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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북방의 흑마》 만족을 말한다 댓글:  조회:6229  추천:2  2014-02-20
-나를 고발하는 종업원이 한명도 없다는것에 만족합니다! 환갑생일 답사 병오년 청마해의 첫날인 음력설날은 연변의 간판기업가의 한사람인 조광훈씨(말띠)의 환갑생일날이다. 조광훈은 1986년부터 지금까지 근 30년간 도문시민족비닐공장 공장장, 도문민족비닐집단공사 총경리, 연변제비필름유한회사 총경리, 미국독자기업인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 총경리를 지내왔다. 그는 60돐 환갑생일을 맞으며 회사원들에게는 《절대 못 온다》고, 친구와 사회분들에게도 《생일을 안 쇤다》고 길목을 막아버렸다. 친척들 위주로 단촐하게 모여앉은 자리에 《불청객》들도 찾아와 함께 어울리며 진지한 덕담들을 주고받았다. 하객들의 진심 어린 축사에 조광훈은 답사를 올렸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낳아 주고 사랑해준 부모님과 친척들, 나를 아껴주고 믿어준 회사의 종업원들, 나를 믿고 부축해준 사회의 여러분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내가 공장장직에 있으면서 제일 감동되고 잊지 못할 일이라면 지난 90년대에 도문시민족비닐공장종업원들이 공장벽에다 〈공장장의 마음에 종업원이 있으니 종업원의 마음에 공장장이 있다》는 문구를 내붙인 사연입니다. 지금까지 해당 부문을 찾아다니며 나를 고발(신소)하는 종업원들이 한명도 없다는것에 저는 만족할따름입니다. 》 필자는 30년간 기자사업을 하면서 28년간 줄곧 한눈으로 조광훈과 그의 기업을 지켜보았다. 그의 생일에는 두번 참가하였는데 환갑생일답사에서 한 그 의미심장한 말의 뜻을 깊이 음미해보게 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종업원들이 자기들 공장장을 고발(신소)하게 되는가? 필자의 분석이다. 종업원들이 자기네 공장장을 고발하는 대체적인 원인은 공장도급제를 실시한후 일부 공장장들이 단기행위로 자기 염낭을 챙기는데서 그리고 독선을 하는데서, 종업원들의 로임을 제때에 발급하지 않거나 종업원들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지 않기때문이 아닐가. 그러나 조광훈은 달랐다. 배경자료로 16년전 첫 생일에 참가하고 쓴 기사 《뜻 깊은 생일날》을 다시 펼쳐들었다. 16년전의 기록 1월 28일, 음력설날은 도문민족비닐집단공사 조광훈총경리의 43돐 생일이다.   아침 7시30분, 생일축하술이라도 함께 나누려는 생각으로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해마다 설날이면 그가 분망히 보내는줄 알고 처가편에서 밤 12시에 《대표》4명을 보내 새벽생일을 쇴단다. 오늘은 부모님께 세배를 올린 다음 회사에서 초빙한 로간부들을 방문할것이란다. …설명절에 운전기사를 쉬라고 조경리가 직접 운전을 하였다. 9시15분, 염종운(원 도문시남새국 부국장)네 집에 갔다. 집에는 염종운내외뿐이였는데 새해 첫날 첫손님이 조경리라며 그들내외는 기뻐서 야단이다. 염종운네 뜰에 잘 가꾼 과수나무가 있었다. 조광훈은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더니《올봄 공장주위에 나무를 심는것을 책임져주십시오. 로간부는 회사의 보배입니다. 식수는 공장미화뿐아니라 후대들에게도 좋은 유산을 물려주는 일이지요.》라고 부탁한다. 이에 염종운은 과수나무품종선택부터 자기가 맡겠다고 자진하였다. 9시 45분, 도문 오공촌에 있는 로간부 려조요네 집으로 가는 길에 도문민족비닐집단공사 멜라민공장을 지나게 되였다. 차에서 내린 조광훈이 공장의 당직실과 공장주위를 돌아본후 공장대문을 나서는데 한 녀성이 그의 뒤를 따라 허리를 굽혀가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알고보니 이 종업원네는 생활이 곤난하였는데 조광훈은 재무과에 부탁하여 달마다 자기 로임에서 100원씩 떼여 보조해주고있었다. 기실 조광훈은 이 녀성종업원과 그의 남편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이였다. 조광훈은 이런 식으로 다른 3명의 빈곤종업원 가정도 정기적으로 돕고있었다. 10시 30분, 김복렬(원 도문시농업위원회 주임, 시장조리)네 집이다. 《지난해 우리 아주버님께 합리화건의 1등상을 기입해준 조총경리께 감사를 올립니다.》김복렬의 제수가 영예증서를 들고 하는 말이다. 《나도 회사의 절반 사원》이라며 김복렬의 안해까지 조언을 하며 나서다보니 간단히 차린 술상이 기업운영계책모임으로 번져졌다. 11시30분, 연변제비필름유한공사 생산직장을 찾은 조광훈은6명 당직종업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말하였다.《설에도 쉬지 못하게 해 죄송합니다.》 《지면피복필름생산설비를 방금 올렸기에 지금 생산을 다그치지 않는다면 공급이 딸리니 방법이 없습니다.》 12시15분, 장안진에 있는 손유리(원 장안진 진장, 진당위서기)네 집이다 술잔을 부어 올리는 손유리의 안해는 3일전 조총경리는 6명의 로간부와 17명의 판매원 그리고 그들 가족을 동부인하여 회사를 참관시킨후 좌담회를 소집하고 기념품까지 발급했다고, 44명 일행과 함께 연길대우호텔에 가서 《평생 처음 그런 대접을 받아보았다.》고 입에 침이 마를새 없이 치하를 하였다. 오후 3시 30분, 연길 철남 권춘자네 집이다. 10년간 한해도 빼놓지 않고 방문을 오는 조광훈의 관심에 권춘자는 감개무량해한다.《1988년 나는 직장책임자였는데 어느 날 기계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 후부터 조광훈은 해마다 한두번씩 집까지 찾아와 방문하며 생활을 돌봅니다. 자기의 돈으로 우리 딸 귀옥이를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 오후 4시 45분, 도문으로 돌아가는 도중 조광훈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음력설이 생일날인 조광훈은 매년 그렇게 생일을 쇠고있었다. 하객의 축사 조광훈의 60돐 환갑생일에 한 하객이 올린 축사다. 조광훈의 삶의 취지는 《건강하라, 돈을 벌라, 그리고 베풀라》입니다. 조광훈의 드팀없는 인생철학은 《약속은 서로간의 얼굴이고 성실은 서로간의 마음이며 신용은 서로간의 생명이다.》입니다. 조광훈은 바로 이런 삶의 취지와 인생철학으로 자신을 닥달하면서 가정을 경영하고 기업을 경영하며 참된 인간관계를 확립하여왔습니다…근 30년간 조광훈을 지켜보면서 그의 이런 삶의 취지와 인생철학을 배우고있습니다. 조광훈은 1986년 리윤액이 10만원을 맴도는 도문시민족비닐공장 공장장을 떠맡고 6년만인 1990년에 공장을 길림성의 첫《국가경공업부 중점골간기업소》로 부상시켰습니다. 말띠인 그는 용맹과 질주의 기상을 떨쳐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다공능제비필름을 생산하여 국가의 여섯가지 공백을 메웠으며 중국프라스틱업종에서 《북방의 흑마)》(北方黑馬)로 자랑스럽게 불렸습니다. 2000년 12월 28일, 조광훈은 자기가 친히 설립한 중한합자도문내쇼날플라스틱유한회사를 떠나면서 회사 총주식의 34%에 달하는, 1,000만원의 개인주식을 1전 한푼 남김없이 전부 회사전체종업원들의 공동주식으로 돌렸습니다. 조광훈은 또 30여명의 불우학생들의 부모로 되여 그들을 떳떳한 대학생으로, 튼튼한 사회일군으로 진출시킨 《대학생부자》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없는 김미영은 6년간이나 조광훈네 집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를 해 대학에 붙었습니다. 미영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조광훈은 미영이의 창업자금으로 3만원을 저금해준 《대학생아버지》입니다. 조광훈의 참된 삶의 취지와 드팀없는 인생철학으로 하여 그는 길림성청년기업가협회 부회장, 전국소수민족용품생산협회 부회장 등등의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고 연변의 공장장원로와 간판기업가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조광훈은 연변에 2700만 딸라 되는 외자를 유치한 공신이기도 합니다.. 조광훈은 또 가정경영을 잘한데서 아들조웅일(趙雄一)을 꼴프영재로 키워 우리 나라 국가골프팀에 첫 조선족선수로 보낸 공신아버지아기도 합니다. 길림신문 2월 19일자
130    생일을 《모난일(母难日)》로 쇠면… 댓글:  조회:5986  추천:4  2014-02-20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되기까지는 이런 배경이 있다. 순서적으로 배렬하면 정인갑교수의 글 《우리 민족의 부조문화를 개조하자》, 감동중국조선족걸출인물 오기철의 생일조사 보고 《전화벨소리가 겁납니다》, 《로인세계》잡지사 김장혁주필의 글 《나의 불효》를 읽고, 거기에 60대 녀성이 《아들이 엄마는 무관하고 밖에서 생일을 잘 쇳다》며 늘어놓는 자랑과 모 공무원의 생일에 어머니가 200원을 내놓더라는 자랑을 듣고, 그리고 중한 수교 전기인물 한성호 (88세)박사가 《내 생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니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생일을 안 쇳다》는 얘기와 모 외국로무일군이 《기자선생님, 우리 조선족들의 생일쇠기를 개변할수 없습니까?》는 물음을 듣고 바로 필을 들었다. 이상의 글, 노여움, 자랑, 얘기와 물음은 한마디로 부조금이 오가며 해마다 쇠는 생일에 대한 반감이였다 오죽하면 오기철씨가 생일에 청하는 전화벨소리가 겁난다고 했겠는가? 이에 필자는 각자가 자기 생각에 따라 생일은 쇠데 어떻게 하면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문명한 생일을,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발양에 의미가 있는 생일을 쇨것인가를 고안해보았다. 바로 생일을 모난일(母难日)로 어머니를 위문하고 어머니에게 감사를 올리는 생일로, 효도를 바탕으로 부모자식이 자리를 같이하는 행복한 생일로 《모난일》을 쇠는것이다. 생일은 명실공한 《모난일》이다. 지난해 나는 아들이 촬영한 며느리의 출산동영상을 보다가 마음이 저려남을 금할수 없었다.하늘땅이 맞붙는 출산의 산통과 산통에 따른 애처로운 비명과 신음은 남성으로서 도저히 상상할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 1월 손녀 첫돐생일에 제왕절개수술을 포기하고 자연분만을 선택한 장한 며느리에게 손녀의 《모난일》에 특제한 《사랑패》와 금반지로 며느리에 대한 시부모의 사랑을 표했더니 자리를 함께 한 중한명문대학교의 교수들과 많은 하객들로부터 생일에 《모난일》을 쇠는것이 옳(좋)다는 인정을 받았다 생일을 《모난일》로 쇤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로인을 존중하고 애들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따사로운 《가풍(家風)》을 세세대대로 전하는데 유조하고 《모난일》에 많은 하객들을 청하지 않기에 남들에게 경제부담을 주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당신의 생일이면 형제자매가 함께 모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다정다감한 가족모임으로 될것이니 당신의 생일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에 보탬이 되고 동네서 부러워하는 가족모임과 남에게 부담이 없는 문명한 생일로 될것이므로 나 좋고 너 좋고 동네 좋은 길일로 될것이 불보듯하다. 물론 어머님이 타계하고 부득불한 사정으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할 경우는 별도의 추모와 효도이벤트를 조직하면서 말이다. 길림신문 2월 19일자
129    "한국 정부의 협량"에 한마디를 댓글:  조회:9648  추천:5  2014-02-19
기자의 인생에는 한방이 없다. 기사 하나를 마치면 다른 기사를 또 준비하는것이 기자의 직책이고 기자의 일생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해 한국을 다녀오고 “동포라고 하면서 왜?”라는 글을 쓴 뒤를 이어 올해는 “왜?”의 답을 찾고저 한 달간의 한국방문기간에 재한조선족들과 대화하고 신문과 문고학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와중에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사건팀장, “한겨레21” 사회팀장 등을 지낸 안수찬기자 쓴 “뉴스가 지겨운 기자 -내러티브 탑사보도로 세상을 만나다”를 읽게 되였다. 필자는 안수찬기자의 “…수많은 밀입국과 사기피해는 한국정부의 협량에서 비롯된것이다”를 읽고 “왜?”의 답을 찾은듯 마음이 개운하였다. 저자는 “한겨레”탐사보도팀은 “조선족 대이주 100년”취재를 위해 “단행본과 연구론문 등 1500여쪽의 자료를 검토”하는 등 품을 들여 8회에 걸쳐 “조선족 대이주 100년”을 련재하였다며 이렇게 쓰고 있다. -조선족은 일제시기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기반이였다. 1945년 해방 때 그들 대부분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와도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조선족이 홍군에 가담했다. 당시 사망한 이들이 수두룩하여 지금도 동북3성지역 조선족마을에는 혁명렬사기념비가 곳곳에 있다.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북한(조선) 인민군대에 편입되거나 중공군에 징집되여 전쟁에 참여했다. 동족상잔이 비극이라 할 때 그 동족에는 조선족이 포함된다. 1960년대 문화혁명시기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의 지도급 엘리트들을 대거 숙청했다. 강고한 민족문화의 전통이 빌미가 됐다.1980년대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중국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가 돈을 벌었다. “농민공”이 등장했다. 중국의 독특한 호구제도 때문에 조선족은 “농민공”이 되는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마침 문호를 개방한 한국은 그들의 유일한 활로였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그 뿌리가 북한(조선)에 있는 조선족의 입국은 불허했다. 조선족 다수의 고향이 북에 있었으므로 그 시절 수많은 밀입국과 사기피해는 한국정부의 협량에서 비롯된것이다. 한국에 들어왔어도 자긍심 높은 조선족들은 한국인의 차별 대우에 마음이 상했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원래 목표와 달리 그곳에서도 한인타운의 최하층 로동을 담당했다 그렇게 아득바득 돈 벌려는것은 자식교육때문이다. 그러나 부모가 고향을 떠나자 가족이 붕괴하고 마을이 사라지고 학교조차 문을 닫았다.…  필자는 저자의 글이 세절면이나 표현상에서 비록 차도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총적으로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을 옳게 반영한 글이며 재한조선족들의 불미한 원인을 “한국정부의 협량”때문이라고 옳게 짚은 글이라 하겠다. 이번 걸음에서 필자가 들은 조선족들의 오가는 화제는 F-4 비자를 따기 위해 거액의 “쓸데 없는 교육비”를 낸다는것, "F-4 취업제한을 철페하라”는 것이였다. 그들은 한국정부에서 2007년에 한국방문취업제 때 제정한 한국어시험 때 응시자의 40%이상이 연변조선족인데도 연변에 시험장을 설치하지 않은데서(전국에 10개) 조선족들이 많은 경비를 팔면서 내지에가 시험을 쳤다는것(시험장배치는 한국정부와는 관계없다고 필자는 생각함), 한국정부에서 H-2 비자를 F-4 비자로 바꿔주면서 거금의 교육비를 받으며 실시하는 “기술교육”과 그 후의 “F-4 취업제한”을 거론하면서 “모든 것이 조선족을 대상한 한국정부의 돈벌이”라며 성토했다. 80여만원의 거금을 내고 육아도우미자격증을 딴 정씨(56세)녀성과 58세 나이에 75만원의 거금을 팔고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공부를 하는 강씨남성은 여러모로 “한국정부의 돈벌이”를 렬거했다. “그래도 한국덕분에 돈은 벌었다”고 하면서도 “한국정부에서 조선족을 대상해 돈벌이를 한다”는 재한조선족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에 동참해 한국매체에 “일한게 죄인가요?”, “새해 F-4취업제한 철페해야”등 한국의 언론이 뒤따르는것이 그래도 다행이였다. 한중미래재단 정인갑리사장의 말이다. “동포들이 기술력에 따르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한국의 비자정책때문이다.” “비자변경을 미끼로 하는 동포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한국체류의 합법성을 위한 비자장사다.”
128    설기간 세간에서 오간 두마디 말 두고 댓글:  조회:6007  추천:6  2014-02-17
올해의 음력설을 맞으며 세간에서 오가는 두가지 말에 귀맛이 당긴다. 《올해는 간부들이 위문하는 뉴스가 없어서 좋다》, 《공무원이 메유 이쓰다》(공무원이 재미가 없다). 뜻인즉 왕년에는 설명절이면 신문방송에 간부들이 줄을 서서 다니며 극빈호와 로간부를 위문하는(기실 보면 년령이 많아서 로간부가 아니라 전임 리직간부)뉴스가 신문지면이나 텔레비죤화면을 메웠는데 올해는 그런 뉴스가 없어서 좋다는것이고 왕년에는 설명절에 공무원(특히는 권력자 공무원)들에게 차례지는 공짜들이 많았는데 금년에는 달력마저 없어서 멋이 없다는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해마다 설명절이면 여러 부문의 지도간부들이 극빈호나 로간부를 위문했다는 뉴스가 진저리가 날 지경이였다. 기실 방문이나 위문은 간부들의 정상적인 일로서 뉴스가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백성들이 신문이나 텔레비를 보고나서 《공가돈을 가지고 제인사를 내면서…》라며 불만을 토했다. 한편 위문금을 받은 극빈호들 역시 《평상시에는 모른척 하다가 그까짓 돈을 주면서…》라며 신문이나 텔레비화면에 자기들의 낯을 빌려주기를 꺼려하였다. 오죽하였으면 모 시 위문단 수행기자가 극빈호에서 받은 위문금이 100원이라는것을 알고 (너무하구나!)는 생각이 들었는데, 웬걸 위문단들이 돌아와서 벌린 푸짐한 술상을 보고 량심이 가책되여 《원고를 빨리 써 바쳐야 한다》는 구실을 대고 자리를 피했다고 하겠는가. 《간부들이 위문하는 뉴스가 없어서 좋다》는 간부사업 작풍과 신문보도 가치의 변화를 말해주고 《공무원이 메유 이쓰다》는 당정간부 반부패 성과를 말해준다. 길림신문 2월 16일자
127    《백년대계》설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9126  추천:4  2013-12-24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 백년을 보고 사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군 한다. 너나가 관심하는 《백세시대》, 부르기 좋은 《백년부락》, 교육에서의 《백년대계》, 건축에서의 《백년대계》 등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러루한 생각을 갖고 필자는 요즘 방송된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장수암호(长寿密码)》프로를 주시해보게 되였다.《지금까지 발견된 중국의 최장수로인은 127세이다. 그러나 로씨야의 생물학자는 인간의 최장수명을 280년으로, 유럽의 학자들은 인체세포재생의 기제로 인간의 최장수명은 800년, 1000년, 5000년도 가능하다》고 하였으니 이런 설화에 실로 경악하지 않을수 없었다. 기실 필자는 언녕부터 건축현장의 《백년대계 질제1》이라는 구호판을 보고 《백년밖에 못 견디는 집을 지으면서…》라며 별로 탐탁치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연길의 한 학교 옥상에 세워진 《백년대계 교육위본》이란 홍보간판물을 보면서 교육에서도 《백년대계》라니 앞길이 멀지 않다는 김빠진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긴 백년대계가 꼭 100년을 두고 한 개념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이런 제기법은 퍽 뒤떨어진 혹은 먼 앞날에 대한 설계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얼핏 떠오르는 생각으로도 북경의 고궁 등 중국 고도의 고택들과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고있는 2500년전 공자의 교육학과 례(礼)문화 등과 비교하면 백년대계는 너무 단거리라는 느낌이다. 《하늘을 쳐다보며 뛰면 나무높이만큼 뛰지만 나무를 쳐다보며 뛰면 채석돌높이만큼 뛴다》는 말이 있다. 뜻인즉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앞을 멀리 내다보라는것이다. 필자는 눈앞에 다가온 백세시대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를 막론하고 후세들에게 한치의 부끄럼 없이 《백년대계》가 아닌 《천년대계》, 《만년대계》로 계획하고 더 깔끔히, 더 튼튼히, 더 신중하게, 더 책임적으로 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을 크게 내밀고싶다.
126    백성은 언제나 옳다 댓글:  조회:8619  추천:1  2013-12-11
근래에 크고작은 모임이거나 공공장소의 열띤 화제가 습근평총서기를 위수로 한 당중앙의 포치에 따라 진행되는 당의 군중로선교육활동, 네가지 불량기풍 배격, 부패분자 타격, 절약실시와 랑비반대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다. 백성들의 평가를 종합하면《지금 공무원들의 봉사질이 좋아지고 령도들이 부지런히 사업하며 공가돈을 대상하던 업주들이 울상이고 먹은자들이 불안해하며 백성들이 기뻐한다》는 한마디로 《지금 정말 잘한다》는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호화음식점의 경리는 물론 심지어 모 사진관의 경리마저 《공산당의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점점 돈줄이 끊어진다》며 울상이다. 반면 70대의 송모는 《오늘 텔레비에서 습근평주석이 헐망한 농촌집에서 농민들과 함께 마주앉아 조사연구를 하는것을 보고 우리 주석이 잘한다며 박수를 쳤다》고 기뻐했다. 수선복장업을 하는 50대 장애인 김녀는 장(長)자 붙은님들의 자녀직업배치를 례로 사회의 부정부패를 성토하며 《지금 정말 잘한다》고 통쾌해했다. 필자는 요즘 병원, 사회구역, 파출소, 정부대청 등 곳에 다니며 일을 보았는데 공무원들의 봉사태도는 물론 의사, 민경들의 봉사태도 할것없이 모두 달라지고있다는감을 느꼈다. 호적을 올리는 문제로 그전 같으면 첫마디로 본인이 아니면 《안된다》던 일을 지금은 안내서류까지 만들어주면서 순서를 알려주었고 또 주동적으로 전화련계까지 하면서 어느 부문의 누구를 찾으란다. 최근에 필자는 세번 공식행사에 참가했었는데 공직자들의 사업작풍에 탄복하게 되였다. 한번은 국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촌에서 마련한 행사에는 끝까지 참가하였지만 음식상은 피했고 한번은 마감까지 회의를 사회한 진장이 래빈들에게 《식사를 배동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다음에 내가 개인 이름으로 접대하겠습니다》라고 사과하고나서 회의장을 떠났다. 또 한번은 불가피한 정황으로 음식상을 배동했던 공무원들이 오후 출근때문이라며 아예 술잔을 멀리하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는것을 본적있다. 백성들이 말하는 《지금 정말 잘한다》는 뜻은 지난날에 가졌던 그 어떤 바람이나 오늘의 현실에 대한 긍정,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당과 정부를 따르는 백성들의 신심과 자세를 말해주는것이 아니겠는가싶다. 상업계에서 《고객은 언제나 옳다》를 진리라고 한다면 정계에서는 《백성은 언제나 옳다》를 영원한 진리로 간주해야 하지 않을가. 그래서 필자는 지난 10월에 길림성당위 상무위원회 지도부에서 소집한 민주생활회의에서《작풍건설의 실제성과로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한 결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였다.
125    친절이란 뭐길래? 댓글:  조회:7098  추천:7  2013-11-26
친절이란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으로 정성의 마음이 행동표현이다. 친할《親》자를 어버이 《親》자라 하겠다. 《親》자를 풀이한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모자간이 살았다. 하루는 아들이 일보러 먼 길을 떠났는데 돌아오기로 한 약속시간이 이미 지났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으로 안절부절 못하시던 어머니는 마을앞에 나서서 아들을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가는데도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머니는 큰 나무우에 올라가서 아들이 오는 쪽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이렇게 어머니가 나무(木)우에 서서(立) 바라보는(見) 형상을 담은 글자가 바로 《親》자이다. 그러니까 친은 어버이의 지극한 사랑의 마음이다. 친에 붙은 말은 나쁜 말이 없다. 친절(親切),친밀(親密),친목(親睦),친화(親和),친애(親愛),친숙(親熟),친근(親近),절친(切親),간친(懇親)… 모두가 아름답다. 친절이 베푼 일례다. 뉴욕 변두리의 한 가구점 처마밑에서 람루한 차림을 한 로파가 비를 피하고있었는데 가구점 주인(브랜든)이 다가와 그에게 자기 가게에 들어와 쉬였다가 비가 그치면 가시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그 일이 있은후 브랜든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가 왔다. 《친애하는 브랜든씨, 그날 저희 어머님께 베풀어주신 친절에 감사하며 이번에 저희 그룹이 구입하고자 하는 가구전부를 귀하의 가구점과 계약을 맺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전보 발신인은 당시 미국 최고의 부자인 백반장자 록펠러였다. 그후 브랜든의 가구점은 기적 같은 매출로 발전을 거듭하여 몇년후엔 미국의 굴지 가구회사로 되였다. 흔히 일본을 경제대국이라고 한다. 필자는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된것은 국민들의 친절성과 친절을 핵으로 한 직업도덕이라고 말하고싶다.일본사회를 쓴 저서에 일본의 친절봉사가 경제대국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밝혔다. 일본을 소개하는 《이라비아 상인이 주는 교훈》의 한 단락이다. 옛날부터 세계적으로 장사를 가장 잘하는 민족을 아라비아인이라고 했다. 계산이 빠르고 리해타산이 빠르며 론리적이고 상술이 특별히 높다.이런 아라비아상인이 일본서 물품을 구매했는데 처음에는 100만딸라만 구입하려 했으나 결국은 180만딸라어치를 구입했다. 원인을 물었을 때의 그의 대답이다. 《그 기업의 정문에 있는 수위의 친절에 감동되여 20만 딸라를 추가하고 구매상담자의 친절과 제품에 감탄되여 20만 딸라를 추가하고 90도로 인사하는 사장의 극진한 친절과 례절에 매료되여 40만딸라를 더 구해하게 되였다》. 일본의 이런 작은 친절이 모여 오늘의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는것이다. 일본에 가보면 알게 된다. 필자가 일본땅에서 처음으로 친절을 느낀것은 바로 공항에서 본 《참 잘 오셨습니다!》라는 우리 글 프랑카트였다. 마치 일본국민들이 언녕부터 우리를 기다리고있은듯한 친절감을 느끼게 되였다. 필자가 일본서 목격한 은행의 은행원과 병원의 안내원들은 한쪽 무릎을 땅에 굽히고 웃음띤 상냥한 얼굴과 공손한 말씨로 고객을 상대하였다. 부모들과의 동거로 아들네는 갑자기 식솔이 늘어나는바람에 수도물사용량이 늘어나게 되였다. 생각밖으로 수도물회사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와 집식구가 불었는가 아니면 수도시설이 고장났는가고 친절히 묻는것이였다. 만약 수도시설이 고장났다면 회사에서 사람을 보내 수리해드리겠단다. 아무튼 국민들의 친절과 직업도덕이 일본사회를 움직이는 황금열쇠가 아닌가싶어졌다. 친절은 례의만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의 미덕이다. 친절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때문에 주는 자는 흐뭇하고 받는 자는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친절이 아름다운것이다. 친절은 실행하고 베풀수록 그에 대한 보답(보상)은 내가 준것 이상이 되여 돌아오고 가구점의 주인(브랜든)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운명이 바뀌여지는 기적의 행운을 만날수도 있다. 친절과 배려가 그토록 아름다운 리유는 우리가 함께 하는 사회를 더 따뜻하고 향기롭게 만들기때문이다. 친절에 관한 명언이다 -똑똑하기보다는 친절한 편이 더 낫다(탈무드). - 친절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며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그리고 얽힌것을 풀고 어려운 일을 쉽게 하며 암담한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똘스또이).
124    연길강변에 제발 '고층바자'를 세우지 말라 댓글:  조회:10115  추천:7  2013-11-15
연길시 지도부에 다시 한번 건의한다 연길강변에 일떠선 '고층건물바자'   자치주 수부인 연길은 우리 조선민족의 얼굴이다. 그래서 필자는 연길의 미모에 신경을 쓰게 된다. 특히 연길의 건설, 시용, 간판 등등에 말이다. 필자는 모아산은 연길의 "아버지산"이고 연길강은 연길의 "어머니강"이라 칭한다. 그런데 매년의 연길건설현장을 살펴보면 연길강주변에 한해가 다르게 일떠서는 고층건물로 연길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3년전 필자는 "연길시지도부에 건의한다"란 제목의 글을 신문에 올린적이 있다. 그 때 연길시지도부에 건의한 몇 개 건의중 한단락이다. '2008두만강지역개바래방도문발전포럼'에서 중국도시발전연구회 주철진부리사장의 발언내용이다. - "나는 국내외 여러 지역과 도시건설발전의 정, 반면의 경험에 비춰 도문을 산수가 수려한 생태도시, 국제물류중심도시, 생태통상구도시로 건설할것을 제안한다. 특히 국내외 도시건설발전의 생동한 실례로 도문에서 강변에 고층건물바자를 세우지 말것을 간절히 제안한다. 도문이 아름다운 우세의 하나는 강이다. 강변에 세운 로하여 시민들이 자연의 아름다운 흠상하는 시야를 절대로 막지 말라." 주철진씨의 이런 권고를 들은후 필자는 언젠가 "길림송화강변에 고층건물이 숲을 이룬다"는 자랑거리 신문기사를 읽고 "몰라도 한심하게 모르는 구나,,,"는 댓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연길강변에 일어서는 '고층배자'가 길이가 늘어나기로 말이 아니다. 누군가 장백산환경보호를 론하면서 "개발하지 않는것이 개발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주철진씨는 "도시경쟁은 브랜드경쟁이다. 1류 도시는 브랜드에 의거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1류 도시건설을 시도하는 연길의 브랜드는 무엇일가? 이는 연길시 지도부를 비롯한 모든 시민, 주민(州民)이 답해야 할 눈앞의 숙제다 "도시가 문화를 창출하고 문화가 도시를 살찌운다."는 말이 있다. 필자가 오늘 주철진씨의 권고를 반추하며 연길시지도부에 다시 한번 연길강변에 '고층배자'를 세우지 말것을 재삼 건의함은 연길을 환경이 아름답고 문화가 살진 우리 민족의 명품 수부로 건설하는데 보탬이 되려는 마음이다.  
123    “언녕 이래야 되는데…” 댓글:  조회:8019  추천:5  2013-11-07
근래에 술상이나 또는 기차역, 뻐스역 등 공공장소에 가면 “언녕이래야 되는데…”를 화제로 흥미있는 대화들이 열성것 오간다. “언녕 이래야 되는데…”란 18차 당대회후 습근평총서기를 위수로 한 새로운 당중앙의 포치에 따라 진행하는 당의 군중로선교육활동, 비평과 자아비평. 네가지 불량기풍배격, 부패분자타격을 참 잘한다고 기뻐하는 말이다.  “언녕 이래야”는 지금”백성들이 기뻐하고 공무원들이 긴장해하며 식당사장들이 원성이 높고 먹은 눔(놈)들이 불안해 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확실히 그랬다.   모 회사의 경리는 “지금 식당로반들이 울쌍이다”며 생동한 실례를 들었고 70대의 송녀는 “텔레비에서 습근평주석이 헐망한 농촌집을 찾아 농민들과 한자리에서 조사연구를 하는 것을 보고 우리주석이 잘한다며 박수를 쳤다”고 했고 50대 장애인 김녀는 지난 창업의 고충을 말하면서 장(長)자를 가진 간부들의 자녀들의 직업배치를 례로 지난날 사회의 부정을 성토하며 “지금 정말 잘합니다.”며 기뻐하였다. 사회눈치가 빠른 모 중층간부는 “이번에 x x x가 걸려야 한다”는 계속으로 “지도자경제학”(돈벌이)이 구멍을 정리했다. “후비간부대오(权錢交易), 생일, 자식결혼, 승학, 출국(축의금), 주원치료(문병봉투), 건설항목(건설업자의 사례금). 토지징용(개발상들의 돈봉투)이다”며 어느 어른이 어디서 얼마를 건설을 했다면 그의 부정수입을 계산해 낼수있다고 한다. 아래는 필자의 “언녕 이래야”체험이다. 최근에 필자는 세 번 공식행사에 참가, 한번은 국장을 비롯한 공직간부들이 행사에는 끝까지 참가하고 마지막 음식상을 피했고 한번은 마감까지 회의를 사회한 모 진장이 외래손님들에게 “식사를 배동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다음에 내가 개인 이름으로 접대하겠습니다”며 인사를 나누고 회장을 떠났다. 그 다음 한번은 불가피면한 음식상에 공직간부 몇이 로인분들을 배석하며 술잔을 멀리하고 간단한 식사후 오후 출근 때문에 제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성들이 말하는 “언녕이래야…”는 지난 날에 대한 바람, 오늘에 대한 긍정,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당을 따르는 백성들의 자세를 말해준다. 상계에서 “고객은 언제나 옳다”를 진리라고 한다면 정계는 “백성은 언제나 옳다”를 영원한 진리라고 필자는 감히 단언한다.
122    "서기(시장)가 바뀌면 가로수도 바뀐다" 댓글:  조회:7797  추천:10  2013-10-25
  지난달에 영국에 다녀 온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조광훈총경리가 하는 얘기다. 영국에서는 일단 건물을 짓고 나무를 심었다면 그 건물과 나무를 마음대로 허물고 베지 못한다는것이 법으로 규정되였다. 전문 법으로 관리하는 부문있어 그들의 허가가 없이는 아무리 임자라고 해도 건물내부구조는 다시 개조할수 있어도 원체를 허물지 못하는데 이는 환경보호를 위해서란다. 조광훈이 아깝다는 당년의 도문가로수 (당년에 흑백사진이였음)   수시로 낡은 건물을 허물고 새로 건물을 짓는다면 그 만큼한 물력의 랑비와 건축자재생산으로 환경이 오염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 설명했다. 며 조광훈은 도문의 유산으로 남아야 할 도문인민은행…과 도문을 자랑하던 단풍나무가로수를 헐어버리고 뽑아 버린 것이 정말 잘못된 일로 생각하면 아쉽단다. 서기(시장)교체로 교체된 도문도심의 가로수   확실히 그랬다. 원 도문시공안국은 일제 때 건물로(?) 지난 세기 80년대 말에 허물어 그 자리에 다시 도문서 제일 높은 공안국청사를 짓더니 불가 20년이 될가하는데 또 허물어 버렸으니 말이다. 서기(시장)교체로 교체된 도문도심의 가로수 도문사람들은 서기(시장)이 바뀜과 함께 바뀐 가로수를 곁들면서 요, 이요, 요 하며 이미 떠난 서기(시장)어른들을 배풍질한다.  물론 시정건설의 수요와 현실이고 장원한 시점에 립각하여 꼭 허물어야 할 것은 허물고 베여야 할 나무는 베되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도 선진국을 따라 배워 후세한테서 빌려 쓴다는 사유로 하나밖에 없는 지구를 아끼며 그 누가 돈이 있다고 하여 마음대로 집을 허물지 말며 지도자들이 자기의 정적(政績)이나 형상을 위해 함부로 망동하며 정적공정, 형상공정을 벌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가 힘을 합쳐 가 아닌 로 유서 깊고 문명하며 깨끗한 지상물 유산을 후대들에게 남겨주자는 바람이다.
121    "젊은 국장눔들이 택이 높기로 말이 아닙니다…" 댓글:  조회:7184  추천:10  2013-10-23
일전에 진당위서기, 시농업국국장을 지내다가 정년퇴직후 모시 새일대관심위원회에서 사업하는 N씨가 하던 말이다.  그 때는 그저 그렇거니 듣고 지냈는데 자기가 직접 당하고 보니 그 말이 옳았다. 일전에 모 진료소에서 지난 90년대에 모 가도에서 사업하던 X씨를 만났다. 그 때 X씨는 사업관계로 종종 필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온 X씨가 지금은 모M국 국장직에 있다니 필자는 반가워 먼저 인사를 했는데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에 무뚝뚝한 어조로 라고 답할 뿐 다른 문안이나 악수도 없었다. 그의 오만한 태도에 속으로 오줌을 마신 듯 꺼름했다. 더욱 꼴불견은 X씨가 의사를 불러 하고는 돈 결산을 하지 않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서성거리고 젊은 남성이 돈을 결산하고 푸짐한 약꾸러미를 들고 X씨를 모시고 승용차에 올랐다.  X씨가 간 후에 필자는 의사에게 방금 약꾸러미를 들고 다니던 젊은이가 X국장비선가고 물으니 X국장의 기사란다. 는 N씨의 말을 증언하는 생동한 과당이였다.  필자가 X씨의 인사를 못 받은 것은 그렇다 하고 젊은이가 70대 의사한테 인사도 없이 가다니? 젊은이가 자기 병치료에 승용차에 심부름꾼(짊꾼)까지 동원하다니? 그것도 당정간부들이 에 한창 총질하는 때에 말이다.  사람은 먼저 자기의 몸부터 갈고 닦아 바르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바로 잡아야만 세상의 보다 큰 일을 할수있다. 그래서 고 한다. 만약 X국장에게 성인대전임부주임 고리정문이 눈병치료로 북경을 갈 때 전용차나 비행기도 아닌, 그리고 침대표나 좌석표가 없어서 서가는 기차를 타고 수행인원도 없이 혼자서 갔다는 실례를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가? 혹시 제 노릇도 못한다고 비웃지나 않을가?  
120    한심한 뻐스표값, “나는 모른다”는 한심한 차장 댓글:  조회:6744  추천:5  2013-10-11
지난 10일, 필자는 도문-석현뻐스를 타고 달라자에 다녀왔다.  도문- 석현선로뻐스는 도문→안산→달라자→향양→수남→송림→동흥→석현순으로 표값이 4원이다.그런데 도문-달라자간의 뻐스값이 정말 한심했다.  필자가 도문시발점에서 뻐스를 타고 달라자에서 내리려고 하니 값이 3원이란다. 하여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 “석현까지 4원인데 어찌하여 3원을 받는가? 같은 거리에 도문-곡수(2대)는 1원인데…(비록 곡수는 시내 선로뻐스라고 하지만)”라고 반문하니 차장은 무뚝뚝한 어조로 “나는 모른다”는 단마디 대답이다. 도문-달라자의 거리는 도문-석현의 근 3분의 1 거리다. 그런데 도문-달라자의 뻐스값이 도문-석현전액의 4분의 3이라니 얼마나 한심한가?! 물론 필자는 몇 년에 한두번씩 다니는 곳이니깐 뻐스값이 비싸거나 억울해도 넘겨지날수는 있지만 뻐스를 교통도구로 하는 당지 농민들은 결코 계속 당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물론 응당히 내야 할 돈이라면 얼마라도 내야 하지만 부당한 돈이라면 1전도 내지 말아야 한다. 그 누가 “그까짓 돈을 가지고…”하면서 “시시하다”고 하거나 “짠돌이”라고 비웃는다면 그 사람은 유권(維权)의식이 없는 법맹(法盲)이라 하겠다. 민생에 관계되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없다. 려객의 물음에 “나는 모른다”로 답하는 차장은 려객들의 알권리를 무시하는것으로 차장자격이 없고 직업도덕이 없는 “불합격차장”이라 하겠다.
119    한권의 책이 심어준 꿈 댓글:  조회:7509  추천:2  2013-09-30
일전에 필자는 모 사장에게 필자의 작품집을 선물하면서 인사말로 고 했더니 뜻밖에도 고 답하는 것이였다. 상상외의 대답이라 섭섭하거나 불쾌감 먼저 대방의 무지(無智)함를 모르고 성의를 표한 필자가 오히려 무지라 느껴지며 반성이 따랐다. 책을 읽는것은 결코 취미만이 아닌 생활의 일부분이고 인생의 필수라 하겠다. 그래서 이며 는 명언이 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전쟁의 포성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52년간 8천여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08년 독일 문학의 인 괴테는 나폴레옹을 만나 동서고금을 종횡으로 누비는 그의 견문을 듣고서 국적마저 다른 전쟁광에게 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괴퇴를 만나고 나서 하는 묘언을 남겼다고 한다. 실로 일각에서는 당대 최고의 영웅이며 천재로 칭송되던 나폴레옹이 괴테를 자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인정한것이야 말로 최상의 찬사로 문학담, 인생담 등 할것없이 막힘없이 풀어 가는 괴테의 독서힘에 감복한것이라 필자는 생각된다. 19세기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한권의 책으로 고고학계의 큰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다. 슐리만이 소년시절, 아버지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라는 책이 있었다. 이 책은 어린이의 흥미를 돋구는데 알맞게 삽화도 곁들어 있었다. 그 삽화 중 하나가 바로 희랍군의 침략을 받아 불타고 있는 트로이시를 묘사한 것이였다. 이때 소년인 슐리만은 책읽기를 멈추고 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 후로부터 슐리만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준비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신화 또는 전설에 불과한 그런 얘기가 실재했을리가 없다며 그를 조롱하기도 하였지만. 생활이 빈곤한 슐리만은 잡화상 점원을 하면서 부지런히 돈을 모았는데 그가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겨우 마련했을 때 그의 나이 47세, 계속하여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백방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곳이 지금의 토이기지방인 소아세아 서해안 히사트리크 언덕이라고 확증을 얻어 내기까지 59세 나이에 결혼, 안해와 함께 히사트리크로 길을 떠난것은 1870년, 목적지에 도착하여 1년 동안 줄곳 땅을 파니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했다. 그러나 슐리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하여 흙과 돌을 파헤치다가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증명하는 으로 알려진 조개무늬 금관이 발견되여 막막하기만 하던 그의 50년 집념이 제 길을 찾았다. 이렇게 되자 유럽각국에서는 초국가적으로 그를 지원하기 시작, 발굴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여 히사트리크언덕 전체에서 일곱개의 트로이 유적지가 매몰되였음이 드러났다. 슐리만은 평생을 트로이 발굴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품베이 발굴에 나섰다가 68세에 객사하였다.(1876년에 미케네를, 1880년에 오르코메소스를, 1884년에 티린즈를 발굴) 한권의 책이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전 인생을 좌우한다. 세계 고고학계의 가장 큰 별의 하나인 슐리만을 발굴의 화신으로 만든 것은 그가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집 속에 담긴 신화, 한권의 책이였다. 책은 미지의 세계로의 길을 찾고 바르게 현실을 걷도록하는 리정표다.슐리만의 일례가 책의 위대함, 독서의 위대함, 인간 집념의 위대함을 말해준다. 우리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여 책향기에 흠뻑취해 마음을 살찌워야 한다.그런데 조사 결과 지난해 18~70세의 중국인의 독서량이 일인당 평균 6.7권(이 조사에 수분 없는지 의심된다), 한국이 10.8권, 미국이 15권으로 밝혀져 너무 수치스럽다..
118    "세계변소의 날"을 맞으며 댓글:  조회:7243  추천:4  2013-09-16
지난 7월 24일 제 66차 유엔대회에서는 매년 11월 19일을 "세계변소의 날"로 정하고 사람마다 문명하게 변소를 사용할것을 권장했다. 2001년 11월 9일에 30여개 나라와 지역의 500여명 대표들이 싱가포르에서 처음으로 "변소"를 국제적인 화제로 "인류가 어떻게 변소를 잘 사용할것인가?"을 토의했다. 유엔이 밝힌 통계에 따르면 지금 세계인구 65억중 25억이 변소가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고 11억 인구가 아무 곳에서나 대소변을 본다고 한다. 인류가 변소위기를 겪는 것은 인구가 증장에 비춰 공공변소가 줄어들고 물 결핍으로하여 24억 인구가 변소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변을 보면 공공변소가 없어서, 공공변소가 어지러워서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보는 현상이 너무나도 보편적이다. 2011년 6월 1일 "중조청소년서화경연"때 조선서 온 10여명의 대표선수들이 도문 두만강광장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할수 없이 중국안내원의 지시로 두만강유보도의 가장자리에서 숱한 행인들을 등에 돌리고 소변을 봤다. 심지어 도문 국문(國門)정상에 올랐던 관광객이 국문정상에서 소변을 봐 갑을간에 큰 언쟁까지 이르켰다.  실로 "국제망신"이 아닐수 없다. 중한수교의 전기인물 한성호박사는 태산에 다녀오고 "관광명소의 화장실이 더러워 중국망신, 태산에 오줌똥이 넘쳐나니 태안(太安)은 영원히 불안(不安)"이란 글을 발표, 이 글을 읽고 막진규태안시당위서기가 직접나서 "화장실혁명"을 이르켜 3개월간 2216개의 화장실을 개조하였다. 필자가 본 일본은 쓰레기상자는 눈에 잘 띄우지 않았지만 어디에 가나 화장실은 유표하여 불편이 없었다. "인생은 먹어야 하고 싸야 한다. 먹는 것만 알고 싸는 걸 모른다면 인생을 모르는것이다"(한성호) 화장실도 관광명소다. 일본 동경다이바에 있는 한 공공화장실은 옥상은 "천지"요 둘레는 폭포로 많은 유람객들와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나라 광주에도 800만원을 투자한 화장실(舒心阁)이 있다. "서심각"은 6성급무료화장실로 실내장식에 황금(한 근)까지 사용하였다. 이밖에 필자가 돌아본 로씨아, 일본, 한국은 화장실이 무료였다. 몇 년전 연변경제문화고찰단으로 한국을 동행한 연변작자협회서진정부주석은 한국의 깨끗한 무료화장실을 곁들며 "그 좋은 화장실을 왜 무료로 제공하는가? 우리 고장에서는 청소공들의 공자 해결한다며 돈을 받겠는데…"하며 리해하지 못했다. 화장실무료제공이 얼마나 우세기에 도문국문남쪽에 자리한 도봉호텔에서는 한기간 "도봉호텔은 커피, 관광기념품, 무료화장실로 당신을 환영합니다"는 거폭의 프랑카트를 걸고 손님을 끌었겠는가. 필자는 해당부문의 결책자들은 "인생은 먹어야 하고 싸야 한다. 먹는 것만 알고 싸는 걸 모른다면 인생을 모르는 것이다"를 명기하고 해마다 맞는 "세계변소의 날"을 계기로 "막진규식화장실혁명"(태안시당위서기)을 할것을 권장한다. 필연코 백성들이 옹호할것이다. 아래는 필자가 추천하는 일본의 화장실이다.
117    누가 국가의 "3농부축자금" 향수하지? 댓글:  조회:7474  추천:5  2013-09-06
수남촌 당지부서기의  물음 구경 누가 국가의 을 향수하는가? 근년에 필자는 도문시월청진과 석현진의 부분적 농민, 촌간부들이 찾아와 국가의 3농부축자금향수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지난 8월 23일 도문시석현진수남촌당지부서기(김진섭,65)는 필자를 만나 며 며 이런 문제를 반영했다.  지금 나라에서 많은 정책과 자금으로 을 한다. 그런데 국가의 정책들이 기층에까지 하달되는데 문제가 많다. 례하면 나라에서 농민들이 자기집에 채색양철기와를 올리려면 호당 4000원을 보조한다. 내가 알아 보니 120평방되는 집에 채색양철기와를 올리려면 전문양철가공부에서 말하는 것이 재로비와 수공비를 합쳐서 8000원 좌우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4000원외 개인이 4000원을 보태면 된다. 그런데 3농부축자금을 하달하는 부문에서 하는 말이 채색양철기와를 올리자면 꼭 자기들이 지정한 시공대에 일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시공대를 찾아가서 물어보니 120평방좌우 되는 집에 1만 2000원, 심지어 그 이상이 든단다. 그러니까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돈 외에 개인이 8000원을 부담해야 한다는 말이다. 김서기가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해당부문에서 새농촌건설에서 통일설계, 통일관리, 통일감독을 위하여 어느 기업소나 시공대에 위탁하는 것은 가이 마땅하다고 본다. 문제는 새농촌건설에 관한 모든 공사(집짓기, 기와씌우기, 길닦기, 가로등장치,울바자를 세우기 등)를 진행함에 있어서 어느 부문에서 자기들의 리익관계로 모 시공대를 정해놓을 것이 아니라 일을 공개적이고 평등한 경쟁(재료경쟁, 가격경쟁, 인건비경쟁)기제로 시공대를 선택한다면 진정한 농촌주인들의 감독과 협조하에서 농민들의 의견이나 불만이 없이 모든 일이 순리적으로 진척될것이라고 생각된다.   
116    안전검사로부터 본 미국과 중국의 관념차이 댓글:  조회:7268  추천:2  2013-08-27
안전검사로부터 본 미국과 중국의 관념차이 일전에 필자는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햔회사 조광훈총리가 안전검사를 화제로 한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는 미국독자기업으로 10여 년간이나 미국측의 6가지 종합고찰에서 880점 이상을 따내 미국서도 흔치 않는 로 평을 받고있다(미국독자기업이지만 회사는 100% 내국인이 운영함). 조광훈의 말이다. 미국측의 검사는 품질 외 안전, 환경보호, 로동법집행검사다. 안전은 불이 못나게 하는 예방(防)조치검사와 불이 나면 무조건 도망하라는 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재산손해는 보험으로 보상받고 사람이 살고 기계가 돌면 화재손실은 재생하면 된단다. 미국측고찰단의 검사는 전면적이고 매우 세심했다. 상기 세가지 검사에 2달간 체류하며 매일 2시간 이상의 작업을 했다. 그런데 중국은 어떤가? 한마디로 중국해당부문의 검사는 방후(放后)조치검사였다.물론 고는 하지만 대체로 가 검사내용이다. 례하면 불이나면 단 얼마라도 공장실내기둥이 타는 것을 연장하기 위하여 기둥에 방화도칠을 하라(기실은 도칠냄새에 질식할수 있는데), 불이 나면 저 문을 막으라, 저 간이 창고를 당장 허물라는 등등의 지시다. 검사는 대체상 겉에서 보이는것에 대한 검사고 검사시간도 20여분이면 족하다. 그리고 좀 거슬려하는 눈치면 생산을 정지하라는 등의 행정명령으로 정상적인 생산을 영향주고 불필요한 재투자로 미국측에서 접수하기 어려워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중국은 혁명적인 가치관의 표현이라면 미국은 예방과 이인위본(以人为本)의 가치관의표현이다. 조광훈의 말에서 필자는 비록 단적이나마 화재를 대처하는 미국과 중국의 관념차이를 비교할수 있었다.
115    다시 오는 "비판과 자아비판"을 마중하자 댓글:  조회:7234  추천:2  2013-08-20
올해에 당중앙에서는 >, , 반대 등 당의 작풍개진을 심화할 조치들을 잇따라 대고 있다. 이에 비춰 최근 중공중앙 정치국동지들은 군중로선을 견지할데 관한 당중앙의 력대 중요문헌을 학습하고 작풍건설강화, 본보기역할발휘를 둘러싸고 반성하고 분석하며 스스로 발언제강을 작성, 중앙군위에서까지 특정민주생활회를 소집하고 면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부분석하고 비판과 자기비판을 적극 전개하며 작풍건설을 제도적으로 강화할 조치를 대고있다는 등 민심을 흥분시키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간고분투하는 작풍, 군중과 밀접히 련계하는 작풍, 비판과 자기비판의 작풍은 당의 우량한 3대작풍이다. 습근평동지는 며 고 지적하였다. 이는 근간에 거의 들어보지 못하던 반가운 소식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는 제목을 달았다.  필자와 동배의 사람들에게는 이 그렇게 생소하지 않은 말이다.  지난세기 60년대 필자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규약과 중국공산당당장학습에서 비판과 자기비판이란 사업작풍을 배우고 비판과 자기비판을 자기를 개조하는 사상무기로 배웠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황당하나 여러가지 정치운동은 말고도 하는 때까지는 이 귀에 쟁쟁했다. 그때 우리 생산대에서 말이 없이 일을 잘하는 로동모범인 전순옥녀성마저 년말사원대회에서 며 울면서 어느 날 옥수수가을을 하고 퇴근하는 길에서 주은 통옥수수 한이삭을 집체에 바칠 대신 자기 집에 가져왔다며 자기를 비판을 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들어보면 유치하긴 하나 그 시대에 아주 말단 사원마저 그만큼 을 했다는 말이고 실례다.  그런데 특히는 개혁개방후 의 무기가 점차 꼬리를 감추더니 지금은 , , , 들의 이나 독선으로 이어지고있다.  하급은 상급을 감히 비판하지 못하고 상급은 자기비판은 멀리하고 하급을 훈계하고 비평하기만 하는 것 같다. 이런 결과로 하급은 상급에 입발린 미사구려(美詞句丽)로 찬송가만 불러대며 만 하면서 손바닥만 비벼대기에 라는 신조어까지 나돈다. 비판과 자기비판에 대하여 모택동주석은 로 비판의 의의와 비판을 받는 대상을 요구했다면 습근평주석은 로 자기비판(자아정화, 자아완벽, 자아혁신, 자아제고)의 목적과 자세를 요구했다. 필자는 비판과 자기비판을 함에 있어서 모택동주석의 처방과 습근평주석의 처방을 잘 결합하면 각급 당정지도자들의 사업작풍에 새로운 모습(毛习)이 나타날 것임이 불보듯하다.     는 속담이 있다. 는 로 정언, 직언을 말한다. 정언, 직언은 인민군중들의 주인공적 권리의 행사로 정부나 지도자에 대한 바람, 의견, 건의와 비판이다. 습근평주석은 이번 당의 군중로선교양실천활동의 대상이 현, 처급이상 지도기관, 지도부, 지도간부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필자는 현, 처급이상 지도기관, 지도부, 지도간부들에게 을 대청소하는 비판과 자기비판의 민주생활회의에서 서로간 미사려구로 듣기 좋은 말을 말고 상대가 누구든지 감히 정언, 직언을 하는 참다운 민주생활회의로 당중앙에서 요구하고 백성들이 갈망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14    도문 쌍둥이 고층건물 국제친선빌딩으로 바꾸지 못할가? 댓글:  조회:8509  추천:5  2013-08-01
저 쌍둥이 고층건물을 국제친선빌딩으로 바꾸지 못할가? 이 3년간에 도문시민들의 말밥에 올랐던 한창 시공중인 도문시정부와 도문시당위쌍둥이청사 건축공정이 최근에 시공을 중지했다.  자금이 쫄리여서 중지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필자는 도문시당정지도자들이 습급평동지를 위수로한 과 중공중앙 판공청과 국무원 판공청에서 최근에 발표한 정신에 따라 과단히 선택한 명지한 결책이라 하겠다.  중공중앙과 국무원판공청의 통지는   실로 당중앙과 국무원에서 도문에 비춰 내린 지당하고 제때적인 시책인듯 하다.  도문시민들이 도문서 새로 짓는 당정기관고급공용건물에 불만이 있는것은 대개 이런 세가지 원인이다. 첫째; 새로 짓는 두개고급건물은 그 돈이 국가돈이든 지방재정돈이든 도문의 경제형편에서 거금을 투자해 시정부와 시당청사를 지을 형편이 못된다.   도문시정부청사는 몇 년전에 보수까지 한데서 여전히 멀쩡하고 시당위청사는 몇 년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주용기총리시대는 여러지방에서 정부청사를 팔아 지방경제건설을  돕는다는 신문소식이 빈번하였는데 지금은 시민살림살이나 지방경제가 변변치 못한 신세에 거금을 투자하여 정부와 시위에서 11층짜리고층청사를 짓는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하필이면 왜 도문을 홍보하는 얼굴이고 도문의 노랑자위로 불리는 그 금터에 시정부와 시당위청사를 짓는가? 셋째: 새로 짓는 고층건물이 도문당정기관청사라는 것을 집터를 선정했을 때부터 시민들이 알고 떠들었는데 왜 건축현장에 세운 에 건설단위를 도문시공안국이라고 했는가? 그래 도문시민들이 도문시공안국을 새로 지은 것을 모른단 말인가? 만약 국가에서 공안국을 지으라고 내려보낸 돈이라고 해도 그 돈으로 꼭 정부나 시당위청사를 지어야만 하는가? 국가돈도 국민의 세금으로  모은 돈인데 말이다.   특히 새로 짓는 시정부와 시당위청사집터는 도문해관, 도문통상구, 전주청년들이 모금하여 세운 친선탑과 한마당을 이룬 곳으로 많은 시민들이 이 몇 년간에 도문서 를 주제로 을 크게 펼치니 도문해관 앞의 낡은 구조물(旧造物)을 빨리 청리하고 그 자리에 도문통상구광장이나 아니면 도문을 홍보하는 국제적쇼핑몰을 신축할것을 제의, 필자더러 시민들의 마음을 담은 글을 시지도부에 반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여 필자는 몇 년전에 를 서면으로 작성하여 도문시당위서기와 시장한테 올렸더니 2008년4월20일에 시정부판공실에서 필자에게 감사를 표하며 도문해관청사앞 관련건설이 이미 도시건설 전망규획에 들었다고 답신하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시정부청사와 시당위청사를 짓는다니 시민들의 불만의 있을수밖에 없다.  필자는 중앙과 국무원의 통지정신에 비춰 시에서 저 쌍둥이고층건물을 시정부나 시당위청사로 짓지못함이 불보듯하며 그 쌍둥이 고층건물의 위치상으로 보아 그 건물을 시민들의 바람대로 호텔, 쑈핑, 력사, 문화, 관광, 등 시설이 구전한 종합적인 국제친선빌딩으로 돌리자는 건의다.  만약 그 금터에 규모화, 현대화한 국제친선빌딩이 선다면 국제도시 도문을 홍보하는데 유조하고 도문의 정치, 경제, 문화, 관광, 투자유치, 그리고 국제친선이벤트 등 모두에 유조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113    감동인물에게 올리는 뒤늦은 글 댓글:  조회:8213  추천:4  2013-07-23
지난 7월 13일, 필자는 에서 는 제목의 길림성인대전임부주임리정문동지의 사적을 읽고 큰 감동을 받고 즉석에서 (내가 읽고, 듣고, 본 감동받은사실로 리정문에게 올리는 글을 쓰겠다.)고 작심했는데 지난 19일에 인터넷길림신문에서 윤수범의 를 읽고 리정문이 에 실린 그 이틑날인 14일에 애석하게도 타계한것을 알게 되였다. 실로 너무 비통하고 안타까운 비문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원래 이 글을 로부터 로 개명하였음을 밝힌다.  리정문은 원래 도문서 사업한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리정문의 그때 그일을 외운다.  아래에 필자는 내가 읽고 듣고 만났던 순으로 글을 계속한다. 내가 읽은 리정문 와 란 글에서 필자는 리정문동지야말로 우리 민족의 감동인물, 감동간부임을 더욱 느꼈다. 아래는 두편글에서 필자가 감동을 받은 몇 단락이다. 리정문주임은 촌사업시찰 때 먼저 생활이 제일 어려운 집 3가구를 알려달라고는 그들을 한집한집 찾아서 200원씩 건네면서 생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수 있기를 바란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나중에야 촌지부서기를 찾아 마을의 정황을 알아봤다. 장춘에 돌아온후 우평이 그 600원을 결산해주려고 하니 그는 《내 개인의 명의로 드렸는데 그럼 안되지.》라면서 되려 우평이를 교육하였다.   한번은 리주임이 눈병때문에 치료로 혼자서 북경으로 떠났다. 그만한 위치에서 다른 간부들 같으면 앞뒤에서 수행인원들이 모시고 전용차나 비행기로 가련만 그는 침대표는 고사하고 좌석표도 없이 서서 가는 표를 겨우 사서 홀몸으로 렬차에 올랐다.   리주임은 성인대에 간후 아침운동을 위하여 50원짜리 눅거리 자전거를 샀다. 그는 아침전에는 그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하고 퇴근후는 그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일을 보고 그 자전거를 타고 출근도 하였다. 이 일이 행정관할 판공청부청장에게 발견되여서야 그의 전용차와 운전기사가 배치되였다.   성인대 상무위원회의 부주임으로 선거된 다음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리정문이 여러차례 이렇게 말했다.《나보다 덕재가 구비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소수민족〉이라는 덕을 봤을 뿐입니다.》   그의 딸 리해단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으신지 새벽에 제가 일어날 때마다 탁상등을 켜놓고 앉아서 뭘 쓰기도 하고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글을 다 써놓고 가끔 어린 저와 ‘해단아, 제목을 이렇게 달면 좋을가, 아니면 바꾸는것이 나을가,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 라고 물어보시기도 했습니다. 어린 제가 뭘 안다고... 》 부인 한금옥은 이렇게 말한다.  6남매중 맏이로 그는 관직이 어느 위치에 있든간에 자녀와 부모, 동생들을 위해 조직과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남의 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그였지만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누구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일가친척들외 소식을 알고 부랴부랴 찾아온 문상객들까지 합해 20여명 정도였다. 그의 생일도 안해와 자식들끼리 조용히 한끼 식사로 끝마치는것이 전부였다. 그야말로 읽을수록 감동된 나머지 (그런 위치에서 그가 진짜 그렇게 했을가?)는 의혹까지 가질 정도였다. 이에 비춰 너무나 인상이 깊던 란 제목의 김봉관의 풍자만화가 내눈 앞에 서서히 떠올랐다. 내용인즉 남편이 국장이니 안해가 안하무인으로 온 동네서 우쭐대고 그의 아들, 딸 들은 물론 그 집 개까지 으르렁거리며 으스대는 만화다. 내가 들은 리정문 리정문의 처형딸 김향단의 말이다.   지난 80년대에 나는 리정문의 이런 을 구전(口傳)으로 듣고 한때 리정문을 본따 리정문시늉을 하기도 했다. 이란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배움의 자세다.. 이미 례로한 리정문의 딸 리해단의 말이 아버지가 남긴 을 증명한다. 유태인의 우수성은 으로 불리는 유태민족이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부모따라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과 아버지의 과 련결된다고 한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며 유태인으로 첫 미국 국무장관인 기신거박사는 고 했다. 리정문의 아들(리무림)딸(리해단)의 오늘의 모습과 그들의 성장사가 그들의 을 썩 잘 설명한다. 내가 만난 리정문 《리주임은 성인대에서 자신을 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을 낮췄습니다. 그는 언제나 찾아온 사람들게 여러 부문에 련결해주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늘 자기는 인대임직원들의 뒤근심을 덜어주는 복무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일이 생기면 언제나 자기 일처럼 달려가서 도와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였으며 우러러 봤습니다.》 이는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판공청 부주임, 래신래방국장을 지낸 정년퇴직간부 왕국의가 리정문을 회포하며 하는 말이다. 바로 필자가 리정문의 덕목의을 직접 수혜한 사람중의 하나다. 2001년 9월 하순에 필자는 출국을 했다가 돌아오니 해당부문으로부터 오기자가 연변자치주정부일본고찰방문수행기자로 출국수속을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때 이번 고찰방문단의 다른 단원들은 이미 일본비자를 받은 뒤였다. 이에 필자는 관련부문의 특별취급으로 주에서 당일에 출국수속을 끝내고 이틑날에 장춘에가서 성외사판공실을 찾아 출국수속을 하려고니 국경절공휴가 당금이여서 정상공무출국수속을 접수하지 않았다. 이에 안달아 난 필자는 이리 저리 고려중 떠 오르는 분이 성인대 리정문비서장이였다. 그래서 사처로 수소문하여 리비서장과 겨우 전화만남으로 도움을 청했다.리비서장은 전화로 지금은 손님접대중이니 15분후에 다시 전화를 하란다. 하여 꼭 15분후에 전화를 했더니 그는 이미 성외사판공실의 아무개와 련계를 했으니 그를 찾아 가란다. 그래서 그분을 찾아 갔더니 그는 방금 리비서장한테서 전화가 왔더라며 그렇게도 열정것 도와주고는 또 다른 도움이 필요없는가고 물었다. 그 시각 필자는 리비서장이 얼마나 감사한지 일구난언으로 말할수 없었다. 모든 수속을 가급으로 끝낸 필자가  하고 시름을 놓는 한숨을 내 쉬는데  리비서장한테서 또 전화가 왔다. 일이 원만했는가, 도와드릴 일이 더는 없는가, 일본에 다녀온뒤 연변을 위해 좋은 글을 많이 써 달라고 부탁하는외 국경휴가를 잘 보내라는 다감한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그번 일은 필자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감동을 받은 마멸할 수 없는 일로 필자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만약 모든 당, 정간부들이 리정문처럼 인민의 공복이 된다면 우리의 당은 백성들이 따르는 당, 우리의 정부는 백성들이 시름을 놓는 정부로 될것이 의심치않다. 리정문은 명실공히 일생을 正文에 바쳤고 한생동안 正을 지킨 우리 민족의 감동인물이라 하겠다. 그래서 >(인테넷길림신문)를 쓴 저자는 리정문을    로 종필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된다. 리정문, 그는 우리민족간부의 훌륭한 감동인물이다. 필자는 고 리정문동지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112    조선족을 위한 '민족공정'에 동참 하고저 댓글:  조회:6307  추천:3  2013-07-22
근래에 저는 여러 친지와 동사자들이 나더러 자서전이 아니면 칼럼집을 출판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에 나는 책을 낼만한 자격도, 도 없다며 번번히 외면하였다. 그렇게 지나오던 중 저는 에서 중화인민공화국창건 60주년 특별기획으로 계렬보도한《60주년에 만난 60인》을 민족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의 출판발행기념식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전임주임이 한 발언을 신문에서 읽었다. 리덕수동지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60주년에 만난 60인》은 건국후 사회주의건설과 개혁개방에서 조선족을 위해 기여를 한분들이다.《길림신문》은 큰 일을 해냈고 좋은 일을 해냈다. 책의 출간은 민족형상을 잘 세우는 한차례 이다. 우리는 이들을 선전하고 선전하고 또 선전해야 한다. 선전하지 않고 사회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것이라 해도 가치가 없다. 가치는 부단히 사회에 용납되고 인정받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저는 《60주년에 만난 60인》의 출판이 조선족을 알리는 으로서 조선족의 형상을 수립하는 활동이고 창의이라는 리덕수주임의 이한 발언에서 깨우침을 받고 이 에 적극 참여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근 기자사업 30년간 인터뷰한 300여명의 인물들중에서 100명을 선정하였는데 어떤 주인공들을 빼자니 너무 아쉬워서 53(군체를 포함)명을 더 보충하였다. 그리고도 30년간에 쓴 칼럼문집도 함께 출판하기로 하였다. 2011년 3월 나는 이 두책의 원고를 가지고 연변인민출판사를 찾아 가니 리성권사장이 라며 한꺼번에 두책을 내지 말고 한해에 한권씩 출판한다면 출판사에서 출자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나의 두책은 조선족이라는 한 으로조선족의 양과 음을 반영하는 자매편으로 함께 출판하겠다고 하였다. 하여 출판비용이 2만 7천원에 달하는 는 출판사의 출판으로 신화서점발행을 하고 출판비용이 2만 8천여원 되는 은 나의 출자로 출판하여 개인 발행을 하게 되였다. 이것이 내가 두 책을 함께 출판하게 된 시도와 경로다. 두 책의 주인공들은 우리나라의 개혁개방의 시대와 함께 숨을 쉰 사람들로 지금 다시 읽어도 사회의 맛, 시대의 맛, 집단과 사회의 주인공맛이 풍겼다. 더욱 흥분된것은 책의 주인공들중 타계한 6명을 제외한외 지금도 거의 모두가 사회의 중견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나는 이에 부인도 동원하여 원고타자를 시켯는데 타자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 부부는 우리가 주변에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들이 너무나 많다는것을 즐감했고 우리도 책의 주인공들처럼 가치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압력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훌륭한 분들을 많이 갖고 있는것으로 고 몇번이나 외웠다. 나는 기자업에 종사하면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온 사회에 홍보하고저 적극 노력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바탕이 슴배여 있다.  나는 모주석의 지난 6, 70년대 모택동저작을 학습하며 모주석의 이란 저서의 를 해석한 주은래총리의 는 서평, 그리고 구전되는 는 모택동주석의 말씀에서 우리 조선족은 위대한 민족이고 선진적인 민족이며 영예로운 민족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민족의 이런 영예를 지켜나가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되였다. 한편 모든 사물이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장단점이 있듯이 우리민족에게도 장단점이 있는데 우리 민족의 장점을 확보하려면 우리 민족의 단점과 렬근성과 극복하고 폭로하고 비판하며 반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래서 이 우리 민족의 양면이라면 는 우리 민족의 단점과 렬근성을 폭로한 음면이라고 나는 여긴다. 말하자면 인터부문집에 있는 라는 제목의 국가민족사무위워회 전임 주임 문정일, 1990년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에 100만원을 기부한 중국의 록음악황제 최건, 80년대의 산뢰봉-고만길, 조선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누님, 1985년에 전국 전투영웅모범회보단을 접대한 도문시홍광향 달라자촌 조선족농민들의 군상, 연변의 독서왕 송해숙, 민족정신을 이어가는 북경의 조선조로인들 등 수많은 작품과 칼럼문집에 있는 , , , , , , , , , ,  등등의 수두룩한 비판, 건의, 바람의 문장들이 우리 민족의 오늘의 장, 단점을 설명해 준다. 나는 이한 에 참여하여 우리 민족의 양과 음을 어떻게 사회에 알리고 후대에 전해져 우리의 후세들에게 우리 민족이 지킬 것은 무엇이고 버릴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저 나의 두책을 주 도서관, 시도서관, 시로간부국, 시교육국산하 모든 조선족학교에 기증하였다. 현실을 정시해보면 배금주의, 조선족이동, 다문화가정, 결손가정, 민족동질 등 여러모로 우리 민족의 번영과 발전은 고험과 세레를 받고있다. 이한 고험과 세례를 어떻게 극복하고 지혜롭게 이겨 나가느냐는 우리 모두의 공동한 몫이다. 우리 민족은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고 근면하고 용감하며 창조적인 민족이다. 이런 우수 민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을 어떻게 접목시켜 우리 민족이 중화민족의 대가정속에서 우수민족으로 부상되는가의 관건은 선배들의 본보기다운 행동과 그에 따르는 휴대양성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이 갖고있는 정면을 사회에 알리고 선전하는 것이 이라면 우리 민족의 음면을 폭로하고 제때에 반성하는 것도 우리 민족을 위한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으로 우리의 후대들에게 를 알려주는 것을 하나의 급선무로 선배들에게서 이어 받은 우리 민족의 보귀한 계주봉을 정확히, 제때에, 재치있게 후대들게 넘기자는 바람이다. (본 문장은 지난 7월 12일 도문시새일대관심위원회에서 주최한 에서 한 필자의 서면발언임- 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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