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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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동북아 황금삼각'이란 이 루빅큐브는 맞춰질 것인가? 댓글:  조회:2891  추천:1  2018-06-09
'동북아 황금삼각'이란 이 루빅큐브는 맞춰질 것인가?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길림성 연변 훈춘시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중국, 로씨야, 조선 3국 접경지역에 위치해있는 국경도시이다. 두만강 입해구와 맞닿아있는 훈춘시는 또한 중국의 선박들이 일본해에 직접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훈춘시는 로씨야 연해주의 하싼지역과 륙지가 린접해있고 조선 함경북도와는 넓지 않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훈춘시는 두만강구역 국제협력개발 핵심지대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로부터‘동북아 황금삼각'지대로 불리워왔다. 이 지대에는 중국의 훈춘과 조선 함경북도 라진, 선봉 그리고 로씨야의 포시에트로 련결되는 1,000키로메터의 소삼각지역 그리고 중국의 연길, 조선의 청진,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를 련결하는 약 5,000키로메터의 대삼각지역이 포함되여있다.    이‘동북아 황금삼각’지대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개발을 위해 1990년 7월 중국이 선참으로 훈춘개발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이듬해에 유엔개발계획(UNDP)의 후원하에 두만강개발사업(TRADP)이 출범하였고, 따라서 유엔개발계획의 지원하에 1995년에 이르러서는 중국, 로씨야, 한국, 조선, 몽골 등 5개국이 참여하는 정부간 협력사업으로 전환되였다. 당시 경제학자들이 제시한 두만강개발 청사진에 고무된 연변사람들은 훈춘개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훈춘에서는 한때 부동산 개발 붐이 크게 일기도 했었다. 하지만 연변사람들의 열망과는 달리 그 뒤 훈춘을 비롯한 두만강 하류 황금삼각지대에 대한 개발사업은 오래동안 지지부진했다.    그 주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비유할 것 같으면 중국, 로씨야, 조선, 한국, 일본, 몽골 등 여러 나라들로 이루어진 ‘동북아 황금삼각’지대라는 이 거대한 루빅큐브(Rubik,s cube)는 조선반도 북과 남 사이에 오래동안 지속되여온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 때문에 도저히 맞춰낼 수 없었다. 바로 이 때문에 두만강개발사업은 조선반도에 조성된 전쟁위기상황으로 인해 지지부진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동북아시아 여러 관련국들이 적극 동참해야만 추진될 수 있는 두만강개발사업(TRADP)은 마치 ‘뇌혈전’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게 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반도에서의 전쟁위기 국면으로부터 대화를 통한 평화국면에로의 전환은 2018년 벽두에 발표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시작되였다. 김정은은 한국에서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을 바라면서 참여할 뜻을 내비쳤다. 문재인 정부가 이를 즉각 받아들임으로써 평창동계올림픽을‘남북평화의 올림픽'으로 잘 치뤄냈다. 이런 평화의 무드는 2018년 4월 27일과 5월 26일에 각각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과 북측 통일각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이런 평화의 분위기가 습근평과 김정은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으며 6월 12일 싱가포르 조미정상회담으로까지 확장되였다.    ‘4.27’ 판문점 조선반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 이후로 조선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둔 변경도시 단동의 집값이 뛰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미상불 기쁜 소식이다. 훈춘의 집값도 궁금하다.    만일 조선반도 7천여만 백의민족의 오랜 숙망인 조선반도에서의 비핵화 그리고 북과 남 사이의 평화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되는 날이면 조선반도 남과 북의 경제협력은 물론이고 조선반도도 경의선이나 동해선철도의 개통으로 이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경의선은 중국 료녕성과 이어지고 동해선은 길림성 훈춘과 로씨야 씨비리횡단 대철도와 이어져 기차들이 유라시아대륙을 실북 나들듯 오고갈 그 날도 곧 도래될 것이다.   요즘 또 하나의 경사가 생겨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한국이 조선의 찬성표를 얻어 국제철도협력기구(OSJD)에 정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중국횡단철도(TCR)와 씨비리횡단철도(TSR)를 포함해 28만키로메터에 달하는 국제철도로선 운영에 참여하게 되였다.    필자는 조선반도에서 평화의 무드가 계속 이어진다면 두만강류역에 위치한 ‘동북아시아 황금삼각'이라는 이 거대한 루빅큐브는 조만간에 무난히 다 맞춰질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한 지역의 평화는 그 지역의 경제발전과 직접적으로 련관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길림신문 2018.6.8    
69    거짓말과 진실한 말 댓글:  조회:5191  추천:0  2013-09-04
거짓말과 진실한 말   김 관 웅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몇천년전부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수없이 전승되여 오고있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가 철부지 아들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한참 크는 중돼지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중국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이다. 부모로 된 이들은 어린 자식들앞에서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이다.   고대 그리스의 《이솝우화》에는 심심풀이로 늑대가 왔다고 여러번 거짓말을 한 목동애가 진짜로 늑대가 왔을 때 늑대가 왔다고 구원을 청했지만 마음사람들이 또 거짓말을 하는가 여기면서 누구도 구하려 달려가지 않은 바람에 늑대에게 물려 죽었다는 우화가 있다. 역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담은 우화이다.   자고이래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고 이토록 강조를 하여 왔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한다는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였다.   “지록위마(指鹿为马)”라는 이 사자성구는 이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력사사실이 기록되여 있다.   진시황이 죽고 그 아들이 진2세로 등극한 뒤에 재상으로 있었던 조고(赵高)는 궁정정변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정의 뭇 신료들이 자기에게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를 한 번 떠보기로 작심한다. 하루는 조고가 진2세의 앞에 사슴 한마리를 끌고 와 바치면서 “황제페하께 준마 한 필 바치나이다”라고 말하자 진2세가 웃으면서 “재상이 무슨 말씀이시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라고 했다. 이에 조고가 조정의 문무대신들더러 대답해 보라고 했다. 혹자는 사슴이라고 진실을 말했고, 혹자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고, 혹자는 말이라고 대답하면서 조고에게 아부했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진실을 말한 대신들은모두 가차없이 죽여 버렸다. 이후로부터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조고가 무서워 벌벌 떨었다고 한다.   진실한 말을 한다는 것은 옛날에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현대에 들어와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59년 여름. 려산회의에서 팽덕회는 중국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진실한 말을 했다가 그만 역린(逆鳞)을 하여 이른바 “반당분자”로 몰리지 않았던가.   자라보고 놀란 놈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팽덕회사건 이후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로 되였다. 그중 가장 큰 거짓말쟁이로 된 사람은 바로 림표였다.   림표는 사석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 한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을 전후하여 모택동의 환심을 사기 위해 림표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던가. 모택동을 “수천 년만에 나타난 천재”라고 치살렸고, “모택동사상을 맑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라고 올리췄고, “모주석의 말씀은 한마디가 만 마디를 필적한다”고 하면서 별별 거짓말을 다 했지만 종당에는 정변을 일으켜 모택동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려던 음모가 들통이 나서 비행기를 타고 황망히 도주하다가 황막한 사막에 떨어져 불귀의 객이 되지 않았던가.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는 진실한 말을 하는 실사구시의 전통이 다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본위시대와는 달리 이 경제본위 시대에는 또 그 나름대로의 거짓이 횡행하고 있다. 몇년전에는 멜라민을 첨가한 “유독분유사건”이 터져서 중국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경악케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중국의 적잖은 음식점들에서 구정물통에 들어간페유(地沟油)를 다시 정제하여 쓰는가 하면 심지어 쥐고기를 양고기로 둔갑시켜 고객들을 속이기도 한다. 요즘은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 게(挂羊头卖狗肉)” 아니라 “양대가리를 걸고 쥐고기를 파는(挂羊头卖鼠肉)” 판국이다. 이 세상의 비리와 거짓이 어디 이뿐이랴.   그래서 요즘은 “이 세상에서 엄마를 내놓고는 다 가짜”라는 말이 항간에 류행할 정도로 진실과 진짜가 증발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마다 거짓말을 하여 세상이 거짓으로 충일하는 시대에 있어서 가장 강유력한 무기는 진실한 말을 하는것이다. 진실한 말 자체가 웅변적인 힘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일단 진실한 말을 하게 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쩔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치도 안데르센동화에 나오는 순진무구한 아이가 “임금님께서는 옷을 입지 않았어요!”라고 큰 소리를 치듯이 진실을 소리 높이 웨쳐보라. 그러면 일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옷을 입지 않은 알몸임을 발견하고는 황급하게 치부를 가리다보면 진실을 말한 사람과 맞대결한 겨를이 없어지게 되는 법이다.   특히 언론매체의 생명력의 원천은 진실에 있다. 대지의 여신가이아의아들인 안타이오스의 무진장한 힘의 원천이 대지에 있듯이 언론매체의 힘의 원천은 진실을 말하는데 있다. 언론매체가 이 강유력한 무기를 장악하여 초지일관하게 당과 나라와 백성들의 리익을 대변하여 진실한 말만 하여 나간다면 그 매체는 반드시 번영창성의 일로를 걷게 될것이다.   나는 해란강닷콤 사이트가 거짓을 배격하고 진실한 말한 하는 사이트로 운영되여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이 바로 사이트 개국을 맞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다.                     2013년 7월 19일 연길에서  * 본문은 "해란강닷콤"의 오픈축하문으로 기고한것이다.-편자주
68    나는 누구인가? - 문화신분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6437  추천:52  2009-04-05
☆연설문☆     여러분, 고대 그리스의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알라”는 말을 한적 있습니다.   철인,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는 전제 혹은 첫 출발점은 바로 자기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모두 철인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되고자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을 상대로 미래의 철인, 지혜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대부분은 가장 전형적인 이민문화의 속성을 갖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후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의 강연의 키워드 혹은 중심사상은 디아스포라입니다.   여러분, 그럼 먼저 오늘 강연의 키워드인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이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구약성서》 <신명기(申明記)>에 나오는 말로 고국 팔레스타인의 땅을 쫓겨난 유태인들의 민족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최근 20세기후반에 들어 여러 이유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부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전형적인 디아스포라입니다. 중국조선족 북방 시단의 원로시인 리삼월선생은 《접목》(1993)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접목의 아픔을 참고 먼 이웃 남의 뿌리에서 모지름을 쓰면서 자랐다   이곳 토질에 맞게 이곳 비에 맞춤하게 이곳 바람에 어울리게   잎을 돋치고 꽃을 피우고 이제는 접목한 자리에 든든한 테를 둘렀거니   큰바람도 두렵지 않고 한 마당 나무들과도 정이 들고 열매도 한 아름 안고…   그러나 허리를 잘려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   가끔 메아리로 되돌아오면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시인은 고국을 떠나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을 산 설고 물 설은 타향의 나무에 접목된 접수(椄穂)에 비유합니다. 이 어린 나뭇가지는 타향의 풍토와 기후에 적응해 튼튼하게 자라났고 다른 나무들과 어울려 숲을 이루었으나 “허리를 잘려 / 옮겨오던 그날의 칼 소리”만은 잊을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 조선족의 이민사와 생활사를, 우리민족의 정체성의 갈등을 뛰어난 은유와 상징기법으로 노래한 시라고 하겠다. 다만 우리를 중국조선족을 “남의 뿌리”에 접목한 접수(椄穂)하고 한 것은 어딘가 탐탁치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문화의 뿌리에다 남의 문화의 가지를 가져다 접목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달포 전 (2006.7.27), 한국 텔레비죤 KBS 1방송에서《이것이 인생이다》라는 프로를 눈물을 흘리면서 본적 있습니다.   스물일곱 살의 한 중성인의 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면서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저도 두 눈언저리가 축축하게 젖어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인(中性人)으로 태여나서 사춘기까지는 여자로 행세를 하였지만 그녀(그)의 《여자》 몸속에는 분명히 남성(男性)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그)는 여자 친구들로부터도, 남자 친구들로부터도 모두 요상한 괴물로 치부되고 왕따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피가 터지도록 물매를 맞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그녀(그)는 남자로 되고자 결심하며 그냥 일생을 치마를 두르고 여자로 살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가출을 단행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성(性)의 정체성을 상실한 삶은 죽음보다 무섭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남자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그녀(그)의 하루 일과는 불룩한 여자의 가슴을 남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천으로 납작해지도록 감싸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자의 강건한 몸뚱이와 울룩불룩한 근육을 갖고자 그녀(그)는 땀을 철철 흘리면서 거중을 하는가 하면, 남자로 전환하는 성전환수술을 하려고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때로는 끼니도 거르면서 악착 같이 돈을 모으는 한편 간이 다 잘 못 되여 낭종(嚢腫)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남성호르몬주사를 맞아가면서 남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투(死闘)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적자아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제도 될 수 없는 이다지 평범한 욕구의 실현이 그녀(그)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거는 일이였습니다.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였습니다.   정상적인 고추나 보리를 갖고 태여나서 이 세상에서 평범한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깊이깊이 감사를 드려야함을 어제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습니다.   한 평범한 남자와 여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도 일부 사람들은 이처럼 피눈물 나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거는 모험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인간의 아이덴티티-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광장에서 젊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기를 알라”고 역설했듯이 “자기를 알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여 참새처럼 말을 쨀쨀 하기 시작하면 부모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바로 “난 어디서 왔어?”가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철없는 아이들에게 흔히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병원에서 사 왔다” 등의 무책임한 대답을 합니다. 한 고지식한 한 아이는 자기를 “공원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 하니 정말로 다리 밑의 더러운 구석구석을 샅샅이 돌아보면서 자기가 누워있었을 만한 곳을 “이곳일까? 저곳일까?” 머릿속으로 거듭거듭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다가 적지 않은 아이들은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처럼 이른바 “성명위기(姓名危機)”에 직면하게 됩니다. 에릭슨은 원래는 독일인이였으며 에릭슨이라고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계부의 성을 따라 헤르버그(Herberger)라고 성을 고쳤답니다. 이 일을 거치면서 그는 자아인식에서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중에 그는 자기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의 공식적인 신분을 확정하게 됩니다. 즉 자기의 계부와의 동일성을 인정하게 되였던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린다면 “위대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며 그에 귀순하게 된 셈이지요. 이는 아동심리발전에서의 필연적인 경력이며 일종 권위에 대한 굴복인 것입니다.   어디 독일의 에릭슨뿐이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우리대학의 모 교수님의 양자도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에릭슨과 비슷한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네아이들이 자기네 부모들이 뒤에서 쉬쉬하면서 뒷공론하는 말들을 알아듣고는 모 교수의 양자를 업둥이라고 놀려댔던 것입니다. 모 교수님의 양자는 자기의 생부생모가 누구이고 어디서 사는가를 캐묻게 되었습니다. 모 교수님 부부는 할 수 없이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모 교수의 양자가 이 말을 듣고 찾아간 곳은 전기도 안 들어간 두메산골이였고 그곳에서 살고있는 생부생모는 숱한 자식들을 거느려 째지게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거퍼 한 달도 채 안 되여 모교수의 양자는 자기가 외독자로 모 교수부부 슬하에서 얼마나 사랑을 받고 호강을 하면서 자라왔는가를 깨닫게 되여 연길에 다시 돌아와 모 교수부부에게 울면서 사과하고 다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가족성원의 구성이 복잡한 재혼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정도부동하게 이런 “성명위기(姓名危機)”를 겪은 경력을 갖고 있을 겁니다. 특히 어머니를 따라 계부(継父)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성(姓)이 계부 그리고 계부의 자식들인 이모이부(異父異母)의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계부와 재혼한 뒤에 낳은 이부동모(異父同母)의 동생들과도 다른 데 대해 많은 정체성의 갈등을 겪게 되는 겁니다. 즉 가정 내에서의 성(姓)의 동일성을 잃음으로 하여 심각한 “성명위기(姓名危機)”에 빠지게 되는 법이지요. 이처럼 재혼가정에서 자라는 형제자매들은 동일성의 정도가 많고 적음에 따라 각 소 그룹들 간의 친소(親疎)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즉 부부가 재혼한 뒤에 낳은 동부동모(同父同母)의 형제자매 그룹은 이런 재혼가정에서 정체성의 통일을 가지게 가장 쉬우며 따라서 아버지가 전처와 살아서 낳은 자식들인 동부이모(同父異母)의 형님, 누나들보다는 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님과 누나들에서 동일성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이들과 더 친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머니가 같은 것이 아버지가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를 뿌리 깊은 모권제의 유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중요한 지위로부터 인기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인간은 이처럼 어머니 배속에서 태여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性)적이나 가정(家庭)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만 봉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밖에도 인종적, 민족적, 사회적인 아이덴티티 - 자아동일성문제에도 봉착하게 됩니다.   쉐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오셀로》의 동명주인공의 그 무서운 질투는 그의 내심속의 극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리해하지 않고서는 그 생성 원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니스 원로원의 원로인 브라반쇼우는 백전백승의 명장인 흑인장군 오셀로의 용감성과 지혜로운 용병술에 대해서는 탄복하지만 자기의 딸 데스니모나가 흑인인 오셀로를 사모하여 동거까지 하는 것은 결사 반대합니다. 리간쟁이 이아고가 데스디모나와 오셀로장군 그리고 오셀로장군의 부관이며 미남인 캐시오 사이에서 리간을 붙이고 나중에 오셀로가 데스디모나의 목을 조여 죽이도록 종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흑인장군 오셀로의 깊은 마음속의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분명하게 보아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증언하고 리론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한 첫 사람은 프란츠 파농(1925~1961)입니다. 파농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아인의 후예로서 중부 아메리카의 마르티니섬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국이였던 알제리를 지배했던 종주국-프랑스를 자기의 "조국"이라고 착각을 하고 프랑스가 독일 파쇼에 의해 강점당하자 비분을 못 이겨 친구들과 함께 의용군을 무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들어가 참전합니다. 그는 유명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지만 해방된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승전경축파티에서 오히려 프랑스 녀인들의 질시와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프랑스 여인들은 포로가 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병정들과는 춤을 추지 못해 발광하지만 아무리 자기들을 해방시켜준 은인이라도 "깜둥이"들과는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파농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하고 자문하게 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1997년부터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의 붙박이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면서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지단과 함께 프랑스에 우승의 월계관을 안겨주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서부 인디안출신의 축구명장 티에리 앙리도 "내 조국 프랑스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았습니까. 프랑스 축구국가대표팀의 주장 지네딘 지단이 2006년 7월 10일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박치기를 한 이유도 그가 알제리아계 이민출신의 디아스포라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마르코 마테리치가 경기도중에 여러 번이나 지단을 보고 "비렬한 테러리스트", "네 어미, 녀동생은 매춘부"등 험악한 언사로 모욕했다는  것은 그가 알제리아계 이민출신이라는 점이 타겟(target)이 되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은 지단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어 박치기를 하게 했고 그로 인해 지단은 레드카드를 받고 그라운드에서 쫓겨나면서 자신의 축구생애를 마무리했고 프랑스는 억울하게 이탈리아에게 무릎을 꿇고 말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백인종의 문화권속에서 살아가는 재구미 동포들은 오늘도 겪고 있습니다. 바나나처럼 속은 흰색으로 동화되었더라도 겉만은 여전히 노란색으로 남아 있는게 바로 재구미 동양인출신 디아스포라(Diaspora) 2세, 3세들입니다. 스톡홀름대학동양학연구소 소장인 조승복교수의 따님은 프랑스인인 어머니를 닮지 않고 동양인인 아버지를 꼭 빼어 닮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과년한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그렇게 기뻐한 그분의 말씀에서 우리는 구미문명권속에서 섞여 사는 우리 백의민족 디아스포라들의 고충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피부색이 노랗고 키가 작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전형적인 몽골인종의 얼굴을 가진 자기의 딸에게 오리지널 스웨덴 백인 남자친구가 생겼으니 어찌 부모로서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디아스포라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혼혈과 혼종과 인종적 아이덴티티 및 주체의 확립문제입니다. 서울말 “튀기” 그리고  연변사투리 “짜구배”가 환기시키듯이 혼혈인들은 “사이에 있는 것, 모호한 것, 합성된 것”이란 점에서 순혈주의에 기초한 배제의 정치학에 의해 인종적, 민족적 편견과 멸시를 받게 됩니다. 동시에 “나”이면서 “나”가 아니고, “너”이면서 “너”가 아닌 “튀기”의 이중성과 양가성은  인종적 아이덴티티 및 주체의 확립에 있어서 혼혈아들을 혼란에 빠트립니다. 몇 년 전, 스페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세서 태어난 “튀기”임을 고백하면서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며 눈물을 훔치던 여성 탤런트 이유진의 모습은 그런 푸닥거리의 힘이 얼마나 강고하며 뿌리 깊은가를 예증(龋証)하고도 남습니다. 이 비극적 코미디는 그녀가 경험하는 “굴욕”의 시작과 끝이 “국민 되기” 문제, 구체적으로 국민에서의 배제와 국민에로의 편입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선족 아버지와 한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의 한 은사님의 딸은 연변 밖의 외지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언제나 자기가 조선족임을 숨기고 우리말이 아닌 한어만 하면서 한족으로 행세하였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우리 문학을 가르치는 대단한 교수이고 조선족의 최고의 엘리트에 속했지만, 그 아버지가 속해있는 조선족공동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는 중국에서는 약세문화에 속하고 어머니가 속해있는 한족공동체가 영위하고 있는 문화는 중국에서 강세문화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속으로 자기 딸도 우리민족으로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민족에 대한 사랑을 운운하는가 하면서 은사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은사님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충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혼혈인들의 인생은 비극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미국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가난과 차별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미식축구계의 최우수선수로 우뚝 부상하여 한국인 어머니를 모시고 금년 4월에 금의환향한 자랑스러운 혼혈청년 하인즈 워드를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동양인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혼혈청년 하인즈 워드가 미국사회에서 이만한 인생의 성공을 이룩하는데 얼마만큼 피 나는 노력을 했겠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습니까.   체질인류학적으로 똑같은 몽골인종에 속하는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 속에 섞여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집단인 우리 중국조선족이나 재일동포들은 이런 인종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은 겪지 않게 된다고 해도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한 세기 가까이 일본에 살아오면서도 일본국적을 얻지 못하고 나그네 신세로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은 해마다 한 번씩 날인-손도장을 찍어야만 일본에서의 체류자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니 이런 민족적인 수모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지금도 재일동포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일본문화권에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 즉 국외자(局外者), 방외인(方外人)으로 살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우리 중국의 조선족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재일동포들과는 달리 중국의 국적을 갖고 있기에 헌법상으로는 중국경내의 모든 민족들과 동등한 평등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주체가 살고 있는 연변은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 주류문화에 상대해 변두리적인 위치에 처해있으며 따라서 우리도 중국에서도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10대 관계를 논함”이란 글에서 모택동이 지적한 것처럼 실질적인 불평등은 아직도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역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설사 우리가 중국에서 “인사이더”, 즉 당국자(当局者), 방내인(方内人)으로 처신을 하더라도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개가 쥐를 잡으러 나서듯이 싱거울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도를 넘는 과분한 정치참여의식을 자조적으로 말할 때 “중국의 정치는 북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속에는 정치의 중심인 북경에서나 해야 할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정치의 변두리에 처해 있는 연변조선족들이 너무 설친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말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중국에서의 자기의 정치적 위상에 대해 착각을 하고 싱거운 짓을 한 적이 많습니다.   우리는 거주국인 중국에서만 아니라 모국인 조선반도의 남과 북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사이더(insider)”가 아닌 “아웃사이더(outsider)”입니다. 마찬가지로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1989년, 저는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평양에 가서 반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연구학자로 체류한 적 있습니다. 비록 조상의 땅이고 아버지의 고향에 갔지만 그때 나의 신분은 중국학자였습니다. 조선 측에서도 나를 그렇게 대접해 주었습니다. 친척이나 친지를 만나보자고 해도 외국인에 대한 규정에 좇아 김일성종합대학 외사부에서 허락하고 배치해야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인대접을 받아 평양에서는 고위급관원들이나 타고 다니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금강산도 다녀오고 친척방문도 다니고, 외국인 전용상점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평양의 서민들은 엄두도 못내는 창광원의 수영장이나 사우나탕, 이발소에 가도 외국인 전용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도저히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 반년 동안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평양에서 생뚱 같이 외국인의 대접을 받아 호사를 하면서도 “나는 대관절 누구인가?”를 거듭거듭 묻게 되였습니다. 오히려 평양의 서민들처럼 초만원의 기차, 지하철, 버스나 공공목욕탕, 이발소 같은 공중교통이나 공중서비스시설에서 곡경을 치렀다면 아마도 이런 의문이 덜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광주 김씨의 원조(遠祖)는 신라의 천년사직을 세우고 지켜왔던 김알지 왕이고 족보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이 우리 광주김씨의 직계조상입니다. 경순왕이 천년 사직(社稷)을 통째로 신흥 왕조인 고려에 들어 바치고 그 다섯째 아들이 왕건으로부터 지금의 광주군에 지방관원으로 책봉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남한산성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근교의 광주군(広州郡)은 우리 광주 김씨의 발원지입니다. 하기에 서울은 말 그대로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장이지요. 1945년 8.15광복 후, 평양에서 살던 나의 아버지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하나밖에 없는 삼촌은 1952년 겨울 강원도 양구 최전방에서 조선인민군과의 대치전(対峙戦)에서 전사하여 지금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19호 묘역에 누워 계십니다. 그래서 서울 역시 저에게는 아주 친근한 고장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저는 역시 외국인으로 치부됩니다.   1993년 3.1절을 하루 앞둔 날,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공항안의 대기실에서 입국하는 줄에 서서 입국검사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날따라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좋이 반시간을 기다려서 려권을 검사원한테 들이밀었더니   “외국인은 저쪽으로 가세요.” 라고 간단히 대답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 사람을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저도 모르게 입국을 기다리는 한국인들의 줄에 끼여 들었음을 깨닫게 되였지요.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외국인들의 줄에 선다는 자체가 김포공항에서는 본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동물적인 귀소본능이 이렇게 시켰어도 제가 찾아온 조상의 땅은 분명히 나를 외국인으로 치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나는 멋 적게 벽안자염(碧眼紫髯)의 외국인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친 제일 뒤꼬리에 다시 뒤돌아가 서서 다시 기다리면서 다시 한번   “나는 대관절 누구인가?”를 묻게 되였습니다.   2004년, 저는 한국대전에 있는 배재대학에 객원교수로 나가게 되여 그쪽에 서류를 보낼 때, 제가 10여 년 전에 평양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반년 동안 체류했던 경력을 솔직히 이력서에 써넣었더니 한국으로부터 사증발급인증서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솔직함이 오히려 자신을 불편스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국 안기부 쪽에서 저의 신원을 다시 조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반 학기가 다 지나 가서야 한국에서 겨우 서류가 도착하여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이런 고충은 아마도 저희들 같은 디아스포라들만이 겪게 되는 고충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저 같은 디아스포라들의 처지를 생각할 때 마다 박쥐 우화를 련상하군 합니다.   조선에는 이런 박쥐 우화가 있습니다. 새들끼리 봉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를 마련했는데, 박쥐만이 불참했습니다. 봉황이 박쥐를 불러놓고 꾸짖자, 자기는 네발을 가진 길짐승이므로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기린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는데, 박쥐가 또 불참했습니다. 그래서 기린이 꾸짖으니, 자기는 날개가 있어서 길짐승과는 관계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후로 박쥐는 길짐승과 날짐승 모두에게 미움을 사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활동하게 되였다고 합니다. 우리 디아스포라들은 박쥐처럼 길짐승과 날짐승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1930년대 초반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들에서 발생했던 “민생단사건”에서 천명도 넘는 조선족혁명자들이 같은 항일대오 내의 동지들의 손에 무참하게 학살당했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을 보면 역시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항일유격대의 유능한 지휘관이였던 박두남이 억울하게 “민생단”으로 몰려 “왜놈도 죽일 것이고 공산당도 죽일 것”이라고 고민하면서 추운 산속에서 두 달 이상이나 헤매다가 발이 동상을 입어 썩어 들어가게 되여 어쩔 수 없이 일제에게 투항한 것이나, 역시 “민생단”으로 몰려 혁명대오를 이탈했지만 왜놈에게는 차마 투항할 수 없어 1년 동안이나 잠복해 있다가 산속에서 방황하다가 어쩔 수 없이 왜놈에게 투항한 중국공산당 동만 특위 조직부장 리상묵의 비참한 인생경력을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고민과 마음속의 깊은 상처를 우리는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문화혁명 중 연변의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반국폭란(叛国暴乱)”이라는 감투를 억지로 뒤집어씌우고 무력으로 탄압한 이른바 1967년의 “8.2, 8.4사건”과 그 후의 연변 각지에서 만연된 “조선특무색출사건”(연변지역에서만 해도 조선족들 속에서 천명을 훨씬 웃도는 이른바 “조선특무”들이 색출되였음) 역시 그 궁극적인원인은 중국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위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날짐승과 길짐승의 요소를 두루 겸비하고 박쥐는 림기응변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박쥐와 족제비”라는 이솝우화에서 박쥐는 새를 미워하는 족제비에 붙잡혔을 때는 자기는 새가 아닌 쥐라고 말해서 목숨을 구하고 쥐를 미워하는 족제비한테 붙잡혔을 때 자기는 쥐가 아니라 새라고 해서 목숨을 구합니다. 이처럼 박쥐는 포유류이면서 날아다니기 때문에 설화문학에서는 길짐승과 날짐승 사이에서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하는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동물로 등장합니다. 이런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띤 중국조선족의 특성은 중국조선족출신의 신 친일파 김문학 같은 인간들에게서 가장 전형적으로 표현되였습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구성원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량난의 난감한 처지에 빠지거나 안팎으로부터, 량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신앙과 기회주의가 뒤섞이고 방황과 추구가 부단히 교체되는 겁니다.   아무튼 박쥐같은 처지와 처신술은 중국조선족 만이 아닌 모국 밖의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우리 백의민족 디아스포라들의 숙명인지도 모르며 또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많은 비극이 빚어지는 지도 모릅니다.   객관에서 우리들을 보는 시각이 복잡하고 미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마음 역시 복잡하고 미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중국에서는 아주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중국의 한족이나 기타민족의 문화를 “타자화(他者化)” 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중국 국가대표팀과 조선이나 한국국가대표팀이 맞붙어 축구경기를 펼치게 되는 경우에 나는 에누리 없이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조선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군 합니다. 축구에 한해서만 내 마음속에서 중국국민으로서의 국민의식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백의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축구는 정치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필경 저는 중국에서 태여나서 중국에서 자라면서 교육을 받고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기에 내 마음속의 중국콤플렉스는 대단하다. 내 마음속의 이런 “중국 콤플렉스”는 조선,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 갔을 때는 유감없이 표현됩니다. 즉 중국의 국문만 벗어나오면 저는 엄연한 중국 조선족이 되여 중국의 립장에서 서서 다른 문화를 타자화(他者化) 합니다. 심지어 조선반도의 남과 북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문화에 대한 부정이나 폄하는 더욱 저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저는 진심으로 내가 살아가는 나라 중국의 번영창성을 바라고 중국이 세계 민족과 국가의 수림 속에서 우뚝 선 한 그루의 거목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저는 량가감정(兩家感情)을 가지고 모국과 중국을 경우에 따라서 부동하게 타자화(他者化) 하기도 하고 지극히 사랑하기도 합니다. 저는 마치도 남성과 녀성을 공유한 중성인(中性人)처럼 모국과 중국에 대한 진한 애정(愛情)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친일파 김문학이 연변을 주축으로 하는 중국조선족들을 갈대나 박쥐같은 속성을 지녔다고 지적한 것은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다만 김문학이네 형제들처럼 조상의 나라 모국도, 태여 나서 자란 중국도 모두 타자화(他者化) 하면서 일본극우세력에 편승하여 일제가 만들어낸 황국사관의 잣대로 이 량자의 문화를 재고 나아가서는 이 량자의 얼굴에 모두 똥칠을 하는 매국배족의 짓거리는 설사 목에 칼을 대고 협박해도 우리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문학처럼 자신은 그 어떤 민족공동체에도 귀속되지 않은 국제인이라고 표방하고 자기는 민족문화의 뿌리와는 완전히 단절된 존재라고 표명하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새로운 거주국 일본의 주류문화에 편승하여 일본극우세력의 대변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때로는 양쪽으로부터 모두 왕따를 당하고 의심을 받고 또 그래서 곤혹스럽고 방황은 하더러도 언제나 이러한 양가감정을 지니고 내가 태어나서 자라났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며 앞으로 내 뼈가 묻힐 것이고 또 저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살아 갈 중국 땅과 내 고향 연변 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모범적인 중국 국민으로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민족의 문화를 사랑하고 지키고, 조상의 뼈가 묻혀 있는 무궁화 삼천리의 나라에 대해서도 다함없는 사랑과 향수를 안고 진지한 민족의식과 민족감정을 간직하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 것입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기처럼 만연되어 있는 강세문화인  중국의 주류문화와 약세문화인 우리민족문화 중에서 저만이 아니라 저의 딸까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저의 작은 딸은 이 번 학기부터 북경민족대학교에서 한국 언어학 석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선택하라고 권고했고 본인도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습니다. 중국에 살면서 한국언어학을 전공해서 뭘 하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작은 딸은 절대 이 선택을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가 정년이 되어 대학교단에서 물러나더라도  저의 딸이 중국 대학의 교단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는 교수로 성장하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자승부업(子承父業)이라는 성구가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업을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하다가 채 못 하면 저의 딸이 이어서 중국에서 우리말과 우리문화를 지키면서 살아갈 겁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한국 마광수 교수의 《어느 외로운 날》이라는 시 한수가 떠오릅니다.   아,  꽃들은  얼마나  좋을까    자기 몸 안에  암술과  수술을  함께  갖고  있으니      저는 절대 한국의 하리수 같은 이들처럼 남성(男性)이나 녀성(女性) 한 쪽만을 살리기 위해 어느 쪽은 거세해버리는 그런 잔혹한 성전환수술 같은 량자택일(両者択一)의 의식전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달갑게 의식(意識)과 감정(感情)의 중성인(中性人)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마치도 한 그루에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는 자웅동주(雌雄同株)의 꽃나무 같은 존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는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중국 공민이면서 또한 백의민족의 후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중적인 문화신분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들이 날로 세계화가 되여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자신의 강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단적인 사례는 미국의 신임대통령 버락 ․ 오바마입니다. 그의 몸에는 흑인의 피와 흑인의 피가 섞여서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그는 두 가지 이상의 문화와 그런 문화을 갖고 있는 부동한 인간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리해할 수 있게 되였습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누구보다도 강인한 의지력과 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바마는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로서의 강세를 갖가지고 수억 미국인민들의 지지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오바마의 승리는 어쩌면 디아스포라들의 승리이고, 세계의 방방곡곡의 디아스포라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겨주는 확기적인 사건이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힘 내세오!   빨래줄 같은 긴 연설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년 2월 22일 연길에서  
67    [수필]추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거짓말(김관웅) 댓글:  조회:6210  추천:65  2009-01-04
추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거짓말 김관웅     중국에는 몇 천 년 전부터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춘추시대의 일이라고 한다. 공자님의 제자인 증자(曾子, 서기 521-490)의 아내가 먼 장터에 갈 때 철부지 아들 녀석이 따라나서니 “장에서 돌아오면 저 기르던 우리안의 돼지를  잡아주마”하고 얼렸다. 땅거미 질 무렵에 장에 갔던 증자의 아내가 귀가하자 아들 녀석은 돼지를 잡아달라고 졸라댔다. 증자가 칼을 잡고 돼지우리로 다가가 돼지를 잡으려고 하자 그 아내가 “여보, 한창 크는 돼지는 왜 잡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미쳤잖아요!?”라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증자가 “임자가 저 녀석한테 아침에 돌아와서 꼭 잡아준다고 하지 않았소?”라고 반문을 하자 아내는 “이 녀석이 하도 따라가겠다고 졸라대니 내가 어쩔 수 없어 거짓말을 한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증자는 “자식들 앞에서 부모로 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라고 꾸중하더니 기어이 그 돼지를 잡아서 돼지고기를 아들 녀석한테 삶아 먹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이솝우화》에도 거짓말을 해서면 절대 안 된다는 교훈적인 우화가 있다. 한 목동이 양떼를 몰고 들판에 나갔다가는 너무 심심하니 “늑대가 왔어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외침소리를 듣고 동네 어른들이 쟁기를 들고 달려왔으나 그것은 한낱 개구쟁이의 거짓말이였다. 이에 재미를 붙인 이 목동은 이튿날도 똑같이 이런 거짓말을 했지만 동네 어른들은 또 허둥지둥 쟁기를 들고 달려 왔다. 그들은 또 거짓말인줄 알고는 욕을 퍼부으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에는 정말로 흉악한 늑대가 덮쳐들었다. 다급해 난 목동이 “늑대가 왔어요! 늑대가 왔어요!……”라고 죽어라고 소리를 비명을 질렀지만 이 번에는 동네 어른들이 또 거짓말을 하는 줄로 여기고 달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목동은 늑대에게 물려죽었다고 한다.   옛날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우화 같은 허구적인 이야기에만이 아니라 실제생활에서도 추한 거짓말쟁이들은 많고도 많았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는 야심가 림표였다. 림표는 사석에서는 숫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을 성사시키지 못 한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문혁”을 전후하여 모택동의 환심을 사기 위해 림표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던가. 모택동을 “수천 년 만에 어쩌다가 나타난 천재”라고 치살리고, “모택동사상을 맑스-레닌주의의 최고봉”이라고 올려 추고, “모주석의 말씀은 한마디가 만 마디를 필적한다”고 하면서 별별 거짓말을 다했지만 종당에는 정변을 일으켜 모택동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음모가 발각되여 비행기를 타고 황망히 도주하다가 몽고 원두얼한의 황막한 사막에 추락하여 불에 그슬린 개 마냥 추한 죽음을 죽었다.   그러나 거짓말이 다 추한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거짓말이 가장 착하고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말이 될 수도 있다.   병원에서 착한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하게 된다. 소중한 사람들이 중한 병이거나 불치의 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흔히 그 진상을 알려주지 않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런 거짓말은 추한 거짓말이 아니라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도 거짓말은 경우에 따라 착한 말이지만 군신간의 관계 같은 엄숙한 인간관계에서도 거짓말은 때로는 아주 착하고 충성스럽고 아름다운 거짓말일 수 있다.   고려조 26대왕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은 시를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임금이였다. 그가 임금이 되기 위해 원나라 대도에서 고려로 돌아올 때 너무도 사랑하는 녀인을 두고 와야 했다. 그는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오는 도중에도 왕은 그녀를 잊을 수 없어 자기를 보필하는 문신(文臣) 리제현(李齊賢, 1287-1367)을 시켜 그 녀인을 가보게 하였다. 리제현이 가 보니 그녀는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녀가 힘겹게 시 한 수를 써서 임금께 전해 달라고 하였다. 떠나며 보내신 연꽃 한 송이 처음엔 너무도 붉었습니다. 줄기를 떠난 지 며칠도 못 되어 초췌함이 내 모습과 한가지예요. 贈送蓮花片, 初來的的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그 녀인이 충선왕에게 답장으로 쓴 이 시의 뜻을 알기 쉽게 다시 풀이를 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도 선연히 붉던 연꽃이 제 줄기를 떠난 지 고작 며칠 만에 초췌하게 시들어 버렸습니다. 내가 당신의 품안에 있을 땐 처음 주신 련꽃처럼 선연히 고왔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시니 나는 이제 저 꽃처럼 참혹하게 야위어 갑니다……   리제현은 돌아와 거짓으로 아뢰였다.   “가 보니 그 녀인은 술집에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어 찾았으나 못 만나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충선왕은 분하게 여겨 침을 뱉고 그녀를 잊었다. 이듬해 충선왕의 생일에 리제현이 축수의 잔을 올리고는 뜰아래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두사죄를 하였다. 왕이 무슨 일이지 묻자 이제현은 앞의 시를 올리면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 녀자의 그 시를 보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날 만약 내가 이 시를 보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갔을 것이오. 그대가 나를 사랑한 까닭에 거짓으로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 충성이 간절하다 하겠소.”라고 하였다.   리제현이 충선왕한테 한 거짓말은 참된 군신(君臣)관계에 대한 미담으로 조선조시대 성현(成伭)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도 기록되여 있다.    얼마 전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 각국의 매체들을 들썽거리게 한 멜라민을 첨가한 “유독분유사건”까지 겹쳐서 요즘은 “이 세상에서 엄마를 내놓고는 다 가짜”라는 말이 항간에 류행할 정도로 진실과 진짜가 증발해가고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동서고금의 추한 거짓말과 아름다운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 음미해보군 한다.    이 세상에 아무리 거짓말이 란무(亂舞)하더라도 추한 거짓말은 하지 말고 참된 신하 리제현처럼 아름다운 거짓말만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2008년 11월 18일 연길에서       
66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 (김관웅) 댓글:  조회:5524  추천:68  2009-01-03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전쟁에서 전진과 후퇴는 흔히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전진을 위한 후퇴가 있고 후퇴를 위한 전진이 있을 수 있다. 성공적인 후퇴는 전진을 내포하고 또 그래서 전진을 위한 후퇴이다. 그러나 졸렬한 후퇴는 후퇴만을 위한 후퇴로서 전진이 내포되지 않은 후퇴이다.    전진을 위한 후퇴, 전진을 내포한 후퇴의 전례는 많고도 많지만 그 가장 전형적 사례가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의 2만 5천리 장정(長征)1)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11개 성을 지나면서 무수한 전투를 치르고 설산과 초지를 지나면서 2만 5천리를 후퇴하였기에 중국공산당은 천하를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방적인 후퇴는 오히려 자신을 죽음에로 몰아간다. 이자성(李自成)2) 농민봉기군의 패퇴가 그 단적인 실례이다. 오삼계(吳三桂, 1612-1678)3)가 산해관을 열어 준 이자성의 농민봉기군은 만족기병에 의해 한번 싸움에서 진 뒤로는 그냥 후퇴만 하다가 나중에는 얻었던 천하도 잃고 말았지 않았던가.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은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사는 일상생활과 대인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중국 청나라시기의 명재상이였던 장영(張英, 1637-1708)4)의 일화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영의 고향은 안휘성 동성(桐城)이였다. 그의 고향 동성 상부(相府)와 이웃집 사이에는 아주 비좁은 공지가 길게 뻗어 있었다. 이웃집에서 오랜 담장을 고쳐 쌓을 장영네 집쪽으로 몇 자 가량 더 내 쌓았다. 이 일로 두 이웃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다. 장영이네 집사람들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고 있는 장영의 세력을 등대여 이웃집을 혼내주려고 장영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장영의 회답 편지에 다음의 시구가 적혀 있었다.  천리 밖에서 편지를 띄운 건 애오라지 담장 때문이웃집에 석자쯤 양보해도 무방하잖겠나                 만리장성은 지금도 여전히 서 있으나                       오늘날 진시황은 어디에 있단 말이요?                   千里修書只爲墻, 讓他三尺亦無妨.萬里長城今猶在, 如今何有秦始皇?        장영네 집 식구들은 이 시를 보고는 느끼는 바가 많아서 자기네 집 담장을 수선할 때는 장영의 말대로 이웃집에 양보하여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를 본 이웃집에서도 자기의 과욕을 뉘우치고 쌓았던 담장을 허물어서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 그리하여 장영네 집과 이웃집 사이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니기 편리한 여섯 자  남짓한  행길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이 행길을 “육척항(六尺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야말로 “한 걸음 물러서면 세상이 끝없이 넓어진다”는 고훈(古訓)이 딱 들어맞는 사례이다.   이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간 미담은 서양에도 있다. 한번은 독일의 대작가 괴테(1749-1832)가 좁은 길을 걷고 있다가 자기와 늘 의견 상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 문인을 만났다. 이 문인은 자기의 논적인 괴테를 보더니만 대뜸 얼굴이 돼지 간처럼 지지벌개져서 “나는 바보한테는 길을 피할 줄 모른다!”고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다. 이에 괴테는 오히려 여유 있게 웃으면서 “나는 바보에게 길을 피해 줄줄 안다!”고 응수를 하면서 길 한쪽에 비켜서서 그 문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한 걸음 물러 설줄 아는 괴테의 일화도 줄곧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길을 피하는 일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로 자기와 상대도 안 되는 인간하고 드잡이를 한다거나 심지어 결투까지 벌였다면 괴테의 품위에 많은 손상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퇴와 양보가 만능인 것은 아니다. 비록 우화이기는 하지만 동곽 선생처럼 늑대에게 그냥 양보만 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자기를 죽음에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를테면 19세기 초반의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푸슈킨(1799-1837)을 극도로 미워한 적수들은 그의 아내 나탈리아와 프랑스인인 근위사관 G.단테스가의 프랑스의 건달꾼  놀아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푸슈킨은 자기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걸었고 바로 결투에서 그는 가슴에  그는 총탄을 맞고 2일 후에 죽었다. 만일 푸슈킨의 건달꾼 단테스앞에서 비실비실 뒷걸음질을 쳤더라면 인격적 품위는 아마도 일락천장이 되었을 것이다. 푸슈킨은 비록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사람답게 살려는 패기를 세인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후퇴해야 일과 후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임을 또한 잘 알아야 한다. 이는 사회상의 인간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집안에서의 부부 관계를 포함한 모든 대인관계에 통하는 일반적인 삶의 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장을 둘러 싼 자질구레한 길을 비켜주는 것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거나 한번 양보하면 살아가는 공간이 끝없이 넓어지고 살아가는데 언제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사람들은 “꽃나무를 많이 심고 가시나무를 적게 심으라”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큰 시비나 큰 원칙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다가가는 필연적으로 인격적 품위를 잃게 됨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인간은 골기가 없는 무골충이 되고 말며 늘 남들에게 죽어 대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또 “나귀가 순해빠지면 누구나 타려고 하고 사람이 순해빠지기만 하면 남들이 짓밟는다”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경구와 속담들은 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모 그 어느 특정한 경우를 말한 상대적인 진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을 잘 터득하는 것이 마음 편안하게도 살며 또한 사람답게도 살 수 있는 길임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8년 11월 17일 연길에서 
65    연변서 이룰수 있는 변두리의 찬란함 댓글:  조회:5446  추천:109  2008-05-26
연변서 이룰수 있는 변두리의 찬란함-“윤동주문학상 백일장” 수상식 축사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저는 연변대학 한국학학원의 교수 김관웅입니다. “제9회 윤동주문학상 백일장 시상식” 주최측의 부탁을 받고 축사를 드리게 된 것은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윤동주님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 한민족의 시단에서 가장 독자들의 사랑은 받는 걸출한 민족시인의 한 분입니다. 윤동주님도 저 자신이나 여기 앉아계신 학생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즉 조선반도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에 건너온 조선이민들의 후예입니다. 다 아시다 시피 윤동주님은 우리 연변의 룡정 명동촌에서 출생하셨고 윤동주님의 묘소도 고향 룡정 동산 교회공동묘지에 있습니다. 윤동주님은 명실공히 우리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입니다. 저는 윤동주님 같은 한 고향 대선배를 모시고 있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년 전개된 윤동주님의 시창작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민족적 정체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줍니다.〈서시〉,〈자화상〉,〈또 다른 고향〉,〈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입니다. 윤동주님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민족적인 량지와 량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서”, “죽을 때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윤동주님을 가장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암흑기의 가장 걸출한 민족시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분명히 윤동주님이 살았던 그 암흑한 시대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국조선족은 오늘날 커다란 시련과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국외 로무송출과 국내 대도시진출로 인한 민족의 이동으로 우리연변의 조선족인구가 나날이 감소되고 조선족학교가 줄어들고 조선족마을이 줄어들고 한족학교로 가는 조선족학생들이 늘어남으로 하여 우리글과 말을 잃어가고 있는 후세들이 많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연변의 조선족 민족교육을 비롯한 조선족문화는 말 그대로 “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로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격변기에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이 거의 9회에 걸쳐서 성공리에 치러졌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천이 마르지 않으면 강줄기는 마르지 않는 법입니다. 뿌리가 죽지 않으면 나무줄기와 가지는 죽지 않는 법입니다. 강의 원천이 깊은 산속에 있고 나무의 뿌리가 깊은 땅속에 있듯이 중국조선족문화의 원천은 연변을 위수로 한 동북의 여러 산재지역의 시골과 소도시들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중소학교 교육은 중국조선족문화의 원천이요, 중국조선족문화의 뿌리입니다. 중국조선족의 중소학교 교육에서도 그 핵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교육에 있습니다. 중소학교의 교육이 살면 중국조선족문화의 줄기와 가지도 자연히 싱싱하게 살아나게 되는 법입니다. 저는 9회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은 우리 중국조선족 민족교육에 있어서 말 그대로 가물에 단비 같은 존재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10년 가까운 동안에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은 윤동주님의 민족애와 민족정신을 따라 배우고 우리 모두의 령혼을 정화시키고 아울러 우리 민족의 희망인 중학생들로 하여금 윤동주님을 본보기로 삼아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우리글과 말과 글을 지키고 민족의 얼을 지키고 빛내여 가도록 인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왔습니다.    윤동주님은 또 중국조선족의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또 용기와 희망과 꿈을 심어주는 분이기도 합니다. 북간도의 산간 오지에서 명동촌에서 태여나서 자란 윤동주님의 시비가 한국의 명문대인 연세대 교정에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저 같은 이순(耳順)의 나이에 접어드는 늙은 사람도 갑자기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연세대의 초청으로 연세대를 방문한  “윤동주문학상 백일장”의 젊은 당선자들이 윤동주님의 시비를 보고는 아마도 저보다는 열배이상으로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문화에서나 중국문화에서나 모두 변두리와 경계에서 살고있는 디아스포라입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디아스포라로 사는 과정을 통하여 수많은 내면적 갈등을 축적해왔으며 그것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면적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치고 바이링규알(bilingual), 즉 두 개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국조선족치고 피해의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구성원들은 항상 자신이 지켜야 할 내면적인 규범과 삶의 외부적 환경 사이의 극심한 대립이나 모순과 타협하기 어려운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매개 구성원들은 이러한 갈등을 어려서부터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신분적으로 체험하면서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북간도라는 이 디아스포라에서 살던 윤동주의 유년시절, 청년시절의 삶 자체가 이러한 갈등의 소산이였던 것입니다. 윤동주님은 자신의 이러한 내심적인 갈등을 훌륭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력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시킴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동시에 특정한 사회, 문화적 상황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한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던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인 유대인들속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배출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리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로부터 칼 맑스, 지그문트 프로이드,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춈스키나, 스필버그에 이르기까지 이들 유태민족에게서만 집약적으로 천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바로 이네들의 특수한 디아스포라적인 체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언제나 변두리에서 살아오면서도 언제나 변두리의 찬란함을 만방에 과시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변두리를 언제나 중심으로 바꾸어 놓곤 하였습니다.   우리 연변도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의 땅입니다. 이 땅에서 윤동주님이 태여 나고 송몽규 같은 분이나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이 배출되게 된 것 역시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먼 옛날로 소급해 올라가면 우리가 살고 있는 두만강 류역은 비록 동북아세아에서의 만황지지(蠻荒之地)였지만 중국을 270여 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청나라 황실 조상의 발상지이고, 조선반도를 500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조선조 왕실 조상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천자가 나시고 국왕이 나신 고장입니다. 우리 연변 땅은 말 그대로 개천에서 룡이 나온 “흥룡지지(興龍之地)”입니다.       학생 여러분,  우리 연변의 미래, 중국조선족의 미래는 바로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은 비록 산간 오지이고 변두리인 연변 땅에 살지만 기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큰 꿈을 이룩하기 위해 하여 백배의 노력을 경주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기필코 윤동주님처럼 변두리의 찬란함을 세상에 과시하는 그런 거룩한 공업(功業)을 이룩하시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5월 25일 연길에서
64    민족과 문화 (김관웅) 댓글:  조회:5466  추천:101  2008-04-18
[강연고]민족과 문화김관웅 연변대학 교수모국의 동포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말에는 운명(運命)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중국어에서는 그 순서가 달라서 명운(命運)이라고 합니다. 운명이든지 명운이든지 모두 명(命)과 운(運)이라는 두 가지 뜻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그 뜻은 같습니다. 선천적으로 정해진  명(命)과 후천적으로 차례지거나 쟁취하여 얻어지는 운(運)이라는 두 요소가 합쳐져서 운명의 뜻이 됩니다. 아무튼 인간에게는 누구에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명(命)이 있습니다. 그 명(命)은 하늘이 정했다거나 혹은 선천적으로 정해진 존재라고 해서 사람들은 흔히 명(命)을 천명(天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남자나 여자라는 성적인 정체성도 천명이요, 조선민족이요 일본민족이요 하는 민족적 정체성도 역시 천명(天命)입이다. 한 인간이 부정모혈(父精母血)이 합쳐서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어져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달 동안 자라다가 자기의 주체적 선택이 없이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면서 동시에 조선민족 혹은 중국민족, 일본민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민족적 신분은 한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타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석학이신 이어령 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더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한 인간과 자기가 속한 민족과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입니다. 손오공이 한번 곤두박질하면 10만 8천리를 날아가도 여래불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듯이 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이질을 쳐도 영원히 자기가 만난 숙명적인 민족과의 그 억만 겁의 인연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입니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아무리 가난하고 못생겼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어머니가 아니라면서 못 본 체 할 수 없듯이,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이 아무리 두메벽촌이라고 해도 자기의 고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듯이, 자기가 속한 민족이 크고 강한 민족이 아니라 약소한 민족이라고 해서 자기 민족을 배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민족이란 이렇게 소중한 것이기에 우리민족의 선열들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 민족과 나라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마저 초개같이 던졌던 것입니다.   옛날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박제상이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라고  한 것은 애족애국의 충정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박제상은 왜왕이 높은 벼슬과 많은 제물을 준다는 것도 물리치고 달게 죽음을 맞았으니 그것은 『차라리 내 나라의 귀신이 되리라』함에서였다.   안중근 의사(義士)가 할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총으로 사살하고 여순 감옥에서 단두대에 오른 것은 민족의 존엄을 수호하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자기의 소원을 세 번을 물어도 모두『대한의 독립』이라고 하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 서슴없이 3.8선을 건넌 것은 분단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민족은 바로 이런 선열들의 애국충정에 떠받들려서 단군성조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신 이래 반만년의 역사의 대장정을 하여오면서 지금도 세계민족의 수풀 속에서 한 그루의 거목으로 우뚝 서있습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모국에서는 먹고 살아갈 수가 없어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들입니다. 마치도 집이 너무 가난하여 내버려진 기아처럼 중국 땅에서 150년 동안이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언제 한 번도 못난 모국이 못났다고, 조상이 못나서 고생을 한다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바로 우리 연변 땅에서 벌여졌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이 독립군의 주요한 멤버이었습니다. 북간도의 산과 언덕마다에는 산골짜기마다에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고 북간도의 산골짜기마다에는 애국지사들의 선혈이 붉게 물어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상님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붉은 피를 흘려 싸우고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들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몸에도 애국애족의 붉은 피가 맥맥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단군성조가 물으신다면 저는 서슴치 않고  『저의 소원은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단군성조님의 자손으로 살고 싶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다음 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이 몸이 죽어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배달의 얼을 간직하고 살고 싶습니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내 육신이 살아있고 내 정신 무지러지지 않는 한 중국에서 중국의 우수한 국민으로서 우리 민족문화를 지키면서 올곧게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동포여러분,저 김관웅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는 과거의 60평생을 이 소원을 위해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이 소원을 이룩하려고 살 것입니다. 어려서 모국을 떠나 이국타향에서 60평생을 살아오지만 단군성조님의 자손으로 한민족의 얼을 간직하고 살다가 죽는 일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우리 200만 중국조선족동포들과 함께 이렇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조상들이 개척한 중국 동북 땅에서 중국의 우수한 국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습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집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먼 장래의 일이요 현실의 일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세계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거세차게 일어나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짙은 피를 함께 나누고 유구한 역사를 공유한 민족공동체는 일시적인 정치나 경제적 사정에 의해 산생된 이데올로기나 제도보다도 더 상대적인 불변성을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정치적 사정에서 70여년이나 합쳐졌던 매머드 같이 거대했던 CCCP - 소베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한 세기 이상이나 인류사회를 석권했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제도는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혈통의 조국을 부정하고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지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과 단결과 국제적 연대성만을 주장하던 인터내셔널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 경제도 변하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라는 김구 선생이  60년 전의 지론은 오늘날의 세계 인류사회의 현실이 진리임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일찍 어느 민족 안에서나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로  여러 파벌로 동족상잔의 피비린 싸움을 하지 않은 없거니와 세월이 흘러가면 그것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중국에는 수천년 동안 내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않았고, 200백년의 역사 밖에 안 되는 미국에서도 동족 간의 남북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동족상잔의 혈투는 잠간이었고 더 긴 것은 동족간의 사랑과 화해였습니다. 그것은 민족은 필경 비바람이 지나간 뒤의 나무와 풀의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본다면 한반도에서의 남과 북 사이에 있었던 동족상잔의 전쟁과 반목, 질시, 대결이라는 것도 결국은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우리들은 요즘 남북의 정상회담을 통한 화해와 평화의 무드에서 보아낼 수 있잖습니까!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합니다. 그러나 혈통과 문화로 뭉쳐진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운명의 유대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위에 남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은  헤어진지가 너무 오랍니다. 헤어진지가 오래면 합쳐지는 법입니다. 남과 북이 민족의 대단합을 이룩하고 국가의 통일을 실현하는 날이면 우리민족의 힘은 더 커지고 더욱 당당하게 세계 민족의  수림 속에서 한그루의 거목으로 우뚝 서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해외동포들은 삼천리금수강산이 보다 강대해지고 번영창성해지기를 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동포 여러분,  오늘날의 인류사회를 “세계주의 와 민족주의”라는 이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연주가가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이 오케스트라에서 자기 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하듯이 한 민족도 이 세계에서 자기 민족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입니다. 이것은 제가 믿고 있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민족과 국가의 통일이 한반도에서 실현되고 나아가서는 아세아의 평화,  세계의 평화가 실현을 위해 우리민족이 힘을 보탤 수 있기를 원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단군성조의 이상이 바로 이것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중국조성족의 지성인들은 연변조선족문화의 문지기, 파수꾼이 되기를 원했거니와 그것은 우리민족의 문화를 지키는 일에서 존귀비천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 200백만 중국조선족은 비록 중국 땅에서 150년 동안이나 살아오면서도 단군성조의 자손으로 살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꾸리고 신문사 , 방송국, 잡지사를 운영하면서 한 세기 반 동안이나 한민족의 말과 글을 비롯한 우리민족의 문화를 고스란히 지켜왔습니다. 문화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무력보다 강합니다.    한때는 중국에 군림하면서 천하를 호령하였던 몽골족이나 여진족은 모두 중국문화에 동화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네들의 민족문화가 빈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호메트와 칭키스칸의 대조를 통해 이 점을  분명히 보아낼 수 있습니다. 마호메트는 젊어서는 돈 많은 미망인의 머슴으로 지내다가 그녀와 결혼하였는데 문맹이었습니다. 40세에 유태인과 기독교인을 만나서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고, 천지청조의 유일신 알라를 알게 되였습니다. 그로부터 힌트를 받아 자신을 알라의 사도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KORAN)》《수나(SUNNA)》는 마호메트가 스스로 편찬한 것입니다.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는 온 유럽북부와 북부아프리카, 인도 국경까지 제압하였고, 오늘에는 중앙아시아는 물론 인도북부, 인도네시아, 말레시아까지 확고한 자리를 잡았습니다. 칭키스칸은 인류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웠으나 오늘에는 위축되어 가련한 그 흔적만 조금 남았습니다. 정신문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택동은 칭키스칸을 영웅이라고 인정하면서 “활 당겨 수리개밖에 쏠 줄 몰랐다(只識彎弓射大雕)”고 평가를 했었습니다. 모호메트와 칭키스칸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의식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정신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혼불입니다. 민족문화는 민족의 얼입니다.   한 민족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입니다. 민족문화가 없는 민족은 얼이 없는 인간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무력이 강하고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민족문화가 빈약한 민족은 힘이 없는 민족입니다. 민족문화가 강하고 뿌리 깊어야만 강한 민족으로 될 수 있습니다. 민족문화가 살아야만 그 민족이 사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지금 중국조선족에게 위협으로 닥쳐오는 것은 무력의 약화도, 경제력의 결핍도 아닙니다. 지금 중국조선족에게 위협으로 닥쳐오는 것은 문화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세찬 도시화, 세계화의 바람 앞에서, 이민족의 망망대해 속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가정이 흔들리고, 집거지가 흔들리고 따라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교육, 우리의 문화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중국 조선족사회가 해체의 위기를 맞는다면 동북아지역은 귀한 문화자산을 잃게 될 것이며, 또한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21세기 역사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중국의 조선족 사회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한반도와 중국의 변연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 조선족문화는 한반도문화의 뿌리에 중국문화의 가지를 접목하여 새로 만들러진 이중문화 구조를 가진 독특한 민족공동체로서 한중 관계의 발전에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발전을 기반으로 하여 조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을 국가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중국에서도 조선족공동체는 앞으로 전개될 21세기 동북아 국제협력시대의 중요한 매개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아스포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새로운 역사시기에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능이고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동안 지켜온 중국조선족 특유의 문화를 계승 ․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것은 비단 중국조선족 자신의 일일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민족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성원하는 것은 여기 계시는 분들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포 여러분,  지금 중국조선족문화건설은 잠시 어려움에 봉착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조선족문화는 반만년의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 배달민족의 문화의 뿌리에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문명의 본거지인 중국문화라는 거목에서 가지를 잘라다가 접목시켜 만들어진 특수한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조선족문화건설의 미래는 그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습니다.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독특한 자기 문화를 지켜나가면서 당당하게 중국 땅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조선조의 건국서사시《용비어천가》중의 시구를 빌어서 저의 웅변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도 좋고 열매도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냇물에 이르러 바다로 가나니(根深之木,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賁其實.源遠之水, 旱亦不竭, 流斯爲川, 于海必達.) 감사합니다.                            2007년 10월 18일 중국 연길에서  
63    령수인물 점수 매기기 댓글:  조회:5834  추천:108  2007-11-26
령수인물 점수 매기기김관웅  지난 11월 13일, 서울에서 경희대학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있는 이승래교수의 안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리승만박사의 저택 리화장(梨花莊)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화장은 리승만 대통령이 1945년 10월에 미국에서 환국(還國)한 후 서울의 한 독지가가 마련해준 저택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리승만 대통령은  줄곧 리화장에서 살았고,  1960년 4.19이후 하야한 후에도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다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1970년으로부터 리승만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녀사가 양아들, 양며느리와 줄곧 이 곳에서 살다가 타계했다고 한다.   그날 우리를 맞아준 이는 다름 아닌 22년 동안이나 리승만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녀사를 리화장에서 모시면서 살아왔다는 리승만 대통령의 자부(子婦) 조혜자 녀사였다.   조혜자 녀사는 칠십을 넘기신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젊어서 이화녀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한때는 신문사의 재외기자로 활약했었고, 유엔 사회고문관으로 임직한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지식녀성이였다.   1988년 이래 리화장을 개방하였다고는 하나 우리가 찾아간 그날 리화장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하였다. 리승만 대통령은 지금 전람관마저 갖고있지 못하고 그의 일생의 파란만장한 경력은 리화장안에 간소하게 전시되여 있었다. 나는 리화장을 둘러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만리장성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으나 그 만리장성을 쌓게 했던 지고무상한 권력을 가졌던 진시황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조혜자 녀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전시장과 리화장 내부의 처처소소를 자세히 돌아보고 나서 리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이였다는 아늑한 방안에서 우리 일행은 조혜자와 녀사와 마주앉았다.   조혜자녀사의 동기를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리승만 대통령이 권좌에 앉아있을 때에 인연을 맺은 것이 아니라 리승만 대통령이 권자에서 물러난 후에 인연을 맺고 남편과 함께 리승만 대통령 부부를 오래 동안 모셔온 분이였다. 조혜자 녀사의 말속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한 한국사회의 홀대(忽待)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948년 5월부터 1960년 4월까지 만 12년 동안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다음 5년 2개월간의 하와이 망명생활로 생을 마감한 이승만에 대해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남아있는 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언제나 그의 이름 앞에 “독재자”란 딱지가 붙어 다녔고 “부정선거”와 “친일파의 비호자”란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새로운 언어로 평하되여 왔다. “친미주의자” 혹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 “미군정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권력욕의 화신”으로, “분단을 획책한 주범”에서 “김구암살의 배후 조종자” 등으로 한국사회에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적대적이였다.   그러나 그가 73살의 고령에 대통령의 보좌에 오르기까지 적어도 거의 반세가 가까이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제국의와 용감하게 싸워온 항일지사임을 부정할 사람은 또 크게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정의 초대 대통령이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를 재건한 초대 대통령인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항일지사의 경력과 만년의 실정, 리승만은 분명히 공(功)과 과(過)를 다 갖고 있는 령수인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관론정(盖棺論定)이라고 하지만 1965년 리승만 대통령이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후로 이미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리승만에 대한 공정한 점수매기기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리화장을 떠나면서 나는 차안에서 이런 생각을 굴렸다.   령수인물들을 10점제로 점수를 매긴다면 워싱톤 같은 정치령수는 권좌에 연연하지 않고 격류용퇴(激流勇退)를 했기에 공(功)만 살아있고 과(過)는 별로 없으니 정치령수로서는 최우수생이라고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한 불후의 공을 세웠지만 문화혁명 등 만년의 실정(失政)으로 만점 10점은 맞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적잖은 사람들은 모택동은 공(功) 7, 과(過) 3라고 점수를 매기고 있다. 중국어로는 “삼칠개(三七開)”라고 한다. 100점제로 한다면 70점이라는 말이다.   공(功)과 과(過)가 각각 반이라면 정치수령으로서는 낙제생이다. 공(功) 6, 과(過) 4라면 급제생이다. 리승만의 공(功)과 과(過)중에서 공(功)은 얼마를 차지하고 과(過)는 얼마를 차지할까? 그러면 리승만은 몇 점을 맞을 수 있을까? 급제생일까? 락제생일까?   나 같은 방외인이 언감생심 리승만 같은 령수인물에게 점수를 매길 수 없지만, 또 매겼다고 해서 어느 누가 수긍할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앞으로는 누군가가 나서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점수를 매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11월 18일 연길에서
62    목정(木精), 곡주(谷酒) 그리고 문학의 진품(眞品) 댓글:  조회:5432  추천:101  2007-11-21
목정(木精), 곡주(谷酒) 그리고 문학의 진품(眞品) 김관웅 그저께 저녁, 백산호텔에서 리경자 씨의 자서전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의 출간식을 하니 와 주십사 하는 전화 통지를 받았다.    아마추어에 가까운 문학신인이 자서전을 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관절 무슨 자서전이길래 출간식까지 하는가? 이런 생각을 갖고 어제 오전 출간식을 하는 식장에 찾아갔다. 나는 술도 몇잔 얻어 마시고 책도 한 권을 얻어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밤도와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토밥으로 만든 알콜은 목정(木精)이라고 하고 알곡으로 빚은 술은 곡주(谷酒)라고 한다. 목정을 마시다가는 몸이 크게 상하거나 심지어 눈이 멀 수도 있다. 그러나 곡주는 설사 과음을 했더라도 뒤가 깨끗하다. 재료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잘 알 수 있다.   술을 빚는 것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러하다.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는 재료는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재료는 작자 자신의 진실하고도 절실한 생활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뼈와 살을 깎는 생활체험과 처절한 정감의 루적을 재료로 하지 않은 문학작품은 마치도 토밥으로 만들어낸 목정과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무병신음(無病呻吟)의 가짜 문학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자신의 뼈와 살을 깎는 생활체험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문학작품은 진품(眞品)으로 될 확률이 높다. 알곡으로 빚은 곡주와 같아서 읽을수록 그윽한 맛이나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오래도록 심취하게 된다.         리경자 씨의 자서전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는 토밥으로 만든 목정이 아니라 알곡으로 빚은 곡주라고 평가를 하고 싶다.    리경자 씨의 자서전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에서 그려진 그 사건 자체의 진실성과 표현된 정감의 진실성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서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진실성이다. 통속가요에서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진실인거야》라고 했듯이, 이 노래말을 패러디한다면 《문학은 장난이 아니야, 문학은 장난이 아니야, 진실인거야》라고 할 수 있다. 자조적인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자서전의 생명력은 진실성에 있다.  아무리 미사려구로 점철된 미문(美文)이라도 진실성이 증발된 수필이나 자서전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리경자 씨의 자서전《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는 결코 이런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니다.    그리고 리경자 씨의 자서전은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는 잘 나가는 사람의 제 잘났다는 소리를 한 그런 자아홍보, 자아포장의 상투적인 자서전이 아니였다. 공자님이《시가이원(詩可以怨)》이라고 했듯이 한 녀인의 내심 속의 고독, 고민, 아픔, 한, 소망, 추구와 함께 자기 남편이나 가족성원의 치부까지 진실하게 드러낸 자서전이였다. 그리고 책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한 섬약한 녀인이 역경 속에서 굳세게 살아오면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간, 눈물겹게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역어진 아름다운 자서전이였다.   남편이 없는 어려운 상황하에서 두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오고있는 리경자씨를 통해 나는 《녀자는 녀자로서는 약하지만 어머니로서는 강하다》는 이 말이 참으로 옳은 말임을 어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서전은 거룩한 사람들만이 쓰는 것이 아님을 리경자 씨의 《비바람을 이겨낸 민들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초가 쓴 자서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그 시대상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료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리경자 씨를 포함한 우리문단의 랑자군(娘子軍)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리경자 씨를 포함한 우리문단의 랑자군(娘子軍)들이 앞으로 문학의 상상봉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매진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07년 11월 17일 연길에서  
61    김학철과 죽음의 시련 (김관웅65) 댓글:  조회:6025  추천:111  2007-11-07
김학철과 죽음의 시련김관웅    문혁(文革) 중에서 외웠던 모택동 어록 중에는 《공산당인들은 죽음도 무서워  하지 않는데 곤난을 두려워 하겠는가?》하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인데, 공산당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까짓 곤난 같은 것을 두려워 하겠는가 하는 뜻이다. 물론 모든 공산당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진짜로 죽음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만이 그러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죽음의 시련을 이겨내면 이 세상에서 이겨내지 못할 시련은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련옥의 단련을 거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범인들과는 다른 인식과 리해를 갖게되며 따라서 이런 사람들의 생명력은 남달리 굳세고 그 지혜도 범인들과는 달리 초월적으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특수한 재료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의(陳毅) 원수가 바로 이런 삶과 죽음의 련옥을 거쳐온 강철처럼 굳센 사람이다.   1935년 중국 공농 홍군이 강서에서 장정을 시작했지만 진의는 부상으로 대오를 따라서 장정대오에 섞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강산의 산속에서 남아서 유격전을 견지하게 되었다. 1936년 겨울, 국민당은 진의가 숨어있는 산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진의는 다리부상에 라병으로까지 앓고 있었기에  적들에게 포위되여 20여 일 동안이나 악전고투를 하였다. 적들의  포위에서 몸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진의는 생사관두에 《매령삼장(梅嶺三章)》을 써서 옷갈피 속에 절명시(絶命詩) 넣어두었다.  이 목이 오늘 잘린들 어떠랴 간거한 창업엔 전투가 많나니 황천에 가면 옛 부하들을 불러서 십만 군기를 날리며 염라왕을 베리라 남국엔 봉화가 십년 채 타오르니 잘린 이 머리는 성문 우에 걸릴테지 훗날 죽을 제군들 억세게 싸워 첩보를 날리면 지전으로 삼겠네. 혁명을 집으로 삼고 투신하였거니 피바람 몰아쳐도 그칠 때 있을지니 오늘 의로움 위해 목숨 내던져 인간 세상에 자유의 꽃 활짝 피우리. (斷頭今日意如何, 創業艱難百戰多. 此去泉臺招舊部, 旌旗十萬斬閻羅.南國烽煙正十年, 此頭須向國門懸.後死諸君多努力, 捷報飛來當紙錢. 投身革命卽爲家, 血雨腥風應有涯. 取義成仁今日事, 人間遍種自由花.)      죽음의 시련은 진의원수로 하여금 인생의 길에서 시종 죽음을 초개 같이 여기는 초연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의원수는 큰 재난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시밭길을 탄탄대로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문혁 당시 진의원수는 충격을 당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웃으면서 반란파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란파들이 모주석어록을 읽으면서 진의더러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임》을 승인하라고 하자 진의 역시《모주석어록, 진의동지는 좋은 동지이다!》라고 대꾸했다고 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967년 2월 진의는 또 엽검영, 서향전, 섭영진 이 네 원수와 함께 책상을 치면서 일어나서 문혁(文革)을 단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의가 이처럼 용감하고 태연할 수 있은 것은 죽음의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학철 선생이 《20세기의 신화》로 10년 옥살이를 했지만 타협하거나 투항하지 않고 시종일관 자신의 초지를 지킬 수 있은 것은 역시 젊은 시절에 이미 죽음의 련옥을 헤쳐 나오셨기 때문이다. 1941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호가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포로되여 일본감옥에서 한 쪽 다리를 절단하면서 지조를 굽히지 않으면서 이미 죽음을 초월하는 의지를 키웠던 것이다. 1975년 5월에 있었던 공판대회에서도 아갈잡이를 하면서 모욕을 하려고 하여도 김학철은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척각으로 서 있어도 이 땅에서 가장 꿋꿋이 서 있었다.   2002년 가을, 곡기(穀氣)를 끊고 물만 마시다가 저 세상으로 자진하여 가실 때는 죽음의 신(神)을 가지고 노시기까지 하시지 않던가!   젊은 시절에 이미 겪은 삶과 죽음 시련은 김학철로 하여금 범인과는 다른 특수한 성격을 형성하게 하였던 것이다. 김학철의 이름처럼 강철같이 굳센 성격이 형성되였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은 이 한 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김학철의 특수한 성격형성과정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2007년 11월 5일 연길에서
60    사자와 하이에나(hyaena) (김관웅64) 댓글:  조회:5653  추천:133  2007-09-20
사자와 하이에나(hyaena) 김 관 웅 연변대학 교수   로신의 산문집 『화개집(華蓋集)』에는 「전사와 파리」라는 유명한 수필이 있다. 아주 짧으니 아래에 옮겨 보기로 하자.   “Schopenhauer는 이런 말을 한적 있다. 사람의 위대함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정신상의 위대함과 체격상의 위대함의 법칙은 완전히 상반된다. 후자의 거리는 멀수록 작아지지만 전자는 오리려 거리가 멀수록 커진다.     바로 가까울수록 작아지기에 거리가 가깝게 되면 결점이나 상처가 자욱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네들도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신도(神道)가 아니고, 요괴가 아니고, 이상한 짐승이 아니다. 그네들도 의연히 사람이다. 다만 이러할 따름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하기에 그네들은 위대한 인간이다.     전사가 전쟁터에서 죽게 되면 파리떼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점과 상처이다. 파리들은 그 결점과 상처를 맴돌고 윙윙거리면서 득의양양해 한다. 마치도 자기네들이 죽은 전사보다 더 영웅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전사들은 이미 죽었기에 달려드는 파리떼들을 쫓아내지 못한다. 이렇게 되니 파리떼들은 더욱 기승스럽게 윙윙거리면서 스스로 자기네들의 소리가 불후하다고 여긴다. 그것은 자기네들은 그 완전함에 있어서는 전사들보다 월등하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구도 파리들한테서 결점과 상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전사는 필경은 전사이지만 완미한 파리는 필경은 파리에 불과한 것이다.     가거라, 파리들아! 네놈들은 비록 날개가 달렸고 윙윙거리기도 하지만 절대 전사를 초과하지는 못한다. 이 더러운 버러지들아!”   요즘은 인터텍스튜얼리-호문성(互文性)이 강조되는 시대이니 상기 로신의 수필을 본떠서 아래에 다음과 같은 사족(蛇足)을 붙여보기로 하자.   아프리카 열대초원에는 사자와 하이에나(hyaena)라는 동물이 살고 있다. 사자는 절대 썩은 고기를 나 죽은 시체는 먹지 않지만 개과에 속하는 초원의 청소부로 불리는 하이에나의 거의 대부분의 먹거리가 바로 썩은 고기나 죽은 시체이다.   백수의 왕인 사자가 죽게 되어도 예외 없이 하이에나의 밥이 되여 하이에나 무리들에게 갈기갈기 뜯기게 되는 법이다.  이 정글의 법칙이 인간 세상에도 통하는 법인가 보다.  지난 번 문인들의 한 모임에서 나는 우리문단의 “죽은 사자 한 마리”를 “하이에나 무리”들이 갈기갈기 뜯어먹을 잡도리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죽은 사자가 아무리 산 하이에나 무리들에게 뜯겨도 사자는 사자고 하이에나는 하이에나이다.  하늘에서 날던 수리개가 상처를 입고 땅에 떨어져서 구렁이의 밥이 된다고 해도  수리개는 여전히 수리개이고 구렁이는 여전히 구렁이인 법이다.  나폴레옹이 꺼꾸러지자 구라파의 봉건세력들이 날뛰던 19세기 10년대의 유럽의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영국의 낭만파시인인 바이런은 『차일드 하럴드의 편력기』라는 장시(長詩)에서  “사자가 꺼꾸러지니 늑대들이 살판을 친다”고 개탄한 적 있다. 그날 나는 바이런 같은 기분이 되었다. 2007년 9월 4일 연길에서
59    김학철은 신이 아닌 존경스런 인간이다 댓글:  조회:5189  추천:106  2007-09-10
김학철은 신이 아닌 존경스런 인간이다   김관웅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 량효성은 모택동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목전 모택동을 추억하는 서적과 글들의 형형색색의 작가와 작자들은 모택동에 대한 각기 부동한 심태를 지니고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첫째는 모택동이라는 이 신격화된 령수를 신단에서 모셔 내려 범인들 속에 세워놓고 다시 보려는 것이다. 둘째는 모택동에 대한 추억을 통해 중국공산당 역사에서의 많은 중요한 사건의 ‘내막’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셋째는 중국근대사에서의 남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모택동의 위대한 지위를 전복하려거나 동요시키려는 것이다. 이 최후의 목적은 가장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모택동이 새 중국을 창립한 그 공적은  태산 같은 존재로서 그 누구도  전복하거나 동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에도 흑점이 있는 것처럼 모택동도 결코 완미한 인간은 아니다. 건국 후 나라를 건설하는 면에서 모택동은 시행착오를 거듭 범했고 10년 문화대혁 중에서는 엄중한 과오를 범했다.   한마디로 모택동을 “나라를 세우는 데는 공로가 있으나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시행착오를 저질렀고, 문화혁명 중에는 엄중한 과오를 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학철 선생의 『20세기의 신화』는 결코 모택동의 건국의 공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1957년 반우파운동 이래 나라를 건설하고 다스리는 면에서 범한 모택동의 과오를 비판한 소설이다. 적어도 중국 당대 문학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모택동이라는 이 신격화된 령수를 신단에서 모셔 내려 보통 인간들 속에 세워놓고 다시 보려고 한” 첫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문단의 일부 사람들이 들먹이고 있는 “정치표준 제1, 예술표준 제2”라는 잣대로 재어 보아도 김학철의 장편소설『20세기의 신화』는 인민대중과 광범한 지식인들을 대변하여 정의의 눌함(訥喊)을 올린 대단한 정치소설이다.    그러나 김학철 선생 역시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분도 만년에 이런 저런 글들을 써서 적잖은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렸었다. 많은 경우에는 옳은 말씀을 했지만 일부는 무근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설사 이렇다고 해도 모택동의 주류와 공적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김학철 선생의 주류와 대 방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선의적으로 김학철 선생의 일부 결점이나 시행착오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이다.    신단(神壇)에서 모택동을 인간들 속으로 모셔 내리려고 한 김학철 선생 역시 인간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모택동을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듯이 김학철 선생도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량효성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역사의 ‘두뇌’에 기억된 사람들은 영원히 오점이나 저열한 점이 있는  위인이나 명인이며 이른바 ‘완미한’ 보통 인간들의 이름은 모조리 묵살해 버린다.”    우리문단의 일부 “결점이 없는 완미한 사람”들이 김학철 선생을 아무리 폄하하려고 해도 그것은 매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 보려는 격이다.    김학철의 문학은 우리 중국 조선족문학이라는 이 산맥에서 거룩한 한 산봉우리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앞으로 영원히 동요가 없을 것이다.                                                                                                2007년 9월 7일 연길에서
58    '야심가'비교론 (김관웅62) 댓글:  조회:5214  추천:112  2007-08-14
"야심가" 비교론   김 관 웅   중국 청나라시기 오경재(吳敬榟, 1701-1754)의 장편소설《유림외사(儒林外史)》를 번역하는 가운데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광초인(匡超人)이란 인물형상이다. 그것은 이 인물이 많은 련상의 여지를 남겨주어 많은 것을 심사숙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학리론의 용어를 동원하여 표현한다면 대단한 전형성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물이라고나 할까. 이 인물은 시대적 락인이 깊이 찍혀있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에까지 우리들에게 많은 사색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광초인은 원래는 부지런하고 총명하고 인사성이 밝고 또 효성이 지극한 시골 젊은이였다. 항주에 돈 벌러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마음이 선량한 마이 선생이란 선비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공부만이 출세의 길이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충고를 받게 된다.      고향 집에 돌아온 그는 중풍으로 앓아누운 아버지를 극진히 병시중을 들면서도 과거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며 그 효행과 열심히 책을 읽는 근면성이 우연하게 그 현의 리 지현(지금의 현장 격)에게 알려져서 리지현의 환심을 사게  되고, 또한  리 지현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수재로 뽑힌다.      나젊은 광초인이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숙환으로 죽고 리지현도 라이벌들의 암투로 무함을 받아 해직이 된다. 이 일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광초인은 다시 고향을 떠나 항주로 와서 고향의 촌장영감의 소개로 반삼(潘三)이라는 시정배와 사귀게 된다. 반삼은 비록 비법적인 사기, 협잡수단으로 남의 재부를 갈취하는 나쁜 놈이였지만 광초인만은 아주 의리 있게 대해준다.      반삼이와 가까워지면서부터 광초인은 인간적, 도덕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광초인은 조금도 주저 없이 반삼의 졸개로 되어 관가의 문서를 위조하고 남을 대신하여 과거시험을 쳐준다. 이렇게 해서 돈이 생기게 되자 번삼의 중매로 항주 부아문에서 관차로 일하는 정영감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반삼의 죄상이 드러나서 옥에 갇히게 되자 광초인은 연루가 될가바 전전긍긍하지만 결국에는 번삼이가 물어 먹지 않았기에 무사하게 경성에  올라가서 재차로 중앙관청의 급사중이라는 벼슬자리로 승진한 리지현의 도움을 받아 중앙관계에서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리 급사중의 소개로 광초인은 자기가 이미 결혼한 몸임을 속이고 리 급사중의 생질녀와 결혼한다. 몇 달 후 광초인은 시험을 보아서 경성에서 에서 교습이라는 벼슬자리를 얻게 되고, 고향에 보낸 새색시는 마침 죽게 되여 그의  중혼죄도 자연히 가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스탕달의 『적(赤)과 흑(黑)』중의 주인공 쏘렐처럼 이전에 있었던 녀자편력 때문에 야심가의 길에서 좌절을 당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경성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경성에서 벼슬을 하면서부터 광초인은 점점 인간성과 도덕성을 잃어 가게 된다. 옥에 갇힌 은인인 반삼이 편지를 보내어 한번만 면회를 와달라고 해도 그는 자기의 벼슬길에서 장애물이 될가바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순박한 시골청년으로부터 야심가로 변한 광초인의 형상을 보면서 프랑스 스탕달의 장편소설『적(赤)과 흑(黑)』중의 청년 야심가 쏘렐, 그리고 발자크의 장편소설『고리오령감』중의 청년 야심가 라스띠냐크, 영국 대커리의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중의 청년 야심가 베케 솨프를 련상하게 되었다.      오경재의 장편소설《유림외사》중의 청년야심가 광초인,    프랑스 스탕달의 장편소설『적(赤)과 흑(黑)』중의 청년 야심가 쏘렐,   프랑스 발자크의 장편소설『고리오령감』중의 청년 야심가 라스띠냐크,   영국 대커리의 장편소설 『허영의 시장』중의 청년 야심가 베키 솨프   이상의 이 네 동서양의 청년 야심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모두 비천한 가정의 출신들이다.      광초인은 시골 농부의 아들이고, 쏘렐은 작은 시가지의 목수의 아들이고, 라스띠냐크는 외성의 몰락한 귀족가문의 아들이고, 베키 솨프는 런던의 가난한 시민의 딸이다. 바로 출신이나 신분이 미천하기에 이들에게는 상류사회로 기여 오르려는 강렬한 욕망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다. 궁자사변(窮者思變) - 궁한 사람은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 법이다.      중국에는 "물은 낮은 데로 흐르려 하고 사람은 높은 데로 올라 가려 한다"는 속담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모두 성공을 갈망하고  현재의 지위보다 높은 데로 오르려는 욕망이 있는 이는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이런 까닭에 웅심과 야심 사이에는 종이 한장 차이밖에 없다. 웅심이 약간만 도를 넘으면 야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모두 야심가로 될 소지를 다 일정하게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비천한 신분이나 지위에 있던 사람들의 신분이나 지위의 상향욕구는 더욱 강렬하다. 내려 보는 사람들보다도 올려보는 사람들이 더 상향욕구가 강한 법이다.  이런 까닭에 비천한 가정에서 출생한 사람들 중에서 야심가가 나타날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서 포병학교를 다닐때 촌티가 난다고 늘 동학들로부터 조롱을 당했던 프랑스의  오지 코르시카섬의  섬놈이 아니던가. 그래서 시골닭이 관청닭의 눈을 빼먹고, 개천에서 룡이 난다는 속담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둘째, 강렬한 신분 ․ 지위 상향 욕구가 있고, 근면하고 총명하고 잘 생기고 사교에 능해야 한다.     미천한 가정에서 태여난 사람들이 야심가로 될 확률이 더 높다고는 하지만  비천한 가문의 출신들이라고 해서 모두 야심가로 되거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야심가로 되려면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체적인 조건, 즉 야심가로서의 소질을 갖추어야 한다.      야심가로 되려면 우선 강렬한 신분 ․ 지위 상향 욕구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야심가로 되려면 근면해야 하며, 또 이렇게 되자면 남보다 몇 배나 더되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갖추어야만 한다. 가만히 안자있는데 입에 큰 떡을 물려주지는 않는 법이다.      또 근면하기만 해도 안 된다. 반드시 총명한 재기와 추하지 않은 용모와 체격을 갖추어야 한다. 너무 못생긴 추남이나 추녀는 일반적으로 야심가로 되기 어렵다. 당금 먹을 떡도 꽃을 돋친다고 너무 못나면 남들에게 환심을 사기 어렵다. 라스띠냐크는 그 미모로서 수많은 유한마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지 않았던가. 모파쌍의 장편소설『미모의 벗』중의 야심가 뒤류아의 주요한 무기 역시 미모가 아니던가.      그러나 야심가로 되자면 겉모양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며 또 발랄한 재기와 총명성, 능란한 사교술을 겸비해야만 한다. 광초인은 그 이름처럼 초인(超人)적인 총명성을 갖고 있었고, 쏘렐 역시 성경을 얼음에 박 밀듯이 암송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주의력을 환기시키지 않았던가.       강렬한 상향욕구, 근면성, 총명성과 재능, 근사한 용모와 체격, 능한 사교술-- 이는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체적인 소질이다.   광초인 ․ 쏘렐 ․ 라스띠냐크 ․ 베키 솨프는 이 몇개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셋째,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설사 아무리 이상에서 렬거한 야심가로 될 수 있는 주체적인 소질을 갖추었다고 해도 사회적인 환경에서만이 야심가로 될 수 있다.      중국에서 수천년 동안 지속된 과제시험에 의한 관리선발제도와 권력본위의 사회가치관 그리고 이로 하여 생겨난 수많은 사회적 비리들은 광초인이 야심가로 변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대환경이다. 부르봉왕조복벽시기의 교회권력의 복귀, 귀족사회의 가치관 및 그로인하여  산생된 수많은 사회적불평등과 비리는 은 쏘렐이 야심가로 변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환경이다. 19세기 초반 자본주이적 생산관계와 생활방식의 확립으로 하여 금전만능의 사회가치관과 도덕적 타락은 라스띠냐크가 야심가로 변질하게 된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환경이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시대 식의 야심가들이 있는가? 다른 고장의 상황은 불문에 부쳐 두고라도 우리 연변의 상황, 아니 우리문화계의 상황만 본다면 어떠한가? ..."야심가비교론" - 이것도 비교문학연구에서의 하나의 재미나는 연구테마라고 생각한다.  2007년 7월 24일 장춘에서
57    후퇴와 전진의 변증법 (김관웅61) 댓글:  조회:5030  추천:109  2007-08-08
후퇴와 전진의 변증법 김 관 웅   전쟁에서 전진과 후퇴는 흔히 변증법적인 통일을 이룬다. 전진 속에 후퇴가 있고 후퇴 속에서 전진이 있을 수 있다. 성공적인 후퇴는 전진을 내포하고 또 그래서 전진을 위한 후퇴이다. 그러나 졸렬한 후퇴는 후퇴만을 위한 후퇴로서 전진이 내포되지 않은 후퇴이다.      전진을 위한 후퇴, 전진을 내포한 후퇴의 전례는 많고도 많지만 그 가장 전형적 사례가 중국 공농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서성에서 섬서성까지 11개  성을 지나면서 무수한 전투와 설산과 초지를 지나면서 2만 5천리를 후퇴하였기에 중국공산당은 천하를 얻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방적인 후퇴,  전진을 내포하지 않는 후퇴는 오히려 자신을 죽음에로 몰아간다. 리자성의 농민봉기군의 패퇴가 그 단적인 실례이다.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 준 리자성의 농민봉기군은 만족기병에 의해 한번 싸움에서 진 뒤로는 그냥 후퇴만 하다가 나중에는 얻었던 천하도 잃고 말았지 않았던가.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은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데도 적용이 된다. 장춘에서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 칸에서  “한 걸음 물러서면 세상이 끝없이 넓어진다”는 수필을 한편 읽고 느끼는 바가 크다.     청나라 시기 안휘성 동성(桐城)출신의 명재상인 장영(張英)의 일화는 참으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영의 고향 동성 상부(相府)와 이웃집 사이에는 아주 비좁은 공지가 길게 나 있었다. 이웃집에서 집을 수선하다가 담장을 장영네 집쪽으로 몇 자 가량 더 내 쌓았다. 이 일로 두 이웃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다. 장영이네 집 식구들은 조정에서 큰 벼슬을 하고 있는 장영의 권세에 등대여 이웃집을 혼내주려고 장영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장영에게서는 회답이 왔는데 그 편지에는 이란 시구가 있었다고 한다.        천리 밖에서 담장 때문에 편지를 보냈구료        千里修書只爲墻,    이웃에 석자 양보해도 무방하잖겠나                讓他三尺亦無妨.    만리장성은 지금도 있으나                              萬里長城今猶在,    오늘은 진시황이 어디에 있느뇨                      如今何有秦始皇.    장영네 집 식구들은 이 시를 보고는 느끼는 바가 많아서 자기네 집 담장을 수선할 때는 장영의 말대로 이웃집에 양보하여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고 한다. 이를 본 이웃집에서도 자기의 과욕을 뉘우치고 쌓았던 담장을 허물어서 자기 집 쪽으로 석자 들이 쌓았다. 그리하여 장영네 집과 이웃집 사이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니기 편리한 여섯 자  남짓한  행길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이 행길을 륙척항(六尺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한 걸음 후퇴하여 자신의 인격적인 품위를 지킨 미담은 서양에도 있다. 한번은 괴테가 좁은 길을 걷고 있다가 자기와 늘 의견 상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는 한 문인을 만났다. 이 문인은 자기의 숙적인 괴테를 보더니만 대뜸 얼굴이 검으락 붉으락해서 “나는 바보한테는 길을 피할 줄 모른다!”고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다고 한다. 이 괴테는 오히려 웃으면서 “나는 바보에게 길을 피해 줄줄 안다”고 응수를 하면서 길 한쪽에 비켜서서 그 문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후퇴를 할 줄 아는 괴테의 이 일화도 서양에서는 줄곧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길을 피하는 문제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로 자기와 상대도 안 되는 인간하고 드잡이를 한다거나 심지어 결투까지 벌인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만일 괴테가 그 당시의 기분을 컨트롤하지 못해 그 문인과 같이 놀았다면 이는 아마도 괴테의 품위에 많은 손상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퇴와 양보가 만능인 것은 아니다. 비록 우화이기는 하지만 동곽 선생처럼 늑대에게 그냥 양보만 한다면 그것은 결국에는 자기를 죽음에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를테면 푸시킨이 자기의 부인과 놀아나는 프랑스의 건달군 단테스에게 그냥 양보를 했다면 푸시킨의 인격적인 품위는 아마도 일락천장이 되었을 것이다. 푸시킨은 비록 목숨을 잃기는 했지만 사람답게 살려는 패기를 세인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후퇴해야 하는 일과 후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선택임을 또한 잘 알아야 한다. 이는 사회상의 인간관계로부터 시작하여 집안에서의 부부 관계를 포함한 모든 대인관계에 통하는 일반적인 삶의 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담장을 둘러 싼 자질구레한 문제거나 또는 문학평론이나 창작이 아닌 길을 비켜주는 것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거나 한번 양보하면 살아가는 공간이 끝없이 넓어지고 살아가는데 언제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사람들은 “꽃나무를 많이 심고 가시나무를 적게 심으라”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큰 시비나 큰 원칙적인 문제에서 한 걸음 후퇴하다가는 필연적으로 인격적 품위를 잃게 됨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인간은 골기가 없는 무골충이 되고 말며 늘 남들에게 죽어 대령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또 “나귀가 순해빠지면 누구나 타려고 하고 사람이 순해빠지기만 하면 남들의 업신여긴다”는 교훈적인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경구와 속담들은 다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어느 특정한 경우를 말한 상대적인 진리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전진과 후퇴의 변증법을 잘 터득하는 것이 마음 편안하게도 살며 또한 사람답게도 살 수 있는 길임은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07년 8월 7일 연길에서   
56    벼슬살이의 맛 (김관웅60) 댓글:  조회:6471  추천:154  2007-08-01
☆독서필기☆ 벼슬살이의 맛 김관웅     나는 벼슬 복이 없다. 벼슬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그러나 나는 관청의 내막과 벼슬살이의 맛이 구경 어떠한지 무척 알고 싶다. 마치도 무지렁이 노총각이 길가에서 미모의 처녀를 향해 자꾸 곁눈질을 하듯이 자기와 인연이 없을수록 호기심이 동하게 되는 것도 아마 인간의 상정이리라. 그래서 요즘에는 여름방학을 리용해 오경재(吳敬梓, 1701~1754)의 《유림외사(儒林外史)》의 번역을 시작했다. 인생에는 남북으로 갈림길 많고 장상(將相)이나 신선(神仙)들도 원래는 범인(凡人)들이라네. 백대(百代)의 흥망은 조석(朝夕)이 바뀌는 것 같고 세찬 강바람 전조(前朝)의 고목 넘어뜨리네.   부귀공명은 뜬 구름 같아 모든 심혈 다 기울여도 애오라지 세월을 허송할 뿐 탁주 석 잔에 거나히 취할 제 낙화유수는 어디로 흘러 흐르려나    이 사(詞) 역시 나이 든 서생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평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생의 부귀공명이란 본디 사람의 몸 밖의 것임을 설파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부귀공명이 눈앞에 보이면 모두 목숨을 내걸고 그것을 잡으려고 아득바득한다. 일단 그것이 손에 잡히고 보면 그 맛은 초를 씹듯 하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이를 꿰뚫어 보았던가!    《유림외사》는 이렇듯 허두를 뗀다. 번역하면서 읽어 내려가노라니 주로는 벼슬살이를 하기 위한 후보관원-유생들이 관청에 들어가기 위한 평생의 비참함 몸부림, 그리고 벼슬길에 오른 후의 벼슬아치들의 정계에서의 암투와 그 검은 내막을 주로 묘사했음을 알게 되였다. 바로 우에서 인용한 《부귀공명은 부질없는 것 / 모든 심혈 다 기울여도 / 애오라지 세월을 허송할 뿐》임을 그 주제로 내세운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벼슬살이의 그 맛을 알고 싶었다. 그것도 옛날이 아니라 오늘날의 현실에서 우리네 부모관(父母官)들이 벼슬살이를 하는 그 맛을 간접적이라도 알고 싶었다. 물론 남이 씹어주는 떡은 제 맛이 나지 않는다고는 하지는 말이다.  그러던 중에 장춘 서점에서 왕몽의 자서전 《半生多事》(제1부), 《大塊文章》(제2부)를 사서 읽으면서 비록 남이 씹어주는 떡이기는 하지만 왕몽의 자술을 통해 벼슬살이를 하는 그 맛을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왕몽은 1953년부터 문학창작을 시작하여 1956년에는 《조직부에서 온 젊은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것이 문제로 되어 우파감투를 쓰고 신강에서 17년 동안이나 정배살이를 하다가 1979년에야 북경에 다시 돌아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설가이다. 이런 글쟁이가 1982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중공중앙후보위원으로 당선되었다가 1986년에는 마치도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어 용으로 변한 것처럼 일약 문화부장으로 승진되었다. 1987년에는 그 관운(官運)을 타고 중공중앙 중앙위원으로 되었으며 1992년까지 옹근 10년 동안이나 중국의 문인으로서는 가장 큰 벼슬자리에서 벼슬맛을 톡톡히 보았다. 왕몽은 《大塊文章》(제2부) 중의 <관장일별(官場一瞥)>에서 벼슬살이 맛이 신 맛(酸), 단 맛(甛), 쓴 맛(苦), 매운 맛(辣)에 대해 리얼하게 서술하였다.  벼슬살이의 단 맛:  왕몽은 벼슬살이를 하였기에 세계가 좁다하게 다 돌아다니면서 세상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고급비행기에 고급호텔에 들면서 만판호강을 하면서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부 부장을 하면서 다닌 나라만 해도 50여 개 국이나 된다. 월급단자에도 00001로 첫 번째로 되어있고, 운전기사도 차를 운전해주고, 어디 가서 말을 하면 그것이 지시로 되어 관철되어야 했으니 사람으로 난 보람을 만끽했을 것이 아닌가.  벼슬살이의 신 맛:  왕몽은 《관직이 오를수록 자기의 관직이 작은 것을 느끼게 된 것이 벼슬을 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 첫 감수》라고 술회했다. 맞는 말 같다. 문화부장 우에도 숱한 거물들이 도사리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거물 앞에서 처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살얼음이 언 강을 건너가는 기분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벼슬살이의 신맛은 자기보다 못한 자한테 억눌리거나 수모를 당할 때 일어나는 시샘이나 질투심과 더 많은 함수관계를 가질것이다.  《유림외사》제2회에서 주진이라는 늙은 수재는 학식이 있고 글재주가 있었지만 수무번이나 거인을 뽑는 시험에 참가했지만 모두 락방을 하여 자기 아들벌도 채안되는 같은 해에 수재로 된 젊은 서생 매구란 건방진 녀석한테 갖은 수모를 다 당한다. 벼슬살이를 하자면 이런 신 맛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벼슬살이의 쓴 맛:  며칠 씩 연속 하는 마라톤식 회의를 소화해 내야하고, 많은 사태에 대해 태도 표시를 해야 하고도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늘 무함을 당하거나 밀고를 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야만 한단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를 죽이면서 살아가면서 나사못이나 부분품으로서의 요소를 나날이 강화해야만 한다고 한다. 대부분 경우에는 참가하기 싫은 회의에 참가해야 하고, 내키지 않는 말을 해야 하고, 언제나 상급 앞에서 근신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고 한다. 자기의 개성을 모조리 죽이고 살아야 하는 게 벼슬살이의 생리라고 한다. 마치도 살얼음우로 걸어가듯이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게 벼슬살이라고 한다.  벼슬살이의 매운 맛:  중국에는 《하늘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고, 사람에게는 조석으로 변하는 길흉화복이 있다(天有不測風雲, 人有旦夕禍福)》는 말이 있다. 벼슬길은 그 어느 인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보다 앞길을 예측키 어렵다. 그래서 왕몽은 벼슬살이에는 《길흉화복이 예측키 어려운 법칙》이 적용된다고 설파한바 있다. 한창 잘 나가던 자동차가 어디에서 사고를 칠지 모르듯이 벼슬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들의 앞에는 언제 어디서 천길 수렁에 빠져죽고 언제 어디서 나가는 단두대가 기다리는지 모른다. 양귀비라는 여자가 황제의 은총을 한 몸에 입고 분수를 모르고 정치권력이란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모반을 한 군사들에게 목 졸료 죽지 않던가? 강청의 말로도 양귀비와 다른게 뭐가 있는가? 한마디로 벼슬사이의 맛은 고추, 당추보다 더 맵다  《유림외사》의 제1회에는 왕면(王冕)이란 농부출신의 재사가 등장하는데, 그 어머니가 임종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의미심장하다.    “보아하니 내 명은 이제 다 한 것 같구나. 이 몇 해 동안 사람들은 나의 귓전에 대고 아들이 학문이 깊으니까 벼슬길에 오르게 하라고 권하더구나. 벼슬하는 게 가문을 빛내는 일이라고는 한다만 내가 보건대 벼슬아치들은 모두 끝장이 안 좋더라. 게다가 너는 성미가 도고해 만일 화를 불러오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 모르는거다. 너는 부디 이 어미의 유언대로 나 죽은 뒤 장가를 들어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나의 산소를 지켜다오. 절대 벼슬길에 나가지를 말거라. 그렇게만 한다면 이 어미는 죽어도 눈을 감겠다. ”  왕면은 울면서 그러겠다고 대답해서야 어머니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더니 영영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 효자인 왕면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한 평생 벼슬을 호랑이 피하기라도 하듯이 벼슬길을 피하면서 조용히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벼슬살이의 맛이 얼마나 매운가를 증언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왕몽은 왕면처럼 운둔거사로 된 것이 아니라 벼슬길에 나섰지만 한 10년간 벼슬길에서 벼슬 맛을 보다가는 역시 본의 아니게 다시 작가라는 제자리로 되돌아 왔다. 왕몽이 이 모든 것을 인생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이 멋지다.  그러니 10년 동안의 벼슬살이는 작가 왕몽에게 있어서는 남들을 해볼래야 해볼 수 없는 생활체험으로 되었던 것이다. 낮은 곳에서의 생활체험도 중요한 생활체험이지만 높은 곳에서의 생활체험도 중요한 생활체험인 것만 분명하다. 중국 청나라 후기의 조설근이 《홍루몽》같은 명작을 쓸 수 있은 것은 그가 열여섯 살까지는 대부호, 대관료의 가문에서 태여나 만판 호강을 하면서 호의의식을 해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고, 조선조의 김만중이《구운몽》 같은 작품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조정 관원으로 높은 곳에서 벼슬살이를 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도 여전히 자기 할 일을 찾아하면서 여유 있는 심태를 가지고 자아를 잃지 않고 계속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인생의 복이고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왕몽은 10년 동안의 벼슬살이를 무난하게 마치고 다시 소설가라는 자기의 자리에로 복귀를 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10년 동안의 벼슬살이의 경력을 문학창작의 양질의 소재로 충분히 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왕몽은 전임 문화부장이라는 때 지난 관직을 늙은이가 지팡이에 의지하듯이 리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한 소설가로서의 이름과 창작실적으로 만년의 아름다운 명절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왕몽의 자서전 제2부 <大塊文章> 2007년 제1판만 해도 6만 5천부를 찍었으니 원고료수입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원고료가 천자당 1000원이라고 하니 이 책 한권의 원고료만도  45만원이라는 엄청난 돈이다.    너무너무 운수 좋고 너무너무 총명한 왕몽이다.   참으로 부러운 인생이다.                                          2007년 7월 14일 장춘에서
55    녀왕벌, 수펄 그리고 일벌 (김관웅59) 댓글:  조회:5419  추천:88  2007-06-01
녀왕벌, 수펄 그리고 일벌 - 대학에서의 교장, 행정간부와 교수집단의 관계를 론함 김 관 웅         꿀벌은 고도로 발달된 사회생활을 하는 곤충으로서 우리 인간들의 사회생활과 아주 류사성을 갖고 있다. 게스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의 리론에 의하면 벌집이라는 이 기능적인 단위는 어쩌면 대학이라는 이 인간생활의 단위와 이질동구(異質同構)의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벌집에서의 녀왕벌, 수펄 그리고 일벌 이 삼자관계는 대학에서의 교장, 당 ․ 행정 인원과 교수집단의 삼자 관계와 대단한 류사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벌집의 구조관계는 대학의 구조적관계 및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나 감정의 훌륭한 객관대응물(客觀對應物)로 되는 것이다.       꿀벌은 가장 사회성을 띤 곤충으로서 가장 진화하였으며 항상 봉군(蜂群)이라는 하나의 기능적인 단위로 생활하고 있다. 봉군은 한 마리의 녀왕벌과 계절에 따라 그 수가 변하는 수만 마리의 일벌, 그리고 번식기인 4-9월에 나타나는 2000~3000마리의 수펄로 구성된다.      먼저 녀왕벌의 생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녀왕벌은 한 개 대학에 비하면 교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만 마리의 일벌들에 의해 둘러싸인 녀왕벌을 보면 자연히 수만 명의 교직원을 거느리는 위풍당당한 교장을 련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녀왕벌과 일벌은 모두 암컷으로서, 똑같은 수정란에서 태여난다. 녀왕벌과 일벌의 분화는 성육(成育)하는 벌집의 방과 유충기에 주어지는 먹이의 량과 질의 차이에 따라 유충 전기에 결정된다. 녀왕벌은 선택되여 큰 방에 모셔지고 먹는 것도 일벌들과는 다른 로열젤리(중국에서는 蜂王漿이라고 한다.)이다. 로열젤리는 우화 후 일주일 전후하여 젊은 일벌들의 입에서 나오는 분비물로서 고단백의 액상물(液狀物)이다. 이 단백질은 일벌이 꽃에서 채집한 꽃가루에 의한 것으로서 일벌들이 일단 체내에 섭취하였다가 생합성(生合成)을 거쳐 영양가 높은 로열젤리가 되는 것이다. 녀왕벌의 유충은 다량의 로얄젤리를 유충기간 동안 계속 먹이는 데 비해 일벌의 유충은 유충기 6일간 중 전반 3일간은 거의 로얄젤리와 같은 일벌유(乳)를 조금씩 먹이고, 후반 3일은 봉밀과 꽃가루의 혼합물을 먹인다. 이처럼 유충기의 영양조건에 따라 여왕벌과 로동벌로 분화된다.      녀왕벌은 우화(羽化)한 뒤 7~10일 쯤 되면 보통 3~7회 공중에서 교미하여 수컷에서 얻은 정자를 저장낭에 모아둔다. 이 정자의 수는 700만개에 이르는데, 녀왕벌이 생존하는 동안에는 계속 저장낭속에서 살고 필요에 따라 필요에 따라 수란관으로 나오게 된다. 증식기인 4-7월 사이에 녀왕벌은 하루 2000개 이상의 알을 낳아 수만 마리의 봉군을 형성시킨다. 녀왕벌의 건강과 줄기찬 생식력은 봉군의 존속을 지탱해 준다.   다음은 일벌의 생태를 보기로 하자.       일벌은 녀왕벌과 마찬가자로 암컷으로서 똑같은 수정란에서 태여 난다. 우에서 언급했다시피 유충기에 녀왕벌과 같은 먹이를 먹지 못했기에 일벌로 된 것이다. 일벌은 유충으로부터 우화하는 과정에서 생리조건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벌집의 청소, 육아, 영소(營巢), 파수 등의 역할을 하는 내근(內勤)벌과 꽃을 찾아 화밀(花蜜)이나 꽃가루를 운반하는 외근(外勤)벌로 구별된다. 수명은 봄에서 여름에 걸쳐 활동이 활발한 시기에는 30-40일, 겨울에는 6개월 정도이다.      우화(羽化)한 일벌이 최초로 하는 일은 벌집방의 청소이다. 2~3일이 지나면 봉유(蜂乳, 즉 로열젤리, 일벌유, 수펄유를 총칭한다)의 분비가 시작되면 육아에 전념하게 된다. 그 후 얼마 지나서 일벌들은 또 봉랍(蜂蠟)을 분비하여 육각형의 집을 만들기 시작한다. 약 3주일이 지나면 내근벌들은 외근벌로 이행해 간다. 꽃을 찾고 화밀과 꽃가루를 모아 운반하는 위험한 일은 로령(老齡)의 일벌이 맞는다. 분봉(分蜂)과정에서도 시종일관하게 일벌들의 주도에 따라 행해지게 된다. 이처럼 일벌은 봉군에서의 주체로서 모든 생산적인 고역을 전담하는 것이다. 마치도 인간사회에서의 인민대중과 같은  존재이다.      세 번 째로 수펄의 생태를 보기로 하자.      수펄은 일벌이 낳은 것이다. 원래 자성(雌性)인 일벌은 녀왕벌이 죽고 다음 대(代)의 녀왕벌의 육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산란을 시작하는데, 낳은 알은 모두 무정란으로서 작은 수벌로 우화한다. 수펄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종족유지에 필요한 녀왕벌과의 교미가 유일한 역할이다. 번식기에는 2000~3000마리에 이른다. 그러나 녀왕벌과 교미를 하는 수벌은 거퍼 10마리 미만이다. 교미가 끝나면 수펄들은 파수를 담당한 일벌들에 의해 죄다 목이 잘리고 만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곤충 공동체로서의 봉군(蜂群)과 인간 공동체로서의 대학은 이질적인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그 구조는 상당한 동질성을 갖고 있다.      녀왕벌은 한 개 대학에 비하면 교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만 마리의 일벌들에 의해 둘러싸인 녀왕벌을 보면 자연히 수만 명의 교직원을 거느리는 위풍당당한 교장을 련상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벌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과학연구를 하는 교수들을 주축으로 하고 대학의 각종 후근보장을 담당하는 직공들과 사무원들과 가르침을 받는 대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대학의 각 당기관이나 행정 부서의 각급 처장과 과장들은 같은 행정 간부나 당 간부는 수벌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녀왕벌이 아무리 생식력이 강하다 하더라도 수펄들이 제공하는 정자(精子)가 없으면 봉군(蜂群)을 형성할 수가 없듯이 대학의 교장이 아무리 상징성이 높고 능력이 있고 아이디어가 훌륭하다 해도 그런 아이디어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간부집단이 없다면 대학교를 운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봉군(蜂群)에 적정한 수량의 수펄들이 있어야 하듯이 대학에서의 행정간부들도 적정한 수량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대학들에서의 행정간부집단은 그 수량이 너무나 많다. 행정간부들에다 당계통의 간부들까지 합치면 비교학(非敎學), 비연구(非硏究) 인원이 대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도 많다. 교미기가 끝나면  파수를 담당한 일벌들이 쓸모없게 된 수벌들의 목을 잘라 죽이듯이 해야 하겠지만 중국 대학들에서는 아직까지는 이런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중국대학들에서의 구조적인 병폐는 이런 비교학(非敎學), 비연구(非硏究) 인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는데 있다.      중국의 적지 않은 대학들에서 이 수펄 같은 존재인 행정 간부들이  막강한 권세를 누리면서 대학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교수는 다 똑같은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교장》이나 《원장》이나 《처장》등 보직을 맡은 교수가 마치 더 실력 있는 교수로 간주되고 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교수사회에는 학문연구와 강의보다는 보직을 얻거나 보직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어떤 교수들은 보직을 지키느라고 거의 한 평생을 허비한 이들도 적지 않다. 필자의 은사들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 이 분은 학문적 업적을 높이 쌓아올릴 기초와 조건을 훌륭하게 갖춘 분이였지만 20년 가까이 보직에 연연해 있다가 황금 같은 귀중한 학문연구의 시간을 다 놓치고 말았으며 종당에는 이른바《교수》와 《학자》라는 허울만 남았다. 이는 분명히 비극이다.         이런 전철(前轍)을 분명히 보고 있으면서도 왜 아직도 《보직+교수=보직교수》식의 량 다리 걸치기 교수들이 가득한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생의 학문적인 성공을 희생하면서라도 보직을 쥐려고 애들을 쓰는가?        그것은 모든 교수, 학자들이 다 영광과 실리를 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술업적이 뛰여난 교수나 학자라고 하더라도 대학이나 학계에서 《벼슬 감투》를 쓰고《보스》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면 명예와 실리를 챙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형태로든지 무슨《조직》을 장악하고《행정실권》을 틀어 쥐여야만 하는 것이다. 연변대학의 경우만 보다도 그렇다. 혼자서 공부만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살아생전에 명예와 실리를 다 챙기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기 어렵고, 대개는 교학이나 연구보다는《조직관리》나 《벼슬감투쓰기》에 능한 사람이  능력 있는 학자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글만 열심히 쓰고 강의만 열심히 하고 있으면 늙어서 외로워지기 쉽다. 이른바 《대학의 정치》를 통해 인간관계를 원활히 하고 후배 관리를 잘 해야만 늙은 뒤에 가서 《원로교수》의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원래 정치적인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청정해야할 대학가에서마저 매사에 정치가 동원되니 정치에 둔감한 교수들은 언제나 불리익을 당하게 된다. 살아있을 때는 정치에 능란하여 명예와 실리를 두루 다 챙기면서 살아왔지만 죽고 나서는 잊혀져버리게 되는 교수들이 바로 이런  보직교수들이다. 그러나 현세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진 적잖은 교수들은 사후의 일은 관계치 않는다.        중국의 적지 않은 대학들에서는 바로 이런 보직+교수=보직교수들이 량 손에 떡을 쥐고 좋은 일은 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보직교수들은 인사권, 경제권, 행정권을 다 틀어쥐게 되었기에 살아가기 윤택하고 모든 기회를 남 먼저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연변대학에서 한 평생 서양문학을 가르쳐 오고 있지만 보직이 없는 일반 교수로 일관해 오다보니 유럽려행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원래 중국 고전 문학을 전공했던 한 보직교수는 장(長)자를 달더니 중국 국내의 명산대천은 두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9개 나라나 순방하고 돌아왔다. 대학에서 “로열젤리”를 먹는 것은 교장 한사람에게만  국한되여야 하겠지만 수벌 같은 존재인 보직교수와 행정간부들도 “로열젤리”를 장복(長腹)하고 있는 형국이며, 제일 얻어먹지 못하는 것은 교학과 연구에만 정진하고 있는 일벌 같은 무보직의 교수들이다.      사실 교장과 원장을 제외한 보직은 직원이 맡으면 된다. 이런 원인으로 적잖은 대학들에서는 교수와 행정직원의 구별도 별로 없다. 적지 않은 행정직원들은 이런저런 도경을 통해 쾌속으로 석, 박사를 마치고는 교수로 탈바꿈하는 까닭에 교수진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게 만든다. 이런 풍토에서 중국의 적지 않은 대학들에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어용교수, 무능교수, 속물교수들이 속출하고 있다. 꿀도 따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수펄 같은 보직교수들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는 교직원 사회에서만 아니라 학생들 속에서도 만연되여 가고 있다. 요즘 연변대학의 대학가에는 요해부문의 보직을 맡은 “아무개 아무개 교수의 석사나 박사를 해야 전도가 있다”는 말들이 학생들 속에서 파다하게 떠돌아 있으며, 심지어는 그 보직교수의 석사연구생들 사이에서 쟁총(爭寵) 끝에 드잡이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보직 없이 오로지 학문연구와 교수에만 정진하는 일벌 같은 수많은 정직한 교수들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에피소드들이 많고도 많다. 필자는 연변대학에서 박사생지도교수로 십여 년 간 후학들을 맡아서 가르쳐 왔는데, 대부분은 외지 대학에서 재직으로 박사공부를 하러 온 젊은  학자들이 필자를 지도교수로 선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그네들에게 있어서 론문만 잘 써서 빨리 박사학위를 따는 게 상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박사학위를 따는 것 외에도 취직이라든가 출국 등 학문연구 밖의 실리를 챙기려고 하는 젊은 친구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파워가 막강한 보직교수를 택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학과의 한 젊은 교원이 이런 내막을 잘 모르고 필자의 박사연구생으로 공부를 했던, 외지대학에서 온 자기의 동창생에게 《너는 왜 아무개 교수(이 교수는 막강한 보직을 갖고 있는 보직교수임)를 도사로 선택하지 않고 김관웅 교수를 도사로 선택했는가?》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학문 외에는 아무런 행정파워도 없는 교수를 택해서 먹을알이 뭔가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직이 없는 필자는 후학들에게 학문의 젖은 줄 수 있지만 다른 실리의 젖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박사학위를 따려는 목적도 사실은 취직을 해서 밥 먹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니 이런 실리를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보직교수들은 학문수준의 여하를 떠나서 후학들에게 인기가 아주 높다. 젖 주는 게 어미라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올바르지 못한 대학의 풍토는 학생들의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관의 형성에도 많은 작용을 하고 있다. 즉 적지 않은 학생들은 학문에만 전념하는 교수들을 오히려 무능한 교수로 인정하고 학문보다는 《조직관리》나《벼슬감투쓰기》에 능한 보직교수들을 능력 있는 교수님으로 인정하고 아부를 하고 그 줄에 대려고 무진 애를 쓴다. 아부를 하다못해 노예에 가깝게 별별 잡역을 다 대신해 주며 보직교수들은 엎음 갚음으로 이런 젊은 친구들에게 많은 기회를 알선해 준다. 이런 풍토는 학파의 형성보다는 당파의 형성을 꼬드기며  교수사회와 대학가의 전반 물을 흐리고 있다.       이런 풍토는 적지 않은 교수들로 하여금 보직(당이나 행정직)이 무슨 큰 감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학문연구나 교수보다는 보직에 연연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수펄들을 일벌이 낳았듯이 원래는 학문의 싹수가 보이던 교수들마저 권력의 유혹을 못 이겨 분분히 수팔 같은 보직교수로 탈바꿈을 하려고 한다.      이런 악과가 빚어지게 되는 가장 궁극적인 원인은 중국의 뿌리 깊은 “관본위(官本位)”의 전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위(本位)는 바로 가치표준으로서  “관본위(官本位)”는 벼슬(官)의 높고 낮음을 사회가치의 계산 표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대학에서마저도  “관본위(官本位)”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다. “벼슬”이 높으면 의례 능력이 있고, 학문이 많고, 안계가 높고, 견해도 독특하고 심각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학문연구의 성과를 평가하거나 직칭(職稱)을 평정할 때도 론문을 발표한 단위의 행정급별로 그 가치를 평가한다. 국가급 간물에 발표하면 점수가 높고, 지방급 간물에 발표하면  점수가 낮다. 그래서 연변대학의 많은 강사, 부교수들은 이른바 “핵심간물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벼슬은 확실히 사회가치의 계산 표준임을 보아낼 수 있다.        아직 중국의 대학들이 교수 사이를 평등한 수평관계로서가 아니라 관청에서와 같은 수직적 상하관계로 묶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연변대학에서는 학문으로서의 파워(power)보다도 대학 내에서의 벼슬, 보직 - 행정적인 파워가 자신의 신분을 더욱 보장해 줄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많은 교수들의 잠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면 눈치 빠른 적잖은 교수들은 보직과 교수를 겸하여 실리를 챙기려 한다. 대학인 이상 교수직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또 교수직을 부둥켜안고 있어야 또 별로 먹을알이 없으니 량 손에 떡 쥔 식으로 보직과 교수직을 량 손에 거머쥐고 있으려 한다. 이런 교수들은 《학문적 변질》을 손쉽게 하게 되며, 량 손에 쥔 떡을 다 놓치지 않기 위하여 곡학아세(曲學阿世)까지도 서슴지 않는 서글픈 곡예사로 전락해 버린다. 부학무술(不學無術)의 학술류망들이 오히려 《능인(能人)》으로 떠받들리면서 대학가에서 보직에 교수직까지 거머쥐고 막강한 권력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심심찮케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비정상적인 분위기속에서 자기의 전공분야에 대한 독자적인 탐구만을 업으로 외곬 길을 걸어가야 할 적잖은 교수들마저 마치 정직한 일벌들이 무위도식하는 수펄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듯이 행정보직을 넘보는 학문의 외도군으로 타락해간다.      그래서 행정보직 교체기에 접어들기만 하면 교수들마저도 괜히 들떠 머리를 기웃거리며 원장, 처장, 관장 자리를 넘보는 판국이다. 사실 연변대학에서의 교수들이 벼슬자리 감투 하나 바라보고 헤덤빈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수는 강의나 잘 하고 연구만 잘 하면 되었지 무슨 행정적 파워나 벼슬감투인가 하겠지만 여기에는 그럴듯한 내막이 있다. 여기에는 연변대학만이 아닌 전반 중국 대학의 구조적 병폐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연변대학을 포함한 중국의 많은 대학들에서는 교수나 학생의 본위가 아니라 행정보직의 본위로 돌아가는 판국이기 때문이다.      벌집에서의 본위 또는 주체가 일벌이듯이 대학의 본위 또는 주체는 마땅히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와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이여야 한다. 선진국의 《교수치교(敎授治校)》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에서 나온 듯하다. 교수협의회의 파워가 막강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수 전화 한 통화만 해도 행정인원들이 척척 알아서 해주는 세상이다. 대학에서 행정업무는 교학(敎學)이라는 주체행위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정말 별 볼일 없는 말 그대로 보직(補職)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교수치교(敎授治校)》가 아니라 《행정치교(行政幹部治校)》형국이다. 이른바 행정간부들, 특히는 보직교수들이 쥐락펴락하는 판국이다. 그들은 말로는 《교학을 위해 봉사하는》 머슴, 청지기라고 하지만 그들의 입김이나 파워는 막강하다. 우리 학교의 경우 인사처장이나 교무처장이나 연구생원 원장, 과학연구처 처장   쯤 되어도 그 파워는 막강하다. 더 한심한 것은 강의를 하다가 수준미달로 쫓겨나 행정으로 넘어갈 경우 오히려 더 빨리 승진하고 《출세가도》를 달리는 아이러니도 비일비재하다. 여기에 비서에 승용차까지 따라 붙으면 기분은 붕 뜨고 그 기세 또한 기고만장해진다. 그리고 행정은 돈을 주무른다. 월급은 쥐꼬리만 하지만 보이지 않는 돈은 적어도 노루꼬리쯤 된다. 사인에 결재에 다 돈을 주무르는 재미다. 자그마한 학과장이라도 천신을 해야 제 쌈지 돈 쓰지 않고도 술 소비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중국의 관본위 관료주의형태의 대학가내에서의 전형적인 한 보기이다. 그러니 행정직은 자연히 보직(補職)이 아니라 보직(寶職)으로 탈바꿈한다. 그러니 너도나도 행정보직(寶職)를 거머쥐려고 발버둥이를 친다. 그런데 얄미운 것은 보직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감당하기도 어려운 교수직과 기타 학문적인 조직체의 장(長)마저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학가가 관청 같은 분위기로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들은 사실 행정직을 맡으라 해도 안 하며 또 맡겨서도 안 된다. 창의성이 있는 학자로 되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함은 물론이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그런데 책을 많이 보면 볼수록 자기의 무지가 발견되면서 볼 책은 더 많아지고 연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꼬리에 잇닿는 문제점으로 하여 연구거리는 더 많아진다. 언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학문에 전력투구하는 진정한 학자들이 가치를 인정받고 학생들로부터 존중을 받는 풍토가 조성되여야만 대학교수는 《벼슬의 꼭두각시》나 《정치적 눈치군》이 아니라《광적인 공부벌레》나 《용감한 가설의 제출자》가 될 수 있으며 대학은 정치판이 아닌 학문연구의 전당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대학들은 관본위, 행정본위의 가치관을 떠나서 학술본위, 교수본위로 가치관의 전향을 철저히 해야만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으로, 진정으로 학문적인 창의성이 있는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하여 학문의 꿀을 따는 데만 정력을 바치는 부지런한 일벌 같은 교수들이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될 때 대학은 진정으로 희망이 있는 대학으로 될 것이다.                                         2007년 5월 10일 연길에서
54    사이버시대, 글로벌시대 그리고 애정의 변질 댓글:  조회:5241  추천:127  2007-05-07
사이버시대, 글로벌시대 그리고 애정의 변질 김 관 웅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사이버(cyber) 시대, 즉 가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가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호텔이나 다방이나 사무실이라든지 하는 데를 가면 종이나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造花)가 생화(生花)를 제치고 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본다. 아무리 조화가 생화보다 색채가 더 현란하고 모양이 더 곱고 앙증맞다 해도 자연의 향기가 없는 가상적인 꽃에 불과한 가짜 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이 세상에서는 가짜의 꽃이나  나무들이 진짜의 생화나 나무들을 쫓아 버리고 더욱 우리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종이나 천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는 생화의 대리라고 할 수 있다. 비유를 할 것 같으면 지금 세상은 본인보다 대리인이 더 우쭐하는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허구의 세계, 가짜의 세계, 대리의 세계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 대부분 가정에는 텔레비죤도 있고, 컴퓨터도 있다. 텔레비죤이나 컴퓨터에 비치는 화면의 세계, 흔히 우리는 그것을 사이버의 세계라고한다. 이 가상의 세계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들은 누구나 절실한 체험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황산이나 미국의 나이아가라폭포 같은 관관명소를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는 텔레비죤 화면을 보는 것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유효할 수 있다. 왕복비행기표와 숙박비 몇천딸라를 내지 않고서도, 한장에 백딸라도 훨씬 넘는다는 입장권을 사지 않고서도 우리는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지난 6월의 한일 월드컵의 수많은 감동적인 장면들을 죄다 현장에서 보듯이 보지 않았던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날 현실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 가상의 세계를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즉 비추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텔레비죤이나 컴퓨터에 비친 가상의 세계가  아무리 현실의 진짜 세계보다 더 실감이 나고 더 효과적이라고 해도 역시 앞에서 언급한 가짜 꽃인 조화가 진짜 꽃인 생화의 대리인것처럼의 현실세계의 대리일 따름이다. 그림자의 세계일따름이다.   그림자의 세계는 우리 인간의 시각인 눈을 즐겁게 해줄 수는 있지만  다른 감각기관은 별로 즐겁게 해주지 못하고 인간의 기타 다른 욕구는 별로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이를 테면 인간의 식욕을 그림자의 세계로서는 만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에는 화병충기(畵餠充飢)라는 성구가 있고 우리 말 성구에도 리라는 말이 있는것이다. 한마디로 그림속의 떡으로는 배 고픈 것을 말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디 식욕뿐이랴.  성욕에 바탕을 둔 인간 남녀들의 성애도 가상적인 세계로써는 종국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텔레비죤에서 미스 월드의 화용월태를 본들 감질나기나 할뿐 무슨 문제를 해결하는가.  요즘은 연길에서도 컴퓨터의 대화방에 들어가 채팅을 하는게 크게 류행하고 있다. 가상적인 세계에서 생면부지의 남녀들이 서로 님이요, 남이요 하면서  숱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재미나는 해프닝들이 일어나고있다. 만족되지 못한 사랑의 욕구를 채팅을 통해 만족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욕구의 대리배설에 불과하며, 어디까지나 감질나는 에 불과하다.    단지 생면부지의 남녀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이 일고 있는 오늘날의 가상세계속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결혼 그리고 결혼에 의해 맺어지고 있는 부부관계도 준엄한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그 실례를 한국 권지예의 소설 를 실례로 들어 보자. 이 소설의 제목부터 해석한다면 “마리오네뜨”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인형이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제목을 단다면 이라고 달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30대중반의 젊은 부부이다. 남편은 프랑스 빠리에 가서 류학을 하고 안해는 한국 서울에서 과외지도를 하면서 어린 딸을 기르고 있고 남편의 뒤바라지를 해주면서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안해는 남편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으면 잔화를 한다. 가상적인 공간에서만 부부는 전화선을 통해서 련결되여 점점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소원해지는 자기들은 부부임을 다시 확인하군 한다.   어느 날, 안해는 빠리에 가는 비행기에 오른다. 빠리에 가서 남편을 만났지만 남편이 남편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오히려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서먹서먹한 느낌이 든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부부관계도 갖지만 그때 그 순간뿐이고 지나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허무감이 깃들고, 정이 안 든다. 그러던 차에 남편이 나가고 난 뒤에 안해가 방을 청소하다가  자기 것과는 색갈이나 형태가 판이한 다른 녀성의 음모(陰毛)를 발견하게 된다. 남편이 자기가 없을 때 저지른 불륜의 증거를 찾아내게 된 것이다.   남편의 불륜의 증거를 찾은 그날, 남편이 귀가했을 때 남편에게 화를 낼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고 하니 자신을 자해하는 자살극을 벌인다. 이;렇게 소동을 벌이니까 놀란 남편이 안해를 달래면서 간신히 진정되기는 했으나 안해는 영영 아물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전화라든가 컴퓨터 같은 가상적공간속의 한 가닥의 줄에 매달려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부부관계를 인형의 관계와 같다고 해서 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서울과 빠리에 전화선이 련결되여 있어서 부부가 전화를 통해 말을 주고 받기는 하지만 실제로 손을 잡고  살을 섞을수있는게 아니다. 부부의 관계는 상대방의 숨소리를 제 귀로 직접 듣고, 상대방의 체취를 제 코로 직접 맡아보고, 몸과 몸이 직접 접촉하는 그런 관계이다. 두몸이 아니;라 한몸이 되는게 부부관계이다. 텔레비죤, 컴퓨터, 전화를 심벌로 하는 오늘날의 사이버시대는 우리의 몸이 대방의 몸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시대이다.   의 부부는 부부가 아니라 인형이 되여 버린 것이다. 살과 살을 섞는 부부가 아니라 가상적인 부부, 즉 실제상에서는 남남인 가짜부부가 되여 버린 것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안해는 안해 대로 스스로 인형으로 바뀌여 버린 것이다. 법적으로는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부부이지만 유명무실한 가상적부부로 되여 버린 것이 어디 소설중의 허구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가.   우리의 중국조선족사회는 비록 아직은 진정한 아이티혁명의 시대와는 일정한 거리기 있기는 하지만 글로벌리즘시대에 들어섰음은 분명히 보아낼 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이제는 한국만이 아니라 로씨야, 프랑스, 독일, 미국, 카나다 같은 구미는 물론이고 호주, 뉴질랜드, 사이판 같은 대양주 그리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남미에까지 발길을 뻗치고 있다. 그래서 중국조선족을 집씨족에 비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집씨족은 류랑을 하더라도 가족을 포함한 동네 전체가 함께 류랑을 하지만 우리 중국조선족은 부부가 헤여져서 떠돌이를 한다는 점이다.   작년에는 전 연변의 제정경제수입보다도 해외에서 연변조선족들이 벌어들인 외화가 더 많았다고 한다. 표면상이나마 연변의 번영은 사실 해외에 진출한 연변의 조선족들이 벌어들인 외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요, 유득(有得)이면 반드시 유실(有失)인 법이다. 해외진출은 통해중국조선족이 잃은 것은 아주 많지만 그 중에서고 가장 큰 잃음은 인형화된 부부관계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강좌만 보아도 그렇다. 나와 나보다 네살  년상인 선배한 분를 제외하고는 기타 네명은 모두 부부리산의 고배를 마시고 있는 중이다. 한창 녀자 맛, 남자 맛을 알 나이에 부부가 헤여져 사는 것이다. 2, 3년의 잠시적인 리별도 있지만 개중에는 10년 동안이나 헤여져 사는 친구도 있으니 옆에서 볼 바에도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적어도 인도주의원칙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대학교수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리실업을 당한 로동자들이나  농민들은 아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부부리산의 파생물로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한국에 돈벌이를 간 중국조선족들사에서 확산되여 가고 있는 림시부부현상이나 로씨야에 진출한 중국조선족들 사이에서의 따발(搭伴兒)현상이다.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사이버시대에는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에서 이런 부부관계의 가상화, 인형화추세가 더욱 심각해지지 않겠는가.  
53    세상은 돌고 도는 법 (김관웅56) 댓글:  조회:5308  추천:88  2007-03-29
세상은 돌고 도는 법   김 관 웅     동양사람들은 순환론적 사고방식을 갖고있다.    즉 세상만사는 돌고 돈다고 생각한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추운 겨울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다. 춘, 하, 추, 동은 돌고 돈다.   봄에 만개했던 꽃도 하루 아침에 시들어 떨어지는 법이고, 시들었던 꽃도 봄을 맞으면 다시 꽃이 피는 법이다. 꽃이나 풀 같은 산천초목도 돌고 돈다.        아침에 동천에 욱일승천하던 아침해도  저녁이면 서산에 맥없이 지는 법이고, 어두은 밤이 지나면 또다시 아침해가 동천에 솟아오르는 법이다.   달은 둥글어졌다가도 기울어지고 기울어졌다가도 둥글어지는 법이다.      해도 돌고, 지구도 돌고, 달도 돌고, 별도 돈다. 일(日), 월(月), 성(星), 진(辰)은 돌고 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로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맑게 개였던 날씨도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면 음침한 날씨로 변해지고, 련며칠 장마비도 그치면 쨍 하고 해뜬 날이 된다.     그래서 중국에는 "山不轉水轉"이라는 말이 있다. 설사 산은 돌지 않는다고 해도 물은 돌지 않는가.     자연현상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제반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청년, 장년시기가 지나면 노년과 죽음의 시기가 다가오는 법이고 노인들은 죽어가고 젊은이들은 자라나는 법이다.    얻게 되면 언젠가는 잃게 되는 법이고, 잃게 되면 언젠가는  얻게 되는 법이다.     개인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한 집단이나 국가 같은 인간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합쳐진지 오래면 헤여지는 법이요, 헤여진지 오래면 합쳐지는 법이다.     천하를 석권하고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도 두 대를 넘기지 못하지 않던가. 천하절색 양귀비도 때가 지나니 그만이지 않던가. 그래서 "삼십년하동, 삼십년하서(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라는 말이 있잖은가.     세상의 정치세력이나 정치판도는 돌고 도는 법이다. 오늘의 여당이 래일에는 야당이 될수도 있고, 오늘의 야당이 래일에는 여당으로 될수도 있는 법이다.    청명한 세상이 어지러운 세상으로 변할 수 있고, 또 세상이 어지러워 진지 오래면 맑아지는 법이다.     바른 길을 걷다가도 비뚠길로 들어갈 수 있고, 비뚠 길을 오래 걷다가는 바른 길로 돌아가는 법이다.   그래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상만사는 바른 길로 돌아오게 되여있는 법이다.   요즘 우리문단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동양의 순환론이 다 틀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2007년 3월 22일  연길에서
52    야누스, 구미호 그리고 미문(美文)(김관웅54) 댓글:  조회:5061  추천:79  2007-03-18
        야누스, 구미호 그리고 미문(美文)                                   김관웅야누스(Janus)는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이다. 야누스의 머리 앞뒤에 같지 않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영국 소설가 스티븐슨의  소설『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야누스라는 이 고대신화의 원형을 갖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지킬박사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의사로서 훌륭한 도덕성과 연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 내심속의 선(善)과 악(惡)의 부동한 경향을 탐구하기 위해 약을 발명하게 되는데, 그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자기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이드씨라는 자기의 화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지킬박사와는 달리 하이드씨는 철두철미한 악한이였다. 하이드는 가지가지의  악행을 저지르다가 나중에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 이처럼 지킬박사는 선(善)과 (惡)을 한 몸에 담고 있는 량면파로 되어 버린다. 나중에는 악한 하이드씨가 착한 지킬씨를 압도하게 되자 경찰이 체포하러 오기 전에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리론중의 심리구조설과 인격구조설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인 도덕과 량지와 본능적인 욕구사이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도덕적인 나인 초아(超我)와 본능적인 나인 본아(本我)의 량극적인 대립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리론에 의하면 야누스 같은 량면성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으로서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갖고 있는 인간들의 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량면성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우리 문단에는 한 녀류 문인이 있는데, 이 친구는 가장 전형적인 야누스적인 량면파이다. 돈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이 녀자는 도처에서 남의 돈을 홀려낸다. 그리고 탕녀인 이 녀자는 남자들을 호려서 간도 내어먹는 구미호(九尾狐)이다. 이 구미호 때문에 여지 없이 망신을 당하고 불행을 당한 남자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은 남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의  글은 온갖 미사려구와 가짜 감정을 동원하여 가장 장식적으로 아름답게 미문(美文)으로 꾸며졌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고 하지만, 이 여자의 미문(美文)만 읽는 독자들은 자칫하다가는 글의 작자를 천사로 련상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글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이 여자의 본질을 간파할 수가 없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위장한 꽃뱀 같은 존재이다. 이 꽃뱀은 살모사에 못지 않은 극독약을 지니고 있어 한번만 물리면 남자들은 치명상을 입는다.      한마디로 이 녀류문인은 가장 추레한 영혼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할 줄 아는 언어의 련금술사이다. 이런 가짜문학은 자기를 기만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수많은 독자들을 기만하는 사기행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신성한 문학에 대한 모독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 진정으로 아름다운 문학작품은 선량하고 고상한 령혼의 샘터에서 솟아나는 깨끗한 샘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 두자.    우리 모두 글과 인격은 작가에게 있어서 마치도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여서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모자라도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2007년 3월 12일 연길에서 
51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은 녀인 댓글:  조회:5265  추천:150  2007-03-16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은 녀인 김관웅  2004년 5월의 하루, 북경 경도 신원반점에서는 뜻 깊은 만남이 있었다. 문화혁명기간에 왕광미의 남편인 류소기는 모택동에 의해 억울함을 당해 목숨까지 잃었다. 그리고 왕광미 자신은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의 박해를 받아 진성감옥에 10년 이상 갇혀서 말로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므로 왕광미에게 있어서 모택동과 강청은 불구대천의 원쑤임이 틀림없을 것이고, 고양이와 쥐보다도 더한 앙숙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광미가 모택동의 두 딸인 이민(李敏)과 이눌(李訥) 그리고 두 사위와 자식들을 만나서 함께 회식을 하였던 것이다. 두 시간 남짓한 회식 자리에서 왕광미는 모택동의 딸들인 이민(李敏)과  이눌(李訥)을 보고는 “몸을 주의하고 잘 살아가라“고 당부했고, 이민(李敏)의 딸과  이눌(李訥)의 아들을 보고도 여유 있게 덕담을 했다고 한다.      이민(李敏)은 모택동과 하자진(何子珍) 사이의 딸이나 이눌(李訥)은 모택동과 강청 사이에서 태여난 딸이다. 왕광미는 강청의 질투로 인해 감옥에서 10년 동안이다 옥살이를 하고 구사일생으로 문화혁명이 끝나자 출옥했던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돌아 문화혁명이 끝나자 강청은 사형을 언도 받고 유예집행으로 감옥살이 10여 년 만에 옥사를 했다.      이 날 왕광미의 의도에 의해 마련된 모씨 가문과 류씨 가문의 만남의 자리는 두 가문 사이에 얽히고설킨 지난날의 은혜와 원한을 다 잊자는 그런 만남의 자리였던 것 같다.     2005년 10월 21일 왕광미가 별세하자 모택동의 두 딸과 자식들은 왕광미를 모신 령당에 찾아가서 조문을 했고, 강청의 외손자인 왕효지(王效芝)는 닷새동안이나 매일마다 왕광미의 령당을 떠니지않고 고인을 지켰다고 한다.       원쑤를 갚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에 고통을 안겨주었던 원쑤를 영원히 복수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원쑤를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방식이다.      왕광미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은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세의 범속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마음을 초월한 거룩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선택이다.     휴머니스트인 빅토르 유고는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바 있다.   “대지보다 더 넓은 것은 바다이고, 바다 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며,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왕광미는 가히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은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3월 11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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