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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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침묵의 값 댓글:  조회:5535  추천:1  2015-06-01
                                            침묵의 값      고금동서에 명인들이 침묵에 대한 많은 금과옥조를 남겼다. 그중에서도《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서방의 명언이 으뜸일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침묵은 어떤 압박감을 주는듯한 낱말이다. 로신도 대방으로 하여금 내막을 알수 없게 하는데는 침묵이 으뜸이라고 했다.    사실 적당한 때의 침묵은 일종 남다른 지혜로서 어떠한 연설보다 더 훌륭할것인줄로 안다. 그래서 침묵할수 있는 능력이 말할수 있는 능력과 동등하다면 인간의 력사는 훨씬 더 행복했을것이라고 했는가? 정말이지 경험은 인간이 자기의 혀를 지배하는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다고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같은 하잘것없는 사람의 인생경험이 누구에게 유조하랴만 침묵하지 않아서 쓰디쓴 맛을 본 못난 과거사가 있는것은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도 형편없이 어리석지만 말이다.    20여년전 늦은봄, 정치풍파가 모아산밑 마을에까지 미쳐《반혁명분자》들에 대한 토벌공세가 들이닥쳤다. 어느날 저녁, 집뒤 전선대에 달아맨 유선방송스피카아래 모기불을 피워놓고 식후일미에 취해있는데 누군가 격분한 소리로 시를 읊었다.  《나는 슬퍼하는데/ 요귀는 좋아하고/ 나는 통곡하는데 / 승냥이는 웃는고나/ 눈물뿌려/ 영웅을 추모하고 / 분노하여/ 검을 빼드노라.》    듣자마자 죽을 망녕이 들었던지 내 입에서 그만 감동이 툭 튀여나왔다.《헛참, 그 시 참으로 명작이로군!》하며 시를 아는체 으시대다가《아차!》실수 한번에 천고의 한이 될가봐 얼른 입을 닫으며 주위를 훔쳐보니 어둠속에 지켜듣는 귀가 있는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밤말은 쥐가 들었던가!한창 득세하여 날치고있던 반란대 장씨가 마치 대역무도한 큰 놈이나 잡아낸듯 문장을 만들줄이야, 잔뜩이나 잘난 출신때문에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여 쩍하면 내세워지던 처지라 입덕 한마당 톡톡히 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때 여러날 비판받으면서 그저《죽여줍시사.》하고 사죄해서야 겨우 관대처분받던 일이 어제같이 새삼스럽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가벼운 입에 자물쇠를 잠그고말았다. 말하자면《금(金)》을 간직했던것이다. 그런데《금》도 내게는 보호신이 아니였다.  《우경번안풍》반격전이 농가에도 백열화되던 때다.《번안》이란게 서쪽에 붙은건지 동에가 너부러진것인지도 모르는 로친네들마저 급선봉으로 나서서 비판에 열을 올렸다. 하건만 나는《재난의 문》을 서뿔리 열수 없었다. 그러자《침묵》도 문제로 되였다.《너는 왜 말이 없느냐? 무언으로 옹호하는게 아니냐?》하면서 언감《대리인》모자까지 막 씌워주는판이였다.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운다던가,    침묵이 절정에 달했을 때 당신은 말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한적이 있지만 그래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에게 엄청난 모자를 씌우는 그 인물을 얼없이 바라보며 그저 바보처럼 헤헤 웃을수도 없었다.    사람의 혀란 참 별난것이다.《반격》에 열을 올리던 그가《우경》어른이 다시 국권을 잡으시자 제사 충신인듯 영명하시다니 어쩌니 하면서 입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의 혀를 찬찬히 보았다. 아무리 보아야 한가닥인 사람혀였다. 지금도 고향마을에서 어쩌다 만나면 그의 혀가 지금은 몇가닥인가 속으로 헤여본다.    나는 입덕을 단단히 본 사람이지만 침묵에 정이 들지 못하였다. 처세에서 남에게 미움을 사고싶으면 입바른 말을 하고 남에게 환심을 사려거든 마음에 챙김이 없는 말을 하고 미움도 환심도 사지 않으려면 입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몰라서가 아니지만 그냥 입덕을 쌓으며 멋대로 살아간다.    자신이 이렇다 할 지자(智者)가 아니니 침묵이 스스로의 교오가 되지 못하고 또 무지하지는 않아서 침묵이 엄페물로도 되지 않아서일가, 그러나 패자의 무거운 침묵에서 은근한 새 도전을 보는것이 부럽고 승리후 침묵을 지키면서 은연히 겸손을 과시하는 그 인격이 우러러보인다.    한걸음 물러서서 보면 침묵이란것도 구체장면, 모종의 경우에 프리즘을 통과한 빛의 굴절현상 같은것이 아닐가고 제나름으로 분석해보기도 한다. 생존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침묵은 명지한 선택으로서《금》일진대 지신을 허위와 바꾸는 침묵은 인격을 땅에 처박으니 도금이 아닐가?   《침묵》이 자고로 수많은 소인배들을 평안무사하게 해주었다면 한편 침묵은 또 한 수많은 영웅호한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그러고보면 침묵은 변증법속의《모호개념》이 틀림없다. 진정 침묵을 지킬줄 아는이는 침묵으로 세상과 대화하고 침묵을 표방하는 간교한자는《침묵》으로 현실을 도피하는것이다.    나는 침묵보다 웅변을 좋아한다. 폭풍전양의 침묵이 가장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미구에 터지는 대자연의 웅변ㅡ노호하는 풍풍뢰우, 사나운 눈보라, 지심을 울리는 폭포의 굉음이 피를 끓게 해서 좋고 가슴을 울렁이게 해서 좋더라.    사자의 울부짖음, 볼을 타는 백호의 포효소리야 더 이를데 있으랴만 풀숲에서 벗을 부르는 베짱이의 속삭임소리도, 매미의 서느러운 낮타령도, 뭇새들의 지저귐도 생명존재의 제1표징이여서 듣기좋고 진실한 심장의 울림이여서 귀기울이고싶더라.    인간의 웅변이 대자연의 웨침에 비하면 너무나 무기력하지만 그래도 인간사회의 활력을 안아온다고 해야 하리라. 어머니의 신음소리속에서 태여나 울린 첫고고성은 이 세상에 고하는 첫도전이다. 만약 이 세상에 벙어리들만 산다면 얼마나 침침하고 울적할것이랴, 벙어리 랭가슴 앓기라고 쉽게들 비유하지만 그 답답한 속을 누가 알아줄것인가? 그네들에게 침묵이란 낱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조물주가 말을 하며 살라고 열어준 입을 두고도 사람소리 한번 못해보고 손짓발짓으로 제의사를 표달해야 하는 그 가슴타는《침묵》이야말로 피맺힌 비애가 아닐수 없다.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완벽화해주는 으뜸의 사항이 언어생 활일진대 그 복됨을 선천적으로 빼앗기고 사는 삶이 얼마나 애닲을가,    모든 번쩍거리는것이 금이 아닌것처럼 침묵일반이 다《금(金)》은 아닌것이다. 해빛이 비치면 먼지도 빛날수 있는것처럼 모종 침묵은 돋보일수도 있을테지만 그래도 녹쓴 쇠쪼각우에 도금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화옹이 입은 하나, 귀는 두개를 만들어준것은 말은 적게 하고 많이 들어두라는것이라고 로인들이 이르지만 나는 받아만 들이고 내보내지 못하는 사해같은 삶이 지겨운줄을 안다.    침묵이 그 누구의 삶에 안전계수를 높여주지만 웅변은 밝은 문명사회의 첫표징이 될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웅변만세이다.                                2000년 3월 9일
499    《문화》우환 댓글:  조회:5337  추천:0  2015-06-01
                                    《문화》우환      식자우환이란 말은 누구에게나 별이의없이 얼른 통하겠지만《문화》우환이라 하면 생뚱같이 웬 오리발을 내미느냐 마뜩잖아 할 분들이 꽤 많으리라. 부디 반기부터 들지 말고 먼저 문화의 의미부터 다시 씹어보자. 문화에 대한 정의가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각양각색인데다가 시대발전과 동보하여 새록새록 그 의미가 가미, 확충되 여서 한마디로 찍어 말하기 어렵게 되였다.    철학적견지에서 말하는 정의에 따르면 문화란 인류가 사회적, 력사적 실천과정에 창조한 물질적재부의 총체이다. 다시 물질적재부의 총체에서 고찰한다면 상하 5000년 을 두고 인류가 고안해낸 그 모든것이 문화의 범주에 속할수 있다. 아마 이런 리론적 견지에서 문화라는 개념이 범람하게 되였는지…    그러나 문화란 곧 문명과 등호로 되는것이 아님을 천명해 두어야겠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란 사회발전의 매 단계에서 이룩된 과학과 기술, 문학과 예술, 사회도덕과 풍습인것이다. 그래서 우선은 문화교류, 문화분야, 문화전선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것이다. 따라서 문화인이라 하면 언필칭 작가, 예술인, 교원, 과학자, 기자를 비롯 한 주로 무화부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또 그래서 개인리력서에 문화정도란이 밝혀져 그의 교육정도를 주명한다.    이런 차원의 문화에서《문》과《화》는 내재적통일을 이루고있다.《문》은 우아한 내용과 형식이고《화》는 교화에 힘씀이다. 더 부언한다면 문화란 곧 고상한 정신으로 사람을 부상시키고 심미적형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형식이다.    상업시대에 이르러 문화는 처음으로 대중의 소비사회에 리익을 도모하는 산업으 로 되여 일체 문화행위와 상업행위로 세화변질됨으로써《산업문화》,《상업문화》등 조작과정에 더욱 분화되였다. 하여 이른방《음주문화》,《성문화》,《연기문화》등 자계통을 이루었다. 개념은 외연이 커질수록 내연이 작아지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문화가 무슨 만능점착제처럼 아무데나 붙고보면 기실 그자체의 내포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는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문화》가 부르기좋은 개똥녀처럼 되여 무어나 다 문화의 계관을 쓰고있다. 이른바《온돌문화》,《변소문화》가 어쩌니 하더니 만천하에《문화》의 기분이 넘쳐나고있다. 모두가《문화의 흥성》을 보여주는 기꺼운 경상이라 하겠으나 이른바《김치문화》,《된장문화》란 박래어가 들어와 시골량반 통갓쓰고 읍거리에서 행세하듯 행세치례하다보면《개고기문화》,《양고기뀀문화》란 말도 서먹 서먹하지 않을것이다.     내친김에《문화타령》이나 엮어보자《저가락문화》도 좋고《신받치개문화》도 《위생종이문화》도 리유가 못설리 없다. 세월을 썩 거슬러 올라가서 문화의 뿌리를 찾는다면《상투문화》,《두루마기문화》,《버선문화》,《가마문화》,《화투문화》… 그 부지기수의것들이《문화》가 못될 까닭이 없으렷다.   《변소문화》가 잘 통한다면 무릇 변소에 들어앉아 신진대사를 하면 다 문화행위일터이고 곧《문화인》이 되는게 아니겠냐? 이렇게 따지면 미개인, 야만인이《로천변소》를 사용할줄 알면서 문화는 그때로부터 온 산에 꽃피운것이 될게 아니냐? 포크와 칼로《돈까스》인지 하는것을 점잖게 먹어야《음식문화》일가? 이발과 손톱으로 짐승의 생고기를 찢어 기아를 말리던 원시인들에게는 그게 문화행위가 아니던가?《인두마》를 마시고 산 원숭이의 대골을 파먹으며 별미라고 껄껄거리는 사람들만 문명사회의《음식문화》의 정영일수 없으 니말이다.    너무 극단으로 나가는 모르겠지만《변소문화》일 때 변기도 문화용품이 되는게 아닌가? 다만 그렇게 말하지 않을뿐이다. 주요하게는 문화란 고차원적인 개념을 너무 일상적의것에, 인간이면 다 하는 짓에 마구붙이지 말고《변소문화》따위로 오염시키지 말자는것이다. 금으로 만든것일지라도 요강이면 요강이지 그게 꽃병일리는 없지 않은가? 가령《쓰레기문화》란 개념이 성립된다면 뒤미처《청소문화》,《비자루문화》를 따라세워야 할것이니 너무 부담이 커지는게 아닐가? 이렇듯《문화쓰레기》를 자꾸 제조하는것은 현대문화에 먹칠하는것이고 또 무모한 짓이라 본다.    진정한 문화의 차원에서 문화를 꽃피우자. 그리고 담론하자!문화의 전파자는 우선 인격방면에서 심사해야 한다. 즉 문화속에서 정신적인과 별로 관계없는 잡동사 니들에 문화감투를 씌워준다면 문화의 본색이 잃어지고 온 지구에 넘쳐나는 그 모든 《문화인》과 문화인은 구별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문화란 개구쟁이가 이리저리 코 물을 씻다가 얼굴 아무데나 말라붙인 코딱지가 아니다.  《양복문화》란 말이 가당하다면 양복입은 강도도《문화인》이 될것이요《회뢰문화》,《수뢰문화》도 명분이 바르게 될것이니 회뢰명인, 수뢰명인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노란콩알 먹여서는 애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남이 장보러 가니까 섶지고 나서는격으로 누구네가 문화천지를 열고 문화멋을 내두르니까 덩달아《문화, 문화》하면 쓰잘것없는《문화우환》을 반들지 말아야겠다. 이는 문화의 타락만이 아니라 모독이다. 《만능문화》에서 나올 유익한것은 없다.                       2002년 10월 17일  
498    홀로의 풍경구 댓글:  조회:5256  추천:0  2015-06-01
                                 홀로의 풍경구       흔히 더불어 살며 둥글어 온 이 세상이란다. 옳다. 저마다 나름대로 느끼고 사 고 할줄 알게 되면서부터 인간의 심령세계에 적막과 고독이라는 홀로의 풍경구가 그 어지게 되였다면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의 정신풍경구가 아니면 반갑지 않은 심리오구라 할가?     쉐익스피어는 고독한자는 야수가 아니라 신령이라했다. 그리고 진짜 야수는 심산계곡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욱실거리는 곳에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니 누군가 스스 로 잠겨보는 고독한 세계라면 야성에서 잠간 해탈되여《신》의 경지에 이른것이라해도 어페는 아닐것이다. 그만큼 고독이라해서 다 공허가 아니며 더구나 무료함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여유로운 어느 한때 산마루에 앉아 락조를 바라보노라면 펼쳐지고 모여오늰 상념도 피같이 진하게 물드는듯싶은데 지각한 사랑처럼 아쉬운 석양이 잔뜩 클클해지는 가슴에 한오리 고독의 연기를 피여올리고 갑자기 절해고도에 떨어진듯 짜릿한 감구지회가 어떤 성스러움에 받들려질것이다.    혹 갈길은 먼데 날은 저물어 그냥 갈가말가 주저주저할제 산기슭 외딴집에서 새여나오는 한가닥 불빛은 때아니게 당신을 고독감에 푹 절어들게 할것이다. 혹 어느 려관방에 하루밤을 기탁한 타향나그네의 차거운 베개가에 꿈마저 서러울제 적막과 고독은 쌍으로 찾아들것이다. 그럴때엔 확실히 마음속에 어두운 골짜기가 깊숙히 패인다.    그러나 그 모든 감각은 대단할것 없는 수의적반응으로서 작막이자 곧 고독이 되겠지만 일단 새로운 자극속에 잠기면 바람에 실린 쪼각구름처럼 정감의 고개너머로 사라져버릴것이다. 이런 환영같은 적막, 고독과는 다른 차원의 정신풍경구가 있거니, 비록 한바구니에 실려갈지라도 도저히 엉킬수 없는 모래알같은 개체심령일바 하고는 가끔씩 혼자 있어보는것도 멋진 인생자세게 될수 있다는것을 당신은 믿는가?    혹시 너무 오래되면 세상이 나를 완전히 망각하고나 있지 않을가싶은 위구심이 생길수도 있겠지만 걱정할것 없다. 아무 방해없이 저 혼자의 정신경계를 가능껏 확충해갈수 있는 그 자의식의 절정ㅡ홀로의 정신풍경구에서 벌거벗은 자신을 포옹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런 자성적인 독릷성안에서 인격력량의 승화를 기약할 때 또 한가지 정신향수가 아니겠는가?     이른바 침묵속에서 수련하고 고독의 세례속에서 또 하나의 지혜의 쪽무을 열고《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이제 어데로 가려는가…》하는 인생숙제를 풀어간다면 자신이 더없이 근엄해질것이다. 이렇듯 지성인에게는 적막, 고독이 반성과 재선택의《련옥》이 되고 자기를 고스란히 지키는 정신보루가 될 때가 있다. 도시의 화단에서는 초라해보이는 영춘화가 심산속 벼랑가에 고즈넉이 피면 제격이듯이 홀로의 의미에 스스로 자긍할수 있다.    늘 쫓기듯 공리에 불안하고 누군가와 내기라도 하듯 조바심치는 마음에는 그런 고차원의 정신풍경구가 펼쳐질 빈자리가 있을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때문에 그런 사 람들은 조금 적막하거나 고독하면 풀이 죽어 맥살을 못춘다.    고독했던 니체의 고백이말로 너무 인상적이다.   《나는 추종도 염오하거니와 남의 길잡이도 싫다. 복종? 아니다. 통치? 절대 아니다. 나는 지배하는것도 싫고 충돌도 싫다. …야수처럼 무변광야에서 소요할것이다.》    이는 물론 천재나 위인들만이 할수 있는 적막이였다. 고독은 확실히 숙명이기도 하였다. 니체나 바이론같은 인간세상의 큰 별들은 끝끝내 세속의 리해와 용납을 받지 못하고 한가닥 눈부신 호광(弧光)을 남기고 총총히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서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고독으로 세속에 대한 천재식의 격분과 저주와《잔혹한 격정》을 쏟아낸 혜성들이 아니였던가?     지구는 돌고 광음은 재촉한다. 현시대 생활절주는 눈이 아찔하도록 급촉해졌고 저저마다 팽이처럼 돌아치며 공리에 다사분주하고 자극을 찾다보면 고독같은것은 고루한 샌님네의 막무가내한 피난소쯤으로 생각해버릴것이다. 그건 그들의 자유이다. 인생길은 제각기 걷는 방법이 다른 법이 아니냐?    우리는 우리대로 지성인들의 홀로의 풍경구로 돌아가자. 적벽가에 배띄워놓고 생황의 은은한 소리에 취한 소동파나《동쪽, 담장가에 국화꽃 따면서 남산을 유연히 바라보노라.》하고 읊조리며《도화원》의 리상세계를 동경하던 도잠어른의 높은 지조를 뉘라서 따를손가, 그들로 말하면 고독과 적막속의 또 다른 초탈은 절반은 고달픈 현실이였지만 절반은 신선의것이였거늘 어이 경이롭지 않으랴.    자고로 자재적인 지성 인들은 량지의 빛발아래 자신을 투시하면서 적막, 고독을 자기생명의 씨앗을 움틔우는 가원으로 삼아왔다. 가령 한 지자에게서 적막의 청정함과 고독한 성찰의 자유를 빼앗아버린다면 그 령민한 두뇌속에서 사색의 기계는 더는 지혜의 불꽃을 튕기지 못할것이다. 루쏘의《참회록》은 고독한 령혼의 부르짖음이 아니였으며 발자크의《인간희극》은 적막과 고독의 난산아가 아니였던가?    달리는 개꼬리를 밟으며 허둥대는 개구쟁이들은 적막과 고독의 경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은 어른이 되여서야 외로움을 느끼고 보다 성숙의 언덕우에서만 홀로의 정신풍경구가 어떤것인지 알수 있다. 그래서 정감상에서 고독한자는 인정세계가 광막한 황야로 느껴지군 한다.    사색의 왕국에는 적막이 드리워있고 고독만이 있다. 성가시고 까다롭고 피로한 삶의 현장을 잠시 떠나서 편한대롤 혼자 앉았을 때의 그 모습이 진정한 제모습으로서 체험하고있는 현실을 투시하는 리성자각의 기제를 찾음으로써  당신은 최고의 정신경계에 들어섰음을 기쁘게 느낄것이다. 한것은 그때야말로 리성의식이 크게 신장되고 자아에로 완전히 환원될수 있기때문이다.    끝내 자기를 알지 못하고 이중인, 삼중인으로 자신을 각색해나갈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이고 또한 종국적인 비애가 아니겠는가? 늘 욕망과 유혹에 끌리여 방종하면서 뜬구름같은 마음으로 세상이 영원히 파하지 않는 연회장이 되였으면 하고 바란다면 어디까지나 가면구를 써야 하고 꼭두각시극을 놀수밖에 없다.    농가의 처마밑에서《아침회의》를 하는 소란스러운 참새들은 기껏해야 좁쌀을 얻어먹을 의논에 시끌벅적할뿐이요 절벽강산에 고독을 잠재우고 만리창공을 오연히 날아예는 수리개의 슬기를 불가사의하게 여길것이다. 늘 수선을 피워대는 참새떼도 가긍하거니와 모는대로 떼지어 다니는 양떼들의 삶은 얼마나 비애로운 삶일가?    인생광장앞은《대동세계》여서 떠들썩하여 사는 멋이 무더기로 쏟아지는상싶다. 그러나 삶의 진실한 의미는 적막하고 고독한 인생의 뒤뜨락에서 반추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랴!동서고금의 모든 학자는 고독했고 적막속에서 로력적이였으며 바로 그런 홀로의 풍경구에서 인류문화의 정품이 창출되였던것이다. 더우기 고독, 적막의 주인은 예이제 철학자였다는것을 세인이 알고있다.    현대사회에 적막과 고독의 풍경구가 소실된다면 그것은 이 사회가  감각자극병이 들었다는 하나의 징표가 아닐수 없다. 신이 자초에 아담의 고독에 마음이 쓰이여 그이 갈비뼈로 만든 이브를 안겨준것은 잘한 일이기도 하지만 뱀이 이브를 꾀여 감각의 첫대문에 들어서게 한 그때로부터 그네의 후손들의 느낌은 곁길로 빠져버렸던바 이는 인간의 원죄의 시작이였다.    적막한 절간에 도승처럼 저마다 념주를 세며 적막을, 고독을 달래라는 말이 아니다. 홀로 있으나 세상과 대화하고  홀로있으나 온 세상을 품고있는 그 아량고 흉금을 아무나 가지는것은 아니다. 그냥 밖으로만 박고있던 눈길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향해 투시해보라. 그것을 결코 자신을 자신속에 가두어두는 외로운 세계가 아니라 고독한 그속에 인격이 여물어가는 진실된 정신풍경구이다. 그래서 나는 고독을 찬미한다.    자족이 주는 쾌락과 안일이 주는 라태에서 헤여나와 사색세계의 부지런한 로동자로 되여보라. 감성적인 자기와 리성속의 자신을 마주앉혀놓고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현자의 모습이 얼마나 우러러보일것이냐?                            2002년 2월 26일     
497    기다림의 미학 댓글:  조회:5697  추천:0  2015-06-01
                                기다림의 미학      당신은 어떤 기다림끝에 가슴가득 마연자실의 재티가 쌓여본적 있으신가? 참으로 못견디게 절절한 기다림이라면 그것이 곧 생명의 연소이며 인생의 소야곡이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만큼 분침이 게을러보일 때가 없을것이며 그대로 예리한 바늘이 되여 가슴을 아프게 찌를 때가 없을것이다. 그런 기다림은 막무가내한 자기 학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기다림과 등지고 살수는 없다. 우리가 탄 인생렬 차는 크고작은 무수한 기다림의 역에서 실망을 부리고 새 희망을 싣고 달려가기 마련이다.     어릴적 개눈깔사탕을 사준다며 빈 집에 남겨두고 장보러 간 어머니를 해가 지도록 동구밖에서 지켜섰던 그 기다림은 지금 생각해봐도 미쁜 기다림이 아닐수 없다. 초침을 헤아리며 님을 기다리던 그 밤의 기다림은 그 많은 못잊을 사연들과 더불어 생활의 별책(别册)을 이어준다는 의미에서는 더없이 소중하기도 한것이다.    저 유명한 베케트의 황당극《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들처럼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그저 소극적인 시간의 헤아림이지만 생사존망과 관계되는 목마른 기다림은 원망고 초조함으로 절어있기에 아무리 독실한 신다라도 하느님까지 곁들어가며 푸념질할것이다. 그러다가도 바라던것이 마침내 오고 이룸과 만남의 꽃다발이 안겨지면 그 모든 괴롭던 마음은 바람앞의 구름처럼 사려져버릴것이다.    기다림끝에는 또한 무지개같은 현란함만 있는것이 아니다. 기다림의 저쪽에 혹《어부의 이야기》에서처럼 바다마귀같은것이 나타나 당신을 아연실색하게 할수도 있다. 마음의 기둥이 밑뿌리채 흔들리게 하지 말라. 생명의 상록수엔 아직도 희망의 열매가 달릴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가, 남들이 모두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고 기쁘게 들 떠날 때 한 청년은 기다림의 한끝까지 가보지 않고 그만 자기를 포기해버렸다. 운명은 결과적으로만 아니라 과정으로도 인간을 희롱하기 일쑤다. 그 청년이 자살한 사 흘만에 그 운명적인 대학입학통지서가 왔다. 그러나 기다림의 락제생이였던 그 청년은 이미 인생학교에서 자퇴해버렸으니 그저 애석하다 해야 할가?    어떤이에게는 또 기다림이 절주 빠른 선률처럼 고조를 이루다가 저조에 들어가면서 불협화음을 연주할수도 있다. 훼멸적인 충격파로 되여 자칫 가느다란 희망의 빛마 저 쓸어버리기도 하는것이다.  《희망에 들어서란 바보라도 령리하나니/실수는 반병신이요 락심인즉 천치니라》는 옛시조가락 한번 되새겨보라. 절해고도에서의 로빈손의 기다림은 처절한 인생박투였다. 하지만 그렇듯 강한 끈질긴 기다림이 마침내 숙망의 귀국선을 불러오지 않았던가! 로빈손이야말로 기다림의 강자, 자기 운명의 지배자가 아니겠는가?    기다림은 확실히 인생예술의 일종이다. 기다림은 결코 나무밑에 앉아 두번째 토끼가 뛰여와 죽기를 기다린 송나라 사람의 그런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은 한사람의 의지와 감내력을 벼리는 모루이며 인격적 성숙도를 표지하는 눈금이기도 하다.    마음속에 륙도삼략(六韬三略)을 지니고 앉아서도 벌써 3분천하의 웅대한 구상을 끝내고있었던 천하기재인 제갈량이 와룡강언덕에 밭갈고 풍월을 읊으며 기다린것이 과연 무었이였던가, 비록 류비가 삼고초려(三顾虑) 하여 간청했기에 산을 내렸지만 결코 륭중땅에  숨어있던 와룡이 중원을 휩쓸며 나래칠 천시(天时)는 아니였던것이다. 마침내 당대의 명주였던 류비를 받들어 3분천하 하고 대업은 이루었지만 통일대업은 이루지 못하고 그것으로 마침표를 찍을수밖에 없었으니 불우하다고 해야 하리라.    기다림과 포옹할 아량을 지니라. 기다림의 고험을 이겨낼 사람은 비바람 사나운 밤 갈림길에서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찾아낼수 있다. 기다림은 비장한 기대감이며 아름다운 풍경선너머 신비한 약속이기도 하다. 판도라가 닫아버린 전설의 상자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것이 희망이였다는것을 명기하라. 상하5천년 인류의 영속은 바로 희망에 대한 기대감과 기다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것이 아니랴. 기다림에 지겹더라도 언젠가는 뜨거운 만남과 아름다움이 반겨줄것이다. 기다림끝에서 환희를 느낄 때 당 신이 기다림에 소모한 생명도 보람찬것이며 그지없이 아름다운것이다.    깡그리 타버린 재무지속에서 일체 공리가 소실되고 허무만이 남았을지라도 당신은 자신의 생명체의 실존의미를 기쁘게 발견하고 우주와 함께 흔들리는 이 삶의 마당에 튼튼히 버티고 서있다는 자각만도 소중한것이 아니랴.    변화다단한 인생길에 기다림의 역이 없었다면 너무나 피로한 길일것이요, 그 촉박함에 늘 숨가쁠것이다. 기다림이 기다림을 마중나선 길에 실망이 막아서더라도 주저앉지 마시라. 또 다른 기다림의 새 언덕에 올라 마음 넉넉히 잡고 이마에 손을 얹으시라. 인생의 굽이마다에 생화가 피지는 않더라도 그 길로 래일이 오리라.    당긴채 놓아둔 활처럼 팽팽하게 휘여져있는 마음이라면 기다림이 높낮은 고개고 개를 넘을수 없다. 더 멀리 뛰기 위해 몇걸음 물러서는 그 자세도 기다림의 한 자세이다. 기다림이란 바로 생명운동의 일종 방식이다. 확고한 기다림속에 많은 성공들이 잉태되고 한차례 또 한차례의 기다림은 생명의 승화가 될수도 있다.    맨 나중에 제일 통쾌하게 웃을지도 모르니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 그리고 자기를 가다듬어라.                               2000년 10월 10일
496    생각에 느낌이 따라 (81-84)오월의 서정 외 3수 댓글:  조회:5825  추천:1  2015-05-22
                       (81)   오월의 서정                                       야 조                                                          청자빛 하늘이 좋아                             그린듯 멋지던 구름                             모아산 산정을 날고                               연초록 바람이 불면                             뻐꾹새 뻑뻑꾹 울고                             종다리 높이떠 지종                               농사일 하도나 바빠                             모른채 스쳐간 풍경                             지금은 아쉬운 서정                            (82)     내가에서                                    야 조                           물은, 흘러서 내리는 물은                              저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리여 흘러서 흐릅디다                                         낮아서 좋다고 주절주절                           흐르나니 이같을진저                              공자님 가라사대 있어도                                    내 마음은 거슬러 높은데로                                          자꾸 흐르는걸 어찌하오리까                           욕망은 바다로 깊어 팽창하는데                               이룸은 더 높은곳에서 춤을추니                                     흐르는 물이 좋다고 감탄표를                                           찍지나 말것을 그럼니다려                           봄여름, 가을저녁 기분좋은 때                               강가에 나앉아 련달아 흐르는                                     물결에 열한번도 더 물어도 봅니다                                           마음을 왜 낮게 가져야 하느냐?                           드틸줄 모르는 먼산은 말이없고                               작정하고 흐르는 류수는 나는 간다                                     날잡아라 저 아래 또 아래로 간다                                           싫거든 따라오지 말라고 합니다려                             83) 귀뚜라미                                    야 조                               가을이 왔노라고                             가을이 깊어간다고                             찬이슬 풀서리속에서                             귀-뚤 울어싸는 귀뚜라미                               울다가 조금 참는체                             하다가 못참아서 외마디 귀뚤~                             농가의 소야곡이던 귀뚜리소리                             어서오라 짝불러 밤패던 숫귀뚤                             우직한 놈은 긴긴밤을 톺질하는데                             약은놈은 한 30초 잠간 우는체하다                             유혹에 끌려온 암컷 먼저 재끼는                             귀뚜라미네 로맨스를 미처 몰랐네                                     (84 ) 가을볕이 좋던 때                                              야 조                                      서풍 부는 늦가을이면                                          양지라 가을볕만 찾아들며                                    추위타던 시절이 있었더라오                                      잠시잠간 구름속에                                          해가 숨어버리면 서운해서                                    구름에 종주먹질도 하던때라                                      그때는 부모님들 악착같이                                          부지런 피우며 일만했는데                                     가난은 어이 서풍에 떨었던가
495    고향산별곡 댓글:  조회:6968  추천:0  2015-05-21
                                      고향산별곡      내 태줄을 묻고 잔뼈를 굳혀온 고향산ㅡ 비암산은 타관땅세 살아오는 동안 가끔씩 꿈속에서도 찾아보던 그리움이였다. 이 봄, 비록 금의환향은 아니래도《꼬마작가》들의《왕》이 되여 희희락락 떠들며 오르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4월의 동화가 아기자기하게 엮어지는 산경은 정겹기만하다. 동장군이 태쳐놓은 어수선한 자리에 봄아씨가 따스한 입김으로 진달래꽃 수집은 꿈을 터뜨려놓고 아지랑 이를 불러내느라 이 산 저 산에서 너울거린다. 《선생님, 빨리요!》    춘색에 취해 걸음이 떠지는 내 손을 잡아끌며 종달새처럼 들까부는 아이들, 나는 이 아이들 기분에 신이나 동년을 찾은듯싶었다. 40년 긴긴 세월의 허리에 그리움을 칭칭 감으며 머리속에 웅자로 받들어올린 고향산, 산은 옛산이로되 만단회포속에 새롭게 치솟아오른다. 산은 높이만큼 뿌리도 깊었던가, 세상은 겉으로만 보지 말고 속깊은 소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침묵으로 가르쳐준 성산, 고향산은 그리서 좋았다. 나무들이 잎을 더디게 피운다고 풀벌레들이 늦게 눈뜬다고 조바심치지도 않았다. 안개가 제 몸을 휘휘 감싸 멋진 모습을 가리워도 불평이 없었고 눈보라 휘몰아쳐 바위를 얼구어도 가슴 깊은곳의 푸른꿈 한번 흐트러뜨린적이 없었다. 고향의 산은 그렇게 천년을 만년을 살았을것이다.   《야, 진달래꽃불 타번지다.》    아이들의 환호성에 상념에서 꺠여나 바라보니 고향산을 불태우는 진달래꽃 꽃무늬속에 딩굴던 그제날이 선연히 안겨오는듯싶었다. 진달래꽃 꺾어 꽃집을 짓고 메싹을 캐여 밥을 짓는다며 능금볼 태우던 소꿉동무 성여랑도 이 산을 잊지는 않았을것이다.   《야호 ㅡ야아ㅡ》하고 웨치고는 메아리에 귀 기울이고 선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이 또 추억을 말아올린다.    조롱조롱 쪼르르 물매듭진 아침이슬에 잠뱅이 적시며 숨이 턱에 닿아오르다가도 싱싱한 풀밭에 벌렁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면 바다같은 푸름속에서 풍덩 뛰여들어 스 윽스윽 헤염도 쳐보고싶던 그 시절이 산버들가지에 봄물이 오르듯 생생하게 살아난다.    정겨운 고향의 쪽빛하늘아래로 쏟아지는 추억을 녹이고있는데 산의 묵은 가슴을 어루쓰다듬듯 산바람이 어서 산정에 오르라 옷자락을 잡아끈다.   《선생님, 이슬!아직도 이슬이 반짝이여요…》    깜찍한 계집애가 구슬이라도 주은듯 나무이파리에 맺힌 이슬을 보고 감탄한다.   《오, 간밤 아기별이 흘린 눈물이겠는데 해님은 왜 훔쳐주지 않았을가?》   《나무잎이 입을 꼭 물고있어 못본거죠. 아니, 살짝 건드렸더니 꼴깍 삼켜버렸 네.》   《그게 바로 시로구나. 》    뒤따라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늦잠에서 깬 산새들이 놀라서 포르르 날아가버린다.    저쪽에서 어느새 아름차게 진달래꽃을 안은 한 소녀가 방실거리며 뛰여온다. 꽃다발이 그대로 안겨오는듯 현란하다.   《꽃속에 묻힌 너도 그대로 꽃이구나. 넌 그걸 시로 쓰렴.》   《야, 난 꽃의 시를 찾았다.》    날듯이 기뻐하는 그 모습에 사내애들은 시샘이난듯 오구구 산벼랑에 치달아오른다. 구름이라도 잡을듯 한껏 두팔을 뻗치고 아찔한 벼랑가에서 짜릿한 자극을 맛보는 그애들, 그것은 푸른 하늘에 훨훨 날아오르고싶어 퍼덕이는 날개가 아니겠는가,    저저마다 가슴속에 서정을 잡아 머리에 봄날의 산수화 옮겨가는 애들의 불타는 모습이 너무나 대견스러워 내 마음도 오래도록 설레임을 멈출줄 몰랐다.                                      2001년 11월 20일  
494    나의 산노래는 댓글:  조회:4992  추천:0  2015-05-21
                              나의 산노래는      산이여, 우뚝 치솟아 면면한 련봉이여, 너는 조화옹의 가장 위대한 걸작!게으른 안개, 구름을 털어버리고 웅자를 드러내면 네 기상에 절로 허리굽혀지는구나.    철철철 흐르는듯 짙푸른 숲에 꽃사슴은 아니보이고 남의 둥우리에 알을 낳아버리고 온 뻐꾸기만 구슬피 우는데 네가슴에 아이처럼 안기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산곡간에 흐르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사라져버린 풍경선과 아지랑이같이 사라진 보고싶은 얼굴들이 혼자 그리워져라. 가슴으로 그리워져라.    날리는 세상, 벌레같은 내 인생이여서 잡다한 소음, 혼탁한 사람냄새, 흐린 물결같은 인파속이 싫어 네가 부르는듯 혼자 찾아왔구나. 푸른산속에 팔베개하고 누우니 사무한신(事无闲身)인데 한나절 구름이 가고 해가지고 바람도 자고 눈물이 말라도 다시 밝을 빛나는 아침이면 싱싱한 이슬을 사뿐 즈려밟으며 시골 큰애기님네 버섯따러 총총 달려올가?    현대물질문명에 체증이 생긴 도회지의 유한선생이 되여서가 아니다. 메말랐던 내가슴 너와 마주서면 가슴이 흐느끼고 너의 눈높이만큼, 무게만큼 무엇이 마음속에 뿌리내리는 그 뿌듯함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네 억센 어깨를 딛고 오르면 나는 더 왜소해지건만 정은 오히려 만산에 이어진다. 산아!너를 찬미하려면 세상을 겉으로만 보던 그런 스치는 눈길로가 아니라 안을 꿰뚫어보는 속깊은 마음을 가져야 함을 나는 썩 후에야 알았다. 벽계수는 움직이며 정을 흘려도 조용히 마음을 키우는 산아, 나더러 말없이 살라하는 그뜻 고맙다.    자기품에서 나무들이 더디게 움트거나 풀벌레들이 눈을 늦게 떠도 조바심치지 않는 그 참을성에, 얄궂은 안개비가 네 아름다움을 흐리워도 묵연한 그 아량에, 눈보라치는 겨울 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려 봄을 불러오는 그 사색적인 자태에 감격스럽다. 높아도 으시대지 않고 낮아도 기가죽지 않고 어깨에 어깨겯고 의좋게 살아온 그 정조에 탄복한다. 그렇게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너는 이 지구우에 유일하게 오염되 지 않는 영원의 청탑이다.    네품에 아이처럼 엎드리면 미움도 욕망도 명예도 허위도 다 털어버리고 순수의 사랑을 하며 누구누구와 더불어 진솔하게 살고싶어진다. 아마도 나무들이 내쉬는 푸 른 숨결에 먼지낀 내 마음 려과되고 아침 맑은이슬이 눈동자처럼 빛나서 어둡던 가슴구석이 밝아지는가보다.    허나 산에 태줄을 묻고 산에서 잔뼈를 굳혀 반평생을 살때는 어이하여 그런 서정과 랑만은 다 도망가버리고 기겨웁기만 했던지…한생을 이 산과 저 골령에 묻혀사는 산사람들과 묻지는 말아야지. 그네들은 썩전에 랑만따위에는 무감각해졌고 진저리치고 있는줄 알고있다. 좋은 음식도 늘 먹으면 보통음식ㅇ이 되고 나중에 싫증나듯이 그 네들도 산에 진절머리나있을테니까,     패기기 넘치던 그때 절당같은 시골학교에서 종을 쳐 에들을 불러들이고 글을 가 르치고 좁은 운동장에서 술래잡기도 하면서 살겠노라고 트렁크 하나 댕그랗게 들고 찾아들었던 마래골이였는데 토배기《훈장님》들은 그게 다 뜬 구름같은 풋생각이라고 비웃었다. 그 말이 들어맞았다. 3년이 못되여 내눈길은 구름이 건너간 오랑캐령을 자 주 더듬었다. 마침내 사은 무게만큼 나를 짓누르것 같았고 산의 뿌리만큼 내 가슴에 적막이 뿌리내렸다.     나는 끝내 산을 등졌다. 가지말라고 진달래, 나리꽃 꺽으며 함께 산의 작문, 물의 작문을 짓자던 소년소녀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오랑캐령을 넘었다. 그러고서도 10년 후 산뜻한 시내애들을 데리고 다시 한왕산에 올라서 산의 매력이니 하면서 낯간지러 워하지 않고 지껄였다. 하지만 산은 이 불청객을 기억하는지 마는지 바람만 몰아다 로송의 더위를 말려주고 백바위는 씁쓸히 침묵을 지켰다.     그래도 옛노래가락은 잘도 떠올랐다.《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내가에 다리를 놓고/ 길잃은 길손 건네게 하며/ 봄이면 버들피리 꺾어불면서/ 물방아 도는 래력 알아보련다.》하고 해탈이니 빈 마음이니 하는 류행어에 곧잘 동조하는 심정에 따라 명가사를 흥얼거리니 우습지 않으랴., 황차 산을 즐겨도 기화요초 란만 하고 십이곡방에 풍류가 번화한 봄산이나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의 산만을 찾아 소풍 하는 자세로서 어찌 가사에 담긴 그 깊은 함의를 몸으로 옮기랴, 결국 나는 산을 겉으로만 안고 돌면서 흰소리나 친데 지나지 않은것이다.    옛날 로승들이나 도사들이 이른바 속세를 피하여 심산의 큰 절에 들어가 종을 치고 념주를 세며 도를 닦은 그 한생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에로의 회귀라 할수 있고《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라고 부끄럼없이 읊을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그들이 추구하는 자연은 심령의 결백을 얻기 위한 자연이요, 사치한 랑만이 없는 자연속에로의 회귀이기때문이다.    도회의 혼탁해진 문명가 청산속의 결백함, 이 두가지 가운데서 한가지를 선택하라면 나자신은 전자를 택할것이다. 무덥고 목이 마를 때 제격인 시원한 얼음과자이지만 주식이 될수 없다는 가치관념처럼 대자연이 아무리 아름답고 매혹적이라도 구경에 그치는것이요, 더 현실적이고 실혜적인 흡인력은 그래도 공장연기가 자욱한 도시에 있다는 가치추구가 나를 굳혀놓는것이다. 모르긴해도《정든 땅 언덕우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꼬면서/ 새들이 우는 래력 알아 보련다》하고 노래 지은이도 그때에도 시골보다 좋았던 도회지사람이였을것이다. 《산이 좋아 산에 사는 산사람》이라고 읊었던 시인도 시골농민은 아니였던듯이 말 이다.    여북하면 소새끼를 살찌우겠거든 산골로 들어가고 사람을 만들겠거든 버덕으로 나가라는 말이 지금도 항간에 떠돌고있겠는가, 아닌게아니라 산사람들은 천방백계로 산골을 빠져나오려고 한다. 살기가 힘겨워, 자식들을《사람》을 만들어보려니까, 반대 로 도시사람들은 한가함을 달래고 정서와 정감을 윤색하고저 산을 찾되 명산, 승경만 을 골라잡는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 삶의 풍경선인가, 산에 오르는것은 결코 가로수 휘늘어진 아스팔트 유보도를 산보하는것처럼 개운한것은 아니다. 허지만 행복해서 찾아하는 고생은 아름다운것이다.     경치좋고 아늑한 산골의 풍치에 취할 때면 나도 곧잘《초가삼간 집을 짓고/ 정든 님고 둘이 살짝 살아가는》목가적인 생활을 동경하지만 정작 다시 호구서껀 떼가지고 솔가하여《입산》하라면 정배살이로 락담실망할것임에 틀림없다.    도시사람들이 산을 좋아하는것도 사실이고 또 나쁠게 없다. 그런데 명산대천도《정복》하여 개발해버리고 호텔같은것을 통채로 옮겨놓고 편안히 자면서 만포식한후 현대교통도구로 산을 만유한다. 20여년전 백두산천지에 오를 때 그 아슬아슬하던 감각과 스스로의 장함에 가슴 울렁이던 환희를 지금 다시 찾을수 없다. 잘 포장된 도 로에 승용차까지 타고 산정에 오르니《험한봉이여 네 아슬함도 등산자의 발밑에 있노라》하고《장부의 호연지기》를 크게 읊조리기에 앞서 어린애와 달리기를 하고 이기기나 한것같은 싱거움만 그들먹해졌다.     밤, 산아래 고급호텔의 창가에 명멸하는 불빛이 원시림의 천년어둠을 찢고 꽝꽝 울려나오는 쟈즈곡에 밤새 울던 옛풍경선도 색바래지였다. 저절로 솟아 반가웁던 온천도 돈때국에 식어버린듯 서글프다. 하긴 의식주가 걱정없고 로고도 없으니 시의 (诗意)가 현대파적이긴 해도 심령해방이란 말은 어째 격에 맞지 않았다.    원래 고독한 산은 고독하기에 고독한 사람들이 그 깊은 속을 알아주려 하지만 가벼운 소풍식 산구경은 시내변두리의 야산이나 찾으면 제격일것이다.    산행은 도회지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의의있고 흥겨운 일이다. 그러나 산에 살던 사람들이 도회지문명의 물결속에 합류하려면 어렵고 어렵다. 지금 나자시는 산을 등 져버린 유복한 사람들에 속한다. 하지만 진정한 산노래는 영영 부를수 없게 되였다.    사람들이 어찌 행하고 어찌 생각하든지 산은 제 성미대로 계절마다의 멋을 가꾸면서 산행자를 반기고있다.    산아, 내 마음의 요람아, 다시 보자!                                2004년 8월 20일
493    고락의 변증법 댓글:  조회:5037  추천:0  2015-05-21
                               고락의 변증법       인생은 무변고해라는 옛로인들의 교훈이 있고 반대로 고진감래(苦尽甘来)라는 말도 있으니 초로인생에 성씨를 단다면 고(苦)가 돼야 하나? 락(乐)씨가 돼야 하나?    인생고를 뜻하는《고》에는 고생, 고난, 고역, 고뇌, 고통 등 정신적육체적인《고》가 들어있겠으나 결국《괴로움》에 모아지고 인생락을 가리키는《락》에는 환 락, 쾌락, 영락, 오락 등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겠으나 역시《즐거움》에 귀결될것이다. 파란만장한 우리네 인생에서 락이야말로 제한된 삶을 완벽화하는것이여서 저마다의 가치척도로, 추구로 되여있다.    살며 느끼는 인생은 비극이요, 생각하는 인생은 희극이라고 누가 말했던지, 그래서 바랄수는 있어도 오를수는 없는 천당이라는것을 환상해내고 아직 누구도 가보았다는 사람이 없는 지옥을 고안해 내였을게다.    그러나 동경은 동경에 머물고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지속되나니 무릇 숨쉬는자에게는 고통이 있고 생각하는자에게는 비애가 있다.      성경에 이브가 금과를 훔쳐먹은 죄로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날때부터 인류에게는 고생무이 터져서 남자는 밭갈고 녀자는 길쌈하고 남자에게 몸바치고 아이를 낳는 피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고 쓰고있다. 그 얘기가 비록 신화일지라도 아무튼 인간은《고(苦)》와 숙명적인 인연을 맺았다고 해야 하리라. 이른바 흥진비래요, 고진감래이니 아마도 우리 인생의 성은 두자성인《고락》이라 하는게 적절할것 같다.    고와 락의 관계는 동전의 량면과 같아서 고락의 의미는 대응되는 량면에 대한 각자 소감의 차이에서 현연되는것으로서 모두가 추구하는 락이란 실제상 차일시 피일시라 지구촌 수십억 인간들로 말하면 수십억개일수 있다. 말하자면 나의 쾌락은 이때의 여기에서 느껴질수 있고 당신의 쾌락은 그때의 그곳에서 선택될수 있다는 말이다.    아담과 이브는 고통을 알기전에 향락에 젖어있었는바 인류는 그 향락의 유전인소를 고스란히 받아안았던것이다. 하여 소수의 놀고 먹는자들이 다수사람들의 고통우에 안락궁을 짓고 향락에 질탕거렸다. 현대에 와서는 더구나 고기술적으로 락이 창출되고 그 차원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있다. 사람은 저마다 락을 추구하게 마련이니 락을 두고 왈가왈부할것은 없으되 문제는 물극상반(物极相反) 의 변증관계가 전혀 망각되고있는 그 점이다. 희망에만 매달려있는 사람은 꼭 실망하기 마련이고 극도의 쾌락이 지나간 자리에는 극도의 비애가 들어앉는다지 않는가, 하지만 말을 타면 소수레를 타던 때를 잊어버리고 자동차를 타면 말타던 때의 희열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 현대인이다.    고대희랍의 륜리학자인 니코마코스는 쾌락을 정신적인것과 육체적인것으로 나누어서 론하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락은 거개가 촉각에서 오는 실제적향락으로서 크게는 식도락이나 섹스같은것을 첫손으로 꼽을것이다. 이에도 단순성분의 락과 혼합성 분의 락이 있다. 례하면 강간범의 광란적배설만족에서 오는《락》은 동물적인것에 불과한 단순성분의《락》이다.     자고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배꼽이 깊이 패인 탐관오리들이나 오늘의 허울좋은《충복》들이 나라의 거금으로 롱탕치면서 만끽하는《락》은 곧 악마의 향연과도 같은것으로서 문명의 허울을 쓰고 붉은 외투밑에서 감행되는 혼합성락이다.     정신적쾌락에는 인류공영의 위업을 이루어 명예를 얻거나 학문을 탐구하거나 하는데서 오는 락이 들어있다.     그런데 인륜지락의 복지는 인간의 본능적인 쾌락이 거의다 점유해버리고 말아서 정신적인것이란 별로없다. 인간의 원죄와 비애가 여기에 있는것이 아닐지? 어찌하여 인간은 육체적, 본성적쾌락에 기울어져버렸는가?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육체적쾌락을 지향해왔고 누구나 다 경험해보았기때문이라고 고대희랍의 철학자 니코르마코스는 해석하고있다.    어찌되였든간에 쾌락은 생활고를 제거하는데 유일한 령약임에는 틀림없다. 무시로 인간고를 겪고있는 세속의 중생이나만큼 락을 갈구하는것은 당연한 권리이고 응당한 선택이니 더욱 그럴수밖에, 고난이 인간에게 숙명적인것이고 원초적인 결핍일 진대 바로 그때문에 그 결핍을 충족시키는것이 쾌락인것이다. 먼저《고》가 있기에 후에《락》이라는것이 인간의 정감사전에 새겨졌다. 유감스러운것은 락이란 안개같은 것이여서 곧잘 사라져버리고 고통의 토양에서 자란 추억의 나무만은 상록수로 뿌리가 깊은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이다.    우리 모두는 모체가 가장 고통에 모대길 때 이 세상에 나왔다. 울음으로 시작한 인생은 이런저런 인간고의 련속이고 마감에는 역시 죽음이라는 고통으로 한생에 종지 부를 찍게 되여있다. 그런데도 인생고의 일면을 외면해버리고 락만 내내 누리기를 바란다면《사회색망》으로서《고통》의 포로로 될수밖에 없다.    지위와 명예와 권력과 금전만 있으면 쾌락한 인생이라고 자처하는 총명하고 유식한《사회색망》들이 우리 주위에 날로 많아지고있다. 외국속담에 무식하 멍청이보다 유식한 멍청이가 더 심한 멍청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당장 먹고 살 근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고생을 락의 전제라고 말한다면 창백무력한 설교가 되겠지만 참으로 티끌세상의 고해를 헤쳐나오느라 갖은고난을 겪었다는것은인생에 승화를 가져왔다는것을 의미한다. 생명이 훼멸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해 낼수 있는 인간고는 모종 의미에서 무형의 재부이다. 고락은 결코 인생마당에 단선경주로처럼 금이 그어져있는것도 아니다. 고난속에 굳어진 근육은 순발력을 산생할수 있으며 인간고속에 제련된 사상은 그후의 향락열을 식혀줄수 있다. 인간고속에서 피와 땀의 세례를 받은 령혼은 허황한 잠꼬대를 하지 않으며 그 인격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감히 인간고를 정시할수 있다면 그것은 삶의 용기의 표현이며 그것 과 감히 맞서려는 심리자세가 갖추어졌다면 현실적인 인생기술을 닦은 대장부의 길에 올랐다는것을 의미한다.    옛사람이 고생을 회피하는 사람에게는 고생이 평생을 따라다니지만 고생과 동반 하여 끈질기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고생도 절로 알고 반생만 따라다닌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도 못산다는 금언을 남겼을것이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쾌락도 없고 영구한 고생도 없다.《천당》에 오르느냐 《지옥》에 굴러떨어지느냐 하는것은 그의 인생행각에 달린것이고 그 자신의 됨됨이와 인 격저력에 달렸다. 이 도리를 깨우쳤을 때 그는 비로소 살기시작한것이다.    오늘 잘살고 못살고로 인끔을 가를수는 없다. 저속한자의 쾌락은 어디까지나 감성적이고 동물적일테지만 지성인들의 쾌락은 정적인것에 가까운것이다. 사유와 독서같은데도 육체적, 자극적쾌락에 짝지지 않는 제나름의 쾌락이 있다. 진정한 인생지락은 재래로 조용하고 담박하며 결백하고 진솔한 삶을 가꾸는 그런 보통인들의 가슴속에 머물러있기를 더 좋아하는 법이다. 오래 지속된다 해서 그것 이상으로 완성되는 법이 없으며 그저 순간순간으것일뿐이다.    부정축재로 누리는 락에 깃든 속썩은 한숨을 우리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 들을수 있다. 세상에 깨지 않는 악몽이 없는것처럼 파하지 않는 잔치란 없는것, 한때 일세영달하고 부귀속에서 이른바 락을 누리다가 철창속에서 늦고생을 하사받은 재미란 뼈저릴것이다.    행복이 쾌락을 낳을수는 있겠지만 모든 락이 곧 행복과 등호인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면 나중에 울음이 터진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좋을 때 자기를 자제하는것이 곧 바람직한 일이다.    지금 어렵더라도 깔깔한 인생고의 모래알속에 삶의 금싸락이 있을수 있다.그것을 소중히 여기여 열심히 금싸락을 이는 그런 사람에게 락이 차례지기를 기대해본다.                               1999년 2월  10일   
492    낚시질과 인생 댓글:  조회:5160  추천:0  2015-05-21
                           낚시질과 인생      태초에 낚시를 만들어 고기를 낚은 사람이 누군지 고증할수는 없으되 낚시질하면 제잡담하고 먼저 떠올려지는것이 강태공의 낚시질이다. 아마도 천고의 미담으로 전해 내려온 그 괴이한 낚시질때문인가보다.    강태공은 기원전 11세기의 사람으로서 이름은 상(尚)자는 자아(子牙)인데 후에 사람들이 태공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바람이 부나 비가오나 하루같이 위수가에 나앉아 미끼도 없는 곧은 낚시를 던져놓고《태공이 낚시질하오니 원하는자는 물릴지어라.》하며 고기가 물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취옹의 뜻은 술에 있는것이 아니라 흉중에 륙도삼략(六韬三略)을 품고 그가 80고령이 다되도록 끈덕지게 기다린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기회였다. 마침내 하늘이 점지하였는지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널리 구하던 주문왕이 태공씨를 찾아 위수가에까지 왔다. 실로 고목봉춘(古木逢春)이랄가, 일개 어옹으로부터 일약 승상으로 추대되여 나라의 기틀을 잡고 후에는 상나라를 멸하여 800년 주나라강산을 확립했으니 곧은 낚시로 지인지감(之人之感)을 낚고 청운의 뜻을 낚은 셈이였다. 그 배포유하고 운치있는 인생자세는 후세의 록록한자들 이미칠바가 아니다.    물질문명의 현시대 유한계층속에서 류행되는 낚실질은 주말의 한가로움을 장식하는 일종의 생명운동으로, 하나의 생활풍경으로 되였지만 본인은 여유로운 삶의 정취를 느끼지 못해서인지 여태껏 참대꼬챙이 한번 쥐여보지 못했다. 그래서 낚시질애호가 친구는 나를 살줄모르는 빈충이라고 힐난했다. 그 친구가 역설하되 물이 깊은 어느 강가의 풀그늘에 낚시를 던져놓고 여유작작하게 앉아있노라면 그 청정하고 도고한 기분속에 시간도 멈추어진듯싶어 또 다른 삶의 묘미를 체험하게 된단다. 그때는 마치 속세의 영욕을 다 내치고 일심불란(一心不乱)으로 도를 닦는 생불처럼 그 오연함속에 서 생명의 확충이 이루어지기도 한다고…    그럴법도 한 일이겠다. 그래서 제나름대로 낚시질에 대해 음미해보기도 한다. 물고기를 낚는 과정을 겉으로 볼때는 확실히 낚시군이 미끼로 물고기를 낚는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수도 있다. 기실 낚시군이 물고기를 낚기전에 물고기자체가 또 다른 미끼로 되여 낚시군을 물가로 꼬시고 발목을 잡아가두는것이라고, 결국 누가 누구를 낚았는지 피장파장이다.    물고기는 미물이여서 그저 미끼만 보고 낚시는 보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고기에게는 미끼가 곧 죽음의 사절이다. 혹간 낚시에 물렸다가 요행 살아날수도 있겠지 만 미끼앞에서선 영원히 약자인 물고기는 이때 여기서 낚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필경 죽음을 삼키게 된다. 그것은 물고기의 숙명이라 할수 있다. 그런 물고기가 오죽 측은하였으면 백거이할아버지가《향그러운 미끼를 보면 입다물고 / 깊은 물속에 숨어 버려라.》하고 읊조렸을가, 청렴하고 고매한 선비의 덕성이라 하겠다. 물고기의 비극은 그 입이 탐욕스러운데서 빚어지는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인생살이도 낚시질과 방불한데 있다고 말할수 있다. 얽히고 얽힌 이 인간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내가 남에게 낚이울 때가 비일비재이고 그만큼 나도 남 을 낚아채야 하는게 우리네 삶이다.    인생현장을 크게 세개의《낚시터》로 나누어 본다. 첫쨰로 관본위(官本位)사상이 주재하는 벼슬마당(官场)이고 둘째로는 재물신이 횡행하는 상업마당(商场)이고 셋째로는 미색이 판을 치는 정사마당(情场)이다. 자고로 권력을 낚으려 아글타글한자, 공방형(孔方兄)을 낚으려고 인성도 내친자, 미색을 낚으려고 방종한자, 뜬구름같은 명예를 낚으려고 음모술을 꾸민자, 별의별《낚시군》이 다 있는 대천세계이다. 이 세 마당에 공용되는 미끼는 금전, 권력, 미색으로서 그야말로《원하는자는 물릴지어라》이다. 인간은 만물의 령장, 존재하는 사물의 척도라고 자긍하지만 온갖 유혹이 던지 는 낚시앞에선 미끼를 탐하다가 잡혀죽는 물고기보다 별로 고명한게 없다.    인간이야말로 그 탐욕때문에 욕망의 바다에 뛰여들어 허우적거리고 울고웃으며 인생희비극을 엮는《물고기》들이다. 인생의 세개 낚시터에서 제일 탐나는《물고기》는 권력이다. 권력이라는 이《물 고기》배속에는 공방형이 들어있고 미색도 들어있으느니 말이다. 그리고 제일 재미나 는 낚시터는 정사장이다. 권력자는 권력으로 미인어를 낚으려하고 갑부들은 금전으로 미인어를 낚으려 한다. 기실 그들은 누구를 낚기전에 낚이운 셈이다. 현대 미인어들은 용의자들이 낚시줄을 늘이기전에 자청해서 낚시를 끌어다 삼키고 나중엔 낚시군마저 삼켜버린다. 유명한 서양명언에 있듯이 녀자들은 웅성을 정복함으로써 세계를 정복하는것이다. 그래도 모두들 문명해서《애정》이라는 상표를 붙이고 으쓱거린다.    현대의 광고술도 낚시질의 일종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요란스러운 광고속에는 소비의 바다에 가짜,저질미끼를 던져놓고 어리숙한 물고기를 낚으려는 가증한《낚시군》들의 철면피한 작동도 많다. 역시《원하는자는 물릴지어라.》이겠지만 왼고개가 탈리지 않을수 없다.    인생의 허허바다에 진정 낚아올릴 고기가 있는지 알바없다만 저마다 무엇을 낚아 보려고 모지름을 쓰는 우리들이다. 결과적으로 낚시군이기도하고 미끼이기도 하고 서로《물고기》기가 되기도 한다. 참으로 황당무계한게 고급령장동물인 우리 인간이라 할가, 누구를 낚았노라고 기분날릴 필요도 없다. 우화시조였던 이소프씨가 남잡이가 제잡이라고 경계하지 않았던가? 인생낚시질의 학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리라.                                  2002년 12월 24일  
491    새띠풀이 댓글:  조회:5738  추천:1  2015-05-21
                                 새 띠풀이       억조창생이 붐비는 지구촌, 더불어 살기마련인 삶의 현장이라 류류별별의 인간상을 다 보게 된다.     한사람의 개성특징을 심리학에서는 성격이나 기질로 분석, 판정하고 의학상에서는 혈형과도 관련시켜 보는데 조선이나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그 사람으 성격, 됨됨이, 운세를 타고난《띠》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를테면《쥐, 룡, 원숭이》띠의 사람들은 적극적인 활동형의 리상적조합이라 풀이했고《소, 뱀, 닭》띠의 사람들은 목적의식적이고 차분한 성격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최선으 결과를 위해서 충성스럽고 헌신적으로 싸우는 투사들이며 끈기와 흔들리지 않 는 결단에 의해 성공하는 류형이라 한다.    《범, 말, 개》띠의 사람들은 인도주의를 추구하고 보편적리해를 중시하기에 대체로 인간관계가 좋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뉴대를 강하게 발전시키며 솔직하고 열려있어 적응력이 강하다고 했다.《토끼, 양, 돼지》띠의 사람들은 감정에 의해 움직이기 좋아하며 내보이기 좋아하고 직관이 뛰여나 심미예술면에서 탁월하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띠의 사람들이라도 태여난 시각과 달에 따라 다를수 있고 띠와 상극인 동물의 시각에 태여났다면 그의 성격이 어떤 동물의 영향을 따른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한다. 결론적으로《띠는 각 사람의 심장에 숨어있는 동물》이라는 재미스러운 표현이 있는데 띠풀이가 얼마나 과학적인가는 론단할수 없으되 실생활에서 어떤 사람은 정말 그 동물로부터 진화되지 않았나 당혹할만큼 근사한것을 보게 된다.    먼저 소띠의 풀이를 보자.《북방의 황소이든 남방의 물소이든 설산고원의 모우이든 소라는 동물은 인류의 가장 충실한 벗으로서 불굴의 정신과 고된 일을 통한 번영 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아닌게 아니라 인류의 문화사에는 소에 대한 미담이 많이도 올라있다.    견우와 직녀의 아름다운 전설도 있거니와 로자가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났다는 고사도 있고 전국시기 제나라 명장 전단이 불소를 적진으로 내몰아 연나라대군을 일거에 깨뜨렸다는 전쟁담도 있다. 그래서인지 력대의 화가들이 천자백태(千姿百态)의 소들을 그리기에 필묵을 아끼지 않았으며 천고의 명화들이 오늘에까지 남겨져있다.    우리 말 속담에도《농사군은 아비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 못산다.》고 했으니 소와 인류의 친밀도를 알겠고 로신선생이《찬 눈길로 천부의 손가락질에 대하고 머리숙여 유자의 소가 되리.》라고 격앙한 시문도 지었으니 소에 대한 찬미라도 리유가 당당함을 말한다.    비록 소띠는 아니여도 더없이 충직하고 근면하며 조용하고 자률성이 강한 소의 고매한 품성을 닮은 동량지재들을 만날 때 인격적으로 탄복이 가는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랴, 그들은 생명의 순환을 영속시키는 안정력, 역경의 시련속에서도 단호하고 나무랄데 없는 자세로 정의의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 일체를 바치는 소처럼 일터에서 무겁고 힘든 일만 골라지고 말없이 꾸준히 봉사한다. 풀을 먹고 우유를 짜내는 젖소들처럼 그들에게 차례지는것이 남보다 적더라도 원망소리 한마디 없다.    그러나 공리주의가 앞서는 현시점에서 그런《황소》들에게 주는 찬사에는 모두 린색한 법이고 입만 까진자들이 외히려 우직하다느니 고집불통이라느니 하고 입방아를 찧으니 세상도는 인심이 한심함을 개탄하지 않을수 없다.    힘세고 떼질없이 짐만 잘 끄는 기둥소에게는 짐을 실을수록 욕심부리다가도 혹여 가파른 올리막길에 헐떡거리거나 하면 사정없이 채찍을 안기는 고약한 농부의 심사라할지 아니면 인간성의 세기말적타락이라할지…    사회경제력의 발전과 더불어 뜨락또르, 자동차가 농촌에서 소의 로동을 대체하면서부터 영광의 로동소가 한낱 고기소로 전락되여 소의 빛나는 창업사도 력사의 한페지로 남게 된것은 사실이다. 인류사회 물질적재부창조에서 황소의《실각, 실총》이 숙명적인것이였다면 우리 사회에서 줄곧 제창해 온《황소정신》이 색바래지고 안일함과 실혜의 리론이 이 사회의 풍조로 대두한것은 인격력량의 진보인가? 퇴보인가?    가령 소가 말할줄 알고 늦게나마 자각하여서《너무 충직하지 말라.》는 유촉을 남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얼굴 뜨겁게 받아외워야 할것이다. 초유록이나 공번삼 같은 절세의 충혼들은 더구나 구천에서 개탄할것이고…소가 마침내 인류와 함께 일하며 살아온 력사의 무대에서 퇴직당하고 도살장에 적을 옮겼다지만 인간의 복지사회건설에서《황소정신》은 영원한 추진력이 될줄로 믿어마지 않는다.    석가모니가 림종에 앞서 뭇짐승들을 불렀을 때 제일 약삭바르게 대령한것이 쥐였다고 한다. 그래서 12지지의 첫자리에 놓였다는 쥐띠의 풀이도 그럴듯하다.    《쥐는 진보, 탐험, 통찰활동의 모태로서 쥐띠생들은 성격상 보통 밝고 명랑하고 사교적인데 그속에 대단히 당파적인 기질의 사람이 많으며 인생에 장애물은 그들 자신의 과도적인 야심이라 한다.》     역시 꽤나 기분이 들리는 띠풀이지만 실상 동물중에서 뱀의 버금으로 가증한것은 쥐무리이다. 쥐족속들은 그 왕성한 번식력으로 인류와 대결하여 오면서 오늘까지 한 지구촌에 공존해있지만 불공대천이 흉물이다. 그래서 자고로 큰길에 나온 쥐를 보고 때려잡으라고 소리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저 유명한《시경》의《위풍,석서》에서《큰쥐놈아, 큰쥐놈아 /나의 기장 멀지 말라 / 석삼년을 살렸건만 / 나를 아니돌보는가 / 너를 떠나가리로다 / 락토 / 내 살곳 을 찾으리라.》하고 당시 봉건적통치자들을 큰쥐에 비유하여 성토하며 노예들의 원한을 표현하였다.    조선의 고전명작 림제의《재판받은 쥐》에서도 쥐가 얼마나 악착하고 음충맞으며 방자한 놈들인가를 재삼 감득하게 된다. 허나 만물의 령장이라는 인류는 고양이의 힘을 입어 쥐를 대처해왔고 물질문명시대에 들어와서 고양이족속들이 육체적, 기능적으로 퇴화하고 정신적으로 라태해지자 인류는 화학적, 물리적조치를 대고있으나 전지구적인 쥐의 피해에 망연자실하고있다.    세상에 쥐띠를 타고난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나 가끔 정말 못돼먹은 쥐로부터 진화되지 않았나 의심이 가는 자들도 있다. 이네들은 안광이 좁아서 눈앞으 리익에만 혈안이 되여 날친다. 마치 흙뒤주이든 콩크리트벽이든 닥치는대로 뚫고 들어가서 기탄없이 갉아먹고 쏠아대다가 고양이에게 먹히우고 덫에 치우고 독약에 비명횡사하는 쥐들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확천금하고 국고에도 감히 손을 대여 사욕을 채우다가 쇠고랑을 차고 노란콩알 먹고 저승길을 가건만 그런《쥐》들이 계속 번성하기만 한다.    중국력사상 인피를 쓴 석서(碩鼠)들이 부지기수였는데 그중에서 청조의 고관대작 이였던 화신을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것이다. 기재에 의하면 징치당하기전 전답이 8,000무, 전당포 75곳, 화원루대106채, 은장집이 42곳, 골동품가게 13곳이 있었고 총재산은 은1억냥이나 되는데 건륭의 집정시기 군비지출의 10배에 해당되고 그 시기 청정부의 재정수입의 절반에 해당되였다. 그런데도 전문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대권을 쥐고 호령질하였다닌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석서》들은 지금도 번성하고있어 원성이 터지고있다. 원 북경시 시위부서기 왕보삼도 공금을 람용한것만 해도 인민페 1억원에 또 2,500딸라가 더있다고 하니 제 옆채기에 넣은것은 얼마겠는가? 이외에도 수도강철공사의 관지성, 거금을 가지고 출타한 무한의 위지안, 태안시의 위군자인 호건학 등 잡혀서 처형된자도 많거니와 아직 덫에 치이지 않은《석서》들이 얼마나 될지 땅귀신이나 알 일이다.    돼지띠의 풀이는 어떠한가,《신의 모든 아이들중에서 나는 가장 순수한 마음을 지녔다. 천진한 믿음으로 사랑으 신의 보호속을 거닌다. 나자신을 넘치게 줌으로써 나는 더 풍부해지고 두배의 축복을 받는다. 공통의 우애로 모든 인류와 련결되는 나의 선의는 우주적이며 끝이없다. 나는 돼지다.》라고 풀이한다.    역시 기분이 번쩍 드는 띠이지만 인류의 실생활에서 돼지는 재래로《걸어다니는 료리》였을뿐이다. 돼지의 숙명은 어이 그리 처절한가? 주작인이《양저(养猪)》라는 글에서《륙축중에 돼지는 가장 타락한 일종이다.》라고 썼고 영국작가 파톤은《편안함이 돼지를 타락시켰다.》고 썼다.    안일한 생활에 습관되여 철저히 퇴화한 륙축가운데의 이《부옹》은 자초에 향락 을 탐내여 그 날카롭고 악세던 이발을 움츠러뜨리고 사라을 따라 산을 내린후 비록 늘어지게 향락을 누리게 되였으나 측간옆의 더러운 안식처에서 드디어《록림호한》의 그 용맹과 흉포는 철저히 사라지고말았다.    돼지가 인류의 핍박에 의해《록림》의 예기를 잃은것은 막부득이한 선택이였다면 집짐승들의 회의에서 선발되여 주인의 생일상에 오르게 된 운명은 그자신의 생활관의 악과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살찌는 돼지는 운이 나쁘다.》는 사람이 만들어낸 격언을 그자신은 모르고있기에 그냥《실컷먹고 자는》데 도취되여있는것이다.     욕설인들 얼마나 먹고 사는가?분명 사람이 탐식하면 꼭《돼지같이 처먹는 놈》이라고 빗대고 욕하고 목덜미가 실해도《돼지목덜미》라 비유하고 잔뜩 배가 불거지면《돼지배》라고 하니 인간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빨리 살찌기는 바라면서 천대는 천대대로 하니 스스로으니 풍자가 아닐수 없다.    진짜 돼지혼을 타고난 사람을 당신은 못보았는가?일하기 싫어하고 리해득실에는 늘 두덜거리고 공명과 공리에는 등한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다 돼지띠를 타고나지 는 않았지만 기실 돼지보다 더 나을게 없다. 돼지띠의 풀이가 우습게 탈려진것같다.     인류의 선조와 한족속이였다는 원숭이의 띠풀이를 보자.    《나는 미로를 헤치는 능숙한 려행자, 민첩함의 수호신이며 불가능한 일을 하는 마법사, 나의 탁월한 창의력은 아직까지 누구에게 견줄바 없으며 나의 마음은 백가지 주문을 거는 강력한 마법으로 가득차있다.》     원숭이띠의 사람은 창조자이고 림기응변자이며 다른 사람의 동기를 유발시키고 자극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상대를 속이는 능력뿐만아니라 인간의 고도의 지능을 물려받은 사람이 원숭이때라는것에 놀라지 말라고 하였다. 한편 모방할수 없는 간계와 매력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당길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야바위군이라고도 한다.     누군가 원숭이띠를 타고났다면 어느 면으로 길한데가 있겠으나 원숭이띠가 아닌데 원숭이혼을 타고난듯 얄망궂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흉내를 잘내면 코흘리개들은 《잰내비》라고 놀려대기 일쑤다. 앵무새도 사람흉내를 곧잘 내지만 원숭이에 비하면 영원히 렬등생이다. 열두동물중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금수들중에서 원숭이가 가장 많이 인간을 닮아서일것이다.     흉내를 점잖은 말로 모방이라고도 하지만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옮겨서 하는 짓인 흉내와는 또 다른 의미여서 다른것을 보고 본따거나 본받음을 일컫는데 모방창조라는 말이 있듯이 사회적류행, 고도의 문화활동에서 모방의 영향력은 크며 인류의 문화, 사회발전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의 발생을 인간의 모방본능에서 기인되였다고 인정하였는바 그후 모든 사회현사의 근원이 모방에 있다고 주장하는 모방설까지 나온다.    흉내쟁이로는 원숭이가 제일 적임자이긴 해도 창조적모방의 고차원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미물이다. 모방에 확실히 창조성이 곁들어있다면 그저 흉내현상에는 아무래도 원숭이의 앙증스러운 상판부터 떠올라 재수없고 흉내란 원숭이들이나 하는 최저급행위라는 결멸적인 거부감이 솟구치는것을 숨길수 없다. 한즉 정말 원숭이띠를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흉내와는 담을 쌓고 살것은 뻔하다.   《한단학보(邯郸学步)》라는 한어성구가 있다. 조나라사람들의 걸음새가 멋진것을 보고 배우러 갔다가 흉내도 제대로 못내고 원래 걷는 능력마저 상실하여 벌벌 기여서 돌아왔다는 그 연나라 사람처럼 흉내에 열을 올리지 말자. 남을 너무 닮아가면 결국 자기인격의 훼멸인줄 알면서도 기꺼이 고집한다면 별수없는 일이겠다. 유식한 멍청이는 무식한 멍청이보다 더 멍청이라는 격언이 있으니 말이다. 서울말씨를 본따봐야 그저 흉내이고 한국식외래어람용에《재기》를 피워봤대야 참새 방아간 지나는 격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금발머리를 욕심내도 파란눈이 되지 못하는데 왜들 설칠가?    원숭이가 수천만년을 사람흉내를 내봤지만 여직껏 사람으로는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소총명때문에 동물원에 갇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고 곡마단에서 재주보이기를 하고 지어는 남방사람들에게 산채로 두개골이 깨지는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존재하게 되였을뿐이다.      선조들이 남겨준 띠풀이대로 기분 쾌하게 풀이한 열두가지 띠와 인간의 개성특징, 운세관계를 왈가왈부하는것이 내 소임이 아니기에 일일이 까밝히고 뒤집지는 않겠다. 그저 필자의 새 띠풀이를 흥미있게 보아주면 좋겠다.                        2003년 3월  
490    (느낌에 생각이 따라) 76-80) 그대로 말해라외 4수 댓글:  조회:6409  추천:0  2015-05-12
(76)    그대로 말해라                야조   더우면 덥다고 말해라 피부에 스미여 끓는데 춥지는 않다고 하다니   눈빛이 슬픔에 젖는데 기쁘지 않다고 말하냐 숨긴다 숨겨질 일인가   마음에 구름이 꼈다면 아닌체 꾸미지 말아라 흐리고 맑을줄 이시랴 즐거워 마음이 편하면 스스로 눈길이 빛나고 입귀가 귀밑을 돌거니   옳은건 옳다고 말하라 그른건 그르다 하여라 부정의 부정은 불가분   아는건 안다고 말하고 모르면 모른다 하여라 그런체 하다가 골로가   (77) 어떤 친구가 남긴 말                 야 조   ㅡ허, 욕심과 아웅다웅할 때는 미처몰랐어, 정말 이리 될줄을 이제, 내것이란 촉급한 시간뿐 남길것도 가져갈것도 없네그려   어, 두어가지 있지, 유감과 후회 끝없는 욕심이 날 혼미시키기전 아쉬워도 활 펴버리고 가야겠지 연기로 사라질 넋이야 있고없고 근심걱정 없는 곳이면 천당이제 숨이 다해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가물~가물 저승길이 열리고나서         흰옷입고 앞선 지기들 마중올가…   (78)      헛된 욕망                야 조   워낙에 본래도 전혀 이름없는 미미한 나 나를 아는이 많잖고 나도 아는이 많잖아   잔풀에도 이름없는 무명초인 존재인데 싫어도 부대끼면서 세상이라 그냥 살지만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드러나는 내가 부끄럽게도 부끄러워 절벽에 독수리고파   고요한 늪에서 노니는 밑물고기가 나는 싫어서 연어처럼 물살 거슬리는 담찬 연어되고 싶어지오                         (79 )     별        야 조   별은,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혼자서 남몰래 반짝인다   우주학자의 긴긴 설명도 하나님의 증거도   점성술에서   운명의 시계론도 별의 말이 아니다   청청하늘에 별도 많지만 인촌에 잡다한 별   해빛을 빌어 빛을 자랑하는 달같은 별들 많다                               참으로 정말 금싸락같은 별들 明星이 못되여도   별아닌 잡다한 “별”들에 묻혀도 진흙속에 보석같아라      (80 )     곧이듣지 마라                     야 조     입발린 그모든 찬사와   귀바퀴 두드린 拍掌에   진심은 거꾸로 서더라      우정과 신의가 무어냐   웃는듯 때따른 변덕에   차갑게 굳어진 얼굴들     서로가 서로를 따먹고   손자밥 떠먹고 아닌체   천정을 올려다 보듯이                               충성도 아부요 게발림   우습다 그누가 웃을가    피장에 파장에 얼시구                                                                                                           
489    수상소감 댓글:  조회:6111  추천:0  2015-05-03
                                 수상소감      갓마흔에 첫버선이라고 문단에서 상을 받기는 처음이라서 감오가 각별하다. 돌이키면 지각한 문학도의 서툰 발걸음을《연변문학》에서 익혀온 30년, 맺은 인연이 깊은만큼 관심과 가르침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스스로 열심히 뛰느라 했지만 이제 인생이 저문 고개에서 돌아보니 큼직한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우왕좌왕 잔걸음친 흔적만 어수선해서 석양의 잔광에 유감많은 가슴만 불타오를뿐이다.그저 땀만 흘리다가 그렇게 끝나버린 일이라면 비애가 아닐수 없겠다. 이 길에 들어선이상 한구실 착실히 해냈어야 하는데 그 참구실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자탄할 때 수필로 첫자리매김을 해주어서 고마움과 함께 그냥 더 해봐야겠다는 용기서껀 갖게 된다.    수필쓰기에 선행하여 풍부한 인생체험, 인격수련이 있어야 하고 과거에 대한 성찰이든 미래지향의식이든 그리고 세속화한 자아표출이든 우리 모두의 삶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모종 사색의 알찬 씨앗처럼 영글었어야 훌륭한 수필이겠는데 나로서는 아직도 자신심이 서있지 못하다.    다만 수필에서 다루어지는 정감과 뉴앙스들이 독자들에게 소중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을 가미해주는 새 사상이 있기때문이고 그 사상이 누군가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는것은 고달픈 삶의 긴 터넬속을 비춰주는 한가닥 위안의 빛으로 되기때문이리라.    수필에서의 핵은 정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학이 본연에로의 회귀는 작가의 리성의식의 포기나 사회도덕적책임의식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각성한 개체리성은 사회적활동, 문필작업에 책임져야 하며 작가적량지로 발견한것이 모종의 사회가치성을 띠기를 바랄것은 물론이다.    영국에서는 수필을 사상을 소유하는 서정시라고 한다는데 이에 립각하여《우환의 한적함》,《한적한 우환》의 심미리상속에서 풍물이나 문물을 쓴 주작인의 담담한 창작심리상태보다《한갈래 혈로를 헤쳐온》로신선생의 지성과 인격력량을 우러르는 나다.     누가 기탁한것이 아니지만 제나름의 사명감을 지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인생의 빈 페지들을 보다 실속있는 수필창작으로 채워보려 한다.     《내 서러워도 웃고 기뻐도 울며 세치 붓끝에 백발을 휘날림은 / 넓은 우주에서/ 우리 인간의 생명의 빛을 찾고자 함이니!》                            2004년 4월 29일
488    구실을 말하다 댓글:  조회:6604  추천:0  2015-05-03
                         구실을 말하다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웅이나 위인이 될수는 없다. 그러나 항상 사람이 될수 있다.》누가 한말인 백번도 옳은 말이다. 그런데《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이라야 사 람이지.》라는 말도 있다. 전자는 명백한 객관사실을 천명하였고 후자는 현념 비슷한 인생숙제를 내고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사람의 허울을 썼지만 사람다운 구실을 하며 살아야 명실공히 사람이라 칭할수 있다는 그 점이다. 아마 그래서 인간의 사색중에서 가장 침중한 사색은 어떻게 참사람이 될것인가 하는것이리라. 사람이 되는데는 련습이 따로 있을수 없거니와 또 참사람의 기준과 통일된 표준답안이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라야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고 세상을 마주하여 마음이 걸리는 점이 없는 사람이라야 할수 있을가? 세상에 흔하디흔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례로 들어 보자.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모든 생육능력이 구비되여있는 성인남녀는 자신이 원하고 상대가 있을 때 별로 마음 별러먹지 않고도 쉽게《아버지》,《어머니》가 될 수 있다. 로신선생이 일찍 말했듯이 사람아버지(어머니)와 아이아버지(어머니) 두 부 류중에서 어떤 아버지(어머니)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는 각자의 그 행하는 구실여하에 따라 갈라지게 된다. 이를테면 처자를 양육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그 책임감마저 내버린다면 애아비는 되였으되 사람아버지는 못되 는것이요. 남성은 옳되 남편구실, 아버지구실, 나아가서 사람구실을 못하는《사람》이 아닐수 없다. 녀자도 마찬가지다. 뻐꾸기처럼 알만 낳아놓고《어머니》의 직책을 다 하지 않거나 지어 제좋은 노릇만 한다면 애에미는 되였으나 어머니구실을, 안해구실을 못한 한낱《애에미》에 불과한 녀자일뿐이다.    이른바 신분, 직업에 좇아 나눈 3교9류의 사람들을 놓고 말할 때 결국은 각자가 해야 할 구실로 되기도 하는것이다. 농부는 농부의 구실, 병사는 병사의 구실, 교원 은 교원의 구실…등등.    지고무상한 제왕을 놓고 보자. 베이컨은 제왕을 보통 사람이면서도 인간세상은 신 또는 신의 의지의 체현이라고 말했는데 자신의《권력의지론》에서 출발한것이다. 보다 낮잡아 말한다면 왕이란 국민에 대한 걱정이라는 부담을 짊어진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수 있다. 그가 개국왕이든 세습왕이든 찬탈왕이든 일단 왕이 되였다면 그 나라안에서 제일 중대한 구실을 잘해야 왕다운 왕인것이다.    사학가들은 흔히 봉건중국의 력사는 건달과 수재의 력사라고 말한다. 그 전범으로 류방이나 주원장을 들고있는데 어찌 론의되든간에《득민심자 득천하(得民心者)》 라는 치세의 도리는 들어서 알고있는 개국왕들은 그래도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긴했으나 그후의 세습왕들은 거개 부화타락하여 궁궐을 짓고 미녀를 뽑아들여 주지육림, 주색잡기에 미쳐돌다보면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다시 천하가 뒤번져 새 왕조로 바뀌 군했다. 제왕은 아니였어도 실권을 쥐고 중국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자희태후야말로 만고에 악명을 남긴《제왕》이였고 제구실을 못한 악녀였던것이다.    제왕의 좌우에서 후한 봉록을 타먹으며 부귀영화를 누린 대신이나 재상들의 구실도 천근같이 무거운것이다. 설사 바보혼군을 보좌했더라도 국계민생의 밝은 정치를 펴도록 진충보국해야 하는데 건륭의 재상이였던 화신처럼 국고가 비건말건 제 배때기만 채운 탐관오리가 되거나 애국명장 악비를 모해하고 일세영달을 위해 외적과 화친을 구걸한 진회따위가 되여서는 다 제구실을 못한 대신들이 되고 결과적으로 사람구실을 못한 페물들인것이다. 이런 인간찌꺼기들은 우리 배달민족의 력사에도 많다. 더는 말고라도 근대사에《을사오적》이라는 더러운 이름을 남긴 리완용같은 인물들이 그렇지 않은가?      이른바 지방관들의 구실은 어떠해야 하는가? 벼슬감투를 썼다면 소임의 구실을 바르게 해야 국태민안(国态民安)하고 부국강병(富国强兵)한 나라가 세워짐을 먹물이 좀 든 사람이라면 다 아는 도리이다. 변학도처럼 민중의 고혈을 짜내고 주색에 혈안 이 되여 날치면《가성고처에 원성고(歌声高处 怨声高)를 빚어 필경은 암행어사수종들 의 륙모방망이에 골통이 으깨질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고금동서에서 보면 어떤 나라에서든 이런 제구실을 못한 란신적자(乱臣贼子)들에 의해 국운이 기울어진것이다.    옛날만을 더듬어 망령들만을 꾸짖을일이 아니다. 현시대에 와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가치관념속에서 소위《구실》은 이질화되여 제노릇이 되고말았다. 옛날 할아버지네들이 대통을 내흔들며《에익, 사람구실을 못할놈 같으니라구!》하고 꾸짖은것은 장차 제 안속을 옳게 채우지 못할놈이라고 걱정한것이라기보다 립신양명하여 맡은바 일을 잘 감당해내지 못할가봐 우려한것이라 생각해야 마땅하다. 아닌게아니라 살아오는 동안 세상에서 제일 배워내기 어려운 기술인즉 사는 기술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바꾸어말하면 사람다운 인간구실을 하면서 산다는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그 점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구실을 바르게 하는것일가? 일찍 학문을 깊이 닦아 박학다재 (博学多才)하면 제구실하게 되는것일가? 덕재를 겸비하여 도덕을 숭상하면서 살면 사람구실을 하는걸가? 우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래로는 애비된 의무와 도리를 다하 면 명분이 바르게 되는걸가? 모르긴 해도 그게 구실의 전부는 아니리라. 아, 참으로 제구실을 다하고 산다면 후회많은 인생이란 없으련만 도저히 깨칠수 없는 인간구실을 두고 고민고민하다가 일전에 세상물정에 밝고 인정에 숙달한 한 로스승을 찾아가서《구실》의 도를 가르침받은바 있다.   《어렵도다. 구실의 도를 터득한다는것은 옛날 공자같은 성인도 그로서의 구실을 다하려고 3천제자를 모아 인, 의, 례, 지, 신(仁,义,礼,智,信》을 설파하면서 치국지도를 펼치고 렬국을 돌아다니며 공명을 이루려했지만 사관벼슬 한달만에 소정묘를 죽인것밖에 해놓은 일이 없었도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벽에 코가 부딪지고 시골농부에게마저 놀림을 받았으니 기타 록록한 무리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리오.》    현대에 와서 뢰봉이나 구양해, 초유록이나 공번삼같은 지인지사들이 나오긴했지만 잔뜩 슬기로와지고 약발라진 사람들의 시점에서 그들을 다 제구실 잘한 사람들이 라고 입을 모을지 알수 없는터인즉 그대 이제 지천명도 저물어서 구실을 도를 묻는것은 눈이 어둡고 귀가 먼 이 늙은이를 딱하게 굴자는것이 아니라면 무모한짓이 아니겠는고?》  《예, 아니올시다. 제가 구하고저 하는것은 사변술도 아니고 더구나 정도로서의 구실이 아니라 한낱 포의한사(布衣士)로서 공리(功利)의 실혜를 얻는 구실의 도입니다.》   《어허, 그게 무슨 고약한 심사인고? 정말 우직하도다. 비정한 구실의 도를 구하다니, 그대가 말한것처럼 지금은 완전히 공리의 시대여서 같은 문제를 두고도 어진것을 어질다 하지 않고 지혜로운자를 지혜롭다 하지 않아서 덕성과 덕망이 오히려 비웃음거리로 되였거니와 오직 리기만이 좋고 나쁨의 척도가 된줄 모르는가? 한즉 어떻게 하는것이 바른 구실이고 어떻게 하는것이 잘하는 노릇인지 구분하기 어렵도다. 황차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할자들이 오히려 》하기에 설쳐대는판에 진정 구실의 도가 있겠는고? 이미 다 궁해버렸느니라.    단지 세상물정에 어둡고 리성정신에 열을 올리고있는 지성인들이 고지식하게 렴결봉공(廉洁奉公)이요, 무슨 량지요, 우국우민이요 하면서 세기말의 페단에 길이 개탄하고있느니라. 자고로 소가죽이 다 썪었는데 윤기나는 털이 있었던가, 어렵도다 어렵도다.》   《로선생의 말씀이 페부지언이기는 하온데 정말 바른 구실의 도가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단 말씀입니까? 도가 한자 오르면 마도 한장 오른다하지 않았나이까?》  《그렇도다. 바른 구실의 도를 현대류행어로 정신문명이라 할수 있는데 그게 평민백성들더러 아무데나 오줌누지 말고 침뱉지 말며 사람을 대하되 언행이 례절바른것을 요구하는 등 자질구레한 현상유지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응당 선행되여야 할것인즉 상층계층의 도덕건설이니라. 그러지 아니하고 하고 가르쳤다는 옛날 얼간둥이 서당훈장처럼 처사해야 그게 웃음거리 아니겠는고? 그런즉 지금 세상엔 리기와 투기로써 제 배를 채우는 길이 있을뿐이로다.    내 그대에게 말하거니와 이 길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역빠름인데 이미 전문적인 학문이 되였느니라. 범죄심리학이 사회심리학의 분과로 된것처럼
487    왜 글을 쓰느냐? 댓글:  조회:5537  추천:0  2015-05-03
                                                                 왜 글을 쓰느나?                                                                           최 균 선        왜 글을 쓰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답도 막연한 우문이다. 이는 도박군에게 왜 도박에 매료되였는가를 묻는것과 같고 등산애호가에게 산에 오르면 무슨 볼멋이 있는가 질문하는것과 같이 동질, 동형의 우문이다.     “나에게 어찌하여 푸른산에 살고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웃기만 하며 대답은 하지 않으리, 마음이 스스로 한가할뿐, 복숭아꽃 아득히 흘러가 있으니 인간이 살지 않는 별천지라네 (問予何事捿碧山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라는 의미로운 한시로써 우문에 중언부언하는바이다.     혹자는 표현욕의 충동을 이지지 못하여 쓸수도 있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것을 사회독자들과 교류하고싶은 마음이 불붙을듯 할 때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글이 자연스럽게 거침없이 엮어질것이다. 일컬어 일필휘지라할 가? 물론 본원적으로 글짓기에 필수적인 자질이 따라야 한다. 여기서 필력문제가 제 기된다. 선천적자질도 있어야 하거니와 후천적인 련마도 있어야 함은 자명하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자기삶의 흔적을 남기기에는 글이 으뜸이다. 말하자면 글로써 존재의의를 찾을수 있다. 사람은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생명가치를 지닌다.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등한 존재이나 어떠한 삶을 사는가는 자신의 의지와 여건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만일 어떤 사람의 삶이 가치있는것으로 평가되여 후세에 전할만하다면 글로 남겨지는게 관례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인간은 단지 생존을 위해 먹기만 하는것이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은 일반인에게도 해당된다. 생각 그 자체가 인간형상과 동일시되기때문이다. 물론 가치있는 생각을 말한다. 가치있다는것은 나에게 유 익한게 아니라 보다 큰 범주로는 나를 포괄하는 공동체 즉 사회적차원에서의 유익 함을 뜻한다. 결국 가치있는 유익함을 남긴 사람은 이름과 더불어 남는다는것이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한데 어쩌면 오래살려는 욕구가 전제가 될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충족을 위해 글을 써서 남기려는 목적도 있을법하다. 황차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지 않는가? 유한한 삶을 글로 연장시키려는 욕망을 누가 나무람하랴. 사실 세계적인 대문호들은 글을 남김으로서 영생하고있다. 우와같이 다양한 동기, 목적, 계기들에 의해 글을 쓴다고 하면 종합적이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때때로 자신에게 왜 글을 쓰냐?하고 자문하면 스스로 우문이라 정답도 없다. 원고료를 바라고? 지금 누가 얼마 안되는 원고료때문에 뼈를 깎는 역사질하겠는가? 하다면 명예를 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글을 지어 남에게 유익한 계시나 조언을 주려고? 공자가 춘추를 지으시사 란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는데 내 글은 “란신적자” 들을 웃기지도 못하는데 왜 그냥 미친년 달래캐듯 글밭을 헤집는지…     남들은 그래저래 쓰겠지만 대관절 나는 왜 쓰는걸가?신들린듯이라는 말은 내게는 사치하고 미쳐서 미친것도 아니니 악습처럼 자판에서 손가락을 꿈지럭거리지 않으면 생활의 곳간이 텅비는 느낌여서 그냥 글이랍시고 답새기는데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의사처럼 한사코 책을 읽지도 않다보니 알고 있는것도 언녕 바닥이나서 새롭고 그럴듯한 사상감정을 토로할수도 없어가지고도 그냥 무엇이든 쓰고 싶은것은 어찌보면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만년의 조급함인가?     “나는 글을 사랑한다. 글을 짓는다. 그러나 글재주가 없는것을 나는 잘 안다. 내 글은 세련이 없고 미숙하며, 내글은 현란치 못하고 난삽하며, 내글은 맑은하늘, 밝은 달같은 맛이 없고 흐린련못 진흙같이 틉틉한줄 잘 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지으려고 애쓴다. 나는 다만 내가슴에 서리서리 엉킨 뜨겁고 의로운 정을 쏟치면 족할뿐이다. 세상이야 웃거나 욕하거나 나는 내 아들을 사랑한다. 내 아들이 잘나서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내 고통을 말하여주는것은 오직 내아들(창작)뿐인 까닭이다. 내 아들은 참말 못났다. 세상에 보이기 무섭게 못생겼다. 그러나 그는 내 고통을 알고 말하여준다. 나는 그러므로 사랑한다. ”     이것은 열혈의 작가 최서해님의 “혈흔”에 한단락이다. 내가 외우다싶이 하고있는 최작가의 진솔한 표백의 마디마디가 내 가슴을 울리고 공감시키지만 “나는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마음에 담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사랑할만큼의 글이 아 님을 잘 알기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글을 지어도 제정신이 아니게 집착한다. 쥐도 한 모뚫으면 성공한다고 해서도 아니다. 장끼가 아니라 아집인게 분명하다.     베이컨은 “글을 써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 사라져라”는 지극히 “신랄”한 말을 한적이 있다. 살아있는 삶을 글쓰기와 동일시했으며 글쓰지 않는 삶을 죽음과 같이 여겼다는 말이다. 또는 살아 있으려면 글을 쓰고 죽음과 같은 삶을 하려면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는 베이컨이 그만큼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말이였으며 실제생활에서도 자기가 말한대로 빛나게 실천했다.      베이컨의 말처럼 문화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글을 써서 발표하는것만큼 확실한것이 없을것이다. 문자표현은 생명충동으로서 인간의 정신생활을 리드하고 심령세계를 꽃피운다.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이 멈추지 않는한 글짓기도 단절될수 없다. 그만큼 글짓기는 즐거운 작업이여야 하는데 실은 뼈를 깎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글을 지어낼수 있는가? 늘 생각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의 길이 남다른 경지에 이르는 사람, 창신의식이 강렬한 사람, 그리고 기질적으로 표현능력이 강한 사람, 문학수양이 있는 사람이 가능하게 어떤 성취를 따낼수 있다. 그만큼 어떤 종류의 글이든 진실의 표백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환골탈태한다해도 일만팔천리 떨어진 미달의 경지이다. 그래서 더구나 자괴감이 든다. 내 글은 문자유희인가 유희문자인가? 문자유희, 유희문 자가 무슨 가치함량을 가지고있는 문장인가? 혹시 공방형앞에서 경례를 하는건가?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이나 명성을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금전의 빛이 문자에 투영된것이라면 문자역시 기필코 기기괴괴하게 될것이다.     왜 발표하려 하는가? 나도 사고할줄 알고 감정이 있으므로 세상을 향하여 자신이 생동하게 살아있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가? 만약 글을 쓰는것이 자기생명의 수요가 아니라면 우리는 평생 진실한 감정으로 글을 지을 필요가 없다. 정상인으로서 자발적인 표현수요 즉 글로써 또 다른 자아를 실현하려는 욕구가 없다면 머리아프게 글을 지으려 전전긍긍 할 필요도 없기때문이다.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있으랴만 자기 생각과 감정, 정서를 글로 발표하지 않고도 잘만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작가가 독자를 만들지만 독자없는 작품도 존재의 리유를 잃고만다. 이 세상에 글을 써내는 사람이 없다면 인생현장은 풀한포기 없는불모의 사막처럼 될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한사코 글을 쓰는 사람이 필수적이 되는 인생현장이다. 그런데 진실로 훌륭한 작가들의 대부분은 뻐스를 놓쳐버린 사람들과 같다. 한번의 인생밖에 살수 없는데 뻐스를 놓친다면 다른 실패자들과 함께 길위에 남아있을수밖에 없다. 나도 한사코 뻐 스를 놓쳐버린 사람이 되고싶어서인가? 그렇더라도….                                                                              2013년 6월 5일  
486    감동과 감사 댓글:  조회:5658  추천:0  2015-05-03
                                   감동과 감사       인간을 물질과 정신, 리성과 비리성, 의식과 잠의식, 문명정감과 원시적본능의 다층차적인 복합체라고 한다.     인지상정(人之常情) 인 희,노,애,락, 애,오,욕(喜怒哀乐恶哀欲)에 감동과 감사가 들지 않았지만 기실 감동과 감사에 근원을 두고있다. 깊이 느껴져 마음의 움직임이 없다면 기뻐하고 노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욕심부리는 7정이 얽히지 않을것이다.    감동에는 크게 주는것과 받는것 두개 면이 있는데 감동의 계기와 대상물, 내용은 류류별별에 형형색색이다. 진,선,미에서 기인된 자기 마음의 움직임으로 기준하는 심리적감동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리득에 기준한 실혜적인 감동이 있다. 하여 동일한 계기와 대상에도 감동받는 사람이 있고 무감동의 사람도 있게 되는것이다.    누구를 깊은 감동으로 울려준다는것은 내가 그를 따스한 인간애로 포용한 증거이고 남에게서 감동을 받았다면 정감의 합리하고 필요한 방출이며 일종 무성무형의 자각적행동으로서 깨끗한 심령의 정화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감동은 지성적인 심령들의 반가운 부딪침이기에 전감의 부싯돌이 우리들의 가장 따스한 마음과 열정에 박애의 불꽃을 반짝 튕겨줄것이며 그 신비한 불꽃에 힘을 입어 한차례 인격의 승화를 가져오게 될것이다. 감동이야말로 나날이 깊이 패이고있는 인심의 골짜기를 이어놓는 금다리로 되기때문이요, 이에서 비롯하는 좋은 정서는 어두운 마음이 하늘을 사랑으로 가득 채울것이다.    감동은 꼭 물질적인 실혜에서만 받는게 아니다. 한번의 밝은 미소와 친절한 인사말과 손짓 등이 당신의 심벽에 강렬한 감동으로 맞쳐올것이다. 당신도 뜻하지 않는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감동에 젖게 할수 있는데 그 감사의 뜨거운 마음을 보상받게 될것이다. 값치를수 없는 인정의 보답이란 아마 그런것을 두고 하는 말일것이다. 정때문에 울고웃는 우리 인간이 아니냐?    잘 감동된다 해서 녀성적이라고 말할수 없다. 울지 않는 젊은이는 야만이요 웃지 않는 늙은이는 바보라고 한 죠지샨챠야나의 말은 얼마나 잘한 말인가! 야차가 아닌이상 누구나 감동을 안고 살기마련이다. 감동이야말로 정감의 홰불이 아닐가?    당신이 만약 감동받았을 때의 감각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순결무구하며 마음의 눈빛도 맑아 이 세계가 투명한 옥처럼 비꼈음을 의미하며 한차례 령혼의 세례를 받았음을 의미한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아름다운 정신적정복이 된다. 당신이 어떤 감동을 받고 틀어졌던 행위궤적이 바로잡아졌다면 바로 어두운 심령에 희망의 서광이 밝아오고 새 출발의 종이 울린것이다.    이처럼 감동은 인간의 잠들었던 량지를 깨워주고 깨여난 량지는 아직도 깨지 못 한 인성을 불러 깨울것이며 황페한 마음의 뒤뜨락에 화해의 봄을 불러올것이다. 물론 인간들속에 야비하고 허위적이며 용속한자들이 있는 한 거짓된 감동이 있기마련이다. 입에 발린 미소로 눈속에 비낀 증오의 빛을 덮어감추려는 우둔한 사람들을 우리는 흔 히 보게 되는데 진정한 감동과는 인연이 업슨ㄴ 사람들이고 인간애와 등을 돌린 사람 들이니까 숫제 제쳐놓고…    누군가 나보다 훌륭한 때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기꺼이 내주는 그 고매한 인격에도 우리는 스스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감동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만약 자선같은 감동이라면 주는것에 선행되는것은 동정과 련민일것이요, 감동을 받은자의 마음에 따른것은 감사일것이다. 하긴 어떤 실혜를 받았을 때 감사의 정이 생길것은 당연하나 감사의 심오한 함의는 이것에 그치는것이 아니다.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은 인격적매력에 따르는 겸허한 태도에서 우러나온다. 감사하는 마음음보다 득실을 따지는자는 근근히 보수밖에 받을 자격이 없는자이다. 개에게 빵쪼각을 던져주듯이 돈뭉치를 안기면 고두백배(叩头百拜)하는 그런 감지덕지는 그저 노복의 아부일뿐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뢰가 울고 번개가 치는 폭풍의 밤, 유람객을 태운 한 륜선이 미씨건호에서 화물선에 부딪쳐 침몰하게 되였는데 물에 빠진 39명의 승객들이 아비규환속에서 구원을 청했다. 이때 스펜서라는 대학생이 주저없이 물속에 뛰여들어 한사람, 또 한사람 구해냈다. 뼈를 에이는 차디찬 물속에서 열일곱번째 사람을 구해낸 그는 종당에 기진맥진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때로부터 휄체어신세를 지며 불우한 여생을 보내게 되였다.    몇년후 한 신문사 기자가 그를 인터뷰하면서 그날밤 가장 잊을수 없었던 일이 무엇이였는가를 물었을 때《내가 목숨을 구해준 열일곱 사람들중에서 한사람도 찾 아 와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슬픈 사실입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왜 그렇듯 감사에 린색했을가?    하긴 그것이 세상인심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엄동의 설한풍속에서 푸름을 잃지 않고있는 소나무는 따사로운 봄바람과 보슬비의 애무를 수요하지 않는줄로 착각하고있다. 이런 사유방식은 관습에서 오는걸가? 알수 없다.    다만 영웅의 마음속에서도 부드러운 안위와 긍정과 감동과 고무가 수요되였다는 그 한가지만은 의심할바 없다. 스펜서에 의해 구원된 사람들이《감사합니다.》라는 그 한마디에 린색하였기에 이 영웅은 세월이 갈수록 깊어지는 실망감을 안고 살게 된것이다.    빙설처럼 얼어붙은 인간관계를 녹이는 유일한 길은 서로 진실된 감동을 주면서 감사하는 마음들로 얽혀사는 길이다. 탐욕은 얻는데서 이룩되고 인격의 높이는 주는데서 이룩된다. 자기가 이미 차지한것에 만족할줄 모르고 남의것마저 가지려고 군침흘리는 무리들에게는 감동을 줄만한 인격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리 없으며 그만큼 감사의 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무에서 내려온 류인원은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자연과의 마찰과 인간들 호상간의 충돌속에서 서로를 생존경쟁의 적수로 네가 나를 먹느냐 내가 너를 먹어치우느냐 하는 약육강식의 원칙만을 내세워 싸늘한 기계처럼 천만년을 회전하였다. 하여 인생현장은 무자비한 결투장이 되였고 자연도태의 혈투만이 생존방법이 되였다.    현시대의 인간관계는 갈수록 더 랭혹해지고있다. 재부와 명예와 권력과 자기중심에 집착하다보면 자기외에 아무것도 안중에 없을테니 너는 네멋에 살고 나는 내 잘난멋에 사는식이 되고 인정세계는 사막화가 될뿐이다. 결국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보다 나을것이 없다.     내가 남을 감동시키고 나도 감동받으면서 인정이 얽혀야 세상은 둥글어지는것이다. 설사 작은 감동일지라도 늘 감동받을수만 있다면 힘겨운 인생살이도 조금 가벼워질수 있으며 마음속에 해살을 품은듯 눈물의 골짜기같은 이 삶의 현장을 웃으며 헤쳐나갈수 있으리라.     사람들이여, 감동과 감사에 너무 린색하지 말자. 장미꽃다발을 선물할 때 향기는 그래도 내 손에 남아있다는것을 잊지 말자.                                         2004년 5워 일   
485    변절자의 새 의미 댓글:  조회:5770  추천:0  2015-05-03
                               변절자의 새 의미      무릇 변절자란 배신자나 반역자 등과 같은 의미로 통하는데 그저 듣기만 해도 이마가 찡그려지는 존재이다. 그래서 고금동서의 어느 민족의 어떠한 계층의 사람들이든 변절자라 하면 인간패류들로 락인찍고 불구대천의 원쑤로 절치부심(切齿腐心)하고있다.    나라에 이런 배반자가 없다면 충신이니 애국자이니 하는 말조차 생기지 않았을테지만 세계 어느 민족사이든 너무도 많은 배반자들을 기록하고있다. 우리 중국에서는 고대민족반역자라 하면 진회를 꼽고 현대에 와서 한간이다 하면 왕정위를 떠올린다. 그리고 우리 배달민족의 근대사에서 악명높은 리완용, 리근택 등《을사오적》들을 치욕의 기둥에 못박아놓고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념속에는 변절자란 개념이 고어로 되여서 잊혀지고있다. 하긴 태평성대에 변절자란 당치않을수도 있겠으나 심층의미에서 캐여보면 우리 주위에 《변절자》들이 너무 많다. 이런 변절자들이란 바로 국민들이 미워하는 탐관오리와 부패분자들로서 사람들은 흔히 이들을 단순히 경제상의 범죄자들로 치부하는데 기실 평화시기에 가장 위해로운 변절자들이다.    리유는 충족하고 도리는 자명하다. 우선 자기가 든 당의 종지를 위반했으니 당의 변절자이고 다음 국법을 무시하고 국가에 큰 손해를 끼쳤으니 나라의 변절자이며 근로대중의 피땀으로 이룩한 국가재부를 횡령해 사복을 채웠으니《충복》으로서 인민을 배반한 자이다.     이 시점에서 관리층의 비리경제문제를 정치적신념의 동요에서 기인된것으로 파악해야지 일반적인 도덕부패문제로 간주한다면 아주 유치하고 편협한 인식으로서 국민을 오도하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상에서 문제있다고 해서 반드시 정치상에서도 견정하지 못하다거나 자기 신조를 버렸다고 말할수 없다고 하는데 얼떨떨한 사람이 아니라면 가제는 게편인가?아니면 한바지가랭이에서 놀다가 잡아당긴 넌출에서 감자알이 묻어나오듯 자기도 묻어나올가 속이 켕기여서 변죽을 울리는건가?    경제가 무엇을 위해 복무하는가?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를 모를 사람이 어데있으랴! 아직도 우리에게 나라와 민생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훌륭하고 청렴한 지도간부들이 있다는것은 그들에게 견정불이한 정치신념과 당기률을 수호하려는 정신이 살아있기때문이 아닌가?    자고로 한 나라를 건설하는데는 국력을 키우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의 담보로는 치세의 담당자들인 관리들속에서 변절분자들을 부단히 색출해내고 렴결봉공하면서 밝은 정치를 펼치는것이다. 력대의 거의 모든 왕조는 결국 권력층내부에 생성한 악질관리들의 손에서 무너졌다는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경제상에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탐욕의 구렁텅이에 빠져든 사람이 정치상에서 견정하면 얼마나 견정할것이며 지조가 높으면 얼마나 높겠는가? 이라크전쟁에서 자기의 조국을 초토로 만들고 인민들을 도탄속에 몰아넣은 원쑤들이 딸라뭉치로 유혹하자 무치하게 변절자로 전락한 민족의 패류들이 그래 신조만은 견정하다는 말인가? 가령 이들에게 정권을 맡기면서 나라를 잘 건설하라고 한다면 족제비에게 닭을 맡기면서잘 보살펴달라고 하는것과 무엇이 다르랴!    사서를 한번 펼쳐보라. 국운이 기울어질때 먼저 적에게 무릎을 꿇은자들이 어떤 자들이였던가? 열에 아홉은 간신배들이였고 또 모두 인민들의 고혈을 짜낸 탐관오리들이였다. 반대로 진충보국(尽忠报国)한 모든 충신들은 모두 청렴한 관리들이였고 백성들이 칭송했던 명관들이였다. 고대 악비나 신기질, 림측서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 귀감들이요 새 중국의 건국수령들인 주은래, 류소기, 주덕이나 팽덕회같은 위인들은 영원히 기릴만한 인민의 훌륭한 아들들이다.    탐오분자, 부패분자들을 정치와 무관한것으로 보는것은 국민의 마비된 의식의 일종 표현이다. 왕보삼이나 성극걸처럼 몇백 몇천만원씩 제 옆채기에 넣은자들을 당에 충직하고 나라와 인민들에게 충성하는 이른바 충복이라 칭찬할수 있단말인가?    첫사회주의국가였던 쏘련이 물먹은 모래탑처럼 내려앉은 근본적원인이 바로 붉은외투를 입은 변절자들이 구데기처럼 너무나 많이 생겨났기때문이 아닌가? 일찍 낭떠러지에서 말을 멈춰세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한 진운동지의 경고를 명기할 필요가 있다.    나라에서 련속부절히 잡아내고 처단하지만 들쥐들처럼 번성하는 변절자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불요불굴의 기개로 탐욕의 바다에 뛰여들고있다. 그러다가 재판석에 앉게 되면 일매지게 자산계급사상에 물젖어서 사상개조를 늦추었기때문이란다. 그야말로 우스운 참회이다. 대관절 소경이 그르냐? 개천이 그르냐?    이들은 그 무슨 자산계급사상의 희생자가 아니라 인격과 도덕과 량지의 결핍자, 자각적인 변절자들일뿐이다.                                 2004년 5월 1일
484    (교육칼럼)원래 이렇게 되여야 하는것을… 댓글:  조회:5605  추천:0  2015-04-27
  원래 이렇게 되여야 하는것을…                                           진 언       근일 교육부에서 유치원교육의“소학교화”를 방지, 규정하는《…의견》을 발포하였다. 유치원에서 20이상 수자의 가감승제계산을 하지 말아야 하며 영어, 병음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였는데 이에 북경에서 솔선수범하여 감독하기 시작하였다.《북경아침신문(北京晨报)ㅡ3월18일자》    비록 너무 늦어진 제시이지만 명철한 시책이요, 쾌거이다. 기실 2012년에도 이런 제시, 규정이 나왔지만 다시 제기된것이다. 왜 이렇게 되여야 하는가? 너무 앞당긴 “소학교화” 는 유아의 성장에 백해무익한바 우선 공부하기 싫어하는 정서를 야기할수 있고 유아들의 천성, 쾌락의 권리를 압살하게 되여 아이들의 량호한 행위 습관을 양성하는데 부작용을 놀뿐이다. 이 시점에서 유치원의 “소학교화”를 방지하게 된것은 당연한바 교육을 원점에로 회귀시키려는 또 하나의 징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교육리념이 급공근리적이다보니 지식장악에만 몰입하였는데 캐고보면 불가피적으로 교육목표와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헤겔은 말했다. “한개 민족으로 말할 때 하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으면 희망이 있으며 오직 발밑에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많으면 미래가 없다.”고, 발밑에 일이란 지금 말로 곧 급공근리이다. 유치원교육이 상업화되면서 시작된 “소학교화”는 수익의 산물인바 모종 면에서 곡식고갱이를 잡아당겨놓는 옛날 송나라 사람의 맹목적조급정서와 비슷하다.    여기서 조기교육에 대해 재론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기교육이 가장 의론이 많고 혼신을 투입하는 “새로운” 령역이 되여지면서 새로운 사회문화현상, 산업으로 변화되였다. 현재 조기교육에 유관된 학술기구, 상업 등이 호황을 이루면서 새시기 사회의 “열점화제”로 되였다.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것이며 정상적인 교육현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기실 조기교육에 대해서는 가장 할말이 없고 할수 있는 일도 없다. 원래는 부모들이 금심걱정이 필요없거니와 아이들은 더구나 시름걱정이 무럭무럭 자라야 하는 인생단계로서 먹고싶으면 먹고 놀고싶으면 놀고 자고싶으면 자는 자유롭고 활기찬 시절인데 조기교육의 틀에 잡아넣고있으니 문제가 아닌가?    실제정황(진상)을 두고 말하면 “상식론리”에 어긋나는것이다. 이전에는 왜 “조기교육”개념이 없었을가? 선인들이 조기교육의식이 없었고 전혀 몰라서였을가? 너무 잘알고있었다. 다만 그들은 지금처럼 부모들마다 교육에 대해 “근심”하지 않았고 나아가서 공포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뿐이다.    심리학적으로 따진다면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클수록 교육에 열중하게 되고 공포심리가 심각할수록 교육의 단계성을 더욱 앞당기려 한다. 조기교육풍조가 바로 이런 심리바탕에서 일게 된것이다. 풀어말할진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자기 아이가 그때 혹은 지금 학습성적때문에 로심초사하겠는가? 선인들은 아이들이 매일 즐겁게 잘 놀고있는가? 심신건강에 차질이 없는가? 등에만 왼심을 썼던것이다.    물론 현대의 부모들도 아이들의 의식주행에 각별하다못해 “과분함”혹은 “강박 식”에 이르게 되였다. 지금 아이들이 감내하는 온갖 압력(스트레스라던가?)은 기실 우리 학부모들이 끝없이 보태주는격이 되고말았다. 아닌가? 아이들은 우리가 비교적 쉽게, 내키는대로 조작할수 있는 놀이감자동차같다. 아이들의 학습부담이 과중해서 받는 심리압력과 심신피로는 어른들의 심리압력과 피로를 아이들에게 밀어부치는격 혹은 그것의 투사라고 말하면 괴리인가? 다시말하면 아이에 대한 방방면면에서의 지극히 초조한 심리가 유의무의하게 아이들에게서 체현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현대부모들은 조기교육을 더 앞당길 여지도없이 앞당겨놓았다. 그렇지 않은가? 언제부터인가 아직 양수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생명이 성장하는 때부터 “수업” 을 시작하는데 “태아교육”이라는 현념적인 개념이 류행되였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정녕 조기교육을 바랄가? 조기교육이 빠를수록 좋을가? 성찰이 수요된다.    조기교육에서 뛰떨어지면 학교에서도 뒤떨어진다고 한근심이 되여 조바심치는데 보편적으로 그렇게 되는가? 대체상 아이의 발전목표는 아이들 자신이 결정하는것이 아니라 부모가 결정해주는바 실질적으로 아이의 목표가 아니라 부모의 목표인셈이다. 부모들은 사랑의 명의로 아이들의 본성을 침점해버리고있다. 어리디어린 그들에게는 무슨 “주제”혹은 “목표”를 정해줄 필요가 없다. 그들이 본능적인, 원시적추구를 스스로 찾도록 시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교육은 주물공의 기계적인 작동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하느님은 천성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이 늘 100점을 맞기를 바라고 일등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감각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감각적인 만족을 위한 “분투”인것이다. 그러면서도 다 아이를 위한것이라고 여기는데 기실 착각이다. 부모들이 실제 사랑하는것이 점수가 아닌데 시험성적이 떨어지면 “밥을 먹지 말아!”하는 식으로 징계하기 일쑤이니 사랑의 착위현상이 아니겠는가?    모든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룡”이나 “금봉황”이 되기를 바라고 각방면에서 “우수”하기를 촉구하다보니 아이의 천성적인 자질여하를 불문하고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치고 운동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해야 하는 욕심이 고고행진이 다. 죽어나는것은 아이들로서 마치 코꿴송아지이다.    좀 야한 비유이지만 송아지도 코를 꿸때가 있고 딱 꿰야 할곳을 꿰야 한다. 너무 얇게 꿰놓으면 물렁코가 되고 너무 깊게 꿰면 들코가 된다. 본래 햇송아지는 자유 자재로 풀을 찾아 뜯어먹으며 자라게 생겼다. 그런데 부모들이 젖떨어진 송아지같은 애들을 두고 이것도 배워라, 저것도 전공해라 하면서 그들의 선택공간도 임의대로 차지해버리니 독립적인격발전이 시초부터 틀려지고 개성발전의 공간이 침탈당한다.    그렇게 아이들을 주조해나가면서 아이의 내심적인 반응에 신경을 쓴적이 있는가 곰곰히 생각해 보자. 애들에게 쾌락한 동년을 마련해주기는 글러먹은 인문환경인것도 사실이지만 될수록이면 그들만의 “에덴동산”에 불청객이 되지 마시라. 그들 자신이 뱀도 발견하고 지혜의 “금과”도 발견하고 훔쳐먹고 때가 되면 스스로 자기네 동산을 작별하도록 하라. 꽃은 가꾸지만 어떤 꽃이 어떻게 피라고 강요할수 없지 않는가!      어린애들에게는 “공부”라는 개념이 없는데 껍찔을 깨고 병아리를 꺼내는식으로 조급해하는 어른들이 공부만능의 인생길을 이른 새벽부터 떠나도록 달구치는것이다. 실천적으로는 어렵지만 “공부”를 완전히 잊고 놀음에만 탐하다가 때가 되면 “공부신” 이 슬슬 찾아들게 하는것이 최적이다. 육체발육, 지력적발전의 규률이 그렇게 되여있다. 아이들은 놀음, 장난질속에서 지력이 트고 독립적사고능력이 움트게 된다. 아이 들이 저절로 “학습전당”에 찾아들도록 기다리자. 조기교육이 인재시교가 아니다.    아이들의 심신발전 규률에 좇아 어릴때부터 건강, 지혜, 덕 등 각방면에서 고루 발전하도록 이끌어 그들의 인생의 초행길에 전면발전기초를 착실하게 닦는것은 왈가왈부할바가 아니지만 조기교육중점이 아이의 “지력개발”인것은 사실이나 단순히 쓰고 읽고 계산하는것만이 아니다. 관찰력, 사유능력, 기억력, 주의력, 상상력과 창조력 이 여섯개 요소가 호상촉진하면서 완정한 능력체계를 구성한다. 하기에 아이의 잠재적 능력발굴과 정체적자질제고에 주의를 돌리여 생존능력, 독립성양성이 요긴하다. 어느 년령단계에 무엇을 알고 무슨 일을 한다는 가장 소박한 경험은 유아교육에서 절대 진리이다. 그래서 유치원소학교화가 문제시된것이 아닌가!                             2015년 3월 25일
483    (교육칼럼) 우리가 키우려는 사람들 댓글:  조회:5457  추천:0  2015-04-26
                                우리가 키우려는 사람들       개혁개방의 시대 상품경제모식에로의 급전환, 사회분배체계의 대분화, 외래문화의 침습, 사회상의 온갖 부패현상 등은 사람들의 사상관념, 가치취향, 도덕기준을 크게 헝클어놓았다. 하여 진짜와 가짜, 미와 추, 선과 악에 대한 도덕적판단에 비리한 영향을 생성시켰다.     이런 사회대환경은 학교의 덕육 소환경을 점차 오염시켰으며 정치사상교육과 륜리도덕교육으로 하여금 준엄한 도전에 직면하게 하였다. 특히 응시교육으로부터 자질교육에로 전환하는 문제에서 하나의 새로운 난제를 제기하였는바 덕육의 목표, 내용, 방법, 방식에 대하여 새로운 탐구가 수요되고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키워야 하는가?《합격된 중학생》을 양성하는 덕육목표에는 전면적인격발전이 전제로 되고있지만 목전 학교덕육현황을 본다면 의연히 정치리론의 주입과 각종 규장제도에 대한 약속력 등이 도덕륜리교육의 완성화, 내지는 결과로 묵인되고있다.    덕육을 단순히 정치화라고 생각하는것은 극《좌》적사상의 후유증이다. 만약 정치교원마다 리론설교에 력점을 두고 높은 점수만 추구한다면 청년학생들은 자신발전의 심리수요를 도외시하게 되고 덕육과정에서 개체의 도덕사회화와 사회도덕개체화, 량자간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합격된 사회주의공민》을 양성한다는것은 학생각도에서 문제를 사고하던데로부터 점차 사회주의공민의 각도에서 사회도덕문제를 사고하고 판단할줄 알게 하는 덕육의 최종목적을 실현하는것을 말한다. 주지하다싶이 능력형의 인재는 반드시 옳발른 도덕기준, 도덕원칙, 가치관념, 도덕행위방식을 갖추어야 한다.      학교의 덕육은 전반 국민도덕교육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자 그 기초로 되여있기에 국가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시대 청년학생들의 도덕 관념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있는가?     세계적범위에서 덕육의 추세는 이미 사회화에로 나아가고있다. 그런데 우리가 의 연히 리론에서 리론에 그친다면 경쟁의식이 소용돌이치는 현대사회에 적응할수 있는 인재를 육성할수 없을것이다. 때문에 덕육의 목표를 시대적차원에로 끌어올려 인격양 성에 모를 박아야 한다.  《사람은 오직 교육을 거쳐야만 사람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전후 부동한 층차의 사람으로서 전자는 자연인을 말하고 후자는 사회적인간을 말한다. 교육에서 사람을 육성한다는것은 바로 후자로서 인격적인간이다.    현재 우리 청년학생들의 인격발전은 상당히 불균형적인바 자아가치창조보다 맹목적으로 환경에 순응하려는 생각이 많고 외국숭배사상이 짙은가 하면 자신심,나아가서는 민족적자존이 아주 결핍하다.    전국을 들썽하게 한 한국기업주 김진선(金珍仙)이 자기 기업의 고용로동자들더러 무릎을 꿇게 한 사건에 대한 일부 대학생들의 도덕적가치판단은 실로 경악과 우려를 자아낸다. 100명 중국로동자들이 한국이업주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에 대하여 광주의 모대학의 1996년급 학생들이 토론을 벌리였는데 그들의 말은 참으로 시대의 난제를 제기하고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무릎을 꿇었다는 그 행동으로 말하면 어느 누구에게 무릎을 꿇은것이 아니라 현실에, 금전에 머리를 숙였을뿐이다. 이는 슬픈 일일망정 결코 수치스러운 일은 아 니다…》  《무릎을 꿇었다는것은 손천사(유일하게 무릎을 꿇지 않은 청년로동자)보다 더 용감하고 더 큰 용기가 수요되는 일이다.》  《한사람의 잠시적인 굴욕은 한집안의 안녕과 포식을 안겨준다. 그래 속이 빈 몸뚱이로 민족자존을 살릴수 있단말인가?…》   이런 사이비한 가치판단에 실망한 선생은 옳바른 면에로 이끌려고 자기의 견해를 칠판에 써놓고 동의하는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80여명 학생들 중에서 5~6명이 겨우 손을 들고 나머지 학생들은《와!》하고 웃었다. 물론 대학생들의 웃음에는 그들로서의 까닭이 있었을것이고 또 이런 사건에 대한 도덕적가치판단이 전반 대학생들의 도덕가치를 대체한다고 단정할수는 없지만 아무튼 시대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일찍 미국의 정객인 덜레스가《평화적이행설》을 내놓은후 자기들이 아먕을 우리의 제3-4대에 기탁하면서 호시탐탐하고있다는 사실을 젊은세대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사회주의혁명의 고향이였던 쏘련의 해체, 동구라파 사회주의 제 국가들의 붕괴는 맑스주의에 대한 신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랭정하게 생각할 때 가급적으로 청년학생들에게 애국애족의 굳은 신념을 키워주고 혁명적세계관을 수립시켜야 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높은 도덕적각오에는 고상한 인격이 안받침되여있다. 자고로 나라의 충신(忠臣),의사(义士)들은 지성인들이였는바 그의 우국우민의 고귀한 정신은 륜리도덕과 갈라 놓을수 없다. 그런데 장기적인 평화적환경에서 그리고 새중국의 행복의 요람에서 고이 자란 청년학생들은 자아주체, 자아중심의 경향이 점점 극단에로 나아가고있다.    하다면 덕육과정에 어떠한 인간상을 부각할것인가? 필자는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인격적인인간상을 그려본다.    첫째, 자타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줄 알며 남을 생각해주는 인정미가 있는 후더운 인간.    둘째, 밝은 사회가 수요하는 성실한 품성을 지녀 맡은바 일을 책임껏 열심히 해나가는 사람.    셋째, 자존, 자주, 자애의 정신이 있고 굳센 의지를 지니고 역경을 헤쳐나갈수 있는 진실한 사람.    넷째, 공익과 헌신정신을 발휘할수 있으며 관용과 아량이 있으면서도 품위가 있는 사람.    여섯째, 창조적의력으로 충만되여 자기의 운명에 도전하며 협동정신이 있는 운치있고 슬기로운 사람,.    일곱째, 애증이 분명하고 불의에 떨쳐나설줄 알며 정의를 위해 용감히 싸우는 고매한 성격의 사람.    여덟째, 렴결과 봉공을 인생척도로 나라와 민족의 진흥에 한몸을 바치려는 웅심이 깊은 사람.    상술한바와 같이 미덕은 인격형성의 주축으로서 미덕은 도덕의 집합이고 도덕의 기초는 인간의 자률정신이다. 미덕에 대한 자발적추구가 없다면 완정한 인간이 될수 없듯이 인간의 심미적의식은 그 사람의 일정한 사회적실천경험, 민족문화심리 등 제요소의 영향을 받게 되는바 옳바른 심미관은 인격형성의 좌표로 된다.    하지만 우리는 도덕완성의 자률정신양성을 유의무의하게 홀시해왔다. 자률정신양성에서 다음 몇개방면에 모를 박아야 할것이다. 우선 륜리규범에 대한 리성적천명이다. 륜리규범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것이라면 리성적인 천명은 어째서 그리해야 하는가를 납득시키는것 즉 해결이다. 이는 도덕적판단양성의 전제로 된다. 도덕규범을 알고있다는것과 도덕문제해결능력이 있다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덕육은 주입이 위주가 아니라 피교육자로 하여금 주동적으로 사고하게 하고 상응한 도덕기준으로 자아인격을 형성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도덕의 선택방식에는《습관형, 량지형, 리지형》이 있다. 습관형도덕선택방식의 특점은 여러사람의 시비표준이 곧 자기의 시비표준이 되고 권위의 시비표주이 곧 자기의 시비표준이 되여져 독립자주적판단능력이 결핍한것이다. 이는 이는《전형적인 중국전통적 도덕선택방식》이며 또 청년학생들이 흔히 취하는 선택방식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권위라 하여 절대적으로 미신하지 말고 자기의 경험, 자아리성, 자아반성으로 분별하여 판단할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 도덕정감, 도덕의지, 도덕신 념 등 도덕품성의 각 요소가 조화적으로 발전되도록 전면 고려해야 한다.     고금동서의 덕망이 높은자는 고상한 인격자였다. 그러기에 덕육은 인격양성에서의 주선이 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양성해야 할 인간은 현대적인 인격자이므로 어디까지나 시대적특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할것이다.    재래의 덕육내용, 방식, 방법에서 해탈하여 일련의 사상, 도덕문제에서의 곤혹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주의국가와 발달한 자본주의국가간의 경제실력차 이를 어떻게 볼것인가? 개인발전과 집단리익과의 관계 및 상호경쟁과 협동정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정확한가?《일체는 돈을 향하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외국의 달이 중국의 달보다 더 밝은가? 민족문화의 뿌리를 이어나가는것이 시대추세에 맞는가? 외국문화수용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민족의 자존, 자립이 세계화와 모순되는가? 일련의 사회성문제는 청년학생들도 관심하는 문제이므로 분석, 토론가운데서 사회투시력, 판단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교과서의 매마른 리론은 코란경처럼 설교에 머물고만다.    청년학생들도 진학, 취업, 련애, 개인발전, 치부 등에 대해 사회인과 마찬가지로 민감하다. 따라서 사회상의 도덕충돌은 이들의 심력속에서도 진행되고있다. 우리의 청년학생들은 일단 학교문을 나서면 망연자실(茫然自失)해하고 속수무책이기 일쑤이다. 그들은 공부하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면서 졸업증, 학력, 취직을 위한 공부만 하기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향상정신이 만족을 얻을지는 몰라도 인간의 궁국적인 목적인 자기발전이나 국가, 사회에 기여하는 창조적인재로서는 빈구석이 생기고있는것이다.    현시대 청년학생들의 심리속에는 무관심, 무흥취, 무감동 등 세가지 심리공간이 있다. 그러므로 학교가 자신의 범위내에서 공부를 잘하고 규률을 잘 지키는 이른바《합격된 중학생양성》각도에서만 문제를 사고하고 실천한다면 오도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생활속에 침투하고 사회에로 접근하게 하여야만이 장래 각종 모 순충돌과 부딪쳤을 때 능란하게 처세하고 자기절로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줄수 있다. 한마디로 참다운 인생관의 수립은 리론으로 완수할수 없다는것이다.    관건은 어디에 있는가? 교육주체의 자아실천을 잘 통제하는것이다. 환언한다면 도덕교육과 교육자아실천의 탈절을 시급히 통제해야 한다. 현재 교육실태를 보면 의연히 점수통수이고 민주의 기치와 의의를 날마다 말하지만 교원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일인치하의《순민교육》현상이 합법화되고있으며 충성, 성실을 권장하면서도 학급사이의 각종 경쟁에서 얼렁뚱땅하며 실속이야 어떠하든《우수》만 탐하는 현상이 보편적이다. 특히 번다한 수금현상은 학생들의 심령에 오도된 가치관념, 금전위력을 락인찍어주고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급히 바로잡혀져야 한다.    덕육은 학생심리발전수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덕육사업자들은 학생들이 무엇을 듣고싶어하는가, 무엇을 가장 많이 말하는가, 현재 어떤 구체적곤난이 있는가, 무엇을 가장 많이 말하는가, 현대 어떤 구체적곤난이 있는가 등 문제의 해결에는 아랑곳없이 정치리론설교에만 그친다면 학생들에게 모종의 거부심리를 생성시킬수 있을뿐 자각적인격수양을 잘 이끌어줄수 없다. 교육자와 피교육자는 높은 문화층차를 배경으로 한 인정세계의 동등한 성원이 되고 학교는 곧바로 지식의 전수, 평등한 삶의 의미를 나누어가지며 보람있는 인생을 준비하는 의로운 장소로 되여야 한다.    부언하는바 기본공덕과 고차원의 정치사상교육을 병진시켜야 한다. 반사회공덕을 구비한 사람이라 해서 정치각오가 높다고 할수는 없지만 정치각오가 높지 못한 사람은 도덕이 고상한 사회주의공민이 될수 없다. 이는 되돌아와서 정치사상교육으로 인격발전을 완전히 대체할수 없다는 설명이 되기도 한다.    자기본위, 자아실현만이 실혜적이라는 인생관 및 가치취향이 시대사상인듯 착각되고있는 현시대에 인성의 회귀, 인간성의 발굴, 인간성의 함양이 절실히 수요된다는것을 리성으로써만이 아니라 정감으로 트득시켜야 처세술, 처세의 도리, 사교술, 공관계처리 등에 능란한 보다 완미한 인격자로 부각될수 있다.    교육의 시대적추세는 어디까지나 진리로 인간심령을 밝혀야 한다. 교육자는 지력적, 신체적, 도덕적, 정감적, 심리적 제방면에서 가능한한 완성된 인격적인간을 양성 해내야만 우리의 더욱사업이 성공적이라고 부끄럼없이 말할수 있을것이다.                             1997년 1월 10일      
482    공룡의 방귀가 주는 계시 댓글:  조회:5094  추천:0  2015-04-26
                                   공룡의 방귀가 주는 계시      신화나 전설속의 괴물마냥 더없이 신비한 동물이였던 공룡가족은 1억5천만년이나 이 지구에서 서식하였건만 6천5백만년전 알수없는 괴변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공룡가족은 어찌하여 씨종자마저 남기지 못하고 전멸하고말았는가?    공룡의 멸종원인은 시종 해답이 묘연한 수수께끼로서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제기한 가설만해도 무려130여종이 되지만 서로 엇갈리고있다. 외행성충돌설, 지자기(地磁气)역전설, 성기능쇠퇴설에 화산폭발설 등등이다. 그중에서 가장 희극적색채를 띤것은 프랑스의 한 과학작가 최근에 제출한 이른바 공룡의《방귀자멸설》이다.    이 과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공룡의 가족성원은 구성이 복잡해서 하늘을 나는 익룡도 있었고 뒤다리로 걷는 공룡도 있었으며 육식하는 공룡도 있고 초식하는 공룡도 있었다. 길이가 1메터되는 작은놈도 있었고 몸길이가 30메터도 넘고 체중이 80~ 100톤이나 되는 놈도 있었다. 거대한 공룡이 매일 먹는 식물이 13~260키로그람이나 되는데 쉴새없이 방귀를 뀌였다고 한다.    공룡의 방귀에는 대량의 메탄(甲烷)이 함유되여있는데 1억년동안이나 내보낸 메탄이 산소층을 파괴하다보니 지구의 생태환경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로하여 지구상에서 공룡들의 먹거리가 없게 되였다. 결국 공룡들은 자기들의 방귀로 멸종의 비극을 초래한것이다.    물론 공룡의 방귀자멸설은 수많은 가설중 하나로서 믿어도 되고 안믿어도 된다. 그러나《인간과 자연》의 각도로부터 연구한 공룡의 멸종원인속에《합리적내핵》이 있다는것을 믿지 않을수는 없을것인바 모든 생물군이 다른 물종을 무시하고 너무 팽창한다면 공룡들처럼 기필고 자멸을 자초한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공룡의 방귀는 생태환경에 유해했지만 그렇다고 뀌지 않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너무 많이 뀌여서도 안된다. 우리는 지구촌의 패자였던 공룡이 제방귀에 자멸했다는 가설에서 다시 한번 깊이 사색해보지 않을수 없다. 지금 공룡의 멸종원인에 대한 고심참담한 연구는 실제상에서 인류자신의 생존과 번성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출발한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인류는 공룡이 아니라 고급령장동물이다. 그러나 공룡처럼 이 지구촌의 패 자로 종횡무진한 력사도 유구하다. 억겁으로 헤아리는 시간에 비하면 몇십만년이란 한순간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대자연에 대한 파괴의 력사로는 결코 짧지 않다고 말해 야 할것이다.    인류의 물질문명은 고도로 발전하였고 인구의 증장률은 지구가 용납할수 없는 극한에로 치달아오르고있다. 그만큼 인류문명권에서 무한정 쏟아낸 온갖 배설물들은 공룡의 지독한 방귀에 못지 않게 지구의 생태환경을 여지없이 파괴하였다. 인류의 문명은 소위 만물의 령장으로서의 자존심을 체현할수 있겠으나 돌이킬수 없는 죄악적인 자연파괴의 력사와 동보해왔던것이다.    인류는 최고문명을 찬미하면서 결국 자신의 찬미시를 써왔지만 비극은 이미 그 찬가속에서 잉태되였다. 인류가 세계중심, 절대적인 지배자로 자처한 그 시각부터 모든 동식물의 재앙이 시작되였다. 다른 물종의 생존권과 존엄은 철저히 박탈당했다. 지금 지구상에서 매일 27개의 물종이 사멸되고있건만 인류는 이런 비렬한 행각을 끝까지 그럴듯한 리유로 변호하고있다.    그 리유란 바로 대자연에 대한 정복이다. 처음엔 대자연이 몹시 잔혹했지만 현재는 인간이 잔혹하다. 인류가 대자연에 대해 란폭하게 행사할 때는 모든 규률을 무시했고 대자연이 인류에 대해 보복할때는 모든 규률에 따른다. 대자연은 착오를 범할줄 모른다. 착오는 자고로 인류가 범해왔고 지금도 그냥 범하고있다.    유아시기의 인류는 거대한 자연앞에서 늘 겸손했고 소심했으며 또 그만큼 근신하였다. 그러다가 원시적인 지혜가 싹트고 도구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점차 대항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대자연에 대한 무지와 몽맹의 략탈전이 무지경으로 시작되였다.    인류는 이미 거의 모든 령역에서 자여을 정복하고 자신을 고도로 발전시켜오면서 천문수자로도 계산할수 없는 물질재부를 창조했는바 응당 축하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대자연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삼림에 대한 무절제한 훼멸은 드디어 전 지구적인 사막화를 가속화함으로써 마침내 사막이란 불가항력의 자연력이 인류의 록색가원을 향해 대진군하고있다. 해마다 더 극성부리는 황사바람이 인류를 세기말의 공포에 밀어넣고있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하천들이 고갈되고 담수공급이 극한에 이르러 오늘 5대주의 50여개 나라에서 물자원을 빼앗기 위한 충돌이 자주 생기군 한다. 유엔사무총작 안난은 담수에 대한 치렬한 쟁탈은 가능하게 미래의 대충돌과 전쟁의 근원이 될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 이렇게 자연의 보복을 당하는것은 과연 인과보응이 아닐가? 뒤늦게야 각성하고《인류환경선언》을 반포했지만 너무 늦었다. 죄는 지은데로 가고 공은 닦은데로 간다는 옛말이 그른데 없다.     일면적인 경제발전과 불합리한 경제개발은 페수, 페가스, 페찌끼 등 세가지 페물을 수없이 배출함으로써 환경을 만구할수 없을 정도로 오염시켜버렸다. 인류자시의 활동으로 하여 조성된 제2환경문제 혹은 차생환경문제는 이미 지구촌의 공동한 우려로 되였다. 이외 도시의 먼지와 소음, 쓰레기와 방사성물질도 인간의 목숨을 노리고있다. 그래 이 모든것이 공룡의 방귀와 무엇이 다른가?    미국의 많은 도시주민들의 가장 청신한 공기를 마실것을 바라는 마음은 거의 종교에 대한 추구만큼이나 열광적이란다. 그들의 추구가 너무 사치한것이라면 사시장철 연기를 맡으며 오물냄새에 습관되여야 하고 화학비료에 절은 낟알과 남새를 먹으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무엇을 추구해야 사치하지 않고 실제적일가? 알수 없다.    다만 인류가 스스로 창조한 기적의 시대에 기탄없이 뀌고있는 그 모든 방귀들이 공룡의 방귀처럼 장차 자아훼멸의 비극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 혹시 어떤 사람들은 기나라사람이 하늘을 근심하는 격이라고 웃을수도 있겠지만 자연은 인류가 그냥 마음껏《방귀》를 뀌라고 내버려두지 않을것이다.                                            2004년 5월 12일 
481    인간백태 댓글:  조회:5486  추천:0  2015-04-26
                                   인간백태      인간이란 무엇이냐? 그 의미가 다원적이여서 착안점에 따라 정의도 다각적이고 다층차적이다. 우선 생물학각도에서 인간은 포유강 령장목 인과에 속하는 진화가 가장 우수한 동물이다. 즉 로동할줄 알고 말할줄 알고 사유할줄 아는 고급령장동물이다.    문화적각도에서 인간은 유일하게 재부를 창조하고 리해할줄 아는 동물이다. 철학 적각도에서 인간은 사회관계의 총화, 만물의 척도라고 한다. 그래서 정치동물, 경제동 물로 다시 진화하고…그리고 인간은 일종 자위적존재로서 능히 주객체가 호상 체험하는 유일하게 수치를 알고 웃을줄 아는 동물이다. 한즉 상기 여건중 어느 한가지만 구비하여도 인간이라고 하겠다. 거지도, 부옹도, 위인도, 범부속자도, 시정배도, 무뢰한도, 강도도, 살인악마도…    옛날 성현들은 인간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었다. 군자란 인격이 고매하고 품성이 돈후하며 정직한 사람을 가리키고 소인이란 인격이 저렬하고 품성이 악렬하며 파렴치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간을 말한다.   《한서. 위전》에 이런 구절이 있다.《인,의, 례, 지, 순, 선, 신의 마음이 없는자가 소인이니라.》한즉 소인과 군자의 인간품격의 우렬은 그 행위결과에서 헤아려진다고 할수 있겠다.     인간행위의 발로에는 세개의 기원이 있다. 첫째는 욕망(욕념, 충동, 용기)이다. 욕망은 허리부위에 위치해있는데 곧 에네르기인바 그 근본은 성욕능력의 저장이다. 둘째는 정감(정신, 웅심, 용기)이다. 정감은 피를 순환시키는 심장에 위치해있는데 경험과 욕망의 유기적공명이다. 셋째는 지식으로서 대뇌에 위치해있다. 지식은 욕망의 눈이고 령혼의 향도자이다. 상술한 품질과 능력을 소유한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 사람이면 다 공유하고있다.     어떤 사람들은 천생 욕망의 화신으로서 본분을 벗어나 무지경의 탐욕에 빠져들고 무절제한 욕념때문에 정신과 육체를 탕진하고있다. 이런 탐욕자들은 이미 가진것이 자신의 목표에 비해 늘 보잘것 없다고 여기면서 더 가지지 못해 안달아한다. 아마 이 부류의 인간들을 두고《욕심이 곰발바닥보다 더 두껍다.》라는 속담이 만들어졌으리 라. 이런자들은 봉건시대에도 많았거니와 현대사회에도 한없이 많다. 그들이 기업이나 산업을 지배, 조정하면 제배속채우기에 날치는데 절은 황페해도 방장만은 살지는 기괴한 사회현상이 생긴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정감과 용기의 전당에 오른다. 그들이 근심하고 담론하는것은 재부가 아니라 싸움이며 승리자의 자세이다. 그들의 자호는 곧 권력이다. 그들의 쾌락도 전쟁에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예로부터 륙군이나 해군을 조직하였다. 프랑스의 비스마르크나 로씨야의 뾰뜨르1세, 나뽈레옹과 히틀러같은 제왕들을 례로 들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군대를 등대고 독재정치를 실시하면 멸망은 곧 닥쳐온다.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그들의 쾌락은 심사숙고와 감오(感悟)이다. 그들이 갈망하는것은 재부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바 곧 지식자체이다. 그들은 더러운 시장(市场)을 백안시하고 격세적인 사상적고요와 청정함속에서 자신의 생며가치를 실현한다. 이 부류의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이 과인하지만 자고로 세상이 용납하지 않았고 등용하지 않았다. 례하면 구라파의 볼떼르와 루쏘, 맑스와 중국의 량 계초같은 지성인들이다.     이와 반대로 소인배들은 예로부터 권력자들의 안목속에 하나의 풍경이였다. 소인배들은 권력이라면 혈안이 되여 광분하였는바 마치 구리내 맡은 파리떼나 등불에 모여드는 모기떼같다. 그런자들이 일단 권력을 잡으면 세상 몹쓸짓을 다하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당에는 나라까지 말아먹는다. 춘추전국시기 제환공의 충신 비무기(费无忌),진조의 간신 조고, 남송의 간신 진회, 당현종의 총신 안록산, 청조 건륭시기의 화신…등은 모두 자신을 진주라고 여긴 자들로서 그들은 무시로 매몰당하는 고통을 겪기마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인배들이였다.  《인생12진법》이란 책에서 인간의 출생, 운명, 성격을 우주공간의 성좌와 련계시키고있는데 인간이 생명현상과 별의 운행에 어떤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는지 단언 할수 없지만 인류문화사의 은하계에 확실히 수많은 찬란한 별들이 떠오른것은 사실이다.    례하면 천재식 격분과 저주의《잔혹한 격정》을 쏟았지만 사회의 리해와 용납을 받지못하고 이 세상을 총총히 떠나버린 니체와 바이론을 혜성에 비긴다. 천재의 지혜와 끈질김으로 인생의 허무와 비극을 투시하고 세속을 개조하는 실천속에서 자신의 생명력을 과시함으로써 인류의 문화사에 빛나는 편장을 엮은 칸트나 볼떼르 같은 천재들을 항성으로 떠올리고있다.    웃으면 다른 사람도 웃게 하고 사고하면 다른 사람도 사고하게 하였던 볼떼르는 루쏘와 더불어 인류사회의 대선각자들이다. 이들은 진정 인류사회의 벽공에 떠오른 큰 별들이다. 중국이 대성인 공자도 이 세상을 하직할 때《큰별이 기울도돠. 큰별이 기울도다.》라고 자탄하였다 한다.   《류장상법(柳庄相法)》이란 책에서는 사람들을 이렇게 분류하였다. 사람이 정직하고 나라와 민중을 위해 심려한다면 천인상(天人相)으로서 천인상을 지닌자는 별에서 왔다고 한다. 사람이 흉금속에 길상을 품고 어진마음으로 세상을 널리 구제하고저 한다면 보살상인데 보살상을 지닌 사람은 신선들속에서 왔다고 한다. 사람이 탐욕스러운데다가 잘노하고 어리석으며 남을 해치면서까지 제속만 채우려하는 사람을 중생 상(众生相)이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금수들속에서 왔다고 한다. 천인상이나 중생상이나 보살상은 흔할리 없으나 우리 모두가 중생상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에게 속하는 동물성을 가지고있어 무슨 띠를 타고났다고 한다.    그렇긴 하지만 후천성 인간상을 부각하는것을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은 곧 도덕적품격, 인격력량으로서 자기다운 참된 인간상을 지니고 세상을 살자는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천층만층 구만층이다. 이런 인간상을 우리는 흔히 보게 된다. 만국동물대회에서《나를 내놓고 또 누가 왕이 될수 있는가?》라고 웨치는 사자처럼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안하무인인 사람, 범을 등대고 위풍을 부렸다는 여우같은 사람, 사촌이 기와집지어도 배아파하는 격으로 남이 좀 잘되는듯싶으면 질투하고 시기하는 원숭이같은 사람, 남이 사정이야 어찌되였든 제 배만 채우려는 제주도 똥돼지같은 사람,제 주견이라고는 한가지도 없이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기 좋아하는 앵무새같은 사람, 약자는 기시하고 강자앞에선 아양떠는 발바리같은 사람, 창조정신이런 없이 주인이 주는 사료에만 만족해하는 가축같은 사람, 야산의 승냥이처럼 독단독행하며 인연을 모르는 사람…등 인간상은 이 세상에 귀찮은 존재이다.    하지만 세상에 순금이 없듯이 사람도 완전완미한 사람은 없다. 하믈며 인간은 역설의 화신이요, 모순덩어리라 함에랴ㅏ,인간은 자기가 가지고있는것의 총화가 아니라 아직 가지지 못한것, 혹은 앞으로 가질지도 모르는것의 총화라 할 때 잘나도 못나도 진실한 인간상을 가꾸며 사는것이 또한 인간다운 삶일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활동이며 미래에 대한 불후의 예감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튼 인간은 한순간은 사람으로 살수는 있어도 한평생 사람으로 살기는 어렵다.                                                                          2003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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