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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채영 시인의 시- 「개망초 너무 작은 씨」「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언제부턴가
겨울 벌판에 팔짱을 끼고
혼자 서 있는
그런 나무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옆에 미농지 한 장 날리고
그 미농지 속에
무슨 불덩이가 싸여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겨울 국그릇을
뒤엎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잘 모르는 하이데커가 죽었다고
큰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를 압도시키지 못한
그의 콧수염보다
전염성이 강한
국제독감國際毒感이 네게 와 있다.
별 상관도 없는 것들이
나를 화상火傷입게 하고 얼게 하고
개망초의 너무 작은 씨앗들이
너무 큰 얼음덩이 속에 묻혀
겨울을 난다는
그런 생각의 얼음덩이가
덜 풀려 있다.
-----「개망초 너무 작은 씨」전문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사이로
단조短調의 구름 몇,
비산비야非山非野에
비명에 간 울음 몇,
오기傲氣들은 빨갛게 익어서
산천에 떨어진다.
은사시나무잎 떨어지는 자리에
귀 밝은 바람만 쌓이고
아무리 흔들어도
묵묵부답黙黙不答인
저 쪽
커다란 응답應答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전문
양채영 시인의 시편들은 거듭 읽고 음미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 즉 대상을 일정한 거리에 떼어 놓고 응시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여백을 남겨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여유롭게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개망초 너무 작은 씨」에는 그의 독특한 상상이 눈길을 끈다. 겨울나무 옆에 불덩이가 미농지에 싸여 있다는 그의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열게 한다. 이 시에서 겨울과 불덩이의 대립적인 관계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그리고 겨울과 뜨거운 국그릇의 관계는 또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상반된 관계는 오히려 상반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게 확대된다. 죽음과 삶은 겉으로 볼 때에는 상반된 개념이지만 죽음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보면 결국 죽음과 삶은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겨울 속에 들어 있는 봄의 기운을 불덩이나 뜨거운 국그릇이라고 은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시는 그런 수사修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들은 왜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의 집을 짓지 못하고 외국의 철학에 매달려야 하는가를 하나의 화두로 제기하고 있어서 관심을 집중시킨다. <뜨거운 겨울 국그릇을/뒤엎어버리면 어떻게 될까./내가 잘 모르는 하이데커가 죽었다고/큰 사진을 보여주었다.//나를 압도시키지 못한/그의 콧수염보다/전염성이 강한 /국제독감國際毒感이 네게 와 있다./별 상관도 없는 것들이/나를 화상火傷 입게 하고 얼게 하고> 있다고 그는 독백조의 말로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개망초의 너무 작은 씨앗들이/너무 큰 얼음덩이 속에 묻혀/겨울을 난다는/그런 생각의 얼음덩이가/덜 풀려 있다.>고 결론 짓는다. 독자들은 그의 논리보다도 그의 상상력과 직관에 더 동감하게 된다. 서양철학의 논리성보다도 동양의 직관이 더 날카롭고 파괴적일 때가 있다. 어떤 중이 운문雲門 스님에게 불佛(불법, 진리)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운문雲門스님은 한 마디로 건시궐乾屎橛(변소간의 뒷쓰개 작대기)이라고 대답했다. 불佛이 진리를 의미하는 숭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왜 운문스님은 더러운 것을 들어서 그것이 불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고정관념을 파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 말 속에는 불법에는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없다는 의미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깨달음의 씨앗이 들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어법을 선禪에서는 도어법倒語法이라고도 한다. 이 시의 끝 부분<생각의 얼음덩이가/ 덜 풀려 있다.>는 구절은 자신의 사유에 대한 성찰과 서양철학의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을 꼬집는 은유다. 그러면서 생각의 얼음을 풀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은 이러한 동양적 직관의 세계를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시대적인 아픔도 한 아름 안고 있다. <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 사이로/단조短調의 구름 몇,/비산비야非山非野에/비명에 간 울음 몇,/오기傲氣들은 빨갛게 익어서/산천에 떨어진다.>는 앞 구절을 살펴보면 시인이 얼마나 깊은 사유 속에 잠겨 있는지 알게 된다. 구름 몇과 울음 몇은 서로 대구對句가 되어 의미를 심화시킨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울음 몇 점의 의미는 구름보다 더 절실하고 크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구름 몇 점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그 응답은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선禪에서 말하는 불입문자不立文字의 세계다. 그래서 이 묵묵부답은 그 자체가 우주의 실체를 드러내는 큰 응답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응시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영원을 보고 있는 직관의 눈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양채영(梁彩英:):1966년 <문학춘추><시문학>에 「안테나 풍경」「가구점」「내실의 식탁」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노새야」「善․그 눈」「은사시나무잎 흔들리는」「지상의 풀꽃」」「翰林으로 가는 길」「그리운 섬아」「그 푸르른 댓잎」등
송수권 시인의 시- 「여승女僧」「시골길 또는 술통」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짓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릿대를 든 女僧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 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女僧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숨어 산다는 걸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여승女僧」전문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물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시골길 또는 술통」전문
송수권 시인의 시편 속에 담겨 있는 서정은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그리고 사실성과 서사성이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이미지와 에너지를 전한다. 이러한 그의 특성은 세련된 언어에 의해서 감칠맛을 내고 있다.「여승女僧」은 소재素材에서 1930년대 시인 백석白石의 「여승女僧」을 떠올리게 하지만 서사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다만 여승의 모습이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연상聯想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 시를 찬찬히 읽으면 송수권 시인의 내밀한 정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의 시의 원천이 어디 있는가를 조금 짐작하게 된다. 그의 순수 서정시는 가끔 꿈속에서 만나는 여승에 대한 감정의 순수한 발산이다. <....이따금 꿈속에선/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여승을 만나곤 한다/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詩를 쓴다.> 는 구절은 미당未堂이「나의 시詩」에서 자기의 시는 봄날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부분이 어딘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풀밭에 앉아 있는 어느 친척 부인의 치마폭에 풀밭에 홍건히 떨어진 낙화를 주워 모아 놓는 수진무구한 마음의 행위였다고 고백하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순수무구한 감정의 행위가 아니면 서정시는 태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의 서정시들은 공리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현상에 영합하여 이미 정해진 수순에 따라 전개되는 시들이 그것이다. 그런 시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정시라고 말할 수 없다.「여승女僧」은 공리성이나 사회성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자기만의 순수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투명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는 그의 서사(추억담)는 독자들에게 어떤 논리적 해석으로도 풀이 할 수 없는 애련哀戀한 정서의 세계로 유인한다.「시골길 또는 술통」은 송수권 시인의 신명이 즐겁게 솟구쳐 나온 시다. 흡사 한 판 굿거리를 펼치듯 풀어내는 그의 신명은 정말 순진무구하여서 독자들의 마음까지 햇빛으로 가득하게 하고 그 여운을 오래 남긴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비틀거린다/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은 사물(술통)과 시인이 한 몸이 되지 않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신명의 세계다. 점층적으로 반복되는 동적인 이미지가 계속하여 뿜어내는 에너지는 허무의 길을 죽이는 에너지로 상승한다. 그것이 이 시의 의미공간이다. 나는 그의 정서가 그의 열린 마음에서 용암鎔巖처럼 타오르고 솟구치고 있기 때문에 더 가슴에 와 닿고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허무를 이겨내는 그의 시적 방법에 깊이 동감한다.
*송수권(宋秀權):1973년 <문학사상>에 「산문에 기대어」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에 기대어」「꿈꾸는 섬」「다시 산문에 기대어」「야도」「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등 다수
오진현 시인의 시 -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밤비」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밤비」전문
오진현 시인의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그의 외롭고 치열한 시 쓰기의 한 결정체다. 1988년에 상재된 시집「탈관념」은 시단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지만, 2003년 디지털리즘의 선언으로 인해서 그의 시운동은 확실한 거점을 만들고 있다. 그의 탈관념은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다. 어떤 감상도 배경지식도 들어가 있지 않은 시「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은 직관적인 감성이 언어와 결합하여 하나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여준다. 그 환상은 동적인 에너지를 안고 스스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깊은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콩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고정관념(사전지식)에 묶여 있는 독자들은 당돌하고 낯선 느낌이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는데 주저한다. 그리고 공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고 가로수나 황단보도 빌딩의 콩크리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언어의 끈을 잡고 늘어진다. 사실 이 시는 그런 독자들의 의식혁명(언어혁명, 깨우침의 훈련)을 위해서 감성수련感性修練의 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시다. 이 감성수련은 언어에서 해방된 세계가 어떠하다는 것을 직관을 통해 체득하게 한다. 그래서 오진현 시인은 「탈관념」시집의 후기에서 이 시의 감상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이 시를 마음속으로 깊이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눈앞에 깨끗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을 상상해서 그린다. 다음에 시의 진행에 따라서 공을 튀기어 본다. 공이 점점 높이 뛰어오르도록 한다. 그래서 천정도 뚫고 올라가서, 하늘 높이 뛰어 오른다. 이렇게 뛰는 상상을 반복해서, 파란 하늘의 끝까지 뛰어 오르게 하여 별로 박힐 때까지 계속한다. 이런 일을 반복한다. 즉 이렇게 해서 실제로 뚫고 지날 수 없는 관념의 벽인 천정도 뚫고, 중력도 뚫고 나서 눈을 떠 보도록 한다. 그러면 이 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시의 모든 것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충동적인 의식의 흐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고정되어 있던 컵이며 휴지며 모든 사물이 뜨는 느낌(감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서 보면 관념의 어떤 한恨이나 얘기(내용)로부터 오는 감동보다 더 깨끗한 탈관념의 본질적인 직감만으로서 느낀, 감동과 그것의 무의식 속에서 조합되어 나오는 깊은 내용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렇게 실제의 체험을 통한 탈관념의 훈련은 언어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선禪의 세계와 같다.「밤비」는 이런 탈관념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내면의식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순간 포착의 촬영기법 즉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라는 디지털리즘의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밤중에 그는 깊은 명상(집중)의 의식 속에서 빗소리를 듣는다. 그때 그는 빗소리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 빗소리는 문득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의 미루나무을 떠올리게 하고 비바람에 이파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그는 아무런 관념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키 큰 미루나무가 선/밤비 속/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라고 자신의 내면의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과 깊은 의식의 세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파란 에너지의 불빛이다. 그것은「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 들어 있는 동적 에너지와는 다른 내면의 에너지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가 아닌 (언어의 껍질을 벗은) 생동하는 물질(생명체)로 감지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오진현 시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감지되는 이런 독특한 감각을 디지털리즘이 내재하고 있는 야성野性의 사고에서 솟아오르는 생생한 본질적인 감각이 아닌가라고 나름대로 짚어보면서도, 알 수 없는 그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즐거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진현(吳鎭賢): 1975년 <시문학>에 「입술 푸른 뻐꾸기」외 2편이 천료되어 등단. 시집 「동진강 월령」「草民」「탈관념」「東學詩」「딸아 시를 말하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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