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북성 천문으로 하향했던 호발운은 1970년에 무한으로 돌아와 7435공장에서 3년간 용접공으로 있다가 통계원으로 되였다. 1974년의 어느날, 공장책임자가 와서 방송국에서 그를 한번 왔다가란다고 전해주었다. 그날 호북성인민방송국 문예부에 찾아간 호발운은 거기서 처음 리홍이란 처녀를 만났다. 호발운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대를 그에게 권하고 자기도 한대를 꺼내 피우는것이였다. 호발운은 그 년대에 젊은 녀자가 담배를 피우는것을 처음 보았다.
리홍은 호발운의 작품을 방송하는 문제를 상의하려고 그를 불렀던것이다. 호발운은 리홍을 보고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서안에서 출생했는데 초중69기를 졸업하고 집체호에 내려가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고 했다. 문화대혁명시기의 초중69기면 소학교졸업정도였다. 집체호에도 내려가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가 제대한후 성방송국에 들어간다는것은 일반인의 자제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당시 반특권주의자였던 호발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방송국에서 사업하니 정말 세상이 망태기이지”하고 욕을 내뱉었다.
그런데 리홍은 화를 내지 않고 “군대에 나갔다고 해서 복을 누린것은 아닙니다. 당신들만 고생한건 아니지요”라고 말했다.
열흘후 호발운은 리홍의 전화를 받았는데 그녀는 그더러 자신이 만든 프로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뜻밖에도 그녀가 만든 프로는 매우 수준이 높았다. 특히 극좌적인 년대에 그녀는 우아한 피아노협주곡을 리용했는데 매우 듣기 좋았다. 호발운은 그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였다. 리홍은 륙속 호발운의 작품을 방송해주었다.
1975년 늦봄, 리홍은 호발운의 집에 책을 빌리러 찾아왔다. 그녀는 영광표 담배 2갑과 과일병졸임 한병을 사가지고왔다. 그들은 온종일 이야기하면서 담배 2갑을 다 피웠다. 그 병졸임은 점심술안주로 되였다. 리홍은 담배를 피울뿐만아니라 술도 잘 마셨다.
그녀는 부대에서 영화를 상영했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상영기구들을 자동차에 싣고 책가방에 찬만두와 짠지, 물병을 넣고 먼길을 떠나군 했다. 그리고 부대에 도착하면 나무막대기를 땅에 박고 영화화면으로 될 하얀 천을 걸어놓은후 깊은 밤까지 련속 몇부의 영화를 돌리군 했다. 영화가 끝나면 상영기구들을 수습하여가지고 돌아갔고 또 돌아가서는 필림을 원상태로 돌려놓고 설비들을 잘 보양해야 했다. 그녀가 영화를 돌릴 때엔 병사들이 늘 머리
를 돌려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보군 했다. 부대에서는 녀자를 볼수 없었기때문이였다. 그녀는 로병들처럼 담배로 답답함을 달래고 술로 추위를 막군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침내 병을 얻어 두번이나 위출혈을 했다.
리홍이 호발운한테서 처음 빌린 책은 《쑈팡평전》이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기때문에 쑈팡의 피아노협주곡에 대해 알고있었다.그 다음 그녀는 《뿌쉬낀시선집》, 《체호브단편소설선집》, 《안나 까레니나》 등 책을 빌려갔다. 리홍은 그 당시 군이상간부들만 볼수 있는 내부서적들을 가져다주었다. 문학과 음악이란 두가지 공동한 애호를 가진 그들은 이렇게 사귀게 되였다.
1977년 10월 6일,호발운은 갑자기 “반동언론”을 퍼뜨렸다는 죄명으로 공장에서 격리심사를 받게 되였다. 그는 공장의 한 자그마한 방에 갇혀있었는데 방에는 자그마한 창문이 있고 밖에는 높다란 담장이 막혀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상적으로 정전이 되여 밤에는 초불을 켰다. 호발운은 다 쓰고 남은 물렁물렁한 양초로 고니, 토끼, 코끼리, 꽃사슴 등 여러가지 동물을 만들었다.
어느날, 밤중에 담장밖에서 웬 녀인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리홍의 목소리였다. 그는 감시일군에게 자신이 만든 양초조각품을 주면서 나가서 리홍에게 갖다주라고 부탁했다.
그후부터 밤마다 리홍은 담장밖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그는 감시일군에게 부탁하여 여러가지 모양의 양초조각품을 그녀에게 갖다주게 했다. 리홍도 감시일군을 통해 담배, 과일, 과자, 통졸임, 고기졸임, 털실옷, 털수건 등을 보내주었다. 그녀는 경상적으로 담배갑속에 편지를 써서 그에 대한 그리움을 표달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끝내 조사소조 일군들에게 발각되였다. 조사소조에서는 리홍의 단위에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방송국에서는 리홍을 비판하고 감시했으며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한테 통지하여 리홍이 현행반혁명분자를 사랑하고 매우 위험한 일을 저질렀다고 알려주었다.
호발운은 정식으로 현행반혁명분자로 정해져서 처리를 기다려야 했다. 1978년 11월, 리홍은 호발운을 면회하러 왔다. 그녀는 호발운에게 “어머니는 처음에는 저를 미워하던것이 가슴이 아파서 편지를 보내여 집으로 오라고 해요. 저는 당신을 위해 2년동안이나 부모를 보러 집에 가지 않았어요. 당신이 자유를 얻기전에는 집에 가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호발운은 “우리가 이후에 어떻게 되든지 그분들은 영원히 리홍의 부모요.꼭 부모를 보러 가야 하오”라고 설복했다. 그녀는 부모를 보러 가는데 동의하면서 가기전에 호발운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가서 부모들과 고별하고 와서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1978년 11월 28일, 호발운은 마음씨 고운 감시일군의 도움을 받아 가만히 공장감방에서 빠져나가 약속한 골목에서 리홍을 만났다. 그날은 몹시 추웠는데 그들은 량쪽에서 마주 걸어왔다. 리홍은 붉은색솜옷을 입고 붉은색수건을 두르고 왔는데 손에는 사탕 한주머니와 빠나나송이가 들려져있었다. 호발운은 너무 씻어서 색이 바랜 옷을 입었다. 한 친구가 빌려준 집이 그들의 혼례식장이였다. 친구가 주는 열쇠를 쥐고 그들은 낡고 자그마한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들은 신성하고 랑만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진정한 부부로 된후 그들은 붉은기사진관에 가서 결혼기념으로 4촌짜리 흑백사진을 찍었다.한달후, 력사적인 11기3중전회가 열렸다. 그 황당한 사건도 황당한 시대와 함께 결속되였다. 1979년 1월 6일, 호발운은 현행반혁명분자란 모자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되였다. 출근하는 첫날 그들은 각자의 단위에 결혼신청서를 바쳤다. 그들은 서안에 있는 리홍의 친정집에 갔는데 리홍의 어머니는 그들을 위해 성대한 결혼잔치를 차리고 가정무도회를 열어주었으며 그들을 데리고 명승고적을 관광했다. 그들은 또 북경에 가서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하고있는 리홍의 아버지를 만나보았다. 로홍군간부인 리홍의 아버지는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1980년 봄에 리홍은 아들을 낳았다. 1986년, 리홍은 북경방송학원에 시험쳐서 들어갔으며 졸업한후 호북촉촌경제방송국의 문예부 주임으로 되였다. 1989년 여름, 리홍은 방송국을 떠나 텔레비죤극중심에 들어가 편집사업을 했다. 2001년, 리홍은 또 위가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위암중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후 수술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는 동안 호발운은 안해의 곁에서 한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11월 28일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였다. 이날을 어떻게 보낼것인가를 상의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25년전에 신혼의 첫날밤을 보냈던 그 잊을수 없는 거리를 다시 걸어보려는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그날 안해와 함께 뜻깊은 려행을 하고 돌아온 호발운은 안해를 원형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써서 안해에게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3개월후 그는 안해에게 바치는 장편소설 《여언》을 써서 원고예약이 있었던 인민문학출판사와 당대문학잡지사에 보냈지만 민감한 내용이 있다는 원인으로 발표되지 못했다.
그후 호발운은 안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병원을 돌아다녔으며 안해가 가는 마직막 순간까지 곁에서 병시중을 해주었다. 그는 또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를 창작하여 작곡가에게 부탁하여 곡을 붙였다. 그후 그는 늘 안해를 안고 조용히 《안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2004년 11월 28일은 그들의 결혼기념 26돐이였다.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여 기다리던 리홍은 힘겹게 병상에서 일어나 남편의 어깨에 몸을 기대였다. 아들이 그들 부부의 마지막 사진을 찍어주었다.
2004년 12월 2일 7시 38분, 리홍은 호발운의 곁을 영영 떠났다. 호발운은 병원에서 파견한 화장사를 거절하고 직접 안해에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는 안해를 보내면서 “천국에서 기다려주오”라고 부탁했다. 2009년 1월, 장편소설 《여언》이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그는 책의 첫페지에 안해와 함께 찍은 사진을 싣고 사진아래에 “먼저 간 안해에게 바친다”는 글을 써넣었다.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