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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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김소월 시혼(詩魂)
2014년 06월 09일 20시 37분  조회:7220  추천:1  작성자: 최균선
                                                        시혼(詩魂)

                                                          김소월
                                       
                                                              1.

    적어도 평범(平凡)한 가운데서는 물(物)의 정체(正體)를 보지 못하며, 습관적(習慣的) 행위(行爲)에서는 진리(眞理)를 보다 더 발견(發見)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어질다고 하는 우리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여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밤에 깨여서 하늘을 우러러 보십시오. 우리는 낮에 보지 못하던 아름답움을, 그곳에서,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파릇한 별들은 오히려 깨어 있어서 애처롭게도 기운있게도 몸을 떨며 영원(永遠)을 속삭입니다. 어떤 때는, 새벽에 저가는 오묘한 달빛이, 애틋한 한 조각, 숭엄 (崇嚴)한 채운(彩雲)의 다정(多情)한 치마귀를 빌려, 그의 가련(可憐)한 한두 줄기 눈물을 문지르기도 합니다. 여보십시오, 여러분. 이런 것들은 적은 일이나마, 우리가 대낮에 는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던 것들입니다.
    다시 한 번, 도회(都會)의 밝음과 짓거림이 그의 문명(文明)으로써 광휘(光輝)와 세력(勢力)을 다투며 자랑할 때에도, 저, 깊고 어두운 산(山)과 숲의 그늘진 곳에서는 외로운 버러지 한 마리가, 그 무슨 슬픔에 겨웠는지, 쉬임 없이 울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버러지 한 마리가 오히려 더 많이 우리 사람의 정조(情操)답지 않으며, 난 들에 말라 벌바람에 여위는 갈대 하나가 오히려 아직도 더 가까운, 우리 사람의 무상(無常)과 변전(變轉)을 설워하여 주는 살틀한 노래의 동무가 아니며, 저 넓고 아득한 난바다의 뛰노는 물결들이 오히려 더 좋은, 우리 사람의 자유(自由)를 사랑 한다는 계시(啓示)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고인(故人)은 꿈에서 만나고, 높고 맑은 행적(行蹟)의 거룩한 첫 한방울의 기도(企圖)의 이슬도 이른 아침 잠자리 위에서 듣습니다.
    우리는 적막(寂寞)한 가운데서 더욱 사무쳐 오는 환희(歡喜)를 경험(經驗)하는 것이며, 고독(孤獨)의 안에서 더욱 보드라운 동정(同情)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다시 한번, 슬픔가운데서야 보다 더 거룩한 선행(善行)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며, 어두움의 거울에 비치어 와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보이며, 살음을 좀 더 멀리한 죽음에 가까운 산(山)마루에 서서야 비로소 살음의 아름다운 빨래한 옷이 생명(生命)의 봄두던에 나부끼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곧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나 맘으로는 일상(日常)에 보지도 못하며 느끼지도 못하던 것을, 또는 그들로는 볼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밝음을 지워버린 어두움의 골방 에서며, 살음에서는 좀 더 돌아앉은 죽음의 새벽빛을 받는 바라지 위에서야, 비로소 보기도 하며 느끼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分明)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보다도 맘보다도 더욱 우리에게 각자(各自)의 그림자같이 가깝고 각자(各自)에게 있는 그림자같이 반듯한 각자(各自)의 영혼(靈魂)이 있습니다. 가장 높이 느낄 수도 있고 가장 높이 깨달을 수도 있는 힘, 또는 가장 강(强)하게 진 동(振動)이 맑지게 울리어 오는, 반향(反響)과 공명(共鳴)을 항상(恒常) 잊어 버리지 않는 악기(樂器), 이는 곧, 모든 물건이 가장 가까이 비치어 들어옴을 받는 거울, 그것들이 모두 다 우리 각자(各自)의 영혼(靈魂)의 표상(標像)이라면 표상(標像)일 것입니다.
                                                          2.
    
    그러한 우리의 영혼(靈魂)이 우리의 가장 이상적(理想的) 미(美)의 옷을 입고, 완전(完全)한 음률(音律)의 발걸음으로 미묘(微妙)한 절조(節操)의 풍경(風景) 많은 길 위를, 정조(情調)의 불붙는 산(山)마루로 향(向)하여, 혹(或)은 말의 아름다운 샘물에 심상(心想)의 작은 배를 젓기도 하며, 이끼 돋은 관습(慣習)의 기험(崎驗)한 돌무더기 새로 추억(追憶)의 수레를 몰기도 하여, 혹(惑)은 동구(洞口) 양류(陽柳)에 춘광(春光)은 아리땁고 십이곡방(十李曲坊)에 풍류(風流)는 번화(繁華)하면 풍표만점(風飄萬點)이 산란(散亂)한 벽도화(碧桃花) 꽃잎만 저흩는 우물 속에 즉흥(卽興)의 두레박을 드놓기도 할 때에는, 이 곧, 이르는 바 시혼(詩魂)으로 그 순간(瞬間)에 우리에게 현현(顯現)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시혼(詩魂)은 물론(勿論) 경우(境遇)에 따라 대소심천(大小深淺)을 자재변환(自在變換)하는 것도 아닌 동시(同時)에,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한 존재(存在)입니다.
    어디까지 불완전(不完全)한 대로 사람의 있는 말의 정(精)을 다하여 할진대는, 영혼(靈魂)은 산(山)과 유사(類似)하다면 할 수도 있습니다. 가람과 유사(類似)하다면 할 수 있습니다. 초하루 보름 그믐 하늘에 떠오르는 달과도 유사(類似)하다면, 별과도 유사(類似)하다면, 더욱 유사(類似)할 것입니다. 그러나 산(山)보다도 가람보다도, 달 또는 별보다도, 다시금 그들은 어떤 때에는 반드시 한번은 없어도 질 것이며 지금도 역시(亦是)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적어도 변환(變換)되려고 하며 있지마는, 영혼(靈魂)은 절대(絶對)로 완전(完全)한 영원(永遠)의 존재(存在)며 불변(不變)의 성형(成形)입니다. 예술(藝術)로 표현(表現)된 영혼(靈魂)은 그 자신(自身)의 예술(藝術)에서, 사업(事業)과 행적(行蹟)으로 표현(表現)된 영혼(靈魂)은 그 자신(自身)의 사업(事業)과 행적(行蹟)에서, 그의 첫 형체(形體)대로 끝까지 남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혼(詩魂)도 산(山)과도 같으면은 가람과도 같으며, 달 또는 별과도 같다고 할 수는 있으나, 시혼(詩魂) 역시(亦是) 본체(本體)는 영혼(靈魂) 그것이기 때문에, 그들보다도 오히려 그는 영원(永遠)의 존재(存在)며 불변(不變)의 성형(成形)일 것은 물론(勿論)입니다.
    그러면 시작품(詩作品)에는, 그 우열(優劣) 또는 이동(異同)에 따라,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일지라도 혹(或)은 변환(變換)한 것 같이 보일는지도 모르지마는 그것은 결(結)코 그렇지 못할 것이, 적어도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은 시혼(詩魂) 자신(自身)이 변(變)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산(山)과 물과, 혹은 달과 별이 편각(片刻)에 그 형체(形體)가 변(變)하지 않음과 마치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작품(作品)에는, 그 시상(詩想)의 범위(範圍), 리듬의 변화(變化), 또는 그 정조(情調)의 명암(明暗)에 따라, 비록 같은 한 사람의 시작(詩作)이라고는 할지라도, 물론(勿論) 이동(異同)은 생기며, 또는 읽는 사람에게는 시작(詩作) 각개(各個)의 인상(印象)을 주기도 하며, 시작(詩作) 자신(自身)도 역시(亦是) 어디까지든지 엄연(儼然)한 각개(各個)로 존립(存立)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산색(山色)과 수면(水面)과, 월광성휘(月光星輝)가 모두 다 어떤 한 때의 음영(陰影)에 따라, 그 형상(形狀)을, 보는 사람에게는 달리 보이도록 함과 같습니다. 물론(勿論) 그 한때 한때의 광경(光景)만은 역시(亦是) 혼동(混同)할 수 없는 각개(各個)의 광경(光景)으로 존립(存立)하는 것도, 시작(詩作)의 그것과 바로 같습니다.
    그렇다고, 산색(山色) 또는 수면(水面), 혹은 월광성휘(月光星輝)가 한때의 음영(陰影)에 따라, 때때로, 그것을 완상(翫賞)하는 사람의 눈에 달리 보인다고, 그 산수성월(山水星月)은 산수성월(山水星月) 자신(自身)의 형체(形體)가 변환(變換)된 것이라고는 결(決)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작(詩作)에도 역시(亦是) 시혼(詩魂) 자신(自身)의 변환(變換)으로 말미암아 시작(詩作)에 이동(異同)이 생기며 우열(優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時代)며 그 사회(社會)와 또는 당시(當時) 정경(情境)의 여하(如何)에 의(依)하여 작자(作者)의 심령(心靈) 상(上)에 무시(無時)로 나타나는 음영(陰影)의 현상(現象)이 변환(變換)되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겨울에 눈이 왔다고 산(山) 자신(自身)이 희여졌다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초생이라고 초생달은 달 자신(自身)이 구상(鉤狀)이라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구름이 덮힌다고 별 자신(自身)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사람이야 어디 있겠으며, 모래바닥 강(江)물에 달빛이 비친다고 혹(或)은 햇볕이 그늘진다고 그 강(江)물이 『얕아졌다.』或은『깊어졌다.』고 할 사람이야 어디 있겠습니까.

                                                                 3

    여러분. 늦은 봄 삼월 밤, 들에는 물 기운 피여 오르고, 동산의 잔디밭에 물구슬 맺힐 때, 실실히 늘어진 버드나무 옅은 잎새 속에서, 옥반(玉盤)에 금주(金珠)를 구울리는 듯, 높게, 낮게, 또는 번(煩)그러히, 또는 삼가는 듯이, 울지는 꾀꼬리 소리를, 소반같이 둥근 달이 등잔(燈盞)같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망연(茫然)히 서서, 귀를 기울인 적이 없으십니까. 사방(四方)을 두루 살펴도 그 때에는 그늘진 곳조차 어슴푸레하게, 그러나 곳곳이 이상(異常)히도 빛나는 밝음이 살아있는 것 같으며, 청랑(淸朗)한 꾀꼬리 소리에, 호젓한 달빛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보십시오, 그 곳에 음영(陰影)이 없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호젓이 비치는 달밤의 달빛 아래에는 역시(亦是) 그에뿐 고유(固有)한 음영(陰影)이 있는 것입니다. 지나(支那) 당대(唐代)의 소자담(蘇子膽)의 구(句)에『적수공명 積水空明』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곧 이러한 밤, 이러한 광경(光景)의 음영(陰影)을 띠내인 것입니다. 달밤에는, 달밤에뿐 고유(固有)한 음영(陰影)이 있고, 청려(淸麗)한 꾀꼬리의 노래에는, 역시(亦是) 그에뿐 상당(相當)한 음영(陰影)이 있는 것입니다.  
    음영(陰影) 없는 물체(物體)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존재(存在)에는 반드시 음영(陰影)이 따른다고 합니다. 다만 같은 물체(物體)일지라도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의 여하(如何)에 의(依)하여, 그 음영(陰影)에 광도(光度)의 강약(强弱)만은 있을 것입니다. 곧, 음영(陰影)에 그 심천(深淺)은 있을지라도, 음영(陰影)이 없기도 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시인(英詩人), 아더·시몬느의 (영문 략) 라는 시 (詩)도 역시(亦是) 이러한 밤의, 이러한 광경(光景)의 음영(陰影)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시혼(詩魂)은 본래(本來)가 영혼(靈魂) 그것인 동시(同時)에 자체(自體)의 변환(變換)은 절대(絶對)로 없는 것이며,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에서 창조(創造)되어 나오는 시작(詩作)에 우열(優劣)이 있어도 그 우열(優劣)은, 시혼(詩魂) 자체(自體)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음영(陰影)의 변환(變換)에 있는 것이며, 또는 그 음영(陰影)을 보는 완상자(翫賞者) 각자(各自)의 정당(正當)한 심미적(審美的) 안목(眼目)에서 판별(判別)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동탁독산(童濯禿山)의 음영(陰影)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가지 뻗어 트러지고 청계수(淸溪水) 맑은 물이 구비져 흐르는 울울창창(鬱鬱蒼蒼)한 산(山)의 음영(陰影)보다 미적(美的) 가치(價値)에 핍((乏)할 것이며, 또는 개이지도 않으며는, 비도 내리지 아니하는 흐릿하고 답답(沓沓)한 날의 음영(陰影)은 뇌성전광(雷聲電光)이 금시(今時)에 번갈아 일으며 대줄기 같은 빗발이 붓듯이 내려 쏟히는 취우(驟雨)의 여름 날의 음영(陰影)보다 우리에게 쾌감(快感)이 적을 것이며, 따라서 살음에 대(對)한 미적(美的) 가치(價値)도 적은 날일 것입니다.
    그러면 시작(詩作)의 가치(價値) 여하(如何)는 적어도 시작(詩作)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가치(價値) 여하(如何)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영(陰影)의 가치(價値) 여하(如何)를 식별(識別)하기는, 곧, 시작(詩作)을 비평(批評)하기는 지난(至難)의 일인 줄로 생각합니다. 나의 애모(愛慕)하는 사장(師匠), 김억(金億) 씨(氏)가 졸작(掘作)『님의 노래』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내 가슴에 저저 있어요.

긴 날을 문(門)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히도 흔들리는 노래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孤寂)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말아요."

를 평(評)하심에, "너무도 맑아, 밑까지 들여다 보이는 강(江)물과 같은 시(詩)다. 그 시혼(詩魂) 자체(自體)가 너무 얕다."고 하시고, 다시 졸작(掘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한 사람이 내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歲月)을
쓸 데 없는 괴로움으로만 보내였겠습니까!

오늘날은 또 다시 당신의 가슴 속, 속 모를 곳을
울면서 나는 휘저어 버리고 떠납니다 그려!

허수한 맘, 둘 데 없는 심사(心事)에 쓰라린 가슴은
그것이 사랑, 사랑이던 줄이 아니도 잊힙니다."

    를 평(評)하심에, "시혼(詩魂)과 시상(詩想)과 리듬이 보조(步調)를 가즉히 하여 걸어 나아가는 아름답은 시(詩)다."고 하셨다. 여기에 대(對)하야, 나는 첫째로 같은 한 사람의 시혼(詩魂) 자체(自體)가 같은 한 사람의 시작(詩作)에서 금시(今時)에 얕아졌다 깊어졌다 할 수 없다는 것과, 또는 시작(詩作)마다 새로이 별(別)다른 시혼(詩魂)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좀 더 분명(分明)히 하기 위(爲)하야, 누구의 것보다도 자신(自身)이 제일 잘 알 수 있는 자기(自己)의 시작(詩作)에 대(對)한, 씨(氏)의 비평(批評) 일절(一節)을 일년(一年) 세월(歲月)이 지난 지금에 비로소, 다시 끌어 내여다 쓰는 것이며, 둘째로는 두 개(個)의 졸작(掘作)이 모두 다, 그에 나타난 음영(陰影)의 점(點)에 있었어도, 역시(亦是) 각개(各個) 특유(特有)의 미(美)를 가지고 있다고 하려 함입니다.
    여러분. 위에도 썼거니와, 달밤의 꾀꼬리 소리에도 물소리에도 한결같이 그에 특유(特有)한 음영(陰影)은 대낮의 밝음보다도 야반(夜半)의 어두움보다도 더한 밝음 또는 어두움으로 또는 어스름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을의 새어가는 새벽, 별빛도 희미(稀微)하고, 헐벗은 나무 찬비에 처진 가지조차 어슴푸레한데, 길 넘는 풀 숲에서, 가늘게 들려와서는 사람의 구슬픈 심사 (心事)를 자아내기도 하고 외롭게 또는 하염없이 흐느껴 숨어서는 이름조차 잊어 버린 눈물이 수신절부(守臣節婦)의 열두 마디 간장(肝腸)을 끊어 도지게 하는, 실솔 (귀뚜라미)의 울음을 들어보신 적은 없습니까. 물론(勿論) 그곳에 나타난 음영(陰影)이 봄날의 청명(淸明)한 달밤의 그것보다도 물소리 또는 꾀꼬리 소리의 그것 들보다도 더 짙고 완연(完然)한, 얼른 보아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인 것만은 사실 (事實)입니다.
    그러나 나는 봄의 달밤에 듣는 꾀꼬리의 노래 또는 물노래에서나, 가을의 서리 찬 새벽 울지는 실솔의 울음에서나, 비록 완상(翫賞)하는 사람에조차 그 소호(所好)는 다를런지 몰라, 모다 그의 특유(特有)한 음영(陰影)의 미적(美的) 가치(價値)에 있어서는 결(決)코 우열(優劣)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다시 한 번(番), 시혼(詩魂)은 직접(直接) 시작(詩作)에 이식(移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영(陰影)으로써 현현(顯現)된다는 것과, 또는 현현(顯現)된 음영(陰影)의 가치(價値)에 대(對)한 우열(優劣)은, 적어도 기(其) 현현(顯現)된 정도(程度) 급(及) 태도(態度) 여하(如何)와 형상(形狀) 여하(如何)에 따라 창조(創造)되는 각자(各自) 특유(特有)한 미적(美的) 가치(價値)에 의(依)하야 판정(判定)할 것임을 말하고, 이제는, 이 부끄러울 만큼이나 조그만 논문(論文)은 이로써 끝을 짓기로 합니다.

                     - 개벽(開闢) 1925년 5월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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