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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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54장 장백으로의 진격 댓글:  조회:2170  추천:0  2014-02-14
  무송현전투때의 소남문포대. 무송에서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해 적을 호되게 타격 대덕수 소덕수 반절구 전투에서 항일련군 위망 떨쳐 무송현소재지전투 1936년 8월, 쟝쟈탕즈밀영에서 제2군 제4, 제6사, 제1군 제2사의 주요한 간부들과 장백산지대에서 활동하고있는 의용군 두령들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참가자들은 병력을 집중, 련합작전하여 무송의 중요한 진들을 습격하기로 작전방침을 정했다. 8월중순, 제2군의 1500여명 주력부대와 항일구국군 리홍빈부대, 항일의용군 구참, 만순, 만군부대의 600여명은 쟝쟈탕즈회의 부서에 좇아 무송현 서북부에 집결하였다. 군중을 발동, 단결하고 항일련군의 영향면을 확대하기 위해 제2군 군부는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하여 무송현소재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무송은 통화지구 일만군의 큰 거점이였다. 일제는 무송을 “동변도치안숙정”의 중점거접으로 삼고 실전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다까하시 한 개 중대의 일본군 정예부대와 위만군 한 개 영, 위만경찰 한 개 대대 도합 1000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있었다. 무기장비가 좋고 탄알도 충족했으며 견고한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 있어 일제는 무송을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라고 자부하고있었다. 그런만큼 무송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것은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아주 의의가 컸다. 무송현소재지공격은 장백산서북부일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는 전투로 될것이였다. 제2군 6사 사장 김일성은 한때 무송에서 지낸적있기에 시가지를 손금보듯 알고있었고 항일부대의 영향하에 있는 위만군 한 개 중대가 서문보초를 서고있어서 작전에 퍽 유리했다. 위만군 왕부중대장은 아군이 성시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는 시간에 성문을 일시에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8월 16일, 6사의 한갈래 부대가 돌연히 무송현소재지부근의 송수진을 습격하여 적들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다른 한갈래 부대는 김일성의 포치에 따라 안도, 몽강, 림강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했다. 전투개시시간을 17일 새벽 1시로 정하고 부대가 급보로 행군하여 성문앞에 다달았으나 위만군 반일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준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교대시간이 되어 다른 병사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때문이였다. 위만군 반일병사들은 기관총의 기관실에 모래를 쓸어넣고 초소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성문을 은밀히 열고 성안에 돌입하여 적들을 일격에 섬멸하려던 작전계획은 일단 뒤틀려졌다. 그렇다고 하여 전투를 정지할 수는 없었다. 8월 17일 새벽 3시, 드디여 무송현소재지를 공격하는 아군의 총소리가 울리였다. 주공임무를 맡은 6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동산포대를 점령하고 대남문, 소남문 방향으로 공격하여 성안의 적을 소멸하기로 되어있었다. 반일부대는 동문과 북문 방향을 담당하기로 되었다. 공격명령을 내리기 바쁘게 동산포대를 점령한 김일성부대는 소남문방향을 향해 돌진해갔다. 반일부대 병사들도 북문과 동문쪽으로 진공하였다. 소남문앞거리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성문으로 육박하는 아군을 향해 포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들이 짖어대는 기관총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그러나 아군은 기관총중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성문을 까부시고 시내로 돌입해들어갔다. 그런데 6사 전사들이 육탄으로 돌파구를 열어놓은 그 시각에 북문을 공격하던 만순부대가 적의 포성에 질겁하여 퇴각한다는 련락이 날아왔다. 조금후 동문을 담당했던 리홍빈의 부하들이 반격해오는 적을 막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한탓으로 동문을 나선 적들이 모조리 소남문쪽으로 밀려오고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광이 책임진 소부대가 만량하습격전투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보고까지 날아들었다. 만순부대의 공격서렬이 수라장으로 되자 그 여파가 익측에까지 미쳐 리홍빈부대도 풍지박산이 되었다. 전국을 미처 수습하지도 못하였는데 벌써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고있었다. 정황은 아군에게 시시각각으로 불리해지고있었다. 아군은 예상외로 적의 병력이 증가된 상황에서 적을 밖으로 끌어내다 족치려 했다. 그때를 김일성회억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앞에는 날이 완전히 밝기전에 전장에서 철수하든가, 아니면 정면돌격의 방법으로 결사전을 벌리든가 하는 두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인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품은 다음에도 인명피해가 두려워 퇴각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늘이 우리를 돕는 기적이 생기였다. 현성과 그 주변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서리면서 한치앞도 가려볼수 없는 천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각 부대들에 흩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동산과 소마록구 릉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적들은 퇴각하는 아군을 미친 듯이 따라왔다. ...7련대 주력은 자욱한 안개를 리용하여 동산남쪽고지에 긴 매복진을 쳤다. 반일부대들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맞은켠 릉선을 차지하였다. 그때에야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중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안개 낀 골짜기로 깊숙이 철수하였다. 그들도 나중에는 골짜기 막바지에 있는 산등성이에 올라 감쪽같이 매복하였다. 시참으로 악명을 떨친 다까하시부대는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의 함정속으로 모조리 끌려들어왔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셈이였다. 우리는 산에서 내리쏘고 적들은 골짜기에서 올리쏘는 화력전이 얼마동안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다까하시는 사병들은 만순이 용맹의 전범이라고 말하던 그런 악독한 전술로 파장식돌격을 들이댔으나 매번 주검만 남기고 물러서군하였다. 돌격이 은을 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총질을 멈추고 산기슭에 붙어 증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리였다. 나는 반돌격명령을 내리였다. 류창한 나팔소리와 함께 매복진에서 뛰쳐일어난 아군용사들은 적들을 닥치는대로 쓸어눕히였다. 백병전의 선두에는 “연길감옥”이란 별명을 가진 7련대의 분대장 김명주가 서있었다. ...김명주가 연길감옥에서 탈옥투쟁을 할 때 그를 희생적으로 도와준 8련대의 중대장 려영준도 이 전투에서 “칠성자” 못지 않게 잘 싸웠다... 유격대의 “녀장군” 김확실은 시종 두눈을 부릅뜨고 기관총을 쏘았다. ...김정숙이 량손에 싸창 한자루씩 거머잡고 기관총으로 련발사격을 하듯이 불질을 하여 10여명의 적을 쓸어눕혔다는 일화도 무송현성 전투가 빚어낸것이였다. ...다까하시의 “정예부대”는 동산골짜기에서 전멸을 면할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그날 오전중으로 관동군사령부에 보고되였다. 훗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보고 알게 된데 의하면 그때 신경비행장에서는 무송주둔군을 지원하려고 폭탄과 탄알을 만재한 군용기들이 떠올랐고 통화, 환인, 사평가 등지에서는 증원부대가 긴급히 출동하였다. 중강진수부대도 무송으로 급파되였다... 다까하시를 구원하기 위한 적의 병력은 림강, 장백, 몽강을 비롯한 린접 현들에서도 홍수처럼 밀려오고있었다. 그러나 비상한 속도로 추진된 이 발광적인 수습책도 다까하사를 함정에서 건져내지는 못하였다. 8월 17일 오후 일부증원부대들이 무송에 들이닥쳤을 때는 벌써 승패가 결정된 뒤였다. 아군이 진지수색을 끝마치고 깊은 수림속으로 승리적으로 철수해가고있을 때에야 신경에서 날아온 적기들이 공중에서 우릉거리기 시작했다. 적기들은 아군에 의해 파괴된 동산포대와 현소재지 부근의 주민가옥들에 눈먼 폭탄들을 마구 내리던지였다. 무송공격전에서는 아군은 비록 현소재지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항일련군의 위망과 정치적영향력을 크게 과시했다. 장백에서 벌린 전투 무송현소재지공격전을 끝낸 항일련군 제2군 제6사는 되골령을 넘어 장백현으로 진출한후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발전구전투, 이도구전투 등 비교적 규모가 크고 치렬한 전투를 벌리였다. 1936년 9월 1일, 김일성의 령솔하에 이도강서남의 대덕수촌에 이르러 항일선전을 위한 연극공연을 펼쳐보이려고 금방 무대가설을 끝냈는데 200여명 일본군 “토벌”대가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부딪친 6사 전사들은 사장 김일성의 지휘하에 군중들의 지지성원을 받으면서 교묘한 매복전을 벌리였다. 부대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리게 되었다. 적들이 보리밭 맞은편에서 고랑을 따라 접근해왔다. 적들이 보리밭을 거의다 벗어져나오기를 기다려 아군의 사격신호가 울리였다. 항일련군이 매복해있을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적들은 어쩔새 없이 호되게 얻어맞았다. 대패한 적들은 이동강쪽으로 도망쳤다. 그날 아군은 적 40여명을 소멸하고 기관총 1정, 보총 40여자루 로획했다. 전투의 승리를 경축해 대덕수마을 군중들은 감자떡을 치고 농마국수를 눌러 전사들을 위로했다. 전사들은 간단한 공연과 항일선전으로 답례한후 마을을 철퇴했다. 대덕수를 떠난 부대는 소덕수등판에서 숙영한후 마등창수림속에 이동하여 휴식했다. 어떤 전사들은 한창 굳잠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적들의 총소리가 울렸다. 15도구방향과 이도구방향에서 밀려온 적들이 남북량쪽에서 거의 동시에 달려들고있었던 것이다. 무성한 숲은 적아를 구분하기 어렵게 했다. 아군이 감쪽같이 빠져나가면 적들은 저들끼리 맞붙을 가능성이 충분한 기회였다. 이에 사장 김일성은 마등창수림에서 슬쩍 빠져서 15도구등판으로 철수하라고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아닌게 아니라 아군이 철수하자마자 맞다들어 쏘아대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아군은 등판에서 저들끼리 싸우는 꼴을 실컷 구경할수 있었다. 적들은 좋이 서너시간을 싸웠는데 이동강쪽패가 정 못견디겠던지 먼저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15도구패들도 제편끼리 싸운줄 알았는지 사격을 중지했다. 그날 전투에서 일본군수비대 70여명을 포함하여 적 150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날 적들은 담가가 모자라 신창동의 집집마다에서 문짝이라는 문짝은 다 뜯어다가 저들의 시체를 거두어가지고 황황히 꽁무니를 뺐다. 대덕수, 소덕수전투의 승리는 광범한 인민대중을 크게 고무했는바 젊은이들은 용약 항일부대를 찾아와 참군할 것을 지원했다. 9월 12일, 6사는 다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반절구에 대한 야간습격전을 벌리였다. 반절구는 장백현에서는 비교적 큰 촌락이였고 적들의 군사요충지였다. 적들은 부락에다 적지 않은 일본경찰과 위만군을 주둔시키고있었다. 6사는 3시간여의 치렬한 전투를 벌려 반절구를 점령, 경찰서를 까부시고 위만군거점을 뿌리뽑아버렸다. 10월 19일부터 24일까지 6사는 련속하여 이도강, 이십도구에서 많은 일만군 유생력량을 소멸했다. 하리회의후 장백현일대로 진격한 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는 일만군을 호되게 타격해 항일련군의 성망을 높였으며 남만인민들의 반일정신을 크게 고무격려했다. 또 항일련군부대가 장백현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훌륭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계속)  
53    제53장 동북항일련군제1로군건립 댓글:  조회:2225  추천:0  2014-02-14
김일성의 친필원고. 하리회의서 조선인공작회복할데 관한 결의 채택 중국혁명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인 이중사명 제시 조국광복회 결성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김일성회고록(제4권)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창립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다 모여왔으나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까지 보내왔던 남만의 전광(오성륜)이 대회가 끝나도록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오지 못하였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을 타고 교원대표와 로동자대표 각각 한사람씩 왔다. 력사적인 조국광복창립대회는 5월 초하루날부터 시작되였다. 꽃은 만발하지 못하였지만 만산에는 봄빛이 짙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다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간이나 진행되였다... 창립대회에서 김일성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힘있게 전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진술한후 “조국광복회10대강령”(김일성 작성)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김일성 작성)을 대회심의에 붙였다. 대표들은 심중한 토론을 건친후 강령과 선언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2. 재만 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련합으로써 일본 및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령토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현할 것. 3. 일본 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써울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4. 일본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5.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해없이 발전시킬 것.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전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실현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발할 것. 7. 량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벌없는 인륜적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 것. 8. 노예로동과 노예교육의 철페, 강제적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9. 8시간로공제실시, 로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로동범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로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 것. 10.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련합하여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친선을 유지할 것. 5일동안의 토의를 거친후 김동명(김일성), 리동백,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이 채택되였다.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여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력량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반일회, 농민협회, 부녀회 등 각종 반일단체의 조선인들을 조국광복회두리에 묶어세워 반일에 총궐기시키게 했다. 강령에는 중조민족과 일본제국주의자와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된 정황하에 신변에 쌍중임무를 걸머진 동북조선인들이 반드시 해결하고 리행해햐 할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대외정책 등 제 방면의 문제가 명백히 제시되였으며 한 방면으로는 중국혁명에 참가해야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는 중조공동항일무장투쟁의 정책도 구현되여있었다. “조국광복회는 민족주의세력을 비롯한 모든 반일력량은 한데 뭉치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였습니다. 과거의 계급투쟁을 버리고 평화, 민주주의기치하에 일체 항일력량을 포섭, 전민족이 항전에 떨쳐나서기 위해서였습니다. 중국인들은 구국회두리에 뭉쳐 항일에 떨쳐나섰습니다.”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된후 김일성은 권영벽 등 30여명의 정치공작원을 장백산일대의 농촌에 파견하여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하여 7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결성, 리제순이 회장을, 장증렬, 황금옥이 각기 청년부장, 부녀부장을 맡았다. 1937년초 장백현조국광복회는 산하에 상강구위와 하강구위를 두었다. 상강구위산하에는 신흥촌, 행산, 19도구, 주경동, 대사동, 평강동, 왕가동, 치부동 등 9개 지회를 두었고 하강구위산하에는 도천리, 요방자, 14도구, 신방자, 탕성리, 태호산, 팔도구, 구도구 등 8개 지회를 두었다. 지회산하에는 49개 분회를 두었고 회원은 수천명에 달하였다. 금천하리회의 4개월 남짓 되는 간고한 려정을 거쳐 동북항일련군 제2군 주력부대인 제1사와 제3사는 안도, 돈화, 무송, 림강, 몽강 등지를 전전하다가 1936년 6월 드디여 남만의 금천현 하리항일유격근거지에 다달았다. 7월 4일, 중공남만특위에서는 금천하리의 후방기지인 혜가구밀영에서 50여명 대표가 참가한 제2차 당대표대회를 거행했다. 중공동만특위서기이며 제2군 정위인 위증민이 한 개 련의 병력을 이끌고 때마침 하리에 도착하여 회의에 렬석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만공산당조직과 제1군에 공산국제 제7차 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하려던 위증민은 직접 대회에서 상기의 정신을 보고하게 되었다. 대표대회에서 제1군 군장 양전우가 군사보고를, 중공남만특위서기 리동광(조선인)이 당의 지방사업보고를 진술했다. 대회에서는 중공남만특위 제1차 대표대회이래의 경험과 교훈을 총화하고 금후의 사업방침과 책략을 제정,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고 당조직과 항일련군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킬 문제를 토의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또 조선인공작을 회복할데 관한 결의가 채택되였으며 조선인은 일제를 타도한후 자원의 기초에서 동북에 남아 자치를 실현할수도 있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에 몸바칠수도 있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중공남만당대표대회가 페회된 며칠후인 7월 7일, 위증민과 양정우는 금천하리에 있는 항일련군 제1군 밀영에서 중공동남만특위 및 제1, 제2군 주요한 령도간부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는 양정우, 위증민, 리동광, 류좌건, 왕인재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 위증민이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의 정신과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중공만주성위를 철회하고 동만, 남만, 길동, 송강 4개 성위를 조직하며 항일련군을 “로군”으로 편성할데 대한 지시정신을 전달했다. 회의에서 양정우가 동북항일투쟁의 새로운 형세를 분석하고 동북지구의 중공당과 항일련군부대의 목전의 전투임무를 제시했다. 회의에서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연변지구와 동변도지구에서 활동하고있는 제1군과 제2군을 합병하여 동북항일련군 1로군으로 재편성할 문제와 두 지구의 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동남만성위를 건립할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했다. 연변지구의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미 적들에 의해 파괴되였고 제2군의 주력도 이미 남만으로 전이해온 상황이다. 이것은 1,2군의 배합작전과 공산당의 통일령도에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하여 회의에서는 중공동남만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남만성위 혹은 중공남만당조직을 합병하여 중공남만성위로 재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위증민이 중공남만성위서기로 선거되였다. 위증민, 양정우, 왕덕태, 리동광, 리학충, 조아범, 김일성, 이준산, 안이화, 주수동, 진한장, 왕윤성, 송철암, 려백기, 전광, 왕인재 등 16명이 중공남만성위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회의에서는 제1, 제2군을 련합하여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으로 편성하고 통일적인 군사지휘기관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부를 조직했다. 총사령 겸 정위를 양정우가 맡고 부총사령을 왕덕태, 총정치부 주임을 위증민이 맡았다. 제1로군산하에 제1, 제2군을 두고 6개 사를 배치했다. 원래의 제1군의 1, 2, 3사는 그대로 편제를 두고 제2군의 3개 사를 4, 5, 6사로 개칭했다. 제1군 군장과 정위를 양정우가 겸직하고 정치부 주임을 송철암, 참모장을 안광훈이 맡았다. 제1사 사장에 정빈, 정치부 주임에 호국산, 참모장에 리민환, 제2사 사장 겸 정위에 조국안, 참모장에 리희민, 제3사 사장에 왕인재, 정위에 주건화, 참모장에 양준항이 임명되였다. 제2군 군장을 왕덕태, 정위를 위증민, 정치부 주임을 리학충, 참모장을 류한흥이 맡았다. 제4사 사장에 안봉학, 정위에 주수동, 참모장에 박덕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 제3퇀 퇀장에 랑화가, 정위에 주수동이 임명되였다. 제4사 사장에 사충항, 정위에 왕윤성, 참모장에 진한장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는데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제5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왕송백이 임명되였다. 제6퇀은 퇀장, 정위를 정하지 않고 사부에서 직접 령도하기로 했다. 제6사 사장에 김일성, 정위에 조아범이 임명되였다. 아래에 4개 퇀을 두었는데 제7퇀 퇀장에 손장상, 정위에 김재범, 제8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왕진아,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정위에 김산호, 제10퇀 퇀장에 서학충이 임명되였다. 2군 병력은 근 3000여명 되었는데 조선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있었다. 하리회의에서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유격활동방침과 임무를 확정하고 제1, 제2군과 각 사의 활동구역을 획분했다. 제1군 군부와 제1, 제3사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렬하, 수원으로 서정하여 관내 홍군들의 동정과 배합하라는 지시에 좇아 료남, 료서로 진군, 광활한 지역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유격전쟁을 벌리기로 하고 제2군 군부와 제2, 제6사는 무송, 몽강, 통화, 장백, 림강 등 로유격구에서 투쟁을 견지하면서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로 했다. 제5사는 동만, 수녕 지구에 남아 제5군과 배합하여 유격활동을 벌림과 동시에 제1로군과 남만성위, 제3, 제5군 및 북만, 길동 당조직과의 련계를 확보하기로 했다. (계속)  
52    제52장 남북만으로의 전이 댓글:  조회:2402  추천:0  2014-02-14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조선인장병들. 제2군 남북만에서 일만군 호되게 족치고 동광서 재만조선인광복회 조직문제 토의 따푸차이허전투 동북항일련군 제2군 각 사는 제2군, 제5군 당위특별회의에서 결정한 “남만의 1군과 길동의 5군과 협동작전하면서 광대한 유격구를 개척한다”는 전략방침에 좇아 부대를 나누어 활동을 개시했다. 제1군과 함께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위해 제1, 제3사는 군장 왕덕태, 정위 위증민의 인솔하에 돈화, 화전, 무송, 몽강, 림강, 장백 등지로 진군해들어갔다. 제5군과 배합작전하면서 수녕항일유격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제2사는 진한장, 왕윤성의 령솔하에 녕안, 목릉, 동녕 일대로 진격해들어갔다. 제2군 군장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이 이끄는 제1사 주력부대는 서진박차를 가하면서 전투기회를 노리다가 4월초, 돈화, 화전 경내로 들어가 따푸차이허전투를 진행했다. 이번 전투는 제2군이 창립된후 그 주력부대가 남만으로 향하는 도중 연변경내에서 벌린 가장 큰 전투였다. 따푸차이허는 장광재령산맥인 부얼령 동북쪽, 한총령과 목단령의 서남쪽에 위치하고있는데 장광재령을 계선으로 길림지구인 화전현과 잇닿아있고 동남으로는 안도현과 통화지대의 무송현과 이웃하고 있다.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따푸차이허에는 인가가 몇호 되지 않았다. 1936년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면서 부근의 석인구, 경구, 류수하자 등지의 산재호들을 집중시켜 마을을 만든후 위만경찰서까지 설치하여 경비를 강화하였다. 따푸차이허는 일본군이 돈화 남부지대를 통제하는 중요한 거점이였다. 이곳에서 능히 안도, 돈화, 화전 3개 현의 접경지대를 통제할수 있어 항일련군 제2군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는데 매우 큰 장애로 되었다. 따푸차이허는 돈화현소재지와 60킬로메터 떨어져있기에 일단 일이 나면 증원부대가 금방 닿을수 있었다. 이런 중요한 군사적위치를 가지고있는 따푸차이허를 진공하기 위하여 군장 왕덕태, 정위 위증민은 제1사 사장 안봉학 등과 면밀한 전투방안을 세웠다. 1936년 4월 6일, 제2군의 소분대는 따푸차이허를 포위, 공격하는것처럼 꾸미고 주력부대는 밤도와 돈화와 따푸차이허 중간에 있는 한총령으로 강행군해갔다. 이튿날 동틀 무렵 한총령에 이른 부대는 길 량쪽산의 수림속과 골어구에 매복했다. 4월 7일,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은 따푸차이허가 항일군의 공격에 림하고있다는 정황을 접한후 즉각 500여명의 일본군과 250여명의 위만경찰을 출동시켜 급급히 따푸차이허를 향해 진격해왔다. 이튿날 오전 9시, 적들의 선견부대 60~70명이 아군의 포위망속으로 먼저 들어섰다. 선견부대가 지나간 뒤를 이어 대부대가 골짜기로 들어섰다. 점심때쯤 하여 일만군 대부대는 제1사의 매복권안에 완전히 잡히고말았다. “땅, 땅!” 공격명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와 함께 길량켠 매복하고있던 항일련군 전사들은 일만군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수류탄과 작탄이 적중으로 날아들어가 굉음을 울리면서 적들의 대갈통을 박살내고 살점을 뜯어 하늘로 날려보냈다. 사기충천한 항일련군 전사들의 공격앞에서 묵사발이 되어 쩔쩔매기만 하던 적들은 드디여 창황히 퇴각했다. 항일련군은 몇시간동안의 치렬한 전투를 벌려 대량의 적들을 섬멸하고 많은 중형무기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전장을 수습한 아군은 따푸차이허를 습격하기 위해 인차 되돌아섰다. 10일 새벽 아군의 주력부대는 따푸차이허 동쪽어구에 바싹 접근하여 적의 포대를 점령하고 다른 한 부대는 서북쪽에 있는 적의 포대를 까부시였다. 위만군 대대장은 두 개 중대를 거느리고 부얼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그곳에 매복하고있던 아군의 돌연적인 습격을 받았다. 대대장이 졸개 몇을 데리고 도망친외에 두 개 중대가 전부 아군에 의해 포로되고말았다. 따푸차이허를 점령한 항일련군은 군중대회를 열고 중국공산당의 항일구국정책을 선전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당장에서 항일련군에 가입하겠다고 나섰다. 따푸차이허전투후 1사 주력은 남하하여 무송, 몽강 일대로 진격, 유격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동강회의 항일련군 제2군 제3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안도를 출발하여 무송경내로 직접 진격해들어가 몇차례의 전투를 벌렸다. 3사의 주력부대는 4월, 만강을 습격하여 주둔하고있는 적들에게 회멸성타격을 가했고 5월초 동강부근에 이르러 동강툰위만군병영을 습격, 침중한 타격을 줌과 아울러 적의 거점을 제거해버렸다. 5월초, 제2군 군장 왕덕태는 1사를 거느리고 동강에 도착하여 김일성의 3사와 회사한후 손가봉교(孫家峰窖)밀영에서 군, 사급 간부회의를 소집, 1사와 3사의 금후 행동계획을 연구했다. 회의에서 3사는 무송, 안도, 장백, 림강 등에서 활동하면서 장백산을 중심으로 하는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무송과 안도경내에는 항일의용군소분대와 항일산림대가 많이 활동하고있었다. 회의에서는 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을 쟁취하여 항일련군에 가입시켜 제9퇀과 제10퇀을 새롭게 편성, 제3사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제9퇀 퇀장에 마덕전, 제10퇀 퇀장에 서괴무를 임명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왕진아를 제8퇀 정위로, 손장상을 제3사 참모로 임명했다. 동강회의에서는 또 항일유격구의 군중공작을 강화하고 광범한 항일군중을 동원하여 항일구국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아울러 “일본의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과 련합하여 한인(韓人)내부 반일련합전선을 건설하라”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조선인군중들로 결성된 통일전선조직-“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를 조직할 문제를 토의, 조국광복회는 모든 반일력량과 련합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식민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였다. 남북만에서의 전투 동강회의후 왕덕태는 제3사 8퇀을 이끌고 무송현 북강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김일성은 3사 7퇀, 9퇀을 이끌고 무송현 서강과 림강현 변경에서 활동했다. 리학충은 군부소년영을 이끌어 마안산밀영일대에서 활동했고 제3사 10퇀은 무송현소재지 남쪽에 있는 송강일대에서 활동했다. 5월 8일, 제3사 10퇀은 삼도묘령에서 무송현위만경찰대대의 수십명 병력과 맞다들어 격전을 벌렸는데 싸움에서 대대장 왕영성을 비롯한 많은 적들을 격살하였다. 5월중순 제3사 7퇀은 탕하구부근에서 무송의 위만군 모부 기병 3련과 조우,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섬멸하고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다. 동강회의가 있은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제3사 사부에서는 일만군 한 개 대대 병력이 무송으로부터 림강방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7퇀, 9퇀의 일부 병력과 경위련 도합 200여명이 산발을 타고 급행군하여 림강과 무송 가운데 있는 로령에 음밀히 매복해있다가 적선견부대가 포위권안에 들자 맹렬히 사격, 1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하고 각종 무기 30여자루와 탄알 2000여발을 로획했다. 전투가 끝난후 7퇀의 한 소부대는 농민복장을 한후 당지 군중들속에 섞여 서강툰으로 잠입, 위만군병영을 습격하여 40여명 위만군을 살상하거나 포로했다. 본부대가 서강에 진주한후 군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전투후 서강의 40여명 젊은이가 항일련군에 자원하여 입대했다. 6월 6일에도 3사의 100여명으로 조직된 한 부대는 김일성의 인솔하에 림강현 서남차의 적거점을 지혜롭게 탈취하였다. 농민복장을 한 전사들이 깜쪽같이 적보초병에게 슬슬 다가선후 맹호마냥 달려들어 총을 빼앗은후 쓰러눕혔다. 이어 부대가 번개같이 경찰분소로 쳐들어갔다. 전투는 10여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아군은 적 18명을 격살하고 총 18자루를 로획, 경찰분소를 불살라버리고 포대를 폭파해버렸다. 서남차전투후 3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서강과 동강에서 련이어 전투를 벌려 적들을 타격했다. 7퇀, 8퇀, 경위련은 무송의 서강툰에 이른후 어둠을 타서 서강에 주둔하고있는 위만군을 습격, 10여명을 격살하고 10여명을 포로하고 100여자루의 무기를 로획했다. 다른 한 부대는 동강위만병영을 들이쳐 중대장 이하 100여명을 포로하고 10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1, 제3사의 장백산지구에서의 유격전쟁과 반일통일전선의 부단한 확대는 제2군의 위망을 높여주었으며 당지 여러 민족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한편 새롭게 편성된 제2군 제2사는 녕안, 왕청, 동녕 등지에서 적들과 전투를 벌리였다. 2사 4퇀 4련, 7련은 녕안현 퇀싼즈에서 100여명 일만군과 교전, 40여명을 소멸하였고 위자구에서는 포위를 돌파하면서 40여명을 소멸했다. 1936년 3월 23일, 2사 5퇀의 한 개 부대는 도-녕(도문-녕안)철도의 삼차구역에서 왕청현 락타산으로 들어가는 일군을 공격했다. 5월 18일에는 2사 4퇀과 5군 1사 3퇀이 녕안현 경박호남쪽에서 련합작전을 펼쳐 일본군 10여명을 격살했다. 5월 27일, 제2사 일부 부대와 제5사 일부 부대는 녕안현 연통구의 위만경찰대를 습격하여 3명을 격살하고 나머지 30여명을 전부 포로했다. 후국충이 인솔하는 2사 4퇀 한 부대와 5군 부군장 시세영이 인솔하는 부대는 녕안현 사도하자에서 위만삼림경찰대를 습격, 60여명을 포로했다. 이도하자에서는 하루동안의 격전을 벌려 적들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고 10여차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6월초, 2군 2사 4퇀 주력부대는 녕안현 예허난거우에서 위만살림경찰대를 습격, 10여자루의 총을 로획했다. 6월 23일, 2군 2사 5퇀은 돈화현 소황구에서 위만군과 교전하여 10여명을 소멸했다. 7월, 2군 2사 한 부대는 동경성에서 남호두로 가는 도로에서 일본군용자동차운수대를 습격하여 차에 타고있던 적들을 소멸하고 차량 3대를 소각, 대량의 무기와 물자를 로획했다. 이 시기 2군 2사 6퇀은 2군의 참모장 류한흥 등의 인솔하에 동녕, 왕청 등지에서 유격활동을 벌려 부단히 적들을 타격하였다. 총적으로 항일련군 제2군 2사는 1936년 봄과 여름 사이에 치빙과 수녕지구에서 제5군과 밀접히 배합, 협동작전하면서 크게 발전장대해졌다.(계속)
51    제51장 동북항일련군 제2군 건립 댓글:  조회:1912  추천:0  2014-02-14
  미혼진밀영에서의 항일련군 제6사 조선인장병들. 조선인항일무장력 조선혁명력량 및 중국항일무장력량 이중사명 확인 김일성 등 조선공산주의자들 중한인의  통일된 무장대오건립을 주장 용맹한 서부파견대 1935년 9월, 일본군은 전면적인 추기“토벌”을 발동했다. 서부파견대는 액목에 온후 일만군과 여러차례의 전투를 벌리였다. 9월중순, 서부파견대는 액모현 청구자, 6호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려 적들을 소멸했다. 9월26일, 돈화현 관지서남에서 일만군을 매복습격하여 위만군 제11련대장 진옥청을 비롯한 일만군 10여명을 격살하고 군수물품을 로획했다. 10월에는 액목현 만리구, 삼도구에서 위만군과 두차례 교전하여 적들을 살상, 포로했다. 11월3일, 서부파견대는 액목현 청구자부근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전부 소멸하고 경기관총 1정, 보총 10자루, 권총 2자루, 탄알 600발을 로획했다. 청구자전투에서 서부파견대는 자신의 위력을 충분히 과시해 적들로 하여금 크나큰 위협을 느끼게 했다. 특히 전투중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왜놈만 죽인다!” 등 구호들을 은을 내여 많은 위만군 병사들이 인민혁명군과 싸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지어 인민혁명군을 가만히 방조해주기가지 했다. 어떤 위만군 장령들은 “당신네 부대를 만나면 공중에 대고 총을 셋방 쏘겠으니 그럴 때에는 우리 부대인줄 알고 못 본척해달라”고까지 하면서 일부러 교전을 피하기도 했다. 일본군과 위만군을 구별하는 중요한 표식의 하나기 철갑모였다. 철갑모를 쓰면 일본군이고 안 쓰면 위만군이였다. 인민혁명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철갑모를 쓴 일본군만을 골라서 갈기군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위만군까지 철갑모를 쓰고 전투장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래서 인민혁명군은 위만군에 향해 인민혁명군과 싸우지 않으려거든 철갑모를 벗으라고 련락했다. 그런 경고를 받은 다음부터 위만군은 인면혁명군한테 접근하면 철갑모를 벗어 자기네가 만주군이라는 것을 알리였다. 이런 상황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빨찌산이 철갑모를 쓴자들이 대렬앞에 있으면 앞을 치고 뒤에 있으면 뒤를 치군 하였다. 일본군은 “빨찌산이 신통히도 우리들만 골라친다”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위만군이 “토벌”에 나올 때 오발 등의 방법으로 빨찌산들에게 신호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약속도 곧잘 지키였다. 오발도 못할 때에는 수십명씩, 수백명씩 한데모여서서 “지지가가”, “지지가가”하고 떠들어대는 방법으로 자기네 위치를 알려주군 하였다. 위만군들은 편지 한 장만 내도 무기, 탄약, 식량을 실어다주었고 전투마당에서 “요창 부요밍(총만 요구할뿐 생명은 요구하지 않는다)”하고 입대포만 놓아도 총을 바치고 투항하였다. 적“토벌대”들은 우리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였지만 우리는 적군을 포로하면 위만군이건 일본군이건 차별하지 않고 인도주의적으로 잘 대우하고 친절히 교양하여 려비까지 주어 돌려보냈다. 이렇게 하니 심지어 우리 부대에 총을 메고 7차례나 포로되여온 위만군 병사까지 있었다. 우리가 그 병사에게 롱조로 “이 친구 또 왔구려” 하면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혁명군에 총바치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군 하였다... 서부파견대는 11월 5일, 앵목현 로투구부근에서 일본군 11명과 자위단 몇놈을 죽였다. 또 액목현성에 쳐들어가 일만군 20여명을 소멸하고 많은 총과 탄알을 로획했다. 12월6일, 서부파견대는 돈화 관지에서 간부회의를 열고 유격활동을 범위를 더한층 확대하기로 결정, 리형박, 김일성이 제5군 제1사 제1퇀 제1련과 제2군 제3퇀 제4련, 제4퇀 제2련의 110여명으로 분견대를 조직, 이끌고 서남으로 진격하여 황니허, 교하지구에서 길돈철도를 습격하면서 아군의 정치영향력을 확대하고 나머지 부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이 부서에 따라 서부파견대 분견대는 12월 7일, 먼저 관지를 공격, 일본교관의 지휘하에 있는 위만경찰중대와 1시간남짓 격전을 벌리여 일본군교관 3명을 비롯한 30여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위만경찰들이 분분히 총을 놓고 투항해 아군은 관지거리를 손쉽게 점령하게 되었다. 통구강자에 주둔해있던 일본군은 소식을 듣고 즉시 증원병 200여명을 관지에 파견했다. 아군은 적들이 경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통구강자 동북부의 길 량켠에 매복해있다가 적들이 포위권안에 들어서자 맹렬히 사격, 대부분의 적들을 섬멸하였다. 이와 동시에 적들의 본영이 비여있는 틈을 타서 일부 병력을 파견하여 뒤돌아가 통구강자본부를 점령하게 했다. 관지와 통구강자를 점령한 아군은 3일동안 남아있으면서 군중대회를 열고 일제주구를 청산, 적들의 창고를 헤쳐 식량과 물자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돈화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련대는 관지와 통구강자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한후 즉각 대량의 일만군과 위만경찰을 출병시켜 돈화 동부와 서부의 관지, 통구강자, 흑석, 맹목에 쳐들어왔다. 1936년 1월 7일, 아군은 흑석진을 공격, 3시간 남짓되는 격전을 벌려 적들의 방선을 철저히 쳐부수고 흑석진을 완전히 공략했다. 1월 8일 흑석진에서 철퇴한 아군은 이튿날(1월 9일) 앵목진을 진공, 2시간여의 격전을 벌려 액목진을 장악했다. 전투에서 아군은 일본군 지휘관 1명, 교관 2명 헌병 6명을 격살하고 위만군 50여명을 살상, 대량의 탄약과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부대는 군중대회를 열고 로획한 군수물자 일부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5년 11월부터 1936년 1월말까지 두달남짓되는 사이에 서부파견대는 앵목, 돈화 지구에서 수차의 전투를 벌려 적들의 “토벌”활동에 충격을 주면서 일부분의 유생력량을 훼멸, 이 지구에서의 일만군통치에 타격을 주었다. 동시에 광범한 군중들에게 항일구국 선전, 조직 공작을 펼쳐 2군과 5군의 정치적력량면을 확대, 군중들의 항일열정을 고무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인민혁명군에 가입하여 부대의 력량을 장대시켰다. 2군 4퇀 2련의 서부원정을 시작할 때에는 일색으로 조선인전사들이였지만 이때에 와서는 많은 중국인전사들이 편입되여 보충되였다. 미혼진회의 1936년 2월 10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국공산당대표단은 “8.1선언”의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 및 여러 반일의용군은 함께 전 중국적으로 통일된 항일련군을 조직하자”는 정신에 따라 “전 동북의 항일련군총사령부를 건립하기 위한 결의초안”을 제출하고 반일통일전선의 수요에 적응하여 전 동북의 항일군대의 명칭을 동북인민혁명군으로부터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으로 고칠 것을 결정하였다. 모스크바에 있는 중국공산당 국제대표단에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1936년 2월 5일, 흑룡강성 녕안현 경박호 북호두에 있는 제5군 군부에 도착하여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공산국제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을 전달, 주보중 등과 함께 항일련군편성을 비롯한 일련의 문제를 토의연구한후 5군 군부를 떠나 동만으로 오는 도중 경박호 남호두에서 녕안에서 회사한 제2군과 제5군의 지도자들을 만나 제2군, 제5군 주요령도간부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성위를 철회하고 유격구에 따라 남만, 동만, 길동, 송강 등 4개 성위를 건립할데 관한 지시정신과 동북항일투쟁에 관계되는 일련의 정신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 위증민은 중공대표단의 “중한(中韩)민족은 련합하여 공동항일함으로써 중한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조선인문제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기본주장과 중공동만당조직에서는 한인“민생단”책략을 개변하여 망군노를 원치 않는 모든 사람들을 흡인하여 광범위한 항일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민생단”문제에 대한 지시정신도 전달했다. 회의후 위증민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왕덕태, 리학충, 김일성 등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안도유격구의 미혼진에 이르렀다. 미혼진에 다달은 제2군의 주요한 간부들은 위증민의 사회하에 중공동만특위와 제2군 군, 사, 퇀급 간부들이 참석한 련석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전영림 등이 참석하였다. 위증민은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정신과 중공주재 공산국제대표단의 “동만인민혁명군을 중한(中韩)항일련군으로 편성할 건의”를 전달한후 제2군 평선문제를 상세하게 토의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이 광범위하게 반일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적응되지 않는다고 인정하고 인민혁명군을 항일련군으로 이름을 바꿀 것을 일치하게 결의했다. 동시에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조선공산당주의자들은 항일련군 가운데 조선인부대와 중국인부대를 각기 건립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고 마땅히 항일련군의 이름으로 무장투쟁을 함께 조직하고 벌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8.1선언”과 “동북항일련군통일군대건제선언”을 충분히 토론한 기초에서 회의참가자들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편성할 것을 결정했다. 왕덕태가 군장으로 임명되고 위증민, 리학충, 류한흥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아래에 3개 사와 군부직속교련퇀, 소년영을 두었다. 제1사는 원래의 제1퇀에 일부의 반일삼림대를 흡수하여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안봉학이 임명되고 주수동, 려백기, 박덕범 등이 정위, 정치부주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으며 아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에 최현,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필수문, 정위에 려백기(겸)가 임명되였다. 제3사는 원래의 정2퇀과 제3퇀의 일부 및 전영림이 이끌던 항일의용군 6개 중대를 합쳐 편성하였는데 사장에 김일성, 정위에 조아범이 임명되고 산하에 2개 퇀을 두었다. 제7퇀 퇀장에 전영림, 정위에 마덕전이 임명되였다. 3월 20일, 사충항이 부대를 이끌고 항일련군 제2군에 가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여 제4, 제5, 제6퇀이 인차 편성되였다. 사충항이 사장으로 임명되고 왕윤성, 진한장이 정위,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였다.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자균, 정치부주임에 왕송백, 제6퇀은 사부직속지휘에 두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은 전원이 2000여명이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절반을 차지했다. 군당위원회는 군정위, 군장, 군정치부주임 및 세 개 사의 정위, 사장 등 9명으로 조직되였는데 그들로는 위증민, 왕덕태, 리학충, 주수동, 안봉학, 왕윤성, 사충항, 김일성, 조아범 등이다. 위증민이 서기로 당선되였다. (계속)  
50    제50장 로흑산전투 댓글:  조회:2006  추천:0  2014-02-13
  주보중(바이족)장군의 일기장에 씌여진 동북항일련군 여러 민족 지휘관들의 명단, 조선인지휘관들의 명단이 뚜렷하다. 정안군 사도하자를 피로 물들이고 인민혁명군 지혜롭게 정안군 괴멸 피로 물든 사도하자 라자구와 동녕현부근의 흑산은 지형이 복잡하여 우리 군이 활동을 활발히 벌리는데 매우 유리한 지구였다. 곡창지대인 로흑산부근은 또 아군의 식량기지이기도 했다. 일제는 항일군의 식량공급을 단절시키고 유격활동을 저지시킬 목적으로 일찍 1934년말에 정안군을 로흑산에 파견하여 주둔시켰다. 정안군은 악패지주와 한간주구들의 자제들을 긁어모아 조직한 부대였는데 일본군지휘관이 직접 지휘하고있었다. 정안군은 무기장비가 월등했는바 스스로 황군의 “철군”이라고 자칭했다. 정안군은 백성들에게 못된짓이란 못된짓은 다하는 비적무리였다. 놈들은 쩍하면 행패를 부리면서 백성들이 소, 돼지, 닭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여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악질적으로 항일부대를 추격, “토벌”했는바 반동기염은 실로 하늘을 찔렀다. 팔소매에 “정안군”이라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린다고 하여 백성들은 이자들을 “훙수톨(紅袖頭)”이라고 불렀다. 어디에 “홍수톨”이 나타나면 그곳 백성들의 머리우에는 재난이 날아들었다. 라자구에서 서쪽으로 7.5킬로메터쯤 들어가면 28호 농가가 오붓이 모여사는 사도하자라는 마을이 있다. 시도하자에서 5킬로메터 더 들어가면 사간방이라는 곳인데 동북인민군 제3퇀의 밀영경계소였다. 이 경계소에서 15킬로메터 들어가면 투로퍼띵즈인데 바로 3퇀의 밀영지가 있었다. 사도하자에는 세칸짜리 큰 기와집 한 채가 있었는데 혁명군은 사도하자에 올 때마다 그 집에서 회의를 하고 혁명가곡을 배워주면서 항일선전을 하였다. 주보중, 김일성, 시세영 등 항일면장들이 자주 나든다고 하여 사람들은 사도하자를 “공산당사령부”라고 불렀다. 음력 12월, 일본놈 절름발이퇀장이 령솔하는 정안군이 동녕으로부터 5갑(라자구 下河)에 와서 음력설을 쇨 때였다. 개다리본성을 고치지 못하고있던 주구 서일남이 절름발이퇀장을 찾아와서 “사도하자는 공산당의 둥지이다. 몽땅 공산당이다.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고자질했다. 보고를 접한 절름발이의 얼굴엔 지독한 랭기가 감돌았다. 1935년 음력 정월보름날 밤, 시도하자 주민들이 깊이 잠들어있을 때 절름발이 일본놈은 대포와 중기등으로 무장한 백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사도하자를 포위해왔다. 날이 밝을 무렵이였다. “쿵쾅!” “뚜루룩...” 난데없이 날아들어와 터지는 포탄소리와 자지러진 기관총소리에 마을의 새벽정적은 산산쪼각이 났다. 마을은 삽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포연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아츠럽게 울려나왔다. 한시간만에 마을은 잿더미로 되고 말았다. 한창 포격을 하고 기관총사격을 퍼부은후 놈들은 마을로 돌격해들어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대학살은 마을동족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오우준, 김군삼 등 몇집 식구들이 제일 먼저 살해당했다. 봉사였던 총수산의 어머니는 날창에 찔려 밸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미 숨진 두 손자의 손목을 꼭 잡고 피못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녀의 셋째아들(19세)은 차몰이군 주로인과 한데 묶이여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가에서 참살당했다. 머리에 총알을 여러발 맞아 대뇌가 랑자하게 터져나와 있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홀아비 은령감은 물만두를 삶다가 놈들이 총창에 찔려 가마목에 쓰러져 숨졌다. 잔인무도한 놈들은 살아남은 마을주민들을 밀짚가리곁에 몰아다 세우고 기관총을 휘둘렀다. 그 속엔 외지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삼도하자의 오명학로인은 산에 가 올무를 놓다가 놈들에게 살해당했고 훈춘현의 지하공작원인 리영실과 그의 딸은 김군삼네 집에 왔다가 참살당했다. 놈들은 도합 57명을 참살했는데 그중 16명이 총창에 찔려 죽었다. 이번 참살에서 마을서쪽에 살고있던 세집식구들이 요행 죽음을 면했다. 총소리에 깨여나 밖에 나온 리용덕로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을이 삽시에 포화에 휩싸이고있었던 것이다. 혁명군이 마을을 향해 포와 기관총을 쏠수는 없었다. 적들이 마을을 공격하는 것이 틀림없다. 리로인은 가까이의 설씨, 정씨네 집을 향해 소리쳤다. “놈들이요! 빨리 강쪽으로 뒤오!” 리로인의 웨침소리에 정신차린 세집 식구는 강쪽으로 달음쳐가 버들숲속에 숨었다. 하여 세집의 12식구가 요행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놈들은 돌아갈 때 주령감네 말 두필을 몰고갔다. 날이 희붐히 밝자 린근마을이 주민들이 사도하자에 달려왔다. 사람들은 밀짚가리앞에 쓰러진 시체속에서 요행 살아있는 조선인어린애 8명을 찾아냈다. 김룡운이 8명 여자애 중 하나를 자기가 키우기로 하고 나머지 7명은 안아다 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친척이 있는 집에서는 그래도 대강 짠 관에라도 시체를 넣어 묻을수 있었으나 친척이 없는 주검은 움 속에 묻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혜로 정안군을 소멸 한족청년 총수산과 조선족청년 리씨는 식구들의 주검을 묻고나니 혈혈단신이 되었다. 비분에 찬 그들은 그날로 3퇀 밀영으로 찾아갔다. 정위 김일성이 그들을 만나주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을의 참살정황을 낱낱이 보고했다. “우리를 혁명군에 받아주십시오, 우리는 꼭 원쑤를 갚고야말겠습니다.” 김일성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은후 즉시로 한 개 반 전사들을 현지에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했다. 과연 모든 것이 사실이였다. 사도하자 참변소식을 접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3퇀과 제4퇀은 어찌해서나 이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김일성, 후국충 등 지휘관들은 정안군을 소멸하기 위해 정찰병들을 파견, 적들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장악했다. 1935년 6월, 라자구에서 단오명절을 쇤 인민혁명군부대는 라자구 석두하자에서 떠나 로흑산방면으로 향발, 황혼 무렵 동남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을 통하여 정안군이 겨울에만 “토벌”을 하고 여름에는 될 수록 항일군과 교전을 피하면서 산림대나 토비 같은 것만 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이에 적들을 끌어내여 매복소멸하기로 작전을 짰다. 3, 4퇀 주력부대는 적들이 보는데서 일부러 대낮에 부대를 라자구로 철수시켰다가 그날 밤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로흑산에서 서쪽으로 10킬로메터 떨어진 투도구를 돌아왔다. 부대는 골짜기 심처의 남북 량측 산에 은밀히 매복했다. 아군은 높이 약 200~300메터되는 좌우 산릉선과 골짜기 가까이의 산기슭을 따라 전호를 파고 기여드는 적을 기다리기로 했다. 연후에 한 개 소분대를 출동시켜 적들을 꿰여오게 했다. 소분대는 중국말을 잘하는 대원들로 구성됐다. 전사들은 산림대로 가장하고 왕보만으로 내려갔다. 마을에 내겨간 소분대는 산림대행세를 부리면서 백성들의 소를 빼앗기도 하고 가재도구를 차서 굴리기도 하고 남새밭의 바자를 뽑아버리기도 하면서 한바탕 야료를 부리는척하다가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된판인지 정안군은 아군의 유인에 걸려들지 않았다. 아군은 매복지점에서 하루밤을 무료하게 보내야 했다. 다음날에도 소분대는 마을에 내려가 산림대행세를 하고 식량을 가득 실은 소수레를 몰고 오면서 산림대만이 통용하는 용어로 떠들어 댔다. 적들은 끝내 낚시찌를 물고야 말았다. 아침 8시쯤 되어 소분대를 산림대인줄로 안 적들은 소분대의 발자취를 물고 골짜기로 졸졸 따라 들어왔다. 100여명이나 되는 적들은 소분대를 놓칠세라 바싹 뒤쫓았다. 척후를 앞세운 적들은 인민혁명군이 감쪽같이 매복해있는줄도 모르고 기름냄새를 맡은 고양이마냥 포위권안으로 들어섰다. 놈들의 발걸음소리마저 금방 귀가에 들려왔다. 놈들이 지나가는 어떤 곳은 가까이 10메터가량 되기도 했다. 드디여 적들의 전 부대가 사격권안에 들어섰다. “땅!” 사격을 알리는 총소리가 야무지게 골짜기의 고요를 터뜨렸다. 아군의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였다. 이와 동시에 골짜기를 들었다놓는 혁명군전사들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중국사람은 중국사람을 쏘지 않는다!” “우리는 무장을 요구하지 목숨을 요구하지 않는다!” “너의들은 누구를 위해 일본놈의 총마개로 되어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지휘부의 돌격명령과 함께 인민혁명군전사들은 맹호마냥 적들을 향해 돌격해 내려갔다. 비발치듯 퍼붓는 혁명군의 총탄에 적들은 삼대마냥 쓰러졌다. 전투는 30분만에 아군의 철저한 승리로 끝났다. 전투에는 인민혁명군은 일본지휘관을 비롯한 적 100여명을 완전히 섬멸하고 박격포 1문, 중기관총 1문, 경기관총 1정, 보총 80여자루, 목갑총 7자루, 박격포탄을을 비롯한 각종 탄환과 군수품을 로획했다. “철군”이라 자랑하던 일제의 정안군은 이렇게 괴멸되고 말았다. 로흑산전투의 승리는 인면혁명군의 북만원정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준비를 더 잘하게 하였다. 북만원정 로흑산전투후 인민혁명군 제3퇀, 제4퇀은 왕청현 수분대전자에 돌아와 휴식정돈하면서 녕안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유격구에 3퇀의 제1, 제2, 제3련, 4퇀의 제4련 등 3분의 1병력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대는 제3퇀 퇀장 방진성, 정위 김일성, 제4퇀 퇀장 후국충 등이 인솔하는 북만원정대를 구성, 6월말에 녕안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유격구를 확대시켜 길동유격구와 이어놓고 길동지구에서 활동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제5군과 련계를 맺으며 배합작전하려는데 있었다. 부대는 서북령, 로야령 등 고산준령을 넘는 어려운 산악행군을 해야 했다. 살을 지지는 것 같은 뙤약볕과 모기떼의 성화를 받으면서 로야령을 넘기란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부대는 무수한 곤난을 극복하면서 7월에 승리적으로 녕안현 로청구의 산동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사는 산동툰에 이르렀다. 정보를 탐지한 일본군은 동만원정대와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 회사를 막기 위해 목단강, 녕안, 동경성 등지로부터 800여명 병력을 모아가지고 산동툰을 향해 진격해왔다. 적들의 진공은 아군의 드센 반격을 받았다. 반나절의 전투 끝에 적들은 끝내 물러가고야말았다. 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주보중이 인솔하는 제5군과 회사했다. 두 부대의 지휘원들은 녕안현 이도하자에서 제2군, 제5군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제2군 3퇀 4련, 4퇀 2련과 청년의용군, 제5군, 1,2,4퇀으로 서부파견대를 무어 2군 3퇀 정위 김일성, 5군의 시세영, 리형박 등의 인솔하에 앵목, 돈화일대로 나가 활동하면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기로 하고 류한흥, 후국충 등이 지휘하는 2군 3퇀 5련, 4퇀 3련, 5련은 녕안에 남아 5군과 함께 활동하며 왕윤성이 이끄는 2군 4퇀 1련, 6련, 7련은 왕청, 훈춘에 돌아가 남아있는 부대와 함께 유격전을 견지하기로 결의했다.(계속)
49    제49장 동만유격근거지의 포기 댓글:  조회:1819  추천:0  2014-02-13
안도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주동적으로 유격근거지 포기 수부원정길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창건의 토대 닦아 처창즈근거지의 포기 1935년 8월 30일,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이른바 “소화 10년 관동군추기치안숙정만주국방면협력요망”을 제정하고 항일무장“토벌”의 중점을 빈강, 길림, 간도, 봉천, 안동 등 5개 성에 두었다. 이 “숙청계획”에 따라 일제와 위만국은 장춘, 열하일대에서 대량의 군대를 움직여 동만, 수녕에 투입, 3개월내에 반일무장력을 철저히 소멸한다고 장담했다. 1935년 9월중순, 일만군은 추기“대토벌”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 제2퇀은 부대를 여러갈래 소분대로 편성한후 안도, 돈화, 몽강 일대에서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적들을 대처했다. 1935년 10월, 적들은 수백명의 일만군을 동원하여 처창즈유격근거지를 포위공격하였다. 토벌군은 오동양차, 송강, 쓰치개 방면으로부터 포위망을 조이며 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제2군 군장 왕덕태의 지휘하에 직사포, 박격포, 경기, 중기 등 중무기로 무장한 우세한 적들과 련속 며칠동안 접전하였다. 그러나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정황에서 근거지를 끝까지 보위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아군은 주력부대를 내두산쪽으로 이동시키고 반일자위대는 근거지군중들을 데리고 서남차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서남차에서 두달 남아 머물러있던 반일자위대와 근거지군중들은 근거지인민들을 해산시키고 반일자위대도 유격전으로 넘아가라는 동만특위와 군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근거지군중들을 놓고 말하면 이것은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물과 고기처럼 생사를 같이하던 부대를 떠나 보내고 근거지마저 버린후 적구로 내려가야 하니 앞이 캄캄해날 수밖에 없었다. 대회를 열고 근거지해산의 절박성과 정당성을 인내성있게 해설하여 군중들은 어렵지 않게 리치를 깨닫기는 했으나 정작 해산을 집행하는 실무적단계에 들어가서는 적구로 내려갈수 없다고 나누웠다. 군중들은 풀을 뜯어먹고 짐승가죽을 우려먹어도 좋으니 여기서 죽든살든 하겠다면서 야단을 쳤다. 적구로 갈바에는 차라리 유격구에서 굶어죽겠다면서 떠들어댔다. 어떻게 적구에 내려가 왜놈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살겠는가! 안될 일이다! 일부 군중들은 적구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참군을 요청하였다. 입대적령기에 들어서지 않은 아동들과 소선대원들도 혁명군을 따라가겠다고 성화를 부리였다. 어떤 아동단원은 데려가기 싫으면 차라리 총으로 쏘아달라고 하면서 매달려 강짜를 부리기도 했다. 유격구의 해산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전에는 인민들은 식량을 군대에 공급하여 전투를 견지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군대가 인민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적들과 싸워 량식을 빼앗아다가 인민들에게 공급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혁명군에게 있어서 커다란 보따리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개월이나 존속하였던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적아력량대비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1935년 11월에 해산되였다. 처창즈에 있던 제2군 군부와 일부분 부대 그리고 병기공장, 옷공장, 병원 등 후방기관들이 모두 내두산으로 옮겨갔다. 내두산은 마을서쪽에 두 개의 젖꼭지모양의 산이 있는 것으로 하여 생긴 이름인데 태고연한 심산밀림속에 자리잡은 이 부락을 중심으로 송강과 천지에 이르는 주위 100여킬로메터 구간은 무인지경이였다. 그래서 망망한 림해속에 숨어있는 이 마을을 하늘아래 첫동네라 하였다. 내두산에 진주한 인민혁명군은 로천무대를 가설하고 무기탈취투쟁, 녀성해방 등 내용을 담은 작품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한편 정치공작원들은 주민들에게 일제를 쳐부셔야 한다는 도리를 선전하였다. 중공안도구위행동위원회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낡은 구장제를 페지하고 정권의 성격을 띤 농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서부원정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1935년 후반기부터 남북만에로의 간고한 원정을 시작했다. 1935년 8월, 인민혁명군 제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은 제2퇀의 2련과 3련의 150여명으로 서부원정대를 조직하고 처창즈를 떠나 무송을 지나 몽강지구로 나갔다. 서부원정의 목적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를 맺은후 동남만유격구를 한데 련결시켜 료녕, 길림 두 성 변계지대에 유격근거지를 건립, 련합작전을 벌리려는데 있었다. 8월말, 서부원정대는 제1군의 강남유격구에 도착, 먼저 1군 제8퇀과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리동광 등 제1군 관병들과 유격구군중들은 제2군 서부원정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월 4일, 몽강현 나이굉부근에서 제1군과 제2군 간부련석회의를 거행했다. 회의에서 쌍방은 자기군의 활동지구와 항일투쟁정황을 소개하면서 투쟁경험을 교류했다. 아울러 련합작전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중심으로 길료변경유격구를 개척할문제와 전 동북항일정부 및 항일련군총사령부건립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상응한 결의를 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제2군의 회사로 하여 동만항일유격구를 분할하고 포위하려던 적들의 음모는 철저히 실패하고말았다. 두 군의 회사는 또 동만과 남만의 두 유격구를 하나로 이어 놓아 유격전쟁가운데서 밀접히 배합하면서 협동작전하는데 유리하게 했으며 항일련군 제1로군의 창건을 훌륭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동시에 북만지구의 제3, 제4, 제5, 제6군 및 기타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제2군은 서부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임무를 완수한후 몽강을 떠나 1935년 11월 내두산유격근거지로 돌아왔다. 내두산보위전 내두산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은 1935년 겨울, 안도현으로부터 악명이 자자한 리선도“토벌대”와 안도현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박격포부대, 위만경찰, 위만군 등 800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내두산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때 제2군주력은 적후에 들어가 유격활동을 벌리고있는 상황이여서 내두산근거지에는 두 개 련 병력과 후근기관일군들뿐이였다. 적아간의 력량대비가 비록 현저했으나 절대 물러설수는 없었다. 군장 왕덕태는 견정하게 최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완강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적들은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전사들은 목숨으로 진지를 사수하면서 한차례 또 한차례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첫날 전투에서 적들은 10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튿날 적들은 또다시 삼면으로 포위공격해왔다. 군장 왕덕태는 좌우부대에 적들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내라고 명령한후 한 개 부대를 인솔하여 정면으로 반격해나갔다. 아군의 드센 반격에 적들은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고말았다. 전투가 치렬해지면서 우리 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아동단, 녀전사, 부상병까지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밥과 물, 탄약을 최전선에까지 날라왔다. 적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왕덕태는 소분대습격전을 벌리였다. 소분대는 사면으로 적들을 들이쳐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날이 갈수록 적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아군은 투자가 앙양되였다. 시기가 성숙되였음을 간파한 왕덕태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명령, 맨앞장에 서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 백병전을 벌리였다. 한창 격투를 벌리고있을 때 아군 소분대는 민첩하게 적들의 등뒤로 달라붙어 번개마냥 습격전을 벌리였다. 하여 적들은 앞뒤로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어쩔수 없었던 적들은 부랴부랴 산아래로 철퇴해버리고말았다. 내두산을 한입에 삼켜버리려고 기염을 토하던 적들은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제일 추운 겨울이라 엄한 추위까지 덮쳐들어 더는 견딜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으며 승리적으로 내두산유격근거지를 보위했다.왕덕태주력부대가 녕안으로 전이해간후 적들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가지고 다시 내두산을 진공해왔다. 1936년 1월 일만군 “토벌대”는 미친 듯이 쳐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적들의 두차례 진공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군사력의 뚜렷한 차이로 하여 적들의 진공을 더는 격퇴할수 없게 되었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군민들은 주동적으로 근거지를 버리고 무송방면으로 전이했다. (계속)  
48    제48장 경도선렬차습격전 댓글:  조회:1897  추천:0  2014-02-13
  1935년 5월 2일, 연길현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퇀 제5련은 련장 김철진의 지휘하에 반일의용군과 련합해 하발령에서 202호 국제렬차를 습격, 일본군 30여명을 격사하고 일제 및 만주국 고급관원 17명을 체포하였다. 하발령 대서서 일본군 렬차 전복 군수품 로획 일본군 장군도 체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창립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창립된후 비록 많은 좌절을 당했지만 유격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확대하는 가운데서 부단히 장대해져 1200여명의 병력을 가지게 되었다. 1935년 5월 30일, 중공동만특위와 독립사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군부를 정식으로 창립할데 대한 선언”을 발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이 정식 창립되였음을 세상에 선포했다. “선언”은 제2군의 성질과 임무를 이렇게 지적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중국인, 조선인 등 여러 민족 인민과 애국지사들의 무장력량이다. 혁명군은 동만에서 일만군과의 장기적인 류혈투쟁속에서 영용무쌍하다는 위망을 얻게 되었다. 혁명군의 위대한 임무는 군중을 조직하고 무장시켜 일본강도의 일체 세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빼앗긴 동북령토를 되찾아 중국의 령토완정을 회복한후 동북에 인민의 깨끗한 정권을 세워 중화민족의 독립해방과 자유를 취득하는 것이다. 제2군의 병력배치에 대하여 연변대학 최홍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2군의 총병력은 1200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조선인이 3분의 2를 차지하였습니다. 조건의 제한으로 군밑에 사를 세우지 않고 의연히 4개 퇀과 유격대대를 증설하여 활동하고록 결정지었습니다.” 군장에 왕덕태, 정위에 위증민, 정치부주임에 리학충, 참모장에 유한흥이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안태학, 정위에 주수동, 제2퇀 퇀장에 장천옥, 정위에 조아범,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후국충, 정위에 왕윤성, 유격대대장에 전영림, 정위에 김산호가 임명되였다. 그외 군부밑에 직속경위련과 교도대를 두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중공만주성위의 “2군은 서쪽과 북쪽으로 주동적으로 출격하라”는 지시정신과 용영구회의에서 구상한 전략적결책에 따라 부대를 두갈래로 나누어 유격활동범위를 늘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1퇀과 제2퇀은 돈화, 화전과 녕안, 동녕, 액목방향으로 나아가 유격활동범위를 늘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려 했다. 이에 따라 제1퇀과 제2퇀은 돈화, 액목을 향해 정진, 제3퇀과 제4퇀은 녕안지구를 전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과 배합작전하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경도선렬차습격전을 벌려 국내외를 진동시킨 제1퇀의 영용무쌍한 이야기는 오늘까지도 미담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하발령렬차습격전 퇀장 안봉학의 령솔하에 제1퇀은 명령에 좇아 처창즈유격근거지를 떠나 경도선(신경-도문)의 길림-돈화 구간을 따라 돈화, 액목, 교하, 서란 등지로 진군하면서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개척, 제3군과 련락을 맺어야 했다. 경도선은 일제가 동북자원을 강탈해가는 주요한 동맥이였다. 일제는 군사, 경제 면에서 이 철도선에 매우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있었다. 제2군 지휘부에서는 적의 기염을 꺾어 놓고 근거지군민들의 필수품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1퇀더러 경도선렬차를 습격할 것을 명령했다. 제1퇀은 행군도중 련속하여 적들을 매복습격하였는데 1935년 5월 2일, 하발령에서의 일만군렬차습격전이 가장 유명한 전투의 하나이다. 5월 1일 저녁, 제1퇀 5련은 임무를 접수한후 주동적으로 항일의용군인 평일군, 천량군과 련합하여 대석두와 하발령 철도구간의 예정된 지점에 도착하였다. 아군의 병력은 200명이였다. 기차를 정복할 지점은 깎아지른듯한 가파로운 산굽인돌이였다. 아군은 안도와 대석두쪽에 각각 방어조를 배치하고 기관총로획조, 습격조, 파괴조를 철도량켠에 대기시켰다. 기관총로획조에는 렬차 앞뒤에 달린 장갑차의 탈취할 임무가 주어졌다. 5월 2일 새벽 1시경이였다. 안도쪽 2.5킬로메터 지점에 배치되여있던 신호병으로부터 장갑차가 온다는 신호가 왔다. 김철진련장이 인솔하는 5명의 파괴조는 재빨리 철길에 뛰여들어 지레대, 스파나, 못뽑이 등으로 레루의 치목에서 못을 반쯤 뽑아놓았다. 놈들은 기차와 안전통행을 위해 선로검사차를 앞세우고 뒤에는 포를 건 장갑차에 호송대원을 앉혀 후위를 서게 하였다. 얼 마 안가서 적의 선로감시용장갑차가 나타났다. 장갑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 지나갔다. 파괴조성원들은 다시 날쌔게 뛰여내려가 침묵에 반쯤 박혀있는 못을 전부 뽑아버리고 레루를 들어 한쪽으로 약간 드티여놓았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진행되였다. 긴장한 순간이 한초한초 흘러갔다. 얼마후 놈들이 렬차가 온다는 신호가 전해져왔다. 습격조는 총가목을 틀어쥐고 기차가 나타날 산굽인돌이만을 주시하며 기다렸다. 레루장이 울리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더니 기관차의 전조등이 어둠을 쫙 가르면서 비쳐왔다. 이것은 조선 라진으로부터 신경(장춘)으로 가는 202호 “국제렬차”였다. 기차가 매복권내에 들어서자 습격조는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사격소리와 함께 요란한 폭음소리가 나더니 기관차가 탈선되였다. 기관차는 연통을 땅에 들이박은채 15메터나 앞으로 달려갔다. 탈선된 차량들이 서로 요란하게 충돌하더니 마치 큰 바위라도 굴러떨어지듯이 기관차가 궤도옆으로 나딩굴었다. 순간 화통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확 피여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기관차뒤에 달렸던 7개의 차량도 련달아 쓰러졌다. 쓰러진 차량들에서 놈들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단발마적으로 들려나왔다. 호송대원들이 앉은 맨뒤의 장갑차만이 번져지 않고 그 자리에서 씩씩거리고있었다. 습격조와 기관총로획조는 쓰러진 렬차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 수류탄을 던지면서 비호마냥 돌진해나갔다. 한동안 지나서야 장갑차안의 적들이 정신을 차리고 기관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군의 수류탄공세와 집중사격으로 장갑차안의 적들은 인차 소멸되였다. 습격조는 쓰러진 렬차를 수색하고 살아남은 적들을 생포했다. 전투는 한시간만에 결속되였다. 이번 습격에서 아군은 적 30여명을 소멸하고 군정요인 17명을 포로하였는데 그가운데는 일본황족 한사람과 일본군 장군 한사람이 있었다. 그밖에 대량의 군수물자와 만주국화페 20여만원을 로획했다. 대서렬차습격전 하발령기차습격이 있은후 제1퇀은 안도현 경내에서 유격전을 벌리다가 처창즈유격근거지로 돌아와 잠시 휴식정돈했다. 충분히 휴식한 부대는 8월 19일 경도선 량병태와 남구구간의 대서에서 또 놈들의 군용화물차를 습격하였다. 퇀장 안봉학은 제2련의 패장들인 주춘일 등을 철도선에 파견하여 그곳 형편을 알아오게 하였다. 백성으로 가장한 그들은 철도연선에 내려가 며칠동안의 정찰을 거쳐 8월 19일 새벽에 신경으로부터 조선으로 나가는 제291호 군용화물차가 량병태역을 지난다는 정보를 탐지하였다. 8월 18일 저녁, 제1퇀의 주력과 반일의용군 해룡부대 도합 200여명은 량병태서쪽의 대서부근에 도착하였다. 대서는 지금의 안도현 량병태에서 서쪽으로 약 5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있다. 대서촌서쪽에는 가파로운 산이 서북쪽으로 뻗었는데 북쪽의 가파로운 산밑으로 경도선철길이 동서로 뻗었고 철길북쪽으로는 개활지가 펼쳐져있었다. 부대는 재빨리 산굽이의 지정된곳에 매복하였다. 4명으로 구성된 파괴조는 날렵하게 철길에 뛰여올라 스파나, 지레대 등으로 레루장을 련결한 못을 반쯤 뽑아놓았다. 8월 19일 새벽, 남구쪽에 있던 정찰병으로부터 선로감시용장갑차가 온다는 전지불신호가 왔다. 이윽하여 선로감시용장갑차가 전조등을 환하게 켜고 달려오더니 량병태쪽으로 사라졌다. 파괴조는 철길에 다시 뛰여올라 날랜 솜씨로 반쯤 뽑아놓았던 못을 마저 뽑아버린후 한쪽 레루를 안으로 굽혀 다른 한쪽 레루와 어긋나게 해놓고 번개마냥 사라졌다. 파괴조성원들이 어둠속으로 사라진지 1분도 채 못되였을 때였다. 귀청을 찢는듯한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숱한 차량을 단 조선행 제291호 화물차가 쏜살같이 내달아왔다. “꽈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이 산곡간을 들었다놓았다. 기차는 레루장을 똬리처럼 틀면서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나가다가 왼쪽의 개활지로 곤두박혀 굴러내려갔던 것이다. 10여개의 차바곤도 뒤따라 깊이 3메터나 되는 진펄속에 곤두박혔다. 맨뒤의 장갑차도 어쩔새없이 굴러떨어지고말았다. 기관차의 증기가마가 폭발되여 세찬 불길과 증기를 내뿜었다. 돌격나팔소리와 함께 전사들은 총창을 비껴들고 전복된 기차를 향해 돌진해갔다. 제5련 련장 김철진은 전사들을 지휘해 장갑차에 삐죽이 나온 기관총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기관총은 이내 벙어리로 되고말았다. 장갑차에 앉았던 일본군은 한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격사되였다. 차량의 문을 열러제끼고 보니 천, 쌀, 사탕가루, 담배 등이 가득하였다. 전사들은 조선인 기관사와 화부는 적에게 피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량해를 구하고 포승으로 묶어놓은후 제가끔 물자들을 잔뜩 짊어지고 인차 퇴각해버렸다. 이때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대가 금방 떠나자 놈들이 잇달아 추격해왔다. 아군은 뒤따르는 적들을 물리친후 사흘동안 강행군하여 안전하게 처창즈에 도착하였다. 이번 기차습격전에서 아군은 1명의 손길도 없이 적 10여명을 소멸하고 400여필의 천과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이번 기차전복전투에서 대하여 《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는 일제의 자료(“8월 19일 량병태와 남구간에서의 렬차습격전”, “현대사자료”(30), “조선”(6), 제245페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8월 19일 길림발 도문행 291호 화물렬차(기관차 1, 화물차 21, 호위차 1 도합 23바곤)는 같은 날 오후 9시 15분 정각에 남구역에서 발차하여 경도선 남구아래 3000메터(신경에서 390킬로메터)지점을 지날 때 오후 9시 30분경에 공비 약 130명의 습격을 받아 기관차가 탈선되여 전복되면서 기관차에 련결된 화물차 6바곤도 탈선되여 전복되였다. 적은 차장 조선인 장진석을 총살하고(기관사 및 화부 1명은 무사하고 화부 2명은 행방불명) 화물이 있는 각 차량에 휘발유를 치고 불을 달아 13바곤의 화물이 몽땅 소각되여 그 손실은 수만엔에 달하였다. 그해 9월 23일, 제1퇀은 교하현경내의 이도하자와 황송전의 철도구간에서 또 한차례의 기차습격전을 벌리였다. 이번에 전복된 기차도 신경으로부터 조선 청진으로 가는 국제렬차였다.(계속)  
47    제47장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 개척 댓글:  조회:2345  추천:0  2014-02-13
1935년 남만의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에서 작성한 일본어로 된 선전문.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군민이 혼연일체 되어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일제의 봉쇄 분쇄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 1935년 1월, 중공만주성위는 위증민을 동만에 파견하였다. 위증민은 연길현 삼도만에서 얼마동안 조사한후 2월 27일부터 3월 3일까지 왕청현 대황외에서 동만공산당, 공청단 특위 제1차련석회의를 소집(세칭 “대황구회의”)하였다. 이번 회의에 위증민, 왕덕태, 김일성, 왕중산, 종자운, 주수동, 장창수, 리학충, 조아범, 리실일, 림수산, 최봉문, 강창연, 리동규, 김희문, 왕윤성 등 26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위증민의 사회하에 진행되였는데 주요하게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사업보고를 청취하고 지난 1년간 중공중앙과 중공성위의 공작방침정책을 집행할 정황을 조사한후 동만당단과 군대의 공작방향과 긴급임무를 제정, 당단특위령도기구를 개조했다. 중공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를 철소하고 위증민, 리학충, 리광림, 왕윤성, 왕정렬, 왕중산, 마진금 등으로 특위를 조직한후 위증민이 특위서기를 담당했다. 공청단특위서기는 주수동이 맡았다. 인민혁명군건설공작을 강화할데 대한 중공만주성위의 2월 1일 지시에 근거하여 1935년 3월 21일, 왕청현 요영구유격근거지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련석회의(세칭 “요영구회의”)가 소집되였다. 회의는 독립사 정위 왕덕태와 특위 서기 위증민의 사회하에 진행되였다. 회의에는 독립사의 지도자들과 제 1, 2, 3, 4퇀의 정위, 공청단만주성위 특파원 종자운 및 공청단동만특위책임자 도합 11명이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오는 4월에 동만항일련합군총지휘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으며 “인민혁명군정치사업조례”, “인민혁명군전사대우조례”를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또 제2군 독립사의 활동방향을 확정하였는데 원래의 항일근거지를 고수하는 동시에 수분대전자(왕청현 라자구지대)와 안도현 처창즈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여 이를 거점으로 군중기초가 두터우나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교통이 불편한 돈화, 화전, 동녕, 녕안, 목릉 방면에서 유격활동을 폭넓게 벌릴 것을 결정하였다. 회의에서는 독립사 지도부와 각 퇀 간부들을 조절하였다. 왕덕태가 사장으로, 리학충이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제1퇀 퇀장에 리승규, 정위에 림수산, 제2퇀 퇀장에 장봉운, 제3퇀 퇀장에 방진성, 정위에 김일성, 제4퇀 퇀장에 하덕윤, 정위에 왕윤성이 임명되였다. 회의후 동만특위는 수분대전자로 이동하고 독립사본부는 처창즈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왕청과 훈춘의 근거지군민들은 수분대전자에 집결하고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근거지 항일기관과 군민들은 처창즈로 이동하였다. 대황외회의와 요영구회의부터 시작하여 동만특위림시공작위원회에서 범한 “좌”경착오가 점차 시정되기 시작했으며 진일보로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관철되게 되었다.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1939년 동북항일련군 에 나선 만주국 . 동만특위의 파견을 받은 화룡현위 서기 김일환과 박덕산(김일)은 1933년 11월 처창즈에 가 유격구개척활동을 비밀리에 전개했다. 그들은 처창즈에 온후 공산당원을 발전시키고 군중을 조직하여 반일회, 농민협회 등 반일혁명단체를 묶어 공산당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하여 산림대를 쟁취하여 그들로부터 식량, 군복, 생활필수품 등을 지원받아 처창즈유격근거지개척을 위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1935년 1월, 연길현, 화룡현, 안도현 각 근거지의 군민 1000여명이 처창즈에 집중되여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정식 건립하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사부와 제1퇀, 제2퇀은 동남차골안의 묘령 북쪽기슭의 반일삼림대가 버린 병영에 자리잡았으며 팔구정부는 그 서쪽에 자리잡았다. 왕우구, 팔구, 옹성라자구 공산당지부는 구정부와 함께 있었다. 근거지군민들은 나무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귀틀집을 지었고 정부에서는 비옥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적점령구의 인민들을 통해 종자와 부림소를 얻어왔다. 한편 반일자위대를 조직하여 오동앙파, 쓰치개, 송강 등 방면으로 쳐들어올 적들을 밤낮으로 경계했다. 근거지에서는 또 서남차의 고동하지류 량안에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앉히기도 했다. 병기공장에서는 보잘 것 없는 원시도구로 대량의 탄알과 작탄을 만들고 각종 총을 수리제조했는데 때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작식대와 재봉대는 자체로 제작한 재봉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복을 지어 부대에 보내주었고 병원에서는 채집해온 초약을 달여 상병자들을 구해냈고 지어 수술도 했다. 처창즈유격근거지가 세워진지 얼마 안되여 적들의 “토벌”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2퇀 전사들은 근거지인민들의 지지속에서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어놓으면서 쳐들어오는 적들을 근거지에 한발자국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봉쇄로 말미암아 초봄부터 기아에 허덕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의 정경을 《준엄한 시련속에서》(려영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하여 송피를 벗겨먹고 우묵우묵 패인 물구뎅이에 가서 개구리알까지 떠다가 삶아먹으며 일하였다. 햇풀이 땅우로 봉긋이 솟아오르면서부터 남녀로소가 산과 들에 널려서 숨위나물, 삽지, 고사리, 기름고비, 물고비, 더덕, 도라지, 참나물, 절나무, 개암나무, 한충, 메마늘, 세투리, 메뿌리, 씀바귀, 냉이, 산미나리, 산시금치, 참나리, 개나리 등 먹을수 있는 풀은 죄다 캐들였다. 이런 산나물은 송피보다 먹기 좋았다. 하지만 이런 산나물을 먹을 때 기름 한방울 놓지 못하였다. 간장, 된장, 소금마저 없어서 맹물에 삶아먹거나 생나물을 그대로 씹어먹다보니 나중엔 사람의 몸에 풀독이 오르고 병이 나서 선후 100여명 군중이 사망되였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도 그때의 간고했던 상황을 쓰고 있다. 왕덕태를 비롯한 군부의 여러 지휘성원들을 위하여 작식대원들은 날마다 아침부터 산에 올라가 솔껍질을 벗기였다... 매운 재불에 송기를 넣고 3시간이상 끓인 다음 흐물흐물해진 것을 건져내여 강물에 헹군후 돌우에다 놓고 망치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또 물에 씻어냈다. 저녁이 다될 때까지 이런 공정을 여러번 되풀이하다가 쌀겨를 넣어 죽을 쓰든가 떡을 만들었다. 이것이 처장즈의 일등음식이였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채 깨여나지 않은 뱀들을 잡아먹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쥐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씨붙임을 할 때 신고 일하던 도로기도 작식가마에 들어갔다. 도로기를 우린 즙쯔레한 물을 한공기씩 마시고 병사들이 포복전진을 하듯 매밀이를 해가며 봄파종을 하였다. 오늘 씨를 뿌리고는 하루나 이틀이 지나기도전에 그 씨를 파먹었다. 인민혁명정부와 대중단체들에서는 씨붙임이 끝난 밭들에 보초를 세우고 종자를 파먹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 보초들마저도 주림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씨앗을 파먹었다... 이런 기아속에서 처창즈사람들은 밭고랑을 기여다니면서 김을 매였다. 손으로 우비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또 일어나 손톱끝이 모지라지도록 땅을 우비였다. 두벌김까지 매고나니 보리이삭이 패였다. 속살은 없고 맹물만 차있는 알들을 정신없이 훑어먹었다. 일어서서 걸어다닐 기력조차 없어 밭고랑에 엎드린채 간신히 보리대를 후려당겨서는 한알두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보리고개가 되자 아이들이 먼저 기아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은 남자들속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자기자신들은 굶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임무를 걸머지고 태여난 녀성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차례졌으니 그들은 굶어죽은 남편과 아들딸을 관도없이 가랑잎으로 덮어주고 그 하나하나의 시신앞에서 온 육신이 깡그리 타서 재가 될 지경으로 슬프게 울고싶어도 기력이 없어 눈물조차 흩리지 못하는 최악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기아와 공포는 무서웠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기아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반“민생단”투쟁이였다. 기아마저도 꺼꾸러뜨리지 못했던 투사들은 반“민생단”투쟁으로 쓰러졌다. 김일환, 주도산, 석봉세 등 근거지의 지도자들은 이번 투쟁으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살해되였다. 그러나 근거지인민들은 이빨을 악물고 무서운 공포를 이겨냈을뿐만아니라 그해 가을에는 보리 50석, 감자 100석, 조 15석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자제병인 인민혁명군에 보내왔다. 그것은 어찌 그저 곡식이라고 할수 있으랴. 그것은 인민들의 피이며 골수이며 반일정신이며 혁명의지였다. 부대에서는 인민들의 목숨으로 바꿔온 식량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여 전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식량들을 도로 인민들에게 보내주었다. 이렇듯 인민혁명군과 근거지인민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공고히 하였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 일제 가 항일근거지 에 사용한 비행기. 요영구회의의 결정에 의해 1935년 3월, 중공동만특위기관은 라자구의 사도하자로 전이해 간후 원유의 혁명적군중에 의거하고 여러갈래의 항일력량과 련합하면서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 확대했다. 2600여호 거주민들이 살고있는 라자구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보위하기 좋은 훌륭한 전략기지였다. 일찍 1930년 9월,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작일군을 파견하여 라자구에 공산당조직을 건립, 중공라자구구위를 설립하였다. 구위의 령도아래 삼도하자, 하동, 태평구, 신춘자, 로무주거우 등지에 7개의 기층 중공당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청년단, 부녀회 등 반일혁명군중조직이 결성되였다. 1934년 독립사가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사충항의 항일구국군 등 기타 항일부대와 손잡고 라자구전투를 벌린후부터 라자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구로 되었다. 하여 독립사 제3퇀, 제4퇀 장병들과 반일혁명적군중들은 요영구, 탕수허즈, 금창 등지로부터 라자구에 모여 유격근거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공동만특위서기 위증민은 라자구의 사도하자에 온후 원래 있던 공산당조직을 기초로 하여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를 건립, 중공동만특위의 령도아해에 두고 종자운을 서기로 임명하였다. 1935년 봄, 특위교통처가 설립되여 라자구항일투쟁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중공동만특위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지도기구가 정식으로 건립되게 되었다. 근거지내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농민위원회를 설립한후 춘경생산을 내밀도록 군중들을 동원했다. 독립사 제3퇀, 제4퇀 일부 병력은 라자구를 중심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면서 적군에 대한 와해공작도 벌리였다. 큰 전투는 별반 없었고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을뿐이였기에 인민혁명군은 휴전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부대는 중공라자구공작위원회에서 700여명 군중을 발동하여 진행한 “분량투쟁”과 “집단부락”건설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일본군의 “집단부락”건설계획이 1935년말까지 한발자국도 진척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근거지에 대해 경제적봉쇄를 하려는 음모를 철저히 분쇄해버렸다. (계속)  
46    제46장 독립사의 출격 댓글:  조회:2129  추천:0  2014-02-13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의 조선인장병들. 뒤줄 중간에 선 사람 김일성.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건립 일만군 “토벌” 분쇄 새로운 유격근거지 개척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 보전 능지영회의 두차례의 일본군“토벌”을 이겨낸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더한층 발전장대해져 1934년 봄 동만의 유격대는 900여명으로 발전하였으며 적위대 등 군중성 자위무장도 1000여명 되었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이러한 항일무장대오는 이미 동만지구의 항일무장의 골간력량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1934년 3월말 중공동만특위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유격대는 중공중앙의 “1.26”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동만의 4개 현 유격대를 토대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건립”하라는 지시정신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항일유격근거지에서 중공동만특위와 4개현 유격대책임자들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동만항일유격투쟁 력사상 한차례의 중요한 회의였다.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 연길현유격대 대대장 주진, 정위 왕덕태 등 15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독립사 사장에 주진, 정위에 왕덕태가 선발되였다. 독립사는 4개 퇀으로 편성, 제1퇀은 원 연길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고, 제2퇀은 원 화룡현유격대로서 아래에 5개 련을 두고, 제4퇀은 원 훈춘현유격대로서 아래에 4개 련을 두기로 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지휘부는 잠시 삼도만 동구에 앉히였다. 회의에서는 반일부대와의 통일전선을 강화하고 항일유격구를 확대시키며 항일유격전쟁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길동반일련합군과 남만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하여 동만과 길동에 분산되여 있는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할 방침을 확정했다. 주동적으로 적을 타격 독립사가 건립된후 일제의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단부락”건설을 더욱 다그쳤다. 때문에 로항일근거지에서의 독립사의 활동은 날따라 곤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립사는 “한곳을 고수하면서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릴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진공책략을 취하라”는 중공만주성위의 유격전술을 채택, 죽도록 산골을 사수하면서 적들과 소모전만을 펼치던 국면을 타개하고 적극적으로 적점령구에 진격해들어가 활동하기로 했다. 4월 1일, 동북인민군 제2군 독립사의 일부는 항일의용군과 련합하여 연길현 팔도구금광을 습격, 일만군과 3시간동안의 접전을 하였다. 4월 7일, 독립사 일부는 왕청현 배초구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일만군경찰들을 습격, “집단부락”수건작업을 파괴했다. 4월 18일, 독립사 제1퇀 30여명은 왕청현 배초구 신안툰의 자위단을 습격, 총 20여자루 로획했다. 4월 22일, 독립사 일부는 연길현 차조구를 습격한후 명월구로부터 증원오는 일만군 한 개 부대를 소멸했다. 4월 23일, 독립사 제3퇀은 “집단부락”을 한창 수건하고있는 화룡현 우심촌을 습격하였다. 5월 2일, 독립사 제3퇀은 안도현에서 련속 4일간의 격전을 벌려 안도 대전자를 점령, 일만군 30여명을 격살했다. 5월 9일 독립사 제1퇀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연길현 사도만에서 한창 “집단부락”을 수건하는 위만군을 습격 17명을 투항시키고 총 11자루를 로획했다. 7월에는 독립사 제2퇀 일부가 산림부대와 련합하여 300여명 병력으로 안도 대전자를 밤낮 11일동안 포위공격하였다. 8월상순, 독립사 제2퇀과 항일의용군은 안도현 대사하를 진공, 위만군 30여명을 소멸, 70여명을 포로했으며 100여자루 총을 로획했다. 8월중순, 독립사 제2퇀은 기타 반일부대와 련합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점령, 위만군 300여명을 기의하게 하였고 그 일부를 인민혁명군에 참가시켰다. 안도현에서 독립사는 10개 반일무장부대와 련합작전하면서 왕덕태를 총지휘로 하는 항일련합지휘부를 건립하였는데 그 병력이 1000여명이 되었다. 련합부대는 련속적인 승리를 하면서 처장즈, 대전자, 태평구 등 항일유격구를 개척하게 되었다. 독립사 제3퇀과 제4퇀 주력도 왕청현, 동녕현, 녕하현 일대에서 유격전쟁을 주동적을 벌리였다. 왕청의 각 근거지는 적들의 장기적인 “포위토벌”로 하여 크게 파괴되였다. 하여 제3퇀은 적들의 주력부대를 피해 왕청과 녕안변계일대로 전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4년 5월 7일, 독립사 제3퇀은 구국군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위만군부대를 진공하여 많은 총과 탄약을 로획했다. 제3퇀은 또 소왕청 마촌등지에서 일만군과 전투를 벌려 일만군 25명을 소멸했다. 독립사 제4퇀은 훈춘으로부터 왕청, 동녕변계로 전이해와 활동을 벌리였는데 그 일부는 사충항부대와 련합하여 동녕현 이도하구의 위만군 장정단을 진공, 100여명을 포로하고 보총 30여자루를 로획했다. 6월 23일에는 라자구공격전을 벌리였다. 적들의 기재에 따르면 1934년 4월부터 10월 사이에 동만항일련합부대가 일만군을 103차나 주동적으로 습격하였는데 참전 련인수는 3537명이였다. 그중 2군 독립사가 53차 단독 출격, 참전 련인수는 1350명이였다고 한다. 제3차 반"토벌"투쟁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동만항일부대의 중견력량으로 장대해졌다. 독립사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에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지휘부를 건립하고 대일작전협정을 체결하는 등 반일무장련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와 맞섰다. 일제는 반일력량이 장대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1934년 가을, 일제는 3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제3차 “대토벌”을 감행했다. 일제는 중국공농홍군을 “포위토벌”한 장개석이 경험을 리용하여 중요한 부대를 중요한 도시와 교통요도에 배치하여 사수하게 하는 한편 정예부대를 집결시켜 “보보위영(步步爲營)”작전방침을 펼치였다. 적들은 항일근거지를 포위한후 “추격하면서 토벌”하거나 습격하는 등 전술로 독립사의 주력을 소멸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동시에 일제는 잔혹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여 인민군중과 항일부대와의 련계를 끊어놓아 항일부대가 기아와 추위속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게 하려고 시도했다. 1934년 9월, 히로세사단장을 총지휘로 하는 일본군정예부대와 위만군경비려, 정안군 등 “토벌대”는 비행기와 대포의 배합과 엄호하에 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와 각 유격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준엄한 형세에 직면한 독립사는 실력을 보존하면서 적을 타격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이미 파괴된 유격근거지를 버리고 새롭게 개척한 근거지로 전이했다. 제1퇀은 연길현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 등 근거지에서 철퇴하여 안도현 경내와 남호두 등지로 전이하고 제2퇀은 화룡현 어랑촌에서 물러나와 안도현 처창즈로 옮겨갔다. 제3퇀은 왕청현 대황외, 대왕청, 소왕청에서 퇴각하여 요영구로 전이하고 제4퇀은 훈춘현 하남, 하북, 반가채에서 빠져나와 금창, 화소포일대로 옮겨갔다. 독립사 각 퇀은 적들과 조우전, 습격전을 벌리면서 전이했다. 10월 8일, 독립사 300여명은 왕청현 대황외에서 이께다의 일본군 “토벌”대와 맞띠웠다. 독립사의 맹공격에 일본군은 격퇴당하고말았다. 독립사 제1퇀은 연길현 의란구 신흥동에서 일본군 무라다부대를 격퇴한후 주동적으로 기와바야시 “토벌대”를 습격하여 놈들을 섬멸했다. 11월, 독립사 제3퇀은 왕청현 삼차구와 대황외에서 일본 노구찌부대와 교전을 벌리였다. 이와 동시에 제2퇀의 130여명 전사들은 적들의 등뒤를 돌아 위자구위만경찰서를 습격했다. 12월초 독립사 제3퇀 제4련, 제4퇀 제5련 파견대 150여명은 녕안현 석두하자에서 위만군과 맞띠워 격전을 벌려 적 30여명을 소멸했다. 1935년 1월, 독립사는 성공적으로 대전이하였다. 하여 독립사 각 퇀은 전투에서 주동이 되어 반“토벌”투쟁에 림할수 있게 되었다. 1934년 4월, 독립사 제2퇀은 동만특위와 사부의 통일적 포치에 따라 안도현 처창즈방면으로 진군했다. 4월부터 8월사이에 제2퇀은 독립퇀과 함께 대전자를 두차례나 포위공격하고 반일부대와 공동으로 대사하부락을 습격하고 안도현소재지를 공격하는 등 일련의 전투를 진행하여 처창즈, 대전자, 태평구 일대를 통제, 유리한 자연조건을 가지고있는 처창즈에 유격근거지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1934년말부터 1935년초까지 삼도만근거지에서 기아와 엄한을 이겨낸 삼도만, 왕우구, 팔도구 유격근거지의 군민들이 안도현 신선동을 거쳐 처창즈에 들어갔고 화룡현 천수동과 머구령에 있던 어랑촌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처창즈로 들어갔다. 1935년 1월, 일제는 여러갈래로 처창즈를 향해 진공해왔다. 아군은 도로를 파괴하고 적들의 통신력량을 끊어놓아 일군과 위만군이 련합작전을 못하도록 하였다. 하여 처창즈유격구보위전에서 적 40여명을 격살, 총 20여자루를 로획한 반면 아군은 몇 명의 사망자를 냈을뿐이였다. 제1퇀과 제2퇀은 처창즈를 근거지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벌려 1935년 1월부터 5월사이 30여차례 전투를 벌렸는데 적 600여명을 살상하고 360여자루의 총과 각종 군사물자를 로획했다. 1935년 3월 21일, 독립사 제4퇀은 훈춘 금창으로부터 왕청경내로 진군하던 도중 전쟁이 싫어 한 개 련의 위만군병사들이 대황구에 피해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4퇀 전사들은 인차 대황구 위만군병영을 포위한후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강렬한 정치공세하에 위만군 련장은 82명 병사를 거느리고 인민혁명군에 참가했다. 정돈과 교양을 거쳐 새롭게 3개 련을 편성, 훈춘퇀은 도합 7개 련으로 늘어났다. 1935년 4월말, 독립사 제1퇀, 제2퇀은 안도현경내에서 위만군 1개 경비영을 매복습격하여 련장 2명을 포함한 50여명을 살상하고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제3차 반“토벌”투쟁에서 동만의 각지 근거지는 엄중한 파괴를 당했으나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함으로써 승리적으로 항일무장력량을 보전하고 적들의 “토벌”를 타개했다. (계속)  
45    제45장 일제의 집중영 “집단부락” 댓글:  조회:1703  추천:0  2014-02-12
  집단부락을 통제하고있는 무장자위단들. 부락주위에 높은 담벽 쌓고 깊은 도랑 파 밤낮 주민 감시 한사람 걸리면 10호 련좌 일제의 "채무농노"로 “일제는 정치면에서는 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탄압하고 조선인들과 항일부대와의 혈연적인 련계를 단절, 유격구를 고립시켰으며 경제면에서는 조선인들을 ‘안무’한다는 미명하에 ‘반일적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집단부락정책’이거나 ‘안전농촌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의 이런 정책은 조선인들을 일본독점자본에 예속시키는 “통제-안정방침”을 관찰하는 구체적인 통치정책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1931년 “9.18”사변이후 일제의 침략전쟁과 항일무장조직에 대한 “토벌”로 하여 수많은 조선인농민들은 집이 소각당하는 등 전쟁재앙을 입어 도처로 류랑하는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동북 각지에 피난민이 생겼는데 위만주국민정부척정사 제10과의 “간도집단부락건설개술”(1935년 12월 25일)에 따르면 연변 4개 현의 피난민은 1611호에 8387명에 달했다. 일제는 피난민을 “구제안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총독부와 망철회사가 공동으로 투자, 동아권업회사가 경영하기로 하고 1932년부터 우선 남북만의 피난민을 안치하기 위하여 료녕성 철령현 락석산, 1933년에는 료녕성 영구현 전장대, 흑룡강성 주하현(현재 상지현) 하동촌, 1934년에는 흑룡강성 수화현 현성부근, 1935년에는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 각기 “안전농촌”을 건설하고 피난민과 류랑민을 수용하였다. 일제는 “안전농촌”을 경영하면서 “단순한 구제에 머물러있지 않고 진일보 저극적인 지도하에 조선인의 모범촌을 건립한다”고 하면서 1938년부터 자작농창정계획을 실시하였다. 자작농창정계획이란 일제의 투자하에 토지, 부락건설비, 가옥건축비, 농업경영비 등을 농민들에게 대여준후 8푼의 리자를 가첨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매년 분년정기상환으로 10~15년간에 빚을 전부 상환하면 토지와 가옥 등이 개인소유로 되어 자작농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보기에는 농민의 경제적지위를 향상시키는듯한 정책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농민들을 채무농노로 전락시켜 동아권업회사의 토지에 속박되게 하여 자유로 이주하지 못하게 하며 농촌내에는 경찰분서와 자위단을 건립하고 농민들을 감시함으로써 항일부대와 민중간의 련계를 단절시키자는 정책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 안전농촌의 농민들은 해마다 빚을 상환하기는 하나 이듬해 봄이 되면 생활이 곤난하게 되어 또 회사 돈을 꿔 그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나 이듬해 또 빚을 더 지게 되는 처지에 빠지는 악선순환을 거듭해야 했다. “자작농창정” 대상으로 된 조선인농민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였다. 그들은 일본식민회사에 빚과 리자를 상환해야 할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가렴잡세도 납부해야 했다. 만약 제때에 규정된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면 이른바 “연장세”와 “예약위반금액”과 같은 추가금액을 내야 했다. 이렇게 되어 농민들의 빚은 해마다 늘어나 일본회사의 영원한 빚진 노예로 되어야했다. 1935년 연길현 동성용촌에는 “자작농창정”대상으로 된 집이 42세대있었는데 그들은 360정보의 토지를 부치고있었다. 그 토지값은 도합 3만5500엔이였다. 1945년에 이르러 이곳 농민들은 이미 각종 세금 5만7300여엔을 납부하였으나 일본식민지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후 4년동안에 1만6700엔을 더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일제의 “자작농창정계획”은 일본식민주의자들이 략탈한 토지를 고가로 파는 고리대금형식의 매우 간편한 방식에 의거하여 최대액수의 리익을 빨아내는 착취수단이였다. "보갑제도" 실시   목도구(지금의 안도현 복흥향에 속함)의 동포이민집단부락. “1933년부터 일제는 연변지구에 이른바 ‘피난민과 빈곤호구제’의 명의로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처음에는 원지방으로 돌아갈수 없는 피난민을 상대로 상부지부근 또는 기타 ‘안전한 지대’에 ‘집단부락’을 건립하고 안치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1차로는 북하마탕, 이란구 태양 등지에 9개의 집단부락을 건립했는데 855호에 4470명이 수용되여있었고 1934년에 제2차로 연길현 금불사, 삼명월구 등지에 15개의 집단부락을 건설했는데 수용되여있은 농호는 478호, 인구는 2557명이였다고 한다. 일제는 집단부락정책을 치안특별공작의 일환으로 삼았다. 항일유격구 및 항일근거지를 “토벌”, 소각한후 근거지의 민중과 그 부근의 산재호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집단부락을 건립했다. 집단부락을 민중을 감시하고 항일유격대 및 기타 항일군과의 련계를 차단하는 즉 “비민분리”의 “치안숙정” 목적을 위하여 리용하였다. 일제의 1935년 12월 통계에 의하면 연변에 건설한 “집단부락”은 121개이며 1만2362호, 8만1955명을 수용하였다. 1936년 8월, 일제와 괴뢰만주국정부는 “재만조선인지도강요”를 제정하고 연변 5개 현과 동변도의 18개 현을 조선인집거구로 지정, 중쏘, 중몽 변계지구와 기타 산재지구의 조선인을 강박적으로 일제가 지정한 곳에 가서 집중하게 하였다. 일제는 “집단부락”건설을 위하여 농촌에 산재해있는 집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주민들을 강제로 한데 모아 저들의 통제와 감시밑에 몰아넣고 가혹하게 탄압했다. “집단부락”의 구조는 1개 촌을 100호를 기준으로 하고 부락 4변 주위에는 2.5메터의 담벽을 쌓고 담벽 4각에 포대를 설치하였으며 대문은 한 개만 내였다. 항일부대의 습격을 방지하기 위하여 담벽밖에는 또 너비 3메터, 깊이 2메터의 깊은 도랑을 팠다. 부락 중앙에는 경찰분서 파출소와 자위단을 설치하고 부락 통용문은 자위단이 밤낮으로 보초를 섰는데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는 대문을 닫는다. 부락주민들에게는 “량민증”을 발급하여 “량민증”이 없는자는 “반일분자” 또는 “통비”혐의로 체포하였다. 일제는 이른바 “5가작통”, “10가련좌법” 등으로 불리우는 “보갑제도”를 실시하여 10호를 한패로 하고 촌 또는 이에 준할수 있는 구역내의 패로 1갑을, 경찰서 관할구역내의 갑들로 1보를 조작하고 주민들 호상간에 서로 감시, 통제하게 하였다. 한 사람이 “통비”혐의에 걸리면 본인은 물론 5호나 10호가 “련좌”되여 함께 처벌을 받는 것으로 부락민 호상간에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1936년 3월말, 일제가 동만지방에서 “보갑제도”를 실시한 정황은 이렇다. 연길경찰청, 보 2개, 갑 44개, 패 429개,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화룡현, 안도현 등 다섯 개 현에다 보 116개, 갑 523개, 패 7278개를 조작했다. 가혹한 수용소   연길현 고려촌 집단부락에서 조선인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있는 일제경찰과 그 앞잡이들. 차조구 중평촌의 “집단부락”은 1934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까지 11일동안에 건설되였다. 이 “집단부락”은 연변에서 두 번째로 건설한 36개소의 “집단부락”가운데의 하나로서 당국에서 조작한 “방어를 위한 집단부락”규격에 의해 건설되였다. 부락의 형태는 정방형이였는데 포대, 토성, 전호, 전기철조망 등의 방어설비를 갖추었다. 포대는 진흙을 이겨서 쌓거나 토피로 쌓았고 포대와 포대사이의 거리는 100메터이고 포대안에는 방한설비로 온돌을 놓았다. 흙토성높이는 3.33메터이고 밑너비는 1.98메터, 웃너비는 0.82메터이고 토성우에는 14호철사로 전기철조망이거나 가시철조망을 늘이였다. 전호의 표준은 웃너비 4.62메터, 밑너비 0.99메터이고 길이는 3.33메터이상이였고 문안팎에 약 2.62메터 높이의 철조망을 둘렀다. “집단부락”건설에 수요되는 설비는 비용만도 당시 시가로 약 11만4060원이 들었다고 한다. 이 “집단부락”건설에 동원된 로동력은 연인수로 3300명이였는데 그것은 호당에 풍기면 연인수로 28.6명이나 되었다. 공공시설비용과 영농자금, 가옥건축비는 호당 6250원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부담한 이 금액은 새로 지은 자기의 가옥을 저당잡히고 4년을 환납기한으로 하고 현에서 대여받은것인데 절대부분 농호들은 그 돈을 환납할 능력이 없었다. 이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집단부락”에 들어선 첫날부터 채무자로 전락되였다. 중평촌의 “집단부락”에는 105호의 조선인과 5호의 중국농민이 수용되였는데 그들은 원래 241쌍의 경작지를 가지고있었다. 호당 2.34쌍이였다. 그러나 “집단부락”에 수용된후 경작지면적은 크게 감소되였다. 경작지를 1.7쌍이하 갖고있는 농호가 이사하기전의 12%로부터 32%로 늘어났다. 자작농은 27.6%로부터 15.6로 감소되였고 소작농은 51.7%로부터 59.3%로 증가되였다. 부락과 멀리 떨어진곳에 가서 밭을 부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먼곳의 밭들은 죄다 황무지로 변했다. 식량이 모자라는 농민들은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끼니를 에웠다. 그들이 들어있는 집은 헐망하기짝이 없었다. 굶주림과 추워에 견디지 못하여 많은 농민들이 앓아죽고 얼어죽고 굶어죽었다. 집단부락에서는 공무인원과 불구자를 제외하고 18세부터 40세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자위단에 참가해야 했다. 부락내에 자위단시설이 설치되고 몇자루의 총과 탄알이 배치되였으며 단원들은 륜번으로 순라를 돌았다. 매호에서는 자위단비와 보갑비 등 경비를 정기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집단부락”의 경비는 일본헌병대의 지휘밑에 위만군과 경찰 그리고 매 “집단부락”에 조직된 약 50~100명에 달하는 일반자위단 혹은 무장자위단이 담당하였다. 1935년 연변유격근거지주변에 조직된 자위단은 241개였는데 그 대원은 7146명이였다. 1936년에는 319개로 1만8131명으로 증가되였다. 이가운데 직업무장자위단이 11개로서 141명이였다. “집단부락”에는 부락장과 부부락장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락장은 “보갑련좌법”에 의해 갑장을 겸하고 부부락장은 자위단장을 겸하였는데 만주국현장이 그들을 임명하였다. 부락장은 현의 일반행정보조사무를 겸하고 부락민에 대한 감독을 담당하였으며 부부락장은 부락의 경비를 책임지고 자위단에 대한 지도와 감독을 담당하였다. 부락민은 외출시 규정된 분량이상의 량식과 물자를 가지고 다닐수 없었으며 반드시 부락장 또는 경찰서의 허가가 있어야 휴대할수 있었다. 이것은 민중이 항일부대에 물자, 량식을 공급하는 것을 엄금하기 위해서였다. “실제상 ‘집단부락’은 ‘집중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집단부락’의 전략적인 성적을 보고 이 정책을 1936년부터 전 동북에 보급하였습니다. 항일부대가 활약하고있는곳이기만 하면 강제로 ‘보급’하였는데 어떤곳에서는 단독으로 ‘집단부락’을 건설하였고 어떤곳에서는 ‘집가병촌(集家幷村)’으로 산재호를 모조리 불사르고 강제로 ‘치안이 확보된’ 부락에 집결시켰는바 ‘병촌’부락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한 부락에 수용하고 유격근거지나 유격구는 전부 소각 또는 파괴하여 ‘무인지경’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집단부락”정책은 중세기적인 야만적이고 가혹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계속)  
44    제44장 제2차 반“토벌”투쟁 댓글:  조회:1712  추천:0  2014-02-12
  일제는 연변의 항일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각지에 수많은 토찌까를 세웠다. 사진은 위자구부근의 토찌까. 지금은 철소되였다. 일본군 "보보점령"전술로 모조리 죽이고 불살라 유격대 적후서 일군 위만군 습격 군수창고 소탕 소왕청작전 1933년 11월 17일, 일제는 6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소왕청유격근거지, 연길현 왕우구, 삼도만유격근거지,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자, 남구유격근거지를 불의에 포위공격해왔다. 일제의 토벌중점은 왕청유격근거지였다. 1500여명의 일본군, 위만군, 자위단이 3개 방면으로 소왕청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기는 아군의 군정지도기관이 자리잡고있는 마촌과 리수구를 연거퍼 폭격하였다. 왕청유격대의 반“토벌”투쟁의 총성은 뾰족산과 마반산에서부터 울렸다. 유격대와 적위대는 유리한 산세를 리용하여 적을 진지 가까이까지 끌여들여 매복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적들은 뽀족산 앞자락에서 60메터 상거한곳에까지 기여들었다. “땅, 땅...” 유격대는 불의에 집중사격을 들이대는 한편 작탄세례, 돌세례를 안겨 달려드는 적을 요정냈다. 경사가 급한 산벼랑으로 돌사태가 쏟아져내릴 때 전장을 들었다놓는 벼락치듯한 소리와 포연을 방불케 하는 자욱한 먼지구름은 침략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유격대의 드센 반격에 적군은 악착같이 달려들었으나 전초진지를 한걸음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편 산기슭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등뒤로부터 우박같은 총탄이 쏟아졌다. 유격대원들은 언녕부터 반대편 산우에 매복해있었던 것이다. 배후의 공격까지 받은 적군은 10여명의 살상자를 남기고 줄행랑을 놓고말았다. 포수대로 조직된 수십개의 저격조는 유리한 자세를 리용하여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을 쏘아눕혔고 부녀회원들은 주먹밥과 더운물을 이고 전호를 오르내렸다. 아이들은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전투원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마반산 쑥밭골초소에서 적을 저격하던 방차대는 새벽부터 쑥밭골을 포위하고 달려드는 적과 치렬하게 싸웠다. 귀틀집초소가 불에 타 허물어질 때까지 적의 진공을 7차례나 물리치면서 영용히 싸운 방차대원들은 총탄을 열세군데, 일곱군데, 세군데, 두군데 맞은 유격대원도 있었다. 그후 왕청유격구사람들은 그들을 이름 대신 “13련발”, “7련발”, “3련발”, “2련발”이라고 불렀다. 적의 대병력이 뾰족산과 마반산 진지에 련속 투입되자 유격대는 전면방어전으로부터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였다. 새로운 전술적조치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반군사조직성원들과 함께 전초진지들에서 철수하여 유격구의 종심깊이로 적을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의 천변만화한 전법으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통쾌하게 때리였다. 불무지작탄전은 그 효률이 100프로였다. 유격대는 진지를 옮길 때마다 다음 계선으로 철수하면서 불무지들에 작탄을 파묻게 하였다. 적들은 아군의 방어진을 차지하게 바쁘게 불무지앞에 모여들어 언몸을 녹이군 하였다. 그럴때마다 작탄이 폭발하여 적들을 요정냈다. 유격대는 적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전도 자주 조직하였다. 2-3명이나 4-5명 규모로 무어진 습격조를 적진속에 들여보내여 적군와해를 위한 삐라도 뿌리고 총도 몇발씩 쏘고 오게 하였다. 적의 천막이나 불무지 같은데 총을 서너방만 갈겨도 온 숙영지가 수라장이 되군 하였다. 이런 야습은 하루밤사이에도 세 번, 네 번, 지어는 다섯 번씩 하는 때도 있었다. 적들은 온밤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에 떨거나 저희들끼리 헛총질을 해댔다. 그러나 적들의 전술도 이만저만 악착스럽지 않았다. 유격구로 쳐들어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피스톤식 “토벌”이 아니라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숙영하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여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가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이행하였다. 일본군의 포화에 잿더미가 된 소왕청을 뒤에 두고 주민들은 십리평으로 피난하였다. 적들은 유격대에 검질기게 달라붙어 장기전을 시도하는 한편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기만 하면 죽였다. 한달가량 소왕청 반“토벌”전투를 진행하면서 유격대는 적군 200여명을 소멸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항일군민 1000여명이 죽었다. 거기에다 반“민생단”투쟁까지 겹치여 유격근거지는 인심이 황황해졌고 공산당과 유격대의 력량이 엄중히 쇠퇴되였다. 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공왕청현위는 소왕청유격구를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1934년 1월의 어느날 밤, 항일군민들은 적들의 방위가 허술한 서대파와 쟈피거우를 돌파구로 하여 포위망을 뚫은후 대황외와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했다. 적아간의 공방전이 가렬하게 진행되던 어느날 유격대 정위 김일성의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는 건의하에 유격대는 두패로 나뉘여 작전하게 되었다. 한패는 최춘국의 지휘하에 심리평을 지키고 다른 한패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적구로 나갔다. 2월중순, “토벌”대는 십리평항일유격근거지를 거듭 진공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과 특위기관은 부분적 유격대과 군중들과 함께 십리평 묘구의 대북구일대로 전이했다. 3월 21일 적군이 포위해왔다.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는 전투에서 중병으로 시달리고있던 동장영은 설상가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조선족녀전사 최금숙(왕청현부녀회 주임)은 탄알이 빗발치는 가운데서 동장영을 업고 포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동장영은 최금숙에게 엎힌채 희생되고 최금숙도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적들의 등뒤를 들부시다 김일성의 지휘하에 유격대 한 개 편대는 밤어둠을 타 배밀이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후방으로 깊이 들어갔다. 예견대로 적후방은 오히려 텅 비여있었다. 그때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맨처음 친 것이 량수천자의 적이였다. 우리의 벼락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자위단이 녹아나고 일본령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였다. 량수천자에서 적후교란전의 첫 총성을 울린 우리는 멀리로 사라지는척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곳에서 이동하는 적자동차수송대를 습격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우리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새 전투를 준비하였다. 1934년 2월 16일밤 북봉오동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은 모두 우리 부대에 의해 살상포로되였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가를 울리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방향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동골에 있는 삼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토벌”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사이의 철길을 끼고있는 주요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 “토벌대”로 변장한 유격대는 100여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의 조로 나누어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여일전의 출발지점으로 퇴각하였다. 기타 유격구에서의 반"토벌"전 연길현유격구는 대부분은 야산지대여서 적들에게 쉽게 로출될 불리한 형편에 있었다. 일제는 “연길현 공비소굴을 완전히 소멸한다”고 장담하면서 포위공격해왔다. 적들은 연길현 팔구와 왕우구 등 유격근거지에 이르자 야포와 박격포 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유격대를 공격했다. 부암에서 벌어진 첫날 전투에서 유격대의 명사수들은 50여명 적을 사살했지만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유격대와 군중들이 집중되여있는 사방대를 향해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해왔다. 적들은 사방대의 관문인 작살바위유격대진지를 맹포격하면서 아군의 방선을 뚫으려 들었다. 작살바위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은 적을 근거지에 접근시켜놓은후 맹사격을 들이대 쓰러눕히기도 하고 바위돌을 굴려 대갈통을 박살내기도 하면서 하루동안이나 고수했다. 1933년 12월 24일부터 1934년 2월 21일까지 연길현유격대 주력은 연길현 삼도만유격근거지일대에서 적들과 격렬한 반“토벌”전을 벌리였다. 1934년 2월초 연길현경찰국장 및 경찰대대장이 령솔하는 300여명 적들은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거 진공했다. 삼도만유격근거지 군민들은 련속 14일간 적과 23차 교전하여 150여명을 섬멸하였다. 3월 29일, 김순덕, 왕덕태, 남창익 등이 인솔하는 유격대는 연길현 팔도구의 삼상촌과 장재촌 사이에 매복하여있다가 “토벌”하러 오는 팔도구경찰대와 자위대를 공격하여 경찰순경부장을 비롯한 일군 몇 명을 격살, “토벌”을 격퇴시켰다. 같은 달 연길현유격대 한 개 지대는 삼도만 소묘구에서 “토벌”대 15명을 사살하고 총 13자루를 로획했다. 유격대는 근거지보위전투를 벌리는 동시에 부분적 병력을 적후에 파견하여 적병영과 군사요새를 습격하였다. 1934년초 연길현유격대 한부대는 로동자들의 배합하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천보산동은광에 쳐들어가 대량의 탄약과 광산경비대의 총을 뢰획했다. 화룡현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일본군을 쳐부셔 기타 유격근거지군민들의 반“토벌”전을 유력하게 지원했다. 유격대 대장 차룡덕은 유격대를 이끌어 삼도구의 일본경찰대를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30여명을 격살했다. 유격대는 또 청두골에서 매복전을 벌려 일본수비대를 공격, 군용자동차를 훼멸시키고 30여명을 격살했다. 훈춘현유격대도 대황구와 소오도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려 50여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유격근거지내에서 반“민생단”투쟁을 벌려 많은 령도간부와 전사들을 의심하고 처결하는 바람에 유격대의 사기가 저락되고 인심이 황황하여 반“토벌”전에서 작전을 순조롭게 조직할수 없어서 중대한 손실을 보기도 했다. 1934년 봄 동만 4개 현 유격근거지군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여 적들의 “토벌”과 맞섰다. 근거지의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량면으로 유격대를 원호하였다. “토벌”군이 쳐들어와 무차별학살과 방화를 했으나 군중들은 추호도 굴하지 않고 불탄 집터에 불도 꺼지기전에 다시 집을 지었다. 적들이 소각하면 짓고 또 짓고 하여 심지어 한 집터우에 서른두번이나 집을 짓기까지 하면서 유격대와 혼연일체가 되어 근거지를 보위하면서 “포위토벌”을 분쇄했다. 이번 반“포위토벌”을 통하여 유격대와 공산당조직은 더욱 장대해졌다.(계속)
43    제43장 반일통일전선 무어 댓글:  조회:1997  추천:0  2014-02-12
  구국군명장 왕덕림 오의성 사충항 시세영(왼쪽으로부터) 유격대와 구국군 어깨겯고 싸워 각지에서 일본군 위만군 무찔러 대도회와 구국군 제1차 반“토벌”전에서 연변의 각 현 항일유격대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대오를 한층 성숙시켰을뿐만아니라 풍부한 경험을 쌓아 무장으로 일제를 몰아낼 견정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가 약하고 적이 강한 참혹한 조건하에서 단결된 항전만이 승리를 취득할수 있다고 인식, 마땅히 구국군을 비롯한 반일부대와 단결하여 공동전선을 무어야 한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구국군과 한족반일군중들로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된 무장단체인 대도회는 반일항전에 적극 나서면서 동만의 일본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32년 3월 20일, 왕덕림의 구국군 250여명과 대도회 50여명은 로투구를 습격했다. 3월 30일에는 천보산광산을 습격하고 이튿날인 31일에는 왕덕림의 구국군 1500여명이 배초구를 공격했다. 4월 2일, 400여명 대도회무력은 삼도구를 습격하여 4월 8일까지 점령하고있었고 4월 8일에는 이도구(서성)를 습격, 중국공안분서 40여명 장병과 50여명 보위대원들이 봉기하여 대도회와 합류하여 일본경찰서를 습격하였다. 5월 9일에는 구국군과 대도회가 련합작전하여 달라자를 습격하고 이튿날인 5월 10일에는 구국군 220여명이 삼도만을 습격하였다. 6월 8일 구국군 200여명은 가야허일본경찰분서를 습격하였고 6월 14일에는 700여명 병력으로 삼도구를 다시 공격하여 일제가 무산수비대까지 동원하고 2차례의 비행공습까지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1932년 10월 27일 밤, 구국군 오의성부대 200여명은 쌍하진으로부터 목단촌을 경과하여 배초구를 습격하였고 11월 2일에는 대도회와 손을 잡고 동불사를 습격하였다. “대도회 등 자발적인 대중무장과 구국군의 저항은 일제의 크나큰 장애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1932년 4월 19일 이까다가 이끄는 제19사단 1600여명의 간도파견대와 일본관동군 제10사단 1400여명 도합 3000여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두갈래로 연변에 쳐들어와 대도회와 구국군에 향해 대규모적인 포위토벌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대화한 정규군에 의해 대도회가 괴멸되고 구국군도 괴사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들 수천명의 무장력량이 일제에 의해 비극을 맞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투쟁으로 하여 일제의 연변침략이 견제되였고 동만 각 현 유격대건립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게 되었습니다.” 구국군과 대도회의 반일투쟁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교수의 긍정적인 평가였다. 항일의 기발을 추켜들고 연변지구에서 활동하던 구국군은 일제의 “포위토벌”로 여지없는 참패를 당하고 1933년부터 중쏘변계로 밀리다가 쏘련으로 넘어간후 쏘련으로부터 관내로 철수해버리기 시작했다. 왕덕림과 공헌영 등이 이끄는 부대도 연변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구국군의 장병들은 의연히 남아있었는데 오의성, 사충항, 시세영 등이 계속 남아있었다. 이들이 이끄는 구국군은 연변과 동녕, 녕안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통일적이 못되였는데 어떤 이는 항일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주저하면서 방황하고있었다. 이러한 장병들은 틀림없는 중요한 항일력량이였다. 제1차반“토벌”전에서 각 현 항일유격대는 구국군의 남아있는 부대를 쟁취하여 공동항일하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임무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다. 동녕현소재지전투 1933년 9월, 김일성이 지휘하는 왕청, 훈춘 항일유격대의 110여명으로 조직된 결사대는 오의성, 시세영, 사충항이 이끄는 길림구국군과 리청천이 인솔하는 대한독립군부대와 련합작전하여 동녕현소재지를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련합부대의 병력은 3000여명이였다. 동녕현소재지에는 이사다가 이끄는 500여명 일본관동군 병력과 관퇀장이 지휘하는 1개 련대정도의 위만군병력외에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었다. 놈들은 대포와 비행기로 장비되여있었고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라자구를 떠난 원정부대는 며칠간의 시간을 로상에서 보낸후 9월 6일 밤부터 9월 7일 낮까지 동년현소재지전투를 벌리였다. 유격대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사충항이 인솔하는 구국군과 제3퇀과 함께 동녕성 서대문밖 릉선에 2층으로 축성되여있는 서성포대를 쳐부실 임무를 맡았다. 유격대 지휘관 김일성은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훈춘중대를 짜작골에 배치하고 왕청중대를 주공방향에 진출시켜 서산포대를 점령하기로 하였다. 밤 9시, 적진에 은밀히 접근한 유격대 파괴조는 진공의 신호총소리와 함께 적포대를 향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아간에는 몇시간동안의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졌다. 왕청유격대는 련속하여 10여차의 진공을 발동하면서 혈전을 벌리였다. 그때를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서문으로 시내에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을 봉쇄하게 하는 한편 일부 역량을 포대북쪽으로 우회시켜 맹렬한 작탄공격으로 서산포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동틀무렵이 다 되어서야 포대는 저항을 중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주력부대는 일본군수비대병영을 강철그물같은 봉쇄망으로 둘러싸고 적의 필사적인 반돌격시도를 가차없이 좌절시키였다. 일본군은 북문으로 도망쳤다. 편의대로 가장하고 시내에 미리부터 들어가있던 구국군부대들과 동문과 남문을 거쳐 시내에 돌입한 구국군부대들도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전투를 하였다. ...우리 부대는 결사적인 시가전으로 점령구역을 확대하면서 적들을 현성일각으로 압축하였다. 구국군도 이에 고무되여 병기공장을 점령하고 군수품적치장들을 습격하였다. 시가전은 여러 시간동안 계속되였다. 련합작전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달성되였다고 인정한 나는 아군에 철수명령을 내리였다. 유격대는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여 현성밖으로 빠져나오는 구국군부대들을 화력으로 엄호하였다. 우리가 사충항려단장이 중상을 당한채 시내안에 쓰러져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이때였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 사지판에 려단장을 남겨둔채 시내밖으로 도망쳐버리였다. 부관도 그를 돌보지 않고 살구멍을 찾아 성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최충국에게 사충항을 구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최충국은 그 명령을 결사적으로 집행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원해낸 사충항을 등에 업고 그를 화력으로 엄호하면서 부대를 고지쪽으로 무사히 빼돌리였다. 이번 전투는 동만유격대와 구국군 등 반일무장부대와의 가장 규모가 큰 한차례의 련합전투였다. 전투에서 유격대원들은 유격대의 영용왕강한 전투정신을 충분히 과시했으며 구국군과 기타 항일부대의 높은 신망을 얻었다. 동녕성전투에서 련합부대는 일본군과 위만군 150여명을 죽이고 7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위만경찰 2명을 죽이고 3명을 부상입혔다.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에서는 51명이 희생되고 19명이 상했다. 라자구공격전 1934년 6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군 제3퇀, 제4퇀의 부분적대원들, 수녕반일동맹군, 라자구일대의 사충항, 공헌영, 시세영, 리산협이 거느린 항일구국군은 도합 600여명으로 련합부대를 구성하여 라자구의 위만군을 들부시기로 하였다. 련합부대는 주보중과 김일성의 사회하에 적들을 소멸할 작전계획을 세웠다. 련합군의 진공기미를 알아차린 위만군 문영장은 부근에 있는 소속부대 500여명을 라자구에 집결시켜 전호를 파고 포대를 쌓아놓고 저항할 준비를 하였다. 6월 26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부대는 부락서쪽의 평지에 매복하여 적이 나오기를 기다렸고 사도하자에 주둔하고있던 수녕반일동맹군과 항일구국군 사충항, 시세영 부대는 마을동산의 뒤쪽으로 우회하여 배후를 습격하였다. 위만군은 박격포로 아군의 진지를 포격하였으나 련합부대가 맹렬하게 반격하는바람에 하는 수없이 라자구거리로 도로 들어갔다. 이날 전투에서 련합부대는 적 30여명을 죽이고 보총 4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이튿날, 인민혁명군, 동맹군, 항일구국군의 지휘원들은 회의를 열고 세 개 부대를 편성하여 라자구를 공격할 전투방안을 짰다.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중에 라자구공격전이 시작되였다. 제2부대는 라자구서쪽으로부터 거리에 쳐들어가 총 한방 쏘지 않고 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경찰들을 포로하고 총 2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그들은 그 길로 제3부대와 련합하여 라자구의 위만군영부를 진공하였다. 제1부대는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할 임무를 맡았는데 그것은 이번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고리였다. 그런데 적들의 포화가 어찌나 맹렬한지 일거에 쳐부실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구국군의 어떤 지휘원들은 동요되여 철퇴하자고 주장하였다. 구국군이 철퇴하면 아군은 매우 큰 손실을 받을것이였다. 인민혁명군전사들이 다시 한번 공격하였으나 여전히 서산포대를 점령할수 없었다. 이때 시가전도 긴장했다. 위만군은 아군을 반격하기 위하여 한 상점을 점령했다. 그러자 훈춘 4퇀의 부분적조선인전사들은 상점지붕에 올라가 뜨락을 지키는 적들에게 연길폭탄을 안기였다. 하지만 놈들은 그냥 완강하게 버티고있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였다. 전투가 시작된지 사흘째되는 날인 28일이였다. 전투를 시작하기전에 아군지휘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각 부대의 병력과 화력을 집중하여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일거에 점령하기로 하였다. 적들은 박격포를 쏘아대고 비행기로 폭격하였다. 그래서 구국군은 많은 중상자를 냈다. 구국군은 동요했고 사기가 저락되였다. 이것을 본 인민혁명군 전사들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꼭 점령하여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게 다졌다. 인민혁명군 전사들이 결사적으로 적진에 돌격하여 들어가 30분동안에 “난공불락의 보루”라고 큰 소리치던 적의 서산포대와 박격포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시가전에서 동요하던 구국군전사들이 갑자기 사기가 올라 용감히 적의 영부로 쳐들어갔다. 구국군은 인민혁명군과 협동작전하여 재빨리 위만군 영부를 짓부셔버렸다. 전투에서 이길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위만군 문영장은 하는수없이 투항하겠으니 담판할 대표를 파견하겠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련합부대 지휘부에서는 적의 요구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반일부대에서 담판하러 오는 대표 한사람을 솨죽였다. 그러자 적들은 다시 진지를 사수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련합부대는 7주야의 격전을 거쳤지만 라자구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하는 바람에 련합부대는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련합부대는 이번 전투에서 많은 적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각종 무기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이번 진공전을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는데 튼튼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계속)  
42    제42장 반민생단투쟁.3 댓글:  조회:2031  추천:0  2014-02-12
  조선인부락을 토벌하는 일본군 . 가짜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원혼 통곡하고 사형장에서도   “공산당 만세!” 높이 웨쳐 억울한 원혼들 동만항일무장투쟁의 참가자 채광춘(蔡光春)은 반“민생단”투쟁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금창(金倉)에서 총살당한 사람은 정필국, 정동식, 최학철, 서노톨, 오일파이다. 5명은 구위서기거나 구위이상의 간부들이였다. 이들을 모두 묶어 가지런히 땅에 꿇어앉히였다. 나는 처음으로 총살임무를 집행하다나니 속이 떨리여 세 번째부터 제대로 맞히지 못하였다. 이때 반장은 “탄알이 귀중한데 랑비할수 없다”고 하면서 나의 사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총창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찔러죽였다... 우리가 잠을 자고있는데 보초병의 고함소리가 우리를 깨웠다. 일어나보니 정필국이 살아서 왔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령도를 만나게 해 줄수 없는가? 나는 민생단이 아니고 공산당원이요. 죽기가 아쉬운데 나를 남겨주오.”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령도는 그의 애걸을 들어주지 않고 우리를 보고 그를 데리고 가서 총살하라고 하였다. 후에 내가 가서 보니 그의 온 얼굴은 피흔적과 상처투성이였다. 그가 만약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적들이 있는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 우리를 찾아와 두 번째로 총살당하겠는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화룡현의 반제동맹위원회 책임자는 재인강에 나가서 정치공작을 하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30여명의 애국자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자위단원들은 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사람한사람씩 목을 쳐서 죽이였다. 고도도 물론 그런 형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도의 목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목의 살과 가죽이 훌렁 벗겨져서 등에 가붙고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이것은 죽은 그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치명상이였다. 고도가 정신을 잃고 스러진 사이에 적들은 사형장을 떠나가버리였다. 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형장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등에 가붙은 살가죽을 목에 끌어다 붙이고 옷을 찢어 동여맨 다음 60여리의 험산준령을 배밀이로 기고 굴러서 마침내 어랑촌유격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고도의 상처가 완치되기도전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군중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그가 적의 주구로서 혁명대렬내에 깊숙이 잠복하려고 일부러 목에 상처를 내가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좌경분자들은 고도의 “죄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심판장에 끌려나온 군중들은 그들의 판결을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판의 조직자들은 고도를 살려두고 일정한 기간 검열을 통해 그의 정체를 밝힌다는 판결을 내리였으나 뒤에 돌아가서 그를 암살해버리였다. 연변당사연구부문에서 1982년에 수집,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제4퇀 전사 전흥문은 자신이 민생단으로 지목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차 대오를 떠나 달아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쪽지를 남기였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원이지 민생단원이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잡으려는것은 백분의 백으로 틀린것이다. 나는 산에서 내려가지만 절대 주구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지만 나의 총은 계속 혁명해야 한다. 나는 총을 큰 나무밑에 묻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과연 그 나무밑에서 총을 찾게 되었다. 1945년 “8.15”광복후 주보중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파견하여 전흥문을 찾게 하였으며 그를 인민해방군의 패장으로 배치하였다고 한다. 1930년 음력 4월 중공훈춘현위 선전부장 김규봉이 민생단으로 체포되여 압송될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주피구로 압송되는데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압송하던 유, 최 등 사람들은 적들의 토벌대가 덮쳐오는 것으로 오인한 나머지 김규봉을 버리고 급급히 도망쳤다. 하지만 김규봉은 홀로 그들을 따라 20리를 쫓아갔다. 그들을 따라잡은 김규봉은 “당신들을 파견하여 나를 체포하라 하였는데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어떻게 교대하겠는가?”고 말하였다. 하지만 유, 최 등 사람들은 갈길이 멀고 또 적들을 만나게 되면 위험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김규봉을 총살하여버렸다고 한다. 원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일환이 살해된 경우는 더욱 억울하다. 처창즈의 당지부서기 리억만(변절자)은 경상적으로 약담배를 피우며 공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김일환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이에 리억만은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 하면서 김일환을 민생단협의분자라고 거짓고발하였다. 1934년 11월의 어느날 리억만은 군중대회를 열고 김일환을 즉시로 총살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때 구국군의 한사람이 대표로 나서더니 “김일환은 진정으로 항일하는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일년남아 같이 있었는데 그를 잘 알고있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국군의 모든 병사들이 총알을 재워들고 “누가 만약 김일환을 총살하면 우리는 곧 그 자의 머리를 박살내겠다.”고 웨쳐댔고 회의장의 기분은 매우 긴장되였다. 밤중에 리억만이가 한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김일환을 암살했다. 그날밤 총살을 집행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김일환은 사형될 때 “공산당 만세!”, “동지들은 혁명을 끝까지 하라!” 등의 구호를 웨쳤다 한다. 어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김일환뿐이랴. 가짜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당한 수많은 억울한 원혼들이 울고 있다. 반"민생단"투쟁 종결 1935년에 이르러 “동만에 지금 있는 고려동지들은 누구나 모두 민생단이라는 공술이 있다. 만약 민생단의 공술이 없는 고려동지를 찾으려면 찾을수 없게 되었다”고 지적한 위증민의 말은 추호도 과장이 아니였다. 하여 반“민생단”투쟁을 주도하여오던 중공동만특위령도자들도 누가 민생단이고 누가 공산당인지 똑똑히 분간할수 없게 되었다. 결국은 무지막지한 의심과 야만적인 핍박공술로 거의 모든 조선인항일혁명간부들에게 민생단협의를 들씌워놓은 셈이였다. 조선인간부들도 며칠이 지나지 않으면 곧 민생단이라는 공술이 있었으니 동만특위의 한족간부들은 큰 곤혹과 불안을 느끼지않을수 없었다. 하여 자기 신변의 “고려동지 간부들에 대하여 일부의 무서움까지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동만항일근거지와 공산당, 공청단 조직내에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한족령도간부들은 결코 조직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 모두를 공술과 의심 그대로 배척하거나 체포할 수는 없었다. 동만의 모든 항일유격구가 기본상 조선인들로 이루어져있고 인민혁명군의 기본대오와 골간들도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때문에 조선인들에 대한 전체적인 배척과 탄압은 바로 동만항일혁명의 포기거나 자멸과 거의 같은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하여 민생단협의가 있는 거의 모든 조선인들을 아무리 믿기 어렵고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들과의 공존은 불가피한 사정이였고 그들과는 공동투쟁 역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하여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재고하지 않을수 없었고 피비린 투쟁방법만이라도 완화시키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민생단공술과 협의가 있으면서도 혁명대오내에서 주요한 간부로 있은 조선인들로는 인민혁명군 제1퇀 퇀장 방성괴, 정치위원 림수산, 제2퇀 참모장 류란환, 김일성, 동만특위 부녀위원 황선일 등이 있었다. 당시 동만항일유격근거지 군중의 95%는 조선인이였다. 일제의 삼광정책의 잔혹한 유린속에서도 유격근거지인민과 군인들은 완강하게 유격근거지보위에 목숨바쳐 나섰다. 대다수가 민생단이라면 무엇 때문에 항일무장투쟁에서 그처럼 생사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겠는가. 이러한 형세하에 중공만주성위 길동순시원 오평은 중공동만특위에 편지를 보내여 “만약 유격구내의 절대다수 군중이 민생단이라면 이런 유격구역은 일찍 일본군에게 소멸되였을것이다”고 지적하면서 종자운을 비판하였다. 위중민도 만주성위에 보내는 편지에서 “과거 인민혁명군은 완전히 민생단의 령도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치상의 매우 큰 착오이다”고 종자운을 비판했다. 그후 종자운도 공청단만주성위에 편지를 보내여 위증민을 비판, “그들은 고려동지들을 완전히 체포하고 해결하려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 무조건으로 공작을 철소하려고 계획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6월 17일 동만공산당, 공청단 특위가 제출한 보고서는 민생단이 “우리의 령도기관을 민생단의 기관으로 만들려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줄곧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생단의 문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반“민생단”투쟁에서 매우 적극적이던 공청단동만특위 서기이며 제2군 제1퇀 정치위원인 주소동마저도 공청단성위에 보내는 편지(10월 23일)에서 “만약 동만에 그렇게 많은 민생단이 있다면 이 몇 년간의 영용한 반일투쟁은 계속될수 없었고 우리의 인민혁명군은 일찍 일제한테 가서 변절하였을것이며 언녕 폭동이 일어나 령도자로 있는 몇 명의 중국인을 죽여버리고 투항하려 갔을것이다”고 지적하였다. 1935년 5월 쏘련으로 떠난 중공동만특위 서기 위증민은 그해 12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민생단들이 가끔 유격구에서 도망쳐 일본제국주의에게 가서 투항하지만 일제도 그들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 (아주 적은 민생단의 령수들만 믿고 하층군중은 믿지 않는다.) 일제가 그들을 붙잡으면 마찬가지로 고문하고 도살하기 때문에 민생단이 유격구에서 도망쳐간 것이 비교적 매우 적다...”고 했다. 하여 반“민생단”투쟁후기에는 민생단공술이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체포하지 않았고 소위의 교육해석공작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마치 대오내에 민생단이 없어진것처럼 되었다. 1935년 9월 라자구유격구의 포기와 10월 서남부 처창즈유격구의 포기를 최후로 동만의 원래의 항일유격근거지는 전부 소실되였고 인민혁명군 제2군은 두갈래로 나뉘여 북만과 남만으로 진출하게 됨으로써 반“민생단”투쟁은 객관조건상 사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36년 2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에 반“민생단”투쟁 등 동만문제를 회보하고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의 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 및 동만에 대한 새로운 지시를 가지고 위증민이 동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위증민은 “민생단문제에 있어서 동만 각 유격구에 민생단이 그와 같이 많았다는 것을 부인하고 만약 그와같이 많았다면 유격구와 인민군대를 지금까지 유지하지 못하였을것이니 지금 신임하고 사용하라”는 지시를 전달, 이 전달을 듣고 조선인 마음속에 쌓여있던 공포는 해소되였다. 1936년 3월초 동만특위와 제2군은 안도현 미혼진에서 위증민의 주최하에 령도간부회의를 열고 중공중앙의 “8.1선언”과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제3사를 새롭게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미혼진회의”직후에 신편 제3사단의 사단장 김일성 등은 무송현 마안산에 이르러 그곳에서 감시, 개조받고있던 민생단협의자 100여명에게 완전 무죄를 선포하고 그들 전부를 제3사단 부대에 편입시켰다. 이때 이들 협의자들의 자백서, 심문서 등을 모두 깨끗이 불태워버렸는데 이는 반“민생단”투쟁의 최후종결을 선고한 것으로 된다. (계속)  
41    제41장 반“민생단”투쟁.2 댓글:  조회:1547  추천:0  2014-02-12
유격대의 녀성대원들(왼쪽 세번째 김정숙) 무한히 확대되는 억울한 사건에 련류되여 원 조선공산당원 항일로간부 등 전부 숙청 파쟁주의자도 민생단으로 몰려 1933년 9월, 동만특위는 제1차확대회의를 소집하고 반“민생단”투쟁을 새로운 고조에로 불어일으켰다. 확대회의의 결의문은 “조선인 파쟁주의자와 민생단분자들이 하나로 되어 당내에서 일본간세계통을 건립하고 공산당의 령도기관을 차지함으로써 중앙에서 온 편지(“1.26편지”)에서 제출한 당면의 임무를 완전히 집행할수 없게 하였으며 당과 혁명운동이 매우 큰 손실을 받게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하여 과거 조선공산당 각파와 그 산하 반일혁명조직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민생단과 동일시되여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령도기구도 개편되였는데 특위조직부장 김성도를 “파쟁령수”로 지목하고 그의 직무를 해임, 총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반년전만 하여도 동만특위순시원의 신분으로 화룡현에서 수십명의 조선인혁명동지들을 민생단으로 몰라 억울하게 죽게 한 김성도자신도 결국은 마촌 남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1933년 12월 7일, 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 만주성위는 련합으로 “일본강도의 간세인 민생단 및 파쟁을 반대할데 관하여 한국민중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문장에서는 “파쟁분자들은 그 무슨 에멜파, 화요파, 상해파, 서상파, 고려공산청년단파 등으로 나뉘여져있다. 이런 민족주의의 파벌과 파쟁의 수령인물들은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주구, 간세들로서 사람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중국공산당, 반일유격대와 반일회 등 군중단체속에 섞여들어와 일본의 간세작용을 일으키고 중한민중련합반일의 민족혁명을 파괴하고자 한다. 일체민족주의의 파쟁수령과 민생단은 모두 일본강도 제국주의의 간세이고 반혁명분자들이며 당신들 민족의 계급적적들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흘후인 12월 11일에는 동만당, 단특위에 편지를 보내여 “당과 단의 계급성분과 민족성분을 전변시키며 기층간부까지의 모든 당, 단조직과 반일회, 농민협회, 농민위원회, 인민혁명정부, 유격대 등 일체 군중단체의 령도기관을 개조하여 파쟁분자들을 모조리 몰아내는 조직상의 철저한 전변”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지시정신하에서 동만의 반“민생단”투쟁은 더욱 치렬하게 전개되는수밖에 없었다. 중공동만특위서기 동장영은 원래 신체가 허약한 편이였는데 민생단을 신문하느라 며칠간 밤잠을 제대로 자지못해 각혈까지 하였다고 한다. 민생단에 대한 적발, 체포와 고문은 계속되였는데 간부뿐만아니라 일반군중과 군대속에서도 살벌하게 진행되였다. 무슨 공작상의 착오가 있으면 민생단작용이 아닌가고 감시하였기에 일반은 공포에 떨었다. 이에 따라 군대의 전투력도 저하되였다. 체포될가봐 두려워 도주한자도 있었다. 어떤 민생단사건으로 검거당한자는 자수해야 산다는 호소밑에서 체포된 첫날부터 어떻게 하면 진정한 자백이라고 확인될가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고심초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의 과거착오를 민생단의 작용이였다고 밝히고 자기와 같이 공작한 동지들을 민생단 조직원이라고 공술하였다. 과거의 민족주의자, 파쟁분자는 모두 민생단이라고 규정되였다. 민족주의자, 피쟁자와 민생단은 삼위일체라고 인정되고 한몸에 새개의 머리가 그려진 그림에 민족주의, 파쟁분자, 민생단이라고 글을 쓴 만화가 일시 성행되였다. 무한히 확대된 반"민생단"투쟁 1934년 3월, 중공동만특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연길현 삼도만 능지영에서 각 현 유격대책임자들이 참가한 련석회의를 소집하고 동만4개현의 유격대를 합편하여 통일적으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를 건립하기로 결정, 원 연길현 유격대 대대장 주진(朱鎭)과 정치위원 왕덕태를 사장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독립사 산하에 4개 퇀과 하나의 유격대대를 두었는데 무장대오는 900여명에 달하였고 군중무장으로는 청년의용군이 200여명, 반일자위대가 천여명이였다. 항일혁명대오내의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반“민생단”투쟁이 매우 첨예하게 진행되였지만 독립사 퇀급간부가운데는 대다수가 조선인이였다. 1934년 11월초순, 공청단만주성위 순시원 종모모가 동만에 온후 반“민생단”투쟁은 두 번째 고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공동만특위 “특별회의”는 2, 3일간 열리였는데 중공만주성위의 “10.1일 서한”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만공산당내의 반“민생단”투쟁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하였다. 최후로 주진, 리상묵과 훈춘현위서기 최학철을 “민생단”의 두목이라고 토론결정하였다. 주진, 리상묵 등을 체포하게 된 주요원인은 간도현병대의 특무외각조직인 “간도협조회(間島協助會)”가 1935년 1월 3일에 음모, 조작한 “사방대사건(일명 한영호사건)”이다. 1935년 1월 3일, 간도협조회공작원들이 공산당지하공작원으로 가장하고 연길현 사방대유격근거지를 찾아왔는데 이들은 제1보초선에서 보초병과 한담하면서 유격구량식운수대장 한영호를 잘 알고있는 듯이 백초구일대에 공작하려 나간 “한영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보초병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갑자기 총을 빼앗아가지고 적구로 달아나버렸다. 불의의 습격에 무장까지 빼앗긴 보초병은 유격구령도에게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게 되었고 령도기관에서는 한영호가 적들과 내통하는 민생단원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적구에서 임무를 완성하고 사방대유격구로 돌아온 한영호는 인차 체포되였는데 심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여 자신이 민생단원임을 승인함과 동시에 독립사 사장 주진과 제1퇀 제3련장 박춘도 민생단원이라고 공술하였다. 주진, 박춘도 인차 체포되였는데 주진은 탈출한후 변절화고 박춘은 고문 끝에 특위조직부장 리상묵도 민생단이라고 공술하게 되었다. 결국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리상묵은 민생단특위서기로, 독립사 사장 주진은 민생단특위 군사부장으로, 훈춘현위 서기 최학철은 민생단특위 선전부장으로 인정되고말았다. 리상묵이 도주하고 주진이 체포되였다가 탈출한 사실은 항일혁명대오에 일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선 주진의 부하로 있던 조선인간부 40여명이 민생단원으로 체포, 총살되였다. 그리고 주진, 리상묵 등 주요한 간부들의 도망과 변절로 하여 동만특위도 연길현 삼도만에서 왕청현 대황구로 전이하게 되었다. 조공단출신 항일로간부 전부 숙청 동만의 반“민생단”투쟁의 엄중성을 고려하여 만주성위 신임대리서기 양광화는 중공할빈시위 서기 위증민을 전권대표로 동만에 파견하였다. 1935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중공동만특위는 중공만주성위 전권대표 위증민의 조직하에 왕청현 남하마탕 대황외에서 동만당단특위 제1차련석확대회(대황외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동만특위를 철소하고 위증민을 서기로 한 새로운 특위를 조직하였으며 각 현의 현위를 특별지부로 개편하고 안도와 라자구에 두 개의 특구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대황외회의는 반“민생단”투쟁이 “네가 살면 내가 죽고 내가 살면 네가 죽는 생사투쟁”이라고 규정하고 숙반위원회를 조직하여 인민혁명군과 유격구내에서 전문적으로 민생단과 반혁명분자를 진압한다고 하였다. 이미 500명 이상의 민생단을 체포하였지만 아직도 “볼만한 성적을 얻지 못하였고” “지금 민생단이 매우 많다”고 인정하면서 “민생단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또 적지 않은 새로운 발전이 있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새로 조직된 숙반위원회는 동만특위 상무위원 3명(서기 위증민, 조직부장 리학충, 선전부장 리송일), 특위비서장 조아범, 공청단동만특위서기 주수동,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정치위원 왕덕태, 독립사산하 4개 퇀의 정치위원들로 구성되였고 주석은 리송일(조선족)이였다. 대황외회의부터 동만특위는 반“민생단”투쟁을 동만의 전체 공작중의 유일한 중심문제로 하고 세 개 단계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하였다. 제1단계는 먼저 민생단의 상급령도기관을 일률로 체포하고 소멸하는것이였는데 그 주요한 임무는 그들의 일체 상급령도의 간부들을 완전히 소멸하여 그들의 하급들이 령도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하는것이였다. 민생단조직계통은 공산당의 공작방법과 방식인데 민생단간세의 내용을 바꾸어놓은것뿐이며 민생단수령들은 공산당에서 제발시켜 당단령도공작을 하는 적극분자들이기에 제1계단에서는 이런자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만특위는 민생단의 “동만특위”와 각 현의 “현위”간부로 인정되는 25명(그중 특위간부 6명, 각 현의 현위간부 16명, 주요 교통원 2명)을 체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모두 총살하였다. 이들중에는 왕청현위서기, 동만특위 숙반위원회 주석, 특위선전부장인 리송일(민생단특위로 지목됨), 인민혁명군 독립퇀 퇀장 윤창범, 정치위원 김락천, 원 3퇀 퇀장 리남규, 원 공청단특위서기 김창연(민생단청년특위서기로 지목됨)등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조직과 군대의 조선인간부들이 포함되여있다. 위증민의 보고서에 따르면 약 2개월전에 리상묵, 주진, 최학철 등이 “낡은 민생단총기관”이 중공당에 파견된후 리송일이 민생단의 새로운 특위를 조직하려 하였고 리송일스스로도 자신이 민생단의 새로운 특위서기임을 승인하였다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조직과 인민혁명군내의 조선인주요간부들이 민생단의 상층령도들로 인정되고 무자비하게 숙청당한 것이다. 조선인간부중 최고위급에 있던 리송일의 경우, 그는 원래 반“민생단”투쟁에서 아주 적극적이였는바 민생단청산문제에서 엄격한 실행자로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민생단의 동만 총령도자, 민생단 최고수령이라는 있지도 않는 죄명을 쓰고 그가 죽인 많은 동지들과 만찬가지로 자기 동지들의 손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말았다. 리송일은 간도협조회가 조직한 “가짜편지”사건에 련류되여 죽음을 당한 것이다. 1935년 3월 13일, 간도협조회본부 공작원인 강현북과 리동화는 항일혁명군의 활동구역인 왕청현 쟈피거우에 들어가 간도협조회 회장인 김동한의 이름으로 리송일에게 보내는 가짜편지-즉 전번에 당신에게 부탁하였던 공산구역내 기밀보고 일은 본부에서 파견한 공작인원과 밀회하여 처리하기 바란다는 내용을 의도적으로 길가에 살포해놓았고 그 가짜편지를 발견한 공산당조직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리송일을 즉시로 체포, 총살하였다. 사형당할 때 리송일은 “정말로 민생단이라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환영(幻影)이였댔는가?”라고 탄식하였다 한다. 결국 제1계단의 투쟁을 거쳐 과거 조선공산당출신의 로간부, 로항일혁명가와 소자산계급출신의 지식인들을 “전부 소멸하였다.” 제2단계는 민생단의 일체 주요령도기관이 모두 파괴되고 수령들의 10분의 7,8이 이미 체포되거나 구축되였다고 인정한 상황에서 민생단의 중하급간부 및 하층군중들을 처리하는것이였다. 제3단계의 주요한 임무는 최후로 유격구밖에서 민생단의 조직을 소멸한다는것이였다.(계속)  
40    제40장 반 “민생단”투쟁.1 댓글:  조회:1733  추천:0  2014-02-11
   1932년 4월, 이케다대좌가 지휘하는 가 룡정으로 침입하는 장면. 억울한 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조선족항일전사들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꼬박 3년 4개월동안 동만의 공산당과 공청단 및 혁명대오내에서는 조선인 당원간부와 항일전사들만을 타격한 억울한 사건이 빚어졌다. 일제와 총칼을 맞대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조선인전사들, 항일을 위해 목숨을 내건 조선인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의 총탄에 맞아 삼단같이 쓰러졌다. 이 사건을 세칭 “반‘민생단’투쟁”이라고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 저명한 반일명장 주보중(周保中)은 “동만지구 당조직내에 적어도 50%의 민생분자가 있다고 하여 2000여명을 죽이였다. 동만 각 지방의 조직은 당, 단 특위, 현위로부터 아동단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적극분자들이 모두 살해되였고 사람마다 자기를 지키기에 인심이 황황하였다.”고 한바 있다. 반“민생단”투쟁은 확실히 항일혁명대오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통계에 따르면 반“민생단”투쟁의 피해자는 1000여명에 달한다. 그중 이름을 밝힐수 있는 피해자로는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김성도, 중공왕청현위원회 서기 리용국, 중공화룡현위원회 서기 김일환, 중공연길현위원회 군사부장 박동근 등을 비롯하여 560명이나 되고 피살자는 430명이나 되었다. 그럼 민생단이란 어떠한 조직이며 반“민생단”투쟁이란 어떤 투쟁이였을가?  "송노톨사건" 민생단이란 일제에게 투항한 조선민족개량주의들인 조병상, 박석윤이 룡정에 기여들어 공개적으로 조직한 친일반공적인 반동적사회단체로서 1932년 2월 15일에 결성되여 그해 7월 14일에 해체되였다. 민생단은 창립된 그날부터 반일혁명적군중들의 호된 타격을 받아오다가 일제의 제한과 동만반일혁명적군중들의 강렬한 반대로 만 5개월만에 자연 해산되였다. 중공연길현로두구위원회의 비서 “송노톨”은 30세초반의 중년이지만 수염을 더부룩하게 많이 기른 까닭으로 사람들은 그를 “노톨”(老头儿 즉 늙은이)이라고 불러왔는데 1932년 8월경 그는 로두구 일본헌병분견대에 체포되였다. 일주일 남짓이 지난후 항일유격구로 찾아온 그는 일본헌병대구류소를 “탈출”하여 왔다고 하였다. 구당위 공산당조직에서는 그의 체포 및 탈옥과정에 대해 의심되는바가 있었기에 원래의 구당위 비서직무를 취소하고 연길현농민협회에서 꾸리는 “농민투쟁보”사에 보내여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는 한편 조직적인 감시와 조사를 진행했다. 10월 16일, 세린하일대에서 활동하던 연길현항일유격대는 매봉산에 지형정찰을 나온 로두구분주소의 일본헌병 상등병 고노와 통역관 주모 등 3명을 발견하였다. 연길현유격대 장총대 분대장 최현은 분대원 4명을 데리고가 상등병 고노 등 2명을 격살하고 주모라는 통역관을 생포하였으며 권총 3자루를 로획하였다. 통역관은 "토벌"하기 위한 군사략도를 그리러 왔다고 자백하면서 “송령감”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심문한즉 그놈은 송노톨은 헌병대유치장에 갇혀있을 때 헌병대에 매수되여 “민생단”을 조직하여 유격대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사명을 가지고 파견된 사람이라고 하였다. 특위간부들이 송노톨을 체포하여 심문하니 처음에는 펄쩍 뛰면서 “생사람을 잡는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헌병대 통역놈을 대면시키니 송노톨은 더 말을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렇게 되어 “누가 민생단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이 뒤따르고 송노톨은 빈사상태에서 묻는대로 20여명의 조선인 간부와 열성분자들을 “민생단동료”라고 불어댔다. 이리하여 7월 14일 민생단이 실제적인 자연해소후 항일유격근거지 내부에서 새롭게 반“민생단”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겨우 25세밖에 안되는 중공연길현위서기 한인권은 송노톨이 고문핍박에 의해 공술한 모든 말을 그대로 믿고 매우 당황하여 전 현 범위내의 중공 당조직과 공청단조직 그리고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등 모든 항일군중단체 내부에서 민생단숙청운동을 광범위하게 조직, 전개하였다. 송노톨은 변절자, 주구밀정으로 인정되여 처형된 것은 두말할 것 없지만 그의 공술에서 지명된 20여명 사람도 즉시로 체포되여 심문받게 되었다. 잔혹한 육체고문과 지독한 공술핍박으로 하여 억지로 적발되여나오는 소위의 민생단원은 날로 많아졌다. 핍박공술에서 적발된 많은 사람들은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체포, 감금당하고 심문받았으며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였다. 반"민생단"투쟁의 격화 그해 겨울에 이르러 위자구에서 소위 공산당내민생단조직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몇 명의 공산당원이 팔도구 일본경찰분서에 가 귀순한후 유격구에 돌아와 가족을 데려가려 할 때 체포된 것이였다. 계속되는 일만군경의 피비린 “토벌”과 극도로 곤난해지는 유격구의 생활, 거기에다 내부의 긴장한 반“민생단”투쟁이 날로 험악해가는 상황에서 동요하고 투항변절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게 되었던것이다. 하지만 유격구공산당조직은 이러한 현상을 모두 내부에 잠입한 민생단의 작용으로 보고 반“민생단”투쟁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던것이다. 이리하여 당내에서 동요, 변절하는자가 더욱 많아지고 반“민생단”투쟁은 더욱더 격렬하게 전개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였다. “송노톨사건”을 도화선으로 연길현항일유격구에서 살벌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반“민생단”투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룡현으로 번져갔다. 1933년 3월 중공동만특위는 조직부장 김성도(金聖道)를 화룡현위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김일천, 리동규, 김락천(화룡유격대 정치위원) 등 5명으로 “청산위원회”를 조직하고 화룡현에서의 반“민생단”투쟁을 조직, 지도하였다. 이들은 먼저 평강농민협회 책임자 리화춘을 체포한후 자세한 심사도 하지 않고 군중대회에서 민생단이라 선포하고 즉시로 총살하였다. 이로부터 화룡현항일유격구에서도 반“민생단”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김성도는 화룡현에 가 순시하는 2, 3개월동안 혁명대오내에서 소위 민생단원을 수십명이나 살해하였다. 1933년 6월초, 중공만주성위의 대표단으로 반경우(潘慶友)와 양파(楊波)가 중공동만특위소재지인 왕청유격근거지에 오게 되면서 반“민생단”투쟁은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6월 4일부터 소집된 중공왕청현위 제1차확대회의에서 왕청현위가 지난날 “우경기회주의로선 밑에서 혁명적 현재단계를 뛰여넘어 쏘베트를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실행하려 하였으며 우경기회주의적 실질을 감추고 만주의 위대한 반일민족혁명운동을 보지 못했다. 그 착오의 내용은 한국민족주의자와 파쟁주의잔여와 립삼로선의 간여를 포괄하고있었다”고 결론짓고 현위서기 리용국(李用國)과 군사부장 김명균(金明均) 등의 령도직무를 취소하였다. 면직당한 김명균은 불만을 품고 부인을 데리고 가만히 유격구를 빠져나와 도망쳤으나 이튿날 도중에서 유격대에 발견되여 체포되였다. 유격구에 감금되여 조직심사를 받던 김명균은 깊은 밤중에 기회를 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를 감시하던 리건수는 민생단으로 지목되여 총살당했다. 이 사건은 동만특위를 긴장시켰다. 이들은 원 왕청현위 서기 리용국, 조직부장 석초 등 20여명의 당정군 간부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새로 임명된 현위서기 김권일(金權一)도 체포한후 모두 소왕청유격구에 감금하였다. 만주성위대표단은 왕청에서의 문제해결을 마친후 양파는 연길현으로 가고 반경우는 특위서기 동장영의 안내하에 훈춘현 대황구유격근거지에 이르러 훈춘현 공산당과 공청단 확대회의를 7일간 소집하였다. 반경우와 동장영은 중공중앙과 만주성위의 지시정신을 전달하고 훈춘현위가 “좌”경로선을 집행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이 지구에 쏘베트를 건설한 것은 “좌”경로선이고 민생단의 책동이다”고 질책하였다. 이들은 5월달에 이미 희생된 원 훈춘현위서기 서광(徐光)을 지명비판하고 현위를 재조직하였다. 그리고 령북유격대 정치위원 박두남을 파쟁분자라 비판하고 그의 중공당 당적과 정치위원 직무를 취소한다고 선포하였으며 권총까지 회수하였다. 7월 20일 반경우는 김남규네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그 집 뜨락에서는 한 개 분대의 유격대원들이 한창 식사준비를 하면서 새로 로획한 일제 3.8식보총을 돌려가며 구경하고있었다. 박두남도 그 총을 구경하겠다고 넘겨받은후 인차 총알을 재워넣고 문앞에 달려가 반경우를 겨누며서 소리쳤다. “애매한 박두남을 죽이려 하는 네놈이 먼저 죽어야 한다!” 박두남의 웨침소리에 뒤이어 총소리가 울리고 반경우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다. 명사수인 박두남은 쓰러진 반경우의 몸에서 재빨리 권총을 빼들고 유격대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에게 덤벼들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고나서 산림속으로 도망쳐버렸다. 반경우의 피살은 동만특위에 있어서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동만특위에서는 선전부장 리상묵을 훈춘현에 파견하여 반혁명숙청운동을 직접 령도하게 하였다. 리상묵은 훈춘 공산당조직, 정부, 유격대와 군중단체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무단적으로 선포하고 현위위원 오일파 등 구급이상의 주요간부 60여명을 체포하여 령북, 령남의 3개 구류소에 감금, 반년 남짓한 기간내에 갖은 흉악한 고문을 거쳐 6차에 나누어 60여명 간부중 한창혁 한사람을 제외한 전부를 총살하거나 타살하였다. 그리고 지주, 부농 가정출신인자, 문장을 쓸수 있는 지식인, 로간부, 과거 조선독립군과 조선공산당 당파에 참가했던자, 공작중에 참오가 있었던자, 공작표현에 이상이 있다고 보이는자, 유격구의 생활곤난에 불평표현이 있었던자, 심지어 식사중에 밥알을 흘린 사람까지도 모두 민생단원이라고 몰아치면서 그중 100여명이나 체포, 학살하여 전체 유격근거지가 내부공포에 떨게 하였다. 1934년 1월 공청단만주성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1933년 8월 1개월간 동만에서 민생단을 크게 파괴하였는데 항일유격구와 유격대내에서 민생단 200여명을 발견하고 그 수령 12명을 선택하여 총살하였다. (계속)  
39    제39장 제1차 반 “토벌”투쟁 댓글:  조회:2087  추천:0  2014-02-11
  어랑촌에 세워져있는 기념비.   일제는 가는곳마다에서 모조리 죽이고 불사르고 빼앗고 유격대는 군중과 함께 피어린 투쟁을 벌려 근거지 보위 일제의 야만적인 "삼광정책" “항일유격근거지가 건립되고 유격대가 점점 장대해지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식민지통치에 거대한 위협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유격대와 유격근거지를 없애버리려고 련속하여 군사적‘대토벌’을 감행했는데 1932년 봄부터 1935년까지 세 차례의 대규모적인 군사‘토벌’을 감행했습니다. 제1차 ‘토벌’은 1932년 봄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진행되였는데 유격구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의 반‘토벌’투쟁은 참으로 간고했지만 끝내 일제의 ‘토벌’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일본군의 제1차 군사“토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1932년 4월 동만에 침입한 일본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의 이께다대좌가 지휘하는 “간도파견대”는 서쪽의 장춘에서 출동한 관동군 제10사단의 히라가부대, 북쪽의 녕안에서 증원 온 쯔루미부대와 함께 주요한 주민지역들을 무장점령함과 동시에 간도일본총령사관소속 경찰 및 위만군까지 총동원하여 항일혁명력량에 대하여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4월 3일부터 7월 2일까지 일만군경들은 동만항일군민과 10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였고 비행기를 380차례나 출동시켰다. 년말까지 “토벌대”는 “검거소탕”을 진행하여 항일군민 1200여명을 살해하고 150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듬해 3월까지 모두 381차의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일본총령사관소속의 경찰들은 322차의 작전(그중 일본군과의 련합작전 196차, 경찰부대 단독작전 126차)을 진행하여 항일군민 2766명을 살상하고 2485명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일본군경들은 항일혁명지역에 대한 “대토벌”에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삼광정책을 실시하였다. 1932년 4월부터 5월까지 적들은 왕청현 덕원리, 동일촌일대를 “소탕”하였는데 토벌가운데서 지하공작원 리재봉(김상화)과 한영호를 체포한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작두로 목을 자른후 보안대문앞의 높은 나무에 달아놓고 효시했다. 일만군“토벌”대는 화룡현 평강구, 개산툰구, 달라자구, 삼도구에서도 야만적인 “삼광정책”을 진행했다. 반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놈들은 개산툰의 자동을 47차나 토벌했으며 무고한 군중 43명을 살해했다. 4월 27일, 적들은 연길구 실현촌에서 중공동만특위 선전부장 조기석 등 28명의 항일지사들을 체포한후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5월, 훈춘현 연통라즈에 대한 “토벌”에서 그 일대 20여개 부락, 1천여 주택을 전부 소각하였으며 무고한 백성을 수없이 학살했다. 해란구 화련리에서는 세인을 놀래운 “해란강대학살사건”을 빚어내기도 했다. 놈들은 연길현의 이란구, 팔도구, 봉림동, 화련리일대의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어놓았다. 해란강대학살사건 일제는 일찍부터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란유격구를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해란유격구인민들은 중공해란구위원회의 지도밑에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벌렸으며 반동적인 지주, 매국적 주구를 처단하기도 했다.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란강유격구에서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자 일본경찰과 헌병들은 “화련리의 하늘땅을 뒤엎겠다”고 고아대면서 해란구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일본“토벌”대는 연길현 소영자자위단 단장 최남수, 리철우, 하동자위단 고문 박희선, 박명호, 박승준, 허남철, 자위단 참모 김동후, 형사고문 황병연, 보안대원 서봉묵, 자위단 후보대원 윤승화, 박병승 등을 앞세우고 해란강반의 마반산, 하동, 화련리, 소영자, 화첨자 등지를 끊임없이 포위토벌하였다. 일제는 공산당 1명을 죽이면 15원 장려하며 산사람을 잡으면 총 한자루를 장려한다고 하면서 한간, 주구들을 부축켰다. 1932년 음력 3월 28일, 일본수비대 50여명은 괴뢰만주국자위단과 함께 남화련리 중지방, 류정촌, 석건평 등지의 무고한 인민들을 마구 체포하여 학살했다. 놈들은 남화련리에서 청년 김룡수를, 중지방에서 의사 김도제를, 류정촌에서 리동근을, 학교촌에서 리씨 등을 체표하였으며 석건평으로 가는 길목에서 18명의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자 학살하였다. 일제와 자위단놈들의 탄압에 해란구인민들은 중공해란구위의 령도밑에서 대담하고도 지혜롭게 일본군과 악질지주, 철도경비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기를 무장하는 한편 류정촌동골, 중지방, 상지방 등 세곳에 철공장을 세우고 비밀리에 무기를 제작하였다. 그해 7월 항일유격소대를 건립하고 벽수, 화첨자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였고 집사대로 위장한 다음 화첨자경찰분주소를 습격하여 경찰들의 무기와 의복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에 악에 받친 일제는 “조선사람 100명을 죽이면 1명의 공산당원이나 공청단원을 잡을수 있다”고 하면서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놈들은 또 항일혁명대오 내에 변절자를 박아 넣어 내부로부터 와해하려고 하였다. 1932년 음력 8월초 해란구 등 3개 구의 항일유격소대는 중공연길현위의 지시에 좇아 류정촌에 거주하는 해란구 서기 리상근의 집에 모여 계림촌에 주둔하고있는 40여명의 철도경비군의 무기를 탈취하려는 전투계획을 토론하였으나 현위에서 파견한 백창헌은 우정 습격날자를 질질 끌었다. 백창헌은 혁명을 배반하고 연길일본령사분관의 끄나불이된 놈이였다. 이자는 이번의 무장탈취계획을 처삼촌 리성포에게 알려주었고 리성포는 주구 조혜천을 시켜 일본령사분관에 밀고하게 하였다. 밀고를 받은 일본령사분관에서는 주구 리진우가 인솔하는 “토벌대”와 벽수자위단 도합 70여명을 출동시켜 음력 8월 7일 이른새벽에 기관총 3정과 대포까지 걸러놓고 불의에 류정촌을 습격하였다. 하여 세집에 나누어 류숙하고있던 항일유격대원 60여명은 불의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5,6시간이나 반격을 견지하였다. 놈들은 마을에 기여들어 민가에 불을 질렀다. 놈들은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2살난 어린이와 72살의 할머니를 날창으로 찔러 불속에 집어넣었다. 이번 불의의 습격에서 중공해란구위의 리상근, 장상순, 김정길, 오용묵 등 22명의 유격대원이 희생되고 30여명의 군중이 학살되였다. 이것이 전 동만을 진동시킨 “8.7”참안이다. 1932년 음력 12월 12일, 일제는 연길일본수비대, 경찰, 하동자위단으로 “토벌대”를 무어가지고 다시 해란구에 쳐들어갔다. 대부분 군중들은 피신했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군중들은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김학선은 북화련리의 허궁다리에서 자위단과 격전하다가 희생되였도 그의 식구 일곱명 가운데서 며느리와 딸이 겨우 사경에서 벗어났을뿐 나머지 다섯식구는 불잡혀 화형을 당했다. 태명금은 소영자자위단에 체포되였다가 소영촌 구하동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놈들은 토굴속에서 장질부사로 앓고있는 5명의 혁명자를 체포하여 나무가리우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토벌대”놈들은 김귀송을 붙잡아 칼탕을 쳐죽인후 불에 태워버렸으며 박원섭을 체포하여 그의 사지를 각을 떼서 끓는 가마에 삶았으며 21살나는 유일남을 석마에 갈아 죽였고 김고농을 석마에 달아매 놓고 피를 받아죽였으며 김규식을 눈알을 뺀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이렇게 일본군경과 자위단은 연길현 해란구 화련일대의 12개 자연촌과 200여호의 주민들에 대하여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대소 94차례의 “토벌”을 진행하고 중공당원과 항일군중 1700여명을 학살하였다. 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유적비. 일제의 동만에 대한 제1차 “대토벌”에 대하여 중공동만특위와 각 현위에서는 유격대와 적위대, 항일혁명군중을 령도하여 적극적인 반“토벌”전을 벌리였다. 1933년 2월 11일 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항일근거지 어랑촌에서 “군민련합경축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이틀전 화룡유격대가 일군으로 가장하고 지주 장보림의 무기를 빼앗은 전과를 경축하기 위해 펼친 대회였다. 대회후 중공화룡현위서기 최상동은 김병수, 안학선, 김정한, 김동해, 문관우 등 구위 간부들과 함께 앞으로 할 일들을 토의하느라고 새벽 3시까지 회의를 했다.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본군은 정탐을 파견하여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와 유격대실정을 빤히 알게 되었다. 그러던차 자기들의 코밑에서 “황군”으로 가장한 화룡유격대가 장보림의 무기를 몽땅 털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미쳐날뛰였다. 일제군은 두도구, 이도구, 삼도구와 룡정 등지로부터 일본경찰, 수비대, 무장자위단 등 도합 360여명을 긁어모아 “련합토벌대”를 무어가지고 사면팔방으로 어랑촌을 포위해왔다. 군민련합경축대회가 있은 이튿날 새벽에 적들은 어랑촌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총창을 꼬나든 “토벌대”놈들이 마을로 기여들 때 왕지평쪽에서 총소리가 세 방 울렸다. 그것은 임무를 맡고 나갔던 제2소대 대원들이 마을에 다가든 적들을 발견하고 적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을에서 보초를 서고있던 제1소대 유격대원 채동식은 총소리를 듣자 즉시 유격대실로 달려가 중대장 김세에게 알리였다. 채동식에게서 보초를 교대받은 유격대원 천국선도 겹겹이 포위하고 다가드는 적들을 발견했다. “적이다!” 천국선은 높이 웨치면서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마을사람들은 문을 차고 뛰여나왔다.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마을을 포위한 적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놈들은 기관총과 박격포사격을 들이댔다. 삽시에 마을은 포화에 잠겨버렸다. 사태는 몹시 위급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어랑촌에 있는 모든 당정간부, 유격대, 적위대 그리고 군중들은 적들의 포위를 뚫고 나갈수 없게 된다. 중대장 김세는 우선 현위기관과 군중들을 안전하게 전이시키기로 하고 중대를 세 개 전투소조로 나눈후 적들과 생사박투를 벌리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공산당원 리구희, 공청단원 류택규와 유격대원 유만길은 유격대실을 진지로 삼고 진군해오는 적들을 정면반격했다. 유격대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접근할수 없게 되자 적들은 유격대실에 불을 질러놓았다. 불길이 타번지는 집속에서 세 용사는 끄덕않고 적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불에 타던 집이 물앉는 순간 그들은 뛰쳐나와 포위를 돌파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현위서기 최상동은 군중을 엄호하며 전이시키다가 적탄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총을 꼬나들고 달려드는 일본놈의 대갈통을 돌을 들어 까부신후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대장 김세, 정위 ‘김아주머니“(김병호) 등 대원들은 서쪽 주택과 담장에 가 음페하여 적들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진공해오는 적들을 한차례 또 한차례 격퇴시키면서 현위기관과 군중들의 안전한 전이를 위해 박투하다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는 여섯시간이나 지속되였다. 대부분 군중과 간부들은 산속에 옮겨갔다. “토벌대”는 세대의 자동차에 18구의 저들의 시체와 20여명의 부상자를 싣고 어랑촌을 물러갔다. 그 속에는 “간도파견군”군관의 시체도 있었다. 어랑촌을 일거에 삼켜버리려던 일본군은 유격대의 영용한 반격을 받고 물러갔다. 이날 유격대에서는 현위서기 최상동, 중대장 김세, 정치위원 “김아주머니”(김병호), 1소대장 리구희, 유격대원들인 안흥원, 류택규, 유만길, 정두호, 김국진, 리길원, 적위대 대장 류억만, 적위대원 리명배, 소년선봉대 대장 차정숙 등이 희생되였다. 1933년초, 일본침략군은 3000여명의 병력에 비행기, 대포의 엄호와 배합하에 소왕청과 연길현 의란구, 석인구, 삼도만,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등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규모적인 “토벌”을 감행했다. 1933년 3월, 적들은 소왕청유격근거지를 중점 “토벌”하기 위하여 2000여명 병력을 3개 갈래로 나누어 소왕청근거지를 행해 진군했다. 동만특위의 지휘하에 왕청유격대와 리광이 지휘하는 별동대는 항일구국군과 배합하여 유격근거지 주위의 산마루에 매복권을 펼쳐놓고 쳐들어오는 적들을 기다렸다. 3월 30일 이른아침, 대두천에서 쳐들어온 한갈래의 적들은 마촌에서 2키로메터가량 떨어진 뾰족산일대의 포위권에 들게 되었다. 아군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을 행해 맹렬히 사격했다. 2시간가량 격전을 통해 아군은 진공해오는 적들을 여러차례 물리쳤다. 우세한 병력을 믿고 적들은 아군의 방선을 넘으려고 악을 썼지만 끝내 방선을 뚫지 못했다. 이때 유격대는 주동적으로 철퇴하여 적들의 배후에 가 진공했다. 등뒤로 공격받게 된 적들은 어찌된 갈래판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황망히 도망쳤다. 도망치던 적들은 저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병력을 발견하고 유격대인줄 알고 맹렬한 사격을 퍼부으면서 저들끼리 죽일내기를 벌렸다. 이렇게 첫날전투는 적들의 실패로 끝났다. 이튿날과 사흗날에도 적들은 각 방면으로부터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유격대와 항일구국군의 기동령활한 배합작전으로 실패하고말았다. 소왕청 반“토벌”전에서 유격대는 일본군 300여명을 소멸하고 총 259자루, 박격포 4문, 기타 군용품을 수두룩이 로획했다. 1933년 훈춘유격대는 공산당의 령도하에 각지에서 주동적으로 일만군의 “토벌”대를 습격하여 항일유격근거지를 승리적으로 보위했다. 9월, 훈춘유격대는 주동적으로 흑룡강성 동녕현에 진격하여 적들을 진공했다. 10월 7일 훈춘에 돌아온후 대황구부근에서 “토벌”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몇시간의 치렬한 전투를 거쳐 박진흥, 오빈 등 13명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연길현 삼도만항일유격근거지군민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일본군 “토벌”대를 습격하여 몇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각급 공산당조직의 령도아래 항일근거지군민들은 단결하여 적들과 용감히 싸워 알심들여 획책한 적들의 제1차“토벌”을 끝내 물리치고 금방 건립된 유격근거지를 보위해냈다. (계속)  
38    제38장 동만항일유격근거지 댓글:  조회:1574  추천:0  2014-02-11
  1933년 5월에 발행된 제11호 표지. 은 항일전쟁시기 중공동만특위기관지였다. 쏘베트정부 정치 경제 문화 로농병을 위해 복무 동만항일유격전쟁의 튼튼한 전략적기지로 건설 산악지대에 근거지 건립 일본제국주의의 파쑈통치가 극대화되고 유격대를 그 맹아시기에 소멸하려는 일본군의 군사적“토벌”이 미친 듯이 감행됨에 따라 각지의 유격대와 대중들은 자신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적을 타격하고 몰아내기 위한 전략적기지-항일유격근거지가 적발히 수요되였다. “성세호대하게 진행된 ‘추수’, ‘춘황’투쟁이후 동만지구는 기본상에서 광범한 항일혁명군중에게 통제된 상태였습니다. 의란구거나 배초구같은곳은 혁명군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있었는데 배초구일본령사분관 관원과 경찰들은 언녕 도망쳐버리고 없었습니다. 이것은 항일유격근거지건립을 위한 군중기초가 형성되였음을 증명해줍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항일유격근거지건립을 위한 군중토대와 공산당의 지도력 및 객관적인 유리한 조건 등을 하나하나 분석했다. 동만의 중국공산당조직은 군중을 령도하여 항일투쟁을 진행한 경험이 풍부했다. 1928년 제일 처음으로 중공룡정지부를 성립한 그때로부터 연변의 공산당조직은 “붉은5월투쟁”, “8.1”길돈폭동 등 대규모적인 혁명운동을 이끌면서 그 지도력을 과시했다. 또 이미 500여명의 유격대원을 가진 4갈래의 유격대가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군중성적인 무장조직인 돌격대, 적위대, 소선대 등이 있었다. 지형조건으로 보아도 장백산일대는 고산준령으로서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퍽 유리했다. “중공동만 각급 공산당조직들에서는 이 유리한 조건을 틀어쥐고 적들의 통치가 빈약한 산간지대와 농촌들에 항일근거지를 건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설명이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김철수)에 기재된 1932년(소화 7년) 11월에 분석한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간도에 있어서의 이른바 ‘쏘베트구역’”은 아래와 같다. 훈춘현 투도구로부터 오지 초모정자에 이르는 지대. 훈춘현 동포대로부터 로만국경 동남쪽 지대. 훈춘현 황구로부터 가야하동북지대를 지나 왕청현 서대파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의란구 왕우구 류채구로부터 석인구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삼도만으로부터 동불사 북쪽 위자구 차일령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화련리 북심미동으로부터 왕청현 경계 사수평에 이르는 지대. 삼도구 수침동으로부터 이도구 어랑촌에 이르는 지대. 화룡현 득미동으로부터 하광포 평정산을 지나 우심산, 류동에 이르는 지대. 연길현 장인구로부터 안도현 대황구에 이르는 지대. 동만 공산당, 공청단 특위의 사업보고에서는 당시 적색유격구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밝혔다. 왕청현: 황구구, 소왕청구, 대황구구, 가야하구. 연길현: 만구구, 팔도구구, 삼도만구, 로투구구, 의란국구. 훈춘현: 황구구, 연통라자구, 하남구, 반가요구. 화룡현: 이도구구. 이러한 지대는 모두다 중국공산당과 그 령도밑에 있는 항일조직들이 통제하고 있는 곳들이였다. 다시말하면 일본침략군의 “토벌”로 하여 허다한 지방의 대중들은 부득불 산골인 상술한 지대에 집결되였으며 중공동만특위를 비롯한 각급 당조직들도 부득불 이러한 산간지대에 이동하였다. 이리하여 일제의 침략통치구역과 멀리 떨어진 상술한 지역들은 자연히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지역으로 되었다. 동만의 각 항일유격근거지는 이러한 정세와 토대우에서 창설되였다. 1932년말까지 동만에는 연길현 북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하는 연길유격구, 왕청현 남부와 중부 및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왕청유격구, 화룡현 서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화룡유격구, 훈춘현 서북부와 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훈춘유격구 등 네 개 유격구가 형성되였다. 유격구내에서 각현의 당조직에서는 유격대와 반일군중들을 이끌고 유격전을 벌리는 한편 적들의 통치가 박약하고 군중투쟁이 활약적이며 진공, 방어에 유리한 지대를 골라 10여개의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다. 왕우구, 석인구, 위자구, 능지영, 소왕청, 마촌, 가야하, 사수평, 영창동, 대황구, 연통라자, 어랑촌, 우복동 등 유격근거지가 그것이다. 유격근거지들은 둘레 60~70리, 지어 100리까지 되었으며 인구는 적어서 500~600명, 많으면 2000명도 더 되었다. 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근거지는 동만의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아래에 초보적인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왕우구항일근거지는 룡정북부의 연길, 왕청경계에 자리잡고있었다. 근거지는 왕우구, 북동, 송림동, 봉서동, 의란구 남구, 북동, 남양촌 등 몇 개의 비교적 큰 자연툰을 포섭하고있었는데 1000여호의 조선인농호가 있었다. 근거지가 건립된후 중공동만특위서기 동장영을 위수로 하는 중공동만특위기관과 중공연길현기관은 조양천으로부터 왕우구유격근거지의 고성툰으로 옮겨왔다. 이때로부터 왕우구유격근거지는 동만항일투쟁의 지도중심으로 되었다. 훈춘대황구유격근거지는 영안, 밀강의 북부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중강자, 삼안(하중구), 상중구, 청수동, 황구, 동구, 북구, 대빈랑구, 소빈랑구, 서대마구, 양목교자등 자연툰을 포섭, 1000여호의 주민이 있었으며 둘레는 1000여평방키로메터였다. 항일유격근거지들이 건립된 지역으로 보면 왕우구, 팔도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하는 부르하통하 이북의 산악지대, 어랑촌을 중심으로 한 봉밀구일대의 산악지대, 가야하, 소왕청, 요영구를 중심으로 한 가야하량안의 산악지대,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황구령이북의 령북산악지대와 연통라자를 중심으로 한 훈춘강 이남의 산악지대들이다. 근거지의 쏘베트정부   1933년 화룡현 어랑촌유격근거지에 성립된 아동단학교. 박창욱교수는 근거지내에서의 쏘베트정부의 건립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했다. “1932년 6월, 중공중앙은 상해에서 북방회의를 소집하고 ‘혁명위기의 증장과 북방 당의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습니다. 이 결의는 실제상 제3차 ‘좌’경모험주의책략을 북방지구 공산당의 사업가운데 시달한것입니다. 이때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직부장 하성상을 이 회의에 참가시켰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만주는 특수한 상황인데 그것은 첫째로는 만주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영향이 크지 못하고 민중이 잘 발동되지 않고 있으며 둘째로는 이미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만주의 혁명은 무장을 탈취하여 일제와 싸우는것이여야 한다고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동북의 특수성을 말살하고 만주성위가 제출한 ‘동북당의 중심임무는 무장으로 일제침략에 반항하는것이다’는 주장에 대해 ‘만주특수론’이라고 비판하였으며 동북도 관내와 마찬가지로 홍군과 쏘베트정권을 건립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결과 중공동만특위는 할수 없이 중앙 ‘북방회의’정심에 따라 유격근거지에 홍색정권을 건립하고 토지혁명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11월에는 연길현 이란구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서, 1932년 12월에는 왕청현 5구 가야하유격근거지에서, 훈춘황구대황구와 연통라자유격근거지에서, 1933년 1월에는 왕청현 2구 소왕청유격근거지에서, 1933년 2월에는 연길현 팔도구 석인구유격근거지에서 선후로 로농병대표대회를 소집, 중화쏘베트공화국의 헌법, 강령, 법령에 근거하여 쏘베트구역시정강령을 제정하고 구쏘베트정부와 일부 촌쏘베트정부를 선거하였다. 연길현 옹성라지구의 삼도만, 이란구의 남양촌, 연길현의 화련지구, 삼도구구의 우복동 등 지역에서는 선후로 혁명위원회를 건립하고 쏘베트정권의 직능을 대행했다. 쏘베트정부는 낡은 정권의 법령과 민족불평등제도르 페지했고 적에 대해서는 독재를 실시하였다. 16세이상의 로동자, 농민 및 혁명군인들에게는 민주,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주었지만 부농에게는 이러한 권리를 주지 않았다. 경제상에서는 봉건착취제도를 배척하면서 지주와 일제의 주구, 반혁명분자의 토지, 집, 농기구 등 자산을 몰수하여 고농, 빈농, 중농 및 유격전사들에게 분배해주었다. 8시간 로동제도를 선포하고 가렴잡세를 취소했으며 누진세를 실행했다. 쏘베트정부에서는 조선인민회금융부를 철소하고 고리대착취를 취소했으며 무리식대부의 농민신용사를 세웠다. 쏘베트정부에서는 농민들을 조직동원하여 농업생산을 추진하는 한편 병기공장, 피복공장, 병원을 꾸리기도 하였다. 쏘베트정부에서는 또 유격근거지에 소학교를 세우고 학령어린이들에 대한 “소학교의무교육법”를 공포, 실시하였다. 각 근거지에서는 투쟁실제와 군민의 수요로부터 출발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학교를 건립했는데 학교에서는 교육이 로동인민과 항일전쟁을 위해 복무하며 생산로동과 결합하게 하였다. 학교에서는 항일전쟁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 각 근거지에는 30여개 학교가 있었다. 학교들에서는 본민족 언어문자로 수업하였다. 성인사회교육에 중시를 돌려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식자반, 야학교 등을 꾸려 문맹을 퇴치하고 사람마다 글을 읽을수 있게 하였다. 유격근거지내에서는 각종 문예오락활동도 활발히 벌리였다. “혈해지창”, “전투적인 밀림”, “경축대회”등 연극을 창작공연하였으며 수많은 항일가곡을 창작하였다. “투쟁”, “두갈래로선”, “전투일보”등 간행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군사상에서는 유격대외에 적위대, 소선대 등 반군사성조직을 건립하기도 했다. 동만유격근거지에는 1234명의 공산당원과 830명의 공청단원, 1600여명의 아동단원과 적위대원이 있었다. 유격근거지에는 2만여명의 항일군중이 있었는데 각급 공산당조직과 유격근거지의 쏘베트정부에서는 군중운동을 활발히 벌리여 반일회, 호제회, 아동단, 소선대, 부녀회 등 반일단체를 조직, 이런 조직들로 하여금 유격근거지의 생산, 건설, 전선지원, 상병간호, 보초, 한간방지, 정찰, 통신, 선전 등 활동에 적극 참가하도록 이끌면서 유격대의 작전에 배합, 근거지의 든든한 후군이 되었다. 유격근거지에서는 소형의 병기공장, 피복공장, 인쇄공장을 꾸려 무기를 수리하고 탄약, 수류탄, 토배기작탄, 군용칼, 단발권총, 군복 등을 만들어 유격대에 보냈으며 문화선전품과 교과서, 신문간행물을 인쇄하기도 했다. 동만근거지내에는 병기공장 4개, 피복공장 4개, 인쇄공장 3개가 있었다.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원인으로 하여 유격근거지는 비록 분산적이며 규모가 작고 밀접히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각급 공산당조직의 령도아래 근거지의 군민들은 일치 단결하여 유격근거지를 동만항일유격전쟁의 전략적기지로 건설하였다. “동만항일유격근거지는 동북에서 제일 구전하고 제일 오래 지속된 항일유격근거지였습니다. 그러나 동만공산당조직이 왕명이 ‘좌’경모험주의를 집행하고 타격면을 넓혔기 때문에 유격대와 반일부대의 관계가 악화되였고 동시에 유격근거지에 쏘베트정권을 건립하여 홍색구역과 적통치구를 대립시키고 적통치구군중을 쟁취하는 사업을 틀어쥐지 않은 탓으로 홍색구역이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에 불만을 가진 부농, 부유중농 등 단결할수 있는 항일력량을 포섭하는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확대하며 유격근거지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지적이였다.(계속)  
37    제37장 동만항일유격대.2 댓글:  조회:2003  추천:0  2014-02-11
항일전쟁시기 연변에서의 김일성, 최현, 안길. 반일군중들 간고한 환경서 항일유격대 지원 장대해진 유격대 유격근거지건설에 박차를 훈춘현유격대 1932년 1월,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의 김한구(김혁), 방철산, 리국진 등 15명의 반일 청년들은 대황구 서대마구 두도령 심산속에 밀영을 세우고 별동대를 건립하였다. 대장은 강석환이 맡았다. 1932년 2월에는 연통라즈 서구에서 10여명의 대원으로 돌격대를 건립, 강일무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돌격대는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는외 과거 반일민족주의무장단체에서 파묻어두었던 총 20여자루와 많은 탄약을 파내여 대오를 무장하였다. 별동대와 돌격대는 영용하고도 기민하게 적의 손에서 무장을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였다. 1932년 봄 연구의 돌격대원 오일파, 리해봉 등은 연구 뚱아라경찰분대의 집수리에 동원된 당지농민들속에 섞여 경찰분대 뜨락에 들어갔다. 그들은 일하면서 동태를 살펴보다가 물마시러 들어가는척하고 집안에 들어가 총을 닦고있는 경찰들을 때려엎었다. 리해봉은 손에 닿는대로 삽 한자루를 들고 대문으로 달려가 보초놈을 찍어넘겼다. 그들은 보총 두자루를 빼앗아들고 대문을 빠져나와 그 길로 산길을 질러 연통라즈에 돌아왔다. 이때부터 리해봉은 “삽자루”란 별호를 가지게 되었다. 1932년 6월초, 중공훈춘현위서기 서광은 10여명 연구돌격대를 련솔하여 하남 남진맹동척회사무장자위대를 야습하여 보총 10자루를 탈취했다. 그리고 별동대원 3명은 경신향 회룡봉해관장의 숙사를 야습하여 권총 1자루를 얻었다. 여러차례 전투에서 무기를 마련한 그들은 훈춘현유격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6월 중공훈춘현위는 중공동만특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대흥구 청수동에서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훈춘현유격대의 건립을 결정하고 연통라즈 서구에 연구유격대(령남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일무가 대장으로, 리청(중국인)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처음에는 1개 중대밖에 없었는데 김태준이 중대장을 맡았다. 7월에는 대오가 2개중대로 늘어나자 구선일이 제2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겨울에 이르러 대원이 130여명으로 늘어나고 총 100자루가 되자 유격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였다. 중공훈춘현위에서는 구국군 왕옥진부대에 공산당원과 공청단윈들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게 하였다. 그 결과 구국군 13퇀에서는 보총 14자루를 지원했다. 이 무장을 토대로 대황구에서 황구유격대(령북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석혼이 대장으로, 박두남(후에 변절함)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후 구국군 왕옥명을 데리고 유격대에 넘어오자 그를 대장으로, 윤석원을 정위로 임명했다. 1933년 1월, 유격대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훈춘현위에서는 연구유격대와 황구유격대를 합병하여 훈춘현유격총대를 편성, 공헌신을 총대장으로, 박태익을 정위로 임명하였다. 총대밑에 2개 대대를 두고 제1대대장에 공헌신, 정위에 박태익, 제2대대장에 심랑동, 정위에 박두남을 임명하였다. 유격총대는 130여명으로 늘어나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왕청현 라자구일대의 밀림속에서 활약하면서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유격대가 건립된지 얼마 안되여 일제군은 연통라즈 “토벌”을 감행하였다. 1932년 7월 소선대 대장 황정해가 연구에서 비밀련락을 가다가 야침봉부근에서 100여명의 “토벌대”를 발견하고 즉시 연구에 되돌아가 알렸다. 유격대는 연구에서 3리가량 떨어진 곳에서 매복전을 벌려 적 10여명을 격사, 경상하고 “토벌대”를 격퇴시켰다. 같은 시기에 연구유격대의 몇몇 대원들은 반석향 장류구에 있는 일인축산회사의 목장을 습격하여 소 160여마리를 빼앗아 연구유격구로 몰고왔다. 1933년 초봄, 훈춘의 토호들과 악질지주 및 친일상인들은 동흥진의 상인들과 자금을 합쳐 동흥진에 군수품상점을 세우기로 하고 25대의 마차에 상품들을 가득 싣고 훈춘을 떠났다. 이 소식을 입수한 중공연구당위에서는 장수림더러 20여명의 유격대원과 적위대원을 거느리고 매복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로룡구의 뒤산에 매복하여있다가 친일상인들의 짐실은 마차가 매복권안으로 들어오자 맹사격을 퍼부었다. 호송대로 따라온 왜군병사 대여섯놈과 위만군 몇놈이 격사되자 그 외의 놈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유격대는 마차 25대에 실은 피복, 신, 밀가루, 소금 등 많은 물자를 탈취했다. 1933년 5월, 훈춘유격대 소대장 최진과 박창준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소륙도구 다리목에서 일본군들이 호송하는 20여대의 마차를 습격하여 일본군 9명을 격사하고 총 9자루, 밀가루 40여마대를 빼앗았다. 1934년 4월 6일, 40여명의 유격대원들은 탑자구집단부락의 자위단을 야습하여 부단장 신연택을 격사하고 12자루의 보총과 천여발의 탄약을 얻었다. 유격대원들은 당장에서 자위단의 소굴을 불살라버리고 축산조합의 소 3마리를 빼앗았다. 그해 5월 12일 유격대원들은 반일병사들과 손잡고 오도구집단부락을 습격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괴뢰군 4명을 격사하고 2명을 격상시켰으며 13명을 생포하고 총 17자루와 많은 군수품들을 로획하였다. 훈춘현의 유격근거지인민들은 간고한 환경속에서 항일유격대의 항일투쟁을 열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유격대는 가는곳마다에서 인민들의 지성어린 위문을 받았다. 인민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격대에 식량을 날라다주었으며 생활용품을 공급해주었다. 연구의 녀성들이 조선에 건너가 피륙, 신, 양말 등을 사 경신구에 가지고 오면 그곳 청장년들은 물품을 지고 산을 넘어 유격구에 날라갔다. 유격대의 물자구입과 수송을 위하여 경신구 회령봉의 지하공작원 김규성 등 몇몇 동지들은 헌식적으로 사업하였다. 녀성들은 유격대에 옷을 만들어 보냈다. 연구의 7명의 녀성은 왜군들의 “토벌”이 우심했으나 4개의 재봉침으로 밤낮 악전고투하여 유격대원들의 옷을 지어 제때에 공급하였다. 녀성들은 일본놈들이 쳐들어오면 재봉기, 옷감 등을 산속과 땅속에 감추어두었다가 적들이 돌아가면 다시 파내여 옷을 만들었다. 대황구의 “3.1”학교에서는 아동들을 조직하여 보초, 련락, 정보수집 등과 같은 아동들의 힘에 알맞은 일을 하였다. 학교에서는 항일혁명가곡을 불렀고 매주 토요일이면 강연대회를 열었고 선전대를 조직하여 유격대의 전사들과 병원의 부상병들에게 위문공연을 하였다. 1934년 3월말, 훈춘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으로 편입되여 새로운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연길현유격대 1932년 봄, 중공연길현위는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상급의 지시정신에 따라 항일유격대를 건립하며 적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라고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의란구, 로투구, 팔도구, 해란구 등지에서 돌격대, 적위대를 조직하여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 1932년 봄, 의란구소년선봉대 대장 박동무가 지주에게서 권총 두자루를 탈취하였다. 연길 북산촌 김홍규는 국자가 동쪽거리에서 보초를 서고있는 괴뢰만주국경찰의 총 1자루를 빼앗았다. 대마록구에서는 공청단 단지부서기 림춘익 등 5명이 룡정, 조양천 부근에서 지주집을 습격하여 보총 2자루, 권총 2자루, 렵총 몇자루를 빼앗았다. 7월에 공청단원 김충진은 연집강 연성촌에서 괴뢰만주국경찰을 강물에 처박고 권총을 탈취하였다. 8월에 최현 등 3명은 소동구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총 5자루를 탈취하였다. 이렇게 로획한 무기를 토대로 하여 1932년 초여름, 연길현 의란구와 로투구에서 유격대가 건립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대원 30여명이였으며 대장 박춘이였고 로투구유격대는 대원 20여명이였으며 대장은 박주철이였다. 유격대는 1932년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무려 20여차의 전투를 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소연집강 보안퇀분주소를 습격하여 총 11자루를 탈취한후 7월 어느날에는 소배초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저격하였으며 뒤이어 화전자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총 몇자루를 로획하였다. 8월에는 팔도구경찰서를 습격하고 일본인광산자본가와 앞잡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9월에는 유란환, 김동규 등 유격대원들은 의란구 춘홍가부근에서 “연길폭탄”으로 일본군 군용트럭 3대를 습격하여 적 20여명을 살상하고 보총 2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1932년 10월, 의란구유격대와 로투구유격대는 련합하여 연길현유격대를 건립하였다. 1932년 11월,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군대를 집결하여 동만유격대에 대한 제1차“대토벌”을 감행하였다. 연길현유격대와 적위대는 적들의 “토벌”에 맞서 영용히 싸웠다. 유격대는 삼도만 대동구에서 400여명의 “토벌대”와 이틀동안 싸워 적 90여명을 소멸하였으며 왕우구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괴뢰군을 저격하여 많은 살상자를 냈다. 연길현유격대는 “자기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놈들을 소멸하고 몰아낼수 있는 전략적기지”를 창설하기 위하여 왕우구, 석인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한 부르하통하 이북의 산간지대에 선후로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였다. 유격근거지를 창설한 유격대는 이곳저곳에서 신출귀몰하며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점차 장대해진 연길현유격대는 유격대대로 확대되였다. 대대장에 박동근, 정치위원에 박길이 임명되였다. 대원은 130여명이였다. 그들은 보총 60여자루, 권총 15자루, 기타 원시적무기와 “연길폭탄”으로 무장하였다. 대대아래에 4개 중대를 두었는데 제1중대는 삼도만 능지영에, 제2중대는 부암에, 제3, 4중대는 왕우구, 북동에 주둔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연집강, 팔도구, 의란구, 삼도만 등지를 넘나들면서 유격활동을 활발히 벌려 적들을 타격하였다. 1932년 3월말, 연길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편성되였다.(계속)  
36    제36장 동만항일유격대.1 댓글:  조회:1779  추천:0  2014-02-11
소왕청 리수구에 자리잡은 왕청현 반일유격대 지휘소. 대중적인 무장탈취투쟁 활발히 벌려 조선인 민중들 유격대건립에 앞장서 화룡현유격대 1931년 겨울부터 동만 각지에서는 항일유격대의 건립사업을 다그쳤다. 화룡현항일유격대의 건설사업도 1931년 “추수투쟁”과 1932년 “춘황투쟁”에서부터 시작되였다. 1930년 “붉은 5월 투쟁” 후 중공화룡현위와 각구의 당조직에서는 개산툰, 달라자, 평강, 삼도구 등지에서는 유격대, 적위대, 돌격대 등 노동자, 농민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그들은 이러한 무장단체에 의거하여 적들의 무기를 탈취하는 투쟁을 지혜롭게 펼치기도 했다. 1932년 봄, 장락영 등 돌격대원들은 개산툰에서 친일지주인 차성남의 장원을 습격하여 보총, 권총, 양포 한자루씩 탈취했다. 6월에는 개산툰돌격대 대장 리동일이 돌격대원들을 이끌고 선구공안국을 습격하여 총을 빼앗았고 7월에는 개산툰적위대 대원들이 백룡평해관을 습격하여 권총을 빼앗았다. 무기가 장만되자 이들은 개산툰의 고석동에서 “개산툰권총대”를 건립, 채규진이 대장을 맡았다. 권총대는 계속하여 무기탈취투쟁을 벌려나가면서 대오를 확대했는데 7월말에는 20여명으로 불었다. 중공화룡현위 달라자구위에서는 “붉은 5월 투쟁”속에서 건립된 적위대를 기초로 1932년 여름 “달라자장총대”를 건립, 김창섭이 대장을 맡았다. 20여명의 대원을 갖고있는 장총대는 금곡, 룡암, 달라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해 가을 장총대는 달라자와 함보동길에서 괴뢰군집사대를 매복습격하여 세놈을 죽이고 보총6자루를 빼앗았다. 그들은 금곡의 매바위산의 동굴에다 소형병기공장을 앉히고 자작폭탄을 만들기도 하고 장총대의 무기를 수리해주기도 했다. 평강구에서도 1932년 여름 적위대를 기초로 유격대를 건립, 김세가 대장을 맡았다. 20여명의 대원을 갖고있는 평강유격대는 평강, 장인강, 투도구 일대에서 무기탈취투쟁을 전개했다. 가을에 유격대는 장인강과 투도구의 지주장원을 습격하여 보총, 권총, 사냥총 등 20여자루를 탈취하였다. 삼도구에도 10여명으로 조직된 유격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우복동, 삼도구 등지에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화룡현위의 지시에 따라 각구의 유격대는 어랑촌에 집결, 화룡현유격중대를 건립하였다. 김세가 중대장을 맡고 “김아줌마”(별호 본명 김병활)가 정위를 맡았다. 1933년 1월 15일(음력) 어랑촌유격중대 중대장 김세는 일본군으로 변장한 14명 유격대원을 거느리고 삼도구 합신촌 친일악질지주 장보림의 장원을 들이쳤다. 이날 유격대는 보총 16자루, 탄약 500여발과 기타 군사물자를 탈취했다. 화룡현유격중대는 중공화룡현위의 지도아래 적극적으로 무장탈취투쟁을 벌리여 1933년 봄에는 여러 가지 총 50여자루로 무장한 80여명 대오로 불었다. 이리하여 화룡현유격중대는 화룡현중한항일유격대대로 확대편성되였는데 대대장을 장승환이 맡고 정위를 차룡덕이 맡았다. 화룡중한항일유격대대는 아래에 3개 유격소대를 두고 평강, 삼도구, 달라자, 개산툰 등지에서 계속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화룡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2퇀으로 편성되였다. 왕청현유격대 중공왕청현위에서는 1932년초에 군사부장 김명균에게 유격대를 건립할 과업을 맡겼다. 김명균은 2월초에 현당위련석회를 열고 적의 무장을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기로 했다. 2월 20일 김철은 유격대의 건립을 앞두고 대감자공안분주소를 불의에 들이쳐 보총 7자루를 탈취하였다. 뒤를 이어 석현 장동에서 자위단을 매복습격하여 보총 3자루를 로획했다. 반일유격대창건의 기미를 알아차린 일제는 “대토벌”을 감행했다. 4월초 일제는 조선주둔 제19사단의 75련대 이께다대좌를 대장으로 하는 “간도파견대”를 조직하여 “대토벌”을 감행했다. 일제는 보병, 기병, 포병을 포함한 1600여명의 무력에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대감자와 대두천, 덕원리, 동일촌을 소탕하여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군중들은 항일에 떨쳐나섰다. 왕청현 열혈청년들은 소왕청 최창호네 방앗간에 모여 10여명으로 구성된 왕청현로농반일유격대의 건립을 선포하였다. 김철이 대장을 맡았다. 회의에서는 또 리광 등 9명을 구국군에 파견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리광을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는 뒤골짜기의 사시나무숲속에 귀틀집을 짓고 유격대대부를 설치하였다. 유격대가 건립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혁명군중들은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량식이 있으면 량식을 내고 렵총이 있으면 렵총을 내놓았고 앞다투어 남편과 자식들을 유격대에 보냈다. 라자구 태평촌당지부의 최호연은 밤중에 태평의 지주 호가네 집과 상함의 지주 문가네 집을 습격하여 보총 2자루를 탈취하여 유격대에 보냈다. 군중들은 며칠사이에 렵총 18자루를 유격대에 보냈다. 무기가 있고 대오가 늘어나자 유격대는 적의 무기를 탈취하는 한편 유격전을 벌리기 시작했다. 5월부터 김명균과 리광은 유격대와 별동대를 거느리고 하마탕 전하툰에서 지주의 집을 습격, 보총 7자루를 탈취, 남하마탕 교두에서 위만군수송대를 습격, 적 한 개 패를 소멸하고 보총 33자루, 탄약 10상자, 량식 수십마대를 포획하였다. 같은 시기 리원섭이 거느린 유격대는 길청령에서 일제의 군용자동차를 매복습격하여 보총 1자루와 많은 탄알을 로획하였다. 유격대의 타격을 받은 일제는 피비린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상하진에 둥지를 틀고있던 일본군은 위만군과 함께 6월 22일 룡수동에서 무고한 백성 24명을 학살하였다. 유격대는 룡수동적위대와 함께 대북구어구에 배복해있다가 놈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겨 일본군관 2명을 포함한 20여명의 적을 격살하고 보총 20자루와 탄알 수천발을 로획하였다. 짧디짧은 2개월사이에 유격대는 신속히 발전하여 유격중대로 편성되였다. 김철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였다. 8월에 유격중대는 별동대와 협동작전하여 마록구에서 위만구수송대를 습격, 적 10여명을 격살하고 13자루의 보총과 많은 탄알을 로획하였다. 그후 유격대는 하마탕 위만군병영을 습격하였고 로송령에서 철도경비대 40여명을 무장해제하였으며 목단지교두에서 위만군수송대를 습격하였고 천교령, 묘령, 황가령 등지를 습격하였다. 유격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무려 30여차의 련속작전을 벌려 적 150여명을 소멸하고 수십자루의 무기와 수천발의 탄알 및 기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황재룡 등 4명의 유격대원은 남하마탕에서 친척방문을 오는 국자가의 위만군 영장 손가의 아들을 인질로 보총 13자루, 탄알 1300발을 얻었다. 같은 해 10월초에 왕청현유격대는 자신의 력량을 확대하기 위하여 츠얼거우에 대피하고있는 삼림대-관대장부대를 쟁취할 목적으로 정치지도원 김은식을 위수로 한 5명의 유격대을 삼림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배신행위로 김은식, 장포수 등 4명이 살해당하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분노한 유격대는 일제에게 투항하러 가는 삼림대를 추격하여 10여명을 살상, 보총 5자루와 말 두필을 로획하였다. 1932년 봄, 순시원으로 파견을 받은 김일성은 안도현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하였다. 김일성은 안도현 소사하토기점에서 군사훈련반을 꾸려 항일청년들을 양성한후 구국군의 별동대를 조직, 1932년 4월, 안도현별동대는 남만지구의 조선혁명군을 쟁취하려고 남만원정을 하였다. 그들은 남만을 순시하고 북상하여 녕안현에 도착하였다. 그때 녕안현에서는 김근의 지도하에 녕안현유격대를 건립하였다. 1933년 녕안에 도착한 김일성의 별동대는 녕안현유격대와 함께 왕청현에 전이하여 왕청현유격대와 합류, 왕청현유격대로 확대편성, 량성룡이 대대장으로, 김일성이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유격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는 1933년 벽두에 수비대와 위만군, 자위단, 경찰 등 700여명을 동원하여 사수평쪽으로부터 쳐들어왔다. 대대장 량성룡은 1,2중대를 거느리고 유리한 지형물을 리용하면서 적을 매복습격하여 30여명을 격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 최명산은 적 20여명을 쓰러눕힌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적들은 할수 없이 시체를 끌고 가야하쪽으로 꽁무니를 뺐다. 유격대는 일제의 앞잡이와 악질지주 및 적대분자들을 숙청하였으며 토비무장을 해제하고 일제의 간첩 10여명을 처단하기도 했다. 유격대는 쟈피거우 청립에서 전선대를 운반하는 일제수송대를 습격, 적 10여명을 소멸하고 보총 9자루를 로획했으며 가야하 상동에서 일제의 소금수송대를 습격하여 보총 3자루를 로획하였다. 김만삼 등 유격대원들은 동신향 얼차즈에 피신해있는 북만로농의용군 10여명과 구국군 수명을 설복하여 유격대에 받아들였다. 사수평의 “토벌”에 실패한 일제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항일유격근거지 소왕청에 대한 “춘기토벌”을 발동하였다. 1933년 4월 17일부터 3일간에 걸쳐 일제는 15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왕청, 대왕청, 쟈피거우 등 세 개 골짜기를 포위하였다. 이때 3중대는 다홍왜에서, 4중대는 요영구에서 각기 보위임무를 집행하고있었다. 그러다보니 근거지에서는 두 개 중대가 수십명의 적위대의 지원을 받으며 열배도 훨씬 넘는 적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유격대는 유리한 지형물을 리용하면서 기동령활한 유격전술로 3일동안에 적 400여명을 살상하여 유격근거지의 보위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유격대는 박격포 4문, 보총 253자루와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소왕청 근거지보위전의 승리는 군사정치면에서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혁명적항일민중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1934년 3월, 왕청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퇀으로 개편되여 항일투쟁의 새로운 로정에 올랐다.(계속)  
35    제35장 “옹성라자사건”과 왕덕림의 구국군 댓글:  조회:2242  추천:0  2014-02-10
항일군민을 생매장하고있는 일본관동군. 애국사병 나라 주권 위하여 일본인 사살 왕덕림구국군 군사 일으켜 대일작전 펼쳐 애국사병의 정당행위 “9.18”사변후 동북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전민항전의 호소와 전국인민들의 거세찬 항일물결의 추동밑에 자발적인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다. 1931년 12월 7일, 안도현 명월구에 주둔하고있던 길림성방군 제677퇀 왕덕림 3영의 애국사병들은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요충지인 포대산에 기여드는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사원 오또 오반지 등을 쏴죽였다. 이 사건을 “옹성라자사건”이라고 한다. “옹성라자사건”은 연변을 들썽해놓았다. 당시 명월구복판에 있는 포대산우에는 “로3영”의 주둔하고 있었고 포대산남쪽기슭에는 제9련의 병영이 있었다. 12월 7일, 일본 “만주철도”주식회사 돈화-도문선측량인원 7명이 9련 병사들이 거듭되는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요충지인 포대산에 기여들어 정찰활동을 감행했다. 포대산을 지키고있던 9련 2패의 서대성과 주덕재는 군사기지내에서 측량활동을 할수 없으니 즉시 물러나가라고 거듭 경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사병들의 경고를 듣는둥마는둥 안하무인경으로 지형을 측량하기도 하고 이곳저곳 살피기도 하면서 제멋대로 놀았다. 일본인들의 무리한 태도에 격분한 애국사병들은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고 군사요충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정당방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애국병사 서대성과 주덕재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되알진 총소리와 함께 일본인 2명이 당장에서 격사되였다. 나머지 일본인들은 겁을 먹고 부랴부랴 뺑소니쳤다. 애국사병들의 정당행위는 동만 각계 애국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2월 18일,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민중에게 고하는 글”과 “사병에게 고하는 글”을 련이어 발표하고 “중조 병사와 민중들은 일떠나 유격전을 벌리여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제기, 애국민중들은 시위투쟁과 파공,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애국사병들을 성원할 것을 호소했다. 사건이 발생한후 일본의 룡정주재특무기관은 국자가에 사람을 파견하여 연길경비사령관에게 위협적인 공갈을 했다. 이미 룡정령사관에 “투항”을 표한바 있는 한간 길흥(吉興)은 머리 숙여 사과함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뜻에 쫓아 인차 사람을 명월구에 파견하여 이른바 조사를 단행하게 했다. 아울러 한간 희흡(熙洽)과 비밀리에 상담한후 죽은 두 일본인에게 무휼금 3천원씩 배상하기로 했다. 길흥의 매국적행위는 애국관병의 분노를 자아냈다. 연변의 주재하고 있던 일본고문 등 사람들이 명월구에 와 “옹성라자사건”을 추궁하면서 주둔군을 향해 질문하자 3영 영장 왕덕림은 머리를 번쩍 추켜들고 호매롭게 대답했다. “포대산은 아군의 군사요충지이기에 그 어떤 사람도 들어올수 없다. 두 일본인들이 억지로 포대산에 기여오르다가 맞아죽었다. 이것은 우리의 정당한 임무집행이다.” “옹성라자사건”이 발생한후 동북군 길림부사령관 공서 참모장 희흡은 일본침략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범을 산에서 떠나게 하는 수를 써서 명월구의 주둔군 “로3영”을 바꿔치우려 했다. 희흡은 새로 임명된 제27려 려장 왕수당을 보내여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왕덕림 구국군 일으켜 돈화에 도착한 왕수당은 즉각 명령을 내려 왕덕림의 “로3영”을 명월구에서 철수시킨후 돈화에 집합하게 하고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왕덕림을 퇀장으로 승급시키며 계속하여 “로3영”을 이끌고 흑룡강성에 가 항일하고있는 마점산부대를 진압하라는 희흡의 명령을 전달했다. 산에서 범을 끌어내리려는 희흡의 음모를 간파한 왕덕림은 단연히 명령을 거부했다. 왕덕림은 대기하고있는 기차에 오르지 않고 부대를 이끌어 액목에 간후 항일에 나섰다. 왕덕림이 항일에 떨쳐나섰다는 소식이 삽시에 동만에 쫙 펴졌다. 왕덕림의 수하에서 련장으로 있던 오의성은 소식을 접한후 즉시에 식당경영을 팽개치고 부대를 찾아와 함께 항일할 것을 결의하였다. 화룡현 이도구에서 경찰들을 이끌고 기의한 순관 시세영을 비롯한 원 동북군의 애국적인 장병들과 애국인사 및 청년학생들도 분분히 이 항일대오를 찾아왔다. 사하연의 대부호 대홍창은 일가로소 50여명과 함께 몇만관 되는 재산을 들고와 왕덕림부대에 가입했다. 왕덕림부대가 북으로 전이하여 소성자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1500여명으로 늘어났다. 1932년 2월, 왕덕림은 소성자에서 “만구위망, 수복동북”을 종지로 하는 항일구국군의 설립을 정식으로 선고, 왕덕림이 총지휘를 맡고 공헌영이 부지휘, 오의성이 전적사령을 맡았다. 구국군이 설립되자 국민당투항파의 3인대표단 및 길동3현사신대표단이 련이어 찾아와 관직을 주고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등으로 왕덕림의 항일의지를 개변키려 들었다. 이에 왕덕림은 단호하게 응대했다. “공산당이건 국민당이건 난 관계치 않는다. 그저 항일하기만 하면 장한 것이다!” 당파거나 민족을 가리지 않고 힘을 합쳐 공동항일하여 구국의 대업을 이루려는 왕덕림의 소박한 항일주장은 공산당과 동만의 광범한 민중의 크나큰 지지와 옹호를 받게 되었다. 공산당원 구국군서 활약 “9.18”사변후 중공만주성위와 각지 공산당조직에서는 련합하여 공동항일하기 위해 간부와 공산당원, 공청단원을 항일의용군 및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항일대오속으로 적극 파견하여 사업하게 하였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산당원 리연록을 비밀리에 구국군내부에 파견하여 항일사업을 하게 하였다. 리연록은 왕덕림의 존중과 신임을 받고 구국군의 전적사령부 참모장 겸 제1보충퇀 퇀장을 담임했다. 리연록은 비밀리에 지하당지부를 건립한후 통일전선사업을 했다. 중공왕청현위에서도 리광을 오의성부대에 파견하였다. 공산당원 호택민도 오의성부대에 파견되여 가 참모장사업을 하였다. 리연록의 추천에 의해 지식분자출신의 공산당원 맹경청, 류정안이 구국군 총정부의장으로, 김대륜, 하검평이 총부선전부 정, 부 부장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구국군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추켜들고 연동 각지를 누비면서 일본침략군과 영용하게 접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따냈다. 1932년 2월, 구국군은 돈화현성을 공격할 것을 결정한후 부대를 움직였다. 2월 20일 새벽녘, 리연록이 이끄는 보충퇀과 오의성이 인솔하는 “로3영”선봉부대를 주력으로 한 구국군은 돈화를 향해 진격, 순식간에 돈화현성을 점령했다. 일본군과 괴뢰군은 400여명의 상망자를 냈다. 구국군은 이어서 액목현성을 함락했다. 28일에는 또 교하현성을 공략했다. 구국군은 5개의 현성을 점령하면서 대량의 무기를 로획했는데 기관총 28정과 기타 여러 종류의 총 1600자루를 로획하는 휘황한 전과를 올렸다. 구국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동만 각지에 전해지면서 광범한 대중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항일열정으로 끓어번진 광범한 군중들은 구국군의 승리를 환호하면서 열렬히 구국군에 입대하였다. 구국군의 대오는 어느새 4600여명으로 불었다. 왕덕림은 항일전쟁을 장기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녕안지구로 전략적인 대전이를 할 것을 결정, 부대를 이끌고 녕안을 향해 진군하려고할 때 일본관동군 아마노려단장이 인솔하는 일본군이 구국군을 추격해왔다. 이에 구국군은 인차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경박호련환전역을 펼쳐 추격해오는 적을 소멸할 것을 결정했다. 이리하여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2주일동안 여러차례의 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엄중한 타격을 주었다. 장봉매복전에서만도 일본군 100여명을 섬멸했을뿐만아니라 려단장 아마노소장까지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구국군의 성세가 높아가자 참군참전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이때에는 15000명 대군으로 부대가 확대되기도 했다. “경박호련환전역”의 중대한 승리는 동만과 길동의 항일형세에 거대한 추동력이 되었다. “경박호련환적역”은 또 각지 괴로군들을 동요시키기도 했다. 많은 괴뢰군장병들은 주동적으로 구국군과 련계를 맺으면서 기의 혹은 구국군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당시 훈춘현내에는 길림성방군 제27려 678퇀 3개 영이 있었다. 1932년 4월, 중공훈춘현위에서는 주운광, 백전태, 오빈, 윤석원, 향혜민 등을 이 부대에 파견하여 항일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게 하였다. 그들은 상층인물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항일구국사상과 단결하여 공동의 원쑤를 쳐부셔야 한다는 혁명적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들의 열정적인 선전과 내심한 사상정치공작의 영향을 받은 적잖은 장병들이 공산유격대와 합작하여 공동항일할 것을 다짐했다. 이리하여 훈춘현성내의 제2영, 춘화진에 주둔하고있던 제3영에 련이어 항일의 기치를 주켜들고 구국군대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해 9월,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은 훈춘현성, 간구즈, 류수하즈 등지에서 련합작전하여 일본침략자군을 습격,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구국군은 그먼저 4월에는 녕안을 점령하여 각계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경박호련환전역”은 인민들에겐 지대한 고무였지만 일제에게는 침중한 타격이였다. 일제는 저들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4월 3일, 회녕에 주둔하고있는 보병 제75련대장 이께다대좌가 인솔하는 제19사단의 2개의 보기포공 혼성대대를 출동시켜 악명높은 “간도대토벌”을 대규모적으로 감행했다. 구국군은 전략적인 대이동을 승리적으로 완성한후 녕안에서 길림성경내의 여러 항일부대의 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동녕을 구국군의 후방근거지로 한다고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또 리두를 길림항일련합군 총사령 겸 자위군 총지휘로, 정초를 호로군 총지휘로, 왕덕림을 구국군 총지휘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장진방을 21려 려장 겸 항일련합군좌로군 총지휘로 접임(接任)시키기로 결정했다. 녕안회의후 길림성 각 갈래 항일부대는 호상배합하면서 작전을 진행했다. 구국군의 실패 7월, 길동 각 항일부대는 녕안현 하성자에서 다시 소베노련석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정식으로 길림항일련합군사령부를 설립, 각 군부지휘를 총사령으로 결정했다. 왕덕림이 항일구국군 총사령으로 결정되였다. 1932년 9월, “9.18”사변 1주년 되는 때 중공훈춘현위에서는 마적달소학교에서 3000여명이 참가한 “병민련합대회”를 거행했다. 100여명의 구국군 장병이 대회에 참가했다. 이때 구국군은 5~6만명으로 발전하였다. 구국군은 녕안을 중심으로 동만과 길동의 광활한 지역을 누비면서 일제침략군을 타격했다. 하여 일제의 가장 큰 우환으로 되었다.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집중하여 왕덕림부대를 향해 “토벌”을 감행했다. 1932년부터 연변, 왕청, 목단강, 할빈으로부터 출병한 일제군은 동녕일대를 향해 진공했다. 1933년 1월 1일, 일본군은 10사단 제8려단장 소베노소장에게 지대를 편성하여 마도석을 진공할 것을 명령했다. 구국군 참모장 리련록은 보충 1퇀, 2퇀 및 17퇀을 이끌고 마도석에 진을 치고있었다. 일본군은 여러차례 맹공격을 들이댔으나 어쩌지 못했다. 오후, 구국군이 진지를 수리하고있는데 적들이 장갑차와 중포로 맹공격해왔다. 전투는 긴장하고도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아군이 차츰 적들이 공세에 눌리게 되자 리연록은 한갈래의 병력으로 하여금 엄호하게 하고 호하림방향으로 철수했다. 결국 마도석은 적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부의 중동로동선은 일본군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적들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녕의 구국군지휘부를 밀집 공격해 들어왔다. 1월 5일, 6000여명의 일본군과 괴로군이 비행기의 배합하에 두갈래로 동녕현성에 박근해왔다. 구국군은 견뎌내지 못하고 철수하기만 했다. 동녕현성 바깥의 방선은 련속하여 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형세는 점점 준엄해갔다. 1월 6일, 일제군은 또다시 병력을 증가하여 동녕을 맹공격했다. 적들에게 포위된 구국군은 고립적인 전투를 벌려오다 탄약마저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각 려와 상의한후 왕덕림, 공헌영은 1월 13일 쏘련변계로 피해들어가기로 했다. 1월 14일, 동녕은 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왕옥진부대는 적들에게 반변해버리고 구국군 전방사령 오의성만이 길동지구에서 항일을 견지하다가 1933년 12월 부대를 이끌고 쏘련국경을 넘어서고말았다. 이로써 동만과 길동지구에서 1년 남짓 항일의 기치를 들고 싸우던 구국군은 엄중한 좌절을 당하게 되었다. 구국군의 일부 부대가 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와 합작하여 전투를 견지한외에 대부분 부대는 기본상 와해되면서 구국군의 무장항일은 실패를 선고하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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