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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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하느님은 왜 웃을가?
2015년 12월 03일 09시 40분  조회:4476  추천:0  작성자: 최균선
                                하느님은 왜 웃을가?
 
   인류가 만물의 령장이라고 자칭한것은 유일하게 사유할줄 아는 동물이기때문이다. 맑스는 한 죄수의 범죄적념두도 천당에 기적보다 위대하다고 했고 엥겔스도 사유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송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인간의 전부의 존엄이 사상에 있는데《인간이 사색하면 하느님이 웃는다.(미란 콘드라)》고했다.
   하느님이 왜 웃을가? 미란 콘드라는《인간이 사색하면 사색할수록 진리가 멀어지고 인간이 사색하면 사색할수록 인간의 사상은 더욱 멀어진다. 인간은 종래로 상상중의 자기와 같지않기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있다.
   그의 회색유모아가 처음에는 알쏭달쏭하였는데 차차 나이가 들면서 두루 읽은 책이 많아지고 세상물정에 눈을 뜨면서부터 그 의미를 조금씪 터득하게 되였다.
   사색은 사상을 낳는다. 인간의 사색은 심각해야만 되는것이 아니며 진리도 마냥 심오하고 복잡한것만이 아니다. 간단함이 없으면 복잡함이 없고 개체가 없으면 군체가 있을수 없는 도리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상은 인간의 교오이고 행복이며 또한 인간의 일종의 고통이기도 하다. 사상이 있다는것은 곧 독립사고력과 자유적사상을 가리키는바 흔히 사상자에게는 지기가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적고통은 아름답다. 사상은 신성하고 사상은 불멸한다. 그러면 착오적이거나 반동적인 사상도 아름다운가? 이는 사상의 과정과 사상의 결과인 별개의 문제이다. 과정이 없는 결과란 없다. 정확하든지 착오든지 사상과정의 결과인것이다. 이렇듯 사상의 존엄은 결코 정확성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오직 독립적이고 자유적사상이 있어야만 인류는 교오할수 있다.
   인류의 진화와 발전은 사상의 자유에 출발점을 두고있기때문이다. 진리란 때론 매우 간단하고 명백할수 있다. 로신선생의《추우면 솜옷을 입고 배고프면 먹을것을 다툰다.》말은 진리이지만도 잘 사는집 애들은 돈이 없어 학교못가는 가난한 집애 들의 비애가 얼마나 애간장을 끓이는지 알지 못하며 또 영원히 알수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 일단 사고하면 하느님을 웃긴다고 한다. 생명운동의 방식도 간단하고 저마끔이다. 돼지는 주둥이로 앞만 뚜지고 닭은 발로 뒤를 파헤친다. 사는 방식이 제마끔인것이다. 개구리는 모기를 잡아먹고 뱀은 개구리를 삼키고 독수리는 그 뱀을 물고 날아오르고 독수리는 또 …?
   허나 동서고금에 사고하기 즐기고 그 사상이 심각한 선각자들은 결과가 명랑하지 못했다. 400여년전 이딸리아의 철학가 브루노는 범신론을 리용하는 형식으로 유물주의를 선양하였다. 이 천재적인“이단자”는 종교법정에서  판결받고 8년간 옥살이하다가 마침내 화형당하고말았다. 이런 비극을 보고 하느님은 웃었을것이다.  역풍을 일으키는자는 미욱할진저…
   중국에는 경세지언이 많다. 강산을 탈취하는데는 인재와 장수에 의거하고 향수는 노예에 의거한다거나 태평천하는 장수가 열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등등. 소위 태평성세를 이룩한 제왕들이 숭상한것은 예리한 검이지 잘 사색하는 머리가 아니였다. 그들의 머리속엔《새를 다잡으면 좋은 활을 벽에 걸고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가마에 앉힌다.》는 잠규칙뿐이였거니 어찌 사색할줄 아는 머리를 용납하겠는가?
   어제의  유물론자가 래일이면 유심론자가 되고 방금은 무슨 구조주의더니 뒤이어  탈구조주의가 되는 종잡을수 없는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누구에게 사상이 있으면 감옥이 아니면 목이 날아나기가 십상이였다. 몽매했던 봉건시대는 더 말할것 없고 민주화가 선양된지도 수백년이 넘은 현대에도 독립사상은 위험천만한것이다.
   사상이 이단이면 혈전만리 생사를 함께하며 고락을 나눈 전우라도 가차없이 몰아내고 처단한다. 40여년전 려산회의에서 진정서를 올린 팽덕회가 바로 남다르게 사색하고 사색한 그대로 말한탓으로 파직당하고 마침내 비명횡사하지 않았던가? 이는 엄연한 잠규칙이였다. 그런데도 대바른 성미대로 이 진부한 규률을 믿지 않고 자기의 사상을 내놓았으니 하느님의 웃음이 얼마나 서글펐을가?
   문화광란의 시대에 드물게 독립적사색을 한 장지신은 진정한 공산당원의 량지와 랭정한 사색을 하여 결국 후두를 잘리고 혀까지 잘리우는 극형을 당했으니 하느님은 인간세계의 황당함에 그만 눈물을 머금고 웃었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흑한 하늘에 찬란한 별이 되기에 손색없었다.
   이렇듯 동녘에 서광같고 눈부신 저녁노을같은 선각자들이 중국에 한둘이 아니다. 리구련이라는 처녀나 농민 우라극 등은 보통백성이였지만 사유령역에서의 선각자들이였는데 결국 진실과 진리의 제단에 희생양이 되였다. 싸리긁에서 싸리가 난다는 데도《유일성분론》에 언감 반기를 내들었으니《죽어마땅하지 않은가?!》하지만 강권이 곧 진리가 되는것을 보고 하느님이 그번엔 말없이 돌아앉지 않을수 없었으리라.
   개혁개방후《사상해방》이란 말이 류행어처럼 사람들의 입에 늘 올랐는데 사상해방이 왜 새삼스레 고창되는가? 사상이란 원래 하늘을 나는 천마처럼 자유자재가 아니였던가?《사상을 해방하자》는 구호자체가 사상이 종래로 갇혀있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확실히 자유사상은 력대로 억눌려왔으며 홍수나 맹수처럼 여겨졌다. 
   진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진리는 가장 무정하면서도 또한 가장 공정하기도 한 력사의 고험을 거치는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때 진리가 이때에 와서 가능하게 오유로 될수 있고 이때의 오유가 그때에 가서는 진리로 될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적사상에는 마땅히 어떠한 전제(前提)도 없어야 하거니와 죄도 없어야 한다. 인류의 원죄는 통치자가 자기 사상을 절대진리로 내세우고 강박적으로 남에게 주입시킨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사는 피어린 사상사였으며 언론죄, 로선죄, 문자옥의 력사였다. 사상이 원래 자유분방한 자체속성을 상실당하고있었기에 사상을 해방하자는 구호가 터져나온것이다.
   이는 경사스럽지만 캐고보면 슬픈 일이다. 사상이 오래 동안 무형의 사슬에 얽매여 있었기에 구호는 멀리 울려퍼졌지만 경화된 사상은 그냥《갑》속에서 잠자고있었다는 설명이 되기때문이다. 시비곡직을 민중의 사상자유에 맡겨 사색하게 하고 일을  해결하게 하는것은 돈도 들지 않는 좋은 일이건만 어찌하여 그렇게 금구가 되여졌는가? 한시기“백화제방”도 두계급간의 쟁론이였다고 하는게 실제적일것이다. 사상이 현실과 처져있어 사회가 더 전진할수 없게 되자 사상해방을 호소한것이 아닐가?
   사상은 인류의 일종의 재부이고 국민의 품질이며 일종 정신력량이다. 한 민족이 책임적인 심리자세로 자기 민족을 사고하고 고난을 겪은 사상가에 대해 기념할줄 모른다면 그 민족의 생명력은 왕성기에 도달하기 어렵다. 민중이 사고하지 않는것은 정부의 복이라는 히틀러의 유명한 경구가 있지만 밝은 사회건설의 법보는 일체를 사상계에 기탁하는것이다.
   만약 현실이 사상에 선행한다면 장님이 빔중에 말을 타고 달리다가 깊은 호수에로 돌입하는것처럼 침중한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건국후 30년을 줄곧 들볶아댄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지식이 상품화된 시대, 사상도 상품이 될수 있다. 사상은 마땅히 사상령역에서 마음대로 팔고살수 있어야 한다. 누구의 사상이 좋으면 누구의 사상이 잘 팔리도록, 당년 맑스주의가 흡인력이 강했기에 전세계적으로 넓은 시장을 개척하였고 인류력사의 새편장을 엮은 강대한 정신력량으로 되였던것이 아닌가?
   력래의 중국사상사를 보면 림시성《공용》이 많았는바 남산에 말을 놓아먹이고 총칼은 창고에 넣어둔격이 되였다. 인민군중이 어떤 사상을 사야하는가를 감독하면서 마음에 들어하건말건 억지로 도매한 력사시대가 적지 않았다.
   기실 사상은 해방하자고 웨쳐서 해방되는것이 아니며 이제껏 가두어놓은 사람이 풀어놓으면 해방이 되는것이 아니다. 오래동안 초롱속에 갇힌 새는 자유의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아가려하지 않는다. 사상해방은 누구의 의지와 명령으로 곧 해방이 되는것이  아니다.
   사상을 정치수요로 해방하자면 해방되는가? 그것은 사상해방이 아니라 사상소풍이나 사상체조일수 있다. 따스한 봄날에 백화가 다투어 피는것은 무엇때문인가? 사상해방은 체제의 보증, 법률의 보증이 수요된다. 그렇지 않으면 한줄기 바람에 불과하다. 그리고 명절을 쇠는것처럼 며칠 떠들썩하게 될뿐이다.  
   진리를 철갑속에 가두어둔다 하여도 찬란한 빛발을 막을수 없다. 하지만 사상이 일존(一尊)으로 정하여졌을 때 사유는 순복공구로 전락되기 마련이며 유심주의와 미신사상이 깊이 뿌리박힐수밖에 없다.
   국민들에게 진정 결핍한것은 바로 인간의 생명권리와 인격존엄, 인신자유 등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존엄과 그것에 대한 수호이다. 국민의 인성의 마멸과 결핍은 이중적인바 정신적인것과 생존공간상의 물질적수요이다. 물질상 억압은 왕왕 공포적이나 정신억압은 오히려 명랑한 얼굴로  떠오른다. 따라서 공민의 사상자유의식은 력래로 희박해져 있었던것이다.
   지성의 작가 위국정은 쓰고있다. 사회의 투영이라는 현대문학을 보아도 그렇다. 시가에는 더는 북도(北島)식의 격정과 지혜가 없다. 소설에는 녀인들의 육체에 대한 자애와 미련과 자아확대광의 뇌까림으로 넘쳐나있고 산문은 먹고 마시고 즐긴 일기로 변해버렸다. 진정 독립적인 사상을 가진 군체는 흐린날 하늘에 별을 보기 보다 더 어렵다.
   진정한 사상가들은 자기의 머리로 사색하고 손에 잡은 붓대로 혼탁한 사회의 개바닥을 밝히려고 량지를 신장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일정한 상식을 알려주고 공민의 리성과 권리의식을 불러일으키려 모지름쓴다. 공민의 지혜를 불러일으키는 위태로운 길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며 명철보신하여 바람따라 돛을 달지 않는다. 인중승천 이라는 절대적인 사상을 무시하고 자기의 인구리론을 고집하여 령어의 몸이 되였던 마인초선생의 조우는 인구과잉의 결과를 두고 다시 심사숙고를 자아내지 않는가?
   프랑스의 철학가 파스칼의《사상록》에서《인간의 전부의 존엄은 사상에 있다. 인간은 자연계에서 가장 유약한 갈대이지만 사상이 있기에 고귀함과 존엄과 위대함을 현시할수 있다.》고했다. 인류의 위대한 진보는《사상의 자유에 원천을 두고있다.》머리는 단두대에서 사색을 멈추게 되였지만 사상은 광활한 대지에 확산되여 한알의 종자마냥 뿌리를 박고 싹을 틔운다.
   인간들은 동물원의 범에게 자유를 주어 야성훈련을 시킨다지만 제한되여 있고 훈련도 사전에 준비된 씨나리오대로 진행된다. 그러나 인간의 민주란 사상의 자유를 의미한다. 요란스레“민주화”를 팔고다니는 자유의 국토라는 미국에서도 자기 권력과 지배에 그늘지우는 “사상화(思想花”)는 피여나지 못하고있다.  충실한 신도들이 하는 짓거리에 하느님은 웃어도 가만히 웃을것이 아니라《껄껄》소리내여 웃어야 하리라.
   고난과 참담한 인생에 직면하여 림리한 선혈을 투시하려면 오직 사상의 홰불밖에 없다. 사상만이 우리를 더욱 존엄을 가지고 살게 할수 있으며 오직 사상만이 우리들이《사람이 있다면 마음은 죽지 않는다.》는것을 표현할수 있게 한다.
   사상만이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는 마지막 정토이다. 만약 100사람 가운데서 하나의 머리만 사색하여야 한다면 나머지 아흔아홉개의 머리는 존재할 리유가 없게 된다. 과감히 사색하고 비장하게 사색하는 머리를 바친 선각자들의 명복을 오늘 다시 빌면서 이 인류사회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만큼 선홍색으로 피고 스러진 사상의 꽃이 만방에 만개할 그날이 언제일가 기원해 본다.
 
 
                                                2006.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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