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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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동북아 황금삼각'이란 이 루빅큐브는 맞춰질 것인가? 댓글:  조회:3160  추천:1  2018-06-09
'동북아 황금삼각'이란 이 루빅큐브는 맞춰질 것인가?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길림성 연변 훈춘시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중국, 로씨야, 조선 3국 접경지역에 위치해있는 국경도시이다. 두만강 입해구와 맞닿아있는 훈춘시는 또한 중국의 선박들이 일본해에 직접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훈춘시는 로씨야 연해주의 하싼지역과 륙지가 린접해있고 조선 함경북도와는 넓지 않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훈춘시는 두만강구역 국제협력개발 핵심지대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로부터‘동북아 황금삼각'지대로 불리워왔다. 이 지대에는 중국의 훈춘과 조선 함경북도 라진, 선봉 그리고 로씨야의 포시에트로 련결되는 1,000키로메터의 소삼각지역 그리고 중국의 연길, 조선의 청진,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를 련결하는 약 5,000키로메터의 대삼각지역이 포함되여있다.    이‘동북아 황금삼각’지대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개발을 위해 1990년 7월 중국이 선참으로 훈춘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이듬해에 유엔개발계획(UNDP)의 후원하에 두만강개발사업(TRADP)이 출범하였고, 따라서 유엔개발계획의 지원하에 1995년에 이르러서는 중국, 로씨야, 한국, 조선, 몽골 등 5개국이 참여하는 정부간 협력사업으로 전환되였다. 당시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두만강개발 청사진에 고무된 연변사람들은 훈춘개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훈춘에서는 한때 부동산 개발 붐이 크게 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연변사람들의 열망과는 달리 그 뒤 훈춘을 비롯한 두만강 하류 황금삼각지대에 대한 개발사업은 오래동안 지지부진했다.    그 주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비유할 것 같으면 중국, 로씨야, 조선, 한국, 일본, 몽골 등 여러 나라들로 이루어진 ‘동북아 황금삼각’지대라는 이 거대한 루빅큐브(Rubik,s cube)는 조선반도 북과 남 사이에 오래동안 지속되여온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 때문에 도저히 맞춰낼 수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두만강개발사업은 조선반도에 조성된 전쟁위기상황으로 인해 지지부진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동북아시아 여러 관련국들이 적극 동참해야만 추진될 수 있는 두만강개발사업(TRADP)은 마치 ‘뇌혈전’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게 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반도에서의 전쟁위기 국면으로부터 대화를 통한 평화국면에로의 전환은 2018년 벽두에 발표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시작되였다. 김정은은 한국에서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을 바라면서 참여할 뜻을 내비쳤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즉각 받아들임으로써 평창동계올림픽을‘남북평화의 올림픽'으로 잘 치뤄냈다. 이런 평화의 무드는 2018년 4월 27일과 5월 26일에 각각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과 북측 통일각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이런 평화의 분위기가 습근평과 김정은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으며 6월 12일 싱가포르 조미정상회담으로까지 확장되였다.    ‘4.27’ 판문점 조선반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 이후로 조선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둔 변경도시 단동의 집값이 뛰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미상불 기쁜 소식이다. 훈춘의 집값도 궁금하다.    만일 조선반도 7천여만 백의민족의 오랜 숙망인 조선반도에서의 비핵화 그리고 북과 남 사이의 평화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되는 날이면 조선반도 남과 북의 경제협력은 물론이고 조선반도도 경의선이나 동해선철도의 개통으로 이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경의선은 중국 료녕성과 이어지고 동해선은 길림성 훈춘과 로씨야 씨비리횡단 대철도와 이어져 기차들이 유라시아대륙을 실북 나들듯 오고갈 그 날도 곧 도래될 것이다.   요즘 또 하나의 경사가 생겨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한국이 조선의 찬성표를 얻어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에 정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중국횡단철도(TCR)와 씨비리횡단철도(TSR)를 포함해 28만키로메터에 달하는 국제철도로선 운영에 참여하게 되였다.    필자는 조선반도에서 평화의 무드가 계속 이어진다면 두만강류역에 위치한 ‘동북아시아 황금삼각'이라는 이 거대한 루빅큐브는 조만간에 무난히 다 맞춰질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 지역의 평화는 그 지역의 경제발전과 직접적으로 련관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길림신문 2018.6.8    
78    '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의 비극 댓글:  조회:2185  추천:0  2016-09-06
“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의 비극      -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의 디아스포라문학의 주제에 대하여 연변대학교 김 관 웅   1. 들어가는 말    “고향상실의 주제”와 “고향 찾기의 주제”는 이민집단으로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최서해의 《탈출기》, 《홍염》으로부터 시작하여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에 이르기까지 중국조선족문학 초창기의 전반 문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는 “고향상실의 주제”와 “고향 찾기의 주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중국의 특수한 정치적 여건 때문에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고향 상실과 고향 찾기”의 주제는 수면 아래에로 잠적해 버렸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우리문학에는 다시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와 중국에서의 정착사를 작품화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시작되여 리근전 선생의 장편소설《고난의 길》, 최홍일 씨의 장편소설《눈물 젖은 두만강》, 최국철 씨의 장편소설 《간도풍운》, 리혜선 씨의 장편르포《충청도 아리랑》등 력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한중수교를 계기로 하여 중국조선족사회에는 한국바람이 12급 태풍마냥 들이닥치기 시작하였다. 한국바람은 중국조선족이 손에 돈을 좀 쥐여볼 수 있게는 하였지만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뿌리까지 뒤흔들어놓는 후과를 가져다주었다. 지금 한국에 나가있는 중국조선족은 20만 명을 훨씬 웃돈다. 이밖에도 미국, 일본, 구쏘련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버린 중국조선족까지 합치면 그 수자는 어마어마하다. 거세찬 한국바람 앞에서 중국조선족 작가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를테면 김혁 씨의 르포 《천국의 하늘에는 색조가 없다》, 리혜선 씨의 르포《코레안 드림》등이 바로 그 보기이다.    허련순 씨 역시 한국바람 앞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주로는 소설을 가지고 대응을 했다. 그것도 단편이나 중편이 아닌 장편을 창작을 통해 거세찬 한국바람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중국조선족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혀련순 씨는 《흑룡강신문》에 장편소설 《바람꽃》을 련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나는 귀추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꽃, 바람이 불어 왔던 곳에 바람이 지는 그 곳, 두 세계 중의 어느 한곳에 머무르거나 또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도 못한 채 두 곳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였다. 언제나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한곳에 대한 끊임없는 추억과 망각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존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가?"    허련순 씨는 그 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는 누구일가?"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관한  질문을  끈질기게 던져오고 있으며 , 요즘에도 글이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창작주장을 여러 번 천명한바 있다. 허련순 씨는 최근에도 한국 매체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영원히 주류에 속할 수없는 소수자이며 이방인으로서 중국조선족문학의 뿌리는 바로 이런 소수자의 슬픔에 있다고 언급한바 있다. 허련순 씨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집중적으로 또 가장 예술적으로 체현된 2004년부터 일년 남짓이 장백산 잡지에 련재되였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10년 전의 그녀의 장편소설 《바람꽃》에 나타난 디아스포라문학 경향의 연장이면서도 동시에 승화이기도 하다.    지난세기 90년대 중반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창작은 주로 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추적하는데 바쳐졌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허련순 씨의 소설 창작은 가장 디아스포라문학의 주제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원래 허련순 씨의 두 부의  장편소설 《바람꽃》과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를 합쳐서 논하려고 하였으나 짧은 론문에서는 그것이 무리하고 생각되여 후자 한부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2.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미아(迷兒) 군상(群像) 인간은 이처럼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 가정(家庭)적,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된다.    인간은 우선은 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라나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정적인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게 된다. 하련순의 장편소설 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거의 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가정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극심하게 겪어온 인물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안세희부터 분석해 보기로 한다. 세희는 문화혁명 때 부모가 반혁명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골에 사는 큰 아버지 집에 맡겨져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반동새끼라고 놀리고, 집에서는 밤마다 사촌오빠의 희롱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 후 아버지가 죽은 후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세희는 엄마가 아버지의 친구와 한 이불을 덮고 끌어안고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 무서운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해 16세인 세희는 어머니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모한테로 가겠다고 자진해 나선다. 이모네 집에서 세희는 부성애를 이모부를 통해 보상받아 보려한다. 이모부는 살갑게 세희를 대해주었지만 결코 세희를 자기 딸처럼 여기지 않았고 또 여길 수도 없었다. 이모부는 필경은 남이였기 때문이다. 세희는 이모부로부터  친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 꿈꾸었고 또 그래서 이모부네 집에서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으려 하지만 그 갭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진희 앞에서는 언제나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상에서도 세희는 이모부에게 있어서는 한낱 성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미모의 젊은 처녀였을 따름이였다. 바로 세희를 남으로 여겼기에 세희를 육체적으로 범하기까지 하게 되었으며 그 죄책감으로 이모부는 죽고 만다. 세희는 이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모네 집에서도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지 못한다.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지 못하고 늘 방황하던 세희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두 남자와 만나서 번마다 헤여진다. 세희의 말처럼 첫 번째 남자는 세희는 좋아하는데 그 남자가 세희를 싫어했고, 두 번째는  그 남자는 세희가 좋아하는데 세희가 그 남자가 싫어서 헤여졌다. 그것은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생겨난 세희의 불안정한 생활태도와도 밀접한 련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희가 낳은 각성바지 두 아들도 어려서부터 가정적인 동일성의 갈등에 시달리면서 자라난다. “죽은 안해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남자는 도꼬마리 같은 새끼 하나를 그녀의 바지가랭이에 달랑 달아놓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없이 태여나서 자란 세희의 둘째 아들 용이는 천덕꾸러기였다. 이부(異父) 형에 대한 복종과 헌신 정신을 어려부터 갖게 된 용이의 특이한 성격 역시 가정적 동일성의 갈등으로부터 생긴 부산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송유섭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송유섭이 12세 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찬장에 그림이나 그려주고 다니는 장인바치에게 반하여 음분도주한 후로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친 그는 엄마가 이제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리라고 작심한다. 엄마가 집을 버리고 도망치자 술주정뱅이 아버지도 아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송유섭은 고아로 된다. 그를 가긍하게 여긴 송유섭의 친구인 영구의 아버지가 유섭이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기른다. 한해 겨울을 영구네 집에서 얹혀 산 후 송유섭은 윤도림이라는 사람에게 넘겨지기 전에 그는 자기는 원래 버려진 아이였음을 영구아버지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양부모한테서까지 버려졌으니 그는 두 번이나 버려진 셈이였다. 사실 윤도림이네도 송유섭과 나이 비슷한 아들애를 잃고 그 아픔을 잊어보려고 송유섭이를 양자로 데려온 것이다. 그러나 송유섭은 윤도림의 안해에게 있어서는 자기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는 허깨비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도 송유섭은 윤도림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윤도림네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기로 작심한다. 비록 죽은 친아들 송철이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양모가 자기를 허깨비로 생각하는 것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윤도림네 집에서의 3년간은 그래도 대체로 행복했다. 그러나 3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송유섭은 후에 집체호로 나간다. 유섭은 목사였던 양부로 하여 공청단에도 입단할 수 없고, 군대에도 갈 수 없게 되자 윤도림을 아버지로 승인하지 않고 다시 자기를 고아로 내세우면서 살아간다.  “송유섭은 영예롭게 중국인민해방군 전사로 되었다. 윤도림 아저씨를 배신한 영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 달도 못 되여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고아로 가장 한 일이 탄로되여 그는 다시 원래의 농촌 마을로 돌아오게 되였다.”  송유섭은 집체호에서 억울하게 강간미수라는 루명을 쓰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구원된 후에는 다시 양부 윤도림이한태 의지하게 된다.    이처럼 송유섭은 어려부터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과정에서 여러 번이나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처럼 이른바 《성명위기(姓名危機)》에 직면하게 된다. 송유섭은 원래는 기아(棄兒)였으며 누가 생모, 생부인지도 모른다. 친부모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을 치고 난 뒤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업둥이임을 알게 되자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살 희망마저 포기하려고 한다.  이 일을 거치면서 그는 자아인식에서의 위기를 겪게 된다. 목사인 윤도림을 만나서 양부(養父)의 성(姓)을 따라 윤유섭이라고  성을 고치고 공식적인 신분을 확정하게 된다. 즉 자기의 양부(養父)와의 동일성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이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린다면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그에 귀순하게 된 셈이다. 이는 아동심리발전에서의 필연적인 경력이며 일종 권위에 대한 굴복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거세찬 정치폭풍은 송유섭으로 하여금 부득불 자기의 양부와의 동일성을 부인하고 다시 고아의 신분을 되찾게 하였으며 이 덕으로 참군까지 하지만 다시 정치심사에서는 양부와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되여 군대에서 쫓겨난다. 집체호에 다시 돌아온 후 강간미수라는 누명을 쓰고는 자살까지 시도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음에는 다시 양부인 윤도림을 찾아 간다.    한마디로 송유섭은 거의 한평생 집을 잃고, 집을 찾기 위해 방황한 사람이다. 가정적 동일성을 찾지 못해 한평생 우왕좌왕한 사람이다. 송유섭은  “집에 머무를 수 없었고”,  송유섭에게는 “어느 곳에도 집은 없었다.”  집을 잃은 미아(迷兒)의 가장 전형적이 보기이다.    세 번째로 쌍희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쌍희는 부모는 한족이다. 그런데 그가 다섯 살 때 부모가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조선집에 입양되였다. 그 집에는 딸만 셋이고 아들이 없었다. 아마 아들이 없어서 그를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어느 날, 아이스크림 사 먹자고 돈을 찾다가 양부의 돈지갑에서 콘돔을 꺼내여 불궈 가지고 다닌 것이 들통이 나서 집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누나가 쌍희를 찾아 내여 저녁에 같이 자게 되었는데, 누나의 젖가슴을 보고 또 가만히 만져 보게 된다. 그날 밤을 계기로 하여 쌍희는 누나에게 련정을 품게 되며 누나가 시집을 가자 쌍희도 아무런 미련도 없이 탈가한다. 쌍희 역시 가정적인 동일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뜬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고아 같은 신분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가족구조가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이런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갖고 된다. 여러 가지 부동한 원인으로 자기의 친부모와 같이 있지 못하거나 집을 떠나 다른 집에 맡겨져 자라나게 되는 경우에는 흔히 자기의 성(姓)이 계부(계모), 양부(양모)나 그 자식들을 상대로 하여 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된다. 즉 가정 내에서의 성(姓)의 동일성을 잃음으로 하여 심각한 《성명위기(姓名危機)》또는 가정적 동일성 확립의 어려움으로 하여 많은 심리적인 갈등에 빠지게 되는 법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 등장하는 세희, 유섭, 쌍희 등 주요한 인물형상들을 모두 정도부동하게 가정적 동일성을 확립할 수 없음으로 하여 많은 심리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성정해온 사람들이다.    이밖에도 세희의 아들 용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비 없이 태야나서 자란 용이는  외할머니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늘 소외를 당하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래도 당당한 결혼을 통해 태여난 형한테 꿀리고 순종하고 양보하는 가련한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집에서의 용이의 위치가 용이의 불쌍한 성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철 없는 아이지만 용이의 성격은 어쩌면 중국조선족의 민족적성격의 중요한 특징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정판룡 선생의 이른바 “며느리론”은 어쩌면 용이 같은 생존위치에서 생겨난 처세태도라고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집은 가문을 뜻하며 집은 중추적인 사회단위다. 집은 집안과 같은 뜻의 말이 되거나 집안과 어우러져 쓰이면서 훨씬 내면적이고 인간적인 상징성을 띠게 된다. 그 까닭은 집은 삶의 근거, 목숨의 뿌리, 안락함의 보루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양사회에서는 집은 가정주의의 핵심적 개념을 형성한다. 집은 가문, 가계, 가통 등을 상징하면서 전통사회에서는 국가와 거의 대등할 수 있었던 사회단위로 되었다.  자기의 집이 분명치 않고 집을 잃었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덴티티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가정적 아이덴티티(가정적 동일성)의 상실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안세희, 송유섭, 쌍희, 용이 같은 집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은 민족적정체성의 갈등으로 방황하는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인간상들이라고 분석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3.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동물형상들 이 소설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동물형상은 전반 작품구성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집에서 버려진 나비란 이름을 가진 강아지와 밀항선의 선창에 날아 들어온 나비는 비록 필묵을 많이 들이지는 않았으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세희, 유섭, 쌍희, 용이 등과  인물형상과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우선 나비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나비라는 이름을 가진 애완견은 세희의 돈 많은 친구인  춘자가 못 기를 상황이 되어 세희에게 넘겨주어 기르게 된 강아지이다. 그 이듬해 이 나비란 애완견이 예쁜 새끼를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 새끼들은 젖을 떼자 남에게 다 주어버렸다. 새끼를 잃은 나비가 한 현관을 쓰고 사는 옆집 문을 미친듯이 물어뜯고 허비다가 이웃집 한족 령감을 물게 되여 세희네도 어쩔 수 없이 이 나비란 애완견을 강변의 산책로에다 버리게 된다. 택시가 떠나자 나비가 까만 개를 뒤에 남겨두고 정신없이 택시를 쫓아왔다. 두 아이가 뒤돌아보지 못하도록 세희는 오른쪽 팔로는 광이를 왼쪽 팔로는 용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찬 정신없이 쫓아오던 강아지가 포기한 듯  멈춰서더니  자기로부터 멀어져가는 택시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는 그지없이 슬퍼보였다. 그의 눈에는 주인을 따라잡지 못한 안타까움과 괴로움 외에도 체념과 같은 것이 내비치고 있었다. 버리고 가는 주인을 원망이나 저주를 하면 어쩌랴 싶었는데, 강아지는 끝까지 주인을 원망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 눈빛이 더 슬펐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비란 애완견과 세희의 둘째 아들 용이는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관계를 맺고 있다. 나비란 애완견이 세 번째 수컷을 만나 겨우 교배에 성공하여 새끼를 배여 낳았듯이 용이도 세희가 세 번째 남자와 우연히 만나고 사귀어서 임신해서 나은 아이다. 그래서 그런지 용이는 무척이나 애완견 나비를 좋아했고, 아비 없는 천덕꾸러기 용이의  처지와 버려지는 나비의 처지도 아주 묘하게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    고스타 심리학의 동형론(同形論)의 리론으로 분석해본다면 세희의 둘째아들 용이와 애완견 나비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애완견 나비의 처지와 세희, 유섭, 쌍희, 용이 등 인물들의 처지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집 저집으로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주인에 의해 버려진 애완견 나비의 가긍한 처지는 세희, 유섭, 쌍희 등의 처지와 운명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선창의 천정 우에 붙어 있다가 거의 질식해 죽어가는, 역시 탈진상태에 빠져 빈사상태에 이른 세희의 얼굴 우에 떨어져 내리는 나비가 묘사되여 있다. 선창 우에 붙어 있다가 떨어져서 죽어가는 나비와 선창 안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세희 등 밀항자들은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구조적관계를 갖고 있다. 나비를 두고 두 밀항자인 세희와 유섭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 …   유섭이가 간신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살았소?》   《살았어요.》   《그놈도 운수가 되게 나쁘군.어쩌다 이런 곳에 들어와 가지고 날아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게 생겼으니.》   《죽을가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죽지 살겠소?》   《지금 선창밖에 내보낸다면 살지 않을가요?》   《사방이 바다인데 나비가 어떻게 살겠소. 차라리 이곳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지.》   《나비는 아마 제집 같은걸 찾아다니지 않소.》   《그건 왜요?》   《나비는 집이 없으니깐.》   《나빈 집이 없어요?》   《그래 있는 줄 알았소?》   《날아가 있는 곳이면 다 나비집인줄 알았죠.》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이 없는 나비가 가엾다고 생각하고있는지 아니면 집 없이도 자손만대 번식을 하고 잘 살아가는 나비를 부러워 하고있는건지. 암튼 자기 집에 대한 집착으로 죽고 사는 인간에 비해 나비는 현명한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같은 생각이였다.    세희가 손바닥에다 나비를 놓았다. 그리고 후-하고 불었다. 그런데도 나비는 나래를 우로 곧추 세운 채 꼼짝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왜 안 날죠?》 《나비가 날려면 삼십도 이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날 수 있소. 그래서 나비는 맑은 날만 날고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은 날지 않소. 체온을 올릴 수 없으니깐.》 《그럼 나비가 불속에 날아드는 것도 체온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닐가요? 》 《체온에 대한 욕망이 바로 비상에 대한 욕망이겠지. 불에 타서 죽더라도 비상을 해야 하는 나비의 사정은 어찌 보면 인간의 생존의 리유와 비슷한거 아니겠소.》 《나비도 생존리유가 있을가요?》 《생존하는 모든 물체는 다 자기 생존 리유가 있는거요.》 《그럼 나비의 생존리유는 뭘가요?》 《글쎄 뭘가?》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가요?》   유섭은 길게 탄식을 하더니 힘 드는 듯 아주 낮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디에도 없는 집을 찾아서 힘든 나래짓을 하는거. 참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똑 닮았을가…》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은 심리적으로 고토와 거주국의 중간위치에 살고 있기에 나비처럼 “집”이 없다.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뒤 한 세기 반 남짓한 동안에 중국조선족은 모국과 거주국 양쪽으로 백안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여 오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마치도 나비가 하늘로 비상하기를 원하듯이 심리적으로 잃어버린 고토(故土)에 대한 끝없는 향수를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많은 구성원들은 개인과 고토, 자아와 그의 진정한 고향의 격리로 하여 생긴 아물 줄 모르는 상처를 갖고 있으며, 그 커다란 애상은 극복하기 어렵고 또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토에 대한 향수는 디아스포라들의 영구한 감정이며 그것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인 향수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고토에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고토는 실향한 디아스포라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근하게 안아주지 않으며 따라서 고토에서도 이방인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쪽에서 다 정신적인 안식처 - “집”을 잃고 끊임없이 방황한다.      이 점에 대해 허련순 씨는 바로 이 마지막 부분에서 나비라는 이 메타포를 동원해 아주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바 전반 장편소설의 화용점정(畵龍点睛)의 핵심적인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부분은 전반 작품의 주제를 은근하게 암시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장편소설의 제목과 묘한 조응을 이루게 하였다.    이 소설의 제목은 하나의 거대한 은유(隱喩)이다. 은유나 상징이 형성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객관적대상과 인간의 마음사이에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표현대상인 원관념과 비유적 대치 물 사이의 관계는 등가성(等價性) 원리에 의존하는데, 이 등가성원리는 고스타 심리학에서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리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서는 주인으로부터 버려져 집을 잃은 개나 “어디에도 없는 집을 찾아서 힘든 날개짓을 하는 나비”는 가정적 정체성을 잃고 집 없이 헤매는 세희, 유섭, 쌍희, 용이와의 관계는 등가성관계를 갖고 있는것이며 이질동구(異質同構)인것이다. 따라서 “세희네들은 집 없이 헤매는 개다”, “세희네들은 집 없는 나비다”는 비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이 작품은 제목으로부터 전반 작품의 총체적인 구성에 이르기까지 은유성 내지는 상징성을 다분히 띠고 있다.       4.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보이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고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보이는 가정적 동일성을 상실한 인물형상에 대한 묘사는 가정적저인 아이덴티티에 대한 성찰과 사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이나 가정(家庭)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만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국가적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가정적인 동일성의 갈등 속에서 시달리는 세희, 유섭, 쌍희네들은 민족적인 동일성의 갈등도 극심하게 겪고 있다.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에 오른 밀항자들은 중국조선족의 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들인 연변녀자 안세희와 연변남자 송유섭 그리고 료녕 철령에서 온 김채숙,  송유섭, 오미자, 쌍희, 안도에서 온 부부, 왕청 녀자 말숙이…이네들은 모두 한결 같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최하층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중국 사회에서는 소수자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였다. 이를테면  “일이원밖에 안 되는 라면을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말숙이의 아들은 무리싸움에 불려나갔다가 그만 권세 있는 진장(鎭長)의 아들 대신 총알밥이 되여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다. “이런 아픔이 있어서 그녀는 세 번째로 밀항을 하게 되었고”, 또 “세 번 째도 실패한다면 또 다시 네 번째로 밀항배를 탈것이며”, “밀항에 성공하는 것이 아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인양 그녀는 밀항에 큰 뜻을 부여했다.” 이 점에서는 주인공인 안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국에 갈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굴욕도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만이 자기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료녕 철령에서 온 김채숙이란 녀성의 말처럼 살자고 돈 벌러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에 목숨을 걸고 올라탄 그네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운명”이였다.      이처럼 천진하고 순박한 밀항자의 운명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는 자들은 리풍언 같은 밀항조직자들과 브로커들이였다. 이 자들을 밀항이라는 이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밀항자들을 제 손안에 넣고 마구 주물렀다. 리풍언의 손아귀에 걸려든 그네들은 마치도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은 신세였다. “날려 보내든 관상용으로 놓아두든 아니면 털을 뽑아 발가벗긴 채 불에 구워 먹든”다 리풍언이 같은 브로커들의 마음에 달린 일이였다. 밤이 되면 브로커들은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가지고 젊은 녀자들을 배의 운전실에 불러들여서는 저들의 야욕을 채우군 하였다. 주인공 세희는 서류에 차질이 있다는 거짓말을 꾸며대는 바람에 운전실에 올라갔다가 그만 리풍언과 다른 한 놈팽이한테 륜간을 당하고 만다. 명실공히 현대판 노예무역선이 아닐 수 없다. 17세기 이래 유럽에서 성행했던 흑인노예무역선과 다른 점이라면 밀항자들이 자진해서 배에 올랐다는 것뿐이다. 프랑스의 사실주의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 에서는 그래도 노예상인들이 흑인노예들을 선창 밖 갑판우로 날마다 몰아 내여 환기(換氣)라도 시켜주고 육신도 움직일 수 있는 활동시간도 주었지만, 이 밀항선에서는 해상경찰들에게 발각을 당할가바 협착한 선창 속에서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엄하게 단속한다. 하루에 먹는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구멍으로 넣어주는 물도 없는 컵라면 하나뿐이였고, 선창 안에 갇힌 여자들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엉뎅이를 까고 빈 컵라면에다 용변을 보아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였다. 이리하여 이 소설에서 인물형상의 구성은 밀항자들과 리풍언 같은 브로커들 사이의 이항대립구조를 갖고 있다.    이렇게 련며칠 동안 파도를 헤치며 항진하던 낡고 허름한 고기배의 선창 밑에 숨겨진 밀항자들은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하고 짐승보다도 못한 푸대접을 받으면서 한국령 바다와 잇 닿아있는 공해에 가까스로 닿게 된다. 그러나 밀항자들을 옮겨 실어 한국에 잠입하게 되여 있은 한국 밀항선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배는 부득이  허허 바다에 멈추어서있게 된다. 닻을 내린지 사흘이 지나도 한국 밀항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령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순라선에 발견될 위험수위가 높다고 선창입구를 아예 낮이고 밤이고 비닐로 꽁꽁 막아 버렸다. 공기라고는 통할 데 없이 밀폐된 선창 안은 완전히 진공상태였다.” 밀항자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브로커들은 갑판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브로커들은 죽은 밀항자들은 가차 없이 바다에 처넣는다. 이리하여 왕청 녀자 말숙이는 정신이 붕괴되여 미쳐버렸고, 안도 부부는 가지런히 누워서 질식해 죽어버렸고 세 번째로 미쳐서 광기를 부리던 말숙이도 죽고, 송유섭이도 숨을 거둔다. 이처럼 송유섭이네들은 “눈을 감으면서도 그리워했을 마음의 집을 끝내 찾지 못한 채 떠나갔다.”    집과 민족 또는 국가 사이에는 상호 류추관계가 성립된다. 집의 상실은 민족과 국가의 상실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허련순의 말처럼 어디에 가서나 이방인이다. 언제나 개밥에 도토리처럼  소외를 당하고 어디서나 주류사회에 끼여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중국조선족은 모국과 거주국의 경계에서 살면서 안정된 집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은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집시족”, “국제 미아(迷兒)”로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에서 등장하는 “할퀴울대로 할퀴운 돼지구유를 련상시키는 하수룩한 나무배”- 밀항선, 그리고 그 밀항선에 몸을 숨기고 목숨을 건 새로운 살길을 찾아 밀항을 결행하고 있는 밀항자들은 어쩌면 중국조선공동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한 수교이후 중한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조선족은 혈연, 인연, 언어, 문화  등 우세로 하여 중국 국내의 그 어느 민족보다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고 빈번해졌다. 물론 1988년 제24차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중한수교 전부터 벌써 일부 조선족들에게는 친척방문의 기회가  차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한국친척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후에는 한약장사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1992년 중한 수교이후에는 임시취업을 통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중국조선족들의 한국행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한국은 중국조선족에게, 특히는 중국조선족농민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간주되었고 이로 하여 생겨난  "코리안 드림"은 중국조선족에게는 과히 태풍에 비견할 수 있는 충격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은 이  태풍 같은 "코리안 드림", "한국바람"에 말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한국에서 돈벌이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이 16만 명을 웃돌고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시집 간 6만 명을 넘는 녀성들과 거기에 중국조선족 유학생까지 추가된다면 20만 명을 넘어서는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흑룡강이나 료녕성의 조선족 집거촌들에는 "개와 앉은뱅이 내놓고는 다 한국에 나갔다"는 유행어가 돈지 오래다. 연길의 어느 한 중학교의 졸업생들이 연길에서 동창회를 했을 때보다 서울에서 동창회를 했더니 동창생들이 더 많이 모였더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들도 있다. 10년 남짓한  사이에 발생한 한국에로의 인원 유동이 중국조선족사회에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하루이틀사이에 한 지역을 사정없이 강타한 태풍에나 비유할 수 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중국조선족은 중한수교이후의 한국과의 교류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은 동시에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정신철연구원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의 법의식을 약화시키고, 자아주체성을 흐리게 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약화시키고 수많은 변상적인 고아와 과부 ․ 홀아비들을 양산시켜서 중국조선족사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고 인정했다. 정신철연구원의 말을 빈다면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사회의 평온을 깨어버린 장본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 한국은 현재까지 중국조선족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오늘 조선족의 현실을 볼 때 폐단이 이득보다 더 크다 … 역사는 가설이 없지만 가령 '한국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중국조선족은 지금처럼 동요와 당혹 속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신철의 이 견해의 옳고 그름을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정신철의 이 말은 한중수교 이후 거세차게 중국조선족사회를 강타하고 있는"코리안 드림"(일명 "한국바람")은  전반 중국조선족사회의 생사존망에까지 관계될 정도로 그 위력이 엄청남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조상들은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이민들로서 시인 석화의 말처럼 “천성이 나그네”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민문화의 속성이 강한 우리 중국조선족은 또 다시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세계의 방방곡곡에 뜬 구름처럼 흘러 다닌다. 이러한 과분한 유동성은 우리 중국조선족집거지의 존속을 위협하고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조선족의 중국에서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중국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우환의식을 연변의 중견시인 석화 씨의 근작시 《연변 ‧ 4-연변은 간다》에서 표현하고 있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짠지랑 함께 약간 소문이 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랭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게 연변이였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도꾜, 북쪽으로 하바롭스크 그리고 싸이판, 샌프랜시스코에 빠리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엔들 연변이 없을 소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헛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요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 《연변 ‧ 4-연변은 간다》전문    중국조선족은 집시처럼 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이것이 어떤 특정 개인에게는 어쩌면 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공동체로서의 중국조선족에게는 불행이다. 중국조선족공동체는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언제까지 “연변”은 뜬 구름처럼 정처 없이 가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연변”은 국제 미아로 살아가야 하는가?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은《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결코 이에 대해 그 어떤 명료한 대답을 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누구도 아직까지는 이에 대해 똑 부러지는 명료한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허련순 씨는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에서 다만 디아스포라로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은 누구이고 우리의 집은 어디냐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우리의 실존상황의 비극성을 리얼하게 재현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았을 따름이다.      한 부의 장편소설이 민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런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우리 민족의 실존상황의 비극성을 이처럼 리얼하게 재현한 것 만으로서도 그 사명을 충실히 완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나오는 말    허련순 씨는 우리민족의 삶의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민족의 오늘날의 실존적인 고통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민족적 사실주의에 확고하게 입각하여 세련된 언어와 기법으로 소설의 사상예술성을 높이고자 노력해온 작가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디아스포라는 근대 식민주의체제와 현대 후식민지시대의 글로벌화라는 콘텍스트 속에서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의 세계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반적인 사실주의적인 재현 속에 상징적인 기법도 적절하게 인입하고, 또 공간 집중화의 기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한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에서 벌어지는 중국조선족출신의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오늘날의 실존적 상황을 《시대의 서기관》답게 리얼하게, 전형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작자의 깊은 사색을 보여주었다. 고향을 상실하여 방황하고 방랑하는 디아스포라들에게 있어서 아이덴티티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인 것이다. 많은 본토박이 다수자들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들로서의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이며,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 이후 인간 소외의 비극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의 폐선에 가까운 밀항선, 그리고 잃었던 고향을 되찾으려고 목숨을 내걸고 밀항선을 탄 밀항자들은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서 어쩌면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의 전반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밀항선에 탄  중국조선족출신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비규환의 비극적상황은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실존 상황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중국조선족 밀항자들은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Tamango)》에서 나오는 노예무역선에 총칼에 의해 강압적으로 오른 흑인노예들과는 달리 밀항조직자들인 브로커들에게 엄청난 돈을 내고 밀항선에 자진하여 올랐다는 점이다. 밀항선에 오르도록 그네들의 등을 민 것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금전이라는 무형의 검은 손이였다. 고향 상실, 고향 찾기, 목숨을 내건 고향 찾기 실패의 비극은 중국조선족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 널려 사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들, 나아가서는 인류의 공통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협소한 공간을 뛰여넘어 세계적인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어 아주 희망적이다.        이 작품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서 《민족적 아이덴티티 찾기》 - 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되찾음으로써 중국조선족문학이 나아갈 하나의 새로운 주제 영역을 개척하여 주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2007년 3월 26일 연길에서
《길림신문》이 조선족 문학, 문화 리드하는 주축으로 자리매김하길 -김관웅(연변대학교 교수, 평론가)     얼마전 《길림신문》에서 주관하는 제1회 《두만강》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다는 소식을 길림신문사 리영애선생으로부터 전해들었다.   제1회 《두만강》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다는것은 미상불 기분 좋은 일이였다. 특히 이 《두만강》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퍼그나 나의 마음에 들었다. 두만강은 우리 연변의 조선족을 보듬어주고있는 어머니강이다. 이 두만강류역에서 창조되고 전승되여온 수천년동안의 유구한 문화의 뿌리를 더듬어보는 작업을 나는 20년 남짓이 하여왔다. 그 첫번째 결실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연변문학》지에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를 3년에 걸쳐 련재를 했었고 2012년에는 이미 발표된 원고들을 모아서 동일한 타이틀을 달고 상, 중, 하 3권으로 책을 펴냈다. 그리고 이 책에 근거하여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5돐을 맞이하면서 두만강 력사문화 관련 다큐멘터리와 연극작가 리광수의 집필로 된 35집짜리 텔레비죤 련속극 《청조조(清肇祖)—멍거터물》을 준비하고있는중이다. 이번에 수상하게 된 나의 문학평론들은 비록 두만강과는 직접적 련관성이 없기는 하지만 나의 수십년의 문화 및 문학에 대한 추구와 완전히 합치되여서 기분이 상당히 좋다. 그리고 길림신문사가 있는 장춘은 나와는 인연이 류달리 많은 곳이다.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는 나의 두 딸과 외손녀, 사돈 내외 그리고 친구와 동료, 제자들이 많이 살고있는 도시이기때문이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적어도 해마다 여름과 겨울, 두 계절에는 장춘에 있는 큰딸네 집에서 지내오곤 했다. 장춘시 남관구 명주아파트단지에 있는 큰딸집에서 《중국조선족문학통사》, 《세계문학의 거울에 비춰본 우리 문학》 등 저서를 비롯하여 《유림외사》, 《금병매》 등 중국 고전명작을 집필하거나 번역하였다. 때문에 장춘은 나의 문학연구와 문학창작, 문학번역의 주요한 산실이기도 하다. 이제 2년만 지나면 연변대학에서의 나의 훈장으로서의 사명도 끝난다. 그때가 되면 나도 연변과 장춘 사이에서 더욱 빈번이 오가면서 아마도 절반 장춘사람이 될것이다. 오늘 이 수상이 계기로 되여 나와 《길림신문》, 《장백산》, 《도라지》 문학지의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돈독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사실 수십년동안 나는 《장백산》, 《도라지》 잡지사로부터 달마다 무료로 신간잡지를 받아읽을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금할수 없었고 두 문학지 여러분들의 로고에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군 했다. 수상소감을 쓰다가 부지중 위만주국시기 지금의 장춘시 동지가(同志街) 영창로(永昌路)어구에 신문사의 사옥이 자리잡고있었던 《만선일보》가 련상되였다. 그 시절에는 《만선일보》가 발행되고있는 장춘에 최남선, 렴상섭, 안수길, 황건 같은 문학의 거목들이 운집하여있은 까닭에 길림성 조선족문화의 중심이였을뿐만아니라 전반 만주에서의 조선족문화의 구심점으로 되였었다. 《만선일보》는 일제식민지시대의 암흑기에도 살아남은, 세계에서 유일한 한글로 된 신문을 내는 신문사로서 중국 동북조선인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전반 조선반도에서도 조선언어문자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게 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한 신문이였다고 할수 있다. 앞으로 《길림신문》이 《만선일보》처럼 《장백산》, 《도라지》 문학지와 손잡고 전반 중국 조선족문학 내지는 문화를 살리고 리드하는 주축으로 자리매김을 할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으로 성금을 내여 《두만강》문학상을 후원해준 청산그룹의 지도자들과 미숙한 작품을 뽑아준 심사위원 선생님들님과 이번 행사를 성공리에 마치게 할수 있도록 로심초사를 한 리영애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두만강》문학상이 제1회, 제2회, 제3회를 거듭하면서 두만강의 흐름처럼 영원하기를 기원하는바이다. * 본문은 2014년 5월 29일 장춘에서 열린 “길림신문” 제1회“두만강”문학상시상식에서 발표되였다.-문학닷컴 편자주  
76    새천년 이후 조선족문단에서의 전기문학의 흥성과 그 전망 댓글:  조회:3343  추천:0  2013-12-26
  [평론] 1. 새 천년 이후 조선족문단에서의 전기문학의 흥성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주류 독서계는 물론 우리 조선족 독서계에서도 논픽션이 크게 각광을 받고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물전기창작이 일대 성황을 이루고있다. 전기문학은 동양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있다. 서양문학사에서 신화, 전설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장편서사시와 희곡이 가장 오랜 전통인데 반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양유교문화권에서는 《사전전통(史伝伝統)》 즉 력사인물의 일대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력사인물전기가 가장 유구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있는 문학전통이였다. 중국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중의 인물전기가 후세 동양의 문화 및 문학에 끼친 거대한 영향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근대의 문턱에 바투 다가서서야 비로소 조선반도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이민공동체로 발족된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이나 기타 소수민족인 몽골족, 만족, 장족, 묘족, 투쟈족 등 세세대대로 중국땅에서 살아온 토착민족들에 비하면 그 력사가 아주 짧은 청소한 민족이지만 오늘의 시점에 와서는 이미 백년 남짓한 년륜을 아로새기고있다. 한세기 백년 세월속에서 중국조선족사회에는 수많은 뛰여난 인물들이 나타나서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문화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의 력사와 문화를 보다 아름답고 풍부하게 장식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의 후대로서, 민족의 력사와 문화의 서기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우리의 작가들이 우리 민족의 이러한 뛰여난 력사인물들을 청사에 길이 빛나도록 수비립전(樹碑立伝) 즉 기념비를 세우고 전기를 쓰는것은 미루어버릴수 없는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시대적요구에 부응하여 개혁개방후 중국조선족문단에는 수준 높은 전기들이 적잖게 나타났다. 1990년후 우리 문단에 나타난 김학철옹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정판룡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을 필두로 하여 새 천년에 들어서서 전기문학창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를테면 김호웅의 《김학철평전》,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 교육가 림민호평전》, 류연산이 쓴 류자명, 최채 등의 일련의 전기들을 필두로 하여 최근에는 허련순이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장 김진경을 다룬 평전 《사랑주의》가 한국에서 출판되여 반년사이에 련속 다섯번째 인쇄를 기록하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국내에서 한어로 번역되여 출간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다. 리혜선의 정률성평전도 《장백산》잡지에 련재되고있다. 최근에는 연변의 한족작가 우뢰가 조선족작가 김학철을 다룬 전기《무쇠협장아래의 발자취(鐵拐下的足痕)》(상권, 하권)이 작가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공동으로 출판되여 중국의 주류 독서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다. 이중 김호웅의《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 교육가 림민호평전》은 2012년에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수상했다. 2. 제1차 《중국조선족우수〈인물전기〉평선》에서의 수상작 소개 이러한 전기창작의 성황을 감안하여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우리 문단의 력사상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우수〈인물전기〉평선》을 갖게 되였다. 현재 탈중심적이고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속에서 어쩌면 새로운 리합집산이 이루어지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조선족인물전기는 하나의 감로수가 되기에 충분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제출된 인물전기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충분히 확보하고있다. 그래서 우리 심사위원들의 눈은 밝아졌고 마음은 흐뭇했다. 그러면서도 우수《인물전기》선정에 있어서는 고민도 많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이번 우수《인물전기》문학평심은 2000년후에 단행본으로 국내에서 출간된 전기만을 평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작자가 이미 타계했거나 국내에서 이미 국가급 문학상을 받은 전기작품은 배제했다. 그리고 심사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가장 중요한 심사표준으로 내세웠다. 첫번째로는 중국조선족력사 즉 전반 중국력사나 문화사에 있어서의 립전인물의 업적, 가치, 위상이나 인격의 높낮이 등을 고려했고 두번째로는 《결점을 덮어감추지 않고 우점을 부풀리지 않는(不隱惡, 不虛美)》 병필직서(秉筆直書)의 실록(實彔)원칙을 준수하여 전기문학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력사의 진실성 여부를 고려했다. 세번째로는 각종 자료의 수집의 난이도 및 립전인물이나 책속에서 거론된 사건들에 대한 비평과 해석의 수준을 고려했고 네번째로는 형식 측면에서 전기문학으로서의 갖춤새 및 예술표현력 등을 고려했다. 이런 심사원칙하에 심사위원들의 충분한 론의 및 무기명투표를 하여 만장일치로 최국철의 《주덕해평전》, 리광인의 《홍군장령 양림》, 김창석의 《중국영화황제 김염》 세 전기작품을 우수전기작품으로 선정했다. 여기서 부언해야 할 점은 《주덕해평전》은 작가 스스로 겸양의 미덕을 보여 끝까지 심사에 교부하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의 일치한 천거로 심사를 하게 되였다. 《주덕해평전》의 작가에게는 심사참여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없고 새롭게 흥기한 조선족평전문학의 조명,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대 주장 일대기를 그린 주요한 작품이기에 꼭 들어가야 하기때문이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세 우수인물전기 선정리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덕해평전》은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연변조선족의 지도자 주덕해를 립전대상으로 했다. 이 작품은 선행한 《주덕해 일생》에 비해볼 때 사업, 생활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보다 구체적이고 완정한 주덕해의 형상을 문학예술적으로 창조한 면이 돋보인다. 그리고 주덕해의 인간적인 면, 이를테면 그의 성격과 정치생활속에서의 희로애락을 잘 보여주어 실로 생동하고 살아숨쉬는 인간―주덕해를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있다. 《홍군장령 양림》의 립전대상 양림은 중국조선족의 혁명투쟁사에서 력사가 가장 오래고 급별이 가장 높고 중국혁명에 대한 공헌이 가장 큰 사람중의 하나이지만 관련 자료가 절대적으로 결핍한 상황에서 작가가 두발로 뛴 간고한 현지답사의 로고가 돋보인다. 그리고 철저히 력사사실에 준하는 집필원칙은 진실성을 담보했을뿐만아니라 앞으로의 평전 내지 학술연구에도 귀중한 밑바탕이 될것이기에 아주 큰 인식적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영화황제 김염》은 중국조선족의 예술사에서 중국의 영화예술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김염을 립전의 대상으로 했다. 이미 출간된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상하이올드데이스》의 이국적인 시각을 전복하고 중국적인 시각에서 새로 구상하고 집필한 점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중국 100년 영화사의 시각에서 김염의 대표작이나 연기예술에 대해 조명하고있다. 그리고 당시 관객이나 영화인, 예술인들의 평을 널리 인용하고 지금도 생존하고있는 김염의 미망인인 유명한 영화배우 진의(秦怡)녀사의 생생한 증언을 동원한 점이 퍼그나 인상적이였다. 금년가을에 있었던 제1차 《중국조선족우수〈인물전기〉평선》은 중국조선족의 전기창작을 고무, 추동하는 하나의 중요한 촉매제로 작용할게 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3. 중국조선족의 전기문학창작에 대한 전망 주지하다싶이 인물전기는 문학가치와 함께 력사가치, 심리작용과 더불어 거대한 교육적기능을 갖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학자 토마스 칼레(Thomas Carlyle)의 《력사는 무수한 전기의 결정체》, 《확실하게 말한다면 력사는 없고 오로지 전기만 있을따름이다》라고 한 말의 참뜻을 충분히 터득할수 있다. 중국조선족의 문화건설을 춘파(春播), 하서(夏鋤), 추수(秋收), 동장(冬臧)이라는 이 일년 사계절의 농사일에 비긴다면 전기문학창작은 동장이라고 할수 있다. 농부가 아무리 봄철에 씨를 뿌리고 여름철에 부지런히 기음을 매고 가을에 아무리 알뜰하게 가을걷이를 했다고 해도 겨울에 쌀가마니들을 창고에 차곡차곡 잘 쌓아두지 않아 새들이 다 까먹고 쥐들이 다 축낸다면 일년 농사가 허사로 되기 십상인것처럼 우리 민족의 력사에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났지만 이분들을 전기로 정리하여 후손만대에 전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는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말것이다. 우리 민족의 위인전기들을 창작하는것은 바로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보존하여 후손만대에 전하는 아주 성스러운 작업이다. 비록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와 정착사는 아주 짧았지만 위인들은 많았다. 앞으로도 위인들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날것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조선족작가들이 쓴 위인전기는 우리 민족의 력사 및 삶과 더불어 영원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김관웅 길림신문 26일자    
75    거짓말과 진실한 말 댓글:  조회:5328  추천:0  2013-09-04
거짓말과 진실한 말   김 관 웅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몇천년전부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수없이 전승되여 오고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철부지 아들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한참 크는 중돼지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중국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이다. 부모로 된 이들은 어린 자식들앞에서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이다.   고대 그리스의 《이솝우화》에는 심심풀이로 늑대가 왔다고 여러번 거짓말을 한 목동애가 진짜로 늑대가 왔을 때 늑대가 왔다고 구원을 청했지만 마음사람들이 또 거짓말을 하는가 여기면서 누구도 구하려 달려가지 않은 바람에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는 우화가 있다. 역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담은 우화이다.   자고이래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고 이토록 강조를 하여 왔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한다는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였다.   “지록위마(指鹿为马)”라는 이 사자성구는 이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력사사실이 기록되여 있다.   진시황이 죽고 그 아들이 진2세로 등극한 뒤에 재상으로 있었던 조고(赵高)는 궁정정변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정의 뭇 신료들이 자기에게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를 한 번 떠보기로 작심한다. 하루는 조고가 진2세의 앞에 사슴 한마리를 끌고 와 바치면서 “황제페하께 준마 한 필 바치나이다”라고 말하자 진2세가 웃으면서 “재상이 무슨 말씀이시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라고 했다. 이에 조고가 조정의 문무대신들더러 대답해 보라고 했다. 혹자는 사슴이라고 진실을 말했고, 혹자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고, 혹자는 말이라고 대답하면서 조고에게 아부했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진실을 말한 대신들은모두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이후로부터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조고가 무서워 벌벌 떨었다고 한다.   진실한 말을 한다는 것은 옛날에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 들어와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59년 여름. 려산회의에서 팽덕회는 중국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진실한 말을 했다가 그만 역린(逆鳞)을 하여 이른바 “반당분자”로 몰리지 않았던가.   자라보고 놀란 놈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팽덕회사건 이후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로 되였다. 그중 가장 큰 거짓말쟁이로 된 사람은 바로 림표였다.   림표는 사석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 한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을 전후하여 모택동의 환심을 사기 위해 림표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던가. 모택동을 “수천 년만에 나타난 천재”라고 치살렸고, “모택동사상을 맑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라고 올리췄고, “모주석의 말씀은 한마디가 만 마디를 필적한다”고 하면서 별별 거짓말을 다 했지만 종당에는 정변을 일으켜 모택동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려던 음모가 들통이 나서 비행기를 타고 황망히 도주하다가 황막한 사막에 떨어져 불귀의 객이 되지 않았던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는 진실한 말을 하는 실사구시의 전통이 다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본위시대와는 달리 이 경제본위 시대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거짓이 횡행하고 있다. 몇년전에는 멜라민을 첨가한 “유독분유사건”이 터져서 중국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경악케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중국의 적잖은 음식점들에서 구정물통에 들어간페유(地沟油)를 다시 정제하여 쓰는가 하면 심지어 쥐고기를 양고기로 둔갑시켜 고객들을 속이기도 한다. 요즘은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 게(挂羊头卖狗肉)” 아니라 “양대가리를 걸고 쥐고기를 파는(挂羊头卖鼠肉)” 판국이다. 이 세상의 비리와 거짓이 어디 이뿐이랴.   그래서 요즘은 “이 세상에서 엄마를 내놓고는 다 가짜”라는 말이 항간에 류행할 정도로 진실과 진짜가 증발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마다 거짓말을 하여 세상이 거짓으로 충일하는 시대에 있어서 가장 강유력한 무기는 진실한 말을 하는것이다. 진실한 말 자체가 웅변적인 힘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일단 진실한 말을 하게 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쩔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치도 안데르센동화에 나오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임금님께서는 옷을 입지 않았어요!”라고 큰 소리를 치듯이 진실을 소리 높이 웨쳐보라. 그러면 일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옷을 입지 않은 알몸임을 발견하고는 황급하게 치부를 가리다보면 진실을 말한 사람과 맞대결한 겨를이 없어지게 되는 법이다.   특히 언론매체의 생명력의 원천은 진실에 있다. 대지의 여신가이아의아들인 안타이오스의 무진장한 힘의 원천이 대지에 있듯이 언론매체의 힘의 원천은 진실을 말하는데 있다. 언론매체가 이 강유력한 무기를 장악하여 초지일관하게 당과 나라와 백성들의 리익을 대변하여 진실한 말만 하여 나간다면 그 매체는 반드시 번영창성의 일로를 걷게 될것이다.   나는 해란강닷콤 사이트가 거짓을 배격하고 진실한 말한 하는 사이트로 운영되여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이 바로 사이트 개국을 맞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다.                     2013년 7월 19일 연길에서  * 본문은 "해란강닷콤"의 오픈축하문으로 기고한것이다.-편자주
74    조선족문학의 문화적정체성에 대한 모색(1) 댓글:  조회:3455  추천:20  2011-04-30
개혁개방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문화적정체성에 대한 모색(1)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1.     1. 들어가는 말  중국조선족은 조선한반도로부터 두만강, ․ 압록강을 건너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 정착한 조선인韓人농민들로 이루어진 이민공동체로부터 형성, 발전되여어 온 특수한 민족공동체로서 이미 중국에서 150년의 력역사를 갖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조선족은 식민지시대 일제의 강제징용 혹은 류유학을 갔다가 정착한 재일조선한인들이나 도시시민과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재미한인들이나 광부나 간호사로 갔다가 정착한 재독한인들, 그리고 기타의 해외의 한인(조선인)들과도 많이 다르다. 중국조선족은 이민초기의 그 출발점은 비슷했지만 특히 1937년 중앙아시세아에로의 강제이동으로 하여 모국과 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재로러고려인들과도 많이 다르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은 벼농사를 주축으로 하는 농촌마을공동체의 토대우 위에서 형성되여어 온 것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조선족사회는 그 속성상 여전히 전통적인 농업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1978년 중국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도 중국의 대다수 국민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에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국제화, 세계화로 인해 도래된 다문화시대는 중국조선족에게는 약과 병을 동시에 주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워낙 소수자로 동화의 위험에 직면해있었던 중국조선족은 아무런 준비가 없이 이 거센 세계화, 국제화, 다문화 시대의 충격 속에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조선족농촌공동체의 와해와 붕괴가 초래한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자연스럽게 개혁개방 후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 정체성에 대한 모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2. 개혁개방 전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은 과거모택동시대의 종말과 새등소평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개혁개방 전기는 대체적으로 1978년부터 1990년까지로서 중국조선족사회로 놓고 말한다면 전통적인 농업사회로부터 도시사회에로 점진적으로 이행해갔던 시기였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력역사제재와 현실 제제의 문학창작을 통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모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력역사제재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주지하다싶이시피 중국조선족문단은 1958년에 벌어졌던 이른바 ““지방민족주의””를 숙청하는 ““민족정풍””과 “문화대혁명” 중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민족문화혈통론””에 대한 대 비판을 거친 뒤에는 ““민족””이란 두 글자만 말해도 얼굴색이 변해지는 그런 상황이여어서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금지구역으로 되여어 왔다. 그러나 사상해방을 제창하고 문학 분야에 해동解凍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선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에는 이민사에 대한 재현을 통해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김학철(1916~―2001)과 리근전(1929~―1997)의 창작을 들 수 있다. 김학철의 장편소설 《『격정시대》』(1886)는 지난 세기 3. 40년대 본인이 한국의 서울에서 탈출하여 중국의 상해, 남경, 무한, 장사, 태항산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던 반일무장투쟁의 경력과 다문화적 체험을 기록한 대작이다. 이 작품은 다분히 자서전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일제식민지시대의 한 지식청년이 점차 민족의식에 눈이 뜨고 결연히 서울을 떠나 중국에 와서 굳센 반일투사로 성장해 가는 파란만장한한 과정을 그린 대작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1994)의 역시 그의 파란만장한 문화신분의 선택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김학철은 민족정체성을 가장 올곧게 지켜온 항일투사들 중의 한 분으로서 이런 문학창작을 통해 인멸되여어 가는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를 문학창작으로을 복원해 놓음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데 큰 공적을 쌓아올렸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은 한국에서도 출판되여어 넓은 독자층을 보유했던 작품으로서 전반 조선한민족문화권에서 커다란 공명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절름발이현대사를한쪽 다리로걸어온 사람당신은 외다리가 아닙니다우리의 눈에는 잘린 다리가더 찬란해 보입니다봄이 오면 죽은 풀이 되살아나듯그대의 외다리는우리의 다리를 깨워둘에서 넷으로 넷의 넷으로 아홉의 아홉으로일어서게 합니다한명의 배고픈 이 있어도배부른 행복이 죄가 된다는큰 말씀이잘린 다리를 또 자른대도날마다 새롭게 솟아나는님의 다리는사슬이 긴 우리의 력역사입니다. ““잘린 외다리””로 표상되는 김학철의 치렬열한 문학정신은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 조정래의 부인이며 녀여류시인인 김초혜가 읊은 것처럼 ““사슬이 긴 우리의 력역사””의 상징이며 중국조선족 나아가서는 조선한민족의 력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이처럼 김학철을 포함한 항일투사들의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중국의 항일투쟁을 지원했다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조선한국의 국권회복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이 이중적 사명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였다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의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 같은 작품은 중국 조선족사회와 한국에서 모두 커다란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김학철의 마지막 최후의 순간들은 어쩌면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가장 심금을 울리는 일종 퍼포먼스 - ―행위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민1세로서의 김학철은 림임종에 자기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들을 우편함박스에 담아서 두만강 강물에 띄우되 그 우편함박스에 ““원산앞바다 행, 홍성걸(김학철의 본명임) 친족 받음”” 이라고 밝혀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중국조선족문단의 후배들은 김학철의 유언에 좇아 두만강 강가에서 김학철이 1940년대 태항산에서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된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일제와 싸울 때 지은 ““조선의용군추도가””가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우편함박스를 두만강에 띄워어 보냈던 것이다. 락낙엽귀근이라고 김학철은 죽은 뒤에 혼이라도 자기가 태어여난 고향 원산에 돌아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민1세인 김학철의 정체성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북간도(중국 동북 연변지방)에서 살았던 조선한인이주민들의 장례(葬禮)에는 ““혼(魂)보내기””라는 절차 하나가 더 있었다고 한다. 상여행렬이 두만강 기슭을 거쳐 가게 되었였는데, 그곳에서 고인이 남자이면 신었던 신발을, 녀여자이면 꽂았던 비녀를 강물에 띄여어 보냈다고 한다. 두만강의 강물을 타고 혼(魂)만이라도 고향에 돌아가서 살도록 하려는 리이향민들의 비원(悲願愿)이였던 것이다. 그 시절에 북간도에는 ““혼 보내기””를 할 때 부르는 “변조 「아리랑”」이 널리 전해졌지고 있었다고 한다. 간도 벌 묵밭에 무엇 보러 떠나와서동토에 얼어붙어 발을 못 떼나백두산 령영마루 울면서 넘어왔듯고무신이라도 웃으면서 넘어가소두만강 줄기 울면서 저어왔듯비녀를 노 삼아 웃으면서 저어가소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북간도에 이주한 조선인한인이주민 제1세들에게 있어서 장백두산이 민족의 심성이 담긴 머리라면 두만강은 민족의 심정이 흐르는 피핏줄이고 조선한반도 삼천리강산은 뿌리요, 근원이었였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였었다. 리근전(1929―〜1997)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1984)는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첫 대작이였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일찍 1950년대 초기로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작품으로서 개혁개방을 맞이아하여 비로소 집필할 수 있게 된 작품이다. 리근전은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밝힌바 있다. ““우리 민족의 과거 역력사를 진정으로 앎으로써 오늘 우리 민족이 반드시 서야 할 위치를 자각하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족은 조선에서 살수 없어 쪽박을 차고 중국에 밥을 빌어먹으러 건너왔다고 하는데 이는 편면적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우선 대자연과 싸웠고 봉건계급,과 관료 아치들과 투쟁하여 왔으며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여러 민족이 어께 겯고 싸워 중국의 근대사를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썼던 것입니다. …… 우리 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는 기초를 여러 민족들과 함께 닦아 놓았고 동북에 벼농사 기술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력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넋을 지키고 노래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리근전은 바로 이런 창작동기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족인민들이 조선에서 중국 동북에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게 된 연유와 과정 및 조선족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반영하였으며 점차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고 자기의 힘을 키우면서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령영도 밑에서 형제민족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일 투쟁에로 궐기된 피어린 력역사를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였다””고 기존의 문학사 저서들에서는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리근전은 이 작품에서 중국조선족의 개척사와 투쟁사를 많은 편폭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은 가만히 앉아서 남이 이룩해 놓은 것을 나누어 먹거나 혹은 중국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고난으로 점철된 장기간의 개척과 투쟁을 통해 중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자격과 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박천수는 작자가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개척의 주제를 체현한 인물형상으로서 북간도에 이민해 들어온 후 천년 묵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조선의 뽕나무를 간도 땅에 옮겨 심으면서 인적이 없던 간도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고장으로 개척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나라 관헌들이 강요하는 “치발역복(薙髮易服薙发易服)”의 귀화 정책에 맞서서 ““피땀으로 일군 논을 하룻루밤 사이에 떼이고 말았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하여 긍지를 느끼는 데서 그의이 강인한 민족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다. 박천수의 아들 박윤민은 작가 리근전의 이 소설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투쟁의 주제를 체현한 인물형상으로서 반일투쟁에 투신한 투사로 성장하며 나중에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어여 민족주의계렬열에 속했던 의병부대를 중국공산당의 영령도를 받는 항일무장대오로 개조하고 개편하는 과업을 맡아 나섰고 주력부대와 련연계를 잃은 상황 하에서도 계속 무장투쟁을 견지하다가 마침내 공산당의 지령으로 받고 연안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집정당인 중국공산당과 중국조선족 사이의 밀접한 련연관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한 여기 데서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 자기의 문화를 지키면서 조선족답게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와 자격을과 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던 작자의 창작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다소 주제적인  경향의 차이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력역사제재의 장편소설들은 최홍일의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1999), 최국철의 장편소설 《『간도풍운》』(2005)에까지 이어졌다. 이런 주제적인 경향은 시에서도 보여지이고 있다.  비소리바람소리발목에 감고쓸쓸히 누워있는호젓한 한숨보리밭 둔덕 당나무 아래허리쉼 쉬고 간 사연해빛에 별빛에녹쓸지 않은하늘을 허비고 땅을 짜개고떠나간 생명의 연소벌거숭이 쑥대밭 화전의 실연기설원 몇 만리더냐 흰 꿈 검은 꿈 찍으며 -―김성휘,희 “「북향길”」(1988)  짧은 시이지만 조상의 뼈빼가 묻혀있는 고향과 고국을 등지고 만주로 옮겨온 조선족의 이주사와 정착사, 개척사가 함축되어여 있다. 시인은 현재 중국에서 조선족공동체가 건재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난날 자신들의 생명의 마지막까지 연소시켜 가면서 생존을 위해 싸웠던 이주민 조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표현하였다. 2). 현실제재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상술한 역력사제재의 문학창작과 함께 현실재현의 문학창작은 이 시기 문학의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였다.  ㄱ. 김학철의 현실비판의 문학에서 보이는 다중적 문화신분. 김학철의 문학은 로신魯迅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불의에 대한 용감한 저항과 비타협적인 비판성향으로 특징지어진다. 로노신의 비판이 주로 과거의 중국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졌다면 김학철의 비판은 그의 말대로 ““국경도 시효도 없다.”” ““선량한 사람들 ,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옥사(獄死狱死), 형사(刑死), 아사(餓死饿死)시킨 장본인들. 그 장본인들을 단죄하는 데는 시효도 국경도 있을 수 없다.”” 김학철 문학에서 나타나는 ““국경도 시효도 없는”” 비판적 성향은 그의 이중적 문화신분과 밀접한 련연관성을 갖고 있다. 김학철의 이중적 문화신분은 조선의용대시절부터 형성되였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의용대는 이중성격과 이중임무를 지닌 부대였다. 이 점에 대해 《『조선의용군사》[1]』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사람이란 외국인 성격을 가지고 외국  땅인 중국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부대이다. 그러므로 국제주의성격을 지닌 부대이다. 그들은 또한 자기 조국인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대오이다. 그러므로 조선독립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2중 임무는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일찍부터 동북 3성에서 일제와 싸우던 조선독립군은 자기의 정치적  강령이나 목표를 단순히 조선독립에만 두었다.”” 김학철은 민족주의 정당이였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조선독립투사일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을 때는 남로당 당원이었고 월북한 후에는 조선로노동당 당원이었였고 중요한 선전간부로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히 조선적인 문화신분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40년에 입당한 오랜 중공 당원이었였고 팔로군의 간부로서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는 태항산에서 일제와 피 흘려 싸운 항일투사이기도 하였으므로 중국적인 문화신분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은 중국과 조선에 대해 모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드높은 사명감을 갖고 중국과 조선의 정치에 대해 모두 지극히 관심하고 드높은 참여의식을 갖게 되였었으며 자신의 참여권을 당당하게 주장한바 있다. 동시에 항일의 봉화 타오르던 태항산의 항일 최전선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의 일원으로 피 흘려 싸운 경력이 있는 김학철은 중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자신은 당당한 참여권과 발언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공민인 김학철을 중국의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에서 우파로 두들겨 팬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조선공민인 김학철이 중국의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 인민공사, 대약진, ‘반수방수운동(反修防修运动)’에 대해 그렇게 날카롭게 폭로하고 풍자하고 비판한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은 김학철의 다중적 문화신분에 대해 잘 파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학철의 바로 이러한 이중적 문화신분은 그로 하여금 중국이나 여타 나라의 그릇된 정치에 대해 모두 자신은 비판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이런 이중적 문화신분과 다중적사명감은 그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이중적 문화신분으로 인한 김학철의 다중적인 날카로운 비판은 1982년 이후 조선국적으로부터 중국 국적으로 옮기고 1989년 조선로동당원이기를 포기하고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은 복권이 된 만년의 문필활동에서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아야 하는 고되고 아픈, 그러나 끊임없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는 삶을 살아오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러면 1980년대 이후 중국 공민으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국적과 당적을 옮긴 시점에서도 김학철은 어찌하여 조선반도의 사실에 대해서도 그처럼 당당히 자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김학철의 이중적 문화신분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학철은 자신이 갖고 있는 발언의 권리를 ““우리(조선의용군)가 지난날 일본군에 대항해 싸울 때 조선반도는 하나였다.”로 대변한다. 마찬가지 리이치로 김학철은 중국에 대해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발언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여 왔었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가장 살벌했던 1964년부터 1965년 사이에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여 계급투쟁확대화와개인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로 인해 빚어진 ““반우파투쟁””에서의 지식인에 대한 부당한 처사 탄압에 대해 가차 없이 폭로, 비판했던 것이다. 바로 이 소설로 하여 혹심한 필화를 당하여 10년 옥살이를 하였지만 김학철은 복권 후에도 자기의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총적으로 ““디아스포라 작가””로서의 김학철 문학에서 시종일관하게 나타난 ““시효도 국경도 없는”” 강렬한 비판적성향의 밑바닥에는 다중적문화신분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아낼 수 있다. ㄴ. 김성휘의 시 창작에서의 민족의식의 소생. 중국조선족시단의 시인들은 좌경로노선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도 개혁개방 이후의 시기에는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일정하게 찾게 되었였다. 그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김성휘를 들 수 있다. 그의이 작품들은 이전에 보여주었던 찬양조의 송가 양식과 과장된 시의식을 탈피하고 서정적이고 내면화된 어조로 일상적 삶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 《『들국화》』(1982), 《『금잔디》』(1985),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고향생각》』(1989) 등에 실린 대부분 작품들은 어머니와 고향 그리고 이를 통해 암시하고 있는 시인의 민족의식의 소생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어머님이 지어주신 흰 옷 입고 창가에 앉았다 밝은 해빛 따사롭고 마음 한구석은 차겁다 (생략) 차라리 우리 어머님 나에게 검은 옷 지어 주셨다면 나도 그늘 밑에 시름없이 뒹굴며 도야지 개 신세로 살아가련만 아니 못한다 나는 죽어도 골백번 죽어도 어머님 베틀에 짜주신 흰 옷은 벗지 못해 흰 옷 입고 창가에 앉아 깊은 산 외진 하늘 아래 형제를 그리며 슬피 묻노라 흰 옷의 검은 때 언제면 벗으려 -―김성희,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여기서 어머니가 지어주신 ““흰 옷””은 바로 조선족의 민족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암묵적으로 드러내며, 어머니로 암시되는 ““모국””과 백의민족을 의미하는 ““흰 옷””이라는 고유한 문화적 상징을 통해 잃었던 혹은 잊고 있었던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자각을 드러내고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말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 ―윤동주, “「슬픈 족속”」 전문 중국조선족 시문학에서 흰색이미지는 민족의 상징으로 표출되는바, 이러한 흰색이미지에 대한 꾸준한 시적 관심은 윤동주의 상기 “「슬픈 족속”(1938)」으로부터 시작하여 력사적인 련관성을 보여주면서 김성휘의 상기 시를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층 활발해졌다. 한창선의 “「산재마을엔”」, 리성비의 “「우리 춤”」, “「겨울소나무”」, 림금산의 “「하얀 집”」, 김동진의 “「흰 눈이 내리네”」 등이 이러한 흰색이미지를 시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 오더니 떡가루 날렸느냐 마을에 눈 내리네 이쁜이가 가는 길 시집가는 길 하얀 눈이 내리네 하얀연 너울 쓰고 간다 령길에 눈이 내리네 아 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히 내리네 하늘에도 배꽃잎이 곱게 날리네 하늘 땅 그 어데나 흰 눈이 날리네 있더라도 가더라도 우리 다 같이 티 없이 살아보자 흰 눈이 내리네 아 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히 내리네 -―김동진, “ 「흰 눈이 내리네”」 전문 이처럼 흰색이미지에 대한 시적 관심은 중국조선족의 민족 체험의 예술적인 승화로서 민족사랑 나아가서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것은 재로 고려인 작가 박미하일(1949-)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지는 흰색이미지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천사『들의 기슭》』이라는 소설에는 화가인 주인공의 내심독백이 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정신이 피뜩 들 때가 있다. 유럽인이기도 하고, 조선인 얼굴을 한 로씨아인이기도 하고, 종이에다 그 알수 없는 문자로 내 이름조차 쓸 줄도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고(……) 조선에서 그 말이 제대로 통할 수 있을가? 내가 누구일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지 못했다. (……) 조선인에게 있어서 상실을 뜻하는 색은 흰색이다. 과연 하얀 흰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할가” 이 작품 중의 주인공인 화가에게 있어서 조상들의 고국인 조선은 ““흰색””이다. 즉 그 자신이 알지도 못할뿐더러 어떻게 손댈 수도 없는 색인 것이다. 또한 ““흰색””은 무(無无)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 민족에 대한 이미지이다. 사실 작중 인물인 화가와 박미하일은 거의 중첩될 정도로 작품은 자서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박미하일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 다른 민족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특정한 민족의 의식이 증발된 인간일 뿐이다. 고려인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어느 “―족”으로서가 아닌 어느 인간으로 사유한다. 박미하일의 작품들에 대부분 고아인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민족성을 지우는 작업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하겠다. 박미하일과 마찬가지로 재로 고려인 소설가 아나톨리 김(1939-) 의 작품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민족성이 아닌 세계와 우주, 그리고 그 속에 끼여 있는 인간의 운명이다. 이처럼 중국조선족문인들이 자기의 민족성에 대해 분명히 인정하거나 재일조선인(한인)들이 민족성을 말살하는 일본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살아온 것과 달리 재로 고려인들의 민족성은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실정임을 그네들의 문학과 중국조선족문학의 비교를 통해서 여실하게 보아낼 수 있다. 아나톨리 김이나 박미하일은 배달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운명에 의해 로씨아땅에서 태여나서 로씨아국적을 소유한, 그리고 일부 국수주의적인 로씨아 작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로씨아어로 글을 쓰는 한 동양인””에 불과한 일반적 의미의 조국과 민족을 갖지 못한 방황하는 령혼이였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외톨이예술가의 관심이 민족과 국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 내면세계로를 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이 비록 모두 “재외동포문학"이면서도 자기의 특수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ㄷ. 이 시기의 기타 소설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개혁개방 이후 사상해방을 제창하고 국외의 사상이나 사조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중국사회는 문화부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여 이데올로기나 문화의 “일원일색(一元, 一色)”의 “공명(共名)”시대로부터 “다원다색(多元, 多色)”의 “무명(无名)”시대에로 이행하는 전형기(转型期)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중국 전반 문화의 변두리에 처해 있은 연변을 비롯한 동북 3성의 조선족사회는 여전히 농촌문화에 안주하고 있으면서 그 사회적속성은 아직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중국조선족사회의 농촌문화의 속성은 이 시기의 영향력 있는 작품들이 거의 다 농촌문화와 련관되는 농촌제재의 상처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에 속하는 것들이였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상처문학(伤痕文学)에 속하는 김관웅(1951―)의 단편소설 “「청명날”」(1979), 정세봉(1943―)의 단편소설 “「하고 싶던 말”」(1980), 윤림호(1954―2003~)의 단편소설 “「두만영령감”」(1978), ․ “「투사의 슬픔”(1985), 장지민(1947~―)의 단편소설 “「시카코 복만이”」(1983), 우광훈(1954~―)의 단편소설 “「시골의 여운”」(1986)이나, “반성문학”에 속하는 김관웅의 중편소설 “「신념”」(1982), 리원길(1944―)의 중편소설 “『백성의 마음”』(1981) , “․『한 당원의 자살”』(1985), 류원무(1934―2008)의 단편소설 “ 「비단이불”」(1982), 남주길의 “「접동골 녀인”」, 이밖에 “개혁문학”에 속하는 홍천룡(1955―)의 단편소설 “「구촌조카”」(1981), 림원춘(1936~― )의 단편소설 “「몽당치마”」, 윤림호의 단편소설 “「고향에 온 손님”」(1989), 최국철(19620―)의 단편소설 “「봄날의 장례”」(1987) 등은 모두 조선족 시골농촌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재로 하여 창작한 소설들이다. 도시의 생활을 소재로 한 김훈의 개혁소설 “「그녀가 준 유혹”」(1986) , 최홍일의 단편소설 “「도시의 음향”」(1985), 장춘식의 “「출국 전 강습”」(1989) 같은 도시제재의 작품들도 있기는 했지만 필경은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상기 소설들 중에서 상처소설의 계렬열에 속하는 김관웅의 중편소설 “「신념”」은 1930년대 초반에 중국공산당이 령영도하는 간도의 항일대오내에서 수많은 조선족출신의 반일투사들이 그릇되게 숙청되였던 ““반민생단사건”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아 당시 여러 복잡한 환경에서 싸워나가야 했던 경계인, 소수자로서의 조선족의 위치와 고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김관웅의 단편소설 “「청명절”」은 “문화대혁명” 때 사인무리를 쫓는 그 일당들이 연변에서 조작했던, 1967년 “8.2일, 8.4사건””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아 바로 이 사건에 가담했다고 ““조선특무””로 몰려 탄압을 받은 한 조선족가정의 해체와 비극을 재현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중국에서의 소수민족으로 지내는 특수한 사정과 고통을 보여주는바 이런 작품의 발표는 조선족이 중국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며 아울러 민족의식의 소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전반 소설 창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리이원길(1944―)의 대하장편소설 《『땅의 자식들》』에 속하는 《『설야》』(제1부, 1989)와 《『춘정》』(제2부, 1992) 역시 농촌에서의 개혁개방을 둘러싼 중국조선족사회 조선족농민들의 심충적인 문화의식과 문화심리를 반영한 역력작이다. 이 작품에 대해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산재지구 조선족마을에 대한 풍속도 같은 묘사 속에서 ‘‘우리 종족의 모습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중국 문화 속에 변이된 조선족특유의 문화정체성 및 민족의 생존상황을 문화적인 시각에서 풀이하고 있는바 《『설야》』와 《『춘정》』은 중국조선족 산재마을의 한 상징이며 조선족 백년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 “이 땅에서의 ‘‘본토적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있다””고 한 평가는 적중하다. 다만 여기 언급된 이른바 ““본토적 성격””이란 표현은 중국조선족은 이미 중국에서의 백년 이상의 정착생활을 거쳐 이젠 철새가 아닌 터새 같은 존재로서 자기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였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하나 더 보태고 싶은 것은 리원길의 대하장편소설 《『땅의 자식들》』을 통하여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중국조선족사회의 속성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벼농사를 주추축으로 하는 농촌사회이고 ““긴내천”” 같은 조선족 시골마을들은 비록 망망대해 같은 다수민족들 속에 절해고도처럼 포위되어도 사회조직체로서의 자기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200만 중국조선족사회라는 문화공동체가 건강하게 존속할 수 있도록 담보해주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1990년대 이전에는 중국조선족의 농촌마을들은 수많은 혹독한 사회, 정치 변동의 시기에도 시종 병들지 않고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연변문학 2011.4호(다음호에 이음) -------------------------------------------------------[1] 최강 《조선의용군사》,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73    류원무, 허해룡의 장편소설《다시 찾은 고향》연구 댓글:  조회:3230  추천:43  2009-07-13
목록: 一. 들어가는 말 二. 《다시 찾은 고향》의 류원무, 허해룡의 공저(共著) 문제 三. 《혈연》의 내용 및 그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1.《혈연》의 스토리와 플롯 2.《혈연》의 인물관계설정 3.《혈연》의 주제사상 4.《혈연》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四. 《다시 찾은 고향》의 내용에 대한 분석 1.《다시 찾은 고향》의 스토리 2.《다시 찾은 고향》의 인물관계와 갈등 설정 3.《다시 찾은 고향》의 인물형상의 류형적 특징 4.《다시 찾은 고향》의 주제사상 5.《다시 찾은 고향》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五. 《다시 찾은 고향》의 형식에 대한 분석 1.《다시 찾은 고향》의 서사구조와 플롯의 특징 2.《다시 찾은 고향》의 문체의 특징 六. 나오는 말............................................................ 一. 들어가는 말 류원무(1935-2008)선생은 개혁개방 전기(1979-1989)의 중국조선족소설계에서 맹활약을 한 소설가중의 한 분이다. 류원무의 장편소설창작은 아동 장편소설과 탐정장편소설로부터 시작되여 나중에는 성인장편소설에로 전향하였는데, 그 장편소설창작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라렬할 수 있다. 1. 아동장편소설 《장백의 소년》(1980년) 2. 탐정장편소설 《숲속의 우등불》(1980년) 3. 성인장편소설 《다시 찾은 고향》(1985년) 《봄물》(1987년) 《아리랑 열두 고개》(2001년) 이 글에서는 본격적인 장편소설에 속하는 성인장편소설중의 처녀장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다시 찾은 고향》(아래에서는 《고향》이라고 략함)만을 연구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일육지정(一肉知鼎),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성구처럼 이 한부의 장편으로 미루어 보아서 다른 장편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二. 《고향》의 류원무, 허해룡의 공저(共著) 문제 1985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고향》에는 류원무(柳元武, 1935-2009), 허해룡(許海龍. 1927-1998)의 공저(共著)로 밝혀져 있지만 일부 문학사들에서는 이 작품의 제2작자 허해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을 평론하거나 연구함에 있어서 제1작자 류원무만 연구해서 안 되는 리유는 단순한 작가의 저작권이라든지 명예 같은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반 작품의 사상과 내용을 보다 깊이 있게 리해하려면 반드시 제1작가 류원무와 함께 제2작자 허해룡에 대해서도 반드시 심층적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물론 이 작품에는 작자의 “서언”이라든가 “후기” 같은 것이 없고, 아직까지는 이 두 작자의 유관 회상기 같은 것도 발견되지 못했다. 또한 지금 이 작품의 작자인 류원무, 허해룡 두 분이 이미 모두 타계한 상황하에서 이 두 분들이 어떻게 함께 창작을 기획했고, 어떻게 함께 구상했고, 어떻게 함께 집필제강을 짰고, 집필과정에서는 어떻게 구체 분공을 했고, 어떻게 함께 수정, 윤색하여 탈고를 했는가? 등 상세한 내막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연구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허해룡과 류원무는 문단의 선후배로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오래 동안 같이 근무하고 있었기에 장편소설《고향》은 이 두 선후배 소설가의 긴밀하고 유쾌한 합작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공저로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아래에서《고향》의 소재래원이라고 추정되는 허해룡의 단편소설《혈연》의 스토리, 인물설정, 주제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량자의 긴밀한 관계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三. 《혈연》의 내용 및 그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필자는 류원무와 허해룡의 전반 작품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읽는 과정에서 허해룡의 단편소설《혈연(血緣)》과《고향》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을 돌리게 되였다. 이 두 작품을 자세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필자는 왜 《고향》은 류원무와 허해룡의 공저로 되었는가 하는 이 미스터리의 대체적인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1.《혈연》의 스토리과 플롯 허해룡의 단편소설의 “혈연”은 《연변》잡지 1962년 제9호에 실렸었는데 그 스토리를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에서 림업대학을 졸업한 제1인칭 주인공 “나”(王靑山, 실은 김청산임)는 고향 연변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장백산에서 가까운 오림공사 위생소의 의사인 슈메이(秀梅, 실은 김순희임)와 우연히 만나서 따뜻한 관심과 치료를 받게 된다. 집에 도착한 “나”는 뜻밖에 할아버지가 슈메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게 되며 이 슈메이가 바로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입원했을 때 수혈까지 해주면서 지성껏 치료해준 고마운 처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사진속의 슈메이를 가차에 만났고 한족 처녀의사라고 하니 할아버지는 순이라는 조선족 처녀라고 우긴다. “나”는 슈메이와 순이가 어쩌면 생김새, 직업, 주소가 이다지 똑 같을 수 있을까 하고, 혹시 쌍둥이는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다. 할아버지는 평소에 “나”에게 “나”의 아버지는 혁명렬사라고만 알려주면서 그 상세한 내막은 비밀에 부치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알려 주겠다고 하였었다. 이번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산소는 장백산 부근의 목림이라는 곳에 있으니 추석날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알려주겠다고 대답한다. 며칠 후 현 림업과에 배치를 받은 “나”는 바로 아버지 산소가 있다는 목림지구 산구개발에 참가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목림은 슈메이가 살고 있는 오림이라는 고장과 불과 20리도 안 되였다. 목림인민공사 공소사(供銷社)에서 경영하는 려관에서 “나”는 공사의 공소사 당지부서기로 려관 일을 맡아보고 있는 한 조선족 어머니(슈메이의 어머니이자 칭산의 생모임)를 만나 되여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서로 각자의 신상에 대해서도 다소 알게 된다. “나”는 이 조선족 어머니는 렬사가족으로서 외동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조선족 어머니는 또 칭산의 팔에 난 붉은 기미를 보고는 호기심이 동하여 “나”의 신상에 대해서 물어 본다. 그리하여 슈메이의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 없이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음을 알게 된다. 추석을 사흘 앞둔 어느 날 “나”는 이 조선족 어머니의 방에 들렸다가 왕진을 갔다고 돌아온 슈메이(순이)를 만나며, 할아버지가 고마워하던 그 순이가 바로 자기가 기차에서 만났던 그 슈메이임을 알게 된다. 이날은 마침 순이의 생일날이라 “나”는 이들 모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이가 왜 슈메이로 부르게도 된 사연도 알게 된다. 순이의 아버지 김성팔은 항일투사였는데 일제에 의헤 살해되였고 어머니는 순이를 데리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동안에 성이 류씨인 한족 할머니가 순이를 대신 양육해 주었는데 슈메이라는 이름은 바로 류할머니가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의지가지없는 류할머니는 순이네 모녀와 함께 오래 동안 한 집식구로 살아왔다고 한다. 칭싼이는 이 사연을 듣고는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투쟁은 정말 한족과 조선족 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서, 피로 뭉치게 하였다”고 깊이 느끼게 된다. 추석날, “나”의 할아버지는 목림으로 오셨다. “내”가 묵고 있는 려관에서 친녀동생인 순희, 그리고 친어머니와 수십 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며 아버지 김성팔의 비장한 최후와 그 뒤 “내”가 할아버지에게 구출되여 한족집에서 자라나게 된 경위를 낱낱이 알게 된다. 항일유격대원이였던 김성팔이 일제 토벌대에 의해 살해되고 김성팔의 안해는 왜놈들에게 끌려가게 되자 왜놈들은 세 살배기 청산이가 갇혀 있는 초가집에 불을 지르고 가버린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한족농민 왕씨는 불속에 뛰여들어가 김청산이를 구해 내여 친손자처럼 키워냈던 것이다. 의지가지없는 왕할버지는 청산이의 어머니를 딸로 삼게 되여 조, 한 두 민족의 두 가정은 한 가정식구로 합쳐지게 된다.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血緣)”스토리와 주제 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단편소설 ‘혈연’은 민족단결의 주제에 바쳐진 좋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항일전쟁시기에 한족인 왕할아버지가 왜놈들에게 체포된 조선족항일투사의 아들을 구원해준 감력적인 사실, 해방 후 20년이 지나서 그들이 서로 만나고 그 아들이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상봉하는 곡절 많은 이야기를 통하여 조, 한 두 민족 사이에 ‘계급으로, 피로 뭉친’ 혈연적관계를 눈물겹게 다루었다. 이 소설은 그 소재다 참신하고 사건의 얽음새가 복잡다단하고 작품의 밑바닥에서 혁명적인도주의정신이 빛발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허해룡의 “혈연(血緣)”의 스토리와 주제 등에 대해서는 상기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평가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 작품의 스토리의 얽어 짜기에 있어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우연의 일치(Coincidence)”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왕칭산(실은 김청산)과 슈메이(실은 김순이)가 기차 우에서의 우연하게 만나게 된 것이라든지, 또 왕칭산이 배치되여 간 고장이 면바로 슈메이가 있는 고장이라든지, 더 깊이 알고보니 슈메이는 왕청산의 누이동생이고 그녀의 조선족 어머니는 왕칭산의 생모였다든지 하는 것은 필연성이 별로 없는 “우연의 일치(Coincidence)”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Coincidence)”를 발단으로 하여 스토리가 전개되고 또 이에 의해 플롯을 얽어 짰다는 자체는 사건들 사이의 필연적 인과성을 중시하지 않는 작가의 자의성이 지나치게 플롯을 지배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러한 “우연한 일치”의 람용은 흔히 이야기의 “그럴듯함(Plausibility)”, 즉 심미적진실성의 효과를 저락시키는 요소로 되는 것이다. 2. 《혈연》의 인물관계설정 이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다시피 이 작품의 인물관계설정은 “혈연(血緣)”, 즉 피로 맺어진 인연 -인간관계이다. 이는 주로 조선족 항일투사 김성팔네 일가와 한족농민 왕할아버지 일가와의 피로 맺어진 인연, 즉 조(朝), 한(漢 ) 두 민족 가정 사이의 인물관계로 설정되였다. 항일투쟁 중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조선족 항일투사 김성팔의 어린 아들 김청산이를 왕할아버지는 불속에서 구출하여 어엿한 대학졸업생으로까지 키워준다. 그리고 김성팔의 딸 순이도 역시 그의 안해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한족 류씨할머니에 의해 양육되였다. 그리고 김성팔의 딸 순이는 한족 왕할아버지를 자기의 부모처럼 극진하게 보살펴주고 선뜻이 자기의 피를 수혈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왕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다. 헤여진지 수십 년이 지난 해방 후 오랍누이 김청산과 슈메이(김순이)의 기차에서 우연한 상봉 그리고 김청산이 배치 받아간 고장에서의 순이엄마(김청산의 생모)와 슈메이(김청산의 누이동생)와의 상봉, 또 이 두 차례의 상봉을 계기로 하여 생겨난 이들과 한족 왕할아버지의 상봉은 끝내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를 갖고 있는 두 가정의 극적인 상봉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며 조, 한 두 가정이 한 가정으로 합쳐지는 것으로 이 작품은 대단원을 이룬다. 3. 《혈연》의 주제사상 상술한 인물관계의 설정은 직접적으로 이 작품의 민족단결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이바지했다. 이 작품의 민족단결의 주제는 “혈연(血緣)”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명시되여 있다. 작품은 이상의 스토리와 인물관계설정은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제1인칭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투쟁은 정말 한족과 조선족 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피로 뭉치게 하였다”고 표현했듯이 이 작품은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민족단결이라는 이 주제사상을 직설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냈다. 주제는 워낙 자연스럽게 또 은밀하게 흘러나오게 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딘가 좀 생경하게 주제가 로출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작품에서 표현한 주제사상처럼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투쟁은 정말 한족과 조선족 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피로 뭉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주류는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에 있어서 항일투쟁의 력사에는 한족과 조선족 인민사이의 혈연적관계만이 있은 것이 아니라 일제의 리간, 도발과 중공 당내의 좌경로선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조선족 항일투사와 항일대중들이 억울하게 “혁명의 적”, “일제의 간세(奸細)”로 몰려 수천 명이 타격을 받거나 목숨을 잃은 “반민생단투쟁” 같은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조선족의 력사에 있어서 조, 한 두 민족의 조화, 단결에 의한 공동한 투쟁은 주류였으나 동시에 비조화, 갈등으로 인한 쟁투와 불신도 있었다. 물론 한 편의 단편소설에서 이 모든 면을 모두 망라시켜 반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중국에서의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의 모순에서 한족은 모순의 주요한 방면을 대표하며 민족단결에서의 주체적 혹은 주도적 역할을 놀아야 할 측도 소수민족이 아닌 한족이였으며 지금이나 그 당시나 지방민족주의보다 대한족주의가 중화민족의 대단결에서 보다 큰 위해성을 갖고 있었다. 4.《혈연》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그런데도 조선족작가 허해룡은 왜 이런 “민족단결”의 주제를 주동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는가? 이에 대해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에서는 그 당시나 그 후의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민족단결”의 주제의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시기에 민족단결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민족단결의 주제는 1959년 ‘반우경투쟁’과 더불어 일어난 ‘지방민족주의’를 청산하는 ‘민족정풍운동’을 겪으면서 이 시기 조선족문학에 나타난 시대적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단결에 대한 내용은 줄곧 1960년대 초까지 이어져 항일전쟁을 반영한 력사제재나 현실제재에서 모두 다루어지고있다.” 연변에서는 1957년도의 살벌했던 “반우파투쟁”이 지난지 얼마 안 되어 1959년부터 1960년 초까지 2년 동안이나 또 다시 한차례의 엄혹한 정치투쟁인 “민족정풍운동”이 벌어졌다. 그 주요한 내용은 “지역구역확장론”, “민족우월론”, “민족동화론”, “다조국론”, “민족문화와 언어순결론” 등에 대한 비판투쟁이였다. 이 기간에 많은 조선족간부들과 지식인들은 혹은 자각적으로 혹은 정치압력에 의해 자기의 이른바 ‘오유적립장“과 “오유적언행”을 검사했으며, 적잖은 사람들은 “지방민족주의분자”란 감투를 쓰고 우파분자와 또 같은 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당중앙에서는 협애한 민족주이 사상을 반대하되 주로는 대민족주의와 한족들에게 존재하는 대한족주의를 치중하여 비판하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연변에서는 조선족의 지방민족주의만 비판하고 한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대한족주의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족형님들을 따라 배우고 한어를 배우는 열조를 일으켰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영광스러운 항일혁명전통을 갖고 있고 그 누구보다 공산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연변조선족은 위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그 시대의 사회정치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까닭에 문학작품은 반드시 력사적안광으로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런 “민족정풍운동” 이후의 사회정치환경에 적응하려고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 이 작품에서 보이며 따라서 작품에는 너무나도 많은 우연적인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작위(作爲)적인 흔적을 로정(露呈)하여 소설의 사실주의적묘사의 진실성을 떨어뜨린 일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은 비록 상술한 1960년대 연변의 특정한 사회정치문화환경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작자의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는 조선족 항일투사 김성팔네 부부를 비롯한 조선족인민대중의 피어린 항일투쟁을 정면에 등장시키고 이를 감정적으로 행동적으로 동정하고 후원하는 왕할아버지 같은 한족 인민대중들을 대조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연변지역에서의 항일투쟁의 주력군은 조선족이였다는 력사적진실을 완곡적으로 반영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중국조선족은 이전에도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수자인 한족과 조화로운 공존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이 단편소설은 력사와 시간의 고험을 겪어 지금에도 당당하게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한 페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四. 《고향》의 내용에 대한 분석 1. 《고향》의 스토리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이 3만자 좌우의 편폭을 가졌다면 류원무, 허해룡 공저《고향》은 24만자의 편폭을 가진 장편소설로서 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 중에서 “현행반혁명”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8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주인공 박송림(왕송림)은 4인방이 타도된 후 무죄로 석방되였지만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자기의 고향인 오림 림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되며 이야기는 거슬러서 12년 전으로 올라간다. 1965년 가을, 림학원을 졸업한 왕송림(박송림)은 고향의 헐벗은 민둥산을 사시장철 푸른 소나무, 잣나무 숲이 설레는 림해(林海)로 변모시켜 보려는 웅심을 품고 송하림업국으로 배치 받아 오며 송하림업국에서도 제일 조건이 열악한 오림 림장으로 자진해 내려간다. 며칠 후, 왕송림은 송하공사소재지에 갔다가 공사운동대회를 구경하다가 소싸움을 말리려고 달려들었다가 옆구리를 상해서 송하림업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병원의 나젊은 처녀의사인 리춘메이와 그녀의 조선족 어머니와 상봉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왕송림은 한족이름을 가지고 조선어를 류창하게 구사하는 이 “한족이기도 하고 조선족이기도 하다”고 자칭하는 리춘메이와 그녀의 조선족 어머니 김금녀로부터 극진한 간호와 보살핌을 받게 된다. 그러는 중에서 왕송림은 리춘메이가 연길시립병원에서 실습을 할 때 자기의 할아버지 왕유덕을 극진하게 간호해주고 수혈까지 해준,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자기의 녀동생 왕계향이와 함께 기념사진을 사진을 찍은 그 고마운 처녀라는 것, 그들 둘의 고향은 모두 오림이라는 것, 둘은 모두 렬사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 등을 서로 알게 된다. 이리하여 왕송림과 리춘메이의 사이의 관계는 발 빠르게 진척된다. 병원에서 열흘 동안 누워있던 왕송림은 묘포(苗圃)를 만들 일을 근심하여 림장으로 돌아오며 림업국에서도 완쾌하지 않은 왕송림을 근심하여 리춘메이를 림장으로 딸려 보낸다. 오림림장에서 조석으로 같이 일하면서 송림이와 춘메이는 서로간의 래력이나 속사정을 더욱 깊게 알게 된다. 춘메이의 부모는 모두 한족으로서 항일련군의 전사들이였다. 전투에서 춘매이의 아버지는 전사하고 어머니는 체포되여 감옥에 끌려왔는데 그 뒤로 한 달이 지난 뒤에 지금의 조선족 어머니 김금녀도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춘메이의 어머니가 춘메이를 낳은 석달 후 춘메이의 어머니가 사형 당하게 되자 김금녀가 맡아서 춘메이를 키웠던 것이다. 역시 항일렬사의 후예인 왕송림 역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왕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다. 이러한 공동한 운명과 공동한 불행은 춘메이를 더욱 동류의식으로 대하게 되였으며 산속에서 무리승냥이와 박투하는 생사의 고험을 겪으면서 서로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럴 즈음에 춘메이의 어머니 김금녀도 왕송림이라는 이 한족대학졸업생 총각을 두고 20여년 전에 생리별한 자기의 아들이 송림이가 아닐까 자꾸 의심을 갖게 된다. 이런 야릇한 심정이 지꿎게 금녀의 발목을 잡아끌어 오림 림장으로 찾아오게 한다. 오림 림장은 바로 김금녀의 아픈 기억을 남긴 고장이기도 했다. 1930년대 중기로부터 오림은 항일유격근거지의 후방기지였다. 일제의 토벌에서 금녀는 항일유격대 대원인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세 살 난 아들 박송림마저 철거하는 왜놈들이 불을 지른 집안에 두고 자기만이 체포되여 오림을 떠났던 것이다. 아들 박송림을 한시각도 잊어 본적 없는 금녀였기에 왕송림의 래력을 알아보려고 애쓰게 되며 그럴수록 점점 자신의 직감을 믿게 된다. 특히 “아버지가 세 살 때 왜놈에게 희생되였다고 하는데 그때 기억이 나는가?”하고 묻는 금녀의 물음에 “그저 집이 활활 타던 생각밖에 없어요”하는 왕송림의 대답에 금녀는 깜짝 놀라지만 불속에 있었던 세 살 난 애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의 생각을 부인하기도 한다. 1966년 겨울, 송림과 춘메의 사랑이 무르익어갈 무렵에 연변에서도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거세차게 일기 시작했다. 왕송림은 연길에 출장을 갔다가 할아버지는 송림이 들려준 금녀와 춘매이네 모녀의 내력을 듣고는 금녀가 바로 송림의 생모가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하지만 내색을 내지 않고 넌지시 “장차 춘메이와 결혼을 하면 어쩔 셈이냐?”고 물었더니 송림이는 “두 집이 한집에서 살기로 했다”고 대답한다. 왕송림은 사실은 김금녀의 아들 박송림이였다. 송림의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참살당하고 송림의 생모인 김금녀가 체포되여 끌려가게 될 때 불속에 뛰여들어 송림을 구해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왕유덕은 자기의 며느리인 만족 항일녀전사 조봉연이 낳은 딸애와 송림이를 모두 자기의 친손자손녀로 키워냈던 것이다. 왕유덕은 비록 내색은 내지 않았지만 김금녀가 바로 송림의 생모임을 직감하게 되며 자기가 불속에서 구해내 기른 송림이에게 친어머니를 찾아주려고 작심한다. 연길에서 오림림장으로 돌아온 후 이곳에서도 잔혹한 “계급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반란파들은 렬사의 아들인 왕송림을 리용하려는 목적에서 그를 림장으로부터 림업국 혁명위원회로 끌어들이며 그더러 간부와 혁명선배들을 박해하는 이른바 “계급투쟁”에 가담하라고 강요하며 왕송림은 혁명위원회의 위원으로 된다. 한다. 이때로부터 왕송림과 리춘메이 사이에는 의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송하림업국에서 제일먼저 잡혀나온 것은 림업국 국장 곽림이였고, 송하공사에서 제일 먼저 잡혀 나온 것은 김금녀였다. 일제감옥에서 아이까지 길렀고 살아나서 나오기까지 한 김금녀를 무조건 변절자라고 의심하면서 잡아가두었던 것이다. 그 특수한 환경 속에서 송림은 “당을 배반하느냐? 장래의 장모를 배반하느냐?” 하는 치열한 내심적인 갈등에 겪게 된다. 강력한 외부적 압력에 못 견뎌 송림은 끝내 김금녀를 “학습반”에 데려오고야 말았다. 바로 아들 송림이 앞에서 어머니 김금녀는 처참한 고문을 당하면서 당당하게 감옥에서의 자기의 소행을 “탄백”한다. 즉 자기가 감옥에서 춘메이를 받아 기르게 된 그 비장한 사연을 이실직고하게 되는 것이다. 김금녀의 “탄백”을 들으며 송림은 더욱 자기의 잘못을 느끼게 되며 “문화대혁명”이란 이 광란의 반동성과 비인간성을 절감하게 된다. 반란파들의 물매질과 발길질에 중태에 빠진 김금녀를 구원하고자 드디여 결심을 내렸을 때 왕할아버지와 동생 계향이가 찾아왔고 바로 사람잡이를 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왕할아버지는 김금녀에게 송림이가 친아들임을 알려주어 모자간은 극적으로 상봉한다. 송림은 황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문화대혁명”과 “반란파”를 저주한다. 바로 이 죄로 송림은 “현행반혁명”으로 몰려 감옥행을 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제15장부터 소설을 마무리하는 제22장까지는 주로 송림의 참회 및 송림과 춘메이 사이의 사랑의 갈등과 사랑의 재생을 그렸다. 문화혁명 10년 동란중의 참혹한 “계급투쟁”, “로선투쟁”은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나 박해를 한 사람에게나 모두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겨우 어머니를 찾아놓고 어머니를 잃은 송림의 상처는 그 누구보다 컸다. 더구나 어머니를 박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사건에 자기도 동참한 것으로 하여 송림은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때 그토록 자기를 사랑했던 춘메이는 감옥으로부터 고향에 돌아온 송림으로 얼음처럼 랭담하게 대한다. 그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리고 의식적이건 핍박에서였건 송림이는 어머니를 박해하여 세상 뜨게 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8년 동안 어느 남자에게도 시집을 가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춘메이는 송림이에게 량가감정을 갖고 있고 사랑의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송림이로 말하면 또 자기의 죄과로 하여 춘메이 앞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보아내고 다시 복권을 하여 림업국 당위서기로 임직하고 있는 곽림이와 송림의 녀동생 왕계향은 리춘메이를 여러모로 설복한다. 그러나 두 사람사이에 두껍게 얼어붙은 감정의 두꺼운 얼음은 쉽사리 녹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송림이도 춘메이도 모두 대방을 피하여 오림림장으로 피해가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또 오림림장에서 만나게 되며, 당조직과 림장의 마음씨 착한 사람들의 조화를 통해 차츰 사그라졌던 사랑의 불티가 되살아나게 된다. 새 시대의 새봄을 맞아 송림이와 춘메이의 마음속에서는 산에서 붉게 타는 진달래처럼 사랑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바《고향》은 “혈연"의 스토리와 플롯에서의 “우연의 일치”를 답습하였다. 비록 편폭 상에서는 많이 확장되여 세부묘사가 강화되고 “문화대혁명” 이후의 묘사에서 적잖은 사건들이 첨가되고 그 미학적구성도 많이 달라진 점은 마땅히 인정해야 하나 스토리와 플롯 면에서는 《고향》이 “혈연”의 기본골격은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혈연”은《고향》의 원형으로서 량자 사이에는 밀접한 계승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고향》의 인물관계와 갈등 설정 류원무, 허해룡의 장편소설 《고향》의 인물관계설정을 본다면 주로 조선족 항일투사 박지연, 김금녀 부부와 한족농민 왕할아버지 일가와의 혈연적인 관계로 설정되였다. 항일투쟁 중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조선족 항일투사 박지연(김금녀)의 어린 아들 박송림을 왕할아버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하여 자기의 손녀 왕계향이와 함께 애지중지 보살피며 송림이를 어엿한 대학졸업생으로 키워준다. 그리고 김금녀는 옥중에서 희생된 한족 항일 녀투사의 딸 춘메이를 자기 친딸처럼 아끼고 어엿한 녀의사로까지 키워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친 모녀보다 더 다정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김금녀의 딸 춘메이는 왕할아버지를 자기의 부모처럼 극진하게 보살펴주고 선뜻이 자기의 피를 수혈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왕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다. 조선족 어머니가 키운 항일렬사의 딸 춘메이와 한족인 왕유덕할아버지가 키운 항일렬사의 아들의 송림이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살벌한 문화혁명 중에서 박송림은 자신의 미숙한 정치적립장과 태도 그리고 당시 엄혹한 정치형세의 핍박으로 인해 자기의 생모 김금녀를 박해하는 “단지고움”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바로 어머니가 혹독한 고문으로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이 모자간은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며 어머니를 죽음에로 몰고 간 반란파와 문화대혁명에 대해 마구 욕설을 퍼붓는다. 바로 이 일로 인해 송림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출옥한 뒤에도 심각한 내심적 갈등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사랑했던 춘메이로부터 랭대를 당하게 되지만 나중에 당조직과 친척, 친우들의 도움으로 갈등은 해소된다. 이 작품에서의 갈등은 주로 제12장부터 나타난다.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중의 잔인한 계급투쟁이라는 이 외부적환경과 주인공 왕송림, 부수 인물 김금자, 리춘메이 등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외적갈등은 점차 내부갈등으로 확산되여 주인공 왕송림과 부수 인물 김금자, 리춘메이 등 여러 사람들의 내심 속에서도 일어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대혁명은 “당과 수령의 명의”로, “혁명의 명의”로 일어난 전례 없는 사회정치운동이였기에 주인공 왕송림은 “혁명이냐? 사랑이냐?” 하는 어려운 량자택일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송림은 당시의 그 불가항력적인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휘말려 “사랑”보다는 “혁명”을 택했으며 그 결과는 핍박에 못이겨 자기어머니를 박해하여 치사케 하는 비렬한 사건에 가담하게 되고 또 그로 하여 방금 찾은 어머니를 영영 잃게 되는 인생비극에 빠지게 된다. 이리하여 박송림은 한 평생 내적갈등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송림을 사랑했던 리춘메이도 “사랑이냐? 어머니냐?”하는 내적갈등으로 오래 동안 내심적인 고뇌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의 이러한 갈등설정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 작중 인물들 사이의 대립, 인물내부의 량가감정이나 가치관의 충돌을 통하여 플롯에서의 긴장감을 유발하였다. 제12장부터 나타난 갈등설정은 이 작품에서의 그 이후의 플롯을 지탱하는 요소이자 원리가 되면서 인물구성(성격구성) 및 세계관과 가치관의 대립을 형상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작품의 주제사상의 표현령역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갈등설정은 그 소재의 중요한 래원으로 되었던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서의《고향》의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3.《고향》의 인물형상의 류형적 특징 이 작품의 주인공은 박송림으로서 이 작품에서 가장 필묵을 들여 부각한 인물형상이다.《고향》의 주인공 박송림의 원형은 비록 “혈연”중의 김청산이기는 하지만 김청산과는 류형적으로 많이 다른 인물형상이다. 즉 김청산이 영국의 소설리론가 포스트가 언급한바 있는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라고 한다면 박송림은 포스트가 언급한 바 있는 “립체적인물(round character)”이라고 할 수 있다. 평면적인물로서의 “혈연”중의 김청산은 성격구조가 단일하기에 독자의 상상력이나 리해의 범위밖으로 달아나지 않으며 더욱이 성격의 발전이란 거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립체적인물로서의 박송림은 혁명렬사의 후대로서 원대한 리상과 포부가 있는 긍정적인 일면이 주도적이기는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압력앞에서 굴복하며 개인의 정치적전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녀자의 어머니인 김금녀를 박해하는데 동참한다. 왕송림(김송림)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성격조합에 의해 이루어진 립체적인물이였기에 비극적역할을 잘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동시에 왕송림(김송림)은 바로 립체적인물이였기에 평면적인물인 김청산에 비해 성격의 발전과 기복이 있고 내심속의 모순갈등이 있기에 보다 깊이 삶과 인간성의 깊이를 제시해주었다. 바로 박송림(김송임)이 이처럼 다양하고 심오한 성격의 소유자인 립체적인물로 그려졌기에 독자들에게 신뢰감과 진실감을 주어 독자들로 하여금 이 인물에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인물의 형상창조에서 그의 내부의 심리적갈등에 대한 묘사를 보다 강화하여 그의 복잡한 심리활동을 더욱 상세하게 묘사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왕송림(박송림) 외에도 리슈메이 역시 립체적인물에 가까운 인물형상으로서 그는 한 남성에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많이 갈등하는 형상이다. 만일 리슈메이의 내면의 갈등에 대한 묘사를 좀 더 강화했더라면 역시 보다 풍만한 립체적인물로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송림과 리춘메 사이의 갈등은 우리들로 하여금 프랑스 고전주의 극작가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 1606-1684)의 비극《르 시드》(1637년)의 남주인공 로드리그와 녀주인공 쉬멘느 사이의 갈등을 련상시킨다. 이 극의 갈등이 “개인의 사랑의 감정과 가족의 영예간의 갈등”인데 반하여《고향》에서의 왕송림의 내심갈등은 “개인의 사랑과 이른바 ‘혁명’ 사이의 갈등”이였으며 춘메이의 내심갈등은 “남성에 대한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갈등”이였다. 그리고 왕송림과 춘메이의 갈등과 결말에서의 갈등의 해소 역시 로드리그와 쉬멘느 사이의 갈등과 그 해소를 련상시킨다. 김금녀는 형상은 대표성을 띠고 있는 형상으로서 어쩌면 그녀는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갖고 있는 연변조선족의 혁명전통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광스러운 항일투쟁의 경력을 지니고 있고 선량한 인간성을 갖고 있는 김금녀가 “문화대혁명” 동란속에서의 억울한 정치적박해로 인해 고문치사를 당한 그 비참한 운명은 연변조선족이 문화대혁명 중에서 당한 억울한 정치적박해를 개괄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민족성, 계급성 이외에도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포함한 인간성도 있음을 표현하였다. 왕유덕은 조선족의 항일렬사의 자식인 박송림을 불속에서 구출해서 친손자처럼 키워준 인간성이 넘치는 인물형상으로서 그의 손녀 왕계향은 항일투사인 자기 아들 왕희춘과 만족 며느리 조봉녀 사이에서 태여난 처녀인데 이 왕유덕(王有德)은 그 이름이 시사하다시피 인간으로서의 덕성을 상징하고 있는 인도주의정신과 인도주의실천의 화신이다. 김금녀와 왕유덕은 모두 평면적인물이기는 바로 이 김금녀 일가와 왕유덕 일가 사이에 피로 맺어진 인연은 이 소설의 가장 주요한 골격을 이루며 민족단결의 주제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캐리어이다. 기타 부차적 인물형상들에 대한 분석은 략한다. 4. 《고향》의 주제사상 이상의 복잡한 스토리, 인물관계 및 갈등설정 통해서 단순했던 “혈연”의 주제사상을 내포시키면서도 또한 그것을 초월하여《고향》으로 하여금 복합적인 주제를 가지게 했는바, 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혈연”의 이른바 “민족단결”과 혁명적인도주의 주제의 중복적인 표현이다. 즉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항일투쟁은 한족과 조선족 인민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피로 뭉치게 하였다”는 민족단결의 주제이며 계급적사랑에 바탕을 둔 혁명적인도주의 주제이다.《고향》이 주제는 비록 “혈연”의 주제사상의 답습이기는 하지만 “혈연”에 비해 보다 충분한 편폭을 통하여 상세하게 표현되였다. 둘째, 문화대혁명이 조선족인민대중들에게 준 깊은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나아가서는 비인도주의적인 “계급투쟁절대화”의 론리를 단죄하는 주제이다. “당과 수령의 명의”로, “혁명의 명의”로 자행된 문화대혁명중의 만인 대 만인의 잔인한 계급투쟁은 시비와 흑백을 전도하여 수많은 충성스러운 조선족 당원간부들과 인민대중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음에로 내몰아 감으로써 조선족인민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내심의 상처를 주었다는 주제사상을 표현하였다. 이 소설은 망둥이 제 새끼 잡아먹는 것 같은 “문화대혁명”이란 이 전대미문의 내란의 본질을 모자간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비극으로 집약시킴으로써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왕송림과 김금녀 그리고 리춘메이의 형상과 세 세 사람간의 갈등은 이 두 번째 주제를 표현하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대혁명중에서의 항일투사인 김금녀의 비운(悲運)은 전반 중국조선족의 비운이기도 하다. 이 두 번째 부분의 주제사상은 1962년에 발표된 “혈연”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서《고향》에서의 창조적인 확장이였다. 이상의 두 가지 주제사상은 하나로 유기적으로 융합되여 마치 나무의 줄기처럼 이 장편소설의 다양한 부분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붙잡아줌으로써 전반 작품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5.《고향》의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문화대혁명”의 10년 동란 중에서 연변은 자기가 갖고 있는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가 혹심했다. 문화대혁명 10년동안에 빚어진 연변의 억울한 시건으로 해서 연변에만 해도 피해자가 무려 3만 1,532명에 달했는데 그중에서 2.205명이 죽고 3,077명이 불구로 되고, 1,052명이 로동능력을 상실했다. 4인무리가 타도된 후 당의 ‘발란반정(撥亂反正)”의 거세찬 동풍을 타고 “문혁의 오유와 혼란을 시정하는 사업이 시작되였는데, 1978년 6월 20일 주덕해동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1978년 7월 4일에는 이른바 “1967년 8.2, 8.4 판국폭란”, “조선간첩”, “지하국민당” 등 억울한 사건, 가짜사건, 그릇된 사건에 대해 시정했다. 10년 동란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연변도 전국과 마찬가지로 개혁개방을 맞아 “문화대혁명”중에 생겨난 수많은 억울한 사건들을 시정하는 거세찬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문학 분야에서도 발 빠르게 중국 주류문단에 일기 시작한 “상처문학”, “반성문학”의 흐름에 편승하여 연변식의 “상처문학”, “반성문학”이 나타난 것이다.《고향》은 바로 이러한 사회의 정치콘텍스트 속에서 나탄 것이다. 이 시기 류원무는 시대의 발걸음에 맞추어 “상처문학”, “반성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단편소설 “비단이불”(《연변문예》, 1982년 제7호)이다. 이 작품은 “비단이불에 깃든 이야기를 통해 인민공사화와 ‘문화대혁명’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끼친 재난을 비판하면서 백성이 없으면 간부도 없고 나라도 없다는 철리를 제시하였다.” 이런 문학적사색의 연장선속에서 우리는 “문화대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깊은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그 비극산생의 원인을 추적하고 반추하는《고향》같은 장편소설을 창작하게 된 창작배경이나 창작동기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류원무의 이러한 새로운 문학사유는 어찌하여 생겨나게 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 원인은 사상해방의 거대한 조류를 타고 중국 그리고 연변 문단에 나타난 사실주의와 인도주의 문학정신의 복귀에 있었다. 특히 투철한 작가의 주체성과 사회비판정신을 갖춘 김학철의 문학정신에서 사숙(私塾)한바가 컸음을 류원무 자신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하고 담대한 사나이! 김학철선생은 게가 아니였다. 게를 먹는 용사였다! 《20세기의 신화》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발표도 되지 않은 작품을 수색해내가지고 “죄”를 다스리는 그 자체가 “신화”다. 다른 한편 수십만 자에 달하는 그 소설에 혹 과분한 언사가 있고 일부 폐단도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반우파투쟁의 확대화를 질책하고 좌경로선을 비판한 첫 장편소설이라고 본다.(물론 뒤늦은 견해이지만) 지금 전국 문단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장현량의 중편소설 《록화수》도 좋고 종유희의 중편소설 《황하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도 좋고 모두가 60년대 초기가 아닌 80년대 중기에 와서야 비로소 좌경로선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신앙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만세소리 속에서 검증되는 것이 아니며 맹목적인 순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학철에 대한 나의 견해에는 일대 전변이 생겼다. 애숭이 때와 같이 다시금 선생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작가라면 저런 주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앞에 마주앉아 작가적인 맑스주의 신앙에 대하여, 작가의 수양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이상의 인용문은 류원무선생이 1987년에 발표한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류원무선생은 비록 김학철옹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의 진가(眞價)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물고 늘어지는 우리 문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면 사상관념이 아주 일찍이 해방되였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열린 문학사유를 갖고 있었기에 류원무선생은 새 시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굴지의 중견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五. 《고향》의 형식에 대한 분석 1.《고향》의 서사구조와 플롯의 특징 첫째,《고향》시점과 화자 《고향》의 원형인 “혈연”은 짧은 단편소설이였기에 주인공을 제1인칭화자로 내세워 전반 이야기를 서술하였지만 시공간적으로 보다 전개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편소설인 까닭에《고향》에서는 제3인칭 전지적화자로 바꾸었다. 둘째, 《고향》의 서술시간-순차의 특징 순차(Order)는 구조주의시학에서 다루는 시간의 개념을 형성하는 범주의 하나이다. 순차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이 발생한 시간순서를 가리키는데,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rse)이 동일한 순서(1-2-3-4)를 가지고 있는 “표준적 계기성”과 그렇지 않은 “시간변조적 계기성”이 있으며 시간변조는 “소급제시(analepsis)”와 “사전제시(prolepsis)”로 다시 나뉘여진다. 《고향》은 순차(Order) 면에서 본다면 전형적인 “소급제시(analepsis)”의 서술형태를 가진 작품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은 개혁개방초기 주인공이 박송림이 감옥에서 석방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이 작품에서의 주요한 사건은 대부분 “문화대혁명”시기나 항일전쟁시기까지 소급된다. 이를테면 제8장 “피맺힌 사연”, 제11장 “왕유덕일가”, 제13장 “감방에 핀 매화” 등 부분은 가장 전형적인 “소급제시(analepsis)”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전도적서술로서의 이런 “소급제시”는 현념(懸念)을 조성시킴으로써 독자들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심미적효과를 갖게 하였다. 셋째,《고향》의 플롯 류형의 특징 소설학에서 일반적으로 소설을 “플롯중심소설”과 “인물중심소설”로 량분한다. 이 두 개의 플롯 류형은 사건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가지 자질- 행동적자질과 심리적자질에 대응한다. 당연히 행동자질이 중추가 되는 비심리적인 소설이 “플롯중심소설”이다. 따라서 “플롯중심소설”은 인물의 심리변화와 발전 과정에 서술의 초점이 두어지기보다는 사건으로서의 행동의 전개가 서술의 대상이 되는 소설일반을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인물중심소설”은 인물의 심리와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때문에의 사건이나 행위들은 인물의 심리나 성격적 특징에 대한 표현이거나 징후이며 당연히 사건이나 행동은 인물의 성격에 종속되는 것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로신의 《아Q정전》 같은 작품이 이런 소설의 보기이다. 이런 작품들에서의 사건이나 행동들은 례외 없이 작중인물의 심리와 성격의 지표가 되고 있다. 그러면 《고향》은 구경 어느 플롯 류형에 속하는가? 《고향》은 기본상에서 “플롯중심소설”에 속하지만 일부 “인물중심소설”의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에서 언급했던 대부분의 “소급제시(analepsis)”는 주인공들의 심리나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제12장부터 서술된 문화대혁명중에서의 주인공 박송림이 직면한 외부적환경과 의 그중에서 벌어지는 사건속에서의 그의 행위들은 그의 내심갈등과 성격을 묘사하는데 바쳐졌기에 다분히 “인물중심소설”의 요소를 갖고 있기도 하다. 총적으로 이 소설은 “플롯중심소설”적인 요소가 기본을 이루면서도 “인물중심소설”의 요소도 갖고 있는 과도기적인 플롯 류형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비극적플롯 (Tragic plot)”과 “희극적플롯(comic plot)”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 류형으로 나누었다. “비극적플롯”이란 주인공의 운명이 플롯의 최종단계에서 앞서의 단계의 비해 하강하는 구조를 지칭하며 “희극적플롯”이란 그 반대로 최종단계에서 상승하는 구조를 지칭한다. 허해룡의 “혈연”중의 주인공 김청송이 전형적인 “희극적플롯”의 인물이라면 《고향》의 주인공 박송림의 운명선은 우와 아래를 교차하다가 종당에는 상승하기에 희극→비극→희극의 기복을 이루는데 이중에서 “비극적플롯”의 요소가 아주 많고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면 왜 이처럼 복합적인 요소가 나타났을까? 그것은 첫째로 원형으로서의 “혈연”의 “희극적플롯”의 잔재가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러면서도 문화혁명중의 주인공의 비극을 반드시 묘사해야 하였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그 시대(개혁개방초기)가 모든 사람들이 문화대혁명 중의 모든 원한과 갈등을 해소하고 앞을 내다보면서 단합하여 살아갈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이냐? 어머니냐?”하는 내심 갈등속에 빠져서 박송림의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해 주지 못하는 춘메이를 다독여주고 설복하는 송화림업국 당위서기 곽림의 말은 개혁개방 초기의 시대정신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심정은 나두 알만하네. 얼마나 처참한 상처인가. 겨우 어머니를 찾아놓구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러한 상처가 어찌 송림이 한사람에 국한되겠어. 전당전민이 다 상처를 입었는데. 이런 상처를 빨리 아물구자면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구 앞을 내다봐야지.” 총적으로 《고향》에서 보이는 희극 → 비극 → 희극이라는 이 플롯구성은 결코 《춘향전》 같은 전통소설속의 “고진감래(苦盡甘來)”식의 해피엔딩(happy ending)이나 대단원(大團圓)이 아니라 특정한 당시 그 시대의 시대적요구에 부응한 결말처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2.《고향》의 문체의 특징 여러 작가들이 아무리 동일한 플롯, 작중인물, 배경을 설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이야기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나오는 것인 만큼 문체가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그것은 매개 작가들마다 말하는 리듬, 문장 길이, 명료도, 유머감각이나 이미지, 은유를 구사하는 능력 같은 것들이 각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견지에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뷔퐁(Buffon, 1707-1788)은 “문체는 곧 사람”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즉 문체는 작가의 개성의 표현으로서 매개 작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특유의 문체로 글을 쓰며 어떤 작가도 다른 작가의 문체를 흉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향》은 작자가 둘이기 때문에, 또한 그 집필분공을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느 것이 류원무의 문체이고 어느 것이 허해룡의 문체인지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통괄적으로 이 작품에 표현된 문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사실주의소설문학에서 중요시하는 “일어일물설(一語一物說)”같은 “정확한 언어적표현”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두 고참 문학편집원들에 의해 창작한 것이기 기본상에서 정확한 언어표현을 구사하고는 있지만 정확하지 않고, 비규범적인 언어적표현들이 간혹 눈에 띠기도 한다. 그 사례들을 몇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자. ① 송림이 곽림의 손에서 들가방을 다시 빼앗으려 하였으나 곽림은 손을 홰홰 물리쳤다. ② 서보흥이 곽림의 손을 으득으득 잡아끌었다. ③ 늙스그레한 사나이와 검실검실한 젊은이가 허망지망 달려왔다. ④ 슈메이이는 입귀로 흐르려는 고기점을 고비손으로 밀어넣고 해죽했다. ①은 의성어 “홰홰”와 동사 술어 “물리쳤다”가 잘 조응이 되지 않은 경우이고, ②는 “으득으득”이란 의성어를 잘 못써서 “잡아끌었다”는 동사 술어와 조응이 되지 않은 경우이고, ③은 “허망지망”이란 비규범적인 의태어를 사용한 경우이고, ④는 “고비손”란 비유를 잘못 시용한 경우이다. 진정한 작가이면서 진정한 스타일리스트는 “오직 한 개밖에 없는” 명사, 동사. 형용사나 부사나 끝까지 고심해서 찾아내는 끈기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점에서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둘째, 다양한 수사학적인 언어표현을 하려고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만 이 작품만의 개성적인 문체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원인은 이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이 이중적인 민족문화의 신분을 가진 인물이였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조선족이면서 한족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된 박송림(왕송림), 한족이면서 조선족 어머니에 의해 양육된 리춘메이(리춘이), 그리고 등장인물 속에는 왕유덕, 곽림, 류진, 서보흥, 왕계향, 슈란 등 한족들이 오히려 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런 한족인물들의 대화를 아주 개성 있게 표현하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문체는 김학철옹의《격정시대》, 《20세기의 신화》같은 작품이 갖고 있는 개성적인 문체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체의 각도에서만 볼 때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생동미(生動美)와 개성미(個性美)를 크게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문체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는 작가의 출생하고 성장한 지역의 언어적 특징과 후천적인 “교육”과 “독서”를 들 수 있다. 김학철옹이 원산에 태여나서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을 받았고 상해, 북경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거나 문학공부를 하면서 많은 독서를 하게 된 것과는 달리 류원무와 허해룡은 모두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여나서 중국 간도(연변)에서 성장하면서 교육을 받았기에 이 두 분의 언어적 토대는 함경북도 방언에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언어의 규범미, 세련미, 풍부미가 김학철 같은 분에 미치지 못하게 되였다고 사료된다. 사실 언어적각도에서 볼 때 리원길이나 고신일 같은 비함경북도 소설가들의 언어구사력이 함경북도출신의 소설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것도 같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또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 안수길 같은 함경도 출신의 소설가들은 의식적인 노력 거쳐서 걸어 다니는 토속어 사전이라고 할 만큼 자기의 장편소설 《북간도》의 대화부분에서 풍부한 간도 사투리(실은 주요하게 함경북도 사투리)와 토속어를 구사하여 자신의 문체적특징을 살려간 사례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소설계의 연변출신의 소설가들은 안수길(1911-1977)의 장편소설 《북간도》의 연변의 냄새가 물씬 나는 토속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六. 나오는 말 류원무, 허해룡의 장편소설《고향》은 개혁개방 전기의 초기에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일찍 나온 장편소설 중의 하나로서 비록 사상예술상에 미흡한 점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작품보다 선행했던 리근전의 장편소설《고난의 년대》나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김학철의 혁명성장소설《격정시대》가 모두 조선족의 흘러간 과거의 력사에서 소재를 취한 반해《고향》은 조선족의 흘러간 력사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지만 현실의 사회문제와도 긴밀한 련관성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선행시기 기존의 민족단결의 주제를 이어감에 있어서나 새시기 문학에서의 상처문학, 반성문학의 주제를 심화시킨 면에서나 모두 중국조선족의 새시기 소설분야에서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고향》은 기존의 조선족문학사나 연구나 문학비평에서 별로 중시를 받아오지 못했다. 필자의 이 론문은 말 그대로 포전인옥(抛塼引玉)의 글이다. 필자는 이 졸문을 계기로 하여 이 작품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나아가서는 류원무의 전반 소설세계에 대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2009년 4월 6일 연길에서
72    나는 누구인가? - 문화신분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6573  추천:52  2009-04-05
☆연설문☆     여러분, 고대 그리스의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알라”는 말을 한적 있습니다.   철인,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는 전제 혹은 첫 출발점은 바로 자기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모두 철인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고자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상대로 미래의 철인, 지혜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대부분은 가장 전형적인 이민문화의 속성을 갖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후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의 강연의 키워드 혹은 중심사상은 디아스포라입니다.   여러분, 그럼 먼저 오늘 강연의 키워드인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이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구약성서》 <신명기(申明記)>에 나오는 말로 고국 팔레스타인의 땅을 쫓겨난 유태인들의 민족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최근 20세기후반에 들어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부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입니다. 중국조선족 북방 시단의 원로시인 리삼월선생은 《접목》(1993)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접목의 아픔을 참고 먼 이웃 남의 뿌리에서 모지름을 쓰면서 자랐다   이곳 토질에 맞게 이곳 비에 맞춤하게 이곳 바람에 어울리게   잎을 돋치고 꽃을 피우고 이제는 접목한 자리에 든든한 테를 둘렀거니   큰바람도 두렵지 않고 한 마당 나무들과도 정이 들고 열매도 한 아름 안고…   그러나 허리를 잘려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   가끔 메아리로 되돌아오면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을 산 설고 물 설은 타향의 나무에 접목된 접수(椄穂)에 비유합니다. 이 어린 나뭇가지는 타향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해 튼튼하게 자라났고 다른 나무들과 어울려 숲을 이루었으나 “허리를 잘려 /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만은 잊을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와 생활사를, 우리민족의 정체성의 갈등을 뛰어난 은유와 상징기법으로 노래한 시라고 하겠다. 다만 우리를 중국조선족을 “남의 뿌리”에 접목한 접수(椄穂)하고 한 것은 어딘가 탐탁치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문화의 뿌리에다 남의 문화의 가지를 가져다 접목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달포 전 (2006.7.27), 한국 텔레비죤 KBS 1방송에서《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를 눈물을 흘리면서 본적 있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한 중성인의 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면서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저도 두 눈언저리가 축축하게 젖어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인(中性人)으로 태여나서 사춘기까지는 여자로 행세를 하였지만 그녀(그)의 《여자》 몸속에는 분명히 남성(男性)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그)는 여자 친구들로부터도, 남자 친구들로부터도 모두 요상한 괴물로 치부되고 왕따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피가 터지도록 물매를 맞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그녀(그)는 남자로 되고자 결심하며 그냥 일생을 치마를 두르고 여자로 살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가출을 단행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성(性)의 정체성을 상실한 삶은 죽음보다 무섭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남자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그녀(그)의 하루 일과는 불룩한 여자의 가슴을 남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천으로 납작해지도록 감싸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자의 강건한 몸뚱이와 울룩불룩한 근육을 갖고자 그녀(그)는 땀을 철철 흘리면서 거중을 하는가 하면, 남자로 전환하는 성전환수술을 하려고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때로는 끼니도 거르면서 악착 같이 돈을 모으는 한편 간이 다 잘 못 되여 낭종(嚢腫)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남성호르몬주사를 맞아가면서 남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투(死闘)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적자아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제도 될 수 없는 이다지 평범한 욕구의 실현이 그녀(그)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거는 일이였습니다.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였습니다.   정상적인 고추나 보리를 갖고 태여나서 이 세상에서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깊이깊이 감사를 드려야함을 어제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습니다.   한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도 일부 사람들은 이처럼 피눈물 나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거는 모험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인간의 아이덴티티-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광장에서 젊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기를 알라”고 역설했듯이 “자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여 참새처럼 말을 쨀쨀 하기 시작하면 부모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바로 “난 어디서 왔어?”가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철없는 아이들에게 흔히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병원에서 사 왔다” 등의 무책임한 대답을 합니다. 한 고지식한 한 아이는 자기를 “공원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 하니 정말로 다리 밑의 더러운 구석구석을 샅샅이 돌아보면서 자기가 누워있었을 만한 곳을 “이곳일까? 저곳일까?” 머릿속으로 거듭거듭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다가 적지 않은 아이들은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처럼 이른바 “성명위기(姓名危機)”에 직면하게 됩니다. 에릭슨은 원래는 독일인이였으며 에릭슨이라고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계부의 성을 따라 헤르버그(Herberger)라고 성을 고쳤답니다. 이 일을 거치면서 그는 자아인식에서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중에 그는 자기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의 공식적인 신분을 확정하게 됩니다. 즉 자기의 계부와의 동일성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린다면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그에 귀순하게 된 셈이지요. 이는 아동심리발전에서의 필연적인 경력이며 일종 권위에 대한 굴복인 것입니다.   어디 독일의 에릭슨뿐이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우리대학의 모 교수님의 양자도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에릭슨과 비슷한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네아이들이 자기네 부모들이 뒤에서 쉬쉬하면서 뒷공론하는 말들을 알아듣고는 모 교수의 양자를 업둥이라고 놀려댔던 것입니다. 모 교수님의 양자는 자기의 생부생모가 누구이고 어디서 사는가를 캐묻게 되었습니다. 모 교수님 부부는 할 수 없이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모 교수의 양자가 이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은 전기도 안 들어간 두메산골이였고 그곳에서 살고있는 생부생모는 숱한 자식들을 거느려 째지게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거퍼 한 달도 채 안 되여 모교수의 양자는 자기가 외독자로 모 교수부부 슬하에서 얼마나 사랑을 받고 호강을 하면서 자라왔는가를 깨닫게 되여 연길에 다시 돌아와 모 교수부부에게 울면서 사과하고 다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가족성원의 구성이 복잡한 재혼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이런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갖고 있을 겁니다. 특히 어머니를 따라 계부(継父)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성(姓)이 계부 그리고 계부의 자식들인 이모이부(異父異母)의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계부와 재혼한 뒤에 낳은 이부동모(異父同母)의 동생들과도 다른 데 대해 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되는 겁니다. 즉 가정 내에서의 성(姓)의 동일성을 잃음으로 하여 심각한 “성명위기(姓名危機)”에 빠지게 되는 법이지요. 이처럼 재혼가정에서 자라는 형제자매들은 동일성의 정도가 많고 적음에 따라 각 소 그룹들 간의 친소(親疎)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즉 부부가 재혼한 뒤에 낳은 동부동모(同父同母)의 형제자매 그룹은 이런 재혼가정에서 정체성의 통일을 가지게 가장 쉬우며 따라서 아버지가 전처와 살아서 낳은 자식들인 동부이모(同父異母)의 형님, 누나들보다는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님과 누나들에서 동일성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이들과 더 친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머니가 같은 것이 아버지가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를 뿌리 깊은 모권제의 유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중요한 지위로부터 인기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인간은 이처럼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이나 가정(家庭)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만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밖에도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됩니다.   쉐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오셀로》의 동명주인공의 그 무서운 질투는 그의 내심속의 극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리해하지 않고서는 그 생성 원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니스 원로원의 원로인 브라반쇼우는 백전백승의 명장인 흑인장군 오셀로의 용감성과 지혜로운 용병술에 대해서는 탄복하지만 자기의 딸 데스니모나가 흑인인 오셀로를 사모하여 동거까지 하는 것은 결사 반대합니다. 리간쟁이 이아고가 데스디모나와 오셀로장군 그리고 오셀로장군의 부관이며 미남인 캐시오 사이에서 리간을 붙이고 나중에 오셀로가 데스디모나의 목을 조여 죽이도록 종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흑인장군 오셀로의 깊은 마음속의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분명하게 보아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증언하고 리론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한 첫 사람은 프란츠 파농(1925~1961)입니다. 파농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아인의 후예로서 중부 아메리카의 마르티니섬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국이였던 알제리를 지배했던 종주국-프랑스를 자기의 "조국"이라고 착각을 하고 프랑스가 독일 파쇼에 의해 강점당하자 비분을 못 이겨 친구들과 함께 의용군을 무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들어가 참전합니다. 그는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지만 해방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승전경축파티에서 오히려 프랑스 녀인들의 질시와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프랑스 여인들은 포로가 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병정들과는 춤을 추지 못해 발광하지만 아무리 자기들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라도 "깜둥이"들과는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파농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자문하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1997년부터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의 붙박이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면서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지단과 함께 프랑스에 우승의 월계관을 안겨주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서부 인디안출신의 축구명장 티에리 앙리도 "내 조국 프랑스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았습니까.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의 주장 지네딘 지단이 2006년 7월 10일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박치기를 한 이유도 그가 알제리아계 이민출신의 디아스포라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마르코 마테리치가 경기도중에 여러 번이나 지단을 보고 "비렬한 테러리스트", "네 어미, 녀동생은 매춘부"등 험악한 언사로 모욕했다는  것은 그가 알제리아계 이민출신이라는 점이 타겟(target)이 되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은 지단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어 박치기를 하게 했고 그로 인해 지단은 레드카드를 받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면서 자신의 축구생애를 마무리했고 프랑스는 억울하게 이탈리아에게 무릎을 꿇고 말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백인종의 문화권속에서 살아가는 재구미 동포들은 오늘도 겪고 있습니다. 바나나처럼 속은 흰색으로 동화되었더라도 겉만은 여전히 노란색으로 남아 있는게 바로 재구미 동양인출신 디아스포라(Diaspora) 2세, 3세들입니다. 스톡홀름대학동양학연구소 소장인 조승복교수의 따님은 프랑스인인 어머니를 닮지 않고 동양인인 아버지를 꼭 빼어 닮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과년한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그렇게 기뻐한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구미문명권속에서 섞여 사는 우리 백의민족 디아스포라들의 고충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피부색이 노랗고 키가 작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전형적인 몽골인종의 얼굴을 가진 자기의 딸에게 오리지널 스웨덴 백인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어찌 부모로서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디아스포라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혼혈과 혼종과 인종적 아이덴티티 및 주체의 확립문제입니다. 서울말 “튀기” 그리고  연변사투리 “짜구배”가 환기시키듯이 혼혈인들은 “사이에 있는 것, 모호한 것, 합성된 것”이란 점에서 순혈주의에 기초한 배제의 정치학에 의해 인종적, 민족적 편견과 멸시를 받게 됩니다. 동시에 “나”이면서 “나”가 아니고, “너”이면서 “너”가 아닌 “튀기”의 이중성과 양가성은  인종적 아이덴티티 및 주체의 확립에 있어서 혼혈아들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몇 년 전, 스페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세서 태어난 “튀기”임을 고백하면서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며 눈물을 훔치던 여성 탤런트 이유진의 모습은 그런 푸닥거리의 힘이 얼마나 강고하며 뿌리 깊은가를 예증(龋証)하고도 남습니다. 이 비극적 코미디는 그녀가 경험하는 “굴욕”의 시작과 끝이 “국민 되기” 문제, 구체적으로 국민에서의 배제와 국민에로의 편입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선족 아버지와 한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의 한 은사님의 딸은 연변 밖의 외지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언제나 자기가 조선족임을 숨기고 우리말이 아닌 한어만 하면서 한족으로 행세하였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우리 문학을 가르치는 대단한 교수이고 조선족의 최고의 엘리트에 속했지만, 그 아버지가 속해있는 조선족공동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는 중국에서는 약세문화에 속하고 어머니가 속해있는 한족공동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는 중국에서 강세문화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속으로 자기 딸도 우리민족으로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민족에 대한 사랑을 운운하는가 하면서 은사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은사님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충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혼혈인들의 인생은 비극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가난과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미식축구계의 최우수선수로 우뚝 부상하여 한국인 어머니를 모시고 금년 4월에 금의환향한 자랑스러운 혼혈청년 하인즈 워드를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동양인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혼혈청년 하인즈 워드가 미국사회에서 이만한 인생의 성공을 이룩하는데 얼마만큼 피 나는 노력을 했겠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체질인류학적으로 똑같은 몽골인종에 속하는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집단인 우리 중국조선족이나 재일동포들은 이런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겪지 않게 된다고 해도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한 세기 가까이 일본에 살아오면서도 일본국적을 얻지 못하고 나그네 신세로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은 해마다 한 번씩 날인-손도장을 찍어야만 일본에서의 체류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니 이런 민족적인 수모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재일동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본문화권에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 즉 국외자(局外者), 방외인(方外人)으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재일동포들과는 달리 중국의 국적을 갖고 있기에 헌법상으로는 중국경내의 모든 민족들과 동등한 평등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주체가 살고 있는 연변은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 주류문화에 상대해 변두리적인 위치에 처해있으며 따라서 우리도 중국에서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10대 관계를 논함”이란 글에서 모택동이 지적한 것처럼 실질적인 불평등은 아직도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역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설사 우리가 중국에서 “인사이더”, 즉 당국자(当局者), 방내인(方内人)으로 처신을 하더라도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개가 쥐를 잡으러 나서듯이 싱거울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도를 넘는 과분한 정치참여의식을 자조적으로 말할 때 “중국의 정치는 북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속에는 정치의 중심인 북경에서나 해야 할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정치의 변두리에 처해 있는 연변조선족들이 너무 설친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말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중국에서의 자기의 정치적 위상에 대해 착각을 하고 싱거운 짓을 한 적이 많습니다.   우리는 거주국인 중국에서만 아니라 모국인 조선반도의 남과 북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마찬가지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1989년, 저는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평양에 가서 반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연구학자로 체류한 적 있습니다. 비록 조상의 땅이고 아버지의 고향에 갔지만 그때 나의 신분은 중국학자였습니다. 조선 측에서도 나를 그렇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친척이나 친지를 만나보자고 해도 외국인에 대한 규정에 좇아 김일성종합대학 외사부에서 허락하고 배치해야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대접을 받아 평양에서는 고위급관원들이나 타고 다니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금강산도 다녀오고 친척방문도 다니고, 외국인 전용상점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평양의 서민들은 엄두도 못내는 창광원의 수영장이나 사우나탕, 이발소에 가도 외국인 전용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도저히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 반년 동안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평양에서 생뚱 같이 외국인의 대접을 받아 호사를 하면서도 “나는 대관절 누구인가?”를 거듭거듭 묻게 되였습니다. 오히려 평양의 서민들처럼 초만원의 기차, 지하철, 버스나 공공목욕탕, 이발소 같은 공중교통이나 공중서비스시설에서 곡경을 치렀다면 아마도 이런 의문이 덜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광주 김씨의 원조(遠祖)는 신라의 천년사직을 세우고 지켜왔던 김알지 왕이고 족보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이 우리 광주김씨의 직계조상입니다. 경순왕이 천년 사직(社稷)을 통째로 신흥 왕조인 고려에 들어 바치고 그 다섯째 아들이 왕건으로부터 지금의 광주군에 지방관원으로 책봉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남한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근교의 광주군(広州郡)은 우리 광주 김씨의 발원지입니다. 하기에 서울은 말 그대로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장이지요. 1945년 8.15광복 후, 평양에서 살던 나의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삼촌은 1952년 겨울 강원도 양구 최전방에서 조선인민군과의 대치전(対峙戦)에서 전사하여 지금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19호 묘역에 누워 계십니다. 그래서 서울 역시 저에게는 아주 친근한 고장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저는 역시 외국인으로 치부됩니다.   1993년 3.1절을 하루 앞둔 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공항안의 대기실에서 입국하는 줄에 서서 입국검사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날따라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좋이 반시간을 기다려서 려권을 검사원한테 들이밀었더니   “외국인은 저쪽으로 가세요.” 라고 간단히 대답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 사람을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저도 모르게 입국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의 줄에 끼여 들었음을 깨닫게 되였지요.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외국인들의 줄에 선다는 자체가 김포공항에서는 본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동물적인 귀소본능이 이렇게 시켰어도 제가 찾아온 조상의 땅은 분명히 나를 외국인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나는 멋 적게 벽안자염(碧眼紫髯)의 외국인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친 제일 뒤꼬리에 다시 뒤돌아가 서서 다시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나는 대관절 누구인가?”를 묻게 되였습니다.   2004년, 저는 한국대전에 있는 배재대학에 객원교수로 나가게 되여 그쪽에 서류를 보낼 때, 제가 10여 년 전에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반년 동안 체류했던 경력을 솔직히 이력서에 써넣었더니 한국으로부터 사증발급인증서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솔직함이 오히려 자신을 불편스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국 안기부 쪽에서 저의 신원을 다시 조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반 학기가 다 지나 가서야 한국에서 겨우 서류가 도착하여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이런 고충은 아마도 저희들 같은 디아스포라들만이 겪게 되는 고충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저 같은 디아스포라들의 처지를 생각할 때 마다 박쥐 우화를 련상하군 합니다.   조선에는 이런 박쥐 우화가 있습니다. 새들끼리 봉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를 마련했는데, 박쥐만이 불참했습니다. 봉황이 박쥐를 불러놓고 꾸짖자, 자기는 네발을 가진 길짐승이므로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기린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는데, 박쥐가 또 불참했습니다. 그래서 기린이 꾸짖으니, 자기는 날개가 있어서 길짐승과는 관계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후로 박쥐는 길짐승과 날짐승 모두에게 미움을 사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활동하게 되였다고 합니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박쥐처럼 길짐승과 날짐승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1930년대 초반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들에서 발생했던 “민생단사건”에서 천명도 넘는 조선족혁명자들이 같은 항일대오 내의 동지들의 손에 무참하게 학살당했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을 보면 역시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항일유격대의 유능한 지휘관이였던 박두남이 억울하게 “민생단”으로 몰려 “왜놈도 죽일 것이고 공산당도 죽일 것”이라고 고민하면서 추운 산속에서 두 달 이상이나 헤매다가 발이 동상을 입어 썩어 들어가게 되여 어쩔 수 없이 일제에게 투항한 것이나, 역시 “민생단”으로 몰려 혁명대오를 이탈했지만 왜놈에게는 차마 투항할 수 없어 1년 동안이나 잠복해 있다가 산속에서 방황하다가 어쩔 수 없이 왜놈에게 투항한 중국공산당 동만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의 비참한 인생경력을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고민과 마음속의 깊은 상처를 우리는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문화혁명 중 연변의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반국폭란(叛国暴乱)”이라는 감투를 억지로 뒤집어씌우고 무력으로 탄압한 이른바 1967년의 “8.2, 8.4사건”과 그 후의 연변 각지에서 만연된 “조선특무색출사건”(연변지역에서만 해도 조선족들 속에서 천명을 훨씬 웃도는 이른바 “조선특무”들이 색출되였음) 역시 그 궁극적인원인은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날짐승과 길짐승의 요소를 두루 겸비하고 박쥐는 림기응변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박쥐와 족제비”라는 이솝우화에서 박쥐는 새를 미워하는 족제비에 붙잡혔을 때는 자기는 새가 아닌 쥐라고 말해서 목숨을 구하고 쥐를 미워하는 족제비한테 붙잡혔을 때 자기는 쥐가 아니라 새라고 해서 목숨을 구합니다. 이처럼 박쥐는 포유류이면서 날아다니기 때문에 설화문학에서는 길짐승과 날짐승 사이에서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하는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동물로 등장합니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중국조선족의 특성은 중국조선족출신의 신 친일파 김문학 같은 인간들에게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되였습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구성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량난의 난감한 처지에 빠지거나 안팎으로부터, 량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신앙과 기회주의가 뒤섞이고 방황과 추구가 부단히 교체되는 겁니다.   아무튼 박쥐같은 처지와 처신술은 중국조선족 만이 아닌 모국 밖의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 백의민족 디아스포라들의 숙명인지도 모르며 또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많은 비극이 빚어지는 지도 모릅니다.   객관에서 우리들을 보는 시각이 복잡하고 미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마음 역시 복잡하고 미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는 아주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중국의 한족이나 기타민족의 문화를 “타자화(他者化)”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중국 국가대표팀과 조선이나 한국국가대표팀이 맞붙어 축구경기를 펼치게 되는 경우에 나는 에누리 없이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조선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군 합니다. 축구에 한해서만 내 마음속에서 중국국민으로서의 국민의식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의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축구는 정치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필경 저는 중국에서 태여나서 중국에서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기에 내 마음속의 중국콤플렉스는 대단하다. 내 마음속의 이런 “중국 콤플렉스”는 조선,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유감없이 표현됩니다. 즉 중국의 국문만 벗어나오면 저는 엄연한 중국 조선족이 되여 중국의 립장에서 서서 다른 문화를 타자화(他者化) 합니다. 심지어 조선반도의 남과 북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문화에 대한 부정이나 폄하는 더욱 저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저는 진심으로 내가 살아가는 나라 중국의 번영창성을 바라고 중국이 세계 민족과 국가의 수림 속에서 우뚝 선 한 그루의 거목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는 량가감정(兩家感情)을 가지고 모국과 중국을 경우에 따라서 부동하게 타자화(他者化) 하기도 하고 지극히 사랑하기도 합니다. 저는 마치도 남성과 녀성을 공유한 중성인(中性人)처럼 모국과 중국에 대한 진한 애정(愛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친일파 김문학이 연변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조선족들을 갈대나 박쥐같은 속성을 지녔다고 지적한 것은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다만 김문학이네 형제들처럼 조상의 나라 모국도, 태여 나서 자란 중국도 모두 타자화(他者化) 하면서 일본극우세력에 편승하여 일제가 만들어낸 황국사관의 잣대로 이 량자의 문화를 재고 나아가서는 이 량자의 얼굴에 모두 똥칠을 하는 매국배족의 짓거리는 설사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해도 우리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문학처럼 자신은 그 어떤 민족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은 국제인이라고 표방하고 자기는 민족문화의 뿌리와는 완전히 단절된 존재라고 표명하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새로운 거주국 일본의 주류문화에 편승하여 일본극우세력의 대변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때로는 양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고 의심을 받고 또 그래서 곤혹스럽고 방황은 하더러도 언제나 이러한 양가감정을 지니고 내가 태어나서 자라났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며 앞으로 내 뼈가 묻힐 것이고 또 저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살아 갈 중국 땅과 내 고향 연변 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모범적인 중국 국민으로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민족의 문화를 사랑하고 지키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무궁화 삼천리의 나라에 대해서도 다함없는 사랑과 향수를 안고 진지한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을 간직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기처럼 만연되어 있는 강세문화인  중국의 주류문화와 약세문화인 우리민족문화 중에서 저만이 아니라 저의 딸까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저의 작은 딸은 이 번 학기부터 북경민족대학교에서 한국 언어학 석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선택하라고 권고했고 본인도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에 살면서 한국언어학을 전공해서 뭘 하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작은 딸은 절대 이 선택을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가 정년이 되어 대학교단에서 물러나더라도  저의 딸이 중국 대학의 교단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교수로 성장하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자승부업(子承父業)이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업을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하다가 채 못 하면 저의 딸이 이어서 중국에서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지키면서 살아갈 겁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한국 마광수 교수의 《어느 외로운 날》이라는 시 한수가 떠오릅니다.   아,  꽃들은  얼마나  좋을까    자기 몸 안에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갖고  있으니      저는 절대 한국의 하리수 같은 이들처럼 남성(男性)이나 녀성(女性) 한 쪽만을 살리기 위해 어느 쪽은 거세해버리는 그런 잔혹한 성전환수술 같은 량자택일(両者択一)의 의식전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달갑게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의 중성인(中性人)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마치도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는 자웅동주(雌雄同株)의 꽃나무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는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중국 공민이면서 또한 백의민족의 후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중적인 문화신분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날로 세계화가 되여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자신의 강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단적인 사례는 미국의 신임대통령 버락 ․ 오바마입니다. 그의 몸에는 흑인의 피와 흑인의 피가 섞여서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는 두 가지 이상의 문화와 그런 문화을 갖고 있는 부동한 인간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리해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누구보다도 강인한 의지력과 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바마는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로서의 강세를 갖가지고 수억 미국인민들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바마의 승리는 어쩌면 디아스포라들의 승리이고, 세계의 방방곡곡의 디아스포라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주는 확기적인 사건이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힘 내세오!   빨래줄 같은 긴 연설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년 2월 22일 연길에서  
71    [수필]추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거짓말(김관웅) 댓글:  조회:6364  추천:65  2009-01-04
추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거짓말 김관웅     중국에는 몇 천 년 전부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춘추시대의 일이라고 한다. 공자님의 제자인 증자(曾子, 서기 521-490)의 아내가 먼 장터에 갈 때 철부지 아들 녀석이 따라나서니 “장에서 돌아오면 저 기르던 우리안의 돼지를  잡아주마”하고 얼렸다. 땅거미 질 무렵에 장에 갔던 증자의 아내가 귀가하자 아들 녀석은 돼지를 잡아달라고 졸라댔다. 증자가 칼을 잡고 돼지우리로 다가가 돼지를 잡으려고 하자 그 아내가 “여보, 한창 크는 돼지는 왜 잡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미쳤잖아요!?”라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증자가 “임자가 저 녀석한테 아침에 돌아와서 꼭 잡아준다고 하지 않았소?”라고 반문을 하자 아내는 “이 녀석이 하도 따라가겠다고 졸라대니 내가 어쩔 수 없어 거짓말을 한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증자는 “자식들 앞에서 부모로 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꾸중하더니 기어이 그 돼지를 잡아서 돼지고기를 아들 녀석한테 삶아 먹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이솝우화》에도 거짓말을 해서면 절대 안 된다는 교훈적인 우화가 있다. 한 목동이 양떼를 몰고 들판에 나갔다가는 너무 심심하니 “늑대가 왔어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외침소리를 듣고 동네 어른들이 쟁기를 들고 달려왔으나 그것은 한낱 개구쟁이의 거짓말이였다. 이에 재미를 붙인 이 목동은 이튿날도 똑같이 이런 거짓말을 했지만 동네 어른들은 또 허둥지둥 쟁기를 들고 달려 왔다. 그들은 또 거짓말인줄 알고는 욕을 퍼부으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에는 정말로 흉악한 늑대가 덮쳐들었다. 다급해 난 목동이 “늑대가 왔어요! 늑대가 왔어요!……”라고 죽어라고 소리를 비명을 질렀지만 이 번에는 동네 어른들이 또 거짓말을 하는 줄로 여기고 달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목동은 늑대에게 물려죽었다고 한다.   옛날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우화 같은 허구적인 이야기에만이 아니라 실제생활에서도 추한 거짓말쟁이들은 많고도 많았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는 야심가 림표였다. 림표는 사석에서는 숫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 한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문혁”을 전후하여 모택동의 환심을 사기 위해 림표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던가. 모택동을 “수천 년 만에 어쩌다가 나타난 천재”라고 치살리고, “모택동사상을 맑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라고 올려 추고, “모주석의 말씀은 한마디가 만 마디를 필적한다”고 하면서 별별 거짓말을 다했지만 종당에는 정변을 일으켜 모택동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음모가 발각되여 비행기를 타고 황망히 도주하다가 몽고 원두얼한의 황막한 사막에 추락하여 불에 그슬린 개 마냥 추한 죽음을 죽었다.   그러나 거짓말이 다 추한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거짓말이 가장 착하고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말이 될 수도 있다.   병원에서 착한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들이 중한 병이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흔히 그 진상을 알려주지 않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런 거짓말은 추한 거짓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도 거짓말은 경우에 따라 착한 말이지만 군신간의 관계 같은 엄숙한 인간관계에서도 거짓말은 때로는 아주 착하고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거짓말일 수 있다.   고려조 26대왕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은 시를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임금이였다. 그가 임금이 되기 위해 원나라 대도에서 고려로 돌아올 때 너무도 사랑하는 녀인을 두고 와야 했다. 그는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오는 도중에도 왕은 그녀를 잊을 수 없어 자기를 보필하는 문신(文臣) 리제현(李齊賢, 1287-1367)을 시켜 그 녀인을 가보게 하였다. 리제현이 가 보니 그녀는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녀가 힘겹게 시 한 수를 써서 임금께 전해 달라고 하였다. 떠나며 보내신 연꽃 한 송이 처음엔 너무도 붉었습니다. 줄기를 떠난 지 며칠도 못 되어 초췌함이 내 모습과 한가지예요. 贈送蓮花片, 初來的的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그 녀인이 충선왕에게 답장으로 쓴 이 시의 뜻을 알기 쉽게 다시 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도 선연히 붉던 연꽃이 제 줄기를 떠난 지 고작 며칠 만에 초췌하게 시들어 버렸습니다. 내가 당신의 품안에 있을 땐 처음 주신 련꽃처럼 선연히 고왔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시니 나는 이제 저 꽃처럼 참혹하게 야위어 갑니다……   리제현은 돌아와 거짓으로 아뢰였다.   “가 보니 그 녀인은 술집에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어 찾았으나 못 만나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충선왕은 분하게 여겨 침을 뱉고 그녀를 잊었다. 이듬해 충선왕의 생일에 리제현이 축수의 잔을 올리고는 뜰아래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두사죄를 하였다. 왕이 무슨 일이지 묻자 이제현은 앞의 시를 올리면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 녀자의 그 시를 보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날 만약 내가 이 시를 보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갔을 것이오. 그대가 나를 사랑한 까닭에 거짓으로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 충성이 간절하다 하겠소.”라고 하였다.   리제현이 충선왕한테 한 거짓말은 참된 군신(君臣)관계에 대한 미담으로 조선조시대 성현(成伭)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도 기록되여 있다.    얼마 전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 각국의 매체들을 들썽거리게 한 멜라민을 첨가한 “유독분유사건”까지 겹쳐서 요즘은 “이 세상에서 엄마를 내놓고는 다 가짜”라는 말이 항간에 류행할 정도로 진실과 진짜가 증발해가고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동서고금의 추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 음미해보군 한다.    이 세상에 아무리 거짓말이 란무(亂舞)하더라도 추한 거짓말은 하지 말고 참된 신하 리제현처럼 아름다운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2008년 11월 18일 연길에서       
70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 (김관웅) 댓글:  조회:5666  추천:68  2009-01-03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전쟁에서 전진과 후퇴는 흔히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전진을 위한 후퇴가 있고 후퇴를 위한 전진이 있을 수 있다. 성공적인 후퇴는 전진을 내포하고 또 그래서 전진을 위한 후퇴이다. 그러나 졸렬한 후퇴는 후퇴만을 위한 후퇴로서 전진이 내포되지 않은 후퇴이다.    전진을 위한 후퇴, 전진을 내포한 후퇴의 전례는 많고도 많지만 그 가장 전형적 사례가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의 2만 5천리 장정(長征)1)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11개 성을 지나면서 무수한 전투를 치르고 설산과 초지를 지나면서 2만 5천리를 후퇴하였기에 중국공산당은 천하를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방적인 후퇴는 오히려 자신을 죽음에로 몰아간다. 이자성(李自成)2) 농민봉기군의 패퇴가 그 단적인 실례이다. 오삼계(吳三桂, 1612-1678)3)가 산해관을 열어 준 이자성의 농민봉기군은 만족기병에 의해 한번 싸움에서 진 뒤로는 그냥 후퇴만 하다가 나중에는 얻었던 천하도 잃고 말았지 않았던가.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은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사는 일상생활과 대인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중국 청나라시기의 명재상이였던 장영(張英, 1637-1708)4)의 일화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영의 고향은 안휘성 동성(桐城)이였다. 그의 고향 동성 상부(相府)와 이웃집 사이에는 아주 비좁은 공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이웃집에서 오랜 담장을 고쳐 쌓을 장영네 집쪽으로 몇 자 가량 더 내 쌓았다. 이 일로 두 이웃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다. 장영이네 집사람들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고 있는 장영의 세력을 등대여 이웃집을 혼내주려고 장영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장영의 회답 편지에 다음의 시구가 적혀 있었다.  천리 밖에서 편지를 띄운 건 애오라지 담장 때문이웃집에 석자쯤 양보해도 무방하잖겠나                 만리장성은 지금도 여전히 서 있으나                       오늘날 진시황은 어디에 있단 말이요?                   千里修書只爲墻, 讓他三尺亦無妨.萬里長城今猶在, 如今何有秦始皇?        장영네 집 식구들은 이 시를 보고는 느끼는 바가 많아서 자기네 집 담장을 수선할 때는 장영의 말대로 이웃집에 양보하여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를 본 이웃집에서도 자기의 과욕을 뉘우치고 쌓았던 담장을 허물어서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 그리하여 장영네 집과 이웃집 사이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니기 편리한 여섯 자  남짓한  행길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이 행길을 “육척항(六尺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야말로 “한 걸음 물러서면 세상이 끝없이 넓어진다”는 고훈(古訓)이 딱 들어맞는 사례이다.   이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간 미담은 서양에도 있다. 한번은 독일의 대작가 괴테(1749-1832)가 좁은 길을 걷고 있다가 자기와 늘 의견 상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 문인을 만났다. 이 문인은 자기의 논적인 괴테를 보더니만 대뜸 얼굴이 돼지 간처럼 지지벌개져서 “나는 바보한테는 길을 피할 줄 모른다!”고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다. 이에 괴테는 오히려 여유 있게 웃으면서 “나는 바보에게 길을 피해 줄줄 안다!”고 응수를 하면서 길 한쪽에 비켜서서 그 문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한 걸음 물러 설줄 아는 괴테의 일화도 줄곧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길을 피하는 일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로 자기와 상대도 안 되는 인간하고 드잡이를 한다거나 심지어 결투까지 벌였다면 괴테의 품위에 많은 손상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퇴와 양보가 만능인 것은 아니다. 비록 우화이기는 하지만 동곽 선생처럼 늑대에게 그냥 양보만 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자기를 죽음에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를테면 19세기 초반의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푸슈킨(1799-1837)을 극도로 미워한 적수들은 그의 아내 나탈리아와 프랑스인인 근위사관 G.단테스가의 프랑스의 건달꾼  놀아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푸슈킨은 자기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걸었고 바로 결투에서 그는 가슴에  그는 총탄을 맞고 2일 후에 죽었다. 만일 푸슈킨의 건달꾼 단테스앞에서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쳤더라면 인격적 품위는 아마도 일락천장이 되었을 것이다. 푸슈킨은 비록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사람답게 살려는 패기를 세인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후퇴해야 일과 후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임을 또한 잘 알아야 한다. 이는 사회상의 인간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집안에서의 부부 관계를 포함한 모든 대인관계에 통하는 일반적인 삶의 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장을 둘러 싼 자질구레한 길을 비켜주는 것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거나 한번 양보하면 살아가는 공간이 끝없이 넓어지고 살아가는데 언제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사람들은 “꽃나무를 많이 심고 가시나무를 적게 심으라”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큰 시비나 큰 원칙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다가가는 필연적으로 인격적 품위를 잃게 됨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인간은 골기가 없는 무골충이 되고 말며 늘 남들에게 죽어 대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또 “나귀가 순해빠지면 누구나 타려고 하고 사람이 순해빠지기만 하면 남들이 짓밟는다”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경구와 속담들은 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모 그 어느 특정한 경우를 말한 상대적인 진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을 잘 터득하는 것이 마음 편안하게도 살며 또한 사람답게도 살 수 있는 길임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8년 11월 17일 연길에서 
69    연변서 이룰수 있는 변두리의 찬란함 댓글:  조회:5599  추천:109  2008-05-26
연변서 이룰수 있는 변두리의 찬란함-“윤동주문학상 백일장” 수상식 축사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저는 연변대학 한국학학원의 교수 김관웅입니다. “제9회 윤동주문학상 백일장 시상식” 주최측의 부탁을 받고 축사를 드리게 된 것은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윤동주님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 한민족의 시단에서 가장 독자들의 사랑은 받는 걸출한 민족시인의 한 분입니다. 윤동주님도 저 자신이나 여기 앉아계신 학생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즉 조선반도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에 건너온 조선이민들의 후예입니다. 다 아시다 시피 윤동주님은 우리 연변의 룡정 명동촌에서 출생하셨고 윤동주님의 묘소도 고향 룡정 동산 교회공동묘지에 있습니다. 윤동주님은 명실공히 우리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입니다. 저는 윤동주님 같은 한 고향 대선배를 모시고 있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년 전개된 윤동주님의 시창작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민족적 정체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줍니다.〈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입니다. 윤동주님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민족적인 량지와 량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 “죽을 때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윤동주님을 가장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암흑기의 가장 걸출한 민족시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분명히 윤동주님이 살았던 그 암흑한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국조선족은 오늘날 커다란 시련과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국외 로무송출과 국내 대도시진출로 인한 민족의 이동으로 우리연변의 조선족인구가 나날이 감소되고 조선족학교가 줄어들고 조선족마을이 줄어들고 한족학교로 가는 조선족학생들이 늘어남으로 하여 우리글과 말을 잃어가고 있는 후세들이 많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연변의 조선족 민족교육을 비롯한 조선족문화는 말 그대로 “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로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격변기에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이 거의 9회에 걸쳐서 성공리에 치러졌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천이 마르지 않으면 강줄기는 마르지 않는 법입니다. 뿌리가 죽지 않으면 나무줄기와 가지는 죽지 않는 법입니다. 강의 원천이 깊은 산속에 있고 나무의 뿌리가 깊은 땅속에 있듯이 중국조선족문화의 원천은 연변을 위수로 한 동북의 여러 산재지역의 시골과 소도시들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중소학교 교육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원천이요, 중국조선족문화의 뿌리입니다. 중국조선족의 중소학교 교육에서도 그 핵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교육에 있습니다. 중소학교의 교육이 살면 중국조선족문화의 줄기와 가지도 자연히 싱싱하게 살아나게 되는 법입니다. 저는 9회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은 우리 중국조선족 민족교육에 있어서 말 그대로 가물에 단비 같은 존재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10년 가까운 동안에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은 윤동주님의 민족애와 민족정신을 따라 배우고 우리 모두의 령혼을 정화시키고 아울러 우리 민족의 희망인 중학생들로 하여금 윤동주님을 본보기로 삼아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우리글과 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의 얼을 지키고 빛내여 가도록 인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왔습니다.    윤동주님은 또 중국조선족의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또 용기와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분이기도 합니다. 북간도의 산간 오지에서 명동촌에서 태여나서 자란 윤동주님의 시비가 한국의 명문대인 연세대 교정에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저 같은 이순(耳順)의 나이에 접어드는 늙은 사람도 갑자기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연세대의 초청으로 연세대를 방문한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의 젊은 당선자들이 윤동주님의 시비를 보고는 아마도 저보다는 열배이상으로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문화에서나 중국문화에서나 모두 변두리와 경계에서 살고있는 디아스포라입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디아스포라로 사는 과정을 통하여 수많은 내면적 갈등을 축적해왔으며 그것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면적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치고 바이링규알(bilingual), 즉 두 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국조선족치고 피해의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구성원들은 항상 자신이 지켜야 할 내면적인 규범과 삶의 외부적 환경 사이의 극심한 대립이나 모순과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매개 구성원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려서부터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신분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북간도라는 이 디아스포라에서 살던 윤동주의 유년시절, 청년시절의 삶 자체가 이러한 갈등의 소산이였던 것입니다. 윤동주님은 자신의 이러한 내심적인 갈등을 훌륭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력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동시에 특정한 사회, 문화적 상황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한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인 유대인들속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배출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리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로부터 칼 맑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춈스키나, 스필버그에 이르기까지 이들 유태민족에게서만 집약적으로 천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로 이네들의 특수한 디아스포라적인 체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언제나 변두리에서 살아오면서도 언제나 변두리의 찬란함을 만방에 과시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변두리를 언제나 중심으로 바꾸어 놓곤 하였습니다.   우리 연변도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의 땅입니다. 이 땅에서 윤동주님이 태여 나고 송몽규 같은 분이나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이 배출되게 된 것 역시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먼 옛날로 소급해 올라가면 우리가 살고 있는 두만강 류역은 비록 동북아세아에서의 만황지지(蠻荒之地)였지만 중국을 270여 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청나라 황실 조상의 발상지이고, 조선반도를 500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조선조 왕실 조상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천자가 나시고 국왕이 나신 고장입니다. 우리 연변 땅은 말 그대로 개천에서 룡이 나온 “흥룡지지(興龍之地)”입니다.       학생 여러분,  우리 연변의 미래, 중국조선족의 미래는 바로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은 비록 산간 오지이고 변두리인 연변 땅에 살지만 기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큰 꿈을 이룩하기 위해 하여 백배의 노력을 경주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기필코 윤동주님처럼 변두리의 찬란함을 세상에 과시하는 그런 거룩한 공업(功業)을 이룩하시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5월 25일 연길에서
68    민족과 문화 (김관웅) 댓글:  조회:5613  추천:101  2008-04-18
[강연고]민족과 문화김관웅 연변대학 교수모국의 동포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말에는 운명(運命)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중국어에서는 그 순서가 달라서 명운(命運)이라고 합니다. 운명이든지 명운이든지 모두 명(命)과 운(運)이라는 두 가지 뜻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그 뜻은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정해진  명(命)과 후천적으로 차례지거나 쟁취하여 얻어지는 운(運)이라는 두 요소가 합쳐져서 운명의 뜻이 됩니다. 아무튼 인간에게는 누구에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명(命)이 있습니다. 그 명(命)은 하늘이 정했다거나 혹은 선천적으로 정해진 존재라고 해서 사람들은 흔히 명(命)을 천명(天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남자나 여자라는 성적인 정체성도 천명이요, 조선민족이요 일본민족이요 하는 민족적 정체성도 역시 천명(天命)입이다. 한 인간이 부정모혈(父精母血)이 합쳐서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져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달 동안 자라다가 자기의 주체적 선택이 없이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면서 동시에 조선민족 혹은 중국민족, 일본민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민족적 신분은 한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타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석학이신 이어령 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한 인간과 자기가 속한 민족과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입니다. 손오공이 한번 곤두박질하면 10만 8천리를 날아가도 여래불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듯이 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이질을 쳐도 영원히 자기가 만난 숙명적인 민족과의 그 억만 겁의 인연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입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아무리 가난하고 못생겼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어머니가 아니라면서 못 본 체 할 수 없듯이,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이 아무리 두메벽촌이라고 해도 자기의 고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듯이, 자기가 속한 민족이 크고 강한 민족이 아니라 약소한 민족이라고 해서 자기 민족을 배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민족이란 이렇게 소중한 것이기에 우리민족의 선열들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민족과 나라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마저 초개같이 던졌던 것입니다.   옛날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라고  한 것은 애족애국의 충정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박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제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맞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함에서였다.   안중근 의사(義士)가 할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총으로 사살하고 여순 감옥에서 단두대에 오른 것은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자기의 소원을 세 번을 물어도 모두『대한의 독립』이라고 하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 서슴없이 3.8선을 건넌 것은 분단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민족은 바로 이런 선열들의 애국충정에 떠받들려서 단군성조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신 이래 반만년의 역사의 대장정을 하여오면서 지금도 세계민족의 수풀 속에서 한 그루의 거목으로 우뚝 서있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모국에서는 먹고 살아갈 수가 없어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들입니다. 마치도 집이 너무 가난하여 내버려진 기아처럼 중국 땅에서 150년 동안이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언제 한 번도 못난 모국이 못났다고, 조상이 못나서 고생을 한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바로 우리 연변 땅에서 벌여졌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이 독립군의 주요한 멤버이었습니다. 북간도의 산과 언덕마다에는 산골짜기마다에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고 북간도의 산골짜기마다에는 애국지사들의 선혈이 붉게 물어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상님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붉은 피를 흘려 싸우고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몸에도 애국애족의 붉은 피가 맥맥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단군성조가 물으신다면 저는 서슴치 않고  『저의 소원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단군성조님의 자손으로 살고 싶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다음 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이 몸이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배달의 얼을 간직하고 살고 싶습니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내 육신이 살아있고 내 정신 무지러지지 않는 한 중국에서 중국의 우수한 국민으로서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면서 올곧게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동포여러분,저 김관웅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과거의 6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이 소원을 이룩하려고 살 것입니다. 어려서 모국을 떠나 이국타향에서 60평생을 살아오지만 단군성조님의 자손으로 한민족의 얼을 간직하고 살다가 죽는 일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우리 200만 중국조선족동포들과 함께 이렇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조상들이 개척한 중국 동북 땅에서 중국의 우수한 국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습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집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먼 장래의 일이요 현실의 일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세계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거세차게 일어나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짙은 피를 함께 나누고 유구한 역사를 공유한 민족공동체는 일시적인 정치나 경제적 사정에 의해 산생된 이데올로기나 제도보다도 더 상대적인 불변성을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정치적 사정에서 70여년이나 합쳐졌던 매머드 같이 거대했던 CCCP - 소베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한 세기 이상이나 인류사회를 석권했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제도는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혈통의 조국을 부정하고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지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과 단결과 국제적 연대성만을 주장하던 인터내셔널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 경제도 변하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라는 김구 선생이  60년 전의 지론은 오늘날의 세계 인류사회의 현실이 진리임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일찍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여러 파벌로 동족상잔의 피비린 싸움을 하지 않은 없거니와 세월이 흘러가면 그것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중국에는 수천년 동안 내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않았고, 200백년의 역사 밖에 안 되는 미국에서도 동족 간의 남북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동족상잔의 혈투는 잠간이었고 더 긴 것은 동족간의 사랑과 화해였습니다. 그것은 민족은 필경 비바람이 지나간 뒤의 나무와 풀의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본다면 한반도에서의 남과 북 사이에 있었던 동족상잔의 전쟁과 반목, 질시, 대결이라는 것도 결국은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우리들은 요즘 남북의 정상회담을 통한 화해와 평화의 무드에서 보아낼 수 있잖습니까!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합니다. 그러나 혈통과 문화로 뭉쳐진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운명의 유대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위에 남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은  헤어진지가 너무 오랍니다. 헤어진지가 오래면 합쳐지는 법입니다. 남과 북이 민족의 대단합을 이룩하고 국가의 통일을 실현하는 날이면 우리민족의 힘은 더 커지고 더욱 당당하게 세계 민족의  수림 속에서 한그루의 거목으로 우뚝 서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해외동포들은 삼천리금수강산이 보다 강대해지고 번영창성해지기를 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동포 여러분,  오늘날의 인류사회를 “세계주의 와 민족주의”라는 이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연주가가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이 오케스트라에서 자기 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듯이 한 민족도 이 세계에서 자기 민족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입니다. 이것은 제가 믿고 있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민족과 국가의 통일이 한반도에서 실현되고 나아가서는 아세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실현을 위해 우리민족이 힘을 보탤 수 있기를 원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단군성조의 이상이 바로 이것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중국조성족의 지성인들은 연변조선족문화의 문지기, 파수꾼이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민족의 문화를 지키는 일에서 존귀비천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 200백만 중국조선족은 비록 중국 땅에서 150년 동안이나 살아오면서도 단군성조의 자손으로 살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꾸리고 신문사 , 방송국,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한 세기 반 동안이나 한민족의 말과 글을 비롯한 우리민족의 문화를 고스란히 지켜왔습니다. 문화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무력보다 강합니다.    한때는 중국에 군림하면서 천하를 호령하였던 몽골족이나 여진족은 모두 중국문화에 동화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네들의 민족문화가 빈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호메트와 칭키스칸의 대조를 통해 이 점을  분명히 보아낼 수 있습니다. 마호메트는 젊어서는 돈 많은 미망인의 머슴으로 지내다가 그녀와 결혼하였는데 문맹이었습니다. 40세에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만나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고, 천지청조의 유일신 알라를 알게 되였습니다. 그로부터 힌트를 받아 자신을 알라의 사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KORAN)》《수나(SUNNA)》는 마호메트가 스스로 편찬한 것입니다.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온 유럽북부와 북부아프리카, 인도 국경까지 제압하였고, 오늘에는 중앙아시아는 물론 인도북부, 인도네시아, 말레시아까지 확고한 자리를 잡았습니다. 칭키스칸은 인류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웠으나 오늘에는 위축되어 가련한 그 흔적만 조금 남았습니다. 정신문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칭키스칸을 영웅이라고 인정하면서 “활 당겨 수리개밖에 쏠 줄 몰랐다(只識彎弓射大雕)”고 평가를 했었습니다. 모호메트와 칭키스칸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의식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정신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혼불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얼입니다.   한 민족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입니다. 민족문화가 없는 민족은 얼이 없는 인간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무력이 강하고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민족문화가 빈약한 민족은 힘이 없는 민족입니다. 민족문화가 강하고 뿌리 깊어야만 강한 민족으로 될 수 있습니다. 민족문화가 살아야만 그 민족이 사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지금 중국조선족에게 위협으로 닥쳐오는 것은 무력의 약화도, 경제력의 결핍도 아닙니다. 지금 중국조선족에게 위협으로 닥쳐오는 것은 문화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세찬 도시화, 세계화의 바람 앞에서, 이민족의 망망대해 속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가정이 흔들리고, 집거지가 흔들리고 따라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교육, 우리의 문화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중국 조선족사회가 해체의 위기를 맞는다면 동북아지역은 귀한 문화자산을 잃게 될 것이며, 또한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21세기 역사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중국의 조선족 사회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한반도와 중국의 변연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조선족문화는 한반도문화의 뿌리에 중국문화의 가지를 접목하여 새로 만들러진 이중문화 구조를 가진 독특한 민족공동체로서 한중 관계의 발전에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조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중국에서도 조선족공동체는 앞으로 전개될 21세기 동북아 국제협력시대의 중요한 매개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역사시기에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능이고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동안 지켜온 중국조선족 특유의 문화를 계승 ․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은 비단 중국조선족 자신의 일일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민족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성원하는 것은 여기 계시는 분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포 여러분,  지금 중국조선족문화건설은 잠시 어려움에 봉착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문화는 반만년의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 배달민족의 문화의 뿌리에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문명의 본거지인 중국문화라는 거목에서 가지를 잘라다가 접목시켜 만들어진 특수한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문화건설의 미래는 그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독특한 자기 문화를 지켜나가면서 당당하게 중국 땅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조선조의 건국서사시《용비어천가》중의 시구를 빌어서 저의 웅변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도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에 이르러 바다로 가나니(根深之木,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賁其實.源遠之水, 旱亦不竭, 流斯爲川, 于海必達.) 감사합니다.                            2007년 10월 18일 중국 연길에서  
67    령수인물 점수 매기기 댓글:  조회:5984  추천:108  2007-11-26
령수인물 점수 매기기김관웅  지난 11월 13일, 서울에서 경희대학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있는 이승래교수의 안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리승만박사의 저택 리화장(梨花莊)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화장은 리승만 대통령이 1945년 10월에 미국에서 환국(還國)한 후 서울의 한 독지가가 마련해준 저택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리승만 대통령은  줄곧 리화장에서 살았고,  1960년 4.19이후 하야한 후에도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다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1970년으로부터 리승만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녀사가 양아들, 양며느리와 줄곧 이 곳에서 살다가 타계했다고 한다.   그날 우리를 맞아준 이는 다름 아닌 22년 동안이나 리승만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녀사를 리화장에서 모시면서 살아왔다는 리승만 대통령의 자부(子婦) 조혜자 녀사였다.   조혜자 녀사는 칠십을 넘기신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젊어서 이화녀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한때는 신문사의 재외기자로 활약했었고, 유엔 사회고문관으로 임직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지식녀성이였다.   1988년 이래 리화장을 개방하였다고는 하나 우리가 찾아간 그날 리화장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하였다. 리승만 대통령은 지금 전람관마저 갖고있지 못하고 그의 일생의 파란만장한 경력은 리화장안에 간소하게 전시되여 있었다. 나는 리화장을 둘러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만리장성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으나 그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지고무상한 권력을 가졌던 진시황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조혜자 녀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전시장과 리화장 내부의 처처소소를 자세히 돌아보고 나서 리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이였다는 아늑한 방안에서 우리 일행은 조혜자와 녀사와 마주앉았다.   조혜자녀사의 동기를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리승만 대통령이 권좌에 앉아있을 때에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니라 리승만 대통령이 권자에서 물러난 후에 인연을 맺고 남편과 함께 리승만 대통령 부부를 오래 동안 모셔온 분이였다. 조혜자 녀사의 말속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한 한국사회의 홀대(忽待)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48년 5월부터 1960년 4월까지 만 12년 동안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다음 5년 2개월간의 하와이 망명생활로 생을 마감한 이승만에 대해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 “독재자”란 딱지가 붙어 다녔고 “부정선거”와 “친일파의 비호자”란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새로운 언어로 평하되여 왔다. “친미주의자” 혹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 “미군정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권력욕의 화신”으로, “분단을 획책한 주범”에서 “김구암살의 배후 조종자” 등으로 한국사회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적대적이였다.   그러나 그가 73살의 고령에 대통령의 보좌에 오르기까지 적어도 거의 반세가 가까이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제국의와 용감하게 싸워온 항일지사임을 부정할 사람은 또 크게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를 재건한 초대 대통령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항일지사의 경력과 만년의 실정, 리승만은 분명히 공(功)과 과(過)를 다 갖고 있는 령수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관론정(盖棺論定)이라고 하지만 1965년 리승만 대통령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후로 이미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리승만에 대한 공정한 점수매기기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리화장을 떠나면서 나는 차안에서 이런 생각을 굴렸다.   령수인물들을 10점제로 점수를 매긴다면 워싱톤 같은 정치령수는 권좌에 연연하지 않고 격류용퇴(激流勇退)를 했기에 공(功)만 살아있고 과(過)는 별로 없으니 정치령수로서는 최우수생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한 불후의 공을 세웠지만 문화혁명 등 만년의 실정(失政)으로 만점 10점은 맞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적잖은 사람들은 모택동은 공(功) 7, 과(過) 3라고 점수를 매기고 있다. 중국어로는 “삼칠개(三七開)”라고 한다. 100점제로 한다면 70점이라는 말이다.   공(功)과 과(過)가 각각 반이라면 정치수령으로서는 낙제생이다. 공(功) 6, 과(過) 4라면 급제생이다. 리승만의 공(功)과 과(過)중에서 공(功)은 얼마를 차지하고 과(過)는 얼마를 차지할까? 그러면 리승만은 몇 점을 맞을 수 있을까? 급제생일까? 락제생일까?   나 같은 방외인이 언감생심 리승만 같은 령수인물에게 점수를 매길 수 없지만, 또 매겼다고 해서 어느 누가 수긍할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앞으로는 누군가가 나서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점수를 매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11월 18일 연길에서
66    목정(木精), 곡주(谷酒) 그리고 문학의 진품(眞品) 댓글:  조회:5595  추천:101  2007-11-21
목정(木精), 곡주(谷酒) 그리고 문학의 진품(眞品) 김관웅 그저께 저녁, 백산호텔에서 리경자 씨의 자서전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의 출간식을 하니 와 주십사 하는 전화 통지를 받았다.    아마추어에 가까운 문학신인이 자서전을 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관절 무슨 자서전이길래 출간식까지 하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어제 오전 출간식을 하는 식장에 찾아갔다. 나는 술도 몇잔 얻어 마시고 책도 한 권을 얻어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밤도와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토밥으로 만든 알콜은 목정(木精)이라고 하고 알곡으로 빚은 술은 곡주(谷酒)라고 한다. 목정을 마시다가는 몸이 크게 상하거나 심지어 눈이 멀 수도 있다. 그러나 곡주는 설사 과음을 했더라도 뒤가 깨끗하다. 재료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알 수 있다.   술을 빚는 것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러하다.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재료는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는 작자 자신의 진실하고도 절실한 생활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뼈와 살을 깎는 생활체험과 처절한 정감의 루적을 재료로 하지 않은 문학작품은 마치도 토밥으로 만들어낸 목정과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병신음(無病呻吟)의 가짜 문학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자신의 뼈와 살을 깎는 생활체험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문학작품은 진품(眞品)으로 될 확률이 높다. 알곡으로 빚은 곡주와 같아서 읽을수록 그윽한 맛이나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오래도록 심취하게 된다.         리경자 씨의 자서전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는 토밥으로 만든 목정이 아니라 알곡으로 빚은 곡주라고 평가를 하고 싶다.    리경자 씨의 자서전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에서 그려진 그 사건 자체의 진실성과 표현된 정감의 진실성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서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진실성이다. 통속가요에서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진실인거야》라고 했듯이, 이 노래말을 패러디한다면 《문학은 장난이 아니야, 문학은 장난이 아니야, 진실인거야》라고 할 수 있다. 자조적인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자서전의 생명력은 진실성에 있다.  아무리 미사려구로 점철된 미문(美文)이라도 진실성이 증발된 수필이나 자서전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리경자 씨의 자서전《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는 결코 이런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니다.    그리고 리경자 씨의 자서전은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는 잘 나가는 사람의 제 잘났다는 소리를 한 그런 자아홍보, 자아포장의 상투적인 자서전이 아니였다. 공자님이《시가이원(詩可以怨)》이라고 했듯이 한 녀인의 내심 속의 고독, 고민, 아픔, 한, 소망, 추구와 함께 자기 남편이나 가족성원의 치부까지 진실하게 드러낸 자서전이였다. 그리고 책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한 섬약한 녀인이 역경 속에서 굳세게 살아오면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간, 눈물겹게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역어진 아름다운 자서전이였다.   남편이 없는 어려운 상황하에서 두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오고있는 리경자씨를 통해 나는 《녀자는 녀자로서는 약하지만 어머니로서는 강하다》는 이 말이 참으로 옳은 말임을 어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서전은 거룩한 사람들만이 쓰는 것이 아님을 리경자 씨의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초가 쓴 자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그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료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리경자 씨를 포함한 우리문단의 랑자군(娘子軍)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리경자 씨를 포함한 우리문단의 랑자군(娘子軍)들이 앞으로 문학의 상상봉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매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7년 11월 17일 연길에서  
65    김학철과 죽음의 시련 (김관웅65) 댓글:  조회:6176  추천:111  2007-11-07
김학철과 죽음의 시련김관웅    문혁(文革) 중에서 외웠던 모택동 어록 중에는 《공산당인들은 죽음도 무서워  하지 않는데 곤난을 두려워 하겠는가?》하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인데, 공산당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까짓 곤난 같은 것을 두려워 하겠는가 하는 뜻이다. 물론 모든 공산당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진짜로 죽음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만이 그러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죽음의 시련을 이겨내면 이 세상에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은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련옥의 단련을 거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범인들과는 다른 인식과 리해를 갖게되며 따라서 이런 사람들의 생명력은 남달리 굳세고 그 지혜도 범인들과는 달리 초월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의(陳毅) 원수가 바로 이런 삶과 죽음의 련옥을 거쳐온 강철처럼 굳센 사람이다.   1935년 중국 공농 홍군이 강서에서 장정을 시작했지만 진의는 부상으로 대오를 따라서 장정대오에 섞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강산의 산속에서 남아서 유격전을 견지하게 되었다. 1936년 겨울, 국민당은 진의가 숨어있는 산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진의는 다리부상에 라병으로까지 앓고 있었기에  적들에게 포위되여 20여 일 동안이나 악전고투를 하였다. 적들의  포위에서 몸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진의는 생사관두에 《매령삼장(梅嶺三章)》을 써서 옷갈피 속에 절명시(絶命詩) 넣어두었다.  이 목이 오늘 잘린들 어떠랴 간거한 창업엔 전투가 많나니 황천에 가면 옛 부하들을 불러서 십만 군기를 날리며 염라왕을 베리라 남국엔 봉화가 십년 채 타오르니 잘린 이 머리는 성문 우에 걸릴테지 훗날 죽을 제군들 억세게 싸워 첩보를 날리면 지전으로 삼겠네. 혁명을 집으로 삼고 투신하였거니 피바람 몰아쳐도 그칠 때 있을지니 오늘 의로움 위해 목숨 내던져 인간 세상에 자유의 꽃 활짝 피우리. (斷頭今日意如何, 創業艱難百戰多. 此去泉臺招舊部, 旌旗十萬斬閻羅.南國烽煙正十年, 此頭須向國門懸.後死諸君多努力, 捷報飛來當紙錢. 投身革命卽爲家, 血雨腥風應有涯. 取義成仁今日事, 人間遍種自由花.)      죽음의 시련은 진의원수로 하여금 인생의 길에서 시종 죽음을 초개 같이 여기는 초연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의원수는 큰 재난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시밭길을 탄탄대로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문혁 당시 진의원수는 충격을 당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웃으면서 반란파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란파들이 모주석어록을 읽으면서 진의더러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임》을 승인하라고 하자 진의 역시《모주석어록, 진의동지는 좋은 동지이다!》라고 대꾸했다고 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967년 2월 진의는 또 엽검영, 서향전, 섭영진 이 네 원수와 함께 책상을 치면서 일어나서 문혁(文革)을 단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의가 이처럼 용감하고 태연할 수 있은 것은 죽음의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학철 선생이 《20세기의 신화》로 10년 옥살이를 했지만 타협하거나 투항하지 않고 시종일관 자신의 초지를 지킬 수 있은 것은 역시 젊은 시절에 이미 죽음의 련옥을 헤쳐 나오셨기 때문이다. 1941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호가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포로되여 일본감옥에서 한 쪽 다리를 절단하면서 지조를 굽히지 않으면서 이미 죽음을 초월하는 의지를 키웠던 것이다. 1975년 5월에 있었던 공판대회에서도 아갈잡이를 하면서 모욕을 하려고 하여도 김학철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척각으로 서 있어도 이 땅에서 가장 꿋꿋이 서 있었다.   2002년 가을, 곡기(穀氣)를 끊고 물만 마시다가 저 세상으로 자진하여 가실 때는 죽음의 신(神)을 가지고 노시기까지 하시지 않던가!   젊은 시절에 이미 겪은 삶과 죽음 시련은 김학철로 하여금 범인과는 다른 특수한 성격을 형성하게 하였던 것이다. 김학철의 이름처럼 강철같이 굳센 성격이 형성되였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은 이 한 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김학철의 특수한 성격형성과정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2007년 11월 5일 연길에서
64    사자와 하이에나(hyaena) (김관웅64) 댓글:  조회:5804  추천:133  2007-09-20
사자와 하이에나(hyaena)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로신의 산문집 『화개집(華蓋集)』에는 「전사와 파리」라는 유명한 수필이 있다. 아주 짧으니 아래에 옮겨 보기로 하자.   “Schopenhauer는 이런 말을 한적 있다. 사람의 위대함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정신상의 위대함과 체격상의 위대함의 법칙은 완전히 상반된다. 후자의 거리는 멀수록 작아지지만 전자는 오리려 거리가 멀수록 커진다.     바로 가까울수록 작아지기에 거리가 가깝게 되면 결점이나 상처가 자욱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네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신도(神道)가 아니고, 요괴가 아니고, 이상한 짐승이 아니다. 그네들도 의연히 사람이다. 다만 이러할 따름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하기에 그네들은 위대한 인간이다.     전사가 전쟁터에서 죽게 되면 파리떼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점과 상처이다. 파리들은 그 결점과 상처를 맴돌고 윙윙거리면서 득의양양해 한다. 마치도 자기네들이 죽은 전사보다 더 영웅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사들은 이미 죽었기에 달려드는 파리떼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이렇게 되니 파리떼들은 더욱 기승스럽게 윙윙거리면서 스스로 자기네들의 소리가 불후하다고 여긴다. 그것은 자기네들은 그 완전함에 있어서는 전사들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도 파리들한테서 결점과 상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전사는 필경은 전사이지만 완미한 파리는 필경은 파리에 불과한 것이다.     가거라, 파리들아! 네놈들은 비록 날개가 달렸고 윙윙거리기도 하지만 절대 전사를 초과하지는 못한다. 이 더러운 버러지들아!”   요즘은 인터텍스튜얼리-호문성(互文性)이 강조되는 시대이니 상기 로신의 수필을 본떠서 아래에 다음과 같은 사족(蛇足)을 붙여보기로 하자.   아프리카 열대초원에는 사자와 하이에나(hyaena)라는 동물이 살고 있다. 사자는 절대 썩은 고기를 나 죽은 시체는 먹지 않지만 개과에 속하는 초원의 청소부로 불리는 하이에나의 거의 대부분의 먹거리가 바로 썩은 고기나 죽은 시체이다.   백수의 왕인 사자가 죽게 되어도 예외 없이 하이에나의 밥이 되여 하이에나 무리들에게 갈기갈기 뜯기게 되는 법이다.  이 정글의 법칙이 인간 세상에도 통하는 법인가 보다.  지난 번 문인들의 한 모임에서 나는 우리문단의 “죽은 사자 한 마리”를 “하이에나 무리”들이 갈기갈기 뜯어먹을 잡도리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죽은 사자가 아무리 산 하이에나 무리들에게 뜯겨도 사자는 사자고 하이에나는 하이에나이다.  하늘에서 날던 수리개가 상처를 입고 땅에 떨어져서 구렁이의 밥이 된다고 해도  수리개는 여전히 수리개이고 구렁이는 여전히 구렁이인 법이다.  나폴레옹이 꺼꾸러지자 구라파의 봉건세력들이 날뛰던 19세기 10년대의 유럽의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영국의 낭만파시인인 바이런은 『차일드 하럴드의 편력기』라는 장시(長詩)에서  “사자가 꺼꾸러지니 늑대들이 살판을 친다”고 개탄한 적 있다. 그날 나는 바이런 같은 기분이 되었다. 2007년 9월 4일 연길에서
63    김학철은 신이 아닌 존경스런 인간이다 댓글:  조회:5330  추천:106  2007-09-10
김학철은 신이 아닌 존경스런 인간이다   김관웅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량효성은 모택동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목전 모택동을 추억하는 서적과 글들의 형형색색의 작가와 작자들은 모택동에 대한 각기 부동한 심태를 지니고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첫째는 모택동이라는 이 신격화된 령수를 신단에서 모셔 내려 범인들 속에 세워놓고 다시 보려는 것이다. 둘째는 모택동에 대한 추억을 통해 중국공산당 역사에서의 많은 중요한 사건의 ‘내막’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셋째는 중국근대사에서의 남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택동의 위대한 지위를 전복하려거나 동요시키려는 것이다. 이 최후의 목적은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모택동이 새 중국을 창립한 그 공적은  태산 같은 존재로서 그 누구도  전복하거나 동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에도 흑점이 있는 것처럼 모택동도 결코 완미한 인간은 아니다. 건국 후 나라를 건설하는 면에서 모택동은 시행착오를 거듭 범했고 10년 문화대혁 중에서는 엄중한 과오를 범했다.   한마디로 모택동을 “나라를 세우는 데는 공로가 있으나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시행착오를 저질렀고, 문화혁명 중에는 엄중한 과오를 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학철 선생의 『20세기의 신화』는 결코 모택동의 건국의 공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1957년 반우파운동 이래 나라를 건설하고 다스리는 면에서 범한 모택동의 과오를 비판한 소설이다. 적어도 중국 당대 문학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모택동이라는 이 신격화된 령수를 신단에서 모셔 내려 보통 인간들 속에 세워놓고 다시 보려고 한” 첫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문단의 일부 사람들이 들먹이고 있는 “정치표준 제1, 예술표준 제2”라는 잣대로 재어 보아도 김학철의 장편소설『20세기의 신화』는 인민대중과 광범한 지식인들을 대변하여 정의의 눌함(訥喊)을 올린 대단한 정치소설이다.    그러나 김학철 선생 역시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분도 만년에 이런 저런 글들을 써서 적잖은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렸었다. 많은 경우에는 옳은 말씀을 했지만 일부는 무근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설사 이렇다고 해도 모택동의 주류와 공적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김학철 선생의 주류와 대 방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선의적으로 김학철 선생의 일부 결점이나 시행착오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신단(神壇)에서 모택동을 인간들 속으로 모셔 내리려고 한 김학철 선생 역시 인간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모택동을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듯이 김학철 선생도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량효성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역사의 ‘두뇌’에 기억된 사람들은 영원히 오점이나 저열한 점이 있는  위인이나 명인이며 이른바 ‘완미한’ 보통 인간들의 이름은 모조리 묵살해 버린다.”    우리문단의 일부 “결점이 없는 완미한 사람”들이 김학철 선생을 아무리 폄하하려고 해도 그것은 매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 보려는 격이다.    김학철의 문학은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이라는 이 산맥에서 거룩한 한 산봉우리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앞으로 영원히 동요가 없을 것이다.                                                                                                2007년 9월 7일 연길에서
62    '야심가'비교론 (김관웅62) 댓글:  조회:5354  추천:112  2007-08-14
"야심가" 비교론   김 관 웅   중국 청나라시기 오경재(吳敬榟, 1701-1754)의 장편소설《유림외사(儒林外史)》를 번역하는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광초인(匡超人)이란 인물형상이다. 그것은 이 인물이 많은 련상의 여지를 남겨주어 많은 것을 심사숙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학리론의 용어를 동원하여 표현한다면 대단한 전형성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물이라고나 할까. 이 인물은 시대적 락인이 깊이 찍혀있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에까지 우리들에게 많은 사색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광초인은 원래는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인사성이 밝고 또 효성이 지극한 시골 젊은이였다. 항주에 돈 벌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음이 선량한 마이 선생이란 선비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공부만이 출세의 길이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충고를 받게 된다.      고향 집에 돌아온 그는 중풍으로 앓아누운 아버지를 극진히 병시중을 들면서도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며 그 효행과 열심히 책을 읽는 근면성이 우연하게 그 현의 리 지현(지금의 현장 격)에게 알려져서 리지현의 환심을 사게  되고, 또한  리 지현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수재로 뽑힌다.      나젊은 광초인이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숙환으로 죽고 리지현도 라이벌들의 암투로 무함을 받아 해직이 된다.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광초인은 다시 고향을 떠나 항주로 와서 고향의 촌장영감의 소개로 반삼(潘三)이라는 시정배와 사귀게 된다. 반삼은 비록 비법적인 사기, 협잡수단으로 남의 재부를 갈취하는 나쁜 놈이였지만 광초인만은 아주 의리 있게 대해준다.      반삼이와 가까워지면서부터 광초인은 인간적, 도덕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광초인은 조금도 주저 없이 반삼의 졸개로 되어 관가의 문서를 위조하고 남을 대신하여 과거시험을 쳐준다. 이렇게 해서 돈이 생기게 되자 번삼의 중매로 항주 부아문에서 관차로 일하는 정영감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반삼의 죄상이 드러나서 옥에 갇히게 되자 광초인은 연루가 될가바 전전긍긍하지만 결국에는 번삼이가 물어 먹지 않았기에 무사하게 경성에  올라가서 재차로 중앙관청의 급사중이라는 벼슬자리로 승진한 리지현의 도움을 받아 중앙관계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리 급사중의 소개로 광초인은 자기가 이미 결혼한 몸임을 속이고 리 급사중의 생질녀와 결혼한다. 몇 달 후 광초인은 시험을 보아서 경성에서 에서 교습이라는 벼슬자리를 얻게 되고, 고향에 보낸 새색시는 마침 죽게 되여 그의  중혼죄도 자연히 가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스탕달의 『적(赤)과 흑(黑)』중의 주인공 쏘렐처럼 이전에 있었던 녀자편력 때문에 야심가의 길에서 좌절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경성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경성에서 벼슬을 하면서부터 광초인은 점점 인간성과 도덕성을 잃어 가게 된다. 옥에 갇힌 은인인 반삼이 편지를 보내어 한번만 면회를 와달라고 해도 그는 자기의 벼슬길에서 장애물이 될가바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순박한 시골청년으로부터 야심가로 변한 광초인의 형상을 보면서 프랑스 스탕달의 장편소설『적(赤)과 흑(黑)』중의 청년 야심가 쏘렐, 그리고 발자크의 장편소설『고리오령감』중의 청년 야심가 라스띠냐크, 영국 대커리의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중의 청년 야심가 베케 솨프를 련상하게 되었다.      오경재의 장편소설《유림외사》중의 청년야심가 광초인,    프랑스 스탕달의 장편소설『적(赤)과 흑(黑)』중의 청년 야심가 쏘렐,   프랑스 발자크의 장편소설『고리오령감』중의 청년 야심가 라스띠냐크,   영국 대커리의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중의 청년 야심가 베키 솨프   이상의 이 네 동서양의 청년 야심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모두 비천한 가정의 출신들이다.      광초인은 시골 농부의 아들이고, 쏘렐은 작은 시가지의 목수의 아들이고, 라스띠냐크는 외성의 몰락한 귀족가문의 아들이고, 베키 솨프는 런던의 가난한 시민의 딸이다. 바로 출신이나 신분이 미천하기에 이들에게는 상류사회로 기여 오르려는 강렬한 욕망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궁자사변(窮者思變) - 궁한 사람은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 법이다.      중국에는 "물은 낮은 데로 흐르려 하고 사람은 높은 데로 올라 가려 한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모두 성공을 갈망하고  현재의 지위보다 높은 데로 오르려는 욕망이 있는 이는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이런 까닭에 웅심과 야심 사이에는 종이 한장 차이밖에 없다. 웅심이 약간만 도를 넘으면 야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야심가로 될 소지를 다 일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비천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던 사람들의 신분이나 지위의 상향욕구는 더욱 강렬하다. 내려 보는 사람들보다도 올려보는 사람들이 더 상향욕구가 강한 법이다.  이런 까닭에 비천한 가정에서 출생한 사람들 중에서 야심가가 나타날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서 포병학교를 다닐때 촌티가 난다고 늘 동학들로부터 조롱을 당했던 프랑스의  오지 코르시카섬의  섬놈이 아니던가. 그래서 시골닭이 관청닭의 눈을 빼먹고, 개천에서 룡이 난다는 속담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둘째, 강렬한 신분 ․ 지위 상향 욕구가 있고, 근면하고 총명하고 잘 생기고 사교에 능해야 한다.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난 사람들이 야심가로 될 확률이 더 높다고는 하지만  비천한 가문의 출신들이라고 해서 모두 야심가로 되거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심가로 되려면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체적인 조건, 즉 야심가로서의 소질을 갖추어야 한다.      야심가로 되려면 우선 강렬한 신분 ․ 지위 상향 욕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야심가로 되려면 근면해야 하며, 또 이렇게 되자면 남보다 몇 배나 더되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갖추어야만 한다. 가만히 안자있는데 입에 큰 떡을 물려주지는 않는 법이다.      또 근면하기만 해도 안 된다. 반드시 총명한 재기와 추하지 않은 용모와 체격을 갖추어야 한다. 너무 못생긴 추남이나 추녀는 일반적으로 야심가로 되기 어렵다. 당금 먹을 떡도 꽃을 돋친다고 너무 못나면 남들에게 환심을 사기 어렵다. 라스띠냐크는 그 미모로서 수많은 유한마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 않았던가. 모파쌍의 장편소설『미모의 벗』중의 야심가 뒤류아의 주요한 무기 역시 미모가 아니던가.      그러나 야심가로 되자면 겉모양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며 또 발랄한 재기와 총명성, 능란한 사교술을 겸비해야만 한다. 광초인은 그 이름처럼 초인(超人)적인 총명성을 갖고 있었고, 쏘렐 역시 성경을 얼음에 박 밀듯이 암송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주의력을 환기시키지 않았던가.       강렬한 상향욕구, 근면성, 총명성과 재능, 근사한 용모와 체격, 능한 사교술-- 이는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체적인 소질이다.   광초인 ․ 쏘렐 ․ 라스띠냐크 ․ 베키 솨프는 이 몇개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셋째,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설사 아무리 이상에서 렬거한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체적인 소질을 갖추었다고 해도 사회적인 환경에서만이 야심가로 될 수 있다.      중국에서 수천년 동안 지속된 과제시험에 의한 관리선발제도와 권력본위의 사회가치관 그리고 이로 하여 생겨난 수많은 사회적 비리들은 광초인이 야심가로 변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대환경이다. 부르봉왕조복벽시기의 교회권력의 복귀, 귀족사회의 가치관 및 그로인하여  산생된 수많은 사회적불평등과 비리는 은 쏘렐이 야심가로 변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환경이다. 19세기 초반 자본주이적 생산관계와 생활방식의 확립으로 하여 금전만능의 사회가치관과 도덕적 타락은 라스띠냐크가 야심가로 변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환경이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시대 식의 야심가들이 있는가? 다른 고장의 상황은 불문에 부쳐 두고라도 우리 연변의 상황, 아니 우리문화계의 상황만 본다면 어떠한가? ..."야심가비교론" - 이것도 비교문학연구에서의 하나의 재미나는 연구테마라고 생각한다.  2007년 7월 24일 장춘에서
61    후퇴와 전진의 변증법 (김관웅61) 댓글:  조회:5174  추천:109  2007-08-08
후퇴와 전진의 변증법 김 관 웅   전쟁에서 전진과 후퇴는 흔히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전진 속에 후퇴가 있고 후퇴 속에서 전진이 있을 수 있다. 성공적인 후퇴는 전진을 내포하고 또 그래서 전진을 위한 후퇴이다. 그러나 졸렬한 후퇴는 후퇴만을 위한 후퇴로서 전진이 내포되지 않은 후퇴이다.      전진을 위한 후퇴, 전진을 내포한 후퇴의 전례는 많고도 많지만 그 가장 전형적 사례가 중국 공농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11개  성을 지나면서 무수한 전투와 설산과 초지를 지나면서 2만 5천리를 후퇴하였기에 중국공산당은 천하를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방적인 후퇴,  전진을 내포하지 않는 후퇴는 오히려 자신을 죽음에로 몰아간다. 리자성의 농민봉기군의 패퇴가 그 단적인 실례이다.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준 리자성의 농민봉기군은 만족기병에 의해 한번 싸움에서 진 뒤로는 그냥 후퇴만 하다가 나중에는 얻었던 천하도 잃고 말았지 않았던가.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은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데도 적용이 된다. 장춘에서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 칸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세상이 끝없이 넓어진다”는 수필을 한편 읽고 느끼는 바가 크다.     청나라 시기 안휘성 동성(桐城)출신의 명재상인 장영(張英)의 일화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영의 고향 동성 상부(相府)와 이웃집 사이에는 아주 비좁은 공지가 길게 나 있었다. 이웃집에서 집을 수선하다가 담장을 장영네 집쪽으로 몇 자 가량 더 내 쌓았다. 이 일로 두 이웃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다. 장영이네 집 식구들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고 있는 장영의 권세에 등대여 이웃집을 혼내주려고 장영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장영에게서는 회답이 왔는데 그 편지에는 이란 시구가 있었다고 한다.        천리 밖에서 담장 때문에 편지를 보냈구료        千里修書只爲墻,    이웃에 석자 양보해도 무방하잖겠나                讓他三尺亦無妨.    만리장성은 지금도 있으나                              萬里長城今猶在,    오늘은 진시황이 어디에 있느뇨                      如今何有秦始皇.    장영네 집 식구들은 이 시를 보고는 느끼는 바가 많아서 자기네 집 담장을 수선할 때는 장영의 말대로 이웃집에 양보하여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를 본 이웃집에서도 자기의 과욕을 뉘우치고 쌓았던 담장을 허물어서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 그리하여 장영네 집과 이웃집 사이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니기 편리한 여섯 자  남짓한  행길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이 행길을 륙척항(六尺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한 걸음 후퇴하여 자신의 인격적인 품위를 지킨 미담은 서양에도 있다. 한번은 괴테가 좁은 길을 걷고 있다가 자기와 늘 의견 상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 문인을 만났다. 이 문인은 자기의 숙적인 괴테를 보더니만 대뜸 얼굴이 검으락 붉으락해서 “나는 바보한테는 길을 피할 줄 모른다!”고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다고 한다. 이 괴테는 오히려 웃으면서 “나는 바보에게 길을 피해 줄줄 안다”고 응수를 하면서 길 한쪽에 비켜서서 그 문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후퇴를 할 줄 아는 괴테의 이 일화도 서양에서는 줄곧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길을 피하는 문제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로 자기와 상대도 안 되는 인간하고 드잡이를 한다거나 심지어 결투까지 벌인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만일 괴테가 그 당시의 기분을 컨트롤하지 못해 그 문인과 같이 놀았다면 이는 아마도 괴테의 품위에 많은 손상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퇴와 양보가 만능인 것은 아니다. 비록 우화이기는 하지만 동곽 선생처럼 늑대에게 그냥 양보만 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자기를 죽음에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를테면 푸시킨이 자기의 부인과 놀아나는 프랑스의 건달군 단테스에게 그냥 양보를 했다면 푸시킨의 인격적인 품위는 아마도 일락천장이 되었을 것이다. 푸시킨은 비록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사람답게 살려는 패기를 세인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후퇴해야 하는 일과 후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임을 또한 잘 알아야 한다. 이는 사회상의 인간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집안에서의 부부 관계를 포함한 모든 대인관계에 통하는 일반적인 삶의 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장을 둘러 싼 자질구레한 문제거나 또는 문학평론이나 창작이 아닌 길을 비켜주는 것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거나 한번 양보하면 살아가는 공간이 끝없이 넓어지고 살아가는데 언제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사람들은 “꽃나무를 많이 심고 가시나무를 적게 심으라”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큰 시비나 큰 원칙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다가는 필연적으로 인격적 품위를 잃게 됨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인간은 골기가 없는 무골충이 되고 말며 늘 남들에게 죽어 대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또 “나귀가 순해빠지면 누구나 타려고 하고 사람이 순해빠지기만 하면 남들의 업신여긴다”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경구와 속담들은 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어느 특정한 경우를 말한 상대적인 진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을 잘 터득하는 것이 마음 편안하게도 살며 또한 사람답게도 살 수 있는 길임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7년 8월 7일 연길에서   
60    벼슬살이의 맛 (김관웅60) 댓글:  조회:6602  추천:154  2007-08-01
☆독서필기☆ 벼슬살이의 맛 김관웅     나는 벼슬 복이 없다. 벼슬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러나 나는 관청의 내막과 벼슬살이의 맛이 구경 어떠한지 무척 알고 싶다. 마치도 무지렁이 노총각이 길가에서 미모의 처녀를 향해 자꾸 곁눈질을 하듯이 자기와 인연이 없을수록 호기심이 동하게 되는 것도 아마 인간의 상정이리라. 그래서 요즘에는 여름방학을 리용해 오경재(吳敬梓, 1701~1754)의 《유림외사(儒林外史)》의 번역을 시작했다. 인생에는 남북으로 갈림길 많고 장상(將相)이나 신선(神仙)들도 원래는 범인(凡人)들이라네. 백대(百代)의 흥망은 조석(朝夕)이 바뀌는 것 같고 세찬 강바람 전조(前朝)의 고목 넘어뜨리네.   부귀공명은 뜬 구름 같아 모든 심혈 다 기울여도 애오라지 세월을 허송할 뿐 탁주 석 잔에 거나히 취할 제 낙화유수는 어디로 흘러 흐르려나    이 사(詞) 역시 나이 든 서생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평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생의 부귀공명이란 본디 사람의 몸 밖의 것임을 설파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부귀공명이 눈앞에 보이면 모두 목숨을 내걸고 그것을 잡으려고 아득바득한다. 일단 그것이 손에 잡히고 보면 그 맛은 초를 씹듯 하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이를 꿰뚫어 보았던가!    《유림외사》는 이렇듯 허두를 뗀다. 번역하면서 읽어 내려가노라니 주로는 벼슬살이를 하기 위한 후보관원-유생들이 관청에 들어가기 위한 평생의 비참함 몸부림, 그리고 벼슬길에 오른 후의 벼슬아치들의 정계에서의 암투와 그 검은 내막을 주로 묘사했음을 알게 되였다. 바로 우에서 인용한 《부귀공명은 부질없는 것 / 모든 심혈 다 기울여도 / 애오라지 세월을 허송할 뿐》임을 그 주제로 내세운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벼슬살이의 그 맛을 알고 싶었다. 그것도 옛날이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서 우리네 부모관(父母官)들이 벼슬살이를 하는 그 맛을 간접적이라도 알고 싶었다. 물론 남이 씹어주는 떡은 제 맛이 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는 말이다.  그러던 중에 장춘 서점에서 왕몽의 자서전 《半生多事》(제1부), 《大塊文章》(제2부)를 사서 읽으면서 비록 남이 씹어주는 떡이기는 하지만 왕몽의 자술을 통해 벼슬살이를 하는 그 맛을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왕몽은 1953년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여 1956년에는 《조직부에서 온 젊은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것이 문제로 되어 우파감투를 쓰고 신강에서 17년 동안이나 정배살이를 하다가 1979년에야 북경에 다시 돌아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설가이다. 이런 글쟁이가 1982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중공중앙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가 1986년에는 마치도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어 용으로 변한 것처럼 일약 문화부장으로 승진되었다. 1987년에는 그 관운(官運)을 타고 중공중앙 중앙위원으로 되었으며 1992년까지 옹근 10년 동안이나 중국의 문인으로서는 가장 큰 벼슬자리에서 벼슬맛을 톡톡히 보았다. 왕몽은 《大塊文章》(제2부) 중의 <관장일별(官場一瞥)>에서 벼슬살이 맛이 신 맛(酸), 단 맛(甛), 쓴 맛(苦), 매운 맛(辣)에 대해 리얼하게 서술하였다.  벼슬살이의 단 맛:  왕몽은 벼슬살이를 하였기에 세계가 좁다하게 다 돌아다니면서 세상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고급비행기에 고급호텔에 들면서 만판호강을 하면서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부 부장을 하면서 다닌 나라만 해도 50여 개 국이나 된다. 월급단자에도 00001로 첫 번째로 되어있고, 운전기사도 차를 운전해주고, 어디 가서 말을 하면 그것이 지시로 되어 관철되어야 했으니 사람으로 난 보람을 만끽했을 것이 아닌가.  벼슬살이의 신 맛:  왕몽은 《관직이 오를수록 자기의 관직이 작은 것을 느끼게 된 것이 벼슬을 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 첫 감수》라고 술회했다. 맞는 말 같다. 문화부장 우에도 숱한 거물들이 도사리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거물 앞에서 처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가는 기분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벼슬살이의 신맛은 자기보다 못한 자한테 억눌리거나 수모를 당할 때 일어나는 시샘이나 질투심과 더 많은 함수관계를 가질것이다.  《유림외사》제2회에서 주진이라는 늙은 수재는 학식이 있고 글재주가 있었지만 수무번이나 거인을 뽑는 시험에 참가했지만 모두 락방을 하여 자기 아들벌도 채안되는 같은 해에 수재로 된 젊은 서생 매구란 건방진 녀석한테 갖은 수모를 다 당한다. 벼슬살이를 하자면 이런 신 맛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벼슬살이의 쓴 맛:  며칠 씩 연속 하는 마라톤식 회의를 소화해 내야하고, 많은 사태에 대해 태도 표시를 해야 하고도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늘 무함을 당하거나 밀고를 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야만 한단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를 죽이면서 살아가면서 나사못이나 부분품으로서의 요소를 나날이 강화해야만 한다고 한다. 대부분 경우에는 참가하기 싫은 회의에 참가해야 하고, 내키지 않는 말을 해야 하고, 언제나 상급 앞에서 근신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고 한다. 자기의 개성을 모조리 죽이고 살아야 하는 게 벼슬살이의 생리라고 한다. 마치도 살얼음우로 걸어가듯이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게 벼슬살이라고 한다.  벼슬살이의 매운 맛:  중국에는 《하늘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고, 사람에게는 조석으로 변하는 길흉화복이 있다(天有不測風雲, 人有旦夕禍福)》는 말이 있다. 벼슬길은 그 어느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앞길을 예측키 어렵다. 그래서 왕몽은 벼슬살이에는 《길흉화복이 예측키 어려운 법칙》이 적용된다고 설파한바 있다. 한창 잘 나가던 자동차가 어디에서 사고를 칠지 모르듯이 벼슬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들의 앞에는 언제 어디서 천길 수렁에 빠져죽고 언제 어디서 나가는 단두대가 기다리는지 모른다. 양귀비라는 여자가 황제의 은총을 한 몸에 입고 분수를 모르고 정치권력이란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모반을 한 군사들에게 목 졸료 죽지 않던가? 강청의 말로도 양귀비와 다른게 뭐가 있는가? 한마디로 벼슬사이의 맛은 고추, 당추보다 더 맵다  《유림외사》의 제1회에는 왕면(王冕)이란 농부출신의 재사가 등장하는데, 그 어머니가 임종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의미심장하다.    “보아하니 내 명은 이제 다 한 것 같구나. 이 몇 해 동안 사람들은 나의 귓전에 대고 아들이 학문이 깊으니까 벼슬길에 오르게 하라고 권하더구나. 벼슬하는 게 가문을 빛내는 일이라고는 한다만 내가 보건대 벼슬아치들은 모두 끝장이 안 좋더라. 게다가 너는 성미가 도고해 만일 화를 불러오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거다. 너는 부디 이 어미의 유언대로 나 죽은 뒤 장가를 들어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나의 산소를 지켜다오. 절대 벼슬길에 나가지를 말거라. 그렇게만 한다면 이 어미는 죽어도 눈을 감겠다. ”  왕면은 울면서 그러겠다고 대답해서야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더니 영영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 효자인 왕면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한 평생 벼슬을 호랑이 피하기라도 하듯이 벼슬길을 피하면서 조용히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벼슬살이의 맛이 얼마나 매운가를 증언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왕몽은 왕면처럼 운둔거사로 된 것이 아니라 벼슬길에 나섰지만 한 10년간 벼슬길에서 벼슬 맛을 보다가는 역시 본의 아니게 다시 작가라는 제자리로 되돌아 왔다. 왕몽이 이 모든 것을 인생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멋지다.  그러니 10년 동안의 벼슬살이는 작가 왕몽에게 있어서는 남들을 해볼래야 해볼 수 없는 생활체험으로 되었던 것이다. 낮은 곳에서의 생활체험도 중요한 생활체험이지만 높은 곳에서의 생활체험도 중요한 생활체험인 것만 분명하다. 중국 청나라 후기의 조설근이 《홍루몽》같은 명작을 쓸 수 있은 것은 그가 열여섯 살까지는 대부호, 대관료의 가문에서 태여나 만판 호강을 하면서 호의의식을 해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조선조의 김만중이《구운몽》 같은 작품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조정 관원으로 높은 곳에서 벼슬살이를 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도 여전히 자기 할 일을 찾아하면서 여유 있는 심태를 가지고 자아를 잃지 않고 계속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인생의 복이고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왕몽은 10년 동안의 벼슬살이를 무난하게 마치고 다시 소설가라는 자기의 자리에로 복귀를 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10년 동안의 벼슬살이의 경력을 문학창작의 양질의 소재로 충분히 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왕몽은 전임 문화부장이라는 때 지난 관직을 늙은이가 지팡이에 의지하듯이 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소설가로서의 이름과 창작실적으로 만년의 아름다운 명절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왕몽의 자서전 제2부 <大塊文章> 2007년 제1판만 해도 6만 5천부를 찍었으니 원고료수입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원고료가 천자당 1000원이라고 하니 이 책 한권의 원고료만도  45만원이라는 엄청난 돈이다.    너무너무 운수 좋고 너무너무 총명한 왕몽이다.   참으로 부러운 인생이다.                                          2007년 7월 14일 장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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