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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2013년 05월 06일 10시 58분  조회:8124  추천:44  작성자: 김정룡



대청제국의 망국은 중화사상 때문

 

만약 대청제국이 조금만 융통성이 있었더라면 아편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8국 연합국의 침략도 없었을 것이며, 원명원이 약탈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국운명은 중국인이 스스로 빚어낸 결과였다.

중국, 중국이란 개념은 이렇다. 주나라 초기 중국이란 국호가 잠깐 등장했다가 그 후 청나라 말기까지 줄곧 중국, 중국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왕조호칭을 나라호칭으로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 서양이 중국을 침략하고 보니 역사와 문화가 유구하고 과거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데서 중국, 중국인이 반사적으로 반응하면서 중국, 중국인이란 호칭이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때론 이민족이 통치하던 위진·남북조시대와 몽골족이 통치하던 원나라 및 만주족이 통치하던 청나라시기 모두 자신들이 중국을 차지하고 있다는 관념이 강했다.

중국이란 말 그 대로 세게 중심이라는 뜻인데 본래 “중원을 차지하면 천하를 얻는다.”는 역사적인 맥락에 의해 어느 역사조대에서든 자신을 중국이라 여겼던 건만은 사실이었다.

어찌되었든 중국인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중심 국가, 또 문화가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에 주변 이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취급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중원을 기준으로 동쪽 이민족을 ‘동이(東夷)’, 남쪽 이민족을 ‘남만(南蠻)’, 서쪽 이민족을 ‘서융(西戎)’, 북쪽 이민족을 ‘북적(北狄)’이라 불렀다.

주나라 시기부터 중원의 천자를 중심으로 주변이민족과의 외교관계는 조공과 책봉의 패턴으로 굳어져왔다. 즉 주변 이민족은 중원조정에 특산물을 바치고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의 통치자를 00상장군, 00대장군, 00중장군, 00소장군 혹은 00왕의 식으로 책봉하였다.

중원조정은 주변 이민족과 단순한 조공과 책봉의 외교관계를 뛰어넘어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주변국에 보여주기도 하였다. 수양제(隋煬帝)는 정월 대보름이 오면 주변국의 사신들을 불러들여 대형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의 규모는 악사만 8천 명, 횃불을 든 자가 만여 명이었다. 음악소리가 사방 십리에 울려 퍼졌고 불빛이 사방 십리를 비추었다고 한다. 연회 기타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연회에 참석했던 외국 사신들은 아마 대제국의 스케일에 기가 죽어 있었을 것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 및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 유학생이 2만여 명이나 장안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주변국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가서 배운 학문은 주로 사서오경, 노자철학, 주역 등이었으며 과목이 단조로웠다. 지금처럼 학과가 세분화된 시대라라고 가정하면 유학생의 숫자는 아마 20만 명도 넘었을 것이다. 당시는 현시대처럼 국가 간 서로 유학생을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에서 일방적으로 당나라로 몰려들기만 하였다.

당나라시기 때론 주변국에 유명 인사를 파견하여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에 도사(導師)를 파견하여 오랜 시간을 머물면서 특강을 진행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의 실세였던 막리지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을 올렸다. “폐하, 가마솥의 받침대가 셋이듯 나라를 받치는 기둥도 세 개여야 마땅하오나 우리 고구려는 유교와 불교는 있으나 도교가 없어 기둥이 두 개이니 온전치 못하옵니다. 그래서 당에 요청하여 도사를 모셔오는 것이 지당할 것이옵니다.” 허수아비인 보장왕은 실세 막리지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윤허하였다.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도사를 파견하고 도관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도사의 강의를 보장왕이 직접 경청하였다고 적고 있다.

주변국 유학생이 장안에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또 도사를 파견하여 자기네 문화를 주변국에 전수하고 있었으니 중화사상의 우월성에 들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청나라는 비록 만주족이 통치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한문화 중심 국가였으며 여전히 한·당·송·명의 중화사상의 우월성을 물려받았다.

서구는 그리스 도시국가시대부터 무역을 중시해왔다. 그들이 무역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여 농경에 의해 생계가 곤란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무역에 의지하여 생존의 길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무역은 전체 서구에 전파되었고 따라서 서구의 무역은 점차 자유무역, 평등무역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한나라시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해외(중국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해외라고 표현함) 국가들과 무역을 많이 해왔으나 관방주도의 무역이었을 뿐 자유무역, 평등무역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 길을 열려고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영국의 왕은 “하느님이 중국 인구를 4억으로 만든 것은 우리 앵글로·색슨 민족에게 무역을 하여 부를 쌓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기뻐했다.

당시 영국의 복장 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중국을 고찰하고 나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중국인은 수의(睡衣 : 잠옷)을 입지 않고 있다. 만약 중국인에게 수의를 입는 법을 가르치고 일인당 한 벌씩만 사도 4억 벌을 팔 수 있지 않는가! 당장 인도의 수의옷감을 독점할 것이다.”라고 몹시 들떠 있었다. 마치 한국인이 수년 전에 중국에 진출하면서 “13억 인구의 중국시장은 우리한테 기회이다. 일인당 칫솔 하나씩 사도 13억 개의 칫솔을 팔 수 있으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도 돈을 산더미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자만에 찬 어리석은 판단과도 똑 같았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200년 전 영국인이 겪었던 착오적 판단을 한국인이 되풀이하고 있으니 말이다.

청나라 무역은 역시 관방의 주도로 통제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이 청나라와 무역을 하려면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했다. 그래서 황제를 찾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삼구구배(三叩九拜)’였다. 영국인은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예의가 없다. 그것도 한 번 아니고 세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리다니! 게다가 아홉 번씩이나 인사를 올린다는 것은 영국인에게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무역은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뭔 뚱딴지같이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아홉 번 인사를 올리다니 말이다. 영국 상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기 서양은 바티칸의 교황이 천하 중심이었듯이 중국은 중국의 천자가 세계 중심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 상인이 결국 중국인의 중화사상에 부딪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 상인은 절대 ‘삼구구배’를 올릴 수 없다고 뻗히고 중국 관리들은 만약 ‘삼구구배’를 거절하면 당신들이 바라는 무역은 죽었다 깨도 성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양쪽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자유와 평등을 토대로 하는 ‘국제관례’의 정상 무역은 깨지고 남은 것은 영국인이 무력으로 중국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이렇듯 청나라 말기의 중국이 결국 중화사상 때문에 당하지 않을 침략을 당했고 결과는 참담하게 패배하여 반식민지국가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정확히 말하면 통상전쟁이지 아편전쟁이 아니다. 통상전쟁을 아편전쟁이라 표현한 것은 당시 영국의회 전쟁결의안에서 전쟁반대파들(262표)이 전쟁옹호론자들(271표)을 공격하며 비난조로 들먹인 데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남경조약을 살펴보면 오구(五口)통상, 홍콩 할양, 관세체결, 자유무역 등 거의가 경제에 관한 것들이다. 통상전쟁이든 아편전쟁이든 중국이 패배한 것은 서구의 선진과학기술과 민주정치에 무너졌고 그 전쟁을 계기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중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시 조정에 여전히 예부(禮部)가 존재해 있었고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동아세아 조공책봉의 외교질서를 서구인에게 적용하려고 들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외교부에서 담당하는 국제관계 사무도 예부에서 취급하였기 때문에 나라와 나라 관의 관계는 평등관계가 아니라 여전히 중화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외교관례에 따라 움직이려 들었기 때문에 서구세력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청국 조정의 규정에 따르면 영국 관원들이 청 조정에 보내는 문건은 ‘품첩(稟帖 : 관청에 내는 신고서)이라고 불렀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사태는 바람 앞에 등화처럼 위태로웠으나 여전히 중화사상으로 무장된 수구파들에 의해 개혁이 이뤄지지 못했다. 엄복(嚴復)은 저서 《원강(原强)》에서 수구파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과거에 밝고 현재에 어두운 자는 하나는 얻고 둘을 잃은 것이다. 이들은 인류발전진화의 법칙과 서양 각국의 구체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맹목적으로 외국과 중국의 우열에 대해 세상 사람과 다른 고상한 견해나 내놓으면서 예의가 바른 백성이고 우수한 민족이며 주공과 공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고 예의로 다스려진다고 뽐낸다. 그들은 청일전쟁에서 여지없이 패하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러한 형세를 낳은 근본원인은 백성의 힘이 이미 약해졌고 백성의 지혜가 이미 낮아졌으며 백성의 덕이 이미 엷어진데 있는 것이지 결코 중국민족의 본바탕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또한 수천 년 동안의 중국의 전제정치와 사회풍속에 의해 조성되어 결국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엄복,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을 비롯한 진보학자들이 서양의 자유와 민주, 데모크라시(민주)와 과학(사이언스)로 중국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이들은 중국역사는 문화적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밝히는 ‘의고풍(擬古風)’을 일으키고 서양문화를 따라 배울 것을 호소하였다. 이들과 반대로 어릴 적에 영국 유학을 다녀왔고 9개 나라 언어를 마스터한 인문학자인 고홍명(睾鴻銘)은 수구파의 입장에서 서서 공자의 인의예지야말로 인류역사 이래 가장 지극한 윤리도덕이며 이상사회를 구축하는 최고 가치라고 주장하고 중국문화야말로 서양인이 배워야하는 모델이라고 역설하며 심지어 일부다처제를 찬양하고 부녀의 전족문화마저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중국인의 정신》이란 책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먹은 진보파들이 아무리 목이 쉬도록 떠들어대도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굳어진 수구파들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보파는 재야인사들이고 수구파는 권력자들이었다. 전제국가에서 당연히 힘의 균형은 권력자들에게 절대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보파의 힘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보파들의 노력에 의해 서구의 민주와 공화제가 폭 넓게 홍보되어 기울어져가는 청나라 군대는 더는 희망이 없는 청조정을 위해 싸울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한(武漢)에서의 한 방의 총소리가 268년 통치했던 대청제국을 무너뜨린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진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의 제국역사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참으로 비극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2천년 제국역사의 키잡이는 중화사상이었고 이 튼튼하고 견고한 키잡이로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제국역사를 창조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키잡이로 세상에서 가정 먼저 부유한 나라로 되었으나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손을 보지 않고 사용해온 키잡이가 고장 나 세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다. 먼 바다건너에서 밀려오는 ‘덕선생(데모크라시)’과 ‘사선생(사이언스)’의 파워에 밀려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사라졌으나 강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거친 바다에서 훌륭한 뱃사공이 탄생한다는 속담이 있다. 5천년의 문명에 2천년의 제국역사는 거친 파도와 같았다. 중화사상이 독이 되어 2132년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중화사상은 필경 신주인(중국인)의 귀중한 재부이다. 다시 재정비하여 신주대륙(중국)을 이끄는 처방으로 활용한다면 보약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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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9 ]

9   작성자 : 호들깝
날자:2013-05-06 17:42:59
있지도 않는 중화사상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건 좀 웃기다.
과저 황제를 중심으로한 중심관을 오늘날 중국에 대입하는건 억지스럽다.
자기 민족 또는 국가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절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미래에 대해 비관론 낙관론이 병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당장 망한다고 떠들고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당장 미국을 대체하는 것처럼 말하는 데 이 이러한 관점 모두 일종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골이 깊을수록 고개가 높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 중국의 발전은 과거 백여년간의 깊은 골이 있었던 연유로, 또 이러한 크고 깊은 좌절이 있었기에 새중국이 건립되고 그 뒤 반우파요 문화혁명이요 하면서 고통과 실패 좌절 등 댓가와 경험의 기초상에서 총결해낸 발전노선으로서 이미 실천과정에 그 거대한 활력이 충분히 증명되였다. 물론 세상엔 좋은 일만 있을수 없는 법, 발전과정에 나타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중국상하가 모두 위기의식 가지고 있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결방도를 찾고 있다. 민중들은 자기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데 이는 기득권층에 거대한 압력과 개혁적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8   작성자 : 허풍쟁이
날자:2013-05-06 17:19:54
중화사상은 결국 중국을 말아 먹을 것이다.
무술변법이 실패한것도 장개석의 국민당이 집권한 자본주의가 대륙에서 실패한것도 모우저뚱의 대약진 인민공사 문화대혁명이 실패한것도 중화사상이 크게 작용한것이다.
등소평의 개방개혁이 점점 어려워지는것도 이 때문이다.
온가보총리가 여러번 강조한것처럼 정치체제개혁을 안하면 이미 이룩한 경제개혁의 성과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20여년전 경제학자들은 중국의 구조적 고질인 관료주의 특권계층 사회부패가 결국 알면서도 점점해결하기 어려워져 자신의 무덤을 판다 했다.
정치권들에서도 매우 초조해하고있다.왕치산부총리가 추천한 프랑스 혁명을 다룬 서방저서를 최고위층에서는 물론 국유기업의 경영자들도 책상위에 놓고 늘 잃어보군한다.
읽어본 사람은 아마도 매우 깊은 사색과 우려로 초조해질것이다.
중화사상에도 좋은 명언이 없지않다.
살아서는 우려로 인생말로엔 안락으로.
7   작성자 : 호들깝
날자:2013-05-06 16:53:37
등소평이 말했다시피 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오늘날 중국의 정치사회제도를 객관에서 어떻게 부르든지 규정하든지를 막론하고 이 정치사회제도가 30년동안 중국으로 하여금 거족적인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물론 발전과정에 부패문제,빈부격차,환경오염 등 문제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이미 수백년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거쳐 법률,제도 등 면에서 상당히 성숙된 선진국도 부정부패를 완전히 뿌리뽑지 못하고 있거늘 인제 본격적인 공업화를 시작해서 30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법률,제도,의식등 면에서 성숙되지 않은 중국이 부정부패는 어느 정도 감수할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허다한 이른바 민주국가들은 중국보다 부정부패가 더 심각하다.

그렇다고 중국의 부정부패를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부패는 꼭 다스려야 한다. 다스리지 않으면 망당망국의 길밖에 없다.
그리고 빈부격차문제도 세계 그 어데도 빈부격차를 완전 해소한 나라가 없다. 다만 좀 웃기는 건 이른바 사회주의나라라고 하는 중국이 빈부격차가 아주 심하다는 것인데,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문제이다. 중국의 경제발전은 연해지구 중부지구 서부지구 등으로 나뉘여 근본적인 경제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그외 부정부패 등 요소도 있지만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환경문제를 놓고 말하면 어느정도의 환경희생은 이해하며 어쩔수 없는 문제다. 일부 지역에서 너무 성장만 강조한 나머지 환경피해 댓가가 경제성장 이익보다 몇갑절 더 큰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은 다 개선해야 될 문제다. 환경피해의 위해성과 심각성을 전민적으로 인식한 이상 이문제도 잘 해결되리라고 믿는다. 민중의 감독,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이미 선진국들보다 아득히 멀리 낙후되여 있던 중국의 발전은 어차피 한두세대의 희생이 없으면 이룰수 없었다. 서구열강들은 공업화에 필요한 원자재를 식민지에서 헐값으로 약탈하다시피 하여 공업화를 완성하고 재부를 축적하고 기술을 발전켰다. 이과정중에 이들도 오늘날 중국보다 더한 가혹한 노동력착취와 심각환 환경오염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이들은 막대한 재부와 첨단기술을 소유하고 이들 구미에 맞는 세계게임규칙 내지 질서를 세워 놓고 자기들 이외 다른 나라는 영원히 원자재 공급지 또는 하위산업에만 종사하게끔 묶어두려하고 있다.

개혁개방한 중국이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기존의 경제질서에 편입되여 그러한 게임규칙을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자기의 피땀으로 자기 자원을 소모하면서 환경희생을 댓가로 발전하는 것 밖에 다른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바로 중국의 토지개혁으로 인한 토지 국유화, 호구제도 ,인구혜택 등이 자본주의적 요소와 유기적으로 결합되면서 엄청난 추동력으로 되여 중국의 거족적인 경제발전을 만들어 낸것이다.
현재의 문제는 커진 파이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사실 분배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도 나눌 파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발전이 없다면 이런 문제자체가 대두되지도 않는다.
6   작성자 : 개방된 사회
날자:2013-05-06 16:09:40
어제 중국사회과학원의 조사에 의하면 피방문자중 좌경사상을 가진사람이 38%,우경사상을 가진 사람이 8%로 기억하고 있다.장미빛 미래가 아니다.
세대가 바뀌면서 등소평 호요방이 개척한 개방개혁의 노선으로 복귀한다느 희망도 있었다.시진핑총서기가 썬전(심수)을 금년초 방문한것도 이를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노간부뿐만 아니라 좌경 모좌 노좌사상을 가진 문화대혁명 세대와 양극화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좌경으로 기울어져 전반 국세도 좌로 번질수있다는 견해도 지식인들 가운데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제교류가 빈번활성화되는 현인터넷정보사회에서 어리석은 뒤걸음질 퇴보 반문명 우민화 정책은 더 어리석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선다.
개방된 문을 다시 꽉 닫고 잠굴수없기 때문이다.
5   작성자 : 정직하자
날자:2013-05-06 15:52:10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아래분이 올린 글 처럼
"가난한 농민의 후손으로 천대와 억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총을들고 혁명에 참가해서
계급투쟁의 길에 나섰고 지주 자본가를 뒤엎고 사회주의 신중국을 건립했다."
그러나 현재는 혁명전 상태로 돌아갔다..
총을들고 혁명에 참가한 일부 소수들이 권력과 재물을 대를이어 세습하고 있다...
대다수 일반 농공민들의 배고픔은 여전하고....
한마디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어리석은 일반 농공민들을 이용하여 소수
기득권층들의 배만 채우겠다는 엉터리 용어이다...
그렇다면 또다시 다른 혁명세력이 대다수 어리석은 농공민들을 속여서 혁명읋 하여야만
한다는 결론이다...
한마디로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공산당 정치꾼들의 입 장난에 불과하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어디에 있나??
4   작성자 : 변하지않는 중국 변하는 중국
날자:2013-05-06 15:28:11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라면 백성들이 잘사는 자유민주국가로 인식되지만 중국엔 그렇지않았다.가난한 농민의 후손으로 천대와 억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총을들고 혁명에 참가해서 계급투쟁의 길에 나섰고 지주 자본가를 뒤엎고 사회주의 신중국을 건립했다.
하지만 제도적으로 많이 결핍하여 경제개혁을 위주로한 개방개혁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두었지만 사회복지와 정치체제개혁은 제자리었다.그결과 관리와 상인 상업의 결합이 되어 특권계층이 생겨나고 정부나 관리부패를 제도적으로 제거하기 어려워졌다.경제도 민간경제가 활성화되기 어려운 관상경제 즉 국가자본주의 형태로 점점 힘들어가고 있다.체제개혁을 안하면 안된다는 도리도 모를 리 없다.
문화발전에도 매우 신경을 쓰지만 모든 일에 정부나 크고 작은 관리가 나서니 지방뉴스를보면 알듯히 재미가 전혀 없었다. 문화를 백성교육과 정치선전에만 이용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과 방법이다.세계각구에 큰돈들여 만든 공자학원도 이 모양이다.사영업체 민간 개인이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지혜나 감동력 공신력 소프트파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드림도 마찬가지이다.
중화사상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낙후하고 경직된 전통사상을 토대로 "엔징과 전보기계만 주입"하고 선진적인 민주법치제도를 외면하므로 남들이 모두 피해가는 힘만가지고 지혜와 도리를 모른는 꺽다리힘장사가 되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도리를 지금 현명한 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다 아직도 자본주의 자유 민주 평등이란 말만들으면 분노해서 펄쩍 펄쩍뛰는 노간부가 남아있고 늘 영향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현명한 중국지식인들은 헌법을 선두에 놓고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기초로 점진적으로 민주법치국가 인권도 부단히 개선하고 극단민족주의 선군정치 유아독존엔 거리를 두고있으며 경계도 하고있다.영원히 패권주의를 부리지않는다고 선언 다짐했다.
민주 자유 인권이 나쁠리 없다란 말도 중앙당교의 교수의 입에서 나왔다.전인류의 보편적 진리와 가치도 당18대회의에서 결의문으로 나올정도로 많이 변하고 있다.총서기도 집권당을 포함해 전국인민들은 국가헌법에 근거해 사고하고 준수하며 행동하라고 여러번 강조하며 제창했다.
좌경이나 우경이나 모든 지성인들과 언론계에서도 민주법치제도를 개선하며 헌법정치로 국제문명질서에와 글로벌경제에 발맞추어나가는 큰틀은 앞으로 확고할것같다.
국제질서에도 많이 유연해지면서 유엔과 보조를 맞추고 있는 과정이다. 한국은 중국과도 더 많은 교류와 합작을 추진해야만한다.
3   작성자 : 호들깝
날자:2013-05-06 13:46:49
사실 중국에는 중화사상란 말이 없다. 주변에서 많이 떠들뿐...
과거 봉건전제왕조시대에 황제는 스스로 자기는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하늘의 아들로서 따라서 자기 왕조는 천하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화질서속에 편입된 주변 소국들도 이에 이의가 없었고 복종하였고 이 질서밖의 기타 나라들은 또 그들나름의 중심관 질서가 따로 있었다. 문제는 중국외 기타 나라들은 재국을 세웠다가 멸망하고 소국들로 사분오렬되여 이러한 중심관이 계승될수 없었던 반면 중국은 합구필분 분구필합의 장구한 역사를 겪으면서 천하대통이라는 천하관이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과거 황제를 중심으로한 제국시대가 아닌 공화제 국가이다.
더는 과거와 같은 황제를 중심으로한 천하 중심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말하는 중화는 이른바 주변에서 말하는 중화사상이 아니라
수처년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자랑하는 대국이라는 자부심이다.

그리고 중국이 개혁개방 30년의 거대한 발전은 이러한 전통과 자본주의 요소들이 절묘하게 결홥된 산물이다.
중국은 5.4운동, 특히 신중국건립후 토지개혁,문화대혁명(긍정하는 말이 아님)을 거치면서
구중국의 사회관계,질서,기득권 등이 짓부셔 졌다.조직으로서의 기존질서는 없어졌다.
이러한 변혁들이 개혁개방후 자본주의 요소들이 믹스가 되면서 거대한 활력으로 작용하면서 세인이 경탄하는 중국의 기적을 만들어 낸들어 냈다.

반대로 인도는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본질적으로는 기존의 사회관계,질서,종성제도,신분제도가 변혁을 겪지 않음으로 하여 중국보다 발전이 더디게 되였다.
2   작성자 : 유아독존
날자:2013-05-06 13:05:35
중화사상은 저서 100권을 내도 다 싣지못할 만큼 거폭 광폭의 그림이다.
중화민족의 최대 자랑거리이자 자부심 자존심 분발력의 원천이다.
그만큼 유익한점이 있듯이 중국의 평화발전과 중국인 매개인에게 독성도 강하다.
중화사상이란 명사는 부정적 비판적으로 일직 몇십년전부터 전세계에 알려졌지만 중국의 권력자들은 거부하고 말살해버렸다.중국인들은 거의다 들어보지도 못했다.소수지식인들은 "천조사상""화이관"(중화와 오랑캐)을 좀 알 정도 뿐이다.
현실의 합법성이자 통합력으로 활용하는것이다.
하지만 그내실엔 낡고 썩어빠진 전통고유보수사상 관념 습관,심지어 근현대중국의 아버지인 손문조차 서방의 민주제도 사상을 이 중화사상에 맞추려했다.5.4운동과 더불어 맑스주의가 들어오면서 이 낡은 전통사상관념엔 비판이 끊어지지 않았다.
최근에 들어서면서 복구주의가 다시 부상하면서 민족주의를 애국주의와 국학으로 분장해 환심을 사기도 했지만 극단민족주의 재부상에 부채질을 하여 부정하는 세력도 만만치않다.
이 전통사상과 이데올러기 현대민주사상(인류의 보편적진리와 문명) 3자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융합는가에 매우 어렵지만 "중국의 길"의 성공과 실패가 달린다.
보시라이도 "중경모델"과 "중국모델"을 극구 내세우며 홍가회(붉은노래조직)를 부추겼지만 정치음모와 부정부패로 실패로 돌아갔다.
중화사상은 나라와 민족을 곤경에 빠트렸고 주변국을 포함한 국제관계에서 계속 마이너스로 되고 있는것은 듣기싫지만 사실이다.
1   작성자 : 중화사상을 지닌 2, 3류 국가들
날자:2013-05-06 11:57:53
유럽에서는 그리스인, 중동에서는 이란인과 이집트인들이 그들식의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중국인이 그리스인, 이란인, 이집트인과 중화사상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면 서로 호각지세를 이룰 것이다. 깨어있는 중국사람이 이들의 소위 중화사상에 대해 얘기를 들으면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아니 별거 아닌 것들도 중화사상을 갖고 있네!" 중화사상을 지닌 나라들 그리스, 이란, 이집트 삼국이 다 세계 무대에서 이류나 삼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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