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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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의 비극
2016년 09월 06일 09시 46분  조회:211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의 비극     
-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의 디아스포라문학의 주제에 대하여


연변대학교 김 관 웅



  1. 들어가는 말

  
“고향상실의 주제”와 “고향 찾기의 주제”는 이민집단으로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최서해의 《탈출기》, 《홍염》으로부터 시작하여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에 이르기까지 중국조선족문학 초창기의 전반 문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는 “고향상실의 주제”와 “고향 찾기의 주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중국의 특수한 정치적 여건 때문에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고향 상실과 고향 찾기”의 주제는 수면 아래에로 잠적해 버렸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우리문학에는 다시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와 중국에서의 정착사를 작품화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시작되여 리근전 선생의 장편소설《고난의 길》, 최홍일 씨의 장편소설《눈물 젖은 두만강》, 최국철 씨의 장편소설 《간도풍운》, 리혜선 씨의 장편르포《충청도 아리랑》등 력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한중수교를 계기로 하여 중국조선족사회에는 한국바람이 12급 태풍마냥 들이닥치기 시작하였다. 한국바람은 중국조선족이 손에 돈을 좀 쥐여볼 수 있게는 하였지만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뿌리까지 뒤흔들어놓는 후과를 가져다주었다. 지금 한국에 나가있는 중국조선족은 20만 명을 훨씬 웃돈다. 이밖에도 미국, 일본, 구쏘련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버린 중국조선족까지 합치면 그 수자는 어마어마하다. 거세찬 한국바람 앞에서 중국조선족 작가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를테면 김혁 씨의 르포 《천국의 하늘에는 색조가 없다》, 리혜선 씨의 르포《코레안 드림》등이 바로 그 보기이다.
  
허련순 씨 역시 한국바람 앞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주로는 소설을 가지고 대응을 했다. 그것도 단편이나 중편이 아닌 장편을 창작을 통해 거세찬 한국바람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중국조선족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혀련순 씨는 《흑룡강신문》에 장편소설 《바람꽃》을 련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나는 귀추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꽃, 바람이 불어 왔던 곳에 바람이 지는 그 곳, 두 세계 중의 어느 한곳에 머무르거나 또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도 못한 채 두 곳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였다. 언제나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한곳에 대한 끊임없는 추억과 망각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존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가?"
  
허련순 씨는 그 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는 누구일가?"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관한  질문을  끈질기게 던져오고 있으며 , 요즘에도 글이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창작주장을 여러 번 천명한바 있다. 허련순 씨는 최근에도 한국 매체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영원히 주류에 속할 수없는 소수자이며 이방인으로서 중국조선족문학의 뿌리는 바로 이런 소수자의 슬픔에 있다고 언급한바 있다. 허련순 씨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집중적으로 또 가장 예술적으로 체현된 2004년부터 일년 남짓이 장백산 잡지에 련재되였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10년 전의 그녀의 장편소설 《바람꽃》에 나타난 디아스포라문학 경향의 연장이면서도 동시에 승화이기도 하다.
  
지난세기 90년대 중반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창작은 주로 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추적하는데 바쳐졌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허련순 씨의 소설 창작은 가장 디아스포라문학의 주제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원래 허련순 씨의 두 부의  장편소설 《바람꽃》과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를 합쳐서 논하려고 하였으나 짧은 론문에서는 그것이 무리하고 생각되여 후자 한부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2.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미아(迷兒) 군상(群像)


인간은 이처럼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 가정(家庭)적,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된다.
  
인간은 우선은 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라나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정적인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게 된다. 하련순의 장편소설 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거의 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가정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극심하게 겪어온 인물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안세희부터 분석해 보기로 한다.
세희는 문화혁명 때 부모가 반혁명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골에 사는 큰 아버지 집에 맡겨져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반동새끼라고 놀리고, 집에서는 밤마다 사촌오빠의 희롱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 후 아버지가 죽은 후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세희는 엄마가 아버지의 친구와 한 이불을 덮고 끌어안고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 무서운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해 16세인 세희는 어머니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모한테로 가겠다고 자진해 나선다. 이모네 집에서 세희는 부성애를 이모부를 통해 보상받아 보려한다. 이모부는 살갑게 세희를 대해주었지만 결코 세희를 자기 딸처럼 여기지 않았고 또 여길 수도 없었다. 이모부는 필경은 남이였기 때문이다. 세희는 이모부로부터  친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 꿈꾸었고 또 그래서 이모부네 집에서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으려 하지만 그 갭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진희 앞에서는 언제나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상에서도 세희는 이모부에게 있어서는 한낱 성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미모의 젊은 처녀였을 따름이였다. 바로 세희를 남으로 여겼기에 세희를 육체적으로 범하기까지 하게 되었으며 그 죄책감으로 이모부는 죽고 만다. 세희는 이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모네 집에서도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지 못한다.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지 못하고 늘 방황하던 세희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두 남자와 만나서 번마다 헤여진다. 세희의 말처럼 첫 번째 남자는 세희는 좋아하는데 그 남자가 세희를 싫어했고, 두 번째는  그 남자는 세희가 좋아하는데 세희가 그 남자가 싫어서 헤여졌다. 그것은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생겨난 세희의 불안정한 생활태도와도 밀접한 련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희가 낳은 각성바지 두 아들도 어려서부터 가정적인 동일성의 갈등에 시달리면서 자라난다. “죽은 안해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남자는 도꼬마리 같은 새끼 하나를 그녀의 바지가랭이에 달랑 달아놓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없이 태여나서 자란 세희의 둘째 아들 용이는 천덕꾸러기였다. 이부(異父) 형에 대한 복종과 헌신 정신을 어려부터 갖게 된 용이의 특이한 성격 역시 가정적 동일성의 갈등으로부터 생긴 부산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송유섭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송유섭이 12세 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찬장에 그림이나 그려주고 다니는 장인바치에게 반하여 음분도주한 후로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친 그는 엄마가 이제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리라고 작심한다. 엄마가 집을 버리고 도망치자 술주정뱅이 아버지도 아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송유섭은 고아로 된다. 그를 가긍하게 여긴 송유섭의 친구인 영구의 아버지가 유섭이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기른다. 한해 겨울을 영구네 집에서 얹혀 산 후 송유섭은 윤도림이라는 사람에게 넘겨지기 전에 그는 자기는 원래 버려진 아이였음을 영구아버지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양부모한테서까지 버려졌으니 그는 두 번이나 버려진 셈이였다. 사실 윤도림이네도 송유섭과 나이 비슷한 아들애를 잃고 그 아픔을 잊어보려고 송유섭이를 양자로 데려온 것이다. 그러나 송유섭은 윤도림의 안해에게 있어서는 자기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는 허깨비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도 송유섭은 윤도림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윤도림네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기로 작심한다. 비록 죽은 친아들 송철이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양모가 자기를 허깨비로 생각하는 것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윤도림네 집에서의 3년간은 그래도 대체로 행복했다. 그러나 3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송유섭은 후에 집체호로 나간다. 유섭은 목사였던 양부로 하여 공청단에도 입단할 수 없고, 군대에도 갈 수 없게 되자 윤도림을 아버지로 승인하지 않고 다시 자기를 고아로 내세우면서 살아간다.  “송유섭은 영예롭게 중국인민해방군 전사로 되었다. 윤도림 아저씨를 배신한 영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 달도 못 되여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고아로 가장 한 일이 탄로되여 그는 다시 원래의 농촌 마을로 돌아오게 되였다.”  송유섭은 집체호에서 억울하게 강간미수라는 루명을 쓰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구원된 후에는 다시 양부 윤도림이한태 의지하게 된다.
  
이처럼 송유섭은 어려부터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과정에서 여러 번이나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처럼 이른바 《성명위기(姓名危機)》에 직면하게 된다. 송유섭은 원래는 기아(棄兒)였으며 누가 생모, 생부인지도 모른다. 친부모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을 치고 난 뒤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업둥이임을 알게 되자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살 희망마저 포기하려고 한다.  이 일을 거치면서 그는 자아인식에서의 위기를 겪게 된다. 목사인 윤도림을 만나서 양부(養父)의 성(姓)을 따라 윤유섭이라고  성을 고치고 공식적인 신분을 확정하게 된다. 즉 자기의 양부(養父)와의 동일성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이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린다면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그에 귀순하게 된 셈이다. 이는 아동심리발전에서의 필연적인 경력이며 일종 권위에 대한 굴복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거세찬 정치폭풍은 송유섭으로 하여금 부득불 자기의 양부와의 동일성을 부인하고 다시 고아의 신분을 되찾게 하였으며 이 덕으로 참군까지 하지만 다시 정치심사에서는 양부와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되여 군대에서 쫓겨난다. 집체호에 다시 돌아온 후 강간미수라는 누명을 쓰고는 자살까지 시도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음에는 다시 양부인 윤도림을 찾아 간다.
  
한마디로 송유섭은 거의 한평생 집을 잃고, 집을 찾기 위해 방황한 사람이다. 가정적 동일성을 찾지 못해 한평생 우왕좌왕한 사람이다. 송유섭은  “집에 머무를 수 없었고”,  송유섭에게는 “어느 곳에도 집은 없었다.”  집을 잃은 미아(迷兒)의 가장 전형적이 보기이다.
  
세 번째로 쌍희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쌍희는 부모는 한족이다. 그런데 그가 다섯 살 때 부모가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조선집에 입양되였다. 그 집에는 딸만 셋이고 아들이 없었다. 아마 아들이 없어서 그를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어느 날, 아이스크림 사 먹자고 돈을 찾다가 양부의 돈지갑에서 콘돔을 꺼내여 불궈 가지고 다닌 것이 들통이 나서 집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누나가 쌍희를 찾아 내여 저녁에 같이 자게 되었는데, 누나의 젖가슴을 보고 또 가만히 만져 보게 된다. 그날 밤을 계기로 하여 쌍희는 누나에게 련정을 품게 되며 누나가 시집을 가자 쌍희도 아무런 미련도 없이 탈가한다. 쌍희 역시 가정적인 동일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뜬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고아 같은 신분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가족구조가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이런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갖고 된다. 여러 가지 부동한 원인으로 자기의 친부모와 같이 있지 못하거나 집을 떠나 다른 집에 맡겨져 자라나게 되는 경우에는 흔히 자기의 성(姓)이 계부(계모), 양부(양모)나 그 자식들을 상대로 하여 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된다. 즉 가정 내에서의 성(姓)의 동일성을 잃음으로 하여 심각한 《성명위기(姓名危機)》또는 가정적 동일성 확립의 어려움으로 하여 많은 심리적인 갈등에 빠지게 되는 법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 등장하는 세희, 유섭, 쌍희 등 주요한 인물형상들을 모두 정도부동하게 가정적 동일성을 확립할 수 없음으로 하여 많은 심리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성정해온 사람들이다.
  
이밖에도 세희의 아들 용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비 없이 태야나서 자란 용이는  외할머니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늘 소외를 당하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래도 당당한 결혼을 통해 태여난 형한테 꿀리고 순종하고 양보하는 가련한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집에서의 용이의 위치가 용이의 불쌍한 성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철 없는 아이지만 용이의 성격은 어쩌면 중국조선족의 민족적성격의 중요한 특징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정판룡 선생의 이른바 “며느리론”은 어쩌면 용이 같은 생존위치에서 생겨난 처세태도라고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집은 가문을 뜻하며 집은 중추적인 사회단위다. 집은 집안과 같은 뜻의 말이 되거나 집안과 어우러져 쓰이면서 훨씬 내면적이고 인간적인 상징성을 띠게 된다. 그 까닭은 집은 삶의 근거, 목숨의 뿌리, 안락함의 보루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양사회에서는 집은 가정주의의 핵심적 개념을 형성한다. 집은 가문, 가계, 가통 등을 상징하면서 전통사회에서는 국가와 거의 대등할 수 있었던 사회단위로 되었다.  자기의 집이 분명치 않고 집을 잃었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덴티티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가정적 아이덴티티(가정적 동일성)의 상실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안세희, 송유섭, 쌍희, 용이 같은 집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은 민족적정체성의 갈등으로 방황하는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인간상들이라고 분석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3.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동물형상들


이 소설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동물형상은 전반 작품구성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집에서 버려진 나비란 이름을 가진 강아지와 밀항선의 선창에 날아 들어온 나비는 비록 필묵을 많이 들이지는 않았으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세희, 유섭, 쌍희, 용이 등과  인물형상과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우선 나비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나비라는 이름을 가진 애완견은 세희의 돈 많은 친구인  춘자가 못 기를 상황이 되어 세희에게 넘겨주어 기르게 된 강아지이다. 그 이듬해 이 나비란 애완견이 예쁜 새끼를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 새끼들은 젖을 떼자 남에게 다 주어버렸다. 새끼를 잃은 나비가 한 현관을 쓰고 사는 옆집 문을 미친듯이 물어뜯고 허비다가 이웃집 한족 령감을 물게 되여 세희네도 어쩔 수 없이 이 나비란 애완견을 강변의 산책로에다 버리게 된다.

택시가 떠나자 나비가 까만 개를 뒤에 남겨두고 정신없이 택시를 쫓아왔다. 두 아이가 뒤돌아보지 못하도록 세희는 오른쪽 팔로는 광이를 왼쪽 팔로는 용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찬 정신없이 쫓아오던 강아지가 포기한 듯  멈춰서더니  자기로부터 멀어져가는 택시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는 그지없이 슬퍼보였다. 그의 눈에는 주인을 따라잡지 못한 안타까움과 괴로움 외에도 체념과 같은 것이 내비치고 있었다. 버리고 가는 주인을 원망이나 저주를 하면 어쩌랴 싶었는데, 강아지는 끝까지 주인을 원망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 눈빛이 더 슬펐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비란 애완견과 세희의 둘째 아들 용이는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관계를 맺고 있다. 나비란 애완견이 세 번째 수컷을 만나 겨우 교배에 성공하여 새끼를 배여 낳았듯이 용이도 세희가 세 번째 남자와 우연히 만나고 사귀어서 임신해서 나은 아이다. 그래서 그런지 용이는 무척이나 애완견 나비를 좋아했고, 아비 없는 천덕꾸러기 용이의  처지와 버려지는 나비의 처지도 아주 묘하게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
  
고스타 심리학의 동형론(同形論)의 리론으로 분석해본다면 세희의 둘째아들 용이와 애완견 나비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애완견 나비의 처지와 세희, 유섭, 쌍희, 용이 등 인물들의 처지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집 저집으로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주인에 의해 버려진 애완견 나비의 가긍한 처지는 세희, 유섭, 쌍희 등의 처지와 운명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선창의 천정 우에 붙어 있다가 거의 질식해 죽어가는, 역시 탈진상태에 빠져 빈사상태에 이른 세희의 얼굴 우에 떨어져 내리는 나비가 묘사되여 있다. 선창 우에 붙어 있다가 떨어져서 죽어가는 나비와 선창 안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세희 등 밀항자들은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구조적관계를 갖고 있다. 나비를 두고 두 밀항자인 세희와 유섭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 …
  유섭이가 간신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살았소?》
  《살았어요.》
  《그놈도 운수가 되게 나쁘군.어쩌다 이런 곳에 들어와 가지고 날아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게 생겼으니.》
  《죽을가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죽지 살겠소?》
  《지금 선창밖에 내보낸다면 살지 않을가요?》
  《사방이 바다인데 나비가 어떻게 살겠소. 차라리 이곳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지.》
  《나비는 아마 제집 같은걸 찾아다니지 않소.》
  《그건 왜요?》
  《나비는 집이 없으니깐.》
  《나빈 집이 없어요?》
  《그래 있는 줄 알았소?》
  《날아가 있는 곳이면 다 나비집인줄 알았죠.》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이 없는 나비가 가엾다고 생각하고있는지 아니면 집 없이도 자손만대 번식을 하고 잘 살아가는 나비를 부러워 하고있는건지. 암튼 자기 집에 대한 집착으로 죽고 사는 인간에 비해 나비는 현명한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같은 생각이였다.
  
세희가 손바닥에다 나비를 놓았다. 그리고 후-하고 불었다. 그런데도 나비는 나래를 우로 곧추 세운 채 꼼짝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왜 안 날죠?》
《나비가 날려면 삼십도 이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날 수 있소. 그래서 나비는 맑은 날만 날고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은 날지 않소. 체온을 올릴 수 없으니깐.》
《그럼 나비가 불속에 날아드는 것도 체온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닐가요? 》
《체온에 대한 욕망이 바로 비상에 대한 욕망이겠지. 불에 타서 죽더라도 비상을 해야 하는 나비의 사정은 어찌 보면 인간의 생존의 리유와 비슷한거 아니겠소.》
《나비도 생존리유가 있을가요?》
《생존하는 모든 물체는 다 자기 생존 리유가 있는거요.》
《그럼 나비의 생존리유는 뭘가요?》
《글쎄 뭘가?》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가요?》
  유섭은 길게 탄식을 하더니 힘 드는 듯 아주 낮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디에도 없는 집을 찾아서 힘든 나래짓을 하는거. 참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똑 닮았을가…》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은 심리적으로 고토와 거주국의 중간위치에 살고 있기에 나비처럼 “집”이 없다.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뒤 한 세기 반 남짓한 동안에 중국조선족은 모국과 거주국 양쪽으로 백안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여 오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마치도 나비가 하늘로 비상하기를 원하듯이 심리적으로 잃어버린 고토(故土)에 대한 끝없는 향수를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많은 구성원들은 개인과 고토, 자아와 그의 진정한 고향의 격리로 하여 생긴 아물 줄 모르는 상처를 갖고 있으며, 그 커다란 애상은 극복하기 어렵고 또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토에 대한 향수는 디아스포라들의 영구한 감정이며 그것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인 향수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고토에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고토는 실향한 디아스포라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근하게 안아주지 않으며 따라서 고토에서도 이방인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쪽에서 다 정신적인 안식처 - “집”을 잃고 끊임없이 방황한다.  
  
이 점에 대해 허련순 씨는 바로 이 마지막 부분에서 나비라는 이 메타포를 동원해 아주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바 전반 장편소설의 화용점정(畵龍点睛)의 핵심적인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부분은 전반 작품의 주제를 은근하게 암시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장편소설의 제목과 묘한 조응을 이루게 하였다.
  
이 소설의 제목은 하나의 거대한 은유(隱喩)이다. 은유나 상징이 형성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객관적대상과 인간의 마음사이에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표현대상인 원관념과 비유적 대치 물 사이의 관계는 등가성(等價性) 원리에 의존하는데, 이 등가성원리는 고스타 심리학에서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리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서는 주인으로부터 버려져 집을 잃은 개나 “어디에도 없는 집을 찾아서 힘든 날개짓을 하는 나비”는 가정적 정체성을 잃고 집 없이 헤매는 세희, 유섭, 쌍희, 용이와의 관계는 등가성관계를 갖고 있는것이며 이질동구(異質同構)인것이다. 따라서 “세희네들은 집 없이 헤매는 개다”, “세희네들은 집 없는 나비다”는 비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이 작품은 제목으로부터 전반 작품의 총체적인 구성에 이르기까지 은유성 내지는 상징성을 다분히 띠고 있다.

  
  
4.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보이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고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보이는 가정적 동일성을 상실한 인물형상에 대한 묘사는 가정적저인 아이덴티티에 대한 성찰과 사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이나 가정(家庭)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만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국가적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가정적인 동일성의 갈등 속에서 시달리는 세희, 유섭, 쌍희네들은 민족적인 동일성의 갈등도 극심하게 겪고 있다.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에 오른 밀항자들은 중국조선족의 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들인 연변녀자 안세희와 연변남자 송유섭 그리고 료녕 철령에서 온 김채숙,  송유섭, 오미자, 쌍희, 안도에서 온 부부, 왕청 녀자 말숙이…이네들은 모두 한결 같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최하층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중국 사회에서는 소수자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였다. 이를테면  “일이원밖에 안 되는 라면을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말숙이의 아들은 무리싸움에 불려나갔다가 그만 권세 있는 진장(鎭長)의 아들 대신 총알밥이 되여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다. “이런 아픔이 있어서 그녀는 세 번째로 밀항을 하게 되었고”, 또 “세 번 째도 실패한다면 또 다시 네 번째로 밀항배를 탈것이며”, “밀항에 성공하는 것이 아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인양 그녀는 밀항에 큰 뜻을 부여했다.” 이 점에서는 주인공인 안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국에 갈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굴욕도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만이 자기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료녕 철령에서 온 김채숙이란 녀성의 말처럼 살자고 돈 벌러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에 목숨을 걸고 올라탄 그네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운명”이였다.  
  
이처럼 천진하고 순박한 밀항자의 운명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는 자들은 리풍언 같은 밀항조직자들과 브로커들이였다. 이 자들을 밀항이라는 이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밀항자들을 제 손안에 넣고 마구 주물렀다. 리풍언의 손아귀에 걸려든 그네들은 마치도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은 신세였다. “날려 보내든 관상용으로 놓아두든 아니면 털을 뽑아 발가벗긴 채 불에 구워 먹든”다 리풍언이 같은 브로커들의 마음에 달린 일이였다. 밤이 되면 브로커들은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가지고 젊은 녀자들을 배의 운전실에 불러들여서는 저들의 야욕을 채우군 하였다. 주인공 세희는 서류에 차질이 있다는 거짓말을 꾸며대는 바람에 운전실에 올라갔다가 그만 리풍언과 다른 한 놈팽이한테 륜간을 당하고 만다. 명실공히 현대판 노예무역선이 아닐 수 없다. 17세기 이래 유럽에서 성행했던 흑인노예무역선과 다른 점이라면 밀항자들이 자진해서 배에 올랐다는 것뿐이다. 프랑스의 사실주의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 에서는 그래도 노예상인들이 흑인노예들을 선창 밖 갑판우로 날마다 몰아 내여 환기(換氣)라도 시켜주고 육신도 움직일 수 있는 활동시간도 주었지만, 이 밀항선에서는 해상경찰들에게 발각을 당할가바 협착한 선창 속에서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엄하게 단속한다. 하루에 먹는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구멍으로 넣어주는 물도 없는 컵라면 하나뿐이였고, 선창 안에 갇힌 여자들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엉뎅이를 까고 빈 컵라면에다 용변을 보아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였다. 이리하여 이 소설에서 인물형상의 구성은 밀항자들과 리풍언 같은 브로커들 사이의 이항대립구조를 갖고 있다.    이렇게 련며칠 동안 파도를 헤치며 항진하던 낡고 허름한 고기배의 선창 밑에 숨겨진 밀항자들은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하고 짐승보다도 못한 푸대접을 받으면서 한국령 바다와 잇 닿아있는 공해에 가까스로 닿게 된다. 그러나 밀항자들을 옮겨 실어 한국에 잠입하게 되여 있은 한국 밀항선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배는 부득이  허허 바다에 멈추어서있게 된다. 닻을 내린지 사흘이 지나도 한국 밀항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령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순라선에 발견될 위험수위가 높다고 선창입구를 아예 낮이고 밤이고 비닐로 꽁꽁 막아 버렸다. 공기라고는 통할 데 없이 밀폐된 선창 안은 완전히 진공상태였다.” 밀항자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브로커들은 갑판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브로커들은 죽은 밀항자들은 가차 없이 바다에 처넣는다. 이리하여 왕청 녀자 말숙이는 정신이 붕괴되여 미쳐버렸고, 안도 부부는 가지런히 누워서 질식해 죽어버렸고 세 번째로 미쳐서 광기를 부리던 말숙이도 죽고, 송유섭이도 숨을 거둔다. 이처럼 송유섭이네들은 “눈을 감으면서도 그리워했을 마음의 집을 끝내 찾지 못한 채 떠나갔다.”
  
집과 민족 또는 국가 사이에는 상호 류추관계가 성립된다. 집의 상실은 민족과 국가의 상실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허련순의 말처럼 어디에 가서나 이방인이다. 언제나 개밥에 도토리처럼  소외를 당하고 어디서나 주류사회에 끼여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중국조선족은 모국과 거주국의 경계에서 살면서 안정된 집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은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집시족”, “국제 미아(迷兒)”로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에서 등장하는 “할퀴울대로 할퀴운 돼지구유를 련상시키는 하수룩한 나무배”- 밀항선, 그리고 그 밀항선에 몸을 숨기고 목숨을 건 새로운 살길을 찾아 밀항을 결행하고 있는 밀항자들은 어쩌면 중국조선공동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한 수교이후 중한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조선족은 혈연, 인연, 언어, 문화  등 우세로 하여 중국 국내의 그 어느 민족보다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고 빈번해졌다. 물론 1988년 제24차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중한수교 전부터 벌써 일부 조선족들에게는 친척방문의 기회가  차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한국친척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후에는 한약장사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1992년 중한 수교이후에는 임시취업을 통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중국조선족들의 한국행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한국은 중국조선족에게, 특히는 중국조선족농민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간주되었고 이로 하여 생겨난  "코리안 드림"은 중국조선족에게는 과히 태풍에 비견할 수 있는 충격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은 이  태풍 같은 "코리안 드림", "한국바람"에 말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한국에서 돈벌이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이 16만 명을 웃돌고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시집 간 6만 명을 넘는 녀성들과 거기에 중국조선족 유학생까지 추가된다면 20만 명을 넘어서는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흑룡강이나 료녕성의 조선족 집거촌들에는 "개와 앉은뱅이 내놓고는 다 한국에 나갔다"는 유행어가 돈지 오래다. 연길의 어느 한 중학교의 졸업생들이 연길에서 동창회를 했을 때보다 서울에서 동창회를 했더니 동창생들이 더 많이 모였더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들도 있다. 10년 남짓한  사이에 발생한 한국에로의 인원 유동이 중국조선족사회에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하루이틀사이에 한 지역을 사정없이 강타한 태풍에나 비유할 수 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중국조선족은 중한수교이후의 한국과의 교류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은 동시에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정신철연구원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의 법의식을 약화시키고, 자아주체성을 흐리게 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약화시키고 수많은 변상적인 고아와 과부 ․ 홀아비들을 양산시켜서 중국조선족사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고 인정했다. 정신철연구원의 말을 빈다면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사회의 평온을 깨어버린 장본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 한국은 현재까지 중국조선족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오늘 조선족의 현실을 볼 때 폐단이 이득보다 더 크다 … 역사는 가설이 없지만 가령 '한국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중국조선족은 지금처럼 동요와 당혹 속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신철의 이 견해의 옳고 그름을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정신철의 이 말은 한중수교 이후 거세차게 중국조선족사회를 강타하고 있는"코리안 드림"(일명 "한국바람")은  전반 중국조선족사회의 생사존망에까지 관계될 정도로 그 위력이 엄청남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조상들은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이민들로서 시인 석화의 말처럼 “천성이 나그네”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민문화의 속성이 강한 우리 중국조선족은 또 다시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세계의 방방곡곡에 뜬 구름처럼 흘러 다닌다. 이러한 과분한 유동성은 우리 중국조선족집거지의 존속을 위협하고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조선족의 중국에서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중국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우환의식을 연변의 중견시인 석화 씨의 근작시 《연변 ‧ 4-연변은 간다》에서 표현하고 있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짠지랑 함께
약간 소문이 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랭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게
연변이였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도꾜, 북쪽으로 하바롭스크
그리고 싸이판, 샌프랜시스코에 빠리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엔들 연변이 없을 소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헛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요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 《연변 ‧ 4-연변은 간다》전문

  
중국조선족은 집시처럼 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이것이 어떤 특정 개인에게는 어쩌면 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공동체로서의 중국조선족에게는 불행이다. 중국조선족공동체는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언제까지 “연변”은 뜬 구름처럼 정처 없이 가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연변”은 국제 미아로 살아가야 하는가?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은《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결코 이에 대해 그 어떤 명료한 대답을 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누구도 아직까지는 이에 대해 똑 부러지는 명료한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허련순 씨는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에서 다만 디아스포라로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은 누구이고 우리의 집은 어디냐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우리의 실존상황의 비극성을 리얼하게 재현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았을 따름이다.  
  
한 부의 장편소설이 민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런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우리 민족의 실존상황의 비극성을 이처럼 리얼하게 재현한 것 만으로서도 그 사명을 충실히 완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나오는 말
  
허련순 씨는 우리민족의 삶의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민족의 오늘날의 실존적인 고통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민족적 사실주의에 확고하게 입각하여 세련된 언어와 기법으로 소설의 사상예술성을 높이고자 노력해온 작가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디아스포라는 근대 식민주의체제와 현대 후식민지시대의 글로벌화라는 콘텍스트 속에서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의 세계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반적인 사실주의적인 재현 속에 상징적인 기법도 적절하게 인입하고, 또 공간 집중화의 기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한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에서 벌어지는 중국조선족출신의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오늘날의 실존적 상황을 《시대의 서기관》답게 리얼하게, 전형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작자의 깊은 사색을 보여주었다. 고향을 상실하여 방황하고 방랑하는 디아스포라들에게 있어서 아이덴티티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인 것이다. 많은 본토박이 다수자들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들로서의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이며,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 이후 인간 소외의 비극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의 폐선에 가까운 밀항선, 그리고 잃었던 고향을 되찾으려고 목숨을 내걸고 밀항선을 탄 밀항자들은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서 어쩌면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의 전반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밀항선에 탄  중국조선족출신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비규환의 비극적상황은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실존 상황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중국조선족 밀항자들은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Tamango)》에서 나오는 노예무역선에 총칼에 의해 강압적으로 오른 흑인노예들과는 달리 밀항조직자들인 브로커들에게 엄청난 돈을 내고 밀항선에 자진하여 올랐다는 점이다. 밀항선에 오르도록 그네들의 등을 민 것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금전이라는 무형의 검은 손이였다. 고향 상실, 고향 찾기, 목숨을 내건 고향 찾기 실패의 비극은 중국조선족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 널려 사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들, 나아가서는 인류의 공통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협소한 공간을 뛰여넘어 세계적인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어 아주 희망적이다.    
  
이 작품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서 《민족적 아이덴티티 찾기》 - 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되찾음으로써 중국조선족문학이 나아갈 하나의 새로운 주제 영역을 개척하여 주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2007년 3월 26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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