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넋이 살아 숨쉬는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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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향기 그윽한 전화벨 소리 댓글:  조회:1545  추천:0  2015-01-30
여기저기에서 주고받는 전화소리는 가지가지의 사연을 담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여 흘러간다. 인젠 사람들의 일상과 사업의 연장이 되여버린 전화소리는 현대인들의 생활을 좌우하면서 때로는 긴급함을 알리는 명령으로, 때로는 웃음꽃을 피워주는 행복의 바이러스로, 때로는 효도를 실천하는 문안이 되여 인심을 꽃피워준다. 매일 울리는 갖가지 전화소리에 습관되여 있는 나지만 유독 흥겨운 우리가락으로 설정한 전화벨 소리만은 언제나 그리움에 지친 나에게, 사랑에 목마른 나에게 감천이 되여 귀맛을 돋구어주고 굳어진 신경을 살리는 활력소와 에너지가 되여  나를 찾군 한다. 식구들이 흩어져 살아간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변할만도 한  오랜 세월이지만 지나고 보니 언제였나 싶게 손가락 튕기는 한순간처럼 참 빠르기도 하다. 겨울옷들 한겹한겹 벗어내고 오래동안 깊이 간직되여 있던 속마음을 들어내는 계절이라 조용히 앉어서 그리움의 실마리와 향기 그윽한 기억을 더듬노라니 행복감이 온몸을 감돌며 나를 신나게 하고 무르익은 봄향기가 소복히 쌓이기 시작한다. 은은한 미풍에 오감을 자극하는 좋은 추억들로 너무도 깊은 정 너무도 두터운 사랑이 마음의 집을 꽉 채우고 흩어질줄 모른다. 오늘도 불볕 더위는 인정사정없이 대지를 달구지만 거리는 생기넘치고 산과 들은 짙은 록색으로 자태를 뽐내느라 야단들이다. 움이 트던 나무들 어제 같은데 어느새 파아란 패션으로 변신을 마치고 자연의 극치와 순리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거짓의 허울들을 한겹한겹 벗어내고 오래동안 깊이 간직되여 있던 속마음을 들어내는 계절이라 조용히 앉어서 그리움의 실마리와 향기 그윽한 기억을 더듬노라니 행복감이 온몸을 감돌며 나를 신나게 한다. 은은한 미풍에 오감을 자극하는 좋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나 너무도 깊은 정 너무도 두터운 사랑으로 마음의 집을 꽉 채우고 흩어질줄 모른다. 수년의 세월에 홀로의 몸으로 살아가노라면 힘들고 외롭고 그리움에 마음도 갈팡질팡할때도 있을련만 어쩐지 우리 부부는 호언장담도 없고 열렬한 사랑이 없어도 부부의 인연을 끈질기게 잘 이어가고 있다. 남들이 의심하고 질투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요지부동이다. 인젠 저도모르게 50대에 들어서면서  정열의 시절은 소리없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와 그리움은 오히려 나날이 짙어가고 있다. 하루멀다하게 수없이 오가는 국제전화는 돈이 얼마들든 상관없이 일상으로 되여 우리의 인연을 이어주고 그리움과 함께 마음을 따뜻이 덥혀주고 비여가는 마음구석을 사랑으로 차곡차곡 채워주는 보약이 되여 준다. 오가는 대화에는 진심어린 정감들이 살아있고 가슴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떠날줄 모른다. 진심, 방심, 안심들로 너무나 아름다웠던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감미롭게 음미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상큼해 진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의 생활은 언제나 노을 비낀 잔잔한 호수마냥 항상 황홀하고 아름다웠던것은 아니다. 남자의 자존심을 주장하는 나와 강한 녀성의 스타일인 안해 사이에는 입장차이로 티격태격 할때가 많았다. 한치의 양보가 보이지 않고 서로의 립장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을때는 자리를 뜨는것이 상책이라 훌 털고 일어나 버린다. 시간이 얼마간 흐르고 난후 돌아와서는 “아직도 저기압이냐?” 말을 건네면 안해가 큰눈을 부릅뜨고 흘겨보고나면 내전은 끝이다. 동물의 본능이라 할까 아니면 계절의 변화에 따른 환경요인이라 할까 때로는 인생살이가 구불구불하기도 하고 사방의 갖가지 유혹에 갈팡질팡 할때도 있었다. 궁핍한 사색에 빠져  모댁이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고 가지각색으로 느낄수 있는 행복한 순간들을 소리없이 흘러보낼때도 많았다. 감정은 다치면 터질듯 창문지마냥 미풍에도 애절하게 요동쳤고 령혼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다행으로 많게적게 잃고나서는 그 소중함을 깨닳았고 시원하고 터프하고 쿨함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였다. 감성보다 리성으로 인생을 주체한 뿌듯한 결단들이 있었기에 스스로 자랑스럽다. 인젠 한국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견우직녀신세를 벗어날수 있게 되였다. 휴가때면 서로 오가면서 세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세상부럼없는 담소화락에 빠져 가정의 행복을 돈독히 한다. 한국행이 있을적마다 안해는 무작정 나를 끌고 거리를 거닐면서 안면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시키느라 바쁘다. 지어는 한사람에게 몇번이나 인사를 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신난 안해를 보면서 가슴이 뿌듯해지고 휘여들기 시작한 등에 저도 몰래 힘이 불끈불끈 솟구친다. 사실 리혼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겠지만 별로 요란스러운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면서 감정을 앞세운 순간적인 판단미흡으로 자신을 새로운 궁지로 몰아갈때가 많다.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될수 있을까.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이 자신에게 힘든 날들의 새로운 시작이라는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채 자녀에게 심적불안감과 정신적스트레스를 가져다 주면서 가정위기와 해체 그리고 사회적불안의 요인을 만든다. 사실 우리민족처럼 리혼률이 높고 성생활이 혼잡한 민족은 드물것이다. 리성을 상실한 감성은 왕왕 동물의 본능으로 밖에 리해할수가 없다. 이런 민족이 과연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할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살면서 정이 든다더니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서로 다른 남남이 만나 두 사람의 인생에서 한사람의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의 길에서 정은 때가 되면 빠드득 빠드득 움이 트고 땅을 뚫고 세상에 태여나서는 그 존재와 소중함을 보여준다. 그런 정이 있기에 인간세상이 의미있는 진화를 거듭하는것이 아닌가. 70억인구를 뚫고 맺어진 인연은 너무도 소중하지만 책임감이 없고 감성에 매달린다면 소중한 인연도 쉽게 끊어질수 있다. 지나온 세월에 우리의 사랑은 산곡간의 개울처럼 맑고 순수하여 자랑스럽다. 오수가 흘러들어도 자연의 보약으로 상처 가시며 일사천리 앞만 보고 흘러간다. 가슴아픈 상처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아물어 가고 사랑의 정은 노을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모든 지난일들을 추억속에서 새롭게 다듬어 믿음과 정으로 가야 할 머나먼 그 길들을 밝혀준다. 아침노을이면 어떻고 저녁노을이면 어떠랴. 태양이 비춰주는 핑크빛 노을은 변함이 없다. 동산의 무지개나 서산의 무지개나 모두 칠색이 아니더냐. 인생을 빗질하고 나니 희망찬 래일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인생은 아름답고 인생은 이렇게 사는것이 아닐까. 또 전화소리 울린다. 향기 그윽한 그 소리…………………        
6    중년의 의미 댓글:  조회:1634  추천:0  2015-01-30
근간에 료녕조선족신문 열린 마당에 실린 김옥화작 “중년을 이모작하자” 글을 보고 같은 중년으로서 공감이 생기면서 자신을 뒤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오늘도 귀가에 조용히 내린 하얀 서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고 가슴에 서리가 앉는 기분이다. 격정시대는 흘러갔고 만물에 대한 신섬함과 욕망이 줄어들고 때때로 무언가의 두려움에 압력이 늘어나면서 자신이 인젠 중년이라는것을 실감하게 한다. 중년의 사회적역할은 무거운 부담으로 된다. 청년들은 미래를 가리킨다면 노인들은 과거를 가리키고 중년들은 현실을 가리킨다. 중년단계는 가정과 사업 등 여러면에서 비교적 안정된 단계라지만 다른 각도에서 따져보면 중년은 또한 인생의 곤혹단계가 아닌가 싶다. 중년들에 대한 요구가 높고 까다롭다. 사업에선 중년은 강자와 성공인 이여야 하고 가정에선 자상한 남편과 아빠로 효자효손으로 되여야 하는데 어깨가 무겁고 책임은 너무 크다. 기실 매개인이 담당해야 할 부하는 한정되여 있다. 더우기 심리적 부하는 한계를 넘었을때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수 있고 여러가지 위기가 초래 될수도  있다. 더욱 참담한것은 중년의 위기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것이 일반화되여 있다는점이다. 아이들에게는 당당한 아빠가 되고 싶고 부모에게는 심리에 불편을 줄가 걱정해서이다. 안정된 생활속에서도 중년들은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며 인간의 자연적인 속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문화적차원에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인간의 이런 본능에 대하여 중국의 현인들과 고대희랍의 철학가들도 투철한 견해들을 많이 내놓았다. 그저 홀시되여 있는 아쉬운 부분이라면 중년단계에서 중년들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반면 심리적요인들은 가장 불안하다는것이다. 과거의 가치관과 생활질서 그리고 행위방식들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되며 심리적요소들의 움직임이 아주 활발하게 된다. 물론 청년시기나 중년시기나 로년시기나 풀어야 할 과제들이 공동적인면들이 있겠지만 이런 부분들은 자연현상들이 위주가 되겠고 중년단계에 풀어야 할 과제는 문화적차원에서 리성적으로 대하고 풀어야 할 과제들이 더욱 많다. 청년시기는 생활기반을 닦는 단계이기 때문에 자연을 초월하는 시기로서 많은 정력을 자신을 위한데 투입하며 부모에 대한 부양보다 자신들에 대한 배려를 바라지만 중년들은 부모들에 대한 부양을 하나의 책임과 의무로 생각한다. 중년단계에는 고독감, 허황과 현실, 영혼과육체, 자신과 자비, 규범과 실수, 물욕과 탈욕, 견강과 나약, 성숙과 민감 등등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중년자체의 제한성과 현실을 초월하려는 무한성사이의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순들은 중년들의 상대적으로 온정된 물질적 획득, 외부세계의 다양한 변화 그리고 중년자신의 의식적인 반성과정과 충돌하면서 심리적으로 불안한 심리적 특점들을 산생하는것이다. 인생을 초월하려는 욕망이 합리한 도경으로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할때 불가피하게 중년들의 인생에 불리한 영향을 가져다주게 된다. 중년들의 심리적불안과 과민반응의 근원은 중년시기의 결속은 자신의 성취감종말을 의미하는데서 기인되는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년들은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잘 알 필요가 있다. 매개인들의 올라야 할 산들은 태산이든 아니든, 높든 낮든 얼마나 험난하든 자신의 조건이 부동함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장애자들이 천신만고끝에 작은 언덕길에 올랐다해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수 있으며 본인도 스스로 자호감을 느끼고 자신의 가치와 생명의 귀중함을 느낄수 있다. 정상을 향한 휘황도 감동을 주지만 하산의 과정도 보람이 없는것은 아니다. 인생전반기에 겪어불수 없었던 하반생을 무슨 근거로 그 의미를 부정하겠는가? 공리만 매달리던 지난 생애에 비해 문화적 사회적 의미가 더욱 부각될수 있는 새로운 인생일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중년들 건강상태가 피로루적으로 문제점이 많다. 육체적인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피로도 엄중하며 체력과 심력 모두가 문제이다. 우로는 어른을 잘 모셔야 하고 아래로는 자녀들 잘 키워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중년을 배려해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건강을 챙겨야 한다. 사회가 중년에게 안겨주는것은 책임뿐이고 가정이 중년에게 안겨주는것은 의무뿐이다. 사회와 가정은 반드시 중년들의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 주어야 하며 중년스스로가 피흐르는 상처를 핥게 해서는 안된다. 온사회가 청소년들의 성장에 관심을 돌리고 로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로인복지사업에 정력을 돌리고 있는 이때 중년들은 때이른 갖가지 질병과 싸우며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을 소리없이 하고 있다. 현실생활에서 극단적인 음주와 도박 가정폭력 이혼 등 행위는 소수지만 어찌보면 이는 마음속에 쌓여있던 불안정서에 대한 폭발일수도 있다. 나약한 심리적 특징은 중년마다 모두 있다 다만 정도차이일 따름이다. 청년들은 왕왕 불량한 정서와 나약성을 자신들의 일상생활과 사업에서 많이 보여주지만 중년들은 왕왕 내화를 통해 해소하려 하는데 결국 건강이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도 씁쓸함에 따르는 여유 그리고 운명에 따르는 태연함이 있어 성숙이라 할까. 일어날 일은 어느때든 일어날거고 바라지 않던 일도 때도 없이 생기는 법이다. 귀중한 무엇인가 곁에 있는것도 모르다가 잃은후에야 뇌리를 치는 순간들도 많다. 아낄건 아끼고 버려야 할것은 인젠 몸에서 훌훌 털어 버려야 한다. 중년은 바로 인생의 절반이다. 걸어온 길은 힘들었고 가야 할 길 또한 아직도 멀다. 그저 고락이 동반된 인생길이 평안하기만 바랄뿐이다.      
5    아버지 고향 그리고 나 댓글:  조회:1605  추천:0  2015-01-30
너무도 어린나이에 아버지을 잃고 다섯식구가 힘겹게 살아가면서 성장기에 많이 위축되여 있어서인지 나는 어릴적부터 모든 장소에서 주동적으로 교류의 말꼬를 터치고 이끌어 나가는 담량과 비위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도 교사사업에 대한 무한한 애착심의 발로인지 세월이 흐르면서 말재주는 나름대로 늘어가더니 주변으로 부터 언변이 좋다는 말들은 많이 듣게 되였고 여러가지 행사도 사회할 만큼 이미지도 급상승하였다. 나는 비밀이 거의 없다싶이 속을 드러내면서 하고싶은 말은 꼭 하고마는 성미다. 해야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편한 마음과 자세로 하루생활을 일과할수 있는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입에 쉽게 오르지 않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말이다. 여섯살에 아버지를 잃고 나서 한참 아버지를 부르며 동년을 즐겨야 했던 나의 인생에서 아버지란 단어는 너무도 일찍 나와 담을 쌓고 수십년세월을 지내왔다. 남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아버지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줄때면 나는 종종 부러움과 함께 가슴에 닿는 애처로운 처지를 절감하며 아픔에 모댁이기가 일수였다. 반백이 된 오늘 새삼스럽게도 아득히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며 속으로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아버지란 도대체 나에겐 어떤 존재일가? 아버지와 함께 한 즐겁던 추억은 이미  사라지고 기억에 남아 있는것은 다만 만취상태로 집에 돌아와서 주정을 부리던 장면뿐이다. 이런 아버지가 나에게는 너무도 무의미한 존재인것 같다. 뜰안의 쓰레기통을 집안에 던지지를 않나 어머니보고 술상을 차리라고 욱박지르지를 않나 어린 우리들에게 기합을 주면서 으르렁거리지를 않나 좋은 추억은 하나없고 그저 그런 존재려니 생각할 따름이다. 이런 기회를 빌어서 단 한건이라도 추억과 함께 감동을 느끼고 싶은데 가정을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헌신한 아버지 추억은 꼬물만큼도 없으니 한숨만 나온다. 아버지가 무서워 이불속에서 벌벌 떨며 꿈나라에 가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아버지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채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저멀리로 언녕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우리 4형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모성애를 만끽하며 성실하게 성장했을뿐이다. 이런 나의 아버지가 남들의 추억속에서는 멋있고 능력있고 인맥좋고 남을 잘 돕고 인사성이 밝은 훌륭한 존재였다는것을 이입저입을 통해 뒤늦게나마 알수 있었다. 아버지가 문화대혁명시기에 갖은 박해를 받다가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날때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은 37세 열혈청년이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어찌나 많은지 말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아버지의 령구도 손님들이 두어깨에 멘채로 묘지로 모셨다. 이런 아버지가 왜서 우리에게는 훌륭한 존재로 오래오래 함께 할수 없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만 저리고 운명을 탓할수 밖에 없다. 고향을 떠나 수십년세월 타향에서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처지라 해마다 추석 청명이라도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뵐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조상을 잘모셔야 인생이 잘 풀린다고들 하지만 너무 일찍 서먹해진 아버지의 존재는 거리가 멀고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리유로 아버지의 산소로 향한 발길이 거의 끊기다싶이 되였다. 세월이 좋아 청명절도 법정휴가제가 실시되면서 인젠 마음만 먹으면 몸을 털고 길을 떠날수 있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였다. 올해는 큰 맘먹고 아버지산소행을 결심하고 개산툰고향으로 향한 렬차에 몸을 실었다. 원정길이라 마음이 들뜰만도 한데 어쩐지 전혀 다른 착잡한 기분만이 가슴을 때린다. 봄빛이 짙어가면서 날씨는 따뜻하건만 차창밖의 산과 들은 록색이 보이지 않았고 개울에서는 봄날의 따스한 해빛에 녹은 눈과 얼음이 물로 되여 잘잘 흐를뿐이다. 듬성듬성 자리를 잡은 농가에서는 불빛이 가물가물 새여나오고 굴뚝에서 피여나는 연기는 하늘하늘 춤추며 여기저기로 흩어진채 사라진다.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는 평화로운 산골의 풍경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고향은 내가 나서 자란곳이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정은 그무엇으로도 바꿀수 없고 끊을수 없다. 고향의 곳곳에 찍혀있는 나의 발자국 그리고 성장의 흔적들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지금의 고향모습은 어떨까 가슴이 설레인다. 고향이 가까워지면서 마음도 한결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중턱까지 올망졸망 들어선 민가는 번창했던 고향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까이 할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부풀어 있던 마음이 허전함과 허탈감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향거리를 거닐면서 유심히 살펴보니 인적이 너무 드물었고 낯익은 얼굴은 하나도 안보였다. 난민촌을 방불케 하는 거리와 강한 산바람에 하늘을 날아예는 쓰레기 그리고 주인 사라진 빈집들마다 여기저기 뜯긴채 페허로 되여가고 있었다. 즐겁던 동년시절의 고향모습을 다시는 찾을수 없을 정도로 적막함과 황량함으로 가슴이 내려 앉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강산이 두번이나 변할 세월이 더 흘렀으니 고향도 변할만도 하건만 이런 모습의 고향의 변화는 근본 바란바는 아니였고 상상이상의 충격일 뿐이다. 국영공장하나만을 믿고 살아가던 고향사람들은 기업의 도산과 함께 외국으로 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쓸쓸하고 삭막한 고향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나는 느슨한 비탈길을 따라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떠났다. 세월과 함께 변한 산의 모습이라곤 다만 수없이 늘어난 묘뿐이다. 묘비에 쓰여있는 익숙한 이름들도 종종 보였는데 하늘과 땅에서 혼으로 우리들의 인연과 만남이 계속되고 있었다. 힘들게 아버지의 묘비를 찾아보니 우거진 마른 잡초에 꺼진 묘지는 오랜 시간 손길이 닿지않았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버지, 묘에 누워계시는 분이 진짜 저의 아버지 맞으신가요? 수십년세월 홀로 어떻게 지내오셨습니까? 얼마나 고독하셨습니까? 저의들이 언제오나 많이  기다리셨죠. 비록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해준것이 없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귀한 생명을 주셨잖아요. 못난 아들 늦게나마 아버지앞에서 속죄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버지! 상을 차리고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붓고 절을 올리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가슴깊이 숨어있던 아버지란 말이 입으로 튕겨나와 묘지주위를 맹돌았다. 순간 젊은 아버지가 땅을 뚫고 나타나 반백이 된 아들과 상봉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하면서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묘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였다. 머리를 돌려 고향의 모습을 내려다 보니 마음이 서서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고향이 없었다면 고향의 깊은 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의 행복과 모든것이 있을수 없었을것이다. 고향은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마음의 안식처이고 힘의 활력소이고 그리움의 대상이다. 정이 넘치고 동포들로 떠들썩하던 그런 시대가 다시 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세상 어디선가 새로운 삶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고향사람들이 언제라도 한자리에 모여 고향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우리 선인과 위인들은 후세에 너무도 많은 효에 관한 정신적부를 남겨주었다. 맹자가 한 말“孝子之至,莫大乎尊亲”,“惟孝顺父母,可以解忧”의 뜻인즉 훌륭한 효자로 되려면 자신의 부모부터 존경해야 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거늘 하늘과 땅이 결합되여 만물을 생성하니 무슨 걱정할 필요가 있겠느냐이다. “百善孝为先”이라는 말도 바로 효로부터 선을 실천하라는 참뜻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흔히 바쁘다는 리유로 인간의 기본도리를 뒤로 한채 살아갈때가 많다. 자신의 친인들을 따뜻이 대하고 배려하는 기본자세가 갖추어지지 못한다면 일생의 유감이요 비극이 아닐수 없다. 친인들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야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할것이다. 친인들이 떠나고 나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조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잘 모시고 부모님께 효를 실천하는것은 결국 자신에게 리롭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나의 곁에는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셔 우리에게 효도의 기회를 주어서 너무도 감사하다. 아버지께 할수 없었던 효도를 어머니께 배로 해드리는것으로 그 서운함을 달래본다. 부모살아 생전에 자주 들려보고 전화문안이라도 종종 드리는 효도 역시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어머니 부디부디 건강장수하세요. 아버지가 어머니께 해드리지 못한 몪까지 저의들이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인젠 편히 쉬세요. 어머니는 저의들이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어머니 사랑합니다.  
4    술과 인생 댓글:  조회:1440  추천:1  2015-01-30
세월이 조용히 흘러가면서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기억속에서 종적을 감추기 시작하였으나 어쩐지 유아에서 아동에로의 과도시기에 겪었던 술로 인한 기억은 눈앞에 새록새록 자주 나타나군 한다. 신사답고 인맥이 좋아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술상을 자주 드나들던 아버지는 어쩐지 술상에만 앉으면 술의 노예가 되여 늘 만취상태에서 집에 돌아와서 주정을 부리군 히였다. 녹초가 된 심신으로 뜰안의 쓰레기통을 집안에 집어던지지를 않나 꼬부라진 알아듣지못할 말들을 수없이 중얼거리지를 않나 온밤 집안을 부산하게 만들기가 일수였다. 어린 우리형제는 찍소리도 못한채 이불속에 숨어서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몰랐다. 이것이 바로 술이 나에게 남긴 첫 추억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술로 인해 받은 신체적 심리적 고통은 나에게 술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거의 할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지어는 술을 만들어낸 사람이 왜서 이런 괴물을 만들어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가 나보고 “정말 아까운 사람이다. 술만 잘하면 앞길이 창창할 사람인데” 하고 던진 말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너무도 술을 회피하고 늘어나지 않는 주량에 주변도 안타까운 마음인가 보다. 그러면서 술을 잘해야 사회생활을 잘할수 있고 사람들의 긍정을 받을수 있는 오늘의 현실에 안타까울뿐이다. 그런다고 술문화가 그 무슨 나 개인의 의사에 의해 변하는것도 아니고 남녀를 불문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술과 동반자가 되여 살아가면서 단순한 음주라는 사회적행동을 오늘의 문화적현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현실을 무시할수는 없지 않는가. 오늘따라 술이란 존재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새삼스레 점검하고 싶어졌다. 우리민족이 술에 집착하는 이유는 술에 능한 사람들이 남자답고 술에 약한 사람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사회적인식과 생존압력이 가중되면서 고도의 긴장상태가 사람들에게 속심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날려보낼 기회와 장소를 찾도록 하는것이 주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수천년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술문화는 인젠 우리민족의 생활의 일부분이 되여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새로운 의미와 함께 자리을 잡고 있다. 술자리는 인간관계의 교류를 펼치는 장소로 되여 각종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리성의 그늘에 가리워졌던 억압된 감정이 분출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체면, 눈치, 인사치레 등을 중시하는지라 술자리에서 서로 눈치를 보거나 남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강하게 의식하며 술자리 참석에의 강요와 술권유, 그리고 그러한 술자리 규칙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 생기는 손익 등에 비교적 민감하다. 때문에 술자리에서 개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주량에 맞게 술을 적당히 마시는데 어려움이 많고 술자리는 대부분 2,3차로 이어져 계속되는 술 권유에 취할 때까지 마시기도 한다. 자기만의 기분에 취하여 과음함과 아울러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왕따” 취급하듯 감정을 살려가며 분위기를 엉망으로까지 몰고 가면서 술에 집착한다. 술이 별로인 나도 어쩌다 이길수 없는 유혹에 술잔을 들고 보면 목구멍을 파고드는 매캐한 맛뒤에 피여나는 특이한 향기가 입안을 감돌며 감미로운 술의 진맛을 느낄때가 많다. 문학가들이 술을 즐긴 이유도 여기에 있는것이 아니였을까. 그들은 술을 통해 자유분방을 알았고 자연의 극치를 보아냈고 흔들리는 마음의 의미와 갈구를 깨닳았다. 고대시인 리백은 술애호가로서 음주후에 남긴 시구들이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다. 술뒤에 진심을 보여준다는 말이 있다. 정인군자도 술뒤에는 위장을 벗을줄 알고 진정을 보여준다. 담이 작기로 콩알만 하던 사람도 음주뒤 담대해지면서 욱욱 룡을 쓸줄 알고 가슴깊이 숨어있던 하고싶던 말을 던진다. 아부에 미친 사람도 술기운을 빌어 상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리가 있네없네 너스레를 떨줄 안다. 이것이 술의 매력이 아닌가? 언젠가 나도 술에 맘껏 취해 하늘땅이 무서운줄도 모르는 슈퍼맨이 되여 보고 싶다. 몽롱한 의식으로 세상을 보고 싶고 전혀 다른 인생의 감각을 느끼고 싶고 만취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타인의 평가도 듣고 싶다. 진정 그런 날이 있을라나. 술을 마실때는 취해야 술의 매력을 진정 느낄수 있다는게 술군들의 공감이다. 건배의 의미는 취하려는 의미가 이미 담겨있고 오늘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의미와 취기속에서 나름대로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넓혀가려는 의미도 담겨있다. 취중의 몽롱함은 공동체를 찾아가는데 기여하는 바가 확실히 크다. 이렇게 술은 인간에게 떼어 놓을수 없는 반려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때 술을 무시한다는것은 사회의 공동의식을 배척하는것이나 다름없으며 술은 인류에게 있어서 위대한 존재가 아닐수 없다. 거기에다 술은 한기를 없애고 소화를 돕고 안정과 진정역할을 하며 혈액순환을 돕고 부패를 방지한다고 하니 술이란 존재가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기회를 빌어 술에 집착하는 민족의 평균수명이 짧다는 엄연한 객관현실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평균 술소비량이 세계제일이라고 자랑하는 한국인과 중국조선족 그리고 높은 도수의 술을 선호하는 로씨야인들의 평균수명이 모두 해당된 경제실력국가와 민족과 비해 볼때 많이 짧은걸로 집계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우연한 일로만 쉽게 지나치다가 회한의 심리적고통에 모댁일때에야 주해의 엄중성을 절감하며 상상못할 대가를 치른다. 술을 알맞게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고 정신적으로 좋은 자극제가 되어 큰 효과를 나타내지만 지나치면 건강도 해치고 정신도 황폐해지고 가족까지 파멸로 이끈다. 술로 인해 생명을 잃고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은 가련한 사람들이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것이다. 술소비는 응당 문화적소비로서 례의를 지키고 분위기를 띄우고 심경을 토로하고 정취를 만끽하는것이여야 한다. 인젠 축복의 장이 되고 건강의 활력소가 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즐기는 건전한 술문화가 안착되도록 지혜를 모을때가 왔다고 보아진다. 단순한 개인의 음주애호의 범위를 벗어난 인격과 국격 그리고 민족의 영예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사회적현상으로의 건전한 술문화를 창도하는 계기가 조속히 마련되여야 한다. 어쩌다 방종하고 실수하는 술문화는 그것이 경험이 되겠지만 도를 넘어 지나치게 되면 죄가 되고 해가 되는것이다. 우리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며 부정부패의 수단으로 가정파탄과 건강을 해치는 도구로 까지 리용되는 술문화는 청산되고 멀리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술문화 에서의 진화를 가속화하여 술문화에 숨겨진 용속한 습속을 버리는데 모두가 앞장서야 한다. 이 기회를 빌어 음주를 통한 심신건강과 사회적공동체를 진정으로 형성하는 그날이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3    하얀눈의 축복 댓글:  조회:1406  추천:0  2015-01-30
눈이 어느새 땅우에 많이도 쌓였다. 뿌연 하늘에선 소리없이 눈송이가 날려와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는다.눈에 뒤덮힌 길따라 떠난 그는 한마디 말없이 사라졌다. 크다란 발자국은 어느새 소북히 쌓인 눈 아래로 사라진다.흐려지는 기억을 다독이며 나는 스스로를 기억의 울안에 가두어버렸다. 그가 남긴 모든것을 기억속에서 쓰다듬으며 어디선가 뭘하고 있을 그에게 안부를 묻는다. 앙상한 나무가지마다 그래도 눈송이를 붙잡고 고독을 달래느라 바쁘다. 어쩐지 나는 봉사롱아가 되더라도 인젠 그대의 존재를 감지하고 싶은 욕망만은 영원히 갖고 싶다. 그 시절 아름답던 동요와 함께 세월의 곳곳에 숨겨놓았던 그리움과 련민들이 하나하나 심령에 파고든다. 열혈청춘 작열하는 태양밑에서 뜨거운 정이 오가던 랑만의 순간순간들 너무도 소중한 추억이다.그래서 차가운 겨울도 나는 무섭지 않았고 새하얀 눈송이도 포근한 이불이 되여 얼어드는 육체와 령혼을 감쌀수 있어 너무도 좋았다.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멀리 있어도 절대 슬퍼말라고. 그래, 나도 알고 있단다. 나를 홀로 두고 나의 세계에서 영영 사라질수 없다는거. 언제나 너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안고 고운 눈꽃이 되고 투명한 얼움이 되여 함께 한다는거.살아가면서 잊혀지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다지만 그래도 기억의 구석에서 떠나지 않는 네가 있어 행복하고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갈수 있다. 시계는 똑딱똑딱 정적을 두드리고 그리움에 지친 시내물은 얼움속에 종적을 감추고 소리없이 흐른다. 추억속에 젖어드는 눈가의 눈물 인젠 지워줄 사람도 없고 한송이 꽃에 담은 애절한 나의 마음도 인젠 짙은 안개속으로 사라져 간다.살아숨쉬는 리성의 신경을 살려 쓰러지는 나를 스스로 부추키고 기억의 문을 열어가느라 기진맥진이다. 그래도 이래야만 너무도 새하얀 우리만의 세계에로 다가설수 있으니 다행이다. 인젠 그리움과 회한에 안타까움이 없다. 아. 새하얀 눈 펑펑 많이도 내리는구나.  
2    봄날에 내리는 하얀눈은 아름답다 댓글:  조회:1466  추천:0  2015-01-30
봄빛이 갈수록 완연하다. 사람들도 겨울내 움츠렸던 몸을 추슬린다. 그런데 웬걸 때아닌 큰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온 겨울 눈이 그림자도 안보여 서움함이 많았었는데 봄날씨에 봄비가 눈이 되여 펑펑 내리고 있다. 계절을 우롱이나 하듯이 정말 많이도 내린다. 장인의 손놀림이 필요없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여기저기서 눈의 변신이 바쁘다. 복설같은 존재라 계절에 관계없이 포근함과 깨끗함을 안고 사람들에게 애교부리며 다가선다. 아지랑을 싣고 여기저기에서 기웃거리던 봄소식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눈은 우아한 자태로 그리움이든 기다림이든 관계없이 제멋에 취해 춤추며 내린다. 창가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빌딩도 가로수도 그리고 힘들게 움직이는 차량과 행인들 모두가  굳어진듯 하다. 앨범의 경물마냥 세상이 고정되여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이런 날씨에는 당나라 시인들의 명시를 읊으며 와인을 한잔하는것도 랑만이 아닐까 싶다. 여유와 오만함으로 공간을 꽉 채운채 날려오는 눈송이 그리고 눈송이와의 숨박꼭질에 신난 바람은 어쩌면 한쌍의 련인마냥 정답고 행복해 보일까. 함박눈은 기이하고 아름다운 화폭이 되여 황홀함과 무한한 상상에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눈이 잠시 멈춘듯 하더니 구중천에 떠있는 태양은 혼이 나간듯 뿌연하늘에서 정신을 가다듬느라 바쁘다. 빌딩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해빛들은 어쩐지 어색한 모습이다. 자연의 변화는 참말로 신기하다. 멀리 바라보니 광야를 뒤덮은 대설들은 웅위로움에 신나있고 은빛으로 황홀하다. 무거운 눈덩이에 휘여진 길가의 나무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흔들 그래도 신사마냥 겸허하다. 대설은 사람들의 행보를 느리게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지 않는다. 나는 봄날의 피곤함도 없이 기대감을 안고 창가에 서서 춤을 추는 눈송이를 유심히 살펴본다. 눈이 오면 겨울추위가 다가옴을 알려주지만 이번 눈은 의미가 달라진다. 봄날의 정기를 느끼게 하고 봄날의 따사롬을 한결 돋구어준다. 봄날의 눈은 포근하고 겨울처럼 무정하지 않다. 봄날의 눈은 희망을 주고 겨울처럼 삭막하지 않다. 봄날의 눈은 색다른 경관을 보여주며 한수의 시 한폭의 그림 한곡의 감동을 주는 선률과도 같이 찬란한 계절이 되여 우리에게 무한한 동경을 가져다 준다. 눈의 세계에 빠져드니 눈의 사심없는 기여가 고맙기만 하다. 이슬로 녹아 물로 녹아 생명을 다한다 할지라도 짧은 생애에 인간들에게 아름다움을 남겨주고 자신에게는 가장 평범하고 무미한 순간만 남긴다. 백옥같이 눈부신 눈으로 변신하기까지 기나긴 기다림과 모대김을 견디면서 말이다. 그러다가도 자신을 보여주고 자랑할때 복잡한 심경으로 성공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의 결과는 생애의 전부를 인간과 자연에게 선뜻 바치는것이다. 눈꽃은 요란스럽지 않고 정갈하며 우뢰처럼 떠들썩하지 않고 정적을 지키며 바람처럼 변덕이 많지 않고 집착하며 비처럼 애절함에 좌절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며 소리없이 땅에 내려와 마음의 짐을 벗어내린다. 눈꽃마다 반짝이고 부드럽고 까다롭다. 미미한 기류의 이동과 함께 방향없이 란무하며 뒹굴기도 하는 모습이 무용수의 헌신적인 춤의 세계를 보게 하는듯 하고 힘없이 유리창에 키스하다 내려앉는 모습이 련민과 아쉬움에 지친 모습인듯 하다. 그 아쉬움을 달래려는듯 하늘에서 수많은 눈꽃들이 나타나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바람타고 날려온다. 그리고는 나름대로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눈덩이를 이루며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다. 어느새 대지는 말그대로 하얀 세계가 되여 동화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재연한다. 나는 손을 내밀고 하얀 눈송이를 담아봤다. 나의 따뜻함에 감동을 하였는지 순식간에 손바닥에서 한방울의 눈물이 되여 사라진다. 나는 너무도 눈을 기다렸다. 지어는 꿈에서도 백설같은 겨울의 경치를 보군 하였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눈이 끝내 나의 세계에 찾아들었고 아직도 펑펑 쏟아지고 있다. 나는 나의 두눈에 천신만고끝에 찾아온 새하얀 눈을 오래오래 담아두련다. 두다리로 천산만수를 지나서라도 내가 기대하던 황홀한 눈을 찾아보련다. 눈이 오고 세월이 가고나면 남는것은 생활과 생명이 남겨준 무한한 감개와 감사의 마음뿐이기 때문이다. 눈이 언제 오는냐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하늘하늘 춤을 추는 눈을 지켜주고 메마른 령혼을 적셔주면 되는것이다. 이런 날씨 맞게 떠오르는 정감을 살리려면 친구들과 모여앉아 술이나 커피를 마시면서 욕심과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고 눈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워지고 눈처럼 집착하고 시인이 되여주는것이다. 래일은 눈이 있을라나. 봄날의 눈물에 나의 꿈이 깨지지나 않을란지. 꿈이 깨지면 류랑이나 보내지. 세월에 남겨진 숙제는 너무도 많으니까 추억이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다음 눈은 언제나 올라나. 다음눈은 어깨우에 모시고 함께 춤 추리라.        
1    50대의 인생 넉두리 댓글:  조회:1970  추천:3  2015-01-30
50대의 한해가 또 저물어 가고 60대로 향한 거리가 더욱 가까워진다. 오늘따라 새삼스레 거울에 비낀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 보며 감회에 빠져있다. 50대라면 백을 반으로 나눈 꽤나 많게 살아온 인생이다. 모택동이 30년세월을 손가락 튕기는 한순간이라더니 청춘과 랑만으로 넘쳤던 대학시절의 숨결이 아직도 들리고 있는데 인젠 50대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만은 아직 이팔청춘이라 남과 나이를 주고 받을때 언제나 40대 초반 아니면 중반으로 시치미도 뚝 따기도 하지만 거짓없이 얼굴 곳곳에 파고드는 세월의 흔적들은 갈수록 완연하다. 안위따위를 해봤자 인젠 쓸데 없다. 시야가 겹쳐지고 기억력이 쇠퇴되고 힘들게 머리속에 쌓아 놓았던것들도 언젠가 저절로 기억에서 사라지고 몸 여기저기서 켜지는 적신호들로 점점 지쳐가는것은 어쩔수 없다. 때때로 권태와 피로가 느껴질 때 책보기도 싫고 글쓰기도 싫고 일시적인 타락속에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과거의 가치관과 생활질서, 그리고 행위방식들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다. 감성으로 대할수는 없고 리성으로, 문화적차원에서 풀어야 할 과제들이 50대들 앞에 줄 서 있다. 50대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사람도 있고 게으름과 피로로 인해 타락의 시절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살아온 인생이 있어 남한테 뒤질세라 자신에게 채찍질하는것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나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정직한 삶을 추구하고 젊은이들이 하는 모든 일에 과감히 도전을 한다. 그러나 거센 파도에 밀리는 자연의 순리앞에서 우리는 유물론자일수밖에 없다. 이는 중년자체의 제한성과 현실을 초월하려는 무한성사이의 모순을 잘 보여주고 있다. 커피 한잔을 타고 베란다 창가에 다가서니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바깥세상이 한눈에 안겨든다.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익히고 행복을 찾아 동분서주다. 보일락 말락 잡힐듯 안잡힐듯 숨박꼭질만 반복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행복을 찾아가는길이라 모두들 흔쾌히 받아들인다. 나도 그들속의 한 구성원이라 생각하니 세상이 정겹게 느껴진다. 교사직에 종사한지도 어느덧 30년세월이 흘렀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앞만 보고 달려갔지만 돌이킬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였을 때도 있었고 노력의 대가로 영예의 꽃다발속에 묻혀 순간의 기쁨을 전률처럼 느낄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고 치른 대가가 커갈수록 포기하려 해도 인젠 힘들어진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갈수 밖에 없다. 최종결과가 어떻든 인젠 정말 중요하지 않다. 매일 보람을 느끼고 행복감이 든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블로그를 개설한지 시간이 꽤나 흘렀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시간이 가는대로 생각이 가는대로 적는 나만의 공간이다. 정보화시대라 블로그를 개설한 50대들도 많다. 50대들의 블로그를 살펴보면 꾸김새나 글들이 천차만별이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어설픈 블로그들도 수두룩하다. 그래도 글마다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애환과 태도가 담겨있다. 수작이든 졸작이든 모두가 인생기록이고 인생에 대한 터득이고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인생기록과 함께 자신을 되돌아보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거리에 관계없이 블로그를 통해 우정을 쌓아가는것도 블로그의 재미이다. 그래서 시대적 흐름에 자신의 몸을 싣고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쓰고 올리는것이 아닐까. 50대는 인간교제가 가장 왕성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학에서 대학까지의 동창, 직장동료에 사회친구까지 하면 어마어마한 친구군체가 이루어진다. 민감한 부분은 그래도 이성교제이다. 오가는 말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거기서 흡인력이 생길때 친구가 되고 그 다음 손을 잡게 되고 좀 더 가까이 다가들면서 전률을 전달하게 되는것이다. 매 순간의 한계를 장악하기란 쉬운것은 아니다. 맘에 드는 이성을 마주하게 되면 눈을 크게 뜨고 슬금슬금 눈요기를 하는 것은 누구나 똑 같다. 그러나 넘지 말아야 할 한계가 있다는걸 누구나 명심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아직도 생일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지 않다. 자신이 태여난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요란스럽게 축하를 하는지 싶지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바쁘고 또 그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는것이 더욱 보람있지 않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생일은 효를 실천하는 선행으로 인지하고 꼭꼭 챙겨드리지만 다른 생일에는 모처럼 기억을 해서 문안과 축복을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형들한테서 꾸중을 들은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생일을 쇠고 한살 먹고나면 인생이 일년 줄어드는것과 다름없는데 진짜 축하할 일인지 아직도 확답이 안 선다. 지나온 인생을 더듬어보면 인생은 자신과의 싸움이나 다름없다. 적을 이기는것은 하루 혹은 한 순간이면 충분할수 있어도 자신을 이기는것은 평생일수도 있다. 그 싸움이 지루하게 느껴질때 살아있는 매일매일을 생명의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면 더없이 소중한 인생이 될수 있다. 눈물로 어제날을 미워하고 한탄할바에는 땀으로 래일을 위해 오늘 억세게 일하는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남이 나를 긍정하지 않으면 스스로 인가하고 남이 나를 즐기지 않으면 스스로 즐기고 남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축복하면 된다. 사람들의 의심과 시선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 없고 타인들의 무지함으로 자신에게 아픔을 줄 필요는 더욱 없다. 내길을 내가 걸어가거늘 남들이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랴. 지난 수십년 세월, 어찌보면 생존의 기본을 위해 싸워온 힘든 인생이였으나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터득하고 사계절의 향기를 골고루 맡으면서 살아온 보람도 있는 인생이다. 하기에 종종 지난 세월의 좋은 추억에 빠져보기도 하고 힘든 세월의 기억들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승화와 진화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정상을 정복하는 휘황도 감동을 주지만 여유있는 마음의 자세로 주변의 경물에 빠져보는 하산 과정도 너무도 보람있다. 명예와 금전에만 얽매여 심신이 고달프던 지난 세월 비해 인젠 문화적, 사회적 의미가 더욱 부각될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에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집나설 차비를 하는데 또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린다. 날씨가 추우니 옷을 많이 껴입고 나가란다. 인젠 할아버벌로 치닫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언제나 아이다루듯이 사랑의 잔소리에 신나 있다. 어머니에게는 우리가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히 아이로 보이나 보다. 그래서 더욱 행복한 50대이다. 아이면 어떠랴 어머니가 있어서 너무도 행복한 인생인데. 부모님 살아생전 효도의 기회를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데. 길가에 나서니 몸부림치던 앙상한 나무가지들이 어느새 함박눈을 얼싸안고 련민에 빠져있다. 자연의 한 구성원이 되여 나도 눈송이를 한웅큼 손에 꼭 쥐고 김빠진 공마냥 축 처진 자신에게 잔소리을 늘여놓는다. 그래! 인생은 이제부터 또 새롭게 시작하는거다. 여유있는 삶의 자세로 새록이 움트는 봄날처럼 파아란 인생을, 작열하는 여름날의 해볕처럼 화끈한 인생을, 빠알갛게 젖어가는 가을단풍처럼 황홀한 인생을,  새하얀 겨울의 눈처럼 깨끗한 인생을 살아 가는거다. 자신만의 오색령롱한 인생에 종지부를 찍을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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