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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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문학의 문화적정체성에 대한 모색(1)
2011년 04월 30일 09시 23분  조회:3389  추천:20  작성자: 김관웅

개혁개방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문화적정체성에 대한 모색(1)


김관웅 연변대학 교수




1.     1. 들어가는 말
 

중국조선족은 조선한반도로부터 두만강, ․ 압록강을 건너 주로 중국 동북지방에 정착한 조선인韓人농민들로 이루어진 이민공동체로부터 형성, 발전되여어 온 특수한 민족공동체로서 이미 중국에서 150년의 력역사를 갖고 있다. 이 점에서 중국조선족은 식민지시대 일제의 강제징용 혹은 류유학을 갔다가 정착한 재일조선한인들이나 도시시민과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재미한인들이나 광부나 간호사로 갔다가 정착한 재독한인들, 그리고 기타의 해외의 한인(조선인)들과도 많이 다르다. 중국조선족은 이민초기의 그 출발점은 비슷했지만 특히 1937년 중앙아시세아에로의 강제이동으로 하여 모국과 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재로러고려인들과도 많이 다르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은 벼농사를 주축으로 하는 농촌마을공동체의 토대우 위에서 형성되여어 온 것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조선족사회는 그 속성상 여전히 전통적인 농업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1978년 중국에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조선족들에게도 중국의 대다수 국민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에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라고 국제화, 세계화로 인해 도래된 다문화시대는 중국조선족에게는 약과 병을 동시에 주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 워낙 소수자로 동화의 위험에 직면해있었던 중국조선족은 아무런 준비가 없이 이 거센 세계화, 국제화, 다문화 시대의 충격 속에서 많은 것을 얻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조선족농촌공동체의 와해와 붕괴가 초래한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자연스럽게 개혁개방 후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 정체성에 대한 모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2. 개혁개방 전기 중국조선족문학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1978년에 시작된 개혁개방은 과거모택동시대의 종말과 새등소평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다. 개혁개방 전기는 대체적으로 1978년부터 1990년까지로서 중국조선족사회로 놓고 말한다면 전통적인 농업사회로부터 도시사회에로 점진적으로 이행해갔던 시기였다.

이 부분에서는 주로 력역사제재와 현실 제제의 문학창작을 통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모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력역사제재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주지하다싶이시피 중국조선족문단은 1958년에 벌어졌던 이른바 ““지방민족주의””를 숙청하는 ““민족정풍””과 “문화대혁명” 중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민족문화혈통론””에 대한 대 비판을 거친 뒤에는 ““민족””이란 두 글자만 말해도 얼굴색이 변해지는 그런 상황이여어서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거론하는 것은 금지구역으로 되여어 왔다. 그러나 사상해방을 제창하고 문학 분야에 해동解凍의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선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에는 이민사에 대한 재현을 통해 중국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김학철(1916~―2001)과 리근전(1929~―1997)의 창작을 들 수 있다.

김학철의 장편소설 《『격정시대》』(1886)는 지난 세기 3. 40년대 본인이 한국의 서울에서 탈출하여 중국의 상해, 남경, 무한, 장사, 태항산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던 반일무장투쟁의 경력과 다문화적 체험을 기록한 대작이다. 이 작품은 다분히 자서전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일제식민지시대의 한 지식청년이 점차 민족의식에 눈이 뜨고 결연히 서울을 떠나 중국에 와서 굳센 반일투사로 성장해 가는 파란만장한한 과정을 그린 대작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1994)의 역시 그의 파란만장한 문화신분의 선택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김학철은 민족정체성을 가장 올곧게 지켜온 항일투사들 중의 한 분으로서 이런 문학창작을 통해 인멸되여어 가는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를 문학창작으로을 복원해 놓음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데 큰 공적을 쌓아올렸다. 바로 이런 까닭에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은 한국에서도 출판되여어 넓은 독자층을 보유했던 작품으로서 전반 조선한민족문화권에서 커다란 공명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절름발이
현대사를
한쪽 다리로
걸어온 사람
당신은 외다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잘린 다리가
더 찬란해 보입니다
봄이 오면 죽은 풀이 되살아나듯
그대의 외다리는
우리의 다리를 깨워
둘에서 넷으로 넷의 넷으로 아홉의 아홉으로
일어서게 합니다
한명의 배고픈 이 있어도
배부른 행복이 죄가 된다는
큰 말씀이
잘린 다리를 또 자른대도
날마다 새롭게 솟아나는
님의 다리는
사슬이 긴 우리의 력역사입니다.

““잘린 외다리””로 표상되는 김학철의 치렬열한 문학정신은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 조정래의 부인이며 녀여류시인인 김초혜가 읊은 것처럼 ““사슬이 긴 우리의 력역사””의 상징이며 중국조선족 나아가서는 조선한민족의 력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이처럼 김학철을 포함한 항일투사들의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중국의 항일투쟁을 지원했다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조선한국의 국권회복과 민족의 해방이라는 이 이중적 사명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였다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의 《『격정시대》』와 《『최후의 분대장》』 같은 작품은 중국 조선족사회와 한국에서 모두 커다란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김학철의 마지막 최후의 순간들은 어쩌면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가장 심금을 울리는 일종 퍼포먼스 - ―행위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민1세로서의 김학철은 림임종에 자기의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들을 우편함박스에 담아서 두만강 강물에 띄우되 그 우편함박스에 ““원산앞바다 행, 홍성걸(김학철의 본명임) 친족 받음”” 이라고 밝혀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중국조선족문단의 후배들은 김학철의 유언에 좇아 두만강 강가에서 김학철이 1940년대 태항산에서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된 조선의용군의 일원으로 일제와 싸울 때 지은 ““조선의용군추도가””가 장중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 우편함박스를 두만강에 띄워어 보냈던 것이다. 락낙엽귀근이라고 김학철은 죽은 뒤에 혼이라도 자기가 태어여난 고향 원산에 돌아가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이민1세인 김학철의 정체성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북간도(중국 동북 연변지방)에서 살았던 조선한인이주민들의 장례(葬禮)에는 ““혼(魂)보내기””라는 절차 하나가 더 있었다고 한다. 상여행렬이 두만강 기슭을 거쳐 가게 되었였는데, 그곳에서 고인이 남자이면 신었던 신발을, 녀여자이면 꽂았던 비녀를 강물에 띄여어 보냈다고 한다. 두만강의 강물을 타고 혼(魂)만이라도 고향에 돌아가서 살도록 하려는 리이향민들의 비원(悲願愿)이였던 것이다. 그 시절에 북간도에는 ““혼 보내기””를 할 때 부르는 “변조 「아리랑”」이 널리 전해졌지고 있었다고 한다.

간도 벌 묵밭에 무엇 보러 떠나와서
동토에 얼어붙어 발을 못 떼나
백두산 령영마루 울면서 넘어왔듯
고무신이라도 웃으면서 넘어가소
두만강 줄기 울면서 저어왔듯
비녀를 노 삼아 웃으면서 저어가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북간도에 이주한 조선인한인이주민 제1세들에게 있어서 장백두산이 민족의 심성이 담긴 머리라면 두만강은 민족의 심정이 흐르는 피핏줄이고 조선한반도 삼천리강산은 뿌리요, 근원이었였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였었다.

리근전(1929―〜1997)의 장편소설 《『고난의 년대》』(1984)는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첫 대작이였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일찍 1950년대 초기로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작품으로서 개혁개방을 맞이아하여 비로소 집필할 수 있게 된 작품이다. 리근전은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의 창작동기를 밝힌바 있다.

““우리 민족의 과거 역력사를 진정으로 앎으로써 오늘 우리 민족이 반드시 서야 할 위치를 자각하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족은 조선에서 살수 없어 쪽박을 차고 중국에 밥을 빌어먹으러 건너왔다고 하는데 이는 편면적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우선 대자연과 싸웠고 봉건계급,과 관료 아치들과 투쟁하여 왔으며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여러 민족이 어께 겯고 싸워 중국의 근대사를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썼던 것입니다. …… 우리 민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는 기초를 여러 민족들과 함께 닦아 놓았고 동북에 벼농사 기술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력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넋을 지키고 노래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리근전은 바로 이런 창작동기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족인민들이 조선에서 중국 동북에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게 된 연유와 과정 및 조선족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반영하였으며 점차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고 자기의 힘을 키우면서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령영도 밑에서 형제민족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일 투쟁에로 궐기된 피어린 력역사를 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하였다””고 기존의 문학사 저서들에서는 평가를 하고 있다.

특히 리근전은 이 작품에서 중국조선족의 개척사와 투쟁사를 많은 편폭을 통해 재현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은 가만히 앉아서 남이 이룩해 놓은 것을 나누어 먹거나 혹은 중국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고난으로 점철된 장기간의 개척과 투쟁을 통해 중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자격과 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박천수는 작자가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개척의 주제를 체현한 인물형상으로서 북간도에 이민해 들어온 후 천년 묵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성공시키고 조선의 뽕나무를 간도 땅에 옮겨 심으면서 인적이 없던 간도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고장으로 개척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청나라 관헌들이 강요하는 “치발역복(薙髮易服薙发易服)”의 귀화 정책에 맞서서 ““피땀으로 일군 논을 하룻루밤 사이에 떼이고 말았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하여 긍지를 느끼는 데서 그의이 강인한 민족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다.

박천수의 아들 박윤민은 작가 리근전의 이 소설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투쟁의 주제를 체현한 인물형상으로서 반일투쟁에 투신한 투사로 성장하며 나중에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어여 민족주의계렬열에 속했던 의병부대를 중국공산당의 영령도를 받는 항일무장대오로 개조하고 개편하는 과업을 맡아 나섰고 주력부대와 련연계를 잃은 상황 하에서도 계속 무장투쟁을 견지하다가 마침내 공산당의 지령으로 받고 연안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집정당인 중국공산당과 중국조선족 사이의 밀접한 련연관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한 여기 데서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 자기의 문화를 지키면서 조선족답게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와 자격을과 권리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였던 작자의 창작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다소 주제적인  경향의 차이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력역사제재의 장편소설들은 최홍일의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1999), 최국철의 장편소설 《『간도풍운》』(2005)에까지 이어졌다. 이런 주제적인 경향은 시에서도 보여지이고 있다.
 

비소리
바람소리
발목에 감고
쓸쓸히 누워있는
호젓한 한숨
보리밭 둔덕 당나무 아래
허리쉼 쉬고 간 사연
해빛에 별빛에
녹쓸지 않은
하늘을 허비고 땅을 짜개고
떠나간 생명의 연소
벌거숭이 쑥대밭 화전의 실연기
설원 몇 만리더냐 흰 꿈 검은 꿈 찍으며

-―김성휘,희 “「북향길”」(1988) 

짧은 시이지만 조상의 뼈빼가 묻혀있는 고향과 고국을 등지고 만주로 옮겨온 조선족의 이주사와 정착사, 개척사가 함축되어여 있다. 시인은 현재 중국에서 조선족공동체가 건재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난날 자신들의 생명의 마지막까지 연소시켜 가면서 생존을 위해 싸웠던 이주민 조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표현하였다.

2). 현실제재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상술한 역력사제재의 문학창작과 함께 현실재현의 문학창작은 이 시기 문학의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진정으로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였다. 

ㄱ. 김학철의 현실비판의 문학에서 보이는 다중적 문화신분.

김학철의 문학은 로신魯迅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불의에 대한 용감한 저항과 비타협적인 비판성향으로 특징지어진다. 로노신의 비판이 주로 과거의 중국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졌다면 김학철의 비판은 그의 말대로 ““국경도 시효도 없다.””

““선량한 사람들 ,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옥사(獄死狱死), 형사(刑死), 아사(餓死饿死)시킨 장본인들. 그 장본인들을 단죄하는 데는 시효도 국경도 있을 수 없다.””

김학철 문학에서 나타나는 ““국경도 시효도 없는”” 비판적 성향은 그의 이중적 문화신분과 밀접한 련연관성을 갖고 있다. 김학철의 이중적 문화신분은 조선의용대시절부터 형성되였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의용대는 이중성격과 이중임무를 지닌 부대였다. 이 점에 대해 《『조선의용군사》[1]』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사람이란 외국인 성격을 가지고 외국  땅인 중국에서 중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싸우는 부대이다. 그러므로 국제주의성격을 지닌 부대이다. 그들은 또한 자기 조국인 조선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조선민족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대오이다. 그러므로 조선독립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의 2중 임무는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일찍부터 동북 3성에서 일제와 싸우던 조선독립군은 자기의 정치적  강령이나 목표를 단순히 조선독립에만 두었다.””

김학철은 민족주의 정당이였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으로서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피 흘려 싸운 조선독립투사일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을 때는 남로당 당원이었고 월북한 후에는 조선로노동당 당원이었였고 중요한 선전간부로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히 조선적인 문화신분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40년에 입당한 오랜 중공 당원이었였고 팔로군의 간부로서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는 태항산에서 일제와 피 흘려 싸운 항일투사이기도 하였으므로 중국적인 문화신분도 갖고 있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은 중국과 조선에 대해 모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드높은 사명감을 갖고 중국과 조선의 정치에 대해 모두 지극히 관심하고 드높은 참여의식을 갖게 되였었으며 자신의 참여권을 당당하게 주장한바 있다. 동시에 항일의 봉화 타오르던 태항산의 항일 최전선에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의 일원으로 피 흘려 싸운 경력이 있는 김학철은 중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자신은 당당한 참여권과 발언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공민인 김학철을 중국의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에서 우파로 두들겨 팬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조선공민인 김학철이 중국의 정치운동인 ‘반우파투쟁’, 인민공사, 대약진, ‘반수방수운동(反修防修运动)’에 대해 그렇게 날카롭게 폭로하고 풍자하고 비판한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것은 김학철의 다중적 문화신분에 대해 잘 파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학철의 바로 이러한 이중적 문화신분은 그로 하여금 중국이나 여타 나라의 그릇된 정치에 대해 모두 자신은 비판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이런 이중적 문화신분과 다중적사명감은 그의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이중적 문화신분으로 인한 김학철의 다중적인 날카로운 비판은 1982년 이후 조선국적으로부터 중국 국적으로 옮기고 1989년 조선로동당원이기를 포기하고 중국공산당 당적을 회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김학철은 복권이 된 만년의 문필활동에서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아야 하는 고되고 아픈, 그러나 끊임없이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여 싸우는 삶을 살아오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러면 1980년대 이후 중국 공민으로,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국적과 당적을 옮긴 시점에서도 김학철은 어찌하여 조선반도의 사실에 대해서도 그처럼 당당히 자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김학철의 이중적 문화신분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학철은 자신이 갖고 있는 발언의 권리를 ““우리(조선의용군)가 지난날 일본군에 대항해 싸울 때 조선반도는 하나였다.”로 대변한다.

마찬가지 리이치로 김학철은 중국에 대해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발언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여 왔었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가장 살벌했던 1964년부터 1965년 사이에 김학철은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여 계급투쟁확대화와개인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로 인해 빚어진 ““반우파투쟁””에서의 지식인에 대한 부당한 처사 탄압에 대해 가차 없이 폭로, 비판했던 것이다. 바로 이 소설로 하여 혹심한 필화를 당하여 10년 옥살이를 하였지만 김학철은 복권 후에도 자기의 초지를 굽히지 않았다.

총적으로 ““디아스포라 작가””로서의 김학철 문학에서 시종일관하게 나타난 ““시효도 국경도 없는”” 강렬한 비판적성향의 밑바닥에는 다중적문화신분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아낼 수 있다.

ㄴ. 김성휘의 시 창작에서의 민족의식의 소생.
중국조선족시단의 시인들은 좌경로노선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도 개혁개방 이후의 시기에는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일정하게 찾게 되었였다. 그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 김성휘를 들 수 있다.

그의이 작품들은 이전에 보여주었던 찬양조의 송가 양식과 과장된 시의식을 탈피하고 서정적이고 내면화된 어조로 일상적 삶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 《『들국화》』(1982), 《『금잔디》』(1985),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고향생각》』(1989) 등에 실린 대부분 작품들은 어머니와 고향 그리고 이를 통해 암시하고 있는 시인의 민족의식의 소생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어머님이 지어주신
흰 옷 입고 창가에 앉았다
밝은 해빛 따사롭고
마음 한구석은 차겁다
(생략)
차라리 우리 어머님 나에게
검은 옷 지어 주셨다면
나도 그늘 밑에 시름없이 뒹굴며
도야지 개 신세로 살아가련만
아니 못한다
나는 죽어도 골백번 죽어도
어머님 베틀에 짜주신
흰 옷은 벗지 못해
흰 옷 입고 창가에 앉아
깊은 산 외진 하늘 아래
형제를 그리며 슬피 묻노라
흰 옷의 검은 때 언제면 벗으려
-―김성희, “「흰 옷 입은 사람아”」(1987)

여기서 어머니가 지어주신 ““흰 옷””은 바로 조선족의 민족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암묵적으로 드러내며, 어머니로 암시되는 ““모국””과 백의민족을 의미하는 ““흰 옷””이라는 고유한 문화적 상징을 통해 잃었던 혹은 잊고 있었던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시인의 자각을 드러내고 있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말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 ―윤동주, “「슬픈 족속”」 전문


중국조선족 시문학에서 흰색이미지는 민족의 상징으로 표출되는바, 이러한 흰색이미지에 대한 꾸준한 시적 관심은 윤동주의 상기 “「슬픈 족속”(1938)」으로부터 시작하여 력사적인 련관성을 보여주면서 김성휘의 상기 시를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한층 활발해졌다. 한창선의 “「산재마을엔”」, 리성비의 “「우리 춤”」, “「겨울소나무”」, 림금산의 “「하얀 집”」, 김동진의 “「흰 눈이 내리네”」 등이 이러한 흰색이미지를 시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 오더니
떡가루 날렸느냐 마을에 눈 내리네
이쁜이가 가는 길 시집가는 길
하얀 눈이 내리네
하얀연 너울 쓰고 간다
령길에 눈이 내리네
아 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히 내리네
하늘에도 배꽃잎이 곱게 날리네
하늘 땅 그 어데나 흰 눈이 날리네
있더라도 가더라도 우리 다 같이
티 없이 살아보자
흰 눈이 내리네
아 아 송이송이 하얀 눈이
산에도 들에도 소복히 내리네
-―김동진, “ 「흰 눈이 내리네”」 전문


이처럼 흰색이미지에 대한 시적 관심은 중국조선족의 민족 체험의 예술적인 승화로서 민족사랑 나아가서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것은 재로 고려인 작가 박미하일(1949-)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지는 흰색이미지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천사『들의 기슭》』이라는 소설에는 화가인 주인공의 내심독백이 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 하나만으로 정신이 피뜩 들 때가 있다. 유럽인이기도 하고, 조선인 얼굴을 한 로씨아인이기도 하고, 종이에다 그 알수 없는 문자로 내 이름조차 쓸 줄도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고(……) 조선에서 그 말이 제대로 통할 수 있을가? 내가 누구일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찾지 못했다. (……) 조선인에게 있어서 상실을 뜻하는 색은 흰색이다. 과연 하얀 흰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할가”

이 작품 중의 주인공인 화가에게 있어서 조상들의 고국인 조선은 ““흰색””이다. 즉 그 자신이 알지도 못할뿐더러 어떻게 손댈 수도 없는 색인 것이다. 또한 ““흰색””은 무(無无)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곧 그에게 있어 민족에 대한 이미지이다. 사실 작중 인물인 화가와 박미하일은 거의 중첩될 정도로 작품은 자서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처럼 박미하일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민족성에 대해, 다른 민족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특정한 민족의 의식이 증발된 인간일 뿐이다. 고려인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어느 “―족”으로서가 아닌 어느 인간으로 사유한다. 박미하일의 작품들에 대부분 고아인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민족성을 지우는 작업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하겠다.

박미하일과 마찬가지로 재로 고려인 소설가 아나톨리 김(1939-) 의 작품의 가장 주요한 주제는 민족성이 아닌 세계와 우주, 그리고 그 속에 끼여 있는 인간의 운명이다. 이처럼 중국조선족문인들이 자기의 민족성에 대해 분명히 인정하거나 재일조선인(한인)들이 민족성을 말살하는 일본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살아온 것과 달리 재로 고려인들의 민족성은 점차 모호해지고 있는 실정임을 그네들의 문학과 중국조선족문학의 비교를 통해서 여실하게 보아낼 수 있다.

아나톨리 김이나 박미하일은 배달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운명에 의해 로씨아땅에서 태여나서 로씨아국적을 소유한, 그리고 일부 국수주의적인 로씨아 작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로씨아어로 글을 쓰는 한 동양인””에 불과한 일반적 의미의 조국과 민족을 갖지 못한 방황하는 령혼이였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외톨이예술가의 관심이 민족과 국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보편적,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 내면세계로를 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이 비록 모두 “재외동포문학"이면서도 자기의 특수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ㄷ. 이 시기의 기타 소설 창작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모색.
개혁개방 이후 사상해방을 제창하고 국외의 사상이나 사조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중국사회는 문화부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여 이데올로기나 문화의 “일원일색(一元, 一色)”의 “공명(共名)”시대로부터 “다원다색(多元, 多色)”의 “무명(无名)”시대에로 이행하는 전형기(转型期)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중국 전반 문화의 변두리에 처해 있은 연변을 비롯한 동북 3성의 조선족사회는 여전히 농촌문화에 안주하고 있으면서 그 사회적속성은 아직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런 중국조선족사회의 농촌문화의 속성은 이 시기의 영향력 있는 작품들이 거의 다 농촌문화와 련관되는 농촌제재의 상처문학, 반성문학, 개혁문학에 속하는 것들이였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상처문학(伤痕文学)에 속하는 김관웅(1951―)의 단편소설 “「청명날”」(1979), 정세봉(1943―)의 단편소설 “「하고 싶던 말”」(1980), 윤림호(1954―2003~)의 단편소설 “「두만영령감”」(1978), ․ “「투사의 슬픔”(1985), 장지민(1947~―)의 단편소설 “「시카코 복만이”」(1983), 우광훈(1954~―)의 단편소설 “「시골의 여운”」(1986)이나, “반성문학”에 속하는 김관웅의 중편소설 “「신념”」(1982), 리원길(1944―)의 중편소설 “『백성의 마음”』(1981) , “․『한 당원의 자살”』(1985), 류원무(1934―2008)의 단편소설 “ 「비단이불”」(1982), 남주길의 “「접동골 녀인”」, 이밖에 “개혁문학”에 속하는 홍천룡(1955―)의 단편소설 “「구촌조카”」(1981), 림원춘(1936~― )의 단편소설 “「몽당치마”」, 윤림호의 단편소설 “「고향에 온 손님”」(1989), 최국철(19620―)의 단편소설 “「봄날의 장례”」(1987) 등은 모두 조선족 시골농촌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재로 하여 창작한 소설들이다. 도시의 생활을 소재로 한 김훈의 개혁소설 “「그녀가 준 유혹”」(1986) , 최홍일의 단편소설 “「도시의 음향”」(1985), 장춘식의 “「출국 전 강습”」(1989) 같은 도시제재의 작품들도 있기는 했지만 필경은 주류를 이루지 못했다.

상기 소설들 중에서 상처소설의 계렬열에 속하는 김관웅의 중편소설 “「신념”」은 1930년대 초반에 중국공산당이 령영도하는 간도의 항일대오내에서 수많은 조선족출신의 반일투사들이 그릇되게 숙청되였던 ““반민생단사건”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아 당시 여러 복잡한 환경에서 싸워나가야 했던 경계인, 소수자로서의 조선족의 위치와 고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김관웅의 단편소설 “「청명절”」은 “문화대혁명” 때 사인무리를 쫓는 그 일당들이 연변에서 조작했던, 1967년 “8.2일, 8.4사건””을 주요한 배경으로 삼아 바로 이 사건에 가담했다고 ““조선특무””로 몰려 탄압을 받은 한 조선족가정의 해체와 비극을 재현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중국에서의 소수민족으로 지내는 특수한 사정과 고통을 보여주는바 이런 작품의 발표는 조선족이 중국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자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며 아울러 민족의식의 소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전반 소설 창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리이원길(1944―)의 대하장편소설 《『땅의 자식들》』에 속하는 《『설야》』(제1부, 1989)와 《『춘정》』(제2부, 1992) 역시 농촌에서의 개혁개방을 둘러싼 중국조선족사회 조선족농민들의 심충적인 문화의식과 문화심리를 반영한 역력작이다. 이 작품에 대해 오상순 주필로 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산재지구 조선족마을에 대한 풍속도 같은 묘사 속에서 ‘‘우리 종족의 모습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중국 문화 속에 변이된 조선족특유의 문화정체성 및 민족의 생존상황을 문화적인 시각에서 풀이하고 있는바 《『설야》』와 《『춘정》』은 중국조선족 산재마을의 한 상징이며 조선족 백년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 “이 땅에서의 ‘‘본토적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확인하고 있다””고 한 평가는 적중하다. 다만 여기 언급된 이른바 ““본토적 성격””이란 표현은 중국조선족은 이미 중국에서의 백년 이상의 정착생활을 거쳐 이젠 철새가 아닌 터새 같은 존재로서 자기의 문화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였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하나 더 보태고 싶은 것은 리원길의 대하장편소설 《『땅의 자식들》』을 통하여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중국조선족사회의 속성은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벼농사를 주추축으로 하는 농촌사회이고 ““긴내천”” 같은 조선족 시골마을들은 비록 망망대해 같은 다수민족들 속에 절해고도처럼 포위되어도 사회조직체로서의 자기의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200만 중국조선족사회라는 문화공동체가 건강하게 존속할 수 있도록 담보해주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1990년대 이전에는 중국조선족의 농촌마을들은 수많은 혹독한 사회, 정치 변동의 시기에도 시종 병들지 않고 건재해 있었던 것이다.

연변문학 2011.4호
(다음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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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강 《조선의용군사》, 연변인민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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