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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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10대소녀 매음소굴 탈출기 댓글:  조회:3992  추천:0  2010-11-16
예리한 압침이 비수마냥 손톱밑을 찔러대고 알몸으로 엄동설한의 찬물세례를 견뎌야 했으며 소금 반근에 절여진 가지를 눈물과 함께 삼켜야 했던…이 끔찍한 일들은 얼마전 4명의 10대 소녀들이 당했던 참혹한 조우이다. 하남성 락양과 평정산에서 온 이 소녀들은 지옥같은 매음소굴에 팔려가 탈의무를 추고 매음을 하면서 갖은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넷중 가장 나이 많은 소녀는 19살이고 가장 어린 소녀는 17살이다. 이들은 호북과 호남 등지의 KTV, 목욕중심과 호텔을 전전하면서 “순회공연”을 했는데 공연의 주요내용은 탈의무였고 더불어 매음까지 해야 했으며 약간의 반항기미만 보여도 참혹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4월 23일 강서성 구강시공안부문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소녀들은 그제서야 악몽같은 매음소굴을 벗어날수 있었다. 초남(가명)의 이야기: 남자친구에게 속히워 올해 17살난 초남을 매음이라는 끔찍한 구렁텅이에 밀어넣은 장본인은 다름아닌 그의 남자친구였다. 2009년 초남은 락양으로 가 그곳 친구들과 함께 재미나는 시간을 보내던중 친구의 소개로 리모를 알게 되였다. 그번 만남을 계기로 리모와 초남은 급속도로 가까와졌다. 2009년 10월 16일, 리모와 함께 녀주시 온천에 놀러간 초남은 감기기운때문에 홀로 호텔방에 남았다. 밤 10시쯤, 리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같이 병원으로 가자고 하면서 차를 보냈으니 타고 오라는 말만 남긴채 리모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초남은 아무 의심없이 자칭 리모의 사촌형이라 부르는 손모의 차에 올라탔다. 그뒤로 리모는 핸드폰을 꺼버린채 종적을 감추었다. 초남은 손모의 협박에 못이겨 호북으로 끌려갔고 호북에 도착하자마자 리모로부터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좋은 끝장이 없을거라는 협박전화를 받았다. 초남은 일이 상서롭지 못함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초남은 악몽같은 매음소굴에 빠져들게 되였다. 양양(가명)의 이야기: 탈의무, 매음, 혹독한 매 양양은 매음굴에서 근 2년동안 사람취급을 받지도 못한채 뭇남성들에게 유린을 당했는바 4명의 소녀들중 가장 오랜 시일동안 매음소굴에 갇혀있었다. 2007년말, 이모와 함께 광동에서 막일을 하던 양양은 우연한 기회에 고향친구 황모를 만났다. 황모는 친구가 가무단에서 공연할 녀성들을 모집하고있는데 일해볼 의향이 없냐고 제안했다. 가무단에서 공연을 하고 한달에 2000원의 로임을 받을수 있다는 말에 두 사람은 곧장 황모를 따라 호북으로 갔다. 호북에 도착하자마다 그들은 신분증을 비롯한 소지품을 죄다 압수당한채 손모(초남을 호북으로 끌고갔던 손모)를 따라 호텔 2층에 올라가 “공연”을 관람했다. 놀랍게도 공연내용은 탈의무였다. 로골적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양양과 이모는 일이 상서롭지 못함을 눈치채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렇게 그들은 손모 일당의 갖은 수모와 혹독한 매질에 견디지 못해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뭇사람들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다양한 자세를 취해야 했으며 손님의 요구에 따라 매음까지 해야했다. 탈의무를 추면서 손님을 단칸방으로 유혹해서 손님들이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만족시켜줘야 했는데 그렇게 번 50~60원의 수입중 정작 본인이 받을수 있는 금액은 고작 5원이였다. 나머지 돈은 죄다 손모가 압수해갔다. 기회를 봐 매음소굴을 탈출하기 위해 양양은 매번 매음해서 번 돈 5원을 꼬박꼬박 감추어두었지만 번마다 이들 일당에게 들키는 바람에 모아둔 돈을 죄다 압수당하군 했다. 어느 한번 양양은 한 손님을 상대로 매음을 한후 손님으로부터 300원의 화대와 몇십원의 팁까지 받았다. 양양은 손모일당에게 200원만 바친후 자신의 옷에 구멍을 내고 나머지 백여원을 깊숙이 감췄다. 하지만 이것마저 다른 매음녀에게 들키고말았다. 그 매음녀가 가차없이 손모에게 적발하는 바람에 양양은 또 한번 장시간동안의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했으며 한겨울 칼바람이 거침없이 뚫고드는 창가에서 밤새 알몸으로 벌을 서야 했다. 양양은 추위와 아픔과 두려움과 치욕에 온몸이 경련이라도 온듯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뛰여내리고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지만 꼭 다시 엄마를 만나고싶다는 간절한 욕망 하나만으로 그녀는 끝끝내 죽음의 문턱에서 자아를 되찾았다. 그뿐이 아니였다. 이들 일당은 반토막난 가지 한개에 소금 반근을 넣어 펄펄 끓인 뒤 이들에게 먹으라고 호통쳤다. 도저히 먹기 힘들어 남기기라도 하면 또한번 몽둥이로 두들겨 팼으며 울며겨자먹기로 다 먹은 뒤에는 물 한방울 마시지 못하게 했다. 어느 한번 양양은 머리방에 갔다가 자신을 감시하고있던 마모의 핸드폰으로 친구에게 메시지(短信)를 보냈다. 자신은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부모님에게 전해달라는 내용이였다. 그런데 메시지를 받은 친구가 밤에 마모의 핸도폰에 확인전화를 하는 바람에 양양은 또한번 죽도록 얻어맞았다. 이렇게 양양은 자신의 일생에서 더없이 소중한 2년이라는 시간을 악몽같은 매음소굴에 고스란히 바치고말았다.  소여(가명)의 이야기: 압침, 온몸 전신을 괴롭혀 2009년 음력설즈음, 호남에 공연갔던 이들 일당은 경찰들의 조사를 받게 되였다. 간신히 풀려난 뒤 이들은 소여가 제보했다고 의심한 나머지 그에 대해 끔찍한 체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몸에 상처가 나면 공연에 지장이 있을것을 고려해 이들은 결국 얼굴을 제외한 몸 구석구석을 압침으로 사정없이 찔러댔다. 순식간에 소여의 몸 구석구석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이들은 계속해서 찔렀고 아예 압침으로 소여의 손톱과 발톱밑을 마구 찔러댔다. 사후, 소여의 발톱은 혹독한 아픔을 견디지 못한채 죄다 문들어 떨어지고말았다. 연자(가명)의 이야기: 연극단을 미행해 동료들 구출 2009년 년말, 이들 일당은 호북성 경찰들에 의해 대량 체포됐다. 겨우 빠져나온 일당은 일단 피신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4년간 탈의무를 추며 갖은 학대를 참아왔던 연자가 발에 부상을 입었다. 평소 로실하기로 소문났던 연자였던지라 이들 일당은 아무 의심없이 연자를 병원으로 보내주었다. 이 틈을 타 연자는 무사히 도주할수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연자였지만 결코 이대로 다른 자매들의 불행을 좌시할수 없었다. 그는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이들 일당을 암암리에 미행하기 시작했고 결국 강서성 구강시 도창현에서 이들의 종적을 발견했다. 연자와 남자친구는  지체없이 경찰에 이 사실을 제보했다. 4월 15일, 제보를 접수한 구강시 경찰들이 신속히 출동해 이들 일당을 일망타진했다. 4월 22일, 구강시 경찰측에서는 양양 등 4명의 피해소녀들을 구출한 뒤 300원의 로비와 함께 이들이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로써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인생의 모진 시련을 겪은 4명의 10대 소녀들은 드디여 꿈에도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게 되였다.  본 사건은 진일보 심사중에 있다.                                                           《법률문췌보》  
58    마약중독으로 절도범이 된 천만장자 댓글:  조회:3648  추천:0  2010-11-11
2010년초부터 호북성 황산시 단성산의 한 대형슈퍼마켓(超市)문앞에서 오토바이와 전동차 절도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단성산파출소에서는 범죄혐의자를 잡기 위해 이곳에 여러번이나 그물을 쳐놓았으나 교활한 범인은 번마다 그물에서 빠져나갔다. 2010년 5월 27일 저녁 7시, 사복하고 숨어서 지키던 경찰들은 두 사람이 매우 의심스러운것을 발견했다. 그중 한 사람은 주위를 살펴보더니 길옆에 세워놓은 전동차의 자물쇠를 우격다짐으로 비틀어연후 전동차를 몰고 재빨리 현장을 떠나는것이였다. 경찰들이 살금살금 뒤를 따라가보니 그 사람은 황석인민광장에서 내린후 그 차를 어두운 곳에 세워놓고 다시 원래의 현장으로 돌아가 공범과 만나는것이였다. 그들이 다시 다른 차량을 훔치려고 할 때 경찰들은 달려가서 두 범죄혐의자를 붙잡았다. 범죄혐의자 진모와 왕모는 자신들이 차량을 절도한 사실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승인했다.그들은 마약중독자였는데 마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광적으로 차량을 절도했던것이다. 그중에서 진모는 원래 오락성을 경영하는 천만장자였다. 황산시 중심에 오락성을 세우고 리사장 겸 총경리로 된 그는 한때 황산시에서 잘 나가는 인물이였다. 그에게는 행복한 가정도 있었다. 예쁜 안해와 귀여운 딸 그리고 호화로운 별장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부러워하던 그가 마약을 사용하면서부터 가산을 탕진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였다. “사람들은 남자가 돈이 있으면 변한다고 했습니다. 녀색을 즐기게 되고 도박에 물젖게 되며 심지어 마약에 손을 대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비록 돈을 벌었지만 안해이외의 다른 녀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도박이란건 어떻게 노는건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모범총경리, 모범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제가 2001년 3월에 친구의 생일연회에 갔다가 그만 마약을 접촉하게 되는 바람에 모든것을 망치게 되였습니다.” 진모가 친구의 생일연회에 갔을 때 술상에서 가모라는 남자를 알게 되였다. 부동산업을 한다는 가모는 “돈을 버는것은 향수하기 위한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이 얼마라고 고생만 하겠습니까? 돈은 관속에 가지고도 못가는데 살았을 때 실컷 향수를 누려야 하지요”라고 하면서 1000년 묵었다는 술을 내놓으며 “이건 미국대통령도 맛보지 못한 무가지보(无价之 )입니다. 한번 맛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술을 마신후 진모는 기분이 묘해지면서 신선이 된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후 그는 자꾸만 그 술을 마시고싶은 생각이 들어 견딜수 없었다. 참다못해 그는 가모한테 전화를 걸어 그 술을 살수 없는가고 물었다. 가모는 통쾌하게 대답했다. 그후 진모는 그 술에 중독된것을 느끼고 마약을 탄 술이라는것을 알았지만 이미 자신을 통제할수 없었다. 2001년 12월부터 진모는 마약을 흡입했고 2002년부터는 마약을 주사하기 시작했다.  마약을 사용하면서 진모는 빚을 갚기 위해 오락성을 팔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별장과 주택,  자가용차도 팔아버렸다.  그렇게 되자 안해는 리혼하고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나버렸다.2004년부터 진모는 거지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는 밖에서 잠을 자다가 같은 마약중독자 왕모를 알게 되였다. 두 사람은 마약을 흡입하기 위해 차량을 훔쳐 팔기 시작했다.   진모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약때문에 일생을 망쳤을뿐만아니라 모든것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페결핵, 을형간염 등 여러가지 병에 걸려 죽을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때 마약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약공급이 중단되면 고통이 극도로 민감해지며 자주 구역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몸이 떨리는것을 통제할수 없었습니다. 6개월동안 마약을 끊었던 적도 있지만 결국 다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처음보다 더 깊이 인이 박히게 되였습니다. 나는 세상사람들에게 마약에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부탁하고싶습니다.  마약에 손을 대기만 하면 의지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끊을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나처럼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범죄의 길을 걷게 되여 사회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호북석간》    
57    사랑의 힘으로 엮어가는 신화 댓글:  조회:3792  추천:0  2010-08-18
 선량한 처녀의 따뜻한 손길 2008년 3월,  광주시 한 사진관의 촬영실에서 정우빙은 이쁘장하게 생긴 네 처녀에게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그 중에서 조원리라는 처녀는 그와 한 고향 사람이였다.  서로 이웃으로 살던 그들은 뜻밖에 타향에서 만나게 되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며칠후 그들은 굥교롭게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또 만났다.  기차안에서 그들은 오래된 친구처럼 이야기꽃을 피웠다.  로주시에서 태여난 정우빙은 소주시에서 미술전업대학을 졸업한후 광주시의 한 사진관에서 촬영사로 사업하고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 그는 한학급의 녀학생과 련애를 했지만 녀자친구의 부모가 동의하지 않는 바람에 지금은 잠시 떨어져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우빙은 조원리가 고중을 졸업한후 광주시의 한 회사에서 컴퓨터로 수놓이를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기차에서의 상봉이 있은후 조원리는 미술을 전공했던 정우빙한테서 주말마다 미술설계를 지도받았다. 그녀는 점차 자상하고 듬직한 정우빙한테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와 편한 친구사이로 지냈다. 2008년 10월 21일,  정우빙의 아버지가 불행하게도 신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원리는 정우빙을 위안하는 한편 광주시의 유명한 병원을 알선해주었다.  2008년 11월초에 정우빙의 아버지가 광주시의 한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자 조원리는 짬짬이 시간을 타서 정우빙의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2008년 12월 중순, 정우빙의 녀자친구 황효정이 병실을 찾아왔다. 그녀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우빙의 팔을 붙잡고 “당신 아버지의 병은 불치병이여서 치료해도 소용이 없어요. 지금부터 빚더미에 올라앉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눈살이 꼿꼿해졌다. 2008년 12월 21일, 정우빙의 아버지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여 급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집 재산을 전부 긁어모아봤지만 수술비로 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애간장을 태우던 정우빙은 하는수없이 녀자친구 황효정한테 돈을 꾸어달라고 청을 들었다. 그 말에 황효정은 대뜸 얼굴색이 변하더니 절대 빌려줄수 없다고 오금을 박았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자 정우빙은 체면을 무릅쓰고 동료들한테서 돈을 꾸었다. 하지만 수술비로 쓰기엔 엄청나게 모자랐다.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 정우빙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조원리한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뜻밖에도 조원리는 “우빙씨, 걱정말아요. 제가 4만원을 꾸어줄게요.”라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순간 정우빙은 코마루가 찡해나 “원리씨,   정말 고맙소. 이 은혜 평생 잊지 못할거요”라고 말했다.   피할수 없는 운명적 사랑   조원리의 도움으로 정우빙의 아버지는 수술을 받았고 병세가 점차 호전되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후 정우빙은 녀자친구 황효정과 헤여졌다.2009년 음력설이 다가오기 며칠전에 조원리와 정우빙은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기차안에서 정우빙은 떨리는 목소리로 “원리씨,  나의 녀자친구가 되여주오”라고 고백했다. 삽시에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개진 조원리는 “우린 어울리지 않아요”라고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기실 그녀는 정우빙을 짝사랑한지 오래되였다. 하지만 자신은 대학생인 우빙이와 짝이 기운다고 생각하고있었다. 더우기 자신한테 우빙은 사랑보다 고마운 감정이 컸을거라고 짐작되여 매몰차게 거절해버렸던것이다.   그후 정우빙은 몇번이나 조원리한테 녀자친구가 되여달라는 메시지(短信)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조원리는 정우빙한테 “전 남자친구가 생겼어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웬 청년과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정우빙은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것처럼 머리가 뗑해났지만 남자답게 “축하하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정우빙의 축하메시지를 본 조원리는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기실 그녀가 보낸 사진속의 남자는 그녀의 딱친구 효매의 남자친구였다.   2009년 9월 중순, 정우빙은 조원리가 보고싶어 그녀한테 안부의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째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그녀한테서는 회답이 오지 않았다. 정우빙은 더는 참을수 없어 그녀한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 정우빙은 부랴부랴 조원리의 회사로 달려가 보았지만 조원리는 회사에 없었다. 조원리의 동료는 조원리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불행한 소식을 알려주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정우빙은 눈앞이 캄캄해났다. 한참후에야 제 정신이 든 정우빙은 동료한테 조원리가 입원한 병원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조원리의 남자친구도 함께 병원으로 갔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동료는 조원리에게 남자친구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날 저녁, 정우빙은 곧추 고향으로 달려가 아버지한테 이 불행한 소식을 알렸다. 그의 아버지는 눈굽을 찍더니 “물을 마실 때 우물을 판 사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사처에서 돈을 꾸었다.   2009년 9월 28일, 정우빙은 6만원의 현금을 가지고 조원리의 병실을 찾았다. 갑자기 나타난 정우빙을 보고 조원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녀는 뒤늦게야 “우빙씨,  어떻게 여기까지…”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싹 여윈 몸에 창백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정우빙은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것처럼 아팠다. 그는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이토록 큰 일을 왜 나한테 알리지 않았소. 그리고 왜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소”라고 책망조로 물었다. 잠시후,  조원리의 어머니가 병실에 들어섰다. 정우빙이 가지고온 현금을 꺼내놓자 조원리는 흐느껴울면서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우빙은 그녀의 손에 돈을 꼭 쥐여주면서 “원리씨, 오늘부터 내가 당신을 보살필거요. 거절하지 마오. 예전에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보살펴주지 않았소? 나한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오”라고 말했다. 페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우빙의 말에 조원리와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도 감격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후 정우빙은 사진관에 사직서를 내고 일심전력으로 조원리를 보살펴주었다.   사랑으로 엮어갈 신화   어느날 밤,  병실을 지키던 정우빙은 조원리의 이불을 여미여주다가 그녀의 손에 핸드폰이 쥐여져있는것을 발견했다. 그가 살며시 핸드폰을 꺼내 살펴보니 조원리가 딱친구 효매한테 보내려고 써놓은 메시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효매야, 난 더는 우빙씨한테 짐이 되고싶잖아. 난 우빙씨를 떠나야 하는데 이토록 사랑하고있으니 어쩌면 좋아…”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순간 정우빙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끊어진 구슬마냥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살며시 조원리의 손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깨여난 조원리는 살풋이 눈을 떴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정우빙은 “원리씨,  난 당신을 사랑하오. 우리 함께 병마를 물리치기오”라고 고백했다. 그 말에 조원리는 목놓아울면서 “하지만 난 당신한테 짐만 돼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우빙은 “난 당신과 같은 하늘아래에서 숨쉬고있다는것만으로 행복하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조원리도 더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우빙의 품에 안겼고 정우빙은 그녀를 뜨겁게 포옹했다.   그후 정우빙은 련인을 돌보느라고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쳤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그의 지극정성에 조원리의 병세도 나날이 호전되였다. 어느날, 정우빙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조원리한테 청혼했다.   “나와 결혼해주오. 난 당신이 내 안해가 될 날을 오매불망 기다려왔소. 우리 함께 병마와 싸워 이기기요!”그 말에 원리는 비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련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들은 량가부모의 동의를 거치고 2010년2월 14일에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밤, 은은한 불빛아래에서 정우빙은 빨갛게 상기된 안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여보, 우린 이제부터 일심동체가 되여 병마를 물리치기오”라고 속삭였다. 순간 조원리는 남편의 넓은 품에 안기면서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2010년 4월, 조원리는 행운스럽게 골수이식수술을 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화골수창고에서 그녀의 골수와 맞는 기증자를 찾았다는 기쁜소식이 왔던것이다. 그녀는 빠른 시일내에 골수이식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현재 량가어른들과 정우빙은 그녀의 수술비용마련에 동분서주하고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신화를 엮어갈 이들 부부는 꼭 사회 각 계층의 따뜻한 사랑과 도움으로 험난한 인생고비를 무사히 넘길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멀지않아 그들 부부는 희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미래의 설계도를 구상할것이다.           《지음》
56    신혼주택으로 인한 비참한 살인사건 댓글:  조회:3547  추천:1  2010-08-11
2009년 3월초, 28살에 나는 란주 모 기관공무원인 강부영은 낯선 전화를 받았는데 간드러진 녀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강부영씨, 제가 누군지 기억하세요?”라는 물음소리가 들려왔다. 강부영은 갑자기 떠오르는 얼굴이 생각나서 “고령이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은방울 굴리는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 “전 지금 란주에 와있어요. 지금 만나고싶어요”라는 고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강부영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부영과 고령은 모두 감숙성 유중현에서 출생했다. 강부영은 비록 고령보다 2살 년상이였지만 소학교와 중학교를 모두 고령과 함께 다녔다. 한 사람은 체육위원이고 한 사람은 학습위원이였던 그들은 점점 접촉이 잦아지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고중 2학년때 고령은 전학하게 되였다. 그녀는 특별히 새 만년필을 사서 강부영한테 선물하면서 편지를 자주 써달라고 부탁했다. 강부영은 처음에는 편지도 쓰고 전화도 했다. 그러나 서로 떨어져있는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소식이 뜸해지더니 련계가 끊어지고말았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고령이 주동적으로 찾아올줄은 생각도 못했다.   커피점에서 고령을 만난 강부영은 그녀한테 다시 반해버렸다. 그녀는 학교때보다 더욱 예쁘고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던것이다. 고령도 애숭이던 강부영이 멋진 청년으로 되여 자기앞에 나타나자 몹시 기뻤다. 이번의 상봉으로 하여 두 사람의 가슴에는 다시 사랑의 불길이 지피기 시작했 다.   2009년 4월, 강부영은 연구생졸업을 앞두고있는 고령을 만나러 서안으로 갔다가 고령의 어머니 장애연을 만나게 되였다. 고령의 부모는 고생스럽게 키워서 공부시킨 딸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있었다. 때문에 딸의 혼사에 대해서도 매우 중시를 돌리고있었다. 고령과 강부영은 장애연에게 모든 정황을 알려주면서 자신들의 결혼을 허락해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장애연은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았다.   강부영의 부모는 가난한 농민이였다. 그를 공부시키느라고 살림은 더욱 쪼들렸는데 2008년에 강부영의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되는 바람에 빚까지 지게 되였다. 강부영은 고령을 위해서 모든것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되자 장애연은 이 준사위를 받아들였다.   2009년 4월말, 고령은 졸업후 서안에 남기 위해 사처로 뛰여다닌 보람으로 겨우 장경유전 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취직하게 되였다. 장애연은 취직때문에 수척해진 딸이 가슴아파서 “강부영이 뭐가 좋다고 그러냐? 집이 가난한데다가 외지사람이니깐 네가 고생이지. 너희들은 한 사람은 란주에 있고 한 사람은 서안에 있으니 이후 두 곳에 갈라져 살겠느냐?”라고 말했다. 그 시기 강부영은 주말마다 고령을 만나러 서안으로 왔다. 달콤한 사랑에 잠겨있던 고령은 이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었다. 다음 주말에 강부영이 찾아왔을 때 고령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후 우리 서안에 살겠어요? 아니면 란주에서 살겠어요?” 고령이 서안을 좋아하는것을 안 강부영은 자신은 사직하고 서안으로 오겠다고 대답했다. 고령은 기뻐서 이 사실을 어머니한테 알려주었다. 그러나 장애연은 신혼주택을 비롯한 실제문제를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했다. 장애연은 강부영이 “5.1절”기간에 찾아오자 일부러 그와 딸을 데리고 비림구역에 자리잡은 아빠트판매처로 찾아갔다. 고령은 호기심에 차서 신식으로 지은 호화로운 방과 가구들을 돌아보며 매우 기뻐했다. 강부영은 고령의 손을 잡고 함께 다녔지만 주택구매에 대한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장애연은 직방 말하는수밖에 없었다.   “자네들이 서안에서 살 타산을 가지고있는데 신혼주택은 언제 살 작정이요?” 강부영은 집을 마련하는것은 앞으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감정이 깊다면 결혼하여 살면서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 앞으로 꼭 집을 살수 있다고 믿고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집값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강부영은 집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돈을 모으는 한편 아버지한테 손을 내밀려고 고향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빚쟁이한테 시달리면서 고기도 사드시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입을 열수가 없었다. 동네사람들이 아버지한테 생활비를 부쳐보내지 않는 그를 불효자라고 욕했지만 그는 집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때 고령의 단위에서 35만원만 내면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은 침실 3칸짜리 주택을 가질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강부영은 선불금 8만원을 자신이 내겠다고 말했다. 그는 사처로 뛰여다니면서 3만원을 꾸었다. 그리고 은행대부금을 맡으려고 했지만 은행에서 거절했다. 원래 그는 대 학을 다닐 때 대부금을 신청했댔는데 지금까지 몇천원을 갚지 않았기때문에 신용기록에 오점으로 남아있었던것이다. 강부영이 대부금도 맡지 못하게 되자 고령은 화를 냈고 그들은 처음으로 크게 다투었다. 결국 강부영이 3만원을 내고 나머지는 고령이 대부금을 맡아서 주택을 구매했다. 그런데 고령은 가옥소유증에 자신의 이름만 써넣었다. 이에 강부영은 몹시 속상했다.   2009년 9월에 집을 손에 넣게 되자 강부영은 장식한후 곧 결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사직까지 했다. 그가 사직한 소식을 알렸지만 고령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때 월급카드를 손에 든 그녀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대부금을 덜어내고 몇푼 남지 않았던것이다.   강부영은 고령을 찾아가서 결혼전에 집을 장식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고령은 그를 랭대하면서 장식비용은 어디서 구하겠는가고 물었다. 강부영이 꾸거나 대부금을 맡겠다고 하자 고령은 화가 났다. 사직하고 집도 없고 직업도 없이 서안에 와서 대책도 없이 돈부터 꾸겠다고 하는 강부영이 볼수록 싫어졌다.   2010년 1월, 고령은 강부영에게 전화를 걸어 헤여지자고 말했다. 강부영이 찾아와서 애걸했으나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게 먹고 돌아서지 않았다. 강부영은 할수 없이 주택구매에 지불했던 자신의 돈 3만원을 돌려달라고 했다.   며칠후 고령은 강부영한테 3만원을 송금해주면서 “이제 돈을 돌려줬으니 우리사이는 깨끗이 끝났어요. 당신은 정말로 가난에 미쳤군요”라는 비웃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을 본 강부영은 정말로 미칠듯이 화가 났다. 그는 고령을 죽여버리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졌다.   2010년 2월 18일, 칼을 가지고 서안에 온 강부영은 룡수촌부근의 려관에 짐을 풀었다. 그는 여러번이나 고령한테 만나자는 메시지(短信)를 보냈지만 고령은 한번도 응답하지 않았다. 이틀동안이나 부근을 돌아다니던 강부영은 2010년 2월 20일 아침 7시 50분에 출근하는 고령을 길에서 만났다. 고령이 보고도 못본척하자 강부영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자신이 부모도 포기하고 직장도 버리면서 일심으로 그녀를 사랑해왔건만 결국 버림받는 신세가 되였다고 생각되자 온몸의 피가 모두 머리끝에 뻗친 강부영은 칼을 꺼내 고령의 복부와 경부를 사정없이 찔렀다.   “이년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집을 사랑하느냐?” 강부영은 화가 나서 고함치면서 고령의 몸을 10여곳이나 찔렀다. 이때 길을 가던 사람들이 이 비참한 사건을 목격하고 공안국에 제보전화를 걸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강부영은 “나한테 다가오면 죽인다”고 칼로 사람을 위협하면서 부근의 건물로 들어가 승강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120구급차와 경찰들은 즉시 현장에 도착했다. 의사들은 급히 피투성이 된 고령을 구급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망되였다. 15층옥상에서 정서가 격동된 강부영은 2시간남짓한 동안 경찰들과 대치상태로 있었다. 그는 자기절로 복부를 두번이나 찔렀고 여러번이나 자살하려고 시도했다.   “당신들은 날 권고하지 마십시오. 난 이미 마음이 죽었으니 이 세상에 살아서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강부영은 얼마후 정서가 좀 누그러들었다. 경찰들은 그 기회를 타서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강부영이 부상을 입었기때문에 경찰들은 먼저 그를 병원에 싣고갔다. 녀자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후에도 깊은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부영은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난 그년을 죽여버리겠어! 그년때문에 내가 이 지경으로 됐어!” 강부영은 마땅한 징벌을 받을것이지만 고령은 다시 살아올수 없게 되였다. 딸을 잃은 장애연부부는 땅을 치며 울다가 혼절하여 쓰러졌다. 높은 지식과 좋은 직업을 가진 이 젊은 남녀는 원래 행복한 련인이였지만 주택때문에 결국 비참한 결말을 보았으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법제석간》과 구직사이트의 련합조사에 따르면 근 1만명에 달하는 30살정도의 직장인중에서 월수입이 3000~5000원인 남녀가 31.2%에 달하고 월수입이 1500~3000원인 남녀가 28.6%에 달하며 집이 없고 자가용차가 없는 남녀가 47.9%에 달했다. 만약 강부영과 고령이 신혼주택에 그처럼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열렬한 사랑에 빠져 아직 감정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 먼저 사업에 전념하고 두 사람의 장원한 타산을 계획하면서 점차 주택마련에 힘썼더라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것이다.                              《법제석간》
55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사랑 댓글:  조회:3676  추천:0  2010-07-22
54    미녀의 투신자살과 갑부의 죽음 댓글:  조회:3904  추천:0  2010-07-21
2009년 11월 23일 11시 30분, 복건성 진강시 안해진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30여세되는 젊은 녀자가 투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들이 제보전화를 받고 현장에 달려왔을 때는 그 녀자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호주머니에 있는 신분증을 보니 그 녀자는 진강시 안해진에 사는 진소정이였는데 39살이였다. 경찰들은 조사를 거쳐 타살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서 층집에서 뛰여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결속지으려고 했을가? 그날 저녁 6시에 진강시 모 구두회사 정수균리사장랍치사건의 4명 혐의범이 잡히면서 이 자살사건의 수수께끼도 풀리게 되였다. 혐의범들은 진소정의 지시를 받고 정수균을 랍치했다고 자백했다. 그렇다면 진소정이 왜서 정수균을 랍치했으며 또 투신자살까지 했을가?   1961년 10월 21일에 복건성 진강시 내강진의 한 시골에서 출생한 정수균은 중학교를 졸업한후 진강시의 한 구두공장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다가 구두도매점을 경영했다. 1995에 림효영과 결혼한후 그는 안해의 도움을 받아 구두회사를 세웠다.   2007년 2월말의 어느날, 정수균은 장사거래가 있는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가정보모로 일하고있는 진소정을 발견했다. 진소정은 10여년전에 그와 함께 한직장에서 품팔이를 하던 녀인이였다. 그때 20살이 채 되지 않았던 진소정은 예쁘장한 처녀였다. 그당시 그들은 말이 잘 통해서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정수균은 진소정이 진강시 안해진에 있는 시골에서 태여났고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워서 초중도 졸업하지 못하고 품팔이를 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런데 그는 그녀가 구두공장에 들어온지 반년도 안되였을 때 공장에서 나와 자체로 구두도매점을 꾸리는 바람에 지금까지 그녀와 련계가 없었다. 그런데 16년만에 여기서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첫눈에 알아보았지만 그녀가 자존심이 상해할가봐 모르는척하고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함께 일하던 예쁜 처녀가 가정보모로 된걸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날 친구의 집에서 나온 정수균은 자가용차에 올랐지만 떠나지 못하고 친구의 층집아래에서 1시간남짓이 기다렸다. 진소정이 일을 마치고 나오자 그는 차문을 열고 그녀를 불렀다.   “소정이, 난 수균이요. 내가 데려다줄테니 어서 올라타오.”진소정은 정수균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사실 그녀도 정수균을 첫눈에 알아보았지만 자비심때문에 주동적으로 인사하지 못했다. 정수균은 그녀를 실어다주면서 왜서 가정보모로 되였는가고 조심스레 물었다. 진소정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런 일을 하고있지요. 자가용차까지 몰고다니는 당신처럼 성공하지 못했으니깐요.”“10여년이나 련계가 없다가 소정이를 여기서 만나니 정말 기쁘오. 무슨 곤난이 있으면 말해보오. 내가 힘껏 도와줄테니.”   정수균이 자신의 앞에서 뽐내려는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하자 진소정은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10년전 당신이 구두공장을 떠난후 얼마 안되여 집에서 저한테 남자를 소개해주었는데 만난지 3개월도 안되여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고 아이까지 낳았어요. 그런데 결혼후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들과 접촉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일하러도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던 남편이 암으로 앓다가 사망되였는데 병치료때문에 숱한 빚을 졌어요. 전 하는수없이 다시 나와서 품팔이를 했는데 배운 지식이 없다보니 가정보모같은 일자리밖에 생기지 않았어요.”   진소정의 말을 듣고 정수균은 그녀를 몹시 동정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좋은 일자리를 얻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원래 그녀를 자신의 회사에 취직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공연히 안해의 의심을 사서 혼인생활에 영향을 줄가봐 그녀를 친구가 경영하는 구두도매부에 출근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진소정은 몹시 감동되였다.   그후 정수균은 주말에 시간만 있으면 진소정이 출근하는 구두도매점에 가보았다. 그러다가 퇴근하는 그녀를 만나게 될 때면 그녀에게 저녁을 사주기도 했다. 정수균은 진소정을 동정하여 도와주었지만 진소정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정수균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되였다. 남편이 죽은후 처음 자신을 따뜻하게 관심하는 능력있는 남자가 나타나자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고싶은 강렬한 감정이 생겼다.   2008년 6월초의 어느날, 진소정은 하복부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사했는데 의사는 비교적 엄중하니 입원하라고 권고했다. 그녀는 남편이 암으로 사망된 정경이 떠오르자 몹시 두려워서 정수균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정수균은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와서 그녀를 부축하여 CT검사를 했다. 검사결과 자궁에 량성근종이 자랐을뿐 큰 병이 아니였다. 이번 일로 진소정은 정수균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으며 사랑의 감정이 더욱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그녀는 먼저 정수균과 육체적관계를 맺으려고 생각했다.   2009년 5월상순의 어느날, 진소정은 그동안 생각했던 계획대로 정수균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당신이 저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조금이라도 감사한 마음을 표달하기 위해 저녁 한끼를 사드릴가 하는데 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라고 청했다. 정수균이 재삼 사양하자 진소정은 “당신은 절 깔보는거죠?”라고 했다. 정수균은 하는수없이 그녀의 식사요청을 받아들였다.   진소정은 정수균에게 자꾸만 술을 권하면서 자신도 많이 마셨다. 식사가 끝난후 진소정은 “전 취했어요.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부모한테 욕을 먹을것이고 아이한테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싶잖아요. 그러니 당신이 먼저 절 호텔에 데려다줘요. 거기서 쉬다가 술이 깬후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라고 부탁했다. 정수균은 그녀를 호텔에 데리고가서 방을 잡아주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진소정이 갑자기 그를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사실 전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이 절 많이 도와주었는데 이번에 제가 한번만 보답해드리겠어요.” 진소정은 정수균을 꽉 껴안고 키스까지 퍼부었다. 진소정은 비록 40살이 거의 되였지만 얼굴이 예쁜데다가 여전히 풍만하고 부드러운 피부에 매력적인 몸매를 유지하고있었다. 미모의 녀인이 주동적으로 유혹하는데다가 술기운까지 뻗치자 정수균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런 경우 일반적인 남자라면 모두 범할수 있는 실수를 범했다.   그후 정수균은 몹시 후회했다. 그의 사업에서의 성공은 부부가 함께 분투한 결과였다. 근 20년의 결혼생활을 해오면서 그들의 부부감정은 매우 깊었다. 그는 이 일로 하여 가정과 회사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차갑게 대해주었고 그녀한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와도 일이 바쁘다는 핑게를 대고 거절했다. 그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말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리해해주기를 바랐다.   2009년 7월중순의 어느날, 진소정은 정수균한테 여러번이나 만나자고 전화를 걸었다. 정수균은 한번 만나서 자기의 생각을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약속한 장소에서 그녀를 만났다. 진소정은 그를 보고 리혼한후 자기와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러나 정수균은 “그날 일은 내가 미안했소. 나는 안해와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깐 이제 다시는 전화를 하지 마오”라고 말하는고는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진소정은 정수균의 회사에까지 찾아갔으며 그의 안해한테까지 그들의 관계를 알리겠다고 위협했다. 정수균은 진소정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 먼저 안해한테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수균의 안해 림효영은 처음에는 화가 나서 견딜수 없었지만 결혼하여 근 20년동안 남편이 한번 실수를 범했으니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소정은 이런 위협까지 소용없게 되자 미칠것만 같았다. 그녀는 정수균을 랍치하여 자신의 남자로 되게 하려고 자신을 누나처럼 따르던 한효명한테 20만원을 주겠으니 사람을 모아 정수균을 랍치해달라고 부탁했다.   2009년 11월 22일 오후 4시에 한효명은 고향친구 장붕 등을 불러 정수균을 랍치했다. 그후 진소정이 한효명한테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더니 랍치당해 나무에 묶이운 정수균이 돈 10만원으로 보상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절망한 진소정은 층집에서 뛰여내려 자살했다.   얼마 안되여 랍치범들은 법망에 걸려들었다. 한효명, 장붕 등을 붙잡은 후 경찰들은 즉시 그들을 끌고 정수균을 찾으러 랍치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정수균은 이미 사망되여있었고 옆에는 수십대의 일회용주사기가 놓여있었는데 여러대는 이미 사용한것이였다. 경찰들은 주사기와 정수균의 체내에 “독서강(毒鼠强)”성분이 있는것을 발견했다.  또 정수균의 목에 바줄이 매여져있는것으로 보아 질식하여 사망되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비록 원흉 진소정은 이미 투신자살했지만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있다. 정수균은 착한 마음을 가졌댔지만 한발자국을 잘못 내디뎠기때문에 비명에 죽었고 진소정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잘못된 감정에 너무 집착했는데 이는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다.     《법제일보》    
53    안해를 겁주려고 랍치자작극 벌렸다가 댓글:  조회:3610  추천:0  2010-06-12
  기세등등한 안해에게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한 남성이 복수를 하기 위해 “랍치자작극”을 벌렸다가 들통나 형사처벌을 받았다고 《화상신보》가 일전에 보도했다.   료녕성 영구에 거주하는 손모는 직장에서 일하던중 남편 진씨의 핸드폰으로 발송된 문자메시지(短信)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   “당신 남편이 우리 수중에 있다. 당신이 돈을 준비한 뒤 나중에 장소와 시간을 알려줄테니 돈과 교환하자”는 내용이 담겼던것이다.   경찰에 절대 알리지 말라는 경고가 있었지만 손모는 고민끝에 이를 영구시공안국에 신고했다. 경찰들은 즉각 수사팀을 구성하고 사건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수사를 진행하던 경찰들은 다른 유괴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의 범인은 랍치한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손모에게 전화조차 걸지 않은채 “태평”했고 손모의 가정형편도 넉넉치 않았던터라 유괴대상으로는 “함량미달”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수사가 혼선을 빚던 가운데 경찰들은 실종됐던 진모가 대련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곧 그가 머물던 한 호텔을 수색했다. 혼자 느긋하게 텔레비죤을 시청하던 진씨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경찰을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이번 랍치사건이 스스로 벌인 자작극이라고 실토했다.   경찰들이 조사한 결과 진씨는 수년전 직장을 잃고나서 안해가 벌어오는 돈에 의지해 “전업주부”로 일하면서 온갖 구박과 수모를 받았지만 안해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면서 불만이 쌓였던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경찰에 검거된 뒤 “안해에게 이렇게 쥐여사는건 남자로서 할짓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맞붙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며 “안해한테 적당히 겁을 주고 보름정도 푹 쉬다 돌아갈 생각이였는데 일이 이렇게 커질줄 몰랐다”고 후회했다.   공안기관에서는 공공질서소란죄로 진모에게 행정구류 10일 처분을 내리고 사건을 매듭지었다.                         《화상신보》    
52    군인의 어머니 댓글:  조회:4841  추천:0  2010-05-12
  방송에서 “엄마가 보고싶을 때”라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군인들의 면회시간이 되였다. 전 련의 병사들이 줄을 섰는데 면회를 온 군인의 어머니는 한분뿐이였다. 련장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어머니, 어디에서 오셨어요?”“예, 저는 아들보러 산동에서 왔어요.”특유의 산동발음이 섞인 사투리가 구수했다.“어머니, 오시는데 힘드셨죠. 그래 얼마나 걸리셨어요?”“예, 꼬박 하루 걸렸네요.”“어머니, 아들 보고싶으시죠?”“예, 그럼요.”연병장의 병사들은 어머니에게 일제히 경례를 하였다. 련장은 연병장의 병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이분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그러자 수많은 병사들이 앞으로 달려나와서 하나하나 줄을 맞추어 서는 바람에 한쪽으로 물러나있던 련장은 어머니곁에 바싹 다가선 한 병사의 곁으로 와서 물었다.“이분이 어머니 맞습니까?”“예!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그 병사는 군인다운 씩씩한 모습으로 우렁차게 웨쳤다.“어찌 자식이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모르겠습니까?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련장은 그 병사를 보고 다시 물었다.“고향이 어디예요?”“예, 저의 고향은 서안입니다.”“아니, 이 동지 좀 봐. 어머니는 산동에서 오셨는데…”련장은 그 병사의 어깨를 탁 쳐서 밀어버렸다. 그 병사는 쭈뼛쭈뼛하며 한쪽으로 밀려가고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련장은 다음 병사한테 다가가서 어머니가 옳으냐고 물었다. 그 병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예!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어제밤 꿈에 어머니를 보았는데 오늘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련장은 웃으면서 그 병사를 밀어버리고 다음 병사를 보고 어머니가 옳으냐고 물었다. 그 병사도 씩씩하게 대답했다.“저는 어머니의 향기에 이끌려 왔습니다. 어찌 자식이 어머니의 냄새도 모르겠습니까! 저의 어머님이 확실합니다.”련장은 웃으면서 그 병사를 밀어버리고 그 다음 병사를 보고 어머니가 옳으냐고 물었다.“동지도 이 분이 어머니가 확실합니까?”그런데 그 전사는 힘없이 대답했다.“아닙니다. 이 분은 저의 어머니가 아닙니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부대에 오기 일주일전에 돌아가셨습니다.”그 병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목소리도 우울했다. 그러자 전체의 분위기도 숙연해졌다. 그 병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저는 하늘나라에 계신 저의 어머니에게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아, 그래요? 어머니께서 지금 보고계실것입니다. 어서 말해보십시오.”“예,  련장님,  저도 어머니께서 보고계실것이라고 확신합니다.”병사의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는듯했지만 씩씩함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저의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고 저는 지금 고아로 있습니다.”병사의 뺨으로 눈물이 흐르고있었지만 손으로 훔치지도 않고 눈을 감으려고 애쓰지도 않는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다. 련장도 눈물을 흘리고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고 다른 병사들도 눈물을 흘렸다.“그럼 어머니께 한마디 하세요.”병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시선을 하늘로 향한채 씩씩하게 경례를 붙였다.“어머니, 이 아들은 부대에서 수장동지와 전우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잘 지내고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가 없었지만 지금 저에게는 또 어머니가 있게 되였습니다. 어머니, 전 지금 이 앞에 계신 어머니를 저의 어머니로 모시렵니다!”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병사를 바라보면서 병사의 손을 꼭 잡았다.“고맙다. 내 아들!”그러자 전 련의 병사들이 동시에 이구동성으로 웨쳤다.“우리도 어머니를 저희들의 어머니로 모시겠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모든 전사들의 어머니입니다!”잠시 말이 끊어졌다. 눈물에 목이 메여서일것이다. 전사들을 면회온 어머니는 몇달전에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된 이 련의 한 전사의 어머니였던것이다.                                                            《중국군인넷》  
51    제3자의 사생아 남편의 피줄이 아니였다 댓글:  조회:4337  추천:0  2010-01-27
모 국장부인 최평은 남편에게 젊은 정부가 있고 그들사이에서 아들까지 태여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그녀는 분개할 대신 그 아이를  잘 키워주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세상에 최평처럼 너그러운 안해가 있단 말인가? 남편도 기뻐했고 제3자도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있었다. 이 모든것이 최평이 남편에게 보복하려는 심보였다는것을… 현장에서 바람피운 남편을 잡다 2007년 6월 7일 오전, 회의중에 최평은 이상한 메시지(短信)를 받았다.“당신의 남편이 지금 해방로 행복사회구역 2번지 3층 아빠트에서 젊은 녀자와 재미를 보고있다. 믿지 못하겠으면 빨리 찾아가 잡아라.” 최평의 남편 리명뢰는 하남성 모 시의 물자국 국장이고 나이가 50이 넘었지만 여전히 풍도가 있어보였다. 최평은 남편의 주변에 많은 녀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대학에 다니는 딸한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모든것을 꾹 참고 지내려 했다. 하지만 집주소까지 상세하게 알려준 메시지를 받고는 더는 참을수가 없어 회의실에서 뛰쳐나갔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최평은 헐떡이면서 3층까지 올라왔지만 그래도 아니겠지 하면서 조용하게 문을 노크했다.“누구요? 수도세를 받으러 온 사람인가?”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분명 남편이 틀림없었다. 집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남편이였다. 남편은 잠옷을 입고있었는데 품속에 영아를 안고있었다.남편은 아주 당황해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찾아왔소?” 최평은 남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는 쌍침대가 있었는데 젊고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녀자가 잠옷바람으로 그우에 누워있었다. 쌍침대옆에는 영아침대가 있었고 방안에 영아용품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최평은 피가 꺼꾸로 흐르는것만 같았다. 남편이 밖에서 바람을 피우는것까지는 눈을 감아줄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살림을 차리고 애까지 낳아 키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평은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그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여보, 여보, 정신을 차리오. 당신에게 참 미안하오. 하지만 이는 돌이킬수 없는 사실이잖소? 당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소. 하지만 저 녀자와 이 어린애만은 괴롭히지 마오. 내가 잘못했소.”정신을 차린 최평은 남편의 귀뺨을 후려치고는 휘청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후에 최평은 남편이 사귄 녀자의 이름이 곽병병이고 올해 20살밖에 안되는 대학생이며 임신한후 1년간 휴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한창 대학에 다니는 녀학생이 어떻게 50살이 넘은 남편을 만났으며 아들까지 낳게 되였는가? 사실 곽병병은 편벽한 농촌마을에서 대학에 입학했던것이다. 하지만 집이 너무 가난하여 부모들은 딸의 뒤바라지를 해줄 형편이 못되였다. 하여 곽병병은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대학공부를 견지했고 고학을 하면서 돈을 모아 학잡비를 마련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려고 저녁이면 안마원에서 일했다. 2006년 양력설날, 리명뢰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신후 발안마를 했다. 그날 리명뢰는 곽병병한테서 발안마를 받았다. 하지만 솜씨가 서투른 곽병병의 안마가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저리 썩 물러가. 이렇게 하고서도 돈을 받으려고? 이봐 주인, 안마사를 바꿔.”그러자 주인이 사정했다.“지금 다른 안마사가 없습니다. 이 녀자는 새로 온 안마사인데 대학생입니다.” 대학생이란 말에 리명뢰가 눈을 뜨고보니 곽병병이 구석에 서서 괴롭게 울고있었다. 리명뢰도 농촌에서 자랐으며 어려서 많은 고생을 했다. 동정심이 생긴 그는 곽병병더러 계속 안마를 하게 하면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명뢰는 갈 때 책을 사라면서 곽병병에게 따로 팁 100원을 주었다. 그후부터 리명뢰는 발안마를 할 때마다 곽병병을 요구했다. 하여 둘은 자연히 익숙해졌다. 이때 곽병병에게 남자친구 조붕이 있었지만 그는 집이 아주 가난했다. 곽병병은 학습과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주는 리명뢰국장이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나중에 둘은 끝내 넘지 말아야 할 최후방어선을 넘고말았다. 리명뢰는 곽병병한테서 자신의 20대의 격정을 되찾았다. 리명뢰는 10년간 안해몰래 저금한 돈으로 곽병병에게 침실 두개가 딸린 아빠트를 사주었고 그녀의 학잡비를 전부 책임졌다. 둘은 늘 “사랑방”에서 함께 생활했다. 헌데 생각밖에 곽병병이 임신을 했다. 곽병병은 처음에 배속의 애를 지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애가 없으면 예전처럼 돈이 없는 거지생활로 돌아갈것 같아 아이를 꼭 낳으려고 마음먹었다. 리명뢰에게는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그도 아들이 욕심나기에 배속의 태아가 아들이란 말을 듣고 반대하지 않았던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최평은 분통이 터졌다. 자신을 배반한 남편과 가정행복을 빼앗아간 곽병병을 죽이고싶었다. 하지만 최평이 곰곰히 생각해보니 떠들면 떠들수록 부부사이의 감정이 크게 상할것이고 나중에 리혼할지도 모를 일이니 손해볼 사람은 자신이 번연했다. 그는 남편과 곽병병에게 복수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리명뢰가 안절부절 못하고 안해의 “판결”을 기다리고있을 때 뜻밖에 안해가 이런 말을 꺼냈다.“사생아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당신의 정치생명도 끝장이니 아이를 집에 데려와요.  곽병병도 어렵게 대학에 붙었는데 끝까지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는 내가 키우겠어요. 우리 집에서 불쌍한 고아를 데려다 키운다고 말하세요.” 리명뢰는 너무도 감동되여 눈물을 흘렸다. “여보, 참 고맙소. 당신이 이렇게 도량이 넓을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소. 나 이후 당신을 꼭 잘 대해주겠소.” 복수하려고 아이를 팔아버리다 최평은 아이를 집에 데리고왔다. 곽병병은 수속을 밟고 다시 등교했다. 리명뢰는 모든일이 순조롭게 풀린줄 알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좋아했다. 동생 최균이 매형을 찾아가 한바탕 패주겠다면서 펄펄 뛰자 최평은 제지시켜면서 자기의 복수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러지 말고 누나의 말을 좀 들어. 너 지금 어린아이를 사갈 사람이나 물색하거라. 우리 저 아이를 팔아버리자. 멀고 형편없이 가난한 집안이면 더욱 좋다. 못난 매형과 그 쌍년의 속을 말리워서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보자꾸나.”“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지지 않소?”“국가간부와 녀대학생이 바람피웠는데 그들이 감히 들고 일어나? 걱정마.” 최균이 나서서 조건이 부합되는 가정을 찾았다. 광서에서 온 한 농민공이 자기의 삼촌이 반신불수로 생육능력을 상실하여 아이를 사다 부양하려 하나 돈이 없어서 여직껏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최균은 200원에 아이를 광서 중국ㅡ웥남변경에 있는 그 농호에게 팔기로 협상했다. 3일후 리명뢰가 북경으로 출장을 떠났다. 이때라고 생각한 최균은 200원을 받고 아이를 팔아버렸다. 그날 저녁 곽병병은 아이를 보러 왔다가 아이가 없어진것을 보고 의심되여 물었다.“우리 보배둥이는 어디 갔어요? 왜 보이지 않아요?”“보배둥이? 오, 내가 팔았다. 걔를 보기만 하면 난 구역질이 나거든. 내가 죽이지 않은것만도 다행인줄 알아.” 곽병병은 아이를 내놓으라고 최평에게 달려들었다.“아이를 내놓으라고? 너 참 뻔뻔스럽구나. 남의 남편을 꼬시라고 네 에미애비가 널 키워 대학에 보냈어? 우리 집에서 썩 물러가지 못해?” 곽병병은 최평의 집에서 나오는 길로 파출소에 찾아가 두달밖에 안되는 영아가 팔려갔다고 제보했다. 공안국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2007년 8월 23일, 최평과 최균은 영아판매죄로 형사구류되였다. 리명뢰는 정부를 둔 사실이 밝혀져 당적은 제명당하고 공직을 떼웠다.리명뢰는 간수소에 갇혀있는 안해에게 리혼협의서를 남겨두고 곽병병과 함께 아들을 찾으러 광서로 떠났다. 아들은 남편의 친혈육이 아니였다 2007년 9월 16일, 리명뢰와 곽병병은 당지 경찰들의 도움으로 끝내 아들을 찾았다.리명뢰와 곽병병은 아들을 데리고 공개적으로 동거했다. 2007년 10월 17일, 아들이 된감기로 병원에 입원했다. 검사에서 아들의 혈형은 O형이였다. 리명뢰는 자신의 혈형이 AB형이고 곽병병의 혈형은 A형이란것을 알고있었다. 부모의 혈형이 AB형과 A형이면 자식의 혈형이 절대 O형으로 될수 없는 일이다. 의심이 들어 아들을 데리고 DNA검사를 해본 결과 아들은 리명뢰의 친혈육이 아니였다. 리명뢰가 따지고들자 곽병병은 얼버무리기만 했다.“어찌 이런 일이…나도 몰라요.”사실 곽병병은 리명뢰와 사귀면서 이전의 남자친구 조붕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지 않았다. 지어 리명뢰가 사준 아빠트에서 그 남자와 두번 잔적이 있었는데 그때 임신되였던것이다. 곽병병은 그런줄도 모르도 리명뢰의 아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최평과 최균이 석방되였다. 리명뢰는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면서 안해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곽병병은 아들을 데리고 이 도시를 떠났다.   연변라지오TV신문    
50    등소평생애의 마지막 5년 댓글:  조회:4767  추천:0  2010-01-25
1997년 2월 19일, 등소평이 세상을 떴다. 등소평이 우리 곁을 떠난지도 어느새 12년이 된다.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은 탁월한 지도력 및 과인한 용기와 모략으로 중국을 이끌어 전세계를 진동시킨 전대미문의 변혁을 가동했다. 30여년간의 개혁과 개방을 경과하여 지금 중국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80고령에 다시 개혁을 호소 1992년 1월 2일, 등소평은 인민대회당 118대청에서 “계획과 건강”컵 로동지들의 브리지( 牌)시합에 참가했다. 이 시합은 등소평이 1984년에 발기하여 조직된것이다. 시합결과 등소평이 관군(6개 기술등급중 세번째 등급)을 획득했다. 대회에서는 등소평에게 “브리지대사”란 칭호를 수여했다. 등소평은 이때 88세였으나 몸은 여전히 건강했다. 반달이후 그는 남방으로 달리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격정이 넘쳐흐르는 개인려행은 중국의 “활력”을 회복시켰다. 당시 등소평의 강렬한 개혁결심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심수를 떠날 때 등소평은 심수시민들앞에서 심수시당위서기에게 “당신들은 다른 곳보다 좀 더 빨리 진행하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당시 등소평의 남방순방“목표”는 개혁을 가속화하는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개혁을 담보하는것이였다. 등소평의 과거 일화와 마찬가지로 이번 려행도 전기적색채를 띠였다. 심수 선호식물원에서 그는 처음으로 “발재수”를 보았다. 그는 이 나무를 보고 “전국인민들이 다 이 나무를 심으면 좋겠소. 전국인민들이 다 부자로 되게 말이요.”라고 말했다. 그는 심수의 고층건물우에 올라 향항을 바라보았다. 주해에서 등산할 때 경호원은 등소평에게 원래의 등산길을 따라 하산할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원래의 등산길을 선택한것이 아니라 새 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는 되돌아가는 법이 없소”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경호원의 건의에 대답했다. 심수, 주해, 광주와 상해에서 그는 가는 곳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자본주의도 계획경제가 있고 사회주의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말을 여러번 강조했다. 이번 려행은 비밀리에 진행되였다. 향항의 매체에서 일정한 보도를 하긴 했지만 등소평 본인은 신화사에서 자기의 려행소식을 내는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3월상순에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련속 이틀간이나 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의 남방순찰시의 담화를 학습했다. 그해 6월 9일에 국가주석 강택민이 내부회의연설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시장경제”란 개념을 제출했다. 등소평은 이 개념을 정식으로 사용할것을 동의했으며 그해에 소집하는 중공14차 대표대회에서 이 개념을 도입할것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4차 당대표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체제”란 제기법을 더 선명하게 개혁성을 띤 “사회주의시장경제”로 대체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등소평은 특수한 사명을 완수한후 점차 력사무대에서 물러났고 조용히 평범하게 인생의 마지막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규칙과 질서 역시 점차 정식으로 가동되였다. ▶ “나는 이미 답장을 바쳤다” “한 국가의 운명이 한두사람의 명망에 걸려있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것이며 아주 위험한것이다.” 등소평은 1989년 6월 16일에 담화중에 이 말을 했다. 14차 당대표대회를 마칠 때 등소평은 딸 등용의 부축을 받으며 인민대회당으로 와서 대표대회에서 새로 당선된 중앙정치국 위원들을 접견했다. 이것은 등소평의 일생중에서 마지막으로 공공장소에 나타난 중요한 한차례 행사였다. 이로써 그의 “계획”은 기본상 결속되였다. 그는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왔다. “남방순찰”시 상해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진정한 평민백성으로 돌아온것이다. 그날은 정월 대보름이였다. 그는 거리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려 했다. 신변일군이 그에게 상해제1백화상점을 선택해주었다. 그는 오방국한테서 10원을 꾸어 손자벌이 되는 맹맹과 양양에게 연필과 고무지우개를 사주었다. 그는 평민백성이 되여 매대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물건을 사는것이 아주 재미있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오자 등림이 “오늘 상점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상점에 가지 말아야 하겠다. 괜히 백성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라고 대답했다. 그해 여름 그는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수영했다. 북대하에서 그는 8번이나 바다물에 들어가 번마다 45분가량 수영했다. 미국의 어느 한 정치학교수는 근대중국을 총화하면서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등소평 그리고 손중산을 포함한 중국 지도자들은 다 중국에서 현대화를 실현하여 외래 제국주의의 통제에서 해방되려 했다”고 서술했다. 등소평은 주은래와 함께 “네가지 현대화”원칙을 기획하여 중국을 강대한 공업화국가로 건설할것을 추구하여왔다. 그후 개혁개방이후 그는 목표를 조절하여 아주 실제적인 “초요사회”를 건설하는것으로 항선을 바꾸었다. 1993년초 그는 중국공산당의 차기 령도집체에 “중국에 대한 책임문제에 한해 나는 이미 답장을 다 바친 사람이다. 이제부터 당신들이 잘해야 한다”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1994년 10월 1일, 북경 조어대 국빈관에서 등소평은 부축을 받으며 승용차에서 내린 다음 다시 밀차에 앉았다. 그는 국경불꽃을 관람한 다음 생전에 마지막 공개발표한 사진을 남겼다. 당시 그는 이미 90세고령이였다. 그날 밤, 등소평은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영향력이 아주 큰 문장을 발표했다. 그는 국경만찬회에 출석한 박일파에게 위탁하여 축사를 대독하게 했다. 축사중 중앙정치국 성원과 전체 중국공산당 당원에게 “강택민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주위에 긴밀하게 단합하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후부터 등소평은 공개장소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국가책임을 새로운 령도층에 인수인계하는 작업은 끝났다. 국경불꽃이 북경의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었다. 등소평은 중국개혁개방에 새로운 유전자요소를 주입했다. 차후에 중국에서 발생한 모든 변화에는 그의 영향이 깃들어있다. ▶생애 마지막의 청정함 북경 경산후가의 미량고 골목거리 3호에 검은 벽돌에 회색기와를 이은 집에 록음이 흘러넘치는 뜨락이 있다. 이곳에서 살고있는 등소평은 국가를 위한 일에 더는 참여하지 않고 만년을 보냈다.신화사 보도중에 이 뜨락은 자연계의 생기가 넘치는 곳이라고 쓰고있다. “석류과일이 주렁주렁 달렸고 맑고 밝은 록음이 2층집을 가리고있다. 뜨락 복판에 작은 련꽃못이 있다. 여름의 련꽃이 찬란하게 피였다. 못 중앙의 태호석을 타고 물이 졸졸 흐르고있었으며 반공중에 흐느적이는 나무가지에는 간혹 매미가 울고있었다.” 만년의 등소평은 취침전에 꼭 무협소설을 읽는것으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의 인상과는 상반되게 평가했다. “무협소설의 가장 좋은 점은 다음에 또 읽을수 있게 쓴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읽을 필요가 없다.” 이는 등소평이 등용에게 한 무협소설에 관한 평가다. 등소평생애의 마지막 3년간의 내용은 “등소평년보”중 얼마 안된다. 국가를 위해 일을 하지 않기로 한이상 등소평의 생활은 아주 평범하고 별로 기이한 내용이 없다. 등림은 텔레비죤기록편으로 “등소평의 하루”라는 내용을 찍으려고 했는데 몇번이나 시도해보았지만 끝내 실패하고말았다고 소개했다. 등소평의 일상생활이 너무 규칙적이며 평범해서 별로 남길만한 장면이 없었다는것이다.   “희극적인 장면을 찾고 아주 재미가 있는 장면을 고르려고 했지만 그만 실패하고말았다.”이렇게 말하는 그는 “몇번이나 시험해보았지만 종내 성사하지 못했다”고 이실직고했다. 등소평은 여전히 담배를 피웠다. 그해 12월 22일, 페부가 감염되여 중국인민해방군 총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7일에 퇴원했다. 미국 한 방송회사의 주최자 메크 화래이스가 발견한것과 마찬가지로 등소평은 담배려과부분이 담배부분보다 긴 특제담배를 피웠다. 1996년 12월 22일, 등소평은 병이 도져 또다시 해방군 총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그의 생명은 최후의 두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다 하지 못한 사업은 아직도 많고 많았다. 작은것은 중국의 축구문제이고 큰것은 정체체제개혁이였다. 등소평은 입원했을 때 텔레비죤에서 “등소평”이란 기록편을 보았다. 간호원들은 후에 등소평이 자기에 관한 기록편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고 피로했다. 두달후 등소평은 서거했다. 그해 여름 중국정부는 향항의 주권을 행사하는것을 회복했다.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죤에 나오는 등소평의 거처에 있는 울창한 록음을 자랑하는 청송, 해당화와 앵두의 싱싱함을 잊지 않을것이다. 여기서 위대하면서도 평범한 한 로인이 일생의 마지막 5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연변라지오TV신문    
49    10년만에 “원쑤”를 만난 뒤 댓글:  조회:4107  추천:2  2010-01-18
10년전에 나어린 리청청은 성소재지에서 가정보모로 일했다. 그녀는 녀주인의 학대를 받다못해 분연히 뛰쳐나왔다. 10년이 지난후 녀사장으로 된 리청청은 가정보모를 구하려고 로무시장에 나갔다가 당년의 녀주인 동춘교를 만났다… ▲ 주인의 학대를 받다못해 뛰쳐나가다 1997년 음력설, 16살도 안되는 리청청은 부모들이 리혼하자 갈곳이 없어 외할머니집에 얹혀살게 되였다. 그녀는 공부를 하고싶어도 계속할수 없는 처지여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강서성 상률현에서 남창시로 갔다. 처음에 그녀는 사촌오빠 양정호를 따라 장식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가정보모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로무시장에 나가 구직패쪽을 들고 서있는데 30살쯤 되여보이는 한 녀자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보고 말했다. “너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돌볼수 있겠니? 너 이름이 뭐지?”“난 리청청이라 불러요. 아지미, 난 뭐든지 다 할수 있어요.”녀주인은 온순하고 령리해보이는 리청청을 마음에 들어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겠으니 매달 400원이면 어때? 할수 있겠니?”“좋아요. 할수 있어요.” 동춘교라고 부르는 이 녀주인은 아동복장도매상으로서 남편 범성방은 택시를 몰고 아들 범매는 세살이였다. 리청청은 날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남새를 사들이고 집안을 청소하고 밥을 지어야 했다. 때로는 장사일때문에에 몸뺄새가 없는 녀주인에게 점심밥을 날라가기도 했다. 비록 매일 집안일을 하느라고 지칠대로 지쳤지만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범성방은 날마다 아침일찍 나갔다가 저녁늦게야 들어왔는데 집안이 환하고 청청이가 아이와 잘 놀아주는것을 보고 늘 엄지손가락을 내들었지만 녀주인은 칭찬 한마디 없이 항상 굳은 얼굴로 청청을 대했다. 어느날 저녁식사후 청청이 범매를 데리고 밖에 나가 산책을 했다. 광장에서 많은 애들이 뛰놀고있었다. 갑자기 범매가 미끄럼대를 타고 내려오는 한 아이에게 부딪쳐 넘어졌는데 이마가 다치여 멍이 들었다. 당황해난 청청은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약을 발라주었다. 동춘교는 아들애가 다친것을 보고 다짜고짜 청청의 귀쌈을 때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빌어먹을년, 아이를 어떻게 굴었기에?!”여태껏 가난하게 살았어도 청청은 누구한테 매를 맞아본적이 없었다. 그날은 바로 그녀의 16살되는 생일날이였다. 서러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날 동춘교는 청청을 보고 고기와 남새를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물고기가 너무 작다느니 근수가 모자란다거니 하면서 가탈을 부렸다. 청청은 미안해하며 사정했다.“미안해요. 오늘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좀 늦게 시장에 갔댔어요.”“오, 일부러 눅거리를 사오고 중간에서 내 돈을 떼먹은 모양이구나?”“뭐요? 전 여직껏 남새를 사고 남은 돈은 일전도 빠짐없이 돌려드렸어요.”“네가 내 돈을 떼먹은게 틀림없다. 거지같은년, 큰돈이 욕심나면 그만두고 아예 거리에 나가 몸이나 팔아!” 이 한마디는 비수처럼 청청의 가슴을 찔렀다. 극심한 인격모독을 더는 견딜수 없었다. 청청은 분연히 동춘교네 집을 뛰쳐나와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속으로 사라졌다. ▲ 10년후 가정보모가 녀보스로 되다 리청청은 비오는 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 한 간이음식점에 들어가 칼국수 한그릇을 먹고있는데 공교롭게도 양정호네가 들어섰다. 청청이가 울면서 하소연하니 양정호의 친구들은 분해서 펄펄 뛰였다. 청청은 다시 사촌오빠를 따라 장식회사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양정호는 그녀더러 친구인 장파한테서 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이를 악물고 버텨냈더니 몸은 휠씬 야위고 얼굴색이 검어졌지만 되려 더 건강하고 예뻐지는것이였다. 청청은 모든 장식기술을 배워냈을뿐만아니라 장식재료의 종류와 가격까지 척척 외울수 있게 되였다. 2000년, 양정호와 장파는 자체로 장식회사를 꾸렸다. 그들은 품질제일의 경영원칙을 지켰기에 남창의 장식시장에 발을 튼튼히 붙일수 있었다. 회사를 더욱 크게 발전시키려고 양정호와 장파는 2005년에 회사를 가르기로 했다. 양정호가 원래의 회사를 관리하고 장파는 장식재료공급회사를 새로 내오기로 했다. 이때에 와서 청청과 장파는 련애하는 사이였다. 장파는 청청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청청은 꼼꼼하고 령리한 사람이요. 당신이 경영하오. 난 옆에서 거들어줄게.”리청청은 사양하지 않고 회사의 일을 조리정연하게 밀고나갔다. 장파는 주동적으로 영업허가증에 있는 법인대표의 이름을 리청청으로 고쳐놓았다. 2002년에 장파와 청청이는 결혼식을 올렸다. 2년후 아들 장공이 태여났다. 몇년간 분발한 보람으로 그들은 자기의 회사는 물론 아빠트를 마련하고 자가용차까지 사놓았다. 2005년초, 장식일에 더욱 바빠진 청청은 가정보모를 찾아 아들애를 돌보게 하려고 로무시장으로 갔다. 그런데 구직패쪽을 들고 서있는 동춘교와 마주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동춘교는 그녀를 보자 피하려고 했다. 청청은 웃음을 담뿍 담고 뒤쫓아가 물었다. “동아지미, 아지미가 여긴 웬일이죠?”동춘교는 대답대신 눈물부터 흘렸다.“청청이, 난 팔자가 사나운 녀자라오…”“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내가 가정보모를 찾고있는중인데 마침 잘됐네요. 우리 집으로 가자요.”동춘교가 우물쭈물하자 청청은 열정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 10년후 신분이 엇바뀌다 청청의 집에 들어선 동춘교는 자기 눈을 의심할 지경이였다. 당년의 애어린 가정보모가 지금은 으리으리하게 사는 녀주인이 되였던것이다. 그녀는 차물을 마시면서 청청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가고 물었다. 청청은 자기가 지나온 세월들을 숨김없이 들려주고나서 동춘교의 처지를 물었다. 동춘교는 눈물범벅이 되여 “청청이, 내가 그때 청청을 못되게 굴었더니 벌받았나보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신세를 하소연했다. 당년에 청청이 집을 뛰쳐나간후 동춘교는 파출부를 청하여 아이를 데려가고 데려오게 하면서 자기는 그냥 도매시장에서 바삐 돌아쳤다. 어느날 점심때 남편 범성방은 손님을 싣고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라지오에서 갑자기 놀라운 뉴스가 방송되였다. 한 파출부가 유치원에서 아이 셋을 데리고 도망쳤는데 그중에는 범씨성을 가진 아이도 들어있다는것이였다. 범성방은 30킬로메터 떨어진 공항에서 나는듯이 시내로 달려와 동춘교를 태운후 유치원쪽으로 불이 펄 나게 차를 몰았다. 그런데 알아보니 유괴된 아이는 자기 집 아이가 아니였고 범인은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뒤였다. 공연히 놀란 동춘교는 갑자기 부랴부랴 달려오느라고 가게문을 걸지 않은것이 생각났다. 그들 부부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내온후 다시 도매시장쪽으로 나는듯이 달렸다. 그날 비가 퍼부어 길이 아주 미끄러웠다. 범성방의 택시는 갈림길어구에서 큰 화물차의 뒤꽁무니를 들이박았다. 조수석에 앉았던 아들애는 당장에서 죽고 범성방은 중상을 입었으며 뒤좌석에 앉은 동춘교가 경상을 입었다. 범성방은 병원에서 20여일간 구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사망되고말았다. 동춘교는 남편을 구하려고 모든 가산을 다 팔아 치료비로 밀어넣었는데 결국 사람도 재산도 다 잃고말았다. 청청은 범씨네 부자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동춘교에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굳세게 살아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연분이 있어 다시 만났으니 자기 집에서 일하면 절대 섭섭하게 굴지 않겠다고 위안했다. 2007년 9월에 장공은 집부근에 있는 갓 개업한 전탁유치원에 가게 되였다. 일자리를 잃게 된 동춘교가 수심에 잠겨있었다. 이때 청청은 그녀를 보고 자기네 회사에서 일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10년전에 난 청청을 때리고 욕했댔소. 너무 인정머리없이 굴었댔소. 그런데 내가 이 모양이 되였는데 청청은 앙갚음을 할 대신 이렇게 잘 대해주니 도무지 그 뜻을 알수 없단 말이요.” “사실 나도 한동안 아지미를 미워했댔어요. 그런데 그건 10년전의 일이예요. 그리고 만일 당시 아지미집에서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내가 있을지도 모르죠. 10년후에 이렇게 또 만나니 연분이 아닌가요? 더군다나 아지미가 혈육들을 잃고 가정까지 파탄되였는데 어찌 계속 미워할수 있겠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연분이 가장 소중하지요.”   “맞는 말인가보오. 사람의 연분은 하늘이 정해주는거지.”청청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래요. 동아지미, 오늘부터 우리 절대 지난 일을 꺼내지 말자요. 그렇게 할수 있겠죠?”청청은 손을 내밀어 동춘교와 따뜻한 악수를 나누었다. 선량하고 너그러운 청청의 앞에서 동춘교는 더는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연변라지오TV신문    
48    쵸몰랑마봉에 오른 신혼부부 댓글:  조회:4099  추천:0  2009-10-27
복건성 하포현에서 출생한 림도는 1995년에 상해의료기계고등전문과학교를 졸업한후 북경대학에 들어가 석사공부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북경에 회사를 세우고 의료기계를 경영했다. 그후 돈을 많이 벌어 집도 마련하고 자가용차도 갖추었지만 어쩐지 가슴속이 텅 빈것 같았다.   그는 울적한 가슴을 달래기 위해 등산도 하고 격검운동도 했다. 그는 서장등산학교에서 등산활동을 조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참으로 등록했다. 2007년 10월 3일, 33살인 림도는 등산대원들을 따라 서장의 한 녀승암까지 왔다. 여기는 당구라산으로 오르는 해발 4700메터 되는 곳이였다. 림도가 풍막앞에서 쉬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를 부르는것이였다. “림도씨,    과일씨를 좀 줄수 없나요?”림도가 머리를 들고보니 조양이란 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있었다.   다시 보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입이 빨간 작은 새 한마리가 조양의 머리에 앉아 뭐라고 지저귀고있었는데 여간 귀엽지 않았다. 림도는 몇알의 과일씨를 조양의 손에 쥐여주었다.    조양이 웃으면서 과일씨를 쥔 손을 펼쳐들자 입이 빨간 작은 새는 그녀의 손바닥에 내려앉아 과일씨를 쪼아먹더니 그녀의 주위를 날아갔다 날아왔다 하면서 재롱을 부렸다. “정말 신기하오.   그 새는 조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의 화신이 조양에게 청혼하러 온것이 아닐가?”그 말에 조양은 방그레 웃었다. 1972년에 출생한 조양은 대련시체육운동학교를 졸업한후 증권회사에 들어가 행정경리직을 맡았다.  온화하면서도 모험을 즐기는 그녀는 2006년 9월에 산악회의 회원들과 함께 해발 6178메터되는 청해옥주봉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해발 5350메터까지 올라갔을 때 폭풍우를 만나서 포기하고말았던것이다.  그후 등산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사직한후 전문가를 모시고 정규적인 유산소훈련과 근력훈련을 받았다.“이번엔 꼭 성공할거예요!” 조양은 림도를 보고 힘있게 말했다. 그러자 림도는 두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보였다.이튿날,   등산대원들은 계속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림도와 조양은 다른 등산대원들을 멀리 뒤로 떨궈놓고 맨앞에서 올라갔다. 그들은 다른 등산대원들이 6시간만에 오를수 있는 거리를 4시간만에 올랐다.   그들은 풍막을 쳐놓고 해빛에 반짝이는 천연설산을 바라보면서 다른 등산대원들을 기다렸다. 갑자기 자그마한 물체가 길게 호선을 그으며 날아오더니 조양의 머리우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바로 입이 빨간 새였다. 그 새는 해발 4700메터되는 곳에서부터 해발 5400메터되는 이곳까지 따라온것이였다. “허허, 조양의 친구가 따라왔구만!”림도는 흥분하여 소리치면서 재빨리 과일씨를 조양의 손에 쥐여주었다. 조양이 손바닥을 펼쳐들자 그 새는 그녀의 손바닥에 포르르 날아와서 과일씨를 쪼아먹기 시작했다. 조양은 너무도 기뻐서 방그레 웃었다.   그녀의 밝게 웃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순간 림도는 마음이 설레였다. 2007년 10월 5일, 등산대원들은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6000메터를 넘어서자 산체의 곳곳에 많은 균렬이 나타나 등산대원들은 간신히 한발작씩 오르기 시작했다. 림도는 주동적으로 조양에게 안전바줄을 매주면서 보살펴주었다. 두 사람은 먼저 해발 6206메터되는 곳까지 올랐다.   산의 정상에 오른 등산대원들은 너무도 기뻐 두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했다. 북경에 돌아간 림도는 조양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삼삼거리면서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조양에게 여러통의 편지를 써보냈다.   조양도 역시 키크고 멋진 림도를 잊지 못하고있었다. 그녀는 번마다 회답편지를 써보내면서 그리운 정을 표시했다. 2008년 2월 16일, 림도와 조양은 또 함께 탄자니아와 케니아의 변경에 위치한 해발 5895메터되는 치리마짜로산에 올랐다. 그번 등산이 있은후 림도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을 판후 차를 몰고 대련으로 와서 조양과 함께 동거했다. 그들은 손잡고 함께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쵸몰랑마봉에 오르기로 약속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빈해로로 달리면서 체능훈련에 열을 올렸다. 2008년 10월 1일,  림도와 조양은 쵸몰랑마봉에 오르기전의 준비로 기후가 쵸몰랑마봉과 비슷하고 해발 8201메터되는 세계에서 여섯번째로 높은 중국네팔변경에 위치한 탁오유봉에 오르기 시작했다.  조양은 신체소질이 좋고 등산경험이 있기때문에 길잡이의 안내하에 제일 먼저 정상에 올랐다. 림도는 4번째로 정상에 올랐는데 그가 거의 정상에 오를 때 조양은 내려오기 시작했다. 얼마후 내려올 때 날이 밝았다. 해빛이 얼음을 비추자 눈을 자극하는 바람에 림도는 갑자기 앞을 볼수 없었다. 그가 안보인다고 하자 길잡이는 “이는 고원반응이니 별일 없을거라”고 하면서 등산안경을 끼워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오라고 했다. 림도는 아래로 내려오다가 눈앞이 보이지 않아 발을 허공에 딛는 바람에 몸이 벼랑에서 미끌어져내려왔다.  아래는 몇천메터되는 벼랑으로서 떨어지면 분신쇄골이 될판이였다. 다행히 안전바줄이 지탱해주었지만 그의 몸은 허공에 떠있게 되였다.   그가 있는 곳은 얼음이 뒤덮였기때문에 발을 벼랑에 딛고설수가 없었다. 길잡이는 얼마쯤 내려갔기때문에 다시 올라올수 없었다. 그가 사신과 박투하면서 절망할 때 미국등산객과 그의 길잡이가 바줄을 당겨주어 그는 구원될수 있었다. 림도는 산을 거의 내려갔으나 조양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 조양은 림도를 기다리려고 했으나 그녀의 길잡이가 등산시 산소호흡을 하느라 에네르기를 많이 소모했는데 또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오래 머물러있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해서 마지못해 내려왔던것이다.   그때문에 림도는 그녀와 다투고 곧장 부모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양과 헤여진지 3개월이 넘어되는 2009년 1월 29일, 림도는 용기를 내여 핸드폰메시지(短信)로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조양도 자책하면서 이번에 쵸몰랑마봉에 함께 오르자고 약속했다. 림도는 너무도 기뻐서 이튿날 기차를 타고 대련으로 달려갔다. 대련역에 마중나온 조양을 만난 림도는 그녀를 꼭 껴안고 “우리 다시는 헤여지지 말자,   결혼하자”라고 말했다.   그들은 2009년 2월 12일에 결혼등록수속을 밟았다. 2009년 4월초,  쵸몰랑마봉에 오르기 위해 그들은 라싸로 왔다.   그들은 먼저 고원적응훈련을 했다. 산에 오르기전에 림도는 등산대 대장에게 “우리 신혼부부는 손잡고 동시에 쵸몰랑마봉에 오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장은 동의하면서 림도와 조양을 같은 소조에 넣어주었다. 2009년 5월 17일 새벽, 그들은 북쪽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림도가 앞에 서고 조양이 뒤에 섰다. 림도는 몸상태가 매우 좋아서 제일 먼저 제2단계에 올랐다. 여기는 해발 8700메터인데 지세가 험준하고 아래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였다. 림도가 뒤에서 오는 조양을 기다리고있는데 길잡이인 장족사나이가 “빨리 갑시다!  여기는 사람을 기다릴 곳이 아닙니다”라고 재촉했다. 림도는 할수없이 계속 우로 올라갔다. 제2단계를 지나자 달이 눈앞에 보였는데 순식간에 해가 솟아르면서 색갈이 아름답게 빛나고 산과 구름이 모두 발밑에 놓여있었다. 이때 림도는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길잡이가 길을 재촉했지만 림도는 해발 8800메터되는 3단계까지 올라오자 멈춰서서 안해를 기다려 함께 오르겠다고 고집했다. 림도의 길잡이는 대화기로 조양의 길잡이와 련계한후 기다리는데 동의했다.    림도는 바위뒤에서 뼈속까지 스며드는 칼바람을 피하면서 길잡이를 보고 “뉴질랜드등산가 뤄싸얼은 ‘누구도 쵸몰랑마봉을 정복하지 못한다.    쵸몰랑마봉이 그를 받아들일뿐이다.   쵸몰랑마봉이 받아들인 사람은 모두 이후의 생활이 행복할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 쵸몰랑마봉이 나와 나의 안해를 받아들일가요?”라고 물었다. 길잡이는 힘있게 머리를 끄덕였다. 40분동안 기다리느라고 림도와 길잡이는 추위를 견딜수 없어 서로 끌어안고 체온과 체온을 맞대였다. 림도는 “안해여, 안해여, 난 당신을 사랑하오.   쵸몰랑마봉이 당신을 기다리고있소”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소리를 듣고 조양이 마침내 그들앞에 나타났다.   조양은 격동되여 림도의 품에 안겨들면서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림도가 또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조양은 “두려워 마세요. 제가 당신의 눈이 되여드릴게요”라고 말했다. 2009년 5월 17일 오전 10시,  림도와 조양은 마침내 지구의 최고봉에 올랐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힌 웅위롭고 장엄한 쵸몰랑마봉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몹시 설레였다.   그들은 서로를 꼭 껴안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행복을 준 쵸몰랑마봉에 감사를 드렸다.   《지음》  
47    인터넷사랑에 목숨을 빼앗긴 녀인 댓글:  조회:3933  추천:0  2009-10-26
1974년에 산서성 진성시에서 출생한 류효용은 고중을 졸업한후 어느 복장공장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다가 한살 년상인 왕회우를 알게 되여 1997년에 결혼했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1999년, 왕회우는 진성시에 석탄판매회사를 꾸렸는데 석탄가격이 오름에 따라 장사도 잘되여 몇년사이에 2000여만원의 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남편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갑부경리로 되자 류효용은 품팔이를 그만두고 가정주부로 되였다. 2005년 여름에 두번째 아들까지 낳은 그녀는 행복에 겨워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회우는 점점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자 밤마다 오락장소를 출입하면서 돈을 물쓰듯했다.  얼마후 류효용은 남편이 오월이라고 하는 처녀와 늘 붙어다니는것을 발견했다. 오월은 석탄중개인인데 왕회우에게 석탄구매인들을 소개해주고 거기서 중개비를 받아먹군 했다.  오월은 예쁘게 생긴데다가 말재주까지 좋아서 왕회우에게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류효용은 녀인의 감각으로 남편과 오월의 관계가 애매하다는것을 느꼈다. 그녀는 남편에게 드러내놓고 오월이와 래왕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왕회우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내 장사에서 오월이가 소개해주는 손님들이 대부분인데 그 좋은 장사를 하지 말라구?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오. 난 오월이와 장사로 만날뿐 다른 일은 없으니 괜히 신경쓰지 마오!”“난 그녀가 싫어요. 그녀가 금산을 실어다준다고 해도 난 당신이 가지지 못하게 할테예요!” 그들 부부는 크게 다투다가 서로 피해버렸다. 남편이 외도를 한다고 의심한 류효용은 늘 남편과 다투었고 왕회우도 화를 내면서 아예 바깥에서 지내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회우는 류효용이 회사로 찾아와도 경비일군에게 부탁하여 대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일로 크게 다투자 왕회우는 안해를 보고 리혼할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혼할 생각이 없었던 류효용은 동의하지 않았다.   2006년 8월, 왕회우는 안해에게 30만원을 주면서 말했다. “당신이 리혼하고싶지 않다면 이렇게 하지. 당신은 내 안해라는 이름만 가지고있소. 하지만 우리는 서로 상대방이 하는 일을 간섭하지 말아야 하오. 이 돈 30만원은 먼저 가지고 쓰오. 다 쓰면 내가 또 줄테니깐.” 남편이 짐을 꾸려가지고 나가자 류효용은 혼자 남게 되였다. 막내아들을 부모한테 맡긴 류효용은 상심의 눈물을 흘리면서 한달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후 그녀는 자가용차 한대를 사서 비법택시업에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택시를 몰았지만 그녀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택시를 몰았다. 남자운전수들도 밤중에 외지로 뛰기 무서워했지만 그녀는 아무리 깊은 밤이고 아무리 먼곳이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너는 젊고 예쁘게 생겼는데 나쁜놈이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자구 그래?”라고 물으면 그녀는 “차라리 나쁜놈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사는게 멋이 없는데 한번 당하는것도 좋잖아요.”라고 대답했다. 2007년 가을, 류효용은 컴퓨터 한대를 샀는데 그때로부터 채팅에 미치게 되였다. 얼마후 그녀는 인터넷에서 닉네임( 名)이 “설원의 늑대”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몇마디만에 단도직입적으로 “우리 하루밤 사랑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궁금해서 그에 대한 정황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양극력이라고 하는데 1973년에 하남성 확가현에서 출생했소. 2년전에 안해와 리혼한 나는 다섯살되는 아들을 부모한테 맡겨놓고 정주에 와서 일자리를 찾고있는중이요.” 양극력의 소개를 들은 그녀는 친근감이 들어 그에게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았다. 양극력은 그녀를 위로해주고나서 화상채팅을 하자고 요구했다. 그녀는 화면에 영준하고 매력있는 남자가 나타나자 저도 몰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날밤 그들은 날이 샐 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2008년 3월초, 양극력이 한달동안이나 인터넷에 나타나지 않고 핸드폰까지 꺼버리자 류효용은 애가 바질바질 탔다. 한달후의 어느날 저녁, 갑자기 인터넷에 나타난 양극력은 류효용을 보고 “내가 그동안 효용이를 관심하지 않은것이 아니라 일이 좀 있었기때문이요. 그동안 일자리를 찾느라고 돈을 다 써버리고 핸드폰비용과 PC방비용까지 지불할 돈이 없어서 효용이와 련계하지 못했소.”라고 해석했다. 류효용은 그에게 은행구좌번호를 알려주면 1천원을 넣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두번 사양하다가 자신의 은행구좌번호를 알려주었고 그녀는 돈 1천원을 넣어주었다. 류효용은 양극력의 고육계에 걸린줄을 모르고있었다. 그는 8년전에 비법총기매매죄로 감옥살이를 했고 그때문에 안해와 리혼했던것이다. 출옥후 일하기 싫었던 양극력은 도박으로 나날을 보내다가도 사냥물을 노리기 위해 채팅을 즐겼다. 그는 이미 자신의 미모로 10여명의 돈 많은 녀자를 꼬셔 하루밤사랑을 나눈후 장사에 투자한다는 명의로 녀자한테서 돈을 꾸군 했었다. 그는 녀자가 더는 돈을 꿔주지 않으면 차버리고 새로운 목표물을 찾군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의 사냥물로 류효용이 걸려든것이다. 2008년 5월초, 양극력은 류효용을 보러 진성시로 오겠다고 했다. 류효용은 너무 기뻐서 곱게 화장하고 약속한 려관에서 양극력과 만났다. 류효용은 그날밤 미남자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후 양극력이 떠날 때 차비와 용돈으로 쓰라고 1천원을 주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미남자와 떨어지기 아쉬워서 오래도록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후부터 두 남녀는 일주일이 멀다하게 만나서 불륜을 즐겼다. 류효용은 양극력이 일주일만 오지 않아도 참을수 없어서 차를 몰고 100여킬로메터 되는 정주가 아니면 확가현으로 달려가서 양극력의 품에 안기군 했다. 미남자에게 넋을 빼앗긴 류효용은 밤새도록 사랑을 나눈후에는 번마다 꼭꼭 양극력에게 몇천원씩 쥐여주군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돈을 탐했던 양극력은 그것도 만족되지 않아서 이런저런 리유를 대면서 류효용에게서 돈을 꾸었다. 그렇게 돈을 꾸는 차수가 점점 늘어나고 액수도 몇만원으로 늘어나자 류효용은 양극력에게 실망을 느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도 그녀가 경상적으로 외지로 다니는것을 눈치챘던지 “네가 다른 남자와 외도하는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너에게 1전한푼도 주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그후부터 그녀는 조심해서 양극력을 만났고 그를 만나러 정주로 달려갔다가도 하루밤사랑을 나눈후에는 밥도 먹지 않고 즉시 달려오군 했다. 2008년 8월, 양극력은 장사에 투자한다는 명의로 5만원을 꿔달라고 요구했다. 류효용이 거절하자 그는 사랑도 채 나누지 않고 옷을 도로 입고 가려고 했다. 급해난 류효용은 돈 1만원을 내놓았고 양극력은 그녀를 다시 안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후에도 양극력이 계속 돈을 요구하자 류효용은 그와 관계를 끊어버리고 남편과 잘 지내려고 마음먹었다. 양극력은 도박에서 빚을 지자 도박친구 류회와 함께 류효용을 랍치하려고 마음먹었다. 2009년 4월 28일 점심, 양극력은 류효용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꼬셨다. 류효용이 자가용차를 몰고 오자 양극력은 거짓말로 그녀를 꼬셔가지고 시골에 있는 류회의 어머니집으로 데리고갔다. 류회는 사전에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고 빈집에서 사냥물이 오기를 기다렸다. 양극력이 류효용을 데리고오자 류회는 류효용을 묶어놓고 그녀의 은행카드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위협하여 현금 1900원을 찾아냈다. 류효용은 “제가 자가용차까지 주겠으니 절 돌려보내주세요. 절대 공안국에 제보하지 않겠어요”라고 애걸했지만 살인하여 입을 봉하려고 마음먹은 두 사내는 전기줄로 그녀의 목을 졸라서 죽여버렸다. 2009년 4월 28일 저녁, 류효용의 아버지는 여러번이나 딸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으나 통하지 않게 되자 이튿날 공안국에 사건을 제보했다. 공안국에서는 즉시 사건조사에 나섰는데 류효용의 핸드폰통화에서 하남성에 있는 남자와 관계가 밀접하다는것을 발견했고 하남성의 모든 고속도로의 감시카메라를 검사하다가 마침내 양극력에게 중대한 혐의가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2009년 6월 8일 오전, 진성시공안국에서는 양극력의 집에 가서 양극력을 붙잡았다. 양극력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며칠후 류회도 법망에 걸려들었다. 안해가 살해된후 왕회우는 후회하면서 말했다.“나와 안해는 다년간 힘들게 일해서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돈이 있게 되자 안해를 소홀하게 대했습니다. 만약 내가 시간을 짜내여 안해와 함께 있었더라면 가정모순도 없었을것이고 그녀가 이런 봉변을 당하지도 않았을것입니다.”                                            《지음》    
46    황당한 “씨받이”로 인한 리혼사건 댓글:  조회:4178  추천:0  2009-08-27
하남성 정주시의 려려는 분노하여 법원을 찾아가 자기 남편 왕강이 미혼처녀 조미와 장기간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으니 중혼죄에 해당된다고 고소했다. 법원에서는 일심판결에서 중혼죄로 왕강을 유기형 1년에 언도하고 조미를 유기형 10개월, 집행유예 1년으로 판결했다. 그럼 이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되여 발생했을가?   1  1979년 8월 15일, 왕강은 하남성 정주시에서 태여났다. 1999년에 20살에 나는 왕강은 3살 이상인 려려와 결혼을 했다. 2001년 10월에 아들 왕명이 태여났다. 아들을 본 부부는 행복하기만 했다.구변이 좋은 왕강은 과장으로 승진했다. 하늘의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2003년 9월 7일, 이 불행한 날에 그의 가정에는 액운이 날아들었다. 이날 오후 왕강의 아들이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려려는 실신한듯 중얼거렸다. “아들을 잃다니, 내 운명은 왜 이다지도 기구하냐? 난 기어코 아들을 낳고야 말테다…” 왕강부부는 산아제한위원회에 아들을 낳겠다는 신청을 했는데 비준되였다.하지만 려려는 좋다는 방법을 다 대보았지만 임심이 되지 않았다.   2 왕강은 초췌하고 허약한 안해에 대해 점점 실망했다. 왕강은 이렇게 대가 끊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났다. 하여 다른 녀자에게서 아이를 얻을 생각을 해냈다. 왕강은 공장의 판매과장이여서 늘 출장을 다녔다. 왕강이 만나는 사람들중에도 정부를 둔 사람들이 많았다. 왕강은 아들은 낳으려면 다른 녀자를 사귀는것이 과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왕강은 먼 친척관계인 24살인 조미처녀를 목표물로 점찍었다. 조미는 관계를 통해 왕강의 공장에 취직했다. 조미는 부모한테서 왕강이라는 먼 친척오빠가 공장에서는 꽤 권세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의식적으로 왕강에게 달라붙었다. 왕강은 조미네 가정생활이 아주 어려워 보상조건을 제기하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2004년 3월부터 왕강은 자주 조미를 나이트클럽에 데리고갔으며 옷도 사주고 관광을 시키면서 많은 돈을 썼다. 나중에 오빠, 동생하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정부관계로 되였다. 정부관계로 발전하자 왕강은 조미를 보고 아이를 낳아달라고 간청했다. “사랑”에 빠진 조미는 별 생각 없이 승낙했다.려려는 남편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그래도 조미가 먼 친척이니 별로 심각하게는 생각지 않았다. 어느날 왕강은 안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려려는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골머리를 앓았다. 려려는 속을 태우다 못해 남편보고 말했다.“당신이 다른 녀자를 통해 아들을 낳으려는데 전 반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아들을 낳은후 관계를 철저히 끊어야 하며 아들은 내가 키워야 해요.” 왕강은 흐뭇해서 안해의 조건에 동의하면서 “부부협의서”를 썼다. 왕강은 조미를 내세워 집을 세맡고 동거생활을 했다. 려려는 억울할 때가 많았지만 “부부협의서”가 있었기에 참고 또 참았다. 2004년 10월에 조미가 임심했다. 왕강은 너무나 기뻐서 조미더러 출근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내가 돈을 잘 버니 당신은 지금 잘 먹고 잘 휴식하면서 몸관리를 잘해 좋은 아들을 낳는것이 첫째야.” 2005년 음력설에 조미는 설쇠러 집으로 갔다. 조미의 부모들은 딸과 왕강의 이상한 관계를 눈치채고있던터라 딸의 몸의 변화에 민감했다. 부모는 화가 나서 펄펄 뛰였다. 부모들은 왕강과의 관계를 끊고 당장 병원에 가서 류산하라고 야단쳤다. 왕강은 이 소식을 듣고 다급히 돈 2만원을 가지고 조미네 집으로 달려갔다. 왕강은 조미의 부모앞에 무릎을 끓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부모는 하는수없이 돈을 받았다. 조미의 해산기가 점점 닥쳐오자 왕강은 안해에게 조미를 집에 데리고와서 아이를 낳게 하자고 제기했다. 려려는 왕씨네 대를 잇기 위해서는 남편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조미를 집에 데려왔다. 조미가 왕강네 집에 온후 두 녀인은 서로 잘 어울렸다. 왕강은 조미가 아이를 낳기만 하면 돈을 주어 꼭 내보낼것이라고 안해에게 수차 다짐했다. 려려는 남편의 다짐을 믿고 진심으로 조미를 잘 대해주었다.  매일 닭을 고아주고 물고기료리를 해주었으며 과일을 사주었다. 2006년 5월에 조미는 왕강의 집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30일이 되는 날 그들은 남들이 어떻게 의론하던 상관없이 집에서 축하연을 차리고 친척과 친구들을 청해 한바탕 떠들썩하게 잔치를 했다.   3  아이는 장마철의 오이마냥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려려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더러 협의를 리행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이 아들을 잘 키우겠으니 조미를 내보내라고 강요했다. 왕강은 조미가 아직도 몸보신을 해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내쫓을수 있느냐고 안해를 나무람했다. 안해가 강박할수록 왕강의 마음은 조미와 아들에게 점점 기울어졌다. 왕강은 조미를 보내겠다는 말을 더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려려는 너무도 화가 나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미가 상점에 물건을 사러 나간 틈을 타서 아이를 안고 본가집으로 가버렸다. 려려는 아이를 감춰놓고 조미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핍박했다. 조미는 아이가 없어진것을 보고 화가 나서 출장간 왕강에게 전화했다. 왕강은 아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조미는 울며불며 야단쳤다. “당신이 우리 아들을 찾아오지 않으면 난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요. 그런줄 아세요.”왕강은 조미를 달래면서 말했다.“급해마오.  려려가 아들에게는 어쩌지 못할것이요. 내가 꼭 찾아오겠소. ” 왕강은 안해가 친정집으로 간것을 알아냈지만 감히 찾아갈 담이 없었다.  그는 안해에게 전화로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구슬렸다. 려려는 남편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며칠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돌아온후 어느날 갑자기 아이가 또 없어졌다.  이번에는 조미가 아들을 데리고갔던것이다. 왕강부부는 너무 당황하여 급기야 동맹이 되여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조미는 이때 미혼모로서 혼자 아들을 키울 마음을 먹었던것이다. 며칠후 조미는 왕강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들을 찾지 말아요. 난 이런 명분이 없는 생활이 싫어요.  아들은 내가 잘 키울거예요.  당신 걱정하지 말하요. 난 당신이 더는 보고싶지 않아요.” 왕강은 아들을 잃고싶지 않았다. 그는 즉시 택시를 잡아타고 조미의 집으로 달려갔다. 조미는 매서운 눈길로 왕강을 쏘아보며 아들을 내놓지 않았다. 그녀는 왕강에게 자기와의 관계를 끊든가 아니면 돌아가 려려와 리혼하든가 량자간에 결단을 내리라고 협박했다. 왕강은 아들을 잃기 싫어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후부터 왕강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조미와 동거했다.  그동안 왕강은 대부분의 수입을 조미에게 주어 조미네 집을 2층양옥으로 만들었지만 려려와 친딸에게는 돈을 별로 주지 않았다. 려려는 하는수 없이 딸을 데리고 단위에 찾아가 남편의 로임에서 생활비를 잘라내줄것을 요구했다. 조미는 이런 명분이 없는 “부부생활”이 지겨워졌다.  그는 쩍하면 왕강과 다투군 했다. 왕강은 하는수 없이 법원에 려려와 리혼할것과 부부공동재산을 나눌것을 신청했다. 남편이 리혼하련다는 소식을 들은 려려는 너무도 화가 났다. 그녀는 법원에 왕강과 조미의 중혼죄를 신고하고 법에 따라 형사책임을 추궁할것을 요구했다. 려려는 무모하게 후환을 키워 가정을 잃고말았다. 그러나 그가 이 점을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나 늦었다. 왕강은 이 사건을 심리하는 법정에서 려려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전도를 망쳤다고 하면서 리혼할것을 표시했고 조미는 왕강이 만기석방된후 려려와 리혼하면 그와 정당하게 결혼하겠다고 표시했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45    색정에 빠진 녀보스의 말로 댓글:  조회:4975  추천:0  2009-08-25
심양시공안기관에서는 공안부에서 인터넷에 수배령을 내린 리홍을 체포하였다. 올해 33살에 나는 범죄혐의자 리홍은 원래 복장업을 하던 보스였다. 술집과 나이트글럽 등을 오가며 손님들과 함께 질탕 먹고 마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중에 저도 몰래 풍류색광으로 변해버린 그녀는 미친듯이 남자들을 탐했다. 가산을 탕진하고 호주머니가 텅텅 비게 되자 끝없는 정욕을 채우기 위해 돈을 사기치기도 했다.   1  심양시 화평구에 위치한 한 술집 독방에서 리홍은 한창 떠들썩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고있었다. 이상한것은 한상 빙 둘러앉은 사람들중 리홍곁에 앉은 녀자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젊은 청년들이였다. 술이 거나해진 리홍이 맥주잔을 들고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건배해. 오늘밤에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거야, 자!” 청년들은 리홍에게 바싹 붙어서 육욕적인 동작을 하며 춤을 추었고 리홍은 연신 음탕한 옷음을 터뜨렸다. 밤 12시가 넘자 리홍은 백원짜리 한묶음을 꺼내들고 말했다. “오늘밤 특별히 좋았어. 내 보배둥이들아, 상금을 타거라.” 리홍은 청년들에게 각각 200원씩 뿌려주었다. 리홍은 옆에 앉았던 녀자의 부축을 받으며 술집문을 나섰다. “섯! 꼼짝말아!”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매복했던 심양시공안국 모 분국 형사경찰대의 경찰들이 나타나 리홍의 손목에 수쇠를 채웠다.  2  3년전에 리홍은 심양에서 복장장사를 했다. 처음에 남을 대신해 매대를 보아주고 월급을 받았지만 후에는 매대를 세내 장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워낙 성격이 강직하여 무슨 일을 하든 누구에게나 지지 않는 성미였다. 매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밤 늦게까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열심히 일했으며 장사가 잘되여 많은 돈을 모을수 있게 되였다. 그녀는 복장가게를 사고 경영규모를 넓혀 어느덧 돈을 잘 벌기로 소문이 난 녀보스로 되였다.어느날 리홍은 남방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게 되였다. 장사가 끝난후 복장가공업 주인 왕사장과 녀비서가 리홍에게 심수관광을 시켜주었다. 녀비서가 승용차를 몰고 왕사장과 리홍이 뒤좌석에 앉았다. 왕사장은 심수풍경을 소개하는 한편 음탕한 눈길로 리홍을 바라보며 슬슬 리홍의 허벅지를 어루쓸었다.  리홍이 불쾌해서 말했다. “례의를 지키세요.” 그러자 왕사장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리사장이 이렇게도 개방되지 않았다는건 상상밖이야. 리사장은 사업에서는 성공했지만 감정세계는 완미하지 못하군. 리사장은 아직도 ‘개방’이란 의미의 다른 한 부분을 리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이때 앞에서 차를 몰고있던 녀비서가 한미디 했다. “녀인은 남자에게 자신을 개방해야 해요.  그게 바로 현대감이라는것이거든요.” 왕사장도 목소리를 높여 떠들어댔다. “나처럼 돈있고 권세있는 남자가 녀자들을 개방시키지 않으면 생활이 완미하다고 할수가 없는거야. 그리고 남자의 성공과 실력을 나타낼수도 없는거고.” 이번 남방행은 리홍에게 남자와 녀자에 대한 “개방학”을 배워주었고 그녀의 금후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사회교제가 넓어지고 손님접대때문에 나이트클럽, 술집을 드나들다보니 리홍의 주변에는 늘 남자들이 많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밤늦어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너무 초라해보이여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남편을 멀리하다가 나중에 리혼했다. 독수공방의 나날에 리홍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솟구치는 욕정때문에 그녀는 갑자기 남자들을 사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남자들은 돈만 있으면 아가씨들을 마음대로 데리고 노는데 녀자라고 왜 남자를 데리고 놀지 못한다는 말인가? 무슨 일에서나 남에게 지는것을 싫어하는 리홍은 이렇게 구렁텅이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리홍은 곱게 화장을 하고 혼자서 모 나이트클럽을 찾아갔다. 그는 포수마냥 날카로운 눈길로 먹이로 될 남자들을 찾았다. 왈쯔를 추는 젊은 총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동적으로 다가가 총각에게 춤을 청했다.그리고는 총각의 손에 돈 2000원을 쥐여주었다. 청년은 처음에 멍해있다가 나중에 아주 기뻐서 말했다. “누님, 누님은 정말 통쾌합니다. 이 돈은 저의 한달 월급에 맞먹습니다.” 단 며칠만에 리홍은 그 청년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고급호텔에 드나들면서 돈을 물쓰듯했다. 그 청년과 리홍에 대한 소문은 총각의 녀자친구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어느날 저녁 청년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누님, 녀자친구가 눈치를 알아차리고 저와 관계를 끊겠다고 합니다. 전 그녀를 좋아합니다. 우리 헤여집시다.” 그러자 리홍은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잘 들어요. 난 아직도 채 즐기지 못했어요.그 처녀와 관계를 계속하든 끊든 난 상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한달은 내곁에 있어야 해요.  전부를 나한테 맡겨요.  돈은 잘 계산해줄테니깐.  돈이 있으면 처녀는 얼마든지 있으니깐요.” 리홍의 말에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홍은 그 청년을 실컷 데리고놀다가 다시 새로운 목표물을 찾았다. 그후 리홍은 금전과 자색으로 하나 또 하나의 청년들에게 공세을 발동했다. 모 합자기업소의 판매부 부경리가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고 모 기관의 비서가 그녀의 치마폭에 감겼으며 모 국의 국장이 그녀의 포로로 되였다… 그녀는 완전히 색광이로 타락했다. 육욕에 불타는 리홍이였기에 장사는 진작 뒤전에 밀려있었으며 판매액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날 한 직원이 계약서를 가져왔다. 남방에서 100만원에 달하는 복장을 구입하기로 되여있었다. 련속 여러날 밤생활에 지친 리홍은 시장조사와 연구도 하지 않고 경솔하게 결단을 내렸다.   결국 트럭으로 실어온 옷이 팔리지 않아 창고에 적치되였다.  이로 하여 복장점은 문을 닫게 되였다. 사업이 이 지경이 되였으면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그녀는 이미 진흙탕에서 빠져나올 힘이 없었다.그후 2년이 지나갔다. 리홍은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함께 침대에 올랐는지 그 자신도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그녀가 아글타글 모았던 100여만원이 이미 한푼도 남지 않았다.   3  경제원천이 없어졌고 돈은 한푼도 남지 않았다. 부화사치한 생활에 습관된 리홍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밤이 깊어갔지만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눈앞에는 지난날 침대에 올렸던 멋진 젊은이들이 삼삼했다. 더는 이대로 누워있을수 없다고 생각한 리홍은 벌떡 일어나 입술을 깨물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얻어야 한다.” 리홍이 어렸을 때 부모들이 리혼하다보니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생모와 여전히 래왕이 있었다. 어느날, 리홍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세를 준 집이 임대시간이 곧 끝나기때문에 딸더러 대신해 임대연장수속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난 리홍은 금시 눈앞이 환해졌다. 그녀는 임대맡은 사람에게 전화해 더는 세줄 생각이 없으니 집을 빨리 내라고 했다. 집이 나자 리홍은 가옥증명서 등 서류를 가지고 한 가옥중개회사에 매매신청을 했다. 며칠후 가옥중개회사 일군이 리홍더러 집을 사려는 손님을 만나라고 했다. 리홍은 그 손님과 계약서를 체결하고 계약금 5000원을 받아냈다. 이튿날 오전에 리홍은 손님에게 전화해 계약에 의해 4만원을 먼저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리홍은 4만 5000원을  손쉽게 손에 넣었다. 일주일이 지난후 그 손님은 리홍을 만나 상세한 사항을 의논하려 했다. 그런데 리홍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급급히 리홍이 팔려는 집으로 찾아가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도 이 집을 금방 구매했다고 말했다. 손님은 너무 당황하여 그만 목석같이 굳어졌다. 리홍은 이 집을 리용해 같은 수단으로 여러 사람들한테서 20여만원을 사기쳤다.손에 돈이 있게 되자 그녀는 급급히 총각들을 물색해서 하나하나 점유했다. 그녀는 또 멋진 총각 10여명을 단번에 사서 호텔독방에서 방탕하게 육욕을 만족시켰다…   4  간수소에서 만난 리홍은 온 얼굴에 피곤기가 몰려있어 초췌했다. 그녀는 순진한 남편과 행복했던 가정을 떠올렸고 지난날 힘겹게 돈을 벌던 분투의 나날들을 생각했다. 그녀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생활에 돈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절대 돈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하고 돈의 주인이 되여야 한다.   그녀의 눈에선 후회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44    성 결벽증이 부른 사랑비극 댓글:  조회:5834  추천:0  2009-08-21
성생활은 워낙 부부사이에 행복의 뉴대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오는 한쌍의 젊은 부부는 고민할대로 하다가 결국 같이 훼멸의 길을 걷게 되였다… 안해의 결벽증 개체운수업에 종사하던 왕건은 H진 시골에서 사는 진려려라고 부르는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했다. 비록 시골에서 자랐지만 진려려에게는 도시처녀와 같은 기품이 차넘쳤다.   왕건은 성녀같이 순결한 마음과 깨끗한 그녀의 습관에도 매혹되군 했다. 그녀는 방에 먼지 한점이 있어도 안되였으며 앉았다 일어난 자리를 닦고 또 닦아야 시름을 놓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폭발적일 때에도 왕건이 그녀를 포옹하는것까지는 허용했지만 키스하는것을 싫어했다. 강제적으로 키스하면 곧 수건으로 입을 닦고 또 닦군 했다. 련애시절에는 그녀의 이런 결벽증이 왕건의 마음을 한결 더 매혹시키군 했다. 하지만 결혼후에 왕건은 이러는 안해가 리해되지 않았다.  결혼전에는 그냥 깨끗하고 순결한 녀자로만 생각했었다.  육체적인 접촉을 피하는것이 처녀의 몸을 지키는것으로 리해되여 단정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고 그래서 그녀를 더욱 사랑했다. 그러나 결혼후까지 그런 상황이 거듭되자 아름다운 느낌이 아닌 번뇌로 변했다. 신혼밀월을 지내는 동안 진려려는 왕건의 맹렬한 키스를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반감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이렇게 위생적이 아닌 행위는 이제 두번 다시 하지 마세요. 난 견딜수 없어요. 두번 다시 하지 마세요.” 그는 미리 준비했던 더운물에 수건을 적셔 힘껏 얼굴을 닦은후 화장실에 뛰여가 치솔질했다.신혼밀월을 마친후 왕건은 보름동안 외지에 가서 운수업을 했다.  운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왕건은 목욕을 하고 입을 닦았다.  이때 진려려는 쏘파에 앉아 텔레비죤을 보고있었다. 안해의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리고있던차라 왕건은 열심히 몸을 닦고 안해를 품에 그러안으며 입술에 키스를 하려 했다. “아이구 냄새야,  빨리 가서 입을 더 닦고 오세요.” 그 한마디에 왕건의 달았던 몸이 싸늘하게 식었고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했다. 그럭저럭 일은 끝났지만 뒤이어 화장실에서 진려려가 몸을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건은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왕건은 우연히 책을 보다가 자위를 하는 방법을 알게 되였다. 안해가 받아주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자신의 욕망을 푸는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욕정이 북받치면 책의 방법대로 “발등의 불”을 끄군 했다. 어느날 새벽 2시에 왕건은 한창 자위를 하다가 안해에게 들키우고말았다.   그렇게 온순하고 우아하던 진려려는 이날 무척 날카로왔다. “당신 너무 무료하고 비렬해요. 사람을 너무 실망시키는군요.”왕건도 화가 났다.“야밤중에 소리는 왜 쳐? 다 당신때문이라는것을 아직도 몰라?!” 결혼해서 첫 싸움은 이렇게 일어났다. 그들은 날이 샐 때까지 다투었다.  나중에 둘은 서로 그러안고 통곡을 쳤다.  이튿날 진려려는 6000원을 주고 일본제 성생활도구를 사다 남편에게 주었다.  이것이 그녀가 남편에게 바칠수 있는 “사랑”이였다. 그러나 이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안지나 왕건은 성생활도구에 싫증을 느끼고 대신 안해에 대한 욕정이 북받쳤다. 부부의 행복을 위해 그들은 온갖 좋은 방법을 다 생각해냈다.   한달후의 어느날 왕건은 안해가 가르쳐준대로 “해당화무도장”에서 효화라는 아가씨를 알게 되였다. 무도장주인은 왕건더러 안전문제는 고려할것 없이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나 왕건으로서는 스스로 추하다는 죄의식에 시달려 아무런 일도 성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잠에 취한 안해에게 그 과정을 말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끌어안아도 자꾸 당신이 떠오르는걸 어떡해.”“당신은 정말 시키는 서방질도 못하네요.”진려려는 동정어린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왕건은 와락 안해를 품에 안았다.   그러나 진려려는 여전히 남편을 거절했다. “날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하루동안 힘들게 일했어요.”왕건은 혼자 속을 끙끙 앓으며 통곡이라도 치고싶었다. 남편의 권리를 행사 부부 한쪽에서 성생활에 랭담하다고 하여 같이 랭담해지는 일이 아니였다. 오히려 곱절 더 불타오르는듯했다. 날이 갈수록 안해와의 성생활에 대한 왕건의 환상은 부풀어갔다. 3월 18일은 왕건의 생일이였다.  진려려는 일찌기 집으로 돌아왔다. 문밖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집에 들어섰는데 이때 마침 왕건이 한창 인형녀자를 안고 자위를 하고있었다.  진려려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경이였다. 혐오와 실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손에 들었던 생일선물이 떨어지고 차탁의 차고뿌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지나치게 열중했던지 왕건은 안해가 집에 들어선것마저 모르고있다가 느닷없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진려려가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당신 너무 비렬하고 무치해요. 당신은 그렇게도 녀자가 없으면 못사는건가요? ”왕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해앞에서 한 남자의 존엄이 깡그리 무너져버렸다.  그는 옷을 주어입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날 밤에 한 친구의 집에서 눈물로 날을 밝히면서 친구에게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했다.   친구는 그의 사정을 알고 너무도 분해서 말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어?   젊고 이쁜 안해를 둔 남편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건 말도 안돼.  내가 가르쳐준대로 하라구.” 왕건은 친구의 말대로 “남편”의 권리를 행사하기로 했다.   그때로부터 그는 욕정이 북받치기만 하면 안해가 아무리 거절해도 자신의 욕망대로 했다. 진려려는 거의 매일 저녁 공포속에서 시달렸다.어느날 저녁 10시경, 진려려가 잔일을 하고나서 맥이 진해 쏘파에 앉아 숨을 돌리고있었다.   이때 왕건이 귀가했다.  그는 총망히 몸을 씻고나서 곧 안해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으로 하루근심이 사라진줄로 알았는데 새벽이 되자 남편이 또 안해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허약한 안해는 그만 까무러치고말았다.  왕건은 놀라 택시를 불러 안해를 병원으로 실어갔다. 이튿날 오후, 진려려는 친정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파출소에 찾아갔다. 당직경찰은 이렇게 권고했다. “부부사이가 아닙니까? 좋은 마음으로 남편을 감화시키십시오. 될수있는한 안해의 고통을 알아주도록 많이 설명해서 강박적인 성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상해죄가 성립된다면 기소해 법원의 처리를 받게 될수 있습니다.” 그후 진려려는 왕건이 강박행위를 해올 때마다 반항하였다.   그럴 때마다 왕건은 화가 나서 안해를 마구 때렸다.  진려려는 온 몸에 상처를 입은후 사진을 찍어 증거를 만들어 남편을 상해죄로 기소했다. 법원에서 왕건을 상해죄로 유기형 3년에 언도하려고 했을 때 진려려는 울면서 기소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했다. “남편이 감옥에 가게 되면 난 한평생 친척들과 친구들로부터 남편을 해쳤다는 루명을 쓰고 살게 될겁니다. 그리고 아들애도 학교에 가게 되면 아버지가 감옥에 갔다고 놀림을 받게 될것입니다. 아들을 보더라도 그렇게 할수 없습니다.” 변태적인 보복의 후과 남편이 감옥에 가지 않고 자신도 남편의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진려려는 법정에 리혼을 신청했다. 왕건은 리혼이란 말을 듣고 눈앞이 캄감했다. 다시는 강박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으니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후 오래동안 왕건은 안해의 눈치를 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참을수 없는지 왕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말았다.  어느날 저녁 왕건은 목욕하고 타올을 걸친 안해의 날씬한 몸매를 보더니 참을수가 없어 안해를 덥석 품에 안고 침대로 갔다.  안해가 아무리 반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진려려는 남편과 리혼한후 주씨남자를 사귀게 되였다. 왕건은 진려려가 새로 남자를 사귀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려려를 찾아갔다. “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소. 당신이 영원히 다시 재혼하지 않겠다고 했기에 난 리혼에 동의했소. 그런 거짓말로 날 속이다니. 내가 그자보다 무엇이 부족하단 말이요? 알려주지, 당신이 만일 사랑이 생겨 재혼을 한다면 당사자는 이 세상에 나밖에 더 있을수 없소.” 그후에도 왕건은 여러번 진려려에게 혼인관계를 회복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번마다 거절당했다.  왕건은 화가 나서 보복하겠다고 했지만 진려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왕건은 진려려더러 법원에 가서 아들의 부양권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오후 2시경에 진려려가 남동생과 함께 법원으로 가는 굽인돌이에 이르렀을 때 왕건이 뛰쳐나와 진려려를 죽인후 도망을 쳤다. 경찰들은 그날 밤 11시에 왕건을 체포했다. 법원에서는 왕건을 사형에 처했다.서로 사랑하던 한쌍의 부부가 기형적인 혼인생활때문에 함께 죽음의 결과로 치달았다.  결혼생활에는 상호 리해와 사랑이 필요하다. 각자가 장기간 자신의 개성만 강조한다면 비극이 생기지 않을수 없다. 만일 그들이 심리의사를 찾아 고통의 근원을 찾고 해결하였더라면 혼인위기를 극복하고 폭력적인 결과를 피면했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검찰일보》  
43    부부로 된 어제날의 “원쑤” 댓글:  조회:4086  추천:0  2009-08-18
1년전에 무고하게 죄명을 들쓴 서안처녀 조려려가 자기를 무함하고 고달프게 한 왕준생을 피고석에 끌어올렸다. 그러나 1년이 지난후에는 뜻밖에도 그제날의 “원쑤”들이 한쌍의 신랑신부가 되여 결혼식에 나섰다… 첫눈에 반하다 왕준생은 원래 한 국유기업소의 선전간사였다. 그는 촬영,  미술을 잘할뿐만아니라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  1년전에 기업소가 불경기에 처하는 바람에 그는 실업당했다.   그후 그는 한 사영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일수 없었다.  그는 늘 혼자 “은하수다방”에 가서 외로운 마음을 풀군 했다. 어느 하루 왕준생은 “은하수다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모 대형호텔에서 일하는 23살되는 조려려를 우연히 만났고 만난 첫 순간에 반하고말았다. 이날 조려려는 한 동료와 다툰후 발길이 가는대로 가다보니 “은하수다방”을 찾아왔던것이다. 청춘의 매력이 흘러넘치는 조려려가 다방에 나타나자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그녀에게 쏠렸다. 은은한 음악이 울려퍼지자 왕준생은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조려려를 청했다. 조려려의 달콤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용모는 왕준생에게 잊을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그날 밤 조려려의 매혹적인 모습이 떠올라 왕준생은 잠들수 없었다. 왕준생은 조려려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싶어 매일 “은하수다방”의 첫 손님으로 되였다. 하지만 조려려는 이 세상에서 증발되기라도 한듯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사기군에게 사기당하다 두달이 지난 어느날, 왕준생의 뒤에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돌려보니 전화를 하고있는 처녀가 바로 그가 밤낮 그려보던 조려려였다. 왕준생은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처녀는 저으기 놀라는 기색이였다. “절 아세요? 전 당신을 모르는데?…” 왕준생은 급기야 “은하수다방”에서 만나 함께 노래를 불렀던 일을 말했다. 두서없이 말하는 왕준생을 쳐다보던 쳐녀는 곧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얼버무려 대답을 하고는 무슨 일때문에 불렀느냐고 물었다.   왕준생은 처녀도 자신을 기억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어 흥분해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청들었다. 처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후로부로 쳐녀와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졌다. 어느 주말에 왕준생은 쳐녀를 호출했는데 처녀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으니 만날수 없다고 말했다. 왕준생은 이 기회에 아버지도 볼겸 둘의 관계도 공개할겸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처녀는 완곡히 사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돈을 좀 구해주세요.” 왕준생은 저금했던 돈 2만원을 처녀에게 주었다. 이튿날 오후 쳐녀는 또 전화를 걸어와 어버지의 병이 더 위중하여 당장 수술해야 하니 돈을 구할데가 없는가고 물었다.  왕준생은 부모들과 친구들에게서 또 1만원을 모아 처녀에게 주었다. 처녀는 감격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꼭 갚을게요.” 이틀이 지난후 왕준생이 처녀를 호출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는 처녀가 아버지의 병때문에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주일이 지나서 또 호출했다. 하지만 생각밖에 호출중지라는 신호가 울려왔다.  왕준생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서늘해났다… 조려려는 구경 누구인가? 늘 쾌활하게 지내던 아들이 몰라보게 울적해있는것을 보고 부모들이 무슨 일인가고 재삼 따져물어서야 왕준생은 조려려를 만났던 사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왕준생은 또 그 처녀가 아니면 절대 장가를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아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부모들은 하는수 없이 아들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사람들을 사처로 보내 끝내 향항인이 투자해 꾸린 대형호텔에서 그 처녀를 찾아냈다. 왕씨네는 처녀에게 왕준생과 약혼하면 돈문제를 더 따지지 않을것이지만 이 혼사를 동의하지 않으면 공안기관에 사기죄로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처녀는 화를 내면서 자신은 왕준생이란 사람을 전혀 모르며 돈을 사기친 일은 더욱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시켜 왕씨네를 호텔에서 쫓아냈다. 왕씨네는 펄펄 뛰면서 아들의 반대에도 마다하고 공안기관에 제보했다.  공안기관에서 조사해본 결과 왕준생이 조려려에게 돈을 주었다는 시간에 빈틈이 있었고 조려려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한적이 없으며 몸도 아주 건강했다. 왕씨네는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지 않았으며 왕준생과 조려려가 대면할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왕준생은 그만 아연해졌다. 자기 돈을 사기친 처녀가 눈앞의 조려려와 생김새가 같기는 하지만 느낌으로 보아 그 처녀가 아니였다. 이때 조려려도 왕준생이 바로 오래전에 “은하수다방”에서 만나 인연이 있었던 남자라는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이 잘생긴 남자가 이처럼 비렬한 수단으로 자신을 모해할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려려는 대체 무슨 목적이냐고 화를 냈다.  왕씨네는 아들이 난처해하는것을 보고 말꼭지를 잘라 물었다. “목적이 뭐냐고? 모르쇠를 대지 말어. 혼사를 할거냐?  아니면 돈을 돌려줄거냐?” 조려려는 더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왕씨네와 싸우기 시작했다. 조려려가 련애를 빙자하고 재물을 사기쳤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펴졌다. 경찰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 꼭 무슨 사연이 있을것이라고 짐작하고 여러모로 수사를 하여 진정한 사기군을 잡아냈다. 이 사기군은 황려나였다. 황려나는 대학시험에서 락방된후 시재정학교 자비생으로 공부했다.   그녀는 한침실에 있는 학생의 돈을 훔쳤다가 발각되여 학교에서 제명당했다. 황려나는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회에서 떠돌아다니며 이쁜 용모와 달콤한 입으로 재물을 사기쳤다.   그날 저녁 왕준생이 그녀를 잘못 알고 식사를 청했을 때 그녀는 온갖 재간을 다 피워 왕준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돈을 사기쳤던것이다. 분노가 사랑으로 변하다 경찰들은 심입되는 조사를 거쳐 사건의 진상을 밝혀냈다. 조려려와 황려나는 워낙 쌍둥이자매였다.   20여년전에 조려려의 아버지와 황려나의 아버지는 한직장에서 일했으며 아주 친한 사이였다.   한 우연한 사고에서 황려나의 아버지가 조려려의 아버지를 구하다가 불행하게도 생육능력을 잃게 되였다.   조씨부부는 쌍둥이를 낳은후 황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0개월에 나는 쌍둥이중의 한 아기를 황씨부부에게 주었다. 그 어린애가 바로 황려나였다.  황려나가 6살나던 해에 황씨는 하북성 고향으로 전근해갔다.  그때로부터 조씨네와 황씨네는 서로 소식이 끊어졌다. 진상이 밝혀지자 왕씨네는 조씨집을 찾아가 사과했다.  하지만 조씨집에서는 분을 삭일수 없어 왕준생을 법에 신고하고 피고인의 무함책임을 추궁하며 정신 및 명예손상비 8000원을 배상할것을 요구했다. 법원에서는 개정전에 쌍방당사인들을 불러놓고 화해시키려 했다. 왕준생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조려려에게 피해를 끼친 원인은 결국 그녀에 대한 남다른 감정때문이였습니다. 나는 그녀를 보자 바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가 어떤 요구를 제기하든지 다 감당하겠습니다.” 조려려는 왕준생이 미웠고 화가 났지만 그의 진심과 성실한 눈빛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법원에서는 조정을 거쳐 피고 왕준생이 원고 조려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정신 및 명예손상비 8000원을 지불하며 피고에 대한 원고의 기타 요구를 취소하기로 협의했다. 이튿날 조려려는 뜻밖에도 왕준생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그 어떤 경제적인 배상도 당신의 마음의 상처를 가실수 없으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사건에 책임이 있지만 절대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한 처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때문입니다.  미안하지만 돈 8000원은 현재 사기당한 빚때문에 당장 갚을수 없습니다. 시간을 조금 더 주었으면 합니다…” 조려려는 이때까지 수많은 남자들을 살펴보았지만 왕준생처럼 진심으로 한 녀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준생에게 돈에 대해서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며 이후 더는 사기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다. 사랑한 죄때문에 처녀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도 피해를 당한 일로 인해 한동안 풀이 죽었던 왕준생은 조려려의 답장을 받자마자 마음이 따뜻해났다.   그는 조려려의 피해보상비를 빨리 갚기 위해 여러곳의 일을 맡아 밤낮없이 일했다.   3개월이 지난 어느날 그는 보상비를 가지고 호텔로 찾아갔다.   동료는 조려려가 3일전에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알려주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찾아갔더니 조씨네 집에서는 뜻밖에 그를 선선히 받아주었다.   그후로부터 왕준생은 마음으로나마 처녀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해주려고 매일 병원으로 찾아갔다. 결국 왕준생의 행실이 나중에 처녀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때문에 그제날의 “원쑤”가 신랑신부가 되여 결혼식을 올리게 된것이였다.      
42    철창속의 참회 댓글:  조회:4196  추천:0  2009-07-30
인민경찰 이는 내가 평화시대의 군인으로 자랑높은 그 행렬에 들어서는것이 소시적에 품었던 꿈이였다.  선생님이 커서 무엇이 되려느냐고 물으면 경찰이 되겠다고 떳떳이 대답했고 그림을 그려도 경찰모를 그리는것이 유일한 취미로 되여 부모님들의 귀여움을 받던 때가 어제같다. 시골에서 태여나 부모님들의 사랑속에서 꿈많은 동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학습에 노력하고 품성이 우수하여 동학들의 신임을 받는 학급장이 되였다. 나의 적극적인 활약으로 학급의 여러가지 활동이 잘 조직되였고 성과가 뚜렷해지자 선생님들의 믿음과 부모님들의 눈먼 사랑속에 받들려 매일매일 흥분속에 잠기다보니 점차 제멋대로 우쭐하는 학생으로 변했다. 게다가 전자유희청에 자주 드나들고 사회의 “형제”들과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학습성적이 하강선을 그었고 무단결석,  조퇴가 빈번했다. 결국 나에게 차례진것은 고중시험 락방에 이어 집구석을 지켜야 하는 슬픈 운명이였다. 부모님들은 할수 없이 나에게 모 대학 태권도훈련반에 가서 태권도를 배울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는 나는 태권도를 경찰이 구비하여야 할 기본기능으로 삼고 남보다 땀을 더 흘리며 훈련을 열심히 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7년 봄, 항주에서 진행되는 전국태권도시합에 참가하여 남들의 분투정신을 따라배우는 기회를 얻었다.   사회진출에서 한몫을 담당할 신념을 안고 항주에서 돌아오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친형제와 다름없는 딱친구가 무리싸움에서 패거리들의 칼부림에 목숨을 잃었던것이다. 친구와의 의리를 그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긴 나는 딱친구의 골회함을 안고 통곡하다가 꼭 “원쑤”를 갚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다.   그때로부터 품에 칼을 지니고 “복수”의 길에 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와 골목길을 누비며 앙갚음의 기회를 노렸다. 짝패들은 나를 기둥으로 믿고 상대편과 겨뤄보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범죄의 심연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는 아들을 가슴아프게 바라본 부모님들은 나에게 새로운 환경을 바꾸어주었다.   드디여 외성의 한 경찰학교에 입학한 나는 잠시나마 범죄의 길에서 해탈되였다.   경찰학교는 내가 꿈에도 바라던 곳이였기에 모든 곤난을 이겨낼수 있었고 간고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간혹 딱친구를 잃은 슬픔에 종주먹을 부르쥘 때도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사정없는 비판이 뒤따르군 하면 앙갚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수시로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그리하여 지나간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인생길을 개척하리라 다짐하군 했다. 하지만 성미가 괴벽하여 동학들의 간단한 롱담도 받아넘기지 못하고 때때로 주먹을 휘둘렀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타이름과 동학들의 우호적인 도움으로 자신을 반성해본 나는 욱하는 성격을 고치기에 알힘을 들여 마침내 덤덤한 성격의 소유자로 동학들과 가까와졌다. 한학기가 지나서 나는 학교 규률위원,  학급의 체육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주먹세계에 빠져있던 기억을 지워버리고 사람답게 살아볼 결심을 굳혔지만 딱친구를 잃은 상처만은 가슴에 맺힌 한으로 남아있었다.  노력과 분투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흑룡강성 수화시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실습생활을 하게 되였다. 17세 나이에 낯선 타향에서 2년간의 경찰학교생활을 마치고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며칠후 룡문가파출소에서 실습하게 되여 경찰복을 입고 문을 나서니 부모님들은 물론 이웃들도 나에게 대견한 눈길을 보냈다. 실습기간 나는 어둡고 고통스럽던 지난날을 청산하고 삶의 희망을 일구며 새 출발을 하려고 애섰다. “나무는 쉬려 하는데 바람이 자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느닷없이 불행이 닥쳐왔다. 예전에 나와 싸웠던 패거리들은 내가 돌아온줄 알고 여러번 찾아왔다. 나는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당당한 인민경찰로 될 내가 두번 다시 좌절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굳은 약속을 지키려고 그들을 피해다녔다. 나를 찾지 못한 그들은 나의 “형제”들의 집부터 들이쳐서 칼로 모진 상처를 입혔다.  칼부림을 당한 “형제”들의 병문안을 갔더니 그들은 “우리 형제들이 당하고있다. 도와달라!”고 애걸했다. 하얀 붕대를 감고 병상에서 애원하는 “형제”들의 절절한 목소리는 나의 눈굽을 적시였다. 딱친구를 잃은 슬픔이 채 가셔지기전에 또 “형제”들이 병상에서 고통을 겪다니 실로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하지만 경찰복을 입은 나는 싸움을 제지시켜야 할 신성한 임무가 있었으므로 망나니를 패주고싶은 욕망을 삼키느라고 가슴을 마구 탕탕 쳤다.  패거리들은 한번 또 한번 도전을 걸었고 나는 번마다 피하느라고 신경을 도사렸다.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형제”들이 무리싸움에서 류혈이 랑자하여 매일이다싶이 병원에 실려들어갔으므로 “형제”들은 피해다니는 나를 원망하고 비웃었다.  더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수 없었고 “형제”의리를 지키지 않을수 없었다.  맹목적인 의리, 어리석은 배려로 잘못된 삶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드디여 나는 칼부림세계에 다시 들어서 그자들을 혼뜨검내주는 길에 올랐다.1999년 6월 15일 저녁 9시경, 동생이라 불리우는 애가 패거리들한테 맞아 인사불성이 된채로 나를 찾아왔다.  참상을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는 나는 경찰복을 입었다는것을 망각한채 몸에 칼을 품고 패거리들을 찾아떠났다.  방정맞게도 골목길에서 그들과 맞띠웠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칼을 빼들고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자들을 무서워할 내가 아니였다. 나도 칼을 날리며 “용맹”을 떨치여 순간의 실수를 저질렀다.  만일 그때 나에게 법적관념이 조그만치라도 있었더라면 아니 조금만 랭정하게 생각하고 일을 처사하였더라면 자신을 망각하지 않았을것이다. 앞사람이 쓰러지자 뒤에서 달려오던자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쳤다.  당당한 위력을 과시한 우리는 승리자의 자태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튿날은 나에게 있어서 운명을 바꾸어놓은 날이였다. 그날 나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자유를 잃었고 부모형제와 사랑하는 친인들과 생리별해야 하는 애달픔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새벽녘 공안국형사경찰대대에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처음 살인이라는 사실을 대면했을 때 현실을 믿을수가 없었다. 죄를 저지른 나는 법의 천라지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인민의 재판석에 올라 고의상해죄로 유기형 13년에 언도되였다. 분발노력으로부터 타락으로, 인민경찰로부터 죄인으로,  얼마나 현저한 대비인가?  한때는 피타는 노력과 심혈을 가울여 어엿한 경찰이 되려고 애면글면했지만 “형제”의리에 눈이 가리워 기로에 들어섰으므로 사회와 인민,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받을수 없는 죄인으로 되였다. 13년, 한 사람의 인생에 몇번의 13년이 있는가?  그것도 한창 꽃펴날 20살의 청춘시절을 높은 담장안에서 로동개조로 흘러보내야 하니 말이다. 지난일들을 새삼스레 돌이켜보면 마음은 한없이 쓰리고 후회막급하여 흐르는것이 아픔의 눈물뿐이다.  철창을 부여잡고 쪼각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려 앞자락을 적시고 자리에 누우면 그립던 부모님생각에 베개가 젖어들었다. 인생의 꽃피는 시절에 활개치지 못하고 자유를 잃고서야 진정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였다. 나는 특수한 인간세상에서 죄인들의 서글픈 웃음속에 비낀 애절함을 보았고 한숨과 절망속에서 흘러간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참회의 목소리도 들었다. 인간의 가치,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 인간세상의 품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조를 다그치는 오늘도 나는 기로에서 헤매는 청소년들에게 나의 인생의 한토막을 반면교재로 삼아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말것을 바라마지않는다.                                                      정 남     
41    승강기에 갇혔다가 공포증에 걸린 처녀 댓글:  조회:3942  추천:0  2009-07-29
환자: 기영, 26세   병증상: 승강기에 갇혔다가 나온후부터 승강기에 오를 생각을 못하고 심지어 혼자서 층계를 오르기도 두려워했다.  나중에는 집문을 나설 용기마저 잃었다.   의사의 말: 공포성신경증에 걸렸는데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공포증입니다. 기자 최부요:  의외로 승강기에 한시간남짓이 갇혀있은것으로 해서 그녀의 생활은 철저히 개변되였습니다. 승강기에 오르지 못할뿐만아니라 정상적인 외출도 문제로 되고있습니다.   매일 집에 숨어있으면서 하루 세끼도 기본상 배달시켜 먹습니다. 심리의사는 그녀가 공포증에 걸렸다고 말했다.   의외로 승강기에 한시간 갇히다 기영(가명)은 료녕성 철령사람이다. 금년에 26세인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심양의 모 무역회사에서 조리사업에 종사하고있었다. 작년 9월중순의 어느날, 그녀가 탄 승강기가 9층에 이르러 갑자기 멈춰서면서 승강기안의 전등도 꺼졌다.   “저는 승강기안에 한시간넘어 갇혀있었어요.  승강기에서 나올 때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어요!” 기영은 격동되여 회억했다.   그날 그녀는 동사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모두들 제가 잠을 자고나면 좋아지려니 생각했는데 기실 그것은 악몽의 시작이였을뿐이예요.”   이튿날,   기영은 억지로 일어나 회사에 출근했다.  그러나 사무청사에 이르러 그녀는 어떻게 해도 승강기에 오를 용기가 없었다. 나중에 그녀는 혼자서 층계를 톺으며 15층으로 올라갔다. “저는 며칠만 지나면 좋아지려니 생각했어요. 그러나 얼마 안되여 저는 제가 병든것처럼 느껴졌어요. 승강기에 오를수 없을뿐만아니라 층계에 오르기도 두려웠어요.” 기영은 막무가내라는듯이 말했다.  그녀의 정황은 날따라 못해져갔다.  소음도 두렵고 말하기도 싫어졌다. 반달후 그녀는 마지못해 사직하고말았다.   “금년 년초에 와서 저는 집문을 나설 용기마저 없어졌어요.   하루 세끼도 배달시켜 먹군 했어요.  남자친구는 믿기 어려워했을뿐만아니라 리해해주지도 못했어요.  우리는 말다툼끝에 갈라지고말았어요.”   건의:  충격을 당한후 인차 자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걸린 병은 공포성신경증인데 흔히 말하는 공포증입니다.” 기영과 이야기를 나누어본 심양시 정신위생중심 심리과의 오휘주임은 이렇게 진단을 내렸다.   치료효과가 리상적이 되게 하기 위해 오주임은 기영을 데리고 그녀가 마음속으로 제일 두려워하는 사물을 접촉했다. “저는 매일 그녀를 도와 한차례 심리안마를 해주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근육을 안마하고 마음을 느슨하게 해주었습니다. 한달후 그녀는 저를 신임했고 저와 함께 층계를 오르내렸습니다. 지난달 중순, 그녀는 마침내 저의 보호하에 승강기에 올라탔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해주고싶습니다. 충격을 당했거나 괴로운 일에 부딪쳤을 때 인차 잠자지 말아야 합니다.  피곤하더라도 잠자면 안됩니다. 꼭 심정이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에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심리질병에 걸릴 확률을 절반으로 줄일수 있습니다.” 오주임의 제시이다.   “저는 제가 또 정상인으로 변했다고 느껴졌어요.” 여기까지 말한 기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기자에게 지난 4월 15일에 3차나 승강기에 올라탔는데 두려운 느낌이 없었으며 새로운 사업터도 찾았다고 말했다.      
40    정부의 손에 녹아난 해군중장 댓글:  조회:3901  추천:0  2009-07-28
2006년 6월 29일, 신화사는 원 해군 부사령 왕수업이 경제범죄로 해군 부사령직을 해임당했다는 소식을 발표하였다. 농민자식이 장군으로 왕수업은 1943년에 하남성 엽현 등리향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에 힘썼기에 그의 성적은 아주 훌륭하였다. 1964년에 21살인 왕수업은 하남성대학입시에서 6등의 성적으로 천진대학에 입학하여 공업과 민용건축학부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1968년, 해방군 총정치부가 일부 대학교에서 우수한 졸업생들을 뽑아 입대시켰는데 왕수업은 륙군 제38군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는 공병으로부터 시작하여 1994년 7월에 소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95년 12월부터 2001년 7월까지 총후근부 병영건축부 부장으로 있었고 2001년 7월에 해방군 해군 부사령원으로 되였으며 2002년 7월에 해군중장으로 승진하였다. 건축을 하며 억대돈을 탐오수뢰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왕수업은 전군 제3대병영개건을 책임지였다. 관련자금이 방대하기에 부패에 직면할 위험성도 더 컸다. 또한 부대의 병영개혁정책도 그한테 탐오수뢰할수 있는 틈을 가져다주었다. 공용건축은 다 입찰제도를 실시하고있지만 군대비밀이거나 군비에 관련되는 등 원인으로 하여 부대는 아주 큰 정도에서 여전히 지도자가 결정하고 청부업자한테 일을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있었다.   하여 왕수업은 많은 건축도급상들이 달라붙는 대상으로 되였다.  초보적으로 조사한데 의하면 왕수업의 탐오수뢰관련자금은 1.6억원이 된다고 한다. 끝내 정부의 손에 망해 금전과 권세를 갖고있는 왕수업은 십몇년전에 많은 정부를 두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에 정부의 손에 망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왕수업이 건축공사를 책임지였기에 그의 안해도 어느 건축업과 관련되는 공사에서 총경리로 있었는데 부부간은 관계가 좋지 않아 일찍 별거하고있었으며 두 딸은 외국에 나갔다. 왕수업에게는 여러명의 정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고정되고 시간이 제일 긴 녀인이 장모였다.  어느 대군구의 문공단 배우였는데 왕수업의 눈에 든후 그의 정부로 되였다. 왕수업은 기건부장이라는 권세지위를 리용하여 그녀를 북경으로 전근시켜 동거생활을 하였다. 지금 30여살인 장모는 그때 왕수업에게 아들 하나를 낳아주었는데 왕수업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였다. 2001년, 왕수업이 해군 부사령원으로 승진한후 장모는 그와 결혼할것을 요구하였다.  왕수업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갈라질것을 제기하고 다른데로 시집가겠다고 말하였다. 왕수업도 갈라지는데는 동의하였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을 자기한테 넘기라고 하였다.  장모는 그 대신으로 돈 500만원을 청춘손실비로 줄것을 요구하였다. 왕수업이 동의하지 않고 몇년 질질 끌자 장모는 중앙군위 책임자한테 왕수업의 추행을 적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수업과 관계를 가졌던 녀인들이 다 조사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장모가 제일 엄밀한 조사를 받았다. 왕수업은 그녀를 북경에 데려온후 집을 사준다 차를 사준다 하며 적지 않은 돈을 썼던것이다.   왕수업 잡힐 때 자살을 시도 2005년 12월, 왕수업은 몸이 불편하다면서 주해에 가서 휴양하겠다고 조직에 제의하고 12월 23일 오후에 떠날준비를 했다. 12월 23일 오전, 왕수업은 예전처럼 해군사령부에서 열리는 아침회의에 참석했다가 총참모보위부일군들에게 잡혀갔다. 당시 왕수업은 침착한체하면서 회의를 사회하는 해군사령원 장정발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잘못된것은 아니겠죠?” 그러자 장정발사령원이 말했다. “잘못된것이 없지요. 당신의 정치생명은 이미 끝났습니다.” 중앙군사위위회 장숙전이 중앙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 “중앙군사위원회 검찰원의 체포령”을 선독할 때 왕수업은 자신의 공무용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자살하려 했다. 이때 한 특수경찰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권총을 빼앗아내고 수갑을 채웠다. 검사결과 왕수업이 늘 휴대하고 다니는 공무용가방에 독일제 권총이 두자루가 있었고 모두 장탄한 상태였다. 집에서 거액의 장물이 나타나 왕수업이 체포된후 조사일군들은 북경과 남경에 있는 두채의 집에서 인민페 5200만원을 사출해냈다. 그는 랭장고와 세탁기에 장물을 감추었던것이다. 조사일군들은 또 그의 사무실에 있는 비밀금고에서 5000여만원이 들어있는 저금통장을 찾아냈다. 군대내에서의 반부패폭풍 총후근부 부장 료석룡상장은 군대 각급 지도간부 특히 고위급지도간부의 경제권력이 대단한데 어떻게 군사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관리하고 기제와 뿌리로부터 부패를 다스리겠는가 하는것이 우리 군 건설에서의 중대한 과제로 되였다고 말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앞으로 5년간 전군에서는 4000여명이상의 지도간부에 대해 심계를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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