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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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제14장 봉오동전투 댓글:  조회:3357  추천:0  2014-02-05
봉오동전투사적지의 하나. 최명록의 집 옛터에서 본 하촌 옛터. 지금은 저수지로 되여버렸다. 일본침략군과 진행한 첫 련합작전 반일무장투쟁에서 이룩한 첫 승리 봉오동전투의 도화선 도문 일광산(해발 390.7메터)은 아름다운 산이다. 깍아지른듯한 괴암절벽으로 병풍쳐져있는 일광산은 수려하고 멋들어진 한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일광산을 휘여잡고 흐르는 두만강은 산과 조화를 이루고있어 신비한 운치를 돋쳐준다. 일광산 턱밑에 있는 마을이 유명한 산툰자(三屯子 지금의 도문시 월청향 마패촌 제7촌민소조)마을이다. 간평, 혹은 새불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을은 1920년 당시에는 화룡현 월신사(月新社)에 귀속되여있었다. 일광산에서 내려다보면 간평대안의 자그마한 마을이 한눈에 안겨오는데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원래는 종성군에 소속) 강양동철도역과 마을이다. 돌아서서 바라보면 도문과 조선 남양이 지척으로 보인다. 거북바위밑으로 범진령고개길이 뉘연히 누워있다. 1920년 6월 4일 아침 5시, 신민단소속 박승길부대 30여명이 삼툰자에서 출발하여 도강한후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 일본군헌병 군조 후꾸에 산다로이하 4-6명을 감쪽같이 섬멸하고 강을 건너 돌아왔다. 강양동습격전은 당시 연변의 각 반일단체들에서 진행하고있은 조선국내진입작전의 일환이였다.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을 비롯하여 일본군경주둔지거나 경찰서를 습격하는 일이 련속 일어났는데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습격사건은 1650여차나 되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고 한다. 그날 박승길부대는 돌아가고 걸만동방면으로부터 다른 한갈래의 반일부대가 강양동습격을 목표로 삼툰자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두만강 남안 종성수비대 순라병들이 강양동방면으로 향하다가 두만강북안의 항일군을 발견하고 총질, 이에 반일부대도 맞불질을 하여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강양동초소가 습격당하고 삼툰자마을에서 일본군종성수비대와 항일군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총격전을 벌리였다는 급보를 접한 남양수비대의 아라요시중위는 6월 6일 오전 11시 자기소대와 야마모도헌병오장이 거느린 헌병을 포함한 17명을 거느리고 삼툰자에서 7-8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중국경내로 기여든후 범진령을 에돌아 삼툰자서쪽 작은 골짜기로 내려와 마을 뒤산을 점령하고 반일부대를 일거에 소멸할 목적으로 삼툰자마을을 습격하였으나 반일부대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자 악에 받쳐 마을의 무고한 백성들에게 분풀이하고는 범진령을 넘어 반일부대 종적을 따라 계속 추격하다가 일광산기슭에서 숙영하하면서 대안의 후원을 바라고있었다. 밤 10시, 수십명의 무장한 반일부대는 삼툰자서북쪽고지에 이르러 숙영하고있는 일군의 보초선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톼각, 쌍방의 손실은 별반 없었다. 6월 5일, 일본군 야스가와소좌는 조선주재 제19사단의 명령을 받고 보병 제73련대(라남)소속 기관총 1소대와 보병 제75련대(회령)소속 보병 1개 중대로 이른 바 “월경추격대대”를 편성하여 가지고 6월 6일 저녁 9시부터 해란강과 두만강합수목에서 10리 떨어진 하류로부터 도강을 시작하였다. 한편 일광산에서 숙영하고있던 아라요시부대는 안산방면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가야하를 건너 곧추 안산방면으로 하여 후안산부근에서 야스가와부대와 회합하여 봉오동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 “이번 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보병 약 200명, 헌병 8명, 경찰 10명 합계 220여명이였다.”(최홍빈 “봉오동전투에 관한 몇 개 문제”) 봉오동을 진군하기 위하여 일본군추격대는 길안내를 찾으려고 정찰병을 후안산마을에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에 가서 모금하고 돌아온 최명국 등 13명 모금대가 전안산 최명국네 집에서 저녁을 먹은후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 와서 등불을 밝혀놓고 금후 행동방안을 상의하고있었다. 일본군정찰병들이 후안산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한집에 불이 켜져있는지라 누구의 집인줄도 모르고 무작정 문을 떼고 들어섰다. 갑자기 뛰여든 일본군정찰병을 향해 최명국 등 반일전사들은 일제히 사격하여 쏴눕히고 집을 뛰쳐나와 북쪽 고려령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여 오는 일본군에게 불질하였다. 일본군은 항일군의 꼬리를 물고 계속 추격해왔다. 전투는 2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캄캄한 밤중에 진행된 준비없는 싸움이였던지라 쌍방은 그다지 큰 손실을 입지는 않았다. 일본군 1명이 죽고 독립군 1명과 최진삼의 처가 희생되였으며 마을사람 5명이 체포되였다. 야스가와의 “월강추격대”가 봉오동을 향해 진군할무렵 봉오동에 주둔하고있던 홍범도련합부대 300여명은 이미 전투배치를 끝낸 상태였다. 사령관 홍범도가 거느린 부대와 지휘부는 상촌 서산에, 최명록부대는 북동과 남동 동산에, 신민단부대는 남산에 배치하여 적들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하였다. 리천오의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강산모의 제2중대는 동산에, 강시범의 제3중대는 북산에, 조권식의 제4중대는 서산남단에 각기 매복하였다. 백성들은 홍범도의 명령으로 모두 피신되여있었다. 일본군을 매복권내에 끌여들이기 위하여 리화일분대를 고려령북측 1200메터 지점과 그 동북촌락에 매복시켜놓고있었다.  홍범도장군 홍범도장군이 1922년 러시아 불라고베시첸스끄에서 지낼 때 현지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홍범도(洪範圖)는 1868년 8월 27일 조선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부근의 한 가난한 농부가정에서 태여났다. 집이 함경남도 갑산으로 이사한후 젊은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갑산은 험준한 산골이였다. 그는 그곳에서 사냥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신묘한 검술과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가진 그는 직업포수들의 단체인 안산사 “포수계”에 가입하였고 포연대장으로 추대되여 직업포수계의 두령으로 되었다. 그는 인품이 당당했고 정신이 꿋꿋했으며 장대한 체구와 불의에 굽힐줄 모르는 의협심이 있는 사람으로 린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가난했기에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천성이 름름한 쾌남이였다. 홍범도가 갑산지대에서 “척왜(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집하여 기의한것은 륭희원년(1907년)도 저물어가던 때였다. 그해 9월 7일에 민중의 무장투쟁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했다. 민간에 있는 무기, 화승총을 회수하기 위하여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이것은 산간지방에서 수렵을 주업으로 삼고 근근득식 하는 산포수들에게는 청천벽력이였다. 이 법령은 쌍이고 쌓인 반일감정에 불을 지핀거나 다를바 없었다. 홍범도를 위수로 하는 삼수, 갑산 등지의 포수들은 의거하여 일떠났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는 의병을 지휘하여 총기를 회수하려 온 회수군을 한놈도 남기지 않고 몽땅 죽여버렸다. 이튿날에는 북청수비대소속 1대가 호위하는 우편마차를 중도에서 습격하였다. 1907년 8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홍범도를 비롯한 반일의병들의 무장투쟁의 봉화는 조선 방방곳곳에서 드세차게 타올랐다. 이에 안달아난 왜적들은 의병대에 대한 참혹한 “토벌”을 감해하는 한편 반일력량을 분화, 와해시키려고 회유책을 썼다. 일제침략자들의 갖은 음모를 분쇄하고 시련을 이겨낸 홍범도와 그의 이병대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반일기치를 추켜들고 무장투쟁을 견지해나갔다. 1909년 겨울, 홍범도의병대에서는 다수의 의병들이 해산하여 돌아가고 모든 군사물자가 단절되였다. 이런 어려운 조건에서 홍범도는 소수의 정예대오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장백현 십칠도구 왕가구로 전략이동했다. 여기서 그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사냥하여 의식문제를 해결했다. 한편 의병대본영을 건설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탄약을 제작하기도 했다. 1911년 3월 홍범도는 압록강을 건너가서 함경북도 경원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장백현 왕가구 둔전지에서 3년세월을 보낸 홍범도는 자그마한 의병대를 거느리고 로씨야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궂은 일, 고된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장장 6년이란 세월을 두고 일했다. 부두에서, 금전판에서, 어선에서, 경작지에서 피땀흘려 번돈 3050루블로 오련발초 17자루와 탄약을 사가지고 중국 밀산 김형무농장에 와서 농사하였다. 3년 농사하며 사냥하여 얻은 귀중한 약재를 팔아 무기와 탄약을 더 샀다. 홍범도는 드디여 106명을 무장시키게 되었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이전의 의병과 포수들을 단합해서 “대한독립군”을 결성, 사령으로 추대받았다. 독립군은 400여명 병력을 가지고있었다. 1919년 8월 홍범도는 200명 대원을 거느리고 야밤에 조선 혜산을 맹렬히 공격, 수십명의 적군을 소멸하고 병영에 불을 질러놓고 무기, 탄약, 군수품을 로획했다. 그해 10월에는 만포진을 습격, 1920년 2월, 독립군군련합부대는 불의에 회령의 왜군을 기습하였다. 3월에는 로씨야 연해주로부터 많은 무기를 들여온후 근거지를 왕청으로 옮겼다. 4월에는 연해주로부터 700여자루의 보총을 반입하여 독립군부대를 무장시켰다. 새장비로 무장한 독립군은 빈번히 일제침략자들을 타격하였다. 조선통독부의 보수적인 통계에 의하더라도 1월부터 6월까지사이에 전후 32차나 되는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련합부대가 홍범도장군의 지휘밑에 연변땅에서 벌린 첫 저격전이였다. 봉오동전투후 홍범도는 또 김좌진장군 등과 함께 청산리대첩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청산리전투가 끝난후 홍범도장군은 독립군을 이끌고 밀산에서 출발하여 호림현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건너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했다. 1921년 1월 로씨야에 철퇴한 반일부대들은 이르꾸쯔크공산당이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싸할린부대를 위수로한 대한의용군의 파벌투쟁으로 하여 발생된 “자유시참변”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두파의 렵합을 주장하고 분렬을 반대하였다. 그후 그는 동양비서부가 지도하는 고려군정청의 징집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부대는 쏘련붉은군대 제5군단에 배속되였고 그는 조선인려단 제2련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여 백파군을 섬멸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1921년 러시야 크레믈리궁앞에 선 홍범도장군.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공산주의혁명조직 제1차대회”에 52명 조선인대표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였으며 레닌을 만나보았다. 이는 홍범도가 구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하는 계기로 되었다. 홍범도는 백파군을 소멸하는데 공을 세웠다. 붉은군대의 군인들을 제대시켜 인력을 경제건설에 투입하였는데 조선인려단도 해산되고 고령인 홍범도는 군인생활을 끝마치고 제대하여 전사들을 거느리고 연해주에서 조선동포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조직, 농촌건설에 힘썼고 1929년에는 쏘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러시아 우즈베크공화국 알마타에 있는 홍범도장군의 묘지. 1929년부터 년로한 홍범도는 년금생활로 만년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피쥘오르다시에서 별세하였다. 연변에서의 일제와의 첫 겨룸 봉오동 중촌 옛터. 물파란 호면에 주변의 산자락이 곱게 비껴있는 봉오동저수지, 멀리 초모정자산의 번듯한 이마가 보기 좋게 안겨온다. 너무도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기만하다.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이 곳이 연변땅에서 대일전의 첫 전투가 벌어진곳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가. 그번 전투는 전 중국에서 일제와 격돌한 첫 전투였다. 저수지둑아래에 있는 봉오동반일전적지기념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장으로 한 조선족독립운동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곡 봉오동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소속부대, 아라요시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폈다. 반일독립군은 빈틈없이 매복진을 쳐놓고있다가 오후 1시경 일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군 150여명을 살상하고 10여명을 부상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변반인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붇돋아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중공도문시위통전부 도문시 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  1993년 6월 7일 유적비밑면은 벽돌로 쌍았는데 아직 콩크리트를 바르지 않은 비완성상태였다. 기념비 왼켠에 름름한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있는데 하늘을 날아오를 기상이여서 그젠날 영웅들의 정신이 살아숨쉬는것 같아 보였다. 한아름으로는 안을수 없는 보기에 끼끗한 소나무였다. 1920년 6월 7일 아침 4시 45분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후안산에서 최명국일행과 교전하다가 계속 추격하여 왔는데 전위중대가 드디여 리화일부대의 매복권에 들어서게 되었다. 리화일부대는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긴후 쏜살같이 고려툰 뒤산 산등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쪽을 후퇴해버렸다. 돌연습격을 받은 일제는 잠시 후퇴했다가 다시 대오를 정배해가지고 리화일부대가 후퇴한 방향으로 추격하여 8시 30분경에 하촌마을에 들어섰으나 이미 온 마을이 텅 비여있을 때였다. 헛물을 켠 일본군은 골짜기를 따라 중촌으로 진격했다. 중촌에서 늦은 아침을 지어먹은 일본군은 계속하여 상촌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성들에게 마구 총탄을 퍼부어 많은 살상자를 냈으며 한 농민의 수레를 빼앗아 기관총을 싣고 그 농민을 길잡이로 상촌을 향해 진격했다. 낮 12시경 일본군 척후병들이 반일부대의 매복권내에 들어섰고 오후 1시경에 일군 추격대 전부가 드디여 매복권내에 들어서게 되었다. 상촌에서 일본군은 북동과 남동을 수색했으나 마을은 텅 비여 사람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그제야 독립군의 매복전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황급히 남동 앞골짜기로 하여 비파동으로 퇴각하려 시도하였다. “땅!” 산골짜기를 찢는 맵짠 총소리와 함께 일본군 지휘관 한놈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총소리는 홍범도장군이 총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서산과 동산에서 분노의 총탄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일본군은 두정의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면서 서산을 향해 돌격했다. 이때 서산지휘소에서 작은 붉은 수기를 흔드니 골짜기 홈채기에 매복했던 허형근소대가 근거리에서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적들은 두갈래로 나뉘여 한갈래는 허형근소대의 매복지점으로 돌격하고 다른 한갈래는 서산으로 계속하여 돌격해갔다. 이에 허형근소대는 접근하는 적들을 대응하는 한편 서산을 향해 돌격하는 적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드디여 적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하여 허형근소대를 덮쳤다. 이번에는 동산에 매복해있던 최명록부대가 허형근소대에 덮쳐드는 일본군주력부대를 향해 맹사격을 했다. 동서로 되는 교차사격권에 든 일본군은 황급히 퇴각하려 했다. 이때 남산에 매복해있던 신민단부대가 적을 향해 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동서남 삼면의 교차사격을 받게 되었고 남쪽의 퇴로까지 차단되였다. 일본군은 쩔쩔매다가 병력을 집중하여 동쪽방향으로 퇴각로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때는 오후 4시 20분경이였다. 하늘에서 시커먼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굵다란 우박이 폭풍과 함께 마구 쏟아져내려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겹게 되었다. 일본군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빌어 흩어진 부대를 긁어보아가지고 비파동으로 줄해랑을 놓았다. 반일부대도 억수로 퍼붓는 우박과 비 그리고 전투에서 지쳤는지라 더는 추격하지 않고 싸움터를 수숩한후 왕청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봉오동전투의 첩보를 보도한 상해의 봉오동전투는 반일련합군의 대승로 끝났다. 봉오동전투는 반일부대들이 계획적으로 매복전을 진행하여 일본침략자를 격파시킨 항일군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로서 중국의 반일무장투쟁이 첫 발단을 열어놓았다. 봉오동전투는 또 연변의 반일무장부대들의 첫 련합작전이였다. 1920년 3월 홍범도는 조선국내에 대한 진공작전을 효과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대한의군단의 본영을 명멸구로부터 왕청현 대감자로 옮기고 당시 연변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켰던 반일단체인 간도국민회와 손잡고 군무위원 안무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회군과 련합하여 정일 제1사령부를 설립하였고 후에는 최진동과의 련합을 도모했다. 봉오동전투 직전인 5월 11일 홍범도, 최진동 등 북로독군부, 신민단, 광복단, 의군단 도합 4개 무장단체의 지도자들은 봉오동에서 회의를 열고 련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보았다. 5월 28일에는 대한의군단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가 련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사령부본부를 봉오동 상촌에 두었으며 병력을 집결하여 강력한 조선국내진격을 계획하고 중요간부와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봉오동전투는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광범한 대중들에게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무장을 들고 굳게 뭉치기만 하면 그 어떤 침략자라도 격파할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계속)
13    제13장 15만 탈취사건 댓글:  조회:2352  추천:0  2014-02-05
  1920년 1월 4일 저녁, 용정남쪽 동량어구에서 있은 의 영웅들. 림국정, 최봉설, 윤준희, 박웅세, 김준(상하좌우로부터). 날랜 용사들 적들의 수송대 엄습 변절자에  의해 거사 물거품으로 원쑤를 갚자면 손에 무장을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핀 나즈막한 언덕아래에 15만원 탈취 거사석비가 세워져있었다. 룡정에서 10리쯤 떨어진 동량리어구이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륙도하가 눈앞에서 흐르는데 강물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미츨한 백양나무에 돋은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은 봄바람에 귀옆게 한들거린다. 연변의 여느 고장과 별다른데가 없는 곳이지만 바로 여기에서 세상을 놀래운 15만원 탈취사건이 벌어진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백양나무가 서있지만 옛날에는 버들방천이였지요. 바로 저기에 동량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제법 주막집까지 있었습니다. 마을은 후에 저기 보이는 승지촌에 소속되여 갔습니다.” 룡정“3.13”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마을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페촌되여버린 마을자리에는 나무와 잡초가 무성할뿐 그 옛날 사람살았던 흔적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있었다. “‘3.13’운동에서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낀 철혈광복단성원들은 자나깨나 무기를 갖춰야 하겠다는 생각이였지요.” 철혈광복단 단원인 최봉설, 한상오는 무기를 갖추기 위해 로씨야에 건너가려고 작심했다. 이에 그들의 부친들은 자래우던 송아지를 팔아 려비를 마련해주면서 어떻게하나 총을 구해가지고 오라고 고무해주기도 했다. 로씨야에 건너간 두 사람은 막로동판에 뛰여들어 돈을 벌었다. 돈이 되는 일이기만 하면 무슨 일이나 마다하지 않았다. 무기를 사기 위해 아글타글 돈을 모으면서 죽을 고생을 격었다. 돈이 모아지자 그들은 권총 4자루, 보초 2자루, 수류탄 몇 개를 사가지고 귀향했다. “3.13”운동이후 연변각지에서는 반일무장단체가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그들은 무장근거지를 건립하고 군사훈련소, 사관양성소같은 것을 대량 설립하여 군사인재들을 양성하는 한편 민간에 있는 렵총과 재래식총을 거두어들여 재빨리 자신을 무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반일단체들에서는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거나 일제주구들의 집을 들이쳐서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한 이러한 방법으로는 급속히 발전장대해지는 반일대원들의 무기수요를 만족시킬수가 없었다. 대량의 무기를 구입해다 반일무장대원들을 무장시키자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금활동으로만으로는 대량의 무기를 구입할 돈을 모을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씨비리에서 쏘련사회주의혁명을 무력으로 간섭하려고 쳐들어왔던 체코군단이 패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보총 한자루와 탄약 100발을 일본돈 30원에 마구 팔아버리고있었다. 이것은 군자금만 손에 쥐면 맘대로 무기를 구입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1919년 여름, 연변지역의 유지인사들은 군자금을 모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에게 주어 무기를 구입해줄것을 부탁했다. 하여 2000여자루의 총과 수십만발의 탄알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수도중 무기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나 침몰되는 바람에 아까운 무기를 몽땅 바다에 던지고말았다. 이러한 후과를 책임져야 했던 김하석은 연길현 와룡동에 있는 철혈광복단 단원 최봉설에게 빠른 시일내에 군자금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철혈광복단 단원들인 최봉설, 윤준희, 림국정 등은 빠른 기일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면 금융기관에 있는 조선인들과 줄을 달아야 했다. 그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국민회 회원인 전홍섭(全洪燮)이 조선은행룡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윤희준은 전홍섭에게 룡정촌 예수교병원뒤쪽 공동묘지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띄웠다. 약속한 시간에 윤준희은 림국정과 함께 전홍섭을 만나서 상급의 지시와 금자금 모금정황을 소개한후 “일본놈들이 회령에서 룡정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 구체적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아주 손쉽게 해결할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전홍섭은 자기도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번 참가한적 있다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윤준희 등 기타 대원들은 그 동안 은행궈탈취에 수요되는 준비사업을 하기로 하고 혜여졌다. 그러던 1919년 12월 그믐날 전홍섭은 끝내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룡정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가 다게다 지로우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는데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15만원의 현금을 수송해오게 된다는것이였다. 전홍섭은 즉각 최이봉의 장인인 김하규를 통해 최이봉에게 비밀통지를 전달했다. 1920년 1월 1일, 전홍섭의 비밀통지를 받은 최이붕은 즉시로 윤준희를 찾아갔다.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수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는 내용의 글이 씌여져있는 쪽지는 너무도 돌발적이고 격동적이였다. 윤준희와 최이붕은 단숨에 와룡동에 있는 김하석집으로 뛰여갔다. 전홍섭의 쪽지를 받은 김하석은 윤준희와 최이붕더러 인차 명동에 있는 김계하의 집에 찾아가서 거기에 대기하고있는 박웅세와 김준을 만나 행동계획을 면밀히 짜라고 지시했다. 1월 3일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이붕,한상호, 림국정 등 6명은 교동에 있는 김계하네 집에 집결하여 습격계획을 짰다. 습격지점을 동량어구로 정하고 행동편리를 위하여 여섯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었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비장한 격전 15만탈취사건의 참가자 최계림(앉은 사람)과 림국정. 1919년 반일운동이후 림국정과 최계림이 러시아에서 무기를 가지고 나올 때 찍은 기념사신. 1920년 1월 4일, 집집의 굴뚝마다에서 늦은 아침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이따금 개짓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오는 동량마을은 오늘따라 느닷없이 한가로워 보인다. 눈덮인 사자산은 흰사자가 허리를 꼬며 휘우듬이 돌아앉아 있는듯 사뭇 웅위롭기까지 했다. 하늘향해 머리를 건뜻 쳐든 선바위는 위풍도 당당했다.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명동촌을 떠나면서 여섯은 사자산과 선바위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거사가 성공되리라로 굳게 믿었다. 일행은 유익하의 집에 들려 점심을 먹은후 숨도 돌릴새없이 길을 다그쳤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삼림속으로 목적지까지 가야 했는데 많이 내린 눈으로 하여 발이 눈속에 푹푹 빠지기도 했지만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어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족 류충괴, 리수옥이 경영하는 주막에 들여 식하한후 두 개조로 나뉘여 큰길옆 버들방천에 숨어 송금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겨울바람은 사정없이 휘몰아와서 용사들의 얼굴을 핥아놓았다. 움직여도 모르겠는데 꼼작안고 숨어있자니 그 추위가 더욱 가심했지만 이들은 입을 앙당그려물고 추위을 참았다. 1시간이 지났는데도 은행권수송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4일 아니면 5일이라 했으니 혹 래일 오는 것이 아닐가. 래일 다시 와서 기다려야 하는걸가. 대원들은 추위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서성이기만 했다. 윤준희는 최이붕더러 한 개 소조를 데리고 계속 버들방천에서 기다리게 하고 박웅세, 김준과 함께 회령방향으로 정찰을 떠났다. 반시간후에 윤준희일행은 짐실은 말을 앞세운 적들의 수송대를 발견했다. “수송대가 틀림없소! 김준형, 어서 최이붕소조에 소식을 알리오!” 윤준희는 간단히 명령하고 박웅세와 함께 길옆에 매복했다. 김준에게서 소식을 받은 최이붕일행은 인차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들이 오는 방향을 향해 줄달음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적들의 수송대는 거들먹거리면서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가 점점 똑똑히 알렸다. 은행권을 실은 말이 앞서서 오고 그 뒤로 우편물을 실은 마차가 따르고있었다. 일행은 도합 6명, 룡정에서 파견한 은행원 하루구찌, 회령은행출장소 서기 김용억, 일본순사 나가도모, 박연흡, 상인 진길풍 그외에 우편원 하라가시이였다. 우편물을 실은 마바리와 은행권을 실은 마바리를 앞세우고 그 뒤로 진길풍과 나가도모순사가 말을 타고 따르고있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루구찌은행원과 박순사 맨뒤로 가시하라가 따라오고있었다. “땅! 땅!”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맵짠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던 것이다. 대원들은 일제히 일본놈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와 상인 진길풍이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말에서 떨어진 일본순사 나가도모가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박웅세와 김준의 철봉에 맞아 당장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기타 수송대원들은 겁에 질려 사시나무떨 듯 와들와들 떨기만했다. 그런데 총소리에 놀란 말이 내처 앞으로 내달렸다. “빨리 말을 잡아타오!” 윤준희는 소리치면서 은행권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최이붕이도 달려와 우편물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윤준희와 최이붕은 15리 떨어진 팔포강 산중턱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조금후 한상호가 달려왔다. 마바리에 실은 흑색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셋은 환성을 터치였다. 10워짜리 지페 5만원, 5원짜리 지페 10만원 도합 15만원의 새돈이 꽉 차있었던 것이다. 셋은 돈을 나누어가지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할 작정이였다. 한편 박웅세와 김준은 습격지점에서 자기들의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우편물을 실은 말을 몰고 윤준희일행이 떠난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밤새 지치고 아침까지 굶다나니 맥이 없어 쓰러지군 했답니다. 윤준희가 급한 김에 권총을 빼드로 ‘빨리 걸어라! 안 걸으면 죽여버리겠다. 이러다간 붙잡히고만다’ 라고 하자 최봉설이 권총을 맞대며 ‘왜 동지를 죽이려 하느냐, 네가 쏘면 나도 쏜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 어떻게 하나 같이 가야지’ 라고 맞대들었답니다. 그러자 쓰러졌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또다시 간고한 급행군을 했답니다. 동성에서 해란강을 건느는데 신을 벗고 맨발바람으로 성에장이 뜨는 물을 건너 강기슭에 올라 땅을 디디니 자갈돌이 발에 척척 붙어나더랍니다. 부르하통하를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답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최봉설의 아들 최동현씨의 진술이다. 일행은 간고한 급행군을 하여 새벽 3시경에야 와룡동에 다달았다. 그들은 최이붕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늘어지게 잔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김하석이 있는 의란구 류채구로 출발했다. 의란구에서 모든 준비를 갖춘 윤준희, 최이붕, 한상호, 림국정 등 4명은 김하석과 함께 1월 10일 돈을 휴대한후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15일에 로씨야 모구위에 도착, 거기에서 약 1주일간 기다렸다가 22일에 배를 타고 울지보스또크를 향발, 23일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여 당지의 반일지사이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기자에게 에 대해 설명해주고있는 룡정사업위원회  최근갑회장.(2004년 4월말.) 최후의 순간 사건이 발생한후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1월 5일 룡정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도난사건을 사출해내려고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평강일대에 파견하여 조선인들은 검거체포했다. 1월 6일 일제는 일본경찰 36명과 지방순경 57명을 동원하여 와룡동을 수색하면서 도난사건의 실머리를 잡게 되었다. 하여 최이붕의 종적을 찾아 사처에 수색망을 펼쳤지만 최이붕일행은 이미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난후였다. 일제가 윤준희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악에 바쳐 발광하고있을 때 이들은 신한촌에 머물러 있으면서 최의수란 소개자를 앞세워 일본돈으로 루블을 바꾸는 한편 무기상들과 련계를 맺기 시작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기만 하면 갖고온 돈으로 3만여자루의 총을 살수있는데 연변에 있는 반일단체는 물론 울라지보스또크의 500여명 조선족반일투사들까지도 완전히 무장시킬수 있었다. 무기구입을 책임진 림국정이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한 것이 끝내 화근으로 되고말았다.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 숨어들어 일제의 졸개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곁으로는 무기를 사는 일을 근심말라고 호언장담하면서 감쪽같이 우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일본정부는 헌병대의 정보를 제공받은후 즉각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을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였다. 조선인반일투사들을 일망타진할 주밀한 계획을 세운 일제는 1월 31일 밤 신한촌을 대검거하기 시작했다. 윤준희 등이 무기교섭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즐겁게 술을 마셨는지라 눕자마자 꿈나라에 떨어지고말았다. 한밤중 개들이 자즈러지게 짖어대는 통에 잠을 털고 일어난 일행은 왁작대는 바깥동정에 정신을 차리고 준비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있었던 것이다.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갑자기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셋은 어쩔새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뒤방문곁에서 자고있던 최이붕이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하고 문을 박차고나가면서 앞에 서있는 일본군을 발길로 걷어찬후 나는 듯이 달려가면서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일본군헌병들이 최이붕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은 취이붕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맨발로 계속 앞으로 내처 뛰였다. 얼마 안가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상처를 입었다. 몇번이나 눈앞이 캄캄해나는 것을 참으면서 뛰고 또 뛰였다. 최이붕은 반일비밀공작원인 채성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번 사건으로 하여 현장에 있던 일본돈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으며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고말았다. 울라지보스또크의 일본헌병대는 윤준희일행을 체포한후 조선인반일무장단체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 들이댔지만 “15만원 탈취사건”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1920년 2월초 일본놈들은 윤준희일행 3명을 청진감옥에 압송하였다. 얼마후에는 또 서울서대문감옥에 압송하여 갔다. 거기에서 이른바 “15만원도나사건”에 해한 공개재판을 열었다. 재판석에서 윤준희를 비롯한 반일투사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행동은 정의적인 거사로서 무죄하다고 절규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이야말로 죄악적이라고 규탄했다. 1921년 8월 25일, 일제는 서울감옥에서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을 사형에 언도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때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 림국정은 27세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이붕은 그후 “적기단”을 결성한후 단장직무를 맡고 쏘련과 연변에서 무장투쟁을 벌린 한편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12    제12장 “3.13”후의 반일무장단체들 댓글:  조회:1946  추천:0  2014-02-05
1920년 9월 청산리전투를 앞두고 왕청현 서대파에 모인 북로군정서 장병들. 앞줄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장군.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무장단체들 료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무장투쟁 노도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3.13”운동의 경험교훈이였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데 있어서 “외교독립론”이거나 중국정부의 힘을 빈다는것은 닿지도 않는 일이라는것을 피의 교훈으로 느낀 각계 반일단체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더욱 강력한 무장투쟁을 벌리기 위하여 무장단체의 결성과 무기구입, 군자금모집 및 반일기지건설의 방침을 제정하고 힘차게 밀고나가는것만이 생로라는 것을 알고 즉각 대오를 무장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내세우게 되었다. 간도국민회 간도국민회는 “3.13”반일운동후 연변에서 그 영향력이 가장 크고 세력범위가 가장 넓은 반일무장집단이였다. “3.13”반일운동이 일어난 이틀후인 1919년 3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연변의 반일의사들은 연길현 지인향 솔완자(지금의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에 모여 “3.13”학살사건의 경험교운을 총화한 뒤 “한족독립기성총회”(회장 구춘선)를 건립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각지 반일운동을 지지 지도하고 민중을 조직, 동원하면서 반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을 악질 친일분자들을 체포, 처단했으며 운동자금을 모연하기도 했다. 3월 21일 로씨야에 파견되였던 김약연, 정재면이 돌아온후 이들은 민족독립은 남에게 의거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반일무장단체를 결성할것을 결정하였다. 하여 “한족독립기성총회”를 “간도국민회”(회장 구춘선)로 개편하였다. 소재지는 하마탕(후에는 의란구 구룡평에 옮겼음)에 두었다. “간도국민회”는 중앙총회아래에 다섯개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소재지와 탄탄한 간부진용을 갖고있었다. 촌지회도 100여개가 있었다. 1920년 봄부터 “간도국민회”에서는 경호대와 국민회군 등 군사조직을 내왔다. 경호대 총사령은 리용(李鏞), 국민회군 사령은 안무(安武)가 맡았다. 이들은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지회에 교관을 파견, 청장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진행, 군대에 편입시켰다. 1920년 8월의 총병력수는 450명,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이들은 또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속에 사관훈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920년 5월 국민회군은 홍범도의 독립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신민단의 부대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간도국민회”는 전 동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반일단체였는데 회원이 8000여명이나 되었다. “간도국민회”는 반일단체들의 통합에 힘쓰면서 반일무장투쟁에서 련합을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금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취득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1920년 “경신년대토벌”후 국민회군은 기타 반일부대들과 함께 북만의 밀산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고 홍범도를 사령으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로씨야로 이동하였다. 주요간부들은 국민회의 회복건설에 힘썼고 1921년말에는 리동휘가 지도하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참가하여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중앙총회를 건립하고 민족해방투쟁을 견지하였다.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대종교동도본사의 주관 서일이 지난날의 반일의병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중광단”이 발전되여 세워진 반일무장단체이다. 1919년 5월, 서일은 유교계인물들과 함께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개편하고 10월에는 정의단을 반일무장조직인 “대한군정서”로 개편하였다. 그해 12월에는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병사모집과 군사훈련, 무기구입 등에 힘을 모으면서 반일무장조직을 확대했다. 북로군정서는 정치행정사무, 군자금모연, 군인모집, 지방통신련락, 교제, 경비 등 사무를 담당하는 총재부와 군사훈련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담당하는 군사령부 두 조직체가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부는 왕청현 덕원리에 있었는데 서일이 총재를 담당하고 수하에 부총재, 비서장, 비서, 서무부장, 재무부장, 인사국장, 경리국장, 계사국장, 탁지국장, 모연국장, 징모국장, 경신국장 등을 두고있었다. 군사령부의 소재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두고있었다.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리장녕이였다. 수하에 참모부장, 려단장, 련대장, 참모, 련성대장, 군기국장, 군범국장, 군계보관, 정탐대장, 참모, 군의정, 부관 등을 두었다. 총재부산하에는 지방경신국과 경비대가 있었는데 35개 경신분국, 200여명 경비대원이 있었다. 군사령부산하에는 400여명 학생을 수용한 사관훈련소가 있었는데 김좌진이 소장을 맡았다. 1920년 9월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은 1600명, 동년 화룡현 청산리로 진출한 병력은 600명이였다. 무기장비는 보총 1300자루, 기관총 7정, 권총 150자루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끝내고 북만의 밀산으로 철퇴한 북로군정서는 연변으로부터 철퇴한 각 반일부대들과 련합하여 서일을 총재로하는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그후 그들은 로씨야에 철퇴하였는데 그때 서일은 밀산현 담벽진에 남아서 군정서군대들을 규합하여 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로씨야에 철퇴한 부대들은 “자유시(즉 스보보드니시)참변”으로 하여 좌절되였고 같은해 8월 17일에는 친일토비 고산의 습격으로 하여 하루밤사이에 담벽진의 기지는 파괴되고 무장을 탈취당하였으며 수십명의 장병들이 살해되였다. 크게 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7일 담벽진 뒤산에 올라가서 돌을 베고 누워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였는데 당년 41세였다.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은 이름난 의병장 홍범도가 1919년 “3.1”운동후 원래의 옛부하들을 토대로 세운 순수한 반일무장단체였다. 홍범도는 10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19년 9월 연변에 왔다. 그후 인차 다른 부대와 합쳐 400명의 병력으로 늘었다. 홍범도의 리상은 조선국내진입작전이였다. 《연변항일사적지 연구》(김철수)에 따르면 “당시 중국관방의 자료에도 일단 빠리강화회의에서의 교섭이 실패하면 전대(결사대)는 백산의병대장 홍범도대장의 인솔밑에 의기를 들고 혈전하려는 계획이라고 기록하고 일제의 1919년 10월 9일 첩보자료에도 ‘홍범도는 결사대 2500명을 인솔하고 조선내지에 침입하려고 기도하고있다’고 기록되고있는 정황과 1919년 12월 13일의 조선함경남도 지사의 보고요지의 ‘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불령선인들의 수령 홍범도수하에 약 2천여명의 부하들이 있는데 독립운동의 준비로 부하들을 날마다 훈련시키고있으며... 그 근거지를 내두산에 설치하고 음력 11월기간에 조선내지로 침입하여 일본관현과 교전할 계획을 하고있다’는 등 자료들을 놓고볼 때 홍범도는 확실히 일제와의 싸움을 첫 자리에 놓는 주목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대한독립군은 후에 국민회와 합하여 국민회산하에 귀속, 국민회의 근거지를 자신의 기지로 삼고 전문 전투에 뛰여들었다. 홍범도부대는 다른 무장단체들과는 달리 “3.1”운동후에 무장투쟁을 준비한것이 아니라 이미 기성된 부대로써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나갔다는 특점이 있다. 홍범도는 특히 반일무장단체들의 련합을 선도해 나섰다. 국민회와의 련합을 실현한후 련속하여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를 열어 통일과 련합문제을 토의하였다. 잠시 통일은 가져오지 못했지만 련합전선을 결성할데 대한 협의를 맺기도 했다. 1920년 대한독립군은 군무도독부와 통합,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한후 근거지를 왕청현 봉오동(지금 도문시)에 옮기였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는 정일(征日)제1군사령원의 신분으로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후 각 무장단체들에서는 련합전선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면서 통합을 찬성하는 서명운동을 진행, 동도독군부로 통합(북로군정서를 제외)되였다. 홍범도가 사령관을 맡고 근거지는 연길현 의란구 구단구 산속에 두었다. 사령부 산하에 4개대대를 두었다. 1920년 8월중순 홍범도부대는 일제침략군을 부단히 타격하기 위하여 근거지를 떠나 이도구일대로 이동, 반일기지를 세우고 유격전을 벌리였다. 국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반일부대들도 이도구와 삼도구일대로 이동하여 홍범도부대와 함께 이름난 청산리전역을 벌려 일본침략군을 호되게 족쳤다. 기타 반일무장단체들 리명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한민회는 로씨야에서 성립된 “대한국민의회”의 지부로서 1919년 4월 14일경에 성립되였다. 훈춘한민회군사부 부장은 황병길(후에 김정)이였다. 1919년 7월 한병길은 결사대를 보집하여 “급진단”을 건립한후 연통라자 서골에 땅 40상을 사서 귀틀집 7채를 짓고 대오를 4개중대로 편성한후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에 “의사단”, “포수단”과 합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로 정식 편성되였다. 1920년 새롭게 군사부를 편성 최경천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새로 구성된 군사부는 군내에 엄격한 군사규률을 세우고 간부선거 등은 민주적으로 진행했다. 군사부에서는 조선진입전투를 벌리면서 일제침략군을 타격했다.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는 의민단은 연길현 숭례향 차조구(현재 안도현) 천주교 교회당에서 천주교신자들을 위주로 하여 세운 반일단체다. 본부는 차조구 천주교 교회당에 두었다가 후에 명월구 묘구로 옮겼다. 의민단무장력은 200여명, 1920년 5월 국민회군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에 편입되였다. 최명록을 총재로 하는 도독부는 “3.13”운동후 봉오동에서 자위대형식의 반일무장조직을 건립한 기초우에서 결성한 단체이다. 병력은 200명밖에 되지 않지만 지반이 든든하고 식량공급이 충족했다. 1920년 3월과 5월 도독부는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 결정에 의해 국민회, 훈춘한민회, 홍범도군 및 기타 반일단체들과 함께 북로독군부를 편성, 홍범도를 정일(征日)제1군 사령으로 6월에 봉오동전투를 벌리였다. 그후 령도권문제로 홍범도와 모순이 발생하여 7월에 홍범도군은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으로 이동하고 최명록군은 라자구를 거쳐 동녕으로 이동했다. 최명록을 부장으로 하는 북로독군부는 1920년 5월 27일 봉오동에서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도독부군, 홍범도군이 련합하여 결성하였는데 후에 의군부, 의민다과 신민단도 련합여 들어왔다. 병력은 600여명, 기관총 2정, 5련발보총 355자루, 38식보총 13자루, 30식보총 28자루, 구식보총 4자루 합계 보총 400자루가 있었고 이밖에 각종 권총 18자루, 수류탄 다수가 있었으며 식량이 충족했다. 리범윤을 명예단장으로 김성극을 단장으로 하는 광복단은 의병장 리범윤이 로씨야에 갔다가 “3.13”후에 돌아와서 반일의병을 규합하여 결성한 단체인데 반일단체이면서도 또한 리조왕권의 광복을 꾀하는 조직이였다. 병력은 150명이고 본부는 왕청현 대감자이북의 곰골에 있었다. 1920년 10월 22일 어랑촌에 갔다가 동녕으로 철퇴, 다른 부대들과 함께 대한총군부를 건립하고 리범윤을 사령을 추대했다. 리범윤을 총재로 하는 의군부는 “3.13”후 공교파들이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병력은 200여명, 10월초 홍범도군과 함께 와룡동에 갔다가 다시 라자구를 거쳐 동년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김종식을 의사부장으로 하는 라자구의사부는 “3.13”후 라자구에서 조직되였다. 처음엔 대장에 리춘범, 최정국이였다. 10월경에는 개선을 거쳐 김리근이 의사부장으로 활약했다. 병력은 200여명이였다. 그외에도 림창세를 총재로 하는 야단, 김중건을 단장으로 하는 대진단, 리백성 등이 조직한 의형제단, 리춘정이 성립한 구제단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궐기해 나섰다. (계속)  
11    제11장 룡정“3.13”반일운동 댓글:  조회:2396  추천:0  2014-02-05
3만여명 조선인동포들이 참가한 1919년 룡정 반일집회. 노호하는 3만 조선족군중 부패군벌과 맞서고 한족 반일군중들도 조선족과 어깨 곁고 싸워 “3.13”반일의사릉 반형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3.13”반일의사릉은 멀리에서도 유표하게 알린다. 하얀 비석이며 잘 정리되여 있는 묘들을 가쯘하게 가공된 석재로 둘레를 쌓아올려 보기에도 한결같이 정연했다. 앞줄에 모셔진 묘소가 9자리이고 뒤줄에 모셔진 묘소가 4자리였다. 기념석비정면에는 한자로 “3.13반일의사릉”이라고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족인민군중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정책에 저항하여 일떠나 민족독립을 재취하기 위하여 벌린 군중성적혁명투쟁이다. 동월 17일 룡정합성리공동묘지에서 순난렬사들을 안장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지방당국의 잔폭한 죄행에 항의하였다”는 비문과 19명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그들로는 채창현(蔡昌鉉 충렬대 지휘자), 공덕흡(孔德洽 출렬대 기수), 박문호(朴文鎬), 김흥식(金興植), 정시익(鄭時益), 현봉률(玄鳳律), 김승록(金承록), 김태균(金泰均), 장학관(張學觀), 김종묵(金종默), 허준언(許俊彦), 김병영(金炳榮), 박상진(朴尙鎭), 최익선(崔益善), 현상로(玄相魯), 리유주(李裕周), 차정룡(車正龍), 원인선(元仁先), 리균섭(李均燮) 등이다. 룡정“3.13”반일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화강암으로 다듬어만든 석비를 어르쓸면서 입을 열었다. “1989년 한국 동아일보 문화부 부장 리영철씨가 ‘3.13’반일운동좌담회에 참가하고저 왔을 때 이 묘소에 대해 물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하반년부터 찾기 시작했습니다. 수십차의 답사를 거쳐 합성리의 방청화(당시 81세)로인에게서 우연히 ‘만세묘지’가 있었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들을 묻은 묘소라는것이였습니다.” 그 로인을 앞세우고 고증한 결과 바로 최근갑선생이 애써 찾던 묘소였다. 하여 1990년 4월 10일에 확정하고 5월 19일에 연변 각지의 유지인사들이 모여 추모회를 열었다. “당시 주당위 장진발부서기가 힘되는 말씀을 하셨는데 잊어지지 않습니다. 장진발부서기는 ‘항일하다 사망된 사람은 민족을 불문하고 기념할수 있는바 이는 력사유물주의에 부합된다’고 지시했지요.” 이 자리에 안치된 렬사들은 모두 14명이였는데 후에 한분을 친척들이 딴곳으로 이장하여 가서 지금 13자리이고 5명은 그 당시 제마끔 안치했다고 한다. 3월 17일까지 5일장을 보았는데 4000여명 군중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길손들이 다니면서 추모하라고 이곳에 모신것 같습니다. 후에 추모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으나 일제가 공공연히 간섭하고 제지시키는 바람에 오는 사람이 뜸해졌지요. 렬사들은 70여년간 이 황페한 곳에서 쓸쓸히 지냈지요.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리들이 묘소를 파헤쳐보니 관에다 안장한것이 아니라 봇나무껍질에 감아서 모셨더군요.” 최근갑선생은 “3.13”반일운동은 물론 조선의 “3.1”반일봉기를 지지성원하는 연변인민들의 대규모적군중운동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떠올리였다.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자극받아 1919년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자결주의의 사조에 따라 일본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자 그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일으키여 온겨레가 민족해방을 위해서 일본관헌과 싸웠다. 물론 일본군대의 출동으로 탄압받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에서 210개 지방의 1500여개 단체들이 일떠났는바 동원된 인원은 200여만명이였다. 사망자는 7500여명, 부상자는 1만6천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7천여명이였다. 연변에서도 “3.1”운동전부터 울라지보스또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련계하여 운동준비를 공동으로 추진하고있었다. 하여 김약연과 정재면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강봉우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연해주에 파견된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한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하던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연변에 들어왔다. 하여 반일운동자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3월 13일 룡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결정, 대회장에 김명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고 준비에 서둘렀다. “‘3.13’운동은 사실상 1905년부터 온양되였는데 특히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된후 그 정서가 앙양되였지요. 각 학교에서 반일교육과 민족교육을 진행하면서 인재를 양성했고 이제 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가 나오면 조선, 로씨야, 연변에서 함께 일어나자고 기다리고있었는데 조선에서 먼저 터졌지요. 이에 연변의 학생들은 궐기해일어나 동맹휴학을 하면서 투쟁을 선도하자 기다리지말고 싸우자고 나섰습니다. 10여년간 준비해온 화산이 단꺼번에터진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의사부에서는 3월 11일 일본총령사관에 통지를 내여 일본령사관이나 일본인들을 해치지 않고 우리끼리 시위를 한다는 내용을 전달하였으며 12일에는 길림성성장과 북경 외교부에 전보로 소식을 알렸다. 또 연길도윤공서나 맹부덕퇀에서도 성에 “조선인들이 반일집회를 가지려는데 어떻게 대처할것이가”하는 청시를 올렸다. 당시 길림성성장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표시했다. “좋은 말로 권해서 시위를 하지 말도록 하게 하라” 이밖애 연길도윤서와 맹부덕부대는 각지에 명령을 내려 “상부지외에서 벌리는 조선족의 모든 반일활동에 대해서는 우리는 방관한다, 상부지내로 들어오는것을 견결히 막아야 한다”는 방침을 제정했다. 3월 13일의 폭풍 1919년 3월 13일 17명 이름으로 룡정반일집회에서 반포한 . 기원 1919년 3월 13일이 밝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지면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굵은 모래알까지 날려보내는 광란의 궂은 날씨는 대체 무었을 예고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룡정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녀인들, 지어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합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개산툰지방의 민중들은 자동의 정동학교 교원, 학생들과 함께 3월 12일 밤부터 주먹밥을 싸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민중들은 새벽에 떠나 명동학교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명동학교 학생들과 함께 나팔과 북을 울리면서 룡정을 향해 떠났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로두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곳이 1919년 3월 13일 반일집회가 열렸던 곳입니다.” 최근갑선생은 룡정시중심유치원마당에 들어서면서 한구석에 세워져있는 기념석비를 가리켰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석비 정면에는 한자로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새겨져있었다. 석비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 연변인민 3만여명이 이곳에서 회집(會集)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3,13기념사업회”라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저기가 천주교회당이 있던 자리인데 교회당 종소리가 울리면 대회를 거행하기로 했지요. 룡정빈관으로부터 룡정중학교(대성중학교)까지 가로 길이 빠었댔는데 길 남쪽은 치외법권내에 들어있는 상부지이고 치외법권내에 들지 않은 북쪽은 상부지외여서 대회를 상부지외에서 하기로 했지요.” 3월 13일의 반일집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일본총령사는 연길도윤에게 “만일 중국측에서 탄압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의 군경을 동원하여 탄압하겠다”고 통첩을 전했다. 이것을 알게된 장작림은 일본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발생될가봐 루차 길림독군과 성장에게 조선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것을 지시하였다. 연길도윤은 맹부덕군에 지시하여 령사관을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거사를 저지시키라고 하였다. 맹부덕은 13일 새벽부터 룡정거리에 보초를 세우고 순라대를 출동시켜 집집마다에 걸어놓은 태극기를 뽑아버리고 행인을 수색하였으며 룡정으로 들어가는 네갈래 통로른 전부 차단했다. 그러나 반일의 노한 물길을 막을수 없었다. 군중들은 총칼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룡정으로 모여들었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2만여명의 군중들이 집결했다. 그중에서 명동학교,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을 중심으로 320명의 “충렬대”가 조직되였다. 또 국자가 도립중학교의 조선인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자위단원 1000여명, 훈춘과 안도지방에서 하루 앞당겨온 용사들도 있었다. 독립선언축하회는 원래 정오 12시에 룡정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하기로 되었느나 지방군경들이 교회당의 대문을 닫고 종을 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당시 15살에 나는 림민호동지가 면바로 시위대오를 구경하느라고 교회당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림민호는 종옆에서 구경하고있었다. 대회측에서 대회를 선포하자 밑에 있던 사람이 “얘, 빨리 그 종을 쳐라”고 웨쳐서 얼결에 종을 힘차게 쳤는데 그것이 대회를 알리는 종소리로 되었다. 종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온 민중들이 태극기를 손에들고 대회장에 모여들는데 그 광경은 거세찬 폭풍우였다. 광야에서 열리는 집회였기에 군중들은 륜형을 짓고 그 중앙에 “정의인도>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오장기를 세웠다. 국자가 예수교목사이며 대회 회장인 김영학이 대회를 사회했다. 그는 우선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으로 된 “독립선언포고문”과 “고약3장”을 선독했다. 아(我)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4천년 력사의 방국(邦國)이요 우리는 2천만 신성한 민족이였노라. 그런데 아 력사를 시멸(示滅)하고 아 민족을 타파하여 기반하에 신음케 하며 롱락중에 고통케 함이 어언 십개 성상을 개력(開力)하였도다. 자(兹)에 아의 수부되는 경서에서 독립기를 선거(先擧)함이 사방이 파동하여 반도강산은 초목금수가 모두 향응하여 굉명(轟鳴)함일세. 우리 간도거류 80만 민족도 혈맥을 련속하며 성기(聲氣)를 상토하여 황천의 명소(明召)에 감열하여 인류의 계급에 동등하는바이다. 4352년(1919) 3월 13일 간도거류민일동 “독립선언포고문”랑독이 끝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어 류례균, 배형식, 황지영 3인의 독립주창연설이 계속되였다. 이에 군중들은 흐느껴 울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환호성을 터치였다. 천지를 진감하는 만세소리에 일본령사관에서 관리하는 간도보통학교의 학생들까지 뛰쳐나와 시위행진에 합류되였다. 이무렵 룡정시내 800호 조선족가옥마다에 태극기가 게양되여 모래를 날리는 광풍폭우속에서 힘차게 펄럭이였다. 대회가 끝나자 군중들은 일본총령사관을 향해 시위행진을 벌리였다. 철혈광복단 성원들이 맨앞장에 섰다. 기수 공덕흡이 “정의인도”라는 글자가 씌여진 오장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씨엉씨엉 걸었다. 그뒤로 명동중학교의 대오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기세 드높이 전진하였다. 군중들도 자발적으로 대오를 묶어가지고 뒤를 따랐다. 이때 맹부덕은 일본총령사의 사촉하에 졸개들을 거느리고 시위대오가 경과할 상부지계선거리에 총칼을 꼬나들고 대기하고있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군중시위대오를 막아선 맹부덕군대는 시위대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공덕흡의 기발을 빼앗았다. 이에 격노한 공덕흡은 수차 격투 끝에 기발을 탈환하여 가지고 정성스레 두손으로 받쳐들고 무정한 탄환에 선혈이 랑자하여 가지고도 계속 전진했다. 격분한 군중들이 군경들을 향해 돌맹이를 던지면서 방선을 돌파하려 할 때 반동군경들은 적수공권의 군중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수십명 군중들이 쓰러졌는데 공덕흡을 비롯한 10명이 당장에서 즉살하고 40여명이 부상당했다. 제창병원에 호송되여가 치료받던 도중 4명이 죽고(5명은 그후에 사망) 300여명이 체포되였다. 1919년 3월 17일, 1500여명 조선인동포들이 반일시위에서 순직한 14명 렬사를 합성리묘지에 모시고 추도식을 거행하는 장명. 대회조직자들은 즉시 시위대중을 해산시키고 구춘선 등 5명대표를 연길도윤공서에 파견하여 중국군대가 시위군중을 사격한 사건에 대하여 엄정히 항의하면서 수난가족들을 무휼하며 일체 손실을 배상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후 3월 17일 연변 각계층 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고 4천명이 룡정에 모이였다. 그들은 “조선독립순직자”라고 쓴 만장을 들고 희생된 14명의 령구를 메고 룡정 동남교외의 합성리공동묘지에가서 렬사들을 안장하고 “충렬자제공지묘”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3.13”반일운동에 참가한 한족들 “한족들도 ‘’3.13>반일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1919년 3월 13일의 정경을 설명했다. 앞장에 선 충혈대에는 동산소학교(한족학교)의 조선인학생과 한족학생들이 끼여들어 용감하게 전진했다. 조선인학생과 한족학생들은 어깨를 곁고 구령을 부르면서 나가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고 름름했다. 군경들이 막아서자 한족학생들이 새된 한족말로 질책했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는가! 부끄럽지도 않는가. 량심이 있는가!” “우리와 한편이 되어 나쁜 일본놈을 쳐야지 않는가. 총부리를 돌려라!” 한족학생들의 박력있는 질책에 군경들은 학생들 가슴에 견줬던 총을 내리면서 기죽기도 했다. 길회철도부설반대운동을 선도했던 관준언도 “3.13”반일운동을 지지했댔는데 그는 연길 북산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보호하기도 했다. 화룡현 소동구에 사는 안시영은 조선족뿐만아니라 한족군중들과도 단결하고 그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여 그들을 반일운동에 궐기시켰다. 마을의 한족 조옥재, 조옥귀, 조옥부 등 삼형제는 평시 일제와 경찰들에게 피해를 당해 적대감정을 가지고있었으며 정의감이 강한 지주였다. 안시영의 반일사상을 받아들인후 그의 령솔하에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3.13”의 연장으로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련달아 일어났다. 1919년 3월 16일 두도구에서 1000명 반일집회가 있었고 이튿날인 17일에 이도구에서 4000명 집회가 있었댔는데 조옥재는 소동구부근의 한족들을 추동하여 이 집회에 참가하게 했는데 무려 100여명의 한족들이 반일집회에 참가했다. 3월 20일 안시영 등이 주도하에 전개된 룡두산 500명 반일집회에도 조옥재를 위수로한 한족민중들이 조선인민중들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조옥재 등은 반일무장단체를 성원하여 군수물자를 운송하여 주었고 또 반일무장집단을 위하여 주동적으로 군수물과 군자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1920년 9월 국민회군이 이도구일때로 전이하여 왔을 때 한족들은 옥수수가루 200여근, 울로초신 100컬레, 무우 두마대, 조옥재집에서 자래운 200여근짜리 돼지 1마리, 현금 75원을 안시영이 준비해놓은 군수물자와 함께 조옥재가 친히 마차에 실어서 국민회군에 수송해주었다. 청산리전투때에도 조옥재는 마차로 부상자를 양개골에 세운 병원에 실어오기도 했다. 1924년 11월 국민회군이 북만으로 철회하기 위하여 과동준비가 수요될 때 소동구의 조옥재 등은 또 군수품을 직접 자기 마차에 실어서 이도구 자피거우에 운송하였는데 운송한 군수품으로는 동복 240벌, 보손 150컬레, 토시 100개, 피나무초신 250컬레, 초신 250컬레, 현금 250원이였다. 국민회군의 안무장군이 일본경찰에게 참살된후 유해를 룡정 동산에 안치하였다. 수많은 반일청년들이 안무장군의 묘소에 와서 참배는바람에 일이 잘못 뒤틀릴 것 같아 묘소를 옮기려고 할 때에도 조옥재가 나서서 집접 마차로 유해를 소동구의 내풍동에 실어왔다. 반일에 떨쳐나선 한족들을 어찌 조옥재형제들뿐이겠는가. 수많은 한족들도 항일에 떨쳐나섰으며 공훈을 세운 것이다. “3.13”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3.13”은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있게 추동했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족들을 반일에로 궐기시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여러 민족이 공동전선을 이루어야 하며 반드시 무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되었다.“3.13”반일운동은 연변의 반일운동을 반일무장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0    제10장 명동과 명동학교 댓글:  조회:2733  추천:0  2014-02-04
1930년 12월 명동학교 졸업사진. 중국조선인근대문화의 발상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 명동의 5대가족 선바위는 장려한 바위산이다. 지신진 신동골어구에 우뚝 솟은 선바위는 아무때 보아도 그렇다. 대지주 동한(董閑)이가 이곳 땅을 차지하고있을 때만 하여도 선바위를 비둘기바위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사이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였던것이다. 1899년 2월 18일, 김약연 등 회령과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높던 4대가족 142명이 하루사이에 여기에 이사왔다. 그때부터 비둘기바위를 선바위로 이름을 고쳤는데 아마 민족의 강한 절개와 굳은 신념의 표현이였을것이다. 선바위에 오르면 오랑캐령에서 발원하는 륙도하 량켠의 마을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장재촌, 동거우, 룡암촌(지금의 명동촌), 중영촌, 성교촌, 퐁락촌, 수남촌...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약연을 위수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왔습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바라보노라니 떠날 때 들려주던 연변대학 력사교수 박창욱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박교수는 5대가족에 대하여 하나하나 소개해주었다. 남종구는 종성5현의 한분인 남명학의 손자인데 이주시엔 환갑이 넘은 로인이였다. 그는 7명의 가족을 거느리고 제자인 김약연을 따라 명동지구로 이사해온것이다. 김약연은 일족 31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 처음에는 경제형편이 너무도 빈궁하여 땅도 없었으나 동생 유연이와 함께 7도구의 산골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거기에서 얻은 수확고로 동한지주의 집과 림야를 사서 1901년 규암재를 꾸렸다. 김하규는 일가족 63명과 함께 명동에 이주, 명동마을 건설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병규는 일가족 40명을 거느리고 명동에 이주하여 왔다. 로동력이 많고 재력이 있어서 4대가족중 제일 부유했는바 룡암촌과 중앙촌에 이르는 넓은 벌을 가지고있었고 대사동에도 밭과 가산이 있었다. 윤하현은 1900년에 명동으로 이사하여왔으니 4대가족 집단이주에는 속하지 않는다. 부친 윤재옥의 인솔하에 1886년 종성에서 광개향 자동에 이주하여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돈을 모았다. 후에 일가족 18명을 거느리고 명동으로 이사와서 룡암촌에 정착, 토지와 재산이 꽤 되었다. “명동에 집단이주한 5대가족은 북부조선에서 빈궁하여 살길을 찾아온 기타 류랑민과는 달리 세대로 내려오면서 관북에서 변경방술에 종사하던 무반출신의 후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종성5현의 후예들이거나 문하사람으로서 학식이 있고 다소나마 재력도 있는 유학자들이였지요. 그들이 집단이주한 목적은 척박하고도 값이 비싼 조선의 땅을 팔고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서 개간하여 잘살아보자는것이였고 썩어빠진 조선에서는 어찌할수 없으니 중국의 연변땅에 가서 조선민족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고 새 살림을 하자는것이였지요.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구국구민(救國救民)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습니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명동학교 선바위에서 내려 륙도하를 거슬러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장재촌이다. 장재촌마을 뒤산기슭에 멀리서도 유표한 보이는 봉분 세 개가 있다. 김약연과 부인 안연, 장자 김정근의 묘소이다. 1901년 김약연은 자기 동생과 함께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한족집을 사서 “규암재”란 서재를 꾸린 다음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 뒤를 이어 대사동에서는 김하규가 “소암재”, 중영촌에서는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1908년 명동에서는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려고 규암재, 소암재, 중영촌 함한서재를 합쳐서 명동서숙을 세웠는데 룡정의 서전서숙의 근대지향인 반일민족교육방침을 계승했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진행할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이때로부터 주위의 마을을 망라하여 명동이라 통칭했는데 “밝은 조선민족의 새 민족공동체라는 뜻”(박창욱)이다. 1909년 북간도교육단 단장 정재면이 명동에 왔다. 그의 영향하에 김약연 등은 근대화한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라고 개칭하였으며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최봉기를 서기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으며 유가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여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리희순, 정신태,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녀자민족학교를 병설했다. 그리고 마을에는 야학부를 꾸려 어른들의 문맹을 퇴치해주었다. 장재촌을 지나 계속 걸으면 길옆에 “윤동주생가”라고 새긴 자연석으로 된 석비가 한눈에 안겨오는데 길아래마을이 바로 명동촌이다. 마을에 들어서니 커다란 기와집이 한눈에 안겨온다. 새로 복원된 명동교회당이다. 교회종각이나 십자가는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의 종교적분위기가 다분이 안겨오는 교회당이다. 마당 한쪽의 기와비각속에 김약연공덕비가 모셔져있었는데 공덕비는 모진 세월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있었다. 웃모서리가 사정없이 끊기여버린것이다. 교회당옆에 마을의 정미소가 있고 정미소 왼켠에 난 길에 들어서면 금방 윤동주생가에 닿을수 있다. 8간기와집으로 된 윤동주생가 마당은 언제보나 깨끗하다. 몇 년전에 찾아왔을 때만 하여도 물을 기러 마셨댔는데 우물은 작년 장마에 꺼져버려 볼품없이 되어있었다. 명동학교자리는 마을의 중심지에 위치해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밭으로 쓰고있었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어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 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곳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자중학부였다고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 솟아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의 검)이 깃 치신 이 터에 그 씨앗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쓸쓸한 터밭을 향해 서있을라니 “명동학교교가”를 부르면서 발걸음도 씩씩히 군사훈련을 하던 열혈청년들의 기세 드높은 목소리가 귀전에 울리는것 같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하고있었다. 조선어문에 있어서 민족 글과 말을 알게 하는 것은 민족문화의 향상과 보급의 기초이며 문화 향상과 보급은 민족생존과 실력양성의 첩경이라고 인정되였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대한사략”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 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침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은 력사과작문에서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는데 이는 교장 김약연을 위수로 한 학교의 전통으로 되었다. 창가 역시 명동에서는 조선어문과와 마찬가지로 중시되였는데 창가는 민족의 존엄성과 적에 대한 저항정신을 제고시키는데 작용이 켰다. 체조는 병식체조를 말하는데 앞으로의 반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로 되었고 학생들을 일정한 군사기초지식이 있는 반일무장투쟁의 결사대, 전위대로 육성하기 위한것이였다. 민족의식에 대한 제고는 일제에 대한 증오에서 깊이 표현되였다. 교장은 “日本”을 “曰本”으로 또는 “倭놈”으로 불렀고 학생들도 따라했다. 후에 중국의 비행사로 된 서일포는 자기의 이름자에 있는 日자를 曰자로 고쳐 서왈포로 고쳤다. 학교의 명절에 사용하는 만국기에는 태극기는 있으나 일장기는 없었고 지리부도에도 조선을 독립국가로 여기면서 일본본토와 색깔을 달리 색칠했다. 명희선교원은 가끔 옷을 거꾸로 입고 다녔는데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으니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는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서였다. 1910년부터 1925년에 명동중학교가 페쇠되기까지 15년간 명동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그들중에서 저명한 반일인사와 교육자, 수많은 반일무장투쟁이 투사들이 나타났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3.13”반일시위운동에서 희생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많은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을 위수로 하는 의사들 그리고 민족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로 전변한 송산우,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종업생들이다. 20년대후에도 많은 인재들이 나타났는데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비행사 서왈보,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서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국내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행동이 곧 나의 유서 “김약연목사님은 언제나 조용하신분이였습니다. 천둥이 쳐도 끄떡하지 않을 그런 분이시였어요. 언제나 한복차림을 정히 하고 넙적고무신을 신었습니다. 구변과 웅변에 능하셨고 사리가 밝고 인정스러운 분이시였답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는데요 목사님이 나를 업어주었어요. 목사님은 남을 욕하는 법이란 없었답니다. 그분이 교장으로 계실 때 강의하시다가도 누구든지 강의에 집중하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고 자기의 종아리를 쳤다고 하데요. 학생을 책망할 대신 자기가 강의를 잘못했기때문이라고 스스로 자책을 했다는겁니다.” 명동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퇴직한 김재현씨의 말이다. 유가(儒家)사상을 숭배하던 김약연은 신앙마저 바꾸면서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그들의 영향으로 하여 유교만 고집하던 민중들은 신문화를 접수하면서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는바 1913년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와 학교가 병립된것이 36개소, 그 영향으로 세워진 사립학교가 62개소나 되었다. 김약연이 쓴 “동만료회 30년력사”라는 글에는 “3국전도회의 본부가 명동에 있다보니 각 교회와 학교의 임무가 거의 전부가 명동학교 출신으로 충당였다”고 씌여있다. 이런것을 미루어보아 연변에서의 기독교문화의 전파, 기독교를 통한 사립학교와 신문화의 발전은 명동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할수 있다. 김약연은 서양문화인 기독교를 접수하면서도 민족의 리념, 사상과 의지만은 잊지 않았으며 민족정신을 언제나 주되는 위치에 놓았다. “명동이 중국조선민족문화의 중심지로 되게 된 것은 김약연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창욱교수는 김약연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무진장했던 김약연은 무슨 일에나 앞장섰다고 한다. 나무를 메여도 세사람몫을 담당했고 기와나 벽돌을 구울 때에도 힘든 일을 남먼저 하면서 기술을 제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배워주었다. 후학들의 교육사업을 위하여 자신들의 토지가운데서 10/1의 제일 좋은 토지를 학전(學田)으로 바쳐 공동소유로 하게 하였는데 1930년대에는 8만평으로 증가되였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거의 전부 공동체에 바쳤다. 반일의사 안중근, 구춘선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구국의 방도를 토의하기도 하고 독립의 꿈도 무르익히기도 하였다. 일제가 명동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명동을 “불령선인의 소굴”로 간주하고 감시와 취제를 늦추지 않던 1919년 3월 21일, 김약연이 간도대표로 로씨야의 니꼬리스크에 파견되였다가 돌아와보니 일본경찰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였다. 그러나 청나라에 입적한 김약연은 청나라 당국에 의해 2년동안 연금되여 일제의 체포망을 피할수 있었다. 1922년 연금에서 벗어난 그는 어느덧 55세의 나이가 되었다. 반일민족운동은 일제의 미친듯한 토벌로 저조기에 들어갔으며 사회주의사조가 바야흐로 일고있었다. 1924년에는 자연재해로 하여 경제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룡정이 새로운 문화도시로 된 형편에서 그는 마을사람들과 상론하여 중학교를 은진중학교에 넘기기로 하고 소학교만 명동에 남겨두었다. 김약연은 2년동안 정재면, 구춘선, 마진 등과 련계를 맺어 간도국민회를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실패하고말았다. 1929년 61세의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가서 1년간 수학하고 목사로 된다음 명동으로 돌아와서 명동책임목사로 되어 기독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1937년 룡정으로 이사와서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학교의 리사, 리사장으로 있다가 1942년 광복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다. 김약연의 제자 림재준은 스승을 이렇게 찬송했다. “규암선생의 일생은 맹자가 수양했던것과 가까운바 담담하나 싫지 않고 간단하나 고상하며 온화하면서도 리지적이였습니다. 선생의 일생에서 먼것은 가까운데서 비롯됨을 알수 있고 그 행동에서 결백함을 알수 있으며 사소한것에서 현명함을 알수 있습니다.”(계속)  
9    제9장 서전서숙 댓글:  조회:2080  추천:0  2014-02-04
1906년 룡정에서 설립된 서전서숙 룡정에  뿌리  내린  반일교육의 불씨 일제의 문화침략을 반대하는 불길로 서전서숙옛터 룡정시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구석에 두아름되는 비술나무 한그루가 름름히 서있다. 비술나무에는 “서전서숙기념나무”라는 패쪽이 걸려있는데 패쪽에는 이런 패문이 쓰여져 있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서전서숙은 조선족의 재래의 구학서당교육으로부터 신식학교교육에로 첫 걸음을 떼였는바 반일민족교육의 선봉이였다. 조선족신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 뿌리내린 이 나무는 력사의 견증으로 리상설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해가고있다. 기념나무 곧바로 뒤에 정자가 있는데 정면 웃모서리에 “리상설정(李相卨亭)”이라는 네글자가 새겨져있다. 정자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쏘련홍군동북해방기념탑”과 “심련수시비”가 세워져있고 그 중간에 바로 자연석으로 다듬은 “서전서숙”옛터 유적지기념석비가 세워져있다. 석비 정면에 “서전서숙”이라라는 네글자가 한자(漢字)로새겨져있고 반듯이 놓여진 다른 돌에 아래와 같은 비문에 새겨져있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근대학교요 민족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開塾 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3.13기념사업회 4월 4일9(2004년). 일요일이면서 청명날이여서 그런지 교정은 유난히 조용했다. 조무래기 몇이 운동장 저쪽에서 무슨 장난에 심취되여 있는지 쪼크리고 앉아 재잘거릴뿐이였다. 정자의 콩크리트바닥에 아무렇게나 터버리고 앉은 전임 룡정시문련 주석 김재권선생은 고즈넉한 교정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다가 자신이 펴낸 룡정시관광지점안내서 제1권 《유서깊은 해란강반》을 펼치더니 당시의 서전서숙을 찍은 사진을 가리킨다. 깔끔한 초가 앞마당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총총히 걸어 나오는데 포도넝쿨로 보이는 바자기둥에 “瑞甸書塾”이라고 새긴 간판이 보기 좋게 걸려있는 사진이였다. “서전서숙은 중국 조선인지역에서 제일 처음 세워진 신학사립학교인데 비문과 패문에 새겨진바와 같이 1906년 ‘헤그밀사사건’때 ‘돌아오지 않은 밀사’로 이름을 떨친 저명한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선생과 갈라놓고 말할수 없지요. 리상설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조선 충천북도 진천고을 덕산에서 태여났는데 조선왕조의 부승지(副承旨)로 리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적 있는 리룡우의 양자로 들어가 리희영, 리시영, 려조현 등과 리제촌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고 후에는 류린석에게서도 학문을 배웠습니다.” 김재권선생은 박밀듯 리상설지사에 대해 이야기 했다. 반일지사 리상설 서전서숙에 대해 설명하고있는 원 룡정시문련 주석이며 저명한 민간문학가인 김재권선생. 리상설은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1905년 “을사매국조약”이 강제로 체결될 때 리조 의정부의 참찬이였다. 그는 고종(高宗)의 고문인 헐버트박사와 사귀면서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고 구미자본주의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지식도 습숙(習熟)했으며 천주교, 불교, 유교 등 종교철학과 천문학, 지리, 고등수학, 법학 등도 습득하여 당시 학계의 권위자로 되었다. “20세때에 벌써 비범한 재주를 보여주어 ‘문행남하위관(文行南下蔚官)’이라는 찬송까지 듣게 되었다. 그후 그는 승정원 비서감, 비서랑, 성균관 교수, 성균관 관장, 탁지부 재무관 등 관직을 지냈다. 그는 고종에게 일제의 침략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였다. 그래서 당시 ‘광무가지(光武嘉之)’라는 말까지 세상에 전해여진 반일의사였다.”(일목 “조선족지구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반일학교 서전서숙”) 1904년 6월 리상설은 동지들과 함께 “대한협동회”를 조직, 회장직무를 맡았다. “대한협동회”의 회장단은 탄탄한 독립의사들로 무어졌는데 부회장은 “헤그밀사사건”때 화란 헤그에서 일제의 작간으로 제2차만국평화회의참가를 거절당한후 이에 격분하여 자결(화병으로 사망했다는 일설도 있다)한 리준이였다. 총무에 정운복, 평의장에 리상재, 서무부장에 리동휘, 편집부장에 리승만, 지방장에 량기탁, 재무부장에 허위였다. “일제가 조선을 강박하여 을 체결하던 1905년 11월에 리상설선생은 의정부 참찬으로 발탹되였는데 곧바로 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옥에 갖히기도 했지요. 일제는 이등박문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통감부정치를 실시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이 망국의 위기를 만회할수 없다고 생각한 리상설선생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만회해보려고 민족독립의사들을 서울에 모이게 한후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김재권선생은 정자의 천정에 그려져있는 리상설선생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말끈을 계속하여 풀었다. 그번 모임에서 민족독립의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 것을 결정, 구체지방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하기로 했다. 룡정은 조선인들이 집결된 곳이기에 반일교육을 진행하기 편리할뿐만아니라 북으로는 로씨야와 가까이 있어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편리했고 조선과는 두만강 하나를 사이두고있어 조선과 래왕하기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리상설 등을 선봉으로 해외로 나가기로 했다. 1906년 4월 18일(음력) 리상설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가산을 처리하고 리동녕과 함께 인천항에서 중국상선을 타고 상해를 거쳐 청도에 도착, 그 길로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리상설과 리동녕은 정순만(즉 왕창동), 황달영(즉 전공달), 김우용(즉 김동환), 려조현(즉 려준), 박정서(즉 박무림), 홍창섭 등을 만나서 연변에 나가 교육진흥사업을 밀고나가기로 협상했다. 그들은 그해 10월에 울라지보스또크를 떠나 룡정촌에 와서 자리잡은후 리상설의 자금으로 룡정기독교회장 최병익의 새로 지은 8간집을 사서 “서전서숙”을 창립하게 되였다. 반일민족교육의 요람 학교경비의 대부분은 리상설선생이 개인재산을 털어 해결하였다고 한다. 초대숙장은 리상설이 맡고 교원으로는 리상설, 려조현, 김우용, 황달영이 맡았으며 정순만, 리동녕 등이 구체운영을 맡았는데 제일 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반일을 취지로 한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서숙에서는 학생을 갑, 을 두반으로 나누었는데 갑반은 고등반이고 을반은 초급반이였다. 학생들에게 가르친 과목들로는 력사,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공법, 법률 등이였다. 리상설은 직접 “산술신서” 상, 하권을 편집하여 갑반학생들에게 교수하였고 황달영은 력사와 지리과를, 김우용은 초급반의 산술과를, 려준은 한문, 정치학, 법학을 가르쳤다. 서전서숙의 교원들은 다 열렬한 반일민족운동가들이였기에 모든 수업에서 반일애국사상을 관철하는 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서전서숙의 교육이 일제에 대한 비할바 없는 증오로 충만되였음을 1907년 9월 16일 통감부간도파출소 소장 사이또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있다. “한국황제가 양위하였다는 소식이 이곳(연변)에 전하여오자 교직원들과 년령이 많은 학생들은 모두 슬피 울었다. 그중 왕창동(정순만교원)이 더욱 심하였는데 그는 옷을 찢고 모자를 땅에 팽개치면서 분개해 하였다.” “간도서전서숙와산실록”에도 이렇게 기록되여 있다. “헤그만국회의에 조선대표들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하였다는 비보가 우리 학교(서전서숙)에 전하여오자 전교의 교직원, 학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현규환선생은 자신의 저서 《한국류이민사》에서 서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동척간행 ‘간도사정(間島事情)’ 기사중에 당시 통감부는 한국정부와 협동하여 간도한인보호책을 내정하고 1907년 봄에 륙군중좌 사이또 스에지로와 사무관 시노다 지사꾸 등을 밀행케 하여 간도파출소의 예정지 및 기타의 정황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의 주도자를 방문하였을 때 마침 리상설은 산책을 하려고 문을 나서려 하다가 이자들의 온뜻을 묻게 되었는바 일행은 상업시찰도중에 들렸다고 하였다. 때는 점심시간이였으므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더운물과 그릇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교위원들은 빌려줄수 없다 하여 랭랭히 이를 거절하고 리상설의 경위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일행은 할수 없이 강역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추겨가며 식사를 끝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오만하였는가는 알수 없는 일이다” “간도문제의 회고”를 쓴 사이또의 수행 사무관 시노다 지사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청사를 앉힐 적당한 자리를 찾기 위하여 한 학교에 들렸는데 교장으로 보이는 조선인신사가 불손한 태도로 우리 일행이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였다. 후에 알고보니 불손한 태도를 취하뎐 신사가 바로 우리 나라를 놀래우고 또한 리태왕의 퇴위를 반대하던 리상설임이 판정되였다.” 1907년 4월 고종왕의 밀서를 갖고 리상설의 동생 리상익과 리준이 리상설을 찾아왔다. 밀서의 내용은 5월에 열리게 되는 화란의 수도 헤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리준, 리위종(로씨야주재 공사 리범진의 아들)과 함께 수석특사로 참가하라는것이였는데 고종의 친필밀서였다. 리상설은 리준, 리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로씨야에 가서 로씨야주재 한국공사 리범진과 상의한 끝에 로씨야의 니꼴라이황제와 련계하여 로씨야대표의 알선으로 만국회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헤그에 이른 이들은 일제의 작간으로 회의참가를 거절당했다. 이에 격분한 리준은 자결로 반항했다. “리상설은 그 길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 각국을 역방하다 다시 울라지보스또크로 돌아가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1910년 권업회를 설립하여 사업진흥에 애쓰면서 하바롭쓰크로 가 군정부와 사관학교를 세워 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여 사무쳐오는 통분으로 침식을 잃고 지친 끝에 병든 몸을 코디스크로 옮겨 심음하다가 1917년 음력 2월 9일 눈을 못감고 천추의 원혼이 되고말았습니다.” 김재권선생의 비통에 찬 목소리다. 리상설은 서전서숙을 떠나면서 숙장을 려준에게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숙을 운영해나갔다. 그해 8월 통감부간도파출소가 룡정에 세워졌다. 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곳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지어는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하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에서는 단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연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으로 1907년 9월경 페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塔道溝)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끝맺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후 3개반 74명을 졸업시켰다. 각지의 반일학교들 서전서숙 운영자들은 합작하여 학교를 운영하자는 사이또의 제의를 단연 거절하고 학교교사를 팔아버렸다. 1908년 사이또는 방매한 서전서숙을 사들여 친일학교인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그후 서전서숙의 졸업생과 일부 교원들은 연변 각지에 흩어져 근대과학문화와 반일민족사상을 전수하는 사립학교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친일교육을 반대하고 수구적인 구학서당을 개혁하면서 일제의 문화침략에 대항해나섰다. 1908년 서전서숙 교원 박정서와 졸업생 김학연, 최기학 등은 명동에 가서 김약연 등을 설복하여 구학서숙인 규암재(圭岩齋)를 개혁하고 명동서숙을 설립하였으며 국자가 서쪽 와룡동에서는 서전서숙출신인 리병휘 등이 교편을 잡으면서 창동서숙을 창동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리동춘, 김하석, 김립, 윤해, 구춘선, 계봉우, 장기영 등에 의하여 소영자에 길동기독학당이 설립되였다. 길동학당은 원래 반일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정법과와 중학부 그리고 부속소하교와 녀자야학부를 설치하였는데 학생은 모두 100여명이였고 합숙제를 실시하였다. 나중에 경제난으로 정법과와 중학부를 페지하고 속성사범과로 개편하였다. 길동학당은 그후 1914년에 광성학교로 개칭되였다. 1907년 신홍남, 김종만, 홍우만, 리진호, 김리택, 송창회, 서성권, 문경 등은 창동학교를 설립하였다. 연길시 소영향 민흥촌 와룡동에는 1935년에 창동학교를 기념하여 세워진 “사은기념비”가 지금도 건재해 있다. 1912년 화룡현 삼개사(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후저동에서 김성래, 김윤승에 의해 사립정동중학교가 설립되였다. 1912년 전후 북간도지방에서는 사립청파학교(화룡현 호천포), 사립덕흥학교(지신사 영암촌), 사립장동학교(덕신사 장동촌), 사립영신학교(룡정촌) 등 반일사립학교가 우후죽순마냥 설립되였다. 1916년 일본측 조사에 따르면 그 시기 조선인학교수는 182개였고 총학생수는 3,836명이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1928년에 북간도지방에는 사립학교가 211개나 있었는데 은진중학교(1917년 7월에 설립되고 1920년후에 중학부를 증설), 명신녀자중학교(1920년 6월), 일광학교(1920년 8월), 동흥학교, 동흥중학교(1921년 4월), 영신중학교(1921년 6월), 해성소학교(1921년 8월), 대상중학교(1921년 10월) 등 이름난 학교들도 이 시기에 설립되였다. “서전서숙은 페교되였지만 서전서숙에서 배양해낸 한점의 불꽃들은 그후 연변 각지에 흩어져 이같이 반일민족하교를 설립하면서 연변의 광범한 청소년들에게 근대과학지식과 반일민족사상을 전파하는 중견인물로 되었지요.” 김재권선생은 서전서숙기념석비와 서전서숙기념나무를 바라보면서 감개무량해 말한다.(계속)
8    제8장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댓글:  조회:2020  추천:0  2014-02-04
조선인사회의 지도자 김약연선생 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단체들 조선인  사회의  건설을  위해 몸부림 1910년대의 반일단체들 “간도협약”이 체결되자 연변의 조선인들은 한결같이 일떠나 룡정에다 간도총령사관을 설치하고 조선인에 대하여 “치의법권”하는것을 반대해나섰다. “간도협약”이 맺어지자 일제는 상부지내에서 “령사재판권”을 실시했고 잡거구의 조선인에 대해서는 “지조권(知照權)”, “청심권(聽審權)”, “복심신청권(復審申請權)”을 실시하려고 책동했다. 이에 각지 진보적인사들은 반일단체를 묶어 저항해나섰다. 이런 단체들가운데는 반일보황주의를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고 자산계급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으며 러시아와 중국의 급진파들과 련합전선을 결성할것을 주장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물론 조선인반일민족전선은 신구사상의 교체시기에 처해있어 일정한 경향성은 있었으나 료원의 불길같은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해 그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 1910년 훈춘현성에서 리종호 등을 주요간부로 한 해도회(海島會)가 성립되였다. 연해주와 간도에서 한글자씩 따내 이름한 이 단체에서는 러시아와 연해주, 훈춘, 간도의 반일지사들간의 련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각지와의 통신련락에 전력하면서 일제의 동태를 정찰했다. 1911년 왕청현 덕원리에서 대종교수령 서일이 중관단(重光團)을 묶고 단군숭배를 반일민족사상으로 고취, 반일인재양성에 힘쓰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서일은 후에 자신이 건립한 대한군정서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총재를 맡고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밀고나갔다. 북로군정서 산하에는 총재부와 군사령부가 있었는데 김좌진장군이 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북간도 룡정거리. 1912년 왕청현 백초구에서 조상갑을 단장으로 하는 급당(急黨)이 성립, 중국신해혁명에 편승하여 민중을 폭동에로 궐기시켜 민족독립을 실현하려 하였다. 1912년 훈춘현성에서 김학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상무회(商務會)가 성립, 훈춘시의 시민과 상인을 반일민족운동에 궐기시켰다. 1912년 화룡현 덕신사에서 김태일을 단장으로 하는 민권당(民權黨)이 성립되였다. 종지는 급당과 동일했다. 1912년 왕청현 라자구에서 김천보를 회장으로 하는 농상회가 성립되였다. 농상회는 농업과 상업을 추진하는 단체로 표방했으나 실지로는 “반일흥한(反日興韓)”을 주장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하여 산업을 진흥시키려 했다. 1913년 훈춘현성에서 황병길을 회장으로 하는 기독교교우회가 성립되였다. 기독교교우회에서는 기독교신자들을 반일민족운동에 궐기시키기에 힘썼다. 1913년 훈춘현에서 박상규를 총리로 하는 둔전영(屯田營)이 성립되였다. 이 조직에서는 중한반일인사들을 련합하여 반일공동전선을 결성할것을 주장했다. 1914년 연길현 의란구에서 황성현을 회장으로 하는 친목회가 성립되였다. 이 단체에서는 일제의 통감정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호상협력할것을 주장했다. 그외에도 연길현 동성용에서 성립한 사우계(士友契), 룡정에서 성립한 청년친목회, 국자가에서 성립한 대동협신회(大東協新會) 등 수많은 반일단체들이 있었는데 이런 반일단체들에서는 일제의 중국침략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인에 대해 식민통치를 유지하는것을 반대해 나섰다. 그중에서도 1913년 5월에 민국정부의 인정을 받으면서 성립된 “간민회(墾民會)”가 영향력이 큰 반일단체이다. 간민회는 후에 반일보수단체인 “농무회”와 첨예하게 대립된다. 조선인사회 건립 위하여 “간도협약”이 체결된 1개월후인 1909년 10월, 화룡현의 진보적인사들인 박무림, 김약연 등 30여명은 일제의 “치외법권”을 반대하기 위하여 “한민자치회”를 결성하고 민중을 동원, 일제와 그 주구단체인 “일진회”의 죄악을 폭로단죄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들은 연변에서 “민족자치”를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듬해 1월 연길부청에 인가신청을 제기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족들이 일본과 청나라를 반대하여 “독립하려 한다”고 날조하면서 청나라에 “한민자치회”를 해산시킬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연길부윤 도빈(陶彬)은 “귀화입적”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청나라통치를 탈리하여 “조선인자치”를 실시하는것을 허락할수 없다고 했다. 청나라 역시 조선인들이 청나라통치를 벗어나는것을 두려워했던것이다. 1910년 3월 조선인종교계인사 40여명이 조선인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국자가에 “간민교육회”를 설립하려고 연길부윤 도빈에게 인가신청을 하였다. 도빈은 조선인교육에서 “중국어를 주요과목”으로 가르치고 교수법과 기타 교과서 등도 “청나라의 지도에 의거”할것을 전제조건으로 “간민교육회”를 인정하여 허락했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귀화입적한후에는 중국경찰학당까지 졸업한 중국어에 능통한 반일친중국파이며 조선족교육가인 리동춘(1873년생)이 “간민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였다. 정부에서는 그에게 로임까지 지불했으며 수하에 서기 몇사람을 두고 일하게 했다. “간민교육회”는 지회를 각 현에 건립하였는데 1911년의 통계에 의하면 회원이 130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간민교육회”는 저명한 반일운동가인 리동휘, 김립 등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받기도 했다. 특히 소영자 길동학당에는 “간민교육회”의 중견인물들이 운집하여 있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간민교육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간민교육회에서는 ‘조선이 망했으니 조선에다 국적을 둘 필요가 없다. 조선에 국적을 둔다는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 국적을 중국에다 옮기자’는 반일친중국사상을 선전하면서 ‘신학’을 제창하고 ‘구학’을 개량하기에 힘썼습니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인들의 이러한 활동을 환영하였습니다.” “연길부윤 도빈은 간민교육회내부에 ‘간민교육연구회’를 비밀리에 설치하게 하고 그 회원들에게 조선인을 통치함에 있어서 나타난 문제들을 조사하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의견들을 제출할 임무를 주었다.”(전신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손중산을 위수로 하는 “동맹회”는 만청봉건통치를 뒤엎고 중화민국을 창건하였다. 중화민국림시정부에서는 “련성자치제(聯省自治制”)를 주장했다. 이것은 “간민교육회”의 대단한 활력소였다. “간민교육회”에서는 리동춘 등 4명의 대표를 북경에 파견하여 려홍원(黎元洪)부대통령을 만나 연변지구 조선인사회상황을 보고한후 “간민자치회”의 성립을 허락해줄것을 바랐다. 려원홍은 찬성을 표시하면서도 “자치”란 두 글자를 취소할것을 지시하였다. 1913년 5월 “간민교육회”는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고 국자가에서 총회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간민회장정”을 정식으로 통과한후 간부들을 선거,임명하고 동남로관찰사서(東南路觀察使署)의 인가를 받았다. 저명한 반일활동가인 김약연이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간민회”는 자기의 종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간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땅에 이주한지 40여년이 되고 간민인구도 수십만에 달하나 식견이 어둡고 종래로 흩어져 거주하기 때문에 통일된 규범도 없다. 이에 간민회를 조직하여 민중지간의 감정을 소통하고 중국의 법률을 연구하여 민중들을 민국의 법률에 복종하게 하며 공화정부의 보호에 의거하여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언어, 풍속의 통일을 기하여 노력할것이다.” “간민회에서는 망국노를 원치 않는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국국적에 가입하고 중국정부에 의거하여 중국법률의 보호하에서 자치를 실시하며 나아가서는 연변을 반일민족운동의 기지로 건설하려고 하였다.” (전신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마침 민국정부에서도 1912년 국적법을 제정, 반포, 조선인들에게 귀화입적하여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날것을 요구했다. 민국정부에서는 연변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인들이 일제의 통치기반에서 벗어나 중국의 통치를 받기만 하면 연변에 대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령토주권을 수호할수 있다고 인정하였던것이다. 간민회에서는 지체없이 “입적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민회에서는 또 구학을 반대하고 신학을 제창하며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봉건가부장제와 봉건미신활동을 반대하는 “사숙개량운동”을 전개하여 조선인들의 개화를 추동하였다. 각지에 야학교와 식자반을 꾸려 문맹퇴치사업도 전개했고 농민들로 하여금 생업을 개발하고 수입을 증가하게 하기 위해 “식산흥업(殖産興業)”운동도 벌렸으며 조혼을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간민회에서는 러시아의 “권업회”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졌고 미국과 러시아에 건립된 “국민회”와도 련계를 가지면서 비밀리에 반일민족활동을 전개하였다. 간민회에서는 간민교육회를 계승하여 연변에서의 반일문화계몽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펼쳐나가면서 조선인자치운동을 전개했다. 간민회의 활동을 상해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1920년 1월)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간민회의 조직과 활동은 간도조선인사회의 새기원을 열어놓았다.”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간민회의 활동은 연변에 살던 유림(儒林)들의 강력한 반발을 자아냈다. “그것은 간민회가 주장하는 민주공화정치와 신문화교육운동은 공매지도를 ‘중화(中華)’사상으로 이어가려는 유림들의 주장과는 어긋났고 또 그들의 사회기반이였던 서당교육을 궁지에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김춘선 “ 간민회와 농무계의 대립”) 이에 유림들은 사회단체로서의 “농무계(農務契)”를 조직하여 간민회와 법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공교회(孔敎會)를 건립하여 신앙활동으로 대중적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1913년 6월 29일,간민회가 성립된지 몇 달 안되여 연변의 유림들은 연길현 지신향 솔완자에 모여 농무계를 출범시켰다. 최남기가 총회장에 당선되였다. 그해 11월에 200여명 유림들이 모여 “공교회연길지회”를 정식으로 창립하고 공자묘까지 세웠다. “농무회와 공교회에서는 조선인들의 입적을 반대했으며 입적한다는것은 민족과 조상을 배반하는것으로 여겼습니다. 또 신학을 반대했는데 신학에는 인류교육의 최고의 도덕이 없다는것이였습니다. 1912년 중화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된 원세개는 공맹지도를 국교로 삼는다고 공포했습니다. 때문에 공교회를 믿어도 중국정부에서는 어쩌지 못했지요. 유림들은 간민회에서 회비를 강제징수한 문제,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부담을 안긴 문제, 일부 향약이나 렬신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리용하여 간민회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간민회에 대한 유림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간민회의 활동에 상당한 곤난을 조성하여 주었습니다.” 박창욱선생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면서 모순의 실질은 신구문화사상간의 투쟁이였고 초점은 입적여부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한편 간민회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중화민국 2년 12월 2일 김약연은 동남로관찰사서에 “보고”를 올려 “공교회”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그자들은 공교의 세력에 등대고 첫째는 유신교육을 훼방하고 둘째는 간민회를 반대합니다. 무릇 어떤 종교든지 그 성격을 보면 도덕을 양성하는것인데 간민구학구(舊學究)들이 조직한 공교회는 절대로 선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그자들의 행실을 따져보면 형식은 공교의 이름을 띠고있지만 내용은 농무계와 한동아리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앞날에 지방행정에 실제 위험으로 되는 문제입니다.” 중화민국 3년 6월 1일자 동남로관찰사서 “연길현공서보고 제154호”에서 연길현지사 관운종은 이렇게 피력하고있다. “대체로 간민회는 적극적인 주의를 가지고 한민교민을 간민회에 받아들이였고 귀화민을 입적시키고 치발역복을 하게 하고 공화민권을 신장하여 일한합병‘’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농무계사람들은 모두가 중국에 거주한지 오래된 초간, 월간 한족(韓族)들로서 전답과 재산을 가지고있으므로 망국에 대한 사상이 약했다. 비록 곁으로는 입적하지 않았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동화되여 가고있었으며 복장과 풍속은 여전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수구파의 표현이였다. 그들은 유신파들이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것을 보면 저항하고 격렬한 수단으로 무리를 지어 공격했다. 이것이 간민회와 농무계의 의견상이이다.” 정부에서는 농무계와 간민회의 상호비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화해시켰으나 치렬한 대립은 계속되였다. 그러다가 1913년 11월 3일 공교회 회원 정안립이 길신녀학교에서 공교회년례를 치르던중 간민회회원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이에 농무계에서는 관찰사서에 상소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앉아버티기를 하려고 하였다. 조선인의 두 단체는 다 반일친중국견해이면서도 이렇게 법정에서도 민간에서도 계속 첨예화되였다. 한편 관찰사서에서는 간민회와 농무회간의 대립의 첨예화가 일제에게 중국내정에 간섭할수 있는 언턱거리를 줄수 있다고 보고 곁으로는 간민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지지하는척 하면서도 실지로는 감독, 간섭, 단속하였다. 1914년 3월 원세개는 지방련성자치기관을 철페할데 관한 명령을 하달, 이에 근거하여 길림동남관철사서에서도 포고 11호를 반포하여 “간민회와 농무계가 모두 자치성격을 띤 조직이므로 즉시 해산”할 것을 선포하였다. 연변조선인의 반일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놀던 간민회는 이렇게 력사의 무대에서 정치적 막을 내리게 되였다. (계속)  
7    제7장 간도일본총령사관 댓글:  조회:1856  추천:0  2014-02-04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투쟁을 진압한 소굴 연변의 풍부한 물질자원을 수탈한 수뇌부 죄악의 붉은 담장 네귀에 삼엄한 또치까를 앉힌 우중충한 붉은 벽돌담장, 2메터도 넘는 그 붉은 담장에 옹위되여 있는 미색의 건축물-룡정시 륙도하로 869번지. 룡정시인민정부사무청사로 사용되고있는 이 건축물이 바로 악명이 자자한 간도일본총령사관유적지이다. 지금은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애국주의 교양의 터전으로 각광받고있지만 일제치하에 시달리던 그때 누가 감히 이 건축물을 바라볼수 있었으랴. 악마의 아구리인양 쩍 벌리고있는 그 시커먼 철대문으로는 누런 군복의 일본경찰들이 밤낮으로 반일지사들을 붙잡아 들이느라 혈안이 되어 실북처럼 드나들었으리. 1909년 9월 4일 청나라를 강요하여 “간도협정”을 체결한 일제는 길림으로부터 조선 회령에 이르는 길회철도수축권을 얻었으며 국자가, 백초구, 두도구, 룡정 등을 일본에 개방하는 상업도시로 정하고 연변에서의 령사재판권을 얻었다. “간도협약” 제2조, 제7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해 11월 1일, 일제는 룡정에 설치하였던 “한국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간도일본총령사관”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침략활동을 감행하게 된다. 3월 13일(2004년), 기자가 “룡정‘3.13’반일운동85주년기념대회”보도를 위해 찾아갔을 때 으리으리한 이 철대문앞에서 전임 룡정시문련주석이며 저명한 민간이야기수집가인 김재권선생을 만나 간도일본령사관 정황을 묻게 되었다. “지금 보고있는 이 청사는 1922년 11월에 불탄후 1924년에 착공하여 1926년에 준공된것입니다. 건축면적은 2,503평방메터인데 담장에 싸여있는 울안은 42,944평방메터나 됩니다. 령사관은 지하 한층까지 합해 3층으로 되었는데 중간 남쪽이 보는것처럼 5층로 돌출되여 있습니다. 바같벽은 미황색타일을 붙였고 지붕은 저렇게 록색뼁끼칠을 한 양철지붕입니다. 청사뒤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있는데 반일투사들을 취조하는 감옥이였지요. 지금은 룡정혁명력사전람관입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건립된 그날부터 연변지구에서 하늘에 사무친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여 항일애국지사들에 의하여 두 번이나 불에 타 잿더미로 되었습니다.” 김재권선생은 깨끗하게 정리되여 있는 정원길로 천천히 걸으면서 간도일본총령사관을 소개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은 건립초기에는 대리총령사와 부관 1명, 서리생 2명, 경찰서장 1명과 16명의 경찰뿐이였다. 그러나 1920년에 한국통감부로부터 300명의 경찰을 끌어왔으며 총령사관에 경찰부를 두었다. 동시에 10여곳에 경찰서를 설치, 1928년 10월 2일에는 일본으로부터 100여명의 경찰을 끌어왔으며 1931년 11월에는 총령사관 경찰부에 “특수수사반”을 두고 지하당의 정보를 수집하고 혁명력량을 파괴하는 죄악적활동을 감행하였다. “1930년 11월의 조사에 의하면 총령사관 경찰부의 관할밑에 룡정촌, 국자가, 두도구, 동불사, 로두구, 팔도구, 천보산, 의란구, 대립자, 걸만동, 팔도하자, 백초구, 량수천자, 훈춘, 흑정자, 훈춘두도구 등 18개곳에 경찰서 혹은 경찰분서를 증설하였습니다. 1935년 5월의 통계에 의하면 경관은 646명이였습니다.” 1937년 11월 5일, 일본과 괴뢰만주국이 체결한 “만주국의 체외법권을 철회하고 남만철도부속지행정권을 양도할데 관한 조약”에 의하여 그해 12월에 “간도일본총령사관”과 5개 령사분관 및 경찰서를 철회하였다. 그후 룡정 총령사관자리에는 “개척병원”이 들어앉았다. 령사관의 관리들은 전부 일본관동군과 그 소속하의 특무기관에 넘어가고 경찰들은 다 괴로만주국경찰기구에 들어갔다. “특수수사반”은 “간도특별공작반”으로 개칭하고 계속 죄악적활동을 감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소굴 당시의 룡정거리. 청사 뒤의 지하실문을 여니 좁은 복도가 나진다. 몇메터 들어가니 가로 빠진 복도가 다시 보였다. 복도 량켠에는 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간방과 고문실이였다고 한다. 첫칸부터 다섯 번째칸까지는 혁명렬사박물관을 설치해놓을 예정이였고 이미 3칸을 꾸려놓고있었다. 간소하지만 일제의 죄악이 한눈에 안겨오게 꾸며져있었다. 정부울안을 정비하면서 발굴했다는 일제가 사용하던 총칼이며 취조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진렬되여있는 세 번째칸에 들어서니 저도 몰래 긴장되고 불안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달틀”은 시커먼 녹이 쓸어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얼마나 많은 반일투사들의 손목이며 발목이 거기에 결박되였댔을가. 얼마나 많은 혁명자들이 이 형틀의 이슬로 사라졌을가. 땅바닥에 놓여있는 한틀의 작두!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진렬장에 놓여있는 녹쓴 창칼, 녹쓴 탄알... 반일혁명가들의 가슴터치는 고함소리가 금방 귀전을 두드리는듯 하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16년동안 간도총령사관 소속 경찰서에서 조선족반일투사들을 28,245명을 체포했는데 그중 녀자가 1121명이였습니다. 각종 형벌을 받은 사람은 16,949명이나 됩니다. ‘9.18’사변 이후인 1934년 한해의 례만 들어도 대단합니다. 한해동안에 3,635명이 체포되였는데 그때 연변에 조선족들이 426,000여명이였으니 인구비례를 따지면 170명당 1명이 체포된셈이지요. 총령사관에서 여북했으면 보이라실까지 감옥으로 설치하지 않으면 안되였겠습니까? 보이라실로도 모자라자 이번엔 청진감옥으로 압송했습니다. 1930년 제4차공산당사건시에는 300여명 혁명자들이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여 가기도 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아직 발표하지 않은 “1907년-1945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연변조선족인민들이 받은 피해정황”이라는 론문원고를 건네여주면서 비분에 차 말했다. 론문원고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45년 사이에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일제는 연변지구에서 조선인반일군민 4만여명을 살해했고 38,000여명을 체포구류했다. 그중 반일인사가 10,165명이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2월말까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연변의 조선인반일무장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벌린 대토벌을 박교수는 이 론문에서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일제는 침략군 2만여명을 동원하여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했다. 그번 대토벌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야수성을 남김없이 들어냈는바 간곳마다에서 3광정책을 추행했다. 그번 토벌을 사람들은 ‘간도참안’이라고 한다. 토벌에서 반일군민 2,600여명 살해되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당지의 군벌과 결탁하여 “3.13”반일시위를 탄압했으며 1930년 5월에는 연변인민들이 발동한 “붉은 5월투쟁”을 탄압했다. 1931년 9월 20일에는 팔도하자 소명당현동에서 기관총으로 12명의 청장년을 살해하고 시체를 집안에 넣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1932년 4월 2일에는 침략군 제19사단이 연변에 기여들어서 “천명을 오살할지언정 공산당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웨치면서 야만적인 대학살을 감행해 4000여명을 살해했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사촉하에 감행된 죄행은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수 없다.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는 룡정에다 황민교육을 선향하는 보통학교를 세운후 국자가, 투도구, 배초구 등지에다 분교를 세웠습니다. 령사관에서는 소비돈, 교과서, 기숙사를 공급해주는 등 수단으로 많은 조선인학생들을 유혹하여 끌어들였습니다. 제1기 졸업생중 40%가 일본순사거나 경찰, 직원으로 된것만 보아도 이런 학교들에서 친일분자양성을 주목적했다는 것을 알수 있지요.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일제가 간도총령사관을 설치한것은 침략세력을 확대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조선사람을 취죄하기 위한것이였으며 조선의 신민통치를 위협하는 반일기지를 박멸하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총적으로 간도일본총령사관은 연변을 침략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탄압하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는 수뇌부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분노에 차 말했다.   소가죽 한장의 전설   김재권선생은 간도일본총령사관 터자리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면서 말끈을 푼다. “기유년에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일본 놈들은 청정부를 욱박질러 룡정에 총령사관을 세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지을바에는 크게 지어 한치라도 중국 땅을 더 삼키고싶었던 령사놈은 못된 궁리를 꾸며냈지요.” 일본령사는 국자가에 자리잡고있는 청나라 도태부에 있는 윤대인을 만났다. 웃음속에 칼을 품고있는 일본령사는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곁으로는 웃음을 살살 발라가면서 레절스럽게 말했다. “대인도 알다싶이 우리 두 나라는 자고로 친선적인 이웃이였지요. 내 오늘 대인과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나라의 일을 담론하게 되었은즉 그 영광이 하늘에 미치오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소?” “귀정부에서 룡정에 우리 총령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령사관원들이 당도하였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이옵니다.”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요. 대체 얼마나 큰 집을 세우려 하시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령사는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으면서도 곁으로는 빌붙는체 했다. “우리는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사람들이라 욕심부릴줄 모르웨댜. 그저 령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만 떠여주면 족하옵니다.” “뭐라오?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이랬소?” “예.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이랬소이다. 그만큼하면 족하옵지요.” 아무리 큰 소라도 가죽을 벗겨놓으면 큰 구둘에 절반도 펼가말가 하겠는데 령사관을 지을 자리를 소가죽 한장만큼 달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수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하여 다시 한번 물었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라 윤대인은 속으로 소국놈은 소국놈이로구나 하고 비웃으면서도 꼭 간특한 궤교가 있을것 같아 일본령사를 피하라 하고는 관원들을 불러놓고 전후사실을 말했다. “그자들로 하여금 집을 지으라고 하십시오.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 집을 짓지 않고 좀이라도 우리 땅을 점하는 날엔 혼쌀을 먹여줍시다”. 한 관원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한물곬을 팠다. 일은 쉽게 락착되여 일본령사는 물러갔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놈들이 룡정에다 으리으리한 총령사관을 지었다는 소문이 윤대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닫는 말에 채찍을 갈기면서 룡정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과연 높다란 담장이 빙 둘러있는 속에 커다란 고층건물이 우뚝 솟아있었다. “이것이 그래 소가죽 한장만한 땅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언약도 없고 국제공약도 없단말인가?” 윤대인의 벼락터지는 소리에 일본령사는 되려 웃으며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린 언약대로 소가죽 한장만큼한 땅에다 령사관을 지었을뿐이옵니다.” “눈이 먼줄로 아는가? 이렇게 크게 집을 지어놓고도 소가죽 한장만큼이라니!” “룡정시장의 소 한마리를 사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가지고 재여서 딱 그만한 자리에다 토성을 쌓았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한번 손수 재여보시지요.” 령사는 미리 준비해놓고있던 소가죽을 가져오라고 하졸을 시켰다. 그런데 그 자가 가지고 나온 소가죽은 통것이 아니라 실오리처럼 가늘게 오리오리 오려낸 소가죽이였다. 령사가 오려낸 소가죽을 붙여놓으라고 하자 졸개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잠간사이에 소가죽을 붙여놓았다. 틀림없는 큰 소가죽 한장이였다. “이 소가죽 한장을 길길이 늘여놓으면 꼭 우리 령사관의 토성둘레와 같사옵니다. 소가죽을 통채로 놔두어도 소가죽 한장이옵고 오리를 낸걸 합쳐도 소가죽 한장이오니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가죽 한장이야 한장이지 두장이나 백장은 아니잖고 뭡니까?” 간특한 령사놈의 얼굴에 침이라고 뱉어놓고싶었지만 손수 대답한 말이라 윤대인은 입이 막히고말았다. 이렇게 되어 룡정에 으리으리한 일본총령사관이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계속)  
6    제6장 “간도협약” 댓글:  조회:1589  추천:0  2014-02-04
두만강가에서 조선류랑민을 수색하는 일제국경경찰들. 부패무능한 청정부 불평등조약 맺고 고난의 조선인들 이중악박에 모대겨 백두산 “정계비” 청나라 강희황제는 일찍부터 《청일통지(淸一統志)》를 편찬하여 청나라경역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물론 청나라-조선 변계가 두만강, 압록강이라는것은 명확했지만 상류지역은 지형이 복잡한데다가 인가까지 없어 그 분계가 명확하지 못했다. 게다가 두 강 상류에서 조선사람들이 청나라 관군을 살해하는 등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여 1691년에 대신을 파견하여 두 나라 변계를 재확인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20년후인 1710년 조선의 평안도 위원군에 사는 리만기 등 9명이 밤에 월강하여 산삼을 캐는 청나라 사람 5명을 죽이고 삼과 기타 물건을 로략질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강희황제는 두 강 상류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겠다는것을 확정, 우라총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압록강, 두만강 상류답사를 지시했다. 1711년 강희황제의 상류답사지시문에는 “...도문강은 장백산의 동쪽으로부터 흘러나와 동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도문강 서남은 조선경역에 속하고 강 동북은 중국경역에 속한다. 역시 강을 국계로 한다. 이점은 이미 명백한바이다... ”고 상세히 적혀있다. 목극등은 1711년 성지를 받들고 답사길을 떠나려다가 못하고 이듬해인 1712년 2월 17일 쪽배 10척을 만들어 흥경변(興京邊)으로부터 길을 물어 두도구로 나와 압록강을 따라 수륙으로 소행(溯行) 10일만에 조선 후주에 도착, 조선의 접반사 박권 등을 만나 5월 4일 혜산에 도착했다. 목극등은 8일에 곤장덕에 이르렀는데 통역관과 짐군 20명, 조선관원 6명, 길안내 2명과 함께 15일간 먹을 량식을 휴대하고 200여리를 걸어 강원을 규명하고저 11일 백두산산정에 올랐다. 당시상황을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조선문헌에 아래와 같이 서술되여 있다. “11일, 산정에 오르니 해가 서쪽에 기울어지고있었다. ...정상에는 큰 웅덩이와 같은 큰 늪이 있었는데 주위가 20-30리는 되는것 같았다. 늪물 색깔은 검푸르고 깊이는 알수 없었다. 여름이 다 되었으나 빙설이 쌓여있었고 바라보면 넓은 바다와도 같았다. 산모양은 멀리서 보면 흰 독을 엎어높은듯한데 산정에 올라가보니 사위가 솟아있고 독아가리가 우로 놓인듯한데 밖은 흰색이고 안은 고동색이다. 사위벽은 깎아 세운듯한데 금주단병풍을 두든듯 하다.” 수원을 살펴본 목극등은 “북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깎아지른듯 솟아있고 그사이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루었는데 그것이 바로 송화강원지이고 산마루에서 약 3-4리를 천천히 내려가니 압록강원지가 있었다”고 송화강과 압록강원지를 비교적 정확히 지적하였다. 일행은 동으로 흐르는 두만강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산아래서 동으로 흐르는 시내물을 발견, 그곳이 분수령으로 여겨져 “정계비”를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목극등은 “토문강이 땅속으로 흐른고로 강계가 불명확하니 비석을 경솔히 세울수 없다”고 지적하고 강물을 따라 동류(東流)여부를 확인하게 하였다. 수행인원들은 60여리 더 답사한후 저녁켠에야 돌아와서 “물이 과연 동으로 흐른다”고 여쭈었다. 그제야 목극등은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비문은 횡서로 “대청(大淸)”이라 새기고 종서로 “우라총관 목극등이 어명을 받들고 변계를 답사하면서 이곳을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土門)이니 분수령에 돌을 깎아 기록하노라. 강희51년 5월 15일, 필첩식 소이창, 총관 홍이가, 조선군관 리의복, 조대상, 차사관 허량, 박도상, 통관 김응헌, 김경문”이라고 새겼다. 이것이 력사에서 말하는 유명한 “정계비”이다. “두만강은 ‘투먼(土門)’으로 기록되였는데 녀진어의 음역으로서 ‘만물의 근원’ 혹은 ‘만수의 회합’으로 전이되여 불려진 명칭이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 그후 두 나라는 두만강, 압록강을 계선으로 량국의 변계를 수호하였으며 1714년 청나라에서는 훈춘협령을 설치, 변경지구의 순찰을 강화하였다. 일제의 연변침입 세월은 흘러 171년이 지났다. 그런데 170년여년후인 1883년에 이 정계비가 말썽을 일으킬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조선에서는 백두산 “정계비” 위치는 두만강강원에 세워진것이 아니라 “흙무덤”에 세워졌기에 비문의 “토문”은 두만강이 아니고 다른 강이라는 이설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170여년이 지난후 발견된 정계비위치가 송화강원류인 이도강강원 우쪽 ‘흙무덤이 문같이 생긴 곳’에 세워져있었겠는가? 그것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제이다. 아무튼 중국측은 후세사람들이 정계비를 옮겨놓았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강희황제의 지시를 받은 목극등이 압록강, 두만강의 ‘극진처’, 즉 두 강의 강원을 찾아 정계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송화강연안의 우라총관인 목극등이 두만강이 두 나라 변계라는것을 몰라서 송화강원류인 ‘흙무덤’에 정계비를 세울수는 없었던 것이다.”임희준선생은 “장백산 ‘정계비’ ”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흙무덤”에서 흐르는 강이 송화강원지이니 길림 등지를 경유해 흘러 흑룡강에 합류되는 송화강이 국계라면 광활한 지역이 다 조선땅이라는것이다. 1885년 9월에 진행된 제1차변계담판에서 조선은 “정계비”의 위치를 기준으로 변계를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청나라는 비문에 새겨진 “동쪽은 토문”의 “토문”은 두만강의 동이이자(同音异字)이니 두만강의 강원을 찾아 변계로 확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87년 4월 제2차변계담판에서 조선측은 “토문”이란 “도문”의 동음이자의 동일한 강이라는것을 묵인하였다. 결국 두 나라 대표와 정부에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종전처럼 량국의 천연적국계로 하자는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다.”(임희준 리춘 “19세기 80년대 중, 조 두 나라간 두차례의 ‘국계담판’ ”) 1897년 조선조정내의 친로파는 조선인민의 반일기운을 리용하여 친일내각을 물리친 뒤 고종을 봉대하고 “광무개혁”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후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하였다. 로씨야세력을 등에 업은 친로파들은 지난날 두차례의 변계담판에서 확인한 내용을 모조리 뒤엎고 또다시 “정계비위치”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변을 탈취하려고 음모했다. 이에 로씨야도 동조, “연변탈취”에 관한 비밀협정까지 맺는다. 1902년 “북변간도시찰특사”로 리범윤이 연변에 파견되여 온다. 연변에 온 리범윤은 조선족간민들의 호적과 토지를 조사하고 스스로 촌의 령장, 참리, 검찰, 감무를 임명하였으며 호구세를 징수하였다. 그는 또 “자위단”을 묶고 “사포대”를 조직하여 무장시켰으며 청나라관원들의 직무수행을 방해하고 청나라 백성들을 살해, 무장폭동까지 준비했다. 리범윤의 음모를 간파한 중국 길강군(吉强軍)은 폭동군을 숙청하기로 결정, 통령 호전갑(胡殿甲)은 1903년 4월 10일부터 16일까지 리범윤폭동군을 토벌하였다. 리범윤은 크게 패하여 도망쳤으며 하는수 없이 1904년 6월 화룡욕에서 “중한변계선후장정”을 체결하고 무력탈취음모를 포기하였다. 로씨야도 1905년 일로전쟁에서 패전, 로씨야세력을 등에 업고 연변을 탈취하려던 친로세력의 음모는 깨여지고말았다. 1905년 일로선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지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획책하였다. 1905년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불평등조약 “을사조약”을 맺는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연변은 전략상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일본이 서부일본의 니이가다 등지로부터 한국의 청진 등지의 항구를 개척하고 나아가서 청진-회령-길림을 련결시키는 길회철도를 부설하여 ‘뒤문’으로 동북을 침입하는것은 동부일본의 오사까나 고베로부터 료동반도로 침입하는것보다 더욱 가까운 로정이였으니깐요. 결국 일제는 ‘한국의 보호국’으로 자처하면서 ‘한국을 대신하여 간도소속문제를 해결한다’는 미명하에 연변침략을 획책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에서 “대륙침략의 선봉”이라고 할수 있는 구니모도는 “간도탐험기”라는 글에서 “간도란 압록강상류와 백두산구간에 있는데 백여년래 청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립지역이며 지금의 인구 25만중 조선인이 20만을 차지하고 토지도 대부분 조선인이 차지하고있다.” 그러므로 “간도”는 “응당 한국의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등박문은 친일내각 박제순을 사촉하여 한국정부의 명의로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간도한인을 보호해줄것”을 제기하도록 했다. 1907년 8월 일제침략자가 룡정에 설치한 소장 사이또중좌. 일제는 또 로씨야와 “비밀협약”을 맺는 등 교활한 수단을 피우면서 로씨야와 기타 렬강들의 입을 막아놓고는 일본군 중좌 사이또 일행 63명을 룡정에파견, 1907년 8월 23일부터 “조선총감부간도림시파출소”라는 간판을 걸고 이른바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사무를 보게 하였다. 그자들은 한편 “(1) 간도는 한국의 령토이다. (2) 한인들은 청국의 재판에 복종하지 말것. (3) 청국관헌들이 징수하는 일체 조세를 파출소에서는 일률로 승인하지 않는다. (4) 청국관헌들의 일체 법령에 대하여서도 파출소는 승인하지 않는다. (5) 청국관헌이 임명한 도향약, 향약 등을 한인과 마찬가지로 대할것이다”는 훈령까지 내렸다. 일제의 연변침입에 대해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하고있다. “일제는 김해룡 등 일진회회원을 리용하여 조선족간민을 기만 우롱하고 민족모순을 도발하여 조세를 청정부에 납부하지 못하게 하고 청정부의 지령에 항거하라고 선동하였습니다. 일본헌병들은 도처에서 중국내정을 간섭하고 사단을 일으켰습니다. 일제는 간도가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변계문제를 리용하여 대륙침략의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에 침입했던것입니다.”   룡정 소장 사이또와 그 일당들. 불평등조약 “간도귀속문제”와 “한인보호문제”를 두고 청일 두 나라에서는 장시기 티격태격하다가 1909년 2월 17일 조회에서 일본이 간도가 중국의 령토가 옳다는 것을 똑똑히 승인한후에야 담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연변의 조선인은 “한국신민”이기에 보호국인 일본이 그에 대한 재판권을 향유한다는것과 중일 쌍방이 길회철도를 공동경영하며 천보산동광을 공동개발할것을 제기했다. 청나라는 일제가 만약 조선인에 대한 치유권을 가지게 되면 연변은 표면상 중국령토이나 실제상 일본의 통치를 받는거나 마찬가지라는것을 간파하고 일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역시 ‘간도귀속문제’를 미끼로 로일전쟁후 동북에서 취득한 리권을 더욱 확대, 공고화하려고 지난날 해결하지 못한 안봉철도의 개축(경편철도를 광궤철도로 개축), 일제가 점령한 만철과 병행하여 청나라가 부설한 신민툰-법고간의 철도페지, 로씨야가 자난날 부설한 영구-대석교간의 철도를 일본에 귀속시킬것, 무순, 연대 탄광의 개발권 등 일련의 문제를 제기하였다.”(임희준 심홍매 “간도협약”) 드디여 1907년 9월 4일 일본특명전권대사 이슈인과 청국외무대신 량돈언(梁敦彦)이 북경에서 “중한도문강변무조약” 즉 “간도협약”과 “만주5조건”에 관한 조약이 체결된다. “간도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중일량국은 도문강을 중한량국의 국계로 삼으며 그 강원지방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를 경계로 할것을 성명한다. 제2조: 중국정부는 본 협약을 체결한후 지체없이 아래의 몇 개곳을 개방하여 각국인들이 거주하고 무역하도록 하며 일본국은 그곳에 령사관 혹은 령사분관을 설립한다. 개방날자는 따로 규정한다. 개방할 상부지는 룡정촌, 국자가, 투도구와 배초구이다. 제3조: 중국정부는 한민이 두만강 북쪽 개간지구에 거주하는 것을 비준한다. 그 지역은 따로 도면으로 설명한다. 제4조: 도문강이북지방 잡거구역내에 거주하는 한민은 중국지방관 관할하의 법권에 귀속되여 중국법권에 복종하며 중국관리들은 응당 한민들을 중국인과 동등하게 한다. 한인들의 민사, 형사 등 일체 소송사건에 대해서는 응당 중국관원이 중국법률에 의하여 공평하게 재판하며 일본국의 령사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자유로 재판청에 가서 재판을 들을수 있다. 인명에 관계되는 중대한 사건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사전에 일본국령사관에 조회하여 재판청에 가서 재판을 방청하게 한다. 만약 법률에 의하여 판결하지 않을 때 일본령사관은 신용을 보장하기 위하여 중국의 다른 관원을 파견하여 복심할 것을 신청할수 있다. 제5조: 도문강이북 잡거구역내의 한민들의 모든 토지, 부동산과 재산 등은 중국정부로부터 화민(중국인)의 산업과 마찬가지로 일률로 절실히 보호하며 도문강연안의 적당한 지점에 나루터를 설치하고 량국인민의 자유로운 래왕을 보장한다. 증명과 공문이 없이 무기를 휴대한자는 월경할수 없다. 잡거지역내에서 나는 미곡은 한민들이 판매, 운반할수 있다. 그러나 감산되였을 때에는 금지한다. 곡초나 땔나무도 상기 조례에 의하여 한다. 제6조: 중국정부는 장래 갈장철도를 연길 남부변경까지 연장시켜 한국 회령지방의 한국철도와 련접시킨다. 그 일체 관법은 길장철도와 마찬가지로 한다. 어느 때에 수축하는가 하는 것은 중국정부의 구체상황에 따라 다시 일본정부와 상의, 결정한다. 제7조: 본조약이 체결된이후 규정된 각항을 즉시 실행하며 일본총감부파출소 및 문무인원들은 2개월내에 말끔히 철퇴하며 일본국정부 역시 2개월내에 제2조에 규정된 상부지에 령사관을 설치한다. “ ‘간도협약’을 통해 연변지역은 점차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되였을뿐만아니라 일제에게 연변을 발판으로 동북내지를 점령할수 있는 ‘대문’을 열어주었다.”(임희준 심홍매 “간도협약”) 1910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는 “한일병합(韓日倂병合”을 실시하면서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부패무능한 청정부는 ‘간도협약’을 통해 뒤로 승냥이가 들어오게 문을 열어준것이지요. 비록 령토는 찾았지만 이때로부터 조선족의 이중국적문제가 제기되면서 조선족에 대한 이중적악박이 가중해지게 됩니다. 연변은 실제상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됩니다. 일제가 조선족의 반일민족운동을 탄압하는데 유리했으며 안봉철도개축권, 영대철도관리권, 길회철도부설권, 무순, 연대 탄광채굴권 등에서 리권을 취득하였습니다. 결국 동북은 더더욱 ‘식민지화’ 되었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간도협약”은 “불평등조약”이라고 베여 말했다.(계속)
5    제5장 피눈물의 지팡살이 댓글:  조회:1536  추천:0  2014-02-04
농촌녀인들 함지에 점심밥 담아 밭으로 나르고 귀가길에는 땔나무 이고 돌아온다. 지주 지방관청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에 녹아나는 조선족농민들 포산호의 억울함 태고연한 원시림과 잡목이 우거진 황지에서 흰옷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엄동의 눈보라를 가르며 괭이가 언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아츠럽다. 조선족간민들에 의해 황지는 차츰 밭모양을 냈으며 마침내 옥답으로 변하여 조며 감자농사가 제법 잘 되기만 했다. 한창 재밌게 농사를 짓고있을 때 난데없는 (만족식두루마기를 입은 점산호)들이 나타나 남의 땅에서 웬 농사질이냐며 호통친다. 다 된 곡식을 마구 짓밟으며 당장 떠나라고 을러메기도 한다. 주인없는 황지인줄 알고 개간했더니 점산호들의 사지증서안에 든 땅이였던것이다. 어떤 점산호들은 조선족간민들이 자기 땅을 개척하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다가 황지가 옥답으로 변한 다음 불현듯 나타나서 주인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자들은 계속 농사짓겠으면 소작료를 내라고 강요했다. 하여 조선족간민들은 자신이 일군 땅을 떠나거나 아니면 소작농으로 전락되여야 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에 대해 류병호선생은 “점산호와 포산호”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족간민들의 개황방법을 보면 첫해의 가을 혹은 이듬해의 이른봄에 잡초와 관목들을 베여낸후 괭이와 보습으로 갈아번지고 조를 심는데 첫해에는 밭고랑도 내지 않고 김도 매지 않는다. 이듬해부터 콩, 옥수수, 보리를 심었다. 이렇게 2-3년이 지나면 황지가 점차 옥답으로 되는데 이사이에 겨울이면 도끼로 나무뿌리를 찍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간민들을 당시 지방관청에서는 간민이라고 불렀고 한족과 만족들은 지호(地戶) 혹은 포산호(刨山戶), 즉 산을 뚜지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점산호의 소작농으로 전락된 포산호들의 생활이란 중세기 장원주의 농노와 같았다.” 산골짜기에 단풍물 오르고 밭곡식이 여물어서 누렇게 익은 가을, 탈곡장에 높이 쌓은 낟가리를 바라보면서 봄내 여름내 손이 갈라터지게 일한 보람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난데없는 날벼락이 날아든다. 무장한 졸개들을 거느린 다부살이가 탈곡장에 뛰여들어 마구잡이로 조선족간민들이 지은 곡식을 우마차에 실어간다. 자기들의 요구에 만족되지 않으면 그 집 안해를 빼앗아 가기도 한다.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자식까지 빼앗아간다. 포산호들은 혼히 4상의 토지를 소작맡으면 점산호의 1상의 밭을 무상으로 다루어주어야 했다. 또 해마다 10-20일간 점산호의 일을 무상으로 해주어야 한다. 이외에도 점산호를 위해 잡역을 해주어야 했다. 례컨대 음력설전후이면 점산호의 마소들이 1년간 먹을 사료를 썰어주어야 하며 립추전후이면 땔나무 50단을 하여 바쳐야 한다. 같은 글에서 류병호선생은 포산호들의 억울함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근채구의 점산호 손보산은 포산호들에게 매년 1상의 감자를 심도록 하였는데 꼭 김 세벌을 매게 하고 가을이면 잘된 감자만 골라 자기의 국수방에 가져오게 하였다. 점산호들은 잘 다룬 옥답을 빼앗아 례물을 많이 바치는 다른 간민들에게 소작주고 옥답을 빼앗긴 간민에게는 다른 황지를 개척할 것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빚갚지 못해 처자 빼앗겨 옛날에 연변에서 땅없는 농민들이 지주의 토지를 소작맡아 부치는것을 지팡살이라고 했다. 지팡이란 한어를 잘 몰랐던 농민들이 지주가 차지하고있는 “地方(띠팡)”을 지팡으로 잘못 부른데서 생겨난 말인데 일부에서는 “地盤爾(띠팔)”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주민들이 입버릇처럼 외운 지팡이란 곧 토지를 비롯한 생산자료가 어느 한 지주에게 들어간 지방을 말한다. 례를 들면 쑹개네지팡(宋家地方), 왕개지팡(王家地方), 조개지팡(趙家地方)같은것들이다.”(박청산 김철수 《이야기중국조선족력사》) 개간초기 조선족농민들은 쌀도 농구도 없기에 지주에게서 쌀, 농구, 생활비를 빌어 땅을 부치잖으면 안되였다. 이런 것을 방청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쌀, 농구, 부림소, 생활용품을 대주면서 3년동안 소작료를 안받는다 해놓고는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쓸어들고 상품경제가 점차 발전해가자 첫해부터 소작료를 내라고 했다. 첫해에 수확고의 20%, 이듬해에 30%, 그 다음해에 40% 바치는데 거기에다 월리식까지 합하면 수확고의 70-80%를 바치는셈이였다. 네 번째해부터는 종자, 농구, 부림소 등을 자부담하면서 방청을 반작으로 넘어가게 한다. 반작은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는걸 말한다. 등허리를 내리 쬐는 무서운 땡볕아래에서 잔뼈도 굳지 않은 애숭이 머슴애가 후치를 끈다. 이마로는 비지땀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마구 쏟아진다. 후치대를 잡은 아비의 목에서도 겨불냄새가 난다. 이것은 당시 조선족농민의 풍경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조선족농민들에게 있어서 부림소 한 마리 갖춘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소가 메여야 할 쟁기를 흔히 사람이 메잖으면 안되였다. 뼈가 물러나게, 살이 떨어지게 한해농사를 지어놓았으나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여러 명목의 가렴잡세까지 바치고나면 다시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만다. 이듬해 봄이 되기도 전에 쌀독이 비게 되어 조선족농민들은 지주에게서 높은 리률로 쌀을 꾸어다 호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곡물반환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봄에 곡물 1되를 꾸어주고 가을에 3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봄이면 지주들은 시장가격보다 비싼 값으로 꾸어준다. 그러나 가을이면 폭락한 값으로 6배에 해당한 곡물을 받아들인다. 례하면 봄에 량식 한되 값이 1원이라면 한되에 1.5원으로 꾸어주는데 가을이면 량식값이 0.5월으로 폭락했으나 의연히 봄의 가격으로 받는다. 그러니 봄에 1되 꾸어온 량식이 가을에 6되 되는 것이다. 이외에 점산호들은 고리대로 지호들의 고혈을 짜냈다. 리자는 보통 5푼이고 높을 때에는 10푼짜리도 있었다. 정한 기한내에 갚지 못하면 처자를 빼앗기기도 했다. 빚을 못갚은 농민들의 아들딸들은 지주집에 꼴모슴, 부엌데기로 들어가야 했다. “덕신향 장동촌 하촌의 최대동은 점산호의 고리대를 갚지 못하여 하마터면 고환을 잘리울번하였다.”(김희 “장동촌을 개척한 사람들”) 가렴잡세와 “동양척식회사”의 착취 “조선족농민들은 지방관청으로부터도 온갖 수탈을 당했습니다. 동북의 다른 지방에서는 볼수 없는 괴이한 세금을 바쳤는데 문턱세, 인두세같은것이 그런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조선족농민들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길 없다고 한다. 조선족농민들은 교육비, 순경비, 보위단비 등 지방세를 바쳐야 하는외에 사묘, 도로, 교량수축비같은 촌세를 바쳤으며 억울하게도 문턱세, 인두세. 고용세, 양우세(養牛稅), 굴뚝세, 입적비 초대비, 땔나무세, 해산세 등을 바쳐야 했다. 문턱세라는 것은 관청에 불리워간 조선족들이 관청의 대문에 들어설 때 바치는 세금이다. 소로 농사를 짓는다고 소세를 바쳐야 했고 지주의 토지를 소작받는다고 고용세를 바쳐야 했다. 이외에도 호세(戶稅)라는것도 있었는데 주둔군의 생활비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량식, 닭, 닭알, 땔나무, 술, 담배, 잡화의 비용을 모두 호세로 각 호에 분담시켰다. 그리고 군대가 촌락을 경유할 때 촌민들이 무상으로 식사와 잡비를 제공하여야 하고 관리와 경찰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쓰는 비용도 촌민들이 부담해야 했다. “가련한 조선족농민들이 당하는 설음은 이것뿐이 아니였다. 그들은 악착스러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악박과 착취도 받아야 했다. 1918년 일제의 에서는 조선족농민들의 토지계약서를 저당잡히고는 대부하는 방법으로 대를 이어 개척해놓은 땅을 앗아갔으며 그 땅에서 40-50%의 소작료를 받아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서봉학 리광수)의 해설사이다. 이 대형다큐멘터리에서 하마탕주민 오준섭(80세)로인과의 인터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이 수전, 한전 5헥타르 다룬다면 문패에다 한 헥타르당 얼마를 바치라는 것을 써붙여 놓습니다. 세금이 어찌나 높은지 혀를 찰 정도였지요. 세금을 못내는 경우엔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가장집물을 빼앗거나 부셔놓군 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연변대학 황룡국교수와의 인터뷰도 있다. “연변의 토지를 점하기 위하여 일제는 연변에다 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구제한다는 명의로 농민들에게 대부금을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토지대금, 밭갈이소값, 농기구값, 량식값 등이 망라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농민들은 그 규정에 따라 밭을 사가지고 토지계약서를 동양척식회사에 바쳐야 했습니다. 규정에는 리자와 본전을 다 물면 토지계약서도 돌려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리자가 어찌나 높았던지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도 리자를 다 갚은 사람이 없었답니다.” 지주와 지방관청 그리고 일제의 악박착취는 조선족농민들의 명줄을 꽉 틀어쥐고 놓아주질 않았다.(계속)
4    제4장 벼꽃향기 댓글:  조회:1798  추천:0  2014-02-04
수전농사를 하고있는 1920년대의 북간도 조선인농민들. 거치른 벌판에 벼꽃향기 싱그럽고 조선족농민들 “어곡전”까지 다뤄 첫 수리공사 “연변의 벼농사는 우리 조선족에 의해 시작되였습니다. 력사적으로 보면 고구려나 발해시기에 이곳의 벼농사는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는 이야기는 발해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이란 지금의 개산툰진 광개일대를 말합니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한후 동북의 벼농사는 없어지고말았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교수는 자그마한 연변지도를 펼쳐보이면서 두만강기슭을 가리킨다. 보풀이 일 정도로 낡은 지도는 1920년대초 일제가 만든 지도라고 한다. “연변에서의 초기수전개발”(일목)이라는 글에서도 이렇게 설명되고있다. “ ‘만주경제 연구보’에 의하면 1868년좌우 두만강연안에서 제일 처음 수전농사를 지었다고 하였고 또 전하는데 의하면 1895년 두만강연안의 종성위자에서 수전농사가 시작되였다고도 한다.” 봉금제도가 엄했던 그 시기 범월잠입한 조선족농민들은 청나라관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두만강북안의 산골짜기의 자연수를 리용하여 처음에는 아마 뙈기수전을 부쳤을 것이다. 그후 1900년 해란강연안의 세전벌인 동성용에서 수전경작이 시작되였다. 1906년 룡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연도인 대교동에서 수전을 개발하였다. 이로부터 벼농사는 연변각지에 파급되였다. 버드나무가 제법 파랗게 물이 오르고 종달이가 하늘 높이 떠서 지종대던 1906년 6월, 한무리의 흰옷입은 사람들이 곡괭이가 자갈에 부딪치면 불꽃이 튕기는 강바닥을 파헤치느라 비지땀을 쏟는다. 1,308메터의 물도랑을 째느라고 떨쳐나선 대교동의 조선주민 14명이였다. 이들은 륙도하물을 끌어들여 33상의 논을 풀었다. 이것은 연변에서의 최초의 수리공사이다. 박창욱선생은 낡은 지도우에 확대경을 대고 끝내 대교동을 찾아낸후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그뒤를 이어 룡정의 수남촌, 반석촌, 화룡현의 수신향(두도구일대), 평강 등지의 조선이주민들도 해란강물을 끌여들여 논농사를 짓기 시작했지요.” 강이 많은 연변은 논농사하기가 제격이다. 두만강 북쪽기슭과 해란강기슭의 평강벌, 서전벌 및 부르하통하, 가야하 하류의 넓은 들, 훈춘하연안과 밀강류역이 바야흐로 논벌로 변했다. 조선족개간민들이 무상기가 짧고 기온이 낮은 동북의 불리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고 벼농사에 성공한것은 연변농업에서의 일대 비약이였다. 이로부터 밭농사만 짓고 남방에서 입쌀을 날라다 먹던 력사를 종말짓게 되었던것이다. 대지에 풍기는 벼꽃향기 쪽박차고 괴나리보짐 등에 지고 처음 왔을 때 조선족농민들의 눈앞에 펼쳐진것은 거치른 벌판뿐이였다. 깊이 잠든 산기슭과 들판으로 야수들이 들락거렸으며 찢어진 옷자락으로는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복장에 하얗게 회칠한 집에서 살면서 하얀 이밥을 먹는 민족이 조선족이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라 했던가.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민족이라 했던가. 아무튼 벼지푸라기 하나 없던 이 땅에 논이 펼쳐졌고 밥상우에 이밥그릇이 놓이게 되었다. 고난에 허덕이던 민족에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데 있겠는가.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에 대해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1918년에 이르러 연변의 벼가 대외로 수출되게 되었지요. 이는 대단한 일입니다. 력사적으로 벼를 수입해오던 연변에서 벼를 수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변화가 관청을 놀래웠지요. 이리하여 1919년 4월에 연길현공서는 ‘연길현벼농사잠행규정’을 내놓았지요.” 벼농사를 하려면 수리건설을 해야 하고 수리건설을 하려면 밭을 점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밖에 땅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행규정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사람이든지 벼농사를 하는 농민의 정당한 리익을 침범하지 못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규정은 당시 우리 조선족농민들의 합법적리익을 보호하는데 매우 유리했다. 1921년 12월 3일, 길림성 성장 홍렬신이 연길현공서에 “수전농사를 잘 하여 농사를 진흥시키라” 는 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적지 않는 한족들도 벼농사대오에 가입하였다. “연변에서의 초기수전개발”(일목) 일문에서 20세기초 연변 조선족농민들이 온갖 곤난을 극복하면서 수전을 개발한 면적을 연대별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06년 12.6정보 1912년 185.0정보 1917년 764.0정보 1918년 1,458,0정보 1919년 3,608.7정보 1922년 6,605.8정보 그후 수전농사는 멀리 길림, 장춘에 까지 파급되였고 나아가서 흑룡강성의 동경성, 목릉, 밀산, 녕안, 해림, 지어 동부몽골지구에까지 파급되였다. “내몽골의 수전개발”(리성도 손만수) 일문에서 내몽골에서의 조선족농민들의 수전개발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17년 람루한 홑저고리를 걸친 한패거리의 조선족농민들이 백설로 뒤덮힌 저리무맹대초원의 바얀탈르에 왔다. 이들 15호 74명은 김일선의 인솔하에 매서운 찬바람속에서 물길을 째고 천년묵은 초원을 수전전으로 개간하였다. 수개월동안 악전고투하여 이듬해 봄에 50여상의 수전을 개발하고 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여태규가 거느린 16호 69명의 조선족농민들이 락봉보에서 50여상의 수전을 개발하고 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4월 김지휘 등 2호 14명이 청하하류에서 동서 150리, 남북 30여리의 평탄하고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수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족농민들은 동북수전농사에 마멸할수 없는 공헌을 세웠다. “어곡전” 화룡현 동성향 비암촌과 룡정시 개산툰진 광종촌 하천평에 위만주국괴뢰황제 강덕의 “어곡전”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광종촌의 “어곡전”을 말하려 한다. 1917년 2월 18일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채여난 최학출이 광종촌의 “어곡전”을 다루었다. 원 룡정시문련 주석이였던 저명한 민간문학가 김재권선생은 최학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최학출은 1935년에 하천평에 이사와서 지주의 땅을 부치였는데 1941년 봄에 소출을 높이려고 간이창문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해빛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었습니다. 하여 남들보다 한절기 앞서 벼모를 한데서 소출도 많이 났거니와 입쌀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아 천하진미로 평가되였지요.” 그후 최학출의 온상육모법이 광범하게 보급되였다. 하여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장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고 강덕황제의 “어곡전” 은 다룰 사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최학출은 1943년 봄에는 “농업사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가서 온상육모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해부터 “어곡전”을 다루게 되었다. 농민시인 심정호선생은 “강덕황제의 어곡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매지게 자라서 일매지게 머리를 수그리고 일매지게 설레이며 사근대는 이삭들의 소리가 마음에 감미롭다. 논두렁을 밟으며 벼들의 속삭임을 듣노라니 ‘어곡전’을 다루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곡전으로 짐승들이 나들지 말라고 뼝끼칠을 한 울바자를 둘렀다. 모철이면 하얀 버선을 신은 꽃같은 처녀들이 유리판처럼 써레질을 해놓은 논판에 들어서서 물차는 제비처럼 찰랑찰랑 모를 심는다. 가을도 가관이다. 새하얀 수갑을 낀 손들이 사락사락 한포기 한포기씩 벼를 베여 정성들여 묶은 다음 마당에 곱게곱게 낟가리를 앉힌다. 탈곡하면 앞목으로 마대에 넣었다가 쌀을 찧어낸다. 쌀은 마을의 고운 아가씨들이 모여들어 뉘와 귀떨어진 쌀알들을 골라내고 눈귀도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 모아서 눈덩이같이 하얀 옥약목주머니에 넣어 절복한다. 그것도 검사에 통과하여야 강덕황제의 어곡합격증을 받는다.” 최학출이 다룬 “어곡전”면적은 천평이였는데 봄에 논갈이 할 때만 소의 힘을 빌고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고 한다. 논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고 버선을 신어야 했으며 거름은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벼가을과 탈곡을 할 때면 해당 관원들의 감시하에 했고 정미한 입쌀을 처녀들이 유리판우에 올려놓고 한알씩 골랐다고 한다. 색깔과 빛이 다르거나 쌀알의 귀가 덜어져도 안되였다고 한다. 어곡을 생산할 정도로 조선족농민들의 벼농사가 소문을 놓았으니 실로 자랑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쌀을 짓는 농민도 허리띠를 졸여야 하는 세월에 어곡을 다듬어 강덕에게 바친다는것은 농민들로 놓고 말하면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계속)
3    제3장 고난의 조선인 간민(墾民) 댓글:  조회:1838  추천:0  2014-02-01
조선인 농민들의 벼모내기. 문전옥답 치발역복하지 않았다고  정부에 빼앗기고 사지안에 들었다고 영문 모른채 점산호에 빼앗기고 조선간민구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황무지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훈춘녕고탑초간(招墾)장정”을 반포,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은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60문(文)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후에 갚게 하며 그 나머지는 한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밖에 간민들에게 부림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빚을 갚게 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했다.   1885년에 와서 간민전문개간국을 설정하기에 이르는데 그 의의에 대하여 연변대학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우리 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토지를 개간할수 있는 합법적권리를 얻은것입니다. 많은 조선족들이 연변땅에 들어왔기에 그후 민족공동체형성에 중요한 조건을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한편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정부에서 관황(官荒, 관청의 황무지)을 조사하여 풀어놓은 기회에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을뿐만아니라 5년내에 조세를 받지않으며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사금을 선대해준다는 좋은 조건으로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런 좋은 조건은 조선농민들을 더욱 자극하게 되어 수많은 조선농민들로 하여금 두만강연안의 4개보, 39개 사로부터 해란강이북과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쪽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괴나리보짐을 풀고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 2백리 땅이 조선농민들에 의해 전부 개간되였을뿐만아니라 해란강이북지역과 가야하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초강국설치시의 조사에 의하면 당지에 숙지가 적잖았는데 훈춘지방에 5620헥타르, 남강지방에 3073헥타르, 흑정자지방에 144헥타르가 있었다. 훈춘변황후선지부 리금용의 조사에 의하면 가야하로부터 고려진북안에 이르는 구간에는 이미 8곳이나 개간되였는데 그 면적은 2000여헥타르에 달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야는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지방에 쳐들어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실색한 연변지방 관리들과 군경들은 길림으로 꼬리를 사렸다. 그 기회에 조선간민들은 연변지구에 더 많이 이주하였는데 1909년에 이르러서는 3만4133세대에 18만4867명으로 늘어났다.   치발역복 귀화입적 1891년, 청정부에서는 화룡 월간국과 통상국을 무간국으로 고치고 이듬해에는 무강총국을 국자가에 옮겼으며 조선족의 호적을 조사하여 4개보, 39개 사에 편입시키고 조선족을 청나라신민으로 인정하였다. 당시의 정세를 류병호선생은 “조선족에 대한 청나라의 ‘편적위민’과 ‘치발역복’정책”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조선족간민에 대한 청나라조정의 편적위민은 민족동화를 목적으로 한 치발역복을 기초로 하였다. 근대적국법을 아직 수립하지 못한 청나라조정은 입관시에 관내지역의 한족인민들에게 강요하였던 치발역복정책을 200년후 조선으로부터 이주하여온 조선족간민들에게도 강요하고 이를 토지소유권을 부여하는 전제로 삼았다.”   청나라조정은 조선족간민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는 것은 령토주권을 버리는것과 같으므로 치발역복하여 만족으로 동화된 조선족간민만이 청나라의 신민으로서 토지소유권을 가질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물론 이런 정책을 조선족간민들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백의흑관은 조선민족의 상징이요, 상투와 머리태는 남서의 성가여부를 상징하는 표징이였다. 장기간의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엄격한 상하간의 례의와 타문화에 대한 배타주의사상을 길러온 조선민족은 조상이 물려준 백의흑관을 버리고 호북(만족복장)을 갈아입고 부모가 준 머리카락을 깎아버리는 것을 조상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참으로 머리위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닐수 없었다. 복종하지 않으면 피땀으로 걸구어온 옥답을 빼앗기고 지어 가장집물까지 털린후 강건너 설음의 고향땅으로 쫓겨갈판이였다. 그렇다고 만주호적에 든다는것도 조상들에게 죄스러운 일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굶어죽으면 죽었지 “치발역복, 귀하입적”하지 않는다면서 문전옥답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관부에서 순찰할 때만 호북에다 머리를 풀어 땋고 평소에는 여전히 한복차림을 했다. 그러다가 1900년 의화단운동이 일어난후 짜리로씨야가 연변을 침략하자 연변지방의 관리들이 길림으로 도망치는통에 치발역복바람이 즘즘해졌다. 하여 치발역복하였던 많은 조선족들은 다시 민족복장을 입었다.   점산호와 조선인 지주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지방관리와 군벌, 대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권세를 등지고 청장(淸丈, 토지를 재주는 일따위)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부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꽂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어떤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하였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상인들을 가리켜 “점산호”라고 하였다. 그때의 정경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점산호들이 차지한 토지면적은 토지증명서에 ‘동쪽은 수림이고 서쪽은 강이며 남쪽은 수림이고 북쪽은 개울’이라고 써넣고 이것을 ‘사지(四至)집조’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사지를 정해놓으니 개간민의 토지도 사지안에 들어갔다. 관청에서 비록 경작지를 다시 측량하고 등록된 면적을 초과했을 때는 ‘부다지(浮多地)’로 처리하여 땅세를 받아들였으나 그것 역시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아 조사해내지 못한 토지가 많고 또 조사해냈다 해도 우선권이 점산호들에게 있어서 땅세를 바치면 그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개간민들은 웬 영문인지 모른채 피땀으로 일군 문전옥토를 점산호들에게 점령당하고 빈주먹으로 나앉게 되었다.”   거기에다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하지 않은 개간민들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관청에서는 치발령을 어긴자에게 기한을 정해 토지를 한족지주나 한족주민에게 넘겨주도록 강요하고 기한내에 넘겨주지 않으면 강건저 조선땅에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조선개간민들은 자기 손으로 가꾼 토지를 점산호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나 고농으로 전락되였다.   조선이주민속에도 대지주가 나타났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치발역복, 귀화입적을 한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관청과 점산호들에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의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든 덕에 점산호들로부터 몇백헥타르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대지주가 된 것이다. “변발호복”하여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리를 받아들이며 그가운데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었고 일부 사람들은 관부와 결탁하여 기타 귀화입적하지 않은 간민들을 고용하여 황지를 개척한 뒤 자기이름으로 령조납세(領照納稅) 함으로써 일약 수십상의 토지를 점유한 지주로 되었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의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끌리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솔가이주하여 일약 수십상의 황무지를 소유한 지주로 되었다.(계속)
2    제2장 간도(間島, 사이섬) 댓글:  조회:2647  추천:3  2014-01-20
두만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이민초기의 어부들. 월강죄 두려워한 거짓말 "간도농사" 향연이 짙은 력사의 지명ㅡ"간도"로    조선 하산봉 농사군 리영수형제 강너머 땅이 얼마가 기름졌으며 버들이 우거지고 풀들이 키를 넘을가. 대한재로 하여 말라빠진 자신들의 밭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리재민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이렇게 탄식했으리라. 그리고 고양이 기름종지 노리듯 북안기슭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섰을 것이다.    19세기 60년대, 조선 종성군 하산봉에 사는 농사군 리영수형제가 끝내 죽음을 자초하는 기아와 맞서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떼목을 타고 용감히 강을 건넌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를 찍어내고 풀을 베여내여 밭을 일구었다. 그때를 선구촌 제1촌민소조의 농민시인 심정호씨는 이렇게 말한다.    "로인들한테서 들은 얘긴데 130년전에 종성 하산봉의 리영수형제가 떼목을 타고 강을 건너와 이 천평벌에 첫 괭이를 박았다고 그럽니다. 그 먼저 종성사람들은 저 뚝너머사이섬에서 농사질을 했다는군요. 리영수형제는 월강죄가 무서워 사이섬에 가 농사를 지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다음부터 저기 산너머 마늘골이랑, 애끼골이랑에 가 밭을 일구었고 석정골이며 연집골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면서도 사이섬에 가 농사짓는다고 거짓말을 하잖으면 안됐다더군요."    선구촌 제6촌민소조 마을앞 두만강뚝에 올라서면 심정호씨가 말하는 사이섬이 한눈에 활餠쨈? 마을사람들은 이 섬을 "미소(尾島)"혹은 정답게 "꼬리섬"이라고 부른다. 얼마전까지도 사이섬에는 조선농민들의 농막이 있었으며 조선농민들이 나룻배를 타고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런 섬이 두만강에는 아주 많았는데 "꼬리섬"은 그중 큰 섬이였다. 조선농민들은 감히 륙지를 범하지는 못하고 그저 이런 섬들을 개간하여왔댔는데 이번에 리영수형제가 담도 크게 이 벌에 첫 괭이를 박은 것이다. 물론 가을이면 곡식을 떼목에 싣고 돌아가서는 정부의 눈을 속이기 위해 여유작작 사이섬 즉 "간도(間島)"에 가 농사를 지어왔다고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후 농사군들은 절골(애민촌), 애끼골(제동), 자동, 후동 등 광제욕지역은 물론 석정과 연집 등지에까지 파고 들어와 화전을 일구어가면서도 "간도"에 가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때로부터 "간도"란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면서 아예 강너머 땅을 "간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간도(間島)"와 "간토(墾土)" 란 명칭의 발원지로 알려지고있는 유서깊은 . 1878년 좌우에 개간되면서부터 이곳은 조선인동포들이 로 이주해오는 주요한 길목이였다. 1883년, 청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변계가 "김림조선상민무역지방장정"에 의해 개방되고 연변지구에 대한 봉금령이 페제되면서 월간국이 설치되게 되었다. 하여 많은 조선농민들이 연변땅에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땅을 개간한다고 하여 연변지구를 "간토(墾土)"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말이 "간(墾)"자와 "간(間)"자가 같은 음이고 "도(島)"자와 "토(土)"는 근사한 음이여서 민간에서는 구별없이 "간도"라고 불렀다. "중조 량국간에 간도문제를 둘러싸고 시비가 생긴 것은 1903년 로 임명된 리범윤이 중국측 월간국에 는 라고 주장하며서부터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란 낱말이 외교에서 사용되였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1"에 기재된 자신의 글 "의 발생과 일제의 "라는 제목의 글을 상기시킨다. 그 글에서 박교수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두만강류역에는 크고작은 허다한 들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을 라 하였다 이나 의 기재에 의하면 는 원래 이 아니다.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의 선구, 광소촌과 조선 종성 사이로 흐르는 두만강의 중국 측 강안에 길이 약 10리, 너비 1리가 되는 2000여무의 이 있었는데 그 복새험은 광제욕(光霽 )에 잇대여 있는 륙지였다. 이 이 어느때부터 개간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1881년 연변지구의 봉금제가 페지되자 월경한 조선족간민들이 광제욕앞을 개간하느라고 물길을 뺀후부터 은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인 으로 되었다. 당시 한족들은 이 을 도는 이라고 불렀고 조선족간민들은 또는 라고부럴ㅆ다. 이로부터 조선족간민들에게서 란 칭호가 나왔다. 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란 칭호가 나왔다. 땅은 주로 조선의 종성농민들이 중국의 월간국에 조세를 바치면서 경작하였는데 매년의 조세총액은 800여냥에 달하였고 월간국에서는 조세를 받아 월간사무비로 사용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간도문제" 두만강 남쪽에 자리잡은 선구나루터 옛터.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천순만의 조선인들이 터진 홍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었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1883년에는 청나라 조정에서는 화룡욕(지금의 룡정시 지신향소재지)에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이북 길이 700여리, 너비 50여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간민의 개간구역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청나라는 변방보위수요로부터 출발하여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는 기구인 월강국을 세우고 전문 조선족의 개간사무를 맡아보았습니다 .연변을 조선족의 전문개간구로 확정한 이것은 우리 연변력사와 조선족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1905년,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료동반도와 남만철도 및 그 부속지를 강점하였을뿐만아니라 저들의 기정된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침략을 정식으로 확정하였다. 하여 리범윤이 제기해오던 "간도"가 조선땅이라는 넉두리를 되풀이하면서 조선보호국으로 자처, 조선을 대신하여 간도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면서 "압록강, 송화강과 두만강 등 3개 강의 발원지일대에는 이 엄연하게 존재하며 이를 라고 부르는데""는 동서 760리, 남북350리나 되며 모아산(帽兒山), 김림성 림강현소속)을 따라 흐르는 휘발하(輝發河)로부터 송화강 이남일대의 지역까지 모두 지역에 속하는바 그 광활함은 우리나라 (일본)의 규슈(九州)지방에 해당된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도대체 중국에 속하느냐 아니면 조선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단정하기 어렵다"는 망설까지 해댔다.    그후 일제는 자의로 간도를 북도소, 회령간도, 종성간도와 무산간도로 행정구역을 획분하고 4개 구역에는 "도사장"을 임명하고 그 관할하에 41개 사, 290개 촌을 두고 사장, 촌장을 임명하였으며 신흥평, 국자가 등 14개소에는 일본헌병대분견소를 설치하고 헌병과 조선경찰을 배치하였다. 결국 일제는 력사문헌과 실지조사를 통하여 "간도는 조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두만강변계문제를 리용하여 저들의 대륙침략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변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변에 들어온 일제는 그후 조선족들을 탄압하고 략탈하는 야수의 무리로 되었다. (계속) 
1    제1장 월강곡(越江曲) 댓글:  조회:3277  추천:1  2014-01-17
  이 땅에 정착하게 되는 민족의 전주곡 애달픔이 맺혀있는 겨레의  슬픈 노래   1 겨울 두만강은 꽁꽁 얼어붙어있다. 눈보라가 아츠란 비명을 지르면서 눈덮인 강우에서 란무한다. 두만강언제에서 바라보는 사이섬은 무척 황페해 보인다. 뒤 돌아보니 멀리 룡정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의 굴뚝이며 천평벌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촌락들의 하얀 지붕이 바라보인다. 자그마한 호수를 지척에 두고있는 선구촌 제6촌민소조가 바로 턱밑이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이 언제에 서서 사이섬이며 촌락들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월강곡"이다. 애처로운 "월강곡"노래소리가 눈보라에 실려와 귀전을 울려주는것만 같다. "월강곡"은 이 땅에 정착하게 되는 우리 민족의 전주곡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북쪽을 우러러 탄식하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던가. 항간에서는 게걸스레 먹는 아이를 보면 "기사년에 난 애같다"고들 한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의 11년간 조선 북부에서는 대한재와 대충재가 련이어 들었다. 특히 1869년 기사년(己巳年)에 함경도의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 6진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겪어보지 못해던 특대한재였다. 해동머리부터 가물이 시작되였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비 한방울 오지 않았으니 전대미문의 왕가물이 아닐수 없었다.    조선 리조왕조의 부패한 관리배들의 학정으로 풍년이 들었다 해도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백성들이였는데 왕가물까지 겹쳤으니 살길이 꽉 막혀버리고만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은 산나물, 들나물을 캐먹었고 산열매를 따먹었다. 나무도 열매도 없어지자 그들은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다. 집집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길가에는 임자없는 시체가 나뒹굴기도 했다. 어떤 부락에서는 배고픈걸 견디다못해 등에 업었던 자식을 잡아먹는 참상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때의 참상을 "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박청산, 김철수 저)일서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굶어죽었으면 이 해를 라고 까지 불렀겠는가."    사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의 유일한 삶의 길이 되고말았다. 그러나 이 길마저 순순히 열리는 것은 아니였다. 조선 리조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우고 월강을 엄금시켰으며 월강하다 잡힌자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버렸다. 2    한편 청나라 통치자들은 도읍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긴후 장백산이북의 천리땅을 "룡흥지지" 즉 만족의 발상지로 만들고 엄한 봉금을 실시하면서 이민들의 이주를 일률로 금지했다. 이것이 바로 력사에서 말하는 "봉금령"이다. "봉금령"이 내려진후 만주땅은 천부지토(天府之土: 생산물이 풍부한 땅)로 되고말았다. 무연한 황무지, 끝없는 살림, 무진장한 자연자원이 깊이 잠들고있었다. 연변땅은 청나라 팔기병들의 훈련장소로 인삼과 진주를 캐고 사슴과 수달피 등 진귀동물을 잡아 청나라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수렵장소로 되고말았다. 만족을 내놓고 이 민족이 들어오는 경우 추방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잘못 걸리면 목을 잘리웠다.    장백산지구는 이렇게 인가가 없는 황량한곳으로 200여년 비여있게 되였다. 무성한 삼림, 비옥한 땅은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을 유혹하기에 너무나 충분하였다. "앉아서 굶어죽으면 어떻고 월강하다 잡혀 죽으면 어떠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판인데 강을 건너고 보자. 혹 성공하면 살수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비밀리에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허봉학, 리광수 저)의 독백장면이다.    처음에는 일귀경작(日歸耕作)하는걸로 그쳤다.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는 아침이면 돌아갔다. 후에는 며칠씩 북박혀 있으면서 농사짓기도 했다. 청나라 관청의 령이 엄하면 돌아오고 뜸해지면 또 들어가는 방법으로 두만강연안 순라선에서 좀 멀직이 떨어진 산골짜기에 숨어 곡식을 심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봄에 월강하여 깊숙이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고는 가을이면 타작한 곡식을 등에 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주 집을 짓고 살림을 차리는 사람들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목숨을 내건 일들이였다. 그러다가 잡히면 엄벌을 받는데 두만강기슭에서 사람을 죽여 목을 걸어놓고 효시하는 장면을 언제든지 볼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고향에 남아있는 안해들은 남편들 때문에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른다. 어느날 불현 듯 두만강가의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남편의 머리를 발견하고 기절하여 쓰러진 녀인들이 얼마였으랴. "월강곡"에는 이러한 애달픈 심정이 련련히 맺혀있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류연산의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재되여있다. 1883년 서북경락사 어윤중(西北經略使 魚允中)은 함경북도를 순찰하던 도중 종성의 수향루에 올라 두만강대안을 바라보다가 산발에 오불꼬불 뻗어있는 오솔길을 발견하고 "저건 무슨 길인고?"하고 물었다. "백성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나이다." 종성부사이 대답이였다. "저승길이라니?" "이곳 날농사군들이 강을 건너서 골짜기에 들어가 부대를 일구면서부터 난 길이옵니다. 월강죄는 목을 친다고 했으니 저승길이 아니겠나이까?" 종성부사의 이실직고였다.    크게 깨달은 어윤중은 월강금지령을 페지하고 "월강죄인불가진살(越江罪人不可塵殺)"이라고 하면서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어 강북으로의 이주를 승인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연변지방에서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족을 출국시킬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수도 없다면서 집조를 발급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청나라 조정에서는 로씨야의 침략 등 국내외 복잡한 정세속에서 조선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1885년에 봉금령을 페지하였다. 이로부터 변강주민들은 더는 "월강곡"을 애타게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3 월강무죄의 령이 각 부락에 제때에 전해지지 못해 월강죄로 아쉽게 죽어간 마지막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무산의 사포수였다. 그때의 장면을 작가 류연산씨는 장편기행문 "혈연의 강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월강사냥을 한 사실이 탄로가 나서 관가에 잡힌 사포수는 달구지에 앉아 두만강변사형장으로 떠났다. 국경한계가 없이 자유로이 넘나드는 짐승이야 국적이 있으랴만 사람이 강을 건넜다는 리유 하나로도 당시엔 사형판결이 쉽게 떨어질수 있었으리. 수인차를 끄는 둥글소는 울퉁불퉁한 길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암소처럼 대소변 때문에 멈추는 시간랑비도 없이 슬슬 잘도 끌고간다. 강변사형장의 단두대 량옆엔 벌써 명을 받고 온 도부수들이 름름히 대기하고있었다. 도부수들이 손에 들린 선들선들한 큰 칼을 보자 사포수는 진작 혼백이 구중천으로 날아올랐다. 수인차가 사형장에 이르기 바쁘게 사령들은 결박한 사형수를 끄집어내려 꿇어앉히고 단두대에 머리를 얹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고을쪽으로부터 말 한필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등에 앉은 파발군은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소리를 쳤는데 거리가 멀어서 무슨 소리인지 가려 들을수가 없었다. 판결문을 읽고나자 도부수들은 칼을 허공에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었다. 목이 두동강이 나면서 뻘건 피가 분수처럼 쏴 - 솟아 사방에 휘뿌려졌다. 목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싸늘히 식어가는 몸둥이는 마치도 커다란 웨침표마냥 모래사장에 뉘여졌다. 그것은 월강죄에 대한 종지부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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