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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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34장 항일무장대오건립을 위하여 댓글:  조회:2988  추천:0  2014-02-10
  연변 각 현 유격대들은 유격근거지 내에 병기공장을 설치하고 자체로 무기나 작탄 등을 제조하고 있었다. 사진은 연길현 화련리 병기공장에서 사용하던 쇠망치와 집게. 용감하고 지혜롭게 일제의 무장을 탈취하고 토배기병공기공장서 자체로 "연길폭탄"제조 명월구회의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 각급 공산당조직에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대중적투쟁을 벌리라고 호소한후 공산당조직의 력량이 강하고 군중토대가 좋은 지방에서는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1년 11월 16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순시원을 파견하여 유격대를 창건할 사업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양림(조선인)을 성위 군위서기로 소환하고 중공대련시위서기 동장영을 중공동만특위 서기로 임명, 파견하였다.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동장영의 주최하에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 40여명이 참가한 회의를 열었다. “9.18”사변이 일어난 3일후인 9월 21일, 연길진수사 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인 길흥은 룡정주재 일본총령사관에 사람을 파견하여 투항의 뜻을 전달하였다. 이리하여 연변은 총소리 한방 울리지 않고 일본군의 점령지로 되고말았다. 일제의 침략에 직면한 동만 각 현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즉시 사업중점을 항일구국투쟁에로 옮겨놓고 광범한 대중들을 인솔하여 새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운 정세에 수응하여 항일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명월구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회의참가자의 한사람인 김일성동지의 회억에 따르면 회의에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증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투사들이 참가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중 리광, 량성룡, 오중화, 오중성, 김철 등은 왕청현대표들이고 채수항, 김일환은 화룡현대표들이며 오빈, 리청산 등은 연길현대표들이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하는 점은 왕청현대표인 오중화는 1931년 봄에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힌후 1932년 12월에 석방된 점이다. 그런데 회의는 1931년 12월에 열렸으니 오중화가 이 회의에서 참석할 시간이 없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명월구회의”에서는 군중토대가 좋고 적의 통치력량이 약한 지대를 선택하여 대중투쟁의 토대우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유격구를 개척할데 대한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의 지시정신과 중공만주성위의 “병사사업을 강화하고 유격대를 건립할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과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강화하고 대중을 발동하여 유격대를 창건하며 유격전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각급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반제동맹, 공회, 농민협회, 부녀회, 소년선봉대, 적위대 등 단체들을 발전시킬데 관한 문제, 년말전으로 채무를 반대하고 가렴잡세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할데 관한 문제, 춘황투쟁을 준비할데 관한 문제, 병사사업을 벌리고 병변과 의거를 조직하며 무기를 탈취할데 관한 문제 등 여러 가지 과업들을 토의결정하였다. 명월구회의의 의의에 대한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월구회의는 동만의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들의 정신을 분발시켰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었으며 중국공산당이 동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며 항일구국투쟁의 새로운 앙양기를 맞이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조직적 토대를 마련하여주었습니다.” 무기탈취투쟁 추수춘황투쟁을 거친 연변인민들은 강대한 일본침략자와 싸우자면 무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또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무장해결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독립운동시기에는 돈만 있으면 로씨야로부터 얼마든지 무장을 살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로씨야가 이미 사회안정이 실현되여 한창 사회주의건설의 열이 오르고있는 때여서 무기를 아무데서나 구할수 있는 사회환경이 아니였다. 또 중국정부의 공산당반대의 리념차이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하여 무기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리고 연변인민들은 일제와 지방정부의 수탈, “토벌”로 빈주먹밖에 없어 군자금을 헌납할 힘도 없었다. 때문에 오직 두 손으로 적들의 손에서 빼앗은 무기와 야장간같은 “병기공장”에서 만들어진 칼, 날창, 자작폭탄 같은 것이 유격대를 창건하는 최초의 무기가 되었다.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대책을 강구했는데 생사를 불문하고 지혜롭게 적의 무장을 탈취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고장에서는 녀성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빨래방치로 군경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어놓고 무기를 빼앗기도 했으며 고춧가루를 놈의 눈에 쳐놓고 총을 빼앗기도 했습니다. 김충진이라는 젊은 형제가 총을 빼앗은 이야기도 참 지혜롭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부 박창욱교수는 무기탈취를 위해 싸운 심금을 울려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1931년 여름 어느날 연집강부근의 밭에서 김을 매던 충진의 형제는 순경 한놈이 허리에 권총을 차고 흔들먹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놈의 총을 빼앗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충진의 형제는 순경놈이 들으라고 우정 호미로 돌을 탕탕 치면서 인기척을 냈다. 강을 건너려고 주춤거리던 순경놈이 아니나다를가 충진의 형제를 불렀다. 충진의 형제는 내키지 않은척 하면서 느릿느릿 순경놈한테로 다가갔다. 그놈은 충진이더러 자기를 업어서 강을 건너라고 호령했다. 강심에 이르니 물이 넓적다리를 넘어섰다. 순경놈은 구두가 젖을가봐 몸을 솟구치며 두다리를 곤두세웠다. 순간 충진이는 순경놈을 물속에 거꾸로 처박은후 한손으로 대가리를 눌러놓고 다른 한손으로 제꺽 권총을 빼냈다. 그리고는 강에서 나와 산으로 올리달았다. 물참봉이 되어 강에서 벌벌 기여나온 순경놈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충진의 형제는 그 길로 유격대에 찾아가 총을 바치고 유격대원이 되었다. 녀성들도 지략으로 무장을 탈취하였다. 1932년 가을에 있은 일이였다. 적 보안단 졸개들은 늘 왕우구 토성촌에 와 행패를 부리군 하였다. 그날도 보안단 졸개 일곱놈이 마을북쪽의 한 초막에 기여들었다. “삼동서”로 분장한 부녀회 회원들은 더운물을 부어준다, 담배를 권한다 하며 그놈들을 “열정”적으로 맞았다. 점심에 술까지 “대접”받고 거나해진 놈들은 저마끔 나자빠져 코를 골았다. 땅거미질 무렵 잠에서 깨여난 놈들은 돌아가려고 서둘렀다. “삼동서”는 다시 주안상을 차려놓으면서 저녁을 먹고가라고 극구 말렸다. “삼동서”의 “뜨거운 열정”에 입이 헤벌쭉해난 일곱놈은 다시금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는 쓰러져 잤다. 이때 짬을 엿보던 적위대원들이 욱 달려들어 놈들의 총을 빼앗은 다음 “연길폭탄”으로 일곱놈을 몽땅 죽여버렸다. “베감투”이야기도 동만인민들속에서 오래동안 류전된 전설적인 이야기의 하나이다. 개산툰지구에서 활동하던 지하공산당원 리동일은 총을 탈취해가지고 유격대로 급히 오라는 상급당조직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동지들과 토의 끝에 선구촌에 자리잡고있는 공안분주소를 들이치려고 작전했다. 1932년 음력 5월 20일, 난데없는 상두를 멘 장례행렬이 선구공안분주소에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베감투를 쓴 청장년속에는 소년들도 섞여있었다. 상제, 복인, 조객들로 이루어진 이 장례행렬은 20여명 잘 되었는데 상주인듯한 중년사나이가 맨앞에 섰다. 사나이는 분주소에 들어서자 두손을 맞잡고 소장에게 인사하였다. 소장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젖히고 앉아 점도록 베감투를 눈빗질해보았다. 이놈은 출출하면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육상에 파묻혀 썰썰이병을 떼고야 돌아서는 놈이라 장례행렬을 그저 순순히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베감투는 소장놈이 지금 엉뚱한 궁리를 하고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하면서 “도살세”를 바치러왔다고 굽석거렸다. 그때에는 관혼상제에 소나 돼지를 잡으려면 공안분주소의 비준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 떠 소를 잡았습지요.” “제길, 소는 무슨 놈의 소란 말이야. 돼지를 잡아도 될걸.” 한창 점심때라 소장놈은 긴 하품을 늘이며 심술배인 소리를 줴치다가 서랍을 들춰 도살세수고지를 끄집어냈다. 느적느적 필을 찾아쥐더니 수고를 떼느라고 머리를 테불상에 파묻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베감투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소장놈의 가슴에 권총을 들이댔다. 그제야 정신이 펄쩍 들어 궁둥이에 찬 권총을 잡으려 했으나 총갑을 열기도전에 잡힌 몸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밥을 짓던 화식원놈이 인기척 소리를 듣고 식칼을 든채로 나타났다. 베감투는 집싸게 몸을 훡 돌리면서 그놈의 가슴팍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자지러진 총소리와 함께 화식원놈이 나동그라졌다. 항두를 지키고있던 장례군들은 불이 펄나게 향두를 헤친후 관덮개를 열어제치고 그속에 숨겨놓았던 몽둥이며 괭이며를 들고 쏜살같이 분주소로 쳐들어왔다. 한창 낮잠을 자던 순경들이 총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웬 영문인지 정신차리지 못하고있었다. 방안에 뛰여든 장례군들은 벼락같이 달려들어 벽에 걸려있는 총을 벗겨들었다. 시퍼런 대낮에 장례행차로 가장하여 선구공안분주소를 쳐들어간 사람들은 다름아닌 개산툰학성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이였고 베감투를 눌러쓰고 상주로 변장한 사나이는 학성적위대 대장 리동일이였다. 그날 그들은 선구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보총 8자루, 권총 1자루를 로획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연길폭탄" 동만유격근거지의 병기공장에서 만든 토배기무기가운데 유격대들의 환영을 각별히 받은 무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연길폭탄”이다. 그러나 일본군경들은 “연길폭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했다. 1931년말, 중공화룡현 다라즈구위 서기 김일환은 구위확대회의를 열고 항일무장대오의 건립과 무기해결문제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회의에는 금곡촌공산당지부 서기 손원금, 적위대 대장 장원, 금곡촌의 박포수 등이 참가했다. 회의참가자들은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는 외에 차제로 병기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여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하였다. 하여 연길직업학교에서 로동자로 일한적이 있는 손원금과 무기를 잘 다루는 박포수가 무기제조과업을 맡게 되었다. 손원금과 박포수는 남포의 원리를 리용하여 폭탄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두사람은 금곡의 매바위산에 올라가서 자그마한 막을 짓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도구를 마련하였다. 이때로부터 금곡촌에는 설비가 보잘 것 없는 병기공장이 생겨났다. 손원금은 공장의 전우들과 함께 폭발위력을 높이기 위한 방도를 여러모로 연구하였다. 그들은 창호지를 구입해다가 장약함을 만들어 마침내 폭탄을 제조해냈다. 폭탄을 시험폭발해보니 위력이 괜찮았다. 빈 집안에서 터지는 폭탄소리는 요란했으며 집주위는 검은 연기로 휩싸였다. 그들은 소리가 유별나게 굉장한 이 폭탄을 “소리폭탄”이라고 이름지었다. 손원금은 본격적으로 “소리폭탄”을 생산하여 각 부락의 적위대에 보내주었다. “소리폭탄”은 위력을 보여주었다. 적들은 “소리폭탄”이 터지는 소리만 듣고도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도망쳤다. 그럴 때마다 적위대원들은 그 틈을 타서 놈들의 무기를 탈환하였다. 어느 하루 적위대원들은 반제거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한 적위대원이 불을 달아 던진 “소리폭탄”이 면바로 서장놈의 발밑에서 폭발하였다. “소리폭탄”은 이름 그대로 굉장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러나 경찰서 서장놈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결국 “소리폭탄”의 약점이 적들에게 탄로되고말았다. 이리하여 병기공장에 시급히 새로운 폭탄을 만들어낼 과업이 떨어졌다. 박포수가 “고추폭탄”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해왔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오소리잡으러 산으로 갔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오소리굴을 발견하고 연기를 피워 넣었는데도 오소리가 나오지 않자 아버지가 이마를 찡그리면 궁리하더니 굴어구에다 고춧가루를 태우더라는것이였다. 그랬더니 오소리는 매운 냄새에 견디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는 것이였다. 박포수는 화약에 고춧가루를 섞어 폭탄을 만든다면 그럴듯한 “고추폭탄”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고 했다. 결국 “고추폭탄”을 시험제조하기로 결정지었다. 그들은 시험삼아 먼저 일정한 량의 화약에 고춧가루를 섞은 다음 불을 달아보았다. 화약에 불이 달리면서 고춧가루가 타기 시작하자 눈물이 쏟아지도록 매운 냄새가 풍기였다. “고추폭탄”을 만들어낸 손원금네는 어느날 저녁 고석동 너럭바위골에서 새로운 폭탄시험을 하게 되었다. 벼락치듯한 폭발소리와 함께 독한 냄새가 확 퍼지자 모였던 사람들은 기침을 마구 하며 눈물코물범벅이 되어 쩔쩔맸다. 대성공이였다. 병기공장에서는 일손을 다그쳐 “고추폭탄”을 생산해냈다. “고추폭탄”은 위력을 과시했다. 적위대원들은 선후로 내연평, 팔가자, 반제거우 경찰서놈들에게 “고추폭탄”벼락을 안기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1932년 봄부터 동만 각지에서는 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가 보편적으로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형세의 발전에 따라 “고추폭탄”도 자체의 사명을 다하게 되었다. “고추폭탄” 역시 살상력이 없었기때문이였다. 항일유격대에서는 살상력이 있는 폭탄을 요구하였다. 하여 “돌자갈폭탄”을 만들어 폭발시험을 했다. 효과가 아주 좋았다. “돌자갈폭탄”은 가는곳마다에서 일본군경놈들을 호되게 족치였다. 이렇게 되자 바빠맞은 놈들은 폭탄출처를 알아내려고 미쳐날뛰였다. 손원금은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고 병기공장을 매바위절벽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옮겼다. 후에 동굴이 놈들에게 발견되자 매바위에서 동남쪽으로 15리가량 떨어진 알미대에 옮겨가 무기생산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부단한 실천속에서 “돌자갈폭탄”의 원리를 응용하여 “쇠쪼각폭탄”을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병기공장에서는 솥이나 화로 같은 쇠붙이를 깨여서 돌쪼각을 대신했다. 하여 폭탄의 위력을 높였다. 하지만 “쇠쪼각폭탄”도 때로는 불발사고가 일어나 유격전에 영향을 주었다. 손원금은 전우들과 함께 세심하고 반복적인 시험을 거쳐 폭탄이 습기를 막아낼수 있도록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장약통을 양철로 만들고 밀페한 다음 화약을 재우고 양철통겉면에 쇠쪼각을 붙였다. 그런후 양철로 외피를 한 벌 더 씌우고 철사로 그물처럼 얽어놓았다. 그랬더니 폭탄은 습기를 막아낼수 있었고 불발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폭탄을 점차 자기의 위력을 발휘하여 전투원들의 사기를 고무하였고 일본놈들을 전율케하였다. 동만 각 현에서 항일유격대의 “쇠쪼각폭탄”에 맞아 “철벽진”이라고 자랑하던 놈들의 포대와 성곽들이 요란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내리고 수많은 병영들이 하늘로 날아올랐으며 수많은 일본군경들이 황천객이 되고말았다. 연길지방의 일본군경들은 이 폭탄에 어찌나 넋을 잃었던지 “연길폭탄”이라는 이름을 자체로 붙였다.(계속)
33    제33장 추수춘황투쟁 댓글:  조회:2195  추천:0  2014-02-10
  에 관련해 중한민중에게 알리는 중공동만특위의 1932년 1월 7일부 서한. 이때부터 에 진입했고 유격대가 조직되였다. 농민들 지주의 낟가리 허물어 “감조감식”실현 지주들의 창고문 열어 소작농들의 봄량식해결 “9.18”사변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관동군은 심양의 북대영을 공격하고 동북을 침략하는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9.18”사변이 발생한 이튼날 연길지수사겸 길림성방군 제27려 려장 길흥(吉興)은 한간이며 길림부사령관공서 참모장인 회흡의 지시에 좇아 대표를 파견하여 룡정총령사관에 가 투항하고말았다. 하여 일제는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앉은자리에서 연변을 삼켜버렸다. 이때로부터 연변인민들은 전 동북의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철제밑에서 가증스러운 식민지생활을 하게 되었다. “9.18”사변이 발생한 사흗날인 9월20일, 중국공산당은 “동북3성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강점을 반대하는 중국공산당의 선언”을 발표하여 전국인민은 일떠나 항일구국할 것을 호소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도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에 대한 무장점령과 목전 당의 긴급임무에 대한 결의”를 지었다. 만주성위에서는 또한 “만주의 조선인 로동자, 농민, 학생 및 로고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일제의 억압과 착취에 의해 비참한 생활을 하고있는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여러 민족 인민들과 일치단결하여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고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9월 28일, 중공동만특위에서도 긴급회의를 열고 중공만주성위의 지시를 전달했다. 동만특위에서는 “일제의 만주점령을 반대하는 긴급결의안”, “일본의 만주점령을 반대하여 대중들에게 알리는 글”, “농민운동 결의안”, “사병운동 결의안” 등 일련의 문건들을 련이어 발표하여 항일구국운동을 힘있게 밀고나갔다. 하여 연변 각지에서는 각종 반일단체들이 조직되였고 여러 가지 형식의 반일운동이 전개되였다. 공산당의 령도밑에 있는 “반일회”, “반제동맹”,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들이 분분히 일떠나 반일집회와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당시 연변각지에서 성세호대하게 벌어졌던 “추수투쟁”, “춘황투쟁”은 이러한 력사적환경에서 벌어졌다. 추수투쟁 1931년 봄, 동북군벌정부산하 길림성정부에서는 “3.7”, “4.6”감조법령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지주들은 이 법령을 실행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이 기회를 빌어 광범한 농민들에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3.7’, ‘4.6’제를 실시하자”는 투쟁구호를 내놓고 추수투쟁을 일으켰다. 1931년 9월, 연길현 로투구부근의 관도구와 대기동 등지의 800여명의 농민이 먼저 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추수투쟁”의 첫 불길을 지펴올렸다. 그들은 중공로투구구위의 령도하에 시위행진을 거행하였으며 지주 장원을 포위하고 식량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소작농들에게 분배해주었다. 투쟁의 불길은 재빨리 전연변을 휩쓸었다. 연길의 소영자, 화룡현의 자동, 삼동포, 천평, 후동, 왕청현의 배초구, 소왕청, 훈춘현의 경신, 밀강 등 곳들에서 련이어 투쟁이 일어났다. 이번 투쟁에 약 1만5000여명의 농민이 참가했는데 투쟁은 4개월동안이나 지속되였다. 동만 각지에서 일어난 “추수투쟁”가운데서 연길현의 “추수투쟁”이 가장 기세가 높았다. 1931년 10월, 중공연길현위에서는 중공동만특위의 지시에 좇아 추수투쟁을 발동하기로 결정짓고 현위서기 김성도를 마반산지구에 파견, 직접 투쟁을 지도하게 했다. 11월, 중공해란구위와 연길구위는 합의를 본후 먼저 화련리, 계림촌, 하동, 온림동, 마반산, 부암, 광흥촌, 소영촌의 농민들을 발동하여 감조감식을 기본내용으로 한 추수투쟁을 벌리였다. 각 촌 농민대표회의에서 강태익 등 5명을 대표로 선출하여 11월 5일 소영촌 대지주 임보성과 감조감식에 대한 담판을 진행하기로 토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흥촌 서구공안분주소 순경들은 선손을 써서 농민대표 5명을 체포하여 분주소에 구금하였다. 이에 해란구위에서는 즉시 공산당, 공청단 지부, 반제동맹, 농민협회, 부녀회, 소선대, 적위대 등 몇백명을 동원하여 11월 6일 대표들을 구금하고있는 광흥촌 서구공안분주소를 겹겹이 포위하고 대표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군중들이 항의에 겁을 먹은 공안분주소 소장은 당장에서 대표 2명을 석방하고 3명은 국자가 연길현공안국에 압송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에 시위군중들은 공안분주소 소장을 앞세우고 곧추 국자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서 연길구위의 선동으로 발동된 연길의 청년학생과 연길근교 농민 수백명이 달려나와 시위행렬에 가담하였는데 국자가에 닿았을 때 시위군중은 수천명에 달하였다. 현정부를 둘러싼 시위군중들은 현장을 나서라고 웨쳤다. 현장은 “민란”이 일어날가 두려워 구금된 농민대표 3명을 즉시 석방함과 동시에 감조감식에 대한 요구를 접수한다고 표했다. 농민시위군중들은 석방된 농민대표들을 데리고 소영촌 대지주 임보성네 집에 이르러 더 받아갔던 소작료를 도로 찾아 소작농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날 태양향, 팔도향을 포함한 팔구의 연집강, 와룡동, 소평, 광돌촌, 광석촌 일대의 농민군중 천여명도 국자가 동시장거리로 달려와 현정부를 포위하고있는 연길구, 해란구 농민시위대렬에 합세하였다. 임보성네 낟가리를 헤친후 그들은 그 길로 연길 서교에 있는 상발원대지주 장원으로 몰려갔다. 이 소식이 태평향에 전해지자 중편촌, 중흥촌, 횡도촌, 태흥촌, 회녕촌, 오합궁, 장승촌 등 여러 마을의 천여명 농민이 떨쳐나와 국자가에서 올라오는 시위대오에 합세했다. 상발원의 지주는 장사진을 이룬 시위대오를 보자 두눈이 뒤집혔다. 그는 황급히 국자가에 있는 민국군대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구원을 요청했다. 그자의 요청에 응해 민국군대 사령부에서는 기병 백여명을 파견하였다. 기병대는 농민시위대오를 앞질러와 해산하라고 으르댔다. 농민시위대오 지도자인 중공팔구 구위서기 리신준은 “골간 백명을 선발하여 핵심대오를 짓고 그 좌우에 군중대오를 정렬시켜 투쟁대렬을 편성할 것, 핵심대오는 어떠한 일이 있던지간에 헤쳐지지 말것”을 지시했다. 잠간사이에 투쟁대렬을 재편한 시위군중은백명의 핵심대원을 선두에 세우고 민국기병부대와 대결했다. 농민대표가 나서서 “우리는 성정부의 포고대로 ‘3.7’, ‘4.6’제 실시를 요구할뿐 다른 의도는 없다”고 하자 기병대지휘관이 “성정부의 포고대로 나눠주도록 우리가 보증할테니 해산하여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렇게 할수 없다. 우리는 오늘 직접 나눠가지겠다.” 농민대표의 단호한 대답이였다. 쌍방에서는 추호도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담판이 오래 끌게 되니 농민투쟁대오의 지휘부에서는 각 촌마다 투쟁에 참가한 농민들에게 밥을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어떤 촌에서는 소수레로 밥을 날라왔고 가까운 마을에서는 녀성들이 함지박에 음식을 담아이고 달려왔다. 민국기병대는 할수 없이 물러서면서 포고대로 곡식을 나눠가지라고 했다. 팔구농민투쟁대오는 계속하여 구수하방향으로 전진하면서 소평, 광동의 소지주들과 협상하여 순조롭게 감조감식을 실현하였다. 날이 저물자 이날 밤은 광동촌에서 묵었다. 이튿날 새벽 4시경부터 각촌에서 밥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시위농민들은 아침밥을 든든히 먹은후 광석촌의 지주 정전방의 집을 향해 떠나려고 서두르는데 팔도의 금광로동자 백여명이 달려와 핵심대렬에 가담했다. 하여 투쟁기세는 한결 더 높아졌다. 정전방은 성정부의 포고대로 “3.7”, “4.6”제를 인차 승인했다. 농민들은 낟가리를 헤치고 소작농들에게 곡식을 돌려주었다. 농민대오는 계속 전진하여 중흥촌 지주 수풍림과 온정풍네 집에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곱다란히 순종하였다. 대오는 승승장구로 횡도의 정영규지팡, 구제회지팡과 태흥의 심원지팡을 휩쓸었다. 지어 일본인 소유인 구제회지팡에서는 농민투쟁대오를 친절히 맞이하고군 소리없이 감조를 접수했다. 회녕촌에서 두 번째 밤을 지내고 사흘째 되던날 농민대오는 구수하일대에서 유명한 악질지주인 장전란과 맞다들게 되었다. 관청에서 허락해야 감조요구에 응하겠다면서 장전란은 토성대문을 걸어달고 뻗치였다. 투쟁지휘부에서는 대오를 두패로 나누었다. 핵심대렬에서 500명과 농민군중 2천여명을 뽑아 장가네 장원을 철통같이 포위한후 도망치거나 외계와 련계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고 또 핵심대원 500명과 농민군중 천여명으로 편성된 다른 한패의 투쟁대오는 곧추 횡도공안분주소로 향하였는데 이 두패 사이의 련락임무는 적위대와 소선대에서 맡았다. 농민들은 토지문제를 갑장을 찾아가 해결하라는 분주소 소장을 끌고 갑장을 찾아갔더니 갑장은 벌벌 떨면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떼질썼다. 농민들은 갑장과 소장을 끌고 장가네 집으로 향했다. 이때 합세한 두 개 패의 농민투쟁대오는 4천여명에 달하였다. 농민들이 장전란, 갑장, 분주소 소장 등과 담판하는 사이에 팔도구보위퇀 퇀장이 병사 수십명을 데리고 달려왔다. 보위퇀 병사들이 총을 쏘겠다고 위협하면서 농민투쟁대오를 해산하라고 으르렁대자 지휘부에서는 미리 약정한 암호대로 령을 내렸다. 핵심투쟁대렬은 즉시 장사진으로 변하여 머리와 꼬리를 맞물려 보위퇀이며 순관이며 갑장이며 지주 장가놈을 에워쌌고 그 둘레에 수천면 군중이 포위하였다. 당황해난 퇀장은 상관하지 않겠으니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걸했고 소장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농민대표들은 지주 장전란이 협의서에 도장만 찍으면 다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양전란은 떨리는 손으로 협의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승리한 농민투쟁대오는 핵심대렬을 선두로 팔도향 장흥촌 지주 서다매태의 장원으로 향했다. 장전란이 굴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다매태는 순순히 협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투쟁대오가 팔도향 관할에 있는 정사빈지팡과 최석마지팡에 이르니 이 자들은 군말없이 감조요구를 접수하였다. 이밖에 각 촌 소지주들의 낟가리를 각 촌 농민들이 스스로 해결하기로 하였다. 사흘동안 진행된 팔구농민추수투쟁은 농민들의 승리적으로 끝났다. 춘황투쟁   1933년 2월 5일 삼도구 합신툰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빼앗아온 평강유격대의 승리를 경축하여 어랑촌병민련합경축대회가 2월 8일에 열렸다. 사진은 이 경축대회의 이다. 추수투쟁에 이어 1932년 봄,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농민들의 봄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 및 그들의 주구를 타도하고 그들의 재산과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 “지주에게서 식량을 ‘꿔’ 기근을 넘기자!”는 등 구호를 제기하고 “차량(借粮)투쟁”을 전개할 것을 농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 투쟁을 세칭 “춘황투쟁”이라고 한다. 1932년 2월, 연길현 의란구의 류채, 남양촌, 왕우구의 수백명 농민드이 공산당의 령도밑에서 “춘황투쟁”의 첫 포를 쏘았다. 농민투쟁대오는 구룡평에 있는 일본경찰분서를 포위, 습격하고 일제의 주구들을 청산하고 그들이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투쟁에서 체포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하여 농민대오는 구룡평 일본경찰분서를 향해 진격하였다. 일제는 경찰들과 괴뢰보안단을 출동시켜 군중들을 향해 총질하였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결사적인 박투를 벌리였다. 의란구의 “춘황투쟁”은 료원의 불길처럼 전 동만지구를 신속히 불태웠다. 로투구, 달라자, 개산툰, 대황구, 연통라자, 대감자의 농민들도 일어났다. 차량투쟁은 점차 주구청산투쟁, 무장탈취투쟁으로 넘어갔다. 많은 토호렬신, 친일지주들이 혼비백산해 뿔뿔히 도시로 도망쳐가는 바람에 대다수 농촌의 일급기층정권이 기본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완전히 공산당이 령도하는 민중들의 통제하에 있었다. 기아에서 헤매이는 기민대중아 도시에서 농촌에서 일떠나서라 아사에로 농촌에서 착취제도를 망치로 곡괭이로 때려부시자... 농민들은 “기민투쟁가”를 높이 부르면서 투쟁에 떨쳐나섰다. 훈춘현 락타하자의 지주 원대순과 벌린 “춘황투쟁”은 좋은 실례이다. 원대순은 왜놈의 충실한 주구이며 간악하기 그지없는 대주주였다. 원대순은 600여쌍의 토지와 수십필의 마소를 차지하고있었다. 1932년 봄, “춘황투쟁”의 불길은 훈춘에도 만연되여왔다. 중공훈춘현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대황구, 중강자, 연통라자 등지의 수천명 농민들은 “춘황투쟁”에 뛰여들었다. 3월초순의 어느날, 250여명의 남녀로소가 저마다 쌀주머니, 낫, 바오래기를 들고 락타하자에 있는 원대순에 집을 향하여 떠났다. 공청단황구구위 서기 남석우의 아버지 남덕향, 아동단 단장 전기옥이 대오의 맨앞장에 섰다. “일본제국주의을 타도하자!” “일제주구를 때려엎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 천지를 진감하는 구호소리가 락타하자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 전해 추수투쟁에서 혼난 원대순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대문밖에까지 나와 영접하면서 무슨 사연인지 요구대로 처사하겠다고 했다. 이에 앞장에 섰던 남령감이 “식량이 떨어져서 좀 ‘꾸’자고 왔다”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대순은 “맘대로 가져가십시오” 하면서 머슴보고 식량창고문을 열라고 하였다. 남령감이 소리치자 250여명의 남녀로소가 환성을 울리며 식량창고로 몰려갔다. 교활한 원대순은 농민들이 식량을 담는 틈을 타서자기의 심복을 말에 태워 일본령사분관에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령사분관 경찰분주소의 짚차 두 대가 원대순네 집뜨락에 들어섰다. 교활하고 음험하기 그지없는 경찰분주소의 미하라놈이 차에서 내리더니 간사하게 웃으면서 능숙한 조선말로 누가 책임자인가를 물었다. 남령감이 나서서 자기가 책임자라고 대답했다. 어느새 왜놈들은 250여명의 남녀로소에게 겹겹이 둘러싸였다. 충천하는 기세에 짓눌린 미하라놈은 원대순의 귀에 대고 뭐하 수군거리더니 해해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조용하십시오. 난 여러분들의 이번 거사에 동정을 표하는바입니다. 방금 원대순선생께서도 자선심을 베풀어 오신분들에게 피낟과 콩을 한짐씩 선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표 두분을 일본령사분관에 보내면 소 20마리에 수수쌀도 보내드리겠습니다.” 미하라는 그럴듯하게 소개신까지 써주고는 농민들속을 비집고 빠져나와 꽁무니를 뺐다. 투쟁에서 승리한 청수동농민들은 원대순 놈의 집에서 점심밥까지 배불리 먹고 저마다 피낟과 콩을 한짐씩 지고 발걸음고 가볍게 귀로에 올랐다. 이번 춘황투쟁에 참가한 농민은 20만명에 달했다. (계속)  
32    제32장 간도농민폭동 댓글:  조회:2014  추천:0  2014-02-10
1930년 11월 화룡현혁명위원회가 중한농민에게 알리는 폭동구호. 반년사이 680여차 폭동 일으켜 봉건세력  타격  토지혁명 단행 중공동만특위 건립 “‘8.1’길돈폭동을 뒤이어 연변 각지에서는 련이어 폭동이 일어났는데 ‘5.30’폭동이 일어난 1930년 후반년에만 하여도 크고 작은 폭동이 선후로 680여차나 일어났습니다. 촌마다에 폭동위원회가 건립되였고 농민들은 ‘폭동! 폭동! 또 폭동!’의 구호를 부르면서 열광적인 기분으로 투쟁에 림했습니다. 이러한 폭동은 모두다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일어났는데 목적은 토지혁명의 실현과 유격대와 유격근거지의 창건에 있었습니다. 력사상에서 이 폭동을 ‘간도농민폭동’이라고 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연변에서의 그번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제2차“좌”경로선의 영향하에서 범한 “좌”경모험주의였고 투쟁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중외반동세력에 대해 여지없이 타격했고 광범한 군중들속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심각히 심어주었으며 공산당의 기층조직은 물론 공청단, 농민협회, 반제동맹, 반일회 등 군중단체가 크게 확대되게 하였는바 튼튼한 군중기초와 간부기초를 닦아놓았다고 지적하였다. 1930년 9월 20일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료여원(蓼如院)은 성당위에 “동만의 길돈철도연선 각 현을 순시한데 대한 사업보고”를 제기, 25일 료여원의 보고에 근거하여 만주성위에서는 “지시편지”를 발부하여 동만특위를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안도, 무송, 화전, 액목, 장백 등 10개 현을 동만특위에서 령도하기로 결정했다. “지시편지”는 동만의 금후 중심임무와 책략 및 조직건설, 선전 등 문제를 상세히 천명했다. 10월 10일, 료여원과 양림(楊林, 조선인)은 성당위의 “지시편지를”를 지니고 연변에 와 중공연화중심현위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지시편지”를 전달했다. 회의에서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건립했다. 특별위원회는 료여원, 양림, 왕경, 주건, 류지원, 리용, 리용국 등 7명으로 구성, 료여원이 서기를 맡았다. 조직부장을 왕경, 선전부장을 주건, 교통부장을 리용, 비서처장을 라일, 청년부장을 리용국, 부녀부장을 리인활이 맡았다. 성당위의 지시정신에 좇아 연변지구의 반일무장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회의에서는 중곡동만특별위원회 군사위원회를 설립, 양림이 군사위원회서기로 되었다. 위원회는 양림, 류지원, 송국서 등 3인조로 구성되였다. 성세호대한 폭동 1930년 9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우경사상을 극복하고”, “토지혁명을 심입전개하며” “쏘베트정권을 건립하고” “지주의 일체 토지를 몰수할것”을 중공동만당조직에 지시하고 돈화와 연변의 유격대를 정돈하여 “홍군 제44군을 창건”하며 “각지에서 유격전쟁을 벌릴것”을 호소하였다. 동만의 공산당조직에서는 성당위의 지시와 호소를 관철하여 전 동만적으로 되는 “추수폭동”을 성세호대하게 벌렸다. 9월,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군중들은 당조직의 지도밑에 건립된 “폭동위원회”와 “행동위원회”의 조직하에 봉기를 일으키고 친일주구와 악질지주들을 청산, 그들의 가옥을 불살라버렸으며 적들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적의 거점에 폭탄을 던지고 현금, 무기 등을 탈취하였으며 지주, 부농, 고리대업자들의 토지문서, 소작계약, 고리대문서 등을 불살라버렸다. 10월에는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489명 군중이 유격전에 참가하여 일제주구 33명을 처단, 악질지주의 가옥 29채를 소각하였으며 반동문서들을 불사르고 지주의 곡식창고를 열어 빈고농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었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길철수)는 당시 “조선일보” 1931년 4월 12일에 실린 간도농민폭동에 대한 기사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작년 1년동안에 조선인 공산당원이 길림내에서 폭동을 일으킨 피해조사가 성내 각 현정부로부터 길림성정부에 도달한 정보에 의하면 작년 1년동안에 공산당의 폭동사건의 피해 상황은 아래와 같다. 길림성 간도의 연변은 폭동의 중심지였는데 사건이 한번 발생(“5.30”폭동)하자 뒤이어 일어난 것은 실로 680회, 사방자 160여명으로 금후도 그 운동이 어데까지 미칠는지 예측할수 없다. 폭동사건 총계 684건 조선인피살자 116명 중국인피살자 47명 조선인부상자 47명 중국인부상자 27명 방화소각가옥 253채 방화소각학교 34소 전신, 전화시설 피해 41건 투쟁가운데서 각지에서는 쏘베트정부, 혁명위원회 등을 건립하고 적위대, 적색유격대를 창립하였다. 중공연화현위원회에서는 평강구에서 연화현혁명위원회를 내오고 농민협회를 조직하였다. 혁명위원회 산하에 토지부, 군사부를 두고 토지혁명과 유격대, 적위대건립을 지도하였다. 각지 당조직의 노력밑에 중공동만특위산하에 유격대, 연화현혁명위원회 산하에 적색유격대 그리고 라자구, 평강, 개산툰, 삼도구와 길돈 등 지구에 8개 무장대오가 조직되여 홍군의 창건을 위한 무장탈취, 군자금모집 등 투쟁을 벌렸다.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 기세드높은 대중폭동은 일제와 지방정부에 엄중한 위협을 주었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이미 있는 400여명의 경찰외에 조선으로부터 106명 경찰을 보충받고 군벌정부와 야합하여 대“토벌”을 감행했다. 중국군벌정부에서는 9월 25일에는 또 “길림성비적토벌사령부”를 새로 앉히고 일련의 반공조례와 “법규”에 관한 훈련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2개 퇀의 병력을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 배치하여 “폭동”을 탄압하게 하였다. 1930년 6월부터 6개월간 일제는 전후 34차에 걸쳐 880명의 혁명군중을 체포하였는데 19명의 한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인혁명간부와 농민들이였다. 이번 대탄압에서 일제간도총령사관에서 접수한 체포된 인원은 1200여명(군벌정부 군경이 체포한 중요인원도 인계받았음)이였다. 반동적이고 친일적이며 부패무능한 군벌정부는 체포한 조선인혁명가들을 일제의 요구대로 일본령사관에 넘겨주었다. 하여 일제는 연변의 내정을 공개적으로 간섭하여 1200여명의 “피고자”들을 재판하였다. 이번 탄압사건에서 1200여명은 일본령사관의 “령사재판권”에 의하여 “초심”을 거쳤는데 “초심”중 갖은 혹형을 자행하였기에 10명이 옥사하였다. 600명은 “무죄석방”되였으나 수개월 내지 1년을 옥고를 치렀고 갖은 혹형을 받았으며 석방이후에도 “요시찰인물”의 명단에 올라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나머지 430명은 서울에 압송되였다. 일제는 430명의 “수인”을 40여차에 걸쳐 압송하였고 공판에 수요되는 총포, 작탄, 칼, 석부, 석괴와 선전삐라, 문건 등 5000여건을 2대의 트럭에 꽉 박아싣고 서울에 송치하였다. 서울형무소에서는 그들을 “예심취조”하였는데 “예심취조”중 강렬모 등 20여명이 중병으로 하여 옥중에서 죽었거나 보석되여 집으로 돌아와 사망되고 그 외의 1명은 보석중이여서 “예심”에 참가 못하고 나머지 390명이 24가지 “죄명”으로 예심종결을 끝마쳤다. 그중 백규찬 등 118명이 “면소처분”을 받고 1932년 12월에 석방되였으니 실제상 2년의 옥고를 치른셈이였다. 결국 그 외의 272명이 재판에 회부되였다. 그런데 공판에 회부된 이후 강경모 등 10명이 옥사하고 그 외 4명은 중병으로 재판장에 나올수 없어 결국 출정한이는 260명이였다. 일제는 “피고”들을 취조하는 한편 서울에다 700명을 수용할수 있는 재판소를 보수하느라고 3년동안 애를 썼다. 드디여 1933년 9월 25일 이들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였다. 이처럼 규모가 큰 “대사건”의 판결은 조선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있은 사건이였다. 이번 “간도폭동”공판은 대체로 18차에 걸쳐 진행되였는데 재판소는 이미 보수되였으나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재판소까지 “피고”들을 압송하는 것이 놈들에게는 “골치아픈 일”이였다. 1933년 9월 22일, 23일, 24일 동아일보에 련재된 보도에 의하면 상기 서대문형무소에서 정동골목을 빠져서 재판소에 이르는 로정에는 종로경찰서 경관 50명이 총동원되고 그것도 부족하여 서울시 각 경찰서에서 100명의 경찰을 더 동원하여 도합 150명의 경찰과 일본헌병대가 출동되여 이른아침부터 비상경계를 실시하여 물샐틈없이 경계망을 늘여놓고 “피고”들을 경전(京電)뻐스 한 대에 20명씩 7~8대의 버스에 실어 2차에 나누어 압송하였는데 공판이 18회나 되다보니 모두 36차를 래왕하였다 한다. 공판이라야 형식에 불과하여 “피고”측을 변호하는 변호사는 있을수 없고 다만 검사들이 “죄상”을 공소하고 재판장이 “심문”하면 “피고”들이 답변할뿐이였다. 놈들은 폭동의 현상만을 렬거하여 이른바 “살인, 방화, 강도, 절도, 총기취체위반” 등 24가지 달하는 “죄상”을 “피고”들에게 들씌웠다. 그러나 리동선, 주현갑, 고하경 등 혁명가들은 공판장을 일제침략자들의 침략죄행을 성토하는 장소로 삼고 떳떳이 항변하였다. 공판에서 사형받은이들로는 리동선, 최관옥, 로창호, 김광묵, 김동필, 류태순, 김응수, 고하경, 민창식, 지련호, 박금철, 김봉돌, 조동률, 리성철, 귄태산, 허완진, 박동필, 김룡운, 리종립, 김금난, 박익섭, 주현갑 등 22명이고 무기도형을 받은이들로는 김명원, 박봉현, 차병철, 안응손, 김준걸 등 5명이였다. 1936년 7월 20일과 21일, 22명의 혁명자들은 “적기가”를 부르면서 적들의 교형장에 올랐다. 이것이 바로 제5차 간도공산당 사건의 결말이다. (계속)  
31    제31장 “8.1”길돈폭동 댓글:  조회:2249  추천:0  2014-02-10
돈화ㅡ액목 일대 조선인들이 중공길동위원회의 지휘하에 발동한 길동폭동소식을 실은 분노한 폭동대오 지방군경과 격돌하고 악에 받친 지방군벌 피비린 탄압 강행 폭동의 획책 “1930년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제2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배하에 ‘혁명세력의 회복기’를 ‘혁명의 고조기’로 오인하고 전국적인 대폭동을 발동하여 ‘한개 성 또는 몇 개 성에서 먼저 혁명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전국혁명승리를 달성, 나아가서는 세계혁명의 승리를 추진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연변에서도 례외없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1930년 8월 1일, 돈화, 액목 지구의 조선인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 그 실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1930년의 “‘8.1’길돈폭동(‘8.1’吉敦暴動)”의 력사적배경과 규모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중공중앙 “8.7”긴급회의의 “좌”경로선을 계속 집행하고있던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연변의 “붉은 5월 투쟁”을 거듭 긍정하면서 새로운 투쟁을 벌릴 것을 지시하였다.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로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연변특별지부서기 왕경이 돌아왔다. 그는 “붉은 5월 투쟁”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연변의 대중운동을 한걸음 더 추진하기 위하여 “8.1”봉기를 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8.1’길돈폭동은 얼마전에 있었던 ‘5.30’폭동과 달랐습니다. ‘5.30’폭동에서 주요한 예봉을 일제에게 돌렸다면 이번 폭동에서는 그 예봉을 주요하게 중국지방군경에게 돌린것입니다. 폭동의 목적은 중국지방군경의 무기를 탈취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색유격대를 창건하며 지방쏘베트정권을 수립하기 위한것이였다.” 박창욱선생은 폭동의 목적을 설명했다. 1930년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김(金), 왕(王) 성씨를 가진 두 사람을 순시원으로 연변에 파견하였다. 순시원은 돈화에 간후 모아산(현재의 현유향 모아산)에서 간부련석회의를 열고 폭동에 해당된 문제들을 토의하고 폭동계획을 연구하였다. 회의에서는 이번 폭동의 총지휘를 중공길돈림시당부의 마천목(馬天穆)이 맡는다고 선포하였다. 조선인이며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마천목은 북벌전쟁이 실패한후 연변에 돌아와 혁명활동을 벌리고있었다.  총지휘산하에 행동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황세형(黃世亨)이 위원장을 맡고 조직부장을 강세일(姜世一), 선전부장을 한광우(韓光宇)가 맡았다. 총지휘부산하에 3개 폭동대대를 두었다. 제1대대는 액목대대로서 김명균(金明均)의 지휘하에 7개 파괴대와 2개 습격대로 편성, 총인원수는 200여명이였다. 파괴대는 신참-길림간의 2개 철교를 파괴하고 신참-교하, 교하-내자산, 교하-황송전, 교하-이갑자 구간의 전선을 끊고 습격대는 이갑자구와 관지의 주둔군 병영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제2대대는 돈화대대로서 강세일, 리학경이 지휘했다. 총인원수는 400여명이였다. 이들은 남황니허의 현공안국 제3분주소, 신개도보위단 제1정대 제1분대의 병영, 마호주둔 륙군 제7련대 유격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여 적들의 무기를 탈취하기로 하였다. 제3대대는 교하대대로서 지휘는 한일광이 맡았다. 이들은 교하북쪽에 있는 위구참의 보감소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노한 파도마냥 1930년 7월 31일 밤, 각지의 폭동대원들은 예정한 지점에 집결하였다가 이튿날인 8월 1일 새벽 2시에 동시에 폭동을 일으킨다. 액목대대의 파괴대는 길림-교하-돈화-신참구간의 교통과 통신망을 단절시켜 폭동이 순조롭게 진척되도록 담보하였다. 8월 1일 새벽 돈화대대의 김익수가 지휘하는 40여명 폭동대는 양포, 칠성자권총, 자작폭탄 그리고 몽둥이 등을 지니고 신개도의 보위퇀 제1분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폭동대 대원들은 병영의 동쪽 담벽을 뛰여넘어 들어가서 병영안에 수류탄을 뿌리고 양포를 쏘았다. 16명의 사병은 7월 28일에 모두 산에 들어가 약담배수색을 하게 되어 이날 병영에는 5명의 잡부들뿐이였는데 폭동대원들의 공격에 2명의 잡부가 경상을 입었다. 잡부들은 놀란나머지 사시나무떨듯 와들와들 떨뿐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폭동대원들은 무기고에 돌격해들어가 16자루의 보총과 탄알 1000여발을 로획한후 병영에다 불을 지르고 철퇴하였다. 마호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7련대 유격중대의 병력을 습격할 임무를 맡은 100여명의 폭동대원들은 지휘 한광우의 지령에 따라 먼저 3명의 대원을 파견하여 어둠을 타서 병영동쪽의 흙담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통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마호는 돈화에서 따푸차이허, 화전 등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지이며 목단강상류지대를 통제하는 중요한 지대이다. 8월 1일 새벽 2시가 되자 폭동대원들은 이미 개척한 통로를 담벽안으로 쳐들어갔으나 보초병에게 발견되여 반격을 받게 되었다. 약 2시간동안의 접전을 거쳐 적병 7명이 부상을 입고 폭동대원 조규선, 박팔암 등 3명이 희생되고 20여명이 체포되였다. 폭동대는 부득불 남산방향으로 철퇴하였다. 8월 1일 새벽 2시, 홍일산(洪一山), 윤순찬(尹順燦), 리병호(李炳浩)가 거느린 20여명 퐁동대원은 남황니허에 있는 현공안국 제3분주소를 습격하였다. 폭동대원들은 분주소의 서쪽 담벽을 뛰여넘어 돌아가 보초병을 까눕히고 병영을 향해 보총을 쏘고 작탄을 던지면서 맹공격을 들이대여 2명의 경찰을 부상입혔다. 그러나 경찰들이 미친 듯이 반격하는 바람에 폭동대원들은 할수 없이 철퇴하고말았다. 정철호(鄭哲浩), 리범룡(李範龍)이 이끄는 100여명의 액목습격대의 폭동대원들은 8월 1일 새벽 관지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7련대 8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습격대는 병영 서남쪽 널바자를 뚫고들어가 작탄으로 보초병을 까눕히고 보총 한자루와 탄알 50발을 로획한후 병영을 향해 맹사격을 퍼부었다. 폭탄소리에 놀라 깨여난 관병들은 즉시 총을 들고 반격하여 많은 폭동대원들이 체포되였고 3명의 폭동대원이 희생되였다. (그후 8월 15일 저녁 29명의 폭동대원이 재차 8중대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날 새벽 액목대대의 일부 습격대원들은 액목현세무분국에 쳐들어가 세무문서, 계약문서 등을 소각해버리고 피복류와 현금 등을 로획, 2명의 세무일군을 부상입혔다. 폭동대원들은 또한 지방정부의 량식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무상으로 중국인농민들과 조선인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3대대인 교하대대도 한일광(원 서상파 공청회남만지구책임자)의 지휘하에 이리하, 의기구, 의기장자, 단산자와 교하남쪽 10킬로메터 지점에 있는 남대툰 등지 민중들을 동원하여 세갈래로 진격하여 교하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메터 상거한 위구참의 보갑소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7월 31일 정로인을 보내여 적정을 탐지한 후 이리하일대의 100여명 폭동대원은 검성중학교 출신인 림학선(林學善), 최무갑(崔武甲) 등의 인솔하에 도끼, 괭이, 몽둥이 등을 지니고 이리하 강물을 건너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면서 위구참을 향해 떠났다. 마을의 부녀들도 폭동대원들이 먹을 밥과 삶은 옥수수 등을 이고 폭동대원들 따라나섰다. 남강자에서도 권태산(權泰山) 등이 령솔하는 40여명 폭동대원이 소부태하를 건너 의기구에 도착하여 그곳의 폭동대와 합세하였다. 남강자와 의기구의 두 폭동대는 문성국(文成國)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위구참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남대툰의 20여명 폭동대원도 한일광이 지휘하에 50킬로메터 상거한 위구참을 향해 31일 대낮에 떠나 오림구쪽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곡괭이, 삽, 도끼 등을 들고 일하러 가는 농군처럼 가장하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림구를 거쳐 위구참으로 떠났다. 세갈래 폭동대오는 위구참부근에서 합세하여 8월 1일 새벽 2시가 되자 예정된 계획대로 보갑소와 륙군보위단 병영을 포위하였다. 폭동대는 보초병을 까눕히고 보총을 로획한후 병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보초병의 고함소리에 놀란 관병들이 총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반격했다. 곡괭이, 삽, 도끼 등 원시적인 무기밖에 없는 폭동대원들은 마구 퍼붓는 총탄앞에서 더는 진공할수 없었다. 하여 뿔뿔이 헤쳐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탄압 민중들의 공격을 받은 지방군벌들은 악에 받쳐 폭동군중들을 참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길림에 “방공사무처”를 설립, 12월에는 “길림성비적사령부”를 신설하였으며 “길림성관민이 공산비적을 방지, 토벌할데 관한 장려 및 징벌규정”, “길림경찰, 보위단의 공산운동방지법” 등 수십가지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륙군보병 제7려단 제19련대와 제13려단 제7련대를 동원시켜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서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8.1”길돈폭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13려단 제7련대 련대장 왕수당은 300여명 전예부대를 거느리고 돈화에 와 본부를 설치하고 지방에 주둔하고있는 공안경찰과 보위단을 모조리 출동시켜 도처에서 폭동군중을 체포하였다. 지방군경들이 초보적통계에 의하면 돈화에 있는 제7련대 본부 창고에 70여명, 교하공안국에 78명 도합 277명이 체포구금되였다. 봉기에서 실패한 폭동대의 대부분은 이미 적들의 탄압을 피하여 부근 산중에 들어가 은페하여있었기에 구금된 대부분은 무고한 민중들이였다. 8월26일부터 27일까지 지방군경들이 체포한 사람들을 심문한 끝에 대부분 군중을 석방하고 협의가 있는 21명을 계속 감금하였다. 그중 리상수 등 15명은 돈화현성밖에서 군경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였다. 향수하자에서는 12월중순 2명이 살해되였으며 길돈림시당부의 책임자였던 마천목도 1930년 교하감옥에서 살해되였다. 이번 폭동의 지휘자들인 리형준, 한일광 등은 길림감옥에 압송되였으나 “9.18”사변후 전부 석방되여 연변에 나와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이번 폭동의 실패원인과 의의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중국공산당의 제1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도하에 진행되였기에 모험적이고 맹목적이였다. 중공만주성위와 연변당조직이 나이가 어리고 투쟁경험이 결핍했다. 투쟁의 예봉을 일제침략자들한테 돌린 것이 아니라 지방군벌에게 돌렸다. 한족(중국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지방군벌세력에게 일정한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인들의 반제반봉건투쟁정신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폭동을 통하여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민족평등정책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며 투쟁방향을 명확히 할수 있었다. 이번 폭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영향은 길돈지구 조선인들속에 더욱 깊이 침투되였고 조선인들속에서 당조직과 혁명단체가 신속히 확대되여나갔다.” (계속)  
30    제30장 약수동의 두 항일투사 댓글:  조회:2734  추천:0  2014-02-09
   약수동항일기념비.(2004년 사진)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첫 반제 반봉건투쟁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 탄생     약수동의 버드나무 새롭게 세운 약수동항일기념비의 오른쪽에는 보기만 해도 름름한 천지만엽의 울창한 버드나무 한그루가 거연히 서있다. 얼싸안아보니 두아름도 더 되었다. 멀리서 보이던 그 버드나무였다. 버드나무주위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깨끗이 정비되여있었다. 버드나무 그늘밑에는 자그마한 하얀 비석 하나가 세워져있는데 비석주위를 붉은 벽돌로 다져놓아 아늑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비석과 버드나무는 나지막한 나무바자에 둘러져있는데 바자에다 자그마한 문까지 달아놓아 드나들 때 그 문을 여닫아야 했다. 비석앞면에는 이런 글자가 진붉게 새겨져있었다. 抗日烈士朴相活永垂不朽 中共龍門鄕委員會 龍門鄕人民政府  자그마한 바자문을 열고 들어가 비석 뒷면을 살펴보니 “박상활동지의 혁명간력”이 새겨져있었다.  朴相活同志革命歷史簡介 一九0四年吉林省和龍縣龍水鄕石國村農民家庭中生, 一九二四年十一月參加抗日工作, 一九三一年九月安圖縣倒木溝赤韋對責任人之一, 一九三六年迷昏鎭東北人民革命軍第一軍二師任軍需部長, 一九三七年十二月四一和龍縣龍門鄕藥水洞抗日戰鬪中光榮犧牲. 一九九0年六月五日 비석을 옹위하고있는 버드나무는 1924년에 심은 나무라고 한다. 그러니 80성상을 자란 나무인 것이다. 박상활은 어린 시절 구학서당에서 한창 글을 익히며 눈을 틔워야 할 나이에 먹고살 근심 때문에 부득불 공부를 그만두고 농쟁기를 들고 부모를 따라 밭일을 해야 했다. 1924년 룡정 동흥중학교에 다니는 약수동의 청년들과 가까이하면서 반일사상의 영향을 받은 박상활은 반일혁명의 길에 나설 큰뜻을 세우게 된다. 어느날 박상활은 집뜨락에 버드나무를 떠다옮긴후 안해와 나어린 동생을 불러놓고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난 이 나무와 생사를 같이하겠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버드나무처럼 어디에나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며 자랄테요. 혁명승리의 기발이 하늘가에 높이 날릴제 버드나무는 혁명을 위해 자랑을 느낄것이며 민족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렬들을 그릴것이요.” 얼마후 약수동에서도 비밀리에 초기 맑스-레닌주의단체가 조직되였다. 박상활은 이 단체에 들어가 야학교도 꾸리고 소작농들속에서 혁명의 불씨를 뿌려갔다. 쏘베트정권의 일원으로 직접 신춘의 교양을 받은 박상활은 “5.30”폭동에 참가할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에 바삐 돌았다. 1930년 6월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건립되였으며 바로 그날 박상활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때로부터 박상활은 평강구쏘베크정부에서,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에서, 안도현도구거우적위대의 책임자로, 동북항일련군 제1군 2사의 군수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37년 박상활은 2사에서 6사로 파견되여가던 도중 발에 엄중한 동상을 입고 유격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상처는 빵처럼 팅팅 부었고 발가락은 썩어 앙상한 뼈가 다 들여다보였다. 목숨을 보전하려면 절단수술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병원에는 마취약이며 수술칼 같은 약과 의료기재가 없었다. 이에 박상활은 결연히 말했다. “나는 두발을 잃더라도 살아야겠소. 살아서 끝까지 항일을 해야 하겠소. 이제부터 우리 함께 절단수술을 합시다.” 박상활은 통졸임통을 펴서 톱을 만든후 수술에 달라붙었다. 동무들아 준비하자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 침략자를 때려부시고 용진 용진 나가세 기승스럽게 억천만번 죽더라도 원쑤를 치자 나가자 판가리 싸움에... 모진 아픔으로 하여 이마로 콩알같은 비지땀이 굴러떨어졌지만 박상활은 지그시 참으면서 이새로 “유격대행진곡”을 내뱉었다. 마취도 시키지 않은 다리를 통졸임통을 펴서 만든 무딘 톱으로 절단한다는 것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그 톱날이 뼈를 썰 때의 아픔을 무슨 말로 형언할수 있으랴. 그저 항일혁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 하나가 있었기에 뻗칠수 있은 것이다. 력사학자 리광인씨는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2》에서 이때를 이렇게 쓰고있다. 첫날에는 엄지발가락 하나를 잘라냈다. 좀만 힘을 들여도 휘어드는 톱이라 일은 도시 축나지 못했다. 수술톱이라면 한겻이면 끝을 보련만 밤낮 사흘간에 겨우 한쪽 발 다섯 발가락을 잘랐을 뿐이었다. 박상활을 끝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동지들은 연신 그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시체같이 꽛꽛하게 굳어진 그의 몸을 주물렀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린 그는 자리를 더듬어 톱을 찾았다. 당황해난 동지들이 하루만 쉬고 계속할것을 애원했으나 어느결에 톱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옹근 엿새 동안의 전투를 거쳐 절단수술은 끝났다. 그것은 격동 없이는 들을수도 볼수도 없는 격렬한 전투였다. 그것은 또한 전대미문의 영웅서사시였다. 그해 음력 12월4일, 간첩의 밀고로 병원이 적들이 포위에 들게 되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운신 못하던 박상활은 불사조마냥 비상을 꿈꾸고있었다. 적을 유인하여 동지를 구하려는 불타는 정신은 그에게 나래를 돋쳐주었다. 박상활은 두손을 눈속에 깊숙이 박으면서 몸을 움직여 기여나갔다. 눈우에는 박상활이 기여나간 자리가 눈띄이게 깊숙이 패였다. 벼랑가에까지 다달은 박상활은 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저 멀리서 접근하여 오는 왜놈들을 분노의 눈길로 쏘아보면서 큰소리로 웨쳤다. “이놈들아! 혁명자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서슴없이 몸을 날려 벼랑으로 굴러떨어졌다. 적들은 박상활의 자취를 따라 벼랑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 사이 전사들은 안전히 전이했다. 버드나무, 약수동의 버드나무는 력사의 견증자로 되어 오늘도 설레인다. 항일혁명을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친 희생된 주인의 넋을 기리고저 하늘하늘 춤추고 있다. 불굴의 녀투사 김순희 연변에는 조선민족의 영웅적기개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들이 아주 많다. 그중에도 약수동의 녀투사 김순희의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이다. 김순희는 1910년 안도현 소사하에서 태여났다. 그는 선배들의 영향밑에 일찍 항일혁명에 참가했다. 김순희는 1931년 2월과 3월 두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약수동에 다녀왔다. 눈온뒤의 발자국처럼 그가 왔다간 뒤에는 꼭 흔적이 남군했다. 김순희는 당지의 군중들을 동원하여 학교를 꾸리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듯이 혁명도리를 알기 쉽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1931년 4월, 김순희는 약수동적위대 대장 송태익과 결혼하였다. 약수동에 온 김순희는 적위대 대원으로 활약했고 약수동에 대한 적들의 토벌이 가심해지자 적위대는 산으로 들어갔다. 김순희는 마을에 남아 군중들을 이끌고 지주와 투쟁하면서 식량과 의복 등 필수품을 적위대에 공급해주었고 소선대를 이끌고 적후사업을 감쪽같이 수행하였다. 약수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던 투도구의 일본령사분관과 경찰서에서는 1932년 음력 10월하순부터 11월초순사이에 련속하여 세차례나 약수동을 대“토벌”했다. 11월 4일, 이른새벽이였다. 200여명되는 일본수비대, 경찰, 자위단 놈들이 갑자기 약수동을 3면으로 포위해들어왔다. 왜놈들이 어둠을 타서 세린하쪽으로 에돌아 기여들었던탓으로 마을에서 몇리 떨어져있는 도끼지광(진화)의 첫 보초선에서 적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두 번째 보초선인 마을부근의 조개산보초선에서 적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마을은 이미 포위에 든 뒤였다. 당조직에서는 혁명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간부, 유격대원, 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을 즉시 피신시켰다. 허나 만삭이 된 김순희는 조직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마을에 남아있었다. 마을에 뛰여든 토벌대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놈들은 주구놈을 앞세우고 집집마다 수색했다. 놈들은 10여채의 집과 학교에 불을 질렀다. 연기와 불길이 삽시에 마을을 뒤덮었다. 집안에서 이 참상을 내다보던 김순희는 갑자기 일제놈들의 구두징소리가 들려오자 제꺽 물동이를 팔에 끼고 나서려고 했다. 정지문이 벌컥 열리더니 왜놈들이 우르르 쓸어들어와서 가슴에 총창을 들이댔다. “어디로 가?” “물길러 가요.” “흥, 물길러 간다구? 잔말말고 따라왓!” 김순희는 태연히 문을 나섰다. 토벌대놈들은 김순희를 보고 마을의 몇몇 아낙네들과 함께 점심을 지으라고 윽박질렀다. 마을에는 보초를 섰거나 앓아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적위대 부대장 정태경, 리덕길, 소선대 대장 김두봉 등도 붙잡혀 정태준네 뜨락에 끌려왔다. 김순희는 적들이 자기의 신분을 알고있다고 직감했다. 정명화아주머니가 순희더러 동떨어져있는 적위대원 허룡남네 집으로 피하라고 눈짓했다. 순희는 일거일동을 은근히 살피던 토벌군은 순희를 붙잡아놓고 심문을 들이댔다. “네년이 김순희지?” “그렇다!” “빨갱이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네 서방은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식량은 어디다 감췄느냐?” “모른다!” 그러자 놈들은 다짜고짜로 물매를 들이댔다. 그래도 모른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놈들은 모난 참대저가락을 손가락새에 끼워넣고 마구 비탈았다. 순희는 이발을 옥물고 아픔을 참았다. 악형을 들이대다가 나중에는 정태순로인네 집마당으로 끌고갔다. 거기에 이미 적지 않은 동지들이 끌려와있었다. 자기를 바라보는 동지들의 눈에서 큰 힘을 얻은 김순희를 더욱 견정하게 적들과 맞섰다. 놈들은 총박죽으로 순희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빈정거렸다. “이년아, 네년이 배속에 뭐가 들어있느냐?” “몰라서 묻느냐? 잘 나면 놈들을 잡을 영웅이구 못나면 대문거리를 쏘다니는 너희들같은 놈일거다!” 김순희의 말은 서슬푸른 칼날인냥 놈들의 가슴을 찔렀다. 악에 바친 놈들은 더욱 미쳐날뛰엿다. “빨갱이년! 공산군 어디 갔어?” “기다려라, 이제 곧 네놈들을 잡으러 올거다!” 야수같은 놈들은 김순희를 땅바닥에 쓰러뜨린후 만삭이 된 배우에 널판자를 올려놓고 두끝을 마구 내리눌렀다. 순희는 까무러쳤다가는 다시 정신을 차리군 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으니 이번에는 주전자로 고추물을 입에 쏟아넣었다. 모진 고통을 참으면서 몸을 뒤척일 때 배속의 새 생명마저 야수같은 일제놈들에게 불행을 당해야 될 일을 생각하면 심장에 칼이 박히는 것 같았지만 김순희는 입을 악물고 참았다. “이년, 말하지 않을 테냐? 네 혀바닥이 견디나 이 피대가 견디나 어디 한번 보자!” 갈퀴같은 피대가 련속하여 순희의 입을 열려고 미처날뛰였다. 그러나 그건 망상이였다. 순희는 악 소리치면서 입을 악물었다. 혹시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에 비밀이라도 루설할가봐 순희는 이발로 혀를 물어끊은 것이다. 순희는 크게 입을 벌리더니 끊어진 혀와 뻘건 피를 놈들의 얼굴에 확 뱉었다. 악에 바친 놈들은 조짚을 집안에 넣고 김순희 등 8명을 꽁꽁 묶어 그속에 가두었다. 최후의 순간이 닥쳐온 것을 직감한 사람들은 목청껏 구호를 웨쳤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공산당 만세!” 놈들은 한바탕 기관총을 련사한후 추녀밑에 불을 질렀다. 집안에서는 련달아 비장한 구호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때 김순희는 22세였다. 약수동은 김순희와 같은 조선인항일투사 60여명이 뜨거운 피를 뿌린곳이기도 하다.(계속)
29    제29장 약수동쏘베트정부 댓글:  조회:2513  추천:0  2014-02-09
멀리 보이는것이 약수동마을이다. 운동 당시까지만 하여도 약수동은 300여호의 조선인농가가 살고있는 큰 마을이였다. 그러던것이 일제의 로 말미암아 많은 주민들이 떠났고 1934년에 약수동 하촌에 집단부락을 설치하고 상촌과 중촌의 주민호를 강제로 이주시켜 약수동은 페허로 되여버렸다. 사진에 보이는 중촌마을은 1970년에 새로 일떠선 인삼장 인삼호의 주택이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첫 반제 반봉건투쟁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 탄생  유서깊은 약수동 투도진을 떠난 취재차는 누른색을 띠게 시작한 8월(2004년)의 룡문벌을 누비면서 달렸다. 화룡시 아동저수지에 채 닿기전인 나지막한 언덕우로 뻗은 오른쪽 길로 가면 약수동이라 한다. 언덕길에 올라서니 생각밖에도 꽤 널직한 산벌이 펼쳐졌다. 농한기여서인지 밭에도 마을에도 사람그림자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길가에 나타난 짙은 농부차림의 사람과 “약수동쏘베트유적지”가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 ‘쏘베트’ 라는 것이 뭠두?” 하고 눈이 둥그래진다. 구구히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지라 기념비같은 것을 세운 곳이 어디 없는가고 물으니 손가락질로 마을밖을 가리킨다. 바라보니 좀 멀리 눈에 확 띄우는 버드나무 한그루가 보이고 그 주위에 하얀 비석으로 보이는 물체가 알렸다. 거기까지 풀이 아무렇게나 자라있는 올퉁불퉁한 수레길이 뻗어있었다. 농부가 가리킨쪽으로 간신히 차를 몰아가니 아닌게 아니라 약수동쏘베트유적지였다. 기념비는 두곳에 세워져있었다. 먼저 오래 된 기념비를 가보았다. 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데 앞쪽것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석비이고 한자쯤 뒤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래된 목비였다. 석비엔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약수동항일기념지 화룡인민정부 1985년6월1일”이라는 조한문으로 된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금방 뒤에 세워진 목비는 이미 거묵하게 썩기 시작하고있었는데 손톱으로 뜯어보니 나무보풀이 쉽게 떨어졌다. 앞면에는 조한문으로 “약수동항일기념지”라고 씌여져있는데 짙은 옥색만은 색바래지 않고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역시 조한문으로 씌여져있었다. 1930년 5월 27일 이곳에서 동북에서의 첫 번째 쏘베트정부가 성립되였다. 1930년 6월 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성립되고 서기로서는 리봉삼이였다. 1930년 7월 10일 중공평강위워원회가 성립되고 서기는 주현갑, 조직부장은 리주헌, 선전부장은 황룡문, 비서는 윤준걸, 유일환이였다. 아래에 12개 지부가 있었다. 평강구위는 선후로 약수동-어랑촌-마고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전부 파괴되였다. 1930년 8월 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성립되고 서기로는 김창일, 조직부장은 정만준, 선전부장은 한별, 군사부장은 박윤세였다. 1932년 음력 11월 4일에 항일녀영웅 김순희와 호조회장 정태준 등 13명 동지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였다. 목비 왼면에는 “一九八六年九月三日”이라고 씌여져있고 오른쪽면에는 “화룡시인민정부”(조한글자)라고 씌여져있었다. 글자가 희미하고 어떤 것은 지워져있어서 조한글자를 대조해보면서 겨우 이만큼 맞출수가 있었다. 기념비뒤에는 한그루의 오얏나무가 휘여지게 자라고있었는데 색고운 오얏들이 얼핏얼핏 눈에 띄였다. 그뒤로는 해바라기밭이 펼쳐져있는데 둥실한 해바라기꽃들이 환히 웃고있었다. 해바라기밭은 살구나무과원과 잡목으로 우거진 산자락을 배경하고있어 한결 우아해보였다. 금방 앞으로 실개천이 흐르고있었는데 개울물소리가 가을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한결 정다왔다. 한길가량 되어보이는 얕은 골짜기를 건너뛰여 이번엔 새롭게 세운 기념석비를 가보았다. 화강암으로 다듬은 2메터남짓 되어보이는 기념석비정면에는 “약수동항일기념비(조한문)”, “순난렬사만세!(조한문)”라는 짙은 붉은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약수동쏘베트정부 탄생 1930년 5월에 진행된 “붉은 5월 투쟁”은 5월 23일부터 부분적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에로 넘어갔다. 약수동, 투도구, 달라자, 삼도구 등지의 농민들은 공산당조직의 령도밑에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료계약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버렸다. 그들은 또 지주, 토호렬신 및 친일주구들의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1930년 4월말 황포군관학교출신인 조선족공산당원 신춘(申春)을 혁명군중기초가 좋은 약수동일대에 파견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하도록 했다. “붉은 5월 투쟁”속에서 약수동의 농민들은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지주의 장원으로 쳐들어가 지주의 고리대문서를 태워버리고 량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 5월 27일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농민군중들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약수동 상촌의 팔간집마당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신춘은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이는 동북에서의 첫 민중정권의 탄생이였다. 그것도 일제치하와 봉건통치배들의 코앞에서 벌어진 력사적장거였다. 신춘은 쏘베트정부의 창립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창립의 력사적의의와 그 사명에 대하여 얼음에 박밀 듯 피력했다. 신춘의 열정적인 연설은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켜주기에 족했다. 대대손손 착취와 빈궁의 멍에에 짓눌려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온 가난한 무권리 농민들로 놓고보면 이건 크나큰 경사였다. 군중들은 쏘베트정부의 성원들을 선출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정부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자!” “토지혁명을 실행하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수백명 군중들은 목터져라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약수동학교의 소선대원들은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구호와 노래소리가 삽시에 약수동 하늘가를 진감하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은 여지없이 하노라 시위대 군중들은 지주와 일제주구놈들의 집앞에서 더 힘차게 구호를 웨치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 시위는 사흘동안 계속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일제주구 몇놈을 붙잡아 처단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를 들춰내여 불태워버렸다. 리경천 등 10명으로 조직된 농민적위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하면서 농민들의 시위투쟁을 보위하였다. 약수동의 농민들은 쏘베트정부창립대회의 결의에 따라 “5.30”폭동의 거세찬 투쟁에 뛰여들었다. 폭동후 일제경찰들은 약수동에 덮쳐들어 100여명의 청년을 체포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제의 련속부절한 탄압으로 활동을 전개할수 없게 되었다. 하여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창립되여 3일만에 부득불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같은해 8월말 중공평강구위에서는 약수동의 농민들을 령도하여 재차 토지혁명을 단행하였다. 그들은 약수동 웃마을의 약수동쏘베트가 창립되던곳에서 또다시 쏘베트대표대회를 열고 “쏘베트건립대회결의안”을 채택하고 평강구쏘베트정부의 창립을 선고했다. 대회에서는 리봉삼(李鳳三)이 구쏘베트정부 주석으로 당선되고 정부내에는 선전, 행정, 경제, 군사 등 부서를 두었다. 같은해 10월 중공평강구위는 투쟁의 수요에 따라 약수동을 떠나 장인강쪽으로 이동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잠시 취소하고 농민협회가 쏘베트정부의 사업을 대체하게 하였다. 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에서의 하나의 큰 사변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의 “좌”경로선의 산물이였다. 이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붉은 5월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여 일으킨 첫 번째 반제반봉건투쟁입니다. 이 운동을 통하여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투쟁이였지만 이번 투쟁은 거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조선인군중가운데 파급시켰습니다. 이번 투쟁을 거친후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의 교훈은 ‘좌’경이였습니다. 경황없는 상황에서 진행하였기에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키지 못한 오유를 피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 약수동은 또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던 고장이기도 하다. 회의장소는 쏘베트정부가 있던 마을(지금의 약수동마을 서북쪽 1.5킬로메터되는 산기슭) 한가운데 자리잡고있던 70여평방메터되는 조선식초가집이였는데 지금은 허물어지고 집터자리가 약간 남아있을뿐이다. 1930년 7월,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인 왕경(조선인)은 중공만주성위 비서장 료여원과 함께 연변으로 되돌아왔다. 료여원은 성당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원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을 심사하러 왔던 것이다. 료여원과 왕경은 친히 각 현에 가 원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사업을 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연변의 중공당조직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런 토대에서 7월하순 료여원과 왕경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건립준비사업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6일간 열렸는데 도합 15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동북에서의 조선인농민투쟁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데 관한 지시정신을 학습하고 구당위를 건립하고 당원대표대회를 선거하는 등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회의후 회의에 참석했던 당간부들은 각지에 내려가 연화중심현위의 건립을 위한 준비사업을 하게 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은 친히 약수동에 내려가 평가구당원대표회의를 열고 주현갑을 서기로 한 중공평강구위를 건립하였다. 공산당조직에서는 약수동을 당사업의 토대가 매우 좋아 당의 회의를 열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지목하고있었다. 1930년 8월 13일, 각지에서 온 당원대표들은 약수동 웃마을에 모였다. 대표대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의 책략과 총로선을 관철할데 대한 조치를 세우고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한 사업을 총결하였으며 7명의 위원과 2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를 선거하였다. 이들가운데는 원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 마준, 원 조선공산당 당원이였던 김성도, 한별, 리용국의 전(全, 양말제조로동자), 최(건축로동자), 리(빈민)씨 성을 가진 당원대표도 있었다. 중공연변연화중심현위 위원회 부서와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았다. 서기 왕경(조선인), 조직부장 마준(조선인), 선전부장 한별(조선인), 군사부장 박윤서(조선인), 청년부장 리용국(조선인), 녀성부장 김여신(녀, 조선인)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산하 직속인 연변에서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였다. 중심현위 산하에는 개산툰구위 등 10개 구당위와 61개 기층당지부가 있었으며 당원은 도합 480명 있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농민운동을 힘껏 발전시키였으며 공산당조직과 공청단조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하여 토지혁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적위대, 유격대 등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혁명위원회를 건립하여 지방폭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리하여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연변지구의 당산당원, 공청단원들은 근 천여명이나 되었고 여러 대중단체들에는 5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이런 조직영향하의 군중들은 5만여명에 달하였다.(계속)
28    제28장 "붉은 5월 투쟁" 댓글:  조회:2058  추천:0  2014-02-09
    1932년 추수투쟁때 폭동군중들이 짓부셔버린 화룡현 삼도구의 일본경찰서. 거세찬 폭동 료원의 불길마냥 타오르고 간담 서늘해난 일제 피비린 탄압 감행  5월투쟁행동위원회 1929년 하반년부터 1930년 상반년사이 전국의 혁명정세는 매우 호전되였다. 홍색정권과 홍군의 력량은 크게 장대해져 국민당통치구역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조직사업과 대중사업도 상당한 정도로 회복되였다. 이러한 정세에 직면한 중국공산당은 전면적인 무장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을 지도방침으로 하였다. 1930년 4월 5일, 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만주성위에서는 “ ‘5.1’에 대한 사업결의”를 채택하여 각지 당조직들에서 “5.1”절을 계기로 폭동을 적극적으로 조직할 것을 요구하였다. 4월 24일, 중공만주성위에서는 “ ‘5.1’투쟁행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반동군벌정부를 타도하자!”, “고리대착취를 반대하자!”,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각 민족 빈곤농민들에게 분배하자!”,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쏘베트정권을 세우자!” 등 투쟁구호를 제기하였다. 폭동지휘부 겸 련락처로 아지트를 건립하라는 상급 공산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오원세(주덕해의 숙부)는 교통이 편리하고 적들의 이목이 잘 미치지 않는 승지촌에다 자기 친척의 이름으로 세집 한 채를 맡고 투도구방면의 폭동지휘 최형익과 차정숙(친척사이)을 가짜부부로 살림을 차려주어 사람들의 이목을 흐려놓게 하였다. 집은 승지촌에서 좀 떨어진 독립가옥이여서 지하활동으로 쓰기가 편리했다. 이리하여 이곳은 당시 연변특별지부와 “붉은 5월투쟁”지휘부 성원들의 비밀거점으로 되었다. 1930년 4월 24일, 승지촌 오원세네 집에서 “ ‘5.1’에 대한 사업결의”를 집행하러 연변에 파견되여온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와 마준,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 왕경(일명 리완룡), 위원 이복해(伊福海), 조선공산당(엠엘파)동만도책임자 김근, 원 조선공산당 당원 김철, 엠엘파계렬의 고려청년회 동만도책임간부 등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붉은 5월투쟁”행동계획을 구체적으로 짜고들었다. 우선 이번 “5.1”투쟁을 지도하기 위하여 연변당부와 본 특파원은 4월 24일 “5.1행동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책임에 김한봉(金漢峰, 전임 엠엘계 연변책임), 위원에 박xx, 만(萬)xx(전임 엠엘계 Y책임), 김평철(金平鐵, 폭파총지휘)외 2명의 중국동지(이름 미상)들로 구성되였다.”(김철수《연변항일사적지연구》) 회의에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쏘베트정부를 세우자!” 등 구호들을 제출하여 투쟁방향을 똑똑히 했으며 투쟁력략을 제정하고 각지 인민들은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밑에 일떠나 파업, 동맹휴학, 농민폭동 등 형식으로 “붉은 5월투쟁”속으로 뛰여들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  "5.1"투쟁  1930년5월, 중공연변특별지부와 “5.1투쟁행동위원회”의 령도밑에 연변 각지의 농민, 로동자, 학생들은 반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파업, 동맹휴학, 시위행진 등을 성세호대하게 단행했다. “5.1”투쟁은 륙도구(룡정)로동자와 학생들의 파업, 동맹휴학을 선두로 일어났다. 당시 륙도구에는 200여명 로동자가 있었는데 이번 투쟁에 200여명의 로동자들이 한결같이 참가했다. 이들 로동자들은 철도로동자 30여명외에 양말, 인쇄, 목상(木商), 목공, 철공 등 로동자들이였는데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중앙학교(원 보통학교)를 제외한 20여개 학교에서도 모두 동맹휴학을 하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당시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는 성당위에 보내는 보고서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4월 27일부터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성적은 다음과 같다. “5.1”삐라를 도합 1만7000부를 찍었으며 연변의 한인 각파에 “5.1”투쟁에 참가할 것을 호소한 선언을 도합 3000부를 찍었다. 륙도구에서 기념파업과 동맹휴학을 실시하고(200여명 로동자들이 참가) 평강 석문자(石門子)등지에서 기념대회를 열었으며 반제대동맹을 조직하고 쏘베트대표회대표의 로자를 모금하였다. 그리고 백색테로를 방비하여 농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5월 5일 약수동에서 농민들을 조직하여 시위하였는데 참가한 농민이 도합 600여명이다. 5월 21일 화룡현가에서 현립제1학교를 중심으로 시위대를 조직하였는데 국민당의 당화교육을 반대하는 구호와 식민지교육을 반대하며 사립학교봉쇄를 반대하는 구호를 높이 부르며 각자는 손에 작은 붉은기를 들고 연변당부에서 내보낸 삐라를 산발하였다. 5월 23일 화룡현 사립명동소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들과 농민군중들은 련합하여 현립제1학교에서 단행한 같은 성격의 군중대시위를 거행하면서(참가군중 약 600명) 일찍 명동학교사건으로 체포되였던 3명을 구출해왔다.  “붉은5월투쟁”은 룡정과 투도구일대에서만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개산툰 자동, 북하마탕, 연길현 팔도구, 돈화, 액목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5월 27일 약수동과 부근의 군중들은 집회를 가지고 쏘베트정부의 창립을 선포하였다.  "5.30"폭동  “붉은5월투쟁”이 심입됨에 따라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5.30”참안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폭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모든 행동은 계획대로 진척되였다. 하여 1930년 5월 29일 밤, 삼도구충신장(지금의 화룡시소재지)에서 친일지주 로명화, 김주황의 집을 소각하는 것으로 폭동의 봉화가 지펴지였다. 폭동대오는 이날 저녁 평양려관에다도 불을 놓았다. 청파호부근에 파견된 폭동대오는 부근의 전화선을 끊어버리고 전선대를 찍어넘겼다. 삼도구지대의 폭동을 서막으로 투도구, 룡정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폭동이 료원의 불길마냥 타오르기 시작했다. 30일 밤에 룡정에서 대폭동에 들어갔는데 그때 상황을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때는 왔다. 5월 30일 밤 자정! 대륙의 도시 龍井村의 여름밤은 깊었고 만뢰(萬籟)는 고요한중에 순경의 칼날과 눈총을 피하여 가며 하나, 둘, 열, 백, 천으로 모이는 군중은 약속과 같이 東山大陸고무간판밑에 잠복하였다. 이때이다. 新興학교의 뒷산인 北山정상에서 폭동책임자 金喆은 회중전등으로 개전의 암호를 하였으니, 응원대의 합성에 응하여 직접행동대는 령사관, 정차장, 기관차, 전기공사, 철도 등을 차례로 방화하고 살상의 시가전이 연출되였다. 화광은 충천하고 총성은 은은하여 함성과 비명이 소란한 중에 령사관에서는 기관총을 난사하여 수많은 군중이 쓰러졌으며 31일 아침까지에 電燈公司는 5000圓가량의 손해를 입었고 海蘭河철교는 무너지고 東拓會社에는 폭탄이 투척되였다. 이같이 룡정촌에서뿐만아니라 폭동의 계획은 전부 실현되였으니 同日 同時에 和龍, 延吉. 頭道溝등 간도일대는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투도구의 주요한 폭동공격목표는 투도구일본령사분관, 조선인거류민회, 보통학교, 상부국, 중국군병영, 공안국 및 친일지주 자택이였다. 폭동준비를 위하여 폭동지휘부에서는 소성규를 평강지역에 파견하였다. 소성규는 구지대의 폭동지휘를 책임진 김윤봉을 찾아가 세린하 와룡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중평리, 약수동, 세린하, 강겅, 룡수평, 소오도구 등지에서 온 대표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구체적인 폭동방안을 연구하였다. 와룡동회의에서는 폭동시간과 공격목표를 정한후 폭동대를 파괴대, 방화대, 응원대 등 3개 대로 나누고 해란강을 계선으로 수남, 수북 두갈래로 각기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5월 30일 밤, 해란강이남의 70여명 폭동대는 홍혜순, 오창길, 김응수 등의 지휘밑에 투도구남쪽 해란강다리목 버들방천에 와 매복하였다. 해란강이북의 폭동대들도 박세진, 박상활, 리경천 등의 지휘밑에 투도구 북산언덕에 이르렀다. 약수동, 장인강, 세린하 등 일대의 군중들로 구성된 수북폭동대오는 렵총 18자루와 석유, 솜 등 물건들을 가지고 폭동신호를 기다렸다. 밤 11시, 투도구시내의 민회사무실이 불에 타는 것을 신호로 수남, 수북의 폭동대는 사전의 계획대로 행동을 시작하였다. 응원대는 렵총을 쏘고 폭죽에 불을 달아 석유통에 넣어 기관총소리처럼 울리게 하였다. 총소리, 폭죽소리에 놀란 일본령사관의 경찰들과 중국상부국경관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보통소학교가 소각되고 친일주구의 자택도 불에 탔으며 일본령사관의 담벽은 폭동대의 사격에 의해 탄알자리가 어수선하였다. 수남폭동대는 철수하면서 사도구(룡호촌)의 일본보조서당을 소각해버렸다. 룡정폭동대의 주요한 공격목표는 대륙고무공장, 전기회사, 동척회사, 해란강철교, 기관고, 신흥학교뒤산 정상 등이였다. 5월 30일 밤, 대흥전기회사를 파괴할 임무를 맡은 폭동대는 도끼, 몽둥이, 석유 등을 가지고 전기회사에 가 보초놈을 까눕히고 전기회사뜨락으로 쳐들어갔다. 폭동대원들은 송전용전선대를 도끼로 찍어넘기고 송전실에 들어가 새로 가설한 배전판의 저항기, 전류계 등을 파괴해버렸다. 이리하여 룡정과 투도구 시내는 삽시에 암흑세계로 변하였다. 간담이 서늘해난 일제는 피비린 탄압을 감행했다. 일제경찰은 김근 등 67명을 체포하고 39명을 서대문형무소에 압송하였다. 폭동책임자인 김근은 사형에 언도되고 소성규는 무기형, 황진영은 10년형에 언도되였다. 이것이 “제4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계속)  
27    제27장 중공연변특별지부의 탄생 댓글:  조회:1589  추천:0  2014-02-09
에서 습격받은 룡정발전소와 동척회사, 간도파출소. 조선공산주의자들 집단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반제반봉건투쟁에 궐기  연변에서 중국공산당 초기 활동 1921년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탄생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선후로 당원간부를 동북에 파견하여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조선인의 첫 중국공산당원 한락연(韓樂然)도 있었다. 한락연은 1924년 봄에 동북에 파견되여 봉천, 할빈 등지에서 사업하면서 청년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10월24일, 할빈 도리구(道里區)에서 동북 제1차 중국공산당대표대회가 열리였으며 중공만주성위가 탄생, 성당위기관을 봉천에 두었다. 이로부터 동북지구에 통일적인 공산당기관이 있게 되었다. 1928년초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민중토대와 혁명운동의 토대가 좋은 연변에 중공당원인 주동교를 파견하여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게 하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은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 기회에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여서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진지로 되었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당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들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1928년 7월에 각지에는 기층단지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는데 류건장과 조지강은 다 향산자유원의 졸업생이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1928년10월 중공동만구위가 재조직되였는데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리별천, 선전위원을 손좌민이 맡았다. 중공동만구위와 그 산하의 당조직에서는 학교를 기본진지로 청년학생들에게 공산주의도리를 선전하고 애국주의를 선양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러나 당시의 공산당사업은 단지 지식계층에만 국한되고 광범한 로농대중속에 심입하지 못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룡정에서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제공산당 "12월테제"  1928년 12월,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 각파가 신청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승인하지 않고 “12월테제”를 내려보냈다. 테제의 주요내용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반드시 “파쟁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나 로농민중을 튼튼한 기반으로 한 볼쉐위크화한 당을 재건설”하라고 촉구하는것이였다. “12월테제”의 정신을 접수한 조선공산당 각파는 파쟁을 극복하고 볼쉐위크화한 당을 재건한다는 명의하에 각기 재건설위원회를 내왔다. 각파 재건위원회는 중국공산당조직과 접촉하면서 동북조선인들의 실제에 근거하여 혁명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조선인들의 력차의 투쟁은 모험주의 경향과 각파 사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엄중한 손실을 보았다. 이러한 결점들을 보아낸 조선인들은 각파 재건위원회에 점차 실망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능히 통일단결되여 민중운동을 정확하게 령도할수 있는 령도력량을 찾기에 고심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의하여 동북에 있는 조선공산주의단체들을 쟁취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는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인들은 중국관내에서부터 중국공산당에 먼저 가입하기 시작했다. 1927년9월 상해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근거하여 집체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강소성위원회의 소속인 “법남(法南)구한인직부”를 조직하였으며 이어서 북경의 조선공산주의자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북경지부를 설립하였다. 1930년 1월과 3월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서는 2차에 걸쳐 조선공산당 각파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가입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고 리춘산, 한빈 등을 상해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가입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월 할빈에서 각파 대표들의 협의회가 있었는데 화요파의 김찬 등 소수인들이 중공당가입을 동의하지 않고 조공당재건을 주장한외에 대부분 대표는 중국공산당가입을 찬성하였다. 회의후 엠엘파는 “선언”을 발표하여 엠엘파만주총국의 해산을 선포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표시했다. 화요파의 동만도간부들은 총국의 의도여하를 불문하고 먼저 해산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서상파는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동맹”을 설립하였으나 공산주의자동맹은 결국 “조선혁명연장론”이며 “일국일당”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동년 8월에 해산되고말았다. 하여 동북에서의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해체되고말았다. 한편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리원, 리춘산, 한빈, 장시우, 김재춘, 김기철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가입을 선전하고 그들의 입당수속을 도와주고 각지에 중공만주성위의 소속으로 지방당부를 내오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만주총국은 해산되였지만 력사적 의의는 위대합니다. 10년동안 비록 ‘조선연장론’, 파벌싸움, 맹동주의의 착오를 범하기는 하였지만 금후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상당한 리익을 주기도 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시상을 광범위하게 전파했으며 많은 혁명군중단체를 건립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도시공작으로부터 농촌공작에 들어갈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은것이였습니다. 1931년전에는 동북에 공산당원이 186명뿐이였으나 1931년에는 1700여명으로 되었습니다. 연변에만 636명 공산당원이 있게 되었으며 조선인 중국공산당 당원은 전체당원의 90%를 차지하고있었습니다. 많은 공산주의인재들이 양성되였는데 녕안, 밀산, 몽릉, 탄원, 반석, 청원, 류하 등지의 제1대의 현위서기는 다 조선인당원간부들이였습니다. 10년동안 수천명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이 양성되였는데 리철부(조공당중앙위원)는 중공하북성위 서기로 사업하기까지 했습니다. ‘9.18’사변후 우선 조선인지구에서 유격근거지가 창설된것도 조공당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활동은 중국공산당의 동북에서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역할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평가이다.  중공연변특별지부 탄생  중공동만구위가 파괴된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인 공산당원 왕경(王耿 원명 문갑송)을 연변에 파견하여 당조직을 재건하게 하였다. 왕경은 먼저 팔도하자(지금은 덕신향 숭민촌)에 와서 교편을 잡고 피신해있는 조지강을 찾아 성위의 지시를 전달하고 당조직재건사업을 연구하였다. 왕경은 처음에는 팔도하자, 달라자 일대에서 사업했다. 그러나 이 일대가 일제침략자들이 룡정으로부터 조선으로 통하는 교통요로이기에 관방의 경계가 삼엄하므로 당사업을 전개하기 불편하여 이동이 필요되였다. 조지강은 화룡현교육국 국장 관준언의 방조를 얻어 왕경을 화룡현제2소학교(지금은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소학교) 교원에 취직시켰다. 왕경은 교원신분으로 공산당지하공작을 벌리였다. 당시 화룡현소재지였던 달라자에서 건립된 중공연변특별지부는 2월 20일(1930년) 왕경이 교편을 잡고있는 상천편(개산툰)으로 옮겼다. 왕경이 서기를 맡고 조지강, 이복해, 요일평이 위원을 담임하였다. 왕경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특별지부는 15명 당원으로 발전되였으며 석건평, 남양평, 달라자, 동량사에 기층 당지부를 두게 되었다. 얼마 안되여 왕청현 대감자에도 지부를 건립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가 건립된후 적극적으로 당조직을 회복하는 사업을 전개함과 동시에 연변의 실제와 결부하여 토지혁명을 진행하고 고리대를 반대하며 조세납부를 반대하고 국민당정부에서 교육권을 회수하는 것을 반대하는 등 구호를 제출했다.  1930년4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인공산당원 박윤서, 마준을 연변에 파견하여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붉은 5월 투쟁”을 발동하게 하고 투쟁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고찰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끔 하였다. “붉은 5월 투쟁”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밑에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고찰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하여 공산당의 조직건설이 비교적 빠른 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투쟁가운데서 일부 간부와 조직이 폭로되여 특별지부성원인 조지강 등이 부득불 연변을 떠나게 되어 특별지부에는 왕경 한사람만 남게 되었다. 5월중순 왕경(이미 리왈룡으로 개명), 리창일, 주건, 리용 등은 연변특별지부를 재조직하였다. 서기는 그냥 왕경이 맡았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인들이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대중을 령도하여 들끊는 “붉은 50월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그러나 일제군경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하여 많은 당원간부들이 체포되고 희생되였다. 왕경도 부득불 연변을 떠나 봉천으로 중공만주성위를 찾아갔다. “중공연변특별지부는 조선인공산주의자들과 광범한 조선인대중들을 과거의 협애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여러 민족 인민들과 어깨겯고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반동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이끌었으며 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파벌관념을 버리고 중국공산당의 령도밑에 중국혁명에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견해이다.(계속)  
26    제26장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댓글:  조회:2046  추천:1  2014-02-09
1930년 5월 30일, 간도폭동사건으로 체포된 항일투사들. 혁명적학생들 무장한 일제경찰과 적수공권으로 박투 폭동위원회 민중단체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  연변을 휩쓴 반일학생시위 1929년 1월, 조선 광주에서 대규모적인 학생반일투쟁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들이 지펴올린 반일의 봉화는 료원의 불길마냥 서울, 대구, 부산, 평양 등지에서 세차게 타올랐으며 연변에도 파급되여왔다. 연변 각지 조선인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서 광주학생들을 성원하는 반일시위투쟁을 단행했다. 11월 26일(1929년) 화룡사립약수동학교의 학생들은 사립룡평학교, 두도구의 사립신흥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단행, 두도구거리에 떨쳐나섰다. 학생시위대는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 “조선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한다!”는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면서 연변학생운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약수동청년회 책임자인 손철운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청년들을 휘동하여 시위물결에 뛰여들었다. 아동의 사립협동학교, 장인강의 사립일신하교, 세린하의 사립와룡동학교 등 학교의 학생들도 시위운동에 호응해 나섰다. 시위대렬은 거리를 메웠고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급해맞은 두도구일제령사분관의 무장경찰들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물호스를 내저으면서 시위대렬을 해산시키려고 날뛰였다. 적지 않은 시위골간들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굴함없이 시위운동을 계속 단행했다. 이날 대동구, 룡두산 등지의 사립학교 학생들과 명성촌, 내풍동, 신풍동 등지의 학생들은 놈들이 저애하는 바람에 미처 두도구에 이르지 못하고 개척리에 모여 시위를 단행했다. 1930년 1월, 대립자의 현립1교와 사립명동학교의 학생들은 대립자현소재지(당시 화룡현소재지는 대립자에 있었음)의 거리를 메우며 지나갔다. 수십명학생들이 민국경찰에게 체포되자 《민성보》사장이며 화룡현 교육국장인 관준언이 나서서 교섭하여 구출하였다. 1930년 1월 23일, 룡정의 각 중학교에서도 동맹휴학을 단행, 거리로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적인 지휘밑에 살을 에일듯한 풍설을 무릅쓰고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학생들은 태극기와 수기를 흔들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광주학생사건으로 검거된 학생들을 석방하라!”,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멸시를 반대한다!”, “노예교육을 반대한다!”는 등 구호를 높이 웨쳤다. 시위행렬이 일본령사관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경찰들이 총칼을 휘두르면서 적수공권인 학생들에게 덮쳐들었다. 대성, 동흥, 은진 등 중학교의 학우회간부들인 리영식, 김창준 등 50여명 학생들이 당장에서 체포되였다. 이에 분노한 학생 1000여명이 은진중학교 운동장에 다시 모여 성세호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은진중학교는 영국조계지안에 있었으므로 일제경찰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동흥중학교, 명신신녀자중학교,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의 학생들은 앞다투어 일제의 야만적만행을 규탄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였다.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요란히 들리였다. 일제 기마병 10여명이 조계지 철조망밖에 다달아서 호각을 불어대면서 시위대오를 해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보는체만체하면서 계속하여 구호를 웨치면서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일제 기마병들이 계속하여 호각을 불면서 야단치자 학생들은 철조망을 사이두고 경찰들과 항변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서 철조망을 뛰쳐나가 기마병에게 덮쳐들어 박투를 벌리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말에서 끌여내려 엎드려놓고 반주검이 되도록 두둘겨팼으며 놈들의 군도를 빼앗아 끊어놓고 옷과 모자를 찟어놓았다. 이것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무장한 일본경찰드로가 맞다들어 박투한 반일행동이였다. 1월 28일 룡정의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중학교을 중심으로 한 수백명의 학생들은 수기를 들고 다시 영국조차지에 모여 반일성토대회를 가지였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수 없어 거리에 몰려나가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는데 여러 학교의 학생들도 자각적으로 이 시위대오에 가담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투쟁은 2월달에도 계속 일어났으며 뒤이어 전 연변에 파급되였다. 1930년 2월경에 사립어랑학교, 수성촌의 사립영동학교, 명암의 사립보진하교의 학생들은 베자루에 자갈돌을 넣어가지고 가서 이도구 구산장의 일제보통학교의 창문유리를 모조리 깨여버렸다. 이날 어랑하교의 한 학생은 종이로 만든 삼각기에 “일제는 중국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내용의 혈서를 써가지고 내려왔다. 분노한 학생들은 이도구경찰분서를 짓뭉개려 했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학생들의 반일시위가 있은후 일본경찰들은 수시로 각 중학교에 뛰여들어 학생들을 잡아다가 주모자를 사출해내려고 심문을 들이댔다. 허나 아무런 단서도 잡을수 없었다. 오히혀 학생들의 지대한 분노를 자아냈을뿐이였다. 2월 5일, 룡정의 각 학교의 학생대표들은 회의를 열고 “전동만학생폭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삐라를 살포하여 “전 동만학생들은 깨여일어나 적나라의 아성에 들어가 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동포들과 함께 전투를 하자!”고 호소하였다. 대규모적인 민중시위 얼마전부터 조선공산당조직과 련계를 가지게 된 중국공산당만주성위에서도 반제투쟁에 결부시켜 동북 여러 민족 인민들을 반일투쟁에 궐기시키기 위해 조선의 “3.13폭동”11주년을 계기로 각지 당조직의 지도밑에 집회 또는 시위운동을 거행하여 민중들의 항일운동을 제고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에서는 1930년 1월에 “3.1폭동”11주년을 계기로 농민, 학생과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적인 민중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만과 북만에 “ ‘3.1폭동’11주년기념준비위원회”를 각기 조직하여 시위운동을 령도하기로 결정, 선전부장 장주련(장시우)을 연변에 파견했다. 장시우는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현재 화룡시 동성향 명풍촌)에 있는 조선공산당 평강구역국 책임비서인 유태순(후에는 중공 연화현 평강구위 조직부장)의 집에서 동만도(화요파) 책임비서 윤복송, 조직부장, 강석준, 선전부장 한별 그리고 연변학생련합회의 간부인 리동선 등과 함께 동만도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동만의 각 군중대표자들로 “ ‘3.1폭동’11주년기념준비위원회” 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2월 20일경 “준비위원회”는 연변학생련합회, 동만조선인청년총동맹 등 대표 5명을 구성, 리동선이 총책임을 지교 표면지도를 하기로 하였다. 준비위원회에서는 각지의 민중들을 조직동원하는 한편 시위하는 당날 살포할 선전삐라와 수기 등을 만드느라 바빴다. 군중선동에 사용할 견문은 주로 장시우와 윤복송이 기안한것을 선전부장 강시준의 책임아래 3월 1일 전야까지 몇십종 약 30만장을 인쇄하였는데 장시우, 강석준, 윤복송, 한별 등은 유태순과 강만홍(박봉남 후에는 제1대 중공밀산현위 서기)네 집에 기숙하면서 낮이면 움속에서 밤이면 뒤방에서 등사기와 씨름했다. 유태순과 강홍만의 가족들은 붉은천과 흰천으로 수기를 만드느라 바삐돌아쳤다. 그들이 작성한 선전문 가운데 중요한것을 보면 “나가자 만세시위장으로!”, “선언”, “전 조선학생혁명자의 혁명적투쟁에 대하여 피압박대중에게 다시 고함” 등이였다. 격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지금 조선에서 우리의 형제자매, 학생들은 개와 같은 일제놈들에게 몇만명이 체포되였고 구타, 살해되였다. 개와 같은 일본강도의 참을수 없는 학대와 학살을 반대하여 일어나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만세! “3.1폭동”11주년기념일은 다가오고 있다. 이날 전 간도는 광범히 일어나서 적과 싸우자! 적기(赤旗)를 높이 들고 만세시위장으로 나가자! 무장폭동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과 간도에서 일제에게 체포된 혁명자를 탈환하라! 동지들이여, 우리의 혁명가들은 우리의 혁명적투쟁, 희생적혈투를 바라고있다. 동지들이여, 일제히 일어나서 투옥된 우리의 혁명적학생들을 탈환하자! 우리에게 고통과 압박을 가하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우리의 무장폭동을 련합하여 그놈들을 끝까지 박멸하자! 모든 방법을 다 리용하여 투쟁을 확장하고 폭동을 일으키자! 그리하여 즉시 로동자, 농민, 병사, 도시빈민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 ...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30여만장의 삐라와 수천폭의 수기를 동만 각지의 당, 단 세포에 배포하는 한편 직접 구두를 통하여 민중을 선동, 조직하게에 힘썼다. 그리하여 1930년 2월 28일 소오도구, 개척리, 대동구,수평동, 이도구, 장인강 등지의 농민들은 두도구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독립만세!” 구호를 높이 웨치면서 검은 글씨로 쓴 붉은색, 흰색의 작은 기를 흔들면서 성세호대하게 시위운동을 벌리였다. 이튿날(3월 1일)에도 련속 시위운동을 전개했는데 룡정, 두도구를 비롯한 전 간도는 마치 무장폭동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였다. 두도구일본령사분관 경찰들은 룡정총령사관의 군경들의 도움밑에 민중시위를 해산, 탄압하려고 미쳐날뛰였다. 3월 1일 일제경찰들은 시위군중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하여 두도구령사관 마당에는 체포된 농민과 학생들로 꽉 차게 되었다. “체포된 시위군중 가운데 문두찬이라는 장인강에서 온 15살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일제 경찰놈들은 소녀를 얕잡아보고 주모자가 누구냐고 따졌으나 입을 꾸 다물고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성난 일본경찰은 소녀의 머리태를 거머쥐고 흔들면서 위협공갈했지요. 이에 문두찬소녀는 ‘새벽닭은 누가 시켜 우나요? 우리들도 때가 되니 일떠섰어요!’ 라고 야무지게 대답하여 일본경찰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고’를 받고 석방되여 나온 문두찬소녀는 놈들이 감아쥐였던 자기 머리태를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가위로 뭉청 잘라버리고 단발머리를 만들었습니다. 소녀는 계속 혁명의 앞장에 서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한 소녀의 생동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시 군중들의 혁명열정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제3차간도공산당사건” 시위에 동원된 군중들이 많고 기세가 대단한 것을 관찰한 “3.1”운동11주년기념준비위원회에서는 보다 규모가 큰 민중폭동을 계획하였다. 3월 5일 강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유태순, 리동선 등은 래풍동에서 희의를 소집하고 이번 시위투쟁을 총화하였다. 결과 민중들을 궐기시켜 무장폭동을 일으킬수 있다고 결정하고 준비위원회를 “전동만폭동위원회”로 성격전환하였다. 폭동위원회에서는 조직, 선전, 규찰대, 경리, 출판 등 부서를 설치하고 조직책임에 리동선, 선전책임에 리철한, 규찰대책임에 김상근, 경리책임에 리병식, 출판부책임에 안평을 가기 임명하고 행동에 돌입하였다. 폭동위원회의 활약부서가운데 규찰대가 있는것은 주목할만한 점이였다. 규찰대는 중앙대, 지방에는 지방대, 구역에는 구역대, 각 촌에는 분대를 설치하고 중앙대로부터 촌분대의 책임자는 모두 해당 당조직의 주요간부들이 책임지고 령도하기로 하였다. 규찰대 성원들은 민중단체의 골간분자들로 구성하고 각 촌 분대성원들로 하여금 각지의 지하조직과의 통신련락을 담당하는 동시에 반동분자, 일제경찰과 그들의 앞잡이들의 행동을 정찰, 감시하고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폭동위원회는 민중혁명단체를 동원하여 무기와 자금을 장만하고 5월 1일에 폭동에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중심간부들인 장시우, 윤복송, 강석준, 한별 등은 표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조종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만폭동”계획은 3월 하순 일제의 간도총령사관에 포착되여 검거되기 시작하여 5월 중순까지 130여명이 체포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3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체포된 사람중 49명은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1931년 2월 5일부터 서울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위반의 “죄명”으로 공판을 받았는데 장시우는 10년, 윤복송은 9년, 강석준은 6년, 리병식은 8년6개월... 언도 받았다. 리동선, 한별은 검거선풍에 걸리지 않았으나 후날 “5.30폭동”, “추수폭동”에 앞장서서 투쟁하다가 체포되여 한별은 혹형으로 사망하고 리동선은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에서 피살되였다. “한마디로 그번 폭동준비는 ‘좌’경모험주의의 그릇된 견해에 의해 지도된 행동이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관내 토지혁명전쟁의 경험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맹동주의적인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연변대학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계속)  
25    제25장 “제2차간도공산당사건” 댓글:  조회:1795  추천:0  2014-02-07
  일제시대 서울서대문형무소. 공산당 자파(自派)중심 만주총국 편성하고 일제의 야만적탄압으로 동만청년동맹 해체 당내 파벌투쟁 조선공산당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던 화요파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성립되던 그날부터 만주총국을 화요파중심으로 조직하려고 했으나 세력이 막강한 상해파와 청년운동에서 우세를 차지하고있는 엠엘파가 있어서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요파의 조봉암, 최원택, 김찬 등은 상해파의 윤자영, 김하구, 엠엘파의 김응섭, 이르쿠쯔파의 김철훈 등을 흡수하여 표면상에서 각파로 조성되여 보이는 통일총국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실제상 화요파가 의연히 책임비서, 조직부장, 선전부장(상해파의 윤자영이 병을 구실로 선전부장자리를 내놓아 후임으로 화요파의 김동명이 부임), 위원 등을 차지하게 되어 령도권이 화요파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었다. 후에 엠엘파의 박윤서를 군사부장으로 보충선거하였으나 결과는 화요파와 엠엘파간의 모순을 격화시켰을뿐이였다. 1926년 5월 만주총국에서는 김동명(화요파)에게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조직할 임무를 주었다. 그러나 당시 엠엘파에서는 이미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를 조직하고 실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있으면서도 김동명은 고려공청회 만주비서부와 아무런 상론도 없이 김해일, 강우, 홍원석, 한진, 전승우, 최동욱, 리주화, 김훈, 김동명 등 9명으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구성하였다. 이에 엠엘파의 박윤서는 자신이 만주총국에 들어가지 못한데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김동명에게 “개별행동을 취하여 별개의 공청을 조직했다”고 항의해 나섰다. 상해파에서도 화요파의 이런 처사에 대해 의견이 있었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은 한때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27년 8월 김동명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선전부장으로 부임된후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의 책임비서를 엠엘파의 리종희가 맡아보게 되었다. 리종희는 김동명이 제의한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위원명단을 무시하고 리윤수, 박사, 강진, 한익국, 김광근, 한사빈, 박병희 등을 위원으로 제기했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최원택은 리종희에게 원래의 결정을 집행할것을 명령했으나 리종희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내에 파벌투쟁이 있다는것을 구실로 최원택의 명령을 거역하였다. 이리하여 화요파, 엠엘파, 서상파(서울, 상해파)사이의 내부모순은 격화되였다. 1927년 10월 2일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 터졌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주도하던 최원택을 비롯한 주요한 간부들이 일거에 검거되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아 마비상태에 빠지고말았습니다. 거기에다 창립당시부터 잠재해있던 여러 파들 사이의 모순이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여 각파에서는 ‘자파중심(自派中心)’으로 혁명세력을 편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당내 여러 파들이 령도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되였던 첨예했던 모순을 피력했다. 1927년 10월 9일 만주총국의 간부들인 김하구, 주건, 리신, 정창순, 김완, 정을산 등은 녕안현 장하(章河)의 서병택네 집에 모여 금후의 사업방안을 토의했다. 회의에선 우선 리순, 정창순, 김한호 등 3명을 연변에 파견하여 검거된 당원들을 위문하고 기층조직을 재건하면서 일제와 지방정부의 동태를 파악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조직부장에 전룡락, 선전부장에 김봉만을 림시로 보충선거했다. 동만구역국의 사업은 남아있는 당원들이 잠시 책임지기로 했다. 만주총국과 동만도(1928년 1월 구역국을 도로 고쳤듬) 가부사이이 련계는 림민호, 전룡락, 김기철(김만선) 등이 책임지기로 하였다. 3개의 만주총국 림민호, 김기철 등은 연길현 옹성라자에 와서 리순(엠엘파) 등과 토의한후 금후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과 동만도간부는 고려공산청년회(엠엘파) 가운데서 유력자를 선발하여 등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엠엘파의 본위주의의 경향이였다. 그와 반대로 상해파의 리환수, 주건, 김희창 등은 상해파 가운데서 만주총국과 동만도의 간부를 내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주총국과 교섭했다. “10.2”사건-즉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에서 별로 손실을 입지 않은 엠엘파와 서상파는 령도권을 놓고 점차 치렬한 공방전을 벌리였는데 모순은 본격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화요파는 비록 “10.2”사건에서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김찬의 지도밑에서 만주총국을 회복하였다. 후보위원으로 있던 리동산이 책입비서를 맡고 김성득(백파)이 조직부장을, 김홍선(김홍한)이 선전부장을, 최충호, 진허, 리우영 등이 위원을 맡았는데 이는 화요파일색의 만주총국이였다. 이에 박윤서는 조선공산당중앙에 화요파의 “전형행위”를 소송하고 엠엘파로 구성된 만주총국명단을 제기하였다. 당시 엠엘파가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의 령도권을 장악하고있었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의 책임비서 안광천(엠엘파) 등은 1928년 3월 화요파의 만주총국을 부정하고 엠엘파가 제기한 만주총국간부명단(첵임비서 리경호, 위원 박기석, 박윤서, 김영식, 리순)을 비준했다. 동만도의 간부로는 김기석, 최종학, 김진탁, 리순, 동만도공청회 간부로는 리정만을 선임하였다. 이러한 간부임명에 대해 화요파는 승인하지 않으면서 원래의 만주총국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구에서 엠엘파총국과 화요파총국이 동시에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이러한 정황하에서 1927년 8-9월 서울파와 상해파는 련합하여 “재만조선공산주의동맹”을 결성, 리동휘, 윤자영, 리운혁, 장도정, 최동욱, 김철수, 김영만 등으로 지도소조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3개파가 제마끔 만주총국을 세우고 활동하는 국면이 초래되였다. 북풍파의 일부 성원들은 비록 “10.2”사건에서 체포되고 수령인 김봉익도 울라지보스또크로 피신간 정황이였으나 한상묵, 류운섭, 최화봉, 황욱(황금달) 등은 다시 일어나 조직을 회복하였다. 11월 중순 그들은 한상묵을 책임비서로 하는 북풍파당조직을 성립하고 울라지보스또크에 피신해있는 김봉익과 련계를 달아 임무를 접수하였다. 북풍파에서는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와 련계가 없이 자체로 조직을 확대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은 《민성보》에 문장을 발표하고 삐라를 살포하는 등 수단으로 자본주의의 죄악을 폭로하고 조선인군중을 선동하여 사회주의혁명에로 궐기시켰다. 1928년에는 “5.1”절을 계기로 반일강연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그들의 활동을 감시해오던 일본경찰들은 5월 10일 밤 8시 30분에 수색망을 늘여 북풍파성원들을 체포하였다. 이리하여 원래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북풍파는 철저히 파괴되고말았다. “비록 이렇게 각 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놓고 파쟁을 벌리기는 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피력했다.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민족유일당조직을 창립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또 반일투쟁에서 그들은 함께 일제의 침략죄악을 폭로, 친일조직과 밀정을 타격하였습니다. 혁명조직을 보위하기 위하여 서상파는 ‘적기단’을, 화요파는 ‘모험총대’를 조직하여 룡정, 길돈연선, 봉천, 할빈 등지에서 폭동을 계획했으며, 엠엘파는 룡정에서 ‘맹호단’, ‘철혈단’을 조직하고 폭동계획을 짰으며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훈련소를 밀산지구에 설립하려고 의연금을 모습하거나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을 벌렸습니다. 반봉건투쟁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 하였습니다.” “제2차간도공산당사건” 마레주의의 전파와 조선공산당조직이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연변에서의 청년운동도 생기발랄히 발전하였다. 연변지구에서의 청년운동의 비약적발전은 통일된 청년조직의 발족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1926년 1월 25일, 동진청년회 등 20개 단체의 대표 28명이 룡정의 시천교강당에 모여서 동만청년총련맹의 창립대회를 열었다. 대회에서 동만청년련맹의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합리한 사회생활의 지적교육과 실지훈련을 목적으로 한다. (2) 우리는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대동단결에 힘쓴다. (3) 우리는 대중을 본위로 한 신문화의 향상에 힘쓴다. 총련맹의 간부진영은 다음과 같다. 림시의장 박재하 서기 김소연 규약기초위원 리주화, 김소연, 김소광 선언 및 강력기초위원 리린구, 김봉익, 주채희 집행위원 리주하 이하 15명 동만청년련맹은 창립된후 약 반년동안 독자적인 청년운동을 벌리다가 1926년 10월 동만구역국과 고려공산청년회 구역국이 설치된후 직접 그 령도를 접수하게 되었다. 동만청년련맹은 연변지구청년운동의 구심점으로 되면서 조직확대와 회원흡수에 모를 박았다. 1928년 1월 1일에 정기대회에서 동만청년총련맹을 “동만청년총동맹”으로 개칭, 단일동맹수는 24개로 급속히 늘어났고 5000여명 회원이 있었다. 1928년 8월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진영을 보명 중앙집행위원장, 중앙집행위원 22명 가운데서 공산당원과 공청원이 13명이고 무소속은 9명뿐이였다. 이렇듯 동만청년총동맹은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이 령도하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산하의 표면단체였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조직에서는 1928년 9월 2일이 “국제청년일”인것을 기회로 산하의 가장 유력한 합법단체인 동만조선청년총동맹을 동원하여 기념집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보가 일본총령사관에 탐지되여 대규모 검거체포되였다.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책임비서 리정만을 비롯한 고려공산청년회 동만도간부와 조선공산당 동만구역국 간부 51명, 동만청년총동맹 소속 및 기타 21명 총 72명이 검거투옥되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하여 연변지역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을 뒤이어 또 한차례의 준엄한 시련에 부딪쳤다. 동만청년총동맹도 문화부장 윤용준을 비롯한 12명의 간부를 잃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일제는 여기에서 손을 떠지 않았다. 1928년 10월 연변의 여러 지역에서 동만청년총동맹의 간부들을 검거투옥하기 위하여 지방치안을 파괴한다는 죄명을 들씌워 공개적인 단속에 나섰다. 이리하여 동만청년총동맹은 1928년 10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공개적인 활동을 그치게 되었다. (계속)  
24    제24장 “제1차간도공산당사건” 댓글:  조회:2867  추천:0  2014-02-07
    1927년 10월 에서 체포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 조직부장 최원택(앞줄 오른쪽),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안기성(앞줄 가운데), 위원 리주화(뒤줄 왼쪽), 김지종(뒤쪽 오른쪽), 김소민(앞줄 왼쪽). 동만구역국 주요한 간부들 일거에 체포되고 혁명적청년학생들 일제와 맞서 용감히 시위 동만구역국 성립 1925년 4월 27일 조선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창립대회가 비밀리에 거행되였다. 이튿날인 4월 28일, 서울에서 고려공산청년회도 창건되였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는 해외에 있는 조선인들의 혁명투쟁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해외부, 만주부, 일본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상해에 있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의 조봉암 등을 동북에 파견하여 만주총국의 설립사업을 하게 하였다. 1926년 5월 16일 조선공산당 화요파대표 조봉암, 최원택, 상해파대표 윤자영, 김하구, 이르크쯔파대표 김철훈 등은 흑룡강성 주하현(상지현) 일면파의 하동에 있는 김철훈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총국기관을 흑룡강성 녕안현 녕교탑에 두고 그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구역국을 내오기로 결정지었다. 고려공청회에서도 만주총국을 세웠다. 만주총국에서는 동만구역국을 설립하기 위하여 한응갑과 전룡락을 연변에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1926년 10월 28일 밤 룡정시교 삼리촌(三里村)에서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채세진, 박두환, 리순, 김인국, 림민호 등과 만나서 협의한 끝에 룡정촌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을 성립할것을 결의했다. 구역국산하에 비서, 선전, 조직, 검열 등 부를 설치하고 집행위원들을 선거하였다. 집행위원으로는 전룡락, 김인국, 리순, 리주화, 림민호, 채세진, 김소연, 림계학과 후에 총국에서 한사람을 파견하기로 하여 도합 9명이였다. 전룡락이 책임비서를 맡고 김인국이 조직부장, 리순이 선전부장, 표면부(表面部)원에 김소연, 검열부원에 채세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자에 림민호가 선거되였다. 동만국역국이 조직된후 그들은 연변의 여려 계렬의 조직들을 정리하고 새롭게 룡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명월구, 왕청, 라자구, 훈춘 등 지역에 17개의 세포조직을 내왔다. 1927년이 통계에 의하면 동만에는 19개 기층당조직과 116개 외각단체가 있었는데 혁명단체의 성원들은 9766명에 달했다. “만주총국은 성립된 그날부터 조선공산당의 방침, 로선에 근거하여 사업을 벌려나갔는데 사실은 연변의 실정과 조선의 실정은 같지 않았습니다. ‘조선연장론’은 연변실정에 부합되지 않는데도 조선공산당정강을 연변에 결부시키려 했습니다.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낳았지요. 그러나 맑스주의 전파, 일제에 대한 타격, 혁명군중조직의 단합, 당기층조직의 확대, 허다한 우수한 당간부양성 등 면에서 걸출한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의 설립은 금후 연변에서의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피력, 반면 여러 공산주의단체들간의 파쟁이 심했기에 단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연변에서의 공산당 4개파 “연변에는 ‘화요파’, ‘서울파’, ‘엠엘파’, ‘상해파’ 등 4개파가 있었습니다.1920년대초에 쏘련이 이르꾸쯔크파와 리동휘가 조직한 고려공산당 ‘상해파’간의 모순을 조절하기 위하여 쏘련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두 파는 극동조직국을 세워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순이 계속 존재하고 악화되여 극동조직이 실패하자 극동조직국에서는 비밀리에 정재달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 진주에서 강영달과 련합하여 1923년 7월에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북풍회’파와 련합하여 1924년 11월 ‘화요회’를 건립하였습니다. ‘화요회’란 공산주의자들이 화요일날 한번씩 회의를 하기에 그렇게 부른것이였고 또 맑스의 탄생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 조직을 ‘화요파’라고 불렀습니다. 두 번째 단체로는 ‘서울파’입니다. 당시 조선경내의 청년운동은 매우 활약적이혔는데 그 지휘권은 장덕수, 리광수 등 자산계급우파들이 장악했습니다. ‘서울파’단체내부에는 ‘좌’파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인물이 김사국입였습니다. 후에 투쟁을 거쳐 ‘좌’파세력들이 우파세력을 물리치고 령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세력들이 1925년 4월 ‘고려공산주의동맹’과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을 건립했습니다. 력사에서 이들을 ‘서울파’라고 합니다. 세 번째단체로는 ‘엠엘파’입니다. 1920년대초에 ‘엠엘파’는 ‘상해파’와 많은 모순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청단성원들인 박윤서, 김월선, 한빈 등 청년들이 ‘우리는 파벌투쟁을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원 ‘엠엘파’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엠엘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1924년 룡정에 들어와 고려공산주의청년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또 남만의 반석현을 중심으로 기반을 닦아나갔는데 이들을 력사에서 ‘엠엘파’라고 합니다. 네 번째단체로는 ‘상해파’입니다. 1919년 8월에 리동휘가 쏘련에서 상해로 들어가 1921년 5월에 고려공산당을 건립하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담임하였습니다. 상해에서 건립되였다 하여 ‘상해파’라고 하였습니다. ‘상해파’는 1921년말에 중앙위원 김하구를 돈화에 파견하여 서상파의 중영총감부를 돈화에 세우고 국민회 회원들을 장악하여 ‘상해파’에 가담시켰는데 이를 력사에서 ‘상해파’ 또는 ‘서상파’라고 부릅니다.” 박창욱교수는 1927년 10월부터 1928년말까지 각파가 분립되여 령도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파쟁을 벌리고 의견상이가 있었지만 호상 불가상용하여 분쟁만을 끊임없이 벌린 것은 아니였다고 하면서 반일민족협동전선문제에 있어서 각파는 노력을 경주했다고 피력하면서 “동만구역국에서는 광범한 대중들에게 맑스-레닌주의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고 조선인가운데서의 선진분자들을 묶어세워 혁명투쟁을 이끌어나갔습니다. 그들은 청년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동만조선족로동총동맹, 녀성단체인 근북회(槿北會) 등 단체들도 내왔습니다. 1927년 12월에는 각 민중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의 조직인 ‘전간도조선인단체협의회(全間島朝鮮人團體協議會)’를 결성하고 혁명투쟁을 활발히 밀고나갔습니다.” “제1차간도공산당사건” 1925년 11월 22일 조선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당시 전 조선국내적으로 공산주의비밀결사에 대한 대검거선풍이 일어났다. 그번 검거에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朴憲永)을 비롯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 및 성원들이 대량적으로 체포되였다. 그후 1926년 6월에 있은 조선“6.10”만세사건으로 인하여 발생된 제2차조선공산당사건에서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였던 강영달을 비롯한 100여명의 당간부와 관계자들이 대거 체포되였다. 두차례에 걸쳐 체포된 조선공산당 당간들에 대하여 1927년 10월에 일제는 공판대회를 열고 심판하였다. 만주총국은 일본공산당 후꾸모도주의의 “방향전환론”의 영향밑에 사상전파운동에서 정치투쟁에로 전활할데 관한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군중을 발동하여 련속적인 반일시위를 단행했다. 1927년 5월 1일, 연변지구의 조선인들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의 구체적인 지도밑에 룡정, 두도구 일대에서 “5.1”국제로동절기념시위행진을 성대하게 진행하고 일제의 침략과 조선인들에 대한 파쑈적만행을 규탄하였다. 이번 시위운동은 별다른 저애없이 순조롭게 거행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동만구역국에서는 10월 2일, 조선공산당사건에서 체포된 동지들의 공판대회를 반대함과 아울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일체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보다 큰 반일시위를 단행키로 결정지었다. 10월 2일, 룡정에는 큰 비가 억수로 내렸다. 하여 시위운동을 부득불 이튿날로 미루게 되었다. 이날 만주총국 책임대리비서이며 조직부장이였던 최원택, 동만구역국 책임비서인 안기성 등은 동만구역국간부들과 함께 안기성의 집에 모여 이튿날의 투쟁계획을 연구하게 되었다. 사전에 이런 상황을 탐지한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경찰을 파견하여 안기성네 집을 포위하고 최원택, 안기성, 현칠종, 리주화, 김소연, 림계학, 박재하, 김규국 등 구역국간부들을 체포하였다. 10월 3일,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청년학생들은 손에 붉은기를 들고 거리에 떨쳐나와 삐라를 뿌리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시위대오는 거리를 지나 일본총령사관 문앞에 가서 체포된 간부들을 석방하라고 하면서 강렬한 항의하였다. 청년학생들은 “일제침략을 반대하자!”, “일제백색테로 반대!”, “일체 정치범 석방하라!”, “무고한 교원들을 석방하라!”는 등등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를 단행하였다. 이번 사건에서 29명의 주요한 간부가 체포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100여명의 간부와 민중을 체포, 구금하였다. 그중 29명의 주요한 간부를 서울에 압송하여 징역에 언도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이다. (계속)  
23    제23장 학교가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댓글:  조회:2536  추천:0  2014-02-07
  조기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던 룡정대성중학교. 학교마다에 맑스주의 연구회 세워지고 청년학생들 민중속에서 반일사상 선전 실오리같은 비가 차분히 내리는 7월 11일(2004년), 룡정제1중학교 교정은 관광객들로 붐비였다. 다들 대성중학교옛터를 참관하러 온 관광객들이였다. 회색벽돌로 건축한 교사는 원래의 교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다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하여놓은것이라고 한다. 교사는 중간이 3층현관으로 돌출되여있는 2층건물이였다. 현관 1, 2층 사이에 "私立 大成中學校"라는 글이 옥칠로 새겨져있었다. 교사는 동서의 길이가 36.5메터이고 남북 너비는 8메터였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이 교사는 학교의 교무실로 사용되였댔는데 허물고 다시 지은후 지금은 학교력사전시실로 되어 많은 손님들을 끌고있다. 전시실에는 룡정을 빛낸 력사인물들과 대성중학교를 비롯한 룡정의 은진, 동흥, 영신 등 학교의 력사를 반영한 사진과 도편이 전시되여있었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관객들 앞에서 예쁜 녀학생해설원이 한창 청아한 목소리로 해설하고있었다. 관객들은 녀학생의 해설사를 들으면서 력사의 현장을 재현한 도편과 사진앞에서 자주 발걸음을 멈추군했다. 비장한 력사의 시각을 실감하게 되니 떠나올 때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이 하던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기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된 맑스주의의 보급운동은 청년들속에서 세찬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룡정의 여러 학교는 혁명적청년을 양성하는 중심지로 되었는데 맑스주의연구소조 등이 많은 학교에 세워졌습니다. 특히 룡정의 대성, 동흥, 등 학교들은 ‘공산주의온상’이라고 불리우기까지 했습니다.” 해설원 녀학생은 “대성중학교는 혁명적청년세대를 양성하는 중심지가 되어 맑스주의전파활동을 각지 조선족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하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있었다. 대성중학교 대성중학교는 대성유교의 공교회에 의하여 1921년에 창립되였다. 창립초기에는 7명의 교원과 160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교원들이 공교회의 유지인사들이였기에 교수는 자연 공자의 사상으로 지도되였으며 “사서(四書)”, “오경(五經)”, “명심보감(明心寶鑒)” 등을 주요 학과목으로 삼았다. 공자의 봉건륜리도덕을 교수의 기본내용으로 하였다. 교사 현관 웃쪽 지붕우에 덧얹은 다락층에는 “공자위패”를 걸어놓고 매달 초하루날 아침마다 전교 사생들이 모여 “존공의식”을 진행하였는데 향불을 피우고 “공자제”를 지냈다고 한다. 대성중학교에는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가운데는 맑스주의사상을 접수한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 의해 많은 조선문으로 된 맑스주의간행물들이 학교에 전파되여 들어왔는데 맑스주의사상은 비밀리에 학생들에게 전파되였다. 1922년 조기공산주의자들인 리주화(李周和), 리린구(李麟求)의 지도밑에 맑스주의연구소조 “광명회”가 조직, 10명의 소조원들이 포섭되였다. 소조원들은 저녁마다 리주화네 집에 모여 동흥중학교의 교원 정중섭(鄭重涉)에게서 “과학적사회주의리론”과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혁명사상”에 대한 강좌를 들었다. 미구하여 동흥, 은진 등 학교의 진보적인 학생들이 찾아와서 광명회에 가담하게 되여 연구소조는 소조원이 30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광명회의 활동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였는데 하학후와 일요일에 학교의 교실을 리용했다. 방학이되면 학생들은 농촌마을에 내려가서 “동학(冬學)”반이나 야학반을 꾸려 문맹퇴치사업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농민들을 모아놓고 문화오락활동을 전개하는 기회에 맑스주의의 리론과 사회혁명사상을 열정적으로 선전했고 대중속에 반일투쟁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광명회의 많은 학생들은 학습을 통하여 차츰 로씨야10월혁명의 승리를 지지했고 중국의 “5.4”운동의 영향으로 반제반봉건적인 신문화운동을 제창해나섰다. 소조원들은 학교내에서 봉건미신을 타파하고 “공맹지도”를 페지하는 한편 민주와 과학을 제창할것을 주장하면서 투쟁의 예봉을 공교회에 돌리였다. 룡정은진중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기념사진(1927년 4월 4일) 1922년 4월 1일 아침, 학교의 규례대로 공자제를 지낼 때였다. 광명회의 진보적인 학생들의 선동을 받은 전교학생들은 누구도 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학교를 개혁할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대표들은 만약 학교당국에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끝까지 동맹휴학을 할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학교당국에서는 학생들의 요구에 답복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은 교사지붕의 다락에 올라가 “공자위패”를 뜯어버리고 전교학생들의 한결같은 요구에 따라 학우회에서 학교를 인수, 관리한다고 선포했다. 학생들은 공교회인사이며 보수적인 교무주이인 림봉규를 몰아내고 수학교원인 현기형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했다. 학우회에서는 교원들과 협상하여 학교운영방안과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사회과교수를 위주로 하고 자연과와 외국어(영어, 일어), 한어를 적당히 교수하고 예능과에는 습자, 수공, 도화, 음악, 체조 등 과목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종교의식을 무조건 페지한다고 선포하였다. 동맹휴학한 4일만에 학생들은 학교교육을 종교와 철저히 분리시키고 복학하였다. 1923년 3월, 초기공산주의자인 김사국(金思國)이 로씨야 연해주에서 룡정으로 왔다. 그는 방한민(方漢民), 김정기(金正琪), 리명희(李明熙) 등 인사들과 힘을 합쳐 대성중학교의 부설학교로 “동양학원(東洋學院)”을 꾸리고 교사 아래층 2칸을 내여 대성중학교 제1회 졸업생들을 위주로 70여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동양학원에서는 공산주의선전부와 특별부를 설치하여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리론을 기본교수내용으로 삼고 청년들을 양성하였다. 동양학원은 연변의 첫 무산계급민주주의교육을 창시한 학교로 되었다. 하여 동양학원은 일제의 눈에든 가시로 되었다. 일본총령사관에서는 동양학원을 큰 화근으로 여기고 없애버리려고 했다. 1923년 8월 일제는 저들의 주구들를 사촉하여 야밤에 학교마당에다 작탄을 매설하여놓고는 령사관경찰들을 출동시켜 사출해낸후 50여명의 사생들을 체포하는 “작탄매설사건”을 조작, 끝내 동양학원을 페교해버렸다. 체포된 대부분 학생들은 인차 석방되였으나 김정기 등은 조선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압송되여 갔다. 김사국과 리명희 등은 로씨야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여 공산주의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대성중학교는 한때 저조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926년 가을, 공산주의자 박재하(朴載夏) 등이 대성중학교의 복교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연길의 공교회학교 대동중학교와 련합하여 대성중학교 옛터에다 대성중학교를 복교하고 교장을 맡았다. 1928년 여름 중공동만구역위원회 서기 주동교가 대성중학교에 파견되여 중어를 가르치는 한편 맑스-레닌주의와 “중국혁명사”를 가르쳤고 새로운 맑스주의대오를 건설했다. 1930년 10월, 대성중학교에는 중공지하당지부가 건립되였다. 1934년 일제는 대성중학교 3층지붕이 고려시대의 건축특색을 띠고있다는 트집을 잡고 방학동안 학생들이 없는 틈을 타서 허물어버렸다. 그리고 일본교원 가쯔다와 사도오를 박아넣었다. 또 교원과 학생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학교동쪽문밖에 접수실같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총령사관의의 분주소를 앉혔다. 이를 반대하여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이에 악이 오른 일제는 대성중학교를 “공산당을 길러내는 소굴이다”라고 비방했다. 동흥중학교 룡정동흥중학교 옛 모습 룡문교를 건너 서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을 건 학교가 있다. 피혁공장과 담장 하나를 사이두고있는 이 학교가 바로 동흥중학교 옛터이다. 얼마전까지도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댔는데 지금은 “룡정제3중학교”라는 간판으로 바뀌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면서 학생들은 예쁜 우산들을 바쳐들고 재밌게 등교하고있는데 얼굴들에는 생기가 넘쳐나고있었다. 갖가지 화초로 교정은 잘 가꾸어져있었으나 옛날의 동흥중학교의 흔적이라든가 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같은것을 얼핏 찾을수 없었다. 그저 평범한 보통 학교의 모습이였다. 대성중학교와는 조금 대비가 되었다. “동흥중학교도 대성중학교처럼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 전파와 혁명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던 학교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림민호같은 많은 우수한 혁명인재를 키워냈지요.” 동흥중학교에 대한 박창욱선생 소개였다. “동흥중학교는 조선민족종교인 천도교(天道敎)에서 꾸린 학교이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동흥중학교는 천도교신도이며 한시기 연변의 반일투쟁에서 이름높던 간도국민회 사법부장을 맡고있다가 국민회군 안무장군의 부관으로 활약하던 최익룡(崔翼龍)과 공산주의자 박재하, 김소연 등에 의하여 1921년 10월 1일 창립, 최익룡이 교장으로 추대되였다. 학생들은 당지와 연변 각지에서 온 천도교신도들의 자제들이 위주였고 로씨야 연해주와 조선, 남만, 북만 등 각지에서 온 청소년들도 있었다. 수업과목은 조선어, 대수, 산수, 물리, 화학, 영어, 생리, 지리, 력사, 한문, 도화, 작문 등이였고 천도교에 대한 강의도 했다. 이 학교에서는 1925년 12월부터 신학제를 채용하여 남녀공학을 실시하였고 사회주의에 배치되는 학과목을 페지하고 학교내에서 “혁명가”도 불렀다. 동흥중학교는 창립초기부터 맑스주의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온 진보적인 학생들은 맑스주의단체들에서 발간한 “새벽종” 등 간행물과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사상을 선전하는 출판물을 들여다 학습하였다. 1923년,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온 공산주의자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의 지도하에 “사회과학연구회”, “학생친목회” 등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가 결성되였고 같은해 상해로부터 온 림호(林虎) 등이 학교내에서 종교와 교육을 분리하는 투쟁을 발동하였다. 이미 사회주의사상을 접수한 교직원과 학생들은 종교미신과 봉건가부장제사상을 타파하고 과학과 민주를 제창하는것을 지지하면서 “교육종교분리”를 주장, 학교가 종교에 예속되는것을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벌리였다. 1925년 4월에는 교원 김성호의 지도밑에 맑스-레닌주의연구단체인 “독서회”가 산생되였다. 동흥중학교 사생들도 대성중학교 사생들과 마찬가지고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한후 대중속에 들어가 선전활동을 벌리였다. 학생들은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농촌에 내려가서 야학을 꾸리고 어린이들과 실학청년 및 녀성과 장년들에게 조선글을 가르쳤고 “혁명가곡”을 배워주었으며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리고 강연회, 변론회 등을 통하여 청장년과 녀성들에게 맑스-레닌주의를 체득시켰으며 그들을 반일민족해방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림민호, 김세광 등은 고향인 장흥동(화룡시 동성향 태흥촌)에서 “동구청년회(東求靑年會)”를 조직하고 “혁명사상”을 선전하면서 대중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체활동을 벌리는 형식으로 청년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을 선전하면서 투쟁의 불길을 지폈다. 로창률(盧昌律)은 소오도구(화룡시 동성향 흥영촌)에 내려가서 “청년회관”을 꾸리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6년 10월, 룡정에서 성립된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산하에 4개 지부를 두었는데 지부성원 거의다 룡정의 각 중학교 교원들이였다. 그들중 박재하, 김소연 등은 동흥중학교 교원들이였다. 학교운영권을 둘러싸고 교내에서 치렬한 투쟁이 벌어졌는데 조선총독부의 심복들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할것을 주장했으며 박재하, 김소연, 전룡학 등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있는 교원들은 총독부에 맞서 견결히 투쟁했다. 결과 일제순사들의 감시밑에 박재하, 조병삼 등은 교사직에서 해임되고 14명의 학우회 대표들은 학적을 취소당했을뿐만아니라 체포, 구금되였다. 1926년 11월 29일, 일제의 간섭과 타협파들의 매국적행위에 격분한 동흥중학교 137명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집단적으로 대성중학교로 전학해갔다. 이번 투쟁은 거의 1년간 진행되였는데 이듬해 2월 25일에 또다시 제2차동맹휴학을 선포하고 많은 학생들이 대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 10월 동흥중학교에 중공지하당지부가 성립되였다. “9.18”사변후 일본문부성과 조선총독부에서 심사비준했거나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으나 교원과 학생들은 일치단결하여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을 반대하여 조선어사용을 견지하였고 조선어로 편찬한 국어, 조선력사와 조선지리를 가르쳤다.(계속)  
22    제22장 연변에서 공산주의운동 흥기 댓글:  조회:1865  추천:0  2014-02-07
  1920년대 연변에 전파된 맑스주의 서적들.  맑스주의사상 연변대지에 뿌리내리고 조선인들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궐기 아세아 최초의 공산주의단체 1917년 11월 7일(로씨야력으로는 10월 25일) 로씨야 무산계급은 레닌의 령도하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게린스끼의 자산계급림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인 쏘베트정권을 성립하였다. 10월혁명의 승리는 동방 약소국 인민들에게 민족해방과 독립의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연변지구를 중심으로 거족적인 반일무장투쟁을 벌려오던 무장단체들과 반일조직의 간부들은 일제의 야만적인 “경신년대토벌”로 연변을 떠나 조선인이 많이 살고있는 쏘련 극동지방으로 넘어갔다. 진보적청년들은 빨찌산을 무어 쏘련 붉은군대와 배합하여 청소한 쏘베트정권보위전에 참가하면서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사회주의10월혁명을 믿게 되었다. 중국에서 구민주주의의 쓴맛을 볼대로 본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지난시기 민족해방투쟁의 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점차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되였으며 맑스주의리론의 지도밑에서 민족해방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로씨야 연해주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선인농민들의 실태를 조사하던 리동휘는 게린스끼림시정부의 헌병 구석성에게 “독일특무”라는 혐의로 체포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리동휘는 감옥에서 쏘련 볼쉐비크들과 사귀는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게 되었고 10월혁명을 인식하게 되었다. 감옥밖에서는 김립, 리한영, 김하구 등도 10월혁명을 지지하고 볼쉐비크에 의거하여 리동휘를 감옥에서 구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리동휘의 사상은 진일보 전변되여 로농혁명을 주도하는 볼쉐비크와 쏘베트정권을 옹호하게 되었다. 리동휘는 쏘련공산당 하바롭스크당부의 비서이며 원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인 조선인 알렉싼드라 뻬뜨로브나 김의 도움으로 진일보 사회주의혁명에 전심하게 되었다. 1918년 6월 리동휘는 로씨야 하바롭스크에서 로씨야볼쉐비크당원들의 방조밑에 아세아지구에서의 첫 맑스-레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창립했다. 한인사회당은 리동휘의 지도하에 쏘베트정권옹호, 외국무력간섭격퇴, 토지개혁실시, 세계무산계급과 약소민족해방진영과의 련대성 등 정강을 공포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그 약법 제3조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강령을 내세웠다. 1) 사회주의국가를 조직한다. 2) 일체 계급을 타파한다. 3)토지 및 일체의 생산업을 공유한다. 1920년 리동휘는 국제공산당제2차대표대회에 출석한 박진순 등과 함께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중국공산당창시자인 리대소, 진독수, 일본의 사회혁명가들을 만나 동방 각국에서의 공산주의사상의 전파를 토론했다. 아울러 리동휘는 관내에 있는 조선청년들에게 10월사회주의혁명정황, 국제공산당에서 식민지 반식민지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성원한 사례와 맑스주의와 로농혁명사상을 통속적으로 소개했다. 리동휘 등의 영향하에 일부분 조선인들은 중국의 사회주의신앙자들과 함께 “중한로농동맹련합회”를 성립, 두나라 로동자들의 단결을 강화하면서 어깨곁고 공동의 적과 투쟁할것을 결의하였다. 공산주의사상의 전파 공산주의운동의 선각자 리동휘선생. 리동휘 등은 조선인청년사회주의신앙분자들을 자신들의 주위에 굳게 뭉치게 한후 사회주의연구회, 조선인사회과학연구회 등 맑스주의연구소조를 성립하였다. 특히 북경의 조선인학생들은 맑스주의연구소조를 결성한후 맑스주의사상을 학습연구하는 한편 경상적으로 리대소 등 중국공산당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1921년, 상해에서 활동하던 리동휘 등은 국제공산당 원동부의 지원으로 조선문인쇄소를 세우고 《공산당선언》번역본을 비롯한 맑스주의서적을 출판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은 사회주의기치하에 로농혁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것을 선전하였다. 그해 1월 리동휘, 김립 등은 상해에서 한인사회당대표회의를 소집한후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5월 23일부터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고려공산당(상해파)대표대회를 소집하고 당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강령에는 장차 조선에서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하며 현단계에는 민족독립을 실현한다고 했으며 “조국광복은 본 당인 공산 및 로농집정의 전제”라고 천명했다. 회의에서 리동휘가 당위원장에 당선되고 김립이 비서장으로 선거되였다. 고려공상당중앙총감부는 상해에 있었는데 1921년 중앙위원 김하구가 돈화에 와서 원 국민회의 구춘선, 강구우, 마진 등을 회견하고 국민회성원들을 고려공산당에 흡수,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총감부를 건립하였다. 총감부에서는 안무와 최량을 쏘련에 보내여 국민회 전체 성원들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다는것을 동양비서부에 회보하고 1922년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할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만주총감부는 돈화를 중심으로 간도, 열하 등지에 공산당조직을 확대하였다. 1920년 7월 로씨야에 거주하고있던 김철훈 등 조선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국제공산당 동양부대표의 지지밑에 “전로한인공산당”을 창립하였다. 1922년 11월에 이 조직에 가입한 인수는 4433명에 달아였으며 중앙본부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모스크바, 찌따, 하바롭스크, 니꼴라스크, 우라지워스또크, 대흑하, 할빈, 액목, 상해, 북경, 장춘, 평양 등지의 련락소를 통해 “붉은기” 등 신문, 잡지를 발행하여 10월사회주의혁명의 경험을 소개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윤복송, 정치운, 리주화, 우룡선 등은 조선과 로씨야로부터 연변에 들어와 룡정과 화룡에서 김홍선, 로창률, 리영규, 류태순, 장시우 등과 련계하여 조기공산주의단체인 간도공산당을 성립하였다. 후에 그들은 이르쿠츠파와 련합하여 화요파로 형성되였다. 중로변경인 이만,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던 리중집, 남공선, 최경천 등은 당지에서 공산주의단체를 성립한후 림산, 동녕, 녕안고 훈춘에 공산주의 기구와 청년회조직을 세우고 활동했다. 1921년 니고리스크와 녕고탑에 총리부를 세운 한족공산당은 녕안, 돈화, 국자가, 투도구, 동녕, 훈춘, 대황구 등지에 많은 인원을 파견하여 공산당조직과 련락소를 세우고 사회주의간행물을 산포, 공산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연변에 들어온 맑스주의 서적들 공산주의단체에서 산포한 서적과 간행물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연변과 동북의 여러곳들에 퍼져나갔다. 일본간도총령사관에서 초보적으로 조사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쏘련과 상해, 천진, 북경 등지에서 연변에로 전파되여온 신문, 서적과 간행물들은 매우 많았는바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몰수한 수자만 하더라도 아래와 같았다. 1922년 122종 4208건 1924년 164종 3450건 1925년 201종 4408건 1926년 259종 3606건 주요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자유보”, “새세계”, “로농세계”, “붉은별”, “붉은기”, “뭇별”, “로동신문”, “동아공산신문”, “투쟁보”, “대중시보”, “정보”, “화요”, “민언”, “경종”, “일세보”, “농민익보”, “로동보”, “농보” 등이 있었으며 잡지들로는 “서광”, “새사회 이르면”, “공산”, “효종”, “선구”, “광명”, “동우”, “홰불”, “붉은기 아래서”, “불꽃”, “로동자의 길” 등이 있었고 소책자로서는 《공산당선언》, 《로동조합이야기》, 《우리 무산계급이 나갈 길》, 《칼 맑스》, 《로씨야공산당 정치강령》, 《녀자해방》, 《로농! 공산당》 등 수십종에 달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상해, 북경 등지에서 출판된 “신청년”이나 “매주평론”과 같은 한문으로 된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들도 한족공산주의분자들의 손을 거쳐 길림, 연길 등지의 한족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조선인학생들속에 퍼졌다. 리봉, 관준언 등 한족지식인들은 연길에서 “신문서사”를 꾸려 학용품을 경영한다는 명의로 많은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구입하여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런 간행물들과 서적들을 통해 맑스주의 사상은 신속하게 연변조선인들에게 침투되였다. 이에 연변에 파견된 간도련락장교는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서 “적색의 거센 물결이 간단없이 간도를 적시고 있다. 심지어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에 경향하고있다”고 당황해했다. 맑스주의서적과 간행물을 통해 연변조선인들은 점차적으로 로씨야혁명길만이 살길이며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사회주의의 새국가를 창건하여 전세계인민들과 함께 영원토록 자유와 평등,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구미자본주의렬강들의 “공리는 강권을 이긴다”, “정의, 인도”, “민족자결” 등은 허위라고 인식하게 된다. 연변에 전파되여 온 로씨야에서의 새로운 제도탄생의 소식과 더불어 전인류에게 새로운 인식을 안겨준 맑스-레닌주의사상은 일제와 봉건군벌의 야만적인 업압과 수탈로 허덕이던 연변조선인들에게는 해동을 약속하는 해볕과 같이 느껴졌다. 맑스주의전파와 더불어 조선족인들의 혁명투쟁도 구민주주의혁명시기로부터 신민주주의혁명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맑스-레닌주의를 행동지침으로 삼게 된 조선인들은 조기공산주의단체의 령도밑에 새로운 삶의 길을 개척하기 궐기하게 된다. (계속)  
21    제21장 피로물든 장암동 댓글:  조회:1920  추천:0  2014-02-07
  장암동마을 앞장대에 세워진 유적비(2004년 취재시 사진) 하루 아침사이에 마을은 불바다로 변하고 무고한 조선인백성 무참히 두벌죽음 당해 평화로운 노루바위골 잡풀이 뒤덮힌 산자락에 소수레길이 가리마처럼 뻗어있었다. 내려다보니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온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모습이 번득번득 눈에 비쳐오는데 어데선가 들려오는 뻐꾹새의 울음소리가 귀맛 당긴다. “통통통...” 마을에서 울려오는 뜨락또르의 동음에 섞여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가 작은 합창을 이룬다. 정오의 햇볕을 이고 농부들이 쟁기를 들고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이 멀리서 동화처럼 읽혀진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장암동의 풍경이다. 오면서 여러 마을에 들려 “장암동”이 어디인가고 물었더니 사람마다 머리를 가로저으면서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말로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댔다고 하던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 생각나서 “노루바위골”이 어디인가고 물으니 사람마다 안다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세전벌 동남쪽 뉘연한 한전밭 중간에 난 수레길을 따라 들어가니 우리가 애타게 찾던 룡정시 동성용향 동명촌이였다. 다시 골연을 파면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노루바위골 즉 장암동이라고 했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노루는 보이지 않고 꿩우는 소리가 이 골 저 숲에서 다정스럽게 들려올뿐이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가 바라보니 산자락에 큼직한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자연석으로 세운 장암동유적비였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 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 에 용납 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 6月 30日 산새들이 지저귀고 풀벌레가 울어대는 인적없는 산길을 얼마간 더 접어가니 길옆에 금방 본 유적비보다 작은 석비가 자리하고있었는데 쑥대에 묻혀 얼핏 알리지 않았다. 석비정면에는 “一九二0年 十月 三十日 日軍의 間獐巖慘殺事件犧牲者三十人追念碑”라고 새겨져있었다. 왼쪽 면에는 “一九九四年 七月”이라는 석비를 세운 년월이, 오른쪽 면에는 “犧牲者遺家族代表 故 金京三의 子 金基柱建”이라는 세운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니 묵은 뙈기밭 한자리가 있었다. 농부의 손길이 닫지 않은 밭에서 잡풀이 곡식을 대신하고있었다. 어찌보면 집앞 뙈개밭으로 보이기도 하는 아담한 밭이였다. 아마 여기가 1909년에 조선족농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원 장암동마을 옛터자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개울과 나란히 뻗은 수레길을 따라가며 보니 마을이 들어앉았음직한 곳이 여러곳 있었다. 1920년 참안당시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있었다고 한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였으며 이들 다수가 반일운동에 적극 투신하는 열성자들이였다고 한다. 린근에서 장암동마을을 “예수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永信)이라는 이름을 붙인 학교가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마을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반일교육의 요람으로 소문난 명동학교가 있었다. “3.13”운동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직원들은 반일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1920년 10월에는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여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였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동부지방 총회장 량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련계를 갖고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악마들의 살인현장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일본국학자료원에서 출판한 두툼한 “현대사자료”집에서 장암동사건에 관련된 페지를 찾아 펼친후 그대로 번역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보병장교 스스끼대위 이하 72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은 후방련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장암령부근의 불령단을 소탕할 임무를 맡고 30일 0시 룡정촌 병찬부에 집합하여 29일에 억류된 5명의 조선인을 안내자로 장암촌으로 향했는데 이들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도망을 기도했기에 죽여버린후 남양평을 향해 진군했다. 남양평에서 조선사람 1명을 안내자로 세우고 장암동에 도착하여 오전 6시30분부터 포위토벌을 시작했는데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적 30여명이 동산촌방향으로 종대를 지어 퇴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사격을 명령했는데 11명의 살상을 냈다...” 1920년 10월 30일 새벽 0시 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하고 마을주민들을 강박하여 교회당마당에 집결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을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불속에 던져넣군 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룡정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제창병원 원장 말틴은 자기의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있다.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룡정촌에서도 보였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의 젖먹이를 업은 녀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 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여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심여추는 “연변조사실록”에서 장암동참안을 이렇게 쓰고있다. 일본군은 10여리에 산재해있는 장암동마을을 단꺼번에 불태워 페허로 만들었는데 마우계견(馬牛鷄犬)같은 짐승도 한 마리 남지 않았다. 가슴치며 통곡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가슴에서 아직도 피눈물이 흐르고있는데 악마같은 일본군은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간악한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했다.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이 토벌에서 간도국민회 동부총회 회장이며 반일련합부대의 군무청장인 량도헌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의 시체인지 알수 없어 유골들을 한데 모아놓고 합장하였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소각된 집가운데는 영신학교도 들어있다고 한다)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고 제좋은 소리를 줴치면서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장암동참살사건은 일본군이 감행한 ‘경신년대학살사건’ 가운데서 저지른 수많은 사건중 한 토막의 만행에 불과합니다. 일본군 기무라대장은 자기 상전에게 바치는 보고서에 ‘무릇 경유하는 부락마다에서 불령단같은자나 도망치는자를 보기만 하면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총살하였다’고 썼습니다. 일본침략자는 가는곳마다에서 야만적인 파쏘본질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무고한 백성을 마음대로 학살하여 연변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력사를 잊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박창욱교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계속)  
20    제20장 경신년대학살사건 댓글:  조회:3511  추천:0  2014-02-06
  연변에서 반일지사들을 학살하는 일제침략군. 잔악한 일본강도 연변땅 피로 물들이고 조선인 백성 친인 잃고 삶의 터전 잃어 무고한 백성들을 “토벌” “일본침략군은 중국땅에 들어온 그날부터 반일부대는 물론 무고한 백성들까지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백운평전투때에도 적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사람들을 젖먹이까지도 빼놓지 않고 죄다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찌르고 기관총을 휘둘러 쏴죽이고는 시체를 불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군은 보복을 무고한 백성에게 감행했는데 그 잔인성과 참혹성은 인류력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경신년대토벌”은 사실상 “경신년대학살사건”이라고 피력했다. 청산리전역후 반일부대가 안전하게 로령일대로 전이한후 일제는 약 8개월간 중국의 조선인사회를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 조선인학교와 교회당 심지어 식량, 가옥마저 무차별 소각하는 천인공노할 참변을 빚어냈다. “일본군은 10월 26일 간도총령사관에서 작성한 ‘배일부락 및 학교조사표’에 근거하여 연길현내에서는 동불사, 태평구, 와룡동, 소영자, 의란구를 비롯한 23개 마을과 흥동학교, 영신학교, 명신학교 등 18개 학교, 화룡현내에서는 상광포, 어랑촌, 류동, 청산리, 청파호, 장재촌, 걸만동 등을 비롯한 12개 마을과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동학교, 정동학교 등 19개 학교, 왕청내에서는 류수하, 대감자, 덕원리, 서대파, 봉오동, 합수평, 라자구 등을 비롯한 11개 마을과 명동소학교, 원동소학교 등 5개 학교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소탕’과 학살을 감행하였다.”(김춘선 “경신참변연구”) 중국지방관원 장순사(張巡師)와 포대사(鮑大師) 등이 1920년 11월 5일 외교총장에게 한 보고에서는 “간민들이 모여사는 부락을 한당들의 근거지라고 하면서 온 마을을 불살라버렸으며 조선인농민들 대부분을 살해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마을을 골라서 몇집 또는 몇십집씩 불살랐고 몇명 또는 몇십명씩 죽여버렸는데 가는곳마다 불타버린 집과 시체가 있었다. 이들 태반이 밭가는 농민들이였지 결코 무기를 들고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는 무리가 아니였다. 이렇게 마음대로 참살하는것은 실로 인간성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일이다”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피로 물든 연변땅 “경신년대학살사건 하면 흔히 ‘장암동(獐岩洞)참안’을 전형으로 렬거하고있는데 그것은 당시 가나다 목사들이 조사한 자료를 신문을 통하여 세상에 공포하였고 지금도 그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변에는 ‘장암동참안’같은 사건이 아주 많습니다. 의란구는 여러차례 토벌을 당했는데 구룡평, 고성촌, 류채촌, 태양촌, 련화촌은 일제의 살인현장이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일제가 마수를 뻗치지 않은 곳이 연변 어디에도 없을것이라고 한다. 구룡평은 의란구의 중심지이고 고성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15.5키로메터 떨어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분지에 자리잡고있으며 류채촌은 구룡평에서 동북쪽 3.5키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있다. 태양촌은 구룡평에서 서북쪽 5키로메터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고 남동이라고도 불리우는 련화촌은 구룡평에서 15.3키로메터 떨어진 산지대에 자리잡고있다. 의란구에는 당시 간도국민회와 의군부가 있었는데 방초령에다 국민회군의 사관훈련소까지 설치하고있었다. 의군부가 고성촌, 련화촌 등지에 자리잡고있어 의란구는 반일부대의 탄탄한 후방기지이기도 했다. 1920년 10월부터 일본군은 의란구일대를 여러차례 “토벌”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일본군 제19사단 이시쯔가대대는 의란구“토벌”을 감행하여 리동근, 리종옹, 김득산, 윤남극, 강경성, 김해룡, 김순지, 김락세, 리붕재 등을 살해하였다. 며칠후인 24일에는 일본군 74련대가 의란구를 토벌, 양만홍, 리태미, 리근치, 리렬 등 10여명을 살해하고 학교 1채와 민가 5채를 소각해버렸다. 11월 3일에는 반일사상을 고취하고 반일부대의 군자금모집과 정보수송을 하였다는 리유로 일본군 76련대가 재차 의란구를 토벌하여 리국화, 리일재, 김렬, 리명초, 리진철, 리창옥, 김성운, 리종란, 리종눌, 리여익, 리여영, 리병재, 허익, 최병조 등 16명을 살해하였다. 11월 3일, 5일 일본군 76련대는 불령선인가족이라는 리유로 북의란구에서 김창홍, 로우선, 김렬의집을 비롯한 31채의 민가를 불살라버렸으며 3일과 4일에는 태양촌에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는 리유로 교원 리우선 등 2명과 농민 리주향, 리수악 등 13명을 살해하였다. 11월 5일 의군부 총무 리우익, 서무부장,리을, 홍정필을 비롯한 10여명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였다. 당시 연변에 파견되여 현지조사를 한 “대한신보” 기자는 “독립신문”(1920년 12월 19일)에 이렇게 보도했다. “의란구 남쪽은 전부 30여호 되는 리성(李姓)촌인데 3명이 근히 성명을 변하여 해탈되고 그 여의 전수가 학살되였으며 모씨의 4형제는 소화(燒火)되는 가옥중에 던져넣어 분살(焚殺)하였다 합니다. 그외에 수 3명, 혹은 10여명의 학살은 없는데가 없습니다, 방화도 그러합니다.” 당시 연변주재 림시정부 통신원이 “독립신문”(1920년 12월 8일)에 투고한 조사자료에 의하면 26,265명이 학살되고 71명이 강간당했으며 3,208채의 민가, 39개의 학교, 15개소의 교회당, 53,265섬의 곡식이 소각되였다.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19일자 보도에 상기 조사통계의 추가조사에서 연변지구에서 146명이 더 학살되고 민가 78채와 학교 2개소, 교회당 4개소가 더 소각되였다고 했다. 침략자의 야수적 만행   일제의 총칼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조선인 여인들. 당시 룡정에 거주하고있던 카나다장로파 장로교회의 의사인 말틴이 쓴 연변참안 “견문기”가 서방 각 나라 신문에 보도되여 세계를 들썽해놓았다. 하여 일본침략자의 야수적죄행이 세계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견문기”에는 이런 대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북경식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룡정에서 출발했다. 10월 30일에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데서였다. 그날 날이 채 밝기전 무장한 일본군이 이 촌락을 포위하고 쌓아놓은 낟가리에 불을 지르고 집안의 사람들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하였다. 채 죽지 않으면 그우에다 불붙는 곡식단을 들어다 무지군 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세 번이나 사격하후에도 불속에서 숨이 붙어 일어나는자가 있게 되면 총창으로 찔렀다. 마을 성년남자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옆에서 보도록 부녀자들을 강박하여 끝까지 서있게 하였다. 그런후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天長節)을 경축하였다. 나는 19채의 집이 불에 탄것을 사진 찍고 총살당한 시체도 사진 찍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방화한지 36시간이 지난후였다. 나는 학살되고 방화당한 32개 촌의 마을 이름과 정황을 잘 알고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육되였다. 30명이상 살해된 마을이 많다. 서구동에서는 14명을 한줄로 세워놓고 총살한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 일본군사령관은 외국인에 대한 인신안전을 보장하여 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려행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살인수단은 극히 잔인하였는데 연길현 와룡동의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은 얼굴가죽을 몽땅 벗기우고 두눈을 도리운채 처형당했다. 어떤자들은 총창에 찔려 아우성치는 참상을 보고 미친 듯이 웃으면서 기뻐했으며 2-3세 되는 어린이를 총창에 찔러들고 어린아이가 아우성치는 것을 보고 손벽을 치며 좋아했다. 투도구에서는 전선을 절단하였다는 혐의로 12살나는 조선아이를 붙잡은후 아무런 조사도 없이 목을 잘라 전선줄에 꿰여 효시했다. 연길현 춘양향(왕청현 하마탕) 일대에서는 무고한 조선인 3명을 붙잡아 쇠못으로 손바닥에 구멍을 뚫은후 쇠줄로 손과 코를 꿰여 10여리를 끌고다니다가 총살하였다. 연길현 제3구의 남녀로소는 아무런 리유도 없이 사살당하였고 의란구의 12명 조선인들은 부근의 산고개에서 기무라지대의 토벌대에게 생매장당했는데 이듬해 봄에 마을사람들이 시체를 찾아보니 온통 칼자리뿐이였다. 토벌도중 야수같은 일본군은 소영자에서 25명 부녀를 강간하였으며 이도구에서도 20여명 부녀를 강간하였다. 간악한 일본놈들은 소녀를 붙잡기만 하면 꼭 강간한 다음 학살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간도학살사건을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불쌍한 간도동포들 3천명이나 죽고 수십년 피땀 흘려 지은 집 벌어들인 량식도 다 잃어버렸다 척설이 쌓인 이 겨울에 어떻게 살아들 가나 뻔히 보고도 도와줄 힘이 없어 속절없이 가슴만 아프도다 나라 잃고 기름진 복지를 떠나 삭북의 살길을 그 동지조차 잃어버렸구나 오늘 밤 강남도 추운데 장백의 모진 바람 오죽이나 추우랴 아, 생가키우는 간도의 동포들 일본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에 전국인민들이 분노하여 일어났다. 북경, 심양, 장춘, 길림 등지의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강연회, 집회를 열어 일본침략자의 침략죄행을 성토하였으며 북경정부와 봉천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주권을 보호할것을 청원하였으며 일본침략자가 연변에서 즉각 철거할것을 요구하였다. 날로 앙양되여가는 연변지구의 여러 민족들의 반일투쟁과 전국인민들의 강력한 항의밑에 일본침략자들은 1921년 5월 할수 없이 철퇴하였다. (계속)
19    제19장 동부전선 댓글:  조회:1862  추천:0  2014-02-06
용감한 독립군 장병들. 주동적으로 타격하면서 토벌계획 혼란시켜 서부전선 전투부담 경감 아군의 철수 엄호 동부전선의 반일부대 “경신년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진행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서부전선인 청산리전역만 말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벌에 의해 반일부대주력은 연길현과 화룡현의 서쪽으로 기타 부대는 훈춘현과 왕청현 동북부로 이동했습니다. 일제는 동부의 반일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반일부대도 유력한 저항으로 일제의 ‘토벌’에 맞섰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동서 두 전선에 배치되였던 반일부대의 정황을 설명했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란 주로 홍범도부대,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및 기타 부대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주력군을 말한다. 동부전선인 훈춘과 왕청현 일대에는 훈춘한민회와 신민단군이 중로변경에서 활동하고있었으며 원 기지에서는 북로군정서의 잔류부대와 각 단체 간부들이 잠복하여 활동하였고 왕청현 라자구와 로흑산 일대에는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라자구의사부 등에 소속된 약 850명 가량의 부대원이 있었다. 김철수선생은 저서 《연변항일사적지연구》에서 홍범도련합부대와 북로군정서부대가 서진한후 훈춘, 왕청, 연길현북부지대에서의 반일부대의 활동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훈춘한민회 군사부의 일부는 홍범도를 따라 서진하고 리명순과 최경천이 거느린 150여명의 부대는 훈춘현 동북부의 오도구, 륙도구, 초모정자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2)신민단의 일부는 중로변경과 훈춘동북지대에서 활동하고 김준극이 거느린 200여명 주력부대는 연길현 하마탕(지금은 왕청현 소속), 석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3)연길현 의란구에서 활동하던 의군부는 왕청현 배초구를 거쳐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4)왕청현 대감자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단 300여명은 리범윤과 김성극의 령솔밑에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후에 주력부대는 김성극의 인솔밑에 연길현 이도구일대(지금의 화룡시 서성진부근)로 이동하였다. (5)최명록이 거느린 독군부 300여명 대오는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6)북로군정서 주력부대가 서진한후 서일 등은 부분적 군관양성소의 졸업생을 골간으로 부근에서 조선인청장년을 모집한후 300여명의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서대파와 하마탕일대에서 활동하였다. (7)로씨야경내에서 온 동도파견군 300여명은 서상렬의 인솔밑에 하마탕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라자구와 동녕일대로 이동하였다. (8)엄준이 거느린 공의단은 줄곧 왕청 소황구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성원은 600명좌우였다. 그러나 강한 무력은 아니였다. (9)라자구의사부 170여명의 무장인원은 라자구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0)국민회 중북부총회의 간부와 구춘선, 강구우 등은 의란구에서 활동하다가 하마탕일대에 옮긴후에 다시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박창욱선생은 동부전선이 전략상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피력했다. 동부전선은 반일부대들의 원래의 근거지였기에 그곳 민중들은 반일정서가 높고 또 조직화되여있었다. 동부전선은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이므로 반일단체들의 왕래가 쉬웠다. 당시 반일단체의 지도자들은 로씨야혁명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인반일무장대는 로씨야혁명파의 세력범위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수 있었으며 그들과 배합작전하면서 일본군 및 백파와 싸우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일부대는 일본군“토벌”이 심할 때에는 능히 로령으로 이동할수 있었다. 동부전선은 또 반일부대들이 로령과 련계하여 무기를 구입할수 있는 후방기지였다. 그러므로 일본침략군은 반일부대의 주력이 서부지구로 이동하였다는것을 알면서도 동부전선에 수많은 부대를 투입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하고 반일기지를 소각, 파괴하며 로령혁명파와 연변반일부대와의 련계를 단절시키는데 심혈을 기울렸다. 일제의 대량 투병 김좌진장군. 1920년 10월 3일 훈춘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우선 온성에 주둔하고있는 73련대의 아베소좌가 지휘하는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를 훈춘에 침입시킨후 얼마후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와 박격포 2문을 배속시켜 다시 침입시켰다. 이어서 19사단 38려단장 이소바야시소장이 지휘하는 75련대 제1, 3대대의 4개 중대, 2개 기관총소대, 특종포병대, 통신반, 위생반 그리고 제20사단 39려단 78련대 우에사까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통신반, 위생반을 침입시킨후 다시 기병27련대 제3중대, 야포병 제25련대의 2개 중대, 공병19대대의 1개 중대 등을 련이어 훈춘에 파견하여 이소바야시지대를 편성하였다. 1920년 10월 20일에는 기무라대좌가 지휘하는 제76련대의 제1, 3대대 4개 중대와 2개 기관총소대 특종병대, 기병27련대의 1개 소대, 거기에다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양수천자로부터 직접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에 침입하였다. 얼마전인 10월 14일에는 반일부대의 북만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북만파견군 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1개 기병소대를 해림일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또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에서 활동하는 반일부대를 토벌하며 반일부대와 로씨야혁명파간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대좌가 지휘하는 58련대의 1개 대대, 기병17련대의 주력 1개 산포병중대, 1개 공병중대를 동녕현 삼차구의 대안에 집결시켰다가 10월 21일 국경을 넘어 로흑산 라자구방면으로 남하하게 하였으며 10월 19일에는 제11사단의 히데시마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 기병1개 소대, 공병2개 소대를 로령의 바라바시로부터 훈춘현 토문자로 파견하여 훈춘과 왕청현 동북변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일제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 28려단 주력(4,000명)을 보세트에 상륙시켜 연해주의 연추로부터 훈춘에 보내 양수천자, 국자가, 룡정, 회령 등지를 경과하는 “”위협행군을 진행하면서 “토벌”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8일 28려단 15련대의 제2대대는 훈춘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제3대대의 2개 중대는 룡정에서 경비를, 3대대의 1개 중대는 회령의 19사단 사령부의 경비를 각기 담당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일제는 각 지대에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일본군의 토벌을 협조하게 하였고 따라서 경원수비대병력과 헌병, 경찰을 포함한 50여명을 출동시켜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동부전선에 1만여명의 침략군을 투입시켜 훈춘과 왕청을 4면으로 포위하고 “토벌”을 감행하였다. 동부전선에서의 반토벌전 반일의병들. 동부전선에서 일본침략군은 만단의 준비를 갖춘후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이소바야시려단장의 지휘하에 아베, 마끼, 쥬지 등 3개 토벌대는 훈춘현성의 동북쪽에 있는 훈춘하상류, 서북쪽에 있는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밀강상류를 대거 “토벌”하였다. 10월 22일부터 11월 초순까지 상기 3개 “토벌대”는 11사단의 히데시마지대와 함께 훈춘현과 왕청현변경으로 북상하고 양수천자에서 도강한 기무라지대는 직접 서대파, 십리평, 대감자 등지를 “토벌”한 기초우에서 백초구로부터 북상하는 이와바시대대와 함께 대왕청, 소왕청 등지를 “토벌”하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간의 련계를 차단, 동녕현 삼차구로부터 남하하는 13사단 하네이리지대와 호응하여 로흑산 라자구일대를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11월 초순부터 1921년 봄까지 일본군은 훈춘과 왕청 등 현의 중요지점에 분산배치되여 부근 일대의 반일단체와 반일기지를 “토벌”, 파괴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부대들은 이미 기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철퇴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로 반일기지의 파괴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것을 일삼았다. 전투는 다만 반일부대의 이동과정에 진행, 잔류 소부대간의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인것이였다. 대규모적인 일본침략군의 포위“토벌”의 상황에서 반일단체들은 10월 17일부터 13일 사이에 단독 혹은 단체대표들의 련속회의를 소집, 반“토벌”전에 대응한 전략방침을 토의결정하였다. 우선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형세하에서 맹동, 급진 정서를 극복하고 은인자중하며 분산, 은페의 방법으로 전투를 피하면서 반일력량을 보존하며 만약 적을 공격하려면 심산속에 유인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돌연습격하고 신속히 은페하기로 했다. 이들은 또 반일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될수 있는한 적들의 포위권에서 탈출하며 근거지의 백성과 간부, 일체 물자, 무기탄약 둥을 잘 피난시키거나 깊이 감추어 놓아 반일기지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경감시킬 방침을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보다 력량이 박약한 동부전선의 각 부대들은 일본침략군의 “토벌” 제1계단때 이미 왕청현 라자구, 동녕현 로흑산 또는 훈춘현 동북부로 대부분 철수하였다. 제2계단에 들어서도 일본군이 라자구를 중점 “토벌”하자 반일부대는 동녕현 이북으로 철수하였거나 일본군의 후방에 분산은페하여 있다가 이들을 습격하였다. 1919년ㅡ1920년대 연변지역 항일단체 독립군에서 사용하던 인감. 10월 23일 북로군정서 잔류부대는 십리평에서 일본군 이소바야시지대로부터 기무라지대에 편입된 아시다, 다까다 두 중위가 인솔하는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반일군철퇴를 막을 타산으로 금화골 산중에서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매복해있던 반일군은 적들이 가까이 오자 맹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제의 기록으로는 저들의 군대가 1명 죽고 2명 부상 입은것으로 되어있다. 10월 27일 라자구의사부군의 150여명 장병들은 로무주하골에서 다요기병소대, 아베대대의 1개 소대, 히데시마대대의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 등과 약 2시간가량 격렬한 전투를 벌렸다. 이날 오후 3시, 소바야시지대소속 아베대대의 다시로기병소위가 거느린 일본군 소부대 30여명은 로무주하골 어구부근에서 라자구의사회의 최정국이 거느린 150여명의 반일전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아베대대주력은 라자구 태평구에서 “토벌”하고있었다. 어베는 부하가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1개 소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금방 라자구에 도착한 일본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지대 산하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가 전투에 참가하여 약 2시간동안의 격렬한 전투를 거쳐 소부대를 소멸하려던 반일부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북으로 철퇴하였다. 10월 28일 일본군 76련대 이와오소소좌가 지휘하는 부대가 라자구에서 대황구로 돌아오는것을 발견한 반일소부대는 왕청현 장가구에서 련속 2차례나 습격했다. 11월 4일 훈춘한민회군 30여명이 훈춘현 삼도구 북쪽 39리 상거한 지점에서 일본군 제78련대 우에사까대대를 습격, 전투는 약 1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본군 이다소위 이하 5명을 살상하였다. 11월 9일 훈춘한민회의 김운서가 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는 일본군 제75련대 쥬지중좌가 지휘하는 2개 중대를 훈춘현 우두산 남쪽에서 습격, 1시간가량의 교전을 벌리였다. 12월 5일 일본군 시마다소위가 지휘하는 30여명은 하마탕 서북쪽산곡에 있는 반일부대의 숙소를 포위공격함으로써 쌍방이 교전하였다. “보시다싶이 10월 5일 전투 이외에는 모두다 분산은페하였다가 주동적으로 적을 공격한 전투였습니다. 반일부대는 기동령활한 전법으로 적을 타격하면서 “토벌”계획을 혼란시켰습니다. 일본군들이 동부전선에서 비록 반일기지를 파괴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수많이 학살하였으나 반일부대를 소탕하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여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아 한시도 안심할수 없어 항상 비상사태를 취했습니다. 동부전선의 의의는 아주 큰바 적의 병력을 견제하여 반일부대들의 철수와 간부들의 잠복을 엄호하였으며 서부전선 반일부대들의 전투부담을 경감시켜주었습니다. 일본군은 동부전선의 소부대들의 빈번한 습격전 때문에 북상하는 반일부대들을 추격할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부전선 주력부대가 밀산 등지로 철수하는것을 엄호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동부전선이 갖고있는 의의를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계속)
18    제18장 청산리대첩.3 댓글:  조회:1899  추천:0  2014-02-06
청산리마을에 세워진 청산리대첩기념비. 고동하강반에서 일본군 또다시 녹아나고 반일부대 반“토벌”전서 위대한 승리 거둬 백성들의 일편단성 “청산리전역을 비롯한 모든 반일무장투쟁은 연변인민들의 생산존망을 위한 일이였습니다. 일제가 연변에 침입하여 ‘토벌’을 감행한것은 반일무장부대만을 진압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전반 조선인에 대해 탄압하고 조선인들을 저들의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한것이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인들은 사명감을 안고 저들의 아들들을 반일무장부대에 보냈으며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각적인 행위였습니다. 일본침략자를 반대하는것은 또 조선인만의 리익을 위한것이 아니였습니다. 때문에 광범한 한족들도 청산리전역때 생명을 무릅쓰고 군수품을 지원했습니다.” 청산리 베개봉.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청산리전역시 한족을 비롯한 수많은 군중들이 반일부장부대를 위해 군자금과 식량공급을 부담했으며 정보도 제공하고 길안내도 나서주었다고 말하면서 “특히 조선인녀성들이 어랑촌전투때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총알이 귀전을 스치는 최전연진지에까지 음식을 날라다 준 사적은 무척 감동적입니다. 그녀들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음식먹을 시간적여유가 없는 투사들의 입에 밥을 떠넣어주면서 격려했지요. 실로 눈물없이는 들을수 없는 사연입니다”고 하면서 격동을 금치못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형을 당시의 《독립신문》은 “녀자의 일편단성(一片丹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이 지방에 있는 부인들은 애국하는 일편의 적성(赤誠)으로써 음식을 준비하여 가지고 위험을 모(冒)하고 탄우가 분분(紛紛)한 전선에 용진(勇進)하야 전투에 피로한 군인들을 공상(供償)하며 위로하였다. 어떤 군인들은 분전망식(奔戰亡食)하야 진작 응식(應食)치 않을 시(時)에는 부인들이 울며 권하기를 제씨(諸氏)가 만일 차(此)를 식(食)치 않으면 우리는 사(死)로써 귀(歸)치 않겠노라 하야 기어이 취식(就食)하도록 하야 일반군인으로 하여금 큰 위안을 받게 하였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리범석도 부녀들의 이런 헌신적인 지원에 대해 자신의 회상기 “우등불”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교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계속되였다. 굶주림! 그러나 이를 의식할 시간도 먹을 시간도 없었다. 마을 아낙네들이 치마폭에 밥을 싸가지고 빗발치는 총알사이로 산에 올라와 한덩이 두덩이 동지들이 입에 넣어주었다. ...어린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로... 그 얼마나 성스러운 사랑이며 고귀한 선물이랴! 그 사랑 갚으리, 이 목숨 다하도록! 우리는 이 산과 저 산으로 모든것을 잊은채 뛰고 달렸다. 맹개골전투 독립군의 행장. 어랑촌전투를 끝낸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는 50명씩 소부대를 지어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0월 23일. 아침부터 이동하기 시작한 북로군정서 소부대는 오후 3시경에 맹개골(孟家溝)삼림속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반일부대는 일본군 기병 30여명이 이 골짜기의 길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삼림의 변두리에 매복했다가 접근해오자 일제히 사격하여 적 기병 10여명을 사살하였다. 북로군정서 부대는 말 5필, 군용지도 4장, 시계 5개, 기타 피복, 장구(裝具) 등 다수를 로획했다. 만기구전투 맹개골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 부대는 맹개골로부터 맹산하를 따라 서쪽으로 약 10킬로메터 행군하여 만기구(萬麒溝)의 후방삼림속에서 휴식하고있었다. 이때 일본군 보병 100여명이 행군해오고 있었다. 북로군정서부대는 행군해오고있는 부대가 반일부대인지 일본군인지를 판별하지 못하고 “우리 군인가?”고 소리쳐 물었다. 이에 일본군은 반일부대인줄 알고 즉각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그제야 그것이 일본군이줄을 안 반일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30여구의 시체를 남기고 패주해 도망쳤다. 망개골 시거우전투 만기구전투에서 적 30여명을 살상한 북로군정서군은 행군도중 200여명 일본군을 발견했으나 전투를 피하여 황구령방면으로 행군하다가 10월 23일 밤 삼림속에서 숙영하였다. 24일 맹가골 시거우(西溝)로 행군하던 50여명 북로군정서부대는 일본군 100여명이 포 6문을 끌고 행군해오는 것을 발견, 즉각 공격을 개시하여 강타를 안긴후 민첩하게 후퇴했다. 이때 일본군기병 1개 소대가 삼림죄편으로부터 나타나 삼림쪽으로 올라왔다. 이에 북로군정서부대는 20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기병대 1개 소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삼림속으로 숨어버렸다. 천보산전투 어랑촌전투를 끝내고 이동하던 리범석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 소부대는 10월 24일 저녁 8시와 9시에 은동재부근에서 천보산부근의 은동광을 수비하고있던 일본수비대 한 개 중대를 두 번이나 습격하였다. 25일 새벽에는 홍범도련합부대가 식량조달을 위하여 이곳을 습격하여 일본수비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국자가에 있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의 긴급증원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1개 대대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동하전투 “고동하전투는 전반 청산리전역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1920년 10월 25일 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진행된 이 전투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 이이노추격대의 야습을 다시 반격한 반야습전인데 많은 일본군을 섬멸했습니다. 이번 전투는 토벌군의 총사령인 일본군 19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줴친 ‘홍범도, 김좌진 등 불령선인단을 근절’히겠다고 한 호언장담이 무너지고 토벌계획이 파탄되는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고동하전투는 간고한 전투였지만 적을 통쾌히 무찌른 전투였다고 박창욱교수는 말한다. 홍범도, 김좌진 부대를 단숨에 섬멸하려 했지만 처처마다에서 골탕을 먹은 일본군은 고동하방면으로 퇴각한 반일부대의 뒤를 미친개마냥 쫓아왔다. 그러나 봉밀골안을 50시간동안이나 헤매이면서 골골마다 샅샅이 들췄지만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이에 악에 바친 일본군은 혈안이 되어 고동하기슭을 훑기 시작했다. 고동하는 로령동남측에서 발원하여 화룡경내의 와룡을 거쳐 안도경내로 흘러들어가는데 송화강수계에 속한다. 고동하가 화룡경내로 흐르는 길이는 53.5킬로메터, 만족어로 물결이 사품친다는 뜻이라고 한다. 홍범도부대를 찾아헤매이던 일본군 이이노소좌가 인솔하는 추격대는 10월 25일 밤 10시에 고동하곡(오도양차 남쪽, 지금의 고동하림장 남쪽) 10킬로메터 부근에서 우등불을 피워놓고 숙영하고있는 홍범도부대를 발견하게 되였다. 홍범도부대(북로군정서부대의 50여명을 포함) 350여명은 고동하기슭에서 일본군이 포위하여 오는줄도 모르고 고즈넉하게 숙영하고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가에 모여 휴식하고있는 반일전사들의 모습이 우등불화강으로 하여 어두운 곳에서는 너무 뚜럿히 알렸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인차 부대를 전투태세로 정돈하여가지고 2개소대를 돌격대로 홍범도부대를 일거에 소멸하려고 하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소식을 실은 상해 . 10시 30분 일본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환한 화강속에서 아무런 준비없었던 홍범도부대는 적들의 맹공격에 엄중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은 전장을 수습하기 위하여 부대원들을 재빨리 고동하기슭에 솟아있는 절벽가로 철퇴하라고 명령했다. 전사들은 비호마냥 날래게 절벽을 타고 올랐다. 반일부대가 차지한 절벽은 량쪽으로 고동하가 사품치며 흐르는 깎아찌른듯한 절벽이였다. 나무까지 빼곡히 솟아있는 절벽에서 내려다보니 금방까지 차지하고있던 우등불가가 환히 바라보였다. 일본군은 우등불가를 점령한후 대승이나 거둔듯 주위 산을 향해 헛총질을 하면서 우줄렁거렸다. 일본군의 일거일동이 한눈에 안겨오는 절벽가에 몸을 숨긴 반일부대 장병들은 홍범도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잽쌉게 총을 휘둘러 우등불가에서 우줄렁거리는 일본군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반습격을 당한 일본군은 우등불가에 척척 나가 쓰러졌다. 그때를 홍범도장군은 이렇게 회억했다. 처음 일본군은 마적들을 길안내로 반일부대를 찾아 우등불을 쬐이는 곳을 향하여 속사포를 발사했다. 이에 불을 쬐이던 많은 병사들이 회생되였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부대는 날새도 얼씬 못할 바위에 올라가 날 밝기를 기다리면서 우등불을 놓은 곳을 내려다보니 적들이 나다니는것이 보였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우리들이 우등불가를 차지한 적들을 향해 총질하니 누렇게 쓰러졌다. 놈들이 아군이 있는 곳으로 기여드는것을 겨냥하여 총탄을 퍼부으니 쓰러지는 놈들이 수십명이 되었다. 기병이 달려올라오는 것을 또 쏘아눕히니 한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주동을 차지했던 일본군은 삽시에 피동에 빠지면서 무리죽음을 당했다. 당황해난 적들은 공격을 멈춘후 부근의 1143고지에 올라가 있다가 날이 밝게 되여서야 이젠 살았다고 안도감으로 낯에 희열을 나타냈다. 그러나 다시 공격하려고 보니 홍범도부대는 벌써 감쪽같이 철퇴한후였다. 고동하전투를 마지막으로 홍범도련합부대와 김좌진 북로군정서부대는 26일 낮부터 일본군추격대의 “포위토벌”을 완전히 벗어나면서 토벌계획을 철저히 파탄시켰다. 결국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걸쳐 진행된 청산리전역은 10여차의 전투를 반복하면서 반일부대의 “반토벌”대승리로 끝났다. “청산리전역의 승리는 조선인뿐만아니라 중국인민들의 반일의식을 고무시켰습니다. 중국 각지의 신문들은 련속하여 청산리전역의 소식을 보도하여 민중들의 사기를 고무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대한 민중들의 반일의분을 격발시켰는데 특히 각지의 청년 학생들은 집회와 시위운동을 조직하고 일제의 침략을 성토하면서 일본침략군으로 하여금 하루속히 중국에서 철수할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나섰습니다.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동녕 등 연변의 5개현 대표들은 외교관계를 통하여 일제를 중국경내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강력히 제기했으며 안되면 무력을 써서라도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고 3번이나 외교부에 청원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일제의 만행을 저지시키지 못했고 결국 반일부대에 대한 ‘토벌’이 조선민중에 대한 대참안으로 이어지는것을 눈을 펀이 뜨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박창욱선생의 개탄의 목소리였다.(계속)  
17    제17장 청산리대첩.2 댓글:  조회:2120  추천:0  2014-02-06
  청산리전투에서 무리죽음을 당한 일본군이 시체를 메고 철퇴하는 랑패상. 신기한 전술에 속은 침략군 저들끼리 싸우고 홍범도 김좌진 배합작전해 우세한 적 물리쳐 완류구전투 어랑촌부근에 집결되여 있던 홍범도련합부대는 천리봉을 중심으로 각 곳에 배치되여있으면서 군사훈련, 군인모집, 량식, 복장준비 등을 다그쳤다. 당시 홍범도부대 전사들은 누른색군복을 입고 붉은 줄을 띄운 두리모자를 썼는데 완류구골짜기에서 일본놈모형을 만들어놓고 “쏴총”구령을 부르면서 기세당당하게 사격훈련을 했다. 홍범도부대가 어랑촌부근에 있다는 정보를 수집한 아즈마지대는 이도구로부터 곧추 어랑촌에 추격해온후 어랑촌부근에다 본부를 설치했다. “아즈마는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21일 진공을 발동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천리봉에 은페시켰습니다. 홍범도장군의 일지에 의하면 21일에는 전투가 없었습니다. 22일 아즈마는 부대를 이끌고 남완류구로 들어갔고 천보산에 있던 이이노부대는 우회하여 홍범도부대의 퇴로를 차단하면서 량쪽으로 협공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천보산을 떠난후 길을 잃은 이이노부대는 이리저리 헤매다가 남양촌에서 숙영하고 22일 새벽에야 북완류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홍범도장군은 남북 두갈래로 덮쳐드는 일본군‘토벌대’를 주동적을 공격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완류구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홍범도장군은 앞뒤로 포위하려는 적들의 시도를 미리 알아차리고 부대를 남완류구와 북완류구간의 량쪽 등마루에 배치하고 기다렸다. 이런줄도 모르고 일본군 아즈마지대의 예비대는 남완류구를 따라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찾아 골짜기로 올라왔다. 같은 시각 이이노부대는 남양촌숙영지를 떠나 이른 아침에 강을 건너 북완류구를 따라 들어왔다. 적들이 다가오자 홍범도장군은 사격명령을 내렸다. 령마루 량측 산허리에 매복해있던 련합부대의 장병들은 두갈래로 덮쳐드는 적들을 향해 동시에 불벼락을 안겼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적들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미친듯이 반격했다. 이렇게 아침 7시 20분에 시작된 전투는 11시까지 4시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싸움이 한창 격렬해질 때 홍범도장군은 부대를 지휘하여 교묘하게 진지에서 살짝 빠져나와 아즈마지대 예비대의 측면에 피해서게 했다. 고지에 먼저 오른 적 예비대는 돌연히 북완류구쪽으로 올라오는 이이노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이이노부대는 예비대를 홍범도부대인줄로 착각했던것이다. 이이노부대의 공격을 받은 예비대는 이이노부대를 도리여 홍범도부대인줄 알고 맹렬히 반격을 가했다. 이리하여 적들은 저들끼리 맞붙어서 죽을둥살둥 모를고 쏘아댔다. 한 독립군의 모습과 독립군이 사용했던 무기들. 저들끼리 한창 싸우는 것을 구경하던 홍범도부대는 적 예비대의 뒤통수를 향해 몰사격을 퍼부었다. 이리하여 적 예비대는 홍범도부대와 이이노부대의 “협공”속에서 거의 전멸되여버리고말았다. 홍범도부대는 적들이 미처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있을 때 전투에서 물러나 봉밀구방향으로 철퇴했다. “완류구전투에서 홍범도련합부대는 7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고 적들은 400여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다.”(최홍빈) 400여명의 적을 소멸한 홍범도부대는 천수평방향으로 퇴각하다가 김좌진부대가 싸우는 곳에 이르게 된다. 한편 완류구에서 저들끼리 물고뜯고 하던 일본군은 드디여 홍범도부대를 추격하다가 12시 30분에 어랑촌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어랑촌전투 백운평전투에서 승리한 김좌진장군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고 밤도와 강행군하여 원 계획대로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와룡구 갑산촌에 도착, 이른 아침밥을 지어먹었다. 여기에서 김좌진장군은 일본군 한개 기병소대 40여명(리범석의 회억에는 한 개 중대 116명이라고 함)이 천수평에 주둔하고있다는 정보를 당지 주민들로부터 제공받은후 인차 천수평전투를 조직했다. 북로군정서군 려행단(제2제대) 80여명은 갑산촌에서 떠나 산발을 타고 천수동 남산에 이른후 적의 동정을 살폈다. 때는 아침 5시경, 적들은 반일부대가 포위해 들어오는것을 조금도 모른채 깊은 잠에 곤드라져있었다. 부대가 적을 포위하고 습격하려고 할 때 아군의 후방에서 누군가 부주의로 오발을 하였다. 총성은 적들을 깊은 잠에서 깨여나게 했다. 지체할수 없었던 려행단 전사들을 맹호마냥 마을을 습격했다.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적들은 하나, 둘 반일부대전사들의 총탄에 맞아 나뒹굴었다. 이번 습격전에서 적 4명이 본부가 있는 어랑촌으로 도망친외에 전부 소멸되였다. 국민회군의 사령 안무장군. 안무장군은 청살리전역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도망쳐간 적 4명이 본부에 가서 보고하면 대부대가 인차 공격해올것이라고 예측한 김좌진장군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야 된다고 판단하고 일부 부대를 서남쪽 3리남짓 되는 산고지에 파견하여 우선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고 주력부대는 야계골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행동을 개시했다. 아니나 다를가 얼마후 적군 제27기병련대 주력과 일부 보병들은 산포까지 동원해 가지고 가노대좌의 지휘하에 천수동골짜기 어귀에 나타났다. 반일부대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대량 섬멸했다. 그러나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듯이 반일부대의 고지를 향해 진공했다. 저격대는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사격하는 한편 본부가 있는 야계골로 퇴각하였다. 9시부터 진행된 전투는 반일부대와 일본군과의 고지쟁탈전이였다. 먼저 고지를 차지한 반일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의 공격을 한차례 또 한차례 물리쳤다. 몇차례의 진공에서 실패한 적들은 일부 기병대로서 반일군의 진지를 우회하여 반일부대의 우측을 공격하려 시도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려행대의 집중사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전투는 계속되였고 점차 가렬한 백병전으로 번져나갔다. 아즈마소장은 기병 제27련대와 야포병 제25련대 제1대대의 병력까지 출동시켜 보병부대와 배합하여 작전하면서 발광했다. 전투는 점차 수량상, 장비상 절대적으로 적들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반일부대는 비전투원까지 동원되여 최후의 결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전투는 오전 11시를 이어 계속되였다. 12시 30분 홍범도부대의 종적을 따라 추격하던 이이노대대가 이 전투를 당하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전투에 투입한 일본군은 기병대 약 250명, 예비대 약 600명, 이이노대대 약 100명 합계 1000명좌우였다.”(최홍빈) 반일부대전사들은 목숨을 내걸고 결사적으로 항격했으나 어쩔수 없이 점점 밀리우게 되었고 희생자도 늘어났다. 바로 이때 우측 산마루로부터 콩볶듯한 총소리가 울려왔다. 미친듯이 달려들던 적들이 갑자기 쑥대넘어지듯 마구 쓰러졌다. 순식간에 적아간의 격전사태가 급변했다.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이 바라보니 홍범도장군이 거느린 련합부대 장병들이 적들을 향해 사격하고있었다. 완류구전투에서 승리하고 주동적으로 철퇴한 련합부대는 봉밀구방향으로 이동하던중 북로군정서군이 전투하는 야계골로 들어섰던것이다. 홍범도부대는 완류구전투에서 큰손실을 보지 않았기에 원래의 병력을 그대로 보존하고있었다. 홍범도부대는 야계골에 들어서자 김좌진부대가 차지한 고지 옆 그보다 좀 더 높은 산고지를 점령하고 김좌진장군을 향해 진공하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던것이다. 북로군정서군의 장병들을 눈물겹도록 반가와 환성을 울리면서 적들을 무찔렀다. 홍범도부대의 참전은 김좌진부대에 대한 적들의 진공에 막대한 곤난을 주었다. 적들은 방법없이 부대를 분산하여 홍범도와 김좌진부대를 진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투는 저녁 7시반까지 계속 되였다. 전투장에 어둠이 깃들자 적들의 진공이 즘즘해졌다. 이 기회를 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홍범도의 련합군이 점령한 고지에 옮겨간후 어둠을 타 부대를 나누어 감쪽같이 퇴각했다. “어랑촌전투는 청산리전역에서 가장 큰 전투입니다. 백운평전투를 서부전선의 첫 시작이라고 한다면 어랑촌전투는 대회전입니다. 보시다싶이 홍범도, 김좌진 등 반일부대의 주력과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들간의 대접전이였으니깐요. 그뒤를 이어 천보산전투, 만기구전투, 맹가골 서고전투, 고동하전투 등 여러차례 전투가 있었는데 이 모든 전투는 다 아군이 철퇴중의 전투였습니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계속)  
16    제16장 청산리대첩.1 댓글:  조회:1636  추천:0  2014-02-06
청산리마을 전경   독안에 든 침략군 삼단처럼 쓰러지고 반일무장부대 백운평서 첫 승리 맞아  결전전야 화룡시 부흥향 청산리마을에서 해발 1677메터의 베개봉(일명 증봉산)이 커다란 베개마냥 뭇산의 두령으로 덩그렇게 누워있는것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마을어구의 작은 산언덕에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기념비는 500평방메터의 부지에 너비 25메터, 높이 17.60메터의 굉장한 화강석으로 다듬어 세웠다. 보기만해도 기분이 장쾌했다. 석비앞면에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조한문자로 새겨져있었고 밑면에는 일제와 격전을 벌리고있는 반일무장전사들의 군상이 조각되여있다. 청산리마을에서 해란강상류를 향해 4-5리쯤 올라가면 유명한 백운평참안지가 나타난다. 찬찬히 살펴보면 불에 그을린 기초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지금은 황페한 쑥밭으로 되어버렸고 벌목공들이 거처하는 귀틀집이 있을뿐이지만 당년에는 몇십호가 오붓하게 모여살던 조선인마을이였다. 가리마처럼 뻗은 산길을 따라 산을 계속 오르노라면 청고운 개울물소리가 귀맛 당기는데 고요한 산곡간이여서 그 물소리가 더욱 청괘한것 같다. 이렇게 6-7리 더 올라가면 발밑 낭떠러지 아래에 맑은 개울이 여울치며 흐르는 작은 소를 발견할수 있다. 커다란 바위를 껴안고 흐르던 개울물이 락차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면서 소를 이루었다고 하여 직소택이라고 불리우는 유명한 소이다. 물론 봉오동전투에서 혼쌀이 난 일제 륙군소좌 야스가와가 지휘하는 제73련대 선봉부대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부대에 의해 전멸되다싶이 한 곳이여서 더 이름을 떨친곳이기도 하다.   북로군정서의 무장 “무장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던 반일무장부대들은 일제의 ‘토벌’에 대비하여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의 반일무장부대의 이동정황을 설명해주었다. 봉오동전투후 명월구(묘구)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안도현 백두산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 21일경에는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의란구에 근거지를 설치하고있던 안무가 인솔하는 국민회군은 8월 31일 안도현방면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여 9월말경에 어랑촌부근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군부는 초모정자와 탁반구를 거쳐 9월말경 왕청현 라자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은 근거지인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 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도착하였다. 10월 2일 “훈춘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10월 14일 간도침략을 선언하고 16일에는 연길도윤에게 17일 0시를 기하여 간도에서 반일부대“토벌”의 군사행동을 시작함을 통고하였다. 룡정, 국자가, 투도구 방면의 “토벌”을 책임진 아즈마지대는 10월 17일 홍범도부대와 김좌진부대가 어랑촌, 청산리부근에 주둔하고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월 18일에 부대를 나누어 삼도구 청산리부근에 있는 김좌진부대와 와룡구 어랑촌에부근에 있는 홍범도부대를 “토벌”할 목적을 부대를 움직였다. 이렇게 되어 일본침략군과 반일부대의 청산리전역은 불가피하게 된였다. “전투를 앞둔 10월 19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련합부대 수뇌자들은 묘령에서 일본침략군의 ‘토벌’에 어떻게 대응할것인가 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주전파와 피전파간에 론쟁이 붙었는데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이 력량을 보존하려면 절대 일본주력부대와 결전해서는 안된다고 하여 피전책을 취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여 북로군정서군은 왕팔어구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저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청산리쪽으로 철퇴하게 되었습니다. 부대는 이튿날 백운평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설명이다. 10월 17일 아즈마지대장의 작전명령을 받은 야마다련대는 좌우종대로 나누어 좌종대는 야마다대좌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으며 우종대는 나까무라대대장이 인솔하고 이도구를 거쳐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북쪽 퇴로를 차단하고 좌우종대와 책응하여 북로군정서군을 포위하려 시도하였다. 백운평전투 백운평전적지 직소 동쪽구간.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 리범석은 김좌진장군의 지령에 쫓아 직소부근에 부대를 배치, 매복전을 벌려 추격해오는 적을 제어하면서 본부대의 후퇴를 엄호하려 했다. 하여 교성대 200여명을 직소택 량면에 매복시키고 림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게 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이 포치한 매복진은 좌우 량켠에 톺아오르기 힘든 산이 있고 그 사이에 끼인 골짜기는 20-30메터 되나마나 하고 넓은 곳이라야 40-50메터밖에 안되는 매복전에 더없이 리상적인 장소였다. 때는 상강절기를 앞둔 마가을, 북로군정서군 장병들은 한기가 뼈속을 파고드는 추위속에서 밤을 패야 했지만 래일의 격전을 생각하면서 긴장한 마음을 도사려야 했다. 드디여 동녘이 푸름이 밝아오기 시작하더니 금빛 해살이 나무가지사이로 창살마냥 비끼여 들었다. 몸에 락옆을 뒤집어쓰고 지루한 밤을 보낸 전사들은 긴장한 마음으로 적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협곡 량켠 산기슭에 반일부대 용사들이 매복해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한 침략군은 흔들먹거리면서 좁은 산길을 따라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강추격대”를 거느리고 들어왔다가 봉오동에서 참패를 당한 야스가와소좌가 이번에도 선발부대 한개 중대 90여명을 거느리고 죽음의 포위망속으로 기여들고있었다. 이들은 서쪽 2키로메터 지점인 공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밤에 숙영했던 곳과 60여개의 불무지흔적을 발견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한줄로 쭉 늘어서서 북로군정서군의 행적을 따라 올라오고있었다. 청산리직소택 “땅!” 연성대장 리범석의 공격을 알리는 첫 총소리가 산곡간을 찢으면서 맵짜게 울렸다. 앞 뒤 산마루에 매복해있던 200여개의 총구에서 삽시에 불벼락이 터졌다.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돌연적인 습격에 당황해난 적들은 사면으로 날아드는 총탄을 피하느라 갈팡질팡하면서 어쩔줄 몰라했다. 적들은 대응사격으로 발악도 해보았지만 반일부대의 매복지점을 판단할수 없어 헛총질만 할뿐이였다. 코앞에다 적을 둔 반일부대는 복수의 총탄을 여지없이 내뿜었다. 전투는 속결전으로 끝났는데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적군 90여명이 거의 소멸되다싶이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김좌진이 제1제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제2제대에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할것과 다음날 새벽 2시전에 봉밀구 갑산촌에 집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쫓아 제2제대는 제1제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안도 로령으로 철퇴하는것처럼 하다가 급전환하여 밀림을 혜치고 북상하여 밤도와 갑산촌으로 철수했다. 청산리대참안 백운평전투에서 참패를 본 일본침략군 야마다련대는 반일부대가 안도현쪽으로 후퇴한줄 알고 추격하다가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찾지 못하자 오후 2시에 추격을 중지하고 되돌아와서 그 분풀이로 무고한 백운평백성들에게 “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은 모든 집을 불살라버렸고 보이는 사람마다 죽이였으며 지어 어린애마저 생매장하거나 총으로 쏘아죽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날 외지로 친척방문갔던 두 사람이 살아남고는 다 살해되였다고 한다. 당시 백운평에는 인가가 5,60세대가 살고있었다고 한다. 한세대당 평균 5명으로 쳐도 백운평찬안에서 살해된 사람은 300여명 된다. 오붓한 조선인마을은 일제의 야수같은 만행으로 하루아침사이에 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추고말았다. 놈들은 청산리마을뿐만아니라 그 일 때 마을을 모조리 불사르고 사람을 만나면 모조리 죽였다. “목격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백운평에서 사흘동안 연기가 피여올랐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적들은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사용하여 수많은 조선인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무고한 백성을 죽였습니다.” 박창욱교수의 비분에 차 하는 말이다.(계속)  
15    제15장 “훈춘사건” 댓글:  조회:2321  추천:1  2014-02-05
당시의 훈춘성루 출병구실 만들기 위해 조작한 가짜사건 세인을 놀래운 경신년 대참안의 도화선 음험한 획책 “일제는 연변반일무장대오가 저들 정규군을 참패시킬만큼한 력량인줄 몰랐지요. 봉오동전투후 일제는 깜짝 놀랐지요. 반일무장대오를 업수보고 제멋대로 봉오동골로 진격했다가 호된 참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날로 장대해지는 반일무장대오를 소멸하기 위하여 일제는 대량의 정규군을 연변에 파견하여 항일무장대오를 소멸할 획책을 꾸미게 됩니다. ‘훈춘사건’도 그중 하나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일제가 조작한 “훈춘사건”을 설명하면서 “훈춘사건”은 오래전부터 꾸며온 음모였다고 말한다. “3.13”운동후 조선인지구에 건립된 수많은 반일무장단체와 그들이 진행한 반일무장투쟁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5월 상순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 장작림과 일중공동“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과 간도일대의 조선인반일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는다. “수사반”은 남만의 안동, 환인, 관전, 집안, 무순, 류하 등지에서 수백명의 반일무장대원을 체포, 총살하였다. 그러나 길림성 성장 서정림의 강경한 반대로 연변지역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못하고있었다. 이에 간도방면의 수사지휘을 맡은 일군 마찌노중좌는 “중국측의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고 간도의 불령선인의 정황이 날따라 악화되면 우리측에서 철저한 토벌을 실시한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다. 1920년 7월 16일 봉천총령사관 아까쯔까총령사는 작작림과 교섭하여 “중국측 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고문 사이또가 동행하며 중국군대가 토벌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도 참가할수 있게 할것”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토벌”을 2개월로 하고 출동할 병력은 1개련대로 하며 “토벌”지역을 간도와 훈춘, 동녕현 일대로 할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길림성당국은 일본군이 출병은 주권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로 인정하고 단연히 거절하였으며 중국군대를 출동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일본군의 출병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였다. 중국군은 출병하여 토벌을 개시할적마다 사전에 “토벌정보”를 루설하여 조선족반일부대들로 하여금 미연에 삼림지대로 피신하게 하여 피해를 입지 않게 하였다. 이는 오래전부터 출병을 획책해오던 일제에게 큰 불만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근본적인 토벌을 가하려면 일본군을 주체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직접출병의 계기를 마련하는 음모를 꾸미였다. 일제는 씨비리를 포함한 연변 4개현과 동녕현일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중국, 조선, 로씨야 3국 접경지대인 훈춘을 출병지점으로 선택한후 출병구실을 찾으려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급급히 “토벌계획서”작성에 착수하면서 1920년 8월에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사령부와 련락하여 파견군의 일부를 토문자(土門子), 초모정자, 삼차구, 위자구 방면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의 작전에 배합할것을 요구하였으며 륙군성과 참모본부에 28만원의 경비를 신청하였다. 1920년 8월말에 이르러서는 조선주둔군사령부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 전부 작성되였다. 병력은 제19사단의 보병 76련대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25련대의 일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경원부근에 집결시킨 다음 훈춘-초모정자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보병 제75련대와 기병 제27련대일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온성일대에 대기하고있다가 서대파-하마탕-백초구지방을 진격하도록 하였다. 보병 제75련대의 일부와 기병 제27련대의 일부, 포병 제25련대,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회령부근에 대기하였다가 룡정촌-국자가일대를 진공하게 하였으며 보병 제73, 제74련대, 기병 제27련대의 주력, 공병 제19련대의 일부는 서강부근에 대기하고있다가 황포-투도구일대를 진공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일제는 연변일대에 대한 대규모의 “토벌”을 획책하는 한편 북만주파견군에도 불령선인토벌계획에 따라 보병 2개중대는 해림, 녕고탑, 이구방면에 출동할것을 명령하였다. 한편 제19사단장에게는 필요시에는 조선주둔군 사령관의 명령이 없이도 출병할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렇게 일제는 모든 만단의 준비를 완료시킨후 출병하여도 중국정부에서 어쩌지 못하는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훈춘사건”은 완전히 조작된 음모였다고 까밝혔다.  피로 물든 훈춘성   연변의 반일인사들을 학살하는 일제침략군. 1920년 9월 12일 아침 5시경 갑작스러운 총소리가 고요한 훈춘성의 정적을 깨뜨렸다.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지대에 둥지를 틀고있던 진동(鎭東), 만순(萬順)을 두목으로 하는 300-400명의 마적들이 동, 남, 북 3개 방면으로 훈춘현성에 쳐들어왔다. 마적두목 만순은 친일비적 코산의 영향밑에서 활동하고있으면서 코산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는자이다. 만순은 코산의 말이라면 뭐나 다 들었다. 코산은 일본군 간첩인 야마모도 기꾸꼬를 애첩으로 데리고 살고있었다. 야마모도 기꾸꼬는 일찍 일로전쟁시 어릴 때부터 일군의 스파이노릇을 하였는데 이무렵에는 흑룡강류역의 부라고베시첸스크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 제12사단(지휘 오오이중장)의 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코산이 경영하는 술집에서 접대부로 위장하고있었다. 이날 동북쪽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경찰서를 진공했고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륙군병영과 헌병병영을 진공, 현공서를 포격했다. 소규모의 마적들은 여러갈래로 나뉘여 민간에 덮쳐들어 살인, 방화, 략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마적들은 가는곳마다에 불을 놓아 훈춘시가지는 삽시에 화광이 충천하고 자지러진 총소리로 아비귀환이 되고말았다. 당시 훈춘시내에는 관병 270여명이 있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지라 간신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졸히 응전할뿐이였다. 길림륙군 공병영 영장 정기창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상부지로 달려가 일본령사관과 외국인상점을 보호했고 륙군 제2려 제2퇀 제2영 영장 오은성은 대오를 두갈래로 나누어 서쪽성문과 북쪽성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세 번이나 진격했지만 마적들의 맹렬한 사격으로 후퇴하고말았다. 전투가 2시간남짓 진행된다음 마침내 마적들은 대오를 거두어가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길장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일본경찰서, 령사관은 아무런 손실도 없었다. 랍치된자는 화인 80여명, 한인(韓人) 6명이며 200여간의 가옥이 불타버렸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훈춘사건”이다. “일제가 요구하는것은 단순한 훈춘습격이 아니였습니다. 출병구실을 만들자는것이였지요. 그런데 마적들은 일본사람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으니 일본놈들은 안달아날 수밖에 없었지요. 하여 다시 훈춘을 습격하게 하였습니다. 제1차 ‘훈춘사건’이 일어난지 20일밖에 안되는 10월 2일 새벽 4시경 만순을 괴수로 하는 마적무리들은 진동패거리와 합세하여 400여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훈춘을 대거 진공했습니다.” 박창욱교수는 제2차 “훈춘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기관총 1정과 산포 1문을 가지고있는 마적들은 동서 두갈래로 나뉘여 성문에 기관총사격을 들이대면서 성안을 마구 포격했다. 서대문으로 들어온 토비들은 시킨듯이 곧바로 일본령사관에 달려들었다. 비록 중국경찰들이 령사관을 호위하고있었지만 마적들의 기관총과 양총의 화력을 당해낼수가 없었다. 담장을 폭파한 마적들은 물밀듯 쓸어들어 령사관에 불을 질렀다. 동대문으로 쳐들어온 마적들은 관병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상부지에 돌입하여 사람만 보면 죽이고 닥치는대로 빼앗고 불을 질렀다. 4시간남아 발광하다가 100여명의 사람을 랍치하여 가지고 로흑산방향으로 퇴각했다. 이날 마적들은 일본령사관 경찰서장과 조선인 순사 1명, 재향군인 1명을 죽인외에 일본인 남녀 10여명을 살해했다. “경신년대학살”의 도화선 “제1차 ‘훈춘사건’이 있은지 20여일만에 제2차 ‘훈춘사건’이 일어났다는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또 제2차 ‘훈춘사건’에서 아무런 ‘경제적’의의도 없는 일본령사관을 들이쳤다는것은 그 어떤 ‘정치적’목적을 당성하기 위한 음모라는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심영숙 “훈춘사건”) “훈춘사건”후 만순은 코산에 의해 처단되고 코산도 또한 자기 애첩에게 암해된다. 일제는 이번 사건을 저지른 비적들속에 로씨야홍군, 중국군대, 불령선인들이 있었다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여러방면으로 출병구실을 조작하였다. 일제가 이렇게 주장하는것은 로씨야인들이 무력으로 일본에 대해 위협을 주고있으며 조선인반일단체에 대한 “토벌”을 중국군대에 의거할수 없으며 “독립운동”이 위험분자들이 훈춘사건과 같이 저들에게 큰 위험을 가져다주는 화근이기에 훈춘사건은 단순한 마적들의 행위가 아니라 딴 정치적목적을 가진 행동이기에 군대를 출동시켜야 한다는 구실을 더욱 합법화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이며 랍치되였다가 풀려나온 일본상인은 토비들중에는 “조선사람 혹은 불령한당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훈춘사건”은 구실에 불과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조선 라남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19사단 사단장 다까시마중장이 명령을 내려 온성부근에 주둔하고있는 아베대대를 경원군 훈융에 대기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베가 거느린 보병 한 개 중대와 기관총 한 개 소대가 제일 먼저 두만강을 건너 훈춘으로 출동하였다. 뒤이어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려단장 이소바야시가 령솔하는 이소바야시지대, 보병 제76련대장 가무라가 령솔한 가무라지대, 제37려단장 아즈마가 령솔하는 아즈마지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 왕청, 룡정으로 진격하였다. 10월 9일 일본 륙군대신은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사령관과 조선주둔군 사령관에게 간도출병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훈춘사건”은 마침내 “경신년대토벌”의 도화선이 되였다. 일본군은 반일단체들이 북만에로의 탈출을 견제하기 위해 할빈에 주둔하고있는 관동군 제53련대의 야스니시소좌가 거느리는 야스니시지대를 파견하여 해림을 중심으로 한 중동철도연선에서 북을 철퇴하는 반일부대들을 막게 하였다. 일본군은 또 로씨야 씨비리에 출병하였던 제11사단의 보병 한 개 대대, 기관총대, 기병 1개 소대, 공병 반개중대의 병력으로 투문자지대를 구성하고 훈춘동부의 중로변계에서 반일무장부대가 로씨야 연해주일대로 이동하는 것을 제지할 임무를 맡기고 10월 19일 국경을 넘어 훈춘 춘화지구의 초모정자, 토문자 등지에 진격하게 하였다. 일본군 제13사단은 하네이리대좌의 지휘밑에 보병1개 대대, 기병 1개 련대, 포병 1개 중대로 하네이리지대를 구성한후 10월 19일과 20일에 국경을 통과한후 로흑산부근으로 진격했다. 이밖에 연해주에서 철퇴하는 제14사단 제28려단 4000여명 이리본군은 로씨야 포세이트에 등륙, 빈해성을 거쳐 훈춘에 침입하여 제15련대를 훈춘과 룡정에 남겨 “토벌”대를 강화하게 하고 나머지는 국자가, 룡정과 조선 회령을 거쳐 라남으로 돌아갔다. 10월 13일 제19사단 제73련대의 2개 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반일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국내외를 진감시킨 “경신년대토벌”이 시작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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