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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수라상
김혁
▲ 영화 “마지막 황제”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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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아카데미 수상작 “마지막 황제”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여기서 리마스터링이란 과거의 영상이나 음원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화질과 음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필름에 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하고, 파일의 색과 음향을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필름이 손상된 고전 영화는 복원 작업까지 더해진다.
대부분의 극장들이 디지털 영사기로 교체돼 필름 영화는 아예 틀 수 없게 된 지금, 리마스터링은 문화재 보존의 차원과 초고화질 환경에 대한 콘텐츠 공급에 대한 차원의 작업으로 부상되고 있다.
▲ 위만주국 원수 복장차림의 마지막 황제- 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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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생전에 집필한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바탕으로 이딸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의해 엄청난 제작비와 물량이 투입되여 제작된 영화는 1988년 제 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색, 음악, 촬영 등 9개 부문을 대거 수상, “그저 놀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우리가 다신 볼 수 없는 역사드라마”, “강력하고, 장엄한 역사적인 전기영화” 등 엄청난 찬사 속에 불후의 명화로 손꼽힌다.
1906년,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80세의 서태후는 병상에 누워있는 광서제 대신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인 네살의 푸이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
장엄한 황제 즉위식조차 하나의 놀이로 밖에 여기지 않는 어린 푸이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하게 된다.
자금성에서 연금생활을 하며 푸이는 16살때 완용을 황후로, 문수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1924년, 풍옥상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자금성에서조차 추방된다.
중국침략의 야욕에 찬 일제의 사촉으로1934년, 푸이는 세상의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만주국을 세우고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하지만 일본군의 조종하에 위만주국에서 그는 허울뿐인 “꼭두각시 황제”노릇을 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일본 탈출을 시도하던 푸이는 만주에 주둔한 쏘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며 중국인 전범수용소에 갇힌다.
1959년, 특사령에 의해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수용소에서 나온 푸이는 평범한 공민이 되여 만년을 보낸다.
영화는 력사의 도도한 흐름아래 몰락해가는 왕조, 그속에 굴절된 인간의 삶과 영욕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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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푸이가 일제의 사촉하에 지금의 창춘에 허울뿐인 위만주국을 세우고 강덕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런 강덕황제에게 진상한 수라상의 쌀은 바로 간도지역에서 생산되었음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당시 두만강지역은 인적이 드문 “봉금”지역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황무지를 개간하는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사직전의 가난한 조선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월강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용정시 개산툰진의 하천평은 조선인들의 벼농사가 비교적 일찍 시작된곳이었다.
이 마을에 최학출이라 부르는30여세의 조선인 농꾼이 있었다. 최학출은 1917년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군 학사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 재해로 살길이 막연하여 지자 1935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왔다.
그때만 하여도 이 고장의 벼농사는 주로 산종을 했고 벼모이식을 조금씩 하는 정도여서 벼의 생산량이 많지 못했다. 최학출만은 전부 모내기를 할 타산으로 당지의 한냉한 기후조건에 비추어 대담하게 온상육모를 시험했다.
1941년 봄, 유리창문처럼 간이 문창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양광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결과 모를 일찍이 키워냈을뿐만아니라 유별하게 벼모가 건실하게 자라났다. 이해 소출도 뜻밖에 아주 높았고 지어놓은 해쌀밥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가 있어 그야말로 천하진미요, 천하진품으로 되었다.
그의 벼는 현과 간도성 농산품 전시회에 출품하게 되어 으뜸가는 호평을 받았고 점차 전 만주에 소문이 났다.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지금의 창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히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쌀을 전문 생산하는 밭을 가꾸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천자, 제후에 붙이는 높임말인 “어”에 곡식 “곡”자를 붙여 밭이름을 "어곡전(御谷田)"이라고 했다.
최학출이 맡은 "어곡전" 면적은 천평이나 되었다.
“어곡전” 주위는 뺑끼칠을 한 널판자로 울타리를 하여 집짐승들이나 사람들까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촌공서와 경찰서, 현의 관원들이 "어곡전"을 호위해 주었다.
봄에 논갈이를 할 때만 소의 힘을 빌었을 뿐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 논에 일하려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하였고 거름은 오직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
가을이면 먼지가 없도록 까붐질을 한 다음 정미를 하고 온 마을 처녀들을 끌어다 쌀을 고르게 하였다. 처녀들은 유리판 위에 쌀을 펴놓고 한알한알씩 고르었는데 쌀알의 귀가 좀 떨어져도 안되고 쌀의 빛깔이 좀 달라도 안되었다. 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어곡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참으로 세심한 과정이 었다.
이렇듯 만주지역의 논농사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최학출은 만주 지역 벼농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벼재배 기술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안고 오늘도 두만강 연안에서 나는 쌀은 당년 못지 않게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며 밥맛도 참으로 구수하다.
-“청우재(聽雨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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