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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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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시모음 2 ( 한국)
2019년 12월 21일 17시 02분  조회:2305  추천:0  작성자: 강려
기우는 꽃
 
발을 내딛는 길마다 방사선의 금이 갔다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검은 빙판 위에서
꽃보다 먼저 꺾인 관절이
소리 없는 날개로 퍼덕거렸지
바람에 풀잎들이 머리칼로 휘날릴 때
눈빛만으로도 피어나는 꽃이 있었지
은행 한 잎의 미소에도 중심을 잃고 꽃잎은 이슬을 쏟아놓았어
어둠에 젖은 나뭇가지 사이로 별들이 커질수록
붉은 날개는 한 뼘씩 길어졌지
바람을 먹은 빙판이 억새꽃 뿌리를 드러내고
시계추처럼 흔들릴 때도
바위를 등에 지고 천년을 기다려준 산이 있었어
민들레 꽃씨, 깃털의 불꽃을 품고
바람 속으로 기울어져 간다.
[출처] 중심잡기|작성자 김기덕
 
청소부  
 
찢겨진 손들이 멱살을 잡는다. 
비질에 껌처럼 달라붙는 아스팔트 위에 젖은 낙엽들  
가지 끝에 매달린 잎을 떨어내기에는
몇 마디 입김으로 충분했다. 
 
몽둥이와 쇠망치의 계절 
된서리로 온 포클레인이 버마제비 발톱을 내려찍는다. 
패전 복서처럼 쓰러진 붉은 담벼락들 
사각의 링에서 몸을 떠는 무함마드 알리의 다음 상대는 누구인가. 
 
길거리엔 포플러들이 하늘을 비질한다. 
빗자루처럼 사형제가 등장하고 
고층빌딩에선 히틀러가 사각 유리창을 닦는다. 
세르비아 군인들이 무슬림 여자를 목욕시키던 붉은 창가 
쓰레기들이 청소부마저 쓸어내는 비질로 
길은 늙은 여자의 머리칼처럼 헝클어져 있다. 
 
지우개는 문지를수록 때가 묻고 
무심코 뱉은 언어가 압정으로 박힌다. 
버려진 것들의 악취, 
향기가 떠난 후 몸엔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기억을 다 지우고 흔들의자에 앉아계신 할머니는 언제쯤 부처가 되시는 걸까  
 
기러기들 달의 연못으로 목욕 가는 
밤하늘의 푸른 광장 
눈처럼 날리는 새털구름을 후후 바람이 비질한다.
[출처] 청소부|작성자 김기덕
 
유리의 본능
 
다리뼈가 살을 뚫고 나온
피 흘림 뒤에 유리는 나와 동족임을 알았지
속도계가 멈춘 철의 심장
조각난 유리 칼날이
젖은 내 바짓가랑이 속에도 꽂혀 있었어
손을 놓칠까봐 이 앙다문 웃음들
폭포로 무너지는 강물이 유리알처럼
내 몸 속을 흘렀지
조각난 물체들의 몸엔 왜 날카로운 이빨들이 날까
발길에 채이면 물방울마저 조각조각 눈물이 되는
돌아 선 등에 모로선 유리조각이 만져진다
거울 같은 수면 위에 누워
별 총총히 뜬 너의 창문이고 싶었던
내 안의 투명한 뼈들
풀잎이 돋아난 파란 유리창 너머
빗줄기에도 실금이 간다
[출처] 유리창|작성자 김기덕
 
투명인간 
 
누군가 몰래 나의 방을 다녀갔다. 
금언의 황금을 도굴한 흔적과 함께 검은 발자국들이 남았다. 
바람의 불청객은 날개도 없이
건물을 건너뛰며 창가의 어둠처럼 방에 스며들었겠지.  
빗자루를 탄 마녀들의 누리 사냥에 
유명 탤런트가 살해되고, 몇몇 정치인의 옷이 벗겨지고 
성업 중이던 업소가 폐쇄됐다.  
어두운 영들의 빙의 
도깨비감투 쓴 얼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어젯밤에도 왕의 골짜기를 헤매던 그림자들이 
투탕카멘의 황금가면과 황금마차를 훔쳤다. 
밤의 두건을 쓰고 침실을 들여다보는 검은 망자가
창가에 먹물처럼 번진다. 
돌팔매의 파문을 내며 도미노가 시작되고 
사냥게임이 현실이 되는 정글 속에서 
무색의 유리조각, 서로의 살을 베는 익명의 얼굴들로 
쫒기는 하루가 첨탑 위에 서있다. 
하트와 꽃다발과 편지와 별무리는 사라지고 
뱀과 전갈과 돌멩이와 칼과 화살과 총알과 포탄으로 채워지는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와 노려보는 한밤의 부엉이 
흔들리는 수면 위로 
투명망토를 걸친 달빛이 박쥐처럼 내려온다.
[출처] 투명인간|작성자 김기덕
 
연리지목
 
 
 
소나무와 자귀나무가 살을 맞대고 산다.
눈비 오는 한 세월 서로를 껴안고 피와 살을 나누며 살아온 듯하나
실은 냉전 중이다.
 
 
 
자귀나무 연분홍 꽃을 피우고 가지를 흔들어도
소나무는 바늘 같은 잎을 찌르며 공중으로 뻗어간다.
이럴 거면 왜 합했느냐고 몸을 비틀고 소릴 질러도 상처만 깊어갈 뿐
관심이 없다.
 
 
 
안개 속에 눈 뜨는 휴일이면 아이의 손을 잡고 교회 가고
결혼식에 참석하여 행복한 듯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고
동창회에서 등을 다독이며 다정한 하루를 연출한다.
 
 
 
밤이면 각방 쓴지 5년, 혼자 지옥을 산다.
등 돌린 나무의 유령부부, 섹스리스의 삶이 가랑잎으로 바스라진다.
가끔씩 생활비청구서나 아이들 학원비가 적힌 낙엽 메시지가 소통의 전부다.
아이들 위해 자리만 지킬 뿐, 자정 지나 삐삐삐 현관문 잠금장치 열리는 외계인 소리에
한기를 몰고 오는 술 냄새의 역겨운 솔향
매달린 아이들은 자귀나무 차지인데, 소나무는 승승장구하며
하늘로 뻗어간다.
 
 
 
한 때 정장이 어울렸고, 곧고 푸른 성격이 좋았던 남자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과 자귀꽃 미소가 고왔던 여자
 
 
 
단 한 번만이라도 안아달라고 바람 속에 흐느낄 때 남자는 외면했고
휴식이 필요해 집에 돌아왔을 때 여자는 지네발 같은 잎을 펄럭였다.
 
 
 
옆구리에 박힌 쐐기를 자를 순 없다.
한 집의 불편한 동거
커풀룩을 입고 활보하는 연인들이 부러웠다.
잎사귀를 서걱거리며, 가지들 비벼대며 서로를 원망도 했다.
쓸리는 맨살이 아파 소리도 질렀다.
서로 가슴을 후벼 파며 밤새 삐걱대던 가지에서 흐르던 피, 피가 멈추자
딱지가 굳는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투명한 나무가 되었다.
[출처] 연리지목|작성자 김기덕
 
분리수거 
 
노인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병과 깡통과 박스를 고른다. 
잡쓰레기들과 불태워지기 전 고철과 플라스틱을 분류한다. 
쓸 놈들과 못 쓸 놈들,  
몹쓸 놈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어른들은 늘 금을 그었지만 
누구나 신상품으로 태어나 속 꽉 찬 시절이 있었다. 
철학서와 잡지와 통속 소설들이 함께 꽂힌 서고에서  
한 눈에 양서를 읽듯  
예리한 눈금을 그어 돈이 되는 놈들만 고른다. 
같기도 하고 안 같기도 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선과 악 
천사이면서 악마인 얼굴을  
둘로 나눌 천국과 지옥은 있는 걸까. 
현의옹(懸衣翁)이 의령수 가지에 사자의 옷을 내걸고  
연옥에선 때 묻고 속 빈 껍데기들도 녹아 알맹이가 된다지. 
번뇌를 쫓아 성불한다고 
불 속에서 해탈을 기다리는 페트병 스님들, 
기의 흐름에 따라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바람 같은 삶의 재생을 위해  
빈 깡통이 찌그러진 깡통을 고르고  
빈 박스가 물 젖은 박스를 품는다.  
뚜껑 열린 병이나 옆구리 터진 봉지들이 토한 내용물들로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장  
빈 병들이 빈 병을 알아보는 동병상련의 
병과 깡통과 박스들이  
껍데기만 남은 노인들을 줍는다.
 
*의령수: 『시왕경』에 나온 죄의 무게를 제는 나무
[출처] 분리수거|작성자 김기덕
 
누수
 
  밤새 수도가 샌다. 헛바퀴만 도는 꼭지, 파이프를 타고 흘러온 강의 상류는 눈물샘이 되어 솟구친다. 차가운 물방울들은 지류를 따라 계곡을 흘러가고, 체온이 떨어진 숲에 낙엽이 진다. 통증처럼 이는 바람
  부어오르는 십이지장의 벽, 천공 직전까지의 증상에도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장을 거쳐 대장의 배관을 타고 빠져나간 그림자들은 검은 바다를 떠다녔다. 오물과 섞여 부글거리는 물거품들
  가스가 새고, 양분들이 빠져나간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입에서 폭언이 쏟아진다. 걸을 때마다 흘리는 요실금, 흐린 기억들을 바지에 지리며 젖어 사는 빗속은 작은 폭우에도 절벽이 무너져 내린다.
  구멍 뚫린 방화벽에서 지폐가 쏟아진다. 탱크의 기름은 통에 나뉘어져 어둠 속으로 실려 간다. 썩은 나무 구멍을 두드리는 딱따구리들의 보이스 피싱, 한 순간 가지들이 부러지고
  증기자동배출 콕이 고장 난 압력솥은 밥이 되지 않는다. 익기 위해 부글부글 끓이는 속앓이. 적당한 열과 압력을 위해 치밀한 밀봉이 필요해
  입을 다물고 괄약근을 조여 아랫배를 끌어당긴다. 운동을 하고, 약을 먹고 눈물을 삼키며 밥을 채워 넣는 내 안의 방수. 팔등신의 미녀들이 활보하는 거리로 나는 고무공처럼 튀어 오른다.
[출처] 누수|작성자 김기덕
 
물 위에 접시
 
거울 같은 연못이 하늘을 만난다.
연꽃 접시들은 물결에 몸을 싣고 구름으로 떠다닌다.
번개 같은 스침에도 천둥같이 울리는 인연
부딪는 접시들의 소용돌이가 태초의 침묵을 깨뜨리며 우주로 공명한다.
별의 목소리들은 빛이 되고 꽃이 되어 서로를 부른다.
은하수 꿈길을 가는 동그라미들
법당 처마 끝에서 풍경이 운다.
종탑 꼭대기 종소리가 비눗방울로 하늘을 덮는다.
빈 마음으로 만나는 접시들의 청아한 음성, 웅 웅 뼈 속을 울린다.
시간의 물길을 돌고 돌아
티 없이 만나는 접시의 얼굴
눈빛만 마주쳐도 “뗑”하고 가슴에 사무친다.
[출처] 물 위에 접시|작성자 김기덕
 
배말뚝
 
 
 
배가 부른 대리석에 팔뚝만한 쇠사슬이 감겨 녹물을 흘린다.
밀물로 왔다 썰물로 빠져나간 배들 잡지 못한 선착장에서
비바람 휘몰아치던 격정의 밤을 잉태하고
끝과 끝이 만나 다시 돌아오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쇠사슬로 동여매도 물처럼 빠져나가 매어둘 수 있는 것은
바람의 흔적과 끈적거리며 매달리는 비린내뿐이라는 걸 안다.
부침하는 물살과 배반의 폭풍에 밀려온 난파선의 이야기를 뼈에 묻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구름도 보내고 갈매기도 보내고
뿌리로 남아 파도치며 안으로 멍들어 가는 바다를 닮아간다.
[출처] 배말뚝|작성자 김기덕
 
맹수는 우리를 뛰어 넘을 뿐
 
 
 
우리 밥 먹으러 갈까? 우리라는 말이 울타리를 친다. 밥을 먹기보다 우리를 만들기 위해 만나는 우리.
 
 
 
숲에 가면 늑대가 많아 혼자 길을 가면 위험하지. 양들의 무리는 풀을 뜯다가도 해가 지면 서둘러 우리를 찾는다는데. 무리들과 어울려야 풀도 맛있게 뜯을 수 있다는 것을 붐비는 점심시간 혼자서 밥상을 차지해본 사람은 안다. 전쟁터 같은 식당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편안히 풀과 고기를 뜯기 위해선 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함께 가는 길은 당당하고 힘이 넘치지. 자살사이트에선 손잡고 함께 갈 우리를 구했어. 강한 척 큰소리치며 떵떵거리던 시간은 우리 속에 있을 때였나 봐. 뿔로 들이받고 싸우던 양들은 우리를 벗어나는 순간 예기치 못할 위험에 몸을 떨었어. 한 평 반의 우리에 갇혀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짐승처럼 나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몸 하나 안온히 받아줄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서 루이비통을 사고 샤넬을 구한다. 명품으로 약점을 가린 발걸음들은 활기차다. 말뚝을 박고 가로막대를 얹은 끼리끼리의 어깨동무엔 가시철망이 엉켜있다. 명문대를 나온 그녀는 우리에서 내몰리지 않기 위해 밤새워 책을 읽고 논문을 쓴다. 들소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자들을 향해 방어막을 치듯 약자들은 고치를 짓고, 벽을 쌓고, 빌딩을 세우고, 등을 내보인다.
 
 
 
나는 가끔 우리 안에 들지 못한 호랑이를 본다. 강하기 때문에 혼자이고, 혼자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맹수는 우리를 뛰어넘을 뿐, 스스로 갇히지 않는다.
 
[출처] 우리|작성자 김기덕
 
슈거파탈
 
입 맞추기만 해도 솜사탕 여신은 눈물이 된다.
삼킬수록 목마른 생크림 입술
혀끝에 감기는 황홀감에 정신이 혼미하다.
 
이빨 하나 쯤 정표로 주어도 좋아.
풍선이 부풀고, 바람이 빠져나간 뼈들은 수수깡이 되어간다.
심장이 멈추도록 탐하고 싶은 꽃잎들
잎새를 애무하다 사라지는 한 방울 이슬이고 싶어.
 
페이스트슈크림이 눈보다 희게 웃는다.
마들렌에 취한 몽환의 눈빛으로 뭉게구름 슈플레가 드레스를 벗는다.
아트아슈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열매들
애플 타르트의 황홀한 감촉에
오, 오르가즘에 오르는 쇼콜라 퐁당
 
혼을 팔아 펌킨푸딩의 속살을 산다.
미소 속에 감춰진 환각제를 핥는다.
움켜쥘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의 육체가 흐느적거린다.
 
여신은 구름이 되어 사라지고
옷깃을 적시는 백색 필로폰의 눈물
마리화나의 연기에 취해
네펜테스로 굴러 떨어진 몸이 초콜릿 시즙으로 녹는다.
 
죽음이 참 달다.
[출처] 슈거파탈|작성자 김기덕
 
지구를 지켜라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로봇을 부른다.
지구를 지켜온 로봇 태권브이, 마징가제트, 미래용사 볼트론
눈감으면 태양 저편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이젠 그만 일어나라 내게 외친다.
그 때마다 움츠러든 몸엔
무쇠팔 무쇠주먹이 생기고 캉타우의 철퇴가 들려지곤 했다.
남자가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세상에서
나의 삶을 로봇들이 대신 해왔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라고
천둥 속에서, 번개 속에서 저들은 용기를 주었지만
늘 주저하며 머뭇거리던 나는
피닉스킹이나 제트건담의 노랫소리를 듣고서야 분노를 삼키며 날개를 폈다.
강철얼굴에 맞서 우뢰매에서 킹 라이온으로
메칸더브이로 변신합체하며 맞서왔다.
 
밀리면 죽을 수밖에 없어 무적의 파워레인저가 되어야 했고
초강력 칼과 로켓을 장착해야 했다.
누구는 하이퍼 다간이 되었고, 누구는 에반게리온이 되었고, 누구는
영혼을 판 라젠카가 되었다.
 
미래 도시 지구를 지켜온 로봇들
땅을 뚫고 바다를 건너 하늘을 날았던 용사들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부르면 어디서든 발진했다.
포탄이 떨어지고 건물이 쓰러지던 도시
어둠에 맞서 싸우던 나도 한 시대의 트랜스포머였다.
우주 행성을 점령하려는 메카트론을 물리쳐
평화를 지켜온 지구의 용사들
 
그때 그 로봇들은 늙고 병들었는지 이젠 보이지 않는다.
영이도, 데일리도 더 이상 불러주지 않는 영웅들은
잊힌 캐릭터와 먼지 뒤집어 쓴 장난감이 되어 어느 진열대에서 호명을 기다리는 걸까.
 
눈물이 날 때 로봇을 불러봐. 그대의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철문이 열리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켓엔진을 타고 창공을 날아오를 거야.
[출처] 지구를 지켜라|작성자 김기덕
 
코골이
 
물감처럼 어둠이 흘러내린 밤
그의 머리가 땅에 닿는 순간 광풍이 불고 영들이 몰려온다.
도깨비, 달걀귀신, 몽달귀신, 터귀신, 저승사자 콧구멍을 드나들며 굿판을 연다.
들이키는 꽹과리소리, 내뿜는 징소리 밀고 당기며 행차를 나간다.
산 넘고 물 건너
세링게티의 숲, 영역을 지키기 위한 사자의 포효가 울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갈기를 휘날리며 누의 목을 물었고
들소의 숨통을 끊었다. 콸콸 목구멍을 새어나와 초원을 흐르는 강물소리
아래층 여자는 밤새 세탁기를 돌린다고 쫓아올라오고
아무리 빨아도 희어지지 않는 빨랫감들이 목구멍 속에서
물소리와 섞여 돌아간다. 빙글빙글 몸을 돌린
회전의자에서 의사는 늘어진 목젖을 자르자고 한다.
악어 같은 목구멍에 매달린 종
한때는 학교종소리였고 바람결에 풍경소리였다고 여자는 배계를 의심하지만
고혈압 동맥경화가 지속되면서 뼈 속에 바람이 분다.
온난화가 진행될수록 엘니뇨와 라니냐는 지역적 태풍과 홍수를 몰고 왔고
몸에선 허리케인과 토네이도가 잦아졌다. 밤마다
바람에 날아간 여자는 거실 소파에 나뒹굴었고, 아이들은 제 각각의 언덕으로 몸을 숨겼다.
송두리째 휘감아 오르는 용오름,
그는 밤마다 승천하는 걸까.
지각변동 하는 밤의 풍차돌리기가 일순 멈춘 무호흡의 폭풍전야
침묵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출처] 코골이|작성자 김기덕
 
끈 자르기
 
들판에서 순산한 어머니는 탯줄을 짚으로 묶고 이빨로 끊었단다.
 
삼신할미 손에 침 발라 정맥과 동맥의 탯줄을 꼬았다. 탯줄 속의 태극이 우주나무로 이어져 하늘과 땅이 하나이다가 홍수가 나고, 암흑의 동굴을 지나 태양이 뜨며 둘로 갈라졌다. 교미하던 뱀들이 잘려 대문에 내걸린 왼 방향 금줄. 하늘에선 옴파로스*가 떨어졌다.
 
산소 호흡기에 매달리다 아버지는 줄을 자르고 하늘로 갔지만, 바람 속에서 열매들은 안간힘으로 꼭지에 매달렸고, 배꼽이 허전한 나는 복희와 여와도의 그림 같은 DNA 구조에 집착했다.
 
한 다발의 볏짚을 잡고 새끼줄을 꼰다. 세 개의 줄을 모아 삼승 가닥을 만들고 구승을 만들어 이십칠근승 용줄을 만든다. 용을 잡고 노는 마을 사람들의 줄다리기, 용과의 한 판 씨름이 끝나면 줄을 조각내어 지붕에 얹고 달여 먹으며 아들을 빈다. 용줄이 똬리 튼 당산나무엔 별무리 같은 정자들이 꿈틀거렸다.
 
나는 아이의 탯줄도장을 꺼낸다. 상아 속에서 오그라든 탯줄을 잡고 백지 위에 도장을 찍는다. 피가 배어난 이름, 암호 같은 배꼽 속엔 내 전생의 미로가 열려 있다.
 
은하수 자궁 속의 별들은 자라고, 창가에 매달린 거미줄 하나 바람에 흔들린다. 
 
 
*옴파로스: 창조주가 세계의 중심을 잡기 위해 던졌다는 돌.
[출처] 끈 자르기|작성자 김기덕
 
하이브리드 정원
 
스피커에서 사물놀이와 재즈가 몸을 섞는다.
 
순혈의 기둥에 우산살처럼 꽃피운 단일민족 혈통주의 식민지 지리상의 발견 농경사회 오지탐험 게르만 600만 학살, 하늘 가린 검은 파라솔을 접자 태양이 뜨고 구름들은 산을 넘어 빛과 흘레붙는다.
 
농촌총각과 서양처녀가 사는 전원주택엔 피자군만두에 된장소스스테이크와 라이밀*이 어울렸다.
 
텃밭에 토감*을 거두고 나면 무추*를 심었지 상추와 깻잎이 한 가지에 피는 세상이 오면 소통이 열릴 거라고.
 
크로스 오버하는 뜰에 나뭇가지들은 그늘을 만들고, 한 입 베어 문 과일향이 온 몸으로 퍼진다. 열매들로 나를 진단하며, 사랑 없이 사랑하며, 춤으로 노래하며, 숫자로 요리하며, 유행가로 불공하며, 역사를 악보로 연주하며, 철학으로 문학을 색칠하며, 뒤엉킨 가지와 잎들 속에서 라이거의 포효가 들린다.
 
기름과 전기가 만나 소리 없이 미끄러져 온 시간
 
할아버지는 유학자였고 할머니는 무당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되었지.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아침마다 목탁을 두드리는 스님이기도 했지. 제삿날엔 할아버지 따라 축문을 읽었고 일요일엔 교회에서 기도했지. 방학 땐 절에서 공부하며 불공드렸어. 할머니 돌아가신 날 방에선 예배드렸고 대청에선 불공드렸고 마당에선 제사지냈지. 방 마루 마당을 오가며 천당과 극락과 저승이 교미하는 걸 나는 본 걸까? 
 
폭탄주에 컴퓨터와 TV와 오디오가 한 몸으로 춤추며 불러대는 트로트와 니나노의 클래식한 합창 속에서 비빔밥이 버무려져 참기름 향기가 진동한다.
 
* 라이밀: 쌀과 밀이 교배된 곡식
* 토감: 토마토와 감자가 함께 열리는 식물
* 무추: 무와 배추가 함께 자라는 식물
[출처] 하이브리드 정원|작성자 김기덕
 
 
그림자밟기
 
그림자에 쫓기는 남자가 빛 속을 뛴다.
광속의 추격자를 따돌리고 숨은 곳은 또 다른 그림자
 
보름달이 뜨면 동네 아이들은 골목에서 그림자밟기를 했다.
술래가 되어 뒤를 쫓던 흑백의 영상들이
컬러풀한 광케이블을 타고 전속력으로 쫓아온다.
 
벽에 사르트르의 손이 형상을 만든다.
새가 날아오르고, 개가 되어 짖다가
목을 세운 코브라가 사르트르의 손을 문다.
흰 벽에 번지는 검은 피
 
하나의 태양엔 하나의 그늘이 지고 천의 빛 속엔 천의 얼굴이 흔들린다.
빛의 각에 따라 나무처럼 자라는 색깔들
패션에 쫓긴 알몸들이 거리를 헤매고
헤어스타일에 머리채 잡힌 여인들은 횡단보도를 질질 끌려 다닌다.
 
구두에 짓밟힌 술래들이 또 다른 술래를 쫓는
그늘의 품에서 콩나물 같던 아이들이
흑백의 이모티콘을 먹으며 거인으로 자란다.
 
빛이 사라지는 밤
쥐눈처럼 말똥말똥한 별들만 땅에 내려와
그림자밟기 놀이를 한다.
[출처] 그림자밟기|작성자 김기덕
 
 
물의 사진
 
호숫가에 사람들은 풍경 한 장씩 복사해 간다.
폴라로이드처럼 망막에서 인화되는
물의 필름 속엔 흐느낌의 주파수가 흐른다.
단풍잎들은 수면 위에 피 묻은 발자국을 찍고
백발의 시인은 돋보기 너머로 내둘러 쓴 자서전을 읽는다.
빛바랜 일기장들의 나들이
오늘이 복사되는 호수엔 둥근 거울이 떠있고
머리 푼 낮달이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달을 닮은 사내아이 하나 쯤 거뜬히 낳아줄 것 같던
그녀에게서 덜덜거리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빛의 칼에 잘린 얼굴이
흐름을 멈춘 미소 끝에 걸려 말려 올라가지 못한다.
반 쯤 새겨진 이름들은 백지 같은 밤을 까맣게 지새워야 하리라.
짝퉁들이 여류화가의 캔버스 위에서 옷을 벗는다.
발목이 빠지는 껍질들의 숲
물의 렌즈를 연 호숫가에서 나무들은 바람을 낳고
수면은 파랗게 멍든 허물을 벗는다.
[출처] 물의 사진|작성자 김기덕
 
번지 점프
                           김 기 덕
 
추락하는 몸엔 끈이 있다.
심연에 떨어졌다가도 솟구치는 용수철의 힘
부도 맞은 아버지와 낙엽 사이엔 상대성 끈이론이 작용한다.
 
버티던 줄을 놓아버린 여자는 아파트 옥상에서 화단으로 떨어졌고
화살들은 돌아올 수 없는 숲으로 날아갔다.
 
놓아버림과 매달림 사이에서 열매들은 방황한다.
 
성년의 통과의례처럼 추락하는 하루의 절벽,
꽃잎들도 비명을 지른다.
 
줄을 매는 하늘과 줄을 푸는 땅 사이에 비처럼 금을 긋는 유성들
별들은 날기 위해 벽을 넘어 사다리를 오른다.
 
먹이를 움켜쥐려 급 하강하는 독수리
낚시에 꿰어 요동하는 물고기
끈에 매달려 붕붕 울고 있는 요요
 
팽팽히 나를 잡은 끈들의 매듭은 굳게 손가락을 걸고 있다.
 
탯줄의 숨소리 흐르는 양수의 강물로 낙하하는 씨앗들
끈이 풀린다.
[출처] 번지점프|작성자 김기덕
 
 
열림에 대해
                             김 기 덕
 
꼭지가 비틀린 열매들의 웃음이 터진다.
엔진이 켜진 자동차는 부르르 몸을 떨고
등뼈에 꼬리만 남아 금은방 화석이 된 황금열쇠
수만 년 바위 문을 연 월척의 뼈대는 눈부시다.
해를 향해 채널을 고정한 텔레비전 집들의
안개 드라마에 나무들도 눈물샘을 열고
할머니 허리춤 같은 배, 치맛자락 흘러내리는 파도를 타고
아가미가 꿰인 생선들은 열쇠꾸러미처럼 흔들리며 온다.
잠을 퍼내는 바람의 손짓에
공명하는 휘파람소리 빈 항아리 속을 넘나들고
꽃밭을 나는 흰나비들 은색 실핀을 꽂는 능숙한 솜씨에
꽃들의 방이 털리는 아침
숫자들의 젖꽃판을 누르면 열리는 비밀의 문들
땅에서 가슴에서 우주로 길이 통한다. 
[출처] 열림에 대해|작성자 김기덕
 
달력의 힘
 
화, 수, 목, 금, 토, 은하수 징검다리를 해와 달이 놓는다.
 빛의 발자국마다 열리는 신비한 숫자들
 
 
 
번호 속엔 사계의 바람이 불고
 눈과 비의 생애와, 풀과 꽃과 나무의 이력이 담겨있다.
 
 
 
그 중에 나를 닮은 숫자판를 열자
 호랑이, 돼지, 소, 쥐가 그려진 한 아이의 출생지도가 드러난다.
 손금 같은 길, 하지만 가야 할 능선은 백지 같은 안개로 가려져 있다.
 
 
호기심으로 나는 비밀의 방 2012를 들여다본다.
 끊어진 마야의 달력, 지축이 기울어진 땅에선 지진과 해일이 일고
 활화산의 구름이 하늘을 덮는다.
 
 
 
달력이 필요해.
 숫자마다 시간을 엮는 재생의 뿌리들이 빼곡히 들어찬, 완전한 달력이.
 나는 하나 둘 믿음의 숫자를 써내려갔고, 일일이 의미를 새기며 동그라미를 그려보았다.
 
 
 
3을 열자 들판엔 꽃들이 피어났고, 7을 펼치자 사람들은 산과 바다로 떠났고
 9를 뜯어내자 숲속엔 낙엽이 휘날렸고, 12를 벽에 걸자 거리마다 함박눈이 내렸다.
 해와 달의 번호판을 누르는 밀물과 썰물
 
달력의 숫자들이 만드는 회오리에 세상 빛들이 춤추고
 밤과 낮의 채널이 바뀐다.
[출처] 달력의 힘|작성자 김기덕
 
                     김 기 덕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려 등불을 켠다.
성냥불꽃 만큼 검은 문틈으로 밝은 세상이 비친다.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처럼 지나는 표정들이 깜박인다.
연탄이나 장작의 체온이 그리운 길거리마다 내걸린 아크릴 이름들
영토를 지키기 위해 밤새 피를 흘린다.
 
이 밤을 견딜 만큼 나는 반딧불만한 빛이라도 있는가.
빛인 척 반짝이며 스테인리스와 유리들이 웃는다.
 
화살과 총탄과 질주의 무리들은 불꽃으로 박히기 위해 휘파람소리를 낸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
유성들은 밤새도록 머리 위로 성수를 뿌린다.
 
유리벽에 반사된 얼굴들이 야경 속에 파편처럼 흩어지고
흐물흐물 달의 살이 묻어난 골목길로
은 삼십을 받은 유다가 질질 어둠을 끌고온다.
 
태양이 오기까지 가로등에선 뚝뚝 목련 꽃잎이 떨어져 길에 쌓일거야.
하루살이들의 밤
가시관을 쓴 예수가 동녘의 구름을 쓸어낸다.
[출처] |작성자 김기덕
 
레드 와인
                    김 기 덕
 
코르크를 뽑자 4백 년 전의 바람이 인다.
뚜껑이 열린 알라딘의 램프 
햇빛 출렁이는 포도밭과 포도송이들
광장과 깃발과 군중들의 압축파일이 풀려 나온다.
오크통 속으로 쏟아진 눈알들
발굽에 짓밟혀 어둠에서 피 흘리던 얼굴들과
인두 같은 입을 맞춘다.
혀끝에서 감전되어 전신을 마비시키는 뇌향
굽고 뒤틀린 가지에 매달렸던 벙어리들이
두 손으로 바쳐 든 고풍의 병 속에서 나와 자유를 외친다.
시간의 눈금을 긋고 강물로 기다린 오늘
칼이 울리는 축배의 종소리에
나는 천상의 불을 훔친다.
유리창에 달라붙는 단풍의 입술 속에서 불의 언어들이 쏟아진다. 
루주가 묻어난 하늘
비틀거리며 루이 13세는 노을 속으로 떠나고
깃발과 함성과 징소리의 불길로 번진다.
[출처] 레드 와인|작성자 김기덕
 
피자
                               김 기 덕
 
  돌풍에 금이 간 여자는 도우 위에 페파로니, 양파, 토마토, 올리브, 치즈를 얹고 날마다 오븐에 태양을 구웠다. 고구마피자, 포테이토피자, 치즈‧불고기피자, 구울수록 피자들은 유리처럼 조각이 났다. 아이들은 초승달 하나씩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기며 보름달을 꿈꿨다. 곰팡이 핀 지하실에 해가 뜨고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자 아이들은 방 하나씩 차지했지만, 여자는 소스냄새를 풍기며 거실 소파에 피클처럼 쓰러져 쪽잠을 잤다. 아버지 생각이 나면 아이들은 조각난 그림 속의 숫자를 맞추며 치즈의 나른함 속에 녹아든 피망이나 버섯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고무줄처럼 늘어난 얼굴이 몇 가닥의 기억을 붙들고 끈적끈적 매달렸다. 볼우물이 수줍던 아이들은 개나리가 피자 반쪽을 찾아 집을 떠났고, 여자는 그림처럼 남아 미완의 퍼즐을 맞췄다. 보름달이 부풀고 수반에 꽃들이 차오르면 외출을 꿈 꿀 거야. 들판 가득 돌아온 계절과 빗방울 커지는 동그라미들,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오븐 속의 피자가 익어갔다.
[출처] 피자|작성자 김기덕
 
임플란트
 
방풍림을 흔들며 치통처럼 바람이 불었다.  
피고름이 고인 갯벌은 훅훅 입 냄새 풍기며 달려온 태풍에  
아랫도리부터 허물어 졌어 
파도에 물어뜯긴 모래언덕, 할아버지 수염처럼 늘어진  
뿌리들은 허공을 향해 촉수를 흔들었지  
 
쓰레기 매립지를 파고 박은 철 빔들  
지반이 약한 탓에 건축 전문가는 조립식 건물을 권했지만  
내겐 어떤 태풍도 견딜 반영구적 빌딩이 필요했지  
꽃 같은 웃음을 보여주던 마른 대궁들을 뽑고 
들뜬 땅을 다진 후 콘크리트 하여 세운 든든한 믿음의 뼈 
 
아버지는 날마다 성현의 말씀 뼈마디에 새겨 곱씹으며 살라 했는데  
고기토의 집, 상앗빛 말씀들을 갈고 닦지 못했다. 
입에선 악취의 언어들이 쏟아지고  
한 순간, 마른 풀잎들은 바람에 흩날리다 떨어졌지  
뼈 속에 뼈를 심고서야 말씀의 뿌리들이 가슴에 사무친다 
몸에 심겨진 206개의 뼈들이 다 진리였구나.  
 
마을 입구 옹벽이 새 단장을 했다.  
폐차들이 녹슬고  
빗물과 함께 토사가 넘쳐나던 담벼락,  
허물어진 골과 틈을 채워 성형을 했다.  
꿈을 디자인한 타일들의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옹벽이 웃는다.  
초특급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옹벽의 신념들 
동네가 훤하다.
[출처] 임플란트|작성자 김기덕
 
포토샵
                                         김 기 덕
 
  점과 주름을 문지르자 별들이 돋아난다. 칼이 지나는 자리마다 피어나는 꽃들, 다이어트 되지 않는 부위들을 자르고 지우며 바비인형들이 태어나는 상자 속에서 유체 이탈한 나를 수정한다.
 
 명품 옷과 구두를 다운받고 다크서클을 가린 선글라스와 시간이 멈춘 다이아몬드 시계, 드라이플라워의 가슴장식, 흑백의 과거 위에 컬러페인트를 부어 구름이 사라지면 나는 새로운 아바타, 신의 합성품이 되지.
 
  그녀는 잘나가는 탤런트의 눈을 오려왔다지. 다음엔 펄펄 끓는 심장을 잘라온댔어. 구름을 만들어 온 뱃살과 처진 엉덩이를 도려내고 이참에 신세대 몸매로 바꿔치기하면 누군가의 메모리에 저장되어 두고두고 컬러풀한 내일을 복사할 수 있을까.
 
  세상은 불붙이면 타버릴 듯 메마른 나무들이 서있다. 동공 속에 별을 그려 넣으며 뼈를 추켜세워도 흐물흐물 무너져 검게 떨어지는 잎사귀들, 내장들. 죽고서야 전송되는 완성품을 위해 바람은 혼을 불러오고, 하나 둘 익숙했던 이름들이 오려진다.
 
  셀 수 없는 클릭으로 계곡의 그늘과 상흔을 다 지운다 해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의 기억들, 별을 담은 요술 상자 속에서 태어나는 피그말리온의 조각품, 낮선 모습이 우주 밖으로 나를 전송한다.
 
  새롭게 인화되고 싶어.
[출처] 포토샵|작성자 김기덕
 
그물
                             
  한 달 만에 그는 거미줄에 걸린 파리로 발견되었다. 지하실 벽 옷걸이에 나일론 줄로 매여진 몸을 음습한 기운과 악취의 유령들만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줄을 타고 오르던 피라미드 빙벽, 올이 풀리자 믿었던 구석부터 무너지며 순식간에 추락했다. 안전망 하나 없는 절벽 아래 뒹굴다가 정착한 낙엽의 영토, 지하 무덤은 해가 뜨지 않았다. 익명의 무기를 든 악풀러의 베풀과 유러들의 승패가 갈리는 장에서 만랩이 되고 싶었다. 새들의 포위망은 좁혀졌고, 아바타는 코드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로그아웃.  몰리면 고스톱 판을 뒤엎듯 피시를 끄는 거야. 가상공간에서 심장이 깜박인다.
 
  피라미드가 길거리마다 세워지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생매장 되었다. 사촌에 팔촌까지 끌어들여 꼰 실로 숨구멍 없는 집을 지었다. 누에는 집을 나오지 못하고 끝내 질식했다. 도미노로 무너진 건물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끈끈이들이 놀라 뛰쳐나온 사람들의 목을 졸랐다. 거리엔 통나무 나동그라지는 소리와 함께 태풍이 몰려 왔다. 하늘이 없어 날지 못한 스파이더맨은 손바닥의 거미줄을 제 목에 감고 몸을 날렸다.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진 몸, 벽에 달라붙어 단잠에 빠졌다.
[출처] 그물|작성자 김기덕
 
                      김 기 덕
 
책과 가구들은 문 밖으로 쫓겨났다.
액자가 떼어지자 얼굴 속에 얼룩이 선명히 드러났다.
전신거울의 뒷면에 살던 바퀴들과
빗물이 스며든 벽에 핀 검은 곰팡이들,
눈송이처럼 침대 밑을 굴러다니던 먼지를 치우고
칼로 반듯반듯 재단하는 봄
풀냄새 흠뻑 묻어나도록 풀질했다.
꼿꼿이 일어선 풀잎, 벽과 천장엔 꽃잎이 번지고
새들은 날아와 눈빛으로 노래했다.
작은 발소리에도 우우 공명하는 푸른 우주,
벌판엔 겨우내 살아남은 새싹들이 채워지고
하늘엔 강한 날개의 철새들이 날아다녔다.
에덴을 위해
빛바래고 상처 난 영혼들은 길거리에 버려져야 했다.
주인의 취향을 따라잡지 못한
아날로그TV와 성해 낀 냉장고, 지겹게 누러 붙던 밥솥도
고물상에 넘겨졌다.
아끼던 책들과 흠이 적은 장롱만 제자리를 찾았을 뿐,
최신형 벽걸이형TV나 노트북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낡은 책상들이 빠져나가고 명패가 바뀌며 활기가 도는
환절기
어둠의 문을 열고 샤워를 하면
이빨 부딪는 물소리에 바이러스들이 지워지며
낮선 바다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출처] |작성자 김기덕
 
데칼코마니
                        김 기 덕
 
아이가 종이 위에 물감을 짠다. 빛바랜 나의  도화지는 천장에 떠있고 아이의 도화지는 백지로 깔려있다. 적‧청‧황‧흑의 물감들이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다고 아이가 깔깔거리며 동‧남의 끝을 잡고 북‧서의 경계를 맞대 반으로 접어 꾹꾹 눌렀다 편다.
 
대칭을 이룬 뇌 속엔 산과 강이 흐르고 땅과 바다가 하나로 합쳐져 아이의 꿈지도가 펼쳐졌다. 입을 맞추는 남녀의 얼굴, 엄마의 품속에서 나팔꽃 길을 타고 온 나비 한 마리 힘찬 날갯짓으로 날아오른다. 반평생 그려온 나의 산과 달과 구름들은 물그림자로 뜨고 너는 꽃과 나무와 열매의 중심에 내려앉는다.
 
시간의 모래알로 부서지는 물감들, 묵묵히 걸어 온 낙타의 발자국들도 모래바람에 지워지며 박제된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쉴 새 없이 꽃과 벌들은 만났다 헤어지고 날마다 접혔다 펴지며 풀어놓는 밤과 낮의 씨앗들이 아이 눈망울 같은 빛을 향해 날아오른다. 땅과 하늘 빼곡히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가는 점돌,알락, 팔랑 문양들
 
물감들이 눌리며 분출했던 화산을 접어 하늘에 날리자 소리는 사라지고 소용돌이만 허공을 맴돌다가 아이의 동공 속으로 사라진다. 오목렌즈 같은 호수엔 용암들이 잠기고,  풀과 꽃과 나무와 접속하던 나비 한 마리 훌쩍 내 어깨에 매달린다.
[출처] 데칼코마니|작성자 김기덕
 
초점
                            
  밤을 입은 드레스의 여인이 흑인 이빨 같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번개의 손놀림에 한 템포가 늦는 천둥소리. 수천의 눈과 귀의 빔이 쏘아진 피아노에서 소녀의 음계들이 타오른다. 도레미파 솔 솔 솔 
  어깨동무한 산과 섬들이 바다의 일출을 기다린다. 양수를 터트리고 나올 햇덩이, 수평선을 향해 숨을 멈춘다. 카운트 다운하는 폭발점. 용광로의 쇳물이 끓는다. 핏물이 번지며 솟는 새벽, 펄 펄 펄 
  이파리들 휘날리는 골목을 향해 눈뜨는 집들. 원무를 추는 수·금·지․화·목·토·천·해. 태양을 향해 돌고, 태양은 우주를 향해 돈다. 하늘 향해 모은 눈빛들이 반짝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시선이 머문 종이에 불이 붙는다. 눈빛만 닿아도 연기가 풀풀 날리는 빛의 응집. 그녀의 총에 맞아 쾡 하니 구멍 난 표적지의 그을린 탄착점에서 화약 냄새가 피어오른다. 아지랑이 몽롱한 나의 눈동자  
  구멍을 들여다본다. 홍채 속의 동공이 반짝인다. 암실에 떠오르는 별. 구멍들은 블랙홀이 되고 나는 머리부터 빨려들어 간다.
[출처] 초점|작성자 김기덕
 
얼음 날개
                    김 기 덕
 
수은주가 곤두박질치자 지퍼가 열린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갈가리 찢겨진 비닐하우스
난도당한 화초의 속살마다 피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고
추락한 날개의 깃털들은 팝콘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볼을 부비며 구름 풍선을 타고 오른 물방울들
결빙선을 따라 눈물이 되고 얼음이 되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관절들은 얼음과자처럼 쉽게 부러져 덜그럭거렸고
단절된 혈관의 마른 잎들은
기침 소리를 내며 얼음 나라로 굴러갔다.
15층 옥상에서 투신한 여학생의 차디찬 몸이 떨어진 곳은
왜 하필 국화꽃 만발했던 화단이었는지
길엔 꿀을 잃은 벌들이 떨어져 눕고
바다엔 엔진이 다한 비행기가 불꽃으로 산화했는지
차가운 눈망울로 쏟아진 빙점의 쓰라린 상처를 박하사탕처럼
밤은 오래오래 녹여 먹는다.
얼음유성들이 긴 꼬리를 끌며 매달리는 어둠 속에서
꽃향기의 마지막 기억을 품고 마른 대궁들이 쓰러진다.
추락하는 별의 얼음 날개
사선을 긋는 찰나의 빛들이 섬뜩 살을 벤다.
[출처] 얼음 날개|작성자 김기덕
 
화장
 
주름을 지우고 눈썹을 그린다. 어둠이 내려앉은 다크써클, 분화구를 메운 대지엔 베이지 톤의 양광이 눈뜬다. 대리석으로 만져지는 표피의 한기, 찢겨진 상처 위에 파우더를 바르고 순간의 충격 속에서 하늘을 꿈 꾼 푸른 멍울에 무지개를 그린다. 잠의 수렁에 빠진 백설 공주의 핏물 든 독 사과가 검다. 한껏 폼을 잡으며 미소 짓던 순간의 사진들만 낙엽처럼 불길 속에 흩어진다. 구름을 지우는 하늘, 햇살 고운 색조화장에 과실마다 노을이 물들고 산들은 그림자를 지운 머리칼로 이마를 덮는다. 가재미눈을 감추는 아이 샤도우, 치켜 올라간 입 꼬리를 지우는 빨강 루주, 밤새 눈이 온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땅의 낮선 얼굴들, 거울은 늘 빛이 비치는 한 면만 보여주곤 했다. 파운데이션을 덧칠한 여인의 팬터마임은 끝났다. 어둠의 문을 열면 극명히 드러날 하늘과 땅, 마지막 화장을 고친 여인은 춤추는 불꽃과 함께 한 줌 바람의 잡티로 지워진다. 하늘엔 재가 날리고 관객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간다. 덕지덕지 간판으로 덧칠한 빌딩들도 하나둘 옷을 벗는다.
[출처] 화장|작성자 김기덕
 
그대 안의 블랙홀
                    
창밖에 비가 내리면 나는 LP레코드를 튼다.
먼지 앉은 뚜껑을 열고 잊힌 얼굴 같은 판을 얹으면 그대 좋아하던 음악들이
바늘을 타고 떨리는 손길로 전해진다.
 
어둑한 방의 격자무늬 하늘엔 눈물방울 별들만 떨어진다.
핵융합이 끝난 별들은 급격한 중력현상으로 블랙홀이 되고 LP판의 검은 음악 속으로  분열되어 빨려드는 나의 우울증,
쳇바퀴 도는 구멍 속을 빠져나올 순 없는가.
 
목을 조이는 거미줄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밤마다 바다를 헤엄쳤다.
아웃토반을 달려도 여전히 제자리인 집과 얼굴들,
벽에 걸린 음화들이 잠깐 느슨한 감각에 탄력을 주었지만, 이내 절망의 구멍에 빠졌다.
천억 개의 은하계 중 지구별이 속한 은하계엔 천억 개의 별들이 반짝이고, 수백만 개의 블랙홀은 빛을 삼키며 남자들을 빨아들인다.
촉수를 흔드는 검은 실루엣의 Event Horizon
거리를 활보하는 블랙홀들은
가슴에 늙은 느티나무 옹이 하나씩 퀭하니 뚫려 있다.
 
초신성중력으로 다가온 블랙 아이라인 그대 눈동자는 언제쯤 비를 멈출는지.
나이테로 흐르는 삶의 궤적이 다하기까지 지글지글 흐르는 빗소리
LP레코드판이 비를 다 삼키고 나면 우린 상처를 잊고 다시 태양으로 뜰까?
그대 안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든 빛들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하늘엔 어머니의 양수가 은하수로 흐르는데.
[출처] 그대 안의 블랙홀|작성자 김기덕
 
벽은 너머를 감추고 있다
                       김 기 덕
 
가시철망을 두른 무기고의 담을
담쟁이덩굴이 페인트자국을 더듬어 오른다.
담들은 너머를 감추려하기에
볼 수가 없어 넘어가고픈 너머,
콘크리트 암벽의 옆구리에 철심을 박으며
녹슬지 않는 긴장을 찾아 벽을 넘는다.
우리가 꿈꾸는 너머엔 풀과 나무와 새들이 어우러져
노래하며 집을 짓지만, 언제나 뛰어넘는 너머엔
절벽과 웅덩이와 운무들로 가득했다.
톱니바퀴를 타고 오르는 시간의 벽이 보여주지 않는 너머로
사람들은 손을 모은다.
수억 광년을 뚫고 온 별빛이 아름다운 거라고
무르팍이 깨져 달려 온 파도가 푸른 거라고
네 안의 너머를 갖지 못해
시들지 못하는 담쟁이
촉수를 깨워 젖꼭지 같은 뇌관을 더듬는다.
[출처] 벽은 너머를 감추고 있다|작성자 김기덕
 
아직 한여름이다
 
장마전선이 몰려온다.
기단의 지루한 대치에 뱃속은 하루 종일 부글거리고
뼈마디에 천둥이 인다.
 
검은 양복들이 난무하던 길거리
번개 사건이 인터넷 톱기사로 뜨기도 했지만
국지성 호우가 멈춘 거리엔
언제 그랬냐는 듯 건물들이 젖은 몸을 말린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집안에는
아버지 대신 상복들이 밀려다녔고 장례식장으로
날벼락 같은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끼니때마다 들려오던 구름 부딪히는 소리
아내와의 말다툼도 하나로 섞이는 비의 화음인데
꽃이 떠난 뒤 우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구름이 날리는 하늘,
닦을수록 창이 흐려지는 오늘 하루도 일조량이 부족했다.
골목마다 곰팡이가 피고
지각 변동을 꿈꾸는 판들의 지진과 해일,
 
내 안의 용들이 한바탕 휘감고 장대비를 퍼 붓고 나면
왁자지껄 시장바닥처럼 풀들이 일어서겠지
검은 발자국 소리에 광장에는 한낮에도 해가 저문다.
[출처] 아직 한여름이다|작성자 김기덕
 
 
거세에 대하여
 
파일을 지우자 또 다른 악성파일들이 떴고
휴지통엔 무의식의 상처들이 넘쳐흘렀다.
 
수퇘지들이 피 흘리며 비틀거리던 80년대 여름엔
예비군들은 훈련장 귀퉁이에서 유행처럼 정관수술을 했다.
 
 
성폭력 기사가 모니터를 능욕하면서
한 달 분의 욕망을 제거하는 주사가 짐승들에게 놓아졌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고
내시들은 궁형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잡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장의 분비물을 밀어내는 관장약 농글리세린
신진들도 조직을 치고 올라 보스를 흔들어 댔다.
사람들은 과일 속의 씨를 잘라내지만, 늘 제거된 것은 과육이었기에
도시는 스캔들로 들썩였고, 돼지고기는 노린내를 풍기며
몸엔 악성종양이 꽃을 피웠다.
 
땅을 파고 묻은 반코마이신 항생제, 비에 섞여 옴 몸으로 퍼진 후
나무들도 뿌리 뻗어 흙을 움켜잡았다.
자동제거 되는 바이러스파일들, 꿈의 조각모음이 시작됐지만,
서로의 방호벽은 높아만 갔다.
 
[출처] 거세에 대하여|작성자 김기덕
 
하이힐
                김 기 덕
 
나는 가끔씩 여자의 하이힐을 신는다
엉덩이를 치켜들고 몸을 숙인 자태에 발을 밀어 넣으면
G-스폿이 만져질 듯하다
무릎 나온 추리닝에 슬리퍼를 끌다가
문득 빈 자루 같은 몸을 추슬러 세운다
못을 박으며
못이 박히며
벼랑 위에 선 생고무 같은 엉덩이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아랫배를 끌어당기며
괄약근을 조여 자루들의 끈을 묶으면
감각은 깎아지른 언덕에서 하이힐을 신는다
발기한 근육의 종아리
날선 유리의 균형 감각이 발바닥을 찌른다
발레슈즈를 신은 백조들의 비상으로
정상의 바위 끝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장난감 나라일 뿐이다
하이힐을 신은 나는 나무처럼 자라고
하이힐을 벗은 여자의 종아리는 물먹은 스펀지가 된다
몸의 감각에 불을 댕기는
하이힐은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있는 고원으로 나를 실어간다
아슬아슬 줄을 타고
못을 뽑으며
못이 뽑히며
직선의 첨단을 또각또각 걸어가는
정점엔 유리처럼 투명한 빙벽의 추락이 보인다
[출처] 하이힐|작성자 김기덕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
                      
언어들은 대장간의 칼로 녹슬어 있다.
태양이 시간을 돌리는지
시간이 태양을 돌리는지
궁금하지 않은 나의 삶이 식상하다.
달의 짜여진 공식처럼
세상엔 그녀의 달거리와 한통속 아닌 것이 없다.
지구가 기울어져 한 쪽으로 도는 것과
나의 메시지가 물처럼 아래로만 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바람 따라 구름 흐르고, 그녀 따라 내 마음 흐르는
물리학의 법칙엔 예외가 없다.
먹고 마시는 몸의 기계적 활동은 건망증의 뇌가 지시하기 전
내장들이 먼저 아우성쳤기 때문이리라.
주기적인 사랑에 길들여지고
빡빡한 일정표가 나의 삶을 제 맘대로 살고
장기들은 때마다 지급되는 양분에 군말이 없다.
날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으며 중독되는 생각들
부활과 윤회의 소식이 또 다른 반복일 뿐,
새 것이 되지 못한 지 오래다.
쏟아진 우유가 다시 컵에 담기지 않는
고뇌하는 중년이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화살에
집 나간 나의 언어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태양이 뜨듯
사랑한다는 메시지의 처절한 진동
집요한 울림이 아침마다 그녀 몸에 녹슨 못을 박는다.
[출처]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작성자 김기덕
 
이성의 초원 
                       
  삶은 이성의 뼈대 위에 세워져 있다. 반듯한 합리성에 윤리의 기둥을 세워 지은 사고의 집 속은 드라이플라워의 장식처럼 메말라 있다. 인류의 구원을 꿈꿨던 20세기 이성의 칼날엔 피가 묻어 있고, 사고의 벽돌로 쌓은 바벨탑은 더 이상 새 하늘을 보여 줄 수 없게 되었다.
  사막의 삶에 영감은 생명력을 부여해 왔다. 이성이 지배해 온 것 같은 세상을 실은 영감이 지배해 왔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베토벤의 운명 속에서, 도공이 빚은 청자 속에서, 죽음을 초월한 선지사도들의 삶 속에서 영감이 충만한 기운을 느낀다. 초월적 세계의 신성한 불을 만진다.
  영감이 없는 이성의 세계는 향기가 없는 꽃과 같다. 영혼이 사라진 육체와 같으며, 반복된 작업의 복사물이다. 반면 이성이 없는 영감은 녹아버린 아이스크림과 같다. 몽환이고 환상이며, 숲에 떨어진 나비의 허물이다. 영감만 있는 자는 정신분열자요, 귀신들린 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성의 초원 위에 영적 기운이 서릴 때 우린 새벽을 볼 수 있다. 이성만 있는 십자가는 심판의 형틀이었지만, 신령한 영적 능력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이성의 기름 위에 이글거리는 꿈의 열정, 성령의 불로 타오를 때 삶은 세상을 비추며 밝게 빛날 수 있으리라.
[출처] 이성과 광기|작성자 김기덕
 
나는 타오르고 있다
                             김 기 덕
          
  나는 굴뚝을 보고 자랐다. 산꼭대기에 우뚝 선 굴뚝은 바지랑대처럼 하늘을 떠받쳤고, 심호흡으로 내뿜어진 연기들은 용을 만들고 새를 만들며 구름이 되었다. 방에 누워서도 산타가 굴뚝을 타고 온다는 말을 실감하곤 했지만, 쉴 새 없이 오르는 연기에 내 하늘 한 자락은 늘 검게 흐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골초였다. 집안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날에 식구들은 기침을 쿨룩거리며 쫓겨났다. 담배연기가 방안에 찰수록 집안은 어두워져갔고 구겨진 아버지의 미간에선 가끔씩 담을 헐어버릴 듯 천둥이 쳤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검은 눈물을 흘렸고, 하나 둘 자란 형제들은 구름으로 집을 떠났다.
  15년 된 나의 아반테 고물 자동차는 아직 쌩쌩하다. 길거리에 매연을 내뿜으며 큰소리치는 그의 입에서 나온 침과 독설들이 거리를 더럽히고, 하늘과 내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 덜덜거리는 내 가슴 한 쪽은 늘 허전하다. 금과 은을 제련하듯 속도를 제련하는 연기들, 그 속도에 실려 나는 가끔 바람이 되었다.
  내 몸의 세포들이 날마다 양분을 태워 구멍으로 내보낸다. 내 몸의 구멍마다 연기가 피어났고, 염분과 소량의 미네랄들은 산성비가 되었다. 힘든 노동의 대가가 불러온 사막화로 희미한 미소와 창백한 육질 속엔 중금속이 쌓여갔다. 태울수록 늘어나는 주름과 어두운 그림자, 잡티 같은 욕망들은 고스란히 앙갚음으로 땅에 떨어졌다.
  고혈압으로 대동맥이 파열한 친구를 화장했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생긴 굴뚝에선 붉은 연기가 뿜어졌고, 너무 빨리 태워버린 젊음은 45년 3개월의 불꽃을 남기고 재가 되었다. 화장장의 굴뚝에선 또 다른 굴뚝들을 태웠고, 굴뚝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랐다. 굴뚝으로 와서 굴뚝으로 사라지기까지, 나는 한창 타오르고 있다.
[출처] 나는 타오르고 있다|작성자 김기덕
 
 
퍼즐놀이
                     김 기 덕
 
모자이크에 누워 모자이크 속에 빠진다.
타일조각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완성된 돌고래 위에서 내가 조립된다.
아이와 맞추던 로봇 태권V 퍼즐은
이 빠진 한 조각에서 균열이 시작되다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그물망 같은 재건축 단지에 살면서도
사소한 이유로 금이 가는 이웃들, 얼굴 본 지 오래인
내 인맥들은 견고할까.
조각조각 희망을 끼워넣으며
가족들은 제 몸에 맞는 무늬를 고르지만
목소리 큰 아내 곁에서
무능한 남편은 늘 모자이크 처리된다.
땅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세력을 맞추고
하늘엔 완성된 은하의 별들이 총총히 채워지는데
빈 구석이 많아
나는 평생 성경 속의 구절들을 꿰맞춰왔다.
예수와 붓다와 공자와 소크라테스, 하지만
미완인 나의 퍼즐엔 아버지가 없다.
찢겨진 불경들이 빠져나간 빈자리에서 실금이 간다.
촘촘히 짜인 밑그림들은
하나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고 이를 악문다.
아슬아슬한 나의 해부도
모자이크의 법칙을 벗어난 돌고래는 이미 죽어있고
그림들은 시간 밖으로 줄줄이 풀려난다. 
[출처] 퍼즐놀이|작성자 김기덕
 
 
입술의 상징
                                  김 기 덕(공도)
 
 
  우리 몸에서 입술처럼 특별한 곳도 없을 것이다. 피부로 덮인 몸 전체에서 입술만이 속살이 돌출되어 생긴 곳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심장의 돌출부’라고 표현했다. 두근두근 가슴 뛰듯 입술엔 심장의 기운이 살아있다. 입을 맞추면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입술은 몸의 문이다. 몸은 세상이요, 음식물은 세상만물이다. 세상에 오는 것들은 형상을 입고 오지만, 나가는 것들은 영혼의 언어들이다. 우리도 하나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화이다. 자신을 부수고 갈아 사랑의 양분이 될 때 다시 말씀의 모양으로 하늘문에 다다를 수 있다.
  입술엔 태양이 떠있다. 희망의 아침과, 절망의 저녁이 맞물려 있다. 삶은 이 두 입술을 벌려 백옥같이 미소 짓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의 휘파람이며 만남과 이별의 사랑노래이다. 입술을 꼭 깨물고 생각에 잠겨보라. 순간 가슴 속에서 정열의 태양이 떠오르리라.
  입술은 독주고, 꽃뱀이고, 네펜테스이면서 동시에 꽃잎이고, 심장이고, 불이다. 가롯 유다의 입술엔 죽음이 담겨 있었고, 옥합을 깬 마리아의 입술엔 부활이 담겨 있었다. 찬송과 기도와 절제가 있는 입술, 그 아름다운 집에서 말씀인 하나님이 사신다.
[출처] 입술의 상징|작성자 김기덕
 
마블링
                           김 기 덕
 
거리엔 섞이지 못한 피들이 둥둥 떠다녔다.
기름들은 스크럼을 짰고
띠를 형성하고 질주한 길거리마다 붉은 꽃이 피어났다.
연약한 풀뿌리들의 봄 혁명,
하늘을 복사하는 양동이 물 위로
안개 낀 골목을 비추는 거울과 같이 떠다니는 고뇌들
도로마다 넘쳐나는 물감들로
메커니즘의 반항아들은 시내로 잠식하며 흘러들었다.
세상을 휘젓는 막대기 같은 바람과 함께
격동하는 젊음의 무늬들은 피로 엉기어 갔다.
아침을 기다리며 샘물같이 살아온 이파리들도  
물 아닌 삶을 밀어냈다.
검은 영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밀려다니는 바다
흰옷의 달빛이 머릴 풀고 혼을 건진다.
차마 떠나지 못해 끈적이며 매달리는 붉고 푸른 영혼들
시즙은 수의에 한을 그린다.
백지 위로 나타난 넋의 기하학적 무늬
응결된 정신의 문양은 물결로 요동치고 있었다.
살아 있어 처절한 혼의 불꽃을 태우며
한 겹 한 겹 벗겨진 물의 껍질들이
꿈틀꿈틀 생살을 파고들어 새기는 문신
울컥, 치밀어 오른 각혈이 무지개로 흘러내린다.
[출처] 마블링|작성자 김기덕
 
몸에 그린 동그라미
은행잎 카시미론 이불에서 연인들이 입을 맞춘다. 엄마는 아이를 손짓하고 아이는 발목까지 빠지는 노랑물감 속을 뒤뚱거리며 걷는다. 가을을 붓질하는 은행나무 옆에서 내 한쪽 가슴이 물든다.
䷭ 지풍승地風升, 바람이 땅 위로 자라서 올라간다.
징코민 한 알이 몸속에 바람을 풀어놓는다. 으슬으슬 몸살이 날 것 같다. 차단된 벽속에서 그리움 탓인지 잎들의 떨림소리가 들린다. 나를 압축캡슐로 너에게 보낼 수 있다면 너의 혈관을 뚫어줄 수 있을까?
䷑ 산풍고山風蠱, 산 아래 바람이 부니 일이 생긴다.
황금이 쌓인 은행들, 현금지급기 앞에 서면 돈세는 소리가 바람소리로 들린다. 바람에 스쳐가는 얼굴들. 발아를 꿈꾸는 은행의 정자들과 자루 속의 동전들과 묶였던 지폐들과 이별의 메시지들이 흩날린다.
䷩ 풍뇌익風雷益, 파종하여 봄바람이 이니 만물이 풍성하다.
썩는 냄새 훅훅 입김에 불려온다. 거리엔 곰팡이들이 피어나고, 뱃속에선 용연향이 익는다. 알맹이를 감싸는 썩음의 껍질. 구린내가 빗어내는 향기로운 과당을 위해 몸이 썩어간다. 뼈를 감싸고 살이 문드러진다.
䷌ 천화동인天火同人, 하늘 아래 태양이 비추듯이 모두가 만나 함께한다.
여인은 재가 되어 뿌려지고 뿌리만 남았다. 뼈를 타고 온 몸으로 전율하는 뿌리, 몸속엔 나무가 산다. 세모, 네모, 각진 잎들을 떨구며 둥글게 다짐하는 동그라미. 그녀의 얼굴은 해마다 커진다.
[출처] 몸에 그린 동그라미|작성자 김기덕
 
인두화
                      김 기 덕
 
연탄불에 달군 인두가 흰 목질에 달을 그린다.
비명소리 타오르는 연기 속에서 상처들은 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눈 위에 찍는 구두 발자국
뜨겁게 흘린 검은 눈물들이 몸에 문신을 새긴다.
남자는 여자의 볼에 화인을 찍고
여자는 뜨거운 채찍을 피 흘리며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불탄 흔적이 박힌 사람들은 두고두고 재가 된 상처를 쓰다듬는다.
옆구리를 핥으며 독을 내뿜는 붉은 혀의 뱀들이
비늘을 말아 올리며 제 살 깎는 대패질의 꽃판 위에서 달마가 되고 예수가 되고
사막의 능선을 넘던 낙타의 무리들도
빙벽의 등고선을 오르던 설인들도
화석으로 박힌 나신의 등걸,
달빛 뽀얀 속살에 떨어진 마른 꽃잎들을 별로 새겨 넣는 뼈 마디마디
향불처럼 목향이 낮은 숨소리로 피어오른다.
[출처] 인두화|작성자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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