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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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2015년 06월 15일 19시 24분  조회:6193  추천:1  작성자: 최균선
                                          산 행
 
   군자는 대로행이라지만 나는 무덕자ㅡ소인이여서인지 산행이 늘 좋더라. 가을 산길은 불붙는 단풍에 내 마음도 불타서 좋고 겨울 산길은 숫눈길우에 나만의 하얀발자국을 찍어서 좋고…그래서 아무리 외로와도 말없이 오르게 된고 아무리 멀어도 혼자만 걷고싶다.
  《곱게 핀 함박꽃 반겨웃는 산기슭에 / 안개타고 내렸나 숲속에 숨었나 / 산열매 무르익는 오솔길은 걷기도 좋아…》라는 명가사의 랑만에 취해서라기보다 옛날 조선의 리인로할아버지가《지팽이 짚고 청학동 찾아드니 / 숲속에서 원숭이만 처량히 운다.》고 읊었듯이 클클하도록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들고싶은 내 집착이다.
   골깊은 산길은 비탈지고 한산하고 적막하다. 안내하는이도 없다. 꿈속에서처럼 어데론가 뻗어간 산길따라 무작정 걷다가 지쳐서 돌아서더라도 그냥 걷고싶은 산행이다. 이 길엔 넘어져도 거들어줄 사람도 없다. 만고풍상에 시달린 로송이 긴 팔을 드리우고 선 그아래 천년고독이 굳어져버린 청석우에 앉아 땀을 들이노라면 산새우는 소리에 가슴이 따갑다. 마음이 쩌릿해진다. 상념도 무거워진다.
   산새는 왜 자꾸 저렇게 울가? 산이 좋아 산에 사는 산새련만 산의 고독을 우는 새, 고향을 잃고 헤매다가 쓰러진 어느 한많은 나그네의 원혼일가?《산새도 오리나무우에서 운다 / 산새는 왜 우노? 시메산골 / 령넘어 갈랴고 그래서 울지//…불귀불귀 다시 불귀 / 삼수갑산에 다시 불귀!…》하고 읊은 소월님도 이런 산길을 걸으며 피맺힌 정한을 쏟았을가?
   시골서 훈장질할 때에는 이래저래 산길을 많이도 걸었다. 산열매도 따고 버섯도 캐고…산을 내리는 황혼의 산풍경은 어찌 그리 감명깊던지…무심코 머리를 들면 구름을 불태우는 석양이 슬프도록 아름다왔다. 그윽하고 청정한 산속, 일부분의 세계를 내버림으로써 근심걱정없이 옹근 세계를 향수한다는 덕망높은 은사들의 삶의 취향이 이런 정경에서 기인되는것일가? 세상살이에 구겨진 시골훈장의 마음같은건 알것없다는듯 제멋에 피여 고즈넉한 청산을 수놓은 나리꽃, 도라지꽃, 함박꽃의 청초함은 무수한 감동을 찍어준다.
   산행의 의미는 명산에 오르는 멋에 있는것이 아니라 산행 그자체에 있다. 깊은 전설이 깃들어있다는 그 한가지 리유때문에 몇번이고 올랐던 두만강기슭의 한왕산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허위허위 산정에 올라보면 무너진 성벽에 제왕의 꿈이 푸른 이끼로 말라있고 청풍만 소슬하여 살아있음을 확인하는듯 내 옷자락을 잡아끈다.
   술한잔 부어서 산신령께드리고 세월과 더불어 가버린 영웅들을 그리며 두만강을 굽어보면 물결을 출렁이며 세상에 얽힌 번거로움을 씻어버리라고, 부담을 잊은 여유로운 삶을 살라고 속삭인다.
   그렇다, 산길을 걸으면 마음이 한결 담담해지고 삶의 의미를 다시 씹어보게 된다. 붐비는 인파속, 경쟁의 팔굽에 떠밀리고 자신도 남을 떠밀어야 하는 인생마당에서 홀로라면 소외당한듯 고독과 불안이 뒤따를수도 있지만 개체생명의 독존이라는 의미에서 잠시나마 자기를 찾을수 있다.
   산행같은 자기만의 인생의 오솔길을 걸어갈 때 자유공간은 보다 넓어질것이고 누구누구에 대비해 욕망을 팽창시킬 필요도 없고 승벽심 달구어가며 쫓기듯 허위적거려야 하는 위김감을 아니 가져도 좋을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이른바 일치성을 도모할 일도 없고 허영심에 공연한 어깨힘 살려야 하는 거짓도 소용없다.
   돌이키면 나의 산행집착은 서러움도 많던 동년의 그 산자락에서 기원되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숙명적으로 사회의《못생긴 새끼오리》였으니까, 고독은 반평생 내 충실한 친구였다. 모두가《우리는 큰길로 걸어가네》를 부르며 대활보하던 그《격정시대》에는 더구나 그랬다. 붐비며 떠들썩 사는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아픔이 어떤것인가는 인생의 넓은 길에서만 활개친 사람은 모른다.
   하루밤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반쪽만 쳐다보며 살아가듯이, 그러나 나는 주어진 운명대로 생활의 뒤골짜기에서 묘연한 희망의 비탈길을 끈덕지게 톺아올랐다. 세상엔 끝까지 울퉁불퉁한 길이란 없는법, 그리고 길은 걷는자에게 정복되는법, 안생 의 저곡에도 나아갈 길은 있었다. 행운이 나에게 동정의 손길을 내밀었는지 아무튼 후반생은 나도 생활의 큰길로 모두와 함께 걷는다.
   하지만 나는 의연히 고독한 인생의 산길에 집념을 달린다. 그게 내게는 마음편하다. 서로들 깎아내리며 자기를 내세우는 안스러움이 없어 제격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한방향으로 내뛰면 일등은 언제나 하나밖에 없다. 그게 심통이 나서가 아니다. 사면팔방으로 제가끔 내뛰면 앞설수도 있다. 그런 일등이 욕심나서가 아니다. 늘쩔늘쩍 걷더라도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신을 찾고 또 지켜간다는 의미에서《산행》은 또 다른 삶의 한가지 방식이 아닐가?
   홀로걷는 산행에는 떠들썩한 축복소리도 없고 영예의 꽃다발도 없다.그러나 혼자 느껴보는 해돋이, 석양이 있고 분발심과 오연함이 있어서 좋다. 그래서 산행에 나서면 노상 떠오른 시구가 있다.
 《꿈이 익는 가을 산속 / 락엽도 푸르던 그 시절의 해묵은 이야기 쌓여있는데 / 나홀로 어느길로 갈가 / 갈라진 오솔길에 바장이다 / …욕망은 두 길우에 날아예건만  /동시에 걸을수 없는데 / 지친 내 발길은 / 곤혹에 발목잡혀 / 여길가 저길가 바장이다 / 금빛 깔린 저 길은 / 누군가의 발자취 찍혀있으리니 / 뭇짐승 헤매던 /험한 저 숲길에 내 발자국 찍을가부다…》
 
                    2003년 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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