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는 '질(質) 경영'이다. 다른 회사보다 질좋은 제품을 빨리 만들어 시장을 장악하는 것이 질 경영의 요체였다.
이 회장은 지난 10일 저녁 집무실인 승지원에서 가진 주요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제품의 질'이 아닌 '삶의 질'을 화두로 들고 나왔다. 그는 "환경보전과 인류의
건강 및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기업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의 질경영이 상품에서 인류의 삶과 관련된 것으로 한계단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발언이라고 한 삼성 관계자는 해석했다. 이날 결정한 삼성의 미래 5대 신수종 사업은 모두 인류 및 개인의 삶의 질과 관련된 '녹색과 건강의료 산업'에 속하는 사업들이다. 삼성에서는 이를 '넥스트 빅 싱(Next Big Thing)'이라고 부른다.
1987년 회장 취임 후 그가 제시한 화두들은 한국 재계에 큰 변화를 몰고왔다. 이번에 던진 삶의 질이라는 화두가 또어떤 변화를 몰고올지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제품의 질에서 삶의 질까지
1993년 이 회장은 신경영을 시작하면서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사회를 뒤흔들었다. 변화와 함께 내놓은 화두는 질 경영이었다. 이 두 가지 화두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제조기업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을 뿐 아니라 다른
국내 기업들도 변화를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외환위기 때는 위기경영을 들고 나왔다. 선택과 집중,탄탄한 재무구조,상시 구조조정은 삼성은 물론 당시 국내 기업들의 슬로건이 될 정도였다. 위기극복 이후 삼성이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 평가다.
2000년대 들어 그는 눈을 세계로 돌렸다. 글로벌 경영을 주창하며 국내 기업들의
관심을 세계시장으로 돌려놨다. 2003년에는 천재경영론을 내놓았다. "빌게이츠 같은 인재가 서너 명 있으면 국민소득이 3만달러에도 갈 수 있다"며 인재론을 펼쳤다. 국내 기업들이 인재확보 전쟁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2005년에는
디자인경영을 앞세웠다. 그의 디자인경영은
삼성전자 TV가 세계 1위에 오르는 밑거름이 됐고 산업계도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다. 그리고 2006년에는 창조경영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지만 특검 등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지난 3월24일 경영에 복귀한 후 장고해온 이 회장은 '삶의 질'이라는 화두를 꺼냈다. 그동안 질좋은 제품으로 세상을 채워왔지만 이제는 사회와 개인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함으로써 10년 후 먹을거리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과감히 투자하라이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 기회를 선점하라"고 주문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며 회장으로 복귀한 지 한 달 반 만에 23조원의 투자결정을 내렸다. 속도경영의 귀재다운 판단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이면에는 그만큼 삼성이 과감히 투자해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배어 있었다. 일본기업들이 삼성에서 배우려는 '스피드 경영'이 수년째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 공백으로 각사 최고경영자들은 수조원에 이르는 투자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사업이 지지부진했던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다.
이에 따라 이 회장은 자신이 직접 주재한 첫 번째 사장단 회의에서 '신수종 사업'을 결정하고 신속한 집행을 요구했다. 이 회장은 복귀하면서 "삼성을 대표하는 제품이 10년 후에는 모두 사라질지 모른다"며 신사업 발굴에 대한 강한의지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번 결정이 예상했던 일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현실성 있는 사업에서 시작하라
삼성이 결정한 5대 신수종 사업은 태양전지,자동차용 전지,
LED,바이오제약,의료기기이다. 일각에서는 새로울 것이 별로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태양전지와 자동차용 전지는 이미
삼성전자와
삼성SDI가 사업에 착수한 상태다. LED도 삼성LED가 장기발전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삼성이 바이오와 의료기기 사업에 진출하겠다는 것은
삼성전자와 삼성종합기술원이 이미 수 차례 발표하기도 했다.
이인용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사장단 회의와 관련한 브리핑에서 "신사업 결정의 기준은 기술 등 내부 역량을 갖추고 있느냐와 시장성이 있느냐"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삼성이 당장 뛰어들어 시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여부가 신수종 사업 결정의 기준이 됐다는 얘기다. 이날 주요 사업
담당 사장들과 함께 신수종 사업의 재무를 뒷받침해주는 이상훈
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이 참여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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