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항주는 서호 호반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관계(2016년 9월 4일~5일)로 벌써 분주하다. 항주 및 주변 지역의 도로 통제와 운전 제한을 시행하고 있고, 절강성도 항주시의 통제방침을 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 되었든 서호를 중심으로 사방 수 km가 비상통제구역 조치가 취해졌고, 일반인의 통행금지도 이루어지고 있는 통에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책장 안에 꽂혀있는 케케묵은 책들을 두루두루 뒤적이며 망중한 즐기고 있다.
그러다가 어제 인터넷상에 고(故) 김학철 선생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필자 또한 간만에 컴퓨터 자판기에 손을 얹으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작년에 출간했던 연번작가협회 주석 최국철 선생님의 책《석정 평전 —최후의 결전가》에서 다음 한 구절을 이 지면에 옮겨 보겠다.
우리 후세들은 어떤 력사관을 가져야 할가를 잠간 고민해보고 있다.
들어가는 글
뜨거운 선렬의 피 천지간에 타오르고
절망과 어둠의 벽을 녹여내고 마침내 밝은 빛을 뿜어내니
아! 강산은 생명의 꽃 피여내고 슬픔은 피물 씻어 흘러갔다.
혼백은 한마리 새기 되여 영겁을 지켜본다.
잊지 말자. 칠흑같은 그 시절, 그 아픔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일이 없으리라.
동방의 붉은 해살 인류 평화 선봉이 되여
무궁한 번영의 터전 이룰것을
마음 굳게 다짐한다.
이 문구는 석정 윤세주의 흉상을 모신 한국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 베껴온 현대판 “격문”으로 2007년12월, 한국의 한 미술대학 교수가 쓴것이다. 글쓰기가 전문직이 아닌듯한 이 교수의 글은 현재 우리들의 보편적인 감성과 잠재해있던 격앙을 드러낸 글이여서 첫 페지에 옮겨왔다.
몇년전 섬북의 황토고원에서 의용대가 남긴 족적을 답사하면서부터 교통도구도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의 렬악한 환경에서 우리 선인들이 어떻게 이런 오지까지 흘러들어왔을가 하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해보았고 이번에 석정의 초상을 찾아 동방의 “그랜드캐년”이라고 하는 태항산으로 들어가면서 우리의 선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가 하는 물음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졌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초라하게 만들어주는 태항산, 하늘을 찌를듯이 창검처럼 들쑹날쑹하게 치솟은 험산준령들과 기암괴석이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위압감이 아니라 태항산이 내포한 그 어떤 상징성을 풀어야 한다는 숙제가 압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숙제는 의용대와 우리들의 주인공인 석정의 초상을 태항산을 배경으로 잘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어졌다.
대륙을 주름잡았다는 비유는 이런 경우를 두고 생긴 말이다. 그러면서 “몇백명의 의용대가 그렇게 넓은 중국의 대륙에서 대체 무슨 작용을 했나?”라는 후세들의 물음에 어떻게 만족스러운 답을 줄가를 고심했다.《석정 윤세주 평전》을 쓰는 내내 이런 의문에 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고 그것이《석정 윤세주 평전》을 쓰게 되는 력동성을 바꾸어오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남경에서, 무한에서, 중경에서, 계림에서, 태항산에서 석정 윤세주의 초상을 찾았지만 현재 그 어디에도 렬사가 남긴 물리적인 자취는 없다. 중국측에 렬사에 대한 1차적인 자료가 없는 셈이다. 하기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보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평전을 구상할수 밖에 없었다. 석정은 꼭 써야 하는 위인이다. 그가 남긴 내셔널리즘의 사상과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석정이라는 인간 자체를 조명하고 싶고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그리고 동족 항일단체들과 련대하는 과정에서 우화(羽化)되는 현상들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구체적으로 석정이라는 인간이 특수한 환경에서 특수한 전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것이 필자의 욕심이고 후배로서의 의무이다.
한국에는 독립기념관이 세곳이 있는데 천안(국립), 안동(지방), 밀양(지방)이다. 필자는 선후로 이 세곳을 다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고 무슨 자료가 없을가 기웃거려보았다. 그러면서 은연중 참으로 묘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따져보면 묘하다는 언어로는 도저히 풀이가 안되지만 력사 사실과 기술에 대한 형평성 부재에 가슴이 저렸다. 정의와 공평을 추구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대하는 력사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에는 한국독립기념관(국립)이라는 그릇이 너무 작아보였다. 이데올로기문제라고 몰아가기에는 너무 모자가 큰것 같고 경향성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무거워보였다. 한국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정성을 들였고 편폭 역시 그만큼 많이 차지한 반면 그 시대를 함께 한 조연의용군에 대한 소개는 초라한 몇장의 사진과 성의 없는 소개에 그친것이다. 그리고 한국사도 조선의용대에 관해 한쪽 분량을 다룬 반면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해서는 두쪽 분량으로 다루었다. 일본군과 총을 맞대고 싸워본적이 없는 광복군에 대한 편폭이 많은것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용대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있다는것에 질의하고 싶은것이다.
우리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로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외면하고있는 실정이다. 리념의 산물, 분단의 산물 등등 해석이 구구하지만 우리들은 분명 지속적으로 단추를 잘못 끼우고있다. 1993년, 항일투사 김학철옹이 한국정부에 조선의용대기념비라도 세워달라고 한 작은 건의도 묵살되였다. 특정한 력사에 리념이라는 옷을 입혀놓고 그 옷을 벗기는게 달갑지 않고 력사를 공유하고 싶지 않기때문일가.
평전을 쓰는 준비과정에서도 한국의 모 단체에서는 석정이 사회주의계렬에 엮이는것을 달갑지 않아했고 더구나 중국공산당과의 관계에 엮이는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했다. 분명 석정은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말 달리”며 항일에 투신했고 태항산에서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전선총사령부에 귀속되였으며 팔로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항전하다가 최후를 마쳤는데도 이런 객관화된 사실 관계를 외면하고 싶어했다. 석정은 중국 건국공신 28인중의 한분인 팔로군 부총참모장 좌권과 하북성 섭현 석문촌 련화산기슭에 나란히 안치되였다가 현재 하북성 한단시”진기로예렬사릉원”에 다시 이장되여 기녑비를 세워 모셔져있다. 그렇다고 볼 때 리념, 계렬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중국의 항전 시각에서도 석정이라는 인물을 얼마든지 재평가할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중국정부측에서 출판한《항일전쟁중의 국제우호인사》23명중에 석정이 있다. 이는 석정 윤세주에 대한 중국정부측의 최대의 평가이다. 김원봉은 없지만 석정은 있다.
석정은 우리들이 잊기 시작하고 기억에서 바야흐로 사리지는 항일의용대 전사이다. “석정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우에서 어떤 력사를 만들어내겠는가?”하는 물음은 우리들 자신이 이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스무살, 서른살, 마흔살의 석정의 초상에서 그가 만약 그후의 인생을 살아갔다면 과연 무었을 했을가 하는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물음은 어찌 보면 우문일수도 있다. 다행히 이 우문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우리들의 력사관에 대한 질책일수도 있다는 점이 의미가 심장하다. 우리들의 현실은 현문현답보다 번복해서 제기되는 우문현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세들의 력사관을 진실하게 정비시킬수도 있다는 아이로니를 경전처럼 의식해보아야 하지 않을가 생각해보게 한다. 이것이 렬사가 지킨 터전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후대들의 자세라고 인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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