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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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    고함과 납함 댓글:  조회:5380  추천:0  2015-04-26
                                     고함과 납함      사람은 일단 정서가 격해지면 폭발되기 마련이다. 그 폭발형식의 하나가 바로 고함인데 생리상의 자연적반응으로서 그만큼 충동적이고 순발적이다. 하지만 고함속에 담긴 감정색채는 다종다양하다.   우선 환희에 넘쳐도 고함을 칠수 있다. 례하면 거액의 유상권에 담청되였을 때 희출망외(喜出望外)로 터지는 고함이든가 수준급의 축구경기에서 선꼴을 넣은 선수가 운동장을 휘쓸듯 내달리며 지르는 열광에 뜬 괴성이라든가 담밖의 꽃에 혼신이 빠진 남자가 돈뭉치를 안겨줄 때마다 애젊은 녀자가 터뜨리는 애교어린 감탄성이라든가 훔친 사랑의 유희가 고조에 이를 때 정부가 짜는 열뜬 비명소리 등등이 다 이에 속하는 고함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랭담과 무정은 남아돌고 인간애와 관용은 빌어와야 하는 인생현장에서 흔히 격분을 참지못해 내지르는 고함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된다. 이를테면 붐비는 뻐스안에서 아들애의 학비로 가지고왔던 소중한 돈을 도적맞히고 통분해서 웨치는 농촌아주머니의 고함소리는 뭇가슴을 찌르는데 누구에겐가 발을 밟힌 멋쟁이 아가씨가 길길이 뛰며 뽑아내는 욕지거리는 귀청을 찢는다.   권커니 작커니 사이좋게 술을 마시던 친구끼리 무슨 일에 심통이 비틀어졌는지 식당이 들썽하도록 다투며 질러대는 고함소리는 공중의 귀를 어지럽히고 부부간의 언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남편이 위엄을 떨치느라고 뽑아올리는 돼지멱따는 소리는 동네를 부산하게 하고…   사람은 공포에 질려도 고함을 치게 된다. 밤골목에서 강탈당하게 된 녀인이 구원을 청하는 처절한 고함소리는 의례히 의로운 손길을 불러와야 하련만 사람들은 흔히 청맹과니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는게 보통이다. 정의에 나가서는 약자라도 강해진다는데 어쩌면 불의앞에 그렇게 차디찬 얼음덩이가 될수 있을가?   그래서 인생현장은 귀맛좋은 화음보다는 듣그러운 불협화음으로 더구나 시끌벅적한다. 고함이란 거개 자아중심주의 심리에서 인기된 불만의 발설이거나 무단적이고 일방적인 항변이여서 비록 격정은 다분하나 호소력은 약하며 데시벨은 높지만 감화성은 별로 없다.    언쟁할 때 치는 고함은 대방에게 어떤 위압감을 줄는지 모르지만 바람직한 대화의 방식은 아니다. 흔히 도리에 말문이 막힌 사람이 대방을 압제하려 하는데 기실 인간의 취약성의 표현이다. 목소리가 더 높은 사람에게 꼭 도리가 있는것은 아니기때문이다.   경우야 어찌되였든 희로애락으로 반죽된 세상을 살아가니만큼 고함치고싶으면 고함을 치시라. 자갈을 물려놓은 말도 내키지 않으면 울부짖는데 황차 자유언론의 시대에 열린 입을 가지고 사는 인간임에랴!고함은 결코 그 무슨 권위자나 강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이 아니다. 체호브의 명구가 있다.《큰 개가 짖으면 작은 개도 짖는다. 큰 개가 짖는다 해서 작은 개가 짖지 않는것이 아니다. 모든 개는 다 짖을 권리가있다.》    비유가 너무 야하고 빗나갔는지 모르나 인용의 저의인즉 사람은 누구나 다 말하고 소리칠 권리가 있다는것이다. 사람은 천태만상의 세계에서만 사는것이 아니라 온갖 소리속에서 산다. 소리없는 인간세상을 상상할수 있을가? 침묵은 곧 세계의 훼멸을 표징할지도 모른다. 지구촌은 소리가 있기에 활력에 넘치고 사람은 사람소리를 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즐겁게 환기할수 있는것이 아니랴.    그런데 자고로 상급은 무슨 일이 여의치 않으면 별잘못도 없는 하급에게 공연히 고래고래 고함치며 닥달하는게 관례이고 아래사람은 억울해도 참고 듣는게 례의라고 생각하는 노예근성이 거의 관습으로 되였다. 강자가 약자에게 기탄없이 고함지르며 횡포를 부려도 약자는 유구무언(有口无言)이라면 인간의 숙명적비애가 아니겠는가?   우리 말에 고함과 같은 뜻의 납함이라는 말도 있는데 쓰임에서는 구별점이 있다. 납함은 의지적이고 리성적이며 적극적인 항쟁의 의미에서 많이 쓰인다. 따라서 그 발성방식도 다르고 의의와 작용도 다르다. 납함도 가양각색이다.   화형장에서《…지구는 의연히 돌것이다.》라고 부르짖은 부르노의 견정한 웨침이 과학의 새아침을 열어젖히고 무지몽매를 찢어버린 세기적거변이 납함이였다면 이 진리의 수호자를 이단자라고 재판한 종교재판관들의 격노는 무지를 고집한 미친 고함질이였다.   링컨의《흑인노예해방선언》이나 맑스의《공산당선언》은 인류발전사에 새 편장을 펼친 납함이였다. 그러나 알프스산을 넘으면서《나는 알프스산보다 더 높다》고 한 나뽈레옹의 호언장담은 과대망상에서 온 고함이였고 게르만족의 우월론으로 국민을 오도하며 세계제패를 고취한 히틀러의 고함은 살인마의 예고된 파멸을 선고한 단말마적인 광란이였다.   1907년, 화란의 헤그에서 열린 만국평화대회에서 밀사로 파견되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기의 배를 갈라 항의한 애국지사 리준의 절규는 배달민족의 자주독립과 해방을 호소한 비장한 납함이였으며 조선강점을 획책한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의 앞가슴에 저주의 총탄을 안긴 안중근렬사가 웨쳤던《조선독립만세!》는 력사의 대하에 격랑을 일으킨 의로운 납함이였다.   하지만 민족수난의 시대, 맥국매족의 추행으로 하여 영원히 치욕의 기웅에 못박힌 민족의 망나니들도 많았다. 악명이 자자한 리완용 등《을사오적》들은 더 말할것 도 없고 당시 문단의 일인자라던 춘원 리광수가 도처에서 소위《황국신민》을 선양하며 조선청년들을 한사코 일제의 대포밥으로 내몰려고 한 그 악선전은 놈들의 발바닥을 핥을 가증한 주구의 미친 뇌까림이였다.   하지만 리광수류의 어용문인들과는 달리 지조높은 자태로 납함한 열혈의 작가들이 더 많다. 《뺴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통탄하며 조국의 광복을 호소한 리상화나 허위와 요사와 게으른자들을 옹호하고 용납하는 이 제도를 더구나 그저 둘수 없다고 웨친 반항의 작가 최서해의 납함은 암흑한 사회에 대한 투사식의 도전이였다.   《원쑤의 폭격 불타는 거리에서…죽은 엄마를 붙잡고 우는 이 나라 어린애의 눈물을 걸쳐, 모든 어머니들과 안해들의…눈물을 걸쳐 이 글을 쓴다.》고 부르짖은 조기천의 납함은 삼천만의 가슴들은 물론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선량한 마음을 울린 강음이였다.   력사가 증명하다싶이 모든 위대한 문호들은 다 진리를 위해 웨친 납함자들이였고 납함한 이들은 모두 인의지사들이였다. 단떼를 선두로 몰리에르, 쉐익스피어, 바이론, 쉘리, 유고, 뿌쉬낀, 체호브…누구하나 사회비리와 인간의 렬근성에 대해 납함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최대의 악의로써 중국사람들을 추측하기 꺼리지 않은》로신선생은 참담한 인생에 두려움없이 직면하여 납함한 제1투사였다. 반대로 한적한 문인 주작인류의 문인들은 꽃과 새와 풍물을 두고 뇌까리기에 자족했다. 그 역시 일종 삶의 자세이기고 살아있음에 대한 자기식의 환기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지금 세상은 많이 달라졌고 살기가 퍽 좋아졌다. 그래서 납함의 시대는 영영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아직도 우리의 인생현장엔 어둡고 더러운 구석이 너무많고 거짓이 하얀면사포를 쓰고 활개치고있으며 정의와 사악의 팽팽한 대결은 무승부로 남아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비정한 현실은 사람들을 점점 더 상심하게 하고있다.    물론 아직도 사회의 약세력인 문인들의 납함이 기고만장해진 비정한 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큰 길에 나선 쥐이라도 필경은 정신이 아찔하여 갈팡질팡하기 마련이다. 쥐는 어쨋든 쥐로서 갑자기 슬기나 황가리가 될리없다. 고층아빠트에까지 진주하기는 하지만…      억조창생이 얽혀도는 이 세상은 온갖 생명들의 호흡과 소리들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것이 아니랴, 대자연의 교향악엔 산토끼의 간담을 찢는 사자의 포효도 있고 산중왕인 호랑이의 강음도 섞여있으며 피의 향연을 갈망하는 승냥이의 호곡성도 있다. 늘 희소식을 전하노라 꽁지를 달싹거리는 까치의 잡음도 있고 여름내 서늘한 노래만 부르느라 목이 쉬여버린 매미의 단조음도 한몫 끼이고 밤새껏 불러대도 곡조가 맞지 않아 소란스럽기만 한 개구리합창도 있다. 오직 성대가 없어 끽소리 한번 못내본 기린만이 유달리 긴 목을 빼들고 막무가내한 침묵을 자랑할뿐이다.   문학세계도 기실 소리의 세계이다. 목청은 간드러졌지만 별내용도 없는 사연에 혼자 신나하는 꾀꼬리같은 문인들도 있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버리고 제 설음을 우는 뻐꾸기같이 무병신음하는 문인도 꽤 있다. 앵무새같이 흉내는 내면서도 젠체하는 문인도 있으며 시골의 긴긴 밤을 울어대는 부엉이처럼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얘기를 엮는 이야기군도 있다.    어쨋거나 자기 상아탑속에서 옛풍월이나 읊조리며 낡은터에서 이밥먹던 얘기를 하든 모두 제 잘난멋이고 아무튼 소리를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견한 일이라 하리라. 그리고 아지랑이 피는 봄날에는 버들피리소리가 제격이지 마른 천둥소리가 좋을리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의《머리우에 별흐르는 하늘과 마음속에 도덕이 있기에…(칸트)》아직도 납함이 수요된다.세상을 마주하여 납함할 일이 어디 한두가지냐? 민주법제와 인권존엄을 위해, 사회부조리와 날로 심각해지는 반부패전을 위해 납함이 필요하다. 작가적량지와 용기로 더 밝고 살기좋은 복지사회건설을 기리여 우리함께 납함도 해보자.    고함이 개체생명의 격렬한 언동이지만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다함께 웨칠때면 함성이 되는것이고 대지를 진동할것이다. 뇌까림이나 잠꼬대는 혼자만의 목에서 새여 나오는 너무 여린소리라서 아무도 그 전파를 기대하지 않을것이요, 산들바람에도 곧 사라질것이다.   소리를 하며 살바엔 하품이 나오는 혼자소리만 하지 말고 한가슴 터지도록 고함이라도 질러보라. 비록 납함은 아니라도 되맞쳐오는 어떤 회음(回音)이 있을것이다. 그리고 제 가슴에도 메아리칠것이다.                               2004년 4월 25일
479    자리철학 댓글:  조회:5954  추천:0  2015-04-19
                                  자리철학      항간에서는 분수를 모르고 제멋대로 처신하면 앉을자리 설자리를 모른다고 힐난한다. 그 힐난의 의미도 좋으려니와 보다 깊이 파고들면 엄숙한 인생철학을 읽을수 있다.   자리란 곧 위치로서 문자 그대로 사람이 설자리이다. 이 위(位)는 사람의 립각점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적공용을 내포하고있다. 공용(功用)이란 곧(功效)로서 보람, 효험이다. 바로 그래서 위치문제는 치렬한 경쟁이 수반되는 사활적문제요, 만사에 선행되는 급선무로 된다. 그만큼 자리의 기능은 다종다양하고 자리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인류사회의 원시적평등이 찢어지여 계급과 신분이 체크되고 부귀빈천이 갈라지게 되고 화복이 조석으로 바뀌는것이니 인생의 전부의 내용이 응축되여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말은 아닐것이다.   하기에 붐비는 이 인생극장에서 제 앉을자리 설자리를 옳게 척척 찾는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배우의 위치에서는 응당히 연기를 배워야 하고 관중의 위치에서는 마땅히 감상하는것을 배워야 하건만 우리는 때로는 배우가 되여야 할지 관중이 되여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가 있다. 혹 생활자체가 우리들로 하여금 관중의 위치에서 연기를 하게 하고 배우의 위치에서 감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또 인간자체가 워낙 복합동물이고 생각하는 갈대여서 자기가 놀아야 할 각색에 대하여 헛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본의 아니게 가면구를 쓰고 이런저런 위치에 앉아 아닌보살하게도 되고 그리고 보다 많이는 의도적으로 격에 맞지도 않는 배역을 담당해 놓고 제 잘난체 어깨힘을 팍팍 살리기도 하는지 모른다.   수림이 깊고보면 별의별 새가 다 있는법이요,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세상이니 류류별별의 사람들이 있기마련이라 저마다 제 잘난멋에 살아가더라도 제가 원해서 하든 어떤 불가피한 경우이든 제발 자기를 기만한 유취만년의 남곽선생만큼 야비하지는 말아야 하겠다. 전혀 불줄모르는 생황을 부는체 하노라니 자신인들 얼마나 고달팠으랴.   붐비는 이 사회극장에 의자는 적고 지원자들은 너무 많아서 어디서나 비좁다는 괴탄이 터지는 판이다. 렬차에서도 뻐스에서도 선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자리, 자리다툼에 시끌벅적한다. 이런 공간위치문제는 구름이 엉키여 바람에 흩어지듯 하겠지만 문제의 엄중성은 사회적위치문제이다. 공장과 기업, 상점과 학교들, 각종 사업단위와 행정기관…어데라없이 자리가 넘쳐나고 자리에서 밀려난 실업자들이 자리타령에 목이 갈릴 지경이다.    옛글에《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才必有用)》이라 했지만 자고로 적재적소(适材适所)란 한낱 희망사항으로 남았을뿐이다. 제자들에게《불환무위,환소이립(不患不为患所而立)이라고 가르친 공자님 자신도 한자리 얻어하려고 주유렬국(周游列国)하면서 혀가 닳도록 유설하여 마침내 로나라에서 미관말직인 사관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한 달만에 밀려나서 다시 포의한사로 글이나 가르치다가 죽었다.   《자리없다고 근심할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어떻게 지킬것인가를 걱정해야 하느니라.》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불세출의 공자성인께서 천생자질을 가지고도 뜻을 펴지 못했으니 자아풍자라 할가? 아니면 력사의 희롱이라 할가? 로자가 자기를 보러온 공자에게《군자라도 때를 만나면 수레를 타는 몸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밭을 타박타박 걷는 신세가 되는거라오.》라고 했다는  데 세상이 돌아가는 리속을 언녕 꿰 뚫어보고 한 개탄이 아니랴!    로자가 말한 때란 곧 자리이다.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위치가 그를 선택하지만 용속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찾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누군가 말했는데 이 세상에서 그렇게 배포유하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가? 세속적인 관념에서의 자리란 바로 권력의 보좌를 의미하기도 한다. 목숨을 나누어가질수 없듯이 이 세상에서 나누어 가질수 없는것이 권력이다. 하다면 해답은 자명하지 않을가,    세월의 뒤뜨락에 해묵은 락엽처럼 썩고있는 력사의 페지, 피로 얼룩진 자리다툼의 기록에서 우리는 자리가 어떻게 인성마저 싹 말아먹었는가를 몸서리치며 읽을수 있다. 제왕과 수재들의 력사라고 개괄할수 있는 중국의 력사, 승리한자의 꾸며진 회억록에 불과하기도 한 정사(正史)에서 왕권쟁탈의 혈전들과 궁중에서 벌린 골육상잔의 비극이 주선이 아니였던가? 그래서 정계에는 량심과 인의가 앉을자리가 없다고 인의지사들이 통탄했을것이다.    그 모든것이 력사의 앞마당에서 벌어졌던 시끌벅적 요란스러운 인간활극이였다면 정계의 뒤골목에서 벌어졌던 소인배들의 암투는 또 얼마나 불인정시(不忍正视)의 추태극이였던가? 유사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눈이 어두워서 량심을 버리고 인격과 존엄을 넝마처럼 팔며 권력자의 발바닥을 핧았는지 모른다. 그 쟁투속에서 인재죽이기 비극인들 또 얼마나 재연되였으랴.    하여 매관매직이라는 불치의 사회악성종양이 생성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만연되고있으니 바로 이 자리에서 인간의 또 하나의 비애가 잉태되였다고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하긴 금강산 그늘이 관동팔십리라고 옛날에 한집안에 누가 고관대작하면 그 집의 닭개도 지붕에 오른다고도 했으니 그까짓 량심과 존엄이 다 어느 빌어먹을 놈의 뒤씻개냐고 코웃음 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자리다툼으로 서로 물고뜯고 할퀴며 충량지재를 사경에 몰아넣고 저희들 간사한 무리들로 둥지를 틀고앉아 나라를 망쳐먹은 치욕의 력사가 우리 민족의 사책에도 있다. 력대의 그런 간특한 무리들이 마른 뼈다귀를 가지고 바자굽에서 으르렁거리는 개들처럼 물고뜯다가 누가 어떻게 한자리 차지하고 어떻게 재미를 보았는가 하는것은 그자들 개체생명의 활동이지만 결과적으로 국계민생에 소급된 문제로서 개탄이 아니 나올수 없다.    서구라파의 한 현자가《흔히 용속한자가 왕이 된다는걸 당신은 믿지 않는단말인가?》라고 엄청난 질문을 던졌듯이 자고로 덕재가 겸비한 충의지재는 모난돌 정맞듯이 거개 뒤전에 밀려나고 무지무덕한자가 일세영달하는 인생마당이였다. 주임(主任)이라는 옛현인이 이를 두고《대저 자리에 림할때는 먼저 자신을 잘 알고 앉아야 하느니라. 가진 재능도 없으면서 아무자리에나 앉았다가 소임을 감당해내지 못하면 시위소찬(尸为素餐)이니라.》하고 경계한바 있다.    시위소찬이란 시체에 음식을 먹인다는 뜻으로서 맡은 소임을 감당해내지 못하면서 그냥 틀고앉아서 봉록을 타먹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청운에 뜻을 둔 사람들로 말하면 과시 좌우명으로 삼을만한 금과옥조(金科玉条)이지만 예로부터 이런 사치스러운 고훈에 발목을 잡힌 사람이 없었으니 말세의 풍조라고나 할가부다.    속담에도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하였으니 래일은 삼수갑산 가더라도 한자리하고 옆채기 두둑하게 챙기면 그게 난놈이 아니겠느냐? 돈도 아니나올 자각이니 도덕이니 사명감이니 민생고니 하는것을 앞세우고 벼슬할 쓸개빠진 놈이 몇이니 될가부냐? 그게 다 실의한자들이 불평불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붓장난이나 하면서 포도는 시여서 못먹는다고 했다는 여우놈처럼 허튼수작을 하는것이 아니냐? 옛노래에도《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주인이 따로 있나ㅏ?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이 없어 빈의자는 없더라.》고 했거늘 무슨 놈의 말라비틀어진 적재적소냐?… 물론 이는 득의한자들의 론리이다.    옛날에는 확실히 백치라도 어찌해서 관모를 척 쓰고 당상에 높이 나앉아 경당목을 탕탕 두드려대면서 엉터리 판관질을 하여도 분명히 지엄하신 관장어른이였다. 그 때는 봉건사회여서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문명개화한 현시대에도 이런 착위(错位)현상이 존재한다면 멋모르는 젊은세대들은 옛말처럼 귀등으로 흘려버릴것이다.    보통농민이 일약 국무원 부총리로 둔갑했고 공장의 한갖 보위간사가 일국의 수뇌자후보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중국식유모아는 결코 현대 아라비안나이트는 아니였다. 다만 자리철학의 오묘함을 어찌다 터득하랴싶을뿐이다. 제 분수에 없이 너무 높이 올라가면 그처럼 일락천장하기도 십상이라는것을 그네들은 미리 알고나 있었는지…지금도 흔히 보게 되는 평지돌출과 착위현상을 한입으로 일일이 다 말할수 없으니 이만 생략해버린다.    아무튼 자리의 기능은 다양하다. 일단 한자리 하게 되면 누구라도 환골탈태(换骨脱胎)를 한다. 기색도 거동도 사상면모도…석수쟁이 눈깜짝이는것부터 배운다고 틀거지부터 갖추고 배를 내밀면서 제세부리는 어마어마한 모양을 볼 때 겁이 더럭 나기도 하고 웃이 킥 나오기도 해서 왼고개가 탈린다. 한자리 하면 저렇게들 자아팽창증이 오는걸가?    과대의식이 못말리는 직업병이라면 큰 야단이 아니냐?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진다는데도 말이다.《사람이 겸손하여 자기를 적게 나타내고 크다고 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큰 일을 이룩할수 있느니라.》는 로자의 금언을 새격보지 않을수 없다.    기실 자리와 인격력량이 정비례되는건 아니다. 머리 하나 더 달린것도 아니고 눈이 더 뚫린것도 아니여서 본인도 별로 변한게 없다는것을 모를리 없지만 어떤 자리에 앉게 되면 그림자처럼 어떤 비젼이 따라서거니 하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자신을 더없이 고명하다고 자긍한다. 당사자는 얼빤해도 곁에서는 빤하다는 명구는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만들어진것이리라.    자리는 하찮은 인간을 일조에 귀인으로 만들기도 한다.《수호전》에 나오는 고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현대판고구가 많고도 많다. 그런 사람은 먹어둔 먹물이 없어 머리속이 텅 비여있으면서도 하급들이 전심전의로 받들어 모시기를 바라고 자기의 말을 마다마디 금과옥조로 받아들이며 절대복종하기를 바란다. 하긴 이런 사람들의 주위에는 상급의 방귀도 참 달다고 할만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맴돌기마련이다. 술은 스스로 취하지 않는데 사람이 절로 취한다고 할가?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자. 혼잡한 이 세상을 자기답고 옳바르게 살아가자면 자리철학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인생마당에는 오르는 사다리와 내리는 사다리가 놓여있다. 물은 낮은데로 흐르지만 사람은 높은데로 오른다. 이것은 인간상정이고 또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오르는 사다리를 일반적향상으로가 아니라 권력의 보좌에 오르는 사디라로만 간주하고 너무 집착한다면 기로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우만 쳐다보다가 자신이 너무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망양지탄(亡羊之叹)에 빠져있다. 반대로 자신은 늘 남의 위에 앉아있다고 새각하면서 아래를 굽어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안하무인이 된다. 코대가 너무 높으면 자주 벽에 부딪치게 되는데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보다 뒤떨어져있다고 생각하면서 발밑을 잘 살피지 않고 청방지축 덤벙대다가 곤두박질하고도 운수를 탓하면서 그냥 앙앙불락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남보다 늘 앞에서 달린다고 자족하면서 뒤만 돌아보다가 궁둥방아를 찧고서야 뛰는 놈우에 나는 놈이 있다는 사실에 한탄한다.    이렇듯 시선은 위치를 결정하지 못하지만 그 시선때문에 오히려 위치가 영구적인 존재로 남는다. 기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있든지 시선은 사면팔방으로 개방되여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기 위치를 잘 확인하고 튼튼하게 지켜나가야만 주위의 모든것이 정신이 지배속에 있게 될것이다. 그러지 않고 노상 우왕좌왕한다면 주위의 모든것이 주인이 되여 자신을 지배하려 들것인바 노상 아첨과 굴종을 앞세우고 전전긍긍할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자기 정신의 노예로 전락되고말것이다.     가령 사람을 금,은,동이나 혹은 거석, 조약돌, 거목이나 작은 풀 등으로 비교해서 나눌수 있다고 할 때 아무도 돌멩이거나 잡초의 위치이기를 원하지 않을것이다. 금덩 이는 돌무지속에 놓았다 해도 금덩이의 위치로 확인되지만 돌멩이는 금무지속에 놓았 다 해도 의연히 돌멩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영원한 순금일수 없고 또 영원히 돌멩이일수도 없다.     자신을 순금으로 생각하는 과대망상이나 자신을 돌멩이로 여기는 자비감은 다 자 아훼멸의 징표이다. 어떤 자리에서 자기가 적재적소인가 아닌가는 자신이 잘 안다. 병사의 당면 위치는 전방이다. 나뽈레옹이의《훌륭한 병사가 될수 없다면 훌륭한 장군도 될수 없다.》는 명언은 바로 위치의 당위성을 강조한 말이 아닐가?     자리는 흔히 그 임자를 나쁘게 만든다. 훌륭하신 많은 사람들이 홍익인간에 투신하여 공덕을 쌓아갈 때 반대 일부 사람들이 지금 권력이 있을 때 챙기지 않으면 후회해도 쓸데없다고 관리병에 걸려서 욕심쓰다가 일패도지(一败塗地)아니면 인과보응의 죄값을 목숨으로 결산할것이다.    자리에 대한 이런 사람들의 관념은 너무나 진부하고 수구적이며 그 집착성은 가련할만큼 유치하다. 십년을 적게 살망정 권력없이는 하루도 못산다고 해석하고 올라앉을수 있으되 내려앉는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란다. 뉘라서 청산만 늙지 않는다던가? 인간의 자리욕도 인간의 세월과 더불어 영원히 젊어서 살거니...    그러나 자리에 대한 민초인생의 요구는 소박하다. 땀흘려 일할수 있고 자기 거처에서 편안히 살면서 자기 직업을 즐길뿐이다. 이런 시점에서 자리는 곧 직업과 이어 진다.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빛나게 지킨다는것은 자기 직업에 전심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인생백사에서 직업보다 더 긴요한것이 없기때문이다.    세속적인 관념에서는 직업의 명칭에 높고 낮음이 있지만 일의 성질을 학리적( 学理的)으로 해부할 때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 가령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신심이 있고 그에 따른 자질과 능력이 있어서 대통령보좌에 앉았다면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명실공히 잘해나가면 되는것이요, 삼륜차를 모는 사람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기쁘게 잘만 해나가면 되는것이다. 이것이 합리한 생활이며 직업의 신성함이다.    부언하거니와 한 사람이 만약 자기 재능과 처지에 알맞는 일을 맡아서 원만히 해나가면 곧 고귀한 사람이며 자기 가치를 창조해나가는 사람이며 공덕을 빛내는 사람일진대 운명을 내걸만큼 권력보좌에 너무 집념하는것은 허황하고 부질없는 일이다.                            2002년 2월 20일                  
478    스승의 덕을 말한다 댓글:  조회:5598  추천:0  2015-04-19
                           스승의 덕을 말한다      옛글에 스승이란 도리를 전수하고 학업을 가르치고 의혹을 깨우쳐주는 사람으로서 또한 인생의 좋은 교훈을 주고 훌륭한 본보기로도 되는 사람이라고했다. 그래서 위인사표(为人师表)라는 말이 생겼을것이다.    고대희랍의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육신을 낳아준 어버이보다 인간정신을 키워주는 스승이 더 고상하다고 말한것도 주로 스승으로서의 높은 덕성을 두고 한 말이 다.    과거는 어찌되였든간에 새 시기에 들어와서 교원들에게는 영광이 무더기로 안겨졌다. 인류의 아름다운 령혼을 부각한다고《인류령혼의 공정사》라 불렀고 다함없는 정성과 심혈로 나라의 동량지재들을 육성한다고 해서《가장 신근한 원예사》라 했으며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워 다른 사람에게 광명을 준다고《초불》이라 비유했다. 그 뿐만이랴, 먹는것을 풀이지만 짜내는것은 우유인 젖소에 비유하기도 했고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토해내는 봄누에, 애들을 지식의 항구에로 불러들이는 등대 그리고 징검돌, 어버이, 아무튼 아름다운 미칭들로 하여 교원들의 가슴은 뻐근할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태양아래 가장 신성한 직업》이라 하겠다.    그러나 영예가 클수록 그만큼 부담도 큰 법이다. 그리고 영예는 어디까지나 지난 날을 말해줄수 있을뿐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그 빛나던 력사는 기억의 한페지로 넘어 갔고 준엄한 현실은 교원의 덕성에 새로운 과제를 한눈 잠간 제기했다.    한눈 잠간 팔아도 일만가지 욕망을 꼬드기는 유혹의 홍진세계, 자칫 흔들리는 마음이 흑사심의 탁류에 휘말려들면 량심도, 도덕도, 인격도 시궁창에 빠지게 되건만 필사적으로 전철을 밟으며 빠져들어 자맥질하는 공리(功利)시대, 이 사회의《최후록 지》라던 교정에도 리욕이 돈바람타고 불어들고있다. 황금가루는 누구의 눈이나 다 멀게 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가?    마침내 스승의 덕성에도 얼룩이 가기시작했다. 영예의 계관은 땅에 떨어졌다. 고귀한 덕성도 가치분동을 공리쪽에 놓아버린것이다. 하여 교원 일반에 대한 사회평 판 도 나빠졌다. 여기에 무슨 할말이 있는가? 교원도 칠정륙욕이 있는 보통인간이라는 인성의 자각을 부인할수는 없지만 비리한 리욕을 챙기는데 정당한 리유로 될수 없다.    교정은 이제 더는 청수아문(清水衙门)이 아니며 정토(净土)가 아니다. 교육계에 불가사의하게도 폭발호들이 속출된것이다. 한손가락과 아홉손가락을 뒤섞어 론하는것은 안될 일이지만 사실은 언제나 웅변보다 낫다. 교정내에서 상하급간에 회색경제거래가 있게 되였고 심지어 아이들의《벼슬》까지 학부모가 건네는 동봉투에 따라 오르 고 내리는 등 현상은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다.    교육계에 부자가 생겼다면 그들이 조공원수(赵公元帅)의 다리를 부등켜안지 않고서야 어디서 재원이 굴러들것인가!여물을 먹지 않고 질주하는 준마가 있으랴, 쉬파리는 결코 세멘트바닥에 알을 쓿지 않는다. 모든 부정축재가 다 그러하듯 교정에서 누군가 군살이 잔뜩 지고 만복의 배가 기름졌다면 남다른 지력상수가 필요한것도 아니고 출중한 지혜가 동원된여야 하는것도 아니다. 오직 선 위치와 탐욕심과 후안무치 만 앞세우면 된다.    권력은 누가 주었으며 누구를 위한것인가?하는 질문은 너무 유치하고 막연한것이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권력의 실질은 책임감과 량심이고 홍익인간의 덕성이여야 한다는 기대뿐이다. 어둠속에서 보는 고양이는 다 회색이다. 교육자의 외투속에 탐욕을 숨기고 군자인체하던 사람들이 들통이 나서 전국매체들에 소개된바 있다. 웃물이 흐 렸는데 아래물이 맑을가, 보통교원들도 돈빼낼 구멍수를 보느라 열을 올리고있어 물 의를 일으키고있다. 이는 보편적인 개체생명들의 물욕현상만이 아니라 세기적인 악순환을 예기하는 슬픈 궤적이 아닐수 없다.   《돈바람 마구 불어치는데 고요히 서있을 나무가 어데 있으랴!》하는 잠언으로 그런《덕성》을 정당화하려 든다면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공심(空心), 무욕의 경지야 어찌 바라랴만 성직자로 나선만큼은 덕성을 운운하고 지켜야 하지 않을가?    진정 스승이라면 탐욕과 부정축재만은 불가하다. 스승답게 인생을 진실하게 사는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생도들과 함께 진리를 지향하고 고상한 륜리적감각을 길러주면서 자기《천직》을 다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현대아이들은 벌써 때이르게경제효력에 민감하고 그것을 체험하고있다.    별처럼 반짝이는 맑은 눈동자들 앞에서 한점 부끄럼이 없도록 자신의 마음가짐새를 다시 한번 살펴보시라. 시간의 조개에 내린 정의는 진주일수 있고 시간이 석탄에 내린 정의는 보석일수 있다. 교원은 본래 진주나 보석은 아니지만 황금의 마술봉에 따라 보기싫은 꼽새춤만은 추지 말아야 하겠다. 천당을 거쳐 련옥에 이르려는 사람이 잠시 빼여난 인재일지 모르나 결과는 참새가 방아간 지나는 격일수 있다.     자신 자원해서 맡은 교직(教职)이 목적 그체일 때 보람은 빛나는것이다. 교직이 일종 생존의 수단으로만 그칠 때 스승의 덕성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교육자의 타락은 그자신만의 타락이 아니라 미래의 타락을 의미한다는것을 명기하자. 도화꽃 만발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은 절로 억제되리라                                    2003년 4월 30일
477    선택의 곤혹 댓글:  조회:5933  추천:0  2015-04-19
   선택의 곤혹      수수천년, 국문은 장성의 똬리속에 잠궈놓고 문명고국의 위대함과 자아신성의 꿈을 꾸던 중화의 대지에서 궐기하여 세계적인 주시를 모으고있는 개혁, 개방의 길은 일조일석에 가닿을수 없는 묘연한 초행길이다.    그러나 이 력사적거변은 거대한 충격파를 이루어 만백성을이 초행길우에 떠밀었다. 세세대대로 락후와 빈궁, 무지와 몽매를 답습하며 마비되였던 두뇌는 각성하기 시작했고 희망의 섬광은 새 사상의 전원(电源)에 이어졌다. 하여 사람들은 마침내 선택의 가능성, 삶의 다양화에 가능성을 가지게 되였으며 내심의 갈망과 충동을 실천으로 체험해볼수 있는 길이 열리였다. 이 길은 아무도 걸어본적이 없는 초행길이다. 그만큼 선택의 갈림길에 직면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곤혹의 시대가 시작되였다    농경문화의 진공상태에서 나고 자라서 해가 뜨면 일밭에 나가고 해가 지면 묽은 죽이나마 배불리고 잠자리에 드는것을 태평성세라 여기던 조상님네들의 굳어진 생존모식의 영향을 받아 운명에 자족할수밖에 없었던 새세대들로 말하면 이 장엄한 력사행정에서 자각적 혹은 수동적으로 휘말려들게 된 자성의식이 불가역전의 력사조류에 부딪쳤을 때 그 방향성과 곤혹의 모지름은 심각한것이다. 운명의 대전환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새길은 파란만장할것이며 분투, 좌절, 득실의 희비로 반죽될 광야의 길이 아닐 수 없다.    가령 력사를 의지의 필연성으로 본다면 이는 력사가 조성한것이지 결코 우리들의 무능이나 차실이 아니다. 이런 시점에서 역추리해나간다면 시대가 우리를 선택했다고 말할수도 있으리라.    이러한 력사거변의 도전과 선택앞에서 절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기적으로 유전된 소심성과 숙명적기분속에서 위축되고 망설이고있고 어떤 사람들은 보다 미래지향 적이여서 향토문화의 낡은터에 현대물질문명의 새 기반을 창설하려 하면서 바야흐로 1980년대 첫패의 주체형, 창조형의 신형농민으로 대두하여 농민기업가의 길에 나섰다. 그러나 그리 많지 못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람들은 시대의 선험자의 자태로 가치의식과 심령세계를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미처 몰랐던 그리고 오래동안 잃고있었던 세계ㅡ현실적으로 눈부신 유혹의 세계에서 한자리 차지하려고 팔을 뻗치고 인생전환으 광야에 결연히 나섰다.    마침내 세기적숙망의 꿈을 현실로 받아안은 사람들은 이 물질세계가 너무나 벅차고 그만큼 신기하기만 한 세계이고 생소한 세계이지만 조급함과 황홀감, 가슴부푸는 욕망을 앞세우고 대담히 걸어나간다. 이들의 개인적선택은 새시대 농민군체의식에 대한 경종이였고 무의식의 초월이며 운명개척의 신호였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모험에 질겁한 나머지 그들의 사상정서를 순발적인것, 원시적 충동, 공리주의사상의 분출, 맹목에 가까운 가치취향 혹은 이른바《경솔한 시대정신》 이라고 보고있다.     하다면 갈수록 팽배하는 상품경제시대의 소용돌이속에서 행복의 대안을 찾고저 몸부림치는 농민군체의식의 분화와 그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누가 제시할것인가? 농민군체의식이란 지금 와서는 하나의 모호한 개념으로 되였다. 한것은 실제적으로 처해있는 사회지위와 종사하는 일은 비슷하나 행위준칙, 가치관념과 기타 신생사물에 대한 인식차이로 말미암아 농경사회권은 바야흐로 흔들리기 시작하다가 찢어지기시작 했기때문이다.     인생의 망망대해 그 어느곳에 자기의 항만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운명의 신에 도전하면서 줄기차게 박투하는 사람들의 행각에서 우리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상품경제시대 농민의식의 심각한 변화와 정황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페쇄적인 농경생활ㅡ땀으로 걸구어오던《실락원》의 탈출자들이 부단히 도시에로 진출하고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동경의 세계로 다가온 도시생활권이 성공만을 선물하지 않았다. 도시에는 결코 서양음식점, 나이트클럽, 즐비한 상가만이 있는것이 아니라 이 불청객들에 대한 무시, 랭대, 사기와 협잡, 음모가 기다리고있다. 그야말로 농촌에 서정이 있고 도시엔 얼굴이 있는것이다.     보다 뼈저리게 느끼게 된것은 치부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사회적문제이다. 실패하고나서야 내버리고 온 고향의 꿈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고 이를 악물고 버텨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정서세계, 마음의 골방에서만 반죽되는 희로애락을 붓으로 진실하게 그려낼수 없다. 그러면서도 농민은 그저 우매하고《촌스럽지만》않다는것을 세상에 보여주기도했다. 이 세상은 강자들의 세계이면서도 또 보다 많은 약자들의 세계이기도 한것이다.     행운은 언제나 달에 걸려있건만 사람들은 희망만을 싣고 솔가하여도시로 도시로만 흘러든다. 성공자도 있겠지만 더 많은 실패자들이 이 시대의 곤혹을 짙게 한다.    농촌처녀들은 무조건 도시를 선택한다. 사랑을 잃은 총각들이 늘어난다. 세월의 흐름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수요라기보다 목적 그자체로 되였다. 나서 자란 향토를 미련없이 떠나는 큰애기님네들의 앞길에 무엇이 약속되여 있는가? 행운만이 아니다. 차츰 도시의 뒤골목에 숨어다니는 녀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이다. 그들의 리향의 심리바탕은 지겨운 농사일에서의 해탈이 우선이였고 도시처녀들의 말쑥한 얼굴, 류행복, 네온싸인이 명멸하는 밤거리 그리고 도시총각과의 에덴동산…그 모든 유혹을 차지하고싶은 욕망이였다. 그녀들의 향수욕의 과민은 도시생활의 현란한 유혹앞에서 실현불가능의 심리락차를 형성하게 되였고 가치심리평형이 쉽사리 기울어지게 했다. 똑 바로 걷고싶으나 머리는 뜨거워지면 휘청거리기 마련이다.    이들의 눈물겨운 행각에서 우리는 상품경제시대 공리주의 실혜가 어떻게 순결무구하던 수많은 농촌처녀들을 롱락하고 타락시키고 있는가를 가슴아프게 보게 된다. 현대중국사람들의 생명본체론과 인생태도가 바로 이러한것이던가? 농경문화의식의 자연발생적해탈과 도시문화의식 사이의 충돌속에서 그네들이 무엇을 생각하고있을가?    이들 농촌처녀들의 몸에는 낡은것과 새것, 전통적인것과 현대적인것, 사변리성과 실용리성이 얽혀져있을것은 사실이겠으나 화페토템앞에서 그녀들으 도덕, 륜리관념과 정조의  방선은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는게 안쓰럽다. 그들은 스스로 황금신의 희생자 가 되건만 그것을 생존모식으로 여기는것은 더구나 가슴쓰린 일이다.    도시가 바라는것이 내몸에 있고 내가 바라는것이 도시에 있다는 심리정세는 얼마나 공리적이고 실혜만 따지는 가치관념인가? 이런 심태가 있기에 단순하고 솔직하며 마음씨 고운 농촌쳐녀들이 점차 사악해지고 사취와 음모의 주인공으로 탈바꿈하고있다. 이러한 그녀들을 타매해야 하는가? 이것이 막무가내한 시대정서이고 곤혹이기도 할진대 그녀들의 리념의 광환은 언제까지 갈것인가? 이들에게 참회의식이란게 있을가? 처녀로서 찢어진 녀성을 두고 참회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피눈물에 젖은 참회일것이다. 그러나 이제 물러설 길은 없는것이다. 죽기가 아니면 살기마련,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삶을 영위하는 그들의 귀숙(归宿)은 어디쯤일가?    하긴 농촌처녀들이 도시에 진출하여 빛나게 성공한 일례도 있는건 사실이다. 여기서는 실패한 인생을 성공한듯 분식하면서 자기를 기만하는 그런 일그러진 넋들을 더 사색하고싶다. 가령 그녀들이 주지육림(酒池肉林)과 애욕의 피리속에서 언젠가 소스라쳐 자기를 찾을 때 참회의식이…마침내 령혼의 지평선우에 진정한 사랑의 금자탑 과 행복의 기발을 떠밀어올리기에는 너무나 늦다. 돈에 울고 자기의 값없이 팔린 청 춘에 울고…     나도 꽤나 싱거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다만 변혁시대 농민들의 운명과 리상의 충돌을 직각으로 감지하며 주체적능동성과 자아의식의 확신성, 그것의 추구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파악해보싶을뿐이다.     아, 선택과 곤혹의 시대여!                                  1990년 6월      
476    《관계학》에 깃든 학문 댓글:  조회:5507  추천:0  2015-04-19
                          《관계학》에 깃든 학문      세상사에 정통함은 학문의 힘이요, 인정에 숙달함은 문장의 힘이니라고 지성인들은 말하였지만 대천세계 수백종의 학문치고도 처세술의 정수인 이른바《관계학》이 유독성행하여 도처에《관계학학원》이 일떠서니 대체 이는 관념갱신의 기본추항이냐 아니면 가치의식의 변태냐?    찬찬히 살펴보면《관계학》에 아리스토텔레스나 헤겔의 철학같은 심오한 사상도 없고 맑스, 엥겔스의 경제학설같은 과학성도 없으며 똘쓰또이나 마크 트웬의 예술감 화력도 없고 우주공학처럼 신비한 탐색성이나 개척성도 없어 위(伪)학문은 위학문인데 그 신통력은 어찌하여 무변광대하고 괘속실효를 보고있는지?    또 어찌하여 무형의 실체로서《관계학학원》의 체계는 그렇듯 방대하며 가치창조 기제로서 인습에 속속들이 침투되고있는지? 본원으로부터 층층이 분원이 있고 산하에 또《벼슬학계》,《중용학계》,《아첨학 계》등이 있어 사회의 공해로 되고있건만 사람들은 머리가《총명》해질수록 각별히 애착을 가지고 탐구열을 올리고있으니 과연 현대적인 시대《학문》이라 하겠다.    고대에도《관계학》이라 명명했는지 몰라도 아무튼 성행된 력사만은 유구한것이 틀림없다. 하여 포공같은 청렴한 관리가 나오고 해서의 파직같은 비사도 있게 된것이 아닌가? 하긴 고금중외가 두루 일반이라 이 학문의 덕에 흑백을 전도할수 있고 살인 범도 무죄석방되기 여반장이니리해도 되는듯싶다.    목전 번창하고있는 크고작은《관계학학원》을 고찰해보면 일매지게 앞문은 잠궈놓고 뒤문만 활짝 열어놓은것이 상례이다. 주관인물들은 거개 학문을 깊이 연찬한바 는 없지만 학술에 종류가 많고 또《관계학》이 민간일류학문으로 되고있을진대 통털어 무지무용(无知无用)하다도 타매한다면 무척 억울해 할 위인들이다. 왜냐하면《관계학》의 오묘함을 터득함에는 누구보다 머리가 잘 돌고 또 그물을 늘이는데는 왕거미를 울릴지경이요, 사리로 끌어당기고 들어붙고 하는데는 남달리 부지런하기때문이다. 게다가 아첨술에 조예가 깊어서 소진같은 설객도 찜쪄먹자고 하니 말이다.    배우는 학문은 사회과학도 자연과학도 철학도 아닌 위과학으로서 얼렁뚱땅 대포쏘기와 달콤짭짤 나발불기에 정통하는것이고 할거하고 지반을 닦는 이골을 틔우는것이다. 특히 위법자들이라도 여기서는 흰소리 탕탕 치며 기름진 배꼽을 슬슬 튕길수 있는것인데 그들을 위해서 전문 푸른등이 켜져있다. 반대로 합법적이고 합리적이며 능히 해결받을 문제를 가지고 온 정인군자들이 부득이하여 뒤문으로 들어서면 마디마디 우뢰같은 원칙을 풀면서 돌상같은 장비얼굴로 붉은등을 척 내든다 붉은등을 척 내든다.    진짜학문을 닦기가 얼마나 어려운가!하지만 이 학원의 유능생들은 그것없이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위생 로동인사, 병역 등 각박면에서 사통팔달하고있으니 사악한 바람이 낳아길러 종횡무진하는 당대 호한들이라 하겠다.    이들은 특히《난관》돌파를 전문하는데《뒤문치기》의 급선봉이다. 이들이 쓰는 무기를 얕잡아보지 말지어다. 권연을 날창삼아 꼬나들고 단병접전하면서 진세를 간파 하고 고급술병을 수류탄삼아 뒤문을 까부신다음 주육으로 생포하는데 근년에는《코밑치성》보다《옆구리찌르기》가 더 은을 낸다고들 한다.     이 학원의 총칙, 부록, 계률을 보기로 하자.     총칙:     ① 무릇 사리도모에는 반드시 관계를 잘 맺어야 하느니라.     ② 관계만 맺어놓으면 있던 문제도 풀리고 관계를 맺지 못하면 없는 문제도 생기 여 촌보가 난행이니라.     ③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고도의 선택성과《예술성》에 각별히 심중할지어다.    부록:    ① 무릇 관계학을 응용하는자는 권력의 발바닥을 핥아먹을 용기가 있어야 하고 백성들앞에서는《원칙》을 지킬줄 알아야 하느니라.    ② 관계학기교술의 핵심은 강개한 의리와 통이 큰 처사이니라.   계률:   대바르고 성실하며 입바른자는 가차없이 축출하라.                                1988년 3월 16일
475    거짓말을 보듬다 댓글:  조회:5298  추천:0  2015-04-19
                            거짓말을 보듬다        가짜가 꽃너울을 쓰고 란무하는 시대,거짓이 진실의 외투를 걸치고 활보하는 이 시대의 경관에 찬탄해마지 않으면서 새삼스레 거짓말을 보듬으며 품평해본다.     가짜와 진짜가 동전의 량면과 같다면 정말과 거짓말은 쌍둥이자매쯤 되여있으리라. 따라서 진실의 세계가 무궁하듯 거짓말도 그 유래가 깊고 사이비하고…    태초에 인류가 동물권에서 벗어나던 그 분계선쯤에서부터 거짓은 그네들의 심령심처에서 심어졌을가? 그리고 사상의 옷인 유성어가 생성되면서 거짓말도 별도로 마련되였을가? 아닐게다. 잔혹한 자연력과 사활적인 투쟁을 벌려야 했던 인류의 유아시기, 오직 진실로 단합된 군체속에서만 개체생존이 가능함을 시시각각 절감했을 씨족 성원들중 누가 거짓말을 하였다면 그 후과는 상상할수 없었을테니까,     이는 말이란 곧 문명의 산물로서 자초에 진실만의 의사를 보다 확실하게 교환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치기 위해 만들어낸 부호라는 설명이 되지 않을가? 그만큼 말이란 군체를 긴밀히 단합시키는 뉴대였고 어둡고 긴 생존투쟁의 턴넬속을 비추어준 문명의 첫봉화였다. 이렇듯 인류가 말의 힘을 입어 현실을 인식하고 현실을 리드해왔다고 할 때 인류에 의해 창제된 말은 되돌아와 인간을 형성했다고 말할수 있다.    인류가 드디어 만물의 령장으로 군림하고 어섯눈을 뜬 지혜가 제일 먼저 사심을 깨우쳐주었을 때 말은 본의 아니게 중성을 띠게 되여 속심을 드러내는데도 감추는데도 쓰이게 되였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세상에서 제일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 사람은 지자(智者)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거짓말은 인간의 본성 내지는 본능으로 되였고 마침내 만세유전의 처세술로까지 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도 거짓됨 이 인류의 원죄로 되고 기만, 반목, 불신, 사악의 씨가 되여 그렇지 않아도 힘겹고 고달픈 인생을 더더욱 황당무계한 활극으로 만들어버릴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것이 다.    예수를 만들어낸것도 로마인이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것도 로마인이라던가? 인류는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였지만 한편 한몽둥이에 때려눕혀 18층지옥 에 처넣고싶을만큼 강한 량지도 가지고있으니 인류야말로 모순의 복합체라 할수밖에 없다. 우습지 않은가!사람마다 제일 꺼리는것이 변소이지만 그러나 가지 않고는 못배기는곳도 변소이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제일 가증스러워 하면서도 자기를 위해서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이률배반적인 문화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는지? 아마도 영원한 인생숙제인것 같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원된 원시적거짓말은 문명의 개화, 발전과 더불어 종류가 다양해지고 갈수록 고명해졌다. 이를테면 그 동기, 목적으로부터 크게 기획적거짓말과 림기응변성적인 거짓말로 나눌수 있고 성질상 선의적인거짓말과 악의적인 거짓말로 구분할수 있다. 그리고 더 세분하면 도피성거지짓말과 과시성거짓말, 오락성거 짓말과 모략성거짓말 등등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    도피성거짓말, 오락성거짓말은 비선의적인 기획성거짓말에 속한다. 모략성거짓말에는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상업적 등 방면의 고차원저거짓말이 포함된다.    인간세상에 비일비재하는 저차원의 거짓말은 도피성거짓말과 과시성거짓말이라 할수 있다. 누구나 다 어렸을 때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는 어른들의 꾸중이나 책벌이 두려워 거짓말을 했던 경력이 있을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약자의 피해의식속에서 속발된 도피성거짓말들이다. 좀 커서는 소비돈 같은것을 얻어내려고 거짓말을 꾸며내여 소기의 목적에 도달하려 한다. 이런 거짓말은 악의적이거나 모략적인것은 아니여서 그래도 리해와 용허가 들어갈 공간이 있다.    어린이들은 원래 거짓말을 모른다. 그들이 거짓말을 배우게 된 근원은 어른들에게 있다.《만물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왔을 때는 순결하지만 일단 인간의 손을 거치기만 하면 망태기가 된다.》고 한 루쏘의 말처럼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거짓말이 생성될 환경을 만들어주고 변상적으로 가르쳐준 셈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거짓말은 무엇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 잘했노라고 분식하는 어른들의 자아과시성거짓말보다 순진한데가 있어 량자는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어른들의 거짓말에도 선의적인 거짓말이 있고 때론 아름다운 거짓말까지 있다. 례하면 불치증에 걸린 환자에게 하는 위안의 말이나 의사의 완곡한 설명 등은 있을법한《거짓말》들이다.     이 지구촌에서 제일 거짓말을 잘하는 국민들로는 미국인들이 하고 그중에서 텍사스주 주민들의 거짓말이 수준급이란다. 그들은 친구끼리 만나도 한바탕 나발불어대고서야 껄껄 웃으며 헤여진다고 한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통계한데 의하면 미국성년들은 매일 인당평균 200마디의 거짓말을 하고있고 한주일내에 비교적 큰 거짓말을 열세번이나 한단다. 그들에게는 이미 거짓말하기가 그저 심리현상만이 아니라 일종 생리현상으로까지 되였다고 하니 재미있는 국민들이라 하겠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거짓말대왕 선발대회까지 연다. 목적인즉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 긴장한 인생살이를 느슨하게 풀어준다는것이다. 하여 그들은 거짓말할줄 모르는 사람의 일생은 유감스러운 일생이고 거짓말 한번 하고는 곧 얼굴을 붉히는 사람의 일생은 더구나 유감많은 일생이라고 인정한다. 그래서인지 미국사람들은 이젠 국제요교에서도 기탄없이 거짓말을 해대는데 가히《거짓말 합중국》이라고 할만도 하 다.     일상적거짓말이야 어느 민족인들 다를가만 서양식거짓말이 미칠수 없는 중국식 거짓말이 있다. 그것의 특징인즉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믿어야 하는것이다. 지난세기 50년대말깅 중국대지를 휩쓸었던 이른바《대약진》운동 때 전국민적과장푸은 기네스북에 오를만도 한것이다. 허풍을 치며 곡식을 무당 20만근도 낼수 있다고 했고 인중 승천(人众胜天)이라 위성이 하늘에 오른다고 허장성세하였다. 그때 류행된 민가들에서 그 시대의 풍조를 보아낼수 있다. 례하면《콩알이라 쥐였더니 벼알이라 놀랐노라/ 바위라고 앉았더니 호박이라 놀랐노라/ 천년수라 쳐다보니 수수대라 놀랐노라.》하는 따위의 호언장담은 단순히 예술적과장수법의 결과가 아니라 시대정신 그 자체였다. 그후 전례없는 대동란시기, 국민경제가 마비상태에 처했는데도 도처에《꾀꼴새 노래 하고 제비가 춤추는》아주 좋은 형세라고 선전했고 국민은 기꺼이 믿어마지 않았다. 정치적차원으로 승격한 거짓말은 거짓말의 력사로가 아니라 문화비극자체였다.    더구나《영원히 건강》하라던 유명한 부통수께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을 해낼수 없다는 금언을 내놓은후 거짓말은 처세술의 정수로, 법보로 되였다. 그 의발 을 계승한 사람들이 지금 너무 많다. 그래서《유감없는 인생》을 영위하느라고 자각적으로 열을 올리고있는데 미국 텍사스주의 주민들마저《OK!》할 지경이다. 자고로 중국식거짓말시장은 넓고 넓다. 한때 만병통치의 기공열이 신주대지에 궐기하더니 특 수기능자가 장강남북, 장성안팎에서 우후죽순마냥 용솟아서《기적》을 창조하였다. 해빛이 미치면 먼지도 빛난다던가? 한 작자는 물로 휘발유를 대신한다는 천방야담까지 불어댔다.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사교의《교리》마저 사람들을 미혹시키는판이니 거짓말에 대한 국민들의 신비정도를 가히 알수 있지 않는가?       온 사회적으로 두통거리가 된 저질상품, 가짜약, 그것을 진짜처럼 불어대는 광고쟁이들의 거짓말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또 관리가 수잘을 낳고 수자가 관리를 낳는 정계현상은 중국특색이라고나 할가? 그들은 과시성거짓말이 자기력량에 대한 초객관적판단에서 기인된 일종 심리질환인줄 몰라서일가? 홍모보다 가벼운 자기 력사를 태산처럼 과장하고 일을 조금 하고는 도금칠하여 세상을 웃기고있다. 거짓말로 자아 형상을 내세우는 그런 저렬한 령혼들에게는 광명이 없어야 하련만 오히려 득세하였으니 인간사회야말로 기만과 음모의 시장이 아니겠는가?    동서고금의 모든 거짓말은 순박한자들의 편견과 경신(轻信), 명철한자들의 묵인속에서 가꾸어지고 번성하였다. 아름다운 말에 믿음성이 없고 미더운 말이 아름답지 아니하다는 경세지언(警世之言)이 있건만 사람들은 흔히 진실에 잘 향응하지 않고 거짓된것에 더 잘 매료되니 거짓말이야말로 얼마나 크나큰 위력을 가지고있는가?    로신선생은 일찍 과거의 중국은 거짓말나라, 요언련방국이라고 하였다. 일상의 거짓말은  더 시야비야 할것 없고 모략적이고 악의적인 거짓말로 살생지화까지 초래한자들이 얼마였던가? 고대로 말하면 굴원을 모함한 자란(子兰)이나 악비를 암해한 진회같은 패류들…현대로 말하면 문화대혁명시기 일세영달했던 강생, 진백달, 요무원, 척본우, 장춘교…등도 거짓말제조대왕들로서 그들의 더러운 세치혀바닥에 화를 입은 인의지사들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대저 권력자로서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량지와 용기가 있다는 표지이며 정말과 거짓말을 잘 식별할줄 안다면 덕망이 높다는 표징이다. 과거는 물론 오늘날에 도 이런 높은 경지에 이른자가 많지 않다.    언행은 비록 개인의 반응이고 개체심리활동이지만 곧 량심과 사회도덕에 소급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말을 한다는것은 그저 낱말의 선택과 조합,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곧 마음의 문제이다. 글서 머리로 말하지 말고 인격으로 말하라고 하는것이다. 그러나 진실되고 훌륭한 말은 오직 진실되고 훌륭한 마음에서만 나올수 있다. 말은 마음의 메아리이다.    밝은 민주사회건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참말을 하는것이며 악의적이고 모략적인 거짓말의 온상을 짓부셔버리는것이다. 허위를 비판하는것은 진리를 확실하게 하는만큼이나 중요하며 일체 가짜를 강타하는것은 그자체가 벌써 진짜를 선양하고 시장시키는것이다. 한 사회에 진실과 신뢰의 결석보다 더 두려운 일이 있을것인가? 거짓말의 범람은 곧 국민정신의 타락의 표징이고 량지와 책임감의 상실을 표징한다고 말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거짓은 진실의 외투속에 숨기 좋아한다. 그러나 사회는 하나의 밝고 큰 거울이며 민중의 마음속에는 진가를 판별하는 빛나는 천평이 있다. 종이로 불을 싸지 못한다. 거짓말로 일시 득의할수 있지만 흙보살은 강을 다 건너지 못하는 법이다. 책을 좀 읽은 사람들은 이소프으 우화를 알고있을것이다.《승냥이가 와요!》하고 세번이나 거짓말하여 마을사람들을 롱락한 소년은 종당에는 승냥이에게 진짜 먹히웠다. 물론 소년은 자기가 한 거짓말과 함께 승냥이 배속에서 귀속을 찾고… 본분에 어긋난 거짓말을 밥먹듯하고 있더라도 한번쯤은 얼굴을 붉혀보시라.                                                     2003년 7월 12일
474    새벽달 보자고 초저녁부터 나앉냐? 댓글:  조회:6283  추천:0  2015-04-19
       새벽달 보자고 초저녁부터 나앉냐?                                         진 언      새벽달 보자고 초저녁부터 나앉으랴는 속담이 있고 비슷한것으로 우물에 가서 숭늉찾는다는 말도 있다. 전자는 무슨 일을 하려고 미리미리 잘 준비한다는것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후자는 일의 순서도 모르고 성급하게 덤빈다는 말로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푼수대가리가 없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지구촌에 꽤나 있어 경관을 이루고있다    금년, 2월20일 “통일 후 갈등 北 과거 지배 계층·지역갈등·실업 문제" 라는 보고서가 제시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일컬어 보고서에는 “우선 정치분야에서는 통일 후 북한의 지역개발 우선순위 차이에 따른 지 역갈등과 과거 지배 계층에 대한 처벌 문제, 북한 지역에서의 대표선출 등 세 가지가 필수적이고 긴급한 우선순위로 집계 됐다.”고 쓰고있다.    보고서는 "'과거처벌'은 통일 직후에 발생할 사건이지만 통일 이후 처벌방식에 대한 예측에 따라 북한지역의 지배 계층이 통일을 찬성 할지의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라며 "따라서 통일 이전에라도 북한의 지배계층이 통일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당부했다.……”    아이낳기전부터 포대기를 준비하는것은 예견성이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사람이 너무 설쳐대면 “핼래깨비ㅡ농촌사투리”라 힐난받지 않을수 없다. 소위 연구보고서의 너무 앞서나간, 아니, 빗나갈수밖에 없는 발상의 숨은 목적은 결국 대결의 도화선에 불을 다는것이다. 생각이 그 사람을 바꾼다는 말을 잘들 하더라만 제멋에 겨운 어떨궁이에 현실이 개변된 사실이 있던가?    하기사 욕심같아선 건들거리는 오뉴월 쇠불알이 아니라 황소자체가 벼락맞은 소고기로 되여 다익은것을 이발로 널어댈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일것이다. 그래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왼새끼를 꼬다가 마침내 참지못하고 어떻게 칼질하여 나눠먹을가 하는 환상이 현실로 다가온듯이 호들갑떨기에 열을 내는 모양새가 코열고도 답답하다. 그런데 가석하게도 벼락맞은 쇠고기를 먹어보았다는 사람이 세상에 없다. 물론 합중국식 공상과 숭늉뜨러 우물가로 달려가는 작태에서 크낙한 계발을 받았을테고 그에 힘입어 환상의 나래를 펼쳤을테지만 환상이 공상으로 되면 랑패아닌가?    저 유명한 인디라 간디의 명언이 있다.“ 주먹을 쥐고있으면 악수할수 없다.”고,  입만 벌리면 헐뜯고 잡을공론만 하면서 융합이란 말이 가당한가? 그나마 제힘으로는 어방없으니 외세에 매달려 호가호위하면서도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것은 아무리 수사법이라해도 속창이 너무 얄팍하다. 무작정 깔보고 헐뜯으면서도 타력에 목숨거는것은 자가당착이 아니라 불성모양이 아닐수 없다. 굴종은 합작이 아니라 맹종 그 자체이다. 맹종은 나중에 자아상실로 끝나지 않던가?    력사는 궤적대로 돌아간다. 이건 상식이다. 기본상식과 론리조차 무시한 망상을 주관욕망 하나만으로 현실화하려는것은 궤변론자의 기괴한 사고방식이다. 기본적인 상식과 론리를 부정하려면 역시 상식과 론리를 내대야 하는데 상식과 론리를 단순한 상상으로 파탄내버릴 정도이니 그런 발상은 유치한 정도가 아니라 농촌말로 “형페 무인지계-(말할나위 없이 형편이 없다)” 라고 해야 할것이다.    기본적인 상식론리는 현실에 대한 인지의 기초이기도 하다. 자신의 무지를 편견으로 채우려는 작동은 무모하다. 상식이하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초적인 상식론리위에 존재하는 그 자신들의 존재론리조차 부정하는것이며 그 론리를 그 무슨 발상이라고 내돌리는 그들의 황당한 상상에 그만 실소를 금할수 없게 할뿐이다. 하긴 기본적인 상식과 론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상식과 론리로 대응한다는것 자체가 시간과 정력을 랑비하는 어리석은 짓이만…    기본적인 상식과 론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것은 상식이 침몰된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그런 몰상식한 사람의 발상에 대해 응수한다는것 자체가 벌써 같은 부류가 되는것이다. 혹시 그런 환상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든 아니든 그런것은 긴요하지 않고 떡줄놈은 생각하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것은 창신도 아니다.       환상이 공상도 아닌 망상이 되면 비애이다. 지구의 수억광년의 진화가 단 며칠간에 이루어진다고 상상하면 재밋을가? 화석속의 공룡이나 피를 팔아먹는 괴물이나 인간을 꿀꺽 삼키는 식인나무나 감성은 형상에서 짜릿할것이나 만화일뿐이다. 어느땅에서 살든 백성들은 력사적으로 부정할수 없는 동포이고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인데 악만 남아서 입만 열면 “잡는다”고 설쳐대며 살벌한 분위기만 조성하면서 지구촌의 타민족인들을 맨날 웃기고있으니 아무리 젠체해도 세기적비애가 아닌가?    저들은 한창 열에 떠있는데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 대학원 초빙교수는 지난 15일 미국의소리방송과의 대담에서 이른바 “급변사태”에 관련한 질문을 받고 “급변사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현재로선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며 “급변사태 예측이 오랫동안 반복돼 오지 않았는가? 그런 상황이 벌어지길 바라는 희망때문에 자꾸 이런 예측이 나오는게 아닌가싶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며 앞서나간 욕망이 현실적이지 않음을 강조했다.    조엘씨야말로 현실적이고 명철하다. 그는 “오바마행정부의 대북 대결정책인 ‘전략적 인내’정책은 사실상, 파산되었다. 그것도 오래전이다. ”라고 말하고있는데 남들의 어떨꿍이에 찬랭수를 퍼부었으니 너무 역설적인가? 신경질나는대로 실언한 오바마씨도 기분잡쳤을테지만, 상식과 론리로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할 “연구씨” 들이 상식이하의 예상을 앞세우고 그저 다된 밥을 한술씩 먹을가, 가마채로 삼킬가 궁리를 짜내던 나머지 소화불량마저 걱정하니 “새도래”치곤 넘 수준급이다.    언필칭 “전문가”해서 일매지게 수준급은 아니다. 엉터리 “전문가”조롱하는 의미로 “전가(砖家)” 라는 말이 류행되고있다. “砖”이란 벽돌이 아닌가? “百度百科” 에 “砖家”에 대한 설명이 있다.“所谓文化大师,光环下疑窦重重;所谓养生达人,学说却毫无科学依据;所谓权威人士,言论往往自相矛盾。这些人被网友统称“砖家”。“砖家”不以求真知为目的,说话也不负责任,他(她)们最终目标就是利益,而相关监管的缺失,导致假专家的泛滥。”정히 이런 “전가”들이라면 참으로 “맙시사”가 나올법하다.    그래서 소위 전문가들이 뛰여 나와 어떤 일에 대해 증실하거나 설명하면서 대단한 예언가인듯 요란떨지만 맞아떨어지는게 별로 없었기에 사람들은 보통 그런 예측과 반대로 단정한다. 그러한 사유관성은 다 리유가 있다. 이는 진정 명석한 전문가들에게는 모욕적이고 슬픈 일이지만 미꾸리 한마리 온 개천을 흐리거늘…    진실은 명확하고 간단하며 명료하다. 허구는 장황하고 자극적이며 불분명하고 복잡하다. 무엇을 말했는가는 사상전달이고 어떻게 말했는가는 론리성문제이다. 현자는 생각한 다음 말하고 말한 다음 성찰하며 생각한후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식한 바보는 무식한 바보보다 더 멍청하게 되는 때가 있는가보다.    "진실은 권력의 강압이나 정치적 타협에 의해 만들어지는것이 아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의문에 대한 치열한 과학적 논쟁을 통해 의문이 하나하나 해소될 때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낸다"고 누가 말했던지…옛날 장자님이 “개가 짖는다고 해서 용하다고 볼수 없고 사람이 지껄일수 있다고 해서 령리하다고 볼수 없다.”고 했다. 듣기에 야박하기는 하지만 해당자들에게는 뜨끔한 교훈이 아닐수 없다                      2014년 1월 16일 ㅡ2015년 4월 10일
473    바다의 그 내밀한 속은… 댓글:  조회:5513  추천:0  2015-04-13
                                     바다의 그 내밀한 속은…                                                        최 균 선      이른 봄 흩날리는 눈발속에 바다의 풍경은 이색적이다. 별무리같이 빛나는 눈발과 파도거품이 기슭을 온통 뒤덮은 정경을 보느라면 마음까지 온통 눈에 덮힌다. 해가 넘어갈 때 바다는 또 다른 얼굴이 지어보인다. 노을의 잔광을 받아 보랏빛으로 물든 바다. 일찍 청진앞바다에서 보았던 빛깔과 기억되였던 정경을 여기 청도의 금사탄에서 재확인하게 되니 더 감개무량한가? 설레는 바다의 피막(皮膜), 물이 막빠지는 백사장, 노을은 온통 보랏빛으로 보는이의 마음도 색칠한다.    바다는 가까이서 보면 평평하고 멀리 내다보면 둥글어보이는 간단한 구도가 아니라 다채로운 변형체이다. 달빛이 뛰노는 바다, 술렁이는 심야의 바다…바다는 표정이 풍부하다. 잔잔한 바다는 비늘처럼 드러내는가 하면 눈보라속에서 날카로운 포말을 비수처럼 내리꽂는 성난얼굴로 변하기도 한다. 내감성이 투영되여 어둡거나 밝은 색갈이 현연되는것이 아니다.    흔히 바다의 침묵이요, 침묵하는 바다라고 하던데…바다는 정말 침묵하는가? 저 솟구치는 파도와 성난물결과 벼랑에 부딪치고 휘감아치는 몸부림은 바다의 언어가 아닌가? 포효하는듯, 고함치는듯 사뭇 뭍을 깨뜨릴 기세다. 하지만 잠잠할때도 있다. 벙어리인가? 연암 박지원은 “하루밤에 아홉번 강을 건너다”에서 강물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고 쓰고있다.    바다는 침묵한적이 없었다. 단지 우리들이 바다의 언어를 모를뿐이다. 속깊은 바다의 그 내밀한 노래가 파도의 호흡인가. 숨쉬는 바다, 길길이 치솟았다가는 맹랑하게 무너지고 다시 치솟기를 련습하는 파도야말로 바다의 호소가 아니며 우렁찬 생명찬가가 아니겠는가? 기세한번 좋게 밀려왔다가는 멋지게 물러가는 바다물은 나가고 물러섬의 철학을 높은 숨결로 토로하고있다.    그래서 매번 바다를 마주할 때면 저로서도 알수 없는 에너지가 자신을 감싸는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바다의 잠재력의 발산에서 비롯된것이 아닌지. 그리고 그 자체가 사람을 매료시키는 에너지가 아닌지 알수 없지만 아무튼 바다란 인간들에게는 비범한 존재물이다. 인간존재의 시간을 초월한 바다의 시간을 우리로서는 눈에 담을수 없다. 파도에 떠내려온 해조류조각처럼 거뭇한 흔적을 해변가 모래위에 아로새긴 모습에는 원초적인 바다시간의 흔적이 묻어있다.     그래서 바다가에 설때마다 사색도 일렁인다. 물방울이 모여 창해가 되고 마지막 수증기로 구천에 날아올라 말라버리는 그런 륜회의 법칙은 에누리 없는것인가?하는 엉뚱한 생각은 로옹의 은근한 내심인가. 뒹굴며 부서지고 다시 어울리며 거창하게 숨쉬는 바다에 상념의 돛배가 방향없이 무작정 떠간다.    얼마나 많은 문인들이 바다를 찬미하였던가. 느꼈다는것은 소득이며 토로하는것은 자아가치실현이다. 생명의 표현은 감수에서 비롯되지만 현상의 외피속에 숨겨져있는 본질을 투시하는것은 어렵다. 살며 느끼는 인생으로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은 귀중한 소득이다. 신비한 바다의 내속을 읽기에는 상당한 체험이 요청되지만 매번 바다의 푸른숨결에 귀기울이며 바다의 그 내밀한 속에 잠겨보고 싶어진다.    문득 인간의 욕망의 바다도 밀물과 썰물의 섭리를 가지고 있다면 인생마당이 이처럼 시끌벅적하지도 않을것이고 그로하여 혼잡을 겪지도 않을것이라는 허황한 생 각이 붕 떠오른다. 언제면 차고넘칠가? 하는 한계의 미학을 인성의 본질과 이미지와 련계시키면 그릇된 추구를 고집하지 않고 비극을 모르는 조화만을 이루지않을가.    자의이든 맹목이든 욕망은 인성의 본질이며 무한대하다. 욕망은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춤추며 날로 나날이 부풀어 제어하기 어려운 인간의 괴질이 되였다. 허위에 숨겨져있는 본질을 해부해보면 참된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이 새삼스레 소중해진다. 그 허위를 까밝히기싶고 그 진실을 말하고 세상을 마주하여 설파하고 싶어진다.    한마음에 욕망과 절제의 두 기둥을 동시에 세운 완미한 인간이 되기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뻗기만 하는 추구의 가지마다 탐욕의 열매를 부러지게 달아매지 말고 밀물과 썰물의 미학을 배우는것은 가치없는것일가? 풍족함과 만족함은 다른 개념이다. 만물의 령장는 돈벌레로 진화되였으니 소유의 문명이 진실하고 합리한것인가?    하다면 욕망의 합리성은 무엇이고 진실이란 무엇인가? 해답은 인류의 실존과 함께 영원히 난제로 남을줄 안다. 서로의 조화와 아량이라 한다면 정답이 아닐수 있지만 욕망이 극치에 도달해도 만족의 대문은 닫기지 않을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정비례되는 소득은 정당할진대 극한에서 자기를 잃는 물극상반도 기억해야 하리라.    극단에 조화의 미는 없다. 인생가치란 추구과정에서 실현되며 그 과정에 조화도 이루어질 때 비리와 부정, 불협화와 갈등, 자족과 긍지, 향락과 권태…인생극장의 온갖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것이다. 챙기기만 하고 베풀줄을 모르는 흉금으로는 그가 누구든,어떤 자리에 앉았든 참된 인간의 이미지로 부각될수 없다.    인간심령에 추구의 지평선이 이루어지기 어려운것은 바로 탐욕의 무한선때문이다. 조화가 실현불가능이라면 인간은 영원히 비극속에 어리광대로 될수밖에 없으며 더욱 비참한 동물로 타락할수밖에 없다. 완성된 인간의 모습은 반드시 물질재부의 금자탑우에서만 현연되는지 나로서는 영원히 알수 없지만 그 어떤 강렬한 충동도 욕망의 바다에서 비롯되듯이 썰물처럼 물러갈줄은 모른다는것만은 명백하다.    인간에게 절제는 금구인가? 욕망이 합리할때는 본성이 되고 극으로 치달아오르면 탐욕이 되며 절제에서 행복의 풍경선이 그어지고 인생의 향기에 자족할수 있을것이다. 챙기고 나눔의 화해가 사회풍조로 될 때 유토피아가 따로 없을게다. 대하도 시내물도, 격류도 잔잔한 흐름도 다 받아들이는 바다의 아량은 인간의 욕망의 바다와는 왕창 다른 별개의 문제이다. 물욕은 자칫 바다거품처럼 자신을 허무하게 만들수 있다.    허위의 면사포를 벗겨버리고 진면모를 직시할 때 비로소 욕망의 바다의 내밀한 계시에 귀기울이며 흑심에 사느니 깨끗한 삶을 지향하려는것은 지어먹은것이 아니다.  일처사가 곧 그 사람이라 한다. 처사에는 두가지 경계가 있다. 첫째는 공익의 경계이다. 일을 하는것은 령혼의 수련과 자기완성의 수단이요 정신상에서 얻는것이 더 중요하다지만 리익이 유일한 목적이라 자사(自私)가 앞서게 되니 막무가내한것이다.    백년도 살기 어렵건만 천년욕망의 궁전을 세우려드니 부질없지 않은가? 욕망이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들에게 대동소이하게 공유되고있으며 본성과 본능으로 되여져 바다에 비유되고 있지만 바다는 다르다. 넘칠줄 모르게 받아들이기만 하는 바다가 늘 반갑게 안겨오는 까닭은 지대한 용량때문만이 아니라 받은만큼 되돌려주는 너그러운 아량때문인것이다. 하얗게 밀려오고 푸르게 물러가는 바다물이 먼저 버려야 얻을수 있다는 철학을 시사하기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바다를 마주하면 넘쳐나는 감동의 쪽 배에 하잘것업는 사색의 조개나마 욕심껏 가득싣고 저멀리 띄우게 된다.                                  2009년 1월 26 일   황해가에서             (흑룡강신문 2015년 1월 9일)
472    잡초와 민초 댓글:  조회:5804  추천:0  2015-04-10
                                      잡초와 민초                                          최 균 선      잡풀이란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대수롭지 않은 여러가지 풀이라고 풀이한다. 만물의 척도로 자처하는 인간들이 제멋대로 대수롭지 않게 불러버린것이다. 누가 어느것은 잡초이고 어느것은 정종의 풀이라고 단정할수 있을것인가? 우쭐하는 풀은 조물주의 예술품일가? 난쟁이풀들은 장난삼아 만든 졸작일가?    모든것이 대칭되지는 않아도 조화로운 대자연이다. 산풀이든 들풀이든 홀로 자라지 않고 군체를 이루어 오손도손 대가족으로 산다. 그렇게 함께 하면서도 의지가지 없기도 한 풀은 지구와 더불어 영원히 그렇게 살아갈것이다.    밤하늘은 별빛을 빌어 이제 곧 조락을 재촉하는 가을밤의 사연을 읊조리며 싸늘 한 밤 찬공기에 더 올똘해지는 풀꽃, 꽃이라 피여서 자족하는 조촐한 모습, 봄이면 봄마다 뒤질세라 새싹이 트고 작은 꽃송이가 피고 태양의 한계절 자기답게 살다가 조용히 지는 작은 소망과 무성하던 계절의 그리움들 안고 오늘도 오롯이 생명을 호소하는 무명초를 보며 풀의 리페를 생각하게 된다.    제나름대로 덕목을 지니고있는 풀은 서로를 닮아가려 하지 않고 원래 생긴 제모습을 자랑하며 만록총중에서 가장 겸손하다. 풀은 가장 낮게 살아왔으므로 동량과는 인연이 없다. 어디서나 푸르게 웃는모습, 하나의 줄기로도 생명을 지탱해가며 대롱대롱 진주이슬을 이고 선 그 모습이 예쁘다.    풀은 생장에는 극성이지만 무욕무탐이다. 들판이나 절벽이나 강둑이나 계곡이나 혹은 꽃밭이나 나무아래나 소신껏 서식한다. 사람들이 알아주건말건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마감한다. 머리를 들면 태양을 우러르고 머리숙이면 갈한목 추겨주는 단비, 궂은비의 속삭임소리를 듣는다. 시름걱정없이 흘러가는 꽃구름을 쳐다보고 부는 바람 따라 나울거린다. 갖가지 벌레들을 불러들이며 날새들과 더불어 화목하다.     풀은 유약하지만 굴강하다. 광풍이 불어치면 휘둘리다가 바람잦으면 본연을 찾아 의연하다. 폭우가 내리면 허리굽히고 림리하게 맞다가도 비그치면 꿋꿋이 일어서는 풀이다. 키낮은 풀이라도 뜻은 높고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굴강한 정신을 키운다. 외세에 의해 보금터가 옮겨지더라도 곧 정착지로 되여 번식한다.    풀은 말이 없지만 무언으로 고할줄 안다. 묵은 덤불을 헤치고 고개를 내밀어 봄의 도래를 알리고 록음방초 승화시로 무성함을 시사하며 새벽찬서리에 시들어 조락의 가을을 알리고 바싹 마른자태로 긴긴 겨울의 혹독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풀이 악착하다지만 풀은 악행을 모른다. 가꾸어주지않든, 학대하든 풀의 본연은 착하다.    잡풀의 끈질긴 생명력은 생명력의 상징이다. 뿌리째 뽑아버려도 햇볕에 마르고도 악착스레 흙의 몸 어느 한구석에 비집고 들어가 새 삶터를 잡는다. 수백수천의 발길이 즈려밟는 학교운동장 같은데서도 매버리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온갖 풀들이 금새 싹을 틔우고 보란듯 고개짓한다. 풀씨는 아마 바람과 함께 살면서 틈만 생기면 새여 드는가 보다. 자기중심적이고 리기적인 인간들의 발밑에서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리라. 들풀은 약자인듯 강자이이기도 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지만 풀은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아무데나  자리잡으면 기어이 머리를 내밀고 생명찬가를 엮는다. 심지어 돌틈에서조차 생생하게 살아서 숨쉰다. 뿌리없이 떠도는 부평초도 풀이려니와 먼지처럼 떠돌다 정착하기도 하고 천고의 밀림속 썩어가는 진대나무 몸둥이위에서도 제법 새 생명으로 터를잡고 살아서 꿋꿋하던 나무의 혼을 기리는것같은 장할손! 풀이로다.    풀은 벼랑끝에 매달려 살아가기도 하지만 아찔함을 모른다. 뿌리채 뽑히여도 다시 뿌리박고 재생을 도모할수도 있다. 풀은 재생은 고집하면서도 이변(异变)은 바 라지 않는다. 숙명에 순종하며 본분을 지키는것이다. 제몸이 무너지고 꺾어지면 새 봄에 그 자리에서 새싹을 틔운다. 베여서 묶어놓으면 풀단이요 무져놓고 흙을 덮어놓으면 록비로 된다. 자기의 희생으로 황금의 물결을 에워오기도 하는것이다.    이 지구촌에서 그냥 무명초로 억천년을 그렇게 살다가 죽어가고 그렇게 다시다시 살아나서 생태평형을 유지하며 록색운동에 지칠줄 모른다. 벌도 나비도 못본체하고 흔하디 흔한 잠자리도 하찮게 보고 스쳐가는 바람과만 잠간 속삭이고 아무도 보아주 지 않는 그 쓸쓸함에도 고독을 모르는듯 고즈넉이 대지를 수놓아간다.    바람새 모질면 엎드릴줄도 알고 한바탕 휘몰아치다가 지나가면 곧장 일어서는 풀, 폭우가 내리면 고스란히 맞고 눈보라 채찍질해도 뿌리깊은 봄꿈을 키우며 납짝 엎드리는 풀. 홍수가 휩쓸어간 강기슭에도 제일 먼저 허리펴는 풀, 둥글게 휘여들고 둥글게 일어설줄 아는 그런 자세가 무명초들의 성격인가?    기실 대자연속에는 잡풀이란게 없다. 어느 풀이나 봄날이면 대자연을 록화하는 록색의 생명이다. 생명은 조물주의 품안에서는 평등한 생존권리를 가지고있다. 풀은 외계에서 오는 모든 강타들을 인내로 이겨간다. 그러나 그런 생사박투에서 풀은 비명 한번 지른적이 없다. 씨앗을 품는 풀, 작은 꽃을 피워올리는 풀, 열매없이 뿌리만으 로도 번성하는 풀, 가냘픈 그 몸 어디에서 그런 생명욕 이 넘치는 걸가?   《구약성서.시편》에서《풀은 아침에 꽃이 피여 자라다가 저녁에는 베인바되여 마르나니라.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榮華)가 들의 꽃과 같으니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 지나니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 로다》라고 읊었는데 《풀꽃》은 이 티끌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   《론어, 안연(论语。颜渊)》에“(초상지풍, 필언(草上之风,必偃)”에서 공자는 웃사람의 덕행은 바람같고 재하자(在下者)의 덕행은 마치 풀과같다고 하였다. 풀은 바람을 따라 눕는다는 뜻으로서 지도자의 덕치와 교화가 백성들에게 영향을 주고 감화시킬수 있 음을 은유적으로 설파한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민초”라고 자칭하였는지 모르나 확실히 민초들은 잡풀 과같은 생을 살아왔고 살아간다.    백성을 풀이라고 할 때 권력은 바람이라 할수 있다. 그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날가? 아니면 바람따라 눕고 바람따라 일어날가? 풀은 아마 허리를 후려 치는 낫날보다 먼저 일어날수도 있다. 그런 풀들을 너무 닮아가면 이중성격의 인간이 되고 파스칼이 질타한 생각하는 갈대가 되는걸가?    그러나 가녀린 풀들도 잘 꼬아놓으면 나무단을 묶는다. 민초들의 힘도 그와 다를바가 없다. 한점의 불꽃도 료원의 불길로 타오르는데는 잡초ㅡ들풀의 연소성에 힘입는것이 아니랴, 이 지구위에 모든 생명은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것. 잘나고 못나고를 누가가늠한단말인가. 묻거니와 존재를 인정하며 사는 공존의식이 문명을 자랑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풀처럼 짙게 물들어있는가?    이 지구촌에 원래부터 잡초란게 없듯이 누구나 나서부터 민초인지 아닌지를 예견하지 못한다. 민초로 살면 민초이고 립신양명했다면 민초가 아닐수도 있다는 말이다. 살아도 죽어도 자기식대로 사는 잡풀들의 삶의 색깔, 이 점에서 우리 인간은 그것들 보다 못하지 않을가싶다. 생존의 자유, 순수의 생명,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돌참, 노박이로 살아온 끈기, 이런 모습이 배달민족의 애환이 담긴 삶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화단에 화사한 꽃들보다 더 애착이 가고 찬미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2008년 7 월 20 일             (연변문학 2015년 3기)
471    지식인의 이미지 댓글:  조회:5484  추천:0  2015-04-07
                                  지식인의 이미지                            인테리겐챠란 멋스러운 말이 한때 류행되였는데 로어에서 따온 지식인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지식인》이란 말도 기실 외래어에 어원을 두고있다.    로마제국이 현대문전에 오기까지는 도덕의 도사와 인류사회에 대한 비판자의 배역을 교사(教士)들이 감당했다. 18세기에 이르러 그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일부 문인들이 미봉했는데 례하면 루쏘나 볼떼르같은 사람들이였다. 이런 사람들의 출현과 더불어《지식인(infellectuai》이란 단어가 창출되였다.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범사(凡事)에 자기 량심과 리성을 견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방의 사인(士人) 이였으며 사회의 량심, 도의의 체현자들이였다.    미국의 한 학자는 자기의 저서《지식인》에서 세인들이 익숙히 알고있는 루쏘,맑스, 입센, 싸르트 등을 지식인으로 꼽았다. 라쎌과 싸르트르는 철학자였고 입센과 똘쓰또이는 작가였다. 그들이 지식인으로 지칭된것은 지식이 과인하여서라기보다 지식을 무기로 사회의 불공평과 인성의 추악성을 폭로하였기때문이다. 이런 의의상에서 문인 혹은 전업인원과 지식인은 절대적인 구별이 있는것이다. 졸라는 원래 문인이였 지만 프랑스사법제도와 유태인을 배척하는 사조를 공격한 이후 지식인의 행렬에 들어섰다. 현대의 표준에서 중국에서는 로신선생을 으뜸으로 추대해야 할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문인과 사인(士人)을 같게 보지 않았다. 문인은 전업인원을 말하였고 사인(사대부)은 도의 짊어진자를 가리켰다. 문인은 꼭 무덕한자는 아니였지만 흔히 자기 한몸의 선(善)만을 꾀하였다. 그러나 사인은 자기의 량심과 리성으로 천하를 구제하려했다.  24사의《렬전》에서는 문원(文苑)과 유림(儒林)을 갈라놓았다. 유림은《문원》에 들고 벼슬을 하지 않은 사인은《유림》에 들었다.《청사렬전》에 원목(袁牧)은《문원》에 들고《천하의 흥망에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절창을 내놓은 고염무(顾炎武)는《유림》에 들었다.    전업인사의 표준은 오직 지식(혹은 기능)이고 지식인을 판정하는 표준은 지식, 사회량심, 그것을 표달하는 용기 이 세가지이다. 여기서 지식인의 본질적특징이 규정 되는바 곧 무슨 일을 해내는것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시비를 의거로 무릇 옳은것은 끝까지 해내고 그른 일은 절대하지 않는바 어떠한 정황에서든지 시종일관하게 이 원 칙을 지킨다. 여기에는 중국의 인구리론전문가 마인초선생이 귀감이 돨수 있다.    현재 대학졸업생, 석사, 박사,교수, 원사들을 지식인이라 하는데 일반적의의상에 서의 아호(雅号)일뿐 과학적의미에서의 지식인과 구별이 있다. 왜그런가? 엄격한 의미에서《지(知)》와 식(识)은 유기적으로 결합된 합성어로서 변증법적관계를 가지고있다.《지》는 정보와 문화의 루적이고《식》은 곧 신념, 사유, 인격, 의지 등 요소를 내포하고있다.《지》는《식》의 전제이고《식》은《지》의 승화이다.《지》는 많은 배움을 말하고《식》은 높은 재능을 가리킨다.《지》의 래원이 만권책을 독파하는데 있다면《식》도 만리길을 걷는데 래원이 있다.    그런데 자고로 중국의 지식인들은《지》를 중시하고《식》을 홀시하였기에《지》 는 있으되《식》은 결여되였다. 그리하여 범진이나 공을기 같은 고리삭은 선비들은 숱해 나왔는데 그들로 말하면《지인》일뿐《식인》은 아니였다. 그럼에도 봉건시대에 는 문인들속에 수재를 인재라고 했다. 기실 글을 많이 읽었다 해서 다 인재가 된것은 아니였다.    인재의 함의는 뭐냐? 인재는《인과 재》의 원만한 결합을 의미한다.《인》은 곧 도덕과 정신을 말하고《재》는《인》의 연장이다. 만약 인재를 한그루의 나무에 비한 다면《인》은 뿌리이고《재》는 가지라 할수 있다.《인》과《재》는 물과 소금처럼 융화도여있는바 우선 사람으로 되는 가운데서《재》가 형성되고 인재로 되는 과정에서 사람으로 된다. 명실상부한 지식인들은 그 민족의 중추신경이고 그 시대, 그 사회 의 중견들로서 국경을 초월한 전 인류적인 사회재부이다.    그러나 고금동서의 력사는 지식인을 너무나 혹독하게 우롱하였다. 어느 사학가가 구중국의 력사는 제왕과 수재의 력사라고 개괄하였는데 어디까지나 벼슬한자는 인재이고 그렇지 못한자는 인재가 아니라는 관본위(官本位)의 사상관념에서 출발한 불가지론이다. 따지고보면 구중국의 지식인들은 정권이라는 소가죽우의 털의 신세였다. 미관말직(微官末职)한자리 못가져보고 원혼이 된 천하기재는 또 얼마였던가? 성인 공자, 시선 리백,시성 두보도 다 일생이 여의치 못했고 도연명이나 소동파 같은 대문인도 은거생애를 마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반만년 문화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사회정수들은 우선 경제압력을 모면하려고 전전긍긍해왔지만 분서갱유(焚书坑儒)로부터 발단하여 건륭의 문자옥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정치올가미에 걸려들었다. 현대에 와서도 언론자유가 없거니와《빵》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자유와《빵》,량자중에서 어느것이 더 소중한가를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빵》에 먼저 매달리지 않을수 없었다. 또 《빵》은 제능력으로 바꿔와야지 빌어가져서는 안된다는것을 알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선택된 자들은 제왕의 은총을 입어 진충보국(尽忠报国)하는 영광을 지녔으되 언제 목이 날아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명철보신하였다. 물론 해서같은 강직하고 대바른 명관들이 있었으나 그 운명은 비참하였다. 이렇게 루루천년을 내려온 인격력량 의 선천성부족과 후천적심리실조는 자질이 낮은 약자대오를 형성하였고 그 치명적인 약점을 현대문인들에게 유전시켰다.    옛날 선비들은 딱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청운의 뜻을 이루려고 주림을 달래가며 들보에 상투를 달아매거나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학문을 닦아《지식인》성공 은 뜬구름이였고 행운은 달에 걸려있었다. 수염이 허옇게 세도록 고심참담하게 경영하였던 학업이 풀이슬로 사라지기가 비일비재였으니 그 소침하고 울적한 정서에 뒤따 른것은 염세뿐이였다.    따라서 할일이 없다는것은 실락한 력대문인들의 가장 좋은 핑게가 되였고 억눌린 인격가치와 자존에 대한 자기위안이 되였다. 비틀어진 그들의 사회지위는 력사가 빚어놓은것이였건만 그래도 사회중임은 문인들이 짊어져야 했으니 숙명인가, 이률배바인가? 문인들에게 있어서 골기와 지조는 담량과 식(识)의 문제였다. 문인이 지조와 기개를 잃는것은 그들 자신의 비애이고 지조높고 덕망있는 지식인을 진정으로 용납하지 않은것은 그 시대의 비극이였다. 이렇듯 지식인들에게 가장 수요된것은 자유도(自由度)였다. 그 자유도는 공간속에 육체의 행동자유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심리세계의 자유 특히는 사상의 자유도인것이다.    옛날은 암흑한 봉건사회여서 그렇다치고 문명의 시대에는 왜 그런 비극이 지속되 였던가? 우리 중국의 경우 건국이래 련이어 일어난 정치운동은 매번 지식인들을 《운동원》으로 내세웠고 지식과 과학은 정치와 권력행사의 희생품이 되였다. 호풍에 대한 탄압, 마인초의 투옥, 그리고 수천수만의《우파》들이 그 례이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1950년대중기까지는 지식인을 존중하면서도 일면 경계하였고 1957년 이후에는 개조대상으로 전락시켰으며 1960년 후반기부터 10여년은 철저한 독재대상으로 되여《고린내나는 아홉째》로 불리웠다. 유물주의가 가장 제창되던 시 대에 유심주의가 가장 심하게 범람했던 아이러니컬한 인문환경에서《지식이 많을수록 반동》이라는 황당무계한 론조가 지식인을 다스리는《상방보검》이 되였으니 자률인가 타률인가? 아무튼 지식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렴가인 정신로 동자로 전락되였다.    지식인은 무상로동과 정신산품의 로동자ㅡ필수적인 생산력이라는것을 몰라서가 아니였다. 한 개인의 로동가치가 그 개인의 존재, 사회지위, 사회신분의 반영임을 알면서도 압살해버린것이다. 하여 문화대혁명시기 지식의 가치는 령이 되였고 그후 10 년은 마이나너스였으며 새 시기에 진입해서야 비로소 정수로 되였다.그러나 력사시대 가 남긴 후유증은 현시대 지식인들에게도 고질로 되였다. 이런 병태는 상품경제시대의 도래와 함께 여지없이 표현화되였다.    개혁의 춘풍은 이들에게 새명충동과 활력대신 심리혼란과 자기쇠락의 경향을 초래시켰다. 그도그럴것이, 오래동안 조롱속에 갇혔던 새가 자유의문을 열어주어도 창공에 날아오른지 못하듯이 당시 중로년지식인들은 치부하라고 푸른등을 켜주었다해도 거개 일거리조차 찾지 못했다. 주어진 운명에 도전하려는 진취심, 순발력도 선천적으로 약했거나와《군자는 리익을 말하지 않고 군자는 자고로 청렴했거니…》라는 낡아빠진 신조를 뇌까리며 자신의 무위무능을 숨기였고 개탄속에 자신마저 기만했을뿐이다. 이런 경화된 가치관념은 수천년의 봉건사회가 벗어놓은 청고함이기도 하지만 기실 관념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제2의 인생을 개척할 용기와 잠재력이 부족하 다는것을 시인해야 했다.    상품경제시대의 충격은 거대하였다. 그러나 자타에 충격을 안겨준것은 상품경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거족적발전행정에 필연적일지도 모를 질서혼란이였다. 예기치 못한 혼란이 낳은 사회분배의 불공평,사회부조리라는것을 단순한 전통적관념으로 똑 똑히 해석할수 없었다.지식인은 또 한번 시대의 도전에 직면했다. 개혁초기 모종 의미에서《독서무용론》이 기괴하게 맞아떨어졌던것이다. 전국범위내에서 벼락부자들의 문화차원은 거꾸로되여 지식을 조롱한 셈이다. 소학문화정도의 사람이 보스(老板)질 하고 고중졸업생이 품팔이대오에 끼여들고 대학졸업생은 사처로 뛰여다니며 구직등록 표를 써야 했다는 시대의 회색유모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마침내 시대는 제 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식인을 우롱했던 력사는 영원히 물러가고 과학의 새봄이 오자 지식인들앞에 찬란한 앞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격변하는 시대는 낡은 절대적무력함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구시지식인의 절대적청고함은 절대적무력함을 폭로했을뿐만아니라 군체적인 시대락오자도 낳았다. 이제 지식인들에게는 가치관념의 대전환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키우는 길만 남았다.    자유경재의 시대,적자생존의 섭리가 도처에서 시시각각 경고하고있으니 어쩐단말인가? 비록 세기적숙망이였던 자유도가 넓어지기는 하였지만 결코 그들자신의 실천과 등호로 된것은 아니였다. 사람에게서 진정한 자유는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만 있는것이 아니라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데도 있다. 하지만 누가 그런것까지 세세히 보살펴준단말인가?    비약하는 시대는 지식인의 활무대이다. 날로 팽창하는 지식상품화의 조류에 힘입어 지혜가 응당 있어야 할 에네르기를 생성시켰다. 지식이 없으면 촌보난행의 시대가 도래한것이다. 리성도 일종의 선택이다. 새 시대의 지식인들은 리성을 선택할수밖에 없다.  화페의 돌개바람은 지식인들의 응집력을 천애지각에 날려보냈다. 하해(下海)의 물결이 일고 출국풍이 일자 지식은 사회의 재부로 축적되고 중국지식인은 세계공민, 전 인류의 재부로 환원되였다. 예로부터 문인의 시비는 특별히 분명하다고 했다. 하다면 21세기 중국지식인ㅡ인테리겐챠의 새 이미지는 어떠해야 할가? 감히 단언할수 있는것은 영광의 시대는 필연코 지식인들의것이라는 이 한가지이다.                                             1997.6.14
470    《하얀》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5324  추천:0  2015-04-07
                         《하얀》에 대한 생각        우리는 스스로《백의동포》,《백의겨레》란 말에 각별한 애착을 갖고있다, 그래서 그런지 근간에 여러가지 글들에서《하얀》이란 단어에 민족의 기질, 품성, 문화심리 및 전통의 계승발양을 기탁하려는듯 력점을 찍고있는데 민족지성이 갸륵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나비효과》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 우리 민족의 순결한 마음, 결백한 품성을 두고《하얀 마음》이란 단어를 쓰더니 뒤이어《하야넋》,《하얀 얼》,《하얀 얼굴》,《하얀 꿈》,《하야 리상》, 《하얀 기백》,《하얀 숨결》,《하얀 웃음》지어는《하얀 세계》라는 기발한 착상까지 내달아오는데는 당혹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민족은 이전에 흰옷을 즐겨왔다. 그러나 민족생활문화의 일부분인 복장의 하얀 색채에 민족군체의 옹근것을 담으려는 그 취지에는 종시 동감이 가지 않는다.    이를테면《하얀 얼굴》,《하얀 웃음》과 같은 말은 문맥으로 봐야 밝은 얼굴, 해맑은 웃음이겠다고 강다짐으로 해석을 붙여보면서도 이런 식의 표현이 범람하면 누구나 새단어《창조》에서 솜씨를 펴 우리 말, 우리 글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심이 곁묻어나온다. 말하자면 백의민족이니 력사도 하얀 력사, 문화도 하얀 문화, 글도 하얀 글, 문학도 하얀 문학으로 될수 있을것이고 또 그 식대로 풀이하면 우리의 노래도 하얀 노래, 춤도 하얀 춤이 될것이고 나아가서 민족진흥도 하얀 진흥, 민족자 치도 하얀 자치로 될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일체에 몰밀어《하얀》의 후광을 씌워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푸른 꿈》,《푸른 리상》은 희망찬 꿈, 청춘의 리상으로 그 상징적의미가 얼른 안겨오는데《하얀 꿈》,《하얀 리상》의 내포는 대체 어떤것인지, 그 어떤 고유한 민족성을 담고있는지?   설사 우리의 선조들이 타민족과 달리 생활문화심리바탕에서 흰옷을 즐겨입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하얀색이 민족 그 자체가 아닌듯이 어필칭《하얀》을 내세운다 하여 곧 민족의 자주,자립, 자강, 자존이 높이 세워지는것도 아닌 전자시대. 위성시대에 와서도《하얀》것을 과대숭상할것은 없지 않는가,   주지하다싶이 언어와 문화가 평행선우에서 발전해왔듯이 색채어의 파생과 발전도 정치, 경제, 과학기술. 사회문화의 진보와 불가분리적련관을 가지고있다. 그런즉 색채 어에는 봉건사회의 정치, 경제, 등급관념, 문화심리 등이 투영되여 있는것이다.    고대중국에서는 음양5행설에 의해 색갈을 정색(正色),간색(间色)으로 나누고 적(赤),황(黄),청(青),백(白),흑(黑) 5색을 정색이라 칭하였다. 유심주의관념으로 획분된 이런 색채설에는 존귀, 비천,정통, 비정통 등의 상징적의미가 부여되였고 그에 따라 복장제도에서도 색책의 상징적인 면이 체현되였다.    이를테면 황색은 제왕 지색으로 정했다. 이로 보아 색채는 봉건사회에서 상하유서(上下有序),존비유도( 尊卑有度)따위의 등급제도의 표시로,권력과 지위의 상징으로 되였으며 따라서 복장제도는 봉건사회질서수호의 주요한 수단으로, 통치 자들이 백성들에 대한 도덕교화의 궤변으로 되였다. 즉 봉건통치자들은 평민백성 들이 색붙이의 옷을 입지 못하게 규정했는바 이러부터 백정(白丁),백신(白身),백의인(白衣人) 혹은 포인(布人),이라 부른 유래를 알수 있다. 한어에서나 우리 말에서《백정, 백신, 백옥(白屋)의 백은 백의와 련관되여있다. 한마디로 백이란 봉건 사회에서 최하층천민의 통칭인것이다. 력사기재에 의하면 원,명나라 이후 비단업이 발전해서야 백성들도 색채있는 옷을 입을수 있게 되였는데 그나마도 너무 산뜻한 색갈은 금지되였다. 더우기 부녀들은 례복에 금수를 놓지 못하게 했고 천의 질에서도 엄격한 동제를 받아야 했다.    문명고국이며 대국인 중국이 이러했거늘 우리 선조의 나라야 더 이를데 있었겠는가, 여기서 볼수 있는바 우리 선조들이 현란한 색갈의 옷을 입을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한 민족심리기질에서《하얀옷》을 즐겨입은것이 아님을 추단할수 있다. 되돌아와 언어학각도에서 다시 일별해보기로 하자.《하얀》이 상징적의미로 쓰 일 경우에도 의미문법적, 론리적으로 통해야 소기한바의 뜻을 바르게 전달될것이 다.    붉은 사상, 붉은 마음이라는 말이 있다해서 하얀 사상, 하얀 마음이라 할수 없을것은 자명하다. 한것은 파생된 색채어들의 현대적의미의 고찰에서 더욱 엄숙한 문제가 제기되기때무이다. 다 알다싶이《하얀》을 붙여 백색정권, 백군, 백색공포, 백파 등 단어로 반동, 반혁명, 투항파를 상징하는 의미적색채어를 지어낸것은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민족만이 넋,얼, 정신, 리상도《하얀》색으로 흰칠갑을 해야 하는가? 참으로 억지공사요, 극단적언어유희라 아니할수 없다.    조기천의 시들에서의《흰옷의 서러운 그림자…》,《하얗게 파도가 밀려온다》 등은 상기한 어색한 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표현이다.    처음으로 아름다운 녀인을 꽃에 비유한 사람은 천제요, 두번째로 그를 모방한자는 용재요, 세번째로 답습한자는 둔재라는 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아무리 민족 적편애를 가지고 보아도 하얀색은 깨긋함과 상쾌함《얼룩이 없을 경우》외에 또 창백하고 무기력하고 허무한감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다. 민족의 영광, 고귀, 휘황을 상징하는 금빛으로 현연하지는 못할망정《하얀》만 붙안고 모야 윷이야 할게 뭐있는가? 눈을 들어 풍물을살펴보아라. 대천세계는 얼마나 오색찬란한가!    바라건대는 우리는《하얀》에 대한《자아신성》의 지나친 추구를 버리고 단결, 진보, 향상을 추구할수 있는 그런 진정한 색채의 뿌리를 찾는데 더 실속있게 도모 했으면 한다.                        1991년 4월 10일
469    취몽유천당기 댓글:  조회:5339  추천:0  2015-04-07
                           취몽유천당기      꿈을 꾸었다. 꿈은 밤의 환각이라던데 내 꿈은 뚱딴지같이 대낮에 둥글었으니 백 일몽인가, 남가일몽인가? 긴 하품끝에 시한구절 어줍잖게 묻어나온다.                     사무한신(事无闲身)태평선비님아                     팔베개 새우잠에도 꿈은 달던가                     창밖에 해그림자 길기도 한데                     내 낮꿈은 오히려 짧기만 하느니                     어즈버, 무딘 붓끝이나마                     취몽유천당기(醉梦游天堂记)나 적어보랴       꿈한마당 해괴해서《허허…》혼자 웃어본다. 글쎄 내사 꿈에 훨훨 날아서 어떤 기이한 곳에 이른것이 아니겠는가!《어랍쇼, 여기가 천당이 아닌고?》하고 은근히 좋아하는데 한 선풍도골(仙风道骨)의 로옹이 오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미궁같은 땅굴속을 내려가다가 이른곳은 커다란 연회청이였다. 장방형의 긴 식탁우에 산해진미가 즐비하게 차려져있었고 목덜미가 기름지고 앞배가 두둑한 사람들이 둘러앉 아있었는데 멋진 장정노복들이 앞에 놓인 접시에 연신 각가지 음식을 담아주건만 웬일인지 모두들 마른 콩을 먹은 소처럼 눈이 데꾼해서 지켜만 보고있었다.    내가 자리에 안내되자 잡담제하고 포그를 접어드는데 노복 두놈이 달려들어 내 두팔에 엷은 판대기를 처매였다. 곧은 팔이 되여 아무리해도 먹을수 없게 되자 부아통이 터지는 중에 가만히 살펴보니 모두 내 처지와 같았고 불만이 자자했다. 워낙 성미가 급한 나인지라 로옹을 찾았디.    《여긴 어딥니까? 예? 련옥이라구요? 그럼 천당은 어떤지 가보게 하시오.》하고 강경하게 나오니 로옹은 두말없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미궁을 나와서 산우에 있는 큰 아치형문의 건물로 들어갔다. 랑하의 굽이를 돌아 이른곳도 연회홀이였다. 기다란 식탁우에 진수성찬이 그들먹하게 차려져있었는데 학자풍도의 로옹들이 근엄하게 둘러앉아있었다.    로옹이 자신을 소개하고 여러 학자들도 인사시켰다. 그는 다름아닌 유토피아주의자였던 토마스 모어선생이였다. 그다음 차례로 쌩 씨몽, 푸리에, 오엔 등 공상적사회 주의자들이였다.    그들이 누구든《옳거니, 여기서는 만포식할수 있겠구나.》하며 안자바람으로 포크를 드는데 또 노복들이 두팔에 판대기를 쳐매였다. 앙앙불락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놀라운 정경이 벌어지고있었다. 모두 나처럼 불편한 팔이였지만 음식을 집어서는 대방을 먹여주느라 열성이였다. 그냥 제배를 채울 궁리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늦게나마 크게 꺠우친 내가 음식을 대방의 입에넣어주엇더니 그도 나에게 먹여주었다. 코마루가 시큰해질 정도로 감동되였다. 만찬이 끝나자 모어선생이 자기 서재로 나를 안내하였다. 우리는 허물없이 대담을 시작했다. 성미급한 내가 먼저 말문을열었다.     나:《두 연회청 사람들이 처지는 똑같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심리품성들이 발로되였는지 의문입니다.》     모어:《아, 그것말입니까? 그건 질적으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니까요. 처음 연회청에는 대탐욕자, 극단적리기주의자들이 모였지요. 인간은 자기중심에서 사고할 줄밖에 모른다면 그렇게 련옥에서 고행하게 되지요.》     나:《원래는 그런 판이였구만요. 그러니까 듣던바처럼 이 천국에 입적하려면 평생 적덕하면서 백성들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말이겠습니다그려.》     모오:《그렇지요. 그리구 기실 천당이란 별게 아닙니다. 목이 몹시 말랐을 때 샘터가 곧 그의 천당이고 아시지경에 이르렀을 때 따뜻한 국밥 한그릇이 곧 천당이며 노그라지도록 지쳤을 때따스한 잠자리가 곧 천당이고…그러니 자기 수요가 만족의 경지에 이르면 이른바 천당이 아니겠습니까?》     나:《현시대 지구촌 주민들은 고도의 물질문명을 창조한만큼 응당히 모든 사회공존자들과 함께해야 하는데 이 중요한 과정을 무시하고 자아와 자족에만 집착하고있습니다. 》     모어:《우리가 살았던 19세기 주민들도 매한가지였지요. 일찍 오엔이 미국땅에서 조직하려했던 실패한 근원도 바로 개체적인간의 그 렬근성에 있었습니다. 보편적사랑과 박애가 메말라가는 현시점에서 지구촌 락토건설에서의 급선무는 어떻게 탐심을 절제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     나:《고도의 물질문명과 인간의 도덕적인격력량이 너무나 탈리되였다는 그 말씀입니까?》    모어:《그렇지요. 인간심령의 이률배반이라 할는지…어쨌든 탐욕서은 자고로 인간을 망친 확실한 독약이였습니다. 탐욕자들속에 자신이 사회정체의 한 부분임을 모르는 바보가 있을가요? 아니지요. 탐욕에는 거인이지만 홍익인간에는 난쟁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맞는 말입니다. 세계적거인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전임대통령이였던 수하르토를 꼽아야겠지요. 사취한 재산이 200억딸라도 넘었다니 얼마나 한심합니까? 한 성장의 천년 로임에 해당한 거금을 챙겼다가 지옥에 간 성극걸같은 탐관이 우리 거기에 있었습니다. 부패는 전 인류의 암증이라 할수 있겠지요.》    모어:《암, 인간의 탐욕성이란 그렇게 무한정입니다. 그러기에 자산계급사회에서만 개인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을 기초로 한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중에서 만족한 그 순간에만 집념한다면 그 하루의 천당이 종당엔 지옥이 될것은 불가피적입니다. 자기만의 천당을 얻으려는 그 용속한 근성때문에 영원히 지옥의 구석에 쭈크리고 앉아야만 한단말입니다.》     나:《이제 인간에게서 더는 진실한 기도와 박애를 기원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인간의 무절제한 탐욕에 속수무책인것같습니다.》     모어:《이제 하느님이 인류의 징벌을 시도한다면 더는 가 없을것입니다. 그만큼 인류는 사악해져서 스스로 지옥을 파고있다는 말입니다.》     나:《남보다 특별히 크고 편리한 사욕의 주머니를 앞뒤에 차고도더 채우지 못해 혈안이 된자들이 불평등을 가속화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인간악의 련쇄에서 최초의 고 리가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모어:《그렇다고 할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 성원을 가진자와 못가진자로 나누어 볼수 있는데 극도의 빈궁은 도적놈, 강도, 무뢰한, 교활한자, 몹쓸놈을 배출하고 반대로 부정축재는 교만한자, 기만자, 허풍쟁이 등을 속출합니다. 물론 인류사회의 모든 성원들이 황금앞에서 약자이기를 원하고 않고 있지만 그건 민중의 저주를 받는 들의 탐욕과는 구별됩니다.》    나:《사람들이 거리에 나온 쥐를 때려잡으라고 소리치지만 그건 본능적인 웨침이지요. 쥐들은 제멋대로입니다. 쥐들도 무척 개화되고 총명해졌지요.》    모어:《저마다 저그만치 차례받는것을 사회적행복의 필수조건이라고 인식시키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걱을 든 년이 한술 더 뜨고 정주간을 파고도는 쥐가 더 기름기가 돈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현실세계입니다. 안그런가요?》     나:《그렇지요. 그래서 건전한 사회란 우선 평화와 번영이 약속되여야 하지만 보다는 인간들의 선의적인 협동정신, 봉사정신이 보편화된 사회라야 부익부, 빈익빈의 차별이 점차 풀릴테지요.》     모어:《그럼요. 서로 주고받는 마음으롱 엉키고 감사의 정이 넘치는 삶의 현장이 당장에는 이루어질수 없더라도남이 가져야 할 몫까지 가로채는 무리들은 정말 가증스럽습니다. 인간은 그렇듯 탐욕앞에서 머리가 총명하지만 그만큼 연골증환자이지요. 는 속담처 럼 탐욕을 앞세우면 누가 누구를 줄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모어:《천당은 지옥의 종국이고 지옥은 천당에 이르는 복도입니다. 그러나 지옥을 거쳐 천당에 이를 필요가 있을가요? 천당이냐, 지옥이냐 하는것은 각자의 량심에서 구분되고 제나름의 가치취향에 달렸습니다. 난 오래전부터 인간의 탐욕성의 절제에 대해 연구하고 방법을 모색했지만 미해결입니다.》    나:《하긴 그럴수밖에 없겠지요. 인간이 개체적존재인만큼 사심은 영구불멸의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모어:《그래요. 우리는 현실적존재는 누구의 리념이나 의지에 의해 개변될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사회부패현상을 성토하는 글을 쓰는것도 따지고 보면 무모한 짓이기도 하지요. 그건 명지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아니면 포도는 시여서 못먹는다고 한 여우로 오해받을수도 있고 자칫 재난을 자초할수도 있습니다.》     나:《제생각도 그렇습니다. 산범은 감히 흘겨보지도 못하면서 죽은 늑대의 배때기나 걷어찬다면 얼마나 싱거운 일입니까?》     모어:《시간더러 재판하라 하지요. 어쨌든 가짜는 진짜가 될수 없고 진짜는 가짜로 될수 없는 법입니다. 흙보살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지요.》    나:《예, 그래서 문인의 시비는 탁상공론에 그치고만다는 옛날 할아버지네 말씀이 맞지요.》    모어:《그건 문인의 영원한 비애이지요. 우리는 다 아름다운 념원에서 출발하다보니 늘 현실의 차디찬 벽에 코가 깨지고말지요. 최선생도 이젠 꿈을 깨시오.》    모어선생이 말을 마치고 어깨를 세차게 치는바람에 나는 정신이 펄쩍 들었다.    참으로 맹랑한 꿈이였다.《꿈속에서 천리를 달리다가 꿈을 깨고보니 침대머리에 있더라.》는 격언이 떠올라 웃음이 피식 나왔다. 프로이드씨는 꿈의 내용은 념원의 만족이라고 했으나 내 꿈은 중도에서 깨지고말았으니 실로 황량몽이라 하리라.     막연한 생각에 가슴 답답한데 큰길 건너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어느 신도들을 천당에로 부르고있었다…                              2002년 5월 24일
468    《초탈》의 외투를 벗으며 댓글:  조회:5119  추천:0  2015-04-07
                           《초탈》의 외투를 벗으며      근간에 흔히 초탈이니 마음을 싹 비우고 사느니 하는 멋스러운 말들이 류행되고 있는데 나는 아무리 마음을 크게 먹어도 어째서인지 가볍게 받아들일수 없고 초탈을 하기란 더구나 어렵다.    초탈이란 무엇인가? 세속적인것이나 일반적인 한계를 벗어남을 이르는것이라는 사전식해석은 아둔한 내 머리에도 인차 인상되지만 그 깊은 뜻은 그냥 납득되지 않으니 내 흉금이 너무 옹졸해서일가? 모든것에 자족하여 만복의 배를 슬슬 문지르는자들 에게는 묻지 않아도 귀등으로 흘려버릴 허황한 잡설일것이다. 그런 비실혜적인 사치스러운 상념이 자리잡을 빈구석이 마음속에 전혀 없을것인데 황차 아무 가진것없이 이 속세에서도 말단에 사는 나같은 미미한 인간이 과연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벗어날수 있으며 또 초탈해서 이르는 경지가 어디쯤이란 말인가?     사회행정에서 무슨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을 소기의 목적에로 바싹 접 근시키려고 시도할 때 선전구호가 요란스레 제기되고있음을 보게 되는데 우리는 땅짚 고 재주넘기를 하는 어리광대를 볼 때의 그런 슴슴한 심정으로 대하게 된다.     불교교리에 이른바 물계,색계, 무색계가 론의되고있다. 석가모니 여래불이나 이 3계를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칠정륙욕을 가진 이 지구촌 족속들가운데서 실제로 3계를 벗어난 사람이 과연 누구런가. 말은 무척 귀맛좋으나 나중엔 인간의 자아풍자 에 불과한것이다.     고서에 이르기를 빈 마음이란 공심(空心) 이고 무심(无心)인데 공심이라 하여 아무 진취심도 없이 되여가는대로 산다는것과는 또 다른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옳은 일에도 욕심이 없으며 성내징 아니하고 어리석지 않게 사는것이 진정 공심인데 마음을 굳게 정함은 안심하느니보다 못하고 안심은 무심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이 대천세계에 물질이 무한정한만큼 끝까지 자사적인 인간의 물욕도 무한대요, 인간의 본성의 하나가 곧 자아타협일진대 공자어른이 가르친대로 실로 망아(忘我),무사(无事), 무욕(无欲)이 가능할것이냐? 성인이였던 공자님도 속으로는 공리공다민줄 안쓰럽게 여겼을줄 안다. 그렇지 않으면 어이 렬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뜻을 이루지 못한것에 길이 탄식했겠는가?     곰곰히 따져보지 않아도 아무리 모지름을 써봤대야 해탈할수 없는 유혹많은 이 속세에서의 불만족스러운 자기 인생에 그만 역증이 나서 몸부림치며 자탄해본 소리가 소위《초탈》,《빈 마음》이렷다. 그것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물욕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스스로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범중엄씨의 천고절창을 후세사람들이 노래처럼 입에 올려왔지만 진적 세속에 혹하지 아니한이가 몇몇이며 그런 성인 현자가 누구누 구던가?     복창증이 올만큼 무엇을 가득 챙겨넣은 무리들도 흑사심이 무지경이여서 더 가지지 못해 앙탈하는 이 현실사회에서 기껏 맡은 사회배역이라야 범부속자밖에 안되는 포의한사 (布衣寒士)로서 벗어버릴것도 없는데 욕념속에서 초탈을 외우는것은《여기 은전 삼백냥이 없소》라는 말고 무엇이 다르랴.     지금 한창 득의한자는 자기의 행운과 떼복에 양양자득해 있고 실의한자는 자기의 불행과 박복함에 앙앙불락해 있을진대 기실 득의자나 다 우연의 손아귀안에서 그리된것이라고 셈평좋게 생각하면 환득환실의 인생에 대해 가슴치며 애를 끓이지 않을수 있건만 전자는 필연의 왕국에서 은총을 하사받았다고 어깨힘을 팍팍 살리며 거들먹거리고 후자는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기는 매일반이라 너나없이 초로인생인데는 객기를 부릴게 뭐냐?    얻은게 있어야 잃는것이 있을터인즉 욕심을 부려봐야 허무한 노릇이니 느끼는 인생비극에 열물을 토할것도 없이 초탈을 추구하지도 말고 그로써 자기를 억지로 위안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두팔굽으로 붐비는 인파속을 아득바득 헤집고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의 팔굽에 떠밀리우며 살아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 약자의 숙명을 저주하며 풀풀거릴 때 그 성냄을 우리는《분노》락 이름지어서 정감사전에 올렸지만 마음약해서 분노가 끓어번져도 감히 쏟아내지 못하고 삼키기만 한다. 대바르고 강직한 선각자는 한번 분노하면 또 다른 일로 분노를 터뜨리지만 종당에는 아주 처참해질뿐이다. 그러나 양가죽을 얻어 쓴 승냥이가 양을 잡아먹을 때 양에게는 비애가 있을뿐 분노란 가당치 않은 법이여서 양의 어쩔수 없는 숙명일수밖에, 그래서 인간에게는 체념이 필요한것이다.    진정 맑은 바람처럼 가진것 없이 왔다가 가진것 없이 가는 삶의 자세로 세상살이에 초연한 사람이 있다면 날로 탐욕으로 얼크러지는 인간사회를 위해서는 천만다행이겠으나 인간이 구상해낸 천사라면 가능할는지…    우리가 보는 세상은 얼마나 황당하고 우습게 번져가는 연극마당인가.가진자의 눈동이처럼 커가는 부의 횡행이나 이미 조금 가졌던것마저 지켜내지 못하는 못가진자의 상실은 다 동시적인 사회비리여서 똑같이 절실한 인간비극인데 오직 한쪽만 차디차게 외면당하지 않는가? 벼락축재자들이나 배꼽이 깊이 패인 탐관오리들은 술과 고기로 만포식한후 이발을 쑤시며 소매치기군의 비행에 노발대발하고 호화별장에 미인과 육욕의 향연을 누리면서 세기말의 도덕을 운운하니 말이다.     살진 큰 손이 백성의 피땀으로 채워진 국고를 허물어도 감히 도적질이라고 맞대놓고 질타하지 못하는 형편에 손은 싹싹 빌고 정신만은 올똘해서《초탈했소》,《마음 비웠소》한다면 초탈을 비상처럼 여기는 그네들이 흰소리 잠꼬대도 아닌 비틀린 소리 라고 얼마나 기분나빠 하겠는가.    소위 용속한자가 용속하다는것은 결코 욕망의 포로가 된데 있는것이 아니라 정신경계가 령점이하로 처져버린데 있으며 반대로 초탈한자가 초탈했다는것은 금욕해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보다 정신경계가 좀 높은데 있는것이 아닐가, 현대어로 이것이 정신문명의 골자이건만 다 쌀에 뉘만큼이나 희귀한 성자나 현자들이 담론할 일이다.     하긴 예로부터 철인들이 인간속세의 초탈방식에 대해 훈계한바 있다. 초탈의 첫째 방식으로 제목숨을 끊어버리는것인데 한번 저승행차에 모든 영욕이 깨끗이 끝난다는것이다. 이런 초탈은 구곡간장에 맺힌 한으로 바꾼 처절한 초탈이라 할것이다. 초탈의 두번째 방식으로는 어지러운 속세의 밑창을 꿰뚫어보고 환멸을 느낀나머지 심산속의 절에 들어가 삭발중이 되여 의식의 흐름을 두절하는것인데 결국은 귀막고 방울 훔치는격의 자기속임이다. 셋째방법으로 만권책을 독파하고 자유산천을 두루 편답하며 인생의 도리를 깨우치고 마침내 도덕가로 부상되는것인데 리기심에 찌들리고 자아중심권에서 으르렁거리는 현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선경이라 할것이다.    공자는《식, 색은 본성이라》고 했거늘 천층만층 구만층의 인간사회라 해도 식, 색의 본성은 개변할수 없는것이요, 초탈의 외투를 걸친다해서 본성을 감출수는 없을것이다. 더구나 정신적으로 모종 신념이 없고 인격상에서 자존, 량심이 없는 사람은 더구나 식사후의 한담으로나마도 초탈을 운운할수 없다.    로자는《있는것에 만족을 모르는 일보다 더 큰 화가 없고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는것보다 더 큰 허물이 없으니 언제나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리라》고 하였다.    《영원한 도는 억지로 행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가볍게 해내는것이다. 정치를 하는 왕공제후들이 이런 도를 지키면 만물과 백성이 스스로 감화하리라. 이 소박한 덕성은 온갖 욕망을 없애며 욕망이 없어지면 민중이 진정되고 천하는 스스로 평온 해질것이리라. 아, 누가 이 풍요로운 천하에 이바지할것인가? 일을 성취하고도 보수를 바라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으며 그 어진성품은 나타내려 하지 않는것이거늘…》       허영심의 비극인《목걸이》이에 모파쌍이《인생행로란 기괴하고 변덕스러운것이 거늘 사람의 흥망성쇠란 어쩌면 그렇게 사소한 일에서 갈라지는가?》고 개탄하였는데 이에서 더 류추한다면 인생의 희로애락은 만족과 불만족의 계선에서 갈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욕망은 굴뚝같은데 별수가 없다고 한탄하는 모습이 더 진솔한 우리다운 모습인줄로 안다. 그러니 마음을 애써 비우려 할 까닭도 없는것이요, 더구나 너무《초탈》하여 자기훼멸의 구렁텅이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겠다.     이것이 초탈하는 학문이라면 학문이라 할것이다.                        2000년 1월 10일
467    인성과 야성 댓글:  조회:5303  추천:0  2015-04-07
                                         인성과 야성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령장이라 자처해왔기에 다른 기타 사물을 자아중심의 시점에서 판정해버리는데 습관되였다. 례컨대 맹수들의 야성은 극히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저렬한 품성이라 평판해놓고 인성이야말로 가장 완미하고 성결한 문명의 상징이라고 자긍하는 등이다.    인성은 과연 그렇듯 완미한것인가? 맹자는 인성은 천성적으로 선하다고 하였지만 순자는 인성은 원래부터 악하다고 반기를 내들었다. 그러나 고자(告子)는 인성에는 선악의 계선이 따로 없이 다만 환경에 따라 호상 전화한다고 절충하였고 후에는 누군가 인성에는 원래 선악이란게 없다는 주장도 내세웠다. 사실상 인간이 대자연속에서 뛰쳐나오기까지는 역시 금수였고 점차 문명개화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인간속에 고 유된 야성은 극복하지 못했고 또 극복할수도 없는것이였다.     만약 인성이란 이미 형성된 정의만을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재성(自在性) 및 현존성을 의미할 때 마땅히 인애와 잔인, 호조우애와 상호 알륵, 성실과 음모궤계 등 량극성이 포괄된 복합체라고 해야만 객관적일것이다. 그렇지 않던가? 인성이란 워낙 극단에로 나아가기 십상이고 경우에 따라 잔악성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가 너무 많기때문이다. 환언하면 두 극단이든 극치이든 어디까지나 다 인성안의 일로서 인성과 야성은 피장파장이다.    흉악과 잔인의 화신인 승냥이는 약소동물들을 잡아먹는다. 인간도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이 점은 량자가 같다. 승냥이는 로획물을 이발과 발톱으로 찢어발기며 아귀아귀 처먹는다. 그 정상은 잔인하고 참혹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존수단의 살생으로서 포식에 그치고만다.    문명인은 생존수요보다 영양학각도에서, 식도락의 욕구에서 모든 네발 가진 짐승,두발 가진 조류, 각종 크고작은 어족들을 내키는대로 잡아먹고있는바 인성이 이룩한 이른바《식문화》의 형식, 내용은 실로 다양하고 다채롭기로 눈부실 지경이다. 껍질 을 벗기고 내장을 훓어내고 각을 뜨고 고기를 발라낸다. 연후에도 토막치고 칼탕치기도 해서 지지고 볶고 튀기고 굽고 고으고 절이고 회치고…거기에 온갖 조미료까지 쳐서 냠냠 먹어댄다.    먹는 형식과 멋에서 인간을 따를 동물은 없다. 중국의 남방에서는 산 원숭이 두개골을 빠개고 뇌수를 파먹는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야성의 발작이라 하지 않는다 하지 않으며 잔인한 생명학대라고 말하지 않는다. 약육강식, 우승렬패의 자연법칙이 인류문명권에도 적용되는것이라고 생각하면 전현 문제시되지 않는것일가?     어찌생각하든 결과적으로 잔인성이란 생존경쟁의 계선을 초월하여 수요이상으로 살생, 학대하는 행위인것이다. 이런 행위는 인간의 향상심과 진취심에서 기인되고 주 밀한 계획성과 그 실현을 위한 무지경의 실천에서 더욱 발휘된다. 엥겔스가 인간의 동물성과 야성을 두고 인간은 절반은 천사이고 절반은 야수라고 말하였는데 얼마나 지당한가?    동물계에는 사상이 없다. 사상이 없는 동물은 생명수요의 계선을 초월하는 법이 없고 따라서 가증한 음모술수도 없다. 배부른 뒤의 사자는 눈앞에 령양떼가 풀을 뜯 고있어도 다음 끼니를 위해 미리 잡아두지 않는다. 이렇듯 야수들에게 락인찍혀진 “잔성”은 그것들과는 무관한것으로 다만 인류가 제 좋을대로 고안해낸 단어로 품평해 버린것이다.    사상이 없는 동물은 자신을 위해 변호할수 없다. 진정 극악한 동물은 인간자신이면서도 다른 동물들을 잔인한 야수라고하니 우습지 않은가! 귀머거리나 벙어리앞에서 의 역설이나 웅변은 보건대 위풍스럽지만 무모한 자아풍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인류는 동물을 향하여 절대적인《진리》를 역설해왔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한가지《우수한 품성》이 있다. 그것은 자연계의 일체를 통치하려는 무한대의 지배욕과 향락욕이다. 그것의 핵심은 자사자리이지만 동물학 대에 대한 행위의거로 된다. 문명사가 시작된 래 인간은 자신들의 리익에 저촉되는 다른 생령들의 생존권을 무단적으로 박탈했고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여왔다. 인류가 자연을 정복한 뒤끝에 얻은것은 무엇인가? 평화롭던 지구촌의 생태환경을 파괴한것외에 또 무엇이 남았는가? 수많은 물종들을 절명시켰거나 멸종의 변두리에까지 몰아넣은 인간의 의지야말로 무서운 품질이다.    웃으면서 칼을 가는 표리부동한 인간구, 함정을 파놓거나 올가미를 걸어놓고 교묘하게 유인할줄 아는 인간군은 자기의 생존수단을 초월한 무비의 기술을 장악하였기에 이 지구촌에서 제일 강력한 물종으로 부상되였다. 하지만 조물주가 태초에 억조창생을 내실제《천하지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고 규정짓지 않았을것이고 모든 금수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하사하지도 않았을것이다.     하건만 야성은 인성의 강포와 모략앞에 영원한 패배자의 운명을 면치못했다. 비상한 살생도구를 창제해낸 인류는 완력으로 굴복시킬수 없는 강대한 동물을 기술과 음모로 굴복시키고 관상용으로 쇠살창안에 가두어놓고 즐기였다. 인간의 모진 학대와 공격에 때때로 개체적 혹은 집단적으로 보복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결국《만물의 령 장》들에게 섬멸당할뿐이였다. 인간과 함께《노아의 방주》에 올라 재난을 모면한 동 물들은 모두 이 지구촌에서 동등한 생존권을 가진《공민》들이건만 인성은 악착스럽게 살생을 추진해왔다.    이 지구촌에는 위선적인 인성은 있지만 허위적인 야성은 없다. 이른바 여우의 교활성이란것도 기실 일종의 생존본능일뿐인데 보다 교활한 인간은 되려 여우에게 그 루명을 들씌웠다. 죽은듯이 떠있다가 대방을 공격하는 악어의 궤계도 생존수단의 일종일뿐이다. 이른바 탐식의 대표자로 추대된 돼지의 탐식도 그의 생리특징에서 기인된 생존욕구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탐식하는 돼지이지만 너무 처먹어서 배가 터져죽 었다는 기문은 여직 없다.     돼지가 탐식한다고 비웃으면서도 빨리 살지기만 바라는 인간들속에서 돼지보다 더 탐욕스러운 인성이《행복》을 마련한다. 흔히 량심이 없거나 패덕한자를 개같은 놈이라고 욕하지만 개보다 못한자들이 인간들속에서 부지기수다. 그래도 주인을 위한 충견들의 미담은 많이도 전해오고있다.     동물들에게는 인간들에게 있는 그런 사치한 요구가 없다. 인간들처럼 더 많은 자연자원을 점유하려는 웅심도 없고 옹근 동물세계를 통치하려는 포부나 야심도 없다. 오직 인성만이 유희삼아 살생하는 품질이 겸비되여있을뿐이다. 그런 인성때문에 수천년의 문명사가 피로 씌여진것이 아니랴!     인성과 야성의 대비속에서 하나의 결론이 지어진다.가장 야만적인것도 인성이요, 가장 잔인무도한것도 인성이다. 수천수만 아니 수백만명씩 서로를 도살하는 동물이 인간을을 내놓고 또 어디에 있는가?인성이 빚어내는 비극이 야성이 빚는 비극보다 더 집대성적이고 더 잔혹함에도 인간은 그냥 웃으면서 야성을 질책하였으니 가소롭지 않으랴.     인간은 마침내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 지구촌에서 인류자신외에 다른 동물을 볼수 없는 날이 오게 된다면 무분별한 악행의 보응으로가장 살기 어렵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료하며 가장 황당한 유일한 동물로 남게 되고 그로하여 이 세계마저 고독 속에서 서서히 훼멸될것임을 자각했던것이다. 하여 동물보호법이 나오고《자연동물호구》니 뭐니 하는 조치를 대기시작했다. 비록 너무 늦었지만 인류를 위해서 다행이 아닐수 없다. 인류는 이제 인간다운 인성으로 새로운 희망사항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2003년 6월 5일
466    (교육칼럼) 말자해도 슬퍼지는 미래 댓글:  조회:6060  추천:1  2015-04-04
 (교육칼럼)                      말자해도 슬퍼지는 미래                                                 진 언      거두절미하고 말한다면 미래란 어디까지 미만하고 보람찬 의미로 쓰이여 기대감에 부풀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들의 하나인데 “슬픈 미래”라니 어불성설이 아니냐고 왼고개를 갸웃할 소지가 충분한 화제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래일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미래가 꼭 찬란 그자체만을 선물한다고 말할수 없다.     그 내용이 일구난설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범주적인 미래 전반은 그만두고 오로지 우리 중국조선족의 미래를 예고하는 교육현황에 대하여 생각해본다면 슬프지 않을수 없으리라. 확실한 사실적인 근거가 있다.  말하자면 11월 17일,《중국조선족소년보》 에 실린 가슴아픈 보도문이다.     기자는 산재지구도  아닌 조선족집거지구인 연변땅에서도 향진의 규모가 꽤 크던 학교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전달하고있다. 글은 비록 소년 아동들을 독자대상으로 한 신문에 실렸지만 읽은 사람은 제일독자들인 아이들에 앞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두고 심사숙고 하지 않을수 없고 범부속자로서 별 신통한 해결책을 내놓을수 없으니 그저 그냥 서글퍼지는 가슴을 어루쓸지 않을수 없다.     지난세기 90년대, 필자가 사범졸업생들의 실습지도를 다닐때만도 왕청현에서 유서깊은 배초구향소학교에 수백명학생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해서 36명에 교원이 18명이란다. 올해 신입생도 단한명, 그나마도 부모를 따라 왕청현성으로 이사가는 바람에 일학년이 없어졌단다. 락담실망이 공연한가? 일엽지추(一叶知秋)라 다른 지방의 실정도 가히 짐작하고 남지 않을가? 천교, 대흥구, 중평 등 여러 향소학교들에도 해빛밝은 교실들에 새별눈들이 가득차서 학구욕에 불탔는데…     열심히 글을 가르치며 인생을 빛나게 장식하던 교원들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기자가 “혹시 학교가 문을 닫게 되면 송선생님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고 묻자 “교육국의 배치를 기다려야죠.”라고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였지만 내마음 빌어 남의 마음도 짐작한다고 그 담담한 표정속에 숨겨둔 내심은 얼마나 부글거리랴, 그리고 바야흐로 페교될 학교 선생님들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것인가?       어찌 왕청뿐이랴, 기자가 전하는데 의하면 화룡시에서 큰진이던 서성진소학교에 도 달랑 16명이고 동성진소학교에도 고작 여덟명이 남았단다. 연길시 조양천진 팔도소학교에는 일곱명, 화룡시 로과소학교에는 단 두명뿐이란다. 오래전 일이지만 필자가 가보았던 로과소학교에도 제일 많을 때는 700여명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활기롭게 뛰놀았는데 세월의 물결에 민족교육의 호황기가 다 씻겨가고 단 두명의 학생을 두고 그냥 학교라고 부르는 처경이니 " 천하흥망필부유책(天下興亡匹夫有責)라는 고매한 차원은 아니더라도 공연히 가슴이 클클해지고 눈물이 나오려한다.     조선족의 집거지구인 연변이 이러하니 성내 각 산재지구 학교정황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길림성 유수현 연화향조선족소햑교는 최고로 490 명의 학생이 있었고 1948년에 세워져서 60여년간 도합 203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유서깊은 학교인데 인제 전교생이라야 9명밖에 안된다 속절없는 개탄이 나올뿐,     학생래원의 고갈은 예고된 페교에 직결되는데 각 향진의 소학교, 중교학교들이 가물에 비물이 증발해버리듯 증발해버리니 기초교육 일선에서 민족교육을 이끌어나갈 생력군을 배양하는 사범학교도 련쇄반응에서 벗어날수 없을것은 두말이면 잔소리이다. 아닌게 아니라 21세기에 들어서서 사범지망생들이 해마다 눈에 확 띄이게 줄어들더니 지금은 매년 초생하는 조선족학생수가 가련할 정도이다.     매일 내집 북쪽창문으로 업간체조를 하는 전교생들을 셈세듯 살펴보게 되는데 새 세기초 돈화사범학교와 련합하여 꾸리다보니 학생수가 넘칠듯싶더니 지금은 잔뜩이나 작아진 운동장에 듬성하게 널려서 섰대야 엉성함을 감출수 없는 정황이다. 2천 대초기까지만도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성내, 주내 각학교들에 배치되여 직접 교단에 나섰는데 지금은 공무원시험인지를 쳐야 교원이 될수 있게 되였으니 사범지망생이 줄어들지 않는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고 그렇게 졸업한 예비교원들마저도 적지 않게 교직을 포기하거나 외국으로 나가다보니 후비력량의 고갈도 짐작되지 않는가?      개혁개방의 춘풍이 갈수록 훈훈하게 불어칠 때 어떤 “선견지명”이 있는 “지자” 들이 페쇄적인 농경문화에 매달리는것은 만성자살과 다름없으니 농민들은 가급적으로 도시진출을 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관내로 진출하여 삶의 질이 보다향상된 새 집거지를 창출해내고 민족교육의 새 출발을 해야 한다고 설왕설래하더니 지금에 와서 이것도 저것도 못되고 그저 무너진것은 무너지고 흘러간것은 흘러가버린 현황을 두고 자신들의 선구자적인 권장이 얼마나 고명했던가를 되돌아 볼런지 궁금해진다.     목하, 주지하는바와 같이 동북3성의 원본거지와 개혁개방후 연해지역의 대도시와 한국을 위주로 한 해외에 널린 중국조선족들을 인구통계에 넣고 세개 지역을 통합적으로 고찰하고 그 발전방향을 전망할수도 있겠지만 념원과 객관현실의 변화는 결코 일치하지 않을것이다. 물론 이땅에 남은 조선족들의 상황으로 전반 조선족의 발전과 미래를 단언한다는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명실공히 중국조선족이라는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하고 미래를 열어갈수 있을것인가 하는 곤혹이 나선다.    무엇보다 민족교육의 상황으로부터 본다면 인구의 대량 류동으로 날로 위축되고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것이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하긴 조선족사회의 초석이고 조선족농촌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땅을 차지하고있는 한 도시로 해외로 진출했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돌아올수 있다고 기대를 가지면 조금 안위되겠지만 실상은 그땅이 이미 얼마나 타자에게 넘어갔고 남은 땅마저 얼마나 지켜갈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연해지역 대도시에 조선족사회의 현황에 대해서는 언론에 많이 보도돼 널리 알려져 있는데 중국조선족의 “제2의 삶의 현장”으로 되고있는 이 지역의 가장 두드러진 현안은 민족문화를 이어가고 민족정체성을 지켜가는 기본인 우리 말, 우리 글 교육이다. 조선족이 50~60만명으로 집계되는 연해지역에 조선족학교라고는 청도에 소재한 학생이 500명정도 되는 2개의 사립학교뿐이다.     청도로 진출한 20만명의 인구에 비하면 조선족학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사립학교인 관계로 국가의 의무교육 지원을 받을수 없어 학교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연해지역에 아직 조선족문화기관과 시설이 없는것도 하나의 현안으로 되고있다.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갈 조선족문화기관과 시설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임은 지각이 든 사람이면 다 알수 있는 사안이지만 그 해결이 미만할것인가? 다행히 청도를 비롯한 연해지역에 조선족들의 사회단체와 친목모임이 활발해 민족문화와 전통을 이어가고있지만 그것도 거의 로세대들이 담당하고있다.    본지,국내각지, 외국지역으로 분산된 중국조선족의 미래를 과연 명랑한 시선으로 내다볼수 있을것인가? 현황을 보면 아무도 쉽게 결론을 내릴수 없을것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할것은 물론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사회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일부는 비관적이고 심지어 실망스러워 하는데 일리가 없을수 없다. 물론 력사적시각과 발전적시각, 보다는 전방위적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중국조선족의 현재와 미래를 옳바르게 진단하고 예측할수 있겠지만 교육현황을 보면 어찌해도 암담해지는 마음을 숨길수 없으니 내사 너무 오지랖이 넓은것이기도 하겠다.                                             2014년 11월 17일 밤
465    광고심리학 댓글:  조회:5519  추천:0  2015-03-30
                                광고심리학      어떤 광고상이 죽어 염라전에 대령했다.    《너는 광고상이였다지? 그러면 이를 소만큼 과장하는 예술에 능했겠구나.》    《예? 대왕님 아니올시다. 광고란게 원체…》    《음, 알겠도다. 이제 네가 갈 곳은 천당과 지옥중에 한곳인데 네눈으로 잘보고 선택하도록 하라.》     염라왕은 광고상을 지하광실문전에 데리고갔다. 열려진 뙤창으로 들여다보니 녕악스럽고도 징글맞은 상판대기의 악귀들이 득시글거리고있었다. 광고상은 몸서리치는 데 염라왕은 천연덕스레 말했다.    《보았겠지, 여기가 곧 천당이니라.》    광고상은 눈이 휘둥그래서 왼고개를 탈았다. 또 한곳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보니 릉라비단으로 온몸을 감은 신사숙녀들이 질탕 먹고 마시며 희희락락 떠들썩하고있었 다. 광고상은 눈이 번쩍 띄였다.《저승에도 이런 극락이 있었구나.》하고 좋아하는데 염라왕은 왕청같은 소리를 했다.    《여기는 지옥이니라. 이제 네 갈곳을 결정하거라.》     광고상은 염라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제꺽 대답을 올렸다.    《예. 대왕님, 소인은 지옥에 있겠나이다. 헤헤…》     그의 말에 염라왕은 빙그레 웃고는 령을 내렸다.    《여봐라, 이 광고상을 지옥에 데려다주어라.》     라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광고상을 밀고 닥치며《천당》쪽으로 끌어갔다.   《틀렸나이다. 대왕님, 잘못들었나이다. 소인은 이 지옥에 있겠나이다.》   《오냐, 분명히 지옥에 보내는도다.》   《아니오이다. 방금 본 지옥에…》  《에끼, 미욱한 놈, 네가 본것은 광고란 말이다.》    광고상이 울고불고 하였지만 염라왕은 껄껄 웃기만 하였다.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지만 작자는 현시대 말썽 많은 광고피해를 두고 무언가를 계시하려 한것 같다.    광고란 말그대로 널리 고하여 알림으로써 곧 알리려는 그 문화행위와 그 알림을 수요하는 대중의 접수심리가 기름과 불처럼 확 달라붙어야 광고의 존재가치가 당당하 게 된다. 훌륭한 광고업자는 무엇보다 먼저 광고심리학을 잘 터득한 다음 광고운영에 나서야 한다.    광고심리학이란 무엇이냐? 광고심리학이란 곧 광고의 유효조건 및 방법,욕망과의 관계 등을 연구하는 응용심리학과의 한부분으로서 연구중점은 광고수요자의 접수심리 이다.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광고륜리학이 있는데 이에는 광고의 표현, 실시에 있 어서 준수되여야 할 도덕과 허위, 과대표현, 중상, 모방, 도작 등에 대한 금지가 포함 되여있다.    개체적인간으로 말할 때 흡인력은 다방면적이고 다층적이며 우선 감성적이지만 결국 지적인것이다. 광고예술의 흡인력도 마찬가지이다. 광고설계에서 착상이 기발하 고 촬영술이 고명하여 시각상 순간적 찬탄을 인기시킬수 있겠지만 시장개척에는 실질 적추진력이 되는것은 아니므로 너무 감성전 면에 초점을 모으고 지적인 면을 홀시한 다면 실책이 아닐수 없다.    광고예술에서 유효수단으로 또 반복법이 있는데 널리 알린다는 목적성과 기억재 생원리에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제군들! 유감천만《스톱!》미안하나 좋은 노래도 세번 들으면 싫증난다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광고의 빈도수는 일정한 정도의 필요조건이 지 절대적표효률의 담보는 아닌것이다. 상품판매활동에서 강태공의 낚시질처럼 “원하 는 물릴지어라”고 할수는 없지만 진짜 설중송탄(雪中送炭)식의 광고라면 지루한 중복 은 시간과 금전의 랑비이다. 그러나 공을기처럼《많을소냐, 많지 않도다.》라고 생각 하면서 다다익선(多多益善) 만 고집한단면 광고심리학에서 말하는 욕망과의 관계를 무시하는것으로서 그리 현명한 결책은 아니다.    광고의 효익은 어디까지나 수용자의 접수심리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런데 재미나는 곳에 범이 뛰여나온다고 한창 흥미진진해 보는 장면에 불쑥 광고가 튀여나온다. 그 저의가 빤하지만 오산해도 한참 가는 오산이다. 결김에 채널을 홱 돌려버리는것을  무리라고 보지 말자. 인차 광고가 끝나겠지 하고 그냥 지키고 앉아있기도 하지만 눈 을 뜨고있다 해서 다 보는것은 아니며 본다해서 다 마음에 담아두는것은 아닌것이다.    텔레비죤광고에서 흔히 쓰는것은《명인효과》인데 명인에 대한 일반적신뢰심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기실 광고의 신비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명인이란 모종 전업면에서 성취가 돌출하여 이름이 유명해진 사람일뿐 해당 상품의 창제자가 아님은 물론 상품질의 담보인도 아닌것이다. 역시 가치법칙에 따라 그 지명도로 광고 수입과 교역할뿐이다. 아니그런가?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말장사군이 말을 속여 천리마로 팔아먹으려고 백락을 찾아갔다.백락도 공방형(孔方兄), 무릅꿇은 노복이였다. 그래서 이튿날 장에 나가 늙은말을 흔상하며《좋은 말이군, 참 좋은 말이구말구》하며 입에 침을 발랐다. 숱한 장사군들도 덩달아 좋다고 하며 천리마가 분명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결국 한 어리숙한 위인이《천리마》를 고가로 사가지고 싱긍벙글하며 돌아갔다. 백락은 약속대로 사례비를 챙겨가지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광고는 해야 한다. 그러나 광고는 경제롱간술이 되여서도 안된다. 광고의 생명은 진실이다. 광고심리학을 모르고 광고업의 도덕을 무시하고 무작정 내미는 광고는 약 사발을 먹이는 야비한 짓거리이다. 광고의 홍수를 다스릴 때가 진작 된것같다.                            2001년 7월 6일
464    오래 사는 비결 댓글:  조회:6268  추천:0  2015-03-30
                              오래 사는 비결      사람이 어찌 3천갑자 동방삭처럼 장수하랴만 그래도《한 500년 살자는데 웬 성화냐》하고 애원을 하면서 한껏 욕심을 부리는게 인간이다. 하기사 그 언젠가는 북망산에 묻혀 외로운 고혼이 되거나 한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릴터이니 사람의 한생에 이보다 더 애석한 일이 또 어데 있으랴.    그래서 인간은 5복의 첫자리에 수(寿)를 놓았고 죽은 정승이 산강아지만 못하다는 속담도 생겨난것이다. 인생이 무변고해이고 산다는것자체가 힘겨운 일이지만 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고대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으뜸가는 원초적이고 강렬한 욕구인것이다.    옛날 3천궁녀를 거느리고 만세에 향락을 누리고저 불사약을 찾아내려고 숱한 동남동녀를 천애지각에 띄워보낸 진시황 영정을 비롯하여 주색잡기에 너무 빠져 단명했던 력대의 봉건제왕들마다 무슨 령단묘약을 구워먹으며 장수를 꿈꾸었지만 당태종 리세민같은 황제는 오히려 금단을 먹고 서천행차를 앞당겼고 서진의 갈홍이 금단묘약을 굽는다고 평생을 고심참담하였으나 그자신도 장생불사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인간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온갖 병마와 싸우고 염라대왕과 대결하면서 생명각축전을 벌려왔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리시진의《본초강목》이 나왔고 화타나 편작같은 천하명의가 나타났다. 서양에서는 참대가치《청진기》로부터 현대의 ×광선, CT와 같은 첨단기술에 이르고 일반 감기약으로부터 고급명약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의학과 약학을 발전시켜왔지만 자연의 섭리인 로쇠와 사망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하긴 세상에 100세가 넘도록 장수한 사람들이 따로 있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장수로인들의 장수비결을 널리 연구하고 그것을 권장하고있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져있는 장수비결을 두루 살펴보면 대동소이한중에 한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얼핏 보아낼수 있다. 그것인즉 곧 정신적요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궁정비방이니 무슨 조상의 비방따위만큼 믿어야 할텐데 사실 그렇지 않고있다.    서방의 한 저명한 의학가는 10년동안의 연구를 거쳐 놀라운 수치를 얻어냈다. 건강장수비결의 60%이상이 그자신에게 있는데 그의 정신적힘에 달렸다는것이다. 이는《운명의 별은 당신의 가슴속에 있느니라.》라고 한 옛성현들의 말과 맞아떨어진다.    사람이 장수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심리절제이다. 이른바 자아심리절제란 곧 언제나 밝은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두고 살아가는것을 말한다. 마음이 탐욕의 대문을 지나면 필연적으로 검어지기 마련이라는 말이 있다. 마치 검둥개가 방아간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겨투성이가 되듯이 말이다. 마음에 밝은 구석이 없다면 운명의 별은 절로 스러지고만다.    사람이 물질면에서나 색에 너무 욕심을 부리면 자연 심리문란이 오게 된다. 사람이 일단 이렇게만 되면 천하의 구복액을 뜨물켜듯 마시고 만가지 보건약들을 미친년 생콩알먹듯 주어먹어도, 주지육림에 들어앉아 배꼽에 기름때를 않히고 새 자극을 찾아도 심리실조에서 해탈될수 없다. 한마디로 생명의 지휘봉은 곧 정서로서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 육체의 훼멸도 뒤따르게 된다.    이에 대한 브라질의 한 의학자의 실험이 아주 유익한 계시를 주고있다. 그는 583명의 탐관오리들과 583명의 청렴한 관리들을 대비하여 고찰하였는데 전자들속에서 60%이상이 각종 병에 걸렸거나 때이르게 저승길을 앞당기였지만 후자들속에서는 병에 걸렸거나 때이르게 사망한 사람이 근근히 16%밖에 안된다는 수치를 얻어냈다. 게다가 탐오수뢰죄를 범한 사람들이 걸린 병을 보니 거개가 암증, 뇌출혈, 심장병이 아니면 신경과민, 실면증 등 불쾌한 병들이였다. 평생 제 땀을 흘리며 두손으로 삶을 영위해가는 평민백성들에게는 자다가도 소스라칠 일이고 한창 그 무리에 가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아닐수 없다.    그러니 정녕 장수하고싶은 사람들은 황금연따위나 산해진미에 신경을 곤두세울것이 아니라 의학적인 장수비결에 마음을 써야 할것이다. 선량한 사람, 처세에 화해로운 사람, 광명정대한 사람, 벼슬도 크게 못했고 돈가방은 홀죽하나 심리상태가 줄곧 평온한 사람들은 혈액흐름량이 언제나 량호한 상태에 처해있기에 건강장수가 스스 로 담보될것이다.    반대로 심지가 불칙하고 탐욕을 부리고 못할짓만 하는자들은 장기간 공포, 불안, 경황, 고뇌, 초조한 상태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기에 자연 면역력이 약해지고 쉽게 병마에 걸려들게 되는것이다. 설사 얼마동안은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법망이란 사회병원에 입원하게 될것이다. 그때에 가서야 청빈하나 마음 밝게 살기만 못했다고 후회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것이다.    세상에 미몽도 황금몽이요, 악몽도 황금몽이다. 그러나 세상에 깨지않는 꿈이 어데있으며 파하지 않은 연회가 어데 있겠는가? 분복이 없지만 남보다 빼여나게 살고 또 오래오래 살려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병적심태가 없어야 할것이다. 그것인즉 무한정, 무절제의 탐심, 안하무인의 오만심리, 권력교역광란증 등등이다.    공자는《지자락 인자수(智者乐,仁者寿)》이라 하였으니 권력을 등대고 사욕을 채우기에 이골이 튼 사람들이《지혜》로와서 일시는 인생을 즐길수 있겠으나 어진자로는 될수 없으니 장수하기기는 글러먹었다. 혼자만 잘살아도 단명하고 잘못먹고 잘못살아도 장수하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수명이란 참으로 가늠키 어려운것이다.                                 1997년 12월 13일
463    성의 곤혹 댓글:  조회:6166  추천:0  2015-03-30
                                     성의 곤혹      이브가 지혜의 금과를 따먹은후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나무잎으로 자기의 제일 은밀한 곳을 가리는것이였는데 이는 수치심이란 인간의 천성이 아니라 문명 특히는 성문명의 첫선물이였다는 원시적해석이 된다. 그러나 그 최초의 수치심은 현대문명과 더불어 거치장스러운 잠옷처럼 벗겨지고 다시 아담과 이브의 그것과도 다른 동물성에로 환원되여가고있다.    정욕이 권력욕과 물욕과 포옹하게 되자 남자가 성세계의 지배자로 되였다. 하여 웅성의 전제주의력사가 시작되였고 녀성의 성애의 화랑에는 랑만적인 전원시가 새겨질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약자에게는 약자로서의 존재방식이 고안되였다. 녀성들은 조물주가 하사한 미색으로 웅성들의 질투심과 독점욕을 꼬드기고 권력과 소통하는 방 식으로 력사발전을 추진시켰으며 자기보호술책인 유혹과 거절의 방식으로 성의 주재자들을 조정하였다.《유혹+거절》은 권력욕을 격발시키면서도 자기만족에 이르는 비상수단이였다. 그래서 남자는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녀자를 점유하고 녀자는 남자들을 정복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한다는 그 유명한 아이러니도 만들어졌을것이다.    자고로 영웅호색이요, 영웅이 미인관을 넘지 못한다는 계률이 있다. 포사의 웃음 한번 사려고 충후한 제후들을 롱락한 주평왕의 어리석음도, 서시의 치마폭에 감겨든 망국재화의 오왕 부차도,초선의 미인계에 걸려들어 비명횡사한 인중 려포도 다 이 정욕이 빚어낸 희비극이 아니랴.    물론 고대중국에 리지로 정감의 분출을 막고 덕으로 육욕을 이겨낸 철인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춘추시기의 로나라사람 류하혜를 첫손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고사는 이러하다.     어느 겨울밤, 날이 저물어 잘곳을 못찾은 한 젊고 아름다운 녀자가 류하혜의 처소로 찾아드는데 류하혜는 쾌히 받아주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 방안이 몹시 추워지자 녀자는 몸을 벌벌 떨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필경 얼어죽을것 같아 류하예는 녀자를 자기의 무릎우에 올려앉히고 옷섶을 헤쳐 포근히 감싸안았다. 기나긴 겨울밤, 류하예는 자기의 체온으로 녀자를 덥혀주면서도 모든 잡념을 뿌리치고 그렇게 고스란히 밤을 패였다. 그로부터 젊은녀자를 품에 안고있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인군자 류하혜의 미담이 오늘까지 류전되여왔다.    동서고금에 이런 유덕한 현인이 쌀에 뉘만큼이나 있었을가? 성에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이였으니 공명정대하게 시인해야 될것이였으나 유교도덕의 천하에서는 성이 금구로 될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천성이라는것은 기실 인간에게 남아있는 동물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인간의 동물성을 자인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연을 외면하는것이고 반대로 인간의 본연인 동물성을 무한정 확대하고 방종을 제창한다면 역시 순 동물성의 환원이 되고만다. 이것이 곧 성의 곤혹이 된다.    속담에 늦바람에 곱새를 벗긴다는 말이 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국문이 활짝 열리고 서방의 성문화가 들이닥쳐 수천년 억제당했던 중국사람들의 욕망을 들쑤셔놓았 다.무한정의 금전욕과 마찬가지로 성자극은 가장 큰 욕망으로 되였다. 하여 공자님의《본성론》을 짧디짧은 20년 사이에 외곡해도 엄청나게 너무 멀리 외곡해버렸다. 감각의 추구가 도덕과 관습이 방파제를 무너뜨려버리고 홍수처럼 사람들을 휘감아버렸 다.    사람들에게 제일 유혹적인 단어가 성감과 련계되는것들이다. 유흥소도 이에 동조한다. 제일 잘 팔리는것을 성기능장제이다. 상품광고도 성감색채가 짙게 설계되여야 일류광고인듯 착각되여있다. 인류의 제일 비밀이였던 자신의 방사도 제일경험자의 자태로, 침대우에서의 인간희극의 세부지도까지《성지남》으로 신문에 싣기도 한다. 밤 아씨들은 헌 양말짝을 벗어던지듯 정조따위를 팽개쳐버린다.    아무리 정이 없어도 욕은 만끽할수 있고 욕이 없이는 정이란게 없다해도 지페로 바꾼 비게덩이는 사랑과 인연이 없건만 그냥 사랑이라고 뇌까린다. 사랑의 위기시대라 할가, 인간의 생육본능이 성욕까지 만족시키고 또 행복감까지 주는것은 성문명의 최대 개척인것은 사실이나 사람이 동물과 다른 또 하나의 천성적본능은 욕을 통제할 줄 알고 에두를줄 아는데 있는것이 아닌가. 사랑은 성욕만이 아니며 플라톤식의 기적 ㅡ정신적사랑도 아니며 음욕, 번뇌, 발설만도 아니다.    성애에서의 수치심도 조절수단이면서도 자극제이고 정감의 장식품이기도 하다. 애정의 감정이 메말랐을 때 새로운 피부감각을 찾기마련이다. 정조니 도덕이니 하는 사람은 고서적을 뒤져보는 사람들일뿐, 그들이야말로 시대적락오자로 점찍혀진다.    그러나 도덕이 진창속에 나딩구는 그러한 사회야말로 자신의 릭익마저 상실했음 을 표징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좀 배부르고 따스하게 입으니 마치 모두가 성기갈 이 나서 맴돌고 그《성》때문에 사는듯한 착각을 주는 그러한 성문명을 조금 억제함 이 어떨가.    경제리익이 결코 일체를 의미하지 않듯이 인간본연에 애써 구축했던 그 고전적애 정의 륙지마저 사막화하지 말자. 아름다운 시어에 “섹스”란 단어마저 활개치게 하지 말자. 돈으로 바꾼 자극은 문명의 퇴화일뿐이며 만물의 령장이라는 자신에 대한 아Q 식의 풍자일뿐이다.                                2000년 7월 18일  
462    유혹을 씹어본다. 댓글:  조회:5852  추천:0  2015-03-30
                                    유혹을 씹어본다.      억조창생이 붐비는 지구촌 어디에나 인간의 리지력으로는 걱부하기 어려운 일종의 마력같은 힘이 군림하고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유혹이라고 이름했다.    유혹이 뭐냐? 추상적대상이면서도 구체적대상물이기도 하고 객체적인가 하면 자성(自性)적인것이기도 한 유혹에서 달랠 유(诱)는 말씀(言) 에 빼여날 수(秀)자가 그림 자처럼 붙어섰으니 충분한 흡인력을 갖고있는 미혹할 혹(惑)은 혹(或)시나 하는 마음 (心)으로 되여있어 문자그대로 남을 흘려서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것, 나쁜 길로 꾀여 내는것이라 사전에서는 명료하게 해석하고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생성, 발전과 더불어 그렇게 락인된 명사일뿐이고 그 속성은인간이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되면서 벌써 인간정신과 리성에 선행되여있었다고 해야 하리라.    그리고 바늘 가는데 실이 간다고 유혹에 상응하여 탐혹이라는 말도 있는데 쌍둥 이자매쯤 된다고 할가, 유혹은 타아에서 기인되고 탐혹은 자아에서 기원되지만….아무튼 오색잡다하기로 요지경같은 살의 소용돌이속에서는 그렇게 가볍게 풀이되거나 소위 싹 비워둔 마음으로 림할수 있는것은 아닌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청 만물의 령장이라 하지만 온갖 유혹앞에서는 가모목에 놓아둔 엿가락처럼 마음이 흐물흐물해지고 삭신은 연골증에 걸린 아이처럼 되여 자칫 넘어지고 엎어져 코빼기를 벗기기 일쑤이고 심하면 천길나락에도 굴러떨어지기 십상이니 헤겔씨가 고집하던 절대리념보다 어어마어마한것이 아니랴.    그런데 주지하다싶이 유혹일반이 다 나쁜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생명을 선도하는 그 방향, 결과로 본다면 유혹에도 선악의 구별, 추하고 고운것의 계선, 고매하고 저렬한것의 차이가 있다.    유혹이 구체적인 대상물에서 기인될 때 류류별별에 각양 각색이 되겠지만 크게 나누면 황금(돈)의 유혹과 미색에서 오는 유혹이 우두머리격이고 제일 난당(难当)이라 하겠다. 하긴 권력의 보좌가 주는 유혹도 엄청난것이지만도 돈이 있으면 권력 따위는 팔고살수 있는것이고 권력 한자락 잡으면 돈나무에 올라앉는 격이라 오동이 무성하면 봉황이 절로 깃든다고 미녀도 명주바지에 도꼬마리처럼 들어붙을것이니 그게 다 그안 에 있는것들이 아니겠느냐?    인류의 모체인 대자연이 주는 유혹을 보자, 광막한 별세계은 우주인이라도 있을 듯싶으니 우주탐험가의 유혹이 될것이요, 천하제일 험봉은 등산가의 유혹이 될것이요, 미지의 바다밑세계는 해양학자의 유혹이 될것이다.    자유로이 창공을 날으는 수리개의 그 멋진 날개짓은 미국 라이트형제의 유혹이였을것이고 번개불의 그 강렬한 빛은 로모노쏘브의 생명을 앗아간 유혹이였을것이며 골드바흐의 추측의 탄생은 진경윤으로 하여금 진씨정리를 낳을수 있게 하였던 유혹이였을것이다. 상술한 그 모든 유혹들은 선지선각자들이 스스스로 당한 유혹으로서 인류의 물질문확재의 창조를 위해 선도자의 길에 오르게 한 세기적전환의 유혹들이다.    동물세계에도 약육강식의 근원이 되는 유혹이 있을것이다. 닭우리속의 씨암탉은 여우, 삵괭이들의 유혹이고 개구리는 굶은 늘메기의 유혹이고…우등불은 부나비의 비 극적정사를 낳는 유혹이요, 백화는 탐화봉접(探花蜂蝶)의 유혹이다.    세속의 유혹은도 얼마나 막무가내한가.《금준미주》는 공짜배기 취한의 유혹이 될것이고《옥반가효》는 쏘바께위치 같은 탐식가의 유혹이 될것이며 큰 권력은 벼슬에 불만족한 용속자의 유혹일것이다. 또 뭐니뭐니 해도 번쩍거리는 금덩이, 빨깍거리는 지페는 어섯눈을 뜬 애숭이로부터 백발로옹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의 불가항력의 유혹이 아닐수 없다.    그러니 정신이 멀쩡하고 오장륙부가 구전한 사람치고 유혹일반과 등지고는 살수 없는게 틀림없다. 유혹을 도피하거나 거절한다는것은 생활을 도피하고 거절하는것과 같고 삶 그자체를 포기하는것과 같은 짓이라 할것이다. 그래서 어느 선배님은 인생의 행복과 성공의 절반은 유혹을 접수하는데 있고 절반은 유혹을 거절하는데 있다고 했다. 아닌게아니라 유혹에 대한 접수자세, 명지한 선택은 생명의 완미함과 불미함, 흥망성쇠와 관련된 인생철학에서 대난제가 되는것이다.    만나고 헤여지고 배우고 잊어버리는 환득환실의 인생길에서 유혹은 인간을 지치도록 피곤하게 만들며 까불어왔다. 그래도 우리는 어쩔수 없이 웃으면서 매달리고 울면서 나떨어지기도 했다. 더구나 물질생활이 점점 풍요로와지는 현시대에서 유혹과 리성, 방종과 절제의 대결은 현대인의 참혹한《인생전쟁》이 되였다. 한번 실수가 천고의 한이 된다는 도리는 다 알지만 그 누구도 자기가 유혹에 맞다들지 않는다고, 유혹에 가슴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없다. 유혹앞에서 욕망이 꼼지락거리고 피가 끓는것이 오히려 정상인의 마음가짐이며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가!    문제는 그 유혹의 결과가 어떠냐에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마음이 약하지만 천고의 미담을 엮어놓은 현인들도 적지는 않다. 이런 재미있는 고사가 있다.    명나라 만력년간에 산동 태화에 조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치안을 관리하고 도적을 나포해들이는 전(典史)였다. 어느 여름날 조정은 타현에 가서 녀도적을 잡았는데 인물이 천하절색이였다. 조정이 녀도적을 압송해가지고 본현 관아로 돌아오다가 날은 저물고 주막은 먼지라 산간의 빈 절에서 밤을 묵게 되였다.    무인산중이요, 야밤인지라 조정은 녀도적의 포승을 풀고 편히 쉬게 하였다. 그런데 밤중에 미녀도적이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조정을 유혹해왔다. 조정은 악연했지만 그래도 젊은가슴에서 일만잔나비가 뛰놀았고 피가 설설 끓어올랐다. 녀자가 스스 로 원해오니 육욕의 향연을 마은껏 베풀고 인정도 봐줄겸 녀자를 놓아준들 시비를 걸어올 사람도 없을것이였다.   그러나 조정은 마침내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지필을 꺼내여《조정은 절대 방종할수 없노라.》하고 큼직하게 써서 벽에 붙였다. 한참후 뜯어내여 불사르고 다시 써서 붙인후 열심히《념불》하였다. 그러기를 여나문번이나 거듭하고나니 날이 밝았다. 나라의 집법관으로서 자기 직분을 지키고 명분이 바르게 처사한 명관이긴 하지만 그렇게 우직한 방법으로 미녀의 유혹을 물리쳤으니 조정이야말로 딱쇠라 할가? 예로부터 영웅호색이라 했건만 조정이야말로 꿈속에서도 자기를 다스릴만한 대장부가 아닌가?    옛날에도 이런 무탕무욕(无荡无欲)하고 일심종사하는 청렴관리가 꽤나 있었는가부다. 헌데 물욕이 횡행하고 돈이 인성을 타래떡모양으로 비트어놓는 현시대에 청백한 관리를 따라 배울이가 몇몇이나 될는지?    석류치마아래 다투어 무릎을 꿇고 공방형(孔方兄)앞에서 소인으로 전락되여버린 개국공신도 있었을라니 기타 녹녹한 무리들이야 더 이를데 있으랴.    이렇듯 사악한 유혹에 포로되여 질탕거릴 때는 내노라 하다가도 마침내 흥진비래 (兴尽飞来)라 쇠고랑을 차고 옥살이하는자, 불콩알맛이 따끔한지 고소한지 기억할 새 도 없이 저승사자에게 덜미를 잡혀 가는자들이 비일비재이니《선재, 선재로다.》인생비극을 빚어내는 위험천만한 유혹이로다.    저마다 제멋의 인생을 사는 마당에 감놔라 배놔라 할수는 없지만 살찌는 돼지는 운이 나쁘다는 외국격언이 자꾸 떠올려진다. 아무렇게나 놓아둔 쌀주머니속에 덫이 있는줄은 모르고 탐닉만 하려든다면 필경은《재판받은 쥐》에 나오는 장끼처럼 붉은콩 한알의 유혹에 목숨까지 빼앗길수밖에 없으리라.   오, 누가 알랴. 인생행로란 기괴하고 변덕스러운것이거늘 사람의 흥망성쇠란 사소한 유혹에서 갈라질줄을.                                  1999년 8월 5일
461    허영의 비극 댓글:  조회:5107  추천:0  2015-03-30
                                허영의 비극      인류의《정감사전》에 영예욕이 오른 그 시각부터 참된것과 허위적인것의 겨드랑밑에, 나발불기와 으시대는것의 내핵속에, 황당한 추구와 허무한 자족의 표피속에 허영심은 암세포마냥 확산의 기회와 응집의 매체를 노려오면서 끈덕지게 생성하여왔다.    허영심은 줄곧 인간과 더불어 숨박곡질을 해왔다. 하여 어떤이는 그것으로 심리평형을 얻어 만면춘풍이 되고 어떤이는 그것으로 충실하지 못한 자기의 생명을 윤색해가고있으며 많은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그것으로 하여 자생자멸의 삶을 기탁한다.     노랑머리소년은 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한다.《어제 울 아버지 비행기타고 왔단말이야!높은 사람이구야 앉아다닌단 말야, 흥!》    이런 노랑머리소년들의 자아표현에는 기특한 일면이 있다하겠지만 백발늙은이들 마저 희뜩머룩하는데는 머리가 저어진다.《난 그때 ××와 함께…참, 그와 나는 친밀했지…》××란 물론 권력가나 큰인물일것이다.    이렇게 허영심은 소년시절부터 늙어 쇠잔해질 때까지 인간에게 묻어다닌다.    허영의 번성기는 젊은시절이다. 청춘의 빛발아래엔 늘 허영의 그림자가 엎드려있다. 그것은 마치 금방 돋아난 새싹이 자기의 풍채를 하루 빨리 과시하지 못해 안달아 해하는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허영은 일종의 동력이란 하겠으나 너무도 취약한것이다. 그가 만약 한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인격과 품성을 갈아먹는 석마돌이 되고만다.    허영은 영원히 자아를 원심력으로 원주운동을 하는바 단순한 자전가운데서 순간순간 쾌감을 맛볼수도 있지만 시간은 나중에 가서 무자비하게 그를 막다른 골목 에로 밀어넣고말것이며 광채롭지 못한 생활의 한페지를 남겨줄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성숙을 향해 나아갈때 문득 머리를 돌려 회고해보면 허영은 웃음거울마냥 비틀어진 인격을 비쳐주고 알찌근한 유모아로만 선물할것이다. 그가 만약 지성인이라면 자기 풍자속에 주렁진 열매만 짓씹을것이다.    영예와 허영은 한글자 차이이지만 그 내포는 천양지차이다. 허영은 어느 명인이 말한것처럼 초불과 같아서 세차게 타오를수록 녹아내리기도 그만큼 빠른것이다. 하건만 사람들은 허영의 노예로 즐겨 충당되는데 인간의 원초적비애라 할는지…    서부독일의 한 유명녀가수가는 남달리 유별나게 차리고다니는것을 좋아해서 자기의 머리칼을 금발도 아니고 종색도 아닌 초록색으로 물들이고 다녔다. 하루는 그 가수가 분수가에 앉아 자기의 독특한 미를 과시하고있는데 마침 곡마단의 락타한마리가 지나가다가 맛나는 풀인줄 알고 마구 물어뜯었다. 녀가수가 죽는다고 비병을 질러댔지만 락타는 막무가내로 뭉텅뭉텅 잡아뜯었다. 이것은 확실히 기문이다. 이처럼 해괴한 거동들은 우리 신변에도 비일비재이다.    어떤 과외작가가 몇해를 두고 고심참담 창작을 하느라 했지만 한편도 활자화된 작품이 없어 친구들의 비웃음을 자아냈다. 전전긍긍해있던차에 우연하게 한 잡지에서 동성동명인이 쓴 소설을 보게 되였다. 이에 기발한 생각이 든 그는 자기의 처녀작이 발표되였노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였다. 썩은 알만 낳는 묵은 암탉이라고 비웃던 친 구들이 성공을 축하한다며 한턱 내라는바람에 그 알량한《작가》는 울며겨자먹기로 여윈 돈지갑을 툭툭 털었다 한다.    서부독일의 녀가수는 머리카락때문에 혹사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머리카락은 자라면 되는것이다. 그러나 생활속에 이러저러한《염색자》들이 각종 물감으로 자기를 분 장함으로써 빚어지는 희비극을 두고 우리 모두 포복절도할것인가? 아니면 방성대곡할것인가? 본색은 어디까지나 본색이고 원모습은 어디까지나 원모습이다. 노마에게 금안장을 얹어준다한들 천리가 될수는 없는것이다. 누가 만약 모종의 심리만족을 위해 허영을 추구한다면 차례지는것은 황련밖에 없을것이다.    시대의 총아로 불리우는 적지않은 기업가들의 흥망사를 보면 거개 허영이 출연한 희비극이다. 그 자신은 지고 일어서지 못할만큼 나라의 대부금을 맡고있건만 무슨 회사요, 기금이요, 자선사업이요 하면서 통이 크게 노는데 받아안는것은 뜬구름같은 명성이요 돌아앉으면 벙어리 랭가슴앓기이다. 우리 말 속담에 웃돌빼서 아래동 괴이고 아래돌 빼서 웃돌 괴인다는 말도 있지만 나라돈을 가지고 멋을 부리는 거동이야말 로 가증한 일이 아닐가? 하긴 그네들에게도 이런저런 고충이 없는것이 아니지만 이런 허영의 희비극을 조장하는 여러가지 사회깆에 대해 대성질호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 해방군의 한 장군이 수수한 찦차를 타고 회의하러 가서 렬등려관에 숙박하 려하다가 가짜 장군이라는 오해를 사서 한바탕 활극을 벌린 사실을 세인이 다 아는바이다. 진실한 인격자로서의 장군에 대해 말하면 눈물겨운 감격이 앞서나 말썽을 일으키고 오해극을 논 그 녀복무원의 심리바탕은 어떻게 분석해야 옳은지…사회현상이 그 복무원을 그렇게밖에 사유하지 못하도록 키워놓은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허영심은 인간의 성실을 독살하고 인간자체를 훼멸하는 비상히 틀림없는데 어찌하여 인간은 허영을 껴안고 맴도는지…인간이 그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다는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징 즉 성실성을 상실한 뜻이 된다.     상품경제시대 허영심에 둥둥 떠서 부평초같은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이 세상에 어떤 유익한 존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기실 대단히 귀찮은 존재들인것이다. 잘살아도 못살아도 제모습 그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깨에 받들려 우리의 사회는 더 밝고 훌륭하게 되는것이다.                        1991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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