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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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곡조가 틀린 거지타령 댓글:  조회:5933  추천:0  2014-09-05
                                                         곡조가 틀린 거지타령                                                                       진 언      인간사회의 영원한 주제는 빈부문제이다. 한번도 굶주려보지 못한 복받은 사람 들이 많더라도 기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일로서 밥을 빌어먹는다는것은 치욕 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치욕은 해당자에게만 속하는것이 아니다. 배를 불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것은 인간사회, 매 시대의 상처이자 치욕이기도 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고있다면 어떤 사회라도 번영하는 행복한 나라는 아니다. 이 말은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어느 나라에든 적용된다. 그 자체가 사회발전규률이기때문이다. 가난하던 나라가 발전하여 부유한 나라가 된것이지 원래 부터 잘살던 나라가 없다. 동서방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든 비럭질을 하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볼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수이다.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든 그 사람의 품성 나름이요 인격력량에 달린문제이다.         거지와 빈곤의 차이에 대한 해석이 있다. “거지’라는 단어가 원래는 한문으로 '클 거(巨)와 '알 지(知)'자로 '크게 깨달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였다고 한다. 이렇게 크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욕심없이 살다보니 살림은 궁색하고 행색은 남루해져서 지금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거렁뱅이' 즉 얻어먹고 사는 사람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저는 지금처럼 혼란한 시기에는 크게 깨달음을 얻어 욕심없이 사는 사람인 거지 (巨知)'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략 )”         거지에 대한 이 해석이 고증을 거친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재미있을뿐만아니라 명석하게 분별해주는 점도 없지않다. “비렁뱅이ㅡ거지”는 매일 밥을 빌어먹느라 자 기의 존엄을 내려놓는다. 그만큼 꼭 돈을 써야 하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흔히 말하듯“사람이 빈궁하면 골기가 있다”진짜거지들은 돈이 없기에 울며겨자먹기로 비럭질을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잘것없으나마 소유한“재산”이 있고 금의옥식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먹고는 산다.         이처럼 가난한 독립적인간과 거지의 인격상은 완전히 다르다. 가난한자=거지로 인식하는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바보일뿐이다. 세상에 거지가 없는 나라는 없다. 서서 말라죽은나무 몇그루를 보고 밀림이 다 말랐다고 하는 사람은 근시안이 아니면 편집 광이다. 천국 미국에도 저그만치400만의 로숙자들이 있다. 명칭 로숙자이지만 실제는 “거지”들이다. 그렇다고 미국전체를 싸잡아서 거지국이라고 욕하는 나라가 있을가? 아프리카의 최빈국을 거지나라라고 비웃는 국민이 있는가?         천당과 지옥의 번지수를 누가 아는가? 약 13%의 지구인 (9억 명 이상)들이 매일 매일 기아에 시달리고 약 35%의 지구인들은 직장이 없거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소위 천국이라고 믿고있는 미국내에서도 약 14%의 가구는 "식량공급 불안층"에 속해있다. “천당”과“지옥” 이 함께 존재하는 이 지구촌이 아니런가?        미국 주택도시개발부의 ‘2010 년례 로숙인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2007~2009년 보호소를 찾은 전체 로숙인이 156만명이라고 한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경제난이 심화되고 있으므로 보호소를 찾지 않은 로숙인들까지 포함하면 로숙자는 최대 300만 명으로까지 늘어날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인구가 3억명이니 이는 한국사회에 대략 50만명의 로숙자가 있다는것과 같다. 이는 서울특별시에 10만명의 로숙자가 있 으며 서울의 각 구마다 4천명의 로숙자가 있다는것과 같다. “대한민국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49.6%이다. 절반가량이 가난하다는 얘기다. “로인거지국인가?” 또한 노인 자살률은 10만 명당 58.6명 (2015년 기준)이다. “로인자살천국”인가?     로동인구를 포함한 미국국민 전체 가운데 빈곤층 규모는 2010년 4356만9000명 (14.3%)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미국국민 7명 가운데 1명이 빈곤층이라는 뜻이 다. 그렇다고 미국을 거지국이라고 할수 있는가? 인간의 행복권은 사회환경에서 출발한다. 세계 최빈국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국민행복지수가 세계1위로 집계되였다.     가난한 사람이면 무작정 거지라고 침을 튕기는 사람은 형편없는 용재이다. 가방끈이 길고 짧은 문제가 아니다. 가난≠거지라는것도 모르고 가난하면 그저“거지” 로 생각하고 제멋에 호기를 부리려는 자들은 기실 겨우 밥술이나 뜨고 등이 좀 따뜻하게 입고있는 사람들이지 진짜 대부호들은 아닌것이다. 대부호들은 내속이 어떻든“귀족 풍도”를 현시하려 하기때문에 “거지가 어찌구”말을 마구 내뱉지 않는다.         제주머니에 돈 20원이 있다고 19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깔본다면 결국 동일한 계층에 속해있다는 가장 간단한 통계학도 모르는 무지자이다. 그런데도 재세를 부린 다면 인격문제에 소급될수밖에 없다. 갑부도 아니면서“거지타령”을 입에 물고있는 자들은 거개 가난한 삶에서 출발 해서 조금 살만큼 된것이다. “너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이들에게 경종이 될만한 금언이다.     우리 말에도 거지가 밥술이나 먹게 되면 거지 밥한술 안준다는 속담이 있는데 가난하게 살던 자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도리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남을 생각할줄 모른다는 말이다. 멀지 않은 곳에 이런 흰둥이들이 너무 많다. 사람은 누구나 잘살고 싶어한다.“가난뱅이가 제일이다. 누구도 너의 그 가난을 훔치려하지 않을테니까” 라고 한 쉐익스피어의 명언을 자기위안으로 삼을 가난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가난 하다는 말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것을 바라는 사람 을 두고하는 말이다”라는 세네카의 격언을 떠올리며 가난에 자족할 사람도 없다.     어디서, 어떤 체제하에 살아가든 백성의 본능은 같고같다. 그런 백성을 비웃을 권리를 누가 누구에게 주었단말인가? 자고로 삼대부자가 없다고 했듯이 영원한 빈궁 도 없다.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솟지만 인간의 운수는 서쪽에서 떳다가 동쪽으로 지 는수도 있다. 참으로 변화속의 세상인줄 모르는자는 청맹과니들뿐이다.         아니라면 잘난듯이 참으로 못난이라 해야 할것이다. 키케로는 말한다.“네가 왕과 함께 동행할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거지와 같이 있을 때 업신여기지 않으면 너는 인격자이다” 단순한 부자와 단순한 가난한자 사이에 삶의 질차이는 있을지라도 가난한 자로부터 부해진 자와 그냥 가난한자 사이에는 결코 인격상의 우렬은 없다. 오늘 좀 살만큼 되였다고 지지리 궁핍하게 살았던 지난날을 잊었다면  기억력문제만 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일가? 인간성인가? 흰둥이들인가?     보통 돈지갑이 불룩해면 인성은 경박스러워지고 텅텅 비면 더구나 천박스러워지 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한 사람이 부귀하고 영달하였을 때 무엇을 하고 곤 경에 빠졌거나 빈궁할 때 무엇을 하지 않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위인인가를 곧 알수 있다고 했다. 잘 나갈때는 거만해지고 신세가 꼬이여서 궁경에 처했을 때 가장 쉽게 위장을 벗어던지고 류랑자ㅡ빌어먹는 거지로 된다. 그러나 푼전한잎이라도 던져줄 생각이 없으면서 동냥바가지까지 깨려는 심사라면 고약하기 짝이 없다.     인간사회는 원래 얼룩덜룩하고 사람들은 변화속에서“인생이중주”를 타고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에 부자가 있고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회중추를 이루 고있다. 좀 배부르게 먹고 옷이나 반반히 입으면 천하갑부라도 된듯이 언필칭 남을 거지라고 욕하는 싱거운 작자들은 젠체하지만 전혀 돋보이지 않는다.     적대감이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다고 부정하기에 이르렀더라도, 편견이란 그렇게 사리도, 민족인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도덕기준도 분별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모든것은 변화속에 있거늘 눈을 들어 멀리 풍물을 보라. 마냥 내노라하는 꼬락서니하곤 참 가련하다. 그리고 불쌍한 정신빈곤자들이라 하겠다.                                                              2014년 7월 19일         (참고자료첨부) 출처 ㅡ정치포탈에서   [세계11위 경제대국 대한지옥=헬조선 꼬라지] -소득격차 세계 2위 (1위 미국, 3위 일본, 4위 영국, 5위 프랑스) -상위 1% 소득점유율 OECD 3위 (1위 미국, 2위 영국) -상위 10% 소득점유율 OECD 2위 (1위 미국, 3위 일본) -빈부격차 OECD 2위 (1위 미국, 3위 멕시코, 4위 스페인) -국민 1(10)%가 국부 18(74)% 차지 -국민 1/5/10%가 사유지 57/65/86% 점유 -국민 5%가 금융자산 50% 차지 -자살률 OECD 1위, 세계 2위(리투아니아 1위) -노동시간 OECD 2위 (1위 멕시코, 3위 칠레) -곡물자급율 26% (미곡 제외 5%) -GDP 대비 공기업 부채비율(27%) OECD 2위 (1위 프랑스, 3위 스웨덴) -외채 6,000억불(GDP의 55%) -무역의존도 GDP의 113% (세계 1위) -지하경제(GDP의 27%) OECD 4위 (1위 멕시코, 2위 그리스, 3위 이태리) -국내자산 해외도피(900조원) 세계 3위 (1위 중국, 2위 러시아) -폐지수집 노인 200만명 -매춘부 120만명 (可姙女 4.2명당 1명) -해외진출 매춘부(12만명) 세계 1위 -사회복지지출 비중 OECD 34위 (멕시코 35위)
399    글읽기의 잠규칙 댓글:  조회:5162  추천:1  2014-08-31
                                         글읽기의 잠규칙                                                 최 균 선       글읽기란 바로 흔상주체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체험하고 재창조하는 정신활동이다. 문학흔상은 곧 작자ㅡ작품과 독자의 대화라 할수 있다. 문학적대화가 시작되기전 독자는 자각적이거나 비자각적인 어떤 심리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접수심경이라 한다. 이런 접수심경속에 기대시야라 부르는 열독심리지향이 산생된다. 기대시야는 접수자가 접수과정에 들어가기전에 이미 가지고있던 접수객체에 대한 기대, 혹은 리해전의 심리상태라고 할수 있다. 독자들의 경험의식, 습관, 취향, 기호, 상식, 교육, 심미규범 등은 모두 기대지평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글읽기는 기계적반응이 아니다. 흔상과정에 독자의 기대시야와 작품사이에 흔히 순향적공감과 역향적반감 이 두가지 정황이 수시로 나타난다. 기대시야에는 작품의 예술형식과 심미특질 등에 기대를 가지는 문학적기대와 작품의 생활내함과 사상의의 등에 기대를 가지는 생활기대가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어떤 유익점을 줄수 있겠는가 하고 미리 예산하고 흔상에 림하는 가치론적인 기대도 있다.     독자가 작품의 보다 심층적인 의미, 정감의 경계, 인생태도, 사상경향 등에 대해 기대하는 의미기대가 있고 열독경험 기대시야도 있다. 열독경험 기대시야는 개체성 기대시야와 집체성기대시야로 나뉜다. 전자는 일반독자의 기대시야이고 후자는 전문 비평에 종사는 특수독자의 기대시야이다. 문학흔상의 고조에는 공명감, 관념의 일치성, 정감경험의 동조, 의지와 념원의 접근과 친밀성 등이 있다.     작품감상에서의 심미희열, 예술향수는 반드시 객체예술작품에 대한 관조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술향수를 느낄 때 흔히 객체자신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객체 의 자극에서 산생된 감정, 정서로써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이것을“내부집중”이라고 한다. 문학적대화후에 재음미하는 정서적반성과 사고이다. 문학감상ㅡ예술접수활동은 독자의 차이에 따라 차이가 있게 되고 독자의 선천자질, 생활경력, 사회분공, 주관 노력 등 개체의 심미수양으로 하여 다다소소 차별이 있게 한다.     첫째로 나서는것이 심미취미인데 심미취미는 주관애호의 형식으로 표현되므로 애호, 정취의 풍부함과 결핍함 등 차이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주관선택과 편애를 배제하지 않는다. 둘째로 취미판단은 추상적리론인식이 아니며 또한 적라라한 도덕 개념도 아니다. 심미주체의 성격, 기질에 따라 각자의 심미취미와 애호가 표현된다. 정체상에서 독자의 흔상과정은 열독주체의 능동적해석과 재창조과정이다.    독자의 각이한 해석은 심미적창조의 작용에서 온것이다. 동화(同化), 감정이입의 경지에 들어서면 작가나 독자는 서로 공감하는 가운데 작가보다 독자가 더 상위에서 작품을 제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렇듯 흔상판단은 론리적판단이 아니라 심미 적이므로 이런 심미감각은 정신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정신세계로 나오는 고상한 생명활동이 된다. 그리함으로써 독자는 유익한 계발이나 조언을 얻어내군한다.     감수성은 자연이나 예술미의 숭고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반응이라는 뜻이며 인식으로서의 문학, 경험으로서의 문학의 전제조건이다. 문학감수는 그저 한부의 두터운 소설책, 지어낸 이야기를 적은 문학서적…등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작품속에 파묻혀 개체자신의 정감반응정보에 목적을 두고있다.  문학흔상에서“기계적반응”도 있게 된다. 말하자면 판에 박힌 반응, 무비판적반응 등을 이르는 말이다.     문학접수에서 공명감은 고조단계에 들어갔다는 주요한 표지이다. 문학의 사회적기능은 독자의 문학경험이 그 삶의 실천속에서 우러나온 기대지평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세계에 대한 리해를 미리 형성하고 그리함으로써 되돌아와 그의 사회적태도에 작용할 때 그 진정한 가능성이 발현된다. 독자에게 정감이라는 심리품질이 없다면 아 무리 뛰여난 필력도 흉금을 사로잡을수 없다. 누군가 작자는 반드시 먼저 나를 놀래 우고 마음을 찢어놓고 두렵게 하며 전률시키고 감동시키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분노하게 하고 그다음 만약 남은 힘이 있다면 나의 두눈을 즐겁게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인간은 각자 자기가 보는 만큼의 세상을 마주하고 산다.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만물은 자기를 닮지 않은것을 낳는 특기가 없다. 문장도 그 나름의 감지와 지각에 국한된것이니 공명이 가면 공명할 일이요 아니 공명된다면 그만두면 될것이다. 그 어떤 경물, 경상이든 누구나 모두 눈으로 볼수 있고 어떤 감각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문학적정서를 가지는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것은 더구나 별개이다. 문학정서는 그 사물로 무엇을 깨우쳐주는것이 아니며 그 정서적느낌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건반을 울려줄뿐 시비의 판가름이 아니다.     사람의 감수에는 원래 짝이 없다. 그것을 글로 옮길때 독자를 의식하며 쓰지만 그에 매이지는 않는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은 심심해서 공연히 해본 소리가 아니다. 어둠속에서 보는 고양이는 모두 회색일수밖에 없으며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상은 그 안경알의 빛에 따라 달리 보일수밖에 없다. 제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뭘 이런걸 다”하고 부정하는것은 그의 자유일세 자신의 주관판단이 곧 진리일리 만무하다.     말하자면 한 작자에 대해 모종 선입견이나 편견을 앞세우고 그 작품을 읽는다면 읽는 사람의 흔상심리도 객관성이나 공정성을 잃기마련이다. 인간은 감정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때문이다. 달걀에서 뼈를 찾아내려는 자세로 작품을“심열”하면 문제는 곧 수두룩해질수 있다. 털면 먼지가 나지않는 옷이란 없듯이 완전완미한 글이란 대가들에게서나 가능한 일로서 나는 고양이도 그릴수 없지만 너는 호랑이를 그리라는식으로 작자에게만 턱없이 기대치를 높이는것은 공정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글은 우선 감정적으로 읽은후 지적인 평판이 따르게 된다. 대저 문장을 바로 읽으려면 우선 어감이 있어야 하고 다음 문감이 있어야 한다.《살구꽃 담장밖에 팔을 내밀고 붉은웃음짓네》를 그냥 살구꽃가지로 읽으면 천성 어감이 없는 표현이고 그로부터 규방심리의 분방함을 련상한다면 문감에다 정감까지 성숙한 지적인 독자가 되는것이다. 이런 독자의 심미취미는 작자의 심미취미와 정비례된다     수필은 시가 아니지만 감정이입이 허용된다. 사회상에 어떤 열기띤 화제를 곧잘“ 뜨거운 감자” 로 비유하는데 그것을 진짜 뜨거운 감자로 생각하고 감자농사의 유래와 용도,공헌에 대해 수다스레 늘여놓는다면 그 열독능력과 감지수준은 제로이다. 수필에 담긴 감정은 나름대로이고 표현도 정의나 공식이 아니기에 어학적으로 따지면 읽을맛이 싹 없어지고 말것이다. 감지에도 피상적인것과 본질적인것이 있다.     피상적인 감지는 작품의 형식, 언어구사, 예술기교에 대한 피상적인식에 의거한 즉흥적인 감지이다. 본질적인 감지는 작품에 표현된 상황을 감지한뒤 자신의 경험과 지식, 가치관을 작자의 관점. 감정에 비추어보며 자신의 흔상심리를 조절, 수정한후의 합리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가능껏 공정할수 있다. “그저 그렇겠지뭐…”하는 선입견을 앞세우면 말타고 꽃구경도 아니고 “참새 방아간을 지나는격”이 되기십상이다.     보통 어떤 새 건물을 구경할 때 건물의 배경과 설계적특징 등 외관에 눈빗질하고 집안에 들어가서 내부구조와 장식, 실용성 등을 감지하며 다시 창문밖에 환경을 보며 감수를 새기게 된다. 문학흔상도 마찬가지다. 한편의 작품에 스며있는 그 어떤 내재 적가치를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면 공명대신 반감부터 찾을수 있다. 귀에 대고 하는 말은 귀로 듣고 심장으로 하는 말은 심장으로 듣고 정서적으로 하는 말은 정서적으로 들을법한 일이 아닐가싶다. 불원이면 무감각자이던가,                                             2008년 10 월 23 일 
398    재미로 보게 되는 악의 향연 ㅡ“왔다! 장보리”를 계기로ㅡ 댓글:  조회:5958  추천:0  2014-08-27
                                      재미로 보게 되는 악의 향연                                                              ㅡ“왔다! 장보리”를 계기로ㅡ                                                           진 언       인기리에 시청되고있는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는 친딸과 양딸이라는 신분의 뒤바뀜을 발단으로 극도의 갈등속에 선과 악으로 대결되는 두 딸과 두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고있는데 장보리는 운명적인 사고이후 헤여져서 인생고를 겪다가 다시 만나 한복명문가의 최고의 한복장인이 되는 권선징악으로 대단원을 이룰것이다.     인간생활의 론리대로 응당 그래야 하지만 뒤바뀐 자리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가족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는데 20년만에 다시 만난 부모와 딸이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감정적인 벽을 혈연이라는 불가항력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관용으로 부등켜 안으며 울고웃을것으로 예상되면서도 악행이 끝이 없고 선행은 그냥 짓눌리고 악역이 긍정적주인공을 짓밟고 고고행진한다. 그야말로 필승불패이고 무소불위인데 주객이 너무 전도되고있어 거부감도 주고있다.     주인공 도보리의 본명은 장은비이다. 1994년 여덟살때 아빠와 엄마가 크케 다투었고 그때문에 은비는 아빠와 엄마를 화해시키기 위해 엄마차에 타고 사고현장을 목격, 큰아빠 시신을 보고 기겁하며 차에서 내려 도망치다가 엄마를 잃게 된다. 그후 양엄마가 된 도혜옥의 차에 부딪쳐 그전에 기억을 몽땅 잃고 도혜옥의 차녀 도보리로 성장하게 되였다. 15년이 흘러 23살이 된 보리는 도씨와 함께 국밥집을 하며 옥수의 제자로 들어가 한복을 배우면서 살다가 어릴적 소꿉친구인 재화와 엮인다.     착하디 착한 주인공 도보리의 형상은 아주 인상적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있는 주인공 도보리! 아름다운 옷이 아닌 따뜻한 옷을 만들고 싶어하는 그녀가 뒤틀 려버린 인생궤적우에서 겪는 인생고는 안쓰럽다. 사건의 발전과 그의 성격발전의 그라프를 보면서 진실과 정의가 나가는 길이 얼마나 파란만장하고 눈물겨운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이눔의 현실은 왜 악인이 살판치고 선한자는 당해야만 하나? 하면서“지성”이 뒤틀리게 한다. 드라마라도 그냥“악의 향연”을 소일거리로, 재미로 보아야 한다면 참으로 슬픈“문화향수”라 아니할수 없다.     자아중심주의시대, 저저 리기에 몸달아있고 혈안이 되여있는 현대인들속에서 너무나 극치를 보여주는 천사, 성모마라아ㅡ도보리라는 때묻지 않은 순수녀의 형상은 부와 명예로 존재하는 모순되고 사악한 인간들과 대비되는데 그로써 그런 류형의 인간군들이 진짜 사람다워졌으면 하는 작가의 지향이 갸륵하여 동조하게 된다.     특히 너무 어린나이에 벌써 극단적인 리기주의를 뼈속에 새기고 성장하여 보리를 궁지로 몰아넣지 못해 앙탈하는 연민정과의 대조속에서 더욱 돋보이게 된다. 그러나 연민정의 악행에 그냥 당하는 도보리의 형상은 정의와 선량을 신장하는데 극단으로 나가다보니 인간, 인성의 본연을 잃고말았다. 그 많은 죄를 지어놓게 하고 어떻게 마무리지으려나?     “난 열심히 산 죄밖에 없어. 좋은 부모밑에서 태어나지 못한건 내잘못이 아니잖아!”라고 말하듯이 얌치를 뻔뻔함속에 묻어버리고 악행을 밥먹듯하는 그의 인간성은 도보리의 바닥없는 착함과 대비되여 타매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천성은 아니라도 기질적으로 악녀라할수밖에 없다. 열살때 벌써 자신이 부자집애라고 거짓말을 흘리고 다니다가 빚쟁이들을 피해 장흥으로 가던중 은비와 악연으로 만나게 된다. 은비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의 이름조차도 모르니 민정이가 은비가 보리밥을 잘먹어서 보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런 비린 녀자애이다.     류학을 마치고 비술채에 재입성해 보리와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비술채에 친손녀로 나타나 끝없이 보리를 괴롭힌다. 이처럼  드라마는 “사랑”과 “가족”이라는 보편성으로 하여 공동의 관심사가 됨으로써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살수 있음에도 여느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드라마속의 사랑과 가족의 모습은 따뜻한 인정미와 바람직한 인간형상보다는 갈등과 음모, 패륜과 범죄, 기만과 암해 등 온갖 인간악의 “향연”으로 지속되고있다. 가족이 이렇게 묘사되는것이 모식적이 되다보니 악의 향연이 재미있는 오락거리로 되고있는판이다. 인간의 취미가 이렇게 타락할수는 없다.     드라마에 등장인물가운데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인물은 재화, 비술채의 초대침 선장, 박수미의 큰며느리이자 재화의 큰이모 등을 내놓고는 거의다 악인형상들이다. 특히 민정의 친엄마. 보리를 키운 양엄마란 인물도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남편이 진 빚에 쫓겨 고향 장흥으로 야반도주를 하다가 보리를 차에 치게 된 인연으로 키운것은 인정일세 보리를 딸로서 사랑한다면서도 보리가슴에 몇번이고 칼을 꽂는다. 그러면 시청자들도 넘쳐나는 막장코드에 점점 습관되여가는듯 하고 비난하면서도 더 자극 적인 설정과 묘사를 원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시청률은 가관이란다.     필자의 주화제는 역시 전형환경과 전형인물의 문제인데 드라마에서는 전형환경을 정절의 배경으로 리해해도 무관할것이다. 극정이 평지풍파는 아니지만 사활적인 쟁투가 벌어지는 드라마의 배경으로 볼 때 차잔속에 폭풍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매회가 거듭할수록 재미가 짙어가지만 스토리전개가 너무 느리여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진실이 밝혀질듯, 밝혀지지 않는 형식의 회가 거듭되여 진실의 행보가 얼마나 어려운가 절감하면서도 인위성의 과도하다는 느낌을 피할수 없다.     현실의 재현이 아니고 그저 허구적인 내용이라서 시청자들이 이를 감안하여 재미로 본다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면이 많다. 말하자면 여타 드라마들에서처럼 전개되는 스토리들이 룡두사미가 될가봐 궁금하다. 사활을 걸만큼 심각한 사안이 아 닌데도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인물들의 각투가 턱없이 과장되여있다. 악녀의 형상을 극단에로 밀어올리다보니 염문정의 경우 인류감정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모성애까지 말아먹는 지경에까지 치달아오른다. 모성애에도 사심이 있으나 이건 아니다.     다음 전개되는 스토리로 예측하건대 그렇게 길어질 리유가 없는데 그냥 복선을 깔고나가며 수수께끼를 던져준다. 드라마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생현장을 투사한다고 할 때, 인간생활은 그저 재미있기만 한것이 아니다. 생활이 드라마를 닮아 가는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드라마는 그저 감정유희의 재연이 아니다. TV 기능에는 사회적인 공인이라는 기능이 있는데 례하여 드라마 “애인”은 비난하면서도 열심히 시청했던 관중에게 그럴수도 있다는 사회적정서를 만들어냈다. 드라마는 우리가 지향하는 복된 사회에 대한 예술적재편성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한국드라마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서 천천히 풀놓은것에 그친다고해도 대중의 가치취향과 가치기준, 행동 양식과 인생관형성에 깊숙히 관여하고있다. 결과적으로 안방에도, 대중에게도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가족은 리상적인 모습이 아닌 기형적이고 기괴한 모습이다.     출생의 비밀, 혈연가족에 대한 지나친 집착, 배우자 외도에 따른 고통, 형제자 매간의 경쟁적인 구도, 가족간의 불신과 갈등이 한국안방드라마의 주된 단골내용이다. 한국의 가정은 마치 비상식과 비도덕, 야비함과 극단적리기심의 광란, 혈연제일주의 등으로 가득차있는듯하다. 특히 모식인양 빈번하게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자기 핏줄에 련련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찌생각하면 가족리기주의를 내보이는 한국인들의 태도와도 직결된 진실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화목하기보다는 경쟁과 반목, 시기와 질투를 하는 모습들이 민족적성격인듯한 인상을 깊게 심어준다. 특히 부유한 가정에서 형제자매들은 가족의 재부를 독점하려고, 서로 음해하고 계략을 꾸미는 악랄한 인성들이다. 또한 일부일 처제가 전통미덕이 되여“가화만사성(家和万事成)”을 가훈으로까지 유전시켜온 단군족으로서 가정의 장유유서, 사랑과 존중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실이 드라 마같다면 부모들은 자식들의 결혼을 반대하는것이 기본인생의 주제인듯싶다.     한국드라속의 가족은 위기를 품은 한국가정의 축도인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사회구조가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이 리상적으로 생각하는 핵가족의 단란한 모습은 현실에서도 흔들리고 있다는 전형적인 제시인가? 리상적인 모식이였던 단란한 핵가족이  “일인가족”, “재혼가족”, “祖孙가족”, “결손가정”구조로 된것이 산업화사회의 필연적인 결과가 되여진 현실이라도 안방드라마에서 건전한 가족의 모습을 이끌어야 한다.《모두가 김치》라는 드라마에서서 악녀 현지의 악행도 가경이고 불가항력적이다.    생물학적인 부모와 그 자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핵가족이 아니더라도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가족기능을 할수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가족을 오히려“문제가족”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 의 재현은 핵가족을 이루지 못한 가족구성원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결핍되고, 비정상적인 존재로 바라보게 만들 가능성이 없지않아 있게 된다.     현대문명권에서 절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라마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 갈등을 필요로 하지만 민족사회가 잘되려면 화합과 소통이 선양되고 권장하기를 바랄것이다. 비리하게 변화하려는 가족현실을 옳바른 방향에로 인도하려면 가족간 갈등과 무한 반복하는 반목, 비윤리적이고 비미래지향적이고 비생산적이 악형상들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심미취향적인 드라마의 사명이 아닐가?    가정이 어떤 형태로 변형되여 가고있든 가족, 가정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구조적존재임에 틀림없기때문이다. 구태어 설교할 일도 아니지만 악의 향연을 한갖 재미로, 소일거리로,감관적, 심리적인 자극을 앞세우고 꾸며낸 별의미가 없는 오락물이라고 치부하기보다 아이들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칠수 있는 의미있는 교육의 마당이라는것을  명기하고 드라마를 비판적으로 독해해야 할것이다.                                                                              2014년 7월 19일
397    ( 잔인한 사진주의 )|자유 게시판 댓글:  조회:7555  추천:0  2014-08-26
[스크랩] 한국(조선)전쟁 사진 ( 잔인한 사진주의 )|자유 게시판 내가찿던곳 | | 조회 613 |추천 3 | 2014.08.26. 04:10 http://cafe.daum.net/sisa-1/dqMu/8836  (일부발췌함 ㅡ 제공자 )    
396    불귀의 자연미 댓글:  조회:5860  추천:1  2014-08-21
                                                       불귀의 자연미                                                           최 균 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문제는 수천년전부터 이어져 온 미의 추구가 과도한 인조미열풍을 몰아왔다는것이다. 자고로“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해서 “신체와 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것으로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것이 효도의 시작”이라했다. 하지만 동양적인 전통관념이 비웃음을 당하는 현실이다. 오히려 예뻐질수만 있다면 그따위 전통은 꿈에 네뚜리라 무슨 성형이든 다한다는 붐이 가관이다. 그만큼 환골탈태할수록 최고로 여기고있다.     생명은 추상적인것이며 전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체속에 존재한다. 아름다움을 평판하는 주체는 인간의 의식이다. 인간은 리념의 주체이면서도 동시에 욕망과 자신의 지향과 추구에 따라 자기를 가꾸는 주체로서 또한 객체에게 관조되는 미적객체가 된다. 이 객체미가 지나치게 추구됨으로써 자신의 원모습을 알아볼수 없도록 변형시켜서라도 아름답게 보이려고 안달하는 심미취향을 현대의식의 발로라 해야 할가?     생명은 자연미의 내적본질을 이루며 육체를 통해 체현될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연은 생명이 그에 적합한 형식으로 존재할 때 아름답게 된다. 이것은 자연생명체의 변형이 남의 눈높이와 일치하는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것이 아니라 포장의 합목성이 미적합목적성과 일치할 때에라야만 뭇눈길들이 심미객체에 공감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경우, 자신의 원바탕에 어울리는 형태를 가지고있는 모든 생명체는 아름다운것이 된다는 사실을 몰각해서는 안된다.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을 살고있다. 공기처럼 만연된 이러한 풍조에서 저저히 미인, 미남처럼 보여야 하고 소지한것이 명품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명품처럼 보여야 한다. 그것이 서로 상생하는 기교이고 인생을 풍미하는 지혜아닌 지혜로 되였다. 어차피 포장은 가짜문화이고 명품으로 치장하는것도 겉과 속이 다르긴 마찬가지이므로 명품이나 짝퉁이나 그게 그것이 된다.     어쩌면 짝퉁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상을 가장 적라라하게 보여주는 진풍경이라고 할수 있겠다. 짝퉁은 명품을 흉내내고 가짜명품으로 인격을 포장한다. 그러나 고귀한 인격에 자연산의 표정과 의복은 비싼 인조미인과 비싼 명품이기보다는 다른 기품, 다른 향기, 다른 차원의것이다. 자신의 체형에 어울리는 의복과 진정어린 미소가 저절로 피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한마디로 말할수 없기에 그저“멋”이라고 이름하자.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멋이란 어디서 기원한것일가?  죄다 멋쟁이를 꿈꾸지만 진정 멋을 지니기란 어려운 법이다. 멋은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내적인것이기도 하므로 멋을 갖추려면 그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말하기 힘들기때문이다. 멋을 부리는 정도라면 겉멋을 구사하기만 하면 되겠지만 그 또한 겉멋인것이 들통날것이다. 진정 멋지려면 속멋이 절로 우러나와야 할텐데 진정 멋져보이기는 요란한 포장을 하듯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질박함”을 내버리고 물리적인“장식”이 돌이킬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포장, 광고시대 인간의 모습도, 인격도 포장되고 심령세계마저 포장되고있다. “있는 그대로”라는 진실은 희귀품이다. 하여 지금은 “단순”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마디로 일체를 인위적으로 복잡화하고있다. 원래 그대로가 그냥 좋은 자연경물도 편리를 위한 부가물로 덧칠되고있으니 이률배반인가?     기실 선택적리념의 주관성과 객관적평판은 통일되지 않는다. 따라서 직관으로 파악되는 실체로서의 외적미는 오성으로 파악될수 없다. 외모가 빼여났다해서 꼭 아름다운 녀자는 아니며 더우기는 사랑스러운 녀자인것은 아니다. 아름다워서 사랑스 러운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워서 아름다운것이라고 레브 똘쓰또이가 말했던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연을 미적대상으로 관조하면서 잃어버린 자연미와 합일되여야 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였다. 자연미가 예술미와 동등한 미학적범주의 론의는 잃어버린 자연성을 회복하려는 문화정신과 그 추구의 산물이다. 소실되는 인간본연의 뒤늦은 자구지책이 된것이다.    한국에서는 자별나게 국내산, 자연산에 입을 모은다. 쌀도, 남새도, 해류도, 육류도 그저 국내산,자연산타령이다. 그래서 “짝퉁”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쓴다. 례한다면 마치 중국산, 중국제품=짝퉁인것처럼 간주하고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일것이다. 사이비한것은 신, 의류, 가방, 손시계를 비롯해서 생활비품은 자랑스러운 국내산을 쓱 제쳐놓고 언필칭 외국산, 명품이다. 뺨을 맞아도 금가락지낀 손에 맞는다는것인지…     그런데 아이러니한것은 미적취향에서는“토산품”, 자연미대신 한사코 인공미ㅡ서양미에 매달린다는 사실이다. 감각적질료의 조작으로서 자연미를 파괴하고 인공미가 거국적인 국풍으로 되여진것이다. 하다면 “환골탈태”한 인조“미인”들은 짝퉁미인이 아닐가? 여기서 나의 설익은 미학적화제가 제기된다.     “인간의 몸은 욕망의 원천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라고 녀자들에게는 미모가 유력한 추천장임은 사실이다. 특히 외모가 곧 능력으로까지 상징되는 한국에서는 남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려는 수단과 방법에 자별난듯, 그런 욕망으로 성형수술이 막을 길없는 풍조로 된후 심각한 문제점들도 산적해있다는것은 또 하나의 곤혹이다.     "너도 나도 예뻐지자"는 성형수술열풍이 휘몰아치면서 세계적으로 성형시장은 45억달러로 전 세계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기록을 창조하였단다. 부자연스러움속에서도 인공미를 추구하는 정신적자족성은 녀자들의 공통한 지향이지만 기실 객체가 전통관념과 경험의식에 따라 미의 주체를 흔상할 때 그래도 익숙한 대상,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름다운것이며 이에 반해 생경하고 낯설때 기괴하거나 추한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한결같이 미녀, 미남들을 꿈꾸는“성형공화국”으로 치달아올랐다.“쭉쭉 빵빵”미인을 꿈꾸는 젊은녀성은 말할것도 없고 고등학생부터 고래희의 로파네들까지도 성형수술대렬에 뛰여든다고 한다. 쌍꺼풀수술, 모발이식 등 남자들도 례외가 아니라니 참으로 절대경이라 할것이다.      젊은이들야 그럴수 있지만 늙음이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것이 되여 백발동안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주름은 쌍가풀 빼고는 다 레이저로“다리미질”을 한다. 한두부위만  성형수술하는것도 성차지 않아 신체 여기저기를 전면“보수공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인위적인 손길이 닿지않은 태생대로의 아름다움은 오히려“촌스러운”것으로 되여지고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낸 인조미가 최고미로 부상한다.     늙기를 거부하고 주름을 거부하고 회춘을 갈구하고 재생을 론하다가 급기야는 시간의 역행을 넘보기까지한다. 태생적인 얼굴, 자연스러운 표정이야말로 자기만의 얼굴, 부모가 주신 모습일진대 한사코 외적인 변형을 선호함으로서 자연을 거부하는 인공시대를 만들고있다. 조화는 추상적형식미의 최고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생명력과 정신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인식하고 있는것이다. 전통관념에 대한 반역인가?     자연의 아름다움은 유한한 현존성과 한계성을 가지며 외적필연성에 매여있다는것은 조금 까다로운 미학리론이다. 미는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가상속에서 나타나는 리념으로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이런 미는 자연미에서의 첫번째 현상이다. 이는 미의 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근간에는 자신의 원모습을 찾기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이 늘고있다지만 다시 불귀의 자연미라 개탄이 나올수밖에 없으리라.                                                                  2013년 5월 24일
395    느낌에 생각이 따라서 (100수) 31. 깨여짐의 미학 외 4수 댓글:  조회:6229  추천:0  2014-08-16
                                             (31) 깨여짐의 미학                                                        야 조                                                   로자는 도를                                                 빈그릇 같다고 하더니라                                                 그릇은 一体 라도                                                 안팎으로 나뉘나니                                                  그릇밖이 안을                                                품고있고 비여있음에                                                무엇을 담고                                                채울수 있어 유용하더라                                                           술병이든                                                사발이든 짤랑 깨보라                                                일신을 지킬 날카로운                                                무기가 되는기라                                                  둥글둥글 모난데 없는                                                원형은 구속감과                                                두루두루 좋은                                                균형의 원중심을 이룬다.                                                  파괴철학 모르는가                                                부서진 원은 어긋나                                                첨단으로 무저항의                                                두려운 눈을 띄우고                                                  녹쓸은 굴종과 맹목의                                                썩은피를 짜내리라                                                뺀질거려서 무사태평한                                                인습을 찢어발기리라                                                  깨진다는것 날카로움을                                                만들어내는 일이여라                                                모난다는것 무엇을                                                겨냥하고 노린다는것                                                  둥근 지구촌도 파괴와                                                건설이 엇갈리거늘                                                그릇이 깨지면 끝난듯                                                또 다른 새 시작인것을                                                   (32) 배반자가 문득                                                                야 조                           여기 나서 어디로 가려느냐                                                  잘살자고 내치고 떠나더니                                 나서자란 조국땅 못잊어서                                     욕심만을 붙안고 맴돌았지                           저 태양도 궤도를 돌고돌고                             뭇별들도 궤도를 못벗어나                                 가는곳만 가는걸 몰랐던가                                     좋은것만 좋은줄 알았던가                               떡밥베고 고향꿈 꾸노라니                                 리탈이란 쓰라림 흐느낀다                                     못살아서 배고파 떠났건만                                         만포식만 인생이 아닌것을                               리탈로써 궤적을 잃었음에                                 다시못올 그 품을 어찌하노                                     주림보다 차별이 더 슬퍼서                                         참괴와 자유를 찢으리라                                         (33) 시골의 설경                                               야 조                              폭설을 짓이기며 기어가는 뻐스                                눈속에 몸살앓는 시골마을행                                    길이라도 길없어 만남의 단절                                        흘러가다가 눈에 굳어진 마을                              그러나 생명은 살아 숨쉬는듯                                삽살이 내달리며 반가움 덥썩                                  황페도 허물어짐에 지치였는가                                      마을에 늙은이들만 남아있네                             시골엔 모든것이 언시래기같아                               눈이내려 많은것을 덮어감춰도 .                                 살풍경이야 어찌 다 덮어갈손가                                       이제 언듯 바람불면 드러나고                             하아얀 허무라는 눈이 하염없이                               내려 고요히 평화를 다독이는데                                   마을길에 여기저기 무져놓은 눈                                       버리운 무덤같이 쓸쓸하구나                                         (34) 박이 열렸어요                                                    야조                                         하얗게 피여나서                                       순결을 빚는듯이                                       초가집 지붕위에                                       고즈넉 어여쁘다                                         꽃피고 열매맺아                                       엄마의 둥근소원                                       은근히 몽그리던                                       박꽃의 하얀정성                                                                                                            보은박 흥부네박                                       달빛을 먹고자라                                       복으로 가득찼냐                                       지붕이 꺼질갑네                                         고운꽃 핀다는것                                       그처럼 미인것을                                       밤바람 퍼나른다                                       흥부박 달렸어요                                                1965년 9월 20일                                                                          ( 35 ) 나무의 정한                                                               야 조                                                 제멋에 나고                                               심어주어 자라는                                               나무, 나무에도                                               정-한이 있을가                                                 꺾이고 베여지고                                               산산 쪼개지고                                               방비없는 나무는                                               피학대자인가?                                                 무더위엔                                               제한몸 그늘되고                                               죽어도 꿋꿋이                                               선채로 죽는나무                                                                               혹독한 설한풍에                                               헐벗어 추워도                                               재가 되도록                                               불타서 열을 낸다                                                 사람아, 네 감히                                               자아희생 말하는가                                               나무의 헌신 안다고                                               그 누가 말하느냐?                                                 나무는 스스로                                               나무인줄 알기에                                               제자리에 고즈넉이                                               희생을 키우고있다
394    (느낌에 생각이 따라 100수) 26, 탐욕하면 그런가 (외 4수) 댓글:  조회:5391  추천:0  2014-08-13
                                                    (26 ) 탐욕하면 그런가?                                                                   탐욕이                                                                 광란하면 그런가                                                                 지페도                                                                 금괴도                                                                 옥돌도                                                                 서화도 골동품도                                                                 다가지고 싶어져                                                                 감질이 나는건가                                                                   흑심이                                                                 입벌리면 저런가                                                                 내것도                                                                 네것도                                                                 미녀도                                                                 지위도 명예랑도                                                                 퉁퉁디 내게라고                                                                   누군들                                                                 욕심이야 없으랴만                                                                 집착이                                                                 탐욕이                                                                 사악이                                                                 범죄로 이어지면                                                                 일락에 천장인걸                                                                   입으로                                                                 렴결봉공 고창하며                                                                 인민을                                                                 봉공을                                                                 전통을                                                                 부르짖어 박수속에                                                                 위군자님 신명났제                                                                   가져도                                                                 넘치도록 가졌어도                                                                 탐심이                                                                 무지경                                                                 끝없어                                                                 말자말자 하면서도                                                                 미쳐나면 다 그런가                                                                   아무도                                                                 유혹자를 못막으리                                                                 실각도                                                                 징벌도                                                                 죽음도                                                                 앞사람                                                                 쓰러지면 기술스레                                                                 용진용진 나가도다                                                       (27) 주먹으로 눈물씻어야                                                                         야 조                                                      펼치면 손바닥 그러쥐면 두주먹                                                       옛시절 장알박힌 손 탁탁해서                                                           일에는 제격이여도 약자의 손                                                               얄궂은 운명을 비틀지 못했다                                                           손금을 잘 쥐였던들 그게 대수랴                                                      인생의 변화무상도 숙명이여                                                          약자는 주먹을 쥐여도 주먹나름                                                              부르쥐고도 눈물을 닦을수밖에                                                                     (28)   소의 눈은                                                                                             야 조                                                         15여성상 소와 친구하며 살면서도                                                            어질디 어진눈에 씌여진 속탄 사연                                                                무엇을 말하는지 읽으려 하지 않고                                                                    무작정 힘내라고 휘초리만 휘둘렀다                                                                                          올리막길에 등이 휘도록 헝헝대고                                                          가파른 비탈길엔 궁둥이로 뻗치며                                                             짐수레 끌면서도 불평한마디 없고                                                                  때리면 때리는대로 아픔을 삼키는                                                       목재판에서 낑낑 우는소를 보았다                                                         도살장에 끌려온 눈물젖은 소눈도                                                            속깊은 한이 눈물로 그렁그렁해도                                                               학대를 삼키고 순종으로 대답했다                                                        수천만년 말못하는 사연 짓씹으며                                                       둥그런 눈을 끔벅거리기만 하는건                                                           본성은 어쩔수가 없다는 해석인가                                                              순하게 동그란 굴레같은 눈 슬퍼라                                                       허기져서 거친풀이랑 대강 씹어서                                                         울분처럼 삼키며 무슨 생각했을가                                                            쉴참에 꿀-꺽 한을 꺼내 조용히                                                                새김질하며 무슨말 하고팠을가                                                                                                              1965년 12월 10일                                                                        (29) 염전의 황혼                                                                                   야 조                                                                          바다가 염전에                                                                죽음처럼 어둠이 온다                                                                        어두운 산그림자도                                                                해풍에 실려온다                                                                          푸르던 바다물                                                                조용히 날아올라 여기                                                                         하얀 소금 정성인양                                                                 남겨놓고는 가뭇없다                                                                           밀물이 염전을                                                                 차분히 적시고 갈 때                                                                         바다속 소금맷돌은                                                                 그냥 돌아가고 있을가                                                                           바다의 령혼을                                                                 소금이라면 안되느냐                                                                         노을속에 바다물이                                                                 흘러든 슬픈 그 정경                                                                            맑은 바다물에                                                                  앙금이 있을줄 몰랐네                                                                         가둔대로 고여서                                                                  소금으로 갈앉을 때에                                                                            보는 내 눈길이                                                                  쓸쓸해짐은 부질없고                                                                         아픈 내마음은                                                                  소금에 절어서 시들다                                                                           색바래지는 해빛                                                                  짙어가는 어둠의 빛에                                                                          내가슴도 그늘지고                                                                  눈물마저 절어서 짭더라                                                                            람루한 내인생의                                                                  앙금같은 얼룩덜룩과                                                                          고기비늘같은                                                                  욕망의 흔적만 쓸쓸해                                                                       ( 30)    적막속에서                                                                                야 조                                                                       야밤은 고요해라                                                                     적막함 쓸쓸하여                                                                     잡념을 간추려서                                                                     사색의 똬리튼다                                                                       덤덤히 무의식속                                                                     보내는 시간들이                                                                     가여워 울먹일때                                                                      고독도 청승떠네                                                                        사색의 똬아리를                                                                      머리에 둘러쓰고                                                                      어설픈 붓대에도                                                                      매달고 끄적인다                                                                                              우주가 좁아지고                                                                      세상은 내안에서                                                                      적막과 내사상을                                                                      나란히 줄세운다                                                                        사색의 똬리우에                                                                      적막을 올려놓고                                                                      혼자의 무언극이                                                                      우스워 눈물나네                                                                        우직한 대당승이                                                                      우랑바 바랑바얍                                                                      주문을 외워대여                                                                      손대성 죽어나듯                                                                        사색의 금고주라                                                                      내게는 자승자박                                                                      우직한 짓이건만                                                                      내치지 못하여라                                                                        유혹의 파동으로                                                                      흔들린 내마음을                                                                      이렇게 가두고파                                                                      밤마다 하는짓이
393    (중편소설) 눈물젖은 가연 댓글:  조회:8843  추천:2  2014-08-12
                                                눈물젖은 가연                                                      최 균 선                                                       쁘롤로그        련애와 결혼은 등반과 같은 결과에 이르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유련애의 시대에 련애는 결혼의 전제이지만 등호로는 쳐지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결혼이란 욕망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라 운명이 결정한다고 할수 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는데는 억지춘향의 경우도 있지만 거개 숙명이라 할수도 있는 연분으로 맺어진다.     이런 녀자(남자)와 결혼하겠다. 저런 남자(녀자)와 결혼하겠다고 작심해서 성사되는것이 아니라 묘하게 운명적인 안배가 작동하여 부부의 인연이 맺어지는게 태반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서로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고 만나서 곧 헤여질수도 있는 사람들이 그 어떤 계기로 인연이 엮어져 결혼하게 되였을 때 그것을 천생연분이라 하는것이 아닐가?     서른살이 넘도록 장가를 들수 없어 심통이 비틀어져있던 내가 결혼하게 된 경우가 바로 그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어렵사리 장가들던 이야기, 그것도 해가 묵어 곰팡이냄새가 나는 어줍잖은 얘기지만 중매로 만나고 정혼하고 결혼후 련애를 하는 그런 보통의 결혼사보다 조금은 다르게 눈물젖은 가연이다.                                                         전형환경       신주대지를 휩쓸던 광란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던 1970년대말기, 대동란속에서 버릇이 잘못굳혀진 깡패들이 쩍하면 무리싸움을 하고 몽둥이도 성차지않아 칼놀음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런 비상시국에 산지사방에서 민공(民工)들이 아동저수지공사판에 모여들었다. 힘센놈이 약한자를 억누르고 약한놈은 까닭없이 얻어맞고도 저 혼자 속을 끙끙 앓으며 풀풀대야 하는 말그대로 노가다판이였다.     아동저수지는 장인강을 가로막은 땜이다. 발달한 서방나라에서는 땜이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지층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건설하지 않거나 허물고있는데 중국에서는 한창 땜을 선호했다. 인류가 대자연에 무언가 보탬을 준다면 자연보다 더 위대한 장거로 될것이다. 보탬은 늘어나는것을 의미하고 늘어나게 하는것은 생장하는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자연의 표면으로 보면 높다란 언제를 쌓는것도 보탬이라 하겠다.     그러나 자연을 좇아 흐르르는 물을 가두는것으로 강의 천연적인 생리를 파괴하고 있는것이다. 하긴 물자원과 전력공급이 부족한 상황이고 또 농업대국이기에 저수지가 절실히 필요한것은 사실이지만, 그리하여 나도 저수지를 만드는 민공(民工)으로 뽑혀 대자연에 파괴하러 가게 되였다.        서성공사(지금의 향)에서 뻐스를 내려 이불짐을 꿍져메고 서북쪽으로 뉘엿하게 드러누운 고개길을 허위허위 걷노라니 그냥 노가다판을 쫓아다녀야 하는 내 신세가 혼자서도 한심했다. 소생의 봄, 약동하는 봄날의 산뜻함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울울침침한 내 심사는 흥분한 봄아씨의 따스한 “입김”이 보듬어주어도 별로 반가운줄 몰랐다.    구불구불 아득히 뻗어간 련산련봉의 남쪽에서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어와 꽃망울 속에 한가득 해살을 불어넣고 부푸는 꿈을 산에, 들에 심어주고있다. 때는 바로 아물아물 아지랑이같이 신비로운 봄내음이 계절의 은총을 베풀어주고있는 오월이였다. 종달새가 시야에 보이지 않을만큼 푸른 하늘에 높이 날아예며 마디마디 희열을 토하고 아지랑이의 추파에 간지럼타는 민들레꽃은 노란련정을 흐드러지게 쏟아내고있다. 봄은 로총각의 마음을 싱숭생숭 들뜨게 하는 애모쁜 계절이기도 한것인가,     강가에, 산속의 수림들에 파릇파릇 물이오르고 논두렁엔 잔풀이 뾰족뾰족 머리를 내민다. 신록의 계절이 변강산촌에 한껏 푸르름을 재촉한다. 밭갈고 씨뿌리는곳이면 어덴들 다르랴, 세전이벌, 평강벌이 농망기를 맞아 분주하다. 촌길엔 손잡이뜨락또 르, 소수레가 분주히 오가고 논벌에는 소들이 헐떡거리며 논갈이를 마무리하고있다.     드디어 룡문향이 내려다 보이자 나는 이불짐을 깔고앉아 땀을 들이며 허래성벌 한귀퉁이의 정경을 굽어보았다. 룡문향동쪽 멀리에 투도구는 옛날“삼하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하진”은 복동하와 해란강 및 장인강이 합류하는 곳이라해서 나온 말이고 룡천촌과 룡문촌 일대를 옛날에는 녀진말로“아동”이라 하였는데 “살이쪗다”, 혹은 “부유하다”는 뜻이란다. 좋은 이름에 걸맞게 잘들살았으면 좋으련만 시골이라서 아직도 궁기가 그대로 흐르고있다. 큰가마밥을 먹는판에 어딘들 다르랴,     “룡문”이라는 이름은 한마리의 기다란 룡(장인강)이 우백호 좌청룡이 지키고있는 문(벼랑)을 뚫고 나왔다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이름한번 그럴듯하게 지은 아동저수지 는 골어귀에 자리잡은 룡문촌에서 장인골쪽으로 2리쯤 올라가서 좁은 여울목에 수축 되고있었다. 룡산촌민공숙소를 찾아 이불짐을 벗어놓고 구경삼아 벅적거리는 공사판으로 스적스적 올라가보니 공연히 가슴을 들먹이게 하는 경관이 펼쳐졌다. 내 입에서 는 저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아주 좋은 형세에 힘을 입어 들끓는 공사장, 덩그렇게 높이 쌓은 언제우에는 이 른아침부터 배기관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따따 용을 쓰는 불도젤소리, 우릉부릉 로드 롤러(轧道机)소리, “워워, 위들쨔…” 우마차를 모는소리로 시끌벅적하였다. 대자 연을 정복하는 잡다한 소음에 귀가 멍멍,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그야말로 천군만마가 비등한다고 할가? 목재판, 개산툰, 삼합의 반수공정(反修工程),해란강제방공사 등 공사판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렇듯 방대한 규모의 공사장은 처음이다.    나는 이튿날 아침 일찍 다이야차에 소 세마리를 메워가지고 자갈실이에 나선다. 이른 아침이라 벌에도 골령에도 안개가 자욱하였다. 이윽고 해가 떠올라서야 지면을 핥으며 뭉게뭉게 떠돌던 안개가 걷히면서 룡문촌이 드러났다. 마을을 둘러싼 높다란 산기슭도 어슴프레 보였다. 푸르고 장엄한 산은 담벽처럼 땅에 뿌리를 박고 거연히 서서 한참 들복아대는 공사장을 가소롭게 굽어보고있었다.     서서히 하늘로 피여올라간 안개는 여러덩이로 흩어지더니 인차 엷은 구름장으로 변하였다. 구름사이로 흘러나온 눈부신 해살은 산마루와 비탈밭에 띠같은 새파란 문양과 거무스레한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먼 산허리와 깊은 골령에 남은 솜발 같은 안개는 스러지기 아쉬운듯 한동안 스멀스멀 골바닥에서 흐늘거리고있었다.     한나절이 되자 구름은 시름없이 떠돌고 골넘어 어디선가 뻐꾸기가 구슬프게 울어대는 소리가 고막을 훑었다. 그 처량한 울음소리는 장가들지 못한 로총각의 가슴을 더구나 클클하게 하였다.     쉬는 참에 싱그러운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는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들먹거렸다. 골짜기를 울리는 물소리에 가슴이 우는것이다. 아득히 가버린것, 잊어버린것, 아른아른 생각나지않는 사람들속에 그 언제면 나도 고운 처녀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 을가고 생각하노라면 시름겨운 한숨에 가슴만 찌들었다. 만고청산은 예나제나 말이없고 한나절 구름만 오락가락하는데 골너머에 우는 뻐꾸기는 왜 저리도 슬퍼하는 지? 혹시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것이 서러워서 우는것일가.     이렇게 맥을 놓아버린 상태로 마라초를 태우며 넋놓고 먼산을 바라보면 세상사가 귀찮아진다. 산다는게 뭘가? 과거를 연장한다고해서 미래가 찬란하게 펼쳐지는것은 아니다. 인생은 생활에 대한 도전이고 리상을 향한 분투라고 하지만 진종일 비지땀 흘리며 허리가 휘도록 모래며 자갈돌을 퍼담아싣고 언제를 오르내리고나면 고역의 긴 긴 하루해가 속절없이 저문다. 그러니 어느 겨를에 인생이요, 리상이요 하는따위를 운운하겠는가? 아직 처녀손목도 잡아보지 못한 나에게 그런 고상한 취미는 사치였다.     매일마다 들쑹날쑹한 산봉우리에 찢어진 살구빛 비단쪼각같은 저녁노을이 걸려서야 빈 다이야차에 앉아 덜렁덜렁 숙소로 돌아오군 하였다. 서둘러 소에게 여물을 주고 도랑물에 얼굴을 씻고나면 어느새 어스름이 깃든다. 일기장에 무엇을 써넣으려 해도 그럴만한 이야기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책에서 본 한구절을 적었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기승스럽게! ”                                                        발단       그날도 여느때처럼  네댓차를 실어올리고 한축 더하려고 서두르는데 또 배가 살살 아파났다. 원래 십이지장궤양이 있는지라 때마다 먹는 옥수수밥이 사람을 괴롭혔다. 쇠덩이도 와작와작 씹어먹을 혈기방장한 나이건만 밥먹을때가 되면 위가 쓰리고 아파나서 식욕도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마음까지 산란하여 시도 때도없이 울적하고 늘 모든것에 반감을 가지게 되였다. 나는 점심전에 우차를 몰고 언제를 내려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막 광신공사 민공들이 거처하는 숙소앞을 지나려는데 화식칸쪽에서 웬 녀자가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나는 얼결에 소를 세워놓고 열려진 문으로 화식칸을 기웃거렸다. 그 소리는 간막이 건너쪽에서 들려왔다.   “야, 이 간나 그냥 소리칠래, 목주래를 콱 분질러버릴라, 좀 가만있어봐, 악! 이년, 사람을 물어?…”    옷이 쫙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였다. 공사판에서 화식칸의“광신공사 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비록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소문에 굉장히 아름다운 처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들은 거개가 눈독 을 들이며 은근히 넘보고있는터였다. 십중팔구는 화식원처녀가 무슨 봉변을 당하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경우가 어찌 되였든간에 “싸움”은 말려야 했다.나는 문가에 세워놓은 멜대로 구정물도람통을 탕탕 두드렸다. 갑자기 화식칸이 잠잠해지는듯싶었다. 이윽고 문이 펄쩍 열리며 30대의 남자가 총알같이 뛰여나오다가 내가 짚고있던 멜대채에 걸려 보기좋게 꼬꾸라졌다. 그 와중에도 나는 화식칸 힐끗 살펴보았다. 량태머리가 풀어져 봉두란발이 된 처녀가 찢어진 옷사이로 하얀 젖가슴이 삐죽이 드러난채 벽에 기대여 사시나무떨듯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땅바닥에 넘어졌던 사내가 발딱 몸을 일으키며 눈을 부라렸다. 낯익은 얼굴이였다. 우뚝선 코마루, 조금 쳐들린 들창코, 마당질하고 무져놓은 검불더미를 방불케 하는 부시시한 머리…어쩌면 조물주가 한창 흥이 날때 측백나무를 베여다가 되는대로 깎아만든것처럼 거칠고 투박해 보였다. 사람은 생긴대로 논다는 옛사람의 말이 맞는것 같았다.     그는 광신공사에서 온 놈팽이인데 주먹깨나 쓴답시고 쩍하면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말썽거리를 찾는 무뢰배였다. 게다가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이 난다고 언젠가 한마을에 과부네집에 뛰여들었다가 들통이 난적이 있는 색마이기도 하였다. 얼마전, 점심때에 졸개 두셋을 달고 우리 숙소에 와서 공연히 트집을 걸며 행패질하다가 우리 룡산촌민공들과 드잡이가 벌어질번했더랬다.    “이 이새끼, 너 룡산촌에서 왔다는 그놈이구나, 네가 뭔데 개×에 보리알삐치듯 남의 흥을 깨는거야? 오늘 잘걸렸다. 어디 이 어른의 주먹맛 좀볼래?”    나는 멜대를 불끈 무지막지한 놈에게 연약하게 보였다가는 무슨 랑패를 당할지 모른다. 원래 공사판은 별의별 위인들이 다 모인 험악한 곳이기에 오기로라도 버텨야지 어리숙하게 보였다가는 자칫 동네북이 된다.    “그래, 이 개새끼야, 백주대낮에 녀자를 강간하려고 설쳐대면서 뻔뻔스럽게 무슨 큰소리야? 덤벼봐라. ”    우리가 왁작 고아대는 소리에 마침 대대지휘부에서 사람 두셋이 뛰여나왔다.    “무슨 일이야? 왜 멜대채를 쥐고 행패질이요?”   “저 잘난 개 잡은 포수에게 물어보시오, 아니면 저 안에 있는…”    때마침 점심을 먹으러 돌아오는 민공들까지 욱 모여들다보니 다행히 류혈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놈팽이와 처녀와 함께 지휘부에 불리워갔다. 그제야 나는 봉변당할번했던 처녀를 지척에서 똑똑히 볼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단독조사를 받고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말이 아니였다. 옷매무시는 대충 했지만 그의 얼굴은 밀랍처럼 해쓱했다. 공포에 질려 두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있었는데 마치 수천개의 별들이 반짝이는것 같았다. 처녀는 치욕을 참을수 없어 몸을 부르르 떨고있었다.     공사판에서 남자들끼리 주먹질은 푸술히 있었지만 강간미수사건은 처음인지라 간단히 지나칠 사안이 아니였다. 나는 목격한 사실을 자초지종을 말하고나서 곧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무지한 놈팽이는 파출속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이른바 “무산계급독재”의 된맛을 톡톡히 보았던것이다. 그러나 그의 짝패들이 암암리에 나와 그 처녀를 벼르고있었다. 나는 싱겁게 그 처녀의 신상을 먼저 걱정했다.     어느날, 나는 랭수를 마신다는 핑게로 화식칸을 찾아가서 그녀에게 쪽지를 건네주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마을밖의 길가에서 만났다. 어둠이 각일각 짙어가고있었다. 깊은 산골짜기에 먼저 깃들었던 어둠이 나무의 우둠지들을 감싸더니 개울을 덮고 산허리로 해서 살금살금 산마루로 기여오르기 시작했다. 소나무숲 상공에는 오뉴월 산모퉁이에 소문없이 피여난 이름 모를 꽃들처럼 별들이 총총히 반짝이였는데 마치 소근소근 다정하게 속삭이는 련인을 방불케 했다. 게다가 무더운 적막속에서 싱그러운 풀내음까지 들판에 가득 풍기여 그야말로 처녀총각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기에는 족했다.    그녀는 다소곳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나의 지꿎은 눈길은 슬며시 그녀의 아래우를 훑었다. 달빛에 어린 희고 동탕한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녀자가 아름답다는것은 가장 녀자답다는 뜻이고 가장 녀자답다고 하는것은 녀자다운 마음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고운 마음씨는 수집은 얼굴에 어린 예쁜 미소와 상냥하고 따뜻한 말씨, 세심하고 절제된 행위로 표현된다. 녀자의 예쁜 미소는 잔잔한 호수에서 이는 미풍과도 같다. 이 녀자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죄다 갖춘 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나의 마음은 좀체로 바람직한 사랑을 이룰수 없다는 실의로 황페해질대로 황페해져있었다. 헌데 마침내 내 마음의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그것은 지금 송녀라는 녀자로 구체화되여 서있는것이다. 하지만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고 혼자만 서뿔리 망녕되게 닭알가리를 쌓는것 같아 허구픈 웃음이 터져나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하늘의 별들도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여 빛을 쏟아내 는듯싶었고 래일아침의 태양도 우리의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서 솟을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를 떨쳐버릴수 없는것은 웬까닭일가? 그저 남자의 본능만은 아닐터,     난생처음 처녀와 나란히 걷고있는 내 마음은 자못 설레이였다. 심지어 낯선 마을의 골목길마저 그처럼 정답게 느껴졌다. 그것은 오래동안 내 가슴속에서 잠자고 있던 꿈이 피여나는 내음이였고 아늑한 안식처를 찾아헤매는 로총각의 욕망이였다. 긴장감보다는 전류가 흐르는것 같은 짜릿한 희열이 나의 전신에 부단히 줄달음치고 있었다. 집집의 불빛도 이제는 거의다 꺼지고 안개속에 희미한 륜곽을 드러내는 마을의 여기저기에서 지쳐버린 개짖음소리만 가끔씩 들려온다. 밤이 이슥해진것이다. 이제 곧 이 녀자와 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삭막한 황무지를 걷는 심정이였다.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촌사람의 품성그대로 진지하게 말하였다.    “요즘 돌아가는 형편을 보니 내가 그냥 여기에 눌러있다가는 필경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것 같소. 나는 곧 집에 돌아가려 하오. 동무도 앞으로 조심하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녀는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고개를 살며시 들어 나를 마주보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날은 정말 고마왔어요. 잊지 않을거얘요.”     그윽한 눈매와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녀자였다.     그녀와 헤여지면서 나는 용기를 내여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주밋주밋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끝이 잠자리날개처럼 파르르 떨리고있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어둠속으로 한들한들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멀찌감치서 그녀를 뒤따랐다. 저 녀자의 마음속에서도 금실은실 실타래가 맺히고있을가? 그 끝에 내가 묶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내가 저 녀자의 마음의 금선에 묶인다면 끊어지지도 동이나지도 않을것이다. 그것을 내가슴속에서 한도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엉뚱한가? 엉뚱하면 또 어떻단말인가? 사랑에는 원래 항상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지 않는가. 자고로 미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랑을 할수 없다고 했다.    나는 며칠후 공정판을 슬며시 떠났다. 그자는 응당한 징벌을 받았지만 그의 등쌀을 믿고 개잡은 포수마냥 우쭐렁거리던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있노라면 재미가 적을것이 뻔하였다. 대대책임자도 여기를 떠나라고 등을 밀었다 서성공사로 가는 고개길을 스적스적 걷는데 삼신할미가 인연을 맺어주느라고 그랬는지 나이지숙한 한 나그네가 이불짐을 멘 그녀를 데리고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만 알은체하며 같은 길이면 처녀와 동행할수 없는가고 했다. 아마 왕복20여리길을 시고스럽게 걸어서 갔다오기가 싫었던모양이다. 나를 거절할 리유가 없었다. 오히려 하늘이 도와 준 기회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는 늘찬 십리길을 함께 걷게 되였다. 단둘이 남게 되자 나는 아예 그녀의 이불짐까지 빼앗아 둘러메였다. 뻐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걸음을 재우쳐야 했던것이다. 그녀는 거의 강다짐으로 이불짐을 빼앗아 메는 나를 바라보며 감격해마지 않았다. 부채살같은 속눈섭, 정이 찰찰넘치는 눈, 상큼한 코, 마음이 밝은 날엔 분명 따스한 웃음이 물리여있을 봉긋한 입술… 청초한 그녀의 얼굴은 대번에 내 마음을 사 로잡아버렸다. 녀자는 깊이있는척 하는 껍데기라고 하지만 이 녀자만은 겉이자 속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안겨왔다.     서성공사가 내려다보이는 고개마루에서 다리쉼을 했다. 나는 풀밭에 벌렁누워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흘러가는 먹구름장들은 인간세상처럼 변화무상하였다. 누군가 인생을 하늘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구름처럼,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고 하였지만 나에게는 하낱 잠꼬대같은 헛소리일뿐이다.     한줄기 바람이 으스스 불어왔다. 비가 올 조짐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조금 지나자 산마루에 투명한 검은비단장막과도 같은 비발이 드리웠다. 비발은 바람과 함께 산비탈을 후려치더니 이윽고 콩알같은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면서 고개길을 뽀얀비안개속에 묻어버렸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방목군의 초막이 있어 그리로 진동한동 달려갔다. 녀자는 얼굴에 그늘이 비꼈지만 나는 은근히 기뻤다. 이제 갈라 지면 언제 만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녀와 짤막짤막하게 주고받는 대화였지만 소낙비가 지난뒤의 무지개처럼 나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주었다. 나는 그녀가 머루알같은 눈동자로 경계심을 도사리고있다는것을 진작 보아냈다. 하지만 나는 그 눈길이 비라면 땅속에 스며들수 있고 그 눈길이 화살이라면 내 가슴을 꿰뚫을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농촌처녀였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건강하고 얌전하고 담담하여 더욱 돋보였다.     비가 점점 억수로 쏟아졌다. 밖에서는 바람이 기승부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소나무숲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세차게 설레였다. 나는 련거퍼 담배를 말아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가슴이 쿵쿵 뛰였다. 그녀는 내가 담배꽁초를 주어서 꽁꽁 묻었다. 산불이 날가봐 우려되였던 모양이다. 제기랄, 차라리 내 가슴속에서 활활 타번지는 불을 꺼주면 얼마나 좋아? 산불이 나면 기껏해야 나무가 타겠지만 사나이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은 심장을 태운단 말이야. 나는 애모쁜 생각에 가슴이 탔지만 체념하였다. 사랑의 감정이란 성스럽고 진지한것이기만 하다면 그리고 사랑이란 이 티없이 깨끗해야 하거늘 서뿔리 신성한 사랑에 먹칠을 하고싶지 않았다.     “비가 그쳤군요. 자, 어서내려갑시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면서…”     내리막길은 질척거렸다. 신발이 젖어 풀을 밟고 지날 때면 자칫 미끌어져 넘어질 위험이 있었다. 옆에서 걷던 송녀가 가끔 휘우뚱리며 내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붉히며 나를 할끔 쳐다보았다. 인간의 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비밀을 고백한다고 한다. 나는 그녀도 야릇한 눈길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의 눈길은 따뜻하고 살갑고 사랑스러웠다. 나는 용기를 내여 그녀의 집주소를 물어보았 다. 뜻밖에 그녀는 선선히 알려주었다. 이후 련락을 허락하는 의미일가. 그 바람에 나는 이불짐이 훨씬 가벼워졌다.                                                                                                 전개       집에 돌아왔으나 그녀의 모습을 잊을수 없었다. 구멍이 펑뚫린 내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든것이다. 눈이 맑고 마음씨 착한 그녀, 비내리는 밤이나 찬서리내린 새벽녘이면 지꿎게 생각나는 볼이 고운 그녀, 달이가고 밤이가고 한숨도 말랐다. 비가 내려 질척한, 싱싱한 곡식밭들이 펼쳐진 서성의 푸른고개길을 함께걷던 그녀가 생각나서 참을수 없었다. 봄은 이미 가버리고 그 화사하던 풍경은 없지만 푸르던 그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며 그녀의 모습이 눈에 삼삼히 밟혀왔다.     허수룩한 나의 초가삼간 뜨락귀퉁이에 초병처럼 서있는 백양나무는 이미 한여름 푸른 꿈이 색바래여져 잎사귀가 누렇게 황이 들었지만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황이 들기커녕 새라새롭게 푸르러만갔다. 서른살이 넘도록 혼사말은 여러번 있었어도 번번히 퇴자를 맞아서 웅성의 용기마저 깡그리 빠진 무골충이 된 나였지만 끝내는 참지못하고 밤을 패가며 편지를 썼다. 그동안 이러루한 편지를 여러번 썼지만 이번만은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내 심정을 고백했다.           송녀 앞:       나의 이 편지가 뜻밖일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주시면 더 바랄것이 없겠습니다.     송녀, 나는 내가 가진것, 남은것을 다내주고 정말로 진심으로 그대를 뜨겁게 사 랑하고싶습니다. 내 가슴은 언제나 텅 비여있었습니다. 성분때문에 남들처럼 기를 펴고 살수 없어 내 청춘의 시름 하늘에 닿고있을 때 그 가엾은 령혼을 마지막으로 깨우쳐준 사람이 바로 그대입니다. 본래는 못난새끼오리로 늘 당하면서도 참으며 살아온, 세상밖에 던져진 하나의 보잘것없는 조약돌 같은 존재였습니다. 누구나 발길 나가는대로 차고 무시하던 하찮은 인간이였지요 그런데 그대와 우연히 알게 된후 모름지기 사랑이 봄싹처럼 돋아났습니다. 그 사랑은 지금 내 마음속에서 무성한 여름을 지나 열매익는 가을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동안 그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에 가득차있었지만 감히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저혼자 벙어리 랭가슴앓듯 애간장만 태웠습니다. 헌데 날이 갈수록 그대를 향한 사랑이 한많은 내 마음에 사랑은 반월처럼 둥글어가고 있으니 이를 어쩌지요? 시들어가는 내 청춘의 빛발을 다시 찾아준 그대여, 운명처럼 만난 우리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줄수는 없을가요? 듣기만해도 가슴이 설레이게 하던 그대의 맑은 목소리가 지금도 내 가슴을 휘젓고 있군요.    내가 말했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대의 가슴 속에 고이 그려지고있는 사랑의 동산이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월이 갈수록 생생하게 현연되는 그대의 모습과 평생 지울수 없는 자국으로 남아있을 그대와의 추억때문에 더욱 그대를 잊을수 없습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원망하지 는 않겠습니다.     그대가 사랑할수 있고 또 사랑해야 하는 리상적인 남자가 꼭 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대의 인생반려로 유일하게 하나인 남자가 되고싶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고백한다고 믿어줄수 없는가요? 내 가슴속에 한남자의 진심이 꼬드기는 모순된 아픔과 고통, 말못하는 나의 슬픔과 고독과 번민을 리해하여 줄수는 없을가요?     나는 자신의 마음을 갑속에 숨겨두려고 애쓰지만 도저히 숨길수 없군요. 오늘 고백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고 여한으로 남을것 같아서 용기를 내여 이 편지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그림자에서 해탈할수 없습니다. 사람이 일생에서 몇번이나 진정한 사랑에 가슴을 불태울가요? 그대를 생각하며 쳐다보는 달은 정다운 귀속말로 속삭이며 나를 신비한 세계에로 이끌어갑니다. 이 세상에 그대가 있기에 이 달밤은 유난히 아름답고 정답게 느껴집니다.     저 하늘에 하얀 달은 눈부신 은빛바퀴런듯, 내 심상의 오솔길에 굴러가며 사랑을 다지고 저 하늘에 초생달은 한자루 은빛낫처럼 내 마음의 창가에 걸려 아픔을 찢는 군요. 내 인생길에 달빛럼 비춰줄 그대가 바로 나의 달님입니다. 나혼자서 아름다운 사랑의 꽃바구니를 엮고있는것이 스스로도 못마땅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나온 감정을 억제한다는것은 네굽을 안고달리는 들말을 멈춰세우려는 것처럼 내게는 어렵고 힘든 일이니 말입니다. 그대가 잡아줄수 없나요? 오늘은 이만 그치겠습니다. 안녕히!                              1978년  5월 20일                            ㅡ그대를 그리워하는 사람       사랑의 꽃편지를 써본 사람은 편지를 보내고 나서 손꼽아 회답을 기다리는 그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다. 더구나 우연한 계기로 늘찬 십리고개를 넘으며 가담가담 주고받은 수집은 대화를 일방적으로 인연의 가느다란 금다리로 여기고 외람되게 덜컥 사랑을 고백해버린 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안타까웠는지 짐작될것이다.     한마디로 답장을 기다리는 나날은 지루함 그 자체이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기다림속에서 내 마음은 분홍빛깃털을 가진 고운새가 푸른 창공을 날아예듯 들떠있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회답편지가 한달넘어서야 드디어 도착하였다. 몇번이고 거듭 편지를 읽는 심정은 한입으로 형언할길이 없다.          회답편지:       편지를 고맙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무어라고 호칭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제야 편지를 보내니 량해하세요, 잠시 오빠라고 부를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부끄럽던 그 일이 있은후, 그리고 우연히 함께 고개길을 걸어서 뻐스에 나란히 앉아 룡정까지 오게된 그날 이후, 저한 테도 가끔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평생을 두고 고맙게 여겨야 할분인데 어찌 쉽게 잊겠어요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인지상정이 아니겠어요.     전류가 흐르는 도선의 주위에는 자기마당이 생긴다는것을 알고계시지요? 책에서는 간단히 앙페르법칙이라고 하지요. 즉 자석들사이나 전류가 흐르는 도선들사이, 자석과 전류사이에 작용하는 자기적힘의 마당을 가리키지요. 미안해요. 유식하게 보이려고 한것이 아니라 저의 마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썼어요. 사랑의 마당에도 자기마당법칙이 있지않을가 하고 생각해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도 오빠를 가다오다 만난 사람처럼 그렇게 쉽게 잊을수 없어요. 오빠가 그날 나타났기에 저는 얼굴을 들고 새 아침을 맞이할수 있고 달을 쳐다보아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사이엔 어두운 그림자가 끼여있다는것을 안타 깝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어요. 오빠도 지금 형세를 잘 알고있겠지요?     저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요. 한 처녀의 순결을 지켜준 백골난망의 은인이 아니얘요. 또한 남자에 고마운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고 익어갈것인지? 시들어가는 풀이 한줄금 단비를 바라는 심정이예요 그런데 비가 오지않는데도 우산을 펼쳐야 하는 제 마음이에요…저도 오빠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이예요…지금 처녀들이 남자를 얻는 첫째조건은 출신이예요. 그러나 제가 바라는것은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감정이 융합되고 령혼이 하나로 될수 있는 그런 사랑이예요.     오빠의 편지는 저의 마음의 호수에 감정의 물결과 사랑의 물보라를 일으키기엔 충분해요. 우리 서로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진정을 익혀가자요. 꽃도 태양과 땅의 화합에 의해 생겨났지만 열매를 맺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녀자는 사랑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렇다고 여기는대로 되여간다는 말처럼 나도 그렇게 되여갈지도 모르지 않아요? 호ㅡ     오늘 이만 갈무리하겠어요.                                        1978년 6월 30일                                         (늘 고마와하는 녀자로부터)           편지란 한 사람의 마음의 울림이다. 너무 지어낸듯, 너무 다듬은듯한 나의 편지에 대한 송녀의 반응을 짐작하면서 머쓱한 기분에 빠졌었는데 그녀의 회답편지를 받고나니 저도 모르게 탄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선에 나가 전업학교를 나오고 황해도 해주의 어느 제철기업소에서 수압프레스를 다루다가 부모가 그리워 대동란초기에 다시 중국에 돌아왔다는 그녀의 문화자질과 삼합조동령을 넘어30리 서리골을 밤에 혼자걸었다는 파란많은 인생경력을 놀라웁게 절감하였다. 나는 재자가 아니지만 그녀는 가인임에 틀림없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우리는 남들처럼 버젓이 내놓고 래왕하지 못하였다. 죽어난것이 그저 잉크를 묻혀쓰는 철필촉과 누런 편지지였다. 그러나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녀자에게 편지를 쓰는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고 회답편지를 읽는날만큼 마음이 둥둥 뜨는 순간이 없었다.    사래 긴 콩밭을 제일 앞장서 매면서도 허리 아픈줄을 몰랐다. 내가 김을 잘매서 가 아니라 여러사람의 지껄임을 피해 혼자서 내 사랑의 꽃밭을 매고 또 매고싶었기에 힘을 가배로 냈던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것을 감수하기에 사랑을 하고있을 때 다른 어느때보다도 훨씬 힘이 솟구치는법이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회답편지를 본따 두번째 편지를 썼다.           송녀:       그대의 의미깊은 편지를 단번에 외워버렸습니다. 그대가 음극이라면 나는 양극이 되고싶습니다. 우리 서로 의지한다면 사랑의 전기가 평생 어두운 인생길을 밝힐것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은 정수, 나는 부수, 우리 모두 유리수이기에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가요. 그대는 존재, 나는 의식, 유물론의 원리에 근거하면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지요. 나는 영원히 그대의 충실한 노복이 되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은 그대에게서 편지가 오려나 하고 기대하고 일밭에서도 내내 그생각뿐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필연적인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점차 얽혀가고 서로를 보듬어주려는 애틋함이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나좋은 생각이기만 하지만도 얼마만큼 깊이 고뇌하는가가 사랑의 무게를 누르지않을가요?     사랑이란 하나를 만들려하는 두 사람의 의지라고 믿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두 심장이 하나로 뛰는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그 불가항력적인 위력을 깨닫기전부터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이여, 서투르나마 심장으로 엮은 시 한수를 보내드립니다. 제목은 “개살 구, 호박꽃, 해님”입니다.     개살구도 그냥 살구라구요/ 시금털털 어른들은 등돌려도/ 뒤동산에 꽃피여 열매 맺으니/ 개구쟁이들 마구 따더랍니다// 호박꽃도 피는 꽃이라구요/ 봄마다 울밑에 소담스레 피여/ 수수해도 꿀벌은 향기를 따라/ 꿀을 빚습디다// 호박꽃, 개살구, 저 하늘 해님/ 더불어 하나로 엉킬수 없어도/ 하냥 따사로워 만물을 보듬으매/개살구 열리고 호박꽃도 피지요// 야산에 흔해빠진 개살구같다고/ 개밥에 도토리신세 보기 싫다고/ 내내 저어하고 망설이며/ 애끓이지 마시고 오세요, 내곁에,                                     ㅡ그대를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가                              …하루는 늦도록 콩밭김을 매다가 어슬녘에 돌아오니 정전이 되여있었다. 시름 시름앓는 몸으로 얼추 저녁을 지어 차려놓은 밥상머리에 마주앉았다. 찬장우에 올려놓은 콩기름등잔이 가물가물 시래기국을 비춰주었다. 허기진김에 숟가락이 부러지게 밥을 퍼넣고 시래기국을 떠먹다가 무엇인지 씹어도 씹어도 씹혀지지 않았다.     어머니 몰래 가만히 뱉어보니 시래기가 아니였다. 로모가 허벅지에 종기가 생기여 고약을 붙이고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되여 국가마에 들어갔고 방정맞게 내 국사발에 담겼던것이다. 나는 투정질할수 없었다. 고래희를 바라보는 로모가 남처럼 며느리의 손에서 밥을 얻어잡숫지 못하고 로총각아들의 때시걱을 맡아하는 신세가 안쓰럽기도 했거니와 내 신세가 너무 서러워서 설음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몇술 더뜨는척 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대충 옷을 갈아입은후 헌 자전거를 타고 룡정으로 달렸다. 생각이 엉망이여서 세흥촌앞을 지나다가 그만 술주정뱅이를 박아놓았다. 거기서 밀고닥치고 하다가 홧김에 그자를 도랑에 처박은후 허겁지겁 페달을 밟다보니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였다. 하지만 이미 떠난길을 돌아설수도 없어 내처 달렸다. 룡남촌에 이르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서야 송녀의 집을 찾았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내밀듯 불쑥찾아든 나의 출현에 송녀는 물론 그녀의 아버지가 아연실색한것은 당연했다. 송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장인강혁 명근거지에서 소년아동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집체귀순하라는 지시에 따라 귀순한 력 사를 가지고있는 사람인데 《삼국연의》,《춘향전》같은 고전명작들을 달달 외울만큼 지자인데가 사리에 밝고 동정심도 강하다고 하였다. 그는  부인을 일찍 저 세상으로 보내고 팔삭둥이 맏아들과 두딸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집살림은 째지게 가난하였다.     송녀의 아버지는 딸에게서 내 얘기를 들어서 잘 알고있다면서 서로 좋아하는건 반대하지 않지만 아직 집안형편이 어려워 딸을 시집보낼 처지가 못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대로 물러설수 없어 진드기처럼 검질기게 들어붙었다. 나중에 두 집에서 잔치에 쓸 돈을 내가 전부 부담하겠다고 큰소리를 쳐서야 마지못해 허락하고 절을 받았다. 드디어 나도 꽃같은 녀자를 안해로 삼게 되였다. 온세상을 다차지한듯 뿌듯하였다.     이튿날 집에 돌아와 어머님한테 희소식을 전했더니 밤이길면 꿈자리가 어지러운 법이니 달구쳐서 얼른 결혼식을 치르자고 서둘렀다. 사랑이 두려운것은 사랑이 깨지 는것보다도 사랑이 변하는것이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며칠후 나는 다시 송녀네 집에 찾아가서 약혼식도 생략한채  잔치날자를 받았다.     내가 송녀를 데리고 마을에 들어서니 어디서 병신이나 데려오면 다행이겠다고 입방아를 찧던 마을아낙네들이 입을 딱벌렸다. 공사에 가서 결혼등기를 할 때 민정 위원이란자가 송녀에게 출신도 나쁘고 나이도 많은 사람에게 왜 시집오려 하는가, 혹 시 불순한 짓을 당하여 마지못해 오는게 아니가고 캐고묻더란다. 송녀가 하도 견결 하게 나오니 할수없이 도장을 찍어주면서도 그냥 못마땅해 하더란다. 혼사엔 흥소 리도 방간이란데 그자가 뭐길래? 물론 그때는 감히 엄두도 못냈지만 혹간씩 그자를 만날때마다 주먹이 울었다.     밤, 송녀와 마주앉은 나는 황홀경에 빠졌다. 나는 송녀의 고운 얼굴을 멍청이처럼 눈한번 깜박하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송녀의 입술은 방긋 벌어진 석류처럼 물들여 져있고 호르륵 뜨거운 숨소리가 곱게 새여나와 남자의 본능을 깨웠다. 여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충격이 나를 걷잡을수없이 만들었다. 가슴이 떨렸다. 마치 전기에라도 닿인듯 온몸이 짜릿해났다.     우리는 만나면 새로운 화제가 샘물처럼 솟아났고 새로운 빛갈로 희망이 물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해지군했다. 인생이란 슬픔절반, 기쁨절반으로 엮어지는것, 바로 녀자에 대한 일종의 숭배심에서 오는것이라고 한다. 이런 숭배심리의 기저에는 정욕이라는 끝없는 욕망에 뿌리내린것이 아닐가? 그 숭배의 진정한 연원을 인류의 미의식이라고 멋지게 표현하고있고 그런 의식은 오직 심령으로써만 감수할수 있을뿐 육체적접촉으로는 감수할수 없다고 말하지만 남녀의 정사를 말로 하는건가?     나는 저도모르게 절절한 갈망과 은근한 기대의 눈길을 박고있었고 그녀의 눈에 서도 나와같은 어떤 욕망이 내비치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는 아무말도 필요하지 않다. 남녀가 진정한 마음을 교류할 때 눈속에 신비한 빛이 내비친다. 진실이 또 하나의 진실과 마주할때에는 더욱 진한 색채를 띄는 법이다.     나의 눈에서 강렬한 정염의 불꽃이 튕기였을것이고 그 불꽃이 그녀의 눈에 박혀 광채를 띠고있는듯싶었다. 나는 거칠게 폭발할것같은 정염을 리성의 마지막 방선에 가두어넣으려고 자제하며 심장에 압축된 호흡을 조금씩 흘렸다. 그녀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눈물은 마력, 그 자체였다. 오그라들어 있던 쇠가죽이 더운물에 퍼진것처럼 팽팽하던 나의 긴장도 느른해졌다. 곱고 올곧고 착하고 알뜰한, 때로는 매섭기도 할 그녀가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여는 소리가 육감각으로 들리였다.     사람은 쾌락이라하면 정욕을 생각한다. 감각이라하면서 육감성을 생각한다. 육체라고 하면서 신비한 삼각지대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가지 좋은것때문에 리성의 방뚝은 와르르 무너져버리는것이다. 만일 정욕이라는것이 이토록 제어할길없이 맹렬하 고 사려가 없는 성질을 갖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번성하지 못했을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면괴스러운 자기 변명이였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자리를 펴고누워 어색하게 둘이만의 밤을 앞질러 만들기시작했다. 나는 한껏 완숙한 녀자의 라체를 처음보았고 그녀의 달착지근한 정열을 만끽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것을 확인했다. 피차 서툴 렀지만 더없는 신비를 앞세우고 진지하고 따뜻하게 서로의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젊은 생명력을 확충하며 서로를 탐닉하는 란무속에서 남녀가 함께 연주해가는 생명 률동의 교향곡으로 새벽을 밀어냈다. 경이로운 흡인력에 빨려들어 그대로 굳어지고 싶었다. 녀자라면 다 이런지는 몰라도 송녀는 흐드러지게 핀 한송이 꽃과 같은 녀자였다.     젊은 녀인의 육체란 이런것인가? 송녀의 머리로부터 발끝까지에서 신성한 빛이 발산하였다. 그 흡인력은 항거할수 없는 무비의것이였다. 나는 그녀의 뜨겁고 향기로운 숨결에 도취되지 않을수 없었다. 마치 뜨거운 김이 뽀얗게 솟구쳐오르는듯 일체가 사라졌다. 오직 나와 그녀의 육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 계급, 신앙, 미래…그 모든것이 보잘것없는 헌 발싸개로 여겨졌다. 오직 충격, 흘러드는 전류만이 감각되고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얼굴과 턱, 수집음을 팽겨쳐버리고 활 드러낸 흐벅진 젖가슴, 미끈하고 풍만한 허벅다리, 되는대로 내버린 하얗고 탐스러운 두팔…그 모든것이 내것이 된것이다. 나는 두팔을 벌려 숨막히도록 끌어안았다. 밀물뒤에 썰물이 있었고 썰물뒤에 다시 밀물이 하얗게 밀려온다. 애욕의 뜨거운 물이 용솟고 세찬 파도는 한껏 달아오른 두몸을 마구 휘감아친다. 질풍노도속에서 환락의 첫밤은 행복으로 바래졌다. 한없이 부드럽고 폭신한 이성의 육체속에서 웅성이 완성되는 것인가? 이런것을 무아의 지경이라 하는가? 착각아닌 착각의 미궁속에서 넋은 온 우주를 행해 나래쳤다…                                     절정        드디어 결혼식날이 다가왔다. 잔치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물론 형제자매들은 천애이역에 흩어져 살고있다나니 오고싶어도 오지 못하였다. 하여 하객이 얼마되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반란파두목인 산호씨가 빈하중농회의를 열고 내 결혼식에 참석하 는 사람은 계급립장문제로 엄중하게 다스릴것이라고 을러메는 바람에 이웃들마저 바자굽너머로 구경만 해야 할 상황이였다. 자고로 잔치집은 흥성거려야 길한데 나는 그런 사치한 행운을 바랄수 없었다. 생각하다 못해 강건너 평안촌의 절친한 친구 상길이를 찾아가 한바탕 불만을 털어놓았더니 그가 팔을 걷고나섰다. “너네 동네 새끼들은 인정머리도 없는자들이구나” 하고 욕설을 퍼붓더니 자기네 대대의 과외 선전대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한바탕 결혼분위기를 띄워주겠노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재수없는놈 소똥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개똥에 코를 박는다더니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불쾌한 일이 생겼다. 잔치떡을 칠 찹쌀이 없어서 소학교동창인 방대장 에게 여쭈었더니 생산대것을 먼저 가져다 쓰라고 하였다. 차입쌀을 가지러 최금지란 창고보관원을 찾아갔더니 자기는 대장에게서 그런말을 들은적이 없다고 하면서 딱 잡 아뗐다. 방정맞게도 방대장은 룡정에 잎담배바치러 가고없었다. 내가 감히 거짓말을 하겠는가고 사정사정했지만 어째서 심술이 꼬였는지 힝힝 코방귀만 뀌였다.     아무리 계급감정이 인정을 삼켜버릴때라 하여도 이건 너무나도 각박한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호사다마도 류만부동이 아닌가? 아무리 눌려사는 처지라도 밸이 울컥 치밀었다. 그러다보니 언쟁이 생기게 되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역시 칼자루 쥔자를 이길수는 없다고 빈손으로 돌아오고말았다. 이튿날 다시 대장친구를 찾아갔더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했다.     “어제 최금지아주머니에게서 량식창고열쇠를 달라했다는게 사실이니?”     “그게 무슨소리니?”     “창고열쇠를 달라고 한 네가 참 철딱서니없다. 빈하중농사원도 아닌 네가…”     “야, 그게 말이되는 소리니? 설사 준다한들 내가 뒤주에서 저절로 퍼내다가 저울질할수 있단말이니? 말같지않은 소릴, 개가 미친들 풀을 뜯어먹겠니?…     “그래도 최아주머니가 자기가 열쇠를 내주지 않으니 한바탕 욕했다고 하더라.”     앙앙불락해서 돌아오는데 마침 가을하러 우리 집옆을 지나가는 최금지를 만났다.     “아주머니, 생사람을 잡아두 유분수지, 어제 내가 언제 창고열쇠를 달라고 했습니까? 꾸며내도 좀 사리에 맞게 꾸며내시오, 억울하게 바가지를 씌우지 말고.”     “그래 찹쌀을 내주지 않는다고 똥밸을 쓰지 않았소? 그게 창고열쇠를 달라구 한것과 무스게 다르오? 제가 무슨 사람인데 내게 막 접어드는거요?     “무슨 사람이면 어떻단 말입니까? 그래도 우선 사람이 아닌가요?”     마을에서 암펌으로 불리우는 그녀의 입에서 좋은말이 나올리 없었다. 결국 언쟁 이 팽팽해지면서 욕설이 쏟아져나갔다. 그녀의 남편은 원래 당소조장이였는데 산호에 게 타도당해서 한쪽구석에 처박혀있었다. 내 입에서 뱀이나가는지 구렝이가 나가는지 모르고 나가는대로 망탕 내뱉은 말에 그녀는 하늘이 낮다고 길길이 뛰였다.       어머니가 내 팔에 매달리며 떡을 못치면 그만이지 좋은날을 앞두고 이게 무슨 일 이냐고 락루하였다. 친척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나를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잔치전부터 곳곳에서 코가 깨진셈이다. 저녁무렵 방대장이 찹쌀 30근을 가져다주어서 다행히 찰떡없는 잔치상을 면하게 되였다.     저녁, 강건너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방안이 터지게 들어앉아 술상을 벌리고 있는데 사원대회에 오라는 전갈이 왔다. 흥이 깨졌지만 어쩔수 없었다. 헌데 설상가 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불쾌한 일이 기다리고있을줄이야, 달패골집 너렁청한 팔간집에 사원들이 꽉들어 앉아있었다. 늘 하던듯이 창문쪽에 내 지정석에 가서 앉았다. 그동안 크고작은 비판을 수없이 받았지만 결혼식을 앞두고 비판을 받는다는것은 기상천외한 일이였다.     산호가 예이제 팔을 내저으며 회의를 집행했다. 얼굴은 강낭떡같고 머리칼은 고 슴도치를 방불케 한다. 손바닥만한 얼굴은 도료에 쐬인듯 까슬까슬하였으며 주독이 올라 무르익은 아가위처럼 빨간코에서는 당금이라도 피방울이 떨어질것같고 조그마 한 눈은 살기를 띠고 신경질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너나없이 계급투쟁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제멋대로 놀아대는 판이라 정세가 제게 유리할듯싶으면 자기의 뒤틀어진 야심을 그럴듯한 혁명구호속에 끼워넣고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너절한 인간들이 수두룩이 뛰쳐나왔다. 산호가 그런 놈팽이였다. 그가 계급투쟁의 불길을 지필때마다 왼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오른손은 공중에 마구 저어댔는데 마치 미국대통령 후보나 된듯 시뚝해하였다.       “어제 우리 생산대에 새로운 계급투쟁의 동향이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집체 창고의 열쇠를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엄중한 두갈래로선 투쟁의 표현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한 부농자식이 감히 한 공산당원에게 접어들어 욕질한것은 그저 사원대 사원 의 언쟁으로 볼것이 아니라 분명히 계급의적들이 당에 대한 창궐한 공격이 멈추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합니다. 에, 그리고 빈하중농들이 결혼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한데 대한 변상적인 보복행위라고 봐야합니다. 여러분,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노래 잘부르는 형가가 말주변은 어떤지”하는 고사가 있듯이 산호가 시비도리없 이 상하좌우를 투쟁하고 비판하는데는 열을 올리고있지만 그의 말에는 어불성설이 많았다. 그자식이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말로 나를 공격하였지만 나는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똥을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만약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나의 눈에서 두줄기 암울한 빛이 번뜩이고 있음을 보아냈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화를 눅잦혔다. 나는 열쇠를 내라는 말을 한적 도 없었고 설사 내주었다해도 나절로 쌀을 떠내온다는것은 애당초 있을수 없는 일이 며 또 최금지아주머니와 다툰것은 한 당원에 대해 모욕한것이 아니라 인지상정으로 다투었을뿐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발 물러서서 년상분을 분별없이 막 대한것은 례절상 잘못된 점이 있으니 반성한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일의 자초지종을 빤히 알고있는 사원들은 서로 눈치만 아무도 입을 열지않았다. 아무리 가재는 게편이라지만 최금지가 산호의 호소에 호응하여 열변을 토하는것이 머 쓱했던지 잠자코 있었다. 산호는 자정까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게 되자 스스로도 억지공사라는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혁명열의가 식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리라고는 꿈 에도 생각하지 못했을것이다.     죽지 부러진 수탉이되여 돌아온 나는 마당가에 백양나무를 부여안고 방성대곡 하였다. 나같은 사람은 마음대로 소리쳐 울지도 말아야 하는 비상시국이다. 꾀꼴새 노래하고 제비가 춤추는 아주좋은 형세하에서 사람마다 혁명열의 끓어넘치는데 통곡 이라니? 사회불만죄로 몰아도 할말이없는 그런 위험천만한 울음이였다.     나의 울음소리는 마치도 서리가 눈이 하얗게 내린 숲속에서 혼자 방황하는 늙은 승냥이의 소름끼치는 호곡성처럼 처절했다. 어느새 상길이라는 친구가 집에서 달려나와 “이게 어느때라구 함부로 울음소리를 내는가”고 호되게 꾸짖었다. 말이 맞았다. 어둠속에서 불쑥 산호가 나타났다. 집에 돌아온 내가 어쩌는가 도적공양이처럼 살피러왔던것이다.     “ 너 왜 한밤중에 꺼이꺼이 울고있니? 사회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있는거지…”     “야, 네가 아무리 반란단 단장이라 해도 옛날 고향친구로서 이렇게까지하는 저의가 뭐니? 우리가 무슨 애비죽인 원한이라도 있니? 일생에 결혼식은 한번뿐이야, 그 런데 하필이면 잔치전날 비판대회를 열다니? 너 너무 지독하구나,”     “헛소리 치지 말라, 준엄한 계급투쟁마당에 무슨 고향친구구 개나발이구 있니? 네가 잔치하든말든 내게 무슨상관인데? 다만 계급투쟁은 날마다 말하고 시각마다 말해야 하기때문이다. 알겠니? 그래도 무산계급의 인도주의정신으로 래일 잔치날에는 비판대 회를 하루 그만두기로 했다. 빈하중농들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사한줄이나 알아라.     그러지 않아도 함께사는 동네에서 너무 무지막지하게 행세한다고 풀떡거리던 친구 상길이가 산호에게 말을 걸며 트집을 잡았다. 렬사의 아들인지라 그는 두려운게 없었다. 당연히 그의 입에 좋은말이 나올리 없었고 결국 산호가 욱 달려드는 평안촌 친구들에게 얻어터지고 말았다. 후과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올줄은 알았지만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속에 응어리가 풀리면서 속이 후련해났다.     이튿날, 우시군들과 같이 모아산에서 뻐스를 타려고 뒤산오솔길에 오르는데 산호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나를 불러세웠다.     “너 지금 당장 내려오라.”     “또 어째 그러니? 그래 잔치날까지 파투를 칠 작장이냐? 야, 제발 좀 그만해 라…”     “괜한소리, 너를 찾는 손님 둘이 지금 우리 집에서 기다고있다.”     말을 내뱉고는 오거나말거나 밸대로 해보라는듯 코웃음치는 산호의 음흉한 눈에는 조롱의 빛이 력연하였다. 나는 할수 없이 우시군들을 집에 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해놓고 코를 꿰운 송아지처럼 산호를 따라갔다. 과연 30대 중반의 한 남자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와있었다. 그들은 송녀네 집에서 파견한 “전권대표”라고 하면서 삐딱하게 나왔다.     “우리가 여기로 온것은 다름이 아니오, 오늘 우리 송녀의 결혼문제때문이오. 어제밤, 우리 송씨네집안에서 토론하여 결정한것인데, 말하자면 이 혼사는 없던일로 한다는것이요. 말하자면 파혼이란 말이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제 아니고 그제도 아니게 생뚱같이 딱 오늘입니까?     “허, 이 사람이 원,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그쪽이 출신을 속이고 송녀를 홀려 냈고 또 송녀애비가 계급각오가 무디여서 허락한것이 아니요. 이는 사기결혼이란 말 이요”     모르긴해도 한집안에서 말깨나하고 시비깨나 캘줄 안다는 사람을 보냈겠지만 내가 보기엔 어처구니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이지 세상에 이런 한심한 일도 있단말인가? 연길서 사업하는 6촌형이 발끈해서 따지고들었다. 그들이 나름대 로 리유를 내세우며 뭐라고 지껄여댔지만 내 귀에는 그저 멍멍개소리처럼 들렸다. 속이 터지고 찢기여도 천쪼각 만쪼각이 나는것 같았다. 하늘이 두 쪼각이 나도 결판 을 지어야 했다.     “이보시오. 무슨 뜻인지 대강 알겠는데 한마디만 합시다. 당신들 파혼과 리혼의 구별도 모릅니까? 우린 이미 결혼등기까지 합법적인 부부란 말입니다. 그러니 파혼이  아니라 리혼인것이지요. 당신들은 여기앉아서 파혼얘기나 하시오, 나는 나대로 새기집에 가서 리혼협의를 할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고 나왔지만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그렇게 믿고있던 사랑이 결국은 허무하게 무너지니 가슴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불덩이를 누를길없었다. 집으로 오면서 보니 이웃집바자굽에 몇몇 아낙네들이 붙어서서 수군덕거리고있었다. 좋은소문이 장화를 신고있는 동안에 나쁜 소문은 준마를 타고 천하를 질주한다고 어느새 입이 빠른 산호녀편네가 온동네에 소문을 퍼나른 모양이였다. 그 모양을 보니 목에서 겨불내가 나고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구경군들속에 옥희도 끼여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이 측은하였다. 우리는 몇해를 두고 서로 좋아했었다. 헌데 렬사의 딸이라는 넘을수 없는 장벽때문에 옥희 는 결국 왕청에 시집갔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몇달 안되여 리혼하고 친정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선 나는 궁핍한 살림에 어렵사리 갖춘 사지옷을 구들에 벗어 메치고 꺼이꺼이 울었다. 친척들을 보기 민망하여 얼굴을 들수 없었다. 집안에 일장풍파가 일어났다. 친구들과 몇몇 조카들이 잔치날에 파탄내는 집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몰려가서 박산내고 오자고 펄펄 뛰였다. 상길이가 내 어깨를 콱 쥐여박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이 못난새끼야, 울긴 왜우는데? 너 래일 리혼수속을 밟더라도 오늘은 새기를 억지로라도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넌 평생 오쟁이를 진놈처럼 치욕을 뒤집 어쓰고 살아야 할것이다. 어서 옷입고 룡정에 가자!에익 더럽게도 불쌍한 놈아…”     맞는 말이였다. 나는 어금이를 뿌드득 갈았다. 나는 두 젊은이의 일생대사를 망가뜨린 장본인들에게 시비곡직을 따져야 했고 평생 진심으로 따르겠다고 말하던 송녀의 얼굴을 다시 보아야 했다. 너도나도 간다는 바람에 나를 따라나선 “토벌대”가 열이나 되였다. 룡정에 이르러 조카들은 식당에서 술을 마시며 기다리게 하고 6촌형님과 둘이서 송녀네 집으로 찾아갔다.     송녀네 집은 결혼식집 같지 않게 않게 마당에 사람그림자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올때는 범이라도 때려눞힐 기세였지만 막상 집앞에 이르니 긴장으로 다리가 굳어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였다. 그러나 더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이미 결판을 지을 각오를 하고 온 이상 여기서 주저앉으면 모든것이 나무아미타불이 되고만다. 나는 용기를 내여 문을 뚝 떼고 들어섰다. 어른 몇몇이 둘러앉아 무슨 얘기를 나누고있었다. “전 권대표”로왔던 사람들이 지름길로 달려와서 사태가 심상치않음을 알린 모양이였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밥상우에 간장종지처럼 쌀쌀하게 대했지만 나는 넉살좋게 구들에 털썩 앉았다. 내가 찾아온 사연을 여쭈었더니 좌상인듯한 어른이 구구히 설명 했다. 나는 입씨름을 생각이 없었다.     “시비를 캐고싶지 않습니다. 결혼은 우리 두 사람이 하는것이지 삼자가 감놓아라, 배놓아라 할 일이 아닙니다. 아님둥? 그러니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본인도 마음이 변했다면 이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송녀가 있을 뒤방사이문을 드르륵 열었다. 예상대로 송녀가 구석쪽에 쪼크리고 앉아 어깨를 들먹거리고있었다. 시집간다는 색시가 화장은커녕 머리가 푸시한 모습이 볼썽 사나왔다. 후에 안일이지만 친척들이 몰아세우는 바람에 생각이 변한 장인어른이 마음을 돌리라고 윽박지르다가 송녀가 입한번 뻥긋하지 않고 고집부리자 두들패기까지 하였단다. 나는 특별히 말을 골라할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만은 솔직하게 말해주오. 아무리 시대가 험학해도 사랑만은 자유요. 그러니 모든것은 송녀의 선택에 달렸소? 만약 송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내가 당 장 당신을 데리고 이 집을 나가겠소. 잔치고 뭐고 무슨 소용이요? 첫날상을 받지 못 해도 원망하지 않겠소. 우리들의 마음만 철석같다면 그 누구도 이 결혼을 막지 못할것이요.”     송녀는 더세차게 어깨를 들먹거릴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할수도 있다. 동방화촉도 밝히지 못하고 과부로 될수도 있는 송녀를 내려다보니 원망대신 련 민의 정이 씨알마냥 가슴에 가득찼다. 혀가 마르고 입술이 타번졌다. 불길이 발바닥 에서 머리우로 치솟아 올랐다. 다시 앞방에 나와앉자마자 엄정하게 선포했다.     “방금 송녀의 마음을 알아보았는데 좋다궂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진작 새각시로 너울을 써야 할 송녀가 결혼을 파탄낸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지 않는다는것은 무언의 동의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집에서 잔치상을 차려주 든말든 송녀를 데려가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해결         나의 말에 좌중이 어정쩡해졌다. 아까부터 어른들속에 끼여앉아 나를 뜯어보던 30대의 사람이 내 신상을 캐여물었다. 소통이 되자고 그랬는지 인상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였다. 내가 룡강촌태생이고 누구의 아들이라는것을 말하자 “네가 쌍디동생이 였구나 ”라고 하며 무릎을 탁쳤다. 찬찬히보니 어덴가 낯익은 얼굴이였다. 소시적에 얼음강판에서 내 발구랑 빼앗아 타며 애를 먹이던 명철이라는 고향마을의 형벌되는 사람이였다.     그는 송녀의 사촌오빠로서 군대에도 갔다왔고 연길가마공장에서 서기로 있어서 집안에 말이 서는 사람이였다.    “그럼 됐다. 이제 우리 큰형님이 오면 결정을 낼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탄자를 펴주면서 신랑대접을 했다. 이때 갑자기 정주칸이 소란스러워졌다. 대사를 좌우지할 권위자가 들어선 모양이다. 명철이가 집안어른들을 다 밖으로 불러내갔다. 후에 안 일이자만 연변방송국에서 근무한다는 명철이의 큰형님이 사연을 듣고나서 어른들을 닦아세웠단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량자가 이미 정한 일을, 그것도 서로 좋아서 죽자살자 하는 젊은이들을 억지로 갈라서게 해서 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떼여놓는건 인간도리가 아니다.”라고 야단쳤다고 한다.     이윽하여 그가 방에 들어와 나에게 이것저것 묻고는 일이 우습게 되였지만 너무 곡하게 생각하지말라고 사과했다. 그제야 닭모가지를 비튼다, 떡쌀을 씻는다, 채를 볶는다 하며 부산을 피웠다. 안방에서도 새기의 차림을 시키느라고 소란스러웠다. 초상난것처럼 썰렁했던 집이 잔치분위가 완연했다. 마을의 청년들도 소문을 듣고  말썽많은 신랑을 구경하려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상을 받고 어쩌고 하다보니 오후가 되였다. 기다리다못해 우르르 무리지어 온 나의 “토벌대”들도 집안에 따로 모셔져 술상을 받게 되였다. 깨여질번했던 혼사는 전화위복이 되여 더욱 이채를 띄였다.     나는 송녀를 데리고 귀로에 올랐다. 산호가 생산대의 손잡이뜨락또르를 쓰지 못하게 하였기에 마음씨 착한 성철이라는 마을친구가 소수레를 가지고 모아산뻐 스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녀한테는 지참품도 별로 없었다. 그저 이불한채, 드렁크 하나, 시시한 보따리 몇개뿐이였다. 첫날 각시가 흙을 밟아서야 되겠냐며 수레에 앉으라고 했지만 잔뜩 뿔난 송녀가 그냥 걷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천히 걸어 서 산을내렸다.     마을에 들어서니 호기심많은 아낙네들이 내가 혼자오는가 해서 바자굽에 붙어서 있었다. 너울도 쓰지못하고 그저 수수한 일반복차림으로 뒤산 오솔길을 내려오는 색시를 보는 그들속에서 혀를 끌끌차는 아낙네들이 있었다. 나는 제법 의젓한 자태로 마을길을 에돌아 “실락원”에 들어섰다. 맨발바람으로 내달온 어머니가 새며느리를 붙안고 락루하셨다. 마음이 알짝지근해나며 나도 눈물이 울컥 솟구쳤다.     두루 격식을 차리여 오락도 하고 친구들의 성화도 받고나니 밤이 깊었다. 정지칸에 불도 꺼지고 어머니도 친척들도 모두 기쁨과 유감과 애석함을 다독이며 잠든듯했 다. 우리도 전등을 껏다. 화촉동방을 밝히는 첫날밤이였지만 우리는 쉽게 자리에 눕지 못했다.     과거를 현재에 매장하려는것은 불가능하다. 어렵사리 치룬 눈물겨운 잔치이지만 남자의 본능대로 만시름을 활 놓고 안해의 풍만한 육체속에 그동안의 모멸감도, 비애도, 분노도 한꺼번에 다 파묻어버리고싶었다. 안해의 싱싱한 체취가 시끄러운 세상을 잊게 한다. 그녀의 가슴에 그렇게 아름다운 예술진품이 감추어져있고 눈부시게 희고 섬세하고 따스해 보이는 몸에 인륜지락의 생경함이 넘치고 있음에랴     처음 안해를 속속들이 알게 되였던 그날밤. 흐드러진 가슴에 넋을 잃고있을 때 수집음의 잔물결이 찰랑대던 안해, “아,아ㅡ”하는 석류빛도는 신음소리가 미묘한 정욕의 피리를 불었다. 두 심장은 하나의 융합을 부르고 있었다. 순간과 영원! 그 집 합점에서 남녀의 첫교향악을 연주하며 극광이 되여 작열하며 새벽으로 달려갔었다.      그녀의 전신에 다시다시 관능의 잔물결이 찰랑대였다. 두개의 심장은 하나의 융합을 부르고있다. 순간과 영원! 그 집합점에서 그들은 하나의 교향악을 연주하며 극광이 되여 작열하며 새벽으로 쭉 뻗어갔었다. 생명의 환희와 기쁨이 얼룩진 그 장쾌 한 충격파와 질풍노도에 휘말려 전률하며 행복한 육욕의 향연을 확인해나가고싶었다.     성스러운 이 시각에도 안해는 감동의 눈물과 함께 몸을 한껏 느슨히 풀어놓고 남자가 쏟아내는 그 모든 사이비한것들을 받아줄것이다. 야성의 그것을 지혜로운 동물이 느끼는 향락 그 자체로 말이다. 온몸에 굽이굽이 감도는 감격과 감동의 여울이 떨리는 속삭임속에서 생명의 환희와 기쁨이 얼룩진 장쾌한 충격파에 휘말려 전률하며 행복한 육욕의 향연을 확인해 나갈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촉동방이 아니던가?     옛날에는 “화촉동방”이란 신혼방의 의미로 쓰인것이 아니라 얼굴이 동탕하고 아름다운 자태의 미녀가 동방(洞房)에서 천천히 거닌다는 뜻으로서 곧 규수가 거처하는 깊숙하고 호화로운 내실을 가리켰다. 그후 당조중기에 이르러서야 “동방” 이 신혼방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였다고한다. 유래야 여하튼간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신혼의 잠자리에는 어둠이 없는법이다. 희열과 광명에 싸여있어 밤도 움츠러든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먹통인데 이밤, 화촉동방이 가당하기나 한가?     매돌밑에 낟알이 무엇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송녀와 나의 생각과 같을것이다. 넋과 넋이 혼합되는 그런 신비한 첫날밤이 되여야 하지만 나의 마음은 너무 지쳐있었다. 다소곳 고개를 숙이고앉은 송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듯싶었다. 나는 송녀에게 옷을 두툼히 입혀가지고 밖으로 끌어냈다. 우리는 뜨락의 굵은 백양나무에 기대섰다.    늦가을, 차디찬 밤하늘 서천가에 쪼각달이 걸려있고 별들이 쏟아질듯이 총총하다. 헤아릴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거리는것은 제각기 종알거리는 작은 입술같아보였다. 저 별들도 얽히고서린 세상사의 어지러움을 비웃는것인가? 나는 별을 쳐다보며 중얼 거렸다. 남편으로서 안해에게 정말 좋은 한때를 마련해 주지못한다면 남자는 녀자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없는것이다. 나는 내옆에 붙어선 송녀에게 무엇을 마련해줄수 있는가? 나는 대답이 궁해져서 자기변명처럼 구시렁거렸다.     “송녀, 사람들마다 모두 자기의 사랑의 경력과 사랑의 기적, 사랑의 비극이 있는법이요, 착한 사람들은 삶이 뜻대로 되지않기가 일쑤이고… 간혹 행복을 만들더 라도 보잘것없을거요. 일월성진의 궤도는 알아도 사랑의 궤적은 아무도 모른다오. 당신의 넋과 마음은 샘물처럼 깨끗하고 맑다는것을 나는 잘아오. 그런데 한번 흐리게 되면 맑아질수 없을것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잘 알고있어요.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것인지두, 당신은 나의 바다물이 되여주세요. 넓고 깊고, 암만 헤염쳐도 대안에 닿을수 없구, 물장구를 쳐도 자맥질을 해도 언제나 부드럽게 감싸주고 받들어주는 바다물이 되여주세요. 다 른 무엇을 더 바라지 않을게요.     나는 송녀의 손을 잡고 마을을 벗어나 신작로로해서 해란강으로 나갔다.  밤길이였지만 어둠속에 따스한 무엇을 향수할수 있었다. 동방화촉으로 굽이굽이 서렸던 정 염을 풀대신 우리는 말없이 별빛을 즈려밟으며 걷는 내내 이렇게 걸었다. 우리가 갈길이 얼마나 멀지는 모른다. 그러나 넘어지더라도 내처 걸어야 하는 길이다.                                                                           에삘로그       나를 잡아먹지 못해 쌍불을 켠 산호가 정말 잔치이튿날 다시 비판대회를 열고 계급투쟁의 불길을 지피느라 열을 올리였다. 내가 불려나가며 내가 바닥에 내려서서 신을 신는데 안해가 슬그머니 돌앉아 눈굽을 훔쳤다. 안해가 울자 나는 마치 실어증 에 걸린 사람처럼 입이 굳어져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저 속으로 내 운명에 저주를 퍼부었을뿐이다.     풍파가 없는 항해가 단조롭더라도 내 생활의 대해에는 다른 풍랑이 없기만 바랬다. 어긋날번했던 내 사랑의 피난처는 바로 안해의 드팀없는 순정이고 내 삶의 보루가 아니겠는가? 이제 고난이 심할수록 안해가 고마워서라도 내내 이렇게 가슴이 세차 게 뛸것이다. 백발이 성성하도록 처음 만날때 그 혹하던 마음을 식히지 않을것이다.     안해로 말하면 빈궁이란 단어의 의미에서 기아란 단순히 먹거리가 없는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갈망이고 알몸이란 단순히 입을 옷이 없다는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의 박탈을 의미할것이다. 돌아갈 집이 없다는것은 몸을 뉘이고 휴식할 곳을 가리킬뿐만아니라 배척과 기시를 가리킬것이다. 빈궁과 기아외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고독과 적막이다. 고독역시 일종 정신적기아이며 따스 한 사랑에 대한 주림을 의미하고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시끌벅적해도 신혼생활은 의연이 인간성 그대로 엮어진다. 성유희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함께 둘이만의 아름다운 악장을 감상하며 격동적이고 조화롭고 은밀하며 뜨거운 도가니속에서 삶겨진다. 사랑의 위대한 힘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다. 험악한 세월속에서 어렵게 이루어진 우리의 사랑,그야말로 눈물젖은 가연이였다.                                                                         1978년 10월 26일   (2014년 8호
392    패러디시”와 자평(自评) 댓글:  조회:5251  추천:3  2014-08-07
                                                     패러디시”와 자평(自评)                                                                                            진 언       통상적으로 요즘 쓰여지고 있는 시들을 일컬어 현대시라면 비슷한 정의가 될것인가? 현대에 씌여진 모든 시가 현대시의 범주에 들어갈수는 없다면 현대시를 지향하고 있는것인가? 현대시라고 했을때 그것은 현대가 가진 정신적인 흐름을 대변하고 있지 않으면 현대시라고 규정지을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면 현대시가 가진 정신적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을 재현하는 사실주의적요소를 부정하면 무조건 현대시가 되는가? 현대시의 개념속에 언어에 대한 테러가 현대시를 포괄적으로 리해하는 바람직한 방법론인가? 나는 현대시를 가슴으로 투철히 터득하지 못하고있다.                                         배우에서                                      바다에 오르면                                 해저속 해묵은 고요                                 가슴에 격파를 일으켜                                 하늘 통채로 삼키누나                                   우등불속 정사에                                 신음하던 부나비들                                 원숭이처럼 곤두박질                                 욕정이 꿈틀거리는가                                  나는 기다린다                                 축축이 마른 공기를 만지며                                 열련처럼 작열하는 랭혹                                 춤추는 배, 전률하는 배…                                  오오, 출항의 배고동                                 자유의 무자유 좋아서                                 저 좁디 넓은 하늘의                                 자궁속에서 들어가자                                  굶주린 짐승같은                                 인간의 무리들의                                 탐욕이 과일즙되여                                 피가 되여 분출하는가                                  창파의 푸른머리채                                감아올려 잡은 미인어                                겨울같은 하얀 이빨로                                내심장 보듬어주누나                                  미인어 미끈한 두다리                                내 상상을 굴러대며                                삘라리 삘라리 라비라                                육욕의 담시를 써낸다.                                  함치르르한 바다의                                단발머리 긴머리칼 잡고                                보배섬 열라 호통치니                                굴러댄다, 배가 요동친다      “축축한 바다공기를 매만지며/ 열련처럼 작열하는 랭혹”이라고 하고보니 시상전개가 도저히 닿지 못할만큼의 상상력의 언어라도 미궁으로 이끌어갔다. 보들레르는 "오늘날 이미지는 무시무시한 새로움! 모두가 눈요기! ”라고 절규하면서부터 이미지의 분렬이 시작되였는지 모른다. 횡설수설하고 보니 스스로도 부질없다.     잠이 와야 잠들수 있지만 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란 무엇인가? 글없는 글, 말없는 말, 시없는 시가 이런겐가? 문을 닫아도 보이고 문을 열어도 안보이는 현실….                                                         고집                                      긍지는 있어도 부정은 없어라                                    똥빼주 마신 안락의자 어허,                                    지구를 돌린다. 하루 일만팔천리                                    의지도 고집스레 스스르르 풀린다                                      전등속에 들어가 춤추는                                    부나비들과 디스코 추고                                    은하수에 오선보 그린다                                    쿵쟈, 쿵쨕, 맥진할 때                                      태양이 후렴구를 엮누나                                   고집을 버려라 무모한,                                    세월의 살을 분지르며                                    긴력사를 토막낸다, 썩뚝!                                     세계는 간결해지고                                   인생은 투명해지고                                   인간은 단순해지고                                    죽음은 행복해지고                                     들고양이 야웅, 쥐와                                   열련에 빠져 하나죽고                                   락관이 비관주의를                                   목잘라 버린다. 싹뚝!                                     생활의 리듬에 맞추어                                   인간론이 인간을 해부한다                                   비였다, 그게 전부이다                                   비였기에 가득찬것이라                                     네 생애를 짓밟누나                                   창문과 지하실이 찡내며                                   해빛을 아작내는소리                                   용서없는 관용은 좋아라        한국의 오탁번이라는 시인은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 시는 시답지 않게 써야 한다 / 껄껄껄 웃으면서 악수하고 / 이데올로기다 모더니즘이다 하며 / 적당히 분바르고 개칠도 하고 /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 똥끝타게 쏘다니면 된다 / 똥냄새도 안나 는 / 걸레냄새 나는 방귀나 뀌면서 / 그냥저냥 살아가면 된다 / 된장에 풋고추 찍어 보리밥 먹고 / 뻥뻥 뀌어대는 우리네 방귀야말로 / 얼마나 똥냄새가 기분좋게 났던가 / 이따위 추억에 젖어서도 안 된다 /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옛마을이나 / 개불알꽃에 대한 명상도 / 아예 엄두 내지 말아야 한다. / 시를 시답게 쓸 것 없다 / 시는 시답잖게 써야 한다 / 걸레처럼 살면서 / 깃발 같은 시를 쓰는 척 하면 된다 / 걸레도 양잿 물에 된통 빨아서 / 풀먹여 다림질하면 깃발이 된다 /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 된다 (하략)”     오탁번 시인의 시 ‘우리 시대의 시창작론’이다. “시는 시답지 않게 써야 한다니 무슨 뜻입니까?” 독자들의 질문이 안나올 수 없다. ‘쉬운 시’, ‘시 쉽게 쓰기’를 강조하는 사람이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근래 한국시가 시인도 이해 못하는 시가 하도 많이 발표돼 그렇게 썼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누구는 시를 시답게 가르치는 교육이 아쉽다고 한다. 감사가 나올듯싶다. 내 시가 시답지 않으니 오히려 만사대길인듯.                                                              훼멸                             구름찢어 얼굴닦던                           이름모를 아가씨가                           공중전을 한번하니                           세월네월 곤두박질                             허망공중 달린시간                           줄이없는 바요링을                           삐삐빽빽 켜는때에                           지구촌이 지랄났네                            흐린공기 매만지며                          열련처럼 식어가니                          목이마른 흙덩이들                          뒤강물을 들이켠다                            푸른숲의 눈동자가                          마른기침 하노라니                          젖은구름 불타누나                          재티되여 날린백설                            겨울안개 무거운가                          머리위에 부서진다                          쪼각이난 안개속에                          하나님이 조으누나                            소리없는 기도소리                           에밀레종 울려대고                           십자가에 매여달린                           울음소리 웃는구나                             흙토에서 솟아오른                           그누구의 하얀발톱                           내이름을 도둑질한                           들고양이 시를읊네                             마른하늘 폭우속에                           저항의팔 우산들고                           보온병이 깨지도록                           노란감주 채우누나                             개구리가 수염쓸며                           파란눈의 령혼불러                           하얀넋을 빚는건가                           눌물같은 별이웃네                             언젠가는 오그라들                           지구덩이 걱정되여                            천고밀림 흐느낀다                           오우오우 지구축복       야콥슨은 시는 선택의 축에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한다고 하였다. 달리말하면 시에 있어서는 류사성이 린접성에 덧붙여진다는것이다. 단어들은 일상대화에서처럼 단지 그들이 담고있는 의미때문에 결합하는것이 아니라 류사성, 대 립, 병렬 등의 패턴과 소리, 의미, 리듬과 함축에 의해 생겨난 패턴에 따라 결합한다. 어떤 문학형식들, 례를 들면 사실주의산문은 련상작용에 의해 기호들을 결합하는 환유적인 경향이 있고, 랑만주의나 상징주의시같은 다른 형식들은 고도로 은유적이라는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현실에 눈을 뜨고                              현실의 고통 치유하려고                            내면의 갈등을 엮으려고                            오랜오랜 먼ㅡ옛날부터                            읽을수 없는 글자들을                            막힘없이 읽어내려고                            세상속을 파고들며                            눈을 꼬옥 감았다                            떳다. 안보인다.       표현의 응축미를 기하려는 동기보다 결과는 모호하게 되였다. 무한한 상상력을 달려보아도 무엇을 환기시키려는 전이적상상력이 무리를 팽겨치고 업고왔다는 모순된 표현에서 나는 아무런 기발함도 없음에 자괴한다. 역시 시쓰기는 어려운가보다.                             시읊는 입                                   시읊는 내입속에                         잠의식이 싹튼다                         상상의 젖꼭지가                         짜내는 감미로움                           때묻은 머리칼에                         꿀타래가 주렁져                         바지속에 두손은                         아기와 녀자손이                           눈물같은 웃음이                         광야에 구르는데                         쥐들속에 구멍이                         불안을 짓씹을떄                           더운 얼음덩이들                         흠집을 기워가고                         동장군이 봄날을                         헐씨근 톱질한다                           달콤한 고통마저                         아파서 웃는구나                         소리없는 라지오                         소음이 좋았구려                           사탕같은 두려움                         편안을 잠재울제                         뜨거워도 차디찬                         녀자의 몸둥아리                                         비틀대는 소리로                         신음을 토해낸다                         고조의 저음인가                         모든것 뒤죽박죽                           바위속 죽은씨앗                         비둘기 쪼아대고                         울음처럼 흐르는                         강물도 굳어졌네                           구구구 난데없는                         삐약병 비둘기가                         할말을 잊고찾아                         웃으며 흐느끼니                            입가득 바위돌은                         이새에 콩가룬가                         무감동이 감격해                         아침해 목이멘다       의식의 세계가운데 관념을 대상으로 하고 의식의 세계가운데 물질적인식인 이미지를 추구하느라 했지만 물질적감각과 관념을 포괄하는 형이상시가 아니다. 그래도 론리에 짜맞춘것으로서 의식의 세계를 대변하는 관념시도 아니고 즉물시도 아니다.                                                                            무의식자찬                                     리성의 이불을 덮고 자다가                                   몽롱의 연기로 포근한 침대에서                                   재채기에 무의식이 튀여나온다.                                   혼돈의 자의식 시줄을 끄적이다가                                    목단추부터 잘못된 끼인것같아                                    숨막힘이 잔뜩 묻은 마음의 골방,                                    창문을 닫고 별다른 저항이 없는                                    별들을 하나하나 잡아들여다가                                      벌레먹은 이발 스물여덟 대체하고                                                                       누더기기를 걸친 벙어리청년의                                    아름다운 노래소리에 졸음이와                                    진실이 담긴 술병을 박살내고                                    천개의 내귀에 크라네를 넣아다오                                    은실금실 그물그네 마음타고                                    만취한 이내 골방에 매달렸네                                    나는 지구와 함께 흔들릴거야                                    영원히 행진하는 산, 바위처럼     무의식의 세계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일정한 작시법도 제시하지 못했다. 일컬어 자동기술법이란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떠올린 생각이나 풍경을 론리와 리성으로 수정하지 않고 떠오른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이건 아니다                                                                                       꽃과 나비                                              나비가 한사코                                            꽃잎에 춤을 춘다.                                            가녀린 꽃잎                                            나비의 무게 가벼워                                            층층이 받들어주는 꽃잎                                            나비가 껴안지만 아무래도                                                                                        나비는 꽃이 아닌것을                                            꺾어진 푸른 나무가지의                                            곧게 쭉 펴진 곡선에서                                            막혀나오는 푸른비명                                            모양새 처절,곱디곱구나       이렇게 쓰다가 말고 체념했다. 지나친 언어의 추상력에 매달렸다는 자괴감에 자랑스러워 무의식을 짜내지 않으려 하지만 언어조합에서는 자꾸 론리성이 자의식을 끌어다붙인다. 그래서 이같은 시적표현은 이미지가 신선하고 생산적이 못된다. 잘된 시는 사물과 내면의 충돌을 통해 현실과 시원의 삶을 투시해내는 마력같은 무엇이 있으련만,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더라도 언어를 다루는 솜씨와 상상력이라도 독자가 경이로운 시적경지에 이를 가능성만큼은 단절시켜서는 안되련만…     읽는 사람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고 사슬처럼 엮어져있는 언어의 맞물림과 시적인 발상은 감미로우리라. 새로운 정신경계를 떠올리게 하는 개성적인 추상력과 상징은 유익하나 무가치하다. 그러면서도 그런 뛰여난 표현능력이 자칫 언어유희에 기울어질 인소에 류의해야 하지만 억지로 지어내니 자꾸만 직선같이 비탈린다.                                    2012년 5월 10일
391    색바랜 추억의 색채 댓글:  조회:5622  추천:1  2014-08-06
                                                   색바랜 추억의 색채…                                                              최 균 선       흔히들 아름다운 추억의 언덕이라고들 하더라만 추억이란 장미빛이기만 하던가? 인생길이 미만하기만 한것이 아니거늘 추억도 얼룩덜룩하지 않으랴!그런데도 사람은 늙으면 왜 추억에 잘 매달릴가? 잡초우거진 산등성이에서 먼 하늘을 바라볼 때처럼 초점없이 느슨히 풀리는 시선, 그 시선끝에 추억을 매달고 꿈을꾸듯 생각에 잠겨있는 로옹의 양자는 결코 돋보일수는 없으리라. 마치나 시골의 칠흑같은 원두막 마른풀위에 누워 하염없이 바라보던 별빛과도 다른 그런 상념의 잔광일뿐이다.                               뜬구름은 바람에 흘러가고                           허무한 내인생 세월에 가네                           저무는 언덕에 부르는 노래                           아롱다롱 밝지만 않더란다.                          인간은 하루에 적어도 5만가지 념두가 산생되며 한시간에 5천가지 념두가 산생된다던가, 더구나 늙으면 마음이 여리여지고 눈물이 헤퍼진다던가? 그래서인지 내마음의 호수에서는 시도 때도없이 비애의 잔물결이 일고 또 잦는다. 잡초무성한 기억 의 언덕을 에돌아 아득히 흘러가버린 세월을 마음에 떠올려보아도 가슴이 클클해지고 할일없어 망향의 설음을 쏟아내는 흘러간 옛노래를 들어도 가슴은 알수 없는 정한으로 뭉클해지면서 눈굽이 절로 축축해진다.     주어진 내생명의 저축소에 얼마남지 않은 목숨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속절없이 저물어간 한생이 너무도 하찮고 서러워서만이 아니다. 따스한 정을 가지고있는 늙은이들이면 다 그러하듯 이래저래 슬프기만 한 가슴이다. 그러나 벙어리 랭가슴앓듯 말 못하고 끙끙 속으로 끓이는 내비애를 누가 아랑곳이나할가? 혼자의 슬픔은 그저 슬픔일뿐으로서 위로의 약은 없고 그저 시간만이 약이 되여 흐지부지 해질것인데…     별빛같은 그리움 타향살이 긴 여울에도 흩어지지 않는 한줄기 그윽한 상념, 청량한 달빛 이슬방울로 맺히는 밤이면 안개처럼 잦아드는 그리움, 파아란 여름의 땡볕에 시달렸던 대지에 성급한 가을이 물감을 들이기 시작할 때, 무서리에 시들해진 들판은 서둘러 누르끼레한 색갈에 묻히고있는데 내추억의 언덕에는 잡초만 무성하여 썰렁한 바람이 스쳐간다. 수확의 계절이라는 가을에 나는 서글픈 추억을 단채로 묶을뿐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것이니 인생만사의 조화라는것도 요것뿐인가싶다. 꽃이 피고지는데 어제는 꽃이 핀 마을에서 자고 오늘 아침꽃이 지는 냇물을 건너네. 인생은 락화류수요 세월은 강물이라더니 인생은 오가는 봄이라 피는 꽃을 보고나서 또 지는 꽃을 보니 머리에도 서리가 한가득 내렸구나.     내가  하루에서 홀로 고독하게 지내고싶은 공간은 경쟁사회에서 계산되고 기계화되여 고달프고 인정머리 없는 시간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자신을 찾는 시간이다. 잠못이루고 이리뒤척 저리뒤척할 때에 돌아누우면 창밖에 외로운 귀뚜라미소리,가을은 그리움이 고향집 추녀밑 달빛에 휩싸였으리,…숫귀뚜라미만 소리내여 우는 그 사연을 그 누가 알소냐? 귀를 열고 듣는다하여도 다 터득할수 없는일이고 들어도 마음에 새겨두지 않으면 얼핏 불고가는 밤바람같이 허황한것이다.     한치앞도 모르는 사람인지라 그 남은 시간이 감히 얼마라고 단정지을수는 없지만 지나간 무수한 시간들을 어찌 그리도 허비했는지 무엇을 위해 지금껏 그렇게 죽으라고 일에 매달려 살아왔는지 그러면서도 과연 내가 지금 무엇을 일구워놓았는지 혼란과 허무함 그리고 자괴감마저 들지도 모른다. 시간은 또 어쩌면 그리 무심히도 빨리 앞으로만 가는지 초조해지기까지 할것이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 보면 내삶의 주체는 분명 나인데 오히려 시간의 노예처럼 끌려다니며 여기까지 온것만같다. 그런 사실을 늦어서나마 인식하게 되였지만 앞으로의 삶이 과연 달라질수 있을가?  이제라도 정말 붙잡아야 할것을 붙잡고 놓아야만 하는것들을 과감히 놓을수 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가도 생각해 본다.     꿈과 목적이 있는 삶은 단연 의미있고 아름다운 삶일것이다. 그것이 거창한던 소박하던 그리고 비록 시작이 늦었더라도 무엇인가에 열심한 삶만큼 감미로운것은 없을것이다. 꿈이 있는한 하루하루의 삶이 지겹고 더디지는 않을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든,  또 이루려고 하든 결국에는 그 만족감도 어쩌면 잠시 잠깐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성취감은 어쩌면 또 다른 허무감을 동반할지도 모른다. 과연 내가 오랜 세월을 노력하고 또 노력한것이 이것이였나하는 반성이 수반되고…     가장 의미로운 삶은 나누는 삶일것이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상대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알고는 있는것일까? 무엇이든 다른 사람과 나눌수 있는것일가? 남을 진정으로 배려한다는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가? 내가 아닌 상대방의 립장에서 다른 사람을  리해하려 하는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나의 허물로 감싸안을수 있을까? 최선이니 최고니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다. 최고는 바라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세상에는 그런것들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한토막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전 영국수상이였던 로허 죠지는 문에 들어서면 꼭꼭 닫는 괴이한 습관이 있었다. 어느 하루, 죠지와 친구가 정원에서 산책하는데 매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등뒤로 하나 하나의 문을 닫는것이였다. 친구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곧 돌아나갈 텐데 뺴놓지 않고 닫는 리유가 뭔가? ”   “응, 이러는건 나에게 당연히 필요하다네”죠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한평생 내뒤에 문을 닫는 습관을 지켰다네. 자네아는가? 자네가 하나의 문을 닫으면 과거도 뒤에 남게되지. 그게 자랑스러운 성과이든 고통스러운 과오이든 말이네. 문을 닫고나서 새롭게 시작되는게 아니겠나?” 친구는 그래도 의아해 하였다. 로허 죠지는 지나간것은 다 돌이킬수도 없고 무의미하다는것을 실천으로 행하고있었던것이다.     설사 어떤 절실하였던 체험이나 경험이 추억거리로 된다고 해도 결국 오래전에 읽은 책의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것과 별로 차이가 없다. 아무쓸데없는 추억에 련련하여 한사코 매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궁상떨고 있는것이다. 발전적이고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미래만 바라보지 추억놀음에 궁상떨지 않는다.     “첫번째 기차를 놓친것을 후회막급해 하는 사람은 긍정코 다음 기차도 놓치고만다”는 경구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역시 과거에 매달려서는 아무리익도 없다는 뜻을 담고있다. 밖으로, 위로만 팔던 시선을 거둬들이고 한창때는 “범을 잡았다는 호기”도 접어버리고 날마다 늘어나고 깊어가는 주름살에 신경을 쓸 일도없이, 흘러가버린 그 좋은 시절을 새삼스레 애석해 할것도 없이 남은 길이나 굳건히 가보소.     더없이 비참해진 다음에야 자기 생활을 개선하려 한다면 너무 늦은때이다. 세상에 원래부터 평탄한 길이란 없듯이 끝까지 울퉁불퉁한 길이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노상 이것도 저것도 눈에 거슬려하며 자기를 학대한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 삶의 내리막길에 접어들면 분명 한번쯤은 뒤를 돌아보며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않았다는것을 씁쓸히 느끼게 될것이다. 김삿갓어른이 이렇게 읊었다. “(萬事皆有情, 만사개유정-온갖 일이 모두 운명에 정해져 있거늘) / (浮生空自忙, 부생공자망-덧없는 인생은 부질없이 헤매는도다)”                                                 2012년 8월 10일           2014년 8월 -2014년 9월호
390    (련시조 10수 ) 青云歌, 落马颂 댓글:  조회:5772  추천:1  2014-08-06
 (련시조 10수 )                     青云歌, 落马颂                                                         진 언                             청운에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섰고야                           도처에 卖官이니 卖职하야 봉창하쟈                           자고로 权钱교역이 불문률이 되얏거늘                                                     벼슬마 올라타고 풍진세상 질주하매                           청운이 무상해도 경개무진 좋을시구                           落马도 제할탓이라 乘马부터 하리로다                             청운이 표표해도 허위단심 내가리라                            암투의 살얼음판 요령좇아 무난커늘                           지화쟈 평지돌출에 운좋으면 步步高라                             험난한 벼슬길에 장벽인들 마다하랴                           아첨에 뢰물괴면 난공불락 없다더라                           전정이 창창하거늘 뭔짓인들 마다하랴                               벼슬이 운수라도 뒤심없이 어방있냐                           권좌가 烈马라도 승승장구 나름이니                           비켜라 큰한소리에 거칠것이 없노매라                            오르고 또 오르면 青云끝에 채운이라                          쇠꼬리 되기보다 닭대가리 되고지고                          권력봉 크지 않아도 휘두르니 금방망이                            권좌가 돌고돌아 원점될때 있더라만                          이아침 술있으면 조석으로 취해야지                          걱정이 팔자이드면 한도많아 悠悠해라                             권세가 하늘찔러 나는새도 떨구더니                           가석타 부귀영화 일장춘몽 박살났네                           옳거니 인과보응을 비켜갈줄 있으리오                             青云歌 불러보랴 落马颂에 눈물지랴                           좋을때 말줄알면 평안무사 되는것을                           탐욕에  일락천장해 계하수가 되얏구나                            자고로 과유불급 섭리라고 닐렀건만                          멈출줄 몰랐으니  일패도지 고이한가                          개천에 떨어진 룡은 미꾸라지 같느니라                     
389    인간의 괴질-사디즘 댓글:  조회:5941  추천:2  2014-08-03
                                                   인간의 괴질-사디즘                                                             최 균 선       문명시대의 인간들은 이원적세계에서 이률배반을 조작하며 살고있다 그 대표성적현상이 폭력ㅡ인간학대이다. 인간의 괴질인 사디즘이란 성적대상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인 쾌감을 얻는 이상성행위로 정의되고 있지만 단지 성적목적뿐아니라 파생적의미로 남에게 육체적,정신적고통을 주고 자신의 공격본능을 표현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행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플라톤의《공화국》에 의 에피소드가 있고, 루크레티우스가 저술한《만상론(萬象論)》에는 “죽음과 싸우고 있는 불행한 뱃사람의 조난을 언덕위에서 구경하는것은 유쾌한 일이다”라는 글이 있다. 여기나 저기나 인간의 괴질은 드러나기마련이다. 이처럼 만물의 령장인만큼 인간은 원죄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주의시대 무감각이 폭력을 부른다. 폭력은 인간주체자가 타자를 먹어치워야 자신이 살수 있다는 점에서 식인주체라고 할수도 있겠다. 지금 국내외의 학교, 사회상에서 인간학대가 기승부리는것도 폭력숭배의 가치관때문이다. 약자의 시각에서는 이런 가치관이 너무나 사이비하지만 임의로 자행되고있는 현실인데야 어쩌랴,     어떤 누구도 그 학대가 누구에 대한 학대인지, 그리고 어떤 학대인지를 추구하지 않는다. 인간학대증은 일부의 악착한 인간의 변태심리이고 대다수 사람들은 선량하다는식의 순진한 반론을 펼칠 생각이 전혀없다. 오히려 현대학대광들은 고대형리들의 학대양식을 초월하여 새록새록 학대기교를 고안하는 창조적인 학대광들이기때문이다. 전세계적폭력문제는 제어불능의 극에 이르렀다고 할수 있다. 아동학대, 가정성원학대, 학교에서의 인간학대, 민족과 민족간의 학대…폭력 자체는 년령에 관계없이 상수이며 보편적현상, 인간악의 괴질이 되여있다.     청소년간의 학대현상은 불행하게도 성인들이 자행하는 인간학대와 너무도 닮아있다. 집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에게, 공사장에서 관리자가 로무일군에게 가하는 폭력 등이다. 그것은 인간교육의 전당이라는 학교에서 시작된다. 손바닥과 손등이 다르듯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피터지게 맞지 않는한 인권, 인간애같은 사회적문제를 관여하지 않는게 덜시끄럽다. 국가적폭력이 합법화되는 세계적인 어경에서 내가 당하지 않으면 영원히 남의 일이므로 피해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천사”는 이 세상에 태여나려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것은 인간이기를 그만둔 귀태들인 인간학대광들은 그 어떤 억압과 폭력을 자행하거나 자행하고나서 마음에 주름이 질일도 없이 잘먹고 잘자고 정부와 만나 웃고떠들고 성유희를 즐긴다는 그 “인간성”이다. 폭력적 이 시대에 온갖것들이 죽어나간다. 인문정신도, 인간의 존엄도 죽었다. 그대신 폭력은 일종 유희로 되고있다. 한국의 드라마는 모순갈등을 남자대 남자들은 깡패의 주먹닥질로 설정되고 녀자들의 갈등과 암투는 언어폭력으로 도배질되여있다.       인간은 육식을 해서 포악해졌는가? 채식을 하면 선량해질가? 자고로 힘센자만이 살아남았지만 지금같은 문명사회에서는 약자도 생존기회를 얻고 오히려 존중받기도 한다. 공존의 가치는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드러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삼키고 소화시키는 폭력적인 주체, 삼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로신이 말한 사람을 잡아먹는 현상이 지금도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찢어발기고 물어뜯고 삼키려는 폭력 적인 주체의 탄생은 인간존재의 취약성과 그로 인한 불안에서 기인하는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상 폭력으로부터 손떼기 싫어하는 악착한 동물이다.       자신의 존재를 걸고 생사결단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치지 않을수 없으며 그만큼 폭력의 시대에 공존한다는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문명국과 미개국을 가르는 기준이다. 그러나 지구를 파괴하는,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한 자원의 략탈, 에너지소모…어찌보면 인류는 자신의 의식마저 조작하는듯싶다.  5대주4대양 곳곳에, 이 마음 저 마음, 내마음 네마음속에 숨겨진 인간악, 모든 지구인들의 혈관속에 흐르는 인간악…이 공간 저 공간에 넘쳐흐르는 탐욕, 착취, 억압자의 횡포…그 모든 인간악의 근원은 결국 인간성의 괴질인 학대증에 있다고 말할수 있겠다.     맹자는 “인지초 성본선(人之初,性本善)이라고도 하고 순자는“인지초성본무(人之初,性本无)”라고도 한다. 물론 절대적으로 선량한자가 없고 반대로 절대적으로 악한 자도 없다. 선행이 배워서 되는것이라면 악도 습득하는가? 애급에 무려800여명의 사람을 목을 매달았는데 자기의“취미가 교살형이였다”며 사람을“처형하는 일을 사랑한다”고 말해 세계적인 충격을 준 하지 압드 알-나비라는 악마도 있으니…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물고문 등 가혹한 테러범 심문법을 창안한 미첼 가란 자는 '해당 심문은 당시 합법이였다'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도록 요청받은 사람일뿐이라며 해당 심문프로그램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사과할것도 없다고 그 기염이 창궐했다. 고문이 그의 자랑찬 사업이였다면 참으로 너절한 넋이 아닐수 없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임은 의심할바없다.     현시대, 인성분석에서 유전인소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면서 생명의 본질을 밝히려 하고있다. 선악에 대해 시각문제. 인식각도문제가 존재하지만 인성의 자연적류출이 현실이라는 어경에서 인간악도 본성적인 자연적류출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선행에 대한 선인들의 이런저런 고훈, 현대의 텅빈 설교로는 악의 현실을 설명하는데 역부족이다. 인간군체에는 좋은 사람, 나쁜사람이란 없고 다만 유한한 리성인만 존재할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리성에는 한계가 있다.     리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리익을 위하여 해를 피하게 하며 착오를 범하게 한다는 명제가 납득될수 있는가? 인간이 자기행위의 악과를 예측할수 있다면 착오를 범하지 않을것이며 충돌을 피할수 있다고 말할수 있는가? 사회성이 인간의 속성이고 선과악, 리성과 감성을 동시에 고유하므로 리기와 리타(利他)가 인간행위의 가능범위라지만 리기와 리타의 합작, 충돌과 분기의 단합이 가능한것인가?      인간은 자고로 폭력의 절경을 창제하여왔고 사람들은 심심할 때 해바라기씨를 까듯이 그 절대경에 심취되여왔다. 가까운 례를 든다면 한국텔레비에서 방영되는 사극들에서는 살인,치사 대결, 독살, 처형, 고문,살해 별별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정채로운”장면들이 다 나오는데 사극《왕건》에서는 어린애마저 철퇴로 쳐죽이는 장면도 나왔고…주리를 트는 등 고문, 치사같은건 거의 대부분 정치사극에 통용이다. 인간이기에 할수 있는 악행이기에 당연한것인가?     우리는 보다 객관적으로 투철하게 사회악의 근원을 파보아야 한다. 인성의 허위 역시 인성의 일종 악의 표현이다. 인성이 본디 착한가? 악한가? 중성인가를 시비하는것은 아무런 의의가 없다. 악이 성행하고 선이 짓밟히게 된 사회적인 기제에 눈길을 돌리면 우리가 눈을 감고있는 진실이 보일것이다.     증오와 복수는 인간의 본능이다. 세상이 더러워지는것은 인간들이 거짓으로 증오를 가중시키고 법이 정의와 진실대신 허위와 횡포를 휘두른다면 분노와 보복에 불을 지르게 된다. 법률이 약세군체만 억누르는 장치가 된다면 세상이 화해로울수 없다. 그러므로 박애정신이 있어야 하지만 무작정 선량하기만해도 안된다. 그 선함을 강인하게 지킬수 있는 힘이 없다면 악이 횡행하는 세상은 공공연히 지속될것이다.                                                             2012녀 3월 12일
388    타락한 인간의 감정 댓글:  조회:5775  추천:0  2014-08-01
                                   타락한 인간의 감정                                             최 균 선        동물도 감정이 있다고 한다. 인간들처럼. 기쁨, 즐거움, 반가움, 모성애, 베풀려는 마음, 통솔자(리더십)로 되려는 야망 등 본능이 있다. 인간이 다만 동물과 다른 점은 고급지능이 있다는것이다. 그 지능이 결국 수요심리라는 감정에서 출발하여 도구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 물질문명, 정신문명을 이룩했다. 감정과 리성이 적절하게 조화된 시점이 최적인데 리성만 내세운다만 로보트같은 랭혈인간이 될것이고 감정지배만 내세운다면 동물의 야수성 이하로 전락할뿐이다.     인간은 오늘날에도 원시시적인 감정론리의 지배를 받는다. 두려움, 환상, 착각…이런 원시감정들은 전부 진화과정에서 대부분 인간의 몸에 배인 습성이 되였다. 깊은 밤, 산속길을 혼자걷다가 숲속에서 부시럭소리가 났을 때 도망치려고 발이 먼저 나가면 감정지배를 받은것이고 “무엇일가? 무서운 맹수일가?” 잠시 랭철한 정황판단에 발목이 잡히면 리성사유의 고삐를 잡은 표징이다.     인간의 감정세계에 끈질기게 유전된 원시적감정은 미확증적인 편향이다. 그것을 진실의 계시로 착각하게 된다. 감정분출의 화구에 리성이 서성거리고 있지만 인간은 그 원시적감정을 확인한후 대부분은 그런 확증편향에 매달려서 시행착오를 범하게 된다. 감정은 가슴에서 나오고 리성은 머리에 잠재하기에 공존하고 있지만 동상이몽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 수화상극이다.       인간감정의 변덕스러움과 무절제가 두드러지면서 리성만세가 고양되였을것이다. 리성에는 합리성과 론리,지성과 랭정이 주요가치로 되였다. 감성축에는 감정과 직관, 격정과 탈론리가 주류이다. 감정활동이 극렬하게 되면 리성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리성이 랭철할수록 열기올랐던 감정도 식어버릴때가 있지만 보통 감정이란 미쳐난 토끼처럼 리성이 치는 그물따위는 냉큼 뛰여넘어 제멋대로 광분한다.     하건만 감정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악영향의 의미는 심리학계에서 오래동안 과소평가되여왔다. 리성과 지능이 인간발달의 최고수준으로 여겨진 반면 감정은 불확실하고 측정할수 없는것으로 인정되였다. 드디어 감정이 인간의 본성을 확실하게 결정한다는것을, 감정이라는것은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한것이며 감성지능이라는것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학자들이 뒤늦게 밝혀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 인간의 의사결정정에서 감정은 무척 중요하며 세상을 지배한 합리성이란 개념조차도 객관성에 의거한 옳고그름이 아니라 감정에 기초하여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것을 극대화하고 싫어하는것을 최소화하는 지혜를 터득한것이다. 감정은 결정하고 리성은 그 결정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좋은것을 극대화하고 싫은것을 최소화하는 합리성사유는 저도모르게 뒤로 밀리는게 보통이였다.     리성의 힘을 입은 합리성, 론리성, 객관성 등을 선행시킨 랭철한 사유능력이 인류사회를 발전시키고 인류를 현대문명인으로 진화시키는 동력이 된것은 사실이지만 감정의 충동앞에서 리성이 무기력해짐으로써 수천년을 두고 인류자신이 자초한 온갖 불행과 비극을 말려내지 못한것은 자업자득이였으며 눈물겨운 아이러니가 되였다.     인간의 감정은 왜 부드러움과 따스함으로 충만되지 않고 갈등과 폭력과같은 파괴적인 감정도 섞이였을가? 그리고 감정과 리성사이에 괴리가 생기는것일가? 감정이란“울컥”이라는 짐승의 우리에 서식하는것인가? 증오와 분노를 비롯해 인류의 평화를 파괴하는 모든 격렬한 감정들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동물들과 구별되는 지능이 오히려 역작용을 놀았기에 박애정신, 동정심, 사랑, 정의감…등 다양한 감정의 뉴앙스들은 안중에도 없게 된것인가? 인간의 감정이 참으로 타락한것인가?     일본침략군 졸병들이 조선반도, 중국에서 저지른 인간이하의 만행도 그렇다. 그자들이 만약 인성을 되돌려오기에 노력하면서 저그들의 날창받이가 된 약세군체들도 같은 인류유전자를 가지고있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명백한 감정세계를 동정했다면 만행이 그렇게 비인간적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기 부모형제와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감을 느꼈다면 짐승보더 더 란폭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야차들이였다.     많은 경우, 인간의 감정은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확증편향으로 기울어지고 인간의 지능이 원시적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 종교도, 정치도, 전쟁에서도 원시감정론리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그 모든 욕망은 곧 감정이기때문이다. 하긴 광란증에 걸린 감정을 리성이 지배할것인가? 감정이 리성을 말아먹었느냐? 묻는것도 무모하다. 고귀하다는 인간의 감정이 광란에 걸리면 인류에 끼치는 참화는 이처럼 형언할길 없다. 이 시각도 인류는 걷잡을길 없는 잘난 감정의 충동에 구사(驱使) 되여 곳곳에서 인간으로서 빚지 말아야 할 참극을 련속부절히 창출하고있다.     요즘 팔레스티나 가자지구를 인간지옥으로 만들고 대학살을 꺼리낌없이 감행하고있는 이스라엘인들의 악행의 근원도 기실 민족감정인것이다. 히틀러의 인종청소의 대상이였다가 마치 받은대로 갚아준다는 만행으로 인식할수 있게 하니 얼마나 웃기는 족속들인가? 이런 심태에서 인간이 자기감정을 관리못하거나 자신의“감정유희” 에 도취된 경우 인촌에 희비극은 끝날수 없는것이다.     인간본연의 감정문제상에서 개체간의 관계도 그렇다. 사람은 보통 생면부지의 사람과 모순충돌이 생기면 피터지게 싸우는 경우도 있지만 아비죽인 원쑤도 아닌데 후배라고, 신입병이라고, 선량한 약자라고 공연히 걸고들어 여럿이 한 약자를 개패듯 하며 감정적으로 어떤 만족을 느끼는것은 정신이상자들이 아니고는 도저히 할수 없다. 무지자이든 문화인이든 남을 해하려든다면 인두껍을 쓴 악마임에 틀림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감정의 소유자들이 세계도처에서 까나고있고 21세기 문명인으로서 인간학대로 야수보다 못한 쾌감을 느끼고 자기존재를 과시하려드는 놈팽이들이 저지르는 참사는 비일비재이다. 학교내에서, 군부대내에서 련속부절히 발생하는 폭력사건은 인제 인습으로, “대물림폭력”의 악순환으로 되였다. 생사의 전우이건만 오락처럼 매질하여 젊은 생명을 죽인자들이 과연 인간인가? 인간에게는 인정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인정머리없는 인간학대광들이 4월한달 조사에서만도 4천명에 육박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엽지추요 한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고 한송이 꽃속에서 천당을 본다는 말이 있으니...    잘난 감정충동으로 기세등등하게 광란하다가 결국 엄벌을 면치못하게 되자 자기들의 죄행을 모면하려고 잔꾀를 굴리여 잔혹행위를 음페하려했다고 한다. 그자들이야말로 추악하기 그지없는 제감정에서는 “강자”였지만 리성적으로는 형편없는 기형아들이요 존재가치가 없는 인간말종들이다. 아니면 거국적으로 천인공노하고 있겠는가?        아무까닭도 없이 욕질하던 뒤골목의 막된 녀인도 하다하다 제풀에 싱거워진다고 하는데 이자들은 젠체 할수록 감정지배의 블랙홀(黑洞)에 빠져들었던것인가? 감정폭발에는 론리적체계나 리성의 충고가 대수롭지 않기에 자신이 기꺼이 감정의 하녀로 충당된다. 참으로 악감정이란 리성보다 더 무서운것이요 비참한 조우이다. 횡포무도한자들은 자기를 한껏 부풀리지만 기실 자기의 연약무력을 스스로 드러내는것으로서 짐승도 모르는 취약성을 폭로한 비겁한 자들이 아닐수 없다.     감정과 리성은 인간생명마차의 하나의 축을 따라 굴러가는 두바퀴와 같다. 그런데 이른바 랭철한 리성적판단과 종잡을길이 없고 제어불능의 감정이 공존한다는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불행이고 비애이다. 디자인이 서로 다른 개체감정이라는 무모한 충 동이 종횡무진하는 인간의 감정세계에서 자기 감정만이 자연스럽고 정당한듯 착각도 아닌 오만성을 휘두르기에 리성과 불가공존의 맹목감정이 비극을 연출한다.                                                            2013년 7월15일 초고    2014년 7월 30일 정리
387    (펌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 댓글:  조회:5491  추천:3  2014-07-30
 ■ 평론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                                                                                                                                   철학으로 통하는 수학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아니, 우리 인생에도 공통분모는 얼 마든지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끼리 공통분모를 이루고 있는 까닭은 인생도 역시 철학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예술 세계의 한 분야인 문학, 특히 시의 영역에서 공통분모와 같은 구실을 하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진한 감동으로 번져주고 있기 때문에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언제 어디에나 자아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자아의식은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인간 실재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작품, 특히 문학작품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작품에 나타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다. 나의 존재가 선명할 때 비로소 모든 존재의 확립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아의식의 발전은 삶과 인격의 발전이며 우리가 접하는 작품의 발전도 자아의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아의식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막연히 자기(自己)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어떤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한다거나 또는 타인이 자기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반응해 줄 때, 즉 타아(他我)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의식하는 경우, 국가나 사회 등의 관계를 초월하여 종교적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의식하는 경우, 또는 이와 같은 외적(外的)인 모든 관계를 끊고, 순수하게 안에서 볼 수 있는 반성의식에서만 자아를 의식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연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은 어떤 모습, 어떤 빛깔로 배어들어 자리 매김을 하고 있을까?   향수에 배어 있는 자아의식   넓은 벌 동쪽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의 전문   돌아가야 한다 해마다 나고 죽은 풀잎들이 잔잔하게 깔아놓은 낱낱의 말을 들으러 피가 도는 짐승이듯 눈물 글썽이며 나를 맞아 줄 산이며 들이며 옛날의 초가집이며 붉게 타오르다가는 잿빛으로 식어 가는 저녁놀의 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 지금은 떨어져 땅에 묻히었으나 구름을 새어나오는 달빛에 몸을 가리고 어스름 때의 신작로를 따라나오던 사랑하는 여자의 가졌던 말을 끝내 홀로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 그러면 나이 먹지 않은 나의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 나를 받으며  커단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잊었던 말들을 모두 찾아 줄 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 이근배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전문     정지용의 「향수」는 타향을 떠도는 자의 가슴에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설의적 감탄이 짙은 향수로 배어 있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5연이나 차지하고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를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이 외침은 연설이나 웅변에서 들을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가 아니라, 어쩌면 심 봉사가 심청을 인당수로 떠나보내며 신음하는 듯한 그런 몸부림일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뜨거운 눈물줄기가 주르르 흐르는 얼굴로 실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그리움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동반한다.     이 시에 담긴 정경이 하나도 낯설지 않다. 그대로 우리의 품이며 정경이고 토속인 바로 우리네의 고향이다. 평화롭고 아늑한 고향이지만 "밤바람 소리", "함부로 쏜 화살", "밤물결 같은…사철 발벗은 아내",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등에서 왠지 불안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이 시인이 처해있는 시대적 환경의 알레고리적 묘사가 아닐까 싶다. 평화롭고 아늑한 우리의 고향이 일제의 학정과 물려받은 가난에 휩싸여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이 시인에겐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지고 있다. 그 넓은 하늘 빛이 그립다니, 얼마나 억눌리고 고립된 삶이었는가 짐작이 간다. 그러므로 무작정 못 잊는 그리움만 읊은 시가 아니라, 정작 그리운 것은 고향이 찾아 누려야 할 참 평화일 것이다. 이는 정경이 그립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데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아파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당시의 민족정서를 우리들 귀에 들려주고 있는 시인의 울음이라면 잘못된 표현일까? 이런 점은 그가 모더니즘의 분위기를 짙게 연출하고 있는 향수의 품에 자리한 자아의식의 일면일 것이다.      자신의 고향을 "리야잔"으로 암시적 표현을 한 이근배의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는 자신의 자아의식을 고향과의 반응에서 오는 그리운 사연들을 소망으로 하여 감정 방출을 하고 있다.     역시 잊지 못할 고향을 그리며 "돌아가야 한다…나의 리야잔으로"를 외치고 있지만, 구체적인 욕구는 "…낱낱의 말을 들으러/…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여자의 가졌던 말을/끝내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잊었던 말들을"에서 보이듯이 "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향한 마음을 '향수'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통한 자기 삶의 말을 들음으로써 오히려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아의식의 미적 가치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정지용의 「향수」와 이근배의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는 고향 그리움에 공통점을 이루고 있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형식에서부터 다르게 나타나 있다. 같은 현대시이면서 자유시(내재율)에 해당하지만 전자는 10연 26행으로, 후자는 전연 18행으로 짙은 시정을 읊고 있다. 연을 나누지 않은 후자는 연을 나눈 전자에 비해 호흡이 매우 급하다. 전자를 느릿느릿 걷는 소걸음이라면 후자는 깡충깡충 뛰는 토끼뜀이다. 돌아가야 할 길이 그만큼 급한 느낌을 준다. 시의 형식이 주는 느낌만도 이렇게 다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서정적인 면을 그린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주제와 소재가 다른데 있을 뿐 아니라 그 추구하는 목표가 같을 리 없다. 전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고향의 정경을 표면적인 주제로 하고 있지만, 내면적 욕구는 진정한 삶의 추구를 위한 평화와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자아의식의 발현으로 보아야 하겠다. 후자를 자아의식의 미적 구현을 위한 강렬한 울부짖음으로 본다면, 이런 점에서 두 작품은 향수라는 공통점 외에 서로 자아의식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아의식의 한계성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山돼지, 매로 잡은 山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서정주「꽃밭의 독백」의 전문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동천」의 전문     「꽃밭의 독백」은 婆蘇斷章을 전제로 하고 있다. 파소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수행을 간 일이 있었다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이라고 미당은 밝히고 있다.   어쨌거나 전연 14행으로 짜여진 현대 자유 서정시이다. 이미지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1-6행, 7-11행, 12-14행으로 기, 서, 결의 3등분으로 나누인다. 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자아의식의 유한성을 노래하고 있다.     즉, '노래'가 구름까지 가기는 갔지마는 더는 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혀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활로 잡았든 매로 잡았든 산돼지나 산새들에도 입맛을 잃었으니, 모든 면의 한계성에 갇혀 있는 실존을 복합감각에 실어서 반복적으로 호소·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한계에 갇힌 자아를 직유법을 동원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소망은 간절하지만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한  발작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이와 같이 한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방법('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으로라도 출구를 찾아 나서겠다는 강한 결심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아실현의 한계에 부딪힌 자신의 간절한 고백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물낯바닥'은 수면(水面)을 바꾸어 표현한 말로, 미당이 처음으로 사용한 신조어(新造語)이다.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의 직유를 보아도 자아의식의 한계에 갇혀 있음이 분명하다. 헤엄을 쳐야 갈 데로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반면에「동천」에 나타난 자아의식의 한계는「꽃밭의 독백」과는 사뭇 다르다. 한계에 부딪히거나 갇혀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기 그지없다. 무한한 가치에의 경외심을 자신의 자아 속에 내포하고 있는 "우리 님의 고운 눈썹"에 이입시키고 있음을 본다.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의 행위에서 오는 반응을 통해 자아존재의 무한한 가치부여를 돋보이고 있으므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넉넉히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서운 새가 눈썹을 비끼어 가는 행위는 눈썹을 밟고 간다는 의미와는 절대 상반되는 것으로써 눈썹에 무한한 존재가치를 인정하면서 오히려 외경심까지 가지고 비끼어(피해) 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이만큼 자아의식의 존재를 고무시킨 작품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자아의식의 내면적 승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서시」의 전문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윤동주「참회록」의 전문     「서시」에는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괴로워하면서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 즉 고난과 역경의 길을 가겠다는 자아의식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자아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찾을 일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현실인식을 확실하게 다듬고 있다. 여기에 자아의식이 내면으로 더욱 분명하게 앉혀지고 있음을 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은 일찍이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 나타난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중 二樂에 속한다.     1연에서 깊은 시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의 3, 4행이다. 사실 '잎새에 이는 바람' 정도라면 괴로워 할 대상으로까지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토록 섬세한 감정의 승화로 우리를 울리고 자신도 울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자아의식이야말로 참으로 처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시가 쓰여질 당시의 우리 민족의 자아의식의 표본이랄 수도 있다.     「참회록」에는 망국의 부끄러움으로 뒤덮인 역사 속에 유물로 욕되게  남아있는 자아의식이 뚜렷하다. 이 부끄러운 고백을 후회하면서 자아를 자아다운 자아로 구현하기 위해 '구리거울 속에 낀 녹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그러면 역사의 떳떳한 십자가를 지고 갈 홀로의 자아가 구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분명한 자아구현이 내면에 자리하므로 내적 자신의 모습 발견에 성공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자아구현은 조국광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즉, 개인적 욕구와 공동체의 욕구가 병행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우리 민족 전체의 자아가 시인 자신에게 집약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자아의식의 신앙적 승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의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박두진「해」의 전문 百 千萬 億겁 찬란한 햇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壓倒하여 주십시오.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쨍, 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心魂, 全 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까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오.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오. 핏방울이 더욱 더 곱게 하여 주십시오.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主. 당신은 나의 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는 것을 아셨습니까.   또약볕에 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 박두진「오도」의 전문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 박두진「하늘」의 전문    「해」에는 해가 솟기를 기다림, 달밤을 싫어함, 청산을 좋아함,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보고 싶은 자아가 절절이 노래되어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광복에의 염원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애타는 갈구이다. 기독교적이라면 그리스도적이요, 메시야적이다. 어둠 속에 억눌린 자의 확실한 해방에의 염원이다. 그러므로 해는 메시야적 절대적 대상이요, 모든 생명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으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이는 복음의 예언자로 불려지는 이사야의 예언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인간 성품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유(類)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궁극적으로는 전 피조물을 변화시키게 된다(롬18:10 이하). 특히 여기 표현된 사실들은 평강의 왕 메시야가 통치하게 될 왕국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도 우리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면 즉, 해가 솟아오르면 이런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서정적 산문시로 개념어나 추상어의 다양한 구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의성어 의태어 활유법 명령법 반복법 종결어미 사용 등을 통하여 자신이 소망하는 자아실현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오도」에서 볕만 쬐는 나 홀로의 광야(曠野)에 핏덩이로 주님을 향해 꿇어 있는 구도자의 모습(자아)을 본다.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 영(全靈)이 주님에게 닳는 지극히 간절한 자아,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이 만나는 장면의 회화적 감각이 반복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땀어린 기도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직 주님을 향해 있는 인생의 모습이라는 간단한 시상을 바탕으로 이와 같이 절절한 믿음의 읊음을 통해 만백성의 공통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박 시인은 이 시에서와 같이 절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며 살아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午禱」는 기도 중에서도 가장 열심 있는 기도(강청기도)를 의미하기 위한 박 시인 나름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나(자아)의 신앙적 승화로 하늘 즉, 주님과의 주객일체를 이룬다. 이것이야말로 자아의 승리인 동시에 곧 믿음의 승리이다. 믿음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될 때 나타나는 신앙적 신비이다. 즉, 1+1=2이므로 완전한 것이 못된다. 주(1)와 객(1)이 일체가 되는 비결은 1+1로는 될 수가 없다. 1×1=1이 되는 비결을 이루어야 한다. 「하늘」은 이런 이치로 신앙적 자아실현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거(존재)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이,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에 쓰인 점층적 수법은 매우 적절한 강조법이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게로 온다" 시공을 초월한 곳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 오셨으니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절대자를 만나는 인생은 자아실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을 살펴보았다. 향수에 배어있는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한계성, 내면적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신앙적 승화 등, 여기서 취급한 작품만이 아니라 자아의식의 정서적 승화는 다른 시작품들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자아의식은 결국 구원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징검다리처럼 인간을 구원의 길목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은 구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확실한 이정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공헌하는 것 중에 자아의식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86    의견, 이견, 무견 댓글:  조회:6169  추천:1  2014-07-30
                                              의견, 이견, 무견                                                          진 언                                                                                                 다들 알고있는 의견, 이견, 무견에 대한 어휘풀이식으로 글머리를 장식한다는것은 별로인데 딱히 좋은 서두가 떠오르지 않는데다가 자초에 화제를 이렇게 잡았으니 그냥 서두로 대체하려한다.《국어사전》에서 의견(意见)은 어떤 사물,현상에 대하여 자기 마음에서 판단하여 가지는 생각이고 이견(异见)이란 다른 의견이나 생각이며 무주견(无主見)은 일정한 자기주장이나 견해가 없음, 주장이 담긴 의견이 없음이라고 풀이하고있다. 그런데는 어떻단말인가?    뜻풀이는 풀이대로 맞겠지만 의견, 이견, 무주견에는 심오한 인생철학문제가 스며있기에 화제거리가 된다. 우리가 가볍게 제기하는 의견은 흔히 건설적인 의견 즉 어떤 사람 혹은 모종 일처사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와 의견을 가리키는 건의(建议) 혹 제의와 맥이 통하는 말로서 민감한 문제나 중대사가 아니라면 받아들여질수도 있고 묵살될수도 있는데 때로는 엄정한 문제로 될때도 있다.     비평가를 찬양하는 동상이 세워진적은 없지만 진리의 횃불은 비평속에서 타오른다. 그러나 그 횃불은 비평자 자신을 훼멸시키기도 하였다. 례하여 강직하고 대바른 로장 팽덕회를1958년“려산회의” 에서 일패도지시킨 “만언서(万言书)ㅡ기실 3700여자였음”도 후에 평가되다싶이 완전히 정당한 의견서였지만 그의 운명을 뒤번 져놓았던것이다. 중국고대에 “문관은 간하여 죽고 무장은 전장에서 죽는다.(文死谏,武死战)”는 격언대로도 아니였다.    포연탄우가 자욱하던 가렬처절한 조선전쟁에서 발톱까지 무장한 미군과 자웅을 겨룬 불사조였던 팽장군이“황제”에게 직접 간한죄로“대역부도” 한자로 락인찍히여 매몰당하게 되였으니 력사가 너무 가혹한 롱담을 한것이 아닌가? 특히 다른 사람은 다 평판해도 팽덕회만은 영원히 평판못한다고 선포하던 류소기가 몇해후 자신이 더 처참하게 당할줄을 알기나 했을가? 자신도 최고권위의 비위를 거슬리는 이견(异见)을 가진것이 죄가 되여 계하수가 되였으니 역시 남잡이가 제잡이가 되는건가?     이처럼 이견은 의견보다 더 아슬아슬한 판국을 불러오게 된다. 볼떼르는 “너의 의견엔 반대하지만 이견을 말할 권리는 인정한다”라고 하였지만 나를 거스르는 언동 이라면 그것이 의견이든 건의이든 이견으로 여긴 자들이 너무많다는것을 력사는 기 억하고있다. 의견은 건의와 맥이 통하지만 다른점도 있다. 의견은 문제를 제기한자가 주동성을 장악하고있으며 가능하게 제출된 의견에 대한 반박일수도 있다. 건의는 의견과 달리 후자가 주동성을 쥐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건의의 방식으로 전자의 사상상에 빈구석을 보충하려 한다.     듣는자의 편견, 자존심, 호악의 감정에 따라 의견이 이견으로 감지될수 있다. 의견주의 자체는 잘못이 없지만 이견주의는 문제가 좀 달라진다. 비판은 차분하게 받아들여 다시 자신을 성찰해보고 칭찬은 겸손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아량 있는 사람을 력사는 많이 기억하고있지 못하다. 다른 사람의 한차례 칭찬은 긍정만이 아니라 진실로 자기를 확인해보는 계기로도 되건만 그걸 몰라서가 아니였다. 자신의 준비가 충분하면 어떤 일에서든 도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느끼고 믿는 한계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신의 자기발굴의 괭이는 마음가 짐이다.     지난시기,“적들이 반대하는것이면 우리는 무조건 지지하고 적들이 지지하는것 이면 우리는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이 무엇을 말하면 무엇을 반대하는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면 나는 저렇게 한다는 식으로 나서면 인간성문제에 소 급된다. 더구나 내가 남보다 아는게 많다는식으로 이견을 주장하는것은 실제상에서 파괴적인 궤론으로 변질하고만다.     이견을 가진 사람은 거개 “이단자(异端者)”로 락인찍히기 십상이다. 사전에서는 전통이나 권위, 세속적인 상식에 반발하여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움으로써 무리로 부터 고립되여있는 사람. 어떤 학설이나 종교, 사상 따위의 이단을 믿거나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해석이 일방적이고 무단적인것같다. 로마제국시대 교황통치하에서는 무릇 교황을 반대하면 모두 이교도(异教徒)로 점찍혔다.     자초에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지동설”을 지지하였다가1633년 6월 22일 로마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나이 70에 대주교앞에서 무릎을 끊고《성경》에 손을얹고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반하는 맹세문을 읽었다.“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주위를 움직인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저와 무관합니다. 그것은 저에 대한 오해입니다. 마땅히 저에게 쏠리는 강한 의혹을 모든 기독교인의 마음에서 없애고 싶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말합니다. 이런 잘못된 개념과 이단적인 사상을 저는 저주하며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모든 오류를 혐오할것입니다.”     최고의 과학자가 자기 자기 신념과 량심에 어긋난 맹세를 하고나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리는것으로 자신의 자괴감을 위로했다. 그러나 브루노는 달랐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요, ”우주는 끝이 없는 무한공간이라는 견해를 위해 그는 목숨을 걸었다. 화형선고를 내리는 재판정에서 "지금 이 선고앞에서 떨고있는 자는 바로 당신들 판사들이오."라고 웨치며 절세의 “이단자”로 남았다.     고대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소당하고 나중에 사형판결을 받아 독배를 하고 죽었다. 그의 죄명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것이였다. 이단자로 락인찍혀 박해받은것은 아니지만 역시 새로운 사상관념을 가지고 선전한 “이단자”라고 할수도 있다.     무주견자란 또렷한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데 핫바지라는 말로 비유되기도 한다. 모르면 약이요 아는게 병이요 그래서 무식이 상팔자라 무주견이면 평안무사하기에 무주견만큼 요긴한 처세술은 없다. 무주견인 사람은 구설수에 걸려들 일도 없고 시시비비에 랑패볼일도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타방에서는 아무 주견머리도 없는 사람이 기실 매우 무서운 사람이다.      무주견자들은 자기의 독립적관점이 없기에 다른 사람들이“옳소”하면 덩달아 “옳소”하는데 일을 처리함에서 우유부단하여 호인의 가면구속에 진면모를 알아내기 어렵다. 마지막엔 자기만 해치는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련루시키므로 이런 사람들은 무척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10년동란”시기에는 누구나 무주견의 사람으 로 살수밖에 없었다. 특히 세끼밥먹듯 뒤몰리던 사람들도 비평과 자아비평속에서 정 신이 얼떨떨해져서 무주견일수밖에 없었다. 시비가 혼돈된 시대에 누군들 “파리가 코 끼리와 대전”하는 용기로 흑백을 가를수 있었겠는가?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하였지만 무주견자는 더구나 담장우에 갈대로 비유된다. 무주견자인즉 무원칙자이다. 다른 사람이 관점이 옳은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를 부정하고 곧 동조한다. 무주견자가 좋은 사람들과 뒤섞이면 “호인”으로 부상되고 나쁜사람들과 한통속이면 더욱 나쁜사람이 되여진다. 이는 그들의 담장우에 갈대의 특점에서 결정된다. 무주견자들이 많으면 국민적인 집체무의식이 형성된다.     바람따라 돛을 달고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자들도 본질적으로 무주견자들이다. 무주견자들이 나쁘게 변하기시작해도 의연히 좋은사람으로 보인다. 비극은 곧 이로써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횡포무도한 악한들과 숨겨진 음흉한 자들을 경계해야 할뿐만 아니라 시종 “쫑대”가 없는 무주견자들도 경계해야 한다.                                                  2013년 6월 20일
385    (진언수상록 19 ) 우리의 역설시대 댓글:  조회:5178  추천:0  2014-07-26
                                                          우리의 역설시대                                                                     진 언       우주만물은 천태만상, 류류별별이지만 자연발생적이고 고유한 흥망성쇠의 섭리대로 순서점진하는데 인간사회에는 모든것이 인위적이여서 역행하는 현상도 많고 또한 그만큼 인생일사에 역설적인것이 많게 되였는가? 표층적역설이든, 심층적역설이든, 상황적인역설이든, 시적역설이든 역설적인 우리가 바로 역설의 시대에 사는듯싶어 역설타령이 절로 나온다. 늙은이가 죽고싶다는말,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는다는 장담, 장사군이 밑졌다는 소리는 세상 제일 큰 거짓말이면서도 결국 인간심령의 역설이다.     그뿐이랴, 장사군은 내심 받아낼만큼의 값을 매겨놓고도 눅거리라 “싸구려”를 고 아대고 위군자가 늘 군자연하고 탐관일수록 청렴을 선양하고…층집들은 우후죽순마냥 일떠서도 빈집이 많은대신 집없는 사람이 지천이고 물질문명은 날이 갈수록 자랑떨 치는데 도덕은 미끄럼질타고 정으로 사는 세상이라지만 풋풋한 인정을 베풀지 않는 사람이 자기만 쏙 빼놓고 인정세계가 점점 사막화되여간다고 개탄을 배배꼬고…     아츠랗게 치솟은 층집들에 창문은 다닥다닥 나있건만 사람들의 마음의 문에는 경계심이라는 문풍지로 도배되여있고 한복도에 출입문을 마주한 이웃간에도 생면부지가 보통이라 이웃이 사촌이란 미풍량속은 옛말책에서나 찾아볼수 있고 네거리는 넓어져서 앞이 확트인것같지만 길손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고…     돈을 많이 벌수록 탈세루세에 잔꾀를 굴리고 거부는 부지기수인데 자선사업에 이름난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모르고 있고 넘치도록 가져서 뽐내면서도 욕망은 퇴직할줄 모르고 눈부신 유혹의 세계에 자극이 강렬하여 흥분점은 많지만 지적인 감동은 줄어들고 삶의 질향상에 열심하지만 무흥취, 무감동의 시대인듯 비리에도 덤덤하고 큰집. 큰집하지만 단란히 모여앉아 식사하고 담소할 식구들은 달랑 둘인 집이 많고...     점수통수로 인재라는 “高材生”은 희출망외로 많아져도 실무능력배양은 뒤전에 밀리고 학벌은 어마어마하지만 물없는 저수지같은 유명무실의 학자들이 많아지고 오밀조밀 영양소 따져가며 진수성찬을 미식하지만 의난잡증이 난당이고 세상은 만화 경같은데 절로절로 웃음나는 정경이 신기루같이 희한하고 입에 걸리고 귀에 걸리는 말인즉 사랑타령이건만 그만큼 리혼행진곡도 날이갈수록 우렁차고…     아이를 위해 코리안드림인지에 열광하는만큼 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는 가정비극이 련속부절이고 얻은것이 많다고 배를 내밀때 잃은것이 등뒤에서 양공질하고 정화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결벽증”이 우심하지만 환경오염이 극심함에는 한눈 감고있고 처처에서 핵분렬의 시대를 자랑하지만 고정관념, 편견은 금성철벽으 로 굳어있고 쭉쭉 빵빵 몸매들은 훤칠해도 인격은 난쟁이가 되는줄 모르고…     유흥업소는 어서오라 손짓하는데 지적인 쾌락은 줄어들고 가진자는 코노래가 절로나서 흥겨운데 못가진자의 애탄과 눈물은 마를날이 없고 화해사회건설을 지향하지만 인간관계는 미묘하게 배탈리고 팽팽해지고 구두뒤축은 턱없이 높게 설계되여도 문 화소양추구는 밟고다니고 가슴을 높이는만큼 정조관념은 곰팡이낀 전통으로 치부되고 비웃음은 확연한데 진심된 미소는 숨박꼭질하고 눈에 보이느니 약방이고 명약, 보약, 전통밀방약광고가 전단처럼 흩날리는데 아픈타령 늘어나고 의료비는 하늘낮다 치솟건만 치료효과는 미비하고 의료설비는 현대적인데 의료사고는 그칠줄 모르고…     입에서는 미사려구가 청산류수처럼 쏟아져나와도 흉금을 치는 진언을 듣기어렵고 옷차림은 명패로, 장신구는 번쩍번쩍 눈부신데 이미지는 회색이 되고 감각을 따라 가자는 구호속에서 리성은 뒤주춤하고 박애를 부르짖지만 리기심은 극한에 이르고, 무슨무슨 전문가들은 늘어나지만 미해결문제는 더 많아지고, 가진것은 더 많아졌지만 소유욕은 더 갈증에 모대기고…비리가 활개치니 정의가 뒤걸음치고…     개체간만 그런가? 인류가 달에 오르는 고기술을 과시하지만 지구촌이라는 가원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리익집단으로 나누어진 민족,국가간에도 언필칭 민주, 인류공존 을 표방하고 평화만세가 지동치건만 미사일이 터지는 소리가 더욱 천둥치고 민주 건설의 기치아래 자원략탈이 앞장서고 기아와 살륙이 판을 치는 지구촌…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空卽是色)”이 기본교리도 되여있는 불교교리에도 기실 역설적인것이 퍼그나 많다. 례컨대 “문자를 세우지 말아라(不立文字)”,“입만 열 면 그르친다(開口卽錯)”,“마음을 비워라(無心)”,“욕심을 내지말라(無慾)” “모든 집착을 다 내려놓아라(放下着)”라는 말에서 “문자를 세우지 말라”는것 자체가 이미 문자를 세운것이요“입을 열면 그르친다”고 설교하나 스스로 입을 열었으며 “마음을 비우라는 생각”이 다시 마음을 채우게 되고“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욕심을 내게 되며 “모든 집착을 내려놓겠다”는 집착을 갖게 되니 사이비한 역설이 되는것이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지만  결국은 신도 역설적존재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그런 존재상황으로 믿는 한 부정할수도 해결할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지금 파악할수 있는것은 단지 인간이란 이 우주공간에서 해명이 불가능한 하나의 존재양상일 따 름이라는것이다.“절대주체”,“절대자아”를 부르짖지만 그게 실현가능한 일인가? 그것은 곧 자아에 대한 집착(자아에 대한 무한긍정?)일뿐 어디까지나 자아표방이고 자아독백에 불과하다. 절대적무한이란 결국 인간만이 상상하는 경지이며 결국은 그것 들은 인간의 자기인식, 자기독백, 자기긍정이라는 관념의 변종일뿐이다.   “영원불멸의 존재는 있다고 할수도 있고 없다고 할수도 없다”는 말은 인간의 역설적존재상황 자체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진술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갈대라고 지칭되는 인간인 우리는 절대적자아를 추구할할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 그리고 자연과 함께 보다 조화로운 관계속에서 더불어 화해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것, 그런 환경속에서 나와 너의 행복이 동시에 성취되도록 노력하는 일밖에 더없다. 인 간이란 아무리해도 대자연의 일부이지 자연밖에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이 지구촌의 주인이 된것은 물질문명을 이루었기때문이지만 영원토록 이 세계의 절대주체로 군림할수 없다.  신화시대를 거쳐온 인간은 문명의 려명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만물의 령장임으로 군림하면서 스스로를 절대시하였기 자아에 심취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꿈에서 깨여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하지만 너무나 늦었다. 존재론적으로 역설을 탈출할수도 없게 되였다.      인간존재가 역설을 벗어나는것은 역설을 만들지 않았을 때에나 가능하였을가? 현재의 력사단계에서 인간은 온갖 욕망에 떠밀려 너무 앞질러 나갔고 자업자득의 역설적상황속에서 자아구제불능이 되고말았다. 칸트는 “자연의 력사는 선량으로부터 시 작되였다. 한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작품이기때문이다. 자유의 력사는 악으로부터 시 작되였다. 한것은 그것이 인간이 창조하였기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인류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유를 운용하였을 때 큰 잘못을 저질렀다. 즉 금과를 잘못 따먹은것이다.” 라고 쓰고있다.     석가모니는 가짜인 자기를 버리고 진짜자기를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아타(我他) 일체의 진짜 자기, 바로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자아를 벗어던 “우주적자아”를 누가 실현할수 있는가? 원래 도리는 간단하다. 오직 타자가 있음으로써 내가 있으며 불완전한 존재인 나와 타자가 공생함으로써 자유로워지고 절대 혼자로는 이 지구에 존재할수 없음이다. 아, 참으로 기특한 령물이지만 반은 천사요 반은 악마인 인간이 엮어가는 무섭고 엄중한 진실이여! 진실의 오묘함이여!                                                        2011년 10월 10일
384    (진언씨수상록 18 )고사신편 네댓편 댓글:  조회:5280  추천:2  2014-07-22
                                                     고사신편 네댓편                                                                                                 진 언       력사서에는 현대인들이 미치지 못할 수많은 현자들이 기록되여있지만 욕망으로 빚어진 현대인들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리해할수 없고 용납할수 없는 현인군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을 경이원지함은 제할탓일세 폄하할수는 없는것이요 더구나 폄훼할 자격이 없으니 기껏해야 “딱한 사람들”이였다고 안타깝게 여길수밖에 없다. 사서를 펼쳐놓고 한사람 한사람 줄을 세울것도없이 얼핏 떠오르는 실례만 들자.     우선 범려(范蠡) 를 참으로 딱한 괴재라 하겠다. 와신상담하는 월왕구천을 보좌하여 오나라를 멸하고 월국의 중흥을 이룬 공훈이 력력하니 권력을 향수해야 명실상부하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그는 고관대작의 후한 록도 사양하고 배를 타고 북상하여 제나라에 가서 장사군이 되였는데 워낙 비범한 인재 인지라 일대상성(代商圣)이 되였다. 제나라에서 그가 재능이 비범한줄 알고 재상으로 모셨다. 그러나 얼마후 곧 사직하고 제나라를 떠나 정도(定陶)에 가서 장사질을 하였다. 그리하여 후세사람들은 그를 “도주공(陶朱公)”칭하였다.     그의 선택이 과연 명지한가? 가치관문제는 아닌가?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현시점에서 분석한다면 범려어른은 정말이지 관직을 버리지 말아야 했다. 대권을 쥐였는데 축재할 기회가 없으며 시간이 오래걸릴가봐 걱정인가? 나아가면 권력봉을 휘두르고 들어와 일확천금할수 있는 전권(钱权) 교역의 오묘함을 모르고 처첩을 거느리고 일세영달의 즐거움을 마다했으니 굴러온 복을 제발로 걷어찬격이 아닌가?     서시에 대한 애정에서도 그렇다. 서로 첫눈에 정이 들어 금쪽같은 녀자였건만 “애국”의 미명하에 사랑마저 팔아버렸다. 미인박명이라고 나라를 위해 한몸을 바친 서시에 대해 후설이 여러가지인데 가령 전해오는것처럼 범려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혼란한 틈에 서시를 데리고 북상하여 만년을 함께 했다면 사랑했던 자기의 녀자를 늦게나마 책임진 다정한이라 할것이다. 애첩 진원원(陈圆圆)원을 빼앗긴데 노하여 마침내 청군을 끌어들인 만고역적 오삼계와는 대조적이나 역시 석연치는 않다.     일언이페지하고, 랭정하게 생각하면 범려야말로 사람이 크게 공명을 떨치면 그 자리에 오래있지 못한다는 처세의 진수를 꿰뚫었으니 과시 현인이다. 거금을 먹이여 벼슬감투를 얻어쓴 사람들, 어렵사리 한자리 차지했을 때 한몫 단단히 챙겨야 한다는 현대관리들의 가치관에서 평가한다면 이래저래 참 딱한 사람이 아닐수 없다.     한광무제시기,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높은 동선(董宣)이라는 사람도 불가사의하다고 하겠다. 동선이 지방관리로 있을때 아첨할줄 모르고 집법에 일호차착이 없이 엄정하였다. 후에 락양령(洛阳令)으로 부임하였는데 마침 류수의 누이인 호양공주의 노복이 주인의 세력을 등대고 백주대낮에 공공연히 살인행각을 벌렸다. 동선이 가차없이 잡아들여 문죄하는데 호양공주의 저애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러나 동선은  호양공주에게 흉범을 감싸는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훈계하고 즉각 처결해버렸다.     호양공주의 공소에 대노한 류수는 동선을 잡아들여 누이의 면전에서 때려죽이려 작정하였다. 하지만 계하수가 된 동선은 추호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고 강개한 어조로 변호하고나서 대궐기둥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피투성이가 된 동선의 얼굴을 얼없이 굽어보다가 감동먹은 류수는 죄를 사면했다.     그러나 누이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동선더러 사죄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동선은 단연히 거부하였다. 류수는 무사들을시켜 억지로라도 머리를 조아리게 하려하였으나 동선은 종시 고개를 꺽지않았다. 하여 그는 “강항령(强项令)”라는 탁호를 가지 게 되였다. 물론  현대탐관들은 가능하게현대인들도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엄정하게 법을 다스린 그를 시야비야할수는 없겠지만 속으로는 림기응변능력이나 령활성이라곤 전혀없는 불통관리라고 왼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찰것이다.     일인천하에 황제의 어명이라면 껍적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할 신하로서 언감생심 거역했을뿐만아니라 황친국척(皇亲国戚)에게마저 득죄하였으니 처세술마저 제로가 되였은즉 앞으로 고배를 마시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그를 위해서는 딱한 심성이요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사람들이 이렇쿵 저렇쿵해도 이미 백골이 진토되여도 그 정신은 영생하리니 얼마나 “딱한”가 ?!     양진(杨震)이라면 사람들은 동한시기 동래태수 동진이의 각금(却金)“사지(四知ㅡ天知、地知、你知、我知)”라는 이야기를 떠올릴것이다. 화설, 양진이 공무로 창읍현을 지나게 되였는데 현령 왕밀이 양진이 전에 자기를 천거해준 은혜를 갚으려고 심야에 황금열근을 사례로 바치였다. 왕밀로서는 의례당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오판했다. 양진 은 한마디로 거절했던것이다. 이에 왕밀이 “밤이 어두워서 아는자가 없나이다.”라고 하자 양진이“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알고있는데 어찌모른다고 하는고?”하고 퇴박을 놓았다. 왕밀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별수없이 황금을 거둬가지고 물러갔다. 양진의 “각금(却金)”사건을 두고 현대인들은 동선이가 마음은 굴뚝같으면서도 혹시 들통이 나면 오사모를 잃거나 목숨을 잃가봐 두려워서 그냥 거절한것이라고 해석할것이다.     송조때 변법으로 유명한 왕안석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그의 변법이 실패했지만 “천하의 재물을 고루나누어 빈한한 백성이 없도록 한다(均天下之财,使百姓无贫)”는 리상을 실현하려 하였으므로 크게 민심을 얻었더랬다. 그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만큼 동류들에게 외목이 나기까지 하면서도 청렴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송신종의 신임을 얻어 권세가 당당하였고 봉록이 600-700문(文)이였는데 현재 인민페로 9만원(2011-02-17新华网)이 되였지만 자기의 관저도 없었고 벼슬에서 물러난후 금릉교외에 “반산원(半山园)”이라는 집을 지었으나 담장도 없이 허술하기 짝이없는 집이였다. 그 집에서 8년을 살다가 그나마도 헌납하고 세집에서 림종하였다. 호화형 아빠틀르 수십채씩 챙기고도 별장에 정부들을 숨겨놓고 질탕거리는 수많은 탐관오리들의 눈에는 왕안석이야말로 살줄모르는 맹꽁이로 여겨질것이다.     명나라때의 저명한 청관 해서(海瑞)도 그렇다. 그리고 참말을 할것을 제창한다는 권위자의 말을 곧이들은 오함이 격앙된 심정으로 일필휘지하야《해서가 황제를 욕하다(海瑞骂皇帝)》,《해서파직(海瑞罢官)》등 문장과 극본을 썼는데 강청의 모해로 모진 박해를 받다가 원혼이 되였으니 력사를 꿰뚫어본 사학가로서는 딱하지 아니하랴, 아니라면 승자가 기록하는 력사의 아이러니가 되는건가?       물론 상술한 일부 고인을 “딱한 사람”들이라고 하는것은 역설로서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개화한 현시대인들이라도 범려의 명지함이나 동선처럼 강직하고 대공무사하여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회해충을 제거한 해서의 장거나 청렴한 왕안석을 본받을 사람이 몇몇이나 될가?     소크라테스는 “미덕은 지혜”라고 단언하였다. 미덕이란 도덕품질의 총화이다. 인간의 도덕수양을 결정하는것은 곧 지혜이다. 한사람의 도덕수양은 다분히 인생의 지혜에서 형성되는것이지 의식형태가 아니다. 그처럼 의식형태와 인생의 지혜는 별개의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두뇌에 속한것이고 후자는 심령의 문제이다. 아니면 속은  굴뚝같이 시커매가지고도 입만 벌리면 렴결봉공을 외우는 위군자들이 득시글거리겠는가? 상술한 고인들이 딱하기는 했어도 만고불후의 지자들이라 하리라.                                                 2010년 6월 21일
383    필생의 기업 —가정 댓글:  조회:5904  추천:1  2014-07-18
가정이란 “모든 공동체의 근원이며 원형”으로서 매 가정의 평화가 온 나라의 평화를 쌓는다고 한다. 가정ㅡ집은 언제나 조건없이 흔쾌히 서로의 가슴과 따스한 품에 안겨 위안을 받을수 있는 안식처이다. 다사다난한 인생마당에서 힘겹고 지쳐 움츠러들면 가족의 위안이나 격려를 받으며 상처받은 령혼과 심신을 달래고 재충전하여 다시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나설수 있는 용기를 주는곳이 내 집이다. 타향만리 떠도는 서러운 나그네가 가장 많이 떠올리는것은 가난했더라도 금슬 좋았던 안해부터 떠올리게 되는 둘도 없는 내 가정이리라. 집에 있을 때 느끼지 못하던 행복을 밖에 나가서 내 가정에 대해 절감하는것은 천리(天理)이다. 그래서 아무리 푸짐한 연회상도 곱돌장사귀가 놓인 내집 밥상보다 탐탁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것을 인생을 경영한다고 한다. 경영이라는 시점에서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세우는 “기업”이 가정이고 필생의 기업경영이 된다. 인생의 정도를 걷는 사람들로 말하면 필생의 인생가꾸기ㅡ가정이란 이 기업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리득이 많고 인생길에 리정비로서 참으로 보람찬 투자기업이라 할수 있겠다. 가장이라 칭하는 남자로 말하면 녀자-안해라는 존재가 그처럼 소중할수 없다. 남자는 홀아비로 되면 절반 남자이지만 녀자는 과부가 되여도 완정한 녀자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과부집에는 은서말, 홀애비집에는 이가 서말이라는 속담까지 만들어진 것이 아니랴싶다. 가정이 있는 남자는 가정(안해)이 없는 백명의 남자들에게 없는 인륜지락을 넘치게 향수하고있는것이다. 한 가정의 운행을 보면 개인의 인생극장에 남녀주인공의 인간상을 여실히 읽을수 있다. 남편은 안해에게서 가장 훌륭한 애아버지라는 말을 들을수 있다면 그는 돈으로도 바꿀수 없는 가장 당당한 남자가 되는것이고 안해는 남편에게서 당신과 결혼한것이 제일 잘한 선택이였고 다시 없는 행운이였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릉라비단을 휘감고 금은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살지 못하더라도 가장 행복한 녀자가 된다. 일컬어 성공했다는것은 무엇무엇을 다 제쳐놓고 우선 결혼생활에 성공한것을 첫손에 꼽아야 할것이 미만한 결혼, 화목한 가정생활이여야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고인들이“치세선치국,치국선치가,치가선치인, 치인선치기, 치기선중립 (治世先治国、治国先治家、治家先治人,治人先治己,治己先重)”천고절창을 내놓았던것이 아니랴. 그래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받들리기보다 가정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되라고 한다 가정경영에는 크게 물질적경영과 정신적경영이 있다. 한 가정을 유지하려면 우선 경제건설이 선행되여야 할것은 자명한 일이다. 근면하고 검소함은 치가의 근본이요, 화목함은 한 가정의 복음이다. 가난하더라도 집안이 화목하면 든든한 대들보를 얹고 사는 초가와 같다.부유는 남편의 허파에 바람들게 하고 가난은 남편의 가슴에 가족애를 심어준다. 물질창조는 토대지만 그 목적은 종국적으로 정신적경영을 위한것이다. 하긴 상품경제시대에 들어와서 돈깨나 벌어서 성공했다 싶으면 뒤미처 “개혁” 하는것이 가정이다. 더 실질적으로 말하면 조강지처를 개혁해 치우고 젊고 아름다운 녀자로 갈아치우는것이 가정혁명의 기본모식이 되는 판이니 가정이라는 이 기업도 수시로 경영난에 부딪치고 파산을 선고하기도 하니 가정이란 결코 경영이 쉽지 않은“기업” 이다. 그 어떤 성공보다 가정에서의 성공이 우선이며 그 어떤 재부보다 자녀들이 가장 큰 재부이고 인생에서 받아안는 가장 값진 훈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가정내에서는 욕에서 기인한 다툼같은 갈등, 애증이 교차되기 마련으로서 아량과 관용으로 무마하며 사는게 가정식구요, 인생이다. 그만큼 천륜의 섭리나 인간이 맺은 인륜을 거스르지 않는 도리와 무조건적인 헌신이 필수적이 된다. 가느다란 철사나 실따위로 여러가지 모양의 금속쪼각이나 나무쪼각을 매달아 미묘한 균형의 아름다움을 타나낸 조형품을 외래어로 “모빌”이라 한다. 가정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모빌이다. 이 모빌은 움직이고 있으며 운동중이면서도 한형태의 틀속에서 변화하는 물체의 집합체를 의미하는것으로 이 안에서 가정성원들이 지적, 감정적, 심리적으로 융합되도록 얽어매주는 무형의 끈-혈연이 소중하다. 가정경영에서 사랑의 결실로서의 자식은 무가지보이자 가장 아름찬 첫수확이다. 자식은 끝없이 귀찮게 구는 존재이지만 형언할수 없이 곱기도 한 생명체이다. 가난한 집에 넘치는 아이들은 시름거리이면서도 부동산투자와 같다.한사람의 인생에 최종 승부도 세상을 다 할 때까지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서 결정된다. 정신적경영에서 제일 난제는 자녀교육문제이다. 항간에는 자식농사만큼 큰 농사도 없고 그만큼 마음대로 안되는 농사가 없다는 말이 있다. 자녀들을 반듯하게 키워 훌륭한 인재로 사회에 내놓는다는것은 신이 부모에게 내린 가장 무거운 의무이다. 가장 확실한 만세유전의 유산은 훌륭하게 키워낸 자식들이다. 육신이 성한 남자(녀자)가 아버지(어머니)가 되는것은 어렵지 않으나 아버지(어머니) 다운 아버지(어머니)가 되기는 어렵다. 특히 자식에게 스승같은 아버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자기를 아는 현자라해서 자기 자식을 잘 아는 지자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령혼의 문을 여는 열쇠가 무엇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귀여워하는것으로는 그들의 령혼속으로 들어갈수는 없다. 그런데 현대부모들은 자녀교육에서 돈이면 만사대길인줄로 알고 로무일군으로 나가 돈을 벌어 자식을 섬기면서 효자현손이 되기를 기원하는데 부유함이 곧 효자의 온상은 아니다. 자식에게 돈을 물려주는것은 많은 경우 아름다운 축복이 아니였음을 력사가 보여주었다.자식은 집에서 노세타령이나 부르며 빈둥거리는데 외국에서 피땀젖은 돈을 꼬박꼬박 부쳐주는 늙은부모들은 인생의 만년에 수정할수 없는 패필을 쓰고있는것이다. 아버지에게 많은 저축이 있는 한 불효자가 집을 뛰쳐나가지 않겠지만 부모 돈지갑을 훔치는 자식이 많은 현시대이니 말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조선족가정위기로 인해 가심화되는 조선족사회의 붕괴위기이다. 가정 하나하나가 합쳐져서 우리의 민족사회를 이루는데 출국붐이 일기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여있던 가정들이 파멸로 치닫고, 아니 파탄의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다는것은 민족군체의 존재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어른들은 제 좋은 멋에 리혼을 밥먹듯이 해대는데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자기 자식들에게 옮겨진다.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서둘러 사악한 세상을 알려주는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물론 그런 불미한 일을 전수하기 위해 리혼하는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눈치로 터득한다. 마치 우리가 남의 눈길을 의식하듯이 어린아이들은 무엇이 선이라는것을 말하지 못하지만 확실히 악에 대한 느낌이 있고 마음드는 사람을 분별하고있다. 어머니란 정체적으로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그러나 현시대 어머니이기를 그만둔 녀자도 부지기수이다. 아이들은 좋은 행동은 잘 따르지 않지만 나쁜행동은 먼저 배운다. 어머니의 젖을 쥐던 고사리같던 손이 장차 탐욕을 그러쥐려 할 때 역시 속세가 털어낸 먼지로 될수도 있다. 한 가정의 튼튼한 뉴대이며 미래이기도 한 아이들의 인격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경솔하게 가정파탄을 선택하지 말라. 자식을 사랑하거든 그들의 존재를 존중하라. 그들의 오늘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당면 조선족가정파탄의 위기는 민족의 존망에 직결된다.      연변일보 2014년  7월 17일자
382    (잡감록 77 ) 이른바 분석과 의도 댓글:  조회:4734  추천:1  2014-07-16
 (잡감록 77 )                             이른바 분석과 의도                                                                  진 언         옛날, 보고도 못본체, 듣고도 못들은체, 생각은 멀쩡해도 아무생각도 없는 맹충인체, 무엇인가 알리는듯 싶어도 아예 모르는체하고 그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살아지는대로 살던 무지랭이 농부였건만 구설수에 올라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외에도 귀에 걸어놓고 코걸이라 하고 코에 걸어놓고 귀걸이라 하던 때 내가 절치부심할만큼 가장 껄끄럽던 말이 소위 “분석”과 그에  이어지던 “의도”라는 말이였다.     무릇 생각하며 사는 정상인으로서 생각인즉 “분석하는 일”인데 왜 꺼리게 되였느냐? 무심히 내뱉은 말한마디도, 본능으로 한 행동도 일단 “분석”에 들어가면 무한히“상강상선(山岗上线)”, 소위 “계급투쟁의 새 동향”,“자본주의복벽”같은 공통어로 “무슨의도”냐고 닥달질할 때는 정말 일구난언이라 함구하면 침묵으로 항거하는 악랄성이 되고 해석하면 발뺌을 하는 변명이라 몰아주는데는 정말 죽을맛이였더랬다.     한가지 례를 든다면 성세호대하여 모아산아래 작은 마을에서조차 열화충천하던 이른바 “우경번안풍”을 대반격하던 때 남들이 신문에 난 말들을 열을 내여 외워대는것을 그저 듣기만하였다. 세상시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촌부로 알길이 없는데다가 그렇지 않아도 비판을 달고있던 나로서는 목에 무우가 걸린 황소처럼 두눈만 뒤룩거리며 열변들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려버렸다.     침묵은 금이라는 사치한 문화명언같은것은 들어보지도 못하였던 나로서 소진, 장의처럼 말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가봐 귀동냥만 하는터였는데 내게는 그때 침묵이 금이 아니라 오히려 화근이 되였다. 마을에서 한다하는 유지지사가 투쟁의 예봉을 내게 돌려서 “등소평의 대리인”이란 모자까지 씌우려들 때 어처구니없기전에 기겁초풍할 지경이였다.     이건 지렁이가 담장을 날아넘었다는격의 황당한 비약이 아니라면 개가 풀을 뜯어먹는 소리였다. 얼마후 정세가 180도로 바뀐후에 “번안풍”을 반격하는 농촌선봉대로부터 일약 열렬한 옹호자로 둔갑하여 무엇이 어찌구저찌구 당나발을 불던 그 낯짝을 보며 저절로도 한심해져서 혀가 닷발이나 나올벌했다…그래서 그런지 그 빌어먹을 “분석” 이니 “의도”니 추측따위에 반감을 가졌고 그 후유증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때 반란파들끼리 설전할 때 잘 쓰는 말의 한가지로 소위“도발(挑衅)”이라는 말이였는데 참으로 어마어마한 말을 롱담처럼 해대였다. 한어에서는 트집을 잡아 일을 만들고 충돌과 전쟁을 일으키려 기도하는것이라 해석하고있는데 어학사전(국어)에서는 남을 집적거려 일을 돋우어 일어나게 함,남을 집적거려 일어나게 하다 뜻이라고 해석하고있다. 일언이페지하고,     촌에서는 같은의미로 “왜 가만있는 사람을 짓거리니? 내가 약비해 보이니? ” 라고 말하였지 “웬 도발이냐?”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짓거리질이든 도발이든 남의 자존심은 도끼등으로 내려치면서도 제자자존심은 바늘에 약간 찔려도 아부재기를 치는 자들이“도발”이라는 개념을 잘 떠올린다.     보아하니 “내코가 석자나 빠진것”같은데 “특정국가”의 사사건건을 분석하느라 분주하고 의도를 추축하느라 뇌즙을 짜는데 “…되고있다는 분석이다.”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그런 분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의도로 분석되였다.”, “…는 것으로 풀이된다” “…라는 주장이 나왔다.”,“라는 관측도 나온다”는 등 주어가 없이 두리뭉실 아전인수하는 기량들을 보면 자연히 옛날 그 고명하던 “분석”,“의도”라는 말이 떠올려지고 랭소속에 오히려 열물이 나온다.
381    (진언수상록 17) 이런 찬가는 목쉬도록… 댓글:  조회:4949  추천:0  2014-07-13
                                      이런 찬가는 목쉬도록…                                                        진 언       제먹을 밥은 제가 벌라는 말이 먼저 나왔는지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말라는 말이 먼저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로동하는 인간만이 사람이라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거의 강박관념으로 우리 의식속에 자리잡았다. 인간은 어떻게 먹든 먹고 신진대사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것이 아니고 공상하고 꿈꾸기 위해서만 사는게 아니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손발이든 두뇌이든 써야 한다.     버둥거림에서 시작되고 버둑거림으로 끝나는 우리네 인생에서 기본주제는 로동이다.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말라는 이 원칙은 계급사회에서 일하는자는 얻지 못하고 얻은자는 일하지 않는다는 대립성에서 제기된것이다.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말라는 이 말에는 밥을 먹을수 있는 자는 일하지 않아도 되며 밥을 먹는자는 반드시 일해야 하며 밥을 먹는자는 가능하게 일하는자라는 세가지 의미가 내포되여있다.     지난 한시기“머리를 쓰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자는 남의 다스림을 받는다(劳心者治人,劳力者治于人)”는 말은 로동인민을 모독한것이라고 비판도 하였는데 틀린말은 아니였다. 맹자가《滕文公章句上》제출한 이 론단은 사회분공문제를 말한것이다. 한편 지무자(知武子)도《左传襄公九年》에서“군자는 머리를 쓰고 소인이 힘을 쓰는것은 선왕이 제정한것이다(君子劳心,小人劳力,先王之制也。)” 라고 쓰고있다. 이렇듯 체력로동과 뇌력로동의 차별은 맹자이전에 벌써 하나의 보편적사회현상으로 되여져 있었던것으로서 후에 맹자가 이런 현상을 개괄했을뿐이다.     문제는 머리도 쓰지 않고 힘도 쓰지 않으면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불공평한 현상이다. 삼대독자도 일해야 곱다는 속담이 있다.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에겐 로동이 본성이고 놀면서 공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로동이 참을수 없는 질곡일것이다. 일하는 자는 고생을 먹으며 살고 놀고먹는 자는 향락을 누리며 사는 인간세상에서 과연 누가 더 자랑스러운가? 과연 누가 더 인간다울것인가? 이는 현답이 아리숭한 우문일수도 있다.     인생은 자재적이 아니여서 울지않는 아이만 볼수 없듯 제하고싶은 일만 골라할수는 없다. 인생이 달착지근 하기만한것이 아니다. 민초로 태여나면 제먹을 밥그릇을 제손으로 챙겨야 산다. 인생에는 어떤 핍박이 필요하다. 어쩌면 굶주림이 로동의 전 제로 되였다고 할수 있다. 기아는 가장 흉포한 사자도 길들일수 있으며 천하에 젠체 하는자에게도 종속과 피복종을 가르치기때문이다. 세상에는 떡함지에 코를 박아도 굶어죽을 라태자가 있고 돌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만큼 이악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옛날 동성용진의 장남촌에 정판돌이란 힘장사의 이야기가 파다하게 알려져있었다. 정판돌이는 토개때 부농이여서 청산맞고 산등성이에 얼마간의 한전을 분배받았는데 소출이랄것도 없는 박토인데가 매고 돌아서면 되살아나는 세투리밭이였다.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 밥그릇이 비지않게 살다가 신세가 거꾸로 된 그인지라 굶지않고 살려면 그런 밭이나마 울며겨자먹기로 다루지 않을수 없었다.     김매기 철이 되자 정판돌이는 고개넘어 덕신골의 한 야장간에 가서 크고 무거운 호미를 새로 벼리는데 야장쟁이는 난생처음 그렇게 너부죽하고 무거운 호미를 만들어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자루까지 맞춘 호미를 한손에 들고 가늠해보던 그는 호미가 가벼워서 안되겠다며 열여덟근짜리 메를 하나 얻어서 호미등에 달아매고 흙을 깊숙히 훓어가며 세투리잡이를 했다. 해마다 그렇게 세벌네벌 김을 잡고 한사코 두엄을 모아서는 밭에 내여 한 삼년 지나서 세투리가 절멸되고 밭도 옥토가 되였다. 부지런한 농부에게는 척박한 땅이란 없다고 몇년이 안되여 그는 다시“신부농”이 되였다고 한다. 그 시기로 말하면 부지런하면 밥술은 뜰수 있었다.     인간들속에는 자포자기가 낳은 기형아, 라태한 인간은 착할수 없고 착한 사람이 라태할수 없다. 라태한자에게는 굴토기를 주어도 샘물을 파내지 못할것이다. 라태가 여드레팔십리 걸음을 하면 가난이 뒤따르며 조소할수밖에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라태는 빈궁을 키운 온상이고 미리 파놓고 기다리는 무덤이였다. 현시대에도 라태는 게으른자의 통행증이고 가난은 그의 문패이다.     잦은 하품은 게으름뱅이가 지을수 있는 가장 멋진 표정이다. 온하루 그늘밑에서 부채질한자는 밤에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법이다. 일하며 사는 근로자들에게는 수면제가 공연한 약일수밖에 없다. 땀흘리며 그리는 미래는 꿈이지만 라태의 베개를 베고 편안타령을 부르는 자들의 달걀쌓기는 망상일뿐이다. 젊어서 노세타령을 부르던 사람은 늙어서 고생타령밖에 더 부를게 있겠는가? 라태한 생활의 뒤뜨락에 행복의 옹달샘이 솟을수 없다. 샘물을 마시려해도 바가지는 갖추어야 한다.     게으른 나귀는 때려죽인다해도 빨리 걷지못한다. 빈몸인데도 강물속에서 자빠지는 나귀에게는 채찍이 안성맞춤이다. 황소가 느릿느릿 걷는것은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다. 력래로 게으른자의 오막살이를 치부가 찾은적이 없다. 옛날부자는 손발이 놀새가 없는 그런 사람들속에서 많이 나왔다. 안일로 빚은 술이라해서 달수 없고 고난으로 빚은 술이라해서 쓰다고 할수 없다.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아무일도 안하는것이다. 실업은 직장을 잃은것이지만 게으름은 할일이 없다는것이다.     물론 로동은 영광스럽다는 등 그럴듯한 말은 호미로 쓴 진리가 아니라 붓대를 쥔 사람들이 지어낸 선전구호이다. 일컬어“쿠리(苦力)”를 우러러보고 떠받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안일은 마음을 썩이고 로동은 육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당신의 집에 행복을 실어다주는것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로동이다. 일하며 사는 기쁨이 따로 있다는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죽는다. 즐거운 인생이란 사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기쁨을 캐내며 사는 인생이라는것을 그들을 알지 못한다.     진정한 행복은 로동이 구워낸다. 숙명적인 농민으로 말하면 로동은 땅에서 삶을 파내는 필생의 직업일뿐 영광을 떨치느라고 일하는것은 아니다. 늘 노는자는 휴식의 의미를 평생 알수 없지만 허리휘도록 사래긴밭을 김매다가 그늘아래에서 땀들이는 담배쉼만큼 개운한 일이 없다. 로동이야말로 휴식을 즐기고 그 의미를 가장 잘 해석해주기때문이다. 일하지 않는자는 죽었다 살아나도 이 도리를 알수 없다.     이렇듯, 어떤 사회환경에서 제기되였든 가장 바람직한 인생자세는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자세이다. 그래서 움직일수 있는때까지 일하려하는 사람만이 미래가 약속된 사람이다. 기실 스스로도 느끼고있지만 이 세상에서 할일이 없다는것 만큼 큰 불행은 없다. 게으름뱅이들에게는 여러가지 그럴듯한 구실들이 있다. 할일이 없다고 변명하지 말라. 변명이 해석이 될지는 몰라도 결코 정당한 리유자체가 아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속에서 성공한자가 잉태되였다.     과거 소농경제시기“근로치부”란 말이 통했다. 돈이 돈을 버는 상품경제시대에 와서는 근면이 곧 치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해야 적어도 밥그릇은 비지 않을수 있다. 자기가 할수 있는 일이 있어도 손을 놓고 그늘을 찾는자는 스스로도 자신이 귀찮게 여겨질것이다.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에겐 오히려 하루해가 짧고 아무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견딜수 없이 하품만 나는 지루한 나날일수밖에 없다.     무위도식자의 삶이 신선할수 없다.“사람은 부지런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착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놀면 음탕하고 음탕하면 착함을 잊으며 착함을 잊으면 악한 마음이 생긴다. ㅡ소학(小学)”나중에 탐욕의 노예가 되여 천길나락에 떨어지는 자들속에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2010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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