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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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제74장 연변인민민주정권의 건립 댓글:  조회:2976  추천:0  2014-03-02
처음으로 연변인민대표대회 거행 민주정권 건립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결성  10대시정방침 반포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쏘련홍군이 연변에 진주한 후 얼마 안되어 ‘간도림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주석은 괴뢰만주국간도성 부성장이였던자이고 정부의 직원이란 모두 괴뢰만주국 간도성공서에서 일하던자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매국적, 주국, 간첩, 경찰 등 잔여세력들이 재생의 희망을 품고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정세에서 중공연변위원회는 지희겸과 강동주에게 만주대동맹조직준비사업을 맡겼습니다. 1945년 10월 27일,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 3차위원회확대회의가 열리였습니다. 회의에서는 총동맹을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재조직하였으며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하고 전상근 등 27명을 위원으로 한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건립에 대한 연변대학 최홍빈교수의 력설이다.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가 해체된후 붉은군대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그해 8월 24일, 지희겸, 강동주, 박동운 등이 룡정, 연길, 조양천 등지에서 선후하여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을 결성하였다. 혁명적군중단체를 더욱 단결시키고 통일하기 위하여 9월초에 여러 지방 군중단체대표 20여명이 룡정에 모여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을 결성할 것을 협상, 토의하고 지희겸, 박근식, 남창수 등으로 총동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사업에 착수하였다. 연변림시참의회 대회장. 9월 19일, 연길에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대표대회가 열렸다. 연길과 화룡 두 개 현의 대표만 하여도 600여명이나 되었다. 회의에서는 지희겸, 박근식, 유일환, 강동주, 남창수, 전상근 등 30명의 위원을 선거하고 강동주를 위원장으로 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총동맹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0월20일, 중공동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동북항일련군 연변분견대의 강신태를 서기(군사부장 겸직)로, 강동주(조직위원 겸직), 지희겸(선전위원 겸직), 전윤필, 박근식 등을 위원으로 한 중공연변위원회가 건립되였다. 동북위원회는 민주대동맹을 동북에서 군중을 조직, 동원하는 주요한 형식으로 삼으라고 연변위원회에 지시, 연변위원회에서는 민주대동맹이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보다 더욱 광범위한 군중성을 띄였다고 인정하였다. 동시에 연변위원회 선전위원 지희겸에게 민주대동맹조직준비사업을 맡겼다. 10월27일,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 제3차위원회 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녀성 총동맹을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재조직하고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에 따라 지희겸을 위원장으로 선거하고 전상근 등 27명을 위원으로 하는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회의에서는 민주대동맹선언과 강령을 토론, 채택했다. 강령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전국의 통일과 단결, 평화, 민주 및 진보를 수호한다. 2. 광범위한 민주의 토대우에서 국민대회를 소집하고 민주련합정부를 건립하기 위하여 분투한다. 3. 일치 단결하고 호상 협력하여 국제 평화와 안전을 조장하자는 유엔의 주장을 옹호한다. 4. 중쏘우의와 련맹을 공고히 한다. 5. 일본군국주의와 파쑈주의를 숙청하며 중국을 침략한 일제의 장여분자를 숙청한다. 6. 신민주주의적삼민주의를 옹호한다. 7.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및 남녀평등과 인권을 보장한다. 8. 각 시, 현 국민회의에서 민주선거로 민주자치정권을 건립한다. 9. 간첩과 매국적을 인민재판에 넘겨 처리하며 그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인민에게 분여한다. 10. 중국을 침략하고 략탈한 일제의 재산, 토지, 건물을 몰수한다. 11. “밭가는자에게 밭을 준다”는 구호밑에 농촌의 합작조직을 발전시킨다. 12. 감조감식을 실시하며 가렴잡세와 부역을 페지한다. 13. 교육을 보급시키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킨다. 14. 빈고농민과 리재민을 구제하며 로동자의 생활을 개선시킨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이 건립된 뒤를 이어 각 현에서는 민주대동맹본부를 설립하고 구와 촌에는 민주대동맹 지부와 소조를 두었다. 연변철도조합도 연변인민민주대동맹 총부에 귀속되였다. 1946년 2월까지 각급 민주대동맹조직건설사업이 끝났는데 맹원 총수는 14만 5000명에 달하였다. 그중 조선족이 94%남짓이 차지했다.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건립된 이래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자기의 정치적주장과 투쟁강령을 실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동맹은 중국공산당의 정치주장과 방침정책을 적극 선전했으며 인민의 자위무장대오를 건립하여 일제와 괴로만주국 잔여세력과 토비를 숙청하는 투쟁가운데서 적극적인 력활을 했다. 그리고 연변경내의 철도운수를 회복하고 관리하였으며 민주적으로 구, 촌의 림시정권을 세우고 매국적주구청산투쟁을 벌렸다. 중국공산당의 기층조직과 기층민주정권이 정식으로 건립되기전에 현, 구, 촌의 민주대동맹은 민주정권의 역할을 하였다. 민정을 관리하고 생산을 조직하여 교육사업을 강화하고 리재민을 구제하는 등 사업을 하였으며 군중을 발동하여 죄악이 극히 큰 매국적주구들에 대한 청산투쟁을 진행하였다. 화룡현 두도구민주대동맹에서는 만인대회를 열고 괴로만주국경찰서장 등 우두머리들을 공개재판하고 즉시 총살하였다. 룡정에서는 매국적을 정산하는 대회를 열고 정사빈, 리금석, 리수수 등 주구, 특ㅁ를 공개재판하고 총살하였다. 1946년 7월, 중공동북국의 결의정신에 따라 민주대동맹의 간부와 골간들은 농촌의 토지개혁 공작대와 민운공작대에 참가하였다. 도시와 농촌의 민주정권이 보편적으로 건립되자 연변인민민주대동맹은 자기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1946년 8월 해체되였다. 민주정권 건립   연변림시참의회 청사. 1945년 11월, 중공중앙동북국과 길림성공작위원에서는 연안간부 옹문도 등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이때로부터 연변의 민주정권건설이 실제적으로 전개되였다. 1월 15일, 동북국과 길림성공작위원회의 지시정신에 쫓아 중공연변위원회를 중공연변지방위원회로 바꾸었다. 연변지방위원회위원은 옹도문(雍文濤), 강신태(姜信泰), 박일우(朴一禹), 진탄(陳坦), 운청(雲靑), 구회괴(邱會魁) 등 7명이였고 옹문도가 서기를 맡았다. 지방위원회는 연길, 화룡, 훈춘, 왕청, 안도 등 5개 현을 관할했다. 지방위원회에서는 간부를 각 현에 파견하여 현당위와 인민정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5일, 중공연길현위원회와 연길현인민정부가 설립되였는데 옹문도가 서기를 겸하고 왕품일(王品一)이 현장을 맡았다. 역시 11월 15일, 연안간부 진탄, 주개문(周介文), 소춘선 등이 왕청에 파견되여 가 중공왕청현위원회를 새롭게 조직, 진탄이 서기를 맡았다. 이날 왕청인민민주대동맹대표대회를 열고 왕청현림시정부를 철소, 새롭게 왕청현정부를 건립, 주개문이 왕청현 현장으로 추천되였다. 역시 11월 15일, 연안간부, 운청, 진홍조 등이 화룡에 가 중공화룡현위원회를 설립, 운청이 서기를 맡았다. 11월 19일 첫 화룡현정무회의를 개최, 화룡현림시정부를 철소하고 새로운 화룡현정부를 성립했다. 김정계를 새로운 현장으로 추천했다. 11월 20일, 연변지방위원회의 령도아래 연변인민대표대회를 열고 민주정권건설사업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였다. 대회에서 지희겸이 대회준비경과보고를 하였으며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연변정무위원회 위원, 정무위원들로 구성된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를 결성했다. 정무원 위원으로 관선정(서버족), 동곤일 등 3명이 선거되였는데 그중 강신태, 림계학, 지희겸, 박근식, 강동주 등이 조선인이였다. 관선정이 전원으로 동곤일이 부전원으로 선거되였다. 연변정무위원회에서는 간도림시정부를 철소했다. 대회에서는 일본인처리문제, 간도시 개칭문제, 왕청현 반동분자에 관한 문제와 괴뢰만주국시기에 건립한 충혼비, 기념비파괴문제 등 9개 의안을 채택했다. 대회에서는 또 “중한민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체 동포들이여! 이 위대한 명절을 기념하는 나날에 우리들은 쏘련홍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 자유와 행복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목전 중국의 정세를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 목전 중국의 앞에는 두가지 전도가 놓여있다. 그 한가지는 국민당의 일당통치을 견지하며 민주개혁을 허락하지 않으며 중국으로 하여금 비독립, 비자유, 비통일, 비부강의 고통스럽고 암흑한 중국으로 나아가게 하는것이며 다른 한가지는 곤난을 극복하고 전국인민을 해방하며 일치단결하여 독재통치를 페기하고 민주개혁을 실행하며 민주력량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여를 철저히 숙청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독립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통일되고 부강하며 광명한 새중국으로 나아가게 하는것이다. 전 중국의 4억5000만 인민대중의 수백만 산업로동자, 수천만 수공업로동자, 3억6000만 농민 및 기타 광범한 자산계급, 게명신사, 애국인사들은 모두 두 번째 전도를 옹호하고있다. 중국공산당은 이 두 번째 전도를 위하여 옹근 24년을 분투하였다. 특히 항일전쟁에서 중국공산당 및 그가 령도하는 팔로군, 신사군은 9500만 인구를 해방하였고 강적의 압박과 국민당군대의 봉쇄하에서도 거연히 투쟁전렬에 서서 해방구를 발전장대시켰으며 적점령구를 축소시키고 해방구를 확대하고 민주개혁을 철저히 실행하였다. 중한민중들, 전국적범위에서의 민주개혁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른바 국민당독재란 그 실질은 국민당의 반인민적집단의 독재이다. 그들은 중국민중 대단결의 파괴자이며 중국인민이 민주개혁을 실행하는데서의 장애물이다. 국민다으이 일당통치를 철저히 페기하고 민주련합정부를 세워야 한다. 11월21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제1차정무위원회의가 열리였다. 동곤일, 류팽령, 림계학, 지희겸, 박근식, 강동주, 한운승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정무위원회회의에서는 “10대시정방침”을 채택, 공보했다. “10대시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1. 지방자치안을 확보하며 훌률한 사회질서를 건립한다. 일본 잔여병과 토비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무기를 몰수한다. 2. 죄악이 극히 큰 밀정, 한간을 제외한 위만주국정부, 군대에서 일하던자로서 새정부를 향해 진정으로 뉘우치면서 새사람이 되려하는자에 대해서는 더는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는다. 3. 극소수의 일본전쟁범을 제외한 일본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4. 민주정치를 실시하며 인권, 재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5. 공업, 농업, 상업을 부흥시키며 생산을 발전시킨다. 가렴잡세를 면제하며 인민의 부담을 경감시킨다. 6. 민생을 개선하기 위해 감조감식하며 승낙한 말을 실천한다. 7. 로동자들의 임금을 높혀줌과 동시에 기업주의 합리한 리윤을 보장한다. 8. 신민주주의문화를 실행하고 노화교육을 배척한다. 교학을 진행하며 교원들에 대한 대우와 지위를 높혀준다. 실학청년을 구제하며 문화사업과 문화단체를 방조하여 건립, 발전시킨다. 9. 생활을 영위할수 없는 실업로동자, 중한피난민, 로인, 어린이, 불구자를 구제한다. 10. 민족단결과 민족평등을 실시하며 중한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의 평등을 보장한다. 이 시정방침은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포고(延邊行政督察專員公署布告)” 제1호 문건으로 작성되여 당날로 사회에 공포되였다. 11월 22일, 연변민보(延邊民報)에 전원공서의 성립을 열렬히 옹호하고 시정방침을 참답게 관철하여 연변을 훌륭하게 건설하자는 내용의 “위대한 발단”이라는 사설이 발표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연변지위와 각 현 당정지도기관들에서는 촌급선거공작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연변전원공서와 각 현 정부에서는 층층이 선거공작간부양성반을 꾸리고 촌급선거공작간부 2878명을 양성하였다. 선거공작대는 먼저 4개 가두, 89개 촌에 내려가 촌급선거공작을 경험적으로 진행하였다. 한시기 지나 경험을 얻은 뒤 보편적인 촌급선거와 민주정권건설공작을 진행하였다. 하여 1949년 3월에 전 연변의 촌급선거, 민주정권건설공작이 거의 끝나게 되었다. 뒤이어 각 현에서 구급, 현급 인민대표대회를 열고 구, 현 인민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현, 구, 촌 3급 인민정권건설공작을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의 비준을 받고 연변군분구를 설립, 강신태가 사령원을 맡고 옹문도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은 박락권, 제2퇀은 박근식이 맡았다.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하는 조선의용군 교도대가 연변에 도착한후 연변군분구는 6개퇀으로 확대되였다. 병력은 1만 2000여명에 달했다. 12월 1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는 연변공안국을 설립할 것을 결정, 증흥무(曾興茂)를 국장으로 임명했다. 12월 5일, 강신태는 길동보안군사령원의 신분으로 훈춘에 내려가 훈춘현 현장 한석도(韓石濤)와 함께 위만경찰을 골간으로 조직되여있는 현공안국무장을 철소하고 길동보안군 훈춘경비대대를 세웠다. 리림수가 대대장을 맡고 한석도가 정위를 맡았다. 아래에 8개 중대를 두었는데 800여명 대원을 갖고있었다. 12월 8일, 문정일이 인솔하는 조선의용군 선견부대 30여명이 연길에 도착했다. 선견부대는 관선정 등 전원공서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연길에 조선의용군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2월 12일,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박일우가 인솔하는 수백명 조선의용군 제5지대가 돈화를 거쳐 연길에 도착했다. (계속)  
73    제73장 민족운명의 갈림길에서 댓글:  조회:3449  추천:2  2014-02-25
광복을 맞은 연길시민들 거리에 나가 환호. 연변인민 쏘련홍군을 열렬히 환영 중공연변위원회 설립 당조직 공개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 1945년 8월 10일 밤, 룡정대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박근식은 몰래 모스크바한어말방송을 듣고있었다. 낮게 띄워놓았으나 너무나도 똑똑히 들려오는 벽력같은 뉴스였다. 쏘련정부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것이였다. 박근식은 강동주, 김승호, 유일환 등 친구들을 리상욱네 집에 모여놓고 격동에 넘쳐 뉴스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쏘련홍군이 연변으로 곧 진격해들어올것이라고 판단하고 이튿날인 8월 11일,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제1차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거리에 내다붙일 선전문이 채택되였다. 13일과 14일 밤, 위원회 성원들은 다시 리상욱네 집에 모여 제2차회의와 제3차회의를 열었다. 토의 끝에 전윤필, 림정호, 윤철환, 김동우 등을 위원회에 더 받아들이고 강동주와 박근식에게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환영사를 쓸 임무를 주었다. 다른 성원들은 군중속에 들어가 선전고동공작을 하도록 하였다. 8월 15일 정오, 일본천황의 무조건투항조서가 방송되였다. 이에 비밀리에 행동하던 위원회는 반공개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날 밤, 위원회에서는 제4차회의를 열고 쏘련홍군환영대회를 소집할 문제, 시위행진로선 등을 토의결정했다. 8월 10일, 훈춘이 해방되고 15일, 왕청이 해방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룡정시민들은 박근식과 유일환의 인솔하에 17일, 모아산을 향해 떠났으나 쏘련홍군이 연길에 진주하지 못해 되돌아오고말았다. 결국 18일에야 쏘련홍군이 연길에 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룡정시민들은 8월 18일 아침 8시, 환영위원회의 지휘하에 동흥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간단한 동원대회를 가진후 대렬을 지어 룡문교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띠를 두르고 군마를 탄 전윤필과 유철환이 대렬선두에 섰다. 쏘련홍군은 이날 아침에 벌써 룡정교외에 진주하고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심상소학교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있었다. 룡문교를 지난 행진대렬은 도중에 쏘련홍군을 만났다. 홍군전사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는 선전차를 앞세우고 천천히 룡정시내로 들어서고있었다. 행진대렬속에서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나왔다. “우라!” “만세!” 환영대렬은 “3.1”소학교 운동장으로 움직여갔다. 여기에서 전윤필의 사회하에 2만여명이 참가한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박근식이 쏘련홍군의 승리적인 룡정진주를 환영하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대회의 결정에 의해 박근식이 축기와 “환영사”를 지니고 연길쏘련홍군사령부를 찾아갔다. 박근식으로부터 “붉은군대승리”란 글이 수놓아진 축기와 대회에서 채택된 “환영사”를 받은 연길쏘련홍군경비사령부에서는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에 여섯가지 지시를 내렸다. 룡정에 돌아온 박근식은 환영위원회 제5차회의를 소집, 사령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회의에서 강동주가 위원회창립이래의 8일간 공작을 총화한후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가 자기의 력사사명을 완수하였다고 선포했다. 회의후 환영위원회의 9명 성원은 쏘련홍군경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각 계층 군중속에 들어가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 등 인민단체의 조직사업을 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광복을 경축하는 연길시민들의 서광장대회장. 8월 18일, 위만주국황제 부의는 길림성 룡화에서 “퇴위”, 일본으로 도망치려다가 심양비행장에서 체포되였다. 8월 20일, 연길쏘련홍군경비사령부는 간도성림시정부를 설립하고 원 위만간도성 성장 윤태동을 림시주석으로 한다는 제1호 명령을 반포했다. 그후 쏘련홍군의 허락으로 연길현림시정부가 설립되고 원 위만현장이였던 애영균이 현장을 맡았다. 얼마후 애영균은 연길현치안유지회(延吉縣治安維持會)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 유지회는 국민당길림성판사처의 조종을 받고있었는데 대다수 성원들은 위만주국잔여세력들이였다. 이자들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반혁명활동을 진행했는바 10월에 연길현민주대동맹이 성립되자 핍박하여 해산하게 했다. 8월 26일, 박근식, 전윤필 등은 룡정에서 인민무장조직인 룡정별동대를 조직했고 화룡현 평강구 장인강농민들도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패잔병들의 총 20여자루를 빼앗은후 인민무장조직인 장인강자위대를 설립했다. 연길, 룡정, 조양천 등지에서 선후로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혁명군중단체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였다. 반동세력들도 가만있으려 안했다. 위간도성군정기관이 와해되자 일부 반동세력들은 국민당특무의 조종하에 연길, 룡정 등지에 “국민당길림성연변판사처”, “국민당연길현당부” 등 간판을 걸고 일만군잔여세력과 토비 등을 끍어모아 “별동대”, “자위군”, “치안유지회” 등 반동조직을 묶었다. 일만군잔여세력인 왕대정, 안병일 등은 고동하지방유회를, 화룡현송하편탄광의 토비괴수 곽영춘은 200여명을 긁어모아 반공(反共) “보안대”를 결성, 100여자루의 무기를 갖고잇었다. 왕청현 천교령에서도 국민당특무의 조종하에 일만군잔여세력 500여명을 긁어모아 토비무장대를 세웠다. 라자구에도 토비무장이 세워졌다. 9월 2일, 일본정부가 무조건투항서에 서명, 이로써 중국인민의 위대한 항일전쟁은 승리적으로 결속되게 되었다. “그러나 항일전쟁승리의 기쁨도 잠간이였습니다. 국민당반동파들이 항일전쟁승리의 과실을 빼앗으려 반인민적이며 반력사적인 역행을 시도했던것입니다. 이러한 력사적인 시기에 중국에 거주하고있던 216만 우리 민족은 평화와 민주를 쟁취하고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국민당과 날카롭게 맞서 싸우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반동파사이의 사활적인 투쟁의 소용돌이속에서 어느 켠에 서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정세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견해였다.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 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과정이 “8.15”의 포성과 함께 민족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였다. 각자는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붙고 음극에도 가 붙었다. “8.15”해방은 민족의 각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 어디로 갈것인가? 중국의 대다수 조선인은 민족의 운명과 전도에 관계되는 력사적선택 앞에서 단연히 공산당켠에 서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근 반세기 벌어진 피어린 반일투쟁속에서 조선족인민들은 공산당을 믿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주체민족인 한족인민들과 어깨겯고 싸워온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이러한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는데서 결정적역활을 일으킬수 있는 민족의 기둥과 중견들을 갖고있었습니다. 둘째로, 동북경내에 살고있는 조선민족은 국민당에 대해 감정이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항일전쟁시기 공산당은 영향력을 끝없이 확대해왔었고 조선민족과 두터운 감정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셋째로, 공산당이 동북에서 실시한 로선, 방침, 정책이 조선민족인민의 념원과 리익을 구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절대 다수의 조선족들은 중국국적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국적이 없으면 토지를 분여받을수 없고 토지개혁에 참가할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의 이중적인 국적을 승인하고 중국공민이 가져야 할 권리를 주었던것입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조선족인민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공산당은 일본침략자가 빚은 조, 한 두 민족간의 대립과 반목의 력사적악과를 가시고 동북의 정세를 안정시키는데서 결정적역활을 놀았습니다.” 반동세력에 맞서 1945년 가을 룡정에 세운 1945년 9월 15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중공중앙동북을 설립할 경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팽진을 서기로 하는 동북국이 산생되였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쫓아 13만 인민군대와 2만의 간부가 동북에 파견되여왔고 9월 18일, 팽진 등은 심양에 도착하여 사업을 개시했다. 당시 조선족집거구에 들어온 혁명력량은 두 갈래였다. 한 갈래는 팔로군총사령 주덕의 명령을 받고 동북에 진출한 조선의용군이였다. 그들은 동북경내에서 조선의용군 제1지대(남만), 제3지대(북만), 제5지대(동만), 제7지대(길림지구)를 세웠다. 다른 한 갈래는 쏘련홍군과 함께 온 동북항일련군선견대로서 그들은 연변과 목단강에 주둔하여 연변경비1려와 목단강군구 14퇀 13영, 15퇀 3영을 조직했다. 일본이 무조건투항하자 국민당은 동북을 접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이에 중공동북위원회(서기 최석천 즉 최용건)는 “동북항일련군이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의 전략요지를 먼저 점령한다”는 방침에 따라 동북에 온후 장춘, 심양, 할빈, 가목사, 목단강 등지로 간부들을 전격 파견했다. 다른 한 갈래는 김일성의 령솔하에 조선으로 진출했다. 항일련군부대의 전략요지는 도합 12개의 중심도시로서 장춘(주보중이 책임), 할빈(장수전 즉 리조린이 책임), 연길(강신태가 책임), 치치하르(왕명귀가 책임), 북안(왕균이 책임), 해륜(장광적이 책임), 수하(진뢰가 책임), 가목사(팽시로가 책임), 목단강(김광협이 책임), 대련(원래는 동승빈이 7명을 거느리고 갔으나 이미 쏘련군이 접관하였기에 장춘으로 철퇴) 등지였다. 이밖에 매개 큰 전략요지아래에 또 각기 약간한 작은 전략점을 두었는데 50개에 가까웠다. 항일련군이 각 전략요지에 분포된후 중국공산당조직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여 인민정권을 세우는 등 사업들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14년간 일제가 통치하던 동북에다 진정으로 인민이 주인된 새로운 사회환경을 마련하기에 노력했다. 9월 18일,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에 있던 연변분견대는 강신태의 인솔하에 목단강을 거쳐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분견대의 성원들로는 강신태, 최시영, 전운화, 김만익, 림춘추, 류진봉, 조희림, 류상전, 류희문, 김창봉, 박락권, 최명석, 정경숙(녀), 김옥순(녀), 석동수, 강위룡, 김명주, 박춘일, 오죽훈, 김룡근, 홍태학, 려영준, 려련생, 오량본, 상유선, 선포천, 맹도길, 염하동, 임철, 손장상 등이였다. 강신태가 간도주둔쏘련홍군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임명되였다. 돈화에 진주한 분견대성원들로는 류건평, 구회괴, 리문장, 박영선(녀), 심봉산, 류보평, 류복해, 주복창, 사옥곤 등이였다. 이 두 분견대는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만 각지에 주둔하고있는 항일련군 선견대와 함게 군중을 발동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을 숙청하고 국민당과 토비세력을 타격함으로써 혁명력량을 발전시켜 해방초기의 연변의 사업을 개척했다. 9월 19일, 연길에서 3만여명 회원을 대표한 600명이 참가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 동맹위원회대표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 “연변로농청부총동맹(延邊勞農靑婦總同盟)”(10월에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명)이 설립되였다. 9월 20일, 간도성림시정부는 화룡현림시정부를 설립, 원 위만현장이였던 진앙근을 현장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9월 30일에는 쏘련홍군경비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왕청현림시정부를 설립, 소립동을 현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돈화에서는 위만현장 대광원이 쏘련홍군에 체포, 쏘련군의 지지하에 돈화현림시정부를 설립, 류화일을 부현장으로 임명했다. 류화일은 암암리에서 국민당특무와 결탁하여 돈화현공안대를 설립했다. 10월 5일, 주보중은 연변지구공작에 대한 지시편지를 강신태에게 보냈다. 주보중은 국민당군정이 동북에 진입해들어오는 긴급정황을 강조하면서 빨리 정권건립과 인민무장부대건립을 다그치라고 지시했다. 10월 20일, 동북위원회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중공연변지구공작위원회는 강신태의 령도하에 1개월간의 준비공작을 맞힌후 중공연변위원회를 설립, 당조직을 공개했다. 강신태가 서기 겸 군사부장으로 강동주가 조직위원, 지희겸이 선전위원, 전윤필, 박근식이 위원으로 되었다. 중공연변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임무를 제정했다. 첫째, 군중을 발동하여 혁명군중조직을 건립하며 일제와 위만주국 자산을 몰수하고 생산을 회복한다. 둘째, 원 동북항일련군간부들을 골간으로 연변경비사령부를 건립하며 각 현에 경비퇀을 건립한다. 이런 무장은 토비와 일만군잔여세력을 숙청하고 지방치안을 유지하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이로써 쏘련야영에서 건립된 중공연변지구공작위원회는 력사적사명을 완수, 공작을 정지하게 된다. 10월 20일, 주보중은 원 중공동북위원회 서기 최석천(최용건)과 함께 심양에 도착, 중공동북국에 동북항일련군 14년간의 투쟁려정과 중공동북당조직정황, 및 쏘련홍군을 협조하여 동북에 들어온후 전략요지를 점령한 정황 등을 상세히 회보했다. 팽진, 진운 등은 동북항일련군의 투쟁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동북국에서는 원 동북 각지 당조직관계를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쏘련홍군속에 있는 항일련군 대원들을 잠시 철수하지 않기로 결정, 쏘련홍군이라는 편리한 신분으로 계속하여 당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주보중과 최석천은 중공중앙동북국에 동북당의 일체 조직관계를 인계했다. 이로써 중공동북위원회의 력사적사명을 완수, 공작을 정지하게 되였다. 1945년 10월, 동북항일련군은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재편성되고 11월 3일에는 동북인민자위군과 관내에서 온 팔로군, 신사군부대와 함께 동북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으로 편성된다. 1946년 1월, 자치군을 동북민주련군으로 고쳤다. 그리하여 가렬처절한 나날에 동북대지를 넘나들며 싸우던 항일련군은 자기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새로운 군대로 장성발전하였다. 당시 연변의 항일련군 분견대는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별동대, 자위대, 보안대 등 무장대오를 받아들이고 분견대를 골간으로 한 경비사령부를 세웠으며 강신태가 사령원을 맡았다. 그리고 산하에 경비 1,2,3퇀을 두었다. 이 부대는 그후 동북인민자위군에 편입되였고 11월에는 동북인민자치군 간도(연길)분구 사령부로 되었는데 사령원은 그냥 강신태가 맡았다. 산하에 6개의 경비퇀을 두었는데 병력이 1만 1000여명이였다.(계속)  
72    제72장 쏘련홍군 동북진격과 일제의 패망 댓글:  조회:2629  추천:0  2014-02-23
투항의 상징으로 흰완장을 두룬 일본관동군 제3군 사령관 등이 연길부근(의란구)에서 쏘련홍군사령관 치스챠크프에게 투항하는 장명. 백만 쏘련홍군 파죽지세로 동북전장 휩쓸자 일제침략군들 가는 곳마다에서 날벼락 맞아 승리의 전야 1945년 상방년, 세계반파쑈전쟁은 거듭되는 승리를 거두었다. 5월 2일, 쏘련홍군은 베를린을 공격, 점령하자 일주일도 안된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투항을 선포했다. 이딸리아, 독일의 패전은 일제를 고립무원하게 만들어버렸다. 미국과 영국 등 반파쑈전렬에 나선 나라의 군대는 태평양전쟁에서 계속 진공을 발동하여 몇 달사이에 련이어 일본의 쇼다찌히라군도와 오까나와도를 점령하면서 일제의 해군, 공군을 여지없이 괴멸시켰다. 중국전장에서도 1944년부터 국부적인 반공을 시작하여 1945년 봄과 여름에 이르러서는 화북, 화중, 화남의 각 해방구에서 일본침략자에 대한 거대한 공세를 발동하여 련속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쏘련에서 야영훈련을 하고있던 항일련군 교도려는 대반공의 준비로 사상정치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야영지휘부에서는 쏘련측과 협상하여 쏘련출병과 함께 배합작전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정, 우선 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부대는 계속하여 적들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지정한 곳에서 적후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다음 항일련군 락하산부대를 적후에 파견하여 전술적인 정찰임무를 집행하면서 쏘련홍군과 배합작전하도록 했다. 아울러 항일련군 주력부대는 아무 때건 쏘련 극동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기로 하였다. 6월 2일, 야영훈련소에서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와 항일련군 교도려 려부의 주최하에 동북반공에 대한 동원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전체 장병들에게 총반공전투에 투입할 준비를 갖출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당조직과 항일련군은 반드시 중국공산당정치로선의 지도하에 이번 전투에 림하여 항일련군을 확대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을 이룩하면서 동북항일구국회조직과 항일련군당조직을 회복하여 각지 당조직을 령도한다는 행동강령을 확정했다. 7월 26일, 중국, 영국, 미국은 “포쯔담선언”을 발표, 일본군국주의를 영원히 제거하고 일본군대를 영원히 해체해버리며 일본의 전쟁범죄자들을 엄정히 징벌, 일본은 반드시 빼앗은 조선, 중국의 만주, 대만, 팽호렬도 등 령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투항하는 일본관동군. 7월 29일, 일본군국주의정부는 “포쯔담선언”을 거절했다. 7월말,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와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는 전체회의를 열고 개편을 진행, 원유의 대원들을 두 개조로 나누어 일부는 김일성의 인솔하에 조선으로 반격해들어가고 일부는 주보중의 인솔하에 동북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중공동북위원회(중공료길흑림시위원회라고도 함)를 설립하였다. 주보중이 서기로, 풍중운, 장수전, 로동생, 강신태, 김광협, 왕효명, 팽시로, 왕명귀, 왕일지, 류안래, 왕균이 위원으로 되었다. 동북위원회기관은 장춘에 세우고 동북 각지의 당조직을 지도하며 위원회산하에 장춘, 할빈, 심양, 연변 등 12개 지구위원회를 두었다.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위원은 강신태, 박락권, 최명석이며 강신태가 서기를 맡았다. 7월,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의 쏘련 극동홍기군 독립보병 88려번호는 쏘련 극동군 제2방면군에 편입되였다.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는 드디여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튿날인 8월 9일, 중공중앙 주석 모택동은 연안에서 쏘련의 대일선전포고에 대해 환영을 표하고 “일본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이란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주덕총사령은 8월 10일부터 련속하여 7차나 대반공의 명령을 발송하였다. 8월 9일 0시10분, 쏘련 극동지대의 홍군 3개 방면군 150만 대군은 진공을 발동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각 부대들은 통일작전계획에 따라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진격해들어왔다. 그중 일부는 선견부대로 뽑혀 락하산부대에 편입되거나 길안내로 나섰다. 그리고 동북 각지에서 유격전을 하면서 정찰임무를 집행하던 소부대들은 적후에서 교란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는 한편 쏘련홍군의 폭격기에 배합하여 적의 위치와 폭격지점을 무선전으로 지시하여 폭격의 정확성을 확보하여주었다. 적후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항일련군장병들도 분분히 일떠나 대중을 조직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여 쏘련홍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동북을 해방할수 있었다. 침략자의 정수리에 날벼락을 동북에 진격한 쏘련홍군. “7월의 어느날, 사령부에서 나와 전문욱 그리고 오른죤청년인 와샤 이렇게 세사람을 갑자기 불렀습니다. 우리는 선발대로 뽑히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달려갔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그때의 통쾌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즐겁게 이야기했다. “이번에 목단강일대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간후 먼저 정찰하고있다가 전쟁이 시작되면 적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무전으로 적의 이동방향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령부의 명령이였다. 세 정찰병은 군례를 올린후 사령부를 나와 곧바로 적후로 들어갔다. 전쟁직전의 목단강시내는 밤낮 계엄상태에 처해있었다. 세 정찰병은 적들의 병영과 비행장을 정찰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때 휴대했던 무전기는 간편하면서도 출력이 커 송수신이 잘되였다. “나는 전보를 치거나 받지 않을 때에는 방송에 주의를 돌렸습니다. 전쟁판에서 무전수의 우월한 점이란 남들보다 소식을 항상 먼저 아는것이지요. 방송을 통해 쏘련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식을 알게 된 우리들은 더없이 격동되였댔습니다. 쏘련홍군이 드디여 국경을 넘어섰지요. 우린 통쾌하게 왜놈들을 까부셔보자고 다지고 또 다졌지요.” 목단강일대에 도사리고있던 왜놈들은 단솥두껑에 기여오른 개미새기마냥 바글거리면서 황망히 남산에 올라붙었다. 세 정찰병은 적들과 500메터 상거한 지점에서 전선사령부에 무전을 치고는 제꺽 다른 지점으로 옮겨갔다. 산마루의 나무밑에 모여앉은 셋은 흥분된 심정으로 손목시계를 초조히 들여다보았다. 적정신호를 발사한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2시간 50분이 지나자 하늘이 무너져내려앉는듯한 동음이 들려왔다. 쏘련쪽 하늘로부터 전투기와 폭격기가 편대를 지어 날아오고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장쾌한 장면인가. 손채양을 한 세사람은 흐뭇한 심정으로 하늘의 은제비들을 바라보았다. 비행기들은 그들의 군사지도를 보고 암호로 알려준 목단강남산을 한번 선회하더니 기수를 숙이면서 가차없이 기총사격을 들이대고 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는 다시 기수를 쳐들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것이였다. “꽝!” “뚜루룩-뚜루룩...” “꽝! 꽝!...” 왜놈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는 남산은 삽시에 화염으로 휩싸이는 아비규환으로 되었다. 총탄과 포탄이 철천지원쑤 일본침략자들의 정수리에 사정없이 쏟아진것이였다. 적들은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폭탄에 맞아 무리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멀리서 만원경으로 이러한 장면을 내려다보는 정찰병들의 가슴은 통쾌하고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남산에서 살아남은 적들과 목단강시내에 남아있던 적들은 혼란상태에 빠져 갈팡질팡하다가 이번에는 해림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은 무전기를 지고 쫓아가면서 수시로 변화되는 적정을 사령부에 보고하였다. 적들은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고있었다. 이에 정찰병들은 산길을 질러 내달렸다. 손등과 낯이 나뭇가지에 찔리고 긁혀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들은 아픈줄을 몰랐다. 아니 아플수가 없었다. 코앞에서 도망치는 원쑤놈들을 모조리 소멸해야 하니깐. 그러다가 려영준이 벼랑을 내려타면서 그만 바위에 무릎마디를 부딪쳤다. 눈앞이 아찔해났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벼랑을 내렸다. 발을 내디디기 힘겹게 통증이 왔다. 그러나 그는 절룩거리면서 계속하여 앞으로 닫기만 했다. 놈들을 쫓아가 또다시 정수리에 폭탄날벼락을 안겨줘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 곧 우리가 승리한다는 생각이 앞서니 아픔이 아니라 죽는다 해도 통쾌할것만 같았다. 셋은 또 높은 산마루를 톺아올랐다. 산정에 다 오른후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에다 안테나를 건너 매고 우묵진 곳에 무전기를 장치했다. 와샤가 풀속에 엎디여 보초를 서고 전문욱과 려영준은 무전기 앞에 엇갈아 들어앉아 적정을 회보하는 한편 사령부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다. “일본제국주의 무조건 투항. 각 소분대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패잔병을 추격할 것.” 려영준은 귀에 썼던 레시바를 벗어던지면서 소리쳤다. “문욱이, 왜놈들이 투항했다오! 와샤,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했소!” “뭐,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니까!” 전문욱과 와샤는 귀를 의심하면서 려영준쪽으로 마구 달려와 전보지를 나꿔챘다. 두 사람은 전보지를 눈박아 보고 또 보더니 환성을 터치면서 펄쩍 뛰였다. 셋은 산마루에서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목놓아 웨치기도 했다. “항일전쟁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쏘련홍군 만세!” 로획한 일본군 땅크. 눈으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날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경을 헤쳐왔으며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전사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목이 메고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아 셋은 한없이 웨치고 뛰기만 할뿐이였다. 정신을 차린 세 정찰병은 드디여 무전기를 걷어가지고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10일후에 전선사령부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세 정찰병은 산에서 내려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부대로 돌아갔다. 일본의 무조건투항   일본천황의 무조건투항성명에 관한 라지오방송을 들으면서 괴로워 하는 일본인들(1945년 8월 15일)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후 일본군은 8월 10일, 제1방면군 사령부를 목단강으로부터 돈화에 옮겨오고 제3군과 제5군의 24만 병력을 가목사, 동녕으로부터 훈춘변경 및 연변 각 현의 요해지에 배치, 끝까지 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쏘련 극동군은 동북항일련군의 배합하에 두 갈래로 연변에 진격해들어와 연변 각지의 일본군을 진공했다. 한갈래는 쏘련 극동군 제25집단군으로서 훈춘의 춘화, 장령자, 경신으로부터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한후 10일에 훈춘현소재지를 점령하고 11일에 대팔령에 다달았다. 일본관동군 112사단는 대팔령의 험요한 지세를 리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해나섰다. 쏘련홍군은 이틀동안에 100대의 땅크를 소실보면서 격전을 벌렸지만 대팔령을 돌파하지 못했다. 8월 12일, 쏘련홍군은 6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진지를 향해 훼멸적인 폭격을 들이댔다. 이에 일본수비군은 흰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대팔령을 돌파한 쏘련홍군은 드디여 도문방향으로 진공할수 있었다. 도문 후안산에서 또다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은 쏘련홍군은 이틀간의 맹공격을 펼쳐 끝내 일본군을 쳐부수고 8월 17일 도문을 해방했다. 일제의 투항을 알리는 신문기사들. 다른 한 갈래는 쏘련 극동군 제5집단군으로서 8월 10일, 동녕, 수분하 등 국경지대의 중요도시를 함락한후 왕청현 라자구방향으로 진군, 11일부터 14일까지 라자구경내에서 동다라즈, 석두하자, 태평령 등 전투를 펼쳐 일본군을 격파하고 라자구를 점령한후 돈화, 연길 방향으로 진격해들어갔다. 동다라자전투는 아주 격렬했다.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쏘련홍군은 이틀동안이나 격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번 전투에서 쏘련홍군은 일본군 소장이하 10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했다. 다른 한 갈래의 진공부대인 366사와 187사는 협동작전하여 일본관동군 한 개 대대를 소멸한후 석두하자방어공사를 점령, 14일, 직격을 멈추지 않고 태평령에 다달아 반날동안의 격전을 벌려 관동군 128사단의 사단장이하 600여명을 격살하고 2000여명을 포로했다. 1945년 8월 15일, 력사의 시각은 드디여 오고야말았다. 일본천황은 라지오를 통해 “정전조서(停戰詔書)”를 선독, 일본의 무조건투항을 선포했다. 그러나 관동군중의 완고파들은 이에 불복, 투항하지 않을뿐더러 각지에서 완강히 저항해나섰다. 15일, 쏘련군 싸브친꼬브소장이 지휘하는 기계화부대 제10군의 선견대와 보병 39군, 땅크부대 359려 등은 협동작전하여 왕청현소재지를 점령한후 일본군 제127사단의 길청령방어선을 돌파, 8월 18일에 연길이 드디여 해방되였다. 8월 19일에는 룡정과 돈화, 8월 20일에는 화룡이 해방되였다. 쏘련홍군은 연변에서 7차례의 큰 전투를 벌리는 가운데서 중대한 대가를 내면서 일본군과 위만군을 4만여명 소멸하고 3만여명을 포로했다. 쏘련홍군의 연변을 포함한 동북지대로의 출전은 동북에서 14년간 식민통치를 하여온 일제에 해하여 훼멸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계속)  
71    제71장 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 댓글:  조회:5319  추천:12  2014-02-20
시인 윤동주묘소에서의 가족들. 묘비 오른쪽 녀성 윤혜원녀사.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 가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분투한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유명한 “서시”이다. 이 시로하여, 아니 이 시와 견줄만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유명한 시로 하여 윤동주는 이미 조선문자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시인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윤동주에게 눈길을 쏟고 있다.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교의 교수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리해할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향기가 짙은 그의 시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본다. 7월 6일(2005년), 기자가 윤동주선양사업일환으로 연길에 와 잠시 거주하고있는 윤동주의 친녀동생 윤혜원(尹惠媛)녀사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윤여사의 부군 오형범(오스트리아에 적을 두고있음)선생은 수두룩한 자료들을 내여보이는 가운데 윤동주가 9개월간 다닌적있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세운 “윤동주시비” 제막식자료를 손짚어주었다. 사진으로 보는것이였지만 비문에 새겨진 글들이 환히 알렸다. 비문정면에는 윤동주의 친필 서시와 일어로 번역된것이 세겨져있고 뒷면에는 오오무라교수의 비문이 씌여져있었다. 尹東柱詩碑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중인 1931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회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회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하여 도시샤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있었다는 리유로 독립운동의 협의를 입어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그는 치안유치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었다. 한글로 된 서시는 그의 친필원고 그대로이며 일본어번역은 이부키고씨의것이다. 학교범인도시샤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 가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채찍을 들던 윤동주, 그를 죽음에로 몰아넣은 일본에서까지 그 시비가 세워지게 된것이다. 이러한 윤동주는 바로 연변이 낳은 아들이다. 연변의 아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7일), 위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尹永錫)씨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金躍淵)선생의 누이 김룡(金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때 명동촌은 김약연 등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민족의 혼을 깨우쳐주는 교육운동의 보금자리로 되고있었다. 1925년에 윤동주는 그 유명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10세까지 해환이라 불리웠으며 그 밑이 달환이고 그 밑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이름이 별환이였다. 해, 달, 별을 뜻하고있는 이들의 이름에서 윤동주가 많은 시작을 창출했다고 어떤 학자들은 력설하기도 한다. 《윤동주평전》의 작가 송우혜(한국)선생은 윤동주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윤동주가 두 살이던 1919년에 그 땅에서 독립운동의 거대한 봉화가 타올라 독립만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 진행되였고 1920년에는 우리 민족의 대일무력항전사에서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그 땅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집요하고 거세게 지속되였다. 그가 15세의 소년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1년에 일본은 드디여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손에 넣었고 이듬해인 1932년에 그 땅에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만주전체를 일본판도에 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때로부터 만주국의 국민이 되었다. 윤혜원녀사의 회억에 따르면 소년시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인 인상이였지만 의연함과 씩씩함을 지닌 젊은이였다. “오빠는 참 멋쟁이였습니다. 교복이 노란색이였는데 맞지 않으면 재봉틀로 스스로 고쳐입었습니다. 그보다도 항상 책속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더 멋있었습니다. 오빠의 방 책상엔 언제나 아주 많은 책이 꽂혀있었는데 벌써부터 창작을 한거지요. 항상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했는데 난 멋모르고 옆에서 등사되여나오는 종이를 받아주군 했습니다.” 윤혜원녀사는 연변억양이 다분한 말씨로 이렇게 말하면서 윤동주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우린 여섯 살 터울이였는데 지금도 잠자리랑 잡아주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동생들을 특별히 사랑했던 윤동주는 항상 동생들을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했다면서 윤녀사는 말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후 윤동주는 5킬로메터 동쪽에 있는 대립자(지신)의 한족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더 다니다 졸업했다. 그의 시 “별헤는 밤”에서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소녀들의 이름은 아마 이때의 만남이였을것이다. 대립자소학교를 맞힌 윤동주는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룡정에 가게 되자 일가는 아예 룡정으로 이사해버린다. 룡정에 자리잡은 곳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그때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적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2학년때에는 웅변대회에서 1등한적도 있다. 그는 수학도 잘했으며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동급생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에 가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겨앉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된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비자루”, “거짓부리” 등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시절    중학시절의 윤동주와 친구들. 이 사진은 윤동주(왼쪽)가 광명중학교 5학년, 송몽규(오른쪽)가 대성중학교 4학년에 재학할 당시 룡정에서 찍은것이다.(1937년으로 추정) 중학교졸업반이 되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지망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의 굳은 신념을 지녀버린 윤동주는 자기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내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는 극한 대립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손주를 보다못해 할아버지가 나서서 윤동주의 편을 들어주었고 외삼촌인 김약연선생까지도 도와주어서야 윤동주의 뜻은 펴질수 있었다. 하여 1938년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청운의 뜻을 품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서면서 3년간의 서울학창생활이 시작된다. 고향인 연변을 떠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윤동주는 세계문학과 접하게 되며 훌륭한 스승들에 의한 학문의 세계 그리고 민족의식의 드높은 고취를 받아안게 된다. 윤동주는 저녁밥을 먹고나면 교내 잔디우를 뒹굴고 친구들과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론 밤을 새우면서 별을 세기도 하였다. 맑은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을 동무삼아 끝없는 이야기를 펼치는것이였다. 윤동주의 관심분야는 력사, 문화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에 걸쳐 다방면적이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모든 상황이 바뀌여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의 손길이 사처에 뻗치면서 연희전문학교도 영향을 피치못했다. 졸업이 코앞에 다닿자 윤동주의 생각은 무척 복잡해졌다. 진학, 시국에 대한 불안 등은 윤동주를 무척 괴롭혔다. 윤동주의 년보를 보면 1941년 5월이후 대표작이라 할 많은 작품들이 씌여져있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5월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눈 감고 간다” 등은 5월 31일에,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는 6월에, “또 다른 고향”, “길”은 9월에, “별 혜는 밤”, “서시”, “간(肝)” 등은 11월에 창작되고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퍽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며 국내외 많은 문인들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사람들로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리상, 서정주, 발레리,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프랑시스 쟘, 라언 마리아 릴케, 장 콕토 등이였다. 본격적인 문학수업이 닦아지면서 터쳐버린 독서열은 막을수 없었다. 독서와 더불어 그는 창작의 붓을 시들게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시상을 며칠 몇주일씩 묵혀가면서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필을 들어 써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시 손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무언가 뜻깊은 것을 만들어 자신의 졸업을 기념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자필시집이였다. 그것은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것이였다. 이 시집은 19편으로 묶어졌는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었고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3부로 만든후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였던 리영하선생과 후배였던 정병욱군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가졌다. 시집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된 비교적 긴 제목이였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정병옥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서시’가 되기전에는 시집이름을 ‘병원’이라고 볼일가 했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 아닌가?” 그러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 이 시집을 받아본 리영하교수는 “슬픈 족속”, “십자가” 등 작품이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터이니 출판을 보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후에 윤동주자신이 가졌던것과 리영하교수가 가졌던 시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정병욱이 가졌던 시집이 어머니 장롱속에 깊숙이 감춰졌다가 결국 광복후 한국의 정음사에 의해 볕을 보게 된것이다. 윤동주가 검거된 반년후 나는 소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피차에 생사를 알수 없게 된 마당에 이르러 나는 윤동주의 시고를 나의 어머님께 맡기며 나나 윤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여 주십사하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회전문학교로 보내여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윤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 《윤동주》(이건청 저, 건국대학교출판사)에 수록된 정병욱의 회고록이다.   후꾸오까형무소의 이슬 되었어도 윤동주가 옥사한 일본 후쿠오가형무소. 1942년 26세의 윤동주는 드디여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에 건너가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끝없는 자책과 죄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는 일상이였다. 그러한 일상속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는바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이때에 창작되였다. 아울러 일제가 지펴놓은 태평양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한층 격화되였고 부상자와 주검이 실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일본으로 들이닥치는통에 일본판도는 온통 불안속에 잠기였다. 다급해난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징병제도와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명 조선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내몰았다. 그 광란적인 시국에 시작된 윤동주의 류학생활은 자연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연변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터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적상황을 절박하게 느꼈는데 결과적으로는 윤동주의 예언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디케다 아파트에 하숙을 정했다.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창작을 정진시켰다. 륙첩다다미방에서 밤가는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내면서 시를 쓰는 일이 그때의 윤동주의 일상이였다. 윤동주는 1942년 겨울방학에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3년 7월 14일, 도시샤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떠나기 직전 “교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구룹사건”에 련루되여 갑자기 체포되였다. 뒤늦게 공개된 일본경찰의 사상범을 다룬 극비문서 “특별월보”에 따르면 일본경찰의 윤동주에 대한 조사기록은 “요시찰인물”로 주목받고있던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고 윤동주는 그에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결국 두사람은 12월 6일 검사국에 넘겨졌고 해를 넘겨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였다. 재판은 분리 진행되였으며 3월 4일,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일본경도재판소에서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판결 본적: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 주소: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번지 무전아파트 내 사립 동지사대학 문학부 선과 학생 윤동주 1917년(대정 7년) 12월 30일 생 우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강도 효(江島 孝)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아래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판결 구류일수 중 120일을 우 본형에 삽입한다. 리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그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회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소화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때 동경 릿교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하였으나 동년 10월 이후 경도 동지사대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간의 소위 차별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차(怨嗟)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느것리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위하여서는 조선민족의 현시에 있어서의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 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달성을 위하여 동지사대학에 전학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있던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회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선인 학생 송원휘중(松原揮忠), 장성언(張聖彦)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여왔는데 그 중에서도...(이하 략) 우의 재판기록에 서술된 소위 윤동주의 범법행위란 피식민상태의 량심있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기 위한 당연한 자기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막연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후꾸오까형무소에 송치되여 비인간적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인(死因)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 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고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간후 후꾸오까에 도착하자 우선 송몽규부터 면회하였는데 송몽규는 주사를 맞는 행렬에 섰다가 나와서 눈물을 흘렸고 일본인 간수가 “윤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주었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윤동주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그의 혈육들은 두만강변 조선의 상삼봉(개산툰 대안)역까지 마중을 갔다. 장례는 3월초순,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에 치러졌다. 집앞 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졸업 무렵 교내잡지 “문우”에 발표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장지는 룡정동산이였다. 연변은 4월초에나 겨우 해토되는 까닭에 5월의 따스한 날을 기다려 가족들은 윤동주의 묘에 떼를 입히고 꽃을 심었다. 단오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목비를 해세웠다. 김관석씨가 한문(漢文)으로 비문을 작성하여 비의 뒤면에 새겨넣었는데 조선문식으로 훈독하면 아래와 같다. 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면서 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부 이미 이루었어도 그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만 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만했는데 춘풍이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을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연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긴데다 신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이렇게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에게 가족들이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다. 불멸의 시인   윤동주의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여나온 것은 1948년이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이나 지나 비로소 해빛을 본 것이다. 이 시집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의 일부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출판하련다는 소식과 함께 있는 시고들을 다 가지고 오라는 기별이 윤일주로부터 전해오자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씨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하교에 다닐 때 집에 가져다 두었던 세권의 습작노트와 수많은 스크랩과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을 바라고 떠났다. 때는 남북대결이 첨예한 시기라 시국이 몹시 험악했다. 렬차에서는 사람마다 샅샅이 검사하면서 의심스럽기만 하면 잡아가두거나 물건들을 마구 압수 하였다. 윤혜원부부는 룡정을 떠날 때 짐군을 삭내여 스크랩과 사진이 든 보따리를 맡겼다. 그때를 오형범선생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런데 그 짐군이 차칸수색이 시작되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 화장실에 피신해 들어갔다가 아예 창문으로 스크랩과 사진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밖으로 던져버리고말았잖고 뭡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였어요. 지금 윤동주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것은 이러한 원인에서입니다. 노트 세권만은 그래도 우리의 짐속에 있어서 다해이였습니다.” 윤혜원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청진에 이른 우리는 교회당에서 우연히 박춘해(朴春海)라고 부르는 예쁜 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눈에 너무도 익숙한 처녀였지요. 생각을 굴려서야 전에 사진으로 많이 보아오던 처녀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동주와 동창이고 딱친구였습니다. 동주오빠가 그녀의 사진을 집에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랑 아버지랑한테 보였고 나한테도 보이면서 ‘혜원아, 어떠냐? 이쁘지? 마음에 들어?’ 하고 물으면서 싱글벙글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주오빠가 그녀를 몹시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가능하게 그녀와 련애를 했을수도 있고 어쩌면 결혼을 약속했는지도 모를 일이였지요.” 3.8선을 넘을 때 또 한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함께 3.8선을 넘던 어떤 사람의 보짐에다 윤동주의 노트를 간수했는데 그 사람이 너무 당황한김에 그만 짐을 떨구고 온것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때 전 속이 타서 재가 되는것 같더군요. 그걸 지니고 어떻게 3.8선까지 왔다고 그럽니까. 우린 생명을 무릅쓰고 되돌아섰지요. 오던 길을 샅샅이 뒤지다가 요행 풀밭에서 그 짐을 찾았을 때 얼마나 격동되고 떨리던지 눈물이 마구 쏟아졌어요.” 윤혜원녀사는 눈물이 핑 돌아 말했다. 이렇게 습작노트만을 겨우 보전하여 가지고 12월 22일 겨우 서울에 도탁하였다. 하여 이듬해인 1948년 1월 30일, 정병욱이 보관하고있던 자선시집의 19수의 시와 윤혜원녀사네가 갖고간 노트속에서 고른 12수를 합친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디여 출간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서문, “서시”를 비롯한 31편의 유고작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인 유영의 추도시와 강처중의 발문이 순서대로 수록되였다. 그후 1955년 2월, 윤동주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다시 간행되였다. 1968년에 간행된 증보판 시집은 5부로 나뉘여져 있는데 1부엔 윤동주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는 도코시절에 쓴 시 5편, 3부엔 습작기의 작품들을, 4부엔 동요, 5부엔 산문인 “트루게네프의 언덕”, “달을 쏘다” 등 5편이 실리였다. 사실 윤동주가 사망하기까지 활자화되여 발표한 작품은 고작 6편의 동시와 3편의 시, 그리고 한편의 산문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도 본격 문단활동과는 거리가 먼 《카톨릭 소년》 등 아동잡지와 조선일보 학생란 “활천”, “문우” 등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시작품으로 우리가 접할수 있는 것은 모두 117편이다. 그 중에서 동시가 35편 정도이다. 시인으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었으니 초판과 여러차례 걸친 증보판 출판의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연변에서는 감감 모르고있다가 1984년 연변에 다녀온 미중한인우호협회 회장 현봉학씨로부터 처음 시인의 신상이 연변에 전격 소개되게 되었습니다.” 오형범씨는 윤동주를 처음으로 연변에 알려준 사람이 일본학자 오오무라씨가 아니라 현봉학씨였다고 딱 짚어 말했다. 오형범씨의 증언은 현봉학선생이 쓴 《윤동주의 유적지를 찾아서》에서도 명확히 서술되고 있다. 이 글에서 현봉학선생은 이렇게 쓰고있다. 1984년 봄 어느날, 서재필기념재단(필라델피아시소재)리사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태민씨(언론인, 전 경향신문사 부사장)댁에 잠간 들렸다. 우연히 그 댁에서 발견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 30 초판)에 매력을 느껴 빌려본것이 나의 일생에 그렇게도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47년부터 “6.25”전쟁 3년을 빼고는 줄곧 미국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윤동주 하면 일제말기에 옥사를 치른 애국시인이였고, 그의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라는 서시가 아름다웠다는 희미한 기억밖에 남은것이 없었다. 그러나 락서로 오염되였고 찢어진 이 낡은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때 한구절 한구절 흐르는 그 시에 나는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나는 남은 생을 좀 더 아름답고 순박하게 살고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장한 정의감으로 싸울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윤동주의 몸은 비록 흙으로 돌아갔어도 그의 얼, 그의 정신은 그의 시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확실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해 8월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처음으로 중국방문을 하게 된 나는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애국시인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고 또 아무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위대한 애국시인이였음을 역설하고 래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할터이니 꼭 우리 일행이 그 유적을 찾을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해두었다. 그 다음해인 1985년 7월, 제2차 단체중국방문을 했을 때 나는 오로지 윤동주의 묘소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룡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리사장, 룡정중학교 유기천교장 그리고 연변농학원 김동식교수 제씨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오시면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밤새 억수로 쏟아진 비 때문에 우리가 탄 버스는 동산묘지 언덕으로 올라가지를 못했다. 진흙땅에 묻힌 버스 뒤바퀴를 십여명의 힘으로 겨우 밀어내긴 했지만 비로 인한 험한 길을 자동차는 물론 걸어서도 더 이상 올라갈수가 없어서 우리 일해의 묘소참배는 묘소를 눈앞에 두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문인으로 알려진 내 동생 피터 현을 포함한 우리 일행의 실망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그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나큰 감동을 받었다는 일본의 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선생이 도꼬 히비야의 한 다방에서 윤일주씨를 만나 룡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곳의 략도를 그려받게 된다. 윤동주묘소와 그가 살고있던 고향을 찾고저하는 강렬한 충동으로 하여 1985년 오오무라부부(부인 조선인)는 연변으로 오게 되며 연변대학 권철, 리해산 등 교수와 향토력사에 밝은 한생철선생과 함께 윤동주묘소를 찾게 된다. 그때 장면을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옛 동산교회묘지로 올라가는 흙길, 승용차로는 도저히 올라갈수 없는 구릉의 급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조선의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지나가고 그 좌측에 멀리 바라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흙둔덕과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산밑쪽의 묘비들은 넘어지고 부서진게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윤동주의 묘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고생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앞에서 걸어가던 리해산교수가 큼직한 비석을 찾아가 정면을 보니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이 보인다. 끝내 찾아낸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산기슭에서 찦차로 10ㅡ15분 올라가서 비탈길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었다... 이때로부터 불멸의 시인 윤동주가 완정한 모습으로 연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향은 윤동주로 하여 진동을 받았다. 연변이 낳은 윤동주가 세계적인 시인인줄을 깜박 몰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1980년대중엽부터 윤동주는 해마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시인”, “좋아하는 시인”의 으뜸으로 뽑히고있고 그 기세는 세계에로 물결쳐 나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은 해마다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되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이미 30~40명 된다고 한다. “정본 윤동주전집”의 저자 홍장학씨는 “윤동주는 변절과 배신으로 신음해온 우리 현대정신사의 중심에서 민족적량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그리 많지 않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고 하고 있다. 연변대학 권철교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겨레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정을 담은 노래이다”고 했고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그의 시는 자아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고뇌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다... 문익환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상하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진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수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가 되었다. 아무튼 연변땅에 시심(詩心)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祭壇)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 아름다운 시편들은 한줄기 밝은 별빛이요, 우리 청소년들이 삶의 거울이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 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리는 연변사람입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 윤혜원녀사의 말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ㅡ조선민족의 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앞에 나섰다. 윤동주로 하여 연변과 우리 겨레는 이제 더 큰 긍지를 느끼며 자랑을 느낄 것이다. (계속)  
70    제70장 적들의 심장속에 들어가.2 댓글:  조회:2324  추천:0  2014-02-20
동녕 및 연변일대 소부대활동에서 특수한 공을 세운 려영준에게 1944년에 수여한 영예증서. 일본군차림으로  적구와 적 병영을 들락들락 놈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도 사경을 피해  풀속에 엎디여 21시간 “1943년, 나는 또다시 새로운 임무를 맡고 로흑산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주보중이 전문욱을 보내여 나와 함께 활동하도록 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적들의 무력배치정황을 정찰하고 군사시설을 촬영해야 했습니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그때의 정경이 눈에 환히 떠오르는 모양이였다. 창가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로안이 유난히 빛났다. 려영준과 전문욱은 먼저 곰골비행장을 정찰했다. 산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활주로 옆에 비행기 6대가 있었다. 방수포를 씌워놓았기에 무슨 비행기인지 알수 없었다. 사면에 고정보초를 세워놓고 순라병이 몇분 간격으로 왔다갔다 하였기에 낮에는 근본 비행기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밤에 손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밤장막이 드리우기를 숨어서 기다리면서 적들의 동정을 살폈다. 순라병들은 창을 맞춘 총을 받들어 쥐고 규칙적으로 일정한 구간까지 왔다가는 돌아서군 했다. 돌아서서 가는 틈을 리용하면 될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람은 살금살금 비행장에 접근했다. 적순찰병이 이쪽 비행기있는데까지 왔다가 저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두사람은 다람쥐마냥 날렵하게 방수포를 씌워놓은 비행기밑으로 숨어들었다. 비행기를 손으로 만져보니 그것은 나무로 만든 가짜비행기였다. 다음 비행기로 옮겨갔다. 이렇게 6대의 비행기를 다 손으로 만져보았다. 4대가 나무로 만든 가짜비행기였다. 마지막 비행기까지 다 정찰하고 방수포밑에서 나오려고 할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얼뜰하고 나타났다. 적순라병이였다. 걸리기만 하면 물론 빠져나갈수 없는것이였다. 순발적으로 두사람은 잽싸게 방수포기슭으로 몸을 감싸면서 엎드렸다. 어찌도 민첩하게 행동했는지 바스락소리조차 없었다. 순찰병놈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손전지로 방수포주위를 휙휙 비쳐보면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대는것이였다. 순찰병의 발길밑에 엎디여 있는 두사람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채 숨을 딱 끊고있었다. 아무일 없자 순찰병은 저쪽으로 털썩털썩 걸아갔다. 놈의 뒤등을 바라보면서 두사람은 방수포를 살그머니 들고 다람쥐처럼 쏙 빠져나와 산길에 들어섰다. 지하아지트로 사용하고있는 범의 굴까지 오니 벌써 날이 환히 밝고있었다. 새벽이슬에 속옷까지 폭 젖어 물주머니가 된 두 사람은 부랴부랴 마른 옷을 갈아입고 새초를 깐 포근한 자리에 드러누웠다. 한잠 푹 자고 일어나니 벌써 한낮이였다. 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여있다. “래일 날씨 어떨가?” “오늘보다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오늘밤에 적병영에 들어가 숨었다가 래일 낮에 사진을 찍을가?” “거 좋겠군.” 두 사람은 이렇게 계획을 짠후 어슬녘에 사진기를 챙겨가지고 길을 떠났다. 일본군병영은 범의 굴에서 15킬로메터 떨어진 산간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가실철조망으로 둘레를 치고있었다. 철조망 안은 잡초가 무성했다. 철조망 밑으로 기여들어 간 두 사람은 병실정면 풀발속에 엎디였다. 모기떠들이 살판을 만났다고 마구 매달려 기승을 부렸다. 삽시에 얼굴이며 손발이 모기에게 물리여 투둘투둘해졌다. 벌레까지 기여들어 물어뜯는 통에 참아내기가 참으로 힘겨웠다. 움직이면 안되기에 입을 꽉 깨물고 모기와 벌레의 세례를 받아내야 했다. 그런데 모기나 벌레에게 물어뜯기우기보다 더 힘겨운 것이 갑자기 터져나오려 하는 기침이였다. 목이 간질간질해나면서 금방 “칵!”하고 소리가 나갈 것 같아 식은땀이 다 송골송골 돋았다. 이럴 때면 미리 준비해가지고 간 약담배를 약간 뜯어 입에 넣어야 했다. 그러면 기침은 신기하게도 목구멍에서 삭아버리는것이였다. 날이 홰창 밝았다. 호각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병실에서 몰켜나오는 놈들의 구두징소리, 꽥꽤거리는 장교놈들의 돼지멕따는듯한 고함소리가 귀전에서 들렸다. 두 사람은 적들과 불과 100여메터 거리를 두고있었다. 풀 한 대만 흔들해도 놈들에게 들킬수도 있었다. 한낮이 되자 풀모자를 쓴 두 사람은 살며시 앉은 키는 늘구면서 사진기를 적병영, 군수품창고, 병원 등을 겨냥하고 사타를 찰칵찰칵 눌렀다. 원만히 사진을 찍은후 두 사람은 다시 풀속에 엎디였다. 이제부터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야했다. 그것은 지루하기 그지없는 기다림이였다. 풀숲은 바람 한점 안주고 하늘은 사정없이 볕을 쏟아대기만 했다. 찌는 시루안에 들어앉은 듯 열기가 확확 안겨와 인차 땀벌창이 되고말았다. 게다가 벌레들이 갉아대고 파리들이 달려들어 일신은 마비상태에 빠지고말았다. 하루종일 물한모금 먹지 못하다나니 나중에 혀끝마저 바싹 말라 입을 제대로 벌릴수조차 없었다. 이런 속에서 꼬박 21시간 참아내야 했다. 드디여 날이 어두워졌다. 병영앞에서 왔다갔다하면서 보초서던 놈들도 진해빠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무토막처럼 둔해진 다리를 끌면서 무사히 귀로에 올랐다. 적들과 함께 밤을 새워 “1945년 5월, 나와 전문욱은 도문일대를 정찰하라는 임무를 맡고 또다시 국경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대황구 고개를 넘어 량수촌으로 간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잘못들어 왕청의 십리평 뒤산에 떨어지고말았습니다.” 쏘련의 바르꼬브니짜에서 국경을 넘은 두 사람은 삼차하치기로 빠려들어갔다. 반령, 로야령 밑림속을 꿰고나가 대황구고개를 넘은후 곧추 량수로 떨어지려는 타산에서였다. 그런데 로야령(해발 1477메터)에서 그만 산발을 잘못 타는 통에 왕창같은 곳에 가서 떨어졌다. 살펴보니 십리평 뒤산이였다. 두 사람이 어처구니없이 마주보고있는데 어데선가 인기척소리가 와작와작 났다. 허리를 날렵하게 낮추면서 바라보니 십리평골안을 누렇게 덮으면서 일본군들이 들어오고있었다. 왕청에 대한 정찰임무를 맡지는 않았지만 정찰병으로서 적들의 군사적움직임을 보고 피해서는 안되였다. “우린 적들의 무력배치와 방어진지를 정찰할 행동계획을 짠후 십리평골안을 참빗질하면서 일본군방어진지를 정찰하고 왕청시가지에 내려가 시내전경까지 사진찍었습니다. 그리고는 신흥쪽으로 빠져서 삼도구남쪽 장골에 들어섰습니다. 장골은 석현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은 시간, 지점 등을 아주 정확히 지적했다. 장골은 석현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다. 철길을 따라 나가자면 가야하를 네 번이나 건너야 하는데 철교외에는 다리가 없어서 수레나 자동차는 다닐수 없었다. 그래서 놈들은 1943년부터 장골에다 방어진지를 건설하고 백성들이 이곳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일본군복차림이였기에 보초선을 넘어 10여킬로메터 되는 방어선을 무난히 통과할수 있었다. 놈들은 제편인가 하여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방어선을 넓게 치고 한바탕 해볼듯했지만 기실 속은 텅 비여있었다. 골짜기어구의 포진지에는 쇠붙이대포라곤 한문도 없었으며 모두가 장대기에 방수포를 씌운 가짜들이였다. 까울령에 다달은 두 사람은 모닥불을 지펴놓고 젖은 옷을 벗어 말리우면서 싸늘한 5월의 산속에서 하루 밤을 새웠다. 날이 희슥히 밝은후 옆을 둘어본 두사람은 초풍할 듯이 놀랐다. 게딱지같이 쳐놓은 일본군풍막이 여기저기 널려있지 않는가. 그제야 두사람은 적들의 “보호”속에서 하루밤을 새웠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안개가 산기슭에까지 내리덮혀있어 적들이 아직 기미를 차리지 못하고있었다. 안개속에을 헤치면서 두 정찰병은 번개마냥 산마루를 넘어섰다. “그때 우린 매일 낮 12시면 꼭꼭 본부에 무전으로 련락했습니다. 무슨 군대이며 병력은 얼마이며 번호는 어떤가 하는 것을 잘 포착해야 했지요. 때론 한창 전보를 치느라 여념이 없는데 왜놈들이 달려들어 부랴부랴 안테나를 걷어갖고 도망치기도 했지요. 또 차림새가 일본사람같아서 백성들의 오해를 받을 때도 있었는데 백성들은 ‘요 일본놈들이 어느새 마우재(로씨야)말을 다 배웠네’하면서 증오의 눈길을 쏘기도 했지요. 아무튼 그날 우린 신기동뒤산까지 무사히 왔었죠.” 려영준은 이전에 도문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신기동 뒤산 바위있는데까지 내려갔다. 이 바위는 앞면은 절벽이고 뒷면은 까울령산줄기에 이어져있는 아주 기묘한 바위였다. 주봉뒤에 우묵한곳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앉으면 누구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두사람은 그 웅뎅이에 은신하여 밤을 지어먹으면서 낮에는 주봉에 올라가 숨어 망원경으로 도문시내를 내려다보았다. “10여년전에 삯나무군으로 가장하고 수레에 앉아 길가에 삐라를 늘이면서 지나가던 거리며 엿장사로 변장하고 현병대앞으로 지나가던 골목들을 손쉽게 찾아볼수가 있었습니다. 눈에 익은 거리였고 애수가 남아있는 시가지였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책상우에 놓여져있는 망원경을 들어 보이면서 감개무량해 말했다. “그때 5년동안의 정찰활동을 하면서 처음 창조해낸 방법 하나 있었습니다. 망원경을 사진기렌즈 앞에 고무줄로 동여매가지고 원거리목표를 눈앞에 당겨다 찍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도문 일대의 전경을 여러번 찍었습니다. 도문일대의 지형도도 완성했구요. 이런것들은 그후 쏘련홍군의 연변해방에 크나큰 도움을 주었지요.” 두 정찰병은 도문에 대한 지형정찰을 맞힌 후 날이 어두워지자 량수촌 뒤산을 넘어서 대황구쪽으로 갔다. 한번도 다녀본적 없는 익숙치 못한 곳인지라 밤길을 걷다가 길에서 좀 떨어진 수풀속에 들어가 잔다는 것이 그만 60여호 되는 집단부락앞에서 잤다. 날이 푸름해서야 상황을 안 두사람은 부랴부랴 산으로 올라갔으나 어느새 자위단놈들과 경찰대놈들의 추격에 들고말았다. 놈들은 꽥꽥 소리를 지르면서 서지 않으면 쏜다고 야단이였다. 두 정찰병은 산등으로 올라가다가 나무가 꽉 들어선곳에서 옆으로 비껴나갔다. 그런줄도 모르고 적들은 산마루로 곧추 올라갔다. 이렇게 하여 또 한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였다. 시퍼런 도끼 다섯 자루 두 정찰병은 하루종일 가다가 해질무렵에 좁은 골짜기에 들어섰다. 멏굽이 돌아서 골짜기막차기까지 올라가보니 산비탈에 귀틀집 한 채가 있어다. 나지막한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몰몰 피여오르고있었다. 두 사람은 숲속에 숨어서 한창 동정을 살폈다. 집안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두리벙두리벙 사방을 살펴본후 땔나무를 안고 들어갔다. 해도 이미 서산에 곤드라진 뒤라 이 집에서 하루밤 묵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두 정찰병은 숲속에서 나와 주인장을 부르면서 문을 뚝 떼고 들어갔다. 집안은 단칸이였는데 아까 땔나무를 안고들어간 늙은이는 부엌바닥에 터버티고 앉아 새로판 함지안을 유리쪼각으로 다스리고있던참이였다. 늙은이는 흘끔거리면서 불청객들을 눈빗질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집안을 쓸어보았다. 시렁우에 대두병이 놓여있는데 그 속에 든 것이 아무래도 술인 듯 싶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 다섯자루가 늙은이가 앉아있는 벽뒤에 가지런히 세워져있었다. 혼자인가도 물으니 또 한사람이 있다고 했다. 량식가지러 마을로 내려갔는데 아마 래일 아침에나 올것이라고 했다. 하루밤 묵자고 하니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늙은이는 주인이 시키는대로 산속에 들어와 함지를 파면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소개해왔다. “그런데 저 병에것은 무었입니까?” “주인이 치성을 하라고 떠보낸 술이지유.” 늙은이는 술병을 슬쩍 쳐다보고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저 술 한모금만 마시면 꿀잠을 잘것같았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불행은 항상 눈썹에서 떨어질수 있는것이니깐. 두 사람은 다시는 술병을 쳐다보지 않았다. 지루한 밤을 엇갈아 자면서 새웠다. 아침이 되자 다른 늙은이가 왔다. 그는 두 정찰병과 술병을 번갈아보더니 여기서 잔 손님들인가고 의아쩍게 물어왔다. 그렇다고 하니 머리를 살래살래 젖는것이였다. 원래 있던 늙은이가 기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지하공작원들 같은데 저 술 안 마시길 잘했수다. 사람잡는 술입죠. 저 령감쟁이는 놈들의 분부를 받고 여기 와서 함지를 파는체하면서 전문 사람잡이를 일삼습지유. 지하공작원들이 혹시 저 술을 마시고 취하면 저 도끼로 목을 칩니다유. 당신들 어제 밤에 술 마시기만 했더면 영락없이 도끼날밑의 귀신이 될번했슈다.” 두 사람은 등골이 서늘해났다. 늙다리는 악착한 특무였던 것이다. “나에게도 젊은이들같은 아들이 있었는데 유격대에 간후 종무소식이외다. 놈들은 아들을 만나거든 귀순시키라고 여기에 보냈수다. 젊은이들을 보니 아들 본 것 같구만요. 그래 왜놈들 망하기는 망할란가우?” “왜놈들이 오래잖으면 망합니다. 안쪽에서 모주석이 령도하는 팔로군이 나오고 뒤에서 쓰딸린이 령도하는 쏘련홍군이 나오면 왜놈들 꼼짝달싹 못하고 망할겁니다.”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그나저나 저 늙다리가 일러바치러 간 것 같은데 빨리 자리를 뜨시우.” 두 정찰병은 로인님에게 허리굽혀 정중히 인사올린후 마굴을 벗어나 부랴부랴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꼬박 닷새동안 산길을 걸어서 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고 무사히 본부로 돌아갔다.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정찰하여 바친 정확한 정보가 있었기에 그후 대일전쟁에서 쏘련홍군은 손쉽게 왜놈들을 쳐부실수 있었지요.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채 산속 풀밭의 원혼이 되었는지 알수 없지요. 소분대활동은 동북전선에서 탁월한 역할을 했습니다. 소분대 대원들은 정말 광복을 위해 생명을 바쳐 세웠습니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의 자랑스러운 말이다.(계속)
69    제69장 적들의 심장속에 들어가.1 댓글:  조회:2079  추천:0  2014-02-20
로항일전사 려영준(오른쪽)씨와 김세균씨의 당년의 모습. 려영준 범의 굴 지하아지트로 리용 적 심장 파고들어가 군사정보 정찰 정찰병으로 “소부대에 편입된후 나는 무선전송수신, 촬영, 제도기술, 정찰기술 등을 배웠습니다. 레시바를 쓰고 대방에서 보내는 전파의 음향을 골라들으며 수자를 쓰는 련습도 하고 세손가락으로 전건을 쥐고 손목을 까딱까딱 놀리며 발신련습도 하였는데 퍽 흥미로왔습니다.” 6월 14일(2005년), 기자가 소부대활동을 취재하러 연변일보사 로기자 한태악선생과 함께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를 찾아갈을 때 아직 병환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했음에도 그이는 그때의 상황을 금방 벌어진 일인 듯이 얘기해주었다. 90세인 로항일전사의 기억력은 아주 비상했다. 당시의 상황과 전우들 이름, 날자까지도 낱낱이 기억해내면서 이야기를 펼치는데 무척 생동했고 비장했다. “한창 혈기가 왕성하고 기억력이 좋았던 때라 몇 달동안의 훈련을 거쳐 무선전기술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분동안에 60자의 속도로 송수신할수 있었습니다. 촬영기술도 괜찮게 장악했는데 원거리 단거리 임의대로 찍을수 있었지요.” 병환으로 몸동작이 조금 불편해보였으나 정찰계기들을 다루는 동작을 손짓으로 형용까지 하는 려옹의 얼굴은 무척 흥분되여있었다. 드디여 상급의 명령을 받고 1941년 3월, 려영준은 박장춘과 함께 일본군군사기지정찰을 목적으로 중쏘국경을 넘게 되었다. 이번 임무는 로흑산일대의 일본군군사시설에 대한 정찰이였다. 키넘는 갈대밭을 헤치면서 국경선에 다달으니 산중턱에 구름이 감도는 해발 1000메터되는 중국의 산이 앞을 척 막아섰다. 두 정찰병은 갈밭에 몸을 숨긴후 망원경으로 적정을 탐지하면서 넘어갈 길을 찾았다. 백설이 덮인 국경선에 어둠의 장막이 드리웠다. 두 정찰병은 흰천으로 전신을 위장한 후 쥐도새도 모르게 수분하 하류를 건넌 후 가파로운 산비탈에 달라붙었다. 어찌나 험한지 두발자국 올리디디면 한발자국씩 미끄러져 내려오는 통에 이들은 밤새껏 톺아서야 겨우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벌써 먼동이 훤히 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등뒤엔 적의 망원초, 산아래엔 적의 보초막이 있지 않는가. 지금 이들은 적들의 턱밑에서 서성이고있는것이였다. 이미 날이 밝았으니 더는 움직일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두사람은 방법없이 가랑잎을 뒤집어쓰고 계곡에 숨어 하루해가 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여 해가 지고 어둠의 장막이 산을 덮었다. 가랑잎속에서 살금살금 기여나온 두사람은 발자취를 죽이면서 로흑산을 바라고 갈길을 좁혔다. 로흑산은 산속분지였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부락은 북산기슭에 자리잡고있었고 정거장과 일본군병영은 남산기슭에 들어앉아있었다. 두사람은 일본군영뒤산에까지 바싹 기여들어가 매복했다. 놈들이 조기체조를 할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멀리서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가 들리였다. 로흑산의 아침이 밝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병영으로부터 놈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더니 병영장에 줄을 서서 조기체조를 하느라고 야단이였다. 이렇게 련속 이틀이나 적병영 앞산에 매복해있으면서 적의 동정을 살폈다. 매일 아침 조기체조를 나오는 놈들은 150여명뿐이였다. 병종은 기병과 보병이였다. 경찰서는 부락안에 있었는데 순사놈들은 밤낮없이 쏘다녔다. 두 정찰병은 낮에는 산에 매복해있으면서 로흑산일대의 지형도를 그리고 밤에는 산을 내려 철교와 신작로다리의 길이, 너비, 높이, 교각둘레와 교각간의 거리를 쟀다. 나흩동안 로흑산일대를 까근히 참빗질한 두사람은 정찰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고 기지로 돌아가 로흑산의 모형까지 만들어 바쳤다. 적들의 턱밑에서 허름한 자택에서 기자에게 소분대활동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로항일전사 려영준.(2004년) 한달남짓 지난 4월, 새로운 임무가 또 하달되였다. 동녕에 가 적의 또치가내부구조를 정찰해오라는것이였다. 이것은 그야말로 적의 심장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아오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지휘관은 떠나기전에 동녕은 왜놈들의 주요한 군사기지이기에 이번 정찰은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귀띔해준후 모형도를 보여주면서 주공방향까지 제시해주었다. “또치까안으로 들어가자면 우선 일곱갈래의 방어선을 뚫어야 하오. 지금까지 동녕남북산에다 왜놈들이 또치까를 구축했다는것만을 알지 그 내부구조를 정찰해온 사람은 하나도 없소.” “나와 장춘이는 쏘련홍군이 장고봉사건때 로획한 일본군군복을 갈아입었습니다. 나는 대위 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장춘이는 중위견장을 단 군복을 입었습니다. 센또보시(일본군 전투모)까지 꾹 눌러쓰고 반들반들한 가죽집에 넣은 권총까지 척 차니 제법 일본놈으로 변해버리더군요. 좀 격에 맞지 않은 것은 발자취를 감추기 위해 군화 대신 지하족을 신은것이였지만 각반까지 다리에 감고보니 과연 그럴듯했습니다.” 동녕에 도착한후 처음 부딪친 방어선은 여섯층 높이로 늘인 가시철조망이였다. 박장춘이 가시쇠줄을 한손으로 쥐여들자 려영준은 그밑으로 기여들어가 박장춘이의 손에서 가시쇠줄을 받아쥐였다. 두 번째 방어선은 반땅크호였다. 두사람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지도 않고 풍덩풍덩 뛰여내려갔다. 너비는 5메터가량 되었다. 박장춘이가 맞은켠 흙벽에 몸을 딱 붙이고 손으로 어깨를 툭툭쳤다. 려영준은 훈련장에서 하던대로 박장춘의 어깨를 날념하게 밟으면서 번개같이 우로 올라가 배를 땅에 딱 붙이고 엎드린후 두팔을 내리드리워 장춘이를 끌어당겼다. 세 번째 방어선은 여섯층으로 된 가시철조망에다 빈 통졸임통을 주렁주렁 달아맨 방어선이였다. 자칫하면 놈들의 신경을 건드리는판이였다. 두사람은 좌우측 말뚝중간으로 기여갔다. 려영준이가 먼저 한손으로 가시쇠줄을 살짝 올리들었다. 통졸임통이 덜렁거리지 않았다. 가시쇠줄이 들린 밑으로 박장춘이 배를 땅에 붙이고 살살 기여들어 간후 려영준의 손에서 가시쇠줄을 받아쥐였다. 이렇게 세 번째 방어선을 넘어서니 이번엔 땅에 촘촘히 늘여놓은 쇠줄옹노가 기다리고있었다. 그야말로 물샘틈없는 방선이였다. 두사람은 발자국을 늘게 떼면서 옹노사이를 요리조리 더듬어 들어갔다. 다섯 번째 방어선인 철조망까지 넘어들어가니 또치까로 통하는 교통호였다. 밤은 괴괴하고 사위는 무시무시하였다. 중심또치까에서 쏘아올리는 신호탄이 이따금 밤하늘에서 번쩍번쩍 했다. 아직 놈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 같았다. 두사람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교통호를 따라서 또치까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서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났다. 놈들이 일어나면 반격해야 하기에 려영준은 비수를 빼들고 만단의 준비를 하고 박장춘은 호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여 또치까의 내경과 화구규격, 포신구경, 출입구규격, 천장두께 등을 잰후 얼마간의 콩크리트쪽각을 떼여 챙긴후 려영준을 슬쩍 건드렸다. 볼일을 다 봤다는 신호였다. 북산또치까정찰을 맞힌 두 사람은 이번에 남산또치까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앞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적병이였다. 생사판결할 때라고 생각한 두사람은 권총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교통호 한쪽 벽에 납죽 붙었다. 까딱하면 결사전을 펼친판이였다. 말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어둠속에서 바라보니 총을 멘 두 그림자가 점점 앞으로 흔들흔들 다가오고있었다. 신경은 칼날처럼 번득거렸다. 그런데 놈들은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것이였다. 손을 뻗치면 잡힐만큼한 거리에서 슬쩍 스치고 지나쳐버리는것이였다. 얼마나 아짜아짜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의 이마로는 식은땀이 흔건히 배이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앞의 방법대로 남산또치까로 들어가 내부구조를 정찰해가지고 국경선을 무사히 넘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놈들이 쏘련을 진공하자 왜놈들도 쏘련을 침공할 목적으로 쏘만국경지대에 많은 군대를 이동시켰다. 지휘부에서는 급변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각 소분대에 새로운 전투임무를 하달했다. “그때 나와 박장춘은 무전기를 가지고 로흑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적정을 무전으로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이들은 일본군 1000여명이 자동차에서 내려 병영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니 병력이 1000여명 증가되였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무리 산에서 망원경으로 내려다보아도 병력이 증가된 것이 알리지 않았다. 1000여명 불었으니 원래 병력과 합치면 2000여명 되어야 할텐데 의연히 1000여명뿐이였다. 무슨 도깨비감투인가. 적군의 똑똑한 수자를 정확하게 장악하기 위해 두 사람은 일본군으로 변장한후 밤에 적병영에 접근했다. 두 사람은 정거장쪽으로 움직이는 적들의 긴 대렬을 목격하게 되었다. 정거장에 도착한 적들은 군용화물차바곤에 기여오르는것이였다. 일본군을 만재한 군용차는 금창쪽으로 나가고있었다. (왜 갑자기 밤에 이동하는걸가?) 두 정찰병은 의문을 가득 품은채 산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이였다. 부릉부릉 하는 군용자동차의 엥징소리에 정신을 차린 두 정찰병은 망원경으로 적병영을 주시해보았다. 이게 웬 일인가. 1000여명의 병력을 실은 군용차가 또 도착한것이였다. 어제 저녁처럼 1000여명 적군은 정거장에 나가서 군용화물차에 오르는것이였다. “우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병영에 접근하고 지어 정가장홈에까지 들어가면서 끝내 놈들의 군사비밀을 알아내고말았습니다. 그건 사실 놈들의 잔꾀였습니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호방한 웃음을 날리면서 그때의 정경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식으로 병력이 증가되면 로흑산은 일본놈천지로 되고말겠지요. 그러나 일본놈 병력은 조금도 늘지를 않고있었습니다. 그것은 며칠동안 아침마다 1000여명씩 들어오는 일본놈들은 저녁에 실어내갔던 놈들이였기 때문입니다. 놈들은 남들 다 자는 저녁에 눈을 속여 병력을 실어내갔다가는 낮이면 버젓이 끌어들이는데 기실 당지의 백성을 속이기 위한 허장성세였던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무선전으로 상급에 보고한후 계속 로흑산에 있으면서 동녕에서부터 훈춘현 춘화까지 새로 닦은 군용도로의 너비를 재기도 하고 비행장과 포진지에 들어가 정찰하기도 하면서 활동을 전개해나갔습니다.” 범의 굴 지하아지트로 그런데 박장춘이 갑자기 앓아눕게 되어 정찰황동을 계속할수 없게 되었다. 려영준은 박장춘을 야영훈련소에 호송해간후 혼자서 로흑산으로 돌아와 정찰활동을 계속 견지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다닐 때에는 서로 의지하고 말도 주고받을수 있어 외롭지 않았댔는데 혼자이니 무척 고독하기만 했다. 또 두 사람이면 적들의 눈을 쉽게 속여넘길수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여서 여간만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혼자서 일본군군복을 입고다니자니 위험한 때가 많았다. “범의 굴을 지하아지트로 사용한 이야기가 참 생동하던데요.” 범의 굴 이야기가 나오자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깊은 감회에 잠기는것이였다. “그 범의 굴은 참 우연히 발견했댔지요.” 하루는 놈들의 전호를 정찰하고 산을 넘어오다 아침밥을 지어먹으려고 릉선의 움푹한 곳에 삭정이를 모아놓고 불을 피우고있는데 건너산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건너다보니 왜놈순라기병들이였다. 려영준은 삭정이에 달린 불을 밟아 끈후 부리나케 수림속으로 들어갔다. 말잔등에 앉아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던 놈들은 무슨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려영준이가 불을 피우던곳으로 내려왔다. (발견되였구나!) 목표가 드런날줄 생각한 려영준은 단숨에 10여킬로메터를 냅다 뛰였다. 어디로 어떻게 뛰여왔는지 모른다. 머리를 쳐들고 바라보니 더는 빠져나갈수 없는 험산이 앞을 막고있었다. 깊은 골짜기의 막치기였던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온밤 정찰하느라고 배가 몹시 고팠댔지만 지금은 배고픈줄도 모르겠다. 그저 바위틈에라도 숨어야 한다는 일념에 이곳저곳 살폈다. 마침 커다란 바위기슭에 동굴 하나가 있었다. 들여다보니 굴어구에 범 한 마리가 죽어서 해골이 된 것이 있었다. (아, 범의 굴이구나!) 순간 온 몸이 으쓱해나면서 머리가 쭈볏이 일어서는것만 같았다. 굴안에서 당장이라도 “따웅”하고 범이 아가리를 짝 벌리면서 뛰쳐나올것만 같았다. 권총을 뽑아든 려영준은 탄알을 절컥 재워가지고 굴어구에 비켜섰다. 한창 있어도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이번엔 돌맹이 한 개를 굴안에 들이뜨리고 귀를 강구었다. 역시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추격해오는 놈들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들어가보자. 려영준은 발끝걸음으로 살금살금 범의 굴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3메터 들어가니 굴은 2층으로 되어있었다. 빙 둘어보니 30명은 실히 들어가 숨을수 있는 굴이였다. 금방까지의 무시무시한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쩐지 아늑하게까지 느껴졌다. 갑자기 배어서 “꾸르룩”하고 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배가 아플 정도로 허기가 밀려왔다는것을 느꼈다. 삭정이를 한아름 주어가지고 위층에 올라간 려영준은 밥을 끓여먹으면서 밖을 주시했다. 혹 밖에 나갔던 범이 돌아오지나 않을가, 추격해오던 적들이 쳐들어 오지나 않을가 하여 장탄한채로 총을 곁에 바싹 놓고 신경을 도사리였다. 하루가 지났다. 범도 오지 않고 왜놈들도 오지 않았다. 지형을 살펴보니 이 굴은 로흑산에서 20여킬로메터 떨어져있었다. 그런데 죽은 범뼈가 그냥 있는 것으로 보아 당지사람들이 이런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그후 그 범의 굴을 지하아지트로 리용하여 포탄골 장동무랑 태평골 송로인과랑 련계하면서 왜놈들의 군사정보를 수집하여 본부에 보고했지요. 하지만 누구도 내가 범굴에 거처하고 있는줄을 모르고있었습니다. 정찰하러 나갈때에 꼭 밤에 나가고 정찰을 마치고 들어올 때에도 밤을 리용해 돌아오면서 감쪽같이 행동했기때문이지요. 전보를 칠 때에는 밖에다 안테나를 매고 줄을 끌어들여다가 무전기에 련결하였으며 송신이 끝난후에는 인차 안테나를 걷어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몇 달동안 혼자서 정찰임무를 완수한 려영준은 겨울이 되어서야 본부로 돌아갔다.(계속)
68    제68장 연변에서의 소부대활동 댓글:  조회:2475  추천:0  2014-02-20
소부대가 사용하던 개산툰 연두봉 지하아지트. 당조직 반일단체 새롭게 회복 일제 군사시설 파괴 친일 한간, 주구 청산  항일련군 새로운 투쟁 선고 대량의 소부대 동북에로 파견 “소부대활동은 194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남영에 있던 제1로군에서만도 연변에 7개의 소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소부대의 주요한 활동내용은 첫째로는 이미 파괴된 공산당조직과 반일조직을 회복하는것이며 둘째로는 쏘련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부대를 찾는것이며 셋째로는 일본군의 초소를 습격하고 군사시설을 파괴하여 적들의 후방을 교란하는것이며 넷째로는 민중들에게 항일련군이 살아있다는 것을 선고하려는것이였습니다. 김일성이 지휘한 소부대는 왕청 쟈피거우로 나온후 다시 몇 개 소부대로 나뉘여 각지로 진출하였습니다. 김일, 림춘추 등은 왕청지대와 천보산지대로, 전문섭과 김홍수는 안도 처창즈부근으로, 한창봉과 한태룡은 장백현지대로, 류경수 등은 화전방향으로 각각 진출하여 활동을 벌렸습니다. 려영준, 박장춘은 동녕현 로흑산지대에서 활동하고 박락권 등은 녕안현 목단강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김명주, 김병수 등은 훈춘일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군사정보수집은 매우 간고하였습니다. 례를 들면 1943년, 로흑산으로 진출한 려영준, 박장춘 등은 일본의 방어전선을 정찰하고저 직접 변복하고 일본비행장에까지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여 쏘련으로 전송하였습니다. 그외에도 그들은 동녕일대에서 적의 방어공사를 정찰하는 과정에 방어공사에 세워놓은 대포들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알아내고 정보를 제때에 아군의 지휘부에 전송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내린후 그들은 목단강까지 나가 쏘련홍군의 진군로선을 무선전으로 지휘하였으며 일본군의 후퇴로선을 제때에 무선전으로 아군지휘부에 알려 쏘련비행기가 직접 일본군을 소멸하도록 담보하여 주었습니다. 김명주도 1941년에 김병수와 함께 흑룡강성의 우쑤리강변의 호림일대로 소분대활동을 하러나갔다가 1943년과 1944년 두차례에 걸쳐 차조구일대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거주하고있으면서 정찰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8월에는 마적달로 나가 쏘련홍군의 진공로선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려영준, 김명주 등은 쏘련원동군사령부의 표창을 받았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소부대활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면서 “소부대활동은 특정한 력사조건하에서의 일정한 구역과 규정된 시간내에서 동북항일전쟁을 끝까지 진행하기 위한 유격투쟁의 한 형식이다. 소부대활동은 일제를 철저히 소멸하는데 있어서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고 피력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쏘련경내에서 야영정치군사훈련을 벌리는 한편 동남만지역에서 광범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각지에 흩어져있는 항일련군부대를 회복정돈하며 동남만과 조선북부지역 인민군중들의 항일기세를 붇돋우어줌으로써 항일의 승리를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기 위해 1941년 3월 20일부터 5갈래의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했다. 그중 가장 일찍 동북에 파견된 소부대는 김일성이 이끈 제1소부대와 안길이 이끈 제2소부대였다. “우린 김일성부대다!” 김일성은 29명으로 조직된 제1소부대를 이끌고 4월 9일, 야영훈련소를 떠난후 쥐도새도 모르게 훈춘 중쏘변경을 넘어 백두산지대를 향해 전진했다. 이번 걸음에 중공동남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인 위증민을 찾거나 그 소식을 알아오는 것이 소부대의 주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달전인 3월 8일, 화전현 쟈피거우 목단령 이도하자밀영에서 장백산을 주름잡으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동북항일련군의 우수한 지휘원 위증민이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불행하게도 이미 타계했다는 것을 이들은 감감 모르고있었다. 소부대는 적들의 삼엄한 봉쇄선을 피하면서 눈덮힌 산속으로 행군하였다. 그러다보니 행군속도가 빠를리 없었다. 부대가 로흑산을 지나 헤이샤즈거우에 이르렀을 때 김일성은 집단부락을 기습하여 지방에 남아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부대에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고 했다. 집단부락 성문보초막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던 자위단놈은 고래고래 지르는 성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니 웬걸 한무리의 “일본군”이 버티고 서있지 않는가. 성문이 열리자 욱 몰려들어온 “일본군”중 사관복차림을 한이가 보초놈을 모질게 닦아세웠다. “바가야로! 무슨놈의 꼬락서니야! 꾸벅꾸벅 졸면서 보초를 어떻게 서겠다는거야!” “하이, 죽을 죄를...” 자위단보초병은 꺽꺽거리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어서 대장실로 안내했!” “일본군”의 불호령에 시래기가 된 보초놈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자위단실로 안내했다. 자위단놈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의 왕림에 쩔쩔매고있을 때 벽에 걸려있던 총이며 혁띠에 차고있던 총들이 눈깜박할새에 해제당했다. "되질 놈들아! 우린 김일설부대다! 살겠거든 고분고분해라!“ 벼락같은 소리에 자위단놈들은 그저 부들부들 떨뿐이였다. 다 죽었다던 항일련군이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놈들은 얼이 빠져 눈에 화등잔이 되었다. 총 한방 쏘지 않고 집단부락을 점령한 소부대는 군중들을 모아놓고 서전고동사업을 벌리는 한편 남아있던 항일부대들이 소식을 탐지했으나 동정이 없었다. 이에 김일성은 대오를 이끌고 석두하자를 지나 소왕청부근의 쟈피거우에 이르렀다. 무전기까지 휴대한 소부대가 도가선(도문-가목사), 경도선(신경-도문) 철도와 여러 갈래의 큰길곁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김일성은 박덕산, 김철우 등더러 이곳에 남아있으면서 쟈피거우를 근거지로 소성자, 도문, 동녕, 왕청 일대에서 적정을 조사하며 군중들 속에서 정치조직사업을 벌려 항일련군과 군중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반일혁명의 대중적기반을 튼튼히 다지도록 지시하였다. 그외의 대원들을 거느린 김일성은 5월 12일 도가선을 넘어 왕청현의 삼차구, 다홍왜, 사하장과 돈화현의 황니허즈를 지나 경도철도를 무사히 통과한 다음 다시 돈화현 이도하자, 삼도하자를 거쳐 하발령산줄기를 타고 안도현 한총구일대에 이르렀다. 1년전에 위증민과 헤여진 곳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5월 20일, 소부대는 다시 세 개 소조로 나누어 위증민과 기타 부대의 종적을 찾기로 했다. 동숭빈(한족)이 책임진 한 개 조는 돈화현소재지부근의 이도하자, 고려모자, 유수천, 삼도황구, 사도황구, 마호, 륙과송 등지에서 위증민과 제1로군의 분산된 부대들의 종적을 찾을 임무를 맡고 류삼손(류경수)이 책임진 한 개 조는 화전현동부의 부루하, 쟈피거우, 로금창, 희춘잔 등지에서 제1로군총부와 기타 부대의 종적을 찾을 임무를 맡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거기에는 전광과 1로군후방부 관부관의 밀영이 있었댔다. 제3조는 김일성이 직접 맡고 안도현 대전자, 대사하, 소사하, 화룡현북부, 무송현동북일대의 넓은 지역을 류동하면서 각 부대와 련락을 취하고 제1로군을 다시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달 남짓이 찾았으나 위증민과 제1로군의 종적을 끝내 발견할수 없었다. 7월 28일, 세갈래의 소조는 왕청현 대두천부근에서 집결, 박덕산소조와 류삼손소조가 남아 도문, 석현, 왕청부근의 적정을 계속 살피기로 하고 김일성은 기타 대원들을 이끌고 정황을 회복하려 야영으로 돌아갔다. 9월 14일, 김일성은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연변에 들어와 왕청일대에서 활동하는 소분대와 회사한후 활동을 전개하다가 11월 12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소부대활동을 전개하면서 이들은 1로군의 잔여부대에 대한 소식을 많이 수집했으며 적정도 대량 파악했다. 이들은 또 항일단체와 지방당조직도 회복시켰고 한간과 주구들을 투쟁, 처단하여 항일련군의 위신을 높이기도 했다. 신출귀몰 1941년 8월 25일, 안길이 이끄는 제2소부대 일행 17명은 국경을 넘은후 왕청, 도문, 연길, 훈춘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0월 19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동년 7, 8월에는 최현이 이끄는 10여명 소부대가 국경을 넘어 왕청현 로흑산부근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라자구에 건설되여있는 일본군 간이비행장에 관한 시설을 정찰하는것이였다. 그들은 낮이면 산골짜기에 숨어있고 밤이면 정찰활동을 개시했다. 하여 끝내 비행장의 규모, 편대를 정찰해냈다. 이들은 또 군중들의 협조하에 가치가 있는 많은 정보을 수집하기도 했다. 소부대는 로항일근거지의 공청단원 최봉선을 지도하여 라자구에 “경성사진관”을 세워 소부대활동의 련락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사진관을 통해 1941년부터 1944년사이 일만군의 군사시설, 우두머리들의 활동상황이 담긴 가치가 상당한 사진 300여장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료들은 금후 연변지구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중대한 작용을 발휘했다. 소부대는 임무를 완성한후 10월 19일 순리롭게 남야영에 도착했다. 1942년 봄, 남야영총부는 쏘련방면과의 협상에 쫓아 소부대를 중쏘변경에 파견하여 단기적인 정찰임무를 완수하게 했다. 이러한 정찰활동은 금후 대일작전의 수요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3월부터 시작하여 6개의 소부대를 연변에 파견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3월 20일, 도정비를 대장으로 하는 5인소부대가 동북으로 들어와 활동, 8월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도정비와 혁자신이 희생되였다. 리청이 인솔하는 소부대 12명은 중쏘변경을 넘은후 녕안, 동경성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전부 야영으로 돌아갔다. 4월 27일, 최현이 인솔하는 10명 소부대는 야영을 떠난후 왕청, 도문, 연길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만주와 조선의 철로교통도 등을 수집하기도 했고 배초구일대에서 항일선전을 벌리기도 했다. 소부대는 대류수구에서 북하마탕경찰서 특무 4명을 총살하기도 해 당지군중들의 우환을 없애주었다. 소부대는 군중들과의 관계를 밀접히 건립한후 11월 11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5월 13일, 박덕산이 인솔하는 11명 소부대는 무선전발사기를 휴대하고 국경을 넘은후 수분대전자, 왕청, 도문, 목단강, 장춘-도문철도연선에서 활동하면서 적정을 정찰, 6월 24일 천보산에 이르렀다. 6월 25일, 곽지산이 몇몇 대원들을 이끌고 화전현 쟈피거우로 들어가 과동준비를 하고 박덕산, 강위룡, 김홍수, 리두익 등 4명이 개산툰일대에 가 중단되였던 군중관계를 회복하였다. 소부대가 본영으로 돌아간후 강위룡 등은 개산툰일대에 남아 친척관계를 리용하여 계속하여 반일조직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연두봉아지트를 거점으로 조선 회녕의 비행장정황, 비행차수와 규률을 정찰했다. 연두봉은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서남쪽 6킬로메터되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 산봉우리 북쪽기슭 길서쪽에는 항일소부대시기에 소부대원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던 비밀아지트의 옛터가 있었다. 이 비밀아지트에 대하여 “룡정현근현대유적지조사표”(1984년 5월, 제72페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비밀아지트는 광개향 자동촌 제2툰 남쪽 8리되는 연두봉 북쪽기슭에 있는 인행도로의 서쪽에 있는데 판전구(板田溝)어구남쪽 1500메터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밀아지트자리가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남북의 길이가 5메터이고 동서의 너비는 3메터로서 동, 서, 남쪽은 돌로 쌓은 벽이고 북쪽은 흙으로 쌓은 벽이다. 남쪽벽은 제일 높은데 80센치메터밖에 되지 않는다. 이 연두봉 항일아지트는 로전사인 강위룡이 항일련군소부대활동시기에 리용하던 것이다. 1944년후에는 지점산(池占山)이 막을 차지하였고 토지개혁때에는 김기룡(金基龍)이 사용하였다. 1959년 조선항일전적지답사단에서 원래의 집재목들을 가져갔었다. 1960년 6월말에 자동관리구에서 목축장으로 쓰기 위해 이곳을 늘구어 원래의 면모가 없어졌다. 지금은 단지 허물어진 흙벽만 있을 뿐이다. 5월 29일, 안길이 인솔하는 12명 소부대는 국격을 넘은후 왕청현 수분대전자, 라자구 동남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정찰활동을 하는 한편 농민들 속에 심입하여 동북항일련군의 정황, 쏘독전쟁정황 등을 선전하면서 항일전쟁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11월 5일, 소부대는 순리롭게 본영에 도착했다. 7월 17일에는 시세영이 8명 소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활동하다가 넘어갔고 11월중순에는 김윤호가 5명소부대를 이끌고 넘어와 활동했으며 련이어 안길, 최현 등도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왕청, 연길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봄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총적으로 이시기 남야영에서 파견한 소부대는 간고한 지하투쟁을 벌리면서 항일련군 잔여부대를 찾고 당조직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왕청현 이란구에 1개 중공구위와 공청단구위를 회복시켰으며 액목현 남대창에 1개 당소조, 녕안현 동부와 개산툰에 반일회 등 조직을 세웠습니다. 소부대는 또 왕청현 라자구, 십리평, 왕청역, 도문 북대동, 명월구 남산툰 등지에 비밀련락원과 련락거점을 두고 일만군의 정치, 경제동태와 군사정보를 수집하게 했으며 적들의 초소를 습격하고 칠일파주구를 숙청하면서 항일련군이 살아있으며 적들과 새로운 투쟁을 벌리고있다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소부대활동에 대한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1943년이후 동북항일련군은 소부대활동을 중지하고 동북에서 활동하고있던 극소수의 항일련군을 제외한 대다수 대원들을 야영에 집결시켜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1941년 6월 22일 파쏘독일은 쏘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찢고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일제는 진주항을 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 몇 년간의 치렬한 박투를 거쳐 제2차세계대전의 동서방전선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쏘련에서의 쓰딸린그라드전역의 승리를 전환점으로 하여 쏘련군은 전략적인 방어로부터 전략적인 진공으로 돌입하였다. 하여 구라파에서의 독일의 패배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에서도 미국은 드센 반격을 보여주면서 일본의 패배를 재촉하고있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동북항일련군은 대일작전의 준비를 다그치게 된 것이다. (계속)  
67    제67장 쏘련에서의 야영훈련 댓글:  조회:2334  추천:0  2014-02-20
하바롭스크야영훈련소에서의 동북항일련군 장령들. 앞줄 왼쪽 두번째로부터 리조린, 왕일지, 주보중, 김일성.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 설립 항일련군 재편성 야영지에서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훈련 강행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 설립 우세한 적들과의 끊임없는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항일련군은 무모한 희생을 피면하고 유생력량을 보존하며 정치, 군사적 자질을 높이는 한편 력량을 부단히 장대시켜 항일투쟁을 끝까지 견지하기 위하여 1940년말부터 대부대를 륙속 쏘련경내로 이동시킨후 야영훈련을 조직하였다. 야영훈련에는 동북항일련군 각 군에서 사업하던 김일성, 최용건, 김책, 안길, 강신태 등 많은 조선인 지휘원들과 전투원들이 참가하였다. 그들은 다른 항일련군대원과 함께 남북 두 개 야영지에 나뉘여 훈련하면서 수시로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하였다. “쏘련으로 들어가 두곳에 야영훈련기지를 설치했는데 한곳은 A영(북영), 다른 한곳은 B영(남영)이라고 불렀습니다. 먼저 들어간 곳이 북영인데 나꼬롭스크의 중간지에 있는 지방이였습니다. A영은 흑룡강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흑룡강을 로어로 아무르강이라고 부르기에 그 첫 자를 따다가 A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제2로군의 총부와 제3로군의 총부가 들어와 밀영을 세웠습니다. 제1로군은 쌍성자와 울라지보스또크 중간지대에 있는 곳에 가 밀영을 잡았는데 그곳 이름을 부쉬로부라고 불렀기에 첫 자를 따서 B영이라고 불렀습니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앞으로의 반공(反攻)을 준비하여 일반군사활동뿐만아니라 공중락하, 무선전 등 선진적인 특수기술도 학습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야영훈련에 대한 소개였다.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속에서》에서 “그 당시 내가 들은데 의하면 1로군의 500여명과 2로군의 일부를 합하여 700여명이 제1야영훈련소로 가고 2로군의 대부분과 3로군 도합 1000여명이 제2야영훈련소로 갔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야영훈련에 참가한 장병들중 절반이 조선인이였다고 한다. 연변의 아들딸들로 조직된 남야영에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제3방면군, 경위려가 배속되였는데 “실력을 집중시키고 간부를 보존하며 정돈을 진행하고 부대를 분산시켜 활동한다(收縮實力, 保存干部, 進行整頓, 化整爲零, 分散活動)”는 방침을 시달하기 위하여 남야영의 부대를 재편성하고 당조직을 완벽하게 했다. 1941년 3월, 국경을 넘어온 1로군부대를 1로군 제1지대로 개편, 김일성이 김일성이 지대장을 맡고 안길이 참모장을 맡았다. 아래에 두 개 대대를 두었다. 남야영에 함께 주둔하고있던 2로군 5군을 2로군 제5지대로 개편, 시세영에 중공남아영위원회를 건립하고 리청을 서기로, 시세영, 김일성, 박덕산을 위원으로, 최현, 김윤호를 후보위원으로 선거하였다. 북야영에서도 당조직을 새롭게 건설하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1941년 4월 13일, 쏘련과 일본은 “쏘일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중국경내로 들어가 활동하는 것을 중지해달라는 쏘련측의 요구에 의해 항일련군은 소부대를 동북에 파견하여 임무를 집행하게 하는 외에 대부대는 남북야영훈련소에 남아 정치, 군사 훈련을 하게 했다. 1942년 8월, 남북야영훈련소와 동북에서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부대를 통일적으로 항일련군교도려로 개편, 명의상에서는 쏘련극동군에 예속시켰다. 정식번호는 쏘련극동홍기군독립88려(蘇聯遠東紅旗軍獨立88旅)였고 대외번호는 8416보병특별려였다 그러나 내부로는 의연히 항일련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있었다. 주보중이 교도려 려장을 맡고 장수전(리조린)이 정위를 맡았다. 아래에 4개 영과 2개 련을 두었는데 1로군을 기간(基干)으로 제1영을 편성, 김일성이 영장을 맡고 안길이 정위를 맡았다. 2로군 제2지대를 기간으로 제2영을 편성, 왕효명이 영장을 맡고 강신태가 정위를 맡았다. 3로군을 기간으로 제3영을 편성, 허형식이 영장을 맡고 김책이 정위를 맡았다. 제2로군 제5지대를 기간으로 제4영을 편성, 시세영이 영장을 맡고 리청이 정위를 맡았다. 려, 영의 부직(副職)은 쏘련측에서 파견한 인원들이 담임했다. 1942년 9월 13일, 중공동북항일련군전당대회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을 설립하였다. 회의에서 특별지부국 제1기 집행위원과 후보위원을 선거하였다. 주보중, 장수전, 최석천(최용건), 김일성, 김경석, 팽시로, 왕명귀, 김책, 왕효명, 안길, 리청이 집행위원으로 당선되고 왕일지, 심태산이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서기에 최석천, 부서기에 김일성, 김경석이 당선되였다. 중공동북당조직 특별지부국은 중공항일교도려위원회와 동북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이였다. 이로부터 동북당조직은 통일령도가 있게 되었고 동북항일련군은 통일적인 지휘가 있게 되었다. 야영정치군사훈련 전투가 빈번하여 여태까지 군사훈련과 정치, 문화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항일련군 대원들에게 있어서 이번의 야영훈련은 참으로 뜻깊은 나날이 아닐수 없었다. 야영에 참가한 대부분 대원들의 문화수준은 높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는 문맹과 겨우 자기 이름자나 쓸줄 아는 사람이 30%나 되었다. 야영지는 심산밀림속에 건설되여있었다. 전사들은 자기들 손으로 병영을 짓고 훈련장을 닦았으며 량식창고, 피복창고, 병원, 재봉소, 강의실, 병기수리소 등을 꾸려놓았다. 밭을 일구어 남새도 가꾸고 사냥, 고기잡이도 하여 식생활을 개선하였다. 본격적인 야영훈련에 들어서자 전사들은 일과표에 따라 긴장하면서도 유쾌하게 군사훈련과 학습, 문화오락활동을 했다. 정치학습은 대원들의 문화수준에 따라 두 개조로 나누어 했는데 문화수준이 높은 대원들은 자체로 학습하고 토론을 위주로 했으며 문화수준의 낮은 대원들은 위주로 강의를 들었다. 장기간은 유격전쟁가운데서 학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라 대원들은 가물에 단비를 만난 듯이 학습에 열성을 올렸다. 주보중, 장수전, 풍중운 등 항일련군 지도자들은 무시로 야영훈련소에 찾아와 보고회를 조직하고 관내에서 싸우고있는 팔로군, 신사군의 전투적위훈을 소개하기도 하고 1941년 1월 7일에 발생한 환남사변의 경과와 환남사변후의 중국공산당의 태도를 상세히 알려주어 대원들의 항일투지를 더욱 북돋우어주기도 했다. 전사들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원리와 《쏘련공산당(볼쉐위크)력사》, 모택동의 《지구전을 론함》, 《당의 작풍을 바로잡자》, 주은래의 《쏘독전쟁과 반파쑈투쟁을 론함》, 주덕의 《동방민족반파쑈통일전선을 건립하자》 및 1936년의 《쏘련헌법》 등을 체계적으로 학습했으며 “중국민족해방전쟁의 력사적단계 및 승리의 조건”, “전국항일전쟁의 형세”, “동북유격운동의 발전전도” 등 문제를 놓고 열렬한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김일성은 조선인장병들에게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제목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학습을 거쳐 대원들은 맑스-레닌주의리론수준을 높이였으며 애국주의와 국제주의 정신을 발양하여 반파쑈전쟁의 종국적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몸바쳐 싸워야 한다고 인식했다.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식자반을 꾸려 문맹퇴치를 하는 한편 한어를 잘 모르는 조선인전사들에게 조선말정치과목특별반을 꾸려 조선말로 정치과를 강의하였는데 김일성 등 고위급간부들이 친히 강의했다. 그리고 한어조를 꾸려 한어를 가르쳐주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로어를 배워주기도 하였다. 전사들은 벽보를 꾸리고 강연회를 조직하고 오락만회를 벌리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여 “계급각오”, 문화수준을 높여주었다. 군사과목은 주로 대렬훈련, 사격, 창격술, 정찰, 보초, 전달 등 내용이였다. 부분적대원들은 항공과 무선전 기술을 학습하였으며 락하산, 스키타기, 도강, 폭파 등 훈련도 하였다. 1941년 6월 22일, 파쑈독일은 신의를 저버리고 쏘련을 불의에 진공하였으며 12월 7일에 일본은 진주항을 불의에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 12월 8일,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월 11일,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제2차세계대전은 더욱더 확대되였으며 선후하여 60여개 나라와 지구, 20억명 이상에 달하는 인구가 이 전쟁의 도가니속에 휩쓸려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직면한 항일련군장병들은 쏘련홍군과 어깨겯고 독일침략자와 일본침략자를 물리치는 전쟁에 뛰여들것을 강력히 탄원해나섰다. 야영당위원회에서는 “원쑤를 소멸할 기량을 더 잘 닦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하고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그리하여 폭파, 락하산, 방화, 반땅크 등 과목을 더 늘이고 매일 8시간씩 꼬박 훈련에 돌입했다. 교도려에서는 소부대를 무어 동북지방에 계속 대원들을 파견하는 한편 쏘련원동군사령부에서 반포한 “보병훈련대강”에 좇아 전시의 수요와 동북유격전쟁의 실제에 결부시켜 체계적인 현대화군사훈련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으며 일부 특수기술과 기능도 배웠다. 1942년 9월말부터 10월초까지 교도려에서는 항공륙전대훈련을 조직하여 조선인전사들을 망라한 많은 남성대원들과 20여명 녀성대원을 참가시켰는데 특히 녀성대원들이 침착하고 용감하게 훈련에 림해 총교관의 칭찬을 늘 받았다. 주보중려장은 자기의 일기에 이들 녀전사들을 중국항공락하산기술력사의 중요한 한페지에 적힐것이라고 밝히면서 그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기도 했는데 그중에 조선인 녀대원이 10명 있었다. 그녀들로는 김창옥, 리명순, 김옥순, 김백문, 류명옥, 정만금, 김순희, 장경숙, 박경옥, 리영숙 등이였다. 여름철에는 수영도 배우고 도강훈련도 강행했으며 겨울철에는 스키타기를 익혔는데 꾸준히 노력한 보람으로 물에 들어서면 누구나 날래게 헤염을 칠수 있게 되었고 스키를 탈라치면 50킬로메터쯤은 손쉽게 달릴수 있게 되었다. 부대는 100여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정하고 스키를 타고가면서 수색, 매복, 불의의 습격, 부대내부에서의 호상정찰, 실탄사격 같은 종합군사훈련도 늘 했다. 야영정치군사훈련을 거친 동북항일련군의 조선인 지휘원과 전투원들은 그후 항일투쟁의 종국적승리를 위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계속)  
66    제66장 엄혹한 시련속에서의 악전고투 댓글:  조회:1929  추천:0  2014-02-20
  두만강을 삼엄하게 지켜선 일본군경.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간안한 적들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뒤엉킨 간고한 시련에 맞서 제2방면군 역경을 뚫고 홍기하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제2방면군은 이튿날인 1940년 3월 26일, 화룡현 화랜라즈에서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일본군“토벌”대를 공격, 40여명을 소멸한후 적들을 뿌리치고 안도현으로 빠져나갔다. 안도현에 도착한 2방면군은 4월 29일, 련속하여 남도툰, 한가가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자위단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며칠후 제7퇀 오백룡부대는 만보툰의 위만경찰과 자위단을 습격하여 몇놈을 죽이고 무기와 량식을 로획했다. 안도현경내에서 여러차례 타격을 받은 일제는 병력을 집중하여 2방면군의 뒤를 밟았다. 이에 2방면군은 적들의 “토벌”에 대처할 책략을 연구하기 위하여 5월 2일 총지휘 김일성의 주최하에 돈화현 륙과송에서 금후의 전략전술방침을 연구하는 긴급회의를 가졌다. 제2방면군 정치부 주임 려백기, 부관장 필수문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후 려백기는 일부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현 쌍동툰, 대황구, 대마록구 등지의 일만군기지를 련속하여 습격하였다. 대마록구전투에서 려백기는 중상을 입고 이미 변절하여 특설부대의 우두머리로 된 림수산(2월 24일 몽강현 쟈피거우에서 일본군에 투항)에게 체포된후 역시 수치스러운 별절자로 되었다. 이로써 려백기가 인솔하던 부대는 해체되고말았다. 제2방면군 주력부대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분산적인 전투를 벌렸다. 7월 2일, 돈화현 하발령정거장을 습격, 7월 11일, 제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이 경위려와 2방면군 일부 부대를 이끌고 화룡현 와룡툰을 기습, 일군 20여명을 죽이고 군량을 로획했다. 같은날, 2방면군 한 부대는 훈춘현 신안툰, 이도구를 야습하여 량식과 생활용품을 로획했다. 이튿날인 7월 12일, 다른 한갈래 부대는 안도현 신흥부락을 공격, 일본군 20여명을 격살했다. 아군의 이러한 부단한 기습과 공격에 일제는 더욱 악착스럽게 달려들었다. 이에 2방면군은 8월 10일, 돈화현 하발령에서 회의를 열고 상응한 대책을 강구했다. 계속하여 분산활동을 하는 한편 입동후 부대는 장백산 밀림으로 철퇴해 들어가 한시기 휴정하기로 했다. 이때 제1로군의 파견으로 자방공작에 나섰던 김재범 등 5명이 동불사 평성촌에서 활동하다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 김재범은 변절해버렸다. 경우려 려장 박덕범이 왕청현 삼가구부근에서 체포된후 역시 변절해버렸다. 이시기 위증민은 병이 악화되여 부득불 부대를 떠나 화전현 쟈피거우 이도하자 밀영에서 병치료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1월, 2방면군 7퇀 퇀장 오백룡은 17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쟈피거우에 가 위증민을 만나 과동물자 등을 남긴후 서북차, 따푸차이허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3방면군 피어린 결전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은 제2차 투도류하회의후 화전, 녕안, 연변 일대에서 주요하게 활동하는 한편 교하, 서란, 오상 등지를 넘나들면서 전전했다. 3방면군은 “강적을 피하면서 약한 고리를 공격하고 기회를 엿보아 섬멸성적타격을 가하는” 전술을 리용하여 때론 련합작전으로 때로는 분산출격으로 일본군에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1940년 1월, 3방면군 한 부대는 연길현 무학동에서 50여명 위만경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격살했다. 같은 달 최현이 이끄는 13퇀은 선후로 연길현 사방대, 돈화현 따푸차이허, 관지 등지를 습격하여 일만군에 타격을 주었다. 3방면군 일부 부대와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 5군 2사는 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5군 2사 사장 도정비의 인솔하에 돈화일대에서 활동했다. 1940년 봄, 진한장이 인솔하는 부대는 돈화현 우심정자밀영에서 2000여명 일만군의 포위에 들었다. 적들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진공해들어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7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진한장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진한장은 부상당한 몸으로 계속하여 부대를 지휘하여 포위를 돌파한후 사하연일대로 전이하게 했다. 그러나 련이어 우심정자의 여러 밀영이 회멸되였으며 피복공장전사들이 참혹하게 참살당했다. 재봉침, 식량, 남새 등을 모조리 빼앗기면서 후방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제3방면군 15퇀 퇀장 리운룡이 인솔하는 한갈래 부대는 연길현으로 전이해왔으나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적들의 추격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적지 않은 손실을 당한 리운룡부대는 부득불 왕청현으로 전이하여 소부대유격활동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1940년 5월, “적들의 ‘토벌’중심지 돈화현을 신속히 떠나라”는 1로군 대리사령 위증민의 명령을 받은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오상방면으로의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길에서 3방면군은 도처에서 적들의 포위공격과 추격을 받으면서도 돈화현 쌍하령 동강에서 일본군수비대를 기습하여 30여명을 격살했고 교하현에서 추격해오는 적들을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일본군 13명, 위만경관 14명을 살상했다. 6월초, 부대는 드디여 오상현경내에 들어섰다. 6월 5일, 3방면군은 오상현 랍림하삼림벌목경찰대 향수하자분주소를 야습하여 일본군 10명과 위만경찰 4명을 죽이고 로동자 120여명을 해방시켰다. 오상현에 들어선후 3방면군은 류도적자, 석두하자, 신가영자 등 위만군거점을 습격했다. 6월 18일, 오상현 장가만에서 일본군 수비대 60여명, 위만경찰 30여명과 조우전을 벌린 3방면군의 한 부대는 10명의 적들을 죽인후 포위를 돌파했다. 6월 25일에는 오상현 충하진을 기습, 적 30여명을 포로하고 현금 8700여원을 로획했다. 3방면군 15퇀과 2로군 5군 2사는 진한장과 도정비의 지휘하에 돈화, 교하, 오상 등지에서 전투를 벌리면서 원정하는 도중 대오가 1배로 증가했다. 1940년 7월, 진한장은 1로군총부와 분산작전하고있는 3방면군 13퇀과 14퇀 및 대오를 떨어진 전사와 부상병들을 찾기 위해 130명 대오를 이끌고 돈화로 나오는 길에 교하현 평지구, 평창툰 등 집단부락을 공격한후 액목의 목단강삼차구에서 적들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었다. 아군은 결사적으로 항격하여 포위를 돌파하였지만 절반의 병력을 잃고말았다. 이에 돈화에서의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녕안현으로 전이했다. 1940년 10월, 진한장은 나머지 병력 60여명을 이끌고 녕안현 경박호남호부근에까지 갔다. 그곳에는 월래 4개월 남짓이 먹을수 있는 량식이 저비되여있었댔으나 변절자의 밀고로 몽땅 적들에게 소각되여버리고 없었다. 하여 부대는 “안으로는 량식이 떨어졌고 밖으로는 구원병이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한장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1월말 진한장과 도정비는 행동계획을 짠후 유격전을 벌려 량식을 해결하려 했다. 진한장은 4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1940년 12월 3일 밤, 진한장은 녕안현 황가툰 도로건설공사장과 고강자집단부락을 쳐 무기와 량식 및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2월 5일에는 북호두의 일제벌목작업소를 습격, 량식을 로획했다. 그러나 몇차례의 전투에서 아군은 많은 상망자를 냈는바 진한장의 신변에는 겨우 10여명의 전사가 남았을뿐이였다. 이에 진한장은 소만만구밀영으로 돌아가 한시기 휴정하려고 했다. 12월 6일 밤, 밀영으로 돌아오던 중 대오내에 변절자가 생겨 진한장의 신상이 적들에게 밀고되고말았다. 적들은 즉시 부대를 동원해 소만만구밀영을 포위했다. 진한장은 10여명 전사를 이끌고 적들의 포위공격에 대처해나섰다. 죽어도 굴할줄 모르는 아군전사들은 적들과 2시간 남짓한 격전을 벌리여 여러차례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10여명의 적군을 격살했다. 그러는 동안 아군 전사들도 하나하나 쓰러졌다. 적들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다. 적들은 공심전을 벌려 진한장을 사로잡으려고 시도했으나 진한장은 남은 몇몇 전사들더러 포위망을 돌파하게 하면서 자신은 맨뒤에서 한편으로 엄호하고 한편으로 철퇴했다. 진한장이 죽어도 굴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적들은 아군대오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진한장은 오른손과 흉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간신이 일어난 진한장은 커다란 소나무에 의지해 마지막 탄알이 떨어질 때까지 왼손으로 권총을 휘둘렀다. 한무리의 적들이 소나무를 삥 둘러쌌다. 한놈이 진한장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진한장은 분노의 눈길로 적들을 쏘아보면서 된욕을 퍼부었다. 이에 흉악한 왜놈은 달려들어 단도로 진한장이 눈을 도려냈다. 연변출신의 항일명장 진한장은 최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이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전략전인 전이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진행된 일제의 대규모적이고 철저한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지 않으면 안되였다. 원유의 항일유격근거지가 몽땅 파괴되고 양정우, 진한장 등 우수한 지휘원과 용감한 전사들이 희생되였다. 3만여명이던 동북항일련군이 1941년에 이르러 2000명도 되나마나하게 남았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000명도 채 안되였다. 적들은 1로군의 뿌리를 완전히 빼앗기 위해 끊임없은 “대소탕”작전을 벌리였다. 적들은 분산되였거나 흩어져있던 1로군 전사들을 수색체포하기 위하여 1로군 각 부대의 활동구역을 샅샅이 뒤지면서 엄격한 “반문(盤問)”과 “대검거”를 실시했다. 이른바 “반문”이란 행동이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온갖 악형을 다 가하면서 끝까지 따져묻는것이며 “대검거”란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호구와 거민증을 조사하는것인데 일단 조금이라도 거슬리는자를 발견하기만 하면 “불량분자”로 취급하여 체포했다. 1940년 11월, 위만간도성정부는 “동만공산당조직을 복멸”시키기 위해 “특수반”이라는 전문기구를 설립했다. 각 현의 특수반은 각 현의 경방대에서 지휘하고 관리했다. 아울러 정규적인 “토벌”과 배합하여 공산당조직을 파괴했는데 중점을 항일교통원과 지하공작자를 수색체포하는데 두었다. 1941년초에 이르러 형세는 급격히 악화되였다. 항일련군과 지방군중조직의 련계가 기본상 이루어질수 없게 되었으며 각 부대와의 련락도 철저히 두절되여 버려 병력집중 등 군사적행동을 더는 이룰수 없게 되었다. 량식, 복장 및 군수물자를 보충받을 원천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근거지가 없이 산간지대에 분산되여 활동하고있는 항일련군전사들은 극히 곤난한 처경에 빠지고말았다. 거기에다 일부 나약한자들이 무치하게 변절하여 부대의 종적과 비밀을 적에게 고발하는바람에 항일련군은 더욱 큰 곤경을 당하군 했다. 그 간고성을 위증민이 1940년 11월 당중앙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가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위증민의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키잡이를 잃은 바다속의 작은 배마냥, 두눈을 실명당한 어린이마냥 우리는 어쩌할바를 모르고 동분서주할뿐이다. 동북항일련군의 앞에는 엄혹한 자연과의 투쟁, 무서운 병마와의 투쟁, 극심한 식량난과의 박투, 간악한 적들과의 치렬한 싸움이 하나로 뒤엉킨 모진 시련이 닥쳐왔다. 이러한 정세에서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려면 유격운동의 전략적책략을 개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0년 11월,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적들의 끈질긴 포위“토벌”을 떨쳐버린후 남은 병력을 인솔해 훈춘에서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들어갔다. 1940년 9월 29일, 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은 왕청현 천교령에서 일본“토벌”군의 특별공작반에 체포된후 변절, 하여 경위려의 주력이 기본상 와해되였다. 그중 일부가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들어갔다. 제3방면군 13퇀, 14퇀 일부는 최현, 안길의 인솔하에 훈춘, 왕청, 녕안, 동녕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봄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를 거쳐 쏘련국경지대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1941년 봄에 이르러 원 연변의 제2군출신 항일련군 생존부대는 일제의 악착한 “포위토벌”을 헤치고 기본상 쏘련국경지대인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부근에 이르게 되어 전략적인 전이임무를 완성, 항일혁명세력을 보존하게 되었다. 하바롭스크회의 1935년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6.3지시”정신에 의해 1936년 1월 9일 중공만주성위가 철소된후 동북에는 여태껏 당의 통일적인 지도기구가 없었다. 공산국제 중공대표단도 모스크바에 주재하고있었는지라 직접적으로 동북의 당조직과 항일무장활동을 령도할수 없었다. 1939년부터 동북항일 유격전쟁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의연히 중공중앙의 통일적인 령도를 받을수 없었다. 이에 위증민, 주보중, 풍중운 등 동북항일련군 지도자들은 편지를 쓰거나 사람을 파견 혹은 직접 쏘련으로 건너가 쏘련방면의 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상황보고를 전달했다. 1939년 9월, 중공북만성위 상무위원 풍중운은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여 쏘련원동 해방부문과 교섭, 쏘련방면의 협조로 북만, 길동 회의를 소집, 길동과 북만의 당조직을 통일하고 2로군, 3로군의 합병과 통일을 꾀하려 했다. 쏘련측에서 풍중운의 건의를 접수하고 정치, 조직, 군사상에서 동북항일련군을 방조하기로 했다. 이에 1940년 1월 24일부터 2월 5일까지 쏘련경내의 하바롭스크에서 중공길동성위와 북만성위대표련석회의가 소집되였다. 이 회의를 세칭 “제1차하바롭스크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중공길동성위 책임자이며 동북항련군 제2로군 총지휘 주보중, 북만성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풍중운, 항일련군 제3군 군장 조상지 등이 참가했다. 회의가 열릴 때 중공동만성위와 제1로군 군부가 이미 파괴되였기에 대표를 파견하지 못했다. 회의에서 동북항일유격전쟁의 겸험교훈을 총화한후 부대편제는 반드시 정세의 발전에 적응하여야 한다는 문제를 토론하고 “실력을 보존하고 점차 편제를 줄이여야 한다”는 회의방침에 근거하여 각 로군을 10개 지대로 줄이기로 하였다. 아울러 중공북만당조직, 중공길동당조직, 동북항일련군의 대표는 쏘련극동군정당국과 국제공산당의 도움밑에 항일련군은 쏘련의 일부 필요한 원조를 받지만 동북항일련군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반드시 견지하며 동북항일련군의 독립성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협의를 달성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의 항일유격운동과 중공당조직을 분리시킬데 관한 제안을 부결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항일구국운동에 관한 새로운 제강초안” 등 문건을 채택하였다. 1940년 여름, 독일이 서구라파를 병탄하자 일본은 아시아주와 태평양지구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급급해했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딸리아, 일본은 “3국동맹조약”을 체결했다. 파쏘들의 결맹은 쏘련으로 하여금 구라파와 원동변계를 수시로 침략당할 위험에 놓이게 했다. 쏘련당국은 원동의 국세에 특수한 관심을 보이면서 1940년 9월말, 동북항일련군 지도자들인 양정우, 위증민, 주보중, 조상지, 왕효명, 장수전, 풍중운, 시세영, 리청 등에게 통지를 발부하여 “금년 12월에 당과 유격대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당조직과 목전의 유격운동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했다. 1로군에서는 양정우가 이미 희생되고 위증민이 중병으로 치료중이였기에 2방면군 지휘 김일성, 1로군 총부군의처장 서철, 3방면군 안길 등 3명이 동남만성위와 1로군의 정식대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여 1940년 12월하순부터 1941년 1월상순까지 두 번째 하바롭스크회의 즉 만주전당대표대회가열리게 되었다. 회의에는 주보중, 최석천(최용건), 리청, 왕효명, 시세영, 김책, 김일성, 서철, 장수전(리조린), 풍중운 등 11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중공중앙의 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정황하에서 동북항일련군의 조직편제에 관한 중요한 결의를 지었다. 동북항일투쟁을 통일적으로 령도하기 위하여 회의에서는 동북항일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주보중을 총사령으로, 장수전을 부총사령으로, 위증민을 정치위원으로 추천한다고 지적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주보중, 장수전, 최석천으로 동북당림시지도기구 즉 “3인단”을 조직했다. 이번 회의는 중공중앙과 련계를 맺으려고 하였지만 객관적원인으로 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총사령부를 건립할 문제가 제기되고 결의까지 지었지만 정황의 변화로 하여 그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회의에서는 동북의 각 항일부대가 쏘련경내로 철퇴해들어온 정황에서 소부대를 동북경내에 파견하여 유격활동을 전개할데 대한 중요한 결책을 내오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전국의 형세를 보다 정확하게 예견하고 장기적으로 투쟁을 벌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환경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공산당의 령도하에서 단결하여 항일련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최후의 승리를 안아올 때까지 항일을 견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계속)
65    제65장 홍기하에서의 대승리 댓글:  조회:2084  추천:0  2014-02-19
홍기하전투유적지기념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일제"포위토벌"로 근거지 상실 제2방명군 홍기하에서 지혜롭게 마에다 부대를 전멸 두도류하회의 1939년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동북에 대량의 부대를 증파하여 잔폭한 “포위토벌”을 감행했다. 련속적이고 전면적인 진공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엄중한 손실을 받게 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악착한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항일련군과 군중들간의 련계가 단절되여 항일련군은 엄중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동남만의 항일투쟁형세는 날따라 악화되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항일련군 제1로군 총부는 료령근거지를 포기하고 북으로 전이, 심산밀림에 들어가 숙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로써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유격근거지의 상실과 더불어 유격구역도 점차 축소되면서 항일련군 각 부대는 부득불 장백산지구의 높은 밀림지대를 전전하면서 간고한 환경속에서 전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긴급한 정세밑에서 양정우는 화전현 두도류하에 있는 항일련군밀영에서 1939년 10월 1일부터 5일까지 제1로군 주요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양정우, 위증민, 전광, 방진성, 서철, 한인화, 황해봉 등이 이번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토벌”투쟁을 벌릴것인가 하는 책략문제를 놓고 세심히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엄중한 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한후 실력을 보존하고 섬멸적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 각 부대들을 소부대로 분산시켜 활동할 방침을 제정했다. 이 방침에 근거하여 각 부대의 반“토벌”활동구역과 전투임무를 획분했는데 제1방면군은 조아범의 지휘하에 몽강, 휘남, 금천, 림강 등 현의 린접지대에서 유격활동을 벌리며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무송, 화전,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고 제3방면군은 두갈래로 나누는데 한갈래는 위증민의 지휘하에 돈화, 화전, 길림지구에서 활동하며 다른 한갈래는 진한장의 지휘하에 녕안, 동녕, 교하, 오상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리면서 북만의 형제부대와 련계를 맺기로 했다. 양전우는 총사령부의 경위려와 1방면군 일부 부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각 부대와 배합작전을 하기로 했다. 제1차 두도류하회의후 각 부대는 기동령활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일제의 거점과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식량 등 긴요한 필수품을 해결했다. 근거지를 상실한 불리한 환경속에서 항일련군은 신출귀몰하면서 적을 주동적으로 타격, 자신의 력량을 지켜나갔다. 적들이 기재한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1939년 하반년에 항일련군 제1로군은 적들과 276차의 싸움을 벌렸는데 아군이 주동적으로 적을 습격한 차수는 177차였다. 양정우가 직접 지휘하는 사령부부대 400여명 전사들이 적들과 여러차례 접전하면서 제1차 두도류하회의정신을 각 부대에 전달하고있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원 양정우가 불행하게 전사한 것이다. 1940년 2월 23일, 35세의 나젊은 항일명장 양정우는 수백명이나 되는 적들과 혼자 남을 때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양정우의 희생은 1로군의 투쟁형세에 급작스러운 역전을 불러왔다. 적들은 “만주치안의 암”을 근치한다고 떠들어대면서 더욱 발광적인 “토벌”을 벌리였던 것이다. 이에 1로군의 중임을 한어깨에 떠메게 된 위증민은 1940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다시 화전현 두도류하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주요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위증민, 전광, 서철, 한인화, 박덕범, 리명산, 진수명(사령부비서), 김광학(제1방면군 정치부 주임), 김백산(경위려 제3퇀 퇀장), 황해봉(경위려 제1퇀 정위), 김재범 등이 회의에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지방당조직이 엄중히 파괴되고 지방군중사업이 박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부대내의 우수한 간부를 지방에 파견함으로써 각 계층가운데서 군중을 발동하고 반일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으며 련락원을 쏘련에 파견하여 중앙(국제당주재 중공대표)과 련계를 맺기로 하였다. 전광이 지방당사업을 전면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김재범 등 5명으로 구성된 연변지방사업위원회를 구성, 동남지구에 내려가 지방사업을 개척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장백산지구에서 장기적인 “토벌”을 받아 엄중한 손실을 본 정황에서 제1로군 주력부대를 장도선철도이북에로 진군시켜 목릉, 오상, 녕안, 왕청 등지에서 소부대의 분산유격활동을 하도록 결정했다. 그 외에 1로군 지도부를 새롭게 구성했다. 중공동남만성위 서기 위증민이 1로군의 총지휘르 맡았다. 전광이 동남만성위원회 겸 제1로군 지방사업부장, 군수처장을, 한인회가 성위위원 겸 제1로군 군부참모, 경위려 정위를, 서철이 성위 위원 겸 군의처 처장을, 김재범이 성위 후보위원으로 각각 임명되였다. 당시의 형세가 얼마나 참혹하고 위급했는가 하는 것은 위증민이 공산국제주재 중공대표단에 보낸 1940년 4월과 1940년 7월에 보낸 보고서만 보고도 알수 있을 것이다. 1940년 4월의 보고서에서 위증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대해속에서 키잡이를 잃은 작은 배같으며 두눈을 잃은 어린 아이 같다.” 7월 1일 보고에서는 “올해 아군의 식량 및 용품은 아주 결핍하다. 촌락과 작은 도시를 습격해서만 식량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모험을 무릅쓰고 촌락을 치지 않으면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습격은 항상 예측할수 없는 부상과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 제2차 두도류하회의정신에 근거하여 1로군은 위증민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즉각 분산활동에 들어갔다. 한인회는 경위려를 이끌고 통화, 동만, 길림, 녕안 방면으로 나갔고 전광은 부대를 이끌고 남만으로 이동했다.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 림강, 안도, 화룡, 연길, 돈화 등지를 누볐다. 제3방면군은 진한장의 지휘하에 교하, 서란, 오상, 녕안 일대에서 움직였다. “토벌대”를 유인 올기강전투후 제2방면군은 1939년 11월, 돈화방면으로 원정하여 12월 17일에 마호부근의 륙과송을 습격하여 그곳을 지키고있던 살림경찰대를 소멸하고 부대를 확충하였다. 륙과송전투에서 7퇀 퇀장 오중흡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12월 24일에는 기신자에 가서 그곳 살림대를 들이쳐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1940년초, 제2방면군은 재차 안도현과 화룡현 접견지대로 진출하였는데 적들은 제2방면군을 소멸하기 위하여 화룡현 경찰“토벌”대대 및 마에다중대를 출동하여 추격하게 했다. 3월 11일, 2방면군은 안도현 대마록구 삼림경찰대를 돌연습격하여 적 10여명을 살사하고 현금 1만여원과 많은 총과 탄약, 식량을 로획하였다. 아군은 140여명 목재소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로획물을 메워가지고 감쪽같이 자리를 떠났다. 부대의 행방을 감추기 위해 일부 전사들에게 군수물자를 지고온 로동자들을 도로 데리고 다시 대마록구쪽으로 가면서 눈우에 발자국을 크게 내도록 하고 주력부대는 지나온 발자국을 지우면서 반대방향으로 떠났다. 화라즈에서 2.5킬로메터가량 떨어져있는 홍기하의 서북방향 대마록구상류인 735고지의 한 협곡에 이른 주력부대는 이번 전투의 승리를 경축하면서 충분하게 휴식하였다. 대마록구삼림경찰대가 습격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분이 상투밑까지 치민 일제는 삼도구에 가미오까를 위수로 하는 전투사령소를 설치하고 마에다중대, 아까후리부대, 야마네중대 등을 동원하여 제2방면군을 추격하였다. 그런데 항일련군 발자국을 따라가던 토벌대는 발자국이 다시 대마루구쪽으로 간것을 보고 허둥지둥 대마록구로 가보았으나 항일련군은 그림자도 없었다. 련며칠 수색했으나 항일련군은 그림자도 찾지 못하게 되자 아까후리부대와 야마네중대는 돌아가고 마에다중대만이 계속 남아서 산속을 참빗질 했다. 한편 2방면군은 적들을 따돌린후 얼마동안 화라즈밀영에서 휴식하다가 3월 25일 다시 대마록구방향으로 진출하였다. 그때 아군의 숙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적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는데 대마록구방향으로 가자면 그 길을 건너야 했다. 아군은 발자국을 알아볼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 길우에 가로놓여있는 진대나무를 타고 길을 건넌후 눈속을 내처 걸었다. 부대가 지나간 다음 두 전사가 뒤에 떨어져서 눈우에 난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이때 농민차림의 두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알고보니 그들은 일본군에게 붙잡혀갔던 당지농민들이였다. 두 농민은 화라즈골짜기에 적“토벌대”가 170여명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정안군 300여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정보를 접한 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추격해오는 적들을 홍기하골짜기에서 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월이라 하지만 장백산고산지대는 아직까지도 적설이 허리를 치고있었다. 이는 적아쌍방의 행동에 다 지장을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행군속도가 아군보다 더 빨랐다. 아군이 앞에서 생눈길을 내면 적들은 그뒤를 졸졸 따라왔기 때문이다 하여 적아의 거리가 5~7.5킬로메터 정도로 좁아졌다. 홍기하상류의 대마록구하는 여러갈래의 골물로 되여있었다. 그 한골에 이르니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을 푹 쉬우지 않고는 싸울수 없다고 생각한 지휘부에서는 목재소로동자들이 사용하다가 버리고간 헌집에 들어가 푹 쉬라고 지시했다. 적들의 코앞에서 시름놓고 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만 전장에서 단련된 전사들은 배낭을 벗자마자 코를 골았다. 다음날, 행군길에 나선 아군은 소마록구쪽으로 릉선을 타고 나가다가 골짜기로 떨어졌다. 그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 골짜기 량옆의 산들이 묘하게 생겼습니다. 상류를 향해서 오른쪽에는 3형제같이 생긴 3개의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매복진지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골짜기왼쪽에도 봉우리가 있었습니다. 그 봉우리기슭에 자그마한 수림이 있었는데 그것도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지물이였습니다. 나는 지휘관모임을 열고 간단한 전투조직을 했습니다. 골짜기오른켠에 있는 3개 봉우리에는 기관총소대와 경위중대를 배치하고 왼켠 봉우리의 변두리에는 7련대와 8련대를 배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되 각 부대들은 일부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고지로 올라오는 발자국을 메우면서 제가끔 지정된 장소에 매복하고 유인대는 발자국을 크게 내면서 계속 골짜기의 첫 고지 북쪽을 차지하고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습니다. 유인대는 골짜기끝에까지 가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갑자기 따스해졌기 때문에 양지쪽에서는 눈이 녹아 길이 질척질척했다. 2방면군 전사들은 눈속에 몸을 숨기고 적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오도 지나고 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때에야 적이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것은 10명 가까이 되는 적척후병이였다. 놈들은 눈우에 난 발자국을 따라 두리벙기리면서 매복권안으로 기여들기 시작했다. 척후병들의 뒤로는 첨병들이 나타났다. 첨병들이 마지막 고지의 앞을 지나갈 때 군도를 찬 장교가 골짜기에 들어섰다. “토벌”대장 마에다였다. “토벌”대의 앞머리가 매복권안에 깊숙이 들어서고있었다. 마에다는 걸음을 멈추고 눈우에 찍힌 발자국과 골짜기의 묘한 지형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나는 그가 골짜기우에 척후대를 파견하거나 부대를 뒤로 뽑을 궁리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0여일이나 산악지대를 돌아치며 허탕만 치는통에 지칠대로 지친 마에다는 랭철하게 사고하고 판단해야 할 그 운명적인 시각에 탕개를 늦추고 방심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에다가 독립수밑에 서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부하장교들이 그 옆에 모여들었습니다. 마에다는 군도를 짚고 서서 그들에게 무슨 지시를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적의 기본대오는 전부 매복권안에 들어섰습니다.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격신호를 내렸습니다... 김일성회고록에서의 묘사이다. 일제 “귀신 곡할 작간”이라 한탄 김일성의 사격명령과 함께 산천을 들었다놓는 총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아군은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기관총이 불을 토했고 수류탄이 류성마냥 적들속으로 날아갔다. 마에다는 당장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뻐뜨려졌다. 불의의 날벼락을 맞은 적들은 갈팡질팡 헤매기만 하다가 순식간에 절반의 병력을 잃고말았다. “토벌대”부대장 이즈미는 급급히 대오를 수숩해가지고 북쪽고지에 있는 아군을 향해 돌격하려 하였다. 이때 맞은켠 산밑 수림속에 매복해있던 아군이 놈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맹렬한 교차사격은 놈들 진영을 대뜸 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놈들은 숨을 곳을 찾느라고 허우적거렸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아군의 돌격나팔소리가 대마록구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아군전사들은 매복지점에서 번개마냥 뛰쳐나와 함성을 지르면서 놈들을 향해 육박해내려갔다.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도 그만 질겁하여 두손을 쳐들고 기여나왔다. 전사들은 항복하는 놈들의 무기를 해제하였다. 전투는 2방면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아군은 마에다중대장이하 100여명을 격사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그리고 기관총 5정, 보총 87자루, 권총 12자루, 무전기 1대, 탄알 수만발을 로획했다. 이날 3킬로메터쯤 거리를 두고 마에다부대의 뒤를 따라오던 정안군 300여명은 왜놈들이 녹아나는 것을 눈을 펀히 뜨고보면서도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눈먼 총질만 해대고있었다. 아군이 로획한 5정의 기관총으로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자 놈들은 어둠을 타 내꼴봐라 도망치고 말았다. 홍기하전투를 두고 일제의 경찰잡지는 “어떻게 된노릇인가. 토벌에 있어서는 천군만마의 오랜 강자인 마에다대장, 이러한 술책에 빠져본적이 없는 토벌의 왕자인 마에다대장이 뜻하지 않게도 이런 궁지에 빠져들어간데 대하여 이러저러한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요컨대 흔히 말하는 귀신의 작간이라 할 수밖에 다른 말을 찾아낼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력사학자 김철수씨는 홍기하전투유적지를 답사하던중 1982년 4월, 홍기하전투가 일어난 곳에 일제시대에 세운 돌비석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폭발해버렸다는 것을 한 림산작업일군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하여 폭파해버렸다는 비석파편을 찾으려고 현장에가 풀밭을 샅샅이 뒤져 끝내 비석쪼각 3개를 발견했다. 그것을 맞추어놓으니 한 쪼각이 비록 모자라기는 했지만 새겨진 글은 모두 있었다. 거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前田中隊激戰之地)”라고 새겨져있었다. 이전에는 홍기하전투적지를 찾으려면 도보로 갔지만 지금은 차가 통할수 있는 림산도로가 닦아져있다. 또 지난 한시기에는 “마에다중대격전지지”비석을 세웠던 자리에 널판자로 “홍기하전적지”라고 쓰여진 나무패말이 스산하게 세워졌지만 지금은 “홍기하전투유적지”라고 번 듯이 새겨진 대리석비석이 보기 좋게 세워졌다. 비석뒤면에는 이런 글이 조한문자로 새겨져있다. 1940년 3월 25일, 김일성장군은 이곳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유인매복전으로 일위“마에다경찰토벌대”를 소멸하였다. 화룡현인민정부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세움 홍기하전투에서 승전고를 올린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안도현의 처창즈, 돈화현의 소하발령과 훈춘현경내에 진출하여 계속 적들의 “포위토벌”을 격파함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항일련군의 위력을 과시했다. (계속)  
64    제64장 대사하전투와 한총령전투 댓글:  조회:1951  추천:0  2014-02-19
대사하전적지기념비. “워성타원” 전술로 적을 꾀여들인후 악질적인 미야모또 “토벌대"를 섬멸 제3방면군의 설립 1939년 3월 11일, 류하부근의 밀영에서 한달나마 정치학습과 군사훈련을 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경위려와 소년철혈퇀, 2방면군 일부 및 제2군 제4사는 총사령원 양정우와 중공동남만특위서기이며 부총사령원 위증민의 인솔하에 화전현 북쪽에 있는 목기하림장을 들이친후 돈화, 화전, 안도, 무송 등 4개 현의 접경지대에 있는 중요한 교통요충지 따푸차이허로 진군해갔다. 일제는 항일련군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곳에다 야전군무기창고를 세우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있었다. 이 무기창고를 위만군 1개 영과 위만경찰 20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 적들은 부락주위에는 토성물 쌓고 그밖에다 또 높은 나무울바자를 세웠다. 어찌나 경계가 삼엄한지 부락사람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따푸차이허에 항일련군과 련계를 맺고있는 장영춘이라고 하는 무장자위단원이 있었다. 아군은 장영춘을 통해 따푸차이허에 주둔하고 있는 주력부대가 외지로 “토벌”을 나가고 성안에는 지금 적들이 얼마 없다는것을 알아내냈다. 이에 양정우와 위증민은 따푸차이허를 들이칠 것을 결정했다. 4월 7일 저녁 7시 30분, 제2군 4사는 산발을 타고 내려와 은밀히 서대문쪽에 접근하여 은페했다. 부대가 매복한지 얼마 안되여 서대문밖에 있던 위만군 몇이 말을 끌고 성안으로 들어오려고 성문밖에서 대문을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대문을 열려던 적 보초가 어망결에 항일련군이 성문밖에 매복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산군이 왔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뜻밖의 사태에 직면한 아군은 잠시라도 지체할수 없었다.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아군의 총탄이 서대문을 향해 비발치듯 날아갔다. 아군의 드센 공격에 배겨내지 못한 적들은 서대문을 버리고 시가로 물러났다. 서대문으로 돌입해 들어간 아군은 서쪽구역을 완전히 통제했다. 이때 경위려와 소년철혈퇀도 각각 동대문과 남대문을 들부시고 시가로 맹돌입해 들어갔다. 지방경찰대실, 경찰서, 일본군변영은 삽시에 아군의 손에 들어왔다. 전투에서 아군은 위만경찰부대 200여명과 일본경위 후지다 이찌후도와 만석척식출장소 주임 가이데 이이찌 등 일본인 20여명을 섬멸하였다. 이어 진한장이 인솔하는 2군 5사와 5군 2사 5퇀은 련합하여 연길현을 거쳐 돈화 삼도구로 진군하다가 석두하자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맞다들어 격전을 벌려 일만군 32명을 격살하였다. 4월말, 부대는 안도현 청구자 “집단부락”을 들이쳐 적 6명을 격살하고 보총 30여자루와 탄알 1500여발을 로획했다. 6월 5일에는 항일련군 2군 4사 1퇀이 안도현 성북, 한총구를 습격, 일본교도관을 비롯한 위만군 2개 련 100여명을 전부 포로하고 경기관총, 보총, 권총 등을 로회했다. 그날 2군 5사는 오상현 랍림하삼림경찰대를 야습하여 100여명 로동자를 해방시키고 량식 등을 로획했다. 제1로군 총사령부를 찾고있던 2방면군 한부대는 안도현 미혼진에서 5사 진한장부대와 만난후 한양구에 있는 위증민의 주둔지로 왔다. 이렇게 모인 부대가 바로 천보산전투를 벌렸던 것이다. 7월말, 제2군 4사, 5사는 안도현 한양구에서 위증민의 사회하에 부대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제13퇀, 제14퇀, 제15퇀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이였다. 3방면군이 설립된후 위증민과 진한장은 부대를 이끌고 안도, 돈화지구에서 련속하여 일만군을 격파했다. 그중에서도 제3방면군, 제2방면군 9퇀, 제5군 도정비부대 등 500여명 병력이 련합하여 대사하를 중심으로 하여 벌린 전투는 동만의 유격전쟁에서 전례없는 대작전이였으며 제3방면군의 전투기세를 떨친 싸움이였다. 대사하에서의 격전 대사하는 한요구동북쪽 안도현 소재지의 서북쪽의 위치해있는 규모가 큰 집단부락이였다. 부락은 토성으로 둘러쌓여있고 부락안에 있는 경찰서울안에는 높은 포대가 있었는데 적들은 거기에다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방을 감시하고있었다. 부락에는 경찰 30여명과 무장자위단 수십명밖에 없었지만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안도(송강)와 명월구의 적들이 인차 도착할수 있어 서뿔리 공격하기엔 쉽잖은 곳이였다. 이에 아군은 “위성타원(圍城打援)전술”, 다시말하면 성을 포위하고 그 속에 든 적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원군을 치는 전술을 쓰기로 했다. 즉 안도와 명월구의 적을 대사하에 끌어들여 소멸한다는것이였다. 8월 23일, 위증민은 13퇀, 15퇀과 2방면군 9퇀의 일부 부대 300여명 병력을 인솔하여 사가점 큰길옆 서쪽 도랑홈에 약 2.5킬로메터의 폭을 두고 매복해있다가 명월구방면으로 오는 적의 증원병을 치기로 하고 진한장이 인솔하는 14퇀과 경위련 200여명을 대사하집단부락을 친 다음 대사하 남쪽에 매복하여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오는 증원병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대사하를 공격할 임무를 맡은 부대는 대사하부락 토성밖에 매복해있었다. 아군의 계획에 의하면 0시에 보초가 교대하는 틈을 타 성안에 있는 지하일군 리홍산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공격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날이 훤히 밝고있는데도 리홍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리홍산은 뜻밖에도 전날밤에 양초구에 일이 있어 불리워갔던 것이다. 아군은 하는수없이 날이 밝아 사람들이 물길러 나오는 기회에 공격하기로 했다. 성안에 우물이 없기에 날이 밝으면 적들은 보초를 철수하고 물 길러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드디어 날이 환히 밝았다. 아군은 대문이 열리고 주민들이 물 길러 나오기를 도정신해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일이 또 벌어지고말았다. 그번 전투에 직접 참가한적 있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항일투쟁회상기 《준엄한 시련속에서》에서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난데없는 일본경찰 한놈이 대문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가 채소밭에 매복해있는 것을 보고 픽 돌아서더니 부락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섯” 토성에 붙어섰던 한 전사가 소리쳤다. 그때 나도 토성에 붙어서있었다. 뛰던 놈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또 경찰서쪽으로 곧추 달려가며 “공산당이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성문북쪽에 숨었던 전사가 그놈을 당장에서 쏴죽였다. 이 바람에 마을안에선 호각소리가 “호르륵, 호르륵”하며 련이어 나더니 집안에 있던 놈들이 북달질하며 포대안에 들어가 총질하였다. 진한장은 전투명령을 내리고 각 련의 주공방향을 제시하였다. 토성밖에 매복해있던 전사들은 마을안으로 물밑듯 들어가는데 경찰서뜨락의 포대에서 기관총이 미친 듯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탄알은 눈앞에 와 우박처럼 떨어져다. 우리는 담벽에 다가붙어 경찰서쪽으로 돌진해들어가다가 큰길을 건너지 못하고 사격선을 피하여 부근의 민가에 흩어져들어갔다. 이곳 집들은 기차굴처럼 길게 지은 줄집인데 아래웃집사이에는 간벽이 있었다. 적든 계속 총질하였다. 우리는 민가의 벽을 뚫고 나가 포대에 대고 사격하였다. 그런데 탄알은 포대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왔다. 적아의 교전은 치렬하였다. 적진을 노리고 있던 김수학패장이 한손에 수류탄을 쥐고 배밀이해 나갔다. 한 전사가 또 김패장의 뒤를 어어갔는데 그의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포대높이는 5메터가량 되었다. 두 용사는 포대벽에 가붙어서 수류탄을 올리뿌렸다. 헌데 수류탄은 화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적들은 고함을 지르며 총질했다. 두 용사는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쥐여 다시 올리뿌리려다가 그만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의 기관총수가 요란한 폭파소리에 놀라 대가리를 움츠리고 앉았다가 다시 쳐드는 순간 이여다. 1선에 매복해있던 동무들이 포대화구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누구의 탄알이 명중했는지 적의 기관총수가 맞아서 화력이 멎었다. 이 순간 우리는 경찰서의 토담을 넘어들어가 포대안에 수류탄을 밀어넣고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뒤미처 대부대가 들어와 경찰과 자위단놈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사하를 점령하였다... 전반전투는 원 계획보다 훨씬 늦어졌다.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은 부지휘 후국충에게 14퇀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송강방면으로 달려가 적의 증원부대를 저격할 것을 명령했다. 저격부대는 전속력으로 소사하남쪽 산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아군이 소사하 고개길에 거의 닿고있을 때 대사하로부터 급보를 받은 안도현성의 일본군은 9대의 자동차에 분승하여 아군이 매복하려던 고개를 넘어오고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적들은 유리한 지형에서 아군은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여였다. 적탄이 비발치듯 날아왔으나 전사들은 노도와 같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언덕진 고개우로 돌진해 나가다가 후국충부지휘와 14퇀 허자장, 정위 양형우(조선족)가 희생되였다. 지휘관을 잃은 전사들은 눈에 달이 올라 죽음을 겁내지 않고 일격에 돌진해들어갔다. 아군은 드디여 소사하언덕을 점령하였으며 왜놈지휘관놈들과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 뱀을 굴에서 끌어내다 대사하를 치면 명월구에서 인차 오리라고 예견했던 적증원부대는 이날 낮에 오지 않아 류수촌 남구에 매복한 부대들은 하루종일 허탕을 치고말았다. 해가 진 다음 각 부대들은 류수촌집단부락을 중심으로 린근의 집단부락들을 분공하여 진공한후 하루밤을 류숙키로 하였다. 안길, 전동규부대들이 류수촌부락을 들이칠 때 적들의 저항은 드셌다. 50여명 경찰과 자위단은 맞불질 하면서 완강히 버티였으나 불과 5분도 채 안되여 아군은 적들을 무찌르고 부락을 점령했다. 최현부대는 동량툰을 점령했다. 최현퇀장은 적의 경비전화를 리용하여 뱀을 굴에서 끌어내기로 했다. 하여 안도현소재지, 명월구 등 각처의 경찰서와 주재소들에 전화를 쳐 “우리 항일련군은 이미 대사하와 대장강, 동양툰을 점령하였다. 용기가 있으면 싸우러 오라!”고 위협조로 통고했다. 자정이 되자 과연 증원병을 태운 적 트럭 6대가 동양툰에 들어섰다. 보초선에 있던 전사들이 적들을 발견하고 반격했다. 녀기관총사수 허성숙은 한 대원에게 빨리 지휘부에 가 알리라고 말하고 혼자서 기관총을 휘둘렀다. 이 전투에서 부대의 녀장군으로 불리우면서 사랑받던 허성숙은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적증원부대는 아군이 이미 종적을 감추고 없는지라 부랴부랴 송강쪽으로 내뺐다. 이튿날 아군은 또다시 전날에 포치하였던 매복지점에와 매복하였다. 송강에서 명월구로 가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에 되돌아가는 적들은 반드시 이 길로 지날것이였다.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본군과 조선인 “특설부대”, 그리고 일본군가족 수명을 태운 대형 군용트럭 7대가 안도현성족으로부터 아군의 포치선으로 질주해왔다. 그중 한 대의 트럭에 앉은 적들은 대사하전투에서 요행 살아남은 적들이였다. 트럭은 아군 매복선남쪽 하단을 거쳐 2.5킬로메터쯤 질주하여 오다가 선두의 트럭이 정지하자 그 뒤로부터 따라오던 트럭이 전부 한곳에 집결되였다. 아군의 기관총, 보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어떤 놈은 자동차우에서 죽고 어떤 놈은 뛰여내리다 맞아죽었다. 불과 몇십분 사이에 적주력은 소멸되였으며 살아남은 적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남은 적도 도로서쪽 홈에 매복한 아군의 집중사격에 의하여 독안에 든 쥐신세가 되었다. 뒤이어 아군의 돌격신호가 울리였다. 전투가 끝난 다음 너저분하게 널린 적군의 시체를 세여보니 100여구나 되었다. 미야모도는 운전실에서 나오지도 못한채 죽었다. 이틀동안의 전투에서 제3방면군은 적 25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7정의 경기관총과 700여자루의 보총, 권총 및 여러문의 적탄통과 대량의 군수물품들을 로획하였다. 한총령매복전 대사하전투후 제3방면군은 부대의 식량과 기타 군수품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총령에서 적들을 매복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보화기를 통하여 9월 25일에 일본군 마쯔시마부대가 돈화로부터 대포시하로 “추기토벌”을 나온다는 정보를 도청한후 제3방면군의 주력부와 제5군 제2사 정치부 주임인 도정비부대 도합 500여명은 9월 24일(음력 8월 12일) 한총령 남쪽비탈의 고해루에서 매복전을 펼치기로 작전,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과 참모장 박득범의 령솔하에 목적지를 향해 강행군했다. 이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였는데 간혹 안개까지 끼여 동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적들은 도로 량켠 200메터안의 초목들을 몽땅 베여버리고 번번한 개활지대를 만들어버렸는데 그 거리가 약 50킬로메터나 되었다. 뿐만아니라 한총령과 그 길가의 고지마다에는 높은 포대까지 쌓아놓고 주둔하면서 밤낮으로 아군의 행동을 경계하고있었다. 부대는 가을비와 안개를 리용하여 한총령의 요차즈에서 북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한총령남쪽기슭의 좁고도 긴산골짜기인 고해루부근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꽉 우거져 매복전을 펼치기에 제격인곳이였다. 돈화에서 따푸차이허로 통하는 도로는 바로 이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뻗어있었다. 진한장은 한 개 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작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25일 점심때쯤 드디여 놈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군소장 마쯔시마가 령솔하는 “토벌대”였다. 놈들은 12대의 트럭에 앉아오고있었다. 그속에는 50여면 위만경찰들을 실은 2대의 트럭도 있었다. 놈들의 자동차가 아군의 매복권내에 완전히 들어섰다. “땅!” 사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가 산곡간에 울려퍼졌다. 전사들은 놈들을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전사들이 던진 수류탄은 호선을 그으면서 날아가 놈들의 머리우에서 련속 터졌다. 적자동차들은 하나하나 불길속에 휩싸이고말았다. 그러나 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력량을 조직하여 대응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화력을 몇 대의 자동차에만 집중한후 마쯔시마 소장을 쏴죽였다. 마쯔시마소장은 아직 자동차에서 내리지도 못한채 총알받이로 되고말았다. 놈들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살아남은 놈들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놈들의 트럭도 머리를 돌려 오던길로 내뺐다.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아군은 혼란에 바진 적진으로 맹호마냥 돌진해들어갔다. 맹렬한 격전을 통해 아군은 적의 주력을 기본상 소멸해버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꼬리빳빳이 도망쳤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마쯔시마소장을 비롯한 일본군 100여명을 격사하고 자동차 1대를 불살라버렸으며 기관총 4점, 보총 100여자루, 탄알 70여상자를 로획했다.(계속)  
63    제63장 올기강전투와 천보산전투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4-02-19
유서깊은 력사의 강 올기강. 제2방면군 두만강 넘나들며 일본군 짓부시고 연변인민 고향에 돌아온 자제병 열렬히 환영 올기강전투 1939년 4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은 장백현 북대정자회의후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격, 대홍단전투 등을 벌리고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넜다.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오중흡의 제7퇀을 올기강서쪽지대에 배치하고 자신은 제8퇀과 경위련을 이끌고 두만강줄기를 따라 동쪽의 옥동골, 휘풍동일대로 진격해 들어갔다. 부대가 휘풍동에 도착하자 집단부락 경찰대는 접전도 하지 않고 꼬리를 빼버려 아군은 손쉽게 집단부락을 점령했다. 아군은 화룡현 광평 등지를 휩쓸면서 10여개의 집단부락을 련이어 습격해 일만군경을 거듭 격파, 수많은 적을 소멸했다. 아군은 간 곳마다에서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고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일군중들은 자신들의 자제병이 고향에 온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각처에서 얻어맞은 일본군은 대부분를 움직여 검질기게 항일련군의 뒤를 쫓았다. 아군은 추격해오는 적을 페문툰부근에서 일망타진하기로 작전을 짠후 두만강상류의 동경평, 대동, 원봉 등지에서 활동하고있는 제7퇀마저 불러들여 백리평북쪽의 동수골막바지에 집결시켜놓았다. 그때 백리평에는 가장 악질적인 토벌대 “정안군” 1개 련이 주둔하고있었다. 적들은 항일련군부대가 휘풍동에서 군중정치공작을 하다가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정보를 입수한후 매일 페문툰어구의 사금구다리에 가 기관총을 걸어놓고 40명씩 두 교대로 나뉘여 다리목을 지키고있었다. 뿐만아니라 놈들은 화룡현일대의 도로와 마을마다에 삼엄한 경계망을 늘여놓고있었다. 그때 화북전선에서 특출한 군공을 세워 천황의 표창까지 받았다는 다이노라는 자가 “토벌대장”을 맡고있었다. 이자는 가슴팍에 아수라를 입묵해가지고 다니면서 “아수라”로 자칭하기도 하는 악착하기 그지없는자였다. 6월 10일 새벽 3시경, 동수골을 떠난 아군 300여명은 백일평 올기강기슭에 이르러 적들을 유인하고저 금점굴주위의 돌들을 짓밟아 놓은 다음 부근에 매복하였다. 올기강기슭 큰길을 사이두고 서편언덕 북쪽과 약 500메터 거리를 상거한 지점에 8퇀 정위 박덕산(김일)이 책임진 기관총소대와 8퇀을 일렬횡대로 매복시키고 맞은편 밀림지대에 오중흡의 7퇀과 경위련을 매복시켰다. 금전굴은 올기강으로부터 약 200메터 떨어진 길가에 있었다. 올기강은 청산리골짜기에 있는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서쪽 영액령에서 동남으로 흘러나오는 강이다. 해란강은 베개봉서북쪽의 로리커호가 그 발원지대인데 올기강발원지의 북쪽 약 3킬로메터의 산너머에 있다. 올기강은 베개봉서쪽에서 흘러나와 약 25킬로메터 흘러 소마록하와 합수된후 홍기하로 이름을 바뀌여진다 올기강량쪽기슭은 갈숲으로 우거져있고 자동차길이 그 한옆으로 뻗어있었다. 길 오른쪽에는 산들이 남북으로 가로놓여있었다. 매복전을 펼치기에는 제격인 지형이였다. 게다가 전사들이 모두 풀로 위장하고있었기에 가까이에서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안개가 서서히 거치기 시작하는 늦은 아침, 만단의 준비가 다 되자 2명의 전사가 백일평쪽으로 내려가다가 총을 쏘았다. 드디여 백일평쪽에서 일본군 “토벌대장” 다이노가 거느린 정안군 한 개 련이 여러 정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기세사납게 나타났다. 때는 오전 8시경이였다. 올기강을 건넌 놈들은 길어구에서 머뭇거리며 주위지형과 동정을 살피더니 큰길을 따라 올라왔다. 그때를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7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적의 대오가 우리의 매복권에 모조리 들어섰을 때 긴 칼을 찬 일본장교가 웬일인지 물도랑옆에 와서 걸음을 멈추더니 수상한 흔적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마 우리 동무들중 누구인가 거기에 발자국을 냈던 모양입니다. 싸움을 끝내고 전장을 수색할 때 전사한 일본장교들의 가슴을 헤쳐보았는데 물도랑옆에서 우리의 흔적을 맨처음으로 발견한 긴 칼을 찬 그 장교가 바로 “아수라”로 자처하는 “토벌대”대장이였습니다.  “아수라”가 물도랑옆에서 일어서는 순간에 나는 사격명령을 내리였습니다. 우리는 잠간사이에 200여명의 적을 살상포로하였습니다. “아수라”는 칼집에서 군도를 절반도 뽑지 못한채 물도랑옆에 쓰러졌습니다...  올기강기슭은 순식간에 일본군시체로 너저분해졌다. 첫방에 얻어맞은 다이노대장은 살겠다고 금전굴로 기여들어갔다가 그곳에 매복해있던 아군 전사들에 의해 처단되였다. 이어 돌격나팔소리가 울렸다. 항일련군 전사들은 기세 드높게 적진으로 육박해들어갔다. 몇놈이 내뛰다가 우리 전사들에게 붙잡혔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도관 이하 50여명을 소멸하고 대부분을 포로했다. 전리품은 기관총 4정, 보총 100여자루였으며 아군은 1명의 손실도 보지 않았다. 올기강전투의 승리는 연변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항일군중들은 전투의 승리를 열렬히 환호했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련군에 참가하려고 서둘러 부대를 찾아왔다.  천보산전투  6월 29일, 제2방면군 제9퇀은 제2군 4사, 5사의 부분적 부대와 함께 천보산을 습격할 목적으로 300여명 병력을 집결시켰다. 박덕범(4사 참모장), 최현(4사 1퇀 퇀장), 마덕전(제2방면군 9퇀 퇀장)은 부대를 이끌고 30일 저녁 삼면으로 천보산을 포위했다. “9.18”사변후 천보산광산은 일본침략자들의 연변의 지하자원을 략탈하는 주요한 기지였다. 이리하여 놈들은 이곳에다 일본수비대와 위만군, 경찰부대 및 위만무장자위단을 주둔시켜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부대를 항일련군“토벌”을 위해 우심산으로 출동시키다나니 광산에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니 네귀에 탐조등이 환히 켜져있어 어둠속에서 광산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정문으로 밤대거리 로동자들이 나가고있었다. 부대는 두패로 갈라져 한패는 천보산부락을 들이치고 다른 한패는 광산을 들이치기로 했다. 4사 1퇀 전사들은 출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광산에 이르러 보초병을 해제낀후 순식간에 광산구역으로 돌입해들어갔다. 눈깜빡할새에 광산에 있는 경찰들은 몽땅 생포하고 일본군수비대와 맞불질했다. 놈들의 저항을 완강했다. 전반 전투계획에 영행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소수의 전사들을 남겨 놈들과 계속하여 맞불질하게 하고 대부분 전사들은 광산의 설비들을 파괴하고 광산사무소를 습격하게 했다. 광산사무소를 점령한 전사들은 도끼로 금고자물쇠를 마스고 대량의 위만화페를 찾아내 마대에 담아 메고 나온 후 사무실에 불을 질렀다. 다른 한패의 전사들은 퇴근하는 로동자들을 따라 천보산마을로 내려와 일본자본가들이 경영하는 상점, 량식점, 약방 등을 습격하여 대량의 량식, 천, 약품, 신 등을 로획했다. 경찰서를 들이친 전사들은 류치장문을 짓부시고 갇혀있던 로동자들을 구해냈다. 아군은 전투에서 광산보위단 단장 요시다를 포함한 15명의 일본놈들을 소멸하고 20여 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 후 아군은 광산에 불을 지르고 로동자들의 협조로 로획품을 운반하는데 그중 50여 명이 자진하여 항일련군에 가입했다. 임동자에 도착한후 생포한 놈들중 악질분자 다섯놈을 그 자리에서 처단해버리고 일부분 전리품을 당지 백성들과 짐을 지고온 로동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천보산전투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는바 적의 통계에 의하면 이번 전투에서 그들이 입은 손실은 80여만원이상에 달하였다. 그후 천보산광산은 또 1년동안이나 생산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튿날 임동자수림속에서 행군할 차비를 하고있는데 보초선에서 련락병이 달려와 적정을 알렸다. 천보산골짜기를 향해 로투구쪽에서 200여명의 일본군이 몰려온다는것이였다. 쳐들어오는 적들은 관동군정예부대인데 최신무기로 장비하고있었다. 아군은 휴식을 포기하고 인차 철수했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적들은 화룡현 십리평으로 철퇴하는 아군을 계속하여 추격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적들은 산골짜기와 강가에 숙영지를 정하고 여기저기 우등불을 피웠다. 아군은 먼저 소수의 대원들로 밤에 적들의 숙영지를 습격한 다음 진펄로 끌어내여 골탕을 먹이기로 작전했다. 어두운 밤, 10여명 전사들이 여러 패의 습격조로 나뉘여 적진에 돌입해들어가 보초병을 제껴치우고 천막에 접근하여 기관총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에서 적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적들은 대오를 수습한후 산에 올라붙어 총질했으나 습격대원들은 이미 적의 사격권내에서 벗어나 귀로에 오르고있었다. 다음날 아침 해뜰무렵이였다. 적들은 다시 산정으로 돌격해왔다. 그러나 이 산정에는 적을 유인할 소분대만 있을뿐 대부대는 수림을 지나 진펄을 건너고 없었다. 소분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기동령활하게 진펄쪽으로 철퇴했다. 앞에 죽음의 진펄이 펼쳐져있는줄을 감감 모르고있는 적들은 “도쯔께끼!”를 부르면서 미친 듯이 추격해왔다. 그러나 진펄에 들어선 왜놈들은 덫에 갖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강이까지 쑥쑥 빠지는 진펄에서 허우적거릴뿐 용빼는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진펄 저쪽에서 6정의 기관총이 복수의 불을 내뿜었다. 진펄에 갖힌 왜놈들은 어쩌지 못하고 총알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한놈까지 까눕힌후 아군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면서 유유히 삼림속으로 사라졌다. (계속)  
62    제62장 고난의 행군 댓글:  조회:1980  추천:0  2014-02-19
  1939년 여름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조선인장병들. 추위 기아 병마 일만군의 포위공격 이겨내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개척 위해 고난의 행군 강행 일제의 “3성련합토벌” 1937년 7월부터 시작한 “3년숙정계획”에 근거하여 일제는 5만여명의 병력을 집중하여 3강지구에 대한 1년반 동안의 “대토벌”을 감행한후 “치안숙정”의 중점을 동남만지구에 돌리였다. 하여 일제는 1939년 10월부터 1941년 3월까지의 1년반 동안의 “3성련합토벌”을 감행했다. 이번 “대토벌”의 주공목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이며 주요한 토벌구역은 간도성과 통화성 전체, 길림성 동부인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지와 목단강성의 녕안현이였다. 이번 “대토벌”에 참가한 일만군경은 도합 6만명, 그중 일본군으로는 관동군독립수비대 제5, 제9, 제21, 제7, 제8, 제4 등 6개 대대(후에 제19, 제20대대를 증가)였다. 그외에 각 대대에 20개의 무선전분대와 헌병을 배비, 총 6400여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위만군은 제2군관구보병 제2려, 기병 제2려, 제2교도대, 제8군관구 제1, 제2, 제3혼성려, 제8교도대, 제6군관구 1개 려, 제7군관구 1개려, 제1군관구 보병 제5퇀 및 통신부대와 자동차대 등 도합 2만 5000명이였다. “토벌”에 참가한 경찰대로는 통화성경찰대(10개 대대), 간도성경찰대(5개“토벌”대), 길림성경찰대(14개“토벌”대), 목단강성경찰대, 간도특설부대, 통화성의 9개 현, 간도성의 5개 현, 길림성의 반석, 화전, 돈화, 교하, 서란 등 현과 목단강성의 녕안현 경찰대, 통화, 간도, 길림 3성 및 소속 각 현의 경찰조직과 특별순찰반, 동변도지구의 각 위만삼림경찰대, 위만신경경찰학교 학병대, 위만영구해상 경찰대의 비행기 2대, 및 금주, 봉천, 빈강 등 성의 경찰증원대 도합 3만여명이였다. 일제는 “3성련합대토벌”을 대체상 3개 단계로 진행하기로 계획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 4월까지 제1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통화성 각현과 길림성 화전현에 두고 제1로군 총사령부와 경위려 및 제1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1940년 4월부터 9월까지 제2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안도, 화룡, 왕청, 목단강성의 녕안, 동녕, 길림성의 서란, 빈강성의 오상 등지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1940년 9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제3단계인데 “토벌”의 중점을 간도성 특히는 목단강, 간도, 길림3성 변경지구와 왕청, 훈춘, 동녕, 앵목 4개 현에 두고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 경위려, 제2방면군과 제3방면군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 일제는 미친듯한 군사 “토벌”과 함께 “토벌”구역에서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항일련군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 항일부대에 량식한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통화, 간도, 길림 3성에 예비도로 20여갈래를 새롭게 건설했고 100킬로메터의 전화선을 새롭게 가설했다. “토벌”기간에 일제는 도로와 철도 량켠에 농작물을 심지 못하게 했고 산비탈에 밭을 일구지 못하게 했다. 철도와 도로 량켠에 50메터내의 나무를 모조리 베여버리게 하고 철도와 도로연선에 경위대를 배치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제는 항일련군밀영 2085개를 훼멸해버렸다. 일제는 군사 “토벌”과 함께 “사상토벌”, “문화토벌”도 감행했는데 “토벌”지구에 대량의 “선무”인원을 파견하여 “선무활동”을 하게 했다. 동시에 “토벌”지구에 반공삐리와 색정적인 사진, 음란한 서적과 간행물을 살포하여 항일련군의 사상을 부식시키고 정신을 유혹시키려 했다. 항일련군내부를 분화시킬 목적으로 일제는 항일련군 고급장령을 잡거나 죽이면 상금을 준다고 결정했다. 군급간부의 경우 1만원, 사급간부의 경우 5000원, 퇀장, 참모장의 경우 2000원, 기타 장령은 1000원으로 상금을 정했다. 일제의 발광적인 “토벌”은 항일련군에 참중한 타격을 주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말까지 일만군에게 도살된 항일군민은 1170여명이 되었고 포로된 사람은 900여명이 되었다. 일제의 “다니전술 ” 1938년 11월 25일, 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는 몽강의 남패자에서 제2군 제6사와 회사한후 2군 6사를 정식으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으로 개편하였다. 김일성이 지휘로 임명되고 려백기가 정위로 림수산이 참모장으로 필수문이 부관으로 림춘추가 의관으로 임명되였다. 직속경위련 련장에 오백룡, 제7퇀 퇀장에 오중흡, 정위에 주재일, 제8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박덕산,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영이 임명되였다. 병력은 총 500여명이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수많은 지하조직이 파과되였기에 1938년 장백지구의 반일혁명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에 제2방면군은 김일성의 지휘하에 장백산구에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기 위하여 몽강현 남패자를 떠나 장백현 북대정자로 진격하는 행군을 시작했다. 이번 행군은 적들의 추격과 함께 엄혹한 자연, 극심한 식량난, 무서운 병마가 한데 뒤엉킨 시련과 난관으로 일관된 고난의 행군이였다. 그해따라 추석전에 첫 서리가 내렸고 추석후엔 인차 큰 눈이 퍼부어 초겨울부터 박달나무 얼어터지는 강추위가 들이닥쳤다. 부대는 출발하자부터 적들의 추격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병마와 식량난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 도보로 대엿새면 가닿을수 있는 거리였지만 아군은 무려 110여일의 엄창난 품을 들여서야 행군을 완성할수 있었으니 그 간고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말치 않아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행군은 적들의 끊임없는 추격과 포위속에서 진행되였는데 적들은 통신수단으로 비행기까지 날리면서 싸움에 열을 올렸다. 적들은 처음부터 검질기게 달라붙어 상대를 못살게 구는 “다니전술”(진드기를 일어로 “다니”라고함)을 썼다. “다니전술”은 “토벌대”를 요소마다에 미리 배치해놓았다가 항일련군이 나타나면 치고 또 일단 발견한 항일련군에 대해서는 꼬리를 물고 끝까지 따라가며 소멸한다는 전술이였다. 그 전술은 항일련군으로 하여금 쉬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면서 줄창 쫓겨다니며 얻어맞다가 기진맥진해서 녹아가게 하는 악착한 전술이기도 했다. 적들은 서로 교대하면서 아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함정속에 빠진 아군은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줄 모르는 적들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무턱대고 추격만 당하면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자멸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갈지자전법”이였다. “갈지자전법”이란 행군로를 갈지자모양으로 잡아나가는것이였는데 굽인돌이마다에서 되돌아아 앉아 지키고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전술이였다. “갈지자전법”은 눈이 몇갈씩 쌓인 산지에서 뒤따라오는 적들을 무찌르는데 가장 적합한 전법이였다. 그해 겨울따라 눈이 어찌도 많이 내렸는지 앞사람이 눈을 다지며 길을 내야만 행군할수 있었다. 아무리 건강한 대원도 50~60메터만 걸으면 맥이 진해 주저앉군 했다. 어떤 곳은 눈이 너무 깊어 몸을 굴려 다져가며 길을 내야 했고 어떤 곳은 눈굴을 파고 지나가야 했다. 적들은 어차피 아군이 낸 갈지자길을 졸졸 따라오는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갈지자전법” 7퇀 퇀장 오중흡은 행군종대의 맨 뒤에서 갈지자모양으로 길이 꺾이는 대목마다 기관총을 휴대한 전투소조를 배치시켰다가 적들이 다가붙으면 사격하게 했다. 적들이 시체를 처리하는 사이에 매복타격조를 이동시켰다가는 적들이 다시 다가오면 또 답새기군 했다. 적들은 아군이 낸 외통길을 따라오기 때문에 매번 얻어맞는 신세가 돼버렸다. 아군은 드디여 주동권을 쥐고 적을 타격할수 잇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군은 림강현 요구집단부락습격전, 마의하부근전투, 왕가점습격전을 비롯한 무수한 전투를 벌리면서 1939년 정초에 장백현 7도구에 이르렀다. 적들은 갈수록 더 많은 “토벌”대를 내몰아왔다. 적기가 아군의 행방을 찾느라고 자주 돌아치기 때문에 우등불초자 맘대로 피울수 없어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끊임없는 행군이 이어지다보니 걸으면서 잠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군의 행방을 탐지한 적기가 지상부대에 련락을 주어 “토벌대”를 행군종대에 벌떼처럼 달려들게 하였다. 앞에도 적이요 뒤에도 적이요 하늘에도 적이였다. 급박한 관두에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은 앞에서 달려드는 적은 기관총소대가 무찌르고 뒤로 달려드는 적은 7퇀이 막고 나머지 대원들은 측명돌파로 포위속에서 빠져나가게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험한 고비는 요행 모면했지만 노상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였다. 이에 큰 병력의 집단행군이 여러모로 불편함을 간파한 부대는 분산행동으로 넘어갈 것을 결정했다. 부대는 세 개의 방향으로 분산하기로 했다. 지휘 김일성이 경위련과 기관총소대를 이끌고 청봉밀영을 거쳐 가재수방향으로 나가고 오중흡의 7퇀이 장백현 상강구일대로, 8퇀과 기타부대가 무송현 동강일대에로 나가기로 했다. 부대가 분산되자 집중타격의 성화는 덜 받게 되었으나 식량난만은 어쩔수 없었다. 김일성은 부대를 이끌고 굶으면서 청봉방향으로 행군했다. 먹을것이 없어 전부대가 아사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봉부근에서 난데없는 가을하지 않은채로 남아있는 조밭을 발견하게 되었다. 눈속에 파묻혀있는 조이삭을 보고 대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형을 살펴보니 봄에 부대가 신태자밀영으로 가면서 씨붙임을 한 조밭이였다. 지난봄, 부대전사들이 여기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을 보고 봄씨붙임을 하느라고 밭에서 일하던 농민들이 허둥지둥 어디론지 달아나버렸다. 아마 항일련군을 일본군“토벌”로 생각하고 도망친 것 같았다. 밭임자가 가을에 와서 곡식을 거두어가게 하자고 조를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 밭의 조가 가을을 하지 않은채로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대원들은 눈무지속에서 한이삭두이삭 힘들게 따낸 조이삭을 찧어 죽을 쒀먹었다. 그러나 그 좁쌀마저 인차 거덜이 났다. 이제 식량을 구할수 있는 방도는 청봉밀영에 가서 감자를 한배낭씩 얻어가지고 가는 것뿐이였다. 그러나 적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감자밭에 이르러보니 감자는 이미 다 파가고 없었다. “토벌대”는 어느새 뒤에까지 따라와서 기관총을 마구 쏘아댔다. 부대는 골짜기를 버리고 벌판쪽으로 내려간후 날이 저문 틈을 타서 강행군으로 멀리 빠져나갔다. 강행군 도중 삼림부대병영을 만나 돌격해들어가보니 놈들은 이미 다 도망쳐버리고 금방까지 음식을 먹던 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대원들은 식탁우에 푸짐히 차례져있는 음식을 배낭에 챙겨넣은후 뒤쫓아오는 적들을 따돌리고 부후물등판으로 피해버렸으나 또다시 추격에 들고 말았다. 적들은 건빵 한 개 먹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달라붙었다. 대낮에 버젓이 들판 지나 지휘 김일성은 부대로 하여금 추격해오는 적을 뒤꼬리에 단채로 한바퀴 돌자면 하루걸음이 잘되는 부후물등판두리를 빙빙 돌게 하였다. 한 두어비퀴 돌았을 때 새로운 “토벌대”가 나타나 아군과 뒤따르던 본래의 짝패들 짬에 끼여들었다. 서로 련계가 없는 두 무리의 적이 겹쳐서 추격하는 괴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를 타 부대원들은 흰천으로 몸을 감싸면서 감쪽같이 옆으로 빠진후 숲속에 숨어버렸다. 맨 뒤에서 추격해오던 적들은 앞의 대오가 항일련군인줄 알고 사격을 가했다. 이에 적들은 저들끼지 숱한 주검을 내면서 생사결단하고 맞붙고말았다. 이번엔 적들이 심산에만 주의를 돌리는 틈을 타서 아군은 적들의 눈길이 덜 쏠리는 야산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행군이 간고할수록 도주자가 생겨나는 것이 막심한 문제였다. 도주자들은 인차 적에게 투항한후 항일련군의 종적을 일러바쳐 다시 추격, 혹은 포위속에 빠져들게 했다. 심산을 버리고 가재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은 헌헌한 벌판이였다. 그러나 적들은 포대에서 아군을 빤히 내려다보면서도 건드리지 못했다. 주력이 산에 가 있다보니 부락에는 력량이 얼마 없는데다가 아군의 기세가 하도 당당해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아군은 대낮에 벌판을 버젓이 지나 수림지대로 들어가 밥도 해먹고 휴식도 할수 있었다. 수림지대를 벗어나 다시 행군하고있을 때 적들이 뒤에서 추격해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후 척후병들이 앞에도 적이 있다고 알려왔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일본군이고 앞에서 마주오는 것은 만주국부대였다. 아군은 적은 병력으로 뒤를 견제하게 한후 아무멋도 모르고 마주오고있는 위만군부대를 무찌르면서 포위를 돌파하려고 작전을 짠후 전투에 달라붙었다. 경위련장 오백룡이 맨 앞장에 서서 부대를 이끌고 마주오는 적들을 향해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만주국부대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자 굉장한 부대와 맞붙은 줄 알고 배낭이며 짐짝들을 다 내던지고 꼬리빳빳이 퇴각했다. 아군은 적들이 던진 배낭들에서 먹을 것을 걷어서 걸머지고 꿰진 신발까지 갈아신고 대통로있는데까지 맹추격했다. 드디여 분산행군하던 각 부대가 3개월남아되는 간고한 행군을 거쳐 북대정자에서 회사하게 되었다. 북대정자는 온통 축제마당으로 되었다. 100여일동안이나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난대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웃고 뒹굴면서 회포를 나누었다. 1939년 4월, 김일성의 주최하에 장백현 북대정자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령도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반년래의 유격활동의 경험교훈을 총결하고 금후의 활동방향을 연구, 필요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타격하기로 결정했다.(계속)  
61    제61장“로령회의”와 “혜산사건” 댓글:  조회:2195  추천:0  2014-02-18
출전을 앞둔 항일련군 장병들. 타락분자 비겁분자들 적에게 투항하고 반일조직  항일련군 엄중한 파괴  당해 “제1차로령회의” “로구교사변”후 항일련군 제1로군은 영용히 싸워 일제의 부단한 “토벌”을 분쇄했지만 항일유격근거지도 크게 파괴되였으며 항일련군도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중공남만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총정치부 주임인 위증민은 전국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후의 국내외형세와 동북항전의 새로운 형세를 연구한후 1로군의 투쟁방침과 임무를 확정하려고 총사령원 양정우와 회합할 것을 기획했다. 이에 양전우는 제1군 군부 및 직속부대를 이끌고 환인에서 북상하여 집안에 이르고 위증민은 제2군 주력부대를 이끌어 남하하여 집안의 로령에서 만나기로 했다. 1938년 5월 상순, 위증민부대와 양정우가 거느린 제1군 군부가 집안의 로령산구에서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5월 11일부터 6월 1일까지 오도구밀영에서 중공남만성위와 항일련군 제1로군 군정간부회의가 소집되였다. 이번 회의를 세칭 “제1차로령회의”라고 한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양준항, 한인화, 황해봉, 진수명, 서철, 려백기, 이준산, 송무선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전국과 동남만의 투쟁형세를 분석하고 항일유격전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였으며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들의 전면적인 진공을 분쇄” 할 방침과 책략을 채택, 금후의 유격운동의 방향문제를 토의하기도 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관내의 팔로군과 련계할 문제와 동북항일련군 각 부대의 배합작전문제를 제의했다. 양정우의 제의에 따라 중공중앙과 팔로군과의 련계를 계속하여 추진하기 위해 다시 서정하기로 결정, 제1군 제3사가 서정을 선행하기로 했다. 그뒤를 이어 제1군 제1, 제2사가 따르기로 했다. 각 항일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위해 제2군 제4사, 제6사는 계속하여 통화지구에서 유격활동을 벌리기로 하고 제5사는 의연히 수녕지구에서 활동하면서 길동, 북만지구 항일련군들과 련락공작을 견지하기로 하였다. 제1로군 개편 로령회의의 정신에 좇아 제1로군 각 부대는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양정우가 이끄는 서부원정부대는 움직이자마자 적의 대포위에 들어 말할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때 제1군 제1사 사장 정빈이 적에게 투항했다. 원래 양정우가 제1군 군부와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환인을 떠난후 본계, 환인, 관전, 봉성일대의 투쟁형세는 급격히 악회되였던 것이다. 적들의 군사“토벌”, 경제봉쇄, 정치유항(诱降)의 지독한 정책에 의해 항일대오중의 견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동요해버리고말았던 것이다. 1938년 2월 13일, 일제의 “장도공작반”과 “흑기유격대”가 갑작스레 환인현 우모구 서차밀영을 습격했다. 남만성위 선전부 인쇄주임 반제(원명 김영호) 등 5명이 전투중에서 희생되고 제1군 참모장 안광훈이 체포된후 별절해버렸다. 안광훈은 변절한후 적들에게 제1군의 중요한 기밀을 제공했다. 안광훈의 공술에 의해 적들은 2월 25일, 환인현 쭈무타이즈에서 제1군 정치부 선전과장 겸 남만성위 비서처 편집주임 박세창을 체포했다. 3월 6일에는 환인현 우모대산에서 남만성위 청년부장이며 항일구국청년단 남만총회 서기인 류좌건을 살해했다. “장도공작반”은 교란을 목적으로 변절자 안광훈, 후국신 등더러 여러차례 제1사 사장 정빈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한편 “흑기유격대”는 군사적진공을 가해왔다. 적들은 6월 8일, 제1사 근거지의 포석하에까지 진공해왔다. 정빈은 부대를 거느리고 관전, 환인, 본계로 이동하면서 여러 차례 적들의 타격을 받았다. 6월 29일, 정빈은 본계에서 “장도공작반”의 투항서를 접수한후 투항을 견결히 반대한 1사 6퇀 정위 리철수, 1사 정치부 보안련 정위 김종한 등 지휘원들을 총으로 쏘아죽이고 수하 29명과 함께 적들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제1군에는 심각한 난국이 조성되고말았다. 제1군은 물론 전반 항일련군 제1로군의 군부서, 부대건제(建制), 지휘원들의 활동경로와 부대의 활동구역, 전략전술, 군수물자원천, 소속부대의 번호, 밀영설치의 비밀 등을 잘 알고있는 정빈의 변절은 1군에 있어서는 참으로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정빈은 투항후 두말할 것 없이 이 모든 것을 적들에게 일일이 교대했다. 정빈의 투항으로 하여 1군의 서부원정계획은 더구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정빈의 투항으로 엄중한 손실을 받은 중공남만성위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은 1938년 7월중순, 양정우, 위증민, 방진성, 이준산, 서철, 한인화, 황해동, 양준항, 려백기, 손무선, 리흥소 등이 참가한 가운데 재차 집안의 로령에서 긴급회의를 개최, 정빈이 변절한후 정세에 좇아 1로군의 전반 항일투쟁에 대해 다시 연구했다. 회의에서는 일부대오를 남겨 로령산구에서 계속 유격전을 견지하게 하고 주력부대는 룡강산맥의 하리와 화전, 몽강 등 산악지대로 이동하면서 서부원정계획을 취소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제1로군의 군과 사의 체제를 취소하고 총사령부의 통일적인 령도하에 한 개 경위려와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 각 부대의 작전지역을 새로 획분할데 관한 중요한 결정을 짓기도 했다. 1938년 7월말, 원 제 1, 2군 교도퇀과 2군 독립려를 합병하여 사령부경위려로 편성, 양정우의 직속령도를 받게 했다. 려장에 방진성이 맡고 정위에 한인화가 맡았다. 독립려의 병력은 도합 500여명이였는데 주요하게 금천, 몽강, 집안일대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동년 8월 50여명으로 된 소년철혈대를 무어 총사령부의 활동에 밀접히 배합하게 했다. 8월, 제1군 2사와 2군의 부분적 병력으로 금천현 곰골에서 제1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조아범, 정치부 주임에 이준산, 참모장에 윤하태가 맡고 아래에 한 개 퇀과 한 개 기관총반을 두었다. 병력은 약 250명, 집안, 림강, 통화, 금천, 휘남, 몽강 등지에서 활동했다. 11월, 몽강현 남패지에서 원 제2군 6사로 제2방면군을 편성하였다. 지휘에 김일성, 정치부 주임에 려백기, 참모장에 림수산이 맡았다. 아래에 2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50여명, 장백, 무송, 몽강, 림강, 화룡, 안도, 연길, 훈춘, 왕청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9년 7월말 돈화현 한양구(지금의 안도현경내)에서 원 제2군 4, 5사가 합병하에 제3방면군을 편성했다. 지휘에 진한장, 부지휘에 후국충, 참모장에 박덕범이 맡았다. 아래에 3개 퇀과 1개 경위련을 두었다. 병력은 300여명, 연길, 왕청, 훈춘, 돈화, 액목, 교하, 녕안, 오상, 서란 등지에서 활동했다. “혜산사건” 중공당원인 권영벽은 1935년 조국광복회가 설립된후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30여명 정치공작원들과 함께 장백현에 파견되여 장백현조국광복회를 조직했으며 조국광복회의 우수한 회원들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여 당조직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드디여 1937년 중공장백현위를 건설, 제1임 현위서기를 맡았다. 7월, 장백현 17도구에서 제1차 중공장백현위원회를 소집, 군중을 발동하고 항일련군의 항일투쟁에 배합하여 일만군의 병툰계획을 파괴하는 등 투쟁방향을 명확히 했다. 간고한 나날 중공장백현위는 전 현 각급 공산당조직과 당의 외각조직, 광범한 인민군중을 조직, 령도하여 항일을 선전하고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등 활동을 활발히 발리였다. 중공장백현위의 이러한 반일활동은 적들에게 큰 위협이 아닐수 없었다. 적들은 “장백특무공작대대”를 무어 사처에 특무를 파견하여 정보를 탐지했다. 적들에게 걸려든 김태국은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 몇 대를 맞고는 권영벽이 17도구에 있다는 것을 인차 고스란히 섬겨바쳤다. 9월의 어느 깊은 밤 조선 혜산의 일본경찰들은 감쪽같이 17도구에 기여들어 권영벽과 서응진을 체포했다. “혜산사건”은 이렇게 막을 열게 되었다. 김태국의 고발에 의해 벌써 권영벽, 리제순, 박인진 서응진, 박록금 등 수많은 핵심인물들이 검거되게 되었다. 제1차 검거를 통하여 적들은 장백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가두고 수사의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건너 갑산일대에까지 마수를 뻗치였다. 하여 중공장백현위와 장백현조국광복회는 마비되거나 해체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후 마동희와 장증렬이 체포되였는데 마동희는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혀를 스스로 끊으면서 투쟁을 견지한 반면 장증렬은 곤장맛을 몇 개 보기 바쁘게 인차 자기가 아는 밀영들과 지하조직들을 다 불었다. 그는 자기가 관여한 조직들을 다 공개하였고 장백현의 상강구와 중강구 관하에서 자기와 련계를 맺고있던 반일혁명조직의 지도핵심성원들을 다 불었으며 항일부대와 밀영의 위치까지도 아는것대로 대주었다. 그리고 경찰들을 데리고 19도구 아지트에까지 와서 지태환과 조개구를 체포하게 하였다. 조개구도 장증렬처럼 변절하고 말았다. 조개구는 재봉대가 자리잡고있는 간판하자밀영에 경찰들을 안내하여 재봉대원들 전원이 희생되게 했다. 이번 사건에서 수많은 중공당원, 조국광복회 회원, 반일인사들이 체포되였는데 일제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만 하여도 167명이나 된다. 일제는 이들의 “죄”를 158페지의 판결서로 렬거, 전원이 “치안유지법위반”이고 그 외에 주택침입, 강도, 살인, 살인미수, 방화, 공문서웨손, 우편법위반, 전신법위반, 총포화약류취체위반, 출판법위반, 륙군형법위반, 군기보관법위반, 법인을 감추고 비호한 죄 등 되도록 중하게 하기 위하여 갖은 죄명을 다 들씌웠다. 이번 사건을 통하여 적들에게 압수된것으로는 기관지 “火田民” 제1호로부터 7호까지, 비밀출판물 “朝鮮共産主義者의 任務”, “同志여 團結하라!”, “日中戰爭과 朝鮮靑年의 任務”, “國際뉴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10여종, 무기로서는 권총, 탄약, 단도 등이였다. 이러한 죄목으로 일제는 1941년 8월 28일, 167명에 대해 판결했는데 권영벽 등 6명을 사형에, 박금철 등 4명을 무기징역에 처했다. 그 외에 15년징역에 4명, 13년징역에 6명, 12년징역에 9명, 10년징역에 18명, 8년징역에 14명, 7년징역에 7명, 6년징역에 4명, 5년징역에 8명, 4년징역에 10명, 3년 6개월 징역에 7명, 3년징역에 48명, 2년 6개월 징역에 5명, 2년징역에 16명이 언도되였다. “혜산사건으로 하여 결국 중공장백현위와 조국광복회의 지도기관은 철저한 파괴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금후 항일련군의 군사활동에 엄중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계속)  
60    제60장 피눈물의 이민생활 댓글:  조회:2486  추천:0  2014-02-16
  1941년 연길현(지금의 안도현) 명월구 도안촌의 개척민부락. 속임수에 걸려들어 강제이주되여온 조선 이주민들 “출하”  임무 완수 못하면 근로봉사에  끌려가기도 일제의 강제이민 “조선인의 동북에로의 대량적인 이주는 1931년 ‘9.18’사변이후로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14년간인데 이 시기를 개괄하여 강제이민시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14년을 또 3개 시기로 세분할수 있는데 1931년부터 1936년까지는 ‘통제이민’시기이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집단이민’시기이며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개척이민’시기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일제의 강제이민에 대한 분석이였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의 통제이민시기에 일제는 동북에서의 저들의 식민통치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자 동북의 농업자원을 더 략탈하기 위하여 조선의 파산농민들을 대량적으로 동북에 이주시켰다. 1936년 8월, 일본관동군은 괴뢰만주국정부를 사촉하여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을 제정했다. 이 요강에 의하면 조선으로부터 해마다 1만세대 5만여명의 조선파산농민을 동북에 이주시키며 조선인 이민의 이주구역을 간도 및 동변도의 23개 현(1938년에는 19개 현을 더 확대하여 39개 현)으로 제한하며 중쏘변경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인농민을 강압적으로 지정한 구역에 이주시키는것이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의 서울에 조선이민경영기구인 “석만척식회사”를 세우고 괴뢰만주국의 신경(장춘)에 그의 집행회사인 “만석척식유한주식회사”를 세운후 새 이주민과 기주민들에 대한 통제와 집결, 그들에 대한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했다. 1937년 3월부터 만석척식회사는 연변지구의 왕청, 연길, 안도 그리고 료녕성 영구지구에 2339호, 1만 2149명의 이민을 수용하여 35개의 집단부락을 세웠다. 그리고 북만, 특히 중쏘국경지대에 산재하고있거나 류랑하고있는 조선인들을 “국방과 치안의 수요”라면서 영구, 류하, 환적, 왕야묘, 대함창 등 5개 지구에 집중시킨후 1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1016호의 4338명을 수용하였다. 1937년 일제는 수전경작을 위주로 하고있는 조선남부의 경기도 외 6개 도에서 2500호의 농호를 이민으로 선정하고 간도성과 봉천성 연구현구역에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1938년 7월에는 남만과 북만에 16개 이민현을 더 증가하였다. 1939년 12월에는 39개 현에만 이주하게 하던 규정을 철수하고 전 동북을 다 이민지점으로 확정하였다. 1940년 8월까지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만 3897호의 6만 1421명의 “집단, 집합이민”을 받아들여 동북 각지에 230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하였다. 조선이주민은 1940년부터 북만을 중심으로 6450호, 1941년에는 2725호, 1942년에는 3462호 이주하여왔는데 1942년 12월말까지 동북의 조선인 인구는 151만 6000명, 1943년 6월에는 163만 3220명, 1944년 4월에는 165만 8572명, 동년 9월에는 175만 492명, 1945년 광복까지 약 210만명으로 증가되였다. 1940년 6월 일본인 이민경영을 담당하던 만주척식회사와 만석척식회사를 합병하여 “만주척식공사”로 개편하고 동북경내의 이주민과 이주사업을 통일적으로 관리하였다. 특히 1941년부터는 나날이 확대되는 저들의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농지조성계획”, “긴급농지조성계획”을 세우고 동료하, 제2송화강지구를 위주로 하는 동북 간지의 대소가경지를 개간하기에 광분했다. 조선이주민이 증가함에 따라 동북지구의 수전경작도 신속하게 확대회였는데 1935년 전 동북의 수전면적은 3만 5353헥타르에 벼산량은 8만 3517톤이던데로부터 1940년에는 수전면적이 8만 9134헥타르, 벼산량은 16만 5589톤, 1944년엔 수전면적이 다소 축소되여 8만 1108헥타르였으나 벼산량은 19만 124톤으로 증가되였다.   야만적인 “량곡출하제”   일본으로 략탈해가는 동북의 특산물. 일제는 “만주농업이민 100만호계획”을 조작하고 20년동안에 일본인 100만호, 500만명을 동북에 이민시키기로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일제통치자들은 이주조선인을 통제하고 집결시키고 조선농민을 강제로 동북지방에 이주시키는 외에 위만정부와 결탁하여 조선농민들이 일군 토지를 함부로 략탈하여 일본개척단에게 주었다. 1936년 8월부터 1941년 3월까지 괴뢰만주국정부와 “만척”에서 략탈한 토지면적은 연변에서 1207.6헥타르, 목단강성에서 17만 3850헥타르, 안동성에서 2102헥타르나 되었다. 인구가 적은 개척단이 많은 토지를 점하고있어 부분적토지를 조선인농호와 한족농호에 소작주기도 했다. 하여 조선인농민과 기타 여러 민족 농민들은 일본개척단의 소작농으로 전락되기도 했다. 특히 “7.7”사변후 일제는 농민들에 대한 고리대착취를 다그쳤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은 대부금과 변돈을 갚을수가 없어서 자작농으로부터 일제식민지회사의 소작농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제는 이른바 “략곡출하제”와 “식량배급제”로 동북의 여러 민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량곡출하”란 농민들이 일년내내 뼈빠지게 가꾸어 타작한 알곡을 최대한으로 략탈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거두어들이는것인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후에는 “결전징수방책”을 실시하여 동북의 량곡을 철저히 징수하려들었다. 지어는 무력적으로 농민들을 강박하여 량곡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는 이른바 “보은출하”로 량곡을 더 바치도록 강요했으며 수전을 경작하는 조선인들은 벼를 몽땅 바친후 잡곡을 사서 먹게 했다. 일제는 최고한도로 생산량을 내오고 최저한도로 백성들의 배급을 줄이면서 침략전쟁의 수요를 만족시키려 미쳐 날뛰였다. 위만관리들과 경찰들은 출하기간이면 농호에 뛰여들어 온 집안을 휘딱 뒤지면서 어디에다 량식을 감추지 않았는가 수색하기가 일쑤였다. 촌공서의 관리나 경찰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쌀뒤주를 들추고 심지어 작대기에 색대를 맞추어 짚가리, 나무가리, 구들고래안, 지붕과 변소까지 들추었는데 일단 량식을 감춘 것이 드러나는 날이면 마구 때리고 붙잡아갔다. 연길현 구수하 영창동골안에서 산 박로인의 일제출하에 대한 구술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구수하 영창동에는 33호가 살고있었는데 말짱 길주, 성진, 명천 사람들이였다. 바심이 끝나면 촌공서와 분주소의 순사들이 나와 출하량을 매호에 정해주고는 아무 때까지 바치라고 하였다. 굶어죽어도 완수해야 했는데 완수하지 못하면 감옥에 붙잡혀갈판이였다. 대동아전쟁이 폭발한 뒤 더 혹심해졌는데 한번 바치고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있는대로 바쳐야 했다. 순사들이 다 긁어가면 끼니거리가 떨어지니깐 동네사람들은 순사들이 눈을 피해 골안에 찾아가 김치움처럼 굴을 파고 쌀독을 거기에 넣어두었다. 쌀독에 조, 옥수수, 콩, 보리, 수수 따위의 걷곡을 채워넣고 뚜껑을 잘 덮고는 흙으로 묻어버린 뒤 나무검불로 눈가림을 해놓았는데 그렇게 하고서야 분주소의 순사나 총공서의 관리들의 수색을 요행 피면해서 그걸고 겨울을 나고 밭갈이철에 씨종자로 할수 있었다. 그런데 출하를 완수하지 못해서 매맞고 구류당한 사람이 있었다. 반작을 하는 사람들은 두 번째로 공출하는 출하는 고사하고 처음 출하도 완수할 재간이 없었다. 그때 동네에 전조감이라는 량반이 있었는데 이미 일흔고개를 넘기고있었다. 어느해인가 그 량반댁에서 출하를 완수하지 못하자 분주소의 왜놈순사가 그 량반을 차렷을 시켜놓고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면상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출하를 완수못하였거나 량식을 감춘 것이 발각되여 얻어맞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축이였고 그보다 무서운 것은 근로봉사에 끌려가는것이였다. 놈들은 출하를 완수하지 못한 사람과 량식을 감춘 사람들을 근로봉사에 보냈는데 촌공서의 사무원이 분대장으로 되어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근로봉사에 끌려간 사람들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근로봉사에 나가서 죽은 사람이 하도 많았기에 근로봉사에 나갈 때면 모두들 죽는다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1941년부터 주민들의 식량표준을 최대한 제한하는 “배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농민들은 피땀으로 벼농사를 지었지만 쌀은 한알도 입에 대보지 못하고 털어바치였으며 그대신 보리, 감자, 옥수수 같은 잡곡을 타다가 끼니를 에워야 했다. 도시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이 이밥을 먹다가 밀정이나 주구에게 발각되면 “경제범”으로 몰려 징벌을 받았다. 기짓말에 속히워 온 이민들 ㅡ만주는 땅이 흔하고 농사가 잘된다. ㅡ로자는 물론 첫해의 량식, 종자 등을 선대해준다. ㅡ소, 수레, 농기구도 선대해준다. ㅡ몇해만 부지런히 일하면 자작농으로 될 수 있다. ㅡ지금 거처할 집까지 지어놓고 당신들을 기다린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을 듣고 조선의 파산농민들은 땅이 흔하고 기름지다는 만주에 가 팔자를 고쳐보자고 정든 고향산천을 등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지정해준 목적지에 도착해보면 집까지 지어놓고 기다린다는 것은 새빨간 것짓말이였다. “놈들에게 속았구나!” 격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어디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하여 울며겨자먹기로 눌러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부득불 한족농민들 집에 얹혀살거나 거의 찌그러가는 방앗간, 고간 같은 데를 빌어 대수 손질하고 들지 않으면 안되였다. 고향을 떠날 때만 하여도 만주의 허허벌판 어디엔가에서 논을 풀고 벼농사를 지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다수 농민들이 정작 도착한곳은 지세가 높은 산골같은데였다. 만선척삭회사에서 첫해에 종자와 식량, 농쟁기를 살돈을 선대해주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로 종자값과 선대한 돈 그리고 거기에 붙은 리자까지 갚아주어야 했다.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이민들은 봄갈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집단이민에 대한 다큐멘터리사진촬영을 목적으로 5년간 심층조사를 벌려온 촬영가 리광평씨가 처음으로 발견한데 의하면 만선척식회사에서는 1935년 음력 3월 연길현 6구 대말리구 남하마탕에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200세대 농민들을 사기수단으로 끌어들여 시험적으로 조선인집단이민부락을 세웠다고 한다. 만선척식회사의 이런 선전에 넘어간 조선인농민들이 어찌 이들뿐이겟는가. 1937년 봄부터 경상북도의 문경, 상주, 봉화, 안동, 려천 등지에서만도 400~500호가 왕청현 동신향 전각류, 태양촌 등지에 이민으로 왔고 라자구에는 1937년 가을부터 1938년 봄까지 600호, 1940년에 100호가 거짓말에 속아 들어왔다. 지금 연길에 살고있는 금년(2005년)에 83세의 채도식씨의 고향은 경상북도 산양면 현리 문경군에 있었는데 고향에 일가친척이 70여호나 있었다. 조실부모한 채도식씨는 백부님과 함께 고농살이를 하다가 팔자를 고쳐보려고 1938년 2월 27일 아침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도 기차역까지 배웅나오섰던 백부님이 떠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통곡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한다. 기차에는 채도식씨처럼 고향을 등진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기차가 떠나자 렬차안은 울음바다로 되고말았다. 눈물과 한숨을 가득 실은 기차는 추풍령을 넘어 근 50시간을 달려 3월 1일 아침에야 도문에 들어섰다. 거기서 좀 멈춰섰던 기차는 다시 떠나 아침 9시경에 대흥구에 도착하였다. 대흥구에서 하루 쉬고 3월 2일 이른아침에 트럭을 타고 눈이 하얗게 깔린 산골을 100여킬로메터나 달려, 그것도 50킬로메터나 되는 무인지경을 경과하여 목적지인 사도하자 집단부락에 도착하였다. 집단부락주위에는 높다란 흙담을 쌓았는데 담밖에는 한길 넘는 해자를 파놓았고 동서남북 네곳에 대문을 달고 경찰의 감시밑에서 자위단원들이 보초를 서고있었다. 라자구에 이민으로 온 집들은 1937년 가을에는 150호, 1938년 3월에는 450호였는데 모두 6개 집단부락에 나뉘여 살았다고 한다. 집단부락과 집단부락들사이는 3~5킬로메터 되었는데 후에는 이민들이 너무 많아 한족부락에 나뉘여 살게 되었다. 채도식씨 일가는 한족집 곁방에 거처했었는데 6평방메터밖에 안되는 방에 여섯 식솔이 들었다. 좁은 방에 크고 작은 가장집물을 놓고나니 발펼 자리도 없었다. 급선무는 봄갈이전에 집을 짓는것이였다. 3월말부터 언 땅을 파고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4월초가 되어도 땅이 녹지 않아서 벽을 쌓을 수가 없었다. 토피를 만들자면 밭갈이전에 집을 못다 지을 것 같아서 큼직큼직한 흙덩이를 떠다가 개암나무로 엮어가며 벽을 쌓았다. 4~5일사이에 전부락에 흙집들이 세워졌다. 이런 집에 구들을 놓고 거적으로 문을 달고 이사를 했다. 이사온 첫날밤에야 여섯 식솔이 오래만에 다리를 펼고 쉴수 있었다. 구들이 뜨뜻했지만 갓지은 흙집이라 누기가 몹시 찼고 초벽을 못한 병에는 구멍이 숭숭하여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 봄눈이 내리면서 바람이 불었다. 방안으로 눈이 날아들어와 덮은 이불이 축축이 젖었다. 그래도 이게 내집이라 생각하니 추운줄 몰랐다. 봄갈이가 시작되였다. 만선척식회사에서 봄갈이전에 매호에 소 한 마리씩 대부해주기로 했는데 소들을 미처 사들이지 못하였다. 요행 사온 소들가운데는 너무 어려서 아직 쟁기를 메울수 없는 소들도 있었다. 하는수 없이 네댓집에서 겨리를 무어 한전 씨붙임을 하는 한편 논을 풀었다. 보를 막고 물길을 째고 논에 물을 대였다. 채도식씨네 집에는 땅이 두쌍 차례졌는데 씨붙임을 제때에 할 것 같지 못해 온 식솔이 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오곡과 남새를 심었다. 그야말로 별을 이고 나가 달을 이고 들어오면서 죽을둥살둥 일에 달라붙었다. 일이 고되고 수토가 맞지 않아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애벌김이 끝난 7월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질에 걸려 고생하였다. 그때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름에 보리를 조금 거두었다. 가을에는 벼, 조, 옥수수, 기장, 콩, 감자 등도 거두어들였다. 1941년부터 생활이 다소 안정되였으나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게 되자 통제는 더욱 심해졌다. “출하”제가 실시된후부터는 왜놈들이 입쌀을 몽땅 빼앗아가는바람에 명절때나 잔치와 같은 경사에도 입쌀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래도 집짐승들을 길러 팔아서 아이들 월사금을 물고 비누, 소금 같은 것을 살수 있었으나 이젠 먹이가 없어서 짐승을 기를수도 없게 되었다. 1943년 여름에는 황충이 성해서 곡식잎들이 황충에게 다 갉아먹히워 버렸다. 산전에 심은 곡식들은 곰과 메돼지들이 덮쳐들어 모조리 절단내는 바람에 그해 농사는 거의 페농이 되다싶이 되었다. 그래서 그해의 “출하”임무를 완수할수 없었다. 그러자 놈들은 경찰을 풀어 집집을 수색하여 낟알을 몽땅 략탈해갔다. 이밥을 먹거자 입쌀을 감추어 두었다 들키는 날이면 경찰서에 끌려가 물매를 맞기가 일쑤였다. 마을에 김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밥을 먹다가 경찰놈들에게 들켜 석달동안이나 류치장신세를 졌다. “출하”를 바치면 돈을 주기는 했으나 그 돈으로 빚을 갚고나면 옷감이나 신을 살 돈도 없었다. 그리고 “출하”량에 따라 천을 주기로 되었는데 그것마저 관리놈들이 잘라먹다보니 실지 농민들에게는 별로 차례지지가 않았다. 1944년에 들어서서는 입을 옷이 없어서 이불을 뜯어 옷을 해입었고 이불솜으로 무명천을 짜서 여름철옷을 만들어 입었다. 어떤 집에서는 여자들이 밖에 입고 나갈 치마가 없어서 치마 하나를 번갈아입었다. 그해 겨울에 권도찬이라는 27살나는 청년이 홀옷바람에 나무하러 갔다가 그만 얼어죽고말았다. 채도식씨가 겪고 본 이민조선인들의 비참한 생활은 그때 가는곳마다에서 펼쳐졌다.(계속)  
59    제59장 일제의 황민화정책.2 댓글:  조회:2188  추천:0  2014-02-16
일본경찰서의 조사를 받고있는 조선인젊은이들. “황국신민의 선서” 외치면서 천황에게 충성맹세 “창씨변경세칙”  강요로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 “황국신민의 선서” 1940년 5월, 부의는 두 번째로 도꾜에 불리워가 일본천황을 배일한 다음 천황이 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를 신경(장춘)에 세운 건국신묘에 가져다가 “건국신”으로 모시게 했다. 하여 동북지방을 완전히 일본 판도에 그어넣고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철저히 일본신민으로 전락시키려고 광분했다. 매일 아침조회시간이면 교직원과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일본 황궁과 만주국 제궁에 요배하며 일장기를 띄우고 “황국신민선서” 혹은 “국민훈”을 암송하는 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정오에는 장소와 교수시간에 관계없이 일본천황과 만주국황제의 안녕을 빌면서 일제침략자들의 “승전” 및 죽은자들의 “명복”을 비는 “정오묵도”를 하게 했다. 학생들은 신사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모자를 벗고 절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하기만 하면 마구 때리고 가장 품행이 나쁜 학생으로 치부하여 낙제 혹은 퇴학까지 시켰다. 때론 경찰이나 헌병에게 고발하여 체포하고 유치장에 집어넣기도 했다. “당시 나는 길림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강요에 진절머리가 났더랬습니다. 방학이 되어 연변에 와보니 여기는 길림보다 엄청 더 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은 완전히 일제의 황민화정책의 그늘에서 시달리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벌어지고있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학교마다에서는 첫 상학종이 울리면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킨후 “규죠요하이(官城遥拜)”를 해야 했다. 선생이 “덴노헤이까니 다이시데 사이게례(천황페하에게 최경례)”하고 웨치면 학생들은 동쪽을 향해 “사이게례”를 한다. 그다음 “고데이헤이까니 다이시데 시이게례(황제페하에게 최경례)”하면 서쪽 신경을 향해 90도 경례를 한다. 구죠하이가 끝나 선생이 “고고구신미노지까이(황국신민의 선서)”라고 하면 학생들은 목청을 높여 일제히 “황국신민의 맹세”를 외운다. 중학생이면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워야 한다. “황국신민의 선서”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쳐서 천황페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의 서사” 성인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겠다. 2.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겠다. 3.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겠다. “황국민의 맹세(서사)”가 끝나면 아메데라스 오미가미를 향해 묵도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어서 승리하여주옵소서”라고 빈다. 아침조회가 끝나 교실에 들어가서 급장이 “일만기를 향해 경례!”하고 소리치면 학생들은 일만국기에 15도경례를 한다. 그제야 제자리에 앉아 하루수업을 시작할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을 때면 밥곽을 책상우에 놓은후 급장이 “하시오도례” 하고 길게 빼면 저가락을 두 엄지손가락과 식지사이에 끼워들고 “저가락 들면 천지의 은혜와 부모와 시조의 은덕을 새기며 먹겠습니다”라고 외우고나서 밥을 먹는다. 식사가 끝나 급장이 다시 “하시오도례”라고 하면 저가락을 두엄지와 식지에 끼워들고 “고찌소사마”를 외운다. 일본말사용과 이런한 “맹세”같은 것을 도시주민과 농촌농민들에게도 강요하였다. “황국신민의 서사”같은 것은 50세이하의 사람이면 왕왕 외워야 했는데 아니면 거리에 나설 궁리를 말아야 했다. 일본경찰은 길가는 청장년을 세워놓고 “오마에고, 고꾸신민노지까이오요메!(너 황국신민의 맹세를 읽어봐!)”라고 명령하는데 조금이라도 꺽꺽거리거나 외우지 못할 경우 “바가야로, 우찌니가에레!”하고 꽥 소리를 지르면서 귀쌈을 후려갈긴후 집으로 되쫓아보내여 다시 외우게 했다. 불복하면 신분증을 빼앗는데 이것은 매맞는 일보다 더 무서웠다. 신분증이 없으면 외출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자칫하면 “공산비적”이로 몰리기 때문이다. 또 빼앗긴 신분증을 빼앗은 순사를 찾아가서 손이야발이야 빌고서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 하여 학교문턱을 가로타보지도 못한 일자무식의 농민들도 생계를 위해 일본말을 배우고 “맹세”를 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족농민들의 황민화를 단속하기 위하여 일제는 시가지로 드나드는 어구를 지키기도 했다. 연길현 조양천에는 고바리소좌가 거느리는 261부대가 있었는데 이자들은 늘 조양천으로 드나드는 큰길어구를 지켰다. 삼봉동농민들은 조양천으로 일보러 들어갈 때면 일본병사들의 총칼에 가로막히군 했다. 왜놈들은 총창을 농민들의 가슴에 대고 상투적인 수법으로 “고고꾸신민노지까이”를 외우라고 으르렁거렸다. 물론 외우지 못하면 젊은이건 늙은이건 귀쌈을 얻어맞는건 물론 시가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며 집으로 쫓아보내 다시 외워가지고 와야 시가지로 들어가게 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대량의 조선청년들은 징병자, 징용자, 보국대로 뽑혀 끌려갔는데 일본말을 모르면 안되기에 일본어강습소, 조선청년특별훈련소를 세워 일본말을 억지로 배우게 했다. “일제는 동북3성 조선인집거구에서 제일 지식이 있고 신체가 좋은 사람을 뽑아(자기가 먹을 쌀을 지고 가서) 서란현 막석에 꾸려놓은 훈련소에 보내여 훈련시켜 교관으로 양성한후 그 사람들을 다시 동북 각지 농촌에 보내여 훈련소를 꾸리게 하였는데 농민들은 1개월동안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훈련한후 징병 등에 뽑혀 나가야 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자신이 보고 겪은 사실을 피력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후 일제는 이러한 망발을 더욱 다그쳤다. 간도성만 하더라도 1944년 일본어강습소가 452개에 학생 2만 54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943년부터는 조선인청년들에 대해 이른바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높이고 징병제도실시의 기초를 닦는다는 명목으로 일본말학습을 주로 하는 훈련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시켰다. 전기에는 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거나 국민학교를 다녀본 청년들을 각 현 훈련소에에 보내여 3개월동안 합숙시키고 1년동안은 사숙시키면서 내무, 훈육, 학교교련 등을 진행하였다. 후기에는 서란현 국립중앙청년특별훈련소에 보내여 몇 달동안 강제훈련시켰다. 이런 훈련은 완전히 군사파쑈적이며 폭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였다. 훈련이 끝나면 물론 강제징병을 당해야 했다.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야   에 끌려간 조선인백성들. 일제치하에서 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지금도 “다이꼬빈따”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이꼬빈따란 일종의 독특한 체벌이였다. 이것은 학생 한사람이 잘못하면 그 학생이 소속된 학급전체에 강행하는 체벌인데 학생들을 두줄로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치게 하는것이였다. 체조때 간혹 늦게 나오거나 암송하라는 과문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조심하지 않아 조선말을 했다거나 하면 다 이런 체벌을 받아야 했는데 학생들은 두줄로 마주서서 대방을 사정없이 때려야 했다. 느슨히 때리거나 하는 기미만 보이면 교원은 옆에서 사정없이 질책하여 세게 때리게 했는데 일단 맞고보면 대방에 대해 역시 힘껏 때리게 되는데 이렇게 교원이 성차할 때까지 때리면 다들 얼굴이 퉁퉁 붓기가 일쑤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일본인교원들은 학생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때리였다. “갔다와라”하면서 때리고 갔다오면 “갔다왔느냐?” 하면서 때렸다고 한다. “이른바 ‘건국정신’이라는 과를 세우고 천조대신은 나라를 만든 신이라고 고취했으며 군인칙서, 교육칙서, 시국조서, 건국10년조서 등을 외우면서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조선인학생들을 핍박했습니다. 중학교는 철저히 일어화, 황민화, 병영화, 직업화시키기에 노력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다. 이렇게 조선인에 대해 천황과 일본에 충성하도록 강요, 일본인으로 철저히 동화시키려 들었다. 1943년 태평양전쟁에서 련이어 패하게 되자 일제는 조선인들을 저들의 침략전쟁에 내몰기 위하여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재학중인 조선인학생들을 전쟁마당에 내몰았다. 1944년 8월 23일에는 “녀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하여 만 12세이상 40세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인녀인들을 징용하여 일본본토와 그 외 전쟁마당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단발령을 내려 남학생의 경우 머리를 빡빡 깎게 했고 녀학생은 단발머리를 하게 했다. 중학생들은 일본군복식으로 국방색통일교복에 전투모를 착용하게 했으며 다리에 각반을 치고 가슴에는 이름표를 달게 했다. 중학교에 일본군 현역장교를, 소학교에는 재향군인을 배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그리고 학생근로봉사라는 명의로 륜번으로 학생들을 강제로동에 내몰았으며 녀학생들과 처녀들을 꾀여 “위안대”로 전락시켰다. 교관들은 맘대로 학생들을 구타하고 벌을 주면서 정신훈련과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학생들을 다 “협화청년단”이거나 “재향군인”에 가입시켰고 팔에는 완장을 끼고 다니게 했다. 일제는 조선이란 존재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조선사람의 이름마저 빼앗는 광란을 서슴지 않았다. 1939년 11월 10일, 일제는 “제령”으로써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사람의 성명제를 페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사용하도록 규정하였으며 12월 26일에는 “창씨변경세칙”을 공포하여 이를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이 법에 의하면 조선사람은 “김(김해), 박(밀양), 최(수원), 리(한산)” 등의 전통적인 성을 버리고 그대신 “가네우미, 아라이, 미즈하라, 마끼야마” 같은 일본식 성씨를 붙이며 조선사람의 이름을 버리고 “겐이찌, 이찌로, 하루꼬, 아끼꼬” 같은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무릇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학교입학, 전학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런 학생에 대해 맘대로 구타하게 했다. 관청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문서를 처리해주지 않았으며 기차역이거나 우편국에서는 화물을 취급해주지 않았다. 지어는 “불온선인”이라고 루명을 씌워 체포하거나 혹형을 가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제도는 조선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그 대가는 형별과 옥살이뿐이였다. 개보다 못한 신세를 탓해 어떤 사람들은 우정 “개새끼”라는 의미로 “이누노고”라고 성을 고친 사람들도 있었는데 호적계로부터 수속거절을 당한건 물론 요구대로 성과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고 얻어맞을뿐이였다. 창씨개명마저도 일본놈들의 돈벌이구멍수가 되었다. 이름을 고칠만큼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경찰서에 수속비 4원을 내고 이름을 고치게 했다. 생활형편이 괜찮은 사람은 돈을 내고 무난히 이름을 고칠수 있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낼 돈이 없어 두 손바닥만 싹싹 비빌뿐이였다. 그때 돈 20전이면 입쌀 한말을 살수 있었고 명태, 이면수, 청어 같은 것은 두두름을 살수 있었다. 그러니 4원이란 가난한 조선인들에게는 생계를 거는 거금이나 다를바 없었다. 할수 없이 경찰서에서 찾아오기전에 먼저 성과 이름을 고친 동본인 친척을 찾아가서 그 사라들이 고친 성과 이름을 알아두었다가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본적을 알려준후 “미리 알아두었던 일본성을 댄다. 경찰이 “오마에노나마에와나니까?(너의 이름은 뭐라 부르지?)” 하고 다시 물으면 역시 미리 준비해두었던 이름을 대고 재난을 모면하였다. “정치적권리는 두말할 것 없고 최소한의 생존조건마저 빼앗는 이같은 잔악하기 그지없는 황민화책동을 일제는 저들이 패망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하였습니다. 일제의 이러한 간악한 수단은 중일, 한일간의 민족모순을 격화시키면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원한과 반항을 불러일으킬 뿐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의 력설이다.(계속)  
58    제58장 일제의 황민화정책.1 댓글:  조회:1838  추천:0  2014-02-16
  일제 로구교 점령 북경 포위 전면적침략 감행 동북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파쏘통치를  강화 로구교사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군사연습중에 있던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왕평현성에 대한 수색을 무리하게 요구해나섰다. 이것을 발단으로 하여 충돌이 야기되였는데 일본군은 송철원의 29군이 저항해나서자 로구교를 점령하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자그마한 우발적인 충돌이였던것만큼 얼마든지 현지교섭으로 해결할수 있었으나 일제는 구실을 찾고있던참이라 생트집으로 중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 것이다. 일제는 로구교사변에 앞서 1933년 1월의 산해관공략으로부터 시작하여 화북지구의 침입, 열하작전에 의한 성소재지 승덕의 점령, 진황도 상륙, 하북성 동부지구에로의 진격 등 군사작전을 벌리면서 미구에 감행하게 될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준비해왔다. 장개석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후 침략의 마수를 관내로 뻗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을 반대하고 로농홍군을 “토벌”하는데 혈안이 되어 적극적인 항전대책을 세우지 않고있었다. 오히려 방대한 군사력량을 동원하여 서금에 있는 중공중앙쏘베트를 없애버리려고 무려 5차례에 걸쳐 대규모적인 “토벌”작전을 벌리였다. 로구교사변후 군부의 압력에 의해 일본 고노에내각을 각의에서 결정, 8월 13일 상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중일간의 큰 전쟁이 터지게 된 것이다. 로구교에서 울린 총성은 결국 근 3000일동안이나 중국을 피바다에 잠그고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속에 휘몰아넣는 전주곡이 되고말았다. 이로부터 일제는 광활한 중국땅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롯한 중국인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곳곳에서 감행,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르면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지배와 아세아의 맹주로 될 야수의 꿈을 무르익히려 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마자 중국공산당은 “평진이 위급하다! 중화민족이 위급하다!”고 대성질호하면서 한결같이 떨쳐나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중화민족의 생존의 길이기에 “민족통일전선의 튼튼한 장성을 쌓아 왜놈들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전국에 호소했다. 7월 15일에는 “국공합작의 선언”을 국민당중앙에 보냈다. 서안사변을 계기로 려산에서 진행된 장개석과 주은래의 담판은 마침내 결실을 얻게 되어 국민당도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의 선언에 대한 담화”를 발표, 국공합작을 기초로 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정식으로 형성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전민족적인 항전의 새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전쟁의 폭발은 동북항일투쟁의 전략적임무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제는 중국내지에 대한 전면적인 진공을 발동하면서 이미 침략한 동북을 저들의 중요한 후방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리하여 관내는 항일전쟁의 주요전장으로 변해버렸다. 5년 남아 독립적으로 진행된 동북의 항일투쟁은 전국 항일전쟁의 한부분으로 변하여 동북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관내의 주요전장에 대해 배합하고 지지하는 작전으로 되었다.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무하에 동북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단결하여 일제에 저항했으며 각지 항일련군들도 새로운 항일투쟁의 고조를 형성하여 일제에게 침중한 타격을 가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전국적인 항일투쟁의 고조에 발맞추어 일본군에 대해 타격을 가했는데 이는 동북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습니다. 동북항일련군에 의해 일본제국주의가 신속하게 동북을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꿈이 파탄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면서 1936년 3월에 제정한 일제의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설명해주었다. 이 숙정대강에 따르면 일제는 동북을 점령한후 동북을 침략을 확대하는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첫해(1936년 4월-1937년 3월)의 “숙정”중점지구는 빈강, 길림, 간도, 삼강(합강) 등 성이며 두 번째해(1937년 4월-1938년 3월)는 첫해의 “숙정”성과를 진일보로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한편 전 동북에 대한 “숙정” 공작을 확대하는것이며 세 번째해(1938년 4월-1939년 3월)에는 특수지구에 대한 “철저한 숙정”이였다. 적들은 “집단부락”을 건설해 무인구역을 만들며 경제봉쇄를 실시해 항일련군과 군중들의 련계를 단절시키는 한편 경찰, 특무 조직을 강화하여 항일무장을 고립시켜 적화사상의 뿌리를 빼버리려 했다. 로구교사변후 일제는 “숙정계획”에 대한 전략적인 변경을 했는데 그해 제2기 “치안숙정공작요강”에 “치안숙정의 주요지구를 만주국동부지구, 특히 동변도 및 동부삼각지대-장백산지구로 한다.”고 명확히 해놓았다. 이로써 적들은 항일련군 제1로군을 주요목표로 정한후 병력을 집중하여 “3강성(길림, 통화, 간도)토벌”등을 감행해 반일무장을 완전히 소멸해버리려 시도했다. 일제는 항일련군과 인민대중과의 혈연적관계를 절단하기 위해 1936년에 이르러 동북지구에 이미 1만 3451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으며 보갑련좌법을 실시했다. 1938년의 통계에 의하면 일제가 동북에 경찰서 1233개소, 경찰분주소 3651개소, 파출소 1630개소나 설치하였으며 경찰은 10만명에 달했다. 연변지구에는 32개의 경찰서와 153개의 분주소, 55개의 파출소, 10개의 삼림경찰소를 설치하였는데 경찰총수는 4230여명에 달했다. 1940년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지구에 319개의 자위단이 있었는데 자위단원이 1만 8131명이 있었다. 경찰과 자위단은 “경제범”, “형사범”, “사상범”, “국사범” 등 죄목을 씌워 무고한 인민을 마구 체포하고 형벌을 가했으며 도형에 언도하거나 학살했다. 일제의 문화 파쑈적통치   에 잡혀가는 조선인들. 일제는 정치경제면에서뿐만아니라 문화면에서도 파쑈적인 노예화교육과 민족동화정책을 감행했다. 로구교사변후 일제는 각종 수단을 리용하여 “일만일체”, “공존공영”, “천황지상”, “왕도락토” 등 반동사상을 고취했다. 1938년 1월 1일 위만주국은 이른바 “신학제”를 실행하면서 일어를 “국어”자리에 놓고 민족노화교육을 강압하기에 이르게 된다. 조선민족에 대한 일제의 정치적압박 역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자들은 조선인들에게 이른바 “황민화운동”을 진행하게 하면서 어떠한 장소에서도 본민족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강박적인 수단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하여 조선인들이 본민족 성명을 가질 권리마저 박탈했다. 도처에 “신사”(일본황실의 조상이나 신대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를 세우고 조선인을 일본의 “선족(鲜族)”이라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강박, 조선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없애고 조선민족을 저들이 마음대로 혹사하고 유린하는 “망국노”로 만들려 했다. 일제의 이러한 의도는 교육에서 돌출하게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여 이른바 “일시동인”, “내선일체”, “내선공학”이라고 조선인을 기만했다. 일제는 “문화통치”의 허울밑에 조선말과 조선력사를 말살하고 일본어와 일본력사에 대한 교육을 더욱 강화했다. 또 일본문화와 생활양식을 조선인청년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전통 문화와 교육을 파괴하고 민족의식을 없애며 나아가서는 조선민족을 철저히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망발했다. 일제는 “국민된 성격의 함양”을 위하여, 고등보통학교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를 숙달시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강박함과 아울러 교과서를 통해 일본의 인물, 시가, 풍속, 지방특성을 알리고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로 일관된 내용을 불어넣었다. 일제가 조작한 교과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우리 나라는 아세아주의 동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렬도와 조선반도로 이루어진다. 그밖에 만주국에서 빌린 관동주와 렬국(列国)에서 맡긴 남양제도가 있다... 우리 나라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다. 그가운데에도 후지산, 금강산, 세도내해는 널리 알려져있다. 9천만 국민이 우로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들면서 각자 그 업에 매진한다. 세계에 나라가 많지만 우리 나라만한 곳이 다시 없다. 조선어 또는 “조선어 및 한문”과목의 교수방법은 일본어교수에 준하거나 일본어와 련계시켰고 경우에 따라서 일본어로 가르치게 하였다. 교과서내용도 되도록 간단하고 쉬운 것을 골라넣었으며 그마저도 일본문화와 신민지정책이 가득 들어찬것이였다. 조선의 인문, 시가, 문학작품, 풍속, 지방특색 등 사항은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교과서에는 대개 이런 내용의 글들이 실리였다. 一植木 福童이는 四月四日아침에 學校뒤집 老人을 만나서 인사를 엿주엇소. 老人 “어제 너의들은 무슨 일로 그러케 일즉이 學校에 모엿느냐.” 福童 “어제는 神武天皇祭日이올시다. 저의들은 일즉이 모여서 선생님을 따라 學校林에 갓다왓습니다.” 老人 “그러면 植木을 하러 갓드냐.” 福童 “네 學校에서는 神武天皇祭日植木日로 定하고 해마다 그날을 學校林에 가서 나무를 심습니다.” 老人 “그것은 참 조흔 일이다. 죠션은 어듸든지 붉은 山이 만타.”... 력사와 지리교육도 조선력사와 조선지리과목을 각급 학교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대신 보통학교 고급학년에 일본력사와 일본지리를 설치하여 가르치고 중등학교들에 “력사지리”과목을 설치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청소년들의 력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다. 교과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기도 했다. ...이 무렵 조선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이 있어서 이를 3한이라고 했다. 그가운데서도 신라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웠고 세력 또한 강했다. 황후는 먼저 신라를 복종시킨다면 구마소는 스스로 평정될것이라고 생각하여 다께우찌노 스꾸네와 함께 계략을 꾸미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토벌했다. 때는 기원 860년이였다... 황후는 군선을 이끌고 대마도에 건너가 그곳에서부터 신라로 쳐들어갔다. 군선이 바다에 가득하여 그 형세가 매우 성하매 신라왕은 크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동방에 일본이라는 신국이 있고 천황이라는 훌륭한 군주가 있다고 들었다. 지금 오는 것은 바로 일본의 신병일 것이다. 어떻게 방어할수 있을가” 하더니 즉각 흰기를 들고 항복하여 황후의 앞에서 맹세하기를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일은 있을지언정 매년 공물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을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황후는 개선하였는데 그후 백제와 고구려의 두 나라도 또한 우리 나라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선은 천황의 덕에 이끌려 따르게 되고 구마소도 스스로 평정되였다... 이와같이 외곡된 터무니없는 “건국설화”를 꾸며대면서 조선이 예로부터 일본의 종속국이였던것처럼 날조함으로써 조선청년들에게 렬등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그외에도 ‘임진왜란’의 원인을 조선에 들씌워 사실을 외곡했는가 하면 ‘강화도사건’도 조선이 도발했으며 중일갑오전쟁마저도 청나라가 도발한 것으로 외곡함으로써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 력사외곡의 글로 교과서를 일색화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계속)  
57    제57장 로진창전투와 보천보전투 댓글:  조회:2204  추천:0  2014-02-16
불타고있는 보천보의 일제기관들. 로진창에서 악질주구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고 압록강 건너 보천보에서 일제  통치기관 들부셔 1937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제1퇀, 제3퇀, 6사 제9퇀, 제10퇀은 무송현 동강양무띵즈밀영에서 회사한후 령도간부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1936년 가을부터 진행된 반“토벌”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1937년 상반년의 활동방향과 병력배비문제를 토의했다. 적아의 태세를 분석한후 부대를 나누어 유격활동을 진행하면서 적들의 분할포위를 돌파하기로 방침을 제정, 4사주력은 연변지구인 안도, 화룡으로 진군하여 유격활동을 하다가 다시 장백현으로 돌아오며 6사주력은 무송에서 장백현으로 곧바로 나아가 장백산구에서의 유격전을 견지하면서 적들의 1937년 춘기대“토벌”을 분쇄하기로 했다.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다 동강회의후 두만강연안을 거쳐 조선의 무산지구로 진출할 임무를 맡은 4사 1퇀, 3퇀과 사부소속부대 및 6사 9퇀의 300여명 병력은 4사 정위 주수동, 1퇀 최현 등의 인솔하에 며칠동안 급행군하여 돈화현 목단령에 다달았다. 4월초 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북쪽도로에서 군수물자를 만재한 군용마차 20여대를 습격하여 많은 식량과 피륙을 로획하여 결핍하던 군복과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4월 23일 안도현 승평령동남쪽에서 일본군과 맞다들어 격전을 벌린후 적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안도현 로진창부근에 이르렀다. 4사 1퇀 퇀장 최현은 부대의 행동을 보장하기 위해 5명으로 구성된 정찰조를 파견하여 사위의 정형을 정찰하게 했는데 정찰조원들은 적의부대가 지나간 것 같은 많은 발자국이 나있는데 그 발자국에 고인물이 아직 흐린대로 있더라고 보고했다. 이에 최현은 3련을 파견하여 로진창동북쪽 묘령의 경계에 배치하고 주력부대는 수림에서 나와 계곡을 따라 행군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가지 않아 대사하에 이르렀다. 대사하는 워낙 물살이 세고 차거웠다. 게다가 봄물이 져서 부대가 건너려면 다리를 놓아야 했다. 최현은 한 개 련을 파견하여 강에 다리를 놓게 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강가의 금전굴곁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몹시 지친 전사들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코를 골면서 굳잠에 빠져들고말았다. 이때 황구령에서 항일련군에게 군수물자를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리도선은 200여명 병력을 거느리고 은밀히 아군의 뒤를 밟으면서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떠날 때 리도선은 상전앞에서 “이번 길에 공비들은 모조리 소멸하겠다. 만약 한놈이라도 놓친다면 황군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을것이다”고 큰소리쳤다. 토비출신인 리도선은 한때 항일대오속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9.18”사변후 혁명을 배반하고 왜놈의 개다리로 되였다. 총질을 특별히 잘하는 명사수였던 이자는 주구의 자식들이 아니면 반역자거나 명포수들을 모아 부대를 묶어 우두머리질을 했다. 불악귀같은 놈들은 동만일대에서 수천명의 혁명투사와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그 대가로 왜놈에게서 훈장까지 탔으며 안도현치안대 사령의 보좌에까지 올랐다. 이자의 수하 중대장, 소대장은 거의다 왜놈들이였다. 리도선부대는 일본군과 배합하여 항일련군 “토벌”에 나서서 나쁜짓이란 나쁜짓을 다 저질렀다. 이자는 마안산밀영을 포위하고 항일련군 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과 부상병들을 살해했고 처창즈, 황니거우, 석문자, 호로계자, 투도구 홍륭 등지를 여러번 “토벌”하면서 무고한 백성과 항일투사들을 무수히 살해했다. 리도선부대가 지나가는 마을들에서는 무고한 백성들이 무리죽음을 당하게 되기에 안도지방사람들은 리도선을 “저승에서 보낸 악귀”라고 저주했다. 왜놈들의 특수훈련을 받은 이자들은 항일련군의 유격전술에 대해 익숙히 알고있었고 안도일대의 지형, 산세, 인심을 파악하고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계획하고 아군이 휴식하고있는 근처에까지 배밀이로 접근해온 적들은 30~40메터 사이두고 우리의 보초병에 의해 발견되였다. 보초병은 “적이다!”하고 큰소리로 웨치는 한편 방아쇠를 당겼다. 놈들은 아군에게 손쓸 틈을 주지 않으려고 일제히 사격을 가해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전사들은 재빨리 무기를 찾아들고 적들을 향해 맞불질을 했다. 정위 주수동이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사태는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항일련군의 유명한 기관총수 리경달이 벌떡 일어나 적들을 향해 련발사격을 퍼부었다. 뜻하지 않은 불벼락을 얻어맞은 놈들은 잠시 대가리를 땅에 틀어박고 전진을 멈추었다. 하여 아군은 어려운 순간에 귀중한 시간을 얻을수 있게 되었다. 그때를 최현은 회상기 《혁명의 한길에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대원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주위에 널려있는 금점구뎅이와 버럭더미로 분산하여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면서 맹렬한 반격을 가하였다. 쳐들어오던 적들은 적지 않은 시체를 남기고 얼마쯤 물러섰으나 더 물러설곳이 없는 것을 알자 결사적으로 대들었다. 적아간의 화력전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강안이 금시에 포연으로 자욱해졌다. 아군부대들은 버럭들과 구뎅이들을 리용하여 계속 사격하였다. 그리하여 적대렬에는 혼란이 조성되였다. “2중대는 좌측으로. 1중대는 우측으로!” 이것은 불리하게 널려있는 안군진지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구령에 의하여 부대성원들은 적탄이 우박치는 속에서도 대렬을 재정돈하게 되었다. 나는 계속 금점구뎅이에서 허리를 솟구쳤다. 낮추었다 하며 전투를 지휘하고있었다. 그런데 적 두놈이 내앞에 나타나 나를 쏘려고 겨누었다. 순간 나는 허리를 굽혔으나 적탄은 나의 어깨를 때렸다. 나는 부상을 당했지만 전투를 계속 지휘하였다. 전투개시후 거의 반시간이 지나갔다... 아군의 완강한 방어와 명중사격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바득바득 기여들었다. 그때까지만도 적들은 벌써 수십명이나 꺼꾸러졌지만 아군의 턱밑으로 배밀이를 하며 기여드는것이였다. 놈들도 퇴각을 하기만 하면 전멸당한다는 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적아간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져 이제는 20~30메터 지어는 약 10메터까지 된곳도 있었다. 그런데 놈들은 아직도 공세를 취하고 우리는 수세에 처하여있었다. 피동적인 수세에 오래 머물게 되면 필연코 아군부대에 만회할수 없는 불리한 정세가 닥쳐올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놈들에게 반공세를 취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벌써 놈들도 구뎅이와 버럭밑으로 기여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투는 사실상 고착되고말았다. 놈들은 버럭을 몸가림삼고 혹은 구뎅이속에 대가리를 틀어박고 지구전을 시도하였다. 이제는 적들도 우리를 사격하기에 불리했고 우리도 역시 곤난하였다. 그런데 적들의 응원부대가 올 위험성이 있었다. 나는 이때 놈들에게 수류탄을 던질 것을 명령하였다. 우리의 수류탄들이 일제히 눈앞에 널려있는 적들의 음페지를 향해 날아갔다... 연거푸 안겨지는 수류탄불벼락을 받고 수많은 놈들이 비명을 울리며 쓰러지게 되자 남은 놈들이 뿔뿔이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돌격명령을 하였다. 우리 용사들은 도망치는 적들을 향하여 성난 사자와도 같이 함성을 울리며 돌격해나갔다... 아군은 혼비백산한 적들을 총창으로 찌르고 총탄으로 쓰러뜨리면서 5킬로메터나 추격, 일망타진해버렸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전사들은 “신선대”라고 불리우는 리도선의 악질부대와 싸운줄을 모르고있었다. 적들에게 짐군을 강제로 잡혀온 농민들의 말을 듣고서야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전장을 수색할 때 한 농민이 시체사이게 끼여있는 한 군관을 가리켰다. 놈은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으면서도 짐짓 숨진체 가장하고있었다. 농민은 저놈이 리도선이라고 손짓과 눈짓으로 전사들에게 알려주었다. 누군가 달려가 발로 몇 번 차도 놈은 죽은체 꼼짝하지 않았다. 수색해보니 목에는 항상 걸고 다니는 금인형이 걸려있고 호주머니에는 도장이 들어있었다. 틀림없는 리도선이였다. 놈은 총알에 넓적다리를 맞아 도망칠래야 도망칠수 없게 되자 시체더미속에 죽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놈을 발견했던 농민은 꽁무니에 차고있던 도끼를 빼들었다. “윽”하는 소리와 함께 악질주구의 대가리가 땅우에서 딩굴었다. 짐군들은 모여들어 몽둥이와 돌로 그놈의 시체를 죽탕을 만들어놓았다. 그때 현소재지까지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망쳐간 놈이 네놈인데 그놈들도 어떻게나 혼쌀이 났던지 당도하자마자 두놈은 그 자리에서 죽어자빠지고 한놈은 입원치료를 받다가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리도선부대에서 살아남은 놈은 단 한놈뿐인 것이다. 로진창전투는 리도선부대를 완전히 소멸해버림으로써 군사적인 면에서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화광에 휩싸인 보천보 보천보 경찰관주재소의 포대. 천상수와 소덕수를 거쳐 5월중순경 지양개등판에 이른 6사는 압록강을 건너가서 적을 무찌르기 위해 대오정비와 여러 가지 선동사업을 벌리였다. 대원들에게는 승마복형태의 새 여름군복을 지급하였다. 새 군복차림으로 일신한 6사 장병들은 1937년 6월초, 19도구를 떠나 20도구, 21도구, 22도구를 거쳐 구시산이 지척에 바라보이곳에 와닿았다. 앞쪽의 등판이 제비등판이였는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곤장덕과 마주서있었다. 부대는 구시산마을에서 얼마간 머루르다가 제비등판에 올랐다. 6월 3일 새벽이였다. 조선의 높고낮은 산봉우리들이 키돋움을 하면서 6사전사들을 반기였다. 망국의 설음을 안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총잡고 항일련군에 참가한 조선인전사들은 조선땅을 바라보면서 설레이는 가슴을 달랠수 없었다. 그날 부대는 제비등판에서 로독을 풀었다. 선발대원들은 구시물동에 가서 떼목다리를 마련하였다. 6월 3일 밤, 부대는 압록강을 건넜다. 적들이 몇겹으로 경계진을 치고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선을 감쪽같이 건넜던 것이다. 구시물동은 소연한 물소리로 부대의 도하를 감싸주었다. 부대는 지체없이 곤장덕에 올랐다. 곤장덕은 울창한 수림으로 덮여있는 평평한 야산이였다. 여기서 부대는 보초를 세우고 하루밤을 숙영하였다. 다음날은 이른아침부터 곤장덕숲속에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포고, 삐라, 격문도 준비하고 지도부회의도 소집했다. 정찰원들을 농민으로 가장시켜 시내동정을 면밀히 정찰하게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곤장덕을 내리여 곧바로 보천보시가지에 들어선 부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여 소정된 위치를 차지했다. 부대가 어찌도 엄밀히 행동했는지 지휘처로 정한 근처의 농가앞마당에서 흥이 도도해 장기를 두고있던 농민들도 사정을 깜빡 모르고있었다. “땅!” 정각 10시, 김일성은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보천보의 밤하늘에 쏘아올렸다. 신호총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맹렬한 사격으로 적기관들을 들수시였다. 먼저 온갖 폭압과 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이 안기여졌다. 삼림호구에 적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있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부대는 거기에도 드센 공격을 들이댔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혔다. 얼마후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오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삼림보호구, 소방회관을 비롯한 여거래의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리 전체가 여러개의 대형조명등을 설치한 무대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전투는 순식간에 승리로 끝났다.(계속)
56    제56장 장백산기슭에서의 전투 댓글:  조회:2057  추천:0  2014-02-16
서간도 밀강 5도구밀영지에서 6사 장병들과 함께 있는 김일성장군(중간에 앉은이) 용감무쌍한 6사 전사들 림기응변 신출귀몰하면서 곰골  홍두산전투 벌려 일제의“동기대토벌” 분쇄 일제는 림강, 장백현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의 련속되는 타격을 받게 되자 창황히 병력을 집중하여 “동기토벌”을 감행, 장백현에서 활동하고있는 제2군 제6사를 포위섬멸하려고 망상했다. 이것을 간파한 아군은 대부대활동과 소부대활동을 적절히 백합하면서 유인매복전과 불의의 습격전, 철벽의 방어전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대오를 토막내여 소멸하는 전법 등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전술을 활용하여 적들을 반격했다. 적들이 “토벌”을 강화하면 할수록 아군은 밀림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면서 적들을 골탕먹였다. 그중에서도 곰골전투는 밀영에 대한 적들의 기습소탕전을 앞질러 좌절시킨 방어전투의 전범이였다. 곰골에서의 격전 적들의 “동기토벌”이 시작되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은 부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주로 곰골밀영쪽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날 밀영을 탐지하고있는 농민옷차림의 밀정 두놈을 붙잡았다. 밀정들은 아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후 산밑 “토벌대”에 신호를 보낼 임무를 맡고있었다. 밀정의 진술에 의하면 적들은 일만합동 “토벌대”를 편성하고있었는데 그중 한 부대는 이도강을 떠나 곧바로 곰골로 밀려오고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16도구의 마가자 서북쪽을 거쳐 밀영으로 접근하고있는데 자기들이 약속된 신호를 보내면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였다. 이 “토벌”를 위해 회령에 있는 비행기까지 동원하기로 되어있었다. 형세는 급박했으나 적들의 포위환은 아직 완전히 형성되여있지 않고있었다. 아군은 적들이 수색을 벌리면서 밀영으로 조여들고있는 형편에서 밀영근처의 유리한 지대에서 적을 친후 슬쩍 빠져나갔다가 되돌아가는 적을 삼개골지대에서 밤을 리용하여 한번 더 때리기로 작전을 짰다. 곰골의 남쪽은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있었다. 적의 주력이 들어오게 되어있는 골에는 잘룩한 병모가지처럼 묘하게 생긴곳이 있었다. 이 골의 량쪽비탈은 날렵한 산짐승들조차도 발붙이기 힘든 벼랑이였다. 적들을 좁은 홈통속에 몰아넣고 족치기에는 둘도 없는 유리한 지형이였다. 사장 김일성은 2련과 4련을 동북쪽고지에 매복시키고 골안 깊은 곳에 허위진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몇 명의 대원들을 거기에 배치하여 마치 주력이 그곳에 있는것처럼 불도 피우고 소리도 내게 했다. 배치가 완료되자 이번에는 유인조를 파견하여 적진에 들어가 밤새껏 소란을 피우다가 날이 밝으면 대부대가 움직인것처럼 흔적을 내면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유인조는 적진으로 들어갔다. 유인조는 적들을 아군의 주력이 배치되여있는곳으로 끌어오려고 골바닥에 대부대가 지나간 듯이 무질서한 발자국을 내면서 허위진지쪽으로 올라갔다. 잠시후에 그쪽 산비탈에서는 여러개의 우등불연기가 솟구쳐오르고 떠들썩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유인조의 꼬리를 물고 골안에 들어선 적들은 우등불을 피워놓고 법석대는 허위진지쪽에 신경을 모으면서 공격대기를 했다. 적의 척후대는 기마대렬이였다. 잠시 한자리에 몰켜서 골안쪽의 허위진지를 살펴보며 쑥덕거리던 기마척후대의 일행중에서 기병 3명이 골짜기 아래쪽으로 내달려갔다. 반시간쯤 지나 기마척후대는 보병종대를 뱀꼬리처럼 기다랗게 달고 다시 골안에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조선주둔군 함흥 20사단의 패거리들이였다. 정안군장교들은 말을 얻어타지 못한채 졸개들과 함께 도보로 오고있었다. 적부대의 뒤꼬리에는 박격포를 분해하여 기르마에 얹은 대오가 뒤따랐다. 다른 골짜기로도 적들이 기여들었다. 포위환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뻔했다. 아군은 100여명뿐인데 비해 적은 500명도 더 되었다. “땅!” 공격의 신호총소리가 터지자 포위해있던 아군은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공격개시신호를 기다리던 적들은 순식간에 풍지박산이 되고말았다. 적들의 포는 폭탄을 장탄한채 전장에 나딩굴었다. 한바탕 타격을 가한후 아군은 어둠을 타서 슬쩍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아군의 공격, 눈코뜰새 없는 추격, 사나운 추위 등으로 시달릴대로 시달린 적들은 날밝기를 기다리기 위해 으슥한곳에다 숙영지를 마련했다. 이것을 정찰해낸 아군은 적숙영지야습을 주도했다. 야습에는 많은 병력이 필요없었다. 한 개 패의 병력으로 무어진 습격조가 어둠을 타 적의 숙영지로 은밀히 접근해갔다. 습격조는 보초병을 사로잡아 숙영지내막을 알아냈다. 일본군대가 숙영지복판을 차지하고 위만군이 그 두리에 잠자리를 잡고있었으며 짐군으로 끌려간 백성들이 맨 바깥쪽에 총알받이로 배치되여있었다. 습격대원들은 적순찰병으로 가장하고 3명씩 나누어 조를 형성한후 미리 알아낸 군호로 적들을 기만하면서 보초선을 무사히 통과하여 숙영지 한복판까지 들어갔다. 일본군들은 천막안에서 젖은 신발들을 우등불가에 걸어놓고 혼곤히 잠자고있었다. 눈앞의 적들을 향해 습격조원들은 맘놓고 사격을 들이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적들은 신발도 찾아 신을새 없이 허덤벼쳤다. 적아를 가리지 못한 적들은 제놈들끼리 향방없이 마구 쏴갈기기도 하였다. 숙영지는 벌둥지를 쑤셔놓은것처럼 발칵 뒤집히였다. 혼란한 틈을 타 습격조원들은 감쪽같이 빠져나왔다. 적들은 저들끼리 밤새껏 총격전을 벌려 무리죽음을 냈다. 어떤 놈들은 신발도 외투도 찾아신지 못하고 간신히 도망치긴 했지만 동북림해의 11월의 강추위에 거의다 얼어죽고말았다. 홍두산전투와 도천리전투 횡산에서 1937년의 음력설을 보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은 일부 장병들을 거느리고 홍두산밀영으로 돌아왔다. 아직 행장도 풀지 않고있는판인데 망원초쪽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울려왔다. 적들이 쳐들어오고있었던 것이다. 정황은 아주 긴박했고 형세는 아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아군의 병력이란 기관총반과 리두수네 련의 대원 몇 명뿐이였다. 반면 적의 병력은 아군의 몇배나 더 되었다. 그런데다가 망원초에서 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적들이 이미 망원초고지에 거의다 접근하고있을 때였다. 아군은 완전히 적들의 제압군내에 들어버리고 말았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투원들은 재빨리 남쪽릉선을 차지했다. 김일성은 리두수련장에게 지시하여 망원초의 대원들을 철수시키고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도록 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망원초의 대원들로 하여금 반드시 적들이 눈에 뜨이게 칼릉선을 타고 내려오게 하였다. 망원초로 통하는 칼릉선은 한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깊은 골짜기의 눈속에 굴러떨어져 파묻힐수 있는 외통길이였다. 망원초의 전사들은 과연 적들을 칼릉선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적들은 자석을 따르는 쇠붙이처럼 망원초의 아군전사들의 뒤를 꼭 물고 칼릉선에 올라섰다. 홍두산 남쪽릉선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은 기다싶이하면서 가파른 릉선에 매달려있는 적들을 손금보듯 내려다보면서 경기관총을 휘둘렀다. 불의의 사격을 받은 적들은 퇴각한다는 것이 릉선아래 골바닥에 갇혀버렸다. 골짜기에 갇힌 적들은 이번엔 남쪽릉선을 오르려 했으나 남쪽릉선 비탈은 얼음강판이였기에 아군의 진지로 근본 접근할수 없었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거의 전멸되다싶이했지만 아군은 단 한명의 부상자를 냈을뿐이였다. 홍두산전투후 6사 주력은 장백현 하강구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적들은 다시 대병력을 긁어모아 항일련군을 찾아 대대적인 수색전을 펼치고있었다. 아군의 주력부대가 하강구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적들의 력량을 분산시켜놓고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의 “동기토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겨우내 항일련군을 뒤쫓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허탕만 치던 적들도 6사 주력부대를 찾아 헤매이다가 지금 도천리부근에 주둔하고있었다. 요방자에서 도천리나 최령감골로 가려면 봇나무, 자작나무, 가시나무와 키가 넘는 갈대며 새초풀들이 얼기설기 뒤엉킨 무연한 15킬로메터의 소로길을 지나야 하였다. 만약 이 길로 적들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적들은 외줄로 행군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아군은 진대통이 가로놓인 요소요소에 매복해있다가 손쉽게 적들을 토막쳐 족칠수 있을것이였다. 유인조는 적들이 나타나자 그 선두대렬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한후 재빨리 몸을 피하여 가시덤불 등판으로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복병이 있는줄도 모르고 적들은 아군의 그림자를 뒤쫓아 무작정 가시덤불밭으로 뛰여들었다. 적들에게 있어서 가시덤불은 가시철조망과 다를바 없는 장애물이 아닐수 없었다. 가시덤불의 성화 때문에 적들의 대오는 토막토막 끊어지였다. 숨어있던 매복조성원들은 토막난 적대렬을 향해 사정없는 사격을 안겨주었다. 수백명의 적들은 아군의 토막치기전술에 걸려들어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갈팡질팡할뿐 어쩌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진맥진한 적들은 공포를 꺼안은채 도천리마을로 철퇴하고 말았다. 도천리마을의 항일련군 지하조직에서는 “공비군”을 소멸하러 온 장병들을 위로한다면서 닭도 잡고 쌀도 찧어 떡을 만들면서 우정 저녁식사를 늦잡아놓았다. 결국 패배의 수치도 모르고 만포식한 적들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마을앞 큰길 좌우에는 언녕부터 항일련군 전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이런줄도 모르고 늑장으로 부리면서 지나가던 적들은 갑자기 터지는 수류탄과 씽씽 날아드는 총알의 세례를 톡톡히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매복전에 걸려든 적들은 완전히 괴멸되고말았다. 새초가 깔린 등판에 적의 주검이 한 벌 널려있었다. 아군은 시체들에서 총만 벗겨가지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 시체들을 실어나르느라고 적들은 24대의 소발구를 동원했다고 한다. 그 소발구 하나에 주검 9구씩 싣고 13도구까지 날라갔다고 하니 이날 황천객이 된 적들은 200명도 더 될것이였다. 적들의 “동기토벌”에 맞서 아군은 몇백차의 전투를 벌리면서 끝내 “토벌”을 분쇄했다. 항일련군의 련전련승으로 하여 장백땅은 완전히 항일련군의 세상이 되고말았다. (계속)  
55    제55장 장백유격근거지의 개척 댓글:  조회:2389  추천:0  2014-02-14
  장백밀림속의 곰골밀영. 장백림해에 대량의 밀영을 건설해 유격활동에 돌입 낮이면 적의 세상이다가도   밤이면 우리 세상 되여 림해에 세워진 밀영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적들의 “토벌”에 주동적으로 반격하면서 정치적영향력을 확대, 1936년말에 이르러서는 장백일대의 광활한 지역이 공산당과 항일련군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장백산지구는 서간도와 조선, 북간도를 련결하는 삼각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거점이기에 이 일대를 통제하는 것은 자못 중요했다. 이런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2군 주력은 장백산지구에 대량의 밀영을 건설하여 유격활동에 돌입하였다. 그때로부터 장백일대는 일제와의 교전회수가 가장 많고 총포성이 가장 높은 전장으로 되었다. 밀영건설은 대부분 소분대의 몫이였다. 소분대는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파견되여 가서 지점을 선택한후 밀영을 건설했다. 이런 밀영은 키가 낮은 온돌식영방이였는데 일반적으로 나무가 밀집해있는 높은 산의 복부에 건설했다. 밀영은 목제형과 석제형이였다. 목제형은 통나무로 짓는 귀틀집이였는데 바닥을 몇자 파들어갔기에 밖에서 보기에는 키가 낮아보아나 집안은 높았다. 지붕은 나뭇가지나 풀로 덮어 위장하고 주위에 나무와 풀을 옮겨심어 외부의 시야를 가리였다. 실내는 구둘로 덥히였는데 연기는 밖에다 낸 고랑을 따라 2~3리 상거한곳에 가 피여오른다. 이런 고랑도 초목으로 가리워놓아 얼핏 발견할수 없게 했다. 석제형은 산기슭을 리용하여 건설했는데 산세를 따라 몇메터 파들어간후 돌을 쌓아 만든다. 산굴식의 집이여서 보온성이 강해 좋았다. 이런 밀영은 물론 수원이 충족한곳에다 지였다. 1936년 봄 항일련군 2군이 안도현과 무송현 경내에서 활동할 때 이미 이런 밀영을 리용한적 있는바 미혼진밀영, 로투띵즈밀영, 마안산밀영 등이 그것이였다. 이번에 장백, 무송일대에 대량적으로 밀영을 건설했는데 무송, 장백, 안도, 금천, 관전, 류하, 몽강 등지에 건설한 밀영들로는 곰골밀영, 홍두산밀영, 양무띵즈밀영, 나얼훙밀영, 띠수이라즈밀영, 청봉밀영 등이다. 조선쪽에도 밀영을 건설했는데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밀영 등이다. 2군에서 건설한 밀영은 건축방식이 령활하고 다양했으며 전용성이 강했는바 영방, 지휘부, 통신처, 정훈부, 수리소, 인쇄공장, 학교, 간부훈련소, 량식창고 등 다종다양했다. 밀영마다 용도와 크기가 달랐다. 2군 6사에서 장백에다 건설한 곰골밀영은 비교적 규모가 큰 밀영이였는데 밀영은 장백현소재지에서 90킬로메터, 이도강에서 40킬로메터 떨어진 백두산동남부 90킬로메터 지점의 심산밀림에 자리잡고있었다. 곰골밀영은 남으로 19도하가 막아서 있고 서로 홍두산맥이 둘레를 쳐주고있어 천연적인 유격근거지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6사는 여기에다 부대병영, 련락처, 병기공장, 병원, 수군학교 등을 세웠다. 어떤 밀영은 길이 30메터, 너비 8메터, 높이 2.6메터로서 비교적 규모가 컸는데 한꺼번에 200여명을 용납할수도 있었다. 이러한 밀영을 리용하여 항일련군은 숙영문제를 해결했을뿐만아니라 자신을 엄호했으며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군중과 련계, 신출귀몰하면서 유격전을 벌려나갔다. 낮이면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남만에 온후 유격근거지를 개척함과 동시에 유능한 간부와 공산당원들을 인민군중속에 파견하여 선전고동활동을 벌리였다. 그들은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조국광복회, 청년동맹, 반일회, 부녀회, 반일소년단 등 군중적인 혁명단체를 결성했다. 1936년말부터 1937년 2월, 장백현 20도구에 조국광복회장백현공작위원회를 건립, 산하에 수십개의 기층조직을 세웠다. 이시기 장백현 19도구에 권영벽을 서기로 하는 중공장백현위원회를 건립하고 아래에 3개 특별지부와 10여개 직속 지부를 두었다. 적들의 통치지구에 건립된 군중단체들은 중공장백현위의 령도아래에서 군중을 발동하고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이런 군중단체들은 또 량식과 병력을 보충하는 큰 뒤심이기도 했다. 이 시기 300여명 청년이 항일련군 제2군에 참가했다. 반일단체에서는 당조직의 령도하에 청년들을 골간으로 하는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유격대는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반군사조직이였는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생산로동에 참가하여 량식을 생산해 항일련군에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적정을 정찰하거나 보초를 섰으며 유사시에는 항일련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장백항일유격근거지는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때와 같지 않았다. 연변의 유격구는 해방지구의 유격구였는데 유격구에서는 적구의 군중들을 쓴외보듯 했으며 지어 적통치지구의 인민들에 대해 “백색군중”이라고 하면서 적대시하였고 중간지대의 군중들에 대해서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경원시하였다. 그러나 장백에서는 군중을 “적”, “백”으로 갈라놓는 실책을 피해 적점령구 깊이에까지 들어가 군중공작을 하여 항일하려는 모든 군중을 단결, 투쟁에로 불러들였다. 하여 집단부락의 경비를 맡은 자위단원들속에도 우리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적들의 기층정권기관에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공작인원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대부분의 구장, 촌장, 툰장자리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원들의 심부름을 해주는척하다가도 밤이 되면 회의도 하고 야학도 꾸리고 항일군에 보낼 후방물자수집도 하고 원호미도 찧으면서 바쁘게 돌아쳤다. 하여 낮이면 적의 세상이지만 밤만 되면 우리들의 세상이였다. “언제인가 우리는 팔도강이라는 집단부락에 식량공작을 간 일이 있었다. 팔도강의 자위단에는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이 있었다. 우리 소분대는 이 공작원의 련락을 받고 혁명가요를 부르며 곤두총을 쏘면서 마을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자위단의 무장은 해제하지 않고 공작원이 미리 마련해놓은 식랑만 가지고 돌아왔다. 유격대가 철수한 다음 공작원은 일본인경찰을 찾아가 유격대가 마을을 들이치고 식량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포대만 점령하지 못하였다. 포대 때문에 자위단이 살아났다고 하면서 놈들을 속여넘기였다.”(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광활한 심산밀림속에서 유격활동을 벌렸을뿐만아니라 적점령구의 반일단체와 인민군중들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받으면서 부대를 장대시켰다. 반"토벌"전투 장백지구에서의 항일련군의 맹활약은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이에 관동군은 동변도를 포함한 만주일대에 항구적인 치안대책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만들기에 이르게 되었고 만주국정부는 “3개년치안숙정계획요강”을 내놓았다. 가장 중심적인 특별공작대상자로 정한 것이 바로 북부동변도 즉 장백, 림강, 무송, 동강, 휘남, 금천, 류하, 통하, 집안 등지였다. 위만주국은 중앙에 “동변도부흥위원회”를, 통화에 “동변도부흥판사처”와 “동변도특별치안유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만주국군부 최고고문인 사사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화토벌사령부”를 내오고 북부동변도의 치안확보를 겨냥하는 “동기대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의 동기토벌을 대비해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2사와 제2군4사, 6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의 령도하에 장백, 무송, 몽강, 안도 등 현에다 많은 밀영을 건설하고 대량의 량식과 군수물자를 축적, 반“토벌”전을 준비했다. 반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국경일대에는 각양각색의 “토벌”부대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였다. 남부조선의 경찰부대도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치치할에 있던 광동군부대들도 장백산쪽으로 남하기기 시작했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 산하 부대들도 압록강을 건너왔다. 일만경찰부대들과 위만군“토벌대”들도 항일련군을 향해 몰려들었다. 압록강연안에는 경찰관주재소들이 부쩍 늘어났다. 곳곳에 단속초소들이 생겨났으며 강우로는 전화선들이 줄줄이 늘어졌다. 바로 이 무렵부터 적들은 경찰관의 아내들까지 사격훈련을 시키였다. 달구지나 발구, 말파리 같은 것이나 겨우 드나들던 백두산일대 두메산골 오솔길들로는 대표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게 되었고 밀림속 곳곳에 군마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지기 시작했다. 장백산지대는 “토벌대”들로 쫙 덮혔다. 적들은 “이번 토벌을 최종적인 것으로 하여 치안을 결정적으로 확립한다”고 하면서 장백산일대를 참빗질하였다. 그러나 항일련군의 기동령활한 유격전앞에서 적들은 간곳마다에서 골탕을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 10일, 2군 4사와 6사의 400여명 전사는 안도현남부의 동청구부근에서 위만군 제7려 14퇀을 습격 일본군 대좌와 중좌를 비롯한 10여명을 격살했다. 이에 적들은 5000여명 병력을 긁어모아 4사와 6사를 포위추격해왔다.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 등은 부대를 이끌고 무송, 림강, 몽강 등지의 림해설원으로 적들을 끌고다녔다.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면서 이곳에서 한바탕 두둘기고 저곳에서 뒤통을 답새기면서 적들의 추격을 파괴해버렸다. 11월 4일,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는 대양차위만군주둔지를 물샐틈없이 포위한후 맹렬한 공격하는 한편 정치공세를 들이대 10여분만에 적들이 두손들고 투항하게 했다. 하여 아군은 기관총 2정, 보총 150여자루, 탄알 15상자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으며 적들의 장백산지구로 들어오는 목이나 다를바 없는 군사요충지를 회멸해버림으로서 장백산지구 각 현 항일유격선로를 개통해놓았다. 11월하순, 2군에서는 무송현 소탕하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정보를 알아낸 적들은 600여명 병력을 동원해 소탕하를 향해 진군해들어왔다. 소탕하서북측의 고지를 점령한 적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아군의 주둔지를 향해 돌연적으로 습격해왔다. 왕덕태는 1개 패를 파견하여 군중을 엄호하면서 후퇴하게 하고 군부 교도퇀 1개 련을 적들의 등뒤로 빠져나가게 하여 앞뒤로 적을 포위해버리려 했다. 적들의 공격을 점점 거세져 전투는 갈수록 가렬해졌다. 아군의 희생자도 점점 많아졌다. 긴요한 관두에 아군의 기관총수가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적들은 머리를 쳐들고 미친개마냥 달려들었다. 이때 6사 8퇀 정위 김산호가 비발치는 총탄을 맞아 받아 달려나가 쓰러진 전우의 손에서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돌격해오던 적들을 기관총사격에 폭폭 쓰러졌다. 그러나 그마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눈앞에서 두 전사가 쓰러지는 것을 본 왕덕태는 벌떡 일어나 전우의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은밀히 파견되였던 교도퇀은 끝내 적들의 뒤등으로 공격해왔다. 최현퇀장이 인솔하는 4사 1퇀도 정면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넘어서야 부대는 적들의 포위를 완전히 뚫고 나올수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가 불행히도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왕덕태는 겨우 28살이였다. 왕덕태가 희생된후 제2군의 모든 령도중임을 위증민이 맡게 되었다. 위증민은 2군 4사, 6사와 1군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다시 림강으로 전이했다. 12월 2군의 4사와 6사의 200여명 병력은 림강의 5도구에서 위만군과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격살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1937년 양력설, 500여명의 일만군이 6사의 홍두산밀영을 습격해왔다.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림강일대에서 활동하고있어 밀영에는 30여명의 전사들이 남아있을뿐이였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접한 전사들은 주동적으로 밀영을 비워놓은후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련속하여 적들을 볶아댔다. 이곳저곳에서 얻어맞은 적들은 100여구의 시체를 남긴채 창황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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