어야죠. 그래서 아빠가 누가 한 사람 육지로 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을 청해야겠다고 했어요, 헤엄을 칠줄 아는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었으므로 난 단단히 결심하고 온 거예요. 미스 후커는 만일 곧 구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이리로 와서 자기 아저씰 찾아라, 그러면 아저씨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거예요. 난 1마일쯤 하류에서 육지로 올라 그때부터 쭉 누구에게 어떻게 좀 부탁해 보려고 생각하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모두 다 '뭐라고, 이런 밤에, 이런 물살에 그런 지각 없는 소린 그만둬. 증기선 나룻배를 찾아봐' 하더군요. 그러니 이제 아저씨가 좀 가주셔서...... "그야 물론 가주고말구, 꼭 가주겠지만 대관절 그 돈은 누가 치른다 네 아버지는...... "아아, 걱정 말아요. 그건 미스 후커가 나에게 다짐까지 하며 말한 건데 혼백 아저씨가...... "뭐, 혼백이 바로 그애 아저씨란 말이야 이봐, 너 거기 불빛이 보이지 거기까지 뛰어간 다음 서쪽으로 구부러져 4분지 1마일만 가면 선술집이 있을 테니, 거기 있는 사람더러 짐 혼백네 집을 가르쳐 달라고 그래. 그리고 또 짐이 삯을 치른다고 그러고. 도중에서 놀면 안 돼. 어서 이 소식을 짐에게 알려야 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말도 전해라. 그 사람이 마을에 이르기 전에 문제없이 조카따님을 무사히 건져 내겠다고, 내가 그러더라고. 자, 빨리 기운을 내고, 난 이 모퉁일 돌아 기관사를 깨워가지고 올 테니." 나는 불빛 있는 데를 향해 달렸지만 이 사나이가 모퉁이를 돌기가 무섭게 다시 돌아와 스키프에 올라타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낸 다음, 한 600야드쯤 물살이 빠르지 않는 강가의 흐름을 상류 쪽으로 저어 올라 재목배 사이에 숨어 버렸다. 나룻배가 떠나는 것을 볼 때까진 안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걸 통틀어 그 악당놈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수고를 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과부댁이 이걸 알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내가 이러한 악당들을 살려낸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할 테지. 과부댁과 그밖의 선인들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악당들과 게으름뱅이놈들이니까. 그런데 얼마 후에 난파선이 희미하고도 어두운 장막에 싸여 떠내려 오는 것이 아닌가 오싹하고 오한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난파선을 향해 저어갔다. 왜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까닭으로 이래가지고는 안에 사람이 살아 남을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걸 곧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주위를 뎅빙 돌면서, '여보 여보' 하고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대답은 없고, 모든 것이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그 악당들로 해서 기분이 무거웠지만 대단치는 않았다. 놈들이 그걸 참을 수 있다면 나도 참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룻배가 왔다. 그래서 나는 긴 사류를 타고서 강 한가운데로 나와, 이젠 보이지 않을 테지 하고 생각될 장소에까지 오자 노질을 그만두고는 뒤돌아보았다. 나룻배가 미스 후커의 시체를 찾아서 난파선 주위를 빙빙 돌면서 냄새를 맡고 있었다. 선장은 백부인 혼백이 시체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나룻배는 단념하고는 둑 쪽으로 향했으므로 나는 또다시 젓기 시작하여 곧장 강을 내려갔다. 짐이 켜놓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까지 지독히 오랜 시간이 걸린것만 같았다 보이긴 해도 1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겨우 도착했을 때에는 동쪽 하늘이 다소 회색으로 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어떤 섬으로 향하고, 뗏목을 감추고, 스키프에는 물을 넣어 가라앉게 하고는 잠자리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마치 죽은 사람처럼 푹 잠이 들었다. 제14장 솔로몬 왕은 지혜로운 사람인가? 얼마 후에 일어난 우리는 그 악당들이 난파선에서 훔쳐낸 물건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다. 장화, 담요, 의류 그밖의 여러 가지 물건과 또 많은 책과 소형 망원경 한 개, 여송연이 세 상자가 나왔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이렇게 부자가 되어 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송연은 최고품이었다. 우리는 오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숲속에서 얘기나 하고 쉬었으며, 나는 책을 읽기도 하면서 아주 즐겁게 보냈다. 나는 그 난파선에서 겪은 일과 나룻배 얘기를 들려주며, 이런 종류의 일이야말로 모험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짐은 모험은 딱 질색이라며 머리를 흔들었다 짐이 하는 말이 임자가 상갑판실로 들어가고, 나는 뗏목을 타려고 엉금엉금 기어서 뒤로 선 것인데, 와 보니 뗏목은 어디론가 가고 꼭 죽을 것만 같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젠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으며, 누가 건져주지 않으면 빠져죽고 말 게고, 건져주면 건져준 사람이 상금을 타려고 날 왓슨 아주머니 댁으로 보낼 게 아니냐 말이야. 그러면 왓슨 아주머니는 날 남부로 팔아 버릴 게 뻔하지 뭐야, 정말 그 말이 옳았다. 짐이 하는 말은 대체로 늘 옳았다. 짐은 검둥이치고는 머리가 뛰어났다 나는 짐에게 임금이니 공작이니 백작이니 또는 그밖의 것에 관해, 또는 이 무리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성장을 하고 있고, 거만을 떨며, 서로를 미스터라고 부르지 않고 폐하니 각하니 대감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왜 상세히 읽어 주었다. 그랬더니 짐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며 재미있어 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 난 몰랐군. 솔로몬 왕은 예외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람 얘길 들은 적이 별로 없어 난. 트럼프 짝에 나오는 임금님까지 그 안에 넣지 않는다면 말야. 임금님은 월급을 얼마나 타는 걸까?" "월급이라고? 원한다면 한 달에 1천 달러라도 타겠지 얼마든지 타고 싶은 대로 타겠지. 무엇이든지 다 자기 거니까." "근사하군 그럼 허클, 무슨 일을 하는데 그래,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별로 하는 게 없어. 그것도 몰라!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거야." "아니 , 정 말이야." "정말이구말구 그냥 앉아만 있을 뿐이라니까. 하기야 전쟁이 있을 때엔 그렇지 않지만 그땐 전쟁에 나가는 거야. 그 외에는 매사냥이나 하구 - 그저 매사냥이나 하거나 침이나 뱉구 - 쉿,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어" 우리는 벌떡 일어나 가보았지만 그것은 하류 저 멀리서 곶을 돌아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기선의 타륜 소리였기 때문에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을 때에는 임금 님은 국회에 가서 소동을 일으키며,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의 모가질 쌍둥 잘라 버리는 거야. 하지만 대개는 임금님은 늘 후궁 근방을 배회하는 거야." "어디라구" "후궁 말이야" "후궁이 란 뭔데" "마누라를 두는 데지 뭐야. 짐, 너는 아직 후궁이 뭔지 몰라. 솔로몬 왕도 하나 있었는데, 마누라가 백만 명이나 있었어." "아 정말 그랬었지...... 난 깜빡 잊었었군 후궁이란 기숙사렷다. 애들 방은 말이 아닐 테지, 그 시끄러운 것은 게다가 또 여자들끼리니까 말다툼을 하느라고 그 소란한 건 대단할 거구. 그러면서도 솔로몬 왕은 세상에서 가장 어진 임금이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난 암만해도 믿어지지 않아 왜 그러냐고 어진 양반이 그런 소란통 속에서 어떻게 배길 수가 있었겠느냐 말이야? 어림도 없는 소리지. 어진 사람이라면 백만의 후궁을 두기보다는 차라리 보일러 공장을 세우는 편이 훨씬 나을거야. 그러면 쉬고 싶을 때엔 보일러 공장의 문을 닫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솔로몬 왕은 틀림없이 가장 어진 사람이었을 거야. 과부댁이 자기 입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으니까." "난 과부댁이 무슨 말을 했건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천만에, 어질긴 그 임금님이 어디가 어질어.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사람을 난 본 적이 없어 이봐, 그 임금님이 둘로 쌍등 잘라 버리려고 한 애 얘길 알고 있어" "알구말구, 과부댁한테서 모두 들었는데." "그렇다면 말이야,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가 세상에 또 어디 있어? 많이두 말고 조금만 생각해 보란 말이야. 저봐, 저기 나무 그루터기가 있잖아. 저게 그런 여자의 하나라고 치잔 말이야. 여기 임자가 있구, 임잘 여자라구 치구. 난 솔로몬이야. 이 1달러짜린 여자애구. 임자들 둘이 어린애를 자기 어린애라고 다툰단 말이야. 난 어떻게 하면 좋지. 난 말이야 그 근처를 뛰어다니면서 그 1달러짜리가 임자들 둘 중에서 누구의 것인가를 캐어물어 틀림없이 그 주인공을 찾아서 준단 말이야. 이거야말루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뻔한 짓이지 뭐야. 그렇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 난 달라 그 1달러짜리를 둘로 잘라가지고 그 절반을 임자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또 한 여자에게 준단 말이야 솔로몬도 어린애를 그렇게 하려고 했단 말이야. 한데 임자에게 잠깐 묻겠는데, 그 절반짜리가 무슨 소용에 닿지 아무것도 살 수 없을게 아냐 그렇다면 어린애 그 절반짜리가 무슨 소용에 닿겠느냐 말이야 그런 거 백만이 있어도 소용없어." "하지만 짐, 너의 말은 전혀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천 마일이나 어긋나 있어" "누가. 내가 말이야. 천만에. 얼토당토않다고 하는 건 이 날 보고 할 소리가 아냐, 이래뵈도 분별 정도는 알고 있는 나라구. 그 솔로몬이 하는 식은 분별이 있는 사람이 하는 짓은 아냐. 요는 절반짜리 애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완전한 애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지. 완전한 애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를 절반짜리 어린애로 처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진작 비가 와도 비 하나 비킬 만한 분별도 못하는 위인이지 뭐야 내겐 솔로몬 얘기 같은 건 아예 꺼내지도 말아줘, 허클. 난 그 사람에 대해서 뭐든지 아니까" "그러니까 짐은 요점을 모르고 있다는 거야." "요점이 다 배꼽을 쥐고 웃겠다. 내가 아는 건 아는 거야. 이봐, 정말 요점은 좀더 멀리, 좀더 깊게 있는 거라구. 그건 솔로몬이 자라난 품에 관계가 있어. 그저 자식이 하나 둘밖에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란 말이야. 이 사람은 자식을 함부로 하겠느냐 말이야? 물론 못하지. 할수 없구말구. 애 중한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한데 집안에 새끼가 500만이나 뛰어돌아다니는 사람의 경우는 전혀 얘기가 달라지거든. 이런 작잔 애들을 고양이처럼 문제없이 둘로 쌍둥쌍둥 잘라 버린다는 말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 애새끼 하나 둘쯤은 솔로몬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야." 이런 검둥이는 난생 처음이다. 한번 이렇다고 생각을 하면 다시는 그 생각을 바꿀 줄 모르는 것이다. 솔로몬을 이렇게 공격하는 검둥이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왕들 이야기를 시작하고 솔로몬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했다. 옛날에 프랑스에서 교수형을 당한 루이 16세의 이야기와, 그 조그만 아들 돌팡의 이야기를 꺼냈다 돌팡은 국왕이 될 태자였지만 체포된 후 투옥되어 옥사하고 말았다는 사람도 있다. "아이구 불쌍해라" "하지만 감옥에서 탈옥하여 미국으로 왔다는 사람도 있어" "그건 참 잘 됐군. 하지만 왜 심심할 테지. 여긴 임금님이 없으니까 말이야, 허클" "그렇지." "그럼 밥벌이 자리도 없을 게 아냐. 어떻게 할 셈일까" "나두 모를 일이지. 순경이 되는 자도 있고, 프랑스 말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구" "뭐라고 허클 프랑스 사람은 말이 우리들과 다른가" "다르구말구 짐. 너 같은 건 프랑스 사람이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거야, 한 마디도." "이런 정말이야 어째서 그래" "나두 몰라. 그렇지만 좌우간 그런 거야. 난 그 프랑스 사람의 꼬부랑 말을 책에서 좀 배운 적이 있어. 만약 누가 짐에게 와서 폴서 '빠르부 프렌치' 라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할 거야" "생각은 무슨 생각. 붙잡아 그놈 대가릴 깨뜨려 놓고 말지 뭐......물론 그게 백인이 아니라면 말이지만, 검둥이더러 그렇게 부르겐 절대로 못하게 할걸, 난." "아니, 이건 왜 이래, 누가 절 보고 욕을 했나. 프랑스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그러면 왜 그렇게 안하느냐 말이야, 놈은" "안하긴 왜 안해, 프랑스 사람은 본시부터 말투가 그러니까 그렇지." "그런가 아주 싱거운 놈의 말투로구먼. 난 이젠 이 이상 그런 소린 듣기 싫어. 전혀 의미가 없어." "이봐, 짐. 고양인 우리들처럼 똑같은 말을 할 줄 아나" "못하지. 고양인 못해." "그럼 소는" "소도 못해." "고양인 소처럼 얘길 하나, 소는 고양이처럼 얘길 하나" "아냐, 못해." "고양이와 소가 서로 다른 말투를 하는 건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 아니 겠느냐 말이 야. 안 그래" "그야 물론이지." "그럼 고양이와 소와 우리 사람들과 다른 말투를 하는 것도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 아니냐 말이야" "그야 그렇지."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이 우리와 다른 말투를 쓰는 것이 어째서 당연하지 않고 옳지 않느냐 말이야 자, 어서 대답 좀 해봐." "고양이가 뭐 사람인가, 허클." "아니지." "그렇다면 고양인 사람처럼 말할 까닭이 없잖아. 소는 사람인가 혹은 고양인가" "아니, 아무 쪽도 아니지" "그렇다면 고양인 사람이나 소처럼 얘기할 까닭이 없지 않느냐 말이야. 프랑스 사람은 사람인가" "그야 그렇지." "그럼 됐어. 자 그럼 왜 프랑스 사람은 사람처럼 얘길 안하는 거지. 이걸 내게 대답해 보란 말이야." 이 이상 더 얘길 해봐도 소용없다고 나는 깨달았다 검둥이에게 토론을 가르치는 것은 소귀에 경 읽기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단념했다. 제15장 짐을 골려주다 그후 사흘 밤 안으로 우리는 일리노이 주 남단의, 오하이오 강이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카이로라는 곳에 도착하리라고 생각했다 거기가 목적지였다. 뗏목을 팔아 증기선을 타고 오하이오 강을 올라, 자 유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한시름 걱정을 덜게 된다. 그런데 이튿날 밤, 안개가 끼기 시작하여 안개 속을 달리는 것은 좋지 못했으므로 뗏목을 붙잡아 매놓기 위해서 우리는 사주 있는 데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카누를 타고 뗏목을 붙잡아 매놓을 밧줄을 가지고 먼저 저어 가보았더니, 조그마한 대목 외에는 매놓을 곳이 없었다 나는 깎아내린 듯한 절벽 바로 한끝에 자라 있는 나무 하나에다 밧줄을 감았지만, 흐름이 빨랐으므로 뗏목은 대단한 기세로 돌진해 와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가지고는 떠내려가고 말았다. 안개는 자꾸 짙어만 가 그걸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으므로 잠시 동안은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렸을때는 뗏목은 간 데가 없었다. 20야드 앞을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카누 속으로 뛰어들어가 고물 쪽으로 달려가서 노를 집어들고는 한 번 뒤로 저었다. 그러나 카누는 꿈쩍도 안했다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매 놓은 것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일어나 밧줄을 풀려고 했지만 너무나 흥분해 있어 손이 떨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출발하자 나는 곧 뗏목 뒤를 따랐고, 맹렬한 기세로 사주를 따라 내려갔다. 사주가 있는 데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 사주의 길이는 60야드도 채 못 되었고 그 최하를 통과한 순간 사방이 온통 안개 속에 잠긴 속으로 들어가고 말아, 어딜 향해서 배가 나가고 있는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저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런 짓을 하다간 도리어 둑이나 사주나 무엇을 들이받고 말 것이니,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수수방관으로 있자니 마음이 안절부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어이'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저 훨씬 하류 어디서 희미하게 '어이' 하고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므로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시 한번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하고 나는 귀를 기울이면서 그 뒤를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 갔다. 다음에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그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난 바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소리가 난 왼쪽이라는 상태로 - 조금도 접근한 듯한 기색이 없다. 어이 하는 소리는 훨씬 아래로 곧장 떠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이리저리 빙빙 돌기만 하고 있었으므로 거리는 조금도 단축되지 않았다. 나는 짐 녀석이 양철 냄비를 두드릴 것이 머리에 떠올라 계속해서 두들졌으면 하고 은근히 그걸 바랐지만, 놈은 전혀 그런 짓을 해주지는 않았으므로 어이 소리와 어이 소리의 그 죽은 듯이 고요한 간격에 그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데 '어이' 하는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이 소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 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방향을 바됐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나는 노를 던져 버렸다. 또다시 '어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도 역시 후방에서 들려왔지만 방향이 달랐다. 소리는 점점 접근해 오며 끊임없이 장소를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에 따라 계속해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저쪽이 또다시 내 앞으로 왔으므로 그 바람에 흐름이 카누의 이물을 하류 쪽으로 돌려놓고 만 것을 알았다 만일 그 목소리가 짐의 목소리로, 딴 뗏목 사공이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라면 참 고마운 일이었다. 안개 속에서는 모두가 부자연스럽게 보이며 무엇이나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법이다. '어이, 어이' 하고 서로 부르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동안 채 1분도 못 되어 나는 큰 나무들이 마치 유령처럼 희미하게 쭉 서 있는 절벽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흐름은 나를 왼쪽으로 던져 버리고는 화살처럼 재빠르게 절벽 앞을 지나 물 속에 잠긴 나무 사이로 흘러들어 갔으며, 흐름이 어찌나 빨랐던지 그 바람에 그 나무들은 사뭇 윙윙 울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또다시 그 일대가 뿌예지며 고요해졌다 나는 가만히 앉은 채 가슴의 고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것이 백 번 고동치는 사이에 한 번도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만 단념하고 말았다. 사태를 깨달은 것이다. 그 깎아내린 듯한 절벽은 섬이고, 짐은 섬 저쪽으로 가버린 것이다. 10분 동안에 통과해 버릴 수 있는 사주는 아니다. 큰 숲이 있는 버젓한 섬이다 길이 5,6마일, 폭 반 마일 이상은 되리라. 15분 동안 나는 가만히 앉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계속 시속 4,5마일의 속력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에겐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본인으로서는 가만히 물 위에 둥실 떠 있는 것만 같고, 물 속에 잠긴 나무가 자기 옆을 미끄러지듯 재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얼핏 보이면 얼마나 빨리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숨을 죽이고 '아니, 저 나무는 얼마나 무서운 기세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밤 안개 속에 잠긴 채 이런 꼴로 홀로 있는 것이 무섭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번 해보란 말이다 -단번에 그 맛을 알게 될 테니까. 다음 약 30분 동안, 나는 가끔 '어이, 어이' 하고 불러보았다. 한참만에 멀리서 대답이 있어 그 뒤를 쫓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주 한가운데로 밀려들어갔다 양쪽에 사주의 모습이 희미하게 여기저기 보였다. 때로는 사주와 사주 사이의 좁은 수로인 경우도 있고, 또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수로인 경우도 있고 해서. 그럴 때에는 둑에 걸려 있는 낡은 썩은 나뭇가지와 쓰레기에 부딪치는 물소리로 해서 거기가 수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후에 또다시 사주의 하류 쪽에서 '어이, 어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쫓아가 보려고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도깨비불을 쫓는 것보다 더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소리가 이리저리 이동하고, 또 빈번히 장소를 바꾼다는 것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강에서 삐죽이 나와 있는 섬에 충돌하지 않도록 너댓 번 왜 힘을 들여 저어서 둑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얼마 후 또다시 강의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나온 것 같았으나 아무 데서도 '어이'하고 부르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도 짐은 물 속에 잠긴 나무에 걸려 그만 물귀신이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솜처럼 녹초가 되어 있었으므로 카누에 드러누워 이 이상 더 그 일로 마음을 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자고 싶진 않았지만 견딜 수 없이 졸렸으므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깐 눈을 붙여 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잠간 붙여 보았을 정도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눈을 뜨고 보았더니 별이 반짝이고 있었고, 안개는 깨끗이 걷혀 있었으며, 나는 이물을 앞으로 한 채 커다란 만곡부를 무서운 기세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자기가 어디 있는 줄도 몰랐고,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차례차례로 살펴보기 시작하였더니, 지난 주에 일어난 일처럼 희미하게 머리에 되살아났다 이 근처는 터무니없이 큰 강으로, 별빛으로 비쳐보니 양 둑에는 다시 없을 정도로 큰 우거진 나무들이 담벼락처럼 빽빽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저 멀리 하류 쪽 물 위에 까만 점이 하나 보였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거기 가보았지만 다른 게 아니라 꽉 묶은 제재용 통나무 두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다음 또다른 흑점이 보였으므로 그걸 따랐고, 또 다른 것을 따라가 보았다. 이번엔 내 판단이 옳았다. 역시 그 뗏목이었다. 뗏목에 이르러 보았더니, 짐은 무릎 사이에다 머리를 푹 박고 손을 조타노에다 걸치고는 잠을 자고 있었다. 또 한 개의 노는 산산 조각으로 깨어져 있었으며, 뗏목에는 나뭇잎과 나뭇가지와 진창이 온통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단단히 혼이 난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카누를 뗏목에다 매고는 뗏목으로 기어올라가 짐 바로 코 밑에 나자빠졌다 다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주먹을 짐에게 들이박으며 말했다. "이봐, 짐 난 자버린 건가 왜 깨우지 않았던 거야" "아니 이건, 임자가 아누, 허클, 임잔 죽은 게 아니던가. 물귀신이 된 게 아니던가 돌아온 거야. 정말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군. 도련님 너무 좋아서 정말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아. 어디 잘 좀 보자구, 좀 만져 보자구 옳지 죽은 게 아니로구나! 살아왔구나! 여전히 튼튼한 그전대로의 허클이로구나. 그전대로의 허클이야, 신의 조화야" "대관절 어떻게 된 셈이야, 짐 한잔 한 건가" "한잔 했다구 내가 한잔 했다구 내게 그럴 짬이 있었다구"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미친 소릴 하느냐 말이야" "내가 어째서 미친 소릴" "어째서냐고 그렇겠지, 마치 내가 어디 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돌아왔느냐고 뭐냐고 허튼소릴 한 게 아냐, 짐" "허클, 허클 핀, 내 눈 좀 똑바로 보소. 내 눈 좀 보라구.데구 가버린 게 아니란 말야" "가버렸느냐구 대관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아무 데도 간 게 아냐 어디 갈 곳이 있느냐 말이야" "참 이상한 소린데, 분명히 잘못된 데가 있어 확실히 있어 난 나인가. 난 누군가. 난 여기 있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어디 있는 건가. 난 그게 알고 싶어 죽겠단 말이야" "뭘 그래, 여기 있잖아. 뻔한 걸 가지고.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 늙은 바보로군" "내가 그런가, 이 내가. 그럼 이 말에 하나 대답해 보란 말이야 임잔 사주에다 뗏목을 매려고 카눌 타고 밧줄을 가지고 떠난 게 아니었던가." "천만에, 안했어. 사주가 다 뭐 말라죽은 사주야. 난 사주라곤 하나도 본 일이 없어." "사줄 보지 않았다구. 이봐 이봐, 밧줄이 풀어져서 뗏목은 무서운 기세로 강을 떠내려갔고, 임자와 카누를 안개 속에다 내버린 채가 아니었단 말이야." "무슨 안개." "무슨 안갠 무슨 안개야, 바로 저 안개지. 밤새도록 내린 저 안개지. 그래서 임자가 어이 하고 소릴 지르면 나두 어이 하고 소릴 지른 게 아냐. 그러는 새에 섬이 다닥다닥 붙은 사이로 끌려들어가, 하나는 그만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또 하나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분간을 못 했으므로 하마터면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뻔했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래서 난 그 많은 섬에 몇 번 부딪쳤는지 모를 지경이었고, 몇 번씩이나 혼이 나 하마터면 물귀신이 되고 말 판이었어. 어때 허클, 그렇지. 틀려. 이 말에 대답 좀 해보라구." "어처구니가 없어 난 대답이 안 나와. 난 안개도 섬도 보지 못했으며, 혼도 난 일이 없고, 아무 일도 겪은 일이 없어. 밤중에 여기 앉아서 짐과 얘길 하고 있던 것인데 10분쯤 전에 짐은 잠이 들어 버렸고, 나도 아마 잠이 들었던 모양이야. 그 10분 동안에 짐이 술에 취할 리도 없고 하니 물론 짐은 꿈을 꾼 것이 분명해." "천만에, 아니 무슨 수로 내가 그까짓 10분 동안 그렇게 여러 가지 꿈을 꿀 수 있단 말야." "제기랄, 분명히 꿈을 됐다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걸로 보아." "그런데 허클 내겐 만사가 모두 분명히 마치...... "아무리 분명해도 그런 건 문제가 아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렇잖아. 난 모두 알고 있어. 여기 그대로 쭉 앉아 있었으니까." 짐은 한 5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짐짓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더니 입을 열어 "그럼 난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꿈 치곤 참 대단한 꿈이군, 난생 처음이야. 그리고 또 이렇게 몸을 녹초로 만든 꿈도 난생 처음이고." "음, 그야 그렇지 때로는 꿈도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꿈은 대단했던 모양이군. 낱낱이 얘기해 봐, 짐." 그래서 짐은 자초지종을 낱낱이 있는 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인데, 상당히 과장한 점이 많았다. 얘기가 끝나자 짐은 이 꿈은 하나의 경고로서 온 것이니까 해몽을 해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말했다. 처음 사주는 우리를 위해서 도와 주려는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흐름은 우리를 그 사람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사람을 대표한 것 이라는 것이었다. '어이' 하고 부르는 소리는 가끔 우리들에게 경고로서 온 것으로 열심히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를 재난에서 건져주는 대신 도리어 재난 속으로 몰아넣고 만다. 그 수가 많은 사주는 앞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놈들과 여러 가지 종류의 천한 놈들 때문에 우리가 받게 될 성가신 일을 암시해 주는 것이지만, 우리가 다만 자기 분수를 지키고, 말대답을 하지 않고, 그자들의 화를 돋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근사하게 그 안개 속을 지나 물이 잔잔한 큰 강으로 나와 이 이상 더 귀찮은 일은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뗏목에 이른 직후 하늘에는 구름이 덮여 사방이 컴컴했던 것인데 이제는 또다시 말끔히 벗겨지고 개려는 참이었다. "음 그런가, 거기까진 이해가 되지만, 짐, 이건 뭘 나타내는 거지." 그것은 뗏목 위에 있는 나뭇잎과 깨진 노와 쓰레기들로 지금 분명히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었다. 짐은 그 쓰레기를 보고. 다음 나를 보고, 또다시 쓰레기를 보았다. 짐은 꿈얘길 너무나도 머릿속에 단단히 넣고 있었던 까닭으로 곧 그걸 쏟아 버리고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머릿속이 정리되자 짐은 미소도 짓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저게 뭘 나타내느냐구. 이제부터 설명해 주지. 내가 일과 임잘 부르는 일로 그만 녹초가 되어 잠이 들고 말았을 때엔 임자가 보이지 않아서 슬퍼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앞으로 나와 뗏목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난 상관하지 않았어. 잠을 깨어 보니 임자가 원기왕성한 모습으로 와 있잖아. 그땐 눈물이 다 나왔어. 난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임자 발에다 키스까지 했단 말이야. 그만큼 난 고마웠어 한데 임자 쪽은,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해가지고 이 늙은 짐을 골려줄까 하고 그것만 생각하고 있단 말야. 저기 있는 쓰레긴 쓸데없는 물건이야, 친구 머리에다 진창을 발라 창피를 보게 하는 인간은 쓰레기란 말야." 여기서 짐은 천천히 일어나 윅왬 쪽으로 걸어갔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나 자신을 한없이 천한 놈이라고 생각하고는, 그 말을 철회해 줄 수만 있다면 나야말로 짐의 발에다 키스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검둥이에게 사과를 하러 갈 결심이 붙기까지에는 15분이 걸렸지만 그러나 나는 이 일을 해냈다. 그리고 나중에도 내가 사과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는 천한 장난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을뿐더러, 짐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리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 장난도 하지 않았을 것을. 제16장 방울뱀 껍질의 조화 우리는 거의 하루종일 잠을 자고는 밤이 되자 어느 행렬처럼 천천히 떠내려가는 무섭게 긴 뗏목 뒤를 따라 출발했다. 이 뗏목의 네 귀퉁이에는 각기 네 개의 큰 노가 달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능히 30명은 타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위에는 간격을 넓게 두고서 커다란 윅왬이 다섯이나 있었고, 한복판에는 노천으로 된 야영 모닥불이 있었고, 높다란 깃대가 뗏목 양쪽 끝에 서 있었다 위풍당당한 뗏목이었다. 이러한 뗏목의 승무원이 되면 참 근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커다란 만곡부 쪽으로 떠내려갔다 밤은 아주 흐리고 무더워졌다. 강폭은 아주 넓고, 양쪽에는 빽빽이 우거진 숲이 담벼락처럼 죽 즐비해 섰고, 짬 하나 불빛 하나 그 사이로 보이지 않았다. 짐과 나는 카이로 얘기를 하고는 거기까지 왔을 때 과연 거기를 카이로라고 알아볼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워했다. 아마 알기 어려울 거라고 내가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카이로에는 집이라곤 몇 채밖에는 없고, 만일 거기 사람들이 불을 켜놓고 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옆을 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짐은 두 개의 큰 강이 거기서 하나로 모이는 곳이니까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섬기슭을 지나고 있는 것이니까, 다시 아까 그 강으로 나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 아니냐고 내가 반대했다. 이 말을 듣고 짐은 불안해했으며,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는 점으로 귀착하고 말았다. 나는 최초의 불빛이 보이면 둑으로 카누를 저어 가서, 사람들에게 아빠가 나중에 장사배로 오지만 아직 카이로까지 얼마나 되는지 그걸 알고 싶어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내 의견을 말해 보았다 짐은 거 참 좋은 의견이라고 맞장구를 쳤고, 우리는 이렇게 작정하고는 담배를 한 대씩 피우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려 카이로를 놓칠세라 지켜보는 외에는 아무일도 할 일이 없었다. 짐은 꼭 찾고야 만다. 왜냐하면 카이로를 발견한 순간부터 자기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며, 만일 놓치고 말면 또다시 노예의 나라로 돌아가 다시는 자유의 몸이 될 기회는 아주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짐은 몇 번씩 벌떡 뛰어 일어나며 이런 말을 했다. "저 게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가 않고, 도깨비불이 아니면 개똥벌레불이었다. 그래서 짐은 또다시 풀썩 주저앉아 아까와 마찬가지로 감시를 계속했다. 이처럼 자기가 자유세계 바로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리고 열이 난다고 했다 짐의 이 말을 듣고 보니 이심전심으로 나도 온몸이 떨리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짐은 이젠 거의 자유의 몸이나 마찬가지다 - 그건 누구 때문일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암만해도 이 생각을 양심에서 몰아내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때문에 번민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없었다. 한 곳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까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염두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가 않다 이번 생각만큼은 머리에서 떨어지지 가 않고 한층 더 나를 괴롭힐 뿐이었다 이것은 내 탓은 아니다. 내가 짐을 그의 소유주에게서 빼낸 것은 아니니 까라고 자신에게 타일러 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럴 때마다 양심이 머리를 쳐들고는 말했다. '그러나 너는 짐이 자유를 찾아서 도망을 친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 그러니까 너는 둑에 배를 갖다대고 누구에게든 그 일을 일러바칠 수가 있었을 게 아니냐 말이다.' 옳은 말이었다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었다. 내 마음이 괴로운 점은 바로 이 점이었다. 양심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쌍한 왓슨 아주머니가 너에게 뭘 했길래 그 사람의 검둥이가 바로 네 눈앞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도 넌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이냐. 그 불쌍한 아주머니가 너에게 뭘 했길래 너는 이렇게까지 지독한 짓을 그 아주머니에게 하느냐 말이다 그 사람은 너에게 책을 가르쳐 주려고 했고,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려고 했고, 힘 자라는 데까지 여러가지 점에서 너에게 친절을 다하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바로 이러한 것이 그 사람이 한 일이 아니었던가.' 내 꼴이 너무나도 비열하고 비참하게 생각되어 나는 죽고만 싶었다. 나는 자신의 양심에 채찍질을 하면서 뗏목 위를 조바심 치며 왔다갔다 했다 짐도 역시 조바심을 치며 왔다갔다하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 두 사람은 둘 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짐이 뛰어일어나며, '카이로다.'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를 때마다 나는 마치 총알에 얻어맞은 것만 같았고, 그게 정말 카이로라면 나는 비참한 나머지 죽어 버리고 말 것이 라고 생각했다. 내가 혼자 나 자신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짐은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유주에 이르면 우선 제일 먼저 하려고 생각하는 일은 돈을 모을 것이고, 일전 한푼도 쓰지 않고 충분히 저축이 되거든 왓슨 아주머니가 살고 있는 데서 그리 멀지 않은 농장의 소유물이 되어 있는 자기 마누라를 다시 사고, 그러고 나서 둘이서 열심히 일을 하여 아들 둘을 되사며, 만일 주인이 팔지 않는다고 하면 노예 폐지론자에게 부탁하여 애들을 훔치게 할 작정이라고 했다. 이러한 얘기를 듣고 나는 거의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이제까지 짐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자기가 조금만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된다고 생각하자 이렇게까지 변하는 것일까. 옛날 격언에도 있듯이 '하나를 얻으면 열을 바란다'는 식으로, 이것도 내 생각이 모자라는 데서 온 것이다. 내가 도망치는 것을 도운 거나 마찬가지의 이 검둥인 자기 아들을 훔쳐내겠다고까지 분명히 말하고 있다 - 내가 알지도 못하고, 나에게 아무 해도 끼친 적이 없는 사람의 소유물이 되어 있는 애들까지를. 나는 짐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슬펐다 이 말은 도리어 짐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 나는 아까보다도 한층 더 몹시 나에게 채찍질을 하는 양심을 향해, '날 괴롭히는 건 그 만둬. 제발‥‥이제라도 늦진 않았으니까......불빛이 보이는 대로 곧 둑으로 달려가서 일러 줄 테니' 하고 외쳤다 이러고 나니 나는 대번에 마음이 놓이고, 행복감이 되살아나며 깃털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민은 말끔히 가셔지고, 나는 불빛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날카롭게 감시하며 노래라도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얼마 후에 불빛이 하나 보였다. 짐은 그걸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젠 됐어, 허클. 이젠 살았어. 어서 뛰어 일어나 춤을 추잔 말이야. 이젠 그 고마운 카이로에 다 왔어, 난 다 알아." 내가 그 말을 받았다. "내가 카눌 타고 가서 보고 올게, 짐. 틀릴지도 모르니까." 짐은 뛰어 일어나 카누 준비를 하고는 나에게 방석을 만들어 주려고 바닥에다 자기 헌 저고리를 깔고 나서 나에게 노를 건넸다. 나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나는 기뻐서 큰 소릴 지르겠구나. 그리고 말할 테지, 이게 모두 허클의 덕택이라고. 난 자유의 몸이다. 하지만 허클이 없었다면 난 자유의 몸이 될 리가 없잖나. 허클이 해준 덕택이다. 짐은 일평생 임잘 잊지 않아, 허클. 임잔 짐의 제일 좋은 친구야. 그리고 이 늙은 짐이 이제 가지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야." 나는 짐을 밀고해 버리려고 빠른 속력으로 노를 젓기 시작했지만, 이 말을 듣자 마음이 아주 꺾이고 말았다 이렇게 떠난 것이 기쁜 일인지, 기쁘지 않은 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50야드쯤 떨어졌을 때 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임자가 거길 저어 가는구나, 정든 친구요, 인정이 많은 허클 도련님이. 이 늙은 짐과의 약속을 절대로 깨뜨린 일이 없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백인 신사가." 이 말에 나는 기분이 금세 나빠졌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 치워 버려야겠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만둘 수는 없다. 마침 그때 총을 든 두 사나이가 탄 스키프가 나에게로 가까이 와 섰으므로 나도 카누를 세웠다. 그 중 하나가 물었다. "저기 있는 건 뭐냐." "뗏목 부스러기 예요" "넌 그 뗏목 사람이냐." "네 , 그렇습니다." "누가 타고 있는가." "하나 타고 있습니다." "그래. 실은 오늘밤 검둥이 다섯이 상류의 둑이 굽은 그 한 끝에서 도망을 친 거야. 네 뗏목에 타고 있는 건 백인이냐 검둥이냐." 나는 얼른 대답을 못했다. 대답을 하려고는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1초인가 2초 동안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해 버릴까 했지만, 차마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토끼만한 용기조차도 없었다. 나는 기가 꺾여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렇게 말해 버렸다. "백인입니다." "이 눈으로 가서 확실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제발 좀 그렇게 해주세요. 거기 있는 건 우리 아버지인데, 아저씨들은 내가 뗏목을 둑 저기 저 불빛이 보이는 데까지 끌고 가는 걸 도와 주시겠지요. 아버진 이제 병으로, 엄마도 메리 앤도 모두 병이에요." "에잇, 귀찮아. 우리는 지금 급해. 이봐 총각, 그렇지만 그냥 가버릴 순 없군. 자, 노를 저어라, 같이 가줄 테니." 나는 부지런히 젓기 시작했고, 그 사나이들도 노를 집어들었다. "아버진 아저씨들을 아주 고마워할 거예요. 뗏목을 둑으로 좀 끌어달라고 부탁하면 누구나 다 도망을 쳐버리니 나 혼자선 될 일도 아니고." "거 몰인정한 놈들도 다 있군. 하지만 이상한데. 어이, 총각 네 아버지는 어떻게 됐길래 그러는 거야." "그게저......저......뭘, 대단한 건 아녜요." 이 말에 두 사람은 노 젓는 것을 중지했다. 우리는 뗏목 아주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총각, 그건 거짓말이지. 네 아버지가 어떻게 됐다는 거냐. 자 솔직히 말해 봐. 그게 너를 위해서 좋은 일이니." "말할게요, 아저씨, 말하겠어요......하지만 우릴 내버리진 말아 주세요. 제발, 실은......실은......아저씨들 좀더 조금만 더 저어 주세요. 그리고 나에게 밧줄을 던지게 해주신다면 뗏목 근처까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돌아서. 존. 돌아서." 그 중 하나가 외쳤다 그러자 두 사나이는 뒤로 물러섰다 "옆에 오지 말아 이놈아. 바람목으로 서. 제기랄, 바람이 우리들에게 병을 날려 보낼지도 모른다. 네놈 아버진 천연두에 걸려 있는 거야.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솔직하게 그 얘길 안한 거야. 병을 퍼뜨릴 작정 이냐." "그런데 저" 하고 나는 울음보를 터뜨리면서 말했다. "이제까지 모두들 그 소리만 하면 우릴 남겨 둔 채 가버리는 거예요." "참 딱한 노룻이구나. 하지만 그것도 무린 아냐. 참 딱한 노릇이긴 하지만 우린 제기랄, 천연들 딱 질색이야. 이봐 알겠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마. 혼자서 육지에 오르려고 해선 안 돼. 그런 짓을해서 천연두를 퍼뜨리는 날엔 모두 다 멸망이다. 20마일쯤 강을 내려가면 강 왼쪽에 마을이 있다. 그때쯤 되면 해가 뜬 지 오래일 테니까 거기서 도와 달라고 할 땐, 식구들이 감기에 들어서 열이 높아 모두들 자고 있다고 그러는 거다. 또 바보 소릴 해서 사람들에게 배 속을 들여다보게 해선 안 돼. 자, 우린 친절하게 해주었으니까 넌 우리들로부터 20마일 떨어지는 거다. 저 불빛이 보이는 델 가봐도 소용없어. 제재소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봐, 네 아버진 가난하고, 이제 큰 고생을 하고 있을 테지. 이 판자 위에다 20달러짜리 금화 하나를 놓을 테니까 판자가 네 옆에까지 떠내려갔을 때 집어라. 널 버리고 간다는 건 참 안된 일이지만 말이다. 천연두에 걸려들면 우린 그만 녹아, 알지." "가만 있어, 파커" 하고 또 한 사나이가 뒷말을 받아, "내 몫으로 20달러 한 장을 판자 위에다 더 놓을 테니, 잘 가라구 총각. 파커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다. 그럼 만사가 다 잘 될 테니까." "그렇구말구, 자 안녕, 안녕이다. 총각. 만약 도망친 검둥일 발견하면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붙잡는 거다. 그럼 얼마간 돈이 될 테니까." "안녕히들 가세요. 될 수 있는 대로 도망친 검둥일 놓치지 않겠습니다." 사나이들은 가버렸고, 나는 무겁고 비참한 마음으로 뗏목으로 바꿔 탔다. 자기가 한 일이 나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짓을 하자고 별러도 나에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전혀 기회는 없는 법이다. 위급한 경우에 부딪치면 뒤를 밀어서 좋은 일을 하게 등을 밀어 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 지고 만다 이때 나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가만 있자, 내가 옳은 일을 해서 짐을 남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하면 지금보다 내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천만에' 하고 나는 고쳐 생각해 본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리라 - 지금과 마찬가지 기분이리라. 그렇다면 옳은 일을 하는 데 힘이 들고, 나쁜 짓을 하는 데는 힘이 들지 않고. 그 보수가 같다면 옳은 일을 하려고 해본댔자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나는 그만 딱 막히고 말았다 이 문제에 해답을 내릴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젠 이 일 때문에 마음을 쓰는 일은 아예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그때 그때 제일 편리한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나는 윅왬 속으로 들어갔지만 짐은 거기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 데도 없었다. "짐." 하고 나는 불러보았다. "나 여기 있어, 허클 이젠 놈들 가버렸나. 큰 소릴 내지마" 짐은 고물에 달린 노 아래에 잠긴 채 코만 수면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젠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뗏목으로 기어올라왔다. "난 얘기하고 있는 소릴 죄다 들었어. 그래서 강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놈들이 뗏목 위로 올라오면 둑으로 헤엄쳐 가리라고 생각한 거야. 그리고 놈들이 가버린 후에 뗏목으로 다시 헤엄쳐 돌아올 작정이었어. 한데 임잔 근사하던데, 놈들을 둘러치는 그 수완이 그렇게 근사하게 속여대는 솜씬 난 난생 처음이야. 정말 그 덕택으로 이 늙은 짐은 살아났구먼. 이 일은 죽어도 잊어 버리지 않을 거야, 허클." 그 다음 우리는 돈에 관해서 의논했다 한 사람 몫으로 20달러씩이니까 상당한 액수다. 짐은 이 돈만 가지면 기선의 3등표를 살 수 있을 뿐더러, 자유주에서도 우리가 가고 싶은 데까진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했다. 뗏목으로 가자면 20마일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 거리지만 그래도 어서 빨리 도착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도 했다. 먼동이 틀 무렵에 우리는 뗏목을 둑에다 잡아매었지만, 짐은 뗏목을 감출 장소에 관해서 아주 까다롭게 굴었다. 다음 짐은 하루종일 짐을 챙기고는 언제든지 뗏목 여행을 그만둘 준비를 갖추었다. 그날 밤 열 시경, 우리는 훨씬 하류의 왼쪽 만곡부에 마을의 불빛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나는 카누를 타고 물어보러 갔다. 그러자 얼마 후에 낯선 사람 하나가 스키프를 타고 강 한가운데 서 흘림낚싯줄을 늦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바싹 그 옆으로 저어가 물어보았다 "아저씨, 저 마을이 카이론가요." "카이로냐고. 천만에. 이놈 큰 바보놈이로구나. " "그럼 무슨 마을이에요, 아저씨." "알고 싶으면 가서 물어봐라. 이 이상 30초라도 내 옆에서 우물거리기만 해봐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니." 나는 뗏목으로 돌아왔다. 짐은 아주 낙망했지만 나는 걱정할 것 없다고, 요다음 마을이 카이로일 거라고 위로해 주었다 먼동이 트기 전에 또다른 마을을 지났으므로 또 가보려고 했지만 이 마을은 고대위에 있었으므로 가지 않았다 카이로 근처에는 고대라곤 하나도 없다고 짐이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깜빡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왼쪽 둑에 꽤 가까운 사주에 숨어서 그 날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어쩐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짐도 마찬가지였다. "암만해도 그날 밤 그 안개 속에서 카이로는 지난 것만 같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얘긴 그만둬, 허클. 불쌍한 검둥이에게 행운이 올 리가 없어, 난 그 방울뱀 껍질의 조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난 그 뱀껍질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 그런 걸 보지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임자 탓은 아냐. 모르고 그런 걸 뭐. 임잘 책망하는 게 아냐." 날이 환히 밝아오자 과연 둑 근처에는 오하이오 강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고, 그 저쪽은 언제나 다름없는 미시시피 강의 탁류였다. 이걸로 카이로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의논했다. 둑에 올라도 소용이 없다. 물론 뗏목으로 강을 거슬러오를 수는 없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카누로 상류로 올라가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딴 길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원기를 회복하여 일할 수 있도록 미루나무 숲에서 하루종일 자고는 어두워진 후에 뗏목 있는 데로 돌아와보니, 카누가 간 곳이 없는 게 아닌가. 한참 동안 우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 또한 그 방울뱀 껍질의 조화라고 하는 것을 둘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얘기해 본댔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말이다. 다만 그 얘길 하면 방울뱀 껍질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되고 말아. 결국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잠자코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재난은 계속 자꾸만 일어날 것이리라. 얼마 후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의논하였고, 돌아가는 카누를 살 기회가 얻어걸릴 때까지 뗏목으로 강을 내려갈밖에 딴 길은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빠가 늘 하는 식으로 사람이 없을 때에 카누를 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짓을 하다간 추격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어두워진 후에 우리는 뗏목을 타고 출발했다. 이제까지의 뱀껍질의 조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뱀껍질을 주무르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들 믿지 않는 사람도 앞을 더 읽어 나가 껍질이 우리에게 이 이상 더 무엇을 했나를 알게 되면 믿게 되리라. 카누를 사는 장소는 대체로 둑에 쭉 늘어서 있는 뗏목 저쪽이다 그 러나 둑에 늘어서 있는 뗏목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세 시간 이상이나 떠내려갔다 그런데 밤은 뿌옇게 흐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안개 다음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강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거리도 분간할 수 없다. 밤도 깊어지고 사방이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때 기선이 강을 올라왔다. 우리는 초롱을 켜고, 기선에서 그것이 보이리라고 생각했다. 상류로 올라가는 기선은 보통 우리 옆으로 오지 않는다. 사주를 따라 암초 아래의 물결이 약한 흐름을 찾아서 간다. 그러나 이러한 밤에는 강 전체를 한몸에 받아가며 수로를 마구 돌진해 올라가는 것이다. 그 기선이 올라오는 소리는 들렸지만 바로 옆에 올 때까지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기선은 곧장 우리를 향해서 올라왔다 이따금 기선은 이와 같이 해서 얼마나 가깝게 뗏목에 부딪치는 일 없이 빠져 나갈 수가 있나 그걸 해보는 수가 있다. 때로는 타륜이 큰 노를 빼앗아가는 일도 있고, 그럴 때는 기관사가 배 밖으로 머리를 쑥 내밀고는 웃으며,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기선은 다가왔다. 우리의 뗏목 바로 옆을 지나갈 작정인가 보다고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했는데, 기선은 조금도 피하려는 기색이 없다 큰 기선이었다. 게다가 아주 빠른 속도였다. 주위에 개똥벌레를 몇 줄씩 둘러멘 검은 구름처럼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기선은 큰 선체를 불쑥 나타냈다 커다란 입을 벌린 기관이 쭉 긴 대열을 짓고 있고, 새빨갛게 단 이빨처럼 활활 타고 있었다. 거대한 고물과 쇠사슬이 우리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 이쪽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기관을 끄라는 찌릉찌릉 울리는 신호 소리, 마구 떠들어대는 욕소리 기적 소리 등이 한꺼번에 들리고, 짐이 저쪽에서, 내가 이쪽에서 텀벙 물 속으로 뛰어드는 찰나에 기선은 뗏목 한복판을 둘로 갈라놓고 말았다. 나는 물 속에 잠겼다. 밑바닥까지 내려갈 작정으로 있었다. 30피트의 타륜을 그 밑으로 빠져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으로 타륜과 나와의 간격을 훨씬 넓게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1분 동안은 물 속에 잠겨 있을 수가 있었는데 이때만은 1분 반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으므로 빠른 속도로 수면으로 떠올랐다. 겨드랑 아래까지 떠올라 코에서 물을 내뿜으며 '하하'하고 약간 숨을 쉬었다. 물론 흐름은 빨랐고, 기선은 기관을 끄고 나서 10초 후에 또다시 기관을 건 것은 물론이었고, 뗏목 사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엔진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지만 짙은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기선은 물방울을 날리면서 강을 올라가 버렸다 나는 10여 회나 짐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서서 헤엄을 치고 있는 동안 손에 부딪친 판자를 붙잡고 그것을 앞으로 밀면서 둑을 향해 헤엄쳐 갔다 그러나 흐름이 왼쪽 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내가 횡단수로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방향을 바꿔 그쪽으로 헤엄쳐 갔다. 그것은 그 길고도 모로 흐르는 2마일이나 되는 횡단수로의 하나로 건너는 데 왜 시간이 걸렸다. 무사하게 둑에 이르러 기어올랐다. 겨우 눈앞이 보일 정도였지만, 나는 손으로 더듬으면서 울퉁불퉁한 길을 4분지 1이상이나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그걸 깨닫기도 전에 커다란 두 채가 한 채로 된 구식 통나무집 앞에 와 있었다. 나는 그곳을 빠져 나가려고 했지만 개가 여러 마리 뛰어나와 으르렁거리기도 하고 짖기도 하였으므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제17장 그랜저포드 가의 한 식구가 되다 약 1분 가량이 지나자 누군가가 창 밖으로 머리를 내놓지 않은 채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그만 짖어. 거기 있는 건 누구지." 나는 대답했다. "나예요." "나라니 , 누구야." "조지 잭슨이 에요." "무슨 일이냐."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앞을 지나고 싶은데 개들이 지나가게 하지 않아요." "이런 밤중에 뭣 점에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거냐, 응." "배회하고 있는 게 아니고 기선에서 떨어졌어요." "아. 그러냐. 누가 불 좀 켜라. 이름은 뭐랬지." "조지 잭슨이에요. 아직 애예요." "이봐, 정말이라면 무서워할 것 없다. 아무도 너에게 해를 끼치진 않아. 하지만 움직여선 안 돼. 가만히 거기 점잖게 서 있어. 누가 봅이나 톰을 좀 일으켜서 총을 가지고 오너라. 조지 잭슨. 너 누구 동행이 있느냐." "아뇨, 아무도 없어요." 이때쯤 해서 집 안에선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불빛이 보였다. 사나이는 소리를 질렀다. "그 불을 저쪽으로 비켜, 이 벳시의 바보놈아. 그만한 머리도 없어, 그걸 현관문 마루에다 놓으란 말이다. 봅, 너와 톰이 준비가 다 되었거든 너희들 자리로 가라." "준비 완료." "자. 그럼 조지 잭슨, 넌 세퍼드슨 집을 알고 있느냐." "아뇨.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응,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고. 자. 준비는 다 됐다. 조지 잭슨, 앞으로 나와 봐라. 이봐라. 서두르는 게 아냐. 아주 슬슬 오란 말이다. 만일 동행이 있다면 그놈은 뒤에다 남겨 두고 와. 그 놈이 나오면 쏴 죽인다. 자, 나오너라. 슬슬 와. 문은 네가 열어. 몸을 모로 해서 몸 하나 들어을 정도로 여는 거다. 알겠는가." 나는 서둘지 않았다. 서둘자고 생각해도 서둘 수가 없었다. 한번에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다만 내 가슴의 고동소 리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개들도 사람들처럼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지만 내 조금 뒤에서 따라왔다. 통나무 세 개로 만든 계단 있는 데까지갔을 때에 자물쇠를 열고 빗장을 뽑고 열쇠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에다 손을 걸치고 조금씩 여는데 어디선가, "자 그걸로 됐어 머리를 안으로 넣어 봐." 나는 하라는 대로 했지만, 머리가 잘려 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났다 마루 위에 촛불이 놓여 있고, 거기 전원이 모여 나를 흘낏흘낏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흘낏흘낏 쳐다본 것은 약 15초 가량이었다. 키가 큰 세 사나이가 나에게 총부리를 대고 있어 나는 그만 질겁을 하고 말았다 제일 연상은 백발로 60세 가량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30세 남짓한 사나이 들인데, 세 사람 모두 호남이었다. 그밖에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해 보이는 백발의 노부인, 그 뒤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젊은 여자 둘이 있었다. 노신사는 입을 열었다. "자, 괜찮을 것 같다. 들어오너라 "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곧 노신사는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빗장을 찌르고 걸쇠를 걸고는 젊은 사나이들에게 총을 가지고 따라들어오라고 한다 그들은 전원이 마루에 융단을 깐 커다란 객실로 들어가, 집 정면 쪽에 붙어 있는 창 반대쪽 한구석에 서 있었다. 옆으론 창이 없었다. 그들은 촛불을 쳐들어 얼굴을 잘 들여다보더니, "아니, 이 앤 세퍼드슨 집 사람은 아냐 전혀 세퍼드슨을 닮은 점이 없어" 했다. 그 다음 노인은 무기를 가졌나 찾아볼 테니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악의가 있어서 하는 짓이 아니라 그저 확인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인은 주머니 속에까지 손을 넣지는 않고 그저 겉에서 한번 슬쩍 훑어보는 정도로 하더니 노인은 나에게 마음을 턱 놓으라고 하고서, 사정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으라고 했다 그러나 노부인이 끼여들었다. "아니, 여보, 저 애 꼴 좀 보오 참 불쌍도 해라 온통 젖어 있는 게 아뇨. 저걸 좀 봐요. 그리고 배도 고플 거라고 당신은 생각하지 않우." "당신 말이 옳아, 난 깜박 잊고 있었군." "벳시 (이것은 흑인 여자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애에게 먹을것을 준비해 줘, 거 참 가엾구나. 그리고 너희들 중 하나가 가서 벅을 깨워서 이렇게 일러라. 옳지, 바로 벅이 저기 왔구나, 벅 너 말이다. 이 꼬마 손님을 데리고 가서 젖은 옷을 벗기고, 마른 네 옷을 아무거나 하나 입히도록 해라." 덕이라는 애는 내 또래의 소년이었다. 열셋이나 열넷 정도였지만 나보다는 좀 몸집이 컸다. 입고 있는 것이라곤 셔츠 한 장으로 머리칼은 밤송이처럼 까실까실한 머리였다. 하품을 하고 눈을 주먹으로 비비면서, 또 한쪽 손으로는 총을 끌고 들어오면서."세퍼드슨 집 놈들이 온 게 아냐." 하고 물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응 그래. 만일 있기만 했다면, 난 한 놈쯤은 죽였을 텐데" 그 말에 전원은 깔깔 웃었다. 봅이 입을 열어, "이봐 벅, 하마터면 우리 모두의 머리껍질을 벗겨 갔을지도 모를 뻔했구나, 네가 이렇게 늦게 왔으니" 하고 놀려댄다. "하지만 아무도 날 불러 주는 사람이 없잖았어. 모두 나빠. 언제나 난 낙제야. 솜씨를 보여 줄 기회가 전혀 없어." "걱정할 거 없다." 노인이 끼여들었다."앞으로는 기회가 얼마든지 올 테니까 서둘 필요는 없다. 자아, 어서 가서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라." 이층 벅의 방으로 올라갔더니, 벅은 자기 셔츠와 짧은 저고리와 바지를 내주었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입었다. 입고 있는 동안 벅은 나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고는 내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저께 숲속에서 잡은 여치와 토끼새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촛불이 꺼졌을 때 모세가 어디 있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아직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맞춰 봐." 벅 이 종주먹을 댔다. "한 번도 그런 얘길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맞춰 본단 말이야." "그래도 맞춰 보면 되잖아. 아주 간단한 거야 " "어느 초인데." "어느 초냐고. 아무 초인면 어때 " "모세가 어디 있었는지 알게 뭐야. 어딨었어." "뭘 그래, 아주 컴컴한 속이지. 그 속에 모세가 있었어." "그럼 어딨었는지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뭣 땜에 나한테 물은 거냐." "이런 바보, 이게 수수께끼라는 거야, 몰라, 걸. 이봐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작정이냐. 언제까지 있잖으면 안 돼. 모두 다 재미있는 것 뿐이야 아직 학교는 없고. 너 개 있니. 난 한 마리 있어. 이놈은 말이야, 나무 부스러기를 강에다 던지면 막 가서 물고 온다. 넌 공휴일날에 빗으로 머리를 잘 가리는 등 그런 바보 수작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좋으냐. 난 아주 싫어 죽겠어.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시켜 이 헌 바지 새끼 말이야, 꼭 죽겠어. 입는 게 좋으리 라곤 생각하지만 입기 싫어 참 죽겠어, 더워 준비 됐니. 그럼 됐어. 자, 가자, 이 친구야." 차가운 옥수수방과 차가운 콘비프와 버터와 탈지유 - 이러한 것들이 아랫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후 오늘날까지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을 먹어 본 기억이 없다. 벅도, 벅의 어머니도, 다른 식구들도 모두 다 옥수수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곤 어디로 가버린 검둥이 하녀와 젊은 두 딸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했고, 나는 먹으면서 얘기를 했다. 젊은 여자들은 누비이불을 몸에 두르고, 머리카락을 등 아래로 흘려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여러 가지 것을 묻길래, 나는 아빠와 나와 모든 집안 식구들이 아칸소의 남단에 있는 조그마한 농장에서 살고 있었는데, 누나 메리 앤이 집을 도망쳐 나가 결혼한 이래로 소식이 없으므로 빌이 이 누나 부부를 찾아서 나간 것인데 이 빌도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톰과 모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나와 아빠 둘만 남게 된 것인데, 아빠는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해서 꼴이 말이 아니었으며, 결국 아빠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자, 본래 이 농장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남은 것을 챙겨서 3등으로 강을 올라오게 된 것인데, 그만 강에 떨어지고 말아 결국 여기 이렇게 오게 된 운명이 되고 말았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집안 식구들은 내가 있고 싶을 때까지 얼마든지 있어도 좋다고 했다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거의 새 벽이 되어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벅과 함께 잤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떠보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나는 자기 이름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만 것이 아닌가1 그래서 한 시간쯤 드러누운 채 이리저리 생각해 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때 벅이 눈을 떴으므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벅, 너 철자법을 아니." "알구말구." "내 이름자는 쓰지 못할 거야." "할지 못할지 어디 내기 할래." "좋아, 어디 해봐." "G - e - o - r - g - e J - a - x - o - n 자, 어때." 자못 의기양양하다. "옳지, 참 용쿠나 못할 줄만 알았더니, 그저 아무렇게나 댈 수 있는 이름자는 아니니까 공부하지 않고서는" 나는 몰래 그것을 적어 두었다. 누가 다음에 대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때에는 내가 이 이름에 익숙해 있는 듯이 술술 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매우 좋은 사람들이었고 집도 또한 훌륭했다. 나는 아직까지 시골에서 이만큼 훌륭하고, 이만큼 품위가 있는 집을 본 적이 없었다. 현관문에는 쇠걸쇠도 사슴 가죽끈이 달린 나무로 만든 걸쇠도 없이, 도회지의 집에서 보는 것과 같이 놋쇠 손잡이를 돌리게 되어 있었다. 시골의 사랑방에는 침대라곤 하나도 없고, 침대를 놔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도회지의 집 사랑방에는 침대를 파둔 방이 얼마든지 있다 커다란 난로는 그 바닥이 벽돌로 깔려 있고, 그 벽돌은 물을 부어 다른 벽돌로 문질러 늘 깨끗하고 새빨갛게 해놓고 있었다 때로는 도회지에서 하는 것처럼, 스페인 갈색이라고 불려지는 빨간 물감으로 씻어낼 때도 있었다. 커다란 놋쇠 장작통은 제재용 통나무까지도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난로 한복판에는 시계가 놓여 있었고, 유리로 된 정면 하부 절반에는 어느 도회지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한복판의 둥근 곳은 태양으로 되어 있고, 그 뒤에는 추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 시계의 똑딱똑딱하는 소리는 참 아름다웠다 가끔 행상인 하나가 와서 시계를 깨끗이 청소하고 조절해 놓으면 태엽이 모두 풀릴 때가지 뗑뗑 하고 150번이나 계속해서 치는 수가 있었다. 집안 식구들은 아무리 값을 많이 주어도 이 시계를 팔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시계 양쪽에는 커다란 외국풍의 앵무새가 놓여 있었다. 백묵 같은 것으로 되어 있고, 화려한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앵무새 한 마리 옆에는 도자기로 만든 고양이가 있고, 또 한쪽 앵무새 옆에는 도자기 개가 놓여 있었다. 이 고양이와 개를 꾹 누르면 찍찍 하고 소리를 내는 것이었는데, 입을 여는 것도 아니고, 표정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 찍찍하는 소리는 아래쪽에서 났다. 이러한 물건 뒤에는 야생 칠면조 깃털로 만든 커다란 부채가 한 쌍 펼쳐져 있었다. 방 한가운데 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능금과 글과 복숭아와 포도를 수북이 담은 멋진 도자기로 만든 바구니 같은 것이 놓여 있는데, 그것들은 진짜보다는 훨씬 빨갛고, 훨씬 노랗고, 훨씬 아름다웠지만 진짜는 아니었다. 그 증거는 색이 벗겨진 아래에서 석고니 그것 비슷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테이블에는 아름다운 커버가 덮여 있었다. 적색과 청색 날개를 편 독수리가 그려져 있고 가장자리에도 빙 둘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멀리 필라델피아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테이블 양 끝에는 책이 몇 권 아주 단정하게 포개 놓여 있었다. 한 권은 그림이 많이 들어 있는 대형 가정용 성서였다 다른 한 권은 '천로역정'이라는 책으로 집을 나간 사나이의 이야기지만, 무슨 이유로 집을 나갔는지는 쓰여 있지 않다. 이 책을 나는 가끔 읽은 일이 있다 이야기 줄거리는 재미있었지만 어려웠다. 또 한 권은 '우정의 선물' 이라는 책으로, 아름다운 문구와 시가 잔뜩 들어 있었지만 난 시는 읽지 않았다. 또 한 권은 헨리 클레이(미국의 웅변가)의 연설집이고, 또 한 권은 건 박사의 '가정의학사전'으로, 이 책에는 누가 병이 나거나 죽거나 했을 때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잔뜩 쓰여 있는 책이었다. 찬송가도 한 권 있었고, 그밖의 책도 많았다 튼튼한 고급•등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한가운데가 헌 광주리처럼 움푹 들어가 갈라진 물건은 아니었다. 벽에는 그림들이 몇 장 걸려 있었다. 주로 워싱톤과 라파이에트(독립 군에 몸을 던져 미국을 원조한 프랑스의 흔혈아. 1757i¡1834)의 그림, 전쟁 그림, 하이랜드 메리(스코틀랜드의 시인. 번즈의 정인. 매리 캠펠과 매리 모리슨에게 주어진 칭호)의 그림 등으로, 그 중에 하나 '독립선언서 서명'이라는 표제의 그림도 있었다. 크레용화도 몇 장 있었지만, 그것은 이 집의 죽은 딸이 열다섯 살 때 손수 그린 것이었다. 이 그림은 내가 아직까지 보아 온 어떤 그림과도 달랐다. 대체로 보통 그림보다는 색이 검었다. 한 장은 날씬한 검은 옷을 입은 여자의 그림으로. 겨드랑 아래를 혁대로 졸라매서 잘름 가늘게 한 매끈한 까만 드레스, 소매 한 가운데가 양배추 모양으로 부풀어올라 있고, 삼 비슷한 모양의 커다란 밀짚모자에 검은 베일, 까만 테이프를 옆으로 감은 희고도 날씬한 발목, 끌처럼 아주 작은 까만 구두를 신고 있는 몸차림으로 수양버들 아래에 서서 근심에 잠겨 바른쪽 팔꿈치를 묘석 위에다 괴고, 이만큼 옆으로 떨어져 있는 다른 쪽 손에는 횐 손수건과 손가방이 쥐여져 있었다 그 그림 밑에는 '슬프도다. 재회의 날은 또다시 없는가'라고 쓰여 있었다 또 한 장은 머리칼을 머리 꼭대기로 말끔히 치켜올려가지고는 의자등처럼 생긴 빗 앞에서 땋고 있는 젊은 귀부인의 그림으로, 그 여자는 손수건을 얼굴에다 대고 울고 있는 것인데, 한쪽 손에는 죽은 새가 발을 위로 치켜든 채 나자빠져 있었다 그 그림 아래에는 '슬프도다. 그대의 구슬 같은 노랫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는가'라고 쓰여 있었다. 창가에서 달을 쳐다보고 있는 젊은 여자의 그림도 있었다 눈물이 뺨을 흘러내리고 있었고, 손에는 한쪽 끝에 까만 봉랍이 붙은 밀봉을 뜯은 편지를 들고 있고, 그리고 쇠줄 한쪽이 달린 로켓을 입에다 누르고 있었다. 그 그림 밑에는 '슬프도다. 그대는 가버렸는가, 그렇다 그대는 가버렸도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 그림들은 모두 잘 된 그림이라곤 생각하지만 웬일인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좀 기분이 나쁠 때에 이러한 그림을 보면 마음이 어수선해지기 때문이다. 이 소녀는 이러한 그림을 아직도 얼마든지 그릴 작정으로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이 소녀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녀가 그린 그림만 보더라도 얼마나 중요한 인물을 이 가족이 잃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질의 사람으로서는 차라리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발병했을 때에는 집안 식구들이 이거야말로 이 소녀의 최대 걸작이라고 부른 그림에 착수한 것이어서, 소녀는 밤낮으로 이 그림을 끝마칠 때까지 자기 목숨을 살려 주었으면 하고 기원했지만, 끝내 그 소원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것은 횐 장의를 몸에 감은 젊은 여자가 이제라도 당장 물속에 뛰어들려는 자세로 다리 난간에 서 있는 그림으로, 머리칼은 온통 잔등으로 흘러떨어져 있고,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팔은 가슴 위에 십자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또 두 팔은 앞으로 쑥 뻗쳐 있고, 나머지 두 개는 달을 향해 뻗쳐 있었다 - 이렇게 팔이 많은 것은 어느 팔이 제일 근사하게 보이는가를 연구하여 그 나머지 불필요한 팔은 모두 지워 버릴 작정이었지만,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결심이 붙기 전에 죽어 버리고 말았으므로 이 그림은 이 소녀의 방 침 대머리에 걸려 있었고, 해마다 소녀의 생일이 오면 집안 식구들이 그 앞에다가 헌화한다. 그 이외에는 늘 조그마한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이 그림의 젊은 여자는 귀엽고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도 팔이 많아서 나에게는 마치 거미처럼 보였다. 이 소녀는 생전에 스크랩 북을 만들고 있어 '장로교회신문'에서 사망 기사, 사고 기사,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기사 등을 오려내어 붙여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맨 끝에다 손수 생각해 낸 시를 써넣어 두었다. 여간 잘된 시가 아니었다. 이것은 스티븐 다올링 봇스라고 하는, 우물에 빠져서 죽은 소년에 관해서 쓴 시였다. 스티븐 다올링 봇스에게 바치는 송시 └■└? 스티븐은 병에 걸려 , 젊은 스티븐은 세상을 떠났는가. 슬픈 마음은 괴로워했던가 상중의 사람들은 울었던가. 그렇지는 않았도다. 젊은 스티븐 다올링 봇스의 운명은. 슬픈 마음은 괴로웠지만 그것은 병 때문은 아니었나니. 백일해가 그 몸을 괴롭힐 것도 아니고, 또 홍역의 종기가 그 몸을 망치고 만 것도 아니었나니, 이러한 것들이 스티븐 다올링 봇스의 슬기로운 이름을 더럽힐 것은 아니었나니, 곱슬진 머리를 친 것은 헛된 사랑 때문도 아니었고, 저 젊은 스티븐을 쓰러뜨린 것은 위병도 아니었나니 눈에다 눈물을 머금고 들을지어다. 그의 운명을. 우물에 빠져서 이 차디찬 세상을 떠났나니 그의 영혼은 우물에서 건져내어 물을 토하게 했지만 슬프도다 때는 이미 늦었나니. 그의 영혼은 전지전능한 천국으로 드높이 사라졌나니 채 열네 살도 못 된 소녀의 몸으로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던 에메라인 그랜저포드가 만일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사람은 없으리라. 에메라인은 시 같은 건 문제없이 술술 지어낼 수 있었다고 벅이 말했다 도중에서 손을 쉬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숨에 한 줄을 쓰고, 그것에 운이 맞는 시구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지워 버리고 다른 또 한 줄을 단숨에 고쳐 쓴다 이렇게 시를 짓는다고 벅이 말했다. 에메라인은 소재에 관해서 별로 까다로울 것도 없이, 슬프기만 하면 아무거나 시로 지어낼 수 있었다 남자건 여자건 애건 할것없이, 죽기만 하면 반드시 에메라인은 시체가 식기도 전에 '공양사'를 지어가지고 그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에메라인은 그러한 시를 '공양사'라고 불렀다.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는 제일 먼저 의사, 둘째가 에메라인, 셋째가 장의사의 순서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장의사는 에메라인보다 먼저 간 일이 절대로 없었는데, 꼭 한 번 먼저 가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죽은 사람의 위슬러라고 하는 이름에 맞는 운이 얼른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찾아내느라고 쩔쩔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부터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변해 버렸고, 결코 불평을 말하는 법은 없었지만 자꾸만 마르는 것이 그후 얼마 살지 못했다. 불쌍한 에메라인 그녀의 그림에 화가 나 그녀 일로 약간 기분이 나빠질 땐 나는 곧잘 에메라인의 방으로 올라가 그 스크랩북을 꺼내어 읽곤 했다 나는 죽은 사람까지 넣어서 집안 식구가 모두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언제까지나 정을 붙이며 살아가고 싶었다 불쌍한 에메라인은 생존시에는 죽은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주었지만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만 이제 아무도 에메라인에게 시를 지어 주지 않는 것은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나는 손수 한두 절을 지어 보려고 큰 노력을 해보았지만, 웬일인지 잘 해낼 것 같지가 않았다. 집안 식구들은 에메라인의 방을 깨끗하고도 단정히 치워 놓고는 무엇이나 다 에메라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대로 해놓고는 아무도 그 방을 사용하지 않았다 검둥이 하인이 몇 사람 있는데도 노부인은 손수 이 방을 치웠으며, 여기서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또 성서를 읽기도 했다. 이제까지 얘기한 사랑방 창에는 아름다운 커튼이 걸려 있었다 흰 바탕에 벽이 온통 덩굴로 덮인 성과 물을 마시러 오는 가축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오래된 조그마한 피아노도 있고, 그 안에 함석 냄비가 몇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는데, 젊은 부인들이 '최후의 고리는 끊어지고 말았네'를 노래 부르거나, 피아노로 '프라그의 전투'를 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이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만 같았다. 어느 방의 벽도 석고로 하얗게 발라져 있고, 방마다 마루에는 융단이 깔려 있고, 집 전체의 외부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집은 두 채로 되어 있는데, 두 채 사이의 넓은 공지에는 마루를 깔고, 지붕을 올리고 있어 때때로 여기다 식탁을 준비했는데,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 장소였다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어디 있으랴1 음식도 좋고, 또 분량도 넉넉 했다. 제18장 왜 하니는 모자를 가지러 가는데 말을 몰았는가 그랜저포드 대령은 신사였다. 철두철미한 신사였다. 집안 식구들도 그러했다. 대령은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양가 출신이었고, 그것은 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일이라고 더글라스 과부댁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부댁이 우리 마을에서 제일급 가는 귀족이라는 것을 누구 하나 부정한 사람은 없다. 하기야 우리 아빠 같은 건 신분으로 해서 말하자면 메기만도 못한 위인이었지만, 이 아빠까지도 늘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랜저포드 대령은 아주 키가 컸으며 체격이 날씬했다. 얼굴색은 혈기라곤 조금도 찾을 길이 없이 푸르죽죽했다 아침마다 그 마른 얼굴을 깨끗이 면도질을 했다 입술은 더할 나위 없이 얇고, 콧구멍은 가늘고 코는 높고, 눈썹은 진하고, 까만 눈은 너무나 깊이 움푹 들어가 있는 까닭으로 말하자면 동굴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격이었다. 이마는 높고, 머리칼은 백발이 희끗희끗 섞였으며, 똑바로 어깨까지 흘러떨어져 있었다 손은 길고도 가늘었고, 일생을 통해서 매일같이 깨끗한 셔츠를 입고 있었고, 격식대로 단정히 의관을 갖춘 한 벌의 모시옷은 눈이 부실 정도로 순백색이었다. 일요일에는 놋쇠 단추가 달린 푸른색의 연미복을 입었다. 마호가니 스틱에는 은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어디를 보나 경박한 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으며, 얘기를 할 때에도 절대로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친절한 것은 더할 나위 없었다. 분명히 그것이 보였다 그래서 신뢰감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때로 생글 웃는 수가 있었고. 그것은 옆에서 보기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대령이 국기 게양목처럼 몸을 꼿꼿이 하고 눈썹 아래에서 번갯불을 번쩍번쩍 하기 시작하면, 그 이유를 아는 것은 나중 일로 미루고 우선 나무에라도 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령은 절대로 남에게 행실을 잘하라고 주의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나 대령이 있는 데에서는 행실을 좋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모두가 대령 옆에 있고 싶어했다. 대개 대령은 일광과도 같은 존재였다 - 대령만 있으면 날씨가 좋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령의 얼굴이 흐리기 시작하면 한 30초 동안은 무섭게 어두워지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후부터 일주일 동안은 만사가 태평으로 돌아가니까. 아침에 대령과 노부인이 이층에서 내려오면 집안 식구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다음 톰과 봅이 술병이 들어있는 찬장으로 가서 맛이 독한 맥주를 한 잔 섞어서 그걸 대령에게 주었다. 대령은 유리잔을 손에 든 채 톰과 봅의 몫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톰과 봅은 머리를 숙이고는, "아버님 어머님에게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하면 대령 부부는 약간 머리를 숙이고는 "고맙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셋이서 그것을 마셔 버렸다. 봅과 톰은 컵 속에 넣은 설탕에다 한 스푼 가득히 물을 붓고, 소량의 위스키가 아니면 애플 브랜디를 따라서 나와 벅에게 주었다. 그러면 우리들도 노부부의 건강을 위하여 건배를 올렸다. 봅이 제일 맏이고 그 다음이 톰 - 키가 후리후리한 미남들로 아주 넓은 어깨와 검게 그을은 얼굴, 기다란 머리와 까만 눈의 소유자들이었다. 노대령과 마찬가지로 의관은 단정하게 횐 모시옷을 입고 있고, 차양이 넓은 파나마모를 쓰고 있었다. 미스 샬롯트는 스물다섯 살로 키가 크고 기품이 있어 보이고,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화를 내고 있지 않을 때는 더할 수 없이 호인이었다. 하지만 일단 화를 낼 때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소스라치게 하는 무서운 얼굴을 했다. 미인이었다. 그 동생 미스 소피아도 미인이었지만 조금은 종류가 다른 미인이었다. 비둘기처럼 상냥하고 귀여웠다 이제 나이 겨우 스무 살이었다. 집안 식구 하나 하나가 모두 자기 전용의 검둥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벅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 검둥이는 자못 편했다. 나는 별로 남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벅의 검둥이는 쉴 새라곤 조금도 없었다. 현재로선 이게 가족 전원이지만 전에는 더 있었다. 아들 셋이 있었는데 피살되었고, 그리고 에메라인은 죽었다. 노대령은 많은 농장과 백 명 이상이나 되는 검둥이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끔 10마일인가 15마일 떨어진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와서 5,6일씩 묶고 갔다. 그때 그들은 근처 강가에서 호탕하게 놀았으며, 낮에는 숲속에서 댄스와 피크닉, 밤에는 집에서 무도회를 열었다. 대부분이 친척들로, 남자들은 총을 가지고 왔다. 모두가 신분이 높은 사람들뿐이었다. 이 근처에 5,6세대로 되어 있는 또 하나의 특권 계급의 일문이 있었으며, 이름은 세퍼드슨이라고 했다. 이 집안도 그랜저포드 집안 못지않게 품위있고, 명문이며, 부자이고, 격식이 단정했다. 세퍼드슨 가와 그랜저포드 가는 우리집에서 두 마일쯤 상류에 있는 똑같은 나루터를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때로 집안 식구들과 함께 거기를 가면 세퍼드슨 가의 사람들이 훌륭한 말을 타고 거기 와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벅과 내가 숲속 깊숙이 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우리는 길을 횡단하려던 참이었다. 벅이 허겁지겁 서둘러 댔다. "어서 빨리. 숲속으로 숨어." 우리는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나뭇잎 사이로 저쪽을 내다보았다. 얼마 후에 훌륭한 몸차림의 청년이 말을 몰고 길 이쪽으로 달려왔다. 유유히 말 잔등 위에 올라앉아 있는 폼이 군인 같았다. 총은 안장머리 에 걸고 있었다. 나는 전에 한번 이 청년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하니 세퍼드슨 청년이었다. 벅의 총이 내 귀 바로 옆에서 땅 하고 터졌고, 하니의 모자가 머리에서 굴러 떨어졌다. 하니는 총을 움켜쥐자 우리들이 숨어 있는 장소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어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물거리지 않았다. 숲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숲은 우거져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보며 총알을 피했다. 그리고 하니가 두 번 벅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본 것인데, 얼마 후에 하니는 오던 길을 다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말을 몰고는 되돌아가 버렸다. 모자를 가지러 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쭉 뛰었다. 노대령의 눈은 잠시 번쩍거렸다. 기뻐서 그랬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 얼굴을 얼마간 평상시대로 하더니 부드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덤불 뒤에서 쏘는 건 좋지 못해, 왜 한길로 나가지 않았지 벅." "세퍼드슨놈들은 그렇게 안해요 아버지 그놈들은 늘 짬을 노려요." 벅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미스 샬롯트는 여왕처럼 머리를 쳐들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청년들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미스 소피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하니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제 혈색으로 돌아왔다. 나는 나무 아래의 옥수수 저장고 옆으로 벅을 끌고가 둘만이 있게 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넌 그 사람을 죽일 작정이었니, 벅." "그럼." "그 사람이 너에게 뭘 했길래." 그 사람. 아무것도 없지." "그럼 왜 죽이려고 했느냐 말이야." "이유는 그저 숙원이 있기 때문이야." "숙원이 란 뭐냐." "뭣이, 넌 어디서 자랐단 말이냐. 숙원이 원지도 몰라." "들은 적이 없으니까 그렇잖아. 얘기해 봐." "그래, 숙원이란 이런 거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싸우고 그 사람을 죽여 버린단 말이야. 그러면 그 피살된 사람의 형제가 처음 사람을 죽일 게 아냐. 그러자 그 양쪽 형제들이 서로 맞붙어서 죽인단 말이야. 이번엔 사촌들이 끼여들 게 아냐. 이렇게 해서 점점 모두 죽고 말게 되면 결국엔 숙원은 없어지고 마는 법이야. 하지만 빨리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이 걸려." "이 숙원도 오래 걸렸다구, 벅." "음, 그랬나봐. 30년인가 그 전에도 일어났나봐 무슨 일로 해서 귀찮은 일이 일어나 재판이 되고 만 거야. 그 재판에서 한쪽이 지고 말았으므로 진 쪽이 재판에 이긴 쪽을 총으로 쏴 죽인 거야. 물론 그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지.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야" "그 귀찮은 일이란 원인이 뭔데, 벅. 토진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잘 몰라." "그럼 쏜 편은 누구야. 그랜저포드 집 사람인가, 세퍼드슨 집 사람인가."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니. 아주 오래된 옛날 얘긴데." "누구 아는 사람은 없어." "그야 있지. 아빤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다른 노인들도 몇 사람은. 그렇지만 제일 먼저 뭣 때문에 싸우게 되었는지 그걸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많이들 죽었나, 벅." "음, 장례식이 얼마든지 있었어 그러나 늘 죽이는 건 아냐. 아빠도 사슴총알을 두서너 발 몸에 맞았지만 본래 몸이 가벼운 사람이니까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계셔. 봅은 칼로 몇 군데 찔렸고, 톰도 한 두 번은 다쳤어." "금년 들어서 죽은 사람은 없나." "음, 우리가 하나 죽였고, 놈들이 또 하나 죽였어. 석 달쯤 전에 내 사촌으로 열네 살 되는 버드가 강 저쪽의 숲속을 말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아, 글쎄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단 말이야 바보지 뭐야 쓸쓸한 곳에 왔을 때 뒤에서 말소리가 들리길래 돌아다보니 볼디 세퍼드슨 노인이 바람에 백발을 날리면서 손에 총을 들고 쫓아오는 게 아냐. 버드는 말에서 뛰어내려 덤불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지 않고서, 그 대신 노인을 떼어버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말을 몬 거야. 그래서 둘은 5마일 이상 떨어지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고 같은 간격을 둔 채 달렸지. 결국 노인 쪽이 따라붙어 버드는 이젠 틀렸다 하고 말을 세우자 홱 방향을 바꿨단 말이야. 총알을 앞에서 받기 위해서였지. 그래서 노인은 거기까지 와서 버드를 쏴 죽인 거야. 하지만 노인은 자기의 행운을 기뻐할 사이가 길지도 못했어. 왜냐하면 그후 채 일주일도 못 되어 우리집 사람들이 그 늙은일 죽이고 말았으니까." "그 늙은인 비겁한 사람이군." "천만에, 비겁자가 아냐. 세퍼드슨 집에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어. 한 사람도 없어. 그랜저포드 집에도 없구. 이봐, 그 늙은인 말이야, 어느 날 그랜저포드 집 식구 세 사람을 상대로 하여 30분 동안이나 버티어 나간 끝에 마침내는 이기고 말았으니까. 그 늙은인 말에서 뛰어내리자 조그만 장작더미 뒤로 들어가 말을 앞에다 놓고 총알을 피한 거야. 그런데 그랜저포드 집 사람들은 말은 탄 채 노인 주위를 뛰어다니며 쏘았단 말이야. 노인도 세 사람을 향해 쏘았지 노인과 말은 지쳐 다리를 절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우리 쪽 사람은 업혀서 올 정도였어. 하나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고, 하나는 다음날 죽었어 그렇지 겁쟁일 찾고 싶어도 세퍼드슨 집을 찾아선 소용없어 그 집엔 겁쟁일 하나도 낳지 않았으니까." 다음날 일요일에 집안 식구 모두 말을 타고 3마일쯤 떨어진 교회에 갔다. 사나이들은 각자 총을 한 자루씩 가지고 갔고, 벅도 가지고 갔다. 그들은 총을 무릎 사이에다 꽂기도 하고 가까운 벽에다 기대놓기도 했다. 세퍼드슨 집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설교는 왜 지루했다. 동포애니 뭐니뭐니 하는 지루한 소리만 늘어놓는 것인데, 그러나 모두들 참 좋은 설교였다고 칭찬하며, 돌아오면서도 그것에 관해서 연방 찧고 까불었고, 신앙이니 선행이니 관대한 은총이니 전세의 인연이니 하고 떠드는 소리가 산처럼 많았으므로 나에겐 그때까지 이렇게 힘든 일요일이라곤 처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점심이 끝난 후 약 한 시간이 지나서 집안 식구들은 모두 낮잠을 잤다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방에서 자고 있는 까닭으로 왜 지루했다. 벅과 개는 해가 내리쪼이는 풀밭에서 네 활개를 펴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나는 벅과 같이 쓰고 있는 방으로 올라가 나도 한잠 자볼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들 방 바로 옆방이 소피아의 방이었는데, 그 방문 앞에 상냥한 미스 소피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문을 가만히 닫고 나서, 너는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자 그녀는 자기를 위해서 무슨 일을 좀 해줄 수가 없겠느냐고, 그 얘길 아무에게도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길래,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는 성경책을 잊어 버리고 왔노라고, 교회의 자기 자리에다 다른 책 두 권 사이에 꽃아 놓고 왔으니 몰래 집을 나가 그걸 좀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다짐을 두었다. 나는 그대로 하겠노라고 대답을 하고 몰래 집을 빠져나가 교회에 갔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있는 건 돼지가 한두 마리 있을 뿐이었다.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고, 돼지는 여름에는 바닥이 찬 판자 마루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대체로 사람들은 가야 할 때에만 교회에 가지만 돼지는 그렇지 않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필경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구나. 처녀가 성경책으로 해서 저렇게까지 안달을 하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성경책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두 시 반'이라고 연필로 쓴 조그만 종이조각 한 장이 떨어졌다. 나는 성경책을 구석구석 찾아 보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통 알 수 없었으므로 종이조각을 도로 성경책 속에다 꽂았다. 집으로 돌아와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미스 소피아가 자기 방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방안으로 끌어 넣더니 문을 잠그고,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뒤지는 동안에 그 종이조각을 찾아내고 말았다. 그녀는 그것을 읽고 곧 희색이 만면해지며 아니 이건 어찌된 셈이야 하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나를 꼭 껴안고서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애니까 누구에게도 이 얘길 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다짐했다. 다음 순간 미스 소피아는 얼굴색이 새빨개지고 눈은 활활 타고 여간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적이 놀랐지만 호흡이 정상대로 되돌아오자 그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다시 미스 소피아가 이 종이를 읽었느냐고 묻길래 난 읽지 않았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다시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묻길래 쉽게 쓴 거라면 읽을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미스 소피아는 그 종이는 읽은 장소를 잊어 버리지 않도록 책 사이에다 꽃아 두는 서표에 지나지 않으니, 자, 이젠 나가서 놀라고 했다. 나는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강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후에 내 검둥이가 뒤를 쫓아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오자 이 애는 잠시 뒤와 주위를 살피고 나더니 나에게로 바싹 뛰어와 이런 말을 한다. '조지 나으리, 늪으로 가면 물뱀이 득실거리는 걸 보여 드릴 테유." 이건 참 이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애는 어저께도 이런 소릴 한 것이다 일부러 찾아서 갈 만큼 물뱀을 좋아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하는 것쯤은 알 일이 아닌가. 어쨌든 이 애는 어찌자는 셈일까. "좋아, 그럼 앞서라." 반 마일쯤 따라갔더니 늪지가 나왔다. 늪지로 들어가 또 반 마일쯤 발목까지 물에 적시며 건너갔다. 잠시 후에 조그만 평지가 나왔다 그 곳은 땅이 습하지가 않고 나무와 덤불과 덩굴이 우거져 있었다. "조지 나으리, 이제 두서너 걸음만 더 가보세요. 거기 있으니까. 난 전에도 봤으니까 이젠 또 보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을 하더니 그는 물 속을 철벅철벅 저쪽으로 걸어가서 금세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나는 좀더 걸어 온통 사방이 덩굴로 덮여 있는 침실만한 넓이의, 나무가 자라나 있지 않은 곳으로 나왔다.그러자 웬 사나이 하나가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건, 그건 다름 아닌 짐이 아닌가. 나는 짐을 깨웠다. 그리고 나와 또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짐이 깜짝 놀랄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짐은 놀라지 않았다. 기쁜 나머지 눈물이 글썽글썽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그날 밤 짐은 내 뒤에서 헤엄을 치고 있었으므로 내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그 소리를 듣긴 들었지만 붙잡히게 되어 다시 노예가 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여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난 좀 다쳐서 빨리 헤엄칠 수가 있었어야지. 그래서 나중엔 임자에게서 왜 떨어지고 말았지. 임자가 둑에 올라섰을 때에 난 임자에게 소릴 지르지 않아도 오른 뒤에 능히 따를 줄 알았어. 하지만 저 집을 보고 나서부터 난 슬슬 걸었지 뭐야. 너무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임자에게 무슨 소릴 하는지 통 들리지 않더군. 난 개가 무서워. 하지만 사방이 고요해 졌으므로 임자가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을 알았어. 그래서 난 숲속으로 들어가서 밤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했지. 아침 일찍 들일을 나가는 검둥이가 몇 지나다가 날 여기다 안내해 준 거야, 여기라면 물이 있으니까 개가 따라올 까닭도 없고 그래서 밤마다 그 친구들이 먹을 것을 날라다주고 는 임자 소식을 전해 준 거야." "왜 좀더 빨리 날 여기 데려오도록 내 잭크에서 말하지 않았지, 짐." "우리가 윌 할 수 있을 때까진 임잘 방해해도 소용없을 게 아냐, 허클. 하지만 이젠 우리들 걱정 없어 난 짬이 있을 때마다 솥과 먹을 것을 샀고, 밤에는 뗏목 수리를 하고...... "뗏목이 라니." "우리의 그 뗏목 말이야 " "그럼 우리의 뗏목이 산산조각나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안 깨지구말구. 다만 우리의 물건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우리가 그렇게까지 깊이 물 속에 잠기지 않고. 그리고 또 그렇게까지 그날 밤이 어둡지 않고, 그렇게까지 벌벌 떨고만 있지 않고, 그렇게까지 바보만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뗏목을 보았을 거야. 허나 보였건 안보였건 마찬가지야 차라리 안 보인 편이 더 나았어. 이젠 새것이나 다름없는 새 뗏목이 되었고. 잃어 버린 물건 대신 새 물건이 얼마든지 손안에 들어왔으니까" "대관절 어떻게 해서 짐은 그 뗏목을 또다시 손안에 넣은 거야. 붙잡은 건가, 짐 이." "무슨 수로 숲속에 있는 내가 뗏목을 붙잡을 수 있단 말이야. 천만에, 검둥이 몇이 강의 그 만곡부에 가라앉아 있는 나무에 걸려 있는 뗏목을 발견해 가지고 버드나무 속의 개울에다 감춰 둔 거야 그래서 그 뗏목이 누구의 것이냐고 서로들 떠들썩하게 야단을 치는 바람에 그 소리가 나 있는 데까지 들려왔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 뗏목은 너희들 누구의 것도 아니고, 나와 임자의 거라고 말하고는 싸움을 가라앉혔지 뭐야. 그러고 나서 너희들은 백인 신사의 물건을 훔쳐가지고 능지처참을 당하고 싶으냐고 해주었지. 여기서 내가 놈들 각자에게 10센트씩 주었더니, 놈들 모두 반색을 하며 좀더 뗏목이 떠내려와서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고 좋아하더군. 그 검둥이들은 내겐 아주 잘 해 주어 무슨 일이구 한번 부탁하기만 하면 돼. 두번 다시 부탁할 것도 없어. 그 잭크라는 애는 참 좋은 검둥이야. 게다가 아주 영리한 것이." "정말 그래. 짐이 여기 있는 얘긴 절대로 하지 않고, 나더러 오라고, 그러면 물뱀을 얼마든지 보여 주마고 그러는 게 아냐. 만일 무슨 일이 생겨도 발뺌이 된단 말이야. 우리가 같이 있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게 아냐. 또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 다음날 일은 그다지 쓰고 싶진 않다. 그저 간단히 적어볼 생각이다 . 새벽녘에 잠을 깬 나는 이쪽으로 돌아누워서 한참 다시 자보려고 생각한 것인데, 그때 사방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고요해진 것을 깨달았다. 아무도 일어나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늘 이런 일은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에 벅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이 생쥐처럼 잠잠하기만 하다. 집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장작더미 있는 곳에서 나는 잭크를 만났다. "대관절 어떻게 된 거야." 하고 내가 물었다. "아직 모르시는 건가유, 조지 나으리." "응, 몰라." "실은 말야유, 소피아 아씨가 집을 나가 버렸어유. 정말이야유. 밤새 몇 신진 모르지만 도망쳤어유. 몇 신지 아무도 몰라유. 저, 그 하니 세퍼드슨 도련님과 같이 살려고 도망친 거래나유. 그렇지 않을까 하는것이 모두의 생각이 야유. 집안 식구들은 30분 전에야 겨우 - 좀더 전일지 모르죠 - 그걸 알았지 뭐야유. 모두 1초라도 우물거릴 순 없었죠. 총이니 말이니 하고 그렇게 서둔 적은 한 번도 없었어유. 여자들은 친척을 부르러 달려갔고, 소올 나으리와 도련님들은 총을 집어들기가 무섭게 말을 집어타고는 강둑길을 쏜살같이 올라갔어유 그 젊은이가 소피아 아씨를 데리고 강을 건너기 전에 붙잡아 해치워 버리려구 말이 야유. 필경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벅은 날 깨우지 않고 가버렸구나." "아, 그럼요. 도련님까지 성가신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가 않았으니까 그렇죠, 집안 식구들은. 벅 도련님은 총에다 장진을 하고는 꼭 세퍼드슨의 개새끼를 하나 잡아온다고 큰소릴 하던뎁쇼. 세퍼드슨 집 놈들 우루루 떼로 몰려올 테니 재수만 좋으면 필경 하나쯤은 붙잡아 올 거 야유." 나는 강둑길을 빠른 속력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런데 얼마 후에 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기선이 닿는 장소의 재목 창고와 장작더미가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나무와 덤불 아래를 기어 적당한 장소에 나와 총알이 미치지 못할 미루나무 가지 위로 기어올라가 앞을 내다보았다. 이 나무 바로 전방에 높이 4피트 가량의 재목더미가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 뒤에 숨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안한 것이 천만다 행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4,5명의 사나이가 말을 타고 재목더미 앞 공지에서 욕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었다. 그리고는 기선이 닿는 장소 그 앞에 있는 재목더미 뒤에 숨어 있는 소년 둘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중 하나가 재목더미의 강 쪽으로 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총에 얻어맞았다 두 소년은 재목더미 뒤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을 다 볼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청년들은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고함소리를 지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재목더미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소년 하나가 일어나 재목더미 위에서부터 잘 겨누어서 말에 탄 사람 하나를 쏘아 떨어뜨렸다. 사나이들은 그 바람에 모두 말에서 뛰어내려 총에 맞은 사나이를 부축하여 재목더미 쪽으로 운반해 가려고 했다. 그 순간 두 소년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 소년이 내가 숨어 있는 나무 쪽으로 절반쯤 달려왔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사나이들은 그것을 깨닫고는 말에 올라타 소년들을 뒤쫓았다. 사나이들은 두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 그러나 완전히 따라설수는 없었다 소년들의 출발이 너무도 빨랐었기 때문에, 결국 추격도 아무 소용에 닿지 않았다. 두 소년은 내가 올라가 있는 나무 앞의 재목더미에 이르자 그걸 순식간에 넘더니 그 뒤로 재빨리 미끄러져 숨어버렸다 그래서 또다시 소년들은 사나이들에 대해서 유리한 지점을 점령하게 되었다 소년의 하나는 벅이고, 또 하나는 열아흡 살 정도된 몸집 이 호리호리한 청년이었다. 사나이들은 잠시 동안 미친 듯이 뛰어돌아다니더니 얼마 후에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사나이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벅에게 큰 소리로 이젠 가버렸다고 알렸다. 처음에 먹은 나무에서 들려온 내 목소리에 무슨 영문인지 전혀 알지를 못해 몹시 놀랐다. 벅은 나에게 잘 감시를 해서 놈들이 또다시 오면 알려 달라고, 그놈들은 무슨 간교를 부리러 간 것이니까 곧 다시 돌아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나무에서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러나 내려가지 않았다. 벅은 울며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고, 자기와 사촌형 조(이게 또 하나의 청년이었다)는 이제부터 오늘의 앙갚음을 단단히 할 판이라고 대단한 기세였다. 아버지와 형 둘이 죽었고, 상대도 두서넛 죽었다는 것이다. 세퍼드슨의 개새끼들은 아버지들을 잠복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형들은 친척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 세퍼드슨의 개새끼들은 세 사람에겐 지나친 강적이었다고 했다 나는 하니 청년과 미스 소피아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기뻤다. 그러나 하니를 쏘던 그날 놈을 쏘아죽이지 못한 것이 큰 한이라고 벅이 원통해 하는 꼴은 내가 지금까지 듣고 보던 중 가장 심한 것이었다 이때 갑자기 땅. 땅. 땅. 하고 계속해서 서너너덧 번 총소리가 울려왔다. 사나이들은 말은 타지 않고 도보로 몰래 숲속을 돌아 배후에서 나타난 것이다. 소년들은 강속으로 뛰어들었다. 둘 다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흐름을 타고 하류 쪽으로 헤엄쳐 내려가는 것을 사나이들은 둑을 따라 쫓아가면서 "저놈 죽여라, 죽여." 하고 외치며 총을 쏘았다. 이 소리를 듣고 나는 기분이 나빠서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다. 자초지종을 전부 여기다 적을 의사는 전혀 없다. 그런 짓을 하다간 또다시 기분이 나빠지니까. 이러한 광경을 볼 결과가 되고 말 것이었다면 차라리 그날 밤 둑에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했다. 이때의 경험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꿈에 되살아나온다. 나는 내리는 것이 무서워 컴컴해질 때까지 그냥 그대로 나무 위에 있었다 가끔 숲 저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고, 총을 든 한 무리가 말을 타고 재목더미 옆을 쏜살같이 빠져 나가는 것이 두 번 보였다. 이것으로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자못 기분이 무거워져 두번 다시는 그 집 근처로 가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나에게도 얼마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종이쪽지는 미스 소피아가 두 시 반에 어디서 하니 청년과 만나서 도망치자는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그 종이쪽지와 미스 소피아가 안절부절 못하던 그 이상야릇한 태도를 그녀 부친에게 얘기해야만 했을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부친은 미스 소피아를 방에다 가둬 놓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버렸을 테니까, 이런 무서운 소동은 일어나지 는 않았으리라. 나는 나무에서 내려와 강둑을 잠시 발소리를 죽여가며 살금살금 하류 쪽으로 걸어가, 물가에 시체가 두 구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육지로 끌어올려서 얼굴에다 보자기를 덮어 준 후에 되도록 빨리 그곳을 떠났다. 벅의 얼굴에다 보자기를 덮을 때 나는 좀 울었다. 나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해는 완전히 지고 말았다. 나는 집 근처에는 접근하지도 않고, 곧장 숲을 빠져 늪지로 나왔다 짐은 그의 섬에 없었으므로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크리크 쪽으로 달려가 어서 뗏목을 타고 이 무서운 땅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서 버드나무를 헤치며 걸어갔다. 뗏목은 간 곳이 없었다. 아아, 얼마나 가슴이 덜컹했던 것이냐. 거의 1분 동안은 숨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후에야 비로소 소리를 질러보았다. 그러자 25피트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임자였던가, 도련님. 소릴 지르는 게 아냐." 그것은 짐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반가운 목소리를 듣기란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둑을 약간 달려 뗏목으로 뛰어올랐다. 짐은 나를 만나서 반가운 나머지 나를 껴안았다 "아이구, 고마워라, 도련님 난 임자가 또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우. 잭크가 여기 와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총에 맞았음에 틀림없을 거라고 하길래 난 곧 뗏목을 크리크 어귀에다 밀어다 놓고, 잭크가 다시 와서 임자가 확실히 죽었다고 하면 곧 떠나려고 준빌 하고 있던 참이라우 임자가 돌아와서 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 , 정말." "옳지, 모든 게 잘 됐군. 집사람들은 날 찾아낼 순 없을 거야. 내가 총에 맞아 물에 떠내려 갔다고 생각할 테지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데 꼭 알맞은 물건이 거기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우물거리지 말고 어서 뗏목을 큰 강으로 내몰란 말야. 어서 되도록 빨리." 뗏목이 거기서부터 2마일 하류로 내려와 미시시피 강 한가운데로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 불안했다. 거기서 우리들이 신호등을 켜자 다시 한번 자유로운 안전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제 이래로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었으므로 짐은 나에게 옥수수 비스킷과 탈지유와 돼지고기, 양배추, 야채 등을 꺼내주었다. 적당하게 요리만 되어있다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맛있는 요리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짐과 얘기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나는 그 숙원에서 빠져 나을 수 있어서 무한히 기뻤으며, 짐은 짐대로 또 늪지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무한히 기뻐했다 결국 뗏목 이상으로 살기 좋은 집은 세상에 없다고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른 곳이라면 아주 갑갑한 것이 숨이 막힐 것만 같은데 뗏목만은 그렇지 않다. 뗏목 위라면 모든 게 자유롭고, 마음이 놓이며, 편하기 짝이 없다. 제 19 장 공작과 황태자의 출현 두서너 낱, 두서너 밤이 흘러갔다. 나로선 헤엄쳐 흘러가듯 지나갔다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조용히, 평온하게, 즐겁게 흘러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 근처는 강폭이 지독히 넓었으며 때로는 한 마일 반이나 되는 수도 있었다 우리는 밤에는 활동하고, 낮에는 누워서 쉬었다. 밤이 끝나고 먼동이 틀 무렵이 되면 우리는 강을 내리는 것을 그만두고 둑에다 뗏목을 매는 것인데, 대개 모래톱 아래의 물이 고여 있는 곳에다 세워놓고, 미루나무와 버드나무의 유목을 잘라서 그 위에다 덮어 뗏목을 감추었다. 그리고는 흘림낚싯줄을 흘린다. 다음에 우리는 원기를 돋우고 몸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서 강 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치고 그것이 끝나면 이번에는 물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사주 바닥에 앉아서 먼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방은 죽은 듯 고요하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요함, 그것만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잠을 자고 있는 것만 같다. 다만 가끔 먹 개구리가 큰 소리로 울어대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 위를 저 끝까지 내다보고 있으면 우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희미한 선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저쪽 둑의 숲이다 그밖엔 아무것도 알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하늘에 한 군데만 뿌우연 데가 나타나며,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갔다. 다음 강이 저 멀리서 뿌옇게 밝아왔다 그리고 이젠 검은 색은 찾을 길도 없이 회색으로 변해 갔다 저 멀리 꺼뭇꺼뭇 흑점이 떠있는 것은 장삿배나 그런 등속의 배였다 그리고 긴 검은 줄은 뗏목이다. 때로는 큰 노가 찍찍하는 소리와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수도 있었다 그만큼 사방은 고요했다.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다. 그러는 사이에 물 위에 무늬가 나타나 보였다 그 무늬의 모양으로 해서 그곳에는 빠른 흐름 밑에 물 속에 잠긴 나무들이 있고, 물이 그곳에 부딪쳐 갈라져서 저런 무늬가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안개가 수면으로 떠오르며 동쪽 하늘이 훤해지고, 그것에 따라 강물도 훤해지며 여기서 훨씬 먼 저쪽 둑 위의 숲 가장자리에 통나무 오두막집 한 채가 있는 것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재목장 인 것만 같았다. 그 쌓아올린 폼이 엉터리의 손으로 해서 된 것인지 온통 엉성해서 얼마든지 개가 빠져 나갈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그때 또 산들바람이 일어나 숲과 꽃을 스쳐 불어오는데, 시원하고 신선하며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버린 죽은 가오리 또는 그와 비슷한 죽은 생선 위를 불어오는 까닭으로 아주 코를 찌를 정도로 그 냄새가 고약할 때도 있었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밤은 완전히 새어 가고, 세상 만물이 아침 햇빛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이 시각이 되면 웬만한 연기쯤은 눈에 띄지 않는 까닭으로 우리는 낚싯줄에서 고기를 떼어 따뜻한 조반을 만들었다. 그후 우리는 쓸쓸한 강을 내다보고, 할 일도 없이 무료하게 있으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꾸벅꾸벅 잠이 온다. 얼마 후에 잠을 깨어 무엇 때문에 잠이 깼나 하고 사방을 둘러보면 그것은 빵 빵 빵 소리를 내며 강을 올라가는 기선이었다. 너무도 멀리 떨어진 저쪽 둑을 따라 올라가는 까닭으로 외륜차가 고물에 달려 있는지 현측에 달려 있는지를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이고, 그밖의 것은 아무것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후 한 시간쯤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전한 고독뿐이었다. 다음 먼 쪽에 뗏목 하나가 떠내려갔다. 그리고 얼빠진 놈 같은 사나이 하나가 그 위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뗏목 위에선 거의 언제든지 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것을 하는 것인데, 이제도 도끼가 번쩍 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이지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 도끼가 다시 한번 위 로 올라가 사나이의 머리 위까지 왔을 때 그때서야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 물 위를 전해 오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무료하게 고요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루를 보냈다 일단 짙 은 안개가 내리게 되면 지나가는 뗏목 및 그밖의 것들은 기선과의 충돌을 피해서 양은냄비를 두들겼다 거룻배나 뗏목 같은 것은 우리들의 바로 옆을 지나가는 까닭으로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 욕소리, 웃음 소리 등이 들렸다 - 이러한 것들이 똑똑히 들리는 것이지만 사람 모양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령이 공중에서 그렇게 장난을 치고 있는것만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짐은 유령이라고 믿었지만, 그러나 나는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이 빌어먹을 놈의 안개 같으니라구' 하는 유령이 어딨담." 밤이 되기가 무섭게 우리는 출발하여 강의 한가운데 근처에까지 오면 뗏목을 떠내려가는 대로 내맡기고는 파이프에 불을 붙여 물고, 발을 물 속에 담그고는 온갖 얘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주야를 가릴 것 없이 모기가 심하지 않을 때엔 늘 나체로 있었다. 벅의 집안 식구들이 나에게 지어준 새옷은 너무도 좋아서 입기에 불편했고, 게다가 나는 본래 옷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질이었다. 때로는 광막한 강 위에 오랫동안 우리들만 있을 때도 있었다. 강 저쪽은 둑과 섬 어쩌다가 번쩍 하고 비치는 것이 있었지만, 이것은 오두막집 창가의 촛불 광선이고, 때로 물 위에 하나 둘 번쩍 하는 것은 뗏목이 아니면 거룻배였다. 그러한 뗏목의 하나에서 바이올린 소리나 노랫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었다. 뗏목 생활이란 여간 멋진 것이 아니다. 머리 위에는 온통 별을 박은 하늘이 있다. 우리는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별은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생긴 것일까 토론한다 짐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나는 저절로 된 것이라고, 저렇게 많이 만들자면 여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럴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짐은 달이 낳은 것이라고 화제를 돌렸다. 그것은 일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으므로 나는 이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구리가 그에 못지않게 많은 알을 낳는 것을 본 일이 있으므로 물론 달인들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유성도 가끔 보았으며, 그게 길게 꼬리를 끌고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짐은 저것이 썩어서 하늘에서 버림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한 번인가 두 번 밤중에 기선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것을 본 것인데, 가끔 연통에서 불꽃을 무수히 내뱉어 놓아, 그것은 마치 비처럼 강 속으로 떨어져 절경을 이루었다. 얼마 후에 기선은 모퉁이를 돌아 그 바람에 불빛은 삽시에 꺼지고 말고, 소란한 소리도 뚝 그치고 말아 강은 또다시 침묵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기선이 일으킨 파도는 그 배가 사라진 지 한참만에 우리의 뗏목에까지 미쳐 그 바람에 뗏목이 약간 흔들렸다. 그후로는 언제까지 정숙만이 계속될 뿐 들려오는 소리라곤 개구리나 그런 등속의 소리 정도의 것들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둑에 있는 사람들은 잠자리에 들고, 그후 두서너 시간동안 양쪽 둑은 다같이 암흑 속에 잠기고 만다. 오두막집 창가에는 이젠 불빛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 불빛이 우리들의 시계 구실을 한다. 또다시 보인 최초의 등불은 아침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면 우리는 뗏목을 감추고는 즉시 매어 둘 장소를 찾는 것이다. 어느날 아침 먼동이 틀 무렵에 나는 카누를 한 척 발견하고 급류 - 불과 200야드밖엔 되지 않았다 - 를 횡단하여 본류의 둑에 이르러 딸기를 딸 수 있을까 하고 한 마일쯤 사이프러스 숲 사이의 개울을 올라갔다. 마침 소들이 밟아서 생긴 길 같은 것이 개울을 건너지르는 곳에까지 왔을 때, 두 사나이가 그 길을 허둥지둥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추격하고 있을 때 언제나 몰리고 있는 편이 내가 아니면 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이젠 모든 게 다 글렀구나 하고 단념했다. 나는 급히 도망쳐 버리려고 했는데, 그때에는 벌써 사나이들은 꽤 가까이까지 접근해 있었으며, 큰 소리로 사람 좀 살려 달라고 나에게 애원하고 - 자기들은 아무 나쁜 일도 한 것이 없는데 몰리고 있다고 - 이제 뒤에서 사람들과 개들이 쫓아오고 있다고 애원했다. 두 사람은 그대로 개울 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 내가 말했다. "그런 짓을 해선 안 돼요. 개 소리도 말굽 소리도 아직 들리지 않는데 뭘 그래요. 덤불 속을 헤치고, 개울을 좀 올라갈 만한 시간은 있어요. 그 다음에 물 속으로 들어가 여기까지 걸어와서 타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개를 골릴 수 있어요, 냄새를 딴 데다 뿌리는 것이 되어." 두 사람은 나 하라는 대로 했고, 그들이 카누에 올라타자 나는 뗏목을 매어 놓은 사주를 향해 젖기 시작했다. 그후 5분인가 10분인가가 지나자 멀리서 개와 사람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개울 쪽으로 초는 것은 그 소리로 알 수 있었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는 잠시 머뭇머뭇하는 모양이었으나, 우리들이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어 목소리마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숲을 한 마일쯤 떨어져 강으로 나왔을 때는 모든 것이 다 고요해졌다. 우리는 사주로 건너와 미루나무 밑으로 안전하고 무사하게 숨어 버릴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70인가 그 이상으로 대머리에다 순백색에 가까운 구레나룻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다 낡은 엉망진창인 소프트모에다 기름때가 찌든 푸른색의 털셔츠. 장화 속에 틀어넣은 다 해진 능직면포 바지 차림인데. 그 바지는 집에서 만든 멜빵이 한쪽만 매달려 있었다 팔에는 매끈매끈한 놋쇠 단추가 달린 다 낡은 능직면포의 연미복 비슷한 저고리를 걸치고 있고, 두 사람 다 커다란 배가 부른 쥐에게 뜯긴 듯한 융단으로 만든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다. 또 한쪽 사나이는 30세 가량으로. 이것도 노인 못지않은 초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모두 쉬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우선 안 것은 이 두 사람이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노형은 어쩌다 이런 일에 걸려들었단 말이오" 민대머 리가 젊은 사나이에게 물었다. "뭘요, 난 치석을 벗기는 약을 팔고 있었죠, 그 약은 사실 치석도 벗기지만 대체로 법랑질마저 함께 벗겨 버린단 말이에요. 한데 나는 하룻밤쯤 한 고장에서 너무 오래 있다가 이젠 삼십육계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 그 마을 이쪽 길에서 임잘 만난 거죠. 그랬더니 임자 하는 말이, 놈들이 날 쫓아오고 있으니 좀 도와 달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바로 나도 마찬가지로 귀찮은 일에 걸릴 것만 같아, 임자와 같이 삼십육계를 부르자고 했을 뿐이오. 내 얘긴 이것뿐이외다. 자, 그럼 임자 얘긴" "글쎄, 내 얘기란 건 거기서 한 주일 남짓하게 대단치도 않은 금주부활운동을 해서 술꾼들을 단단히 먹여댄 탓으로 적은 것 큰 것 할 것 없이 여편네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었어 보란 말이야, 하룻밤에 수입이 5달러 내지 6달러나 올랐단 말이야 - 입장료가 한 사람당 10센트, 애와 검둥이는 무료로 해서 - 그래서 일은 점점 번창해져 가는 판이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어젯밤에 내가 사람 눈을 피해서 한 잔 들이킨다는 소문이 퍼졌단 말이야. 오늘 아침 검둥이가 하나 와서 날 깨워 일으켜 마을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말을 타고 이제 몰려오는 중이라고 하는 게 아냐, 머지않아 나에게로 와서 날 먼저 떠나게 하고 반 시간쯤 지난 후에 날 추격하여 붙잡을 수 있으면 붙잡아 가지고 필경 나에게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달아 철봉에 태워 이리저리 끌고 다니겠다고 하더라고 가르쳐 주었단 말이야. 난 조반을 기다릴 판이 아니었지. 배가 고픈 게 다 뭐야" "그럼, 영감" 하고 젊은이가 끼여들었다."우리 공동으로 장사를 해볼까요......어떨까요." "나쁠 건 없지 노형 장사는 뭐지, 주로." "직업은 장돌뱅이 인쇄공이죠. 매약에도 약간 손을 대고 있고, 배우 노릇도 하고. 물론 비극 쪽이지만 기회가 있으면 최면술과 골상학에도 손을 대고, 좀 장소가 달라지면 노래나 지리 따위도 가르치고, 때로는 연설도 해치우는 때도 있죠. 그야 못하는 것만 빼놓고는 죄다하죠. 닥치는 대로 힘드는 일만 아니라면 자, 그럼 노인 직업은 뭡니까." "난 한참 젊었을 땐 의사 노릇을 왜 잘했단 말이야. 손바닥 요법이 내 특기로서, 암이니 중풍이니 그러한 등속을 고치는 거야. 그리고 누구든지 사실을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운수점도 곧잘 치지,설교도 그렇지만 야외 설교니 전도 방면도 내 특기란 말이야. "잠시 동안은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으나 얼마 후에 젊은이가, "아아" 하고 한숨을 지었다. "아아라니. 거 무슨 소리요." 민대머리가 따지고들었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되고 말았고, 이런 작자들과 짝패가 될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리고 젊은이는 다 헤진 헝겊으로 눈 가장자리를 훔치기 시작했다. "에이, 이 천벌을 받을 놈 같으니라구. 네 짝이 못 될 게 어디 있단 말이냐, 이 내가" 민대머리는 꽤 거만하게 버티며 내뱉았다. "그야 그렇지, 내겐 지나칠 정도죠. 그 가치가 있구말구요 그만한 높은 지위에서 이러한 천한 몸으로 날 떨어뜨린 것은 누구죠. 이 나예요. 여러분, 난 여러분을 비난하고 있는 건 아니올시다 천만에. 비난할 턱이 있나요. 당연한 응보죠. 차디찬 세상이 그 최악을 다하라죠. 난 하나만은 알고 있어요. 날 위한 무덤이 어디 있다는 말이에요 이 세상은 여전히 다를 것 없이 행동하며, 나에게서 뭐나 다 빼앗아가겠죠. 사랑하는 사람들 재산. 모든 것을 하지만 무덤만은 빼앗아갈 수 없어요. 언젠가 나는 그 무덤 속에 누워 모든 걸 잊어 버리고 내 불쌍한 깨진 가슴은 안식을 구할 것입니다" 이러면서 계속 울기만 했다. "불쌍한 깨진 내 가슴이라니 배꼽이 하품을 할 일이군." 민대머리도 지지 않았다 "뭣 땜에 네 놈의 불쌍한 깨진 가슴을 우리에게 갖다붙이는 거야. 아무 죄도 없는 우리에게." "그렇구말구요, 없구말구요 난 뭐 임자들을 책하는 건 아니올시다. 여러분. 난 나 스스로 타락했으니 까요. 그렇죠, 나 스스로 타락하구말구요 괴로워하는 건 당연하죠. 정말 당연합니다. 한탄하는 게 다 뭐예요." "어디서 타락했다는 거야. 어디서 타락한 거야." "아아, 임자들은 믿지 않을 테죠. 세상사람은 누구 하나 믿어 주지 않아요. 내버려두세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내 신분의 비밀은 ...... "신분의 비밀이라구. 설마 ...... "여러분." 하고 젊은이는 엄숙한 어조로 돌아가, "여러분에게는 터놓기로 하겠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사실 나는 공작이올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짐의 두 눈은 튀어나왔다. 내 눈도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자 민대머리가 다시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구" "정말입니다. 브릿지워터 공작의 장남인 내 증조부는 맑은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서 전세기 말경 이 나라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결혼하고, 자식을 하나 남겨 놓고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바로 이와 동시에 그의 부친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간 공작의 차남이 작위며 재산을 횡령하고 말아 어린애인 정당한 공작은 무시되고 말았죠. 나는 그 어린애의 직계 자손입니다. 나는 정당한 브릿지워터 공작입니다. 그런 내가 이처럼 혼자 쓸쓸히 높은 지위에서 끌어내려져, 고독으로, 사람에게 몰리고, 차디찬 세상으로부터 는 멸시를 당하고, 다 헤진 옷을 입고, 피로할 대로 피로해졌고, 상심에 젖어 버렸고, 그리고는 뗏목의 악당들과 한 무리가 될 만큼 타락해 버렸습니다" 이 말에 짐은 여간 동정하지 않았고, 나도 동정했다. 우리는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 그다지 위로는 되지않는다 자기 신분을 인정해 줄 마음만 있다면 그게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자기에게 얘기를 걸 때에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각하'니 '경'이니 하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며, 또는 다만 그저 '브릿지워터'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은 이렇든 저렇든 칭호이고 이름이 아니니까. 그리고 또 누군가 하나 식사시에는 자기 시중을 들며, 하라고 하는 일은 제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무엇이고 간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아주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대로 했다 짐은 식사시에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거기 서서 시중을 들었고, "각하,이걸 좀 잡수시렵니까. 이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고, 공작에게는 이게 무척 기분이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인 쪽이 입을 봉하고는 말이 없었다 별로 입을 여는 일도 없이 공작이 시중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으로 무언지 가슴속에 생각이 있다는 눈치였다. 오후가 되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이, 브릿지워터, 난 사실 임자를 불쌍하다고 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한 건 임자 하나만은 아니란 말이야." "나 혼잔 아니라구." "임자는 하나만은 아니지. 높은 신분에서 억울하게 떨어진 건 임자 하나만은 아니 란 말이야." "거 , 안됬군" "그렇구말구, 신분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임자 하나만은 아냐," 이러더니, 어럽쇼. 노인은 울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왜 이러슈. 어떻게 됐다는 거예요." "브릿지워터 , 임자 신용해도 좋을까"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죽어도 입밖에 내놓지 않겠소이다." 공작은 노인의 손을 잡고 몹시 힘을 주었다 "임자의 비밀 말해 보라구요" "브릿지워터, 난 그전 프랑스의 황태자외다" 이 말에 짐과 나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뜬 것은 물론이다. 그러자 공작이 "임자 뭐라구요" 하고 물었다. "그렇소이다. 친구여 이건 너무도 뻔한 사실이외다. 임자의 눈은 지금 이 순간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의 아들인 그 불쌍한 행방불명된 황태자 루이 17세를 보고 있는 거외다 " "당신이오 그 나이로 천만에 샤를마뉴 대제라면 어때요. 암만 젊 게 쳐도 6,7백 살은 돼 있을 테죠, 틀림없이 당신 나이는." "고생을 한 탓이죠 브릿지워터 고생을 한 탓이외다. 고생이 머리칼을 이렇게 백발로 만들어 버렸고, 이렇게 빨리 대머릴 만든 거죠. 그렇소이다. 신사 여러분, 능직면포의 의복을 입고, 초라한 꼴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나라에서 내쫓기고, 밟힐 대로 밟혀 한참 고생을 하고 있는 정당한 프랑스의 국왕은 이렇게 여러분의 눈앞에 서 있는 거외다" 그는 어찌나 몹시 울어댔던지 나와 짐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우리는 매우 측은하게 생각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람과 함께 있게된 것이 기쁘게도 그리고 자랑거리로도 생각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노인도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짓을 해도 소용없다. 죽어서 이 모든 고생으로부터 모면되는 것만이 상팔자다. 하기야 사람들이 자기에게 그 신분에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자기에게 얘기를 걸 때에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반드시 '폐하'라고 부르며, 식사시에는 우선 남보다 먼저 자기에게 시중을 들고, 자기 앞에선 앉으라고 할 때까지 있어 주면, 그래도 얼마 동안만은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명랑해지는 수가 가끔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짐과 나는 그를 폐하 대우를 하기 시작했고, 이일 저일 그의 일을 보살펴 주었고, 그가 앉아도 좋다고 할 때까지 서 있었다. 그 효과가 대번에 나타나 그는 만면에 희색이 가득 차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공작은 왕에 대해서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이 결과에 대해서 자못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왕은 공작에 대해 아주 친하게 대했다 그리고 공작의 증조부도 브릿지워터 공작 일족 전부도 내 선제께 선 친하게 대해 주셨으며 궁중 출입을 허락했노라고 했다. 그러나 공작이 언제까지나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왕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젠 별수없이 우리는 싫증이 날 정도로 함께 이 뗏목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단 말이야. 그러니 그렇게 임자가 우거지상을 해도 소용없지 않나. 다만 마음만 서먹서먹할 뿐이란 말이야. 내가 공작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그건 내 탓이 아니고, 임자가 왕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도 그건 임자의 탓이 아냐, 그러나 마음을 썩질 건 없어. 만사를 운명에 맡기고 하는 데까지 해본다는 것이 내 목표야. 우리가 여기오게 된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단 말이야. 먹을 것에 부족은 없고, 퍽 맘이 놓여지고 말이야. 자, 공작이여, 악수하자구, 그리고 우리 모두 친하게 해나갑시다." 공작이 악수를 하는 것을 보고 짐도 나도 여간 기쁘지 않았다. 이것으로 꺼림칙하던 마음이 모두 가시게 되어 우리는 어쨌든 마음이 놓였다 어떠한 불화도 뗏목 위에 있고 보면 여간 비참한 일이 아닐 테니까. 뗏목을 타고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전원이 만족하고, 서로서로 올바르고도 친절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쟁이들이 왕도 공작도 아니고, 그저 천한 사기꾼이며 엉터리라고 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않았으며 얼굴에도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혼자의 가슴속에만 넣어두고 있었다.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해두면 자연 싸움도 일어나지 않고, 귀찮은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놈들이 자기들을 왕이니 공작이니 하고 우리들에게 그 호칭을 원한다면 그것이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는 한 나는 반대하지는 않았다. 또 짐에게 얘기해도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고 해서 짐에게도 잠자코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서 무엇 하나 배운 것이 없다고는 하더라도 이런 종류 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나가는데 제일 좋은 방법은 놈들 마음대로 내버려둔다고 하는 이 일 하나만은 배운 것이었다. 제 20 장 두 놈의 악당 두 놈은 우리들에게 왜 여러 가지 일을 물으며, 왜 뗏목을 그렇게 나뭇가지로 덮어 두느냐고, 어찌해서 낮에 강을 내리지 않고 쉬고 있느냐고, 짐은 도망중인 검둥이냐고, 이러한 일들을 알고 싶어했다. 나는 대답했다. "천만에요. 도망중인 검둥이가 남쪽으로 가요." 그렇지, 남쪽으로 도망치는 법은 없지, 하고 놈들도 맞장구를 쳤다. 나는 사태를 뭐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집 식구들은 미주리 주 파이크 군에서 살고 있었어요. 난 거기서 태어났지요. 그리고 나와 아빠와 동생 아이크 외엔 모두 죽어 버렸어요. 아빠는 집을 정리하여 자기는 오린즈 하류 44마일 지점에서 조그만 농장을 가지고 있는 벤 숙부네 집으로 가서 살겠다고 했어요. 아빠는 아주 가난한데다가 빛도 얼마간 있었으므로 그걸 모두 청산해 보니까 남은 거라곤 돈 16달러와 검둥이 짐뿐이었어요. 이걸로선 3등이건 그밖의 어떤 식으로든 1400마일의 여행을 하기엔 부족했단 말이야요. 그런데 강의 물이 불었을 때 어느날 아빠는 하나의 행운에 걸려 이 뗏목을 붙잡은 거예요. 그래서 이걸로 오린즈까지 내려오게 된 거지 뭐예요. 한데 아빠의 행운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고, 어느날 밤, 기선이 뗏목의 앞쪽 한 귀퉁이를 그만 들이받고 말아, 그 바람에 우리는 모두 강에 빠지고 말아 타를 아래로 파고들어 갔어요 짐과 나는 무사히 물 위로 떠올랐지만 아빠는 취해 있었고 아이크는 네 살이었으므로 결국 이 둘은 떠오르지 못했어요. 그후 하루 이틀 동안 우린 아주 혼이 났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늘 스키프로 와서는 짐이 도망친 검둥이임에 틀림없다고 하면서 내게서 빼앗아가려 고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젠 이 이상 낮엔 강을 내리지 않기로 했어요. 밤이라면 아무도 성가시게 구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공작이 이 말을 받았다. "원한다면 낮에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테니 내게 맡기면 어때. 잘 궁리해 볼 테니까 말이다. 잘 궁리를 해서 잘 될 수 있는 계획을 하나 세우지. 하지만 오늘은 그만두기로 하자. 저 건너 마을의 옆을 대낮에 지나는 것은 좋지 못해. 안전하지 않단 말이야." 저녁이 되면서 하늘이 컴컴해지고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멀리 지평선에 가까운 얕은 하늘에서는 번갯불이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하며, 나뭇잎이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왜 험상궂은 날씨가 될 것이라는 것은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공작과 왕은 잠자리를 보러 들어갔다. 내 침대는 짚으로 된 것으로 짐의 것보다는 나았다. 짐의 침대는 옥수수 껍질로 된 것이며, 옥수수 껍질 침대에는 반드시 옥수수 속이 여기저기 섞여 있어 몸에 찔려 아팠고, 또 구르면 마른 쩝질이 쌓아올린 가랑잎 위를 구르는 것 같은 소리가 나 잠이 깨고 만다 그래서 공작은 내 침대를 자기의 것으로 하겠다고 한 것인데, 왕이 그대로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옥수수 껍질 침대는 내가 잘 곳이 못 된다고 하는 것을 신분의 차이가 당연히 그대에게 가르쳐 주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각하는 옥수수 껍질 침대를 택하도록 하라구" 다음 순간 짐과 나는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고 몹시 마음을 조렸다 그런 만큼 공작이, "압제의 쇠 발뒤꿈치에 짓밟혀 늘 진창 속에 처박혀 있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오, 불운은 한때는 고만하였던 내 영혼을 파멸시켜 놓았다구요. 복종하죠 굴복하죠. 그것이 내 운명이니까요. 이 세상에서 나는 외톨박이올시다. 괴롭혀 주십쇼, 그걸 난 참을 수 있습니다" 했을 때는 참으로 기뻤다. 우리는 완전히 사방이 어두워지자 곧 출발했다 왕은 강의 한가운데로 나가 그 마을의 훨씬 하류에까지 나을 때까진 불을 켜선 안 된다고 명령했다 얼마 후에 조그마한 불빛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 마을이었다. 반 마일쯤 떨어진 지점을 무사히 통과했다. 4분지 3마일쯤 내린 후에 신호등을 켜달았다. 열 시쯤 되었을 때 비가 몹시 퍼붓기 시작했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고, 번갯불이 번쩍번쩍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왕은 우리 둘에게 날씨가 가라앉을 때까지 망을 보고 있으라고 하고는, 자기와 공작은 침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열두 시까지는 나는 비번이었지만 비록 침대가 있었다하더라도 침대 속으로 들어 가지는 않았으리라. 이러한 폭풍우는 그저 매일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아, 얼마나 지독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이냐. 1초인가 2초마다 번갯불이 번쩍 하고 반 마일 사방의 횐 파도를 비춘다. 섬들은 비 속에 잠겨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바람에 불려 몸부림치고 있는 나무들이 보였는가 하면, 거기 또 우지끈 뚝딱. 하는 천등소리 - 땅 땅 땅땅땅땅. 땅땅땅 - 천둥소리는 우르릉하고 중얼거리면서 멀리 사라진다 그러자 번갯불이 하나 번갯불이 큰놈이 온다. 나는 몇 번씩이나 하마터면 파도 속에 횝쓸리고 말 뻔한 경우를 여러 번 겪었지만 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무도 걱정되지 않았다. 번갯불이 끊임없이 사방을 비춰주었고, 도처에서 번쩍 번쩍 하였으므로 뗏목 머리를 이러저리 돌리며 물 속에 가라앉아 있는 나무를 피할 만한 시간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밤 0시부터 새벽까지 망을 보게 되어 있었는데, 열두 시경이 되자 졸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짐이 두 시까지 대신 해주겠노라고 했다. 참으로 짐은 늘 이처럼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었다 내가 자러 기어들어가자 왕과 공작이 다리를 뻗칠 대로 뻗치고 누워 있어 누울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밖에서 잤다. 날씨가 따뜻했으므로 비 같은건 문제도 되지 않았고, 파도는 이제는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두 시경에 또다시 높아졌으므로 짐은 나를 깨우려고 했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깨우지는 않았다. 아직 파도는 위험할 정도까지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얼마 후에 굉장히 큰 파도가 밀려와 나를 물 속으로 휩쓸어 갔기 때문이다. 짐이 죽겠다고 깔깔 웃어대었다. 어쨌든 저렇게 쉽게 웃어대는 검둥이는 둘도 없었다. 이번엔 내가 망을 보고 짐이 누웠는데, 금세 잠이 들어 쿨쿨 코를 골았다. 얼마 후 폭풍우는 완전히 가라앉았고, 나는 짐을 깨워 최초에 보 인 강둑 위 오두막집의 불빛으로 뗏목을 그날의 은닉장소로 몰아넣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왕은 더러운 트럼프를 한 틀 꺼내더니 공작과 둘이서 한 번에 5센트씩 걸고는 잠시 세븐 업을 했다 얼마 후 싫증이 나자 둘은 소위 '유세계획 수립'이라는 걸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공작은 여행가방을 뒤져서 인쇄한 조그마한 광고지를 여러 장 꺼내어 큰 소리로 읽어 나갔다. 그 중 한 장에 '유명한 파리의 아르망 드몽딸방 박사'는 어떤 장소에서 아무 날에 입장료 10센트로 '골상학의 강연'을 한다. 그리고 '골상도는 한 장에 25센트로 공급한다'는 사연이 쓰여 있었다. 공작은 이게 바로 자기라고 했다. 또 한 장에서는 공작은 '세계적 명성을 떨친 세익스피어 극의 희극배우, 런던, 두루리좌 전속 2대째의 개릭으로 되어 있었다. 다른 광고지에서는 여러 가지 변명을 가지고 여러 가지 조화를 부렸다. '점치는 지팡이'로 땅 속의 물과 금을 찾는다거나, 마녀의 주문을 쫓는다거나, 안 하는 일이 없었다. 얼마 후에 공작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극이 되고 보면 난 통 맥을 쓸 수 없단 말이야. 근데 폐하, 임자는 이제까지 무대에 서 본 일이 계슈." "없는데." 왕의 대답이다. "그럼 사흘이 되기 전에 무대를 밟게 해드리지, 몰락한 폐하. 제일 먼저 들어서게 될 큰 마을에서 공회당을 빌려가지고 (리처드 3세)의 검극 장면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을 하기로 합시다. 그래 어떻겠소, 임자 생각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가릴 것 없이 그야 전력을 다해서 하지. 헌데 말이오, 노형, 난 연극일은 아주 캄캄 소경이고, 또 그다지 본 일도 없구려. 선친께서 궁전에서 연극을 시키실 때엔 난 아주 꼬마였으니까.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건가, 임자 생각은." "드러누워 떡먹기지." "자, 그럼 됐어. 어쨌든 난 뭐든 좀 색다른 것이 하고 싶어 주먹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iN ┤τ└σ┐i ??▒Γ?? ???├┤┘. "그래서 공작은 로미오는 어떠한 인물이고 줄리엣은 어떠한 인물이라고 하는 것을 낱낱이 왕에게 설명하고는 자기는 늘 로미오의 역을 맡아 했었으니까 왕은 줄리엣 역을 맡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보 공작 줄리엣이라는 게 그렇게 젊은 처녀라면 이 내 대머리와 횐 구레나룻 수염은 여간 이상하게 보일 게 아니겠느냐 말이오." "뭘요 별 걱정 다하슈 이런 시골 촌놈들이 그런 걸 알아보면 제법이게요. 게다가 의상을 쓴다니까 그럼 아주 딴 사람으로 뵈죠. 줄리엣은 발코니에 나와 자기 전에 달빛을 즐긴단 말이야. 횐 잠옷에다 술이 달린 침모를 쓰고. 여러 가지 역에 쓰는 의상이 여기 있어요." 공작은 커튼용 갱 사천으로 만든 의상을 두서너 벌 꺼내어, 리처드 3세와 그 상대역의 중세풍 갑옷이라고 설명한다. 그 다음에 긴 무명천으로 만든 잠옷과 그에 알맞은 술이 달린 침모도 꺼내들었다. 이걸 보고 왕은 만족했다. 그래서 공작은 책을 내놓고 어떠한 식으로 하는지 그걸 보이기 위해서 손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껑충껑충 뛰어다녔고, 동시에 실제 연기까지 하면서 아주 뻐겨대는 득의 만만한 태도로 대사를 읽어나갔다. 그 다음에 왕에게 그 책을 주며 자기 대사를 외우라고 했다. 강의 만곡부의 하류 3마일 지점에 초라한 조그마한 마을 하나가 있었다 공작은 점심을 끝마친 후 낮에 강을 내려가도 짐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날 염려가 없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고 하면서 마을로 가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결정해 보겠노라고 했다. 왕도 무슨 좋은 일이 얻어걸릴 게 있나 가보고 오겠다고 했다. 마침 커피가 떨어졌으므로 짐은 나에게 같이 가서 커피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다. 마을에 당도하고 보니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고, 한길도 텅 비어 있는 것이 마치 공휴일처럼 고요하며 활기가 없었다 뒷마당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검둥이 환자 하나를 만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주 어린애들과 중병인과 노인들 외에는 모두 여기서 3마일쯤 떨어진 숲속의 야외 집회에 나가 있다고 했다. 왕은 그 방향을 물어, 그 집회에 가서 한바탕 돈벌일 해볼까 하며 너도 같이 가도 괜찮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공작은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은 인쇄소라고 했다. 하나를 찾아냈다. 조그마한 가게로 목공소 이층에 있었다. 목수도 인쇄공도 모두가 야외집회소에 나가 있었지만 어느 가게에도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난잡하게 물건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곳으로, 잉크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벽 일면에 온통 말과 도망친 검둥이의 그림이 든 광고가 붙어 있었다. 공작은 저고리를 벗고는 이젠 됐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 왕은 야외 집회 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반시간쯤 걸려서 우리는 땀을 흘리면서 그곳에 당도했다. 지독히 더운 날이었다. 그곳에는 20마일 사방에서 약 천명 가량의 사람이 모여 있었고, 숲은 짐마차와 그것을 끄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사방에 말이 매어 있었고, 짐마차에 단 여물통에서 여물을 먹기도 하고, 발을 구르며 파리를 쫓기도 하고 있었다. 가는 통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가지로 지붕을 간 오두막집이 몇 채 있었고, 거기서 라무네와 생강빵을 팔고 있었다. 또 수박과 푸른 옥수수와 그밖에 그런 등속의 것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설교는 이와 비슷한 오두막집에서 진행 중이었는데 다만 이쪽 집이 좀더 규모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뿐이었다. 벤치는 통나무의 바깥쪽 두꺼운 판자로 만들어져 있었고, 둥근 쪽에다 구멍을 뚫어 나무토막을 박아서 다리로 하고 있었다. 기대는 장소는 없었다. 그 집한쪽 구석에 높은 단이 있었고, 설교사들은 그 위에 서 있었다. 여자들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면모 합직의 저고리를 입은 여자, 줄무의 옷을 입은 여자, 젊은 여자 중에는 갱사옷을 입고 있는 여자도 몇 있었다. 젊은 남자 중에는 맨발로 있는 사람도 있었고, 아이들 중에는 아무것도 입은 것이 없이 다만 굵은 베 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늙은 여자 중에는 뜨개질을 하고 있는 노파도 있었고, 젊은 축 중에는 몰래 서로 재미를 보고 있는 남녀들도 있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들어선 집에선 설교사가 찬송가를 띄엄띄엄 읽고 있었다. 설교사가 두 줄을 읽으면 사람들이 뒤를 이어 합창을 했다. 사람들이 많은데다 모두들 힘을 들여 하는 까닭으로 어쨌든 여간 장엄하지 않았다. 그 다음 설교사가 또 두 줄을 읽고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 합창했다∼이렇게 해서 자꾸만 계속되었다. 사랑들은 점점 흥분하여 노랫소리가 점점 높아갔고 나중에는 신음하는 자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자까지 나타났다. 여기서 설교사는 설교를 시작했다. 우선 단 한쪽 구석으로 바싹 걸어가더니 다음에는 돌아서 저쪽 구석으로 바싹 걸어갔다. 이번에는 대에 엎드리듯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연방 팔과 몸을 움직이며 있는 대로 목소리를 짜냈다. 가끔 성경책을 쳐들어 한 군데를 편 채 그걸 이리저리 뒤흔드는 것처럼 하며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이것이 광야의 뱀이니라. 이것을 보고 살지어다." 그러면 사랑들이 이에 화답하여, "신에게 영광 있으리. 아멘." 하고 크게 외친다. 이와 같이 해서 설교사는 설교를 계속하고, 사람들은 신음하고, 외치고, 아멘을 부른다 "아아, 죄를 회개하는 자의 자리로 오라. 오라, 죄에 더럽혀진 자여.(아멘.) 오라, 병든 자, 다친 자. (아멘.) 오라 , 병신된 자, 다리를 저는 자, 눈이 먼 자. (아멘.) 오라, 가난하고 삶에 고달픈 자, 부끄러움속에 가라앉아 있는 자. (아멘.) 오라, 피폐하고 더럽혀지고 고뇌하는자 모두. 깨어진 혼을 가지고 오라.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오라. 누더기와 죄와 더러운 것을 입은 채 오라. 마음을 씻는 물은 값이 없나니, 천국의 문은 넓게 열려 있느니라. 아아, 안으로 들어와 쉴지어다. (아멘. 신에게 영광 있으라, 신에게 영광 있으라, 할렐루야.)" 이러한 상태였다. 벌써 이제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와 비명 때문에 설교사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군중이 모여 있는 도처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만면에 눈물을 흘리면서 온갖 힘을 다하여 사람들을 떠다밀고는 회개자들이 앉아 있는 벤치로 몰려나갔다 그리고는 회개자들이 전부 군중의 맨 앞자리에 모이자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그들은 마구 노래를 부르는 등, 짚단 위에 몸을 던지는 등 그야말로 야단들이었다. 이때 비로소 나는 왕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왕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의 것보다도 컸다. 다음 왕은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러자 설교사는 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왕에게 부탁하였고, 왕은 그대로 했다. 그는 자기는 해적이라고, 인도양에서 30년 동안이나 해적 노릇을 했노라고, 부하들은 이번 봄의 싸움에서 꽤 많은 살상을 입었으므로 이제 자기는 신병을 모집하러 왔노라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고맙게도 어젯밤 도둑을 만나 돈 한 푼 없이 강제 상륙을 당하고 말았다. 자기는 이 일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런 고마운 일은 난생 처음이다. 그 까닭은 자기는 이제 딴 사람이 되어 있고, 난생 처음 행복하게 되었으니까. 자기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이제 곧 출발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인도양으로 돌아가 여생을 해적들을 참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바칠 생각이다. 인도양의 해적들을 모두 알고 있는 까닭으로 그 일에는 자기가 최적임자다. 한 푼도 없이 인도양까지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꼭 자기는 돌아갈 작정이다. 그리고는 해적 하나를 설득할 때마다 그 사나이에게 이야기 할 작정이다. '나에게 감사할 게 아냐. 내 덕택이라고 생각해선 안 돼. 모두 그 포 크빌의 야외 집회의 그리운 분들의 덕택이야. 그분들은 나면서부터 형제이며, 인류의 은인들이야. 또 그 설교사님의 덕택이기도 해. 그분은 해적에겐 둘도 없는 친우란 말이야.'라고.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 그러자 그 중 누가 버럭 소리를 높여, "이 사람을 위해서 모금합시다 모금합시다" 하여 이에 5,6인이 곧 그 일에 착수하려고 하였지만, 또 누가, "그 사람에게 자기가 모자를 가지고 돌라고 하면 어때." 하고 외쳤다. 그 바람에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했고, 설교사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왕은 모자를 들고 군중 사이를 낱낱이 돌아다녔다. 눈물을 닦으면서 사람들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그렇게 먼 곳에 있는 불쌍한 해적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해주시다니 이럴 수 있겠느냐고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꾸벅거렸다. 그리고 차례차례로 아주 아름다운 처녀들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당신을 잘 기억해 두기 위해서 키스하고 싶은데 그렇게 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반드시 허락하고는 그 중 몇은 꼭 껴안기까지 하며 5,6회씩 키스를 했다. 그러는 중에 그는 한 일주일 동안 자기 집에서 쉬어 갈 수 없겠느냐고 하는 초대까지 받았다 모두들 자기 집에 묵게 하고 싶어했고, 그러면 참 명예로운 일일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이 야외 집회의 마지막날이고, 자기로선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으며, 더군다나 곧 인도양으로 어서 돌아가 해적들에게 전도를 해야 하니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고 딱 잡아떼었다. 뗏목으로 돌아와 계산해 보았더니 87달러 75센트나 되었다. 게다가 또 숲 사이를 빠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짐마차 아래에서 발견한 3갤런들이 위스키병까지도 그는 어느새 들고 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봐서 오늘의 벌이는 전도 사업에서 소비한 어느 날보다도 많았다고 왕은 자못 만족해했다. 야외 집회의 무리들을 속이는 데에 이교도를 쓰는 수법은 해적담에 비교하면 어림도 없는 수작이라고 왕은 기 염을 토했다 공작은 왕이 돌아올 때까진 그래도 자기는 왜 한몫 단단히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의 얘기를 들은 후엔 자기가 한 일을 그다지 성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 인쇄소에서 활자를 짜서 농부들을 위해 조그마한 일을 둘 해주었다∼말 광고였다 - 그리고는 그 대금으로 4달러를 벌었다. 그리고 신문에 낼 광고 주문도 받았다 그것은 10달러 드는 것을 선불하면 4달러로 실어 주겠다고 하고는 그것을 따먹었다는 것이다 그 신문 대금은 1년에 2달러인데 선불 조건으로 일부에 대해 반 달러의 예약을 세 건 받았다. 사람들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장작과 양파로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공작은 이제 바로 이 가게를 산 참이어서 손을 보지 않을 정도로 싸게 하여 이제부터는 현금 지불로 해나갈 작정이라고 했다 그는 손수 지은 시 한 편을 인쇄에 붙였다. 3절로 된 약간 달콤하고도 슬픈 시였다. 제목은 '그렇다 냉혹한 세상이여, 이 상처입은 가슴을 깨뜨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제라도 곧 인쇄에 붙일 수 있도록 조판해 놓고 그 대가는 한푼도 청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식으로 9달러 반을 벌게 되었는데, 하루의 일치고는 왜 좋은 성적이라고 좋아했다. 그 다음 공작은 인쇄는 했지만 요금을 청구하지 않은 또 하나의 조그마한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인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에는 도망친 검둥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어깨에다 메고 있는 작대기에 보따리를 걸치고 그 아래에다 '상금 200달러'라고 쓰여 있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모두가 짐에 관한 것으로 자세하게 짐의 인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에는 짐이 작년 겨울 뉴 올린즈로부터 40마일 하류의 센트 잭크슨 농원으로부터 도망을 쳐 북쪽으로 간 것 같다는 사연과, 누구든 짐을 체포하여 송환해 준 사람에게는 상금과 그 비용을 지불하겠노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하고 공작은 입을 열었다."오늘밤만 지나면 이제 우리는 생각만 있으면 대낮에라도 달릴 수 있단 말이야. 누가 오는 것이 보이면 얼른 짐의 수족을 결박하여 방 한구석에다 처넣고 이 광고를 보이며, 우리들이 상류에서 이놈을 붙잡았지 만 가난해서 기선으로 여행할 수가 없어, 친지에게서 이 조그마한 뗏목을 외상으로 사가지고 이제 상금을 타러 가는 도중이라고 하면 된단 말이야. 수갑과 쇠사슬을 채우면 한층 더 짐에게 어울리겠지만 그러면 우리들이 아주 가난하다는 얘기와는 어긋나게 될 게 아냐. 그런 물건은 너무 과해. 밧줄이면 그만이야 무대에서 말하는 조화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우리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공작은 참 머리가 좋다고, 이젠 대낮에 달려도 문제없겠다고 좋아했다. 그 조그마한 마을의 인쇄소에서 저지른 공작의 장난은 큰 소동을 야기할 것이 뻔했으므로 그 소동으로부터 멀리 피하기 위해서 오늘밤 안으로 우리는 도망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후로 우리는 생각만 있다면 정정당당히 뗏목을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밤 열 시경에 출발하여 마을에서 왜 떨어진 지점을 몰래 통과하여 마을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등불을 켜지 않았다. 짐이 새벽 네 시에 당직 교대로 나를 깨우러 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허클, 임잔 이 여행에서 좀더 왕들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래, 그럼 됐어. 왕도 하나들이라면 괜찮지만 그 이상이라면 골치야 골치. 이 왕은 대단한 주정뱅이고 공작도 조금도 나을 것이 없어." 나는 짐이 왕에게 프랑스말이란 대관절 어떠한 건지 듣고 싶으니까 얘기해 보라고 졸라대고 있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왕은 자기는 이 나라에 와서 너무도 오래 되었고, 너무도 고생을 많이 해서 모두 잊어 버렸다고 했다. 제21장 아칸소의 사건 벌써 해가 뜬 후였지만 우리는 뗏목을 매려고도 하지 않고 자꾸만 강을 내려갔다. 얼마 후에 왕과 공작은 꽤 시뻘건 얼굴로 나타나, 강으로 뛰어들어 한바탕 헤엄을 치고 나니 제 기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왕은 뗏목 한끝에 걸터앉아 장화를 벗고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는 기분을 전환하려고 다리를 물 속에다 담그고는 대롱대롱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파이프에다 불을 붙여 물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 암기를 시작했다. 꽤 암기한 후에 그와 공작은 둘이서 같이 연습을 시작했다 공작은 대사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것을 왕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왕에게 한숨을 쉬라는 등, 가슴에 손을 얹으라는 등 잔소리를 하더니, 잠시 후에는 꽤 잘한다고 칭찬을 했다 "그냥, 로미오. 하고 마치 황소가 우는 것처럼 해선 안 돼. 부드럽게 상심하는 듯 괴로워하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로오미오. 이렇게 하란 말이야, 알았지, 줄리엣은 귀엽고 상냥한 아직 어린 처녀니까 수나귀 같은 소릴 내지 않아." 자, 이번에는 두 사람은 공작이 떡갈나무대로 만든 긴 두 개의 칼을 집어들고서 검극 연습을 시작했다. 공작은 자기를 리처드 3세라고 불렀다. 둘이 서로 겨누면서 뗏목 위를 뛰어다니는 꼴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왕이 발을 헛디뎌 그만 강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므로 두 사람은 잠시 쉬어 그때까지 미시시피 강을 오르내리며 그들이 해온 가지가지 모험담의 꽃을 피웠다. 점심이 끝났을 때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봐, 카페(프랑스의 왕. 카페 왕조의 시조. 938. - 996) 이놈을 최상급의 신파로 만들고 싶단 말이야. 그러려면 뭐 좀더 덧붙여야 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어쨌든 앙콜에 대답할 것이 좀 필요하단 말이야." "앙콜이란 뭐야, 브릿지워터." 공작은 그것을 설명하고 나서 말했다 "앙꼴로 난 스코틀랜드의 탈춤이나 사공춤을 출 테니 임잔......가만 있자, 에......또......옳지 됐어 햄릿의 독백을 하면 돼 " "햄릿의 뭐라고." "햄릿의 독백 말야. 세익스피어 극 중 제일 유명한 거야. 아아, 숭고하고말고. 숭고하고말고. 늘 극장 안을 녹이고 말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대본에는 들어 있지 않아. 이거 한 권밖엔 가진 게 없어 지금은 하지만 기억에서 건져낼 순 있을 거야, 능히. 어디 잠간 여길 왔다갔다 하면서 기억의 동굴 속에서 불러낼 수 있을는지 한번 해볼까." 그는 잔뜩 생각에 젖은 얼굴로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가끔 무섭게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는가 하면 손을 이마에다 대고 뒤로 비틀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 다음 한숨을 푹 내리쉬고,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했다. 아름다운 구경거리였다. 마침내 그는 햄릿의 독백을 기억해 냈다 우리들에게 이젠 모두 조심들을 하고 있으라고 했다. 다음 그는 한쪽 발을 앞으로 쓱 내밀고, 두 팔을 높이 쳐들고,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우러러보며 아주 품위있는 포즈를 취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미쳐 날뛰며 이를 북북 갈더니 다음 대사를 외우는 동안 큰 소리를 지르고, 두 팔을 넓게 펼쳐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는 내가 아직까지 보아 온 어떤 연기도 능가할 정도로 멋지게 해냈다 이제 그 대사로, 그가 왕에게 가르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손쉽게 외울 수 있었다.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한 자루의 단도면 깨끗이 청산할 수 있을 것을, 글쎄 이 저주가 있기에 인생은 일평생 불행하게 마련이지. 그 누가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지루한 인생에 신음하며 진땀을 뺄쏘냐, 버남의 숲이 던시네인까지 다가올 때까지 사후의 공포가 대자연의 제2의 요리라고 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잠을 죽이고, 부지의 운명의 나라로 날아가기보다는 가혹한 시탄을 우리들로 하여금 던지게 하는 일만 없다면. 이를 생각하니 망설여질 수밖에. 문을 두드려 던컨의 잠을 깨워라. 그대에게 그것이 할수 있다면 오죽이나 좋으리. 세상의 능욕과 조소를, 폭군의 비도를, 오만한 자의 무례를, 재판의 지루함을, 언제나와 다름없이 엄숙한 후의를 몸에 감은 무덤이 입을 벌리고서 기다리는 무서운 한밤중의 민사를 누가 참을 쏘냐. 한 번 가버린 나그네가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나라가 이 세상으로 악풍을 보내고, 생생한 혈색을 가진 우리의 결심은 격언에 있는 고양이 모양으로 우려로 창백해지고, 지붕 위 얕게 드리워진 구름도 이 때문에 길을 빗가고. 마침내 실행력을 잃게 되는 일이 없다면, 죽음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대소원의 극치. 그러나 기다리자 아리따운 오펠리아여, 그대의 무거운 대리석 턱을 열지 말고, 수녀원으로 가라 - 어서 어서 어서. 이 대사는 왕의 마음에 들었고, 단번에 그는 곧잘 그 대사를 해치우게 되었다. 마치 그는 이 대사 때문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며, 익숙해져 날뛰어 떠들어대면서 우뚝 장승처럼 서 있는 꼴은 정말 볼 만했다. 운 좋게 얻어걸린 최초의 기회에 공작은 신파 광고를 인쇄했다. 그후 2,3일 동안 떠내려가는 우리들의 뗏목은 그야말로 대단한 활기를 띠었다. 왜냐하면 - 공작의 말을 빌리면 - 검극과 대사 연습만이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다. 아칸소 주에 왜 접근했을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커다란 만곡부에 조그마한 마을 하나가 나타났으므로 거기서부터 약 4분지 3마일 정도의 상류 지점에 사이프러스나무가 터널처럼 우거져 있는 개울 입구에다 뗏목을 맸다. 그리고는 짐 이외의 세 사람은 모두 카누로 강을 내려, 그 마을에서 우리들의 신파를 할 수 있을는지 그것을 보러갔다. 우리는 참 운이 좋은 때 온 셈이었다. 마침 그날 오후 이 마을에서 서커스가 개최될 예정으로 있었으며, 벌써부터 시골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다 낡은 덜컹거리는 마차와 말을 타고서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커스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떠날 것이니,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신파는 아주 좋은 기회에 얻어걸린 셈이다. 공작은 큰 저택을 하나 빌렸고, 우리는 광고를 붙이며 돌아다녔다.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기록되어 있었다 세익스퍼어극 재상연. 미증유의 인기거리. 당야한. 세계적으로 유명 한 비극배우, 런던 드루리 레언 극장 전속, 2대 데이비드 개릭크 및 런던 피카디리, 푸딩 레인 화이트 채플 왕립 헤이마 아케이드극장 및 왕립 대륙극장 전속. 초대 에드먼드 키인 이 양인이 출연할 숭고한 세익스피어 극중의 흥행물은 로미오와 줄리엣 중의 발코니의 장면...... 로미오......개릭크 씨 줄리엣......키인씨 극단원 총출연. 의상, 배경, 제도구 신조. 이 밖에 또 리처드 3세 중의 혈용육약의 아기자기한 산도싸움...... 리처드 3세 ...... 개릭크씨 리치몬드......키인 씨 이밖에 또(특청에 의하여) 햄릿 불멸의 독백...... 유명 한 키 인의 출연. 파리에서의 300회 연속 흥행. 구주 흥행의 기일 박두로 인해. 당야 한. 입장료 25센트, 소인, 하인 10센트 그것이 끝나자 우리는 거리를 싸질러 다녔다. 가게와 집은 거의가 다. 낡은 것이 삐걱거리는 바싹 마른 목조 건물로, 페인트라곤 바른 적이 없고 지면으로부터 3,4피트 다리를 달아서 높게 한 것은 홍수 때물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 주위에는 조그마한 정원이 있었으나 거의 아무 것도 심은 것이라곤 없었고, 나팔꽃과 해바라기뿐이었다. 그밖에 잿더미가 있었다. 다 낡은 쭈그러진 장화와 단화, 병 깨진 것, 넝마, 쓰지 못하게 된 양철 제품 등이 있었다. 울타리는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판자를 각기 다른 때에 닥치는 대로 박아서 만든 것으로, 이리저리 제멋대로 기울고 있었다. 문에는 대체로 돌쩌귀라곤 하나밖에 없었고, 그것도 가죽 돌쩌귀였다. 어떤 울타리는 어느 때 발랐는지 희게 바른 것도 있기는 했는데, 공작은 아마 그것은 콜럼버스 시대에 바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로 마당에는 돼지들이 들어가 있었고, 사람들이 그걸 몰아내고 있었다. 가게들은 모두 하나밖에 없는 한길에 늘어서 있었다. 가게 앞에는 집에서 직접 짠 횐 광목 차일이 쳐져 있었고, 시골사람들은 말을 그 차일 기둥에다가 매놓고들 있었다. 차일 아래에는 빈 포목상자가 놓여 있었고 부랑자들이 하루종일 거기 붙어 앉아서 대형 나이프로 상자를 썰기도 하고, 담배를 씹기도 하고, 하품을 하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있었다 - 모두 지독히 천한 녀석들이었다. 놈들의 대부분은 거의 우산 만한 누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러나 저고리도 조끼도 입고 있지 않았다. 서로들 빌이니 벅이니 조니 앤디니 하고 부르고 있었고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느릿느릿 말을 하고 있었고, 서로 욕들을 하고 있었다 차일 기둥 하나에 건달 하나씩 기둥에 기대앉아 거의 두손을 호주머니 속에 꽃고 있었고 남에게 씹는 담배를 한 대 꾸어 준다거나 어디를 긁는다거나 할 때 외엔, 절대로 손을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놈들 사이에서 늘 오고가는 말이 있었다. "어이, 행크, 담배 한 대만 줘." "안돼 한 대밖에 없어. 빌에게 달래." 빌은 한 대 줄지도 모르고, 혹은 거짓말을 시키고는 하나도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런 건달들 중에는 돈이라곤 한 닢도 없고, 또 자기 담배라곤 한 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작자도 있다. 이런 작자들은 담배는 늘 빌려서 피우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임마, 한 대만 빌려줘, 잭크. 지금 막 벤 톰프슨에게 마지막 한 개를 줘버렸어 " 그런 수작은 대개 거짓말인 것이 뻔하다. 타지방 사람이 아니면 속진 않는다 그러나 잭크는 타지방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대답했다. "네놈이 그놈에게 한 대 주었다고. 거 대단한 일을 했군. 지금까지 내게서 꾼 걸 내놔. 레이프 벅너. 그러면 한 들이건 두 들이건 얼마든지 빌려 줄게, 그리고 이자 같은 건 내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언제 좀 갚지 않았나." "그럼, 갚구말구. 여섯 대쯤 같았지. 네놈은 가게서 파는 담배를 꾸고서 니거 헤드(품질이 좋지 않은 까만 씹는 담배)로 갚았겠다." 가게에서 파는 담배란 납작하고 색이 까만 누런 담배지만 이러한 건달들은 거의 다 생 이파리를 비튼 것을 씹고 있었다. 한 대 꿀 때엔 대개 나이프로 자르지 않고 입에다 물고는 이빨로 물어뜯어 잘라질 때까지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면 가끔 담배 주인은 자기 몫이 된 부분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비꼬아 말할 때가 있다. "어이, 그 문 쪽을 이리내, 이걸 줄 테니." 큰길이고 작은길이고 간에 모두가 진창 투성이였다. 진창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콜타르 모양으로 시꺼멓고, 곳에 따라선 깊이가 한 피트 되는 것도 있었고, 어디를 가도 2,3인치 정도의 깊이는 보통이었다. 어디를 가나 돼지 투성이로 꿀꿀대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다 한길을 진창 투성이의 암퇘지와 한 배의 새끼돼지들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그리고 어미돼지는 길 한복판에 벌렁 나자빠져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피해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암퇘지는 새끼돼지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동안 몸을 쭉 뻗고 눈을 지그시 감고, 귀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마치 월급이라도 타고 있는 것 같은 행복감에 젖어있다. 얼마 후에 건달 하나가, "쉭 쉭. 저놈을 물어라, 티지." 하고 큰 소리를 지르자 암퇘지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물고 늘어진 개를 한두 마 리 질질 끌면서 도망을 쳤다 그 뒤를 4,50마리나 되는 개가 모여들었다. 건달들은 모두 일어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며 낄낄 웃으며 이 대소동을 고마워하는 눈치들이었다 다음 놈팡이들은 개싸움이 있을 때까지 다시 한번 제자리로 돌아가 서성거리고 있다. 개싸움만큼 이 놈팡이들의 정신을 바짝 내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행사는 없다. 하기야 똥개에다 테레빈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지르는 것과, 똥개 꼬리에다 양철 냄비를 매달아 죽을 때까지 뛰어 돌아다니다가 죽고 마는 것을 구경하는 경우는 예외였지만 강둑에 있는 몇 채의 집은 머리를 숙이고 한쪽으로 기울어 있고, 이제라도 당장 강으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데로 벌써 이사들을 하고 있었다. 몇 채의 집은 한쪽 구석의 토대 밑으로 강둑이 무너져서 없어져 버렸고, 그 구석이 강 위로 공중에 떠있었다. 그러한 집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한꺼번에 집 폭의 긴 땅이 무너지기 시작해, 한여름 걸려서 무너지고 또 무너져 그 전부가 강으로 떨어지고 마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마을은 강이 자꾸만 둑을 침식하고 마는 까닭으로 결국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날, 정오가 가까워짐에 따라 거리의 짐마차와 말은 그 수가 자꾸만 뒤에서 밀려왔다. 시골서 온 가족들은 도시락을 가지고 와 그것을 짐마차 안에서 먹고 있었다. 위스키를 마시고 주정을 하는 사람도 몇 있었고, 나는 싸움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복스 영감이 온다. 달에 한 번씩 취하러 오는 그대로 이번에도 또 시골서 왔구나. 저봐, 모두들." 놈팡이들은 모두 기쁜 얼굴이었다. 복스 영감으로 해서 늘 이 패들이 재미를 보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 중 하나가 그 말을 받았다. "저 영감, 이번엔 누굴 죽일 작정일까. 이날 이때까지 20년 동안이나 해치워 버린다고 벼르던 사람들을 전부 깨끗이 해치워 버렸다면 그 영감도 이젠 왜 유명해졌을 게 아냐." 다른 사나이가 그 다음 말을 이었다. "복스 영감이 날 죽인다고 하면 참 좋겠는데. 그러면 난 천년 동안은 죽지 않게 될 테니 말이야." 복스는 마치 인디언처럼 와아와아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어이, 비켜. 난 이제부터 전쟁에 나가는 길이야. 관 값이 오를 판이 야." 복스는 취해 있었고, 안장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쉰을 좀 지난 나이로, 얼굴색이 여간 빨갛지 않다. 모두 다 복스를 향해서 와와 떠들고, 조소를 던지며 욕을 하고, 복스 영감도 조금도 지지 않고 말대답을 하면서 '네놈들도 차례차례로 꼬박꼬박 죽여 버려야 하겠지만 오늘은 셔번 대령 영감쟁이를 죽이러 온 것이니까 지금은 꾸물거리고 있을 순 없어, 내 모토는 '고기가 제일 과자는 다음'이니까 네놈들은 다음 차례로 밀밖에 없다'며 자못 의기양양해했다. 복스 영감은 나를 보자 내 앞으로 바싹 말을 몰고 와 "임마.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죽을 각온 다 됐나." 이 한 마디를 던지고는 획 저쪽으로 가버린다. 나는 겁이 났지만 옆의 사나이가 말했다. "괜찮다 저 작잔 술이 취하면 으레 저 모양이야. 아칸소에서도 제일 마음씨가 착한 바보 영감쟁이란다. 취해 있든 취해 있지 않든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어." 복스 영감은 마을에서 제일 큰 가게 앞에다 말을 바싹 갖다대고, 목 을 숙여 차일 안을 들여다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리 나와, 이놈. 셔번. 어서 나와 네놈이 속여 먹은 사람과 맞서지 못해. 네놈은 나에게 몰리고 있는 똥개야. 이놈 혼내줄 테니." 이러한 식으로 복스는 오만가지 욕설을 셔번에게 퍼부었고, 길거리는 그것을 듣고 웃어대고 떠들어대는 건달들로 가득 차고 말았다 얼마 후에 쉰다섯쯤 되어 보이는 거만하게 생긴 사람 하나가 - 그러나 마을에서도 훌륭한 옷을 입고 있었다 - 가게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내려고 좌우로 길을 비켰다 그 사람은 아주 침착한 목소리로 천천히 복스에게, "이젠 이런 장난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그러나 한 시까지 참아주지. 한 시까지야. 알았어. 그 이상은 안돼. 한 시 이후에 한 번이라도 나에게 입을 열어 봐, 암만 멀리 도망가도 꼭 붙잡고야 말 테니." 이렇게 한 마디를 하고 그 사람은 획 돌아서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 가 버렸다. 건달들은 모두 엄숙한 얼굴로 돌아갔고, 꼼짝도 안 할 뿐더러, 웃는 놈조차 하나도 없었다. 복스는 목소리를 끝까지 돋구어서 셔번에게 욕설을 퍼부우며 한길 저쪽으로 가버렸다.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가게 앞에 서서 또다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복스 주위에 모여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사람들은 복스에게 앞으로 15분만 지나면 한 시가 된다고 일러주고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당장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복스는 있는 힘을 다하여 욕설을 퍼부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자를 진창 속에다 던지고는 그 위를 말발굽으로 짓밟고 이내 백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미친 사람처럼 한길 저쪽으로 말을 몰았다 힘이 자라는 사람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복스를 말에서 내려 취기가 깰 때까지 감금해 두고 했지만 헛수고였고, 또다시 한길을 이쪽으로 달려와 셔번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그때 누가 소리를 질렀다. "딸을 불러와. 빨리 딸을 불러와. 딸의 말이라면 혹간 들을 때가 있으니까 복스를 타이를 수 있는 사람은 딸밖엔 없어" 그래서 누가 부르러 뛰어갔다. 나는 거리를 좀더 걸어 내려가서 걸음을 멈췄다. 5분인가 10분인가 후에 또다시 복스가 왔지만 이번에는 말을 타고 있진 않았다. 내 쪽으로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친구 둘이 양쪽에서 팔 하나씩을 붙잡고 복스를 재촉하고 있었다. 본인도 말이 없이 불안한 눈치였다 조금도 위축되는 일이 없이 자기도 서둘고 있었다 그때 누가 버럭, "복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셔번 대령이었다 한길 한가운데 에 몸 하나 까딱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바른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겨누진 않고, 총신을 하늘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젊은 처녀 하나가 총총걸음으로 두 사나이와 함께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복스와 양쪽 사나이는 누가 불렀나 하고 되돌아보았다 권총을 보자 두 사나이는 얼른 옆으로 비켰다. 권총의 총신은 천천히 흔들리지 않고 수평의 위치에까지 내려왔다. 격철이 양쪽 다 서 있었다 복스는 삽시에 두 손을 쳐들고 말했다. "어이구. 제발 살려줘." 땅. 하고 처음 한방이 터지자 복스는 허공을 쥐면서 뒤로 비틀거렸다. 땅, 하고 두번째가 터지자 복스는 팔을 편 채 꽈당 하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젊은 처녀는 비명과 함께 달려들어 부친에게 몸을 던지고는 왁. 하고 울어댔다. "아아, 저 사람이 아버질 죽였어, 저 사람이 아버질 죽였어." 사람들은 두 사람 주위로 몰려들어 이 광경을 보려고 목을 길게 뽑고는 서로 밀치락 달치락 야단이었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것을 밀어내려고, "물러 서. 물러 서. 바람을 통하게 해 바람을 통하게 해."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셔번 대령은 권총을 땅바닥에다 내던지고는 획 돌아서 저쪽으로 가버렸다. 사람들은 복스를 조그마한 약방으로 끌어들였다. 건달들은 아까처럼 그 주위를 밀치락달치락하며 따라갔고, 그 뒤에서 마을 사람전체가 따라갔다. 나는 달려가 창가의 좋은 장소 하나를 점령하고는 복스 바로 옆에서 안을 잘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복스를 마루 위에다 뉘고는 머리 아래에다 한 권의 큰 성경책을 놓고, 또 한 귄의 성경책을 그의 가슴 위에다 펼쳐 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전에 복스의 셔츠를 찢어 벗겼으므로 나는 탄알의 하나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알 수 있었다 복스는 열 몇 번이나 한참씩 헐떡거렸다 숨을 들이 마실 때에는 성경책이 들먹하고 들렸고, 숨을 내쉬면 또다시 성경책은 내려왔다. 그후 복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사람들은 통곡을 하고 있는 딸을 그에게서 떼어 어디론지 데리고 갔다 처녀는 나이가 열여섯 살쯤 된 귀엽고 상냥하게 생긴 모습이었지만. 얼굴색이 창백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마을 안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창가로 가려고 밀치락달치락 야단들이었다. 먼저 있던 사람들은 비키려고 하지 않고 또 나중에 온 사람들은, "이봐. 당신들은 실컷 보지 않았소. 언제까지 비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보여 주지 않는 건 심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권리가 있잖나" 하고 불평이 대단했다. 말대답을 하는 측도 대단했으므로 나는 큰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는 그곳을 슬쩍 빠져나왔다 한길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흥분하고 있었다. 사살 현장을 본 사람은 어떻게 피살되었는가를 얘기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목을 길게 뽑고서 듣고 있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큰 횐 모피 실크햇을 삐딱하게 쓰고 손잡이가 굽은 지팡이를 들고 있는 키가 큰 날씬한 사나이가 복스가 있던 장소와 셔번이 있던 장소에다 표를 했다. 사람들은 그의 꽁무니를 줄줄 따라다니며 그 사나이의 거동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면서 알았다는 증거로 연방 머리를 끄덕끄덕하였고, 지팡이로 땅에다 표를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약간 앞으로 몸을 숙이고는 두 손을 넓적다리에다 고이고, 그 사나이가 지팡이로 땅 위에 그 장소의 표를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음 셔번이 서 있던 장소에 똑바로 뻣뻣이 일어서 얼굴을 찡그리고 모자 테두리를 깊숙이 내리고는 이렇게 외쳤다. "복스." 그 다음 지팡이를 천천히 수평으로 내리며, '땅.'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뒤로 비틀거리며 또 '땅.'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덜컥 뒤로 나자빠졌다. 복스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랬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치고는, 약 열 명 가량의 사람들이 위 스키병을 꺼내서 그 사나이에게 마시라고 했다. 이러는 사이에 누군가 셔번을 사형에 처해 버려야 한다고 외쳤다. 1분 후에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동감이라고 맞장구를 치고는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교수용으로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빨랫줄을 잡아채어 가지고는 달려갔다. 제22장 사형의 실패 사람들은 마치 인디언처럼 떠들어대면서 셔번의 집을 향해 몰려갔다 무어나 다 길을 비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키지 않았다간 짓밟혀 터지고 말판이었다 참으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옆으로 비키려고 군중들 앞을 달려갔고 길가의 창이라고 하는 창은 여자들 얼굴로 가득 찼으며, 나무라고 하는 나무에는 검둥이 사 내들이 올라가 있었고, 울타리라고 하는 울타리로부터는 검둥이 남녀 하인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군중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손이 미치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피해 버리는 것이었다. 많은 수의 여인과 처녀들이 죽은 듯이 겁을 먹고는 큰 소리로 마구 울어댔다 사람들은 셔번의 집 말뚝 앞으로 빽빽이 몰려들어 어찌나 서로 떠들어대고 있는지 자기가 하는 소리가 자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집 앞은 20피트 정도의 조그마한 정원이었다 그 중 누가, "담을 헐어 버려 담을 헐어 버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찢어발기는 등. 빼어 버리는 등 때려부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소동이 일어나 울타리는 와르르 무너지고, 군중의 최전선은 파도처럼 와 하고 안으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셔번이 조그만 현관 지붕 위로 나타났다. 손에는 그 연발 장총을 들고, 말 한 마디 없이 침착한 태도로 유유히 서 있었다. 소동은 갑자기 그치고, 인파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셔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거기 선 채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고요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분이 나쁜 것이 불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셔번은 천천히 군중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친 사람들은 되쏘아 붙이려고 했지만 눈을 내리깔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내 셔번의 입가에는 웃음이 날렸으나 그것은 유쾌한 웃음이 아니라 모래가 든 빵을 씹었을 때에 나오는 그러한 웃음이었다. 그 다음 셔번은 천천히 , 사람을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이 누구를 린치 한다고 재미난 생각이야 너희들에게 사나이를 린치 할 만한 배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마을로 온 불쌍한 의지할 곳 없는 버림을 받은 여자들에게 콜타르를 바른 후에 깃털을 붙일 만한 용기가 있다고 해서, 그래서 사나이에게도 손을 댈 만한 배짱이 있다고 생각했는가 흥, 너희들 같은 인간 1만 명이 있어도 그 사나이는 꿈쩍도 안 할 거다 대낮이고, 배후에서 얻어걸릴 염려만 없다면. 내가 너희들을 알고 있느냐고 잘 알고 있구말구. 나는 남부에서 나서 자랐고, 북부에서 산 일도 있다. 그래서 모든 평범한 인간을 잘 알고 있단 말이야. 평범한 인간은 겁쟁이라는 거야. 북부에선 짓밟으려 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를 짓밟게 하고, 그후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것을 참아 낼만큼의 겸허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올린단 말이다 남부에선 한 사나이가 자기 혼자서 대낮에 사람들이 가득 탄 역마차를 세워 놓고는, 승객들로부터 돈을 빼앗는단 말이다. 너희들의 신문은 너희들을 용감한 사람이라고 허풍을 떨며 부르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자기들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용감하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용감은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그러한 것으로, 월등히 뛰어나다고 할 것도 없어. 왜 너희들의 배심원은 사람을 죽인 그 하수인을 교살하지 않는 거지 그것은 그 하수인의 친구 놈들이 어둠을 타고 뒤에서 자기를 쏘아 죽이지나 않을까 그것이 무섭기 때문이지. 그 친구 놈들은 틀림없이 그 짓을 해내고야 말 테니까 그래서 배심원들은 늘 무죄 방면이라고 하는 방법을 쓴단 말이다 그러면 한몫 값의 사나이가 복면을 한 겁쟁이 100명을 거느리고 밤에 가서 그 악당을 린치 한단 말이다. 너희들의 잘못은 너희들이 그 한몫 값의 사나이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 첫째의 잘못이고, 또 하나는 어둠을 타고 오지 않았다는 것, 게다가 복면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너희들이 데리고 온 것은 절반 짜리 사나이란 말이다. 저기 있는 저 벅크 하크네스가 바로 그거야. 그리고 벅크의 사주만 없었다면 너희들은 그저 와와 하고 공포만 쏘았을 거야 너희들은 오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평범한 인간은 귀찮은 일과 위험을 싫어하는 법이거든. 너희들도 그런 것을 싫어하지만 저기 있는 저 벅크 하크네스와 같은 절반 짜리 인간이 '놈을 린치 하라' '놈을 린치 하라' 하고 외치면 너희들은 뒤로 물러서기가 무서워지거든-너희들의 본성이 겁쟁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에 드러날까 봐 그게 무서워 큰 소리를 지르고, 그 절반 짜리 사나이 저고리 꼬리에 잔뜩 매달려서 장한 일을 해낸다고 큰소릴 탕탕 하고는 대단한 기세로 몰려왔단 말이지. 세상에서도 제일 불쌍한 건 폭도야. 군대 역시 그렇단 말이다. 폭도야 자기 몸에서 배어 나온 용기로 싸우는 게 아냐. 그 집단에서. 그 상관에서 빌려 온 용기로 싸운단 말이다. 하지만 그 선두에 사나이다운 사나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폭도는 불쌍이고 나발이고 없단 말이다. 자, 너희들이 할 일은 꽁무닐 돌려 어서 집으로 돌아가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는 일이다 진짜 린치를 할 작정이라면 남부 식으로 어둠을 타고 하는 거야. 그리고 올 때엔 복면을 가지고 올 것, 한몫 값의 사나이를 데리고 올 것, 이 두 가지다. 자, 모두 돌아가 너희들 그 반쪽 짜리 작자도 같이 데리고 가는 거다." 셔번은 총을 왼팔 위에다 겨누고는 격철을 찰싹하고 올렸다. 군중은 갑자기 뒤로 물러서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벅크 하크네스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꼴로 슬금슬금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그대로 있을 생각만 있다면 그대로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영 그 생각이 없었다. 나는 서커스로 가서 뒤꼍을 서성거리며 감시인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텐트 아래로 해서 슬쩍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20달러 짜리 금화 외에도 얼마간 돈이 있었지만 이렇게 집과 멀리 떨어진 타향에 나와 있으면 언제 어느 때 돈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냥 모아 두기로 했다 조심하는 것밖에는 없다 그밖에 딴 도리가 없을 때엔 언제나 돈을 내고 서커스 구경을 하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러나 서커스 같은 것에 헛되이 돈을 써 버릴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정말로 굉장한 서커스였다. 단원 전부가 나란히 서서 말을 타고 입장하는 광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남매가 둘씩 서서 들어왔다. 남자는 속바지와 셔츠만으로 신도신지 않고 등자도 없이 경쾌한 모습으로 손을 넓적다리 위에다 올려놓고 있다. 20명쯤은 되었으리라. 여자들은 아리따운 안색으로 정말 아름다웠으며, 진짜 여왕들의 한 떼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몇백만 달러씩이나 하는 금강석을 아낌없이 박은 번드레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다음에 그들은 하나씩 말 잔등 위에 일어서 아주 천천히 파도치는 물결인 양 넘실거리면서 우아 하게 링 주위를 빙빙 돌아다녔다. 남자들은 키가 크고, 경쾌한 몸가짐으로 똑바로 몸을 펴고는 높다란 텐트의 지붕 아래를 부딪칠 듯 말 듯 지나가며, 그때마다 머리를 남실남실 숙였다 여자들의 장미 꽃잎 같은 옷은 찰싹찰싹 허리 둘레에서 부드럽고도 가볍게 펄럭거리며 다시없이 아름다운 양산처럼 보인다 얼마 후 그들은 한층 더 속력을 놓아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높이 공중으로 쳐들더니 이내 또 한쪽 다리를 쳐들었다. 말은 한층 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단장은 링의 한가운데 기둥 주위를 빙빙 돌면서 '하이 하이' 하고 장단을 맞췄다 단장 뒤에서는 광대가 농으로 양념을 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전원은 말고삐를 손에서 놓고, 여자들은 모두 주먹을 허리에다 짚었고, 남자들은 팔짱을 끼었다. 그때 말들은 앞으로 바짝 몸을 숙이고는 허리를 둥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해서 전원은 차례 차례로 링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멋들어지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구경꾼들은 미친 것처럼 날뛰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서커스는 처음서부터 끝까지 구경꾼들을 놀라 자빠지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게다가 광대가 시종 양념을 치고 있는 판이어서 구경꾼들은 깔깔대고만 있었다 단장이 무어라고 한 마디 하면 그 뒤를 받아 이내 광대가 사람들을 죽여 놓는다.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것을 그렇게 빨리 척척 앞뒤가 들어맞게 생각이 튀어나오는지 나로서는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 같으면 1년이 걸려도 그런 생각은 나을 것 같진 않았다 . 그러는 중에 주정꾼 하나가 링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였다-난 말을 타고 싶다. 말 타는 덴 둘째가라면 슬퍼할 자기라고 하며 펄펄 날뛰었다. 서커스 사람들은 주정꾼을 링 밖으로 내몰려고 했지만 주정꾼은 막무가내로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 바람에 서커스 가 중단되고 말았다. 구경꾼들은 주정꾼을 향해 야유하기 시작했으므로 주정꾼은 더욱 미친놈처럼 펄펄 뛰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구경꾼들 사이에선 큰 소동이 일어났고, 대부분 자리에서 일어서 링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놈을 때려부숴 저놈을 내던져 버려"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장은 간단한 연설을 하고는, "여러분, 제발 떠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분이 더 이상 소동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또 능히 말을 타고 있을 생각한다면 태워 드려도 좋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손님들 생각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구경꾼들은 모두 와아 하고 웃으면서 동의했다. 그래서 그 사나이는 말에 올라탔다 올라타기가 무섭게 말은 펄펄 뛰며 껑충껑충 링 안을 뛰어 돌아다녔다. 계원 둘이 말고삐에 매달려 말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주정꾼은 말 목을 잔뜩 끌어안고 앉아 있었고, 말이 뛰어오를 때마다 발꿈치가 높이 공중에 뛰어올랐다. 구경꾼 전체가 총기립 상태가 되어 깔깔대며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웃어대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계원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은 말고삐를 자르고는 달리기 시작했고, 주정꾼은 말 잔등에 엎드려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한쪽 발이 말 잔등 한쪽으로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흘러내렸고, 또 다음 순간에는 다른 한쪽 발이 다른 쪽 땅에 닿을 정도로 흘러내렸다 구경꾼들은 완전히 미쳐 버렸다. 그러나 내게는 재미고 뭐고 조금도 없었다. 이 주정꾼의 위태로운 꼴에 몸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 주정꾼은 겨우 기어 일어나서 말 잔등에 올라타 이쪽으로 저쪽으로 건들건들하면서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말 잔등 위에 뛰어오르더니 고삐를 놓고는 우뚝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말은 불이 붙은 집 모양으로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그 사나이는 나서부터 한 번도 술에 취한 일이 없다는 듯이 그저 말 잔등 위에 꼿꼿이 서서 보기에도 기분 좋게 경쾌한 솜씨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러면서 입고 있는 옷을 벗어서는 한 가지씩 내던지기 시작하였다. 연거푸 내던지는 바람에 공중은 온통 옷사태가 난 것처럼 보였다. 전부 17장이나 벗었다. 옷을 모두 벗어버린 사나이의 체격은 미끈한 것이 미남이었고, 아무도 아직까지 본 일이 없을 만큼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채찍으로 말을 몰아대어 휙휙 달리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말에서 뛰어내려 손님들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구경꾼들은 즐거움과 놀람으로 그저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서야 겨우 단장은 자기가 얼마나 속고 있었나를 알았다 단장의 그 어쩔 줄 몰라 하는 얼빠진 얼굴이란 왜 그런고 하니 주정꾼은 단원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익살을 몰래 자기 혼자서 생각해 내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그렇게 감쪽같이 속고 보니 무척 얼간이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비록 1천 달러를 준다고 하더라도 그 단장의 지위에 있고 싶지는 않다. 이 서커스보다도 몇 갑절 근사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 그러한 것에 얻어걸린 적이 없다. 어쨌든 이 서커스는 나에게는 둘도 없는 근사한 서커스였다. 그건 그렇구, 그날 밤 우리들의 흥행에는 입장객이라고는 겨우 12명밖엔 되지 않았다. 겨우 경비가 나왔을 정도였다. 더구나 그 구경꾼들이 껄껄 웃고만 있는 판이어서 공작이 화를 내는 폼은 대단했다 어쨌든 잠이 든 사내애 하나를 빼놓고 전원이 신파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공작은 이런 아칸소의 바보들은 격이 높은 셰익스피어를 알 까닭이 없다. 이놈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저급한 희극보다도 얼마간 격이 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펄쩍 뛰며 화를 내었다. 나에게는 이농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하고는 다음날 몇 장의 커다란 포장지와 검은 페인트를 구해 가지고 광고를 써 마을 도처에다 붙였다 광고의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저택에서 사흘 밤 동안에 한함 세계적으로 유명 한 희극배우 2대 데이비드 개릭크 및 초대 에드먼드 키인 런던 및 구주 대륙 제 극장 전속, 혈용육약의 비국왕의 기린 입장료 50센트 그리고 맨 아래에다가는 제일 큰 글씨로 이렇게 한 줄 써넣었다 부인과 애들의 입장을 금함 "자, 이거란 말이야, 이 한 줄을 써넣어도 오지 않는다면 난 아칸소를 잘못 본 셈이지 ‥‥‥ 공작은 자못 우쭐거렸다. 제23장 인품이 고약한 왕들 공작과 왕은 하루 종일 무대 장치, 커튼 준비, 각광용 초의 진열 등으로 몹시 바빴다 그날 밤 극장 안은 입추의 여지도 없을 만큼 구경꾼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게 되었을 때, 공작은 출입구의 문지기 노릇을 그만두고는 슬쩍 뒤로 돌아 무대 앞에 나타나 일장 연설을 하고는, 이 비극을 칭찬하며 이 비극이야말로 고금 미증유의 혈용육약의 걸작이라고 허포를 땅땅 쏘았고, 이 비극의 주인 공역을 맡은 초대 에드먼드 키인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이와 같이 해서 구경꾼들의 기대가 고조에 달했을 때 커튼을 올렸다. 다음 순간 왕이 벌거벗은 채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무대로 뛰어나왔다 온몸에 가지각색으로 바퀴 모양의 줄무늬와 선 무늬가 마치 무지개 모 양으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나 그 외의 몸차림은 아무래도 좋았다 단정한 맛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우스운 점만은 여간 우습지 않았다. 구경꾼들은 죽겠다고 깔깔 웃어대었다. 그리고 왕이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배경 뒤로 뛰어들어갔을 때에는 구경꾼들은 모두 울부짖고, 박수를 치고, 대소동을 하며 웃어댔다. 할 수 없이 왕은 다시 그 짓을 했고, 그후에 또 한번 다시 그 짓을 되풀이했다. 정말 그 바보가 뛰어 돌아다니는 꼴을 보면 소라도 웃었을 것이리라. 그 다음 공작은 막을 내리고는 구경꾼들에게 머리를 숙여 런던에서 의 계약 날이 절박해 있으므로 이 위대한 비극은 이후 이틀밖에는 상연 할 수 없으며, 이 극을 공연키로 한 드루리 레인 극장의 좌석은 벌써 매진되어 버렸다고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만일 이것이 여러분들 마음에 들고 도움이 되었다면 제발 이 비극을 친구 분들에게 널리 선전을 하여 보시러 오게 권고를 해주신다면 참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라고 덧붙였다. 20명쯤 되는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벌써 끝난 거야 이것이 전부야" 공작이 그렇다고 하자 대소동이 일어났고, 다들 "속았다"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미친 사람들처럼 뛰어올라, 무대와 두 사람의 비극 배우를 향해 돌진해 오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그때 체격이 큰 훌륭한 풍채의 사나이가 벤치 위에 뛰어올라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잠깐 기다리시오, 여러분 한 마디 할 말이 있소." 그 말에 사람들은 주춤 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과연 속았소. 하지만 우리는 이 마을 내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진 않소.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이대로 그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단 말이오. 성이 가라앉지 않는단 말이오. 아니죠, 우리들이 하고 싶은 것 은, 여기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가서 연극을 칭찬하며 다른 마을 사람들도 이 지경에 빠뜨리는 거예요 그러면 모두 오월동주격이 될 테니까. 그것이 영리한 방법이 아닐까요" "그 말이 옳아 판사님 말대로다"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럼 좋소, 우리가 속았다는 걸 한 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맙시다 자, 어서 들 집으로 돌아가서 누구나 다 이 비극을 보러 오라고 권고합시다 " 다음날은 마을 안에 이 연극이 굉장하다는 얘기 외에는 다른 얘기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날 밤도 극장은 초만원이었고 우리는 이 구경꾼들도 똑같은 식으로 속여 냈다 나와 왕과 공작은 뗏목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고, 얼마 후 한밤중에 왕과 공작은 짐과 나에게 뗏목을 저어 강 중류로 끌어내어 마을로부터 2마일쯤 하류 지점에다 뗏목을 대게 한 후 감추게 했다. 사흘째 되는 날 밤도 극장은 초만원이었고, 이번은 처음 오는 구경꾼들이 아니라 전날 밤에 온 사람들이었다 공작과 함께 출입구에 서 있던 나는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주머니에다 무엇을 불룩하게 넣고 있거나 저고리 아래에다 감추고 있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것은 결코 향료 등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으로 셀 만큼 많은 양의 썩은 달걀과 썩은 양배추와 그런 등속의 냄새가 물씬 코를 찔렀다 또 죽은 고양이가 그 근처에 있을 때의 징후를 알고 있다고 하면 나로서는 확 실히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인데, 64마리 분이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간 동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너무도 많은 냄새들이 코를 찌르는 통 에 뭐가 무슨 냄새인지 전혀 분간할 수 없었다. 도저히 참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이상 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게 초만원이 되어 버렸을 때 공작은 한 사나이를 붙잡고 그에게 25센트 은화 하나를 주면서 잠시 문지기를 부탁한다고 하고는 자기는 뒤쪽 무대 문 있는 데로 돌아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돌아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집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서 빨리 걸어. 그 다음에 악마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빠른 속력으로 뗏목 있는 데로 내달리는 거다" 나는 그대로 했다. 공작도 그대로 했다. 우리는 동시에 뗏목에 이르렀고, 채 2초도 되기 전에 컴컴한 어둠 속을 고요히, 아무도 말을 않고 비스듬히 강 중류를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불쌍하게도 왕이 구경꾼들로부터 혼이 나고 있으려니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던 것인데, 천만에 얼마 후에 왕은 윅왬 아래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엔 어땠지 재미가 공작" 그는 애당초 마을에는 전혀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마을로부터 10마일 가량 하류에 내려올 때까지 전혀 등불을 내놓지 않았다 거기까지 와서 비로소 등을 켜고 저녁을 먹었다. 왕과 공작은 고소하게 마을 사람들을 곯려 주었다고 허파가 터진 것이 아닌 가하고 생각될 만큼 몹시 웃어댔다. 공작은 말했다. "병신 놈들, 바보 놈들 첫날 구경꾼들이 가만히들 있어 가지고 마을의 나머지 놈들을 불러 넣으리라고 하는 걸 난 뻔히 알고 있었어. 그리고 사흘째 밤에는 잔뜩 대기를 하고 있다가 이번엔 네놈들 차례라고 벼르고 있던 것도 난 뻔히 알고 있었어. 그렇지, 이번은 우리들의 차례구먼 구 대관절 놈들이 얼마만한 효과를 올렸는지, 난 무슨 짓을 해서라고 그걸 알고 싶단 말이야. 놈들이 찬스를 어떻게 썼는지 그게 알고 싶단 말이야. 생각만 있으면 놈들은 피크닉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 처먹을 걸 듬뿍 가지고 들어왔으니까 " 이 사흘 밤으로 악당들은 465달러를 벌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본 적은 없었다. 얼마 후에 놈들이 잠이 들어 쿨쿨 코를 골기 시작하자마자 짐이 물었다 "이 왕들의 하는 일에 임잔 놀라지 않았어 허클" "아니, 놀라긴 왜." "웬일이야, 놀라지 않았다니" "왜는 왜야, 놀랄 게 어딨어. 신분이 신분이니까 말이지. 왕이란 모 두가 그런 거 야." "그렇지만 허클, 우리의 왕들은 정말 악당들이 군. 놈들은 정말 그래. 뼛속까지 밴 악당들이란 말이야." "그라, 내 얘기도 바로 그거야. 내가 알고 있는 한 왕이란 거의가 다 악당 놈들인데 뭐 . " "그래 " "한번 읽어보면 안단 말이야. 헨리 8세를 보란 말이야. 헨리 8세에 비하면 이따위 것은 주일학교 선생 감이야. 그리고 찰스 2세를 보란 말이야. 그리고 루이 14세를, 그리고 제임스 2세를, 그리고 에드워드 2세를, 그리고 리처드 3세를, 그밖에 이런 게 40명이나 돼. 그리고 또 그 옛날에 천지를 뒤흔들고 돌아다니던 그 색슨족의 7왕국 시대의 왕녀석 전부를 생각해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지독이니 나발이니 다 없어, 참말이지 한창때의 헨리 8세 영감을 만나 보았더랬으면 참 좋았을 걸 그랬군. 정말 화려했지. 매일 새 아내와 결혼해 가지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아내의 모가질 쌍등 잘라 버린단 말이야. 마치 달걀을 주문하듯 손쉽게 해치웠다니까. '넬 권을 데리고 오너라' 한단 말이야. 그러면 신하들이 데리고 올밖에. 다음날 아침 '이년 목을 잘라서' 이런다 말이 야. 그러면 이번에는 신하들이 쌍등 목을 자른단 말이야. '제인 쇼를 데려다 바쳐라' 하면 제인이 온단 말이야 다음날 아침 또 '목을 잘라 라' 그러면 신하들이 쌍등 잘라 버린단 말이야, '페아 로자먼을 불러 라' 그러면 페아 로자먼이 초인종에 불리워 나타날밖에. 다음날 아침 엔 역시 '목을 잘라라' 이러는 거지 그리고 이 왕은 아내들에게 매일 밤 얘기 하나씩을 시켜 가지고는 그걸 베껴 두었다가 그렇게 해서 1,001의 얘기가 모이면 그것을 한 권의 책에다 써 '최후 심판일의 대 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단 말이야. 이 이름은 참 잘된 이름으로, 일목요 연하게 그 사정을 설명하고 있지. 짐은 왕이라고 하는 걸 잘 모르지만 난 잘 알고 있어. 우리 뗏목에 있는 영감님들은 내가 역사책에서 만난 중에선 제일 얌전한 색시들이야. 그런데 말이야, 그 헨리라는 작자는 이 나라와 한판 겨누려고 무슨 궁리를 한 거야. 그래서 어떠한 식으로 했는지 알아 미리 예고를 했나,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에게 충분한 기 횔 주었나 천만에, 그런 짓을 하긴 뭘 해 이봐, 갑자기 보스들 항구 에서 차를 모두 바닷속으로 던져 버렸단 말이야. 그리고 독립선언 설 선포하고는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 투지. 이게 놈이 하는 식이야. 절대로 남에게 기횔 주지 않아. 자기 아버지 웰링톤 공작에게 그전부터 의혹을 품고 있었지.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알아 출두하라고 명령한 줄 알아 천만에, 그럴 리가 있나. 고양이에게나 하듯이 포도주 통에 넣어서 물 속에 덤벙 던져 버렸단 말이야, 글쎄. 사람이 그 작자 옆에 다 돈을 놓고 잊어 버리고 가면 그 작잔 어떻게 한 줄 알아 자기 마음 대로 써버리는 거야. 가령 놈이 무슨 계약을 한다고 해서 임자가 놈에 게 선금을 지불하고, 거기 앉아서 그놈이 하는 짓을 감시하고 있지 않는다면 놈은 무슨 일을 한지 알아 늘 정반대 짓을 한단 말이야. 입을 열면 그땐 무슨 말을 하구 금세 그 입을 봉해 버리지 않으면 열 때마 다 거짓말이 툭툭 튀어나온단 말이야. 헨리란 이런 녀석이야. 그러니 까 이제 여기 있는 왕들 대신으로 헨리를 태우고 있다면 이 왕들보다 도 몇 갑절 지독하게 마을 사람들을 곯렸을 게 아냐 나도 이 왕들이 양처럼 온순한 사람들이라곤 안해, 냉정하게 사실을 바라본다면 사실 그렇진 않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이 작자들은 저 헨리 8세에게 비교해 보면 어림도 없어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왕은 역시 왕이니까 사정 을 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전체로 봐서 왕이라는 건 지독하게 인품이 고약한 축들이야, 워낙 그렇게 자랐으니까 " "그래두, 이제 타고 있는 왕은 정말 지독한 놈이던데, 허클." "뭘 그놈이 다 그놈이지. 제아무리 지독한 놈이라 할지라도 우리로선 어쩔 수 없어. 역사책에도 어떻게 하면 좋다곤 써 있지 않아." "공작은 그래도 얼마간 좋은 데가 있는 작자던데 ." "그래, 공작은 달라. 하지만 그리 다를 것도 없지 이 공작은 공작 중에서도 꽤 지독한 축이야. 취했을 땐 근시에겐 왕과 영 구별이 안될걸" "그럴까, 어쨌든 이런 놈들은 딱 질색이야, 허클이 두 놈만으로 난 그만 손들었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짐. 하지만 우리들이 저놈들을 뗏목으로 데려 왔으니 저놈들이 어떠한 인간이라는 걸 잊어버리지 말고 사정을 봐주지 않으면 안 돼. 때론 왕이 없는 나라 얘길 좀 들었으면 할 때가 있어 , 나도." 이놈들이 왕도 공작도 아니라는 얘길 짐에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무 소용도 없을 뿐더러, 아까 내가 얘기한 대로 이놈들과 진짜 왕을 구별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나는 잠이 들어 버렸고, 내 당직 시간이 와도 짐은 나를 깨우지 않았다. 짐은 가끔 이런 일을 해주었다. 마침 새벽녘에 눈을 떠보니 짐은 거기 그대로 앉아서 머리를 무릎 사이에다 박고는 혼자서 신음을 하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나는 거기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또 그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나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짐은 멀리 떨어져 있는 처자 생각을 하고 그것으로 상심하여 향수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집을 떠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가 족을 생각하는 심정은 백인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지만 그러나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밤에 내가자고 있는 줄 생각하고 짐은 가끔 슬피 신음하면 서, "불쌍한 어린 엘리자베스 불쌍한 어린 조니 정말 쓰라린 일이고 나 너희들을 두 번 다시 만날 수는 없겠구나. 두 번 다시는" 하는 것이었다. 짐은 정말로 좋은 검둥이였다 그러나 이때만은 어떻게 된 셈인지 짐에게 그의 마누라와 아이들 이 야기를 시켜 주었다 잠시 후에 짐은 이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슬픈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방금 바로 저쪽 둑에서 철썩하고 무엇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그것으로 해서 그 어린 엘리자베스에게 몹시 굴던 때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야. 아직 채 4살도 못 되어서 성홍열에 걸려 하마터면 세상을 하직할 판이었는데. 겨우 그것이 나아 어느 날 그 애가 내 옆에 서있길래 엘리자베스에게 이렇게 말했단 말이야. '야, 문을 닫아라.' 그런데 그 앤 문을 닫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뻣뻣이 선 채 싱글싱글하며 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냐. 어찌나 화가 나는지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 큰 소릴 버럭 질러. '내 말이 안 들리냐 문을 닫으란 말이야' 하고 쏘아붙였단 말이야. 그런 데 그 앤 역시 그대로 우뚝 선 채 그냥 싱글벙글 이라, 그만 오장육부가 틀리는 게 아냐 그래서, '어디 내 뭐랬는지 알려 주마' 하면서 엘리자베스의 뺨따귈 힘껏 한 대 후려갈겼더니, 아니 그 앤 그만 쓰러지는 게 아냐. 그래서 난 다른 방으로 가서 한 10분 동안 있다가 다시 돌아 와 보니까, 문은 아직 그때까지 열린 채로 있는데 그 앤 문 한 중간쯤 되는 지점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슬프게 눈물을 짜고 있는 게이냐. 난 화니 나발이니 없었어 난 그만 그 애에게로 달려들려고 한 것 인데, 바로 마침 그때 바람이 획 불어와 문을-그 문은 안쪽으로 열 리는 문이었는데 - 닫아 버렸단 말이야. 그 애 뒤에서 꽈당 하구 ......그런데 말이야, 그 앤 꿈쩍도 하지 않았어, 난 그만 숨이 막혀 버릴 것만 같았어. 도저히 ...도저히...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난 부들부들 떨면서 가만히 기다시 피하여 나와 문을 가만가만 열고는 그 애 뒤로 살짝 머리를 내밀고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왁 하고 소리를 질했단 말이야. 그러나 여전히 꼼짝 도안하는 게 아냐 그 앤 아아, 허클 나는 그만 와아 하고 울음보를 터뜨리고는 두팔로 그 앨 꽉 껴안고는 이렇게 울부짖었어. '아이고. 불쌍한 이 어린것아 전지전능하신 하늘에 계신 하느님, 이 불쌍한 늙은 짐을 용서해 주소서 저는 제 목숨이 계속되는 한 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아, 허클, 그 앤 아주 아무것도 못 듣는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었어...... 아주 아주 아무것도 못 듣고 말도 못 하는. 그런데 그걸 그렇게 야단을 쳤으니." 제24장 목사로 바뀐 왕 다음날 날이 어슬어슬 저물 무렵 우리는 강 중류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라 있는 조그만 사주 아래에 뗏목을 매고는, 공작과 왕은 양쪽 둑에 있는 그 두 마을에서 한몫 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짐은 공작에게 되도록이면 두서너 시간 내에 끝나는 일로 해달라고, 하루종일 밧줄로 결박을 당한 채 윅왬 속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고, 진력이 나 죽을 지경이라고 애원했다. 우리는 짐을 혼자 남겨 두고 뗏목을 떠날 때는 그를 결박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짐이 결박 도 당하지 않은 채 혼자 있는 것을 남에게 들키면 도망친 검둥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작은 하루종일 결박을 당한 채 있는 것은 참 힘들게라고, 그렇다면 그렇게 안해도 좋을 무슨 방법을 하나 생각 해 주마고 했다. 공작은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인지라 곧 그 방법을 생각해 냈다. 공작은 짐에게 리어왕의 복장을 시킨 것이었다 -커튼용의 갱 사천으로 만 든 긴 옷과 백마털의 가발과 구레나룻 수염이었다. 그러고 나서 공작 은 신파용 페인트로 짐의 뺨과 손과 귀와 목 전체를 온통 마치 9일간이나 익사체로 있던 사나이처럼 육중하고도 칙칙한 푸른색으로 칠했다 정말 짐의 이와 같은 무서운 꼴을 본 적은 없었다. 다음 공작은 판자 쪽에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썼다. 아라비아인 환자 -단 미쳐 있지 않을 때엔 해 없음 공작은 이 판자쪽을 가는 나무쪽에다 못으로 박고는 그것을 윅왬 앞에다 세웠다. 짐은 자못 만족한 투로 매일 몇 시간 동안이나 밧줄로 결박을 당한 채, 요만한 소리 하나가 버스럭 날 때마다 부들부들 떨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얼마나 나은지 모를 일이라고 좋아했다. 공작 은 짐에게 마음을 턱 놓고 편히 있으라고, 그리고 만일 누가 붙잡으러 오는 일이 있다면 윅왬에서 튀어나와 잠시 날뛰면서 야수 모양으로 한 두 번 짖어 대면 그 사람은 그냥 내버려두고 가 버릴 테니 그렇게 하라 고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자못 그럴 듯한 판단이긴 했지만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짐이 짖어 댈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으리라. 짐은 죽은 송장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꼴로 보였으니까 말이다. 이 악당들은 다시 한번 '걸작'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큰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쯤은 그 소식이 이 근처에까지 퍼져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히트가 될 만한 계획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공작은 잠시 쉬어 가지 고 한두 시간 궁리를 한 다음 아칸소 마을에서 상연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하고 궁리해 보자고 주장했고, 왕은 아무 계획도 미리 세울 것 없이 그저 무턱대고 그 마을로 건너가서 히트될 만한 일은 신의 섭리에 맡기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것은 악마의 꼬임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그 전에 상륙했던 장소에서 기성복을 사들 것이 있었다. 그것 을 이제 왕은 입고는 나에게도 내 것을 입으라고 했다. 물론 나는 하라는 대로했다. 왕의 옷은 완전 흑의로, 그것을 입고 나니 정말로 의관 이 단정한 것이 여간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옷이 날개라 고,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인지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 여태까지는 둘도 없는 악질적인 늙은이로 보였는데 이제 횐 실크 모자를 벗고 생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훌흉하고 선량해 보이고, 경건하게 보이는 까닭으로. 이제 방금 노아의 편주 에서 걸어내려 온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고 어쩌면 노아 그 자신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짐은 카누를 깨끗이 청소했고, 나는 노를 저을 준비를 했다. 마을에서 3마일쯤 상류의 갑 아래쪽 둑에 커다란 기선 한 채가 서 있었다 짐을 싣기 위해서 2시간 전서부터 그 곳에 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왕이 말했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 몸차림을 하고 있으니까 센트루이스나 신시내 티나 그렇잖으면 그밖의 대도회지에서 강을 내려온 것으로 하면 좋을 테지. 저 기선에다 갖다대라, 허즐베리야 그놈을 타고 저 마을로 들어 가기로 하자. " 나는 기선을 타러 가자고 두번 다시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마을로부터 반 마일 상류의 둑에다 갖다댄 후 깎아내린 듯한 절벽을 따 라 흐름이 느린 물을 저어갔다. 얼마 후에 우리는 악의가 없어 보이는 시골 청년을 만났다. 젊은이는 통나무에 걸터앉아 얼굴의 땀을 씻고 있었다. 그날은 날이 퍽 더웠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 이 2개 놓여 있었다. "둑에다 대라." 왕의 명령이었다. 나는 하라는 대로 했다. "어딜 가시는 길이지, 젊은이" "기선을 타러요. 올린즈에 가는 길이에요." "그럼, 타시지" 하고 왕이 한 마디 "가만 있자, 잠간 내 머슴에게 그 가방을 도와 안으로 넣게 하지 둑에 올라가서 저 양반을 좀 도와 드려, 어돌푸스." 이건 내 이름일 테지 하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셋은 또다시 강을 오르기 시작 했다 이 젊은이는 아주 고마워하며 이런 날에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 은 큰 두통거리라고 하고는 왕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왕은 오늘 아침 강을 내려와 저기 저 마을에 상륙한 것인데, 이제는 2,3마일 상류의 농장에서 살고 있는 옛 친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대 답했다 그러자 젊은이가 말했다 '처음 내가 노인을 보았을 때 난 나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죠, '저건틀림없이 월크스님이야. 정말 그래. 한 걸음만 빨리 왔더라면 됐을걸, 에이' 했지요. 허나 이렇게도 생각했죠, '천만에 월크스님일 까닭이 없어 그 양반이라면 강을 저어 올라가진 않을 거야'라고. 노인은 월크 스님은 아니실 테죠" "아니, 내 이름은 블로젯트라고 하오. 알렉산더 블로젯트. 알렉산더 블로젯트 존사라는 것이 내 정말 이름이라고 할까, 주의 가난한 머슴의 하나니까. 허나 그건 그렇구, 월크스님이 시간에 대서 오시지 못한 것은 거 안됐구려. 그걸루 해서 무슨 손해라도 보는 일이 계시우.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 "뭘요, 재산의 손해는 없어요 그건 틀림없이 들어올 테니까요. 하지 만 그분 동생 피터님의 임종에 참석하지 못한 거죠. 그걸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건 아무도 알 길이 없죠만, 피터님으로서는 이 세상의 어떠한 것과 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죽기 전에 한번 월크스님을 보기가 소원이었습죠. 요 3주일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얘기라곤 통 없었으니까요, 두 분이 어릴 때 이후 쭉 오늘날까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는군요, 글쎄. 게다가 동생 월리엄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월리엄이라는 건 벙어리 소경 동생이에요-나이는 아직 서른인 가 서른다섯도 채 못 됐죠. 미국으로 이주해 온 것은 피터님과 조지님 들뿐으로, 조지란 결혼한 동생 말이에요. 조지님과 마나님은 작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아 이제 남아 있는 건 하베이와 월리엄, 이렇게 둘뿐 이에요. 그런데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이 사람들은 임 종시에도 서로 만나질 못했습죠. " "누가 소식을 알렸던가" "아. 그럼요. 알리구말구요. 한두 달 전에 피터님이 병석에 눕게 될때 알렸죠, 그야. 이번엔 어째 나을 것 같지 않아 하고 본인이 그랬으 니까요. 나이가 나이였으니까요. 여간 연만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조 지님의 딸들은 그 빨강머리인 매리 제인 외에는 모두 아직 너무 어려 서 그다지 의논 상대도 되지 않고 해서 피터님은 조지님과 마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웬일인지 아주 쓸쓸하게 보였어요 그리고 그리 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구요. 하베이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 보고 싶다고 결사적으로 애걸애걸이었지만-이 일이라면 월리엄님도 만나고 싶어했죠, 그야-그분은 유언장을 쓸 생각이라곤 통 염두에 두는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베이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장 써 그편지에다 어디다 돈을 감춰 두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제발 조지님의 딸들도 돈 걱정하지 않도록 재산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는 분부를 단단히 했단 말이에요. 조지님은 돈이라곤 한 푼도 남겨놓지 않았으니까요. 이 편지도 거기 있는 사람들이 가까스로 사정사정해서 쓰게 한 거죠. " "왜 하베이님은 오시지 않은 거지 어디서 살고 계시길래" "아아, 영국에 살고 있죠, 세필드에. 거기서 목사 노릇을 하고 있습죠. 이 나라엔 한 번도 온 적이 없습니다. 틈이 있어야죠 뭐. 게다가 어쩌면 그 편질 전혀 받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 "거 참 안됐군, 거 참 딱하게 됐군, 형제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니 거 참 가엾군. 자낸 올린즈에 가는 길이라고 했겠다" "네. 그렇지만 그건 일부분밖엔 안돼요 난 배를 타고 내주 수요일에 는 백부가 계신 리오 자네이로까지 간답니다. " "왜 긴 여행이군 하지만 즐겁겠군 나두 그런 여행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매리 제인이 제일 손윈가 다른 딸애들은 몇 살이구" "매리 제인이 열아홉, 스잔이 열다섯, 조안나가 열넷쯤 됐을까요. 이조안나라는 애가 자선사업에 열중인데 언청이지요." "불쌍한 애들이군 이런 차디찬 세상에 그런 꼴로 남게 되었다니." "뭘요, 그래도 괜찮은 편이죠. 피터 노인에게 친구가 여럿 있어서 그분들이 딸애들에게 나쁘겐 굴지 않아서요. 침례교파의 목사 홉슨이니 교회 집사 노릇을 하고 있는 로트 하베이니, 그리고 벤 럭커니, 앱너 새클포드니, 변호사인 레비 벨이니, 의사인 로빈슨이니. 그리고 이상 여러분들의 아내되는 양반들과 과부댁인 바틀리, 그리고‥‥‥가만있자 그밖에도 많죠. 그러나 이 사람들이 피터님과 가장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로 영감님이 영국으로 편지낼 때엔 가끔 편지 속에 그 이름들이 나오던 양반들로 하베이님도 여기 오면 누가 친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 다. " 왕은 연방 미주알고주알 이 젊은이에게서 캐어물어 그가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거의 다 캐내고 말았다. 물론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 관한 일. 모든 일도 낱낱이 캐어물었다 월크스 집 얘기도 전부 들었고. 피터의 직업도 물었다. 그는 무두질장이였다. 그 다음은 조지 의 직업도 물었다. 목수였다. 그 다음 하베이의 직업도 물었다. 영국 국교 반대파의 목사였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것을 물었다. "왜 그럼 자낸 그 기선 있는 데까지 걸어서 가려고 한 거지" "왜라니요, 그 배는 올린즈행의 대형 선이어서 마을에선 서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죠. 짐이 많을 때엔 불러도 서지 않 거든요. 신시내티에서 오는 배는 서지만 이 배는 센트 루이스에서 오 는 배거든요. " "피터 월크스님은 살림이 넉넉했던가" "그럼요, 꽤 넉넉한 편이었죠. 집과 땅이 있었고, 게다가 현금으로 3,4천 달러를 어디다 감춰둔 모양이에요." "세상을 떠나신 건 언제라고 그랬지" "그런 말 한 기억은 없지만 어젯밤이죠." "그럼 장례식은 필경 내일이겠구먼" "네 , 정오경 이에요. " "정말 딱한 일이 되었군. 하지만 우리들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 각오만큼은 해두지 않 으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러면 걱정할 게 없지." "그럼요, 그게 제일이죠. 어머니도 늘 그런 말씀이었어요." 기선에 이르고 보니 짐 싣는 일도 거의 끝나 얼마 후에 출범했다. 왕은 같이 타자는 말을 한 마디도 안했으므로 나는 결국 기선에 탈 기회를 놓치고 만 셈이었다. 기선이 떠나고 말자 왕은 나에게 1마일쯤 상류의 쓸쓸한 지점까지 저어 가게 한 다음 둑에 오르며 말했다 "자 대지 급으로 가서 공작을 데리고 와. 그리고 새 여행가방을 가지고 오는 거다. 공작이 저쪽 둑에 가 있다면 거기까지 가서 데리고 와.그리고 돈 걱정은 말고 몸치장을 단단히 하고 오라고 해 자, 그럼 어 서 저어라 " 나는 왕의 배짱을 알 수 있었지만 물론 아무 말도 안했다. 공작과 함께 돌아오자 우리는 카누를 감추었다 그 다음 둘이서는 통나무에 걸 터앉아, 왕은 그 젊은이가 한 말을 그대로 공작에게 전부 옮겼다 한 마디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얘기를 하고 있는 도중 왕은 영국 사람 처럼 하려고 노력을 하며, 이러한 악당치고는 왜 능숙하게 해치웠다 나에게는 그러한 흉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그런 흉내를 아 예 내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왕은 그 흉내가 참으로 근사했 다. 얼마 후에 왕은, "임잔 벙어리와 귀머거리 흉내는 낼 수 있을까. 브 릿지워터" 하고 물었다. 공작은 그런 것은 자기에게 맡기라고, 귀머거리와 벙어리 역이라면 무대에서 한 일이 있다고 대답하고는 두 사람은 기선이 오기를 기다리 고 있었다. 오후도 절반이 지날 무렵에 조그마한 기선이 2척 내려왔지만 그것은 상류 쪽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드디어 큰 놈이 왔으므로 두 사 람은 어이 하고 소리를 질러 그 배를 세웠다. 기선이 보트를 보내 주었 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탔다 그 배는 신시내티에서 온 배로, 우리들이 불과 4,5마일밖엔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자 선원들은 지독히 화를 내어 우리들을 욕하며 상륙시켜 주지 않겠다고 야단이다. 그러나 왕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손님들이 각자 1마일당 한 사람 몫으로 1달러씩 지불하고 보트에 태워서 내려달라고 한다면 기선이라도 그분들을 실어 줄 수 있을 텐데, 어떻겠소" 이 말을 듣자 선원들은 노기가 풀어지며 좋다고들 했다 그리고 마을 에 이르자 보트로 우리를 둑에까지 실어다 주었다 보트가 가까이 오 는 것을 보고 2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왕이 "여러분들 중에 어느 분이 피터 월크스님이 살고 계시는 데를 좀 가르쳐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고 묻자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어때, 내 말이 옳지" 하는 듯이 서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그 중 하나가 친절하고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참 딱한 일이 옵니다만, 우리로서는 월크스 노인이 어젯밤까지 살고계시던 장소만을 가르쳐 드릴 수 있을 따름이올시다 " 그러자 정말 갑자기 그 야비한 왕녀석은 완전히 도를 잃고는 그 사나이에게 쓰러지며 턱을 그 사나이의 어깨에다 고이고 등에 대고 울면 서, "아이구, 아이구, 가엾어라 우리 동생.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구 나. 한 번 서로 만나보지도 못하구‥‥‥아아, 너무도 너무도 심하구 나" 하고 흐느껴 울면서 공작 쪽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바보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물론 공작은 여행 가방을 떨어뜨리고는 울음보를 터뜨렸 다. 정말 이 두 놈처럼 지독한 사기꾼놈들은 난생 처음이었다. 사람들 은 주위에 모여들어 두 사람에게 동정하고, 여러 가지 친절한 말을 던 지면서 그 여행가방을 언덕 위에까지 날라다 주었다 그리고 자기들에 게 기대어 달라붙어 우는 대로 내맡기고는 왕에게 그 동생의 임종의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 주었다. 그러나 왕은 또 왕대로 그것을 다시 한 번 공작에게 손짓으로 이야기해 주며, 두 사람은 마치 12사도를 잃기라도 한 것처럼 다같이 세상을 떠난 그 무두질장이의 신세를 슬퍼 했다. 전에도 이러한 꼴을 구경한 적이 있다면 나는 백인이 아니라 검 둥이였다. 정말 인류라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제25장 눈물에 젖은 가짜 백부들 이 뉴스는 2분내로 온통 마을 내로 퍼져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뛰면서 저고리 소매에 손을 끼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삽시에 우리는 군중에게 포위되고 말았고, 그 몰려오는 군중들의 발소 리의 소란함은 마치 군대 행진 같았다 모든 창과 뜰은 사람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울타리 쪽에서는 그칠 사이 없이 누가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저 양반들이야" 그러자 군중과 함께 타달타달 뛰어오던 누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 그 집에 이르고 보니 집 앞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로 문간에는 딸셋이 서 있었다. 과연 매리 제인은 빨강머리였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 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 미모는 놀랄 만한 정도였으며 얼굴이며 눈이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백부들이 온 것을 그만큼 반가워 했었다 왕 은 두 팔을 괼쳤다 매리 제인은 그 팔 속으로 뛰어들었고, 언청이는 공작에게 뛰어들어 서로 꼭 껴안았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서로 만나 고, 이처럼 반가워하는 꼴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여자들 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에 왕은, 나에게는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을정도로 공작을 팔꿈치로 꾹 찔렀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고. 한 쪽 구석에 있는 의자 2개 위에 놓여져 있는 관을 보자, 왕과 공작은 서로의 어깨에다 한 팔을 걸치고, 다른 한쪽 손을 눈에다 갖다대고서 엄 숙하게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길을 내기 위해서 비켰고, 얘기소리며 떠드는 소리며가 뚝 그치고는 사람들은 '쉿' 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남자들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다. 그 고요 한 것은 마치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두 사람 은 관 있는 데까지 걸어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고는. 올린즈까지 들 릴 만한 큰 소리로 엉엉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서로 목 에다 감고, 턱을 서로의 어깨에다 고이고는 3분인지 4분인지 모르겠지 만, 나는 사나이 둘이 이렇게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게 다가, 내 말 좀 들어봐. 누구나가 다 이와 같은 짓을 해서 방안이 온통 내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축축하게 되고 말았다. 다음 하나는 관 이쪽 구석에 또 하나는 저쪽 구석에 무릎을 꿇고는 이마를 관에다 얹고 기도를 올리는 시능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자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울음 보를 터뜨리고 큰 소리로 흑흑 흐느껴 울었다. 불쌍한 딸들도 마찬가 지였다. 그리고 거의 전부의 여자들이 한 마디 말도 없이 소녀들 앞으 로 가서 엄숙하게 이마에다 키스를 하고, 다음 소녀들 머리에다 손을 얹고 눈물이 글썽글썽한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통곡을 하고는 혹 흑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으며 그 앞을 떠나 다음 여자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이렇게 가슴속이 메스꺼워지는 광경을 난 본 적이 없다 얼마 후 왕은 일어나 약간 앞으로 걸어나와 점점 감정이 고조된 듯한모습을 지으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눈물과 엉터리 가 반반 섞인 연설이었다 나와 내 불쌍한 동생에게 있어, 고인을 잃은 것, 더군다나 4천 마일이라고 하는 먼 나그네 길을 온 것인데, 이처럼 살아 있는 고인을 만나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쓰라린 시련이지만, 그 쓰라린 시련도 여러분들의 고마우신 동정과 그 신성한 눈물로 해서 우 리들에게는 유쾌하고 신성한 것이 되었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 형제는 마음에서 감사를 드린다. 말로는 너무나도 약하고 냉정하므로 감사를 드릴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엉터리 수작을 늘어놓은 위에, 왕은 흐느껴 울면서 자못 신앙이 깊고 경건하게 아멘까지 부르고, 그러고 나서 열으로 물러서 가슴이 터지지나 않 을까 할 정도로 울어댔다. 왕의 입에서 이러한 연설이 끝나자 군중 속에서 누군가 영광의 송가 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동은 있는 목소리를 다 짜내어 합창하자 마음이 으쓱해지며 마치 예배가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속이 후 련해졌다 정말 음악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저렇게 터무니없는 왕 의 연설과 엉터리 수작을 들은 후에 이만큼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상 쾌하게 하고, 성실한 아름다운 음률을 전해 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러는 중에 왕은 또다시 그 엉터리 수작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 가족의 절친한 친지 몇 분이 오늘밤 여기서 우리들과 식사를 같 이 하고, 고인의 유해 옆에서 함께 철야를 해주시면 나와 조카들은 얼 마나 고맙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며, 저기 누워 있는 불쌍한 동생이 이 야기를 할 수 있다면 누구누구를 불러댈지 나는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그리운 이름들이며 동생으로부터의 편지 속 에 가끔 나온 이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분들의 이 름을 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사 홉슨 씨, 집사 로트 하베이 씨 벤 럭커니 씨. 앱너 새클포드 씨, 레비 벨 씨, 의사 로빈슨 씨, 그 리고 그분들의 부인들 및 바틀리 과부댁들이올시다 " 라고 말했다. 홉슨 목사와 로빈슨 의사는 둘이서 마을 동구 밖으로 사냥을 나간 중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의사는 환자를 저세상으로 보내 버리기 위해 서, 목사는 그것에 올바른 방향을 알리기 위해서 나갔다고나 할까 변 호사인 벨 씨는 일이 있어 루이스빌에 출장중이었다 그러나 그밖의 사람들은 모두 거기 있었으므로 모두 왕에게로 몰려나와 왕과 악수를 나누고 사례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공작과도 악수를 했지만, 말이라곤 한 마디도 없이 바보들처럼 그저 싱글벙글 할 뿐 연방 머리만 끄덕여 보이고 있었다. 한편 공작은 여러 가지로 손짓을 하면서 마치 입이 떨어지지 않는 젖먹이 모양으로 연방 "으 으 으......으 으 으" 할 뿐이었다. 이와 같이 왕은 엉터리 수작을 계속 지껄였고, 마을 안 모든 사람과 개까지 일일이 그 이름을 대며 이제 어떠냐고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 마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종류의 자질구레한 사건과 조지와 피터의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 등을 지껄였다. 왕은 그게 모두 피터로부터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던 것처럼 지껄였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 다.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우리들이 카누로 기선까지 데려다 준 그 젊은 바보에게서 들은 것이었다 얼마 후 매리 제인은 부친이 남겨놓은 편지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 것을 큰 소리로 읽고 나서 또 울었다 편지에는 집과 금화 3천 달러를 딸들에게 주고, 한참 성업중인 제혁소와 그밖의 집 몇 채와 토 지(약 7천 달러의 가치가 있는)와 금화 3천 달러를 하베이와 월리엄에게전하라고 써 있고, 예의 그 6천 달러의 현금이 지하실 어느 곳에 감추 어져 있다고도 쓰여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기꾼은 지하실로 가서 그 6천 달러를 가지고 와 모든 것을 공명정대하게 하자고 하고는 나에게 초를 가지고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는 지하실로 들어가자 문을 꼭 닫 고 주머니를 찾아내서 안에 든 것을 마룻바닥에 쏟아놓았다. 모두 금 화였는데,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왕의 두 눈이 반짝이는 꼴이란 왕은 공작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이봐, 어때 근사하지 아니 천만에 근사니 나발이니 하고 있을 때 가 아냐 어때, 브릿지워터, '걸작' 같은 건 이것에 비하면 문제도 안 되지, 어때 " 공작도 그 말이 옳다고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은 금화를 긁어모아 손가락 사이에서 마루 위로 짤랑짤랑 흘려 떨어뜨렸다. 왕은 말을 이 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 소용없어. 부자인 고인의 형제이며, 뒤에 남은 재외 재산상속인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야, 브릿지워터, 임자와 내 가 맡은 역할이란 말이야. 이게 모두 신의 섭리를 믿은 데서 생긴 일이 야. 결국 뭐니뭐니 해도 이게 제일이야. 난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지만 이게 역시 제일이더군." 보통사람이라면 이 금화더미를 보고서만도 만족하고는 계산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자는 그렇지 않았다. 계산 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는 결국 415달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 다 왕이 단번에 불평을 했다. "젠장 대관절 이 415달러를 어떻게 했을까" 잠시 두 사람은 조바심을 치며 그 근처를 찾아보았으나 한참만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왜 중병이었으니까 잘못 생각했는지도 몰라. 아마 그럴 거 야. 제일 좋은 방법은 이대로 내버려두고 가만히 입을 꾹 봉하고 있는 거야. 이만한 액수라면 없어도 되니까." "쩟, 그도 그래. 없어도 되긴 하지. 그까짓 거 난 아무렇게도 생각 안해. 여기서 우린 아주 무섭도록 정정당당하고 정직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이 돈을 위로 가지고 가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계산해 보고 싶다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의혹도 모두 풀릴 게 아냐. 그 렇지만 고인이 6천 달러 있다고 했으니까 우리들로서는 ...... "가만 있자...... 공작의 말이었다. "우리들 돈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면 어떨까" 이러면서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기 시작한다 "그것 참 귀신이 놀라 자빠질 좋은 생각이군. 여보, 공작. 정말 노형 은 훌륭한 머리의 소유자구려 예의 그 '걸작'이 또 우릴 돕는다 그말 이지." 왕도 금화를 꺼내서 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파산 직전까지 갔지만 6천 달러의 귀를 깎듯이 맞추었다 "이봐" 하고 공작이 다시 말을 이어, "또 하나 생각난 게 있어. 위로 올라가서 이 돈을 계산해서 그걸 딸들에게 준단 말이야, 어때 " "옳지, 좋은 생각이야, 임잘 껴안게 해달라구 어쩌면 그렇게도 좋은 생각이 척척 나올까, 난생 처음인데. 확실히 임잔 아직 내가 보지 못한 깜짝 놀랄 머릴 갖구 있구먼. 아아, 참 좋은 생각이군. 틀림없어. 우릴 의심하라면 얼마든지 하라지. 이걸로 의심은 깨끗이 풀릴 테니까." 우리들이 위로 을라갔을 때에는 모두 테이블 주위로 모여들었다. 왕 은 금화를 세워 테이블 위에다 300달러씩 한 덩어리로 하여 보기좋게 20개의 덩어리로 쌓아올렸다 모두들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군침 을 흘린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금화를 또다시 주머니 속에다 긁어넣 고는 왕은 또 한바탕 연설을 하려고 가슴을 넓게 폈다. "여러분, 저기 누워 계신 나의 불쌍한 동생은 슬픔의 골짜기에 남겨 진 자들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푸셨습니다. 동생은 그가 귀여워하고 보호해 온 이 불쌍한 어린 양들에게, 그 아비와 어미를 잃은 이 고아들 에게 아낌없이 선심을 베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 일 동생이 그가 사랑하는 월리엄과 내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면, 이 딸애들에게 좀더 아낌없이 선심을 베푸셨음에 틀림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내 마음속엔 아무것도 의심할 거라곤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차제 에 동생의 소원을 방해하는 형제란 도대체 어떠한 형제이겠습니까 또 차제에 동생이 그렇게까지 애지중지하던 이 불쌍한 귀여운 어린 양에 게서 돈을 빼앗는 - 그렇습니다. 돈을 빼앗는 것입니다 - 백부란 도 대체 어떠한 인간들이겠습니까 월리엄만 상관없다면 괜찮으리라고 생 각합니다만 - 월리 엄도 - 어디 잠간 물어보겠습니다. " 왕은 공작 쪽을 돌아다보고는 계속 손짓을 시작했다. 공작은 잠시 멍청한 얼굴로 왕을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뜻을 알아챘는지 기쁜 나머지 왕에게로 달려들어, 15번이나 껴안고 나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왕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바로 그대로입니다. 이걸로 월리엄이 이 일을 어떻게생각하고 있는지 이제 한 짓을 보시면 의심할 여지도 없겠지요. 자, 매 리 제인, 스잔, 조안나, 이 돈을 받으라구. 고스란히 받으라구 이것은 저기 누워 계신 차디차게 식어 있지만 기뻐하시고 계신 저분으로부터 의 선물이외다. " 매리 제인은 왕에게로 달려들고, 스잔과 언청이는 공작에게로 달려 들어 아직까지 내가 본 일이 없을 정도로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였다.그리고 모두 눈에다 눈물을 싣고서 달려와 이 사기꾼들의 손이 부서져 라고 힘껏 악수를 하면서 쉴새없이 지껄였다. "아이구 얼마나 착한 분들일까 얼마나 기특한 분들일까 어쩌면 그렇게도"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또다시 고인의 얘기를 시작했고, 참 착한분이었다는 등, 그분이 세상을 떠난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지 모르겠 다는 등, 그러한 얘기를 여러 가지로 늘어놓았다. 얼마 후에 쇠 같은 턱을 하고 있는 몸집이 큰 사나이가 밖으로부터 사람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와 말 한 마디도 없이 장승처럼 우뚝 서서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 사나이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왕의 얘기에 모든 사람이 넋을 잃고 귀를 기울이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무슨 얘기를 꺼내려 하다가 이런 말을 하고 있 었다. "이분들은 고인의 특별한 친지였으니까 그래서 오늘밤 여기다 초대 한 것이올시다. 그러나 내일은 여러분 전부가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왜냐하면 고인은 여러분 전부를 존경하였고, 좋아 하셨으니까요. 그러니까 고인의 장례 오오지스(잔치)에는 여러분이 와 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 이와 같이 왕은 자기 스스로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엉터리 소리를 늘어놓으며, 연방 장례 '오오지스' 이야기에 꽃 을 피우고 있었지만 마침내 공작은 참다못해 조그만 종이쪽지에다. '옵시퀴즈(장례식)야, 이 병신아' 하고 써서 그것을 접어. 중얼거리면 서 사람들 머리 위로 손을 뻗쳐 왕에게 주었다. 왕은 그것을 보더니 주 머리 속에다 처넣고는 이렇게 화제를 돌렸다. "불쌍하게도 월리엄은 저런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항시 올바른 마 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장례식에 초 대해 달라고, 누구나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환영해 달라고 나에게 단단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는 데......나는 이제 방금 그 얘길 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왕은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해,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가끔 예의 오오지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세 번 이 문구를 쓴 후에 왕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오오지스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보통 쓰는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그렇게 쓰이진 않지요. 옵시퀴즈라고 하는 것이 흔히 쓰는 말 이지요. 그러나 오오지스라고 하는 편이 올바른 말투이기 때문이올시 다. 현재 영국에선 옵시퀴즈란 말은 쓰지 않습니다. 폐어가 되어 버렸 지요. 이제 영국에선 오오지스라고 합니다 그것이 좋지요. 왜냐하면 그 편이 우리의 의사표시를 정확히 표현해 준단 말이에요, 이것은 그 리스어의 '오르고' 즉 외부. 공개 해외라고 하는 말과 헤브라이어의 '지이숨', 즉 심는다. 덮는다 배상한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시겠지만 장례의 오오지스란 실외의 혹은 공개 장례식이라는 뜻이을시다. " 이것은 최악의 큰 실수였다 여기서 그 쇠턱 사나이는 정면으로 "하,하, 하" 하고 웃어댔다. 모두 아찔해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이구동성 으로, "어찌된 일이오, 로빈슨 선생" 했다. 앱너 새클포드가 그 뒤를 받아 "아니, 로빈슨 아직 모르고 있구먼 이분이 바로 하베이 월크스 씨 라네"라고 했다. 왕은 열심히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한쪽 손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선생이 바로 우리 불쌍한 동생의 친한 친구인 의사선생이시던가요저 나‥‥‥ "손을 떼지 못해" 의사가 쏘아붙였다 "네놈은 바로 영국 사람처럼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런 서투른 흥내는 난생 처음이다 네놈이 피터 월크스의 형이라고 너는 사기꾼이야. 그게 네 놈의 진짜 모습이야" 모든 사람이 흥분한 꼴이란 모두들 의사 주위에 몰려들어 그를 달래려고 야단이었다 하베이가 얼마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가 하베이 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었고, 동네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알고 있고,개 이름까지 알고 있더라는 것을 설명했고, 하베이와 이 불쌍한 소녀 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도록 주의해 달라고 거듭 애원했다. 그러 나 헛수고였다. 의사는 더욱 펄펄 뛰며 영국 사투리를 이렇게 서투르 게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사기꾼이 아니면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원 이겠느냐고 호통했다. 불쌍한 처녀들은 왕에게 매어달려 울고불고 야 단이었고, 그러나 이번에는 의사가 갑자기 처녀들 쪽으로 홱 돌아섰 다 "난 너희들의 부친의 친구이며, 너희들의 친구이기도 하단 말이다.난 친구로서, 더구나 너희들을 해악으로부터 지키고 싶다고 원하는 성 실한 친구로서 경고하는데 이 악한과 손을 당장 떼도록 하란 말이다.그리고 그리스어니 헤브리어니 하고 터무니없는 소릴 떠들어대는 이 무식한 사기꾼과 제발 손을 떼란 말이다 이런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 는 사기꾼놈은 다시는 없어 어디서 귀담아 들은 너희들의 이름과 사 실들을 주워 가지고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걸 너희들은 증거라고 딱 믿고는, 게다가 좀더 좋은 분별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이 바보 친지들 의 조력으로 점점 바보짓만 하고 있단 말이다. 매리 제인 월크스, 너는 내가 네 친구이며, 더구나 사심이 없는 친구라고 하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자 내 말을 잘 듣고 이 불쌍한 악당을 쫓아내라구 이게 내 소원이다. 알겠나" 매리 제인은 자기 몸을 꼿꼿이 편 것인데, 아아, 그 아름다운 모습 "이게 내 대답이에요 " 매리 제인은 금화가 든 주머니를 쳐들어 왕의두 손에다 쥐어 주었다 "이 6천 달러를 받으시고 나와 동생들을 위해 서 아무쪼록 좋도록 투자해 주세요. 우린 영수증 같은 건 소용없으니 까요. " 매리 제인은 한쪽에서 왕을 껴안고, 스잔과 언청이는 또 한쪽에서 껴안았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전원이 마치 폭풍우가 부는 것처럼 박수 를 치며 마루를 발로 쿵쿵 굴렀다. 일면 왕은 머리를 곧추 쳐들고는 자 못 만족한 듯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좋아, 난 이 일에서 손을 뗄 테야. 그러나 너희들에게 미리 경고하 는 바이지만, 너희들은 오늘의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쓰라릴 때가 꼭 오고야 말 게다. " 이러고 나서 의사는 성큼성큼 방을 나가 버렸다. "알았습니다, 선생님." 얼마간 비웃는 듯한 어조였다. "쓰라려지거든선생님을 모시도록 하지요." 이 말을 듣고 모두 껄껄 웃어댔고, 참 말 한번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제26장 왕의 약탈품을 훔치다 사람들이 모두 가버리자 왕은 손님용 침실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매리 제인에게 물었다. 매리 제인은 손님용 침실은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은 월리엄 아저씨에게,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자기 방은 하베이 백 부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동생들의 방에 가서 조그만 침대에서 잘 작 정이며, 그리고 다락에는 짚이불이 있는 조그만 방이 하나 있다고 했 다. 왕은 이 다락방을 자기 머슴의 방으로 하자고 했다. 이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매리 제인은 우리를 이층으로 데리고 가 각자의 방으로 안내 해 주었다. 소박하고 기분이 좋은 아늑한 방들이었다 매리 제인은 하 베이 백부님의 방해가 된다면 옷가지와 여러 가지 잡품을 방에서 내오 겠다고 했지만, 왕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조금도 방해가 될 것이 없다 고 딱 잡아떼어 말했다. 옷가지는 벽에 쭉 걸려 있었고, 마루까지 끌리 는 갱사 커튼이 그 앞을 덮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헌 모피 트렁크가 놓여 있었고, 다른 쪽 구석에는 기타의 상자, 그리고 여자애가 방안을 장식하는 데 사용하는 가지가지의 조그만 장난감과 번드레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왕은 이러한 것이 있는 편이 도리어 가정적이고 기분이 좋으니 그대로 놔두도록 했다. 공작의 방은 아주 협소했지만 그러나 왜 훌릉했고, 나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성대한 만찬회가 베풀어졌고 낮에 왔던 남녀 전원이 참석했 으며, 나는 왕과 공작 의자 뒤에 서서 시중을 들었고, 검둥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 매리 제인은 테이블 상좌에 스잔을 옆에다 앉히고 앉아서, 이 비스킷은 모양이 왜 이러냐는 등, 이 설탕절임은 맛 이 왜 이러냐는 등, 이 프라이치킨은 왜 이렇게 맛이 없고 단단하냐는 등, 이러쿵저러쿵 보통 여자가 칭찬을 듣고 싶을 때 입에다 담는 가지 가지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손님들도 모든 음식이 뛰어나 게 맛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렇게 받았다. "어떻게 해서 이 비스킷을 이렇게 고운 갈색으로 구을 수가 있었을 까" "아니 도대체 어디서 이런 슬슬 녹는 설탕졸임을 구했을까" 하고 여 러 종류의 손님들이 만찬회 석상에서 지껄이는 으레 나오는 그 아첨의 말을 늘어놓았다. 만찬회가 끝나자 나와 언청이는 부엌에서 먹다남은 것을 저넉밥으로 먹었고, 다른 사람들은 검둥이들이'설거지하는 것을 도왔다. 언청이가 가끔 영국 이야기를 묻는 바람에 살얼음을 밟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 임금님을 본 적이 있어" "누굴 월리엄 4세 말이야 그럼 있구말구. 우리의 교회에 오니까." 나는 월리엄 4세가 훨씬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딱 떼고 있었다 그래서 월리엄 4세가 우리의 교회에 온다고 했더니 언청이 가 물었다. "뭐라고 늘 오나" "그럼. 늘 오지. 왕의 자리는 마침 우리 자리 바로 건너편에 있었는데 , 설교단 저쪽에 ." "난 임금님은 런던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렇구말구. 도대체 그밖에 어디서 살고 있을 줄 알아" "한데 넌 세필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말문이 딱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닭의 뼈가 목에 걸린 시늉을하고는 위기를 면할 시간의 여유를 얻어 이 고비를 넘길 계획을 세웠 다. 잠시 후 나는 대꾸했다. "내 말 뜻은 말이야, 왕이 세필드에 오실 때엔 늘 우리의 교회에 오신다는 말이야. 그것은 여름뿐으로, 왕은 해수욕을 하러 오시는 거야."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세필드는 해변가가 아냐." "그래 , 누가 해변가라고 그랬나" "어머나 자기가 그러구서 ." "내가 언제" "그랬어" "안 그랬어 " "그랬어"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어." "그럼 뭐라고 했지" "왕이 해수욕을 하러 오신다고 그랬지 그뿐이야," "그럼 해변가도 아닌데 어떻게 무슨 수로 해수욕을 해" "이봐, 넌 '컨그레스 광천'을 본 일이 있느냐 말이야" "그래 있어." "그렇다면 광천을 얻고 싶은 사람은 꼭 컨그레스(국회)에 가야만 하나" "그야 그렇지 않지 ." "그럼, 월리암 4세도 해수욕을 하러 바다까지 갈 필요는 없단 말이 야." "그럼 어떻게 해수욕을 해" "이 지방 사람이 컨그레스 광천을 얻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통에다실어온단 말이야. 계필드의 궁전에는 솥이 몇 개씩이나 있어서 왕은 바닷물을 끓이게 한단 말이야. 그만한 양의 물을 바닷속에선 도저히 끓일 수 없으니까, 그 설비가 없기 때문이지." "이제 겨우 알겠군, 애당초부터 그렇게 말하면 시간이 절약됐을 걸 가지고. " 언청이가 이렇게 말했으므로 나는 또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온 것만 같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후련해졌다. 다음 언청이는 이렇게 물었다. "너도 교회에 가니" "가구말구. 늘 가지 ." "어디 앉아" "물론, 우리 가족석에 앉지." "누구의 가족석" "물론 우리들 자리지. 네 하베이 백부님 자리지." "백부님 자리라고 왜 백부님에게 자리가 필요하담" "앉는데 자리가 필요하지 무엇 때문에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넌" "하지만 백부님은 설교단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아이쿠, 나는 그가 목사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말문이 딱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한번 더 닭뼈가 목구멍에 박힌 시능 을 하고는 그 동안에 지혜를 짜냈다 "제기랄, 한 교회에 목사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어머나, 그럼 뭣하러 몇 씩이나 있어" "뭐라고 왕 앞에서 설교하는데 말이야 너 같은 사람을 본 일은 없 어. 열일곱 명이나 있어." "열일곱 명이나 어머나 나라면 비록 천국에 못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무슨 수로 듣는담. 한주일 동안이나 걸 릴 게 아냐." "천만에, 같은 날 모두 설교하는 게 아냐, 그 중 하나만이 하는 거 야."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어" "뭐 대단할 게 없지. 서성거리거나 헌금 접시를 돌리거나 그저 그럭 저럭 그런 거야. 대체로 하는 건 없어," "그럼 뭣 땜에 있어" "뭣 땜이냐구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지 넌 아무것도 몰라" "그래, 난 그런 엉터리 수작은 하나도 알고 싶진 않아. 영국선 머슴 대접이 어때 우리들이 검등일 대우하는 것보다는 나은가" "천만에 저쪽에선 머슴 같은 건 전혀 사람이 아니지. 개만도 못해,그 대접이" "우리들처럼 휴가를 안 주나 크리스마스, 정월의 한주일이니, 7월 4일의 독립제니" "아서, 아서, 그것만 들어도 네가 영국에 가본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저, 말이야, 언청‥‥‥ 아니 저 조안나, 1년 중 휴가라는 건 없어, 있을 게 뭐야. 서커스에도 안 가고, 신파에도 안 가고, 검둥이 신파에도 아무 데도 안 가." "교회에도" "응, 교회에도." "하지만 넌 언제나 교회에 나가지 않아" 아이쿠, 또 큰일났다. 말문이 또 꽉 막히고 말았다. 내가 저 늙은이 의 머슴이라고 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나 곧 피할 길 하나가 머리에 떠올라, 시종은 보통 머슴과는 달라 싫어도 할수없이 교회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법률이 있다고 하 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다지 근사하게 되지 않아, 얘기를 한 후에도 언청이가 만족해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자, 정말을 얘기해 줘, 넌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냐" "정 말이야." "하나도 거짓말이 아냐" "하나도 거짓말이 아니구말구 거짓말이라곤 하나도 없어." "이 책에다 손을 얹고서 그렇게 말해 봐." 보니 그것은 사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손을 얹고서 그렇게 말 했다 그래서 언청이는 겨우 납득이 간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조금은 신용이 가 하지만 넌 모두가 믿어지진 않아." "뭣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냐, 조" 하고 그때 마침 매리 제인이 스잔을 거느리고 부엌으로 들어와서 우리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었다 "이 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좋은 일도 친절한 일도 아니다. 특히 타국민으로 집과 사람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냐 네 가 저런 대우를 좀 받아 봐. 그 기분이 어떤지 " "또 시작이군 언니는 누가 아직 경치기도 전에 언제나 꼭 나타나서 그 사람을 돕는단 말야 난 얘에게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얘기 말이야,어째 나에게 거짓말을 시귀고 있는 것만 같애, 그걸 전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했을 뿐이야. 내가 한 말은 그뿐이야. 그런 조그 만 것쯤 참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 "작건 크건 그건 아무래도 좋아. 이 앤 우리집에 온 손님이니까 그런말을 하는 건 좋지 못해 만일 네가 이 애의 입장에 있다면 넌 부끄러 운 생각이 안 들겠어 그러니까 남에게 부끄러운 생각을 불러일으킬 말을 해선 안 돼 . " "하지만 언니, 이 애가 그러는데 ‥‥‥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네가 이 앨 친절하게 해주고, 그 애가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는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을 해선 안 돼." 나는 혼자 가슴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 처녀의 돈을 저 늙은 뱀이훔치는 것을 잠자코 보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스잔이 끼여들어 놀 랍게도 이것 또한 언청이를 몹시 나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또 생각했다. '그놈이 돈을 훔치고 있는 것을 내가 잠자 코 보고 있는 피해자의 처녀가 또 하나 있구나' 하고 얼마 후에 매리 제인이 또 한번 공격을 시작하며 부드럽게 순순히 타 일렀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말이 끝나자 불쌍한 언청 이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는 와아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럼 됐어, 이 애에게 잘못했다고 해." 언니들의 말대로 언청이는 사과했다 그 사과하는 폼이 참 근사했다.어찌나 아름다운지 듣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이 애에게 사과시킬 수 있다면 거짓말을 천 번 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했 다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또 하나 있는 이 처녀의 돈을저놈들이 훔치는 것을 보고도 나는 모르는 체하고 있구나' 하고. 그래 서 언청이가 나에게 사과를 하자 이번에는 세 사람이 다같이 열심히 내 마음이 풀어져 친한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 려고 노력을 했다 나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천하고도 비열하게 생 각되었으므로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했다. 결심은 되었다. 이 처녀들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돈을 감춰 둬야겠다고. 그래서 나는 급히 부엌을 나왔다. 자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 말은 언젠가는 자겠다는 뜻으로, 나는 혼자가 되자 깊이 이 일을 궁리해 보았다 그 의사에게로 몰래 가서 이 사기꾼놈들을 밀고할까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의사는 밀고한 사람의 얘기를 남에게 할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왕과 공작으로부터 나는 경을 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몰래 매리 제인에게 가서 얘기할까 아니, 그것도 안 될 소리다. 매리 제인은 그것을 안색에 나타낼 것이 뻔하니까. 그러면 두 녀석이 대뜸 그것을 알아채고는 돈을 가지고 있으니까 곧 그것을 가지고 몰래 자취를 감출 것이 뻔하다. 만일 매리 제인이 응원을 구한다면 필경 나도 도중에 그 속에 횝쓸려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안될 노릇이니까 좋은 방 법이라곤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훔쳐내는 것이다.내가 했다고 그놈들에게서 의심을 받지 않을 방법으로 감쪽같이 훔쳐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놈들은 이 동네에서 좋은 봉을 잡았으니 필시 이 가족과 이 마을에서 긁어모을 수 있을 때까진 여기를 떠날리가 만 무하며, 나로서는 충분히 기회를 가질 여유가 있으리라 나는 돈을 훔 쳐내어 감춰 두었다가 얼마 후 강 훨씬 하류에 갔을 때 편지를 내어 매리 제인에게 어디다 돈을 감추써 두었는지를 알리기로 하자. 그러나 되도록이면 오늘밤 훔쳐내는 것이 좋다. 그 의사는 그렇게 말을 하기 는 했지만 정말 손을 멜 생각은 없고, 두 녀석을 여기서 위협해서 쫓아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놈들의 방으로 가서 찾아보리라 생각했다 이층 복도는 기암절벽이었지만 공작의 방을 찾아내어 손더듬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이 그 돈을 자기 이외의 사람에게 맡겨 둘 리는 만무하리라 고 생각하게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왕의 방으로 가서 그곳을 찾아보았 다 그러나 촛불이 없이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물론 촛 불을 켤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하나의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매복해 있다가 두 녀석의 말을 엿듣자는 것이다.마침 그때 이층으로 올라오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침 대 밑으로 도망쳐 들어가려고 그쪽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으나 침대는 내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곳에 없고, 손에 부딪친 것이라곤 매리 제인의 옷가지를 감추는 커튼이었다 나는 그 뒤로 얼른 몸을 피해 옷들 사 이로 바싹 몸을 감추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오자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공작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무릎을 꿇고 침대 아래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까 찾았을 때 침대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 이 무슨 일을 몰래 하려고 할 때 으레 침대 밑에 숨는 것이 당연한 일 이 아닐까그 다음 두 사람은 앉아서 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데, 대관절 뭐야 어서 얘기를 꺼내봐. 여기서 놈들에게 우리들의 얘기를 할 기회를 주기보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슬픈 소릴 지르고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을 테니까 말이야." "이봐, 이렇단 말이야, 대장, 난 불안해 죽겠어. 암만해도 그 의사가 마음에 걸려 죽겠어. 그래서 임자의 계획을 듣고 싶었단 말이야. 나에 게 안 하나가 있는데, 그건 좋은 안이라고 생각해." "어떤 안인데, 공작" "다른 게 아냐, 새벽 3시에 여길 탈출하여 이미 우리 수중에 들어온 것만을 가지고 강을 빨리 내려가는 편이 좋겠다는 거야. 더욱이 이렇 게 손쉽게 그것을 손안에 넣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 마땅히훔쳐서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돈을 돌려주어, 말하자면 우리들의 머 리에 내던져진 격이니 난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어서 삼십육계를 부르는 게 좋겠단 말이야. 암만해도," 나는 이 말을 듣고 꽤 실망했다. 한두 시간 전이라면 그렇지도 않았 겠지만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당황하고, 아주 낙망하고 말았다 왕은 열 심히 반대하여, "뭐라고 나머지 재산을 팔아 버리지 않는단 말인가바보탈을 쓰고서 8,9천 달러의 가치가 있는 재산을 내던지고 내뺄 작정 이란 말이지 전부 버젓한 날개가 돋아 있듯이 잘 팔릴 물건을" 공작은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으며, 이 금확 주머니만으로 충분하 다 자기는 이 이상 더 깊이 들어가기는 싫다. 고아들로부터 낱낱이 그 재산 전부를 빼앗아 버리기는 싫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이 렇게 말했다. "이봐, 거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우리가 그 계집애들로부터 빼앗는 건 이 돈뿐으로, 그밖엔 아무것도 없어 이 재산을 사는 놈이 손해를 볼 뿐이야. 왜냐하면 소유자가 우리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기 가 무섭게, 그것도 우리들이 삼십육계를 부른 후 곧 그것이 탄로날 것 이지만, 매도는 무효가 되어 모두 원주인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단 말이야. 이 집 고아들은 집이 되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해 아직 젊고 건 강하니까 편히 살아갈 수 있지. 고생하리라는 염려는 조금도 없어 근 데 좀 생각해 보란 말이야. 이 애만도 못한 살림을 하고 있는 작자들이몇 천명 몇만 명 있잖아. 정말 저 애들은 무슨 불평 하나 늘어놓을 자 격이 못 돼." 왕이 이리저리 공작을 설복하는 바람에 그만 공작이 지고 말았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렇다면 그 의사녀석이 줄줄 따라다니고 있 는데 언제까지 꾸물거리고 있는 것은 여간 어리석은 짓이 아니라고 했 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지지 않으며, "의사놈이 다 뭐야 그까짓 놈이 다 뭐 말라죽은 놈이야 마을 내의바보놈들이 우리 편을 들고 있잖아 그리고 어떠한 마을이든 바보놈들 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냐" 두 녀석은 또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공작이 말했다. "저 말이야, 그 돈 감춰 둔 데 있잖아 그게 암만해도 시원찮은 것만같애 내 생각엔." 이 말을 듣고 나는 기운이 났다. 단서가 될 만한 힌트가 전혀 없구나하고 실망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 "어째서냐고 하면, 매리 제인은 이제부터 상복을 입게 될 테니까 무엇보다도 우선 이 방 청소를 하는 검둥이가 이 옷가지들을 상자에다 넣어서 정리하라는 명령을 받을 것이 뻔할 게 아냐. 그러면 검둥이의 일인지라 돈 낌새를 맡기가 무섭게 그 얼마를 훔쳐내지 않을 놈이 어 디 있을 거냐 말이야." "임자 머리가 다시 분별을 갖게 됐군 공작." 그러자 왕은 나에게서 2,3피트 떨어진 커튼 아래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벽에 딱 달라붙어 서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그리고는 만일 놈들에게 들키게 되는 날엔 뭐라고 말대답을 해야 할 것이며, 실제로 붙잡혔을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절반도 생각해 내기 전에 왕은 주머니를 찾아내어,내가 거기 있다고는 꿈에도 의심치 않았다. 두 놈은 깃털 이불 아래의 짚이불 틈으로 해서 주머니를 짚 속으로 1,2피트 밀어넣고는, 자, 이 젠 안심이다. 검등인 깃털이불만을 정리하고 짚이불은 1년에 2번밖엔 뒤집지 않으니까 이렇게 해두면 도난당할 걱정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편이 윗수였다 놈들이 계단을 절반도 내리기 전에 금화 주머니를 거기서 꺼내고 만 것이었다 나는 내 방 쪽으로 길을 더듬으면 서 올라가 좀더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거기다 감춰 두기로 했다. 감춰두기엔 집 바깥 어디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주머니가 없어진 것을 알아채면 집안을 샅샅이 뒤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나에 게는 그것이 분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다음 옷을 입은 채 침대 속 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어서 이 일의 결말을 내고 싶다고 조바심을 친 나머지 그리 쉽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왕과 공작이 다시 을 라오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짚이불에서 굴러나와 턱을 사다리 꼭 대기에다 괴고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밤늦게까지 일어나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전부 가라앉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의 소리가 아직 시작되기 전까지 그대로 꾹 참고 있었다. 그 다음에 몰래 사다리를 미 끄러져 내려갔다. 제27장 죽은 픽터가 돈주머니를 갖고 나는 두 사람이 들어 있는 방문 간으로 몰래 가서 귀를 기울였다. 두사람 모두 코를 골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발끝으로 걸어 무사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무 데고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식당문 깨진 데로 해서 안을 들여다보자 밤을 새우고 있는 사나이들이 전부 의자에 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문은 사랑방 쪽으로 열려져 있고. 사랑방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양쪽 방에 촛불이 하나씩 켜져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거기에는 고인의 시체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자꾸만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정면 문이 잠겨 있는데 열쇠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침 그때 누가 내 뒤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랑방으로 뛰어들어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금화 주머니를 감출 장소라곤 관 속 외엔 없었다. 뚜껑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젖은 보를 씌운, 수의를 몸에 감은 고인의 얼굴이 보이도록 1피트쯤 밀려 있었다. 나는 금화 주머니를 뚜껑 아래 시체의 두 손이 서로 팔짱을 끼고 있는 바로 그 아래에다 틀어넣었다. 그렇게 했을 때 어찌나 그 손이 차던지 난 오싹하고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그러고 나서 방을 다시 뛰어나와 문 뒤에 몸을 감추었다. 내려온 사람은 매리 제인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관 있는 데로 가서 무릎을 꿇고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다음 손수건을 꺼내 울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하기야 잔등이 이쪽으로 향해 있었으므로 그 소리 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살며시 빠져 나왔다. 식당을 빠져 나을 때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두가 잘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나는 살며시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렇게까지 수고를 했고 그렇게까지 모험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되 고 말았으므로 자못 마음이 무거웠다 그 금화 주머니가 지금의 장소 에 그대로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들이 100마일이나 200마일쯤 강을 내려간 후에 매리 제인에게 그 사실을 편지로 알려, 그러면 그녀가 고인의 무덤을 다시 파헤쳐 금화 주머니를 손안에 넣을 수가 있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될 법한 일은 뚜껑을 나사못으로 박을 때 그 주머니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왕의 손안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왕은 다시는 남에게 그 돈을 훔칠 기회를 주지는 않으리라. 물론 나는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관 속에서 그 주머니를 꺼내가지고 오고 싶었지만 그런 용기가 없었 다. 이제는 벌써 시시각각으로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머지않아 밤을 새우는 사람 중의 누가 눈을 뜰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붙잡히 게 될지도 모른다. 누구로부터 맡아 달라고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닌 6천달러를 손에 든 채. 그러한 판국에 빠지고 싶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침이 되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밤을 새운 사람들은 다 가버렸고, 사랑방에는 집안 식구들과 바틀리 과부댁과 우리 일당 외엔 아무 도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놈들의 얼굴을 지켜보았지 만 잘 알 수 없었다. 그날 정오경에 장의사가 조수를 데리고 와 관을 방 한가운데에 있는두 개의 의자 위에다 얹고, 집안 내의 의자를 낱낱이 동원하여 한 줄로쭉 늘어놓은 후에, 그밖에 또 근처에서도 더 의자를 빌려 왔으므로 복 도도 사랑방도 식당도 의자로 꽉 차고 말았다. 판 뚜껑은 아까와 조금 도 다를 것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주위에 잔뜩 모여 있는 까닭으로 나 는 감히 뚜껑 아래를 들여다보러 갈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사람들은 방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사기꾼들과 처녀 들은 관머리에 해당하는 맨 앞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반 시간 동안 이나 사람들은 천천히 한 줄로 빙 돌며 잠간씩 고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들 고요한 것이 엄숙했 다. 다만 처녀들과 사기꾼들만이 눈에다 손수건을 갖다대고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로 마루를 긁는 발소리와 코를 푸는 소리뿐이었다. 사람들은 교회를 제외한 다른 어느 곳보다도 장례식 때에 더 코를 풀었다. 방이 사람들로 가득 차자 검은 장갑을 긴 장의사는 찬찬하고도 사람을 달래는 듯한 태도로 가만가만 걸어다니면서 최후의 손짓을 하여 사 람들과 여러 물건을 정연하고도 아늑하게 했다. 게다가 고양이처럼 소 리 하나 내지 않았다 말이라고는 전혀 없고, 머리를 끄덕이는 것과 손 짓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늦게 온 사람들을 줄에다 밀어넣고 통로를 내었다. 그것이 끝나자 이번에는 저쪽 벽 앞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이 사나이처럼 조용히 미끄러지듯 무엇이나 남의 눈에 띄지 않 게 해치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햄덩어리 모양 그에게는 전 혀 웃음이라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소형 오르간을 빌려 왔다. 깨진 것이었다. 모든 것의 준비가 완료되자 젊은 여자가 앉아서 치기 시작했다 풍금은 몹시 끽끽 하 는 소리를 내어 마치 복통이라도 일으킨 듯한 소리를 내었다. 사람들 은 전원이 그것에 소리를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내 생각으로는 덕을 보고 있는 것은 죽은 피터 하나뿐이었다 다음에 홉슨 목사가 천천히 엄숙하게 입을 열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것과 동시에 아직까지 아무도 들은 일이 없을 만한 무서운 소동이 지하실에서 돌발했다 그 것은 다만 한 마리의 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소동이란 대단하였고 언제까지 킹킹대며 야단이었다. 그래서 목사는 관 옆에 그대로 선 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자기 생각조차도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참으로 난처한 느낌으로 누구나 모두 어떻게 해야 좋 을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사람들은 그 다리가 긴 장의사 가 목사에게 마치, '걱정 마시오. 나에게 맡겨 두시오' 하는 듯이 신호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장의사는 몸을 굽혀 다만 어깨만을 사람들 머리 위로 내밀고는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걷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도 소동은 점점 더 커져만 갈 뿐이었다. 마침내 장의사는 방 양 쪽을 빙 돌아 지하실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후 2초가 지나자 찰싹 하고 때리는 소리가 들렸고, 개는 펄펄 뛰는 비명을 한두 번 지르더니 그후로는 그만 뚝 그치고 모든 것이 죽음처럼 고요히 가라앉고 말았 다 이때 목사는 중지했던 곳으로부터 다시 엄숙한 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1,2분이 지나자 이 장의사의 잔등과 어깨가 또다시 벽을 따 라 미끄러지듯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처럼 방 삼면을 빙 돈 후 일어 나 입에다 손을 대고 사람들 어깨 너머로 목사 쪽으로 목을 길게 뽑고 는 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쥐를 봤어요" 그는 또다시 몸을 숙여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의당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으므로 이것으로 자못 만족했다. 이와 같은 사소한 일은 그다지 수고도 될 것이 없고, 사람이 존경을 받고 호감을 사게 되는 것은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마을에는 이 장의사만큼 인기가 있는 사나이는 없었다. 장례식의 설교는 매우 훌릉했지만, 지나치게 긴 것이 지루했다 그 다음에 왕이 뛰어나와 예의 종잡을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것 이 끝나자 장의사가 나사 돌리개를 들고 관 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 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장의사는 전혀 딴 짓은 하지 않고, 마치 옥수수죽처럼 가볍게 뚜껑을 미끄러뜨려 닫고는 나사돌리개로 조여 버렸다 이건 큰일났다돈이 그대로 거기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만일 누 가 몰래 그 주머니를 홈쳐갔다면 어떻게 하지 매리 제인에게 편지를 써야 좋을지, 쓰지 않는 편이 좋을지 어느 쪽으로 해야 좋을까 만약 매리 제인이 관을 파내서 그 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면 나를 어 떻게 생각할 것인가 제기랄 나는 수색을 당하여 결국 감옥 신세가 될 지도 모른다 차라리 모르는 체하고 편지를 쓰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 까. 정말 이제야말로 사건은 복잡하게 되고 말았다. 잘한다고 한 짓이 나는 도리어 사태를 백 배나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대로 내버려두었으 면 좋았을 걸 하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런 제기랄 매장을 끝마친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또다시 놈들의 낯빛 을 살피기 시작했다.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얼굴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 왕은 사람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아첨을 하고 자못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고 영국의 신도들이 자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테니까 아주 급히 재산을 처분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서둘게 된 것 을 정말 미안해했다.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 좀더 오래 있어 주 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리한 일이라는 것은 자기들도 잘 안다고 했다. 왕이 자기와 월리엄은 물론 조카딸들을 함께 영국으로 데리고 갈 작정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되면 처녀들이 친척 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정말 잘됐다고 하며 좋아했다. 이 말을 듣고 처녀들도 반색을 했다. 너무도 반색을 한 나머 지 처녀들은 세상 고생이고 뭐고 모두 잊어 버리고는, 무슨 수를 써서 라도 어서 빨리 재산을 팔아 주세요, 자기들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할 테니까, 하고 무척 좋아했다. 이 불쌍한 처녀들이 기뻐하는 행복스 러운 모습을 보고 나는 이렇게까지 조롱을 당하고 기만을 당하고 있는 가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이로 끼여들어 가 모든 사태를 바꿔 버릴 만한 안전한 방법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은 집과 검둥이들과 그밖의 모든 재산을 경매에 붙인다고 광고를 내고 말았다. 장례식이 끝난 이틀 후가 경매날이었는 데, 그러나 누구든지 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도 비밀리에 살 수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정오경 처녀들의 기쁨은 그 최초의 타격을 받았다. 두 명의 검둥이 상인이 와서, 왕은 소위 3일 후 지불 어음으로 검둥이들을 상당한 가격으로 팔아 버렸으므로 아들 둘은 상류 멤피스 로, 그 어미는 하류 올린즈로 팔려갔다. 나는 불쌍한 처녀들과 검둥이 들이 슬퍼하는 나머지 가슴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서 로를 꼭 껴안고 엉엉 울어대는 꼴을 보고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처녀들은 가족이 뿔뿔이 사방으로 헤어지거나, 마을 이외의 곳으로 팔려가 는 것을 보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비탄에 젖은 불쌍한 처녀들과 검둥이들이 서로의 목에 매달려 울고 있는 광경을 나는 언제까 지 잊어 버릴 수가 없다 만일 이 매매가 무효로, 검둥이들이 한두 주 일만 지나면 다시 돌아오리라고 하는 것을 몰랐다면 나는 그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어 이 악한들을 밀고했음에 틀림없으리라 이 사건은 마을에서도 큰 소동거리가 되고 말아, 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어미와 자식들을 그렇게 떼어 버리는 것은 괘씸한 일이라고 강 경히 따지고 들었다. 이 항의에는 사기꾼들도 다소 움찔했지만, 그 늙은이 바보놈은 공작이 이리저리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경히 버티고 나갔으므로 공작은 정말로 몹시 불안해했다. 다음날이 경매일이었다. 완전히 밝아졌을 무렵 왕과 공작이 다락방 으로 올라와서 나를 깨웠다 두 놈의 얼굴 표정으로 봐서 나는 무슨 일 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왕이 다짜고짜로, "이놈, 너 엊그제 밤 에 내 방에 들어왔었지" 하고 물었다. "아뇨, 폐하." 우리들 외에 아무도 없을 때에는 나는 늘 놈을 이렇게 불렀다. "어제나 어젯밤은 어때" "아뇨, 폐하 " "맹세하지 거짓말은 아니지" "맹세합니다. 폐하. 정말로 얘기하는 거예요, 매리 제인이 폐하와 공작을 안내하여 그 방을 구경시킨 후론 그 방 옆엔 얼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 공작이 끼여들었다 "누가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아는, 각하, 기억이 없는데요," "잘 생각해 봐. "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고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검둥이들이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몇 번 보았는데요." 놈들은 잠시 띨어오르며 뜻밖의 일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다 음 순간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물었다. "뭐라고, 검둥이들이 전부 말이냐" "아뇨, 적어도 한 번에 전분 아닙니다. 말하자면, 다만 한 번 외엔 놈들이 함께 몰려나오는 걸 본 것 같진 않은데요." "뭣이 그게 언제 일이야" "장례식날 아침이에요, 바로. 그다지 일찍은 아니었어요, 나는 늦잠 을 잤으니까요. 멍하니 사다리 아래를 보고 있자니까 검둥이들이 보이 던데요." "그래서. 어서 얘기해 봐 놈들이 무슨 짓을 했단 말이야 어떻게 하더란 말이야. " "아무 짓도 안 하던데요. 또 내가 보기에 놈들은 별로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진 않았어요. 발끝으로 살금살금 나가 버리더군요. 그래서 난 단번에 짐작이 간 것인데, 폐하가 잠을 깨고 있는 줄만 알고 방청소를 하거나 뭘 하려는 생각으로 들어온 것인데 들어와 보니 폐하는 아직 주무시고 있었으므로 일부러 깨워서까지 이쪽에서 사서 귀찮은 일을 당하기보다는 나가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어요." "이거 큰일났군" 왕이 소리쳤다. 둘 다 오만상으로 낯을 찌푸리고는 어안이벙벙한 듯 한 낯으로 잠간 동안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생각에 젖어 장승처럼 서 있더니, 잠시 후 공작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이놈들 봐라, 검둥이놈들한테 단단히 얻어걸렸구나. 놈들이 이 지방을 떠나기를 슬퍼하는 듯한 연극을 단단히 한바탕 하더니만 나두 놈 들이 슬퍼하는구나 하고 믿었고, 이건 임자도 마찬가지였을 게구,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마찬가지였겠다. 검둥이들에게 무슨 연극의 재능이냐고, 아예 다음부턴 그런 소릴 제발 말아줘. 천만에. 그 수에 넘어 가지 않을 놈은 아무 데도 없겠는데. 내 생각 같아서는 놈들 그걸로 큰 돈을 번 셈이야 나에게 자본과 극장만 있다면 이 연극보다 더 수지맞 근 사업은 없겠군. 한데 보란 말이야, 우리는 놈들을 똥값으로 팔아 버렸으니. 게다가 그 똥값마저 손안에 넣을 성싶지 않으니 대관절 그 돈 뜬 어디 있는 거야, 그 어음은"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서 은행에 있지, 어디 있긴 어디 있어 그밖에 딴 데 있을 줄 아나" "그런가, 그럼 됐군,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군." 나는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아니, 뭐 잘못된 일이라도 생겼나요" 이 말에 왕이 홱 내 쪽으로 돌아서며 호통을 쳤다. "네놈이 참견할 일이 아냐 네놈 같은 건 입을 꾹 다물고 남의 참견말고 네 일이나 해. 저 할 일이 있다면 말이지만. 이 마을에 있는 한 이걸 잊어선 안 돼, 알겠나" 그러고 나서 공작을 향했다. "이 일만은 우리들끼리 잠자코 참고서 아무 말도 해선 안 돼 잠자코 있는 게 제일 이야. " 두 사람이 사다리를 내려가려고 할 때 공작은 또다시 킬킬거렸다. "통째 삼키려다 걸린 셈인가 잘 됐군, 정말," 왕은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난 잘 되라고 하고서 얼른 팔아 버린 거야. 비록 이익이 허사가 되고, 큰 손을 보아 맨손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순전히 내 탓만은 아냐." "그런가, 만일 내 충고를 받아들여 주었더라면 검둥이들은 아직 이 집에 있고 우리는 이젠 없을 게 아냐." 왕은 자기에게 안전할 정도로 공작을 몰아대 고는 이번에는 내 쪽을향해 또다시 화살을 던졌다. 내가 검둥이들이 왕의 방에서 살금살금 걸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왜 알리러 오지 않았느냐며 펄펄 뛰었다. 아 무리 바보라도 그걸 보고서는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쯤은 알 았을 게 아니냐고 야단이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자기 자신을 저주하 였고, 이게 모두 자기가 밤 늦게까지 일어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아침 잠을 잤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은 데서 일어난 일이며, 이런 짓은 두번 다시는 할 일이 아니라고 사뭇 투덜거렸다. 이렇게 두 사람 은 서로 말다툼을 하면서 나가 버렸다 나는 모든 것을 검둥이들 탓으 로 돌려 버렸고, 더욱이 그렇게 함으로써 검둥이들에게는 아무 손해도 끼쳐 준 일이 없음을 자못 기쁘게 생각했다. 제28장 과욕은 실패의 원인 얼마 후에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내려 아래층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처녀들의 방 옆을 지날 때 방문이 열려 있고. 매리 제인이 혼자 헌 가죽 가방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방 뚜껑은 열려 있고, 매리 제인이 짐을 싸고 있는 중이었다 영국으로 갈 준비였다 그러나 이제는 개켜 놓은 옷을 무릎 위에다 올려 놓은 채 손을 쉬 고 두 손 사이에다 얼굴을 파묻고는 울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엾게 생각되었다. 물론 누구나 그 꼴을 보았더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 매리 제인, 당신은 남이 괴로워하는 걸 보면 견딜 수 없죠 나도 그래요, 대체로는‥‥‥내게 터놓고 얘기해 봐요." 매리 제인은 얘기해 주었다 그것은 검둥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예상하던 대로였다. 매리 제인은 영국으로의 즐거운 여행도 허사라고 했고. 어머니와 애들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을 알고 어떻게 영국에 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도 한층 더 몹시 울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아아,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면 좋아, 그 사람들이 다시는 서로 못 만날 것을 생각하니 " "하지만 만날 수 있어요. 2주일 이내에‥‥‥난 잘 알고 있어요" 아니, 이건 어쩌다 이런 말이 나오고 말았을까 그러자 눈 깜빡할 사이에 매리 제인은 내 목을 껴안고는 "다시 한 번만 말해 봐, 다시 한 번만 말해 봐, 다시 한 번만 말해 봐" 하고 야단이었다1 나는 안할 소 릴 괜히 했구나 하고 후회의 마음이 앞섰다 나는 좀 생각할 사이를 달 라고 매리 제인에게 부탁했다. 이 말을 듣자 그녀는 아주 지루하다는 듯이 흥분을 하며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는 앉아 있었지만, 그 꼴은 마 치 이를 빼버린 사람처럼 시 원해하는 것같이도 보였고, 또 마음이 놓 였다는 모양으로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깊이 궁리를 해보았다. 막다 른 골목에 몰려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다. 하기 야 나에게는 경험이 없으니까 확실한 건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나 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사실을 고백하는 편이 거짓말을 하 는 것보다 훨씬 좋을 때가 있는 법인데,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나에게 는 생각되었다. 이 일을 마음속에다 새겨두고 언젠가 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 너무도 이상야릇하고 파격적인 일이니까. 이러한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옳지, 하고 나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좌우간 어떻게 되든 해보자. 이번만큼은 정말을 말해 보자. 마치 화약통 위에 앉아 자기가 어디로 날려가 버릴지 그걸 알기 위해서 화약에다 불을 당기는 격이었지만. 잠시 후에 나는 입을 열었다. "미스 매리 제인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한 3,4일 동안 있을 만한곳이 없어요" "있구말구. 로드로프 아저씨 댁에 갈 수 있지. 한데 그건 왜" "왜고 뭐고 없어요. 만일 검둥이들이 서로-2주일 이내에 -이 집에서 또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느냐는 것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서 그것을 알고 있는가를 증명한다면, 아씬 로 드로프 아저씨 댁에 가서 나흘 동안 묵을 수 있어요" "나흘 동안이라고 1년 동안이라도 좋지" "그럼 좋아요, 아씨의 일이니까 그 말만으로 충분해요. 다른 사람이성경책에다 입을 대고 맹세를 하기보다도 나에게는 아씨의 말이 더 좋아요. " 이 말에 매리 제인은 생글 미소를 짓고는 귀엽게 얼굴이 빨개졌다.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상관없다면 문을 닫고서 빗장을 지르겠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나는 다시 돌아와서 걸터앉았다 "큰 소릴 질러선 안 돼요. 가만히 앉아서 용기를 내어 들어줘요. 나 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고, 아씬 정말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돼요. 아씨, 이것은 지독한 얘기로 듣기 힘들 거죠. 그러나 딴 방법이 없습니다. 아씨의 백부들은 아무것도 아니죠. 한쌍의 사기꾼놈들이에 요. 진짜 사기꾼이에요. 자 이걸로 제일 언짢은 것을 얘기해 버렸으니 까 그 담 얘긴 비교적 쉽게 참을 수 있겠지요 " 물론 이 말을 듣고 매리 제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젠 급소를 통과하고 있었으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꾸만 이야기를 진전 시켰다. 그동안 그녀의 눈은 자꾸만 충혈되어 갔다. 나는 모든 것을 숨김없이 낱낱이 털어놓았다. 나는 맨 처음 우리들이 기선 있는 데로 가 던 도중에 그 바보 청년을 만난 이야기부터, 매리 제인이 현관문에서 왕의 가슴에다 몸을 던지고는 놈이 16번인가 17번 키스를 한 이야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얘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석양의 하늘처럼 얼굴에 홍조를 띠고는 뛰어올랐다. "짐승놈들 자, 1분이라도 1초라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그놈들에게콜타르를 칠해 깃털을 발라 강에다 던져 버려야 해" 내가 끼여들었다. "옳은 말이야, 하지만 그 전에 아씬 로드로프 아저씨 댁에 갈 작정이아니었던가요, 그렇잖으면‥‥‥‥ "아니, 난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 글쎄" 하면서 매리 제인은 또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한 말을 마음에 두지 않지 -제발 부탁이니까 그렇지 이봐, 그렇지" 이러고서는 그녀는 비단과 같이 매끈한 손을 내 손에다 놓았다 이렇 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나는 마음에 두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흥분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난 그만 울컥하고 올 라와서. 자, 어서 앞을 얘기해 봐. 다시 그런 소릴 안할 테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걸 가르쳐 줘, 네가 하라는 건 원이나 몽땅 할 테니까. " "그럼요, 저 두 사기꾼들은 지독한 놈들이에요. 하지만 나는 좋건 싫 건 간에 좀더 그놈들과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판국에 빠져 있어요.그 이유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만일 아씨가 저놈들을 밀고 하면 이 마을은 나를 저놈들 손톱으로부터 자유의 몸으로 해주어 나는 그걸로 팔자를 고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이 모르는 또 하나의 사나이가 있어 그 사나이가 경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린 그 사나이를 구해 내야만 하는 거예요, 물론. 그래서 놈들을 밀고할 수 가 없는 거 예요. "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묘안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어쩌면 나와 짐이 그 사기꾼들과 손을 떼게 되고 놈들을 이 마을의 감옥에 다 쓸어넣고 우리들만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았다. 그러나 대낮에 나 이외 질문에 대답할 사람이라고는 타고 있지 않는 뗏목을 타고 간다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므로 밤이 왜 늦 을 때까진 계획에 착수하지 않기를 원했다 "제인 아씨,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걸 얘기해 보죠. 그렇게 하면 아 씨도 로드로프 아저씨 댁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아도 돼요. 거긴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죠" "채 4마일도 못 돼. 여기서부터 쑥 들어간 시골이야." "아아. 그럼 잘 됐군. 그리로 가요. 그리고 오늘밤 아홉 시나 아홉 시 반까지 숨어 있다가 그 집 사람더러 여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그래 요. 뭐 생각난 일이 있다고 그러고는. 만일 여기 열한시전에 도착하면 이 창에다 촛불을 내놔요. 만일 내가 나타나지 않거든 열한 시까지 기다려 줘요. 그래도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도망을 쳐서 안전하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건을 동네 안에 소문을 퍼뜨려 이 사기 꾼놈들을 감옥에다 처 넣으세요, " "좋아, 그렇게 하지." "또 만일 내가 도망을 칠 수가 없어 놈들과 함께 붙잡히게 되는 경 우, 아씬 내가 미리 모든 걸 당신에게 고백했다고 하고는 되도록 내 편 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네 편을 들어준다고 무슨 소릴 해. 머리칼 하나라도 다치게 할 줄 알고 " 이렇게 말할 때의 매리 제인의 콧구멍은 벌름거렸고, 두 눈은 반짝 거렸다. "만일 도망을 쳤다면 여기 있으면서 이 악한들이 아씨의 백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겠지요. 비록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예요. 놈들이 사기꾼들로 밥버러지들이라고 하는 걸 단언할 수 있을 뿐으로, 말하자면 그것만으로도 조금 도움은 될테지만.그런데 나보다도 더 잘 그것을 증명해 낼 사람들이 있어요. 나처럼 곧 의심을 받을 염려가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찾 아낼지 가르쳐 드리죠, 연필과 종일 좀 줘요. 자, '브릭스빌 왕실 의 걸작' , 이걸 잊어 버리지 않도록 잘 간직해 둬요. 재판소가 이 두 놈에 관해서 조사를 하고 싶을 때에는 브릭스빌로 사람을 보내 '왕 실의 걸작'을 연출한 놈을 붙잡았는데, 누가 증인이 돼 줄 사람이 없겠 느냐고 한 마디만 하면 돼요. 그렇게만 하면 눈 깜빡할 사이에 마을 전 체가 통틀어 이리 몰려옵니다. 게다가 잔뜩 화가 나서들 말이죠." 나는 이걸로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경매는 걱정 말고 맘대로 내버려두세요. 공시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산 물건의 대가는 경매 후 만 하루가 지나기까지는 지불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놈들도 그 돈을 손안에 넣기 전에는 이 지방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우리들의 계획에 의하면 경매는 무효가 될 테니 까 돈은 한 푼도 놈들 수중에 들어갈 리가 만무해요. 검둥이들의 경우 도 마찬가지예요. 매각행위가 없었으니까 곧 돌아옵니다 놈들은 아직 검둥이를 판 돈을 긁어모으지도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놈들은 정 말로 난처한 함정에 빠져 있는 거예요, 아씨." "그럼 난 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는 곧장 로드로프 아저씨 댁으로 떠나기로 하겠어 " "천만에요, 그건 안 돼요, 아씨. 절대로 안 돼요. 조반 전에 어서 떠나요. " "왜 " "아씨, 내가 아씨에게 어서 가달라는 건 대관절 뭣 때문이라고 생각 하죠" "그건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생각해 봐도 난 몰라 그건 왜지" "왜냐구요 그건 아씨의 얼굴은 가죽 껍질 같은 무표정한 사람과는 다르니까요. 아씨의 얼굴만 보면 곧 알아요. 사람들은 그 앞에 앉아 커 다란 활자로 인쇄한 인쇄물처럼 똑똑히 그걸 읽어 낼 수 있을 테니까,그렇잖아요. 아씬 절루 가서 백부님들이 아씨에게 아침 키스를 하러 왔을 때 그걸 ‥‥‥ "자, 그만, 그만, 알았어 그래 아침 식사 전에 갈 테야. 날개돋힌 것처럼 가구말구. 그럼 동생 애들은 그놈들에게 남겨놓고" "그럼요. 동생들 일로 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분들은 이 제 잠깐 참고 있으면 돼요. 만일 아씨들이 전부 간다면 놈들은 이거 수상한데 하고 의심할 게 아냐요. 놈들도 동생들도 이 마을의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 게 좋아요 동네 사람들이 백부님들 안녕하시냐 하고 물 을 때, 아씨 얼굴에는 반드시 뭣이 나타날 테니까요. 그래요, 어서 가 요, 아씨. 다른 사람들 걱정은 내게 맡기고 어서 곧 떠나세요. 스잔 아씨에게 부탁해서 아씨가 안부를 전하더라고 백부님들에게 전해 달라고 하겠어요. 그리고 아씨가 잠깐 휴양을 취하여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라거나, 또는 친지를 방문하기 위해서 잠시 집을 비우지만 오늘 밤이 나 내일 아침에는 돌아온다더라고 전해 두죠." "친지를 방문한다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말은 난 싫어 . " "옳지. 그럼 그만두기로 하죠." 아무 해도 없는 일이니까 매리 제인에게 그렇게 해둬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무 성가신 일도 없이 해낼 수 있는 사소한 일이며, 또 이 지상에서 사람이 가는 길을 가장 평탄히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소한 일 인 것이다. 그렇게 한 마디 해두면 매리 제인은 안심할 것이며, 게다가돈이 한 푼도 걸린 것이 없다. 다음에 나는 또 한 마디 했다 "또 하나 얘기할 게 있어요. 그 돈이 든 주머니 말예요." "아아, 그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그게 바로 그놈들 손안에 들어간 경로를 생각하니 참 난 얼마나 바보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아녜요, 그건 아씨 생각이 잘못이에요. 그놈들이 가지고 있지 않아요." "아니, 그럼 누가 가지고 있어" "내가 그걸 알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난 모릅니다. 한번은 내가 가진 적도 있었어요. 놈들에게서 훔쳐 냈으니까요. 아씨에게 주려고 훔쳐냈어요. 그리고 내가 손수 그걸 감춘 장소도 알고 있지만 거긴 이젠 벌써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난 참 안됐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안됐다고 생각하긴 난생 처음이에요. 하지만 난 될 수 있는 데까진 했어요. 정말이에요. 하마터면 붙잡힐 뻔했으므로 어쨌든 제일 가까운 손 잡히는 곳에다 주머닐 밀어넣고는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그건 감추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어요." "어머나, 자길 책하는 건 그만둬. 그런 말을 들으면 견딜 수가 없어,나로서도 그런 건 용서할 수 없어. 그렇게 할 수밖에 딴 도리는 없었을 테고 그건 네 탓은 아닐 게 아냐. 어디다 감춰 뒀길래"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그 귀찮은 일을 회상케 하고 싶지는 않았으 며 그 시체가 배 위에 돈주머니를 올려놓은 채 관속에 누워 있을 것 을 그녀의 눈앞에 역력히 그려놓게 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내 입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제인 아씨, 말 안해도 괜찮다는 걸 아씨가 허락해 준다면. 난 그걸 어디다 감췄다는 걸 얘기하긴 싫어요. 하지만 종이에다 써줄 테니 원 이라면 로드로프 아저씨 댁에 가는 길에 읽으면 좋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럼 괜찮구말구 " 그래서 나는 종이 위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그것을 관 속에다 넣었습니다. 밤 늦게 아씨가 거기서 울고 있었을 때 주머니는 거기 들어 있었어요. 나는 문 뒤에 서서, 아씨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제인 아씨, 매리 제인이 단신으로 그 방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그 악마와도 같은 놈들이 하고 많은 곳에서 하필 그녀 자신의 지붕 밑 에서 자고 있으며, 그녀를 모욕하고 그녀의 돈을 빼앗아 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니 내 눈에 눈물이 펑 돌았다. 그리고 종이를 접어서 매리 제인에게 주었을 때, 역시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핑 고여 있는 것을 보 았다. 그녀는 내 손을 꽉 잡고는. "잘 가 난 모든 걸 네가 하라는 대 로 꼭 그대로 할 테야. 그리고 비를 다시는 서로 만날 일이 없을지라도 네 일은 언제까지 잊어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네 생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할 것이고, 또 널 위해서 기도를 올릴 테야" 이러고서 그녀는 나가 버렸다. 나를 위해서 기도를 올려 만일 그녀가 나라고 하는 인간을 알고 있 다면 그녀는 좀더 그녀의 인격에 알맞는 행동을 취했을 것이 틀림없 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나를 위해서 틀림없이 기도를 을 려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그녀에겐 후퇴라고 하는 것 이 없는 여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이 뭐라고 할지라도 내 의견으로 는 내가 아직까지 보아 온 어느 소녀보다도 매리 제인은 용기를 가지 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아첨 같지만 절대로 아첨이 아니다. 또 아름답다고 하는 점에 관해서는, 그리고 마음씨가 고운 점에 관해서도 그녀 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녀가 그 문에서 나가는 것을 본 이래로 나는 다시는 그녀를 본 일이 없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몇 번 씩 그녀 생각을 했고, 그녀가 나를 위해서 기도를 올려주겠다고 한 것 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그녀를 위해서 기도를 올리는 것 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떠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기 도를 올렸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매리 제인은 뒷문으로 빠져 나갔는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스잔과 언청이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이 가끔 만나러 가는 강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름을 뭐라고하지 " 둘은 대답했다. "몇 집 있어. 그렇지만 주로 프록터즈 아저씨 댁이야." "옳지 그렇군. 하마터면 잊어 버릴 판이었군 실은 그 집 어느 분이 갑자기 중병이 나서 급하게 떠나는 길이니 너희들 둘에게 그렇게 좀 전해 달라는 부탁을 매리 제인한테서 받았어 " "누가" "난 몰라. 그만 잊어 버렸어. 그러나 확실히‥‥‥‥ "설마 핸너는 아닐 테지" "안됐지만 그게 바로 핸너였어." "아니 뭐, 그 앤 요전 주일까지만 해도 그렇게 튼튼했었는데1 몹시 아프대" "아픈 정도가 아냐. 집안 식구 전부가 밤새도록 한잠도 못 자고 그 옆에 붙어 앉아 간병을 했다고 매리 제인이 그러던데. 그리 오래 견디 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식구들이. " "아니, 웬일이야1 대관절 어떻게 된 셈이야" 곧 그럴 듯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렇게 대답 했다 "유행성 이하선염이래 . " "유행성 이하선염이라구 그 병에 걸린 사람을 밤새도록 간병하는 사 람은 없어 . " "그야 그렇지 하지만 이 병은 그런 게 아니래, 이 병은 종류가 다르 대. 신종이라고 제인 아씨가 그러던데 " "어떤 신종이래" "다른 여러 가지가 섞여 있대." "다른 여러 가지라니" "저 ‥‥‥홍역, 백일해, 단독 폐렴 황달, 뇌막염, 그 나머진 잘 모르겠어 ." "어머나, 그걸 유행성 이하선염이라고 해" "제인 아씨가 그랬다니까. " "그럼, 대관절 뭣 점에 그걸 유행성 이하선염이라고 부를까" "뭘, 유행성 이하선염이니까 그렇지 시작이 그러니까 그래." "어머나, 그런 이론이 어딨어 발가락을 돌에 부딪혀 독을 마시고, 우물에 빠져 목이 부러져 머리가 깨진 사람이 있는데 누가 와서 이 사 람은 왜 죽었느냐고 물으니까 어느 바보가, '발가락을 돌에 부딪혔으니까요'라고 했다고 해봐 그런 이론이 어딨지 없어요, 절대로. 이제 네 얘기도 그것처럼 이론이 안 서, 그 병은 전염되나7" •전염 되냐고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써레는 걸리나-어둠 속에서 말이야 한 개의 이빨에 걸리진 않는다 하더라고 다른 이빨엔 걸릴 게 아냐 그렇지 않아 그래서 써레 전체를 끌고 오지 않는다면 그 이빨을 뺄 수가 없을 게 아니냐 말이야 그 유행성 이하선염도 말하자면 써레 와 같은 거야. 게다가 그냥 보통 써레는 아냐. 한번 걸리면 영원히 빠 지지 않는 그런 써레라니까 " "아이, 무서워라." 언청이가 끼여들었다. "난 하베이 아저씨한테 갈 테야, 그리고‥‥‥‥ "아아, 그게 좋구말구. 물론 나라면 그렇게 하구말구. 꾸물거리진 않 아" "아니, 그럼 왜 안해" "잠간 생각해 봐, 그럼 알 게 아냐. 너희네 백부님들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지 않아 그리고 백부님들이 너희들만을 남겨놓고 그 긴 여행을 너희들끼리만 시킬 그런 나쁜 사람 들이라고 생각하나 기다려 줄 건 뻔한 일이지 뭐야. 거기까진 그걸로 좋아. 너희 하베이 백부는 목사지 그렇다면 말이야. 목사라는 건기선 승무원을 속이진 않을 테지. 백부님은 기선 승무원을 속일까 매리 제 인 아씨를 배에 태우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자 그런 짓을 하시지 않을 것은 너희들도 잘 알 테지. 그러면 어떻게 한다』 이렇게 말할 테지. '참 안된 일이지만 우리 교회 일은 되는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어 내 조카딸 애가 무서운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려 있으니까. 그 애가 감염 이 됐는지 안 됐는지 판명되기까지 석 달 동안은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내 의무야' 하고. 그러나 상관없어. 하베이 백부님에게 얘기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면‥‥‥‥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우리들이 모두 영국에서 잔뜩 재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언니가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그걸 알려고 기다리며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어야 한다니 그런 바보 같은 소린 제발 그만해." "응 그래. 그렇더라도 어쨌든 동네 누구에게 얘기해 두는 것이 좋을 지 몰라 " "이봐, 좀 들어봐. 너같은 바보는 둘도 없을 거야, 글쎄. 그 얘길 해 봐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그 얘길 퍼뜨릴 게 아냐. 아무에 게도 아무 얘기도 안 하는 것 외에 방법은 없어." "그렇겠군, 그게 좋을지도 모르겠군‥‥‥그렇군, 정말 그 말이 옳아." "하지만 하베이 백부님이 언니 일을 걱정하면 안될 테니까. 하여간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다는 얘길 아저씨에게 얘기해 두지 않으면 안 되 겠다고 생각하지만 " "그래, 매리 제인 아씨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고 그걸 바란 거야. '동생들에게 하베이 백부와 월리엄 아저씨에게 안부를 잘 전하고 아침 키스를 드리도록 해줘, 난 강을 건너 저.. 가만있자, 저 피터 아저씨가 늘 아주 친하게 지내던 부잣집 이름이 뭐했지. 저 말이야, 내가 말하는 건 저.. "저 앱도프 댁이 아닐지 몰라" "옳지, 그래 앱도프 댁이야. 그런 이름은 아주 딱 질색이야. 웬일인 지 그런 이름은 절반밖엔 외워지지 않더라. 옳지, 옳지, 매리 제인 아 씨가 하는 말은, 앱도프 댁에 가서 우리집을 사줘요, 피터 아저씨는 다 른 누구보다도 아저씨가 와서 사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겠다고 전해 달 라고도 했어. 그리고 앱도프 아저씨들이 오겠다고 할 때까지 졸라보겠 다는 것이며, 그래서 너무 몸이 녹초가 되어 있지 않다면 집으로 돌아 올 것이며, 녹초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내일 아침까진 돌아오겠으니 그렇게 전해 달라는 거였어. 프록터 아저씨 얘긴 아무 말도 말 고 앱도프 아저씨 얘기만 해달라고 그랬어 그건 정말이야, 매리 제인 아씨는 사실 이 집을 사달라고 그걸 부탁하러 가는 참이니까 왜 내가 그걸 알고 있느냐 하면 매리 제인 아씨가 제 입으로 그렇게 얘기했으 니까 그렇잖아. " "그럼 됐어" 하고 소녀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는 백부들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안부를 전하고 키스를 하고 언니의 전갈을 전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이것으로 모든 게 잘 되었다. 처녀들은 영국으로 가고 싶은 나머지 아무 말도 지껄이지 않을 것이며, 왕과 공작도 매리 제인이 로빈슨 의 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기보다는 경매일로 분주히 어디로 나갔다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나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왜 근사하게 일을 꾸몄다는 생각이 들었다∼톰 소여라 할지라도 이 이상 더 근사하게 일을 꾸며낼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톰의 일이니까 여러 가지 양념을 쳤겠지만. 그러나 나는 자란 품이 톰과는 다르니까 그렇게 까지 멋지게 일을 꾸며낼 수는 없었다. 이야기가 바뀌어, 경매는 오후에도 늦게까지 마을의 광장에서 계속 되었고, 사는 사람들은 자꾸만 뒤에서 몰려왔다. 왕은 잔뜩 독살스러 운 얼굴로 경매인과 나란히 그곳에 서 있었고, 가끔 짧은 성경 구절을 한 마디씩 섞기도 하고, 또 간단히 무슨 선인다운 말을 한 마디씩 하기 도 했다 공작은 어떤가 하면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으 으를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 꼴을 보이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럭저럭 경매도 끝이 났으며, 모든 것이 거의 팔리고 말았다. 남은 것이라곤 묘지에 있는 조그마한 쓸모 없는 땅뿐이다. 그래서 놈들은 그것마저 경매에 붙이기로 했다. 나는 이 왕녀 석처럼, 뭐든지 빨아 삼키려고 하는 이러한 기린과 같은 녀석을 본 일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경매에 붙이고 있을 때기선 한 척이 와 닿았다. 그리고 2분이여 쯤 지나자 한 떼의 사람들이 떠들며, 웃으며, 소동을 일으키며 우르르 몰려와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 자, 경매 적수가 나타났소이다. 피터 월크스 노인의 상속인이 두 패로 나뉘어졌소이다. 여러분 돈을 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으시오" 제29장 폭풍우 속을 도망치다 그 사람들이 데리고 온 사람은 아주 점잖아 보이는 노신사와, 바른쪽 팔을 삼각 붕대에다 달아매고 있는 이 사람도 역시 품위 있어 보이는 좀더 젊어 보이는 신사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얼마나 언제까지 떠들어대고 웃어댔던 것이랴 그러나 나에게는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그 의미를 다소라도 알았다면 공작도 왕도 다시 뜨끔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새파랗게 질렸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천만에, 새파랗게 질리기는커녕 도리어 공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의심하는 듯한 기색도 없이, 버터 밀크를 뚝뚝 흘리는 주전자 모양으로 행복스럽고도 만족스러운 꼴로 여전히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왕은 세상에 이런 사기꾼과 악당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심장 한구석에서 복통이 날 지경이라는 듯한 시선으로 이 신래자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아 그 꼴은 참으로 근사한 것이었다. 주된 인물들이 우우 하고 왕 주위를 둘러싸곤 자기들이 왕의 편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다. 이제 방금 도착한 노신사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얼 마 후에 노신사는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자못 영국 사람다운 발음이라 는 것을 나도 곧 알 수 있었다. 왕의 발음과는 달랐다. 하기야 왕의 것 도 흉내치고는 왜 잘하는 편이었지만, 나로서는 노신사의 말을 전할 수도 없으며 또 흉내를 낼 수도 없지만, 그러나 노신사는 군중 쪽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것은 내가 예기치도 못한 놀랄 만한 사건이며, 나는 이 사태를 만나 그것에 대답할 준비가 아직 그다지 되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그 까닭은 동생과 나는 재난을 만났기 때문이며, 동생은 팔을 분질렀고, 우리들의 짐은 어젯밤 사이에 여기보다 상류에 있는 마을에 잘못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피터 월크스의 형인 하 베이며 여기 있는 것은 동생 월리엄으로 귀도 안 들리고 얘기도 못합니다. 게다가 이제 쓸 수 있는 것은 한쪽 손뿐이어서 손흥내도 제대로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방금 말씀드린 사람들로 하룬가 이틀이 지나 짐이 도착하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아 무 말도 하지 않고 여관으로 가서 기다리기로 하겠습니다. "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노신사와 새로 온 벙어리는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 껄껄 웃으며 주책없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팔을 분질렀다구. 있을 법한 일이군. 손흥내를 내야만 할 텐데 그 짓을 모르는 사기꾼에겐 그럴 듯한 편리한 얘기란 말이야. 짐을 잊어 버렸다구 이것 또한 멋진 얘기야 게다가 또 지독하게 죄가 있는 수작 이 란 말이야 이러 한 경우면 " 그러고 나서 또 왕은 자지러지게 한바탕 껄껄 웃어댔다 다른 사람들 도 모두 따라 웃었다. 세 사람인가 네 사람, 혹은 여섯 사람쯤은 그렇지 않았지만, 그 하나는 예의 그 의사이며, 또 하나는 눈초리가 날카로 운 신사로 융단 천으로 만든 구식 여행 가방을 들고 있다 이 신사는 이 제 방금 기선에서 내린 의사와 뭐라고 낮은 목소리로 수군수군 대면서 가끔 왕쪽으로 시선을 주고는 둘이서 서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은 루이스빌에 가 있던 변호사 헤비벨이었다 그 다음 또 하나는 사납게 생긴 몸이 튼튼한 거한으로, 어디선지 와서 노신사의 얘기를 전 부 듣고 나서 그 다음에는 왕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왕의 이 야기가 끝나자 이 거한이 물었다. "이봐 네놈이 하베이 월크스라면 이 마을엔 언제 왔다는 거야" "장례식 전날이죠, 노형 " 왕의 대답이었다 "그날 몇 시만 말이 야" "저녁때죠. 해가 지기 한두 시간 전일까요 " "오게 된 내력을 얘기해 봐 " "신시내티에서 스잔포웰호로 왔습죠." "흥. 그럼 그날 아침 뭣 땜에 상류 곶 있는 데 있었지. 카누를 타 고" "내가 그날 아침 갑 있는 데 있었다고요, 천만의 말씀." "거짓말쟁이 " 몇 명이 이 사나이에게로 달려들며, 노인이고 또 목사이기도 한 분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다. "흥, 목사, 뭐 말라죽은 게 목사야. 저놈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예요. 그날 아침 곶 있는 데 있었어. 내 집이 거기 있지 않느냐 말이야 그래서 내가 거기 있자니까 이놈도 거기 있었다는 거야. 거기 있는 걸 내 똑똑히 봤다니까 이놈은 팀 콜린즈와 어떤 아이 하나와 함께 카눌 타고 왔다니까. " 의사가 그 뒷말을 받았다. "하인즈, 자낸 그 앨 다시 한번 보면 생각이 나겠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쩔지 몰라. 아니, 저기 있구먼, 대번에 알겠네 ." 그 대장부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바로 나였다. 의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 나로서는 새로 온 그 두 사람이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만일 이 두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난 바보-그저 그뿐이 란 말이오. 이 사건을 자세히 조사할 때 까진 이 두 사람이 우리 마을에 서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란 말이에요. 하인즈, 따라와. 다른 분들도 따라오고. 이 자들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아까 그 사람들과 대면시킵시다. 그러면 그게 끝나기 전에 원이든 알 수 있을 테니까. " 왕쪽에 편을 든 사람에게는 이것은 못마땅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크게 재미난 일이었으므로 전원이 따라나섰다. 해 가 저물 무렵이었다. 의사는 내 손을 붙잡고 끌고 가며, 매우 친절하게 해주긴 했지만 절대로 손을 놓으려 고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여관의 큰방으로 들어가, 양초 몇 개씩을 켜고는 그 새로 온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 그리 심하게 굴고 싶진 않지만 그러나 나에게 는 이놈들이 사기꾼 놈들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그 정체에 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공범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있다고 하면 공범자는 피터 월크스가 남겨 놓은 돈주머닐 가지고 도망 을 칠 법하지 않을까요 있을 법한 일이죠. 만일 이 자들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그 돈을 가지고 오게 하여 의심이 풀릴 때까지 우리들에게 보관시키는 일에 반댄 안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모두 그 말에 찬성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두 놈은 왜 괴로운 곤궁 에 몰리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은 다만 슬픈 얼굴을 지었을 뿐,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 나는 돈이 거기 있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한심한 사건의 공평하고 솔직하고 철저한 조사를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을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돈은 거기 없습니다. 원한다면 사람 을 보내서 찾아보시오 " "그렇다면 어딨다는 거 야" "그건 말입니다 내 조카딸 애가 그 돈을 나더러 맡아 달라고 나에게 주었을 때 나는 그걸 내 침대 짚이불 속에다 감췄습니다. 여기 불과 2,3일밖에 체류하는 것이 아니니까 은행에다 맡길 생각이 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검둥이들에게 습관이 되어 있지 않는 까닭으로 영국의 머슴들처럼 정직하리라고만믿고 침대야말로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한 거죠. 검둥이들은 그 다음날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에 그 돈을 훔쳐 낸 것이올시다. 그것을 나는 검둥이들을 팔아 버렸을 때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놈들은 돈을 가지고 감쪽같이 도망친 거죠. 여 기 있는 내 머슴이 그걸 설명해 드릴 겁니다. 여러분." 의사와 몇 사람은 "시끄러워" 하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쳤고 아무도 왕의 말을 진짜라곤 믿지 않는 눈치를 나는 간파했다. 한 사나이가 나에게 검둥이들이 돈을 홈치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길래, 나는 훔치는 것을 보진 못했지만 방에서 발소리를 죽이며 나와 허겁지겁 나가 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별로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검둥이들이 내 주인의 잠을 깨게 할 것이 무서워, 책망을 듣기 전에 나가 버리려고 저렇게 서둘고들 있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내게 물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의사가 획 내 쪽으로 돌아서며 이렇게 물었다 "너도 영국 사람인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의사와 그 밖의 몇 사람이 껄껄 웃으며 "쓸데없는 소리 마" 하고 코방귀를 뀌었다. 이야기가 바뀌어, 그후 그들은 일반 조사에 착수하여 여러 가지 것을몇 시간씩이나 조사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얘길 꺼내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해서 그들은 언제까지나 조사를 계속한 것인데, 이러한 혼란 을 보기란 처음일 것이다. 사람들은 왕에게 이야기를 시켰고 다음 노신사에게 이야기를 시켰다. 그것을 들으면 편견에 사로잡힌 대다수의 바보 외엔 누구나 노신사가 사실을 말하고, 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는 것쯤은 능히 짐작이 갔을 것이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이번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으라고 했다. 왕 이 눈 가장자리로부터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으므로 나는 조 심을 해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셰필드의 얘기부터 시작하여, 우리들이 거기서 어떠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가, 또 영국에 있는 월크스 일족의 이야기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의사는 껄껄 웃어댔고, 변호사 헤리벨이 이렇게 말했다. "야, 앉아라, 이놈. 내가 너라면 그런 무리한 소린 안해. 너는 거짓 말을 하는 졸업이 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구나, 술술 나오는 것 같지 않다. 연습이 필요해. 퍽 어색해." 이 칭찬은 조금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해방을 당하여 기뻤다. 의사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쪽으로 돌아섰다. "헤비벨, 자네가 처음부터 마을에 있었다면.... 왕이 끼여들어 손을 뻗치며 말했다. "아아, 이분이 고인이 된 동생으로부터의 편지에 자꾸만 안부를 하던 친구분이 셨던가요" 변호사와 왕은 악수를 교환했다. 변호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즐거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얘기를 계속한 후에 한쪽 구석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었다. 이윽고 변호사가 음성을 높여 이렇게 말했다. "이걸로 결판이 납니다. 나는 명령서를 당신 동생 분과 함께 보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만사가 문제없이 잘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 여기서 그들은 종이와 펜을 가져오고, 왕은 걸터앉아 머리를 한쪽으로 기우뚱거리고 혀를 깨물며 무엇인지 갈겨썼다. 그 다음 그들은 공작에게 펜을 주었다. 이때 비로소 공작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 만 그러나 역시 펜을 집어들고 뭐라고 썼다. 그러자 이번에 변호사는 새로 온 노신사 쪽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부탁이니, 동생 분과 함께 한두 줄 써서 서명해 주십쇼." 노신사는 썼지만 그것은 아무도 읽을 수가 없었다. 변호사가 자못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이쿠 이건 모르겠는데." 그리고 주머니에서 묵은 편지를 한 뭉치 꺼내어 가지고 조사해 보고 다음 왕의 글씨를 조사해 보고, 그 다음엔 또다시 편지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묵은 편지는 하베이 월크스가 쓴 편지올시다 여기 두 가지 필적이 있는데 이 자들이 이걸 쓰지 않은 것은 누가 봐도 뻔합니다 " (왕과 공작은 변호사가 얼마나 교묘하게 자기들을 곯려 댔는가를 알자, 걸려들었구나 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 "그리고 이게 이 노인의 필적인데 이분이 이 편질 쓰지 않았다고 하 는 것도 누구나 용이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실은 이분이 쓰신 흘림 글씨 는 전혀 글씨 모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몇 통의 편지는‥‥‥ 새로 온 신사가 말을 가로질렀다. "죄송합니다만 내게 설명하게 해주십시오 여기 있는 동생 외엔 내 필적을 알아볼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청서를 시키는 거죠. 당신이 거기 가지고 있는 편지는 동생의 필적으로 내 것은 아닙니다 " "이것 봐라" 변호사였다. "이건 사곤데. 월리엄씨로부터의 편지도 몇 통 가지고 있으니까 동생 분더러 한두 줄 써 달라면 그것과 비교해 )‥‥‥" "동생은 왼손으로 못씁니다. 바른손을 쓸 수 있다면 동생이 자기 편 지도 내 편지도 둘 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겠구먼요. 제발 양쪽을 비교해 보십쇼. 둘 다 마찬가지 필적이니까요." 변호사는 하라는 대로했다. "그런 것 같군요. 또 비록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어쨌든 맨 처음에 눈에 띈 것보다는 훨씬 강한 근사점이 있습니다 자, 자, 자 나는 해 결의 대로를 곧장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데, 일부분이 글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한 가지만은 증명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 누구 도 월크스 집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올시다. " 변호사는 왕과 공작 쪽으로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까지 되어도 그 고집통 바보는 항복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정말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험 방법은 공평치 않다는 등, 동생 월리엄은 세상에서도 제일가는 장난꾼으로 정신을 차려 쓰려고 하지 않았다는 등, 월리엄이 펜을 종이에다 댄 순간 또 예의 그 장난 버릇이 나왔구나 하는 것을 자기는 알았다는 등,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신이 나서 연방 지껄이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지껄이고 있는 것을 자기 자신도 진짜라고 믿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금세 새로 온 신사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여기 어느 분이든 내 동생 -고인이 된 피터 월크스를 매장하는 것을 도운 분은 안 계십니까" "있죠." 누가 대답했다. "나와 앱 터너가 했습니다. 우리 둘 다 여기 있습니다. " 다음 노신사는 왕쪽을 바라다보며 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분은 피터 월크스의 가슴에 어떤 문신이 있었는지 그걸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시겠죠" 사실, 왕은 곧 용기를 가다듬지 않았다면 밑바닥을 도려낸 강둑 모양으로 털썩 쓰러졌으리라. 너무도 큰 돌발사였다. 확실히 누구나 아무 예고도 없이 이러한 난처한 질문을 하면 대개 녹아 떨어질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무슨 수로왕이 고인의 가슴 위에 문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 까닭이 있었단 말인가 이 말에 왕은 약간 움찔했다.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방은 물을 끼얹은 듯이 고요해졌고, 누구나 앞으로 약 간 몸을 내밀고는 왕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속으로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젠 항복할 테지 이 이상 버티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데 왕은 항복했을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항복을 안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왕이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이 그만 녹초 가 되어 그 수가 줄어든 틈을 타서 공작과 둘이서 포위망을 뚫고 내빼려는 작정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왕은 거기 앉아 있었으며 금세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음 대단히 힘든 질문이시군 정말 옳지, 동생 가슴에 무슨 문신이 있었는지 설명해 드리지. 그것은 조그맣고 가느다란 푸른 화살에 지나 지 않습니다. 그게 그 문신이에요, 그러니까 잘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지요. 자, 뭐라고 하실는지‥‥‥네" 정말, 나는 이렇게 뻔뻔스럽게 지껄일 수 있는 놈을 본 적이 없다. 새로 온 노신사는 갑자기 앱 터너와 짝패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 번에야말로 왕을 항복시켰다고 생각했던지 두 눈에 반짝 광채가 일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자 이제 한 말을 들으셨겠다 피터 월크스의 가슴에 그런 표가 있었습니까" 두 사람은 같이 대답했다. "우린 그런 표는 보지 못했는데요. " "그럼 좋아요" 하고 노신사가 받아, "자, 당신들이 피터 월크스의 가슴 위에서 본 것은 희미한 P자와 B자(그것은 피터가 젊었을 때에 쓰기를 그만둔 머리 글자였지요), 그리고 W자로 P-B-W 이런 조그마한 글자지요." 그리고 노신사는 그렇게 종이 위에다 써 보였다. "자, 당신들이 본 것은 이러한 것이었겠죠"둘 다 또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우린 못 왔어요. 표니 뭐니 못 봤어요." 일이 이렇게 되자, 모두가 격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은 모두 사기 놈들이다 강에다 처넣어 버려 빠뜨려 죽여 철봉에 태워서 조리를 돌려 " 그리고 일제히 우우 하고 떠들며 큰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변호사는 테이블 위에 뛰어올라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 제발 여러분 한 마디만 들어줘요. 꼭 한 마디만 들어줘 요, 소원이니1 아직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가서 시체를 파내어 조사해 봅시다. " 이 말은 사람들 마음에 들었다. "우와" 하고 곧 내려뛰려고 하는 것을 변호사와 의사가 제의했다 "잠깐, 잠깐 이 네 명과 애를 붙잡아 데리고 가기로 합시다. " "그럽시다" 하고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만일 그 표가 없다면 네 놈을 린치하기로 합시다" 나는 정말 겁이 났다. 그러나 도망칠 길은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들 네 사람을 붙잡아 묘지 쪽으로 끌고 갔다. 묘지는 하류로 1마일 반쯤 내려간 지점에 있었다 마을 안 사람들이 모두 뒤에서 따라왔다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시간은 아직 아홉 시밖에는 되지 않았으니까. 집 앞을 지날 때 나는 매리 제인을 마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더라 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했다 이제 만일 슬쩍 눈짓으로 매리에게 신호 만 할 수 있다면 그녀는 뛰어나와 나를 구해 주고, 이놈들은 사기꾼들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폭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가의 길을 마치 살쾡이 모양으로 떠들썩하며 떼를 지어 걸어갔다. 그리고 한층 더 무섭게 하려는 듯이 하늘이 우중충 흐려지더니 번갯불이 번쩍번쩍 비치기 시작했고, 바람이 나뭇잎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서운 광경과 위험한 고비는 난생 처음이었으므로 나 는 멍청하게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마음만 내키면 떡 버티고 앉아서 이 재미 난 소동을 구경하며, 아주 급한 고비에 처하게 되면 미스 매리 제인이 내 뒤에 있어서 나를 구해 내어 자유의 몸으로 해주려니 하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나와 돌발적인 죽음 사이에는 그 문신 외 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만일 그 문신이 없다면. 그런 것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웬일인지그밖의 것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 판이어서 군중들 사이에서 몸을 피하기 엔 참 편리했지만, 그러나 그 거한이 ∼하인즈가∼내 손목을 꽉 붙잡고 있는 까닭으로 이 사나이 손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은 거인 골리앗에게서 빠져 나오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뛰면서 그 뒤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묘지에 이르자 사람들은 그 안으로 눈사태 모양으로 밀려들어갔고, 홍수처럼 횝쓸었다 묘 있는 데에 도달하자 사람들은 삽은 필요한 수보다도 백 배나 많이 가지고 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들고 올 것 을 생각해 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번갯불을 이용하여 파기 시작했고, 반 마일쯤 떨어져 있는 제일 가까운 집으로 가서 등 하나를 빌려 오라고 사람 하나를 보냈다. 사람들은 열심히 파고 또 팠다. 사방은 무서을 정도로 어두워졌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며 바람은 요란하게 휘몰아쳤다 번갯불은 자꾸 만 더 번쩍거렸고, 천둥소리도 요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에 는 아랑곳도 하지 않을 정도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순 이 대군중 의 하나 하나의 얼굴과, 삽에다 수북하게 담은 혼이 묘에서 던져지는 것이 보였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암흑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참만에 사람들은 관을 헤쳐 내어 뚜껑 하나를 뜯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우우 몰려와서 밀치락달치락 새치기를 해 가며 들여다보려고 했는데 그 소동은 다시없으리라고 생각될 정도였고, 암흑인데다 그 꼴이었으므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하인즈가 어찌나 내 손목을 잡아당기는지 나는 손목이 견딜 수가 얼었다. 하인즈는 너무도 흥분하여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므로 나 같은 건 깨끗이 잊어버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때 갑자기 번갯불이 사방을 환히 비쳐 주었다. 그 바람에 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건 어찌된 셈이야, 가슴 위에 돈주머니가 놓여 있으니" 하인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왁 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내 손목을 놓고는 군중 속으로 돌진해 갔다. 나는 급히 빠져나와 어둠 속 을 뚫고 한길 쪽을 향해 내 달렸으며, 그 꼴은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만큼 가관이었으리 라. 한길에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나는 날듯이 뛰어갔다. 적어도 한길에는 담과 같은 암흑, 가끔 한 번씩 번쩍 하는 번갯불, 확확 내 리는 비, 휘몰아치는 바람,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 외엔 나밖에 없었다 나는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마을에 이르러 보니 폭풍우 속에 나와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눈 에 띄지 않았으므로 뒷길을 찾을 것도 없이 큰길을 똑바로 달려갔다. 집 근처에 왔을 때 나는 집으로 시선을 주고는 그쪽을 응시했다. 불이 보이지 않고 집안은 캄캄했다. 웬일인지 나는 그것을 보자 슬퍼지며 맥이 빠져 버렸다. 그러나 드디어 마침 내가 그 옆을 뛰어 지나가고 있으려니까 마침 매리 제인의 창 에 불빛이 반짝하고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가슴이 뿌듯해지며 터질 것만 같았다. 동시에 집이고 원이고 모두 내 등뒤의 어둠 속에 가라앉고 말았다. 이 세상에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날 리는 만무하리라. 매리 제인 은 내가 알고 있는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처녀이며 가장 용기가 있는 처녀 였다. 여기라면 모래톱을 볼 수 있을 테지, 하고 생각될 만큼 마을의 상류 에 접근한 순간부터 나는 빌릴 만한 보트가 없을까 싶어 열심히 사방 을 찾았다. 그리고 번갯불이 번쩍 하는 그 불빛으로 매어 놓지 않은 한 척을 발견하자 나는 그놈 속으로 날쌔게 뛰어올라 젓기 시작했다. 그 것은 카누였는데 밧줄로 매어 있을 뿐이었다 사주는 강 한가운데에 있었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일순간이라도 꾸물거리고 있지 않았다. 겨우 뗏목에 당도했을 때에는 너무나도 녹초가 되어 있었으므로 되도록이면 크게 네 활개를 뻗고 좀 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뗏목 위로 뛰어오르기가 무섭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와, 짐, 뗏목을 내려 아이구 고마워라, 놈들을 쫓아 버렸다" 짐은 뛰어나와 너무도 기쁜 나머지 두 팔을 크게 벌리고는 내쪽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번갯불에 비친 짐의 모습을 얼핏본 순간 나는 심장 이 입 속에까지 띄어 오를 만큼 놀라 뒤로 뗏목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짐이 리어왕 겸 물에 빠진 아라비아인 역을 혼자서 맡고 있다는 것을 나는 깜빡 잊어 버리고 있었으므로, 너무도 깜짝 놀란 나머지 간장도 폐장도 몸에서 빠져 나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짐은 나를 강에서 건져내어 껴안으며 축복하려고 했다. 내가 돌아온 것과 왕과 공작을 쫓아 버린 것이 한없이 기뻤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리쳤다 "지금은 안돼. 아침 식사 때에 해 어서 밧줄을 잘라 뗏목을 내려" 그래서 2초 후에 우리는 강을 내려가고 있었다. 또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 큰 강에 우리들만이 있게 되었고, 누구 하나 우리를 괴롭힐 사람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잠시 깡충깡충 뛰어다니기도 하고, 뛰어오르기도 하며 발꿈치를 몇 번씩 서로 맞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 번 맞부딪쳤을 때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왔으므로 숨을 죽 이고 귀를 기울이고는 기다렸다 그러자 과연 다음 번갯불이 물위를 번쩍하고 비쳤을 때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열심히 노를 저어 스귀프를 화살처럼 달리게 하고 있는 것은 왕과 공작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풀이 죽어 판자 위에 그만 풀썩 주저앉아 단념하고는 소리를 내어 울지 말자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30장 금화, 도둑을 구하다 놈들이 뗏목에 올라타자 왕은 나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면서 말했다 •우릴 버리고 내빼려고 이 개새끼야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 싫어졌단 말이지 , 응 " 나는 대답했다 "아뇨,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제발, 그렇게 떠밀지 말아 주세요, 폐하‥" •그럼, 어떡할 작정이었는지 어서 얘기해 봐. 그렇지 않으면 네놈 창자를 온통 파헤쳐 버릴 테니" "맹세코, 모든 걸 있는 대로 얘기하겠습니다. 폐하. 나를 붙잡고 있던 사나이는 여간 친절하지 않아서, 나와 똑같은 나이의 아들이 자기에게도 있었는데 작년에 죽고 말았다고 계속 그 얘길 되풀이하면서, 애가 이런 위험한 함정에 빠진 것을 보면 참 딱해 견딜 수 없는 노릇이 라고 했어요. 그리고 모두 금화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관 쪽으로 우르르 몰려갔을 때 나를 놔주며, '자, 어서 도망쳐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네 목을 매어 죽일 테니까 라고 조그만 목소리로 그라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도망친 거예요. 거기 있어도 아무 소용에 닿을 것 같지도 않았어요. 내가 무엇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성싶지도 않았고, 또 내뺄 수 있는데 가만히 있다가 목을 매어 달리고 싶지 않았어 요. 그래서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려오다가 카누를 발견한 거예요. 여기 이르자 짐에게, 어서 서둘러, 그렇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붙잡아서 목을 매달아서 죽일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폐하와 공작 은 지금쯤은 살아 있지 않을 거라고 하며 몹시 슬퍼하던 참이었어요. 짐도 슬퍼했지요. 그러니까 두 분이 오시는 걸 보았을 땐 아주 정말 기뻤어요. 정말인지 아닌지 짐에게 물어 보세요." 짐이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자 왕은 입을 닥치라고 호통을 치고는,"암, 그럴 테지, 정말 그럴 법도 한 일이지" 하면서 다시 나를 치받으며 물에 빠뜨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공작이 이쪽을 보고, "이 아이를 놔 이 늙은 바보 영감아1 임자와 이 애가 뭐 다를 게 있어 자 유의 몸이 되었을 때 임잔 언제 이 앨 찾은 적이 있어 나에겐 기억이 없는데" 하고 말하자, 왕은 나를 놓고는 그 마을과 마을 사람 전부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작은 이렇게 말했다 "임잔 차라리 입자 자신을 욕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자격이 제일 있는 건 임자니까 말이야. 애당초부터 분별이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한 것이 없잖아. 저 엉터리 푸른색 화살 문신으로 뻔뻔스럽게도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것을 빼놓고는. 그것만은 근사하던데. 정말 대성공이었 어. 그 덕택으로 우리들 모두 살아났으니 까, 안 그래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우린 그 영국 사람들의 짐이 도착할 때까지 유치장 신세를 지 게 췄을 것이고, 그 다음엔 감옥 신셀 졌을 것이 뻔하지 뭐야 허나 그 계략이 놈들을 묘지로 인도하였고, 금화는 우리들에게 좀더 큰 친절을 베풀어주었단 말이야. 그 흥분한 바보들이 우리들을 놓고서 한번 보려고 그렇게 밀려가지 않았던들 우리 셋은 다같이 오늘밤 넥타이(목을 매는 밧줄)를 하고서 자고 있을 테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이상으로 오래 써도 낡지도 닳지도 않을 것이 뻔한 넥타이를 하고서 말이야."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젖어. 얼마 후에 왕이 정신이 멍해진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흥 우리는 그걸 검둥이들이 훔쳤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먼1" 이 말을 듣고 나는 몸둘 곳이 없었다 "그렇지." 공작이 받았다. 자못 비꼬는 느릿한 조의 말투였다. "우리들이 말이지 ." 한 30초 가량이 지난 후에 왕이 느릿느릿 받았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지 ." 공작도 똑같은 말투였다 "천만에, 그렇게 생각한 건 나야," 이 말에 왕은 불끈 화를 냈다 "어이, 브릿지워터, 임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공작도 지지 않으며 왜 팔팔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거라면 임자야말로 무슨 소릴 하는지 도리어 이쪽에서 묻고 싶구먼" "병신 같으니" 왕이 쏘아붙였다. 완전히 비꼬는 투였다. "하지만 난 몰라. 아마 임잔 자고 있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몰랐을 테지," 이 말에 이번엔 공작이 불끈 화를 냈다. "이봐, 그런 바보 소린 좀 작작 하란 말이야. 날 천치 바보로 알고 있단 말인가, 임잔 그 돈을 관속에다 감춘 사람이 누군지 내가 그걸 모를 줄 안구" "그럴 테지 임자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내 어찌 몰라 임자 자신이 했을 테니까" "가 새끼가1" 공작은 왕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야, 손을 놔줘 목을 조르지 마 이제 얘기한 건 전부 취소야" 왕은 이 명을 올렸다. "좋아, 그럼, 이놈 너 언젠가 나중에 내 선수를 써 가지고 그 마을로 다시 몰래 들어가서 파내어 가지고 자기 독차지로 할 작정이었다는, 우 선 그 말만 자백해 봐 " "잠깐만 기다려, 공작. 나에게 하나만 정직하게 대답해 줘, 만일 임 자가 돈을 거기다 감추지 않았다면 그렇다고 말해 달란 말이야 그러면 난 그걸 믿고 내가 아까 한 얘긴 전부 취소할 테니 " "이 늙은 악당 농아, 내가 했다고, 천만에. 그걸 네놈은 뻔히 안구 있으면서도. 자, 그래도 그래" "그럼, 좋아, 임잘 믿어. 하지만 나에게 하나만 더 가르쳐 줘, 화를 내지 말고 임잔 속으로 그 돈을 훔쳐 가지고 감출 생각이 아니었느냐 말이 야" 공작은 이 말에 잠시 덤덤히 말이 없더니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비록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그런 짓은 하지•않았으니까, 안 그래. 하지만 네놈은 맘속으로 그렇게 계획을 세웠을 뿐 아니라 실제로 실행했겠다. " "내가 했다면 내 생전 창피를 못 면할 거요, 공작, 정말이야 이건.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곤 아내 그럴 생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임자가 아니 누가 선수를 친 거야." "가 새끼가 저놈이 하고서 제 발이 저리니까, 이놈이 했으면 했다고 고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 왕은 목구멍을 올골거리고 사뭇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만둬 ‥‥‥그럼 자백할 테니 " 왕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그때서야 마음이 놓였다. 아까 보다도 훨씬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공작은 손을 놓았다. "그런 짓을 안 했다고 다시 한번만 지껄여 봐, 당장에 물 속에 던져 버리고 말 테니 거기 앉아서 젖먹이처럼 훌쩍훌쩍 울어대는 게 네놈에겐 제일 어울려, 모든 걸 한꺼번에 꿀꺽 삼켜 버리려고 하는 너같은 늙은 타조와 같은 욕심쟁이 놈은 난생 처음이야. 그런 놈을 난 이제까지 마치 아버지처럼 모든 걸신용하고 있었다니 불쌍한 검둥이 놈들 이 자기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값을 쓰고 있는 것을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서서 가만히 듣고 있다니, 이 늙은 놈아, 수치를 좀 알란 말이야, 수치를 좀. 그런 터무니없는 바보 수작을 감쪽같이 신용할 만큼 바보 였다니 나라는 녀석도 참 어처구니없는 녀석이었지, 정말. 제기랄, 이 제 겨우 네놈이 왜 그렇게 열심으로 그 부족액을 메꾸자고 했는지 알겠어. 내가 '걸작'이니 뭐니로 번 돈을 몽땅 착복하려고 했단 말이지, 이 죽일 놈아1" 왕은 사뭇 머뭇거리며 아직도 코맹맹이 목소리였다. "하지만 공작, 부족액을 메우자고 한 건 어디 그게 나였던가 임자였지 . " "닥쳐 네놈 소린 이제 듣기 싫어 그래, 그 결과가 어찌됐는지 이젠 알겠구나 그놈들은 놈들의 돈을 고스란히 되찾았을 뿐 아니라, 우리 돈까지도 은화 하나 둘을 남겨 놓고 몽땅 훌어간 게 아니냐 말이야. 어 서 잠이나 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다시 부족액이니 뭐니 나에게 그런 소릴 해봐라" 이 말에 왕은 살금살금 윅왱 속으로 기어들어가 울분을 풀기 위해서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공작도 자기 술병을 들고 나선 것인데, 반시간 후에는 두 사람은 언제 그랬더냐 는 듯이 친해졌고, 취기가 돌아감에 따라 점 점 사이가 좋아져 갔고, 나중에는 서로 팔을 베개로 하여 코를 골며 잠 이 들어 버렸다. 두 사람은 자못 마음이 풀어진 것이지만 제아무리 마음이 풀어졌다 하더라도 왕은 돈주머니를 감춘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다시 꺼내서는 안 되겠다고 명심하고 있는 것을 나는 감지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안심하고 또 만족했다 물론 두 녀석이 코를 골기 시작하자 우리는 이야기 주머니를 끌러 놓기 시작했고, 나는 짐에 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제31장 거짓을 기도 드릴 수는 없다 우리는 며칠씩 다시는 어느 마을에도 기착하는 일없이 곧장 강을 내려갔다. 이젠 기온도 따뜻한 남부로, 집으로부터도 봬 떨어진 셈이다. 큰 나뭇가지에서부터 스페인 이끼가 횐 턱수염처럼 축 늘어져 있는 나무도 보이기 시작했다. 스페인 이끼가 자라 있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그 때문에 숲은 장엄하고도 음산하게 보였다. 그래서 사기꾼들도 이젠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는 또다시 마을을 터는 일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우선 금주 강연을 했는데 손안에 들어온 돈이라곤 술값도 되지 못했다. 또 하나의 마을에선 무도 학교를 열었지만 둘 다 댄스에 관해서는 캥거루만큼도 춤을 출 줄 몰랐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쫓아 버리고 말았다 또 한번은 웅변술을 해보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채 웅변을 하기도 전에 청중이 일어서서 욕을 마구 퍼붓는 바람에 그만 두 사람은 삼십육계를 부르고 말았다. 그들은 전 도니, 최면술이니, 의사니, 점쟁이니 하는 식으로 닥치는 대로 모든 것 에 손을 댔지만 그다지 신통한 재미를 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드디어는 두 사람은 주머니 속이 텅 비고 말아, 떠내려가는 뗏목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때로는 반나절씩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주 우울해 하며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태도가 일변되어, 그들은 윅왬 속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는 목소리를 죽여 가며 두서너 시간씩 뭐라고 수군거렸다. 짐과 나는 불안해졌다. 어쩐지 우리는 그 꼴이 싫었다. 지금까지보다도 더 질이 나쁜 계획을 짜고 있다고 우리는 판단했다. 우리는 이리저리 궁리를 한 끝에 놈들이 어느 집이나 가게를 털려는 심사가 아니면 사전 을 만들려는 심사거나 좌우간 그런 것을 계획하고 있는가 보다고 판정을 내렸다. 이렇게 판정을 내리자 우리는 덜컥 겁이 났고 그런 일 에는 절대로 관여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는 대로 우리는 이 두 놈을 내버리고는 그대로 뗏목을 내버리자고 쩟 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우리는 파이크스빌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촌의 하류 약 2마일 지점에 있는 적당하고도 안전한 곳에다 뗏목을 감추고는, 왕은 상륙하여 이제부터 마을로 가서 벌써 누가 '왕실의 걸작'소문을 들은 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탐지하고 올 테니 그 동안 모 두들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도둑질하러 들어갈 집 얘길 하 고 있는거구먼' 하고 나는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도둑질을 끝내고 이리 돌아와 짐과 나와 뗏목이 없어진 것에 깜짝 놀랄 테지, 어쨌든 놀라고는 그만 체념하고 말 테지.' 왕은 또 만일 자기가 한낮이 되 어도 돌아오지 않거든 성공했다고 생각해도 좋으니 곧 공작과 나도 마 을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공작은 안절부절못하며 사뭇 조 바심을 치기 시작했다. 뚱해 가지고 자못 못마땅한 얼굴이다. 무슨 일 만 있다면 그것으로 해서 우리들을 몰아대었고 우리들이 하는 일거일동이 모두 못마땅하다는 눈치였다. 공작은 눈곱만한 일 하나 하나를 일 일이 꼬집어 뜯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 정오가 되어도 왕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기뻤다. 어쨌든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 공작은 마을로 들어가서 왕을 찾아 돌아다닌 것인데, 얼마 후에 어느 조그마한 하류 선술집에서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는 왕을 찾아내었다. 그리 고 많은 건달들이 그를 둘러싸고는 재미로 그를 놀려대고 있었다. 왕 은 온갖 힘을 다하여 욕설을 퍼붓고 위협을 하는 등 야단이었지만, 너 무도 만취가 되어 있었으므로 걸을 수도 없었고 해서 건달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꼴을 본 공작은, 이 바보 늙은 놈아 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고, 이에 왕도 지지 않으며 응수했다 두 놈이 정신없이 서로 다투고 있는 틈을 타서 나는 급히 그 장소를 피해 다리야 날 살려라고 사슴처럼 강둑 길을 내달렸다.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당분간 놈들은 나와 짐을 만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숨이 차서 못 견딜 지경이었지만 기쁨으로 가슴이 뿌듯해져 뗏목에 이르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뗏목을 풀어, 짐. 이젠 문제없어" 하고 외쳤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고, 윅왬으로부터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짐이 간 곳이 없다 나는 불러 보았다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그 다음 또 한번 불러 보았다. 그리고는 습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불러 보기도 하고, 또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그리운 짐은 간 곳이 없었다. 다음 나는 풀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앉아 있을 수도 없고 해서 얼마 후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고 한길로 나갔다. 그러자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내아이를 만났다. 이러이러한 복장을 한 낯선 검둥이를 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이 대답이,"만났어" 하는 것이 아닌가 "어디쯤 서 " "여기서부터 2마일 하류의 사이러스 펠프스 아저씨 집에서. 그놈은 도망친 검둥이로 사람들이 붙잡은 거야 넌 그 검둥일 찾는 중이야" "찾고 있는 게 다 뭐야 난 한 시간인가 두 시간 전에 그놈과 숲에서 만났는데 그놈은 만일 내가 소릴 지르면 배창자를 잘라 놓겠다고 공갈 을 치는 게 아냐. 그리고 또 가만히 누워서 꼼짝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했는데 뭐. 나오는 게 다 뭐야 무서워서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었는데 뭐 꼼짝도 못하고." "응 그래. 이젠 무서워할 건 없어. 붙잡혔으니까 남부 어디서 도망 쳐 왔대 . " "붙잡아서 큰 돈벌일 했군 " "그럼 네 말이 옳아 200달러의 상금이 붙어 있으니까 말이지. 길에 떨어져 있는 돈을 줍는 것과 마찬가지야, " "그렇구말구 나도 어른이었더라면 그 돈을 탈 수 있었을걸 그랬군. 제일 먼저 그놈을 본 건 나니까. 누가 붙잡았지" "어떤 낯선 노인이었어. 그런데 자기 권리를 40달러에 팔아 버렸대. 강을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고 해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면 서 좀 생각해 보란 말이야 나라면 기다릴 테야, 비록 7년 동안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괜찮아 " "나도 한데 그렇게 싸게 파는 걸 보니 그 이상의 가치가 없었으니까 그랬을지도 몰라. 어쩌면 엉터리가 있는 게 아냐"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아. 팽팽한 실처럼 엉터리가 없어. 난 이 눈으로 삐라를 본 거야. 그 검둥이에 관한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더군. 그림을 보듯이 인상이 쓰여 있던데 그래.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 온 뉴 올린즈의 농장에 관한 얘기도 써 있고. 정말 이봐, 이 투기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다. 정말 그래. 이봐 너 씹는담배 있으면 한입만 줘." 나에게는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그 애는 가 버렸다. 나는 뗏목으로 돌아와 윅왬 속에 들어가 앉아 생각해 보았지만 암만해도 좋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아파질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이 난국을 해결할 방법이라곤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까지 긴 여행을 해 왔고, 그 악한들을 그렇게까지 섬겨 왔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고,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으니. 그 것은 놈들이 불과 더러운 그 40달러 때문에 짐을 이렇게까지 속였고. 일생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노예로 할 수 있을 만큼 무정한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짐이 어차피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면 짐의 가족들이 있는 고향에서 노예 노릇을 하는 편이 짐에게도 천 배나 좋을 것이니까, 톰 소여 에게 편지를 내어 왓슨 아주머니에게 짐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라 고 써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생각은 곧 단념했다. 즉 왓슨 아주머니는 자기 곁을 떠난 짐의 괘씸한 심사와 배은망덕에 골을 내고 싫증을 느끼고는 짐을 같은 하류 지방으로 또다시 팔아 버릴지도 모를 일이고, 비록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배은망덕한 검둥이를 의당 경멸하여 늘 짐에게 그 점을 느끼게 할 테니까, 짐은 사시사철 자기가 천하고 수치스런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허클 핀이 검둥일 자유의 몸으로 하는 데 조력을 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질 테니, 만일 그 마을에서 누구라도 만나게 되는 날엔 난 부끄러워서 얼굴도 쳐들지 못하게 될 게 아닌가. 그 까닭은 이렇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한 행위를 한다. 그리고 그 보복을 받기를 싫어한다. 숨어 있을 수가 있는 한은 수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괴로운 입장도 바로 이것이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점점 내 양심은 나를 괴롭히고, 점점 자기가 나쁜 천한, 지긋지긋한 놈으로 생각되었다 마침내 갑자기 그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언 뜻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것은 분명히 내 얼굴을 때린 신의 섭리의 손길이며, 나에게 아무 해도 끼친 일이 없는 불쌍한 노파로부터 검둥이를 내가 훔쳐내고 있을 동안, 신이 하늘에서 나의 악행을 보고 있었다 는 것을 깨우쳐 주고, 그리고 또 늘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이와 같은 철없는 행동에 대해서,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 앞으론 안 된다 하고 금하고 있는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찌나 무서웠던지 그 자리에 그만 풀썩 주저앉을 판이었다. 그래 서 나는 원래 자라나길 그렇게 못되게 자라났으니 그럴밖에 없지 않느냐고, 거기까지 탓할 건 없지 않느냐고 타일러 얼마간이라도 마음의 위안을 구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내 가슴속에서 무언지 모를 존재가 이렇게 계속 책하는 것이었다 "주일학교라는 게 있잖았어 너는 갈 생각만 있었다면 능히 갈 수 있었을 거다. 갔었다면 그 검둥이에게 해준 것 같은 짓을 하면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게 될 거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 이렇게 생각을 하자 나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기도를 올려, 이제까지와 같은 애가 아니라 좀더 좋은 애가 될 수 있을는지 그것을 시험해 보리라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말 이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신에게 감추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또 내 자신에게 감추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왜 말이 안 나오는지 나에게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두 마음이 있기 때문이 다 나는 죄를 그만두는 척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가장 큰 죄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옳은 일, 깨끗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검 등이 주인에게 검둥이의 거처를 편지로 알리겠습니다.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거짓 기도를 올릴 수는 없다 - 나는 그것 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나는 가슴속이 고뇌로 가득 찼으며, 이 이상은 더 괴로워할 수 없을 만큼 가득 차게 되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 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나는 한 가지 것에 생각이 이르렀다. 편지를 쓰자 - 그러고 나서 기도가 나올는지 시험해 보자. 그러자 놀랍게도 나는 깃털 모양으로 기분이 가벼워지며 고뇌는 전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기쁨으로 가슴속이 두근거렸고,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썼다 왓슨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의 도망친 노예 짐은 파이크스빌 하류 2마일 지점에 있습니다. 펠프 아저씨가 붙잡았습니다. 상금을 보내면 석방할 것입니다. 허클 핀으로부터 나는 난생 처음 죄가 깨끗이 씻겨진 것처림 상쾌한 기분이 되어 이제 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곧 기도를 드리지는 않고 종이를 아래에다 내려놓고서 앉은 채 생각했다 참 이렇게 되어 서 천만다행이다. 하마터면 지옥에 떨어질 판이었다고. 그리고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러는 중에 강을 내려오던 우리의 여행 생각이 얼핏 머 리에 떠올랐다. 짐의 영상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달밤인 때도 있었고, 또 폭풍우가 일던 때도 있었다. 우리는 얘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웃으면서 강을 내려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짐에게 악감정을 품었던 경우라곤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그 반대의 장면만이 머리 에 떠올랐다. 짐이 자기 몫의 당직을 한 위에, 내가 그대로 잘 수 있도 록 나를 깨우지 않고 내 몫까지 해주고 있는 짐의 모습이 자꾸만 머리 에 떠올랐다. 또 안개 속으로부터 내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리고 그 '숙원'이 있던 땅에서 늪지에 있는 짐에게로 돌아왔을 때에도, 또 그와 같은 다른 경우에도 짐이 그 얼마나 기뻐해 주었는지 그 모습이 머리 에 떠올랐다. 그리고 늘 나를 도련님, 도련님, 하고 부르며 귀여워해 줬고,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고 간에 나를 위해서 전력을 다해 주었다. 짐은 그 얼마나 나를 친절하게 생각해 주었던 것이랴. 맨 나중 에 나는 이 뗏목에 천연두 환자가 타고 있다고 하여 짐을 구해 냈을 때 짐이 아주 고마워하며 임잔 이 늙은 짐이 세상에서 가진 가장 좋은 친구이며, 그때로선 유일한 친구라고 하던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우연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예의 그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다 나는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었다. 영원히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는 잠 시 이렇게 생각했다. '옳지 그럼 난 지옥으로 가기로 하자.' 이러고는 종이를 부욱 찢어 버렸다. 그것은 무서운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그러나 벌써 입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내뱉은 대로 내버린 채 그 이상 개심 을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에서 모든 것을 짜내어 버려, 그러한 식으로 자라났으니 내 성품에 맞는 악행을 또다시 계속해 나가자, 그 반대의 행동은 나에게는 성품에 맞지 않으니까라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 처음 일로서 짐을 다시 한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내자, 그보다 더 나쁜 일이 머리에 떠을랐다면 그것도 해내자. 악행을 하기로 작정 한 이상, 더욱이 끝까지 하기로 작정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 다음 나는 어떻게 착수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고는 마음속으로 왜 여러 가지 방법을 이리저리 궁리한 후에 나에게 가장 알맞는 계획 하나 를 하기로 작정했다. 그 다음 나는 강 조금 하류에 있는 나무들이 우거진 섬의 위치를 잘 봐둔 후에 해가 완전히 저물자 살며시 뗏목을 내어 그 섬으로 가 뗏목을 거기다 감춰 놓고 잠자리로 들어가 밤새도록 잤다. 그리고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가게에서 산 양복을 입고, 다른 옷과 그 밖의 것을 한 보따리로 싹수머리고 카누를 타고서 둑을 향해 젓기 시작했다 이 부근이 펠프의 땅이려니 하고 생각 된 곳의 하류에 상륙하자. 보따리를 숲속에다가 감춰 놓고, 또 필요한 때에는 찾아낼 수 있도록 카누를 돌로 채워 둑에 있는 조그마한 증기 제재소로부터 4분지 1마일쯤 하류에다 가라앉혔다. 그 다음 나는 한길로 나섰다. 제재소 옆을 지날 무렵 '펠프스 제재 소'라는 간판이 나와 있었다 거기서부터 농가들이 쭉 즐비해 있는 곳 에 왔을 때 나는 끊임없이 눈을 흡뜨고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날이 환히 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그러나 나 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이 근처의 지세를 알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 계획에 의 하면 나는 하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이 동네로 온 것으로 하 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슬쩍 한번보고 나서 나는 곧장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마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만난 것은 공작이었다. 공작은 '왕실의 걸작' 광고를 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번과 똑같이 삼야한 이라고 하는 그것이다 정말 뻔뻔스러운 녀석들이다. 이 사기꾼놈 들은 나는 피할 사이도 없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이 되고 말았다 공작은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어이, 어디서 온 거냐" 그 다음 기쁜 듯이 힘을 주어, "뗏목은 어디 있지 안전한 장소에다 매 두었나" "아니, 그건 내가 각하에게 물어 보려고 하던 건데요." 내 말에 공작은 아까보다는 덜 기쁜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에게 묻다니 어찌된 셈이야" "실은 어제 그 선술집에서 왕을 보았을 때 더 술이 깰 때 까진 몇 시간 동안은 데려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기다리는 시간을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시내 안을 이리저리 싸질러 다녔죠, 그러는데 어떤 사람이 하나 와서 10센트를 줄 테니 스키프를 타고 강 저쪽으로 가서 양을 데리고 오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기에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간 것인데, 양을 배 있는 데까지 끌고 와서 그 사람은 나에게 밧줄을 붙잡고 있으라고 하고는 자기는 양 뒤로 가서 처밀어 배 안으로 넣으려고 하는 참에 양이 나보다도 힘이 세었으므로 밧줄을 뿌리쳐 끊고 는 그만 내뺐어요. 그래서 둘이서 그 뒤를 쫓은 거죠, 개를 데리고 있지 않았으므로 양이 녹초가 될 때까지 따라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지 뭐예요. 어두워진 후에 겨우 붙잡아 가지고 강을 건넌 후에 나는 뗏목 있는 데로 돌아왔죠. 한데 뗏목이 없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 사람들은 사고를 일으켜 그만 내빼고 말았구나. 그래서 내 검둥일 데리고 내뺐구나. 나에겐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검둥일 데리고. 그래서 난 이제 낯설고 눈설 은 고장에서 돈이라곤 한 푼도 없이 어떻게 살아 나가야 좋을지 막연하구나'하고요. 그래서 나는 가만히 앉아서 울다가 밤새도록 습속에서 잤어요. 하지만 대판절 뗏목은 어떻게 된 셈이죠 그리고 짐은, 그 불쌍한 짐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그 뗏목이 어떻게 췄다는 것을 그 병신 영감쟁인 장사랍시고 해 가지고 40달러를 벌어, 우리들이 선술집에서 그 병신을 찾았을 땐 거기 있던 건달들이 반 달러씩 거는 노름을 하며 마 신 위스키 대금 외엔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빨아 버린 거야. 밤 늦게 서야 겨우 그 병신을 데리고 와 보니 뗏목은 간 데가 없고 해서 '고놈의 새끼 봐라, 우리 뗏목을 훔쳐 가지고 저만 강을 내려갔구나' 하고 한참 펄펄 뛰던 참이었어," "내가 자기 검둥일 내쫓을 까닭이 없잖아요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다만 하나밖에 없는 검둥이고, 또 하나밖에 없는 재산인데요." "우리는 거기 까진 생각 못했는데, 실인즉 저건 우리들의 검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였고, 정말 그놈 때문에 단단히 수고를 한 셈이지. 그러한 까닭으로 뗏목은 없어졌고, 우리는 동전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지라, 다시 한번 '왕실의 걸 작'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더란 말이야. 그래서 말이다. 그때부터 쭉 오늘날까지 술이라곤 한 모금도 마신 적이 없고, 화약통처럼 바 싹 말라 가지고 이렇게 분주히 싸질러 돌아다니는 판이란다. 그 10센트 는 어딨지 이리 내놔." 나는 돈을 왜 가지고 있었으므로 10센트를 공작에게 주었지만, 그러나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전액으로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으니 뭐나 좀 먹을 것을 사가지고 나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다.공작은 나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순간 내 쪽으로 홱 돌 아서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너 그 검둥이놈이 우리들의 일을 폭로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짓을 해봐라. 그놈의 새끼 껍데길 벗겨놓고 말 테니" "무슨 수로 폭로할 수 있겠습니까 짐은 내뺀 게 아닌가요" "아냐. 그렇지 않아 그 병신 영감쟁이가 팔아 버리고는 돈을 나에게분배하지도 않고 그만 공중으로 뜨고 만 거야. " "팔아 버렸다구요" 이러고 나서 나는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하 지만 저건 내 검둥이로 그 돈은 내 것이란 말이에요. 짐은 어딨어요,지금 난 그 검둥이가 없으면 큰일이 에요." "흠, 너 검둥일 찾아낼 수 없을걸, 그저 그뿐이란 말이야 그러니 그 훌쩍대는 건 그만두란 말이다. 임마, 설마 네놈은 우리들의 일을 폭로 할 셈은 아닐 테지 내가 네놈을 신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간 큰 잘못 이다 알겠나, 폭로라도 해봐라 " 여기서 공작은 말을 끊었지만 공작이 이러한 험상궂은 낯을 짓는 것 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는 여전히 홀쩍훌쩍 울어댔다. "난 누구의 일이든지 폭로하겠다는 생각은 없고 또 그럴 틈도 없습니다 내 검둥일 찾으러 어서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난." 공작은 삐라를 팔뚝에다 걸치고 펄럭거리면서 이마에다 주름살을 일 고는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젖어 있더니 한참만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좋은 걸 하나 가르쳐 주마. 우리는 이 마을에 사흘 동안 있어야 해.만일 네가 우리들의 일을 폭로하지 않고 그 검둥이에게도 폭로하지 않 게 한다고 약속을 하면 그 검둥이가 있는 장소를 가르쳐 주겠다. " 그래서 내가 약속을 하자 공작은, "농사꾼인데 그 이름은 사이러스 페...... 말끝을 내지 못하고 공작은 여기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나 에게 정말 얘기를 할 작정이었던 모양인데, 그렇게 말끝을 흐리고는 또다시 생각에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구나 하고 나는 생 각했다. 정말 그대로였다. 공작은 나를 신용하지는 않고 확실히 사흘 동안 나를 멀리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참 있다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검둥일 산 사람은 에이브러햄 포스터 에이브러햄 G. 포스터라 고 하는 사람이야. 여기서 40마일 떨어진 벽지로, 라파에트로 가는 노 상에 살고 있어." "그럼 됐어요, 40마일이라면 사흘이면 충분해요, 오늘 오후에 곧 떠 나기로 하겠어요. " "아냐, 안돼. 이제 곧 떠나라. 1초라도 지체해선 안 돼. 도중에서 지껄여도 안 된다. 그저 입을 곽 다물고 그저 자꾸만 가는 거야. 그러면 우리들로부터 혼날 것 없이 괜찮을 거란 말이다 알았나" 이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것으로, 이런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고서 내 가 잔 것이다. 자기 계획에 착수하기 위해서 나는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떠나. 포스터 아저씨에겐 네 마음대로 아무 얘길 해 도 좋아. 짐이 네 검둥이라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구. 바보에겐 증서라 곤 필요없으니까. 적어도 이 남부에선 그런 작자들이 있다고 하는 얘 길 들었어 그 삐라와 현상금이 엉터리라고 말하고 왜 그런 짓을 했는 가를 설명하면, 모르긴 몰라도 네 얘길 아마 진짜로 들을 거다. 자 어 서 떠나, 포스터 아저씨에게 무슨 얘길 해도 좋지만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도중은 말이다.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얘길 해선 안 돼. 정신차 려." 그래서 나는 길을 떠나 그 시골 마을을 향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뒤 돌아보진 않았지만 웬일인지 공작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러나 언제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는 그 동안에 그만 녹아떨어지 고 말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1마일쯤 곧장 시골 쪽으로 걸어간 다음 거기서 걸음을 멈추고는 숲을 빠져 펠프스 집을 항해 다시 돌아왔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일 없 이 내 계획에 곧 착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놈들 이 도망칠 때까지 짐의 입을 봉해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놈 들과 성가신 일을 일으키긴 싫었다. 나로서는 싫증이 날 정도로 놈들 을 알고 있는 까닭으로 완전히 손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 제32장 새 이름 그곳에 이르고 보니 사방은 일요일처럼 고요한 것이 무덥고 해는 쨍 쨍 내리쪼이고 있었다. 머슴들은 모두 들일을 나가 있었다. 공중에서 는 딱정벌레와 파리가 웅웅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리고, 그것이 까닭 모르게 외로운 기분을 자아내 주며, 모든 사람이 죽어서 어디론지 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주고 있었다 또 산들 바람이 획 불어와 나뭇잎이 흔들리니 구슬픈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혼이 먼 옛날에 죽 은 사람의 혼이 - 서로 속삭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므로 마치 자 기 일을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자기까지 죽어 버려 끝장을 내야겠다고 생각되는 것뿐이 었다 펠프스의 농장은 조그마한 초라한 목화농장으로, 그러한 농장은 대 개 비슷비슷하다. 2에이커 정도의 마당에는 횡목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고, 그 울타리를 넘기 위해서 키가 각각 다른 통을 쭉 늘어놓은 것처럼 계단식으로 통나무를 톱으로 켜서 만든 발판이 있었고, 여자들이 말을 탈 때에도 그 위에서 뛰어올라 타게 되어 있었다. 털은 마당 쪽에는 초라한 풀밭도 있기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털이 다 빠진 헌 모자처 럼 아무것도 자라 있는 것이 없이 평평했다. 백인이 살고 있는 집은 커다란 두 채의 통나무집으로 잘 다듬지 않은 재목으로 되어 있었고, 틈새를 진흙과 몰타르로 틀어막아 놓았다. 그리고 이 진흙 줄무의에는 횐 회가 칠해져 있었다. 등근 그대로의 통나무로 만든 부엌은 커다랗고 폭이 넓으며 지붕만 달려 있는 낭하로 안채에 달려 있다. 부엌 뒤는통나무로 지은 훈제장이 있었고, 그 건너편에는 조그마한 통나무로 지은 검둥이 오두막집이 세 채 한 줄로 쭉 늘어서 있었다. 따로 조그마한 오두막집이 한 채 저만큼 떨어진 뒤껼 울타리 옆에 있었고,그 건너편에 몇 채의 딴 채가 또 있었다. 그 조그마한 오두막집 옆에는잿물통파 비누를 고는 큰 솥이 놓여 있었고, 부엌 입구 옆에는 물이 든양동이와 바가지를 올려놓은 벤치가 있었다 몇 마리의 개가 그 근처에서 햇볕을 쪼이며 낮잠을 자고 있었다 서쪽 구석에는 해를 가려주 는 나무가 세 그루쯤 서 있었고, 까치밥나무 덤불과 구즈베리 덤불이 울타리 옆에 한 덩어리로 수북하게 자라 있었다. 울타리 밖에는 채소밭과 수박밭이 있었고, 그 다음부터 목화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목 화밭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숲이 시작되었다. 나는 빙 뒤껼으로 돌아 잿물통 옆 발판을 넘어 부엌 쪽으로 향했다.조금 가자 물레바퀴 소리가 붕하고 높아졌다가 다시 붕하고 낮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나는 정말 죽어 버리고 싶었다. 이보다도 쓸쓸한 소리는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별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그냥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 다. 유사시에는 신이 적당한 말을 가르쳐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되는 대로 내맡겨두면 반드시 신이 적당한 말을 가르쳐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반쯤 왔을 때 우선 한 마리의 개가, 그 다음엔 다음 개들이 일어서서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물론 나는 걸음을 멈추고는 놈들과 얼굴을 맞대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짖어대는 시끄러운 소리란 이루 말할 수 없다1 채 15초도 못 되는 사이에 나는 바퀴통 꼴이 되고 말았다. 15마 리나 되는 개가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짖으며 으르렁거렸다. 수는 점 점 늘어만 갔다. 울타리를 뛰어럼고 모퉁이를 돌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부엌에서 검둥이 여자 하나가 손에 국수방망이를 들고 뛰어나와 고 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티지, 절루 가 점박이, 절루 가, 이놈아" 여자는 우선 티지를, 다음에는 점박이를 그 방망이로 후려갈겼으므 로 두 마리는 짖으면서 저쪽으로 내뺐다. 그러자 다른 개들도 그 뒤를 따라 도망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곧 그 절반이 다시 돌아와 내 주 위에서 꼬리를 흔들며 친구가 되려고 했다. 정말 개라는 것은 악의가 없는 짐승이다. 그 검둥이 여인 뒤에서 조그마한 검둥이 계집애 하나와 사내 애 둘이올이 거친 베 셔츠 하나만을 걸친 꼴로 어머니 옷에 매달려 그 뒤에서 부끄러운 듯이 내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검둥이 애들은 늘 이렇게 했 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인 여자가 집에서 뛰어나왔다. 마흔다섯 내지 쉰 살 정도로, 모자도 쓰고 있지 않고 손에는 물레방망이를 들고 있었다. 그 뒤를 그 여자의 애들이 마치 검둥이 애들이 하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하면서 따라나왔다. 이 여자는 얼굴에 온통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이 어렵다는 정도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너였구나 드디어 왔구나 그렇지" 나는 무심코 "예, 아주머니" 하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이 여자는 나를 확 껴안더니 내 두 손을 잡고 부서질 정도로 힘껏 쥐었다 눈에는 눈물이 넘쳐 떨어졌다. 그녀는 힘껏 껴안고 악수를 해도 부족하다는 듯이 계속 지껄였다. "넌 생각하던 것보다는 어머닐 안 닳았구나. 하지만 그까짓 아무려면어때, 널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구나 정말, 정말 깨물어 먹고 싶 을 정도야 얘들아, 이건 너희들 사촌 톰이란다. 인사해." 그러나 애들은 눈을 내리깔고는 입에다 손을 문 채 어머니 뒤에 숨어있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리즈, 어서 급히 뜨거운 조반을 준비해. 혹 배에서 아침을 먹었을 까" 내가 배에서 먹었다고 하자 그녀는 내 손을 끌고 집 쪽으로 걸어갔 고, 애들은 뒤에서 따라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나를 등의자에 앉히고 자기는 내 앞에 놓인 얕은 걸상에 걸터앉아 내 두 손을 잡으면서 또 말문을 열었다 "자, 이젠 네 얼굴이 잘 보이는구나. 정말 몇 해 동안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구나 이제 겨우 그 소원이 이루어진 셈이구나 집에선 2,3일 전부터 이젠가 저젠가 하고 고대하고 있었단다. 어째 늦 었니 배가 좌초라도 되었었니" "그렇습니다. 마님. 배가‥‥‥ "그렇습니다. 마님이 다 뭐냐. 살리 아주머니라고 그래, 그럼 어디서좌초를 당했지"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배가 강을 올라왔는지 내려갔는지 몰랐었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대개 직감으로 처리해 버렸다.그리고 내 직감은 그 배가 훨씬 하류인 올린즈 쪽에서 올라왔다고 가 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쪽 사 주의 이름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주의 이름을 뭐 라고 하나 만들어 내거나, 또는 좌초당한 사주의 이름을 잊어 버린 척 하거나 둘 중 어느 쪽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 때 좋은 생각이 하나 머리에 떠올라 이렇게 말했다. "좌초 때문에 늦은 건 잠시였어요. 실린더 대가리가 터졌어요." "어머나 누구 다친 사람은 없었니" "없었어요, 마님. 검둥이가 하나 죽었을 뿐‥‥‥‥ "그건 참 다행이구나. 때때로 사람이라는 것은 다칠 수도 있으니까.2년 전에 네 사이러스 숙부가 뉴올린즈에서 '랠리 룩'호로 강을 올라왔 는데, 그때 배 실린더 대가리가 터지는 바람에 사람이 하나 병신이 되고 말았단다. 아마 그 사람은 결국 죽었을 거야. 그 사람은 침례파 신 자로, 베이튼 루즈에 사는 그의 가족을 사이러스 숙부는 잘 알고 있었 단다. 옳지, 이제 생각나는군. 그 사람은 정말 죽고 말았단다. 괴저가 일어나 절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던가 수술을 했지만 헛수 고였어. 그래 괴저였어 정말 그랬어. 온몸이 새파래지고는 영광에 빛 나는 부확을 바라면서 죽고 말았지. 볼 만한 광경이었다더라, 사람들 말이. 네 숙부는 너를 맞으러 매일같이 마을로 나갔단다. 오늘도 한 시 간 전에 나갔으니까 이제 곧 돌아을 거야. 도중에서 만났을 텐데, 너 못 만났니 왜 나이가 든, 저 ...... "아뇨, 살리 아주머니. 아무도 못 만났는데요, 배가 마침 새벽녘에 도착했으므로 짐을 선장 배에다 두고 시간을 보내서 여기 너무 빨리 도착하지 않도록 마을 구경을 하고. 또 겸해서 시골 쪽으로 가보았어 요. 그래서 뒷길로 해서 왔지요." "짐은 누구에게 부탁하구" "아뇨, 아무에게도 부탁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런 짓을 하다간 도둑을 맞게." "내가 감춰 둔 곳이라면 도둑질을 당할 것 같진 않던데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배에서 조반을 먹었느냐" 그것은 오싹 소름이 끼치는 살얼음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 답했다 "내가 거기 서 있는 걸보고 선장이 상륙하기 전에 뭐 좀 먹는 게 좋겠다고 하며 상갑판에 있는 사관 식당으로 데리고 가내가 원하는 걸 뭐든지 먹게 해줬어요." 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있을 수 없을 만큼 불안해졌다. 아까부터 애 들 쪽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한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질문을 좀 하여 내가 대체 누군지 알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를 주 지 않고 펠프스 부인은 쉴새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얼마 후에 펠프스 부인은 내 등골이 오싹해질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넌 이렇게 지껄이고 있으면서도 형님 안부며, 누구 얘기도 한 마디 없으니 어떻게 된 젬이냐 자, 이걸로 난 얘길 그만 할 테니까 이젠 네가 좀 해보렴. 하나도 빼놓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얘기를 잘들 지내고 있는지 어떤지, 나에게 어떤 안부를 전했는지, 생각나는 대로 전부 얘기해 봐." 자,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정말 난처했다 이제까지는 신은 그래도 틀림없이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좌초에 걸리고 말아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대로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전혀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두 손을 들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먹고 사실을 실토해야 할 때가 왔다고 속으로 속삭였다 나는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을 때, 펠프스 부인은 나를 붙잡고 급히 침대 뒤로 데리고 갔다. "자, 돌아오셨다 머릴 좀더 숙여. 옳지, 옳지 됐어. 그러면 네 모습 이 보이지 않아. 여기 있는 걸 알려선 안 돼. 잠깐 내가 장난을 해보일 테니까. 너희들 아무 소리도 하는 게 아니다. " 이건 정말 큰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을 해본댔자 소용 이 없다. 그저 가만히 있다가 벼락이 떨어지면 획 뛰어나갈 수 있도록 대기를 하고 있을밖에 딴 길이 없다. 나는 들어온 노신사를 한번 흘낏 보았을 뿐으로, 침대가 그 사람을 감춰 버렸다 펠프스 부인은 신사에 게로 뛰어들며, "그 애 왔수" 하자, "아니" 하고 남편이 대답했다. "아니 저런, 대체 어떻게 된 셈일까" "나도 모르겠는걸. 정말 걱정되어 죽겠는데." "걱정된다구 난 이제라도 당장 이칠 것만 같은데 그 앤 꼭 왔을 텐 데 당신은 길에서 그 앨 놓친 거예요. 꼭 그래요 웬일인지 그렇게만생각되 는군요. " "원, 당신두, 내가 길에서 그 앨 놓쳤을 것 같수, 천만에......그건 당신도 알 텐데 . " "하지만 저런 ......형님이 뭐랄지 몰라 그 앤 틀림없이 왔을 거예요당신이 놓쳤어요, 그 아일." "아, 그렇잖아도 맘을 조리고 있는데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마우. 대 관절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모 르겠구려 게다가 맘이 불안해서 꼭 죽을 지경이야. 하지만 필경 그 애 가 왔을 리가 없어. 왔다면 내가 놓칠 리 만무하니까 여보, 큰일났구 려. 정말 큰일났구려. 필경 배에 무슨 일이 생겼을 거요" "아니 사이러스 저쪽을 좀 봐요 누가 오지 않아요" 신사는 침대머리에 가까운 창가로 달려갔다. 이것이 펠프스 부인이 노리고 있던 기회를 주었다. 부인은 급히 침대다리 쪽으로 몸을 굽혀 나를 잡아끌었으므로 나는 나왔다. 신사가 창에서 돌아와 보니 부인은 활활 타고 있는 집처럼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 있었고, 그 옆에는 내가 매우 점잖게 식은땀이 나을 지경으로 서 있었다. 노신사는 눈을 흡떴 다. "아니, 그아인 누구요" "누구라고 생각해요" "정말 모를 노릇인데, 누구요" "톰 소여 예요" 놀라고 말고가 없었다. 정말 나는 허리가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노인은 남의 속도 모르고 다짜고짜 내 손을 확 붙잡고 흔들며 언제까 지 흔들고 있었다. 그동안 부인은 춤을 추며 뛰어돌아다니는 등. 웃는 등, 우는 등 정말 야단이었다. 그러고 나서 둘 다 시드와 메리. 그밖의집안 식구들에 관한 질문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제아무리 기뻐했다 하더라도 내가 기뻐한 것에비교하면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 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이나 나에게 얼어붙은 것처럼 바싹 달 라붙어 앉아 마침내 나중에는 내 턱이 그만 뻣뻣하게 되어 이 이상 더 움직이지 않게 되기까지 나는 우리 집안 식구에 관해 - 결국 그건 소 여의 집안 식구들이지만 - 여섯 개의 소여 집안에서 일어난 것보다도 더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또 화이트강 화 구에서 실린더 대가리가 터져 그것을 고치는 데 사흘이 걸렸다는 것도 자세히 설명했다. 모든 게 정말 근사하게 된 셈이었다. 두 사람 다 그 것을 수선하는 데 왜 사흘이나 걸렸는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으로 실 린더 대신 나사못 대가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모든 게 멋지게 통했으 리 라. 이제야말로 나는 한편으론 마음이 후련해지며 턱 놓였지만 또 한편으론 불안한 마음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톰 소여인 척하고 있는 것은 쉽기도 하고 마음편한 일이었다. 그 마음편한 생각은 얼마 후 기선이 콩콩 기침을 하면서 강을 내려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계 속되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만일 톰 소여가 저 배로 온다면 어떻게 하지, 그리고 이제라도 이리곧장 들어와서 내가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할 사이도 없이 내 이름 을 큰 소리로 부르면 어떻게 하지 옳지, 그런 일이 일어나면 큰일이다. 절대로 안 된다. 한길로 나가서숨어서 통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나는 마을로 짐 을 찾으러 갔다오려고 생각한다고 두 사람에게 말했더니 노신사가 함 께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뇨, 나는 혼자서 말을 몰 수 있으니까 더 폐를 끼치긴 싫습니다" 했다. 제33장 왕과 공작의 가련한 최후 그래서 나는 짐마차를 몰고 마을로 향했다 절반쯤 갔을 때 저쪽에서짐마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틀림없이 톰 소여였다. 나는말을 세우고 톰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서라" 하자 그 마차와 내 마차는 나란히 섰다 톰은 입을 가방 만하게 크게 벌리고는 언제까지 벌린 채로 있었다.그러고 나서 목이 타는 듯이 두서너 번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에게 아무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어. 그건 너도 알 테지.그렇다면 뭣 때문에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서 나에게 달라붙어 날 괴롭히려고 하는 거냐" "난 다시 돌아온 게 아냐. 언제 내가 죽었었어 야 말이지." 내 말소리를 듣자 통은 얼마간 제정신으로 돌아왔는데, 그렇다고 해 서 완전히 납득이 간 것도 아니었다. "날 속여선 안 돼. 나는 널 속이진 않을 테니까. 진짜 넌 유령이 아 니지 " "진짜 난 유령이 아냐 " "응, 그래......난......난 말이야......이걸로 물론 얘기는 다 된 셈이지. 하지만 웬일인지 나에겐 석연치 않아 암만해도. 이봐, 그럼 넌 전 혀 죽었던 게 아니었단 말이냐" "그렇구말구, 내가 죽긴 왜 죽어. 난 모두를 속인 거야. 내 말이 믿 어지지 않는다면 이리 와서 날 좀 만져 보란 말이야." 그래서 톰은 하라는 대로 했고, 그걸로 해서 납득이 갔다. 그리고 또 다시 나를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며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꼴이었다 그는 곧 모든 얘길 듣고 싶어했다. 위대한 모험이며, 신비적이어서 톰 의 급소를 찌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분간 내버려두기로 하자고 하고, 톰의 마부에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령하고는 우리는 조금 앞까지 마차를 몰고서 내가 이제 어떠한 곤경에 빠져 있는가를 톰에게 알리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톰은 잠시 자기를 내버려두고 방해를 하지 말라고 하고는 열심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더니,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됐어. 내 가방을 네 마차에다 싣고 네 가방인 척하고 있으란 말이 야 그리고 알맞게 집에 도착할 수 있도록 슬슬 말을 몰고 돌아가란 말이야 나는 마을로 잠시 들어갔다가 다시 출발하여 너보다 15분이나 한 30분쯤 늦게 도착할 테니. 너는 처음에는 날 알고 있는 척은 안해도 좋아." "그럼 됐어. 그러나 잠깐만 기다려. 또 하나 할 얘기가 있어 나밖엔 아무도 모르는 얘기야 그건 말이야, 저,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려는 검 둥이가 하나 있어 짐이라고 하는...그 왓슨 아주머니네 짐 말이야," 이 말에 톰은 음성을 높여, "뭣이 그런데 짐은... 톰은 뒷말을끊고는 생각에 젖어 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너는 그런 짓은 더럽고 치사한 일이라고 할 테지. 하지만 어떻다는 거야 난 야비한 인간이야. 그러니까 짐을 훔쳐낼 작정이야. 그걸 네가 가만히 눈감아 주었으면 하는 거야 그렇게 해주려나" 이 말에 톰은 눈에 광채를 띠며 말했다 "난 네가 짐을 훔쳐내는 걸 도와 주겠어" 이 말을 듣고 나는 총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듣기란 난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톰 소여 도 그 사나이값이 떨어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 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검둥이 도둑 톰 소여라니 "바보 소리 마 농담이지." "농담이라니, 천만에 . " "그럼 됐어, 농담이건 아니건 도망친 검둥이 얘기가 어디서 나오거 든 넌 그런 놈의 얘긴 전혀 모르고, 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 여기서 톰은 가방을 내 짐마차에다 넣고서 자기는 마을 쪽으로 다시 돌아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물론 나는 너무도 기쁜 나머 지, 그리고 생각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천천히 말을 모는 것을 감쪽같이 그만 잊어 버리고는 거리로 봐서 너무도 빨리 도착하고 말았 다. 노신사는 문간으로 나와서, "야, 이건 근사하구나 그 암말이 이렇 게 빨리 뛰리라곤 신의 조환데 시간을 재뒀더면 좋았을걸 그랬군. 게 다가 털에는 땀도 붙어 있지 않구나. 한 방울도 붙어 있지 않아, 이상 한데. 이러고 보니 100달러를 주겠다고 해도 팔고픈 생각이 없는데, 정 말. 그걸 전엔 15달러에 팔아 버렸을지도 모르지, 그만한 가치밖에 없 는 줄 생각하고. " 노신사의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렇게 순박하고도 선량한 노인은 난생 처음이다. 하지만 그것은 별 로 놀랄 것이 못 되었다. 그는 그저 농부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목사이기도 했기 때문으로, 목화 경작지 뒤꼍 저쪽에다 조그마한 통나 무로 지은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그는 교회와 학교를 겸해서 자기 비용으로 지은 것으로, 설교는 돈을 받아도 충분히 그 가치가 있 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한 푼도 받지를 않았다. 남부에는 이러한 농 부 겸 목사가 그 외에도 많았다. 반 시간쯤 지난 후에 톰의 마차가 정말 층계 바로 옆에 와 닿았다.샬리 아주머니는 창 너머로 그것을 보았다. 불과 50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까. "저봐, 누가 왔나봐 누굴까 타관 사람 같은데, 지미."(그것은 아이중의 하나였다.) "리즈한데 뛰어가서 점심 접시를 하나 더 내놓으라고 그래라." 집안 식구들은 모두 현관 쪽으로 급히 몰려갔다. 왜 그런고 하니 물론 타관 사람은 별로 오는 수가 없었기 때문으로, 따라서 오기만 하면 신기해서 황열병 정도의 소동이 일어났다. 톰은 계단을 넘어서 집 쪽으로 걸어오고, 마차는 마을 쪽 길을 달려가 버렸다. 우리는 모두 현관에 모였다. 톰은 가게에서 산 양복을 입은 위에 청중을 가지고 있어 - 그것은 언제나 톰 소여가 좋아하는 바였다. 이러한 처지에 있으 면서도 톰은 그것에 알맞는 풍을 몇 개 덧붙인다는 것은 그에겐 너무 나도 용이한 일이었다. 톰은 양처럼 온순하게 마당으로 들어설 그러한 소년은 아니었다. 숫양처럼 유유히 빼면서 들어왔다 우리들 앞으로 오자. 그 안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나비들의 방해를 하지 않도록 상자 뚜 정을 연다는 그러한 식으로, 자못 품위 있고도 우아하게 모자를 벗고 는 "아치볼드 니콜라스 댁인가요" 하고 물었다 "아니." 노신사가 받았다. "쯧, 저런 가엾어라, 마부에게 속았구나.니콜라스 댁은 아직도 3마일이나 더 가야 해. 어쨌든 자 들어와, 들어 와" 톰은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이젠 너무 늦었군. 마부도 보이지 않네." "그럼, 가버렸다니까 그러니 우리집에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점심이나 좀 먹어. 그러고 나서 마차 준빌 해서 니콜라스 댁까지 데려다 줄 테니 " "원, 그런 폐를 끼쳐서 되겠습니까 별 말씀을 다. 난 걸어가죠. 멀 어도 괜찮아요." "하지만 걸려서 보내다니, 그런 짓을 하면 남부의 손님 대접법에 어긋나네. 자, 어서 들어와." "자, 어서 들어오지." 샬리 아주머니도 등을 밀었다 "폐가 되긴 무 슨 폐가 된다고 그래. 조금도 그럴 게 없는데. 푹 쉬었다 가요. 3마일 이나 되는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어서 보내다니 될 말인가. 더군다나 총각이 오는 걸 보고 난 접시를 하나 더 놓으라고까지 했는데. 그러니 까 우릴 섭섭하게 해선 안 돼. 자, 어서 안으로 들어와 푹 좀 쉬어." 그래서 톰은 마음으로부터 그들에게 치하하고는 결국 주인 청을 받아들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는 오하이오주 힉스빌에서 온 자 로 월리엄 톰프슨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톰의 입에서는 수다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힉스빌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관해서 발명해 낼 수 있는 데까지 마구 꾸며 대는 바람에 나는 그만 걱정이 되어, 이것이 나를 이 난처한 입장에서 건져주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하고 도리어 불안해졌다. 오랫 동안 혼자 지껄이면서 톰은 목을 길게 뽑고는 샬리 아주머니의 입에다곧장 똑바로 키스를 하고, 다시 편히 의자에 물러앉더니 또 계속 지껄였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뛰어 일어나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이 뻔뻔 스러운 녀석" 하고, 톰은 다소 감정을 상한 듯한 얼굴로 이렇게 받아 넘겼다. "이런, 놀라셨군요, 마님." "놀라, 대관절 날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놈 혼을 단단히 내줘 야지, 내게 키스를 하다니 어떡할 작정이지" 톰은 겸손한 태도를 지었다. "어떡할 작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마님. 악의를 가지고 한 게 아니라구요. 난......난......키스를 하면 마님이 좋아하리라고 생각해서." "뭐라고 이 천치놈아" 그녀는 물레방망이를 쳐들어 그걸로 찰싹 때 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는 시능을 했다. "뭣 점에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 "저,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저 사람들이...... 사람들이 그러더군요,마님이 그렇게 하고 싶어할 거라고." "사람들이 그랬다구 그따위 소릴 하는 놈 모두가 미친놈이야.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글쎄 세상에사람들이라니, 누구 말이냐" "뭘요, 모두 그러던데요. 모두들 그랬어요, 마님." 부인은 때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눈은 활활 타고, 손가 락은 쥐어뜯고 싶어 죽겠다는 듯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란 누구냐 말이야 어서 그 이름을 대봐 대지 않으면 너 같 은 바보가 하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되는 거야." 톰은 슬픈 듯이 일어나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나더러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모두들 다같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마님에게 키스를 하라고 했어요. 마님이 좋아할 거라고 말예요. 모두 그랬어요 ......하나도 빠지지 않고. 하지만 마님, 죄송했습니다. 이젠 안해요 ......정말 다신 안하겠습니다 " "다신 안한다구 흥, 필경 다신 안할 테지 그야" "그렇습니다. 정말 안하겠습니다. 다신 안하겠습니다. 마님이 해달라고 하실 때까진. " "해달라고 아니, 세상에 이런 꼴을 보기는 처음이야1 너 같은 놈들 은 내가 부탁하기 전에 천지창조 이래의 메두셀라(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의 인물 창세기 제5장에 나옴) 같은 천치가 되어 자빠져 있을 게 다. " "그럼, 큰일났군요.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모두가 그러길래 나도 그러 리 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 여기서 톰은 말을 끊고는 어디서 동정해 줄 눈초리라도 찾으려는 듯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노신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렇게 물었다. "마님은 내가 마님에게 키스를 해주었으면 하고 그걸 바라고 있었다 고 아저씬 생각지 않으셨어요" "뭘, 아냐 아냐, 저 난...... 응, 아냐,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 여기서 톰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와 시선이 마 주치자 이 렇게 말했다. "톰, 넌 샬리 아주머니가 두 팔을 펴고 이렇게 말하리라곤 생각지 않 았니, '시드 소여 하고...... "아니 뭐" 갑자기 부인이 끼여들어 다짜고짜 그에게로 달려들며,"이 뻔뻔스런 고약한 녀석아 아니 이 녀석아, 사람을 놀려도 분수가 있지 글쎄...... 이러면서 그를 확 껴안으려고 했지만 톰은 그것을 막 으며, "안돼요. 우선 나에게 부탁하기까진, 아주머니가." 그래서 부인은 즉시로 부탁하고는 몇 번씩 톰을 껴안고는 키스를 했 다. 그러고 나서 노인 쪽으로 톰을 떠밀었으므로 노인은 그 찌꺼기를 받았다 그리고 소동이 좀 가라앉자 부인이 이야기했다 "정말 이렇게 놀라긴 난생 처음이구나. 우리는 톰만 올 줄 알았지 너까지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구나. 형님 편지에도 톰 외엔 누가 온다 고 써 있지 않았고." "그건 톰만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내가 졸라댔더니 겨우 톰이 떠날 직전에야 나도 가도 좋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 서 강을 내려오면서 나와 톰은 우선 톰이 먼저 이리 오고 나는 나중에 늦게 모르는 사람처럼 슬쩍 나타나면 집안 식구들이 깜짝 놀랄 것이라 고 생각했던 것이에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샬리 아주 머니, 여긴 타관 사람이 오기엔 안전한 장소는 아니군요." "그렇구말구, 뻔뻔스러운 건방진 장난꾸러기들이 오기엔 말이지, 시 드. 그저 네 녀석 턱을 한번 먹여댔으면 좋겠다만. 이렇게 화가 나긴 생전 처음이야. 하지만 이젠 괜찮아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아. 너희들 이 여기 와주기만 한다면 이런 장난은 천번 당해도 기꺼이 참겠다 그 러기로서니 아까 그 장난은 정말 네가 그렇게 쭉 소리를 내며 나에게 키스를 했을 때엔 사실이지 난 깜짝 놀라 어떻게 될 뻔했단다. " 우리는 집과 부엌 사이에 있는 그 넓은 복도에서 점심을 먹었다. 테 이블 위에는 일곱 사람분의 음식이 듬뿍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 음식 이 모두 따뜻하고 이제 방금 만들어진 음식으로, 밤새도록 축축한 지 하실 찬장 속에 넣어 두어서 아침이 되면 다 식은 오래된 식인종의 두 꺼운 살덩어리 같은 맛이 도는 그러한 굳은 고기는 아니었다. 사이러스 아저씨는 왜 긴 식전 기도를 올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 고, 기도라고 하는 방해물이 곧잘 음식을 식히고 마는 것을 보아 왔지 만 아저씨의 기도는 음식을 식히는 일도 없었다. 오후 내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나와 톰은 늘 조심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도망친 검둥이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 지 않았었고, 그렇다고 해서 또 우리들이 이야기를 그쪽으로 끌고 가 기에도 겁이 났다. 그러나 그날 밤 식사 때 사내애 하나가, "아버지.톰과 시드와 나, 이렇게 셋이서 구경가도 될까요7" 하고 물었다. "안돼, 신파 같은 건 없을 거다 있다 하더라도 가선 안 돼 그 도망 친 검둥이가 버튼과 나에제 엉터리 신파 얘길 전부 들려주어 버튼은 그 얘길 모든 사람에게 한다고 했으니까 지금쯤 사람들은 벌써 그 뻔 뻔스러운 건달놈들을 마을에서 쫓아 버렸을 거다. " 이것 봐라, 큰일이구나 하지만 나로선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톰과나는 같은 방에서 한 침대에 자기로 되어 있었다. 피곤했으므로 우리 는 저녁 식사가 끝나자 곧 인사를 하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 으로부터 기어나온 다음 피뢰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 마을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왕과 공작에게 신변의 위험을 말해 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을 터이니까, 급히 가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반드시 붙잡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도중에 톰은 내가 학살을 당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 아빠가얼마 후에 자취를 감추고 만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짐이 도 망을 쳤을 때 큰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 등을 얘기해 주었다 나는 '왕 실의 걸작' 악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시간이 허용하는 한 뗏목을 타고 강을 내리던 때의 이야기를 낱낱이 톰에게 들려주었다 마을로 들어와 보니 - 여덟 시 반이었다 - 저쪽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이 노 도처럼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와아 와아 떠들어대기도 하고, 또 양철냄비를 마구 때리기도 하고. 호각을 불기도 하면서 돌진해 왔다 우리는 그 행렬을 보내기 위해서 길 한쪽으로 얼른 비켰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 보니 그들이 왕과 공작을 철봉 위에다 올려 앉히고는 지고 가는 것이 보였다. 둘 다 전신이 콜타르와 깃털로 덮여 있고, 도저히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한쌍의 머간 크지 않은 군모의 깃털 장식 같았으나 나는 린치를 당하고 있는 두 사람이 왕과 공작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오싹 몸서리가 쳐졌다 그 리고 이 가엾은 악당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고, 아무리 해도 이 두 놈 을 미워할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보기에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서로에 대해 매우 참혹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젠 어떻게 할 길이 없다. 뒤떨어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들 얘기가 모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신파 구경을 가서 쥐 죽은 듯이 가만 히들 있었는데, 불쌍한 왕이 무대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판 에 누가 손짓을 하자 구경꾼 전원이 와아 하고 일어서서 두 놈에게로 몰려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후 우리는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까지의 건방진 생각은 없어지고, 웬일인지 자기가 천박하고 비열한 인간 처럼 느껴지고, 웬일인지 또 자기가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마음속이 편 치 않은 것을 느꼈다 하기야 아무것도 한 일은 없었지만. 이것은 언제 나 마찬가지로, 옳은 일을 하든 그른 일을 하든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 이다.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사물의 도리를 깨닫지 못해도 어쨌든 인간을 책할 뿐이다 만일 인간의 양심만큼도 사물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는 똥개가 있다면 난 그놈을 잡아 죽여 버릴 테다. 양심은 인간의 내장 전부가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도 좀더 큰 장소를 차지하고 있으면 서도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것이다. 톰 소여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했다. 제34장 짐을 격려하다 우리는 이야기를 그만두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톰이 말했다 "이봐, 허클, 아직까지 이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니 우린 참 바보 였구나 난 짐이 어딨는지 알 것만 같애." "정말, 어디야" "잿물통 옆의 오두막집이야. 생각해 봐, 우리가 밥을 먹고 있을 때 검둥이 하나가 먹을 걸 그리로 날라가는 걸 못봤냔 말이야" "봤지 . " "누구에게 줄 거 라고 생각했느냐 말이야" "개지 뭐 야. " "나두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나 실은 개에게 주는 게 아냐." "왜 " "왜라니, 수박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옳지 그랬어 나도 봤어. 개가 수박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니 큰 실수였군. 인간은 뭔가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다니까. "' "한데 말이야, 그 검둥인 오두막집에 들어갈 때 자물쇠를 열고, 나와 서는 또 잠그더라. 우리가 테이블에서 물러설 때 아저씨에게 열쇠를 갖다 주었어. 그 열쇠가 틀림없어. 수박은 사람이라는 걸 가리키고, 열 쇤 죄수라는 걸 가리키는 거지 뭐야. 요까짓 손바닥만한 농장에서, 게 다가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만이 있는 곳에 죄수가 둘이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아. 죄수는 짐이야. 옳지, 난 탐정과 같은 방법으로 그걸 찾아낸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아, 다른 방법은 딱 질색이야. 자. 너 잘 좀 생각해서 짐을 구해 낼 방법을 궁리해 보란 말이야. 나도 생각할 테 니 그리고 가장 좋다고 생각한 것을 택하기로 하자."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이지만 얼마나 훌릉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일까 만일 내가 톰 소여와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공작으로 해준 다 하더라도, 서커스의 익살꾼으로 해준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것과 바 꾸지 않겠다. 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훌륭한 계획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것은 애당초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톰이 물었다. "됐니" "응." "옳지, 그럼 얘기해 봐 " "내 계획은 이래. 저기 있는 게 짐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돼. 알게 되면 내일 밤 카누를 물에서 건져내어 섬에서 뗏목을 가져온단 말이 야. 맨 처음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에, 자러 간 아저씨의 주머니에 서 열쇠를 훔쳐내어 짐을 데리고 강을 뗏목으로 내리는데 나와 짐이 그전에 하던 것처럼 낮에는 숨고 밤에는 행동한단 말이야 이 계획이 잘 될까" "잘 되겠냐고 물론이지. 쥐 싸움처럼 당장에 끝이 나구말구. 하지만그건 너무 간단해서 재미가 전혀 없잖아 그런 너무 쉬운 계획이란 재 미가 없어. 거위젖처럼 싱거워. 이봐 허클, 그런 짓을 하는 건 비누 공 장에 뚫고 들어간 만큼의 평판밖엔 되지 못할 거야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으레 톰이 그러한 말을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톰은 자기의 계획이 일단 결정되고 마는 날에는, 이와 같은 반대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계획도 그랬었다. 톰은 자기의 계획을 들려주었는데, 그 양식부터가 벌써 내 계획의 15배나 가치가 있었고, 짐을 자유의 몸으로 한다는 것은 내 계획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그 때문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만족했고, 그 놈을 하 자고 동의했다 그것이 어떠한 계획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것이 그대로 이행될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고, 톰이 그 계획을 실행하면서 여기저기서 바꾸어 가며, 기회 있는 대로 새로운 생각을 첨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대로 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가지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톰 소여가 진지하다는 것과 실제로 그 검둥이를 훔쳐내는 데 조력하려는 태도였다. 이것은 나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톰은 가정교육이 훌륭한 아이며, 집에는 점잖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그 가문에 똥칠 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리하며 바보는 아니다. 아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무식하지 않았다. 악의가 없고 친절하다. 그런데 이 애는 자존 심도 정의도 감정도 다 버리고는 이와 같은 일에 손을 대어, 모든 사람 들 앞에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의 얼굴에다 똥칠을 하려는 것이 다. 나에게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천만 뜻밖의 일로,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었어도 말해 주어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야 비로소 톰의 참된 벗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당장에 단 념케 하여 그의 몸을 지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실제로 그 렇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지만 톰은 나의 입을 막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도 대체 내가 무엇을 할 작정인지 그걸 알고 있지 않단 말야" "모르긴 왜 몰라, 알고 있지." "나는 그 검둥일 훔쳐내는 것을 돕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했지 ." "그럼 그걸로 됐지 뭐야." 이것이 톰이 얘기한 전부이며, 또 내가 말한 전부이기도 하다 그 이 상 말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톰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해 내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톰이 왜 이렇게까지 자진해서 이 일에 관여하려고 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고는 이 이상 마음을 쓰지 말자고 결심했다. 톰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한다고 한 이상 나로서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집에 이르고 보니 집안은 컴컴하고 죽은 듯이 고요했다. 우리는 잿물통 옆 오두막집을 조사해 보러 갔다. 개들 상태를 알기 위해 서 마당 안을 지나간 것인데, 개들은 우리임을 알자 시골 개가 밤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지르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오두막집까지 오자 정면과 양쪽을 조사하고, 내가 아직 모르고 있던 쪽, 즉 북쪽 왜 높은 곳에 네모진 창이 하나 있고, 거기에 튼튼한 한 장의 판자를 못으로 박아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좋은 게 있구나. 우리가 저 판자를 빼버리면 그 구멍으로 짐이 기어나을 수 있을 게 아냐. " 톰이 이내 말을 받았다. "그런 건 오목과 학교를 까먹는 것처럼 거저먹기로 할 수 있지. 난 그것보다는 좀더 복잡한 방법을 썼으면 좋겠단 말이야. 허클 핀." "그럼 요전에, 내가 죽기 전에 한 것처럼, 톱으로 통나무를 잘라서 짐을 구출해 내면 어떨까" "그쪽이 낫긴 해. 정말로 수수께끼 같고, 귀찮고, 좋긴 좋아. 허나 그 배나 오래 걸릴 것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서두를 건 없으니까 좀더 그 근처를 찾아보기로 하자." 뒤껼 오두막집과 울타리 사이에 울타리에 기대어 지은 판자 헛간 비 슷한 게 하나 있었는데, 오두막집과는 처마로 연결되어 있었다. 길이 는 오두막집과 같았으나 폭은 좁았고, 6피트 정도였다 문은 남쪽에 붙 어 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통은 비누를 고는 가마 쪽으로 가서그 근처를 뒤져, 뚜껑을 여는 데 쓰는 쇠도구를 들고 와 그것으로 자물쇠 하나를 비틀어 열었다. 쇠사슬은 떨어지고,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성냥을 그어 보니 헛간은 오두막집에 기대어 지었을 뿐 붙어 일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또 헛간에는 마루도 없고. 있는 것은 몇 자루 녹슨 괭이니 삽이니 곡괭이니 이가 부러진 가레 따 위가 있을 뿐이었다. 성냥은 꺼져 버렸고, 우리도 헛간에서 밖으로 나 와 또 고리못을 박고는 아까처럼 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톰은 자못 유쾌한 모양이었다. "자, 이걸로 됐다. 짐을 파내기로 하자. 일주일은 걸릴걸" 그 다음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나는 됫문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갔 다 녹비 걸쇠의 끈을 약간 잡아당기면 되는 것이다. 이 집사람 들은 자물쇠를 채우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톰 소여는 이것은 너 무나도 싱거운 일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피뢰침 장대를 기어올라가 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절반쯤 세 번이나 기어오르고는 그때마 다 굴러떨어져, 더군다나 맨 마지막에는 하마터면 골을 깨고 말 판이 었으므로 본인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한 참 쉬고 난 다음에 다시 한번 재수를 보기 위해서 해보겠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성공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먼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서 개들을 삶아놓기도 하고, 또 짐에게 음식을 나르는 검둥이와 접근하기 위하여 검둥이 전 용 오두막으로 갔다 - 먹을 것을 받아 먹고 있는 것이 짐이라고 한다 면 검둥이들은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는 밭일을 나가는 길이었다 짐 의 검둥이는 양철 냄비에다 빵과 고기와 그밖의 여러 가지 먹을 것을 산처럼 쌓아가지고 다른 검둥이들이 막 오두막을 나가려고 할 때에 집 에서 열쇠가 왔다. 이 검둥이는 사람이 좋을 것 같은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고수머리 전체를 실로 몇 개의 조그마한 단으로 땋고 있었다. 그것은 마 녀를 몰아내는 부적이었다. 그는 요즈음 마녀가 밤마다 어찌나 자기를 괴롭히는지, 온갖 이상한 물건을 보여 주기도 하고 또 이상한 말과 소 리를 들려 주기도 하여 지금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마법에 걸리기란 처 음이라고 했다.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자기 괴로움만 지껄이고 있는 동안 자기가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그것을 깜빡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틈을 타서 톰이 한 마디 물어보았다. "이 먹을 건 뭘 하는 거야 개에게 주는 건가" 검둥이 얼굴에 마치 벽돌 조각을 진창 웅덩이 속에다 던져 넣었을 때처럼 점점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럼, 개구말구유, 시드 도련님. 게다가 이상한 개지. 가보고 싶어 유" "응, 가보고 싶어 ." 나는 팔꿈치로 톰을 쿡 찌르고는 속삭였다. "이런 새벽녘에 벌써 가는 거야 그런 계획이 아니었잖아" "그래. 하지만 이젠 그럴 계획이야." 어깰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간 것이지만, 나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자 너무 컴컴해서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과연 짐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알아보았던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건 허클 도련님이 아닌가 그리고 저건 톰 도련님이고" 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애당초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리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으며,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었으리라 예의 그 검둥이가 대번에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아니 뭐야, 어럽쇼 이잔 도련님들을 알고 있는가유" 이젠 꽤 사방이 잘 보이게 되었다 톰은 그 검둥이를 물끄러미, 그리 고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반문했다. "누가 우리들을 알고 있다고" "누구냐구유, 여기 있는 이 도망친 검둥이지 누군 누구야유" "난 이놈이 우릴 알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데. 한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구유 이 작자가 이제 방금 도련님을 알고 있는 듯이 막 큰 소릴 지르지 않았느냐 말이야유" 톰은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당황한 태도로, "그렇다면 참 이상한 노릇인데. 누가 큰 소릴 질렀다구 언제 큰 소릴 질렀다는 거야 뭐라 구 큰 소릴 질렀다는 거야" 이러고 나서 톰은 시치미를 딱 떼면서 내 쪽으로 돌아서며 물었다. "넌 누가 큰 소릴 지르는 걸 들었나" 물론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그러자 이번에는 톰은 짐 쪽으로 돌아서며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는 듯이 흘낏홀낏 그쪽을 훌 어보았다. "그래 임잔 큰 소릴 질렀나" "아뇨, 아무 말도 안했어유." "한 마디도" "네, 한 마디도." "임잔 우리들을 전에 만난 일이 있었나" "아뇨, 기억이 없는뎁쇼." 그래서 이번에는 미친 듯한 얼굴로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검둥이 쪽으로 돌아서며 톰은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대관절 임잔 어떻게 됐다는 거야 어떻게 돼서 누가 큰 소릴 질렀다 고 생각한 거지" "아아, 그 지긋지긋한 마녀 탓이군요, 나으리. 정말 난 죽고 싶어유. 놈들은 늘 이 짓을 해서는 날 그만 죽일 만큼 놀라게 한단 말예유. 하 지만 이 얘길 아무에게도 말아줘유, 제발. 그렇잖으면 사이러스의 큰 나으리한테 혼이 나니까유. 큰 나으린 마녀 같은 게 어디 있느냐고 야 단 야단이시 거든유 이제 여기 계시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큰 나으린 뭐라고 하실 테지 이번 만큼은 뺄 구멍이 없을 거야, 마녀를 시인할밖에 하지만 세상은 늘 이래. 바보는 죽어야 신세를 면한다구 세상 일 을 조사하여 손수 찾아내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에유. 그리고 이쪽에서 찾아내어 알려줘도 그걸 신용하지 않거든유." 톰은 그에게 10센트 은화를 한 닢 주며, 우리는 아무에게도 그 얘길안하겠다고 하고는 그 돈으로 실을 사서 머리를 묶으라고 했다 그러 고 나서 이번에는 짐을 쳐다보며, "사이러스 아저씬 이 검둥이 놈의 목 을 매달아 죽일지도 몰라. 만일 내가 도망칠 만큼 은혜를 모르는 검둥일 붙잡는 날엔 그놈을 그대로 내버려두진 않을 테야. 꼭 목을 매달아 죽이고야 말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검둥이가 문간 쪽으로 가서 자꾸만 그 은화를 들여다보면서 진짠가 아닌가 시험해 보느라 깨물어 보 고 있는 동안에 톰은 짐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우릴 아는 척해선 안 돼. 그리고 밤에 땅을 파는 소리가 나면 그건우리야. 우린 짐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하려는 거야." 짐에게는 겨우 우리들의 손을 붙잡고 꼭 누를 시간밖에 없었다 그때 검둥이가 돌아왔으므로 소원이라면 언젠가 또 함께 와줘도 좋다고 했 다. 그러자 검둥이는 제발 좀 그렇게 해달라고, 특히 컴컴할 때에는 제발 좀 그렇게 해달라고, 마녀는 대개 컴컴할 때 나오니까 그때 누가 함께 와주면 참 고맙겠다고 하며 반색을 했다 제35장 음모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은 남았다 우리는 오두막을 떠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 까닭은 톰에 의하면, 작업 상태를 보기 위해서는 아무거라도 좋으니 그 무슨 불빛이 있어야만 하고, 등불은 너무 도 밝아서 귀찮은 일을 일으킬지도 모르며, 우리들이 구해야 할 것은 여우불이라고 부르는 어두운 장소에 많이 놔두면 희미한 광선을 발산 하는 썩은 나무덩어리를 많이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한 아름씩 들고 와 풀 속에 감춰 놓고는 앉아서 쉬었다. 톰은 못마땅한 얼굴을 지었다 "정말 이 일 전체가 참으로 쉬워서 다루기 거북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어려운 계획을 세우기가 무척 힘들단 말이야. 마취제를 써 야 할 감시인도 없구. 그렇지, 감시인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텐데, 수 면제를 줘야 할 개 한 마리 없으니. 짐은 10피트의 쇠사슬로 침대 다리에 한쪽 발이 결박되어 있을 뿐이니까 침대를 쳐들어 쇠사슬을 벗겨내면 그걸로 그만일 테고, 그리고 사이러스 아저씨는 모든 사람을 다 신용하고는 열쇠는 그 호박대가리 검둥이에게 주어 버리고는 그 녀석을 감시할 감시인 하나 없단 말이야. 짐은 벌써 먼 옛날에 그 구멍으로 도망칠 수도 있었단 말야. 다만 10피트의 쇠사슬을 발에다 달고 도망을 쳐본댔자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제기랄, 이런 싱거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이야, 세상에 정말, 허클, 생전 처음이군. 이쪽에서 모든 어려운 일을 발명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다니 그래 정말 할 수가 없어 여기 있는 재료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돼. 어쨌든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결국 어려움이나 위험을 제공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걸 하나도 제공해 주지 않을 때 이쪽 머리에서 그런 것들을 전부 짜내야 할 경우, 많은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나이를 구출해 내면 그 만큼 명예로운 일이 된다는 거야. 저 말이야, 저 등불 하나만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란 말이야 차디찬 현실 문제가 되고 보면, 우리는 등불 은 위험하다는 척이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니냐 말이야 뭘 그야 마음만 내키면 횃불 행렬로 일을 할 수도 있긴 하지, 난 그렇게 믿어. 한데 이런 걸 생각해 보니 기회 있는 대로 어서 톱을 만들어 낼 물건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겠단 말이야, 우린." "톱은 뭣에 쓰게" "뭣에 쓰냐구 쇠사슬을 푸는데 짐의 침대 다릴 자르지 않아도 된단 말이냐" "아니, 이제 방금 넌 침대를 쳐들어 가지고 쇠사슬을 풀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어디까지 역시 넌 너구나, 허클 핀. 그저 넌 한다는 게 유치 원식의 일밖엔 생각이 나지 않는단 말이지. 대관절 넌 책이라는 걸 읽었느냐 말이야 - 트렌트 남작(오스트리아의 군인으로 1740년 마리아 테레사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가 투옥되다. 그의 저서 '자서 전'은 널리 알려져 있음)이니, 카사노바(1725∼1803, 1776년 베니스 감옥 탈출의 고심담은 그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음)니, 벤베누토첼리니(이탈리아 의 애국자. 1538년 세인트 안젤로 성에 감금되었다가 익년 그 성을 탈출한 당시의 사정은 '자서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니, 앙리 4세(프랑스 국왕)니 하는 그러한 영웅들의 얘길 하나도 읽은 일이 없느냐 말이야 그런 할망구 같은 식으로 죄수를 구출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어. 하기야 최상의 권위자들이 하는 식에 의하면 침대 다리를 둘로 썰어서 감쪽같 이 그대로 해놓고는 톱밥은 눈에 띄지 않도록 깨끗이 삼켜 버리고 제 아무리 고양이 같은 눈을 가진 집시의 눈에도 다리가 잘려 있다는 것 을 전혀 알 수 없고, 다리가 완전하다고 생각되게끔 그 자른 장소 주위 에다 진흙과 기름을 발라 두는 거야. 그러고 나서 준비가 모두 끝난 날 그 다리를 걷어차면 침대는 좌당 쓰러지고 쇠사슬은 풀리고 말아 자유 의 몸이 되는 거야 다음은 다만 밧줄 사다리를 흉벽에다 걸치고 그걸 타고서 기어내려가 못 속에서 다리를 분지르기만 하면 돼. 왜냐하면 밧줄 사다린 19피트나 길이가 모자라니까 그렇지. 그러면 그곳에는 말 과 심복 부하가 기다리고 있어 널 쳐들어 안장 위에다 던져 줄 테니,그럼 넌 말을 몰아 고향인 랑구독크니 니봐르니 그밖의 아무 데라도 가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어때, 신나지, 허클 핀 이 오두막에도 못이 하나 있으면 근사할 텐데 그랬군. 짐을 내놀 때 시간이 있다면 어디 못 을 하나 파볼까 " "오두막 아래로 짐을 몰래 내놓겠다고 하는데 못은 무슨 못이야" 그러나 톰은 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내가 있는 것도 그밖의 모든 것도 잊어 버리고 턱을 괴고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얼마 후 에 톰은 한숨을 쉬고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건 안돼. 그렇게 할 만한 필요조건이 부족해." "뭣 땜 에 " "뭘, 짐의 다릴 잘라 버리는 거지." "아니 얘가" 내 입에서는 큰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럴 필요까지뭐가 있어. 대관절 뭣 땜에 짐의 다릴 자르겠다는 거지" "그건 말이야, 가장 훌륭한 권위자 중에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쇠사슬이 풀어지지 않아서 손 을 자르고는 도망친 거야. 다리라면 더 좋지. 하지만 그것만큼은 그만 둬야 해. 게다가 짐은 검둥이니까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테 구, 또 유럽에선 그게 습관으로 돼 있다는 걸 알 까닭도 없을 테구하니. 그러니까 그만두기로 하자 하지만 요것 하나만큼은 할 수 있지. 짐도 밧줄 사다리라면 가질 수 있단 말이야. 우리들이 욧잇을 찢으면 밧줄 사다리를 만들 수 있을 게 아니냐 말야. 그걸 파이 속에 넣어서 들여보내면 되지 않아, 대개 그렇게들 하는 거야. 난 그보다도 더 지독한 파이를 먹어 본 적도 있는데 뭐." "어이, 톰 소여, 넌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짐에게 밧줄 사다리가 뭣 땜에 필요하다는 거야" "밧줄 사다린 꼭 필요해. 너야말로 무슨 소릴 하느냐고 해주고 싶구 나.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 있잖구 짐은 꼭 밧줄 사다리가 필요하다니 까. 다들 그래 ." "대관절 뭣에 쓰게" "뭣에 쓰냐구 침대 속에 감출 수 있겠지, 안그래 그러니까 짐도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허클, 너는 하나도 정식대로 하고 싶지 않은 모 양이구나. 늘 신기한 것만 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애. 만약 짐이 그 밧 줄 사다릴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다 밧줄 사다린 도망친 후에도 침대 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단서가 될 게 아니야 그리고 사람들은 단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않아, 넌 물론 필요로 할 것이 뻔하지. 그런데 단서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변칙이 어딨어난 그런 소릴 듣진 못했어." "응 그래. 그게 규칙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밧줄 사다릴 갖게 해야만한다면 괜찮아, 그럼 짐에게 갖게 하도록 하지 뭐. 난들 규칙에 어긋나 는 일을 하고 싶진 않으니까. 하지만 여기 문제가 하나 있어, 톰 소여 우리가 만일 짐의 밧줄 사다리를 만드는데 욧잇을 찢는다면 그 때문에 한사코 샬리 아주머니와 으르렁거리게 될 게 아니야.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어떨까, 힉코리 나무 껍질 사다리는 돈이 들지 않고, 헛 버리는 게 없고, 네가 만들려고 하는 어떠한 헝겊 사다리 못지않게 파 이 속에 틀어넣을 수도 있고, 또 짚이불 속에 감출 수도 있을 게 아니 냐 말이야 게다가 또 짐으로 치고 보면 경험이 없으니까 아무거라도 상관없을 게.. "쩟, 너두 참, 내가 너만큼 무식하다면 난 가만히 있을 테다. 입을 꾹 다물고, 정말 가만히 있을 테다. 국사범이 힉코리 사다리로 도망쳤다는 얘길 난 들은 적이 없어, 아직까지. 그런 싱거운 소리가 세 상에 어딨어 " "그럼 됐어 톰, 너 좋을 대로 해. 한데 말이다. 내 충고를 받아들여 준다면 빨랫줄에서 나에게 욧잇 하나만 빌려 줄 수 없겠느냐 말이야." 그건 좋겠다고 톰도 동의했다. 그것이 톰에게 또다른 생각이 떠오르 게 했다. "셔츠도 한 장 빌리도록 해 . " "셔츠는 뭘 하게. 톰" "짐더러 거기다 일기를 쓰게 하기 위해서지 " "일기, 무슨 얼어죽을 일기야. 짐이 무슨 글씨를 쓸 줄 안다구" "쓸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헌 백람 스푼이나 헌 철통테 부스러기로 짐에게 펜을 만들어 주면 셔츠에다 그걸로 표를 찍을 순 있잖아" "뭘 그래, 톰, 거위의 깃털 하나만 뽑으면 그보다 몇 배 좋은 펜이 되잖아, 게다가 빠르기도 하고." "펜을 만들기 위한 깃털을 빼라고 어떤 놈의 거위가 죄수가 들어 있 는 지하실 주위를 뛰어돌아다닐 거냔 말이야, 이 바보야. 죄수라는 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헌 놋쇠 촛대니 그런 등속의 아주 단단한 절대로 부러질 염려가 없는 가장 귀찮은 걸로 펜을 만드는 거야. 그걸 뽀족하 게 하는데 몇 주일씩 몇 달씩 걸리거든. 벽에다 갈아서 뽀족하게 해야 하니까. 비록 손안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죄수라는 건 거위 깃털을 쓰 려고 하진 않아. 본식이 아니니까 " "그럼 잉크는 뭘로 만들어 주지" "대부분의 죄수는 쇠녹과 눈물로 잉크를 만들지만, 이건 흔해빠진 잉크로 여자들이나 하는 장난이야. 최고의 권위자는 자기 피를 사용하는 거야. 짐은 그걸 할 수 있어 그리고 어디 자기가 은폐되어 있는가를 전세계에 알리려는 극히 짧고도 흔해빠진 것을 몰래 알리고 싶다면 양 철 접시 아래에다 포크로 써서 창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거야. 철가면 은 언제나 그렇게 한 거야. 그건 멋진 방법이지." "짐에게 어디 양철 접시가 있어야 말이지 먹을 건 냄비에다 넣어서 갖다 주니까. " "그런 건 아무려면 어때. 우리가 양철 접시를 넣어 주면 되잖아." "접시에다 쓴 짐의 글씨를 읽어 낼 사람이 어디 있어야 말이지 " "그런 건 아무문제도 안돼. 짐이 해야 할 것은 접시에다 써서 내던지는 그것뿐이 야. 뭘, 죄수가 양철 접시니 뭐에다 쓴 그 절반은 아무도 읽어내지 못하는데 뭐." "그럼, 왜 접시를 못 쓰게 하는 거야" "그러면 어때, 그 죄수의 접시는 아닐 테니까." "하지만 접시 주인이 있을 게 아냐" "그렇지, 그게 어떻다는 거야 비록 누구의 접시라고 할망정 죄수가 뭐 그런 거에다 마음을 쓸 줄 알아." 여기서 톰은 말을 끊었다. 아침 식사를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숲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오전중에 나는 빨랫줄에서 욧잇과 횐 셔츠를 한 장 씩 빌려, 헌주머 니를 하나 찾아 거기다 이것들을 넣었다. 숲으로 들어가 여우불을 낱 낱이 주워서, 이것도 주머니 속에다 넣었다. 나는 아빠가 늘 그랬으므로 빌린다는 말을 쓴 것인데, 톰은 그것은 빌리는 것이 아니라 훔치는 것이라고 했다. 톰은 우리는 죄수의 대표자라고, 그리고 죄수라고 하 는 것은 무엇을 손안에 넣기만 하면 그만이지 그 수단 방법은 문제가 아니며, 또 아무도 죄수를 탓할 권리는 없는것이라고 했다. 죄수가 도망치는데 필요한 물건을 훔치는 건 죄가 안 된다 그렇게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죄수를 대표하고 있는 한 여 기 있는 물건 중에서 우리들이 조금이라도 탈옥에 필요로 하는 물건은 무엇이나 훔칠 권리가 있다. 만일 우리들이 죄수가 아니라고 하면 이 야기는 전혀 다르다. 죄수도 아닌데 훔치는 것은 천한 인간이 하는 짓 이라고 톰은 말했다. 그래서 그 근처에 있는 물건은 원이고 간에 훔치기로 했다. 그러나 그후 어느 날 내가 검둥이 밭에서 수박을 훔쳐가지 고 와서 먹었을 때엔, 톰은 마구 화를 내며 나에게 까닭도 이야기하지 않고 검둥이에게 10센트 은화를 갖다주고 오라고 펄펄 뛰며 야단이었 다 톰은 자기가 말한 의미는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을 훔쳐도 좋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수박이 필요해서 훔쳤노라고 그랬더니 통 은 탈옥하는 데 수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그게 잘못이라고,만일 네가 그 속에다 칼을 감추어. 그것으로 집사를 죽이기 위해서 몰래 짐에게 그것을 주는데 수박을 필요로 한다면 자기는 다른 잔말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나는 말을 끊었다. 그러나 나는 수박을 훔칠 때마다 그렇게도 많은 자질구레한 구별을 일일이 앉아서 생각해 야 한다면 죄수를 대표해서 무슨 이익이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바꾸어, 우리는 그날 아침 집안 식구들이 모두 일에 착수하 여 누구 하나 마당에서 얼씬도 안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후에 야 톰은 예의 그 주머니를 헛간으로 운반하여 갔고, 한편 나는 좀 떨어 진 곳에 서서 감시를 했다. 얼마 후 톰이 밖으로 나왔으므로 우리는 장 작더미 있는 데로 가서 그 위에 올라앉아 이야기를 했다 톰이 먼저 입 을 열었다. "도구 외엔 만사가 잘 되었어. 도구도 문제없이 구할 수 있을 거야 " "도구라니" "그래 . " "뭐하는 도군데" "뭐하냐고 물론 파는 도구지. 설마 이빨로 긁어서 짐을 끌어낼 순 없겠지 , 어때" "저기 있는 못쓰게 된 곡괭이로도 검둥이 하나쯤은 능히 파낼 수 있 을 게 아냐" 톰은 이쪽이 울고 싶을 만큼 불쌍하게 보이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 았다. "허클 핀, 넌 말이야, 죄수가 땅을 파서 탈옥하는데 곡괭이니 삽이니 그밖의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를 옷장 속에다 가지고 있더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는가 한데 말이야, 너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런 걸 가지고 있다면 어떠한 기회가 그 죄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놓는 다는 거지 그렇다면 차라리 열쇠를 빌려 주어 당장에 해버리는 게 낫 지 않아. 곡괭이와 삽이라구, 그런 건 왕두 손안에 넣기 어려울걸." "그렇다면 곡괭이와 삽이 필요없다면 뭣이 필요하다는 거야" "두 자루의 칼집에 든 칼이지 뭐야." "그걸루 저 오두막집 아래 토댈 파내는 거야" "그럼 . " "쩟 쓸데없는 소리 마, 톰." "아무리 쓸데없어도 상관없어. 그게 올바른 방식이라는 거야 '그밖에내가 들은 방식이라곤 하나도 없고, 난 이런 얘길 조금이라도 쓴 책이 라면 안 읽어 본 책이 없는데, 반드시 칼집에 든 칼로 파는 거야 게다 가 또 전부 흙만은 아냐. 대부분이 굳은 바위를 파내는 거야. 몇 주일 씩이나 걸리는 거야. 이봐 마르세이유 항구에 있는 디프 성 지하 감옥 에 갇혀 있던 죄수 하나를 생각해 보란 말이야. 이 사람도 이런 식으로 구멍을 파고 탈옥한 거야. 얼마나 오래 팠으리라고 생각하지" "모르겠는데 ." "자, 그럼 맞춰 봐." "모른대두. 한 달 반" "37년이야. 그리고 나와 보니 중국이더란 말이야. 그런 거야. 이 요 새 아래도 굳은 바위라면 좋을 텐데." "중국엔 짐이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어 "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거야 여기도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 어. 한데 넌 왜 밤낮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하느냐 말이야. 왜 요점을 잡지 못하느냔 말이야. 넌" "좋아, 나오기만 하면 어디로 나오든 난 상관없어. 짐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짐은 나이를 먹었으니까 칼집 에 든 칼로 짐을 파낼 순 없을 거야 그때까지 살아 있진 못할 테니 까." "천만에, 살구말구 흙 토댈 파내는데 37년이나 걸리리라곤 넌 생각 하지 않을 테지. 어때" "얼마나 걸릴까, 톰" "글쎄, 사이러스 아저씨한테 소식이 오는 것도 그다지 먼 일은 아닐테니까 우리도 마음대로 시간을 바치단 위험해. 아저씬 짐이 뉴 올린 즈에서 도망쳐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테지. 그러면 다음에 할 일은 짐을 광고에 내거나 그것 이슷한 짓을 할 테지. 그러니까 우린 짐 을 파내는 데 마음대로 시간을 바칠 순 없단 말이야. 사실은 한 2년쯤 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지만 어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말이지 앞일이 너무도 불안하니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난 생각하는데, 즉 말이 야, 우린 되도록 빨리 여길 파고 또 파서 그것이 끝나면, 우리 자신에 게 37년 걸린 걸로 치면 되잖아. 그렇게 해놓고서 정보가 있자마자 짐 을 납치해 가지고 그만 도망쳐 버리는 거야. 을지, 이게 제일 좋은 방 법 이 아닐까 하고 난 생각하는데 ." "을지, 그건 분별이 있는 소리군. 37년 걸린 걸로 해놔도 돈이 한 푼드는 것도 아닐 테고 또 조금도 귀찮지도 않구. 그럴 필요만 있다면 우 린 150년이 걸린 것으로 해놔도 상관없을 테지. 그렇게 해놓으면 착수 한 뒤에도 힘들지 않을 테구. 자 그럼 이제부터 당장 가서 칼집에 든 칼을 두 자루 훔쳐 내도록 하자." "세 자루 훔쳐내 와 톱을 만드는 데 한 자루 더 필요해." "톰, 이런 말을 해도 정식이 아니라는 등, 신앙심이 없다는 등 하고그런 낀잔을 듣지 않는다면 말하겠지만, 훈제실 뒤 비 막는 벽판자 아 래에 낡은 녹슨 톱 하나가 꽂혀 있던데 그래." 이 말에 톰은 다 귀찮다는 듯한 맥이 빠진 모양을 지으며 이렇게 말 했다 "참, 이런 젠장. 넌 소귀에 경 읽기로구나. 어떤 걸 가르쳐 줘도 소용없으니 어서 칼이나 훔쳐 와 세 자루다. " 그래서 나는 하라는 대로 했다 제36장 탈옥 준비 그날 밤 모든 집안 식구들이 잠들어 버렸다고 깨닫자, 우리는 피뢰침을 타고 내려와 붙여서 지은 오두막집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고는 여우불을 한 덩어리 수북이 꺼내놓고 일에 착수했다 토대가 되는 통나무 한복판을 따라 한 4,5피트 가량 걸려대는 것을 전부 깨끗이 치워버렸다. 톰은 이제 우리는 짐의 침대 바로 뒤에 있으니까 그 아래를 파내려가자, 그러면 다 뚫어낸 후에도 짐이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온 사람으로, 거기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짐의 이불이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기 때문에 그 구멍을 보려면 이불 을 쳐들고 아래를 내려다봐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칼집에 든 칼로 거의 한밤중이 될 때까지 열심히 팠다. 그랬더니 그만 녹초가 되어 버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거의 판 것 같지도 않았다.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이건 37년간의 일이 아니라 38년간의 일이지, 톰 소여." 톰은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한숨을 쉬고 나서 파는 것을 그 만두고는, 꽤 오랫동안 생각에 젖어 있더니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이건 안 되겠군, 허클, 일한 것 같지가 않아, 도무지. 우리가 죄수라면 이걸루두 좋아. 얼마가 걸려도 상관없고 서둘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파는 건 감시원이 교대하는 동안의 몇 분 동안이니까 손에 물집이 생길 리가 없어. 그리고는 몇 해 동안이라도 자꾸만 파내려갈 수도 있고, 올바르게 도리어 맞는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나 어디 그럴 수가 있어야 말이지, 어물어물하고 있을 틈이 없어, 단 번에 해버려야지. 한시가 바뻐. 허나 만일 또 하룻밤을 이런 꼴로 보내 야 한다면, 물집이 없어지려면 일주일이나 쉬지 않으면 안 되겠구먼 그래 적어도 그만큼 되지 않고선 칼에 손도 대지 못할걸." "그럼 어떻게 하면 좋지, 톰" "이렇게 하면 돼. 그렇게 하면 정당하지도 못하고 또 도의에도 맞지 않는 일이고 해서 난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러나 방법 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어. 우린 곡괭이로 짐을 파내고선 칼집에 든 칼로 한 것으로 치잔 말이야." "옳은 말이야. 됐어" 나도 맞장구를 쳤다. "네 머린 점점 좋아져 가는구나, 톰 소여. 도의에 맞건 안 맞건 파는 데 곡괭이가 제일이야. 나 에 관한 한 그 도의니 나발이니 하는 소린 쥐방귀 같은 소리야. 검둥이니 수박이니 주일학교의 책이니 훔치려고 한 때에는 훔치기만 한다면 무슨 수단으로 훔치든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내 검둥이거나 수박 이거나 주일학교의 책이란 말이야. 그래서 곡괭이가 제일 편리한 물건 이라면, 난 그 곡괭이로 그 검둥이니 수박이니 주일학교의 책이니를 파내기만 하면 됐지, 권위자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 따 위 건 내 알 바가 아냐 " "한데 말이야" 톰은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선 곡괭이로 칼 집에 든 칼 대용을 하는 척하는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구선 난 찬성도 안하고 또 멍하니 서서 규칙이 깨지고 마는걸 보고만 있지도 않지 왜 그런고 하니, 옳은 건 어디까지 옳고 그른 건 어디까지나 그른 거니까, 무식해서 그 이상은 모르는 사람은 예외지만 좌우간 그른 일을 해도 좋다는 건 절대로 아냐. 네가 짐을 곡괭이로 파 내가지고 칼집에 든 칼을 쓴 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상관없을 거야. 너에겐 그 이상의 지혜가 없으니까 말이야. 허나 더 세상일을 알 고 있는 나에게는 그건 안 되는 소리야. 칼집에 든 칼을 이리 줘." 톰은 자기 것을 옆에다 놓고 있었지만 나는 내것을 집어서 주었다.그러자 톰은 그걸 내동댕이치며 "칼집에 든 칼을 이리 줘" 했다. 나는 대관절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그러나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생각이 났다. 나는 헌 도구 속을 뒤져서 곡괭이를 찾아 그것을 톰에게 주었다. 톰은 그것을 받아들고 파기 시작했는데 말이라곤 한 마디도 없었다. 톰은 늘 이렇게 까다로웠고, 또 주의에 철저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삽을 들고 둘이서 서로 도구를 바꿔 가면서 곡괭이로 파는 등 삽으로 파는 등, 그야말로 열심이었다 우리는 반 시간이나 이런 상태로 계속했지만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 상당 히 큰 구멍이 되고 말았다. 이층으로 돌아가 창에서 밖을 내다보았더니 톰이 열심히 피뢰침을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톰은 두 손이 너무도 아팠으므로 창까지 기어오를 수는 없었다. 애를 쓰다 말고 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돼 못 올라가겠어. 무슨 "있어. 허나 정식 방법이라곤 생각지 않아 계단을 오르는 거야. 그 리고 그걸 피뢰침이라고 해두면 되잖아" 톰은 그대로 했다. 다음날 톰은 짐에게 펜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백랍 스푼과 놋쇠 촛대 하나씩과 수지 양초 여섯 개를 훔쳤다 나는 검둥이 오두막집 근 처를 배회하며 기회를 노려 양철 접시 세 개를 훔쳐냈다. 톰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짐이 내던진 접시는 창구 아래에 피어 있는 카밀레꽃과 나팔꽃 속으로 떨어질 테니,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걸 다시 가져다. 또다시 짐에게 쓰도록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때서야 톰은 만족한 모양이었다. "한데 생각해야 할 것은, 여러 가지 물건을 무슨 수로 짐에게 주느냐하는 거지 . " "구멍을 다 파내거든 그 구멍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되잖아" 톰은 사람을 경멸하는 듯한 얼굴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아무도 아직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톰은 두서너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지만, 아직 어느 것으로 할지 결정할 필요는 없다. 이 일을 우선 짐에게 의논해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10시 조금 지나서 우리는 피뢰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초를 하나 들고 가서 창구 아래에서 귀를 기울였다. 짐은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초를 안으로 던졌지만 짐은 잠을 깨지 않았다 그런 다음 우 리는 곡괭이와 삽을 들고 일에 착수했고, 2시간 반 정도로 일을 끝마쳤 다. 우리는 짐의 침대 아래로 해서 방안으로 기어들어가 손더듬으로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우리는 잠시 짐의 앞에 서서 짐의 몸에 아무 이상도 없는 것을 보고는 가만히 짐을 깨웠다. 우리를 보고 짐은 너무 도 기쁜 나머지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우리를 도련님이니, 그밖에 또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애칭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쇠사슬을 다리에 좋은 생각이 없나"서 잘라 버릴 정을 찾아다 달라, 한시라도 지체할 것이 없이 내빼겠다 고 애원했다. 그러나 톰은 그것이 정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는, 다 음 앉아서 우리들의 계획을 낱낱이 짐에게 털어놓았다. 또 정보가 있는 즉시로 일순간에 그 계획이 변동되고 말 거라는 것을 말하고, 반드시 도망칠 수 있게 해줄 테니 조금도 걱정 말고 있으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래서 짐도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후 우리는 잠시 옛날 얘기에 꽃을 피웠다 톰은 여러 가지 일을 물 었는데, 짐이 사이러스 아저씨는 기도를 올리러 매일 아니면 이틀에 한번씩은 꼭꼭 와주고, 사이러스 아주머니는 짐이 잘 지내며 먹을 것 도 충분한가를 보러 와 주며, 두 사람 다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다고 하자 톰이 말했다. "이걸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겠구먼 그 사람들을 시켜서 물건을 전하도록 해야겠군." 내가 끼여들었다. "그런 짓은 제발 그만둬. 그런 바보 소리는 들은 적이 없어" 하고 말렸지만, 톰은 내 말 같은 건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그저 자기 얘기만 계속 지껄였다. 일단 계획을 세우면 늘 그는 이러했다 그래서 우리는 짐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검둥이인 낫트로 해서 밧 줄 사다리가 든 파이와 그밖의 큰 물건들을 차입시켜야만 하겠다는 것 과 짐이 정신을 바짝 차려가지고 놀라서는 안 된다는 것과, 낫트에게 그런 물건들을 여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과, 우리들이 조그마한 물건을 아저씨의 윗웃 주머니 속에다 넣어 둘 테니 그것을 훔쳐내 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기회 있는 대로 아주머니의 앞치마 끝에다 매거나 앞치마 주머니에다 넣어 두거나 할 테니, 그것도 훔쳐내지 않 으면 안 된다고 하는 얘기를 했고, 또 그것이 어떠어떠한 물건이며 그 용도가 무엇이라는 것도 설명해 주었다. 그 다음 어떻게 해서 피로 셔 츠에다 일기를 써야 하는지와, 그밖의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었다.톰은 짐에게 낱낱이 일러주었다. 짐은 그 얘기의 대부분이 도리에 어 긋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백인이었으므로 자기보다는 지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것으로 만족하여 톰이 얘기한 그 전부를 그대로 실행하겠다고 말했다. 짐은 옥수숫대로 만든 파이프와 담배를 많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우 리는 마음을 터놓고 유쾌하게 지냈다. 그러고 나서 구멍으로 기어나와 집으로 자러 돌아왔지만, 우리의 손은 마치 무엇에 물린 것처럼 되어 있었다. 톰은 자못 기분이 좋은 것만 같았다. 난생 처음 재미난 일을 해보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지능적이기도 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는 일평생 이 일을 계속하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이 일을 맡겨 짐을 구출하게 하자, 짐은 이 일에 익숙하게 되면 될수록 점점 이 일이 좋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하면 80년 동안이나 연장되게 되어 장기 탈옥의 신기록을수립하게 될 테니 관계자 전부가 유명하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장작더미 있는 데로 가서 놋쇠 촛대를 알맞은 길이로 잘라 그것을 톰의 백랍 스푼과 함께 주머니 속에다 넣었다 그 다음 검둥이 오두막집으로 가서 내가 낫트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고 있는 동안에 톰은 짐의 냄비 속의 옥수수빵 한복판에다 알맞게 자른 촛대 부스러기를 보기좋게 틀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러 낫트를 따라 함께 간 것인데, 그것은 정말로 멋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짐이 덥썩 물어뜯는 순간 이가 전부 부러지는 것이 아닌가고 생각될 만큼 세게 깨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멋지게 되기란 자기로서도 정말 처음이라고 톰은 말하고 있었다. 짐은 흔히 빵 속에 섞여 있는 돌부스러기나 무엇인 척하고 있던 것인데, 그 후로는 우선 포크로 서너너덧 군데 찔러 보고서가 아니면 절대로 무엇 이든지 깨물지를 않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가 어두컴컴한 한가운데 에 서 있는데 그때 개 2마리가 짐의 침대 밑에서 불쑥 솟아나왔다. 그리고는 차례차례로 삽시에 11마 리나 되어 버렸으므로 방안은 거의 질식될 만큼 비좁아지고 말았다.아니 이런 우리는 붙여서 지은 헛간의 문을 닫는 것을 그만 깜빡 잊어버렸던 것이다 낫트는 외마디로 "마녀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그만개들로 들끓고 있는 그 한복판에 나자빠져 죽고 말 듯이 신음소리를 질렀다. 톰이 날쌔게 문을 열고는 짐의 아침 식사용 고기를 한 덩어리 밖으로 내던졌으므로 개들은 우르르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2초 동 안에 톰 자신도 밖으로 나갔다가 또다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나는 톰 이 또 하나의 문도 닫아 버린 것을 알았다 그 다음 톰은 검둥이 간호 에 착수하여 달래는 등 부드럽게 위로의 말을 하는 등하며 또 무엇을 본 것 같았느냐고 물었다. 낫트는 일어 나서 눈을 껌벅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시드 나으리, 임잔 날 바보라고 하시겠지만 그러나 난 확실히 백만마리의 개니 악마니 뭐니를 봤다고 하지 않는다면 난 여기서 당장 죽 어도 좋아유, 정말. 시드 나으리, 난 확실히 봤어유. 봤을 뿐만 아니라만져봤어유, 나으리, 놈들은 막 내 위를 뛰어넘어갔어유. 그 마녀를 단한 번이라도 좋으니 꼭 하나 붙잡아봤으면 좋겠어유 꼭 한 번이라도 좋아유. 그것만이 내 소원이에유 허나 무엇보다도 난 놈들이 날 내버 려두었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어유 정말." 톰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럼, 내 생각을 얘기해 볼까. 마녀들은 왜 하필 이 도망친 검둥이의 조반시에만 꼭 오느냐 말이야 그건 배가 고파서이지 그 때문이야.임잔 그놈들에게 마녀의 빵을 만들어 주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돼 " "하지만 시드 나으리, 내가 무슨 수로 놈들에게 마녀의 빵을 만들어줄 수 있단 말예유내가 만들 줄을 알아야쥬. 그런 얘긴 들은 적도 없 어유." "응, 그렇다면 내가 손수 만들어야겠군." "만들어 주시겠어유, 도련님 만들어 주시겠어유 난 임자 발바닥이 라도 핥겠어유, 핥구말구유" "옳지, 그럼 만들어 주지, 임자 일이니까. 임잔 우리들에게 잘 해주 었고, 또 도망친 검둥이도 보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임잔 조심하고 있 지 않으면 안 돼. 우리가 오거든 저쪽을 보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냄 비 속에다 뭘 넣어도 아는 척해선 안 돼. 그리고 짐이 냄비에서 꺼낼 때에도 봐서는 안 돼. 뭔진 모르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녀의 물건에 손을 대선 안 돼." "손을 댄다고, 시드 나으리 그게 무슨 말씀이슈 난 억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그런 것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줄 알구, 정말이에유 " 제37장 마녀의 파이 이것으로 이야기가 모두 결정되고 말았으므로, 우리는 그곳을 떠나 헌 구두와 넝마와 병 깨진 것과 구멍 뚫린 양철 제품과 그밖의 여러 가 지 쓰레기들이 쌓여 있는 뒷마당 쓰레기더미로 가서 거기를 뒤져서 헌 양철 빨래 대야를 찾아냈다. 그것으로 파이를 굽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데까지 구멍을 잘 틀어막고는 지하실로 가지고 가서 거기다 가득히 밀 가루를 훔쳐 담은 다음 아침밥을 먹으러 집으로 갔다. 그리고 지붕 판 자에 박는 못을 2개 발견했는데, 톰은 이거야말로 죄수가 감옥 담에다 자기 이름과 슬픔을 낙서하기에는 안성맞춤이 라고 하고는 그 중 한 개를 의자에 걸어 둔 사이러스 아주머니의 앞치마 주머니에다 넣고,또 한 개는 화장대 위에 있던 사이러스 아저씨의 모자테에다 꽃아 놓 았다. 애들이 아빠도 엄마도 오늘 아침은 도망친 검둥이의 오두막집으 로 가기로 되어 있어, 그것이 끝난 후에야 아침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다고 했기 때문에 톰은 백랍 스푼을 사이러스 아저씨의 저고리 주머니 에다 넣은 것인데, 샬리 아주머니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잠 시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주머니는 드디어 오고야 만 것인데, 얼굴이 홍당무처럼 노해 가지 고 기분이 나빴으며, 식전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태도였다. 기도가 끝나자 아주머니는 한손으로 커피를 따르고, 골무를 긴 다른 한손으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애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집안을 찾아 보았지만 당신의 다른 셔츠가 어디 갔는지 영 눈에 띄지 않는구려 . " 이 말에 내 심장은 폐와 간장과 그밖의 것 사이로 떨어지고 말고. 옥수수빵의 굳은 껍질 한 조각이 그 뒤를 따라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그 놈은 도중에 아래서 올라오는 기침과 충돌하여 테이블 저쪽까지 날아 가 애들 하나의 눈에 맞았으므로 그 애는 낚시용 지렁이치럼 몸을 움 츠리더니 함성과 같은 큰 소리를 질렀다. 톰은 턱밑 살 근처가 약간 파 래지고 이 바람에 온 좌석은 한 15초 가량 큰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 다 나는 나를 사가는 사람만 있다면 반값으로라도 좋으니 팔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후로는 모든 게 또다시 평온으로 돌아 갔다 우리들을 그렇게까지 서늘하게 한 것은 일이 너무나도 돌발적이 었기 때문이었다 사이러스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참 이상하구려, 모르겠는데. 벗은 것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왜냐하면......" "왜냐라니요, 당신은 한 장밖에 안 입고 있으니까 그렇지 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당신이 벗은 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의 그 흐린 기억보다는 더 잘 알고 있어요. 그 셔츠는 어저께 빨랫줄에 걸려 있었으니까 그렇잖아요. 난 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요 뭐. 한데 그게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뿐이에요. 또 당신은 내가 새걸 만들 때까지 빨간 프란넬 셔츠로 바꿔 입을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는 것뿐이에요. 이건 2년 동안에 세번째 만든 셔츠예요. 당신에게 셔츠를 입혀 놓느라고 난 정말 눈알이 돌 지경이구려 대관절 당신이 셔츠를 다 어떻게 하는지 난 전혀 모르겠구려. 당신 나이가 되면 좀더 셔츠를 소중히 여길 법도 한데 그렇구려, 내 생각엔." "그만둬, 여보, 난 될 수 있는 데까진 소중히 여기는 거라우 한데 내 탓이 아닌 게 뻔하지 않냐 말이야. 내가 입고 있을 때 외엔 셔츠 구 경도 못할 뿐더러, 셔츠와 관계도 없으니까 그렇잖아. 게다가 또 내가 입고 있는 셔츠를 잃어 버린 일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난 " "옳지, 입고 있는 셔츠를 잃어 버린 일이 없다면 그건 당신 탓은 아 니겠지만, 당신이 잃어 버릴 수 있다면 꼭 잃어 버렸으리라고 난 생각 한단 말이에요. 게다가 잃어 버린 건 셔츠뿐이 아니구려. 스푼도 한 개 가 모자라요. 전부가 다 있지 않아요. 열 개 있던 것이 아홉 개밖에 없 구려. 셔츠는 송아지가 가지고 갔다고도 생각되지만, 글쎄 송아지가 스푼은 갖다 뭘 하우" "그밖에 또 잃어 버린 건 없수" "글쎄, 초가 여섯 개 없구려......사실은 쥐가 훔쳐갔을지 몰라요. 틀 림없이 그럴 거예요. 당신은 늘 쥐구멍을 막는다는 말뿐이지 막지 않으니까 쥐가 집안 물건을 전부 훔쳐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예요. 또 쥐가 바보가 아니라면 당신 머리칼 속에서 자겠구려, 여보. 그래도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을 양반이에요.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스푼은 쥐 탓으로 돌릴 순 없으니까요." "아, 그렇군, 여보 마누라, 내가 나빴소, 나도 자인해, 그건. 늘 게 으름뱅이였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쥐구멍을 틀어막으리다 " "뭘 그러우, 서둘 게 없는 걸 가지고. 내년이라도 괜찮을 게 아냐요. 아니, 얘가, 마틸다 앤젤리나 아라민타 펠프스야" 이러면서 골무로 때리는 바람에 이 계집애는 얼른 설탕 단지에서 손을 움츠렸다. 마침 그때 검둥이 여자가 복도로 들어와서, "마님, 글쎄 욧잇이 한 장 보이지 않는군요" 하고 말했다. "욧잇이 없어졌다구 아니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내 오늘 꼭 쥐구멍을 막으리다. " 이러며 사이러스 아저씨는 슬픈 얼굴을 지었다. "어머나, 가만 있어요 쥐가 욧잇을 끌고 갔다고 생각하셔요 어디 갔을까, 글쎄, 리즈" "영 모르겠어요, 마님. 어저껜 빨랫줄에 걸려 있었는데 그게 없어져 오늘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요." "이 세상도 끝인가보구나. 이런 변은 난생 처음이야. 셔츠에다. 욧잇에다 스푼에다, 초가 여섯 개...... "마님" 하며 젊은 혼혈여자가 들어왔다. "놋쇠 촛대가 없어졌어요." "귀찮아 절루 못 가 안 가면 이 냄빌 던질 테야" 정말 아주머니가 펄펄 뛰는 꼴이란 못 볼 지경이었다. 그래서 노기가풀릴 때까지 몰래 빠져나가 숲속에가 있자고 생각했다. 아주머니의 노기는 언제 풀릴지 몰랐으며, 흔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얌전히 있었다. 맨 나중에 사이러스 아저씨는 멋적은 듯이 주머니에서 예의 그 스푼을 끄집어냈다. 아주머니는 입을 딱 벌리고 손을 쳐든 채 그만 떠들던 것도 뚝 그치고 있었다. 한편 나 는 예루살렘이나 어디로 그만 도망을 가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상태는 그리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이런 말을 꺼냈기 때문 이다 "생각했던 바로 그대로군 그럼 당신은 애당초부터 그걸 주머니에다 넣고 계셨군요. 다른 것들도 필경 거기 들어가 있을 거예요. 어떡해서 스푼이 그런 델 들어가 있었을까" "난 정말 모를 일이오, 여보." 사과하는 투였다. "알고 있었다면 꼭 말했을 게 아냐. 난 조반 전에 사도행전 제17장의 설교 제목을 연구하던 중이었어 그래서 난 성경책을 넣는다는 것이 무심코 스푼을 거기 다 잘못 넣은 모양이지 아마. 아마 그럴 거요. 성경책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지 않아 그렇지만 어디 가보고 오리다. 그래 만일 성경책이 내 파둔 장소에 그대로 있다면 내가 성경책을 넣지 않은 것이 확실해. 그 리고 내가 성경책을 아래다 놓고 스푼을 집어들고, 그리고.... "아이구머니나, 제발 날 좀 쉬게 해줘요 너희들은 전부 절루 가 그리고 내 가슴이 가라앉을 때까지 내 가까이 오면 안 돼." 아주머니가 비록 큰 소리를 지르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똑똑히 들렸을 것이며, 내가 죽어 있었다 하더라도 나는 일어서서 아주머니 분부에 복종했을 것이리라. 우리들이 거처하는 방을 빠져 나오려고 할 때 노인이 집어든 모자에서 지붕 판자용 못 이 하나 탁 마루에 떨어졌다. 그것을 노인은 그저 주워서 난로 선반에 다 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나가 버렸다. 톰은 그것을 보고는 스푼 일을 생각했다. "안되겠는데, 아저씰 통해서 물건을 전달한다는 건 안 되겠어. 신용 이 안 가." 다시 말을 이어, "하지만 아저씬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푼 으로 우리들을 위한 일을 해주었으니까, 우리들도 아저씨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아저씨를 위한 일을 해주기로 하자 쥐구멍을 막아주면 어 떻겠느냐 말이야. " 지하실에는 굉장히 많은 쥐구멍들이 있었고, 그걸 막는 데 꼬박 한 시간은 걸렸지만 우리는 확고하고도 근사하게 그 일을 해낸 것이었다.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으므로 불을 끄고는 숨어 버렸다 아니나다를까 온 것은 아저씨로, 멍한 표정으로 한손에는 초를 들고,또 한손에는 구멍을 틀어막을 물건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는 쥐구멍 하나 하나를 멍하니 들여다보며 전부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한 5분 동안 흘러내리는 촛농을 초에서 떼어 버리면서 생각에 젖은 모양으 로 장승처럼 서 있다가 얼마 후에 천천히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이 계 단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대관절 언제 틀어 막았는지 나두 모르겠는걸. 이걸루 난 쥐 일로 해서 책잡힐 일은 없다고 하는 것을 마누라에게 증명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쩟,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버려두자. 그런 짓을 해본 댔자 별로 신통한 일도 없을 테니까." 이처럼 혼자 중얼거리면서 아저씨는 위로 올라가 버렸으므로 우리도 거기를 나왔다. 아저씬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이제도 그렇다. 톰은 어떻게 하면 스푼을 손안에 넣을 수 있을까 퍽 애를 썼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푼만큼은 수중에 넣어야 한다고 톰은 그 궁 리에 몰두했다 계획 하나가 머리에 떠오르자 톰은 그 계획을 나에게 일러주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샬리 아주머니가 오기를 스푼통 옆에 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오자 톰은 스푼을 세어서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나는 그 중 하나를 슬쩍 소맷자락에다 밀어넣었다. 톰이 말을 걸었다 "이봐요, 아주머니, 스푼은 암만해도 아홉 개밖엔 안 되는군요." "어서 저리 놀러들이나 가라, 내 방해는 말구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손수 세어 보았으니까 " "그래도 아주머니, 나는 두 번 세어 보았는데요. 내가 세어 보니 암 만해도 아흡 개밖엔 안 돼요." 아주머니는 이제라도 터지고 말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물론 와 서 세어 보았다. 누구나 다 그렇게 했으리라. "어머나, 정말 아흡 개로구나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셈이냐...... 빌어먹을, 어디 또 한 번 세어 볼까." 여기서 나는 감춰 두었던 것을 슬쩍 돌려놓았다 아주머니는 모두 세 고 나서, "이게 어찌된 셈이냐, 에이 귀찮아, 이번엔 열 개구나" 하고 노한 듯한,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톰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주머니, 설마 열 개 있을라구요" "바보녀석. 내가 세고 있는 걸 넌 보고 있지 않았단 말이냐" "보고 있었어요, 하지...... "그럼 다시 한번 세어 보자." 여기서 나는 한 개를 슬쩍 훔쳐내었고, 스푼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 홉 개가 되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정말 노발대발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끝까지 세고 또 세어 나중에는 그만 머리가 아찔하고 말아 때로는 바구니까지 스푼으로 세고 말 정 도였다 그래서 세 번은 수가 맞았고, 세 번은 맞지 않았다. 그러자 아 주머니는 바구니를 움켜쥐고는 담쪽으로 던졌다. 그 바람에 고양이의 눈에 맞았다. 우리들에게는 너희들 어서 좀 나가, 날 좀 가만 내버려 둬. 점심 전에 또 와서 귀찮게 굴면 그냥 두지 않겠다고 야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머니가 철거 명령을 내리고 있는 동안에 남은 스푼을 아주머니의 앞치마 주머니 속에다 슬쩍 넣었다. 짐은 정오가 되기 전 에 그걸 지붕 판자용 못과 함께 무사히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이 일에 대만족이었다 톰은 그 2배의 수고를 해도 보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또 스푼을 세어 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며 세었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셀 수 있었다고는 생각 하지 않을 것이며, 금후 사홀 동안은 미치고 말 듯이 세어 본 결과 그 만 진절머리를 내고는, 다시 한번 세어 보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이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밤 욧잇을 도로 빨랫줄에다 돌려 놓고서는 아주 머니의 골방에서 한 장을 훔쳐내었다 그후 이틀 동안은 돌려놓고 또 훔치기를 계속했으므로 나중에는 아주머니는 욧잇이 몇 장 있는지도 그만 잊어 버리고 말아 그것에 마음을 쓰지 않게 되었고, 그 일로 해서골치를 앓지 않게 되었다. 다시는 계산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계산을 하려면 차라리 죽고 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셔츠와 욧잇과 스푼과 촛대에 관해서는 송아지와 쥐와 뒤죽 박죽이 된 계산 덕택으로 만사가 잘 되고 말았으며, 촛대에 관해서는 대단할 것이 없이 곧 가라앉고 말 것이리라. 그러나 그 파이에 관해서는 큰 골칫덩어리였다. 정말 끝없는 걱정거리였다. 우리는 숲속 깊숙이 들어가서 준비를 하여 그것을 만들었다 한참만에 겨우 만든 것인데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만 하루 사이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공하기까지에는 대야로 세 번 떠낸 밀가루가 필요했다. 그리고 또 여기저기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눈은 연기로 새빨개졌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파이의 외피뿐이었 는데, 그것을 멋지게 부풀게 할 수가 없었고 언제나 납작하게 가라앉 고 말았다. 그러나 물론 나중에는 근사한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사다리도 파이 속에 함께 넣어서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 밤에 짐의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욧잇을 갈갈이 가늘게 찢어서 꼬아 합쳐 날이 새기 훨씬 전에 벌써 목을 매기에 충분한 훌륭한 밧줄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데 아홉 달이 걸린 것으로 했다. 그리고 오전중에 밧줄을 숲속으로 가지고 갔지만 영 그놈이 파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욧잇 한 장 전부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었기 때 문에 파이 40개분의 밧줄이 되고 말았고, 그 위에 수프와 소시지와 또 그밖의 무엇이든 소원대로 음식 속에 넣고도 남을 만한 분량의 밧줄이 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성찬을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은 필요가 없었고, 필요한 것은 파이 하나만 충분했기 때문에, 그 나머지 것은 전부 버리고 말았다. 점질납이 녹으면 안 될 터이므로 우리는 파이를 대야에 굽지는 않았다 그런데 사이러스 아저씨는 근사한 놋쇠 난상기를 하나 가지 고 있었다. 그것은 선조 전래의 아저씨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었다. 선조 중의 한 사람이 영국에서 정복왕 월리엄과 함께 메이플라워인가 뭔가 그런 초기의 배에 싣고 온 긴 나무 자루가 달려 있는 물건으로, 다른 헌 도구와 함께 지붕 밑 방에다 처넣고 있었다. 이러한 물건은 가치가 있어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가치는 없지만 유물인 까닭으로 고귀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몰래 숲속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처음에는 굽는 방법을 몰랐으므로 실패였지만 나중에는 대성공이었다. 우리는 난상기 안쪽에다 반죽을 한 켜 발라 불에다 놓고, 헝겊 밧줄을 그 뒤에다 놓고, 그 위에다 또 반죽을 씌운 다음 뚜껑을 덮고, 그 위에다 뜨거운 타 다 남은 것을 덮고는 긴 자루를 들고서 서늘하고도 편하게 5피트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파이는 15분 동안에 보기에도 근사한 파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먹은 사람은 이쑤시개 두 통은 필요로 할 것이다. 그 밧줄 사다리를 먹기에는 무척 힘이 들것이고, 게다가 또 복통을 일으키고는 잠이 들고 말아, 다음 식사시까지 그대로 있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낫트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마녀의 파이를 슬쩍 짐의 냄비 속에다 틀어넣었다. 그리고 또 냄비 바닥 음식 밑에다가도 그 접시 석 장을 슬쩍 틀어넣었다. 이것으로 짐은 모든 것을 무사하게 손에 넣은 셈이었다 그래서 짐은 혼자가 되자 파이를 활짝 갈라 밧줄 사다리를 이불 속에다 감추었고, 양철 접시에다가는 뭐라고 휘적휘적 그려서 창 구멍 밖으로 내던졌다. 제38장 '포로의 가슴은 여기서 터졌도다' 펜을 만든다는 것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톱을 만드는 것 도 마찬가지였다. 짐은 가장 힘이 드는 일은 글씨를 새겨넣는 일일 거 라고 했다. 그 글씨라는 것은 죄수가 담에다 낙서를 해야 할 글씨로,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톰이 하는 말이, 무슨 일이 있어도 쓰라고, 국사범이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자기 문장을 써놓지 않는 예는 자고로 없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제인 그레이 부인을 보란 말이다. 길포드 더드레이를 보란 말이야, 노덤버랜드를 보란 말이다1 이봐 허클, 이게 퍽 귀찮은 일이라면 어떻게 한다 너라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처리해 버리겠느냐 말이야』 짐은무슨 일이 있어도 글씨와 문장만큼은 써야 하는 거야. 죄수들의 하는 식 이 모두 그래 ." 짐 이 끼여들었다 "한데 톰 나으리, 난 문장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진 않아유 여기 있는 이 헌 셔츠 외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유. 게다가 난 이 셔츠에 일기를 써야 하잖아유, 임자도 알다시피 " "아,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문장이라는 건 입는 게 아냐, 짐 " "옳지." 내가 끼여들었다. "짐이 문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옳 은 말이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렇잖아." "그걸 누가 모르나" 하고 톰이 응수했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기까지 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 가지는 것이 필요해. 왜냐하면 짐은 정식으로 탈옥하는 거니까 기록에 하나라도 흠이 없게 되는 거야." 그래서 나와 짐이, 짐은 놋쇠 촛대로, 나는 스푼으로 펜을, 각자 벽 돌 부스러기로 갈고 있는 동안에 통은 문장을 생각해 내느라고 그야말로 열심이었다 얼마 후에 톰은 어느 것으로도 결정짓기 어려울 정도로 근사한 것이 머리에 수없이 떠올랐지만, 그 중에 결정짓고 싶은 것이 하나 떠올랐 다고 했다 "방패꼴 위 오른쪽 하부에 금색 사선 하나를 긋고, 한복판에 짚은 적 갈색 성 앤드류 십자가를 놓고, 일반 의장은 머리를 쳐들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개로 하기로 하자. 그 발 밑에는 노예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쇠사슬을 요철형으로 늘어놓기로 하고, 제일 상부에는 녹색 산형을 톱니꼴로 늘어놓는단 말이야. 하늘색 바탕에는 3개 의 나선형 선을 넣고, 깊이 파낸 톱니 띠에는 몇 개의 태점이 앞 발을 쳐들고 선단 말이야. 식장은 도망친 검둥이를 흑색으로 나 타내고, 어깨에는 보따리를 왼쪽으로 걸친 막대기에다 달아서 진단 말 이야. 그리고 2개의 적선이 지지하고 있는 건너와 나야. 표어는 •Maggiore fretta minore atto of.' 어느 책에서 딴 거야-그 뜻 은 '바쁘면 천천히 하라'는 거야." •.이런, 그런데 그밖의 여러 가지 것은 대관절 뭣을 의미하는 거지" •.그런 걸 이렇다 저렇다 할 시간의 여유가 없어. 우린 조금도 한눈을 팔지 말고 어서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그렇지만, 그러나 조금은 가르쳐 줘야 하잖아. 한복판이란 어딜 말하는 거지" "한복판이라는 것은 너 같은 건 한복판이 어딘지 알 필요가 없어. 짐이 이걸 만들 때 그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거야." "쳇, 톰, 가르쳐 줘도 상관없지 않아 왼쪽으로 걸친 막대기란 또 뭐 지 " "나두 모르지만 어쨌든 짐에겐 필요한 거야. 귀족은 다 가지고 있어 . " 톰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설명하기 싫은 무엇이 있다면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비록 일주일 동안을 졸라도 마찬가지였다. 톰은 문장에 관한 일을 완전히 결정짓고 말았으므로, 다음은 그 일의 나머지 부분, 즉 슬픈 문구를 지어낸다는 것이었다. 모두 그렇 게 했으므로 짐도 그런 게 하나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통은 여러 개를 지어 그것을 종이 위에다가 쭉 써놓고는 하나씩 하나씩 읽 어나갔다. 포로의 가슴은 여기서 터졌도다. 세상과 벗에게 버림을 받은 불쌍한 죄수, 그 스스로의 슬픈 생얘를 고뇌하였나니 . 37년간의 고독한 유폐 후 여기서 외로운 마음은 터지고, 피로한 영혼은 안식처로 달렸나니 . 37년간의 애처로운 유폐 후 고귀한 타국인, 루이 14세의 사생아는 집도 없고, 벗도 없이 세상을 떠났 도다. 이것을 읽는 톰의 목소리는 떨리고, 거의 울음이 터질 지경이었다.다 읽었을 때 어느 것을 짐에게 벽에다 써놓게 해야 좋을지 통에게는 전혀 결심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그럴 듯했다. 그러나 결국 그 전 부를 쓰게 하자고 했다. 짐은 이렇게 많은 것을 못으로 통나무에다 쓰 려면 1년이나 걸릴 것이며, 더군다나 자기는 어떻게 해서 글씨를 써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톰은 내가 틀을 잡아줄 테니 너는 그 위를 그대로 그리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얼마 후에 톰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통나무론 안 되겠군. 토굴엔 통나무 벽이라곤 없을 게 아냐. 바위에다 새기지 않으면 안 되겠어. 바위를 가져오기로 하자." 짐은 바위 쪽이 통나무보다도 더 고약하고, 이만한 문구를 바위에다 새기려면 지독히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영원히 탈출할 수는 없을 게 아니겠느냐고 불평이었다. 그러나 톰은 허클에게 도와주게 할 테니 무슨 걱정이냐고 도리어 핀잔 비슷한말을 했다. 그리고 다음에 통은 나와 짐의 펜이 얼마나 준비되었느냐고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정말로 지독히 시간이 걸리는 귀찮은 힘든 일로, 그 때문에 내 손에는 상처가 나을 새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진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문장과 슬픈 문구를 새기려면 바위가 필요한데, 이 바위로 일석이조 구실을 하게 할 수 있단 말이야. 저 기 제재소에 있는 굉장히 큰 숫돌이 있으니까 그놈을 훔쳐내는 거야.그래서 거기다가 여러 가지 것을 새긴단 말이야. 동시에 겸해서 그걸 사용하여 펜과 톱을 갈면 될 게 아냐" 그것은 좋은 생각이었고, 그리고 또 만만한 숫돌도 아니었지만 우리 는 그놈과 한번 겨루어 보려고 했다. 아직 한밤중이 되진 않았다. 짐에 게 흔자 남아서 그대로 일을 계속하게 하고, 톰과 나는 제재소로 가서 숫돌을 훔쳐내어 그것을 집까지 굴려 가지고 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 지만 그것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고, 때로는 이놈이 쓰러지는 것 을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막아낼 수가 없었고, 쓰러질 때마다 하마터면 그 밑에 깔려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꼭 둘 중의 하나는 골로 가고야 말 거라고 톰이 말했다. 우리는 도중까지 날라왔지만 그만 녹초가 되어 버려 온몸이 땀으로 멱을 감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것을 알았다. 짐을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짐은 침대를 쳐들고 침대 다리에서 쇠사슬을 끌러 그것을 목 주위에다 둘둘 감고 는, 우리들이 파낸 구멍으로 해서 기어나와 숫돌 있는 데로 와서 톰의 감독 하에 짐과 나는 열심히 분투에 분투를 다한 끝에 그 숫돌을 손쉽 게 날라들였다. 톰은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소년보다도 감독에 능숙했다. 톰은 무슨 일에도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구멍은 왜 큰 것이었지만 숫돌을 들여넣기에는 부족했 다. 그러나 짐이 곡괭이를 집어들고 곧 넓혔다. 그러고 나서 톰은 그 돌 위에다 못으로 문장과 문구를 썼고, 짐에게 못을 끌 대용으로 하고,붙여 지은 오두막 안의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쇠꼬치를 망치 대용으 로 하여 그 문장과 문구를 돌 위에다 새기게 했다. 그리고 남은 초가 모두 타버리고 말 때까지 계속해서 파고, 꺼지면 침대 속으로 들어가고, 숫돌은 짚이불 밑에다 감추고 그 위에서 자라 고 명령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짐이 쇠사슬을 또다시 침대 다리에 다 끼는 것을 도와 주었고, 그 다음에야 우리도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러나 톰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이렇게 물었다. "짐 여기 거미는 없나" "없어유 다행히 거미는 없어유, 톰 나으리." "옳지, 그럼 좀 몇 마리 잡아다 주지." "아니, 무슨 말씀이슈 그게. 도련님. 난 그런 거 소용없어유 딱 질 색이야유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방울뱀이 더 나유." 톰은 잠깐 생각에 젖어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야. 그런 건 전에도 있었을 거야. 필경 있었을 거 야. 이유가 있어. 음, 그건 참 좋은 생각이야. 어디다 기를 수 있지 " "뭘 기른다구, 톰 나으리" "뭐긴 뭐야, 방울뱀이지." "아니, 그게 또 무슨 말씀이슈, 톰 나으리. 만일 여기 방울뱀이 들어온다면 난 대가리로 저 통나무 담을 때려부수고 도망칠 테유 무슨 일 이 있어 두 " "짐, 윌 그리 무서워해, 잠간만 지나면 무서워하지 않을 걸 가지구. 길들일 수 있을 테니까." "길들인다구유" "그래, 문제없어. 짐승이라고 하는 건 어느 거나 다 친절하게 귀여워해 주기만 하면 고맙게 생각하는 법이야. 귀여워해 주는 사람에겐 해 를 끼치지 않는 법이야, 절대로, 어느 책에든지 다 그렇게 써 있어. 한 번 해봐, 내가 부탁하는 건 그것뿐이 야 며칠만 해봐. 윌 그래, 곧 길 들일 수 있을 테고, 뱀과 단짝이 되어 그만 떨어지지 않게 될 텐데 뭘 그래. 그렇게 되는 날엔 너와 같이 자게 되어 1분 동안도 떨어지진 않 을걸. 그땐 네 목에 감기거나 대가릴 네 입속에다 처넣게 될 거야." "제발 제발, 톰 나으리 그런 소린 제발 좀 그만둬유 난 죽어1 방을 뱀이 내 입속에다 대가릴 처넣는다구. 틀림없이 호의로 그렇게 하는 거라구유 언제까지 기다려도 내쪽에서 부탁할 생각은 영 안날 거예유. 더군다나 난 방울뱀과 같이 자는 건 딱 질색이야." "짐,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게 아냐. 죄수란 건 원이건 하나 말 못하는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어야만 하는 거야. 게다가 만일 방울뱀이 아직 한 번도 사용된 일이 없다면 생명을 건지기 위한 다른 어떠한 수 단보다도 맨 먼저 해본 자로서 너는 한층 더 큰 명예를 얻게 될 게 아 냐. " "이봐요, 톰 나으리, 난 그런 명예는 소용없어유. 뱀에게 이 짐녀석 의 목을 물리게 된다면 어디 명예구 나발이구 있다는 거예유 난 싫어,그런 건 딱 질색이야." "할수없군, 한번 시험삼아 해볼 수도 없다는 거야 난 그저 시험삼아 한번 해봤으면 하고 바랄 뿐인데, 잘 안 되면 그만둬도 괜찮아." "한데 그 방울뱀이 시험을 하고 있는 동안에 날 물면 난 그만 아니냐 말예유. 톰 나으리, 난 무리한 일만 아니면 대개는 자진해서 하지만 임 자와 허클이 날더러 길들이라고 방울뱀을 가지고 온다면 난 단연코 손 을 떼고 말 테유." "자, 그럼 그만둬. 짐이 정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띠뱀이나 몇 마리 잡아가지고 올 테니, 그러면 임잔 그 꼬리에다 방울을 달아서 그걸 방울뱀 대용으로 하면 되잖아. 그렇다면 불평은 없을 테지 " "그거라면 할 수 있지, 톰 나으리 하지만 정말 말이지, 난 물론 그 런 거 없어도 잘 해나갈 수 있어유. 난 죄수라는 게 이렇듯 까다롭고,귀찮다는 건 생전 처음인데유." "그렇지, 정식대로 하자면 그런 거야. 여기 쥐는 없냐" "없어유, 한 마리도 본 적이 없는데유 " "그럼 쥐도 몇 마리 갖다 주지." "톰 나으리 난 쥐 같은 건 소용없어유. 내가 알고 있는 가운데서 쥐처럼 지긋지긋한 놈도 없어 사람이 자려고 하면 안면 방해를 하고, 몸 위로 뛰어돌아다니질 않나, 다릴 깨물지 않나 안돼 안돼, 꼭 길러야만 한다면 띠뱀은 괜찮아 하지만 쥐는 소용없어 딱 질색이야, 아무 소용 두 없어 ," "한데 짐, 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길러야만 하는 거야. 모두가 기르니까. 그러니까 쥐 얘기를 이렇다 저렇다 하진 마. 쥐와 같이 있지 않는 죄수란 없어. 그런 예는 하나도 없어. 죄수들은 쥐를 길들여 기르고, 귀여워하고, 요술을 가르치고, 그렇게 하면 파리처럼 바싹 사람들 에게 정이 붙게 되는 거야. 한데 넌 쥐에게 음악을 들려줄 필요가 있 어. 뭐든 좋으니 악기를 하나 가지고 있나" "엉성한 빗과 종이 한 장과 주스 하프(쇠로 만든 장난감으로, 입에 물고숨을 쉬며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외엔 가진 게 없어유, 난. 그렇지만 쥐 는 주스 하프 같은 건 재미있어 하진 않을 걸유." "실은 그렇진 않아. 아무 음악이라도 상관없어. 주스 하프라면 쥐에 겐 그만이야. 짐승치고 음악 싫어하는 놈이 없거든. 감옥에선 음악이 면 그만이지. 더군다나 비통한 음악을 좋아하는 거야. 그런 것에 쥐는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거야. 이런 일엔 원보다도 주스 하프가 제일이 야 쥔 임자가 어떻게 하고 지내는지 그걸 보러 올 거야. 옳지, 그걸로 됐어, 준비는 이걸로 충분해 임잔 밤마다 자기 전과 아침 일찍이 침대 위에 앉아서 주스 하프를 불기만 하면 돼. '마지막 고리는 끊어졌나니'를 하란 말이야. 그걸 하면 다른 원보다도 빨리 쥐를 모을 수 있고 그 걸 2분 동안만 해보란 말이야, 그럼 쥐니 뱀이니 거미니 전부 짐 걱정 을 하여 모여들 테니. 그리고 쭉 너의 주월 둘러싸고, 참 근사해." "톰 나으리, 쥐나 뱀들은 재미있어 하겠지만 그러나 이 짐은 어떻게 되는 거쥬 제일 중요한 점이 통 나에겐 알 수 없군. 하지만 꼭 해야만 한다면 난 그렇게 하리다 난 짐승놈들만 즐겁게 해놓고, 집안은 떠들 썩하게 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해유." 톰은 그밖에 또 무엇이 없을까 하고 잠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 나 잠시 후에, "아, 하나 잊어 버린 게 있구나. 여기서 꽃을 기를 수 있을까, 어때 짐" 하고 물었다 "자, 어떨지 모르지만 하자면 할 수 있을 테죠, 톰 나으리. 하지만 여긴 지독히 어둡고, 게다가 또 난 꽃 같은 건 소용없어유. 지독히 귀 찮을 테구유." "그림 어쨌든 한번 해보는 거야. 죄수로서 꽃을 기른 한 사람도 있으니까." "저 커다란 고양이 꼬리같이 생긴 현삼화라면, 톰 나으리,여기서도 자랄 걸루 생각하는 데유. 하지만 그 수고한 절반의 가치도 없을 거예유. " "그런 소린 마 조그만 걸 하나 갖다 줄 테니 저 구석에다 기르는 거 야. 그리고 그걸 현삼화라고 해선 안 돼. 피치올라라고 하는 거야. 감 옥에선 그렇게 부르는 게 옳은 이름이니까. 눈물로 물을 주는 거야." "하지만 샘물이 얼마든지 있는데유, 톰 나으리." "샘물은 소용없어. 너의 눈물로 물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죄 수란 건 언제나 그렇게 하는 거야." "저 말예유 톰 나으리 난 다른 사람이 현삼화 한 다발을 눈물로 기 르고 있는 동안에 샘물로 그 배나 빠르게 기를 수가 있어유." "그런 게 아냐. 짐은 꼭 눈물로만 길러야 하는 거야." "내 손에 걸리면 말라죽을 거예유, 톰 나으리, 꼭 말라죽어유. 난 우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여기서 톰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지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짐은 양파로 고생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고는, 아침에 검둥이 오두막으로 가서 몰래 짐의 커피 주전자 속에다 양파 하나를 넣어 두 겠다고 약속했다. 짐은 '그것보다는 차라리 담배를 그 속에다 넣어주면 좋겠다'고 하고는 몹시 그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또 현삼화를 기르고. 주스 하프를 쥐 에게 들려주고, 뱀이니 거미니 뭐니를 귀여워하며 기른다고 하는 귀찮 은 일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펜으로 글씨를 써야만 하는 일을 즉 문구니 일기 니 뭐니를 써야만 하는 일을 가장 비난했다. 그 덕택으로 짐은 지금까 지 해온 어떠한 일보다도 죄수가 된 것을 귀찮고 괴롭고 책임이 무겁다고 투덜거렸다. 그래서 톰도 그 이상은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경지 에 몰리게 되어, 너는 이 세상의 어느 죄수도 가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기에 좋은 기회가 얻어걸린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모처럼 의 기회를 헛되이 하려고 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므로, 짐도 후회를 하 고는 이 이상 그러한 불평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집으로 자러 갔다 제39장 익명의 편지 다음날 아침, 우리는 마을로 가서 철사 쥐덫을 사가지고 와 지하실로들고 가서 쥐가 제일 많이 나오는 구멍을 터놓았다 그러자 1시간 사이 에 아주 기운이 센 쥐가 15마리나 잡혔다 그것을 우리는 샬리 아주머 니 침대 밑의 안전한 장소에다 갖다 두었다 그런데 우리가 거미를 찾 으러 가 있는 동안에 토머스 프랭클린 벤자민 제퍼슨 알렉산더가 그것 을 보고, 쥐가 나올지 어떨지 궁금한 나머지 쥐덫 뚜껑을 열었으므로 쥐는 그만 나와 버렸다. 마침 거기에 샬리 아주머니가 들어왔으므로 우리가 돌아왔을 때에는 침대 위에 서서 대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 었다. 쥐들은 아주머니의 권태증을 꺼주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그래서 아주머니는 우리를 붙잡아 힉코리 나무로 먼지가 날 정도로 때 렸으며, 그 주제넘은 아귀녀석 덕택으로 다시 15마리를 잡느라고 2시간이나 걸렸지만, 이번에 잡은 놈들은 먼저 것에 비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 잡은 놈이 집안에서 가장 좋은 놈들이었고, 나는 쥐치고 그런 놈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거미와 빈대와 개구리와 모충과 그밖에도 여러 가지 구 색을 갖춘 훌룡한 일단을 구할 수 있었고, 호박벌집도 구하고 싶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호박벌떼가 벌집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러나 우리는 얼른 체념이 되지 않아 언제까지나 꾸준히 참고 있었다.우리가 벌들을 녹아떨어뜨리거나 놈들이 우리를 녹아떨어지게 하거나,둘 중 어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벌들에게 우리 가 지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토목향을 따다가 쏘인 곳에다 발랐다. 그랬더니 거의 낫기는 나았지만 앉기엔 아직 불편했다 그 다 음 우리는 뱀을 잡으러 갔는데, 띠뱀과 구렁이를 한 2다스쯤 잡아가지 고 그것을 주머니에다 넣어서 내 방에다 두었다 그땐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하루 일치고는 매우 훌릉한 편이었다 배가 고파 졌느냐고 천만에, 조금도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1 그리고 우리들이 돌 아와 보니까 뱀이라곤 한 마리도 없는 게 아닌가 주머니를 꼭 잡아매 놓지 않았으므로 뱀은 이리저리 빠져 나와 한 마리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집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그런 것은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중 몇 마리는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이 집에는 얼마 동안은 뱀이 그대로 있었다. 서까래나 그밖의 곳에 늘어져 있어, 대개 접시 속이나 목둘레나 특히 떨어지면 안 될 장소에 마구 떨어졌다. 이농들은 몸매가 고운 것이 띠무늬가 쪽 서 있어 몇백만 마리가 있어도 아무 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샬리 아주머니 는 그런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뱀이라면 어떤 종류든 무턱대고 경 멸하고, 그리고 아무리 설복을 해도 뱀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뱀이 아주머니 위로 떨어지면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 도 그 일을 내던지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런 여자를 난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천장이 무너져라고 큰 소리를 지르는 꼴이란 화젓갈로 뱀 한 마리쯤 집어내려고는 하지 않고, 또 돌아누웠을 때 침대 속에 한 마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되면 허겁지겁 침대 밖으로 기어나와 집에 불이 라도 붙은 것처럼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아저씨를 못살게 굴었고, 아저씨는 누구를 죽이려고 이놈의 뱀들이 생겨난 것이 냐고 마구 혀를 찼다 뱀을 집 밖으로 내쫓고 한 마리도 없게 된 지 일 주일이 지난 후에도 샬리 아주머니는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목덜미에 깃털이라도 대면 뛰어 일어서며 깜짝 놀랐다. 참 보기에 재미났다 그러나 톰은 여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이런 것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좌우간 여자라는 건 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뱀이 한 마리 아주머니 앞에 나타날 때마다 얻어맞았고, 아주머니는 다시 한번 뱀 같은 걸 집안에 들고 들어와서 퍼뜨리는 날엔 가 만두지 않겠다고 하며 펄펄 뛰었다. 나는 얻어맞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른 뱀을 구해 올 것을 생각하니 그렇지도 않았다. 몹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구해 오고야 말았다. 그 리고 그밖의 여러 가지 것도 구해 오고야 말았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음악 소리를 듣고 슬슬 기어 짐 쪽으로 다가갈 때 짐의 방안의 그 쾌활한 꼴이란. 짐은 거미를 싫어했다. 그리고 거미도 짐을 싫어해서 잠복 하고 있다가 짐을 혼내 주었다. 짐은 쥐와 뱀과 숫돌 때문에, 침대위에서 잘 자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놈들은 모 두 일시에 같이 자지 않고 교대로 자는 까닭으로 자리가 있을 때에는 쥐와 뱀 때문에 잘 수 없었고, 뱀이 자고 있을 때엔 쥐가 간판 위에 나 타나고, 또 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땐 뱀이 망을 보러 오는 식이었다.그러니까 언제나 한 떼는 짐 아래에 있어 짐이 성화를 대고, 다른 한떼 는 짐의 위에 있어서 서커스를 했다 일어서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 면 짐이 저쪽으로 갔을 때엔 이번에는 거미가 슬슬 기 어나온다며 짐은 혀를 찼다. 짐은 이번만 끝나면 다시는 죄수는 되지 않겠다고, 비록 급 료를 타는 일이 있더라도 딱 질색이라고 했다. 이러는 동안에 3주일이 지나자 준비는 모두 끝났다. 셔츠는 진작부터파이 속에 넣어서 짐의 손안에 넣게 했고, 쥐에게 물릴 때마다 짐은 일 어나 잉크가 아직 굳어지기 전에 일기를 한 줄 써넣었다 펜 준비도 끝 났다. 문구도 모두 숫돌에 새겨졌다. 침대 다리는 둘로 톱으로 잘렸고,우리는 그 톱밥을 먹어 버렸는데, 그 때문에 지독한 위통을 일으키고 는 모두 죽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나는 이렇게 소화가 안 되는 톱밥을 본 일은 없고, 톰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우리 셋은 모두 몹시 녹아떨어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녹아떨어진 것은 짐이었다. 아저씨는 2번씩이나 농장으로 편지를 내어 도망친 검둥이를 찾으러 와달라고 하였지만, 그러한 농장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저씨는 센트루이스와 뉴 올린즈 신문에다 짐의 광고를 내겠다고 했다 센트루이스라는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성퐝 가라앉았다. 더 이상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톰은 드디어 익명의 편지를 쓸 때가 왔다고 했다. 그 말에 내가, "무슨 말이야" 하고 물었더니 톰이 대답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경고야. 그 방법 은 때에 따라 틀려. 그러나 반드시 정세를 살펴서 성주에게 밀고 할 스파이가 필요해. 루이 16세가 톨레지에서 탈출하려고 할 때에는 몸종 계집애가 이 일을 했지. 이건 참으로 좋은 방법이야. 그리고 익명의 편지도 좋은 방법이고. 우린 두 가질 다 해보자. 그리고 또 죄수 어머니가 죄수복을 갈아입고, 어머니 쪽이 남고, 죄수가 어머니 옷을 입고 빠져 나가는 방법도 곧잘 있는 방법이야. 우린 그것도 어디 해보자." "한데 말이야. 톰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걸 누구에게 경고하는 것이 어째서 필요하냐 말이야 자기들에게 찾으라면 되잖아. 자기 들이 해야 할 게 아냐."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맡길 순 없어. 우리에게 뭐든 다 맡겨 둔다는 게 그놈들의 애당초부터의 수법이야. 그놈들은 그야 우릴 신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보니까 통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가 일러주지 않으면 아무도 우릴 방해하려는 놈은 없을 거란 말이야 그렇게 하면 모처럼 우리가 이렇게까지 애써서 한 이 탈주가 그만 아무 보람도 없게 될 게 아니냐 말이야.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말의 옷을 내게서 벗겨가지고 자기가 입는 거야, 그러고 나서 우린 모두 다같이 탈출하는 거야. 신분이 있는 죄수가 도망칠 땐 탈출이라고 하 는 거야. 예를 들면 왕이 도망칠 땐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거야. 왕의 아들도 마찬가지야 그 아들이 적자든 서자든 상관없어." 그래서 통은 익명의 편지를 썼다. 나는 그날 밤 그 혼혈여자의 프록 코트를 훔쳤고, 톰의 분부대로 그 편지를 정문 밑에다 틀어넣었다. 편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요주의 사건이 발생중에 있음 엄중한 경계를 계속할 것. 무명의 우인 다음날 밤 우리는 톰이 퍼로 그린 두개골과 X자로 그린 2개의 대퇴 골 그림을 정면 도어 위에다 붙이고, 그 다음날 밤에는 또 하나 관 그림을 됫문 위에다 붙였다. 나는 펠프스 일가만큼 불안해하는 가족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비록 이 집안이 온통 유령으로 들끓고 있고, 모 든 것의 배후와 침대 아래에 숨어 있고, 공중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하 더라도 이집사람들은 이 이상은 무서워하지는 않았으리라. 문이 봐 당 하고 닫히자 샬리 아주머니는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아야"무엇이 떨어지면 그때에도 아주머니는 뛰어오르며, "아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주머니가 무심코 있을 때 무엇이 닿아도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는 어느 쪽을 향해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언제나 자기 뒤에 무엇이 있는 것만 같아 불안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주머니는 갑자 기 뒤돌아다보고는 "아야" 하고 소리를 질렀고, 채 3분지 2도 돌리기 전에 또 머리를 되돌리며 "아야" 하고 소릴 지른다. 아주머니는 자러 가기도 무서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어나 있을 수도 없었다. 이걸 보 고 톰은 참 잘 되어 간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효과를 올린 적은 한 번 도 없었다. 이건 모든 게 잘 된 증거라고 혼자 좋아했다. 그래서 톰은 자, 이제부터 드디어 큰일에 착수한다며 장담을 하고는 다음날 아침 미명에 우리는 또 한 장의 편지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 편 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왜냐하면 저녁 식사 때 집 안 식구들이 검둥이를 밤새도록 앞문과 원문에 보초를 세워 놓도록 하 자고 얘기들을 하고 있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톰은 피뢰침을 타고 정찰을 나갔다 뒷문에서 보초를 서던 검둥이가 자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그놈 목덜미에다 꽃아놓고는 돌아왔다 편지 사연은 다음과 같았 다. 나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귀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인디언 부락에서 온 무지막지한 살인자의 한패가 오늘밤 도망온 귀하의 검둥이를 훔쳐내려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 갱의 일원이다. 그 러나 신앙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일단을 떠나, 또다시 본래의 을바른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는 이 횡포한 계획을 폭로하는 바이다 놈들은 울타리를 따라 한밤중 자정 정각에 위조 열쇠를 가지고 북쪽으로부터 침입하여 검둥이 방으로 들어가서, 그 검둥이를 훔쳐내려고 한다 나는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면 양철호각을 불기로 되어 있는데 그러나 놈들이 집안으로 들어가면 나는 즉시 양처럼 메-하고 울고, 호각은 불지 않겠음. 그리고 놈들이 그 검둥이의 쇠사슬을 풀고 있는 동안에 귀하는 몰래 침입하여 쇠를 채워 놈들을 안에서 잠가 버리고는 천천히 놈들을 죽일 수가 있음. 내 가 귀하에게 알린 방법 이외의 것은 무엇 하나 해도 안됨 그렇지 않을진댄 놈들은 의심을 품고 대소동을 일으킬 것이다. 나는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외에는 아무 보수도 바라는 것이없음. 무명의 친구 우리는 아침 식사 후 아주 기분이 좋았으므로 도시락을 들고 내 카누를 타고 강으로 낚시질을 나가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뗏목을 보러 갔 더니 여전히 잘 있었다 늦게서야 저녁을 먹으러 왔을 때 식구들이 걱 정과 초조의 극한점에 서 있어, 머리로 서 있는지 발로 서 있는지 전혀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뒤죽박죽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치자 우리들을 침실로 쫓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일언반구도 없었고, 또 나중 편지에 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하 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단을 절반쯤 올라 오다가 아주머니의 등이 돌아서는 것을 보자 몰래 지하실 찬장으로 가 서 근사한 도시락 하나를 만들어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잠자리로 들어 갔다. 그리고 11시 반에 일어나 톰은 훔쳐다 둔 샬리 아주머니의 옷을 입고 도시락을 들고 나가려고 하다가, "버터는 어딨지" 하고 물었다. "큰 덩어릴 옥수수빵 위에다 놔뒀는데." "그럼 넌 파둔 채 온 모양이로구나 여기 없어." "없어도 먹을 수 있잖아." "있어도 나쁠 건 없지. 너 지하실로 가서 갖다주지 않겠니 그리고 빨리 피뢰침을 타고 내려와. 난 짐의 옷에다 짚을 틀어넣어 변장한 짐의 어머닐 만들고 있다가 네가 오는 대로 곧 양처럼 메-하고 울어 도 망칠 만반의 준빌 갖출 테니까." 그리고 톰은 밖으로 나갔다 내가 지하실로 내려가 보았더니 사람 주 먹만한 버터덩어리가 파둔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들어 있는 옥수수 빵까지 한꺼번에 집어들고 불을 끄고는 가만가만 발 소리를 죽여가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1층까지는 무사하게 올라을 수 있었지만 거기서 촛불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샬리 아주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버터를 얼른 모자 속에다 넣고는 모자를 썼지 만 아주머니에게 들키고 말았다 "너 지하실에 갔다 왔구나" "예 아주머니 . " "지하실에서 윌 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안했어요. " "아무것도 안했다구" "예, 아주머니 " "그럼, 이런 밤중에 무엇에 홀려서 지하실엘 갔단 말이지" "몰라요." "모르다니 그런 대답이 세상에 어딨어. 톰, 네가 지하실에서 뭘 하 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샬리 아주머니." 나는 이걸로 이젠 보내 주려니 생각했다. 여느때라면 늘 보내 주었기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만 발생하므로 아주머니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생기면 몹시 마음에 걸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 머니는 아주 단호하게 쏘아붙였다. "저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넌 뭘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난 그게 뭔지 알아 낼 때까진 널 내놓지 않을 테다. " 이 한 마디를 남겨놓고 아주머니는 가버렸다. 내가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아니 이건 숱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닌가 15명의 농 부, 그것도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불 쾌한 기분에 쌓여 살그머니 의자 쪽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농부들도 모두 앉아 있었다. 어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잠시 속삭이고 있었고,모두 침착성이 없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감추려고 무척 애를 쓰 고 있었다. 그러나 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꾸만 모자를 벗었다가는 쓰고, 머리를 긁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단추를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도 불안했다.그러나 줄곧 모자를 벗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샬리 아주머니가 어서 돌아와서 나를 처분하고, 때리고싶으면 때려서, 어서 내보내 주면 당장에 가서 톰에게 우리들의 연극 이 너무 과해서 천등소리처럼 웅웅거리는 호박벌집 속에 들어가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하고, 당장에 이런 어리석은 수작을 곧 단 념하고는 이 무뢰한들이 참다못해 우리에게 달려오기 전에 짐을 데리 고 도망을 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마침내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어찌나 꼬치꼬치 따지는지 나는 발로 서 있는지 머리로 서 있는지 모를 정도로 올바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 다. 모인 사람들은 더 이상 안절부절못하고는 그 중 몇 사람은 이제 당장 가서 악한들을 매복하자, 자정까진 몇 분밖에 안 남았다고 당장 떠 날 기세를 보였고, 또 다른 몇 사람은 그 사람들을 만류하며 양의 메 ∼하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자고 주장했다. 한편 아주머니가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나는 나대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이제라도 당장 그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방안은 자꾸 더워만 가는 판이었으므로 버터는 녹아서, '목덜미와 귀 뒤로 마 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 중 하나가, "내가 선수를 쳐서 이제 당장 가서 그놈들이 오면 붙잡아야지" 했을 때에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리고 버터 가 한 줄기 얼굴에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샬리 아주머니의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저런 저런, 저 앤 어떻게 된 셈이야 필경 뇌막염이야. 뇌가 터져나왔어 " 그러자 전원이 내쪽으로 달려왔다. 아주머니는 내 모자를 잡아젖혔 다. 그러자 빵과 버터의 남은 것들이 나왔다. 아주머니는 나를 꼭 껴안았다. "아니, 이 앤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걸까 그래도 이걸로 끝나 난 정말 마음이 놓이는구나. 고마워, 요샌 운이 나빠서 비가 오면 으레 소낙비여서, 그걸 봤을 땐 난 너를 잃고 마는 걸로 생각했구나. 색깔이 영락없이 네 뇌라고 생각했구나 글쎄 하마터면....아이구 녀석아. 왜 버터를 가지러 갔었다구 그 말을 못했단 말이냐 그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걸 가지고. 자, 이젠 어서 가자 아침까지 나오는 게 아니긴" 나는 순식간에 2층으로 올라갔고, 다음 순간에는 피뢰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둠 속을 타고 오두막집을 향해 내달렸다.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통에게 되도록 빨리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1분의 여유도 없다 그 집엔 총 을 가진 사람들로 초만원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톰의 눈에 광채가 일었다. "음 그래 거 근사하구나 이봐, 허클, 다시 한번 고쳐 해보면 200명 모으기는 문제없겠구나 우리가 도망치는 걸 연기할 수만 있다 면.... "어서 어서 짐은 어딨어" "네 바로 팔꿈치에 있잖아. 손을 뻗치면 닿아. 옷을 입고 준비 완료야. 자, 그럼 가만히 나가서 메-하고 신호를 할까." 그러나 그때 몇 사람의 발소리가 문간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물쇠 소리와 그 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내가 빠르다고 안 그랬어. 아직 안 왔구먼.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자 자네들 중 몇이 안으로 들어가 봐 내가 자물쇠를 열어 줄 터이니. 그리고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둠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오면 죽이는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좀 떨어진 곳에 뿔뿔이 흩어 져 있어, 그리고는 오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이고들 있어 " 그들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어두워서 우리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들이 얼른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갔을 때에 하마터면 밟힐 뻔했지만, 그러나 무사하게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살짝 구멍을 빠져 나왔다. 맨 먼저 짐, 그 다음이 나, 나중이 톰 순 서였다 이것은 톰의 명령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붙여 지은 오두막집 에 숨어서 밖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톰은 우리들을 거기 있게 해 놓고는 틈바구니로 밖을 내다본 것인데,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발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을 듣고 있어, 너희들은 쿡 찌르면 제일 먼저 짐이 빠져나가, 난 제일 나중 나갈 테니" 하고 속삭였다 그래서 톰은 틈에다 귀를 대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내뺄 사 이도 없이 발소리가 그 근처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때 톰이 팔꿈치로 우리들을 꾹 찔렀다. 우리는 살짝 밖으로 빠져 나와 몸을 숙이고 숨을 죽여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일렬 종대로 울타리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리고 무사히 울타리에 다다랐다. 나와 짐은 무사히 울타리를 넘을 수 있었지만 톰의 바짓가랑이가 제일 꼭대기 횡목의 갈라진 조각에 걸려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발소리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문에 톰은 억지로 잡아 뽑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바람에 갈라진 조각이 부러지면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톰이 이쪽으로 내달렸을 때에 누가 이렇게 외쳤다 "누구야』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쏜다. " 그러나 우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리야 날 살려라고 내달렸다. 그들 은 우우 돌진해 왔다. 그리고 땅 땅 땅 하고 총을 쏘았고. 총알은 우 리 주위를 순슛 하며 날아갔다 그들이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있어 강 쪽으로 갔어 자, 따라가 개를 내놔" 그들은 전속력으로 우리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그들이 따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화를 신고 떠들며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장화를 신지도 않았고, 떠들고 외치지 도 않았었다 길은 제재소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들이 우리들 바로 배후에 육박했을 때 우리는 몸을 홱 비켜 덤불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보내고 나서 그 뒤를 따라갔다. 사람들은 모두 개를 가둬 둔 채였다. 강도들을 위협해서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되기 때 문이었으나 이때에 비로소 누가 개를 놓았다. 그래서 개들은 백만 마리나 되는 듯한 큰 소리로 왕왕 짖어대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개였으므로 개가 따라을 때까지 그곳에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개들도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들이었고, 조금도 자기들의 마음을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그저 '안녕' 했을 뿐으로 뭐라고 떠드는 소리와 외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곧장 달려가 버렸다. 그 다음 우리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하였고, 제재소 바로 앞에 당도 할때까지 사람들 뒤를 따랐으며 슛슛 바람을 끊으며 내달렸다 그 다음 부터는 덤불 속을 기어 내 카누가 있는 데까지 오자, 카누에 뛰어올라 강 한가운데를 향해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 다음 천천히 기분좋게 내 뗏목을 감춰 둔 섬을 향해 젓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개들이 강둑 도처에서 떠들어대고 짖어대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점점 더 우리 들이 훨씬 멀어졌기 때문에 소리는 희미해지고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전원이 뗏목에 바꿔 탔을 때 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 짐. 임잔 또다시 자유의 몸이 됐구먼. 이젠 다시는 일생 동안 노예가 될 일은 없어." "게다가 그건 참 재미난 일이기도 했지, 허클. 계획도 훌릉하고 실행도 근사했지. 그 이상 복잡하고 멋진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야." 우리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기뻤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제일 기쁜 것은 톰으로, 그것은 장딴지에 총알을 맞았기 때문이다 나와 짐은 그 얘기를 듣자 아까 좋아하던 것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다 상처는 왜 심한 모양으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톰을 윅왱 속에다 눕히고는 붕대를 만드느라고 공작의 셔츠 한 장을 찢었다. "그 헝겊을 이리 줘. 내가 혼자 할 수 있으니까. 이제 서지 마 여기 서 우물쭈물하면 안 돼. 탈출은 그처럼 성대하지 않았다. 큰 노를 달 아, 뗏목을 띄워라 친구들, 우리들이 해낸 일은 근사하지 않았던가 정말 근사했지. 루이 16세의 사건을 우리들이 취급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그의 전기에 '성 루이의 후예여, 승천하라'라는 문구는 없었을 게 아냐. 천만에, 없구말구. 우린 왕의 등을 떠밀다시피하여 무 사하게 국경 밖으로 왕을 탈출시켰을 게 아냐. 필경 그렇게 했음에 틀 림없어. 게다가 그것도 아주 전례가 없을 만큼 근사하게 해치웠을 거 야. 큰 노에 사람을 배치하여라 큰 노에 사람을 배치하여라" 그러나 나와 짐은 서로 의논을 하고는 궁리를 하고 있었다. 잠시 궁리를 한 끝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말해 봐, 짐." 짐 이 대꾸했다. "그럼 내 말할 텐데. 이렇게 생각해, 허클 도련님. 만일 자유의 몸이되는 것이 톰 나으리구, 그리고 임자들 둘 중 하나가 총에 맞았다고 하 면 톰 나으린 '어서 자꾸만 도망을 쳐서 나만 살려 줘 이 앨 살려 줄 의사 같은 건 필요없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느냐 말야 그 말이 톰 소 여 나으리다운 말이겠느냐 말야 톰 나으리가 그렇게 말할까 천만에,그럴 리가 없지 그럼 이 짐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난 의사 없이 여길 한 걸음도 떠나진 않아. 40년이 걸려도 안 떠나구말 구" 나는 짐의 마음이 결백한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반드시 이러한 말이 나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림 그렇게 하자고 하는 데 의견의 일 치를 보았고, 나는 톰에게 의사를 부르러 갔다 오겠다고 했다. 톰이 반 대했지만 나와 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고 하고는 조금도 양보 하지 않았다. 그러자 톰은 이번에도 기어나와 자기 손으로 뗏목을 푼 다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톰이 우리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화를 내도 우리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내가 카누를 타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 톰이 말했 다.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야만 한다면 마을로 가서 해야 할 방 법을 가르쳐 주마. 문을 꼭 닫고, 꽉 풀어지지 않도록 의사에게 눈가리개를 하고, 무덤처럼 침묵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받고, 금화가 잔뜩 든 돈주머니를 그의 손에다 쥐어주고는 뒷길을 돌아 컴컴한 곳만을 골 라 데리고 와서 카누에다 태우는 거야. 그리고 섬 사이를 돌아 여기로 데리고 와 몸을 뒤져서 백묵을 빼앗고, 네가 의사를 마을로 다시 데려 다줄 때까지 돌려주지 않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또 이 뗏목을 알아낼 수 있도록 그 백묵으로 이 뗏목에다 표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는 떠났다. 그리고 짐은 의사가 오는 것이 보이거든 숲속에 숨어 있다가 의사가 떠나 버릴 때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로 했다 제41장 '유령이었음에 틀림없다' 의사는 노인이었다 꽤 마음씨가 착하고 친절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나는 어제 오후 동생과 함께 스페인 섬으로 가서 사냥을 하다가 거기 서 발견한 뗏목 위에서 캠프를 한 것인데, 한밤중에 동생은 꿈을 꾸다 가 자기 총을 발로 걷어차는 바람에 총알이 동생 발에 맞았으니 제발 좀 와서 치료를 해주고, 그 일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놓지 말고 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 까닭은, 우리 는 오늘밤 집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생각에 서 그러는 거 라고 했다. "뉘 댁이지" 하고 의사가 물었다. "저 아래 마을 펠프스 집사람이에요." "음" 하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어떡하다 총알에 맞았다구" "꿈을 꾸었어요. 꿈이 동생을 쏘았지요." "이상한 꿈도 다 있군. " 그는 초롱에 불을 켜고, 안장 주머니를 들고, 우리는 출발했다. 그러나 내 카누를 보았을 때 카누의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혼자라면 안전하지만 둘이서 타면 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윌요, 무서워할 건 없어요. 우리 세 사람도 편히 탈 수 있었으니까요." "어느 세 사람" "뭘요, 나와 시드와 그리고....그리고....그리고 총이죠 내 말은 이렇게 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음, 그래 ." 그러나 그는 뱃전에 발을 걸치고는 카누를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가로젓더니, 좀더 큰 것을 찾아올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 든 카누가 다 쇠사슬로 매어져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으므로 의사는 내 카누를 타고 자기가 돌아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좀더 찾아보거나, 혹은 또 돌아가고 싶다면 집으로 가서 사람 들을 곧 깜짝 놀랠 준비를 해놓고 있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아예 하고 싶지 않다고 하고는 의사에게 뗏목으로 가는 길 을 가르쳐 주었다. 의사는 혼자서 떠났다. 얼마 후에 내 머리에 묘안 하나가 떠올랐다 격언에도 있듯이, 만일 양이 꼬리를 세 번 흔드는 그 잠간 사이에 그 의사가 다리 치료를 할 수 없다고 가정하면 3,4일 걸린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의사의 입에서 비밀이 누설될 때까지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단 말인가그것은 결단코 안 될 소리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 기다리고 있기는 하자. 그리고 의사가 돌아와서 또다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나 도 뗏목 있는 데로 가자. 헤엄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의사를 꼭 결박해 놓고 강을 내려가기로 하자 그리고 톰에게 의사가 필요없게 되면 의사에게 치료비를 주기로 하자 그렇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돈을 고스란히 주기로 하든지, 그 다음에 상륙시킨단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는 한잠 자기 위해서 재목더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눈을 떴을 때 해는 머리 위에 높이 떠있었다 나는 재빨리 의사 의 집으로 내달린 것인데, 집사람들이 하는 말이, 의사는 어제 밤중에 떠난 채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크, 그럼 톰의 상처가 심 한 모양이구나 그러면 어서 섬으로 가기로 하자 이렇게 생각하자 나 는 그 집을 뛰어나와 급하게 모퉁이를 돈 것인데. 하마터면 사이러스 아저씨의 배를 들이받을 뻔했다 "어이, 톰 지금까지 어딜 가 있었느냐, 이 장난꾸러기 녀석아" "가긴 어딜 가요. 다만 도망친 검둥일 찾고 있었을 뿐이에요. 나도, 시드도." "대체 어디 갔었느냐 말이다 네 숙모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몰라" "걱정할 거 없어요. 우린 모두 무사하니까요.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개 뒤를 따라간 것인데, 뒤떨어지고 말아 그만 사람들을 놓치고 말았어요. 그러나 상류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카누를 타고 뒤를 쫓으면서 강을 건넌 것인데, 그만 놓치고 말았지 뭐예요. 그래서 우리는 강을 올라온 것인데 그 동안에 그만 녹초가 되고 말아 카누를 둑에다 매놓고 자고 있었어요. 푹 자고 겨우 한 시간 전에 눈을 떴는데, 소식을 들으러 이쪽 둑으로 왔어요. 그리고 시드는 무슨 소식을 들을 게 없나 하고 우체국으로 가고, 나는 뭐 먹을 것을 좀 살까 하고 서로 헤어져, 그것이 끝나면 우린 집으로 갈 작정이었어요." 그 다음 우리는 시드를 찾으러 우체국으로 가보았지만, 내가 예측한 대로 물론 시드는 거기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우체국에서 편지를 한 통 받고, 좀더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저씨는 자 가자꾸나, 시드는 싸질러 다니기에 싫증이 나면 걸어서 오거나, 카누를 타고 오거나 하면 될 테니, 우린 마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나는 우체국에 남아서 시드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아저씨는 막무가내로 그런 짓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너는 어서 나 와 함께 가서 아주머니에게 너희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막무가내였다. 우리들이 집에 이르자 샬리 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우는 등 웃는 등 그야말로 기뻐서 야단이었고, 나를 꼭 껴안고는 아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때리는 홍내를 내면서 시드가 돌아와도 이렇게 때려 주겠다고 협박했다. 마침 점심을 먹으러 온 농부들과 그 마누라들로 초만원이었고, 떠들어대는 꼴이란 대단했다. 그 중에서도 호치키스 할머니가 가장 심했고, 그 혀는 쉴 사이가 없었다. "한데 말유, 펠프스 성님 난 그 오두막집 안을 낱낱이 뒤졌다우. 그래 그 검둥이 녀석 미친 게 확실해. 담렐 성님에게도 내 그랬지만∼ 담렐 성님, 안 그했수-그랬구말구요, 그놈 미쳤다고 그랬다우 -난 정말 그렇지 뭐야. 다들 얘길 들으셨겠지. 미쳤다고 그랬지 뭐 야윌 봐도 그렇게 밖엔 생각되지 않는다고 그랬다우. 거기 있는 그 숫 돌을 좀 보라고 내 안 그럽디까. 제 정신이 있는 녀석이라면 그런 미친 수작을 숫돌에다 쓰진 않을 것이 뻔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내 안그럽디까. 여기서 이러저러한 사람의 가슴은 터졌느니, 여기서 이러저러한 사람은 37년 동안을 보냈다느니 뭐니, 루이 뭐래는 사생아니 뭐니 터무 니없는 수작을 써넣고 있는 게 아녜요. 그 검둥이 녀석은 완전히 돈 녀석이라고 내 안 그럽디까. 제일 먼저 그 얘길 한 사람도 나구 중간에 가서 한 사람도 나구 맨 나중에 가서 한 사람도 나였지 뭐유, 그 검둥 이 녀석은 돌았다구. 네복쿠드니저 모양으로 돌았다구." "그리고 또, 아 글쎄 호치키스 성님, 그 헝겊으로 만든 사다릴 좀 봐요." 담렐 할머니가 끼여들었다. "대관절 그건 뭣에 쓰자고 그게 필요 했담" "바로 그 얘길 이제도 방금 어터백 아우님에게 하던 참이었지 뭐유 물어봐요, 얘기할 테니까. 아우님은 그랬다우. 거기 있는 헝겊 사다릴 보라고 그랬다우. 그리고 나도 그랬지, 그걸 보라구. 뭣 펌에 그런 게 필요했을까 하고 그랬지 뭐유. 아우님도 그랬다우, 호치키스 성님, 어 터 백 아우님도 그랬다우." "헌데 대관절 어쩌자구 그 숫돌을 거기 넣은 것이었을까 게다가 누 가 거기다 그 구멍을 팠을까 게다가 누가.... "그래요 정말, 펜로드 성님 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수 이제 ∼거기 있는 꿀 접실 좀 이리 주-난 던랩프 성님에게 이제 방금 그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우. 어떻게 해서 그 숫돌을 거기 넣었을까 하 구 게다가 그것도 혼자서 ....혼자서 말이에요 자 문젠 거기죠. 혼자 서라는 말은 제발 그만두라구, 누가 도운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내가 그랬죠. 게다가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라 좨 많은 사람이 도왔을 거라구 그 검둥일 도운 사람은 열들은 돼요. 그리고 누가 했는지 모르겠 으면 이 집 검둥이들을 낱낱이 두들겨서 라도 반드시 도운 놈을 찾아내 고야 말겠다고 내 그랬죠. 게다가 또 난.... "열둘이라구 ....마흔 명이 있어도 그만한 일을 모두 해내진 못해요. 그 칼집에 든 칼톱이니 뭐니를 좀 보구려 그걸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겠수 그걸로 잘라낸 침대 다릴 좀 봐요. 여섯 명이 한 주일은 걸릴 일이에요 그리고 그 침대 위에 있는 짚으로 만든 검둥일 좀 봐요. 그리고 또.... "어쩌면 그렇게도 성님 말이 옳소, 하이타워 형님. 그 말은 내가 다 른 사람도 아닌 펠프스 형님에게 이제 방금 하던 그대로구려. 그 양반 말이, 어떻게 생각하오 호치키스 아주머니 하고, 그 양반이 그러는 게 아냐. 어떻게 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펠프스 형님 하고 내가 끼여들지 않았겠어. 그랬더니 그 양반 하는 소리가, 뭔 뭐야, 그렇게 잘라진 침 대 다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는 소리지 뭐냐구, 그 양반이 그러는 게 아냐.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니 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내가 따 지지 않았겠어. 다리가 자기 손으로 자길 잘랐을 리도 만무하고, 어느 누가 꼭 잘랐을 거라고 내가 해주었단 말이야. 노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게 내 의견이라고, 쓸데없는 의견일지 모르지 만이라고.하지만 아무리 쓸데없는 거라도 내 의견이라고. 누가 좀더 나은 의견 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말해 보라고 내 그했단 말이야. 내 얘긴 그뿐이 야 난 던랩프 아주머니에게 그했단 말이야, 그했단 말이야.... "이봐요, 그만한 일을 하려면 적어도 4주간을 매일밤 거진 방안이 검둥이들로 틀림없이 들끓었을 거예요, 펠프스 아주머니. 그 셔츠 좀 봐 요. 구석구석 잔뜩 피로 쓴 비밀 아프리카 글씨가 써 있지 않습디까 쉴새없이 여러 놈이 열심히 낑낑대며 그걸 썼을 거요, 필경. 물론 누가 그걸 인어 주면 내 2달러 내놓지, 그리고 그걸 쓴 검둥이놈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면, 그놈을 붙잡아서 그저 당장에 능지처참을 하고. 그리 고는.... "그 검둥이놈을 도운 놈들이라고, 사플스 형님 여보. 당신이 이 집 에 조금 전서부터 있었다고 해보오. 필경 그렇게 생각했을 거니. 아 글쎄, 그놈들은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막 훔치는 게 아니냐 말이에요. 아 우린 그걸 줄곧 감시하고 있었다니까요. 그놈들은 그 셔츠를 빨랫줄에 서 훔쳐갔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헝겊 사다릴 만든 그 욧잇 말이에요. 아, 글쎄 그걸 몇번 훔쳐냈는지 몰라요. 그리고 밀가루를 훔쳐내지 않나, 초를 훔쳐내지 않나 촛댈 훔쳐내지 않나, 스푼을 훔쳐내지 않나, 헌난상기를 훔쳐내지 않나 그밖에도 그만 다 잊어 버리고 말았을 정 도로 내 새 캘리코 옷까지 훔쳐내지 않았느냐 말이에요. 게다가 아까 도 얘기한 것처럼, 나와 마누라와 시드와 톰은 주야를 가릴 것 없이 줄 곧 감시를 하고 있었죠. 한데 감쪽같이 그림자 하나가 보였겠어요. 달 각하는 소리 하나가 들렸겠어요. 그리고 마지막 판에 가서 참 기가 막 혀서, 그놈들은 내 코 바로 아래로 몰래 침입하여 우리를 실컷 조롱한 게 아니만 말이에요. 그리고 우릴 조롱했을 뿐만 아니라 그놈들은 인디언 부락의 강도놈들이었다니까요. 그리고 감쪽같이 그 검둥일 데리 고 실제로 도망쳐 버렸죠. 10명의 사나이와 22마리의 개가 곧장 그 뒤를 쫓았지만 헛수고였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참 나 정말 이런 얘기 가 세상에 어딨어요 글쎄. 도깨비 찜쪄먹을 재주였다니까요, 왜냐하면 여러분들 우리집 갤 잘들 알고 있죠 그놈들보다 좋은 개가 어디 있습디까 한데 그놈들이 놈들 냄새를 한 번도 맡지 못했다니까요, 아 글 쎄 누가 그걸 설명할 사람이 있어요 아무라도 좋으니" "정 말 금시초문인데.... "정말 말이 야, 한 번도.... "맹세코, 난 아직 .... "도둑질만이 아니지 .... "어머나, 이런 집에서 살라면 난 무서워서 그만.... "살기가 무섭다니 무섭다 안 무섭다가 다 뭐유, 자자니 잘 수도 없고, 일어나 있자니 일어나 있을 수도 없고, 누워 있자니 누워 있을 수 도 없고, 앉아 있자니 앉아 있을 수도 없지 않겠수 글쎄, 릿지웨이 성 님. 글쎄 놈들은 집안 식구까지 훔쳐가지 않을까 이봐요, 정말 어젯밤 한밤중 12시가 됐을 때, 내 얼마나 놀랐는지 성님도 아시겠구려. 정말 난 놈들이 집안 식구의 누굴 훔쳐가지나 않을까 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해서, 어떡허면 좋을지 몰라 제정신이 아니었다니까요, 글쎄. 이젠 낮 이니까 우습게 생각되지만, 내 맘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저기 저 높은 곳에 있는 쓸쓸한 방에서 내 불쌍한 어린것이 자고 있을 테지 하고 생각하니 내 맘 같지 않아, 그래서 몰래 올라가서 밖에서 열쇠를 채워 안에다 가둬 두지 않았겠수 정말 그렇게 했다우. 안할 부모가 어딨겠수, 세상에 왜라니, 글쎄, 성님 좀 생각해 보구려, 성님이 그렇게까지 무서워서 벌벌 떨고 그 무서운 마음이 언제까지 자꾸만 계 속되고, 맘이 뒤죽박죽이 되어 그만 여러 가지 미친 지랄을 시작하게 되고, 또 맨 나중에 내가 애라면 그 맘속이 어땠겠수. 그리고 저 위층 자물쇠도 채워 있지 않는 방에 있었더면 어땠을 거냐 말이야. 그리고 성님은.... 여기서 아주머니는 말을 끊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빠진 표정으로천천히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나에게 쏠렸을 때, 나는 일어서서 산책을 나갔다. 오늘 아침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 방에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잠 간 산책을 하며 생각해 보면 근사하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혼 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아주 머니가 나를 부를지도 몰랐으므로 나는 멀리는 가지 않았다. 저녁때 늦게 사람들이 모두 가버린 틈을 타서 나는 집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에 게 낱낱이 일러바쳤다. 밖에서 왁자지껄하고 땅 하는 총소리에 그만 나와 시드는 잠이 깨어 그 재미난 소동이 구경하고 싶어서 문에는 쇠 가 채워져 있어 피뢰침을 타고 내려왔다. 그래서 둘 다 약간 부상을 입' 었다. 다시는 이런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그러고 나서 아까 사이 러스 아저씨에게 한 얘기도 전부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너 희들을 용서해 주마, 어쩌면 이젠 이걸로 만사가 다 잘 되었을 테니까라고 했다. 또 사내애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고 까지 하며,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사내애들이 라고 하는 것은 모두 분별없이 저런 짓을 하는 것이니까, 그 장난에서 아무런 해도 일어나지 않은 이상 나는 이젠 다 끝난 일로, 마음을 조리 기보다는 너희들이 살아 있어 몸이 성 하고 아직 이 아주머니하고 같이 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있는 날까지 있다가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다음 에 아주머니는 나에게 키스를 하고,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멍 하니 무슨 생각에 젖어 있었지만, 그때 부리나케 일어서며 이렇게 말 했다. "아니, 이거 큰일이구나,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시드는 아직 돌아오지않으니 그 앤 어떻게 된 셈일까" 나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머니 앞으로 뛰어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당장 뛰어가서 데려올게요. " "아냐, 넌 안 돼. 넌 지금 있는 데서 한 걸음도 나가선 안 돼. 한꺼 번에 다 잃어 버리면 안 돼. 저녁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아저씰 보내지 ." 그러나 저녁 때가 되어도 시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끝내고는 아저씨가 곧 떠났다. 아저씨는 밤 10시경에 다소 걱정스러운 낯으로 돌아왔다 톰과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샬리 아주머니는 여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 이러스 아저씨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며 사내애는 역시 사내 애니까 이 애도 아침이 되면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올 테지 하고 말했다. 그래서 아주머니도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난 어쨌든 좀더 앉아 있다가 그 애 눈에 띄도록 불을 켜놓고 있겠노라고 했다 그 다음 내가 잠자리에 들려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때 아주머니는 초를들고 따라와, 나에게 이불을 잘 덮어주며, 웬일인지 나 자신이 천하게 느껴지고. 도저히 정면으로 아주머니 얼굴을 쳐다볼 수 없으리만큼 애 정 깊이 자기 애처럼 나를 대해 주었다. 그리고는 침대 한곁에 걸터앉 아 한참 동안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시드가 여간 좋은 애 가 아니라는 것과, 언제까지 시드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으로, 가 끔 나에게 시드가 죽은 것같이 생각되지 않느냐는 등, 또는 어쩌면 물 에 빠진 게 아니겠느냐는 등 뚱딴지 같은 소리를 묻기도 했고, 또 혹은 지금쯤 어디서 고생을 하고 있거나 죽거나 내가 옆에 있어서 간호도 해줄 수도 없고, 그 때문에 이렇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니냐고 도 하며 사뭇 한숨을 짓는다 나는, 시드는 문제없어요, 아침이 되면꼭 돌아올 거예요 했더니, 아주머니는 내 손을 꼭 쥐고는 나에게 키스 를 하고 다시 한번 그런 말을 해보라고, 어서 자꾸만 그런 말을 하라 고,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풀린다고, 나는 이제 걱정이 되어서 죽을 지경이니까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방을 떠나려고 할 때 아주머니는 내 눈을 아주 부드럽게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문에는 열쇠를 채우지 않는다. 톰. 그리고 피뢰침도 창도 그대로 있다. 하지만 넌 착한 애지 그래서 아무 데도 가진 않겠지 날 생각해 .'.』 " 사실 나는 톰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게 알고 싶어서 의젓하게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꾸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주머니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보니 차마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머니 일도 마음에 걸리고, 톰의 일도 마음에 걸렸다. 그 래서 잠자리가 편치 못했다. 밤중에 두 번이나 피뢰침을 타고 내려갔 다. 그리고는 몰래 집 정면으로 돌았다. 아주머니는 창가에다 촛불을 켜놓고 그 옆에 앉아서 한길 쪽을 내다보고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 었다 나는 아주머니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나 아 주머니를 슬프게 해줄 일은 다신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밖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번째 눈을 뜬 새벽녘에 몰래 또다시 기어내려가 보니, 아주머니는 그때까지도 거기 있었다. 촛불은 거의 꺼져 가고 있었고, 아주 머니는 늙은 백발을 손을 베개삼아 자고 있었다. 제42장 왜 짐은 교수형을 당하지 않았나 아침 전에 사이러스 아저씨는 또다시 마을로 들어가 보았지만 톰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생각에 젖어 식탁에 앉기는 했지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비장한 얼굴을 하고는, 커피는 식는 대로 내버려둔 채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앉아 있었다. 얼마 후에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 편지를 당신에게 주었던가" "무슨 편지 말유" "어제 우체국에서 가지고 온 편지 말이야." "아뇨, 무슨 편지를 줬다고 그러우." "그럼, 내가 잊어 버린 모양이군." 아저씨는 주머니를 뒤져 본 후 그것을 파둔 곳으로 가서 찾아가지고 와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나. 센트 피터즈버그-형님에게서 온 편지가 아니유" 나는 다시 한번 산책을 나갔다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봉투를 뜯어 보기 전에 그것을 떨어 뜨리고는 내달렸다.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보았다. 그것은 이 불 위에 누운 톰 소여와 예의 그 노인 의사와 여자용 캘리코 옷을 입고 두 손을 뒤로 묶인 짐,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편지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물건 뒤에다 감춘 뒤에 재빨리 달려갔다. 아주머니 는 울면서 톰에게 몸을 내던졌다. "아이고, 죽었구나, 죽었어. 필경 죽었을 거야" 그러자 톰은 몸을 움직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아주머니는 두 손을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구나, 아이구 고마워라 살아 있기만 하면 그만이야 " 아주머니는 톰에게 키스를 하고 나서, 침대 준비를 하러 집으로 달려가면서 한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혀를 부지런히 놀려가며 좌우에 있는 검둥이들이나 누구에게든 닥치는 대로 할 일을 분부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짐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것을 보려고 뒤에서 쫓아갔다. 노인 의사와 사이러스 아저씨는 톰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노발대발하며, 그 중 몇 사람은 동네 검둥이들의 견본으로 짐을 목매달아 죽이라고 야단이었다. 그렇게 하면 다른 검둥이들은 짐이 한 것처럼 도망할 생각을 안할 것이고, 이러한 대소동도 일으키진 않을 터이고, 집안 전체가 밤이나 낮이나 죽을 만큼 벌벌 떨고 있을 리도 만무할 게 아니냐고 야단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짓 을 해도 아무 소용 없다고 반대했다 이 검둥이는 우리들의 검둥이가 아니니까 필경 그 주인이 와서 우리들에게 그 대가를 물어내라고 종주 먹을 댈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잔뜩 흥분하고 있던 사람들도 다소 냉정해졌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나쁜 짓을 한 검둥이 의 목을 매달아 버리라고 항상 가장 열심인 사람들은 목을 매달아 만 족을 얻은 후에 그 검둥이의 대가를 물어낼 단계가 되면 늘 벌벌 떠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짐에게 몹시 욕설을 퍼부었고, 가끔 짐의 따귀를 을려붙였지만 그러나 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또 나를 아는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짐을 그 붙여 지은 오두막으로 끌고들어가 짐이 입고 있던 옷을 다시 입히고. 또다시 쇠사슬로 결박 을 지은 것이지만 이번에는 침대 다리가 아니라 토대 통나무에 박은 커다란 고리쇠에다 붙잡아 매었다. 게다가 두 손과 두 다리를 쇠사슬 로 결박지어 놓고,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음식물로는 빵과 물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고 말하며, 파낸 구멍을 메꾸고, 경매에 걸어 팔 아 버릴 때까지 농부 두 사람씩 밤마다 총을 들고 이 오두막집 주위를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낮에는 불독을 문간에다 매어 두지 않으 면 안 되겠다고 했다 이력저력 이 일도 대강 끝이 나고 말았으므로 사 람들은 서로 욕지거리를 절반씩 섞어 작별인사를 하면서 뿔뿔이 흩어 지기 시작했다. 그때 노인 의사가 그곳으로 나타나 이 꼴을 얼핏 보고 는 이런 말을 했다.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굴어선 안 돼. 이 검둥인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내가 그 애 있는 데로 가보니까 누구 조력을 받지 않고서는 총알을 빼낼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 앨 혼자 남겨놓고 내가 사람들은 불러을 수 있을 만한 용태가 아니었단 말이야. 게다가 그 앤 점점 용태가 나빠 지기만 하여 마침내는 머리 상태마저 돌고 말아 날 절대로 접근시키려 고 하지 않으며, 내 뗏목에다 표시를 하면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는 등 쓸데없는 소리만 언제까지 끝없이 지껄이는 까닭으로 난 도저히 손댈 길이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을 데리고 오 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했더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검둥이 녀석이 어디서 기어나와 도와 주겠다고 하고는, 정말 그 말대로 훌릉하게 도와 주었어. 물론 나는 대번에 이 검둥이 녀석이 도망친 그녀석이로 구나 하는 걸 알아챘지 뭐야. 한데 아, 나 좀 보란 말이야 거기 그냥 그대로 꼼짝도 못하고 한낮 한밤을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단 말이야. 정 말 기가 막혀서 그때 나에겐 감기가 든 환자가 둘이나 있어 물론 그 사람들 진찰을 가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어디 차마 갈 수 있었어야지. 검둥이가 도망칠지도 모르고, 만일 그렇게 되는 날엔 내 탓 이 되고 말 테니까. 한데 어이 하고 불러서 들릴만한 거리 내에 스키프한 척 오는 놈도 없고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난 그대로 오늘 새벽까지 거길 떠나지 못하고 처박혀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데, 정말 이렇게 충실한 간호를 하는 검둥이 녀석을 보기란 난생 처음인걸. 게 다가 이 녀석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몸에 해가 올 것을 알았을 게 아니냐 말이야. 거기에다 몸이 기진맥진되어 있더란 말이야. 최근 몹시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는 표적이 대번에 드러나더라구. 그래서 난 이 검둥이 녀석이 좋아지지 않았겠소. 여러분, 이와 같은 검둥인 천 달러 의 가치가 있는 것이오. 게다가 또 친절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단 말이야.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모두 갖다 주었고, 그래서 그 앤 집에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집에 있는 것 이상으로 돈독한 간호를 받았을 거로 생각한단 말이야, 난. 거긴 퍽 조용한 곳이었으니까 그렇 지 않았겠소 거기서 난 그 애와 검둥일 데리고 오는 새벽녀까지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단 말이야. 그 동안에 몇 사람이 스키프를 타고 옆을 지나가지 않았겠소 천만다행으로 검둥인 짚이불 옆에 앉아 머릴 무릎 위에다 박고 세상 모르고 자고 있지 않겠어. 그래 난 그 사람들에게 눈 짓을 했더니 그 사람들은 살며시 접근해 와 검둥일 붙잡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등절하고 있는 놈을 그만 결박해 버려 아무 문제도 안 일어나고 말지 않았겠소. 그리고 애가 열에 뜬 얼굴을 하고서 자고 있 었으므로 우리는 소릴 내지 않게 노를 살살 저어 뗏목을 아주 감쪽같이 조용히 끌고 왔단 말이야. 아 그런데 이것 좀 보오. 이 검둥인 처음 부터 전혀 떠들지도 않고, 말이라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 이녀석은 절대로 나쁜 녀석이 아냐 여러분, 내 생각은 그렇소." 누가 그 말을 받아, "그렇습니까, 선생님, 그것 정말 신통한 얘긴데' 하고 맞장구를 쳤다. 다른 사람들도 얼마간 손이 누그러지고 말았으므로 난 그처럼 짐에 게 선심을 써준 그 노인 의사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너의 사람을 보는 눈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어 기뻤다 나는 한눈에 벌써 이 사람은 좋은, 인정미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그래서 사람들은 짐이 매우 좋은 행위를 했기 때문에 얼마간 그걸 인정해 주고, 보답해 줄 가치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한 까닭으로 이젠 절대로 짐에 대한 욕설을 퍼붓지 않겠다고 모두 마음속으로 약속한 것이 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그 방에서 나와 쇠를 채우고는 짐을 안에다 가둬 버렸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도 무거우니까 쇠사슬을 하나나 둘 풀어주자는 등, 빵과 물 외에도 고기와 야채도 갖다 주자는 등, 그런 말 을 해주지 않나 하고 은근히 바했지만, 사람들은 채 생각이 거기까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 입으로 그 얘길 꺼낸다는 건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내 눈앞에 가로놓여 있는 난관만 돌파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샬리 아주머니에게 그 얘길 꺼내리라고 생 각하였다. 난관이란 건 톰과 내가 도망친 검둥이를 찾아서 그 지긋지 긋한 밤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얘기했을 때, 시드가 총에 맞은 것을 어 떻게 해서 내가 얘기하는 것을 깜빡 잊어 버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 명 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얼마든지 시간이 있었다 샬리 아주머니는 주야를 가릴 것 없이 줄곧 병실에 붙어 있었고, 나는 사이러스 아저씨가 병실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아저씨를 피해 몸을 감추었다. 다음날 아침, 톰의 용태가 훨씬 좋아지고 해서 샬리 아주머니는 한 잠 자러 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몰래 병실로 들어가 톰이 일어 나 있으면 집안 식구들에게 해도 의심을 살 염려가 없을 그러한 이야기를 꾸며낼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톰은 잠을 자고 있었 다. 아주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고, 이리로 운반되던 때와 같이 달아오른 얼굴이 아니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 앉아 톰이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분이 지나자 샬리 아주머니가 살며시 들어왔다. 나는 또 '이크 이런' 하고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고는 내 옆에 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젠 모두 기뻐해도 좋다는 등, 징후는 매우 양호하며, 저애는 자꾸만 저렇게 잠만 자고 있고, 점점 회복 일로에 있으며, 평온을 회복하고 있으니 십중팔구 이번에 눈을 뜨면 제정신으로 돌아오리라는 것 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톰은 몸을 꿈틀 거리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 다. "아니 이건 난 집에 돌아와 있는 게 아냐 어찌된 셈일까 뗏목은 어디 있는 거야" "그건 아무 문제도 없어 ." 내가 대꾸했다. "그리고 짐은" "아무 일 없어 ." 이렇게 대답은 했지만 그다지 힘있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톰은 그런 걸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옳지, 잘 됐어 이제 우린 안전하구나 아주머니에게 얘기했나" 내가 그렇다고 하려고 하는데 아주머니가 나보다 먼저 "윌 말이냐,시드" 하고 물었다 "뭔 뭐예요, 자초지종 전부 말이에요." "자초지종 전부라니" "전부가 전부지 뭐예요. 하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해서 우리들이 -나와 톰이 -도망꾼 검둥이를 자유의 몸으로 했는가 하는 거예요." "뭐라고 도망꾼 검둥일, 어머나, 이 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걸까,대관절 저런 저런, 너 또 머리가 이상해졌구나" "아뇨. 난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니고 모든 걸 제정신으로 하고 있는거예요. 나와 톰이 그 검둥일 자유의 몸으로 해준 거예요. 게다가 그걸 근사하게 해치웠어요." 톰이 지껄이는 것을 아주머니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내 가 끼여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봐요 아주머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어요. 몇 주일이 걸렸는지 모르겠어요. 밤마다 몇 시간씩,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자고 있는 동안에 말이에요. 그 다음 우리는 초니, 욧잇이니, 난상기니, 숫돌이니, 밀가루니,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물건을 훔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리 고 톱을 만드는 등, 펜을 만드는 등, 문구를 파는 등, 그밖에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얼마나 수고가 들었는지 아주머닌 모를 거예요. 그 리고 또 얼마나 재미 있었는지 그 맛의 절반도 아주머닌 모를 거예요.그러고 나서 우리는 관이니 뭐니 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되었 고, 강도로부터 온 익명의 편질 쓰지 않으면 아니 되었고, 피뢰침을 기 어내려갔다 올라갔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붙여 지은 오두막으로 통하는 구멍을 뚫지 않으면 안 되었고, 밧줄 사다릴 만들어 파이 속에 다 넣어서 들여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고, 도구로 쓸 스푼과 그밖의 것 들을 아주머니 에이프런 포켓 속에다 넣어서 들여보내지 않으면 안 되 었던 거 예요. " "아니 , 얘들이" ....그리고 그 오두막 안으로 짐과 벗이 될 쥐니 뱀이니 뭐니를 잔뜩 틀어넣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그걸 아주머니가 톰이 모자 속 에다 버터를 넣은 채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아 놓고 있었으므로 이 일 은 하마터면 실패하고 말 뻔했어요. 왜냐하면 그건 우리들이 오두막을 나서기 전에 사람들이 우우 몰려왔기 때문으로, 우린 뛰어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인기척을 알아듣고 우리들에 게 총을 쐈던 것인데, 그 바람에 내가 맞은 거예요. 우리는 길에서 몸 을 비켜 그 사람들을 먼저 보내지 않았겠어요. 개는 왔어도 우리들에 겐 아무 볼 일도 없었으므로 앞으로 가버렸지 뭐예요. 그후 우리는 카 누를 타고 뗏목 있는 데로 향했고, 아주 완전한 몸이 되었고, 짐은 자 유의 몸이 된 거예요. 들어봐요, 이걸 전부 우리 손으로 해낸 거예요. 굉장하죠, 아주머니" "어머나, 이런 얘긴 난생 처음 듣는구나 정말 그럼 그게 모두 너희 들이었단 말이냐, 이 꼬마 악당 녀석들아. 요새 이러니 저러니 하고 장 난을 한 것도 감쪽같이 우릴 속여 우릴 죽도록 무섭게 한 것이 그게 모두 네놈들 장난이었단 말이냐. 이제라도 당장 네놈들을 혼내주고 싶 어 이 몸이 막 스멀거리는구나. 그것도 모르고 매일 밤 그렇게 궁상맞 게 걱정을 하며 있었다고 생각하니....너 남기만 해봐라, 이 장난꾸러 기 악당 녀석들아, 꼭 네 두 놈의 나쁜 버르장머릴 고쳐놓고 말 테니" 그러나 톰은 득의만만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얘기를 그만두기는커녕 혀는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주머니도 맞장구 를 치며 까닭없이 화를 내며 마치 고양이 싸움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지껄였다. "그래 좋아, 어서 지금 실컷 네 계획이 잘 됐다고 좋아해라. 왜냐하면 이봐라, 다시 한번 그놈에게 손을 대는 걸 나에게 들켜만 봐라." "누구에게 손을 대요" 통은 웃던 얼굴을 뚝 감추고는 깜짝 놀랐다는 얼굴로 물었다. "누구에 게냐고 누군 누구야, 물론 저 도망꾼 검둥이놈 말이지. 그 밖에 또 얘기할 놈이 있다더냐" 이번에 톰은 아주 정색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톰, 놈은 문제없다고 너 지금 그러지 않았던가 도망친 게 아니야" "놈이라니" 샬리 아주머니가 끼여들었다. "도망등이 검둥이 말이냐도망치다니 천만에. 무사히 데려왔단다 그래서 도로 그 방에다 처넣 고 빵과 물을 주고, 쇠사슬로 단단히 결박시켜 놓았어, 지금. 인수인이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팔아 버리거나 둘 중 하나야." 이 말에 톰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두 눈은 이글이글 노기를 띠고 있 었고, 콧구멍은 물고기 아가미처럼 열렸다 닫혔다 하고 있었다. 그리 고는 나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짐을 가둘 권리가 있는 놈은 아무도 없어 어서 가, 빨리 분이라 도 꾸물거리고 있어선 안 돼. 쇠사슬을 풀어 주는 거야 짐은 노예가 아냐. 이 지상을 걸어다니는 어느 생물 못지않게 자유의 몸이야" "아니 이 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난 한 마디 한 마디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샬리 아주머 니. 아무도 안 간다면 내가 가요. 난 처음부터 그 검둥이 일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기 있는 톰도 알고 있어요. 왓슨 아주머닌 두 달 전 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리고 전에 짐을 하류에다 팔려고 하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유언으로 짐을 자유 의 몸으로 한 거 예요." "그럼, 대관절 넌 뭣 펌에 짐을 자유의 몸으로 하려고 했단 말이냐, 벌써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서" "글쎄요, 실은 그게 문제예요, 역시 아주머니도 여잔 여자군요 뭘 요, 난 그 모험의 재미를 맛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목까지 담그고 피바다를 건너는 한이 있어도....아니, 폴리 아주머니" 폴리 아주머니가 파이를 실컷 먹은 천사 모양으로 기분 좋은 얼굴로 만족스럽게 문 안쪽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샬리 아주머니는 폴리 아주머니에게로 뛰어들어 목이라도 떼어 버릴 듯이 꼭 껴안고는 매달려 울었다. 암만해도 우리들에게 사태가 불리하 게 벌어질 것만 같아 나는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 거기서 내다보고 있으려니까, 얼마 후에 톰네 폴리 아주머니는 샬리 아주머니를 풀어 젖히고는 안경 너머로 톰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 꼴은 마치 톰을 땅 속에다 쑤셔박아 버리려는 듯한 꼴이었다. 얼마 후에 폴 리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옳지, 넌 저쪽을 보고 있는 게 좋을 거다 나라면 그렇게 해, 톰 " "어머나" 샬리 아주머니가 끼여들었다. "이 애가 그렇게 변했어요아니, 이 아인 톰이 아냐요, 시드지, 통은....톰은 아니, 톰은 어디 갔을까 조금 아까까지 여기 있었더랬는데 " "아우님 얘긴 허클 핀 얘기야. 허클 핀 얘기래두 이 긴 세월 동안 톰과 같은 장난꾸러기를 길러낸 내 눈에 톰을 못 알아볼 리가 어딨어.잘못 본다는 건 참 이상한 얘기지. 그 침대 밑에서 어서 나와, 허클 핀." 그래서 나는 나왔지만 가슴속이 조마조마했다. 달리 아주머니는 마치 여우에게 흘린 듯한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 는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그 것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아주머니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사이 러스 아저씨였다. 마치 아저씨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그날 하루를 멍 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지냈다. 그날 밤 기도회의 설교를 한 것인데, 그 것은 아저씨를 굉장히 유명하게 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최연장자라도 그 설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 톰네 폴리 아주머니는 내가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낱낱이 얘기했다. 그래서 나 도 톰 소여로 오인을 받았을 때 얼마나 입장이 곤란했었는가를 얘기하 지 않을 수 없었다. 펠프스 부인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아니다. 앞으로도 샬리 아주머니라고 날 불러줘. 난 그렇게 불리는 데 익숙해졌고, 그러니 고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샬리 아주머니가 나를 톰 소여로 오인했을 때 나는 그대로 참고있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을 부득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밖에 딴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톰이 그런 것에 마음을 쓰고 있지 않으리라고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비한 것이라면 톰은 혹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리고 톰은 거기서 모험을 만들어 내고는 완전히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톰은 자기가 시드인 척하여 되도록 나의 입장을 곤란하게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톰네 폴리 아주머니는 왓슨 아주머니가 유언으로 짐을 자유의 몸으로 해준 것은 톰이 말한 그대로라고 했다 그렇다면 결국 톰은 자유의 몸인 검둥이를 자유의 몸으로 하기 위해서 그런 귀찮은 연극을 했고 성가신 일을 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 순간까지, 또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 그런 좋은 집안에서 자라는 톰이 어찌하여 검둥이를 자 유의 몸으로 하려는 사람을 도을 생각이 났는지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샬리 아주머니가 톰도 시드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자기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노라고 폴리 아주머니는 말했다. "옳지, 저것 좀 봐 내 생각하던 그대로야, 그 앨 감독할 사람 하나 붙이지 않고 흔자 떠나보냈으니 저 꼴이 되고 말았지 그러니까 내가 당장 강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겠고, 이번엔 그 애가 무슨 일을 저지 를지 그걸 가봐야겠다고 말이야. 아우님한테서 그것에 관한 답장이 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아니, 형님이 무슨 편질 했단 말이오 한 장도 못 받았는데 우린." "아니 저런 그래도 난 시드가 와 있다고 하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냐고 두 번씩이나 안부 편질 냈는데 " "하지만 한 번도 안 받았수, 형님." 폴리 아주머니는 천천히 엄숙한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 "너지 , 톰" "예 뭔데요" 통은 시치미를 떼고는 뚱해서 대답했다. "뭔데요라니, 이 뻔뻔스러운 녀석아. 그 편지를 이리 내놔." "무슨 편지 인데요" "그 편지 말이야. 네 녀석을 거꾸로 매달아서라도 그 편지를 내놓게 하고 말 테니 어디 봐라." "가방 속에 있어요. 그럼 됐지요. 우체국에서 찾아온 대로 그대로 뒀어요. 난 안은 보지도 않았어요. 만져 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이 편 지가 귀찮은 문제를 일으키리라는 건 알았어요. 그래서 급한 편지가 아니 라면 감춰도 좋으리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 암만해도 네 녀석을 때려야만 해, 꼭. 그건 틀림없어. 그후 난 또 한 통, 그리 간다는 편질 했는데 그것도 저 녀석이.... "아는, 그건 어제 왔어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 그건 확실히 받았습니다. " 나는 샬리 아주머니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에 2달러를 걸어도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짓은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하 리라고 생각하고는 잠자코 있었다. 최종장 이 이상 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톰과 들이만 있게 되자 탈출에 성공했을 때에는 어떻게 할 작정 이었느냐고 물었다. 탈출에 성공하고,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있는 검 등이를 다시 또 자유의 몸이 되게 했을 때에는 어떻게 할 계획이었느 냐고 물었다. 그러자 톰은 짐을 무사히 도망치게 한 경우 처음부터 머 릿속에서 계획하고 있던 것은, 짐을 뗏목에다 태워서 강 하구까지 모 험을 하면서 데리고 내려간 후, 그 다음에는 짐에게 자유의 몸이 되었 다는 사실을 알려서 정정당당히 기선에 태워 고향으로 데리고 가, 짐 에게 이제까지 수고를 끼친 수고비를 주고, 미리 편지를 내어 고향 일 대의 검둥이들에게 출영을 나오게 하여, 횃불 행렬과 악대로 마을을 오게 한다. 그렇게 하면 짐은 영웅이 되고 우리들도 영웅이 될 게 아니 겠느냐고, 톰이 우쭐대었다. 그러나 나는 일이 이렇게 된 것만도 참 잘 되었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곧 짐의 쇠사슬을 풀었다. 그리고 짐이 그야말로 의사를 잘 도와서 톰을 간호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폴리 아주머니도, 샬리 아주 머니도, 사이러스 아저씨도 그야말로 떠들어대며 짐에게 훌릉한 옷을 입혔고, 먹고 싶은 것은 아무거나 마구 먹였고, 편히 그날 그날을 보내 게 하며,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병실로 짐을 데려다 놓고는 얘기꽃을 피웠다. 톰은 그렇게 참을성있게 우리들을 위해서 죄수 노릇을 해주었고, 그 역을 그렇게까지 잘 해준 대가라고 하면서 짐에게 40달러를 주었다. 짐이 기뻐하는 꼴은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저, 허클 도련님, 내 뭐라고 했었지. 그 작슨 섬에서 말이야, 난 가슴팍에 털이 나 있다고 하지 않더냐 말이야 그리고 다시 한번 부자가 된다고 하지 않더냐 말이야 그게 그대로 됐지 뭐야. 정말 그대로 성사 되고 말았지 뭐야 글쎄, 암만 나에게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예고는 역시 예고란 말이야. 깔볼 수는 없어. 그리고 내가 이제 이렇게 서 있는 게 확실한 것처럼 이제 다시 한번 부자가 되리라고 하는 걸 알고 있 었단 말이 야 진작부터 " 그러고 나서 톰은 언제 그칠지 모를 이야기를 계속 자꾸만 지껄이던 끝에, 가까운 장래에 밤에 셋이서 이곳을 탈출하여, 여행 도구를 준비 하여 반 달이나 한 달쯤 거기 토인 부락에 있는 인디언 사이에서 대모 험을 한바탕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말을 꺼냈다. 나는 좋겠다고,내 마음에 들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나에겐 도구를 살 돈이 없 고, 집에서 보내 달라고 할 수도 없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먼 옛날에 벌써 아빠가 돌아와서 대처 판사에게서 그 돈 전부를 틀림 없이 찾아갔을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톰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아직 마셔 버리진 않았어. 고스란히 그대로 있어, 거기 6천 몇백 달러의 돈이 그리고 네 아버진 그때 이후론 한 번도 돌아온 적이 없었어. 어쨌든 내가 떠날 때까진 돌아오지 않았어 " "그 양반은 이젠 돌아오지 않아, 허클 도련님 " 짐 이 끼여들었다 "왜, 짐" "왜구 뭐구 없어, 허클 도련님 하지만 그 양반은 돌아오지 않는대 - 그러나 내가 어찌나 몹시 따지고 드는지 짐이 털어놓았다. "이봐, 임자는 강을 떠내려온 집을 기억하고 있어 그 안에 사람이 있었지. 그 위에 무엇이 덮여 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덮여 있는 걸 들춰 보았는데, 아 왜 내가 임자더러 오지 못하게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임자는 필요할 때 임자 돈을 타 낼 수 있어. 왜라니 그게 그 양반이었으니까 그렇지 뭐야." 톰은 거의 완쾌되었고, 빼낸 총알을 시계 대용으로 줄에다 달아 목에다 걸고 있었다. 그리고는 늘 지금 몇 시냐고 하고는 그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래서 이것으로 이 이상 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기쁘다 그 까닭은 만일 책을 만든다고 하는 것 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를 알고 있었더라면 나는 이러한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는 않을 테 다. 그러나 나는 톰이나 짐보다도 먼저 토인 부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샬리 아주머니가 나를 양자로 삼아 사람 구실을 하게 해주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에도 그런 경험이라면 한 번 맛본 적 이 있지 않은가
101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댓글:  조회:1068  추천:0  2022-02-04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1771년 5월 4일 훌쩍 떠나오기를 정말 잘했다 싶네 ! 절친한 친구여, 사람의 마음이란 어쩌면 이렇게도 이상야릇한 것일까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며 떨어질 수 없었던 자네를 두고 떠나왔는데도 이렇게 즐거운 기분에 젖을 수 있다니 말일세. 그러나 자네는 용서해 주겠지. 자네 이외의 딴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마음을 지닌 인간을 괴롭히게 마련인 그런 숙명을 타고난 것만 같거든. 레오노레는 정말 안됐어. 하지만 그건 내 책임이 아닐세. 내가 그녀의 여동생의 개성적인 매력에 끌리어 교제를 하고 있는 동안, 레오노레의 가슴속에 나에 대한 연정이 싹텄다 하더라도 나로서야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는 해도----나에게는 정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레오노레의 감정에 그름을 부은 것이나 아니었을까? 레오노레의 꾸밈없는 심정이 드러나는 언동을 재미있어 하며, 사실은 전혀 우스꽝스럽지도 않은데 나는 남들과 함께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지나 않았던가? 정말 그러치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아아, 자신에 대해 스스로 비난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으니 인간이란 참 묘한 거야. 친구여, 나는 자네에게 약속하네, 나는 좀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힘쓰겠으며, 운명이 가져다 준 조그만 불행을 그전처럼 자꾸만 되씹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네. 현재를 즐기고 과거지사는 과거지사로서 흘려보내겠네. 자네가 말한 것은 정말 옳았어. 내 가장 사랑하는 친구여, 만일 인간이-----어째서 그런 천성을 타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부지런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지난날의 불행한 추억을 되새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현재를 태연히 견디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면, 인간의 괴로움은 훨씬 줄어들 텐데 말일세. 미안하지만 어머님께 말 좀 전해 주게. 어머님이 시키신 일은 될수록 잘 처리해서, 그 결과를 곧 알려드리겠다고 말일세. 아주머니를 만나봤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네. 떠들썩하고 괄괄한 성품이기는 하지만 근본은 선량한 여자일세. 우리 몫의 유산을 아주머니가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다는 어머님의 불만을 나는 아주머니에게 분명히 말해 줬네. 여기에 대해 아주머니는 아주머니대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조건을 제시한 다음, 그것이 충족되면 언제든지 몽땅 내 주겠다는 것이었네. 그것도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몫을 말일세----이제 이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네. 어머님께는 모든 것이 잘 돼 가고 있다고만 말씀드려 주게. 친구여, 이 하찮은 용건으로 해서 나는 새삼스레 느꼈는데, 이 세상의 분쟁은 악의나 흉계보다는 오해와 타성 때문에 일어나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네. 적어도 악의나 흉계 쪽이 수적으로 적다는 것은 틀림없네. 그건 그렇고, 이 곳에 온 뒤로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네. 낙원과도 같은 이 고장에서 고독에 잠길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마음에 귀중한 진정제 구실을 해 주고 있다네. 게다가 이 청춘의 계절은 곧잘 겁에 질리곤 하는 내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고 있다네. 모든 나무들, 모든 생울타리들이 꽃다발일세. 차라리 한 마리의 풍뎅이가 되어 향기로운 꽃냄새의 바닷속을 헤매면서 그 속에서 먹이를 찾는 몸이 되었으면 싶네. 이 도시 자체는 쾌적하지 못하지만 교외에는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네. 이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서, 지금은 고인이 된 M백작이 한 언덕 위에 정원을 꾸몄었네. 그 주위의 언덕들이 가로세로 아롱다롱 아름답게 이어지면서 더할 수 없이 아늑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곳일세. 그 꾸밈새는 단순하네. 그러나 그 속에 한 발짝만 들어서면 곧 느낄 수 있는 것은, 정원을 설계한 사람이 조경학자 같은 이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스스로 즐기려는 심정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일세. 벌써 몇 번이나 나는 이 정원 안의 황폐한 정자에서 고인이 된 백작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네. 그 곳은 백작이 생전에 사랑했던 장소요, 나도 또한 그 곳이 마음에 드네. 머지않아 나는 이 정원의 주인이 될 걸세. 이제 겨우 2,3일밖에 안 되었지만, 이 곳 정원사도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고 있네. 내가 이 곳 주인이 되어도 그가 싫은 얼굴을 하지 않으리라 여겨지네. 5월 10일 희한한 상쾌감이 내 영혼에 충만해 있네. 내가 마음껏 음미하고 있는 요즘의 달콤한 봄날 아침과도 같은 그런 상쾌감이었네. 나는 혼자서 호젓이 시간을 보내며, 나 같은 삶의 영혼을 위해서 마련된 성싶은 이 고장에서 내 삶을 즐기고 있네. 나는 정말 행복하네. 친구여, 나는 편안한 심정에 잠겨 있다네. 덕분에 내 예술이 피해를 입고 있는 정도일세.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릴 수가 없네. 한 획의 선조차 그릴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지금처럼 위대한 화가가 되어 본 적은 일찍이 없었네-----나를 둘러싼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드높은 하늘에서 비치는 햇빛은 울창한 숲의 꼭대기에서 머뭇거리며, 그 속의 성전에는 다만 몇 줄기의 빛살만이 새어 들어올 뿐일게. 그럴 때면 나는 소리내어 흐르는 시냇가의 무성한 풀밭에 누워 대지에 얼굴을 바싹대고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풀들을 살펴보곤 한다네. 그리하여 풀줄기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생물들 세계의 준 동이며, 기어다니는 벌레와 날벌레들의 무궁무진한 여러 모습들을 가슴 뿌듯이 느끼는 걸세. 그러고는 새삼 우리네 인간을 자기의 모습과 같이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존재를 실감하고, 우리를 영원한 환희 속에서 떠돌게 해 주신 지극히 높고 자애로운 분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네. 그러다 보면 친구여 ! 내눈은 어느 결엔지 촉촉이 젖고, 나를 둘러싼 세계와 하늘이 마치 애인의 모습과도 같이 온통 내 영혼 속에서 안식을 취한다네----그럴 때 나는 그지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히며 생각에 잠긴다네. 아아, 내가 이것을 표현할 수가 있다면, 내 기슴 속에 이토록 충만하고, 이토록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화면에다 내뿜을 수가 있다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거울인 것처럼, 그것을 내 영혼의 거울로 삼을 수가 있다면......하고 말일세-----친구여, 그러나 나는 한창 그런 생각에 잠겼다가도 그만 힘이 빠져 버리고 만 다네. 이 장엄한 현상의 힘에 기가 꺾여 버리고 마는 걸세. 5월 12일 이 곳에는 사람의 마음을 호리는 정령이 있는지, 아니면 성스럽고 생생한 상상력이 내 가슴속에 깃들어 그것이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이토록 낙원같이 바꾸어 버리는 건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네. 시내 입구 가까운 곳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인어의 화신인 멜루지네 자매가 물에 이끌리듯, 나는 그 샘에 끌려가곤 한다네----자그마한 언덕을 내려가면 동굴이 하나 나오고, 거기서 다시 층층대를 스무 단쯤 내려간 곳에 그 샘이 있는데, 맑디맑은 샘물이 대리석 바위틈에서 솟아나고 있네. 샘을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돌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다란 나무들, 얼굴에 확 끼치는 시원스런 냉기, 이 모든 것들에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 그리고 사람을 전율케 하는 그 어떤 분위기가 있는 것일세. 나는 거의 날마다 그 샘가에 1시간 가량씩 앉아 있다네. 거시 앉아 있노라면, 시내에서 아가씨들이 와서 샘물을 길어 가는 걸세.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면서도 가장 필요한 일이네. 그것을 보고 앉아 있으면, 부족사회 시대의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이나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걸세----마을 어른들이 샘가에서 서로 인사를 트고, 혼담을 교섭하며, 우물가에는 자비로운 정령들이 떠돌고 있는 걸세----아아, 이런 나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여름의 기나긴 여행 끝에 시원한 샘물로 기운을 되찾은 경험이 없는 사람일거야. 5월 13일 내 장서를 보내 주겠단 말인가?----제발 그 짓만은 하지 말아 주게. 나는 이제 이 이상 지도를 받거나 고무되거나 자극을 받고 싶지가 않네. 내 가슴은 스스로도 충분히 소용돌이치고 있다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을 진정시켜 줄 자장가일세. 그리고 그 자장가들은 내가 애독하는 호메로스의 시속에 얼마든지 있다네. 나는 설레는 나의 격정을 그 자장가로 여러 차례 달래어 왔네. 내 마음처럼 이토록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것은 또 없을 걸세. 새삼스레 이런 소리를 자네에게 할 필요조차 없겠지. 슬픔에 잠겼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정신적인 흥분으로 치닫는가 하면, 달콤한 우울에서 파괴적인 정열로 변하여 가는 내 모습을 목격하고 자네가 곤혹스러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말일세. 사실 나는 내 마음을 병든 어린애 다루듯 하고 있다네. 어떤 일이건 떼를 쓰는 대로 다 받아 줄 수밖에 없거든. 딴 사람들한테 이런 소리하지 말게. 좋지 못한 방향으로 해석할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일세. 5월 15일 이 고장 사람들과도 벌써 낯이 많이 익었고, 모두 나를 호의적으로 대하여 준다네, 특히 어린애들은 나를 무척 따른다네. 처음에 내가 이 곳 사람들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허물없이 물어봤더니. 내가 자기네를 놀리는 줄 알고 몹시 퉁명스럽게 대하는 이들도 있었네. 그러나 나는 화를 내지 않았어, 다만 내가 여태껏 몇 번이나 느끼고 있던 사실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따름일세. 다시 말하자면, 다소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서민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위엄이 손상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언제나 냉담하게 서민들을 멀리하고 있는 것 같다는 걸세. 그런 반면에 자기만은 파격적인 체하고 일부러 공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거만스러움을 서민들이 한층 더 느끼도록 하는 경박하고 악의적인 사람들도 있는 거라네. 우리네 인간들이 모두 평등하지 않으며, 또 평등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잇네. 그러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 이른바 하층계급 사람들을 멀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패배가 두려워서 적군 앞에서 도망치는 비겁한 자와 마찬가지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네. 며칠 전에 새가 샘에 나갔더니, 거기 젊은 하녀 한 사람이 있었네. 그녀는 물통을 층층대 맨 아래에 놓고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더군. 물통을 머리에 이도록 거들어 줄, 누군가 아는 사람이라도 없나 하고 살피는 것이었네.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그녀를 보고 말했지----「거들어 줄까요, 아가씨?」----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대답했어----「아니예요, 나리」----「사양할 것 없어요」----그녀는 머리 위의 또아리를 바로잡았고, 나는 물통을 이도록 거들어 주었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층층대를 올라가더군. 5월 17일 나는 모든 계층 사람들과 알게 되었지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아직 찾지 못했네. 내가 지닌 어떤 점이 사람을 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나를 좋아해 주고 있네. 그러나 이 사람들과 나는 다만 잠시 동안만 길을 같이 가는 것 뿐이요, 머지않아 서로 헤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슬프다네. 이 곳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냐고 자네가 묻는다면, 다른 고장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네. 인간들이란 대개 어슷비슷한 거라네. 인간들은 대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기 위한 일에 다 써 버리고서, 자유로운 시간을 살아가기 위한 일에 다 써 버리고서, 자유로운 시간이 그저 조금이라도 남아돌게 되면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잃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 시간을 없애버리려고 기를 쓰는 것이라네. 아아,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련 가!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정말 선량하다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을 잊고 아직도 인간에게 허용되어 있는 즐거움을 이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있다네. 훌륭하게 차려 놓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마음놓고 허물없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마차를 같이 타기도 하고, 댄스파티에 참석하기도 하네. 그런 모든 일들이 나에게는 아주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준다네. 그러나 나의 내부에는 아직도 많은 다른 힘이 잠자고 있으며, 그 힘은 전혀 사용되지도 않은 채 퇴장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레 감추어야만 한다네. 아아,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죄어드는 것만 같네----그러나 오해를 받게 마련인 것이 우리의 운명인 걸 어쩌겠나. 아아, 어릴 적 친구였던 그녀가 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차라리 그녀를 몰랐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라리지는 않을 것을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네.「너는 바보야!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있으니까」그러나 그녀는 나의 친구였다네. 그 무렵 나는 그녀의 위대한 영혼과 접촉했었네. 그 영혼이나를 감싸주었을 때, 나자신이 현실의 나 이상의 존재처럼 느껴졌었네.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가 있었던 걸세. 전말이지 그 때 나는 내 영혼이 지닌 힘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걸세. 그녀와 마주 대하고 있으면 그야말로 영묘한 감정에 휩싸여서, 자연을 고스란히 내 품안에 안아 들일 수 있었네. 우리의 교제는 더할 수 없이 섬세한 감수성, 비길 데 없이 날카로운 예지의 활동이 아니었던가. 그 활동이 갖가지 변화를 빚어내면서 나중에는 장난으로까지 번져 갔지만, 그러한 변화들이 모두 천재의 표시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아아, 그녀는 나보다 연상이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무덤으로 가 버리고 만 걸세. 결코 나는 그녀를 잊지 않으려네, 그녀의 그 꿋꿋한 기질과 숭고한 관용을. 2,3일 전에 나는 V라는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솔직한 청년이었네.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으로 자신이 남달리 영리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아는 것이 많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상당한 노력가인 모양이야. 예컨대 그는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세. 내가 그림을 꽤 그리고, 그리스어를 안다는 사실(이것은 이 고장에서는 놀라운 일이거든)을 저해 듣고는 나를 찾아와서, 그는 자신의 갖가지 지식을 늘어놓았네. 바토에서 우드에 이르기까지, 드필에서 빈켈만에 이르기까지를 논술하는 거야. 그러고는 슬 이론의 제1부를 독파했을 뿐 아니라, 고대연구에관한 하이네의 강의 필기 본을 갖고 있노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네. 또 한 사람 훌륭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공국의 법무관으로서 상냥하고 성실한 사람일세. 듣건대 그에게는 아이들이 아홉이나 있는데, 그 사람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보면 흐뭇하다는 걸세. 특히 그 사람의 맏딸에 대한 평판이 자자하네. 법무관이 나더러 한번 놀러 오라고 했으므로, 일간 찾아가 볼 생각일게. 그는 여기서 1시간 반쯤 걸리는 공작의 사냥별장에 살고 있네. 부인이 죽은 뒤에 허가를 얻어서 그리로 이사를 갔다는데. 이 곳 관사에서 그대로 사는 게 그로서는 견딜 수 없이 슬프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 밖에 두세 명의 괴짜들도 알게 되었는데, 아주 비위에 안 맞는 친구들일세. 특히 친한 체하는 그 태도들이 딱 질색일세. 그럼 안녕! 이 편지는 자네 마음에 들겠지. 아주 사실적이니까. 5월 22일 사람의 일생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함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바지만, 그런 생각이 내 머리에도 줄곧 떠오른다네. 인간의 활동과 연구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속에 갇혀 있는 꼴이란 말일세. 그런 것을 눈앞에 보게 되거나 또는 인간들의 모든 활동이 목적하는 바는, 결국은 갖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며, 그 욕망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가엾은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또 인간의 탐구가 어느 정도가지 이르면 만족해 버리고 마는 것은, 우리를 가두어 두고 있는 감옥의 벽에다 화려한 희망과 밝은 풍경을 그려 놓고서 좋아하는 허울좋은 체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거나 하면, 빌헬름이여,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마네. 나는 나 자신의 내부로 은둔하고 거기서 한 세계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또한 표현이나 생동하는 힘으로서 나타나기보다는 예감이나 막연한 욕망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일세. 그리하여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나의 오관 앞에 희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나는 꿈결인 양 그 세 계의 더 깊은 안쪽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네. 어린애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린애들을 많이 다루고 있는 박식한 가정교사들의 견해가 일치되고 있네. 그런데 어른들도 어린애나 마찬가지로 이 대지 위를 정처 없이 헤매면서 저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체, 뚜렷한 목적도 없이, 비스킷과 케이크, 그리고 채찍으로 조종되고 있는 것일세----이러한 사실은 아무도 시인하려 하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일세.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자네가 뭐라고 말할 건지 나는 알고 있네. 그러니 나도 기꺼이 승복하겠네. 그런 인간, 곧 어린애들과 마찬가지로 별생각도 없이 하루해를 보내며 인형을 안고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과자를 넣어 둔 서랍께로 살금살금 조심스레 다가가서, 마침내 소망하던 물건을 가지면, 그것을 한입 가득 먹고 나서 「더줘!」 하고 조를 수 있는 그런 인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일세. 또 자신의 무가치한 사업이나 자신의 욕정에까지 그럴듯한 명칭을 붙이고서, 그것이 인류의 행복을 위한 대사업이랍시고 버젓이 내세우는 그런 녀석들도 행복한 거야----그렇게 할 수 있는 녀석들은 행복하단 말일세. 그러나 겸허한 마음으로, 이런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네. 그런 사람들은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이 자기네의 조그만 정원을 낙원처럼 가꾸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일이며, 불행을 안고 있는 자들도 그 무거운 짐에 허덕이면서도 쉬지 않고 제길 을 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단 1 분이라도 더 오래 햇빛을 쬐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는 걸세----그렇지, 그런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역시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부터 이룩하며, 또한 행복한 것일세. 왜냐하면 그들 역시 일게 인간이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답답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가슴속에서는 언제나 자유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거라네. 그러하여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정신을 가지고 있는 거지. 5월 26일 자네는 옛날부터의 내 성벽을 알고 있겠지.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하여 그 곳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조촐하게 조용히 살고 싶어하는 그것 말일세. 그런데 여기서 나는 내 마음에 꼭 드는 그런 곳을 발견했다네. 이 도시에서 1시간쯤 걸리는 곳에 발하임이라는 마을이 있네. 언덕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그 위치가 아주 재미있네. 그 마을에서 좁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별안간 골짜기 전체가 내려다보인다네. 마을 여인숙에서는 나 이에 비해 아주 유쾌하고 활발한 안주인이 포도주, 맥주, 코피 따위를 팔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두 그루의 보리수일세. 사방으로 넓게 퍼진 나뭇가지들이 교회 앞의 조그만 광장을 덮고 있는데, 그 광장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는 농가와 곳간, 그리고 저택들이 들어서 있네. 이렇게 정답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광장은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라네. 나는 여인숙에서 조그마한 탁자와 의자를 그 광장으로 들고 나와, 거기서 코피를 마시며 호메로스를 읽는다네. 맑게 갠 어느 날 오후, 내가 처음으로 아주 우연히 그 보리수 그늘 아래에 왔을 때, 광장은 정말 고요했었네. 모두들 일을 하러 들에 나간 것일세. 오직 4살쯤 된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땅바닥에 앉아서 또 한 아이----태어난지 반 년 가량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제 무릎 사이에 앉히고, 두 팔로 아기를 안아 제 가슴에 기대어 놓고 있는데, 말하자면 큰 아이의 팔이 일종의 의자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었네. 그 사내아이는 검은 눈으로 쉴새없이 사방을 둘러보면서도 아주 조용히 앉아 있었네. 그 광경이 내 마음에 들었다네. 나는 그 맞은편에 놓여 있는 쟁기에 걸터앉아 매우 즐거운 기분으로 이 의좋은 형제 상을 스케치했네. 바로 그 곁의 생울타리, 곳간 문, 그리고 부서진 짐수레의 바퀴 두세 개 등을 있는 그대로 그 속에 넣어 그렸네. 그리하여 1시간 뒤에는 내 주관적인 잔재주가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잘 정돈된 재미있는 그림이 완성되었네. 이를 계기로 앞으론 자연만을 근거로 그림 그릴 생각을 더욱 굳혔네. 자연만이 무한히 풍요로우며, 자연만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드는 걸세. 그것은 세상의 규칙과 범절에 따라 판에 박힌 행동을 하는 사람이 이웃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몹쓸 악당이 되거나 하는 일이란 결코 없는 것과 마찬가질세. 그러나 그 반면에, 모든 규칙은 아무래도 자연의 진정한 감정과 그 참된 표현을 파괴해 버리고 마는 것일세. 「그건 지나친 말이다! 규칙은 제한을 할뿐이다. 불필요한 덩굴을 잘라 낼 뿐이야」 이렇게 자네는 말하겠지----좋아, 그렇다면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네. 그것은 마치 연애와 같은 걸세. 어떤 청년이 한 처녀에게 홀딱 반해서 매일같이 그녀의 곁에 붙어살다시피 하면서, 자신이 그 처녀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쉴새 없이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과 재산을 다 기울이고 있다고 치세. 거기에 한 사람의 속물, 이를테면 어떤 관직에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그 청년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걸세.「젊은이! 연애는 인간적일 뿐이오. 따라서 당신도 인간적으로 연애를 해야만 하오.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서, 일부는 사업에 돌리고, 그 나머지 시간은 애인에게 바치도록 해요. 당신의 재산을 잘 관리할 것, 그리하여 필요경비를 따로 제쳐두고 그 나머지 몫으로 애인에게 선물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왈가왈부 하진 않아요. 다만 그것도 너무 잦으면 안 돼요. 애인의 생일이나 명명일 같은 때에만 하도록 해요」 그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모 있는 청년이 되겠지. 나 역시 그를 관리로 채용하도록 어느 군주에게나 추천할 걸세. 그러나 그는 애인으로서는 그것으로 끝장일세. 그리고 그가 만일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거야. 아아, 나는 자네들에게 묻고 싶네! 천재의 분류가 둑을 무너뜨리고 소용돌이치며 밀어닥쳐 와서, 자네들의 영혼을 뒤흔들며 경탄케 하는 일이 어찌하여 이다지도 드문가?----그것은 그 분류의 양쪽 둑가에 점잖은 신사들이 살고 있기 때문일세. 그 신사들이 자기네 정원이나 튤립 화단, 혹은 채소밭이 망가질까 봐 재빨리 제방을 쌓기도 하고, 배수 공사를 하기도 함으로써 닥쳐올 위험을 미리 막기 때문이란 말일세. 5월 27일 이제 보니 나는 비유와 연설을 늘어놓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 아이들이 그 위에 어떻게 왰는지 자네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잊은 것 같구먼. 어제 편지에서 자네에게 단편적으로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그림의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그 쟁기에 걸터앉은 채 2시간이나 그대로 있었다네. 저녁때가 다 되었을 때 가정주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그 아이들에게로 급히 다가왔네. 아이들은 그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얌전히 있었던 걸세. 그 여자는 한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보고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더군.「필립! 너 정말 착하구나!」----그녀는 나에게 눈인사를 했네. 나도 눈인사를 하며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들의 어머니냐고 물었지.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큰아이한테 흰빵 반쪽을 준 다음, 갓난아기를 안아 올리더니 어머니의 사랑이 물씬 풍기는 키스를 하더군----그녀는 말했네. 「이 필립에게 아기를 맡겨 놓고서 제일 큰애를 데리고 시내에 갔었지요. 흰빵니며 설탕, 죽을 쓸 질냄비를 사려고요」----보니 뚜껑이 떨어져서 열린 그 바구니 속에 그 물건들이 다 들어 있었네----「한스(이것이 갓난아기의 이름이었네)에게 오늘 저녁에 수프를 끓여 주려고요. 개구쟁이 녀석 큰아이가 어제 질냄비를 깨뜨려 버렸거든요. 남은 죽을 서로 먹으려고 필립과 싸우다가 말씀이에요」----그 큰아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물었네. 풀밭에서 두세 마리의 거위를 뒤쫓고 있노라고 그녀는 대답했는데, 그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큰아들이 뛰어오더니 바로 아랫동생에게 개암나무 회초리를 선물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그녀는 그 마을의 학교 교사의 딸이며, 그녀의 남편은 사촌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스위스에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모두들 남편을 속이려 한 거예요」하고 그녀는 말을 이였네.「남편이 편지를 몇 번이나 내었는데도 답장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로 떠난 거지요. 언짢은 일이나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남편한테서 도무지 소식이 없어서요......」나는 그녀와 그대로 헤어지기가 어쩐지 서운해서, 두 아들에게 1크로이째르씩을 주고 갓난아이를 위해서도 1크로이째르를 그 어머니에게 주면서, 시내에 나가거든 수프에 곁들일 흰 빵을 사다주라고 말했네. 그런 연후에 우리는 헤어졌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벗이여, 고백하거니와 도저히 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을 때는, 그런 여인은 안달복달하는 법 없이 행복스럽게 정착하여, 애환의 좁은 테두리를 돌며 그날 그날을 살아 나가는 거라네. 나뭇잎이 지는 것을 보고서도 이제 겨울이 오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뿐, 다른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지. 그 때 이후로 나는 곧잘 그 곳에 간다네. 아이들은 이제 나하고 아주 낯이 익어서, 내가 코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는 설탕을 얻어먹고, 저녁에는 버터 빵과 우유를 노나 마시곤 한다네. 일요일에는 그들에게 1크로이째르씩을 꼭꼭 주기로 하고 있네. 예배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가 거기 가지 못했을 때에는 주막집 여주인에게 나 대신 그들에게 돈을 주라고 해 두었네. 아이들은 스스럼이 없어져서 나에게 온갖 이야기를 다 해 준다네. 특히 마을아이들이 많이 모였을 때면 그들의 드센 감정과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이나를 즐겁게 해 준다네. 이 훌륭한 신사에게 아이들이 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해서 애들의 어머니가 무척 신경을 쓰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느라고 나는 꽤 애를 먹었다네. 5월 30일 지난번에 내가 그림에 대해서 썼던 것은, 시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일세. 멋진 대목을 찾아 내어 그것을 대담하게 표현하면 되는 걸세. 그렇게 하면 물론 적은 말로써 많은 것을 나타낼 수가 있지. 내가 오늘 목격한 광경을 그대로 묘사한다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가가 될 걸세. 그러나 문학이니 정경이니 목가니 하는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나. 우리는 자연현상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면 됐지,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주물럭거릴 필요는 없네. 이런 서론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그야말로 대단한 일을 기대한다면, 자네의 그 기대는 완전히 어긋날 걸세. 그토록 세차게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어느 농가의 한 젊은 머슴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내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이고, 또 자네는 으레 내가 과장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겠지. 아무튼 그 무대는 역시 발하임인데, 이런 희한한 이야기가 생길 만한 곳은 역시 발하임밖에는 없다네. 그 보리수 아래에서 코피 파티가 있었네.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별로 탐탁지 않았으므로, 핑계를 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었네. 농사꾼 차림의 한 젊은 청년이 그 근처의 농가에서 나오더니, 지난번에 내가 걸터앉아서 스케치를 했던 그 쟁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네. 그 인상이 마음에 들기에 나는 그에게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보았네. 우리는 곧 가까와졌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늘 그렇지만, 곧 흉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어떤 과부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네. 그 여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면서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나는 곧 이 청년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여주인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아챘지.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여주인은 이제 젊지도 않고, 첫결혼에서 하도 시달림을 당했기 때문에 재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네. 그의 말투로 미루어, 그 여주인이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다시없이 아름답고 매력있는 존재이며, 또 첫결혼에서 겪은 그 쓰라린 상념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도 그녀가 자기를 선택해 주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네. 이 청년의 순수한 모정, 그 사랑과 진정을 그대로 되풀이해야만 하겠지. 여간 위대한 시인이 아니고서는 그의 몸짓이며 표정, 목소리에 담긴 정감, 눈길 속에 깃들여 있는 정열 등을 동시에 자네에게 전달하기는 불가능할 걸세. 아니,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도 그의 태도와 표정 속에 어리어 있는 그것을 재현한다면 서투른 실패작이 될 뿐이지. 특히 내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내가 자기와 여주인과의 관계를 좋지 않게 받아들이고, 여주인의 정숙한 처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하고, 그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점이었어. 여주인의 얼굴 생김새며, 젊음의 매력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꼼짝없이 자기를 사로잡는 그녀의 몸매에 대하여 얘기하는 그 청년의 태도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나는 다만 마음속으로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일세. 나는 출생 이후 오늘날까지, 안타까운 욕정과 뜨거운 소망이 이토록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것을 일찍이 본적이 없네. 아니,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네. 이러한 순수성과 진실을 생각하면 내 영혼은 그 심중으로부터 불타오른다네. 그 진실과 애정의 생생한 모습은 어디를 가나 나를 따라오네. 마치 그 불꽃이 나에게 옮겨 불기라도 한 것처럼 숨가쁘고 애가 탄다네. 이런 소리한다고 나를 나무라지는 말게. 나는 될수록 빠른 시일 안에 그녀를 만나 보고 싶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를 만나는 건 피하는 게 났겠네. 애인의 눈을 통하여 그녀를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직접 보면, 지금 내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그녀와는 딴판일 우려가 있으니까. 그 아름다운 영상을 무엇 때문에 깨뜨려 버릴 것인가? 6월 16일 왜 편지를 하지 않았느냐고?----그런 소릴 묻다니, 그러고도 자네는 학자 축에 끼는가? 그래, 짐작이 가지도 않는단 말인가? 나야 으레 건제하고, 아니, 건제 이상일세. 게다가----한마디로 말하면----새로운 친지가 생겼는데, 그것으로 내 마음이 가득하다네. 나는 ----글쎄, 뭐라고 써야 할지 알 수가 없네.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한 여인과 어떻게 하여 알게 되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해. 나는 행복하며 만족하고 있네. 그래서 훌륭한 사실 기록자가 될 수 없는 걸세. 천사라네!----제기랄, 이건 누구나 자기 애인을 가리켜 하는 소리 아닌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가 하는 것을 자네에게 설명할 수가 없네. 요컨대 그녀는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네. 더없이 총명하면서도 순진하며, 더없이 착실하면서도 다정하고, 더없이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차분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여인일세. 그녀에 대하여는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모두가 하찮은 잔소리, 어줍지 않은 추상적 표현이 될 뿐, 그녀의 모습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걸세. 이 다음에 ----아니지, 이 다음으로 미룰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이야기하지.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일세. 왜냐하면, 기건 우리 사이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뒤로 나는 벌써 세 번이나 펜을 놓고 뛰쳐나가려 했다네. 나는 오늘 아침에, 오늘은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했던 터일세. 그런데도 자꾸만 창가로 가서는, 해가 어디쯤 떠 있나 살펴보곤 하는 걸세. 나는 나 자신을 이겨 내지 못했네. 그녀에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네. 거기 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일세. 빌헬름이여, 나는 밤참으로 빵을 먹고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걸세. 그녀가 귀엽고 발랄 한 어린이들, 곧 8명의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보면, 내 영혼은 크나큰 환희에 젖는다네! 이런 식으로 써내려 가면, 아무리 읽어 봤자 자네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겠군. 좋아,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내 마음을 가라앉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함세. 지난번에 자네에게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나는 법무관인 S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 나에게 자기 은둔처----라기보다 자기의 작은 왕국으로 한번 놀러 오라고 했었지. 그런데 나는 그 분 집에 놀러 가는 걸 미루어 오고 있었다네. 만일 우연이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 한적한 고장에 숨겨져 있던 그 보물을 발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았을 것일세. 내가 알게 된 젊은이들이 시골에서 무도회를 개최하였는데, 나도 기꺼이 거기에 참석했었지. 나는, 마음씨가 곱고 예쁘장하기만 할 뿐 달리 이렇다할 장점이 없는, 디 도시에 살고 있는 소녀에게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네. 서로 협의를 한 결과, 내가 마차를 세내어 파트너인 그 아가씨와 그녀의 사촌 동생을 태우고 무도회장으로 가되, 그 도중에 샤를로테 S네 집에 들러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합의가 되었지. 「아름다운 아가씨를 알게 되실 거예요」 수풀 속에 널찍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그 사냥별장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 속에서 내 파트너인 그 소녀가 말했네----「반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하고 그녀의 사촌동생이 덧붙이는 걸세----「왜요?」하고 나는 물었지. 「그 아가씨는 벌써 약혼한 분이 있으니까요」하고 내 파트너인 소녀가 대답하더군. 「약혼자는 아주 훌륭한 분인데, 지금 여행중이랍니다. 그분의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대문에 여러 가지로 정리할 일도 있고, 또 좋은 일자리를 물색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요」----그런 소리를 들어도 나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15분전에 우리는 그 집 문 앞에 닿았어. 몹시무더웠다네. 여자들은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들을 했네. 지평선 일대에 우중충한 잿빛 구름이 깔려 있어서 한 소나기 몰고 올 것만 같았네. 나는 어설픈 기상학의 지식을 둘러대며 여자들의 걱정을 달래긴 했으나, 나 자신도 속으로는 무도회가 소나기로 중단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녀가 문간에 나오더니, 로테 아가씨가 곧 나오실 테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더군. 나는 안뜰을 지나서 우람한 안채를 향해 걸어갔지. 입구의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정겨운 광경이 눈에 띄었네. 현관방에 2살에서 11살 사이의 아이들 여섯이 한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네. 몸매가 아름다운 중키의 그 소녀는 청초한 흰옷을 입었는데, 팔과 가슴에 연분홍 장식 끈이 달려 있었네. 소녀는 흑빵을 손에 들고 자기를 둘러싼 아이들에게 각각 그 연령과 식욕에 따라 한 조각씩 잘라 주었는데, 어느 아이에게나 그야말로 다정스레 그것을 건네주는 것이었네. 아이들은 빵을 채 자르기 전부터 저마다 그 작은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기다리고 있다가, 빵조각을 받으면 아주 천진스럽게 「고마와요!」하고 소리를 지르는 걸세. 그러고서 아이들은 각자가 받은 몫에 만족하며, 자기들의 언니인 로테가 타고 갈 마차와 손님들을 보려고, 어떤 아이는 뛰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얌전한 성품인지 천천히 걸어서 대문께로 나왔다네. 「미안합니다」하고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네.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이렇게 오시도록 하고, 또 아가씨들을 기다리게 해서...... 옷을 갈아입고, 또 제가 잘라 주어야만 한다고 막무가내랍니다」----나는 그저 상투적인 인사를 했지.내마음은 온통 그녀의 자태와 목소리, 그리고 그 동작에 집중되어 있었네. 그녀가 장갑과 부채를 가지러 거실로 뛰어갔을 때, 나는 비고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 최초의 놀라움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네. 나는 막내둥이에게로 다가갔다네. 그 애는 매우 귀염성스러운 얼굴의 사내아이였는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군. 그 때 로테가 되돌아와서 「루이야, 사촌형님하고 악수해야지」하고 말했네. 그 아이는 시키는 대로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네. 콧물을 흘려 코밑이 약간 지저분했지만 나는 그 애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키스를 했네. 「사촌형님이라뇨?」하고 로테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지. 「나를 아가씨의 친척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시는 건가요?」「아, 그건」하고 로테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네.「저희들에겐 사촌이 아주 많답니다. 설마 그들 가운데서 선생님이 가장 나쁜 분은 아니겠지요....../」----출발하면서 로테는 자기 바로 아랫동생인 소피에게 아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이른 다음, 승마산책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인사 못 드리고 떠났다고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하였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소피 언니를 자기처럼 생각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타일렀네. 두세 아이는 그러겠노라고약속을 했으나 6살쯤 된 숙성해 보이는 금발머리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그렇지만 소피 언니는 로테 언니가 아니잖아. 우린 로테 언니가 더 좋단 말이야」----사내아이 둘은 어느 틈에 마차 뒤에 올라타고 있었네. 내가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해서, 로테는 숲 입구까지 아이들이 그대로 마차를 타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네. 그 재신 아이들은 장난치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지. 우리는 제각기 자리에 앉았어. 여자들은 인사를 나눈 다음, 서로의 옷맵시, 특히 모자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그 날 저녁 무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 이야기 도중에 로테는 마차를 세우게 하고 동생들을 내리게 했네. 아이들은 로테의 손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싶어하더군. 큰 아이는 15세 소년다운 정감이 어린 키스를 했으나, 작은아이는 후딱 해치워 버리더군. 로테는 동생들에게 얌전히 잘 있으라는 말을 다시 한번 하였고, 우리가 탄 마차는 달려가기 시작했지. 내 파트너의 사촌동생이, 일전에 보내 준책을 다 읽었느냐고 로테에게 물었네.「아뇨」하고 로테는 대답했네. 「그 책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돌려 드리겠어요. 그전의 책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어떤 책인데요?」하고 내가 묻자 어떤 책이름을 댔는데,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나는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착실한 성품을 감지할 수 있었네.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새로운 매력, 새로운 정신이 그 얼굴에서 번뜩이는 걸세.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자기 말을 내가 이해해 준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점점 더 부드러워져 가는 것 같았다네. 「좀더 어렸을 때는」하고 로테는 말했네. 「저는 소설을 제일 좋아했었어요. 어떻게나 재미있는지, 일요일이면 방 한구석에 앉아서 미스 제니라든가 그런 주인공의 행운과 불운에 정신없이 빠져들곤 했었지요. 지금도 그런 책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좀처럼 책을 읽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왕에 읽을 바엔 제 취향에 맞는 책을 읽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란 그 작품 속에서 저 자신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고, 저와 같은 처지의 생활묘사로 친근감이 가고 흥미 있는 이야기를 쓰는 그런 작가예요. 저희 가정생활이 물론 천국과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의 원천이지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마음속의 감동을 감추느라고 무척 애를 섰다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감추고 있을 수는 없었네. 그녀가 골드스미드의 소설 를 비롯한 몇몇 소설에 언급하면서, 그것들에 대해 아주 정확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러다가 얼마 후에 로테가 다른 사람에게로 말머리를 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네. 다른 두 여자들이, 그 사이에 줄곧 자기네들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이 기가 막히다 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 사촌동생이란 여자는 몇 번이나 콧등에 잔주름을 지으며 비웃듯이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그런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네. 화제는 댄스의 즐거움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네----「이런 열정이 결점이라고 하더라도」하고 로테는 말했네. 「서슴없이 고백하겠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댄스를 좋아합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을 때라도,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엉터리로나마 무곡을 치고 있으면 그런 대로 기분이 풀리곤 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그야말로 홀린 듯이 그녀의 그 검은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네----그 생동하는 입술, 그 발갛게 상기된 볼이 내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았네----그녀의 멋들어진 말에 넋을 빼앗겨 나는 몇 번이나 그녀의 말을 잘못 듣곤 했다네----나를 잘 알고 있는 자네니까 능히 짐작할만하겠지----아무튼 무도회장 앞에 이르러 마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저물어 가는 세계 속으로 꿈결처럼 빨려 들어갔고, 불이 밝혀진 홀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소리도 내 귀에는 거의 들르지 않을 지경이었네. 두 신사, 아우드란 씨와 다른 한 사람 모씨는----이름 따위를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겠는가----우리 마차가 있는 곳까지 와서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는데, 그들은 내 파트너의 사촌동생과 로테의 댄스 파트너로서 각자 자기의 상대 여성을 무도회장으로 인도해 갔네. 나도 내 파트너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지. 우리는 이리저리 뒤얽히며 메누엣을 추었네. 나는 잇달아 다른 여자에게 같이 추기를 청했었는데,반갑쟎은 상대일수록 한번 어울리면 좀처럼 떨어져 나가려 하지 않더군. 로테와 그 파트너는 영국식 댄스를 추기 시작했네. 이윽고 차례를 따라 그들이 우리 조와 한데 어울려 선회를 시작하였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자네도 짐작할 만하겠지.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네! 그녀는 몸과 마음을 온통 춤에만 집중시켜 그 속에 몰두해 버리는 걸세. 몸전체가 하나의 화음일세. 아무런 근심도 거리낌도 없으며, 오직 춤만이 전부요, 춤 이외의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 같다네......그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네. 나는 로테에게 두 번째 대무곡의 상대가 되어 주기를 청했네. 그녀는 세 번째 대무곡에서 상대가 되어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고는, 그지없이 사랑스럽고 솔직한 태도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독일식 댄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었네. [여기서는]하고 로테는 말을 계속했다네. [한 조를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은 독일식 댄스를 출 때에도 그대로 짝을 짖는 것이 관례예요. 그런데 제 파트너는 왈츠를 잘 못 추니까, 그걸 안 춰도 되면 좋아할 거예요. 선생님의 파트너도 왈츠는 출 줄을 모르고 또 좋아하지도 않아요. 영국식 댄스를 출 때 보니 선생님은 왈츠를 잘 추시더군요. 그러니까 독일식 댄스의 상대로 저를 희망하신다면, 선생님께서 제 파트너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주세요. 저는 선생님의 파트너에게 이야기할께요] 나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의 악수를 했네. 그리하여 우리가 짝을 지어 춤추는 동안, 로테의 파트너인 그 신사는 내 파트너의 상대가 되어 주기로 이야기가 되었지. 드디어 춤이 시작되었네. 우리는 얼마 동안 팔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춤을 즐겼지. 그녀의 춤추는 모습은 경쾌하고 매력적이었네. 이윽고 왈츠가 시작되어 천계의 별들처럼 서로의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하자 그걸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므로 처음에는 다소 어수선했네. 우리는 혼란이 진정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지. 그리하여 서투른 사람들이 물러가고 홀에 거치적거리는 대상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가볍게 춤추기 시작했네, 우리 조와 아우드란 조만이 오래도록 춤을 추었지. 일찍이 그토록 경쾌하게 춤추어 본 적은 없었네. 마치 꿈속을 해 메는 것 같았네.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품에 안고 번개처럼 춤추며 돌아가다 보니,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걸세. 그리고----빌헬름이여, 정직하게 고백하지. 나는 맹세를 했다네. 내가 사랑하고 갈구하는 이 소녀로 하여금 결코 나 이외의 사람과는 왈츠를 못 추게 하겠노라고 말일세. 설령 그 때문에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그 기분, 알아주겠지? 우리는 잠시 쉬기 위하여 천천히 걸어서 홀을 두세 차례 돌았네. 그런 다음에 로테는 자리에 앉았네. 내 몫으로 갖다 놓았던 몇 개의 오렌지가 그 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일이었는데, 그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네. 그런데 그 오렌지를 로테가 한 자리에 앉은 염치없는 여자들에게 노나 줄 때는 가슴이 쓰리더구먼. 세 번째의 영국식 댄스에서 우리는 두 번째 조가 되었네. 사람들의 대열 속을 누비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춤추고 있는 로테----나는 황홀감에 젖은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 팔을 끼고 춤을 추었네. 그러다가 어떤 부인 옆을 지나게 되었네. 그 부인은 이미 젊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애교있는 얼굴이었으므로 그전에도 눈여겨본 적이 있는 여자였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로테에게 시선을 보내더니 위협하듯이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는 우리가 스쳐 지날 때 의미심장하게 알베르트라는 이름을 두 번씩이나 입밖에 내는 것이었네. [알베르트가 누군가요?] 하고 나는 로테에게 물었지. [묻는 것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로테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에 우리는 커다란 8자를 그리기 위해 서로 떨어져야만 했네. 그랬다가 그 도중에 서로 스쳐 지나게 되었을 때 보니, 그녀의 얼굴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더군----[뭘 숨기겠어요]프롬나드로 이행하기 위해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녀가 말했네. [알베르트는 착실한 분으로, 저하고는 약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이에요]----그건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지(오는 도중에 그 아가씨들한테 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처음 듣는 소리 같았네. 잠깐 사이에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존재가 된 이 여인과 그 이야기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지. 나는 머리가 혼란해지고 멍청해져서, 엉뚱한 조의 두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버렸네. 그 바람에 전체적인 진행이 뒤범벅이 되었지. 그런데 로테가 침착하게 나를 이끌어 주었으므로, 곧 원상으로 회복이 되었네. 댄스가 아직 끝나기 전에 번개 치는 도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네. 벌써 아까부터 지평선 저 쪽에서 번쩍번쩍했는데, 나는 그 것을 기온이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 그런데 이젠 천둥소리가 음악을 압도해 버릴 지경이 되었네. 이윽고 여자 셋이 대열에서 빠져나가자, 그 파트너인 남자들이 그 뒤를 쫓아갔네. 홀 전체가 뒤숭숭해지고, 음악소리가 그쳤네. 한창 즐겁게 놀고 있을 때 불행이나 공포가 엄습해 오면, 보통 때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앞뒤의 감정적인 대조가 뚜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요, 또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감각이 활짝 열려 그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일세. 몇몇 여자들이 갑자기 얼굴을 기묘하게 찌푸린 것도 그러한 원인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분별이 있는 한 여자는 홀 한구석에 가서 창문을 등진 채 귀를 막고 있었네. 또 어떤 여자는 그 앞에 꿇어앉아서 상대방 여자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네. 또 한 여자는 그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더니, 눈물을 흘리며 친구를 껴안았네. 이성을 잃고 어쩔 줄 몰라하며, 엉큼한 젊은 남자들의 무례한 행동을 막아 내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었지. 그 뻔뻔스러운 젊은 남자들은, 하늘을 향해 올려지는 불안에 잠기 여인들의 기도를, 그 아름다운 입술에서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가로채기에 바쁜 것 같았네. 몇몇 신사들은 천천히 담배나 피우려고 아래로 내려갔네. 나머지 사람들은 이 집 여주인이 임기웅변의 제안으로, 덧문이 있고 커튼이 쳐져 있는 방을 제공하겠노라고 해서 그리로 가게 되었지. 우리가 그 방에 들어서자 로테는 바지런히 오락가락하며 의자들을 둥그렇게 놓더니,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뭔가 게임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네. [키스타는 달콤한 벌을 받게 될 수도 있겠는걸]하고 벌써부터 입술을 쑥 내밀며 시명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 [숫자 세기 놀이를 해요]하고 로테가 말했네. [자, 잘 들으세요. 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숫자를 세는 거예요. 각자 자기 차례의 숫자를 부르고 그 다음 차례로 넘기는 거지요. 그걸 도화선의 심지가 타 들어가듯이 빨리빨리 불러야만 애요. 막히거나 틀린 숫자를 부르는 분은 뺨을 맞게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어요. 천까지예요]----정말 그건 가관이었다네. 그녀는 한쪽 팔을 내뻗고서 돌아가기 시작했네. 하고 첫 번째 사람이 부르고 그 다음 사람이 부르고 그 다음 사람이 , 또 그 다음 사람이 ,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가는 거야. 로테는 차츰 더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네----그러자 누군가가 틀렸네. 찰싹, 로테가 뺨을 때렸네. 와아 하고 웃는 사이에 그 다음 사람도 찰싹! 그러고는 더욱더 빨리 돌아가는 거야. 나도 두 번 뺨을 얻어맞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세게 때리는 것 같아서 무척 흡족스러웠네. 온통 웃고 떠들어 대는 바람에 천까지 가기 전에 게임은 끝나 버렸지. 가까운 사람끼리 저마다 짝을 지어 자리를 뜨기 시작했네. 소나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거든. 나는 로테를 따라 다시 홀로 나갔지. 그 도중에 그녀는 말했네. [뺨 때리는 데 정신이 팔려 모두들 소나기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 같더군요]----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네----[저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네. [누구보다 겁이 많은 편인데도, 용기가 있는 체하고 다른 분들의 기분을 북돋우어 주려 하고 있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힘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우리는 창가로 다가갔네.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리고 아름다운 비가 조용히 땅을 적시고 있었네. 더할 수 없이 상쾌하고 향기로운 장미냄새가 따뜻한 공기 속에 충만하여 우리 있는 데까지 풍겨 왔네. 로테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조용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네.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이윽고 나를 보았는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네. 그녀는 자기 손을 내 손위에 얹으며[클롭시록!] 하고 말했네----나는 곧 로테가 생각하고 있는 클롭시록의 그 장려한 찬가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그녀가 암호와도 같은 그 말로써 나에게 전달하려 한 감정의 흐름 속에 잠겨들었네. 나는 벅찬 감명을 억누를 길이 없어, 몸을 구부려 환희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지----거룩한 시인 클롭시록이여! 이 눈앞으로 다시는 그대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노라! 6월 19일 지난번 편지는 어디서 끝냈는지 생각이 나지를 않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내가 집에 돌아와서 누운 것이 새벽 2시였다는 것, 그리고 편지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마도 아침이 될 때까지 자네를 붙잡고 지껄였으리라는 것뿐일세. 무도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오늘도 역시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알맞은 날은 아닌 것같네. 그야말로 근사한 해돋이였어. 사방은 온통 이슬에 젖은 수풀과 싱그럽게 되살아난 들판이야. 마차 안에서, 동행한 여자 둘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네. 로테는 나를 보고, 선생님도 좀 주무세요, 하고 권했네. 자기 때문에 체면 차릴 필요는 없다는 거야----[아가씨가 잠자지 않는 동안에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을 응시하였지. [그 동안엔 나도 졸립지 않아요]----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로테네 집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깨어 있었네. 하녀가 문을 열어 주었는데, 로테의 물음에 대하여, 아버님도 애들도 여느 때와 같이 아직도 자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네. 헤어질 때 나는 그 날 중으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녀에게 말했지. 로테는 승낙했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찾아갔지----그 때 이후로, 해와 달과 별들은 물론 변함없이 그 궤도를 돌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제 낮도 없고 밤도 없어졌다네. 세계가 온통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린 걸세. 6월 21일 나는 하느님이 성자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 같은 그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네. 설령 앞으로 내 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인생의 기쁨, 가장 순수한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걸세. 나의 발하임을 자네 알고 있지? 나는 그 곳에 아주 정착하였네. 거기서 불과 반시간이면 로테네 집에 갈 수가 있다네. 그 집에 가면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걸세.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발하임을 산책의 목적지로 선정했을 때, 나는 그곳이 그토록 천국에 가까운 곳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 나의 모든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 사냥별장을, 때로는 언덕 위에서, 때로는 강 건너편의 평지에 서서 바라보기 그 몇 번이었던가!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인간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욕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네. 인간은 자기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하여 여기저기를 헤매어 다니지. 그런가하면 자진하여 속박에 몸을 내맡기고, 습관이란 궤도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내적 충동도 간직하고 있는 걸세. 신기한 일이지. 이 곳에 와서 언덕 위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매료하는 거야----저 작은 숲!----아아, 저 숲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면! 저 산봉우리! 아아, 저기서 이 고을 전체를 내려다보았으면! 연이어져 뻗어 있는 언덕과 정다운 계곡들!----아아, 저 속에 융합될 수 있었으면! 나는 서둘러 그 곳으로 갔다가 되돌아왔네. 내가 바라던 것은 그 곳에 없었네. 아아, 저 너머 먼 곳은 미래와 비슷해! 크고도 어렴풋한 것이 우리 앞에 조용히 가로놓여 있지. 우리의 감정도 또 우리의 눈도 그 속에 융합되어 가네. 그리하여 우리는 동경하는 걸세. 아아! 우리의 전존재를 내팽개치고, 단 하나의 위대하고 숭고한 감격의 환희에 충만하고 싶구나, 하고 말일세. 그러나 아아! 서둘러 그 것에 가 닿아 이 가 되고 보면,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인 걸세. 우리는 여전히 비관과 옹색 속에 서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어느 틈에 빠져 달아나 버린 청량제를 추구하여 헐떡이는 거지. 그래서 아무리 마음을 잡지 못하는 방랑자라도 최후에는 자기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걸세. 자기의 작은 집, 자기 아내의 품, 자식들의 재롱, 처자를 부양하는 일, 그런 것들 속에서, 넓고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거라네. 나는 아침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발하임으로 나가네. 주막집 채소밭에서 완두콩을 따 가지고, 걸상에 앉아 그 깍지를 까며 호메로스를 읽지. 좁은 부엌에 가서 냄비를 하나 찾아내어 버터를 떠 넣은 다음, 냄비를 불 위에 얹고 완두콩을 볶는다네. 냄비뚜껑을 덮고 그 옆에 앉아서, 때때로 냄비를 흔들어 완두콩을 뒤섞기도 하지. 그러고 있을 때 나는, 오딧세우스의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뭇사나이들이 소와 돼지를 잡아서 각을 떠 그것을 불에 굽는 광경을 눈앞에 떠올린다네. 나로 하여금 이렇게 평온하고 진실한 감정으로 충만케 해 주는 것은 부족사회 시대의 생활상, 바로 그것이라네. 다행 이도 나는 그것을 아무런 꾸밈없이 내 생활 속에 얽어 넣을 수가 있는 걸세. 행복한 기분일세. 내 마음은 순진하고 단순한 인간의 기쁨을 감지할 수가 있네. 그 사람들은 손수 가꾼 양배추를 식탁에 올리고 그것을 맛본다네. 아니, 양배추만이 아니지. 그것을 심었던 맑게 갠 아침, 거기에 물을 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과정을 즐겼던 흐뭇한 저녁, 좋았던 나날의 그 모든 것을, 식탁 앞에 앉은 그 시간에 다시 맛볼 수가 있는 것이지. 6월 29일 그저께, 시내의 의사가 법무관 집에 찾아왔었네. 그 때 나는 로테의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놀고 있었지. 어떤 아이는 내몸에 매달리고, 또 어떤 아이는 나에게 장난을 걸었으며, 나는 또 그들을 간질이면서 한데 어울려 떠들어 대고 있었다네. 그 의사는 줄곧 커프스 주름이나 칼라 장식을 매만지는 위인인데, 우리가 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네. 그의 표정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지.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점잖은 설교 따위 할 테면 하라지, 하고 아이들이 무너뜨린 카드로 만든 집을 다시 지어 주었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 의사는 온 시내에 험담을 퍼트리고 다닌 걸세. 법무관네 아이들은 원래 버릇이 없었는데, 베르테르가 들어서 더욱 못쓰게 되어 버렸다는 거지. 빌헬름이여, 이 지상에서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것은 아이들이라네.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사소한 일에서도 장차 그들이 지녀야만 할 일체의 덕성과 힘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네. 그들의 거짓 속에 미래의 의연하고 꿋꿋한 성격을 볼 수 있으며, 장난 속에 세상살이의 위험을 극복해 나가는 유머와 재치를 엿볼 수 있지.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걸세----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언제나 이류의 스승인 예수의이라고 하는 황금 같은 말씀이 생각나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친구여, 우리와 같은 동등한 존재,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어린아이들을 우리는 마치 예속물처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의지를 가져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있네----그렇다면 우리네 어른들도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단 말인가? 나이가 많고 분별이 있기 때문인가!----오오, 하느님, 당신의 눈에는 다만 나이 많은 어린이와 나이 적은 어린이가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을 당신이 더 기뻐하시는지는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벌써 옛날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신의 아들은 믿으면서도, 그 분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물론 어제 오늘에 비롯된 일은 아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른의 틀에 넣어서 기르고 있네----안녕, 빌헬름이여! 더 이상 수다를 떠는 건 그만두기로 함세. 7월 1일 로테가 곁에 있다는 것이 환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기쁜 일인지, 나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서 잘 알 수 있네. 내 불행한 마음은 병상에서 쇠약해져 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용태라네. 로테는 시내의 어떤 신실한 부인 집에 가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네. 그 부임인,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임종이 멀지 않았는데, 그 최후의 며칠 동안 로테의 간호를 받고 싶어하고 있다는 걸세. 지난주에 나는 로테와 함께 성......라는 마을의 목사를 찾아갔었네. 산 속으로 1시간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우리는 4시경에 그 곳에 당도했네. 로테는 둘째 여동생을 데리고 갔었지. 두 그루의 커다란 호두나무 그늘에 덮여 있는 목사 관의 안뜰에 들어섰을 때. 그 선량한 노목사는 문간 앞의 벤치에 앉아 있었네. 로테를 보더니 노인의 얼굴에 생기가 돌더군. 마디투성이인 지팡이를 짚는 것도 잊어버리고, 로테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서려 하였네. 로테는 얼른 달려가서 노인을 앉히고 자기도 그 곁에 앉아 아버지의 안부를 전한 다음, 목사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동이라는 못생기고 더러운 아이를 끌어안는 것이었네. 로테가 그 노인을 대하는 모습을 자네에게도 한번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네! 그녀는 반쯤 안 들리게 된 노인의 귀에 잘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젋고 튼튼하면서도 갑자기 죽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며, 카를스바트 온천물이 좋다는 이야기, 그리고 노인이 이번 여름에 그 곳에 가기로 결심한 것을 칭찬해 드리고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건강이 좋아 보인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였네. 나는 그 동안에 목사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했지. 노목사는 그새 기운을 많이 되찾았네. 그래서 내가 시원스러운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는 커다란 호두나무를 칭찬하자 얼마간 더듬더듬하면서도 그 나무의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네----[오래된 쪽 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몰라요. 이 목사가 심었다고도 하고, 저 목사가 심었다고도 하거든요. 그런데 저 안쪽에 있는 나무는 우리 집사람과 동갑으로, 오는 10월로 50살이 됩니다. 집사람의 아버지, 곧 내 장인이 아침에 저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날 저녁에 집사람이 태어났다는 거예요. 장인은 나의 선임목사였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저 나무를 애지중지했답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지금부터 27년 전의 일입니다만, 내가 가난한 대학생으로서 처음 이 안뜰에 들어섰을 때, 집사람은 저 나무 아래 있는 재목더미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따님은 어디 갔느냐고 로테가 물으니까, 시미트 씨와 같이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갔다더군. 그러고 나서 노인은 그 선임목사가 자기를 무척 아껴 주었고, 그의 딸도 자기를 사랑해 주었으며, 처음에는 부목사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후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이야기가 막 끝났을 무렵, 그 목사의 따님이, 조금 전에 이야기가 나왔던 그 시미트라는 사람과 같이 채소밭 쪽에서 들어왔네. 그녀는 진심으로 로테를 환영하더군.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꽤 매력이 있었네. 갈색 머리에 몸매가 좋고 발랄한 아가씨로, 얼마 동안이라면 시골에서 이야기 상대가 될 만한 여인이었네. 그녀의 애인(시미트 씨가 곧 그런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태도를 취했거든)은 괜찮게 생겼으나 말이 없는 남자로, 로테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우리의 이야기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네. 내 마음이 서글퍼진 것은 그가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는 것이 식견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집과 심술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일세. 그 사실은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네. 우리가 다같이 산책을 나갔을 때 프리데리케는 로테와 짝이 되기도 하고 어쩌다가 나와 나란히 걷기도 했는데, 그런 때면 그렇쟎아도 가무잡잡한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걸세. 그래서 로테는 기회를 보아 내 소매를 잡아당김으로써, 프리데리테에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지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네. 아무튼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일, 특히 인생의 한창때로서 모든 기쁨에 대하여 가슴을 활짝 열어 젖힐 수 있는 젊은이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의 얼마 되지 않는 행복한 날들을 망쳐 버리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네. 그들은 훗날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낭비해 버린 세월을 보상받을 길이 없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 땐 이미 늦은 거지. 이런 생각으로 울화가 치민 나머지, 나는 저녁 무렵 목사관 안뜰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우유를 마실 때, 화제가 이 세상의 고락에 미치자 실마리를 잡고 변덕스러운 불쾌감이란 것에 대해 마구 공격을 해대지 않을 수 없었네----[우리 인간들은 곧잘 푸념하기를, 복된 날은 적고 언짢은 날은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날마다 내려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항상 마음을 활짝 열고 즐기려 한다면, 언짢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거뜬히 견뎌 낼 만한 힘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하고 목사 부인이 응수하였네. [자신의 감정도 자기 뜻대로는 잘 안 되거든요. 신체의 상태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거예요. 몸이 좋지 않을 때에는 뭘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걸요] 나는 일단 그 말을 시인하고 말을 이었네. [그렇다면 그것을 병이라 간주하고, 그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봅시다.] [좋은 말씀이군요]하고 로테가 말했네.[그건 자기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에 비추어서 알 수 있어요. 뭔가 속상하는 일이 있어서 불쾌한 기분이 들면, 저는 벌떡 일어나 나가서 정원을 왔다갔다하며 대무곡을 두어 곡조 노래합니다. 그러면 곧 기분이 가라앉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하고 나는 말했네. [불쾌한 감정은 게으름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아니, 게으름의 일종이지요. 우리는 선천적으로 게으름에 젖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분발하면 일은 척척 진척되게 마련이요, 활동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리데리케는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네. 그러나 시미트라는 그 청년은 이론을 제기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자신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네. [지금 문제삼고 있는 건 불쾌감으로]하고 나는 말했지. [그건 누구나 회피하고자 하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시험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겁니다. 병이 나면 누구든지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니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제하고, 아무리 쓴 약이라도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성실한 노목사가 우리의 토론에 참여하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나는, 목소리를 높여 노인 쪽을 보고 말했지. [죄악에 대한 설교는 허다하게 들었습니다만, 불쾌감을 훈계하는 설교는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그런 설교는 도회지 목사나 해야겠지요]하고 목사는 말했네. [농부에겐 불쾌감이란 없어요. 하긴 때로 그런 설교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적어도 목사 부인이라든가 법무관 님께는 약이 되기도 할 테니까] 그 말에 모두들 웃었네. 노목사 자신도 유쾌하게 웃어젖혔는데. 밭은기침을 쿨룩거리는 바람에 토론은 잠시 중단되었네. 이윽고 그 청년이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네. [당신은 불쾌감을 죄악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좀 지나친 말씀인 것 같이 생각되는군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하고 나는 말했지. [자기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두루 괴로움을 끼치는 일이 죄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죄악이라 하기에 충분한데, 우리 각자에게 허용된 기쁨까지 서로 빼앗아야만 할 까닭이 뭡니까? 자기 자신은 불쾌하지만 혼자 견디어 내며 남들에게는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즐거운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불쾌감이란 오히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마음속의 울분, 자신에 대한 불만, 그리고 그것들과 결부된 어리석은 허영심에 의하여 북돋워진 질투가 아닐까요? 행복한 사람을 보고서도,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불쾌해 하고, 그것을 용납 못할 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로테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네. 프리데리커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어 있었네. 거기에 용기를 얻어 나는 말을 계속했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단순한 기쁨의 한 순간이 그런 폭군의 질투 섞인 불쾌감으로 인하여 망쳐진 것을 보상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꽉 메는 기분이었네. 지난날의 갖가지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네. [우리가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타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하고 나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네. [너는 네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다만 그 친구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고 즐거움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 행복을 더욱 북돋우어 주는 일 이외에는......네 친구의 영혼이 타는 듯한 정열로 인해 시달리며 고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너는 한 방울의 완화제나마 그 친구에게 줄 수가 있는가? 그리고 또, 한창때의 꽃다운 시절을 너로 인해 허망하게 보내 버린 한 소녀가 중병이 들어 가슴아플 정도로 수척해진 채 드러누워 있다고 치자. 소녀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임종의 진땀이 창백한 이마에 자꾸만 번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너는 저주받은 자같이 그 병상 곁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다 짜내어도 그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한 방울의 약, 용기를 되살려 줄 수 있는 한 가닥의 불꽃이라도 주입해 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다 바쳐도 좋겠노라고, 애끓는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면서도 너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내가 일찍이 당면한 적이 있었던 그와 같은 광경이 무서운 기세로 나를 엄습해 왔네. 나는 손수건을 눈에 갖다 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게.[그만 돌아가요]하는 로테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 돌아오는 길에 로테는, 내가 모든 일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 같은데, 좀 자중하라고 간곡히 충고하는 것이었네. [선생님은 그 때문에 몸을 망치게 될지도 몰라요! 자기 몸은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돼요!]----아아, 나의 천사여!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7월 6일 로테는 여전히 그 위독한 부인을 간호해 주고 있네. 언제나 변함없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인정 많은 로테라네. 그녀의 눈길이 닿으면 고통이 덜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이 솟아오른다네. 어제 저녁에 로테는 마리아네 와 어린 말헨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네. 나는 그것을 알고 도중에서 만나 함께 걸었네. 1시간 반 정도 산책한 다음 동네 쪽으로 돌아와, 그 샘터에 다다랐네. 그 샘터는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곳이 되었다네. 로테는 나직한 돌담에 걸터앉고,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엇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네. 그러자 아아, 내 마음이 그토록 외로웠던 그 무렵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걸세----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헨이 집에다 물을 떠 가지고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었네. 나는 로테를 보았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새삼 절실히 느꼈다네. 그 사이에 말헨은 다 올라왔네. 마리아네 가 그 물 컵을 받으려 하자[안 돼!]하고 말헨은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네. [.....로테 언니, 언니가 먼저 마셔요!] 나는 말헨의 그 천진한 애정에 감동되어 얼른 그 애를 안아 올리고 키스를 퍼부었네. 나는 내 감동을 그렇게 밖에는 나타낼 수가 없었던 걸세. 그런데 말헨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네. [선생님이 잘못하신 거예요]로테가 말했네.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지. [저리 가자, 말헨]하고 로테는 그 애의 손을 잡고 돌계단 아래로 내려갔네. [자, 솟아나는 이 깨끗한 물로 씻어라. 얼른얼른 씻는 거야. 그러면 아무 일도 없어] 나는 거기에선 채로 그 어린아이가 물에 적신 작은 손으로 제 뺨을 열심히 닦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네. 기적의 샘물에 모든 부정한 것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서, 보기 흉한 수염이 뺨에 나게 되는 일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네. [이제 그만 됐다!]하고 로테가 말해도 그대로 계속 닦고 있었네. 많이 하는 편이 효과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빌헬름이여, 나는 일찍이 세례의식에도 이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진 않았네. 로테가 다시 올라왔을 때, 나는 만민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준 예언자라도 대하듯 그녀 앞에 넓죽 엎드리고 싶었네. 저녁때, 나는 내 마음속의 기쁨을 숨길 수가 없어서 이 사건을 어떤 남자에게 이야기했네. 분별이 있는 인물이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그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네. 그는, 그건 로테가 잘못한 거라면서, 아이들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불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걸세. 그것이 온갖 망상과 미신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라나, 그런 데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어린이들을 일찍부터 지켜 주어야만 한다는 거야. 나는 그 사람이 바로 1주일 전에 자기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이라는 진리를 되새기고 있었네. 7월 8일 어쩌면 이다지도 어린애 같을까!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눈길을 돌려주기를 바라다니! 어쩌면 이다지도 어린애 같단 말인가! 우리는 발하임에 갔었네. 여자들은 마차를 타고 우리는 걸어서 갔는데, 나는 걸어가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네. 로테의 검은 눈동자 속에 분명히......나는 바보일세, 용서해 주게나,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네, 그 눈을. 간단히 말해서(지금 졸음이 와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형편이거든)이런 이야기일세. 여자들은 마차에 올라타고, 젊은 W군과 젤시타트, 아우드란, 그리고 나는 마차 주위에 둘러서 있었네. 마차 안의 여자들과 바깥에 둘러선 남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갔지. 모두들 수다스럽고 쾌활한 친구들이거든. 나는 로테의 눈길을 잡으려하고 있었지. 아아, 그 눈길은 다른 사내들에게로만 이리저리 보내졌네. 그런데 나에게는! 나에게는! 나는 따돌려진 채 체념을 하고 서 있었네. 그 눈길은 나에게는 단 한 번도 돌려지지 않았다네! 나는 마음속으로하는 인사를 천 번도 더 하고 있었는데 말일세!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보지 않는 거야! 이윽고 마차가 떠나갔네!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머리 장식이 마차의 문 밖으로 내비치더니, 그녀가 뒤를 돌아다보는 게 아닌가. 아아! 나를 보기 위해서 그랬을까? 친구여!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네. 아마 나를 돌아다본 것이겠지,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일세----잘 있게나! 아아, 어쩌면 나는 이다지도 어린애 같을까! 7월 10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로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바보스러운 거동을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네! 누군가가 내게 로테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더구나----마음에 든다! 나는 그런 말이 딱 질색일세. 로테가 마음에 드는 사람 치고 모든 감정이나 생각이 그녀로 인하여 충만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마음에 들다니! 며칠 전에 나에게 오시안(아일랜드의 전설적 시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은 사람이 있었지. 7월 11일 M부인의 용태는 매우 위독하다네. 나는 부인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네. 로테와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 터이니까 말일세. 내가 그 부인 집에서 로테를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오늘 로테는 나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네----M이라는 노인은 아주 탐욕스러운 수전노로서, 여태껏 그 부인을 몹시 고생시키고 야박하게 굴어 왔다는 걸세. 그러나 부인은 어려운 대로 겨우겨우 살림을 꾸려 왔다는 걸세. 며칠 전, 의사가 그 부인에게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녀는 남편을 병상에 불러 놓고(로테는 그 자리에 있었다네)다음과 같이 말했다네. [당신에게 고백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제가 죽은 뒤에 분란이 일거나 불쾌한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되겠기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여태까지 최대한으로 절약하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 왔어요. 그러나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할 일이 있는데, 그건 제가 30년 동안 줄곧 당신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에요. 당신은 우리가 결혼했을 때, 부엌살림에 소용되는 경비와 집안살림의 비용 조로 얼마 안 되는 금액을 결정하셨지요. 그 뒤로 우리의 살림 규모도 늘고 장사가 확장되었는데도, 매주 당신이 주시는 돈은 변함이 없었어요. 좀더 올려 달라고 제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당신은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살림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에도 1주일에 7굴덴의 돈으로 꾸려 나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저는 당신 말대로 고분고분 그 7굴덴을 받았고, 모자라는 돈은 매주 가게의 매상금 중에서 따로 떼어 충당해 왔지요. 주부가 매상금의 일부를 훔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조금도 낭비를 하지 않았어요. 이런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편히 저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 뒤를 이어 살림을 꾸려 나갈 사람이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당신은 또 보나마나 그전 마누라는 그 돈으로 거뜬히 꾸려 나갔노라고 우기실 테니, 그 생각을 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로테와 이야기를 했네. 대충 2배 정도의 경비가 소요된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7굴덴으로 꾸려 나가고 있다면 그 이면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텐데, 그것을 그대로 지나쳤다니......그러나 나는 자기 집에가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네. 7월 13일 이건 나의 망상이 아닐세!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나에 대한 그리고 나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어리어 있음을 알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네. 그녀는 ----아아, 천국을 이런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까----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일세!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네! 그걸 알고부터 내가 나 자신에게 있어서 그지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자네에겐 이런 소릴 해도 괜찮을 테지. 자네는 나를 이해하니까----존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뒤부터! 이것은 나의 지나친 자만일가, 혹시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닐까?----로테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워지는 그런 인물은 없네. 그러나 로테가 그녀의 약혼자에 대해 열의와 사랑을 드러내며 이야기할 때, 나는 명예와 지위를 모조리 박탈당하고 대검까지 빼앗겨 버린 사람과 같은 느낌이 든다네. 7월 16일 어쩌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거나, 우리의 발이 테이블 아래에서 맞닿거나 할 때면, 아아, 뜨거운 피가 내 혈관속에서 소용돌이를 치네. 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그 손가락이나 발을 움츠렸다가는, 감각의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어 또다시 스르르 앞으로 내밀게 된다네. 모든 감각이 일시에 마비되어 현깃증이 날 지경이라네. 아아! 그런데도 그녀의 천진난만하고 구김살 없는 영혼은 자기의 그런 대수롭지 않은 친근감의 표시가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가를 전혀 알지 못한다네. 뿐만아니라, 그녀는 이야기를 한창 하는 도중에 자기 손을 내 손위에 얹기도 하고, 이야기에 열중해서 나에게 몸을 바싹 대기도 하여 그녀의 순결한 입김이 내 입술에 와 닿는 일조차 있다네. 그럴 때면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넋을 잃고 스러질 것만 같다네. 빌헬름이여, 혹시나 내가 언젠가 감히 이 천국을, 이 신뢰를----! 내마음 알아 주겠지? 내마음은 그토록 타락하지는 않았네! 다만 약할 뿐일세! 정말 약하단 말일세! ----그러나 이 약하다는 것이야말로 타락이 아니까?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는 신성 불가침의 존재일세. 그녀 앞에 나서면 일체의 욕망이 잠잠해지네. 그녀가 곁에 있으면 내 기분이 어떤지조차도 알 수 없어지네. 영혼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세----그녀는 한 멜로디를 천사처럼 소박하고 진지하에 피아노로 연주하네. 그것은 로테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지. 그녀가 그 최초의 음을 치는 소리가 울리기만 해도 나는 고뇌와 혼란, 그리고 우울로부터 해방된다네. 나는 이제 음악의 마력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기게금 되었네. 그 소박한 멜로디가 내 마음을 꼼짝없이 사로잡아 버리는 것을 보면 알 만하지 않은가! 로테는 내가 자신의 이마에 총알을 한 방 쏘고 싶어지는 그러한 때에 곧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네. 그러면 내 영혼의 미망과 암흑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나는 다시금 생기를 되찾아 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네. 7월 18일 빌헬름이여,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산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램프 없는 환등이나 다를 바 없는 걸세! 작은 램프를 끼움과 동시에 갖가지 영상이 흰 스크린에 나타나지. 그것이 한낱 그림자요, 일시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린애들처럼 그 앞에 서서 신비로운 광경에 가슴 설렌다면 , 그것은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거싱ㄹ세. 오늘 나는 로테네 지벵 가지 못했네. 피치 못할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하인에게 로테네 집에 갔다오라고 시켰지. 론테의 곁에 가 있다가 온 인간을 내 몸 가까이에 있도록 하고 싶었던 걸세. 얼마나 마음을 죄며 그 하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이윽고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 설레도록 반가왔다네. 체면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그의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 주고 싶었네. 형광석은 햇빛을 흡수해서, 밤이 되어도 얼마 동안은 빛을 발하다고 하더군. 그 젊은 하인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존재였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얼굴, 그의 뺨, 그의 웃저고리 단추, 그리고 그의 외투깃에 닿았었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신성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네. 그 순간, 누가 천 탈레르를 준다고 해도 나는 그 하인을 딴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걸세.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할 수 없이 흐뭇했거든----제발 비웃지는 말게나. 빌헬름이여,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그것이 한갓 환영일까? 7월 19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외친다네. 밝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태양을 맞이하면서 하는 거야. 그리고 진종일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네. 모든 것이 이 소망 속에 잠겨 버리는 걸세. 7월 20일 나더러 공사를 수행하여 xx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자네들의 의견이지만, 나는 그럴 의향이 없네. 나는 남에게 애속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게다가 모두들 나를 알다시피 그 공사라는 사람은 비위상하는 인물일세. 어머니께서 내가 활동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자네 글을 읽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지 않단 말인가? 완두콩을 세고 있건 잠두콩을 세고 있건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닌가! 세상만사 따지고 보면 다 하잘것없는 것들일세.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열이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허덕지덕 뼈빠지게 일을 하면서 돈이라든가 명예 따위를 얻으려 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바보일세. 7월 24일 그림 그리기를 등한히 하지 말라고 자네는 충심으로 충고하고 있지만, 그 문제는 잊어버리고 싶네. 바른 대로 말해서, 그 이우로 나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고 있는 실정일세. 지금처럼 내가 행복했던 적은 일찌기 없었네. 돌멩이 하나에서 풀잎에 이르기까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내 가슴 속에 지금처럼 충만했던 적은 없다는 걸세. 그런데----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나의 표현력은 미약해서, 모든 것이 내 영혼 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할 뿐, 윤곽조차도 포착할 수가 없네. 그러나 진흙이나 백랍이라도 있으면, 뭔가를 만들어 볼 생각이 들 것 같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진흙을 주물럭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완성되는 것이 비록 케이크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일세. 나는 로테의 초상화를 세 번이나 그리기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네. 전에는 꽤 솜씨있게 그릴 수 있었는데. 그래서 한층 더 울화가 치밀어오르더군, 그 뒤 나는 그녀의 실루엣을 그렸다네.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7월 26일 잘 알았소, 사랑하는 로테여. 만사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부디 일을 많이 맡겨 주이오. 될수록 자주 일을 시켜 주기 바라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내게 서 보내는 편지에는 잉크를 말리는 모래를 뿌리지 말아 주이오. 오늘은 편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더니, 입술이 깔깔합디다. 7월 26일 로테를 너무 자주 찾아가지 말자, 하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네. 그러나 그게 지켜질 리 없지. 매일 스스로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나서는, 나는 또 엄숙히 맹세를 하는 걸세. 내일은 찾아가지 말아야지, 하고 말일세. 그랬다가 그 내일이 되면, 나는 또다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찾아 내고는 어느새 벌써 그녀 곁에 가 있게 되는 걸세. 가령 전날 밤에 로테가 하고 말했다면, 그 누가 가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녀가 어떤 일을 부탁했을 경우도 있지. 그러면 내가 직접 가서 그녀에게 그 결과를 알려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걸세. 또 어떤 때는 날씨가 하도 좋아서 발하임으로 산책을 나간다네. 거기가지 가고 보면 로테네 집가지는 불과 반 시간이면 갈 수 있거든. 거기서부터 벌써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걸세. 우리 할머니는 곧잘 자석산 이야기를 해 주셨지. 배가 그 산 가까이 다가가면, 별안간 배 안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그 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뱃삶들은 가엾게도 산산이 흩어진 널빤지를 잡고 버둥거리다 죽는다는 내용이었지. 7월 30일 알베르트가 돌아왔네. 이제 나는 이 곳을 떠나야만 하겠지. 비록 그가 기품있고 훌륭한 인물로서, 모든 점에거 내가 그보다 한 수 처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여성을 소유하고 있는 그를 누앞에 두고 본다는 것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노릇일세. 소유!----그렇다네, 빌헬름. 어쨌든 그녀의 약혼자가 돌아온 걸세. 그는 훌류한 청년신사로, 누구나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세. 다행히 나는 그가 돌아올 때 마중하는 자리에는 있지 않았네.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걸세.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직 한 번도 로테에게 키스를 한 적이 없다네. 하느님, 사려깊은 그의 행동에 상을 내리소서! 그가 로테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서 나는 그를 경애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도 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으나, 짐작컨대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났다기보다는 로테가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인 듯하네. 그렇나 점에서는 여자란 빈틈이 없으니 말일세. 한 여자가 자기를 숭아하는 두 남자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할 수가 있다면, 덕보는 것은 언제나 여자 쪽이거든. 하긴 언제나 그렇게 잘 되어 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알베르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네. 그의 의젓함은 두드러지게 침착성이 결여된 내 성격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네. 그는 감수성도 풍부하며, 로테의 가치도 잘 알고 있네.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별로 없는 듯하네. 불쾌한 감정이야말로 내가 무엇보다도 증오하는 죄악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알베르트는 나를 사려깊은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일세. 로테에 대한 나의 애모,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나의 열렬한 기쁨, 그러한 것으로 인해 그가 느끼는 승리감은 더욱 커지고 따라서 그는 더 한층 로테에게 사랑을 쏟게 되는 걸세. 그가 때때로 사소한 질투로 로테를 괴롭히는 이리 있지나 않은지, 그런 것은 덮어 두기로 하겠네. 내가 알베르트의 처지라도 질투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것은 어찌되었든, 로테 곁에 있을 수 있는 나의 기쁨은 이제 사라져 버렸네. 내가 어리석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눈이 멀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뭐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실 그 자체가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을!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알베르트가 돌아오기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일세. 로테에 대하여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지. 왜냐하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한도 안에서의 사랑이었던 것일세. 그런데 마침내는 그 약혼자가 나타나서 그녀를 빼앗아 가 버리자, 이 바보 같은 인간은 눈이 휘둥그래져 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나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비웃는다네. 그러나 만일 나더러, 단념해라,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그자를 몇 배나 더 비웃어 주겠네. 그런 정신을 가진 인간은 없어져 버려가! 나는 숲속을 걸어 돌아다니다가 로테네 집으로 간다네. 그러면 알베르트가 정원의 정자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다네. 그것을 보면 나는 그만 더 이상 자중할 수가 없어져서, 마음껏 장난기를 발동시켜 어릿광대 같은 짓을 하곤 하는 걸세. [제발]하고 오늘 로테는 나에게 말했네. [어저께와 같은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식으로 지나치게 쾌활하게 구시면 어쩐지 무서워져요] 자네에게만 고백하지만, 나는 알베르트가 일이 바쁜 때를 노리고 있다가 그 틈을 타서 얼른 찾아간다네. 그래서 로테가 혼자 있으면 좋아하곤 한다네. 8월 8일 용서하게나, 빌헬름이여. 어쩔 도리가 없는 운명에는 얌전히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그런 인간은 딱 질색이라고 내가 매도했던 것은, 자네를 두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네. 자네도 그러한 의견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지.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자네 말이 옳아. 그러나 친구여, 내 한마디만 더 함게. 세상 일이란 으로 딱 부러지게 결말이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문 법일세.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는 실로 다양한 변화와 차이가 있는 걸세. 마치 매부리코와 사자코의 중간에 무수한 변화의 단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러니 자네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내가의 중간노선을 헤엄쳐 나가려 하더라도 제발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게나. 자네는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라고 말하는 거지? 로테에게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희망이 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서 소망을 성취하도록 하라.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용단을 내려서, 온 정력을 좀먹는 불행한 감정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노력하라, 이 말이지? 친구여! 그 말인즉 지당하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네. 서서히 악화되어 가는 질병으로 인해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와져 가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보고, 단도로 푹 찔러서 단박에 그 병고에 종지부를 찍어라, 하고 권유할 수 있겠는가? 환자의 정력을 좀먹는 질병은 또한 그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용기마저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닐까? 자네는 다른 비유를 끌어다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 즉, 우물쭈물하다가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상처난 팔을 끊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말일세. 나는 모르겠네! 비유를 끌어다 대면서 논쟁을 벌이는 짓은 그만두기로 하게. 아뭏든 빌헬름, 때때로 나는 모든 고뇌를 털어 버리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치솟을 때가 있다네. 그래서......만일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게 되기만 하면, 나는 그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할 걸세. 8월 8일 저녁 얼마 동안 팽개쳐 두었던 일기장을 오늘 무심코 펼쳐보고 놀랐네. 나는 번연히 알면서도 현재의 이런 사태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빠져 들어오고 있었던 걸세! 자신의 입장을 언제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어린애같이 처신해 왔네. 지금도 나는 그걸 분명히 알고 있네. 그러면서도 여기서 헤어나게 되지를 않는군. 8월 10일 어리석지만 않다면 나는 최고로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텐데......한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환경만큼 갖가지 조건이 결합되어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걸세. 정녕 우리의 마음만이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일세. 나는 지금 단란한 가정의 한 식구가 되다시피 해서, 노인들로부터는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고, 아이들로부터는 아버지처럼 흠모를 받으며, 또 로테로부터도! 그리고 성실한 알베르트, 그도 또한 변덕이나 무례한 언동으로 내 행복을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없다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우정으로 나를 감싸 주고 있네. 그는 이 세상에서 로테다음으로 나를 사랑해 주고있다네! 빌헬름이여, 우리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로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누가 옆에서 듣는다면 재미있을 걸세. 세상에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나는 때때로 눈물이 핑 들곤 한다네. 어느 날, 알베르트는 로테의 훌륭하였셨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네. 그 임종의 병상에서 로테의 어머니는 집안 일과 아이들을 로테에게 맡긴다고 말했다는 걸세. 그 이후로 로테는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정신적인 자세로 살아 나갔으며, 집안 일에 대한 배려라든가 그 진지성은 진짜 어머니를 방불케 했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일하며 동생들을 보살폈는데, 그러면서도 언제나 쾌활하고 상냥한 성품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걸세. 그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길가의 꽃을 꺾어 공들여 꽃다발을 만든 다음, 흘러가는 개울물에 그 곷다발을 던지고 그것이 천천히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네. 자네에게 이미 알렸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알베르트는 이 곳에 정주하여 궁정으로부터 상당한 급여가 지급되는 어떤 관직에 앉게 될 모양일세. 그느느 궁정에서 꽤 호감을 사고 있는 더이거든, 이릉ㄹ 착실히 하고 부지런히 해 낸다는 점에서 그와 비견할 만한 자를 나는 본 적이 없네. 8월 12일 분명히 알베르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인간일세. 그런데 나는 어제 그와 더불어 한바탕 기묘한 논쟁을 벌렸네. 나는 작별인사를 하러 그의 집에 찾아갔었던 걸세. 말을 타고 산으로 여행을 하고 싶어졌었거든. 지금 이 편지도 여행지에서 쓰고 있는 것이라네. 그의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으려니까, 권총이 눈에 띄더군. [저 권총을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여행중의 호신용으로 휴대하고 싶은데]하고 나는 말했지 [좋도록 하세요]하고 그는 대답하였네. [다만 총알을 장전하는 수고는 당신이 해야만 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그저 장신용으로 걸어 놓았을 뿐이니까요]나는 권총 한 자루를 집어 내렸지. 알베르트는 말을 계속하였다네. [지나치게 경계를 하다가 엉뚱한 사건이 벌어진 뒤로는, 이런 총기를 만지지 않기로 했지요] 내가 그 사연을 묻자 [시골에 있는 어느 친구 집에]하고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네. [석 달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요, 나는 한 쌍의 소형 권총을 장전도 하지 않은 채 갖고 있었는데, 그래도 밤에는 아무 걱정없이 잘 잤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무심히 앉아 있노라니까 어찌된 영문인지,문득 강도가 언제 덮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권총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기분, 당신도 이해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하인에게 권총을 내주며, 손질을 좀 하고 총알을 장전하라고 일렀어요. 그런데 그 하인이 하녀들과 장난을 치느라고 권총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 중에 어쩌다가 그만 권총이 발사되었지 뭡니까. 총구 청소용 꽂을대가 꽃힌채 발사되었는데, 그 꽃을대가 하녀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발혀 엄지손가락이 박살이 나 버렸지요. 울고불고 소동이 벌어진데다가 나는 치료비까지 물어 줘야 했답니다. 그러뒤로 나는 총기에는 일제 총알을 장전하지 않고 놓아 두기로 했어요. 아무리 조심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위험이란 예측할 수 없는 거싱거든요. 하긴......]그러데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알베르트란 인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건 이런 말을 꺼내기 이전의 그에 한정되는 걸세. 어떤 일반적인 명제라 하더라도 예외가 있는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러데 이 인물은 자기 말이 꼭 정론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세. 약간 경솔한 말을 했다거나, 일반적인 말, 혹은 불확실한 발언을 했다 싶으면, 그는 먼저 한 말을 새로이 한정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며 한없이 늘어놓아서, 나중에는 어떤것이 본론인지 모르게 되어 버리곤 하는 걸세. 이번에도 그는 장황하게 파고들며 변론을 벌이는 것이었네. 결국 나는 그의 말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엉뚱한 환상에 빠져 권총 부리를 내 오른쪽 눈 위의 이마에다 갖다 대었다네. [저런!] 하면서 알베르트는 내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네. [이게 무슨 짓이오?] 총알도 없는데 뭘 그러십니까!]하고 나는 말했지. [총알이 들어 있지 않더라도,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쏠 정도로 어리석을 수가 있는지......생각만 해도 불쾌해요]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하고 나는 외쳤네.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현명하다, 그것은 좋다, 그것은 나쁘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인데, 그렇게 말함으로서 어떤 해위의 내면적인 사정을 다 헤아릴 수 있나요? 어째서 그러한 행위가 행하여졌겠는가, 어째서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는가, 그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나요?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들도 그렇게 성급한 판단은 내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시인하겠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말했네. [어떤 종류의 행위는, 그것이 어떤 동기에서 행하여지든간에 죄악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네. [그렇지만 말입니다]하고 나는 응수했지. [거기에도 약간의 예의는 있어요. 도둑질이 죄악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러나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당장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아사를 ㅁㄴ하기 위하여 도둑직을 했다면, 그자는 동정을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벌을 받아야 할까요? 정당한 분노가 치받치어 부정한 아내와 그녀의 비열한 유혹자를 살해한 남편, 환희의 한때에 이성을 잃고 억누를 길 없는 사랑의 환락에 몸을 내맡긴 소녀, 이들을 향해 누가 냉혈적인 기준마저도 감동하여 형벌을 유보하지 않습니까?] [그건 별문제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대답하였네. [걱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 인간은 사려분별이 전혀 없어져 있기 때문에, 술취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과 같이 간주되니까요] [아아, 당신네 이성적인 사람들이여!]하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외쳤네.[걱정! 술취한 사람! 미친 사람! 당신들은 그렇게 말하며 마치 남의 일처럼 태연하군요. 훌륭한 도덕군자들입니다. 술취한 사람을 나무라고, 정신착란자를 외면하며, 성직자들처럼 그 옆을 지나서는, 바리세인들처럼 자기가 그러한 인간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겠지요. 나는 술취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격정에 사로잡혀 거의 제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업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이릉ㄹ 성취할 비범한 인간들은 옛날부터 모두 주정뱅이라느니 미치광이라느니 하는 지탄을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자유롭고 고결하며 남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 할라치면, 그 이릉ㄹ 하고 있는 도중에 거의 예외없이, 저놈은 미쳤어, 저놈은 바보야, 하고 매도를 하니, 이건 정말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정신이 말짱한 당신네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당신네 현명한 사람들이여!] [그것 역시 당신의 편력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말했네. [당신은 무엇이나 지나치게 과장을 합니다. 적어도 이번의 경우, 당신의 논리는 부당해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자살인데, 그것을 당신은 위대한 행위에 비하고 있으니 당치않은 일이지요. 자살은 아무래도 의지가 박약한 행위로밖에는 볼 수 없어요.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인생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 나가기보다는 죽어 버리는 편이 편하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나는 그만 논쟁을 끝맺으려 했네. 남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시덥쟎은 상투적인 문구를 들고 나오니, 그것처럼 못 견딜 노릇이 없거든. 그런데 그의 이런 말은 전에도 여러 차례 들었고, 나도 몇 번 화를 낸 일이 있으므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간 쾌환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네. [의지가 박약한 행위라뇨, 제발 겉만을 보고 오판하지 마세요. 폭군의 지독한 압정에 시달리고 있던 민족이 마침내 궐기하여 그 압정의 쇠사슬을 끊었을 때, 그것을 당신은 의지가 박약한 행위라 할 수 있나요?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놀라서 온몸에 힘이 불끈 솟고, 여느 때에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드는 사람이라든가, 또는 모욕을 당하고 격분해서 여섯 사람을 상대로 맞싸웟 그들을 때려눕히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의지가 박약한 인간이라고 해야만 옳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긴장하 노력하는 것이 꿋꿋한 행위라면 지나친 긴장이 어째서 그 반대가 되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알베르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네. [기분나빠하지 말아요. 방금 당신이 든 예는 이 경우에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하고 나는 말했네. [나는 여러 차례 비난을 받은 바 있어요, 나의 연상이 때때로 엉뚱한 곳으로 뻗어 나간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논법으로 내 의견을 말해 보겠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즐거워야 할 인생을 포기해 버리려고 결심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상상할 수가 없는지, 우리 한번 시도해 봅시다. 요컨대,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떤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니까요. 인간의 본성에는 어떤 하계가 있는 겁니다. 기쁨이나 슬픔, 고통 등도 어느 일정한 한도까지는 견뎌 낼 수가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서면 파멸하고 맙니다. 이건 사람이 약하다든가 굳세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 견뎌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지요.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나 말입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어요. 당한 것은, 악성 열병으로 죽는 인간을 비겁한 자라 함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이겁니다] [그건 궤변입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알베르트가 외쳤네. [당신이 생각하듯이 그런 궤변은 아닙니다]하고 나는 응수를 했지. [이런 것은 당신도 시인하리라 믿어요. 가령 육체가 몹시 병들고, 기력도 기능도 쇠약해져 버려서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할 때, 우리는 그걸 죽을 병이라 함이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을 정신에 적용해 봅시다. 생각을 외곬으로만 모이며 끙끙 앓는 인가능ㄹ 잘 관찰해 보세요. 갖가지 인상이 그에게 작용하여 관념이 고정되고, 마침내 격정이 더욱 항진되어서 냉철한 사고능력이 상실된 끝에 그는 파멸하고 마는 겁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 불행한 인간의 상태를 위에서 내려다보녀, 이래라저래라 말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건강한 인간이 환자의 병상 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기 힘을 그 만분의 일도 환자에게 주입시켜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내 말은 알베르트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연못에 투신자살한 한 소녀의 일을 그에게 일깨워 준 다음, 그 이야기를 그에게 되풀이해 주었지. [착한 아가씨였지요. 일정한 집안 일을 돌보며, 지극히 좁은 세계에서 자라났답니다. 낙이라고는 조금씩 저축해서 장만한 나들이옷을 입고 일요일이면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거나, 큰 축제일에 무도회에 참석한다거나, 남들의 평판이며 뒷소문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웃집 처녀들과 하염엾이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따위가 고작이었죠. 그런데 이 아가씨의 열정적인 성질이 마침내 좀더 깊은 요구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남자들이 치켜 주는 바람에 그런 요구가 더욱 부풀어올라 여태까지 낙으로 여겨 왔던 일들이 차츰 시들해졌던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지요. 여태껏 알지 못했던 감정에 정신없이 끌려들어서, 자기의 모든 희망을 그 남자에게 걸고 주위의 세계를 잊어버렸지요. 자기에게 유일한 존재인 그 남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된 상태로, 오로지 유일한 존재인 그 남자만을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일찌기 바람이 나서 부질없는 쾌락을 즐기는 따위의 해독에 물든 적이 없는 아가씨였으므로, 그녀의 소망은 오직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지요. 지금까지 누려 보지 못했던 모든 행복을 동경해 오던 일체의 기쁨을 그와의 영원한 결합 속에서 찾아 내려 한 것입니다. 희망의 실현을 보증하는 거듭된 약속, 그녀의 욕정을 더욱더 향진시키는 그의 대담한 애무,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렸지요. 황홀경 속에서 그녀는 온갖 기쁨을 예감하며, 극도로 긴장된 심경으로 마침내 자기의 소망을 품에 안으려고 두 팔을 벌렸답니다. 그때 애인은 그녀를 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넋을 잃고 깊은 연못 앞에 멈춰섭니다. 사방은 온통 암흘이요,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위안도,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오직 그 남자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으니까요. 자기 눈앞에 있는 넓은 세계도 보이지 않고, 잃어버린 보물을 보상해 줄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도 눈앞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전세계로부터 버림을 받고, 혼자 외토리가 된 자신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눈앞이 캄캄해지고,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연못에 몸을 내던집니다. 자기를 감싸줄 죽음 속에서 모든 고뇌를 잔재워 버리려고 말입니다. 알베르트 씨,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아까 말한 병자의 경우와 이치는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서로 얽히며 싸우는 갖가지 힘의 미궁 속에서 생명의 탈출구를 찾아 내지 못하여 결국 그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곁에서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할 거요. 그것은 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알베르트는 이 비유도 납득할 수 없는 모양으로, 여전히 몇마디 반론을 제기했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네. 즉, 내가 말한 것은 한낱 무지한 여자의 얘기로, 만일 그렇게 외곬으로만 치달리지 말고 좀더 넓게 생각하는 분별력을 가졌던들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세. [알베르트 씨]하고 나는 소리쳤네. [인간은 다 마찬가지랍니다. 얼마쯤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걷잡을 수 없이 정열이 고조되어 한계점에까지 몰렸을 때는 거의, 아니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모자를 집었네. 아아, 내 가슴은 꽉 메는 듯하였다네.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지.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네. 8월 15일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없을 걸세. 로테는 나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네. 나는 그것을 그녀의 태로에서 느낄 수가 있네. 아이들도 내가 날마다 찾아 주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네. 오늘 나는 로테의 피아노를 조율해 주러 갔었는데, 그 일은 건드리지도 못했네. 아이들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로테도 아이들의 청을 들어 주라고 했기 때문일세. 나는 아이들에게 저녁 빵을 잘라 주었지. 아이들은 이제 내가 빵을 잘라 주어도 로테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받아 먹는다네----그런 다음에 나는 골방에 갇힌 공주 이야기를 해 주었네. 그것은 내가 곧잘 해 주는 이야기로, 공주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천장에서 여러 개의 손이 내려와서 먹을것을 주었다는 내용이지. 얘기하면서 나는 배우는 게 많다네.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깊이 감명을 받는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이야기 속의 세세한 대목은 창작해서 들려 주기도 하는데, 먼저 했던 것을 잊고 좀 다른 소리를 하면, 이이들은 곧 지난번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세. 그래서 지금은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이 정확하게 암송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네.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는데, 저작자가 자신이 지어서 일단 출판했던 책을 개정해서 재판을 내면, 설령 예술적으로는 더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 저서는 반드시 손산을 입게 마련이라는 걸세.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첫인상이 좋은 법이거든. 인간은 아무리 엉뚱한 이야기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있게끔 생겨먹었단 말일세. 더구나 일단 받아들여진 인상은 곧 머릿속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 걸세. 그것을 수정하거나 말살해 버리려는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8월 18일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또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천이 됨은 불가피한 일이란 말인가? 내 마음 속에 충만해 있는 생동하는 자연에 대한 열렬한 감정은 나로 하여금 기쁨에 넘치도록 하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낙원으로 변모시켜 주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가혹한 박해자요, 고뇌의 정령이 되어 어디를 가나 내게 달라붙어 다니네. 일찌기 바위 위에서 강 건너 저 쪽 언덕에가지 이어진 풍요한 골짜기를 굽어보며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싹트고 생기에 넘치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또 기슭에서 산봉우리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뒤덮여 있는 저 산들과 아름다운 숲그늘 아래 구불구불 뻗어 있는 저 골짜기들을 바라모았을 때,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은 소곤대는 갈대 사이를 미그러지듯 빠져나가면서 다정스런 저녁바람이 일렁일렁 불어 보내는 사랑스러운 구름을 그 수면에 비추고 있었지. 그리고 새소리는 사방에서 기차게 춤추고, 풍뎅이들은 태양의 마지막 섬광을 받으며 풀숲에서 해방되어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녔었지. 나를 둘러싼 웅성거림에 이끌리어 땅 위로 시선을 돌리면, 내가 서 있는 단단한 바위에는 이끼가 달라붙어 양분을 빨아들이고, 메마른 모래언덕의 사면에는 저 멀리 아래쪽까지 관목이 자라 있어서, 자연히 펼펴 보여 주었었지. 그 때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내 뜨거운 가슴 속에 감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넘치는 풍요로움 속에서 나 자신이 신이 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에 잠기기도 했었다네. 그리하여 무한한 세계의 갖가지 장려한 모습들이 내 영혼 속에서 활기에 넘쳐 약동했었다네. 거대한 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깊은 연못이 내 눈앞에 가로놓여 있었으며,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은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려서 내 발 아래를 흘러갔고, 숲과 산들에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네. 그 때 나는 구명할 수 없는 그 모든 힘들이 대지의 밑바닥에서 서로 뒤섞이며 작용하는 것을 보았네. 그렇게 하여 창조된 온갖 생물들이 지금 이 대지 위를 뒤덮고, 하늘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는 걸세. 생명을 지닌 것들이 천태만상으로 이 세계에 가득 차 있단 말일세. 그런데 인간은 그 조그마한 집에 모여 살면서 몸의 안전을 도모하고, 거기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주제에 넓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 걸세! 오, 가엾고 어리석은 존재여! 너는 너 자신이 미소하기 때문에 만물을 그와 같이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창조자의 영혼은 근접할 수 없는 산악에서 인적미답의 황야를 넘어 미지의 대양의 끝에 이르기까지 충만해 있으며, 그것을 느끼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온갖 생물을, 티끌과 같은 존재에 이르기까지도 기뻐하시는 거라네. 아아, 그 때 나는 머리 위를 날아가는 학의 날개를 빌어, 망망한 대해의 저 건너편 기슭으로 얼마나 날아가고 싶어했는지 모른다네. 신의 술잔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넘쳐나는 더없는 생명의 환희를 마시고, 단 한 순간이나마 만물을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해 내고 있는 지고하신 분의 지극한 행복을 맛보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네. 친구여,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만이 내 기억을 북돋우어 주는 일이라네. 형언할 수 없는 그 무렵의 감정을 되새겨 보려는 노력만으로도 내 영혼은 승화되고 고양된다네. 그러나 이윽고는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불안함을 더한층 절실히 느끼게 된다네. 내 영혼 앞에 드리워져 있던 장막 같은 것이 걷혀 버린 듯싶네. 무한한 생명의 무대는 이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입을 벌리고 있는 깊고깊은 무덤으로 변해 버린 걸세. 모든 것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번개처럼 빠르게 사라져 가네. 그 지극히 짧은 동안의 존재조차 온전히 누리는 일도 없이 변전의 분류속에 휩쓸리는가 하면, 물밑에 가라앉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혀 으스러져 버리기도 하는 걸세.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한순간 한순간이 자네와 자네 주위의 사람들을 좀먹어 가고 있는 걸세. 한순간 한순간마다 자네 자신이 파괴자가 되고 있으며, 또 그렇게 도지 않을 수 없는 걸세. 무심코 산책을 할 때만 해도 수많은 벌레들의 생명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한 발자국을 내딛다가 공들여 쌓아올린 개미들의 전당을 무너뜨려, 그 작은 세계를 참혹한 무덤으로 화하게 하지 않는가. 어쩌다가 일어날 뿐인 세계적인 대재액이나, 마을들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 도시를 삼켜 버리는 지진, 나는 결코 그런 따위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세. 자연의 온갖 사물 속에 잔재되어 있는 잠재력, 이것이 내 마음의 터전을 파헤쳐 무너뜨리는 걸세. 자연 속에서 창조된 일체의 것은 예의없이 자기의 이웃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걸세. 나는 불안하다 현깃증이 난다네.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서 잘용하고 있는 것은, 영원히 집어삼키고 영원히 반추를 하고 있는 괴물뿐이라네. 8월 21일 아침에 가슴 답답한 꿈에서 어렴풋이 눈이 뜨이면, 나는 헛되이 그녀를 찾아 두 팔을 내뻗는다네. 그녀와 나란히 초원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거기에 수없이 키스를 퍼붓는 착각에 빠져 한밤중의 침대 속에서 나는 헛되이 그녀를 찾는다네. 아아, 그리하여 아직도 덜 깬 도취경 속에서 소능로 그녀를 더듬다가 퍼뜩 제정신이 들면 미어지는 듯한 가슴 속에서 눈물의 분류가 솟구쳐 오르는 걸세. 그리하여 나는 절망 속에서 어두운 내일을 생각하며 엎드려 운다네. 8월 22일 비참한 심경일세. 빌헬름! 내 활동력은 이상을 일으켜 불안스러운 나태로 변해 버렸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런 허탈상태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큰일일세. 나에겐 이제 사고능력도 없고, 자연을 감상할 흥취도 없네. 책따윈 더구나 진절머리가 나네. 자기 자신을 상실하다는 것을 뜻하지. 거짓말도 아니고 과장도 아닐세. 때때로 나는 날품팔이꾼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드네. 아핌에 눈을 떴을 때 그 날 하루의 목표가 뚜렸다고, 자신을 긴장시키는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때때로 알베르트가 부럽다네. 서류 속에 파묻혀 있는 그가 나라면 얼마나 좋을 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자네와 장관에게 편지를 내어 공사관에 자리를 하나 얻어 달라고 할까 생각했었지. 그런 자리라면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았고, 자네도 또한 보증해 줄 걸로 믿고 있었기 때문일세. 그전부터 장관은 나를 아껴 주었고, 어떤 자리에든 앉아서 실무를 보라고 권유해 왔거든. 한순간 그럴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생각이 달라지곤 하네. 어떤 말이,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지겨워져 제 몸에 안장을 언고 마구를 얹어 달래서 사람을 태우고 다니다가, 마침내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는 그 우화가 생각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마는 걸세. 친구여! 환경의 변화를 구하는 마음은 초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어디를 가나 나를 뒤쫓아오는 것이 아닐까? 8월 28일 내 병이 고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고쳐 줄 사람은 틀림없이 이들일 걸세. 오늘은 내 생일일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알베르트로부터 소포가 배달되었다네. 포장을 끄르자 곧 바로 눈에 띈 것이 분홍색 리본이었네. 로테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가슴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그 후에 몇 번인가 그녀에게 졸라서 내가 얻으려 했던 것이지. 그리고 12절판의 문고본이 2권 들어 있었네. 베트시타인 판의 호메로스로, 산책을 하면서 무거운 에르네스티 판을 들고 다니기가 거추장스러워서 벌써부터 갖고 싶었던 책이지. 이런 식으로 이 사람들은 내 소망을 미리 알고서, 알뜰한 우정을 나타내는 조그마한 선물을 찾아 내어 준다네. 이러한 성의는, 보낸 사람의 허영심에 받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게 되는 그런 값진 선물보다는 천 배나 더 귀중한 것이지. 나느 그 리본에 수없이 입술을 갖다 대었네. 그리고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그 즐거웠던 날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짧은 그 시절의 행복한 추억들을 되새겼다네. 빌헬름이여, 그러나 불평은 하지 않겠네. 인생의 꽃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거니까. 얼마나 많은 꽃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채 떨어져 버렸는가. 열매를 맺는 꽃은 지극히 적고, 열매를 맺어도 온전히 익게 되는 것은 더구나 더 적은 걸세. 그렇다고 익은 과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네. 그런데도......아아, 친구여! 우리가 그 익은 열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맛도 보지 않은 채 썩여 버려도 괜찮은 걸까? 잘 있게. 멋진 여름일세. 나는 곧잘 과일을 따는 긴 장대를 들고 고테네 과수원 나무에 올라가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딴다네. 그러면 로테는, 그 아래에 서 있다가 내가 떨어뜨려 주는 배를 받는다네. 8월 30일 불행한 사나이여! 너는 바보가 아닌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 아닌가? 미칠 것만 같은 이 끝모르는 정열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나는 이제 그녀에 대한 기도밖에는 모리게 되어 버렸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녀의 모습뿐이라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공상에 잠겨 있으면 나는 행복한 몇 시간을 누릴수가 있다네. 그러나 이윽고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려야만 하는 걸세! 아아, 빌헬름이여! 내 마음은 나를 어디로 몰아가려 하는 것일까?----그녀 곁에서 2시간이고 3시간이 흘러가면, 그녀의 모습, 그녀의 거동, 그리고 그녀의 말의 고상한 표현들에 황홀해져 있다가도 차차 모든 감각이 긴장되어 눈앞이 캄캄해지고 귀가 먹먹해지며, 암살자의 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 그리하여 내 심장은 숨막히는 감각을 완화시키려고 세차게 고동치는데, 그것이 오히려 감각의 혼란을 더 가중시킬뿐이라네. 아아, 빌헬름! 그러면 나는 자신이 이 지상에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게 되어 버리는 걸세. 때때로 가눌 길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있을 때, 로테가 자기 손에 얼굴을 묻고 실컷 울어서 가슴 속의 괴로움을 풀어 버리라고 슬픈 위안을 해 주기라도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 버리지 않을 수 없네. 그리하여 먼 들길을 헤매고 다닌다네. 길도 없는 숲속을 속이 후련해지는 걸세. 그야말로 얼마쯘 말일세! 그러다가 도중에서 피로와 갈증 때문에 몇 번이나 쓰러져 눕곤 한다네. 보름달이 하늘높이 떠오르면, 상처입은 발바닥을 잠깐이나마 쉬게 하려고 고요한 숲 속의 구부러진 나무뿌리 위에 앉아 있다가 정신적인 해이와 피로 때문에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꾸벅꾸벅 잠들어 버린다네. 아아, 빌헬름이여! 참회의 수도복에 가시덤불의 띠, 그리고 암자 속에서 혼자 거처하는 일, 그것이 내가 마음 속으로 동경하며 갈구하고 있는 위안인 것만 같네. 잘 있게! 이 비참한 상태의 종말은 무덤밖에는 없을 것 같네. 9월 3일 나는 여기를 떠나겠네! 고맙네. 빌헬름. 흔들리는 내 결심을 자네가 굳혀 주었으니 말일세. 벌써 2주일 전부터 그녀 곁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주곧 해 왔으면서도 결단을 못 내렸는데, 이젠 정말 떠나야겠네. 그녀는 시내의 아는 부인 집에 가 있네. 그리고 알베르트는......그리고......어쨌든 나는 떠나야겠네. 9월 10일 안타까운 밤이었네! 빌헬름, 지금 나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있네. 이제 다시 그녀를 만나는 일은 없을 걸세. 아아, 자네 목을 끌어안고 실컷 눈물을 흘리며, 내 가슴 속에서 몰아치는 갖가지 생각을 망음껏 하소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지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아침이 되기는 기다리고 있다네. 아아, 그녀는 편안히 잠들어 있네. 다시는 나를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걸세. 2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내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네. 아아, 정말 기막히는 대화였네! 알베르트는 저녁식사를 마치면 곧 로테와 함께 정원으로 나오겠노라고 약속을 했었지. 나는 언덕의 밤나무 아래에 서서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그리운 골짜기, 조용히 흐르는 강물 저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네. 지금까지 나는 몇 번이나 그녀와 함께 이 곳에서 그장엄한 광경을 바라보곤 했었지. 그러나 지금은......내가 좋아하던 가로숫길을 오락가락해 보았네. 내 마음을 이끄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정취가 어리어 있어서, 아직 로테를 알지 못했을 때부터 나는 곧잘 이 곳에서 발길을 멈추곤 했었다네. 그리고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가 다같이 이 곳을 좋아하고 았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이나 기뻐했었지. 확실히 이 곳은 내가 본 곳 중에서는 가장 낭만적인 장소일세. 우선 밤나무들 사이로 전망이 탁 틔어 있다네------여기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벌써 꽤 여러 번 이야기한 것 같군------너도밤나무숲이 병풍처런 둘러싸고, 그에 이어져 있는 우거진 나무들로 가로숫길은 더욱더 어두워지는데, 그 끄트머리에 아늑한 장소가 있지. 거기엔 섬뜩할 정도의 정적이 깃들여 있다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어느 날 한낮에 처음으로 이 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었지. 그리고 이 곳이 장차 내 행복과 고뇌의 한 무대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었다네. 내가 약 반 시간쯤 이별과 재회의 애달프고 달콤한 상념에 잠겨 있으려니까, 두 사람이 언덕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네. 나는 얼른 달려가서 그들을 맞이하고, 일종의 전율을 느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거기에 키스를 했네. 우리가 언덕 위에 오르자, 때마침 달이 울창한 언덕 너머에서 떠오르기 시작하였네. 잡담을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두운 정자에 이르렀네. 로테는 정자 안으로 들어가 앉았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네. 나는 일어나서 그녀 앞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다시 앉았네. 어쩐지 몹시 불안한 기분이었네. 로테는 달빛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네. 달은 너도밤나무 숲의 꼭대기에 걸려 우리 앞에 펼쳐진 언덕을 구석구석 비추고 있었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었네. 우리가 있는 장소가 깊은 암흑에 싸여 있는 아늑한 곳이 있었는데, 이윽고 로테가 말문을 열었네. [달밤에 산책을 하면, 저는 언제나 돌아가신 분들 생각이 나요. 자꾸만 죽음이라든가 내세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우리도 언젠가는 저세상에 갈 게 아니예요?] 로테는 뭐라 말할 우 없는 감정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네. [베르테르 씨, 우리는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까요? 서로가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테]하며 나는 눈에 눈물이 그득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았네.[우리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세상세서나 저세상에서나 나 다시 만나게 되구말구요!] 나는 그 이상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네. 빌헬름이여, 내가 애달픈 이별을 가슴 속에 숨기고 있을 때 그녀가 나에게 그런 말을 묻다니! [돌아가신 그리운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요?]로테는 말을 계속하였다네. [우리가 몸성히 잘있으면서, 변함없이 그 분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아아! 조용한 저녁 무렵, 어머니의 아이들, 곧 제 동생들과 같이 있을 때,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제 둘레에 모여들 때마다 어머니가 임종하실 때하고 약속했던 그 일을 제가 정성껏 지키고 있는 모습을 어머니께서 보셨으면 하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중얼거린답니다.라구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네! 아아, 빌헬름이여, 그 누가 그녀의 말을 되풀이할 수 있으랴! 생명 없는 차가운 문자로 그 성스러운 정신의 꽃을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알베르트는 점잖게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네. [로테, 그런 생각을 너무 골똘히 하면 해로와요. 당신이 곧잘 그렇 생각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제발 부탁이니......] [아아, 알베르트 씨]하고 그녀는 말했네. [잊지 않으셨겠지요, 저녁마다 조그마한 둥근 테이블 둘레에 모여앉아 있었던 일 말이예요. 아빠는 아직 여행에서 돌아오시지 않고, 아이들은 재워 놓은 뒤였지요, 당신은 가끔 책을 갖고 오셨지만, 그것을 펼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지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그 기품있는 영혼과 접촉하는 일이 마음을 사로잡았으니까요. 어머니는 아름답고 다정하고 쾌활하셨으며, 휴식을 모르는 분이었어요. 하느님은 제 눈물을 알아 주실 거예요. 저는 침대에서 하느님 앞에 엎드려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랍니다] [로테!]하고 소리치며 나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네. 내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손을 적셨네. [로테, 하느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있고, 또 어머니의 영혼도 결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베르테르 씨가 저희 어머니를 생전에 아셨더라면] 로테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네. [어머니는 당신이 인정할 만한 훌륭한 분이었어요!] 나는 까무러칠 것만 같았네. 이토록 자랑스러운 말을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었네. 로테는 말을 계속하였네. [하지만 어머니는 한창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막내가 태어난 지 채 6개월이 되기 전이었어요. 오래끈 병환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운명에 몸을 맡기고 있었는데, 다만 아이들, 특히 막내 일을 생각하며 가슴아파하셨어요. 마침내 임종이 가까워지자 저에게 하셨어요,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작은 애들은 아직도 사정을 알지 못했고, 큰 애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주위에 둘러서자, 어머니는 두 손을 들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해 주시고, 한 아이씩 차례로 입을 맞춰 준 다음 밖으로 내보냈어요. 그리고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 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맹세를 했지요. 하고 어머니는 말씀하였어요. .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으셨으나,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어요. 슬픔을 못이겨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가셨던 겁니다. 알베르트 씨, 당신은 그 때 방에 계셨죠. 어머니는 당신 말소리를 듣고 누구냐고 묻고는 , 당신을 곁에 부르셨어요. 그리고 당신과 저를 보시며, 너희 두 사람은 행복할 거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하시고는 안심한 듯이 평온한 눈길을 보내셨어요......] 알베르트는 로테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면서 외쳤네. [그래, 우리는 행복해!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거요!]냉정한 알베르트도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있었으며,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네. [베르테르 씨]로테는 다시 말했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가장 사무치게 느끼는 것은 아이들일 거예요. 아이들은 그 뒤로 하며 오래도록 슬퍼했지요] 로테는 일어섰네. 나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이 깜짝 놀라면서 로테의 손을 잡았네. [그만 돌아가요]하고 그녀는 말했네.[밤이 늦었어요] 로테는 손을 빼려 했으나, 나는 더욱 힘을 주어 그 손을 잡았지.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하고 나는 외쳤네.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서로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난 가겠어요]그런 다음에 나는 덧붙였네. [기꺼이 작별하겠어요. 그러나 영원한 이별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로테! 안녕히 계십시오, 알베르트 씨!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내일 말이지요?]하고 로테는 내 말을 농담으로 돌리며 말했네. 그 이 어떤 것인지 나는 똑똑히 느꼈다네! 아아, 그러나 로테는 그것을 짐작조차 못하는 걸세. 두 사람은 가로수가 우거진 길을 나란히 걸어갔다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달빛속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보습을 바라보고 있었지. 그러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실컷 울었다네. 이윽고 나는 벌떡 일어나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네.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보리수나무 아래 정원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로테의 하얀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네. 나는 그 쪽을 향해 두팔을 내밀었지. 그러나 그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렸네. 제 2 부   1771년 10월 20일 우리는 어제 이 곳에 당도했네. 공사는 몸이 좀 불편해서 2,3일 집 안에 들어앉아 있을 모양일세. 그 사람이 좀 불편해 까다롭지만 않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련만, 나는 알고 있네, 운명이 나에게 가홀한 시련을 내리려 했다는 것을 그러나 용기를 내야지! 가벼운 기분을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견디어 낼 수 있는 걸세. 가벼운 기분? 이런 말을 쓰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군. 아아, 좀더 경쾌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되었을 텐데. 기가 말히는 일 아닌가! 다른 녀석들이 보잘것없는 힘과 재능을 갖고 가슴을 쫙 펴고 보란 듯이 으스대며 내 앞을 활보하고 있는데, 나는 내 힘과 재능에 절망하고 있으니 말일세! 저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그 절반을 도로 가져가시고 그 대신 자신과 만족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참아야지! 그러면 잘 되어 갈 걸세. 친구여, 자네 말이 맞네. 세상 사람들 틈에 끼여 날마다 일에 쫓기며, 딴 사람들이 하는 일이며 그들의 행동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나는 나 자신과 훨씬 더 잘 타협할 수 있게 되었네. 확실히 우리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른 모든 것과 비교하게끔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대상에 따라서 결정되는 걸세. 그러므로 고독같이 위험한 건 또 없는 걸세. 우리의 상상력은 그 본질상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며, 또 문학이나 시 같은 것에 스여 있는 내용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의 서열을 매기는데, 그러고 보면 자기 자신은 서열의 가장 아래쪽에 있고 자기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보다 훌륭하고, 누구나 자기보다는 완전한 것같이 보이는 것같이 생각하게 마련이거든. 제다가 자기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첨가하고, 더 나아가서 일종의 이상적인 생활의 즐거움까지를 덧붙이는 걸세. 그리하여 완전무결하게 행복한 인간이 만들어지는데, 알고 보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에 지나지 않네. 그와는 반대로, 힘이 약하면 약한 대로 전력을 다 기울여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가면, 설령 속도가 느리고 멀리 돌아가는 일이 거듭된다 하더라도, 돛을 올리고 노를 저으며 나아가는 다른 자들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앞지르게 되는 걸세.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게 되거나, 혹은 앞질러 가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진정한 자각과 자신이 생겨나는 것일세. 11월 26일 이 곳에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네. 무엇보다도 다행항 것은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일세. 게다가 갖가지 유형의 새로운 인물들이 내 마음 속에서 다채로운 연극을 보여 주고 있다네. 나는 C백작과 알게 되었네.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넓은 식견을 가졌으면서도 인정이 많은 분일세. 남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우정과 사랑이 넘쳐난다네. 자기가 부탁한 일을 내가 무난히 처리해 준 후로 나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네.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하고라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나하고 잠깐 얘기를 나누어 보기만 하고 알게 된 것 같네. 또한 나로서도, 나에게 보여 주는 그의 허물없는 태도를 뭐라고 칭송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라네. 뭐니뭐니해도 크고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가슴을 탁 터놓고 대해 줄 때 가장 참되고 따뜻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걸세. 12월 24일 공사 때문에 이만저만 속이 상하지 않는군. 예상했던 그대로 일세. 그렇게 고지식한 공생원은 다시없을 걸세. 일거일동에 꾀 까다롭기가 노처녀나 다를 바가 없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일이 결코 없으며, 누가 어떤 일을 해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위인일세. 나는 일을 간결하게 처리하기를 좋아하고, 일단 처리한 일은 끝난 것으로 돌리고 다시 더 뒤적거리지 않는 성미지. 그런데 공사는 내가 써낸 초안을 되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걸세. [이만하면 괜찮지만, 좀더 잘 검토해 보게. 좀더 좋은 말, 더욱 적합한 접속사를 찾아 내게 될 테니까]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네.라든가 그 밖의 대수롭지 않는 접속사 하나가 빠져도 안 된다는 걸세. 내 문장에는 때때로 도치법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건 그에세 있어서는 불구대천지 원수라네. 복합문을 쓸 경우에는 상투적인 틀에 맞추어 쓰지 않으면, 그는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이런 위인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재난일세. C백작이 나를 신뢰해 주는 것이 유일한 구원일세. 최근에 그분은 나에게 매우 솔직하게 공사의 완고하고 까다로운 태도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네. 그런 사름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괴롭게 만든다는 거야. [그러나]하고 백작은 말했네. [체념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지. 험한 산을 넘는 나그네와 같은 마음으로 말일세. 물론 산이 없으면 길을 가기가 훨씬 편하고 거리도 가깝지.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산이 거기 있으니 넘어가지 않을 수 없거든] 공사 영감도 백작이 자기보다는 나에게 더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는 모양일세. 그게 못마땅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상대로 백작의 험담을 늘어놓는다네. 물론 나는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지. 그래서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는 걸세. 어저께는 몹시 분개하였네. 백작을 헐뜯으면서, 은근히 나까지 휩싸서 빈정거리는 걸세. [이런 세속적인 사무처리에는 백작도 뙈 유능하지. 일도 빠르고 문장도 괜찮거든. 그러나 기초적인 학식이 결여되어 있어. 이건 모든 문장가들에게 공통된 폐단이지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네. 그러나 나에게 그런 말이 통할리 없지. 나는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인간을 누구보다도 경멸하니까. 나는 지지 않고 격한 말투로 되받아 주었네. [백작은 인품으로나 학식으로나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입니다. 자기의 정신을 넓게 펼쳐서 수많은 사물에 작용시키며, 그 위에 이러한 정신활동을 세속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지속해 나가는 일을 그 분처럼 성공적으로 이룩하고 있는 예를 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 주었으나, 이런 말은 공사에게는 우이독경일세. 나는 더 이상 그의 잠꼬대를 들음으로써 속을 끓이기 싫었으므로, 그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자네들 책임일세. 마구 쓰석거려서 나에게 굴레를 씌우고, 활동의 공덕이라는 것을 입을 모아 찬양하며 나를 부추긴 것은 자네들이니까 말일세. 활동이 다 뭔가! 밭에 감자를 심거나, 말을 몰고 도시로 밀을 팔러 가거나 하는 편이 지금의 나보다 오히려 더 나은 활동을 하고 있는 걸세. 만일 내 말이 틀렸다면,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앞으로 10년 동안 지금 매여 있는 이 노예선 속에서 뼈가 닳도록 일하겠네. 게다가 이 곳에서 서로 곁눈질을 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는 비루한 인간들의 한심스러운 그 비참하고 따분함. 서로 한 발짝이라도 먼저 기어 올라가려고 쉴새없이 눈을 번득이고 있는 출세욕. 서글픈 집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 가령 여기에 한 여인이 있다고 치세. 그녀는 누구한테나 자기네 가문과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리석은 여자로군, 대단찮은 가문과 영지를 내 세우고 다니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세. 그러나 사실 그 여인은 이 근처 태생으로 서기의 딸에 지나지 않는다네. 이렇게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는 분별이 없는 족속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는 일이지만, 친구여, 자신의 척도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세. 나는 나 자신의 일만으로도 힘에 벅차고 가슴 속에 이토록 폭풍우가 휘 몰아치고 있으니, 남의 일에는 참견하고 싶지도 않네. 다만 나로 하여근 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뿐일세. 무엇보다도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숙명적인 그 시민근성일세. 물론 나도 계급의 차별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나 자신이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네. 다만 내가 이 지상에서 지극히 미미한 기쁨이나 또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된 때에 그런 것이 들어서 방해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것일게. 요즘 나는 산책길에서 B라는 아가씨를 만나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네. 애교있는 아가씨로, 딱딱한 격식을 차리는 생활 속에 묻혀 지내면서도 선천적인 순박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해서, 작별할 때 내가 했더니,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승낙을 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녀를 찾아갈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네. 그 아가씨는 이 고장 태생이 아니고 아주머니 뻘 되는 친척집에서 묵고 있는 중이라네. 그 나이 많은 부인은 인상이 그다지 좋지 못했네. 나는 그 부인에게 신경을 써서 이야기도 주로 그녀와 나누었는데, 반 시간도 되기 전에 사정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네. 사정이란 나중에 아가씨가 나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그 부인은 그 나이에 만사가 여의치 못하다는 걸세. 이렇다할 만한 재산도 없고 재능도 없으며, 조상의 족보 이외에는 의지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걸세. 그녀를 보호해 주는 것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계급뿐이요, 낙이라고는 2층 창문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 정도라네. 젊었을 적에는 제법 미인이었던 모양으로 마음내키는 대로 즐기며 지냈다는데,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여러 명의 젊은이들을 괴롭혔다는 걸세. 한창때를 지난 후에는 어떤 나이 많은 장교와 동서생활을 했는데, 그의 사랑을 받으며 얀전히 지냈다네. 그 장교는 상당한 생활비를 제공하며 그녀의 40대 반려자로 지내다가 얼마 후에 주었다네. 지금 그녀는 50대로 의지할 곳도 없는 신세인데, 마침 상냥한 조카딸이 있어 그녀를 돌보아 주며 여생을 보내는 모양이었네. 1772년 1월 8일 한심한 무리들일세. 정신은 온통 격식에만 사로잡혀서 자나깨나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식탁에서 한 자리라도 더 상석에 앉을 수 있을까, 하는 걸세! 달리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닐세. 할 일이 없기는커녕 태산같이 쌓여 있는 실정이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느라고 중요한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 걸세. 지난주에는 설매놀이를 갔었는데, 거기서 또 말썽이 생겨서 모처럼의 즐거움을 잡쳐 버리고 말았네. 어리석은 녀석들일세. 원래 지위 같은 건 문제가 아니고,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최고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은 존처럼 없는 법인데,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대신들의 뜻에 따라 조종되는 왕이 그 얼마나 많으며, 또 비서관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대신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경우, 누가 제일이란 말인가? 나더러 말하라면, 다른 사람들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정열과 능력을, 자기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사 할 수 있는 역량이나 지략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 하겠네. 1월 20일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시골 농가의 조그마한 방에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이리로 피난을 온 것입니다. 그 서글픈 둥지와도 같은 D시에서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 내 망음에 전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 틈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에는, 당신에게 편지를 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오두막집에 혼자 적막하게 갇혀 눈보라가 펑펑 쏟아지며 창문을 세차게 흔드는 속에서,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모습, 당신의 추억이, 아아, 로테! 순결하고 따뜻하게 나를 엄습했습니다. 행복한 순간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요지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난장이와 조랑말들이 내 눈앞에서 바삐 돌아가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혹시 착각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나도 글드과 같이 연기를 하고 있으면서, 아니, 꼭두각시처럼 조종을 당하고 있으면서, 때때로 곁에 있는 연기자의 나무손을 잡았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밤이 되면, 내일은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즐기리라 결심하지만, 막상 아침이 되면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는 것입니다. 낮에는 또 낮대로, 오늘 저녁이 되면 방 안에 그대로 틀어박혀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며, 무엇 때문에 잠자리를 들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생명을 발효시켜 주고 있던 효모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전에는 마음을 약동케 하는 것이 있어서 밤이 깊어도 졸음을 느끼지 못했고, 아침이 되면 퍼뜩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만 그런 것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참으로 여성다운 여성을 이 고장에서 한 사람 발견했습니다. B라는 아가씨로, 당신을 닮은 여자입니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닮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하고 당신은 말하겠죠.. 아닌게아니라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남의 비위를 꽤 잘 맞추게 되었습니다. 제담도 곧잘 한답니다. 그래서 이 곳 부인네들은 나만큼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그리고 거짓말도 잘 한다는 말을 덧붙여야 하겠지요.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그렇게 칭찬을 잘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B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아가씨는 풍요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그녀의 푸른 눈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아가씨는 자기의 신분이 자신의 소망을 하나도 이루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분을 짐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또 언제나 시끄러운 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곧잘 몇 시간씩 순수한 행복에 충만한 전원생활을 상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아아, 그리고 당신에 대한 생각도 물론 빼놓을 수 없지요! 그녀가 당신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그렇게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며,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 그리운, 그 정다운 방에서 당신 발 아래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우리의 그 아이들이 모두 내 주위를 깡총거리며 돌아다녀 주었으면. 아이들이 너무 떠들어서 당신을 귀찮게 하면, 나는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꺼내 애들을 내 주위에 모을 텐데. 태양은 찬연한 설경 저 너머로 장려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눈보라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나는----또다시 돌아가서 우리속에 감금되어야만 합니다----안녕히 계십시오! 알베르트 씨는 당신 댁에 있는지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주여, 이런 질문을 용서하옵소서! 2월 8일 1주일 내내 아주 고약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네. 그러나 나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기분일세. 왜냐하면 내가 이 곳에 온 이후로 아무리 날씨가 좋은 날이라도, 딴 사람으로 인해 그런 날씨를 잡쳐 버리거나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일세. 그래서 비가 내리거나 눈보라가 치거나, 아니면 길바닥이 얼어붙거나 눈이 녹아서 진흙탕이 되거나 하면 나는 한시름 놓는다네.하고 말일세. 아침에 해가 떠오르고 날씨가 좋을 듯하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네. 무릇 그들이 서로 빼앗으려고 악다구니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만한 사물은 하나도 없지. 건강도 명성도 기쁨도 휴양도. 그것은 대체로 어리석음이나 무지, 좁은 도량 등이 그 원인인데, 그런 주제에 그들의 말에 의하면, 최선의 호의로써 남을 위해 그런다는 걸세. 때때로 나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하고 싶어진다네. 제발 그렇게 미치광이들처럼 자신의 창자를 마구 휘젓는 짓은 하지 말아 달라고 말일세. 2월 17일 공사와 나는 더 이상 타협해 나갈 수 없을 것 같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일세. 그가 이릉ㄹ 처하는 방식은 참으로 가소로와서, 나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적당히 처해 버리기도 한다네. 그것이 그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당연하지. 그런 일로 해서 그는 최근에 나에 대한 불만을 궁정에 보고한 모양일세. 그 결과, 나는 장관으로부터 가볍긴 하지만 아무튼 질책을 받았네. 그래서 사표를 낼 결심을 했지. 그런 참에 장관으로부터 사신이 왔다네. 그 편지를 읽고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그 고결하고 깊은 사려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네. 장관은 내가 너무나 감각적인 경향이 있음을 훈계한 다음, 활동성이라든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 이릉ㄹ 하는 데 있어서의 철저성 등에 대하여 내가 지니고 있는 패기만만한 생각을 청년다운 기개로 높이 평가하고 그것인 참되게 활용되어 유효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라고 궈고해 주었네. 덕택에 1주일쯤은 용기를 얻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네. 마음의 평화라는 것은 값진 걸세.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지. 친구여, 다만 이 아름답고 귀중한 보석이 쉬 부서지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2월 20일 내 사랑하는 분들이여, 한느님이 당신들을 축복하고, 나에게는 내려질 수 없는 좋은 날들을 모두 당신들에게 베풀어 주기를 빕니다.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알베르트 씨, 당신이 나를 속인 것에 대하여. 나는 당신들이 결혼날짜를 알려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나는 엄숙히 로테의 실루엣을 벽에서 떼어 내어, 그것을 다른 서류들 속에 넣어 둘 생각이었지요. 지금 당신들은 하나로 맺어졌고, 실루엣은 여전히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제 그냥 놓아 두렵니다. 이대로 두어서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누를 끼치는 일 없이, 로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자리를 유지해 나갈 것이며, 그러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습니다. 만일 로테가 나를 잊어버린다면 나는 미치고 말 것입니다. 알베르트 씨, 이 생각 속에는 지옥이 숨어 있습니다. 알베르트 씨,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그대 천사여, 안녕! 3월 15일 불쾌한 일을 당했네. 이제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네. 제기랄! 이 불쾌감은 보상할 길이 없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자네들 책임일세. 나를 부추기고, 재촉하고, 졸라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이 자리에 앉힌 것은 바로 자네들이니까 말일세. 이런 파국을 초래한 근원은 모두 나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에 있다고, 자네들은 이번에도 그렇게 말할 테니까, 나는 여기에 사건의 자초지총을 있는 그대로 간명하게 적겠네. 연대기의 기록자와 같은 필치로 말일세. C백작이 나를 아껴 주고 돌보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고, 자네에게도 벌써 몇 번인가 이야기했었지. 어제는 식사에 초대를 받아서 그 C백작 댁에 갔었다네. 저녁에는 그 집에서 상류사회 신사숙녀들의 파티가 열리기로 되어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나와 같은 졸때기가 그런 모임에 동석할 수 없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네. 아무튼 나는 백작과 식사를 같이 하였고, 식후에 홀 안을 왔다갔다하면서 백작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마침 들어온 B대령과도 대화를 나누었네. 그러는 사이에 파티 시간이 다가왔네. 그러나 나는 그걸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네. 근엄한 S부인이 남편과 더불어 들어왔네. 그들은 거위 같은 딸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녀는 납작한 가슴에 근사한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죄어붙인 아가씨일세. 이 세 사람은 걸어 들어가면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거만한 귀족적인 눈매와 콧구멍을 보여 주었네. 이런 족속들을 보면 그야말로 속이 메스꺼워지는터라, 나는 이를 계기로 그만 물러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C백작이 그들과의 시시한 잡담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마침 그 때 그 B양이 들어왔네. 이 아가씨를 만나면 언제나 조금은 기분이 밝아지므로, 나는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녀의 의자 뒤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러데 조금 지난 연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는데, B양은 나하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느 때와는 달리 뭔가 서먹서먹하고 난처한 듯한 태도더라 이 말일세. 나로서는 참으로 뜻밖이었네. , 이런 생각을 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아서 그만 물러나오려 했네. 그러나 나는 한동안 거기에 눌러 있었네. 그녀의 그런 태도가 나의 잘못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또 조금 있으면 그녀가 다정한 말 한마디쯤은 해주리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손님들이 그득히 모여들었네. 프란츠 1세의 대관식 무렵의 예복을 입은 F남작, 직책 관계상 귀족 칭호를 받고 있는 궁중 고문관 R과 귀가 어두운 그의 부인. 시대에 뒤떨어진 의상의 해진 부분을 요즘 유행하는 천으로 기운 초라한 옷차림의 J씨도 빠드릴 수 없지. 이러한 무리들이 줄을 이어 들이닥쳤네. 나는 안면이 있는 한두 사람에게 마릉ㄹ 건네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들 말수가 적었네. 왜들 이러는 거지, 하면서 나는 B양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네----그래서 나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는데----그 사이에 여자들이 홀 한구석에서 수군덕거리고, 그것이 남자들에게로 전파되었으며, 이윽고 S부인이 백작에게 이야기를 해서(이것은 모두 나중에 B양이 나애게 이야기해 줘서 알았지), 마침내 백작이 나에게로 걸어왔네. 그리하여 그는 나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하고 말문을 열었네. [우리네 신분상 관례는 아주 미묘하거든. 자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모두를 아무래도 못마땅한 모양일세. 나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각하] 하고 나는 말을 가로막았네.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깨달았어야만 할 일입니다. 각하께서는 저의 이러한 결례를 용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까부터 그만 물러가야지 물러가야지 하면서도, 미련스럽게 어물어물하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덧붙이고 나는 절을 하였네. 백작은 어떤 감회가 어린 동작으로 내 손을 잡았는데, 그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하고 싶었던 모양일세 나는 그 고귀한 무리들 사이를 슬며시 빠져나와서, 2륜마차를 타고 M으로 갔네. 그리하여 그 언덕 위에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호메로스를 펼치고, 오딧세우스가 돼지치기에게 대접을 받는 감동적인 대목을 읽었지. 흐뭇한 기분이었네. 해가 진 뒤에, 식사를 하러 시내로 돌아왔네. 레스토랑에는 아직 손님이 별로 없었네. 몇 사람의 단골들이 구석자리에서 테이블보를 벗겨 놓고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네. 거기에 아델린이라는 고지식한 친구가 들어오더니, 모자를 벗고 나에게로 다가와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네. [당신 화가 났겠군요?]----[뭐가요?]하고 나는 되물었지. [백작이 당신을 파티에서 내쫓았다면서요?]----[파니 따위가 뭐 말라빠진 거요!] 하고 나는 말했지. [밖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을 쐬니까 기분이 상쾌해졌어요]----[그렇다면 다행이군요]하고 아델린은 말했네. [당신이 대수롭쟎게 생각하니까 무엇보다도 다행이에요. 그런데 아무래도 불쾌한 건 벌써 어디를 가나 그 소문이 퍼져 있다는 사실이오- 그 소리를 들으니까 비로소 오늘 있었던 일이 충격적으로 되살아나더군. 그렇게 생가갛니 분노가 치밀더군. 오늘은 어디를 가나 동정을 받는 신세가 되었네. 더구나 나를 시기하고 있던 녀석들이 의기양양해서, 하는 등 온갖 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들으면, 내 심장에 칼을 꽂고 싶은 심정일세.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찮은 건달들이 남의 약점을 잡고 이러쿵 저러쿵 지껄여 대는 소리를 꾹 참고 얌전히 듣고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네. 아아, 그 험담들이 점혀 근거 없는 소리라면 못 들은 체해 버릴 수도 있으련만. 3월 16일 모든 것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네. 오늘 가로숫길에서 B양을 만났네. 우리가 일행에서 조금 떨어지게 되자, 나는 저번의 그녀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네. [어머나, 베르테르 씨]하고 그녀는 진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네. [제가 불안스러워했던 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셨어요? 제 성질을 잘 아실 텐데요. 홀에 들어섰을 때부터 선생님 때문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빤히 알 수 있었거든요. 선생님께 귀띔을 할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답니다. S부인과 T부인은 선생님과 동석할 바에야 남편과 함께 퇴장하겠다고까지 했거든요. 그리고 백작으로서도 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지요. 그래서 일이 그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랬었나요?]하고 나는 충격을 감추며 반문했네. 그저께 아델린이 나에게 한 말이 그 순간에 열탕처럼 내 혈관 속을 소용돌이쳤네. [저도 그 때부터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는지 몰라요]하고 다정스러운 그 여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네. 나는 자제력을 잃고, 그녀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릴 듯이 몸을 구부렸네.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하고 나는 외쳤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네. 그녀는 눈물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그것을 닦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네. [저의 아주머니를 아시지요? 그 분도 아세요? 베르테르 씨, 아주머니는 엊저녁에도 또 오늘 아침에도, 제가 선생님과 교제를 하는 데 대한 설교를 늘어놓으셨어요.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선생님을 변호하려 했지만, 제가 생각한 것의 절반도 말을 할 수가 ㅇㅂㅅ었어요. 아주머니가 말도 못 하게 하는걸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칼끝처럼 내 가슴을 찔렀네. 그녀는 그런 소리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은혜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거지.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를 더 계속하여, 이런 소문이 퍼질 것이라느니, 전부터 나를 비난하고 있던 사람들은 남들을 대할 때의 내 거만한 태도와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한 거동에 벌이 내렸다면서 고소하게 여기고 기뻐할 것이라느니 하는 소리들을, 빌헬름이여, 진심으로 동정어린 목소리로 들려 주었다네.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는 허탈상태에 빠졌네. 지금도 미칠 것만 같네. 차라리 누군가가 면대해 놓고 나를 비난한다면, 그 놈의 가슴을 단도로 푹 찔러 버릴수 있으련만. 피를 보면 얼마쯤 마음이 진정될 거야. 아아, 나는 백 번도 더 칼을 손에 쥐었네. 이 답답한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고 싶었던 걸세. 좋은 혈통을 이어받은 말은 지나치게 흥분했을 때 본능적으로 혈관을 물어 뜯어 호흡을 진정시킨다고 하더군. 나도 그러고 싶어지네. 혈관을 절개함으로써 영원한 자유를 얻고 싶은 걸세. 3월 24일 나는 궁정에 사표를 제출하였네. 아마도 수리될 걸세. 미리 자네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점은 아무쪼록 용서하게나. 어차피 나는 이 고장을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나를 만류하기 위해 자네들이 충고할 말도 알고 있네. 이 사실을 우리 어머니께 넌지시 좀 전해 주기 바라네. 나 자신을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내가 어머니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더라도 양해해 주십사고. 물론 어머니는 슬퍼하시겠지. 모처럼 아들이 추밀원 고문관이나 공사가 되기를 지향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는데, 이렇게 중도이폐하고, 망아지는 마굿간으로 되돌아가게 된 셈이니까!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선 자네들 좋을 대로 생각하게나. 내가 유임할 수 있었을 것이라든가, 유임했어야만 할 것이라든가 마음대로 말해도 괜찮지만, 아무튼 나는 떠나서 어디로 갈 거냐고 묻겠지? 이 고장에 XX공작이라는 분이 있는데. 나와 교제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모양일세. 내 결심을 전해 듣고는 함께 자기의 영지로 가서 거기서 아름다운 봄을 같이 지내지 않겠느냐고 나를 초대해 주었다네. 나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는 약속도 해 주었고, 어느 정도 서로 이해하고 있는 터이기도 해서, 운을 하늘에 맡기고 그와 동행할 작정일세.   4월 19일 두 통의 편지, 고맙네.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사표가 수리 될 때까지는 잠자코 있고 싶어서, 동봉한 편지도 써 놓기만 하고 부치지 않았기 때문일세. 어머니께서 장관께 부탁을 하여 내 계획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였지. 그러나 이젠 끝났네. 나의 해임이 재가되었어. 해임발령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장관이 나에게 어떤 편지를 써 보냈는지, 그런 것들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네. 그건 자네들의 새로운 비탄을 유발할 뿐일 테니까. 황태자께서 전별금조로 25두카텐을 하사해 주셨네. 그와 함께 보내 주신 글을 읽고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네. 덕택에 전번에 어머니께 내가 부탁드렸던 돈은 필요없게 되었네.   5월 5일 내일 이 곳을 떠나네. 내가 태어난 고장이 그리로 가는 길에서 6마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오래간만에 잠깐 들러 볼 생각일세. 꿈결처럼 행복하게 지냈던 그 옛날의 날들을 회상해 보고 싶은 걸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와 내가 마차를 타고, 정든 그 고장을 떠날 때 지나온 바로 그 성문을 거쳐서 들어갈 생각이라네. 잘 있게. 빌헬름! 가는 도중에 또 소식 전하겠네.   5월 9일 성지 순례자 같은 경건한 심경으로 고향 방문을 마쳤네. 뜻하지 않은 갖가지 감회가 나를 사로잡았네. S쪽을 향해 시내에서 15분 정도 나간 곳에 커다란 보리수가 한 그루 있지. 그 근처에서 마차를 세우고 내렸네. 걸어가면서 지난 추억을 새로운 기분으로 생생하게 마음껏 되새겨 보고 싶었던 걸세. 그런데 그 보리수 아래세서 걸음을 멈추고 보니, 아아, 어쩌면 이렇게도 달라졌을까!......그 곳은 옛날 소년시절에 내 산책의 목적지요 또한 종점이기도 했는데, 그 무렵에는 아무것도 모른채 행복 속에 잠겨 미지의 세계를 동견하곤 했었지. 그 넓은 세계로 나가면 갈망하고 동경하여 마지않는 이 가슴을 채워 줄 풍부한 양식과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걸세.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넓은 세계로부터 돌아왔네. 아아, 친구여! 그 많은 희망은 헛되이 사라지고, 다채롭던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렸네. 눈앞에 보이는 저 산들을 향해 나는 수없이 소망을 걸었었네. 몇 시간 동안이나 이 곳에 앉아 먼 곳을 동견하며, 정다운 모습으로 내 눈앞에 다가드는 수풀과 골짜기에 마음이 융화되어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들곤 했었지.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도 나는 이 곳을 떠나기가 한없이 아쉽기만 했었네. 시내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낲익은 하나하나에 대하여 인사를 보내었네. 새로 생긴 집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집뿐이 아니라, 그 밖에 여기저기에 보이는 변화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네. 시내로 들어가는 성문을 지나면서부터는 곧 내가 완전히 옛날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친구여,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말아야지.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그리운 것이면 그리운 것일수록, 이야기를 하면 단조로운 것이 되어 버릴 테니까 말일세. 나는 시장 맞은편, 우리의 옛 집 바로 곁에 있는 여관에 묵기로 하였네. 그리로 가는 도중에 발견한 것인데, 성실한 노부인이 우리 개구장이의 어린 시절을 곧잘 가두어 넣었던 그 교실은 잡화점이 되어 있었네. 그 속에 갇혀서 겪어야 했던 불안과 눈물, 그리고 지루함과 애달픔이 회상되었네.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뭔가 다른 추억이 되살아나곤 했네. 성지를 찾은 술례자라 해도 이처럼 숱한 종교적인 회상의 장소를 대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걸세. 그리고 또 그 마음이 이토록 신성한 감동으로 충만되는 일도 드물 걸세. 이야기하고 싶은 일은 수없이 많지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네. 나는 강을 따라서 어떤 저택이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갔네. 여기도 역시 옛날에 내가 곧잘 다녔던 길로, 우리 소년들이 납작한 돌멩이를 물 위에 던져서 물수제비뜨기 시합을 했던 곳이었지. 나는 때때로 이 곳에 서서 이상한 에감에 가슴을 부풀리며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 시선을 보내곤 했다네. 그 때 나는 그 물줄기가 닿을 머나먼 고장, 신비에 가득 찬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지. 그러다 보면 내 상상력은 한계에 도달하여 더 상상할 밑천이 없어져 버리는데, 그래도 여전히 생각은 앞으로 앞으로 자꾸만 나아가서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세계 속으로 들어가 망연해지곤 했었지. 친구여, 우리의 훌륭한 조상들은 한정된 세계 속에 살면서도 그토록 행복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감정, 그 시가들은 또 얼마나 천진난만했던가! 오딧세우스가 무한한 바다, 무한한대지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그 말은 진실하고 인간적이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요, 절실하고 신비로운 것이었네. 내가 지금 지구는 둥글다고 국민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본들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인가능ㄴ 지상에서 살면서 지하에 잠들기 위해서라면 더욱 적은 땅이 있으면 되는 걸세. 지하에 잠들기 위해서라면 더욱 적은 땅으로 충분하지. 지금 나는 공작의 사냥별장에 와 있네. 공작과는 그럭저럭 기분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네. 그는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는 사람일세. 그런데 그를 둘러싼 기묘한 사람들의 정체는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네 악인들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진실한 인간들 같지도 않네. 때때로 진실해 보이는 경우도 있느나, 어쩐지 믿을 수가 없네. 그 밖에 유감스러운 일은 , 공작이 딴 사람한테서 들었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곧잘 하는 점일세. 더구나 그것을 딴 삶에게서 들은 듯한 관범에서 이야기하는 걸세. 게다가 공작은 나의 지성과 재능을 나의 영혼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네. 영혼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인데 말인세. 그것만이 모든 힘, 모든 기쁨, 모든 불행의 원천이 아닌가. 아아,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지만, 나의 영혼 그것은 나만이 지니고 있는 걸세.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는 자네들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네. 그러나 그것도 무산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야 아무런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전쟁터에 나갈 생각이었네. 이 계획을 나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지. 공작을 따라 이 곳에 온 것도 주로 그 때문이었네. 공작은 XX근무의 장군이거든. 같이 산책을 나갔을 때 이 계획을 공작에게 털어놓았더니, 그는 나를 타이르며 그만두라는 것이었네. 따지고 보면, 내 가슴 속에서 요동하고 있었던 것은 정열이라기보다 변덕에 불과했는지도 몰라. 나를 움직인 것이 정열이었다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진 않았을 테니까.   6월 11일 자네가 뭐라고 하든 난 이 이상 더 이 곳에 머무를 수가 없네. 공작은 나를 한껏 극진히 대접해 주고 있으나 여긴 정주할곳이 못 되네. 우리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공통되는 점이 없어. 공작은 극히 세속적인 지성인일세. 그와의 교제는 나에게 재치있게 쓰여진 책을 읽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네. 1주일간 이 곳에 더 있다가 그 뒤엔 다시 정처없는 여행을 떠나야겠네. 여기서 내가 한 일 가운데 최상의 것은 스케치일세. 공작은 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센스는 갖고 있네. 만일 역겨운 학문적인 취향이나 틀에 박힌 상투적인 술어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더욱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닐 수 있었을 걸세. 내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연과 예술의 세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해 줄 때, 그는 진부한 용어를 들고 나와 그 한 마디로 문제가 해결된 듯이 여긴다네. 그럴 때 나는 몹시 안타깝다네.   6월 16일 그렇다네.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나그네. 이 지상의 한 순례자일세. 자네들은 그 이상의 존재일까?   6월 18일 어디로 갈 작정이냐구? 자네에게만 살짝 알려 주지. 앞으로 2주일 동안은 이 곳에 있어야만 하네. 그 뒤엔 XX광산을 찾아가야지, 하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데 사실인즉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네. 나는 다만 로테 곁으로 다시 가고 싶은 걸세. 그게 내 마음의 전부야. 나는 그런 나 자신의 마음을 맘껏 비웃고 있네. 그러나 결국은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줄 수밖에 없네. 7월 29일 모든 것이 그것으로 족할 텐데, 내가 그녀의 남편이라면! 아, 저를 만드신 하느님, 당신께서 그런 기쁨을 제게 내려 주셨더라면 저는 평생토록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당신께 항거하려는 것ㅇㄴ 아닙니다. 저의 이 눈물을 용서하소서. 이 덧없는 소망을 영서하소서. 그녀가 내 아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녀를 내 품에 껴안을 수 있다면. 아아, 빌헬름이여, 알베르트와 결혼하기보다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 더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걸세. 알베르트는 그녀의 마음 속의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 못 되네. 사물에 대한 감각에 모종의 결함이----이건 자네 좋을 대로 해석하게나----있네. 예를 들면, 마음에 드는 책을 같이 읽고 있다가 내 마음과 로테의 마음이 서로 공감하여 하나로 합쳐지는 그런 대목에서 그의 심장은 끄떡도 하지 않네. 로테와 내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절로 감탄의 소리를 내는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네. 사랑하는 빌헬름! 그러나 그는 로테를 진심으로 살ㅇ하고 있네. 그만한 사랑이라면 어떠한 보답이라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와서 방해를 당했네. 눈물은 말라 버리고 마음이 몹시 산란하네. 잘 있겠나, 빌헬름.   8월 4일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세. 인간은 누구나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반당하는 거지. 보리수 아래에 살고 있는 그 마음씨 고운 부인을 찾아가 보았네. 큰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네. 그 소리에 이끌리어 그 아이의 어머니도 나왔는데, 전과는 달리 기운이 없어 보였네. 그녀가 한 첫마디는 이랬다네. [아이구, 선생님이시군요. 우리 한스가 죽었어요] 그 막내동이 얘기였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네. [그리고 바깥양반도] 하고 그녀는 말했네. [스위스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빈털터리였어요. 오는 도중에 열병에 걸려, 친절하신 분들이 돌봐 주지 않았더라면 구걸을 하며 올 뻔했답니다] 나는 할말을 잃고 아이의 손에 돈 몇 푼을 쥐어 주었을 뿐일세. 그 어머니가 사과 몇 알을 주기에 그것을 받아들고, 나는 슬픈 추억의 장소를 떠났네.   8월 21일 내 마음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잘도 변한다네. 어떤 때는 날이 밝아 오는 것같이, 인생의 즐거움이 다시 찾아올 것 같은 마음이 든다네, 아아! 그러나 그것은 다만 한 순간에 지나지 않네. 아련한 꿈속 같은 기분에 잠겨 있을 때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다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내가......그리고 고녀가......그리고......이런 공상을 끝없이 추적해 나가다가 마침내 심연의 일보 직전까지 가는 걸세. 그랬다가는 몸서리를 치고 뒤로 몰러선다네. 성문을 지나 로테를 무도회에 데리고 가기 위하여 처음으로 마차로 지나간 그길을 걸어가 보니, 참으로 많아 변했더군!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어! 지난날의 그 모습은 흔적도 없고, 그 때의 그 감정은 자취조차 없네. 일찍이 전성기를 자랑한 영주가 임종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물려주었던 견고하고 호화로운 성곽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린 폐허에서 망령이 되어 돌아 다니는 기분일세.   9월 3일 가끔 가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지네. 내가 그녀를 이토록 깊이,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사랑할 수가 있으며, 그 사랑이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일세, 나에게는 그녀 이외의 세계는 없네. 그녀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단 말일세. 자연의 계절이 가을로 접어드는 데 따라서 내 마음도, 또 내 주변도 가을이 되어 가네. 나라는 나무의 잎은 누렇게 물들고, 내 주변의 나뭇잎들은 벌써 떨어져 버렸네. 언젠가 어느 농가에서 머슴살이하던 집에서 쫓겨났다고들 하는데, 그 이상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네. 그런데 어제 다른 마을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그 청년을 만났네. 말을 걸었더니 청년은 사정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것을 듣고 나는 거듭거듭 감동하였네.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자네도 곧, 과연 그럴 만하구나 싶어질 것일세.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자네에게 하려는 거지? 어째서 나는 나를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을 내 가습 속에만 간직해 두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 자네 마음까지 어둡게 만드는 걸까? 어째서 언제나 자네가 나를 측은해 하고 책망할 기회를 주는 걸까? 아마 이것도 내가 타고난 운명인가 봐! 처음에 그는 잔잔한 슬픔을 드러내 보이며 내 물음에 대답했네. 얼마간 머뭇거리는 기색이 엿보였지.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만 자깐 그랬을 뿐, 이윽고 자기와 나와의 관계를 새삼스레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탁 터놓고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는 불행한 신세를 하소연하는 것이었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자네에게 들려 주고, 자네의 판단을 들었으면 싶네. 그는 고백하였네. 아니, 고백하였다기보다는 추억에 따르는 행복감과 쾌감에 젖은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였네. 여주인에 대한 정열은 날이 갈수록 어해 가서, 나중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이 표현에 의하면 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는지조차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는 걸세. 먹을 수도 마실수도 잠을 자 수도 없게 되었으며, 목구멍도 막혀 버렸다는 걸세.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시키는 일은 잊어버리는 등,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같이 되었는데. 마침내 어느날, 그 여주인이 2층방에 있는 것을 알고 뒤따라 올라갔다는 걸세. 저도 모르게 그리로 이끌려 올라간 셈이지. 그녀가 그이 소망을 들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폭력으로 그녀를 정복하려 했다네......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하느님도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녀에 대한 자기의 소망은 언제나 진지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다만 그녀와 결혼해서 한평생 같이 살아가는 일이었다......이렇게 얼마 동안 이야기를 하더니 청년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네. 아직 말하고 싶은 것이더 있기는 한데, 시원스럽게 털어놓기가 난감한 듯한 기색이었네. 드디어 그는 머뭇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하였네. 여주인은 자기가 얼마쯤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용납해 주었으며 어느 정도의 접근은 인정해 주었다는 걸세.....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두세 번 중단했었는데, 이윽고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네.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여주인을 나쁜여자로 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는 그녀를 전과 다름없이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 이런 소리는 여태껏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다,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건 내가 도리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 주기 바라서이다, 하는 것이었네. 친구여, 여기서 나는 또다시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를 되풀이 하겠네. 자네 앞에 그 청년을 세워 보고 싶네!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꼭 그대로, 그리고 지금도 내 눈앞에 서 있는 모습 그대로 말일세. 자네에게 모든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그의 운명에 동정하고 있으며, 또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을 자네가 알아 주었으면 싶은 걸세, 그러나 이제 그만둠세. 자네는 내 운명도 알고 있으며, 나라는 인간 자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어째서 모든 불행한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불행한 청년에게 이끌리게 되었는지 자넨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일세.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더니, 이야기의 결말을 빼먹어 버렸군그래. 하긴 자네라면 쉬 짐작할 수 있을 테지. 여주인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오빠라는 사람은 전부터 그 청년을 미워하고 있었으며, 그를 그 집에서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네. 누이동생이 재혼을 하면 자기 아이들에게 돌아올 유산이 줄어들게 되것을 두려워했던 거지. 누이동생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그 유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걸세. 그는 청년을 당장에 내쫓고 왁자하게 소문을 퍼뜨렸으므로, 여주인으로서는 설령 그럴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청년을 집에 들일 수가 없어져 버린 거야. ㅈ.금은 아른 고죵인을 썼는데, 그 고용인과의 관계로 해서도 오빠와 사이가 틀어졌다는군. 게다가 마음사람들은 여주인이 틀림없이 그 고용인과 결혼할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는데, 청년은 목숨을 걸고 그걸 막을 결심이라고 말했네. 지금가지 한 이약에 과장은 없네. 미화하지도 않았네. 오히려 가능한 한 덤덤하게 이야기한 셈일세. 게다가 세속적이고 상투적인 말들을 씀으로써 딱딱하게 된 느낌이 없지 않네. 다시 말해 이 사랑, 이 진실, 이 정열은 결코 문학적 창작이 아니란 말이세. 이건 살아 있는 걸세. 우리가 교양이 없다느니 상스럽다느니 하고 말하는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 그야말로 순수한 형태로 살아 잇단 말싱세. 그런데 우리네 소위 교야있는 인간들은 교양으로 인해 왜곡되고 무능하게까지 되어 버렸네! 부디 이 이야기를 진지한 망음으로 읽어 주기 바라네. 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오늘은 마음이 차분해졌네. 글씨만 보아도 알겠지? 황망하게 휘갈긴 여느 때의 글씨와는 다르지 않은가. 읽은 다음에 생각해 주게, 이건 자네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맞았어, 이건 내 신상에 일어났던 일일세. 아니,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야. 나는 이 가엾고 불행한 청년에 비하면 절반도 결단력이 없네. 비교하기조차도 면구스러울 지경일세.   9월 5일 로테는 일 관계로 시골에 가 있는 남편 앞으로 편지를 썼네. 그 서두는 이러했네. 그때 한 친구가 찾아와서, 알베르트는 일의 형편상 빨리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네. 편지는 저녁때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 띄었다네. 나는 그걸 읽고 미소를 지었네. 왜 웃느냐고 로테가 물었네. [상상력이란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이군요]하고 나는 큰 소리로 말했네. [나는 잠시 이것을 내 앞으로 쓴 편지라고 상상해 보았거든요] 로테는 입을 다물어 버렸네.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네. 나도 입을 다물고 말았네.   9월 6일 결단을 내리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마침내 결심을 하고 로테와 처음으로 춤출 때 입었던 푸른 연미복을 벗어 버리기로 했네. 이젠 아주 낡아서 추레해졌거든. 그래서 깃이며 소매를 그것과 똑같이 해서 새로 한 벌 마췄네. 조끼와 바지도 그런 것과 같이 노란 빛으로 했지. 그런데 어쩐지 아직도 옷이 몸에 붙지를 않네. 하지만 날이감에 따라 차차 마음에 들게 되겠지.   9월 12일 로테는 알베르트를 마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서 며칠 동안 집에 없었네. 그런데 오늘 찾아가니, 로테가 나를 맞이해 주었네. 나는 기쁨에 넘쳐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지. 카나리아 한 마리가 경대 위에서 로테의 어깨로 날아와 앉았네. [새로운 친구예요]하고 그녀는 새를 자기 손바닥 위에 앉혔네. [아이들을 위해 갖고 왔지요. 여간 귀엽지 않아요. 이것 보세요! 빵을 주면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얌전히 쪼아먹어요. 저에게 키스도 해요. 이것 보세요!] 그녀가 입술을 내밀자 새는 아주 귀엽게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녀의 감미로운 입술에 부리를 갖다 대는 것이었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말일세. [선생님께도 키스시켜 드릴께요]하고 로테는 나에게로 내밀었네. 그 조그만 부리가 로테의 입과 나의 입을 간접적으로 닿게 해 주었네. 그 감촉은 사랑에 넘치는 입김과도 같았고, 또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네. [이 키스에는]하고 나는 말했지.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 있군요. 먹이를 찾는 것 같아요. 응석을 부려도 아무것도 주지를 않으니까 허전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제 입으로 주는 모이를 잘 받아 먹는답니다]하고 로테는 말했네. 그리고 그녀는 빵조각을 입에 물고 새에게 먹여 주었네. 그 입술은 천진난만한 애정의 기쁨에 넘쳐서 미소짓고 있었네. 나는 얼굴을 돌렸네. 그녀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네! 그런 그림과 같은 광경, 천국과 같은 청순하고 복된 정경을 보면, 내 상상력은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거든. 생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껏 잠든 내 마음을 다시금 일깨워 놓게 된다 이 말일세. 그렇다고 로테가 못할 짓을 한 건 아닐세. 그녀는 그토록 나를 믿고 있는 거야!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일세!   9월 15일 빌헬름이여, 이 지상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사물에 대하여 이해심도 없고 감정도 없는 인간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미칠 것만 같네. 성XX의 충직한 목사를 찾아갔을 때, 로테와 함께 내가 그 그늘에 앉았던 호두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것은 참으로 근사한 나무였네! 그 이후로 언제나 내 마음을 그지없는 기쁨으로 충만케 해 주고 있었다네! 그 나무가 있음으로 해서 목사관이 얼마나 친근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네! 그 시원스러운 나무 그늘! 그 무성하고 멋들어진 가지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먼 옛날에 나무를 심었던 성실한 목사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 학교 선생님은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면서 그 목사의 이름을 말해 주었지. 훌륭한 분이었다고 하는데, 그 나무 아래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성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었네. 어제 우리ㅏ 그 호두나무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학교 선생님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였네. 베어 버리다니! 나는 미칠 것만 같네. 맨 처음에 도끼로 내려 찍은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가령 그런 나무가 늙어서 말라죽었을 경우라도 슬픔으로 몸이 까칠재질 지경인 내가, 이 일을 잠자코 보고 있어야만 하다니. 친구여,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다네! 인간의 감정이란 참 묘한 걸세. 온 마을사람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한 거야. 목사 부인은, 버터며 달걀이며 그 밖의 선사품이 들어오는 양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자기가 마을사람들에게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 깨닫게 될 걸세. 나무를 베게 한 장본인은 바로 그 여자거든. 새로 부임한 목사 부인은(전의 노목사는 돌아가셨네)마르고 병약한 여잔데, 그녀가 세상사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네.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기 때문이지. 학자들 틈에 끼여서 성서 연구에 골몰하고, 한창 유행하는 도덕적 비판적 그리스도교 개혁에 참여하였으며, 라바테르의 광적인 신앙에 어깨를 으쓱거리던 끝에 건강이 몹시 나빠졌는데, 그렇게 되고 보니까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대지에선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게 되어 버린 어리석은 여잘세. 그런 여자니까 그 호두나무를 베어 버리게 할 수 있었던 거지. 그녀의 구실인즉 이렇다네. 낙엽이 지면 뜰이 지저분해지고 잎이 무성할 때는 햇빛을 가리고 호두가 열리면 아이들이 돌을 던지니 신경에 거슬려서, 케니코트와 제믈러, 그리고 미야엘리스의 비교연구를 할 수가 없다는 걸세. 마을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노인들이 무척 불만스러운 듯하기에 나는 물어 보았네. [여러분들은 어째서 보고만 계셨나요?] [이 고장에선 촌장이 일단 작정을 하면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거든요]하는 대답이었네. 그런데 한 가지 고소한 일이 생겼다네. 촌장과 목사는 그 나무를 판 돈을 둘이서 반반씩 나누어 갖기로 합의를 보았다네. 목사는 평소에 늘 묽은 수프만 끓여 주는 그 부인에게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녀의 변덕스러운 신경질의 덕을 좀 볼까 했던 거지. 그런데 그런 내막이 소득 관리소에 알려져서, 나무값은 관리소에 납입하라는 통고가 내려오게 된 걸세. 목사관의 대지 가운데 그 나무가 서 있던 땅은 아직도 관리소가 그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걸세. 결국 그 호두나무는 관리소에 의하여 경매에 부쳐지고 말았다네. 어쨌든 호두나무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네. 아아, 내가 영주라면 목사 부인이며 촌장이며 관리소를 모조리......영주라! 영주라면 영내의 나무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을 턱이 없지!   10월 10일 로테의 검은 눈을 보기만 해도 나는 행복해지네! 그런데 못 마땅한 것은, 알베르트가 별로 행복해 뵈지 않은 일일세---만일---나라며---이러하리라---생각했던 만큼은 말일세---이런 줄표가 좋아서 긋고 있는 것은 아니라네.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일세.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겠지.   10월 12일 오시안이 내 마음 속에서 호메로스를 밀어 내었네. 이 위대한 시인이 나를 끌어들이는 세계는 그야말로 기막힌 세계일세. 나는 피어나는 안개에 싸여 희뿌연 달빛 속에 조상들의 영혼을 꾀어 내는 비바람에 시달리며 황야를 방황한다네. 줄지어 있는 산들의 저 너머에서, 골짜기의 요란스러운 시냇물 소리와 더불어 동굴 속 망령들의신음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들려 오네. 소녀의 통곡소리도 들려 오네. 그녀는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쓰러져 간 애인의 무덤, 잡초로 덮이고 이끼가 낀 네 개의 묘석 언저리에서 숨이 끊어질 듯이 탄식하고 있는 걸세. 이윽고 유랑하는 백발의 음유시인이 나타나네. 광막한 황야에 조상들의 발자취를 찾아 헤매다가, 아아, 마침내 이 곳에서 그 묘석을 찾아 낸 걸세. 그는 비탄에 잠긴 채 사납게 물결치는 바다 저 너머로 빠져 들어가는 저녁별을 바라보네. 그의 가슴 속에는 지나간 시대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네. 용사들의 고난에의 길을 축복해 주듯이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죄고 개선하고 돌아오는 화환으로 장식된 배에 달빛이 내리비쳤던 그 옛날의 일이 말일세! 노인의 이마에는 깊은 고뇌의 자국이 새겨져 있네. 최후에 혼자 남은 이 용사도, 지금은 기진맥진 무덤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네. 그러나 가 버린 사람들의 방황하는 망령들을 눈앞에 대하자 벅찬 기쁨이 새로이 샘솟아 올랐네. 그는 흔들거리는 풀숲, 차가운 땅을 내려다보며 절규하고 있다네. [아름다왔던 날의 나를 아는 나그네들은 와서 물으리라, 하고, 나그네들은 내 무덤을 밟고 넘어가서, 나를 찾아 헛되이 이 지상을 헤매어 다니리라] 아아, 친구여! 나도 충성스러운 무사와 같이 칼을 빼어들고 서서히 숨이 끊어져 가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나의 영주 오시안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네. 그리하여 해방된 그 반신의 뒤를 따라 나도 가고 싶네!   10월 19일 아아, 이 공허! 무서운 공허, 그것을 나는 이 가슴 속에 느끼고 있네. 나는 자꾸만 생각한다네, 딱 한 번, 딱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이 가슴에 껴안을 수가 있다면 이 공허는 완전히 메꿔질 텐데, 하고 말일세.   10월26일 그렇다네, 나는 점점 더 확실히 느끼게 되네. 치눅여, 한 인간의 존재 같은 건 대수로운 게 아닐세. 전혀 대수롭지 않은거야. 로테네 집에 그녀의 여자친구가 한 사람 찾아왔었네. 나는 그 옆방으로 책을 가지러 갔었는데, 책읽기가 시들해져서 펜을 들고 긁적거리기 시작했네. 두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네. 아무개가 결혼을 한다느니 아무개는 병이 들었는데 심상치 않다느니 하는 따위의 자질구레한 시중의 소문이었지. [마른기치믕ㄹ 하고 볼이 홀쪽해졌는데, 때때로 까무러치기도 한 대요. 거의 가망이 없는 모야이에요]친구가 말했네. [N씨도 많이 아프다면서요?]로테도 말했네. [부종이 심하다나 봐요]하고 친구가 말하는 소리. 나의 상상력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불행한 사람들의 병상을 머릿속에 그렸네. 나는 생생하게 볼 수가 있었네. 그들은 삶을 등지기를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모른다네. 그들은 얼마나......빌헬름이여,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마치 전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죽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어조로 말일세.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네. 로테의 의복, 알베르트의 서류, 그리고 가구류를 보았네. 그것들은 모두가 나에게는 정든 물건들일세. 잉크병까지도......나는 생가에 잠겼네. . 아아, 인간은 그지없이 덧없는 것이라네. 자기의 존재가 정말 확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곳, 자기의 존재를 정말 확고하게 인상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수 있는 애인의 추억이나 그 영혼 속에서조차도, 인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마련인거야,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10월 27일 이 가슴을 찢어 버리고 머리통을 부수어 버리고 싶어지네. 어째서 사람들이 서로 이토록 냉랭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말일세. 아아, 사랑도 기쁨도 우정도 즐거움도, 내가 남들에게 제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주지를 않네. 그리고 진심을 다 기울여서 남을 행복하게 해 주려 해도, 눈앞에 그림자처럼 차갑게 서 있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효능이 없네.   10월 27일 저녁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은 많으나,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리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더라도 그녀 없이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걸세. 10월 30일 나는 벌써 수백 번 그녀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려 했었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데 손을 뻗쳐 잡아서는 안 된다니, 이 안타까운 심정은 하느님만이 아실걸세. 그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적인 충동일세. 아이들은 갖고 싶은 제 눈에 띄면 얼른 붙잡으려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11월 3일 정말이지 다시는 깨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라면서, 아니, 때로는 그렇게 되리라 믿으면서 잠자리에 들기 그 몇 번이었던가! 그러나 아침이 되면 나는 다시 눈을 뜨고, 태양을 보고, 그리고 비참한 심경이 된다네, 아아, 차라리 모든 것을 날씨 탓으로 돌린다든가, 누군가 다른 사람, 또는 잘못된 계획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 견딜 수 없는 울분의 짐이 절반은 줄어 들련만!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너무나 똑똑히 알고 있네, 모든 죄가 나 혼자에게만 있다는 것을. 아니, 그건 죄라고 할 수 없지. 하지만 모든 불행의 근원이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사실일세. 전에 모든 행복의 원천이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처럼 말일세. 충만한 감정 속을 떠돌아다니면서 한 발짝 내디딜 때만다 낙원이 뒤따르던 그 무렵의 나나 지금의 내가 다를 바 없으련만, 그 무렵의 나는 온 세계를 넘치는 사랑으로 포옹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 마음이 죽어 없어져 버렸네. 이제 내 마음에서는 어떤 감동도 솟아나지를 않는 걸세. 상쾌한 눈물이 오관을 소생시키는 일도 없며, 불안으로 말미암아 이마에는 나날이 주름살이 늘어 간다네. 이 괴로움, 이것은 내 삶의 유일한 환희를 잃었기 때문일세. 성스러운 소생력, 내가 내 주위의 온갖 세계를 창조해 내었던 그 힘, 그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일세! 창문 밖으로 멀리 언덕을 바라보면, 아침 햇살이 언덕 위로부터 안개 속을 뚫고 초원을 비추고 있네. 강물은 잎이 다 져 버린 버드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조용히 흐르고 있네. 마치 니스를 칠한 유화처럼 딱딱해져 버렸네. 당연히 환희를 느껴야 할 이러한 광경도 이제 내 심장으로부터 한 방울의 행복감조차도 뇌수로 빨아올려 주지 못하네. 사내 대장부가 말라 버림 샘, 물이 없는 물통처럼 하느님 앞에 서 있을 따름일세. 나는 몇 번이나 땅바닥에 엎드려 제게 눈물을 내려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었네. 마치 하늘이 황동처럼 머리 위에서 빛나고, 대지가 말라 터져 버렸을 때에 농부들이 비를 갈구하듯이. 그러나 아아, 나는 알고 있네, 우리들이 애타게 탄훤하다고해서 하느님이 비나 햇빛을 내려 주시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되돌아보면 괴롭기만 한 그 시절이 어째서 그토록 행복했던 것일까! 그것은 내가 참을성 있게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환희를 충심으로 감사하며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11월 8일 로테가 나의 무절제를 충고해 주었네. 아아, 그것도 지극히 다정스럽게! 포도주 한 잔에서 시작하여 한 병을 몽땅 비워 버리는 그런 나의 무절제를.[그러히면 안 돼요]하고 그녀는 말했네. [제 생각도 좀 해 주세요!] [당신을 생각하다뇨?]하고 나는 말했네. [그런 말은 하실 필요 없어요. 생각하다뿐이겠습니까! 아니,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으니까요. 오늘도 나는 며칠 전에 당신이 마차에서 내렸던 바로 그곳에 앉아 있었답니다] 로테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서, 내가 더 이상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 버렸네. 친구여! 이제 나는 내가 이닌 것이나 다름없네. 그녀는 나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네.   11월 15일 고맙네. 빌헬름이여! 자네의 그 염려와 친절한 충고에 사의를 표하네. 그러나 제발 안심하게나, 나는 끝내버티어 낼 테니까. 지치기는 했지만 아직 그만한 힘은 지니고 있다네. 나는 종교를 숭아하고 있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종교가 지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지팡이가 되어 주며, 병들어 쇠잔해가는 자들에게 소생의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네. 그러나 종교는 누구에게나 다 그런 작용을 받지 못했고 도 앞으로도 받지 못할 사람은 수천 명도 더 될 걸세.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는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도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만일 내가 하느님이 보내 주신 그가 아니라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나를 자신의 곁에 매어 두시려 한다면?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말아 주게. 아무런 사심없이 하고 있는 내 말 속에 조소가 깃들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란 말일세. 내 심경을 그대로 자네에게 내보였을 뿐이니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잠자코 있었을 걸세. 나 자심도, 또 남들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간에 나는 말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터이니까. 자기에게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 술잔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아들의 입술에도 쓰디쓴 것이었는데, 내가 어찌 허세를 부리며 그것이 달콤한 체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라는 자체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전율하고 과거가 번갯불처럼 어두운 미래의 심연 위에서 번쩍이며, 나를 둘러싼 만물이 멸망하고, 이 몸과 더불어 온 세계가 무너져 내리려 하는 그 무서운 순간에 내 어찌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으랴. 그 부르짖음이야말로, 자기 자신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몰린 채 힘이 다하여 걷잡을 수 없이 전락해 가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가.라고 한 그 부르짖음 말일세. 그런데 내가 그런 부르짖음을 부끄러워할 것은 없지. 또한 그와 같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겠지. 하늘을 한 필의 옷감처럼 두르르 말아서 거둘 수 있는 하느님의 아들조차도 피할수 없었던 순간이니까.   11월 21일 로테는 깨닫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네. 그녀 스스로가 나와 그녀 자신을 파멸시키는 독약을 조제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것을 들이마시네. 내 몸을 파멸시키기 위해 내미는 그 독배를 비우는 걸세. 다정스러운 그녀의 그 눈매, 나를 자주, 아니, 자주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쩌다가 나를 빤히 보는 그 당정스러운 눈매. 무심결에 나타내는 내 마음을 받아들여 주는 그 호의. 그리고 나의 인고를 애처로와하는 마음이 그녀의 이마에 새겨지네. 그것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제 내가 돌아오려 할 때, 그녀는 나에게 소능ㄹ 내밀며 말했네.[안녕히 가세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 사랑하는 베르테르! 그녀가 나를 을 붙여서 부른 것은 처음일세. 골소에까지 스며드는 말이었네. 나는 그 말을 입 속으로 수백 번이나 되풀이했지.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중얼중얼 혼잣마릉ㄹ 지껄이고 있던 중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네. [잘 자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그러고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지.   11월 22일 나는 하고 기도할 수는 없네. 그러나 가끔 그녀가 내 것인 듯한 생각이 든다네. 하고 그도할 수는 없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의 것이니까. 나는 지금 스스로 괴로움을 재료로 이론유희를 하는 걸세. 이러다간, 명제와 대립명제의 끝없는 기도가 되풀이될 걸세.   11월 24일 그녀는 내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고 있네. 오늘 그녀의 눈매는 내 마음 속 밑바닥까지 스며들었다네. 찾아갔더니 그녀는 혼자 있더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보았네. 여느 때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름다움과 뛰어난 정신의 밝은 빛은 보이지 않았네. 그런 것들은 모두 내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네. 그런 것보다도 훨씬 더 숭고한 괴로움에 대한 애달픈 공감이 어리어 있었네. 어째서 나는 그 발 아래 굻어 엎드리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끝없는 키스로 그에 보답하지 않았을까! 로테는 몸을 피하여 피아노 앞으로 갔네. 그런고는 피아노를 치면서 나직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렀네. 로테의 입술이 그 때처럼 매혹적으로 보였던 적은 없었네. 그 입술은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빨아들여 그 나직한 반향만을 내보내는 것 같았네. 그것을 그대로 자네에게 전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만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맹세했네.. 그러면서도 나는 결코 단념할 수가 없었네. 내 마음 알겠지? 아아, 그것이 장벽처럼 내 영혼을 가로막고 있네. 사무치는 행복을 이 몸으로 맛보고, 그러고 나서 그 죄를 씻기 위하여 파멸해 버리고 싶네 그것이 죄일까?   11월 26일 때때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네. . 그러고 나서 옛시인의 글을 읽으면, 마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네. 나는 수많은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하네! 아아, 인간이란 내가 있기 이전에도 이토록 비참했을까?   11월 30일 나는, 나는 아무래도 평정을 되찾을 수가 없네. 어디를 가나 어퍼구니없는 사건에 맞닥뜨리게 되니 말일세. 오늘도! 아아, 운명이여! 인간이여! 점심때 강변을 산책했네. 나는 요즘 입맛을 잃었네. 그리고 모든 것이 처량하기만 하다네. 산에서 눅눅하고 차가운 서풍이 불고, 잿빛 비구름이 골짜기로 흘러들고 있었지. 멀리 초록색의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나이가 바위 사이를 기어 다니는 것이 보였네. 약초라도 찾고 있는 것 같았네. 내가 다가가자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사람의 마음을 끄는 생김새였네. 조용한 슬픔이 어리어 있는 얼굴로, 선량하고 정직한 인간미가 엿보였네. 검은 머리는 두 가닥으로 말아서 핀을 꽂았고, 나머지 머리는 굵게 땋아 등 뒤로 드리우고 있었네. 옷파림으로 미루어보아 신분이 낮아 보였으므로,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내가 관심을 보여도 언짢게 여기지 않을 듯싶어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 [꽃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한숨을 후우 내쉬면서 그는 대답했네. [그런데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군요.] [꽃이 있을 철이 아니니까요.]나는 웃으면서 말했지. [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고 그는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내려오면서 말했네. [우리 집 뜰에는 장미와 인동덩굴 두 종류가 있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주신 것인데, 잡초처럼 많이 나 있죠. 벌써 이틀째 그걸 찾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이 근처에도 언제나 꽃이 피어 있지요. 노란 꽃, 파란 꽃, 빨간 꽃들이 말입니다. 수레국화도 예쁜 꽃이지요. 그런데 하나도 안 보이는군요] 나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슬쩍 에둘러서 물어 보았네. [꽃을 따서 뭘 하려고 그러죠?] 경련하는 듯한 기묘한 미소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네. [이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하고 그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는 말을 이었네. [저는 애인한테 꽃다발을 선물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거 근사하군요.]하고 나는 말했지. [아아! 제 애인은 다른 물건들은 많이 갖고 있어요. 부자거든요] [그래도 당신의 꽃다발은 기쁘게 받겠지요] [그녀는 보석을 갖고 있어요. 왕관도 갖고 있지요] [그 분의 이름은 뭡니까?] [네덜란드 정부가 나에게 월급을 주었더라면]하고 그는 엉뚱한 말을 했네.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그래요, 옛날엔 좋았지요. 저는 행복했습니다.! 이젠 글렀어요. 지금은 저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물을 짓는 그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네. [그러면 그전에는 행복했었군요?] 하고 나는 물었지. [아아! 다시 그런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 무렵엔 행복했었지요. 즐겁고 기뻣어요.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하인리히!]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노파가 우리있는 쪽으로 다가왔네. [하인리히, 여기 있었구나. 사방으로 찾아다녔다. 자, 가자, 밥 먹어야지] [할머니의 아드님인가요?] 나는 노파에게 다가서며 물었네. [네, 제 불쌍한 자식이랍니다.]하고 할머니는 대답했네. [하느님께서 저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셨어요.] [이렇게 된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지. [이렇게 얌전해진 지는 반 년쯤 되었어요. 그 전에는 꼬박 1년 동안 어찌나 날뛰고 행패를 부렸는지, 정신병원에서 사슬에 묶여 있었지요. 지금은 행패는 부리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임금님이 어떠니 황제가 어떠니 하는 소리만 한답니다. 원래는 온순하고 얌전한 아이였죠. 짐안살림도 도와 주고 글씨도 잘 썼는데, 갑자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고열이 나고, 그러고는 정신이 돌기 시작하더군요. 그랬다가 지금은 보시는 것처럼 이 모양이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네. [그토록 행복했었다, 즐거웠었다 하는 건 언제 얘긴가요?] [바보 같은 소릴 또 했군요!] 노파는 연민의 미소를 머금고 말했네. [완전히 정신이 돌았던 때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랍니다. 언제나 그걸 자랑삼아 얘기한답니다. 정신병원에서, 자기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의 이야기지요] 그 말은 벼락처럼 내 가슴을 때렸네. 나는 노파의 손에 지폐를 한 장 쥐어 주고 얼른 그 곳을 떠났네. 시내를 향해 황망히 걸음을 재촉하면서 나는 외쳤네. 하늘에 계신 주여! 당신은 인가느이 운명을 이게 정하여 놓으셨나이까? 이성을 지니기 이전과, 이성을 잃어버린 이후를 제외하고는 행복해질 수 없도록! 가엾은 사나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의 슬픔과, 그대를 초췌하게 하는 정신착란이 부럽고나! 그대는 희망에 부풀어 행차한다, 그대의 여왕을 위하여----한겨울에----꽃을 따려 하다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한탄을 하되, 어째서 꽃이 보이지 않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런데 나는 희망도 목적도 없니 나갔다가, 집을 나섰을 때와 똑같은 기분으로 돌아온다. 그대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월급만 주었더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몽상하고 있다. 행복한 사나이여! 행복해질 수 없는 까닭을 이세상의 현실적인 장애 탓으로 돌릴 수 있다니. 그대는 모르고 있네, 그대가 비참하게 된 원인이 산산이 파괴된 그대의 마음 속에 있으며, 그대를 미치게 한 머릿속에 있음을. 그리고 지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그대를 거기서 구해 낼 수 없음을. 신병을 고치기 위하여 약효가 있다는 먼 온천장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 때문에 도리어 병이 악화되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비웃을 수 있는 인간, 양심의 가책을 면하고 영혼의 고뇌를 없애기 위해 고난을 겪으며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을 멸시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윈안도 받지 못한 채 죽을지어다. 길도 없는 길을 걸어가느라고 발바닥은 상처를 입을지라도, 그 한발짝 한발짝이 괴로워하는 영혼에게 있어서는 한 방울의 진통제가 되는 걸세. 고달픈 여행의 하루하루를 참고 견디어 낼 때마다 가슴 속의 무거운 짐은 그만큼 가벼워지고, 마음은 그만큼 평온해지는 걸세.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공허한 이론을 논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을 망상이라 부를 권리가 있는가? 망상! 아아, 하느님! 저의 눈물을 보소서! 인간을 이토록 가난하게 창조하신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이 얼마 되지 않는 가난한 소유분까지도 빼앗아 가 버리는 동포를 덤으로 주셨나이까? 그 동포는 당신께로 향한 얼마 되지 않는 믿음까지도 빼앗아 가 버립니다. 만물을 사랑하시는 주여! 약초를 믿으며, 뚝뚝 떨어져 내리는 포도즙을 믿는 그 마음은, 당신께로 향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만물 속에, 우리에게 한시도 없어서는 안 될 진정제와 치료제의 효력을 간직해 놓으신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느님 아버지시여! 전에는 당신께서 제영혼을 구석구석까지 충만케 해 주셨으나, 지금은 저를 외면해 버리셨습니다. 부디 저를 당신 곁으로 불러 주십시오. 이 이상 더 침묵하지 마소서! 당신의 침묵은 갈망하는 이 영혼에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뜻밖에 자기 아들이 돌아와서 매달렸을 때 화를 낼 수 있는 아버지가 있을까요? 그 아들은 외칩니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노여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좀더 오래 참고 견디어 계속해야만 할 편력을, 저는 중도에서 그만두고 돌아왔습니다. 세상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고생을 하고 노동을 하면 보수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 가장 좋습니다. 아버지가 보시는 곳에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맛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시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는 아버지시여, 당신께서는 이 아들을 물리치시겠습니까?   12월 1일 빌헬름이여! 자네에게 이야기했던 그 사나이, 그 행복하고도 불행한 사나이는 로테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서기였다네. 로테를 사모하며 그것을 남몰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것을 고백한 끝에 해고당했다는 걸세. 가슴 속에서 불타던 정열이 이 사나이를 미치게 한 거지. 이 덤덤한 편지를 일고 헤아려 주기 바라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았겠는가를. 알베르트는 태연스레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네. 아마 자네도 태연스레 이 글을 읽어 나갈 테지.   12월 4일 부디 이 심정을 헤아려 주게. 나는 이제 글렀어. 이 이상 더견딜 수가 없네! 오늘 나는 그녀 곁에 앉아 있었네. 그녀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지. 갖가지 곡을, 온갖 감정을 나타내면서! 온갖 감정을 다 말일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녀의 어린 여동생이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있었네.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네. 고개를 숙였더니 로테의 결혼반지가 눈에 띄더군. 눈물이 왈칵 솟았네. 그때 그녀가 그 그리운, 황홀한 멜로디를 치기 시작하였네. 그것을 실로 돌발적이었어. 내 영혼은 구석구석까지 위로를 받았네. 그와 동시에 지나간 날들의 추억이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쳤네. 전에 이곡을 들었을 무렵의 일, 로테 곁을 떠나 있었던 음울했던 날들, 울화가 치밀었던 일, 차례차례 무너져 버린 희망 등등이, 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네. 복받쳐 오르는 감회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네. [제박]하고 나느 격력한 감정을 못 이겨 로테 곁으로 내달으며 말했지. [제발 그만두어 주십시오!] 로테는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네. [베르테르 씨] 하고 그녀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네. 그 미소는 내 마음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네. [베르테르 씨, 몸이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좋아하시던 곡이 귀에 거슬리는 걸 보면, 그만 돌아가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제발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나는 훌쩍 그녀 곁을 떠났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 비참한 모습을 보고 계시겠죠. 어서 이 불행이 끝나게 해 주십시오.   12월 6일 어디를 가나 그녀의 모습이 나를 따라다니네! 자나께나 그 모습이 내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네! 눈을 감으면 마음의 눈길이 쏠리는 머릿속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타나네.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할 수가 없군, 어쨌든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걸세. 바다와도 같이, 심연과도 같이, 그것은 내 앞에, 아니, 내 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내 생각을 충만케 해 준다네. 반신(半身)이라 찬양되는 인간의 꼴을 보게나! 가장 힘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에 힘이 빠져 버리니 말일세. 기쁨에 겨워 날뛸 때도, 슴픔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때도, 바야흐로 무한한 자의 충만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리고 싶어지는 그 순간에, 언제나 덜미를 잡혀 둔하고 차가운 의식 속으로 되끌려오고 말지 않는가.   12월 12일 사랑하는 빌헬름이여, 나는 지금, 악령이 씌었다고 여겨졌던 그 불행한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네. 때때로 뭔가가 나를 엄습해 오는 걸세. 그것은 불안도 아니고, 욕방도 아니고, 불가해한 내적 발광이라네. 그것이 내 가슴을 쥐어뜯으려 하고, 내 목을 조르는 거야. 아아, 불행하도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져서, 인간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이 계절의 황량한 밤경치 속으로 나가 헤맨다네. 어젯밤에도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네. 갑자기 눈석임물이 불어나서 강물이 범람했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강마다 물이 넘치고, 발하임의 아래쪽 그 그리운 골짜기가 물에 잠겼다는 거야. 밤 11시가 지나서 나는 집을 뛰쳐나왔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네. 바위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까, 달빛속에서 탁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네. 밭도 목장도 산울타리도, 모두가 그 모습을 감추었고, 넓은 골짜기는 온통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친 바도로 변해 있었네! 이윽고 검은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다시 얼굴을 내밀자, 그 물바다는 섬뜩할이만큼 아름답게 빛을 반사하면서 저 먼 곳을 향해 요란하게 굽이치면 내 눈앞을 흘러가는 것이었네. 전율과 그리움이 나를 엄습하였네. 아아,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심연을 향하여 선 채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네. 그리고 이 괴로움, 이 번뇌를 노도처럼 휩쓸어가 버리는 환희에 싸여 나는 넋을 잃었네. 아아, 그러나 나는 땅에서 발을 뗌으로써 모든 고통을 종식시켜 버릴 수는 없었네. 내 운명의 모래시계는 아직도 모래가 다 흘러내리지 않았던 걸세. 나는 그것을 절실히 느꼈네. 아아, 빌헬름이여! 저 폭풍우로 구름장을 찢어 대 홍수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인간적 존재를 기꺼이 내던질 텐데. 아, 그런 큰 환희는 얽매인 몸에는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어두운 마음으로 언젠가 어느 무더운 날 산책을 나갔다가 로테와 함께 쉬었던 그 그리운 버드나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도 물에 잠겨 있었네. 버드나무도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네. 로테네 목장, 로테네 집 주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정자는 격류에 볼품없이 허물어져 버렸겠지,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에, 죄수의 마음 속에 숨어 들엉오는 자기 집의 가축 떼와 목장, 영광스러운 직위에 대한 꿈들처럼, 지나간 날들의 햇살이 내 마음 속에 비쳐들었네. 나는 그대로 오래 서 있었네!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네, 죽을 용기는 있으니까. 나는 차라리......그러나 지금 나는 여기에 한 노파처럼 앉아있네.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는, 기쁜도 없는 생명을 한순간이라도 더 연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남의 집 울타리에서 땔나무를 주우며, 이집 저집의 문간에서 빵을 구걸하는 노파처럼.   12월 14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친구여.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놀라고 있네. 로테에 대한 나의 사랑은 더없이 성스럽고 청순한, 형제와 같은 사랑이 아니었던가? 일찍이 단 한 번이라도 내 가슴에 죄가 될 만한 소망을 품은 적이 있었던가? 단언하지는 않기로 함세. 그런데 꿈이란 것은! 아아, 이토록 모순된 갖가지 작용을 불가사의한 힘의 조화로 돌려 버린 사람들의 감각은 그야말로 올바른 것일세! 어젯밤! 그 이야기를 하려고만 해도 몸이 떨리네. 나는 그녀를 내 가슴에 꽉 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입술에 끝없는 키스를 퍼부었다네. 나의 눈은 그녀의 황홀해진 눈 속에 어리어 있었네. 주여! 저는 벌을 받아야 할까요? 지금도 그 불길 같은 기쁨을 설레는 마음으로 되살리면서,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로테! 로테! 이제 끝장이 나려나 보네! 감각이 혼란에 빠지고, 벌써 1주일 동안이나 사고력을 상실하고 있어.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그득하네. 어디를 가나 즐겁지가 않네. 그런가 하면 어디를 가도 즐겁네.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어. 이제 나는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결심은 이런 상황 속에서, 베르테르의 가슴 속에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로테의 곁으로 돌아온 이후로 그것은 언제나 그의 최후의 기대였으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습니다. 그 행위가 조급하고 경솔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선의 확신으로써가능한 한 침착한 결의와 더불어 결행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그의 회의 및 자기 자심과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쪽지가 있습니다. 빌헬름 앞으로 쓴 편지의 서두인 듯한데, 날짜는 없고, 역시 다른 글들과 함께 발견된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녀의 운명, 내 운명에 대한 그녀의 공감, 그러한 것들이 재가 되어 버린 내 머릿속에서 아직도 최후의 눈물을 짜내고 있네. 막을 올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단지 그뿐 아닌가! 그런데 이 망설임은 어떻게 된 건가? 그 안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일까?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는 자가 없기 때문일까?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면 혼란과 암흑을 예상하지. 그것이 우린네 인간정신의 특성인가 보네!] 마침내 베르테르는 이 슬픈 생각에 점점 더 깊이 잠겨들었고, 그 결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빌헬름 앞으로 보낸, 애매한 내용의 편지가 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12월 20일 고맙네, 빌헬름.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해 준 네의 우정에 사의를 표하네. 물론 자네 말은 옳네. 나는 떠나는 편이 아늘 걸세. 그러나 자네들 곁으로 돌아오라는 제안에는 따를 수가 없네. 나는 역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네. 자네가 나를 데리러 와 주겠다는 말, 정말 고맙네. 다만 앞으로 2주일 정도 더 미루어 주게나. 나중에 편지로 자세한 것을 알려 줄 테니까,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게. 무엇이나 무르익기 전에는 따지 말아야 하는 법이거든. 2주일 동안 더 있고 덜 있는 것의 차이는 대단한 것일세. 어머니께 말씀 좀 전해 주게,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그리고 여러 가지로 쓰라린 일을 겪게 해 드린 것을 부디 용서해 달라고. 기쁘게 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네. 잘 있게, 가장 친애하는 나의 친구여. 하늘의 모든 축복이 자네에게 내리기를! 잘 있게!   이 무렵, 로테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었으며, 남편에 대한 배려와 그녀의 불행한 친구에 대한 상념이 어떠했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합니다. 다만 우리는 로테의 성격을 알고 있으므로 대강은 짐작을 할 수가 있고, 또 상냥한 마음씨를 지닌 여성이라면 로테의 심정이 되어 생각하고, 로테와 더불어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로테는 베르테르를 멀리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하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로테가 그 실행을 망설였다면, 그것은 친구에 대한 진정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베르테르에게 있어서 얼마나 쓰라린 희생인지,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말 진지하게 그 결심을 실행해야만 할 필요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만큼 더한층 자기의 지조가 남편의 그것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수록한 편지를 베르테르가 친구 앞으로 쓴 것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이었는데, 그 날 저녁때 그는 로테를 찾아갔습니다. 로테는 혼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침 어린 동생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장난감을 정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베르테르는 아이들의 기쁨을 예상하고, 자기의 유년시절, 갑자기 문이 열리면 촛불이며 과자며 사과 등으로 장식된 트리가 눈앞에 나타나서 천국에 들어간 것같이 황홀한 기분이 되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에게도]하고 로테는 사랑스러운 미소로써 당혹스러운 심정을 감추며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선물이 있을 거예요. 얌전하게 하고 계시면요. 기다란 양초라든가 그런 걸......] [얌전하게 하고 있는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로테?] [목요일 저녁이 크리스마스 이브예요. 아이들도 오고 아버지도 오십니다. 모두들 각각 선물을 받게 되지요. 그 때 당신도 오세요. 그렇지만 그 전에는 오시지 마세요.] 베르테르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부탁이예요]하고 로테는 말을 이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어요. 저를 안정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베르테르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입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한 거동으로 미루어 베르테르가 빠져든 상태를 알아챈 로테는,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그의 마음을 풀어 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좋아요, 로테]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이제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베르테르 씨, 당신은 저희 집에 오셔도 좋고, 또 오셔야만 해요. 다만 지나치지만 않게 해 주세요. 아아, 어째서 당신은 이토록 격렬하게, 한 번 손에 잡은 것을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하실까요? 무슨 일에나 억누를 수 없는 정열을 솓는 성품이시군요! 제발] 로테는 베르테르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습니다. [분수를 지켜 주세요! 당신만한 인격, 당신만한 학문, 당신만한 재능이면 달리 얼마든지 재미있는 일을 즐기실 수가 있어요. 대장부다와지도록 애쓰세요. 저 같은 여자에게 이런 슬픈 애착을 같지 마시고, 당신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가 없는 여자인걸요] 베르테르는 이를 악물고 어두운 표정으로 로테를 보았습니다. 로테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습니다. [잠깐만 차분히 생각해 봐 주세요, 베르테르 씨! 당신은 당신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어째서 저를? 저는 남의 아내인데 어째서 이런 사람을......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를 당신 것으로 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의 망음을 끌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시선을 고정시켜 불쾌한 듯이 상대방을 지켜보았습니다. [훌륭하시군요!] 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알베르트가 그런 대사를 꾸며 낸 거로군요. 전략가야, 훌륜한 전략가!] [그 정도 말이야 아무라도 할 수 있어요] 로테가 응수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당신의 소망을 채워 줄 만한 아가씨가 한 사람도 없을까요? 한 번 마음자고 찾아보세요. 틀림없이 그런 사람이 눈에 띌 거예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벌써 오래 전부터, 당신을 위해서나 저희들을 위해서나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예요. 요즘의 당신은 일부러 자신을 좁은 세계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아요. 용단을 내리세요! 여행을 하면 틀림없이......기분도 풀릴 거예요! 부디 당신에게 어울리는 좋은 분을 찾아 내도록 하세요. 그리하여 진정한 우정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베르테르는 차갑게 웃었습니다. [그 말을 인쇄를 해서 온 세상의 가정교사들에게 배부해 주시도록 하지요. 로테, 앞으로 얼마간만 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 주십시오. 그러면 만사가 다 잘 될 테니까요!] [아뭏든 베르테르씨,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오지 마세요, 네?] 베르테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 했을 때 알베르트가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저녁인사를 나누고, 둘 다 거북한 듯 방 안을 서성거렸습니다. 베르테르는 내용도 없는 잡담을 꺼냈으나, 그것도 곧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알베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알베르트는 아내에게, 자기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하지 못했다는 대답을 듣고는 두세 마디 잔소리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베르테르에게는 그것이 매우 차갑게 들렸습니다. 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망설이는 사이에 8시가 됐습니다. 불만과 불쾌감은 점점 더해 갈 뿐이었는데, 저녁식사 줌비가 다 되었을 때에야 베르테르는 모자와 단장을 집어들었습니다. 알베르트가 좀더 있다가 천천히 가라고 권했으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소리 같아서 퉁명스레 사양을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인이 등불을 들고 나오자 그것을 받아 들고 혼자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를 내며 울고, 흥분한 복소리로 혼잣말을 하였으며, 방안을 조급하게 오락가락하더니, 마침내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11시경에 하인이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까, 그는 그대로 누워 있었습니다. 장화를 벗길까요, 하고 하인이 묻자 그는 순순히 그러라고 하고는, 내일 아침엔 부를 때까지 방에 들어오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12월 21일, 월요일 아침에 베르테르는 로테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책상위에서 봉해진 채 발견되었고, 그대로 로테에게 전해졌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 그가 이 편지를 단편적으로 썼다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 순서에 따라 일부분씩 끊어서 삽입하기로 합니다.   결심했습니다. 로테. 나는 죽으려고 합니다. 낭만적인 과장도 없이, 냉정한 심정으로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나게 될 날 아침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이미 차가운 무덤이 불행한 사나이의 경직된 몸을 덮고 있을 것입니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가지도 당신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알지 못한 사나이였습니다. 무서운 하룻밤을 지새웠습니다만, 아아, 그것은 감사해야만 할 밤이기도 했습니다. 죽는다는 결심을 확실히 굳혀 준 밤이었으니까요. 어제 몹시 흥분하여 떨치듯이 당신과 헤어져 돌아왔는데, 그런 뒤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한꺼번에 내 마음 속에 밀려들었고, 희망도 없고 기쁨도 없는 존재인 내가 당신 곁에 붙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오한이 엄습함니다. 간신히 내 방으로 돌아와서 정신없이 꿇어앉았습니다. 그리고 아아, 하느님은 나에게 더없이 쓴 눈물을 최후의 위안으로 내려 주셨습니다. 갖가지 계획과 기대가 뒤를 이어 내 마음 속에서 어지럽게 설쳤으나, 마침내 죽어 버리자고 하는 한 가지 계획이 확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대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진정된 가운데서도 죽어 버리고 싶은 생각은 확고하게,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내가 끝까지 참고 견디다가 당신을 위하여 희생되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로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어야만 할까요? 우리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은 떠나야만 합니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갈가리 찢어진 이 가슴 속에서는 몇 번이나 어떤 생각----당신 남편을 죽일까? 당신을, 아니, 나를?----이 미친 듯이 맴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지난 일입니다.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 언덕 위에 올라가시거든 부디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그 골짜기 길을 내가 자주 올라갔었던 일을 되새기며 건너편에 있는 내 무덤께로 눈길을 보내 주십시오. 넘어가는 저녁 햇살 속에 무심하게 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쓰기 시작했을 때는 냉정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정경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라서 어린애처럼 울고 있습니다.   10시경에 베르테르는 하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으면서, 2,3일 안으로 여행을 떠날 테니, 옷가지에 손질을 하고 짐을 꾸릴 준비를 해 두라고 일렀습니다. 또 지불할 것이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계산서를 받아오고, 빌려 준 몇 권의 책도 찾아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얼마씩 원조해 온 몇몇 가난한 사람들에게 2개월분의 돈을 선불해 주도록 일렀습니다. 그는 음식을 방으로 가져오게 하여 식사를 마친 다음, 말을 타고 법무관의 집으로 갔습니다. 법무관은 부재중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상념에 잠겨서 정원을 이리저리 왔다갔다했습니다. 죽기 전에 모든 추억들을 자기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그를 조용히 내버려 둘 리 없었습니다. 그를 뒤쫓아와서 달라붙으며, 내일, 그 다음 내일, 그리고 또 하루가 더 지나면, 로테 언니 집에 가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거라면서, 그들의 어린 상상력이 기대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이를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그 다음 내일,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면!]하고 외친 다음, 베르테르는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떠나려 했습니다. 그 때 막내동이가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언니들이 예쁜 연하장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커다란 거예요! 한 장은 아빠에게, 알베르트하고 로테 누나에게도 한 장, 그리고 베르테르 아저씨에게도 한 장, 그걸 설날 아침에 드린댔어요] 베르테르는 이 이야기에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몇 푼씩 돈을 노나 주고 아버지께 안부 전해 달라고 부탁한 다음, 그는 눈에 눈물이 글썽한 채 말을 타고 그 곳을 떠났습니다. 5시경에 집에 당도하자, 그는 하녀에게 난롯불을 잘 살펴서 밤늦게까지 꺼지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습니다. 하인에게는, 아래층에 있는 책을 트렁크에 넣고, 옷가지들은 여행가방 속에다 챙겨 두라고 일렀습니다. 아마도 그 뒤에, 로테 앞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 가운데 다음 부분을 쓴 것 같습니다.   당신은 내가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 말대로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요. 아아, 로테! 그러나 오늘 한 번만 더!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당신은 이 편지를 손에 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당신의 눈물로 이것을 적실것입니다. 나는 단행해야만 합니다. 아아, 결심을 굳히고 나니 어쩌면 이토록 상쾌할까요.   한편 로테는 기묘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르테르와 그 마지막 대화를 나눈 뒤에 그녀는 그와 헤어지는 일이 자기로서 얼마나 쓰라린 일이며, 베르테르도 또한 자기와 헤어지는 것을 얼마나 가슴아프게 생각할까 하는 것을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베르테르가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베르트에게 넌지시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알베르트는 이웃마을의 어니 관리 집에 볼일이 있어서, 그 날 밤은 거기서 묵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테는 혼자 있었습니다. 동생들도 와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남편과 영원히 맺어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남펴느이 그 침착성과 믿음직스러운 성품은 그녀가 착한 아내로서 평생의 행복을 그 바탕 위에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정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남편이 자기에게 있어서, 또 아이들에게 있어서 언제까지나 더없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베르테르도 대단히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서로 알게 된 최로의 순간부터 두 사람의 마음은 아름다운 일치를 나타내었습니다. 오래 계속된 교제. 지금까지 겪어온 갖가지 일들이 그녀의 마음 속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녀가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한 흥미있는 일들은 모두 그와 공감한 것이었으므로, 지금 헤어져야만 한다면 그녀의 전존재에 다시는 메꿀 수 없는 공백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아아,베르테르와 자기가 오누이간이라면!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누군가 자기 친구 가운데 한 사람과 결혼시킬 수는 없을까? 그러면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와의 사이도 다시 전처럼 될 수 있을 텐데! 로테는 자기의 여자친구들을 한 사람씩 차례차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느 친구나 모두 어딘가 난점이 있어서, 베르테르와 짝지어 줘도 좋을 만한 친구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의식속에 분명히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베르테르를 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것이 자기의 은밀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베르테르를 붙들어 둘 수는 없으며, 그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로테의 마음은 평소에는 경쾌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는데, 지금은 답답한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가로막혔으며, 가슴은 옥죄이고, 검은 구름이 눈앞을 가리웠습니다. 어느덧 6시 반이 되었을 때, 베르테르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발소리, 자기를 찾고 있는 그의 목소리를 그녀는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로테의 가슴은 세차게 고동쳤습니다. 베르테르가 왔을 때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만날 수 없다고 따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르테르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당황한 어조로 외쳤습니다. [약속을 어기셨군요!] [나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요]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약속은 안 했어도 제 부탁을 좀 들어 주시면 어때요? 우리 서로간의 평화를 위해 부탁드렸던 건데] 그녀는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베르테르와 단 둘이 있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두어 사람의 여자친구를 불러오도록 하녀를 보냈습니다. 베르테르는 갖고 온 두어 권의 책을 내려 놓고서, 달리 또 책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로테는 친구들이 와 주었으면 싶기도 했고, 오지 말아 주었으면 싶기도 했습니다. 하녀가 돌아와서, 두 친구가 모두 사정이 있어서 봇 오겠다더라는 전갈을 했습니다. 로테는 하녀에게 옆방에서 일을 하고 있도록 이르려 하다가, 곧 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베르테르는 방 안을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로테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서 베누엣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을 고쳐 먹고 베르테르 곁에 가서 앉았습니다. 베르테르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뭐 적당한 읽을거리가 없을까요?] 로테가 물었습니다. 베르테르는 아무거솓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서랍 속에]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번역하신 오시안의 시가 몇 편 들어 있어요. 저는 아직 읽지 못했어요. 기회 봐서 당신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여태껏 그런 기회가 없었고, 또 일부러 기회를 만들 수도 없었어요] 베르테르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번역한 그 원고를 꺼내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었을 때 전율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원고를 펼쳤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 괴었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일기 시작했습니다.   [저물어 가는 밤하늘의 별이여, 그대 아름답게 서쪽 하늘에 반짝이며, 빛나는 얼굴을 구름 사이로 치켜들고, 그대의 언덕을 엄숙히 걸어가고 있구나. 무엇을 보고자 이 황야를 내려다 보는가? 폭풍우는 그치고, 멀리 골짜기 개울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술렁이는 물결은 바위를 희롱하고, 저녁 파리떼의 날갯소리 들에 찼도다. 아름다운 빛이여, 무엇을 찼는가? 그러나 그대는 미소 지으며 즐거운 듯 머리타락을 나부끼고 있도다. 잘 있거라, 조용한 빛이여. 나타나라! 그대 오시안의 영혼의 희한한 빛이여! 그리하여 늠름한 오시안의 빛은 나타나고, 그리운 친구들의 모습이 내 눈에 비치도다. 지나날처럼 로라 들판에 다시 모였도다. 안개기둥처럼 나타난 것은 핑갈의 모습이로다. 용사들이 그를 애워싸고, 그리고 보라! 방랑의 가인들을......오오, 백바르이 울린! 당당한 리노! 목소리 아름다운 알핀 그리고 조용히 영탄하는 미노나도 있구나! 달라져 버린 친구들이여. 젤마 산의 축제일에 봄바람이 번갈아가며 언덕의 풀을 휘어눕히듯이, 노래를 겨루던 내 친구들이여! 모습도 아름답게 미노나는 눈물젖은 눈을 내리뜨고 걸어오도다. 언덕을 불어 내리는 바람에 치렁치렁한 머리를 흩날리며, 애처로운 그 노랫소리, 용사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구나. 몇 차례인가 잘가르의 무덤을 보았으며, 몇 차례인가 불켜지지 않은 콜마의 집을 보았기 때문이로다. 콜마는 홀로 언덕 위에서, 돌아오마 기약한 잘가르를 기다리건만, 찾아오는 건 밤분이로다. 사람들이여, 들으라, 언덕 위에서 탄식하는 콜마의 목소리를.   콜 마 날이 저물었도다! 폭풍우 몰아치는 이 언덕에 나는 혼자 았노라. 산에서 산으로 바람은 윙윙거리고, 골짜기 물은 바위에 철썩이고, 비 피할 오두막조차도 내게는 없구나. 달이여 구름 사이로 나와 주려무나! 밤하늘의 별들이여, 반짝여 다오! 빛을 보내어 나를 인도하라,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으로. 사냥에 지쳐 그이는 쉬고 있으리라. 활을 뉘고, 사냥개들에게 애워싸인 채. 그렇지만 안 되지, 풀 무성한 강변의 이 바위에 있겠노라고 나는 말했으니까. 울려 오는 소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그이의 목소리는 전혀 안 들리누나. 뭘 하고 있어요, 나의 잘가르? 약속을 잊으셨나요? 이게 바위요, 이게 나무랍니다. 강물도 분명히 여기 흐르고 있어요. 밤이 되면 여기 돌아오마고 약속한 당신. 아아, 어디서 길을 잃으셨나요, 나의 잘가르? 당신과 함께 달아날 작정을 했어요, 아버지도 오빠도 뿌리치고서. 우리들 집안은 서로 오랜 원수였지만, 당신과 나는 서로 적이 아니지요, 오오, 잘가르! 잠잠해 다오, 바람이여. 잠깐만이라도 조용해 다오, 물소리여, 잠시 동안만! 그러면 내 목소리가 골짜기에 울리어 찾고 있는 그이 귀에 들리게 되리니, 잘가르, 나예요! 내가 부르고 있어요! 나무와 바위가 있는 이 곳이예요! 잘가르, 사랑하는 이여! 나 여기 있어요! 어찌하여 당신은 망설이고 있나요? 아아, 달이 나왔다. 골짜기는 물에 잠겨 빛나고, 바위는 회색으로 우뚝 솟아 있도다. 그러나 그이 모습 보이지 않는구나. 앞장서 올 개들도 달려오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지, 나는 이 곳에 좀더 머물러야지. 저기 저것은 누구인가? 황야에 누워 있는 저 사람은? 그이인가? 오빠인가? 말하라, 오오, 정다운 이들이여! 대답이 없구나. 어찌 이리 가슴이 설레는가! 아아, 역시 죽어 있구나! 두 사람의 칼은 피에 붉게 물들었도다! 아아, 오빠, 어찌하여 나의 잘가르를 죽였나요? 아아, 자가르, 어찌하여 우리 오빠를 죽였나요? 나는 두 분을 다 같이 좋아했는데! 오빠는 이 언덕 위 수 많은 기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잘난 사람이었고, 잘가르는 싸움터에서 남들이 두려워하는 용사였지. 대답해 주세요! 내 목소리를 들어 주세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아, 그러나 대답이 없다. 영원히 대답이 없으리라! 그들의 가슴은 흙같이 차갑도다! 우뚝 솟은 바위 위에서, 바람 휘몰아치는 산꼭대기에서, 죽은 자의 영혼들이여, 말을 하라! 두렵지 않으니 말을 해 다오! 어디로 쉬러 가 버렸나요, 당신들은? 어느 산 어느 동굴에서 찾아야만 하나요? 바람 속에선 가냘픈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언덕의 폭풍우에 아무런 대답도 실려오지 않는구나. 비탄에 잠겨 나는 주저앉고, 눈물을 흘리며 아침을 기다린다. 무덤을 파는 죽은 자의 친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갈 때까지는 묻어 버리지 마라. 나의 목숨도 꿈처럼 사라지리니, 살아서 보람없는 모숨인 것을, 나는 죽은 두 사람과 함께 여기 살리라. 바위를 치며 흐르는 강물가에서. 그리하여 언덕에 밤이 와서, 사람이 황야를 가로지를 때, 내 영혼을 그 사람에 실어 두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리라. 사냥꾼은 그 소리에 무서워 떨고, 그러다 그 소리를 사랑하리라. 사랑하는 이들을 애도하는 내 목소리, 정답게 정답게 울릴 터이니.   미노나여, 오오, 이것이 그대의 노래였었지. 정답게 볼 붉히는 토르만의 아가씨여, 우리는 콜마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을 헤매었네. 울린이 하프를 들고 나와서 알핀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알핀의 목소리는 다정하였고, 리노의 영혼은 불꽃같이 빛났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무덤 속에 잠들고, 그 목소리 젤마성에 울리는 일 없으리라. 일찍이 이 용사들 살아 있을 때, 어느 날 울린은 사냥에서 돌아와, 그들이 겨루는 노래소리 들었네. 그 노래는 다정하고 그리고 구슬프게, 제일가는 용사 로라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모라르의 영혼은 핑갈의 영혼, 그의 칼은 오스카의 칼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는 싸움터에서 쓰러졌도다. 아버지는 비탄에 잠기고, 누이동생 미노나,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울린이 노래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살그머니 자리를 떴다. 서쪽 하늘에 폭풍우가 닥쳐오는 ㄱ서을 본 달이, 아름다운 얼굴을 재빨리 감추듯이. 비탄의 노래에 맞추어, 나는 울린과 더불어 하프를 켰도다.   리 노 바람은 자고 비는 그쳤다. 구름이 흩어져 맑게 갠 이 한낮. 해는 끊임없이 언덕을 비추고, 강물은 붉게 물든 채 골짜기를 흘러간다. 흐르는 여울물 소리, 내 귀에 정답구나. 그러나 그보다 더 정다운 저 목소리는 뭔가! 오오, 그것은 알핀의 목소리, 죽은 자를 슬퍼하여 그가 노래하고 있도다. 그 머리는 숙어지고, 눈물짓는 그 눈은 붉게 충혈됐구나. 알핀! 세상에 둘도 없는 뛰어난 가인이여! 어찌하여 침묵의 언덕 위에 혼자 았는가? 수풀에 불어닥치는 된바람처럼, 먼 바닷가 물결소리처럼, 어찌하여 그대는 탄식하고 있는가?   알 핀 리노여, 내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 내 목소리는 무덤 속에 잠든 자들을 위한 것. 그대, 지금 모습도 아름답게 이 언덕에 서서, 황야의 아들들 사이에서 돋보이는구나. 그러나 그대 또한 모라르처럼 쓰러지리라. 그리하여 그대 무덤 위에는 슬퍼하는 자가 앉게 되리라. 언덕은 그대를 잊고, 그대 활은 시위도 메우지 않은 채 황야에 뉘어지리라. 오오, 모라르여, 그대 영양처럼 날쌔고 밤하늘의 물같이 맹렬하였다. 그대의 노여움은 폭풍우와 같았고, 싸우는 칼은 황야를 가로지르는 번갯불이요, 그대 목소리는 비온 뒤 골짜기 냇물의 분류, 그리고 먼산의 천둥처럼 울렸다. 수많은 전사가 그대 손에 쓰러지고, 그대 분노의 불길은 적을 불살라 버렸도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돌아왔을 때, 그토록 평온하던 그대 얼굴! 폭풍우 걷힌 뒤의 태양과도 같았고, 소리없는 밤하늘의 달과도 같았다. 그대 가슴 속, 바람 잔 호수처럼 잔잔하였다. 이제 그대 처소는 좁고, 그대 머물 곳음 빛이 없도다! 무덤의 폭은 불과 세 발짝. 일찍이 그대 그토록 거인이었건만! 이끼낀 네 개와 묘석, 그것만이 그대의 유일한 기념물. 잎 떨어진 나무 한 그루, 바람에 나부끼는 무성한 풀들이 사냥꾼에게 용사 모라르의 무덤을 가르쳐 준다. 그대를 위해 울어 줄 어머니도 없고, 사랑의 눈물을 흘려 줄 아가씨도 없다. 그대를 낳은 사람은 돌아가셨고, 모르그란의 딸도 죽었도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 머리는 늙어 백발이요, 그 눈은 눈물로 붉어졌다. 오오, 로라르여! 그는 바로 그대 아버지로다. 싸움터에서의 그대 용명을 아버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대 앞에서 원수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모라르의 공훈도 들었다. 아아, 그러나 그대 몸에 입은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구나! 울지어다, 모라르의 아버지여, 울지어다! 그러나 아들은 그 울음 소리 듣지 못하리라. 죽은 자의 잠은 깊고 베고 누운 흙베개는 얕으니, 부르는 소리에 고개 돌리는 일 없고, 부리짖는 소리에 깨어나는 일도 없으리라. 아아, 무덤 속에 아침이 와서, 잠든 자들에게 고 깨우게 될 날은 그 언제일까? 안녕, 모라르여! 숭고한 인간, 싸움터의 정복자여! 그러나 싸움터는 이제 다시는 그대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대 칼의 번득임에 어두운 숲속이 밝아지는 일도 이젠 없으리라. 그대는 대를 이을 자식 하나 남기지 않았으나, 노래로써 그대 이름이 전해지고, 후세 사람들은 그대를, 싸움터에서 쓰러진 모라르의 이야기를 전해 내려가리라. 용사들은 소리네어 슬퍼하였노라. 그러나 아르민의 목청이 터질 듯한 한숨소리가 한결 드놓았노라. 이는 아들의 죽음을 생각해서였으니, 그의 아들은 일찍이 싸움터에서 전사했노라. 갈말의 이름높은 영주 카르모르도 용사의 곁에 앉아 있었다. 하고 그는 물었다. 비탄에 잠겨 있다고 말하는가? 옳은 말씀, 나는 탄식하고 있다. 이 비탄의 까닭은 하찮은 것이 아닐세. 카르모르여, 그대는 아들도 잃지 않았고 피어나는 딸도 잃지 않았도다. 그대 아들 콜가르, 씩씩한 젊은이는 살아 있고, 그대 달 아니라, 곷다운 아가씨도 살아 있지 않은가. 그대 집안의 가지는 무성하게 벋어 있다. 아아, 카르모르여, 그러나 이 아르민은 아르민집안의 마지막 사람이라네. 아아, 내 딸 다우라! 네 잠자리는 어둡고, 무덤 속에 잠든 네 잠은 깊다. 잠에서 깨어나 너의 그 노래, 마음 흐뭇한 그 목소리를 들려 줄 때는 어느 날인가? 일어나라, 가을바람! 어두운 황야를 휘몰아치라, 숲 속의 냇물! 울부짖으라, 폭풍우, 떡갈나무 가지에! 아아, 달이여, 갈라진 구름 사이를 누비며 방랑하라! 방랑하라 방랑하며 그대 창백한 얼굴을 드러내라! 나로 하여금 상기케 하라, 내 아이들을 죽음이 앗아간 그 무서움 밤을, 씩씩한 아린달이 쓰러지고, 사랑스러운 다우라가 숨을 거둔 그 밤을. 다우라, 내 딸아, 너는 푸라 언덕에 비치는 달처럼 아름답고 내려쌓인 눈처럼 희고, 봄날의 산들바람처럼 향기로왔다. 아린 달, 내 아들아, 네 활은 강했고, 네 창은 날쌔었고, 네 눈은 파도 위의 서릿발과 같았으며, 네 방패는 폭풍우에 날뛰는 불구름과 같았다. 싸움터에서 용명을 떨친 아르마르가 찾아와 마우라에게 사랑을 구하였고, 다우라는 오래 거절하지 않았지. 친구들이 그들에게 건 기대는 아름다왔도다. 오드갈의 아들 에라트는 아르마르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지. 아르마르가 그의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에라트는 뱃사람으로 변장하고 왔다. 물결 위에 뜬 배는 아름다왔다. 그의 고수머리는 이미 희었고, 엄숙한 얼굴은 조용하였다. 다우라는 에라트를 따라가서, 아르마르를 불렀다. 대답하는 것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뿐. 배신자 에라트는 웃으며 육지로 달아났네. 다우라는 목청껏 아버지를 부르고 오빠를 불렀다. 그 목소리는 바다 건너 들려 오고, 내 아들 아린달은 사냥을 하다 말고 언덕은 내려왔다. 손에 활을 들고, 옆구리에 화살차고, 사나운 다섯 마리 검정개가 앞서거니 그를 따랐다. 뻔뻔스런 에라트는 바닷가에 있었고, 아린달은 그를 잡아 떡갈나무에 오묵달싹 못하게 친친 동여매었다. 묶인 에라트의 신음소리는 멀리멀리 바람 타고 울려 퍼졌다. 다우라를 데려오려고 아린달은 거룻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쳐나갔다. 분노한 아르마르, 바닷가로 달려와서 회색빛 깃털화살을 힘차게 내쏘았다. 바람을 가르고 화살은 날아, 네 가슴에 꽂혔구나. 오오, 아린달, 내 아들아! 배신자 에라트 대신 네가 쓰러졌구나. 거룻배는 바위에 다다랐으나, 아른달은 거기서 쓰러져 죽었도다. 네 발 아래 네 오라비의 피는 흘렀다. 어디에다 비기랴, 원통한 너의 탄식, 아아, 내 딸 다우라! 파도는 거룻배를 쳐부수었다. 아르마르는 바다에 뛰어들었다. 다우라를 살려 내어 데려오든지, 아니면 스스로 죽어 버릴 결심으로. 갑자기 언덕에서 돌풍이 불고 파도는 높아졌다. 아르마르는 물결 속에 가라앉은 채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도다. 파도가 철썩이는 바위 위에서 내 딸이 혼자서 탄식하는 목소리, 나는 듣고 있었다. 그 외침소리는 높이 울려 이를 데 없이 슬프게 들려 왔으나, 아비는 그 딸을 구해 낼 수 없었다. 나는 밤을 지새며 바닷가에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밤새껏 그 부르짖음을 들었다. 바람은 울부짖고 비는 바위에 휘몰아쳤다. 아침이 되기 전에 목소리는 잦아들고, 바위 위 풀숲 속에 사라지는 바람처럼, 그녀의 숨결도 사라져 갔다. 슬픔에 잠긴 채 다우라는 죽고, 아르민 혼자만 남게 되었다. 싸움터의 패기를 잃어버렸고, 처녀들이 부러워하던 내 사랑은 사라졌다. 산에서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 북풍에 바닷물이 용솟음칠 때 술렁이는 바닷가게 혼자 앉아서 무서운 그 바위를 바라본다. 기우는 달 그림자 속에 나는 때때로 아이들의 영혼을 본다. 희미한 달빛 속을 그들은 짝을 지어 헤매어 다닌다]   로테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 내려서 그녀의 답답한 가슴에 배출구를 만들어 줌과 동시에 베리테르의 시 낭독을 중단시켰습니다. 베르테르는 원고를 내던지고 로테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로테는 다른 한 손으로몸을 지탱하며,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습니다. 두 사람은 엄청난 감동에 젖어 있었습니다. 숭고한 사람들의 운명 속에서 자신들의 불행을 느끼고, 서로 공감하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의 눈물은 하나로 녹아 내렸습니다. 베르테르의 눈과 입술은 로테의 팔에 닿아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로테는 전율을 느끼며 피하려 했으나, 고통과 동정이 납처럼 무겁게 몸을 짓눌러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그 뒤를 더 읽어 달라고 흐느끼면서 부탁했습니다. 그것은 듣기에도 애처롭고 쓰라린 목소리였습니다. 베르테르는 몸이 떨렸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그는 원고를 주워 들고, 더듬더듬 읽었습니다.   봄바람이여, 어찌하여 나를 깨우는가? 그대 정답게 소곤거린다. 하늘나라 물방울로 만물을 적셔 주려 하노라고. 그러나 내 조락의 때는 가까웠다. 내 잎을 불어 날릴 폭풍우는 가까웠다! 일찍이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던 그 나그네는 들판 구석구석에 눈길을 돌리며 나를 찾으리라. 그러나 그는 나를 찾아 내지 못하리.   이 시가 지닌 힘이 불행한 베르테르를 짓눌렀습니다. 그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채 로테 앞에 꿇어 앉아, 그 두 손을 자기의 눈과 이마에 갖다 대었습니다. 무서운 예감이 로테의 가슴 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로테는 마음이 산란해져서 베르테르의 두 손을 꽉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 대고서 슬픔을 못이기는 듯이 그에게로 몸을 구부렸습니다. 두 삶의 뜨거운 볼이 맞닿았습니다. 세계는 두 사람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베르테르는 두 팔로 그녀를 그러잡아 가슴에 꽉 껴안고,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뜨거운 키스로 뒤덮었습니다. [베르테르 씨!]하고 로테는 몸을 돌리며 숨가쁜 소리로 외쳤습니다. [베르테르 씨!]그녀는 힘없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자기 가슴에서 밀어 내었습니다. [베르테르 씨!]하고 그녀는 그지없이 숭고한 감정이 어린 확교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는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팔에서 풀어 놓으며 넋나간 듯이 그 앞에 쓰러져 엎드렸습니다. 그녀는 사랑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에 몸을 떨며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에요, 베르테르 씨.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 그러고서 그녀는 이 불행한 친구에게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며, 얼른 옆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습니다. 베르테르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내밀었으나, 그녀를 만류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 마룻바닥에 누워 반 시간 이상이나 그 자세로 그냥 있었는데, 인기척이 나는 바람에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하녀가 식사준비를 하려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베르테르는 방 안을 오락가락하다가, 이윽고 다시 혼자만 있게 되자 옆방 문 앞으로 다가가서 나직한 소리로 불렀습니다. [로테! 로테! 딱 한 마디만 작별인사를 하게 해 줘요] 로테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베르테르는 기다렸습니다. 다시청을 하고는 또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문에서 떨어져서 외쳤습니다. [잘 있어요, 로테! 영원히 잘 있어요!] 베르테르는 걸어서 성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문지기들은 그와 안면이 있는 터라, 말없이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11시경에야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인은 베르테르가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돌아온 것을 알아챘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벗겨 주었습니다. 옷은 함빡 젖어 있었습니다. 모자는 나중에 어느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곳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바위의 사면이었습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어두운 밤에 어떻게 굴러 떨어지지도 않고 거기까지 올라갔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베르테르는 침대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베르테르의 부름에 따라 하인이 코피를 가지고 방에 들어갔을 때, 그는 뭔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로테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눈을 뜨는 것도 마지막, 드디어 마지막 눈을 나는 떴습니다. 이 눈은 아아, 이제 다시는 태양을 보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흐릿하게 안개가 끼어서 태양이 가려져 있습니다. 자연이여, 슬퍼하라! 네 아들, 네 친구, 네 사랑하는 자가 그 종말로 다가가고 있는 거니까. 로테! 이것이 최후의 아침이다, 하고 자신에게 타이르는 것은 정말 기묘한 기분입니다. 어렴풋한 꿈결 같다고나 할까요? 로테!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조금도 힘을 상실하지 않고 꿋꿋이 서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내일이면 쭉 뻗어서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것입니다. 죽음!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몇 번이나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존재의 처음과 마지막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만큼 한정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나는 내 것이요, 또한 당신의 것, 당신의 것입니다. 아아, 사랑하는 이여! 그것이 한 순간이 지나면 헤어지고 떨어져 나가서......아마도 영원히?......아니, 로테, 아닙니다. 어떻게 내가 죽어 없어져 버린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죽어 없어져 버린다......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 가슴 속에 아무런 실감도 전해 주지 못하며, 공허하게 울리는 말에 불과합니다...로테, 죽어서 차가운 땅 속에 묻힙니다. 답답하고 어두운 곳에! 철없던 어린 시절, 나에게는 세계만큼 소중한 여자친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영구를 따라 묘지로 가서 관이 무덤 속에 내려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관 밑에서 밧줄을 빼냈습니다. 이윽고 최초의 흙이 한 삽 관 위에 끼얹어졌습니다. 흙은 관 뚜껑에 부딪히며 둔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 소리는 차츰 작아져 가더니, 마침내 관은 완전히 흙에 덮였습니다. 나는 그 무덤 곁에 쓰러졌습니다. 마음 속 깊이 충격을 받고 갈기갈기 찢어진 심정으로. 그러나 나는 그 때 나 자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죽음! 무덤! 이 말들의 뜨슬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아, 어제의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가 내 목숨의 마지막 순간이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아아, 나의 천사! 처음으로, 처음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마음 속 깊이 환희가 불타올랐습니다. 로테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로테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지금도 내 입술 위에서 타고 있습니다, 당신의 입술에서 번져 나온 거룩한 불꽃이. 새롭고 뜨거운 환희가 내 가슴 속에 깃들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아아, 당신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진심어린 눈길에서, 최초의 악수에서 나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떨어져 있을 때, 알베르트가 당신 곁에 있는 것을 보거나 하면, 또다시 열병과도 같은 의심이 일어나서 의기소침해지곤 했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언젠가의 그 고약한 모음에서 당신은 나에게 말을 걸지도 못하고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꽃을 보내주었던 그 일을. 아아, 그 꽃을 앞에 두고 나는 한밤중까지 꿇어앉아 있었습니다. 그 꽃이 나에게 사랑을 입증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아! 마음 속에 새겨진 그 확신도 흐려져 갔습니다. 충만한 천상의 힘에 의해, 또 눈에 보이는 성스러운 증표에 의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알고 난 뒤에도, 이윽고 그것이 신자의 마음 속에서 차차 희미해져 가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당신의 입술에서 맛보고 지금 내 가슴으로 느끼고 있는 이 불타는 생명은 영겁토록 소멸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로테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이 팔은 로테를 포옹하였다, 이 입술은 로테의 입술 위에서 떨었다, 이 입은 로테의 입데 닿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로테는 내 것이다! 그렇습니다, 로테. 당신은 내 것입니다! 영원히. 알베르트는 당신의 남편,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남편! 그것은 이승에서만의 일이쟎습닊? 이승에서는 죄가 되겠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남편의 품에서 당신을 빼앗아 내 품에 안으려 하는 것은. 죄? 좋아요,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에게 벌을 내립니다. 나는 이 죄의 성스럽기까지 한 기쁨을 마음껏 맛보았습니다. 생명의 향기와 힘을 들이마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당신은 내 것이 되었습니다! 아아, 로테! 나는 먼저 갑니다. 나의 아버지요, 당신의 아버지인 그 분에게로 가서 하소연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당신이 올 때까지 나를 위로해 주시겠지요. 당신이 오면 나는 기쁘게 맞이하여, 영겁의 아버지가 계시는 앞에서 당신을 그러안고, 영원한 포옹을 계속하며 함께 있을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영을 그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덤 바로 곁에 와서 더 한층 또렷하게 느낍니다. 우리는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시 만납니다. 당신 어머니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 어머니를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아, 그리고 나는 당신 어머니께 내 마음 속을 모조리 다 털어 놓을 것입니다! 당신을 꼭 닮은 그 분께......   11시경에 베르테르는 하인에게 하고 물었습니다. 하고 하인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베르테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개봉된 쪽지를 하인에게 주었습니다. 로테는 그 전날 밤 거의 자믕ㄹ 자지 못했습니다. 전부터 두려워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뜻밖에, 전혀 걱정조차 하지 않았던 그런 형태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맑게 흐르던 순결한 피가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끓어오르고 갖가지 생각이 아름다운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녀가 가슴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은 베르테르와의 포옹에서 일어난 불길이었을까요, 그의 무례에 대한 노여움이었을까요, 아니면 지금의 자신을 전의 자신과 비교하여 느끼는 불쾌감이었을까요? 전에는 그토록 아무 거리낌없이 구김없는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는데...... 남편이 돌아오면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어제 그 일을 어떤식으로 고백해야 할까? 그대로 고백해도 켕길 것은 없지만, 그러면서도 어쩐지 고백하기가 망설여지는 그 순간의 일을, 벌써 오랫동안 두 사람은 베르테르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 오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판에 이쪽에서 먼저 침묵을 깨고, 하필이면 이렇게 거북스러운 계제에 그가 예상조차 하지 않았을 사건을 고백해야만 옳을까? 베르테르가 왔었다는 말만 들어도 남편은 언짢아할 텐데, 어떻게 그런 뜻밖의 상황을 입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또 남편이 공평한 눈으로 아무런 편견없이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줄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을 속일수도 없는 일 아닌가. 자기는 언제나 투명한 수정알처럼 숨김없는 자세로 남편을 대해 오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그녀를 괴롭히고 곤혹에 빠뜨렸습니다. 베르테르는 이미 그녀로서는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잃는다는 건 가슴아픈 일이었지만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잃으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그였지만. 뚜렷이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부 사ㅇ이에 뿌리를 내린 갈등은 지금 로테의 마음을 무척이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총명하고 선의적인 두 사람이 남모르는 마음의 엇갈림이 원인이 되어 서로 침묵하기 시작하고, 서로서로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부당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사태는 꾀고 악화되어 마침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중대한 순간에 그 매듭을 푸는 일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두 사람이 원래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관용을 북돋우고 속마음을 서로 열어 보였더라면, 우리의 벗은 어쩌면 구원의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특별한 사연ㄴ이 곁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편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베르테르는 이세상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알베르트는 몇 번이나 그에 반론을 제기하였고, 로테와의 사이에도 때때로 그것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알베르트는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철두철미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평소의 그에게서는 불 수 없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자살 계획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남편 말은, 한편으로는 로테를 안심시키고, 그녀가 마음 속으로 끔찍한 광경을 상상할 때의 위안이 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태도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걱정을 남편에게 말하기를 꺼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알베르트가 돌아왔습니다. 로테는 황망하게 그를 맞이했습니다. 남편은 밝은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완전히 처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웃마을의 관리라는 사람은 완고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길이 나빴던 것도 그를 불쾌하게 했습니다. 별일 없었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로테는 얼른, 간밤에 베르테르가 왔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알베르트는 우편물이 온 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편지 한 통과 소포가 몇 개 와서 방에 놓아 두었다는 말을 듣고 알베르트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로테는 혼자 남았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이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에 새로운 감명을 주었습니다. 남편의 관대함과 사랑, 그리고 어쩐지 남편을 뒤따라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평소에 곧잘 그랬듯이 일거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은 바삐 소포를 끄르기도 하고, 편지를 읽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사연도 섞여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로테가 두세 마디 물어 보니까, 남편은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 책상에서 뭔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1시간 정도 함께 있었는데, 로테의 마음은 어두워져 갔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찜찜하게 걸려 있는 일은 설령 남편의 기분이 아주 좋을 때라 하더라도 고백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것을 숨기고 눈물을 삼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한층 괴로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베르테르의 심부름을 온 하인이 나타났을 때 로테의 당혹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하인은 알베르트에게 쪽지를 전했습니다. 알베르트는 침착한 태도로 아내를 보고 말했습니다. [권총을 빌려 드려요] 그러고는 하인을 향해 [여행 잘 다녀오시기를 바란다고 전하게]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벼락처럼 로테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는데,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천천히 벽 쪽으로 가서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내려 먼지를 털고, 그러고는 망설였습니다. 만일 알베르트가 의아스런 듯한 눈매로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랫동안 머뭇거렸을 것입니다. 로테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그 불길한 무기를 하인에게 내주었습니다. 하인이 돌아가자 로테는 일거리를 챙겨 가지고 형언할 수 없는 불안한 마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사태를 그녀 자신에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발 아래 엎으려 어젯밤에 일어났던 일과 지금 자신이 예감하고 있는 것을 다 고백해 버릴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 봤자 그 결과가 바람직하게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을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베르테르를 찾아가도록 한다는 것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식사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때 마침 로테의 허물없는 친구가 물어 볼 것이 있다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곧 돌아가려 했으나 그대로 눌러앉아 같이 식탁에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로테는 애써 이리저리 화제를 돌리면서 마음의 불안을 잊으려고 했습니다. 하인이 권총을 가지고 돌아와 로테가 내주더라는 말을 하자, 베르테르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그 권총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하인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가 식사를 하라고 이른 다음 자기는 책상 앞에 앉아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권총은 당신의 손을 거쳐서 내게로 왔습니다. 먼지를 털어 주셨다구요? 나는 천 번도 더 권총에 키스를 했습니다. 당신의 손이 닿았던 것이니까요. 하늘의 정령인 당신이 나의 결심을 격려해 줍니다! 당신의 손에서 죽음을 받고 싶었는데, 아아! 지금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인에게 고치꼬치 물었답니다. 권총을 내주면서 당신은 떨고 있었다구요. 작별인사는 하지 않으셨다는데, 유감스럽습니다! 나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까? 나를 영원히 당신과 결합시킨 그 순간 때문에 그러셨나요? 로테, 설령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순간의 감명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이토록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을 당신이 미워할 리 없다는 것을.   식사를 마친 뒤 베르테르는 하인을 불러서 짐을 전부 구리라고 이르고 많은 서류를 찢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밖으로 나가서 자질구레한 미불금들을 완전히 청산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교외의 M백작 정원과 그 부근을 서성거리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돌아와 다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빌헬름, 마지막 하직삼아 들과 수풀과 하늘을 보고 왔네. 그럼 자네도 잘 있게나!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빌헬름,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게. 당신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내 짐은 전부 정리해 놓았네. 그럼 잘 있게나! 또 만나세, 그때는 좀더 기쁜 얼굴로 만나게 되 걸세.   알베르트 씨, 당신에게는 몹쓸짓을 했지만 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당신들 두 분 사이에 의혹의 씨를 뿌렸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결말을 지으려 합니다. 내가 죽음으로써 부디 당신들 두 분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알베르트 씨, 천사와 같은 그 분을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이 당신에게 내리기를! 그는 밤에도 내내 원고들을 뒤적거리며 그 대부분을 찢어서 난로 속에 던져넣고 몇 뭉치의 원고는 포장을 해서 빌헬름 앞으로 겉봉을 썼습니다. 그것은 짤박한 수필과 단편적인 감상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몇 편은 나중에 편자도 읽었습니다. 10시에 그는 난로에 땔감을 더 넣게 하고, 포도주를 한 병 가져오게 한 다음, 하인더러 그만 자라고 일렀습니다. 하인의 방은 문지기의 방과 마찬가지고 훨씬 안쪽에 있었습니다. 하인은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잡자리에 들었습니다. 6시 전에 마차가 집 앞에 올 것이라는 말을 베르테르에게 들었던 것입니다.   11시 지나서 주위는 적막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도 평온합니다. 하느님, 이 회후의 순간에 이런 열정과 힘을 저에게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리운 이여, 나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봅니다. 바람에 몰려가는 구름 사이에, 아직도 영원한 하늘에 빛나는 별이 몇 개 보입니다! 그렇지, 그대들은 결코 원망하는 일이 없으리라. 영원한 존재자가 그대들을 가슴에 안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하리라. 별들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좋아한 큰곰자리, 그 성좌의 자루 부분의 별들이 보입니다. 밤에 당신과 헤어져서 문을 나서면, 이 성좌가 언제나 맞은편 하늘에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그지없이 황홀한 심정으로 이 별들을 바라보곤 했었습니다. 두 손을 뻗어 별을 가르키며, 그때 그때의 내 행복의 상징으로 삼고, 거룩한 증인으로 삼았었죠. 그리고 지금도...... 아아, 로테, 어느 것 하나 당신을 생각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을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나는 마치 어린애처럼, 성스러운 당신의 손이 닿았던 것이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닥치는 대로 수집해 왔으니까요. 그리운 당신의 실루엣! 이것을 유물로서 당신에게 드립니다. 로테, 부디 소중히 간직해 주십시오. 몇천 번이나 나는 거기에 키스를 했습니다. 몇천 번이나 나는 거기에 인사를 했습니다. 밖에 나갈 때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나는 당신 아버지께, 나의 유해를 거두어 주십사고 편지로 부탁을 드렸습니다. 묘지의 안쪽, 밭 맞은편 구석에 보리수가 두 그루 있습니다. 나는 그 곳에 묻히고 싶습니다. 당신 아버지께서는 그러실 수가 있고, 또 이 친구를 위해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당신도 그렇게 부탁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경건한 그리스도 교인들은 이 불행한 사나이와 한 장소에 묻히기를 싫어할 것이고, 나도 억지로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길 옆이나 호젓한 골짜기의 어느 구석에 묻어 주셔도 좋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이 성호를 그으며 그 무덤 앞을 지나가고, 사마리아 사람이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말씀입니다. 자, 로테! 나는 두려움 없이 차갑고 으스스한 술잔을 손에들고 죽음을 들이켭니다. 당신이 내게 준 술잔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내 생애의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토록 냉정하게, 이토록 두려움없이 죽음의 철문을 두드릴 수가 있다니! 로제! 나는 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당신을 위해 이 몸을 바치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생활에 평화와 환희를 되찾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씩씩하게, 기꺼이 죽어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아,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그 죽음으로써 친구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생명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극소수의 숭고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입고 있는 옷 이대로 묻히고 싶습니다. 로테, 당신의 손이 닿아서 신성화된 옷입니다. 이것은 당신 아버지께도 부탁을 드렸습니다. 나의 영혼은 관 위를 떠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내 호주머니를 뒤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 분홍색리본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가슴에 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요. 아아, 아이들에게 키스를ㄹ 많이많이 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불행한 친구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귀여운 아이들! 언제나 내 둘레에 모여들곤 했었지요. 아아, 나는 어쩌면 이토록 당신과 밀착되어 있었을까요! 최초의 그 순간부터 나는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 리본도 함께 묻어 주십시오. 내 생일에 당신이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런 물건들을 나는 얼마나 탐냈는지 모릅니다! 아아, 그런 일들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부디 진정하십시오! 탄환은 이미 재어 놓았습니다. 시계가 12시를 칩니다. 그럼 로테, 잘 있어요! 잘 있어요!   이웃사람 하나가 화약의 섬광을 보고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2분, 곧 조용해졌으므로 그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새벽 6시에 하인이 등불을 들고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주인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권총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소스라쳐 놀란 하인은 주인을 안아 일으키며 소리쳤으나, 대답은 없고 목구멍에서 골골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하인은 의사에게, 그리고 알베르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로테는 초인종 소리에 온몸이 떨렸습니다. 남편을 불러 깨우고, 두 사람 다 일어났습니다. 하인은 소리내어 울면서 사건의 내용을 전했습니다. 로테는 실신하여 알베르트 앞에 쓰러졌습니다. 의사가 왔으나 이미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맥박은 뛰고 있었지만 사지는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오른쪽 눈위에서 머리를 쏘았는데 뇌수가 터져 나와 있었습니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팔의 정맥을 째자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아직도 숨은 붙어 있었습니다. 의자의 팔걸이에도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베르테르는 책상 앞에 앉은 채 방아쇠를 당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마룻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의자 주위에서 몸부림쳤던 모양입니다. 발견되었을 때는, 힘이 다하여 창문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 있었습니다. 장화를 신고 있었으며, 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 차림이었습니다. 그 집과 이웃, 그리고 온 시내가 떨들석해졌습니다. 알베르트가 왔습니다. 베르테르는 침대에 뉘어져 있었는데,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벌써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팔다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폐에서는 아직 거친 숨소리가 났습니다.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포도주는 한 잔 정도밖에 마시지 않은 모양으로 병째 놓여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레싱의 대표적 비극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알베르트의 경악과 로테의 비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법무관이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임종의 베르테르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법무관의 아이들도 얼마 뒤에 걸어서 왔는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얼굴에 나타내며 침대 주위에 꿇어앉아 베르테르의 손과 입에 키스를 했습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크 아이는 베르레트가 숨을 거둔 뒤 사람들이 억지로 떼어낼 때까지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낮 12시에 베르테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법무관이 그 곳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로 조치를 취했으므로 소동은 가라앉았습니다. 밤 11시경, 베르테르는 법무관과 그의 아이들은 영구 뒤를 따라갔습니다. 알베르트는 장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로테의 생명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상두꾼들이 영구를 메고 갔습니다. 성직자는 한 사람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100    송시월 시모음 2 댓글:  조회:2082  추천:0  2020-05-19
송시월 시모음 2   출처 http://blog.daum.net/siiwoell   비명      창 밖은 지금 회오리가 일고 은행나무    수천의 노랑나비를 허공에다 풀어놓고 있다   날개를 걸고 팔랑팔랑 흔드는 놈, 등 떠민 놈, 납작 껴안고   공중회전을 하다가 함께 떨어지는 놈, 패거리로    껄렁껄렁 몰려다니며 밟고 밟힌다     유리창 밖의 낙엽 하나   두 손으로 감싸든 잔에 날아드는 든다, 나비    비스듬히 기우는 날개   치켜 뜬 좁쌀 만한 눈의   들릴 듯 말 듯 파르르 떠는 나비,   (이모, 나 "살고 싶어"   원자력병원에 새로운 암치료기가 들어 왔대)   창 밖은 우수수 "살고 싶어"가 쏟아진다     청계천에 비명 노오란 조각, 조각조각 떠내려가고 있다   광인      길가 느티나무 밑    녹슨 철벤치에 앉은 까치집머리 중년의 한 남자    그 옆 한 쪽 귀떨어진 채 졸고 있는 쇼핑백 하나    그 앞엔 배가 홀쪽 누워 있는 깡통 하나     남자가 툭툭 깡통을 찬다    갑자기 회오리바람 인다    까치집머리 찌그러져 엉키고     "명퇴 세상 깡똥 세상"    달리는 버스를 향해 빌딩을 향해 삿대질하고 소리치는 남자    밀고 밀리는 나뭇잎 틈새    빌딩 한 쪽이 사내 쪽으로 조금씩 기운다   그 빌딩 등에 입 쩍 벌리고 있는 초이레 칼날 달      사내의 머리 위로 흐르는 고압전선이 부르릉 떤다     중복 날       -언어의 감옥 8               잠자리들 공중으로 치솟아 수십 겹의 포물선     얼크러졌다 풀렸다 하는 중복 날       웨이브머리에 잠자리날개핀을 꽂은     키 큰 여자     수박을 안고 줄장미 몇 송이 피어 있는     담장길을 돌아      서른 살 통굽 소리 똑똑 찍고 간다     그녀 왼쪽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줄무늬 푸른 대문의 담장을     장미 넝쿨이 넘쳐 내리고 있다       꼬리가 반원으로 휜 담장 위의 잠자리     하트?     한 낮, 암컷의 머리에다 꽂고 비행을 한다     호흡이 잘 맞아 싱싱 흐른다     씩 웃으며 대문을 들어서는 우체부 아저씨      싱싱하게 햇살 몇 송이 핀다   아차산           - 언어의 감옥 7                     휙 휙 스치는 언어의 푸로펠라          길목마다 터지는 4월의 햇볕탄          와와 치솟는 색색의 문장          여기저기 나뒹구는 불발 접속어 야생화           이 꽃 저 꽃 음소를 빠는 윙윙 소리              백운대를 향해 45°바윗길 오르는 리듬들          아차, 미끄러진다    눈을 쓸다가            흰옷, 눈이 내린다     북풍에 조각조각 떨어진다     명주두루마기를 입은 아버지가     회색허공을 가만가만 내딛다가. 두 손으로 거머쥐다가.     무명저고리 어머니가     아버지와 부딪힐 듯 부딪힐 듯     아버지 위로 어머니가 쌓이고 어머니 위로 아버지가 쌓인다     내 비질에     은발을 날리며 어머니가 쓸린다     흰 수염의 아버지가 쓸린다     눈이 그치고     겹겹 쌓인 눈의 고요 속에다 가만히 귀기울이면     어머니의 바느질 시침 소리, 아버지의 붓끝 스치는 소리,     "이제 그만 잡시다" 호롱불 부는 소리     몸이 시린 나뭇가지, 얼굴과 얼굴들 모두 지워지고     높고 낮음, 길고 짧은 밋밋한 선들 사이     나는 티끌 만한 검은 점으로 우두커니 서 있다   호랑나비           4월의 아차산 생태공원 입구,  골목에서 벚꽃이 뻥튀기처럼 뻥 핀다. 벚꽃  사이 햇살 속에서 튀어나온 호랑나비, 묻힐 말 듯 꽃 속을 난다. 내  동공 안  으로 푸른 하늘의 배경을 확 당기자, 꽃술을 밀며 들어가는 나비! 내 눈썹에  와  간질간질 닿는다. 나비가  떤다. 내가  떤다. 떨리는 두 팔이 가벼워지고  나도  나폴거려  본다. 이때, 일방통행길에  포크레인이 지나가고  생태공원  호랑나비의 환영, 드르르르 뭉개진다.   입술에 걸린다          비 100mm 쏟아낸 청계천 먼 하늘을    빨대로 쭈―욱 빨자    물 젖은 별이 입술에 걸린다    은하수를 휘저어 다니던 피라미 떼가 와서 걸린다      주말 새벽 2시     가물가물 선잠 휘저어오르는  피라미떼들     가로등 불빛 엷게 들어서는 유리창을 때린다     아침 장교동과 수하동 사이를  휘젓고 다닌다      유리창 때리는 철거반의 쇠망치 소리     냉장고 에어컨 컴퓨터 골프채 인쇄기기    붉은 딱지를 붙이고 질질 끌려나온다    보관소를 향해 100m 쯤 늘어서 가는 이사짐차들    우리 집 옆으로 펜스가 쳐진다         청계천의 팔뚝만한  잉어 한 마리    저음의 으르렁 소리를 내며 재빨리 꼬리 감춘다    파아란 통유리문 때리고 나서      구름 사이로 미끄러지는 빗방울들      하늘의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햇살    내 속눈썹 가닥가닥에 걸려 파들거리는   제2 한강교       1      제2 한강교를 여자가 걸어간다    강물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한강철교가, 달리는 차들이 흐물흐물 안개가 된다    여자가 안개를 딛고 사박사박 걸어간다    여자의 오른쪽 다리가 지워진다    왼쪽 다리가 지워진다    두 팔로 허우적 허우적 몸통을 끌고 간다    두 팔이 한꺼번에 지워진다    가슴으로 안개를 밀고 간다    여자가 완전히 지워진다    12월 32일의 안개가 여자 속을 걸어간다       2    붉은 런닝에 맨발의 가로수들    아침해를 이고 차선을 달린다    노랑머리 날리며 은행나무가 달린다    붉은 머리칼 떨구며 단풍나무가 달려온다    어깨 스치며 토막울음 우우우......    이른 출근길의 자동차들 꽁무니에    부싯돌이 쉴새없이 그싯고    더러는 꽁무니에 아침노을을 매달고    빨간 스카프를 두른 한강교    노을노을 앰블런스가 지나가고    토막울음소리 우우우......   여승의 합장 보살보살    이사 온 첫날 아침  남으로 난 원형의 통유리에 붉은 장미가 핀다  맞은편 용천사 기와지붕이 미끈한 버선코를 세운다  장마비 앞산에 초록초록 내리고  4층의 나를 올려다보는 여승의 합장 보살보살 내리고  (이번 토요일 오전 10시 올림픽 경기장 평화공원 호수 가에서  시화전)  핸드폰에 문자멧세지 뜬다                    산까치 한 마리 날아간다, 밖으로 열린 창틀  쌍무지개 걸어 놓은 산등성이   백지              맞은편 숲이 나를 받아쓰고 있다 4층 베란다 하늘색 유리탁자 앞에 앉아 데리다 192페이지 “기원에 대한 꿈: ‘문자의 교훈’을 펼쳐 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끄떡거리다 하는 내 얼굴을 정면의 아카시아나무가 잎을 팔락거리며 받아쓰고 있다 허공에다 상형의 소문자로 쓰고 있다 띄어쓰기나 행갈이도 없이 빽빽하게 쓰고 몇 번을 덮어씌우고 하다가 계란형의 중앙에다 눈. 코, 입, 귀 구멍을 내고 구멍만큼의 하늘을 넣는다 그 하늘이 뭐야뭐야 새울음을 운다 내가 기지개를 켜자 우우우 일어서며 옆의 물푸레나무가 대문자로 내 팔을 받아쓰고 키를 받아쓴다 내가 물푸레나무만큼 키가 커지고 몸통이 커지며 바람에 두 팔이 흔들리자 문자들이 뒤집히며 일그러져 날려간 백지             내가 나를 읽을 수가 없다       딸아이의 집.1       그녀 생일날 딸아이가 내 배꼽의 벨을 누르고 들어간다. 앞이 환해지며 딱딱한 허공이 말랑말랑 따뜻해진다. 앞으로 옆으로 그 옆으로 뒤로 그 뒤로 촘촘히 꽂혀 있는 책들, 앞쪽 밑에서 다섯째 줄 중간쯤에 내 동인지 디지털리즘 3호 표지의 D자가 나를 향해 바짝 귀를 세운다 오랜만에 빨간 귓부리를 만지니 따뜻하다. 허공이 탁자 위에다 두툼한 책을 펼쳐 놓고 있는 우측으로 옥매트가 깔려 있고 가지런히 걸려있는 옷가지들 사이 낯익은 밤색벨트가 원피스의 허리를 팽팽하게 조이고 있는 그 앞 가스레인지 위에선 압력밥솥이 밭은 숨을 내뿜으며 딸랑딸랑 나를 부르고 있다. 소파에 앉아 리모콘의 파워키를 누르자 딸아이가 튀어나오고 2007년 1월 1일 0시 종을 울리며 보신각이 뜬다.   딸아이의 집 3         ―윈드서핑   한 시인이 붉은 바다를 입고 지하도를 걸어간다 등짝의 물고기들 아가미를 벌린 채 물살을 차고 튀어 오른다 바다가 뛰어간다 그 뒤로 딸아이가 뛰어간다  붉은 파도가 밀려가고 지하도를 들었다 놓았다 상점의 배들이 기우뚱 덜덜덜 진동이 인다 천정으로 튀어 올라 가로등 눈을 켠 물고기들 환히 비추는 붉은 바다   윈드서핑 저녁 8시 15분의 시침과 분침 사이로 미끄러져나간다   화분에서 자라는 새                               오월 창가 화분에 해가 뜬다      내리쬐는 C32˚의 초록 햇살 쪼아 먹고     찰랑이는 머릿결 초록바람 쪼아 먹고     간지럽게 파고드는 겨드랑이의 초록그늘 쪼아 먹고     느티나무의 초록 지저귐 왼 종일 쪼아 먹고     화분에 달이 뜬다     동맥 정맥 청계천 꿈틀꿈틀 흐르는 사이로     실핏줄 달의 골목 몇 바퀴 휘감아 도는 사이로                 버들치 한 마리, 흐르는 물살에 뒷걸음질 치다가     거슬러 오르다가 허기진 저물 녘     굴러오는 어둠 몇 알 깨트려먹고     별꽃을 먹고 달꽃을 먹고     물밑 모래알에 비스듬히 엎드려 잠이 든다         화분에 발이 빠진 채 깃털 하나 둘     빠져 날리는 새 한 마리   쥐의 공화국   우리집 천정은 쥐의 공화국, 대선 박두 인 듯 마른 쥐오즘자국이 선거벽보처럼 어지럽게 나붙어 있다 발자국 소리 쿵당거리며 새 시대 지도자의 첫째 조건인 말 바꾸기의 빠른 순발력테스트를 마라톤 경기로 대신 한다는 안내 방송이 벽지를 찢으며 내 귓속으로 오물처럼 흘러든다   마라톤이 시작된다. 42,195Km의 지정된 난코스를 돌아 황영조의 지구력과 살라자르의 스피드로 선두 골인하는 기호 3번, 1번, 4번...... 이때 기호 2번이 검은 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본부석으로 뛰어나온다. ‘여러분 희디흰 메가톤급 비리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호 3번이 어제의 밝음을 틈타 표 당 1톤씩의 어둠으로 수 천 표를 매수했으며 그 표들이 이 자리에 세몰이로 동원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공화국을 탈색시킬 치욕적인 표백제입니다 지도자의 바탕은 순진 무구 검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저의 얼굴을, 저의 말을, 새카만 비로도의 이 진실 위에 현명한 한 표를 얹어 주십시오 금세 유세장은 투석전이 벌어지고 창이란 창은 모조리 깨져 어둠이 봇물처럼 빠져나간다.  저마다  검은 공화국의 유리창을 갈아 끼울 지도자는 반드시 “나”이어야 한다고 디데이 전날, 쥐들이 사방에다 쥐덫을 놓는다.     경칩날       아침 수도꼭지를 열자 햇살이 콸콸콸 쏟아진다 진달래화분의 팥알만한 꽃망울들 아침 노을 글썽글썽 유두가 가렵다 바람이 스치자 초경의 숨결 파르르 쏟아진다   지하도에서 밀려나와 리라초등학교 쪽으로 피어가는 노오란 책가방을 멘 아이들 명동 역 3번 출구 노릇노릇... 햇살이 쓸고 간다   남산 입구 박새가 톡톡 내가 움찔움찔 두어 발짝 물러서면 등 뒤 수령 460년 은행나무 잎눈들 검은 벽을 뚫고 개굴개굴 기어나온다   웰빙 상상을 사다   쑥고개 시장 노릇노릇 진도 봄동 한 근 1000원 뿌리 통통 살 오른 강원도 산 노지냉이 한 근 3000원 (금요포럼, 한국관광공사 3층 지리실) William James의 재생적 상상의 티각태각 토론 500g 유리창에 비치는 생산적 상상의 햇살 500g 각각 5000원      주방에다 장바구니를 풀어 놓자 봄동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진도아리랑 한 가락이 아라리 쓰라리 신림동 고개를 넘어오고 또 노지냉이에서 정선아리랑 한 가락이 내 시에 리듬을  깐다 금요포럼 “웰빙 상상을 사다”내시 행간 행간에에다 이월의 유채꽃 무더기무더기 피워 놓고 노오란 햇살이 렌즈를 들이민다 자! 꼰디발로 키를 맞추고 원산지 표시를 보이세요 티각, 리듬을 약간 출렁거리세요 태각, 앞자크 반쯤만 내려 보세요 티각NG, 화난 얼굴이네요 여기서는 홀랑 벗어도 흉보지 않습니다 미소를 지으세요 태각,  티각태각 상상을  빠져나온다 된장국에다 햇살을 풀어 밥말아 먹는다   패션쇼    쥐색 버버리에 삐뚜름히 이마를 가린 베이지색 베레모  정오의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거울 속 시계 속으로 들어가 다리를 약간 벌려고 몸을  살짝 틀어  포즈를 잡는다  반쯤 열린 창으로 들어와 사푼 다가서는  신세대 패션 붉은 꽃무늬햇살  옆구리에다 두 손을 얹고 둘이서  재깍재깍 돌면서 좌로 우로 포즈를 바꾼다  이때, 공지머리에 투명 개량한복의 앙드레김바람 혀꼬부라진 소리로 중얼중얼 끼어든다 세이서 2열 종으로 1열 횡으로 옷깃 스치며 걷다가 휙 돌아서서 나를 중심으로 나란히 선다 모자를 벗는 그들이 닮은골이다 순간, 내 오른발이 미끄러지고 뚝 떨어져 깨지는 안경알, 앞단추를 풀어헤치고 무료하게 걸려 있다 거울 속에 휴일 몇, 옷을 벗고 사라진다 유리창을 지나는 해가 입술을 바짝대고 키스마크를 찍는다  
99    송시월 시모음 1 댓글:  조회:2152  추천:0  2020-05-19
송시월 시모음 1   출처 http://blog.daum.net/siiwoell     애기풀새                     옥상 구석  빈 분에 돋는 풀을 뽑다가  멈칫  손끝에 찌르르~ 전해오는 떨림,       어! 이건 초록 새다.  새 잎의 날개 활짝 펴  종종종 발레를 하는 풀,  내 손등       을 간지럼 태우는 풀, 흙에서 막 깨어 난 풀에게"애기풀새야"하고 부르면 이       슬눈으로 나와 눈맞춤을 한다.  어느새  내 눈이 투명해져 보이는 것마다 참       맑 다. 이때 포르르 날아 내리는 한 무리 참새 떼, 무어라무어라 재재거림에       내 입술이 간지럽다.                *나의 시 쓰기/‘사물과 내가 하나되어’-송시월           탈관념의 창작시론인“꽃의 문답법”을 읽었다. 그 이후, 나의 관심은    생명 탐구쪽으로 기울어졌고, 탈관념의 실험을 하는 시류의 아방가르드    대열에 끼어들게  되었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  이면에는 늘 두려움과    회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선/악을 구분짓는 원죄론(이원론)에 있던 내    가, 사물의 본질은 하나라는 동양적 인식(일원론)에 이르기 까지는 무려    5년 이란 시간이 걸렸다. 암벽 깨기보다 더 힘든 작업이었다. 이제야 어    떤 사물의 상처를 보면 내 몸이 떨리고 아파옴을 느낀다.        4년 전 시류 동인은  아방가르디스트  오남구 시인의 실험에 동참하여     "디지털리즘"  선언한다. 동인의 한 사람인  나는 이후  아날로그시대의    수사학적  말하가(telling)가 아닌 디지털시대의 '보여주기(Showing)'의    시  쓰기를  실험한다. 어떤 사물과의 ‘눈맞춤(靜觀)’을 하고, 직관한    생명의  절편(Unit)을 카메라로  찍듯(접사하거나 염사하여) 언어로 묘사    하는  기법이다. 이때 사물들이 저희끼리 동화되고 때로는 트러블을 일으    키기도  하면서 공명하여  울림을  일으키어  내가  할말을 대신해 준다.     (다만 시는 언어를 통해 태어나는 특성  때문에  내가 쓰는 언어는 지시    적 기능만으로 제한된다) 이것이 내가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 디지털적    시 쓰기인, 보여주기이며  생명탐구의 한방법인데, 나의 확장된  인식이    디지털 카메라의  기법을 통해 시로 태어난다고 하겠다.   계곡 물 속의 풍경     -언어의 감옥 1              계곡의 물이랑 일렁일렁 바람이 밟고 간다. 오후 3시의 햇살이 물 속에 꽂힌다. 사정하듯 쏟아져 나온 햇살올챙이들 바람의 보폭만큼 흔들리는 바위의 배꼽 위로 줄줄이 기어오른다. 바위가 갸웃 몸을 튼다. 빛살무늬의 버들치들 물속 어른거리는 개버들 가지의 그물망을 빠져나와 여인의 얼굴에 뜬 하얗게 굽은 낮달을 살랄살랑 지나간다. 여인의 얼굴이, 달이 잠깐 갈라졌다가 이내 붙는다. 얼굴이 찌르르 아프다.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을 담근다.    오후 3시의 풍경에 뒤엉켜 일그러지는관념의 예수.   남산의 동쪽   수녀님 지금 뭐하세요? 잡풀을 뽑지요 잡풀이란 뭐지요? 죄없는 풀인데 사람의 말 아닌가요? 내 투명한 언어에 찔려 산책로 계단을 총총히 내려서는 그녀, 바람에 날리는 풀머리 어수선하게 엉킨다 남산의 동쪽 고만고만하게 누워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초록 뿌리 잘린 명아주 토끼풀 뱀딸기 까시랑풀 몇 밤 자고나니 거뜬히 기지개 켠다 이슬눈 투명하게 굴리며 낯설면서 낯설지 않게 고화질화면으로 푸르게 어우러진 내 아이들 풀 풀 풀   12시간의 성장   --언어의 감옥 4       낮 10시에 흔드는 시계 알 하늘 한 눈금 먹고 나면 초사흘 노른자위에 심장의 실핏줄이 돋고 또 하늘 한 눈금 먹고 나면 오소소 돋아나는 솜털 또 하늘 한 눈금 먹고 나면 온몸이 가렵고 눈자위에 별이 뜬다.   물상들이 또록또록 반짝인다. 중천을 한참 비켜서서 초록 눈금을 먹는 시계 알 초록~ 초록~ 가려움을 쪼다가 미운털이 박히다가 골골골 알을 짓다가 꼬끼오 운다.     구토    ―언어의 감옥 2       2004년 3월 전화기가 구토를 한다     따르릉 폭설을 토한다   따르릉 실크바람을 토하고 오후 3시의 햇살을 토한다   따르릉 진달래를 토하고 하얀 목련을 토한다     엇물린 신호음, 뚜탄 뚜핵 뚜탄 뚜핵......     청계천이 30년 묵은 검은 가래 토하는 소리     물웅덩이  ㅡ자화상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선 반쪽의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짝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가 휙 일렁이며 간다   푸른진통  ―언어의 감옥 3               물음표에서 싹이 튼다 모니터에 뜬 비안개 자욱한 쌍우물의 언저리 어느 밤 유성이 떨구어 논 살 비듬?  혹은 월식의 발자국? 초음파로도 판독이 유보된 꺼뭇꺼뭇한 ?들 ?가 낳은 ?의 새끼들 ??? 오늘 봄비에 젖은 애무덤 같은 저것들 푸른 진통 싹!!  쑥잎과 냉이 순이 싹트고 있다      내 유방을 만지면 아직은 얼얼한 강물소리 바람 소리 손바닥에 쑥내음 냉이향이 불그스레 묻어난다 (유방암 조직검사~ 요?)   엘빈의 커피잔         동숭동의 빗소리를 놓고 산목*과 마주 앉으면 커피 잔에 봄비가 내린다. 플라타너스 새싹들에, 노 시인의 두 눈에 이제 막 돌아온  가시내 봄비 티스푼으로 건져 올리면 비 멎은 허공에 물먹은 달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한 잔 앨빈의 커피와 내 뇌신경이 말똥거리는 밤 창 밖 풀라타너스의 그림자들 유령처럼 서성인다. 저놈의 벽시계는 눈금을 쩍쩍 미끄러뜨리고 가습기는 아라리 쓰라리 봄을 희뿌옇게 뱉어내고            * 山木: 함동선 시인의 호    사각 ―점1     사각 방 속의 나, 보이는 것 모두 사각이다. 사각 벽, 벽면의  거울 액자, 그 밑의 책상, 책상위의 모 니터, 모니터 옆 책장, 책장에 꽂 인 책, 그 옆으로 창문 문밖의 하 늘, 하늘을 이고 선 빌딩, 빌딩에 매달린 간판, 간판 속의 흔들리는 글자들, 사각사각 사각으로  숨쉬 고 사각의 나 모서리가 말을 한다      모리와 모서리가 부딪는 공간, 유리알 하늘을 쳐다본다. 청옥빛 쨍그랑 깨지며 콕 찌르는 햇살 투명한 초록 눈물 주룩 흐른다.   유명산                 내 앞에 걸어가는 다리가 미끈     쭉쭉 곧은 소나무들,      안개로 짠 하얀 실크드레스를 걷어올리고 있다     한 발짝 옮기며 한 꺼풀     또 한 발짝 옮기며 또 한 꺼풀     불그스레 드러나는 열일곱 살결     소나무 사이로 누드를 팔랑거리는 파스텔 톤의 나비     순백한 하늘을 배경으로       고도를 높이자     떨리는 순결이 찌-익 긁힌다     노오란 날개 팔랑거리며 순음 하는 왕오색나비들     칡넝쿨에 앉으면 초록 나비     망초꽃에 앉으면 하얀 나비       입춘무렵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멧세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 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얼굴 x           -  언어의 감옥5          하늘의     해 ,달, 별, 천둥 번개, 구름, 비, 노을, 어둠     사람의     그림자, 눈물, 웃음, 언어        땅의     나무, 풀, 꽃, 나비, 강물, 불꽃, 바위     얼굴 x이다         심심한 삼복의 한낮     선풍기 앞에 오면 내 얼굴의 기호들이 조각조각 날린다   좌표에서 달리는 지하철      ―점5             시간이 달리고 있는 X좌표의 지하철에    오전10시 30분 볼펜 Y가 입실한다.    철거덕 문 닫히는 소리    서로의 숨소리 팽팽하게 밀고 당기며 내 눈빛 속으로    빨려드는 이력들.      나는 먹물의 사기범, 너는 이념의 신호등 앞에 서성이는 경계인, 그는 산업    스파이, 초범인 듯 털보송이 노랑머리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을지로 3가  에서 고속터미널까지 초록숨소리를 토하고 출감한다      X좌표의 국립도서관 3층 자료실에 볼펜 Y가 다시 입실하면    청옥 빛 바람 섬뜩 차다.    책갈피 속 시의 맥박 차근차근 짚다가    파닥거리는 리듬을 복사해 출구를 나서면    내려서는 계단이 기우뚱거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초록생명  Y는 0,1번 Digit   눈부시게 깨어나는 수면공간      ―점. 2                           장출혈 앓는 새벽 4시 45분      머리 위에 수술중이란 표지판이      혈액의 팩처럼 매달려 있다      부슬부슬 어둠이 떨어져 모르스부호로 찍히고      새벽녘의 눈뜨는 공간      반짝이는 상형의 악기들,        가야금자리  갈루버자리  탄부르자리 거문고자리 오보에자리      구슬리자리  클라이버자리 심벌즈자리 수르나이자리 쳄발로자리      라이베스자리  단소자리 가물란자리 마우피스자리 바이올린자리      색소폰자리 파이프오르간자리 클라리넷자리 기타자리 사론자리의          굴러가는 숱한 겨울의 바퀴들, 장엄한 오케스트라      아다지오 알레그로로 안단테로 때로는 프레스토 모데라토로      그믐밤 하늘을 구르는 선명한 선율,      공간 한 귀퉁이가 부서진다   12월 32일, 안개               제2 한강교를 여자가 걸어간다      강물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한강철교가 달리는 차들이 흐물흐물 안개가 된다      여자가 안개를 딛고 사박사박 걸어간다      여자의 오른쪽 다리가 지워진다      왼쪽 다리가 지워진다      두 팔로 허우적허우적 몸통을 끌고 간다      두 팔이 한꺼번에 지워진다       가슴으로 안개를 밀고 간다       여자가 완전히 지워진다        12월 32일의 안개가 여자 속을 걸어간다   청사과   지하철 1호선 청량리 역 청사과빛 둥근 하늘이 승강기 틈으로 굴러 떨어진다 진동음 철거덕철거덕 지긋이 눈을 감은 순간, 내 입에서 주르륵 신물이 흐른다 눈을 뜬다 철로의 틈바구니 파문처럼 번지는 푸르고 시큼한 저 하늘의 입자들 부셔진 하늘이 역내에 온통 널려있다 나는 2번 출구로 빠져나온다 ` 청사과빛 초가을 하늘에 피라미드형으로 쌓인 노점의 과일가계, 내가 볼륨 2개를 빼내자 와르르 무너지는 오후 3시의 하늘   초록 매미   초록 매미 맹∼ 맹∼ 맹∼ 맹∼ 찌르르르∼운다 치과( 구강외과 치주과) 진료실 하얀 차단 막 위의 한상진 의사 “마취합니다, 아∼ 좀더 크게 아∼ 따끔거릴 거예요” 진초록 마취제가 왼쪽 아랫잇몸을 찌르르 흐른다 매미울음의 큐렛에 시큼 들렸다 놓았다 하는 내 이빨들  윗니 어금니가 덩달아 운다  눈, 코, 입, 전신의 구멍들이 운다  "끝났습니다 양치하세요" 이빨모서리에 찔린 비릿한 피울음 몇 번이고 헹궈낸다   붉은 치통을 쏟는 오후 3시 내 머리 위를 몇 발짝 비켜 느티나무에 기대선 푸른 신호등이 찌르르 운다      *큐렛: 잇몸 치료기   어느 휴일의 NG      잘 익은 백도 맛 같은 길, 부암동「머리하는 날」을 기웃거리다가 얄팍한 지갑을 만지작거리다가 불룩한 아랫배, 150억+알파의 덩치를 상상하다가 NG, 북한산을 축지법으로 한 바퀴 돌아 시청 앞 광장, 인공기의 불춤에 한숨 몇 바가지 끼얹다가 NG, 인사동「된장 예술의 집」에서 어느 시인과  된장 비빔밥을 먹다가  NG, 된장찌개! 토종인 내가 아주 맛지게 재창작해 새로운 된장 예술의 간판을 내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NG, 어느새 총동원된 내 안의 악기들, 뚝딱와글벅적썰고볶고지글뭉글끓이고지지고...... 된장 예술의 새로운 디지털 기법, 한참실험 중이다.   배가 아프다, NG   비구름이                    남산타워 꼭대기에서 미끄러져 내린 비구름이, 절룩절룩 예장동 산 5번지 6호 와룡묘 풍경 소리에 잠깐 귀 기울인 비구름이, 비염 앓는 산까치의 기침 소리를 밟고 산책로 108 벚꽃 계단에서 헛발을 내딛는 비구름이, 교통방송국 안테나를 훌쩍 휘어잡다 도미노 피자가계로 넘어진 배고픈 비구름이,"물은 미래의 행복" 산업자원부 에너지 광고판의 "물" 이란 글자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비구름이, 벽보 속 장서희의 촛불을 들고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비구름이, 폭격 맞은 이라크 어느 소녀의 귀 비구름이, 텅 빈 내 방의 유리창에 살며시 귀를 댄다. 비구름이   마라토너          전국을 완주해 온 봄비!  남산의 보호수    서2-7, 400년 은행나무 594㎝  서2-6, 450년 느티나무 637㎝  가슴둘레를 파랗게 문질러 놓고     숨소리 고르게 을지로 1가  지금 막 내 앞을 지나는 중이다  봄비를 마라토너들이 추격 중이다  뒤이어 플래카드를 든  맨몸의 가로수들이 달린다   플래카드 속 붉은 글자들도 달린다   ‘강국의 중심 ADSL 한 수위’   ‘정상의 물 山水’       가로수 연두 빛으로 빗는다, 봄비!  그때, 빌딩 사이 반짝  물구나무선 햇살에  마라토너들이 추격하고 사라진다   일몰, 4분간             #1         오후 5시 47분이 해를 떨어뜨린다         서산의 이마에 폭삭 깨지며 번지는 핏물, 내 얼굴을  만지자         손바닥이 붉게 젖는다           #2         오후 5시 48분이 빈 논 귀퉁이에다 모닥불을 지피고  있다          젊은 허수아비들 논둑을 서성이며 매운 기침을 하고          낱알을 쪼던 참새 떼 어디론가 재재재 이동중이다           #3          산꼭대기에서 오후 5시 49분이 어스름을 걸치고         성큼 내려선다         길들이 아슴아슴 지워져간다                 #4        오후 6시가 가로등에 일제히 불 알을 켠다        스카이 모텔도 층층 긴 불 알을 켠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4분간, 눈떴다 감았다 용두휴게소 가등 아래         쫄깃한 우동발을 후르르 삼킨 나, 아직도 배가 고프다      겨울 화단        -  점,3        고만고만한 새내기, 화초들  신축 SK빌딩은 겨울 화단이다   정문 옆 맨 첫줄 수호초, 상록패랭이, 송악, 꽃양배추, 원출무늬사사, 왜란, 헬레부로스, 줄 바꿔 늦개미취, 무늬쑥부쟁이, 지피말발도리, 홍매자나무, 또 줄 바꿔 노랑조팝, 삼색조팝, 관중, 맹문동 끼리끼리 이름표를 달고 갓 입사한 듯 어깨 쭉쭉 펴거나 조금은 움추리고 서 있다. 감전주의보 표지판을 살짝 비켜 이름표(원추리 옥잠화)만 덩그머니 서있는 빈자리에 추운 내 아이의 그림자 서성이고 그 사이사이 경력의 소나무들 굵은 대지팡이로 빨갛고 노오란 성탄의 별자리 둥굴게 띄우고 있는 12월     화초들 층,층 놓여 23층이 된다      1.5평의 내 방, 화병에 꽂힌 입술 마른 황색 장미 한 잎 두 잎 지고       맹인 부부       - 점4       검은 잎과 붉은 잎들 구르는 소리   그 소리가 남산 산책로에 간다.   그 뒤로 맹인 둘이 똑똑 점을 찍고 가고   그 뒤로, 그 뒤로 독똑똑......     가던 길 멈춰선 맨 앞의 맹인 부부   盲人보호철책에 기대선다.   그들 머리 위, 개나리 12월의 꽃송이 몇 점 피어 있다.   무어라 소곤거리다가 고개를 치켜들고   뒤따르던 맹인들도 한 방향으로 서서 웃는다.   이때, 산까치 한 마리 깍깍깍 날아가고   조지훈 시비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맹인들이 찍고 가는 소리    똑, 똑, 똑   배추를 절이며                  쓴 소리의 왕소금을 뿌린다       조간신문 행간의 갈피마다 뿌린다       배추포기의 꼭 다문 속잎에도 누우렇게 헤벌어진 겉잎에도       켜켜이 뿌린다       간밤의 열대야와 한낮의 복더위도 끌어다 눕혀 뿌린다       병풍 서풍 비리비리억풍의 날개도 싹뚝 잘라 설설 뿌린다       구름 안개 어둠 계절풍 걸신들 듯 퍼먹어 네 탓, 내 탓,       빨치산 친일파 국민의 이름으로 어쩌고저쩌고 설사하듯       게워내는 입술에도,        얼쑤절쑤 귀거리인지 코거리인지 법이란 놈의       곱사춤의 등줄기에도 쓴 소리의 왕소금을 뿌린다       물 한 바가지 끼얹는다            저 연노오란 속 배기 한 잎       내 텃밭에 남겨 두기로 한다     bill, 빌빌거리다       쉴새없이 날아드는 bill,빌, 청구서들     카드결제청구서 건강보험고지서 국민연금 전화요금     전기료 오물세 수도료 신문대금 할부금 소득세     빌의 숫자들에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빌빌거리다     한 달이 가고 일년이 가고 한 생이 가고         가을이 내게 청구서를 보내온다     문틈으로 햇살의 종이쪽지를 들이밀다가     바람이 활짝 창문을 열어제치다가     아예 빚쟁이처럼 안방까지 퍼질러앉는다     가을 내내 빌빌거리는 내게 더덕더덕 붙여오는     붉거나 노오란 낙엽 딱지들, 나는 전신 차압되었다     이제 몸도 마음도 내 뜻대로 어찌할 수 없는,     1400g의 뇌가 온갖 청구서의 무게에 빌빌거리다     머지않아 부도처리될 것이다     풀처럼 꽃처럼 bill,빌,         이륙하는 비행기의 굉음소리   비양도 태몽        사람들은 이 섬을 비양도라 불렀다.      산봉우리 하나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촉새네가 방정맞게 "산이 날아온다 " 외치자, 중국 쪽에서 날아 오던 그 봉우리가 제주 앞 바다로 다이빙하 듯 뛰어 내렸다. 그 후 닷새 동안이나 코피를 쏟고 나서 주저 주저앉은 섬, 그 후 비양도는 보름달이 뜨면 가끔 시인의 "말의 오두막집"* 뜰로 불려갔다.        내 시가 추락하는 비양도. 하늘, 바람, 파도, 새의 노래, 나무, 꽃, 나비 의 춤 이런 것들로 그득하다. 숨소리와 날개가 늘 푸른 비양도, 푸른 날개 반쯤 접고 엎드린 저 섬이 언제 또 훌쩍 날아가 여의도쯤에다 코피나 쏟지 않을는지, 밤낮 없이 꽃과 새와 나무들 노래와 춤으로 꿈틀거리는 넝마살이               *윤석산 시인의 시집 제목         구토        - 언어의 감옥2           2004년 3월 전화기가 구토를 한다     따르릉 폭설을 토한다     따르릉 실크바람을 토하고 오후 3시의 햇살을 토한다     따르릉 진달래를 토하고 하얀 목련을 토한다     엇물린 신호음, 뚜탄 뚜핵 뚜탄 뚜핵....         청계천이 30년 묵은 검은 가래 토하는 소리   월식      나는 늘 자전의 바퀴만 굴렸다. 북극의 해를 찾아가면 해는 이미 남극에 가 있고 남극으로 가면  해는 북극으로 간 뒤였다. 해도 달도 없는 월식의 밤, 빗장 닫아걸고 천둥 같은  빗쟁이의 전화벨  소리도 재워놓고,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다녔다. 0.3초, 그 혼돈의 눈빛으로 오리온좌의 왼쪽 붉은  베델규스가 되다가  오른쪽의 푸른 리켈이 되다가, 아래의 푸르스름한 시리우스가  되기도 했다.  이때마다 나를 에워싼 구름, 비, 안개, 침묵까지도   푸르거나 붉게 익어갔다. 자유 평화 사랑 꿈  이런 말들이 머루빛으로 익은 지상의 밤 "엄마"하고 부르는 딸아이의 목소리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잘 익은 머루알이였다. 나는 머루빛 밥을 짖고 때로는 친구를 만나 머루빛 눈이 내리는 길에  서 머루빛 시를 이야기했다.    지금은 시큼하게  어둠이 발효된 부엉이 날개가 꺾인 새벽 2시 좀생이별을보는  순간, 어둠이  초생달 하나를 반쯤 토해내고 있다.   12월 그리고 통증                벽의 달력에서 쏟아져 나오는 숫자의 파리떼, 탈옥하는 죄수들이다. 윙윙거리며 닥치는 대로 입술을 들이민다. 나를 빤다. 숨소리를 빨고 눈빛을 빨고 살을 빨고 말랑한 것들은 모두 빤다. (이건 분명 대 재앙이야) 나는 유방을 자궁을 뇌를 손으로 움켜쥐며 필사적으로 쫓는다. 엎치락뒤치락 옥 매트 위에서 굴러 떨어진다. 꿈이였다. 벽에 걸려 반쯤 찢어진 채 파르르 입술 떨고 있는 12월, 노을 빛 창이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다.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들, 그 반짝임 아래로 한 여인이 겁먹은 12월 통증이 지나가고 있다.   장미꽃 해부도                     - 슬픈 중심                    장미꽃에도 선율의 수평선이 있다        일렁일렁 나의        감각들 일렬 횡대로 걸어가고 있다        황홀하고 두려운        장미꽃,        머리위로 새털구름 몇 가닥 흘러간다        한창 뻐꾹뻐꾹 초음파의 울음소리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발목을 타고 오르는         반짝이는 소름의 찰거머리들        내 몸은 푸른 가시가 돋는다        고감도영상, 자궁의 저 아름다운 장미꽃        가시밭에 너무 활짝 피어            슬픈 중심             어지럽다        꽃술 몇 개 간당간당 매달려        충혈된 눈자위 빙그르르    아침 여섯시는 백지다              백지에 반짝 나는 것들     새벽바다 풍랑 위를 유유히 걷는 한 사나이의 뒷모습이     반짝 날고     萬古長空에  一朝風月이     반짝 날고                        불 속의 거미집에서 차를 달이는 고기의 등이*     반짝 날고     임오군란의 와중 피신하는 민비의 "살아야 돼" 절규가     반짝 날고     노오란 은행잎이, 가을바람의 비질이     반짝 날고       환하게 눈을 켠 아침 여섯시는 백지다.     권태로운 밥상 위 잡탕의 언어들, 비빔밥그릇에 비가 내린다.   호랑나비       4월의 아차산 생태공원 입구, 골목에서 벚꽃이 뻥튀기처럼 뻥 핀다. 벚꽃 사이 햇살 속에서 튀어나온 호랑나비 묻힐 듯 말 듯 꽃 속을 난다. 내 동공 안으로 푸른 하늘의 배경을 확 당기자, 꽃술을 밀며 들어가는 나비! 내 눈썹에 와 간질간질 닿는다. 나비가 떤다. 내가 떤다. 떨리는 두 팔이 가벼워지고 나도 나폴거려 본다. 이때, 일방통행 길에 포크레인이 지나가고  생태공원 호랑나비의 환영, 드르르르 뭉개진다.        애기풀새        옥상 구석 빈 분에 돋는 풀을 뽑다가 멈칫 손끝에 찌르르~ 전해오는 떨림, 어! 이건 초록 새다. 새 잎의 날개 활짝 펴 종종종 발레를 하는 풀, 내 손등을 간지럼 태우는 풀, 흙에서 막 깨어 난 풀에게 "애기풀새야" 하고 부르면 이슬눈으로 나와 눈맞춤을 한다  어느새 내 눈이 투명해져 보이는 것마다 참 맑다. 이때 포르르 날아 내리는 한 무리 참새 떼, 무어라무어라 재재거림에 내 입술이 간지럽다.   겨울 새벽 풍경                    샛별 몇 개 깜박거리는 새벽의             TV 뉴스 화면,            쓰나미가 지나간 몰디브의 바다, 12월 31일 여진의 해일이 일고            막막하게 떠도는 산호초의 섬 몇 개            32일을 표류하고 있다            을지로 1가 ㄷ자로 둘러싼 고층빌딩들 드문드문 뜬 사각의 눈으로            쌍방통행의 빈 길을 내려다본다             하얀 파카를 입은 핸드폰 하나 무어무어라 암호의 그림자를            흘리며 뛰어가고            눈이 침침한 가등이 블랙커피를 마시고            1.5평 어스름의 방 안, 점 하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계곡 물속의 풍경 ―언어의 감옥 1                  계곡의 물이랑 일렁일렁 바람이 밟고 간다. 오후 3시의 햇살이 물속에 꽂힌다. 사정하듯 햇살올챙이들 쏟아져 나와  바람의 보폭만큼 흔들리는 바위의 배꼽 위로 줄줄이 기어오른다. 바위가 갸웃 몸을 튼다. 빛살무늬의 버들치들, 물속 어른거리는 개버들가지의 그물망을 빠져나와 여인의 얼굴에 뜬 하얗게 굽은 낮달을 살랑살랑 지나간다. 여인의 얼굴이, 달이, 잠깐 갈라졌다가 이내 붙는다. 얼굴이 찌르르 아프다. 이때, 누군가가 첨벙 손을 담근다.   오후 3시의 풍경에 뒤엉켜 일그러지는 관념의 예수.   아침 찻잔       오후 여섯시 30분   30층 옥상 위로 굴러온 달   둥둥둥 바람에 울리는 황금 북소리, 배가 고푸다    저녁 11시   내 머리 위에서   노오랗게 쏟아지는 오랜지향기, 새콤달큼 배가 부르다   새벽 3시   남산 타워 뒤쪽   구절초 언덕길 넘어가는 만취한 그림자 하나    비틀비틀 공복의 헛기침을 한다     아침 찻잔에 반쯤 떠오른 달, 구절초 향이 아리다   새벽          새벽 3시       별똥별 하나 검은 하늘에 사선의 빛줄기를 긋는다         술을 마시고 방금 들어온 작은애가       냉장고에서 별을 꺼내고       별 하나 귤처럼 달콤하게 삼키고       이내 코를 고는 새벽종소리       촛불을 든 아이들       고요한밤 거룩한 밤을 부르며 지나가고       밤새 빛을 찾아 헤매다가 언 2003년 여의도의 겨울 철새 몇 마리       푸드득 나무 가지에서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건너편 박도순 산부인과 분만실 신생아의 울음소리         누군가가 별과 연결된 퓨즈를 끼운다    앨빈의 커피잔         동숭동의 빗소리를 놓고 산목*과 마주 앉으면   커피 잔에 봄비가 내린다.   플라타너스 새싹들에, 노 시인의 눈에 이제 막 돌아온   가시내 봄비   티스푼으로 건져 올리면 비 멎은 허공에 물먹은 달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한 잔 앨빈의 커피와 내가 말똥거리는 밤   창 밖 풀라타너스의 그림자들 유령처럼 서성이고 있다   저놈의 벽시계는 눈금을 쩍쩍 미끄러뜨리고   가습기는 아라리 쓰라리 봄을 희뿌옇게 뱉어내고          * 山木: 함동선 시인의 호    영하 16도 아리랑                   아침  수도꼭지가 헛돈다            동쪽 능선의 벨브가 열리며 햇살이 영하 16도를         끓인다         청량고추바람을 다져 넣고 얼어붙은 가계부와         “핵”이란 붉은 글자와 갱년기의 요도괄역근을         숭덩숭덩 썰어 넣고         낡은 처마 끝 극좌와 극 우측의 고드름도 따 넣는다            햇살이 내 두뇌의 열 두 신경 줄 현을 탄다         수도꼭지가 요실금처럼 오줌을 찔끔거리고         유리창이 눈물을 흘린다         북한강 남한강이 쩍쩍 엇갈려 부셔진다         반 박자 빠르게 혹은 반 박자 느리게           아라리 쓰라리 아리랑을 엇모리로 편곡중이다     風,楓,풍자에 대하여                    風자에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여름과 가을 사이, 삐꺽이는 소리가 난다       매미들의 토막울음 소리       내 손바닥 허물 벗는 소리       며칠 전 제대한 아이가 긴장과 이완의 골에서 흔들리는 소리          여름과 가을, 그 사잇길로 태풍이 몇 차례를 지날 때 발부리에 채이는 감나무 밑의 풋감처럼, 설  익어 뱉어진 내 언어들도 지금쯤 누군가의 발 밑에서 나뒹굴거나 으깨지고 있을까? 할 말은 해야 한다고, 함부로 내뱉지 말아야한다고, 혀와 입술이 밀고 당기며 삐그덕 소리를 낸다.            楓자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나무들 초록빛깔 벗는 소리       제 몸 다 태워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불길 번져       하늘 끝 타는 소리       風,楓,풍!       획과 획을 통과하는 소리 소리들    4 월 은 갈 지(之)자 다       4월의산은之자다      붉은갈지(之)노오란갈지(之)초록갈지(之)연보라빛갈(之)      앞서거니뒤서거니어깨동무를하거나바람의요람을타거나      하늘하늘공중곡예를하거나      갈지(之자사이로갈지(之)갈(之)새울음이날고      갈지(之)갈지(之)산딸기가열리고      계곡의물이흐른다      색색의배낭들이색색의모자들이      무지개빛갈지(之)자사이로갈지(之갈지(之)      걸어오고걸어온다      4월의산은갈지(之자다    유명산               내 앞에 걸어가는 다리가 미끈           쭉쭉 곧은 소나무들,            안개로 짠 하얀 실크드레스를 걷어올리고 있다           한 발짝 옮기며 한 꺼풀           또 한 발짝 옮기며 또 한 꺼풀           불그스레 드러나는 열일곱 살결           소나무 사이로 누드를 팔랑거리는 파스텔톤의 나비           순백한 하늘을 배경으로             고도를 높이자           떨리는 순결이 찌-익 긁힌다           노오란 날개 팔랑거리며 순음 하는 왕오색나비들           칡넝쿨에 앉으면 초록 나비           망초꽃에 앉으면 하얀 나비   산부인과 수술대 위의 칸나꽃                              칸나꽃이 아프다.     빌딩의 그늘이 짓밟고 간 칸나꽃     48도의 고열이 오르고     신음, 신음     꽃잎이 쏟아진다. 하혈인 듯,         (섬광 한 줄기, 이슬 한 방울 흐른다.)          마침내 햇빛 산부인과 수술대 위에 누운 칸나꽃, 87 마이크로미터의 미세먼지 속을 걸어 온 여름날, 나의 혈압은 머리끝에 곤두서고 심장은 100m 경주하듯 뛴다. 산소의 테놀민으로 혈압을 꿇어앉히고 부분 마취를 시킨 후 꽃받이에 돋아난 중금속의 근종!! 빛살의 칼날이 지나간다.       자웅동화의 길을 막던 울퉁불퉁 부스럼들 다 도려낸 칸나꽃,     꽃술 열어 깔(色)이 싱싱하다.     햇살보다 더 붉은 페르몬 향, 환하게 흐른다.   파아란 휴일        징검다리 휴일이 건너가고 있다.      풍덩 풍덩 휴일의 울안으로 뛰어드는      꽃과 나무와 새      라일락 쩔쭉 자목련 싸리꽃 은행나무 느티나무      손사래치는 잎새들 사이로      참새 두 마리가 포르르 날고      창문 간유리 하늘이 성큼 배경으로 선다          유리창을 닦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휴일에 지는 꽃잎의 게이트 게이트 게이트      (파아란 창의 이 여유!)      휴일의 강 징검다리 디딤돌 휘돌아      소용돌이로 피어나는 4월의 꽃들   4월의 부호들                     1       황사바람에 날리는 벚꽃잎들       안약 히아레인 눈물방울에 젖은 붉은 눈동자,       4월의 부호들이 가렵다.                2      눈을 감으면 고흥 반도 내 유년의 방죽      지평선을 날으는 갈매기의 날개가 가렵고 썰물의 갯벌을 기는      꽃게의 빨간 발이 가렵다.      튀는 망둥어의 꼬리가 가렵다.               3      한 치쯤 자란 고만고만한 모싹들이 서로의 등을 긁는      교동면 상황리 논바닥이 천연기념물 205호      저어새의 질척한 울음소리를 긁는다.      등량만에서 산지 직송되어온 염포탕집 냄비 속      오돌토돌 낙지의 발이 내 눈을 긁는다.        떠도는 4월의 부호들이 가렵다   위 염             오전 11시10분   화살표(→)를 날린다   서울→신촌→수색→화전→강매→행신→능곡→고산→백마   →일산→탄현→운정→금촌→원릉→파주→문산→임진강→   도라산역에 꽂힌 통일호.            정 지!   라이트 꺼!   시동  꺼!   실내등 켜!   운전병 하차!   창문 내려!       전망대에서 침침한 내 눈빛의 화살을(→) 날린다.  한낮의 어둠을 뚫고 원경 12KM 밖  내 스승의 고향 개성의 등에 얹힌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흰 머리칼 날리는 안개, 어머니    거푸거푸 신트림이 넘어온다.  오래 동안 잠복해온 그리움의 헬리코박토파이로리.     흐름을 위하여                            거시기가 흐른다        계곡의 노을 빛 물줄기        보름달밤 이슈타르*의 붉은 눈물        꽃나무 흔들어 깨우는 봄비        내 어머니의어머니의 장독대 옆 금줄 너머의 붉은 바람         거시기의 증후군       두근거리는 꽃술에다 달빛 솔솔 뿌리면       한층 깊어지는 이 우울       커피, 초코렛, 설탕, 소금, 술은 금줄 너머에 둔다        여기저기서 거시기꽃 피고 지는 소리             나는 500번쯤 꽃 둘레 돌아 나왔어도 그 꽃을 모른다      거시기를 따라 오늘도 빛이 오고      어둠이 오고          *고대 바빌로니아의 여신   약 손            한 마음 신경정신과          거울을 막 빠져나온 휘청거리는 해          신당동 지하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내 중추의 열두 계단까지 미끄러진다          정전이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 파랗게 흐르는 지하도가           김밥처럼 또르르 말린다          명치끝에 걸린 영하 7도의 어둠          찌릿찌릿 뒷골로 치솟아 오른다          어지럽고 메스껍다          이때, 어느 출구인지 부스럭 뛰어내려 내 등          까실까실 쓰러 내리는 마른 플라타나스잎들          어머니의 약손          (어릴 적 횟배 앓아 온방을 뒹굴 때 어머니의 손이          사알살 문지르면 거짓말처럼 금방 일어나 뛰어 놀곤 했다)          내 안에 맺힌 구멍이 뚫리고            일만 삼천 샛길들이 환하게 일어선다   안경점 앞에서        명동입구 밝은 세상 통 유리 안의  툭툭 튀어나온 눈알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바짝 다가서자  수 백 개의 안경알 속으로 내 눈빛이 빨려 들어간다   검게 불그죽죽하게 혹은 투명하게  순간, 내 몸에 촘촘히 뜨는 마른눈들  떴다 감았다 뻑뻑하다    말아 쥔 신문을 펼친다  “이라크 테러집단에 인질로 잡힌 김 XX씨 살해됨”이란  활자의 지렁이들 토막토막 꿈틀거린다  이때, 검은 새 한 마리 긴- 선을 그으며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갑자기 캄캄해지는 사위  지팡이하나가 내 발등을 툭툭 치며 지나가고  붉은 장미꽃안경알이 밟혀 깨진다    내가 안경을 벗자 흐릿하게 공중을 기어오르다 낙상하는  빌딩의 개미떼들   노을이 뒤척인다                    저녁노을 뒤척이는 소리     아래층 사오정씨 매일 출근을 한다. 오늘은 북한산 내일은 관악산에서 퇴근한 그는 한 필쯤의 노을 오려다 서른 다섯 새카맣고 큰 눈을 뜬 아내의 목에 스카프처럼 걸어 준다. 그의 귀에는 밤새 스카프 뒤척이는 소리가 난다.   이태백의 내 아이, 담뱃불 타 들어가 듯 물드는 단풍, 당단풍잎 한 장이 밤새 잔기침을 하며 대문을 들락거리고 창틀엔 스무 하루 새벽노을이 걸린다    아침, 사오정씨 8차선 도로를 한 절룩절룩 무단 휭단하고 있다   나팔꽃                하나,둘,셋!   눈 질끈 감고 나팔꽃줄기를 뽑는다   휘청 엎어지는 서녘하늘        10월과 11월   까실까실 담당에 붙은 나팔꽃 줄기    씨방 몇 개 매달고 말라가는 신경줄   가위질 한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갈색 각질, 바스락 끊긴 리듬,   종량제 쓰레기봉투 속으로 눕힌다   내 발 밑에서 노을 부스러지는 소리     철새 한 무리 하늘 저-켠으로 검은 줄기를 놓는다     더듬이     구석구석 더듬어도 잠이 없는 밤 유리창 안으로 굴러든 한가위 보름달이 나를 꼬드겨 일으킨다   달과 손잡고 종로통을 밤새 걸으며 뒤적거려도 이상도 구보씨도 만나지 못하고 다방 제비나 다옥정 7번지는 흔적조차 없다   시장통이나 들판을 아무리 헤매어도 내가 영원히 회귀할 곳은 마땅치 않다   팽목항에 가서 잠수를 할까 한산섬에 가 이순신과 수루에 앉아 시나 한 수 지어볼까 아니면 평양에 가서 김정은과 맥주나 한잔하며 “핵장난감놀이는 싱거워졌으니 나와 함께 유라시아 철도놀이를 하는 게 어때“ 하며 등이나 슬슬 긁어줄까   신경증의 프로이트는 밤잠을 설치면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가 되었다는데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별을 주물럭거려 소용돌이치는 자기만의 별, 불후의 걸작을 만들었는데 조을증 환자 다윈은 밤마다 잠과 싸우며 적자생존의 원리를 터득했다는데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정신분열증의 밤은 만유인력과 상대성원리의 태반이 되었다는데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내가 둥근 문하나 찾아 밤새 더듬은 달이 희뿌옇게 빛을 死産하고 있다     모기     낯선 행성의 배를 탄 별난 밤 파랑 치는 이명을 긁는다 충혈 된 눈에 떠오르는 별, 꼬리를 잇는 별별 생각들   고, 군, 산, 열도를 탄다   구름처럼 떠다니며 색색을 탄주하는 칸칸의 섬들 랑거한스섬*을 잃어버린 낭구갈매기가 끼룩낭구 끼룩낭구 따라오다가 M선생님이 하이퍼하는 ‘새우깡’이란 언어를 받아먹고 하이퍼 하이퍼 활강을 한다   바다에 떨어진 새우깡 몇 개 기웃뚱이는 꼬임의 경계가 두렵고 불안한 나 하늘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낮달을 향해 손바닥 마주쳐 공포탄을 쏜다   폭발하는 팔레스타인 하늘 내 눈에 총총총 박혀오는 검은 포도알 눈들 비실거리는 내게서 무얼 먹겠다고 글썽이며 파고드는지   이흥도 역을 지나 아직 장자도역인데 가자지구도역엔 언제쯤 닿을까   바람에 날리는 초조한 내 사유의 불랙박스, 바람이 해체한다   공룡알을 품은 나금재 통통마디 공작초 함초밭이 질펀하게 노을을 싸고 있다   1869년 췌장에서 특수한 세포집단을 발견한 랑거 한스가 자신의 이름을 따 랑거한스섬이라고 명명하다 인슐린이 만들어짐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때였지만 후에 영국의 샤피-사퍼(1850년-1935)는 당분대사에 필요한 물질이 랑거한스섬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여 섬을 뜻하는 라틴어insula를 따서 인슐린이란 이름을 붙였다     해안선       유리컵에 두 개의 노을빛 해안선이 그려진다   하늘을 수장시키고 하늘을 건져 올리는 한 여름의 짜디짠 해안선, 제부도 조력발전소 타는 내 입술적시며 달의 주기는 밀려왔다 밀려가고 깊고 깊은 바다의 육감들 왜 이렇게 내 젖은 맥박을 느려뜨리고 있는지   사소한 일렁임이 사소하지 않게 출렁이는 파키스탄의 15살 소녀 말랄라 “한 자루의 펜이 세계를 바꾼다”는 속 깊은 속삭임이 노벨평화상이란 봄꽃을 전 지구에 피워가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딪혀 유속을 빠르게도 하고 느리게도 하면서 새로운 예술 사조를 모색 중이라고 마를린 먼로의 붉은 입술로 사방 연속무늬를 끊임없이 그리고 있는 피카소   바다의 속 깊은 속도전은 이론이 아닌 사건이라고 써놓은 해안선에다 석양의 물너울이 나를 새롭게 편집하고 있다   나는 입술 밖에 있는가 입술 안에 있는가     polyandry*       잠시 經의 갑옷을 벗고 맨몸으로 제게 와 주세요 딱 하룻밤씩만 두 분에게서 쌍둥이를 낳고 싶어요   부처와는 ‘남북’과 ‘자비’를 예수님과는 ‘동서’와 ‘사랑’을 낳아 넷이서 뒤통수 맛 대면 멋진 입체파 그림이 될거예요   나와 싫으시면 두 분이 동성애를 하시든가 그도 싫으시면 상의 하셔서 한분이 성기수술을 하시는 건 어때요 ‘돈오 점수’나 ‘구원’ 둘은 꼭 낳아야겠으니까요 ‘해탈’과 ‘부활’ 도 상의해보시고요   예수님을 팔고 있는 유럽이 돈돈돈 돈타령인데도 왜 멸망하지 않을까요 부처님의 나라는 너무 더워 돈도 녹아내려 점수는커녕 돈오도 못할 것 같네요   예보도 없이 오리알만한 우박이 내 머리통을 치네요   요즘 낌새로 보아 사람들끼리 놔두면 원숭이로 퇴화되거나 씨가 마를까 두려워요   그도 저도 싫으시면 ‘종말’이란 화두 삐라처럼 뿌려 놓고 세상을 아예 폭파시켜 버리든가요   오늘은 동서남북하늘이 유난히도 고운 생리혈 철철 흘리고 있네요   * 1처 다부제(폴리앤드리)     싸리꽃     슬로시티 슬로시티   잠이 간간하게 마른 내가 밤새 증도와 신의도를 어슬렁거렸다   목이 말라 염수가 덜 빠진 짜디짠 별을 먹었다   내 몸에 피어나는 하얀 싸리꽃 짜초름한 향기에 시나브로 절여지는 나   딱딱해져가는 내 안에서 총동원되어 드레박질 하는 세포들   0.9%의 나트륨을 유지키 위해 포타슘언어를 낳기 위해 지금 이순간도 반투막 밖으로 짜디짠 관념의 외액, 싸리꽃 피워내는 소리   너무 오래 절은 나를 맹물에 울궈 세탁기에 넣고 탈수 버튼을 누른다     시문학 10월호 게제
98    당시선집, 신석정 역. 댓글:  조회:2396  추천:0  2020-02-09
당시선집, 신석정 역. 序 文   詩文學에 從事한 지 40여년이 넘도록 내 머리맡에서 唐詩가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다. 詩는 바로 내 마음의 고향이요, 내 詩의 요람이었다. 俗情에 끌려 마음이 흐릴 때에도 마치 탕자가 고향에 돌아오는 심정으로 찾아가는 곳은 바로 唐詩의 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눈에 익은 고향 산천의 옛 얼굴과 귀에 익은 고향 산천의 물소리처럼 마음의 회복을 찾게 되는 것은 唐詩의 가락이었으니, 길어내도 길어내도 끝이 없는 지하수처럼 詩心은 그 때마다 새로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唐詩를 애독하는 동안에 우리 말로 옮겨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히게 되어 손을 대게 된 것은 20여년전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李 白의 자유 분망한 가락이나 杜 甫의 침통 무비한 절규를 옮겨 놓기에는 나의 재간은 너무 서투르고 모자람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 시심의 한 자락이나마 전할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당시의 드높은 산맥에서도 詩仙이라 일컫는 李 白과 詩聖이라고 불리우는 杜 甫의 두 巨岳과 더불어 陶淵明을 비롯한 唐代 詩人외에도 몇몇 詩人을 덧 붙였음을 밝혀둔다. 1971년 12월 比斯伐 艸舍에서 辛 夕 汀   이 백 李 白 (701-762) 盛唐의 詩人. 字는 太白, 號는 靑蓮 또 스스로 酒仙翁이라했다. 中宗 長安 元年(701, 신라 효소왕 10년) 사천성에서 났다. 10살에 벌써 詩書에 통하고 百家書를 탐독했다. 고향에서 소년시대를 보내고, 뒤에 각지로 방랑, 襄州 漢水로부터 洞庭湖로, 다시 長江으로 내려가 金陵을 거쳐 楊州로 가 호방한 생활을 하고, 35살때에는 太原에 놀고, 산동성 任城에서 孔巢文․韓 準․裵 政․張淑明․陶 沔등과 만나, 이른바 竹溪六逸의 교유를 맺고, 742년 42살 때 翰林院에 들어갔다. 시와 술로 명성이 높았으나, 결국 술이 원인이 되어 744년에 실각, 陳留에 이르러 道士가 되고, 8578년에 江南에서 玄宗의 아들 永王의 모반에 가담한 죄로 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夜郞에 유배되어 가다가 도중에서 풀렸다. 代宗이 즉위하자 拾遺에 배명, 11월에 當塗에서 62살로 죽었다. 李 白은 自然兒였다. 喜悲哀歡을 그대로 노래에 옮겨, 그의 작품은 한껏 자유분방하여 天衣無縫의 神品이라고 하거니와, 당시 그와 아울러 일컬은 杜 甫가 새로운 詩風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李 白은 漢魏 六朝이래의 詩風을 集大成했다. 모랄에 민감하고 정치에 관심을 보인 杜 甫와는 달리, 현실을 떠난 감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나라 문화의 爛熟期에 生을 받아, 그 퇴폐적 기풍에 젖은데다가 불우했기 때문에 술과 여자에 憂愁를 잊으려 했다. 詩文集 30권이 있다.     峨山月歌 峨眉山月半輪秋 影入平羌江水流 夜發淸溪向三峽 思君不見下渝州 아미산월가 가을 밤 아미산에 반달이 걸려 평강 깊은 물에 흘러가는구나 청계를 밤에 나서 삼협으로 가는 길에 너도 못 본 채 유주로 내려간다.     靜夜思 牀前看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山月 低頭思故鄕 야곡 침실로 스며드는 달 그리매 어찌 보면 서리가 내린 듯도 하이 산 위에 뜬 달을 바라보고는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노라.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 孤帆遠影碧空盡 唯見長江天際流 호연에게 그댄 이 황학루를 그대로 두고 삼월사 말고 양주로 떠나는가 먼돛 그리매 하늘 가에 숨으면 강물만 굽이굽이 흘러가는 것을......   獨座敬亭山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閒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경정산 뭇새 멀리 사라지고 구름만 한가히 떠가는구나 바라봐도 바라봐도 지치지 않는 건 경정산이 있어서 그렇지 뭐.......     子夜吳歌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자야의 부르는 노래 장안에 조각달 멀리 비치는데 다드미 소리 자지러게 들려와 가을 바람 불어도 끝이 없는데 옥관에 달리는 마음 설렌다 임이여 오소라 돌아오소라 원정은 어느때 끝이 나는가.     山中與幽人對酌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대 작 둘이서 잔 드는 사이 소리 없이 산꽃이 피어 한잔 한잔 들자거니 다시 한잔 먹자거니 난 위한채 자고파 그댄 돌아가도 좋으리 낼아침 오고프면 부디 거문고 안고 오시라.   友人會宿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良宵宣且談 皓月未能寢 醉來臥空山 天地郞衾枕 그대와 더불어 천고에 쌓인 한을 풀어 한없이 마시는 술에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 밤은 깊어 밝은 달에 잠도 멀리 가는데 취한채 빈산에 쓰러지니 천지는 하냥 이부자린듯하구나.   烏夜啼 黃雲城邊烏欲棲 歸飛啞啞枝上啼 機中織錦秦川女 碧紗如煙隔窓語 停梭悵然憶遠人 獨宿空房淚如雨 오야제 해설피 구름은 성가에 떠도는데 가마귀는 자꾸만 울어 예고 베틀에 진천아가씨 오늘도 베를 짜네 푸른 창창 새에 두고 혼자 속삭여 물레북 손에 든채 멀리 떠난 그대 생각하며 홀로 새는 방에 비보다 눈물이 더 쏟아져......     送友人 靑山橫北郭 白水遶東城 此地一爲別 孤蓬萬里征 浮雲遊子意 落日故人情 揮手自玆去 蕭蕭斑馬鳴 그대를 보내며 푸른산 북녘 성곽을 둘렀는데 강물은 굽이 굽이 성을 돌아가는구나 예서 그대 한번 보내고 보면 외로이 떠나리 먼 만리길 길손은 뜬구름에 뜬구름에 닮아 지는핸 서글픈 그대의 심정이리 손을 내저으며 이제 떠나거니 울어예는 말소리 더욱 섧구나     月下獨酌 其一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聖賢旣已飮 何必求神仙 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 俱得醉中趣 勿謂醒者傳 월하독작 1 하늘이 만일 술을 즐기지 않으면 어찌 하늘에 주성이 있으며 땅이 또한 술을 즐기지 않으면 어찌 주천이 있으리요 천지가 하냥 즐기었거늘 애주를 어찌 부끄러워하리 청주는 이미 성인에 비하고 탁주는 또한 현인에 비하였으니 성현도 이미 마시었던 것을 헛되이 신선을 구하오리 석잔에 대도에 통하고 한말에 자연에 합하거니 모두 취하여 얻는 즐거움을 깨인 이에게 이르지 마소라.     月下獨酌 其二 花下一壺酒 獨酌無相親 擧盃邀明月 對影成三人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我歌月徘徊 我舞影凌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월하독작 2 꽃 아래 한독 술을 놓고 홀로 안아서 마시노라 잔들자 이윽고 달이 떠올라 그림자 따라 세 사람일세 달이 술은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만 나를 따라 다녀도 달과 그림자 데불고서 함께 즐기는 이 기쁨이여 내 노래하면 달도 거니는 듯 내 춤을 추면 그림자도 따라라 깨이면 함께 즐기는 것을 취하면 모두 흔적이 없이 길이 이 정을 서로 맺아 오늘날 은하에서 또 만나리.     淸平調詞 三首 一. 雲想衣裳花想容 春風拂檻露華濃 若非群玉山頭見 會向瑤臺月下逢 二. 一枝濃艶露凝香 雲雨巫山枉斷腸 借問漢宮誰得似 可憐飛燕倚新粧 三. 名花傾國兩相歡 常得君王帶笑看 解釋春風無限恨 沈香亭北倚欄干 청평조사 1. 발길에 끄는 치마자락은 구름을 생각한다 얼굴은 꽃을 닮아 더 어여쁘구나 봄 바람 살며시 난간을 스치는데 이슬도 꽃처럼 짙어 곱더라 군옥산 산머리에 못 만날양이면 요대 휘영청 밝은 달 아래 거닐 때라도 만나보리......     2. 다만 네가 농염한게 흡사 향그러운 이슬 같아라 무산에 비 머금은 구름만 떠돌아 홀로 애 끊노니 한궁에 누가 널 닯았더냐 비연...그댄 물찬 제비처럼 되려 가련하구나.     3. 꽃도 너도 나는 좋더라 임은 항상 그댈 보고 웃거니 봄바람엔 그지 없는 원한도 풀리는 침향정 난간을 오고 가고 하리라.     怨 情 美人捲珠簾 深坐嚬蛾眉 但見淚痕濕 不知心恨誰   소 곡 발 걷고 앉은 여인 눈썹을 찡그리고 눈시울 젖은 흔적 누구를 원망하여.......   對酒問月 靑天有月來幾時 我今停盃一問之 人攀明月不可得 月行却與人相隨 皎如飛鏡臨丹闕 綠烟滅盡淸輝發 但見宵從海上來 寧知曉向雲間沒 白兎搗藥秋復春 姮娥細栖與誰隣 今人不見古時月 今月曾經照古人 古人今人若流水 共看明月皆如此 惟願當歌對酒時 月光長照金樽裏   잔들어 달에게 묻는 노래 저하늘에 달이 있어 몇 해나 지냈는가 지금 나는 잔 놓고 물어 보노라   사람은 달을 잡을 길 바이 없어도 달은 언제나 우리를 따라 오거니   거울처럼 밝은 빛이 선궁에 다달아 푸른 연기 헤치고 밝게 빛나네   밤따라 바다 위에 고이 왔다가 새벽엔 구름 새로 침몰하누나   봄에도 가을 옥토끼 약을 찧고 선녀는 외로이 누구와 사는가     옛 달을 바라본 이 지금 없어도 달은 천추나 두고두고 비치었으니   인생은 예나 지금 물처럼 흘러도 언제나 달은 떠서 바라봤으니   원하거니 노래 부르고 잔 들 때마다 달빛이여 나의 잔에 길이 쉬어 가라.     蘇臺覽古 舊苑荒臺楊柳新 菱歌淸唱付勝春 只今唯有西江月 曾照吳王宮裏人   소대에서 옛 동산에 버들잎 파릇파릇한데 봄 들어 부는 노래 더욱 서러라 강 위엔 초승달 더욱 밝구나 지난날 옛 궁에 비치던 달이.....     自 遺 對酒不覺瞑 落花盈我衣 醉起步溪月 鳥還人亦稀 황혼 술잔 기울이니 해지는 줄을 몰라 어쩌자고 꽃은 떨어져 옷깃을 덮는가 거나히 취한채 달을 밟고 가노니 새는 깃을 찾고 인적은 끊쳐.......     斷章 昔日芙蓉花 今成斷腸草 단장 옛날의 부용 꽃 인젠 단장초로구나...(妾薄命의 한구절)     早發白帝城 朝辭白帝彩雲間 千里江陵一日還 兩岸猿聲啼不住 輕舟已過萬重山 벡제성을 떠나 아침에 백제성 구름 새를 떠나 강릉 천리 길을 하루에 돌아 왔다 강 기슭에 원숭이 자꾸 울어 예는데 배는 이미 첩첩이 쌓인 산을 돌아......     客中行 蘭陵美酒鬱金香 玉碗盛來琥珀光 但使主人能醉客 不知何處是他鄕 여중 (旅中) 난릉의 술은 바로 울금향이로구나 크나큰 옥배에 넘쳐 호박 같이 빛난다 다만 주인으로 하여금 손을 취케하라 어디가 타향인 줄도 알지 못하게......     春夜洛城聞笛 誰家玉笛暗飛聲 散入春風滿洛城 此夜曲中聞折柳 何人不起故園情 봄 밤 어둔 밤 옥피리 소리 들려 온다 봄 바람에 흩어져 낙양에 가득하여라 이 밤사 말고 절류곡 들려 오거니 뉘라서 고향을 생각하지 않으리.     與史郞中欽聽黃鶴樓上吹笛 一爲遷客去長沙 西望長安不見家 黃鶴樓中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     장안을 떠나면서 한번 쫓긴 몸 되어 장사로 간다 서녘 하늘 아래 먼 장안엔 나의 집도 묻히고 황학루엔 누가부는 옥피리 소린가 강성 오월 달엔 매화꽃도 지는 것을......     山中答俗人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산에서 내게 묻길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웃음으로 대답하니 마음도 한가하이 복사꽃 흘러흘러 멀리 자는 곳 거기 또한 딴 세상이 있나보아......     三五七言 秋風淸 秋月明 落葉聚還散 寒鴉栖復驚 相思相見知何日 此日此夜難爲情 가을밤 가을 바람 맑아 달이 더 밝다 낙엽은 모였다 또 다시 흩어지고 놀란 까마귀 깃을 감돈다 못 잊어 그리는 정 언제나 펴 볼거나 이날 이밤사 말고 더욱 마음 졸이어.     백낙천 白 樂天(772-846) 이름은 居易, 樂天은 字다. 號는 香山, 섬서성 太原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詩를 지었다. 28살 때 進士에 급제, 秘書省 校書郞.翰林學士.左拾遺를 거쳐 810년에 京北部에 전임했다. 이듬해 어머니를 여의고 814년 중앙으로 들어갔으나 그 이듬해 참소를 당해 江州의 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이내 풀려 서울로 송환되어 太子贊善大夫가 되고, 822년 杭州刺使로 전출, 西湖에 이른바 白堤를 쌓고, 825년 蘇州刺使, 827년 秘書監을 지내고, 다시 河南尹.太子太傅.馮翊縣侯를 역임, 刑部尙書로 致仕했다. 만년에는 洛陽에서 香山의 중들과 교유, 그래서 號를 香山이라 한 것이다. 또 스스로 醉吟先生이라 일컬었다. 武宗 會昌 6년(846,신라 문성왕 8년) 8월에 죽었다. 그는 젊을 때부터 정치적 포부가 있어, 시를 짓는 데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사회 비판을 행했으나, 그의 주장이 용납되어지지 않자, 거문고와 술로 나날을 보내고, 시도 한적한 경지를 주로하는 소극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本領은 역시 사회 풍자에 있어, 그 방면의 걸작이 많다. 10首도 가혹한 세금으로 피폐해가는 농촌이며, 상하 빈부의 차가 심함을 노래한 것이다. 이와같이 그의 시풍은 쉽고 명쾌하여, 그의 친구 元 鎭과 함께 라 일컬었으며, 세상에 널리 애송되었다. 저서로 詩 3,800여 首 등이 수록된 71권이 있다.     琵琶行 潯陽江頭夜送客 楓葉萩花秋瑟瑟 主人下馬客在船 擧酒欲飮無管絃 醉不成歡慘將別 別時茫茫江浸月 忽聞水土瑟琶聲 主人忘歸客不發 尋聲闇問彈者誰 瑟琶聲停欲語遲 移船相近邀相見 添酒回鐙重開宴 千呼萬喚始出來 猶抱琵琶半遮面 轉軸撥絃三兩聲 未成曲調先有情 絃絃掩抑聲聲思 似訴生平不得志 低眉信手續續彈 說盡心中無限事 輕攏慢撚抹復挑 初爲霓裳後六么 大絃嘈嘈如急雨 小絃切切如私語 嘈嘈切切錯雜彈 大珠小珠落玉盤 閒關鶯語花底滑 幽咽流泉水下灘 水泉冷澁絃凝絶 凝絶不通聲漸歇 別有幽愁闇恨生 此時無聲勝有聖 銀甁乍破水漿迸 鐵騎突出刀槍鳴 曲終收撥當心畵 回絃一聲如裂帛 東船西舫悄無言 唯見江心秋月白 沈吟放撥揷絃中 整頓衣裳起斂容 自言本是京城女 家在蝦蟆陵下住 十三學得琵琶成 名屬敎坊第一部 曲罷常敎善才服 妝成每被秋娘妒 五陵年少爭纏頭 一曲紅綃不知數 鈿頭銀篦擊節碎 血色羅裙飜酒汚 今年歡笑復明年 秋月春風等閑度 弟走從軍阿姨死 暮去朝來顔色故 門前冷落車馬稀 老大嫁作商人婦 商人重利輕別離 前月浮梁買茶去 去來江口守空船 繞船明月江水寒 夜深忽夢少年事 夢啼妝淚紅欄干 我聞琵琶已歎息 又聞此語重喞喞 同是天涯淪落人 相逢何必曾相識 我從去年辭帝京 謫去臥病潯陽城 潯陽之僻無音樂 終歲不聞絲竹聲 佳近湓城地低濕 黃蘆苦竹繞宅生 其間旦暮聞何物 杜鵑啼血猿哀聲 春江花朝秋月夜 往往取酒還獨傾 豈無山歌與村笛 嘔啞嘲哳難如聽 今夜聞君琵琶語 如聽仙樂耳暫明 莫辭更坐彈一曲 爲君翻作琵琶行 感我此言良久立 郤坐促絃絃轉急 凄凄不是向前聲 滿座重聞皆掩泣 座中泣下誰最多 江州司馬靑衫濕 비파행 심양강 저문 날에 손을 보낼제 갈꽃 단풍잎에 갈 바람 불어 주인은 말을 내리고 손은 배에 올라 잔 들자니 피리도 거문고도 없어라 하염없이 잔 놓고 떠나려 할제 아득한 강물에 달이 적시어 문득 비파 소리 물을 타고 들려 와 주인도 손도 갈길을 잊었구나 비파 소리 따라서 타는 이 물어보니 소리는 끊쳤어도 미처 대답이 없어 배 저어 가까이 따라가 대고 등불 돌려 술을 다시 갖추어 놓고 천만번 부르니 겨우 나오는데 비파 안은채 수집어 고개를 숙여 줄 골라 두어 소리 투겨 보는데 제 가락 아니지만 어딘지 끌려 줄줄이 타는 소리 소리마다 생각이라 평생에 못 이룬 뜻 하소하는 듯하구나 머리 수그린채 비파를 손에 맡겨 덧없는 심사를 쏟아 놓는 듯 지긋이 눌렀다간 되쳐 투기니 예상 뒤이어 육요를 타누나 큰 줄을 쏟아지는 소낙비라면 작은 줄은 속삭이는 말소리 같아 큰 줄 작은 줄이 어울어지는 소린 큰 구슬 작은 구슬 옥반에 구는 소리 꽃 아래 주고 받는 꾀꼬리 소릴런가 흐느끼며 여울물을 돌아가는 시냇물 소리 높고 낮던 소리가 그 어디 엉기어 막힌채 이슥히 소리가 죽어 깊은 한 소스라쳐 일어나는데 되려 없는 소리가 한결 좋아라 은병이 깨져 쏟아지는 물 소리 철기가 뒤끓어 창칼 쓰는 소리 한 곡조 끝내고 줄을 투기니 네 줄이 한데 합쳐 비단 째는 소리 여기 저기 배에선 숨소리조차 없고 가을달만 희구나 강위에 희구나 흥 그리며 발목을 줄사이에 꽂고 옷깃을 여미며 고이 일어나서 스스로 하는 말이 서울 사는 계집으로 고향은 하막릉 아래이었노라고 열세살에 비파를 처음 배워 교방에 있었노라 이르드고 줄 골라 소리 내면 칭찬하는 소리 단장하고 나오면 추랑도 시새웠어 오릉에 사는 귀공자 서로 시새워 내 한 곡 끝나면 비단도 선사했다오 흥겨워 은비녀 비치개로 장단도 치고 술 엎질러 비단 치마 적셔도 봤소 해마다 이러여니 즐거이 보내며 가을달 봄바람을 그저 보냈소 아우는 수자리로 수양어머닌 저승으로 세월이 가고 오고 나도 또한 늙었고 문전엔 찾아 오던 말도 드물고 장사치의 아내가 되고 말았소 사랑보다 이끝에 밝은 장사친 지난달 차 사러 간 뒤 소식이 없고 강 가에 오가며 빈 배를 지키노라면 뱃전을 감도는 달빛 차게 빛나고 이슥한 밤 꿈꾸는 내 지난 청춘이며 흐느껴 우는 꿈에 눈시울도 뜨겁구나 내 듣노니 비파 소리 탄식일레라 중얼대는 그 소린 더욱 설어라 모두다 천애에 떠도는 외로운 사람 어쩌자고 만나서 알게 되었으리 지난 해 서울을 떠나온 이후 귀양살이 심양에 누운 몸이라 궁벽한 고장이라 풍류도 없어 해가 다하도록 한 곡조도 못 들었지 더더구나 나 사는 곳 습기가 많아 집을 싸고 갈과 대 우거졌지 왼종일 이곳에서 무슨 소리 들리리 두견이 피를 토하고 원숭이 슬피 울어 꽃 피는 봄 달 밝은 가을 밤에 흥겨우면 홀로 잔을 기울여 봐도 초동의 노래와 목동의 피리 뿐이여 제가락 찾아서 들을길 없더니 오늘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꿈결에 들려 오는 신선의 주악인듯 원하노니 그대여 한 곡조 더 타다오 그대를 위해 비파행 지으려거니 내 말에 느껴 이윽고 다시 일어나 줄 골라 비파를 급히 타누나 먼저보다 설어라 타는 그 소리 모두다 눈물없이 들을 길 없어 게서도 누가 가장 섧어하는가 내 옷깃 적시네 눈을 적시네     夜雨 早蛩啼復歇 殘燈滅又明 隔窓知夜雨 芭蕉先有聲 밤비 귀뚜라민 자꾸만 울어 예고 꺼질듯 등불이 다시 밝아라 창 건너 구슬픈 밤비 소리 파초에 흩뿌리며 지나가누나.     落花古調賦 留春春不駐 春歸人寂寞 厭風風不定 風起花蕭奈 낙화부 봄은 좋더라 머물지 않아도 저만 가고 우리만 남아 서럽지 바람은 싫더라 나는 싫더라 꽃샘에 지는 꽃이 어떻게 많다고......     池窓 池晩蓮芳謝 窓秋竹意深 更無人作伴 唯對一張琴 가을 저문날 못 가엔 연꽃 지는 소리 창 옆엔 댓잎도 가을을 머금어라 같이 거닐 사람도 없는 것을 혼자서 거문고를 대하는 마음.     古秋獨夜 井梧凉葉動 隣杵秋聲發 獨向檐下眠 覺來半牀月 가을밤 우물 가에 오동 잎새 바람에 나부끼고 옆집 다드미 소리 가을이 분명코나 처마 밑에 홀로 누워 어렴풋이 졸을 때 머리맡에 달빛이 소리 없이 흘러든다.     古墳 古墳何代人 不知姓與名 化爲路傍土 年年春草生 옛무덤 반남아 헐린 무덤 그 뉜줄을 몰라라 길가에 한줌 흙인데 해마다 풀만 우거져     買花 帝城春欲暮 喧喧車馬度 共道牡丹時 相隨買花去 단장 장안에 봄은 이미 저물어 오가는 차마도 시끄러운 속에 모란도 필 무렵이여 속삭이면서 꽃을 사 가는 이의 주고 받는 이야기.     晩望 江城寒角動 沙州夕鳥還 獨在高亭上 西南望遠山 만망 강기슭 성터에 각적이 들려 사주에 새들은 떼지어 돌아오고 홀로 정자에 올라서 보니 서남엔 산만 첩첩 쌓여 있구나.     宿樟亭驛 夜半樟亭驛 愁人起望鄕 月明何所見 潮水白茫茫 장정역에서 야반에 장정에 홀로 누워서 고향을 생각한다 먼 고향을 달은 밝아 휘영청 밝아 밀물도 끝없이 달빛에 젖는다.     賦得古原草送別 離離原上草 一歲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遠芳侵古道 晴翠接荒城 又送王孫去 萋萋滿別情 풀 언덕 위에 풀이 길 나마 우거져 해마다 시들고는 되 살아나     들불에도 풀은 타지 않나보이 봄바람 불면 그러기 돋아 나지     그윽한 향기 길에 스며 들고 옛성 가에도 푸른 빛 연연하다     너를 또 다시 보내고 나면 애끊는 정만 가득 넘쳐 흐른다.     두 보 杜 甫 (712-770) 唐나라 初期의 詩人. 字는 子美, 號는 小陵. 睿宗 太極 원년(712, 신라 선덕왕 11년)에 하남성 鞏縣에서 났다. 7살 때 이미 詩를 지을 줄 알았고, 14~5살 때에는 어였한 詩人이 되었다. 24살 때 進士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 이 때부터 10여년 동안 山東.洛陽.長安등지로 돌아다니며 李 白․高 適등과 깊이 사귀었다. 36살 때 玄宗의 부름을 받아 長安으로 가서 40살에 集賢院待制, 44살에 太子右衛率府의 兵曹參軍事가 되었다가 안녹산의 난리에 난을 피해 三川으로 달아 났다. 46살에 右拾遺가 되었으나 곧 좌천당해 華州의 司功參軍이 되었다. 기근때문에 생활이 곤란하여 벼슬을 버리고 泰州로 가서, 나무 열매를 주워 먹으며 목숨을 이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 20수가 있다. 代宗 大曆 5년(770, 신라 혜공왕 5년)에 湖南의 潭州, 岳州부근에서 病으로 죽었다. 나이 59세. 그의 시는 공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이다. 시집 20권에는 古體詩 399수, 今體詩 1,600수가 수록되어 있다.     登高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非回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鬢 潦倒新停濁酒杯 등고 바람도 높은 하늘인데 원숭이 설리 울고 흰 모래 적시우는 강엔 물새가 날아 끝없는 숲엔 우수수 낙엽지는 소리 다할 줄 모르는 강물은 굽이굽이 흘러라 또다시 이향에서 가을을 맞이하노니 오랜 시름 이길길 없어 홀로 대에 오르네 쓰라린 세월을 머리칼은 자꾸만 세어 늙어가는 외로움을 술로 풀어 보리.     春望 國破山何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춘망 나란 망했어도 산천은 있어 봄들자 옛 성터에 풀만 짙푸르다 한송이 꽃에도 눈시울이 뜨겁고 새소리 마음이 더욱 설렌다 봉화는 석달을 연달아 오르는데 진정 그리워라 고향 소식이여 흰머린 날로 짧아만지고 비녀도 되려 무거웁구나.     絶句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燃 今春看又過 何日時歸年 이 봄도 예이고 보면 파란 강물이라 나는 새 더욱 희고 산엔 타는듯 사뭇 꽃이 붉어라 올봄도 이대로 예이고 보면 어느때 고향엘 돌아가리. 贈花卿 錦城絲管日紛紛 半入江風半入雲 此曲衹應天上有 人間能得幾回聞 화경에게 금성에 풍류 소리 분분히 흘러 반은 강바람에 또 반은 구름 속에 이 가락 응당 하늘에 있을 것이 인간에 몇번이나 들려 오리까.     解悶 一辭故國十經秋 每見秋瓜憶故丘 今日南湖采薇蕨 何人爲覓鄭瓜州 고국을 떠나 고국을 떠나 온지 십년을 지나 추과 볼적마다 그리운 고향 오늘도 남호에 뜯는 고사리 주구를 위하여 정과주를 찾는다.     書堂飮旣夜復邀李尙書下馬月下賦 湖月林風相與淸 殘尊下馬復同傾 久拌野鶴如雙鬢 遮莫鄰鷄下五更 음주 호수엔 달이 밝고 숲에는 맑은 바람 말 내리자 남은 술 다시 기운다 버려둔 수염은 그대로 학을 닮았는데 닭은 덧없이 오경을 아뢰는구나.     貧交行 飜手作雲覆手雨 紛紛輕薄何須數 君不見管飽貧時交 此是今人棄如土 빈교행 손을 두집으면 구름 되고 엎으면 비라 경박한 세사를 어찌 다 헤아리리 그대도 보았으리 관포의 사귄 것을 인제는 그 길을 버렸어 흙같이 버렸어.     도연명 陶 淵明 (365-427) 이름은 潛, 淵明은 그의 字다. 東晋 哀帝 建元 원년(365, 신라 내물왕 10년) 심양의 柴桑에서 났다. 어릴 때부터 榮利를 생각하지 않고 글읽기를 좋아했다. 부모는 늙고 집안은 가난하여, 주의 際酒가 되었으나 마음에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덜아왔다. 35살 때 다시 彭澤의 수령이 되었으나, 고을의 督郵가 오게 되어, 이속들의 말이, 의관을 정제하고 뵈어야 한다 하므로, “내 어찌 5말 쌀을 위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히랴”하고, 그자리에서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저 유명한 를 지었다. 뒤에 또 著作郞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술과 국화를 즐기며 지내다가, 文帝 元嘉 4년(427, 신라 눌지왕 11년) 63살로 죽었다. 세상에서 그를 靖節先生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는 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깊은 의취가 있다. 그는 낙천주의자였고, 또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8권이 있다.     歸去來辭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惆悵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自之可追 實迷塗其未遠 覺今是而昨非 舟搖搖以輕颺 風飄飄而吹衣 問征夫以前路 恨晨光之熹微 乃瞻衡宇 載欣載奔 僮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荒 松菊猶存 携幼入室 有酒盈樽 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 園日涉以成趣 門雖設而常關 策扶老以流憩 時矯首而游觀 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 歸去來兮 請息交以絶游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 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于西疇 或命巾車 或棹孤舟 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木欣欣以向榮 泉涓涓而始流 善萬物之得時 感吾生之行休 已矣乎 寓形宇內復幾時 曷不委心任去留 胡爲乎遑遑欲何之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耔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귀거래사 자, 돌아가련다.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제껏 자신의 존귀한 정신을 천한 육체의 노예로 삼았으나 어찌 슬퍼 탄식하여 홀로 서러워 하리 지나간 인생은 후회해도 이미 쓸데 없음을 깨달아 장래 인생을 쫓아 갈 수 있음을 알았네 실상 내가 인생길을 갈팡질팡한 것은 오래지 않았나니 지금이 바른 삶이요, 어제까지 그릇됨을 알았네 고향가는 배는 흔들흔들 움직여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솔솔 옷깃에 불어 온다 길손애게 고향이 얼마나 머냐고 물어 보며 새벽빛 아직 희미하여 길 떠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마침내 우리 집 대문과 지붕을 보고 기뻐서 뛰어갔네 머슴들도 기뻐 마중나왔고 꼬마들은 대문께서 기디리고 있네 집 마당의 세 줄기 오솔길은 황폐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나를 반기어 꼬마 손을 끌고 방에 들어가니 술이 가득 독에 담겨 항아리와 잔을 끌어당겨 혼자 마시며 마당의 나무 보고 웃음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내키는대로 움직이고 무릅이나 들어갈 좁은 방이라도 편안히 있음을 알았네 동산은 날마다 취향있는 경치로 바뀌고 대문은 달았으나 언제나 닫힌 채로다 지팡이 짚어 늙은 몸 부축하여 걷다가는 쉬고 때때로 머리 들어 주위를 살핀다 구름은 산 굴속에서 나와서는 흘러가고 새는 날기가 싫어져 둥지로 들어가네 저녁 햇빛 그늘져 서산에 지려하고 나는 마당의 외솔을 쓰다듬으며 거니네.     돌아가련다. 세상 사람과 교유를 끊고 세상과 나는 서로 잊고 말지니 다시 한번 관리가 되어도 거기 무슨 구할 것이 있으료 친척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지우련다 농부가 찾아와 애게 봄소식 알려 주니 이제는 서쪽 밭에 갈이를 시작하자 어떤 때에는 장식한 수레를 명하고 어떤 때는 한 척의 배를 노저으리니 작은 배 저어 깊은 시내 골짜기를 찾아가고 장식한 수레 타고 험한 언덕 나아가리라 길가의 나무는 생기있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흘러 가네 모든 만물 봄을 기뻐 맞이하고 내 생은 곧 사라짐을 느끼네 아 그저 그런 것인가 육체가 이 세상에 깃드는 것이 얼마 동안이리오 어찌 마음이 명하는대로 생사를 운명에 맡겨 두지 않으며 어찌 이제 와 덤벙거리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 돈도 지위도 내 바라는 바 아니요 신선의 세계도 기약할 수없네 따뜻한 봄볕을 그리워하여 홀로 산과 들 거닐고 또한 지팡이 세워 두고 밭의 풀을 뽑는다 아님 동편 언덕 올라가 느긋히 시를 읊고 맑은 강물 흐르는 곳에서 시를 짓는다 하늘에 맡겨 죽으면 죽으리니 천명을 즐기며 살면 그뿐, 근심할 일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歸園田居 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 誤落塵綱中 一去三十年 전원에 돌아와서 차라리 허튼 세상엔 뜻도 아니 맞았어 어쩌자고 나는 산이 자꾸만 그리운 것이냐 보살필 일도 없는 것을 헤매이다간 그대로 서른 해가 섬적 지나깠구나. (귀원전거 6수중 한구절)     擬挽歌辭 千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 만가에 비겨서 오랜 세월이 흘러간 이후 뉘 있어 너와 나의 이야길 하리 오직 한되는 일이 남아 있노라 세상엔 내 마실 술이 그리도 없거니와.     飮酒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국화 따 들고 동녘 울밑에 심은 국화 제철이여 따든채 남산을 조용히 바라보노니 해질 무렵 먼 산은 진정 아름다워라 저물어 뭇새들도 깃 찾아 돌아오고 여기 우리 살며 느끼는 끝없는 기쁨이 있어라 무어라 이것을 모집어 이를길도 없구나.     맹호연 孟 浩然(689-740) 당나라 盛時의 詩人. 이름은 浩, 字는 浩然. 中宗 嗣聖 6년(689,신라 신문왕 9년) 호북성 襄陽에서 났다. 鹿門山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시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다가, 40살 때 서울로 나와 진사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뒤에 大學에서 시를 강의했는데 학생들은 그의 박식함에 경탄했다. 張九齡 등과 가까이 사귀었다. 등창이 나서 고생하다가 玄宗 開元 28년(740,신라 효성와 4년) 52살에 죽었다. 그의 시는 自然美나 靜寂의 경지를 노래한 것이 많은데, 특히 五言詩에 뛰어났다. 4권이 있다.     洛陽訪袁拾遺不遇 洛陽訪才子 江嶺作流人 聞說梅花早 何如此地春 그대는 가고 낙양에 그댈 찾아 가니 강령으로 떠난 지 오래더고 매화 피는 철도 이르다지만 어찌 낙양의 봄만 하오리.     臨洞庭 八月湖水平 涵虛混太淸 氣蒸雲夢澤 波撼岳陽城 欲濟無舟楫 端居恥聖明 坐觀垂釣者 徒有羨魚情 동정호에서 팔월달 호수가 잔잔도 하이 하늘도 물에 잠겨 더욱 맑아라 운몽못 가에 물안개 자욱하고 물결은 악양성 향하고 흘러 건너고 싶어도 배엔 노가 없으니 묻혀 살기엔 성덕이 부끄럽다 낚시질하는 옆에 덧없이 앉아 헛되이 고기를 부러워하는 마음     義公禪房 夕陽連雨是 空翠落庭陰 看取蓮花淨 方知不染心 단장 해 지자 몰려 가는 빗발 따라 푸른 산 그리매 뜰에 들고 조촐한 연꽃 바라보니 물들지 않은 마음 알아 즐겁다.     送杜十四之江南 荊吳相接水爲鄕 君去春江正水茫 日暮孤舟何處泊 天涯一望斷人腸 두십사를 보내는 노래 형오랑 강남이라 모두 다 수향이래 그대 떠난 뒤 강물만 아득한데 해 지자 외로운 배 어느 곳에 멈추리 하늘가 바라보면 마음 더욱 애달퍼.....     왕 유 王 維 (699-759) 字는 摩詰, 산서성 太原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詩名을 날려, 12살에 진사에 급제하여 大樂丞이 되었으나, 이내 산동으로 좌천당했다. 얼마후에 벼슬을 버리고 서울 장안의 근교 輞川에 땅을 사 가지고 은사의 생애를 보냈다. 31살에 아내를 잃고나서는 독신행을 계속하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했다. 735년 37살 때 張九齡에 의해 右拾遺에 발탁, 차차 벼슬이 높아져서 752년에는 吏部郎中, 756년에는 給事中에 이르렀고, 시명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곧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그 해 6월 장안이 함락되고 그는 적에게 잡혔다. 난이 평정된 뒤에 복직되어 759년에는 尙書右丞이 되었으나, 그해 61살로 죽었다. 그는 李 白이나 杜 甫에 비하면 마음이 약하여, 현실의 汚濁에 초연할 수도 없고, 반항할 수도 없어, 청정한 자연과 西方往生의 사상에 도피하여 裵 迪․錢 起등과 사귀면서, 평범한 그러나 순수한 정신을 시와 그림에 담았다. 저서에 20권, 6권이 있다.     斷章 天寒遠山淨 日暮長江急 단장 추운 하늘인데 먼 산 씻은듯 맑고 해 지자 강물 소리 더욱 잦이다.     過香積寺 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峯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鍾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薄暮出潭曲 安祿制毒龍 향적사를 지나며 알길 없어라 향적사 가는 길은 몇 리를 들어가도 구름 덮인 산이로고     나무는 길이 넘고 인적도 끊첬는데 깊은 산 어드메쯤 들려 오는 종소린가     흐르는 물 소리는 돌에 걸려 흐느끼고 산 깊어 푸른 솔에 햇볕도 서늘하다     해설피 여울 물 소리만 들려 오는데 선정에 들으니 알 길 없어라.     送沈子福之江南 楊柳渡頭行客稀 罟師盪槳向臨圻 唯有相思似春色 江南江北送春歸 심자복을 강남으로 보내며 버들 우거진 나룻가엔 행인도 드문데 어부는 노 저어 한가히 포구로 간다     다만 못 잊는 정 봄빛처럼 한없는데 강남북으로 찾아온 봄을 보내는듯 하구나.     竹里館 獨坐幽竹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죽리관 홀로 고요한 대숲에 앉아 거문고 뜯다간 휘파람도 불어 보고 깊은 수풀이라 아는 이는 없어도 달빛이 소리 없이 비쳐 오도고......     雜詩 已見寒梅發 復聞啼鳥聲 愁心視春草 畏向玉階生 춘수 (春愁) 벌써 한매도 피어 나고 새 소리도 들려 오고 우거진 풀을 보면 더욱 시름겨워 층층계 덮으니 이렇게 슬플밖에     鹿柴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녹시에서 빈 산에 사람 기척 없는 데 간간이 들려 오는 말소리 있어 비낀 햇볕 먼 숲에 맑고 푸른 이끼 더욱 짙푸르게 빛난다.     雜詠 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 來日倚窓前 寒梅著花未 잡영 그대 고향에서 돌아왔거니 응당 고향 일을 알으렸다 올 무렵 우리집 창 옆엔 하마 매화꽃이나 피었던가     送別 下馬飮君酒 問君何所之 君言不得意 歸臥南山陲 但去莫復問 白雲無盡時 송별 말을 내려 그대여 술을 마시라 묻노니 그댄 어디로 가느뇨 그대 말하기를 뜻을 얻지 못하여 남산 기슭으로 돌아간다 하거니 다못 가라 다시 묻질랑 말아라 흰구름 항상 끝날 줄이 있으리.     送元二使安西 渭城朝雨浥更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盡一一酒 西出陽關無故人 이별의 노래 위성 아침 비에 먼지만 개었구나 객사엔 파릇파릇 버들잎이 푸르러라 임이여 다시 한잔 마시고 떠나시라 관문을 나서면 뉘 있어 또 찾으리.     九月九日憶山東兄弟 讀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遙知兄弟登高處 徧揷茱萸少一人 여수 홀로 타향에 외론 손 되어 명절이면 어버이 더 그리워라 형이랑 아우랑 같이 오르던 언덕에 수유를 꽂고 놀던 한사람이 줄었겠다.     春桂問答 問春桂 桃李正芳菲 年光隨處滿 何事獨無花 春桂答 春華詎幾久 風霜搖落時 獨秀君知不 춘계문답 계수나무여 도화 이화 향그러워 봄빛 간데마다 무르녹는데 그대만 홀로 꽃이 없는가     계수나무 대답하길 언제까지 도화 이화 꽃이 피리 낙엽이 우수수 지는 가을엔 내 홀로 꽃피는 것 그대 아는가     臨高臺 相送臨高臺 川原杳何極 日暮飛鳥還 行人去不息 별리 보내고 돌아서서 고대에 다다르니 산천은 끝닿은 델 알길 없어라 저문날 새들도 깃 찾아 오는데 떠난인 쉬어 가는 흔적도 없어......     소동파 蘇 東坡(1036-1101) 宋代의 詩人. 字는 子瞻, 이름은 軾, 東坡는 號다. 仁宗 景祐 3년 (1036, 고려 정종 2년) 사천성 眉山에서 태어났다. 22살 때 아우 蘇 轍과 함께 과거에 급제, 곧 代理評事簽書에 임명되고, 다시 鳳翔判官에 제수되었다. 神宗때 王安石과 의견이 맞지 않아, 지방으로 나가 杭州通判이 되었다가, 이어 密州.徐州.湖州등지를 맡아보았다. 이 무렵 이미 그의 文名이 높아서 소인들의 싫어하는 바 되어, 44살 때 마침내 黃州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동쪽 언덕(東坡)에 집을 짓고 거처하면서 스스로 東坡居士라 일컬었다. 哲宗이 즉위하자 吏部尙書가 되었다가, 곧 潁州지사가 되고 뒤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兵部尙書, 禮部尙書를 역임, 翰林 侍讀의 양 學士를 兼했으나, 紹聖初에 또 반대파에 모함당해 瓊州로 귀양가 다시 永州로 옮겨왔다가 뒤에 사면되어 돌아왔는 데, 徽宗 建中靖國 원년(1101, 고려 숙종 6년) 7월28일, 常州에서 66살에 죽었다. 高宗때 太師를 追贈, 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儒․佛․道에 다 통했고, 시는 음률이나 詩句에 구애받지 않아 자유분방하다. 이 있다.     東欄梨花 梨花淡白柳深靑 柳絮飛時花滿城 惆悵東欄一株雪 人生看得幾淸明 배꽃에 부쳐 배꽃 담백한데 버들잎 짙푸르다 버들개지 흩날리고 꽃은 만발하고 난간엔 서러운듯 하얀 꽃송이 보고 지고 몇해나 보낼 것인가.     春夜 春宵一刻直千金 花有淸香月有陰 歌管樓臺聲細細 鞦韆院落夜沈沈 봄밤 봄밤은 그대로 일각도 천금이여 꽃 향기 그윽한데 달도 밝어라 풍류에 섞인 노래 멀리 들려 오고 그네 소리에 쩌른 밤 깊어 가누나.     縱筆 寂寂東坡一病翁 白鬚蕭散滿霜風 小兒誤喜朱顔在 一笑邪知是酒紅 종필 적막하다 동파에 병든 늙은이 흰수염 소조히 바람에 날린다 어린앤 붉은 얼굴보고 기뻐하건만 내 술에 취한 것을 어찌 알으리.     왕창령 王 昌齡 (?-755) 섬서성 長安에서 났다. 726년 進士, 방만한 성격 때문에 여러 번 좌천당했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살해당했다. 李 白과 아울러 일컫는 七言絶句의 명수로서, 閨怨의 작품이 많다. 高 適.王之渙등과 사귀었다. 시집에 5권, 1권이 있다.     西宮秋怨 芙蓉不及美人妝 水殿風來珠翠香 郤恨含情掩秋扇 空懸明月待君王 추원 부용도 미인엔 따를길 없는데 수전 드는 바람에 향기만 그윽하다 문득 품은 정 풀길도 없어 휘영청 밝은 달에 임이 더욱 그립다.     閨怨 閨中少婦不知愁 春日凝妝上翠樓 忽見陌頭楊柳色 悔敎夫婿覓封侯 원한 규중에 젊은 아가씨 시름을 몰라 봄단장 고이하고 누대에 오르니 멀리 푸른 버들 우거진 언덕이 보여 벼슬살이 나간 임 보고파 뉘우침 새롭다.     出塞行 白草原頭望京師 黃河水流無盡時 秋天曠野行人絶 馬首東來知是誰 출새행 백초 우거진 원두에서 서울을 바라보니 황하는 굽이굽이 그칠 길이 없구나 가을날 빈 벌엔 인적도 끊쳤는데 말 머리 동으로 두르는 뜻을 뉘 알으리.     從軍行三首 一. 烽火城西百尺樓 黃昏獨坐海風秋 更吹羌笛關山月 無那金閨萬里愁 二. 靑海長雲暗雪山 孤城遙望玉門關 黃沙百戰穿金甲 不破樓蘭終不還 三. 秦時明月漢時關 萬里長征人未還 但使龍城飛將在 不敎胡馬度陰山 종군행 삼수 1. 누대 드높은 성 밖엔 봉화 타는데 해 지자 해풍은 가을을 싣고 온다 관산 걸린 달에 대피리도 구슬퍼 그리운 네 생각에 시름은 만리 간다.     2. 청해 덮은 구름 설산도 어두운데 성 밖엔 옥문관도 아득하여라 황사 싸움에 갑옷도 해졌는데 누란땅 치기 전엔 돌아가지 않으리.     3. 진한이 바뀌어도 관을 못넘어 만리 전야에 떠난인 아직 오지 않고 용성 땅엔 비장이 지키고 있거니 호마로 하여금 음산을 넘게 하리.     送別魏三 醉別江樓橘柚香 江風引雨入船凉 憶君遙在湘山月 愁聽淸猿夢裏長 위삼을 보내며 취한 채 이별하는 강가에 귤 냄새 풍긴다 강바람 비를 이끌어 배에 들어오고 생각하면 그댄 상산 달 아래에서 잔나비 소리에 시름도 꿈속에 잠기리.     西宮春怨 西宮夜靜百花香 欲捲朱簾春恨長 斜抱雲和深見月 朧朧樹色隱昭陽 서궁춘원 서궁에 밤들자 꽃 향기 그윽하고 발을 걷기에도 마음 설렌다 거문고 비스듬이 안고 달을 바라보니 숲은 어둠 속에 소양궁을 가렸구나.     題覇池 腰鎌欲何之 東園刹秋韭 世事不復論 悲歌和樵叟 비가 낫을 허리에 차고 어디메로 가는가 부출 베러 밭으로 가노니 인젠 뜬 세상일 또다시 이야기 않으리 슬픈 노래를 저 초동에게 부치고.......     두 목 杜 牧 (803-853) 당나라 말기의 시인. 字는 牧之, 號는 樊川. 德宗 貞元 19년(803, 신라 애왕 4년) 섬서성 장안부근에서 났다. 26살때 진사, 현량과에도 급제했다. 宣宗 大中 6년(852,신라 문성왕 14년) 에 50살로 죽었다. 성질이 강직하고 호방하여 장군 재상을 역임했다지만 항상 즐겁지 못해 시문에 그 심정을 담고, 양주 진주등 당시에 유명한 환락지를 떠돌아다녔다. 杜 甫를 大杜라 함에 대하여, 杜 牧은 小杜라 일컬었다. 시집은 20권, 1권, 1권이 있다.     題安州浮雲寺樓寄湖州張郎中 去夏疎雨餘 同倚朱欄語 當時樓下水 今日到何處 恨如春草多 事與孤鴻去 楚岸柳何窮 別愁紛若絮 장낭중에게 부치는 노래 지난 여름 비개인 어느날 난간에 기대어 서로 이야기하던 우리 그날 다락 아래 흘러가던 물 시방은 어디메쯤 흘러갔으리 가실줄 모르는 상채긴 사뭇 봄 풀처럼 우거지고 생각하면지난 일 기러기처럼 모두 날아가 강가에 버들 멀리 늘어섰는데 애달퍼라 그대 생각하는 이 시름이여.     經闔閭城 遺蹤委衰草 行客思悠悠 昔日人何處 終年水自流 孤烟村戌遠 亂雨海門秋 吟罷獨歸去 風雲盡慘愁 합려성을 떠나며 옛 성터에 풀은 시들어 지나는 나그네 애달퍼라     나의 사람아 그대 지금 어딘가 강물만 소리 없이 흘러 가누나     수자리에 연기만 멀리 흐르고 해문에 흩뿌리는 가을비 어지러워......     노래도 끝난 뒤 혼자 돌아가노라면 하늘에도 시름은 사무치는듯......     別離 多情却似總無情 唯覺樽前笑不成 蠟燭有心還惜別 替入垂淚到天明 별리 다정도 병인양하여 그리운 정을 잔들고 바라봐도 웃음은 걷고 이별은 촛불도 서러운 탓에 기나긴 밤 저렇게 울어 새우지........     泊秦淮 煙籠寒水月籠沙 夜泊秦淮近酒歌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 진회에서 연기도 달빛도 모두다 자욱한데 밤 들자 진회 가까운 주막에 드니 장사치 계집애는 나라 망한 한을 몰라 강을 건너 시방도 후정화를 부른다.     淸明 淸明時節雨紛紛 路上行人欲斷魂 借問酒家何處有 牧童遙指杏花村 청명 청명절 비가 마구 쏟아져 길가는 사람도 넋을 잃었다 주막은 어디멘가 목동에게 물으니 멀리 가리키는 살구꽃 핀 마을.     위 장 韋 莊 (?-910) 五代 前蜀의 詩人. 字는 端己, 섬서성 長安 杜陵에서 났다. 黃 巢의 난리에 서울 장안에서 전란의 참혹한 꼴을 보고, 이듬해 낙양으로, 다시 강남으로 피난을 가, 여기서 10년 동안 불우한 생애를 술과 여자로 달래다가,893년 서울로 돌아가 이듬해 진사에 급제, 校書郞에 임명되었다. 900년 경에 蜀에들어가 정치․문학에 전념 907년 吏部尙書平章政事가 되었다가, 910년 城都에서 죽었다. 강남에 있을 때의 작품은 대개 환락․퇴폐․自嘲의 심정을 노래한 낭만적인 것이 많다. 시집에 10권이 있다.     白牧丹 閨中莫妬新粧婦 陌上須慙傳粉郎 昨夜月明深似水 入門唯覺一庭香 백모란 백모란엔 규중 여인도 시새워하리 풍류랑도 또한 부끄러울 것을 지난 밤 달은 물같이도 밝아 뜰에 들자 선뜻 오는 그윽한 향기.     春日晏起 近來中酒起常遲 臥見南山改舊詩 開戶日高春寂寂 數聲啼鳥上花枝 봄 아침 연달아 마시는 술이 몸에 배어 진정 일어나기 싫어라 자리에 누운채 남산을 바라보며 묵은 시를 뒤저기노니 문 열자 해는 높아 봄날은 적적하고 멀리 들려 오는 새소리 더욱 고요하여라.     古別離 晴煙漠漠柳毿毿 不那離情酒半酣 更把玉鞭雲外指 斷腸春色在江南 별리 막막한 연기 새로 버들가지 휘날린다 떠나는 정 어쩌지 못하여 반남아 술에 취해 옥 채찍 다시들고 구름 밖을 가리키니 애끊는 봄빛도 강남으로 강남으로.     東陽酒歌贈別 天涯方歎異鄕身 又向天涯別古人 明日五更孤居月 醉醒何處各沾衣 나그네 떠도는 나그네 그대 마저 여의고 내일 밤 새벽 달을 어디서 보리.     金陵圖 江雨霏霏江草齊 六朝如夢鳥空啼 無情最是臺城柳 依舊烟籠十里堤 봄 보슬비에 강도 풀도 모두 젖는데 지난 날은 꿈이런지 새만 우짖어 무심한 봄에도 버들은 늘어져 십리 긴 뚝에 연기처럼 푸르구나.     잠 삼 岑 參 (?-?) 南陽사람.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중에서도 학문을 힘써, 唐詩의 극성 시기에 활약한 詩人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代宗때 嘉州刺史를 지내고, 幕職使로 있다가 파면되어 蜀으로 귀양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시는 말과 뜻이 淸切하여 뛰어난 걸작이 많은데, 한편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베꼈다고 한다. 시집 8권이 있다.     見渭水思秦川 渭水東流去 何時到雍州 憑添兩行淚 寄向故園流 애가 위수는 동녘으로 흘러가는데 언제 옹주를 찾아간단 말이냐 덧없이 지는 애 눈물을 실어 고향엘 찾아가는 물결에 부치리.     磧中作 走馬西來欲到天 辭家見月兩回圓 今夜不知何處宿 平沙萬里絶入煙 사주에서 달리는 말 서녘으로 하늘도 아득한데 떠나와 달은 두번 다시 차고 이울어도 오늘 밤 잠자리는 찾을 길도 없구나 인적도 없는데 연기조차 끊쳤어.....     斷章 海暗三山雨 花明五嶺春 단장 삼산에 오는 비 바다를 가렸는데 봄이라 영 위엔 꽃도 밝구나.     蜀葵花 昨日一花開 今日一花開 今日花正好 昨日花已老 촉규화 어제도 꽃피더니 오늘도 꽃이 피네 오늘 핀 꽃 애틋한데 어제 핀 꽃 이울었어.......     行軍九日思長安故園 强欲登高去 無人送酒來 遙憐故園菊 應傍戰場開 중양에서 산에 오르리 높은 산에 오르리 술 보내 올 친구도 없는 것을...... 생각은 먼 고향 국화에 부치노라 비오듯 살은 가도 꽃은 피었으리.     한 악 韓 偓 (?-?) 9세기경 詩人. 字는 致光, 섬서성 長安에서 났다. 889년 進士가 되고 昭宗때 兵部侍郞.翰林學士를 역임했다. 뒤에 朱全忠에 반대하여 좌천당했다가, 905년 복직의 허락이 있었으나 入朝하지 않고 남쪽으로 갔다. 閨房 婦女의 媚態와 戀情을 주제로한 妖艶한 작품이 많다. 시집에 3권이 있다. 그의 작품과 같은 시를 香奩體라고 하는 것은 이 詩集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效崔國輔體 雨後碧苔院 霜來紅葉樓 間階上斜日 鸚鵡伴人愁 비 뒤에 비 걷자 이끼 더욱 짙푸르고 서리철 단풍이 한결 붉어라 층층계엔 누엿누엿 해가 저물고 잔시름 알아채는 앵무로구나.     效崔國輔體 羅幕生春寒 繡窓愁未眠 南湖夜來雨 應濕採蓮船 밤비 엷은 창창으론 추운 봄이여라 창 아래 시름겨워 잠 못 이루는데 남호에 밤비가 촐촐히 내려 연 따는 배에도 후줄그니 젖으리.     效崔國輔體 澹月照中庭 海棠花自落 獨立俯閑階 風動鞦韆索 달밤에 푸른 달빛 뜰에 들어 해당화는 소리 없이 지고 홀로 층층계에 서성거리니 가는 바람에 그네줄 흔들린다.     장약허 張 若虛 (?-?) 唐나라 초기의 詩人. 楊州사람으로, 연주의 兵曹가 되어 賀知章․張 旭․包 融 등과 吳中의 四士라 일컬었는데, 이에는 이설이 있다. 시집도 전해 오는 것이 없고, 다만 가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유일한 것이다.     春江花月夜 春江潮水連海平 海上明月共潮生 艶艶隨波千萬里 何處春江無月明 江流宛轉遶芳甸 月照花村皆似霰 空裏流霜不覺飛 汀上白沙看不見 江天一色無纖塵 皎皎空中孤月輪 江畔何人初見月 江月何年初照人 人生代代無窮已 江月年年望相似 不知江月照何人 但見長江送流水 白雲一片去悠悠 靑楓浦上不勝愁 誰家今夜扁舟子 何處相思明月樓 可憐樓上月徘徊 應照離人粧鏡臺 玉戶簾中卷不去 擣衣砧上拂還來 此時相望不相聞 願隧月花謝照君 鴻雁長飛光子度 魚龍潛躍水成文 昨夜閑潭夢落花 可憐春半不還家 江水流春去欲盡 江潭落月復西斜 斜月沈沈藏海霧 碣不瀟箱無限路 不知乘月幾人歸 落月搖情滿江樹 달노래 강물은 사뭇 먼 바다에 연닿아 아득하고 바다 위엔 달이 밝아 물결도 눈부시다     굽이굽이 물결은 천만리로다 어디멘들 강물에 이 달빛 흐르리     강물은 흘러흘러 푸른들 돌고 꽃수풀 우거진데 달빛은 눈과 같아     소리 없이 오는 서리 알길 바이 없고 강가에 흰 모래도 보이지 않아     하늘도 강도 분간할 길 없는데 달빛만 외로이 휘영청 흘러라     강기슭에 저 달을 누가 먼저 보았으리 저 달이 처음으로 언제 사람을 비쳤으니     끊칠줄 모르고 이어사는 인생이거니 해마다 강에 비치는 달과 다르리     알길없어라 저 달은 누굴 비치는가 다만 흐르는 물 보내는 아득한 강인데     흰구름 소리없이 흘러가고 이 포구에 잔시름 이길길 없구나     그 뉘가 이 밤을 배에서 새우는가 어디메 다락엔 달 보고 애끊니니     설어라 다락엔 달빛만 흘러들고 그대의 거울을 소리없이 비치리니     발을 말아도 달빛은 흘러 오고 쫓아도 찾아와선 다드밋돌에 들어     서로 바라봐도 아무런 기척 없고 달 따라 그대 있는 곳 비치어 지고     기러기 길게 날아 달빛을 가리는가 물고기도 이 밤엔 유난히 뛰는구나     그리운 그대여 난 지는 꽃을 꿈꾸며 반남아 봄은 가도 갈길은 몰라     강물도 봄을 싣고 흘러 가는데 소리 없이 지는 달도 서녘에 기울어     달 기울자 바다는 안개에 싸여 남북으로 한없이 아득한 길     저 달 따라 몇몇이 고향엘 갔는가 지는 달만 강가의 숲을 적시네.     유장경 劉 長卿 (?-?) 세기말의 詩人. 字는 文房, 하북성 河間에서 났다. 733년에 進士, 玄宗 至德 연간에 監察御史가 되었다가, 상관과의 사이가 나빠, 지방으로 좌천, 벼슬이 隨州刺史로 그쳤다. 王 維의 영향을 받아 五言詩를 잘 지었으며, 시집에 10권이 있다.     重送裴郞中貶吉州 猿啼客散暮江頭 人自傷心水自流 同作逐臣君更遠 靑山萬里一孤舟 별리 원숭이 울어 예고 손은 떠나고 서러워라 부두에 날은 저문다 사람은 사람이기에 서러워하고 물은 물이기에 흘러가는 게지 그대와 더불어 쫓긴 몸인데 더 멀리 떠나는 그대로구나 청산은 아득한 천리 만리여 또다시 뱃길을 언제 가려나.     酬李穆見寄 孤舟相訪至天涯 萬里雲山路更賖 欲掃柴門迎遠客 靑苔黃葉萬貧家 이 목에게 부치는 노래 뱃길도 아득한 먼 하늘 가 그대는 이렇게 찾아왔구려 구름에 첩첩 싸인 머나먼 산길 그대는 이렇게 찾아왔구려 사립문 조촐히 쓸고 또 닦아 멀리 온 그대를 맞아들이리 가난이 무르녹는 나의 집이라 푸른 이끼 누른 잎을 그대께 뵈리라.     彈琴 冷冷七絃上 靜聽松風寒 古調雖自愛 今人多不彈 탄금 거문고 고요한 소리 일곱 줄을 오가는데 멀리 들려 우는 솔바람 소리 추워라 옛 곡조 내 비록 사랑하지만 지금은 타는 사람 드물어 한이여.     過鄭山人所居 寂寂孤鶯啼杏園 寥寥一犬吠桃源 落花芳草無處尋 萬壑千峰獨閉門 그대 집을 지나며 외로운 꾀꼬리 살구꽃 새에 울고 복사꽃 핀 골엔 개가 짖는다 꽃입파리 바람에 흩날리는데 깊은 산 외론 집엔 문도 닫혔어.     逢雪宿芙蓉山 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 눈 오는 밤 저문 날 푸른 산 더욱 멀고 하늘도 추운데 뼈저린 가난이여 사립문 밖엔 개 짖는 소리 눈보라 속에 누가 오는가.     유우석 劉 禹錫 (772-842) 字는 夢得, 代宗 大曆 7년 강소성 中山에서 났다. 貞元 9년에 進士, 監察御史가 되었다. 806년 憲宗이 즉위, 후에 連州刺史로 좌천, 다시 朗州로 밀려났다. 이 때 10여편을 읊었다. 그는 다시 播.連.和.蘇.汝등의 여러 주로 전전하기를 10년, 소환되어 太子賓客이 되고, 뒤에 檢校禮部尙書가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白居易와 친히 사귀었고, 五言詩에 능하여 그의 작품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그의 시풍은 민요풍의 소박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또 南蠻 땅의 풍토를 주제로한 것이 많이 있어, 당시중 특이한 작품이라고 한다. 시문집에 30권, 10권이 있다.     烏衣巷 朱雀橋邊野草花 烏衣巷口夕陽斜 舊時王謝堂前燕 飛入尋常百姓家 오의항 주작교 변두리에 들꽃이 피고 옛 거리에 지는 해 비꼈어라 옛날에 날아들던 제비떼들은 시방은 농부의 집을 오락가락하누나.     浪淘沙詞 鸚鵡洲頭浪颭沙 靑樓春望日將斜 銜泥燕子爭歸舍 獨自狂夫不憶家 낭도사사 앵무주 기슭엔 모래 씻는 물소리 임 계신 곳 바라보니 해는 이미 기울고 제비도 흙물고 자꾸 돌아가는데 그대는 오늘도 집이나 생각는가.     秋風引 何處秋風至 蕭蕭送雁群 朝來入庭樹 孤客最先聞 가을 바람 어디서 불어 오는 가을 바람이기에 소소히 기러기뗄 보내 오는가 바람은 뜰에 들어 나무잎 흔들린다 혼자서 들어 예는 나그네 마음.     秋思 自古逢秋悲寂寥 我言秋日勝春朝 空晴一鶴排雲上 便引詩情到碧宵 가을날 가을은 서럽다 일러 오지만 나는 봄도곤 가을이 좋아 학은 구름을 헤치고 날아 가는데 생각도 푸른 하늘 멀리 흐르네.     가 도 賈 島 (777-841) 字는 浪仙, 范陽사람. 처음에 중이 되어 號를 無本이라 하고 법건사에 있었는데, 뒤에 京兆尹 韓 愈에게 그 시재를 인정받고 환속하여 변변찮은 벼슬자리에 앉았다. 일찌기 의 句를 얻어, 推자로 할 것인지 敲자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해 몹시 애를 먹었다는 일화가 있고, 그래서 지금도 시문을 다듬는 것을 推敲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하루 시를 짓지 않으면 마음이 말라 붙어 낡은 우물과 같이 된다”고 했다. 시집은 10권이 있다.     尋隱者不遇 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心不知處 그대를 찾아서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면 스승은 약을 캐러 갔노라고 다만 이 산중에 있으련만 골마다 구름이라 알길 없구나.     三月晦日贈劉評事 三月正當三十日 風光別我苦吟身 共君今夜不須睡 未到曉鍾猶是春 전춘사(餞春詞) 봄도 막가는 삼월 그믐인데 계절은 저만 가고 나만 남긴다 그러면 그대여 이 하룻밤을 뜬채 새면서 이야기 다하리 새벽 종 그윽히 들리기 전엔 우리는 그대로 봄에 사는 몸이여.     度桑乾 客舍幷州已十霜 歸心日夜憶咸陽 無端更渡桑乾水 郤望幷州是故鄕 고향으로 십년을 병주 땅에 외론 손되어 날마다 고향을 생각하였노라 상건강 건너와 바라보니 병주가 흡사히 내 고향 같구나.     고 적 高 適 (?-765) 字는 達夫, 하북성 滄州에서 났다. 玄宗때 과거에 급제, 肅宗때 諫議大夫에 발탁되어 거리낌 없이 바른 말을 했다. 50살 때 비로소 詩文에 힘썼다. 762년 西川 節度使가 되어 蜀에서 吐蕃을 막고, 左散騎常侍등을 지냈다. 많이 종군하여 그의 시는 변방의 풍경이며 전쟁에서 취재한 것이 많은데, 웅장 호방하여 王 維.孟浩然등과 어깨를 겨루었다. 8권이 있다.     夜別韋司士 高館張燈酒復淸 夜鍾殘月雁歸聲 只言啼鳥堪求侶 無那春風欲送行 黃河曲裏沙爲岸 白馬津邊柳向城 莫怨他鄕暫離別 知君到處有逢迎 야별 등불 밝은 곳에 술빛 더욱 맑고 종소리 들리는데 달 아래 가는 기러기 새는 짝 찾아 울러 밤을 새우는가 어찌하리 봄바람 따라 헤치는 이 심정 황하 굽은 골에 모래 씻는 물 소리 백마진 강변에는 버들만 우거졌다 원망하지 말아다오 잠시 나뉘는 것을 그대 가는 데마다 반가이 맞아 주리.     田家春望 出門無所見 春色滿平蕪 可歎無知己 高陽一酒徒 봄에 문을 나서봐도 바라볼 것 없는데 봄빛만 제 홀로 무르녹아라 찾아볼 친구조차 나는 없는가 주도라 일컬어도 서럽진 않아.     除夜作 旅館寒燈獨不眠 客心何事轉凄然 故鄕今夜思千里 霜鬢明朝又一年 제야 여관 찬 등 아래 잠 이룰길 없어 어쩌자고 마음은 이리도 설레는가 고향을 생각하면 아득한 천리 센 머리 이밤 새면 또 한해 가는구나.     別董大 十里黃雲白日矄 北風吹雁雪紛紛 莫愁前路無知己 天下誰人不識君 그대를 보내며 십리를 뻗힌 구름 햇볕을 가렸는데 기러기 몰고 가는 북풍에 눈은 내려 서러워 말아라 그대의 가는 길을 천하에 그대를 누가 모르리.     위응물 韋 應物 (?-?) 8세기말의 詩人. 섬서성 長安에서 났다. 756년 玄宗을 섬겨 京兆의 功曹가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德宗 때 蘇州刺史가 되었다가 文宗 때 죽었다. 白居易가 그의 詩를 評하여, 高雅閑淡의 독특한 품격이 있다고 했다. 오언시가 많다. 시집에 10권이 있다.     酬柳郎中春日歸楊州南國見別之作 廣陵三月花正開 花裏逢君醉一廻 南北相過殊不遠 暮潮歸去早潮來 양주로 보내며 삼월 광릉엔 꽃이 한창인데 꽃 속에 만나서 취토록 마시고파 남북으로 떠난들 먼길은 아니여 쓰고 드는 물 따라 오고 갈수 있거니.     聞雁 故園渺何處 歸思方悠哉 淮南秋雨夜 高齊聞雁來 문안 고향은 아득하다 어디메던가 떠도는 길손의 서글픈 심사 회남 가을밤에 비가 듣는데 멀리 지나가는 기러기 소리.     秋夜寄丘二十二員外 懷君屬秋夜 散步咏凉天 山空松子落 幽人應未眠 가을밤 가을도 밤이라 그리운 그대 거닐다 바라보면 머언 밤 하늘 솔방울 떨어져 밤은 한결 고요한데 이 밤을 그댄들 잠을 이루리......     幽居 貴賤雖異等 出門皆有營 獨無外物牽 遂此幽居情 微雨夜來過 不知春草生 靑山忽已曙 鳥雀繞舍鳴 時與道人偶 或隨樵者行 自當安蹇劣 誰爲薄世榮 유거 귀하고 천한게 모두 다르지만 문밖에 나서면 제각기 일이 있어     홀로 명리에 끌리지 않아 끝내 한가히 사는 정 기른다     밤새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풀은 얼마나 길어 났는가     청산엔 아침 햇볕 비꼈는데 새들은 집을 싸고 울어 예누나     때로는 도사와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초부를 따라도 가고     이렇게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을 뉘라서 세상영화 엷다 하더뇨.     이상은 李 商隱 (813-858) 당나라 말기의 詩人. 字는 義山, 하남성 沁陽에서 났다. 25살 때 進士, 누진하여 儉校工部郎中에 이르렀는데, 宣宗 大中 12년에 죽었다. 그의 작품은 抒情的인 詩가 많고, 修辭를 중히 여겨, 精密하고 華麗하다. 唐나라 말기와 五代를 통하여 그의 시는 크게 유행했는 데, 세상에서 西崑體라 일컬었다. 저서에 과 3권이 있다.     嫦娥 雲母屛風燭影深 長河漸落曉星沈 단장 운모 병풍에 촛불 그림자 그윽하고 긴 강에 새벽 별 소리 없이 숨는다.     夜雨寄北 君問歸期未有期 巴山夜雨漲秋池 何當共翦西牕燭 郤話巴山夜雨時 밤비에 부쳐 그대 돌아올 길 기약하기 어려워라 파산에 오는 밤비 가을 못을 넘는고야 어느 때 그대와 함께 창 아래 촛불 돋구려 파산에 밤비 오던 때를 서로 이야기하리.     早起 風露澹淸晨 簾間獨起人 鶯花啼又笑 畢竟是誰春 이른 봄 찬 이슬 바람 이는 이른 봄 아침 발새에 혼자서 일어나 보면 꽃 피고 꾀꼬리도 울어 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봄은 아니어.     왕지환 王 之渙 (?-?) 8세기 唐나라 詩人. 산서성 太原에서 났다. 高 適.王昌齡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6수뿐인데, 모두가 絶句이고, 그중에서 가 특히 유명하다.     送別 楊柳東風樹 靑靑夾御河 近來攀折苦 因爲別離多 송별 버들은 휘늘어져 바람에 나부끼고 파릇파릇 실개천 덮었는데 이즈음엔 손 들어 가지도 꺽을수 없어 그렇게 오가는 이별도 잦았던가.     登鸛鵲樓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관작루에서 산을 의지하고 해는 길이 바쁜데 황하는 아득한 바다로 숨어 멀리 바라보고싶은 덧없는 마음에 또 다시 층층계를 올라가노니.     凉州詞 黃河遠上白雲間 一片孤城萬仞山 羌笛何須怨楊柳 春光不度玉門關 양주사 황하는 멀리 구름 밖에 흐르고 성 밖엔 밋밋한 산이 솟았네 피리는 원한의 양류곡이로고 봄빛도 옥문관은 못 넘나봐.     왕 발 王 勃 (647-675) 唐나라 초기의 詩人. 字는 子安,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뽑혀서 朝散郞이 되었다. 당시 유행하는 鬪鷄를 쓴 글로 高宗의 노여움을 사서 劍南으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파면당했다. 交趾에 있는 아버지에게 가다가 배에서 떨어져 물에 빠져 죽었다. 유명한 는 이 여행 중에 鍾陵에서 지은 것이다. 賦詩를 잘하여 唐初 四傑의 한 사람으로 이컬었다. 시집 30권이 있다.     縢王閣 滕王高閣臨江渚 佩玉鳴鸞罷歌舞 畵棟朝飛南浦雲 朱簾暮捲西山雨 閒雲潭影日悠悠 物換星移度幾秋 閣中帝子今何在 檻外長江空自流 등왕각 등왕각 높은 집이 강가에 있어 옥을 굴리며 부르던 노래도 끊쳤구나 단청 고운 기둥 새로 구름이 흘러가고 서산으로 비낀 빗발은 발을 걷고 바라보거니 한가한 구름과 못에 내려앉은 그리매 날은 고요하여 말썽 많은 세월이 몇번이나 흘러갔던가 등왕각 노니던 이 시방은 어디 있으리 난간 너머 아득한 강물만 소리없이 흐르누나. (王 勃의 遺詩)     蜀中九日 九月九日望鄕臺 他席他鄕送客杯 人情已厭南中苦 鴻雁那從北地來 중양에 구월구일에 망향대에 올라 잔 들고 손 보내는 외로운 심정 이제 촉나라엔 머물기도 괴론데 기러긴 어쩌자고 북녘에서 또 오는가.     고청구 高 靑邱 (1335-1374) 이름은 啓, 靑邱는 號다. 강소성 吳縣에서 났다. 1368년에 를 修撰, 戶部侍郞에까지 올랐다. 궁중의 비사를 읊은 일로하여 허리 잘리는 형으로 죽었다. 1,700여수나 되는 그의 시는 청신하고 웅건한데, 18권에 수록되어 있다.     問梅閣 問春何處來 春來在何許 月墮花不信 幽禽自相語 단장 찾아 든 봄 있는 델 알길이 없고 지는 달 말없는가 꽃가지 새만 우짖어.     尋胡隱君 渡水復渡水 看花還看花 春風江上路 不覺到君家 그대를 찾아서 물을 건너고 또다시 물을 건너고 여기 저기 꽃을 보고 가노라면 봄바람도 강을 건너 스쳐 오는데 어느 틈에 그대 집에 다달았구나.     장구령 張 九齡 (673-740) 字는 子壽, 광동성 曲江사람이다. 玄宗을 섬겨 재상에까지 올라서 명망이 높았다. 20권이 있다.     自君之出吳 自君之出吳 不復理殘機 思君如滿月 夜夜減淸輝 그대 떠난 뒤 그대와 나뉜 몸이 베를 짠들 무엇하리 흡사히 보름달 같이 밤마다 빛만 예이느니.     왕 건 王 建 (?-?) 9세기때 詩人. 字는 仲初, 하남성 許昌에서 났다. 775년에 進士, 827년에는 陝州司馬가 되어 변경에 종군했다가 돌아와 韓 愈.張 籍같은 詩人들과 사귀었다. 친척인 宦官으로부터 궁중의 일을 듣고 지은 는 널리 애송되었다. 詩集 10권이 있다.     十五夜望月 中庭地白樹棲鴉 冷露無聲濕桂花 今夜月明人盡望 不知秋思在誰家 십오야망월 달빛 들어 흰뜰인데 까마기 깃들이고 찬 이슬 소리 없이 꽃을 적신다 오늘밤 저 달 보는 이 퍽은 많지만 뉘라서 가을을 생각하는가.     送 人 河亭收酒器 語盡各西東 回首不相見 行軍秋雨中 너를 보내고 술도 다하고 잔을 던지고 이야기도 다하고 훌훌히 갈려 오던 길 되돌아 바라보면 너 실은 차는 가을비 속에 묻혀......     장 설 張 說 ?     蜀道後期 客心爭日月 來往預期程 秋風不相待 先至洛陽城 여정 헤매는 길손 일월과 다투는 뜻은 오고 가는 기약을 하였기 탓이지 그래도 가을 바람 기다리질 않고 날보다 먼저 낙양에 이르었네.     전 기 錢 起 (?-?) 字는 仲子. 玄宗 때 進士가 되어, 벼슬이 考功郎中에 이르렀다. 王 維와 친히 지냈으며, 代宗 大曆年間에 이름 높았던 大曆 十才子의 제 일인자다. 그의 시는 風趣가 풍부했다. 시집 10권이 있다.     歸 雁 瀟湘何事等閑回 水碧沙明兩岸苔 二十五絃彈夜月 不勝淸怨郤飛來 귀안 소상에서 어쩌자고 한가히 돌아올까 푸른 물 흰 모래에 이끼 더욱 푸르다 달 아래 뜯는 거문고 소리 맑은데 그 소리에 못이겨 되돌아오는가.     江行無題 咫尺愁風雨 匡廬不可登 祗疑雲霧窟 猶有六朝僧 강에서 비바람 흩뿌려 여산은 못 오르리 구름 짙은 골에 고승은 사는가.     온정균 溫 庭筠 (?-?) 8세기 중엽의 詩人, 本이름은 岐, 字는 飛卿, 산서성 陽曲에서 났다. 당나라 시인으로서 처음으로 詞에 전심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거의 다 散逸했는데, 지금 남아 있는 수십首는 修辭美를 다한 艶麗한 것들이다. 이 있었고, 소설 가 있다.     題分水嶺 溪水無情似有情 入山三日得同行 嶺頭便是分頭處 惜別潺湲一夜聲 분수령에서 무정한 시냇물도 어찌 보면 뜻 있는듯 산에 들어 사흘을 같이 걸었지...... 분수령에 다달아 이별할 때는 서러워 하룻밤내 울며 갑데다.     유종원 柳 宗元 (778-819) 唐宋八大家의 한사람. 字는 子厚, 산서성 永濟에서 났다. 進士에 급제, 803년 監察御史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남쪽지방으로 좌천, 815년에 柳州刺史에 전임했다. 廣西지방을 방랑하며 많은 기행문을 남겼다. 시문집 45권이 있다.     江雪 千山鳥飛絶 萬徑人蹤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눈 산엔 나는 새 기척도 없고 길엔 지나는 사람도 없는데 어옹은 외론 배에 앉아 눈 속에 낚시를 드리운다.     登柳州峨山 荒山秋日午 獨上意悠悠 如何望鄕處 西北是融州 가을 날 황산 가을날 한낮인데 산엔 아무 기척도 없어 홀로 고향을 생각하노라 서북엔 융주가 있으려니.     황정견 黃 庭堅 (1045-1105) 字는 魯直, 號는 부翁 또는 山谷, 강서성 修水사람이다. 1067년에 進士, 國子監 敎授.國史編修官이 되었다가 1094년 지방으로 좌천, 마지막에는 귀양가 宜州에서 죽었다. 저서 이 있다.     鄂渚南樓書事 回顧山光接水光 凭欄十里芰荷香 淸風明月無人管 倂作南樓一夜凉 다락에서 돌아보니 푸른 산은 물에 연하고 난간에 기대 서니 연꽃 향기 그윽하이 휘영청 밝은 달밤인데 피리 소리도 안들려 드높은 다락에 밤은 그저 시원하여라.     가 지 賈 至 (718-772) 字는 幼隣, 洛陽사람이다. 玄宗때 起居舍人.知制誥를 지냈다. 肅宗이 선위받자. 그는 冊文을 지어 바쳤다. 뒤에 中書舍人이 되었다가 岳州의 司馬로 좌천당했다. 代宗 大曆 7년 (772, 신라 혜공왕 8년) 55살로 죽었다. 시호를 定이라 했다. 시집 10권이 있다.     春思 草色靑靑柳色黃 桃花歷亂李花香 東風不爲吹愁去 春日偏能惹恨長 춘수(春愁) 풀빛 짙은데 버들 더욱 노랗고 복사꽃 난만하고 이화 더욱 향그럽다 동풍은 시름도 불어 갈줄 모르는가 봄날엔 한되는 일 이렇게 많으니......     送李侍郞赴常州 雪晴雲散北風寒 楚水吳山道路難 今日送君須盡醉 明朝相憶路漫漫 노만만(路漫漫) 눈 걷자 흩어지는 구름 바람도 춥다 초나라 오나라는 가는 길도 험하리 그대 보내며 우리 잠시 취해나 보자요 낼 아침 생각해도 길은 아득하리.     西亭春望 日長春暖柳靑靑 北雁歸飛入窅冥 岳陽城上聞吹笛 能使春心滿洞庭 춘망 해 길고 바람 잔데 버들만 푸르러 기러기 돌아가는 먼 북녘 길 악양성 가에 피리 소리 들려 봄 마음 이끌고 동정호로 가누나.     위승경 韋 承慶 (?-?) ?     南行別弟 淡淡長江水 悠悠遠客情 落花相與恨 到地一無聲 별리 담담한 강물 멀리 흐르는데 길손의 심정 비길 데 없어라 낙화도 서러라 바라보는 마음 흩날려도 땅에는 소리도 없이......     江樓 獨酌芳春酒 登樓已半醺 誰驚一行雁 衝斷過江雲 강루 봄날 홀로 마시는 술에 취한채 오르는 높은 누대 어디서 난데없는 기러기 한떼 구름을 가로질러 날아 가누나.     대숙륜 戴 叔倫 (?-?) 당나라 중기의 시인. 字는 幼公, 潤州 사람이다. 德宗때 李希烈이 모반하자, 그는 항주자사로 가 있다가, 뒤에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죽었다. 나이 58, 이 있다.     贈殷亮 日日河邊見水流 傷春未已復悲秋 山中舊宅無人住 來往風塵共白頭 은량에게 부치는 노래 한종일 나는 강기슭에 앉아 한종일 나는 물을 바라보노라 서러운 봄 채 가시우기 전에 애달다 가을이 또 찾아오누나 황량한 고향은 찾을 길도 없는데 옛집엔 사는 이도 없다하더고 풍진에 싸여 사는 몸이라서 모두다 머리칼이 세어 가나베.     湘南卽事 盧橘花開楓葉衰 出門何處望京師 沅湘日夜東流去 不爲愁人住少時 상남에서 비파꽃 피어나는 겨울이 오면 문 밖에 바라보는 먼 서울길 강물은 밤낮 없이 흘러 예어라 나를 위해선 멈출법도 하건만......     夜發袁江寄李穎川劉侍郞 半夜回舟入楚鄕 月明山水共蒼蒼 孤猿更叫秋風裏 不是愁人亦斷腸 가을 밤 배 돌려 야반에 초향에 드니 달 밝아 산과 불 한결 푸르다 가을 바람 속에 잔나비 울어 시름 없는 사람도 애를 끊나니.     이 섭 李 涉 ?     宿武關 遠別秦城萬里游 亂山高下入商州 關門不鎖寒溪水 一夜潺湲送客愁 무관에 들어 고향을 멀리 떠나 만리 길이라 산은 한이 없이 가는 길을 막는구나 관문을 흘러가는 추운 물소리 밤 새어 시름 싣고 흘러가누나.     형 숙 荊 叔 ?     題慈恩塔 漢國山河在 秦陵草樹深 暮雲千里色 無處不傷心 자은탑에 제하여 산천은 한나라 의연하고 진나라 능엔 풀만 우거져 저문날 천리나 먼 구름 보면 상채기 많은 마음 둘 곳이 없어......     낭사원 郎 士元 (?-?) 字는 君冑, 정주 中山 사람. 玄宗의 天寶 15년(756) 進士, 京畿選官에 뽑히고, 渭南尉. 拾遺를 거쳐 영주자사가 되었다. 그의 시는 淸幽秀澹, 한아한 맛이 넘친다. 문집이 있다.     送麴司直 曙雪蒼蒼兼曙雲 朔風燕雁不堪聞 貧交此別無他贈 惟有靑山遠送客 국사직을 보내고 새벽 눈도 추워라 구름도 추워 삭풍에 기러기 소리 마음 설렌다 가난도 몸에 젖어 서러운 이별 푸른 산 푸른 산이 그댈 보내네.     장 욱 張 旭 ?     山中留客 山光物態弄春暉 莫爲輕陰便擬歸 縱使晴明無雨色 入雲深處亦沾衣 청명 산도 눈부시게 빛나는 봄인데 구름을 핑게 삼아 흐렸다 가지마오 청명에 무슨 비가 오기야 하리만 구름도 깊은 곳엔 옷깃을 적신다오.     상 건 常 健 ?     破山寺後禪院 淸晨入古寺 初日照高林 曲徑通幽處 禪房花木深 山光悅鳥性 潭影空人心 萬籟此俱寂 惟聞鍾磐音 선원 새벽녘에 옛절에 들어서니 뜨는 해는 먼 숲 실가지에 빛나고 굽어든 오솔길을 걸어 들며는 선방에 꽃나무만 우거져 파란 산빛은 새도 좋아하는가 푸른 소에 그리매 마음도 가라앉어라 누리는 죽은듯 고요한데 먼 종소리 그윽히 들려 온다.     옹유지 雍 裕之 ?     宮人斜 幾多紅粉委黃泥 野鳥如加又似啼 應有春魂化爲燕 年年飛入未央棲 궁인의 무덤터 연지 곤지 단장하던 궁녀의 무덤터에 새 소리 노래하듯 또 울어 예듯 그대들 혼이 있어 제비라도 되었다면 길 익은 미앙궁을 해마다 찾아 오리.     황보염 皇甫 苒 ?     送魏十六還蘇州 秋夜沈沈此送君 陰蟲切切不堪聞 歸舟明日毘陵道 回首姑蘇是白雲 그대를 소주로 보내며 그대 보내는 적막한 가을 밤에 풀벌랜 어쩌자고 설리 울어 옐까 돌아가는 배 내일엔 비릉에 닿으리 머리 돌리니 고소산엔 흰 구름 인다.     소강절 邵 康節 ?     淸夜吟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 야곡 눈부시게 달은 밝고 바람은 물 위를 기어 오는데 이렇게 시원한 이 한밤을 뉘라서 알고 즐기오리.     개가운 蓋 嘉運 ?     伊州歌 打起黃鶯兒 莫敎枝上啼 啼時驚妾夢 不得到遼西 단장 가지에 꾀꼬리 울리지 마라 임 찾아 가는 꿈길 행여 깨일라.     왕 주 王 周 ?     宿疎陂驛 秋染棠梨葉半紅 荊州東望草平空 誰知孤宦天涯意 微雨瀟瀟古驛中 소피역에서 아그배 가을 물들어 반남아 붉었구나 형주를 바라보면 풀은 하늘에 닿았는데 천애에 외로이 헤매는 나그네 시름 역에는 가는 비 부슬부슬 자꾸만 내리고.     장 악 張 鄂 ?     九日宴 秋葉風吹黃颯颯 晴雲日照白鱗鱗 歸來得問茱萸女 今日登高醉幾人 구일연 나무잎 바람에 불려 사뭇 누렇게 지고 가을 구름 해에 비껴 비늘처럼 빛난다 물었노라 수유 꽃은 여인이 돌아오기에 “오늘은 산에 올라 누구누구 취했던가”.     사마 예 司馬 禮 ?     宮怨 柳色參差掩畵樓 曉鶯啼送滿宮愁 年年花落無人見 空逐春泉出御溝 궁원 버들은 서로 얽혀 다락을 덮고 꾀꼬리 울어 옛 궁엔 시름만 가득하다 철 따라 꽃은 피고 져도 보는 이 없고 샘물은 무심히 뜰을 흘러 넘는다.     두 공 竇 鞏 ?     南遊感興 傷心欲問前朝事 惟見江流去不回 日暮東風春草綠 鷓鴣飛上越王臺 애가 서럽다 지난 일 묻자 했더니 흘러서 올길 없는 강물이구나 해 지자 이는 바람 풀만 푸르러 자고새만 월왕대를 넘나드누나.     우무릉 于 武陵 ?     勸酒 勸君金屈巵 滿酌不須辭 花發多風雨 人生足別離 권주 그대여 이 잔을 들으라 가득 부었다 사양치 마소 꽃 피자 비바람 더욱 많거니 우리 별린들 서럽다 하리.     유 상 劉 商 ?     送王永 君去春山誰共遊 鳥啼花落水空流 如今送別臨溪水 他日相思來水頭 왕영을 보내며 그대 가고보면 누구와 이 봄을 지내오리 새 울고 꽃도 이룰고 물만 흐르는데 그대 시방 보내는 이 시냇물 가를 오는날 생각하면 찾아올 밖에.     구 위 丘 爲 ?     左掖梨花 冷艶全欺雪 餘香乍入衣 春風且莫定 吹向玉階飛 이화 써늘한게 흡사 눈과 같구나 향기는 사뭇 옷깃에 들어와 봄바람도 그렇게 정처 없는지 불어다간 자꾸 섬돌로 날리네.     최혜동 崔 惠童 ?     秦和宴城東莊 眼看春色如流水 今日殘花昨日開 단장 그대 눈망울에 비치는 봄빛 흐르는 물과 같으이 오늘 남아 있는 꽃은 분명 어제 피었으리.     진 우 陳 祐 ?     雜詩 無定河邊暮笛聲 赫連臺畔旅人情 函關歸路千餘里 一夕秋風白髮生 잡시 무정하 강변에 피리 소리 들려 오고 혁련대 기슭을 거니는 나그네 합곡관 돌아오는 길 천리도 더 되어 하룻밤 갈바람에도 머리칼 센다.     두순학 杜 荀鶴 ?     春窓怨 風暖鳥聲碎 日高花影重 춘창원 화창한 날 바람결에 새소리 부서지고 드높은 햇볕 아래 꽃 그리매 두터웁다.     장경충 張 敬忠 ?     邊詞 五原春色舊來遲 二月垂楊未掛絲 卽今河畔氷開日 正是長安花落時 변사 오원 변방엔 봄철도 늦어 이월이 다 가도 버들움 안 터지고 인제사 강에는 얼음 풀리는 소리 장안엔 시방 꽃도 떨어질 것을.     한 굉 韓 翃 ?     宿石邑山中 浮雲不共此山齊 山靄蒼蒼望轉迷 曉月暫飛千樹裏 秋河隔在數峰西 석읍산속에서 구름도 산이 높아 못 올라오는가 아지랑이 사이로 바라보노니 새벽달 나는듯 나무 새에 숨고 은하도 봉을 건너 멀리 흐른다.     장 계 張 繼 (?-?) 字는 懿孫, 연주사람. 天寶 12년 進士에 급제, 代宗 大曆말에 檢校戶部員外郞이 되었다. 시집 1권이 있다.     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水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鍾聲到客船 풍교에서 달 지자 가마귀 울어 서리 찬 하늘 신나무 사이 사이 어화가 졸아 고소성 밖 한산사에선 종소리 은은히 배까지 들린다.     저광희 儲 光羲 ?     江南曲 日暮長江裏 相邀歸渡頭 落花如有意 來去逐船流 강남곡 해는 저물어 강 밖에 저물어 데불고 돌아오는 이 부두에 지는 꽃잎에도 뜻은 있는가 오거니 가거니 배는 물을 따라서......     최 호 崔 顥 ?     黃鶴樓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州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下使人愁 수 (愁) 그댄 흰구름과 더불어 떠나고 여기 다못 황학루가 남아 있구나 학은 떠나 돌아올 길 바이 없어라 흰구름 천겹 쌓여 하늘만 드높은데...... 한양엔 나무만 길남아 솟고 앵무주엔 봄풀만 우거졌거니 해 지자 이 심사 어디다 돌리리 연기 낀 먼 강엔 시름만 부른다.     장 호 張 祜 ?     胡渭州 亭亭孤月照行舟 寂寂長江萬里流 鄕國不知何處是 雲山漫漫使人愁 산만만(山漫漫) 외로운 달 휘영청 가는 밸 비쳐 강물만 요요히 만리를 흐른다 고향 가는 길은 어딘지도 몰라라 구름만 산을 덮어 시름 자아낸다.     설 영 薛 瑩 ?     秋日湖上 落日五湖遊 煙波處處愁 浮沈千古事 誰與問東流 가을날 오호에 해는 지고 저녁 연기 떠 오른다 천고 옛 일은 누구에게 물어보리.     진자앙 陳 子昻 (?-?) 學者요 詩人. 字는 白玉, 사천성 梓州사람. 대대로 집안이 부유했다. 進士에 뽑혔을 때, 高宗의 임종에 글을 올려 시사를 논했다. 側天武后에게 쓰이어 右拾遺가 되었는데, 마침 武攸宜가 거란을 정벌하게되자, 그 書記가 되어 文翰을 맡아 보았다. 뒤에 아버지의 喪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현령이 되어 그의 재산을 탐낸 誣告를 당하여 옥에 갇혀 죽었다. 나이 43이었다. 唐나라 文章의 興隆이 陳子昻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있다.     春夜別友人 銀燭吐靑煙 金尊對綺筵 離堂思琴瑟 別路繞山川 明月隱高樹 長河沒曉天 悠悠洛陽去 此會在何年 그대 보내는 밤 촛불은 은빛으로 사뭇 타는 이 밤에 우리 술이나 한잔 마셔 보자요 떠나는 마당에 거문곤들 못 타오리까 그댄 저 산을 넘고 또 강을 돌아가느니 어쩌자고 나무는 달을 가린 것일까 강물도 소리 없이 하늘 밖에 숨었는데...... 이런 밤을 다시 언제 가져 보리까.     登幽州臺歌 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 애가 바라보아도 떠난 이 없고 돌아보아도 오는 이 없고 천지는 태고처럼 하냥 조용한데 혼자 서성거리며 눈물지느니.     여 온 呂 溫 ?     鞏路感懷 馬嘶白日暮 劒鳴秋氣來 我心渺無際 河上空徘徊 강가에서 말 울자 해지고 칼 소린 가을을 머금어 내 마음 둘 곳 없어 강가를 거닌다.     조 영 祖 詠 ?     終南望餘雪 終南陰嶺秀 積雪浮雲端 林表明霽色 城中增暮寒 여설 밋밋하게 보이는 종남산 봉우리 쌓인 눈이 구름 끝에 더욱 빛난다 숲 너머 개인 날이 밝기도 하여라 해 지자 성중은 자꾸만 추워지고......     이 목 李 穆 ?     發桐廬寄劉員外 處處雲山無盡時 桐廬南望更參差 舟人莫道新安近 欲上潺湲行自遲 동려에서 유원외님께 가는 곳마다 산엔 구름 끊일길 없고 동려서 바라보니 더욱 밋밋하구나 사공아 신안이 가까왔다 이르지 마소 잔잔한 물길 따라 서서히 가려니.     태상은자 太上隱者 ?     答人 偶來松樹下 高枕石頭眠 山中無曆日 寒盡不知年 한진(寒盡) 때로 이 늙은 소나무 아래에 돌을 벤채 잠을 이루기도 하였더니라 도시 산중에 묻힌 몸이라 봄이 와도 해가신 줄을 몰랐어...... 이 화 李 華 ?     春行寄與 宜陽城下草萋萋 澗水東流復向西 芳樹無人花自落 春山一路鳥空啼 봄 의양성 아래 풀만 우거지고 흐르는 물 동으로 또 서으로 숲은 적막한데 꽃만 떨어져 봄 산에 새 소리 자지러지게 들린다.     장 조 張 潮 ?     江南行 茨菰葉爛別西灣 連子花開不未還 妾夢不離江上水 人傳郎在鳳凰山 강남행 자고 잎새 단풍들 무렵 서녘 항구에 이별한 그대 연꽃이 시방 한창인데 돌아올 길 바이 없구나 설어라 가엾은 이내 심사 꿈은 언제나 그 강물에 흘러 잊으랴 잊을길 없는 나의 사람아 봉황산에 산다니 언제 만나리.     허 혼 許 渾 ?     秋思 高歌一曲掩明鏡 昨日少年今白頭 단장 한 곡조 소리 높여 거울을 바라보니 소년은 간데 없고 흰 머리 나부낀다.     謝亭送別 勞歌一曲解行舟 紅葉靑山水急流 日暮酒醒人已遠 滿天風雨下西樓 별리곡 노래 한가락에 배는 떠나고 단풍이 타는 산엔 물 소리 급하다 해 지고 술 깨고 그대는 멀리 가고 비바람 가득한데 다락을 내려온다.     양사악 羊 士諤 ?     登樓 槐柳蕭疎繞郡城 夜添山雨作江聲 秋風南陌無車馬 獨上高樓故國情 누대에서 성근 버드나무 성을 둘렀는데 밤비에 물이 불어 강소리 높다 가을 바람 부는 거리엔 차마도 없고 나는 홀로 누대에 올라 고향을 바라본다.     郡中卽事 紅衣落盡暗香殘 葉上秋光白露寒 越女含情已無限 莫敎長袖倚欄干 즉흥 연꽃 이울고 그윽한 향기만 남아 잎 위에 가을빛 흰 이슬이 차다 월녀의 품은 정 한이 없으니 행여나 긴 소맬 난간에 스치리.     고 황 顧 況 ?     湖中 靑草湖邊日色低 黃茅瘴裏鷓鴣啼 丈夫飄蕩今如此 一曲長歌楚水西 호반에서 청초호반에 날이 저물어 풀섶엔 자고새 설리도 운다 장부의 뜬 마음 둘 곳도 없어 한 곡조 길게 빼어 노래부른다.     聽角思歸 故園黃葉滿靑苔 夢後城頭曉角哀 此夜斷腸人不見 起行殘月影徘徊     단장곡 고원에 누른 잎 푸른 이끼 덮는다 꿈 깨니 성 가엔 효각 소리 서럽고 이 밤사 말고 애끊는 이도 안보여 기우는 달 아래 홀로 서성거린다.     정 곡 鄭 谷 ?     經賈島墓 水遶荒墳縣路斜 耕人訝我久咨嗟 重來兼恐無尋處 落日風吹鼓子花 가도의 무덤을 찾아 무덤엔 물이 둘러 길이 더욱 아득한데 흐느껴 우는 나를 밭갈던 이 바라본다 다시 찾아 오는 뒷날 무덤이나 남았을까 누엿누엿 해는 지고 고자화에 바람인다.     贈別 揚子江頭楊柳春 楊花愁殺渡江人 一聲羌笛離亭晩 君向瀟湘我向秦 증별 양자강 기슭에 버들이 무르녹아 버들개지 흩날려 나그네 시름 자아내고 해설피 들려 오는 젓대 소리에 그대는 소상으로 나는 진나라로.     맹 교 孟 郊 ?     古別離 欲別牽郎衣 郎今到何處 不恨歸來遲 葉向臨卬去 고별리 그대 옷깃을 차마 놓기 어려워 가시는 데 어딘 줄 나는 몰라도 돌아올 길 늦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행여나 임앙으로 떠나실까 두려워.     秋夕懷遠 高枝低枝風 千葉萬葉聲 단장 높고 낮은 가지 바람이 기어들고 잎사귀 잎사귀마다 그윽히 이는 소리.     조 하 趙 蝦 ?     江樓書感 獨上江樓思渺然 月光如水水連天 同來翫月人何處 風景依稀似去年     강루에 올라 홀로 서성거리다 누에 오르니 달도 물을 닮아 하늘에 닿았는데 같이 달 보던 그인 멀리 가고 산천만 그대로 지난해로구나.     도홍경 陶 弘景 ?     詔問山中何所有賦待以答 山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 산에서 산에 묻혀 살자니 무엇 있으리 고개 넘어 오고 가는 흰구름인데 내 홀로 즐기며 살아 가거니 그리운 그대가 생각날밖에......     하지장 賀 知章 (?-?) 字는 季眞, 會稽 永興사람이다. 처음에 秘書監이 되고, 禮部侍郞으로 옮겼다가,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道士가 되었다. 스스로 四明狂客이라 號했는데, 성질이 활달하고 언변이 좋았다. 나이 86살에 죽었다.     回鄕偶書 一. 離別家鄕歲月多 近來人事半消磨 唯有門前鏡湖水 春風不改舊時波 二. 少小離家老大回 鄕音不改鬂毛衰 兒童相見不相識 笑問客從何處來 고향에 돌아와서 1. 고향엘 고향엘 돌아와보니 모두다 변한 것은 인사로구나 문 앞에 호수만 거울도곤 맑아 봄바람 따라서 물결이 인다.     2. 어려서 떠난 고향 돌아와 보니 사투린 예 같아도 머리가 세어 애들도 서로 바라보면서 웃으며 이르는 말 어디서 왔느냐고.     유정지 劉 廷芝 ?     公子行 天津橋下陽春水 天津橋上繁華子 馬聲廻合靑雲外 人影搖動綠波裏 綠波淸廻玉爲砂 靑雲離披錦作霞 可憐楊柳傷心樹 可憐桃李斷腸花 此日遨遊邀美女 此時歌舞入娼家 娼家美女鬱金香 飛去飛來公子傍 的的朱簾白日映 娥娥玉顔紅粉粧 花際徘徊雙蛺蝶 池邊顧步兩鴛鴦 傾國傾城漢武帝 爲雲爲雨楚襄王 古來容光人所羨 況復今日遙相見 願作輕羅著細腰 願如明鏡分嬌面 與君相向轉相親 與君雙棲共一身 願作貞松千歲古 誰論芳槿一朝新 百年同謝西山日 千秋萬古北邙塵 공자행 다리 아랜 봄 싣고 흐르는 물 소리 다리 위엔 귀공자의 발자국 소리     말 울어 구름 밖에 멀리 사라지고 물 가엔 오가는 사람 그림자 잦이다     물결에 씻기는 조약돌 옥같고 구름은 흩어져 바로 비단결이구나     늘어진 버들에도 애끊는 마음이여 복사꽃도 애달퍼 서러운 것을     즐거워라 이날을 젊은 아가씨 노래하며 춤추며 때를 보내리     울금향같이 사뭇 예쁜 아가씨 귀공자 옆을 따라 오고 가느니     주렴엔 햇볕 눈이 부시고 억안엔 단장도 더욱 곱구나     꽃 따라 짝지어 나는 나비들 못가엔 원앙이 오고 가는데     한무제도 한때는 이리 보내고 초야왕도 한때는 이리 보내고     고래로 고운 얼굴 원하는 것을 항차 서로 보는 이날에서랴     원컨대 옷이 되어 그대 허리 감으리 아니면 거울 되어 그대 얼굴 비추리     서로 만나 가까운 우리들이라 일평생 이대로 살아지이다     소나무로 한 천년 살아지이다 뉘라서 무개꽃을 원하오리까     백년을 이대로 살고지고 천추만세후엔 북망의 티끌 되리.     代悲白頭翁 洛陽城東桃李花 飛來飛去落誰家 洛陽女兒惜顔色 行逢落花長歎息 今年落花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已見松栢摧爲薪 更聞桑田變成海 古人無復洛城東 今人還對落花風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寄言全盛紅顔子 應憐半死白頭翁 此翁白頭眞可憐 伊昔紅顔美少年 公子王孫芳樹下 淸歌妙舞落花前 光祿池臺開錦繡 將軍樓閣畵神仙 一朝臥病無相識 三春行樂在誰邊 宛轉蛾眉能幾時 須臾鶴髮亂如絲 但看古來歌舞地 惟有黃昏鳥雀悲 노인을 대신하여 부르는 노래 낙양성 동녘에 핀 복사꽃 바람에 흩날려 뉘 집에 지는가     낙양에 색시들 늙기 한되어 지는 꽃 바라보며 긴 탄식한다     지는 꽃 따라 늙는 이 얼굴 명년에 피는 꽃엔 누가 남으리     보았노라 송백은 땔나무 되고 들었노니 상전은 벽해된다고     낙성엔 옛사람 자취도 없고 지는 꽃 설어하는 젊은 사람들     해마다 해마다 꽃은 피어도 사람은 해마다 해마다 가네     사랑하는 나의 청춘들이여 서럽지 않은가 늙은 이 몸이     늙은이의 센 머리 가련하구나 이래뵈도 옛날엔 소년이었대     나무 아래 모여서 춤추는 귀공자 지는 꽃도 모르고 노래만 부르네     지대엔 비단에 수놓아 걸고 누각엔 신선화 붙이던 장군     병상에 누우니 알 길 없고 구십춘광도 즐길길 없어     그 곱던 얼굴엔 주름 뿐이요 흰 머리 흡사히 실낱 같구나     고래로 놀고지고 하던 터전엔 밤들자 새들만 설리도 운다.     배 적 裵 迪 ?     送崔九 莫學武陵人 暫遊桃源裏 단장 무릉 사람을 배울라 말어 잠시 이 도원에 놀다 가소.     孟城拗 結廬古城下 時登古城上 古城非疇昔 今人自來往 옛성에서 성 아래 집을 마련하고 때로 고성에 올라가면 성엔 옛 모습 간데 없고 낯 모를 사람만 오고 가거니......     두추랑 杜 秋娘 ?     勸君莫惜金縷衣 勸君惜取少年時 花開堪折直須折 莫待無花空折枝 청춘을 비단 옷 쯤이야 아끼질 마오 차라리 그대 청춘을 아낄 것이 꺽고프면 재빨리 꺽어버리지 꽃 지면 빈 가지만 남는 것을......     왕안석 王 安石 (1019-1086) 北宋의 政治家. 字는 介甫, 강서성 撫州 臨川사람이다. 神宗에게 인정받아 翰林學士參知政事가 되고, 1069년 制置三司條例司를 두고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되어, 이른바 新法을 실시했다. 이리하여 新法, 舊法의 당쟁이 일어났다. 재상의 자리에 있기를 8년, 물러나 10여년만에 병으로 죽었다.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29권이 있다.     梅花 牆角數枝梅 凌寒獨自開 遙知不是雪 爲有暗香來 매화 담 모퉁이 매화가 눈 속에 피어 멀리 보면 눈인듯 그윽한 향기.     원 진 元 稹 ?     聞白樂天左降江州司馬 殘燈無焰影幢幢 此夕聞君謫九江 垂死病中驚坐起 暗風吹雨入寒窓 병상에서 가물거리는 등불 어슴프레한데 이 밤사 말고 그대 구강에 쫓기는 소식 병상에 누웠다 놀라 일어나니 어둔 밤 비바람이 창에 부딪쳐.     심전기 沈 佺期 ?     邙山 北邙山上列墳塋 萬古千秋對洛城 城中日夕歌鍾起 山上惟聞松柏聲 망산 북망산 위엔 무덤도 많아 천추에 서린 한이 낙양에 간다 해 지자 성중엔 노래 소리 일어도 산엔 소나무 스쳐 가는 바람소리.     무명씨     贈人 懶依紗窓春日遲 紅顔空老落花時 世間萬事皆如是 扣甬狂歌誰得知 그대에게 창에 기대어 보내는 봄날은 길어 청춘도 지는 꽃에 늙어가는가 헛되이 여의는 서른 마음에 미친듯 노래한들 뉘 알으리.     溪歌 憂思出門倚 逢郎前溪渡 莫作流水心 引新都舍故 단장 선뜻 나서니 그리운 임 오신다 마음이 물같다 버리지 마오.     子夜歌 擥裾未結帶 紋眉出前窓 羅裳易飄飄 小開罵春風 자야가 치마자락 부여잡고 띠도 못 맨채 그대 오시나 창 열고 바라보노라면 표표한 바람에 치마폭 나부끼고 속절없이 바람만 흘러 가누나.  
97    심상운의 디지털시 하이퍼시 모음 댓글:  조회:2350  추천:0  2020-02-09
출처ㅡ 시의 꽃이 피는마을 디지털 시 하이퍼시   심상운의 디지털시 하이퍼시 모음     빈자리  -낮 12시 25분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수돗물을 세게 틀었다                 오후 4시 30분               책상 위의 헌책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붉게 타오르던 유리병의 꽃이 시들시들하다                 나는 주방廚房의 수돗물을 세게 틀었다                              쏴아-                뇌세포 속으로 퍼져나가는 파란 물소리                청각聽覺이 파르르 떤다                유리병의 꽃이 파르르 떤다                  그때 핸드폰에서 터져 나오는 경쾌한 음악                 싱싱한 푸성귀 냄샐 풍기는 그의 목소리                   전파電波를 타고 날아온                 강원도 산속 공기가 내 귀를 파랗게 물들인다       물고기 그림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바다 사진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 무장한 미군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엎은 40대의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흰 거품을 토하며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어두컴컴한 매립지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        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       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       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       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싱싱해서 좋다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기억에 대한 명상    나는 심심할 때, 크레파스를 들고 내 뇌腦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저장된 기억을 뽑아내어서 색칠을 한다. 그러면 파란 기억. 노란 기억, 발그레한 기억, 푸른 기억,검은 기억, 희뿌연 기억. 그들은 색유리가 되어 반짝이다가 아주 가끔 새로운 모자이크 그림이 된다.그들은  타다남은 내면의 불꽃같이 아니면 무덤 속에서  살아나온 시간의 눈빛같이 아니면  버스 창문 밖으로 지나가버린 아카시아 숲의 향기같이 이제는 만져볼 수 없는, 냄새도 없는, 단지 모니터의 영상 속에 숨어 있는, 그러다가도 아, 하는 순간 시퍼런 손자국을 남기고 심장을 관통하는 전율. 그러나 그러나 이따금씩 봄바람이 되어 나를 흔드는 그림. 나는 그 그림들이 띠운 풍선風船을 타고 기억 이전으로, 그 이전의 이전, 부모미생전 父母未生前으로 날아가는 연습을 한다. 아주 홀가분하게 '야호' '야호' 소리치며.  여행지의 들판에서 피어오른 듯한 눈부신 무지개의 등 위에 올라타기도 하며.      길                 길이 1cm 쯤 될까 말까한              배추벌레 한 마리가                     퍼런 배추 잎 위로              배밀이하며 올라가고 있다                자세히 보면              벌레가              지나온 흔적이 보일 듯하다                (배추 잎에 붙어서 분비한 듯)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분비물의 자국!                        마추픽추의 무너진 벽돌 계단 위에             노란 나비가 하늘하늘 날고 있다             * 마추픽추:페루 중남부 안데스 산맥에 있던 고대 잉카 제국의 요새 도시. 마추픽추의     바람소리          겨울 밤 침대에 누워서 읽는 바람소리. 바람은 소리의 알맹이고 소리는 바람껍질인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바람소리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히잉히잉 말 울음소리가 내 잠의 줄기를 흔든다. 잠의 뿌리는 짙은 안개 속에 잠기면서 알타이 초원의 기억을 재생한다. 초원의 별빛이 지붕을 뚫고 쏟아져 내린다. 나는 벌거숭이 망아지처럼 초록 들판을 뛰어간다.    기억은 시간과 어떤 관계일까? 기억은 시간의 집에 놓여있는 오래된 가구일까? 집 안 여기저기엔 지나간 시간들의 지문이 찍혀있고 아직 사물 속에 갇혀있는 시간들도 있다. 그들은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은박지같이 반짝이고 싶어서 스스로 해방공간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바람소리가 또 창문을 흔든다. 나는 집 밖에 나와서도 창문 소리 듣는 것이 즐겁다.그 소리에는 별사탕같이 달콤한 파랑, 초록, 노랑, 빨강, 하양 빛이 묻어있다. 들어가서 살 수 없는 집 울타리엔 노란 개나리꽃이 피어있다   이미지 여행    너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거기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것들이 웅숭그리고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다만 무엇이 휘익 휘감는 느낌만 든다고? 너는 그림자여서, 그 느낌은 빛이 발산하는 백색의 전율이라고?    어디서 둥둥둥둥 소리가 들려오고 막이 오르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너는 거기서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는 원소가 된다고? 그곳에는 시간을 지워버리는 안개의 덩어리들이 솟구쳐 오르고, 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으로 둥둥 떠올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너는 아침 햇빛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나일 강을 내려다보다가 히말라야 하얀 눈 산 위를 지나간다고? 너는 도시의 전동차 안을 떠돌기도 하고,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기도 한다고?    나는 너와 통화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앙코르와트 사원 숲 푸른 공기 속을  둥둥 떠간다. 그때 사원의 짙은 그늘과 무한 질량의 환한 햇살 사이를 넘나들며 UFO처럼 번쩍이다 사라지는 것들이 보인다.   북한산의 레몬 향기        비봉(碑峰)이 눈앞에 탁 마주서는 북한산 계곡 비탈길에서 허옇게 누워있는 늙은 눈을 만났다. 늙은 눈은 피부가 푸석푸석하다. 그 옆에는 오전 11시의 햇빛이 벗어 놓고 간 잠옷이 보인다. 꽃나무와 밤을 보낸 햇빛의 잠옷에 발그레한 향기가 묻어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옷 속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노란 빛이 뿜어져 나온다. 1937년 4월 17일 오전 4시 20분 일본 동경제대부속병원(東京帝大附屬病院) 어두운 침대 위에서 28세의 뼈만 남은 이상(李箱)이 눈을 감고 있다. 그는 임종의 순간, 갑자기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고 한다.진달래나무 가지들이 무성한 계곡, 일주일 전에 속옷마저 훌훌 벗어버린 겨울이 허공에서 와와와와 소리치며  하얗게 쏟아져 내리던 비탈길. 등산화에 밟히는 늙은 눈의 몸에서는 질척한 체액이 흘러내린다. 그때 갑자기 북한산이 꿈틀거리며 체취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노란 레몬 향기가 사방에 퍼진다. 정오의 환한 빛 속에서 수염을 깎지 않은 이상(李箱)이 웃고 있다. 꽃이 피지 않은 꽃나무가지가 반짝인다.   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순식간에 내 눈의 자동 셔터가 찍은 한 컷의 동영상. 2008년 5월 25일 정오 일행들과 북한산 사모바위 틈에 뿌리 뻗어 만개한 라일락 꽃 짙푸른 향기에 취해 있을 때, 햇빛 환한 비봉碑峰 쪽으로 휘익 날아가던 은백색 깃털들. 야아, 소리 지를 틈도 주지 않고 반짝이는 빛을 던지며 10분의 1초의 속도로 내 시야를 벗어나는 은빛 부챗살. 그 반짝이는 부챗살은 화창한 초여름 날 산이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쾌한 UFO? 그럼 지금 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무성하게 돋아난 녹색 이파리들이 노랑 하양 보라 꽃들과 어우러져 한창 신명나는 판을 벌이고 있는 중! 12월 아침 아이들과 식탁에서 죽은 닭의 살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찬란한 별밤 길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도시 전체를 점령해버린 은백색의 젊은 눈들. 질주하는 차바퀴에 깔린 눈들의 몸에서 나온 맑은 피는 도로에 줄줄 흐르고, 아이들은 포크를 던지고 와아, 환성을 지르며 공터로 뛰어나가고, 도시는 하루 종일 은백색의 축제. 너는 지금 사람들의 무의식無意識 속 공간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환한 불꽃들을 팡팡 터뜨리는 UFO의 고향을 찾아 네팔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해발 5000미터가 넘는 백색고산지대白色高山地帶. 그곳은 어떤 것이든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지점. UFO의 탄생지는 그곳 새파란 공기층 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UFO:미확인 비행물체        사각형 스크린     비 그친 아침, 나는 닫힌 창문을 연다. 스르륵 열린 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구름 A, 구름 B,구름 C. 이어서 펼쳐지는 파란 여름바다의 영상.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출렁인다. 동해 화진포에는 빨간 사과 빛 안개. 나는 그곳에 푸른 비늘 덩이로 살아 움직이는 집을 지어 놓았다. 그 집은 환상의 집.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시간 밖에서 일하는 푸른 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별빛이 찬란한 밤바다 모래 위를 걷는다. 사각형 스크린은 무한 공간. 그 속에 가득한 여름바다, 여름바다. 여름바다는 나뭇잎에서도 출렁이고 땅강아지 집에서도 출렁이고 아스팔트 속에서도 출렁이고 노래방에서도 출렁인다. 젊은이들은 동해의 고래를 잡으러 가자며 매일 밤 어깨동무를 하고 여름바다로 떠난다. 그들에게 바다는 황홀한 전율의 출렁임. 햇빛 번쩍이는 검푸른 등을 보이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사각형 속 스크린도 부르르 부르르 온 몸을 떤다. 스크린은 사각형을 확 밀어버리고 수영복차림으로 뛰어나가려는 거 같다. 그때 사각형 스크린 밖에서 사람 A가 열무, 가지, 오이, 호박을 트럭에 싣고 와서 스피커로 “무공해 싱싱한 채소를 싸게 팝니다.”라고 소리친다. 캄차카 바다 돌고래들이 펄떡펄떡 솟구치고 있는 장면이 TV 화면에 가득한 아침이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 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녹색 전율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숨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박쥐 또는 소녀        동굴 탐사요원으로 다녀 온 그의 디지털 카메라 속에서는 신생대新生代의 동굴 속 벽에 검은 부챗살 날개를 접고 붙어 있던 박쥐 떼들이 동영상으로 변해 푸르르 푸르르 날아다니고 있다. 박쥐들은 휘황한 불빛에 놀라 어둠의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듯 날개를 퍼덕이며 난다.    하얀 시트 위에 누워 내시경內視鏡 검사를 받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사춘기 소녀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녀의 동굴에서 어둠을 모아 발그레한 찔레꽃을 계속 피워 내고 있는 볼이 빨간 소녀.    나는 가끔 이미지가 형성되기 이전 암흑의 물질들이 떠다니는 무의식無意識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동굴의 후미진 곳에서 푸드덕대며 날아가는 박쥐가 보이고 그때마다 그녀의 방 벽에 걸려 있는 에서 빨간 볼의 사과들이 햇빛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모형 전시실 또는 깨진 유리창      6월의 태양이 눈부신 한낮 국립박물관 모형 전시실에서는 신석기시대 근육질 젊은 사내의 돌칼 가는 소리가 난다. 사내는 숫돌에 칼을 갈다 가끔씩 고개를 들고 사냥할 때 쓰던 돌화살촉을 움켜쥐고 유리 상자를 깨고 뛰쳐나오려는 듯 허연 수은등 불빛을 노려보고 있다.   12월이 되면  카메라를 메고  세찬 눈보라로 뒤덮인 겨울날 뻘겋게 이글거리던 드럼통 석탄 난로 곁에 둘러서서 외지外地로 떠나려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방금 검은 탄 속에서 나온 듯 이빨이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젊은 광부들의 뿌연 입김이 깨진 유리창에 묻어 있는 30년 전의 K역을 찾아서 눈길을 떠나는 그녀.    낮 12시 20분, 나는 그녀의 모형 작업실 벽에 걸려있는 컬러사진 검붉은 고철古鐵들의 무더기 사이로 돋아난 풀잎의 푸른 혈관 위에 앉아 있던 벌 한 마리가 잉잉 잉잉 방안을 돌며 유리창에 몇 번 몸을 부딪칠 듯 하다가 열린 유리창 밖 환한 빛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본다.     자살폭탄 또는 푸른 울음     자신의 부풀어 오른 봉오리를 만지며 은밀한 욕망 속으로 잠입하는 영화 속의 그녀. 밤마다 폭탄을 준비하는 그녀의 몸은 800만 화소의 선명한 영상 속에서 움직인다.   날카로운 과도果刀로 사과를 도막내어 빨갛게 익은 사과의 중심에 박혀서 스스로 소리 없는 폭발을 꿈꾸고 있던 까만 씨앗 몇 개를 들여다본다. 그들도 촉촉한 살의 유혹 속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있던 걸까?     TV 뉴스 자막이  사라지자, 한여름 밤 안동 지레 마을 산 개구리들이 어둠 속에서 일제히 쏟아내는 푸른 울음소리가  달빛 속을 벗어나서 무한허공으로 출렁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다.      오전 11시 40분의 통화   도봉산 성인봉 하얀 바위벽 아래 깊은 골짜기에서 옆의 푸른 빛 솔잎에게 빨갛게 불타는 자신의 순수한 몸뚱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가을 단풍나무를 본다.   산새 몇 마리 그들 사이를 포르르 포르르 포르르 재빠르게 옮겨 다니는 오전 11시 40분   -삐 소리 후 소리샘 픽 보이스로 연결되오며 통화료가 부가됩니다. 내 휴대폰에서 거듭 흘러나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   순간 하얗게 눈 덮인 소림사 마당에 달마를 찾아온 혜가가 붉은 피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팔 하나를 들고 서 있는 그림이 만월암 바위벽 스크린에 나타나고   하얀 침대시트 위에서 좌선坐禪의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는 *남구의 감은 눈이 불그레해진다.   * 남구: 오남구 시인    아침 드라마    아침 8시 TV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빨갛게  부풀기 시작하고  나는 1,2,3,4...숫자에서 벗어난 그녀의 시간이 접시 위 생선토막에  빨간 소스로 뿌려지는 상상을 한다.   (낳자마자 자식을 버린 어미를 어찌 어미라고 할 수 있단 말이야!) 드라마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그녀는 생선을 구우며 눈물을 흘린다.   그때 40대 여자의 가슴에서 뭉클 솟구쳐 나온듯한 한 뭉치 희끄무레한 연기가 주방의 작은 창문으로 빠져나가고   (파란 신호등 앞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머니와 딸)   나는 또 그녀가 울면서 헤쳐 온 시간의 숫자들이 둥근 공이 되어 아스팔트 위를 통통통통 뛰어가는 상상을 한다.    (오늘 서해상에는 시계 30m의 안개가 걷히고 중부지방엔 오전까지 10mm의 비가 내린 후 날씨가 점차 맑아지겠습니다.)   계속되는 미해결에서 잠시 빠져나온 대도시의 아침시간은 유리창에 줄줄 빗물 흘러내리는 거리에서 초록, 노랑, 빨강 물이 든 풍선을 펑펑 터뜨린다.      사각형과 삼각형과 원     사각형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각종 스크린이 보인다. 아침 7시. 사각 침대 위에서 기지갤 켜며 일어난 삼각형이 사각문을 열고 나오고, 원이 통통통통 튀면서 그 뒤를 따라온다. 삼각형은 원의 손을 잡고 파랗게 출렁이는 바닷가로 뛰어간다. 사각형의 바다 위에서 삼각형의 돛배가 하얀 물보랄 날리며 신나게 달린다.   몇몇 삼각형이 무어라고 소리치며 사각형의 오래된 집의 창문과 벽을 부수고 있다. 사이렌을 울리며 사각형의 경찰차들이 몰려오고, 100여 명의 삼각형과 원이 둘러서서 응원을 한다. 그들은 손뼉을 치며 응원가를 부르다가 가슴팍 속주머니에서 노랑 풍선을 꺼내서 하늘로 날린다. 그 풍선들은 허공에서 서로 손을 잡고 얼굴을 비비고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을 할 때마다 풍선의 입 속에서 또 노랑 풍선들이 나와서 파란 하늘을 가득 채운다. 대도시의 봄 하늘에 유채꽃이 만발한다.   밤 12시 20분. 아이슬란드의 거대한 육각형 빙산 벽이 철썩철썩 무너져 내려 새파란 육각수의 바다 속으로 떨어진다. 수천만 톤의 새 육각수가 바다를 넘어 사각형의 도시건축물都市建築物들을 우르릉우르릉 흔들며 밀려오고 있는 밤이다.   태초의 빛    컴컴한 칠흑 공간 속에서 빛 한 줄기 휘익 환한 선을 그으며 지나가는 찰나 여기저기서  펑 펑 펑 펑 터지는 불꽃들. 아 아 소리치며 태초의 허공 속으로 빨려들어간 나는 눈부신  빛의 알갱이들이 파랑, 초록, 노랑, 빨강, 하양 색깔로 부서져 흘러내리는 프로방스의 야경  사이프러스 숲에서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떠오르는 물고기가 된다.      머리나 입술이나 가슴이나 허리에서 빛이 찬란하게 꿈틀거리는 밤길. 괭이를 멘 농부들은  별빛에 휘감긴 듯 비척거리고, 지나가는 역마차도 흥이 났는지 더 털털거린다. 그때 점점 더 거칠어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숨소리.      한여름 밤 놀이 공원 은하수가 빛나는 스카프를 목에 두른 유모차 속 아이는 잠이 들고, 태초의  빛 속에서 나와 웅성거리던  어른들은 실로폰 소리가 나고 이어서 “아홉 십니다”라는 여자의 예  쁜 음성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몰려가고 있다.      사진을 찍는다     그는 카메라를 메고 사물들의 꿈을 찾아서 매립지埋立地의 안개 속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나는 방 안에서 거울 속의 내 눈동자를 찍는다. 내 눈동자 속에 나를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   그 나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3,4,5,6,7,8,9,10,...의 나, 나, 나, 나............    *第一의兒孩/第二의兒孩/第三의兒孩/第四의兒孩/第五의兒孩/第六의兒孩.........................     나는 만다라曼茶羅 속에 들어가 뱀 옆에 피어 있는 빨간 꽃잎속의 꽃잎에 카메라의 렌즈를 고정한다.     그가 찍어온 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대학로 큰 길을 점령한 시위대의 고함 소리  가 계속 울리고 있다.       * 1930년대 아방가르드 시인 이상(李箱)의 시 (시 제 1호)에서 발췌    초여름 풍경   뱀 굴에서 미끈미끈한 몸뚱일 좌우로 흔들며 뱀 한 마리 뱀 두 마리 뱀 세 마리 뱀 네 마리 나온다.가늘고 긴 혀 날름거리며 나온다. 엊저녁 기억들은 푸른 가지 사이에 허연 비닐봉지로 걸어놓고 햇빛 속으로 스르르르 스르르르 미끄러지며 나온다.   발가숭이 햇빛들은 분수噴水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고 아이스크림처럼 햇빛을 빨아먹는 가로수 잎사귀들 사이로 풍선 하나 풍선 둘 풍선 셋 풍선 넷 둥둥 떠오른다. 찢어진 풍선들은 보이지 않고 새 풍선들이 떠오른다.   초여름 풀 향기 풍기며 19살의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청계천 물속에서 나온다. 눈이 큰 헵번, 입이 큰 헵번이 눈웃음치며 나온다. 휴대폰을 들고 시청 앞 광장 잔디 위에 앉아 있는 목이 긴 헵번은 빨간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다.   가슴에 철퇴를 맞고 허물어진 50년 전 건물들의 폐자재 더미 속에서 나온 유리창의 파편 조각들이 반짝인다. 덤프트럭에 실린 우그러진 창틀을 향해 반짝인다. 원주민들의 구멍 난 양말짝,찌그러진 양재기, 찢어진 홑이불에 묻어있는 얼룩을 보며 반짝인다.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밤 12시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 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구멍탐색     아침나절 5월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개미떼들이 제각기 까만 등을 반짝이며 들락거리고 있는 쓰러진 나무의 구멍에서 작고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 방울들은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나와 초록 이파리 사이사이로 떠돌고 있다.     맥주를 좋아하는 그는 시를 ‘황홀한 탐색’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탐색은 카메라를 메고 존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존재의 구멍은 탄생의 출구? 구멍 속의 시간은 언제나 태초? 병 속에 갇혀 있던 맥주가 구멍에서 나와 투명한 유리 컵 속에서 하얀 거품을 뿜어낸다.     밤 10시, 나는 TV 채널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산의 구멍으로 들어가는 탐험대들을 본다. 컴컴한 굴속으로 들어간 그들은 전조등을 켜고 굴의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굴 속에서는 맑은 샘물이 솟아 흐르고 불빛에 비친 종유석이 찬란하다. 산의 구멍은 컴컴함 속에 찬란함을 숨기고 있다. 한 탐험대원은 꿈틀거리며 굴의 벽을 기어가는 작은 생명체를 촬영하고 있다.    그는 내일 오래 비워둔 집에 들어가서 보일러 연통청소를 하고, 3만6천 피트의 하얀 구름 위에서 빨간 바다 새우를 맛있게 먹었다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한다.     노란 색을 주조로 한 세 개의 그림     구파발에서 의정부 쪽으로 뻗은 큰 도로 옆엔 봄바람에 흔들리는 개나리꽃 울타리가 석재상 마당 한쪽과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돌부처 돌마리아 돌사자 돌여인 돌사슴의 머리와 가슴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그 석물들과 손잡고 노는 상상을 하며 노란 개나리꽃 울타리를 툭툭 치고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 때문일까? 돌부처와 돌마리아가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둘레를 돌사자 돌사슴 돌여인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그들이 뛸 때마다 개나리 울타리에서 노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늘진 석재상 마당이 환해지곤 한다.   목만 있는 늘씬한 젊은 여인이 노란 원피스를 걸치고 서 있는 대형 마트 의류 코너. 그 건너편 쪽에는 목만 있는 청년이 청바지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앉아있다. < 그들은 초현실의 예술품이 아니라고요?>   강남 터미널 대형 TV에서 갑자기 콸콸콸콸 흙탕물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떠내려 온 가재도구들이 큰 물살에 둥둥 떠가다가 나무그루에 걸려있는 게 보인다. 주민들은 무너진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무어라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멀리서 털털털털 헬리콥터 소리가 나고 노란 조끼를 입은 구조대원들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구경을 하던 청년 셋이 TV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모니터에서 튀어나온 흙탕물이 내 몸에 확확 끼얹힌다. 내 옷에서는 노란 개나리꽃 향기가 난다.   우아우아 아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검푸른 파도 펄떡이는 돌고래 (산의 어깨 위로 솟구치는 검붉은 불길)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다시마 미역 멍게 해삼 조개 (풀과 나무들의 울부짖음 불길 속의 주택들)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란 바다 빨간 구름 허연 맥주 거품 (47인치 모니터에서 풀썩풀썩 뿜어져 나와 중계동 은행사거리 상공을 떠도는 LA의 검은 연기 검은 연기)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파도소리 기타소리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 (거대한 공동묘지 상공 떼 지어 떠도는 검은 비닐봉지 위에서 반짝이는 하얀 눈 하얀 눈)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뜨거운 모래밭 달빛 속 엉덩이 (당신은 죽은 30대 여인의 목에서 반짝이던 나비날개 모양의 보석을 보았다고요?) (그녀는 나비가 되어서 봄 나라로 날아갔을 거라고요?)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모닥불 하얀 잿더미 빈 맥주병 (당신은 사람들이 모두 복제품 같다고요?) (검푸른 파도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혁명을 꿈꾸는 체 게바라의 가슴을 껴안고 싶다고요?)   꿈틀꿈틀 아침 바다 붉은 핏덩이 핏덩이 우아우아 아 우아우아 아   블랙홀(black hole)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검은 구멍이 되어 소멸하는 거대한 별에는 정지된 시간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있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고요? 그들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화석化石 속의 물고기처럼 박혀 있을 거라고요?   아산병원 영안실에 있는 그녀의 시신屍身도 자세히 관찰하면 연료가 모두 소모된 마지막 순간에 자체의 중력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되어 생성하는 죽은 별들의 검은 구멍과 다르지 않다고요?   오늘 밤 당신은 35000피드 상공의 비행기가 컴컴한 허공 벽에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우주의 얼음덩이 속에서도 뜨거운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환각제 복용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의 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볼록한 가슴선에선 노란 봄꽃냄새가 물씬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있던 둥근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가득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아스팔트 위의 맨살 여자     아스팔트 위에서 30대의 여자가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허벅지 사이에 넣고 앉아있다. 둥근 여자의 몸은 매끈한 살덩이 바퀴가 되어 아스팔트 도로를 굴러갈 것 같다.   (화가는 왜 여자를 달팽이같이 둥글게 말아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은 것일까?)   (여자는 화가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시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것일까?)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굴려 본다. 그녀는 공기가 팽팽한 고무공같이 가볍게 구른다. 그녀는 통통 튀기도 한다. 구름이 그녀를 태워 하늘로 오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검은 아스팔트 도로에서 파란 바다로 굴러가며 깔깔거린다. 그때 100km로 달려오던 육중한 화물차가 삐익 소리를 내며 간신히 그녀를 비켜간다. 핏발선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휙 스친다.   지금 내 눈 앞에는 파란 바다가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도로에게 반항이라도 하는 듯 맨살로 앉아있는 30대의 여자가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너무 뜨겁다.   파란 의자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    그녀는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우주의 시간   그 미술관 대형 바다 그림 속에는 10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그녀의 가족들이 푸른 살 번득이며 파도치고 있다. 남편과 아이들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반짝이며 춤을 추고 있다.    밤 11시20분, 사이언스 TV에선 은하계 넘어 어느 별에 납치되었던 지구의 사람들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귀환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400명의 귀환인 들은 우주의 0의 시간 속에서 살다왔다고 한다.   3월에 내리는 함박눈은 서로 다른 집에 살면서 애태우다가 떠나간 이들이 만나서 산과 들과 바다에 눈부신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하얗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눈의 입자 속에서는 눈물을 안고 살아온 1000년도 우주의 0의 시간이 되어 반짝이고 있다.    공과 아이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꿈속에서 가지고 나온듯한 빨간 공을 길바닥에 굴리며 놀고 있다. 공은 반짝이며 굴러가고 아이는 공을 쫒아 소리 지르며 뛰어간다. 거리의 유리창들이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는 아침 9시, 공을 따라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 공은 주택가를 빠져나와 통통통통 공장 굴뚝을 오르기도 하고, 통통통통 푸른 가로수 가지 위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건너뛰기를 하다가 초록 들길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 내려 앉아 잠시 멈춰 있다. 아이도 버스지붕 위에서 흰 구름을 보며 쉬고 있다.   긴 사다리를 허공에 설치하고 구름 위로 올라가는 TV 속 사내가 당신을 유혹한다고요? 그래서 당신도 파란 옷의 아이처럼 빌딩과 빌딩을 휙휙 건너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오늘도 꿈속에서 본 빨간 공을 찾아서 뛰어다니다가 빌딩 옥상 구석에 누워서 10월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고요? 그 아이의 집은 해초들이 나부끼는 바다 속인 거 같다고요? 아이의 몸에선 바닷물 냄새가 난다고요? 빨간 공은 수평선의 해 같다고요?   버스 지붕 위에서 쉬고 있던 아이가 빨간 공과 함께 노랗게 불타는 한낮의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 뒤를 밀짚모자를 쓴 이중섭이 화판을 메고 걸어가고 있다.      돌밭의 아우성이 만들어 낸 연상     발가숭이 햇빛이 남한강 물 위에서 팔짝팔짝 놀고 있는 낮 12시 30분. 돌밭에선 하얀 돌멩이들이 피 묻은 깃발을 손에 들고 아우성치며, 아우성치며 파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날아오른 돌들은 한 순간 붉은 동백꽃이 되어 푸른 강물 위를 둥둥 떠가기도 하고 흰 날개 퍼덕이는 두루미 떼가 되어 들판 습지로 날아간다. 나는 수많은 돌중에서 허공으로 떠오르다 물속으로 떨어진 검은 돌 하나를 주워서 걸망에 넣는다.   정동진 새벽바다 뻘겋게 번지는 핏물 위에서 퍼덕이는 금빛 살점들. 그 거대한 물 밑에서 아 아 아 아 아 아 소리치며 꿈틀거리는 붉고 둥근 돌 하나. 그때 둥둥둥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그 후끈 후끈한 소리 속에 그가 있을지도 몰라. 10년 전 지상을 떠나간 그가 비늘 번쩍거리고 있을지도 몰라. 새 빛 번지는 백사장에 나가 껑충껑충 학춤 추는 무의식 속의 나.       *< >부분은 스에나가 타미오의『색채심리』에서 노르웨이 화가 뭉크(Edvard Munch)의 일기를 인용한 글임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 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 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 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비오는 날의 아우슈비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고 작은 언덕같이 쌓여있는 머리칼이랑 가죽 가방 일곱 살 아이들의 꽃무늬 구두가 유리창 진열장 속에서 푸르르 푸르르 떨고 있는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1940년 5월 감옥을 쌓는 회색 벽돌에서 푸른 하늘 한 자락을 꺼내들고 환한 햇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가 있었다고요? 그가 벗어 놓은 듯한 파란 상의上衣가 높은 감시탑 지붕 끝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고요?   나는 영하의 겨울밤 서울 을지로 지하철역 시멘트 바닥에 박스를 깔고 새우잠 자는 노숙자露宿者의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온 파란 손수건을 본다. 영하 25도의 얼음 꽃밭에서 환한 햇빛 속으로 팔랑팔랑 날아오른 노랑나비 한 마리가 그의 잠든 머리 위에서 날고 있다.   비오는 날 폴란드 오슈비엥침 아우슈비츠의 어둡고 침침한 허공에서 쪼로롱 찍찍 쪼로롱 찍찍 쪼로롱 이름 모르는 새소리가 들린다.   30대 여인 또는 구렁이        한 청년이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딴다. 검푸른 살의 꽁치 한 마리가 책처럼 잘 요약 되어 삭아 있다. 이집트 미라의 여인이 관(棺) 속에서 꿈틀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대신전(古代神殿)의 조각상에서 나온 30대 여인이 혼자 중얼거린다. “가면을 쓴  사내가 칼을 들고 말했어” “신(神)은 인간의 피를 좋아 한다고” “나는 그와 잔 적이 있어” 그녀의 그림자 뒤에서 붉은 노을이 TV 화면 가득 이글거린다.     작은 새들이 찌르르 쫑쫑 찌르르 쫑쫑 경쾌한 소리로 날고 있는 5월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어젯밤 드라마 속 여인이 자신의 검은 머리 위로 물을 쏟아 붓고 있다. 그녀의 허리가 푸른 잎 사이에서 구렁이처럼 햇빛에 번득인다.     뱀과 그녀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겨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 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소리가 묻어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통화通話     아 아, 여보세요. 40대의 사내가 한강대교 아치 위에 올라가서 집 나간 아내를 찾아 달라며 자살소동을 벌이고 있는 걸 봤다구요. 그 사내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 뛰어내릴 듯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다구요. 3월의 하늘에선 확성기를 든 경찰과 구경꾼들에게 주는 선물인양 하얀 눈송이를 흩뿌렸다구요.   말수가 적은 40대의 회사원 K씨는 1년에 한두 번 손에 날카로운 못을 들고 자신이 사는 아파트 주차장 고급 승용차들의 차체에 굵은 금을 긋고 다닌다구요.   망치를 들고 깨진 유리창 조각들을 더 잘게 부수고 있는 인부들의 얼굴이 점점 환해 지고 있어요. 그들은 망치질에 신명을 풀어내는 듯 리듬을 타고 있어요. 작은 알갱이로 돌아간 유리들도 햇빛에 반짝이고 있어요.   아 아, 여보세요. 조주 선사가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이고 한강대교를 걸어가고 있다 구요?   * 조주 선사(778-897):『육조단경』에 나오는 중국의 선승. 선가(禪家)에서는  조주고불(趙州古佛) 또는 조주라 부른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묻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말을 했다.     검은 도로     직선의 아스팔트 도로를 100km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검은 도로를 손짓하며 말한다.   “ 방금 지나온 길이 어릴 적 뛰놀던 동네 언덕이야” “ 이 검은 도로 밑에 내가 태어난 마을이 깔려있는 거야“ " 길을 낼 때 언덕의 중심에 퍼런 정수리 뼈 드러낸 바위 하나 있었대" " 비 오는 날이면 도로 밑에서 둥둥둥둥 풍물소리가 울려오는 거 같아"    TV 속에서는 마다가스카르 맨발의 여자들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 웃으며 벌거숭이 아이들 손을 잡고 맑은 강물이 보이는 푸른 풀밭 언덕길을 뛸 듯이 걸어가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중계동 은행사거리 40대 사내의 붕어빵틀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붕어빵이 구워져 나올 때   전자상가 TV 화면에는 시리아 반정부군의 자살폭탄으로 반쯤 부서진 건물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상자들   나는 제주산 노란 감귤 한 봉지를 사들고 행인들이 붐비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고   내 옆을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10대 여자 아이들   아파트 화단 젖은 흙속에서 10cm 가량의 검붉은 지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탈출       제각기 자기의 방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 한밤중   하얀 살들이 속으로 말 하고 있었어. 비 오는 날 손잡고 벌거벗은 망아지처럼 푸른 풀밭을 뛰어다니고 싶다고.   TV 속에서는 야생의 말들이 히힝거리며 몽골 초원의 빛 속으로 뛰어가고 있었어.   나는 벽에 딱 붙어서 바닥에서 통통 튀며 놀다가 창밖으로 날아가는 고무공을 보고 있는 타일 조각들을 생각하고 있었어.   빛 또는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 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 물방울 뿌리며 빌딩 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멘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저수지 수초水草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노랑나비     비오는 날 번쩍이는 빛을 향해 어두운 헛간을 뛰어나간 고양이의 눈빛 같은   노랑나비 하나 내 숲의 어둠 속을 떠다니며 반짝인다   李箱은 에서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 본다. 그것은靈界에絡繹 되는秘密한通風口“라고 했다   그는 오늘도 靈界의 컴컴한 숲속에서 죽은 나비와 춤을 추고 있을까?   정리해고 된 40대의 사내가 중고 트럭 조수석에 아내를 태우고 휘파람 불며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날고 있다.   마네킹 또는 아침 햇빛    오전 8시 30분 백화점 지하창고에서 점원들의 들것에 실려 나오는 가슴이 깨진 20대의 남녀 마네킹 새 두 마리 지하의 어둠 속에서 날아올라 아침 햇빛 눈부신 빌딩 사이로 날아간다   햇빛 속에서 반짝이며 출렁이기 시작하는 나뭇가지들   바이칼 호수 마을에서 둥 둥 둥 둥 푸른 하늘로 울려 퍼지는 북소리 운길산 수종사 나한전에서는 환한 빛을 향해 맨 머리의 나한들이 웃고 있다     빨래판   아파트 창 밖 젊은 남자의 스피커 소리 -싱싱한 물오징어 한 마리가 이천 원, 이천 원   교실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유리창을 흔들며 바다 속 청어가 되어 퍼덕인다   나는 빈 방에서 생목의 가구가 내쉬는 나무의 숨소리를 듣는다 숲의 나무들이 잎사귀를 흔들고 있다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서 팔만대장경판을 둘러보고 나오는 할머니가 옆 할머니 허리를 찌르며 소근거린다 빨래판만 보고 간다고   푸른 풍선 하나 허공에서 둥둥 떠돌고 있는 한낮이다   열탕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다가 어둠이 물컹물컹 밟히는 무의식의 늪지대로 들어간다. 축축하고 후끈후끈한 그 늪이 내 원시의 열탕이라는 걸 발견한다.   식탁에 앉아 칼질과 포크질로 죽은 암소고기의 탄력에서 느끼는 관능. 그 암소고기는 물질의 열탕 속에서 꿈꾸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수석 수집가인 그녀는 쑥돌의 속살을 문지르며 원생대 바다 속 생명체들의 숨소리를 만지고 있다고 한다. TV에서는 시리아 난민 열세 살 키난 마살메흐가 인터뷰를 하면서 "그냥 전쟁만 멈춰줘요, 그게 전부예요."라고 외치고 있다.   카프치나 엔진 소리를 내며 굴삭기가 새 길을 내고 있다   굴삭기의 날카로운 삽날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마을의 푸른 언덕 부르륵 부르륵 퍽, 퍽, 퍽 불꽃이 튀는 굉음 언덕의 중심에 숨어 있던 바위의 정수리에서 터져 나오는 핏빛소리 길바닥엔 언덕에서 파낸 돌과 흙들이 맨 몸뚱이로 바들바들 떨고 있다 그는 어제 밤 빨간 버스를 타고 19세기의 그림 속 마을 카프치나로 떠난다고 했다 산양들이 흰 구름들과 살고 있다는 카프치나   고산지대高山地帶의 산양들이 파란 하늘을 향해 메에 메에 노래할 때 흰 구름은 자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모습을 하고 산양들의 머리 위에서 떠돌고 있다는 카프치나 카프치나   아스팔트 도로의 옛 마을 우물터에서는 어릴 적 빠져죽은 계집아이가 밤마다 색동옷을 입고 나와 혼자 놀고 있다   빛과 시간   빛은 과거의 공간 속에서 탈출한 새 시간이라고? 15억 년 전에 폭발한 초신성의 빛이 지금 지구에 도착한 것이라고? 컴컴한 터널 속에서 환한 빛을 뿜으며 달리고 있는 전동차 속의 나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들을 어떻게 동일하게 맞출 수 있을까? 그녀는 꽃을 안고 천년의 시간이 파란 이끼로 피어나는 탑의 둘레를 돌고 있다          지붕 없는 집   도로를 달리던 차가 지붕 없는 집 앞에 멈춰 서 있다   지붕 없는 그 집에서는 밤이 되면 하늘의 별빛들이 내려와 의자며 식탁이며 깨진 유리창 창틀에서  아이들처럼 뛰고 노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집은 어느 날 스스로 배가 되어 별빛 찬란한 우주의 바다로 둥둥 떠갈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   CCTV 화면에는 60대의 여자가 목에 별빛 스카프를 두르고 아파트 옥상에 서 있는 장면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의 화면   그는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다. 그는 쓰러질 듯 쓰러질 듯 걷고 있다. 태양 볕이 영상 50도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는 모래밭에 쓰러졌다. (그는 장면을 바꾼다. 사막을 초원으로, 계절을 4월로, 그리고 구름이 덮인 하늘, 기온은 영상20도, 풍속은 .....) 그는 풀밭에 앉아 있다. 멀리 마을이 보인다. 그는 일어서서 마을 쪽으로 걷는다. 아스팔트 길이다. (그는 1500cc 빨간 승용차를 아스팔트 길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운전을 하고 달린다. (그는 운전석 옆 자리에 23세의 금발 아가씨를 앉혔다.) 그는 23세의 금발 아가씨와 함께 휘파람을 불며 마을로 들어간다. (그 순간 사라지는 화면) 그는 눈을 떴다. 아침이다. 머리맡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 50분전. 그는 세수를 하고 정장차림으로 문을 나선다. (초원, 빨간 승용차, 금발의 아가씨는 그의 화면에서 지워지고 없다.)              시간   불빛 환한 아파트 창가에는 잠의 시간에서 추방된 사람이 서 있고 지나간 시간이 몽롱한 안개를 피우는 거리엔 한 여인이 죽은 개를 가슴에 품고 걸어가고 있다 그 시간 You Tube의 인문학 특강 “존재의 세계에는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이 없다“는 강사의 목소리가 귀를 울리고 발굴을 끝낸 인골이 굵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카자흐스탄 박물관 유리관 속에서 2500년 전 유목민의 시간이 전등불빛 아래서 반짝이고 있다      사진 한 장           그는 눈 덮인 광야의 사진 한 장 남겨놓고   아시의 시간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밤이 되면 히힝 히힝 광야의    말울음 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알타이 산맥 눈 녹은 초원지대 허공에서    검독수리 한 마리 빙빙 돌고 있는 한낮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남미의 정글 속    거대한 마야의 탑 돌계단에서 잠자던 곰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집을 떠난 한 사내가 몽골말을 타고    바이칼 푸른 호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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