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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사발
길상호
아무런 기적도 없이
가랑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누가 거기 두고 갔는지
이 빠진 사발은
똑, 똑, 똑, 지붕의 빗방울을 받아
흙먼지 가득한 입을 열었다
그릇의 중심에서
출렁이며 혀가 돋아나
잃었던 소리를 되살려 놓는 것
둥글게 둥글게 물의 파장이
연이어 물레를 돌리자
금 간 연꽃도
그릇을 다시 향기로 채웠다
사람을 보내 놓고 허기졌던 빈집은
삭은 입술을 사발에 대고
모처럼 배를 채웠다
프로필
길상호 : 충남 논산, 한남대 대학원 국문과,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모르는 척] 외
시 감상
늦장마가 많이 내렸다. 다행히 하천의 범람이나 큰 홍수로 인한 피해는 예년에 비해 적었다. 비 덕분에 칠월도 그나마 덥지 않게 보냈다. 비는 숲과 땅이 가두어 두고 쓸 만큼만 왔다. 어려운 시절엔 비가 내리면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양동이와 그릇을 밑에 받치면 툭툭, 낙숫물 소리. 그 소리가 무척 그립다. 본문처럼 물의 파장이 되살려놓은 지나간 날의 아련한 향수가 아련하다. 지금보다 못 살았어도 때론 낭만적이고 때론 정의롭고 때론 콩 한조각도 나눌 수 있는 ‘정’이 그득한 시절이었는데, 빗소리가 참 미쁘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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