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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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진언수상록 (28) 유명무실 댓글:  조회:5997  추천:0  2015-01-11
                                 유명무실                                            진 언      우리 말 속담에 아이를 보고 이름을 지으라는 말도 있거니와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도 있다. 말하자면 사물마다 그 존재의 형태에 딱 맞는 실속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옳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 이름에 담긴 내함을 전적으로 맹신할수 없는 말이 되겠다.    천태만상의 우주만물에 알맞게 이름을 정할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일가? 로자가 도덕경에서《이름을 붙일수 있는것은 영원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것 즉 무명(无名)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것 즉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런 까닭에 상유(常无)에서 그 지극히 미묘한것을 보고자 하고 상유(常有) 에서 그 결과를 보고자 한다.》라고 쓰고있다.    하다면 맨 처음 누가 어째서 허공을 하늘이라 하고 지각변동으로 치솟은 높고 험한 곳을 산이라 하였는지 알배없이 그냥 하늘이고 산이라 인지하듯 수많은 사물을 선인들이 이름지은대로 알고 그렇게 부르기에 습관이 되였다. 로자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 존재한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만물을 낳은 모체라고 하였다. 원래 인간에게는 직관이라는 능력이 있지만 별로 따지지 않고 그대로 부르는 관습이 응고되여 있다. 습관이 제2천성이듯이 관습이란 그렇게도 검질긴것이다.    강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물이 말라버렸어도 무슨 강이라 부르고 물은 없고 높은 뚝만 남아도 그냥 저수지라 부른다. 농촌에서는 한번 생산대장질 한사람이면 죽을 때가지 무슨 대장으로 불린다. 옛지명같은것은 이런저런 수요에 맞게 개칭하면 곧 그대로 호칭하지만 그 누구에게 한번 붙인 직함은 그렇게도 생명력이 있는것이다.    우주의 아득한 과거와 무궁한 장래도 쉽게 이야기할바가 아니다. 이를테면 별자리는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을뿐이고 지구에 위도와 경도라는것도 인간이 그은것이지 지구에 원래 그렇게 금그어져있은것은 아니다. 그러니 천지만물이 사람들에게서 이름을 지어 받고나서 그 이름에 맞는 내용을 담고있는것인지 누가 알랴!    자기의 눈으로 볼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될것이다. 장자(내편)에 이런 구절이 씌여있다. “사물은 저것이 아닌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것이 없다. 저것은 저것의 립장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것으로써 알게 되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모든 인식작용은 내가 이것을 안다는식의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안다고 말하는것은 이미 과거가 되여버린 기억속에 인식을 그대로 믿었다는것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다시 한번 고찰해 볼필요가 있다. 표상은 과거에 내가 알고있던것을 재현하는 행위이지 새로운 지각은 아니기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이 갖고있는 이름에 좌우되여서는 안된다. 명실상부, 명불허전이라는 말에 반해 유명무실이던가 허명무실이라는 말이 공연히 생겨난것이 아니다. 도금은 불수강인지, 백금인지 당장은 판별할수 없게 하나 언젠가는 도금이 벗겨지고 원래의 질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옛사람들이 지어놓은 이름을 가지고 그 사물의 본질로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존재는 필요에 의한 뜻의 산물로서 그 이름이 붙여지고 그 이름에 맞는 쓰임을 다하다가 쓰임이 다하면 그 이름도 유명무실해진다. 례컨대 물레라든가 발방아라든가 가대기 같은것들은 이미 력사의 박물관 에 이름만 새기고있듯이 말이다. 꽃은 지고나서 꽃나무로 남고 나무는 목재로 되면 원초적 존재의 리유를 상실하는 도리와 마찬가지이다.    음악, 시, 춤, 그림, 조각 등등 모든 예술은 영원히 명실상부한다. 그런 심리적, 심령적인 행위에는 그 행위에 등가물들이 체현된다. 예술에는 예술에 도취되는 자와 예술작품으로 도취시키는 자가 있다.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예술에 관중을 심취시키는 형식이 있기때문이 아니라 그 심오한 내용이 있기때문이다. 시인 의 노래처럼, 화가의 그림처럼 지성은 그렇게 우리 자아에서 투영되고 있는것이다.    괴테는 말한다. 예술이나 미가 최고의 리상이 아니고 그것은 보다 고상한 존재에 이르는 힘을 부여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것은 그저 활동이며 남을 위하는 희생적인 활동만이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남긴다고…    희랍신화에 제우스신이 동물을 만들때 곰과 코끼리에게는 억센 힘을 주었고 토끼와 사슴에게는 빠른 발놀림을 주었으며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를 주었고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므로 매우 서운하게 생각하고 나중에 물으니 생각하는 슬기와 사랑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령장이 되였다고 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령장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지구촌에 사는 생령들을 대하고 있는가? 아니다.    사람이나 사물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일것이다. 장자는 대지가 내뿜는 숨을 바람이라고 이름했다. 어떤 위치에 앉았던, 어떤 직종의 사람 이든 자신의 근원을 알고 자신의 용도를 알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귀히 여길줄 알게 되고 더불어 존재하는 타자를 자기 존재와 동등 하게 소중히 여길줄 알게 된다. 그것이 함께 하는 이 세상을 사는 지혜요, 살아가는 진정한 리유가 아닐싶다.    존재함으로써 존재의 리유로 된 우리는 사람이라는 미명으로, 자식이라는 이름, 아버지,엄마라는 이름으로, 각종 직업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존재의 리유를 현시한다. 하다면 직장에서 직업자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인가? 몸은 교단에 섰지만 다가 진정하게 가르치는 자라고 말할수 있는가? 학자라는 호칭은 어마어마하지만 지식폭발의 이 시대에 상응하는 학자로 자기를 향상시키고 있는가?    자기의 내속이야 어떠하든 사람들은 흔히 남들의 긍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특히 남들의 칭송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 백방을 다한다.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어도 두달은 살수 있다" 고 했는데 객관적긍정이란 그렇게 중요하다. 복잡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서로의 격려와 칭찬과 긍정적인 말은 한 사람의 가치의 가늠하는 저울판과 같다. 그런데 남의 칭찬이 무슨 대순가?      세상에 허명무실한 사람이 그 얼마던가? 허명무실과 같은 말로 유명무실(有名无实),남기북두(南箕北斗), 명존실무(名存實無)가 있다. 이와 반대의 의미로 명불허전이 라는 말도 만들어졌는데 이를테면 부모라는 허울은 썼으나 자식을 길거리에 내버리고 팔아먹은 그런 인간들도 있으니 그런 자들에겐 부생모육지은이란 말과 애초에 인연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허명무실이란 말이 적격이 되는것이다.    비록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 남을 속임은 비일비재이지만 자기를 속이는것보다 더 무료한 일은 없을것이요 실속없는 자신을 분식하는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리라. 자기를 자꾸 과장하고 분칠하노라면 나중에 원래의 자신의 모습도 모르게 된다. 자신을 속이면서 허장성세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것이 론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것은 무모한 아집이나 넘쳐나는 자아감각에서 출발하기때문일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범한 뒤에야 깨닫는 약점을 가지고있다. 그래서 졸문에서 언감생심 누구를 훈계하려고 하는것이 아니고 오래 살다보니 곤혹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인생철학의 조목들을 두루 베껴보았을 따름이다. 플라톤은 육신의 눈이 둔해져야만 마음의 눈이 예리해진다고 하였지만 그 이름에 맞는 소임을 착실하게 담당한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2008 년 11월 6 일
439    진언수상록 (27)모른다는것의 지혜 댓글:  조회:5867  추천:0  2015-01-08
                                  모른다는것의 지혜                                                진 언      고대 희랍에 찌노라는 대철학가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다.“스승님은 그렇게 지식이 연박하고 문제를 분석함도 투철하여 해답을 분명하게 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의혹을 보류합니까?”    찌노는 아무말없이 큰 원을 그리고 그안에 다시 작은 원을 그린 다음 차분하게 말했다.“이 큰 원안에 면적은 내가 장악한 지식이고 작은 원안에 지식은 너희들이 알고있는 지식이다. 이 두개의 원밖의것은 너희들이나 내가 모르는 지식부분이다. 큰 원의 둘레의 길이가 작은 원의 둘레의 길이보다 더 길므로 내가 접촉한 무지의 범 위가 너희들보다 더 큰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늘 자신을 의심하는 까닭이다. 이 제는 곧 알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찌노야말로 얼마나 겸손한가?    고대과학문화가 고봉에 오른 아테네에서는 철학가 소크라테스를 가장 지헤로운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 철학가는 영예앞에서 랭랭하게 대답하였다.“나는 다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 만약 나의 지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점이 있다면 자신이 무지하다는것을 알고있다는 그 점일것이다.”    역시 대철학가다운 겸허였다.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그와같이 무지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가 무지하다는것을 모르고있다는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혜를 “자기의 무지를 아는 지혜”라고 이름하자. 소크라테스는 한평생 만나는 사람에게 끝없이 묻군했는데 결과 도처에서 알고있다는것의 화려한 외투속에 무지가 숨어있다는것을 간파하였다. 그가 한평생 구지(求知)활동을 한것은 마치 인간의 인식능력은 제한되여있고 얻은 지식도 왕왕 믿을수 없다는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듯싶다.    허위와 성실이 한곳에서 살수 없듯이 교오와 실력도 한사람의 몸에서 살수 없는것이다. 무지는 자부심의 문을 여는 열쇠이고 겸손은 자기를 알도록 이끌어주는 지혜선생이다. 찌노나 소크라테스같은 지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속에 숨어서 살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두뇌를 다른 사람의 사상의 활무대로 만든다.    인간은 자기의 지식은 영원히 알고있지만 자기의 무지는 영원히 모르고 있다고 해야 할것이다.  학문을 이루고 나면 책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있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박식하다고 생각한다면 실상은 그가 더없이 무지하기때문이다. 물론 이런 심오한 도리는 현자들만이 터득할수 있는 학문이라 할수 있겠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알고있을뿐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은 유식한체 하는자의 경솔한 오만성을 비웃고 인간의 인식을 합당한 자리에 올려놓은 극히 겸손하고도 슬기로운 지혜가 아니겠는가?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것을 알고있는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지식이 연박하고 경륜이 풍부하기에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했을것이다. 없는것과 있는 것간에 충돌이 생길수 없듯이 아는것과 모르는것간에 충돌이 구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서 가끔씩 제일인자연하고 권위자연하며 남의 생각을 제생각의 틀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제혼자 총명한체, 잘난체하는 자들은 속물근성이 짙기때문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경우에도 안하무인격으로 돌아가며 남을 나무라고 훈계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왼고개가 탈린다.    가령 어떤 사람이 누구보다 박식하다고 자긍한다면 실상 그가 더없이 무지하기 때문이다. 가령 좌석에서 력사를 담론하게 되였을 때 공을기가《회(回)자를 쓰는데 네가지가 있는데 너 아니?》하는 식으로《중국에 4대발명이 있는데 제지술은 동한 때에, 인쇄술은 수조때에, 지남침은 전국시대에, 화약은 당조말기에 발명되였단 말 이요. 알았소?》라고 낡은 력사교재를 들춰낸다면 듣는 사람이 어떨가?    혹여 입바른 청자가 말바르게《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지금은 더욱 일찍 발명했다는것을 고증하는 경향이라네. 발명사가 새롭게 씌여지구있지, 례컨대 지남침은 기원전 2700년 헌원(軒轅)황제가 발명했고 지남침은 기원전 200년 좌우에 발명됐고 지남침은 기원전 100년좌우에 발명되였고 화약은 3국시대라고도 하고 서한때라고도 하고…당조이전이라고도 하지, 아무튼 당신의 말만이 영원한 진리라고 하는건 무모한 짓거리라구…》  《그게 어디서 난 사이비지식이요? 사유에 혼란이 생긴 사람이 쓴게 분명해…》  《자기가 모르는것은 죄다 사이비하다는것은 경박에 가까운 무리야, 중국이 세계제일 백가지를 보게나. 아니라구? 에라, 당신이 다 맞다구치세. 그러나 강물은 이미 아득히 흘러갔네. 이제 그 물로 방아를 돌릴수 있나? 하하하…》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이런 사람들을 드문히 본다. 그리고 그들의 오만한 자태에 코방귀를 뀔수밖에 없다. 물론 당사자는 제멋에 떠서 남들이 비웃는지 찬탄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것도 틀리오, 저것도 맞지 않소 하면서 그냥 장훈을 부른다. 모르면서도 노상 다 아는체하는 사람은 기실 귀자랑밖에 없는 당나귀와 같다.    두 눈을 싸매고 성마돌을 돌리는 당나귀가 천리를 가는줄로 알고 쉼없이 가고가다가 결국 자기가 제자리를 뱅뱅 돌았다는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맹랑하랴! 빈통이 굴러가면 소리만 요란스럽다. 물은 흐를때 소리난다. 그러나 정녕 깊은 물은 흘러도 고요히 흐른다. 당신은 그래 보지 못하였는가? 조밭에 잘 여물어 알찬 이삭들은 고개 를 숙이고 있는데 꼿꼿이 서있는것은 언제나 가라지들이란것을.    산꽃중에 녀왕이라 할수 있는 나리꽃을 본적이 있는가? 나리꽃은 손수 짜지도 꿰매지도 않은 옷을 입는다. 그러나 그 청순함과 순박함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교만은 무지의 별명이요 무지한자의 통행증이기도 하다. 스스로 자기가 총명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가 갇힌 감방이 널직하다고 자랑하는 죄수와 같다는 명언은 얼마나 유모아적인가?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왜 일매지게 작은병에 담겨있을가? 한번 사색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싶다.    검푸른 바다물은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바위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질 때 하얗게 창백한것을 당신은 보았는가? 자기를 낮추었다해서 손해될것이 없고 자기를 잔뜩 높였다해서 리득될것 하나 없다. 소크라테스의 기본관념은《우리들의 무지를 승인함…》으로써 지혜를 낳는 모체라는것을 가르치고있다. 인류의 지식은 “분립된 개인의 지식”의 형식으로 존재하는것이 결코 일종“정체적지식”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아무도 전 인류의 정체적인 지식체계를 완전히 장악할수 없으며 아무도 인류의 지식의 정화를 완전히 장악할수 없다. 그만큼 우리가 알고있는것은 단순하고 천박하 다. 매개인은 자기만의 생활경력과 심령체험, 인격특징, 지식결구와 사회지위가 있기 에 우주의 오묘함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인식과 감정에 자기의 국한성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무지”의 지혜를 가진 지자들은 부단히 자기를 반성하며 수시로 자기의 원유의 견해와 신념을 포기하고 새로운 지식과 견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여 있다. 자기가 무지하다는것을 아는것은 겸손이 아니라 성실이다. 스스로를 잘 안다는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것은 한 사람의 미덕이 아니라 최저의 교양이다. 인류의 지식령역이 날로 넓어지고 사회생활이 날로 다양해지는 현시대 혼자서 무불통지한듯이 으시대는것은 자기가 무지하다는것을 표백하는것과 같다. 대화에서 혼자 모든 얘기를 도맡아 하려는것은 실례만이 아니라 무분별한 행동이다. 늘 겸손하자!                                    2006년 1월 5일   
438    기담괴론 댓글:  조회:6203  추천:2  2015-01-04
                                  기담괴론                                       진 언      기담괴론이란 우주에 군림하는 이률배반현상을 무시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괴담이다. 여기서 이률배반은 호상충돌, 자아모순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순수리성적 이률배반의 발견은 칸트의 철학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질뿐 만아니라 현실생활에서 심입된 리성적비판으로 현상의 본질을 투시하고 형이상학의 곤경에 빠지는 근원을 찾아내는데서도 심대한 실천적의의를 가진다.    간단한 례를 든다면 모든 장사군들은 가능껏 고가로 더많은 상품을 팔기를 바라고 소비자들은 될수록 눅고 질좋은 상품들을 사려한다. 우산장수는 매일 비가 내리기를 갈망하고 양산을 파는 사람은 맨날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각자 리기적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이는 이률배반적인 가치관, 가치창조문제이다.    이 세상에 일체존재물은 잘못이 없다. 존재가 곧 리유이고 도리이다. 다른건 말고라도 연초공업에 대해 말해보자. 담배는 존재의 자유와 그 자체의 도리가 있다. 연초업은 유구하고 “휘황찬란”한 력사를 기록하고 그만큼 항구력(恒久力)을 가질수밖에 없다. 흡연과 금연에서 제기되는것은 바로 인간이 어떻게 리용하고 소비욕망을 절제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작금에 범람하는것은 연초뿐인가? 누가 그것을 막을수 있는가? 현대인들은 “금령”을 선호하는것같다. 금연의 구호에도 도리가 있다할수 있고 흡연현상에도 자연적인 섭리가 고유되여있다고 단언할수 있다.      흡연도 인류의 활동으로서 담배를 피우느냐 마느냐는 일종 기호, 생활방식이다. 인류가 절멸되지 않는한 근절되기는 틀려먹었다. 세계상에서 약 10억명이 담배를 피우는데 중국만도 3억이 넘는다고한다. 흡연의 매력은 그처럼 강력한것이다. 비록 금연자들의 호소가 주류언론으로 되여있지만 흡연은 이미 복잡한 사회문화현상으로 굳어졌기에 자신과 곁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금연운동을 호소하는것만으로는 리유가 부족고 그만큼 설복력이 결여하다.    흡연자와 “금연운동가”들의 장기간의 기싸움은 누가 누구를 완전히 부정할수 없는 이률배반현상이다. 농민들은 담배재배에 여전히 알심들이고 담배공장들에서는 천방백계로 담배생산을 추진하고 애연가들은 한사코 담배연기를 피워올린다. 흡연으로 온갖 질병이 발생하고 사망자가 얼마얼마라고 겁을 주고있는데도 말이다. 그야말로 생사를 불문하는 비장한 결의가 없이는 행하지 못할 장거와 같다.    금연의 핵심은 건강관리이다. 헌데 왜 수많은 사람들이 한사코 담배를 피우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아직까지 과학적으로 명확한 해답이 주어지지 않고있다. 지금까지 공인된바는 담배속에 니꼬찐이 사람을 흥분시키거나 진정시키는 두가지 상반되는 특수효용이 있기때문이다. 아무튼 흡연은 유구한 력사를 기록한 문화현상으로 되였다.    왜 금연운동이 진일보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는가? 담배가 위해롭다거나 담배에 인이박혔다는 사실자체로는 어떠한 현상도 해석할수 없기때문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것은 생리수요라기보다는 심리수요라 하는것이 더 타당할것이다. 물론 금연운동이 날로 거세여지는 어경에서 담배의 좋은 점이라든가 감각의 호악을 론하는것 자체가 벌써 공중의 타매거리로 될수도 있지만 그나마 호소, 권고에 머무를뿐이다.   폭음도 문제거리이다. 그런데 폭음은 그 본인 하나에 달린문제여서 당연지사로 여기는데 흡연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고해서 뭇매를 맞게 된것이다. 간접흡연으로 신체상 영향이 있다는 론단도 근거를 가지고있다. 하지만 타인의 심신건강에 해를 주는것이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담배연기뿐인가? 다른 물리적인 가해는 없는가?    흡연이 정말 백병의 괴수인가? 담배한가치에 불을 붙이는 순간 죽음의 도화선에 불을 다는것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단정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가?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애연가들을 설득시키지 못하고있다. 그럼에도 흡연자들은 마치 옛날 포병부대의 취사원이 맨날 검은가마를 메고다녔듯이 병마의 잘못을 걸머지고 다닌다.    기실 장수한가 단명한가 하는 문제상에서 작금에도 어떤 물질과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있다. 말하자면 장수한 사람은 어째서 장수하는지, 단명한 사람은 어째 단명한지 증명해내지 못하는 도리와 같다. 흡연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명제로 곧 흡연이 수명을 감소시킨다고 선전하지만 흡연자들이 기겁초풍할만큼 설복력이 있는 과학적증명을 내놔야 확실한데 그저 개률적으로 말하고있는것이다.    흡연자들이 걸린 병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속에도 발병한다. 담배지골이면서도 건강장수한 사람들이 있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속에도 건강장수한 사람들이 있다.  이률배반인가? 자연의 섭리인가? 흡연자들속에 단명한 사람들이 많고 비흡연자들속에도 단명한 사람들이 많다. 흡연자가 장수하고 비흡연자가 단명하다고 강조하거나 흡연자는 단명하고 비흡연자는 장수한다고 강조하는것은 형이상학적이다.    복잡한 문제를 간단화하려는것이 인류가 잘 범하는 잘못의 한가지이지만 담배가 해롭기에 담배재배를 철저히 페지하고 권연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고  담배판매를 근절시키면 된다. 아무런 먹을게 없을 때에 사람은 굶어죽는다. 이런 간단한 처리방법에 이률배반이라는 잠규칙이 작동하고있기에 생산은 생산대로 흡연은 흡연대로 지속되여왔고 또 지속되여가는것이 아니겠는가?    담배의 위해성을 담배곽에 쓰면서까지 담배를 생산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는격도 아니다. 담배를 파는 약국도 있다니 유머스럽다. 엄밀하게 따지면 담배생산으로 인한 제일피해자는 흡연자들이며 담배값을 인상하는 경우, 경제적피해자도 흡연자들이다. 결국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들에게 돈을 받고 위해성을 파는것이다. 속간지러운 거짓말은 먼저 거짓말을 하는 그 자신을 웃기는법이다.    산업론리상, 혹은 경제생리상 연초생산이 울며겨자먹기로 운행될수밖에 없다면 이률배반이지만 단순히 국민의 건강을 위해 권연값을 높여야 한다는 론조는 기담괴론이 아닐수 없다. 진짜로, 유일한 목적이 흡연자를 구제하는것이라면 장기적인 포석에서 담배생산과 판매를 철저히 불허하면 된다.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전세계가 하나같이 움직이지 않는이상 담배를 생산하고 파는 나라가 있을것이고 그러면 밀수담배나 몰래 생산하는 담배가 창궐할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과연 얼마나 많은 흡연자들이 몰래 생산하고 들여온 담배로 흡연을 유지하겠는가? 한편 어느나라든 담배생산을 근절시키지 못한다. 돈은 돈대로 벌고싶고 벌어야 하니까,    비유하건대 지금 전지구촌이 비만증으로 몸살이하고있는데 비만증을 제압하는 한가지 방법으로 량식, 육류, 채소 등 먹거리값을 대폭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담배값을 올려서 건강을 도모한다는 주장과 맞먹는 론리가 아니될가? 비근한 실례로 폭음을 방지하기 위해 술값을 대폭 높이면 주정군들이 근절될가? 알수 없다.     가령 어느날인가 금연운동의 승리자가 지구촌에서 제조한 최후의 담배꽁초를 구두발로 짓뭉개버릴 때 세계가 비애에 잠기지 않을가? 혹 잃어버린 풍속문화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가? 중국의 경우 담배때문에 세계적으로 매년 350만이나 죽는다고 하지만 담배공장들에서는 그냥 재미가 짭짤하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이 중국에서 담배값을 1원씩만 높여도 300만의 생명을 구할수 있다는 고견을 내놓았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담배생산을 제한한다면 설득적이지만 담배값을 올려서 건강을 도모한다는것은 이률배반도 아니고 그냥 천하에 기담괴론이라 해야 할것이다.                                                              2014년 12월 10일
437    발바닥인생 댓글:  조회:6014  추천:1  2015-01-03
                                       “발바닥인생”                                                 최 균 선      인체부위에서 가장 재수없는 말단부위를 차지한것이 발이다. 그런 발에서 발바닥은 최하층에 최하층이다. 이 세상에 올때 맨나중에 나와서인가? 인체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부하를 견뎌내는만큼 제일 홀대받는것도 맨발이다. 조물주가 태초에 인간을 만드실 때 두발로 걸으라고 튼튼하게 만들어주었는데 항간에서는 발이 크면 도적놈의 발같다하고 옛날 중국에서는 펀펀히 자라는 발을 옥죄여 전족을 만들어 녀자들을 속박하기도 하였다. 결국 발은 비천함의 대명사로 되였다.    머리는 발명창조의 기수이고 손은 제작왕이다. 그만큼 모든 발명은 머리가 하였지만 첫불씨를 일구어 인류문명의 새 아침을 맞아온것은 아직 털부숭이였던 인류의 거친 손이였고 인류발전에 큰걸음을 떼여준 불의 발명도 제련술도 손에서 체현되였다. 그래서 인류의 손을 위대하다고 한다. 그런데 손에 의한 광석채굴에 선행하여 찾음을 앞세운 발의 로고가 막심였다. 말하자면 발은 위대한 모든것의 개척자인것이요 누구나의 인생의 선구자이고 대변자이기도 한것이다.    주인이 걷는데만 충성하는듯, 붉었다가 희어지는 과정의 련속이라는듯 희끄무레 한 발바닥, 걸으면 절뚝거리게 하지 않으려고, 서면 똑바로 서게 하려고 안깐힘 쓰는 발바닥, 때때로 상위에 고귀한것들과 무거운 체중에 귀찮아지기도 했으련만, 자신을 억누르는 그 모든 압력에 용케도 인내하는 발바닥은 슬픈 존재이다. 꼼질거리는 발가락의 도움만으로 주인의 한평생이 다하도록 맨아래에서 지탱하는 발바닥이다.    서있어도, 앉아있어도, 걸어가도 단한번도 호사를 모르는 발바닥은 주인이 걸으라면 걷는, 마치 순종이 존재의 리유인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태여났던 모양이다. 주인이 날마다 동분서주하는 리유를 모르는 발바닥은 풀썩거리는 먼지속에서 숨이 막혔건만, 맨발이면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피터져도 말없이 혼자 감내한다. 발바닥은 땀을 낼줄 모른다. 말썽은 발의 새끼들인 발가락들이다. 감발속에서, 신발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발가락이 땀에 절면 악취가 난다고 주인마저 코를 찡그린다. 그래도 인간은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고있는줄 모르는 얌체없는 물종이다.    발이 편해야 인생이 만족(满足)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발의 행복조건은 다섯가지가 없어야 한다고 한다. 즉, 무통(无痛) ,무변형(无变形) ,무부종(無浮腫) ,무냉(無冷) 무육자(無肉刺)가 그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아프지않고 뒤틀림이 없고 붓지않고 차지않으며 티눈같은 나쁜조직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웬간한 사람이면 그렇게 값없이 굴어대는 발바닥에 생명의 경락계통이 제일 많아서 제2의 심장이라고 불릴만큼 중요한 부위라는것을 알고있다. 그래서 족부안마청이 나와서 일종 향수의 장소로 되고있지만 발의 수고로움을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흐른뒤인 최근년간이다.    인생길은 길을 떠난 나그네의 길이다. 한쌍의 발바닥을 믿고 난전같은 자갈밭길을 걸어나간다. 말아놓은 국밥같은 사연들을 엮으면서, 소설같은, 희비극같은 인생을 엮으면서 갈래갈래 크고작은 시내물을 건너서, 가시덤불 숲길도 헤치면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허위허위 걸어야 하는 우리네 인생길이 아니던가!    그래서 인생을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간다고 하지만 기실 맨발로 살다가 맨발로 돌아가는 인생이기도 하다, 그래서 파란만장한 인생행로를 수없이 반복되는 만동작으로 걸어가는 발은 강자이다. 맨발로 살다 맨발로 돌아가는 모든것들은 평범한 세파를 견뎌내는 존재들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먼먼 길을 걸어본적이 있는가? 그러면 발바닥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고역을 겪는가를 알수 있다. 발바닥의 고역이 바로 인생의 고역인것이다.    세세대대로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의 인생을 무엇이라 이름할지 모르지만 초로인생을 살아온 민초들의 인생을 발바닥인생이라 이름한다. 망국의 한을 눈물로 삼키며 아리랑 열두고개를 초신발로 이 땅에 찾아온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그 모진 인생을 살면서 자식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가시밭과 돌길을 걸었을가? 그 범속한 빈궁속에서도 묘연한 희망의 언덕을 바라보며 허위단심 걸었을것이다.    성경에는 “모세야,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은 네인생은 끝났다. 너는 이제 죽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이가 신을 신고 자기발로 걸으면 자기인생이 시작됨을 말한다. 새 세계창출을 위해 천신만고를 무릅쓰고 걷고걸은 선구자들의 머나먼 로정을 2만5천리장정이라 하는데 그에는 감히 비길바가 못되지만 생계를 위해 다람쥐가 채바퀴돌듯하면서 한생을 아글타글하는 민초들의 인생로정도 짧다고는 못하리라.    락후하고 가난해서 웬간한 산촌마을에 뻐스가 통하지 않았거나 드믈게 통하던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누구나 걷는 일의 로고가 무엇인지 절실히 체험했을것이고 발바닥의 수고로움을 인지했을것이다. 나도 반평생나마 참으로 많은 길을 허위허위 걷고걸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걸어야 하는 나그네의 길은 그야말로 백년설이 부른《나그네의 설음》을 외우며 걷는 길이였다.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없는 이발길 /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 나그네 흐를길은 한이 없어라 (하략)     워낙 노래와 척을 지고 태여난 놈이여서인지 노래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건만 가장 곡조가 비틀어지게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오늘 도오오 걷는다마아는/ 정처없는 이 바아알기일…”이라는 식으로 겨우겨우 뽑고나면 나그네의 설음은커녕 저절로도 허구픈 웃음이 물리는 가창이 되였다. 그러나 노래가사만이라도 읊고 또 읊다보니 몇십년이 지나도록 얼음판에 박밀듯이 거침없이 달달 외우고있다.                                        2014년 제12월호  
436    (진언수상록 (26)말을 하기가 쉬운가? 댓글:  조회:6149  추천:0  2014-12-31
                                        말을 하기가 쉬운가?                                                   진언       말이란 자초에 자기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차차 진화하고 개명해지면서 생각을 감추기 위해서 가공되였다. 하다면 말하기가 쉬운가? 쉽다고 할수도 있겠다. 언어중추가 제대로 돌고 성대에 문제가 없다면야 생각머리없이 소리가 나가는대로 아래위 입술을 나불거리면 된다. 혼자 시벌시벌하는 미치광이의 말도 말이라면 그처럼 쉽게 나올수 없으니 말이다.    어떤 말을 제일 하기 쉬운가? 일상 교제에서 더없이 “정확”하면서도 아무쓸데도 없는 말은 하기 쉽다. 말하자면 “해볕이 쨍쨍한 날에는 절대 초모자를 쓰는것을 잊지 말야하오.”, “비오면 우산을 들어야 하오.”, “배고프면 제때에 밥을 먹어야지 아니면 위탈이…”등과 같은 말은 심금을 울릴수 없지만 실제적이고 어페가 없어 아무도 말꼬 리를 잡을수 없다. 청자는 귀가 즐겁고 화자도 걱정이 없어서 가장 하기 쉬운 말들이다. 고한어에서 설(说)이란 글자는 기쁠열(悦)에서 계시를 받아 만들었다니까.    사고없이 되는대로 하는 말은 어두운 밤에 헛총질과 다름이없다. 눈먼총질은 총을 쥐면 아무나 할수 있다. 마찬가지로 눈먼총질과 같은 말은 가히 쉽게 할수 있다. 이에는 둥글둥글, 아리숭하고 긍정도 하지 않고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말들이 속한다. 신신고 열심히 발닥을 긁는격이지만 재화는 피면해서 좋다. 례컨대 “오늘 날씨가 참… 허허허…”, “형세는 참 좋습니다. 하하하…”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는 이런 말들은 아무리 많이 해야 손해될것이 없다.    아첨의 말도 하기 어렵지 않다. 보통 회의장에서 많이 류행된다. 이를테면 회의 “○○○령도동지께서 백망중에도 몸소 오늘 회의에 출석하시였는데 오늘 이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주며 우리의 사업에 대한 관심과 지지, 두터운 배려입니다. 뜨거운 박수로 열렬히 환영하면서 충심으로 되는 감사를 표시합시다.” 또 회의를 총화하면서 “○○○의 친절한 관심과 배려, 적극적인 지지하에, 또한 모든 동지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이번 회의가 풍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였습니다…”등등.     다음은 윗사람의 의사를 가능껏 짐작하면서 순풍에 돛을 달듯이 하는 말인데 이 역시 아첨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대방이 무엇이라 말하면 그말에 바싹 따라서 대답하고 무엇이 좋다고 하면 바람따라 연을 날리는식으로 말을 하는데 령도가 “포도가 달지 않군,”하면 “예. 포도가 시쿨지요.”등,《홍루몽》에 설보채가 “로할머님께서 즐겨 하시는것은 나도 다 좋아해요.”라고 했듯이 가능껏 비위를 맞추는 말들도 하기 쉽다.     큰말, 틀에 박힌 말, 듣기좋은 말을 하기 어렵지 않다. 례하면 지난 한시기 크게 고창되였던 “대목표, 대전략, 대동작, 대사로(大思路), 대규모, 대해방, 대선전… ”등등, 실제에 착안하지 않고 형식적인 문자유희를 하는 틀에 박힌 말, 이를테면 “인식을 한층 높이는것을 전제로, 령도의 중시가 관건, 군중발동이 동력…”등등. 이런 말들은 상하가 다 듣기좋아하는 말로서 누이좋고 매부좋은 격이 되는 말이다.    화제가 되는것은 진실된, 말같은 말을 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로신선생의 “립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집에서 만월이 되는 날 아들아이를 안 고나와 객들에게 보여주며 덕담을 듣기를 바랬다. 한 사람이 “이 아이가 장래 큰 부자가 될것같수다.”라고 하니 두번째 손님이 “이 아이가 장차 큰 벼슬을 하겠구료.” 라고 치하하여 륭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세번째 사람은 “이 아이는 장래에 죽을것입니다.”라고 하여 물매질당했다. 진실한 말을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사하고 있다. 말하기 어렵다는것은 바로 “진실성”에 있는것이다.     이야기에서 세번째 사람은 얼때기(사투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것인가? 잘 모르겠다. 다만 말이란 말하는 자의 지력상수의 저울추이고 인격력량의 척도일진대 말은 말로써만 해석되는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해석된다는것은 자명하다. 자기를 지배하기 어렵다는것은 바로 자기 입을 지배하기 어렵다는 말로서 말문을 어떻게 여닫는가는 일종 처세술이기도 하다. 참말을 하면 바보로 되는 현실사회에서 누군가 참말을 한다면 그런 “바보”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데 그만큼 희귀할수밖에 없다.    입의 재화의 문이라는것은 웬간히 지각이 든 사람은 거개 알고있다.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무사는 전쟁에서 죽고 문인은 황제에게 간하여 죽는다고 했다. 간한다는것 은 바로 직언하는것이다. 력사상 충신들이 황제에게 바른 말을 하여 죽은 사실들이 직언은 곧 죽음과 인과관계가 있음을 실증하고있다.    모든 진실된 말은 생각을 내거는 옷걸이와 같다. 검은것은 검다하고 흰것은 희다하고 좋은것은 좋다하고 나쁜것은 나쁘다고 말하는것이 말의 직분인데 누가 성실하고 충분하게 행사하게 할수 있는가? 생각한 다음 말하느라해도 자기가 뜻한바를 다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 언행이란 얼마나 신묘한가!언동은 확실히 인생난제이다.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려 하면서도 자신이 어째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때가 있기도하니 말이다. 이것은 잠의식의 본능인가? 말에도 관성이라는게 있어 즉흥의 궤도를 따라 일사분란 질주하는것을 누가 말릴수 있을가?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할 말, 꼭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인간사회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침묵은 언어의 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내심은 왕왕 침묵상태에 처해있다. 하여 흔히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서양격언을 잘  인용하는데 사실 침묵이 때론 일종의 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벙어리속은 낳은 에미도 모른다는 속담은 말의 교제력과 필요성을 말한다. 우는아이 젖준다고 제앞에 말도 못하는 사람이 농촌말로 “체메안들고” 사람구실을 제대로 하며 살수 있을것인가?    우리는 할말은 다 못하면서도 언어를 구사함에서 종종 원초적인 언어의 빈곤증을 느끼고 말도 일종 거품이라는것을 절감하게 된다.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거개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각색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하물며 타인에 대해 말한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자못 근신하는데도 근신하지 못한것으로 되는 경우가 많고 가능한껏 대방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말하느라해도 체면을 살려주지 못하여 랑패를 보는 인간의 언행이 아니던가?    말이란 자초에 진실한 정보, 곧이곧대로의 의사전달의 도구이였는데 문명인이 자기속심, 생각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을 만들어낸후부터 말이 기로에 빠졌다고 말할수 있겠다. 총체적으로 사람마다 진실한 말을 듣기좋아하지만 진실한 말을 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은것은 아이러니인가, 한마디 속심의 말이 입밖에 튀여나오는 순간, 자기의 존재를 즉시 조정해야 하는 어경에서 대방의 거절 혹은 분노를 야기시키게 되는데 내뱉은 말은 이미 엎지른 물이 되였으니 류행어로 된 “사과”가 먹혀들것인가?    기실 우리는 일종의 환각속에서 자족하고있다. 그런데 진실한 말을 직설하였으니 환각에 대한 공통한 수요를 깨뜨리여 침중한 대가를 지불하게 된것이다. 직언하라 하지만 직언을 너그럽게, 성근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태여났던가? 말을 쉽게 할수 있다고 여기고 그렇게 언동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수 없다.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렁이가 나가는지 모르고 허투루 내뱉는 말일지라도 따지고들면 책임성이 있으니 작심하고 하는 직설이야 더 이를데 있으랴. 로자가 아는자는 말하지 않고 지껄이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실 말을 많이 한다고 아는것이 많은것은 아니나 역설적으로 말이 없다고 모른다고 말할수 없기도 하다. 이런경우, 저런경우, 참으로 말하기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도다.                                           2013년 5월 20일 
435    진언수상록(25) 거울잡설 댓글:  조회:5929  추천:0  2014-12-27
                                         거울잡설                                             진 언       인류가 자신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비춰보이는 거울을 만들어낸것은 또하나의 획기적인 발전기제였다. 기원전 3000년, 애급에서는 화장용구리거울이 사용되였고 기원1세기에 전신을 비춰볼수 있는 대형거울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중세기에는 빗과 함께 상아 혹은 귀금속으로 만든 함에 넣고다니는 손거울이 성행되였다.    12세기말~13세기초까지 거울뒤면을 은,혹은 철편으로 한 유리거울이 출현되였으며 문예부흥시기에는 베니스에서 만든 거울이 소문이 높았다. 중국에서도 기원전 2000년에 벌써 구리거울이 있었는데 한나라, 위나라시기에 점차 류행되면서 전신을 비출 거울도 만들어냈다. 그러다가 명조에 이르러 유리거울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그후 거울은 자기의 사상,거동을 반성하는데 비유되였다. 일찍《정관정요,구간 (贞观政要。求谏》에 기록되여있듯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수 있고 력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교체의 원인을 알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알수 있다.(以铜为镜,可以正衣冠,以史为镜,可以知兴替,以人为镜,可以知得失)”리세민의 유명한 경구가 있다. 리세민은 자기의 체면을 돌보지않고 직설하는 위징을 사람으로 되여지는 거울로 삼았는데 위징이 죽자 “짐은 거울을 잃었도다”하고 애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거울의 의미는 단순히 물리적인것에 그치지 않는다. 뉴욕의 어느 마천루의 대난제를 해결한 오래전 이야기가 있다, 수십층의 고층건물에 들락거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여서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한번 누르면 미구에 문이 열리지 않기에 갑갑증이 난 사람들은 련신 단추를 누르거나 이미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다시 누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누른것은 셈에 넣지않는다는듯 자기가 직접누르군 하였다. 하여 엘리베이 터가 쩍하면 고장나서 말썽거리였다.     하여 엘리베이터수리비가 엄청나게 들어서 건물주인은 골머리를 앓으며 여러번 주의사항을 써붙였지만 그새장새였다. 그러다가 한 심리학가의 충고에 따라 엘리버이 터문옆에 맑고 커다란 거울을 달아놓았다. 거울은 문어귀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의 조급해마지않는 자태와 얼굴들을 낱낱이 비춰주었다. 그러자 평시에 제멋대로이고 거칠게 행동하던 사람들이 일단 거울앞에 마주서면 환골탈태한듯 례절스럽고 문명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저저 신사숙녀로 서로 례절을 차리며 차례를 기다리는 희한한 정경이 펼쳐졌다.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창출한 기적이라할가,    기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각자의 내심거울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마음속에 거울에 자률정신을 비춰낸것이다. 엘리베이터문옆에 걸린 거울은 각자의 모습과 일거수 일투족을 비추어보였지만 보다는 마음의 거울로 자신의 인격력량을 투시한것이다. 평면거울은 거짓이없어 무섭기도하려니와 마음의 거울은 더더구나 두려운것이 아니랴!    그러나 사람들은 무시로 거울속에 비친 얼굴과 매무새를 확인하고 다시 매무시를 하는데 게을리지않지만 자기 마음의 거울앞에서는 그렇게 극성을 부리지않는게 보통 이다. 늘보는 거울은 흐릴세라 자주자주 닦아놓지만 자신의 마음의 거울은 외면하기 십상이다. 공자가 하루에 자기를 세번 성찰한다는것은 기실 마음의 거울을 보며 수신한다는것을 의미한다. 내마음의 거울에 나의 의식, 관념, 생각, 행동을 비춰보는것으로 옹근인생을 비춰보는것이 되는 정신활동이다.    소중하게 다루던 거울이 깨지면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길수 있으나 마음의 거울이 흐리고 깨지는것은 결코 소홀히 할 일이 아니다. 마음의 거울이란 바로 량심이다. 량심을 상실하면 그 자신의 옹근인격의 상실을 의미한다. 잃어버린 량심을 다시 찾을수도 있겠지만 그로써 이미 얼룩이졌던 인격을 완정하게 되돌려놓을수는 없다.    그러나 거울도 거울나름이듯 마음의 거울을 비쳐보는 일도 사람나름이다. 례컨대 앞에 수레가 번져지면 교훈(前车之辙,后车之鉴)으로 삼는게 상식인데 부정축재자들은 탐욕에 눈이 어둡다보니 파죽세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아주 형상전인 “前腐后继=“钱伏后继”라는 명구가 널리 류행되고있다. 그들로 말하면 돈욕심에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알수 있다는 당태종의 말도 네미덜머리가 되는모양이다.    가령 태종의 말이 진부하면 미국사회학자 쿠리의 말은 어떨지? 그는 “거울속에 내가있다(镜中我)”는 개념을 내놓았다. 이 개념의 골자인 즉 다른 사람의 평가속에서 자아형상을 고찰해보라는것이다. 같고같은 말이지만도, 아무튼 사회라는 거울은 사람들더러 자률하도록 촉구하는 약속 력기제이다. 그러나 이미 탐욕이 괴질이 된 탐관들에게는 “마귀거울”에 마주세우는것이 조금 효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옛날 시인 류우석(刘禹锡)의《昏镜词》에 얘기면 귀가 혹할런지 모르겠다. 글에서 서술하되 한 거울제조공이 열개의 거울을 진렬하고있었는데 유독 하나만 밝아있고 나머지 아홉개는 뜬김이 잔뜩 서린듯 흐리멍텅하였다. 어떤사람이 왜 거울의 질량차가 이렇게 현저한가 의문을 가지니 거울제조공이 웃으며 거울을 맑게 련마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거울장사가 전부 팔도록 우정 이렇게 한것이라고했다. 그러면서 거울을 사는 사람들은 한번 비춰보아 자기에게 적합해야 사간다고, 저 맑은 거울은 잘생기고 못생긴대로 다 내비치므로 잘생긴 사람들만이 잘 사가기에 열개중에 하 나만 맑게 다듬어놓는것이란다.    이에 류우석은 느낀바가 있어《昏镜词》를 지었는데 물론 이 시의 숨은뜻은 단순히 거울이 아니라 현명한자를 배척하고 간신, 무뢰배들을 중용하는 당시의 부패한 조정 을 거울에 비하여 질타하면서 자신의 울분과 증오심을 토로한것이였다.                                      흐린거울은 금으로 만든게 아니라                                    흐릿하여 정기를 잃었도다                                    못생긴 사람이 많이                                    자기를 속여 다른 거울처럼 밝다고하네                                   (昏镜非美金,漠然丧其晶。                                    陋容多自欺,谓若他镜明。                                    瑕疵既不见,妍态随意生。)(하략)          사회라는 이 커다란 거울은 무형, 무색이고 흐릴줄 모르는 대형거울이다. 그 거울속에는 벼라별 사람들이 다 비쳐진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저런 인생상식을 곁사람에게 시사한다. 인간사이의 밀접은 서로 껴안기이다. 인간사이의 가장 먼거리는 기다림이라 이름할수 있다. 인간사이에 보이지않는 거리는 포용이이라 하고 인간사이에 가장 무서운 거리는 당신의 존재가 타방으로부터 무시당하는것이다.    이 세계는 하나의 웃음거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인간상이 비쳐질때 나의 형상도 비쳐진다. 자타를 차근히 살펴보아야 하며 찬탄해 마지않을때 군자연하는 그 뒤에 위선이 웅크리고 있다는것도 보아내야 한다. 웃음거울앞에서는 그 어떤 아름다운것도 모두 뒤틀려지고 변형된다. 리지적인 사람이 마주해도 기괴한 형상이다. 사회라는 밝은거울속에는 가증스러운 사람도, 비루한 넋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역지사지로 상상해보면 자신이 더 가련함을 느끼게 될것이다. 그것이 거울의 계시이기도 하다.                                                                                     2013년 5월 14일
434    진언수상록 (24)과유불급라던데… 댓글:  조회:5523  추천:1  2014-12-18
                            과유불급라던데…                                         진 언      《론어-선진편》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贡)이 스승에게 동 창생인 자장(子张)과 자하(子夏)중에 누가 더 현명한가고 물었다.    공자는 "자장은 늘 주례의 요구를 초과하고 자하는 늘상 주례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니라."고 대답했다. 이에 자공이 다시 물었다.    “자장이 초과하는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까?”    “지나친것은 미치지 못한것과 같니라”하고 공자가 대답했다.    보는바와같이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란 말의 유래이다. 공자의 중용은 결국 물극필반(物极必反)이라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유지를 말한다. 공자의 “과유불급”은 주요하게 도덕적범주와 도덕명제이지만 그속에 변증법적사유방식과 변증법적내용을 포함하고있는것이다. 달리말한다면 과유불급은 량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필연적을 질변을 일으킨다는 도리를 말하고있는것이다.    그것을 얼마든지 장편대론으로 엮을수 있지만도 그것을 읽는 사람도 별로 리해되지 않거나 납득이 가지 않을것이다. 지탐잡을줄밖에 몰랐던 농부였던 그 시절에 과유불급이라는 유식한 말은 어케 된 도리인지 몰랐으나 될수록 적게 먹어 량식을 절약할것을 제창하던 때에 너무많이 먹는 사람을 경계하느라고 “과식은 불식”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는지 모르나 둔한 머리에도 얼른 깨득이 갔더랬다.    울퉁불퉁하고 얼룩덜룩한 인생마당을 황혼이 짙어서 돌아보니 아쉬움과 애석함은 유감으로 굳어지고 희노애락으로 혼탁해진 심령의 류수에 정한은 앙금으로 갈앉고… 이것은 자연인으로서의 감수라 할것이요 소수는 철철 넘치도록 가지고 향락하는데 다수는 못가지고 처져서 막막한 삶이라 불평등이 합목적이 되는 현실에 개탄함은 보통의 민초라도 사회인로서의 절감이라 하리라.    그러나 리익을 위한 각투장인 인생마당에서 넘치고 처지지 않게 평형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인간사회가 자초에는 조물주의 의지대로 넘치고 처짐이 없었다. 어느날 조물주는 로심초사하다가 하나의 천평을 만들어놓고 이 천평으로 인간세상의 공평을 가늠하려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천평의 평형을 잡아주는 분동을 만들려하였지만 실패했다. 탐욕과 허위의 늪에 빠져든 인류를 조물주인들 어찌할손가?    결과적으로 너무 넘치고 너무 처지는 사회현상이 생긴 원인은 과연 무엇일가? 옛날엔 근로치부로 기준을 삼았지만 그런게 아니라는것을 현실이 말하고있다. 머리로 축재한것은 정당하다할세 엉덩이ㅡ위치로 축재하면 갑부라하지 않고 부정축재자라 한다. 근로치부란 리론적으로 더없이 정확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되는 현상도 많다. 신근한 로동의 구슬땀이 얼마나 부유를 창조했는가? 우리는 수단이야 어떠하든, 그 과정이 여하튼 많이 차지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여긴다. 맞다. 자기의 두뇌와 땀으로 정당하게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경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지혜의 외연과 내포는 돈에서 시작되여 돈에서 그치는것은 아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량심도 짓밟고 나가면서 부정축재한 자들은 지혜가 과인하다고 양양자득할것이지만 기실 제일 제혜롭지 못한 우자속에 우자들이다.     인간의 소유욕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이 문제는 관념적이고 복잡한 인성문제에 소급된다. 무엇이든 쓸만한것을 준다면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가져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천성이라 해석해도 되겠지만 결국 오색잡다한 유혹의 늪에서 그 기원을 찾을수밖에 없으리라. 하다면 인간은 또 어찌하여 탐욕의 늪에서 헤여나오지 못하는가? 불교에서 정답을 하고있다. 즉 인간은 무명(无明)하기때문이란다. “무명”의 뜻인즉 지혜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혜라는것도 이분법으로 해석해야 할것이다.    생명선상에서 출발할 때는 평등하였지만 인생경영에서 평등이란 있을수 없다. 사람마다 평등해야 한다는것은 희망사항인 교조주의적인 거짓말이다. 넘치고 처지는 부조리한 현실이 너무나 잘 증명하고있다. 인생의 지혜는 고관대작에게 특별히 부여되는 무슨 혜택이 아니다. 위치는 축재할수 있으나 소질을 높여주지 않으며 부귀공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수 있고 물질욕망을 만족시켜줄수 있으나 그 자신의 가치와 생명의 의의를 실현시키지는 못한다.    부정축재지도도 도박의 정률과 맞아떨어진다. 도박은 딸때도 있고 잃을때도 있다. 잃은자의 실락감속에 따냈던 그 시각의 희열이 녹아있고 따낸자의 자호감속에 잃었을 때의 비애가 숨어있다. 끝없이 수뢰하는자는 다다익선에 입이 벙글써해질것이나 울며겨자먹기로 회뢰하는 자가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서도 시원해할 멍청이는 없다. 멋없이 잃기만하는 도박군에게는 찢어진 아쉬움만 있을것이다.    좋은 주인이면서도 가장 나쁜 주인이기도 한 금전의 노복이 된것을 뒤늦게 깨달았을때는 탐욕의 배가 이미 흑심의 강을 건너간 뒤이다. 욕심의 균형지혜를 끝까지 터득하지 못하면 인생패필은 쓸것이고 늦게나마 터득했다면 가히 일패도지를 피면할수 있을것이다. 옛글에 지족자부(知足者富)라 했으며 극에 달하면 되돌아가는것이라 했다. 넘치고 무유정법(无有定法)이라했으니 인생을 경영함에서 저마끔이겠으나 과유불급은 공동하리라.    인간의 욕구단계는 생명→안전→사회적관계→존경, 명예→자아실현이다. 사람은 먹거리를 얻으려고 종일 헤매다가 포식하게 되면 좋은옷을 생각하고 몸에 릉라비단을 감게 되면 녀자를 생각하고 한구들 넘치게 처첩을 거느리고나면 명예를 바라고 권세가 없어 남에게 기시당할가 걱정한다. 새는 높은곳에 둥지를 틀지만 먹이는 땅에 내려와 먹고 깊은물속에 고기는 낚시끝에 미끼를 잊고있다하더니 금언이라 하겠다.    의식형태의 각이한 집단속에는 군자나 소인이 있다. 그가 어떠한 위치에 있든, 위인으로 뜨르르하든 결과적으로 금전의 노예, 재물신의 하녀로 전락되였다면 소인중에도 소인이 아닐수 없다. “사람이 나고 돈이 낳지 돈이 사람을 낳냐?”라는 말은 아주 교훈적이지만 지구촌에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인간의 량지는 미끄럼질한다.    기득권자이면서도 넘칠수록 더 가지고 싶어하고 가지지 못하여 뒤처진 사람들은 가져보자고 속상한 한숨을 톺는다. 공을기가 회향두맛을 들이고 자꾸 냠냠하는 아이들에게 “많을소냐? 많지않도다!(多乎哉,不多也)”,라고 한것은 어쩌다 사먹는 한접시 회향두를 아까워서였지만 루만금을 가진 억만부자들도 역시 “많을소냐? 많지 않도다!” 라고 말할것이다. 말하자면 과유불급을 믿지 않기때문이다.    가령 별로 대단하지 않은 벼슬자리이나 부동산을 관할하여서 응당 안겨야 할 세 금액을 롱간질해주는 조건으로 주택을 한채, 또 한개체씩 뢰물로 챙기다보니 일곱채나 되였다면 그는 일시 총명이 과잉하다고 할수 있겠지만 지금 호랑이다음 파리도 잡는다고 단단히 벼르는판에 언젠가 차디찬 세멘트바닥에 들어앉을게다.    탄생과 죽음, 현연과 소실, 얻음과 잃음, 존재와 사멸. 이 모든것은 필연적으로 진 행되는 영속과정이다. 재물신의 하녀가 되고서도 공중앞에서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렴결봉공을 웨치며 군자연하다가 결국 좋다가 마는날 사상학습이 어쩌고 하면서 후회막급을 짓씹는다면 먼저 바지띠를 매고 누어버린격인가? 바지띠를 풀고 누려는데 이미 내쌌으니 어찌할것인가? “아함, 과시 ‘과유불급’이로고…”                                            2013년12월11일
433    진언수상록 (23) 인생에 정답이 뭐냐? 댓글:  조회:5411  추천:0  2014-12-18
                       인생에 정답이 뭐냐?                                       진 언       인생에 정답이 무엇인가? 이 물음은 진부한 우문으로서 조금도 새로울것 없으나 인생에 어섯눈이 떳다지만 물덤벙불덤벙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렇게 오래살아가고 있건만 나로서는 미궁이 아닐수 없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는것과 인생이 무상하다는것은 기실 맥이같은 함의를 담고있다. 그런데 왜 의론하게 될가? 그것은 영원한 주제이고 각자 자기의 답이 있기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랴, 죽자살자하던 녀자때문에 자기인생의 쪽배가 뒤번져지기도 하고 닭털도 하늘로 날아오를수 있으며 금전과 권력을 위해 골육상잔도 비일비재였던 인생 마당인데 누가 계획서에 따라 인생의 초행길을 떠나는가? 풍향을 보고 돛을 올리게 되고 손해는 피하고 쉬운것을 고르고 힘든것을 꺼리고 전혀 무지하지 않거나 두려움 이 없거나 무지하지 않은 완미한 인생이 있을가?    그러니 복중화요 전화위복이듯 변화무상한 인생마당이기에 끝끝내 정답이 없거나 심지어 참고답안도 없으며 오히려 오답이 더 많을수도 있다. 살아서 숨쉬는 사람의 앞일을 누가 이렇다 저렇다 단언할수 있는가? 다만 각자의 선택이 있을뿐이고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이 있을뿐이다. 참으로 잘한 결정이거나 아주 잘못한 결정일지라도 오답이 될수도 있고 정답이 될수도 있기때문이다.    기쁘던일, 슬프던일, 뒤늦게 깨우치고 가슴을 치던일…그러나 그것들은 그냥 문제 일뿐 해답은 아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좌에 앉아서 날아가는 새도 떨굴듯 위 세를 피우다가도 일조일석에 계하수가 되여 눈물코물 쥐여뿌리는 가련상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부정축재라도 하여 금의옥식하는게 제일 좋은 답인가? 운좋으면 그럭 저럭 모면도 하겠지만 내심에는 이미 지옥을 파고있을테니 그도 아닌것같다    개체가 객관현실을 지배할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자신을 찾는 길이 그래도 확신이 가능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인생무상의 함의는 실제상 자신을 불신하고 동시에 일체를 의심하는것이기도 한다. 공동체적인 개념이 없는이상 사람들은 무슨 진정한 원 칙을 강구하지 않기에 일종 도의적관념이 생길수도 없거니와 책임정신이란것도 생길수 없다. 개체가 할수 있는것이란 자기보호와 자이리익의 최대화일뿐이다. 물론 이것 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이런 비교의식은 절대적이 아니다. 인생에 필연성이란 극히 적으며 인과관계속에서 진행되는것이 아니라 우연성의 조합이다. 진실한 생활은 스스로 어떤 의의를 부여함으로써만 실현된다. 자기삶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주재할수 없기에 이런 생활을 진실하다고는 할수 없어도 막무가내한것이다. 우리는 허다한 가상적현상들속에서 생활수밖에 없으므로 진정한 자기삶은 스스로 창조할수밖에 없다.    사람은 인생무대에서 누구나 완미한 형상으로 거듭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든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결정할수 없다. 수없이 많은 시험에서 표준답안을 외워쓰고 사회에 나와서도 유의적이든 무심간이든 자신을 무형의 사회표준에 맞추려고 로심초사하고 근신하며 살게 된다. 하지만 대천세계에 사람이 천층만층이고 인생도 십인십색이니 인생에 표준답안은 아무도 작성할수도 없는것이다.    산은 구름과 높이를 다투지않고 대해는 세류가 흘러듬을 꺼리지않는데 사람은 자고자대하지 않으면 남보다 빼여나지 않은줄로 안다.  약간한 찔림에도 곧 터져버릴 고무풍선같이 되더라도 잠시는 정처없이 높이뜨면 좋다는 마음이 곧 허영심으로서 인생살이에서 가장 손상받기 쉬운 반면 정복되기도 어려운것이다. 인간의 허영심은 손상받았을 때 오히려 반발적으로 부풀고 한도를 모르게 된다.    물론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과 향상이다. 밑에는 언덕도 있고 냇물도 있고 진흙구덩이도 있다. 탄탄대로만 있는게 아니다. 원항을 떠난 배가 물결잔잔한 바다위에서 순풍만 탈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라는것은 상식이듯 고난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는 인생철리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성공한 인생보다 실패한 인생이 더많다. 인간이란 신의 실패작에 불과한것인가?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패작에 불과한것인가? 하느님도 정답을 낼수 없을것이다.     무정세월약류파(无情岁月 若流波)라 10년이면 강산도 한번 변한다 하는데 세월의 물결위에 석양은 몇번이나 붉었던고? 인생은 짧다. 혹자는 너무 다복해서 인생이 더 짧게 느껴질것이요 보다많은 불행한 인생들은 애석하나마 지지리 길게 느껴질것이다. 그런들 어쩌랴, 살맛에 깨쏟아져서 악니날때까지 살고싶은데 돈이 많다해도 장생불로약이 없고 선택의 갈림길에 잘못들어서고 시행착오에 가슴치며 후회막급해도 후회약만은 파는데가 없고 상사병에 죽는다 산다해도 심병약이 없는데 일장춘몽같은 인생을 두고 누가 아무런 유감도없이 고종명할수 있을가?    많은것이 사라지고 씻겨가고 많은 일들이 잊혀지는데 무시로 지구촌을 휩쓰는 시대사조는 많은 새로운것을 싣고오니 세상사가 무상하지 않으랴, 상품경제시대라는 신개념이 생겨나서 돈앞에 성인군자가 없는것은 물론 바보가 따로없는 이 시대,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니나오랴!대인관계에 화해로움을 귀중히 여기고 착함이 근본이 되여야 하며 백사에 성실이 선행되여야 한다는 도덕준칙이 현답이 될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정답이 될수 없는것같다. 공방형이 나대는 마당에 방정한게 있을손가?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살아가야 할 때 하루가 숙제이고 어떻게 보냈냐가 답이다.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자기 자신을 보존하면서 감각이라는 지팽이를 따라 발더듬이로 강물을 건너는것과 흡사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잠시라도 미더운것은 직감, 직각뿐이다. 이 아침에 술한잔 생기면 곧 취하는 인생이 장땅이라 한다. 인생이 반복무상하다고 개탄하는 그 마음에는 벌써 우선 자기 자신마저 믿지못하는것이요 따 라서 일체를 의심하게 되는것인데 후현대주의자들의 기질이라 하던가?    출생은 우연이지만 삶은 필연이다. 생명운동은 련속성을 지녔지만 직선적이 아니기에 인생은 파란만장하다고 하는것이다. 누군가 인생마당에 넘지못할 벽은 없다면서 절망감이나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긍정적삶을 사는게 표준답안인것 같다고 한다. 혹자는 변화무쌍한 세계라면서도 명확한 인생계획을 세우란다. 론거인즉 목표와 계획이 있는 인생은 영원히 즐겁기때문이란다. 초로인생에 영원이 가당하기나 한가?    역시나 남의 책에 말을 옮긴데 불과한 뜬소리를 하고있다. 속앓이에 감기약을 주는격인가? 인생지혜란것은 확실히 있고 인생을 지혜롭게 산사람들이 많은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인생에 국한된 정답이지 억조창생의 인생에 다 들어맞는 표준답안은 아닌것이다. 그래서 인생학교에는 종래로 우등생이란 없었다고 하는게다. 제왕장상도, 성인군자도 영웅호걸도 다를것없다. 사람마다 제인생을 살고 제잘난멋에 살기에 각자 답을 작성할수밖에 없는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나 자신이 내린 정의(定义)에 따라 살고저한다. 인생에는 어떠한 경우든 정답이 없는데 어이 정답을 찾으려고 아득바득할가? 이왕지사들이 눈 앞에 삼삼한들 그러잡을것이 무엇이던가? 지금 한창 잘나간다고 너무 양양자득할 필요도 없는데 어이 그리들 으시댈가? 인생을 마감할무렵 늦게나마 정답을 찾았다면 인생경력이 곧 답안일수도 있겠다. 그나마 답안지를 정리못한채 곧 한오리 연기로 사라지니 역시 인생에 당초 정답이 없는게다.                                               2013년 8월 4일
432    진언수상록 (22) 하느님과 착한 사람 댓글:  조회:5674  추천:0  2014-12-14
                                하느님과 착한 사람                                           진 언      신도들은 신앙을 착한 사람으로 되여지려는 륜리적법보로 간주한다. 하다면 신앙을 갖는것과 착한 사람이 되는것은 어떤 인과적인 련관성이 있을가? 신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적덕으로 소통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가? 하느님을 믿는 길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인가? 하느님을 믿으면 극악한 자도 스스로 착해지는가?    한손에 성경을 들고 한손에 피비린 첨단무기를 휘두르며 세계도처에서 남의 나라 가원을 페허로 만들고 야만적인 인간학대에서 쾌감을 느끼는 인두껍을 쓴 무리들이 악행을 자행하도로 종용한 자는 천벌도 받지 않으니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의 선행의 길은 모르는것인가?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는것인가?    요지경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사이비함을 너무 많이 느낀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념원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는 악으로 도배질되고있다. 거짓이 진짜로 착각될 정도여서 혼탁하고 병든 인간세계에 구세주는 없다는것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신도는 아니면서도 막연한 마음으로 착한 사람과 하느님을 련결시켜 본다.    성경전서에서 설교하는 교리에는 인간의 노력이 전제로 되고있는것 같다.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은 다만 가르침과 계명의 역할을 할뿐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며(않는것이 아니라 못하는것이겠지) 나머지는 인간 자신에 맡긴다는데 참으로 알뚱말뚱이다.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것은 은총을 입고 천국에 가는 복을 누리려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달린것이라 설교하니 신빙성을 회의하게 된다.    철학자 칸트는 “산의 력사는 하느님의 걸작이고 악의 력사는 인간의 작품이다. 에덴동산도 이원적세계”라고 말한다. 확실히 지혜와 생명의 금과도 있거니와 사악과 음흉의 상징인 뱀도 있었다. 하느님이 악의 왕국인 싸탄을 소멸하였더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되였을가? 세계발전의 동력은 선악의 투쟁으로서 발전도 무지경이고 선악간이 투쟁도 무지경이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이 악을 이긴다고 설교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덕과 신앙, 착한사람과 신도는 그 기준점이 다른것같다. 착하게 살려는 사람은 나름대로 삶의 좌우명을 인간적인 선의와 량심에 두지만 신도 들은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천국에 올라가는 “은총”에 매달리기때문이다. 선량한 인간으로 살고저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선의이고 선행인지 확신하기에 그렇게 행하려 하지만 교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선을 판단하는 기준을 찾는것같다.     하느님은 인간의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는가? 하느님의 선이나 자비로움은 인간적판단의 대상이 아니므로 믿기어려운것이 아닐가? 승냥이는 하느님이 다시 빚는 다해도 면양이 될수 없을게다. 그러므로 착한 인간이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여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어진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것은 락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작은 부자는 근면과 성실로 가능하지만 큰부자는 세상이 만든다고 한다. 뜻인즉 하나의 큰부자가 되여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것으로서 부자 그 자체가 큰죄를 짓는것이므로 천국에 갈수 없다는것이라고 해석한다.    론리로 말하면 부자가 천국에 갈수 없으면 천국에 갈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중에는 천국에 갈수 있는 제일 유력한 후보자들인 가난한 사람들만이 있는게 아니라 작은 부자 큰부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성경을 하느님의 유지로 믿는 사람들이 죽어 변성명해도 “천국에 가기어렵다 ”는 말을 믿지 않는것인가? 알면서도 막연한 기대심으로 매일같이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고 참회를 표방하는것인가?    때때로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더많을가? 악한 인간들이 더많을가? 하는 우문을 던져본다. 그래도 비례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더 많기에 지구촌이 아수라장이 되지 않고 둥굴게 생긴대로 돌아가는게라고 스스로 “현답”을 하지만 소수의 악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만천하에 떨고있으니 현답이란 없다고 결론을 짓게 된다.    선속에도 악이 있고 악속에도 선이 있다. 그것이 선하다는것은 그 속에 이미 악이 포함되였기때문이다. 물질리익이 일체를 결정한다. 사람은 공리적이 아닌 사람이 없다, 리해득실로 옥신각신하는 현세에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은 태여나지 않았다. 혹시 태여나고싶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선심과 선행은 쓸데없어졌다.    현대시대는 극단적리기주의 시대이다. 그래서 더욱《령성(灵性)ㅡ신령한 품성, 성질)》의 회귀가 요청된다. 이는 종교적관념을 벗어나서 전사회적인 추구로 되여야 함을 말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인디안인의 한 부락에서는 지금도 일종 관습이 류전되고있는데 무릇 일이 있어 외출할 때 몇걸음 걷다가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데 령혼이 걸음을 따라오지 못할가봐 단속하기 위해서란다.    눈을 흐리는 외재적사물에 욕망을 불태우지 말고 사람마다 내적발전ㅡ정신의 정화(정신문명건설)를 추구하자는 념원인것이다. 하느님을 믿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참된것을 고양하고 거짓된것을 박멸하고 착한것을 신장시키고 악한것을 짓뭉개버리려는 령적인 인간촌(조화세계?)건설을 갈구하는것이다. 하다면 어떤 길이 착한 사람으로 될수 있는 길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있다. 바로 사람마다 량심의 약속하에 도덕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길이며 사심없이 베풀어주며 적덕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남의것마저 빼앗고 가로채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착하게 사는 길이 다. 인생의 자세를 다잡는 량심에만 매달려도 자률하게 된다. 량심의 변화는 생명의 자률이고 생명의 자률은 욕망의 자률을 감독할수 있다.    한 사람의 량심에서 도덕의 분수가 솟구쳐 올라온다면 봄비처럼 그 자신의 몸은 촉촉이 젖어있을것이요 그 분수에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도 물보라에 젖을것이고 멀리하며 비웃는 사람은 여전히 악의 상태에서 인생을 영위할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마음을 비울수 있다면 순수의식만 남을것이다. 그러면 욕망도 괴로움도 미움같은것도 없게 된다. 그것이 본성이지만 명상가가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그려볼수도 없다.    물론 착했던 사람도 경우에 따라 악심을 가지게 되고 사욕에 량심을 묻어버리고 악한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착한 사람들도 리득으로 모이고 갈등으로 헤여지는 중생들이나 량심에 물어 조금도 부끄러울것 없는 인생을 살수는 없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기탄없는 비리에 실망하고 체념한다. 매사에 자률적자아로부터 출발하여 량심과 도덕의 약속을 따르면 손해와 실망뿐이니 자연적자아가 자주 분노하게 된다.    착한 사람들도 자신의 불평불만을 남에게도 전염시켜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선악이 얽혀도는 이 인생마당에서 소신대로 살고 제명에 죽으려면 착한 사람이 되는것만으로는 택도 없다는것만은 절실히 느끼고있다. 신앙과 관계없이 착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요상한 인간들이 하도 횡행하여서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진다.    신도는 아니지만 창망한 하늘을 우러러 묻고싶다. 신이 계시여서 성스럽게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을 주었다면 어이 또 악을 만들었는가? 전세계적인 최대흉악범들을 가득가득 만들어내여 선량한 자들에게 불행과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물어도 물어봐 도 우자의 우문이여서인지 아직까지 현답을 듣지 못하고 세월만 늙고 텅빈 하늘에 쪼각구름만 갈곳 몰라하는듯 바람에 오락가락할뿐이다.                                       2012년 1월 20 일
431    기아약 댓글:  조회:6567  추천:1  2014-12-11
                                        기아약                                           최 균 선       옛날 어떤 황제가 멀리 사냥을 나갔다. 한창 사냥에 재미를 쏟을때는 그런줄을 몰랐는데 점심때가 지나 이슥하도록 수종이 오찬을 들라는 말이 없자 황제는 갑자기 배가 아파나면서 눈앞이 노오래지고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가는것이였다. 그날따라 수종들이 그만 점심거리를 가지고 가는것을 깜빡 잊다보니 제때에 점심을 올릴수 없었다. 굶주림이 무엇인지 몰랐던 황제는 자기가 죽을병에 걸린줄 알고 식은땀을 흘리며 수종신하에게 말했다.    《여봐라, 짐이 아마도 몹쓸 극병에 걸린것 같노라.》    《페하, 황공하옵나이다. 죽을 죄를 지었으나 잠간만 참고 견디시옵소서》    수종은 고두백배 사죄하고는 산아래로 내려가 어느 농가집에서 구운떡 하나와 랭수한병을 구해다 바쳤다. 속이 허전하여 무엇이든 먹고 싶었던지라 게걸이 감식으로 구운떡을 게눈감추듯 먹어치우고 랭수한병을 다 마시고난 황제는 대번에 배속이 편안해지고 기운이 돌아오는것을 느꼈다.    《짐이 오늘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던것이뇨?》     신하가 짐짓 태연한체하며 아뢰였다.    《다른 병이 아니라 바로 기아병에 걸린것이나이다.》    《어허, 세상에 고이한 병도 있도다. 기아병에 음식이 령단묘약인줄 알겠구나.》       평시같으면 왼눈으로도 보지 않았을 구운떡이 배가 몹시 고팠던 그에게 천하일 미였을것이고 랭수는 옥체에 대뜸 원기를 돌려준 천하보약이 되였을것이다.     8국련합군의 총포성에 혼비백산해서 서안으로 삼십륙계 줄행랑을 놓으면서도 이르는곳마다에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식도락을 즐긴 자희할망구야 기아가 목구멍에서 나오는지 밑구녕에서 나오는지 알턱이 있었으랴! 부하고 고귀한자들의 식도락과 가난한 백성들의 기아의 맛이 그렇게도 다르지만 식욕과 진미가 그렇게 꼭 맞아떨어 지는것은 아니였다.    만복의 불룩한 배가 무거워 생걱정이 되여진 판에 재수없이 기아란 불길한 말을 들먹거리면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격이 될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기아의 맛이 무엇인줄도 모르는 새세대들에게는 호랑이 담배피우다가 코등을 데였다는 얘기를 하는것처럼 허황하게 느껴질것이고 기아의 맛을 신물나게 맛보았지만 이미 싹 잊고있는 이들에게는 새삼스러울것이다.     거국적으로 아사자가 부지기수로 나타났던 저주로운 기아의 시기는 확실히 력사의 락엽속에서 썪고있음은 사실이다. 이제 더는 낟알때문에 죄없는 참새들과 싱갱이질하지 않아도 되였고 얼마간의 흙투성이 낟알이라도 얻겠다고 쥐굴을 파헤치지 않아도 되였으며 소위《량식절약공약》으로 어쩌다 찾아온 친지들에게 축객령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한끼 에때우고 다음 끼니거리가 한걱정이던 그 시절에 제일 한숨을 썩인 사람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과 안해들이였으리라. 어떻게 하면 남편과 자식들을 배곯게 하지 않을가 가슴을 뜯지 않을수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끼니때마다는 아니여도 좋은 음식을 마주할때마다 나의 밥그릇에 가마굽을 훓어서 다 퍼담고는 자신은 숭늉만 마시던 어머니가 생각나서 회한에 가슴이 쓰릴때가 드믄하다.    예로부터 흉년에 어미는 굶어죽고 아이는 배터져죽는다고 그때 영양실조로 황천길 앞당긴 사람이 얼마였으랴! 어느해 봄이던가, 청명날 안굽이라고 부르는 논을 갈다가 쉬는 참에 들었던 한 녀인의 통곡소리가 지금도 귀전에 생생하다. 역시 마라초로 허기진 배를 다독이며 논둑에 기대여 앉았는데 바로 지척인 뒤산의 어느 묘지앞에 한 로친네가 넋을 놓고앉아 제돌을 치며 울고있었다.      《애고애고…남들은 모두 그런대로 살아남았겄만 당신은 어찌믄 그리도 박명하우, 흐흑!먹을것두 못먹구 입을것두 못입구 처처  고생만 하더니 아이구, 령감만 불쌍해서 내 어찌 사누…》    그때 여러 지탑군들이 함께 담배를 태우며 그 소리를 들었지만 감수는 저마끔 이였을줄 안다. 그러게 장난기가 심한 애숭이지탑군들속에 어느 애가 그 통곡을 흉내내여 창작한 걸작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에구에구, 령감아, 입을것두 못먹구 먹을것두 못입구, 에구, 내사 초기들어서 울맥도 안나우, 나 이제 갈라우…》 사실 그때 이 마을 저 마을들에서 대식품으로 생긴 변비로 고생하다가 맥이 없는 늙은 이들이 많이 죽어나갔다.    자고로 미식가들의 구미에서 새록새록 진수성찬이 고안되였다면 그때 먹거리에 대한 기발한 창조력은 기아를 말리기 위한데서 온것이였다. 그만큼 사람들의 모든 관념은 먹거리에 매달려있었고 상상력이 총동원되였다. 앉으나서나 무엇을 먹을 궁리 에 머리가 돌아갈지경이였고 누가 한번 잘 먹었던 얘기를 할라치면 지레 군침부터 삼켰고 그런 날 밤이면 의례히 베개가 축축하기 십상이다. 꿈속에서 흘린 게침과 눈물에 젖었던것이다.    그래도 쩍하면 숭엄한 마음으로 구사회의 인간지옥을 저주하고 성토하는데 열정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늘의 행복을 기리는 마음을 사람마다의 본분으로 여겼다. 그속에서 가난한 사회주의에 자족할줄 아는 숭고한 정신승리법을 철저히 배워냈다. 대식품시기를 거쳐온 사람들에게는 밭머리에서 콩단채 불을 싸지르고 가맣게 그을린 콩알을 주어먹을 때 그렇게 고소하고 감미울수 없고 보리밭무우를 씹어먹을 때 그처럼 시원달콤할수 없었으리라.    그때의 그런 진미를 아직도 기억하고있는 사람들은 오늘 식당들마다에서 저가락도 대보지 않은 고급채들이 그대로 구정물독에 들어가는것을 보며 말못할 어떤 느낌이 있을것이며 밥상에 흘린 밥알에도 저도 모르게 눈길이 돌려질것이다. 우리 로세대들 모두가《천년기아》는 알지 못하지만 그 어렵던 시기의 기아의 맛은 너무도 뼈저리게 절감할것이다.    사흘굶어 담 아니넘을 놈이 없다는 속담이 있듯이 기아는 량심과 체면을 상실하게 할뿐만아니라 인성을 매몰시키고 야성이 발작하게 한다. 수양제시기 오합지졸을 끌어모아 란을 일으킨 악마 주찬이라는자가 군량이 떨어지면 곳곳에서 닥치는대로 부녀자와 아이들을 잡아들여 잡아먹었다고 고서에 기재되여 있거니와 천하무적이라던 일본군도 동남아의 도서들에서 미국군에게 포위되여 절경에 이르렀을 때 전우의 인육으로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지고있다. 이는 20세기 기아의 비극이였다. 참으로 기아의 맛은 백사에 선행하는 생사ㅡ그 자체인것이다.    어릴 때는 김치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별로 없다. 어떤 때는 지나치게 신맛이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직 설익어서 배추 따로, 소금따로 된 김치였던 그런 기억도 난다. 또한 어릴때란 음식맛을 챙기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배불릴가 하는 생각을 하다보면 맛은 뒤전일수밖에 없었다. 형제자매가 많았던 우리 집에서는 끼니때마다 돌격전이 벌어진다. 그 작은 배에도 멀건 시래기국을 두세발씩 훌쩍 삼 던 나였다. 형들에게 밑질가봐 배터지라고 먹고싶었던 나였다.    어릴 때 아침점심을 다굶고 앞집 은주와 함께 놀음으로 주린배를 달래는데 그애 할머니가《은주야 날래 들어와 밥을 먹어라. 물에 말아놓은 밥이 다 퍼진다.》하던 말이 지금도 귀전에 생생하다. 밥이 퍼지도록 먹지 않고 놀음에 탐한 행복한 내친구, 그 살짝곰보의 얼굴이 언제나 방불히 보이는듯하다. 그래서 평생 음식타발을 해본적이 없다. 그저 너무 입에 거슬리지 않고 배가 부르면 만족으로 생각한다. 찬밥이면 찬밥, 식은국이면 식은국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배부르게 먹고 산다는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나이다. 등허리 휘도록 농사지을 때 배불리 먹지못한 밥을 지금은 흙물한방울 묻히지 않고 배불러서 식욕이 떨어져서 못먹고 사니 내 팔자도 되게 펴인것같으니 감사가 아니나올가?    어린시절 원족가서 먹는 이밥의 맛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설날이나 생진이 아니면 얻어먹기 어렵던 이밥 한종지. 그런 밥을 하늘의 빛나는 태양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더 밝은  자연광아래에서 먹고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식도락이 아닐수 없었다. 도시락속의 밥이 그냥 밥이기보다는 밥알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면서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그 모습을 기억해 낼수도 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이 그냥 그대로 먹음직하게 눈앞에 나타나있을 때 점심때가 되기를 은근히 기다리던 나, 이제 그것을 먹기시작한다고 생각해 본다. 시각을 통해서 전달된 음식의 모습은 다시 침샘을 충분히 자극하여 밥을 씹을 만반의 태세에 돌입하는것이다. 평소 집에서 식사할 때처럼 밥소래에 눈길박고 욕심을 부릴것도 없이 나 혼자에게만 차례진 밥이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를 합목적적인 존재로서 리해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왜 그 때는 그렇게 먹는문제가 어려웠던지…    지금 내 손자놈이 밥을 먹기싫어해서 약을 먹이듯 쫓아다니며 한술한술 떠먹이는 모양을 보며 동년시절 사흘이나 굶어서 오남매가 구들바닥에 늘어져있던 정경이 떠오르고 피골이 상접해 있는 이 세상 다른 어린애들을 련상하게 되고 어쩌다 때를 건네고 먼길을 가며 허기진 배를 달랠때도 내내 굶주리며 사는 사람들도 있을라니 참아야지!하고 자신을 다잡는다. 나는 결코 미륵보살이 아니고 부처님도 아니다. 다만 보통 인간이면 다 가지는 그런 인간상정을 가지고있을뿐이다.        진정 태평성대가 도래하기까지 국민들에게는 기아의 의미가 곧 생존의 내용으로 되여 각별하였다.《부자집에 술과 고기 썩어나건만 길가엔 얼어죽은 시체 딩구네》를 단순히 두보의 명구로 읊기에는 인간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했고 주리고 종된자들의 비침한 력사가 너무나 지루했던것이다.    기아가 수많은 아사자를 낳았고 지금도 낳고있는데 현시대 만포식이 자초한것이 부귀병과 비대증이라면 얼마나 아이니러컬한 력사의 유모아인가? 입맛이 없다는 식욕불진이 생기지 말아야 할 골치거리가 되여졌고 너무 기름진것을 먹어 생기는 귀족병인 지방간이요 고혈지요 하는 시대특색의 병으로 약을 먹는다고 야단이고…녀자들은 다이어트인지 살까기인지 하느라고 몸살을 앓고있으니 얼마나 살맛이 나는가?    옛말 그른데없이 쌀독에서 인심이 나는 법이라서 먹거리가 흔해지자 사람들은 배포가 유해졌고 심성들이 착해져서 고양이도 쥐를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로 키우고 한가함과 부귀증으로 애완견도 키우면서 그 시기에는 외동아들에게도 먹일 궁리를 못하였던 별식을 먹인다. 주린배에 애국이 없다더니 내 배가 부르니 뒤늦게 나마 박애와 《물종평등》의식이 대대적으로 시장되는듯 싶기도해서 개탄이 절로난다.    세월이 하도 좋아져서 지금은 모이면 너무 잦은 연회상에 질색하는 사람들까지 다 생겼으니 그야말로 력사가 우리에게 희한한 롱담을 한다고 해야 하리라. 아무튼 밥사발에 밥을 보며 가마안에 밥을 생각하고 가마안에 밥을 보고 밭에 나락을 생각 하는 사람을 지금은 등불을 켜들고 찾아도 찾지 못할것이다. 개혁개방후 우리 나라에 서는 먹고 입는 문제가 기본상 해결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수천만이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전 지구적으로 무려 30억인구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바 매일 8억 5400만명이 저녁을 굶은채 잠자리에 들고있고 기아인구는 매년 400만명씩 늘어나는 추세라고 유엔세계 량식계획(WFP)사무총장 제임스가 2007년 1월 16일에 밝혔다. 현재 기아 인구는 개도국 8억 2000만명, 과도기국가 2500만명, 선진국 900만명 등 총 8억 5400만명에 달하는것으로 “FAO”는 추산하고있다.    인류의 기아의 력사는 종식되지 않았다. 하루밤 통곡해보지 못한 사람과 인생을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한두끼가 아니라 오래동안 굶주림에 시달려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고가 무엇인지 모른다. 기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생활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이기때문이다. 고생고생해도 배고픈 고생이 첫고생이란다. 어떤 사정으로 한두때를 거른것으로 배고픔을 체험해보았겠지만 그것은 시장기의 맛이지 기아의 맛이 아니다. 기아의 력사는 인류의 문명사와 동보해왔고 지금도 수반되고 있는 사활적인 문제이다.    제배부르니 평안감사가 조카같아 보인다는 우리 말 속담이 있다. 력사가 죽지 않는한 기아의 참상은 언제까지나 존재할것이며 장차 언젠가《천년기아》가 악마보다 더 흉악하게 인류에게 덮쳐들수도 있다. 말을 타고있다 해서 소수레를 타던 왕사를 잊는다는것은 그리 명지한 일이 아닌가싶다. 지금 배부르다고 자기가 겪었던 기아의 맛을 싹잊지 말아야 하고 잊어서는 아니될 일이다. 자기가 겪었던 기아의 쓰라린 맛을 인생의 보따리속에 그냥 간직해 두자. 그러면 저승에 가서도 배고픈 고생이 없을줄로 믿는 나이다.                                                                2007년 3 월 10 일  
430    인권?!참 좋지! 댓글:  조회:6376  추천:1  2014-12-10
                                   인권?!참 좋지!                                                                               진 언      요즘 미국이 시끌하다. 백인경찰들이 잇달아 흑인을 사살하거나 목졸라 죽였지만 불기소처분을 내림으로써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흑인들의 분노의 물결이 퍼거슨을 시발로 뉴욕, 워싱톤, 시카코 등 주요도시와 등 전국각지에서 갈수록 격랑을 일구고있다. 세계미국의 언어학자, 철학자, 정치운동가, 아나키스트, 저술가이자 진보적 교수인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에 의하면 미국은 매년 2만7천명이 자살하고 2만3천명이 살해당하며 1300만명이 폭행,강도,절도,방화 등의 범죄 피해를 입으며 이중 70만명의 녀성이 강간당 하는 사회인 더러운 진실임에도 타국의 인권타령에 목이 쉬니 국제유머가 아닌가? 인의 인권은 물론 자국민의 인권을 중시한다고 가장 많이, 가장 요란스레 인권타령하는 미국이 참으로 지구촌의 인권천사인가?    2009년 4월 15일, 뉴욕타임즈 기고문에서는 미국에서 17분마다 1명씩 총격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썼다. 2012년 12월, 블룸버그통신은 2015년에는 미국 총기사고 사망자가 3만 3천명으로 3만 2천명의 교통사고 사망자를 추월할것이라고 보도하였다. 한 나라의 국민들이 1년에 3만명씩 총격으로 사망한다면 국민들이 서로 인권을 존중하고 있다는것인가? 쩍하면 흑인들을 사살하여 흑인들이 분노하게 만든것은 인권타령인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인간이하의 잔혹한 고문실태를 폭로한 상원정보위원회 보고서가 9일 공개돼 인권국가라면서 겉다르고 속다르게 놀아댔으니 치욕스러운 오명을 어떻게 벗을것인가?     인권은 현행가집행 (可执行)성이고 가히 실시할수 있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도덕행위이라 할진대 그 기준치가 얼마인가? 공존의 평등인가? 민족평등, 국익평등인가? 나를 거역하는데 자기존망을 인권존중에 희생할 강권이 과연 있을것인가? 인권자체에는 아무얼룩이 없다. 인권이 자신의 음모를 위한 방편으로 된다는것은 인권의 자아풍자인가? 눈감고 “야옹”하는 얄팍한 기량도 아니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의견 등이 다를지라도 이 지구촌에 살아가는 인간인이상 모두가 평등하며 누구나 생명을 존중받으며 자유롭게 그리고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것이니 피비린 살육의 력사를 기록해온 인류에게 최고의 성찰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권사상은 억눌리고 유린당해 온 약세군체의 피빛항쟁의 메아리인것을 마치 강자가 베풀어준 선처인양 너스레를 떤다면 너무 웃긴다.    조선전쟁당시 남북삼천리를 무차별 폭격하여 초토화한것은 인권신장인가? 그리고 누구네는 맥아더를 영웅으로 치켜세우고있으나, 그는 인천상륙작전당시 병사들에게 ‘이제부터 눈앞에 보이는 녀자들은 너희마음대로 하고 보이는 재물은 모두 너희들것이다.’라고 독려했다고 한다. 지금도 “민주질서”의 허울을 쓰고 아무나라나 미사일과 폭탄으로 아수라장을 만드는것은 인권의 선행인가? 백인경찰이 흑인을 총으로 쏴죽일 때 인권개념이 있었는가? 장갑차로 두 한국소녀를 깔아죽이고도 수염씻은것은 천추에 기릴만한 미국식인권선언인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권선언을 한 미국이다. 헌데 6000만 인디안인들의 시체와 혈해위에, 흑인노예의 피땀위에 나라를 세우고 남먼저 인권선언을 하였으니 희한한 각성인가? 아니면 늦어진 성찰인가? 자초에 인다안인은 인권밖에 동물이여서 피비린 도살을 감행했던가? 아프리카흑인들은 가축이여서 생존권마저 무시하고 팔고사고 학대하고 고혈을 빨아먹었던가? 지금도 인종차별하면서 인권타령만은 가관이 아닌가?    현대의 국제사회에서 인권보장은 기본도의, 원칙이지만 인권에 대한 구체적정의와 인권보장의 구체방식에서 상당히 큰 쟁의가 존재하며 실천과정에서 사활적인 충돌이 발발하고있다. 세계적인권운동의 아버지라는 넬슨 만델라는 인권운동죄로 투옥되여 27 년이나 고초를 겪었다. 나중에 남아프리카대통령이 되여 노벨평화상까지 탓지만 유색민족으로부터 지켜진 피빛인권인것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미국의 인권타령에 박자를 맞추느라 까불어치는 일본이 과거 조선, 중국에서 저지른 살륙만행들은 인권개념이 부재해서 저질러진 인권극이였던가? 1948년에야 세계인권선언이 있고나서 지구촌에서 가장 악독한 인권유린자가 되였던 과거를 얄팍한 인권타령으로 봉창하려는것인가? 팔레스티나인을 포격하여 2200명을 학살하고 10만명이 집을 잃게 하고도 웃으며 구경하는 유태인들이 “인간짐승”이 어찌고하는 알량한 인권푸념이란 얼마나 비릿한가?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잉(华春瑩)은 23일 특정국의 "인권문제를 ICC에 회부하는것은 한 국가의 인권상황 개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평등하고 상호존중하는 기초위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인권분야의 견해차를 처리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고 말했다. 어느 누가 이보다 더 공정하게 인권을 말할수 있는가.    창천은 양가죽 쓴 늑대들을 잘가려보고있다. 비인간적인 노예무역으로 치가한 서방국가들이 이제와서 인권타령을 늘여놓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는 야합하여 폭탄으로 초토를 만들어놓고 민주니 평화니하며 악어의 눈물을 흘리니 백색인권이란 얼마나 갸륵한가!남의 나라 대통령을 목매달고 두손든 국가원수를 총으로 쏴죽일수 있는것도 과연 인권존중이였던가? 이는 그네들도 우답도 없을 우문이다.    근간에 인권타령이 도처에서 메아리치지만 침탈당하는 약소국들에 진정한 인권을 보장하는 사도가 과연 누구인가? 쥐를 생각하는 고양이는 결코 선량하지 않다. 악어의 눈물은 결코 련민때문이 아니다. 인권이란 그냥 상대적이요 조건부적이다. 나의 권익을 거슬리는데 대방의 인권따위가 우선할것인가? 세계적주어로 된 “인권”이란 사람으로서 인간답게 살 기본적권리와 자유라했으니 자가당착이 아닐수 없다.    인권의식은 인류사상상 늦깎이다. 1950년 12월 4일 국제련합총회에서 세계인권 선언일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채택된후 인권문제는 인류사에 또 한가지 중대한 주제로 되여졌다. 세계인권선언문을 요약한다면 “제1조,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이다. 제2조, 차별은 안된다. 제3조, 안심하고 살아간다.” 건너다보니 절터라고 너무도 명백한것이지만 리득쟁탈에 인간존엄마저 구겨박은 현시대에는 해석이 명랑하지만 않다.    심층적의미에서 대립적이지 않은 인권문제는 없다. 나는 바늘에 찔리여도 인권침해이고 남은 도끼로 내려쳐도 인권교육인가? 내편이면 인권국가, 나와 엇서면 퉁퉁디 반인권국가인가? 하건만 세상사람들은 미국이 참으로 인권을 중시한다고 믿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정치적리유로 강조되고 자기리익에 따라 무시될수도 있는 “인권” 이다.    국제적으로 인권이 너무 유린되니 “인권교육” 세계공민들의 필수과로 되고있다. 교육을 통해서 인권상황을 개진, 향상시키는것은 인류문명발전에 필수적인 그리고 초미의 작업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태양아래 음지가 없는곳이 없거니와 엎어놓은 독안은 눈부신 해살이라도 들이비추지 못한다. 누가 독을 엎어놓고있는가? “인권주의자” 들이“사또님 말씀이야 다 옳습죠”라는 속담의 뜻을 안다면 그네들도 아마 웃다가 빠진 어금니를 꼴까닥 삼킬것이다.    소위 인성과 지각이 있는 사람에게 인권의식을 다시 강조하여야 한다는 론리는 황당하다. 인간이하의 고문을 일삼는 야차에게도 인권의식이 없을리 없듯이 흉악범도 인권이란 말은 안다. 그런데 “이 량반아, 사람의 생존권을 비롯해 안전권도 존중해야 한다니, 칼을 내려놓으세나,”라는 현장인권교육은 얼마나 재미있을것인가?      인권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기본자세라고 교육하면 “오, 원래 인권은 반드시 존중하게 돼있네요. 정말 몰랐어요”하고 무릎치며 사람다운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면 사랑스러운 인간인가? 하지만 이는 황당한 정신현상이다. 세상에 빈구호들이 많지만 세계도처에서 인권일반을 유린하는 자들이 인권타령을 고창하는것은 넘 기특하다.    인권교육의 공동한 임무는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창조하면서 피차간에 서로를 존중하는것이다. 만약 인권에 교육이 없다면 마차는 있되 말이 없는격이고 만약 교육에 인권이 없다면 말은 있는데 마차가 없는것과 같다. 인류의 보편적가치인 인권보장, 인권수호는 강자의 술책이 아니라 약세군체의 절실한 생존권문제다.그런데 30분에 한명씩 자살하여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1위라는 영광을 떨치면 인권국일가?    아동학대를 밥먹듯하는 자들, 늙은부모를 학대하는자들, 로숙자들을 유인하여 정신병원에 넣고 돈을 타먹는 자들이나 생사의 전우를 재미로 폭행하고 때려죽이고나서 일종 쾌감을 느끼는 변태들도 제죽는것은 무서워 입에 인권타령을 쳐바르면서 쥐를 잡아놓고 양공질하는 고양이의 잔악성을 성토하는 그런 “인권타령”이야 참 좋지!                                                 2014년 11월 20일 2014년 12월 8일 수정보충
429    진언수상록 (21) 얼굴값 댓글:  조회:5363  추천:0  2014-12-07
                                    얼굴값                                       진 언      얼굴이란 무엇일가? “얼굴, 감출수 없는 내면의 지도”의 저자 벵자맹은 오관을 가진 해부학적의미의 얼굴과 상징의 집합체로서의 얼굴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얼굴은 그 존재의 특징, 정체라는 의미를 지니고있다. 사람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다. 개성적인 얼굴이 없는 자아란 없다. 거울이 없던 고대에 자신의 이미지는 불완전할수는 있지만 자아가 없을수 없다.    인간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소통을 한다. 타인과의 소통의 최고중심인 얼굴이 한 사람의 정체성, 특징을 형성한다. 그래서 거울을 통해 얼굴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타인의 시선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가꾼다. 얼굴이 자아형성의 전부는 아니지만 오감을 통해 소통하고 표정으로 내심의 색채를 전달한다. 물론 얼굴의 구성만으로는 얼굴의 상징을 나타낼수 없다.    중요한것은 얼굴에서 나타나는 표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을 볼 때 표정을 보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표정만으로 대방의 감정과 느낌을 류추하기 어렵다. 무표정이라는것도 있거니와 표정을 숨길수 있기때문이다. 동물에게도 대가리가 있지만 얼굴이라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희노애락이 비끼는 얼굴이 없다면 인간은 섬세한 감정의 고급동물로 진화되지 못했을것이다.    얼굴은 얼(넋, 령혼)의 굴(통로)이라는 뜻으로서 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곳이 라해서 얼굴이라 한다는 재미있는 해석이 있다. 얼은 그 사람의 얼굴에서 알수 있으므로 보통 멍청하니 굳어진 얼굴을 보고 얼이 빠진것같다고 말한다. 관상쟁이들이 얼의 근원인 얼굴기색을 보고 얼의 바탕인 골상을 살펴서 길흉화복을 말한다.    아무튼 얼굴은 사람의 육체에서 늘 로출되여있고 방비없다. 얼굴에서 얼이 바르게 제대로 박혀있는지 빠져있는지, 마음이 편안한지, 불안한지 여실히 읽어낼수 있는 심리의 현주소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타고난 얼굴보다 후천적인 표정관리가 중요한것이다. 웃는얼굴, 화난얼굴, 경악한 얼굴, 기쁜얼굴 슬픈 얼굴… 변화무상한 예측불가한 우리 인간의 얼굴이다.    얼굴은 인격의 대명사이며 곧 인격을 내비치는 거울로서 그 사람됨을 가장 잘나타내고있어 인격의 체현자라고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량심에 책임지기보 다 자기 얼굴에 더 신경쓰는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숨겨진 자신과 드러난 자신이 있듯이 얼굴에도 거울에 비춰보는 제얼굴과 남들의 눈에 의해 판정되는 얼굴이 있고 타고난 얼굴과 분장한 얼굴도 있다. 아무튼 잘났건 못생겼건 사람마다 목숨처럼 아끼는것이 바로 두손바닥으로 가리울수 있는 조그마한 얼굴이다.    얼굴은 자초에 유전인소가 만들어준대로 가지고 나와서 겉이자 속이라는 공자님 말씀처럼 흉칙스럽게 생긴 사람은 흉칙한 짓만 하면서 살았을것이고 교활하게 생긴 사람은 여우처럼 살았을것이다. 얼굴에 무엇이 씌여지는가? 착하게 살았으면 긍정적인 모습을 굳히고 악하게 살았으면 악을 새겨줄것이다. 명랑한 인생태도는 여유 작작한 얼굴을 만들어주고 짜증과 불만을 짓이기며 살아왔다면 끝까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표정을 지닐수밖에 없을것이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고있는가? 미움의 얼굴, 항상 초조하고 불안에 쫓기는 얼굴인가? 아니면 고요함과 평안함과 감사와 아름다움과 찬양으로 가득차있는 밝은 얼굴인가?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마다 "그 사람의 얼굴은 군자의 얼굴이여!" 라고 말할수 있다면 인생을 헛되이는 살지 않았다고 자부할수 있겠다.    인생을 한장의 종이에 비유할수 있다면 거기에 천사의 얼굴을 그리냐 악마의 얼 굴을 그리냐는 자신이 그릴나름이다. 나이가 들면 원래 생긴 모습의 얼굴외에 또 하 나의 얼굴을 갖게 되기마련이다. 즉 인격의 얼굴이다. 남북전쟁을 거쳐 노예제를 끝 낸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였던 링컨의“사람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는 말의 의미를 모두 알고있을것이다.    사람이 중년기를 넘으면 그 사람의 얼굴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내용을 담게 된다. 천성 잘생기고 못생긴 얼굴이 탈태환골하지는 않지만 그가 어떤 성품과 인격을 가지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 왔느냐가 또렷이 새겨진다는 말이다. 인격의 얼굴은 그 사람 이 살아온 자취와 내면의 세계를 거울처럼 비추어준다. 녀자들이 거울앞에서 바르고 찍고 그리여 얼굴이 보기좋게 되였을지라도 그 자신의 인격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듯 자신을 변화시키는것은 유리거울이 아니라 내자신의 마음의 거울이고 객관의 큰거울이다. 그래서 표정관리가 수요되는것이다.     내얼굴이 바로 내안에 모습이다.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주는것중에 중요한것은 인상이다. 서로 어울리다가 갈라지게 되였더라도 기억되는것은 그 사람의 인상밖에 없다. 한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외모가 아니라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는 성품이기때문이다. 흔히 후더워 보인다거나 깔끔해 보인다거나 사납게 보인다거나 선량해 보인다는 등등의 인상은 얼굴에서 비쳐진 인격에 대한 인상인것이다     사람이 체면을 지키려하고 체면이 손상되면 속상해하는 까닭은 다 조그마한 얼굴때문이다. 흔히 무슨 면목으로 낯을 들고다니랴는 체면을 말한다. 그래서 얼굴이자 체면이고 체면이자 얼굴이다. 사람이 체면학을 모르면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그렇듯 체면학이 가장 요긴한 인생철학이 되는것이다.    나무는 껍질이 있어야 하고 사람은 낯가죽이 있어야 한다. 얼굴에는 크고 작음이 있는데 생김새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바로 체면을 말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체면의 대소와 직위의 높고낮음, 명망의 크고 작음과 정비례된다. 바로 얼굴의 광범성과 가치성이다. 등급사회에서 얼굴이 클수록 값이 높고 얼굴이 작을수록 값이 낮을것은 당연하다. “숙인사회”의 특징이라고나 할가? 아는 얼굴이 없으면 처처에서 벽에 코가 부딪치고 얼굴이 넓으면 얼굴이 창조하는 부가치의 차이가 현저한 세상이므로 얼굴 가치규률을 잘 운용한다면 어디서든 푸른등이 켜질것이다.    얼굴도 분류법에 따라 금으로 된 얼굴이 있고 쇠로 된 얼굴이 있으며 흙으로 된 얼굴이 있다. 황제의 몸뚱아리를 옥체라 하듯이 얼굴을 룡안이라 하였고 황후나 승상들의 얼굴은 귀안이라 하며 흙처럼 흔해빠져 지천으로 널린 로백성의 얼굴은 값이 나갈수 없는 세상이였다. 고구같은 평지돌출의 얼굴도 있었지만 영원히 빛나는 얼굴이란 없다. 무릇 만물이 흥망성쇠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상품화시대, 얼굴도 교역권을 고유한다. 특히 녀자가 잘생기면 어디서나 행운이 기다린다. 옛날 왕비가 된 녀자들이 왜 미녀들이였겠는가를 생각하면 도리가 자명해 진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얼굴에는 시간성도 있다. 세상에 열흘붉은 꽃이 없다는 말처럼 절세가인의 홍안도 세월령감의 심술을 말려내지 못한다. 그래서 성형수술로 아름다운 얼굴을 보존하려 안달이지만 그것은 벌써 진실한 자기 얼굴이 아닌것이다.    얼굴의 그 사람의 풍경이라 할 때 생리적양상을 말하면서도 내심세계의 투영을 말하기도 한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생기록이기도 할 때 밑바닥인생을 사는 민초라도 가진만큼의 얼굴값을 해야 할것이며 설사 대단한 얼굴이라도 체면을 구기지 말고 어떤 얼굴로 세상을 마주할것인가 성찰하면서 진실한 얼굴로 부연되도록 처신해야 하리라. 발자끄는 얼굴은 속이지 않는다고 했다. 절대적은 아니지만,                                           2012년 2 월 6일
428    내 어떻습니까? 댓글:  조회:5631  추천:0  2014-12-03
                                                       “내 어떻습니까?”                                                             최 균 선      하나 손자놈이 늘 칭찬만 먹고 자라서인지 숙제를 좀 빨리 끝냈거나 글씨를 좀 곱게 썼거나 마을할머니들에게 인사를 하였거나…아무튼 제 생각에 조금이라도 잘한듯 싶으면 곧 “내 어떻습니까?”하고 들이대며 칭찬소리를 듣자는 속셈이 뻔해서 그냥 좋도록 “잘했다. 그래 훌륭하다”고 하면 입이 대뜸 헤벌쭉해지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철없는 놈이라서 그러려니 하다가 세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자칫 인간의 덕성으로서 가장 야비하고 너절한 허영심이 골수에 박힐가 우려되여 “내 어떻습니까?” 할 때마다 면박을 주기시작했다. 알아듣건말건 칭찬이란 원래 진심이고 알맞으면 좋은것이지만 마약처럼 사람을 혼미하게 저절로 칭찬받으려고 자꾸 설쳐대는것은 제일 기분을 나쁘게 하는 품성이라고 썩뚝 잘라버리려 왼심을 쓴다.    칭찬은 다른 사람들이 마음으로 우러나와서 하는것이지 내가 빌어서 받는것이 아니라는것, 좋은 어린이는 나만 칭찬받으려 하지 말고 친구가 잘하면 칭찬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것, 성실한 어린이는 칭찬받기만 좋아하는게 아니라 남들의 비평도 성근하게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는 등등의 여러 말을 “엄정하게”하면 대번에 풀이 죽고 입이 실그러진다. 그러나 그렇게 자주 침을 놓았더니 자극을 받았는지 차츰 나 아지고있다.    군자연하고 손자를 욕하고나서 자신을 해부해보니 마음이 억색해지면서 생각은 점점 깊은 골로 빠져서 “나는 어떤가?”하는 물음앞에서 성찰하지 않을수 없었다.“내 어떻습니까?”하고 타인의 긍정을 받으려는 심리는 비교에서 인기된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내 어떻습가?”하는 물음앞에서 자신을 수시로 성찰하지 않을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의 대답은 명랑하지 못하고 궁색하다. 타인의 긍정을 받으려는 심리는 비교에서 인기된것이다. 남보다 더 잘하거나 빼여나야 칭찬을 받을수 있기때 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또 비교의 노예일수밖에 없다.    글쟁이인 나도 남들의 평판에 무심할수 없거니와 혹평보다 과찬이라도 호평을 바라는 심정이 아니던가? 인생무대, 사회무대에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각색을 담당하고있다. 자기 자신만이 관중이 아니라 뭇사람들이 다 관중이 된다. 이 시점에서 누구나 자기의 인생자세와 생명활동을 뭇사람들이 잘 보아주기를 바라지 않을수 없다.    사람이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는것은 인생의 의미와 의의를 상실하는것과 같다. 스스로 고달픈줄 알면서도 허영심의 지배하에 살기에 늘 있는체, 아는체, 잘난체 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모두 남들이 보아주기를 바라는 인생,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산다고 하겠다.    잘 모르긴 해도 누구나 어릴 때 장차 무슨 사람이 되겠다고 인생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공부한것이 아니라 보통 선생님과 부모들이 칭찬해주고 또래 친구들속에서 으 쓱할수 있어서였을것이다. 그렇게 어릴때부터 끊임없이 그저 남의 눈에 보여지는 내 모습이 어떨지에 신경을 쓰면서 부단히 자기를 단속하고 채질하며 성장하였을것이다.    남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남보더 더 비싼 명패옷을 입고 시계도 최고급으로 차고 최고급 호화차를 굴리고싶은것은 자아감각문제이지만 결과적으로 자기과시이고 타의 시선에서 확증될뿐이다. “내가 어떠냐?”하는 자문에서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거든”라는 자답과 같지만 과시욕에 매달리다보면 스스로 피곤해지고 자신의 진정한 인생 혹은 모습과 탈절될수 있다.    흔히 이미지가 어떻고 하는데 자신만을 위한 자화상이 아니라 공중에 비치는 자기의 사회적이미지인것이다. 그런데 뭇눈길이 밝은 거울이라는 의미에서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버지니아대학의 연구진에 따르면 자기에 대한 견해와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한 견해는 근근히 20%-30% 가량 일치하다고 한다. 연구자는 사람들은 저도모르게 자아기편적인 사고방식이 생긴다 면서 자신에 대해 너무 련련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심령상의 “맹인”이 되기십상인데 그들을 “자련주의자(自恋主义者)” 라고 명명하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자기를 투시할때 왕왕 마음이 어두워지며 심리장애 가 생긴다고도 한다.    사람은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산다는 결론은 일가견도 아니다. 보여주기 위한 인생이라면 벌써 자아를 상실한 인생이요 도처에서 거품으로 자기를 포장하지 않을수 없다. 그래서인지 눈에 띄이는것이 부글대는 거품이다. 거품이 없어 잔잔한 대야의 물이 진실인데 거품이 이는 맥주잔에 서둘러 입을대기 좋아하듯이 일상에서도 우리는 요란한것만 보고있다. 돌고돌아서 결국 남들에게 “내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며 살아가는것이다.    바람세찬 날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하얀 거품은 일종의 경관이요, 산곡간 벽계수의 매하나의 작은 물방울은 그 자체가 생명으로 숨쉬고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공장에서 내보내는 페수에서 생기는 거품은 악성오염의 과시로밖에 안된다. 우리가 남의 눈을 의식해서 보여주기에만 열심한다면 결국 페수거품과 같지 않으랴,     직장이나 이웃간의 인간교제를 투시하면 친한듯 멀어있고 무랍없는듯 경이원지 (敬而远之)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설겅설겅 하더라도 얽혀돌아야 하는 인생마당이여 서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다듬어야 하는 우리들이다. 한 사람의 성숙된 표지의 하나가 매일 자기에게서 발생한 일의 99%를 아는것이지만 그나마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의론에 죽고살고 할 필요가 없다.    번화한 네거리에서 안면없이야 누가 한번 돌아보기나 할가? 아무도 나를 류의해 보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한 인생현장이다. 이 도리를 알면 제한된자기 왕국에서는 유유자적할수 있다. 어찌생각하면 아무도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고있음을 발견 할 때 일종의 행복일수도 있다. 적어도 무형의 속박감은 느끼지 않을테니깐.    “샘이 마르면 물고기는 땅위에 모여 서로 숨을 내쉬여 축축하게 하여 조구거품을 내여서 적셔준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 잊고 사는것보다 못한것이다(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相濡以沫.不若相忘於江湖.) ”라는 로자의 경구가 있다.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에서 얽히지 않을수 없고 부대 끼지 않을수 없지만 앉으나 서나 남의 눈길만 의식하고 산다는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 이다.    서로 어울리면서도 독립적생명체의 진실을 말하고있는것이다. 앉으나 서나 남의 눈길만 의식하고 산다는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화단에 화사한 꽃들도 자주보면 존재감만 인지될뿐인데 더구나 작은풀들에 눈길을 박는 사람이 거의없다. 그러나 풀들은 자기생존의 권리를 찾아 움트고 무성하고 시들고 재생하기를 거듭한다. 흔하디 흔한 온갖 풀들은 풍만한 대지의 품에서 제멋에 겨워 비바람속에서도 생명찬가를 엮는다. 우리도 뭇시선의 그물코에 얽힐것도 없고 남의 평판대에서 그네를 뛸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2011년 4월  20일                     2014년 10월 31일 (연변일보)
427    (진언수상록 20) 인생상대론초고 댓글:  조회:6649  추천:1  2014-12-03
                              인생상대론초고                                        진 언      아인슈타인은 심오한 상대론을 “미녀곁에 앉아있으면 시간이 길어도 짧게 느껴지고 달아오른 화로곁에 앉아있으면 짧은 동안도 길게 느껴지는법”이라고 롱담처럼 해석한바있다. 하지만 농부였던 그시절 상대론같은 심오한 학문은 몰랐지만 소박하게나마 상대성원리를 인지할수 있었다.    천하지 만물에 상대적이 아닌것이 없다. 하늘과 땅, 낮과 밤, 시작과 끝, 최고와 최저, 남자와 녀자, 선악, 지자와 우자, 강자와 약자, 창조와 파괴, 평화와 전쟁, 실패와 성공, 암투와 협력, 가난과 부유…벼김을 말때 알릴듯말듯한 벼포기와 벼돌피, 조밭두벌김을 맬 때 애를 먹이던 조와 가라지…    철인 로자도《도덕경》에서 “천하가 아름다운것을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아름다운것은 추한것이며 또 모두 선한것을 보고 선하다고 말하지만 그것 또한 선하지 않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그러므로 있는것과 없는것이 서로 생겨나고 어렵고 쉬운것이 서로 이룩되고 길고 짧은것이 서로 나타나고 높고 낮은것이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소리가 서로 조화하고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라고 쓰고있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의 중심은 바로 너희들 자신이다"라는 말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는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것은 없다. 강함과 유연함은 무시로 우리사는 현실에서 현연된다. 산은 강하고 물은 유연하다. 그러나 물은 산을 씻어내릴수 있다. 높은 산의 위엄이 없다면 벽계수의 아름다움도 없다. 산이 있고 물이 없다면 사막의 모래언덕이나 다를배없고 물이있고 산이 없다면 평원처럼 가관이 없다.    강하다해서 꼭 이기는것이 아니고 유연하다해서 결코 연약무능한것이라 단언할수 없다. 지금 약자라해서 장차도 약자라는 법이없다. “세상에는 강한것이 열두가지가 있다.  “첫째로 돌이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하여 깨여지고 쇠는 불에 의해 녹아버린다.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물은 구름속으로 흡수되여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닌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날리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된다.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지고 술은 잠에 의해 사라진다. 그러나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는 않다. 하지만 죽음조차도 사랑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한다.”    이르는곳마다 모두 어제에 속한다. 산이 아무리 경관을 이루고 있어도, 그 물이 아무리 맑고 바람이 아무리 부드러워도 말이다. 아쉬워 떠나기 싫어하는것은 일종 멍에로 된다. 그리고 묶이는것은 두발-자유이며 미래이다. 험한봉의 절승경개를 보지 못하였다면 매우 유감이다. 높은 산의 아아함에 감탄했지만 바다의 넓음에 감동되지 못했다면 역시 유감이다. 대사막의 광막함을 보았으나 밀림의 울창함을 보지 못했다면 또한 유감이다. 세계에 풍경은 많고 청산은 늙지 않으나 사람은 늙어버린다    누구나 자기가 보는만큼 세계가 넓고 인지하는만큼 판단한다. 구름속에서 벌어진 싸움을 귀머거리는 번개로, 눈먼이는 천둥으로 인식할것이다. 이런경우 비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매사에 비교를 앞세우며 살아가고있다. 비교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러나 무작정 대비심리는 공기처럼 만연되여있다. 동창과 비교하고 동업자와 대비하고 심지어 형제자매간에도 비교하고…종적으로 대비하고 횡적으로 비교해보고…대비, 비교의 결과는 어떠한가? 의기저상과 딱함뿐이 아니던가?    인간공통의 비교심리를 이르는 우리 속담으로 남의 밥에 든 콩이 더 굵어보인다는 말이있다. 그리고 사물의 상대성을 론함에서 이웃집 꽃밭이 더푸르러 보인다는 볼테르의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그는 이웃집 꽃밭을 부러워하지말고 자기꽃밭을 즐기라는 교훈을 남겼지만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쉽게 행해지는것이 아니다.    어디가나 상하차이가 현격한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란 쉽지만 비교가 안될만큼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자 앞에서 기가 죽지 않기란 쉽지 않다. 사회상에 이런 류행어들이 나돌고있다.“식당에서 술도수를 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상표를 따지는 사람은 여유로운 사람들이다. 책을 쓰는 사람은 가난하고 도판자는 부자가 되고 땅을 뚜지는 사람은 가난하고 땅을 매매하는 자는 부자이고 개인빚이 많은 사람은 가난뱅이고 은행빚이 많은 사람은 부자이고…    인생마당이 설사 각투장일지라도 달리기처럼 타인과의 비교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될수 없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사람이라도 결국 인생패필을 쓴 경우도 많기때문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는 절대적인 승자는 없다고 생각하는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비법이다. 행복을 위한 싸움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행복은 하나의 개념이지 가치는 아니다. 이 시점에서 영구불변의 행복한 인생도 없고 평생 불행한 인생도 없다. 행복은 누구에게나 다같은 의미로 새겨져있다.       사람은 누구나 환득환실의 극종을 연출한다. 어떤 사람들은 동이땀을 흘려 돈을 좀 벌었지만 에네르기의 소모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거부가 되였지만 단란한 가정의 따스함을 잃었을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부정축재하였지만 철창신세를 지거나 황천길을 앞당긴다.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는 리해득실이 가져다준 희노애락의 범벅이를 본의가 아니게 맛보며 살아간다.    자기의 심리만족을 위해 내가 더 잘살고 내것이 더 좋았으면 하는 마음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재앙이 닥치고 내것이 좋아지기를 바란다면 소망이 아니라 사악이다. 나에게 미운대상이라서 인정하지 못한다거나 평가절한다해서 이미 존재하는 대방이 없어지는것도 아니다. 인간의 불치병은 과잉욕망이고 최대약점은 리타정신의 부재이다. 재부든 권력이든 명예든 모자람이 없는 상태란 있을수 없는데도 자꾸만 욕심을 부리면 그로부터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갈마든다고 한다.    한 사람의 최대의 자산은 희망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자의 오두막에도 행복은 찾아들것이요. 노상 불만족에 시달리는자의 고대광실에는 불운이 찾아들것이다. 적당히 모자라도 우선 그것에 만족하고 그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뛰는 그런 삶에 행복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고 느껴보기가 바로 참된 인생을 가꾸기이다. 내가 지금 서있는 이쪽 강언덕이 현실이고 소망은 저쪽 강언덕에 있다. 물결세찬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것이 삶의 과정이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신묘한 장미원을 꿈꾸지 말고 울밑에 핀 호박꽃을 즐기라. 호박꽃은 총애받으나 소외당하거나 아랑곳없이 심어놓으면 의연히 피고 오롱이 조롱이 호박을 키운다. 인간도 부귀빈천을 물론하고 자기생명의 권리와 행복의 추구를 가진다. 화단에 꽃은 피여서 총애를 받으나 소외당하거나 때가 되면 속절없이 진다. 고기가 썩으면 구데기가 생기고 생선이 말라도 좀벌레가 생기는법이다.     매일 일상을 반복하기는 쉽다. 변화도, 반성도, 성장도 필요없기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외부에서만 구하는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운동하는것을 구경하면 자신도 건강해것이라고 바라는것과 같이 무모하다. 일년생 수확을 원하면 농작물을 심어라. 수십년수확을 원하면 나무를 심어라. 평생수확을 원한다면 분투를 심으라. 자신을 채찍질하라. 변화되였다는것은 뭔가를 포기하였다는것이기도 하다.                                             2011년 8월 31일
426    (교육수필) 공부는 어째 해야 하나 댓글:  조회:7105  추천:0  2014-11-25
                            공부는 어째해야 하나?                                         진 언      공부는 어째 해야 하나? 하는 물음은 자다가 봉창을 두드리는 격으로 뜬금없기도 하고 달을 보고 짖는 황둥이를 보고 왜 멋없이 짖느냐고 물어보는것처럼 우답도 없는 우문인데 손자놈이 왜 공부해야 하고 또 꼭 잘해야 하나? 하고 물을 때 입으로 단마디명창을 못하고 내심으로 대답해본다. “글쎄나…생뚱같은 물음인데 그것은 나에게도 아직까지 의문이구나…” 그러고나서 나는 아이에게 그냥 공부잘하라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열살도 안되는 아이에게 인간은 자연인과 사회인으로 나누는데 갓태여난 애는 자연인으로서 차차 커서도 교육을 받지 못하면 그냥 자연인으로 남는다고, 사회인으로 되여 힘들지 않게 벌어먹고 살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인도의 밀림속에서 발견한 승냥이소녀를 례로 들어 장황하게 설명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누구나 자랄때는 가끔씩 공부하기가 싫은데 재촉이 성화같은 엄마에게 “공부는 왜하냐?”고 물어보았을것이다. 그때마다, 이런 변명, 저런 변명, 아전인수하며 고식지계(姑息之计) 로 틀어막기에 급급해서 웬 뚱딴지냐고 막 밀어붙이기가 일쑤였으리라.     100점의 굴레를 쓰고 등떠밀려 공부해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 공부하는 법도 모르고 그저 하라니까 교과서와 온갖 잡다한 련습책, 훈련책과 싱갱이질하는 아이들을 가긍하다고 말하면 누구는 그 과정을 안거쳐왔나? 하고 퉁을 놓을것인데…사실 우리도 아이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더구나 시험기가 되면 족집게 과외가 기승이고 번갯불에 콩볶아먹듯 날림으로 머리속에 마구집어넣은 지식들이 시험만 끝나면 사막모래 바람불듯이 부는 바람에 어느새 휭~사라지는것은 아닐가?    아이는 “왜?”라고 묻는데도 “어떻게”로 대답해주는 어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진화된것”이 없다. 좋은 명패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남을 다스리는 뇌력로동자로 되기 위해서, 당장 공부못하면 선생님의 눈에 나고 애들속에서 외목이 나니까, 엄마가 잘못하면 혼쭐난다고 하니까, 못하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하니까…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되돌아보면 춘하추동, 불철주야로, 엄동 설한에 옷도 변변히 입지못해 고추를 얼구면서도 맨날 학교에 가고 악바리로 공부한 리유도 상술한 리유중에 꼭 짚어 하나랄것도 없이 여러개에 걸쳐 포함되여있다.    공부못하면 호미대학에나 붙어서 소궁둥이나 두드린다는 엄마의 말이 얼마나 실용적인 말이였는지도 모른채 공부했지만 어찌하여 반평생나마 짜증나도록 소궁둥이를 묻어다니면서 그제야 “송궁둥이를 두드리는” 고충을 삼백륙십사절골이 다 저리도록  절감하였다. 지금은 시내에서 사는 늙은이니까 두드릴 소궁둥이를 마련해줄수 없으니 무엇으로 손자를 겁줘야 할지 대책이 없다. 잘못하면 직업의 비천을 오도하게 되니…    공자와 자공(子貢)의 대화가 생각나기는 했다. 얘긴즉, 자공이 배움에 싫증나서 공자에게 청들었다. "좀 쉬였으면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인생은 휴식이 없는것이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저는 휴식할수 없다는 말입니까?" 공자가 그말에 "있지, 저 무덤을 바라보라, 높이솟아있고 크고 볼록하고 세상과 고립된 모습인데 휴식하고 있다는것을 말하고있지." 라고 대답했다. 무식이 상팔자라도, 식자우환이라도, 아는게 병이라도 리유가 없이 공부는 해야한다는 리유를 들수도 없어서 그저 마냥 입버릇처럼 하는 말로 윽박지르는 방법밖에 없다. “그냥 공부잘해라!”    화제를 돌려서 지각이 튼 큰애들을 상대로 갖잖은 리론을 펼쳐보자. 지금은 지식경제시대일뿐아니라 지식활용의 범위로 말하면 글로벌시대로서 아는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언은 영원한 진리로 되고있다. 사람은 무엇이나 많이 가지려고 하는 본성을 개변할수 없거니와 그럴필요도 없다. 가진다는것에는 크게 나누어 물질적인것과 정신적인것 두가지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소유를 앞에 놓고있는데 그것을 두고 왈가왈부할것은 없으되 정신적재부는 필수적이요 대물림이다.    썩어빠질대로 썪어빠진 봉건통치시대, 봉건제왕들은 우민정책에 재미를 많이도 보았을게다. 그러나 일인천하 막강한 권력이던들 발전하는 시대의 거륜을 어찌 막아내며 차차차 문명개화하는 백성들의 지각을 그 무엇으로 압제하랴, 민초들이 아는게 많아지면 통치하기 어려울것을 아는 그들은 꽤나 총명하다고 하리라. 코흘리개황제, 어리석은 혼군도 마키아벨리가 말한것처럼 권력은 야수적속성 즉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론리만을 알아서 권력이라는 사회필요악을 내둘렀던것이다.    그래서 공부한후에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막연한 후사가 제기된다. 대도리는 공부하더라도 공을기같은 무재무능한 글뒤주가 아니라 배워낸 학문의 공익성과 보편성의 지향이다. 그렇다고 “인간세상에서 배운사람 노릇하기 쉽지 않구나” 하고 자결한 황현(黃玹) 의 기개를 요구할수 없고 “나라를 잃고도 살아있으니 부끄러운 인간” 이라고 자책한 박은식(朴殷植) 같이 높은 자성능력을 요구할수 없되 공부할 때 외운 학설중 하나라도 되새겨 일후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그 직무의 본령에 맞는것인지 반성할줄 아는 지식인은 되여야 한다는것은 두말할것 없다.    일찍, 류형원은 조선조의 위기가 바로 과거제도에 있다는것을 간파하였다. 그는 과거제가 능력 특히 학력은 시험할수 있으나 덕행을 시험할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과시 선철이라 할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대학입시, 공무원시험은 마치 조선말기의 과거와 관직등용제도처럼 배경이 있는 유력자나 부자들의 잔치로 변하고있다.    기본이 공민의 평균이하인 사람이 “선발”되니 진짜인재가 밀려나고 일부기관에는 사실상 세습이 이루어진다는 공개된 비밀을 보며 오늘의 공부, 지식의 운용, 선발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되지만 “눈을 떠야 별을 보지” 하는 속담처럼 우선은 배워두고 많이 알아두어야 한다. 운명은 누구에게나 기회령감을 보내주기 마련이지만 기회는 언제나 충분히 준비된 자를 먼저 골라잡는 법이다.    치렬한 시험의 승리자들일수록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는 권력자의 권력봉에, 오늘날에는 부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지식인들의 조우는 슬프지만 배우지 않았다면 더구나 불성모양이 될것이다. 선택된 일부사람들은 자신이 차지한 자리가 인민이 준것임을 알지 못한채 마냥 자신이 잘났기에 당연히 차례져야할 결과라 생각하며 정의의 희생에 눈감고 강자들의 비행에 굴종하면서도 부끄러워할줄 모르지만 그것이 영원히 주류로 될수는 없다.    2천여년 과거시험을 시작으로 오늘날 대학입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험에서 선발되고 일컬어 인재로 성장했건만 그들이 진정 백성을 위한 공익에 어떤 기여를 했던가? 멀리도 말고 구한말 나라를 살리자던 동학군과 개화파를 릉지처참하고서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고관대작들, 식민통치가 3천만 백의겨레를 가혹하게 압박착취하며 그렇게 횡포를 부릴때 그들의 수족이 되여준 매국노들 모두 일본의 제국대학이나 동경대학이나 무슨무슨 대학시험에서 우승한 시험선수들 아니였던가?     그래서 지식자체에는 민족정신, 인간도덕률, 량심이란게 없지만 지식이 비정하고 악한자들에게 장악되면 그것은 그저 역으로가 아니라 사회죄악으로 온갖 비행을 저지르는 흉기로 되고만다. 례컨대 법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법학개론의 기초와 전혀 배치되는 범법을 하거나 신성한 교단에 선 교원이 학생들을 개인의 돈나무로 여긴다거나 지식을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아 비리한 일을 저지른다면 그 우수한 머리와 다년간의 공부, 시험통과가 결국 나무아미타불이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2013년 12월 5일
425    (교육수필) 좀 놀아도 됨까? 댓글:  조회:7383  추천:2  2014-11-21
                            좀 놀아도 됨까?                                  최 균 선      주말은 더 말할것 없고 평시에도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숙제부터 먼저 시작할 념은 없이 그냥 놀고싶어하는 손자가 “좀 놀아도 됨까?”라고 할때마다 저도모르게 별 도배도 안될 싱거운 생각에 젖어든다. 그저 손장난이라도 마냥 놀고싶어하는 마음이 오죽하랴 싶으며 갖잖게 교육가가 되여지는듯 생각이 외곬으로 흘러들어간다.    로신의 유명한 말 “아이들을 구하라!”라는 말이 떠올려지며 “아이들을 놀게 하라!”는 구호를 만들어본다. “아이들의 놀권리”라는 말은 일가견이 아니라 UN아동권리 협약 31조에 기재되여있는 말이다. 한창 뛰놀아야 할 애들이기에 산으로, 강가로,들로 나가 광활한 천지에서 생명의 환희를 만끽하고 골목길에서 또래들끼리 짝짝꿍을 치며 동년의 매 한페지들을 알락달락하게 채워가야 하는데 그건 책에나 씌여있다.    지금 아이들은 풍요속에서 “빈곤한 동년세계”를 살고있다. 왜? 겨울같은 때는 어두워 교문을 나서고도 곧장 이런저런 학원에로 종종걸음쳐야 하는 아이들이 그처럼 상식적인 “놀다”를 잊어야 하니 그래 불쌍하지 않단말인가? 자신들에게 당당히 놀권리가 있다는것을 아이들 본신은 물론 부모들조차 생소할것이다. 놀권리라는 말은 일찍 1922년에 사용하였으니 이미 100년도 넘었다.       1989년도에 UN아동권리협약에서는 이 협약을 비준한 여러국가들이 아동들에게 휴식하고 여가를 즐기고 그리고 년령에 맞는 놀이와 오락활동을 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세계아동헌장”에서 이미 모든 학교에서 놀이터를 갖추고 아동이 학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놀이터에서 놀이할것을 명시하고있다.    상술한 협약들에서는 놀이라는것 자체는 교육받을 권리와 더불어 돈이라는 수준의 가치를 지닌다고 언급하고있다. 이는 단순히 지나가는 말로 한 권고차원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의 젊은학부모 자신들도 놀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였기에 아이들은 놀게 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있다. 주말에도 집안에서도 놀지 못하는것은 물론 집밖 아빠트단지내에서도 왁자지껄하며 놀음에 탐한 아이들을 볼수 없고 방과후 야외놀이들은 아예 없는 실정이다.    대신 현대문명의 혜택이라고 할가, 아니면 재난이라고 할가? 지금은 절대대부분 아이들이 미디어에 로출되여있다. 컴퓨터, 인터넷 이런 모든것을 망라해서 늦은시간까지 유희, 게임의 늪에 빠져서 허우저거리고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것을 논다고 하고있고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고 인식한다. 여가놀이, 오락 이런것들을 다 놀이의 범주로 포함시킬수 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하고있는 컴퓨터게임이라든가 SNS를 통한 어떤 오락활동들은 정해진 루트들을 따라가는 굉장히 구조화된 활동들을 하는것이기때문에 놀이의 본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지성인들이 아이들의 일상생활에서 바깥놀이가 현저하게 줄어들고있는것에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있다.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본인들이 좋아하는 활동을 하되 바깥에서 놀이할수 있는 시간, 그리고 공간을 많이 확보해주어야 한다는 이한 문제를 가급적으로, 실효성있게 해결할 사람이 누구일가? 없다.     옛날에는 상상할수 없을정도로 시대가 그저 발전정도가 아니라 비약하였지만 아이들의 생리적, 심리적인 본성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제손으로 만든 원시적이고 조잡한 자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것이 바람직하고 보다는 흙장난도 하고 바깥에서 뛰여놀며 때때로 나무에도 기여오르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나가서 놀기도 하는것이 아이들의 원초적인 본성에 걸맞는다는 사실은 결코 시대성을 띠지 않는다.    평생을 가르치려면 어릴 때 마음껏 놀게 하라는 유태인의 격언이 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아이들의 삶자체가 자꾸 실내, 공간안으로 파고들게 되는 그런 생활구조를 만들어주고 있기때문에 아이들의 동년에서 친자연성이 근원적으로 두절될수밖에 없는것이다. 열명의 아이들중 예닐곱이 놀시간이 부족한 문제가 아니라 아예 놀시간이 없다는것이다. 더구나 부모가 대부분 짜놓은 일정에 맞추어 학교에서 돌아와도 학원에 가느라고 과장해서 큰숨을 들이킬 틈을 내기가 어렵다.    주어진 여건도 여건이려니와 실내든 실외든 아이들이 놀시간이 없게 만든 원흉은 학습부담과중이다. 과거에 비할바도 못되게 문명해진 현대학부모들이지만 잘놀고 또 놀줄아는 아이가 행복하고 또 공부도 잘한다는 도리를 리해하지 못하거나 당초에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 이건 문명개화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건 리해가 어려운 심오한 과학이 아니라 놀이가 아동의 현재 행복과 관계있는것으로 확인된 상식이다. 어릴때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일수록 창조력이 강하다는것을 믿지 않을수 있지만 사실 그렇다. 옛날 장난질을 하며 성장했지만 뛰여난 인재로 된 사람들이 많다. 조선족의 로일대 유명학자, 과학자들을 이어갈 후계자가 몇몇이 나오고 있는가?    아이들은 뭇시선을 먹고자란다. 한아이가 자라기 위해서는 가족과 사회 모두의 시선이 필요하다. 특히는 또래들끼리 하는 여러가지 놀음에서 자기 이미지를 형성시키는데 시선ㅡ평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들의 어울림, 그것은 미래사회인의 어울림의 축도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성적인 부모들은 이런 도리를 잘 알고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벼라별랗게 다 놀면서 자기 아이들이 노는 꼴을 못봐준다. 이건 확실히 유모아가 아니라 자아풍자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가능한껏 살아있는 일체의것 즉 동물이든 식물이든 대자연속에 살아있는는 생명체들을 관찰하고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것이 바로 심신상 건전하게 발육하게 하게 하는 생장소이다. 시내에서 자란 애들은 어쩌다 송아지를 보아도 환성을 지르고 양, 염소를 보아도 신기해 한다.    아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준비계단은 단지 학문을 닦는데만 그치지 않는다. 더불어 노는 가운데서 자신의 약함을 절감하고 새로운 적응력과 비전을 가져온다. 지금 아이들이 왜 보편적으로 신경질적인가?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내심의 스트레스때문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내심에 화가 들어차면 나머지 공간은 더구나 좁아지는법이다.    지금 아이들은 육체적으로 겉만 쑥쑥 잘 커가고있지만 자기가 감당할 부분에 대한 적응력의 발달이 정비례되지 못하고있다. 말하자면 내심적인 성숙이 바람직하게 되지 못하고 있다는것이다. 장난질속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자기가 꼭 해야 할바를 찾게 하는것이 요긴하다. 기성지식을 암기하고 문제에 주어진 답을 쓰고 문제풀이를 하는게 인간교육의 최종목적이 아니며 더구나 전부의 내용일수는 없다.     하건만 현대교육을 점수교육, 차례세우기교육이라고 개괄할수 있다. 환언한다면 아이들을 치렬한 경쟁과 다그침으로 나타날수 있는 타률적교육환경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경쟁력은 점수경쟁에서 수련되는것이 아니며 장차 사회경쟁력은 단순히 학위경쟁이 아니라 능력경쟁이며 정감상수경쟁이다.    바람직한 교육은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 물론 이에 대하여 리론적으로 멋들어 지게 론술할수 있을것이다. 학교교육이 장차 살아가는데 필요한 각종 지식과 삶의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맞되 순수한 교육에 대한 개인의 열정과 취미, 호기심을 실천적으로 무시하는 획일적교육행태라는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로신선생이 “아이들을 구하라!” 라고 납함하였다면 현상황에서는 가히 “아이들 을 놀게 하라!”고 호소할수 있겠다.                                  2014년 10월 20일                                 2014년 11월 25일      
424    인간의 손을 초월한 손, 그리고 또 다른 손들 댓글:  조회:10247  추천:0  2014-11-17
                                 인간의 손을 초월한  손 그리고 또 다른 손들     一名环卫工布满老茧的手上,拿的是前几个月的工资条,上面月薪刚满千元。环卫工李姨说,她在荔城从事环卫工已有5年,以前每年都能领到年终奖。但在今年,公司却不给她们发放年终奖了。(옮겨온 글)        곱고 고운 손, 어떤 손은 이렇게 곱게 생겼는데 청소공의 손은 어이 저리도 몸서리치게 험악한 손인가?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손이 말해주고있다. (제공자) 섬섬옥수로 고운 수는 잘 놓을수 있겠지만 처음의 손, 인간의 손을 초월한 손은 잘 그릴수 있을것인가?       아래의 사진과 맨 위에 사진을 대조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솔뿌리같이 터갈린 손이라고 해도 사진속에 손보다 빈약한 묘술이다. (제공자)      인간은 동물중에서 유일하게 두손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로동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면 손은 로동을 통해 진화되고 발달하였다. 인간의 손을 오늘과 같은 형태가 되도록 한 과정에서 과일을 따거나 무엇을 붙잡기 위해 그러쥐는 손동작을 익혔을것이고 원시적도구를 만들기 위해 손이 갈수록 령활,기민해지고 정교로워졌을것이다.    인간의 진화에서 공격(싸움)력은 창조력에 선행되였다고 볼진대 손의 진화에서 자초에 리익쟁탈을 위한 방위, 공격수단으로 주먹을 그러쥘줄 알게 되였을것이다. 죄악적인 손을 마수라한다. 부패한 손은 검은 손이라 하며 깨끗한 손은 하얀손이라 한다. 그러나 로동으로 거칠어진 검은손이 더 깨끗한가? 당신의 손은 깨끗한가? 더러운가? 아름다운가? 부드러운가? 솔뿌리같이 거친가? 탐욕스러운 추한 손인가? 생산적인 손인가? 파괴적인 손인가? 베푸는 손인가? 모든것을 움켜쥐려하고 남의것을 빼앗는 손인가? 자기의 손은 답을 알고있다.
423    문명과 쓰레기 댓글:  조회:6893  추천:0  2014-11-16
                                 문명과 쓰레기                                         최 균 선      문명의 발전은 마침내 쓰레기문화를 낳았다. 인류는 쓰레기천지라는 또 하나의 문명우환을 안게 되였다. “문명우환론”이란 영국의 력사학가 아놀드 토비의 론제로서 력사발전에서 표현된 서로 다른 “문명”은 모두 “발생ㅡ성장ㅡ파괴ㅡ와해ㅡ사망”의 계단을 거친다고 하였다. 문명 혹은 문화의 위기와 곤경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문명과 문화발전 추세에 대한 사고는 본세기 서방문화의 전통ㅡ문명우환론으로 형성되였는바 “문명충돌론”도 이로부터 연변되여 나온것이다.    그후의 “문화숙명론”도 모두 서방학자들이 자신의 문명에 대한 심각한 우려로 표현되였다. 이는 한마디로 문화우환의식의 총화이다. 이미 공인된바와같이 인간의 문명의 충돌, 우환은 지구에 대한 인류의 무지경의 략탈에서 인기된 생태환경의 파괴, 환경오염, 자원의 고갈 등인데 여기서 다른건 잠시 략하고 쓰레기문화만 말하자.    인간의 문명의 또 다른 형태의 “걸작품” 생활쓰레기는 되돌아와 그 주인공들을 위기로 몰아넣고있다. 중국의 도시환경위생협회의 통계수자에서 현시된바 전국도시의 생활쓰레기의 년생산량은 1.5억톤인데 매년8%~10%속도로 증장하여 목전 전국 도시의 생활쓰레기의 루적, 퇴적량은 이미 70억톤에 달하며 차지한 면적은 무려 80여 만무에 달한다고 한다.    전국의 688개의 성시에서 현성을 제외한2/3의 대중도시가 이미 쓰레기의 포위속에 처해있고 1/4의 성시는 이미 쓰레기를 쌓아둘 적합한 곳이 없는바 세계상에서 쓰레기가 도시를 포위하고있는 가장 엄중한 국가의 하나로 되였다. 중국의 도시들에서 매년 쓰레기로 하여 조성된 자원의 손실가치는 250억원 내지 3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동시에 도시의 생활쓰레기량은 부단히 증가하고 갈수록 복잡해지고있다.    2012년 1월부터 12월까지 현이상 도시에서 청리한 생활쓰레기는 43.91억톤이고 무공해처리는 43.1만톤밖에 안된다. 갈수록 늘어나는 도시생활쓰레기 처리문제로 골치거리가 산적해있다고 보도하고있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도시화과정에서 도시들이 쓰레기처리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서 최근 심각한 환경문제를 낳고있다.    북경의 경우 매일 평균 1만8천400t의 생활쓰레기가 배출되지만 시내쓰레기처리시설의 전체 처리능력은 1만300t에 그쳐 일일 기준으로 8천t가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중국환경보호산업협회의 조사결과 2011년 기준으로 전국 657개도시의 생활쓰레기처리률은 91.1%이지만 이들 “처리된' 쓰레기”의 20%는 단순히 지정된 장소로 운반해 쌓아둔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쌓아놓고 실제로 처리하지 않은 쓰레기가 매년 5천만t씩 늘어나는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점에서 고도의 문명=대량쓰레기생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전세계적으로는 또 얼마일가? 상상조차 몸서리칠 일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역시 문명의 은총이라 할것이다. 지난세기 70년대말까지만도 우리 농촌에는 쓰레기란 별로 없었고 있다해도 걱정거리가 아니였다. 인류가 자연과 함께 숨쉬며 진화하던데로부터 자연을 파괴하면서 제가 싼 똥위에 주저앉은격이 되였다.    쓰레기란 원래 없을수도 있다. 일면 쓰레기되고 한편 자원이 되면 쓰레기는 곧 자원이고 자원이 곧 쓰레기가 되기때문이다. 전통적인 생활양식은 생태학적으로 버리는 쓰레기가 생겨나지 않도록 가축을 키우고 밭을 가꾸며 살아온 농경문화였다. 음식쓰레기는 가축의 먹이가 되고 낡은옷은 구들을 닦는 걸레로 재활용되였다.    재나 인분과 가축의 똥은 두엄이 되고 농토에 섞이여 자연에 환원되고 그렇게 걸구어진 농토는 더많은 량곡으로 인류에게 화답하였다. 그리하여 “비료는 곧 량식”이라는 구호가 높았다. 당시 농촌에서는 쓰레기가 거의 100%가 순환되였다. 그러나 공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촌이 도시화되였고 농토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증산이 강요되면서 순환의 파탄을 야기했다. 도시 역시 주변의 농경지와 가축들이 마침내 걸어다니는 료리로 되는것이 생존리유로 되면서 생태학적순환이 불가능해졌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대자연은 쓸모없는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는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였을 때는 쓰레기를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자연경제와 “키우는 문화”를 짓밟고 자본주체로서의 상품경제와 “생산문명”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면 200년 사이에 온 지구촌은 쓰레기천국이 되여버렸다.    이제 도시는 말할것도 없고 농촌마저 해마다 더 많이 쏟아내는 온갖 재활용불능의 쓰레기로 하여 병들었다. 그래서 “현대문명은 쓰레기생산문명” 이라고 해도 망언은 아닐것이다. 급속한 산업화로 전세계적으로 공업용화학재료, 농약류, 폐플라스틱, 합성세제, 하수침전물, 쓰레기소각재 등에서 많은 종류의 잔류성 화학물질이 속출되고 이로 인한 환경오염문제가 회복불능상태로 심각해졌으니 말이다.    이렇듯 쓰레기는 공업화와 경제성장ㅡ고도의 물질문명이 낳은 걸작이다. 우리가 자호감을 가지고 구가하는 문명이란 결과적으로 “쓰레기문명”이다. 인간은 무지경으로 만들고 만든만큼 쓰다가 내버리고…심각한것은 우리가 쓰레기 혹은 준쓰레기속에서 살고있다는것이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생필품이라는것도 공업문명에서는 쓰레기 후비군에 속한다. 하여 현대사회를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사회라고 특징짓는다. 이 무계획적인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촉진하고 생산과 소비의 순환절주가 불가담당의 고봉으로 치달으면서 쓰레기예비군들이 련속부절하게 현역이 된다.    결과적으로 상품경제사회가 무한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확대재생산하는 거의 모든 상품들이 인류의 삶의 질적향상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장애가 되고있다는 점에서 인류는 스스로 눈물겨운 아이로니를 창출하고있다. 리기적인 문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대인들은 무지경의 생산욕망과 소비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한 쓰레기와 더불어사는 결코 생활양상을 개변하기 쉽지 않을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지구촌에서의 자업자득의 불행에도 눈감고 해양쓰레기를 배출하더니 마침내 태공쓰레기를 제조하는데까지 열을 올리고있다. 광활한 우주공간이라도 무한대한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엔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니다. 지금 태공에는 고기술의 신장과 정비례로 몇천만톤의 쓰레기가 만연되여 제어불능이 되였다. 그것들은 우주사업을 방애할뿐만 아니라 지구에 한층 또 한층의 오염원천을 조성하고있다.     통계수자에 따르면 작금에 근 10만여개의 페기물이 존재하고 있는데 매년 2% 내지 5%의 속도로 증장하고있어 근심하고있다. 이런 쓰레기들은 대량적으로 방사성을 발산하는 물질들로서 기술능력이 따라가는 몇몇 나라들에서 겨끔내기로 쏘아올리고 부서지는것은 누워서 뱉은 침이 제얼굴에 떨지는격이요 멀리 던진다고  생각한 돌이 제정수리에 떨어지는격이다. 그언제 산성비처럼 “쓰레기비가” 억수로 쏟아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것인가?    이런 물질들은 매초 10킬로메터 이상의 속도로 운행하기에 다른 물체와 부딪치면 수류탄의 폭발력과 맞먹는다고 한다. 직경이 겨우 0.5미메터의 금속먼지도 우주복을 구멍낼수 있으며 생명에 치명적이라 한다. 인류문명은 수많은 “배설물”을 하늘에 쏟아올리는 기술은 고도로 발달했지만 그것을 청결하는데는 아직 미달이다. 최근 로씨야 우주당국 책임자가 우주공간이 우주쓰레기로 넘쳐나 20년내 지구 동기 (同期) 궤도가 폐쇄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경고했다. 위대(危大)할손 “쓰레기문화”여,                                                   2013년 7월 17일     
422    잡감시조 100수(81-100) 댓글:  조회:6378  추천:0  2014-11-10
                                                                 1. 어장에 가을드니 물속조차 차가운가                            낚시대 드리워도 고기란놈 딴전부려                            구럭에 실망채워서 늦은길에 더덜털                          2. 먼산에 훈풍부니 적설녹아 간데없다                            한자락 빌어다가 가슴속에 불어넣고                            천추에 묵은정한을 녹여볼가 하노라                                               3. 고래희 인생에도 不知왜라 세상속을                            갑부를 원하던들 분복없이 이룰거냐                            청운에 운이 못틔여 포의한사 되였에라                          4. 재물신 좋다하되 身外自物 되는것을                            모으고 또 모아서 루만금이 되였건만                            하몹쓸 부정축재라 쇠고랑을 덜썩찼네                                                           5. 청송이 하좋아서 앞뜨락에 심었더니                            차차차 시들어서 강대나무 되얏에라                            옳거니 억조창생이 제자리가 있는것을                          6. 풍랑에 혼쭐났다 배를팔던 저사공아                            뭍이라 안전타만 네할일이 무엇일고                            아서라 세상어디에 무풍지대 있으리오                          7. 서가에 밤늦도록 홀로앉아 비몽사몽                            령감을 부르는차 잡생각만 몰려든다                            마음은 늙지않아도 창조력은 볼일없네                                                          8. 일송정 칼바위에 동년의 꿈 새파란데                            친구들 간곳없고 귀에설은 말소리뿐                            고향도 풍진세월에 정나미가 색바랬네                                               9. 금사탄 달밝은 밤 잔파도가 일렁이고                            유흥객들 희희락락 밤가는줄 모르는데                            바다는 어이 공연히 잠못이뤄 하느니                                              10. 늙는길 외곬이라 피해갈데 있을란가                            이마엔 주름깊고 백발성성 흐트러라                            세월에 장수가 있나 순리대로 살고지고                                              1. 홍진에 묻힌몸을 가신듯이 떨칠손가                            돈내에 절어들고 권력맛에 취했어도                            좋을때 그만두는게 명철한가 하노라                                              2. 풍운이 돌변인데 장구함이 있을소냐                           권좌도 조석으로 불안한줄 모르나냐                           락마에 후회막급을 눈물겨워 하더이까                          3. 政系村 시시비비 종잡을수 없는판에                           지조는 뒤로밀고 아첨이랑 앞세워야                           승천의 긴긴 사다리 무난하게 오르리라                          4. 버들숲 달빛아래 속삭이던 님은 없고                           짝잃은 비둘기만 구구구구 울어싸네                           꽃이야 곧 지더라도 맺은사랑 지단말가                         5. 가는봄 슬퍼한들 알은체를 할거인가                                       출국붐 휩쓸고 간 산간마을 볼품없네                           돈바람 불어오던들 산향의 봄 다시올고                              6. 시내가 실버들도 봄빛겨워 휘여있고                           꾀꼬리 가지찾아 꾀꼴꾀꼴 구성진데                           시골의 로총각님아 퉁소소리 애달프다                         7. 꽃피던 옛가지에 봄빛좋아 호듯호듯                           새움이 움트련만 새바람에 움츠렸노                           인재도 이와같아여 날개펴지 못하니라                                             8. 인생길 밟아돈지 칠십년이 넘었건만                           얻은게 바이없고 잃은것만 서러워라                           어즈버 유감도많은 이 한생이 저물도다                                              9. 인생도 락화류수 푸르던 꿈 황들도다                           세월에 꿈이 갔나 청춘도 추억뿐이                           파란도 만장한 삶에 남은것이 바이없네                          10. 오늘도 하루길에 해내싼 일 별로없네                            로옹의 잡생각을 시조가락 얽어놓고                            석양에 지팽이짚고 갈곳몰라 하였노라                              
421    잡감시조100수(61-80) 댓글:  조회:6534  추천:0  2014-11-10
                           1. 민초는 죽어가서 한줌흙이 되야있고                             위인은 세상떠서 연기되여 천당가노                            두어라 저승문턱이 평등한줄 알괘라                          2. 있으렴 부득부득 간다하는 저 딸년아                            이국이 좋다한들 에미품만 더할소냐                            그래도 가야한다면 다시보진 못할레라                          3. 도회의 월색이란 보기조차 창백허다                            불야성 눈부신듸 교교할일 바이없제                            자연의 빛과 소리를 文明神이 망쳤관듸                          4. 창밖은 월백하고 은하수 흐르는데                            로옹의 잠못드는 깊은수심 뉘알랴만                            생각도 병인양하야 그칠날이 없노라                          5. 한국풍 불어칠체 돈번다고 떠나간님                            십년이 다가도록 돌아올줄 모르노에                            락엽도 귀근하는데 가고아니 오느니                          6. 잘산다 과시말고 못산다고 기죽지마                            부귀도 예측불가 일조일석 전도되니                            마음에 꺼림없으면 부자인가 하느니                                          7. 백두를 밟고서서 산하천리 굽어보니                            두만강 줄기찬물 3천리의 혈맥인가                            언제면 건너마을에 행복의 놀 비끼려나                                              8. 붓대를 휘여잡고 작가몽을 익혀놓고                            대작을 지어가며 립신양명 하렸더니                            문학도 상품되나니 허무함만 거품지네                           9. 산촌에 봄이오니 내할일이 태산같다                            논갈이 언제하고 덕이밭은 또 어찌랴                            령감님 농쟁기를랑 손질해야 하오리다                               10. 내가의 방치돌에 곰팽이가 끼였는데                             시골애기 어데가고 빨래방치 누웠구나                             모두들 시내바람에 령넘어에 갔다하오                                             1. 모아산 서덜밭에 호미날을 휘두를 때                            콩대는 아니굵고 잡풀들만 무성해도                            밭고랑 척 가로타고 세계혁명 내다봤네                                                2. 늘먹어 진수성찬 식도락도 지겨웁다                            남산배 이리나와 거동마저 불편하다                            저저의 비만증세가 부자동네 병이런가                                              3. 스승은 초불같이 제한몸을 다태워서                            한가닥 불빛으로 까막눈을 틔워줄제                            영광의 월계관아래 자아희생 눈물계워                          4. 이국땅 천애지각 정든님을 보내놓고                            홀애비 외로워서 병나발만 부는구나                            옳거니 출국의 붐이 리산가족 원흉인듸                          5. 마파람 둥실타고 산을 넘는 저구름아                            서울의 전세방집 창문가에 비를 내려                            령감님 눈물이라고 줄줄이 그으려마                          6.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며 키워노니                            자식놈 절로자라 립신양명 한듯이라                            잘되면 제덕이 되고 못되면 부모탓이                          7. 벽계수 주절주절 밤낮으로 분주코나                            계곡이 싫다한들 어이그리 보채느냐                            청산리 솟고솟아서 생겨난줄 네 잊었냐                          8. 우거진 잡초속에 누웠는가 주무신가                            손발이 터갈리게 일만하신 아버지여                            넋이야 있으리까만 술잔이나 받으소서                          9. 책읽기 시들해서 낡은책을 베고누워                            꿈에는 일취월장 깨고나면 허황타만                            로친아 늙은책귀신 너무그리 닥달마오                                             10. 장백의 폭포수는 마를날이 없노매라                            옛그날 고구려땅 무사들의 숨결인가                            어즈버 단군족기백 옛말뿐이 되단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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