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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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의 비극 댓글:  조회:2116  추천:0  2016-09-06
“집” 잃고 “집”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의 비극      -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의 디아스포라문학의 주제에 대하여 연변대학교 김 관 웅   1. 들어가는 말    “고향상실의 주제”와 “고향 찾기의 주제”는 이민집단으로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오랜 주제였다. 최서해의 《탈출기》, 《홍염》으로부터 시작하여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에 이르기까지 중국조선족문학 초창기의 전반 문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는 “고향상실의 주제”와 “고향 찾기의 주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중국의 특수한 정치적 여건 때문에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고향 상실과 고향 찾기”의 주제는 수면 아래에로 잠적해 버렸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우리문학에는 다시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와 중국에서의 정착사를 작품화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시작되여 리근전 선생의 장편소설《고난의 길》, 최홍일 씨의 장편소설《눈물 젖은 두만강》, 최국철 씨의 장편소설 《간도풍운》, 리혜선 씨의 장편르포《충청도 아리랑》등 력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한중수교를 계기로 하여 중국조선족사회에는 한국바람이 12급 태풍마냥 들이닥치기 시작하였다. 한국바람은 중국조선족이 손에 돈을 좀 쥐여볼 수 있게는 하였지만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뿌리까지 뒤흔들어놓는 후과를 가져다주었다. 지금 한국에 나가있는 중국조선족은 20만 명을 훨씬 웃돈다. 이밖에도 미국, 일본, 구쏘련 등 세계 각국에 흩어져 버린 중국조선족까지 합치면 그 수자는 어마어마하다. 거세찬 한국바람 앞에서 중국조선족 작가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를테면 김혁 씨의 르포 《천국의 하늘에는 색조가 없다》, 리혜선 씨의 르포《코레안 드림》등이 바로 그 보기이다.    허련순 씨 역시 한국바람 앞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주로는 소설을 가지고 대응을 했다. 그것도 단편이나 중편이 아닌 장편을 창작을 통해 거세찬 한국바람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중국조선족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혀련순 씨는 《흑룡강신문》에 장편소설 《바람꽃》을 련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나는 귀추 없이 떠돌아다니는 바람꽃, 바람이 불어 왔던 곳에 바람이 지는 그 곳, 두 세계 중의 어느 한곳에 머무르거나 또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도 못한 채 두 곳을 끊임없이 우왕좌왕하였다. 언제나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한곳에 대한 끊임없는 추억과 망각 그리움과 원망의 갈등을 수없이 겪으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수없이 날아갔었다. 언제나 두 세계에서 함께 공존했던 셈이고 두 세계에서 함께 탈출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나는 누구일가?"    허련순 씨는 그 후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나는 누구일가?"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관한  질문을  끈질기게 던져오고 있으며 , 요즘에도 글이나 대담을 통해 자신의 창작주장을 여러 번 천명한바 있다. 허련순 씨는 최근에도 한국 매체의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영원히 주류에 속할 수없는 소수자이며 이방인으로서 중국조선족문학의 뿌리는 바로 이런 소수자의 슬픔에 있다고 언급한바 있다. 허련순 씨의 이러한 생각이 가장 집중적으로 또 가장 예술적으로 체현된 2004년부터 일년 남짓이 장백산 잡지에 련재되였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은 10년 전의 그녀의 장편소설 《바람꽃》에 나타난 디아스포라문학 경향의 연장이면서도 동시에 승화이기도 하다.    지난세기 90년대 중반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창작은 주로 중국조선족의 아이덴티티를 추적하는데 바쳐졌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허련순 씨의 소설 창작은 가장 디아스포라문학의 주제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원래 허련순 씨의 두 부의  장편소설 《바람꽃》과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를 합쳐서 논하려고 하였으나 짧은 론문에서는 그것이 무리하고 생각되여 후자 한부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2.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미아(迷兒) 군상(群像) 인간은 이처럼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 가정(家庭)적,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된다.    인간은 우선은 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라나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가정적인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게 된다. 하련순의 장편소설 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등장하는 대부분 인물들은 거의 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가정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극심하게 겪어온 인물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안세희부터 분석해 보기로 한다. 세희는 문화혁명 때 부모가 반혁명으로 몰리는 바람에 시골에 사는 큰 아버지 집에 맡겨져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반동새끼라고 놀리고, 집에서는 밤마다 사촌오빠의 희롱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 후 아버지가 죽은 후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세희는 엄마가 아버지의 친구와 한 이불을 덮고 끌어안고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 무서운 심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해 16세인 세희는 어머니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모한테로 가겠다고 자진해 나선다. 이모네 집에서 세희는 부성애를 이모부를 통해 보상받아 보려한다. 이모부는 살갑게 세희를 대해주었지만 결코 세희를 자기 딸처럼 여기지 않았고 또 여길 수도 없었다. 이모부는 필경은 남이였기 때문이다. 세희는 이모부로부터  친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 꿈꾸었고 또 그래서 이모부네 집에서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으려 하지만 그 갭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녀는 진희 앞에서는 언제나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실제상에서도 세희는 이모부에게 있어서는 한낱 성적인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미모의 젊은 처녀였을 따름이였다. 바로 세희를 남으로 여겼기에 세희를 육체적으로 범하기까지 하게 되었으며 그 죄책감으로 이모부는 죽고 만다. 세희는 이처럼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모네 집에서도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지 못한다.    가정적인 동일성을 찾지 못하고 늘 방황하던 세희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두 남자와 만나서 번마다 헤여진다. 세희의 말처럼 첫 번째 남자는 세희는 좋아하는데 그 남자가 세희를 싫어했고, 두 번째는  그 남자는 세희가 좋아하는데 세희가 그 남자가 싫어서 헤여졌다. 그것은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생겨난 세희의 불안정한 생활태도와도 밀접한 련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희가 낳은 각성바지 두 아들도 어려서부터 가정적인 동일성의 갈등에 시달리면서 자라난다. “죽은 안해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남자는 도꼬마리 같은 새끼 하나를 그녀의 바지가랭이에 달랑 달아놓고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없이 태여나서 자란 세희의 둘째 아들 용이는 천덕꾸러기였다. 이부(異父) 형에 대한 복종과 헌신 정신을 어려부터 갖게 된 용이의 특이한 성격 역시 가정적 동일성의 갈등으로부터 생긴 부산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송유섭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송유섭이 12세 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찬장에 그림이나 그려주고 다니는 장인바치에게 반하여 음분도주한 후로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림에 지친 그는 엄마가 이제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으리라고 작심한다. 엄마가 집을 버리고 도망치자 술주정뱅이 아버지도 아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송유섭은 고아로 된다. 그를 가긍하게 여긴 송유섭의 친구인 영구의 아버지가 유섭이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기른다. 한해 겨울을 영구네 집에서 얹혀 산 후 송유섭은 윤도림이라는 사람에게 넘겨지기 전에 그는 자기는 원래 버려진 아이였음을 영구아버지의 말을 통해 알게 된다. 양부모한테서까지 버려졌으니 그는 두 번이나 버려진 셈이였다. 사실 윤도림이네도 송유섭과 나이 비슷한 아들애를 잃고 그 아픔을 잊어보려고 송유섭이를 양자로 데려온 것이다. 그러나 송유섭은 윤도림의 안해에게 있어서는 자기 아들 대신으로 생각하는 허깨비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도 송유섭은 윤도림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윤도림네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기로 작심한다. 비록 죽은 친아들 송철이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양모가 자기를 허깨비로 생각하는 것이 불쾌하기는 했지만 윤도림네 집에서의 3년간은 그래도 대체로 행복했다. 그러나 3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송유섭은 후에 집체호로 나간다. 유섭은 목사였던 양부로 하여 공청단에도 입단할 수 없고, 군대에도 갈 수 없게 되자 윤도림을 아버지로 승인하지 않고 다시 자기를 고아로 내세우면서 살아간다.  “송유섭은 영예롭게 중국인민해방군 전사로 되었다. 윤도림 아저씨를 배신한 영예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 달도 못 되여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고아로 가장 한 일이 탄로되여 그는 다시 원래의 농촌 마을로 돌아오게 되였다.”  송유섭은 집체호에서 억울하게 강간미수라는 루명을 쓰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구원된 후에는 다시 양부 윤도림이한태 의지하게 된다.    이처럼 송유섭은 어려부터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과정에서 여러 번이나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처럼 이른바 《성명위기(姓名危機)》에 직면하게 된다. 송유섭은 원래는 기아(棄兒)였으며 누가 생모, 생부인지도 모른다. 친부모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을 치고 난 뒤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업둥이임을 알게 되자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살 희망마저 포기하려고 한다.  이 일을 거치면서 그는 자아인식에서의 위기를 겪게 된다. 목사인 윤도림을 만나서 양부(養父)의 성(姓)을 따라 윤유섭이라고  성을 고치고 공식적인 신분을 확정하게 된다. 즉 자기의 양부(養父)와의 동일성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이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린다면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그에 귀순하게 된 셈이다. 이는 아동심리발전에서의 필연적인 경력이며 일종 권위에 대한 굴복인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거세찬 정치폭풍은 송유섭으로 하여금 부득불 자기의 양부와의 동일성을 부인하고 다시 고아의 신분을 되찾게 하였으며 이 덕으로 참군까지 하지만 다시 정치심사에서는 양부와 동일성을 갖고 있다고 인정되여 군대에서 쫓겨난다. 집체호에 다시 돌아온 후 강간미수라는 누명을 쓰고는 자살까지 시도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음에는 다시 양부인 윤도림을 찾아 간다.    한마디로 송유섭은 거의 한평생 집을 잃고, 집을 찾기 위해 방황한 사람이다. 가정적 동일성을 찾지 못해 한평생 우왕좌왕한 사람이다. 송유섭은  “집에 머무를 수 없었고”,  송유섭에게는 “어느 곳에도 집은 없었다.”  집을 잃은 미아(迷兒)의 가장 전형적이 보기이다.    세 번째로 쌍희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쌍희는 부모는 한족이다. 그런데 그가 다섯 살 때 부모가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조선집에 입양되였다. 그 집에는 딸만 셋이고 아들이 없었다. 아마 아들이 없어서 그를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어느 날, 아이스크림 사 먹자고 돈을 찾다가 양부의 돈지갑에서 콘돔을 꺼내여 불궈 가지고 다닌 것이 들통이 나서 집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누나가 쌍희를 찾아 내여 저녁에 같이 자게 되었는데, 누나의 젖가슴을 보고 또 가만히 만져 보게 된다. 그날 밤을 계기로 하여 쌍희는 누나에게 련정을 품게 되며 누나가 시집을 가자 쌍희도 아무런 미련도 없이 탈가한다. 쌍희 역시 가정적인 동일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뜬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고아 같은 신분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가족구조가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이런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갖고 된다. 여러 가지 부동한 원인으로 자기의 친부모와 같이 있지 못하거나 집을 떠나 다른 집에 맡겨져 자라나게 되는 경우에는 흔히 자기의 성(姓)이 계부(계모), 양부(양모)나 그 자식들을 상대로 하여 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된다. 즉 가정 내에서의 성(姓)의 동일성을 잃음으로 하여 심각한 《성명위기(姓名危機)》또는 가정적 동일성 확립의 어려움으로 하여 많은 심리적인 갈등에 빠지게 되는 법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 등장하는 세희, 유섭, 쌍희 등 주요한 인물형상들을 모두 정도부동하게 가정적 동일성을 확립할 수 없음으로 하여 많은 심리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성정해온 사람들이다.    이밖에도 세희의 아들 용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비 없이 태야나서 자란 용이는  외할머니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늘 소외를 당하다 보니 어린 나이에 그래도 당당한 결혼을 통해 태여난 형한테 꿀리고 순종하고 양보하는 가련한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집에서의 용이의 위치가 용이의 불쌍한 성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철 없는 아이지만 용이의 성격은 어쩌면 중국조선족의 민족적성격의 중요한 특징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정판룡 선생의 이른바 “며느리론”은 어쩌면 용이 같은 생존위치에서 생겨난 처세태도라고 보아도 과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집은 가문을 뜻하며 집은 중추적인 사회단위다. 집은 집안과 같은 뜻의 말이 되거나 집안과 어우러져 쓰이면서 훨씬 내면적이고 인간적인 상징성을 띠게 된다. 그 까닭은 집은 삶의 근거, 목숨의 뿌리, 안락함의 보루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양사회에서는 집은 가정주의의 핵심적 개념을 형성한다. 집은 가문, 가계, 가통 등을 상징하면서 전통사회에서는 국가와 거의 대등할 수 있었던 사회단위로 되었다.  자기의 집이 분명치 않고 집을 잃었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덴티티에서의 가장 기초적인 가정적 아이덴티티(가정적 동일성)의 상실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안세희, 송유섭, 쌍희, 용이 같은 집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미아(迷兒)들은 민족적정체성의 갈등으로 방황하는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인간상들이라고 분석해도 대과(大過)는 없을 것이다.      3.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동물형상들 이 소설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동물형상은 전반 작품구성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집에서 버려진 나비란 이름을 가진 강아지와 밀항선의 선창에 날아 들어온 나비는 비록 필묵을 많이 들이지는 않았으나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세희, 유섭, 쌍희, 용이 등과  인물형상과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우선 나비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나비라는 이름을 가진 애완견은 세희의 돈 많은 친구인  춘자가 못 기를 상황이 되어 세희에게 넘겨주어 기르게 된 강아지이다. 그 이듬해 이 나비란 애완견이 예쁜 새끼를 다섯 마리를 낳았다. 그 새끼들은 젖을 떼자 남에게 다 주어버렸다. 새끼를 잃은 나비가 한 현관을 쓰고 사는 옆집 문을 미친듯이 물어뜯고 허비다가 이웃집 한족 령감을 물게 되여 세희네도 어쩔 수 없이 이 나비란 애완견을 강변의 산책로에다 버리게 된다. 택시가 떠나자 나비가 까만 개를 뒤에 남겨두고 정신없이 택시를 쫓아왔다. 두 아이가 뒤돌아보지 못하도록 세희는 오른쪽 팔로는 광이를 왼쪽 팔로는 용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찬 정신없이 쫓아오던 강아지가 포기한 듯  멈춰서더니  자기로부터 멀어져가는 택시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는 그지없이 슬퍼보였다. 그의 눈에는 주인을 따라잡지 못한 안타까움과 괴로움 외에도 체념과 같은 것이 내비치고 있었다. 버리고 가는 주인을 원망이나 저주를 하면 어쩌랴 싶었는데, 강아지는 끝까지 주인을 원망할 줄 몰랐다. 그래서 그 눈빛이 더 슬펐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비란 애완견과 세희의 둘째 아들 용이는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관계를 맺고 있다. 나비란 애완견이 세 번째 수컷을 만나 겨우 교배에 성공하여 새끼를 배여 낳았듯이 용이도 세희가 세 번째 남자와 우연히 만나고 사귀어서 임신해서 나은 아이다. 그래서 그런지 용이는 무척이나 애완견 나비를 좋아했고, 아비 없는 천덕꾸러기 용이의  처지와 버려지는 나비의 처지도 아주 묘하게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    고스타 심리학의 동형론(同形論)의 리론으로 분석해본다면 세희의 둘째아들 용이와 애완견 나비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애완견 나비의 처지와 세희, 유섭, 쌍희, 용이 등 인물들의 처지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집 저집으로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주인에 의해 버려진 애완견 나비의 가긍한 처지는 세희, 유섭, 쌍희 등의 처지와 운명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선창의 천정 우에 붙어 있다가 거의 질식해 죽어가는, 역시 탈진상태에 빠져 빈사상태에 이른 세희의 얼굴 우에 떨어져 내리는 나비가 묘사되여 있다. 선창 우에 붙어 있다가 떨어져서 죽어가는 나비와 선창 안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세희 등 밀항자들은 묘한 이원대응(二元對應)의 구조적관계를 갖고 있다. 나비를 두고 두 밀항자인 세희와 유섭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 …   유섭이가 간신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살았소?》   《살았어요.》   《그놈도 운수가 되게 나쁘군.어쩌다 이런 곳에 들어와 가지고 날아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게 생겼으니.》   《죽을가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죽지 살겠소?》   《지금 선창밖에 내보낸다면 살지 않을가요?》   《사방이 바다인데 나비가 어떻게 살겠소. 차라리 이곳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지.》   《나비는 아마 제집 같은걸 찾아다니지 않소.》   《그건 왜요?》   《나비는 집이 없으니깐.》   《나빈 집이 없어요?》   《그래 있는 줄 알았소?》   《날아가 있는 곳이면 다 나비집인줄 알았죠.》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모르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이 없는 나비가 가엾다고 생각하고있는지 아니면 집 없이도 자손만대 번식을 하고 잘 살아가는 나비를 부러워 하고있는건지. 암튼 자기 집에 대한 집착으로 죽고 사는 인간에 비해 나비는 현명한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같은 생각이였다.    세희가 손바닥에다 나비를 놓았다. 그리고 후-하고 불었다. 그런데도 나비는 나래를 우로 곧추 세운 채 꼼짝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왜 안 날죠?》 《나비가 날려면 삼십도 이상의 체온을 유지해야 날 수 있소. 그래서 나비는 맑은 날만 날고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은 날지 않소. 체온을 올릴 수 없으니깐.》 《그럼 나비가 불속에 날아드는 것도 체온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닐가요? 》 《체온에 대한 욕망이 바로 비상에 대한 욕망이겠지. 불에 타서 죽더라도 비상을 해야 하는 나비의 사정은 어찌 보면 인간의 생존의 리유와 비슷한거 아니겠소.》 《나비도 생존리유가 있을가요?》 《생존하는 모든 물체는 다 자기 생존 리유가 있는거요.》 《그럼 나비의 생존리유는 뭘가요?》 《글쎄 뭘가?》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가요?》   유섭은 길게 탄식을 하더니 힘 드는 듯 아주 낮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어디에도 없는 집을 찾아서 힘든 나래짓을 하는거. 참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똑 닮았을가…》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은 심리적으로 고토와 거주국의 중간위치에 살고 있기에 나비처럼 “집”이 없다.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뒤 한 세기 반 남짓한 동안에 중국조선족은 모국과 거주국 양쪽으로 백안시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중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경험하여 오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마치도 나비가 하늘로 비상하기를 원하듯이 심리적으로 잃어버린 고토(故土)에 대한 끝없는 향수를 지니고 살아오고 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많은 구성원들은 개인과 고토, 자아와 그의 진정한 고향의 격리로 하여 생긴 아물 줄 모르는 상처를 갖고 있으며, 그 커다란 애상은 극복하기 어렵고 또 치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토에 대한 향수는 디아스포라들의 영구한 감정이며 그것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에 대한 인류의 원초적인 향수와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고토에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고토는 실향한 디아스포라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근하게 안아주지 않으며 따라서 고토에서도 이방인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양쪽에서 다 정신적인 안식처 - “집”을 잃고 끊임없이 방황한다.      이 점에 대해 허련순 씨는 바로 이 마지막 부분에서 나비라는 이 메타포를 동원해 아주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바 전반 장편소설의 화용점정(畵龍点睛)의 핵심적인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부분은 전반 작품의 주제를 은근하게 암시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장편소설의 제목과 묘한 조응을 이루게 하였다.    이 소설의 제목은 하나의 거대한 은유(隱喩)이다. 은유나 상징이 형성되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객관적대상과 인간의 마음사이에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표현대상인 원관념과 비유적 대치 물 사이의 관계는 등가성(等價性) 원리에 의존하는데, 이 등가성원리는 고스타 심리학에서는 이질동구(異質同構)의 리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가 나중에서는 주인으로부터 버려져 집을 잃은 개나 “어디에도 없는 집을 찾아서 힘든 날개짓을 하는 나비”는 가정적 정체성을 잃고 집 없이 헤매는 세희, 유섭, 쌍희, 용이와의 관계는 등가성관계를 갖고 있는것이며 이질동구(異質同構)인것이다. 따라서 “세희네들은 집 없이 헤매는 개다”, “세희네들은 집 없는 나비다”는 비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이 작품은 제목으로부터 전반 작품의 총체적인 구성에 이르기까지 은유성 내지는 상징성을 다분히 띠고 있다.       4.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보이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고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보이는 가정적 동일성을 상실한 인물형상에 대한 묘사는 가정적저인 아이덴티티에 대한 성찰과 사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이나 가정(家庭)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만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국가적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허련순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는가》에서 가정적인 동일성의 갈등 속에서 시달리는 세희, 유섭, 쌍희네들은 민족적인 동일성의 갈등도 극심하게 겪고 있다.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에 오른 밀항자들은 중국조선족의 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인공들인 연변녀자 안세희와 연변남자 송유섭 그리고 료녕 철령에서 온 김채숙,  송유섭, 오미자, 쌍희, 안도에서 온 부부, 왕청 녀자 말숙이…이네들은 모두 한결 같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최하층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중국 사회에서는 소수자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였다. 이를테면  “일이원밖에 안 되는 라면을 죽기 전에 먹고 싶었던” 말숙이의 아들은 무리싸움에 불려나갔다가 그만 권세 있는 진장(鎭長)의 아들 대신 총알밥이 되여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다. “이런 아픔이 있어서 그녀는 세 번째로 밀항을 하게 되었고”, 또 “세 번 째도 실패한다면 또 다시 네 번째로 밀항배를 탈것이며”, “밀항에 성공하는 것이 아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인양 그녀는 밀항에 큰 뜻을 부여했다.” 이 점에서는 주인공인 안세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한국에 갈수만 있다면 그 어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굴욕도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한국만이 자기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료녕 철령에서 온 김채숙이란 녀성의 말처럼 살자고 돈 벌러 한국으로 가는 밀항선에 목숨을 걸고 올라탄 그네들은 “모두 한 배에 탄 운명”이였다.      이처럼 천진하고 순박한 밀항자의 운명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는 자들은 리풍언 같은 밀항조직자들과 브로커들이였다. 이 자들을 밀항이라는 이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밀항자들을 제 손안에 넣고 마구 주물렀다. 리풍언의 손아귀에 걸려든 그네들은 마치도 새장 안에 갇힌 새 같은 신세였다. “날려 보내든 관상용으로 놓아두든 아니면 털을 뽑아 발가벗긴 채 불에 구워 먹든”다 리풍언이 같은 브로커들의 마음에 달린 일이였다. 밤이 되면 브로커들은 이런저런 구실을 달아가지고 젊은 녀자들을 배의 운전실에 불러들여서는 저들의 야욕을 채우군 하였다. 주인공 세희는 서류에 차질이 있다는 거짓말을 꾸며대는 바람에 운전실에 올라갔다가 그만 리풍언과 다른 한 놈팽이한테 륜간을 당하고 만다. 명실공히 현대판 노예무역선이 아닐 수 없다. 17세기 이래 유럽에서 성행했던 흑인노예무역선과 다른 점이라면 밀항자들이 자진해서 배에 올랐다는 것뿐이다. 프랑스의 사실주의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 에서는 그래도 노예상인들이 흑인노예들을 선창 밖 갑판우로 날마다 몰아 내여 환기(換氣)라도 시켜주고 육신도 움직일 수 있는 활동시간도 주었지만, 이 밀항선에서는 해상경찰들에게 발각을 당할가바 협착한 선창 속에서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엄하게 단속한다. 하루에 먹는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구멍으로 넣어주는 물도 없는 컵라면 하나뿐이였고, 선창 안에 갇힌 여자들은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엉뎅이를 까고 빈 컵라면에다 용변을 보아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였다. 이리하여 이 소설에서 인물형상의 구성은 밀항자들과 리풍언 같은 브로커들 사이의 이항대립구조를 갖고 있다.    이렇게 련며칠 동안 파도를 헤치며 항진하던 낡고 허름한 고기배의 선창 밑에 숨겨진 밀항자들은 인간이하의 모욕을 당하고 짐승보다도 못한 푸대접을 받으면서 한국령 바다와 잇 닿아있는 공해에 가까스로 닿게 된다. 그러나 밀항자들을 옮겨 실어 한국에 잠입하게 되여 있은 한국 밀항선이 나타나지 않게 되자 배는 부득이  허허 바다에 멈추어서있게 된다. 닻을 내린지 사흘이 지나도 한국 밀항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령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순라선에 발견될 위험수위가 높다고 선창입구를 아예 낮이고 밤이고 비닐로 꽁꽁 막아 버렸다. 공기라고는 통할 데 없이 밀폐된 선창 안은 완전히 진공상태였다.” 밀항자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브로커들은 갑판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브로커들은 죽은 밀항자들은 가차 없이 바다에 처넣는다. 이리하여 왕청 녀자 말숙이는 정신이 붕괴되여 미쳐버렸고, 안도 부부는 가지런히 누워서 질식해 죽어버렸고 세 번째로 미쳐서 광기를 부리던 말숙이도 죽고, 송유섭이도 숨을 거둔다. 이처럼 송유섭이네들은 “눈을 감으면서도 그리워했을 마음의 집을 끝내 찾지 못한 채 떠나갔다.”    집과 민족 또는 국가 사이에는 상호 류추관계가 성립된다. 집의 상실은 민족과 국가의 상실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허련순의 말처럼 어디에 가서나 이방인이다. 언제나 개밥에 도토리처럼  소외를 당하고 어디서나 주류사회에 끼여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중국조선족은 모국과 거주국의 경계에서 살면서 안정된 집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은 집을 잃고 집을 찾아 헤매는 “집시족”, “국제 미아(迷兒)”로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에서 등장하는 “할퀴울대로 할퀴운 돼지구유를 련상시키는 하수룩한 나무배”- 밀항선, 그리고 그 밀항선에 몸을 숨기고 목숨을 건 새로운 살길을 찾아 밀항을 결행하고 있는 밀항자들은 어쩌면 중국조선공동체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한 수교이후 중한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중국조선족은 혈연, 인연, 언어, 문화  등 우세로 하여 중국 국내의 그 어느 민족보다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고 빈번해졌다. 물론 1988년 제24차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중한수교 전부터 벌써 일부 조선족들에게는 친척방문의 기회가  차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한국친척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후에는 한약장사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1992년 중한 수교이후에는 임시취업을 통한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중국조선족들의 한국행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한국은 중국조선족에게, 특히는 중국조선족농민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간주되었고 이로 하여 생겨난  "코리안 드림"은 중국조선족에게는 과히 태풍에 비견할 수 있는 충격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중국조선족은 이  태풍 같은 "코리안 드림", "한국바람"에 말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한국에서 돈벌이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이 16만 명을 웃돌고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시집 간 6만 명을 넘는 녀성들과 거기에 중국조선족 유학생까지 추가된다면 20만 명을 넘어서는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흑룡강이나 료녕성의 조선족 집거촌들에는 "개와 앉은뱅이 내놓고는 다 한국에 나갔다"는 유행어가 돈지 오래다. 연길의 어느 한 중학교의 졸업생들이 연길에서 동창회를 했을 때보다 서울에서 동창회를 했더니 동창생들이 더 많이 모였더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들도 있다. 10년 남짓한  사이에 발생한 한국에로의 인원 유동이 중국조선족사회에 끼친 영향은 말 그대로 하루이틀사이에 한 지역을 사정없이 강타한 태풍에나 비유할 수 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중국조선족은 중한수교이후의 한국과의 교류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은 동시에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중국사회과학원 정신철연구원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의 법의식을 약화시키고, 자아주체성을 흐리게 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약화시키고 수많은 변상적인 고아와 과부 ․ 홀아비들을 양산시켜서 중국조선족사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고 인정했다. 정신철연구원의 말을 빈다면 "코리안 드림은 조선족사회의 평온을 깨어버린 장본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 한국은 현재까지 중국조선족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오늘 조선족의 현실을 볼 때 폐단이 이득보다 더 크다 … 역사는 가설이 없지만 가령 '한국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중국조선족은 지금처럼 동요와 당혹 속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신철의 이 견해의 옳고 그름을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정신철의 이 말은 한중수교 이후 거세차게 중국조선족사회를 강타하고 있는"코리안 드림"(일명 "한국바람")은  전반 중국조선족사회의 생사존망에까지 관계될 정도로 그 위력이 엄청남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조상들은 쪽박을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이민들로서 시인 석화의 말처럼 “천성이 나그네”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이민문화의 속성이 강한 우리 중국조선족은 또 다시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세계의 방방곡곡에 뜬 구름처럼 흘러 다닌다. 이러한 과분한 유동성은 우리 중국조선족집거지의 존속을 위협하고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조선족의 중국에서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중국조선족의 미래에 대한 우환의식을 연변의 중견시인 석화 씨의 근작시 《연변 ‧ 4-연변은 간다》에서 표현하고 있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 그건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짠지랑 함께 약간 소문이 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랭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게 연변이였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 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도꾜, 북쪽으로 하바롭스크 그리고 싸이판, 샌프랜시스코에 빠리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엔들 연변이 없을 소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헛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요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 《연변 ‧ 4-연변은 간다》전문    중국조선족은 집시처럼 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이것이 어떤 특정 개인에게는 어쩌면 행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공동체로서의 중국조선족에게는 불행이다. 중국조선족공동체는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언제까지 “연변”은 뜬 구름처럼 정처 없이 가야만 하는가? 언제까지 “연변”은 국제 미아로 살아가야 하는가?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은《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결코 이에 대해 그 어떤 명료한 대답을 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누구도 아직까지는 이에 대해 똑 부러지는 명료한 대답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허련순 씨는 장편소설《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에서 다만 디아스포라로서의 우리 중국조선족은 누구이고 우리의 집은 어디냐는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우리의 실존상황의 비극성을 리얼하게 재현하는데 모든 정력을 쏟았을 따름이다.      한 부의 장편소설이 민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런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우리 민족의 실존상황의 비극성을 이처럼 리얼하게 재현한 것 만으로서도 그 사명을 충실히 완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나오는 말    허련순 씨는 우리민족의 삶의 현실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민족의 오늘날의 실존적인 고통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민족적 사실주의에 확고하게 입각하여 세련된 언어와 기법으로 소설의 사상예술성을 높이고자 노력해온 작가이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의 문학이다. 디아스포라는 근대 식민주의체제와 현대 후식민지시대의 글로벌화라는 콘텍스트 속에서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전쟁, 시장경제의 세계화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반적인 사실주의적인 재현 속에 상징적인 기법도 적절하게 인입하고, 또 공간 집중화의 기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한국으로 향하는 밀항선에서 벌어지는 중국조선족출신의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비극적 상황을 제시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오늘날의 실존적 상황을 《시대의 서기관》답게 리얼하게, 전형적으로 재현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작자의 깊은 사색을 보여주었다. 고향을 상실하여 방황하고 방랑하는 디아스포라들에게 있어서 아이덴티티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인 것이다. 많은 본토박이 다수자들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수자들로서의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허련순 씨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는 《나의 육체적, 정신적 고향은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라는 끈질긴 물음이며,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 이후 인간 소외의 비극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특수한 공간으로서의 폐선에 가까운 밀항선, 그리고 잃었던 고향을 되찾으려고 목숨을 내걸고 밀항선을 탄 밀항자들은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서 어쩌면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의 전반 중국 조선족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밀항선에 탄  중국조선족출신 밀항자들의 꿈과 소망 그리고 그것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아비규환의 비극적상황은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의 실존 상황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나오는 중국조선족 밀항자들은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중편소설 《타망고(Tamango)》에서 나오는 노예무역선에 총칼에 의해 강압적으로 오른 흑인노예들과는 달리 밀항조직자들인 브로커들에게 엄청난 돈을 내고 밀항선에 자진하여 올랐다는 점이다. 밀항선에 오르도록 그네들의 등을 민 것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와 함께 금전이라는 무형의 검은 손이였다. 고향 상실, 고향 찾기, 목숨을 내건 고향 찾기 실패의 비극은 중국조선족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 널려 사는 수많은 디아스포라들, 나아가서는 인류의 공통되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협소한 공간을 뛰여넘어 세계적인 공명을 일으킬 수도 있는 가능성까지 보여주고 있어 아주 희망적이다.        이 작품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서 《민족적 아이덴티티 찾기》 - 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중국조선족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되찾음으로써 중국조선족문학이 나아갈 하나의 새로운 주제 영역을 개척하여 주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2007년 3월 26일 연길에서
5    새천년 이후 조선족문단에서의 전기문학의 흥성과 그 전망 댓글:  조회:3260  추천:0  2013-12-26
  [평론] 1. 새 천년 이후 조선족문단에서의 전기문학의 흥성 새 천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주류 독서계는 물론 우리 조선족 독서계에서도 논픽션이 크게 각광을 받고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물전기창작이 일대 성황을 이루고있다. 전기문학은 동양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있다. 서양문학사에서 신화, 전설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장편서사시와 희곡이 가장 오랜 전통인데 반하여 중국을 비롯한 동양유교문화권에서는 《사전전통(史伝伝統)》 즉 력사인물의 일대기를 진실하게 기록하는 력사인물전기가 가장 유구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있는 문학전통이였다. 중국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중의 인물전기가 후세 동양의 문화 및 문학에 끼친 거대한 영향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근대의 문턱에 바투 다가서서야 비로소 조선반도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이민공동체로 발족된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이나 기타 소수민족인 몽골족, 만족, 장족, 묘족, 투쟈족 등 세세대대로 중국땅에서 살아온 토착민족들에 비하면 그 력사가 아주 짧은 청소한 민족이지만 오늘의 시점에 와서는 이미 백년 남짓한 년륜을 아로새기고있다. 한세기 백년 세월속에서 중국조선족사회에는 수많은 뛰여난 인물들이 나타나서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문화 나아가서는 전반 중국의 력사와 문화를 보다 아름답고 풍부하게 장식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의 후대로서, 민족의 력사와 문화의 서기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우리의 작가들이 우리 민족의 이러한 뛰여난 력사인물들을 청사에 길이 빛나도록 수비립전(樹碑立伝) 즉 기념비를 세우고 전기를 쓰는것은 미루어버릴수 없는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시대적요구에 부응하여 개혁개방후 중국조선족문단에는 수준 높은 전기들이 적잖게 나타났다. 1990년후 우리 문단에 나타난 김학철옹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정판룡의 자서전 《고향 떠나 50년》을 필두로 하여 새 천년에 들어서서 전기문학창작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를테면 김호웅의 《김학철평전》,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 교육가 림민호평전》, 류연산이 쓴 류자명, 최채 등의 일련의 전기들을 필두로 하여 최근에는 허련순이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장 김진경을 다룬 평전 《사랑주의》가 한국에서 출판되여 반년사이에 련속 다섯번째 인쇄를 기록하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국내에서 한어로 번역되여 출간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다. 리혜선의 정률성평전도 《장백산》잡지에 련재되고있다. 최근에는 연변의 한족작가 우뢰가 조선족작가 김학철을 다룬 전기《무쇠협장아래의 발자취(鐵拐下的足痕)》(상권, 하권)이 작가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공동으로 출판되여 중국의 주류 독서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있다. 이중 김호웅의《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 교육가 림민호평전》은 2012년에 중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수상했다. 2. 제1차 《중국조선족우수〈인물전기〉평선》에서의 수상작 소개 이러한 전기창작의 성황을 감안하여 연변작가협회에서는 우리 문단의 력사상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우수〈인물전기〉평선》을 갖게 되였다. 현재 탈중심적이고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속에서 어쩌면 새로운 리합집산이 이루어지고있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조선족인물전기는 하나의 감로수가 되기에 충분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제출된 인물전기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충분히 확보하고있다. 그래서 우리 심사위원들의 눈은 밝아졌고 마음은 흐뭇했다. 그러면서도 우수《인물전기》선정에 있어서는 고민도 많았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되는 이번 우수《인물전기》문학평심은 2000년후에 단행본으로 국내에서 출간된 전기만을 평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작자가 이미 타계했거나 국내에서 이미 국가급 문학상을 받은 전기작품은 배제했다. 그리고 심사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가장 중요한 심사표준으로 내세웠다. 첫번째로는 중국조선족력사 즉 전반 중국력사나 문화사에 있어서의 립전인물의 업적, 가치, 위상이나 인격의 높낮이 등을 고려했고 두번째로는 《결점을 덮어감추지 않고 우점을 부풀리지 않는(不隱惡, 不虛美)》 병필직서(秉筆直書)의 실록(實彔)원칙을 준수하여 전기문학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력사의 진실성 여부를 고려했다. 세번째로는 각종 자료의 수집의 난이도 및 립전인물이나 책속에서 거론된 사건들에 대한 비평과 해석의 수준을 고려했고 네번째로는 형식 측면에서 전기문학으로서의 갖춤새 및 예술표현력 등을 고려했다. 이런 심사원칙하에 심사위원들의 충분한 론의 및 무기명투표를 하여 만장일치로 최국철의 《주덕해평전》, 리광인의 《홍군장령 양림》, 김창석의 《중국영화황제 김염》 세 전기작품을 우수전기작품으로 선정했다. 여기서 부언해야 할 점은 《주덕해평전》은 작가 스스로 겸양의 미덕을 보여 끝까지 심사에 교부하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의 일치한 천거로 심사를 하게 되였다. 《주덕해평전》의 작가에게는 심사참여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없고 새롭게 흥기한 조선족평전문학의 조명,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대 주장 일대기를 그린 주요한 작품이기에 꼭 들어가야 하기때문이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세 우수인물전기 선정리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덕해평전》은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연변조선족의 지도자 주덕해를 립전대상으로 했다. 이 작품은 선행한 《주덕해 일생》에 비해볼 때 사업, 생활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보다 구체적이고 완정한 주덕해의 형상을 문학예술적으로 창조한 면이 돋보인다. 그리고 주덕해의 인간적인 면, 이를테면 그의 성격과 정치생활속에서의 희로애락을 잘 보여주어 실로 생동하고 살아숨쉬는 인간―주덕해를 창조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있다. 《홍군장령 양림》의 립전대상 양림은 중국조선족의 혁명투쟁사에서 력사가 가장 오래고 급별이 가장 높고 중국혁명에 대한 공헌이 가장 큰 사람중의 하나이지만 관련 자료가 절대적으로 결핍한 상황에서 작가가 두발로 뛴 간고한 현지답사의 로고가 돋보인다. 그리고 철저히 력사사실에 준하는 집필원칙은 진실성을 담보했을뿐만아니라 앞으로의 평전 내지 학술연구에도 귀중한 밑바탕이 될것이기에 아주 큰 인식적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영화황제 김염》은 중국조선족의 예술사에서 중국의 영화예술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김염을 립전의 대상으로 했다. 이미 출간된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상하이올드데이스》의 이국적인 시각을 전복하고 중국적인 시각에서 새로 구상하고 집필한 점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중국 100년 영화사의 시각에서 김염의 대표작이나 연기예술에 대해 조명하고있다. 그리고 당시 관객이나 영화인, 예술인들의 평을 널리 인용하고 지금도 생존하고있는 김염의 미망인인 유명한 영화배우 진의(秦怡)녀사의 생생한 증언을 동원한 점이 퍼그나 인상적이였다. 금년가을에 있었던 제1차 《중국조선족우수〈인물전기〉평선》은 중국조선족의 전기창작을 고무, 추동하는 하나의 중요한 촉매제로 작용할게 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3. 중국조선족의 전기문학창작에 대한 전망 주지하다싶이 인물전기는 문학가치와 함께 력사가치, 심리작용과 더불어 거대한 교육적기능을 갖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국의 학자 토마스 칼레(Thomas Carlyle)의 《력사는 무수한 전기의 결정체》, 《확실하게 말한다면 력사는 없고 오로지 전기만 있을따름이다》라고 한 말의 참뜻을 충분히 터득할수 있다. 중국조선족의 문화건설을 춘파(春播), 하서(夏鋤), 추수(秋收), 동장(冬臧)이라는 이 일년 사계절의 농사일에 비긴다면 전기문학창작은 동장이라고 할수 있다. 농부가 아무리 봄철에 씨를 뿌리고 여름철에 부지런히 기음을 매고 가을에 아무리 알뜰하게 가을걷이를 했다고 해도 겨울에 쌀가마니들을 창고에 차곡차곡 잘 쌓아두지 않아 새들이 다 까먹고 쥐들이 다 축낸다면 일년 농사가 허사로 되기 십상인것처럼 우리 민족의 력사에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났지만 이분들을 전기로 정리하여 후손만대에 전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후에는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말것이다. 우리 민족의 위인전기들을 창작하는것은 바로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보존하여 후손만대에 전하는 아주 성스러운 작업이다. 비록 중국조선족의 이민사와 정착사는 아주 짧았지만 위인들은 많았다. 앞으로도 위인들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날것이라고 생각하며 중국조선족작가들이 쓴 위인전기는 우리 민족의 력사 및 삶과 더불어 영원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김관웅 길림신문 26일자    
4    조선족문학의 문화적정체성에 대한 모색(1) 댓글:  조회:3385  추천:20  2011-04-30
개혁개방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문화적정체성에 대한 모색(1)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1.     1. 들어가는 말  중국조선족은 조선한반도로부터 두만강, ․ 압록강을 건너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 정착한 조선인韓人농민들로 이루어진 이민공동체로부터 형성, 발전되여어 온 특수한 민족공동체로서 이미 중국에서 150년의 력역사를 갖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조선족은 식민지시대 일제의 강제징용 혹은 류유학을 갔다가 정착한 재일조선한인들이나 도시시민과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재미한인들이나 광부나 간호사로 갔다가 정착한 재독한인들, 그리고 기타의 해외의 한인(조선인)들과도 많이 다르다. 중국조선족은 이민초기의 그 출발점은 비슷했지만 특히 1937년 중앙아시세아에로의 강제이동으로 하여 모국과 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재로러고려인들과도 많이 다르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은 벼농사를 주축으로 하는 농촌마을공동체의 토대우 위에서 형성되여어 온 것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조선족사회는 그 속성상 여전히 전통적인 농업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1978년 중국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도 중국의 대다수 국민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에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국제화, 세계화로 인해 도래된 다문화시대는 중국조선족에게는 약과 병을 동시에 주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워낙 소수자로 동화의 위험에 직면해있었던 중국조선족은 아무런 준비가 없이 이 거센 세계화, 국제화, 다문화 시대의 충격 속에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조선족농촌공동체의 와해와 붕괴가 초래한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자연스럽게 개혁개방 후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 정체성에 대한 모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2. 개혁개방 전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은 과거모택동시대의 종말과 새등소평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개혁개방 전기는 대체적으로 1978년부터 1990년까지로서 중국조선족사회로 놓고 말한다면 전통적인 농업사회로부터 도시사회에로 점진적으로 이행해갔던 시기였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력역사제재와 현실 제제의 문학창작을 통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모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력역사제재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주지하다싶이시피 중국조선족문단은 1958년에 벌어졌던 이른바 ““지방민족주의””를 숙청하는 ““민족정풍””과 “문화대혁명” 중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민족문화혈통론””에 대한 대 비판을 거친 뒤에는 ““민족””이란 두 글자만 말해도 얼굴색이 변해지는 그런 상황이여어서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금지구역으로 되여어 왔다. 그러나 사상해방을 제창하고 문학 분야에 해동解凍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선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에는 이민사에 대한 재현을 통해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김학철(1916~―2001)과 리근전(1929~―1997)의 창작을 들 수 있다. 김학철의 장편소설 《『격정시대》』(1886)는 지난 세기 3. 40년대 본인이 한국의 서울에서 탈출하여 중국의 상해, 남경, 무한, 장사, 태항산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던 반일무장투쟁의 경력과 다문화적 체험을 기록한 대작이다. 이 작품은 다분히 자서전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일제식민지시대의 한 지식청년이 점차 민족의식에 눈이 뜨고 결연히 서울을 떠나 중국에 와서 굳센 반일투사로 성장해 가는 파란만장한한 과정을 그린 대작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1994)의 역시 그의 파란만장한 문화신분의 선택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김학철은 민족정체성을 가장 올곧게 지켜온 항일투사들 중의 한 분으로서 이런 문학창작을 통해 인멸되여어 가는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를 문학창작으로을 복원해 놓음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데 큰 공적을 쌓아올렸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은 한국에서도 출판되여어 넓은 독자층을 보유했던 작품으로서 전반 조선한민족문화권에서 커다란 공명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절름발이현대사를한쪽 다리로걸어온 사람당신은 외다리가 아닙니다우리의 눈에는 잘린 다리가더 찬란해 보입니다봄이 오면 죽은 풀이 되살아나듯그대의 외다리는우리의 다리를 깨워둘에서 넷으로 넷의 넷으로 아홉의 아홉으로일어서게 합니다한명의 배고픈 이 있어도배부른 행복이 죄가 된다는큰 말씀이잘린 다리를 또 자른대도날마다 새롭게 솟아나는님의 다리는사슬이 긴 우리의 력역사입니다. ““잘린 외다리””로 표상되는 김학철의 치렬열한 문학정신은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 조정래의 부인이며 녀여류시인인 김초혜가 읊은 것처럼 ““사슬이 긴 우리의 력역사””의 상징이며 중국조선족 나아가서는 조선한민족의 력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이처럼 김학철을 포함한 항일투사들의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중국의 항일투쟁을 지원했다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조선한국의 국권회복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이 이중적 사명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였다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의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 같은 작품은 중국 조선족사회와 한국에서 모두 커다란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김학철의 마지막 최후의 순간들은 어쩌면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가장 심금을 울리는 일종 퍼포먼스 - ―행위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민1세로서의 김학철은 림임종에 자기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들을 우편함박스에 담아서 두만강 강물에 띄우되 그 우편함박스에 ““원산앞바다 행, 홍성걸(김학철의 본명임) 친족 받음”” 이라고 밝혀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중국조선족문단의 후배들은 김학철의 유언에 좇아 두만강 강가에서 김학철이 1940년대 태항산에서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된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일제와 싸울 때 지은 ““조선의용군추도가””가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우편함박스를 두만강에 띄워어 보냈던 것이다. 락낙엽귀근이라고 김학철은 죽은 뒤에 혼이라도 자기가 태어여난 고향 원산에 돌아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민1세인 김학철의 정체성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북간도(중국 동북 연변지방)에서 살았던 조선한인이주민들의 장례(葬禮)에는 ““혼(魂)보내기””라는 절차 하나가 더 있었다고 한다. 상여행렬이 두만강 기슭을 거쳐 가게 되었였는데, 그곳에서 고인이 남자이면 신었던 신발을, 녀여자이면 꽂았던 비녀를 강물에 띄여어 보냈다고 한다. 두만강의 강물을 타고 혼(魂)만이라도 고향에 돌아가서 살도록 하려는 리이향민들의 비원(悲願愿)이였던 것이다. 그 시절에 북간도에는 ““혼 보내기””를 할 때 부르는 “변조 「아리랑”」이 널리 전해졌지고 있었다고 한다. 간도 벌 묵밭에 무엇 보러 떠나와서동토에 얼어붙어 발을 못 떼나백두산 령영마루 울면서 넘어왔듯고무신이라도 웃으면서 넘어가소두만강 줄기 울면서 저어왔듯비녀를 노 삼아 웃으면서 저어가소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북간도에 이주한 조선인한인이주민 제1세들에게 있어서 장백두산이 민족의 심성이 담긴 머리라면 두만강은 민족의 심정이 흐르는 피핏줄이고 조선한반도 삼천리강산은 뿌리요, 근원이었였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였었다. 리근전(1929―〜1997)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1984)는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첫 대작이였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일찍 1950년대 초기로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작품으로서 개혁개방을 맞이아하여 비로소 집필할 수 있게 된 작품이다. 리근전은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밝힌바 있다. ““우리 민족의 과거 역력사를 진정으로 앎으로써 오늘 우리 민족이 반드시 서야 할 위치를 자각하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족은 조선에서 살수 없어 쪽박을 차고 중국에 밥을 빌어먹으러 건너왔다고 하는데 이는 편면적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우선 대자연과 싸웠고 봉건계급,과 관료 아치들과 투쟁하여 왔으며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여러 민족이 어께 겯고 싸워 중국의 근대사를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썼던 것입니다. …… 우리 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는 기초를 여러 민족들과 함께 닦아 놓았고 동북에 벼농사 기술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력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넋을 지키고 노래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리근전은 바로 이런 창작동기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족인민들이 조선에서 중국 동북에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게 된 연유와 과정 및 조선족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반영하였으며 점차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고 자기의 힘을 키우면서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령영도 밑에서 형제민족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일 투쟁에로 궐기된 피어린 력역사를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였다””고 기존의 문학사 저서들에서는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리근전은 이 작품에서 중국조선족의 개척사와 투쟁사를 많은 편폭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은 가만히 앉아서 남이 이룩해 놓은 것을 나누어 먹거나 혹은 중국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고난으로 점철된 장기간의 개척과 투쟁을 통해 중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자격과 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박천수는 작자가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개척의 주제를 체현한 인물형상으로서 북간도에 이민해 들어온 후 천년 묵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조선의 뽕나무를 간도 땅에 옮겨 심으면서 인적이 없던 간도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고장으로 개척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나라 관헌들이 강요하는 “치발역복(薙髮易服薙发易服)”의 귀화 정책에 맞서서 ““피땀으로 일군 논을 하룻루밤 사이에 떼이고 말았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하여 긍지를 느끼는 데서 그의이 강인한 민족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다. 박천수의 아들 박윤민은 작가 리근전의 이 소설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투쟁의 주제를 체현한 인물형상으로서 반일투쟁에 투신한 투사로 성장하며 나중에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어여 민족주의계렬열에 속했던 의병부대를 중국공산당의 영령도를 받는 항일무장대오로 개조하고 개편하는 과업을 맡아 나섰고 주력부대와 련연계를 잃은 상황 하에서도 계속 무장투쟁을 견지하다가 마침내 공산당의 지령으로 받고 연안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집정당인 중국공산당과 중국조선족 사이의 밀접한 련연관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한 여기 데서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 자기의 문화를 지키면서 조선족답게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와 자격을과 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던 작자의 창작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다소 주제적인  경향의 차이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력역사제재의 장편소설들은 최홍일의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1999), 최국철의 장편소설 《『간도풍운》』(2005)에까지 이어졌다. 이런 주제적인 경향은 시에서도 보여지이고 있다.  비소리바람소리발목에 감고쓸쓸히 누워있는호젓한 한숨보리밭 둔덕 당나무 아래허리쉼 쉬고 간 사연해빛에 별빛에녹쓸지 않은하늘을 허비고 땅을 짜개고떠나간 생명의 연소벌거숭이 쑥대밭 화전의 실연기설원 몇 만리더냐 흰 꿈 검은 꿈 찍으며 -―김성휘,희 “「북향길”」(1988)  짧은 시이지만 조상의 뼈빼가 묻혀있는 고향과 고국을 등지고 만주로 옮겨온 조선족의 이주사와 정착사, 개척사가 함축되어여 있다. 시인은 현재 중국에서 조선족공동체가 건재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난날 자신들의 생명의 마지막까지 연소시켜 가면서 생존을 위해 싸웠던 이주민 조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표현하였다. 2). 현실제재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상술한 역력사제재의 문학창작과 함께 현실재현의 문학창작은 이 시기 문학의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였다.  ㄱ. 김학철의 현실비판의 문학에서 보이는 다중적 문화신분. 김학철의 문학은 로신魯迅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불의에 대한 용감한 저항과 비타협적인 비판성향으로 특징지어진다. 로노신의 비판이 주로 과거의 중국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졌다면 김학철의 비판은 그의 말대로 ““국경도 시효도 없다.”” ““선량한 사람들 ,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옥사(獄死狱死), 형사(刑死), 아사(餓死饿死)시킨 장본인들. 그 장본인들을 단죄하는 데는 시효도 국경도 있을 수 없다.”” 김학철 문학에서 나타나는 ““국경도 시효도 없는”” 비판적 성향은 그의 이중적 문화신분과 밀접한 련연관성을 갖고 있다. 김학철의 이중적 문화신분은 조선의용대시절부터 형성되였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의용대는 이중성격과 이중임무를 지닌 부대였다. 이 점에 대해 《『조선의용군사》[1]』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사람이란 외국인 성격을 가지고 외국  땅인 중국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부대이다. 그러므로 국제주의성격을 지닌 부대이다. 그들은 또한 자기 조국인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대오이다. 그러므로 조선독립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2중 임무는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일찍부터 동북 3성에서 일제와 싸우던 조선독립군은 자기의 정치적  강령이나 목표를 단순히 조선독립에만 두었다.”” 김학철은 민족주의 정당이였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조선독립투사일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을 때는 남로당 당원이었고 월북한 후에는 조선로노동당 당원이었였고 중요한 선전간부로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히 조선적인 문화신분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40년에 입당한 오랜 중공 당원이었였고 팔로군의 간부로서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는 태항산에서 일제와 피 흘려 싸운 항일투사이기도 하였으므로 중국적인 문화신분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은 중국과 조선에 대해 모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드높은 사명감을 갖고 중국과 조선의 정치에 대해 모두 지극히 관심하고 드높은 참여의식을 갖게 되였었으며 자신의 참여권을 당당하게 주장한바 있다. 동시에 항일의 봉화 타오르던 태항산의 항일 최전선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의 일원으로 피 흘려 싸운 경력이 있는 김학철은 중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자신은 당당한 참여권과 발언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공민인 김학철을 중국의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에서 우파로 두들겨 팬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조선공민인 김학철이 중국의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 인민공사, 대약진, ‘반수방수운동(反修防修运动)’에 대해 그렇게 날카롭게 폭로하고 풍자하고 비판한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은 김학철의 다중적 문화신분에 대해 잘 파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학철의 바로 이러한 이중적 문화신분은 그로 하여금 중국이나 여타 나라의 그릇된 정치에 대해 모두 자신은 비판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이런 이중적 문화신분과 다중적사명감은 그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이중적 문화신분으로 인한 김학철의 다중적인 날카로운 비판은 1982년 이후 조선국적으로부터 중국 국적으로 옮기고 1989년 조선로동당원이기를 포기하고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은 복권이 된 만년의 문필활동에서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아야 하는 고되고 아픈, 그러나 끊임없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는 삶을 살아오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러면 1980년대 이후 중국 공민으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국적과 당적을 옮긴 시점에서도 김학철은 어찌하여 조선반도의 사실에 대해서도 그처럼 당당히 자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김학철의 이중적 문화신분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학철은 자신이 갖고 있는 발언의 권리를 ““우리(조선의용군)가 지난날 일본군에 대항해 싸울 때 조선반도는 하나였다.”로 대변한다. 마찬가지 리이치로 김학철은 중국에 대해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발언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여 왔었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가장 살벌했던 1964년부터 1965년 사이에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여 계급투쟁확대화와개인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로 인해 빚어진 ““반우파투쟁””에서의 지식인에 대한 부당한 처사 탄압에 대해 가차 없이 폭로, 비판했던 것이다. 바로 이 소설로 하여 혹심한 필화를 당하여 10년 옥살이를 하였지만 김학철은 복권 후에도 자기의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총적으로 ““디아스포라 작가””로서의 김학철 문학에서 시종일관하게 나타난 ““시효도 국경도 없는”” 강렬한 비판적성향의 밑바닥에는 다중적문화신분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아낼 수 있다. ㄴ. 김성휘의 시 창작에서의 민족의식의 소생. 중국조선족시단의 시인들은 좌경로노선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도 개혁개방 이후의 시기에는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일정하게 찾게 되었였다. 그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김성휘를 들 수 있다. 그의이 작품들은 이전에 보여주었던 찬양조의 송가 양식과 과장된 시의식을 탈피하고 서정적이고 내면화된 어조로 일상적 삶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 《『들국화》』(1982), 《『금잔디》』(1985),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고향생각》』(1989) 등에 실린 대부분 작품들은 어머니와 고향 그리고 이를 통해 암시하고 있는 시인의 민족의식의 소생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어머님이 지어주신 흰 옷 입고 창가에 앉았다 밝은 해빛 따사롭고 마음 한구석은 차겁다 (생략) 차라리 우리 어머님 나에게 검은 옷 지어 주셨다면 나도 그늘 밑에 시름없이 뒹굴며 도야지 개 신세로 살아가련만 아니 못한다 나는 죽어도 골백번 죽어도 어머님 베틀에 짜주신 흰 옷은 벗지 못해 흰 옷 입고 창가에 앉아 깊은 산 외진 하늘 아래 형제를 그리며 슬피 묻노라 흰 옷의 검은 때 언제면 벗으려 -―김성희,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여기서 어머니가 지어주신 ““흰 옷””은 바로 조선족의 민족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암묵적으로 드러내며, 어머니로 암시되는 ““모국””과 백의민족을 의미하는 ““흰 옷””이라는 고유한 문화적 상징을 통해 잃었던 혹은 잊고 있었던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자각을 드러내고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말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 ―윤동주, “「슬픈 족속”」 전문 중국조선족 시문학에서 흰색이미지는 민족의 상징으로 표출되는바, 이러한 흰색이미지에 대한 꾸준한 시적 관심은 윤동주의 상기 “「슬픈 족속”(1938)」으로부터 시작하여 력사적인 련관성을 보여주면서 김성휘의 상기 시를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층 활발해졌다. 한창선의 “「산재마을엔”」, 리성비의 “「우리 춤”」, “「겨울소나무”」, 림금산의 “「하얀 집”」, 김동진의 “「흰 눈이 내리네”」 등이 이러한 흰색이미지를 시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 오더니 떡가루 날렸느냐 마을에 눈 내리네 이쁜이가 가는 길 시집가는 길 하얀 눈이 내리네 하얀연 너울 쓰고 간다 령길에 눈이 내리네 아 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히 내리네 하늘에도 배꽃잎이 곱게 날리네 하늘 땅 그 어데나 흰 눈이 날리네 있더라도 가더라도 우리 다 같이 티 없이 살아보자 흰 눈이 내리네 아 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히 내리네 -―김동진, “ 「흰 눈이 내리네”」 전문 이처럼 흰색이미지에 대한 시적 관심은 중국조선족의 민족 체험의 예술적인 승화로서 민족사랑 나아가서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것은 재로 고려인 작가 박미하일(1949-)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지는 흰색이미지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천사『들의 기슭》』이라는 소설에는 화가인 주인공의 내심독백이 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정신이 피뜩 들 때가 있다. 유럽인이기도 하고, 조선인 얼굴을 한 로씨아인이기도 하고, 종이에다 그 알수 없는 문자로 내 이름조차 쓸 줄도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고(……) 조선에서 그 말이 제대로 통할 수 있을가? 내가 누구일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지 못했다. (……) 조선인에게 있어서 상실을 뜻하는 색은 흰색이다. 과연 하얀 흰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할가” 이 작품 중의 주인공인 화가에게 있어서 조상들의 고국인 조선은 ““흰색””이다. 즉 그 자신이 알지도 못할뿐더러 어떻게 손댈 수도 없는 색인 것이다. 또한 ““흰색””은 무(無无)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 민족에 대한 이미지이다. 사실 작중 인물인 화가와 박미하일은 거의 중첩될 정도로 작품은 자서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박미하일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 다른 민족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특정한 민족의 의식이 증발된 인간일 뿐이다. 고려인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어느 “―족”으로서가 아닌 어느 인간으로 사유한다. 박미하일의 작품들에 대부분 고아인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민족성을 지우는 작업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하겠다. 박미하일과 마찬가지로 재로 고려인 소설가 아나톨리 김(1939-) 의 작품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민족성이 아닌 세계와 우주, 그리고 그 속에 끼여 있는 인간의 운명이다. 이처럼 중국조선족문인들이 자기의 민족성에 대해 분명히 인정하거나 재일조선인(한인)들이 민족성을 말살하는 일본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살아온 것과 달리 재로 고려인들의 민족성은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실정임을 그네들의 문학과 중국조선족문학의 비교를 통해서 여실하게 보아낼 수 있다. 아나톨리 김이나 박미하일은 배달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운명에 의해 로씨아땅에서 태여나서 로씨아국적을 소유한, 그리고 일부 국수주의적인 로씨아 작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로씨아어로 글을 쓰는 한 동양인””에 불과한 일반적 의미의 조국과 민족을 갖지 못한 방황하는 령혼이였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외톨이예술가의 관심이 민족과 국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 내면세계로를 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이 비록 모두 “재외동포문학"이면서도 자기의 특수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ㄷ. 이 시기의 기타 소설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개혁개방 이후 사상해방을 제창하고 국외의 사상이나 사조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중국사회는 문화부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여 이데올로기나 문화의 “일원일색(一元, 一色)”의 “공명(共名)”시대로부터 “다원다색(多元, 多色)”의 “무명(无名)”시대에로 이행하는 전형기(转型期)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중국 전반 문화의 변두리에 처해 있은 연변을 비롯한 동북 3성의 조선족사회는 여전히 농촌문화에 안주하고 있으면서 그 사회적속성은 아직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중국조선족사회의 농촌문화의 속성은 이 시기의 영향력 있는 작품들이 거의 다 농촌문화와 련관되는 농촌제재의 상처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에 속하는 것들이였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상처문학(伤痕文学)에 속하는 김관웅(1951―)의 단편소설 “「청명날”」(1979), 정세봉(1943―)의 단편소설 “「하고 싶던 말”」(1980), 윤림호(1954―2003~)의 단편소설 “「두만영령감”」(1978), ․ “「투사의 슬픔”(1985), 장지민(1947~―)의 단편소설 “「시카코 복만이”」(1983), 우광훈(1954~―)의 단편소설 “「시골의 여운”」(1986)이나, “반성문학”에 속하는 김관웅의 중편소설 “「신념”」(1982), 리원길(1944―)의 중편소설 “『백성의 마음”』(1981) , “․『한 당원의 자살”』(1985), 류원무(1934―2008)의 단편소설 “ 「비단이불”」(1982), 남주길의 “「접동골 녀인”」, 이밖에 “개혁문학”에 속하는 홍천룡(1955―)의 단편소설 “「구촌조카”」(1981), 림원춘(1936~― )의 단편소설 “「몽당치마”」, 윤림호의 단편소설 “「고향에 온 손님”」(1989), 최국철(19620―)의 단편소설 “「봄날의 장례”」(1987) 등은 모두 조선족 시골농촌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재로 하여 창작한 소설들이다. 도시의 생활을 소재로 한 김훈의 개혁소설 “「그녀가 준 유혹”」(1986) , 최홍일의 단편소설 “「도시의 음향”」(1985), 장춘식의 “「출국 전 강습”」(1989) 같은 도시제재의 작품들도 있기는 했지만 필경은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상기 소설들 중에서 상처소설의 계렬열에 속하는 김관웅의 중편소설 “「신념”」은 1930년대 초반에 중국공산당이 령영도하는 간도의 항일대오내에서 수많은 조선족출신의 반일투사들이 그릇되게 숙청되였던 ““반민생단사건”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아 당시 여러 복잡한 환경에서 싸워나가야 했던 경계인, 소수자로서의 조선족의 위치와 고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김관웅의 단편소설 “「청명절”」은 “문화대혁명” 때 사인무리를 쫓는 그 일당들이 연변에서 조작했던, 1967년 “8.2일, 8.4사건””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아 바로 이 사건에 가담했다고 ““조선특무””로 몰려 탄압을 받은 한 조선족가정의 해체와 비극을 재현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중국에서의 소수민족으로 지내는 특수한 사정과 고통을 보여주는바 이런 작품의 발표는 조선족이 중국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며 아울러 민족의식의 소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전반 소설 창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리이원길(1944―)의 대하장편소설 《『땅의 자식들》』에 속하는 《『설야》』(제1부, 1989)와 《『춘정》』(제2부, 1992) 역시 농촌에서의 개혁개방을 둘러싼 중국조선족사회 조선족농민들의 심충적인 문화의식과 문화심리를 반영한 역력작이다. 이 작품에 대해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산재지구 조선족마을에 대한 풍속도 같은 묘사 속에서 ‘‘우리 종족의 모습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중국 문화 속에 변이된 조선족특유의 문화정체성 및 민족의 생존상황을 문화적인 시각에서 풀이하고 있는바 《『설야》』와 《『춘정》』은 중국조선족 산재마을의 한 상징이며 조선족 백년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 “이 땅에서의 ‘‘본토적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있다””고 한 평가는 적중하다. 다만 여기 언급된 이른바 ““본토적 성격””이란 표현은 중국조선족은 이미 중국에서의 백년 이상의 정착생활을 거쳐 이젠 철새가 아닌 터새 같은 존재로서 자기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였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하나 더 보태고 싶은 것은 리원길의 대하장편소설 《『땅의 자식들》』을 통하여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중국조선족사회의 속성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벼농사를 주추축으로 하는 농촌사회이고 ““긴내천”” 같은 조선족 시골마을들은 비록 망망대해 같은 다수민족들 속에 절해고도처럼 포위되어도 사회조직체로서의 자기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200만 중국조선족사회라는 문화공동체가 건강하게 존속할 수 있도록 담보해주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1990년대 이전에는 중국조선족의 농촌마을들은 수많은 혹독한 사회, 정치 변동의 시기에도 시종 병들지 않고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연변문학 2011.4호(다음호에 이음) -------------------------------------------------------[1] 최강 《조선의용군사》,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3    류원무, 허해룡의 장편소설《다시 찾은 고향》연구 댓글:  조회:3165  추천:43  2009-07-13
목록: 一. 들어가는 말 二. 《다시 찾은 고향》의 류원무, 허해룡의 공저(共著) 문제 三. 《혈연》의 내용 및 그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1.《혈연》의 스토리와 플롯 2.《혈연》의 인물관계설정 3.《혈연》의 주제사상 4.《혈연》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四. 《다시 찾은 고향》의 내용에 대한 분석 1.《다시 찾은 고향》의 스토리 2.《다시 찾은 고향》의 인물관계와 갈등 설정 3.《다시 찾은 고향》의 인물형상의 류형적 특징 4.《다시 찾은 고향》의 주제사상 5.《다시 찾은 고향》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五. 《다시 찾은 고향》의 형식에 대한 분석 1.《다시 찾은 고향》의 서사구조와 플롯의 특징 2.《다시 찾은 고향》의 문체의 특징 六. 나오는 말............................................................ 一. 들어가는 말 류원무(1935-2008)선생은 개혁개방 전기(1979-1989)의 중국조선족소설계에서 맹활약을 한 소설가중의 한 분이다. 류원무의 장편소설창작은 아동 장편소설과 탐정장편소설로부터 시작되여 나중에는 성인장편소설에로 전향하였는데, 그 장편소설창작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라렬할 수 있다. 1. 아동장편소설 《장백의 소년》(1980년) 2. 탐정장편소설 《숲속의 우등불》(1980년) 3. 성인장편소설 《다시 찾은 고향》(1985년) 《봄물》(1987년) 《아리랑 열두 고개》(2001년) 이 글에서는 본격적인 장편소설에 속하는 성인장편소설중의 처녀장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다시 찾은 고향》(아래에서는 《고향》이라고 략함)만을 연구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일육지정(一肉知鼎), 일엽지추(一葉知秋)라는 성구처럼 이 한부의 장편으로 미루어 보아서 다른 장편들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二. 《고향》의 류원무, 허해룡의 공저(共著) 문제 1985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의해 출판된《고향》에는 류원무(柳元武, 1935-2009), 허해룡(許海龍. 1927-1998)의 공저(共著)로 밝혀져 있지만 일부 문학사들에서는 이 작품의 제2작자 허해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을 평론하거나 연구함에 있어서 제1작자 류원무만 연구해서 안 되는 리유는 단순한 작가의 저작권이라든지 명예 같은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반 작품의 사상과 내용을 보다 깊이 있게 리해하려면 반드시 제1작가 류원무와 함께 제2작자 허해룡에 대해서도 반드시 심층적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물론 이 작품에는 작자의 “서언”이라든가 “후기” 같은 것이 없고, 아직까지는 이 두 작자의 유관 회상기 같은 것도 발견되지 못했다. 또한 지금 이 작품의 작자인 류원무, 허해룡 두 분이 이미 모두 타계한 상황하에서 이 두 분들이 어떻게 함께 창작을 기획했고, 어떻게 함께 구상했고, 어떻게 함께 집필제강을 짰고, 집필과정에서는 어떻게 구체 분공을 했고, 어떻게 함께 수정, 윤색하여 탈고를 했는가? 등 상세한 내막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연구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허해룡과 류원무는 문단의 선후배로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오래 동안 같이 근무하고 있었기에 장편소설《고향》은 이 두 선후배 소설가의 긴밀하고 유쾌한 합작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공저로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아래에서《고향》의 소재래원이라고 추정되는 허해룡의 단편소설《혈연》의 스토리, 인물설정, 주제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량자의 긴밀한 관계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三. 《혈연》의 내용 및 그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필자는 류원무와 허해룡의 전반 작품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읽는 과정에서 허해룡의 단편소설《혈연(血緣)》과《고향》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주목을 돌리게 되였다. 이 두 작품을 자세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필자는 왜 《고향》은 류원무와 허해룡의 공저로 되었는가 하는 이 미스터리의 대체적인 실마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1.《혈연》의 스토리과 플롯 허해룡의 단편소설의 “혈연”은 《연변》잡지 1962년 제9호에 실렸었는데 그 스토리를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경에서 림업대학을 졸업한 제1인칭 주인공 “나”(王靑山, 실은 김청산임)는 고향 연변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장백산에서 가까운 오림공사 위생소의 의사인 슈메이(秀梅, 실은 김순희임)와 우연히 만나서 따뜻한 관심과 치료를 받게 된다. 집에 도착한 “나”는 뜻밖에 할아버지가 슈메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게 되며 이 슈메이가 바로 할아버지가 병환으로 입원했을 때 수혈까지 해주면서 지성껏 치료해준 고마운 처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사진속의 슈메이를 가차에 만났고 한족 처녀의사라고 하니 할아버지는 순이라는 조선족 처녀라고 우긴다. “나”는 슈메이와 순이가 어쩌면 생김새, 직업, 주소가 이다지 똑 같을 수 있을까 하고, 혹시 쌍둥이는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다. 할아버지는 평소에 “나”에게 “나”의 아버지는 혁명렬사라고만 알려주면서 그 상세한 내막은 비밀에 부치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알려 주겠다고 하였었다. 이번에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오니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의 산소는 장백산 부근의 목림이라는 곳에 있으니 추석날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알려주겠다고 대답한다. 며칠 후 현 림업과에 배치를 받은 “나”는 바로 아버지 산소가 있다는 목림지구 산구개발에 참가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목림은 슈메이가 살고 있는 오림이라는 고장과 불과 20리도 안 되였다. 목림인민공사 공소사(供銷社)에서 경영하는 려관에서 “나”는 공사의 공소사 당지부서기로 려관 일을 맡아보고 있는 한 조선족 어머니(슈메이의 어머니이자 칭산의 생모임)를 만나 되여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서로 각자의 신상에 대해서도 다소 알게 된다. “나”는 이 조선족 어머니는 렬사가족으로서 외동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조선족 어머니는 또 칭산의 팔에 난 붉은 기미를 보고는 호기심이 동하여 “나”의 신상에 대해서 물어 본다. 그리하여 슈메이의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 없이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음을 알게 된다. 추석을 사흘 앞둔 어느 날 “나”는 이 조선족 어머니의 방에 들렸다가 왕진을 갔다고 돌아온 슈메이(순이)를 만나며, 할아버지가 고마워하던 그 순이가 바로 자기가 기차에서 만났던 그 슈메이임을 알게 된다. 이날은 마침 순이의 생일날이라 “나”는 이들 모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이가 왜 슈메이로 부르게도 된 사연도 알게 된다. 순이의 아버지 김성팔은 항일투사였는데 일제에 의헤 살해되였고 어머니는 순이를 데리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동안에 성이 류씨인 한족 할머니가 순이를 대신 양육해 주었는데 슈메이라는 이름은 바로 류할머니가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의지가지없는 류할머니는 순이네 모녀와 함께 오래 동안 한 집식구로 살아왔다고 한다. 칭싼이는 이 사연을 듣고는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투쟁은 정말 한족과 조선족 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서, 피로 뭉치게 하였다”고 깊이 느끼게 된다. 추석날, “나”의 할아버지는 목림으로 오셨다. “내”가 묵고 있는 려관에서 친녀동생인 순희, 그리고 친어머니와 수십 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며 아버지 김성팔의 비장한 최후와 그 뒤 “내”가 할아버지에게 구출되여 한족집에서 자라나게 된 경위를 낱낱이 알게 된다. 항일유격대원이였던 김성팔이 일제 토벌대에 의해 살해되고 김성팔의 안해는 왜놈들에게 끌려가게 되자 왜놈들은 세 살배기 청산이가 갇혀 있는 초가집에 불을 지르고 가버린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한족농민 왕씨는 불속에 뛰여들어가 김청산이를 구해 내여 친손자처럼 키워냈던 것이다. 의지가지없는 왕할버지는 청산이의 어머니를 딸로 삼게 되여 조, 한 두 민족의 두 가정은 한 가정식구로 합쳐지게 된다.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血緣)”스토리와 주제 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단편소설 ‘혈연’은 민족단결의 주제에 바쳐진 좋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항일전쟁시기에 한족인 왕할아버지가 왜놈들에게 체포된 조선족항일투사의 아들을 구원해준 감력적인 사실, 해방 후 20년이 지나서 그들이 서로 만나고 그 아들이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상봉하는 곡절 많은 이야기를 통하여 조, 한 두 민족 사이에 ‘계급으로, 피로 뭉친’ 혈연적관계를 눈물겹게 다루었다. 이 소설은 그 소재다 참신하고 사건의 얽음새가 복잡다단하고 작품의 밑바닥에서 혁명적인도주의정신이 빛발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허해룡의 “혈연(血緣)”의 스토리와 주제 등에 대해서는 상기 조성일, 권철 주편으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평가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 작품의 스토리의 얽어 짜기에 있어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우연의 일치(Coincidence)”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왕칭산(실은 김청산)과 슈메이(실은 김순이)가 기차 우에서의 우연하게 만나게 된 것이라든지, 또 왕칭산이 배치되여 간 고장이 면바로 슈메이가 있는 고장이라든지, 더 깊이 알고보니 슈메이는 왕청산의 누이동생이고 그녀의 조선족 어머니는 왕칭산의 생모였다든지 하는 것은 필연성이 별로 없는 “우연의 일치(Coincidence)”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Coincidence)”를 발단으로 하여 스토리가 전개되고 또 이에 의해 플롯을 얽어 짰다는 자체는 사건들 사이의 필연적 인과성을 중시하지 않는 작가의 자의성이 지나치게 플롯을 지배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러한 “우연한 일치”의 람용은 흔히 이야기의 “그럴듯함(Plausibility)”, 즉 심미적진실성의 효과를 저락시키는 요소로 되는 것이다. 2. 《혈연》의 인물관계설정 이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다시피 이 작품의 인물관계설정은 “혈연(血緣)”, 즉 피로 맺어진 인연 -인간관계이다. 이는 주로 조선족 항일투사 김성팔네 일가와 한족농민 왕할아버지 일가와의 피로 맺어진 인연, 즉 조(朝), 한(漢 ) 두 민족 가정 사이의 인물관계로 설정되였다. 항일투쟁 중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조선족 항일투사 김성팔의 어린 아들 김청산이를 왕할아버지는 불속에서 구출하여 어엿한 대학졸업생으로까지 키워준다. 그리고 김성팔의 딸 순이도 역시 그의 안해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한족 류씨할머니에 의해 양육되였다. 그리고 김성팔의 딸 순이는 한족 왕할아버지를 자기의 부모처럼 극진하게 보살펴주고 선뜻이 자기의 피를 수혈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왕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다. 헤여진지 수십 년이 지난 해방 후 오랍누이 김청산과 슈메이(김순이)의 기차에서 우연한 상봉 그리고 김청산이 배치 받아간 고장에서의 순이엄마(김청산의 생모)와 슈메이(김청산의 누이동생)와의 상봉, 또 이 두 차례의 상봉을 계기로 하여 생겨난 이들과 한족 왕할아버지의 상봉은 끝내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를 갖고 있는 두 가정의 극적인 상봉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르며 조, 한 두 가정이 한 가정으로 합쳐지는 것으로 이 작품은 대단원을 이룬다. 3. 《혈연》의 주제사상 상술한 인물관계의 설정은 직접적으로 이 작품의 민족단결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이바지했다. 이 작품의 민족단결의 주제는 “혈연(血緣)” 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명시되여 있다. 작품은 이상의 스토리와 인물관계설정은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제1인칭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투쟁은 정말 한족과 조선족 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피로 뭉치게 하였다”고 표현했듯이 이 작품은 한족과 조선족 사이의 민족단결이라는 이 주제사상을 직설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냈다. 주제는 워낙 자연스럽게 또 은밀하게 흘러나오게 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딘가 좀 생경하게 주제가 로출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작품에서 표현한 주제사상처럼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투쟁은 정말 한족과 조선족 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피로 뭉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그 주류는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에 있어서 항일투쟁의 력사에는 한족과 조선족 인민사이의 혈연적관계만이 있은 것이 아니라 일제의 리간, 도발과 중공 당내의 좌경로선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조선족 항일투사와 항일대중들이 억울하게 “혁명의 적”, “일제의 간세(奸細)”로 몰려 수천 명이 타격을 받거나 목숨을 잃은 “반민생단투쟁” 같은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조선족의 력사에 있어서 조, 한 두 민족의 조화, 단결에 의한 공동한 투쟁은 주류였으나 동시에 비조화, 갈등으로 인한 쟁투와 불신도 있었다. 물론 한 편의 단편소설에서 이 모든 면을 모두 망라시켜 반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중국에서의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의 모순에서 한족은 모순의 주요한 방면을 대표하며 민족단결에서의 주체적 혹은 주도적 역할을 놀아야 할 측도 소수민족이 아닌 한족이였으며 지금이나 그 당시나 지방민족주의보다 대한족주의가 중화민족의 대단결에서 보다 큰 위해성을 갖고 있었다. 4.《혈연》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그런데도 조선족작가 허해룡은 왜 이런 “민족단결”의 주제를 주동적으로 또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는가? 이에 대해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에서는 그 당시나 그 후의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민족단결”의 주제의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시기에 민족단결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많이 창작되였다. 민족단결의 주제는 1959년 ‘반우경투쟁’과 더불어 일어난 ‘지방민족주의’를 청산하는 ‘민족정풍운동’을 겪으면서 이 시기 조선족문학에 나타난 시대적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단결에 대한 내용은 줄곧 1960년대 초까지 이어져 항일전쟁을 반영한 력사제재나 현실제재에서 모두 다루어지고있다.” 연변에서는 1957년도의 살벌했던 “반우파투쟁”이 지난지 얼마 안 되어 1959년부터 1960년 초까지 2년 동안이나 또 다시 한차례의 엄혹한 정치투쟁인 “민족정풍운동”이 벌어졌다. 그 주요한 내용은 “지역구역확장론”, “민족우월론”, “민족동화론”, “다조국론”, “민족문화와 언어순결론” 등에 대한 비판투쟁이였다. 이 기간에 많은 조선족간부들과 지식인들은 혹은 자각적으로 혹은 정치압력에 의해 자기의 이른바 ‘오유적립장“과 “오유적언행”을 검사했으며, 적잖은 사람들은 “지방민족주의분자”란 감투를 쓰고 우파분자와 또 같은 역경에 처하게 되었다. “당중앙에서는 협애한 민족주이 사상을 반대하되 주로는 대민족주의와 한족들에게 존재하는 대한족주의를 치중하여 비판하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연변에서는 조선족의 지방민족주의만 비판하고 한족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대한족주의를 건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족형님들을 따라 배우고 한어를 배우는 열조를 일으켰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영광스러운 항일혁명전통을 갖고 있고 그 누구보다 공산당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연변조선족은 위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그 시대의 사회정치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까닭에 문학작품은 반드시 력사적안광으로 보아야 한다. 바로 이런 “민족정풍운동” 이후의 사회정치환경에 적응하려고 작가가 고심한 흔적이 이 작품에서 보이며 따라서 작품에는 너무나도 많은 우연적인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작위(作爲)적인 흔적을 로정(露呈)하여 소설의 사실주의적묘사의 진실성을 떨어뜨린 일면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은 비록 상술한 1960년대 연변의 특정한 사회정치문화환경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작자의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는 조선족 항일투사 김성팔네 부부를 비롯한 조선족인민대중의 피어린 항일투쟁을 정면에 등장시키고 이를 감정적으로 행동적으로 동정하고 후원하는 왕할아버지 같은 한족 인민대중들을 대조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연변지역에서의 항일투쟁의 주력군은 조선족이였다는 력사적진실을 완곡적으로 반영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중국조선족은 이전에도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다수자인 한족과 조화로운 공존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이 단편소설은 력사와 시간의 고험을 겪어 지금에도 당당하게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한 페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四. 《고향》의 내용에 대한 분석 1. 《고향》의 스토리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이 3만자 좌우의 편폭을 가졌다면 류원무, 허해룡 공저《고향》은 24만자의 편폭을 가진 장편소설로서 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 중에서 “현행반혁명”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8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주인공 박송림(왕송림)은 4인방이 타도된 후 무죄로 석방되였지만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자기의 고향인 오림 림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되며 이야기는 거슬러서 12년 전으로 올라간다. 1965년 가을, 림학원을 졸업한 왕송림(박송림)은 고향의 헐벗은 민둥산을 사시장철 푸른 소나무, 잣나무 숲이 설레는 림해(林海)로 변모시켜 보려는 웅심을 품고 송하림업국으로 배치 받아 오며 송하림업국에서도 제일 조건이 열악한 오림 림장으로 자진해 내려간다. 며칠 후, 왕송림은 송하공사소재지에 갔다가 공사운동대회를 구경하다가 소싸움을 말리려고 달려들었다가 옆구리를 상해서 송하림업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병원의 나젊은 처녀의사인 리춘메이와 그녀의 조선족 어머니와 상봉하게 된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왕송림은 한족이름을 가지고 조선어를 류창하게 구사하는 이 “한족이기도 하고 조선족이기도 하다”고 자칭하는 리춘메이와 그녀의 조선족 어머니 김금녀로부터 극진한 간호와 보살핌을 받게 된다. 그러는 중에서 왕송림은 리춘메이가 연길시립병원에서 실습을 할 때 자기의 할아버지 왕유덕을 극진하게 간호해주고 수혈까지 해준,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자기의 녀동생 왕계향이와 함께 기념사진을 사진을 찍은 그 고마운 처녀라는 것, 그들 둘의 고향은 모두 오림이라는 것, 둘은 모두 렬사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 등을 서로 알게 된다. 이리하여 왕송림과 리춘메이의 사이의 관계는 발 빠르게 진척된다. 병원에서 열흘 동안 누워있던 왕송림은 묘포(苗圃)를 만들 일을 근심하여 림장으로 돌아오며 림업국에서도 완쾌하지 않은 왕송림을 근심하여 리춘메이를 림장으로 딸려 보낸다. 오림림장에서 조석으로 같이 일하면서 송림이와 춘메이는 서로간의 래력이나 속사정을 더욱 깊게 알게 된다. 춘메이의 부모는 모두 한족으로서 항일련군의 전사들이였다. 전투에서 춘매이의 아버지는 전사하고 어머니는 체포되여 감옥에 끌려왔는데 그 뒤로 한 달이 지난 뒤에 지금의 조선족 어머니 김금녀도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춘메이의 어머니가 춘메이를 낳은 석달 후 춘메이의 어머니가 사형 당하게 되자 김금녀가 맡아서 춘메이를 키웠던 것이다. 역시 항일렬사의 후예인 왕송림 역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왕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났다. 이러한 공동한 운명과 공동한 불행은 춘메이를 더욱 동류의식으로 대하게 되였으며 산속에서 무리승냥이와 박투하는 생사의 고험을 겪으면서 서로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럴 즈음에 춘메이의 어머니 김금녀도 왕송림이라는 이 한족대학졸업생 총각을 두고 20여년 전에 생리별한 자기의 아들이 송림이가 아닐까 자꾸 의심을 갖게 된다. 이런 야릇한 심정이 지꿎게 금녀의 발목을 잡아끌어 오림 림장으로 찾아오게 한다. 오림 림장은 바로 김금녀의 아픈 기억을 남긴 고장이기도 했다. 1930년대 중기로부터 오림은 항일유격근거지의 후방기지였다. 일제의 토벌에서 금녀는 항일유격대 대원인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세 살 난 아들 박송림마저 철거하는 왜놈들이 불을 지른 집안에 두고 자기만이 체포되여 오림을 떠났던 것이다. 아들 박송림을 한시각도 잊어 본적 없는 금녀였기에 왕송림의 래력을 알아보려고 애쓰게 되며 그럴수록 점점 자신의 직감을 믿게 된다. 특히 “아버지가 세 살 때 왜놈에게 희생되였다고 하는데 그때 기억이 나는가?”하고 묻는 금녀의 물음에 “그저 집이 활활 타던 생각밖에 없어요”하는 왕송림의 대답에 금녀는 깜짝 놀라지만 불속에 있었던 세 살 난 애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의 생각을 부인하기도 한다. 1966년 겨울, 송림과 춘메의 사랑이 무르익어갈 무렵에 연변에서도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거세차게 일기 시작했다. 왕송림은 연길에 출장을 갔다가 할아버지는 송림이 들려준 금녀와 춘매이네 모녀의 내력을 듣고는 금녀가 바로 송림의 생모가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하지만 내색을 내지 않고 넌지시 “장차 춘메이와 결혼을 하면 어쩔 셈이냐?”고 물었더니 송림이는 “두 집이 한집에서 살기로 했다”고 대답한다. 왕송림은 사실은 김금녀의 아들 박송림이였다. 송림의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참살당하고 송림의 생모인 김금녀가 체포되여 끌려가게 될 때 불속에 뛰여들어 송림을 구해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왕유덕은 자기의 며느리인 만족 항일녀전사 조봉연이 낳은 딸애와 송림이를 모두 자기의 친손자손녀로 키워냈던 것이다. 왕유덕은 비록 내색은 내지 않았지만 김금녀가 바로 송림의 생모임을 직감하게 되며 자기가 불속에서 구해내 기른 송림이에게 친어머니를 찾아주려고 작심한다. 연길에서 오림림장으로 돌아온 후 이곳에서도 잔혹한 “계급투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반란파들은 렬사의 아들인 왕송림을 리용하려는 목적에서 그를 림장으로부터 림업국 혁명위원회로 끌어들이며 그더러 간부와 혁명선배들을 박해하는 이른바 “계급투쟁”에 가담하라고 강요하며 왕송림은 혁명위원회의 위원으로 된다. 한다. 이때로부터 왕송림과 리춘메이 사이에는 의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송하림업국에서 제일먼저 잡혀나온 것은 림업국 국장 곽림이였고, 송하공사에서 제일 먼저 잡혀 나온 것은 김금녀였다. 일제감옥에서 아이까지 길렀고 살아나서 나오기까지 한 김금녀를 무조건 변절자라고 의심하면서 잡아가두었던 것이다. 그 특수한 환경 속에서 송림은 “당을 배반하느냐? 장래의 장모를 배반하느냐?” 하는 치열한 내심적인 갈등에 겪게 된다. 강력한 외부적 압력에 못 견뎌 송림은 끝내 김금녀를 “학습반”에 데려오고야 말았다. 바로 아들 송림이 앞에서 어머니 김금녀는 처참한 고문을 당하면서 당당하게 감옥에서의 자기의 소행을 “탄백”한다. 즉 자기가 감옥에서 춘메이를 받아 기르게 된 그 비장한 사연을 이실직고하게 되는 것이다. 김금녀의 “탄백”을 들으며 송림은 더욱 자기의 잘못을 느끼게 되며 “문화대혁명”이란 이 광란의 반동성과 비인간성을 절감하게 된다. 반란파들의 물매질과 발길질에 중태에 빠진 김금녀를 구원하고자 드디여 결심을 내렸을 때 왕할아버지와 동생 계향이가 찾아왔고 바로 사람잡이를 하는 현장에서 죽어가는 왕할아버지는 김금녀에게 송림이가 친아들임을 알려주어 모자간은 극적으로 상봉한다. 송림은 황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문화대혁명”과 “반란파”를 저주한다. 바로 이 죄로 송림은 “현행반혁명”으로 몰려 감옥행을 하게 된 것이다. 소설의 제15장부터 소설을 마무리하는 제22장까지는 주로 송림의 참회 및 송림과 춘메이 사이의 사랑의 갈등과 사랑의 재생을 그렸다. 문화혁명 10년 동란중의 참혹한 “계급투쟁”, “로선투쟁”은 박해를 받은 사람에게나 박해를 한 사람에게나 모두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겨우 어머니를 찾아놓고 어머니를 잃은 송림의 상처는 그 누구보다 컸다. 더구나 어머니를 박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사건에 자기도 동참한 것으로 하여 송림은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한때 그토록 자기를 사랑했던 춘메이는 감옥으로부터 고향에 돌아온 송림으로 얼음처럼 랭담하게 대한다. 그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리고 의식적이건 핍박에서였건 송림이는 어머니를 박해하여 세상 뜨게 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8년 동안 어느 남자에게도 시집을 가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춘메이는 송림이에게 량가감정을 갖고 있고 사랑의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송림이로 말하면 또 자기의 죄과로 하여 춘메이 앞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보아내고 다시 복권을 하여 림업국 당위서기로 임직하고 있는 곽림이와 송림의 녀동생 왕계향은 리춘메이를 여러모로 설복한다. 그러나 두 사람사이에 두껍게 얼어붙은 감정의 두꺼운 얼음은 쉽사리 녹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송림이도 춘메이도 모두 대방을 피하여 오림림장으로 피해가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또 오림림장에서 만나게 되며, 당조직과 림장의 마음씨 착한 사람들의 조화를 통해 차츰 사그라졌던 사랑의 불티가 되살아나게 된다. 새 시대의 새봄을 맞아 송림이와 춘메이의 마음속에서는 산에서 붉게 타는 진달래처럼 사랑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바《고향》은 “혈연"의 스토리와 플롯에서의 “우연의 일치”를 답습하였다. 비록 편폭 상에서는 많이 확장되여 세부묘사가 강화되고 “문화대혁명” 이후의 묘사에서 적잖은 사건들이 첨가되고 그 미학적구성도 많이 달라진 점은 마땅히 인정해야 하나 스토리와 플롯 면에서는 《고향》이 “혈연”의 기본골격은 그대로 보존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혈연”은《고향》의 원형으로서 량자 사이에는 밀접한 계승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고향》의 인물관계와 갈등 설정 류원무, 허해룡의 장편소설 《고향》의 인물관계설정을 본다면 주로 조선족 항일투사 박지연, 김금녀 부부와 한족농민 왕할아버지 일가와의 혈연적인 관계로 설정되였다. 항일투쟁 중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조선족 항일투사 박지연(김금녀)의 어린 아들 박송림을 왕할아버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하여 자기의 손녀 왕계향이와 함께 애지중지 보살피며 송림이를 어엿한 대학졸업생으로 키워준다. 그리고 김금녀는 옥중에서 희생된 한족 항일 녀투사의 딸 춘메이를 자기 친딸처럼 아끼고 어엿한 녀의사로까지 키워주고 서로 의지하면서 친 모녀보다 더 다정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김금녀의 딸 춘메이는 왕할아버지를 자기의 부모처럼 극진하게 보살펴주고 선뜻이 자기의 피를 수혈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왕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다. 조선족 어머니가 키운 항일렬사의 딸 춘메이와 한족인 왕유덕할아버지가 키운 항일렬사의 아들의 송림이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살벌한 문화혁명 중에서 박송림은 자신의 미숙한 정치적립장과 태도 그리고 당시 엄혹한 정치형세의 핍박으로 인해 자기의 생모 김금녀를 박해하는 “단지고움”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바로 어머니가 혹독한 고문으로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이 모자간은 극적으로 상봉하게 되며 어머니를 죽음에로 몰고 간 반란파와 문화대혁명에 대해 마구 욕설을 퍼붓는다. 바로 이 일로 인해 송림은 옥살이를 하게 되고, 출옥한 뒤에도 심각한 내심적 갈등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사랑했던 춘메이로부터 랭대를 당하게 되지만 나중에 당조직과 친척, 친우들의 도움으로 갈등은 해소된다. 이 작품에서의 갈등은 주로 제12장부터 나타난다. 처음에는 문화대혁명중의 잔인한 계급투쟁이라는 이 외부적환경과 주인공 왕송림, 부수 인물 김금자, 리춘메이 등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외적갈등은 점차 내부갈등으로 확산되여 주인공 왕송림과 부수 인물 김금자, 리춘메이 등 여러 사람들의 내심 속에서도 일어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대혁명은 “당과 수령의 명의”로, “혁명의 명의”로 일어난 전례 없는 사회정치운동이였기에 주인공 왕송림은 “혁명이냐? 사랑이냐?” 하는 어려운 량자택일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송림은 당시의 그 불가항력적인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휘말려 “사랑”보다는 “혁명”을 택했으며 그 결과는 핍박에 못이겨 자기어머니를 박해하여 치사케 하는 비렬한 사건에 가담하게 되고 또 그로 하여 방금 찾은 어머니를 영영 잃게 되는 인생비극에 빠지게 된다. 이리하여 박송림은 한 평생 내적갈등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송림을 사랑했던 리춘메이도 “사랑이냐? 어머니냐?”하는 내적갈등으로 오래 동안 내심적인 고뇌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에서의 이러한 갈등설정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 작중 인물들 사이의 대립, 인물내부의 량가감정이나 가치관의 충돌을 통하여 플롯에서의 긴장감을 유발하였다. 제12장부터 나타난 갈등설정은 이 작품에서의 그 이후의 플롯을 지탱하는 요소이자 원리가 되면서 인물구성(성격구성) 및 세계관과 가치관의 대립을 형상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작품의 주제사상의 표현령역을 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갈등설정은 그 소재의 중요한 래원으로 되었던 허해룡의 단편소설 “혈연”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서의《고향》의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3.《고향》의 인물형상의 류형적 특징 이 작품의 주인공은 박송림으로서 이 작품에서 가장 필묵을 들여 부각한 인물형상이다.《고향》의 주인공 박송림의 원형은 비록 “혈연”중의 김청산이기는 하지만 김청산과는 류형적으로 많이 다른 인물형상이다. 즉 김청산이 영국의 소설리론가 포스트가 언급한바 있는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라고 한다면 박송림은 포스트가 언급한 바 있는 “립체적인물(round character)”이라고 할 수 있다. 평면적인물로서의 “혈연”중의 김청산은 성격구조가 단일하기에 독자의 상상력이나 리해의 범위밖으로 달아나지 않으며 더욱이 성격의 발전이란 거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반해 립체적인물로서의 박송림은 혁명렬사의 후대로서 원대한 리상과 포부가 있는 긍정적인 일면이 주도적이기는 하지만 “문화대혁명”의 정치적 압력앞에서 굴복하며 개인의 정치적전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녀자의 어머니인 김금녀를 박해하는데 동참한다. 왕송림(김송림)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성격조합에 의해 이루어진 립체적인물이였기에 비극적역할을 잘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동시에 왕송림(김송림)은 바로 립체적인물이였기에 평면적인물인 김청산에 비해 성격의 발전과 기복이 있고 내심속의 모순갈등이 있기에 보다 깊이 삶과 인간성의 깊이를 제시해주었다. 바로 박송림(김송임)이 이처럼 다양하고 심오한 성격의 소유자인 립체적인물로 그려졌기에 독자들에게 신뢰감과 진실감을 주어 독자들로 하여금 이 인물에 공감하게 하는 것이다. 다만 이 인물의 형상창조에서 그의 내부의 심리적갈등에 대한 묘사를 보다 강화하여 그의 복잡한 심리활동을 더욱 상세하게 묘사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왕송림(박송림) 외에도 리슈메이 역시 립체적인물에 가까운 인물형상으로서 그는 한 남성에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많이 갈등하는 형상이다. 만일 리슈메이의 내면의 갈등에 대한 묘사를 좀 더 강화했더라면 역시 보다 풍만한 립체적인물로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송림과 리춘메 사이의 갈등은 우리들로 하여금 프랑스 고전주의 극작가 코르네이유(Pierre Corneille, 1606-1684)의 비극《르 시드》(1637년)의 남주인공 로드리그와 녀주인공 쉬멘느 사이의 갈등을 련상시킨다. 이 극의 갈등이 “개인의 사랑의 감정과 가족의 영예간의 갈등”인데 반하여《고향》에서의 왕송림의 내심갈등은 “개인의 사랑과 이른바 ‘혁명’ 사이의 갈등”이였으며 춘메이의 내심갈등은 “남성에 대한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갈등”이였다. 그리고 왕송림과 춘메이의 갈등과 결말에서의 갈등의 해소 역시 로드리그와 쉬멘느 사이의 갈등과 그 해소를 련상시킨다. 김금녀는 형상은 대표성을 띠고 있는 형상으로서 어쩌면 그녀는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갖고 있는 연변조선족의 혁명전통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광스러운 항일투쟁의 경력을 지니고 있고 선량한 인간성을 갖고 있는 김금녀가 “문화대혁명” 동란속에서의 억울한 정치적박해로 인해 고문치사를 당한 그 비참한 운명은 연변조선족이 문화대혁명 중에서 당한 억울한 정치적박해를 개괄했다고도 할 수 있으며 민족성, 계급성 이외에도 부모자식간의 사랑을 포함한 인간성도 있음을 표현하였다. 왕유덕은 조선족의 항일렬사의 자식인 박송림을 불속에서 구출해서 친손자처럼 키워준 인간성이 넘치는 인물형상으로서 그의 손녀 왕계향은 항일투사인 자기 아들 왕희춘과 만족 며느리 조봉녀 사이에서 태여난 처녀인데 이 왕유덕(王有德)은 그 이름이 시사하다시피 인간으로서의 덕성을 상징하고 있는 인도주의정신과 인도주의실천의 화신이다. 김금녀와 왕유덕은 모두 평면적인물이기는 바로 이 김금녀 일가와 왕유덕 일가 사이에 피로 맺어진 인연은 이 소설의 가장 주요한 골격을 이루며 민족단결의 주제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캐리어이다. 기타 부차적 인물형상들에 대한 분석은 략한다. 4. 《고향》의 주제사상 이상의 복잡한 스토리, 인물관계 및 갈등설정 통해서 단순했던 “혈연”의 주제사상을 내포시키면서도 또한 그것을 초월하여《고향》으로 하여금 복합적인 주제를 가지게 했는바, 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혈연”의 이른바 “민족단결”과 혁명적인도주의 주제의 중복적인 표현이다. 즉 “공동한 원쑤를 물리치는 항일투쟁은 한족과 조선족 인민사이를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피로 뭉치게 하였다”는 민족단결의 주제이며 계급적사랑에 바탕을 둔 혁명적인도주의 주제이다.《고향》이 주제는 비록 “혈연”의 주제사상의 답습이기는 하지만 “혈연”에 비해 보다 충분한 편폭을 통하여 상세하게 표현되였다. 둘째, 문화대혁명이 조선족인민대중들에게 준 깊은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나아가서는 비인도주의적인 “계급투쟁절대화”의 론리를 단죄하는 주제이다. “당과 수령의 명의”로, “혁명의 명의”로 자행된 문화대혁명중의 만인 대 만인의 잔인한 계급투쟁은 시비와 흑백을 전도하여 수많은 충성스러운 조선족 당원간부들과 인민대중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죽음에로 내몰아 감으로써 조선족인민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내심의 상처를 주었다는 주제사상을 표현하였다. 이 소설은 망둥이 제 새끼 잡아먹는 것 같은 “문화대혁명”이란 이 전대미문의 내란의 본질을 모자간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비극으로 집약시킴으로써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왕송림과 김금녀 그리고 리춘메이의 형상과 세 세 사람간의 갈등은 이 두 번째 주제를 표현하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문화대혁명중에서의 항일투사인 김금녀의 비운(悲運)은 전반 중국조선족의 비운이기도 하다. 이 두 번째 부분의 주제사상은 1962년에 발표된 “혈연”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서《고향》에서의 창조적인 확장이였다. 이상의 두 가지 주제사상은 하나로 유기적으로 융합되여 마치 나무의 줄기처럼 이 장편소설의 다양한 부분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붙잡아줌으로써 전반 작품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하였다. 5.《고향》의 출현의 사회정치 콘텍스트 “문화대혁명”의 10년 동란 중에서 연변은 자기가 갖고 있는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가 혹심했다. 문화대혁명 10년동안에 빚어진 연변의 억울한 시건으로 해서 연변에만 해도 피해자가 무려 3만 1,532명에 달했는데 그중에서 2.205명이 죽고 3,077명이 불구로 되고, 1,052명이 로동능력을 상실했다. 4인무리가 타도된 후 당의 ‘발란반정(撥亂反正)”의 거세찬 동풍을 타고 “문혁의 오유와 혼란을 시정하는 사업이 시작되였는데, 1978년 6월 20일 주덕해동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1978년 7월 4일에는 이른바 “1967년 8.2, 8.4 판국폭란”, “조선간첩”, “지하국민당” 등 억울한 사건, 가짜사건, 그릇된 사건에 대해 시정했다. 10년 동란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연변도 전국과 마찬가지로 개혁개방을 맞아 “문화대혁명”중에 생겨난 수많은 억울한 사건들을 시정하는 거세찬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문학 분야에서도 발 빠르게 중국 주류문단에 일기 시작한 “상처문학”, “반성문학”의 흐름에 편승하여 연변식의 “상처문학”, “반성문학”이 나타난 것이다.《고향》은 바로 이러한 사회의 정치콘텍스트 속에서 나탄 것이다. 이 시기 류원무는 시대의 발걸음에 맞추어 “상처문학”, “반성문학”에 속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단편소설 “비단이불”(《연변문예》, 1982년 제7호)이다. 이 작품은 “비단이불에 깃든 이야기를 통해 인민공사화와 ‘문화대혁명’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끼친 재난을 비판하면서 백성이 없으면 간부도 없고 나라도 없다는 철리를 제시하였다.” 이런 문학적사색의 연장선속에서 우리는 “문화대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깊은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그 비극산생의 원인을 추적하고 반추하는《고향》같은 장편소설을 창작하게 된 창작배경이나 창작동기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류원무의 이러한 새로운 문학사유는 어찌하여 생겨나게 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 원인은 사상해방의 거대한 조류를 타고 중국 그리고 연변 문단에 나타난 사실주의와 인도주의 문학정신의 복귀에 있었다. 특히 투철한 작가의 주체성과 사회비판정신을 갖춘 김학철의 문학정신에서 사숙(私塾)한바가 컸음을 류원무 자신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하고 담대한 사나이! 김학철선생은 게가 아니였다. 게를 먹는 용사였다! 《20세기의 신화》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발표도 되지 않은 작품을 수색해내가지고 “죄”를 다스리는 그 자체가 “신화”다. 다른 한편 수십만 자에 달하는 그 소설에 혹 과분한 언사가 있고 일부 폐단도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반우파투쟁의 확대화를 질책하고 좌경로선을 비판한 첫 장편소설이라고 본다.(물론 뒤늦은 견해이지만) 지금 전국 문단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장현량의 중편소설 《록화수》도 좋고 종유희의 중편소설 《황하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도 좋고 모두가 60년대 초기가 아닌 80년대 중기에 와서야 비로소 좌경로선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맑스 -레닌주의에 대한 신앙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만세소리 속에서 검증되는 것이 아니며 맹목적인 순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학철에 대한 나의 견해에는 일대 전변이 생겼다. 애숭이 때와 같이 다시금 선생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작가라면 저런 주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앞에 마주앉아 작가적인 맑스주의 신앙에 대하여, 작가의 수양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이상의 인용문은 류원무선생이 1987년에 발표한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류원무선생은 비록 김학철옹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의 진가(眞價)를 뒤늦게 깨달았다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물고 늘어지는 우리 문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면 사상관념이 아주 일찍이 해방되였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열린 문학사유를 갖고 있었기에 류원무선생은 새 시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굴지의 중견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五. 《고향》의 형식에 대한 분석 1.《고향》의 서사구조와 플롯의 특징 첫째,《고향》시점과 화자 《고향》의 원형인 “혈연”은 짧은 단편소설이였기에 주인공을 제1인칭화자로 내세워 전반 이야기를 서술하였지만 시공간적으로 보다 전개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편소설인 까닭에《고향》에서는 제3인칭 전지적화자로 바꾸었다. 둘째, 《고향》의 서술시간-순차의 특징 순차(Order)는 구조주의시학에서 다루는 시간의 개념을 형성하는 범주의 하나이다. 순차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이 발생한 시간순서를 가리키는데,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rse)이 동일한 순서(1-2-3-4)를 가지고 있는 “표준적 계기성”과 그렇지 않은 “시간변조적 계기성”이 있으며 시간변조는 “소급제시(analepsis)”와 “사전제시(prolepsis)”로 다시 나뉘여진다. 《고향》은 순차(Order) 면에서 본다면 전형적인 “소급제시(analepsis)”의 서술형태를 가진 작품이다. 이를테면 이 작품은 개혁개방초기 주인공이 박송림이 감옥에서 석방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이 작품에서의 주요한 사건은 대부분 “문화대혁명”시기나 항일전쟁시기까지 소급된다. 이를테면 제8장 “피맺힌 사연”, 제11장 “왕유덕일가”, 제13장 “감방에 핀 매화” 등 부분은 가장 전형적인 “소급제시(analepsis)”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전도적서술로서의 이런 “소급제시”는 현념(懸念)을 조성시킴으로써 독자들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심미적효과를 갖게 하였다. 셋째,《고향》의 플롯 류형의 특징 소설학에서 일반적으로 소설을 “플롯중심소설”과 “인물중심소설”로 량분한다. 이 두 개의 플롯 류형은 사건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가지 자질- 행동적자질과 심리적자질에 대응한다. 당연히 행동자질이 중추가 되는 비심리적인 소설이 “플롯중심소설”이다. 따라서 “플롯중심소설”은 인물의 심리변화와 발전 과정에 서술의 초점이 두어지기보다는 사건으로서의 행동의 전개가 서술의 대상이 되는 소설일반을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인물중심소설”은 인물의 심리와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때문에의 사건이나 행위들은 인물의 심리나 성격적 특징에 대한 표현이거나 징후이며 당연히 사건이나 행동은 인물의 성격에 종속되는 것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나 로신의 《아Q정전》 같은 작품이 이런 소설의 보기이다. 이런 작품들에서의 사건이나 행동들은 례외 없이 작중인물의 심리와 성격의 지표가 되고 있다. 그러면 《고향》은 구경 어느 플롯 류형에 속하는가? 《고향》은 기본상에서 “플롯중심소설”에 속하지만 일부 “인물중심소설”의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에서 언급했던 대부분의 “소급제시(analepsis)”는 주인공들의 심리나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제12장부터 서술된 문화대혁명중에서의 주인공 박송림이 직면한 외부적환경과 의 그중에서 벌어지는 사건속에서의 그의 행위들은 그의 내심갈등과 성격을 묘사하는데 바쳐졌기에 다분히 “인물중심소설”의 요소를 갖고 있기도 하다. 총적으로 이 소설은 “플롯중심소설”적인 요소가 기본을 이루면서도 “인물중심소설”의 요소도 갖고 있는 과도기적인 플롯 류형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비극적플롯 (Tragic plot)”과 “희극적플롯(comic plot)”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 류형으로 나누었다. “비극적플롯”이란 주인공의 운명이 플롯의 최종단계에서 앞서의 단계의 비해 하강하는 구조를 지칭하며 “희극적플롯”이란 그 반대로 최종단계에서 상승하는 구조를 지칭한다. 허해룡의 “혈연”중의 주인공 김청송이 전형적인 “희극적플롯”의 인물이라면 《고향》의 주인공 박송림의 운명선은 우와 아래를 교차하다가 종당에는 상승하기에 희극→비극→희극의 기복을 이루는데 이중에서 “비극적플롯”의 요소가 아주 많고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러면 왜 이처럼 복합적인 요소가 나타났을까? 그것은 첫째로 원형으로서의 “혈연”의 “희극적플롯”의 잔재가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그러면서도 문화혁명중의 주인공의 비극을 반드시 묘사해야 하였기 때문이며, 셋째로는 그 시대(개혁개방초기)가 모든 사람들이 문화대혁명 중의 모든 원한과 갈등을 해소하고 앞을 내다보면서 단합하여 살아갈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랑이냐? 어머니냐?”하는 내심 갈등속에 빠져서 박송림의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해 주지 못하는 춘메이를 다독여주고 설복하는 송화림업국 당위서기 곽림의 말은 개혁개방 초기의 시대정신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심정은 나두 알만하네. 얼마나 처참한 상처인가. 겨우 어머니를 찾아놓구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러한 상처가 어찌 송림이 한사람에 국한되겠어. 전당전민이 다 상처를 입었는데. 이런 상처를 빨리 아물구자면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말구 앞을 내다봐야지.” 총적으로 《고향》에서 보이는 희극 → 비극 → 희극이라는 이 플롯구성은 결코 《춘향전》 같은 전통소설속의 “고진감래(苦盡甘來)”식의 해피엔딩(happy ending)이나 대단원(大團圓)이 아니라 특정한 당시 그 시대의 시대적요구에 부응한 결말처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2.《고향》의 문체의 특징 여러 작가들이 아무리 동일한 플롯, 작중인물, 배경을 설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이야기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가 나오는 것인 만큼 문체가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그것은 매개 작가들마다 말하는 리듬, 문장 길이, 명료도, 유머감각이나 이미지, 은유를 구사하는 능력 같은 것들이 각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견지에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뷔퐁(Buffon, 1707-1788)은 “문체는 곧 사람”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즉 문체는 작가의 개성의 표현으로서 매개 작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특유의 문체로 글을 쓰며 어떤 작가도 다른 작가의 문체를 흉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향》은 작자가 둘이기 때문에, 또한 그 집필분공을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어느 것이 류원무의 문체이고 어느 것이 허해룡의 문체인지 분간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통괄적으로 이 작품에 표현된 문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사실주의소설문학에서 중요시하는 “일어일물설(一語一物說)”같은 “정확한 언어적표현”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두 고참 문학편집원들에 의해 창작한 것이기 기본상에서 정확한 언어표현을 구사하고는 있지만 정확하지 않고, 비규범적인 언어적표현들이 간혹 눈에 띠기도 한다. 그 사례들을 몇 가지만 들어보기로 하자. ① 송림이 곽림의 손에서 들가방을 다시 빼앗으려 하였으나 곽림은 손을 홰홰 물리쳤다. ② 서보흥이 곽림의 손을 으득으득 잡아끌었다. ③ 늙스그레한 사나이와 검실검실한 젊은이가 허망지망 달려왔다. ④ 슈메이이는 입귀로 흐르려는 고기점을 고비손으로 밀어넣고 해죽했다. ①은 의성어 “홰홰”와 동사 술어 “물리쳤다”가 잘 조응이 되지 않은 경우이고, ②는 “으득으득”이란 의성어를 잘 못써서 “잡아끌었다”는 동사 술어와 조응이 되지 않은 경우이고, ③은 “허망지망”이란 비규범적인 의태어를 사용한 경우이고, ④는 “고비손”란 비유를 잘못 시용한 경우이다. 진정한 작가이면서 진정한 스타일리스트는 “오직 한 개밖에 없는” 명사, 동사. 형용사나 부사나 끝까지 고심해서 찾아내는 끈기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이점에서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둘째, 다양한 수사학적인 언어표현을 하려고 고심한 흔적은 보이지만 이 작품만의 개성적인 문체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 원인은 이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이 이중적인 민족문화의 신분을 가진 인물이였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조선족이면서 한족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된 박송림(왕송림), 한족이면서 조선족 어머니에 의해 양육된 리춘메이(리춘이), 그리고 등장인물 속에는 왕유덕, 곽림, 류진, 서보흥, 왕계향, 슈란 등 한족들이 오히려 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런 한족인물들의 대화를 아주 개성 있게 표현하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문체는 김학철옹의《격정시대》, 《20세기의 신화》같은 작품이 갖고 있는 개성적인 문체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체의 각도에서만 볼 때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생동미(生動美)와 개성미(個性美)를 크게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주지하다시피 작가의 문체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는 작가의 출생하고 성장한 지역의 언어적 특징과 후천적인 “교육”과 “독서”를 들 수 있다. 김학철옹이 원산에 태여나서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을 받았고 상해, 북경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거나 문학공부를 하면서 많은 독서를 하게 된 것과는 달리 류원무와 허해룡은 모두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여나서 중국 간도(연변)에서 성장하면서 교육을 받았기에 이 두 분의 언어적 토대는 함경북도 방언에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언어의 규범미, 세련미, 풍부미가 김학철 같은 분에 미치지 못하게 되였다고 사료된다. 사실 언어적각도에서 볼 때 리원길이나 고신일 같은 비함경북도 소설가들의 언어구사력이 함경북도출신의 소설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것도 같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또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 안수길 같은 함경도 출신의 소설가들은 의식적인 노력 거쳐서 걸어 다니는 토속어 사전이라고 할 만큼 자기의 장편소설 《북간도》의 대화부분에서 풍부한 간도 사투리(실은 주요하게 함경북도 사투리)와 토속어를 구사하여 자신의 문체적특징을 살려간 사례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소설계의 연변출신의 소설가들은 안수길(1911-1977)의 장편소설 《북간도》의 연변의 냄새가 물씬 나는 토속적이고 개성적인 문체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六. 나오는 말 류원무, 허해룡의 장편소설《고향》은 개혁개방 전기의 초기에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일찍 나온 장편소설 중의 하나로서 비록 사상예술상에 미흡한 점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 이 작품보다 선행했던 리근전의 장편소설《고난의 년대》나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김학철의 혁명성장소설《격정시대》가 모두 조선족의 흘러간 과거의 력사에서 소재를 취한 반해《고향》은 조선족의 흘러간 력사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지만 현실의 사회문제와도 긴밀한 련관성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선행시기 기존의 민족단결의 주제를 이어감에 있어서나 새시기 문학에서의 상처문학, 반성문학의 주제를 심화시킨 면에서나 모두 중국조선족의 새시기 소설분야에서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고향》은 기존의 조선족문학사나 연구나 문학비평에서 별로 중시를 받아오지 못했다. 필자의 이 론문은 말 그대로 포전인옥(抛塼引玉)의 글이다. 필자는 이 졸문을 계기로 하여 이 작품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나아가서는 류원무의 전반 소설세계에 대한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2009년 4월 6일 연길에서
2    과연 새로운것인가 (김관웅57) 댓글:  조회:3054  추천:104  2007-04-21
과연 새로운것인가                 - 김파의 《립체시론》 독후감                                                                 김관웅       우리 문단의 일부 문우들이 료녕민족출판사에 의해 근간된 김파씨의 《립체시론》를 한번 읽어보라고 자꾸 권하기에 바쁜 와중에도 한번 대충 읽어보았다.     김파씨 본인의 말에 의하면 김파씨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로부터 립체시 창작을 시도했고 그 기초우에서 80년대 중반으로부터 《립체시론》을 태동하기 시작하여 금년에 《립체시론》이라는 이 소책자를 출판하였는데 태동으로부터 출판되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20년동안 《립체시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김피씨가 많은 정력을 기울였음은 가상하게 생각하며 그 로고는 필자도 충분히 긍정하고싶다.    그런데 그 시학주장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이미 90여년전에 미래주의의 중요한 멤버였고 후에는 초현실주의 중요한 멤버로 되였던 이폴리네르가 이른바 《립체시》를 창작하고 립체파시론을 주장한적 있으니 김피씨의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은 결코 낯설기만 한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은 이폴리네르의 《립체시》와 김피씨의 《립체시》, 그리고 김파씨의 《립체시론》을 비교하려는 목적에서 쓰는것이 아니다. 다만 김피씨의 《립체시》와 《립체시론》의 창의성 여부만 론하려고 한다.       김파씨는 《립체시론》에서 이른바 립체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있다.     《…즉 시주제의 다면성, 시결구의 다각성, 시형상의 양성, 시어의 다의성과  수사법의 복합성과 변이와 전환 등이 망라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구조가 외적 및 내적으로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립체구조, 립체형상구조, 립체수사구조, 립체어의 구조 등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호상 련관, 호상침투, 호상 배척되는 대립물의 통일체로 구성되여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립체시를 어떻게 정의할수 있을것인가. 립체시란 그것을 구성하고있는 외적 및 내적구조에 상응된 다주제를 갖고있는 시라고 정의할수 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5〜16쪽.     김파씨는 자기와 다른 사람의 립체시는 모더니즘시들과는 대동소이하나 《모더니즘시에서는 사물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복수성, 다시 말하면 주제의 복수성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시속에 또는 시창작과정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체현되는가 하는 그 규률성이 결여되여있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65쪽.면서 자기의 립체시나 자기가 인정하는 립체시들이 모더니즘시들보다는 한수 우라고 주장하고있다.     이른바 립체시에 대해 김파씨가 숱한 말을 했으나 그 요점은《다주제》라는데 귀결된다. 그런데 묻노니, 여운이 있는 좋은 시들치고, 특히 고대 동서고금의 영물시(詠物詩)들이나 현대의 상징주의나 이미지즘이나 초현실주의 등 여러 모더니즘 시문학류파들의 시들치고 어느것이 다주제가 아닌것이 있는가?     그럼 먼저 조선조시대의 명기 황진이의 시조 한 수를 례로 들어 보자.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렵거늘    명월(明月)이 만공산하니 쉬여 간들 어떠하리    이 시조는 적어도 두가지 뜻(혹은 주제라고도 할수 있음), 즉 자면의(字面義)와 암시의(暗示義)를 가지고있다. 자면의(字面義)를 분석해볼것 같으면 서정적자아는 의인화된 푸른 산속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물과  대화하면서 한번 바다에 흘러들어가면 다시 거슬러 올라올수 없으니 밝은 달이 있는데서 한번 놀다가 가라고 권하는것이다. 암시의(暗示義)을 분석해볼것 같으면 벽계수(碧溪水)는 사실 벽계수(碧溪守)라는 호를 가진 멋쟁이 선비를 암시하는것이고 명월(明月)은 황진이 자신을 암시하는것으로서 풍류기생 황진이가 벽계수라는 멋쟁이선비더러 자기와 더불어 놀고 가라고 넌지시 암시하기 위해 쓴 시이다. 이밖에도 이 시조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하는 식의 급시향락(及時享樂) ― 제 때에 향락을 누려야 한다는 주제가 내포되여있다고 해도 별로 대과(大過)는 없을것이다.      녀석의 눈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쇠창살에 칭칭 감겨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무것도 담아낼 수 없었다.      녀석에게는 오로지 천갈래의 쇠창살만 보였고     그 천갈래의 쇠창살 뒤에는 우주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강인한 네 발로 유연한 걸음새를 보인다만     그 걸음새는 자그마한 쇠살창 안에서 맴돌기만 할뿐,      마치도 힘의 춤사위가 하나의 중심을 에돌기만 하는듯     바로 중심에서 위대한 의지는 현기증에 걸렸도다.      다만 이따금 눈까풀을 소리 없이 걷어 올리니      한폭의 그림이 침입해 들어오지만     사지가 긴장한 적막을 통과하고나니      마음에서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구나.                -릴케 《표범―빠리 동물원에서》    이 시에서의 자면의(字面義)는 이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것과 같이 빠리동물원의 살창속에 갇혀 탈출을 시도하느라고 쉴새 없이 맴을 돌다가 맥없이 주저 앉아버린 한마리의 표범을 그린것이다. 그러나 이 표범은 단순한 표범의 이미지만 전시한것이 아이라 인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릴케 자신과 릴케 같은 젊은 세대의 상징이다. 표범은 《천갈래의 쇠창살》속에 갇혀 쉴새 없이 맴을 도는데, 이는 바로 인간의 방향상실과 곤혹 그리고 방황을 상징한다. 《위대한 의지가 현기증에 걸렸다》거나 전반 《우주》의 상실은 마치도 표범의 감각 같아 보이지만 실제상에서는 인간의 감각을 상징했다. 그러므로 표범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은 바로 인간의 권태, 고민, 곤혹과 방황 그것이다. 시인은 로댕한테서 객관적이고 랭정하고 정확한 조각수법을 배워 추상적인 관념(힘, 의지 등)을 표범의 각종 이미지(《강인한 네발》, 《피곤한 눈길》, 《맴을 돈다》, 《현기증》, 《춤사위》 등)속에 내재화시켰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징을 통하여 발레리가 언급했던 이른바 《추상적인 육감》과 엘리어트가 제창했던 《사상의 지각화》의 효과를 획득했던것이다. 이 시는 시종 인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과정에서의 시인의 곤혹, 방황과 고민의 주관적정서를 상징하고있다.     모택동의 시(詩)나 사(詞)들에도 다주제를 가지고있는 상징성이 짙은 시들이 많고도 많으니 김파의 말을 빈다면 립체파 시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비바람은 봄을 보내고     흩날리는 눈꽃 봄을 맞네.      아직 벼랑에 고드름이 백장인데     꽃가지는 예쁘네.     예뻐도 봄빛을 다투지 않고      다만 봄소식 전할뿐.     산에 뭇 꽃들이 만발할 때에     그 속에 웃으리.         - 모택동《복산자 · 매화를 읊노라》     중국시론의 말을 빌린다면 모택동의 이 사는 그야말로 《말은 끝났으나 그 뜻은 무궁하다(言有盡而意無窮)》, 즉 그 주제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 역시 김파씨의 주장대로 라면 다주제의 립체시다.     시의 상징성과 그에 따르는 암시성, 다의성의 특점에 대해 동서고금의 수많은 시론가들이 이미 수많은 견해를 발표하여 우리 문단에서도 그것이 지난 몇년동안 시인묵객들의 입에서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러니 상식으로 된지 이미 오래다. 특히 중국고대 시론에서의 《신운(神韻)설》은 전문 이 점을 연구대상으로 한 시론범주로서 중국전통시론범주에서의 핵심적인 범주로 된다. 그리고 중국시론중의 《의경(意境)설》이나 《언의상(言意象)론》이나 서양시론중의 《층차론(層次論)》 등은 모두 정도부동하게 시가 갖고있는 다차원의 의미구조에 대해 탐구를 진행하였다. 다만 편폭상의 제한으로 이 점에 대해 충분히 부연하고 전개를 할수 없는것이 조금은 안타깝다.     김파씨는 인류가 창조한 시론들에는 김파씨 자신이 주장하고있는 이른바 《립체시》 혹은 《립체시론》의 골자들이 적어도 천년 이전에 제기되였고 수없이 론의되여왔던 시학명제나 시론범주였음을 잘 알아야 하며 결코 자신의 새로운 발견이나 창조가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해가 중천에 높이 솟아올라 다들 일밭으로 나갔는데, 늦잠꾸레기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서 새날이 밝아왔다고, 자기가 세상에서 첫 사람으로 일출(日出)을 보았다고 소리치는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서양의 상징시와 상징주의시론을 이른바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꿨다고 새로운것이 되고 창의성이 부여되는것이 아니다. 또 중국의 신운설이나 의경설을 《립체시》나 《립체시론》이라고 타이틀만 바꾸었다고 새로운 발견이 되는것이 아니다. 모태주를 다른 술병에 쏟아넣고 다른 브랜드로 바꾸었다고 해도 모태주의 술맛이 변하는것은 아니다. 한 사기꾼이 자기가 모태주를 초월하는 명주를 만들어냈다고 떠들어댄다면 얼마동안은 풋내기 술꾼들을 얼려 넘길수도 있겠지만 고참 주류(酒類) 품상가(品嘗家)의 혀와 코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누구의 말처럼《우리 시단에서 김파의 립체시와 립체시론에 대한 반향은 랭담하지만 오히려 한국의 시단에서 반향은 뜨거웠다》 김파 《립체시론》, 료녕민족출판사, 2005년 105쪽.고 하여 김파씨의 립체시론이 대단해지거나 원래 없던 창의성이 부여되거나 원래 없던 과학성이 생겨나는것이 결코 아니다.                                    2005년 11월 14일 연길에서 <<문학과 예술>> 2006년 2호
1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나가는 김응룡 시인 댓글:  조회:2536  추천:79  2007-03-24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나가는 김응룡 시인                                                                          김 관 웅        동양 시문학의 력사적 흐름속에서 사실주의전통은 시창작의 각도에서 볼 때《시경》을 원류로 하여 당나의 두보나 백거의에 이르러서는 도도한 흐름을 이루게 되었고, 시론의 식도에서 본다면 공자의 《시가이원(詩可以怨)》의 현실비판, 현실참여의 시학주장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유(韓愈)의 《불평스러우면 울어야 한다(不平則鳴)》는 시학주장에 이르기까지 역시 사실주의적인 시학주장이 도도한 흐름을 이루었다. 당나라시기의 사실주의시인 백거의는 《글은 그 시대에 맞추어 짓고, 시는 그 시대의 사건에 맞추어 읊어야 한다(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고 주장했었다.   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유와 백거의의 시학 주장을 종합하여 말한다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울어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시대에 울고 싶은 사람들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유명한 시인들은 대부분 그 시대를 대신하여 운 사람들이다. 10년 전 필자는 이 시대를 대신하여, 우리 민족을 대신하여 우는 문학경향을 《민족적 사실주의》라고 명명하여 부른 적 있으며, 력사의 격변기에 처한 우리 민족문학에 있어서 《민족적 사실주의》는 가장 바람직한 문학경향이라고 인정해 왔으며 이를 적극 권장하여 왔다. 그 후로 필자는 시종 이 자대로 우리중국조선족문학을 평가하군 했다.    김응룡 시인은 최근 몇 년래 중국조선족, 특히는 중국조선족 농촌, 농민, 농업 이 삼농문제에 눈길을 돌리고 우리농촌, 농민이 직면한 절실한 문제들을 자기의 시창작의 소재로 다루면서 우리의 농민과 농촌을 대신하여 구슬프게 울어주고 있는 시인이다. 우리 민족의 오늘날의 준엄한 실존적인 상황은 오불관언이라면서 유미주의의 상아탑 속에서 콧노래만 부르는 그러한 시인들과는 판연히 다른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드팀없이 나가고 있는 민족적 사명감과 량지가 있는 참여파 시인이다.   지면상의 제한으로 김응룡 시인의 지난 한 해에 창작하여 연변문학 2006년 제8월호와 12월호에 게재된 《기다림》,《시골개구리들의 울음》, 《향수》, 《가을의 울음》4수의 시와 작년 한국 《문예시대》2006년 해외동포문학상을 받은 수상작 《둥지》1수 도합 5수만 텍스트로 삼아 최근 김응룡 시인의 민족적 사실주의 창작경향을 분석해 보려고 한다.   정오무렵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시골마을에 개가 짖는다 컹컹   마을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녀인 보고 이 집개 저 집 개 짖어댄다 목 메여 짖어댄다   산비탈 메밀에서 다락논에서 김을 잡던 외기러기 사내들 약속이나 한 듯 일손 놓고 일어선다   행여 행여… 저마다 부서지는 마음을 추슬러 본다        - 김응룡 《기다림》   이 작품은 세련미와 함축미를 갖고 있어 진한 감동과 더불어 간 사색의 여운을 남기는 수작이다. 녀성이 증발해 버린 우리 농촌들에서 살아가는 《외기러기 사내》들이 정오 무렵에 한적한 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난 녀인에 대한 동일한 통하여 리농향도(離農向都), 해외로무송출 등으로 인한 부부리산의 아픔, 로총각들의 결혼난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농촌에서의 가정의 해체화 경향을 잘 보여주었다. 우리농민들의 고통스러운 실존상황을 아주 짧지만 특색 있는 모멘트를 통해 집약적으로 보여준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중국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쪽박을 차고 두만강 ․ 압록강을 넘어 온 이민집단으로서 처음부터 농업이민의 성격을 다분히 갖고 있다. 하기에 오래 동안 중국조선족문화의 기반은 시골에 있었으며 농민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주체였다. 시골에 우리중국족의 삶이 터전이 있었고 우리의 순후한 인심과 민속이 있었고 우리의 교육과 문화가 있었다. 한마디로 농촌과 농민은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이고 뿌리였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맞아 중국사회가 산업화를 발걸음을 다그치면서 전반 중국은 날로 농업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의 변신해가고 있으며 나날이 도시화 되어 가고 있다. 이런 시대의 추이(推移) 속에서 우리 중국조선족공동체는 지금 위기와 기회가 병존하는 역사의 대 격변기에 처해있다. 이농향도(離農向都)의 시대적인 추세 속에서 이미 20만 명 달하는 중국조선족농민들은 중국연해지역의 도시들에 이동해갔고,  2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코레안 드림에 휘말려 한국으로,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가 있다. 가장 팔팔한 일여덟 명에 한명 꼴로 한국에 나가있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중국조선족농민들은 전에 비해 돈은 벌어 어느 정도 부유해 지게는 되였으나 그 대가로 많은 시골의 농민들은 가정의 행복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은 형국이다. 조선족농촌의 해체화 경향은 농민 가정의 해체화 경향으로 나타난다. 농촌에서의 노총각들이 장가들지 못하고 기존 가정은 중국의 내지 진출과 해외진출 인해 《외기러기 아빠》, 《외기러기 엄마》들이 속출하고 , 어린 자식들이 부모들과 헤어져서 살아야만 하고 도처에 폐가들이 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중국조선족문화의 고향이자 뿌리인 농촌과 농민들은 날로 영락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객관사실이며 따라서 중국조선족문화의 본거지인 농촌의 해체는 중국조선족공동체 및 그 문화가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다분히 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중국조선족시단에는 이른바 순수시의 상아탑 속에 깊이 묻혀서 언어유희나 때 지난 언어장난이나 기교장난에만 골몰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김응룡 시인은 이 몇 년 동안의 근작시들에서 중국조선족문화의 뿌리의 흔들림을 농촌과 농민들의 오늘날의 실존 상황을 통해 깊이 감지하고 민족적인 우환의식을 안고 우리농촌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중국조선조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로 남긴 시들을 많이 창작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진실하게, 그리고 충분한 이미지화를 거쳐서 표현한 시작이 바로 바로 「까치둥지」이다.   지는 잎들이 받들어 올린 까만 그리움 하나 백양나무 가지에 동그랗게 걸려 쳐다보는 나의 눈 이슬 젖는다   언어도 음악도 삶의 온기마저 잃은 비인 둥지 주인은 어데 갔나   동구밖 나선 할배할매 눈이 허는데 반가운 기별은 전하지 않고 늙은 총각들 술병 안고 쓰러졌는데 오작교는 놓지 않고   생기가 떠나간 자리 까만 그리움 하나 행복했던 나날들이 락엽되여 뒹구는 시골 백양나무가지에 높이높이 걸렸구나     - 김응룡 《까치둥지》전문      이 시에서는 우리 농촌에서의 가정의 해체화의 현실을 《백양나무가지 우에 동그랗게 달려있는 빈 까치둥지》라는  객관적대상물을 통해 표현했다. 까치는 우리민족의 상징체계에서는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는 길조이다. 그러나 우리의 농촌에서는 그런 길상(吉祥)스런 까치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언어도 음악도/ 삶의 온기마저 잃은/ 비인 둥지"밖에 남기지 않고 애오라지》 《까만 그리움만 하나》만이 《백양나무 우에 높이 높이 걸렸구나》라고 표현하고 있다. 표현된 정서가 다소 회색(灰色)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시인의 민족적인 우환의식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정서의 발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민족적 사명감에서 우러난 김응룡 시인의 우환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이 시는 우리중국조선족시단의 현실외면, 현실도피의 바람직하지 못한 시창작 경향과는 달리 민족적인 실존상황에서 감득(感得)한 진실한 정서를 비교적 생동한 시적형상화를 통해 표현한 점이 높이 평가되여 한국《문예시대》2006년 해외동포문학상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민족적 사실주의 길로 나아가는 김응룡 시인의 시창작은 계속 심화되여 가고 있는데, 근작시《향수》, 《가을의 울음》 역시 우에서 소개한 시적 추구의 심화라고 볼 수 있다.   삶은 올감자에 하얀 김이 서리고 된장 찐 풋고추 향을 피워 올리면 내사 65도 배갈 한 병 마셔도 취하지 않소   앞강의 여울소리 긴긴 절설 풀어내고 숲속의 새들 딸기빛 사랑을 노래했소 젊은 시인은 심장을 뽑아 미루나무에 걸고 둥둥 북을 쳤소   먼먼 지평선 저쪽 내가 태를 묻은 땅이 있으련만 강물의 여울소리도 새들의 사랑노래도 들리지 않고 안개만 자욱하오   불볕에 달아오른 세멘트길 따라 홍개미 한 마리가 포복전진하오 35도 배갈에 취해 비틀 비틀     - 김응준 《향수》전문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눈앞에 비쳐지는 것은 사랑도 희망도 빛바래진 농촌의 현실이고 그 속에서 실의에 빠져 취생몽사하는 사람들도 적잖은 게 오늘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김응룡 시인의 《향수》에서 표현된 노스텔지어(Nostalgia)에는 센티멘털(sentimental)한 애수와 우환(憂患)이 주조(主潮)를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이러한 시들은 우리농촌의 쓸쓸한 만가(挽歌)처럼 쓸쓸하게 들려온다. 하기에 들려오는 우리시골의 가을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김응룡의 《가을의 울음》)도 쓸쓸하기만 하다.    어둠이 깃든 시골 개구리들이 운다 눈물도 없는 개구리들이 울음 높이 질벅하다   비도 오지 않아 강가 모래불에 묻은 엄마 물에 밀려갈 근심도없는데 왜 우느냐 물었더니 아니란다 개굴개굴   개구리들이 우는 리유 아는지 모르는지 이영이 고삭은 초가에서 진작 잠에 곯아떨어진 늙은 량주 꿈을 꾼다   꿈에 안아보는 손자손녀 재롱에 행복의 웃음 느침으로 흘러내려 베개잇 적신다   이 시골 인적 늙은 량주마저 초가에 묻힐가바 개구리들은 운다 밤새껏 밤새껏     - 김응룡 《시골개구리들의 울음》전문      이 시에서 시골의 여름밤의 개구리울음 소리는 초상난 집에서 애고애고 들려오는 곡성처럼 청승맞기 그지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개구리소리는 시인의 애타는 호소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감정이입의 표현수법이 아주 잘 구현된 수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총적으로 김응룡 시인은 날로 황페해 가는 우리 농촌과  날로 령락해 가는 우리 농민들을 대신하여 울어주고 있는 시인이다. 철두철미하게 민족적 사실주의에 립각하여 우리민족의 실존적 현실을 직시하고 표현하고 있는, 강렬한 민족적 우환의식과 민족적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있는 시인중의 한 분이다. 최근 김응룡 시인의 시 창작은 우리 시단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향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김응룡 시인의 시들은 아직도 높은 요구에 비해보면 아직은 거리가 있다. 특히 무엇을 말했는가 보다는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예술적 표현 문제에서 아직은 제고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직설보다는 이미지화를 통한 시적인 형상화 작업을 중요시하여 시작들을 더욱 갈고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탄광의 광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광부들에게 위험을 알렸다고 한다. 민족적 사명감과 우환의식이 있는 우리의 시인들이나 작가들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 비슷한 존재이다.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력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김응룡 시인의 상기 시들은 질식해 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김응룡 시인이 앞으로도 민족적사실주의 길로 드팀없이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2007년 1월 28일 연길 민항아파트에서   2007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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